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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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76) 중한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2016년 03월 02일 08시 51분  조회:4075  추천:31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6)

중한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김문학

  백여년전 중한일 근대사궤적을 조감하면 3국의 근대화 성공여부의 선로가 선명히 부상한다. 중국과 한국은 늘 자부감을 느낄 정도로 “문”의 사회였고 일본은 반대로 “무”의 사회였다는 점이 일목료연히 알린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핵으로 구성된 “문인”에 의한 문치사회와 전통적상무정신의 핵으로 이뤄진 일본의 무치사회는 지극히 대조적인 사회 및 문화패턴이였으며 그 가치관, 행동양식은 역시 대조적으로 이질적양상을 로정했다.

  그런데 필자가 불가사이하게 느낀것이라면 지금껏 중한일의 이 대조적인 문, 무 세계에 대해 중국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문”이 한수 우이고 우수한 반면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문화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렬세로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근대 중국과 한국이 야만의 무사에 일시 패배한것에 지나지 않다고 오만해지며 문의 문화가 왜 무의 문화에 패배했는가 그 원인규명의 자아성찰은 거의 루락돼있다.

  필자가 동아시아근대사 해독작업에서 재발견된것은 우리가 일본 무사문화를 그냥 “야만, 잔혹, 폭력”이라고 랭소적인 경멸로 일축할 사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언이페지하면 근대 조선, 청국이 경시하던(지금도 변함없음) 무사문화의 그 실속을 모르고 그것에 패북당한것이다. 이것은 근대 중, 한이 일본에 근대화경쟁에서 지게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 21세기의 진로에도 이 원인에 의해 중한일의 미래가 규정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의 행동양식, 가치관은 무엇일가? 력사에서 로정된 그 양상을 정리하면 그것은 “실무성”과 “혁명성”으로 귀추할수 있다. 우리가 늘 얕잡아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낱말로만 일축할수 없는 근대적원리가 일본의 무사문화속에 내재해있다.

  이에 비교해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것이 중국과 한국의 유교정신을 토대로 한 독서인, 지식인 즉 문인문화의 “공론성(空論性)”과 “문약성”으로 귀추되는 행동양식, 가치관이며 항상 앉아서 쉽게 안이하게 이루려는 비생산적인 발상이다. 일본무사가 늘 칼을 거머쥐고 생활의 현장에서 행동적인것에 반해 중, 한의 유교신사, 선비는 늘 붓을 쥐고 탁상에 앉아 론쟁을 즐기며 생의 현장에서 행동, 실천은 기피해왔다. 생각만 하고 행동은 결여했던 치명적인 결점 즉 행동력과 혁명력의 결여 그것이였다.

  상대로 일본의 무사계급은 사고한 뒤 그 플랭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이 신속히 따랐던것이다. 상징적인 력사인물을 들어보자. 서양의 충격에 의해 개국을 하게 되는데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 행동양식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등 지식인이며 무사인 그들은 당시 서양렬강에 통용된 국제법저작 《만국공법》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권총사격술도 익숙했다. 이렇게 국제지식과 실용적인 무기사용을 직접 장악할만큼 실무정신이 뛰여났다. 그러나 청국의 지식인들 즉 문인들은 책만 붙들고 탐독하면서 론쟁설전을 벌이기를 즐겼다. 위원, 엄복, 강유위 누구하나 실무적인 권총을 손에 쥘 생각조차 못했다. 조선의 선비들 박규수, 김윤식 등 당대 일류의 지식인 역시 사대주의적 공론에 치우쳐 부전의 양류체험을 거치면서도 실용적인 “무”가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제기하지 놋했다.

  과거제도의 시스템에 의해 문화력을 과시해온 문인지배인 중국에서는 청말 문인관료가 2만명, 무관 7,000명이였으며 총지방관원수가 200만도 안되였으나 이 소수의 문인엘리트사회가 4억 남짓한 인구를 지배해나갔다. 당시 일본은 3,300만 인구에 무사계급 189만의 방대한 체계로 일본 전체를 지배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중국의 문인관료계급은 상대적으로 작은 수자였지만 독립자주할 필요없이 매판무역에 의해 국가의 봉록으로도 윤택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만으로 전 무사계급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무사들은 경제, 산업개혁에 지대한 열성을 보이며 서양의 모방과 함께 “물건만들기”제조업에 힘을 기울인다. 원래 실무정신이 강한 그들은 부국을 강병의 토대로 하여 식산흥업에 혼신을 다한다. 1892년 일본 산업, 기업수는 3,065개, 총투자수는 1억 6,371만원에 달한다. 그런데 청국은 “양무운동”은 1860년에 시작해  산업의 수자, 투자수에서 일본의 규모에 비교가 안된다. 1894년 통계에 따르면 제조기업이 15개, 총투자수가 2,796.6만원이다. 양무파와 민간기업수나 투자액에서 일본과 전혀 견주지 못할 저수준에 머무렀다.

  무인계층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대 중국의 유신은 실무정신과 혁명성에서 모두 일본을 뒤따를수 없을만큼 박약했다. 일본의 근대 공업의 “물건만들기”제조업적인 실무형에 비해 중국의 경제모델은 과잉로동력, 인재, 기술 부족하에서 “배(船)를 만들기보다 배를 사는편이 낫고 배를 사기보다 빌리기가 낫다”는 안이한, 쉬운 사업원리를 고안해냈다. 그리하여 자기민족의 기간산업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경제산업의 현대화는 “그림의 떡”에 그쳤다.

  사실 따져보면 백년이 지난 오늘도 이같은 기업원리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개혁개방 40년이 되오도록 방대한 민족기간산업이 축적, 형성되지 못하고 세계의 기업을 위해 알바를 하는 “세계공장”이란 한계를 안고있다.

  그리고 근대 문인계급의 혁명, 개혁에서도 혁명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귀족계급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일본의 무사들은 새로운 서양관념과 기술에 그 실무성과 혁명성을 발휘하여 익숙히 수용하여 과학과 사상을 토대로 한 근대화모델을 터득한다. 그들이 우선 목을 벤것은 자신들의 목이였다. 혁명의 목표도 뚜렷했다. 중국과 조선은 다같이 문인계급의 결정적인 결함으로 근대혁명은 산업면이나 사상면, 사회면에서도 성사시킬수 없었다.
  근대 중한일의 성공여부는 사실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됐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가지 문화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비교, 분석, 성찰할 의미는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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