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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약소국인 이웃 한국에 대한 강대제국 일본의 “한국병합”은 제아무리 “미화(美化)”시키려 해도 당한 피해자측에서는 감수하기 어려울것이다. 한국병합후 구체적으로 실시된 정책이나 운영에서의 명암에 대한 프리즘분석은 중요하며 그것은 반드시 내실을 규명하는데 필요불가결의 사항이다. 그리고 피해자측에서 가해자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리치이며 그 비극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성차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력사의 주인공이 타자(他者)와 자기로 이루어졌을 때 타자에 대한 비판 특히 감정적 비난절하만으로 고집하면 자신에 대한 반성, 사색의 기회를 스스로 결탁시키게 되는 우를 범한다. 원인은 타자, 자기 량측에서 찾는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병합”에서 일본에게 병합의 구실을 준 우리 자신, 우리 민족의 100년전의 원인을 반추해봄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게을리했던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같은 언설은 아마 지금도 일반대중들에게 수용되기 어려울듯하며 안이하게 대방의 편을 든다는 감정적비판이 동반될지도 모른다는 위구심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은 안이하고 감정적 리유로 반성을 태만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자기비판의 메스는 더욱 그 필요성과 절박성을 느낀다.
필자는 력사를 해독함에 립장을 늘 아래와 같은 두가지로 취하고싶다. 하나는 “경직되고 감정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유연한 시각에서 력사를 바라보자”는것이다. 또 하나는 “력사의 지나간 불행을 타자에게만 넘기려는 성향이 강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제 편견어뵤이 자타(自他)의 복합적시각에서 바라보는 사고방식, 력사읽기로 바꾸자”는것이다. 그리고 늘 타자 탓만 하기앞서 자신에게 원인을 찾는 성숙한 사고와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는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아는 한 “한국병합”을 당한 원인을 조선조, 한국측에 내부에서 철저히 규명한 인물은 유감이지만 지극히 드물며 또한 그런 인물은 “매국노”로 지탄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병합을 세계근대사 및 동아시아 근대사의 시야에서 살펴볼 때 조선조말(구한말)이나 20세기의 초반에까지도 “문명”의 “개화”에서 수동적이였고 태만했으며 “전쟁과 혁명”이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즉 일본이 “문명개화”에 대응하여 신속히 메이지유신을 통해 또한 두차례의 전쟁(청일, 로일)을 통해 국민국가라는 독립자주적으로 강유력한 나라로 탈바꿈하지만 한국은 1910년까지 여전히 일본이나 서구에서 보면 “문명”이 아직 어두운 “조용한 은둔의 나라”였다.
조선말기의 사회는 사실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또는 상상하고있는 모습과는 상당히 괴리된 모습이였다. 서양인의 기록이나 조선지식인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알수 있는데 그때까지 조선조사회는 여전히 농후한 노예제도가 그대로 존속했다. 고려조가 정한 노비안검법, 노비환천법이 조선조에서 노비변정도감과 장예원을 설치해서 노비를 집중적으로 관리했으며 노비제도가 사회의 근본원리의 하나가 되였다. 그러나 “이런 노예제도가 근 천년을 존속해왔지만 그에 대한 피찬이 거의 없었다”고 한국 평론가 복거일씨는 지적한다. 노비제도를 없애고 조선인이 법앞에서 평등함을 이루게 한것은 사실 1894~95년 갑오갱장(甲午新張)이란 혁명적개혁이였다. 그것이 일본의 강요에 따랐다는 하나만으로 평가절하하는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기실 바로 일본의 압력에 그나마 일본을 모델로 성공했던것이 사실의 핵심이다. 만약 갑오혁명의 성과가 뚜렷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민비조선왕조의 수구파에 의한 탄압이여야 한다.
1883년~85년의 《윤치호 일기》를 보면 당시의 사정을 잘 알수 있다. 당대의 탁월한 개화파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조선조의 결함을 서양과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잘 인식하고있었다.
“대저 우리 나라 인민은 무식하여 전재(錢財)가 아니면 꾀여쓸수 없다.” “상께서 비록 좋은것을 알고 또 행하려고 하니 하나 주저하고 의심이 많아 잠시의 평안함을 얻으려 하며 소간(小奸)들에게 현혹되여 능히 결단하는것이 별로없다.” “그러니 일의 성과는 얻기 어렵고 꾀하는것은 많으나 실적은 없게 된다. 아아, 사람으로서는 어찌할수가 없는것을 하늘의 명이라 하니 이것이 하늘의 명인가!” “서양 남녀들이 세상을 횡행하나 능히 대적하지 못하는것을 생각하니 문명의 귀중함이 부럽다.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것이 가장 원통하고 우리 나라가 떨치지 못하는것이 매우 근심스럽고 일본인들이 능히 변화한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이상 《윤치호 일기》 송병기 옮김)
“대저 우리 나라 인민은 무식하여 전재(錢財)가 아니면 꾀여쓸수 없다.” “상께서 비록 좋은것을 알고 또 행하려고 하나 주저하고 의심이 많아 잠시의 평안함을 얻으려 하며 소간(小奸)들에게 현혹되여 능히 결단하는것이 별로 없다.” “그러니 일의 성과는 얻기 어렵고 꾀하는것은 많으나 실적은 없게 된다. 아아, 사람으로서는 어찌할수가 없는것을 하늘의 명이라 하니 이것이 하늘의 명인가!” “서양 남녀들이 세상을 횡행하나 능히 대적하지 못하는것을 생각하니 문명의 귀중함이 부럽다.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것이 가장 원통하고 우리 나라가 떨치지 못하는것이 매우 근심스럽고 일본인들이 능히 변화한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이상 《윤치호 일기》 송병기 옮김)
당시 조선정부에 대해 철저히 실망한 지식인들이 눈길을 돌린 곳이 일본이였다. 조선정부가 하지 못할 모델을 국제적시야를 갖춘 그들이 서구문명수용에 성공한 일본을 배우는것은 자연스러웠다. 지금도 외국에서 류학하면서 그 선진문물을 배우는것에는 흠이 안되지 않는가.
일본식민지통치에 통렬히 비판하고 한국에 대해 가장 동정심을 품고있던 당시의 영국인 지식인 프레더릭 매켄지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관찰하면 오늘 한국이 독립을 상실한 리유는 구조선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제3자의 눈에서 바라본 력사비극의 책임원인이 조선인 자신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1904년에 등장한 일진회는 현재 무조건 친일단체로 일축하지만 이용구 등 인물들이 조선조, 한국의 적극적인 개혁을 회피한 정부에 실망하여 일본과 합방하여 나라를 개혁하자는 구상을 갖게 되는것은 자연적인 개혁수단의 하나였다.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구상과 맥을 같이하고있으며 그 적극적인 인소에 대해 재고해야 할것이다.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한가지가 아닌 다양한 양상을 로정했다는 면을 우리는 다시 인식해야 한다.
근대 한국이 일본에게 치욕적인 “병합”을 당한 우리 측의 원인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본다. (1) 중국 이상으로 경직한 유교식인치(人治)체제 (2) 전근대적 등급관계, 종속관계사회 (3) 중국 유교식가치관과 맹목적인 문명우월주의 (4) 실행력이 약한 공론, 공담적 국민체질 (5) 세계인식에 대한 유연한 사고와 대응의 결여 (6) 가족, 혈통에 짓눌린 혁명의식의 결여 및 박약함 (7) 국가보다 자신의 집단보존을 우선시킨 리기성 (8) 민족의식, 자립의식의 박약 (9) 근대 국민국가의 미완성 (10) 중앙집권제의 부패성.
“한국병합”의 교훈에서 우리 자신이 성찰해야 할 결함을 분석해 보면 결국 우리 자신이 독립의 길을 일본인에게 내준 셈이 되기도 했다. 100년후인 오늘 우리는 다시한번 경건하고 겸허한 심정으로 그 리유와 함께 우리안에 내재된 치명적결함을 재사고, 재인식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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