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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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하드와 소프트 댓글:  조회:3871  추천:85  2006-05-06
하드와 소프트하드와 소프트란 말은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새 하드와 소프트란 말을 모르면 촌스럽고 머저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은 하드와 소프트란 말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실 난무한다기보다는 적당하게 씌일 때 참 멋있는 말이 되기도 한다. 軟環境-연성환경, 소프트가 붙은 신조어로서 관념갱신을 유도하며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 사실 이 세상이 워낙 하드와 소프트로 이루어졌으니 하드와 소프트가 난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님. 우리 인간 하나만 놓고 보아도 머리, 몸덩어리, 사지, 뇌, 오장육부, 신경, 혈관 등은 하드를 이룬다. 그리고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굴리는 우리 머리 속 생각들은 소프트를 이룬다. 바로 이런 하드와 소프트의 온전한 결합 속에 우리는 인간으로 남는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하드와 소프트는 누가누구를 떨어질 수 없는 듯하다. 그러니 다 같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천치바보를 생각하거나 생각을 멈춘 식물인간을 생각할 때 인간에게 있어서 소프트가 훨씬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인간 뇌의 연장이라는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이 없거나 엉망일 때 데스크탑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모니터가 아무리 멋지다 해도 그 컴퓨터는 무용지물에 다름 아니다.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대문, 교실청사, 도서관, 실험청사, 기숙사동, 식당, 매점, 강당, 운동장... 그리고 이런 것을 한 품에 안고 있는 캠퍼스는 하드. 그리고 이 하드들에 들락날락하는 대학교 주체로서의 학생과 교수들의 생각, 그리고 학교 학사, 인사 등 운영은 소프트. 대학교 하드와 소프트로 우리 연변대학교를 보면 요 근간에 하드는 참 많이 변했다. 좋게 변했다. 벌어 써든 꿔서 써든 돈이 참 은을 냈다. 돈이 날개라는 말이 실감나기도 한다. 1980-90년대 졸업한 친구들이 학교를 찾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학교의 하드 변화에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이제 또 5-6억을 투자하여 밖에 있는 의학원, 농학원을 대학본부가 있는 캠퍼스 쪽으로 끌어들이고 통합 캠퍼스건설에 박차를 가한다니 그럴 듯하다. 이제 통합 캠퍼스 건설에서 기존의 올밀졸밀한 공간배치와 답답한 공간거리에서 벗어나고 너무 촌스럽게 삐까삐까하는 것을 좀 죽이고, 그리고 학교 담벽을 없애고 바깥세계와 직접 통하는 오픈된 모습을 갖춘다면 내가 보기에는 하드는 그만하면 됐다. 문제는 소프트다. 보다 중요한 소프트가 문제다. 우리 학교에는 아직도 고루하고 평준화된 생각을 가진 교수들이 많다. 어느 교수 머리 박박 밀고 빤빤 대가리하고 강의에 들어갔다고 할 때 교수 헤어스타일 저래서는 안 되는데 하며 머리를 갸웃하고 뒤 공론하는 교수들이 많다. 별 보잘 것 없는 일에 신경을 많이 쓰며 정작 써야 될 곳은 안 쓰고. 그리고 누가 좀 튀는 생각을 하면 정신병자하고 쳐다보기. 怪才, 괴짜를 허용하고 제창하는 분위기가 없다. 尊重人才의 의미를 진정으로 되새길 줄 아는 교수가 적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일 지구가 폭파한다고 해도 오늘까지 책을 들고 좋아서 보는 진짜 책귀신, 책벌레들이 적다. 대학교의 가장 키포인트인 교수들의 관념갱신, 두뇌의 프로그램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도서관, 대학교의 두 번째 키포인트. 우리 학교 도서관운영시스템은 본말이 전도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교수나 학생들 중심으로 도서관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 직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예컨대 7층 도서실은 우리 학교의 도서관 특색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조문장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까지 컴퓨터검색조차 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열심히 책을 보고 있는 교수나 학생들을 직원들이 점심시간이 되었다고 내쫓기, 그리고 퇴근시간이 되었다고 내쫓기,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은 아예 문도 열지 않음. 그리고 여기 책은 대출도 안 되는 법이니 실로 이 조문도서의 이용율은 얼마나 되는지 의문. 교수와 도서관의 소프트가 잘 되면 학생들의 소프트는 절로 따라 오게 되어 있고 잘 되게 되어 있다. 우리 학교 學事일정에도 본말이 전도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 학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학생이다. 학생들이 과목을 선택하고 교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아직 교수중심의 일방적인 과목배치, 권위적인 시험채점이 통하고 있다. 선진국의 대학교 학사시스템을 보면 교수들이 한 학기 강의할 수 있는 과목을 제시하고 학생들이 필수과목, 선택과목 등 기준에 따라 마음대로 수강신청을 한다. 그리고 교수강의 한번 들어보고 수강신청을 철회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수강신청 변경시간을 1주일 준다. 이래저래 필수과목이든 선택과목이든 규정된 수강신청수 미달일 때 그 과목은 폐강된다. 그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가 강의를 못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기말시험을 치고 난 후 학생이 자기 시험성적을 체크하려면 컴퓨터상으로 담당과목 교수에 대해 제시된 레벨에 따라 평가를 해야 체크할 수 있도록 컴퓨터프로그램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기 성적이 잘 못 채점되었다 싶으면 성적이의 체출기간에 담당과목 교수에게 문의하면 교수는 반드시 해명과 답복을 주도록 되어 있다. 한마디로 전반 학사일정이 학생중심으로 돌아가며 ‘群衆的眼睛雪亮’ 식으로 교수에 대해 일종 감독을 하게 된다. 우리 학교 人事시스템도 문제가 있다. 선진국의 대학교처럼 학과장 같은 별 볼일 없는 보직은 학과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윤번으로 하도록 하고 별 볼일 있는 보직은 반드시 선거에 의해 뽑되 보직에 앉은 교수는 임기가 차면 곧바로 물러나 평교수가 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인사가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갈 때 惰性이 생기지 않고 권위의식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 우리 학교 인사는 일단 별 볼일 없는 보직까지도 조직분지 뭐인지 하는데서 임명하기. 그러니 그 보직은 신비하고 권위가 부여된다. 그러니 보직에 앉자면, 출세하자면 기를 쓰고 위에 잘 보이기, 조직에 잘 보이기. 가련할시구! 그런데 참 웃기는 것은 이른바 민주투표라는 것이다. 매번 조직분지 뭐인지서 보직에 적임자를 임명할 때 민주투표를 하기는 한다. 그런데 투표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 단지 조직분지 뭐인데서 참고용으로 본다는 것이다. 정말 눈 가리고 아웅하기 식. 앞으로 이런 투표는 다시는 하지 말기를! 우리 서민들을 놀린다. 나는 앞으로 절대 이런 투표에는 참가하지 않겠다-서민의 알 권리가 무시당하는 투표를! 그리고 우리 학교 보직은 대개 정책의 연속성 운운하며 한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한기 더 연임할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그러니 너도나도 연임. 여기에 연임이 끝나면 다른 보직으로 跳槽하기. 그리고 跳槽한 보직에서 또 연임하기... 교수란 사람들이 강의와 연구는 옳게 안하고 연임에 跳槽만 하다 보니 세월 다 가고 만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교수 사기군의 한 행태. 그러니 한시바삐 교수보직의 신비성과 권위성, 타락성을 깨는 인사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사실 대학교의 이런 소프트문제는 우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고 대학개혁의 轉形期에 놓인 우리 중국 대학교의 통합적 병폐다. 하드는 뜨르르한데 소프트는 부실한 것...그래서 나는 세계 유수의 명문들을 떠올려 본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와 캠브리지대학교, 아직도 대학교가 서서 사용하기 시작한 15-16세기 문예부흥시기 건물을 그대로 쓴단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고풍스럽기는 하나 거무틱틱하고 좀 지저분하기도 하고 안에 들어가 보면 어두워 낮에도 전등불을 밝히지 않을 수 없으며 흑판이요, 책상이요, 걸상이며는 많이 닳아 있어 반들반들하다. 이 모든 하드들이 현대 최신식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계최신지식으로 무장하고 항상 발랄한 생각과 오픈된 마인드를 가진 일류 교수가 있고, 그리고 자동화온라인으로 사시장철 교수와 학생들을 위해 서비스하는 일류 도서관이 있고, 그리고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대학교 학사와 인사시스템을 갖춘 소프트가 작동하고 있다. 2006. 5. 4
59    我思故我在-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댓글:  조회:3682  추천:81  2006-04-28
我思故我在-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을산은 언제든지 벗는다못 벗는 것은 나다산은 벗어도 당당하고나는 입고 있어도 춥기만 하다-「가을산」전문(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엮음:『중국조선족명시』, 북경민족출판사 2004)언제든지 벗는 ‘가을산’이라는 자연이미지를 모멘트로 하고 여기로부터 튀어져 나오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구속스럽기만 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인간 본연의 실존을 길항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일탈의 욕망을 꼬드겨 붕 뜨게 하며 잠 못 들게 했던 허련화, 너는 이제는 우리 조선족의 현실적 실존을 아파하구나. 순수시에서 참여시에로의 변신이라 할까, 여하튼 너는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는 거지, 그렇쟈?너는 인간 본연의 실존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잘도 개괄했다. 형이상학-‘형이상학은 머리위의 것이다./끝없이 하늘로 비상하는 것들. /새처럼 가볍게 나는 것, 구름처럼, 성당의 종소리처럼/신비로운 것/그래서 아름다운 것.’ 형이하학-‘형이하학은 인간의 몸뚱어리다./땅위를 기어다니는 것, 먹고 배설하는 것, 구체적인 것,/어쩐지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은 것.’ 그렇다. 인간이 정신과 육체적 존재라 할 때 인간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되어 먹었다. 그런데 너는 이 형이적인 인간 실존을 제시하면서도 결론적으로 ‘그래서 아름다운 것’과 ‘어쩐지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은 것.’으로 분명 형이학적인 인생을 추구하구나. 그래서 스스로 ‘자칭 형이상학’이라 했다지. 그래 너는 도고한 맛이 있어. 그래서 너는 중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석사가 되고 현재는 한국의 최고 명문 서울대학교에서 박사별을 바라보고 있지. 그런데 ‘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 창구 앞’에 서는 순간, 너의 ‘자칭 형이상학’은 깨어지고 만다. 그것은 정말 빈 껍질의 허울 좋은 자아감각의 ‘자칭’으로만 남고 만다. ‘수많은 형이하학이 줄지어 앉아있다./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들은 날지 못한다. 그들은 배고프기에’. 너는 한국에서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우리 조선족을 보았쟈? 끝없이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3D일만 차례지는 가련한 우리의 실존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를 쓰고 한국에 가야 하고 한국에 눌러 붙으려 한다. 한국은 아직 우리에게 있어서 노다지판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고 마는 너가 아니지. 너는 우리의 실존과 더불어 너 자신의 실존도 깨닫지. ‘자칭 형이상학인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있’지 않은가? 서울대학교 박사를 한답시고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너-형이상학. 그런데 먹고 살기가 바쁘다. 힘들다. 그래서 헐레벌떡 올리뛰고 내리뛰어야 하는 니 신세, 이 오빠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버젓한 박사별인지 뭐인지 딴다는 것도 결국 잘 먹고 잘 배설하자는 것하고 매치가 많이 되지? 그러니 허울 좋은 빛 좋은 개살구. 그러니 50보에 100보! 그렇쟈? 그 잘난 유학은 내가 니 선배가 아니냐?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도 형이하학인 것 같다’. 임마, ‘같다’가 아니라 바로 그런 거다. 좀 솔직해라. ‘나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렇지, 솔직해서 좋다. 니네, 우리 조선족의 실존, 아무리 형이상학을 하려고 해도 현 단계 될 수 없다. 우리는 형이하학일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은 그래도 약과다. 니니깐 그래도 오락가락하쟈!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우리는 모두 형이하학으로 앉아 형이상학을 꿈꾼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니 같이 出汚泥而不染의 연꽃-蓮花. 我思故我在-‘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명제가 그대로 들어맞는 순간이다. 우리는 ‘끝없이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 ‘새처럼 가볍게 나’기 위해 오늘 ‘땅위를 기어다닌’다. 그리고 ‘먹고 배설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아무리 ‘형이상학을 꿈꾸어도’ 그 사람들, 한국 양반들이 ‘우리를 형이하학이라 부르’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 양반들은 우리를 초라하게 본다. 우리를 떨어버려야 할 짐으로 본다. 우리는 반갑지 않은 손님. 그래서 고국이요, 민족이요 하며 달려온 우리를 울리지 않느냐. 지난 세기 ‘90년대 내가 ‘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 창구’ 앞에 섰을 때 한국 양반들 이거, 북한의 형이하학이 아닌가 하고 이리 묻고 저리 묻고,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며 질질 끌었지. 똑 마치 범죄자를 심문하듯이. 그러니 형이상학을 꿈꿀 시간도 없었지. 그때 일본친구들하고 대만친구들 우리 같은 창구를 썼는데 그들은 5분도 안되어 OK 소리를 들으며 팔자걸음으로 돌아 나왔지. 나는 그때 내가 진짜 중국 사람인 것을 알았지.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중국 조선족의 형이상학을 꿈꾸기 시작했네. 한국 양반들 아무리 형이하학이라 불러도 관계없이. 그렇다. 우리는 꿈꾸는,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의 존재-새로운 실존을 찾아야 한다. 허련화의《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 창구》(미발표. 나한테만 발표)를 횡설수설로 음미해보았다. 횡설수설을 요약하면 추상적인 철학명제인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살아 움직이게 형상적인, 의인적인 시적 메타포로 구사한 것이 돋보인다. 그리고 다양한 대조적인 수법으로 시적인 이미저리를 조직해나간 것이 특징이다. 시의 시작 두절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보편적인 인간실존의 대조적인 양상을 전반 시적 경지의 전제로 극명하게 깔아둔다. 그리고 시적 화자의 눈에 비친 ‘수 많은 형이하학’과 ‘자칭 형이상학’인 내가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자칭 형이상학인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있다./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도 형이하학인 것 같다.’라는 두 구에서 ‘나도’라는 포함의 뜻을 내비침으로써 일종 落差의 대조를 가져와 보다 효과적이다. 그리고 ‘나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사이를 오락가락한다.’에서는 내 스스로의 마음의 대조 색으로 헷갈리는 복잡한 내심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어서 ‘우리는 모두 형이하학으로 앉아 형이상학을 꿈꾼다.’에서는 전반 시의 起承轉結(물론 시의 절의 차원이 아니라 내용적 차원에서)에서 일종 轉의 대조적 역할을 하면서 변증법적 인생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들이 형이상학을 꿈꾸어도/사람들은 우리를 형이하학이라 부른다.’에서는 마지막 절에서의 承轉의 대조적 역할을 하면서 結을 곁들이고 있다.한마디로《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 창구》는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소박함속에 거창한 인간실존, 우리의 실존이 녹아들어 있어 머리를 수굿하고 음미하게 한다. 너처럼 수수하면서도 음미할 것이 있어 좋았다. 시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미지폭력조합’이나 ‘파격적인 이미지조합’으로 몽롱하고 또 몽롱한 나만의 잠꼬대세계를 추구했으되 사실 알고 보면 별 볼일 없는 그런 이미지시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나 혼자만 좋다구 찧고 빻으면 蓮花 짝사랑에 빠져 진짜 횡설수설하는 줄로 알 것이니 우리 같이 음미해보도록 빵빠래~ 형이상학은 머리위의 것이다.          끝없이 하늘로 비상하는 것들.           새처럼 가볍게 나는 것, 구름처럼, 성당의 종소리처럼           신비로운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형이하학은 인간의 몸뚱어리다.           땅위를 기어다니는 것, 먹고 배설하는 것, 구체적인 것,           어쩐지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은 것           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 창구 앞에는           수많은 형이하학이 줄지어 앉아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들은 날지 못한다. 그들은 배고프기에           자칭 형이상학인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도 형이하학인 것 같다           나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우리는 모두 형이하학으로 앉아 형이상학을 꿈꾼다.           우리들이 형이상학을 꿈꾸어도           사람들은 우리를 형이하학이라 부른다.                -《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 창구》전문
58    사랑의 변증법 댓글:  조회:4273  추천:76  2006-04-15
사랑의 변증법우리는 여보당신밖에 없소 하는 진솔한 고백 속에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는다. 그러다보면 이 만리장성을 도탑게 할 아이들도 생겨난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애물단지다. 이 아이들이 묘한 비교급부 하나를 형성한다. “아이는 내 아이 곱고 색시는 남의 색시 곱기”. 이로써 걷잡을 수 없이 발동되는 남자들의 바람기. 저 아이 다 낳은 여편네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했으니 이제 더 별 볼일 없다는 식상한 상-권태감. 이거 막 하는 얘기가 아니고 미국의 어느 권위 있는 조사기관에서 부부간의 이혼문제를 조사해봤더니 딱 정확히 결혼해서 아이를 가져서부터 2-3년 사이에 권태감이 온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런 권태감이 오느냐가 문제다. 심리학자나 미학가들은 사랑의 심미거리상실로 풀이한다. 처녀총각 연애 때 참 좋다. 서로 수다 떨고 애교 부리고 줄가말가 하면서 주기도 하고 안 주기도 하기. 그래서 연애는 밀고 밀리고 끌고 끌리기. 연애는 대방을 알기 위한 정신적인 몸부림. 하나하나 정신적인 베일을 베끼는 가운데 신비의 전율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 베일이 다 베껴지는 것은 아니다. 연애는 충분한 사랑의 심미거리를 확보한다. 그래서 연애는 항상 아름답고 달콤하다. 그래서『詩經』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을 一日如三秋라 했던가. 그래서 연애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르면 결혼에 골인하기. 결혼은 대방을 알기 위한 육체적인 몸부림. 하나하나 육체적인 베일을 베끼는 가운데 신비의 전율을 느낀다. 그러다가 아이라도 생기고 산고의 고통을 같이 치르고 나면 육체적인 신비의 베일은 다 베껴진다. 그러면서 흥분중심은 그 아이한테로 간다. 오, 내 새끼, 티끌 하나 없이 고운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맞다. “아이는 내 아이가 곱다”. 내 생명의 대상화이고 연장이니깐. 그리고 그 세대차속에서 느껴지는 깜찍함, 귀여움은 영원한 심미거리를 형성한다. 그래서 자꾸만 낳고 싶은 것이 아이다. 이때 쯤 되면 찰떡궁합 같은 부부도 흥분중심은 언녕 아이들한테 가 있다. 재롱재롱, 섬바섬바, 아이들 구미에 맞춰주기에 여념이 없다. 특히 여자는 완전히 아이에 빠진다. 남편은 뒤 전에 한 채 헌신적인 모성이 발동된 것이다. 젖 먹이기에, 귀저기 갈아주기에, 자장가 불러주기에... 모성에 놀아나는 여자는 부끄러울 것이 없고 뻔뻔스럽기도 하다. 그러다보면 여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랑의 심미거리가 영으로 되는 순간들이다. 이로부터 매력도 그만큼 떨어진다. 그래서 남자는 느낀다-戀愛是天堂, 結婚是地獄. 이로부터 喜新厭舊도 발동된다. “아이는 내 아이 곱고 색시는 남 색시 곱다”는 말이 몸에 와 닿는다. 중국어의 “家花不如野花香”도 같은 맥락이겠지.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길은 슬그머니 다른 여자한테로 간다. 속된 말로 바람기의 발동이다. 그래서 천금 같은 우리 사랑의 만리장성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역지사지로 여자도 마찬가지. “아이는 내 아이가 곱고 남자는 남의 남자가 더 멋있어 보인다”가 몸에 와 닿는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보다 좀 더 늦게 그리고 은폐적으로 이것이 드러날 뿐이다. 눈 먼 모성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다 크고 남편이 자기에게서 많이 멀어진 것을 느낄 때 여자는 외로워나고 우울증에 사로잡힌다. 여성들 중년의 바람기가 한 돌파구로 발동된다. 남자여자가 이쯤 들뜨게 되면 그 어느 소설가가 말했듯이 결혼이란 황금으로 된 숨 막히는 답답한 집이 되고 만다. 안의 사람들은 뛰어나오지 못해 안달을 하고 밖의 사람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을 하는 그런 빛 좋은 개살구의 집.그럼 하루저녁만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부부간, 一日夫妻百日恩이라는 부부간, 그렇게 물 먹은 담처럼 쉽게 맹랑하게 무너져야만 하는가? 아니, 우리는 先結婚後戀愛의 삶의 지혜를 구사해볼 수 있다. 우리의 남녀칠세부동석의 부모세대들은 바로 연애가 생략된 결혼으로 골인했다. 그래서 우리는 허구픈 웃음을 웃기도 했다. 연애 없는 결혼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그 결혼은 또 어떻게 유지되는 가고? 그런데 그들은 결혼도 잘 했고 우리까지 낳지 않았는가? 그 비결은? 바로 우리의 사랑패턴을 뒤집는 先結婚後戀愛. 어젠가 중국에서 가장 히트 친 영화의 하나가『李雙雙』. 바로 우리 부모세대들의 先結婚後戀愛이야기다. 연애도 없이 어떻게 결혼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느냐는 젊은이들의 짓궂은 질문에 시무럭히 웃으며 대답하는 얼숙게 생긴 남주인공의 대답-先結婚後戀愛. 수더분하게 생기고 아이도 몇이 가졌건만 똑 마치 현대 젊은 처녀총각들이 연애하듯이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는 농촌부부간. 그래서 웃음이 연발하고 생활에 꽃이 피는 희극편. 낮의 요조숙녀와 정인군자가 밤의 요부와 늑대되기, 그리고 까꿍, 자기야 내 봐라, 그래 여보, 윙크에 사랑의 세라믹 날리기, 그리고 찧고빻고... 그런데 戀愛도 오래하면 지겹고 힘에 겨울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랑의 해구심을 복용해야 한다. “정 하나로 맺어진 사랑...”,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서로 그대를 통해 남자를 알고 여자를 알고 남자여자가 되었지? 고마운 정은 많이 남아 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은 그대!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바로 그 정 하나로. 그렇다. 우리는 情人이 되는 거야. 그 시시껄렁한 偷유鷄摸狗의 情人말고. 진짜 情人이 되는 거야. 情人眼里出西施가 아니냐? 정이 폭 배인 情人의 눈으로 서로 보기. 우리는 물 찬 제비 춘향, 늠름한 이도령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건질건질한 등 긁어주며 호물딱 입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꼬부랑 할머니, 백발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그렇다. 바로 이 정, 끈끈한 이 정, 사랑의 애교풀로 딱 붙을 때 우리는 찰떡궁합을 이루고 잉꼬부부가 되고 검은 머리 흰 파뿌리 되도록 白頭偕老할 수 있다. 2006. 4. 15
57    点石成金-壽 石 댓글:  조회:4053  추천:83  2006-04-07
点石成金-壽 石나는 언젠가 우리 과의 신철호 선생을 참 우습게 보았었다. 사람이 참 별난 흥취도 다 있지, 하면서 말이다. 신선생은 워낙 돌덩어리를 좋아 했으니 말이다. 물론 내 눈에는 보잘 것 없는 돌덩어리겠지만 신선생의 눈에는 그것이 더 없이 귀중한 금덩어리였다. 같은 물건 하나 사이에 두고 나하고 신선생은 이렇게 천양지차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자기도 모르게 신선생의 그 별난 흥취에 빨려 들어갔다. 무엇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죽어라 거부하는 나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은 아마도 우연히 신선생 집에 놀러가서부터였을 것이다. 신선생 집에는 워낙 별라별 돌덩어리들이 많았다. 이런 것들을 美其名曰壽石이라 한단다. 창턱이고 어디고 놓을만한 곳에는 전부 이런 壽石들이 놓여 있었다. 사실 그가 일보는 사무실에도 이런 壽石들은 놓여 있다. 이런 壽石들만 보면 눈이 반짝이며 흥분하는 신선생. 그래서 순간적으로 壽石 교수로 둔갑하는 신선생. 자, 그래서 그의 강의는 시작되고, 나는 빨려 들어가고...壽石은 뭐니 뭐니 해도 壽石이여야 한다. 오래 된 돌이여야 한다. 몇 억년의 풍상고초를 이기고 살아남은 돌. 그래서 장수할 壽의 壽石이란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 영원함의 상징-철학. 딱딱하고 차거운 돌이건만 자기도 모르게 우러러나는 숭배심. 백년도 못 사는 우리 인생, 정말 壽石이 되고 싶다. 壽石을 찾아 헤매고 줏는 순간 그것은 내 인생의 영원함을 끌어올리는 순간. 그래서 힘든 줄도 모르고 오늘도 이 산, 저 산, 이 강, 저 강을 探石으로 헤맨다는 신선생. 壽石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석 그대로여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가 빚은 人工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조물주의 선물. 그것은 鬼斧神工이 만든 자연의 신비. 그것은 풍상고초의 세례 속에 허구 많은 자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과 교감하는 壽石-원초자연의 생명의 신비를 말하는 듯한 남근석과 여근석, 그리고 새파란 처녀총각 모양에, 방금이라도 뛰어나올 듯한 아이들의 귀여운 모양에, 파파 늙은 호물딱 모양에, 그리고 날렵한 원숭이 모양에, 미련한 곰 모양에, 깜찍한 토끼 모양에, 그리고 삐죽삐죽 산 모양에, 굽이치는 강 모양에, 오곡백과 무르익는 들 모양에... 실로 一言難盡의 자연의 천태만상이 깃들어 있단다-예술. 그래서 빼어날 奇秀의 秀石으로만 이해한 나의 壽石觀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란다. 壽石은 빼어나도 뽐내지 않고 이 산 녘, 저 산 녘, 이 강 녘, 저 강 녘, 이 바다가, 저 바다가에 되어진 대로 조용히 누워있단다. 그는 知己를 기다린다. 일반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거저 돌일 뿐이다. 그런데 探石家들의 눈에 그것은 손으로 만지며 玩賞하기에 좋은 축소지향의 자연의 천태만상 그 자체. 묘한 느낌 그 자체. 그러나 壽石은 모든 探石家들을 자기의 知己로 하는 것은 아니란다. 자기만의 知己를 기다린다. 그래서 이 探石家에게는 시답지 않게 여겨지나 저 探石家에게는 如獲至寶로 여겨지는 괴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실 壽石은 말이 없으니 壽石의 知己경지는 智者見智, 仁者見仁. 여기에 재미나는 일화가 있단다. 시인 김학송은 워낙 시적 감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뛰어나 어지간한 돌은 모두 壽石으로 승화시킨단다. 다른 探石家들은 별론데 하다가도 김시인이 이것은 산이요, 이것은 강이요, 이것은 폭포요, 이것은 눈이요... 하며 한바탕 열변을 토하면 어지간한 探石家들은 그럴듯하다며 머리를 끄덕끄덕인단다. 그런데, 그래도 머리를 갸웃하는 探石家가 있으면 김시인은 그럼 좀 멀리서 봐봐- 아니, 그럼 몇 백배로 확대해서 봐봐- 눈을 지긋이 감고 아니, 눈을 반쯤 뜨고... 옳지, 옳지, 그렇지-하며 자기 나름의 壽石을 계속 밀어 붙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시인은 여하튼 가장 많은 壽石을 확보하고 있단다. 이렇게 놓고 볼 때 壽石과 그 探石家는 지극히 개성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壽石은 어디까지나 자연석 그 자체다. 그러나 자연만의 그것으로 둘 때 그것은 거칠다. 그래서 探石家들의 손이 가 닿아야 한다.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져야 한다. 죄진 사람들처럼 머리를 수걱하고 이 돌 저 돌 찾아 헤매다가 아, 하는 탄성과 더불어 壽石이 눈에 띄는 순간 探石家들은 산모가 갓난애기를 다루듯이 그 壽石을 다룬다. 털어내고 씻어내고 닦아낸다. 그리고 정중히 모신다. 무슨 座臺라는 것을 한다. 壽石을 돋보이게 하는 座臺. 이 座臺가 있고 없고가 천양지 차란다. 신교수가 지시해 보이는 개구리상壽石. 머리를 한껏 쳐들고 몸둥아리를 솟을가하는 개구리상, 정말 그럴듯하다. 발이 없는 것이 아쉽다면 좀 아쉬운 점.그런데 이 개구리상을 개구리 발모양을 한 座臺에 앉히니 당금 뛰어내릴 듯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가. 座臺의 중요성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壽石수집가들은 바로 이 座臺에 신경을 쓴다. 그렇다 해서 座臺를 요란하게 해서 壽石 본체인 자연석을 죽여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石爲本臺爲輔여야 한다는 것이다. 壽石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란다. 探石家들은 이렇게 느낀단다. 까만 오석은 만지면 만질 수록 반질반질 해지고 기름기 반지르르 흐른다. 생명의 교감이란다. 壽石을 보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 다 있게 되고 무릉도원과 같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단다. 壽石의 질, 모양, 선, 색...점점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가는 신교수. 点石成金, 별 볼일 없는 돌을 척 짚어서 금덩이로 만드는 듯한 연금술사와 같은 신교수의 壽石특강, 내 혼자 듣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나는 워낙 미학을 하는 교수다. 미학의 기본 범주의 하나인 자연미하면 그 속에는 뭐니 뭐니 해도 기암괴석이 으뜸. 사실 이 기암괴석 속에 壽石도 포함되리라. 그래서 나는 신교수를 미학 壽石특강으로 모셨다. 무거운 壽石 한 짐을 지고 땀을 철철 흘리며 계단을 올라간 신교수의 헌신적인 모습은 학생들을 감동시키기에 족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돌덩어리의 신비한 내용과 신교수의 유모아가 넘치는 달변은 학생들을 감복시키기에 족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다. 우리 연변대학에서는 이런 강의를 좀 많이 했으면. 한 학기 내내 그 잘난 문학사의 누구누구는 몇 년도 태어나서 몇 년도 죽었소하는 것을 억지로 외우게 하는 것보다는 한 시간의 이런 壽石특강이 학생들의 감수성을 키우고 풍부한 상상력을 키우는데 효과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신교수를 보고 전 학교 공동과로 壽石특강을 신청할 것을 건의했다. 2006. 4. 5
56    대학교 근친번식 댓글:  조회:4206  추천:92  2006-03-15
대학교 근친번식현재 생물학적으로 근친번식은 인간의 발전에 치명타임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대학교 근친번식에 대해서는 그리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묵인하는 것 같다.대학교 근친번식? 외연과 의미는 넓다. 그만큼 醜態百出! 대학교 근친번식 1.留校, 학생회 간부 남기기. 留校,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선망하는 직업자리. 그러니 학교당국에서는 학생들 가운데 덕, 지, 체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남긴단다. 그래서 학생들 누구나 다 덕, 지, 체 뛰어나게 놀려고 한다. 그런데 교수들 눈에 덕, 지, 체 모두 뛰어난 학생들은 어느새 학생회 간부들로 둔갑해 버린다. 사회상의 관본위 및 관료주의가 신성한 대학교까지 오염시킨 한 징표. 그래서 내가 대학교 다닐 때는 너도나도 반주임(단임선생)이나 단서기한테 알랑거리거나 별수(공산주의신앙이고 무어고 떠나 黨票를 얻는 것도 크게 한 몫)를 써서 학생회간부되기. 그래서 학생회간부 되는 “놈”들을 보면 전부 말깨나 하고 붙침성이 좋아 알랑거리기에 안성맞춤하거나 공부하기에는 머리통이 커 보이는 나이 지긋한 “놈”들(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을 존중하는 “노인문화”의 혜택을 톡톡히 받는 “놈”들)뿐. 그러니 공부는 뒤전. 아무리 공부 잘 하는 “놈”을 留校시킨다 해도 믿기지 않는 법. 결과적으로 留校시킨 “놈”들을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학생회간부했던 “놈”들이니 말이다. 사실 학생회간부 하는 “놈”들을 보면 정말 별 볼일 없는 “놈”들이 많다. 소학생처럼 어떻게 해서나 선생님 말씀 잘 들어 “출세”한 “놈”들이다. 이런 “출세”에 맞장구 친 선생“놈”들 생각은 이렇다. “자, 대학 4년간(우리 다닐 때는 대개 장기집권. 더 올리 “출세”하거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슨 무슨 장하느라고 수고했(사실은 내 말 잘 들었)는데 학교에 남기지.” 이런 식. 그러니 학습성적 같은 것은 그리 안중에 없다. 참, 자비로운 생각들을 잘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留校한 “놈”들은 선생“놈”에게 충성맹세서약하며 충실한 노복이 된다. 그러면 선생“놈”은 留校한 “놈”에게 학부, 학교를 위해 몇 년 봉사(수고? 실제는 제 월급 타먹기)하는 쇼를 보이게 한 후 석사니 박사를 만들어준다. 留校한 “놈”이 박사까지 도금을 할 때는 어느새 그럴듯한 교수로 둔갑한다. 빛 좋은 개살구? 그래서 또 하나의 대학교 근친번식이 이루어져 그놈이 그놈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학교에 留校할 10여 년 전만 해도 정말 그놈이 그놈이 득실득실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 어쩌면 민주선거(물밑에서는 선생“놈”을 동원한 시험성적조작까지 하면서)라는 허울 하에 더 기승을 부린다고 봐야겠다. 공부보다는 학생회간부요 뭐요 하는 덕택으로 추천을 받아 연구생에도 노시험으로 입학하는 학생회간부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린다. 나는 한국 대학교에 이래저래 좀 오래 가 있어 봐서 알지만 적어도 학생회 간부“놈”들과 선생“놈”들 관계 면에서는 근친번식을 하지 않는다. 그들 학생회 간부“놈”들은 애초에 학교에 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개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정계에 진출하기 위한 “놈”들이 선택한다. 그들이 학생회 간부가 되고 안 되고는 애초에 선생“놈”들하고는 관계가 없다. 공부 성적하고도 그리 관계가 없다. 선거전에서 어떻게 해서나 표를 많이 얻는 것이 장땅이다. 그래서 유세를 하고 선거전을 치르는 것을 앞으로 사회에 나가 대통령출마라도 한번 해볼듯한 정치적 자질을 높이기 위한 일종 연습이나 시험장으로 보는 듯하다. 그들 학생회간부라는 것은 직업적인 선택색채가 진하다. 그리고 그들 학생회 간부“놈”들은 말 잘 듣는 “順民”이라기 보다는 학교당국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하고 쟁취하기 위한 농성을 벌리거나 투쟁을 하며 소란을 피우기가 일쑤다. 그래서 이래저래 밉상을 보이기가 십상이다. 한국 대학교 근친번식은 선생“놈”이 기를 쓰고 자기 제자를 자기학과의 교수채용에 채용되도록 밀어주고 다른 학교 출신들을 극력 막는데서 나타난다. 한국식으로 학연의 연에서 나타난다. 중국 대학교에서는 교수채용을 할 때 다른 대학교 출신을 그리 막지는 않되 그래도 자기 제자를 우선시하는 것은 한국의 경우와 비길 때 50보에 100보의 관계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 대학교의 학문적 근친번식-그 선생에 그 제자의 찧고빻고가 그대로 유지되며 맴돌아간다. 대학교 근친번식 2애비애미 친인척 인맥 타기. 대학교수 자제들 대학붙기 쉽다. 부모들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그 자녀들이 지원하면 가산점이 붙는 것은 물론, 여간하면 붙여주기. 이 정도는 그런대로 곱게 보아주자. 힘 없고 가련한 샌님들이니깐. 그런데 문제는 대학을 졸업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留校시키기는 것이 문제다. 공부고 품성은 둘째 치고 단지 그 부모의 후광으로 留校한다. 학교당국에서는 이것을 일종 복지 비슷하게 생각하여 묵인하고 있는 듯하다. 요새는 갖은 방법을 다 해 석사에 박사까지 만들기. 그 다음 留校지 뭔지 한다. 이것은 정말 한국 대학교에서 볼 수 없는 중국 대학교의 독특한 혈연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과에 보면 부모자식에 형제자매에다 삼촌조카까지 한테 뒤엉켜 돌아가는 판인지라 사람관계는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혀 강의고 학문보다는 사람관계에 조심하게 되고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대학교 근친번식 3줄 잘 서기. 차롓, 대학교에서 출세하자면 자기가 설 줄을 알아 잘 서야 한다는 것이다. 자고로 文人相輕이라 대학교도 끼리끼리 돌아감. 그러니 자기가 끼일 끼리를 잘 찾고 모실 상전을 잘 알고 모셔야 보직에도 쉽게 추천을 받고 교수도 쉽게 되고 무엇도 쉽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왕따에 꼬이기만 하는 인생이 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가 훨씬 심하다고 하니 이만 하기로 한다. 대학교 근친번식 4에라, 됬다. 너무 더럽고 치사해서 말이 안 나온다....이제 우리 대학교도 스스로 자성할 때가 되었다. 나는 내 가슴에 손을 언고 떳떳하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가 위에서처럼 留校한 “놈”도 아니요, 애비애미 친인척 인맥을 타서도 아니라 멋모르고 공부만 하다 보니 어떻게 개빵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줄서기도 모르기 때문이다. 요 몇 년 전 우리 중국의 최고 명문 북경대학교가 박사학위논문심사를 외부 교수나 전문가들에게 위임하되 심사받는 박사생에게 심사위원들은 익명으로 처리되도록 했다. 그리고 북경대학교 출신 박사생들을 留校시키지 않는 원칙을 정했다고 한다. 학문적인 근친번식을 막기 위해서란다. 안티테제로 遠親번식을 추구한단다. 그래서 국내 타대학이나 외국 대학의 명교수나 박사들도 최고노임수준으로 초빙해 들어오고 모셔 들어온다고 한다. 최고의 명문다울시고!2006. 3.14
55    대학교수와 보직 댓글:  조회:4334  추천:56  2006-03-12
대학교수와 보직요새 우리 학교는 좀 시껄벅적하다. 행정인원 물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학교 중급간부들인 처장자리 물갈이가 시작되었다. 교수들도 괜히 들떠 머리를 기웃 처장 자리를 넘보는 판국이다. 사실 교수들이 벼슬자리 감투 하나 바라보고 헤덤빈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수는 강의나 잘 하고 연구만 잘 하면 되었지 무슨 벼슬감투나 하겠지만 여기에는 그럴듯한 내막이 있다. 여기에는 중국 대학의 구조적 병폐가 도사리고 있다.대학의 주인은 교수와 학생이다. 선진국의 ‘敎授治校’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듯 하다. 교수협의회의 파워가 막강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수 전화 한 통화만 행정인원들이 척척 알아서 해주는 세상. 대학에서 행정업무는 敎學이라는 주체행위의 뒤치닥꺼리나 하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말 그대로 補職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敎授治校’가 아니라 ‘行政治校’형국이다. 이른바 행정하는 사람, 한 자리하는 사람이 쥐락펴락하는 판국이다. 그들은 말로는 ‘爲敎學服務’의 머슴, 청지기라고 하지만 그들의 입김이나 파워는 막강하다. 우리 학교의 경우 인사처장 쯤 되어도 그 기고만장한 기세에 교수들 숨쉬기가 바쁘다. 더 한심한 것은 강의를 하다가 수준미달로 쫓겨나 행정으로 넘어갈 경우 오히려 더 빨리 승진하고 ‘출세가도’를 달리는 아이러니. 여기에 비서에 승용차까지 따라 붙으면 기분은 붕 뜨고 그 기세 또한 기고만장해진다. 그리고 행정은 돈을 주무른다. 월급은 쥐꼬리만 하지만 보이지 않는 돈은 적어도 노루꼬리쯤 된다. 사인에 결재에 다 돈을 주무르는 재미다. 이런 것들은 우리 중국의 관본위 관료주의형태의 대학가내에서의 전형적인 한 보기. 그러니 행정은 자연히 補職이 아니라 寶職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니 너도나도 행정寶職 바라보기. 교수노릇하기가 진짜 맥삭해난다. 그러나 진짜 교수들은 사실 행정직을 맡으라 해도 안한다. 교수노릇 하자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함은 물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그런데 책을 많이 보면 볼수록 자기의 무지가 발견되면서 볼 책은 더 많아지고 연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꼬리에 잇닿는 문제점으로 하여 연구거리는 더 많아진다. 언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니 어떤 교수가 많은 寶職에 앉아 매일 회의나 하고 돌아다니기나 하며 술이나 퍼 마시면서도 학술을 한답시고 떠벌이는 것은 일종 學術騙子에 가깝다. 天下文章一大抄가 이들의 학술을 놓고 말한다. 이번 二會에서도 대학교수의 學術騙子문제가 거론되는 듯 하다. 그리고 진짜 교수는 돈 하고 거리가 멀다. 전통적인 의미의 청빈에서가 아니다. 입고 먹을 거만 있으면 되는 거지 돈이 그리 필요 없는 것이다. 대학교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가르치고 연구하는 재미로 산다. 이것이 대학교수의 순수한 진면모다. 그런데 그것이 순수한 만큼 그것은 현실에서 쉽게 오염되고 많이 일그러진다. 요 몇 년간 우리 학교 교수들 참 많이 떠났다. 보다 더 나은 월급, 물질적 대우를 바라보고 떠났다. 딸린 식솔을 먹여 살려야 되니, 아니 잘 먹여 살려야 되니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대학에서 정녕 행정보직이 寶職이 아니라 진짜 補職으로 남고 교수들이 그 보직에 미련을 느끼지 않으며 돈을 종이장처럼 우습게 보게 될 때 대학과 교수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2006. 3. 11
54    퓨전 댓글:  조회:4337  추천:71  2006-03-12
퓨전한국에 난무하는 것의 하나가 신조어. 나는 이것을 한국의 역동성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퓨전이나 퓨전음식 하는 말이 요 근간에 식당 간판에 많이 눈에 띈다. 퓨전이 무엇이냐? 짧은 영어이나마 나름대로 풀이해본다. 음식 food에 미래전망 vision의 합성어로 이해된다. 음식비전이니 음식의 미래비전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한 줄로 안다. 그런즉 누구도 못 먹어 본 새롭게 창출된 음식이라는 데서 사람들 구미를 동하게 하기에 족하다. 한국의 퓨전음식들을 좀 보자. 두루치기, 솥뚜껑구이, 맥반석구이, 불닭... 말만 들어도 한국의 독특한 퓨전음식들이다. 두루치기,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음식재료들을 두루 한데 짱뽕하여 요리한 것, 솥뚜껑구이도 말 그대로 솥뚜껑에다가 돼지고기든지 소고기를 굽기, 맥반석구이는 맥반석에 오징어나 조개 굽기, 매운 고춧가루 투성이의 핫 불닭... 이런 퓨전음식들은 서로 자기가 최신 이미지임을 뽐내며 파노라마처럼 번져간다. 그래서 長江後浪推前浪처럼 처음에는 퓨전음식으로 출범했다가 보편화되면서 다른 새롭게 출범한 퓨전음식에 밀리어 도태되기도 한다. 퓨전음식은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고 일종 세계적인 음식개발붐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라면의 신개발 경쟁을 분석해보면 바로 퓨전적 미스매치 감각의 상품화라고 할 수 있다. 우유와 라면을 매치시킨 것이 그렇고 짜장면과 스파케티를 합쳐놓은 짜빠케티의 탄생이 그렇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일본의 라면 광고에서 중국라면에 서양샐러드를 얹어 파는 일본사람들의 발상에서 나온 상술에 의한 것이다.사실 인간의 음식발전사는 이런 퓨전음식의 파노라마에 다름 아니다. 중국의 신화전설에 신농씨는 百草를 맛보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 인간에게 독성이 없는 可食의 草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채집단계에 있어서 可食의 草가 하나하나 알려지면서 우리 인간에게 먹혀질 때 그것은 하나하나의 새로운 퓨전음식으로 안겨왔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가 개발된 可食의 草들 사이 조합이나 짱뽕을 해서 새로운 퓨전음식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영역을 넓혀 海, 陸, 空으로 나아가며 바다의 해산물, 육지의 짐승들,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들을 재료로 한 퓨전음식을 개발되고 또 이런 海, 陸, 空 사이 조합되고 짱뽕되면서 우리 인간은 미증유의 퓨전음식을 개발해낸 줄로 안다. 물론 이런 퓨전음식개발은 마구잡이로 막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모험과 위험이 따른다. 중국말에 "第一個敢吃螃蟹게"란 말은 그것의 좋은 주석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이른바 음식궁합이란 말이다. 퓨전음식을 개발하는 데는 과학성의 원칙이 기본 전제가 된다. 적어도 음에 속하는 찬 음식재료와 양에 속하는 더운 음식재료의 조화 같은 것을 따져야 하고 같이 먹으면 소모적이거나 해로운 것은 피하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시금치와 두부를 퓨전시킬 경우 시금치에 들어있는 옥살산과 두부에 들어있는 칼슘이 결합하여 불용성의 수산칼슘을 생성하므로 인체의 칼슘섭취가 줄어들어 결석증을 유발하는 것, 그리고 오이에 함유되어 있는 아르코르비나제라는 효소는 비타민 C를 파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와 퓨전을 이루면 무의 비타민 C가 파괴됨으로 소위 상극음식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퓨전음식은 어디까지나 과학성에 기초한 상생음식을 이루며 건강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있던 배재대학교 부근에 "세 발 낙지에 통닭 한 마리"라는 퓨전식당이 있다. 식당이 꽤 성황을 이루었다. 식당 사장의 말에 의하면 음에 속하는 찬 세 발 낙지와 양에 속하는 더운 닭의 조화로 감미로운 새로운 퓨전음식을 개발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健康食이요, 다이어트食이요 하며 무공해녹색음식이나 저칼로리음식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퓨전음식을 개발해내는 것도 그 초점은 어디까지나 건강을 챙기는데 있다. 퓨전음식개발에 있어서 향토음식개발은 매우 효과적인 방편으로 등장하고 있다. 해당 지역의 풍토지리 속에서 독특하게 생겨나는 음식재료로 요리한 것은 타 지역의 추종을 불허하며 돋보이는 존재로 될 수 있다. 중국의 8대요리계통은 바로 이런 향토적인 퓨전음식개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퓨전음식개발에 있어서 향수음식개발도 톡톡히 한 몫 한다. 이른바 못 살 때 먹던 강낭떡이 오늘날 인기퓨전음식으로 개발된 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퓨전음식개발은 음식도 음식이겠지만 그 모양새나 그 음식을 먹을 때 주변 환경 및 무드 같은 것도 곁들인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 먹기가 아까운 음식들, 그리고 한국에서 근간에 나타난 더운 여름에 찬물에 발 담그고 식사하기 또는 자동마사지기계에 발마사지 받으면서 식사하기, 그리고 중국에서 근간에 뜨는 한국의 가든식당에 비근한 生太園式식당은 바로 음식만을 먹는 것이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건강을 챙기고 그 환경이나 무드를 즐기는 웰빙족들의 추구는 그 한 보기가 되겠다.이런 퓨전음식개발은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과 존재를 나타내기도 한다. 미국 TV의 한 코미디 프로에 나오는 주인공이 우유와 콜라를 섞어서 마시는 것이나 콜라에다 밥을 말아 먹는 일본 젊은이들의 기괴한 유행 등이 바로 그와 같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기이한 음식습관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 연변의 유명한 의학가인 노박사가 술을 얼마나 좋아했든지 白酒에 밥을 말아먹었다는 에피소드는 퓨전이라는 말이 나오기 썩 전의 이야기지만 그만의 독특한 퓨전적 음식습관을 나타내주기에 족하다.2006. 3. 12
53    감 한 알 댓글:  조회:4039  추천:76  2006-03-10
감 한 알한국에서의 1년간의 교환교수노릇도 끝나고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 떠나가는 이 시각에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서슴치 않고 감 한 알이라고 하련다. 그래 감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기에 나의 뇌리에 똬리를 틀었뇨?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추운 겨울 한국의 시골풍경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바로 이 감 한 알. 예전의 하늬바람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맵짠 찬바람이 쏴 불어대고 나무는 헐벗은 채 몸부림치고 대지는 얼어붙고 사람들 마음도 얼어붙은 삭막한 이 죽음의 계절, 바로 이 감 한 알이 있어 사람들 마음 훈훈해나고 살아난다. 한국에 지천에 널린 과일나무 하면 감나무와 밤나무가 아닌가 한다. 푸른 감이 노란 감으로 변하고 다시 빨간 감으로 변해가는 것이 한국 가을의 진풍경이다. 이 빨간 감을 따서 홍시를 만들고 꽂감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전통적인 한국 겨울철의 주요 과일 먹을거리. 그래서 가을철 빨간 감을 따는 아낙네의 마음은 푸근하다. 그런데 그 먹을거리가 귀했던 전통사회에 있어서 이 감을 따는 데는 불문율이 있었다. 감을 다 따지 않고 몇 알 남겨두는 것이다. 이른바 까치밥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추운 겨울 먹을거리가 없어 헤매일 까치 같은 날 짐승을 먹을거리로 남겨두는 것이다. 한국의 인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추운 겨울 감 한 알 달리지 않은 앙상한 감나무를 보는 한국 사람의 마음은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불안하다. 이것이 한국인의 정서다. 한국에는 고시레 민속이 있다. 들이나 밭에서 일을 하다가 참을 먹을 때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한 술 떠서 '고시레'하며 들이나 밭의 鬼나 神을 대접했다고 한다. 사실 한국 사람은 전통적으로 鬼神뿐만 아니라 길 가는 나그네도 눈에 띄면 막걸리나 식사를 대접했다. 나는 한국 고대 문학사를 배우면서 방랑시인 김삿갓이 방랑시인으로 남을 수 있는 비결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그 비결을 바로 한국 사람들의 감 한 알에서 보았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베풀며 더불어 살기, 그래서 共生共存하고 共榮하기, 인간의 자아독존적인 파멸을 막을 수 있다. 한국은 근대화에 성공하면서도 이 감 한 알이 남아 있어 좋다. 산에 자생적으로 나고 떨어지는 밤이나 도토리, 다람쥐들의 밥이란다. 그래서 줏기조차도 저어하는 한국의 인심. 저 산의 짐승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달아주거나 들녘의 뭇 새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뿌려주는 거, 한국의 겨울철의 진풍경의 하나.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고착된 放生문화, 천주교에서 自省과 더불어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을 위한 금식기도... 그리고 구정 같은 큰 명절 때마다 불우이웃돕기성금기부하거나 자연재해가 들었을 때 성금기부하기, 한국의 겨울은 이런 감 한 알이 있어 나기에 퍼그나 훈훈하다. 그 빨갛게 상기된 감 한 알은 시골 할아버지의 넉넉한 마음이런가, 우리 인간의 영원한 포근한 자궁이다.2006. 2. 23
52    정인갑 아저바이, "손님이 왔으"면 좀 쉽시다 댓글:  조회:4738  추천:44  2006-01-16
정인갑 아저바이, ‘손님이 왔으’면 좀 쉽시다정인갑 아저바이 전 상서:그간 안녕하십니까?아저바이 “심상치 않은 '손님' 화제”를 받아보고 이 먼 이국 땅에서 매우 반가웠습습니다. 언녕 답복을 드린다는 것이 한 해가 다 가고 이제야 필을 들게 되니 그래 이게 말이 됩니까? 후학으로 말입니다.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아저바이 말씀은 천만지당한 줄로 압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지성인을 배양하는 최고 학부”-연변대학에 대한 우려와 관심 내지는 충정에 더 없이 감복하였습니다. 연변대학에 몸 담고 있는 가르치는 자로서 아저바이의 그 우려, 그 관심, 그 충정에 백분의 1도 못 미쳐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에 “ '생리휴강제도' 따위를 연변대학에 끌어들여” “오염시키”려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저바이는 너무 예민합니다. 과잉반응? 내가 “심상하”게 쓴 “손님”을 아저바이는 굳이 “심상치 않은 ‘손님’”으로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원색적인 언어구사를 했습니다. “'생리휴강제도' 따위”, “끌어들여”, “오염시키”기 “따위(나도 한번 써봅시다)” 같은 말은 정말 “따위”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어쩌면 아저바이하고 저하고 세대차라 할가 아니면 시대차라 할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손님”이 워 그리 심상치 않습니까? “손님”이 왔으니 쉬는 것이지요. 아저바이는 내 이 단순하고 홀가분한, 어쩌면 단세포적으로 단순하고 홀가분하다보니 너무도 명료하고 분명한 단순하고 홀가분함에 복잡하고 거창하게 풀이를 하니 정말 눈이 번쩍 뜨이기도 합니다. “한국 청년학생의 정신상태의 변화에 대한 우려”,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이는 한국 대학생들이 태만,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한마디로 “'손님' 현상은 한국 적지 않은 청년학생들의 타락을 나타내는 심상치 않은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머리가 갸웃해집니다. “생리휴강제도”는 “생리휴강제도”대로 돌아가고 공부는 공부대로 잘 하는 한국 청년학생, 대학생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온 저입니다. 적어도 요 1년간 배제대학교 강의체험만 놓고 보아도. 이것은 절대 “저자가 배재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배재대학化하여 생긴 착각(當局者迷)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저바이는 저한테 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거저 한국“놈”들 놀아나는데 잘 놀아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이니깐요. 아저바이 논리대로 하면 한국 교육인적자원부는 정말 정신 나간 “놈”들입니다. 자기네 청년학생, 대학생들을 “태만, 타락”시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2006년 1월 13일 금요일 한국『매일경제』사회면 윤지경 ․ 김명수 기자의 「생리통 결석도 “출석”인정」보도글을 한번 봅시다.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올해 새학기부터 여학생이 생리통으로 결석을 했을 때 출석으로 인정받게 된다./교육인적자원부는 12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여학생이 생리로 인해 학교에 안나왔을 때 건강권과 모성보호 차원에서 적절한 사회적 배려를 하도록 관련제도 등을 보완할 것’을 받아들여 이같이 결정했다./이에 따라 오는 3월부터는 생리통으로 결석했을 때 학교장에게 확인을 받으면 출석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전에는 생리로 결석했을 때 병결이나 병조퇴로 처리됐다. 교육부 관계자는 근로기준법 등에 근거해 ‘출석으로 인정되는 생리로 인한 결석’은 한 달에 하루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좀 지루하니 이만큼 합시다. 내가 아저바이한테 글 안 올리까 하다가 실은 한국 교육인적자원부의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접하게 되어서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부 대학 스스로의 자율권 차원에서, 그것도 주로 학생들 스스로 제 좋은 차원에서 “생리휴강제돈”지 뭔지 야단법석을 피우더니 이젠 정부 차원에서 같이 “놀아”나니 말입니다. 새해에 들어서더니 한국 정부도 새로운 출발을 하는 모양입니다. 한국은 그만하면 민주주의가 잘 된 나라입니다. 무슨 문제든지 공개하고 공론화하고 토론에 부침니다. 그래서 나라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투명화되고 절대 다수의 의견이 결집될 때 그기에 따릅니다. 시끌벅적한 민주주의, 바로 여기에 한국의 역동성과 저력이 있습니다. 물론 절대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꼭 맞고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맹점이라는 것도 바로 여기서 드러나지요. 그러나 현재로는 절대 다수의 논리를 따르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국 교육인적자원부도 아마 제멋대로의 독단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지 않습니다. 이미 근로노동법에 의해 사회직장여성들 범위에서 “생리휴식제도”가 실시되고 있고 또한 대학 범위에서 공론화되고 일부 대학에서 “생리휴강제도”를 실시한 전제하에서 그 합리성, 적법성 같은 것을 충분히 검토하고 검증하는 민주주의절차를 거친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서 “적절한 사회적 배려를 하도록 관련제도 등을 보완할 것’에 합의를 본 줄로 압니다. 현대는 대명천하 민주주의시대라 아저바이가 “심상치 않”게 보고 내가 “심상하”게 보는 “생리휴강제도”는 민주주의원칙 차원에서 볼 때 그 시시비비는 분명할 줄 압니다. 그러니 제가 “'생리휴강제도' 따위를 연변대학에 끌어들”이는 문제도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아저바이께서는 백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나는 적어도 우리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생리휴강제도”옹호/반대? 그래서 한국의 경우처럼 100%는 아니라 하더라도 절대 다수가 “옹호”라 할 때는 “오염” 좀 시켜도 무방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개혁가, 행동가, 실천가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저는 얼마나 나태하고 안일에만 빠져있는지 옹호/반대 같은 묻기조차도 하기 싫어하는 놈입니다. 그러니 아저바이, 정말 마음 놓으십시오. “오염”문제는 원천 봉쇄되고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괜히 내가 “이제 중국에 돌아가 우리 연변대학교 강의 때는”운운, 실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생리휴강제도”, 정말 “심상치 않”게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아저바이한테 한 수 배웁니다. 이것은 워낙 인권에 관한 문제이니깐요. 한국 교육인적자원부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여학생의 ‘건강권과 모성보호 차원에서“ 결정한 것이군만요. 인권, 세상이 점점 개명해지고 문명해질수록 가장 잘 먹혀들어가는 말. 사형수들한테 안락산지 뭔지 한다는 세상이 아닙니까? 아저바이 말씀 지당합니다. ”밥을 짓다가 아기를 낳는다거나, 필자의 모친처럼 해산 후 며칠 쉬지도 못하고 가마니를 짜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먹고살기 바쁜 세월에 정말 인권의 사각지대에 살았습니다. ”손님“보다 더 신성하고 중요한 아기낳이도 대접을 못 받았으니 말입니다. 불쌍하지요? 그러나 시대는 변해 아저바이가 지적하다시피 ”중국에서 1950∼70년대까지 종업원에 한해 해산 후 56일의 휴가제도를 실시하다가 점점 시간을 늘여 지금은 반년, 조건이 허락되는 직장에서는 심지어 1년까지 허용한다.“ 이것이 발전이겠지요. 아저바이의 결론도 이런 거 같습니다. ”이렇듯 사회 발전에 따르는 여권의 伸張은 좋은 일이다.“ 아저바이는 멋지게도 ”생리휴가제도“를 ”여권의 伸張“으로 모 박았군만요. 사실 여권운운 떠나서 ”손님“은 우리 모두의 신성하고 중요한 ‘건강권과 모성보호“의 거창한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여자한테서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아저바이, 제,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도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정말 몸에 와 닿으니 말입니다. ”손님“,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저바이가 ”처음 '생리'를 알게 된 것은 중3때였다.“고 했지요? 그러니 지금 아이들보다 얼마나 늦습니까? 그 ”총각 선생“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저는 아저바이보다 썩 후배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원색적인 ”월경“은 좀 알만한데 ”손님“은 아직 그리 몸에 잘 닿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순이들은 월경 온 것을 누구에게 알리기조차 부끄러워했지요. 아니, 누가 알가봐 겁나했지요. 아저바이의 그 ”너무 수줍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순이와 ”진붉은 월경색 2호 글자로 '월경, 당당히 말하자'라는 제목을 달고 그 옆에 알락달락 예쁜 생리대 아이콘을 줄 세워 놓“은 배재대학교 3순이들하고 한번 나란히 세워놓으면 바로 세월의 자아풍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아저바이가 ”'월경'에 대한 엄폐의식의 파멸이 아니라“고 운운하면서도 ”사회의 변화가 이렇듯 無常한데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참, 인권, 아니, “손님”얘기를 하니 아저바이 말씀대로 여권이라 합시다. 지금 막말해서 세월이 좋다보니 여자들 말 잘 들어주고 있지요. 사회가 나서서 여자들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잘 챙겨줍니다. “손님이 왔습니다”, 그러니 쉬십시오. 우리 사회의 아량이고 신사스타일. 識時務者가 俊傑이 아니겠습니까? 아저바이, 나보다 중국말 더 잘 하니 물론 잘 아시겠지요.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순리인줄로 압니다. 사실 중국어에 “來例假了”도 마찬가지. 의례히 오게 되는 휴가니 쉬어야 된다는 것. 그런데 그 동안 우리 사회가 각박하다 보니 그렇게 못해주었다. 그래 이제 얼마간 살만하고 여유가 있으니 쉴 때는 쉬라하는 식. 이쯤에는 아저바이도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저바이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기의 '손님'은 별문제이다. 이 '손님'은 重體力勞動者에게 적당한 혜택을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아저바이는 重體力勞動者만 내세우면서 정신노동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輕體力勞動者까지 그 혜택에서 제외시키니 학생에 한해서는 더 운운할 여지도 없이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학생에 한해서는 체육시간을 면제해 주면 그뿐이다. 일반 수업까지 빠져야 할 정도의 부담이 되는 '손님'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고 학생의 “손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계시군만요. 그런데 아저바이의 이 “절대”는 좀 극단적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생리휴강제도”가 법적인 효력을 발생하면서 정착한데 대해 한번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輕體力勞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정신노동도 대단히 소모적이고 피곤한 것입니다. 아저바이가 줄곧 정신노동을 해왔지 않습니까? 이 점 잘 아실겁니다. 학생들, 공부 마찬가지의 정신노동입니다. 그것이 기형화될 때는 “입시전쟁”으로까지 비화하지 않습니까? 학생들에게 “손님”은 육체적으로만 나른하고 피곤한 “손님”이 아닐 줄로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성과 연계되면서 그렇게 신성하고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손님”은 찌부둥한 흐린 하늘과도 같은 흐린 기분이랍니다. 이 점을 느껴보자면 사실 아저바이나 나나 여자가 한번 되어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데. 그런데 그것이 일종 모성의 통과의례를 치르는 고역임은 아저바이나 저의 대학교수 지성으로는 얼마든지 공감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고역을 같이 치러주지는 못할망정 우리는 충분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배려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요.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생리휴강제도”가 제도적인 가장 확실한 방식의 하나임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그건 그렇기한테, 아저바이는 “여성에 대한 무제한의 '혜택”이 마음에 걸리지요? “마땅치 않”다 이거지요. 사실 “무제한의 ‘혜택’”문제가 아니라 여자를 보는 아저바이의 근본시각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슨? 안 그렇다구요? 그럼 좋습니다. “시각을 바꾸어 본” 아저바이의 高見을 잠간 보도록 합시다. “여권의 신장이 아니라 오히려 여권에 대한 침해로 변할 수 있다. 여성을 弱者, 심지어 無能者로 취급하며 그 만큼 사회 활동의 領域에서 배제시키는, 하여 여성의 사회 지위가 낮아지는 결과를 빚어낼 수도 있다. 남성과 거의 같이 일하는 중국 여성이 집에서 놀며 남편이 벌어다 주는 밥을 받아먹는 한국 여성보다 사회지위가 훨씬 더 높은 것이 이 도리를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변증법이 흘러넘치고 논리적으로 완벽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너무 비약이 심하고 인간을 너무 경제적 동물로 본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배려가 어찌 손바닥 뒤집듯이 “침해”로 변할 수 있고 “弱者”, 심지어 “無能者”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사회지위를 “낮아”지게 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여성들이 “생리휴가”를 한다고 해서 사회활동영역에서 배제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 배려 속에 여권은 보호받고 그 배려 속에 여성은 육체적, 정신적 충전을 하며 强者, 有能者가 되며 사회지위는 높아집니다. 그리고 그 배려는 남자가 여자에 대한 배려가 아닙니다. 전반 사회적인 협의 하에 우리 인간이 베푸는 배려입니다. 인간만이 베풀 수 있는 배려입니다. 바로 이런 배려와 베품 속에 여성의 인권은 더 돋보이는 존재로 각인됩니다. 아저바이가 여권 운운하니 저도 따라 갔습니다만 사실 여권이라는 말은 근본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남녀이분법에 의한 남권 대 여권의 대립논리를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떨어져 살 수 없고 여자는 남자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상호보완적인 전일체적인 인간존재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남권도 좋고 여권도 좋고 그것은 모두 하나 된 우리 인간의 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우리가 여권을 말하는 것은 이때까지 우리가 가부장제 하에서 인간의 권리를 쪼개어 이른바 남권을 조장하고 남용한데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리휴강제도”라는 것은 아무리 무제한으로 베풀도 마땅한 우리 인간의 성스러운 권리입니다. 그리고 아즈반이, 여성해방의 경제론풀이는 많이 듣던 얘긴데 합리적인 면도 있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는 딱딱한 경제-돈만의 관계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하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관계는 정입니다. 아저바이, “정 하나로 맺어진 사랑...” 한국 트로트 못 들어보셨습니까? 정만 통하면 니가 돈 벌어오니 내가 돈 벌어오니, 니가 많이 벌어오니 내가 많이 벌어오니... 이런 문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집에서 밥만 먹고 잠만 자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할 일이 있습니다. 집안 거두고 아이 낳아 키우고... 얼마 전 한국에서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해보았더니 월평균 적어마치 100만원어치라고 합니다. 사실 여성들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너무도 대단한 일을 합니다. 남자들이 두 손 들고 마는 일을 합니다. 위대한 어머니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른바 사나이 남자들이 집에 들어와서 큰소리 못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정만 통하면 베개머리송사라는 것도 잘만 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이런 말이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남자는 이 세계를 지배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지배한다고. 아저바이, 이렇게 놓고 볼 때 아저바이의 한국과 중국의 여성지위 운운은 좀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전통적인 문화풀이가 곁들어져야 될 줄로 압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안방을 차지하고 창고열쇠를 쥐고 있은 줄로 압니다. 현재도 이런 패턴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편네한테 돈 좀 얻어 쓰기 위해 두 손 싹싹 비비는 한국의 나그네들, 그리고 비자금 챙기기에 바쁜 한국의 나그네들이 불쌍합니다. 아저바이, 한국에 왜 노숙자가 그렇게 많은지 압니까? 돈 못 벌어들어 가니깐 여편네 볼 면목이 없어 스스로 추방한 나그네들이 많이 합류했기 때문이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른바 여권이 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문화대혁명 같은 “혁명”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유교문화를 싹쓸이하여 이른바 여권이 머리를 든 줄 압니다. 현재 중국의 많은 평범한 가정들을 보십시오. 사실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돈을 적게 벌어들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지는 돈을 못 벌어오면서도 돈을 적게 벌어들어 오거나 못 벌어들어 오는 남자에 대해서는 여성들이 피탈하며 우습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저바이,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더 말씀 드리면 부부간, 가정의 문제는 경제, 돈만으로 풀이할 것이 아닙니다.그리고 참, 아저바이가 생리휴강제도를 주자니 공부 빼먹는 시간이 너무 많아 우려된다고 했지요? “'손님'이 머무는 시간을 평균 4일로 하면 남학생보다 15.4% 적게 수업 받는다. '손님'체류 기간과 일요일이 겹칠 수도 있겠지만 수업이 싫어 주장한 것이라고 할 때 일요일 외에 4일간 결근할 것은 당연하다. 1년 수업 기간을 9개월로 가정하면 대학 4년간에 남학생보다 4×9×4=144일 결근하게 된다.” 나는 “손님”이 머무는 시간을 잘 모르는데 아저바이는 너무도 잘 알고 계시군만요. 그리고 그 골치 아픈 산수계산도 너무 잘 해 준 줄로 압니다. “수업이 싫어 주장한 것이라고 할 때”라는 가정법을 곁들이면서 말입니다. 아저바이 계산법으로 볼 때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육인적자원부의 관계자도 “‘생리로 인한 결석’은 한 달에 하루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 대학에서 실제 실시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4일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저바이, 한보 물러서 이 하루쯤은 어떻습니까? 이 하루쯤이면 “여성에 대한 무제한의 '혜택'” 아니겠지요? 아저바이, “생리휴강제도”는 “여간 복잡한 문제”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대학이라고 해도 저마다 손님이 오는 시간이 다르니 강의 진도를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사실 이런 문제는 없습니다. 그저 정상적인 원래 강의진도에 따라 하면 됩니다. 하루 쉬고 곧 바로 따라 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여자들입니다. 물론 “여학생에게 이런 혜택(생리휴강제도)을 주자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더 낙관적이고 적극적이며 주인공다운 인생도 있지 않을까."가 아니라 있습니다. ”시끄럽다! 우리는 한 달에 한번씩 붉은 '손님'이 찾아와 고무해주니 신바람 나는데 휴강은 무슨 놈의 휴강이야! 너네 남학생들 우리보다 작대기 하나에 계란 두 개 더 차고 다니니 몸이 무겁고 힘겹지? 휴강하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해봐라!"라며, 말입니다. 물론 여자들 가운데는 이런 半邊天하는 女强者도 있습니다. 우리 중국 여자들 가운데 많지요? 그런데 여자들 가운데 半邊天할 수 없는 弱女者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손님” 때문에 골치아파하는 여자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의 다원화 내지 다원 가치성 원칙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리휴강제도”는 어디까지나 꼭 쉬라는 것이 아니고 쉴 수도 있고 쉬지 않을 수도 있는 여성들 자율에 맡기는 것입니다. 아저바이는 “생리휴강제도”실시의 구체적인 세부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대학의 경우를 보면 학습성적과 장학금과의 긴밀한 연계 등등의 구체적 조치가 따라 가다보니 실제로 “생리휴강제도”를 남용하는 여학생들은 매우 적습니다. 쉬라도 안 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저바이, 아저바이가 “생리휴강제도”에 찬성표를 던지자 하니 자꾸 “'皆勤生(개근생)' '整勤生(정근생)'”이 뒤를 잡아끈다 이거지요? “필자가 소학을 다닐 때 '皆勤生(개근생)' '整勤生(정근생)'이라는 상이 있었다. 1년에 결근 날자가 이틀 이하면 정근이고 하루도 없으면 개근이다(지각, 조퇴가 3번이면 하루 결석으로 인정한다). 30명 정도의 한 개 반에 해마다 정근생 2∼3명, 개근생 2∼3명의 수상자가 나온다. 심지어 졸업시 6년 정근생, 개근생 수상자도 간혹 나온다.” 맞습니다. 그때는 '皆勤生(개근생)' '整勤生(정근생)'들이여야 공부를 잘 하고 수상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았습니다. 거저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학교에 가야 공부가 되니 말입니다. 집에 책도 없고 TV도 없고, 볼거리가 없는 거지요. 무식쟁이 엄마, 아버지가 많은 지라 가르쳐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집에 책도 있고 TV도 있고, 엄마, 아버지도 유식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굳이 학교에 안 가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새 장비가 좋으니 선생님 강의 녹음, 녹화해온다든가, 인터넷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실제 강의 못지 않은 강의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집의 따뜻한 구들에 앉아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죠. 아저바이, 아저바이는 “중국의 웬만한 대학에서는 며칠 결근했다가는 남의 필기장을 빌어 베낀다, 밀린 숙제를 한다 하며 보충 공부로 둬 주일간 진땀을 흘려야 하는데 말이다.”를 들먹이고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정말 촌스런 시대착오적인 촌 아저바이의 얘기입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 우리도 이렇게 공부했습니다. 지긋지긋 신물이 나도록 말입니다. 시험공부라는 것이 교수님 마디마디 말을 최고지시로 간주하고 달달 외우기. 그래서 강의시간에는 교수님 방귀 뀐 소리 하나 놓칠새라 대구 베끼기. 그리고는 앵무새 노릇하기. 高分低能의 죽은 공부. 대학, 대학강의라는 것이 어디 이렇습니까? 적어도 베끼기가 아니라 같이 사고하고 토론하고 쟁론하기. 결론이 없어도 좋습니다.『성경』같은 경전공부가 아니니깐요. 사고의 깊이를 가져오고 폭을 넓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공부할 줄 알기 배우기, 한 마디로 공부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할 줄 아는 공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습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아저바이나 저에게 있어서 이런 상식적인 논의는 너무 소모적이니깐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실 아저바이가 “'皆勤生(개근생)' '整勤生(정근생)”이라든가, “필기장을 빌어 베끼기”, “둬 주일간 진땀을 흘리기”든가는 제가 이해한 학습방법 차원의 천박한 얘기가 아니고 보다 심도 있는 고차원의 얘기인 듯 합니다. “옛날 한국도 상기의 상황과 비슷하였으리라 본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광복 후의 곤란, 6•25전쟁 후의 난관을 이겨냈으며 한강의 기적도 창조해 냈으리라. 좀 먹고 살만해 졌다고 안일만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세상에 각고분투 없이 출세한 사람이 있는가!” 아저바이는 바로 “정신”을 얘기하고 있구만요. 물질, 방법보다는 정신, 정신적 힘, 그런 거 말이지요? 인간에게 정신이 정말 필요하지요. 정신없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 또한 너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논의입니다. 그리고 아저바이는 이 정신을 너무 흘러간 옛 노래에서 찾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무지막지하게 돌격, 앞으로의 “계속혁명” 시대가 아닙니다. 과학의 시대입니다. 합리적인 과학의 원칙에 따라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좀 먹고 살만해 졌다고” 슬슬 놀아가며 충전도 해가며 여유롭게 사는 시대입니다. 이른바 삶의 질을 따지는 시대입니다. 주 5일 근무제가 세계적인 추세로 확산일로를 걷지 않습니까? “각고분투”의 정신으로 더 열심히 일해 공산주의를 앞당겨 와야 할 우리 중국도 언녕 만만디 주5일근무제를 하지 않았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현재는 많은 작업들이 컴퓨터자동화라인이 되어 있어서 주5일근무만 해도 이전에 하루도 안 쉬고 줄창 일만 하던 때보다도 효율이 높다는 것이지요. 먹고 살만하다는 것이겠지요. 아저바이, 아저바이는 위의 흘러간 옛 노래에서 보면 “한강의 기적”운운에 지난날의 한국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아니 현재의 한국 청년학생,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심기가 불편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보고 있구만요. 그래서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결코 '생리휴강제도'의 합리여부만을 운운하자는 것이 아니다.”지요. 사실 아저바이는 시시껄렁한 “손님”에 “심상치 않”기 보다는 여기에 더 “심상치 않”은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간 우려를 표시할 일이 아니다.”가 아니겠습니까? “중국에 유학 온 한국 대학생 공부 안 한다고 너무 소문났다. 수업에 빠지는 현상은 아주 보편적이며 그 정도도 십분 엄중하다. 어학 연수생의 예로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50% 정도의 수업에 빠지는 학생이 1/4, 30∼50% 빠지는 학생이 1/4이나 되며 1주에 한번도 안 빠지는 학생은 거의 없다. 기숙사에 찾아가 보면 대낮에 쿨쿨 자는데 밤새 카라오케에 가 놀고 새벽에 돌아온 자도 비일비재하다.”, “유학생만 그런가 했는데 자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저바이의 경험에다 필자의 경험을 놓고 볼 때 분명히 이런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저바이의 이런 예리한 지적에는 너무 예리하다 못 해 극단적인 편견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 대학생이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이라는 제한 어구가 붙었습니다만, 아저바이의 그 가르치는 사람의 정의감이 밑받침된 격앙된 감정이 흘러넘치는 질정은 이것을 커버하고도 훨씬 옷돌고 있습니다. 요즘 애들 공부 안 하는 것 같지만 할 “놈”은 다 합니다. 우리 눈에 안 하는 것 같이 보일뿐입니다. 아저바이는 꼭 선생의 강의를 들어야 하고 낮에 해야 공부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요즘 애들은 선생의 강의보다는 스스로 안겨오는 영상, 낮보다는 밤에 더 정신이 나 하며 공부에 열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 데 것은 그만 두고 북경대학만 놓고 보더라도, 썩 오랜 전 언젠가 필자가 북경대학에 놀러갔다가 박사생들을 보고 夜猫子라고 하는데 어안이 벙벙해 하다가 그 사연을 알고는 거저 웃음이 피식 나오고 말았습니다. 낮에는 쿨쿨 잠만 자다가 남 다 자는 밤이 되면 밤새도록 책을 보며 공부를 하니 야행성의 夜猫子라고 할 수밖에. 그래서 북경대학 博士生樓는 밤에도 대낮처럼 환히 밝아 있답디다. 한국 애들은 여기에 한 술 더 뜨는 것 같습니다. 밤에 공분지 무언지 했으면 낮에 잠이라도 자야 되겠는데 커피 둬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낮에도 책을 끼고 돌아다니니 말입니다. 물론 낮과 밤을 뒤바꾸어 행하는 역자연성은 나쁘겠지요. 그러나 못 말리는 요즘 아이들은 바로 이렇게 공부합니다. 그리고 요즘 애들 동기부여가 잘 되고 필요성만 생기면 하지 말라 해도 열심히 공부합니다. 이른바 사회에 나가 쓸모 있는 공부, 취직에 필요하고 살기에 필요한 공부는 열심히 합니다. 아니, 이런 “거창함”보다는 코앞의 장학금을 타기 위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입니다. 야들한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보다는 “필요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더 잘 통합니다. 그리고 요즘 애들 자기 적성에 맞고 흥취가 동하는, 이른바 개성에 맞는 공부는 열심히 합니다. 빌게이츠타입입니다. 좀 자사자리하고 용속하고 별 볼 일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후계자가 되기 위한 거창한 전 인류적인 목표를 가지고 공부했는데 말입니다. 이 면에서 개인주의가 팽배한 한국 애들이 더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저바이의 “한국 대학의 사정을 잘 아는 자에게 이런 예기를 했더니 ‘한국 대학생들 PC방에 가 게임 놀고, 채팅하고, 술 마시고, 데이트하는데 미쳤지 공부하는 줄 알아? 나흘 더 배운 자나 덜 배운 자나 그거이 그거야"며 필자를 면박하는 것이 아닌가!’”에서 그 “한국 대학의 사정을 잘 아는 자”는 사실 잘 아는 자가 아닙니다. 그 자는 너무 피상적으로 심정적으로 말, 아니 내뱉었을 뿐입니다. 필자가 한 1년간 직접 강의를 해보니 이렇지 않습니다.아저바이, 요즘 아이들 정말 획일적으로, 천편일률적으로 보고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因材施敎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우리는 힘듬니다. 아저바이, 저도 중국에 있을 때 우리 학부에 유학 온 한국 연구생들한테 한어를 가르친적이 있습니다. 단 세 명을 놓고 가르치는데 다 제멋대로 놀아납니다. 한 “놈”은 꼬박꼬박 제 시간에 오고 강의도 열심히 듣습니다. 우리가 다닐 때 소학생 같았습니다. 다른 한 “놈”은 위의 그 夜猫子타입니다. 짜식은 자기는 정말 낮에는 정신이 흐리터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가 져야 자기는 정신이 난다는 거지요. 또 다른 한 “놈”은 자기는 아예 강의 자체를 싫어한답니다. 딱딱한 분위기보다 홀가분한 분위기속에서 공부를 해야 잘 된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강의 잘 듣는 그 애만 좋다고 하고 나머지 두 애는 희망 없는 애라고 포기했겠습니까? 이렇게 할 때 가르치는 자로서는 너무도 무책임하지요. 학비까지 받아 챙기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첫 번째 “놈”은 오전 강의 그대로 하고 두 번째 “놈”은 자정 12시(나도 夜猫子니깐)에 하고 세 번째 “놈”은 점심에 밥 먹으면서, 때로는 술 한 잔 곁들이면서 하고, OK? OK! 師道尊嚴을 다 잃고 학생들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 같지만 우리의 교육이 因材施敎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소학교에 매개 반 인원을 적정수준으로 제한하고 교실도 가족적인 분위기로 만들며 강의도 아이들 적성에 맞는 영상멀티매체를 동원하든가, 오락이나 유희 속에서 진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저바이, 因材施敎, 적성에 맞는 교육을 할 때는 ”또한 세상에 각고분투 없이 출세한 사람이 있는가!”가 아니라 그런 사람아 나옵니다. 세상은 萬花境이라 자기 적성만 잘 개발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적성개발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현대교육의 특색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적성개발을 잘 할 때 진짜 이 세상을 감짝 놀래우는 “괴짜”가 탄생하기도 합니다. 빌게이츠, 그렇게 因材施敎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선전국 미국식 대학교육도 자기의 적성개발에 맞지 않다고 판단되자 중도포기.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적성개발에 나서 현재 작지만 가장 강한 세계 최고의 컴퓨터회사를 일떠세웠지 않았습니까? 몇 년 전 중국의 교육계에 불기 시작한 이른바 創新교육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因材施敎를 전제로 한 학생 나름대로의 적성개발 및 창의성발휘에 모멘트가 놓여있다고 봅니다. 어떻습니까? 아저바이?아저바이,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손님”, 더 나아가서는 한국 청년학생, 대학생들에 대해 “한국의 지성인들은 마땅히 이를 심상치 않은 화제로 보아야 한다.”고 그 누구에게 “호소할” 것이 아니라 일단 아저바이의 시각교정이 필요하고 그 다음 “심상치 않”게 볼 문제인 줄로 압니다. 아저바이, 어쩌다 보니깐 말이 길이지고 많아졌습니다. 좀 격앙된가 봅니다. 그러니 논리적 비약을 떠나서 애초에 두서도 없고 논리도 없는 줄로 압니다. 아저바이의 그 하해 같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기분 좋게 받아주고 읽어주십시오. 읽기가 거북스럽거나 싫으면 연길에 놀러 오십시오. 진짜 "손님"이 왔는데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술 한 잔 기울이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껏 얘기합시다. 아저바이하고 할 얘기가 많습니다.항상 건강하시고 웃으며 삽시다.우상렬 배상2006. 1.14
51    韓流가 漢流라 댓글:  조회:4299  추천:100  2005-12-20
韓流가 漢流라한국사람들 韓流는 잘 알아도 漢流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 한국에 와 있는 나는 중국조선족으로서 漢流가 폐부에 와 닿는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韓流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 정확히 말하여 韓流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나는 언녕 알고 있었다. 1993년 처음 조상의 뼈가 묻힌 고국의 땅을 밟는 나의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국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료로 박사공부 시켜주겠단다. 그런데 전제조건으로 한국어시험에 합격되어야 한단다. 그래서 흔쾌히 자신만만한 한국어시험보기.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낙제. 내가 조선어시험을 치렀지 한국어시험은 아니란다. 무슨 두음법칙이니, 띄어쓰기니 하는 것들이 전부 조선어식이란다. 그러니 이불짐 싸지고 돌아갈 준비를 하란다. 나는 속으로 꿍지랑 거렸다. 조선어가 한국어고 한국어가 조선어지, 뭘 별개나. 그래 가지고 통일을 하겠다고. 좁쌀은 좁쌀이네. 그래 기분은 잡쳐 그해 추석도 찌부둥하게 보내고 나니 무슨 한국어는 한국어고 조선어는 조선이야 하는 한바탕 교육을 하고는 입학시켜주더라. 그기에 무슨 자매대학의 추천을 받아왔으니 하는 꼬리표를 달면서. 그래 그럭저럭 공부를 하고 있을라니 진짜 중국사람, 반쪽이 아닌 온쪽의 중국사람 漢族들이 유학을 한답시고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은 한국어가 영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한 1년간 한국어를 배웠다는 친구들이 내 조선어 식 한국어보다는 형편없었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걱정을 했다. 저래 가지고 입학시험에 합격되겠는가고. 그리고 상상은 내달려 저래 가지고 대학원공부는 또 어떻게 하지?하고. 그런데 참 다행한 것은 이들이 시험 치는 쪽쪽 합격이란다. 나의 걱정은 杞憂였다. 나는 한국 사람의 너그러움을 높게 평가했고 그들을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슬그머니 속에 캥기는 것이 있었다. 한국어 수준 내 발바닥 때도 못 따라오는 그들이 쉽게 합격하고 내가 어렵게 합격한데는 무엇이 잘못 되도 한참 잘 못된 것 같다. 그 잘되고 못됨을 캐느라고 몇날며칠을 머리 싸매고 끙끙거리며 보니깐 그 갈래판이 의외로 너무 간단하여 허탈감을 느끼다 못해 허무맹랑해지고 말았다. 원래 이 漢族 유학생들이 한국교수들한테 폐부에 와 닿는 韓流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 韓流란 말이 없었지만. 어, 大國 사람들이 이제 우리 것을 배우러 와. 감사하고 기특할시구. 쏴라쏴라 합격. 한국 사람들 기분파니깐. 한국 사람들 눈에 나 조선족은 大國 사람이 아니다. 너는 어디까지나 우리 小國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같은 종자라 한데 끼어주는 것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럼 그렇다 하자. 그런데 공부하면서 열 받는 것은 아무래도 조선족 내 쪽이다. 漢族들은 과당시간에 거저 와서 자리만 지켜주고 형식적으로 레포터를 내고 시험을 건성건성 치도 곱게 보아주기. 레포터 발표에 꺽꺽거리고 뜨듬뜨듬 거리는 것이 애교성 있고 귀엽게 보였다. 조선족, 나는 연변억양을 좀 띠면 이상하게 여기고 북한 억양을 좀 띠면 눈살을 찌프린다. 그때 나하고 우리 조선족 젊은 여류 소설가 김영옥이가 같이 공부했다. 영옥이는 뚝 밸이 있고 개성이 있다. 작가로서의 기질이 있다. 영옥이는 그때 이미 한국에서 조선어인지 한국어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리말로 소설집『미친녀』까지 출판했다. 촉망받는 젊은 소설가임에 틀림없다. 영옥이는 그때 석사과정을 다 끝마치고 논자시험만 남은 상태. 그런데 그가 논자시험-학위논문제출자격시험 한국어에 합격되지 못했다. 다른 꺽꺽거리고 뜨듬뜨듬 거리는 漢族들은 다 합격하면서 말이다. 영옥이는 울먹울먹하며 나를 찾아왔다. 나는 할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 여린 마음을 위로해줄 수밖에 없었다. 너, 왜 조선족인가고. 漢族이 아니고. 그리고 여기는 정신병원이라고. 내가 공부하는 곳은 그래도 공산주의적 무료혜택이 많아 조선족에 漢族에 여하튼 중국유학생들이 꾸역꾸역 많이 모여들었다. 그러면 나는 에헴, 에헴, 한국 식 선배 틀을 차리며 후배들에게 공부묘방을 알려주었다. 너네, 시험 잘 맞자면 중국사람 아니, 반드시 漢族티를 내야 한다. 조선족 너도. 공부는 대충대충해도 되. 거저 漢族으로서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이면 되. 알았쟈? 과연 내 말은 선배다운 가르침이었다. 중국 후배들 공부 좀 해보더니 그저 내 말이 딱 먹혀들어간단다. 그래서 이 친구들 내 말은 팥으로 미주를 쏜대도 잘 들었다. 사실 내가 있는 연구원뿐이 아니고 전반 한국사회가 그렇다. 여보세요, 중국에서 오셨지요? 얘. 중국에서 온 조선족입니다. 아, 그러니 우리말을 잘 하지/여보세요, 중국에서 오셨지요? 얘. 중국에~서 온 漢族입~니다. 아, 그래요. 속으로는 한국어를 잘 못한다하면서도 아, 그만하면 혹은 그래도 우리말을 잘 하시네요.하고 짜른 바지춰주기. 그리고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말을 잘 하는 조선족은 중국말을 잘 못할 거고 우리말을 잘 못하는 漢族(그가 아무리 방언투성이의 남방말을 구사하더라도)은 중국말을 잘 할 것이다. 그러니 중국말은 그래도 漢族이야하며 漢族한테 일감을 준다. 사실 한국에서 중국 관계 일이야 중국어와 한국어를 다 구사할 줄 아는 조선족(표준적인 북경말을 구사하는)이 제격임은 두말할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 우리 중국조선들하고 교류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한국사람들 처음에 그 四顧無親한 허허 넓은 중국 땅에 들어와 어리뻥뻥. 위압감도 느낀다. 그래서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교포요, 동포요, 친척이요 뭐요 하며 잡은 것이 조선족. 연변에 사는 우리 한국 손님 맞이하기에 바쁘다 바뻐. 우리 연변대학도 민족의 대학이라고 무슨 교수고 학자고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형제결연이요, 자매결연이요 야단법석.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은 꿩구워 먹은 자리. 조선족 별 볼일 없어. 산골짜기 촌놈들이라 말이야. 맥을 못 춰. 그러니 아무래도 맥을 추는 漢族들을 찾아가야지. 그래서 너도나도 북경으로. 북경이 포화상태니깐 상해로, 남방으로. 그래서 조선족이라도 북경에 사는 漢族 가까이 있거나 漢族 같은 조선족들이 텃세를 믿고 우쭐대기.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韓流가 아닌 漢流가 자꾸 뇌리에 흐른다. 사실 한국에는 漢流의 맥이 언녕 용용히 흐르고 있다. 도처에 일어서는 중국어학원, 중국식료품집, 중국요리점... 중국농산품, 공산품 넘쳐난다. 중국본토에서는 언녕 일본유학생을 제치고 일약 1위 자리를 차지한 한국유학생수. 그리고 줄을 이은 기업들의 중국행, 여기에 보따리 장사까지 합류. 중국이 어떤 나라냐? 2000여년이나 漢流의 물결을 일으켜 한반도를 휩쓸었다. 이 2000여년의 줄기찬 漢流, 한국사람들의 한 원형질을 이루어놓았다. 그래서 한국사람들 산이 많아 농사짓기에 불편하고 삼면이 바다인 반도에 살면서 해양문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농경문화인 중국의 漢流에 이리저리 부대꼈다. 그래서 해양문화의 빛을 잠간 반짝인 장보고는 돋보이는 존재. 한반도와 비슷한 지정학적 위치에 처한 고대 그리스사람들이 농경문화로 나아가지 않고 해양문화로 나아간 것은 바로 그들 주변에 漢流와 같은 강대한 이민족의 문화가 없었기 때문. 한국사람들 아직도 漢流의 물결에 헤염치고 있다. 에헴, 에헴 하는 공자제자들 한국이 중국보다 더 많다. 그래서 옛날의 조공관계를 떠나 현재 한국사람들의 머릿속에 중국은 문화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나라. 漢流의 깊은 뿌리는 바로 여기에.중국은 무서운 나라. 디디해 보이고 어리숙해 보이는 중국이 하루아침에 거인의 활보로 다가오고 쫓아온다. 일종 ‘黃禍論’에 가까운 두려움. 앞으로 중국이 미국을 견제하고 세계를 지배한단다. 여기에 한국사람들 작은, 약자콤플렉스 발동된다. 큰데, 강한데 붙어야 산다. 그래서 중국한데 프로포즈하기. 수교. 북방외교 성공이란다. 그 어느 대통령의 공적으로 대서특필. 그런데 조선족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 중국에서는 변두리 약자고 소수민족. 중국을 대변할 수 있는 주체민족이 아니다. 중국의 훌륭한 소수민족정책에 얹혀 살아가는 신세. 적어도 자본주의논리에 젖은 한국사람들의 눈에는 이렇게 보인다. 자본은 趨益避損의 趨益논리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조선족은 소외된 존재로밖에.그러니 韓流에 그렇게 흥분하는 한국사람들의 심리도 알만하다. 韓流가 漢流를 뒤엎는다? 착각. 大國 중국이 2000여년 래 최초로 韓流를 받아들이는 그 고마움 내지 감지덕지도 없지 않아 있으리라.2005. 12. 20
50    수목장(樹木葬) 댓글:  조회:4258  추천:81  2005-12-03
수목장(樹木葬)인간의 생로병사, 태어나서 자라다가 늙으면 쇠약해져 병이 생기고 죽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태어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동서고금, 그리고 종족, 민족을 막론하고 죽음에 대해 신경을 써왔다. 이로부터 시신처리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土葬, 火葬, 水葬, 風葬, 平葬, 天葬... 인간은 실로 다양한 시신처리를 구사해왔다. 유교문화권에서는 부모로부터 받은 모발 하나 흐트릴세라 잘 다듬어 땅에 묻고 봉분을 하는 土葬을 많이 했다. 불교문화권에서는 불로 더러운 육신을 태워 열반의 경지를 창출한다는 火葬을 많이 했는데 일반인들은 골회를 모셨고 스님들은 사리를 모셨다. 물을 인간의 기원과 귀의처로 신비화한 중국 남방의 일부 종족들에게는 水葬이 행해졌고 꽁꽁 잘 싼 시신을 나무판자에 태워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낸다. 사막의 일부 족속들에게는 風葬이 행해졌는데 건조한 기후조건에 시신이 많이 미아리가 된다.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유목민족은 땅에 묻되 남에게 알리지 않도록 봉분을 하지 않는 平葬을 많이 했다. 일대의 영웅호걸 칭키스칸은 바로 이런 平葬을 해서 지금도 그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인간의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보는 티벳에서는 시신을 칼탕쳐 까마귀떼나 독수리에게 먹이는 天葬을 한다. 土葬, 火葬, 水葬, 風葬, 平葬, 天葬...은 각 종족이나 민족이 자체의 전통문화나 민속신앙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창조한 장례문화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현 시점에 있어서 이런 장례문화가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土葬, 이른바 많은 ‘명당’자리에 시신이 들어섬으로 산 인간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 한국과 같이 좁은 국토에서는 이것이 보다 심각한 문제로 부상된다. 그리고 水葬, 風葬, 天葬은 시신에 대한 ‘무책임’한 ‘폐기처분“ 같은 맛을 풍겨 인간존엄에 대한 논란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실로 시신에 대한 처리문제, 현대인간들의 골치덩어리의 하나다. 현대는 이 시신과 싸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현재 각 민족, 각국에서는 나름대로의 새로운 합리적인 장례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전통적인 장례문화에서 합리적인 면은 받아들이고 불합리한 면은 제거하거나 다른 종족이나 민족의 합리적인 장례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아예 제3의 새로운 장례문화 창출에 고심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넓은 땅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土葬을 근절하고 火葬을 권장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근간에 火葬을 전제로 한 가족납골당이 유행하는 듯 하다. 그러다가 가족납골당이라는 것이 봉분형식보다 자리는 덜 차지하되 50보에 100보라,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족납골당이라는 새로운 ‘봉분’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요 최근간에는 새로운 장례문화로 樹木葬에 사람들이 눈 뜨고 있다. 사실 樹木葬이라는 것은 스위스나 독일 같은 일부 선진국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다. 樹木葬은 간단하다. 시신을 火葬하고 골회만 추려 특정 나무 밑에 묻는 것이다. 독일은 법적으로 土葬을 근절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선을 공동묘지에 최장 20년밖에 묻어둘 수 없게 한다. 그러나 樹木葬의 경우는 99년간 묻어둘 수 있게 한다. 이로부터 법적으로 樹木葬을 권장하고 유도한다. 독일의 경우 樹木葬은 樹木葬을 할 수 있는 전문 국립수목림이 정해져 있고 국가의뢰의 전문 樹木葬장례회사가 전담한다. 독일의 樹木葬은 국민들의 공감대속에 새로운 장례문화로 굳혀가고 있다. 한국은 얼마 전에 김장수 할아버지의 樹木葬이 치러져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김장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최초로 樹木葬을 치른 사람이다. 그는 명문 고려대학교 교수로 몸담고 있다가 정년퇴직을 했다. 그는 교육자답게 樹木葬을 유언함으로써 새로운 장례문화를 선도했다. 김장수 할아버지의 樹木葬은 지극히 간단하다. 골회를 한 그루의 나무 주위에 뿌려묻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나무에 ‘김장수 할아버지의 나무’라는 표말이 붙을 뿐이다. 소박해서 자연스럽다. 요 얼마 전에는 한국 TV에서 평범하면서도 멋진 한 사나이를 보게 되어 흐뭇했다. 그 사나이는 자기가 죽어 묻힐 나무를 자기로 손으로 심는 것이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바로 樹木葬을 유언한다. 자기는 죽어 그 나무의 밑거름이 되어 자손들의 쉼터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청명이나 추석이 되어 자손들이 찾아오면 자기가 심고 자기가 묻힌 그 나무 그늘 밑에서 땀을 들이고 쉬며 놀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혼은 기뻐서 웃을 것이다는 것이다. 樹木葬, 落葉歸根의 자연스러움이 있어 좋다. 진실로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경지를 창출해서 좋다. 그러니 거추장스럽게 火葬을 해서 골회를 추르니 어쩌니 하지 말고 아예 통째로 묻히자. 그래야 나무에도 온전한 밑거름이 된다. 나무에 밑거름이 되어 후대에 乘凉의 놀이터를 마련해주기, 인간세상의 아름다운 릴레이. 그리고 자기가 심은 한 그루의 나무에 귀의하기, 새로 태어나기, 멋지다. 樹木葬,현재까지 우리 인간이 창출한 가장 합리적인 장례문화로 손꼽힌다인간의 생명은 일반 동물보다는 길데 일반 나무보다는 짧다. 우리가 좋아하는 소나무의 평균수명이 300년 좌우라 할 때 우리 어찌 소나무로 되어 보고 싶지 않으랴! 그래서 ‘백설이 만건곤할 때/독야청청’해 보자꾸나!2005. 12. 2
49    세상인심-貧者富者화합편 댓글:  조회:3982  추천:52  2005-12-03
세상인심-貧者富者화합편사람이 살아가다보면 貧者, 富者가 생긴다. 貧者, 富者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거, 인간역사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어진 여건, 개개인의 능력 차이에 따라 이것은 필연적이다. 富者에 대한 貧者의 혁명, 이것이 맑스가 말한 유혈적인 계급투쟁의 역사다. 바로 이런 貧者와 富者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맑스가 내건 대안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다. 다 같이 잘 사는 사회,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이다.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눠먹는 거, 니 좋고 내 좋잖아.자본주의는 애초에 貧者, 富者의 나뉘어 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논리다. 富者-자본가가 貧者-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을 조직하는 형식이 자본주의다. 중국에서 금방 개혁개방을 했을 때 ‘讓一部分人先富起來’, ‘讓一部分地區先富起來’도 자본주의의 貧者, 富者 갈림, 차이의 논리를 받아들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貧者, 富者의 갈림, 차이의 조성은 사회의 가장 큰 불안요소이다. 현재 원 사회주의진영에서 다 같이 잘 사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을 포기하고 이른바 개혁개방이라는 것이 貧者, 富者의 골을 파는 것만 같아 서글퍼난다. 사실 많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로부터 사회복지개념을 배우고 도입했다. 그래서 원시자본축적의 피비린내 나는 富者의 착취에 의한 貧者의 아픈 마음을 무마하고 있다. 사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라는 것도 놓고 보면 貧者, 富者 사이 중화작용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貧富균일의 중산층을 많이 양산하는 것이 사회의 바람직한 모델이 된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중화작용은 주로 세금이라는 메커니즘에 의해 진행된다. 사회를 상류층 富者, 중산층, 서민층 貧者로 나눌 때 수입이 많은 상류층에 세금을 많이 먹이고 수입이 적은 서민층에게는 세금을 적게 먹이기. 그리고 극빈층에는 세금을 안 먹일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생활보장금을 지불한다. 현재 한국의 경우는 35~40만원의 최저생계비를 책정하고 있다. 그리고 상류층 내지 재벌들에게 재산이나 이윤의 사회환원을 유도한다. 재산세를 높이 책정할 뿐만 아니라 고액의 재산상속세를 책정한다. 이른바 자식들에게 물려 줄 경우 재산의 40~6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줘 불로소득의 편안한 삶을 살게 하겠다는 부모들의 생각을 원천봉쇄한다. 절발 가량을 떼우니 차라라 기부라는 영예로운 길을 선택하도록 한다. 그리고 재벌이나 기업들의 이윤 사회환원의 메커니즘 및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컨대 어느 재벌이나 기업에서 어떤 공공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증한다든지 어느 대학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한다든지 할 때 세금감면조치를 해주거나 그 시설이나 도서관을 그 재벌이나 기업의 이름으로 명명하여 영원히 그린다든지 등 여러 조치를 취하는 것은 그 보기가 되겠다. 상류층 내지 재벌들의 치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자신들의 노력도 노력이겠지만 워낙 사회적 혜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상류층 富者들의 부동산투기 막기, 돈이 돈을 굴리는 불로소득의 비리를 차단하는 것도 빈익빈, 부익부의 골을 좁히는 효과적인 한 방편이다. 한국에서 이번에 실시한 8.31부동산정책은 전형적인 그 한 보기다. 그리고 서울에 집중된 국가행정의 지방분산계획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방분산으로부터 힘의 균형 및 균형적인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다. 홍보슬로건 ‘행정도시 지방이전 특별법 입헌, 국가균형발전의 초석입니다.’는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이외에 富者 상류층의 자원봉사 및 불우이웃돕기는 사소한 일 같지만 貧者들이 체감적으로 느끼는 貧富 한마당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IMF 후 급속하게 늘어난 무료급식소, 그리고 무의탁어린이들이나 노인들에게 밥보내기, 김치담가보내기, 그리고 매번 겨울이 되면 달동네연탄보내기 같은 행사는 실로 감격적이다. 특히 이번 겨울철을 맞이하여 한국야쿠르트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주관하여 11월 16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사랑의 김장나누기’ 행사는 말 그대로 사랑이 넘치는 행사이다. ‘야쿠르트 아줌마’ 2500여명이 담은 김치 5만7000여포기가 10kg씩 포장되어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1만3000여 가구에 전달되었다. 이런 행사들이 정말 1회적인 행사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貧者와 富者는 동심원을 그려 나갈 수 있다. 사실 貧富 문제는 그 어느 한 개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국가 사이, 지역 사이 문제로도 비화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래서 UN의 기본 역할의 하나가 바로 富者 선진국과 貧者 후진국의 차이를 줄이는데 있다. 중국에서 현재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西部大開發工程은 좁은 의미에서의 중국 국내 동서지역간의 貧富차이를 줄이기 위한데 있다. 개혁개방의 초입에 ‘일부분 사람’, ‘일부 지역’을 먼저 발전시키면서 생긴 편차를 바로 잡기 위해서다. 貧富문제, 특히 절대적 빈곤, 상대적 빈곤을 떠나서 貧문제의 해결은 사회적 안정, 세계적 안정을 가져오는 키포인트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맑스, 엥겔스의 계급론은 또 적중할 것이고 폭력혁명은 또 일어날 것이다.2005. 11.28
48    손님이 왔습니다 댓글:  조회:4163  추천:57  2005-12-03
손님이 왔습니다.한국 대학생들이나 중국대학생들 강의 듣기 싫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교수들 밥통 떨어질세라 고안해낸 것이 출석 체크하기. 1순이, 2순이, 3순이... 이렇게 이름 부르다 나면 한 5분 잡아먹기. 그리고 평상시 학습자세요, 학습 태도요 하며 평시 성적 몇 %, 그리고 이런 성적들을 장학금과 매치시킬 때 학생들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출석을 잘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런 것이 안 먹혀들어갈 때가 있다. 예컨대 아프거나 집에 불상사가 났을 때 청가서를 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 내가 강의를 하고 있는 배재대학교 강의에서 좀 색다른 안 먹혀들어감에 나는 좀 놀라다가 이제는 그 식이 정상이 되어 있다. 3순이:교수님, 내 청가서입니다. 내일 강의 내 못 나옵니다. 교수 우:어, 그래청가서를 받아드는 순간 나는 좀 이상해났다. 공결이유, 뭐, 손님이 왔다구? 이마에 내 川자를 그리는 교수 우.손님이 왔다구? 얘, 손님이 왔습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3순이. 그래, 손님이 왔는데 니하고 관계가 뭐야? 니 공부 니 하면 되지. 아이 참, 교수님도. 손님이 왜 나하고 관계없어요. 여자들 손님인데... 우둔한 우교수는 그제사 좀 깨도가 되는 듯 하다. 아, 그거~ 월~경 아니아니, 달거~ 아니아니 거시기... 깨도가 되면서도 제풀에 주눅이 들어 얼굴이 붉어지고 꺽꺽 거리는 우교수. 그렇지요, 월경 말이지요. 한 수 가르치는 듯한 3순이. 우리 여기서는 생리휴강제도라는게 있어요. 여자들만의 휴강제도! 3순이는 어깨가 으슥해났다. 아, 그래. 그럼 쉬어야 되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속은 켕기어, 임마, 손님, 아니 월경이 뭐 그리 대단해. 부끄럽지도 안 해. 그 잘난거 갖구 쉬겠다구? 우리 엄마는 밭에서 나를 낳고 그 대로 호미자루 잡고 일했단다. 지금 기집아이들은, 참, 못 말려!그런데 이튼 날 배재대학교 신문의 ‘바탕화면’이 전부 핑크색으로 된 톱기사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문화기획/생리휴강(핑크색 1호 글자로, 필자 주)]-제목:월경, 당당히 말하자(진붉은 월경색 2호글자로, 그리고 옆에 알락달락 예쁜 생리대 아이콘을 줄 세워 놓음. 필자 주) 소제목:‘그날’ 아닌 ‘월경’으로 새로운 도약(검은 색 3호 글자로, 필자 주). 호기심에 끌려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숨을 죽여 가며 주~욱 훑어보니, 아닌게 아니라 월경 소리다. 사회에서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여성들에게 생리휴가가 주어지는데 대학생이나 청소년들에게 생리휴강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대학권에서 최초로 생리휴강제도를 정규적으로 실시한 부산에 있는 동아대학교의 경우를 부러운 사례로 꼽고 있다. 그리고는 요즘 들어 경희대학교 총여학생회에서 생리휴강을 시범실시 한다고 발표하게 되면서 대학권에서 생리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니 順理成章 격으로 우리 배재대학교도 여대생들의 생리휴강제도를 실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문조사를 하니 여학생 100% 찬성, 인터뷰를 하니 남학생들도 여성들에게 배려를 하는 것은 신사에티켓의 기본이라고 하며 좋다고 한단다. 그러다가 마침 11월 한국 대학교 학생회장 선거시즌이라 배재대학교 여학생회 출마후보들은 너도나도 생리휴강제도 정착화를 공약으로 내건다. 이 공약이야 말로 學心, 특히 女心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생리, 그것은 어느 새 여성만의 독특한 존재가치로 부상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당당히 말해지는 붉은 원색의 월경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긋지긋하고 우울만 안겨주던 반갑지 못한 손님으로부터 즐겁고 반가운 손님으로 변해간다. 여권이 그 만큼 신장되고 현대사회가 그 만큼 신사화되었다는 말이 되겠다. 신사가 되자면 여성에 대해, 특히 여성의 손님에 대해 배려를 해야 한다. 이로부터 무신경하던 나는 어느새 ‘손님’에 대해 신경이 많이 쓰이고 공손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 배재대학교 강의 때 생리휴강 신청서를 들고 오는 여학생에 대해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OK, OK 연발했다. 그러면서 나는 맹세했다. 이제 중국에 돌아가 우리 연변대학교 강의 때는 여학생들이 생리 기색만 보여도 내가 알아서 척척 생리휴강을 배려해 주리라고. 우리 여학생들은 여자가 아닌가, 무엇이 모자란데 말이다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다보니 손님이 반가운 줄 모르고 무신경하게 아무렇게나 지내 보낸 우리 어머니가 불쌍해났다. 2005. 12.1
47    세상인심-富者편 댓글:  조회:4197  추천:45  2005-11-14
세상인심-富者편나는 맑스주의교육을 받으면서 자란지라 프로레타리아를 가장 고상한 존재로 알았다. 가난하면 가난할 수록 고상하다는 그런 논리를 철칙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소학교에 다닐 때 大公無私한 工人階級이 못되고 自私自利한 農民階級이 된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니꼬운 눈길로 나를 보며 뇌까린다. 자식아, 工人이 좋기는 뭐가 좋다고 그래, 사람은 다 같은기라, 다 배가 불러야 사람노릇 하는기라. 그러나 나의 貧者편에는 드팀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에 사람들 좀 살만하게 되면서 내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어. 富者의 편으로 간 거야.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나한테 먹혀들어간 거야-진리로. 사람들 니 것 내 것 따지고 쫀쫀하던 데서 통이 커지고 대범해진 것이 나한테 와 닿은 거야. 적어도 손님접대에 각박하지 않고 호쾌해질 수 있는 것이 너무 멋있다 말이야. 나는 富者가 좋았어. 1990년대 초반 한국유학생활은 나의 이런 심지를 더 굳혔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서는 알게 모르게 맑스주의계급론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앉았다. 貧者상놈은 좋은 사람, 富者양반은 나쁜 놈 식. 그런데 내가 유학생활을 하는 한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貧者상놈의 각박함, 富者양반의 너그러움이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내가 다니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의 ‘공산주의대학’. 학비무료, 잠자리무료에 식비 거의 무료에 가까운 유로. 그러니 학비부담이 어려운 한국의 貧者상놈자제들이 많이 모여든다. 여기에 우리 중국유학생은 貧者상놈의 상농자제. 그런데 우리 중국 유학생들은 바로 이 한국의 貧者상놈자제들한테 더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른바 없는 놈들끼리 同病相憐이 아니라 서로 시기하고 암투하기,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아르바이트를 좀 하면 공부하러 왔는가 돈벌러 왔는가 하며 용속하게도 자꾸 돈 쪽으로 몰아붙이기. 원래 貧者는 돈에 민감한 법. 그러다가 ‘거러지’ 같은 중국유학생들이 자기네보다 돈 좀 잘 쓰는 거 같으면 배가 아파나기. 그때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중국유학생과 러시아유학생에게 특혜로 한 끼 식대 5백 원도 면제해 주었다. 그러니 돈 잘 벌고 돈 잘 쓰는 저 사람들한테 왜 무료지, 하며 뒤 공론이 숭숭.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일 가지고 대환지 뭔지 하는 것도 둬 서너 번 했지. 이런 와중에 오히려 鶴 立鷄群격으로 가물에 콩나듯 한둘이 와 있는 富者양반자제들이 어른스러웠다. 그들은 우리를 이해했고 아픈 우리의 마음을 많이 위로해주었다. 연구원을 벗어나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접한 한국 사람에 한해 볼 때 대개 貧者타입은 각박하고 富者타입은 너그러운 논리가 그대로 통했다. 꼭 富者라야 인심 쓰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富者의 넉넉한 인심에 많은 감복을 받았다. 富者들은 잘 베푼다. 어떤 富者들은 정말 멋있다. 가난한 중국 유학생의 자존을 건드릴세라 세심한 배려를 해가며 베푼다. 돈을 주어도 무조건 막 주는 것이 아니고 우선생, 이것은 우선생 장학금에 얹어주는 축하금이요 하며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준다. 한번은 내가 서울에 갔다가 버스역에서 연구원 들어가는 공중버스를 기다리느라고 안절부절 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수업 볼 시간이 각일각 닥쳐왔던 것이다. 나의 불안한 정상을 본 귀부인스타일의 부인이 영문을 물어왔다. 여차여차해서 그렇다고 하자 그는 다짜고짜로 고급승용차 한대를 손을 흔들어 세웠다. 그리고는 나의 여차여차한 사정을 말하며 좀 태워주라고 했다. 그러자 신사스타일의 승용차운전수는 흔쾌히 나보고 타라고 했다. 그리고는 죽 강의실까지 태워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운 김에 이름자나 남겨달라고 하자 그 신사남자는 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하며 게면쩍어 하였다. 나는 냉혹한 금전관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活雷鋒’을 만날 수 있어 좀 어안이 벙벙해났다. 그때만 해도 중국의 승용차운전수들은 승용차운전하는 거 차체만으로 기고만장하여 시도 때도 없이 뿡뿡 경적소리 울리고 흙탕물 튕기며 내 보란 듯이 내달릴 때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본 한국사람’해서 어느 잡지에 대서특별해 내었다. 그리고는 방학 간에 집에 와서 이 얘기를 흩뿌리며 다녔다. 그러자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내 친구 하나가 피익 웃으며 한 마디 내깔렸다. 그거, 아무 것도 아니지, 미국에는 공중 교통도구가 없는 산속 같은 외딴 곳에 갔다가 길가에 서서 눈은 외딴 곳으로 팔아도 한 손만 들고 있기만 하면 태워주려는 승용차들이 척 앞에 와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짓부리, 그 개인주의가 팽배가 미국에서... 하면서 부정은 하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졸부가 아닌 진짜 富者들은 마음이 그만큼 넉넉하다. 인심과 인간의 물질적 생활수준은 같이 가는 법. 쌀독에서 인심 나온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 중국의 고대 지성 맹자도 인간은 배부른 후에 부모를 알고 도덕을 알게 된다고 했다. 세계 제3차 심리학물결을 일으킨 미국의 심리학가 마쓸로는 인간의 심리 층차를 피라미드식으로 상승하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아래 부분이 생리수요인데 이것이 만족을 받을 때 안전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안전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귀속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귀속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존경의 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존경의 수요가 생겨날 때 자아실현의 수요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심리수요의 최고경지는 자아실현의 경지다. 이 경지는 생리수요→안전수요→귀속수요→존경수요로 진행되는 한층한층 높은 차원의 수요를 만족 받을 때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현 단계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그 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너무 고지식하게 기계적으로 본 허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쓸로의 이런 심리층차설로 볼 때 그래도 富者들이 자아실현의 경지로 나아갈 바탕을 갖춘 셈이다. 溫飽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貧者는 애초에 이 바탕이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몸에 배인 富者들의 베푸는 문화, 남한테 주고야 기쁜 마음, 자연재해 든 곳에 이름자 하나 남기지 않고 무조건 주기, 여기에 富者들의 자아실현의 경지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신사라는 것도 이런 베푸는 자아실현의 경지가 몸에 밴 모든 것이 넉넉한 富者여라!2005. 9.13
46    세상인심-貧者편 댓글:  조회:3756  추천:79  2005-11-08
세상인심우리가 공산주의를 지향했듯이 다 같이 잘 살면 좋겠는데 세상은 자꾸만 貧者와 富者로 나뉘어 진다. 그래서 역대 농민봉기의 기본모토의 하나가 바로 ‘濟貧富’. 현 단계에 와서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사이 이런 나뉘어 짐은 더 가속화되고 더 심해진다고 한다. 貧者와 富者의 갈등, 현 단계에 있어서도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이다. 이른바 거창한 정치하는 사람들 여기에 신경 쓸지고. 별 볼 일 없는 문학을 하는 나는 貧者와 富者의 좀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도록 하지.세상인심-貧者편貧者와 富者, 누가 더 마음 좋지? 貧者? 富者? 아무래도 나는 貧者가 더 마음 좋다고 생각한다. 무슨 심사숙고해서 얻은 결론은 아니다. 그저 가다오다 얻어 들은 풍월이 그런 거 같다. 김삿갓, 19세기 조선의 희대의 풍류남아. 조선의 山山水水, 村村落落 안 돌아다닌 곳이 없는 방랑객. 그가 접촉한 貧者와 富者는 지천에 깔렸다. 그러니 그에게 貧者와 富者의 세상인심을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排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김삿갓이 지은 한시 ‘吾愛靑山倒水來’다. 현대 우리말로 옮기면 ‘개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주인이여, 미안해하지 마오/나는 원래/물에 비치는 청산을 사랑한다오’. 김삿갓이 허기를 면코자 허름한 초가를 찾아 들어 한 끼 식사를 부탁하니 주인네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개다리 소반에 멀건 죽 한 그릇 내온다. 김삿갓은 기꺼이 죽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런데 그 죽이 얼마나 멀건지 푸른 하늘과 산이 비쳐들어 온다. 이에 주인은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그래서 김삿갓은 장대 휘둘러 거칠 것 없는 가난한 살림이건만 죽이라도 내어주는 주인의 고마운 마음을 위로코자 일필휘지 ‘吾愛靑山倒水來’를 읊는다. 二十樹下三十客四十村中五十飯人間豈有七十事不如歸家三十飯김삿갓이 지은 한시 ‘二十樹下三十客’다. 현대 우리말로 옮기면 ‘스무나무 아래 서른 나그네/마흔 마을에 쉰 밥/인간 세상에 어찌 이른 일이 있을소냐/집에 돌아가서 서른 밥을 먹기만 못 하리’. 김삿갓이 부자동네에서 밥 한 끼를 청했는데 차례지는 것은 고작 쉰밥이다. 이에 그는 괘씸함을 느껴 ‘四十村’ 즉 ‘마흔 마을’을 ‘망할 마을’로 슬쩍 환치하여 부자동네를 저주하고 있다. 단순히 수자유희 같은 시지만 따지고 보면 실은 부자들의 들되 먹은 인심을 꼬집고 있다. 김삿갓은 분명 貧者의 인심을 긍정하고 富者의 인심을 부정했다. 그는 貧者편이였다. 그럼 다시 현대판 貧者와 富者 인심판을 보도록 하자.주병진, 한 때 한국에서 잘 나가던 TV 토크쇼 진행자. 지금은 도박인지 무언지 하는데 말려들어 TV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이 친구도 괴짜기는 괴짜. 세상인심 알아본다고 한번은 서울 성북 어디 못사는 동네 지하철입구에 머리를 옷으로 뒤집어 쓴 채로 땅에 처박고 돈구럭 앞에 놓고 하루점도록 비락질을 해봤다. 돈이 제법 들어왔다. 그 이튼 날 똑 같은 방법으로 서울 강남 어디 잘 산다는 동네 지하철입구에서 비락질을 해봤다. 그런데 돈이 영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친구 결론:貧者 후하고 富者 깍쟁이. 이 친구 貧者편이였다.세상 많은 사람들, 김삿갓, 주병진 貧者富者인심풀이에 동감할 것이다. 옛날에는 못 살았지만 세상인심이 ... 하는 人心不如古하는 한탄은 바로 그 동감의 목소리다. 그러니 다 貧者편인 셈이다. 나도.그럼 富者들, 왜 그리 인심 박하냐? 잘 살면서 말이다.富者들, 마음이 貧者기 때문.富者들, 너무 힘들게 富者가 되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서 너무 힘들게 벌었기 때문이다. 富者종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제 애비 잘 만나 된 놈 별도. 아글타글 해야 富者가 된다. 그러니 그 富라는 것은 자기 피나 살점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 자기 피나 살점을 쉽게 남 줄 놈이 어디 있나. 그래서 富者는 쉽게 자기의 富를 지키는데 연연하는 守錢奴가 되는 것이야. 세계명작의 3대 守錢奴를 비롯한 많은 守錢奴적 富者들은 다 이런 경우야. 베푸는 자린고비는 이런 守錢奴의 역설적인 이야기고.富者들, 자기네 가난한 때를 잘 모른다. 대개 건망증을 가지고 있다. 또는 가난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貧者들이 가질 수 있는 同病相憐의 동정심이 없다. 富者들, 끝없는 욕망에 놀아난다. 이 세상 富를 다 안고 다 가지고 싶어한다. 욕심의 과대팽창, 다람쥐 채바퀴 돌 듯 피곤하기만 하다. 知足者常樂을 모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在於 福中而不知福인 셈이다. 富者들, 자아실현의 인생최고 경지를 잘 모른다. 베풀고 자원봉사자가 되는 그런 樂, 인생최고 경지의 樂을 잘 모르고 천민富者, 속된 富者로 남기 때문이다.富者들, ... 2005. 9.8
45    걸어다니는 회사 댓글:  조회:4225  추천:61  2005-08-29
걸어다니는 회사회사의 규모 살리기,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경제논리.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어느 단계에서 이것이 유행이였다. 한국, 일본의 문어발식 그룹화, 중국의 합병식 集團化는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그러나 아세아의 금융위기 때 대기업의 거품화, 비둔함이 드러나면서 규모의 경제추구가 한풀 꺾이는 듯 하다. 한국에서 문어발을 자르는 빅딜을 비롯한 구조조정은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대만을 비롯한 대기업 중심보다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해온 지구와 나라들은 끄떡 없었다. 그들은 작지만 내실을 기하는 쪽으로 신경을 썼다. 그래서 한국은 문어발식 거품경제의 안티테제로 김대중대통령 시기에 작지만 강한 기업을 육성하는 데로 경제정책방향을 돌렸다. 그것의 구체적 방안으로 논의된 것이 이른바 벤처기업 육성이였다.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최신 경제아이템창업을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IMF 때 우후죽순마냥 생겨난 벤처기업들.사실 세계에서 벤처기업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은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 마이크로소프트 아이템 하나로 성공한 기업. 현재 세계 곳곳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곳에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그것은 단연 컴퓨터왕자. 그래서 빌게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적은 사무실이나 작업장을 가지고 가장 큰 갑부가 되었다. 프로그램개발이라는 것이 워낙 머릿속의 아이템에다가 한번 개발되면 손쉬운 복제로 얼마든지 가지 뻗어나갈 수 있으니깐. 사실 자기의 장끼 하나로 세계무대를 주름잡으며 연간 거액을 벌어들이는 스타들도 하나의 기업체로 보아 무방하다. 한국 IMF 때 박세리 골프채 하나로 미국 우먼리그챔피언라운더를 주름잡으며 수억을 벌어들여 답답했던 한국인의 가슴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주었던가. 요새는 강수연이 그 뒤를 잇는 듯 하고. 박찬호, 선동열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일본의 야구계에 선풍을 일으키며 그들은 몸값은 몇 년간 천정부지로 뛰었던 것이다. 요새 잘 나가는 박지성, 이영표도 마찬가지다. 작지만 고 다구진 우리 동양인의 몸매로 덩치 큰 몸집의 유럽선수들을 제치고 활약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에 좋다. 스포츠계 뿐만 아니라 문학예술계도 스타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록가수 마이클젝슨, 그가 어디 가면 대통령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한번 공연 간다 하면 사람 실어 나르고 무대장치를 실어 나를 전세기 전용비행기만 둬서너대 뜨고 그가 드는 호텔은 대통령급 호화전용룸이다. 그가 먹여 살리는 인원은 매니저 , 보조출연자 및 스탭들 해서 저그마치 몇 백 명이나 된다. 한국의 나훈아, 조용필도 이에 못지 않는 것 같다. 문학의 경우를 보면 멀리는 그만두고 한국의 경우만 보아도 대단하다. 박경리, 16부의 대하소설『토지』를 쓴 한국의 1류 여작가. 그녀는 자기가 20여 년간 산 강원도 원주의 집터에다 토지문학공원을 꾸려 문학의 향훈을 일반 사람에게 풍기고 있다. 그리고 토지문학관을 꾸려 무료로 후학들을 키우고 있다. 이문열도 박경리와 같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줄로 안다. 사실 이들 스포츠계 스타도 좋고 문학예술계 스타도 좋고, 그들이 받는 게임챔피언료든 출연료든 원고료든 실로 어마어마한 수자. 어간한 중소기업의 연간수입을 웃돈다. 그래서 이들을 가히 걸어 다니는 기업이라 말할 수 있다. 현대는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되면서 스포츠, 문학예술 등 문화산업이 뜬다. 이런 스포츠, 문학예술은 인류보편의 정서와 맞아 떨어져 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쉽게 다른 민족이나 나라에 문화적 상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노래, 드라마가 선두주자가 되어 중국대륙에 한류의 붐을 일으킬 수 있은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문화산업은 개인의 장끼발휘가 관건적 요소로 작용한다. 현대는 경제전쟁을 치른다. 문화산업도 만만치 않은 한 몫을 한다. 그러니 하루 빨리 자기의 독특한 장끼를 가진 문화인재들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 이것이 바로 투자가 가장 적은 걸어다니는 회사를 키우는 것이다. 이런 문화인재들을 키우자면 일단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받는 특성화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 많이 운운하고 있는 이른바 創新교육이라는 것도 이런 특성화교육을 논외로 할 수 없다. 개성을 무시한 획일적인 교육은 제품을 찍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은 사실은 획일적인 인재제품을 만드는 교육공장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 전통이라고 할 얘기가 아니고 얼마 전 우리의 교육이 바로 이랬다. 그래서 이런 교육제도에 반발한 괴짜들이 자기의 장끼를 나름대로 알아서 발휘하며 걸어다니는 회사가 되기도 했다. 빌게이츠, 대학 2~3년 땐가 컴퓨터에 미쳐나는 자기의 적성, 장끼와는 전혀 안 맞는 학교교육에 반발하며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자기 친구와 더불어 다른 사람의 창고를 빌어 초라하나마 자기 적성에 맞고 자기 장끼를 발휘할 수 있는 컴퓨터회사를 설립한다.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출발이다. 박세리, 어릴 때부터 지겨운 영어단어 외우기나 가감승제를 한 것이 아니고 골프치기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골프놀음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골프가 재미있고 적성에 맞고 하니 푹 빠져 골프끼가 넘쳐나는 박세리가 되었다. 이문열, 한국의 명문 서울대학교에 다니다가 자기의 글 쓰는 적성, 장끼와 안 맞다 하여 중퇴한다. 그 다음 자기의 끼를 기껏 발휘하면서 소설 쓰기에 전념하니깐 오늘의 이문열로 되었다. 특성화교육, 사회발전의 한 표지. 특성화교육을 진행하는 데는 일반학교보다 전문학교를 많이 세우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학생들이 자기의 적성과 끼에 맞게 선택할 여지가 많아진다.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 전문인재, 장끼가 있는 특수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며 튈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되자면 쓸데없이 넓은 博의 어중쩡한 ‘博士’보다 한 가지만이라도 뚝 부러지게 잘 하는 인재가 진짜 인재, 그리고 모난 돌이 먼저 징 맞는 그런 옹색함이 아니고 톡 튀는 괴짜가 천재만재라는 관념갱신이 필요하다. 2005. 8. 29
44    감정교육 댓글:  조회:4201  추천:71  2005-08-28
감정교육인간은 감정과 이성의 통일체. 이 양자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룰 때 완미한 존재로 됨. 그런데 전반 인간의 이른바 발전 역사를 보면 이런 조화는 점점 깨여져 왔다. 과학으로 대변되는 이성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감정은 메말라간다. 인간의 비극. 그래서 18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계몽운동가 루소는 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감정교육을 주장했다. 그는「감정교육」이라는 계몽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이것을 감정교육의 기본 도경의 하나로 삼았다.루소는 선견지명의 계몽철학가임에 손색없다. 보라, 현재 우리는 자연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메말라 있는가? 나는 요새 그 제일 행복할 것 같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불쌍해 죽겠다. 괜히 큰 눈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메마른 그들. 핵가족에 달랑 하나만 생겨나는 그들. 아니 달랑 하나만 낳는 부모들. 부모들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아니, 곱다고 할매할배처럼 키운다. 그래서 언젠가 중국중앙TV에서 때린 것처럼 그들은 무소불위의 ‘중국의 작은 황제’들이다. 그들은 唯我獨尊의 존재. 이른바 청소년범죄의 급증도 이런 ‘작은 황제’나 唯我獨尊 때문. 그들은 할매할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형제자매도 모른다. 할매할배형제자매의 사랑도 못 받아보고 또 줄줄도 모른다. 좀 더 지나면 사촌이고 무어고 친척도 없다. 그들은 진짜 달랑 외톨로 남는다. 황제나 唯我獨尊은 원래부터 외로운가? 아니 계획생육의 죄. 자연의 순리대로 생기는 대로, 나올 대로 낳아야 되는 법. 여자들의 유방암이고 자궁암이고 하는 것도 이 순리를 어긴데 원인이 많다. 이 순리대로 낳을 때 우리의 아이들은 형제자매와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감정적으로 풍부해진다. 이런 거 다 아는데 뭐 살기가 어렵고 중국에 사람이 너무 많고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런 실제적이고 거창한 논리만 들이대면 내사 할말은 없지만. 우찌 우리 인간이 요 꼬라지가 되었노? 요새 어쩐지 자꾸 할매할배가 생각키운다. 빈가슴이나마 언제나 벌려주고 축 늘어진 젖가슴이나마 마음대로 만지게 하는 할매, 막내라 불쌍해서 그런지 항상 나하고만 겸상을 하던 에험에험 할배. 엄마아버지는 할매할배보다 자애롭지 못했으라. 할매보다 만지기 좋은 젖가슴 좀 만질라고 손만 뻗치면 다 큰 애가 하며 손을 탁 치내던 엄마, 그리고 거기는 왜 손 가, 내껀데 하고 눈썹을 치켜세우는 듯한 아빠, 그리고 좀 울어볼까 하면 항상 사내라는 놈이 하며 기압을 주던 아빠. 그래도 할매할배가 없는 이 마당에 엄마아빠가 생각키운다. 나에게 그렇게 많은 형제자매를 만들어 준 엄마아빠. 정말 그때 우리 집은 ‘사회주의대가정’이었어. 할매할배는 지고무상의 모택동 같았고 엄마아빠는 위의 눈치보기에 아래 눈길 주기에 바빳던 성장이나 시장 같았고 우리 형제자매들은 밥 먹고 똥 싸며 왁자찌껄 살아가는 인민들 같았다. 나는 이 ‘사회주의대가정’에서 ‘세상에 부럼 없이’ 아니, 모르는 것 없이 자랐다. 나는 누이동생과 할매할배엄마아빠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경쟁도 해보았고 형하고 욕을 먹으며 사나이의 의리도 배웠으며 동생에게 주먹 하나로 보스노릇도 해보았다. 우리는 찧고빻으면서 고운정 미운정 다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아빠 따나 저 멀리로 갈 때, 나는 이미 희노애락의 다정다감한 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갑돌이갑순이, 정옥이, 영애, 길남이, 맹추 내하고 놀던 애들이 다 그리워난다. 그리고 그 똥개도 그리워난다. 뿔뿔이 다 흩어졌구나. 지금 너희들 시집살이장가살이에 바쁘고 바쁘겠구나. 그 달랑 잘 난 아이 하나 우생아인지 무언지로 키운다고. 그리고 꼬리를 흔들며 나를 졸졸 따라 다니던 똥개는 아무데서나 해제끼던 그 버릇 못 고쳐 애들은 몇 배나 낳았는지 아니면 언녕 어느 나리님의 단고기나 보신탕이 되었는지... 꼭꼭 숨으라 머리카락 보일라, 바따꿍! 길남이, 니 나하고 정옥이, 영애 고무줄 뛸 때 정옥이영애꺼 거시기 많이 훔쳐보았지. 그리고 정옥이, 영애 너희들은 맹추꺼 거시기 잘도 뒤졌지~ 그래서 맹추를 많이 울렸잖아. 우리는 갑돌이갑순이 장가시집갈 때 첫날 저녁 한 없이 울었지... 아,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우리 한 번 더 놀아볼까. 아이들을 데리고. 책보만 벗어던지면 전자유흰가, 아니 요새는 컴퓨터게임만 하는 아이들, 사람도 없는 컴퓨터세계에 빠져 어른들보고 인사할 줄 모르는 아이들, 지네들끼리는 제 잘 났다고 서로 픽픽 하며 콧대 세우기만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말이다. 나는 우리 엄마아빠에게 한 가지 한이 맺혀 있다. 나에게 누나 하나 만들어 주지 않은 거.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누나 없는 콤플렉스에 누나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날은 열 받아 밥도 안 먹고 옷 입은 채로 그대로 뒤져 잔다. 빨리 죽어버리라고. 그래서 나는 사회에 나와 누나 하나를 삼았다. 그 누나는 나의 누나 없는 빈구석을 잘도 채워주었다. 나도 동생노릇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나는 음심을 품었다. 姐姐姐姐解決問題라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그래서 나는 넌지시 옛날이야기 하나 했다. ‘달래나 보지’. 옛날 옛적에 오랍누이가 앞뒤로 서서 길을 떠났다. 누나가 앞에 서고 동생이 뒤에 서서. 그런데 갑자기 삼단같은 비가 쏟아 부었다. 누나고 동생이고 옷이 다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뒤에서 걷던 동생은 누나의 착 젖은 바지에 그대로 드러나는 방둥이윤곽에 그만 음심이 발동되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되, 내 친누나잖아, 개돼지만도 못한 자식. 그는 돌맹이를 주어들더니 자기의 거시기를 찧 쪼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누나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누나가 한 소리가 ‘달래나 보지’였지. 그리고 누나도 죽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먼 얘기가 아니고 우리 연변의 달래자전설이라고... 내 이야기가 끝나자 나의 누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달래나 보지’하고 묘한 웃음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달래’ 가지고 갈 데로 다 가보았다. 그러다가 ‘연상의 여인’바람에 편승하여 우리는 결혼인지 무언지 해서 요까지 왔다. 정말 남녀지간에는 우정이 없는가봐. 아니, 맺은 남매지간에도. 아니, ‘달래나 보지’의 피를 나눈 남매처럼 그런 치열한 혈육의 정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누가 나빠서가 아니고 서로의 합의 속에 그런 ‘패륜’도 쉽게 이루어진다. 오히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발전인지도 모른다. 요즘 애들 바로 이런 치열한 혈육의 정을 맛볼 수 없다. 그들은 바로 내 같이 어정쩡한 ‘姐姐’의 맛은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묽은데다 쉽게 희석되고 흘러가기 쉬운 맛. 불쌍다.그래도 요새 아이들 행복한데가 있다. 그리고 희망적인 데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행기’‘자동차’ 쾅, ‘돌격총’ 뚜르르, ‘칼’ 번쩍... 산비둘기 와삭와삭 뼈도 안 남기고 먹어 치우기... 마구 마스고 죽이기만 하더니 언제부터 부처님의 자비심도 깃드는가 放生할 줄도 안다. 그리고 겨울에 먹을거리 없어 삑삑 우는 저 산새들에게 좁쌀을 뿌려줄 줄을 알고. 우리가 클 때보다 낫다. 우리는 살기 바빠 放生이 무엇인지 몰랐고 좁쌀 죽 끓여먹기 바빳다. 저 放生하러 가는 아이, 우리 같이 가자!2005. 8. 28
43    애완동물 댓글:  조회:4054  추천:64  2005-08-26
애완동물애완동물 키우는 붐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란다. 좀 먹고 살만 하면 애완동물이란다. 요새 중국도 좀 먹고 살만 하니까 너도나도 애완동물. 짱~짜-짜- 애완동물 만화경→날아다니는 새로부터 땅위의 개, 돼지, 거미, 땅속의 쥐, 뱀, 물속의 고기, 그리고 땅속, 땅위, 물속을 아우르는 개구리, 두꺼비... 실로 이 세상 모든 동물이 애완동물로 되는 듯 하다. 역사는 돌고 도는가, 역사의 아이러니. 언젠가는 인간들이 먹을 것은 다 잡아먹고 해로운 것은 다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씨종자 마른 동물들도 적지 않았지. 그런데 이제는 곱다고 싸돌고 지랄을 하니 알고도 모를 얄궂은 사람들의 마음. 곱게 보아 별 볼일 없는 현대인간들, 각양각색의 애완동물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다양한 취미와 개성을 선보인다고 하겠다.애완동물 키우는 심리투시☞사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동물을 좋아하게 생겨 먹었다. 옛날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와 가장 닮은 동물들을 조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토템이란 것이다. 그래서 동물에 대한 친연성은 개화되고 똑똑해진 현대에 있어서도 인간의 무의식속에 남아 자기도 모르게 동물에게 친밀감을 나타내게 한다. 여기에 만물평등, 衆生平等에 윤회설을 풀이하는 불교신앙이 가미될 때는 그 도가 더 해진다.거창한 의미에서의 사명감. 멸종되고 씨종자가 말려가는 동물들, 보기에 애처롭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 먹이사슬의 한 고리일 때 이런 동물들의 멸종은 생태평형을 깨고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결국 인간에게 해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동물보호운동, 생태환경보호운동을 펼치는 거룩한 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인간들의 비극을 나타낸다. 현대인간은 외롭다. 너무 똑똑하다보니 자기 주의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개성만 고집하다 보니 남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혼자로 남는다. 시집장가 못 간 많은 善男善女, 아니 孤男孤女들은 그 전형적인 보기. 瞬時萬變하는 현대사회에 세대간의 차이, 이른바 代溝, 그리고 핵가족은 노령화사회의 노인들을 영원한 외로운 존재로 만든다. 애완동물은 현대 孤男孤女나 만년의 노인들의 외로움의 상징. 현대는 인간지간의 신뢰, 情義를 그 어느 때보다도 따지면서도 못 믿을 것은 바로 인간. 인간지간에 불신의 장벽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두터워지는 듯 하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동물에 대한 믿음으로 바꾼다. 사람은 배반하지만 동물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옛 신조를 굳건히 믿으면서. 그리고 현대는 이래저래 불안하다. 이 불안을 애완동물에 대한 집착으로 잊어버리려 한다. 애완동물 매니아가 되면 이 세상에 애완동물밖에 안보이니깐. 현대인간들의 허영심리를 만족 받는다. 무슨 애완동물을 키우면 다른 사람은 다 바빠도 내만은 여유로운 듯함을 나타내며 다른 사람은 먹고 살기 바쁜데 나만은 일 안하고 놀아도 먹을 것이 절로 생기는 귀족인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며 지대한 허영만족을 받는다.... ...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애완동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프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연인이나 부부나 되듯이 껴안고 자기. 애를 못 낳는 부부가 마치 자기 아이를 키우듯이 키우는 것. 우유 먹이고 꼬까옷 입히고 놀이감 사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금이야 옥이야... 애완동물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고 죽으면 마치 자기 부모나 죽은 듯이 울고불고 무덤을 만들고 명복을 빌며 야단을 피우기. 그래서 어떤 애완동물보다 못한 신세의 사나이 광고를 냈단다. 귀부인님, 나는 그대가 요구하는 모든 애완동물이 되고도 남으니 나를 데리다 키우세요. 나는 말하는 애완동물!하고. 一言蔽之하면 사람처럼 키우기. 한국의「동물농장」TV프로그램을 보라. 그 많은 종류의 애완견(때로는 돼지 같은 것도 있음)들을 멀쩡한 아파트에서 키운다. 그들은 아파트를 저 들판의 농장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 집이 없어서 아우성인데 그래 이거 말이 되냐 말이다. 그들은 한술 더 떠 그 개새끼들한데 꼬까옷을 입히고 사람 말을 시키고 사람 흉내를 내게 하고 사람처럼 먹고 싸도록 하기에 바쁘다 바뻐. 그 개새끼들 불쌍도 하다. 개는 개처럼 털이 부스스하고 컹컹 짖고 아무데나 똥을 싸야 행복하겠는데... 그런데 개는 개라 아무리 털을 깎아주고 씻어주고 해도 개털은 부스스해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짖지 말라 해도 짖기 마련이고 아무리 아무데나 똥을 싸지 말라 해도 싸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돌연발색하고 괜히 사람들한테 신경질이다. 나는 그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피익 나왔다. 언젠가 한번 나는 내 친구놈하고 대판 싸움이 붙었다. 그 친구 역시 개매니아가 될 정도로 애완견을 안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지라 나도 모르게 고 강아지새끼 고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랬더니 이런 천둥벼락이라구야, 그 친구 붉으락 푸르락 두 팔 걷고 나한테 달려들었다. 그때 나는 정말 개처럼 잘 달아나서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더라면 오늘 여기 앉아 이 글도 못 쓸 것이다. 그래도 우리 동양종자들은 서양종자들에 비해 개는 개처럼 키우는 편이다. 애초에 야생개가 크다고 유전자를 조종하여 고만조만한 애완견들을 생산해낸 것도 그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씨종자를 마구 뿌려댈가봐 애초에 거세를 해버리거나 컹컹 짖는 것이 듣기 싫다고 아예 성대수술을 하거나 할퀴고 찢고 한다고 발톱을 다 뽑아내기도 한다. 이래가지고도 동물보호니 생태환경보호의 선구자인양 애완견을 안고 다니는 데는 실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자아풍자다. 이것은 동물학대다. 이런 사람들이 희한한 동물고기까지도 희한하게 다 먹으면서도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을 한다니깐 ‘개고기먹’는 소동의 개판을 벌리니 실로 개판이 아닐 수 없다. 거창한 논의로는 문화제국주의, 문화침략주의가 되겠다. 정말정말 ‘오래 살다보니’ 별 일 다 보게 되는 해괴망칙한 일들이네. 빨리 죽어야지!동물은 동물이다. 애완동물도 동물이다. 그러니 동물처럼 키워야지 사람처럼 키워서는 안 된다. 사람처럼 키우는 애완동물은 동물학대적 변태다. 그것은 愛玩이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일방적인 인간의 자아중심적이고 독선적인 다른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동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느니 ‘잃어버린 우리 미미 찾아주세요...’할 것이 아니고 미아들을 찾아 나서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 한분이라도 더 찾아봐라! 애완동물들의 먹이를 사들이고 옷을 입힐 것이 아니고 저 태국과 라오스사이 오갈 데 없는 몽족난민이나 아프리카의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을 돌봐라! 그러면 천당에 가느니라! 믿습니까? 믿습니다. OK! 사실 전통적으로 한민족은 개는 개처럼, 동물은 동물처럼 키워왔다. 무슨 애완견이요, 애완동물이요 하는 궁색은 요 그간에 분 ‘양놈’들 바람 때문이다. 똥개,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이든 사람의 똥이든 아무거나 먹고 제멋대로 뛰어다니면서 무럭무럭 잘만 자라기. 개에게 절대의 자유를 준다. 클 대로 커서 다 크면 안스러워나마 잡아먹기. 물론 그 새끼는 받아놓고. 그러면 개는 그때까지 거두어준 주인의 은공에 보답을 하는 듯 달갑게 희생이 되는 것이다. 고기단백질이 귀했던 시절, 우리에게 귀중한 보신이 되어준 개. 이는 똑 마치 아이누족들이 곰을 토템으로 모시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곰을 잡아먹는 사정과 같다. 아이누족들은 곰이 자기네들을 위해 일부러 영양원의 희생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곰가죽을 나무에 걸어두고 곰족에 대한 미안함을 나타내고 곰족의 번성을 기원하며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바로 인간과 동물의 共生을 기하는 여기에 진정한 동물사랑이 있다.2005. 8. 25
42    불안 댓글:  조회:4123  추천:69  2005-08-25
불안현대인간들은 물질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지수가 높다. 반면에 정신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행지수가 높다. 불안, 외로움, 소외... 현대생활의 哈哈鏡으로서의 현대파문학은 바로 이런 것을 다루어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현대인간들의 불행지수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불안이다. 우리는 인간을 자유의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학예술의 기본 주제의 하나가 자유에 대한 노래이다. 生命誠可貴 愛情價更高 若爲自由故 兩者皆可抛무상의 가치로 알려진 웽그리아의 베타뮨(裴多雯)의 자유에 대한 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어 일으켰던가? 그런데 인간은 사실 자유를 포기할 만큼 이 불안이 더 심각한 경우가 있다. 언젠가 미국의 어느 한 유명한 학자가「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저서를 쓰서 세상사람들을 놀래웠다. 노예,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어느 하루아침에 이런 노예에게 해방을 선언하고 자유를 주어보란다. 그러면 노예는 어리둥절해하며 어쩔 바를 몰라 한단다. 똑 마치 사람이 잡아서 올가미를 채우고 집에서 키우던 짐승을 광활한 야생 숲으로 놓아주었을 때 미련이라도 있는 듯 머멎거리는 것처럼. 노예에게는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행해야 되는 자유의 감미로움을 맛보기에 앞서 익숙치 못하고 막연하기만 한 자유가 불확실하여 불안했다. 그래서 이 부담스러운 자유를 주인에게 반납하고 달갑게 원위치로 복귀하게 되는데 주인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는 밥이나 먹으며 불안이 없는 노예생활에 자족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유로부터의 도피’ 행각에 다름 아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운동시기 실제로 이런 행각을 벌인 노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안은 불확실성에서 온다. 그러니 전현대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불안이 적다. ‘日出而作, 日沒而息’, 자연의 이듬에 맞추어 돌아가는 생활, 여기에 ‘少人寡國’식 끼리끼리의 공동체생활은 그만큼 단순하고 안정적이다. 그리고 부모가 무슨 일에 종사하면 자식이 그 일을 따라하며 이어 받아 생업을 삼는 세대물림은 그만큼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전기, 전등의 개발로 밤낮 따로 없이 돌아간다. 불안의 도를 넘어 피곤하다. 여기에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은 서로 모르는 사람을 한데 뒤섞어 놓았다. 이리 봐도 낮선 사람, 저리 봐도 낮선 사람... 불안. 문 꽁꽁 닫아걸기. 그리고 직업이라는 것도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고, 투자를 하고 아글타글 노력을 해서 ‘他人就是地獄’, ‘適者生存’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이긴 자에게만 차례진다. 이제 곧 사회에 진출할 대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이런 직업적 불안을 많이 느낀다. 나름대로 사회에 크게 쓰일 지식과 능력, 재간을 갖췄다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정작 사회에 들어서 보니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취업면접에서 풀이 죽어 나오는 대학생들의 그 얼굴에는 불안과 실망의 빛이 역연하다. 그렇다하여 직업이 차례졌다 해서 불안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鐵飯碗’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런데 열심히 해도 ‘優生劣敗’의 시장원리에 의해 직장이 망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망하’는 수가 있다. 중국의 ‘下崗’이 이런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직장이 안 망한다 해도 ‘長江后浪推前浪’이라 밀리워 나오는 수가 있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이요 하며 행하는 ‘정리해고’에는 이런 경우가 많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신조어는 이런 세태를 잘 말해주고 있다.현대사회는 오픈된 경쟁사회이다. 무한한 경쟁참조계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남과의 비교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상대적 빈곤감, 상대적 무력감, 상대적 학벌... 무수한 ‘상대적’이 현대인간을 울린다. 이런 ‘상대적’ 때문에 불안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질투, 시기 등 인간의 고질병이 발동하며 살기가 힘이 들다. 자족을 맛을 알면 행복하겠는데. 知足者常樂이 아닌가. 현대사회는 활력이 넘치는 역동성을 보인다. 산업화사회, 정보화사회...라는 큰 흐름 틀 속에서 말 그대로 瞬時萬變, 離合集散을 거듭하며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사회다. 과학이라는 가장 확실한 기치는 들었으되 많은 우연성과 개연성이 난무한다. 민주화라 각기 제 목소리를 내라고 하지만 그것은 곧 대중문화의 거세찬 흐름에 함몰되고 만다. 인권의 만인평등을 고취하되 패권의 총칼의 논리가 통한다. 패션 하나만 놓고 보아도 오늘은 길어졌다 내일은 짧아졌다, 그러다가 긴 것과 짧은 것이 뒤죽박죽이 된 것, 실로 헷갈리게 놀아난다. 많은 현대인간들은 隨大流에 어리뻥뻥, 어리둥절. 아무리 똑똑한 현대인간이라 해도 한치 앞이 잘 안 보일 때가 있다. 현대인간들은 이래저래 불안하다. 바로 이 불안 때문에 미래를 대비한다. 그래서 현대의 ‘만능파스워드’인 돈을 벌기에 급급하다. 현대에 극성하는 복권, 투기, 도박, 강도... 이른바 ‘대박’을 잡으려는 요행주의, 한탕주의 등등의 사행 내지는 범죄는 바로 이로부터 기인된다. 돈을 많이 벌어야 장가시집가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이런 하나하나의 확실함속에서 마음은 든든해지고 불안은 해소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불안 때문에 관상쟁이에, 점쟁이를 찾아다닌다. 자기의 사주를 걸고 확실한 팔자를 알아 마음의 불안을 떨어버리려는데 있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왔을 때 심심찮게 눈에 띠는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보고 흥미가 동했다. 한국도 이제 먹고 살만 하니깐 이 세계를 아우르는 높은 경지의 철학을 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웬걸, 관상에 사주팔자 봐주는 것이 ‘철학’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관상에 사주팔자 봐주는 관상쟁이, 점쟁이들이 자기 스스로 철학가로 자부하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고 그들 앞에 부복함에라! 심지어 대통령 후보자들이 찾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노무현대통령 취임 후에 한국에 와서 가장 인상적으로 눈에 띠인 것은 관상쟁이, 점쟁이들이 대거 길거리로 나와 영업판을 벌인데 있다. 종로3가 지하철 에스켈레터를 타고 가다보면 눈에 띠는 이들의 영업판, 그리고 인천 주안지하상가, 주안영화관매표소 옆 등 많은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서울 탑골공원이나 종묘 쪽에 저녁이 되면 얼마간 눈에 띠던 것이 말이다. 그리고 놀란 것은 선남선녀들이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이들 장사가 문전성세를 이루고 있다는데 있다. 옆의 공산품가게들은 장사가 안 되서 인상을 쓰고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다. 이런 관상쟁이나 점쟁이를 찾아 미래에 대한 어떤 답이라도 얻어야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데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이 허황할지라도. 인간이 하느님과 같은 절대자에 기대는 종교요 뭐요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논의로 인간은 아직도 어디서 왔으며 와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 자체에 대해 불안해한다. 죽음 자체는 더 없이 큰 어두운 그림자로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도 죽음의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도 이 불안에서 우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손쉽게 하느님이나 부처나 알라가 약속하는 ‘천당’을 믿는다. 정말 ‘안 믿으면 지옥, 믿으면 천당’하는 식으로 우리의 죽음의 불안도 해소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보면 행보다는 더 잘 띠는 많고 많은 불행이 언제 나에게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나의 운명을 맡기는 편안함속에 종교적 경지의 절대자를 광신하게 된다.사실 1950~60년대 현대파극 유리시스의「고더를 기다리다(等待戟多)」가 유럽에서 그렇게 센세이숀을 불러일으킨 것도 바로 현대인간들의 불안에 있다. 이 극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두 친구가 고더라는 사람이 오니 안 오니로 쟁론을 거듭하다가 결국 온다는 데로 합의를 보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초라한 극이 히트를 치다니 현대인간들도 정말 별 볼일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대인간들의 정상을 보면 지극히 그럴만도 하다. 유럽에서 보면 인간은 중세기 종교적 맹신에서 벗어나 문예부흥시기부터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 스스로의 가치를 만물의 영장으로까지 고양하며 인간 자체를 믿었다. 그런데 바로 자유, 평등, 박애를 고취하는 인간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러 서로 사람 잡이를 했다. 인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다. 인간은 믿을 바가 못 되었다. 인간은 새로운 불안에 빠졌다. 그래서 부정에 부정의 논리로 현대인간들은 다시 종교에 빠지면서도 하느님과 같은 막연한 절대자에 성차지 않아 한술 더 떠「고더를 기다리다」에서와 같이 보다 좀 더 구체적인 존재를 믿고 싶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고더’인 줄로 안다. 여기서 ‘고더’는 누구든지 관계없다. 그는 온다는 확신만을 주는 구체적인 희망의 메시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보다 확실한 현대인간들의 메시아이다. 현대인간들은 바로 이 보다 확실한 메시아를 믿고 기다린다는 희망 속에 불안은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2005. 8. 24
41    인간의 自虐 댓글:  조회:3946  추천:72  2005-08-23
인간의 自虐인간은 분명 자기애적인 나르시시즘적 존재이다. 그래서 중국에는 自私自利의 극단적인 합리화로 人不爲己天誅地滅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런 나르시시즘이 변태적으로 나타날 때 공주병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긍정적인 생명의식으로 나타나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이런 자기애적인 나르시시즘적 존재와는 분명 다른 自虐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자기 스스로가 밉고, 밉다 못해 못살게 구는 것-이것이 우리의 부정적인 생명의식으로 나타나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바로 긍정적인 생명의식과 부정적인 생명의식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생의 무대에서 놀아난다. 술,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고 과음하면 독이 된다. 그런데 마시다, 마시다보면 과음하기 일쑤. 담배, 백해무익. 담배갑에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어떻게 나쁘다고 번연히 쓰박아 두었는데도 아직도 풀풀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무슨 금연의 날이요 하며 시끌벅적하다. 술담배 같은 기호품은 말 그대로 기호품이기 때문에 각자의 기호에 맡길밖에. 그런데 그 기호품 애용자들은 과음하고 폭음하고 골초가 되는 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술로 인한 간암유발, 담배로 인한 폐암유발 등등 의학적 경종이 수시로 울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기에 골인하는 데는 바로 인간의 무의식 깊숙이까지 자리 잡고 있는 自虐심리가 크게 한몫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술담배 같은 기호품은 1차적으로 바로 인간의 무의식적인 自虐심리에 영합하여 시장을 확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自虐심리는 성애에서 마조히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히스테리적인 정신병 발작에서 나타나기도 한다.人生不如意, 人生如意보다 잘 불러지는 인생타령. 바로 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自虐심리가 발동되기도 한다. 에라, 모르겠다, 꾸르륵 술병을 들이키기. 푸-푸- 줄담배 내뿜기. 그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그 극단적인 상황의 한 보기. 그러나 이런 차원은 동물과 별로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 바다가 극심하게 오염되자 돌고래들이 집단적으로 모래사장으로 나와 자살을 한 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적 파탄을 전제로 한 自甘墮落의 自虐로 나아가는 것이 동물과 다르며 무서운 것이다. 일종 사회적 암이다. 얼굴에는 땟국이 흐르고 머리는 삼검불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옷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고. 현재 세계적으로 골머리 아픈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많은 浮浪者-노숙자홈리스(Homelesser), 그 한 보기다. 1950~60년대 미국의 히피들은 自甘墮落의 해괴망칙한 自虐 스타일로 경직된 기성문화에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다. 요새 세계적인 패션으로까지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입는 바지통에 구멍이 뻐끔뻐끔 난 乞丐服도 바로 기성세대들의 자애적인 正裝에 自虐墮落적인 散裝으로 맞선 데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사람 되기를 거부하고 自甘墮落적인 自虐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비극적이다. 술담배의 自虐로 육체가 망가지는 것은 일회적이고 그 자신에 국한된 것이지만 自甘墮落적인 自虐로 정신적인 망가짐은 파급적이고 반사회적으로 흐르기 쉽다. 인생을 이판사판으로 보고 ‘막가파’식 인생을 사는 인간들이 바로 이런 부류다.인간은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존재다. 人生이 아무리 不如意하더라도 열심히 살려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의 自虐는 여기서 기인되기도 한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간은 반성한다. 그 반성이 성차지 않을 때 인간은 스스로 쥐어뜯고 처박고 한다. 이것이 성차지 않을 때는 기꺼이 자살까지도 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자살을 말이다.보편적 인간애로 넘치는 성인들의 인생경지는 한없이 높고 고상하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미몽에 허덕이며 죽어갈 때 살아 있는 자체를 한없이 죄스럽게 생각한 성인들, 그래서 그들은 항상 自虐속에 모대기며 인간구제의 심성을 키웠다. 나는 예수, 석가모니를 떠올려본다. 남이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더 때리라고 가르친 예수, 施虐보다는 분명히 自虐를 가르치고 있다. 그 자신은 결국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못박혔다. 달갑게 自虐의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뭇중생들의 죄를 赦하기 위해. 석가모니, 그는 왕자다. 그러나 그는 普渡衆生의 길을 터득하기 위해 칠칠에 사십구라 사십구일 보리수 밑에서 自虐의 가부좌를 했던 것이다. 예수도 좋고 석가모니도 좋고 이들 성인들은 自虐의 아픔 속에서 인간구제의 종교-사랑이나 자비를 터득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나 불교를 창립한 예수나 석가모니 말고도 진정한 종교인들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금식기도를 하거나 금식일을 정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톨스토이나 윤동주와 같은 위대한 문호들도 이들과 마찬가지다. 톨스토이는 대지주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자아완성’이라는 부활을 가져오나 주위의 따가운 시선 속에 힘겨운 自虐에 모대겼다. 결국 그는 가출하여 객사하고 만다. 윤동주, 그는 십자가를 매고 민족의 제단에 달갑게 머리를 드리울 각오에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가슴을 아파했고’, ‘죽어가는 모든 것을/사랑해야지’로 더 높은 보편애적 경지를 창출하고 있다. 그는 항상 이런 각오와 보편애적 경지에 조금이라도 그 마음이 일그러질까봐 조마조마하고 조심스러우며 自律적인 自虐에 모대겼다. 이런 自虐는 도덕적 깔끔함이 돋보이고 있다. 예수도 좋고 석가모니도 좋고 톨스토이도 좋고 윤동주도 좋고 그들의 自虐를 통한 새로운 삶의 경지추구는 진실로 인간적인 경지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이 동물과 다른 근본 특성이 있기도 하다. 200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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