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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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2005년 08월 25일 00시 00분  조회:4136  추천:69  작성자: ysl
불안

현대인간들은 물질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지수가 높다. 반면에 정신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행지수가 높다. 불안, 외로움, 소외... 현대생활의 哈哈鏡으로서의 현대파문학은 바로 이런 것을 다루어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현대인간들의 불행지수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불안이다. 우리는 인간을 자유의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학예술의 기본 주제의 하나가 자유에 대한 노래이다.

生命誠可貴
愛情價更高
若爲自由故
兩者皆可抛

무상의 가치로 알려진 웽그리아의 베타뮨(裴多雯)의 자유에 대한 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어 일으켰던가? 그런데 인간은 사실 자유를 포기할 만큼 이 불안이 더 심각한 경우가 있다. 언젠가 미국의 어느 한 유명한 학자가「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저서를 쓰서 세상사람들을 놀래웠다. 노예,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어느 하루아침에 이런 노예에게 해방을 선언하고 자유를 주어보란다. 그러면 노예는 어리둥절해하며 어쩔 바를 몰라 한단다. 똑 마치 사람이 잡아서 올가미를 채우고 집에서 키우던 짐승을 광활한 야생 숲으로 놓아주었을 때 미련이라도 있는 듯 머멎거리는 것처럼. 노예에게는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행해야 되는 자유의 감미로움을 맛보기에 앞서 익숙치 못하고 막연하기만 한 자유가 불확실하여 불안했다. 그래서 이 부담스러운 자유를 주인에게 반납하고 달갑게 원위치로 복귀하게 되는데 주인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는 밥이나 먹으며 불안이 없는 노예생활에 자족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유로부터의 도피’ 행각에 다름 아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운동시기 실제로 이런 행각을 벌인 노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안은 불확실성에서 온다. 그러니 전현대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불안이 적다. ‘日出而作, 日沒而息’, 자연의 이듬에 맞추어 돌아가는 생활, 여기에 ‘少人寡國’식 끼리끼리의 공동체생활은 그만큼 단순하고 안정적이다. 그리고 부모가 무슨 일에 종사하면 자식이 그 일을 따라하며 이어 받아 생업을 삼는 세대물림은 그만큼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전기, 전등의 개발로 밤낮 따로 없이 돌아간다. 불안의 도를 넘어 피곤하다. 여기에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은 서로 모르는 사람을 한데 뒤섞어 놓았다. 이리 봐도 낮선 사람, 저리 봐도 낮선 사람... 불안. 문 꽁꽁 닫아걸기. 그리고 직업이라는 것도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고, 투자를 하고 아글타글 노력을 해서 ‘他人就是地獄’, ‘適者生存’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이긴 자에게만 차례진다. 이제 곧 사회에 진출할 대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이런 직업적 불안을 많이 느낀다. 나름대로 사회에 크게 쓰일 지식과 능력, 재간을 갖췄다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정작 사회에 들어서 보니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취업면접에서 풀이 죽어 나오는 대학생들의 그 얼굴에는 불안과 실망의 빛이 역연하다. 그렇다하여 직업이 차례졌다 해서 불안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鐵飯碗’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런데 열심히 해도 ‘優生劣敗’의 시장원리에 의해 직장이 망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망하’는 수가 있다. 중국의 ‘下崗’이 이런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직장이 안 망한다 해도 ‘長江后浪推前浪’이라 밀리워 나오는 수가 있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이요 하며 행하는 ‘정리해고’에는 이런 경우가 많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신조어는 이런 세태를 잘 말해주고 있다.

현대사회는 오픈된 경쟁사회이다. 무한한 경쟁참조계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남과의 비교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상대적 빈곤감, 상대적 무력감, 상대적 학벌... 무수한 ‘상대적’이 현대인간을 울린다. 이런 ‘상대적’ 때문에 불안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질투, 시기 등 인간의 고질병이 발동하며 살기가 힘이 들다. 자족을 맛을 알면 행복하겠는데. 知足者常樂이 아닌가.


현대사회는 활력이 넘치는 역동성을 보인다. 산업화사회, 정보화사회...라는 큰 흐름 틀 속에서 말 그대로 瞬時萬變, 離合集散을 거듭하며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사회다. 과학이라는 가장 확실한 기치는 들었으되 많은 우연성과 개연성이 난무한다. 민주화라 각기 제 목소리를 내라고 하지만 그것은 곧 대중문화의 거세찬 흐름에 함몰되고 만다. 인권의 만인평등을 고취하되 패권의 총칼의 논리가 통한다. 패션 하나만 놓고 보아도 오늘은 길어졌다 내일은 짧아졌다, 그러다가 긴 것과 짧은 것이 뒤죽박죽이 된 것, 실로 헷갈리게 놀아난다. 많은 현대인간들은 隨大流에 어리뻥뻥, 어리둥절. 아무리 똑똑한 현대인간이라 해도 한치 앞이 잘 안 보일 때가 있다.

현대인간들은 이래저래 불안하다. 바로 이 불안 때문에 미래를 대비한다. 그래서 현대의 ‘만능파스워드’인 돈을 벌기에 급급하다. 현대에 극성하는 복권, 투기, 도박, 강도... 이른바 ‘대박’을 잡으려는 요행주의, 한탕주의 등등의 사행 내지는 범죄는 바로 이로부터 기인된다. 돈을 많이 벌어야 장가시집가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이런 하나하나의 확실함속에서 마음은 든든해지고 불안은 해소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불안 때문에 관상쟁이에, 점쟁이를 찾아다닌다. 자기의 사주를 걸고 확실한 팔자를 알아 마음의 불안을 떨어버리려는데 있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왔을 때 심심찮게 눈에 띠는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보고 흥미가 동했다. 한국도 이제 먹고 살만 하니깐 이 세계를 아우르는 높은 경지의 철학을 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웬걸, 관상에 사주팔자 봐주는 것이 ‘철학’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관상에 사주팔자 봐주는 관상쟁이, 점쟁이들이 자기 스스로 철학가로 자부하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고 그들 앞에 부복함에라! 심지어 대통령 후보자들이 찾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노무현대통령 취임 후에 한국에 와서 가장 인상적으로 눈에 띠인 것은 관상쟁이, 점쟁이들이 대거 길거리로 나와 영업판을 벌인데 있다. 종로3가 지하철 에스켈레터를 타고 가다보면 눈에 띠는 이들의 영업판, 그리고 인천 주안지하상가, 주안영화관매표소 옆 등 많은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서울 탑골공원이나 종묘 쪽에 저녁이 되면 얼마간 눈에 띠던 것이 말이다. 그리고 놀란 것은 선남선녀들이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이들 장사가 문전성세를 이루고 있다는데 있다. 옆의 공산품가게들은 장사가 안 되서 인상을 쓰고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다. 이런 관상쟁이나 점쟁이를 찾아 미래에 대한 어떤 답이라도 얻어야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데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이 허황할지라도.

인간이 하느님과 같은 절대자에 기대는 종교요 뭐요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논의로 인간은 아직도 어디서 왔으며 와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 자체에 대해 불안해한다. 죽음 자체는 더 없이 큰 어두운 그림자로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도 죽음의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도 이 불안에서 우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손쉽게 하느님이나 부처나 알라가 약속하는 ‘천당’을 믿는다. 정말 ‘안 믿으면 지옥, 믿으면 천당’하는 식으로 우리의 죽음의 불안도 해소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보면 행보다는 더 잘 띠는 많고 많은 불행이 언제 나에게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나의 운명을 맡기는 편안함속에 종교적 경지의 절대자를 광신하게 된다.

사실 1950~60년대 현대파극 유리시스의「고더를 기다리다(等待戟多)」가 유럽에서 그렇게 센세이숀을 불러일으킨 것도 바로 현대인간들의 불안에 있다. 이 극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두 친구가 고더라는 사람이 오니 안 오니로 쟁론을 거듭하다가 결국 온다는 데로 합의를 보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초라한 극이 히트를 치다니 현대인간들도 정말 별 볼일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대인간들의 정상을 보면 지극히 그럴만도 하다. 유럽에서 보면 인간은 중세기 종교적 맹신에서 벗어나 문예부흥시기부터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 스스로의 가치를 만물의 영장으로까지 고양하며 인간 자체를 믿었다. 그런데 바로 자유, 평등, 박애를 고취하는 인간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러 서로 사람 잡이를 했다. 인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다. 인간은 믿을 바가 못 되었다. 인간은 새로운 불안에 빠졌다. 그래서 부정에 부정의 논리로 현대인간들은 다시 종교에 빠지면서도 하느님과 같은 막연한 절대자에 성차지 않아 한술 더 떠「고더를 기다리다」에서와 같이 보다 좀 더 구체적인 존재를 믿고 싶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고더’인 줄로 안다. 여기서 ‘고더’는 누구든지 관계없다. 그는 온다는 확신만을 주는 구체적인 희망의 메시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보다 확실한 현대인간들의 메시아이다. 현대인간들은 바로 이 보다 확실한 메시아를 믿고 기다린다는 희망 속에 불안은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2005.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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