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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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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현대시 작법 댓글:  조회:6166  추천:0  2015-05-20
현대시 작법 (문학과 지성사              오규원의 저서 중에서)  1. 시적 표현의 이해  1) 장식적 수사를 탈피하라  2) 현학적인 수사을 피하라(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 철학적인 수사를 하고 있다  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3) 관찰을 통한 감각적 심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라  2. 상투적 표현과 관습적 인식  1) 상투적인 표현을 쓰지 말라  2) 이미 쓰여진(다른 작가가 시도한) 언어나 형식을 사용하지 말라  3) 자기만의 시 세계를 개척하라(자기만의 생동감 있는 창작적인 표현을 쓰라)  3. 외화성 언어와 피상적 언어  1) 어떤 사물에 대한 감흥과 리듬을 갖추었다고 해서 다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2) 시란 눈에 띄는 대로 생각되는 대로 적는 행위가 아니다(외화성 언어, 꾸며쓰는 언어  를 피하라)  3) 대상에 대하여 의도적 또는 집중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시적 공간을 구체적 인식을  통해 작가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 종 삼의 墨 畵 -  處署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태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 김춘수의 處署 지나고-  이 두 편의 시는 외화성 언어 또는 꾸며쓰기가 없다. 두 작품의 아름다움은 관찰의 섬세성과 그것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묘사의 적절성에 있다.  시에 있어 미적 인식이란 위의 두 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이다.  4. 감정의 노출과 감정의 억제  1) 시란 감정의 단순한 표현(막연한 느낌)이 아니다  2) 세계가 숨기고 잇는 모든 가치로운 것들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예술 형식이다.  3)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다(엘리어트)  江바닥 모래알 스스로 도는  晉州 南江 물맑은 물같이는,  새로 생긴 혼이랴 반짝거리는  晉州 南江 물빛 밝은 물같이는,  사람은 애초부터 다 그렇게 흐를 수 없다. -- 박 재 삼의 南江가에서 --  진주 남강의 그 '물 맑은 물같이는' '물빛 밝은 물같이는' 흐를 수 없다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을 동반한 그것이다.(막연한 상태가 아닌)  5. 논리적 언어와 통상적 언어  1) 논리적 성향이 강한 언어를 탈피하라  2) 시란 인간 정서의 표현이고, 아놀드의 말을 예시로 들면"가장 완전한 표현 양식"이  라고 할 때 논리적 성향의 언어가 과연 적합할 것인가?  3) 시란 작가의 감정과 태도만을 표현하는 언어 행위도 아니고, 개념적 의미의 정보  만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언어적 세계이다.  4) 지나치게 감정이 드러나는 언어는 탈피하라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추위가 가득한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황 동 규의 조그만 사랑노래 --  6. 추상어와 보편어  1) 추상적인 개념만 있는 언어는 탈피하라 즉 어떤 개념에 생명을 주는 구체적이고 실  재적인 상황이나 시인의 체험 사실, 시인의 체험이 드러나는 감정과 태도를 표현하  여야 한다.  2) 일반적으로 추상어 보다는 구체어를, 일반어 보다는 특수어를 사용한다.(함축적이  기 때문이다)  소리(추상어) -- 바람 소리(소리의 구체어)  발자국 소리 ------------- 토끼의 발자국 소리(구체어)  기계 소리 사람의 발자국 소리(구체어)  바람의 발자국 소리(구체어)  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꽂힌 채  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조각들에 스치며  이지러진 알파벳 흙 속에 감추며  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  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지르며,  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  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 - 이 하 석의 버려진 병 -  7. 시적 묘사에 대해  1) 修辭學에서의 언술 형식  a. 說明 -- 비교. 대조. 실례. 분류. 정의. 분석. 등을 통하여 주제를 밝히는 형식.  b. 論證 --증거에 의한 객관적 논리로 우리를 확인 시키는 형식이다.  c. 描寫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제시하는 형식이다.  d. 敍事 -- 사건의 으미있는 시간적 과정을 제시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설명. 설득. 논증이 이론적 성향의 언술인데 비해, 묘사나 서사는 감각적. 암시적 성향이다.  시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느낌(필링)을 직접 제시하는 언술 양식이고, 소설이란 느낌을 스토리로(이야기) 제시한 언술 양식이다. 즉 시는 묘사되는 것-- 파이퍼의 주장  묘사에는 객관적 묘사, 주관적 묘사, 복합적 묘사가 있다.  毛髮을 날리며 오랜만에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눈보라도 걷히고  저 멀리 물거품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人間의 女子가  誕生하는 것을 본다. --- 김 춘 수의 봄바다 --  싸리울 밖에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 바심 끝마당  허드렛군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二重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 박 용 래의 點 描--  위 두 편의 시는 주관적 묘사이며 시점은 고정 시점이다. 시점도 고정 시점. 이동 시점. 회전 시점, 영상 조립 시점(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함께 묶어 재구성한 것이므로가시권 불가시권 사물이 섞여 있을 수 있다.) 등이 있다.  따라서 어느 쪽이든 한 쪽으로 시각을 맞추어야 작품의 구조가 유기적으로 강화된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핏줄엔 듯  마음에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 영 랑 --  위 시는 심리적 공간에 시각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심상적 고정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마음 속에 도도는 은결"로 반짝이며 흐르는 어떤 정서를 실재하는 형상화해 묘사한 것이다.  꽃이 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난만하다.나는거기서묘혈을판다.묘혈도보이지  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또꽃이향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기묘혈을판다.묘혈은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박잊어버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로눕느나.아아.꽃이또향기롭다.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이 상의 絶 壁--  위 시는 심상적 회전 시점이다. 의식 속의 자기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꽃은 관념적인 존재,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꽃인 것이다. 나는 그 관념적인 존재인 꽃 속에 묘혈을 파는 것이다. 따라서 그 절벽은 의식 세계의 절벽인 것이다.  8. 서사적 구조와 시점 (서사물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십전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늬 생일이라고  10전 짜리 두 개를 보였다. --- 김 종 삼 掌 篇 --  위 시는 서사적, 객관적 고정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개괄 묘사이다. 세밀 묘사는 사물이나 정경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9. 시적 진술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 오는 하늬바  람 위에 혼령 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아무 병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 --- 서 정 주의 봄 ---  외형상 드러난 모양으로는 독백이다. 그러나 이 독백은 의미있는 깨달음을 바닥에 깔고 있어 정서적 호소력이 큰 표현이다. 시적 진술이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이다.즉 마지막 연은 절망적 깨달음의 표현이며 역설적, 점층적 표현인 것이다. 가시내야는 돈호법이다.  10. 진술의 특성  문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 --李箱의 家庭--  위 시는 '잡아 당기기 조차 두려운' 반어적 표현이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 김수영의 꽃잎---  위 시는 극히 일상적인 언술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표현의 평이성에도 불구하고 시적 진실의 파장은 그와 다르다. 풍자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구체화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즉 머리 숙일 사람이 없다는 자각과 통탄이다. 가청적. 고백적. 해석적인 시적 진술은 관찰을 통한 감지라기보다 관조를 통한 감지 쪽이다.  11. 진술의 종류--- 독백적 진술, 권유적 진술, 해석적 진술 세가지이다.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 정 주의 푸르른 날 --  위 시는 독백적 진술 즉 청유형 독백이다 .  권유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있다.  수미 쌍관의 형태로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시구가 직접 맞물리면서 일으키는 연상과 정서적 파동에 의해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깨달음을 동반하고 있다. 역동적이고 다양한 정서를 함유한 이미지이다. 다시 말하자면 젊음.삶의 덧없음이 서정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눈은 살아 있다/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 김 수 영의 눈---  위 시는 권유적 진술이다.  참된 의미에서의 삶을 회복하자는 주장이다. 가슴에 가래가 고인 존재가 아니라 순결한 생명체이다.  / 더러는/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 현 승의 눈물---  위 시는 눈물이라는 대상에 대한 해석적 진술이다.  일정 대상에 대한 시인 나름의 깨달음을 명시적으로 들려주는 형태를 띠고 있다.  12. 진술의 묘사와 어울림  진술형의 시에도 묘사가 사용된다. 시적 진술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에 서경적 요소나 서사적 요소가 필요할 때나 또는 대상을 구체화하여 들려주고 싶을 때 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기, 저 바다는 묘지처럼 배를 불리고/해변의 떼찔레 꽃은 바닷새처럼 떨어진다//  /그대 바다로 오라/ 누구나 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옷 벗은 사람을 만나리라./  -- 오 규 원의 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  1련의 관찰을 바탕으로 한 묘사의 공간 속에서 2련의 진술을 끌어내고 있다.  초록아 눈을 떠라  내가 너희를 날선 칼로 버히겠다  [천지가 흰 뜨물뿐인 눈부신 이 세상]에 --- 이 시 영의 법 --  여기서 세상은 이 세상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을 하기 위한 지각 대상(관념)이다.  13.시적 진술의 구조와 시점  시적 묘사의 구조는 대체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시적 묘사는 대상에 대한 관찰을 축으로 하고 있으므로 관찰자의 시각이 일차적으로 작품의 구조를 결정한다. 때문에 고정 시점. 이동 시점. 회전 시점. 영상 조립 시점 등이 작품의 구조로 나타나고 있다.  / 어제 내가 본 건/그럼 뭐더라/해변도 아니고/마을도 아니고/개도 아니고/교회도 아니고/교회의 첨탑은 더욱 아니고/아니고/아니고/아니고/  -- 이 승 훈의 어제 내가 본 건 --  위 시는 회고적 독백 시점이다. 혼란스런 병치를 통해 심리적 갈등의 현상을 그대로 시적 공간에 묶고 있다.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는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치던 아이야 --- 김 명 인의 동두천 --  위 시는 시적 화자인 '내'가 가르쳤던 혼혈아의 버려진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황폐한 현실과 그 속에서 우리들이 버리지 못한 삶의 "그 더러운 그리움"의 실체를 독백 형태로 노래한다.  14. 관조적 시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 정 현 종의 섬 -  격언적인 해석이다. 어째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지 이해를 도와주는 시적 표현이 작품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흔히 알려진 격언이나 금언이나 잠언이 그러하듯, 체험에서 우러나온 단 한 줄의 시구 속에 숨은 뜻을 우리는 제 나름으로 간파한다.그 섬은 실재의 섬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떠도는 관념적인 어떤 것이다.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있다.  15. 풍자적 시점  풍자적인 시점의 해석적 진술은 일종의 시적 논평이다. 관조적인 형태가 비판보다 대상에 대한 의미론적 또는 존재론적 탐구를 통한 세계의 이해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풍자적인 형태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 그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보다 관심이있다.따라서 보다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해석을 주로한다. "진리의 방패"라는 포프의 주장이 풍자가의 이상을 대변한다는 말로 자주 차용되는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 한 줄의 詩는 커녕/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그는 한평생을 핸복하게 살며/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이 묘비는 살아 남아/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김 광 규의 묘비명-  위시는 사실적인 풍자 시이다. 돈의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을 위해 유명한 문인이 '묘비명'을 썼다는 사실이다. 진실에 반한 그런 묘비명이 사료가 될 역사적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사실적인 예화로 이 시는 들려준다.  16. 시적 화자  시를 쓴다는 일은 물론 창조적인 행위에 속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기가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 등을 언어로 현실화하는 행위이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 김 소 월의 먼 후일 --  위 시는 '나'가 화자이다.화자인 '나'는 작품 속에서'당신'으로 지칭되고 있는 어떤 청자를 상대로 하여 내용을 엮고 있는 형태이다. 이 작품 속의 '나'는 작품 밖의 '나'인 시인과 구별되는 존재이다. 시는 창조적 허구이고' 그 창조적 허구의 국면에 어울리는 화자가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이면 "문학은 말들로 이루어지며, 작가에 의해 구성되며, 페르소나(가면)에 의해 말해진다."는 라이트의 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집이라 치면 精華水 잔잔한 우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의 平床의, 갈앉은 뜨락의,  물내음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울려올 따름, 그 옆에 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春香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 박 재 삼의 水 晶 歌 --  위 시는 화자가 '춘향'이다. 춘향의 눈과 마음을 통해서 본 세계이다. 시인이 춘향의 눈과 마음을 빌어서 그 눈과 마음을 통해 서 본 세계를 작품화한 공간이다.  /무슨 새로운 소식 같은/달이 떠 있는/마당에/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간다/우중충한 물먹은 나무들이/총 칼 같다./ --- 김 영 태의 노래 --  위 시는 화자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달을 "무슨 새로운 소식" 같다고 보고, 또 나무들을 "총 칼" 같다고 의식하는 관찰자가 작품 뒤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관찰자가 숨은 화자이다.  17. 비유와 시적 진술  비유란 에이브럼즈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한 언어의 화자가 어떤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얻기 위해 일상적인 또는 보편적인 그 단어의 의미와 그 단어의 연결체로부터 벗어나는 표현 형태를 말한다.  비유의 종류는 많고 매우 다양하다.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에 뚜렷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단어를 잘 배열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가져오는 비유가 있다.  1) 직유의 종류  직유란 두 가지 사물 또는 관념을 ' 같이' '처럼' '듯이' '인양' '만큼' 등의 연결어로 결합하여 표현하는 비유이다.  맺힌 한처럼(直喩) -- --비유 되는 것  별은 당신의 뼈(隱喩)---비유하는 것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 김광균의 瓦斯燈-  위 시는 원관념 보조관념이 모두 사물인 형태로 결합된 직유이다.  (고층 - 묘석, 야경 - 잡초)  절망이란 오히려  나리는 [눈처럼] 포근하고나 - 조지훈의 눈오는 날에-  위 시는 원관념이 관념이 관념이고 보조관념이 사물이다.  ( 원관념 - 절망, 보조관념 - 눈)  어쩌다 멀쩡한 [정신처럼]  입간판 하나 서 있다 -- 홍신선의 친구와 잠자며-  위 시는 원관념이 사물아고 보조관념이 관념인 형태다.  (원관념 - 입간판, 보조관념 - 정신)  2) 은유의 종류  은유는 직유와는 달리 연결어가 없는 비유이다. 그러니까 원관념을 A라 하고, 보조관념을 B라고 할 때, A = B 라는 형태의 은유를 말한다 이런 형태상의 차이 때문에 직유를 明喩, 은유를 暗喩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유에는 置換隱喩와 竝置隱喩가 있다.  /시간의 강은 흐르고/시간은 강이 되어 흐르고/내 마음은 호수요/나의 허기는 시골역 플랫포옴/ 즉 A = B , A의 B라는 형태를 취한다. 치환은유라고 한다.  /자동판매기를 매춘부라 불러도 되겠다/황금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최승호의 자동판매기-  /둥근 나무 탁자 위/등불 하나/너의 눈이 닿은 자리/나의 눈이 타는 자리/동그랗게 열린/고요 하나 / - 민용태의 한밤의 과일--  위 두 편의 시는 치환은유를 골격으로 하고 있지만 보조관념이 둘이다. 이런 경우 이를 확장 은유라한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  위 시는 액자식 은유라는 것이다. 한 시구 속에 하나의 비유적 표현(황금의 꽃같이)이 다시 다른 비유의 보조관념(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 형태로 된 것을 말한다.  [병치은유의 예]  병치은유는 치환은유처럼 A =B이다의 형태가 아닌 시구와 시구를 병치함으로써 그 시구와 시구가 창출하는 독특한 의미론적 전이의 형태를 말한다.  아뜨리에서 흘러 나오던  루드비히  秦鳴曲  素描의 寶石길  한가하였던 창가의 한낮  옹기장수가 불던  單調 -- 김종삼의 아뜨리에 환상 --  위 시에서 보듯 "루드비히의 진명곡"인 "소묘의 보석길"과 대낮의 창가에서 옹기장수가 불던 "단조"가 나란히 병치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이미지는 사실상 단절되어 있지만 시인의 의도적 표현에 의해 묶여 있다.  19. 상징  가장 간단히 말해본다면, 象徵은 직유나 은유에서 원관념이 숨고 보조관념만 나타나 있는 형태이다.  /길게 드러누운 그 길로/ 바람이 오고 그대는 가고/산 너머 바다는 아니오고/ 파도 소리만 오고/그대의 모습으로 여기저기 풀이 자라고/  위에서 보듯 '길'만 있고 그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우리가 찾아야 한다. 따라서 불명확한 어떤 것( 편의 상 여기서는 그리움이라고 해두자)을 명확한 길이라는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할 때 상징이 나타난다. 그러나 상징은 시인이 어떤 것을 숨겨 표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을 때 사용한다.따라서 상징의 숨은 원관념은 언제나 암시적이다.  상징에는 개인적 상징과 대중적 상징, 그리고 원형적 상징이 있다. 개인적 상징은 시인들이 사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경우이고, 대중적 상징은 제도적 또는 문화적 전통 속의 상징을 빌어 사용하는 경우이며, 원형적 상징은 모든 인간에게 유사한 의미나 반응을 환기하는 이미지나 話素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마차의 바퀴/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가쁜 언덕 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시퍼진다 /  --- 황 동 규--  여기서 '바퀴'는 개인적 상징이다.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바퀴'인 셈이다. 따라서 이렇게 숨은 의미가 하나일 수 없는 것이 다의성이라는 상징의 특징이다. 역사일 수도, 사랑일 수도, 생명일 수도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합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았다 -  친절하게도 신호등만 계속해서 청신호를 보내고  갈수있습니다가도좋습니다가십시오가십시오 -- 김 옥 영--  위 시는 대중적 상징의 예이다. 신호등은 제도적 상징물의 하나이다. 이처럼 문화적, 종교적 관습적인 성격을 지닌 상징을 작품 속에 사용할 때, 그 상징을 우리는 대중적 상징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 강 은 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 --  위 시는 원형적 상징의 예이다. 물은 원형적 이미지의 하나이다. 원형적 이미지란 민족이나 국가 또는 개개인의 개별적 의미나 정서를 초월해서 인류가 공통으로 반응하는 의미의 존재를 말한다. 물, 바다, 강, 바람, 산 , 태양, 달, 사막, 색채 등등, 물은 가장 일반적인 원형 상징의 하나로 탄생, 죽음, 소생, 정화, 속죄와 풍요의 상징이 된다.  20. 활유  활유는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추상 개념에 인간적인 요소를 부여하여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그럴 때 대상(사물이나 추상 개념)은 感情 移入이 되어 생동감을 갖는다.  활유에는 완전 한 의인화와 불완전한 의인화가 있다. 완전 의인화는 상에 인간적인 속성이 완전히 부여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며, 불완전 의인화는 대상에 부분적으로 인간적인 속성이 부여되고 있는 형태를 말한다.  /나의 자랑은 自滅이다/ 무수한 複眼들이/그 무수한 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盲目의 물보다./ -- 이 형 기의 폭포 --  위 시는 완전한 의인화의 보기이다. '폭포'라는 사물을 '나'로 의인화 한 것이다.  /젊은 母體에 매달려/태양의 젖꼭지를 빨며/조금씩 발돋움을 세워 보는/  /저/4월의 잎들은,/ -- 이 수 익의 어린나뭇잎에게 -  /旗는/지금 잠자는 것이 아니라/決意의 주먹처럼 깨어 있으면서/  --이 수 익의 어둠 속에서 -  위 두 편의 시는 불완전한 의인화의 보기이다. "태양(사물)의 젖꼭지와" "결의(관념)의 주먹"이라는 차이가 있다.  21. 제유와 환유  제유는 사물의 일부로써 그 사물의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노래하리라 비오는 밤마다/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우리들 서울의 전쟁과 평화/  -- 정 호 승의 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  여기서 '빵'은 음식물 모두를 말하는 제유이다.  /그때 몇 몇 사람들이/풀 먹인 白依를 걸쳐 입고/고운 손으로 이 나라의 겨울을/  /녹이고 있었다/ -- 김 선 굉의 그해 겨울--  여기서 '白依,는 백의민족(한국)의 精神을 나타내는 환유이다. 환유는 사물의 일부로써 사물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일부로써 그 사물과 관계가 깊은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낸다. 이점이 환유와 제유의 차이이다.  즉, 다시 요약해 보면  빵(음식의 일부) --- (음식물의 전체) ------ 제유  백의(옷의 일부) --(백의와 관계 깊은, 한국인의 정신) ---환유  22. 희언과 기상  희언법은 같은 소리가 나거나 소리는 유사하나 뜻이 전혀 다른 말을 사용한 비유법이다.  / 民主/注意(칠!)/내일은 정녕 얼떨떨하고/역사보다 야담을/사랑하는/  /사랑하는 그대만/진정 아름다워? / -- 송욱의 何如之鄕 -  '主義'를 '注意'로 바꾸고 바꾸어 놓은 '注意'에 칠!을 덧붙여 놓았다. 이와 같이 의표를 찌르는 표현을 통해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수사를 機智(위트)라고 한다.  / 회화 선생 윌이람은/ 비가 올 때마다 '피'가 온다고 한다./  / 그에게 내리는 피는 비이지만/ 우리에게 오는 비는 피였다/  / 온몸이 온 마을이 피에 젖는다./ -- 강창민의 비가 내리는 마을-  잘못된 발음을 그대로 차용하므로써 '비'가 내리고 잇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세계와 '피'가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세계가 극적으로 대비 되어 있다.  /잎새는 겹살로 뭉친 계집의 궁둥이다./ 밑동에 남근처럼 처박힌 뿌리./  / 어디선가 이런 접촉 본 듯하여/ 속배기를 들추던 손이 부끄러워진다./  -- 강우식의 배추--  이와 같이 서로 극히 이질적인 잎새(원관념)와 겹살로 뭉친 계집의 궁둥이(보조관념)가 결합하는 형태가 기상의 전형적인 모양이다.  23. 도치의 보기  문장의 정상적인 배열의 순서를 바꾸어 어떤 부분을 강조하거나 또는 정서적인 반응(감정)의 강도를 적절히 드러내는 수사법이다.  山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龍門寺에 두고 온  바람들 --- 양왕용의 남해도 --  여기서 용문사에 두고 온 바람들이라는 현상이 하나 있는 경우다.  "산 모퉁이를 돌아가고"있다고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용문사에 두고 온 바람들"이다. 그러니까 전혀 예기지 못했던 곳에서 보게 된 '바람'에 대한 놀라움의 강조이다.  잘가거라, 망가진 수수깡과 여름 속의 평안이여.  살붙이들 속에 굳게 길들여진 세상도  두고두고 우리가 용서해 보내는 것 아니다. -- 김명인의 들깨꽃 --  여기서는 마른 수수깡과 여름 속의 평안이라는 두 개의 시적 내용이 있는 경우다.  '잘가거라,의 정상적 어순은 '평안이여' 다음이다. 이렇게 도치를 시킨 것은 '잘가거라'고 말하는 시적 화자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어찌 붙잡을 것인가  흔들리는 본질을  흔들리는 빛을  흔들리는 귓가의 소리를 -- 신협의 강가에서 --  여기서는 반복되는 '흔들리는'이라는 비유에 묶인 것들이 셋이 있는 겨우이다.  '어찌 붙잡을 것인가'을 강조하기 위한 도치이다. 정상적인 어순은 '흔들리는 귓가의 소리를' 다음이다. 만약 정상적 어순이 되면 '흔들리는 것들' 모두가 동격으로 강조되어 작가의 의도가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다.  한강은  더 이상 그대 슬픔의 젖줄이 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울음도 그대의 절망도 -- 김정환의 한강 --  여기서는 정치와 도치가 혼용되고 있다. 정상적인 어순에 이어 강조하고자 하는 시적 주장을 반복과 동시에 도치를 연결한 형태이다. 이로 인해 정상적인 어순이 줄 수 있는 지리한 기계적인 리듬이 없어지고, 반복과 도치의 혼합이 시적 주장을 보다 강하게 나타나게 한다.  24. 대조와 모순  대도는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어구를 연결하여 대비의 느낌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대비와 대립 자체가 또 하나의 통일을 이루게 하는 수사법이다. 음악의 대위법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므로 어조가 비슷한 말을 병립시키는 대구와 구별된다.  나라에 큰 슬픔이 있었고  나에게 눈물이 있었다  꽃은 피고 해는 지고  꽃샘바람 부는 침묵의 강가에서 -- 정호승의 봄편지---  위에서 1연은 대구이고 2연은 대조이다.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단어나 어구를 병립시키지 않고 유사한 어조를 그 바탕으로 한다.  천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 서정주의 춘향유문--  위 시에서는 '천길 땅 밑과 '도솔천 하늘'이 대비되어 있고, 또한 천길 땅 밑의 '검은 물과 '도솔천의 하늘에 날으는 (흰)구름으로 대비되어 있다. 어디에 있든 결국은 도련님 곁이라는 심정을 훌륭하게 드러낸 극적 표현이다.  25. 대조와 모순 어법의 차이  대조와 유사한 대립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모순되는 관념의 결합 상태를 모순어법이라한다. 그러나 이 모순은 외형적일 뿐이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의 승무 -  이 시는 형용사 '고와서'와 형용사 '서러워라'의 모순된 결합이지만 그 속에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아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자의 손수건./ --유치환의 깃발 -  이것(깃발)이 '소리없는'과 '아우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소리없음과 아우성은 서로 모순되는 관념이다.  26. 반어와 역설의 차이  반어(아이러니)는 그리스 희극의 한 주인공인 에이론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론은 자기 과시적인 인물인 알라존과 반대로 '자신을 은폐하는자'즉, 의도적으로 자신의 실상을 숨기고 보다 어리석은체 하는 것이다. 이 에이존이 종말에 가서는 알라존을 이기게 된다. 이 에이론처럼 실상 또는 진실을 안으로 숨기는 수사법이 곧 반어이다.  이와는 달리 역설은 para(넘어서) + dox(진술)이란 어원을 갖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수사법이다. 이와 같이 표현된 것과 은폐하고 있는 표현의 구조가 반어와 유사하므로, 역설을 반어의 종류로 보기도 한다.  /시를 어떻게 쓰나/이 망할놈의 시를/쓸 줄 안다면/얼마나 좋을까/  -- 이승훈의 이 망할놈의 시-  여기서 언어의 반어(아이러니)를 보이고 있다. 망할놈의 시라는 표현이 반어이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는 아카샤 꽃내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곽재구의 평화축복인사-  여기서는 역설이 나타난다. 즉 표면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당신을 위해 싸우는 순간" "제일 행복한" 사람에게는 최루탄 터지는 소리야말로 아름다운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의 그날-  바로 위의 시구가 바로 역설이다. 당연히 아파야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프지 않다. 아니, 아프다는 감각이 없다.  27. 역언법 -- 어떤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오히혀 작가가 생략한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얻도록 하는 수사법이다. 그러므로 생략은 충분히 검토된 표현의 하나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8. 수사적 의문법 -- 응답을 바라고자 하는 형태가 아니다. 질문이라기보다 질문의 형식을 빈주장이다.  쪼개지고 깨어진 정신을 자식에게 줘? --황학주의 조선철쭉 뜨는 구릉에서-  반대로 줄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질문인 형식을 빌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9. 완곡 어법 -- 그리스어의 '좋게 말하다'에 해당한는 말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아름다운 이 세상 풍 끝나는 날 (천상병의 귀천) -- 죽는 날의 완곡한 표현  할머니, 사촌, 차례로 세상 떠나시고---- 죽었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30. 시의 구조와 행. 연  1) 시의 행과 연  형태상으로 보자면 시는 행과 연으로 되어 있다. 행은 단어. 구. 절. 또는 그것들의 연합으로 구성되고, 연은 하나의 행 또는 연합으로 구성된다.따라서 시는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한 연은 한 행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한 행은 한 단어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시의 형태와 행. 연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 김상옥의 鳳仙花-  위 시는 정형시로 시조이다. 시조는 틀(형식)이 먼저 정해져 있다. 기본 틀은 3장 6구 총 44자 내외이다.  초장 [1구 3.4 ][2구 3.4] 7자 3.4조  중장 [1구 3.4] [2구 3.4] 7자 3.4조  종장 [1구 3.5, 6] 8~9자 3.5,또는3.6조 [2구 4.3] 7자 4.3조  또한 리듬은 4음보로 이루어진다. /1/2/3/4, /1/2/3/4. /1/2/3/4, /1/2/3/4/  31. 리듬과 행.연  에즈라 파운드는 시를 음악시. 회화시. 의미시로 나누었다. 김춘수는 시의 행과 연을 리듬. 이미지. 의미의 단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것도 그이 때문이다. 행과 연이 맡은 기능이 변하는 것이다.  압운은 외국시(영.미)시나 한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행의 시작. 끝. 중간에 유사한 소리를 내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 반복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엄격한 체계를 가진 소리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 체계는 음절 단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첨가어인 우리 언어는 음절의식이 약해서 소의 반복이 음수 또는 음보 단위로 형성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형시에는 압운 형태의 구조를 주장하기 힘들다.  /(꽃)가루와 같이 보드라운 고양이의 털[에]/  /미친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위에서 본바와 같이 영시나 한시에서 사용하는 압운과 유사한 형태가 보인다. ( )표는 두운 [ ]표는 각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나타내고 있는 리듬은 자유시에 흔히 나타나는 유사어구 (고양이의, 텅에, 눈에, 입술에, 수염에)와 유사 종결어미(~다, ~라)의 반복 효과로 보아야 한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시에는 압운의 체계를 찾아보기 힘들다.  32. 이미지와 행. 연  문학적 용어로 이미지는 대게 3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넓은 의미로 시나 그 밖의 문학 작품에서 축어적 묘사나 암시 또는 직유, 은유에 사용되는 보조관념들로 언급된 감각적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성들을 의미한다. 둘째, 좁은의미로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의 묘사만을 의미한다. 셋째, 비유의 보조관념들을 의미한다.  화냥기처럼  설레는  봄,  봄날이다  종다리는 까무라치게  자꾸  울어쌓고 -- 이수익의 봄날에2-  감각적 지각의 대상과 특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감각적 지각의 대상은 '봄' '종다리'이며 그 둘은 '화냥기처럼 설레는'특성과 '까무라치게'우는 특성을 갖고 있다. 감각적 리듬,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행갈이을 했다. 이미지를 살리려는 시행은 분행을 한다. 반대로 의미를 중시하는 산문시는 시행이 의미 중심으로 길게 이어진다.  이미지란 경험 사실의 감각화 또는 육화이다. 정신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또한 관념에 봉사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따라 서술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정신적 이미지는 감각기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의 외인촌-  꽃처럼 (붉은) [울음] - 서정주의 문둥이-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박남수의 아침 이미지-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정한모의 가을에-  ( )표는 시각 이미지 [ ]표는 청각 이미지이다. 두 개의 이미지가 결합된 형태를 공감각적 이미지라고 한다.  33. 회화적 구성과 행. 연  회화적 리듬은 그 특성상 시각적 형태로 강조된다. 그런 시각적 형태를 드러내는 데는 대체로 세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사실적 구성(정경 묘사), 기하학적 구성(삼각, 사각,원형, 특정 모양), 기성품을 모방한 구성(선전 문구, 신문 광고 문구, 특정 문구를 패러디함).  34. 의미의 행. 연  시 속에 나타나 있는 의미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라는 예술품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표현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시적 언술의 특성 답게 묘사되어 있거나 진술되어 있다. 그러니까 시 속에 묘사되어 있거나 진술되어 있는 것이 의미가 된다. 그것은 장르가 시적 특성을 띤다는 점에서 시적 의미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묘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서경적. 서사적. 심상적인 작품 구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있기도 하고, 또 축어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며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한만큼, 그 의미의 가시적 양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시 속에 나타나 있는 의미란 시만큼 다양하다고 보아야 한다.  (1).의미(대상과 특질) ( 2).의미(생생한 시각적 묘사 장면) (3).의미(보조관념)  찬 달빛(1)  길게  누웠는-----------특질  산기슭-----------대상  빈 논에(2)  가득히  흐르는 ----------특질  벌레  소리-------------대상  정결한  리디아  선율의----------------------------은유(안개 바람의 보조관념)  안개(3)  바람-------------대상(원관념)  사이에(4)  고이는 ----------특질  종소리-----------대상  -조창완의 라자로 마을의 새벽. 추석-  (1),(2),(4)련은 지각대상(산자락, 벌레소리, 종소리) 그 특질은 (찬 달빛 길게 누운, 빈 논 가득히 흐르는, 사이에 고이는)만 드러나 있는 敍景이다. 넓은 의미로 이미지라는 것이다. 시인들이 어째서 형태의 표상적 의미에 집착하는가는 화가가 의문을 갖고 탐구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이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하고는 그림자 하나조차도 일치하지 않는데도 그 속에서 설득력 있는 이미지를 추측해 내는 그런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절문 밖에는 언제나 별들이(싱그러운 포도밭을 이루고) 있었다.  빗장을 풀어놓은 절간 문 위에는(밤새도록 걸어온) 달이  (한 나그네처럼) 기웃거리며 포도를 따고 있었다.  (먹물처럼) 떨어진 산봉우리들이 (담비떼들 같이 떠들며) 모여들고  따다 흘린 포도 몇 알이 쭈루룩  (산을 흘러가다 구슬 깨지는)소리를 내곤 있었다. -송수권의 靜寂-  시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라는 것을 위 시는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 (하늘의 포도밭) 이라는 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자연(반응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 )속의 비유들을 다시 한 번 새겨보기 바란다.  --사랑을 ?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위 시는 보는 바와 같이 각 연은 시행의 다수와 관계없이 의식의 이동 단위로 연이 나누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랑'을 잃었다는 자각(1련) -- "잘있거라"라고 인사하고 싶은 것들(2련) --문을 잠그고 빈 집에 갇히는 '내 사랑"을 본 것(3련) 이런 의식들의 편차와 단속(단절과 이어짐)이 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35. 양행 걸침과 행. 연  양행 걸침이란 일상적 구문의 형태가 시행에서 의도적으로 분절되어 두 행에 걸치는 것을 두고 일컫는다. 즉 일상적인 구문과 시행의 구문이 동일하지만 행의 배열이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 잠든 사이 (눈은)  더욱 깊게 내릴 것이며  우리들의 숲은 더욱 굳게  노을 속으러 잠길 것이니  우리 잠들지 말아야지  우리 잠든사이 (강물은)  어느새 저만큼 흘러가리  우리들의 새들도  저문 숲을 건너 날아가리 --김수복의 우리 잠든사이--  위의 시에서 (눈은) 앞의 시구 "우리 잠든사이"와 뒤에 오는 "더욱 깊게 내릴 것이며"에 동시에 영향을 끼쳐, 양행에 걸쳐 의미의 파장을 형성한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수법이다.  36.의도적 의미의와 실제  의식저이든 무의식적이든 한편의 작품 속에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의도가 훌륭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작품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의도는 어디까지나 계획의 차원이고 작품은 실제의 차원이기 때문이다.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이 작품에 나타나는 불투명성은 이 의도와 실제의 괴리가 어떻게, 어디에서 발생하는가를 질문해 보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의도와 실제의 괴리 현상은 궁국적으로는 물론 시에 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하겠지만, 인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분화적 사고의 흔적이고, 해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 작품 속에 내재해 있는 의도적 의미, 실제적 의미, 해석적 의미를 구분해 생각해 보지 못한 결과이고, 표현의 측면에서 본다면 시적 언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살리지 못한 결과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즉, 대상 - 감지 - 언어화(의도의 의미)- 작품(실제적 의미)- 독자(해석적 의미)  37.의도와 시작의 과정  의도의 오류라는 말이 있다. 작자의 의도와 작품에서 독자가 받아들이는 그 작품 자체의 의도와는 다를 수가 있는데, 그섯을 달라져서는 않된다고 우기는 것은 잘못이란 뜻이다. 미국의 신비평가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독자란 천차만별의 식별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독자(비평)가 자기 작품을 두고 무슨 말을 하했다고 하더라도 심한 경우가 아니면 묵살 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한편 훌륭한 독자는 작가가 모르고 한 일까지도 지적해 주어 작가에게 어떤 암시와 자극을 주는 법이다.  [출처] 현대시 작법(문학과 지성사 오규원의 저서 중에서) |작성자 옥토끼  
522    시를 쉽게 쓰는 요령...하지만 쉽지만 않은 요령 댓글:  조회:4806  추천:0  2015-05-20
 詩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시인)      1. 상상하는 법을 익혀라     초보자들이 시를 쓸 때 제일먼저 봉착하는 것이 어떻게 시를 써야하며, 또한 어떻게 쓰는 게 시적 표현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필자도 초보자 시절 이러한 문제에 부딪혀 이를 극복하는 데에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거죠.     *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라     필자가 이와 같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이유는 시란 '자기가 경험했고, 보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게 시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힘들이지 않고,개성적으로, 재미있게 쓰는 데에는 이게 바로 함정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거죠. 경험과 느낌은 모든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상상은 천차만별이죠.       *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잘 쓰려면,  상상으로 써야 한다.     상상으로 써야 발전이 빠르고 좋은 시를 계속 양산할 수 있습니다. 즉 시란 자기가 쓰고자 하는 소재를 두 눈 딱 감고 상상해서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는. 보고, 느낀 걸 쓰는 게 시다라는 고정관념에 빠지니깐 시를 한 줄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즉 보고 느낀 것이 다 떨어지면 그때부터 허둥대기 시작하는 거죠. 기껏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게 자기 주변 친구, 부모,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둘러대는 정도. 그리곤 스스로 훌륭한 시를 썼다고 자기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가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만99%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 누구나 다 보고 느끼는 형편없는 넋두리, 서사,풍경 나열이 되기가 일쑤죠.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시를 써왔다면 이 순간부터 기존 쓰는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필자가 안내한 대로 석 달만 같이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글이 달라지는 걸 본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상상하는 것부터 배우도록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 우선 상상할 소재, 즉 상상할 대상을 구체적인 것 하나를 고르라.     자신이 있는 곳이 지금 사무실이라고 하면 주변에 있는 꽃병, 벽, 창, 하늘,노을 등이 있을 겁니다. 이중 어느 하나를 골라 봅시다.     필자가 먼저 어떻게 상상하는지 그 방법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로 한번 해볼까요?  기존 방식대로 이란 소재로 시를 한번 시를 써 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노을을 쳐다보며  대다수가 아마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지 않았겠나 여깁니다. 그러나 이건 느낌을 적은 것이고 상상한 게 아닙니다.     * 상상을 이렇게 해보자     * 만약 자신이 현재 애로틱한 감정상태에 있다면 을 바라보며, 또는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눈부신 상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노을을 발가벗고 있어서 눈부신 여자로 여기고 계속 상상해 가는 겁니다. 이땐 순서를 생각하지 말고 앞 상상의 핵심어를 가지고 다음 상상을 유치하든 품위 있든 따지지 말고 계속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나중에 논리적으로 순서를 다시 잡아 정리, 수정해 가면서 다듬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제목을 로 붙여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근사한 한 편의 시가 탄생할 것 같잖아요?     * 이번에는 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한다면 빨간 노을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상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을 로 여기고 모닥불과 관련된 온갖 경험, 추억, 익살스런 행동, 우tm꽝스런 생각, 이야기들을 계속 꺼내가면서 상상을 하는 겁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을 로 치환했으면 을 멀리 떠나서 상상을 하면 안됩니다. 모닥불과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상상을 펼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내용이 난해해 지게 됩니다.     * 다른 소재들로 상상하는 것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 다듬는 법, 순서를 잡는 법, 제목을 붙이는 법....등등은 그때그때 하나씩 계속 예를 들기로 하고 오늘은 상상하는 요령만 익혀두기로 합시다. 시를 쉽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 처음 시작할 땐 뭐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참고가 될만한 시를 첨부하오니 , , 이란 낱말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상상력을 발휘하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밑에 관하여      나는 위보다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     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   그 사람 밑을 내려가보면   넓은 뿌리가 바닥을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다.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우리도 밑을   논밭처럼 잘 일궈야 똑바로 설 수 있다.   가로수처럼 확실한 밑을 믿고   대로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에서 명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   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   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     나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그 근본을 사랑한다.   근본이 없어도   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아름다운 모퉁이에 관하여     모퉁이가 아름다운 건물을 보면   사람도 모름지기 모퉁이가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입체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로운   내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퉁이가 둥근 말, 모퉁이가 귀여운 사랑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모난 부분을 둥그렇게 구부린 흔적이   바라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옆구리를 한번 돌아가보면서   모퉁이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건물의 중요한 한 분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부까지 품위 있게 해주는   의식의 요긴한 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퉁이를 가꾸는 사람들...   경제학적으로 검토하면 비효율적 투자이겠지만   모두가 모퉁이를 가꾸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어디를 돌아가보고 살아야 하나?   향기로운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입체물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벽           가려보고 드러내봐도 내 앞뒤 골목은 온통 벽이로구나. 한 발로 뻥 찼을 땐 여지없이 되튕기며 발 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벽.     야, 벽에도 이단 옆차기가 있고, 돌려차기가 있구나. 속이 훤히 드러난 유리벽이 있고, 보초를 세워야 하는 철조망 벽이 있구나.     그러면 벽에도 나이가 있고 학벌이 있고 지위가 있다는 것인데, 맘에 안 든 벽을 마구 감옥에 잡아넣는다면 누가 경쟁을 하나? 벽 없이도 세상을 이룰 수 있나? 우리들 마지막 버팀목이 벽이라면 벽 없이도 희망은 존재할까?     벽을 쌓으려면 스폰지를 넣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조립형으로 설계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견고하게 구축하더라도 잦은 발길질과 교묘한 철거 전략에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벽은 융통성 있게 존재해야 하리라.     지금 나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한 사나이가 망치를 들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다.     2.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방법       초보자 시절에 일단 상상하는 요령을 알게 되면 어떤 소재를 고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상력이 일정 수준에 달한 사람은 어떤 소재를 갖다놓더라도 즉각 상상력을 기발하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막하기 이를 데 없죠. 그래서 초기에는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담긴 소재, 언어들을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고르는 게 상상하기 쉽습니다. 구체적이지 않고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소재들은 수준급의 상상력 소유자가 아니면 상상의 단서를 잡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 미움, 과거, 미래, 종이... 등 이런 소재들로 시를 쓴다고 해봅시다. 그냥 숨이 콱 막힐 겁니다. 그러나 공간이 있는 것들 문, 벽, 창, 천장, 집....등 이걸로 상상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한결 쉬울 겁니다. 이건 상상이란 기본적으로 이미지, 즉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고 그 그림은 공간이 있는 것이 평면적인 것보다 훨씬 그리기 쉽고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 구체적인 소재로 상상하라.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을 가지고 상상한다면 현실의 문 (사립문, 철문, 미닫이문, 파란 문, 빨간 문…), 추억의 문, 사랑의 문, 지식의 문...등 상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가령 그 추억의 문 하나로만 상상을 해보더라도 그 추억의 문에 문고리를 달아보고, 자물통도 달아보고, 발로 한 번 뻥 차보고, 파란 페인트, 아니 빨간 페인 트도 칠해보고 온갖 상상을 다 해볼 수 있잖아요?     * 또 이란 소재로 한번 해 볼까요? 처럼 의미적 공간 말고, 이번에는 실제적 공간으로 , 즉 어느 초가집을 한번 그려본다고 해 봅시다. 두 눈 딱 감고 어릴 적에 보았던 초가집 하나를 머리 속에 담고       이렇게 묘사해 놓고 제목을 으로 붙인다고 해 보세요. 정말 김영남의 어린 시절 집을 그린 훌륭한 시가 되지 않습니까?     * 상상은 허구이고 가공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초가집을 그리는데 자기가 실제적으로 본 초가집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요. 상상이 당장 막혀요. 상상은 기본적으로 허구이고 가공입니다. 즉 그 초가집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기억 속에서 모두 불러와 한번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겁니다. 즉 상상 속에서 초가집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죠. 이게 바로 참신한 그림이요, 참신한 이미지요, 참신한 시가 되는 겁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골라 상상을 해 시를 써보도록 하고, 상상은 체험, 허구,가공까지 드나들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시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가공까지 동원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는 걸 유념합시다.          3. 초보자의 시 습작 방법      초보자 시절에는 시 창작 방법을 아무리 들어도 시작하려면 정작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추천할까 합니다.       * 좋은 시를 모방해 보라.     * 첫째로 왕 초보 시절에는 기성 시인의 작품 중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작품을 갖다놓고 그 작품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먼저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즉 그 시를 한번 모방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 했습니다. 사실 어느 시인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좋게 말해서 영향이지, 액면 그대로 표현하면 그 사람을 모방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미술학도 지망생에게 제일먼저 시키는 것이 석고데생, 즉 모사연습이고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어떤 이론, 문법공부보다도 말을 실제로 따라 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음미해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속도로 선진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다는 것도 외국, 특히 인접 일본의 앞선 기술, 문화, 제도 등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의 색깔과 독자성이 문제이지만…     하여, 왕초보 시절에는 구조적으로(기,승,전,결) 잘 짜여진 작품이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을 갖다놓고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내용과 감각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전개방법과 표현기술을 따라서 해보라는 뜻입니다. 이걸 능수능란하게 하다보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표현을 뒤틀어보고 싶고 독특하게 펼치고 싶어져 자기 색깔이 선명하게 나오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 시의 소재를 찾는 방법     * 둘째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감각은 있는데 될만한 시의 소재를 못 찾아 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잡지를 많이 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지, 패선 잡지, 디자인 잡지, 건축잡지, 미술잡지 등 사진과 그림이 많이 담긴 잡지를. 시란 기본적으로 심상, 이미지 즉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림이 많은 잡지를 넘기다보면 언뜻 시로 표현하고 싶은 소재가 스치게 됩니다. 잡지를 깊게 읽지 말고 눈요기식으로 넘기고 광고 카피도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문득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고쟁이들도 시를 많이 읽고 쓴다는 걸 참고해 가면서 말입니다. 이때 얻은 힌트를 가지고 감상평(1),(2)를 참고해서 상상을 펼쳐보기 바랍니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제목에 신경을 쓰지 말고 문득 얻은 힌트, 그 소재를 가지고 상상을 해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상상을 자꾸 새롭게 하고 고치다가 보면 처음 의도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의 시가 탄생하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맨 나중에 붙이는 겁니다.     이상을 참고해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이미지 즉 글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걸 잘하다 보면 나중에 의미있는 말, 표현, 자기철학 등도 요령있게 양념치듯 넣는 기술을 알게 됩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거창한 자기의 말, 주장을 하려하지 말고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감각과 상상으로 접근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방          그 방은 창을 통해 안이 훤히 드러난다. 연둣빛 레이스 커튼을 드리웠고 널린 브래지어가 한결같이 희망표이다. 고개를 들면 갤럭시 손목시계, 악어가죽 핸드백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바닥은 아담하고 천장은 유난히 높고 알록달록한 박달나무 숲속 같은 분위기가 달려오는 방. 저렇게 꾸미는 데는 몇 년 이 걸렸을까. 그 방에 닿으려면 창동역에서 도봉산 쪽으로 날아가는 화살표를 두 번 따라가야 하고 909 국 다이얼을 돌려야 한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만큼 그 방 밖도 늘 매혹적이고 불안하다.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 지만 불이 꺼져 있으면 그 방 밖은 가을이고 수상하다. 그리고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불면 그 방은 사 정없이 흔들린다. 방은 흔들릴 때가 아름답다. 흔들릴 때마다 굳게 잠긴 자물통이 침묵의 장식처럼 중 심을 잡아주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돌아다보면 그 방은 다시 불이 켜진다.     참으로 이상한 방. 한번 쓱 들어가 맘껏 뒹굴어보고 싶은 방. 브래지어가 창인 그녀.       4. 시의 길이는 20행 정도가 적당하다     초보자 시절에 시의 퇴고와 관련하여 자주 고민하는 것이 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시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입니다. 여기에는 내용에 따라 전개하는 형식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만 행갈이를 정상적으로 한다고 할 때 시의 길이는 대체적으로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고, 시의 연은 의미가 달라지는 부분에서 연을 구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행이 넘어 시가 길어지면 우선 시각적으로도 질리게 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됩니다. 시가 길어질 땐 길어지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그 시가 아주 재미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길어도 독자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하는 특별한 기교와 내용이 있든지 해야 합니다. 이젠 독자들도 영악해서 별로 의미 없고 특별한 내용도 없으면서 작자만의 생각으로 길게 쓴 시는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시가 문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걸 생각하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요즘 시 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필자가 말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는 걸 느낄 겁니다. 좋은 시란 적당한 길이에 음악성과 함축성을 겸비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시가 좋은 시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은 끝없이 해놓고 나중에 작품을 다듬어 퇴고할 때 이 정도의 길이로 지향하는 게 바람직할 겁니다.     연을 나눌 때에는 대체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때 나누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상의 내용이 건너 뛸 때. 변칙도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여하튼 기본에 충실하는 게 발전이 빠릅니다. 그리고 1, 2, 3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이 거의 연작시 수준이거나, 연을 구분하기에는 보폭이 너무 클 때 통상 사용하는 것으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       5. 시를 쉽게 잘 쓰려면 2중 구조에 눈을 떠라.     * 이중구조란 글자 그대로 두 가지 그림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 현재의 나와 과거ㆍ미래ㆍ 또는 추억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그림 속의 나…등 이런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의 시를 가장 선명하게 제일먼저 제시한 시인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시인은 주로 거울을 매개체로 해서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를 잘 조응했었습니다. 사실 이중구조 이치만 잘 이해하고 소화한 사람이면 이런 유형의 시가 쓰기도 쉽고 참 재미있다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은 난해하고 쓰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로직은 의외로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온갖 장난과 행동을 다 해보는 겁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와 행동을 이 둘에만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나가면 시적 공간이 나와 거울 속의 나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게 되고 이야기도 풀어나가기가 한결 쉽게 됩니다. 제 시집 '정동진역'에 실려있는 라는 시도 참고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시작도 이런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고의 자유로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데에부터 시작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이상, 김기림, 김수영, 오규원 등 이런 시인들의 시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가 참 재미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소재의 이중구조   위에서 예를 든 이중구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재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즉 어떤 오브제를 갖다놓고 그 소재와 나와의 관계 둘로 보고 시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때 시를 끌어내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첫째는 내가 아예 그 소재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꾸로 그 소재가 나로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소재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서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깡통이 되어 깡통의 속성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본문 내용에 절대 '깡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깡통'이란 말이 들어가면 깡통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깡통이라는 환상이 갑자기 확 깨져버립니다. 이것만 잘 소화해도 현상문예 예선을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가 감각적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거꾸로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또 반대로 '나의' 라는 말이나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단어를 보는 순간 환상이 확 깨져버립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지면상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첫 번째 방법에 충실한 시 한편을 소개하고 게시판 시 감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방법만 잘 활용해도 눈에 확 나는 좋은 시를 금세 쓸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수박  /  윤문자     나는 성질이   둥글둥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리가 없는 나는 그래도   줄무늬 비단 옷만 골라 입는다   마음속은 언제나 뜨겁고   붉은 속살은 달콤하지만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배꼽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말라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겉모양하고는 다르게   관능적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오장육부를 다 빼 주고도   살 속에 뼛속에 묻어 두었던   보석까지 내 놓는다       6. 제목을 효과적으로 잘 붙이는 요령     시의 제목을 제대로 붙일 줄 알려면 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편의 시가 성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또 독자들이 이 시를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제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이 문제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그동안 시 창작에 응용한 사람이 의외로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가 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같은 제목을 붙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제목이 되고, 보다 생산적인 제목이 될 수 있을까? 필자가 그 방법을 개발해서 그동안 작품에 실제로 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써 놓고 제목을 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논문, 일반 문서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제일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는 이걸 제대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시들이 제목을 로 해놓고 화장실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쓰거나,  해놓고 서울역에 관하여 온갖 수사와 기교를 동원해 시를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화장실과 서울역에 대한 정보를 이미 많이 갖고 있어서(어쩌면 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름) 그 시를 쓴 사람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저 그렇고 그런 내용의 화장실과 서울역에 관한 시는 읽으려 하지 않고 쉽게 외면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자는 정말 열심히 최고로 좋은 시를 썼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작자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 화장실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모습의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롭게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어야 그 시를 읽어줄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시로 성공한 작품들을 한번 예로 몇 들어볼까요? 김춘수의 , 김수영의 . 곽재구의  등을 한번 봅시다. 내가 불러줄 때 내게로 와 핀 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평역이란 시를 보기 전에 사평역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사평역을 목포역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도 이 시의 감동이 사평역만큼 올까요?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위와 같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때 효과적인 제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 두 번째 방법은, 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센텐스, 키 센텐스를 제목으로 올리되 전체 내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으로 필자의 시집 정동진역을 읽어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필자가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은 평소 광고 카피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즉 기사와 광고 카피의 헤드라인이란 시로 여기면 제목에 해당하는데 이걸 잘 뽑느냐 잘 못 뽑느냐에 따라 그 기사 또는 광고의 첫 인상 뿐만 아니라 여운까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이 그 카피,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라는 것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시에 한번 적용해봤더니 제대로 맞아떨어지더군요. 이때 붙이는 제목의 형식은 서술형이 되기 쉽고, 내용은 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시 내용중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의 속성을 가진 전혀 엉뚱한 것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법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자면 화장실 내용으로 시를 쭉 써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김영남은 화장실이다" 라는 시를 쓴 거가 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글을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묘사 해놓고 제목을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쭉 묘사해 놓고 제목을 로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 글이 아름다운 여자를 설명하고 묘사한 글이지 어떻게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목을 이라고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시가 되고 안 되고 까지 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시를 하나 소개하고 지면상 한계로 인해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소개하는 시는98년(?) 현대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이고 아주 하찮은 여울을 하나 묘사해 놓고 제목을 엉뚱하게 붙여 성공한 시입니다. 만약 이 시 제목을 < XXX 여울>.로 붙였을 경우 시가 될 수 있는지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춘기  /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 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 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 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7.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     이전 창작강의 및 감상평(6)과 관련하여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중 세 번째인 "엉뚱하게 붙이는 방법"에 관하여 여러 군데에서 전화가 와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보충합니다.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그 수준과 기교가 한결 세련을 요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걸 잘 못 붙이면 시가 난해해져 무엇을 썼는지 독자가 잘 모르게 됩니다. 가끔 시 전문잡지에도 본문과 관련지어 전혀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제목의 시를 종종 볼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이에 해당할 겁니다. 그러나 제목을 제대로 찾아 붙이면 매우 뛰어난 시로 금세 둔갑하게 됩니다.       * 시의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기본적으로 메타포, 즉 은유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참신한 은유관계가 형성될 때 그 시는 그만큼 참신한 시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 첫 번째는 "A는 B이다"라는 은유관계가 있는 문장을 가져와 A를 제목으로 올리고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 시를 만드는 방법이고   * 두번째는 B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써놓은 다음, 나중에 A에 해당하는 제목을 발견해 시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중 첫 번째는 상당한 수준을 요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가 쉽게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지난 강좌 때 이 방법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번 예로 든 시를 다시 읽고 난 다음에 설명하겠습니다.   * 사춘기 / 강순 ( 위 작품 참조)     위 시는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 라는 훌륭한 메타포가 들어있는 시인 것입니다.     * 위에서 언급한 방법을 설명한다면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자신이"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라는 메타포가 눈에 번쩍 띄는 문장을 발견하고 이걸 갖다놓고 제목을 로 올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에 관한 내용만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즉 사춘기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물살 빠른 여울만 구체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죠. 하여 이 방법은 상상력으로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야 하니까 테크닉과 능력이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여간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 두 번째 방법은 눈에 번쩍 띄는 물살 빠른 여울을 묘사해 놓은 다음, 그 내용에 메타포가 잘 조응되는 제목을 찾아 올리는 방법입니다. 위시의 작자는 아마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인상깊은 여울을 먼저 상상으로 묘사한 다음에 그에 잘 조응하는 제목인 '사춘기'를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위 시는 제목을 굳이 '사춘기'로 하지 않더라도 물살 빠른 여울에 조응하는 제목이면 다 성립합니다. 즉 제목을 '나의 대학시절' '80년대' '고교시절' '어린 시절' '신혼기' 등 과도기적 상황의 제목이면 다 잘 어울려 시로 훌륭하게 성립합니다.     하여,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방법 중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좋은 시를 더 쉽게 많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퇴고 과정 중에 버리기 아까운 대목을 따로 떼어내어 보강한 다음 이 방법을 한번 활용해 보세요. 의외로 좋은 시를 아주 쉽게 건질 수 있을 겁니다.         8.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시적 표현 얻는 방식 두 가지     초보자 시절은 시 쓰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설사 알겠다 여겨지더라도 쓰려고 하면 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상관하지 말고 바로 무조건 끄적거려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바로 끄적거려도 남보다 몇 곱절 빠르게 시적 표현을 얻는 방법 두 가지만 공개할까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이 두 가지만이라도 잘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표현을 새롭고 독특하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까? 이걸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이걸 또 설명하려면 한 학기 내내 설명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필자의 개발한 용어로 그 방법을 설명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입니다.     시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 방향이 주로 한쪽으로 쏠려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행동하고 또 사물을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슬퍼하는 방식이 대동소이하고, 우리의 인식구조도 주로 그 쪽으로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쪽에서 새로운 표현을 구하려면 지금까지의 방식보다 몇 곱절 노력과 탐구로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면 결코 효과적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때는 거꾸로 접근해 보는 겁니다. 남들의 시선이 다 한쪽으로 쏠려있을 때 자기는 거꾸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전에 자주 보지 못했던 사고와 행동이니깐 우선 시선을 끌게 되고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고스톱도 여지껏 쳐왔던 방식으로 쳐 잘 안 풀릴 땐 거꾸로 치면 의외로 잘 풀리는 이치와 같은 전략이지요.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시인이 로 표현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지만 이걸 거꾸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 또는 이렇게 되는 거죠. 를 거꾸로 표현하면 . 는 , 는 가 되는 거죠. 어떻습니까?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떤 게 우리에게 더 참신하게 다가옵니까? 후자이지요. 전자가 설명이라면, 후자는 묘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묘사란 그 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인식체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구사할 때 유의할 점은 시 전편에 걸쳐서 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되요. 전편에 걸쳐서 구사하면 이것 또한 한쪽 체계의 인식구조로 전락하고 굳어지기 때문에 군데군데 양념치듯 구사해야 되요. 특히 첫연 첫구절에 이걸 효과적으로 구사하면 독자들을 아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 현 문단에서 이걸 잘 구사하는 시인이 바로 오규원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을 쓴 김수영 시인도 이 기법을 즐겨 구사했구요.      두 번째 방법은, 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깊이 탐구해 작품에 실제 많이 응용했고 현재도 아주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즉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면 시가 그림처럼 아주 선명하게 되고 초점도 또fut하게 됨을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풍물, 풍경시를 쓸 때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형광등, 침대, 커튼, 그림 등이 있는 방에 갇혀 한 여자를 그리워하며 책상에 골똘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방 속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이미지와 초점이 선명하게 되고 할 이야기도 금세 많아지게 됩니다. 대부분이 이걸 잘 모르고 방밖을 벗어나 거창한 소재와 이야기를 자꾸 끌어오려 하다보니깐 시가 초점이 흐려지고 난해해 지게 되는 거죠. 이것만 잘 해도 시가 아주 유창해 집니다.     실제로 이 기법 하나만으로도 신춘문예 당선한 필자의 시 한 편을 그 예로 살펴보고 이번 강좌를 마치겠습니다.       정동진驛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필자는 정동진역 풍경을 그리는데 모두 정동진역 근처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재들은 실제로 정동진역에 다 있던 것들입니다. 억새꽃, 벤치, 모래사장, 라면집, 소주집, 소나무 등등… 그래서 열차가 들어오는 역이니까 겨울이 오는 것도 으로 생각했고, 역도 으로 표현했고, 라면집도 삼양라면을 끓이는 라면집이 아니라 이고, 소주집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필자가 실제로 라면집을 묘사해야 하겠는데 구불구불한 주변 소재를 찾으니까 산 능선, 도로, 해안선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중에서 가장 주변 소재에 어울리는 게 바로 해안선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차용한 겁니다.   또한 마주보고 술잔을 나누는 소주집도 묘사해야겠는데 쓸만한 주변 소재들을 밖을 내다보며 살펴봤더니 배, 수평선, 갈매기, 파도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 소재들이 다 어울리지만 이중에서 파도가 가장 운치 있는 소재로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주변 소재로 둘러댔더니 읽는 사람마다 다 반하더군요.만약 이걸 라고 표현했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평범하고 싱겁겠어요?     위의 시는 시의 템포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마지막 구절을 제외하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동진역을 벗어나지 않고 철저하게 정동진역 주변 소재로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신춘문예에까지 당선되고 성공한 시로 여기잖아요?         9. 시어 선택 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필자를 포함해 이 땅의 모든 시인들은 대중들, 특히 문학 수요자의 환경변화를 하루 빨리 깊게 인식해야 합니다. 예전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는 문학이 중심 매체이었고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대체할만한 마땅한 대체매체도 없어 늘 대중들의 수요에 공급이 모자랐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공급만 하면 수요는 절로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즉 시라는 제품의 효용성, 편리성, 유익성 등을 크게 고려하지 않더라도 시라는 제품에 언제나 충분한 수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로 치달으면서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만한 대체매체가 많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한 대중들의 욕구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젠 특별한 흥미가 고 독자들을 유인할만한 내용이 아니면 독자들이 절로 찾아오리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겁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방식대로는 이젠 통하지 않다는 겁니다.       * 시대감각에 맞는 시어를 선택하라.     그런데 대다수 시인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기존 사고에 갇혀 시의 위기를 수요자인 독자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건 번지수를 잘 못 짚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급자인 시인 스스로가 빨리 변해 독자의 환경변화에 적응해야지요. 지금 정치도, 경제도, 행정도, 교육도, TV도, 영화도, 체육도… 모든 것이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즉 독자 위주로 바뀐 지 오래인데 오직 시만큼은 권위주의 귀족주의 전통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독자를 고려하면 마치 3류 시인인양 취급하고 전문가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시를 해설서를 곁에 놓고 감상 하라는 식의 합리화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는 달라진 독자들의 욕구환경을 고려해 시도 하나의 상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감상하기 쉽고, 재미있고, 음악성 있고, 유익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을만한 시를 만들어 제공해야죠. 그렇다고 품질이 형편없는 싸구려 제품을 만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싸구려 제품과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과는 그 기준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 동안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제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시 쓰는 방식은 수요자 위주로 하루빨리 변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요즘 발표되는 시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특별한 내용도, 흥미도 없으면서 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한 장도 아닌 두 장 세 장으로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일반 독자들이 읽어 주리라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시를 생각하는 방식, 시를 만드는 방식이 종전과 하루 빨리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시의 위기라는 말이 사라지죠.     하여, 초보자들이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기본적으로 유의할 점 두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로 초보자 시절에는 老티 나는 시어를 쓰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  등 혼자 술취해 영탄하는 듯한 용어는 절대 쓰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용어들을 보면 독자들이 바쁘고 바쁜 세상에 혼자 술취해 영탄하고 돌아다니는 소리로 여겨 그런 시는 그냥 넘겨버리게 됩니다. 즉 독자들은 이런 용어를 보면 할 일없고 배부른 소리로 생각해 기분 나빠하기 쉽다는 거죠. 그리고 ,  식의 명령투도 지양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불행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즐겁게 하는 이야기, 유익한 이야기 등에 관심이 있고 또 이걸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잘난 체하는 이야기, 친구 가족 등 주변 자랑 이야기, 명령투의 이야기 등을 들을 땐 아주 기분 나빠하게 됩니다. 실제로 필자는 아주 젊은 시인들 중에도 이런 노티 나는 용어와 명령투의 시를 자주 쓰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창작강의를 듣는 사람은 이런 노티 나는 용어대신 가능한 한 확신에 차 있고 박력 있고 싱싱한 용어를 구사하기 바라고, 명령투 대신 청유형을 구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고어(古語), 사어(死語), 상투어 등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시도 그 시대의 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매체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용언어와 무관하지 않죠. 그런데 이 첨단 시대에 살면서 아직도 화랑, 신라의 달밤, 정읍사의 노래, 달구지, 신작로, 물레방아, 수틀, 바느질, 낮달, 이승, 저승 등등 그 옛날 시절의 풍경과 풍물, 남들이 지겨울 정도로 써먹는 낡은 시어를 들먹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런 용어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싫어하게 됩니다. 시속에 나타나는 시간, 장소, 풍물들의 거리도 독자들에게는 현실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깝게 느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막연하게 먼 시간 속으로 끌고 가는 건 귀찮아해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늘에 UFO가 날아다니는 세상인데 아직도 낮달 운운하는 걸 보면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더군다나 남이 자주 쓰는 시어를 보면 '이 사람 노력도 하지 않고 맨 날 남이 쓴 시어나 갖다 쓰는 참 게으른 시인이구나!' 하고 독자들이 판단하지 않겠어요?     하여, 이 게시판 독자들 중 이런 것에 그 동안 관심이 있었다면 잠시 이를 접어두고 현재의 우리 생활 속에서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 시를 쓰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기본적으로 가능한 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울고 웃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걸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사투리를 쓰더라도 옛것보다는 현재의 것을 쓰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즉 독자를 고려한 전략적 시 쓰기 방법의 한 예입니다.      11.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누가 필자에게 시창작 과정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두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아마 상상력과 퇴고력을 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시의 내용을 상상력이 좌우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퇴고력이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상상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퇴고를 잘 하면 그 시는 크게 흠이 드러나지 않고, 또한 퇴고가 좀 어설프더라도 상상력이 특출하면 이 시 또한 큰 문제점이 노출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소에 문제가 있을 땐 정말 작품이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죠. 하여,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상상력과 퇴고력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하면 작품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퇴고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 또한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 강좌를 대신할까 합니다.       * 상상을 할 때는 뜨겁게,  퇴고를 할 때는 냉정하게     상상을 할 때 마음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뜨겁고 깊게 해야 하지만, 퇴고를 할 때 마음의 자세는 이와 정반대 자세인 냉정하고 넓게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와 작품을 고칠 때에는 정 반대의 심성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을 바로 써서 완성시키면 흥분된 감정상태에 있기 때문에 시도 흥분되어서 좋은 시 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보자 시절에는 시를 써서 곧바로 완성시키고 누구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게 초보자 시절에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힘들여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더디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퇴고기간은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필자의 경험을 말하자면 퇴고는 오래할수록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아무리 짧은 시라도 곧바로 써 바로 완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현재도 시 한 편을 구상해서 남에게 보여줄 정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보름 이상의 퇴고기간을 갖습니다. 그러니깐 필자의 경우 상상은 한두 시간에 깊고 뜨겁게 해서 서랍에 두었다가 2-3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꺼내 이 시에 새로운 상상을 조금씩 덧붙이고 삭제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래야 내용이 흥분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고, 시에 침착성과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퇴고와 관련해 시를 효과적으로 다듬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 정신이 가장 맑은 시간에 퇴고하라.     필자는 퇴고를 위해 정신이 가장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아주 자주 가졌습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자주 가진 이유는 아무리 맑은 정신상태라 하더라도 그 분위기에 또 오랫동안 잠기게 되면 이 또한 마음이 흥분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여 필자는 아침에 맨 처음 가는 화장실을 시 퇴고 장소로 아주 잘 이용하였습니다. 2-3일전에 쓴 시 초고를 갖고 네모난 밀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읽으면 정말 시의 어수룩한 부분, 미흡한 부분, 참신하지 못한 부분 등이 눈에 잘 띄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이 상태에서 지적된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고치고 그랬습니다. 하여 게시판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신이 가장 맑고 평온한 상태가 어느 순간인지를 확인해 퇴고를 할 때 이를 자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라.     마지막 퇴고와 관련해 이와 같은 정신, 즉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이의 지적을 빨리 받아들일 줄 알며, 아끼는 작품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마음 자세의 확보가 중요해서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 자기 동료들의 작품평과 훈수를 귀담아들으면 망하는 길로 가는데 첩경이라는 걸 명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여줄 땐 가능한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시를 쓴 경력이 충분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시를 잘 쓸 줄 모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를 볼 줄 아는 안목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 게시판 독자들은 많은 퇴고는 곧 시 창작력의 향상이다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라고, 이 게시판에 시를 올릴 때에도 정말 최선을 다한 작품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많은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느리게 됩니다. [출처] -詩를 쉽게 쓰는 요령/김영남(시인)- |작성자 옥토끼
521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댓글:  조회:5836  추천:0  2015-05-20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 김재수     1. 들어가면서  흔히 요즘을 정보화 시대라 한다. 이는 컴퓨터의 출현과 인터넷이 서로 연결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쓸모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지식들이 수없이 양산되고 있다. 이와 발맞추어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계된 새로운 용어들도 매일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말로 바꾸는 걸림 작용을 거치지 않고 외래어나 신조어 그대로 사용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보화 사회에서 왕따가 될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상에 활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언어들 가운데 컴퓨터를 활용하기위해서 사용하는 언어와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들이 나타나 우리를 황당하게 하고 있는데 흔히 이를 컴퓨터․채팅언어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에 비해 아직은 언어(言語)라기보다 은어(隱語)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어들이 컴퓨터나 채팅에서는 이미 언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관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은어 가운데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생산되고 있는데 인터넷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는 통신회사(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하이텔 등)에서 제공하는 채팅방을 통해 리얼타임으로의 나타나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에서부터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음성채팅, 한걸음 나아가 영상채팅까지 가능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채팅을 위해서는 워딩 작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워딩 작업은 채팅자의 능력에 따라 속도의 차이가 현저하고, 지금처럼 인터넷 전용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화선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전송속도가 한계가 있어, 장시간의 채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시간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점차 채팅을 즐기는 동호인들은 자신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긴 단어를 함축하여 생략하거나 특수한 기호를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채팅자들의 전유물처럼 사용되던 채팅용어는 어느 사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고,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사회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도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언어의 역사성이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언어는 사용하는 시대의 문화에 따라 살아남기도 하고 죽어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 옳고 그럼을 떠나 한번 쯤 관심을 가지는 일도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터넷상의 대화 언어 중, 시로서 차용이 가능한 기호 언어를 살펴봄으로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 우리 시단이나 해외에서는 실험정신이 강한 이들이 숫자나 기호를 이용해 시를 쓴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아동문학에서는 ‘아동문학’이라는 특성과 한계가 바른 언어사용에 대해 효용성이나 교육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환영받지 못했거니와 ‘채팅’이란 용어가 주는 어감이 아직은 부정적인 까닭에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예는 드물었다고 본다. 다만 낱말의 크기, 형태, 배치의 방법, 글자의 방향을 변경 등 문자가 자리할 지면이라는 평면 환경에 변화를 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 하려는 경우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해 왔음은 사실이다.  “그 누가 새 붓을 잡아 강물 위에 저렇게 새을(乙)자를 썼나??”  이 시는 고려시대 문장가인 정지상이 어린 시절에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강물에 헤엄을 치는 물오리들을 보면서 한자의 ‘乙’자를 연상했으니 가히 동심의 눈으로 포착한 기막힌 발상이 아닌가?  이 외에도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3’이라는 아라비아 숫자와 같다”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르나르라는 시인의 관찰력도 그리고 개미와 ‘3’이라는 숫자와 관계 지음도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천재시인 이상도 일찍이 이러한 시도를 했지 않았던가?  시는 감동의 형상화를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적 감동을 이미지 화 해야 시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총 동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결국은 시각적인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문자보다 형상화 된 기호를 사용함으로서 이미지의 포착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2. 인터넷 채팅 언어들의 종류  우리가 일반적으로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에 대해 채팅언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채팅언어에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포함되어 있다. 즉, 채팅언어와 채팅문자를 하나로 묶어 채팅용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채팅용어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조아(좋아)" "만타(많다)" "어뜨케(어떻게)" "추카추카(축하축하)" 등 소리 나는 대로 쓰기이다.  둘째,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의 단순 줄임이나 음절 축약의 경우이다.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 방장:대화방의 대장, 안냐세요: 안녕하세요  비번:비밀번호, 낼:내일, 몰팅:몰래하는 채팅, 야녀:야한여자, 번개off-line:깜짝 만남  셋째, 현재 컴퓨터상에 사용되는 각종 이모티콘(emoticon)이나 기호를 하나의 언어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컴퓨터의 자판에 나와 있는 기호들을 조합함으로 새로운 느낌의 기호를 만든 경우이다.  ^^ = 미소, *^^*, ^_^, ^.^ = 스마일, 웃음, :-), :-( :*< : 에그머니나  1919 : 아이구아이구  20000 : 이만  2929 : 에구에구  50쇼 : 어서 오십시오  8-) : 안경잡이  -ㅅ- : 황당하다  BF : Best Friend. 좋은 친구  DB : 담배  GG : 좋은 게임. good game 의 약자  IBM : 이미 버린 몸  KIN : 즐(세워서 보면 한글 ‘즐’)  OTL : 좌절.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모습의 상형자.  P방 : 피시방  RG : 알지?  T_T, !_! : 우는 모습,  ☜=이쪽으로  ⁂=눈 내림  ☆=별  ☎=전화  ☼=해  ☾=달  ✉=편지  ㄱ- : 절망  ㄱ-- : 절망  ㄱㅅ : 감사  감4 : 감사  근D : 그런데  ㄳ : 감사  ㄴㄴ : 노노.,아니에요  ㅂㅂ :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ㅂㅂ,ㅂ2-잘가, 빠이빠이  ㅂㅅ : 병신  밥5 : 바보  ㅅㄱ = 수고 하세요,  ㅆㅂ : 씨발 (또는 ㅅㅂ)  ㅇ,ㅇ : 긍정적  ㅇㄷ? : 어디 위치를 뭇는 거  ㅗ : 엿 이라는 뜻 ㅋ 욕할 때  ㅜㅜ ,ㅠㅠ : 그냥 우는 거, 슬플 때  ㅜㅜ : 절망  ㅜㅡㅜ : 왠지 귀엽게 우는 표정  ㅉㅉ : 쯧쯧  ㅊㅋ : 축하  ㅋㅋ, ㅎㅎ : 웃을 때  ㅎ2 : 안녕  ㅎ2 : 하이 의 숫자와 한글 조합한 거  ㅎㄷㄷ : 후덜덜 무서울 때..  ㅎㅎ : 호호, 후후, 허허, 히히  4. 기호 언어로 쓴 동시  필자는 동시를 쓰면서 이미지의 선명함을 위해 문자나 기호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 다음 두 편의 시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다.  목련  새들이 수다를 떨어  아침을 열고 간  담장  무슨 소릴 하고 갔기에  그랬을까?  밤새  퉁퉁 부은 눈망울로  입 다물던 꽃가지마다  참다 참다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  하,하,하,하,하,  하, 하,  하,하,하,  하  하,하, 하,하, 하,하,하  목련꽃의 모습을 ‘하’라는 웃음과 ‘하얗다’라는 꽃이 주는 색의 이미지와 점점 많이 피어나는 꽃송이를 ‘하’라는 문자로 이미지화 한 경우이다.  눈 오는 날  이메일을 열었다  깜박이는 커서가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창밖을 보며  키보드를 친다  톡톡  톡톡톡  자판으로  네 마음을 두드린다  . .  .. ...  ...  .... ....  ...... ....  까만 역상의 화면에  하얀 글씨가  소복소복 쌓인다.  위의 경우는 까만 하늘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형상화 해 본 것인데 컴을 다루는 솜씨가 미숙해서 그 효과는 좀 그렇다.  위 두 편을 쓴 이후 보다 효과적으로 시각화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상주의 방언’을 연구하면서 ‘사회적 방언’에 눈길이 갔고 이 사회적 방언에서 요즘 유행하는 은어(隱語)를 정리하던 중 컴퓨터 대화 언어를 발견하였다.  다음 작품은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 의도적으로 쓴 시이다.  호박꽃  “너도 꽃이니?”  빨간 홍초가 놀려도  “ ^^ ”  “색깔도 촌스러워라”  장미가 빈정거려도  “ ^^~ "  “ 이 정도는 돼야지 ”  다알리아가 뽐내도  “ ^*^ ”  환하게 웃으며 꽃등만 달더니  “ ^^, ^^~, ^*^ ”  웃음만큼 조롱조롱 번지는  토담 위 호박꽃.  도토리(1)  떼구르르-  내 앞에 와서 멈춘다.  허리를 굽혀 주우려는데  누가 보는 것 같다  데록데록  오물오물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  “ ^*^ ”  “ ~^@^~ ”  못 본채 돌아서서  걸었다.  “ ~^@^~  안 봐도 보인다.  오물오물  좋아 하는 거.  도토리(2)  “톡-”  도토리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쉿!  나무도 풀도 갑자기 숨을 멈춘다.  바람도 잠시 멈춰 섰다.  땅이 천천히 팔을 벌리고  앉아 쉬기 편하도록  자리를 펴고 있었다.  ☞ ◉ ☜  편안해 보였다.  봄  온 몸이 자꾸  간지러웠다.  어디 뾰루지라도 나려나  † ‡  @*@, #*# ...  여린 싹이 흙을 뚫고 나왔네  땅이 갈라지느라고  그랬나 보구나  풀과 나무 잎에도  총총  이슬이 맺혔다  --;  1919  힘들었나보구나.  전화  ☎~~~  ☎~~~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 목소리가 달려간다.  금방  네 목소리도 달려온다.  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보인다.  ^*^ ?  >*< ?  =_= ?  내 얼굴도 보일까봐  ^*^  ㅋ ㅋ ㅋ  가을걷이  손바닥 만 한  텃밭에 앉아  할아버지 할머니  타작을 하신다.  “나 여기 있어요.”  “나도 여기 있어요.”  들깨도 콩도  깍지에서 튀어 나온다.  ...˚․˚.  . ... .  .. .. ..  깨알은 쓸어 모아  ✉,  ○○○ ○  ○○ ○○○  까만 콩도 쓸어 모아  ✉✉✉  봉지는 달라도  두 분은 마주보며  ~^*^, ^*^~  맺는 말  시도한다는 건 조금은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은어들이 현실 생활에서 이미 생활언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호로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말은 이 언어들이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어의 역사를 볼 때 생명력을 가진 언어는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죽어버린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향유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고 사회적으로 확산 될 때 생명을 가지는 것처럼.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이러한 은어들이 새로운 언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써 온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 이 글은 신지영 동시인이 "오늘의 동시문학" 2010년 봄호에 위 글에 대한 "반론 토론"으로 제시한 글입니다. 토론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에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  -김재수 시인의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를 읽고  신지영(동시인)  들어가며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에 실린 김재수 시인(이하 경칭 생략)의 기고문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에서 제기된, 문자 기호 이외의 기호를 사용하는 문제는, 동시 표현 방법의 외연 확대에 관한 것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화두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동시 쓰기의 방법 모색은, 필연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하는 시인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 모색에 앞서 염두해야 할 점은 외연을 넓히는 실험에 있어서 그것이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숙고라 할 것이다. 격변하는 시대에 도태되지 않는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그 장르의 내부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 이상 그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된다. 김재수는 기고문에서 자신의 ‘기로 언어’라고 표현한 것을 제시하며 그것을 다섯 가지 분류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로 제시된 ‘조아(좋아)’, ‘만타(많다)’ 같은 표현들은 단순한 연철(連綴)이나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두 번째 제시된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과 같은 줄임의 말의 경우는 특정 언어 사용 집단의 은어(隱語)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는 그 본질이 언어적 문자기호로서, 비언어적 기호와는 그 차이를 달리하는 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 활용 여부 역시 시적 허용 범주 하에 기성 시단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어, 어떤 새로운 양식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특별히 논의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으며, 김재수 역시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제시한 아이소타이프(Isotype)는 그 본질상 이모티콘과 동일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비언어적 시각기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동일하게 평가하면 될 것이다.  이하 본 글에서는 첫 번째로, 문맥상,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혼돈을 줄 수 있는 ‘기호’라는 개념에 대해 우선적으로 통일 된 정의를 내린 다음 음성 기호의 시각적 변환인 언어적 문자 기호와 비언어적 감성 기호로서의 이모티콘을 구분하기로 하며, 그 후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한글 자음으로만 구성된 초성조합이 허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나아가 동시가 아닌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 단계에서 그러한 비언어적 기호들의 사용 여부와, 보론(補論)으로 아동문학과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것들이, 동시에 있어 허용 가능하지의 여부에 대하여 논의를 펼쳐나갈 것이다.  1.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  (1) 기호의 정의와 용어의 통일  기호는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부호, 문자, 표지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음성, 표정, 몸짓, 문자, 그림, 음악, 이모티콘 등 지식, 의지,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일체가 기호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모든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사용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기호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적 기호, 비언어적 기호를 모두 포함하지만, 김재수의 기고문에서 세 번째로 제시된‘기호언어’의 의미는 문맥상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의 논의에서 필요한, ‘기호 언어’라고 제시된 것 중 세 번째 위치하는 이모티콘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정의하는 대로 비언어적 시각 및 감성 기호로 표기하기로 한다.  (2) 이모티콘의 정의 이모티콘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대중문화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접목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모티콘(Emoticon:emotion과 icon의 합성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이 합성어는 새로운 형태의 시각 기호인 동시에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는 발신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감성 기호로서 인터넷 채팅이나 휴대전화 문자 발신 시에 그 의미 작용과 역할을 수행한다.1)  2.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여부  아동문학이 문학이라는 이름표를 부착하고 있는 이상, 그것 역시 국문학의 하위 범주에 포함된다. 국문학이라 함은‘한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여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예술 작품’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문학의 정의를 기호학적으로 접근할 때 의미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여’라는 부분이다. 한국어란, 음성 기호이자 언어기호로서 우리 겨레가 쓰고 있는 구체적인 말을 의미하며, 음성 기호를 기록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세종이 창제하여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문자 기호이자 언어 기로호서의 한글을 포함한다.(단 국문학의 범주에는 한글이 범용되기 이전의 향찰, 이두, 한문도 포함하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구비 전승되는 시가(詩歌), 전설(傳說)이 아닌 이상에야 국문학은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하며, 마찬가지로 아동문학 역시 한글로 된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한다(단 전체적으로 한국어로 씌어졌다고 볼 만한 분량의 작품에서 음성으로 전환될 될 수 있는 소량의 외국어, 아라비아 숫자 등은 사용되어도 국문학으로 본다.) 이제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와 비언어 기로호서의 이모티콘과는 다르게,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한글의 음소문자로서의 성격과 관련하여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동시에 있어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 여부  국문학상의 시의 정의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을 의미한다. 또한 국문학상에서 동시의 정의는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를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볼 수 있듯 동시 역시 어니이의 정서를 읊음과 동시에 ‘시’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시의 조건을 그대로 충족하여야 한다. 따라서 동시 역시 시가 가져야 될 핵심 징표인 ‘gkaa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라 무엇이가? 운율이란 ‘시문(詩文)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고 정의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 유음의 반복 등 운율을 의미하는 것의 필수적인 선행조건은 바로 문자 기호의 소리 기호로의 전환, 즉 한국어의 음성 기호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동시 또는 시에서 독음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운율을 가질 수 없는 기호로서,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함축적 언어’라는 부차적 시의 징표에서도, ‘언어’라는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는 시의 구성 요소로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시의 본령이라고 볼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 그러므로 이코티콘은 감정 전달이나, 이미지 전달에 있어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보다 어느 측면에선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라는 장르의 한계 밖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운율을 가질 수 없는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근거를 우리는 가질 수가 없다. 이는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실험이, 오히려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  (2)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동시 역시 국문학이고 입말문학(口碑文學)이 아닌 기록된 형태의 문학이기 때문에 한글이라는 언어-문자 기호로 기술된다. 또한 동시는 대체적으로 아동이 시초부터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시는 예술적 완성도와 함께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특수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는 표음문자이고,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이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 체계에서 음소들은 자음과 모음으로 나뉜다. 문자의 발전사를 살펴 볼 대, 초기의 음소문자 체계는 히브리어에서와 같이 자음만으로 이뤄졌고 그 사용에 있어 매우 불편하였다. 예컨대 ‘ㅂ ㅂ’이라는 표기를 접했을 때, 김재수는 ‘ㅂ ㅂ’을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를 ‘바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듯이, 불안전하고 그 발음에 혼란을 가져오는 기호 체계였다. 그런 후에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고, 문자가 발전함에 따라 모음문자가 나타나게 되며, 각 문화권의 음소에 적절히 추가되었고, 그러한 추가가 완성된 후 페니키아 문자를 비롯한 각종 알파벳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글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음소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규칙적으로 조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알파벳이 처음부터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창제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지금의 문자 구성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church"같은 모음 하나에 자음이 다섯 개인 1음절의 소리는 알파벳의 성질로부터 어떠한 발음 규칙을 추측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알파벳 사용자들은 모음과 결합하지 않은 새로운 신조어가 나왔을 경우, 그 발음은 누군가가 정의해 주기 전까지 통일된 발음을 이끌어 낼 수 없는 원시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창제한 한글만큼은 이런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서 어떤 자음이든지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듯이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규정한 최초의 문자 체계이다. 세종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발음은 중성 모음 단독, 초성 자음, 중성모음, 종성 모음의 4가지 조합으로 가능하며, 그 조합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이 조합의 배열에 숙련된 경우, 한글 사용자는 한글로 구성된 어떠한 배열이 나와도 그것을 동일하게 읽고, 발음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글이 매우 진보된 문자 체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글에서는 ‘church"를’ ‘ㅊ ㅓ ㄹ ㅊ’라고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한글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자는 ‘처치’라고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다. 이러한 탁월한 언어학적 성취는 한글이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선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글 제자 원리로 자음과 모음의 조형을 접하고, 그 조형에 따른 음성 기로호서 한국어 발음으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동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시에서는 그 내용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목표로서, 어린이의 국어 능력 소양의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이 필요한 바, 국어사용 능력이 완전하지 못한 어린이에게 있어 최우선 순위의 의미 전달 기호는 올바른 의미의 한글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일정 정도의 국어 능력을 갖추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올바른 국어 생활을 위해서는 한글의 적확(的確)한 사용과 그 사용례를 가르치는 것이 아동문학의 목표 중 하나인 것이다.  ‘시인은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시인이다’ 라는 유종호의 선언처럼, 동시인 역시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은 모국어의 정련일 것이다.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시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는 음소의 단독 사용은 장려받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3. 컴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어린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범주는 매우 다양하다. 언어 기호로서 음성 기호와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문학뿐 아니라 몸짓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극과 무용, 문자 기호와 회화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 그림책, 음악 기호와 소리 기호의 결합인 동요 등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사용될 수 있는 기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범주 안에서는 모든 종류의 기호가사용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모티콘이라는 시각 감성 기호 역시 아동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의사 전달 수다으로 사용될 수 잇다. 예를 들어 한글을 모르는 외국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바디랭귀지와 같은 몸짓 기호나,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지만, 그 외의 커뮤니케이션의영역에서는 김재수의 제언처럼 의사 전달의 측면에서 강력하게 활용될 소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연구하는 것 역시 아동문학인으로서 역할 중 하나라 할 것이고, 그러한 새로운 양식의 개척이 곧 아동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모티콘은 다른 문자 기호나 시각 기호에 비하여 감성 표현의 측면에서 강하지만,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기호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감정표현의 명확성, 메시지 이해의 편자, 메시지 내용 전달의 효용성 등 보완점이 필요하다.2)  본론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김재수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아동문학에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는 이미 이러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해체(Deconstruction)란 프랑스의 쟈크 데리다가 주도한 비평 방법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적이며 로고스적인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허와 실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시도했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뮈토스와 로고스를 엄격히 구별하는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이 문학적인 것에 집요하게 반대 해온 투쟁의 종말이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이 작업을 통해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특정한 분야의 전문적인 텍스트마저도 시적이며 창조적으로 변형시킴으로서 무한한 자유놀이를 하는 텍스트로 번안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3)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김준오가 1992년 펴낸 에서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작품으로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시의 어느 날’ 같은 것이 있다. 이 시(?)는 작품의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 만평을 그대로 지면에 옮겨 놓았다. 언어 기호가 아닌 시각 기호로서 회화 기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시의 개념 징표로서 필요한 ‘운율을 가진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를 시라 불러야 할지에 대해 논의가 있으나 필자는 이 작품을 시라고 부르기 보다는 행위 예술적 측면에서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작품의 행위자 황지우 본인의 표현대로, 황지우의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4)는 것처럼. ‘말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음성 기호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말을 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것은 곧 시의 조재 증명인 운율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황지우의 행위 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고, 그것이 시가 아닌 해체시라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황지우의 이 행위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떠나, 이 행위는 이미 시의 범주를 넘어선 새로운 양식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전통적인 시를 읽는 독법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해체시 역시 시의 한 갈래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바, 이러한 견해를 다를 때, 과연 동시에서도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사용하여, 해체 동시(?) 라는 양식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가상적 논의 역시 한번쯤은 필요할 것이다. Deconstruction, 즉 해체라는 것은 Construction, 즉 건축한 것을 제거하는(De-)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해체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시에 있어 해체 동시가 필요하다면,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동시의 개념 징표에서와 같이, 동시는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한 시이다. 그러므로 시인 자체는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을 수 있지만 독자인 어린이는 아직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동시의 역할은 시에 대한 이해태도를 갖추기 위한 구축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문학에서의 해체 동시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나오며  급속도로 변화되는 현대에서 모든 예술은 시대의 정보와 유연성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며 동시대를 비평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거나 융합된다. 예술은 고유한 가치인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켜내며 지나간 시대의 형식을 답습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천성 때문일 것이다. 고루해지지 않으려는 본능, 상투적인 인습과 제도의 틀에 갇히지 않으려는 자유로움, 결코 시대를 변명하지 않는 자존감 등은 예술이 자신을 지켜내는 독자적인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발현할 때 한 가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장르의 틀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을 버리고 다른 대상의 이름을 취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새로움에 목말라 자칫 잊기 쉬운 이 기본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 아래 글은 동시인 신지영씨의 토론에 다시 반론으로 쓴 글입니다. 동시에서 기호언어 사용과 해체시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를 읽고  김재수  들어가면서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28호 p110~p123)에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란 제목의 글을 기고한바 있다. 이 글을 기고하면서 ‘채팅용어’가 사회적으로 아직은 긍정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상태이고 이런 용어들로부터 만들어진 기호언어들이 아직 은어(隱語) 수준이며 더구나 아동문학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어들이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어른들도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동문학에서 이러한 기호언어의 사용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이냐에 대해서는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이러함에도 이 글을 편집자와 의논하여 기고하게 된 까닭은 이를 계기로 그동안 우리 아동문학계에 뜸했던 토론의 장이 열릴 것 같고 동시가 보다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이 글이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도 등재되면서 온라인상에서 몇몇 분들이 격려와 우려의 댓글을 달아 관심을 가졌는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 봄호(29호 p168~178)에 신지영 동시인이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가 토론의 주제로 게제 되어 고맙기도 하고 다행스러웠다.  신지영 동시인(이하 경칭생략)은 매우 논리정연하게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를 시작으로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 여부’, 특히 ‘동시에 있어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여부’,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에 대해 해박한 시론과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에 다소 비판적인 측면에서 자기의 주장을 제시 하였다.  하여, 필자의 의도와 다른 견해는 다시 설명하고 간혹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할 부분은 지적하여 오해를 바로 잡고자하며 편의상 신지영이 제시한 논의의 순서를 따라 이 글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1.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대하여  신지영은 이 글의 서두에서 기호언어 사용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의 모색이라 해도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 여부를 고려해야 하고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면 그 작품은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됨을 우려하였다.  우리나라 동시의 출발을 계간 ‘오늘의 동시문학’은 1908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점으로 잡고, 2008년을 ‘한국동시100주년’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이로 보면 우리 동시의 역사는 이제 100년에 불과하다. 동시라는 이름표를 달고 본격 동시가 씌어 지기 전엔 전래동요가 유일했고, 1923년 소파가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여기에 ‘형제별’, ‘늙은 잠자리’를 발표하면서 동요가 창작되기 시작하였는데 1925년 이전까지는 주로 창가 형식의 동요가 대부분이었다가 1933년 윤석중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가 나온 후 비로소 동시의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동시의 장르 문제는 전래동요 이후 요적(謠的) 동요, 시적(詩的) 동요라는 과도기적 형식에 머물러 있기도 했고 창작동요, 동요 시, 동시의 형태를 거쳐 오늘의 동시문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래동요, 창작동요, 동요시, 동시, 아동시가 장르적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어왔다. 그러다가 이원수로부터 ‘동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시 된 1969년(이원수 아동문학전집 29권 동시작법 1969)을 전후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여러 아동문학가들-예컨대 이오덕, 이재철, 신현득, 김종상과 평론가 최지훈 등에 의해 정리되면서 최근에는 동요와 동시와 아동시를 각각의 장르로 구별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동요는 최지훈에 의해 동요시와 동요가사로 나누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지영이 서두에서 동시의 장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마도 ‘기호언어를 사용한 동시쓰기’와 이를 바탕으로 쓴 6편의 동시가 자신의 동시라는 장르의 기준에 미흡했거나 모호했기에 서두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함에도 필자는 예의 5편 동시가 동시라는 장르적 틀에서 벗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탈 장르의 의미는 내 작품이 구체적으로 동시가 제시하는 장르적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신지영의 말대로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벗어났다면 내 작품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 이거나 동요라는 말이 된다. 또한 이도 저도 아니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생아적 작품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품 속에 기존의 언어와 다른 생소한 기호언어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동시의 장르까지 벗어났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 아닐까 한다.  2.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모티콘)활용 여부  신지영은 아동문학도 문학임에 국문학의 하위 범주이어야 하고 국문학의 정의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동시도 한국어 사용과 또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 즉 음성으로 전환 될 수 있어야 함에 역점을 두었다. 이 역점은 곧 동시가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야 함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비언어적 시각기호인 이모티콘이 사용될 수 있는지와 언어 기호의 성질은 갖고 있으나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폈다.  가. 비언어적 기호는 운율을 표현할 수 없는가?  그는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란 무엇인가 묻고 ‘운율이란 시문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정의를 덧붙이면서 운율을 나타내려면 필수적 선행조건이 바로 문자 기호를 소리 기호로의 전환해야 함으로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는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에는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지영은 운율에서 음성언어만을 강조한 나머지 운율을 가져오게 하는 또 다른 요인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첫째, 과연 소리를 낼 수 없는 기호는 운율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인가?  대부분의 문학작품(시와 산문을 포함해서)은 필수적으로 음성 언어 외에도 여러 가지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문장부호’이다. 문장부호는 분명히 음성으로 표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다. 그러나 비언어적 기호인 문장부호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시의 운율은 현저히 달라진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쉼표(,), 또는 느낌표(!), 줄임표(.....)가 시의 운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시인이라면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다.  둘째, 시에서 운율을 이루는 요인에는 음성 언어 이외에도 또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행과 연이다. 행과 연은 시각기호도 언어기호도 아닌 시인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운율의 공간이다. 마치 한국화의 여백이 감상자로 하여금 무한한 회화적 상상을 하게 하는 것처럼. 흔한 말로 자유시가 이용할 수 있는 운율의 원천은 기호소리 뿐만 아니라 문장 구성 방식, 소리와 낱말 및 어구, 행과 연의 체계적인 반복, 중간휴지(행의 중간에서 말의 흐름이 잠시 뚜렷하게 끊어지는 것), 행의 길이, 그 밖에 속도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지 단순히 음성 언어만으로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과 연도 없고(물론 산문시는 없을 수도 있다) 아무런 문장부호도 없는 동시를 마주한다면 갑자기 낯 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나. 동시의 동요로 전환 불가능에 대해  그리고 그는 비언어적 기호는 동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고 했다. 이런 논리라면 모든 동시는 동요로 전환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동시가 동요로 전환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동시가 초기 동요로부터 파생된 것은 사실이나 동요가 반드시 동시의 본령으로 전환해야 된다고 말 할 수 없다.  더구나 오늘 날 동요와 동시는 성격이 분명히 다른 장르의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동시와 동요는 그 발상부터 다르며 운율 표현 형식도 같지 않다. 따라서 동시를 일부러 동요로 전환해야할 이유나 필요가 없고 본다. 물론 동시도 동요처럼 노래로 작곡이 되어 불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래로 불리는 동시가 반드시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노래로 불리지 않는 동요는 또 얼마나 많은가.  다. 비언어적 기호와 회화기호에 대한 오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의 구성요소로 인정하게 된다면 회화기호로서 그림을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할 수 없어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가 있다고 했다.  생각해 보자. 화가는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이미 보편화 되었다. 그러나 시인, 특히 동시인이 한 장의 그림을 그려놓는다거나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로만 늘어놓고 이것이 동시라고 발표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고 행여 있다면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필자가 예를 들어 쓴 작품 속에 나타난 몇 개의 기호로 인해 이것은 시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오해 할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오늘의 동시문학’ 봄호(29호 p192~p193)에 권영상 동시인은 이 계절의 동시 평 ‘익숙한 방식의 틀을 버린 시들’에서 ‘어린이들이 당당한 네티즌이 되었고 네티즌들이 즐겨 쓰는 온라인 부호나 기호를 동시 속에 접목해 본 이런 시도들은 분명 동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글을 인용하는 것은 권영상 동시인이 내 작품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서가 아니라 신지영이 불안해하는 내 시를 그는 한 장의 그림으로 인식하지 않고 여전히 한편의 동시로 봐 주고 있다는 반가움 때문이다.  우리 지역의 예술인(문인, 화가)들에게 예의 시들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게 웬 그림이냐?’라고 질문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신지영의 견해는 기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3.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배치 허용 여부  가. 동시는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장르인가  신지영은 동시를 아동이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라 했다. 아울러 동시를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지영은 세대 차이로 보면 나보다 어린이들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은데 오히려 요즘의 어린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듯하다. 동시를 읽는 수준의 아이들에게 한글을 익힐 수단으로 동시를 읽힌다는 건 어딘가 맞지 않을 성 싶다. 요즘 어린이들은 대부분 조기교육 덕분(?)에 유아원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으며 늦은 경우라도 유치원에서는 읽고 쓰기뿐만 아니라 셈하기까지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초등학교에서 기성 작가들이 쓴 동시를 읽고 낭송해야 할 정도이면 동시를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수준에도 걸맞지 않는다.  왜 그런 오해를 하고 있을까?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살펴봐도 동시는 어린이의 정서와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표현 된 시를 자신의 정서에 맞게 느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한다고 했지 동시를 통해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이 되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나. 교육적 기능수행으로서의 동시  그리고 동시를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 예를 들어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의 사용은 교육적 기능 수행에 역기능이라는 우려를 나타내었다.  맞는 말이다.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다’라고 할 만큼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도 시를 쓸 때 외래어나 한자어를 삼가고 되도록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우리의 말을 찾는데 고심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 시와 달리 어린이들의 감정과 생각을 나타내야 하는 소재와 주제의 제약과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써야 하는 표현 언어의 특수성이 있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 어려운 말이나 이미지의 비약은 동시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는 교육적 기능 수행의 한 부분일 뿐 전부는 아니다. 자칫 지나친 동시의 효용성 강조는 도덕 교과서처럼 일상적인 언어만을 고집하게 되어 시는 경직되고 재미가 없게 된다.  다. 동시의 재미  그래서 동시도 문학 작품인 만큼 재미를 관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효용성과 서로 맞물려 경중에 관한 균형의 문제가 된다면 나는 효용성 보다는 재미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재미를 찾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시인 전병호는 ‘동시에서 재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어린이들이 느끼는 재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보면 동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반성을 하게 될 때가 많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동시의 효용성을 강조하다가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하는 말일수도 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를 시어라 부른다. 그 까닭은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지시적 기능에 국한되지만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아동의 세계(관념적인 동심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아동의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는 물론 아동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을 찾는 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어린이는 보다 친근하게 시적 정서에 와 닿을 수 있다.  여기에서 어린이들이 현실적으로 즐겨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지영이 우려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들인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은 국어교육이라는 효용성으로 보면 문제가 있지만 요즘 어린이들이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에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 용어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네들끼리는 소리 낼 수 있고 이해하는 것들이다. 그러하여 오히려 동시에 접근하는데 거부감보다는 친밀감을 더 할 수 있는 용어들이라고 생각한다.  라. 자음만의 음소는 소리 낼 수 없거나 이해 불가능한가?  신지영은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임을 강조하면서 자음만으로 이루어 진 ‘ㅂ ㅂ’가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가 ‘바보’의 소리를 가진 것으로 표기하여 그 발음이나 이해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나 신지영이 잘 못 본 내용이다. 실제 필자의 원고에는 ‘ㅂ ㅂ’가 두 번 사용되지 않았다.(p113 위에서 18줄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p115 위에서 22째 줄부터 ‘ㅂ ㅂ’,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23째 줄 ‘ㅂ ㅂ’, 또는 ‘ㅂ2’, ‘잘 가, 빠이빠이’, 24째 줄, ‘ㅂ ㅅ’, ‘병신’, 25째 줄, ‘밥5’, ‘바보’였다) 아마 ‘ㅂ ㅂ’와 ‘ㅂ ㅅ’을 혼돈 했거나 ‘밥5’, ‘바보’를 잘못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지영의 표현대로 이것들이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거나 하나의 독립된 표현으로 떼어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자음들이 문장 안이나 시의 행 안에 들어 있을 때는 단어나 행, 연, 문장의 상호작용을 통해 분명히 이해된다.  예를 들어 보자.  아무리 눈짓을 해도  눈만 껌벅이는 너는  아이 참  ㅂ ㅂ  라는 시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이들은 ‘ㅂ ㅂ’를 모음이 없다고 해서 소리 낼 수 없을까? 아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바이바이’라고 말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글의 문맥으로 ‘바보’로 소리 내고 이해한다.  또 하나 더 보자.  헤어지기 싫어  얼굴은 돌리지만  발길은 차마 떨어지지 않아  무거운 손  빈 하늘에 들어 본다  ㅂ ㅂ  라는 글에서 마찬가지로 ‘ㅂ ㅂ’를 ‘바이바이’라고 소리 내고 이해하지 ‘바보’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종은 참 우리글을 우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자음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드시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영어의 ‘church’를 ‘ㅊ ㅓ ㄹ ㅊ’라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처치’라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게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 자모를 조합하지 않아도 자음만 단순히 나열 된 것마저 어려움 없이 모음을 불러와 소리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마. 동시의 역할이 어린이 국어 능력 소양 발달인가  동시 뿐 아니라 모든 문학 작품이 국어와 관련되고 또 국어 학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신지영은 동시가 한국어 발음으로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고, 동시가 중요한 목표로서 국어 능력 소양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고,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의 필요와 또한 한글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국어 교육과정상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문법, 문학 영역 중 문법 영역에 관한 목표는 될 지언 정 문학 즉 동시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아니라고 본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올라있는 진선희의 ‘시 텍스트에 대한 초등학생들의 학년별 인식 및 선호 양상 연구’ 중 ‘ 1. 시 교육에서의 텍스트’ 첫머리에 “시교육의 목표를 범박하게 말하면 ‘시적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시’라는 개념 혹은 문화적 관례, 가설들이 존재함과 독자가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교육적임을 전제로 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별책 2)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에 따른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Ⅲ)(교육과학기술부.2008. 4.1)가운데 문학부분, 그 중에서도 시와 관련된 내용을 학년별 작품의 수준과 범위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신지영이 제시한 동시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면관계로 구체적인 수준과 범위, 성취기준, 내용요소는 생략하기로 한다.  결국 신지영의 주장은 동시의 역할에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바. 자음만의 음소와 이모티콘이 과연 불필요한 시도인가  신지영은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는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자음들로 이루어 진 몇 가지 용어들이나 필자가 차용하여 동시에 사용한 것들은 대부분 글 전체에서 극히 제한적이고 보조적 이미지로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시나 산문에서 모든 단어나 문장이 모음을 무시한 자음만으로 글을 썼다면 이미 작품이 될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이다.  신지영이 밝힌 바처럼 우리글이 우수한 자모관계를 가진 문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늘 날 어린이들이 ‘ㅂ ㅂ’, ‘ㅋ ㅋ’, ‘ㅎ ㅎ’를 모음이 뒤에 붙어 있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 내어 읽지 못하지 않는다. 글을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크크’, ‘쿡쿡’, ‘킥킥’, ‘호호’, ‘하하’, ‘호호’ 등으로 오히려 자모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크크’, ‘하하’라는 글자보다 더한 다양하게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시라는 장르에서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고 확대 해석하거나 매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신지영이 말하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체계인 훈민정음도 맨 처음 만들어 졌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다. 그러나 이 문자 체계도 시대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사라진 것이 네 글자나 있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각각 시대마다 사용한 문자와 말들이 오늘날 엄청나게 소멸, 생성하며 변화해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의도구로서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즉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 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필수만 존재하지 않는다. 필수가 존재하는 곳에는 당연이 선택도 있기 마련이고 필수를 보조하는 또 다른 역할들이 있게 마련이다. 동시가 언어기호 사용이 필수라 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의 표현에 필요하다면 동시에도 선택적 보조 자류가 필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있어서 컴뮤니케이션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통해 서로가 소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동시의 문제는 작가와 독자의 눈높이 문제, 생각의 차이, 문화와 경험의 차이로 인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대 있다. 신지영이 긍정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이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단순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라 하더라도 동시가 독자와 가까워지고 소통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5. 기호 언어와 낭송 동시에 대하여  신지영의 지적과 궤를 달리하지만 결과적으로 같이 논의해야할 ‘낭송’의 문제도 이 기회에 그 견해를 밝히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다음과 같은 눈둥그리님의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새로운 시도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는 낭송할 때 그 느낌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시의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데 기호언어들은 어떻게 낭송해야 할지 좀 고민이 됩니다. 09.12.16 11:45 ”  눈둥그리님의 우려는 ‘동시가 낭송될 때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 좋은 지적이다. 특히 시낭송은 동시가 낭송자를 통해 청중과 완벽한 컴뮤니케이션을 이루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서 낭송자는 청중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하기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서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에 대한 우려는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낭송자는 최선의 낭송을 위해 배경음악, 음성의 고저장단, 강약의 조절 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 이때는 주로 음성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낭송자는 음성기호가 아닌 것에도 유의한다. 다시 말해 표정, 몸짓, 그리고 행과 연의 휴지부문, 그리고 작품 속에 그려진 문장부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이미 위에서 밝힌 대로 센스가 있는 낭송자라면 자음 만 있거나 자음에 아라비아 숫자가 곁들여 있는 정도라면 낭송자가 자기의 개성이나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낭송이 가능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 -_-, 등과 같은 표정 기호까지도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표정으로도, 음성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회화적 기호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좋은 동시가 좋은 낭송시로서의 조건을 갖춘다면 금상첨화이지만 꼭 낭송하기 좋은 동시가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작품을 쓰는 일에 자유로워야 한다. 작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시적 감흥이 일어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직관으로 쓰는 것이지 첨부터 무엇을 목적에 두고 시를 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많은 동시 가운데 기호 언어로 쓰여 진 시가 아니어도 낭송에 적합하지 않는 시는 이외로 많이 있음을 본다.  6.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대 시론과 무관하게 창작해 온 나에게 갑자기 얼굴을 드려 민 ‘해체시’라는 용어 는 나를 당황하기에 충분했다. 창주문학상과 소년지 동시 추천으로(1974년) 등단한 필자는 의도적으로 작품에 논리적 접근을 하지 않은 채 작품을 써왔다. 물론 시론에 관계되는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변명 같지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시론에 내 감성과 직관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나와 같이 시론에 취약한 까닭은 논리를 생명으로 하는 평론과는 생태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미술 작품의 창작을 위해서는 회화나 디자인에 통일, 변화, 비례, 균형, 대비, 대조 등과 같은 원리들이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첨부터 이 원리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나타난 직관을 통해 창작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작품을 창작하면서 이곳은 비례이고, 저곳은 통일이라는 등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면 작품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원리와 요소들이 잘 어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작가의 예리한 직관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될 것이고 이는 또한 수정보완이 이루어지게 된다. 마치 시인이 퇴고를 하듯. 다시 말하면 내가 시를 씀에 있어 첨부터 시론이나 원리에 집착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신지영은 내 작품 속에 표현된 몇 가지 비언어적 시각기호에 대해 ‘해체시’라는 틀을 갖다 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해체시가 필요한가? 묻고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내 작품을 일단의 행위예술적인 퍼포먼스로 취급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신지영을 통해 첨으로 해체시와 아주 낯선 대면을 할 수 있었다.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 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도, 김준오가 1992년에 펴낸 ‘도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는 것도, 황지우의 행위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라는 것도, 또한 데리다로 부터 출발한 해체시에 대해 그 생성과 성격, 즉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목표와 방향성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해체시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신지영이 깨우쳐 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동시가 해체동시가 되려면 몇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기존의 동시들에 대한 부정이다.  둘째, 기존의 표현 형식에 대한 파괴이어야 한다.  셋째, 이를 위한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작품이 기존의 동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 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동시가 갖는 이미지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기호언어를 사용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기존 동시를 부정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둘째, 내 작품이 기존의 표현 양식을 파괴할 만큼 위험했다는 것인가? 자세히 살펴보면 문장부호는 세종이 한글 창제 때 함께 창제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때인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고 지금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해 비해 최근에 생산된 이모티콘이 기성세대와 일반인에게 생경하다고 해서 과연 표현양식을 파괴하는 요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가끔 어린이 사생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적어도 중학생이 되어야 사용하던 수채물감을 요즘은 초등학교 저학년도 사용하고 있다. 아이들 중에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수성 싸인 펜으로 그린 후 그 위에 수채물감으로 채색하여 싸인 펜이 번지는 효과를 잘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때 우리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싸인 펜으로 그렸다고 해서 수채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인가?  셋째, 필자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이라는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없어 그의 작품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만평이 어떤 의도로 들어 있는지 모른다. 추측하건데 분명히 그 만화는 시의 내용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기존의 운율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였거나 말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선언으로 삽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시도는 시라는 양식이 생태적으로 다양한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가능하지만 동시는 그 특성상 어렵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의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는 기존 동시를 부정하거나 파괴하기 위한 사상적, 이론적 근거조차도 마련되지 않았다. 거듭 말하거니와 동시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표현 방법이지 동시 표현의 방식을 파괴하려는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하며 신지영의 ‘해체동시’ 운운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오면서  신지영의 토론 주제를 읽고 답글을 다는 일을 조금은 망설였다. 그 이유는 문학 이론에 대해 지극히 일천한 내가 과연 논리적인 해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명료하지 못한 해명으로 신지영의 글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이루어 진 토론의 장에 한 번쯤 답변하는 것이 예의가 될 성도 싶어 용기를 냈다. 내 견해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덧붙였지만 충분한 설명이나 명쾌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며, 경우에 따라 의도와는 다른 곁길로 가 버린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점은 너그럽게 이해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묘한 감정 하나를 지울 수 없다. 사실 맨 첨 이 글을 시도를 하면서 원로 아동문학가들로부터 질책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그것은 회갑을 넘긴 사람이 주책에 가까운 객기를 부린 건 아닌가 했는데 이외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틀로 인해 퓨전(fusion)시대에 걸 맞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도한다는 건 조금의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분명 모험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분간 여기에 더 머물러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호 언어들과 함께 소통하며 내 작품의 영역을 넓혀 볼 작정이다.  참고 : 이 원고는 "오늘의 동시문학" (2009년겨울호 )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이 원고 내용에 2010년 봄호에는 신지영 님이 반론을 재기 했고 다시 2010년 여름호에 이 반론에 다시 반론을 재기하여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토론의 장을 열었던 원고임을 밝혀 둡니다.   [출처]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 김재수|작성자 옥토끼
520    무엇을 쓸려면 진정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댓글:  조회:5215  추천:0  2015-05-20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뭣하러 굳이 명상 모임에 찾아오는 겁니까? 당신은 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지 않죠? 만약 당신이 글쓰기 안으로 깊이 몰입할 수 있다면, 글쓰기가 당신을 필요한 모든 곳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나는 쉼표와 마침표, 물음표의 쓰임새를 배웠고, 배운대로 문법에 맞는 글을 쓰는 데만 골몰했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은 진부하고 재미가 없었다. 내가 썼던 글 어디에도 나만의 생각이나 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다. 선생님이 이런 걸 원할 것 같으니까 이렇게 써서 보여드려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대학생이던 나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출신 대부분의 작가들의시와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작품까지 죄다 읽었다고 자부했다. 문제는 내가 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일상 현실과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소설을 읽고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평범한 것이 시란 말인가? 내가 매일 하는 그런 일이 시라고? 그때 무언가가 나의 뇌신경망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 나는 어느새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나만의 생각과 감정이 실린 글을 써 보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나는 먼저 내 가족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여러분에게 안정된 삶의 방식을 가지려고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당부하고 싶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시작할 때 이미 당신은 끝까지 그 일을 따라갈 깊은 안정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 나는 항상 똑같은 방법론을 주장한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결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싫증이 나지 않을뿐더러 나 자신을 더욱 높은 이해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글쓰기를 배우는 길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다. 실천적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충실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수업을 할 때는 나는 학생들에게 '뼛속가지 내려가서 쓰라'고 요구한다.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으라는 말이다. 첫 마음, 종이와 연필 나는 첫 번째 수업을 무척 좋아한다.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글 쓰는 사람으로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 첫마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첫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글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돌아가야 하는 자리일 것이다. 생각은 손이 움직이는 것보다 언제나 앞서 달려가기 때문이다. 노트에 글을 쓰지 않ㄴ고 직접 타자기로 치는 경우도 생각해봐야 한다. 글쓰기는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인 작업이기에 사용하는 도구와 장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글쓰기도 명상과 같이 첫 생각과 만나서 거기서부터 글을 퍼낼 때 당신은 싸움에 나선 전사가 되어야 한다. 특히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감정과 에너지의 힘에 질려 겁을 먹을지 모른다. 하지만 손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생각의 심장부로 뚫고 들어가도록 손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 * 손을 계속 움직여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이것이 규칙이다. 목표에 닿기 위해서는 이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목표는 첫 생각에 불을 활활 붙여 주는 것. 사회적 체면 또는 내명의 검열관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에너지의 심장부에 도달하는 것, 피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진자 마음이 보고 느끼는 것을 쓰는 것이다. 이규칙을 지티다 보면 괴팍하기 그지없는 우리 마음의 정체를 들여다 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닳아빠진 사고의 끄트머리를 계속 탐색해야 한다. 첫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제일 먼저 '번쩍'하고 빛을 낸 불씨다. 이 불씨의 뿌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잠재력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불씨는 대개 우리 내부의 검열관에 의해 진화되어 버린다. 두 번, 세 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의 의식은 일상의 관념 세계로 다시 돌아와 맨 처음 피어난 신선한 불꽃과 교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첫 생각은 에고 또는, 우리를 통제하려고 드는 논리적인 메커니즘에 얽매이지 않은 생각이다. 세계는 불변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의식 차원을 넘어선 글을 쓸 때, 그것은 잇는 그대로 사물의 진실을 나타낸 것이 된다. 어째서 첫 생각에는 이처럼 굉장한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일까? 첫 생각은 참신함 그리고 영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첫 생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그동안 겪어 온 감정과 사건과 정보가 밑바탕이 되어 발산되는 것이기에 엄청난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당신이 바로 지금, 현재에 존재할 때, 세상은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멈추지 말고 써라. 글쓰기 훈련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몸과 육체를 믿는 법, 다시 말해 인내심과 공격하지 않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술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세계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간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법칙은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작품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꾸려 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시와 소설을 방편으로 삼아 진정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무서운 적을 만나게 되더라도 계속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겹겹이 쌓여 있는 마음의 층을 벗겨내야만 합니다."   ---티벳 승려 초감 트롱파  글 쓰기 훈련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마음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가게 하고, 자시 내면의 목소리와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옳았을 때만 좋은 글을 얻을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법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이 사업상의 서류이든 장편 소설이든 박사 논문이든 또는 여행기이든, 그 글에는 힘이 실리게 된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글도 많이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또 육상 선수들은 달리기가 힘들고 지겨워져도 달리는 행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습을 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계속 달리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열망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열망은 절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더욱이 규칙적으로 달리기 훈련을 하게 되면, 이 훈련 자체가 저항감을 잘라내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또 다른 훈련이 된다. 당신은 계속 달린다. 이렇게 한참 동안 달리다 보면 당신은 어느새 달리기를 사랑하게 된다. 게다가 목적지가 보이게 되면 절대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골인을 하고 난 후에는 다시 또 달려 보고 싶다는 갈증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다. 일단 글쓰기에 빠지게 되면,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방황하고 이제야 책상 앞에 앉게 되었는지 의아해질지도 모른다. 글쓰기도 훈련을 통해서만 실력을 쌓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깊은 자아를 믿게 되면, 이제 그곳에는 글쓰기를 두려워하라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설 자리가 없어진다. 글을 쓸 때는 자신을 제한시키지 말라. 자신을 제한하는 순간 당신은 경직되고 얼어붙는다. 책상을 마주했을 때는 최소한의 제한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라고만 하자. 그저 많은 글을 쓰겠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글을 쓰는 동안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제한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그러면 심리적 해방감을 준다. --글을 쓸 쑤록 나는 점점 더 확장되고 느슨해진다. 글쓰기에 몰입하는 학생들을 둘러볼 때가 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슬쩍 보기만 해도 그들이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그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충실하게 "현존"하고 있는지 여부를 금새 알아차린다. 진지하게 글에 빠져 있는 학생의 몸은 점점 느슨해진다. 달리기가 좋아서 잘 달리고 있을 때는 달리는 것에 대한 저항이 없는 법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달리기를 위한 활동에 퍼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달리는 사람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는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의 모든 것이 진정으로 글쓰기에 실려 있다면, 거기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없고,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글쓰는 행위만이 글을 쓰고 있게 된다. * 헤엄을 칠 때나 배가 나아갈 때는 파도에 거슬러서는 안된다. 새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몸을 파도에 맡기면 내 몸이 파도와 일치감을 갖게 된다. 새가 창공을 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상황은 수도승이 수도를 할 때와 같다. 도를 닦으면서 그 상황에 몰입하면 어떠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모든 고통이 희열이 되어 고통과 내가 일치되어 무아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외부와 나의 내부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와 안락을 느끼는 것과 같다. * 실제로 나는 글을 쓰면서 명상에 잠긴다. 마음이 어지러웠다가도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여 글에 몰입하게 되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안락한 기분이 된다. 아무리 무서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글을 쓰게 되더라도 전혀 언짢은 기분이 되지 않는다. 마치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듯한 희열에 잠길 수 있다. --가끔 대단히 화가 나거나 근심스러운 일이 있어서 마음이 불안할 때는 안정제를 먹듯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현재를 벗어나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글을 쓰면서 회상되는 모든 과거는 행복한 감정을 일으키는 안정제가 되어 나의 마음을 차분하고 안락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에게는 글을 쓰는 일이 안정제, 차 한 잔, 조용한 음악 감상, 성인의 숨결과 다름 없다. (051206) 글쓰기는 재갈을 물리지 않은 야성이 숨 쉬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으며 오직 그 순간 글 쓰는 사람과 다른 모든 것과의 연결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글쓰기 훈련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논리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게 된다. 지금 당장 자리에 앉으라. 지금 당신의 마음에 달려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 말라.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것을 잡아라. 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쓰기만 하라. * 글을 쓸 때는 무조건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할 것인가? 평소에 거짓과 위선이 넘치는 마음의 소유자는 그의 글 조차 위선과 거짓으로 넘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람도 계속 글을 쓰면 되는가? 글을 씀으로서 저절로 자기 정화의 효력이 발생할 것인가? 자꾸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다 보면 결국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가 될 것인가?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아니다. 우리의 지각 능력이나 판단력을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각과 판단력은 우리의 의식과 육체를 거쳐서 나온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을 "퇴비를 섞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인생이 남긴 쓰레기더미는 자꾸 쌓여 간다. 우리는 그 안에서 특정한 경험들만을 수집하기도 하고, 때로는 버린 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경험으로 삼기도 한다. 비옥한 토양은 단시일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월이 필요하다. 유기적으로 이어진 인생의 모든 세부 항목들을 계속 뒤집고 도 뒤집어서 쓸데없는 찌꺼기들을 걸러 내야만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시간을 주었음에도 남보다 많은 분량의 글을 써내는 학생들이 있다. 물론 긴 글이라 해서 우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 그런 학생들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의 재료로서 탐색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런 학생들이야만로 그저 '나도 글을 써 보겠다'는 소망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훈련 과정을 충실히 거쳐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무래로 흙을 파내듯 자신의 마음을 자꾸 써래질해주고, 얕은 개울 같은 생각을 자꾸 뒤집어 주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든 일이지만, 이런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고 해서 신경증적인 위험에 빠진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 내면의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그 풍요의 정원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주제에 대달려 거기에 맞는 퇴비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말해야만 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하나의 통일된 실체를 이루어낸 것이다. 퇴비에서 한송이 붉은 튤립이 피어난 순간이었다. *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당신의 작을 힘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하게 만드는 건 "위대한 결정자" 입니다. 당신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당신이, 당신 배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 즉 새, 나무, 하늘, 달, 그 밖의 무수한 생명의 흐름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에만 위대한 결정자가 당신을 도와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카타기리 선사 * 물과 공기를 거역하지 않으면 헤엄과 비행을 더 잘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주만물의 아주 작은 미물이다. 그러나 우주만물에 거역하지 않고 나아갈 때 우리는 거대한 에너지를 얻어 빨리, 강력하게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음과 같다. 각종 스포츠에서 이러한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윈드서핑. 파도타기. 스키, 스케이트 등 공기, 물, 중력 등의 우주에 존재하는 힘과 자신을 일치시키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해 준다. 노자의 "무위자연"이라는 표현도 이러한 마음과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결코 편하게 앉아서 사탕이나 먹으며 살겠다는 핑계거리로 삼지 말라. 우리는 계속해서 비료가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고, 발효시키고, 비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비료가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우리의 근육이 되어 준다면 우리는 위대한 우주의 조류를 타고 더 넓은 곳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인정할 수 있으며 쓸데없는 욕심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것은 그저 사람마다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세에서 그 때를 만날 수도 있고, 죽은 후에야 찾아올 수도 있다. 빠르고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속 써라. 예술적 안정성을 얻는 과정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글을 썼던 네가 지금처럼 멋진 글을 쓰게 되었다니 놀라워! 너를 보면 나 역시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아." 그녀는 온통 불평불만과 진부한 묘사 그리고 악에 받친 분노로 점철된 내 노트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네가 '이런 일을 하는 나는 정말 바보다'라는 생각을 하 때조차, 그 사실을 계속해서 글로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나는 내 인생의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나를 지탱하고 키워주고 있다는 믿음만은 늘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야 할 나만의 길이 하나 있을 거라는 신념은 놓치지 않았다. 비록 마음은 아무런 감흥없이 무간각하게 가라앉아 있거나 잡념들로 산만하게 채워져 있곤 했지만,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그런 산만한 마음과 그 동안 살았던 인생이 전부였다. 나는 거기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스로가 게으르며 불안정하고 자기혐오나 두려움에 쌓인 존재, 정말 말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직면하는 순간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때 당신은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을 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이제 당신은 별 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종이 위에 풀어 놓아야 하며, 그 가련한 목소리가 들려 주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이런 쓰레기와 퇴비에서 피어난 글쓰기만이 견고한 글이 된다. 당신은 어느 것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게 된다. 당신은 예술적 안정성을 지니게 된다. 안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바깥에서부터 쏟아지는 어떤 비평도 무섭지 않다.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런 인식이 생긴 뒤에는 아름다움과 다정한 배려, 명료한 진실을 선택할 수 있는 튼튼한 갑옷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두려움을 등에 진 채 무작정 아름다움을 좇아 거칠게 달려가지 않게 된다. 습작을 위한 글감 노트 만들기 어떤 것이든 모두 글의 재료가 된다. 글을 쓰고 깊은 주제가 떠오르면 언제라도 노트에 적어두라. 그것이 한 단어이든 한 문장이든 이러한 목록들은 당싱이 다음에 글을 쓰고자 할 때 요긴하게 끄집어 내어 사용할 수 있는 글감이 될 것이다. 이처럼 목록을 만들어 보는 일은 글쓰기 훈련에 있어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글쓰기의 재료들을 찾아내는 훈련이 될 뿐 아니라, 글쓰기가 바로 당신의 인생과 그 인생에서 탄생하는 산물임을 깨닫게 한다. 이런 식으로 삶의 경험들을 삭혀서 퇴비로 만드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다. 이렇게 글감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육체는 자연스럽게 글쓰기 작업과 친숙해지고 지난 경험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지 않았을 때조차 글쓰기는 끊임없이 당신의 삶 속에서 진행된다.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통해 양분을 흡수하고 태양열을 빨아들여, 점점 무성하고 진한 초록 잎을 지닌 식물로 자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일단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면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한 가지 주제에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신이 쓰는 글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금 당신이 머물러 있는 길 위에서 계속 걸음을 떼면 된다.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종이 위를 달려가고 있으니까. 2. "기억이 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 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멈추지 말라. 계속 적어라. 그 모든 것이 당신이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으로 다시 살아나게 만들라. 3.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주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골라서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글을 써보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을 확장시켜야 한다. 다음에는 같은 것을 두고 싫어하는 시각으로 글을 적어 보라. 이어서 끝으로, 완전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글을 써 보라. 6.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를 시각화시켜 보라. 지금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려 보라. 그런 다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글로 담는다. 당신의 방 한 구석일 수도 있고, 여름 내내 앉아 쉬던 나무 그루터기일 수도 있고, 동네 가게일 수도 있다. 읽는 사람이 마치 그 장소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그 장소를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표현 때문이 아니라, 글에 나타난 세부 묘사를 통해 당신이 그 장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해 주어야 한다. 글이 안 써질 때도 글을 쓰는 법 "훈련"이란 언제나 잔인한 단어다. 나는 이 단어를 가지고 나의 게으름을 토벌하려 했지만, 소원대로 효과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폭군과 저항군 사이의 싸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당신 속에서 싸움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싸우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 하지만 그 싸움의 한 구석에서,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실제적인 마음이 조용히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 마음이 노트로 옮겨져 더 깊고 평화로운 곳에서부터 나온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실제적인 마음이란 이성적인 마음의 상태? 불행하게도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 두 개의 마음이 같이 살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이 동시에 글에 표현된다. 더구나 우리는 이 두 싸움꾼들을 언제까지나 묶어 두고 억누를 재간이 없다. 억누를수록 이 싸움꾼들은 더욱 결사적으로 들고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잠시동안 그들이 노트에 대고 소리치는 것을 허락해 줄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이 이끄는 대로 글쓰기 속을 빠져들라. 싸움을 걸어 오는 목소리들에게 글 쓰는 공간을 허락하고 나면 그들의 불만이 너무도 빠르게 사그라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욕구불만을 터뜨리는 방법으로서의 글쓰기? 소리지르기. 노래부르기. 운동. 화풀이. 종교적 의식행위.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서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글쓰기 작업은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이며, 엄숙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해서 고독한 글쓰기에 전념하기보다는, 친구와 멋진 식당에 앉아 인간의 인내심에 대해 토론하거나 글쓰기의 고통을 위로해줄 상대를 찾아가는 데 마음이 이끌리게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는 단순한 임무를 스스로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을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선가의 말 --글을 쓰기 싫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글을 쓰기 시작해버리면 된다. 글이 안 써질 때도 무조건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어떤 글이든지 쓰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편집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라 습작 시절부터 "자기 속의 작가"를 내면의 편집자 또는 검열관과 분리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작가가 자유롭게 호흡하고, 탐험하며 표현할 공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하는 말은 늙은 술주정뱅이가 뒤에서 종알거리는 그렇고 그런 허튼 소리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별 의미도 없는 말에 귀를 기울여 쓸데없이 그의 힘을 키워 주는 바보짓을 하지 말라. 눈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직접 경험한 것만이 체험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누군가 써 놓은 글을 읽으면서도 체험할 수 있다. 나는 수업 계획을 미리 세워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상황에 겁먹지 않고 항상 열린 마음응로 충실하려 애쓴다. 그리고 매번 이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결이 있다면, 마음을 계속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모든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리라 결심했다. 나는 흑인 학생들만 다니는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대리교사였다.  "아이들 책상 밑을 보세요. 바닥이 온통 신발에서 묻어 온 흙 때문에 아주 지저분하죠. 정말 좋은 신호예요. 봄이 왔다는 신호니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은 다음에야 처음으로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글을 쓰는 데 자신의 재능이나 잠재력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재능과 실력은 훈련을 거쳐가면서 커지는 법이다. 비만으로 고민하던 사람이 드디어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필요한 정보를 충족시킬 책을 구하러 서점을 찾았다. 하지만 운동법이 적힌 책을 읽는 것 가지고는 절대 살을 뺄 수 없는 법이다.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운동을 해야 한다. 공교육이 저지르는 가장 끔찍한 잘못은 타고난 시인이자 소설가인 어린 학생들에게서, 그들의 문학을 빼앗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문학 수업은, 어린들이게 문학 작품을 읽게 한 다음 곧바로 문학에 '대해서'만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다 우리가 실존하고 있다는 생각, 그것을 착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글이 견고하며 영구불변한 구조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글은 순간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사람들이 나와 내 작품을 똑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낭송한 시는 내가 아니다. 설령 시에서 '나'라는 단어를 들먹인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우리는 한 순간에 얼어붙어 있던 자신과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빠져 나와 신선하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우리를 동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은 더 이상 내면에 있는 것들과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은 자유롭게 된다. 이전까지 싸움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당신과 하나가 되고 당신을 도울 것이다. 나와 내가 쓴 작품을 별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려라 인도에 가면 자동차를 먹은 요기가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 말에 우리는 '왜?'라고 끊임없이 묻거나 옷을 고를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대신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를 종이 위에 쏟아붓도록 해야 한다.작가는 두려움 넚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써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쓰기와 인생 그리고 정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경계가 없다. 자동차를 먹는 사람을 창조해 낼 정도로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만이 개미를 코끼리로 만들고 남자를 여자로 바꿀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각각의 분리되어 있는 형태들을 무너뜨리고 모든 형태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공통된 무언가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은유란 논리나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부터 비롯된다. 은유를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던 익숙한 시각에서 기꺼이 벗어나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평소의 사고 방식에서 한발 물러서서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을 계속 기록해보라. 이런 연습은 사고를 부드럽게 해 줄 뿐 아니라 창조력을 키워 준다. 아주 오랫동안 한 가지 생각에 머물러 본 적이 있는가? 바로 그런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느 한 순간 생각이 비약적으로 튀어오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섬광같은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영감의 근원은 만물의 근원과 맞닿아 있기에 자연히 그것들의 공통적인 법칙과 본질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아니다. 그는 정작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자신의 감정에 대해 단 한 자도 종이 위에 써 내려갈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종이 위에 자신의 감정을 풀어 내기도 전에 세상을 향해 어떤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앞질러 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글 쓰는 이를 경직시켜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당신의 감정은 밖으로 표출되고 싶어한다. 그것이 당신 생각에 방해받기 전에, 솟아나는 감정을 일단 종이 위에 표현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글을 조절하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그때그때 솟아 나오는 감정을 글로 써 내려가라. 누구나 저마다의 경험과 추억,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오븐에서 막 꺼낸 피자처럼 종이 위에 옮겨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을 풀어 주라. 아주 쉬운 말로 단순하게 시작하고, 당신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애써라. 서투르고 꼴사나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당신은 지금 스스로 자신을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절대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대로 연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글쓰기가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당신의 쓰고 있는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다가가도록 한다. 어느 순간, 비참하고 불만투성이고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전반적으로 침체된 기분이 들 때, 나는 이런 것을 그저 하나의 감정으로 인식한다. 나는 이런 감정도 결국 변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감정이 내가 세상 속에서 어떤 장소를 찾아가게 하고 친구를 원하게 만드는 에너지라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다. 글을 쓰는 데는 당신의 온몸, 즉 심장과 내장과 두 팔 모두가 동원되어야 한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그러나 엄청난 분량의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여유를 주자. 자신의 목소리가 지닌 힘을 믿는 법을 배우자. 자연히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방향 설정을 하고 목적지가 어딘지 알게 될 것이다. 강박관념을 탐구하라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강밥관념들을 목록으로 정리해 본다. 목록 내용은 자꾸 변하는데 숫자는 언제나 불어난다. 어떤 것은 고맙게도 아예 잊혀지기도 하지만. 작가란 결국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해 쓰게 되어 있다. 자주 출몰해서 괴롭히는 것, 절대 잊을 수 없는 것, 자신의 육체가 풀려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야기로 엮는다. 바로 이 강박증의 변두리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들을 창조해 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을 괴롭히던 강박증에 일부러 에너지를 쏟아 부어 보라. 이제 우리는 강박증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가 가지는 강박증 가운데 하나는 내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다. 어찌나 강박증이 심한지, 유태인에 대한 글은 이 정도 썼으면 됐다고 스스로를 달애야 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다른 쓸거리들도 얼마든 많지 않은가. 하지만 가족에 대해서 쓰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마다 나는 또 다른 억압감에 시달린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무언가를 회피하려는 데 소모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억누를수록 그와 관계없는 일상 생활의 다른 부분까지 억압받는 느낌에 빠지곤 한다. 다이어트, 알콜, 초콜릿, 압박감의 실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강박 충동의 조정을 받는다. 강박증은 엄청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라. 글쟁이 친구들 대부분이 글 쓰는 일에 대해 강박증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글에 대한 강박증도 음식에 대한 강박증과 똑같이 작용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로 살기란 절대 쉽지 않다. 예술가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절대 그 일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예술 작업에 얽매이고 창작에 대한 강박증에 빠지는 것이 술을 마시거나 초콜릿으로 배를 채우는 일 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에 대한 강박증은 무언가 가치 있는 길을 찾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은 직접 글을 써서 풀어 내야 한다. 세부 묘사는 글쓰기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인생이란 너무도 다양해서 만약 당신이 사물의 과거와 현재의 진정한 모습을 세세하게 써 내려갈 수 있다면 당신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라 우리의 삶은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작가는 의미없이 보이는 삶의 작은 부분들 마저도 역사적인 것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케이크를 구우려면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만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당신은 그저 당신 속에서 흐르고 있는 생각을 글로 적어 내고 있을 뿐이다. -그저 당신의 상황과 진실을 적어 내려 가라. 세부 묘사를 사용하면 당신이 느끼는 환희나 슬픔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전달하려는 감정이 어떤 맛인지 정확하게 표현해 준다면, 그것을 맛보고 싶어하는 미식가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일상 생활이 그의 첫 번째 인생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곱씹는 두 번째 인생이 있다.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모습을 면밀하게 음미한다. 삶을 이루고 있는 재질과 세부 사항을 들여다본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 들거나 비옷을 꺼내 입고 또는 신문으로 머리를 가닌 채 걸음을 서두른다. 하지만 작가는 노트와 펜을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그리고 웅덩이를 바라본다. 웅덩이를 채우는 빗물과 가장자리에서 튕기는 물방울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작가가 되려면 엉뚱하고 미련해지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일까? 바보만이 비를 맞으며 웅덩이를 지켜볼 테니까. 똑똑한 사람이라면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 비를 피할 것이다. 하지만 바보는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거나 시간에 맞추어 직장에 도착하는 것보다 빗물이 고이는 웅덩이에 훨씬 흥미를 느낀다. 결국 당신은 돈을 버는 일보다 글을 쓰기 위해 바보가 되는 것도 무릅쓰는 글쟁이의 인생에 더 많이 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글을 쓸 시간이 많을 때 나는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반대로 시간에 쫓겨 정작 자신이 원하는 일도 못하고 있는데 세금고지서가 날아오면 그야말로 거지가 된 기분이다. 월급쟁이들은 시간과 돈을 맞바꿔, 일한 시간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작가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고 있으며, 그 시간의 중요성과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 이들에게 시간은 조상으로부터 돌려받은 땅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 찾아와 그 땅을 팔라고 하면, 제정신이 있는 작가라면 결코 그 땅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땅을 팔면 자동차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게 되면 조용히 안식을 하고 꿈을 꾸는 데 필요한 장소는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조금 어수룩한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당신 속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느림보가 들어있다. 그 느림보가 당신의 모든 것을 팔아 버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당신에게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이마에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응시하게 만든다. 글쓰기는 육체적인 노동이다 진짜 글쓰기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껌을 씹지 않는다. 대신에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린다. 그리고 호흡이 아주 깊어진다. 글을 쓰는 손은 느슨해지고, 그들의 몸은 몇 킬로미터를 내쳐 달려도 좋을 만큼 잘 이완되어 있다.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보라. 작가가 영감을 받고 글을 써 내려가던 순간의 호흡이 생생히 느껴질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불후의 명작을 완성시키고 싶다면 위스키를 마셔서는 안 된다. 대신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소리내어 읽고 또 읽어 당신 몸을 그들의 운율에 맞춰 춤추게 만들어야 한다. 잘 쓰고 싶다면 잘 들어라. "노래를 잘 부르는 비결은 청음입니다. 당신은 먼저 제대로 듣는 법부터 배워야겠어요."  만약 음악을 온전하게 듣는다면 그것이 온몸을 채우게 되고, 자연히 입을 열어 노래할 때 음악이 자동적으로 몸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말이었다. 글쓰기 역시 90퍼센트는 듣기에 달려 있다. 열심히 들으면 당신을 채우고 있는 내면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자연히 나중에 글을 쓸 때, 당신은 그 내면의 소리를 저절로 분출시킬 수 있게 된다. 내면의 진실한 소리를 듣게 된다면, 글쓰기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다. 당신은 그저 식탁 건너 편에서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곳의 분위기가 내는 소리와 의자와 문이 말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문 너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도. 계절이 만들어 내는 음향과 바람에 실려오고 있는 온갖 색상의 음향을 받아들여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당신이 있는 곳에 귀를 열어 두어라. 귀로만 듣지 말고 온몸으로, 당신의 위장과 심장과 피부와 머리카락으로 들어라. 듣는 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더 깊이 들으려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물에 대한 진실한 글이 태어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셈이다. 열심히 들어주되 어떠한 비평도 가하지 않는 이런 듣기 훈련은 당신의 내면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말하려는 진정한 의미와 영상을 일깨워 준다. 이런 식의 청취 훈련은 당신의 현실과 당신 주변의 현실을 반영하는 아주 선명한 거울이 되어 준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 주고, 많이 써 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냥 단어와 음향과 색깔을 통해 감각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어가라.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느낌이 종이 위에 생생히 옮겨지도록 계속 곤을 움직여라.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은 안개에 젖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그저 듣고, 읽고, 쓰라. 당신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조금씩 당신만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그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051208) 파리와 결혼하지 말라.  이런 경우에는 문제가 글을 읽는 독자에게 있다기보다는 글쓰기 방법 자체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은 작가가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 버린 나머지 원래 하고자 하던 이야기의 방향을 망각하고 본래의 줄거리에서 멀어져 버렸을 때 일어난다. 또한, 작가 스스로 글의 방향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는 채 글을 써 내려가거나, 다루고 있는 글의 소재에 밀착되어 있지 못한 경우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런 부분이 생기면 글의 초점이 흐려지고 결국에는 독자들의 흥미를 떨어뜨리게 만든다.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윤곽이 흐릿해지면, 그 틈새로 독자들의 정신은 그 작품이 아닌 다른 속으로 새어나가고 마는 것이다.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 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방황한다면, 독자 역시 방황하게 된다.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그 목표에 집중해 매달려야 한다. 만약 당신의 마음과 글이 목표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있다면, 원래 돌아가야 할 자리로 부드럽게 잡아당겨야 한다. 글을 쓸 때는 마음 속에 무수한 길들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법이다. 하지만 너무 얼리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묘사도 자신이 정한 방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감정에 푹 빠져서 글의 방향과 한없이 멀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최고의 작품은 감상적인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감상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파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 원한다면 파리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파리와 결혼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착각에 빠진 작가, 우리는 작가라는 사실이 살아있게 만드는 구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이유는, 살아있기 위한 조건이란 따로 없으며 삶과 글쓰기가 두 개의 다른 명제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자기 체면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시는 건강했지만 나는 건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멋지다고 말해 줘요,"라고 했던 말 뒤에 있는 추한 내 모습을 본 것이다. 작가인 우리는 늘 의지할 것을 찾아다닌다. 동료들로부터, 비평가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안심하려 든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나 작품에 대해 보내는 타인의 칭찬에 기대어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이미 매 순간 무엇엔가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한 지원과 격려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누군가 칭찬을 해 주면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비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은 별볼일 없고 진짜 작가도 못 된다는 쓸데없는 믿음만 키워가려 한다. 나는 전남편이 나를 칭찬하려 들염 한 번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그가 나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때는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지곤 했다. 내가 칭찬을 하면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분이군요. 학생들에게 뭔가 긍정적인 말을 해주려고 노력하는 다른 선생님들과 똑같아요." 누군가 당신을 칭찬해 준다면, 정말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그런 일이 익숙하지 않고 겸연쩍더라도, 계속 숨을 둘이마시고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칭찬을 받는 것이 이렇게도 좋다는 것을 반드시 느껴 보아야 한다. 자신을 향한 긍정적이고 솔직한 격려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여유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니까. 꿈에 대해 써라.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인생의 종점에 서 있는 내 모습이 환영처럼 펼쳐졌다. 쓰레기 같은 글나부랭이 속에 파묻혀 손에는 얼마 되지 않는 마지막 시들을 부여잡고 마지막 숨을 거두며, 누군가에게 그 시를 읽어 달라고 애걸하는 내 모습이.  문장 구조에서 벗어나 사유하라 우리의 사고 방식은 문장 구조에 맞추어져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도 그 안에서 제한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이 '주어-동사-목적어-의 틀에 짜 맞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장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고, 신선한 세상과 만날 수 있으며, 글쓰기에 색다른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지나친 우월감에 빠져 있다.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존재들에게도 인간 못지 않게 중요한 그들만의 삶이 있다. 개미는 자기들만의 도시를 만든다. 개들도 그들만의 삶을 살아간다. 식물은 숨을 쉰다. 나무는 우리들보다 훨씬 오랜 수명을 가지고 산다. 인간이 고양이나 개 또는 파리를 주체로 삼아 "개가 고양이를 본다"라는 식의 문장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에는 인간의 언어 구조 속에 한정된, 자기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양식이 들어 있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이다.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터는 "나는 지금 모든 존재와 함께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만이 분리된 듯 "나는 깨달았는데, 너는 못 깨닫는구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소통하는 법을 많이 알 게 될수록, 당신은 글을 쓸 때 상황에 따라서는 구문론이라는 틀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때로는 이처럼 문장 구조를 깨고 글을 씀으로써 우리가 말라고자 하는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 주라  글쓰기에 관련된 오래된 속담이 하나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이것은 이를테면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보여 주라는 뜻이다. 당신 글을 읽은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글을 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 주라는 말이다.  글쓰기는 심리학 논문이 아니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서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독자의 마음을 슬픔과 기쁨의 골짜기로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글에서 "이건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는 식으로 무언가에 "대하여" 라는 단어를 볼 때 나는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를 들은 기분이 든다. 때로는 평범한 진술만큼 정확한 표현이 없을 때도 있다. 사진을 들여다보듯 하나하나 선명하고 분명한 어휘로 써야 한다. 심지어 에세이를 쓸 때도 평범한 진술이 한층 더 생생한 글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이야기 바깥에 있었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야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말은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은 절대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 이야기에 당신만의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확인하라는 뜻이다.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글은 당신이 그 글 속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이다. 그냥 꽃이라고 말하지 말라. 사물에도 인간과 똑같이 이름이 있다. "창가의 꽃"이 아니라 "창가의 제라늄"으로 묘사하는 편이 훨씬 좋다. "제라늄"이라는 단어 하나가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영상을 만들어 내고, 우리가 그 꽃의 존재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도와 준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원에서 같이 거주하는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이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리고 있었다.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 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더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걷닥, 내가 아는 식물들인 산딸나무나 개나리를 보면 그 장소에 더 깊은 친근감을 느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 줄 때 느끼는 기분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쾌한 증명인 것만 같다. 우리가 우리 코앞에 있는 사물에 더 가까이 갈수록, 그 사물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 많이 가르쳐 줄 것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같이 글쓰기 수업을 받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능한 빨리 알아 두라. 그러면 자신이 속해 있는 모임의 성격을 빨리 파악하게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 토론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몰입하기 선 명상법에 行禪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을 배우는, 일종의 걸어다니는 명상법이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발뒤꿈치와 바닥에 맞닿아 있는 발까락을 들어 1인치 정도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 쉬면서 아주 천천히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는다. 이렇게 느린 동작을 하다보면 사소한 발걸음 하나하나도 온몸과 연결되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디딜 때마다 공기와 창문, 햇빛의 존재도 느끼게 된다. 만약 바닥이 없다면, 하늘이 없다면, 생명의 원천인 물이 없다면, 우리는 단 한 발자국도 델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관통하고 있다. 계절조차도 우리의 걸음을 지탱하게 해 준다. 글쓰기 속에 몰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몰입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을 잡는 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평범과 비범은 공존한다. 기본 정보만을 다룬 묘사는, 그 안에 든 비범함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만약 그가 사고로 죽었다면 내 인생마저 흔들렸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물망처럼 얽혀서 서로의 우주를 창조해내고 있다. 누군가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사람은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에게 슬픈 파장을 남기게 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친절하게 대할 책임이 있다. 먼저 자신에게 친절할 때에만 세상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찻잔 또는 바위 언덕, 하늘이나 개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때 그 대상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 대상들에게 선의의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고, 글쓰기를 통해 초월적인 세계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이야기꾼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 나간다. 우리가 글 쓰는 방법을 배우는 이유는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탐욕과 질투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경탄하고 애착을 가지기 위해서다.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작가들은 새로운 글감을 찾아낸다. 말하기는 혼자서 펜과 종이만을 상대로 보내야 하는 길고 긴 창작의 시간에 앞서 하는 준비운동이다. 당신이 수없이 누군가에게 말했던 이야기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그것으로 글쓰기의 많은 부분은 이미 이루어졌다.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한 학생이 말했다. "전 요즘 헤밍웨이만 읽어요. 헤밍웨이를 닮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아 두려워요. 나 자신의 목소리는 잃어 버리고 점점 헤밍웨이를 흉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늘 자신이 누군가를 모방하려 들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살려 내지 못한다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글쓰기는 공통체의 산물이다. 일반인들의 믿음과는 정반대로 작가는 절대 불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다.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 이념 그리고 대중문화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글쓰기 안에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수시로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글쓰기를 배우는 방법이다. 그들은 한 작가에게 다가가, 그가 쓴 모든 작품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휴식을 취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 자신에게서 빠져 나와 다른 누군가의 피부 속으로 옮겨 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사랑하게 되는 능력이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흔들어 깨운다는 뜻이다. 남의 글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신을 더 크게 해 줄 뿐 절대 남의 것을 탐내기만 하는 도둑고양이로 만들지 않는다. 다른 작가가 쓴 글이 아주 자연스럽게 당신 것으로 변해 가면, 당신은 글을 쓸 때 그것들을 활용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나의 생각이나 내가 쓰는 글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아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그냥 글을 쓰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글쓰기는 다른 작가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절대 질투심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가 대단한 작품을 썼다면, 그가 작품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당신은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다른 작가들을 나와 분리된 존재로 여기지 말라. "그들은 훌륭한데, 나는 형편없어"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도 하지 말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의작품은 좋아지기 힘들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만 훌륭하고 나머지는 모두 형편없는 글쟁이들이야>" 이런 지나친 자만심으로는 절대 훌륭한 작가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당신 작품에 대한 비평에도 귀를 막게 만든다.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되어 두 팔로 세계 전체를 담는 글을 써야 한다. 거친 황야에서 홀로 떨어져 글을 쓸 때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같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만이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은 자기 본위에서 나온 우월감일 뿐이다. * 나와 남, 나의 내부와 외부의 만물과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커다란 자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함께 도움을 주고 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아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언제까지나 자신만을 의지하고 밀고 나가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서로에 대해서 알아 두고, 작품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조언한다. 작품을 자신만의 습작 노트에 사장시키지 말라. 바깥으로 꺼내 놓아라 .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 버려라.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럽다. 자신만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이유는 없다. 먹잇감을 응시하는 고양이처럼 어떤 글을 쓰겠다고 계획했을 때 동물처럼 행동해보자. 동물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동물처럼 당신이 쓰려는 이야기의 먹잇감을 하나씩 비축해 두자. 어떤 방법이든지 상관없다. 일상의 찌꺼기에서 발굴해내든지, 도서관을 찾아가든지, 정신의 정원으로 나가든지 마음대로 하다. 무엇이 되었든 모든 감각을 집중시켜라. 논리적인 마음은 꺼 버려라. 마음을 비워 놓고 생각이 들어가지 않게 하라.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껴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당신 육체가 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내 버려 두라. 자신을 믿어라. 세상이란 언제나 흑백으로 갈라지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우리 인생이 언제나 선명한 것은 아닐지라도, 명확하게 인생을 표현해 보는 것이 좋다.  자신이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질문 하나를 만들 수 있다면 아주 잘된 일이다. 하지만 즉시 더 깊은 단계로 내려가 바로 그 다음 줄에서 그 질문에 답을 해 주어야 한다. 글쓰기는 안개에 싸여 있는 마음에 불을 지피는 행위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설사 확실하지 않을 때라도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라. 이런 훈련은, 문장을 훨씬 힘차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일에 대하여 마음은 항상 일과 집중력에 대해 저항하려 든다. 한동안 나는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마음이 하얗게 텅 비어서 창문 밖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되고 싶은 사랑은 느낀적도 있었다. 글을 쓰는 대신 내내 이런 상태로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작업실에 대하여 나느 글쓰기 공간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약간 지저분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은 공간을 볼 때 그 공간의 주인인 작가는 아주 비옥하고 힘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완벽하게 꾸며 놓은 작업실에 갈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그 곳의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적 조절력의 필요성을 외적 환경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자기의 창조성이 완전히 그 반대편, 즉 조절력을 포기하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마을을 순례하라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다.  어떤 장소에 오래 살 게 되면 그 장소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항상 흥미롭다. 새로운 장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선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해 준다. 충분하다고 느낄 때 한번 더 글쓰기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될 때, 조금만 더 자신을 밀고 나가 보라. 당신이 종점이라 생각하는 곳이 실은 초입에 들어선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대문이다. 항상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당신은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을 사랑하라 나는 작가다. 작가는 많은 시간을 홀로 글을 쓰는 데 보낸다. 또한 사회라는 틀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모두가 아침이면 일터로 향하거나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분주하다. 예술가는 제도가 만들어 낸 사회의 바깥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하얀 종이는 앞에 있는데, 마음을 불확실하고 사고는 연약하기만 하고 감각은 무디고 둔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조절력을 잃어 버린 글쓰기. 결과물은 어디에서 나올지 확실치 않은 글쓰기는 무지와 암흑 속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과 정명으로 부딪칠 때. 이러한 무지와 암흑의 장소에서 출발한 글쓰기가 결국에는 우리를 깨우쳐 주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나아가게 만든다. 이런 두려움의 회오리바람에서부터 진정한 천재의 목소리가 탄생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안고 산다"라는 사실에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라. 결국에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민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발 아래 깔린 시켄트와 혹독한 폭풍에 짓이겨진 마른 풀들마저도 다정스레 바라보게 한다. 예전에는 추하게 생각했던 주변의 사물들을 이제는 손으로 만지게 되고, 사물의 세부를 있는 그대로 보아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 사물이 여기 있다는 사실. 우리 인생을 싸고 있는 일부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먹히지 말라 의심과 의문은 고문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전적으로 매달려 심혈을 기울였다면, 그 일은 그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 준다. 의심은 굽히지 않는 불국의 정신을 끊임없이 시험하는 것이다. 의혹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의혹이 이끄는 곳으로 가보았자 고통과 부정적인 마음만 만나게 될 뿐이다. 당신은 열심히 글을 쓰려고 하는데 당신 글의 문제점만 집어 내는 비평가에게도 마찬가지다. 비평가가 지껄이는 말에는 신경 쓸 것 없다. 거기에는 당신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하나도 없다. 대신 자신의 글쓰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라.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인내심과 유머 감각을 키우라.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먹히지 말라. 훈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잃지 말고 저 너머에 있는 광활한 인생을 바라보라.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부터 글쓰기는 좋은 것이며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 게 해 주어야 한다. 글쓰기를 적이 아니라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글쓰기는 당신의 친구다. 글쓰기는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당신이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버릴 수는 있어도 글쓰기가 당신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다. 글쓰기 과정은 인생과 생명력의 끊임없는 자원이다. 때때로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지리멸렬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면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탈리. 넌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거야. 너는 글을 써야 해." 만약 내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간다면, 그 말을 듣는다. 만약 자기파괴적이거나 게으름뱅이라면, 그 말을 듣지 않고 우울증에 대해 계속 힘을 키워갈 것이다. 내 그 말을 들으면 나는 인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언제나 나를 유연하게 해주었고, 참된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었던 순간들과 만난다. 심지어 내가 이른 아침 자동차로 붐비는 고속도로를 묘사하고 있을 때도, 나는 그 혼잡한 도로에 대한 글 속에서 평화로움과 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이다. 아침이면 일어난다. 그리고 나는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고어비달은 아주 멋진 말을 남겼다. "모든 작가와 독자들은 글을 잘 쓰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최고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글을 잘 쓰는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라. 그냥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니까. 장대 위에서 발을 떼라 장대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태로운데, 이제 거기에서 발을 떼라니. 하지만 더 나가기 원한다면 그 끄트머리에서 발을 떼야만 한다. 성공적인 글을 썼다고 해서 결코 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실패한 글을 썼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또는 큰 실패를 맛보았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고 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건 당신은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만이 당신을 건강하게 또 살아 있게 지탱해 준다. 왜 글을 쓰는가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어서.  나의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면 그에 의해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테니까.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왕따가 될 것 같아서 글을 쓰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행복을 느끼게 되어 글을 쓰는 일을 통하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어서 글을 쓰면 남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줄테니까. 글쓰기가 인생을 치료하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글쓰기 자체가 치료술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연을 당한 사람이 초콜릿을 사랑의 대체물로 여겨 마구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오면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초콜릿 먹는 것을 중지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애정결핍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가 흐지부지 중단할 수도 있다. 글쓰기는 치료술보다 훨씬 심오하다. 그래서 당신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만약 당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든지, 글쓰는 행위를 부정하기보다는 자신을 더 깊이 불사르며 글쓰기 속으로 몰입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의 에고는 내가 영원히 살아 있고, 사람들 또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가 한순간의 찰라이며 유한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진실은 나에게 더없이 큰 상처다. 내가 느끼는 모든 기쁨의 가장자리에도 이 상처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는 외롭고, 이 세상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내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 신기하고 놀라운 일은 나 자신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미쳤고, 정신분열증 환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미친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며, 어리석은 일에 빠지기보다는 이 사실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려 한다. 나는 사람들이 잊어버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 주기 위해서, 또 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당신의 입술과 혀에서 나온 말에 형태를 잡아주기 위해 글을 쓴다. 또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을 당신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살아 있기 위해 노력하며,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을 이해하기 위새, 그리고 그 공간에 구체적인 색과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부족한 나의 작품만이 내가 가진 점부가 되어 버리는, 그런 완전한 고립 속에서도 글을 쓴다. 나는 이해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게다가 책상과 노트에서 떨어져 나 자신의 인생으로 얼굴을 돌려야만 할 때도 많다. 그리고 상처를 받으면서 그 상처를 이겨 내는 동안에도 글을 쓴다. 그 상처가 나를 강하게 만든다. 관통하는 글 쓰기 우리는 모두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서 글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관통하는 글쓰기만이, 흐르는 피가 땅에 스며들 듯 다른 곳으로 침투해 들어 가는 힘이 생긴다. 세상에는 많은 현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문제에 당신이 지나치게 빠져 있다면, 세상에는 수많은 현실이 있음을 꼭 기억해두라. 우리에게는 그냥 살아가는 우리 삶이 있다. 우리는 그냥 글을 쓰고 싶은 것이며, 그냥 비와 식탁과 음악과 종이 컵과 소나무를 만지고 싶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습을 하거나 친구와 같이 공동 글쓰기를 시도하다 보면 자기 안에만 깊이 처박혀 있는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한걸음 내딛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작가로 살아남기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로서는 강하고 용감하지만 한 인간으로 돌아오면 한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세상에 대해 우리가 품은 위대한 사랑과, 생활인으로서 우리 등에 달라 붙은 불명예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작품 속과 작품 바깥이라는 두 가지 세계를 하나로 묶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비공격의 실천이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이 기술대로 살아야만 한다. 자신이 쓴 글에서 떠나라 사업가가 되려면 우선 먼저 위대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두려움을 떨쳐내야 하면,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즉흥 글쓰기 창구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다. 글을 쓰는 동안 모든 것을 집중시켜야 하며, 그 다음에는 아무 미련 없이 자기가 쓴 글을 고객에게 넘겨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빠르게 글을 쓰게 되면 실제로 자기제어가 통하지 않게 된다. 내 경우는 처음에 쓰려고 했던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중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대중은 진실의 단면을 보고 싶어 한다. 내가 만든 '글쓰기 창구'는 대중성의 한 극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시인이나 작가에게 특별한 관심과 지원을 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암암리에 글쓰는 행위에 대한 내밀한 꿈과 존경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초원을 떠나라 가끔 처음부터 문장 구조도 완벽하고 서술력도 좋으며 세부묘사도 뛰어난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글에는 계절마다 불어오는 태풍, 혹독한 겨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들의 글쓰기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잘 쓰는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서 잇는 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개척지를 개간하고 미지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한다. 어느 화요일 저녁에 했던 수업이 생각난다. 그 학생들은 내가 흔들어 보기가 힘들 정도로 모두 글쓰기의 기본이 단단하게 잡혀져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한 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 버린 바보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름대로 내 요구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을 흔들고 싶었지만 흔들 수 없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수업이었다. 우리 삶에는 반드시 미쳐 버려야 할 시기, 사물을 바라보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고하지도 않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 데이비드는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통념적인 사고 너머로 비상하고 있다. 나는 그가 언젠가는 땅에 착지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단단한 땅을 밟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발견한 특별한 시야를 명료하게 펼쳐 보여 주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 익숙한 땅을 박차고 날아오름으로써 자신에게 더 많은 공간을 허락해 준 것이다. 정확한 문장에만 집착했다면 뻔한 정교함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소와 양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와 양을 탁 트인 황야에 풀어 놓는 것이다. 글쓰기에서도 커다란 들판이 필요하다. 너무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지 말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길을 헤맨 다음에라야 당신은 자시만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 규칙적인 연습은 창조력을 마비시킨다. 다른 운동이 그렇듯, 글쓰리를 발전시키는 데는 연습만이 지름길이다. 하지만 글쓰기 훈련은 시간 속에 엄청난 압력을 가해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목숨 전체를 기꺼이 그 글 속에 집어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기계적으로 펜을 끄적거리면서 언제 시간이 끝날까 자꾸 시계만 쳐다보게 될 것이다. "매일 글을 쓰라." 이 규칙대로 실행하는데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의무감으로 했기 때문이다. 규칙만 따지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단지 규칙에 맞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는 것처럼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는 없다. 이 때는 글쓰기를 중단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갈증을 느껴, 말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 다음 글쓰기로 돌아가라. 걱정하지 말라. 이것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되어 낭비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만약 오랜 시간에 걸쳐 썼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글쓰기에 충분히 몰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오직 연습 시간의 경과로만 채우고 있다면, 당신은 평생을 연습해도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때로는 더 멀리 가기 위해 인생을 변화시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자신의 규칙대로 미리 단정하지 말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 있는 존재와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법규란 남을 다치게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굳이 법규를 들먹이지 않아도 항상 경우에 맞는 일을 하는 법이다. 규칙에 얽매이면 글쓰기에 필요한 진짜 현실이라는 반석을 얻지 못한다. 규칙으로 자신을 마비시키지 말라. 글쓰기 속으로 깊이 들어기지 못하면 결국에는 글쓰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시간이 흘러 다시 규칙을 지키는 착실한 사람으로 돌아가겠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진실은 말하지 않게 된다. 글쓰기 훈련에 자신을 충식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몰입하는 사람만이 자기 인생에도 몰입할 수 있다. 글쓰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에게는 진실을 말할 신성한 임무가 있으며, 그 임무는 종이에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인생 전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작가로서의 우리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우리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넓어진다. 이런 이유로,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글을 쓰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도전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내가 매일 접촉하는 것들 안에 함께 서서 계속 글을 쓰는 것만이 내 가슴을 열 게  준다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나로 하여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도록 깊은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준다. --내가 종이에 대고 연필을 끄적일 때, 질기고 단단한 마음 속 생각을 부수어 낼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렇듯, 작가가 되려면 아주 깊은 믿음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잇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 그리고 만약 작가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 동안 가야 할 길이다. 외로움을 이용하라 "고독에 익술해질 수 있을까요?" "고독에는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물어뜯습니다. 우리는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독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의 고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점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고립되어 있는 자신과 싸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글쓰기는 지독하게 외로운 것이다. 누가 이 글을 읽어 줄까?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세요? 아니면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쓰세요?"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고독의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은, 거기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와 연민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당신의 인생을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게 된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고독을 이용하라. 고독의 아픔은 당신에게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을, 당신의 더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이용하라. 벌거벗은 자만이 진실을 쓸 수 있다. 일주일에 하루 2시간씩 8주 동안 만나는 글쓰기 워크숍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우리는 4시간에 이르는 글쓰기 마라톤 시간을 가진다. 다른 사람들과 하루종일 글쓰기 훈련을 가져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수업에 참가하는 수강생 모두가 자진해서 하루를 내는 데 동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찬성을 하면 다음에는 수업 수케줄을 짠다. 예를 들어 10분간 한 번, 20분간 두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1시간 동안 글쓰기를 한다. 첫 번째 10분간 모두가 글을 쓴다. 다음에는 각자가 썼던 글을 차례대로 읽는다. 글에 대해 비평하는 시간은 없다. 그냥 자신이 쓴 글을 읽은 다음 다른 사람에게 차례를 넘기면 된다. 이 수업의 특징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쓰고, 읽고, 다시 쓰고 읽기 때문에 의식이란 것을 챙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며, 어떤 비평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유를 얻게 된다. 잠시 후 당신은 자신의 목소리가 해체되어 가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또는 교실 맞은 편에 있는 누군가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글을 발표하는 동안에는 어떤 평도 없기 때문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음 번 글쓰는 시간에 그 사람에게 글로써 알려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 작품에 평을 하지 않는 이 방식은 글로써 모든 것을 표현하겠다는 건강한 욕구를 만들어 준다. 말하고 싶은 에너지를 다음 번 글쓰기에 쏟아 붓는 것이다. 쉬지 않고, 쓰고 읽고 쓰고 읽는 것을 반복하는 이 방법은 내부의 검열관을 잘라 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또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글로 나타내게 만드는 엄청난 자유를 허용해 준다. 맨 처음 마라톤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매우 긴장한다. 아무 쓸 말이 없으면 어쩔까 하고 의혹과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당신은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과 더불어 "나는 하루 종일 글을 쓸 수 있구나!"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라톤 수업은 자신을 열어 보는 대단한 경험이다. 이 수업을 한 직후에는 벌거벗은 느낌. 제어력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자기 방어라는 외투에 커다란 구멍이 꿇린 기분. 벌거벗은 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기분을 갖게 된다. 죄선을 한 직후에도 나는 종종 마라톤 수업이 끝났을 때처럼 벌거벗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혼자서 오랜 시간 동안 글쓰기를 할 때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 찾아온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열어 보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을 벌거벗기고 해체시키는 기분, 하지만 이것도 괜찮으니 받아들이라. 벌거벗은 자만이 어느 것에도 왜곡되지 않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천재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자주 경험하는 아주 이상한 현상이 있다. 아주 뛰어난 글을 써 놓고도 정작 글을 쓴 사람은 그 글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현상이다. 나와 다른 학생들이 아무리 칭찬해도 소용 없다. 그 글을 쓴 사람이 좋은 글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는 사람들이 왜 저럴까 하고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가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조금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 자신이 좋은 글을 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학대를 받거나 짓밟힌 사람을 볼 때보다도 더 심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목소리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 일이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이 어찌나 강한지, 많은 사람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글로 옮겨놓고 나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라는 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정직한 고결함과 세심함으로 자신의 인생을 표현해 내는, 천재의 목소리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과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글이 우수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모두가 부처입니다. 나는 당신이 부처라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내 말이 믿어지지 않겠죠. 당신이 자신이 부처임을 자각할 때, 당신은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바깥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이 좋은 글을 썼음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진정한 재능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사이를 가로막던 장애물을 치워버릴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작업이 아름답고 창의적인 인간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끌어안아야만 한다. 때로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이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깨달음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과장하는 허풍쟁이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뭔가 천재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그것을 바깥으로 발산시켜야만 한다는 뜻이다. 내면에 있는 풍요로움을 외부에 있는 작품으로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 예술가들이 바라면서도 다가서기 힘든, 고요한 평화와 확심감을 얻는 열쇠다. 작품을 평가하는 스스로의 잣대를 가져라. 한 작품을 백 사람이 읽으면 백 개의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보는 시각과 관심의 초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런 다음에 결정을 내려라. 이때 나오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참다운 작품이고 목소리다. 여기에는 불변하는 규칙 같은 것은 없다. 작품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어떤 점을 드러내고 싶은가? 작품 속에서 발가벗는다는 것은 자신을 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자신을 노출할 때도 있다. 그러면 마음이 아주 힘들어진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일은 얼어붙어서 아무 것도 노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어붙으면 나쁜 글밖에 나오지 않는다. 작품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을 두고 읽어 보는 것이다. 만약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잠시 미루어 보라. 세월이 지나면 무언가 보일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지만 당신의 눈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시가 보일지도 모른다.  고쳐 쓰기 자기가 쓴 글을 쓰자마자 다시 읽어 보지는 말라. 자기가 쓴 글을 자시 읽어보기 전에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라. 작품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다. 왜냐하면 당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글쓰기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자신의 소박한 인생에 매료되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된다. 평범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슬쓰리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한 달 후 당신은 그 시절 당신이 썼던 노트를 읽으며 그 글의 훌륭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 서로를 깨닫고 하나가 되는 시점이다. 이것이 작품이다. 다시 읽는 도중 좋은 글이 보이면 동그라미 표시를 하라. 이런 글은 다음 작품의 도입 부분으로 이용하거나 또는 그 자체를 하나의 시로 삼아도 좋다. 만약 글을 쓸 때 당신이 진정으로 글 속에 있었다면, 글로써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제는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썼던 언어들을 더 그럴싸한 다른 언어로 고치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를 벌거벗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시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게 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조금도 과장시키거나 공격하는 일 없이 그저 수용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창작자를 마음껏 풀어 놓아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적절하게, 관습에 맞게,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질서를 부여해야겠다."라는 태도를 삼가라. 만약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함정을 파겠다는 것과 똑같다. 원고 수정 작업은 '새롭게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쓴 글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먼저 전체 그림을 다시 본 다음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부 묘사를 첨가하면 된다. 자신이 쓴 글 중에서 좋은 부분은 표시를 해두라. 이것들을 글감 목록에 적어 놓으면 다음 번 다시 글을 쓸 때 그 중 하나를 잡아서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다. 또 표시를 해둔 글은 그 문장에 대한 기억을 강화해 훗날 필요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문장이 떠오르도록 만든다.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잇던 별개의 부분들이 뭉쳐져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놀라운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카타기리는 위대한 작품 앞에 서게 되면 평화로움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한다. 미술가가 명화를 보면 자신도 명화를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받는다. 예술가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영적인 사람은 평화를 발산한다. 하지만 카타기리는 이 영적인 사람들이 평화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삶의 노력과 그 순간을 움직이는 우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예술가들이 생명력 있는 작품을 얻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요한 평화와 접촉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접촉을 이루지 못할 경우 예술가는 파멸한다고 했다. 사실 알코올 중독과 자살, 정신병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킨 예술가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옮기고 나서 저자는 자유롭게 글을 쓰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글쓰기란 자신만의 솔직한 목소리를 찾아내는 길이며, 굴극적으로 인생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돌이켜보며 인생을 완성시켜 나가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진짜 보물들이다. 이 책은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더욱 높여 주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유와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진정한 연민을 키워가는 끊임없는 훈련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게 되었기 때문이다.작가가 아니라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또한 좋았다. 수많은 얼굴들이 하니씩 선명하게 내 눈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말 또렷하게 내 가슴에 와닿았다.         [출처]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작성자 옥토끼
519    동시조 창작에서 도움되는 동시조 례문 모음 댓글:  조회:4990  추천:0  2015-05-20
    동시조 모음   매미 / 김양수 숨죽여 살금살금  나무에 다가가서  한 손을 쭈욱 뻗어  잽싸게 덮쳤는데  손 안에 남아 있는 건  매암매암 울음뿐.  메아리 / 서 재 환  산 속에는 '야호!'라는 아이가 숨어 사나 봐.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만 올라서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야호! 야호! 부르나 봐. '야호'는 무슨 일로 얼굴을 숨겨 두고 '야호!'라고 소리치면 목소리만 나타나서 그 목청 골 안 가득히 쩌렁쩌렁 우는 걸까. --------------------- 새싹/김 창 현 파아란 새싹들이 땅 속 뚫고 나오면 밟혀도 일어서는 푸른 꿈 간직하고 달콤한 봄비 마시며 어린이처럼 자라요. ----------------- 다람쥐/김 창 현 알밤만 한아름씩 대궐만큼 쌓아 놓고 달구랑 쓰구랑 쓰구랑 달구랑 올해도 햇밤 맛자랑 새벽까지 떠들어요. ......................... 시계는/ 김 용 희  아무리 먼 길이라도 황소를 닮은 걸음. 밤새워 째각째각 느긋한 되새김질. 아침해 띄우는 걸 좀 봐. 힘만은 무척 세지. --------------- 낮달/김용희 달인가 하고 보면 흰 구름 조각이었죠. 하얀 달은 구름 속에 살짝꿍 숨어 다녀요. 온종일 심심하다며 숨바꼭질하겠대요. ------------ 저녁노을/김용희 서산 마을이 다투어 하얀 쌀밥 짓다가 구름을 숯불덩이로 화끈 달궈 놓았어요. 하늘이 너무 뜨거워 해를 덜컥 떨어뜨렸죠 ------------------- 밤 구름/김용희 달 가는 길을 구름이 징검다리 놓았어요. 폴짝폴짝 건너뛰며 재미 삼아 밤길 가라고 구름이 아파할까 봐 달님 살짝 밟고 가요. ------------------ 김치/ 김 몽 선  숨죽은 배추 속살 빨간 고추 매콤한 맛 엄마 손 닿고 나면 침 고이는 저녁 밥상 김치가 휘돌아간 자리 빈 그릇만 얌전하다. -------------------- 운동회/ 김 몽 선  들뜬 마음 푸른 하늘 만국기로 걸어놓고 힘찬 응원 등에 업고 바람 갈라 내달으면 결승선 아득한 흰 줄 내 가슴에 와 안긴다. -------------------- 방울토마토/ 진 복 희  도톰한 방울토마토 한 입에 넣고 굴리다가 아작 깨물면 싱그럽게 터지는 폭죽 단숨에 목젖을 적시는 새콤한 방울 폭죽 ----------------- 채송화/진 복 희  오종종 모여 앉아 무슨 생각을 엮는 걸까. 그 누가 숨어 설레는 해맑은 입김일까. 샛노랑 노랑 하양 빨강 온통 보조개밭이네. ...................................... 할머니-홍시 / 진 복 희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드시는 것 잇몸으로 호물호물 잘도 잘도 잡수신다 먼 발치 바라만 보아도 군침 도는 가을 한때. ----------------- 고추 말리는 날/신 현 배  우리 집 앞마당이 빨간 고추로 덮였다. 눈이 따끔 코가 간질 연방 터지는 재채기 바람도 견디다 못해 주춤주춤 물러난다. 구급차 신 현 배  풍뎅이 한 마리가 방 안에 뛰어든 듯 구급차 한 대가 거리를 휘젓는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차들도 귀가 멍멍. 녹십자 마크를 한눈에 알아본 듯 사거리 신호등이 빨간불을 더디 켠다. 구급차 숨가쁜 목숨에 파란불이 켜진다. 우산 신 현 배  햇빛을 베개 삼아 잠만 자던 헌 우산이 후드득 빗소리에 반가워 눈을 뜬다. 오늘은 철이 손 잡고 학원에 가겠구나. 기지개를 활짝 켜고 거리로 나선 우산이 목말 탄 아이처럼 우쭐우쭐 길을 간다. 접었다 펼친 마음이 무지개를 그린다. 태풍 신 현 배  실바람도 태풍 되면 씨름꾼이 되나 보다 아름드리 나무쯤 딴죽 걸어 넘어뜨리고 덩치 큰 힘센 바다를 번쩍 들어올린다. ---------- 노 루 김 양 수 흰눈 위 아기노루 먼 산을 바라본다 엄마를 새겨보는 해맑은 눈동자 또르륵 이슬 같은 그리움 새봄이 뽑아낸다. 개나리 김 상 형 앞산 양지쪽의 갓 피어난 개나리가 노오란 오운 빛으로 새 봄을 즐기면서 호호호 웃는 소리가 마을까지 들리네. 엄마의 손 김 사 균 이마를 짚어주면 두통이 금세 낫고 배꼽을 쓸어주면 배앓이가 멎는 약손 엄마의 커다란 손은 우리들의 병원이다. 봄 편지 김 몽 선 지난 흰눈 덮고 꼭꼭 숨어 기다리던 모란 가지 그 끝에는 바알갛게 꽃망울이 날마다 더 큰 몸짓으로 봄을 일러주고 있다. 언 바람 온몸으로 받아 내던 개나리도 실실이 풀린 기운 엄마 같은 환한 미소 반가운 봄소식 한 줌 한 겹 벗는 이 세상. 할머니 얼굴 경 철 밤 하늘  멀리 멀리 아련한 저 별자리 무릎 위 앉아 듣던 구수한 이야기들, 어느새 나도 별 되어 외손녀를 안고 있다. 섬노을 바람빛 고 응 삼 푸른 섬 흰구름이 돌 가슴 귀를 열고 숱한 세월 일렁인 삶 못다 섬긴 사랑 노래 노을빛  붉게 타는 섬은 아롱지는 무지개다. 겨울 종소리 박 필 상 1  겨울의 종소리는  흰 눈으로 내립니다  퍼얼펄 쏟아져서  온 세상을 덮습니다  땅위의  온갖 어둠을  새하얗게 씻습니다  2  겨울의 종소리는  눈부시게 푸릅니다  햇살처럼 따스하게  온 세상을 비춥니다  가슴속  온갖 그늘도  새하얗게 지웁니다  눈썹달 2  윤 삼 현 사알짝 돋아난 막내 동생 젖니 같은  흙 틈새 뚫고 나온 봄나물 새촉 같은  가느단  새 순 한 가닥  하늘밭에 솟아났다.  꽃 꿈 이 명 길 내가 만든 꽃밭에  꽃씨 뿌렸다  언제만 새싹이   돋아날까 움틀까  날마다 지켜보면 아직도  추워설까 소식없네.  가만히 생각하니  꿈을 꾸는 게지  파란 하늘 마주 설  파란 꿈꾸고  봄볕에 방실거려 놀  빨간 노란 아기 꿈 봄바람 송 명 호 고양이 발걸음처럼 살금살금 온다고 누가 모를 줄 아나? 처마 끝을 지날 때 똑똑 낙숫물을 밟고 가면서. 금잔디에 숨어서 숨바꼭질한다고 누가 모를 줄 아나? 새싹들이 파릇파릇 알려 주는걸. 사르르 얼음 위로 미끄럼 친다고 누가 모를 줄 아나? 풀리는 강물이 짝짜꿍 손뼉 치며 좋아라 하는데. (7차 교육과정 4학년 1학기『읽기』 p.15  엄마의 손 장 용 복  엄마의 고운 손이 머리맡에 만져져서  눈감고 아픈 듯이 꿍꿍꿍 앓아보니  엄마는 걱정이 되어 살며시 안으시네  우리 맛 정 표 년 참기름 간장 깨소금에  흰쌀밥을 비벼봤나  엄마가 떠 먹여주던  그 사랑을 먹어 봤나  소세지 햄 피자하고는  아주 다른 우리 맛  넷째 시간 서 벌 초침은  달리는 말  분침은  달팽이 발.  가는 건지  마는 건지  시침은  부처님 손.  손 얼른  움직이셔야  도시락  먹을 텐데…….  어머님의 젖꼭지 박 양 권 잎 지고 다 시들은 감자포기 뽑아들면  뿌리 가득 올망졸망 매달린 감자알들  한 줄기 젖줄을 빨며 탐스럽게 자랐네  한 조각 씨감자가 땅 속에서 썩으며  감자알 키워놓고 뿌리 끝에 매달린  까맣게 썩은 씨감자 어머님의 젖꼭지  목 련 신 현 배 꽃샘바람보다 먼저  눈을 뜬 망울들이  겨우내 끼고 있던  벙어리 장갑 벗고  다 같이 가위바위보  하얀 손을 내민다 솔방울 신 현 득 구슬을 갖고 싶은 어린 아기 소나무  손끝에 한두 개씩 솔방울을 들었네.  동그란 솔방울들은 소나무의 노리개.  새벽 숲에서 김 영 수 선잠 깬 어린 새들이 칭얼칭얼 우는 소리  -아가 왜 그래? 찌찌 줄까? 맘마 줄까?  애타는 엄마새들이 달래며 우짖는 소리  느티나무 이사 가던 날 손 상 철 먼 곳의 산들이 와 손잡고 잘 가란다  계곡물 산을 내려와 잘 가라 마당에서 울고  동구 밖 느티나무는 노을 붉게 손 흔든다  입학식 추 창 호 까치가 뱉어놓은  새파란 하늘 아래  햇살 이름표로  반짝이는 아이들  발걸음  종종거리며  초록 꿈을 틔운다  나무는 나무는 김 호 길 나무는 나무는   땅이 엄마인가 봐  엄마 품에 새록새록  안겨 잠든 아가처럼  뿌리를 땅의 가슴에  깊이깊이 내리나봐.       나무는 나무는   하늘이 아빠인가 봐  아빠 손잡고 나선   아장아장 아가처럼  가지를 하늘에 올려  손 흔들고 있는가봐.  물총새 조 주 환 쫑쫑 물 쫑쫑 조약돌에 떨군 울음이 소금쟁이 살여울에 물무늬로 가 앉다가 풋잠 든 아가의 눈에 방울방울 벙근다. 소금쟁이 허 일 소록소록 실비 끝에 동그라미 송송송송 개구쟁이 소금쟁이 불신 신고 쏘다니며 엄마가 부르는 소리 귓등으로 듣는다. 가을 하늘 조 규 영 가을  하늘은  독수리도 탐이 나서 먼 산 위에서 뱅 뱅 맴을 돌며 며칠 째 파란 하늘을  도려낸다 자꾸만. 들길 산길 진 복 희 들길을 가면 나는 한 송이 작은 들꽃. 눈여겨 주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들길. 가다가 풀섶에 앉아 듣는 싱그러운 풀잎 얘기. 산길을 가면 나는 한 자락 푸른 산바람. 굽굽이 오솔길 따라 마냥 걸어가는 내 생각. 새소리 바람 소리 어디쯤 숨어 있을 내 소리. 요리 갔다 조리 갔다 전 의 홍 깎을까, 깎지 말까 더부룩히 자란 머리. 사지 말까, 살까 신나게 쏠 고 고무총. 절러렁 동전 다섯이 이발소를 지나서....... 살까, 사지 말까 장독 다칠 조 고무총. 깎지 말까, 깎을까 소풍 하루 앞둔 머리. 쥐었다 동전을 꼬옥, 가게 앞을 지나며 어머니 김 종 상 때 절은 이불 속 아기는 잠이 들고 졸음 맺는 등잔불 밤도 깊어 으슥한데 세월을 돌리시듯이 물레 잣는 어머니 의상대 해돋이 조 종 현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은가. 받아 든 엽서 정 완 영 네가 보낸 한 장 엽서는 네가 보낸 한 장 바다. 꽃게 같은 이야기들이 곰실곰실 기어 나온다. 썰물에 나갔던 바다가 밀물 타고 들어온다. 봉숭아 김 상 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숭아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도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은,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산길에서 이 호 우 진달래 사태진 골에 돌 돌 돌, 물 흐르는 소리. 제법 귀를 쫑긋 듣고 섰던 노루란 놈, 열적게 껑청 뛰달아 봄이 깜짝 놀란다. 나도 같이 시를 쓴다 이 은 상 아득한 바다 위에 갈매기 두엇 날아 돈다. 너훌너훌 시를 쓴다. 모르는 나라 글자다. 널따란 하늘 복판에 나도 같이 시를 쓴다. 별 이 병 기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귀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산딸기 이 태 극 골짝 바위 서리에 빨가장이 여문 딸기 까마귀 먹게 두고 산이 좋아 사는 것을 아이들 종종쳐 뛰며 숲을 헤쳐 덤비네. 봄 산  장 순 하 가지에선 새싹들이 눈 비벼 깜박이고 땅 속에선 벌레들이 기지개를 길게 켠다. 봄 산은 간지럼쟁이, 까르르르 몸을 꼰다. 딸기밭 박 경 용 높은 산 메아리도 꼬리만이 잦아들고, 강의 먼 노랫가락도 끝자락만 닿아오는 딸기밭 꼬맹이 풀섶에 잔조로운 불씨들. 뜨겁게 머무르는 태양의 가쁜 숨결 째한 한낮을 질러 은밀히 다녀가는 바람도 난쟁이 바람 어디 어디? 저기 저기! 개구쟁이 아랫동생 킥킥대는 웃음이랑 새큼한 여린 맛의 막냇동생 웃음이랑 함께 와 열려서 익네, 설레이는 내 눈길도. 구 두 유 성 규 도툼한 사연이다, 시집 간 누나 마음. 볼에다 비벼대고 바둑이도 불러 놓고 속갈피 비집고 보니 내 구두가 한 켤레. 내 마음 들머리에 달이 둥실 오른다. 추석날 성묘길에서 구두타령 했더니, 누나는 그날의 응석을 가슴 아파했던 게다 채송화 밭에서 이 상 범 다섯 식구가 모여 다섯 가지 보람을 가꾸면 색동인 양 오색 무지개 비 개면 오를 거다. 꽃 지운 자리엔 오소소 다섯 식구 꿈의 씨앗. 민들레 꽃씨 윤 현 조 우리는 낙하산 형제 하늘 높이 날아라 풍선처럼 손오공처럼 춤을 추며 날아라 온 식구 소풍가는 날 바람도 함께 가요. 일학년 임 금 자 1 '여러분은 몇 학년' '우리들은 일학년' '천재들만 모였구나' 선생님 말씀에 종합장 별 세 개까지 반짝반짝 웃는다. 2 새 가방 메고서 으스대고 싶었는데 학교가 코앞이라 아파트 한번 돌고 또 안녕 경비 아저씨 오냐오냐 두 번 웃고. 3 가족수 세던 날 식구 셋이 많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내 동생까지 여섯 식구 제일로 내가 부자야 두 어깨가 춤을 춘다. 해 정 순 량 해를 밀어 올리는 동해(東海)는 힘이 세다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무엇이 끌고 가나 서해(西海)는 해를 삼키고 붉은 피를 토해낸다.        
518    동시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어나라 댓글:  조회:4398  추천:0  2015-05-20
▶ 동시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어나라 ◀   동시조  1.동시조론    이 글은 울산병영초등학교에서 매주 실시하고 있는 “느티나무 동시조교실”내용을 요약한 내용으로 서술의 성격은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문학용어나 시어 사전적 단어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려 하였으며 이는 이론서의 개념보다 현장에서 쓰여질 목적에 그 눈높이가 있다. ‘동시조론’이 ‘시조론’과 다르다는 영역의 확장을 고심했으며  ‘동시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였다.  특히 '동시조 퇴고 실제 예' 와 '시조 가락의 열림과 닫힘의 미학' 부분중 지면 관계상 장과 장의 부분만 서술하고 '6구와 12음보의 열림과 닫힘의 미학'부분은 다음을 약속한다.   * 마당에 줄 세우기 * 1). 시조(時調) 어원 재해석 2). 동시조 출발 의미 3). 동시조와 동시 4). 동시조 형식의 재해석 5). 동시조의 전개 방법 6). 동시조 퇴고의 실제 방법    (1).동시조에 쓸 수 있은 단어인가?    (2).시조 가락의 열림과 닫힘의 미학    (3).의성어·의태어 사용법    (4).한 작품내에 동일 단어의 사용    (5).곁가지 치기    (6).고시조 답습식 단어군 퇴고    (7).장과 장 퇴고    (8).종장 퇴고    (9).내용과 제목의 퇴고   7).배열(행연)의 문제 8).동시조에 쓰지 못하는 단어 9).시조작법 명언집 10).마당 닫은 글   1).시조(時調) 어원 재해석            (1).시조의 '시(時)'자의 의미 잡기   “시(時)”자는 漢字어로 때(시간)를 나타내는 말로 이것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말입니다.“시(詩)” 즉 문학의 한 부분의 의미로 사용하는“시(詩)”자를 사용하지 않고 시간이란 의미의 “시(時)”자를 사용하였을까요? 그것은 여러 친구들에게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시간은 세상을 움직이는 흐름의 기본 단위입니다.즉 시간은? 인간의 일생이고,풀 한포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살아있고 바다와 하늘이 가지는 흐름의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은 미래 지향적이며 과거를 거울로 현재의 삶을 충실히 한다는 인간 삶의 의미로 확대 가능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시조〕의 “시(時)”자는 단순한 문학적 요소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우주관가 역사관 그리고 우리 삶의 미래 지향을 위한 의미로 '시(시간)'이란 시(時)자를 썼습니다.              (2).시조의 '조(調)'자의 의미 잡기    시조의 “조(調)”의 한자(漢字)적 뜻은 “조절하다”란 뜻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왜 시조의 앞 자인 시간의 뜻인 “시(時)”자 다음에 “조절 한다”란“조(調)”자를 썼을까요? 그것은 '시(時)'자가 가지는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고자하는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즉 시간을 조절한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아끼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도덕을 지키며,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킨다는 작은 의미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이롭게 하며 우리 민족과 더 크게는 세계의 주인인 나를 다스린다는 큰 의미도 포함 됩니다.    즉 우리 선조들은 '시(詩)'를 쓴다는 의미보다 자신을 수양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큰 의미로 이 '시조(時調)'란 단어를 만드신 뜻입니다.    그러므로 '時調'는 자신의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을 맑은 눈과 냉정한 이성으로 깊은 관찰 결과에 문학적 감동을 이 시조(동시조) 얹어 자신의 수양과 우리 민족과 더 나아가 이 세계를 다스리고자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단순히 우리 고유문학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시조 어원의 이해     ①.과거형이 아닌 현재형 쓰기이며 미래형으로 닿는 쓰기여야 한다.     ②.소재,내용,단어의 선택이 (1)항을 충실히 수용해야한다.   즉 이 시대 시조의 방향이 저 초가지붕 위의 박과 달빛을 담기에는 그릇이 그 시대의 그릇이 아니라는 자기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조 어원의 재해석’의 이해는 곳 시조의 근본적 이해로 볼 수 있다.   2). 동시조 출발 의미    동시조의 출발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우리를 안으시고 밤마다 불러주시던 자장가다.그것은 우리 귀에 자연히 앉은 우리 언어의 구조이며 수천 년 우리 언어의 흐름이며 해부학적으로는 우리 입과 목과 치아의 구조입니다.    그 흐름은 3.4조의 흐름이며 글자 수(자수)와 음보(가락)가 어우러지는 우리 민족의 내재율 입니다. 그 중심의 자수는 3자이며 그 흐름의 길이는 3자수를 축으로 우리 언어의 자연스러운 길이인 앞이 짧고 뒤가 긴 틀에서 조율되는 우리의 언어이자 그 언어의 문학적 실체화입니다. 자유시(세계 모든 시)와 다른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써야 하는 의무감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글사랑과 그 동일 선에서 흘러야 하는 큰 이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3). 동시조 와 동시            (1).동시와 동시조가 같은 점    그 내용과 소재 그리고 쓰는 목적이 같다.            (2).동시와 동시조의 다른 점    동시는 일정한 형식이 없이 자유로운 행과 배열이 자유스럽다 그러나 동시조(시조)는 앞에서 말한 우리 언어의 기본 구조인 3.4조의 음보(걸음)에 '하늘(초장)' 과'땅(중장)'과 '인간(종장)'의 기본 구조인 초장· 중장·종장의 형식에 얹어 하늘을 땅을 인간을 다스리는 정형(형식)의 시다.   이는 전장에 서술한바와 같이'시조(時調)'의 단어 풀이에서 말했듯이 단순한 문학적 종류인 동시(詩)를 넘어 즉 시조는 시간, 현재, 과거와 미래, 생(生)과 사(死), 그리고 우주를 스스로 다스리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우주관이 담긴 문학입니다.   4). 동시조 형식의 재해석    시조의 기본 형식을 따른다.그러나 그 형식의 해석을 동시조의 눈높이로 다시 할 필요성은 지금의 시조단이 가지고 있는 3장6구12음보의 어려운 형식적 해석으로 그 한계가 있다. 이는 해석의 질의 수준이 아니라 동시조 눈높이라는 선과 우리 민족의 정서와의 선에서 서술하려고 한다.   시조의 기본 형식은 아래와 같다. ------------------------------------- 초장│....3....│....4....│....3....│....4.│ ------------------------------------- 중장│....3....│....4....│....3....│....4..│ ------------------------------------- 종장│...(3)...│..5.... │....4....│....3. │ --------------------------------------    위 형식에서 각 장을 다시 반으로 나누면 6구가 그리고 그 6구를 다시 반으로 나누면 12음보다. 이는 누구나 한번쯤 듣고 아직 이 형식의 해석에서 가감의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고 어찌 보면 이 형식의 무게로 인해 시조의 대중성 (대중성이란 많은 사람들이 쓴다는 것 보다 이 글에서는 생활속에 쓰여 진다 로 해석 한다)을 확보 못하는 무게다.     여기서는 의 해석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서 그 출발점을 찾고자 한다. ----------------------------------------------- 초장(하늘)│ 3(1월) │ 4(2월) │ 3(3월) │ 4(4월) │ ----------------------------------------------- 중장 (땅) │ 3(5월) │ 4(6월) │ 3(7월) │ 4(8월) │ ----------------------------------------------- 종장(인간)│(3)(9월)│5(10월)│4(11월) │3(12월)│ -----------------------------------------------   이는 앞장에서 해석한 '시조(時調)'의 어원 풀이에서 서술한 것처럼 막연한 문학적 장르가 아닌(詩) '시간(時) 즉 生과死을 포함한 우리 민족의 정서 그리고 우주관이 담긴 시(時)조(調)를 즉,'하늘과 땅 인간(작자)을 다스리는 우리 고유의 문학이다'라는 선상에서 3장의 형식이 아우르며 그 하늘. 땅. 인간 즉 다스림의 길에 우리 언어의 자연스러운 길이(한국인이 가지는 언어의 기본 길이) '구'가 형성이 되고 각 구의 형성하는 단위인 음보가 12음보로 통하며 이 12음보는 일 년 12달의 각 내재적 특징을 가진다.    이는 3장6구12음보가 시조의 형식이란 존재보다는 아우름과 다스림의 존재이며 하늘·땅·인간이 서로 공존한다는 형식속에 내재되어진 형식이 시조의 특징이 있다.    초장(하늘)·중장(땅)·종장(인간)은 독립적이나 그 독립은 각 장의 공존으로 다시 어우르며 생성되는 원리이다.    좋은 시조(동시조)를 보면 각장이 독립적이면서 각장이 전체로 아우러짐을 볼 수 있다.즉 자유시와 또 다른 특징이다. 이는 3장6구12음보의 막연히 글자수 맞추는 문학이 아니라 우리 민족적 정서가 승화된 우리 자신의 태를 찾는 극히 자연스러운 '쓰기'로 발전하는 행이다. 즉 시조는 형식 속에 더 큰 형식이 내포되어 있다. 이 쓰기란 '한글사랑'의 가장 보편적인 행함이다.   5). 동시조의 전개 방법   동시조 전개 방법은 아래 분류 내용의 순서를 정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시간을 정하고 계획표를 만들어서 적용하기에는 문학이 가지는 비선형성을 강조하고자하며 동시조 쓰기 선행 뒤에 이론의 따름이 그 이유다.   즉 어린이들은 시조의 이론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조를 쓰고 싶어 한다. 아래 각 항목은 서구적 문학이론이 가지는 시간적인 순서의 논리이며 서구적'과 우리 정서의 표현 실제 예는 '연극'과 '마당극'의 차이로 그 예를 볼 수 있다.이는 연극이 가지는 장소(무대)의 제한의 성격과 우리 마당극이 가지는 무한의 공간미와 원형(태극)의 멋이 그 차이다.   아래 각 항목은 그때그때 마당극적인 요소로 앞과 뒤가 없으며 뒤가 앞을 앞지르지 않으며 버리되 찾을 곳에 두어야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우리가 나로 돌아오는 원리로 적용 해야 한다.    즉 동시조 작품 생산의 도구로 우리 마당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놀이(제기차기,윳놀이,팽이치기,화살던지기,연만들기 등)에서부터 마당의 성격을 이용한 놀이 개발과 사용으로 동시조가 단순히 쓰기 문학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하며 이는 동시조 생산의 지속성의 최대 무기이다.   ●소재(글감의 대상) 찾기 ●제목·주제 찾기 ●소재(글감의 내용) 찾기 ●일반적 이야기 전개와 정 ●동시조 형식에 얹음과 겯가지 치기 ●퇴고 ●감상·낭송 ※감상의 단계에서 낭송은 꼭 필요하다.   6). 동시조 퇴고 실제 방법    여기에 소개하는 퇴고법의 목적은 다수(50이상) 어린이들이 짧은 시간에 동시조 쓰기를  생활화 할 수 있고 그 작품 수준이 참여 어린이들 모두가 한번의 작품 퇴고로 일정 수준의  작품을 쓸 수 있게 하기위해 적용된 사례를 정리한 내용이다. 어느 작품에도 즉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며 특히 다수의 인원을 시조쓰기에 동참하도록 하기위한 방법을 목적으로 한   다.          (1).동시조에 쓰지 못하는 단어인가?                                  ( 8. 동시조에 쓰지 못하는 단어 참조 할 것)          (2).시조 가락의 열림과 닫힘 미학    여기에서는 장과 장의 열림과 닫힘만을 서술한다. 음보와 음보의 열림과 닫힘은 다음을   약속한다. 가락의 열림과 닫힘이란 장과 장이 넘어가면서 가지는 가락의 조절 기능을 서술   하는 것으로 가락의 부분과 내용의 부분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시조가   가지는 장의 열림과 닫힘 그리고 종장이 가지는 가락조절 형식의 내포을 서술하며 시조가   가지는 가락의 열림과 닫힘의 미를 작품 속에서 느끼기 위함. 시조의 내용의 흐름은 일반   적으로 초장은 작품을 펼치고 중장은 아우르며 종장은 다스림의 완성 형태의 작품들이   대분이다.    이런 내용적인 흐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되는 시조의 가락의 열림(가락 여운의 진행)     과 닫힘(가락 여운의 맺음)이 발생하며 이는 내용의 흐름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면이 많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시조의 열림 소리와 닫힘 소리를 구분하며 시조가 가지는 가락의 열림    과 닫힘의 미학을 실제 작품에 적용하기위한 기술적 서술이다.    열림과 닫힘은 각 장의 마지막 가락(네째 음보)의 여운 성격이 가지는 장과 장의 연결적 기    술이며 그 특징적인 구분을 통해 시조가 가지는 열림과 닫힘의 미학을 발견하기 위함.   ❶열림소리 * 완전열림:'~고' '~이' '~을(를)' '~은(는)'’~면’ 등 * 중성열림:종결형 어미(~다,~요,~네 등) 명사 등   ❷닫힘소리 * 닫힘:종결형어미( ~다,~요.~네 등)    시조 가락의 열림과 닫힘의 기본 형태는 초장-열림, 중장-열림(중성열림)종장-큰닫힘의 형    태 하나와 초장-열림(중성열림),중장-닫힘 종장-큰닫힘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즉 가락의 완    급조절을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투영한 결과물이다.    문제는 중성열림의 쓰임이다. 이를 구분하기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하기에 그 구분의 성격    을 서술한다. 작품에서 초장이 완전열림 소리로 끝나고 중장에서 닫힘과 중성열림 소리인 종    결형 '~다'가 왔다면 이것은 완전 닫힘으로 구분하고 초장이 닫힘과 중성열림인 '~다'로 끝    나고 중장에 완전열림인 '~고'가 왔다면 초장의 그것은 닫힘으로 본다.  초장이 닫힘인 '~다'로 끝나고 중장이 다시 닫힘인 '~다'가 왔다면 초장 중장이 중성적 닫힘   이다. 초장이 완전열림 '~고'로 끝나고 중장도 완전 열림인 '~고'로 끝났다면 중성적 열림이    다.  위의 중성적 열림과 중성적 닫힘 작품의 완성은 종장의 성격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나타난다.    중성적 열림의 작품이 종장에서 똑 같은 완전열림인 '~고'로 마무리한다면 가락의 열림과    닫힘의 미가 조화를 잃은 특징이 있다.즉 작품이 완전열림의 작품이 된다. 이런 작품은 읽는    맛이 반복적이며 나열식 느낌을 가진다.   이 중성적 열림의 작품은 3장중 한 장은 닫힘의 가락적 여운이 필요하다.    중성적 닫힘의 작품이 종장에서 똑 같은 닫힘 '~다'로 마무리한다면 이 또한 가락의 열림과    닫힘의 미가 조화를 잃은 특징이 있다.즉 이 작품은 완전닫힘의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읽는    맛이 산문적인 서술형태의 글의 느낌을 가진다. 이 중성적 닫힘의 작품도 3장중 한 장은 완    전열림의 가락적 여운이 필요하다.    즉 이런 시조의 미를 잘 이해 못하는 작품에서는 읽은 맛이 떨어지고 이를 보완하기위해     여러 가지 행연의 조합(자유시적 배열) 및 무의미한 쉼표, 말줄임표, 느낌표, 물음표 등의 겯    가지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종장이 가지고 있는 시조 가락의 완급 조절 기능이다.종장의    자수 형식은 초장 중장의 가락의 완전한 완급조절을 위해  ★첫째 음보는 우리 언어의 가장 자연스러운 길 3자수를 고정시키고,  ★둘째 음보에서는 초장·중장 가락의 모난 부분들의 아우름을 위해 긴 여운의 5~7자수를 두었으며,  ★세째 음보에서는 둘째음보의 긴 여운을 자연히 삭히듯 급격한 자수의 변화를 두지 않기위      해 4자수를 두었고, 셋째 음보의 여운을 마무리하는  ★네째음보는 종장의 첫 음보처럼 3자수로 돌아오는 우리 언어의 미적 완결을 가진 것이 시      조 종장의 특징이라는 사실이다. 즉 시조는 종장의 성격으로 인해 시조의 깊이를 스스로       느끼게 하는 맛이 있다.    이 열림과 닫힘의 미를 장과 장의 범위에서만 서술하였으나 더 확대하면 6구와 12보로의     열림과 닫힘의 원리로 이어진다. 지면상 6구12음보의 열림과 닫힘의 원리는 다음 지면을 약    속하며 조금은 기술적이나 이는 시조의 내적가락 무게의 원리로 보아 자유시와 다른 기준의    기준이다.   즉 열림은 닫힘으로 이르며 닫힘은 열림으로 닿고 종장은 그 열림과 닫힘의 완전한 완급조    절 기능을 가진다. 이는 단수에서 그 특징이 잘 나타나며 연시조의 경우 조심해야 할 것은     자유시의 영향으로 이 가락의 열림과 닫힘을 버리고 단편적 자수의 맞춤과 배열(행연)의 회    화적 무족건적 수용이 위험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 예와 작법은 지면상 다음 기회를     약속한다.             (3).의성어·의태어 사용법    동시조란 특성상 작품에 쓰여지는 단어군의 특징중 의성어·의태어의 사용과 그 많은 사용상    꼭 퇴고의 범주에서 서술해야하는 필요성을 본다. ①.그 수를 어느정도 제한적으로 사용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수의 문제보다 시조가 가지는 언어의 다스림(가락)에 기준이 있다.    즉 의성어·의태어의 다용은 시조가 나열식 문장으로 흐르고 그 가락의 흐름이 튀고    탁해지는 성격을 가진다. ②.동일 성격의 의성어·의태어가 또 다른 형태로 사용되었는가? ③.의성어·의태어의 연속적 사용이 있는가? ④.의성어·의태어의 연속적 사용이 자연 스럽는가? ⑤.의성어 의태어의 자수가 3.4음보에 맞게 고쳐질 수 있는가?    특히 종장 마지막 음보에서는 기본 형식에 맞도록 퇴고해준다               (4).한 작품 내에 동일 단어의 사용 ①.그 단어의 수가 적당한가?(단수에서 특히 조심하여 사용) ②.동일 이미지(내용포함)를 가지는 성격으로 중복되어 사용되지 않았는가? ③.동일 단어가 변이형으로 여러번 사용되지 않았는가? ④.동일한 단어 사용이 자수을 맞추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는가? ⑤.제목으로 이미 사용한 단어를 작품 속에 다시 사용하였는가?                 (5)곁가지 치기     여기서 곁가지란, 작품속에서 버려도 그 뜻이 통하고 자수의 자연스러움(3.4조)에 가까워     질 수 있다면 버려도 되는 작품속의 모든 문자형태. 즉 겯가지 치기의 원칙은 시조가 가락     의 축에서 자수로 가는 문학이라는 것을 실천하기 위함.   ❶'~의'를 버려도 그 풀림이 자연스럽고 뜻이 전달되는가? ❷'~에'를 버려도 그 풀림이 자연스럽고 뜻이 전달되는가? ❸'~를(을)'를 버려도 그 풀림이 자연스럽고 뜻이 전달되는가? ❹'와(과)'를 버려도 그 풀림이 자연스럽고 뜻이 전달되는가? ❺'~도'를 버려도 그 풀림이 자연스럽고 뜻이 전달되는가? ❻'그래서,그래도,그러나,하지만'등의 쓰임이 꼭 필요한가?      주의)위 곁가지 치기의 우선 순위는 가락의 다스림이 자수의 다스림으로 가야 한다.                 (6).고시조 답습식 단어군 퇴고    일선에서 어린이들이 생산하는 동시조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의 하나가고시조풍의 단어의    사용과 그것을 시조라고 믿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 시조교육의 극명한 현실이며 시조인들 사이에도 아직도 그런 작품을 생산하고 그것 이 시조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조의 노령화의 연속적 수레바퀴의 틀에서 현실인식    과 자기 노력이 없는 현실의 결과이다. 시조라는 어원의 재해석의 인식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시조는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현실의 치열한 삶이며 그 치열함이 미래지향적이 문학의     생산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예) ~거라,~니,~랴,~라,~리,~이다,~더니,~로다,~오,~도다,세월,달빛,풍경,업겁,목탁소리,    청산 등.                     (7).장과 장 퇴고 ①.각 장은 뒷장 가락의 가락을 방해하지 않는가? ②.각 장의 넷째 음보의 여운이 뒷장의 첫째 가락에 영향을 주지 않는가? ③.각 장은 독립적인 완결성을 가지는가? ④.각 장의 내용은 잘 어울리는가? ⑤.제목과 각 장의 내용이 잘 어울리는가?                    (8).종장 퇴고    종장을 따로 서술하는 이유는 시조의 중심에 있는 장이며 시조의 특징이있는 장이기에 그     퇴고의 중요성은 어는 장보다 중요하다.   ①.종장의 첫음보의 자수 3은 지켜지고 있는가? ②.종장의 둘째 음보는 5~7자의 가락을 갖는가? ③.종장의 첫음보가 둘째음보에게서 독립성을 확보하였는가? 즉 자수가 아니라 가락이다. ④.종장의 둘째 음보가 나열식 단어 사용으로 작품이 쓰여지지 않았는가? ⑤.종장의 둘째음보가 의성어·의태어의 단순 채움이 아닌가? ⑥.종장의 마지막 음보가 의성어·의태어 자수를 3으로 퇴고 할 수 있는가? ⑦.종장의 첫 음보가 막연한 자수을 맞추기 위한 연결형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하지만 등 등'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9).내용과 제목의 퇴고     동시조에 쓰여지는 내용(소재포함)과 제목은 일부 기성시인들의 동시조(동시) 작품의 내용     과 제목에서 그 문제 점을 찾을 수 있다.이는 동시에서도 자주 문제시되는 동시와 비동시의     문제와 같은 문제로 동시조의 주체가 어린이라는 인식의 바탕은 공감하면서도 실제 발표되     는 작품에서 보면 어린이들이 수용하기에는 힘든 내용과 제목을 가진 작품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최고 작가 등용문이라는 신춘문예 동시부문에서도 이런 문제가 아직도도출되고 있는 현실     에서 그만큼 접근 방법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내용부분은 ①.어린이가 읽기에 적절한 소재와 내용인가? ②.불건전한 내용이 아닌가? ③.개인의 우상화나 자랑의 내용이 아닌가? ④.종교적 비방이나 우월성의 내용이 아닌가? ⑤.세계평화의 이념에 벗어나는 내용이 아닌가?   ※제목부분은 ①.비논리적 제목 ②.추상적인 제목 ③.특정인을 지칭한 제목 ④.어린이 정서와 멀어져 있는 제목 ⑤.어린이가 수용하기 힘든 소재의 제목   7).배열(행연)의 문제     배열의 문제를 올리는 이유는 현재 기성시인들이 쓰고 있는 시조작품의 많은 양이 자유시     가 가지고 있는 배열을 따르고 있고 이는 동시조를 배우는 어린이들에게 자유시적 배열을     학습하기보다 자유시와 시조의 차이점을 알리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즉 자유시의 그 자유     분방한 배열이 시조의 멋인 가락의 맛과 분명 다르며 여기에서 현재 문제시 되고 있는 시    조 파격의 한계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즉 시조의 표준형인 3열배열 고수가 아니     라 자유시와 다르다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며 그 차이를 어린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해야한다.             (1). 3열배열(3장배열)  ★ 3장의 각장을 한 열로 보고 3줄로 배열한 형식    ˚초기 동시조(시조)를 배우는 어린이들에게는 3열 배열 쓰기를 익히도록 해야 하며    ˚쓰기와 함께 필수적으로 낭송으로 우리 시조의 3장6구의 맛을 몸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시조의 맛을 가장 느낄 수 있는 형식이며 자연히 3장6구12음보를 몸으로 습득할 수 있는      형식.             (2). 종장나눔4열배열    초장과 중장을 각 한 열로 하고 종장의 첫 음보을 다시 한 열로 잡고 종장의 첫 음보를 뺀    음보를 한 열로 하는 형식이다. 이 형식의 특징은 시조의 종장이 가지는 첫음보의 자수의 맛     과 종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형식이다.             (3). 종장독립5열배열   종장 나눔4열이 종장을 둘로 나눈다면 본 형식은 초장과 중장을 각각 반으로 나누어 4열로    하고 종장을 한 열로 한 형식. 초장과 중장의 구의 맛을 느낄 수 있고 종장의 독립성으로 시    조가 가지는 종장의 독립적 맛을 느낄 수 있는 형식.             (4). 3장나눔6열배열    각 장을 반으로 나누되 종장의 첫 음보를 한열로 하여 6열로 배열한 형식. 이 형식에서는 종장의 두 열(연)을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시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5). 기타 배열    이외에도 많은 배열이 있을 수 있으나 어린이들에게 시조의 맛과 처음시조를 배우는 사람    들에게는 자유시와 혼동 할 수 있는 여지가 많고 위험한 발상으로 본다. 즉 시조의 정형은     단수 3열 배열이라는 힘을 얹는다.   8).동시조에 쓰지 못하는 단어     이 항목을 따로 서술하는 근본 목적은 '한글사랑'의 실천이며 퇴고의 실질적 방법으로 사    용하기 위함.            (1)사전에 없는 단어. 단 작자의 의도에 따라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쓰여 져 객관    화한 조어(만든 단어)는 제외.      예) 꽃바람,꽃그늘,하늘바다,꿈길,꿈나라,하늘나라 등등            (2).개인적인 단어.    즉 개인의 언어생활 중에 굳어진 단어로 표준어의 범위를 벗어난 단어.            (3).욕, 장난 단어와 은어 및 채팅언어            (4).특정 상품의 이름 및 제품     예) 나이키.프로스펙스.신라면,진로소주,안성탕면,엘란트라(차 이름) 피카추.            (5).특정인의 이름     예) 가수, 연예인, 운동선수 등등 그러나 역사를 속 위인 및 나라를 빛낸 사람들 제외.     예) 이순신,손기정,유관순,이이,최영,황영조            (6).사전에 있는 단어중 글자수(자수)에 맞추기위해 단어를 늘여서 쓴 단어            (7).아름다운 한글이 있으나 한자어로 쓴 단어   9).시조작법 명언집   시조작법 명언집을 올리는 이유는 이것이 이론적인 측면보다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나온 글이라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   *추구하는 것을 게을리 하는 데서는 그 진수가 드러나지 않는다.      (1994.8 고 박재삼 시인) *특히 단수에서 열고(초장) 펼치고(중장) 닫는 (종장) 가락의 완급 조절을 어떻게 했느냐가 곧       작품의 성패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1993.6 박시교 시인) *시조는 오늘 우리들 삶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이지 결코 영탄일 수가 없다.      (1993.12박시교 시인) *항상 캐는 것이 없이는 안되는 것이 시조이다.      거기서 시도(정형율) 다스려야 하며 가락도 우러나와야 한다      항상 시조는 이 두가지가 운명적으로 따라다닌다.      (1994.9 고 박재삼 시인) *그것은 마치 절에가서 공 들이는 행위와 비슷한 일인지도 모른다.      (1994.8 고 박재삼 시인) *형식 그리고 가락 그리고 創意도 캐야하는 것, 요는 부지런히 대드는 것이 요긴하다.      (1994.6 고 박재삼 시인) *보폭이 마치 물흐르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1996.2 박시교 시인) *가락을 자연스럽게 다스리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과제다.   즉 시조를 잘 쓴다는 것은 이       합격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난다.          (1994.12 고 박재삼 시인) *시조의 정석은 역시 단수(短首)입니다.(고 박재삼 시인) *불필요한 생각의 곁가지를 과감하게 쳐내는 일도 아주 중요합니다. (1995.6 박시교 시인) *시조는 말할 나위 없이 가락의 문학이다.         (1992.10 고 박재삼 시인) *시조는 자고로부터 정형(定型)이면서 비정형(非定型)의 면모도 아울러 갖고 있는 셈이다. (고        박재삼 시인)   *한국시의 내일은 시조와 더불어 논의되어야 마땅하다.         (1994.1 박시교 시인) *시조는 3.4조로 되어있는 우리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정형시다.         (1994.7 고 박재삼 시인) *하루 이틀의 가벼운 수련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고, 요는 부지런히 대드는 것이 요긴하다 .           (1994.6 고 박재삼 시인) *오늘 마음대로 안되니 어렵게 치부할 것이 아니라 늘 보물을 캐는 심정으로 노력해야 한다.           (1994.11 고 박재삼 시인) *항상 캐는 것이 없이는 안되는 것이 시조인 것이다.         (1994.4 고 박재삼 시인) *초중종장의 연결고리가 잘 어우러져야 하고 특히 종장 머리가 산뜻하여야만 한 편의 시조로         서 그 성과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1996.2 박시교 시인) *3행(장)의 짧은 시행속에 모든 생각을 정리하여 담아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 입니다.            (1995.6 박시교 시인) *시조의 단수는 정형시로서의 가장 정제된 외형률뿐 만 아니라 내용도 잘 다듬어야만 하는 시         의 보석인지도 모릅니다.        (1995.4 박시교 시인) *시조의 멋은 역시 가락이다.그리고 그 가락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마치 강물이 흐르듯         이 유장하여야 하며 작위적인억지가 드러나서는 아니된다. (1993.3 박시교 시인)   10).마당 닫는 글    동시조가 가지는 의미중 그 방법의 실천적 바탕에 무게를 두고 싶다.그것은 시조가 우리글이란 자기만족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고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의 눈에 가까워지는 미래 시조의 완성 행동이다.    동시조는 앉아서 쓰는 작품의 세계가 아닌 시조 어원이 가지는 의미가 그렇듯 일어나 행동하는 시조의 쓰기와 가르침의 원형이다.    동시조는 시조가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들의 생각       ❶어려운 글(문학)이다       ❷사회 현실 외면의 문학이다.       ❸옛 냄새의 문학이다.       ❹서정은 있으나 사유에 벗어나 있는 노인들의 문학이다.를 한 순간 벗을 수 있는 대안          이다.    시조론의 이론 습득이 아닌 쓰기와 가르침의 실천을 위해 동시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     어나라. 이 시대 시조가 가진 최대의 적은 ‘자기 노력이 없이 시조란 울타리에서 안주하는     것이다’   동시조,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어나라.   [출처] 동시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어나라|작성자 옥토끼  
517    동시조를 잘 쓰려면 댓글:  조회:5503  추천:0  2015-05-20
  동시조창작에 도움주기 위하여 한국 하순희시인의 동시조창작에 관한 글을 올립니다. 우리 시 - 동시조를 잘 쓰려면                   -경남신문사 발간  수록                                                                                                      하순희 1. 우리 민족문학의 꽃 시조 ①시조와 동시조란 어떤 글인가.   어린이 여러분! 동시조의 나라로 함께 가 볼까요? 동시조를 알려면 먼저, 시조란 어떤 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동시조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문학 형식인 시조와 동시가 만나면서 이루어집니다.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노래이고 정형시인 시조의 율, 형식에 맞추어 동시를 쓴 것이지요. 시조는 우리의 자연 환경과 생활감정, 민족정신을 우리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문학 형식입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서양의 14행시(소네트), 일본의 [와카] 와 [하이쿠]라는 단가,중국의 율시(칠언율시, 오언절귀) 등도 그 나라의 민족시로서 사랑 받고 어릴 때부터 배우고 익히고 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동시조를 많이 배우고 익혀서 생활 속에 함께 하도록 사랑하여야겠습니다. 3장 6귀로 된 이 특별한 형식은 고려시대 말쯤에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그 바탕은 아득하게 먼 부족국가 시대의 민요에서부터 신라의 향가와 고려의 별곡(속요) 등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 시조라는 찬란한 꽃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시조라는 이름은[시절 가조]의 줄어진 말로서 [그 시대의 정신이 담긴 노래]라는 뜻입니다. ②동시조의 역사   동시조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40년에 아동문학가 이구조 선생님이 〈아동시조의 제창〉이라는 글을 통해 동아일보에서 어린이 시조 운동을 주장하였고, 1950년경부터 시조시인 정완영 선생님이 어린이들을 위한 동시조를 쓰는 한편,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시조 짓기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1963년 개천예술제에 시조부 백일장을 이명길 시인께서 만들어 해마다 어린이 시조 짓기 대회를 갖는 한편, 여러 곳의 모임에서 시조 짓기를 권장하여 영남지방은 다른 곳보다도 어린이 시조 짓기 공부가 훨씬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1964년 12월 아동문학가 이석현 선생님이 〈계간 아동문학〉 10집의 「아동문학의 미개지」라는 글에서 동시조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뜻을 같이한 박경용, 김상옥, 정완영, 유성규, 이근배, 정의홍, 서벌 등 여러 선생님이 좋은 작품을 선보여 동시조의 걸음을 먼저 가 주셨습니다.   지금 현재 동시조만 전문으로 쓰는 작가는 거의 없습니다. 시조를 쓰는 시인들이 꾸준히 동시조도 쓰고 계시는데, 동시를 쓰는 분이나 시를 쓰는 분이나 다른 문학의 분야에서도 좀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좋은 동시조를 쓰도록 노력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중에도 정완영 선생님은 1979년 정초에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듯이」를 내셨으며, 1999년에 「엄마 목소리」라는 동시조집을 두 번째로 내셔서 훌륭한 작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맥을 이어받은 경남 시조 문학회는 1991년부터 전국에서도 시조만을 단일종목으로 백일장을 꾸준히 개최하여 그 횟수가 9회에 이르렀으며 입상 작품집을 발간, 각 초등학교에 배부하여 어린이들의 동시조 보급에 실질적이고 유익한 작업을 계속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마산의 양계향 시인도 초등학교 시조부를 실제로 지도하여, 그 학생들에게서 나온 작품들을 엮은 「산호빛 목소리」라는 알찬 동시조집을 7집까지 내어 하기 힘든 뜻깊은 일을 하였으며, 광주의 박석순 시인이 「한국 동시조」라는 동시조 만을 전문으로 계간지를 발간하여 많은 시인들이 동시조를 창작하고 발표하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③동시조의 짜임과 실제 쓰기   먼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동시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볼까요? 동시는 사물에 대한 아름다운 생각들을 어린이가 쓰거나 어린이의 생각으로 어른이 쓴 것까지를 함께 말함이지요. 동시를 쓸 때는 리듬을 살려서 길지 않고 짧게,여러 가지 비유를 해가며 아름답게 씁니다.   동시는 이러한 동시를 시조의 형식에 맞게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조의 형식이 어떻게 되어있나 알아봅시다.   시조의 형식은 3장 6구(대개 45자 내외)로 이루어져 있는데 실제 예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장      3 (4)   4 (3)     3 (4)   4 (3)               구               구 중장      3 (4)   4 (3)     3 (4)   4 (3) 종장      3     5 (∼9)    4 (3)   3 (4)         절대불변 초장      동그란 누나 곁의 / 동그란 동생 얼굴               3              4            3        4 중장      그 옛날 바닷가의 / 동그랗던 우리 웃음                 3         4               3         4 종장      조약돌 굴릴 때마다 / 누나 곁의 작은 나                ③         5                    4        3               불변                                                                           ―박경용의 〈조약돌〉 초장      높이 뜨면  높이 뜨면 / 푸른 하늘 꿈이 실리고                    4          4                 4           5 중장      낮게 날면 낮게 날면 / 고추밭에 무지개 선다                 4          4                4           5 > 종장      나두야 고추잠자리 / 날개 하나 달았으면               ③         5                 4            4               불변                                                                                         ―정완영 〈고추잠자리〉 이 두 편의 시조에서 짜임을 살펴봅시다. ㉠ 기 본 율 :   3·4 또는 4·4조 ㉡ 3장  6귀 :  초장, 중장, 종장이 각각 2귀로 되어 전체가 6귀로 짜임 ㉢ 전체짜임:                        초장   3(4)  4(3) / 3(4)  4(3)─┐                     중장   3(4)  4(3) / 3(4)  4(3)  │(45자 이내)                     종장    3     5  / 4(3)  3(4)─┘   위와 같이 3장 6귀 45자 이내의 기본 형태에서 각 구절의 글자 수 변동은 약간씩 허용되고 있지만,  종장의 첫 3음절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되며, 종장의 둘째 마디 5음절도 5자 미만은 안되고 5∼9자 이상을 허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종장의 두 마디는 꼭 지켜야만 정형시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마디는 음보율(글자수)을 다소 벗어나도 괜찮으므로 정형시이면서 자유로운 표현을 많이 허용하고 있습니다. ④형식에 따른 동시조의 구분   ㉠평시 조 : 단시조. 보통의 시조로서 3장 6귀 12마디. 45자 안팎.   ㉡연시 조 : 평시조가 두 수 이상인 시조.   ㉢엇시 조 : 중형시조. 평시조의 초장, 중장 중 어느 한 장의 글자수                가 매우 길어진 시조.   ㉣사설시조 : 장시조. 평시조의 초·중·종장이 모두 길어진 시조.                 시대를 풍자할 때 많이 쓰임.   ㉤절장시조 : 한 마디로 종장만으로 이루어진 시조.                 첫머리 3음절만 지켜서 15자 안팎이 되게 함. 이명길                 선생님이 주장한 것으로 국어시간에 짧은 글짓기하듯이                 쓰거나 처음 동시를 쓸 때 시조 짓기의 첫 단계에서 훈                련하는 방법으로 적합함.   ㉥양장시조 :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주장한 것으로 평시조에서 중장                을 빼고 초장, 종장 만으로 쓰는 시조. 절장시조에 초장                을 붙이면 양장시조가 됨. 동시조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연습을 많이 하면 동시조의 형식을 익히는데 유익함.    2. 동시조의 실제와 감상   첫 장에서는 시조의 특징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예로 든 작품들을 더 살펴보면서 공부해 보도록 합니다. 이 작품들은 여러 시인들이 어린이 여러분들을 위해 쓰신 동시조들입니다. 특히 종장의 표현을 어떻게 했는지 주의 깊게 보며 감상해 봅시다.   (평시조의 보기) 초장      벌써 가을이 진다 고궁은 가을이 진다             2       5                 3        5 중장      노오란 소낙비로 오능잎 가을이 진다                3        4             3        5  종장      바람도 조각난 가을 우수수 가을이 진다             ③            5              3        5                                         ―김상옥 〈오능잎〉 초장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3        4              3        4 중장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3        4             3          4 종장      밤사이 활짝 퍼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③          5                  4        3                                 ―정완영 〈분이네 살구나무〉 초장      금붕어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중장      천사의 날개옷 같은 금비단 지느러미 종장      잠결에 행여 구길까봐 누가 훔쳐 갈까봐                                                        ―허일 〈금붕어〉 초장      찬찬히 들여다보면 꽃잎새 들여다보면 중장      별들이 숨어있네 순이가 숨어있네 종장      고향길 돌담 사이로 순이가 걸어오네                                       ―박석순 〈꽃잎새 들여다보면〉             (연시조의 보기) 보리밭 건너오는 / 봄바람이 더 환하냐 징검다리 건너오는 / 냇물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 소리가 더 환하다 혼자 핀 살구나무 / 그늘이 더 환하냐 눈감고도 찾아드는 / 골목길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 그 목소리 더 환하다                                      ―정완영 〈엄마목소리〉 풀 한 잎 또옥 따서 / 냇물에 띄웁니다 생각 한 잎 또옥 따서 / 내 마음에 띄웁니다 잠길 듯 배 되어가는 / 풀 한 잎, 생각 한 잎 풀 한 잎 생각 한 잎 / 자꾸 따라가서 띄웁니다 숙이네 아랫마을 / 돌아앉은 꽃마을로 잠길 듯 아, 잠길 듯이 / 내 하루가 떠갑니다                                ―서벌 〈풀 한 잎 생각 한 잎〉 청산에 바위 있고 / 절이 있어 아름답다 수도하는 스님 몸에 / 사리에 들어있듯 청산도 뭇 바위들을 / 사리처럼 품고 있다 봉덕 아기 넣어 만든 / 천하명품 에밀레종 평민으로 살았으면 / 백년 겨우 살았을 걸 그 아기 종에 들어가 / 천년 이상 살고 있다 도구와 모필 모두 / 궁핍했던 그 옛날 한 글자 오자 없이 / 써서 새긴 팔만장경 이 시대 조각기술도 / 보존 기술도 세계 으뜸.                                    ―도리천 〈절 가는 길에서〉 날아라 비행기야 푸른 하늘을 날아라 흰 구름 동동동 정답게 팔짱 끼고 우리들 마음 가 닿는 끝끝까지 날아라                                     ―양계향 〈종이 비행기〉 봄이면 예쁜 새싹 쏘오옥 보내주고 여름에는 푸르른 이파리 우산 드리우네 가을엔 향그런 사랑 나무마다 주렁주렁 꿈을 엮는 가슴마다 파란 하늘 열어서 조롱조롱 알알이 꽃 마음 담아주네 온 세상 가득 채우는 한없는 사랑 덩어리                                      ―하순희 〈햇살은〉             (절장시조의 보기)                           편지 - 마음 속 반가운 정이 글자마다 숨었네 책 - 언제나 나의 길동무 일러주는 바른 길 친구 - 지나간 여섯 해 동안 피어온 우리의 우정 도시락 - 엄마의 따슨 마음이 밥알마다 깨소금 맛 짝지 - 화나면 토라지지만 언제나 어깨동무 선생님 - 오로지 한 마음 다해 쏟아 붓는 뜨거운 정 꽃 - 송송송 봉오리마다 번져오는 그 미소                                                       ―하순희-             (실제로 지어봅시다) 연필   - _______ _______________ __________ __________ 어머니 - _______ _______________ __________ __________ 3. 동시조의 실제      위에서의 여러 작품을 참고하여 실제로 작품을 써 봅시다. 동시조는 (동시+시조)의 형식이라고 한 말을 기억합시다. 처음부터 바로 시조를 써도 되겠지만 좀 더 쓰기 쉽게 하기 위해서는 동시를 쓴 후에 그 동시를 시조의 형식에 맞게 다듬으면 됩니다. (가) 아침 ―하순희    ㉠아침은 반짝반짝 빛난다      피아노 건반 같다    ㉡아침이면 햇님도 활짝 웃으며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른다    ㉢큰산도 기지개를 펴며 단잠을 깬다 (나) 아침    ㉠아침은 잘 닦아놓은      피아노 건반이야    ㉡햇님이 웃으며 와      집집마다 딩동댕동    ㉢큰산도      단잠을 깨며      기지개를 쭈우욱 편다   처음 쓴 동시 (가)에서 시가 되지 않는 설명을 빼 버리고 각 연 ㉠㉡㉢을 시조의 초장㉠. 중장㉡, 종장㉢으로 고쳐 써서 평시조(단시조)를 완성했습니다.   좋은 동시조는 자기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리듬을 살려서 쓰면 좋은 동시조가 됩니다. 자연과 생활 속에서 참된 감동을 잘 담아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아동들이 쓴 동시조 감상      아래 작품들은 어린이들이 직접 쓴 동시조입니다. 경남시조 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 중에서 몇 편을 뽑았습니다.             짝지 ( 96장원)                       마산월포초등학교 6-청결 강미경    고목나무 꼭 붙어 울어대는 매미처럼    내 쉴 자릴 잃을까봐 불안하여 꼭 잡았다.    이따금 혼자 갈까봐 긴장했던 순간들.    내 마음이 외로울 땐 엄마 품을 빌려 주고    내 꿈이 메마를 땐 촉촉히 적시었다.    언제든 나를 위해서 밝은 웃음 보였다.    옆에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아무도 없는데서 단 둘이 얘기하고픈    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웃어줄 나의 반쪽.        선생님(‘94. 장원)                   창원남양초등학교 6-6 박유나    석수장이 선생님 모가 난 곳 손질한다.    따스한 손길 속에 사랑이 느껴지고    훌륭한 작품 남기며 조용히 웃고 있다.    하나하나 마음 편지 눈빛으로 읽어간다.    언제나 함께 있는 체온 같은 보살핌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겨울에도 따스하다.   어린이 여러분! 언제나 환한 마음을 가지고 밝은 웃음으로 겨레시의 텃밭, 동시조를 아끼고 사랑하며 활짝 꽃 피우고 열매 맺도록 노력해야겠지요. 0. 경남시조문학회, 경남시조, 도서출판경남, 1999. 0. 경남시조백일장 입선작품집, 도서출판경남, 1994-1999. 0. 김종상, 생활하는 글짓기, 교학사, 1978. 0. 박석순, 한국 동시조, 한림, 1999. 0. 한국 동시조, 한림, 2000. 0. 이우걸·장석주, 현대시조 28인선, 청하, 1991. 0. 정완영, 엄마 목소리  [출처] 동시조를 잘 쓰려면|작성자 옥토끼  
516    <사랑법> 시모음 댓글:  조회:4240  추천:1  2015-05-19
    + 사랑 사랑이란 희생 땅을 파고 자신을 묻는 것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 입을 다물고 눈으로 말하는 것 그리고 살을 가르는 것 無言의 침묵 (박영하·시인, 1955-)  + 사랑법·1 말로는 하지 말고 잘 익은 감처럼 온몸으로 물들어 드러내 보이는 진한 감동으로 가슴속에 들어와 궁전을 짓고 그렇게 들어와 계시면 되는 것. (문효치·시인, 1943-)  + 사랑법  사랑은 풀무  지필수록 가슴은  용광로가 된다.  사랑은  쇠붙이  달굴수록 연하게  휘인다.  나는  대장장이  오늘도 달구고  담금질하고  담금질하고 또 달구어  사랑을 주조해 낸다.  (진의하·시인, 1940-) + 이 시대의 사랑법  사람 하나 사랑한다는 것은 제 목숨 촛불처럼 태우는 것이다. 이 가난한 겨울밤에도 누가 누구를 사랑하여 제 목숨 태우는지 그믐이 끝없이 환해 오고 멀리서 잃어버린 노새가 뜨겁게 울고 있다. (김왕노·시인, 1957-)  + 사랑법 스칠 때마다  넌지시  닿고 감기면  지긋이  숨 가쁠수록  차분히  궁핍하더라도  아낌없이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사랑법·2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라. 그에게서 아름다움을 끌어내어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라. (기자영·시인, 1965-2009) + 사랑법 - 겨울연가·21  사랑도 지혜로워야 한다면  제주도 돌담이  천년을 지켜온 사랑법을  배워야 하겠네.  바람을 사랑하는 법을  일찍이 깨친 제주도 돌담은  바람을 품었다가도  보내주는 법을 알았다 하네.  떠나는 바람을 가로막지 않고  돌 틈으로 넌지시  보내는 것이라 하네.  (김성옥·시인, 부산 출생) + 사랑법 그대 진실로 나를 사랑하려거든  높고 고상한 이름뿐인 나를 사랑하지 말 것.  다만 낮고 낮은 곳에서 머리 풀고  속으로 흐느끼는 나의 슬픔을 껴안을 것.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땅의 사람들을 위하여 울 것.  외로운 자와 함께 외로워하고,  분노하는 자와 함께 분노할 것.  목말라하는 자의 목마름과  배고픈 자의 배고픔을 나누어 가질 것.  그대 진실로 나를 사랑하려거든  거짓과 속임수와 위선으로 가득 찬  그대 병든 가슴을 죽도록 미워할 것   (서덕석·목사 시인, 1957-)  + 나의 사랑법  향토사연구회 답사길에 들른  방춘서원 한눈에 둘러보고 나오는 길목  돌담 너머 알알이 노랗게 익은 살구알들  임신한 주선생 입맛 다시자  그 남편 오선생 슬며시 살구 서리할 때  신 것을 좋아하는 아내 생각에  나도 덩달아 살구 몇 알 따서 주머니에 담고 왔더니  그날 밤 아내는 웬 살구냐고 묻었다  당신 생각나서 따왔다는 말, 차마 못하고  그냥, 색깔이 하도나 고와서……  그렇게 말꼬리 흐리고 말았다  (김경윤·시인, 1957-) + 사랑법       가끔  그 쓰린 맛이 얼마나 울궈졌나  손가락 찍어 맛보는 것  오지 항아리에 담아  세월을 묵히며  눌러 두는 게 아니라  가끔 휘저어  그대 일상을 뒤집어 놓는 것  혼자만의 가슴속에  간직하는 건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  가끔은  확인해 봐야 하는 것  쓴맛뿐인  그 시험에서  어쩌다 맛보는 달큼한 맛  그 잠깐의 순간 때문에  (조성심·시인, 전남 목포 출생) + 달팽이의 사랑법 벗어버릴 수 없는  삶의 무게  등에 업고 시작된 출가  온몸으로 내딛고 되돌아보면  연결된 선의 발자국  하루하루가  묵언의 수행  내려놓고 싶고 털어버리려 했던  과거와 추억도  평생 들춰업고 가야할 내 몫  깨달음에 온전히 이르러서야  닮은꼴인 사랑도  내 몸에서 꿈틀대는 것을  (한상숙·시인) + 눈의 사랑법 - 大地에게 포근하게 다가서기. 다가서서 감싸안기 부드럽게, 그러다가 때론 눈보라처럼 격정적으로 끌어안기도 하면서. 사랑은  너를 찾아가는 거야. 하늘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맨살 드러낸 벌판이며 산비탈이며 숲속에 숨겨진 풀 한 포기 그대 섬세한 신경 끄트머리까지 찾아 한없이 한없이 내려서는 거야. 굳은 표정 풀어 대지의 가장 낮은 어디라도 덮고 찬 계절내 함께 견디어 살다가 언젠가 봄이 오면 그제야 더 낮은 물로 흘러 그대 몸 가득 꽃으로 피어날 거야 나는. (이태건·교사 시인) + 사랑법  나, 이제 이 말 한마디로  너의 앞길 비켜줄게  뭐 그리 따뜻한 얘긴 아냐  감당할 수 없다는 것  널 잃고 살아가질런지  아직은 좀 이르지만  더 이상 너에게 짐이 되는 나를  내가 못 보겠어  괜찮다면 너의 몫까지  힘이 들고 싶어  망가질 게 여지껏 남았다면  헤어진다 해서 변할 것은 없지  아낌없이 주고만 싶어  한번 사랑했으면  죽는 날까지 사랑해야지.  (이풀잎·시인, 광주 출생)
515    현대시 이렇게 쓰자 댓글:  조회:4943  추천:0  2015-05-18
  현대시 이렇게 쓰자  - 본 글은 박진환 님의 "현대시창작"에 있는 내용을 간추려서 게재했음-  제1장 현대시 이렇게 쓰자  시창작에 따른 몇 가지 관심의 환기  . 物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은 사물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 시적 대상으론 사물이 주어지고, 주어진 사물의 해석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시작 태도 및 발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때 사물을 보인 그대 로, 본 그대로 기록한다면 사실의 재현 이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일종의 모방의 한계를 극복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시를 모방으로 규정함(모방 개념은 플라톤류의 해석인 복사가 아니라 모방함 으로써 즐거움을 맛보는 쾌락의 원리로 봄  -시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로써는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냈을 때 가능해지고  사실을 이동하거나 변용했을 때 가능해 진다.  있을 수 있는 가능한 사실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  새로운 사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됨.  物을 보는 법이 다시 제기됨.-사물을 누구나 보는 데로 보면 안되며 남이 볼 수 없는 부분을 본다거나 감춰진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있는 그대로를 이동시켜 본다거나 거꾸로 본다거나 뉘어서 본다거나 하는 변용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더 쉽지 않 는 일이다.  -예//"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의 예외없이 바람이 분다고 할 것이다. -보통사람의 생각  ;가로수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가로수가 하늘을 쓸고 있다)-시인의 생각  →이는 곧 시인은 사물을 봄에 있어서 항용의 시각이 아닌 見者적 시각을 동원해야함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각, 꼭 보지 않고서는 안될 것을 볼 줄 아는 시각이 그 것으로서 이는 랭보가 일찍이 見者詩學에서 지적했던 바다.)  정서적 주정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습작기 사람들의 특성; 본 것을 본 대로 쓰고자 한 것과 같이 느낀 것을 느낀 그대로 표출하고 자 함으로써 直情에 의탁하기 마련이다.;그 때문에 본 것을 본 대로 쓴 것이 사실의 기록에 불과하듯이 느낀 것을 느낀 그대로 쓰는 것도 느꼈 던 사실의 기록에 불과하게 된다.  -정서적 진술이 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정서적 진술처럼 감미롭고 직정처럼 가슴에 직접 와닿는 것도 없다.  워즈워드의 지적  -시를 유로적 정서의 표출로 보아 버린다면 직정은 최선의 시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시는 어느 시대에고 그 본질이 변했던 것은 아니며 주어진 시대마다 드러냄의 방식, 즉 詩法을 달리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오늘의 詩法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오늘의 詩法을 한마디로 집약시킬 수 는 없다 그러나 엘리엇의 지적  -시는 정서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다.(한마디로 정서를 객관화하라는 주문임)  -정서의 객관화  :이것을 하기위해 정서를 물화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이를 엘리엇은 정서로부터의 도피라한다. (왜냐하면 정서로부터 도피하면 정서와 도피 사이 에는 거리가 설정된다. 도피 저쪽에 정서가 놓이게 되고 이 때문에 정서는 가슴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저만큼의 物이 되게 된다. 이 때의 물은 정서가 사물화됐음을 의미하고 정서의 사물화는 정서의 감각화, 즉 정서를 이미지로 대체하라는 주문이 되기에 이른다.  더 덧붙이 면 정서로 드러내지 말고 사물로 드러냄으로써 이미지로 대신 드러내라는 뜻인데 현대시를 한마디로 이미지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서를 객관화, 이미지로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다.  ; 그 때문에 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이 부분에서 좌초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 정서의 도피는 단순한 詩法上의 문제보다 그 배경에 철학이나 과학 그리고 前代적 미학에 대한 자각이 작용하고 있다.  -정서의 문제  ;인간에게 있어 정서는 천부적인 것이다.  ;정서적 환기력은 인간 공유의 것이고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것이다.(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것이다.)  ;설혹 천부적 정감대를 타고 났다고 해도 꽃을 보고 느끼는 것은 끝내 아름다움 이상이 될 수는 없게 된다. 그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아름다움 이상의 것이 되지 못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획득할 수 없는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나?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정서의 객관화, 즉 物化를 통한 이미지의 형상화다.  ex. 가슴이 답답하고 아플 때  -가슴이 답답하다고 골백번 해봐야 답답하다는 이상을 드러낼 수는 없다.  -"윙윙거리는 불벌떼를  꿈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었노라"-서정주[正午의 언덕에서]  (시풀이;정서의 物化에 대한 해답을 곧 얻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불벌떼-꿀과 함께 독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꿀맛보다는 독침에 찔려 아픔이 훨 씬 강렬한 속성으로 작용한다.  이 쏘아대는 불벌떼를 가슴으로 먹었다면 한 마리도 아닌 떼죽들이 가슴에 들어가 제마다 쏘아댔을 것이고 이쯤 되면 가슴이 아프다 못해 빠개지거나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 이다. 이러한 아픔은 그냥 아프다는 사실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환 장할 아픔이다.  -바로 이부분이 열쇠다. 아프다는 사실을 미당은 아프다는 말 대신 아픔을 가져다주는 대상 사물인 불벌떼를 동원함으로써 정서를 物化했던 것이 된다. 엘리엇의 지적처럼 정서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정서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불벌떼라는 사물을 빌어 드러냈던 것 이다. -계속-   생각한 것을 생각한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생각은 觀念과 동의어로 생각해도 좋다. 대부분의 경우 관념은 固定的일 때가 많다. 그만큼 인지의 발달이나 과학적 해석은 모든 견해를 공식화하거나 획일화의 의미론적 고정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상상력이 개입할 틈이나 새로운 견해를 개입시켜 여지 를 봉쇄해 버리고 모든 견해가 규격화되거나 공식화로 굳어버려 모든 사물이나 존재, 또는 정신적인 지향까지도 의미의 틀에 구속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고정 관념의 포로가 되어 버 렸고 포로가 되어 있는 한 결코 새로운 의미의 창조를 불가능하게 했다. 시는 모방도 재현도 묘사도 아닌 창조적 경로를 통한 문화적 창조 행위다. 필연적으로 고정의 틀을 깨뜨리지 않 고는 창조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필사적으로 관념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 이 는 마치 엘리엇의 지적인 정서로부터의 도피와 같은 맥락에 잇대이게 된다.  관념으로부터의 도피는 여러 경로로 통로를 모색한다.  김춘수-이 통로를 관념의 제로지대로 설정함.=관념의 제로지대는 의미로부터의 도피의 뜻.  →무의미의 시가 도출(독자들은 무의미의 시가 의미를 버린 시로 해석해서는 안됨)  →의미로부터 도피하게 되면 '정서로부터의 도피'가 정서를 객관화했듯이 의미의 객관화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의미가 객관화하게 되면 곧 의미가 物化되는 과정 으로 이동된다. 여기에서 의미는 소멸되고 이미지가 대신 그 자리에 앉게 된다. 달 리 말하면 정서를 이미지로 대체했듯이 의미, 즉 관념도 이미지해야 한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관념의 제로지대는 의미가 소멸했기 때문에 관념은 존재성을 상실하고 비로소 새 로운 의미가 탄생하게 된다. 이때의 의미는 고정관념으로 굳어버린 그런 의미가 아 니라 새로이 탄생하는 관념이다. 의미의 새로운 탄생은 곧 창조이다. 이 창조적 역 할의 의미에 의해 시가 탄생된다. 비로소 고정화한 틀이 깨뜨려지고 의미망에 갇 힌 모든 의미가 해방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자유연상이 이루어지고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의미의 탄생을 통해 태어나는 의미의 현현을 보게 된다.  ----旣成의 것, 旣存의 것이 버려진 곳에서 새로이 탄생하는 새로운 것, 그 새로운 것이 곧 시다. 여기에서 관념은 메타(meta)화 한다. 고정의 의미를 초월하거나 관념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숨어 있는 관념의 비의가 드러나기에 이르게 된다. 현대시를 한마디로 메타언어로 규정 하는 것은 바로 의미의 초월이나 비의의 발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게가 만난  슬라브여자의 마음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김춘수[나의 하나님]전문  ;[나의 하나님]의 일부가 보여주듯 고정화의 틀, 일상적 의미가 소멸된 관념으로부터 도피된 관념의 제로지대에서 탄생하는 의미와 秘義가 교직된 채 한 편의 시를 성립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애라는 슬픔의 요소가 눈물이나 한숨 따위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슬픔 과는 전혀 상관성이 없는 '푸줏간에 걸린 살점'과 '놋쇠 항아리'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관념의 제로지대를 환기시킨다면 이 시는 훌 륭한 새로운 관념에 의해 의미역이 성립된다.  푸줏간에 걸린 살점-현대인의 정신과 대응되는 육체적 상징물이다. 하나님이 인간 을 창조할 때는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구조를 인간형성의 원리로 적용시켰다. 그러나 현대 인들은 정신적 삶을 포기하고 육체적인 삶만을 추구하고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러하다. 그래서 육체로 대표되는 폭력주의와 관능적 쾌락주의가 온 세계를 지배하기 에 이른다. 이러한 肉身主義는 하나님편에서 보면 충분히 정신상실의 비애가 될 수 있는 것 이다.  놋쇠 항아리-놋쇠는 청동기시대의 최고의 값어치를 지닌 가치기준의 표상물이다. 이 점에서 현대 물신주의 대표적 척도인 黃金의 원형이 되고 놋쇠와 황금은 원형적 가치기 준에서 최상의 값어치라는 등가물이 된다. 이는 곧 청동을 황금으로 은유한 것으로서 현대의 황금만능주의를 말해줌과 동시에 물신주의에 의해 정신적 가치가 퇴화 내지 소멸됐음을 의 미하게 된다. 이 또한 하나님편에서 보면 충분히 비애의 요소가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기법은 관념의 물화 및 메타화로서 현대시의 중심자리에 놓일 수 있는 시를 성립 시키는 기법이다.  독자를 대상으로 한 창작 실기의 실제화  시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흔히 즉흥시에 가까운 단어를 나열해 놓고 시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여러 기법과 기술적 수사를 통한 다양한 방법론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시를 의도적인 제작으로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의 발상차원의 단계(이또 게이찌의 8단계)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창가에 있는 나무를 볼 때 한 그루 나무가 그저 서 있구나 정도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저게 무슨 나무일까 의문을 곁들이거나 꼭 모양이 벌 서 있는 것 같지라고 표현할 경우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가지가 건성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흔들리고 있는가에 눈을 모아야 하는데 "나무가 춤을 추듯 흔들리는 구나" 했다면 일단 시적이라 할 수 있다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이 바람에 스친 나무 잎사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세밀히 관찰해야 한다. 그 결과 '아, 나뭇잎도 춤을 추는구나'한다든지 '수십 마리의 木魚가 가지 끝에 낚여 있구나'했다면 충분히 시적임---------여기까지는 해볼 만한 단계임(보는 데로)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시상을 본다.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1-4단계는 초보, 5-8단계는 시인으로서의 전문적이고 고도한 시각을 지녔을 때만이 가능한 차원  ;5-8단계는 적어도 시가 되려면 아직 아무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했고, 그렇게 해석해 보지 못했고, 또 누구도 그렇게 느낀다거나 상상해 보지 못한, 분명 지금까지와는 새로운 그 무엇으로 나무가 재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예를 통한 시의 8단계  무슨 죄를 지었기에  종일토록 벌을 서 있는가  나무는  -- 벌선 나무로 변용이 됨.  창밖에 서 있는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를 먼저 식별해야.  식별하는 방법 2가지  1. 무슨 종류인지 식별하는 능력으로서의 지식, 어떤 모습(무엇과 비슷하다-直觀)  2. 경험. 곧 경험과 지식이 육안에 추가돼 더욱 구체적으로 사물을 해석한다는 뜻  ----육안에 지식, 경험, 상상력이 추가되게 되는데 지식과 경험과 상상력이 추가되면 비유가 성립됨  ex. 은행나무 한 그루가 헐벗고 서 있다/ 아카시아 나무가 앙상한 뼈만 드러냈다  -이것도 시적이나 "헐벗고나 앙상한 뼈란 표현은 우리가 흔히 나목을 보았을 때 쓰는 비유다. 곧 누구나 쓸 수 있는 비유로서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때 비유는 비유의 효과가 없어져 버린 사비유가 되어 시 이전의 수사학적 비유 가 된다. 그래서 시가 되기 위해서는  헐벗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추위에 떨며  더운 체온을 꿈꾸고 있다  →춥겠다고 하지않고 그 반대로 '더운 체온을 꿈꾼다'고 진술함으로써 사실을 사실 보다 새로운 사실로 이동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다든지  아카시아 앙상한 가지가  오돌오돌 떨며  소름이 돋혀있다.  →아카시아의 속성을 빌어 사실을 새로운 사실로 재구성해 주고 있다. 이러한 해석 은 나무를 그대로 보지 않고 새롭게 봄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주는 것이 되어 시적 진술의 초보적 단계에 해당되게 된다.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연상상상의 작용- 나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흔히 바람 때문으로 봄  봄 하면 꽃을 떠올리  비하면 우산  꽃 하면 나비  시가 사실의 기록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나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데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은유에서의 치환이 요구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변용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역시 은유에서의 병치(竝置)다.  시의 발상차원의 3차 단계는 바로 치환이나 병치를 동원, 새로운 의미나 모습으로 태어나 게 하는 단계란 뜻이 되는데 여기에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곁들이면 천태만태가 된다. 보기 에 따라서는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춤을 추는 것같기도 하고, 머리칼을 흩날리는 것 같기 도 하고 또는 마치 하늘의 구름을 쓸어내는 빗질 같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무가 춤을 추 고 있구나'한다든지 '머리칼을 흩뜨리고 있구나'했다면 일단 비유는 성립되나 이 또한 흔히 쓰는 비유로서 새로운 감동을 주기에는 모자란다. 그러나 '나무가 검은 구름을 슬어내기 위 해 빗자루가 되었구나'한다면 훌륭히 시가 성립된다.  가로수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 / 가로수가 하늘을 쓸고 있다  -이렇게 썼다면 가로수가 하늘을 쓰는 빗자루로 변용되어 단순히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 라 하늘의 구름을 쓸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전혀 다른 사물로 태어나게 된다. 전혀 다 른 사물로 태어났다면 이는 곧 변용이 되고 동시에 가로수가 아니라 빗자루로 그 의미 또 한 이동되게 되는데 이는 변용과 치환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흔히 현대시를 정의할 때 변용과 치환의 미학이라고들 말한다. 또 현대시의 표현 기술을 말할 때 비유와 상징으로 대표된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비유와 상징은 곧 3차 단계에서의 변용과 치환에 해 당된다. 그리고 이는 시의 발상차원의 3단계는 현대적 해석의 낯설게 쓰기에 해당되는 단계 라고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용과 치환은 본래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그 모 습이나 의미가 이동되기 때문이다.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바람이 부니까 나뭇잎이 움직인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나무가 손을 흔들어 바람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자. 이러면 신선한 감정이 생긴다.  가지와 가지 사이  험한길 마다않고  도폿자락 펄럭이며 찾아온 손을  나무들은 손을 흔들어  전송하고 있었다.  ;바람은 '손님'으로 변용/ 나뭇가지가 흔들린 사실이 손님을 전송한 사실로 바뀌어 새 사실이 탄생함. 시는 관념을 버리고 사물로 변용하거나 새로운 관념을 끌어냈을 때 비로소 성공적으 로 형상화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나무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세밀히 본다는 것은 고정관념을 일탈하거나 초월하는 시력도 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흔히 말하는 구상화(具象化)를 요구한 것이 된다. 현대 시를 일컬어 형상화 작업이라고 한다. 새 모습으로 꾸며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 를 회화(繪 )라고도 하는데 이는 현대의 시각 문명에 걸맞게 시도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 로 생각한 것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란 주문이었던 것이 된다. 그것이 곧 형상화이고 이 형상 화는 곧 구상화 작업에 의존된다. 그리고 구상화되기 위해서는 세밀한 관찰이 더없이 요구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4단계는 이러한 현대시에 있어서의 형상화와 구상화의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무 속에 승화(昇華)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겉으로 들어나지 않지만 그 생명력을 승화시킨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드러내라는 주문이다. 나무의 생명력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이고 정신 적인 것, 곧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 사상과 같은 것들, 일테면 관념과 같은 것이나 우리의 가 슴에 가득히 서려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정서 같은 것들도 다 모습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 에 형상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그대로  사랑이여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사랑이여  한다든지, 또는 느낀 그대로  오, 가슴 아픈 사랑이여  끝끝내 채워지지도  채울 수도 없는 사랑이여  ↓↓↓↓↓  했다면 느낀 대로는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이 생각한 것을, 느낀 것을 모 습으로 구체화, 형상화하라는 주문이니 모양새로 드러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썻다 지우고  지웠다 쓴  이름 하나.  이름 대신  말갛게 가슴만  닳아버렸다.  상금도 버리지 못한  보석보다 귀한  지우개 하나.  했다면 사랑이 지우개라는 사물로 변용됨으로써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화를 담담하게 된 다. 곧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으로서의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이미지를 빌어 형 상화됐다는 뜻이 된다. 정서의 경우도 같은 이치다.  열아홉 난 계집애의  시장끼  꽃피는 날엔  춘궁기의 배고품을  배 아닌 가슴으로 앓았다.  ---사랑의 결핍이라는 정서적 해석이; '열아홉 난 계집애의 가슴으로 앓는 시장끼'로 구상화 됨으로써 가슴으로 해석하는 사랑의 정서가 사물로 대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나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눈에 보이는 사물로 대체, 형상으로 드러내면 되기 때문이다.  수술로는  절개해 낼 수 없는  종양  욋과병원 창들이  가지들의 터진 살갗으로  핏빛 얼룩을 문신처럼 새기고 있다.  이렇게 썼다면 문명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순수 무구한 자연의 생명력으로서의 개 화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때의 개화는 곧 나무의 생명력의 표출이고 또 이 생명력의 표출로 서의 모든 개화는 생명력의 승화에 해당된다. 이렇게 되면 나무의 생명력과 승화는 개화라는 가시적 형상화로 충분히 드러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시의 발상차원의 5단계가 내면적 이고도 정신적이며 형이상적인 것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게 회화화하라는 주문이란 걸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문에 드러내기에 알맞은 사물을 발견, 이로써 형상화하 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이나 견자시학에의 의존이라고 할 수 있다.  견자는 일찍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랭보의 말이다. 시인은 발견자여야 한다 는 뜻으로 한 이 말 속엔 첫째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시각의 소유자가 아니라,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하고 둘째로는 드러나지 않고 가려진 부분가지를 발견해 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꼭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견자라고 했는데 앞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드러내주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가지들이 터진 살갗 은 개화를 뜻하고 개화는 나무의 생명력 내지는 생명력의 승화를 의미한다.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고 그 때문에 견자적 시각을 동원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思想을 본다.  --논리의 초월적 단계,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성립되는 또 다른 논리를 성립시킴  나무는  하늘과 손을 맞잡고자  종일 발돋움하며  팔을 내뻗고 있었다.  ---나무의 사상도 생명력과 같이 불가시의 형이상적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항용의 시각엔 포착되지도, 포착할 수도 없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발견해 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당초 나무의 사상은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다. 부 득이 사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인 쪽에서 사상을 만들어 집어넣든지 끄집어내어 보여주 든지, 그렇게 꾸밀 수밖에 없게 된다.  나무가 하늘과 손을 맞잡고자 발돋움한 것은 구윈의 시사가 된다. 그것은 하늘이 久遠의 세계이자 구원(救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영원한 삶의 추구이고 그럼으로써 소멸로 부터 초월하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무는 상승지향 이미지를 대표하는 원형상징의 표상 으로서 인간이 구원받기를 희망한 것이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곧 나무를 나 무로서만 본 것이아니고 나무의 원형상징을 빌어 상승지향 이미지로서의 나무가 구원의 표 상이라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곧 사물을 사물로서만 해석하지 말고 초월된 모습까지를 포착하고 또 드러나지 않는 내면계까지도 투시, 새로움을 발견해 냄으로써 새로 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무료하면  종일 가지로 그네를 뛰며 놀다가  그도 심심하면  껑충껑충 토끼걸음으로  몰래 그늘을 뛰쳐나갔다  햇볕에 놀라 되돌아오는 바람.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역시 불가시의 것이다. 바람은 모습이 없다. 그러나 위의 예시와 같이 바람으로 하여금 그네를 뛰게 하고 또 토끼걸음으로 껑충껑충 그늘을 뛰쳐나갔다 되돌 아오게 하여 動態化하면 바람의 모습이나 행위가 의인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바람의 여러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 자체를 보고자 하지말고 바람에 모습이나 행위를 부여해야 한다. 앞 단계에서 관념이나 정서를 사물화, 시 각화하듯이 무형인, 그래서 불가시의 바람도 사물의 모습으로 변용하거나 의인화하여 모습을 부여함으로써 형상으로 드러나게 했을 때 바람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의 형상화이고 또 그렇게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꾸미는 것이 변용이다.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나무가 가리키는  손 끝 저쪽  수림의 향수가  자운으로 피어나고  피어나 일몰로도 지워지지 않는  계절 밖  - 나무 저쪽의 세계는 나무가 향수 하는 세계, 혹은 향수가 자운으로 물든 채색된 세계, 채 색되어 일몰에도 지워지지 않는 세계, 그것은 현상학적 물질계라기보다는 정신적이고도 형이 상적인 빗물질계, 즉 초월계이거나 절대 세계가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눈으로 보는 세계 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항용의 세계이고 그 이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세계는 가시권밖의 세 계는 곧, 정신적으로 포착된 세계로서 절대 세계, 초월세계와같은 형이상적 세계가 된다. 나 무가 항시 서서 발돋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세계지향으로 볼 수 있고, 이 드러나지 않는 세 계지향을 보는 것이 바로 나무 저쪽의 세계를 보는 시인의 견자적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마 지막 단계에서는 이러한 형이상적 세계를 볼줄 아는 시력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  (시감상)  과목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명멸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박성룡 [과목]전문  1연-- 과목에 과일이 무르익어가는 것을 보면 계절이나 우주의 섭리를 깨닫고, 놀라움을 드 러내는 시다. 그래서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과물과, 과물이 열려 성숙해 가는 불 가시의 생명력가지를 투시하는 시각이 동원되고 있다.  2연--계절 앞에 선 나무 그대로를 보면서 그 속에서 자연의 여러 조건을 극복해 가는 또 다 른 생명력을 읽어내고 있다. 발상차원의 단계에서 보면 5,6단계에 해당됨.  3연--계절의 소멸 속에서 빛깔과 무게로 영글어 가는 생명력과 그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또 성숙하게 하는 자연의 섭리나 신의 은총까지를 투시함으로써 발상차원의 7,8단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출처] 현대시 이렇게 쓰자|작성자 옥토끼
514    詩佛 - 王維 댓글:  조회:4474  추천:0  2015-05-18
    시불(詩佛) 왕유(王維)의 행장(行狀)      왕유(王維:699~759)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였다. 자는 마힐(摩詰)로 이는 그가 불교에 심취, 유마힐을 좋아해 유마힐에서 따온 자(字)이다. 분주(汾州:지금의 山西省 汾陽) 출신이다. 생몰연대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각각 다르게 기술되어 2년이 차이가 난다. 『구당서』에는 699년에 태어나 759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701년에 태어나 761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사마(司馬)라는 벼슬 직위에 있던 아버지 왕처렴(王處廉)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최씨(崔氏)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왕유는 아우 진(縉)과 함께 어려서부터 시(詩)와 서(書), 음악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9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15살 때 수도 장안(長安)으로 유학을 가 시재가 뛰어나 황실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현종(玄宗: 재위 712~756) 개원(開元)9년(721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태악승(太樂丞)이란 벼슬에 올랐다. 그후 한 때 관직을 떠났다가 734년에 다시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중앙의 관직으로 복귀한 뒤 감찰어사(監察御使), 좌보궐(左補闕), 고부랑중(庫部郞中) 등을 역임했다. 어머니 최씨가 돌아가자 상을 치르기 위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지만 현종 말기에는 이부랑중(吏部郞中), 급사중(給事中)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장안이 점령되자 왕유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뤄양(洛陽)으로 끌려간다. 이곳에서 안록산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으나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전(藍田:陝西省 장안 동남에 있는 縣)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망천장(輞川莊)을 지어 거기에 머물며 시로써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758년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肅宗: 재위 756~762)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장안과 낙양을 탈환한 뒤에 그는 안록산에게 벼슬을 받은 일로 문책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감안되어 사면을 받았다. 그 후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등용되고,이어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중서사인(中書舍人),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다.  이처럼 왕유는 당(唐)문화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에 관직을 역임했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 음악가로써 이름을 떨쳤다. 당시(唐詩)에 있어서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시성(詩聖) 두보(杜甫)에 이어 시불(詩佛)이라 불린 3대 시인에 들어간다. 또한 그의 그림은 남종문인화(南宗門人畵)의 개조로 추앙받는다. 송대(宋代)의 소동파(蘇東坡:1036~1101)는 그의 그림과 시를 평하여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하였다.    왕유의 시는 전기와 후기의 시들이 다른 차이를 나타낸다. 전기의 시들이 도회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의 시들은 전원생활과 자연의 정취들을 나타내는 시들이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소재로 한 후기의 시들이 ㄴ더 높이 평가 받는다. 만년에는 망천장에 은거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자연을 소재로 한 오언(五言)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에 뛰어 났으며 육조(六朝)시대부터 내려온 자연시(自然詩)를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동진의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전원시(田園詩)와 송(宋) 사영운(謝靈運:385~433)의 산수시(山水詩)의 영향을 받아 회화(繪畵)의 기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시를 많이 지었다.  당시(唐詩) 중에서 자연시를 대표하는 시인을 ‘왕맹위유(王孟韋柳)’라 말하기도 한다. 왕유,맹호연(孟浩然:689~740), 위응물(韋應物:734~804), 유종언(柳宗元:773~819) 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 왕유가 자연시를 대표하는 중심인물이다. 왕유의 시집은 『왕우승집(王右丞集)』으로 전해진다. 한 편 왕유는 정건(鄭虔), 오도자(吳道子), 등과 함께 중국 남종화의 개조로 여겨지고 있으며, 문인화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왕유는 인물이나 꽃, 대나무, 산수의 정경 등 다양한 소재로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수묵화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다.장안의 한 건물 벽에 그린 ‘장벽산수화’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유명했다.    관리와 시인 화가로서의 생애를 산 왕유는 결코 평탄한 생애를 산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시와 그림은 자신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21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뜻하지 않던 일로 좌천을 당하면서 인생의 쓰라림을 맛본다. 다행히 얼마 후에 재상 장구령(張九齡)의 발탁으로 다시 등용되어 정치적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장구령이 모함에 걸려 파면 좌천되고 간신 이임보가 등장하면서 정세가 어지럽고 부패해지자 왕유의 고민은 더욱 커졌다. 비교적 온유하고 유약한 성격이었던 왕유는 여의치 못할 때는 숨고 때가 오면 나타나는 은현(隱現)의 생활을 몇 차례 반복하였다. 비록 치죄는 면했지만 안록산에게 벼슬을 받았던 것 때문에 왕유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만년에는 종남산 망천장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세속 경계를 뒤로하고 불도에 심취 도락을 즐기며 서글픈 자기 인생을 조용히 회향했다. 비록 벼슬살이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도모하기도 했지만 그의 생애는 시로서 살고 그림으로 산 생애라고 할 수 있겠다. 유가의 글공부도 했고 잠시 도가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불도에 깊이 심취하여 시로써 선의 경지를 체득한 시불(詩佛)이었다. 그래서 시선일치(詩禪一致)라는 말이 그의 시에서 나왔다.          
513    李箱을 다시 떠올리다 댓글:  조회:6666  추천:0  2015-05-17
이상 (작가)     이상 李箱 출생 1910년 9월 23일  대한제국 한성부 사직동 사망 1937년 4월 17일 (26세)  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부속병원 별칭 본명(本名)은 김해경(金海卿) 초기 필명은 김비구(金比久) 직업 소설가 시인 수필가 삽화가 건축가 국적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학력 강원도 강릉 신명보통학교 졸업 경성 동광고등보통학교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 활동 기간 1929년 ~ 1937년 배우자 1번째 처 금홍(연심) 2번째 처 변동림 부모 김연필(양부) 김연창(생부) 박세창(생모) 친척 구본웅(처이질뻘) 이상(李箱, 1910년 9월 23일 ~ 1937년 4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로 일제 강점기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이다. 원래의 성은 김(金)씨로,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본관은 강릉 김씨(江陵 金氏)이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반 1.2 작품 활동 1.3 언어 유희의 귀재 1.4 필명 유래 1.5 교우 관계 1.6 출국과 죽음 1.7 사후 2 작품 목록 2.1 소설 2.2 수필 2.3 시 3 이상을 다룬 작품 4 평가     생애 생애 초반 1910년 서울에서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김해경이었다. 1912년 생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에게 입양되어 강원도 강릉에 살던 김연필의 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 그는 서울에 생부모가 따로 있는데도 강원도 강릉에 살던 백부와 백모를 부모라고 불러야 되는 점에 깊이 회의를 품고 사춘기 때는 한때 방황하기도 했다. 이상의 생부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손가락 세 개를 잃은 장애인이었다. 이상은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의 김해경은 자신을 친부로부터 떼어놓은 큰아버지도, 큰아버지에게 아들을 빼앗긴 친부도 사랑할 수 없었다. 자기분열적인 이상은 실제로 거울을 늘 들고 다녔다. 혼자서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키며 놀았다.[1] 그는 후일 자신의 시 오감도와 작품, 동료 문인들에게 자신의 유년시절을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집안은 부유하였으며, 그는 양아버지이기도 한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를 거쳐 경성의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1929년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작품 활동 1931년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 〈BOITEUX·BOITEUSE〉, 〈파편의 경치〉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3년 3월 객혈로 총독부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기생 금홍(본명 연심)을 만나게 되어, 후에 서울로 올라와 금홍과 함께 다방 '제비'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5년에는 다방과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연인 금홍과도 결별하였으며 1936년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낸 뒤 그만두고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으며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되었다. [2] 언어 유희의 귀재 그는 12, 12 라는 말을 종종 했다. 이는 발음으로는 십이, 십이 가 되지만 억양을 강하게 발음하면 성기의 다른 뜻이 된다. 구본웅의 당조카이자 구본준의 아들 구광모는 후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이상이 조선총독부를 향해 12, 12라 욕한 것을 후일 접하게 된다.[3] “ ‘朝鮮(조선)’ 1930년 2월호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격렬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 책의 목차에서 총독, 정무총감, 재무국장 등 일본인 최고위층의 정책논설과 함께 이상(李箱)의 장편소설 ‘十二月 十二日(십이월 십이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월간지에는 이외에도 조선인의 글로 이능화(李能和)의 ‘朝鮮喪祭禮俗史(조선상제례속사)’와 안확(安廓)의 ‘各國(각국)의 綴字論(철자론)과 한글문제’ 등도 수록돼 있었다. ‘十二月 十二日’은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되었다. 소설 제목 ‘십이월 십이일’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파동치는 전율을 느꼈다. 오래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이상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에 대해 해괴한 욕설을 퍼부은 작품을 썼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3] ”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 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시켰다. 이상은 후일 자신의 친구들 몇 명에게만 십이 십이의 본의미를 살짝 알려주었다. 소설 속에서 12월 12일은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날인 동시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주인공이 죽을 날이기도 한 동시에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라고 깨닫는 날이기도 했다.[3] 구광모는 '12, 12로 상징되는 욕설과 함께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고 절규하는 그의 소설 속의 외침이 천둥소리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3]'고 평하였다. 한글과 그 발음을 전혀 모르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은 숫자를 이용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료들을 골탕먹였다. 시 ‘烏瞰圖(오감도)’에 나오는 “13人의 兒孩(아해)가…”가 그렇고, 이상이 ‘제비’다방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간판을 붙였다가 그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된 '69 다방' 등도 그렇다. 그 외에도 남녀의 성교를 상징하는 33과 23(二十三, 다리 둘과 다리 셋의 합침) 및 且8(한글로 차팔 또는 조팔이라 읽음. 발기한 남성 성기 또는 18과 대칭을 나타냄) 등의 표현[3]으로 조선총독부를 골탕먹였다. 필명 유래 이상의 필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근무시,현장의 일본인들이 그를 "이씨"란 의미로 "李さん(이상)"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시인 김기림의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림에 재주가 뛰어난 이상이 디자인한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는 자필 서명이 있어, 건축기사 근무 이전에 이미 이상이란 필명을 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필명은 화가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상(李箱)’이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4] 교우 관계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소설가 이석훈(李石薰), 시인 김기림(金起林),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아동문학가 현덕(玄德), 소설가 안회남(安懷南) 등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서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이 이상보다 한 달 먼저 병으로 사망하였다. 출국과 죽음 만년의 이상은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었다.[5]"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5]"고 하기도 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옮겨가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 26년 7개월에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6]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친구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사후 그를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7] 역시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를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4] 작품 목록 소설 《날개》 《종생기》 《단발(斷髮)》 《실화(失花)》 《환시기(幻視記)》 《동해(童骸)》 《봉별기(逢別記)》 《지주회시(蜘蛛會豖)》 《지도의 암실》 《황소와 도깨비》 《지팽이 역사》 《사신1-9》 수필 《권태》 《산촌여정》 시 〈異常ナ可逆反応 (이상한 가역반응)>(《朝鮮と建築 (조선과 건축)》1931년 7월호) 〈破片ノ景色:△ハ俺ノAMOUREUSEデアル (파편의 경치: △은 나의 AMOUEUSE이다)>(《朝鮮と建築 (조선과 건축)》1931년 7월호) 〈▽ノ遊戯ー:△ハ俺ノAMOUREUSEデアル (▽의 유희: △은 나의 AMOUREUSE이다)〉(《朝鮮と建築 (조선과 건축)》1931년 7월호) 〈ひげー:(鬚·鬚·ソノ外ひげデアリ得ルモノラ·皆ノコト)(수염-: (鬚·鬚·그 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모두를 이름))〉(《朝鮮と建築 (조선과 건축)》1931년 7월호) 〈BOITEUX·BOITEUSE〉(《朝鮮と建築 (조선과 건축)》1931년 7월호) 〈空腹ー (공복-)〉(《朝鮮と建築 (조선과 건축)》1931년 7월호) 〈건축무한육면각체〉 〈꽃나무〉(《가톨닉靑年》 1933년 7월호) 〈이런 詩〉(《가톨닉靑年》 1933년 7월호) 〈一九三三, 六, 一〉(《가톨닉靑年》 1933년 7월호) 〈거울〉(《가톨닉靑年》 1933년 10월호) 〈普通紀念〉(《月刊每申》 1934년 7월호) 《오감도(烏瞰圖)》 〈詩第一號〉(《朝鮮中央日報》1934년 7월 24일) 〈詩第二號〉(《朝鮮中央日報》1934년 7월 25일) 〈詩第三號〉(《朝鮮中央日報》1934년 7월 25일) 〈詩第四號〉(《朝鮮中央日報》1934년 7월 28일) 〈詩第五號〉(《朝鮮中央日報》1934년 7월 28일) 〈詩第六號〉(《朝鮮中央日報》1934년 7월 31일) 〈詩第七號〉(《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2일) 〈詩第八號 解剖〉(《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3일) 〈詩第九號 銃口〉(《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3일) 〈詩第十號 나비〉(《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3일) 〈詩第十一號〉(《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4일) 〈詩第十二號〉(《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4일) 〈詩第十三號〉(《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7일) 〈詩第十四號〉(《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7일) 〈詩第十五號〉(《朝鮮中央日報》1934년 8월 8일) 〈실화〉 이상을 다룬 작품 《금홍아 금홍아》 (영화, 1995년) , 배우: 김갑수 《이상 그 이상》 (MBC, 2013년) , 배우: 조승우 《58년 개띠 총각 감독》 (영화, 2014년) , 배우: 조찬형 평가[ 구광모는 그의 12, 12를 '조선총독부를 향한 기발한 욕설[3]'이라 평하였다. 이상의 생년월일이 1910년 9월23일이므로, ‘십이월 십이일’을 집필한 1930년 2월이면 그의 나이 만 19세 4개월 남짓한 무렵으로 그가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임명된 지 11개월 정도가 지난 때였다. 그런데 구광모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9개월에 걸쳐, 십이(12), 십이(12)라는 육감(肉感) 진한 우리 욕설을 숫자로 위장해 소설 제목으로 인쇄해놓은 그의 담력과 기발함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3]' 한다.
512    산문은 환유적으로... 시는 은유적으로... 댓글:  조회:4565  추천:0  2015-05-17
  날(生)이미지 시론 연구   1. 서 론    오규원시인은 관념을 배제하고 언어가 존재와 현상의 그 자체인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전의 형상화 된 언어를 '날이미지'라고 하고 '날이미지'로 된 시를 '날이미지시'라고 이름 붙였다. ‘날이미지’시론은 주체중심의 관점보다는 은유적 언어 체계를 주변부로 돌리고 환유적 언어 체계를 중심부에 놓는 시론으로 오규원시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날이미지’시론에 입각한 환유적 언어체계로 한 글쓰기는 시인이 인간중심의 사고로부터 벗어나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으로 나타난 90년대 초 부터이다. 로만 야콥슨은 은유적인 성격인가, 환유적 성격인가에 따라서 문학의 장르가 달라진다고 보았다. 즉 시는 은유적인 성격이 강하고 산문은 환유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시론을 펼친 이승훈시인은 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토대로 은유와 환유를 대립관계로 규정하고 두 관계를 도표로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은유/환유의 관계는 계열체/통합체, 상사성/접촉성, 선택/결합, 대치/삭제․문맥화, 접촉성 혼란/선택성 혼란, 문맥화 결여/선택결여, 극/영화, 몽타주/클로즈업, 상징/응축․치환, 초현실주의/큐비즘, 모방적 마술/접촉적 마술, 시/산문, 서정시/서사시, 낭만주의․상징주의/사실주의(강조 - 인용자)로 구분하고 있다. 은유와 환유의 대립구도 속에서 일반적으로 시의 전반에 차용되는 은유를 버리고 왜 환유인가는 오규원 시인의 시작노트 및 시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오규원 시인은 환유를 축으로 하는 언어체계는 사실적이며 시에서 두드러진다고 보았다. 은유적 언어 체계가 보여주는 관념이라는 존재의 허망함과 개인화의 시각에 의한 세계의 파편화 현상에 대한 나름의 응전으로‘환유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개념적이지 않고 사변적인지 않은 살아있는‘날이미지’의 표상은 명시화하고 현상화하는데 적합한 환유적 수사법을 적극 수용한 시세계를 통하여 실현하였다.    1. 환유적 언어체계의 글쓰기    오규원 시인이 은유적 축을 예시하고 있는 「現像實驗」과 환유의 축을 예시하는 「후박나무 아래1」 이다. 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토대로 구분한 이승훈의 은유와 환유의 대립구조의 도식에 나타나는 것처럼 은유는 유사성에 의한 선택과 대치라는 인간 사고의 한 축이며 환유는 인접성에 의한 결합과 접속이라는 한 축이다.   言語는 추억에/걸려 있는/18세기 型의 모자다/늘 방황하는 기사/아이반호의/꿈많은 말발굽쇠다/닳아빠진 認識의/길가/망명정부의 廳舍처럼/텅 빈/想像,言語는/가끔 울리는/퇴직한 外交官宅의/초인종이다. 「現像實驗」   은유의 대치적 언어체계는 「現像實驗」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言語는 추억에/걸려 있는/18세기型의 모자라고 한다든가 “늘 방황하는 기사/아이반호의/꿈 많은 말발굽쇠라고 한다든가“가끔 울리는/퇴직한 外交官宅의/초인종”이라고 하여 言語라는 원관념을 밝히기 위해 끌어들인 보조관념, 즉 대치관념이다. 이처럼 대치관념은 무수히 생산될 수 있으며, 무한한 해명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은유는 등가성의 원리를 동원하여 시적 표현을 극대화하는데 ‘A는 B다’식의 구조적 은유로 전락될 수 있는데 반하여, 환유적 언어체계라고 할 수 있는 A와B가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잎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새끼를 낳은 어미 개/싸락눈에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턱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 날고 「후박나무 아래 1」   환유적 언어체계는 「후박나무 아래 1」에서처럼 서술적이다. 작품 속에 나타나 있는 ‘후박나무’어미개, 새끼, 싸락눈, 태반, 선혈’은 ‘어미 개’를 중심으로 한 시간과 공간의 인접성 사물들이다. 그 사물들은 어떤 관념(사물)의 해명을 위해 각각 차용된 것이 아니라 한국면의 구조적 산물이다. 이 사물들이 환유적 의미를 갖는 것은 대치관념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연상되는 관념으로서이다. 환유적인 대상에는 공통 특성이 존재하기 보다는 각기 다른 독립적인 양태로 나타난다.   그 방에 들어가려면 벽에 걸려있는 밥그릇부터 보야야한다 無用이 그린 그 밥그릇 하나는 전지 반장의 아래쪽 한구석에서 오른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래도 담긴 밥이 쏟아지지 않는다 안심하고 오른쪽으로 기운 방향의 앞에 CATHAY PACIFIC이 이곳까지 보낸 달력이 있다 오늘을 중심으로 하고 과거의 오늘과 미래의 오늘이 꽉 차 있다 그 오늘이 CATHAY PACIFIC의 말투를 빌어 Arrive in better shape 하고 도착시간을 정확히 요청한다 ‘베터 샵’하게 둥그런 추가 왔다갔다하는 낡은 벽시계를 건너편 벽을 밝힌다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천장은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방의 벽은 회색의 바탕 위에 갈대들이 우우우우우우- 가득 차고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이 위험한 갈대숲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른쪽으로 길을 꺾으면 문이 하나 있다 방이다 그곳에서도 갈대는 끝이 없다 입구에 뻥하고 그림이 하나 달려 있다 최영림 화백이 이 모자의 몸이며 얼굴에다가 모래를 안고 있다 최영림 화백이 이 모자의 몸이며 얼굴에다가 모래를 덕지덕지 발라놓았다 모래가 우수수- 우수수- 떨어진다 방에 들어가려면 이 모래 속으로 모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 모래의 속도 차고 따뜻하다 「밥그릇과 모래」전문    「밥그릇과 모래」는 환유적 언어체계를 표방한 작품이다. 공간적으로 인접한 사물들인 밥그릇, 달력, 벽시계, 천장, 벽, 방, 모자상 과 의미적 인접의 환유들인 밥, 오늘, 갈대, 새, 모래, 속을 서술하는 정황으로 짜여있다. 이러한 언어구조는 ‘방’이라는 같은 공간에 놓여있는 사물들 사이의 인접성에 의해 이어질 뿐이지, 앞뒤의 논리적인 시적 문맥이나 연결고리는 발견할 수 없다. 첫 번째 등장하는 벽에 걸려 있는 ‘밥그릇을 그린 그림’과 그 다음에 등장하는 ‘CATHAY PACIFIC 달력’은 공분모를 유추해 낼 수 있는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환유적 언어체계는 두 대상 사이의 통상적인 관계에 작용하지만, 두 대상은 상대방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언어들로 구성된다. 환유적 언어체계는 비동일성의 언어가 구성되어 있으면서 유기적으로 통용된다. 나무의 예를 들면 나무라는 몸통에 다른 형질의 나뭇가지(언어)를 접목하여 우수한 열매를 얻는 것과 같은 특질이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풀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 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 집이 셋, 개소주 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다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 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영화 포스트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보도 불럭 위에 방치된 하수도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 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그리고 ××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꼴로 놓인 보도 불럭이 구천 오백네 개, 그리고 그 가운데 깨진 것이 하나, 둘……여섯…… 열 다섯……스물아홉……마흔 둘……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사이」   위에서 살펴 본 시 「밥그릇과 모래」보다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사이」는 사실적 묘사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환유적 언어체계는 시적 리얼리즘의 방법이라고 말할 때, 시적 자아의 간섭이나 통제가 전혀 없는 현실의 파편들이 그대로 노출되는‘무매개시’가 된다. ‘날이미지시’와 ‘무매개시’가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지만 오규원시인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시적세계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무매개시’는 인간의 중심적인 사고가 개입하지 않고 사물의 언어를 날것으로 전달하는 것이므로 ‘날이미지시’와 상통한다. 사물시의 대가인 프랑시스 퐁주의 시 쓰기의 방법을 들으면 오규원 시인의 ‘날이미지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을 발견하게 된다.“시를 택하기보다는 사물의 편에 서서 시를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보다는 사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그 사물에 어울리는 수사학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글쓰기”라는 점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사물이 스스로 말을 할 때 까지 면밀히 관찰하고 지켜본 결과를 詩化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오규원 시인이 진리는 명사로 명명되고 대치된다.그러나 진리는 동사로 발견되고 서술되기도 한다고 한 것과 일치한다.    3.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시 세계    오규원 시인이 일관되게 정의 한 자신의 시세계는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전의 ‘날이미지’로서의 현상으로 이루어진 시라고 한다. 이는 인간문화의 지배적인 관념이나 허구를 벗기고, 세계의 실체인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말을 날것으로 옮기는 것이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의 현상은 날것의 모습, ‘날이미지’이다. 시인이 그토록 찾았던 시적 궁극이 자리하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의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의지와 관계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속에서 의식적으로 무엇인가 찾지 말라고 일갈한다. 의도적으로 숨겨 놓은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읽기를 권유한다. 존재의 현상을 참으로 보고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 모든 존재는 하나하나가 도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가 진리이다.)의 세계가 자신의 시세계라고 설파했다. 그러면서 존재의 편에 서서 ‘날이미지시’를 읽어야 하며, ‘날이미지’의 시세계는 돈오의 세계가 아니라고 한다. ‘날이미지 시’는 환유의 시가 아니라 환유를 축으로 하는 환유의 언어체계로 쓰고 있다고 강조한다. 환유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의 변두리에는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두두’며 ‘물물’은 관념으로 살거나 종속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도 전체와 부분 또는 상하의 수직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숲에 있는 한그루 나무는 숲의 부분이거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리이며 실체인 완전한 개체다. 시의 세계도 이와 동일하여 현상적 사실과 상호 연관관계의 언어인 개방적 구조’로써 말을 하기도 한다. ‘날이미지시’가 그러한 개방적 이미지와 구조이기를 바라고 있다. 오규원 시인의 ‘날이미지’시세계는 1991년부터 1995년 2월 사이에 씌어진 시집 
511    현대시와 현대시조에 관하여 댓글:  조회:4417  추천:0  2015-05-17
                              / 박제천  (시인, 경기대 대우교수)     현대시와 현대시조의 의미구조 탐색 *[시조시학 ] [한국 현대시조의 전통성 탐색               ―시적 의미 구조를 중심으로] 1. 한국 현대시조의 전통성을 탐색하기 위하여 필자는 먼저 두 가지 점을 전제한다. 그 하나는 예술창조자와 향수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의 발전사를 참조하면, 예술은 발전할수록 창조자와 향수자의 거리를 지속적으로 벌이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할 수 있다. 당초에 사람들의 예술적 취향에 부응하여 그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계발되기 시작한 예술은, 그 전담자의 미학적 경험과 예술 창작의 기술성이 증진함에 따라 일반인들의 예술적 기대를 훌쩍 뛰어넘게 되었다.  그리고 고급한 예술을 향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역시 예술가에 못지않은 심미적 감성과 경험을 훈련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근대시민사회가 등장하면서 전문화되었던 소수의 창조자와 향수자의 인구가 대폭 확대되면서 예술 창조자의 소재 개발이 다원화하였고, 나아가서는 심미적 기준조차 변성시키는 단계로 개방되었다.  평면에서 입체로, 입체에서 설치로, 설치에서 환경으로, 도구의 개념을 다원적으로 확대한 회화예술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은 향수자의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전복하는 광범위한 의식의 혁명을 일으켜 왔음을 세계 문예사조의 흐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문학은 다른 예술과 달리 도구나 형태가 고정화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으나, 오히려 끝도 없고 바닥도 없는 의미언어의 추상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다른 예술을 선도해나가는 추진력을 보여 왔다. 또 다른 전제는 세계의 예술이 그동안 더 이상 밀어붙일 수 없을 만큼 혁명을 추구해 왔기에 오히려 이제는 그 내용면의 소프트웨어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추구해온 표현의 혁명은, 이른바 프로이드나 융에 의존한 인간 심리의 분출을 기폭제로 삼아 슈르리얼리즘까지 진전하였으나, 근원적인 인간 심리로서는 그 이상의 외연을 확장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음을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예술은 이제 지역적인 토착문화를 토양으로 형성된 개성적인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으로 새로운 예술의 틀을 짜낸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같은 것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는 게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렇게 범위를 좁히면 그동안의 예술 혁명은 도구쪽의 혁명에도 추진력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아프리카 토속공예가 현대조각에 끼친 영향이나 흑인 영가류나 지역국가의 민요류가 현대음악에 자양을 공급하였듯이, 고유의 문화풍토에서 독특한 생명력을 갖고 발전해온 특징적인 지역문화가 앞으로 진행될 세계 예술의 소프트웨어 혁명의 원동력이 되리라 전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현대시조는 현대시와 함께 이른바 1900년대의 개화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의 경우는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시의 도입과 그 영향 아래 정형성을 고려하지 않는 자유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엄격한 율격의 한시나 자체의 율격을 지닌 고시조에 비해 현대시는 문자 그대로 자유롭게 서술할 수 있다는 자유시의 표현구조로 하여, 특히 새로운 예술 창조자들에게는 첨단적인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로 하여 예술하는 멋과 맛을 동시에 가져다주었기에 대환영을 받았다. 나아가 개화기의 교육 개방과 신분의 자유화로 하여 예술 창조자층이 급속도로 확대되었으며 그 시상의 내용이나 전개 역시 다양하였기에 문화 격변기의 총아로 군림할 수 있는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하겠다.  이에 비해 현대시조는 발생기서부터 한동안 주춤거릴 수밖에 없을 만큼 시대적 환경이 열악하였다. 당초에는 고시조를 답습하는 소수의 전통주의자와 시조를 민족문화의 구심점으로 삼은 개화기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현대시조는 한동안 부흥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그 모범 답안을 작성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현대시조를 둘러싸게 되었다. 우선 그동안의 고시조와 현대시조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한 변별성이 대두되었다.  창사로서의 기능이 강했던 고시조로부터 악곡과의 연결 고리를 단절시키기 위한 작업들이 시도되었고, 음악이 아닌 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위상을 확립시키고자 하는 학문적 연구가 뒤따랐다. 또한 현대 자유시의 유행과 연계되어 그 내용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시조단 내부에서부터 불거져 나왔다. 과거 유교문화의 유산인 음풍농월격인 내용에서 벗어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의미를 담고자 하는 자기 변혁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현대적인 시적 구조와 내용을 갖추고자 하는 혁신적 변화의 모색은 오히려 시와 시조의 변별성 확립에 크나큰 짐이 되고 말았다. 현대시조는 시와의 변별성을 오로지 정형시라는 외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창사로서의 시조의 원형은 노래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것으로, 문학적인 면의 정형성을 추출해 내기에는 부적당한 것이었다. 악곡상의 특성을 배제한 시조에서 문학적 형태를 정립시키기 위한 일환의 노력들은 많은 시행 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현대시조를 창작하는 데 오히려 혼돈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한국의 현대시조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데 등장하는 제일의 문제점은 이러한 현대시조의 발생기적 특징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2 현대시와 현대시조는 어떻게 다른가. 앞에서 말한 대로 현대시는 자유롭게 써내는 자유시고, 현대시조는 특유의 정형성에 의지해 써내는 시라 한다면, 현대시와 현대시조의 변별성을 찾아내기란 더욱 지난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현대시와 현대시조는 그 창작 인구의 친목단체도 별도이고, 발표 매체도 별도이고, 창작인의 호칭이나 창작집의 호칭도 별도이다. 그러나 정형성을 제외한 채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시와 시조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미지, 오브제 등과 같은 시 장르의 특색을 천착할수록 시 장르와 시조 장르의 구분이 퇴색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된 장르의 필요조건인 독자적인 표현구조를 확보하지 못한 채 도식적으로 외형적인 정형성에 의지하거나 자유성에 내맡긴 채 세련된 표현구조를 개발하지 못했기에 한 세기가 달라진 지금까지도 그 변별성을 마련하지 못했다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의 현대시와 현대시조 모두에 해당되는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문학론의 고전적인 명제의 하나에 훌륭한 작품은 그에 걸맞는 형식을 창출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훌륭한 작품이란 내용상의 의미 구조가 그 형식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시인의 정신과 영혼,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시적 논리가 바로 시의 내적 의미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지금까지 현대시조가 외형적 정형성에만 치중하여 논의되어 왔기에, 이러한 내적 구조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다고 보여진다.  시조는 오랜 창작 역사를 통해 3장 6구의 형식 안에서 훌륭한 내적 의미구조를 갖추어온 전통을 갖고 있다. 현대시조가 법고창신의 방법으로 외형적 정형성뿐만 아니라 내용상에 있어서도 정형성을 내포한 의미구조를 부각시킨다면 현대시와의 변별성을 가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에 있어서 내적 의미구조의 파악은 바로 창작 소프트웨어와 직결된다. 현대시 역시 초창기에는 창작기술론에 관한 저서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시론 역시 종류가 많지 않았으며 그 상당수는 서구의 저서와 일본의 저서를 우리 현실에 적당히 맞추어 편집한 책이었기에, 원론이나 지엽적인 테크닉의 설명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정작 시의 표현체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컨대 한편의 시는 몇 행으로 이루어지는가, 그 내용 전개는 어느 부분에서 바꾸어야 하며, 행과 연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와 같은 기본 분야는 자작시 해설로 대충 메워나가는 현실이었다.  대다수 시론의 내용이 이러하다면, 이제까지의 창작교육은 몸집을 갖추는 의미 구조를 외면한 채 팔다리를 휘두르는 지엽적인 기술론에 의지해 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육으로는 창작은 물론 시에 대한 미학적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시인은 타고난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우리 창작교육의 풍토에서는 훈련된 시인이 아니라 자생적인 시인이 출현하고, 훈련된 고급 독자가 아니라 재치문답 테스트와 같은 3행시의 독자만 양산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창작교육의 불구성을 바로잡을 대안은 없는 것인가. 필자는 오랫동안 대학과 문학사숙에서 현대시 창작을 강의하면서 시의 표현구조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필자의 창작 체험과 창작 강의 체험을 기초로 구상한,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이냐’ 라는 문제에서 ‘어떻게’에 치중한 방식이었다.  논의의 요점만 간추리자면, 시의 외형상 표현체제는, ‘도입―전개―전환―마무리‘의 4단으로 구분하되 평균 15행 내외의 길이를 기본으로 삼는다. 따라서 도입부와 전환부와 마무리 부분에는 성격상 2~3행 정도의 길이를 배당하며, 전개부에 7~8행을 중점 배치한다. 따라서 한편의 시는 도입부와 전개부가 합쳐진 10행의 A, 전환의 B, 마무리의 C로 크게 3등분된다. 다시 말해 전개부가 끝나면 잇달아 전환하고, 전개와 전환을 결합하여 마무리를 짓는다. 기능별로는 시의 도입부는 이미지, 전개부는 상상력, 전환부는 강조, 마무리는 알레고리가 추동력이 되면서 갈등에서 화해로 진전된다.  도입부에서 오브제를 제시함으로써 구축된 이미지는 전개부로 이어지면서 오브제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상상력을 획득하게 되고, 이로써 완성된 가설의 내용을 강조하는 장치로서의 전환이 이어지며, A와 B를 수렴함으로써 제시된 오브제는 시인의 의도대로 독자에게 다른 내용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 중 도입부의 이미지 제시가 초심자의 작품을 지도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다. 시 장르를 막연한 심정의 토로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대체로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로 도입부를 전개하므로 한 행을 쓰면 다음 행에는 무엇을 쓰나, 하는 불안감이 팽배하고, 비슷한 어휘를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마련이다. 창작교육에서 시의 이미지는 강조하지만 그 이미지를 어디에 배치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지도를 받지 못했기에, 사적인 감정을 지루하게 전개한 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잘못된 창작습관에 길들어져 있는 것이다. 도입부에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식은 빠른 시일 안에 작품의 품격을 높이는 데 최상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다음의 예시를 보자. 민박집 뒷방 툇마루 아래 가지런히 쟁여둔 장작을 바라본다 ① 불을 품고 얌전히 누워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② 장작 사이 벌어진 틈새들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③ 토해낸다 캄캄한 구멍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게 보인다 ④ 욕망의 마른 혓바닥들이 꿈틀거리며 ⑤ 한꺼번에 기어나올 것만 같다 ⑥ 손만 갖다대도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것이다 ⑦ 제멋대로 몸뚱이를 굴릴 것이다, ⑧ 마음 속에서 수없이 무너지는 연습을 하며 ⑨ 뼛속까지 타오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⑩ 성냥개비 하나의 작은 불씨에도 ⑪ 우르르 몸을 내던질 것 같은 마음의 장작들, ⑫ 멀리 서울을 떠나온 몸이 ⑬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⑭ 곧 진눈깨비가 쏟아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⑮ ―송정란, 『화목』 이 작품은 도입부의 1~2행에서 장작이라는 오브제를 제시함으로써 이미지를 구축하고, 3~10행까지 오브제를 통한 상상력이 전개되며, 11~13행은 오브제를 통한 상상력이 시인의 自我로 전환되면서 도입부를 다시 끌어들여 전환부를 강조한다. 13~15행은 마무리로서 시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갈등을 스스로 다스리며 화해하고 있다. 특히 13행은 전환과 마무리의 가교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복선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현대시의 창작 소프트웨어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시나 시조는 물론 서구의 자유시조차 이러한 표현체제를 이미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구의 자유시란 용어는 그 이전의 엄격한 율격에서 보다 자유로워졌다는 뜻이지, 율격과 무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시는 언어의 기본 율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어의 자유시를 문자 그대로 자유스럽게 받아들였기에 방만한 표현을 다듬어낼 수 있는 기능적인 표현체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자생의 천재시인들에 의해 서정적인 시세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창작교육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예술 발전사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시와 독자의 거리를 넓히는 불구성만 조장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시조의 경우는 한국의 현대시와는 성장조건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와 함께 그 현대성에 골몰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좌표를 스스로 포기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시조의 역사는 장르 형성기 동안에 이미 독자적인 표현체제의 모범답안을 완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장 6구 12음보라는 외형성에 가려진 고시조의 표현체제를 점검할 경우, 그 충족조건의 하나인 창사성을 제외하고서도 불과 3행으로 독립된 시세계에서 전개와 변환을 자유 자재로 완성시키는 내용 구조의 입체감이야말로 경이로운 운용체제가 아닐 수 없다. 아래 인용한 황진이의 시조작품은 시조의 표현체제가 시인의 능숙한 운용에 따라 최대한 내용을 증폭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콋 임의 情이 녹수 흘너간들 청산이야 變퍞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니져 우러 예어 가콋고 오브제를 제시하되 그 뜻을 직절적으로 정의하며 전개되는 초장은 은유의 사용으로 하여 더욱 다이나믹한 힘을 갖고 있다. 중장에서 초장의 오브제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이어붙이는 반복 기법은 확신에 찬 어조로 서술되므로 읽는이의 정서적·심리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붙들어둔다. 초장과 중장의 이 절절한 갈등과 대립은 종장에 이르러 초장 중장의 의미를 부정으로 전환, 마무리함으로써 청산과 녹수의 대립적 긴장관계가 하나로 조화되어 화해로 갈무리된다. 현대시의 갈등에서 화해라는 내적 서술 원리를 불과 3행의 시로서 완벽하게 구축한 작품이다. 남녀간의 미묘한 심정적 갈등이 청산과 녹수라는 오브제에 의해 구체화됨으로써 시각적 이미지를 독자의 가슴에 심어주는 한편, 그 절절한 슬픔을 절제하는 여유야말로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말의 전례라 할 수 있다.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초장에서는 제1구는 ‘동짓달 기나긴 밤’의 시간성을 오브제로 삼으나 제2구에서 ‘한 허리를 버혀내어’의 동사형 어미를 통해 마무리함으로써 이를 시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현대시에서도 고난도의 테크닉이라 할 수 있는 추상 오브제에 그림을 입히는 일이니 참으로 탁월한 솜씨이다. 중장은 ‘춘풍 이불’이라는 조어를 사용함으로써 슈르에서 말하는 서로 다른 두개의 언어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의 창출에 성공하고 있다. 여기서도 ‘서리서리 넣었다가’의 의태어를 합성함으로써 본래의 어의를 변조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특히 초장의 겨울과 중장의 봄이라는 시간성 계절어를 통해 기다림의 체감을 지수화하고 있다는 점도 뛰어난 표현기교가 아닐 수 없다. 종장 첫구에서는 ‘어른님 오시는 밤’이라는 시간적 전환이 이루어지며, 미래형 시제를 통해 초장 중장의 오랜 기다림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현재화시키는 의미의 반전이 이루어진다. 내 언제 無信하여 임을 언제퉳 속엿관쾬 月沈 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업고 秋風에 지콋 닙 소퀳야 낸들 어이 퍛리오 황진이의 이번 시조는 심정적인 정황으로 초장을 전개하나, 그 정황이 ‘속인다’는 사건을 통해 궁금함을 유발시킨다. 중장은 한밤중에도 그가 오지 않았다는 단정적 진술을 하되, 직접적인 사례를 피하여 ‘뜻’이라는 심정어로 의미를 전환시킨다. 사람은커녕 과연 그가 오려는 뜻이라도 있었는지를 음미하게 하는 대목이다. 종장은 가을바람에 지고마는 잎소리를 통해 초장과 중장의 의미를 전환시킴으로써 그 정황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내세운다.  그럼으로써 이 시는 의미의 구조가 바로서고, 동시에 잎이 지는 소리를 알레고리로 설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것이 사람 사이의 일에 다름 아님을 이중의 부정 다음에야 깨우치도록 하는 고난도의 표현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조는 그것이 비록 고시조라 하여도 창사성과 표현체제를 동시에 완성시키고 있는 완벽한 시형식이다. 그것이 현대시조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서구시에 경도해 외형적인 정형성의 논란에 함몰되면서 완벽한 시형식에 합당한 내용 변화를 감내하지 못하였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현대시조가 현대시와 변별성을 가지고 한국시로서의 한 장르의 위상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시조가 가지고 있는 내적 의미구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조는 그 내적 구조상 최소한의 의미단위가 이루어지는 구수율을 지니고 있으며, 전체 12음보의 음보율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초장, 중장, 종장 속에 펼쳐지는 4단의 의미구조를 더 큰 형식의 의미율로서 정립시킴이 어떠할까 하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기해 본다. 3장의 짧은 내용 속에 현대시 1편의 의미구조를 담아 낼 수 있는 내적 틀을 갖추고 있는 것이 시조이기 때문이다.  시조의 3장은 현대시의 3행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것이며, 한 행을 이루는 2구의 성격도 현대시에서의 한 행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시조는 장과 장 사이, 구와 구 사이의 내적 의미의 연결성이 현대시에 비해 매우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황진이의 시조에서 예시한 바와 같이 기승전결의 시적 논리가 한 편의 시조 속에서 완벽하게 구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종장에서 현대시의 전환과 결말을 포괄하는 의미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은 시조의 특장으로써 그 미학적 특성을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를 도식화하면 초장(도입부와 전개부)의 A, 중장(도입부와 전개부)의 B, 종장(전환과 마무리)의 C로 크게 3등분된다. 또한 A와 B가 연속적일 때보다는 A와 B가 변증법적인 대립형태를 취할 때 C의 기능이 증폭된다. 특히 C에서 전환과 마무리를 동시에 담당함으로써 3장의 시가 갖는 단조로움을 피한 채 오히려 입체적 효과를 증폭해내는 장치야말로 시조의 탁월한 특장이랄 수 있다. 요즘 많이 씌어지고 있는 연시조의 경우에도 각 수마다 개별 작품의 의미구조를 수렴하면서 전체적 통일성이 이루어져 할 것이다. 시조의 이러한 표현체제가 현대시조에 내적 율격으로써 정립된다면 현대시와의 변별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리라 본다. 그러나 현재 씌어지고 있는 현대시조를 볼 때 이러한 시조의 특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게 여겨진다. 이미 몇백 년 전에 씌어진 황진이의 시조처럼 종장에서의 확연한 시적 전환과 결말의 묘미로써 시조의 미학적 특성을 잘 표출해 낸 작품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시조 종장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초장, 중장의 내용이 전환의 의지 없이 종장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의 3번째 행의 역할과 다를 바 없다.  대부분의 시조가 자수만 간신히 맞추어 놓은 듯하고, 현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되 오히려 고시조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긴밀한 의미구조를 견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히려 황진이의 시조가 내용은 옛것이되, 그 시적 구조는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어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시조 역시, 단형의 서술 길이가 갖는 탄력성을 잃어버리고 평면화되어버린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된다. 記寫 형식마저 자유롭게 풀어 쓴 경우 형태상으로 현대시와의 차별성이 없어진 데다 그 내적인 의미체계마저 허물어져, 이것이 시인지 시조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시조의 표현체제를 현대시의 그것과 대비할 때, 장형의 서술 길이에서는 의미 체계가 평면화되거나 시간과 장소와 화자의 빈번한 대립으로 시적 긴장도를 낮추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대시조가 단지 자수에 제한만 받을 뿐 그 내용이나 의미 체재가 현대시와 차별성이 없다면, 과연 현대시와 다른 장르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만든다.(이러한 의구심이 곧 현대시조의 아킬레스건으로서 시조단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시조가 자유시를 대신하여 전통적 율격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자각하고 있다면, 이제는 고시조가 보여준 의미의 완벽한 표현체제에 주목, 현대적으로 복원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현대시조는 이미 율격상의 체제는 완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장 6구 12음보의 외형율이 고착되어 있는 만큼 앞서 논술한 내적 의미구조의 체계를 시조의 기본적인 의미율로써 정립해 나간다면 외형과 내용면에서 현대시와의 확연한 경계선이 그어지지 않을까 한다. 3장 속에 함축된 4단의 의미구조를 내적인 율격으로 정립하고, 이러한 표현체제의 기능을 창작교육에 도입하여 시조 창작자와 그 향수자층을 확대해 나간다면 현대시와의 변별성을 확고히 하면서 현대시조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훌륭한 작품은 내용에 걸맞는 형식을 창출한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형식의 습득, 파괴, 창출의 변증법적 순환을 거치면서 현대시조의 독자적인 사고체계가 작품화된다면, 시조는 우리 민족 특유의 시형식으로서 그 위상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추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漢詩가 서구 이미지즘 시의 활력적인 소프트웨어로 제공되고 일본의 하이꾸가 옥타비오 빠스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듯이, 세계의 시문학이 새롭게 충전할 수 있는 시창작 소프트웨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전망해본다.
510    시와 시인 명언 32 댓글:  조회:5655  추천:0  2015-05-16
시와 시인에 대한 명언 32가지 1. 그 속에 한 조각의 애처로움도 없는 시는 씌어지지 않는 편이 낫다. - 오스카 와일드 2. 내가 시를 만든 것이 아니다. 시가 나를 만든 것이다. -괴테 3. 산문은 저녁과 밤을 그릴 수 있지만, 시는 새벽을 노래하는 데 필요하다. - 메레디스 4. 시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선한 마음의, 가장 선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 셸리 5. 시는 그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며, 시를 쓴다거나 감상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다. - 루이스 6.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修辭學)은 눈송이다. 불길과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 칼릴 지브란 7. 시는 번갯불의 섬광이어서, 어휘들의 배열로만 끝날 때는 단순한 작문에 불과하다. -칼릴 지브란 8. 시는 불가해한 것에의 탐구이다. - 스티븐스 9.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근엄하며 더 중요한 무엇이다. 역사가 말해 주는 것은 독특한 것들이지     만, 시가 말해 주는 것은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10. 시는 오직 사물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슬기롭고도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      은 매우 중요하다. -아널드 11. 시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 허먼 12. 시란 강력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고요한 가운데 회상되는 감정에서부터 솟아      난다. - 워즈워드 13. 시란 덕(德)의 표현이다. 훌륭한 정신과 훌륭한 시적 재능은 언제나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다. - 위고 14. 시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때 쓰는 것이다. - 유치환 15. 시란 정을 뿌리로 하고 언어를 싹으로 하며 운율(韻律)을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 백거이 16. 시를 읽으면 품성이 맑게 되고 언어가 세련되며 물정에 통달되니 수양과 사교 및 정치생활에 도움이      된다. - 공자 17. 두 종류의 시인이 있다. 하나는 교육과 실습에 의한 시인, 우리는 그를 존경한다. 또 하나는 타고난       시인,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 에머슨 18. 시인들은 모든 감각을 한없이 오랫동안 신중하게 교란시킴으로써 자신을 환상가로 만든다. - 랭보 19. 시인은 이 세상을, 남자가 여자를 보듯이 본다. - 스티븐스 20. 시인은 어둠 속에 앉아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나이팅게일이다.      - 셸리 21.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일하는 만큼 화가나 음악가보다 진실에 대해 큰 구실을 하게 된다.      - 사이페르트 22. 시인은 영혼의 화가다. - 디즈레일리 23. 시인(예술가)은 인간성의 옹호자이며 보존자이다. - 워즈워드 24. 시인이나 예술가가 실제로 실현시킨 것 이상의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를 읽거나 그림이나      조각을 보는 것 등의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 나다니엘 호돈 25. 시인이란 그 마음속에는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고뇌를 감추고 있으면서, 그 탄식과 비명이 아름다      운 음악을 연주하면서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입술을 가지고 있는 불행한 사람이다. - 키에르케고르 26. 알려진 우주에는 한 사람의 완전한 연인(戀人)이 있으니, 그는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 휘트먼 27. 언어를 살려놓는 수단은 시인의 심성과, 그의 입술과 그의 손가락들 사이에 존재한다.      시인이란 창조적인 힘과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자이다. 그는 영혼의 세계에 대한 소식을 연구      의 세계로 전달하는 전보이다. 시인은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라 가는 언어의 아버지요 어      머니이다. 그가 죽으면 언어는 뒤에 남아 그의 무덤 위에 몸을 던지고는 다른 어떤 시인이 와서 일으      켜 세워 줄 때까지 슬피 흐느껴 운다.      - 칼릴 지브란 28.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쓰면서 동시에 자기 시대를 그린다. - 엘리엇 29. 진짜 시인은 시도해 보는 것으로써 훨씬 아름다움의 비밀을 발견한다. 그것은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마침내 어떤 기도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내용을 펼치기 때문이다. - 알랭 30. 진정한 시인은 자기 자신의 소질에게 생기는 사상과 영원한 진리에서 오는 사상 외에 그 시대의 온      갖 사상의 총체를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위고   31.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시인의 눈을 간직하는 것, 시인의 영혼을 갖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으로      서 명성을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 몇 권의 시집을 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어떻게 흘러      가는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 류시화   32. 우리는 시가 더 많아야 한다. 내가 나를, 내가 너를 만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와 더 가      까와져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이문재      
509    屎屎的 詩 댓글:  조회:4488  추천:0  2015-05-16
 시시한 시    「시를 읽어도 세월은 가고,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세월을 보낸 사람에 비해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 불행하다. 시 읽기가 새롭고 다양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경험이라면,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의 경험은 얕아서 찰방거리고 추억은 남루할 테니까 말이다.」(시인 안도현의 말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시인 안도현은 또 다른 책에서 「이 세상에 시 읽는 기쁨만큼 행복한 일은 별로 없다.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생은 참으로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때로 시를 읽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꿈을 꾼다.」라고까지 말한다. 시인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분명히 제정신이 아닌 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시인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이런 글 올리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닌 글을 골라서 여기에 올리는 사람 역시 틀림없이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단정할 것이다.   시는 참으로 시시하다. 시시하니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안 보고 안 읽는다. 시궁창에 버려진 쉰 밥덩어리만도 못하게 대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난해한 현대시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잠시 시간 내어 보면, 먹게 될 떡을 올려놓아 주었는데 이게 웬 떡 하면서 맛있게 먹을 채비를 해야 하는 건데 딴청을 하고 있으니…     음악도 되풀이해서 듣는 가운데, 그 음악의 맛을 차차 알게 되고 그 맛에 길들여지듯이, 시도 역시 찬찬히 그리고 곰곰이 (소리 내어) 되풀이해서 읽는 가운데, 그 시를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다. 휘딱 읽어치우고 “뭐, 시가 이래.” 혹은 “뭐 세상에 이런 시가 다 있어.” 한다면 시와는 전혀 인연을 맺지 못하게 되고 시와는 평생 겉돌게 된다.     품격 높은 정서(?)를 위해 애송시 시리즈까지 만들어 올렸더만 그림과 유머를 보는 재미에 빠졌는가 시가 시시하게 취급을 당한다. 그림(?)과 유머를 너무 좋아하덜 마라. 詩도 좀 읽고 음미하시라. 시를 읽으면 치매 없이 10년은 거뜬히 더 장수한다고 하더라. 그림을 즐기는 친구들이여, 그림이 그토록 좋은가. 내가 지겨울 정도로 많은 그림이 있는 곳을 가르쳐줄까. 별의별 형태와 작태를 보여주는 그림이 수천수만 장이 모여 있는 기똥찬 사이트들이다. 그런데 거기다 코 박고 즐기다 보면 헛심만 빠진다. 시 읽고 스스로 깊어지는 삶을 살기가 싫으면 어쩔 수 없다만, 조화 있는 삶을 위해 시도 읽고 그림도 보고, 유머도 보고 그래야지, 주로 그림 보는 재미로 살다간 제명도 다 살지 못하면 어쩔 거냐. 모든 건 습관들이기 나름인데… 그렇다고 이왕 시작한 시리즈를 접고 다른 장사(?)를 시작할 수도 없고…. 이 마당에 나도 사뭇 시시한 시와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다...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        "시인은 고독을 슬퍼하면서 즐기는 견고한 바위 같고 바다 같고 별 같고 달 같고 호수 같은 존재이다. 시인은 그 고독을 어떻게 이겨내는가를 스스로 관찰한다. 이때 시는 자신과의 대화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다음의 아픈 견딤일 수도 있고, 참을성 있는 기다림일 수도 있다.“ (p.283)   (푸르메. 2014) 50여 년을 시인이자 소설가로 글을 써온 작가 한승원의 시 쓰기에 관한 책이다.   책의 1부에서는 자신이 시를 쓰면서 겪었던 경험과 함께 시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소개한다. 2부에서는 선의 전통이 배어있는 시와 이야기를 들려주고, 3부에서는 어떻게 시를 쓸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4부에서는 시를 꾸미는 수사법의 종류에 대해 알려준다.   저자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첫 번째 비법으로 시인으로서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스님들이 도를 닦듯이 수양을 해야 한다는 것. 즉 시인답게 마음을 비우고 살고, 어린아이 처럼 우주의 여러 현상과 그 내면의 뜻을 발견하고 놀라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시인의 마음이 갖추어진다면 이미 반 이상은 시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양새를 읊으면 곧 시가 되는 것이므로.” (p.8)   그와 더불어 사랑은 자신의 영원한 화두라며, 좋은 시를 쓰려면 진실로 짝사랑을 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영원한 화두이다. 사랑을 표현한 시 속에서, 그 사랑의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의 도달점이기도 하다.(중략) 확언하건대, 모든 사랑의 시는 진실로 사랑하는 대상이 없으면 써지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면 시도 없는 것이다.” (p.28~p.29)   또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판별하여 읽고, 그것을 암송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시인이 되려는 사람이 일차적으로 가져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며, 시를 치장하는 수사법을 공부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고 한다.   끝으로 '시 쓰기의 실제’에서 들려주는 몇 가지 비법 중 하나인 ‘파도만 보지 말고 물을 볼 줄 알아야 한다.’에 소개된 내용이다.   “바다에 가도 파도만 보고 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파도만 본다는 것은 현상적으로만 본다는 것이고, 물을 본다는 것은 본질, 실체(원래의 참모습)를 본다는 것이다. 보되 현상 아닌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듣되, 현상 아닌 본질을 들어야 한다. 냄새를 맡되, 현상 아닌 본질을 냄새 맡아야 한다." (p.255)   이와 함께 그는 ‘한 주제를 가지고 연작시를 써 버릇하라‘, ’시인은 여러 계층의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시인은 꿈속에서도 시를 쓴다’고 말한다.   책은 다양한 주제를 짤막짤막한 글로 담아내고 있어 술술 읽힌다. 혹 시 쓰기에 대한 대단한 비법을 기대했던 독자들이라면 다소 실망을 할 수도 있다. 결국 시 쓰기든, 소설이나 에세이 쓰기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비법서를 읽기보다 본인이 직접 써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란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될 테니까. 그 보다는 우리 시대의 어른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와 삶의 지혜를 듣는다는 생각으로 읽는 것도 좋겠다.  
508    <스승의 날> 시모음 댓글:  조회:4690  추천:0  2015-05-15
                                                                                                                                        스승의 기도 / 도종환   날려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듯 저희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당신께 그러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뜨거운 가슴으로 믿고 따르며 당신께서 저희에게 그러하듯 아이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거짓없이 가르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저희가 있을 수 있듯  저희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힘차게 나는 날갯짓을 가르치고 세상을 올곧게 보는 눈을 갖게 하고 이윽고 그들이 하늘 너머 날아가고 난 뒤 오래도록 비어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그 풍경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일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저희틀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백 점 맞은 연못 / 박승우(아동문학가) 하늘 선생님이 연못을 채점한다. 부레옥잠, 수련, 소금쟁이 물방개, 붕어, 올챙이…… 모두 모두 품속에 안아 주고 예쁘게 잘 키웠다고 여기도 동그라미 저기도 동그라미 빗방울로  동그라미 친다.       우리 선생님 / 김용택 시인 우리 선생님은  손바닥을 탁 때려놓고 종달아 너 아프냐 물어본다 우리 선생님은 무릎 꿇고 손 들고 앉혀 놓고는 종달아 너 팔 아프냐 물어본다     스승의 날 / 전병호(아동문학가)   선생님께 카네이션 달아 드릴 반 대표는 그야, 선생님 사랑 가장 많이 받은 사람 그럼 반장, 아니 부반장, 아니 그럼 누구? 장난 심하다고 공부 안 한다고 평소에 가장 많이 야단 맞은 나야, 나       스승의 시/ 케빈 윌리엄 허프 (미국의 웹디자이너로서 교사인 아내를 위해 '선생님'에 관한 일련의 시를 씀) 선생님은 학생들 마음에 색깔을 칠하고 생각의 길잡이가 되고 학생들과 함께 성취하고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길을 밝혀 젊은이들을 인도하며 지식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당신이 가르치고 미소 지을 때마다 우리의 미래는 밝아집니다. 시인, 철학자, 왕의 탄생은 선생님과 그가 가르치는 지혜로부터 시작하니까요.     무명교사 예찬사 /헨리 반 다이크·(미국 시인)   나는 무명교사를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노라. 위대한 장군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무명의 병사이다. 유명한 교육자는 새로운 교육학의 체계를 세우나  젊은이를 건져서 이끄는 자는 무명의 교사로다. 그는 청빈 속에 살고 고난 속에 안주하도다. 그를 위하여 부는 나팔 없고,  그를 태우고자 기다리는 황금마차는 없으며,  금빛 찬란한 훈장이 그 가슴을 장식하지 않는도다. 묵묵히 어둠의 전선을 지키는  그 무지와 우매의 참호를 향하여 돌진하는 그이어니 날마다 날마다 쉴 줄도 모르고  천년의 적이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자 싸우며,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워 일으키도다. 게으른 자에게 생기를 불어주고  하고자 하는 자에게 고무하며  방황하는 자를 확고하게 하여 주도다. 그는 스스로의 학문하는 즐거움을  젊은이에게 전해 주며   최고의 정신적 보물을 젊은이들과 더불어 나누도다. 그가 켜는 수많은 촛불  그 빛은 후일에 그에게 되돌아 그를 기쁘게 하노니       가장 좋은 스승 / 윤생진의 < 인생을 바꾼 남자 > 중   칭찬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꾸중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유안진 / 잊을 수 없는 말 한마디 중   우리 모두는 학생이자 스승이다. 칭찬과 꾸중을 확실히 할줄 알면 스승이 되고 그 것 제대로 못하면 인생 공부가 더 필요한 학생이 된다 가장 좋은 스승은 칭찬과 꾸중을 적절히 하는 사람이며, 그런 스승은 학교뿐 아니라 사회나  각 가정에도 많이 있다.   은혜는 인간에게만 있는 귀중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현재의 자신을 키워 준은혜가 있기 마련이다.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안 잊는다는 것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나는 교사다/제인 블루스틴의             -< 내 안의; 빛나는 1%를 믿어준 사람 > 중   나는 교사다. 교사는 누군가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여기엔 마법이 있을 수 없다. 나는 물 위에 걸을 수 없으며 바다를  가를 수도 없다. 다만 아이들을 사랑 할 뿐이다.       누군가의 교사가 된다는 것.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과 같다. 특별한 비법이 따로 없다. 그저 믿어주고 지켜주는 것이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사람을 키워내고 이끌어 주는 일에           사랑보다 더한 마볍은 없습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 중-        
507    황지우 시모음 댓글:  조회:6028  추천:0  2015-05-15
시인 황지우 시 모음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몹쓸 동경(憧憬)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시에게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황지우 黃芝雨 (1952. 1. 25 -  )본명 황재우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버라이어티 쇼, 1984  저 새끼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야 새끼야 눈깔을 엇다 뜨고 다녀?/뭐 새끼야? 이 새끼가 엇다 대고 새끼야 새끼야 나발까는 거야? 左回轉車線에서 영업용 택시 운전수와 자가용운전자(ah, he owns a Mark V GXL Ford)가 손가락을 하늘로 찔러대면서 악 쓴다.  하늘 높이, 아니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교회 첨탑이 솟아 있다. 빨간 네온싸인 十字架가 빨간 네온싸인의 '영동 카바레'위에 켜져 있다. 무슨 通信社 안테나塔 같은게......., 늦은 밤까지 어떤 썩을 놈의 영혼들과 交信中인지.  못 믿겠어. 그들의 '약속의 땅'으로는 들어가지 않겠어. 침략자들!  노래야 나오너라 궁자작 짝짝/안 나오면 쳐들어 간다 궁자작 짝짝/엽저언 여얼 다앗냐앙  나의, 文學, 行爲는 답이 아니라, 물음이, 다. 속, 없는 질문이, 며 덧 없는, 의, 문이, 다. 끝, 없는 의혹이, 며 회의, 이며...... 끝없는의혹이며회의일까?  그대의 의혹과 회의를 축하합니다(풍자적으로)----제12회 상록수 문학상 수상식에서. 이상하다. 그녀는 이 말이 전혀 진심으로 오지 않는다. 꽃다발을 받고 원로 문인들과 기념촬영도하고 신문사에서 인터뷰도 따가고 했는데도 그 女流詩人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공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강간당하고 온 기분이었다.  미쓰 리는 옷을 홀라당 벗고 먼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 틈의 아침 햇살이여. 환한 먼지들이여. 환멸이여, 환멸이여. 죽고 싶도록, 죽이고 싶도록!  오늘 아침 버스를 타는데, 뒤에서 두 번째 오른쪽 좌석에 누군가 한 상 걸게 게워낸 자국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에 서로 먼저 앉으려다 소스라치면서 달아났다. 거기에는, 밥알 55%, 김치 찌꺼기 15%, 콩나물 대가리 10%, 두부알갱이 7%, 달걀 후라이 노란자위 흰자위 5%, 고춧가루 5%, 기타 3% 순으로.  天地神命이시여, 이게 우리이 地上의 糧食이랍니다. 퍼부어주세요. 퍼먹여 주세요.  그러면 농수산부장관, 나와서 답변하시오. 도대체 추곡수매가를 인상 못하는 이유가 머시요? 이제 와서 어디다 顔面 내세울 것도 없는 國民黨의 ㄱ의원이 단상을 치고 핏대를 세우고 아무리 언성을 높혀 보이, 농촌은 그들의 과거이고.  야! 그렇다고 이렇게 놔두면 어떻허니? 뒤에서 두 번째 왼쪽 좌석에 앉은 40대 중년신사가 多少 神經質的으로 언성을 높힌다. 답변 대신, 안내양은 뒤에서 두 번째 오른쪽 그 자리를 신문지로 덮어 두고만 간다.  시위 서울대생 4명 拘束:서울 冠岳경찰서는 15일 교내에서 시위를 주도한 서울대 4년 金영수(22. 수학과) 李혜자(21. 생물학과) 許熙英(23. 신방과) 申윤호(22. 지리학과) 등 4며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행위로 구속했다. 金군 등은 지난 11일 상오 1시 40분쯤 도서관과 학생식당 주변에서 [민주학우투쟁선언문]이라는 반정부유인물 1천여장을 뿌리며 시위를 주동한 혐의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 맨 가슴에다 못을 박습니다.  거 봐! 그러니까 내가 뭐래든.  이번 대형금융부정사건은 정부 고위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검찰총장이 발표한 이상, 이번 대형금융부정사건은 정부 고위층과 아무런 관련이 없  ?  이런 부호 하나 찍을 줄 모르는 신문이 新聞이냐? 官報냐?  뭐 말이 많아, 짜식들 말야! 조져! 무조건 먼저 조져 놓구 보라구!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는 얼굴 한번 움직이지 않고 소리로만 웃는다 철가면 철면피.  40넘은 어느 영화감독이 여중 2학년짜리를 임신시킨 일이 있었잖아---야아, 그게 그 속에 어떻게 들어갔을까? 들어갈 수 있었을까?  모든 현실은 지옥이다. 그때마나.  특히, 제3세계 新生國들 가운데 일반화되었던 '일당독재현상'은 그들의 反식민주의.反제국주의 투쟁의 역사 위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없다, 있다, 없다, 그렇다 없다, 아니다 있다,......  어제, 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 주최한 某세미나에 패널 토론자로서 5人의 국립대학교수들이 참석했다.  대학병원 精神病棟 창가----붉은 제라늄이 피었다가 팍 사그라든다(F.O). 이 세상의, 아무리 하잖은 꽃일지라도, 거기에는 어떤 精神 같은 것, 혹은 어떤 精靈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붉은 제라늄에게는 붉은 제라늄의 정신, 혹은 붉은 제라늄의 정영이 있을 것이다.  精神 좋아하시네! 무슨 얼어 죽을 정신이냐, 정신이긴.  박노석. 23세. 선반공. 월수입 10만원. 그는 기름 묻은 손으로 고구마뎀뿌라를 집어먹는다. 그의 손톱에 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그것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선영(21세. 梨大. 식품영양학과 3년)에게 혐오감을 주엇다. 튀김집 아줌마가 새 튀김을 가져다 줄 때까지 박노석은 뎀뿌라를 어그적어그적 씹으면서, 여대생으로 보이는 그 여자를 뚫어지게 꼰아본았다. 이선영은 기분이 완전히, 잡쳐 버렸다. 금방 씹어 먹을 것 같은 그의 敵意 어린 시선 앞에 자기 몸이 구석구석 남김없이, 속속들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년 후---에도 그의 아들이 그녀의 딸을 그렇게 만날까?  수퍼마케트 양쪽 벽이 다 거울이다. 한쪽 거울이 다른 쪽 거울을 監視하고 다른 쪽 거울은 감시하는 한쪽 거울을 감시하고 한쪽 거울은 또도 그것을 감시하고 또또또 감시하고......  臨濟스님은 禪床에 앉았다가 내려와서 한 손으로 坐見을 거두어 들고 다른 한 손으로 麻谷스님을 잡고서 물었다. "十二面觀音은 어디로 갔니?" 麻谷스님이 몸을 돌려 귀상에 앉으려고 했다. 임제스님은 주장자를 잡고 그대로 후려갈겼다. 마곡스님은 그것을 맞잡은 채 서로 붙잡고서 方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 공사장 입구에 自動人形人間이 붉은 손전등을 左右로 흔들고 있다. 밤 11시가 넘도록 하염없이 좌우로 흔들고 있다. 공사중. 추락주의! 지하 20M  어느 날 어느 때를 위해 지상의 삶을 일체 지하로 대피시키도록!  이건 하나의 가정인데요, 만약, 만약에 말임다, 내가 이 말을 끝내자마자, 지금 당장 核폭탄이 서울 上空에 떨어진다면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읍니까?  예비군 훈련 때 배우대로 화생방 수칙을 지키겠다.  가만히 앉아 있겠다.  기도를 해 본다.  '내일 지구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心情으로 면도를 한다.  속옷을 갈아입는다.  부모님 계신 고향을 향해 절을 한다.  새끼들을 껴안겠다.  꼬불쳐 둔 양주를 마신다.  마누라랑 最後로 한코 하겠다.  그렇다면 核이 귀하의 上空에 積載되어 있다는 사실을 귀하는 알고 계십니까?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나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면서, 모르면서도 알면서, 알면서도 말 못하면서,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진물을 빨고 있는 1천만 마리의 딱정벌레들. 날마다. 밤마다. 화염 아래의 눈먼 삶. 가련한, 가련한, 가련한, 아 가련한  우리가 모두 한꺼번에 죽는다면 우리에게, 죽음은 없다.  20대 女人이 등에 업힌, 生後 삼개월짜리 갓난아이를, 젊은 탁발승이 경멸적인 눈꼬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欲情의 더러운! 사타구니의 蓮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사람의 애벌레. 갓난아이는 세상 모르게, 세상을 두리번거린다(1984.1.31. 강남 터미널 歸省客 대열에서. 全州行 차를 기다리면서).  그러나 바로 그 欲정이 인類를 떠받치고 있어.  鍾三. 피카디리劇場 간판에는 유명한 우리나라 女俳優가 露骨的으로 가랭이를 짜악 벌리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연 3개월간. 우측 하단에는 그녀가 벌거벗은 남자의 상체를 끌어안고 요동치는 씬도 있다. 눈을 감고 입을 쩌억 벌리고 헐떡거리며 신음을 쾍쾍지르며, 한 시대의 삶과 文化 전체가 포르노그라피일 때 우리가 식은 새벽 방바닥에 엎드려 詩를 쓰는 이것은 무슨 짓이냐? 무슨 짓거리냐?  헬스 크럽의 석유난로 하나가 호텔 한 채를 새까맣게 태워 먹고, 7층 8층 창가에서 서로 모르는 善男 善女가 헬機 救命로프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줄을 잡고 가다가 공중에서 떨어져 죽고, 구경꾼들은 그것을 구경하고, 9층 10층에서는 무더기로 엉켜서 사람들이 타 죽어 있고.  야 사람 뒈지는 것 한두 번 봤냐? 뭐, 30명밖에 안 돼잖아.  그러나 小說家 김원우씨는 나와 술 마시면서, 한국 중산층들은 절대, 統一을 원치 않는다고 단언하고.  離散家族들은 상봉 후 다시 뿔뿔히 離散하고.  세월이 원통하다! 세월이 원통해! 세월이 원통! 그 세월이! 원통! 원통해! 이가 갈리도록.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그 어린이는 어느 한적한 시골 국민학교 교정에 銅像으로 서 있고.  출근시간---횡단 보도에 구청 직원들, 근처 은행원들, 동사무소 직원들이 '거리질서 확립' 켐페인 띠를 가슴에 두르고 혹은 그런 피케트를 들고 서 있고.  秩序의 저 끝은 궁극적으로 칼끝에 닿아 있고.  선진이라는 이름의 끝없는 行進.  근처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黃色旗를 들고, 마구 건너가려는 행인들을 저지한다.  제지당한다. 모든 관공서, 모든 학교, 모든 군관민 직장에서. 십칠시 정각에 全國的으로 同時에 국기 하기식이 실시되고, 무심코 지나가던 보행자도 황급히 서서 보이지 않는 국기를 향해 경례한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원기왕성하게, 군기가 꽉 들어서 거수경례를 하고.  이런 모습을 께서 보시면서 하시는 말쌈: '보기에 좋더라."    □ 詩作메모/황지우  지난 겨울,문학을 하겠다는 후배들과 간담하는 자리에서 나는, 詩를 언어에서 출발하지 말고 '詩的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시적인 것'은 뭐라고 딱 말할 수는 없고,딱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禪的인 것'과는 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지난 겨울 문학을 하겠다는 후배 몇몇 사람들과 나는 말한 적이 있다. 그 實例들을 나는 전태일 日記와 臨濟錄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적이 있다.詩란 금방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인데도,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떠마신다.   
506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인... 댓글:  조회:4337  추천:0  2015-05-15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시를 천성의 미학’이라고 생각하여서, 남달리 감정이 풍부한 사람에게 시적 재능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천부적인 감정을 조물주가 제공하기 때문에,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적 재질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C.D.루이스도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인이었다.’고 말하였고, R.M.릴케는 ‘젊어서는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누구나 시적 자질이나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 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이라고 해서 남달리 특별한 이성이나 감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의외로 전제한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인이 되려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왜 시를 배우려고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의 대답을 했다.  첫째는 시를 좋아해서..  둘째는 시를 한번 써보고 싶어서..  셋째는 시 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학생들은 전재한 것처럼 대답하면서 시인은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대답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를 몰라서 전전긍긍하게 된다. 수학 공식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하게 된다.   첫째, 먼저 시에 미쳐라.   둘째, 시를 많이 읽어라.   셋째, 시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라.   넷째, 지속적인 습작을 하라.   시인에게 남다른 재능은 없다고 말하지만, 배우려는 입장에서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든지 시를 잘 쓰려면 남다를 재능을 탓할 것이 아니라 전제한 과정을 잘 이해하고, 습작기간을 거쳐야 좋은 시를 쓰게 된다.   시를 막연하게 생각하고, 낭만이나 취향, 멋, 사치로 알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시 쓰기가 결코 그러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몇 권의 시집을 읽고, 또 몇 편의 시를 습작하고, 시란 별것이 아니라, 시시한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시가 결코 그렇게 써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기 사상이나 우주관에 대한 자기표현 욕구를 토해내는 예술적, 문화적 행위임을 자각해야 한다. 시인이라는 필생의 직업을 받아들이고, 시를 쓰고, 전 생애를 투자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자들은 몇 편의 습작시를 써보다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내 시 쓰기를 중단하고, 아무 생각 없이 버리는 헌신짝을 버리듯이 시를 외면한다. 하지만 시를 잘 쓰려면 끊임없는 습작이 필요하다. 많은 반복의 습작 속에서 시가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되면서 시를 잘 쓰게 된다. 시가 예술성이 강조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재능이나 자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전제한 것처럼 반복성의 습작을 통해서 시를 잘 쓰게 한다. 따라서 특수한 재능의 소유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 못된 생각이다.  시를 선천적으로, 천성적으로, 잘 쓰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시에 대하여서 관심을 갖다보면, 시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남달리 할 수가 있게 되어서, 특수한 정서 표출을 할 수가 있게 된다. 더욱이 요즘의 시는 정서 반응이나, 정서의 환기가 아니라, 이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의도적 제작’을 요구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도적 제작’이란 언어를 조형하고, 정서를 형상화하는 일종의 기술을 말한다. 시 쓰기는 천성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시 쓰는 일을 반복하고, 연마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어떤 기술이든지 테크닉은 연마하고, 수련하기에 따라서 개발되고, 세련되며, 자기만의 독창성이 있는 기법을 터득하게 된다. 시 쓰기 역시 그러하다.   그렇게 보면 시인에 대한 천부적 천성이나, 시인에 대하여 남 달은 재능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시인이 특수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누구든지 시를 박이정(博而精)으로 보고, 논리를 이해하며, 많이 써봄으로써 시인이 될 수 있다. 
505    윤동주 시와 독후감 쓰기 댓글:  조회:6405  추천:0  2015-05-15
  독후감은 시를 읽고 느낀점 또는 자기의 다짐을 써도 좋겠네요.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입니다. 시의 제목이 아니라요. 이 시집의 제일 처음 나오는 시가 바로 서시이고요 다음과 같습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삶의 지향점 절대적 영역 ①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②와 연결          소망했네 →순결한 삶의 소망 ②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럼 외부적 자극 나는 괴로워했다.  순교자적 의지를 지닌 자아 →삶의 고뇌 1-2과거-식민치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소망 이상,어둠과 바람속에서도 결코 꺼지거나 흐려지지 않는 순수하고 결백한 삶, 양심,구원의 지표를 상징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일제하의 우리민족            의지적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민족을 위한 삶의 길 걸어가야겠다  소명의식 의지적 →순교자적 삶의 소망미래-삶의 의지 주제 오늘①밤에도②별이③바람에 스치운다. 그러나 ①일제하의 현실 ②소망 이상 ③현실적 시련 그러나 나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현실적 고뇌 현재 그리고 독후감 쓰는 방법은 다음을 참고하세요   독후감은 어떤 책을 읽고 나서 받은 생각이나 느낌을 적은 글입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따라서 특별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성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쓰면 됩니다.  읽은 후의 느낌을 적는 방법, 주인공에게 글쓰기. 인물에게 글쓰기 등이 방법도 있을 것이고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활용하면 도움이 됩니다.  1. 제목 정하기   독후감의 제목은 책이나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써도 좋지만, 가급적이면 읽은이의 느낌이 뚜렷이 나타나는 제목을 붙이고, 책이나 소설의 제목은 부제로 붙인다.   (예) '허용(虛用)'으로 배우는 삶의 지혜 - '도덕경'을 읽고 -  2. 책을 읽게 된 동기 쓰기   서두는 글의 첫인상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독후감의 경우에는 내가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서두에 밝히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독후감의 서두에 독서 동기를 꼭 써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감동을 가장 많이 받은 대목이나 정경, 또는 내용과 관련이 있는 자기의 생활 경험부터 쓰기도 한다.   (예) 학교 특기 적성 교육 시간에 '철학 고전 탐구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흥미가 생기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열심히 참여하였다.(이하 줄임)  3. 감동 받은 대목이나 깨달음 쓰기(전체적 느낌 쓰기)   책을 읽고 감동 받은 내용이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면, 읽고 난 느낌을 앞부분에서 간결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다. 그러려면 우선 글을 읽고 특별히 감동 받은 대목이나 작품의 주제, 그리고 자기의 깨달음을 간결하게 밝힌다.   (예) 은 공자나 맹자의 사상보다 훨씬 심오하고 난해한 것 같았다. 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생에 밝은 전등이 되어 주고 명확한 안경이 되어 주며 신뢰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은 결코 쉽지 않은 경전이었다. 건성으로 읽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면밀하게 삼천독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려우므로, 항상 마음속에 의 참맛을 느끼기 어렵다.  4. 이야기의 줄거리(책의 내용)와 느낌 쓰기   독후감의 형식에 따라서는 줄거리를 먼저 쓰고 그 느낌을 나중에 쓰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설의 줄거리나 내용을 소개하면서 중간 중간에 그 느낌을 쓰는 것이 좋다.   (예) 나는 을 읽으면서 "허용(虛用)"이라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허용"이란 말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빈 곳의 쓰임'이란 의미다. (중간 줄임) 세상은 점점 병들어 가고 그 속에서 인간은 고통의 신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인간의 마음은 욕심으로 차 있지만, 본래는 빈 것이고, 인간은 원래 자연으로부터 온 자연의 일부분이었다. 노자의 "허용"은 이러한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도 결국은 "허용"의 삶이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용"에 눈을 돌려야 한다.  5. 읽고 난 결심 쓰기   책 전체를 읽고 자신의 결심을 간략히 쓴다.   (예) "허용"만으로 심오한 을 논하니 정말로 나의 생각이 짧고 경솔하다. (중간 줄임) 우리 현대인의 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억지로 하지 않고 본성에 따라 사는 무위자연, 빈 곳이 쓸모가 있다는 허용, 어디서나 물과 같이 구별하지 않고 낮은 대로 임하는 역성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노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 자신이라도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겠다.   * 위 예문은 "제 2회 전국 학생 독서, 독후감 공모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글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고급스러운 독자라면  그냥 동기 줄거리 느낌만 적으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지요.  문학을 보는 관점에 따라 작품을 좀더 구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면 좋은 글이 될 것입니다  문학을 보는 관점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작가   ---  (나)작품    ---   (다)독자                           |                         (라)세계  작가를 중심으로 보는 것을 (가)표현론적 관점, 작품을 중심으로 보는 것을 (나)절대주의적 관점, 독자를 중심으로 본다면 (다)효용론적 관점, 세계를 중심으로 본다면 (라)반영론적 관점, 이렇잖아요. 참 여기서 (나)만을 보면 뭐죠. 내재적 방법이고 (가)(다)(라)는 외재적 방 보면 모두 다 살피면 종합주의적 관점 이렇습니다.  표현론적 관점으로 본다면 작가는 이런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라고 쓸 수 있겠지요.  절대주의적 관점으로 감상한다면 작품의 미적 특성 구조 인물 등을 밝히는 것입니다.  효용론적 관점은 독자에게 이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기술하는 것이고요  반영론적 관점은 이런 세계를 반영했구나를 밝히면 됩니다. 
504    방랑풍류시인 - 김삿갓 댓글:  조회:6003  추천:1  2015-05-15
          시인 김삿갓(金炳淵, 1807∼1863)은 실존 인물이면서도 마치 전설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입니다. 전설처럼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그와 그의 문학에 대해 정작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는 뜻입니다.그에 대한 인생이 삿갓과 죽장, 그리고 뜬구름과 같은 방랑의 이미지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하는 유행가가 나온 지도 벌써 60년이 되어 갑니다. 이처럼 김삿갓이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기며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그의 본명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더군다나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무슨 까닭으로 한평생 방랑을 했으며, 언제 어디에서 세상을 떠나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의 생전 행장을 살피고 그의 시를 통해 그의 삶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죽장 짚고 미투리 신고 한평생을 떠돌아 다닌 천재시인 김삿갓, 풍자와 해학과 기지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과, 보통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 넘는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방랑시인 김삿갓, 그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이 땅의 산수와 저자 간을 마음대로 넘나든 영원한 자유인이요 풍류 가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이미지는 냉전 시대엔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1964년부터 무려 30년간 KBS 제1 라디오 전파를 탔던 반공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김삿갓의 가상 여행을 통해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북한 지도부의 실상을 고발한 뒤, 끝부분에 4행의 풍자시를 붙이는 형식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결국 30여 년간 방송된 이 드라마가 김삿갓과 관련해 전한 진실은 그가 풍자 시인이라는 것 정도인데 김삿갓이 평생 방랑하면서 상류사회를 풍자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었으니 일면 김삿갓을 알리는데 일조를 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으로 순조 7년(1807)에 김안근과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로 밝혀졌는데, 김삿갓은 어찌하여 방랑 길에 나섰을까 하는 것이 오래 된 의문이었습니다. 최근까지는 김삿갓이 21세 되던 해에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의 시제에 따라 그의 조부 선천부사 김익순을 욕하는 시를 지어 장원한 것이 가출, 방랑의 계기라는 설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었습니다. 여기서 ‘정가산’은 홍경래의 난(1811) 때 반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가산군수 정시를 말하고, 김익순은 반군에 항복하였다가 난이 평정된 후 역적으로 처단된 선천부사를 말합니다. 집안의 내력을 모르고 있던 그는 조부인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하게 되고,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절망과 비탄은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그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고 욕된 이름을 버리고 감삿갓으로 자처하며 방랑 길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상한 천재 김병연이 나이 스물이 되도록 치욕스러운 집안의 내력을 전혀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안이 망할 때 그의 나이 다섯 살이었으니 어렴풋이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을 것이고, 그 뒤 이리저리 떠돌며 숨어살던 일이며, 아버지가 울화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도 알고 남았을 것입니다.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 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 만리 장천과도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도는 인생, 세상잡사 초탈하여 풍류 한마당으로 천지간을 배회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김삿갓을 가리켜 뒷날 사람들이 한국의 시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선도 지상에 머무는 동안은 먹어야만 했으므로 때로는 마을에서 문전걸식도 했고 때로는 절에서 공양 신세를 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운율깨나 아는 주인을 만나면 제법 그럴듯한 환대도 받았을 것이고, 또 기막히게 운수 좋은 날이면 풍류를 알아주는 어여쁜 기생으로부터 아래위(?)로 극진한 사랑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음 시는 방랑 생활 속에서 들른 어느 시골 농가에서 죽 한 그릇을 대접받고는,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오히려 자신도 청빈하고 초탈한 삶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칠언절구입니다. 더 볼 것 없이 농민의 삶에 대한 연민과 위로와 배려가 짙게 스며 있는 시입니다. 四脚松盤粥一器(사각송반죽일기)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排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主人莫道無顔色(주인막도무안색)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吾愛靑山倒水來(오애청산도수래)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풍류호걸 김삿갓이 가는 길에 시와 술과 여자도 있었으리니 은근하고 감칠맛 나는 사랑의 시편도 어찌 없었겠습니까? 다음은 ‘회양을 지나며(淮陽過次)’라는 시입니다. 産中處子大如孃(산중처자대여양) 산골 처녀 다 커서 어른 같은데 緩著粉紅短布裳(완착분홍단포상) 분홍빛 짧은 치마 헐렁하게 입었네 赤脚踉蹌羞過客(적각랑창수과객) 맨 살 허벅지 다 드러나니 길손이 부끄러워 松籬深院弄花香(송리심원롱화향) 솔 울타리 깊은 집엔 꽃 향기도 물씬하리 이 시에서 ‘솔 울타리 깊은 집’이니 하는 것은 모두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습니다. 김삿갓이 금강산으로 가다가 강원도 양양 산골마을의 어느 서당에서 신세를 질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서당의 훈장에게는 십 칠팔 세 되는 과년한 딸(홍련)이 있었습니다. 김삿갓이 달밤에 잠이 오지 않아 뒷산 완월정에 올랐는데 그 때 정자의 누각에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아래와 같이 시 한 수를 읊었습니다. .樓上相逢視目明 (누상상봉시목명) 다락 위에서 만나 보니 눈이 아름답도다 有情無語似無情 (유정무어사무정) 정은 있어도 말이 없어 정이 없는 것만 같구나. 그러자 여인이 즉시 아래와 같이 화답하고 정자를 내려가 총총히 집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花無一語多情蜜 (화무일어다정밀) 꽃은 말이 없어도 꿀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법 月不踰薔問深房 (월불유장문심방) 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에 찾아들 수 있다오. 김삿갓은 처녀가 한시를 알아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즉시 화답까지 하는데다 운율까지 정확하여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지라 한 동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서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화답이 노골적인 유혹이 아닌가? 그날 밤 김삿갓은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홍련의 방문 앞에서 아래와 같은 시 한 수를 읊었습니다. 探花狂蝶半夜行 (탐화광접반야행) 미친 나비 꽃을 탐내 한밤에 찾아 드니 百花深處摠無情 (백화심처총무정) 깊은 곳에 숨은 꽃들은 다 무정하구나 慾探紅蓮南浦去 (욕탐홍련남포거) 붉은 연꽃(홍련)을 따려고 남포에 갔더니 洞庭秋波小舟驚 (동정추파소주경) 동정호 가을 물결에 조각배가 놀라네 그러자 방 안에서 홍련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을 합니다. 今宵狂蝶花裏宿(금소광접화리숙) 오늘 밤 미친 나비가 꽃 속에서 자고 明日忽飛向誰怨(명일홀비향수원)내일 홀연히 날아간들 누구를 원망하리오. 김삿갓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홍련은 잠시 멈칫하였다가 김병연 선생님이시지요? 하고 묻는 게 아닌가? 이내 김삿갓이 어찌 나를 아는가 하고 묻자 아버지로부터 들어서 처음 알게 되었고 풍문에 자주 들어 평소에 흠모하고 있었답니다. 이윽고 김삿갓이 기응포치(飢鷹抱雉) 즉 굶주린 매가 꿩을 덮치듯 홍련과 운우지정을 나눈 후에 순결을 너무 쉽게 바치고 부끄러움이 없는 걸 보고 놀리려는 심산으로 불을 밝힌 뒤 지필묵을 꺼내어 아래와 같이 한 수를 적습니다. 毛深內闊 (모심내활)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걸 보니 必過他人 (필과타인) 필시 다른 사람이 지나갔나 보구나 이를 본 홍련이 발끈하여 즉시 붓을 잡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 가는 데, 꾸짖기를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시냇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後園黃栗不蜂坼 (후원황율불봉탁)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터진다오 세게 한방 먹은 김삿갓이 다시 홍련을 어르고 달래 그날 밤 늦도록 다시 정을 나누었답니다. 다음 날 새벽 김삿갓은 홍련이 깨기 전에 작별 시를 써 놓고 도망치듯 그 곳을 떠납니다. 이튿날 이별하면서 써놓은 시 한 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昨夜狂蝶花裏宿 (작야광접화리숙) 어젯밤에 미친 나비 꽃 품에서 잤건만 今朝忽飛向誰怨 (금조홀비향수원) 오늘 아침 훌쩍 날아가니 누구를 원망하랴. 어젯밤 홍련이 화답한 시구를 그대로 인용하여 미안한 마음을 표현한 시를 홍련의 하얀 속치마 폭에 써 놓았는데, 홍련 또한 김삿갓이 머물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건만 그래도 매우 섭섭했으리라. 김삿갓은 이 외에도 시문을 아는 기생들과 사귀며 시와 사랑을 주고받은 흔적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기생에게 주다(贈妓)’라는 시가 그렇습니다. 却把難同調(각파난동조) 잡는 손도 뿌리치고 어울리기 어렵더니 還爲一席親(환위일석친) 되돌아와 한자리에서 친해졌구려 酒仙交市隱(주선교시은) 이 주선(酒仙) 저자에서 숨은 여인과 사귀니 女俠是文人(여협시문인) 이 여인 글 잘하는 문인이구려 太半衿期合(태반금기합) 우리 서로 옷고름 풀기까지 가까웠을 때 成三意態新(성삼의태신) 그대 모습 달빛에 술잔에 새로이 어리네 相携東郭月(상휴동곽월) 이제 서로 껴안고 동녘 성곽 달빛 아래서 醉倒落梅春(취도락매춘) 술 취해 쓰러지듯 봄날 기듯이 정을 통하네. 삿갓은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문 적이 있었는데 가련은 이 때 만난 기생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 셋 혈기 방장한 청년 김삿갓은 힘든 방랑 길에서 모처럼 갖게 되는 안정된 생활과 함께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 모처럼 사랑의 회포를 풀어 놓는데, 기생 가련의 이름을 운을 삼아 읊는 시가 기가 막힙니다. 可憐妓詩 (가련기시) 기생 가련에게 可憐行色可憐身 (가련행색가련신)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可憐門前訪可憐(가련문전방가련)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可憐此意傳可憐 (가련차의전가련)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可憐能知可憐心(가련능지가련심) 가련이는 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방랑벽을 막을 수 없었으니 그는 다시 삿갓을 쓰고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떠납니다. 그래서 쓴 이별이라는 시입니다. 離別(이별) 可憐門前別可憐(가련문전별가련)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可憐行客尤可憐(가련행객우가련)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可憐莫惜可憐去(가련막석가련거)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 말라 可憐不忘歸可憐(가련불망귀가련)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련다 또한 그의 詠笠(삿갓을 읊다)이라는 시는 병연이라는 이름을 숨기고 스스로 표연 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으로 풀이되는 시입니다. 浮浮我笠等虛舟(부부아립등허주)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一着平生四十秋(일착평생사십추)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牧堅輕裝隨野犢(목견경장수야독)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漁翁本色伴沙鷗(어옹본색반사구)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醉來脫掛看花樹(취래탈괘간화수)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興到携登翫月樓(흥도휴등완월루)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 하네 俗子依冠皆外飾(속자의관개외식) 속인(俗人)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滿天風雨獨無愁(만천풍우독무수) 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그에게 삿갓은 자유로운 방랑자의 삶의 상징이고 그것은 허위와 가식을 벗어 버린 진솔한 삶이자, 무소유의 자유와 흥취, 생활에 뿌리 내린 현실적 삶의 지향이었던 것입니다. 김삿갓 시는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표현 기교의 측면에서 한시의 정형성을 파괴하여 언어의 유희성과 구비성 면에서 조선 후기의 전통적 한시의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시는 한시임에도 민요, 잡가, 사설시조 등의 구비 시가처럼 민중의 사랑을 받으며 구전되어 온 까닭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김삿갓 시에는 파격적 해학성과 외설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는 파자(破字)는 물론,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고 비속할 만큼 희작화 한 방식으로 민중들의 삶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희작시(戱作詩)는 민간의 한자 사용 기법을 이용해 점잖은 사대부의 감춰진 독설을 시격(詩格)으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의 한시가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는 이러한 정서적 성격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세태를 꼬집는 풍자적 내용과 함께 한자를 파격적으로 사용한 희작시는 엄숙한 사대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궁벽한 시골의 농민들이나 서당아이들에겐 훨씬 친근하게 다가갔으리라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김삿갓이 어느 서당에 들러 잠시 쉬고 있자니 버르장머리 없는 학동 녀석들이 거지나 다름없이 초라한 행색의 김삿갓을 깔보고 놀려댔습니다. 그러자 김삿갓이 칠판 아닌 벽판에 시 한 수를 써 붙인 뒤 이렇게 일러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 시는 글자 뜻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나는 대로 새기느니라.” 하고 말입니다. 書堂乃早至(서당내조지)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 보니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 방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學生諸未十(학생제미십) 생도는 모두 열명도 못 되는데 先生來不謁(선생내불알)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는구나 또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유식한 척 하는 부부가 식사 때가 되어도 식사 대접을 할 생각은 안하고 딴에 암호 같은 파자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누라 : 인량차팔(人良且八 = 食具 밥상 차릴까요?) 서방 : 월월산산(月月山山 = 朋出 이 친구 가거든.) 파자 시의 대가인 김삿갓 앞에서 이럴 수가!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었습니다. 김삿갓이 자기도 이렇게 파자로 암호 같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 견자화중(犭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구나(猪種可笑 이 돼지새끼들아, 가소롭구나!)” 방랑 시인 김삿갓이 남긴 시중 풍자시는 많지만 숫자로 엮어 나가는 절묘한 시로는 이십수하(二十樹下)로 시작되는 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김삿갓이 함경도 땅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김삿갓은 날이 저물고 추위와 허기가 견딜 수 없자 어느 집에 한끼의 밥과 하룻밤의 잠자리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동냥하러 온 모양이니 아무거나 좀 갖다 먹여 보내라. 그러나 잠자리는 절대 안 된다."하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주인의 호된 면박을 받은 그는 화가 치밀었지만 당장의 굶주림 때문에 꾹 참고 뜰 앞에 서 있는 스무나무 아래에 서서 밥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낡은 소반에 밥을 차려 내왔는데 찬밥에다 된장뿐입니다. 그래도 시장한 김에 숟갈에 밥을 떠서 한입에 넣으니, 쉬다 못해 썩은 밥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니 안 먹을 수도 없어, 억지로 먹고 난 후 일어서며 설움이 복받쳐 지은 시가 바로 이 시입니다.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스무나무 아래서 서러운 나그네가 四十村中五十食(사십촌중오십식) 망할 놈의 동네에서 쉰 밥을 먹네 人間豈有七十事(인간기유칠십사)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선 밥을 먹느니만 못하구나 여기서 스무나무는 느릅나무과로 시무나무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옛날에는 오리마다 오리나무, 십리마다 스무나무를 이정표로 심었다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지식하게 해석을 하면 김삿갓의 시 맛이 떨어 집니다. 여기서 二十樹下(이십수하)라는 시 제목을 잘 보면 상당히 심한 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를 나무 또는 놈 등 훈으로 읽으면 '수하'는 '놈아'가 됩니다. 이십은 된소리로 읽으면 욕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점잖게 해석하면 스무(스물)나무 아래서 서러운(서른) 나그네가(二十樹下三十客) / 망할(마흔) 동네에서 쉰(오십) 밥을 얻어 먹으니(四十村中五十食) /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으리오(人間豈有七十事) /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 밥 먹느니만 못하리로다(不如歸家三十食) 하고 읊었습니다. 어느 날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에서 해가 떨어진 황혼 무렵에 잠 잘 곳을 찾아 어느 집을 찾아가 하룻밤 자고 가자 하니 주인 하는 말이 방이 하나 있긴 한데 땔나무가 없어서 군불을 지필 수가 없다 하며 거절하자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개성인심을 탓하였다 합니다. 邑號開城何閉門(읍호개성하폐문) 고을 이름은 성을 열라는 데 어찌해 집집마다 대문을 걸었으며, 山名松嶽豈無薪(산명송악기무신) 산 이름은 소나무가 많다는데 나무가 없다니 웬 말이냐 黃昏逐客非人事(황혼축객비인사) 황혼에 손님을 쫓아 냄은 사람의 도리가 아닐진 데, 禮儀東方子獨秦(예의동방자독진) 동방 예의의 나라에서 자네 혼자 되놈일세 또 다른 외딴집을 힘들게 찾았으나 이 집 역시 거절하자 이 날은 김삿갓도 별 수 없이 송악산 토굴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합니다. 斜陽鼓立兩柴扉(사양고립양시비) 석양에 사립문 앞에 우뚝 버티고 섰으려니, 三被主人手却揮(삼피주인수각휘) 주인은 손을 휘이휘이 내저어 세 번씩이나 가라고 한다. 杜宇亦知風俗薄(두우역지풍속박) 두견새도 풍속이 야박한 것을 알고 있는지, 隔林啼送不如歸(격임제송불여귀) 저 건너 숲 속에서 돌아감만 못하다고 울어 여이네. 김삿갓이 날이 저물어 하루 밤 신세 지려고 어느 양반 집에 들렀습니다. 문 앞에서 그 집 머슴이 하는 말“우리 주인 어른은 손님을 맞아 들이는데 까다로우니 직접 찾아가 부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이며 하는 말인 즉 “주인 어른이 이마를 만지면 귀한 손님이니 저녁상을 푸짐하게 차리라는 표시이고, 콧등을 만지면 보통 손님이니 적당히 대접하고, 수염을 만지면 귀찮은 손님이니 한술 먹여 보내라는 표시”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김삿갓은 이 말을 듣고 주인 영감에게 찾아갔으나, 행색이 초라한 김삿갓을 아예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데, 그때 머슴이 달려와 주인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삿갓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영감님, 이마에 모기가 앉았습니다.”라고 말하자 주인영감은 허둥대며 이마를 수 차례 비벼 대는 게 아닌가. 그 모양을 본 하인은 무척 귀한 손님인 줄 알고 대접을 잘 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밥을 잘 얻어 먹은 뒤 작별을 고하면서 “하룻밤 잘 머물다 갑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으니 시나 한 수 지어 드리고 갈까 합니다”하고 단숨에 시 한 수를 써 주고 떠났는데 그 시가 바로 이 시 犬子(개새끼) 시입니다. 天脫冠而得一点(천탈관이득일점) 천(天)자가 모자를 벗고 점을 하나 얻어 달았고 乃失杖而橫一帶(내실장이횡일대) 내(乃)자는 지팡이를 잃고 허리에 띠를 둘렀구나 양반인 주인영감 체면 때문에 무슨 뜻인지 물어보지 못하고 낑낑거리다가 나중에야 뜻을 알고 노발대발 날뛰었었다고 합니다. 그 뜻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천(天)자가 모자를 벗고 점을 하나 얻었다는 것은 개 견(犬)자이고, 내(내)자가 지팡이를 잃고 허리에 띠를 둘렀다는 것은 아들 자(子)로 즉, 개새끼라는 뜻이었습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그 집 아낙이 설거지물을 밖으로 홱 뿌린다는 것이 그만 김삿갓에게 쏟아졌습니다. 구정물을 지나가던 객이 뒤집어썼으니 당연히 사과를 해야 마땅하지만, 삿갓의 행색이 워낙 초라해 보이는지라 이 아낙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돌아섭니다. 그래서 삿갓이 등 뒤에 대고 한마디 욕을 합니다. 하지만 양반 체면에 암만 그래도 상스런 욕을 할 수는 없어서 단 두 마디를 던지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해. 해." 아니 이게 무슨 욕입니까? 그러나 잘 풀어보면 해는 年이니까 "해. 해." 하면 년(年)자가 2개니까 2年(이 년)이든지 아니면 두 번 연속이니까 쌍, 곧 雙年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현하기도 하며 한시를 한글의 음을 빌어 멋지게 풍자하고 조롱하는 그의 솜씨는 우리나라 고대문학사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는 요새 같으면 분명 노벨 문학상 감입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죽시(竹詩)입니다. 그 시의 첫머리는 이렇습니다 此竹彼竹化去竹(차죽피죽화거죽) 風打之竹浪打竹(풍타지죽랑타죽) 이것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 저 대나무 되어가는 대나무, 바람이 치는 대나무, 물결이 치는 대나무"입니다. 그러나 그럴 듯 하지만 해석이 틀렸습니다. 이 시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비결은 대죽(竹)에 있습니다. 여기서 김삿갓은 대를 대나무가 아니라 "...대로"의 '대'로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이 시의 첫 구절을 다시 읽어보면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가 됩니다. 竹詩(죽시) 此竹彼竹化去竹(차죽피죽화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風打之竹浪打竹(풍타지죽랑타죽)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粥粥生此竹(반반죽죽생차죽)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是是非非付彼竹(시시비비부피죽) 시시비비는 따르는 그대로 賓客接待家勢竹(빈객접대가세죽)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歲月竹(시정매매세월죽) 시장에서 사고 파는 것은 시세대로 萬事不如吾心竹(만사불여오심죽) 만사는 내 마음과 같지 않은 대로 然然然世過然竹(연연연세과연죽) 그렇고 그런 세상 흘러가는 그대로 얼마나 멋진 시입니까? 그의 시에는 또 구월산이란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昨年九月過九月(작년구월과구월) 작년에는 구월에 구월산을 넘었는데 今年九月過九月(금년구월과구월) 금년에도 구월에 구월산을 넘는구나 年年九月過九月(년년구월과구월)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넘으니 九月山光長九月(구월산광장구월) 구월산 경치는 언제나 구월이로다 방랑시인 김싯갓의 애수가 녹아 있는 이 감상적인 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쓰인 ‘구’자 때문에 담담하게 승화되어 있습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가을 산에 흠뻑 빠진 산 객의 마음을 담고 있어 자주 흥얼 거리는 시입니다. 천하를 방랑하던 김삿갓이 금강산의 한 절에서 글짓기 내기를 하는데 선비를 놀리는 대목이 나옵니다. "좋소, 그럼 내가 먼저 운을 부를 테니 즉시 답하시오." 선비는 이왕 내친 김에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습니다. "타." "타라니, 이건 한문 풍월이요, 아니면 언문 풍월이요?" 김삿갓은 눈을 빛내며 선비에게 물었습니다. "그야 물론 언문 풍월이지." 김삿갓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투였습니다. "좋소이다. 내 답하리다. 사면기둥 붉게 타!" "또 타!" "석양 행객 시장타!" "또 타!" "네 절 인심 고약 타!" "........" `타`자가 떨어지기 바쁘게 김삿갓이 시를 지어 나가니 선비는 어이없는 모양입니다.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만 나오니 다시 더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김삿갓은 선비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그가 `타!`하고 뱉으면 `지옥가기 꼭 좋타!` 하고 내 쏠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해가 질 무렵 어느 마을 서당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재워달라는 김삿갓의 요청에 서당 훈장이 내기를 거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운을 띄울 터이니 시를 지어 보시오. 잘하면 따뜻한 저녁에 술상이 나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림 없소” 김삿갓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시제를 청합니다. ˝멱!˝ ˝무슨 멱 자입니까?˝ ˝구할 멱(覓).˝ 김삿갓은 빙그레 웃고는 마치 운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시구를 댑니다. “許多韻字何呼覓(허다운자하오멱) 많고 많은 운자에 하필 멱자를 부르는가?” ˝다시 멱!˝훈장은 두 번째로 멱 자를 불렀습니다. “彼覓有難況此覓(피멱운자황차멱) 첫 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 자는 어이 할까?” ˝또 멱!˝ “一夜宿寢懸於覓(일야숙침현어멱) 오늘 하룻밤 자고 못 자는 운수가 멱 자에 달렸는데” ˝멱!˝ 훈장은 마지막 멱 자에 힘을 주어 운을 띄웠습니다. 김삿갓은 마지막에도 주저하지 않고 마치 준비된 듯이 남은 시구를 완성합니다. ˝山村訓長但知覓(산촌훈장단지멱) 산촌의 훈장은 멱 자 밖에 모르는가.” 산골 훈장은 이렇게 당하고도 그의 뛰어난 시재에 놀라 깍듯이 대접하여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시대를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으로 일관했던 일세의 풍류시인 김삿갓은 철종 14년(1863)에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57세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조선왕조 말 어지러운 시대의 그늘에서 좌절과 실의를 딛고 죽을 때까지 외로운 발길을 멈추지 않았던 김삿갓의 방랑 또한 그 나름대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구도 행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 명국환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시인 기형도 시 모음과 시인 소개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 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 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 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 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 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 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 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 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그 입 속에 악착 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이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 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 보면 축축한 등 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그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 위로 들이친다.             그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 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늙은 사람                                          그는 쉽게 들켜 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 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 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물 속의 사막                                      밤 세 시, 길 밖에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 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 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 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 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숲으로 된 성벽                                      저녁 노을이 지면 신(神)들의 상점(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城)     어느 골동품 상인(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식목제(植木祭)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 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안개                                                    □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겁탈당하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어느 푸른 저녁                                             □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 그의 마음 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는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래된 서적(書籍)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이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                                □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 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 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세,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장미빛 인생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그는 건장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 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 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 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 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 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 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 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집시의 시집                                           □  1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신(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어떤 아이는 실제로 그가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어른들도 몰랐다. 우리는 그가 트럭의 고장 고등어의 고장 아니, 포도의 고장에서 왔을 거라고 서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때마다 그는 농장의 검은 목책에 기대 앉아 이상한 노래들을 불렀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햇빛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 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가신(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     그의 말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우리의 튼튼한 발을 칭찬했다. 어른들은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은 신기한 폭탄, 꿈꾸는 부족(部族)에겐 발견의 도화선. 우리는 그를 믿었다. 어느 날은 비에 젖은 빵, 어떤 날은 작은 홍당무를 먹으며 그는 부드럽게 노래불렀다. 우리는 그때마다 놀라움에 떨며 그를 읽었다.     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 모든 사물들의 도장(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과오(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     추수가 끝나고 여름 옷차림 그대로 그는 읍내 쪽으로 흘러 갔다. 어른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병정놀이들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코밑에 수염이 돋기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그 사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누군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이미 그의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상급반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혈통과 교육에 대해 배웠다. 오래지 않아       □  3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저녁마다 연필을 깎다가 잠드는 버릇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다.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 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 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 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포도밭 묘지 1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약시(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 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발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 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공중(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척 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 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들. 기억하느냐, 그 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부재(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 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 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흔해빠진 독서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 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기형도(奇亨度)  (1960. 2. 16 - 1989. 3. 7)                                                    인천 옹진 출생.  주요수상  윤동주문학상(1982), 동아일보 신춘문예(1985)     1960년 2월 1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문화부·편집부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시집 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중,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1989),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1990), 《기형도 전집》(1999) 등이 있다.       ................................................................................................................................................................................   ■ 작가 이야기     검은 존재론의 화신, 기형도!       거창하게 시인 기형도의 존재론을 거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를 '검은 존재론(schwarze Ontologie)'의 화신(化身)으로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시세계에는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부터 돌출 되어진 고통과 파괴의 흉터들이 즐비하고 젊어서 세상을 등진 불우한 운명이 자아내는 죽음과 쇠락의 이미지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오래 된 書籍')부터 기어나와 "검은 외투를 입"('어느 푸른 저녁')고, "검고 무뚝무뚝한 나무들 사이로"('안개') "검은 구름"('정거장에서의 충고')을 황량하게 쳐다보며, "검은 페이지"(「오래 된 書籍」) 위에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입 속에 검은 잎')으로 시를 노래한 '검은 존재'의 전형,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한 젊은 시인의 순수한 영혼을 "가엾은 빈집에"('빈집') 가두어 이제는 "흘릴 눈물(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포도밭 묘지 1')고 울부짖게 했는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시집 전체를 내적으로 관통하는 이 검은 부정성(否定性)의 강물은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일까?   대략 세 개의 원천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시인의 가난한 자전적인 경험 즉 유년과 청년기의 상실 체험에 연관되는 샘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도시적 일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실존의 부조리와 그로테스크를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표지로 이해하는 샘이며, 또 다른 하나의 샘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연루되는 상징적인 진혼가의 잔영이다. 어쨌든 그의 돌연사 이후, 독자는 폭발적으로 늘어 이제 그의 시는 시작(詩作)을 꿈꾸는 문청들에게는 일종의 '통과제의'의 성소가 되었다. 그의 시는 이미 신화의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죽음을 통해 다시 신화로 환생하는 끈질긴 저력, 불사(不死)의 시! 실로 끔찍한 아름다움이다. (류신/문학평론가)          나는 이제 다르게 살고 싶다.  그럴 경우 모든 굳은 체념들이 살아날 것이다.   - 기형도 -         시인 '기형도'를 아시나요?     시인 기형도는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잘 등장하지 않는 시인이기 때문에 문학계에서는 매우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중에는 그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시에 문외한인 내가 기형도를 알게 된 것도 고등학교 졸업 후 TV를 통해서였다. 기형도.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TV를 본 후 나는 곧바로 도서관에 가서 기형도라는 낯선 시인의 시집을 찾았다. 시에 무지한 나에게는 기형도 시인이 낯설었지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시집 은 여러 사람의 손때를 가득 담고 있었다.            시인 기형도는 1960년 2월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러나 곧 부친의 사업 실패로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그 터전을 옮기게 된다. 등 몇몇 시에서도 자세히 볼 수 있듯이, 그의 어렸던 시절은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가난한 날의 연속이었다. 가난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있던 어린시절 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우등생이었고, 중학교 때부터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뒤 기형도는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시작했고 이후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었다. 계속해서 시작을 해오던 그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가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며 독창적이고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1989년 3월 뇌졸중으로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그의 시신이 돌연 이른 새벽 종로 3가 한 극장의 관람석에서 발견되었고, 죽음에 이른 원인도 뇌졸증으로 추정만 할 뿐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어 기형도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말들이 있었다.  그의 이러한 미스테리한 죽음은 문학인들이 기형도의 작품세계를 해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형도의 작품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은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보았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시에 대한 이야기          사실 이 시집에 있는 작품들 하나하나는 모두 주옥같아서, 3편을 선정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기준을 두고 나름대로 선정을 했는데, 은 크게 분류해 보자면 사랑에 관한 시와 어릴 때의 회상, 도시인들의 고뇌, 자아의 고독, 사회 문제에 관한 시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 주제들 중 내가 그나마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을 중심으로 시를선정했다. 산업화로 인한 도시인들의 고뇌를 그리고 있는 과 개인의 고독을 말하고 있는 , 사회 문제를 방관하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이 그것이다.         ‘좋은 시’란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가장 와닿고 감동을 주면 그게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시’라고 나는 믿는다. 이 그랬다. 사실 나는 의 사내처럼 어려운 시절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세대가 겪었을 법한 이 상황에 왜이리도 목이 메어오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이 작품 안에서의 ‘사내’가 우리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삶과의 투쟁을 위해서 ‘분노’를 가르쳐 주는 서울로 향하는 사내. 그는 항상 몫 돈이 조금만 모이면 고향으로 내려가 예전처럼 다시 평화롭게 식구들과 오순도순 살겠다고 마음 먹는다. 하지만 항상 몫 돈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금방 동이 나버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식구들에게 서울 갔다 오겠다고 한다. 더 이상 세상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길 바라며.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고, 아마 사내는 구역질 나는 서울에서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 부모님들이 그랬던 것 처럼. 기형도는 이런 상황을 정말 생생한 표현을 빌려 시 전반에서 나타내고 있다.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등 기형도는 누구나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기발한 발상으로 단어 선택을 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층 더 감정에 몰입되게 해준다. 이 작품을 천천히 다시 생각하며 곱씹어 보니 문득,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하는 제목이 생각난다. 급속한 산업화로 소외된 ‘사내’ 같은 민중들의 마음이 바로 저것이 아닐까.         두 번째 작품 는 기형도의 고독한 자아와 인생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최고조에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연의 ‘나는 불행하다’라는 표현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많은 각오를 했었지만 정작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비단 기형도 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젊은 사람들 거의 모두가 느끼는 공통적인 좌절감일 것이다. 즉, 기형도는 졸업을 하고 자신이 각오한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이런 허무함과 회의감은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을 다 갖추었어도 그의 본질적인 삶에 대한 허무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 서로에게 관심 없는 대도시의 도로를 쏘다니며 더욱 깊어지는 외로움에 괴로워 한다. 기형도는 이런 감정을 남들 보다 한 층 깊고 예민하게 느낀 사람이지만 사실 그의 이런 외로움, 고독의 감정은 도시인들 누구나 맘속 깊은 곳에는 내재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의 감정이 대부분인 기형도의 시집이 15년 동안이나 스테디셀러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만 돌아보아도 그렇다, 전철 혹은 버스를 매일 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으로 분노를 하지 않는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밀려서, 늦게 도착해서.. 서울은 옆에 있는 사람을 증오하도록 만드는 곳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매일 섞여 있으면서도 ‘나는 외롭다’는 고독에 휩싸여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기형도처럼 어릴 때를 추억하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2007년 현재에도 도시인들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지만 외로운 귀가길에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을 불러낸다.       마지막으로 은 처음 한 번 읽을 때보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다보면 그 어떤 작품보다 큰 감동으로 다가 온다. 할 말을 하지 못하는 혓바닥을 어떻게 ‘입 속의 검은 잎’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80년대는 다시 한번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던 시기였다.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은 대학생들이었고, 그에 따라 임시 휴업령이 밥 먹듯이 행해지고 학생들은 포탄 연기를 밥 대신 먹으며 살아가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기형도는 에서 그가 회상했듯이 운동에 많이 참가하지 않고 플라톤을 읽으며 지냈다. 그러나 그는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했던' 그'의 죽음을 신문에서 보고 침묵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입 속의 혓바닥이 검게 굳어 말을 못하게 되버린 것인지 그는 침묵한다. 그리고 괴로워 한다. 이 시를 보자 윤동주가 떠오른다. 시대의 권력에 항거하지 못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질책하고 부끄러워 하던 윤동주와 입 속의 검은 잎을 가진 자신을 두려워 하는 기형도가 닮아 있었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흔히들 ‘기형도’하면 그의 작품 저변에 깔려 있는 고독과 외로움의 이미지와 함께 그의 신비스러운(?)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떤 평론가도 말했듯이, 그의 정확히 추정되지 않은 죽음과 관련해서 그의 작품을 보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순수하게 문학적인 관점에서만 평가가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문학 계간지 는 기획 특집 ‘과소평가된 시인, 과대평가된 시인’에서 과대평가 된 시인으로 기형도를 꼽았다. 젊은 비평가 홍기돈은 ‘죽음의 후광을 넘어서기 위한 단상’은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깔려있는 죽음 의식과 그 사회적 공명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홍기돈은 그간에 숱한 비평가들이 기형도의 시를 그의 죽음 위에 올려놓고 읽어간 방식을 문제 삼고 있는데, “어느 한 시인의 우발적인 죽음을 필연으로 수용하는 현상은 그 사회가 처한 조건과 관계 맺는다. 즉 사회에 은연중에 유포되어 있는 죽음의 분위기가 기형도의 죽음과 공명하였기 때문에 마치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기형도의 죽음은 우리 문학계에서 마치 신탁과도 같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 했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앞으로도 그를 한국 문학계의 한 사람으로서 좀 더 깊이있고 폭넓게 보려면 그런 노력이 계속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문학계에서 그의 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한국 문학이 90년대로  넘어가는데 기형도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기형도 시집을 직접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즉, 일제시대 이후 이렇다 할 변화를 갖지 못한 우리의 시 문학에 그는 하나의 혁신을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혁신은 표현 기법 측면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시 문학의 주제가 넘어가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측면이다.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억압에 항거하는 시가, 한국 전쟁 전후에는 분단의 아픔을 표현했던 시가,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자.농민 또는 민주화에 대한 시가 주류를 이뤘던 상황에서 기형도의 출연으로 거의 80년 만에 개인적인 고뇌와 사유를 주제로 하는 시가 시작되었다고 감히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평론가 김현 씨가 말했듯이 문학가들을 지켜보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그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떤 식으로 작품의 성향이 변해 가는지 지켜보는 것인데, 기형도는 그런 여지가 없어 매우 아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이렇게 주옥같은, 그리고 문학사 측면에서도 의미있는 시 만을 내놓고 갔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순수하게 시인 ‘기형도’를, ‘기형도 스타일’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29세에 요절한 작가 기형도. 어쩌면 그가 날개를 펼치기에는 그 시대가 좁았던 것이 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의 주옥같은 시 한 편 한 편들은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손에 고이 들려있을 것이다.    
502    김삿갓과 詩 댓글:  조회:4740  추천:0  2015-05-15
  ▣ 기생과 함께 짓다 ▣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김삿갓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기생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김삿갓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기생     妓生合作                           기생합작  金笠.  平壤妓生何所能       김립.  평양기생하소능  妓生.  能歌能舞又詩能       기생.  능가능무우시능  金笠.  能能其中別無能       김립.  능능기중별무능  妓生.  月夜三更呼夫能       기생.  월야삼경호부능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 젖 빠는 노래 ♡    시아비는 그 위를 빨고  며느리는 그 아래를 빠네.   위와 아래가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둘을 빨고  며느리는 그 하나를 빠네.   하나와 둘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단 곳을 빨고  며느리는 그 신 곳을 빠네.   달고 신 것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嚥乳章三章                    연유장삼장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卽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卽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卽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어느 선비의 집에 갔는데 그가 "우리집 며느리가 유종(乳腫)으로  젖을 앓기 때문에 젖을 좀 빨아 주어야 하겠소"라고 했다.    김삿갓이 망할 놈의 양반이 예의도 잘 지킨다고 분개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 옥구 김 진사 ★    옥구 김 진사가  내게 돈 두 푼을 주었네.  한번 죽어 없어지면 이런 꼴 없으련만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에 한이 되네.     沃溝金進士                           옥구김진사  沃溝金進士   與我二分錢       옥구김진사   여아이분전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 창 ◑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窓                                                    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십자상연구자횡   간간잔도협여파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인옹순숙저수입   치자난개거수파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 양반 ◎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兩班論                                              양반론  彼兩班此兩班      班不知班何班           피양반차양반      반부지반하반  朝鮮三姓其中班   駕洛一邦在上班       조선삼성기중반   가락일방재상반  來千里此月客班   好八字今時富班       내천리차월객반   호팔자금시부반  觀其爾班厭眞班   客班可知主人班       관기이반염진반   객반가지주인반     *김삿갓이 어느 양반 집에 갔더니 양반입네 거드럼을 피우며 족보를  따져 물었다.     집안내력을 밝힐 수  없는 삿갓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주인 양반이 대접을 받으려면   행실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니 그 따위가 무슨 양반이냐고 놀리고  있다.    ♥♥ 어두운 밤에 홍련을 찾아가다 ♥♥         향기찾는  미친나비가  한밤중에 나섰지만  온갖 꽃은 밤이 깊어 모두들 무정하네. 홍련을 찾으려고 남포로 내려가다가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가 놀라네.     暗夜訪紅蓮                                       암야방홍련  探香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탐향광접반야행   백화심처총무정  欲採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       욕채홍련남포거   동정추파소주경     *동정(洞庭)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의 배경이  된 중국 호남성에 있는 동정호 (洞庭湖)를 말한다.   *홍련을 만나려고 여러 여인들이 자는 기생방을 한밤중에 찾아갔는데    어둠 속에서 얼결에 추파라는 기생을 밟고는 깜짝 놀랐다.         
501    소설쓰기 = 감농군 되라, 시쓰기 = 보석세공자 되라 댓글:  조회:5393  추천:0  2015-05-13
시 쓰기와 소설 쓰기의 차이                                           / 김별   소설 쓰는 일을 농부가 산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는 일에 비유한다면, 시 쓰는 일은 보석세공업자가 원석을 다듬어 완성품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단적인 비유는 어느 것이 더 대단하고 더 나은가 하는 값어치의 비교가 아니다.  기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지치지 않는 꾸준한 노고와 농부와 같은 덕목이 필요하지만,  시는 기술적 숙련도와 예술적 요소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랑, 세계 최고의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를 단순 비교하는 사람들을 가끔씩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두 피겨선수의 차이를 예술적 부분에서 극명하게 느낀다.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는 훌륭한 피겨 선수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는 피겨라는 스포츠를 예술의 경지에 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이 두 선수의 차이는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고 안하고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스포츠와 그것을 승화시킨 예술까지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크고도 멀다. 그리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 느낀다.   화전을 일구는 농부는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개간할 것이며, 밭고랑은 어떻게 낼 것이고, 주로 무슨 작물용으로 만들 것인가를 기획하고 산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늘 일에 파묻혀 살아야 하고 용수 걱정, 비바람 눈비에도 시달려야 한다. 그 과정이 아주 고단하고 마음고생이 클 것이다. 소설가의 어려움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보석가공업자는 우선 좋은 원석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금을 선택할 것인가, 옥을 선택할 것인가, 다이아몬드나 호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돌덩이를 선택할 것이냐. 쇳덩이로 정밀한 시계를 만들 것인가.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 것인가 하는 선택의 폭은 무한히 넓다. 그 선택은 종류뿐 아니라 질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선택한 원석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다듬어 나가야 한다. 그 작업은 우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숙련된 기술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도 없지만, 아무나 얻을 수도 없다. 또한 똑같은 일을 오래도록 한다 해도 누구나 명장이 될 수 없듯이 과정과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   한마디로 시인은 우선적으로 언어(글자)를 다루는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 시인에게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이토록 중요한 것은 시는 짧은 문장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시 한편에 쓰여지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진주목걸이의 한 알 한 알의 진주알과 같다는 것이다. 진주목걸이의 진주 한 알이 잘못 되어도 금방 표시가 나서 진주목걸이 전체를 버리고 말듯이, 시에 쓰여진 글자 중에 한 글자만 잘못 되어도 흠이 되어 작품 전체를 망쳐버리는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숙련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듯이, 또한 숙련공이라 해서 모두가 명장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최고의 피겨 선수라 해도 김연아 선수처럼 스포츠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하기에 시인은 언어(글자)를 다루는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해야만 한다.  시를 모든 예술의 최상층부에 있다고 한 사람처럼 시를 그런 경지에 까지 끌어올리기까지는 고도의 기술과 그 기술마저 뛰어넘는 핵심적인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술을 뛰어넘는 힘 역시 그 기술에서 비롯된다. 마치 청출어람과 같다고나 할까. “쪽빛은 쪽에서 오지만 그 빛을 뛰어넘는다.”   다시 강조하건데 시 쓰기에서 언어(글자)를 다루는 기술이 이토록 중요한 것은 시의 완성도가 언어를 선택하고 다루는 기술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선택과 기술이 단순히 금반지 하나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백제 예술의 걸작이라 극찬하는 금동대향로를 만드는 차이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알고 보면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과정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서 고기를 찾는다. 그런 까닭에 어리석음 자체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배우고 익히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어렵고, 무료하고, 고통스럽고, 외로움과 굴욕, 회의적인 아픔을 참아야 하는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평범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사다 마오 같은 훌륭한 피겨 선수도 되기 어렵지만, 설령 아사다 마오 선수와 같은 수준에 올랐다 해도 김연아 선수와의 차이를 좁히지는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설명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아주 단편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고 싶다면 훌륭한 농부가 되어라. 땅은 그대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500    시쓰기 요령 댓글:  조회:4085  추천:1  2015-05-13
시를 쉽게 쓰는 요령                             /김영남     1. 상상하는 법을 익혀라     초보자들이 시를 쓸 때 제일먼저 봉착하는 것이 어떻게 시를 써야하며, 또한 어떻게 쓰는 게 시적 표현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필자도 초보자 시절 이러한 문제에 부딪혀 이를 극복하는 데에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거죠.   *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라   필자가 이와 같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이유는 시란 '자기가 경험했고, 보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게 시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재미있게 쓰는 데에는 이게 바로 함정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거죠. 경험과 느낌은 모든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상상은 천차만별이죠.   *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잘 쓰려면,  상상으로 써야 한다.   상상으로 써야 발전이 빠르고 좋은 시를 계속 양산할 수 있습니다. 즉 시란 자기가 쓰고자 하는 소재를 두 눈 딱 감고 상상해서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는. 보고, 느낀 걸 쓰는 게 시다라는 고정관념에 빠지니깐 시를 한 줄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즉 보고 느낀 것이 다 떨어지면 그때부터 허둥대기 시작하는 거죠. 기껏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게 자기 주변 친구, 부모,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둘러대는 정도. 그리곤 스스로 훌륭한 시를 썼다고 자기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가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만 99%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 누구나 다 보고 느끼는 형편없는 넋두리, 서사, 풍경 나열이 되기가 일쑤죠.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시를 써왔다면 이 순간부터 기존 쓰는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필자가 안내한 대로 석 달만 같이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글이 달라지는 걸 본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상상하는 것부터 배우도록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 우선 상상할 소재, 즉 상상할 대상을 구체적인 것 하나를 고르라.   자신이 있는 곳이 지금 사무실이라고 하면 주변에 있는 꽃병, 벽, 창, 하늘, 노을 등이 있을 겁니다. 이중 어느 하나를 골라 봅시다.   필자가 먼저 어떻게 상상하는지 그 방법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로 한번 해볼까요?  기존 방식대로 이란 소재로 시를 한번 시를 써 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노을을 쳐다보며  대다수가 아마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지 않았겠나 여깁니다. 그러나 이건 느낌을 적은 것이고 상상한 게 아닙니다.   * 상상을 이렇게 해보자   * 만약 자신이 현재 애로틱한 감정상태에 있다면 을 바라보며, 또는 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눈부신 상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노을을 발가벗고 있어서 눈부신 여자로 여기고 계속 상상해 가는 겁니다. 이땐 순서를 생각하지 말고 앞 상상의 핵심어를 가지고 다음 상상을 유치하든 품위 있든 따지지 말고 계속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나중에 논리적으로 순서를 다시 잡아 정리, 수정해 가면서 다듬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제목을 로 붙여본다고 생각해 보세요.정말 근사한 한 편의 시가 탄생할 것 같잖아요?   * 이번에는 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한다면 빨간 노을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상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을 로 여기고 모닥불과 관련된 온갖 경험, 추억, 익살스런 행동, 우tm꽝스런 생각, 이야기들을 계속 꺼내가면서 상상을 하는 겁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을 로 치환했으면 을 멀리 떠나서 상상을 하면 안됩니다. 모닥불과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상상을 펼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내용이 난해해 지게 됩니다.   * 다른 소재들로 상상하는 것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 다듬는 법, 순서를 잡는 법, 제목을 붙이는 법....등등은 그때그때 하나씩 계속 예를 들기로 하고 오늘은 상상하는 요령만 익혀두기로 합시다. 시를 쉽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 처음 시작할 땐 뭐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참고가 될만한 시를 첨부하오니 , , 이란 낱말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상상력을 발휘하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나는 위보다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   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 그 사람 밑을 내려가보면 넓은 뿌리가 바닥을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다.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우리도 밑을 논밭처럼 잘 일궈야 똑바로 설 수 있다. 가로수처럼 확실한 밑을 믿고 대로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에서 명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 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 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   나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그 근본을 사랑한다. 근본이 없어도 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   모퉁이가 아름다운 건물을 보면 사람도 모름지기 모퉁이가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입체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로운 내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퉁이가 둥근 말, 모퉁이가 귀여운 사랑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모난 부분을 둥그렇게 구부린 흔적이 바라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옆구리를 한번 돌아가보면서 모퉁이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건물의 중요한 한 분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부까지 품위 있게 해주는 의식의 요긴한 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퉁이를 가꾸는 사람들... 경제학적으로 검토하면 비효율적 투자이겠지만 모두가 모퉁이를 가꾸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어디를 돌아가보고 살아야 하나? 향기로운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입체물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   가려보고 드러내봐도 내 앞뒤 골목은 온통 벽이로구나. 한 발로 뻥 찼을 땐 여지없이 되튕기며 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벽.   야, 벽에도 이단 옆차기가 있고, 돌려차기가 있구나. 속이 훤히 드러난 유리벽이 있고, 보초를 세워야 하는 철조망 벽이 있구나.   그러면 벽에도 나이가 있고 학벌이 있고 지위가 있다는 것인데, 맘에 안 든 벽을 마구 감옥에 잡아넣는다면 누가 경쟁을 하나? 벽 없이도 세상을 이룰 수 있나? 우리들 마지막 버팀목이 벽이라면 벽 없이도 희망은 존재할까?   벽을 쌓으려면 스폰지를 넣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조립형으로 설계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견고하게 구축하더라도 잦은 발길질과 교묘한 철거 전략에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벽은 융통성 있게 존재해야 하리라.   지금 나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한 사나이가 망치를 들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다.       2.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방법   초보자 시절에 일단 상상하는 요령을 알게 되면 어떤 소재를 고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상력이 일정 수준에 달한 사람은 어떤 소재를 갖다놓더라도 즉각 상상력을 기발하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죠. 그래서 초기에는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담긴 소재, 언어들을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고르는 게 상상하기 쉽습니다. 구체적이지 않고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소재들은 수준급의 상상력 소유자가 아니면 상상의 단서를 잡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 미움, 과거, 미래, 종이... 등 이런 소재들로 시를 쓴다고 해봅시다. 그냥 숨이 콱 막힐 겁니다. 그러나 공간이 있는 것들 문, 벽, 창, 천장, 집....등 이걸로 상상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한결 쉬울 겁니다. 이건 상상이란 기본적으로 이미지, 즉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고 그 그림은 공간이 있는 것이 평면적인 것보다 훨씬 그리기 쉽고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 구체적인 소재로 상상하라.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을 가지고 상상한다면 현실의 문 (사립문, 철문, 미닫이문, 파란 문, 빨간 문...), 추억의 문,사랑의 문, 지식의 문...등 상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가령 그 추억의 문 하나로만 상상을 해보더라도 그 추억의 문에 문고리를 달아보고, 자물통도 달아보고, 발로 한 번 뻥 차보고, 파란 페인트, 아니 빨간 페인트도 칠해보고 온갖 상상을 다 해볼 수 있잖아요?   * 또 이란 소재로 한번 해 볼까요? 처럼 의미적 공간 말고, 이번에는 실제적 공간으로 , 즉 어느 초가집을 한번 그려본다고 해 봅시다. 두 눈 딱 감고 어릴 적에 보았던 초가집 하나를 머리 속에 담고     이렇게 묘사해 놓고 제목을 으로 붙인다고 해 보세요. 정말 김영남의 어린 시절 집을 그린 훌륭한 시가 되지 않습니까?   * 상상은 허구이고 가공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초가집을 그리는데 자기가 실제적으로 본 초가집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요. 상상이 당장 막혀요. 상상은 기본적으로 허구이고 가공입니다. 즉 그 초가집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기억 속에서 모두 불러와 한번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겁니다. 즉 상상 속에서 초가집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죠. 이게 바로 참신한 그림이요, 참신한 이미지요, 참신한 시가 되는 겁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골라 상상을 해 시를 써보도록 하고, 상상은 체험, 허구, 가공까지 드나들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시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가공까지 동원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는 걸 유념합시다.       3. 초보자의 시 습작 방법   초보자 시절에는 시 창작 방법을 아무리 들어도 시작하려면 정작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추천할까 합니다.   * 좋은 시를 모방해 보라.   * 첫째로 왕 초보 시절에는 기성 시인의 작품 중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작품을 갖다놓고 그 작품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먼저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즉 그 시를 한번 모방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 했습니다. 사실 어느 시인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좋게 말해서 영향이지, 액면 그대로 표현하면 그 사람을 모방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미술학도 지망생에게 제일먼저 시키는 것이 석고데생, 즉 모사연습이고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어떤 이론, 문법공부보다도 말을 실제로 따라 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음미해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속도로 선진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다는 것도 외국, 특히 인접 일본의 앞선 기술, 문화, 제도 등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의 색깔과 독자성이 문제이지만...   하여, 왕초보 시절에는 구조적으로(기,승,전,결) 잘 짜여진 작품이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을 갖다놓고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내용과 감각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전개방법과 표현기술을 따라서 해보라는 뜻입니다. 이걸 능수능란하게 하다보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표현을 뒤틀어보고 싶고 독특하게 펼치고 싶어져 자기 색깔이 선명하게 나오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 시의 소재를 찾는 방법   * 둘째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감각은 있는데 될만한 시의 소재를 못 찾아 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잡지를 많이 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지, 패선 잡지, 디자인 잡지, 건축잡지, 미술잡지 등 사진과 그림이 많이 담긴 잡지를. 시란 기본적으로 심상, 이미지 즉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림이 많은 잡지를 넘기다보면 언뜻 시로 표현하고 싶은 소재가 스치게 됩니다. 잡지를 깊게 읽지 말고 눈요기식으로 넘기고 광고 카피도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문득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고쟁이들도 시를 많이 읽고 쓴다는 걸 참고해 가면서 말입니다. 이때 얻은 힌트를 가지고 감상평(1),(2)를 참고해서 상상을 펼쳐보기 바랍니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제목에 신경을 쓰지 말고 문득 얻은 힌트, 그 소재를 가지고 상상을 해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상상을 자꾸 새롭게 하고 고치다가 보면 처음 의도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의 시가 탄생하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맨 나중에 붙이는 겁니다.   이상을 참고해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이미지 즉 글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걸 잘하다 보면 나중에 의미있는 말, 표현, 자기철학 등도 요령있게 양념치듯 넣는 기술을 알게 됩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거창한 자기의 말, 주장을 하려하지 말고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감각과 상상으로 접근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   그 방은 창을 통해 안이 훤히 드러난다. 연둣빛 레이스 커튼을 드리웠고 널린 브래지어가 한결같이 희망표이다. 고개를 들면 갤럭시 손목시계, 악어가죽 핸드백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바닥은 아담하고 천장은 유난히 높고 알록달록한 박달나무 숲속 같은 분위기가 달려오는 방. 저렇게 꾸미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까. 그 방에 닿으려면 창동역에서 도봉산 쪽으로 날아가는 화살표를 두 번 따라가야 하고 909국 다이얼을 돌려야 한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만큼 그 방 밖도 늘 매혹적이고 불안하다.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꺼져 있으면 그 방 밖은 가을이고 수상하다. 그리고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불면 그 방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은 흔들릴 때가 아름답다. 흔들릴 때마다 굳게 잠긴 자물통이 침묵의 장식처럼 중심을 잡아주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돌아다보면 그 방은 다시 불이 켜진다.   참으로 이상한 방. 한번 쓱 들어가 맘껏 뒹굴어보고 싶은 방. 브래지어가 창인 그녀.       4. 시의 길이는 20행 정도가 적당하다   초보자 시절에 시의 퇴고와 관련하여 자주 고민하는 것이 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시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입니다. 여기에는 내용에 따라 전개하는 형식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만 행갈이를 정상적으로 한다고 할 때 시의 길이는 대체적으로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고, 시의 연은 의미가 달라지는 부분에서 연을 구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행이 넘어 시가 길어지면 우선 시각적으로도 질리게 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됩니다. 시가 길어질 땐 길어지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그 시가 아주 재미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길어도 독자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하는 특별한 기교와 내용이 있든지 해야 합니다.이젠 독자들도 영악해서 별로 의미 없고 특별한 내용도 없으면서 작자만의 생각으로 길게 쓴 시는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시가 문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걸 생각하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요즘 시 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필자가 말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는 걸 느낄 겁니다. 좋은 시란 적당한 길이에 음악성과 함축성을 겸비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시가 좋은 시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은 끝없이 해놓고 나중에 작품을 다듬어 퇴고할 때 이 정도의 길이로 지향하는 게 바람직할 겁니다.   연을 나눌 때에는 대체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때 나누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상의 내용이 건너 뛸 때. 변칙도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여하튼 기본에 충실하는 게 발전이 빠릅니다. 그리고 1, 2, 3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이 거의 연작시 수준이거나, 연을 구분하기에는 보폭이 너무 클 때 통상 사용하는 것으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       5. 시를 쉽게 잘 쓰려면 2중 구조에 눈을 떠라.   * 이중구조란 글자 그대로 두 가지 그림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 현재의 나와 과거ㆍ미래ㆍ 또는 추억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그림 속의 나....등 이런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의 시를 가장 선명하게 제일먼저 제시한 시인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시인은 주로 거울을 매개체로 해서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를 잘 조응했었습니다.사실 이중구조 이치만 잘 이해하고 소화한 사람이면 이런 유형의 시가 쓰기도 쉽고 참 재미있다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은 난해하고 쓰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로직은 의외로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온갖 장난과 행동을 다 해보는 겁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와 행동을 이 둘에만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나가면 시적 공간이 나와 거울 속의 나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게 되고 이야기도 풀어나가기가 한결 쉽게 됩니다. 제 시집 '정동진역'에 실려있는 라는 시도 참고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시작도 이런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고의 자유로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데에부터 시작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이상, 김기림, 김수영, 오규원 등 이런 시인들의 시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가 참 재미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소재의 이중구조   위에서 예를 든 이중구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재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즉 어떤 오브제를 갖다놓고 그 소재와 나와의 관계 둘로 보고 시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때 시를 끌어내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첫째는 내가 아예 그 소재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꾸로 그 소재가 나로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소재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서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깡통이 되어 깡통의 속성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본문 내용에 절대 '깡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깡통'이란 말이 들어가면 깡통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깡통이라는 환상이 갑자기 확 깨져버립니다. 이것만 잘 소화해도 현상문예 예선을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가 감각적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거꾸로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또 반대로 '나의' 라는 말이나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단어를 보는 순간 환상이 확 깨져버립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지면상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첫 번째 방법에 충실한 시 한편을 소개하고 게시판 시 감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방법만 잘 활용해도 눈에 확 나는 좋은 시를 금세 쓸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수박  /  윤문자   나는 성질이 둥글둥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리가 없는 나는 그래도 줄무늬 비단 옷만 골라 입는다 마음속은 언제나 뜨겁고 붉은 속살은 달콤하지만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배꼽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말라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겉모양하고는 다르게 관능적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오장육부를 다 빼 주고도 살 속에 뼛속에 묻어 두었던 보석까지 내 놓는다       6. 제목을 효과적으로 잘 붙이는 요령   시의 제목을 제대로 붙일 줄 알려면 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편의 시가 성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또 독자들이 이 시를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제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이 문제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그동안 시 창작에 응용한 사람이 의외로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가 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같은 제목을 붙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제목이 되고, 보다 생산적인 제목이 될 수 있을까? 필자가 그 방법을 개발해서 그동안 작품에 실제로 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써 놓고 제목을 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논문, 일반 문서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제일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는 이걸 제대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시들이 제목을 로 해놓고 화장실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쓰거나,  해놓고 서울역에 관하여 온갖 수사와 기교를 동원해 시를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화장실과 서울역에 대한 정보를 이미 많이 갖고 있어서(어쩌면 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름) 그 시를 쓴 사람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의 화장실과 서울역에 관한 시는 읽으려 하지 않고 쉽게 외면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자는 정말 열심히 최고로 좋은 시를 썼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작자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 화장실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모습의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롭게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어야 그 시를 읽어줄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시로 성공한 작품들을 한번 예로 몇 들어볼까요? 김춘수의 , 김수영의 . 곽재구의  등을 한번 봅시다. 내가 불러줄 때 내게로 와 핀 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평역이란 시를 보기 전에 사평역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사평역을 목포역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도 이 시의 감동이 사평역만큼 올까요?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위와 같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때 효과적인 제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 두 번째 방법은, 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센텐스, 키 센텐스를 제목으로 올리되 전체 내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으로 필자의 시집 정동진역을 읽어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필자가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은 평소 광고 카피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즉 기사와 광고 카피의 헤드라인이란 시로 여기면 제목에 해당하는데 이걸 잘 뽑느냐 잘 못 뽑느냐에 따라 그 기사 또는 광고의 첫 인상 뿐만 아니라 여운까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이 그 카피,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라는 것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시에 한번 적용해봤더니 제대로 맞아떨어지더군요. 이때 붙이는 제목의 형식은 서술형이 되기 쉽고, 내용은 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시 내용중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의 속성을 가진 전혀 엉뚱한 것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법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자면 화장실 내용으로 시를 쭉 써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김영남은 화장실이다" 라는 시를 쓴 거가 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글을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묘사 해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쭉 묘사해 놓고 제목을 로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 글이 아름다운 여자를 설명하고 묘사한 글이지 어떻게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목을 이라고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시가 되고 안 되고 까지 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시를 하나 소개하고 지면상 한계로 인해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소개하는 시는 98년(?)현대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이고 아주 하찮은 여울을 하나 묘사해 놓고 제목을 엉뚱하게 붙여 성공한 시입니다. 만약 이 시 제목을 < XXX 여울>.로 붙였을 경우 시가 될 수 있는지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7.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   이전 창작강의 및 감상평(6)과 관련하여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중 세 번째인 "엉뚱하게 붙이는 방법"에 관하여 여러 군데에서 전화가 와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보충합니다.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그 수준과 기교가 한결 세련을 요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걸 잘 못 붙이면 시가 난해해져 무엇을 썼는지 독자가 잘 모르게 됩니다. 가끔 시 전문잡지에도 본문과 관련지어 전혀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제목의 시를 종종 볼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이에 해당할 겁니다. 그러나 제목을 제대로 찾아 붙이면 매우 뛰어난 시로 금세 둔갑하게 됩니다.   * 시의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기본적으로 메타포, 즉 은유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참신한 은유관계가 형성될 때 그 시는 그만큼 참신한 시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 첫 번째는 "A는 B이다"라는 은유관계가 있는 문장을 가져와 A를 제목으로 올리고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 시를 만드는 방법이고   * 두번째는 B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써놓은 다음, 나중에 A에 해당하는 제목을 발견해 시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중 첫 번째는 상당한 수준을 요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가 쉽게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지난 강좌 때 이 방법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번 예로 든 시를 다시 읽고 난 다음에 설명하겠습니다.   * 사춘기 / 강순 ( 위 작품 참조)   위시는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 라는 훌륭한 메타포가 들어있는 시인 것입니다.   * 위에서 언급한 방법을 설명한다면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라는 메타포가 눈에 번쩍 띄는 문장을 발견하고 이걸 갖다놓고 제목을 로 올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에 관한 내용만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즉 사춘기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물살 빠른 여울만 구체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죠. 하여 이 방법은 상상력으로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야 하니까 테크닉과 능력이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여간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 두 번째 방법은 눈에 번쩍 띄는 물살 빠른 여울을 묘사해 놓은 다음, 그 내용에 메타포가 잘 조응되는 제목을 찾아 올리는 방법입니다. 위시의 작자는 아마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인상깊은 여울을 먼저 상상으로 묘사한 다음에 그에 잘 조응하는 제목인 '사춘기'를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위 시는 제목을 굳이 '사춘기'로 하지 않더라도 물살 빠른 여울에 조응하는 제목이면 다 성립합니다. 즉 제목을 '나의 대학시절' '80년대' '고교시절' '어린 시절' '신혼기' 등 과도기적 상황의 제목이면 다 잘 어울려 시로 훌륭하게 성립합니다.   하여,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방법 중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좋은 시를 더 쉽게 많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퇴고 과정 중에 버리기 아까운 대목을 따로 떼어내어 보강한 다음 이 방법을 한번 활용해 보세요. 의외로 좋은 시를 아주 쉽게 건질 수 있을 겁니다.       8.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시적 표현 얻는 방식 두 가지   초보자 시절은 시 쓰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설사 알겠다 여겨지더라도 쓰려고 하면 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상관하지 말고 바로 무조건 끄적거려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바로 끄적거려도 남보다 몇 곱절 빠르게 시적 표현을 얻는 방법 두 가지만 공개할까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이 두 가지만이라도 잘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표현을 새롭고 독특하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까? 이걸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이걸 또 설명하려면 한 학기 내내 설명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필자의 개발한 용어로 그 방법을 설명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입니다.   시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 방향이 주로 한쪽으로 쏠려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행동하고 또 사물을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슬퍼하는 방식이 대동소이하고, 우리의 인식구조도 주로 그 쪽으로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쪽에서 새로운 표현을 구하려면 지금까지의 방식보다 몇 곱절 노력과 탐구로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면 결코 효과적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때는 거꾸로 접근해 보는 겁니다. 남들의 시선이 다 한쪽으로 쏠려있을 때 자기는 거꾸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전에 자주 보지 못했던 사고와 행동이니깐 우선 시선을 끌게 되고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고스톱도 여지껏 쳐왔던 방식으로 쳐 잘 안 풀릴 땐 거꾸로 치면 의외로 잘 풀리는 이치와 같은 전략이지요.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시인이 로 표현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지만 이걸 거꾸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 또는  이렇게 되는 거죠. 를 거꾸로 표현하면 . 는 , 는 가 되는 거죠. 어떻습니까?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떤 게 우리에게 더 참신하게 다가옵니까? 후자이지요. 전자가 설명이라면, 후자는 묘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묘사란 그 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인식체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구사할 때 유의할 점은 시 전편에 걸쳐서 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되요. 전편에 걸쳐서 구사하면 이것 또한 한쪽 체계의 인식구조로 전락하고 굳어지기 때문에 군데군데 양념치듯 구사해야 되요. 특히 첫연 첫구절에 이걸 효과적으로 구사하면 독자들을 아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 현 문단에서 이걸 잘 구사하는 시인이 바로 오규원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을 쓴 김수영 시인도 이 기법을 즐겨 구사했구요.     두 번째 방법은, 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깊이 탐구해 작품에 실제 많이 응용했고 현재도 아주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즉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면 시가 그림처럼 아주 선명하게 되고 초점도 또fut하게 됨을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풍물, 풍경시를 쓸 때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형광등, 침대, 커튼, 그림 등이 있는 방에 갇혀 한 여자를 그리워하며 책상에 골똘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방 속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이미지와 초점이 선명하게 되고 할 이야기도 금세 많아지게 됩니다. 대부분이 이걸 잘 모르고 방밖을 벗어나 거창한 소재와 이야기를 자꾸 끌어오려 하다보니깐 시가 초점이 흐려지고 난해해 지게 되는 거죠. 이것만 잘 해도 시가 아주 유창해 집니다.   실제로 이 기법 하나만으로도 신춘문예 당선한 필자의 시 한 편을 그 예로 살펴보고 이번 강좌를 마치겠습니다.   ***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필자는 정동진역 풍경을 그리는데 모두 정동진역 근처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재들은 실제로 정동진역에 다 있던 것들입니다. 억새꽃, 벤치, 모래사장, 라면집, 소주집, 소나무 등등... 그래서 열차가 들어오는 역이니까 겨울이 오는 것도 으로 생각했고, 역도 으로 표현했고, 라면집도 삼양라면을 끓이는 라면집이 아니라 이고, 소주집도 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필자가 실제로 라면집을 묘사해야 하겠는데 구불구불한 주변 소재를 찾으니까 산 능선, 도로, 해안선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중에서 가장 주변 소재에 어울리는 게 바로 해안선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차용한 겁니다. 또한 마주보고 술잔을 나누는 소주집도 묘사해야겠는데 쓸만한 주변 소재들을 밖을 내다보며 살펴봤더니 배, 수평선,갈매기, 파도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 소재들이 다 어울리지만 이중에서 파도가 가장 운치 있는 소재로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주변 소재로 둘러댔더니 읽는 사람마다 다 반하더군요. 만약 이걸 라고 표현했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평범하고 싱겁겠어요?   위시는 시의 템포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마지막 구절을 제외하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동진역을 벗어나지 않고 철저하게 정동진역 주변 소재로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신춘문예에까지 당선되고 성공한 시로 여기잖아요?       9. 시어 선택 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필자를 포함해 이 땅의 모든 시인들은 대중들, 특히 문학 수요자의 환경변화를 하루 빨리 깊게 인식해야 합니다. 예전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는 문학이 중심 매체이었고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대체할만한 마땅한 대체매체도 없어 늘 대중들의 수요에 공급이 모자랐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공급만 하면 수요는 절로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즉 시라는 제품의 효용성, 편리성, 유익성 등을 크게 고려하지 않더라도 시라는 제품에 언제나 충분한 수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로 치달으면서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만한 대체매체가 많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한 대중들의 욕구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젠 특별한 흥미가 없고 독자들을 유인할만한 내용이 아니면 독자들이 절로 찾아오리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겁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방식대로는 이젠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시대감각에 맞는 시어를 선택하라.   그런데 대다수 시인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기존 사고에 갇혀 시의 위기를 수요자인 독자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건 번지수를 잘 못 짚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급자인 시인 스스로가 빨리 변해 독자의 환경변화에 적응해야지요. 지금 정치도, 경제도, 행정도, 교육도, TV도, 영화도, 체육도.. 모든 것이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즉 독자 위주로 바뀐 지 오래인데 오직 시만큼은 권위주의 귀족주의 전통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독자를 고려하면 마치 3류 시인인양 취급하고 전문가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시를 해설서를 곁에 놓고 감상하라는 식의 합리화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는 달라진 독자들의 욕구환경을 고려해 시도 하나의 상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감상하기 쉽고, 재미있고, 음악성 있고, 유익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을만한 시를 만들어 제공해야죠. 그렇다고 품질이 형편없는 싸구려 제품을 만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싸구려 제품과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과는 그 기준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 동안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제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시 쓰는 방식은 수요자 위주로 하루빨리 변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요즘 발표되는 시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특별한 내용도, 흥미도 없으면서 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한 장도 아닌 두 장 세 장으로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일반 독자들이 읽어 주리라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이제는 시를 생각하는 방식, 시를 만드는 방식이 종전과 하루 빨리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시의 위기라는 말이 사라지죠.   하여, 초보자들이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기본적으로 유의할 점 두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로 초보자 시절에는 老티 나는 시어를 쓰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  등 혼자 술취해 영탄하는 듯한 용어는 절대 쓰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용어들을 보면 독자들이 바쁘고 바쁜 세상에 혼자 술취해 영탄하고 돌아다니는 소리로 여겨 그런 시는 그냥 넘겨버리게 됩니다. 즉 독자들은 이런 용어를 보면 할 일없고 배부른 소리로 생각해 기분 나빠하기 쉽다는 거죠. 그리고 , 식의 명령투도 지양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불행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 즐겁게 하는 이야기,유익한 이야기 등에 관심이 있고 또 이걸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잘난 체하는 이야기,친구 가족 등 주변 자랑 이야기, 명령투의 이야기 등을 들을 땐 아주 기분 나빠하게 됩니다. 실제로 필자는 아주 젊은 시인들 중에도 이런 노티 나는 용어와 명령투의 시를 자주 쓰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창작강의를 듣는 사람은 이런 노티 나는 용어대신 가능한 한 확신에 차 있고 박력 있고 싱싱한 용어를 구사하기 바라고, 명령투 대신 청유형을 구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고어(古語), 사어(死語), 상투어 등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시도 그 시대의 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매체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용언어와 무관하지 않죠. 그런데 이 첨단 시대에 살면서 아직도 화랑, 신라의 달밤, 정읍사의 노래, 달구지, 신작로, 물레방아, 수틀, 바느질, 낮달, 이승, 저승 등등 그 옛날 시절의 풍경과 풍물, 남들이 지겨울 정도로 써먹는 낡은 시어를 들먹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런 용어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싫어하게 됩니다.시속에 나타나는 시간, 장소, 풍물들의 거리도 독자들에게는 현실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깝게 느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막연하게 먼 시간 속으로 끌고 가는 건 귀찮아해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늘에 UFO가 날아다니는 세상인데 아직도 낮달 운운하는 걸 보면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더군다나 남이 자주 쓰는 시어를 보면 '이 사람 노력도 하지 않고 맨 날 남이 쓴 시어나 갖다 쓰는 참 게으른 시인이구나!' 하고 독자들이 판단하지 않겠어요?   하여, 이 게시판 독자들 중 이런 것에 그 동안 관심이 있었다면 잠시 이를 접어두고 현재의 우리 생활 속에서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 시를 쓰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기본적으로 가능한 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울고 웃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걸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사투리를 쓰더라도 옛것보다는 현재의 것을 쓰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즉 독자를 고려한 전략적 시 쓰기 방법의 한 예입니다.       11.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누가 필자에게 시창작 과정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두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아마 상상력과 퇴고력을 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시의 내용을 상상력이 좌우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퇴고력이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따라서 상상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퇴고를 잘 하면 그 시는 크게 흠이 드러나지 않고, 또한 퇴고가 좀 어설프더라도 상상력이 특출하면 이 시 또한 큰 문제점이 노출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소에 문제가 있을 땐 정말 작품이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죠. 하여,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상상력과 퇴고력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하면 작품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퇴고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 또한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 강좌를 대신할까 합니다.   * 상상을 할 때는 뜨겁게,  퇴고를 할 때는 냉정하게   상상을 할 때 마음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뜨겁고 깊게 해야 하지만, 퇴고를 할 때 마음의 자세는 이와 정반대 자세인 냉정하고 넓게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와 작품을 고칠 때에는 정 반대의 심성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을 바로 써서 완성시키면 흥분된 감정상태에 있기 때문에 시도 흥분되어서 좋은 시 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보자 시절에는 시를 써서 곧바로 완성시키고 누구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게 초보자 시절에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힘들여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더디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퇴고기간은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필자의 경험을 말하자면 퇴고는 오래할수록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아무리 짧은 시라도 곧바로 써 바로 완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현재도 시 한 편을 구상해서 남에게 보여줄 정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보름 이상의 퇴고기간을 갖습니다. 그러니깐 필자의 경우 상상은 한두 시간에 깊고 뜨겁게 해서 서랍에 두었다가 2-3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꺼내 이 시에 새로운 상상을 조금씩 덧붙이고 삭제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래야 내용이 흥분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고, 시에 침착성과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퇴고와 관련해 시를 효과적으로 다듬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 정신이 가장 맑은 시간에 퇴고하라.   필자는 퇴고를 위해 정신이 가장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아주 자주 가졌습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자주 가진 이유는 아무리 맑은 정신상태라 하더라도 그 분위기에 또 오랫동안 잠기게 되면 이 또한 마음이 흥분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여 필자는 아침에 맨 처음 가는 화장실을 시 퇴고 장소로 아주 잘 이용하였습니다. 2-3일전에 쓴 시 초고를 갖고 네모난 밀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읽으면 정말 시의 어수룩한 부분, 미흡한 부분, 참신하지 못한 부분 등이 눈에 잘 띄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이 상태에서 지적된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고치고 그랬습니다. 하여 게시판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신이 가장 맑고 평온한 상태가 어느 순간인지를 확인해 퇴고를 할 때 이를 자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라.   마지막 퇴고와 관련해 이와 같은 정신, 즉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이의 지적을 빨리 받아들일 줄 알며,아끼는 작품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마음 자세의 확보가 중요해서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 자기 동료들의 작품평과 훈수를 귀담아들으면 망하는 길로 가는데 첩경이라는 걸 명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여줄 땐 가능한 한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시를 쓴 경력이 충분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시를 잘 쓸 줄 모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를 볼 줄 아는 안목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 게시판 독자들은 많은 퇴고는 곧 시 창작력의 향상이다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라고, 이 게시판에 시를 올릴 때에도 정말 최선을 다한 작품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많은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느리게 됩니다.      
499    시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아ㅠ... 댓글:  조회:4785  추천:0  2015-05-13
[시의 일부분을 바꾸어 쓰는 방법]   1. 시의 제목을 바꾸어 써 본다.   2. 시의 내용을 바꾸어 써 본다.   3. 행과 연을 바꾸어 써 본다.   4. 자신의 경험과 관련지어 시의 일부분을 바꾸어 써 본다. 예) ㆍ이사한 송이 → 전학한 영호 ㆍ보고 싶은 송이 얼굴 → 그리운 영호 모습 ㆍ꽃 향기에 실려 와요 → 바람결에 실려 와요.   5. 생각을 다르게 하거나 상상하여 시의 일부분을 바꾸어 쓴다.   예) 달팽이     바꾸기 전 바꾼 후 아기 잃은 어머니가 보퉁이 등에 지고 허둥지둥 간다. 어느 철학자처럼 동그란 집 속 웅크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6. 대화글이나 비유적인 표현 등을 써서 시의 일부분을 실감나게 바꾸어 써 본다.   예) 포크댄스     바꾸기 전 바꾼 후 남자 여자 손 잡고 시작하는데 모두 소리를 질렀다. 속으로는 좋으면서 남자 여자 손 잡고 시작하는데 소리를 '깍깍' 거렸다. '치, 속으로는 좋으면서.'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1.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읽는 방법     (1) 시의 장면을 떠올리며 읽는다.   (2)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읽는다.   (3) 시의 제목, 내용, 행과 연을 어떻게 바꾸어 쓸지 생각하며 읽는다.   (4) 시의 일부분을 어떻게 바꾸어 쓸지 생각하며 읽는다.      ㆍ생각을 다르게 하거나 상상하여 바꾸어 써 보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ㆍ실감나는 표현을 넣어 바꾸어 써 보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2. '우리 엄마 시장 갔다 오시면' 읽는 방법     (1) 시의 제목을 어떻게 바꾸어 썼는지 살펴보며 읽는다.   (2) 시의 내용을 어떻게 바꾸어 썼는지 생각하며 읽는다.   (3) 행과 연을 어떻게 바꾸어 썼는지 생각하며 읽는다.   3. 어떻게 바꾸어 썼는지 살펴보기     (1) 시의 제목      ㆍ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 우리 엄마 시장 갔다 오시면   (2) 행과 연      ㆍ3연 9행 → 3연 8행   (3) 내용      ㆍ아빠 → 엄마      ㆍ시골 다녀오시는 내용 → 시장 다녀오시는 내용      ㆍ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생각 → 이사 간 진아를 그리워하는 생각      ㆍ할머니 댁에서 가져오시는 호박잎, 풋고추, 고춧가루 → 시장에서 사오는 고등어, 삼겹살, 시금치   4.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시의 일부분 바꾸기     (1) 시의 내용을 생각하며 시를 읽는다.   (2) 시의 내용과 비슷한 경험을 떠올려 본다.   (3) 시를 어떻게 바꿀지 생각해 본다.      ㆍ제목      ㆍ내용      ㆍ행과 연
498    동시 짓기 댓글:  조회:4961  추천:0  2015-05-13
          글쓰기를 통한 삶 가꾸기 - 동시 짓기   동시 짓는 방법 - ‘동시’란 어린이를 위한 시로, 동심(어린이의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시이다.   동시의 특징 1. 짧게 줄여 쓴 글이다. 2. 글쓴이의 상상력과 느낌 등이 담겨 있다. 3. 다양한 표현 방법을 사용한다. 예) 빗대어 표현하기, 말의 순서 바꾸기,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기, 흉내내는 말 사용하기, 반복되는 말 사용하기 등 4. 연과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시 짓는 방법 1. 시의 글감을 정한다.    -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2.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적는다.    - 어떤 내용을 쓸지, 먼저 자유롭게 글로 표현하여 본다. 3.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재미있는 말로 표현한다.    - 빗대어 표현하기, 말의 순서 바꾸기,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기, 흉내내는 말 사용하기, 반복되는 말 사용하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 본다. 4. 솔직하게 쓴다.    - 꾸미지 않고 솔직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살아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방법이다. 5. 시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도 살아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시에 나오는 물건들을 살아 있다고 표현해서 재미있게 나타낸다. 6. 리듬을 살려 써 본다.    - 리듬을 살리기 위해서는 글자 수를 일정하게 되풀이 하거나 소리나 모양을 흉내내는 말을 쓸 수 있다. 7. 행과 연으로 나눈다.    - 내용과 리듬에 따라 행과 연을 알맞게 나눈다. 8. 다 쓴 다음에는 다시 한 번 살펴본다.    - 시를 다 쓴 다음에는 사실과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은 없는지 등을 살펴서 고치고 다듬는다. 9. 제목을 붙인다.    - 제목은 시를 쓰기 전에 정해도 좋고, 시를 다 쓴 다음에 정해도 좋다. 시의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을 정해 본다.   동시를 잘 쓰려면 1. 무엇이든지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 2. 꾸미지 말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 3. 사물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며 쓴다. 4.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동시를 쓴다. 5. 사물을 볼 때 새로운 방향에서 보고 느끼도록 한다. 6. 책을 많이 읽고, 동시를 많이 써 본다.     비유법의 활용 비유법이란 표현하려는 대상이나 내용을 독자가 알기 쉬운 다른 대상이나 내용에 빗대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비유법의 목적 비유법의 목적은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더욱 정확하고, 참신하고, 힘 있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려는 데에 있다.     비유법의 종류 1. 직유법 표현하려는 대상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대상에 직접 빗대어 나타낼 때, ‘~처럼’, ‘~같이’ 등의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달 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 달 → 달을 쟁반에 직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냄.   2. 은유법 표현하려는 대상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대상을 간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낼 때, ‘~은 ~이다.’의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내 마음은 호수요. → 내 마음을 호수에 간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냄.   3. 의인법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 햇발과 샘물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속삭이고 웃음 짓는다고 표현함.   4. 풍유법 속담이나 격언, 우화는 대부분이 풍유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비유하는 말만 드러내 숨은 뜻을 넌지시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 공든 탑이 무너지랴. →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헛되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5. 대유법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거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물로 대신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 여기에서 ‘빵’은 ‘음식’을 대신하여 나타낸 것임.   6. 의성법과 의태법 의성법이란 실감나는 표현을 위하여 사물이 내는 소리를 그대로 흉내내어 표현하는 방법이고, 의태법이란 사물의 모양이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어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예) 시냇물은 졸졸졸졸 / 고기들은 왔다갔다 / 버들가지 한들한들     비유적 표현이 나타나 있는 부분 찾기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생각이나 느낌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비유적 표현’이라고 한다. 실제의 작품에서 비유적 표현이 나타나 있는 부분을 찾아본다.     [ 중에서] 1. 봄 햇살은 물감을 흠뻑 묻혀 노란 개나리 콕콕 찍고 분홍 벚꽃 콕콕 찍고.   - 봄 햇살을 물감을 흠뻑 묻힌 붓 또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 비유하였다.   2. 아, 눈부셔라! 커다란 그림 같은 봄 풍경.   - 봄 풍경을 커다란 그림에 비유하였다.     [ 중에서] 나뭇잎 뒤에 숨은 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 기와 안의 웃는 얼굴이 수줍어하는 듯한 초승달과 닮았기 때문에 초승달에 비유하였다.     [ 중에서] 목련꽃은 입이다.   아이스 크림처럼 하얀 봄을 한입 가득 물고 있는 아이들의 예쁜 입이다.   목련꽃은 웃음이다.   아무 욕심도 불평도 없이 얼굴 가득 담고 있는 아이들의 티없는 웃음이다.   - 목련꽃의 희고 예쁜 모습이 하얀 아이스 크림을 가득 문 아이들의 입처럼 보이고, 하얀 목련꽃이 활짝 핀 모습이 아이들이 티없이 맑게 웃는 모습과 닮았기 때문에 목련꽃을 ‘입’과 ‘웃음’에 비유하였다.     [ 중에서] 1. 바람의 손이 풀꽃의 여린 어깨를 만져 준다. 마치 아기를 안아 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가장 가까운 눈빛으로 체온까지 재어 본다.   - 바람을 어머니에 비유하였다.   2. 풀꽃의 이마에는 햇빛도 반짝인다. 풀꽃은 바람의 말도 알아듣는 듯 옷차림을 말끔히 가다듬고 바람의 등에 기대기도 한다.   - 풀꽃을 사람처럼 나타내었다.     비유적 표현이 들어간 노래   [달] 작사: 윤석중 / 작곡: 권길상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달 달 무슨 달 낮과 같이 밝은 달 어디어디 비추나 우리 동네 비추지.   달 달 무슨 달 거울 같은 보름달 무엇무엇 비추나 우리 얼굴 비추지.     [곰 세 마리] 작사, 작곡 미상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 아빠곰은 뚱뚱해 엄마곰은 날씬해 아기곰은 너무 귀여워 으쓱으쓱 잘한다.     [꼬마 눈사람] 작사: 강소천 / 작곡: 한용희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비뚤고 거울을 보여 줄까 꼬마 눈사람   하루종일 우두커니 꼬마 눈사람 무엇을 생각하고 혼자 섰느냐 집으로 들어갈까 꼬마 눈사람     [사과 같은 내 얼굴] 작사: 김방옥 / 외국 곡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   오이 같은 내 얼굴 길기도 하지요. 눈도 길쭉 귀도 길쭉 코도 길쭉길쭉.   호박 같은 내 얼굴 우습기도 하지요. 눈도 둥글 귀도 둥글 입도 둥글둥글.     [나무야] 작사: 강소천 / 작곡: 김공선   나무야 나무야 서서 자는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다리 아프지 나무야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497    시쓰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댓글:  조회:5076  추천:0  2015-05-13
  [시창작강의]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나는 음식점을 고를 때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에 적힌 상호, 간판의 크기, 글자체, 디자인에 따라 그 음식점의 역사와 음식의 맛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조’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일단 의심한다. 역사성의 과잉이거나 후발주자의 과장 광고일 수도 있다. 또 무슨 텔레비전에 출연했다고 요란하게 써 붙인 곳이 있으면 경계한다. 그게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맛없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도 아주 싫어하며, 할인가격을 보란 듯이 써 붙여 놓은 음식점도 꽝이다. 또 있다. 터미널 앞 식당가처럼 한 집에서 조리하는 음식의 수가 많아도 기피 대상이다. 최근엔 ‘웰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간판을 달고 있는 보리밥집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웃기고 있네, 비웃어주고 만다.  백석 시엔 멧새 깃털도 없어  후대 독자들 궁금할 수밖에  한 끼의 밥을 위해서도 이모저모 간판부터 살피는데, 하물며 시에서 간판이라고 할 제목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으랴. 시의 제목을 이승하는 ‘첫인상’이라 했고, 강연호는 ‘이름’이라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글을 병법에 비유하면서 “글의 뜻은 장수와 같고, 제목은 맞서 싸우는 나라와 같다”()는 문장을 남겼다.  그만큼 제목은 중요하다. “한 편의 시작품은 여러 부분이나 요소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데, 이때 제목은 전체 구조를 한 곳으로 응집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의 확장에 기여하기도 한다. ”(강연호, )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의 시다. 이 시의 제목은 이다. 그런데 시의 전면에 멧새 소리는커녕 멧새가 빠뜨리고 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처마 끝의 명태와 이를 동일시 한 시적 화자 ‘나’만이 꽁꽁 얼어 있을 뿐이다.  백석은 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독자가 전혀 뜻하지 않은 의외의 제목을 제시함으로써 제목과 내용 사이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노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각과 촉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의 배경음악으로 멧새 소리를 삽입해 청각적 효과를 가미한 것일까? 후대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인 우리가 심심해 할까봐 일부러 그랬을까? (이 짧은 시 한 편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이유도 시에서 제목이 그만큼 중요한 탓이다)  김춘수는 (자유지성사)에서 시인이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따라 시인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미리 제목을 정해 두는 것, 둘째는 시를 완성한 뒤에 제목을 다는 것, 셋째는 처음부터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답게 시의 의미와 내용을 중시하는 휴머니스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한다. “제목이 정해져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용에 결백한 나머지 시의 기능의 중요한 면들을 돌보지 않는 일”이 있다며 시의 형식에 따라 내용이나 제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제’있지만 좋은시 드물어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제목을 처음부터 붙이든 나중에 붙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심하는 그 과정이 창작자에게는 중요하다. 제목을 붙이는 일이 시쓰기의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제목이 시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제목을 고치거나 바꾸는 사이에 시는 진화하거나 퇴보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간다. 그것은 제목이 시의 내용과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에 놓여 있어서다.  실제로 제목을 이렇게 붙여야 한다는 시인들의 조언도 적지 않다. “시의 내용이 추상적일 때는 구체적인 제목으로, 구체적일 때는 추상적인 제목을 붙여주면”(박제천, , 문학아카데미>) 좋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지엽은 “제목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시의 격조와 긴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면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방법”과 “술어를 생략하거나 놀라움을 나타내거나, 감탄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적 호기심이나 관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선정적인 제목을 다는 경우”도 예를 든다. (, 고요아침)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는 가 기다리고 있다.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의 시 다. 사실 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무제’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그건 자기 작품에 대해 창작자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무제’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제’를 제목으로 내건 작품 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대체로 예술가연 하는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품의 미숙성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이는 제목이 ‘무제’를 제목으로 단 시나 그림일 터이다. 특히 비구상 계열의 그림이 이런 제목을 붙이고 화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 다. “허리에 감기는 비단”이 왜 아픈지 나도 아니까!  대체로 제목은 시의 중심 소재를 앞에 제시하는 경우 (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는 없지만 내용보다 어깨를 낮춤으로 해서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에’ ‘-에서’가 붙은 모든 제목이 그렇다),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김중식의 을 읽어보라), 첫 행을 아예 앞에다 내세우는 경우(최승자의 가 대표적이다)가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호기심을 유발하되 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무겁되 가볍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연암의 호쾌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억양을 반복하는 일은 맞붙어 싸워 죽이는 일과 같고, 제목의 뜻을 드러내 보인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사로잡는 일과 같다. 짧은 말이나 글로 깊은 뜻을 담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함락된 적진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일과 같고, 글의 여운을 남겨 놓는 것은 전열을 잘 정비하여 개선하는 일과 같다.”    
496    잘못된 시쓰기 류형 댓글:  조회:4333  추천:0  2015-05-13
잘못된 시 쓰기의 유형 몇 가지- 1. 대상에 대한 관습적이거나 표피적인 인식에 의한 표현 *관습적 인식 -대상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기존의 상투적인 사고와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지각의 자동화)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시원하며 섬은 늘 고독하다. -아침은 희망, 밤은 절망의 시간 -떠오르는 태양은 찬란하고 떨어지는 해는 슬프다. *표피적 인식 -대상에 대하여 깊이 있게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애매모호 하게 파악한다. -숲에는 갖가지 새들이 지저귀고 이름 모를 곷들이 피어나고 있다. *을 소재로 쓴 두 편의 시 읽기 1)피를 흘리며 땀을 흘리며 /퍼렇게 멍든 강은 /꽃망울 송이송이 터뜨릴 내일을 향해 /힘차게 흘렀다 /숨이 차오른 순간의 고통을 /뒤로 뒤로 밀어놓고 /높은 산을 타고 넘는 바람처럼 /끓어오르는 뜨거운 마음을 /안으로 숨기며 /강은 쉼없이 흘렀다. --여기서 , 등은 공허하고 장식적이어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또한 ,라는 표현도 즈낌이 와닿지 않는다. 강이 힘차게 흐르고, 쉼없이 흐르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하겠지만 대상의 실체에 대한 접근 보다는 다분히 관습적이고 표피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대상을 장식하려 하기 때문이다. 2)강은 둑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가다가 잠간 발을 멈추고/ 행락객이 모두 가버린/ 여인숙의 닫힌 창문을 보며/ 밣힌 풀이 다시 허리를 펴는/ 순간을 보며/ 천천히 흘렀다. -- 강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는 작품으로 관찰을 통해 인지한 사실적 풍경과 심상을 재구성해놓고 있다. 구체적이며 과장되지 않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2.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사적인 표현 대상에 대한 감각이나 인식을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언술함으로써 시인의 표현 의도와 작품 내용에 대한 이해를 매우 어렵게 만든다. 대상과 시인 간의 특별한 관계에 대하여 독자들은 알 수 없으며, 시인의 개성적인 표현도 대상에 대한 시각이나 인식, 시적 언술 등에서의 개성을 말하는 것이지 요령부득의 개인적 사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개성적 표현도 객관화, 공유화 되어야 그 가치를 빛낼 수 있다. *밤은 날개처럼 슬프다.// 발이 젖어오면/ 낯설은 거리에서/ 울먹이는 바람을 타고/ 나는 잃어버린 나라의/ 날개의 깃털이 자라나/ 그때 그 거리에서/ 밤보다 야릇한 의미로 젖어들면/ 가슴을 때리는 울림이 있다.(날개) --이 작품에서 내가 잃어버린 나라의 날개는 무엇인가? 시인이 만들어낸 는 시인만이 아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날개의 깃털이 자라나 밤보다 야릇한 의미로 젖어드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는 좀처럼 그 뜻을 읽어낼 수 없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은 그곳에 고 말한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울림이다. 3. 철학적, 관념적인 표현 철학적인 주제나 내용을 시로 형상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좋은 관념시가 될 수 있다. 사물시도 될 수 있다. 사물의 표현 배경에 철학적인 주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시적 형식만 빌릴 뿐 철학적 사변에 머물러 있는 작품은 철학적이지 시는 아니다. 철학적 주제나 내용은 시로 승화되어여만 비로소 시가 될 수 있다. 또한 작품 속에서 관념어의 남발도 피해야 한다. 그것은 작품을 딱딱하게 하고 추상화시키기 때문이다. 1) 먹고 사는 일이 다 뭔가/ 자주, 내가 나에게 던지는 낡고 지친 질문/ 굶주림이란 말이 없었대도/ 가난의 주인은 있는 법/ 배고플수록/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 2) 때 아니게 눈이 내리고/ 아무 대책 없이 집을 나섰다가/ 눈을 맞았다/ 초봅나누는 아직 옷을 입지 못해/ 하늘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데/ 그 나무 아래서 눈을 맞았다/ 내 마음에 심은 나무 한 그루도/ 아직 옷을 입지 못했음을/ 거기서 알았다. --작품 1)은 자기 나름대로 삶의 무언가에 대해서 깨닫고 터득한 양 철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화자가 아는 체 하며 철학적인 냄새를 피우더라도 이것은 막연한 상념일 뿐이다. 철학적인 깊이도 지니지 못하면서 시로서도 실패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작품 2)는 눈 내리는 초봄에 눈을 맞으면서 자신의 내부에도 앙상한 나무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체험에서 오는 구체적인 인식이 철학적인 깊이를 가지면서 시는 모호한 추상성에 빠지지 않고 의미 있는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4. 앞 뒤 문맥에서 논리성이 결여된 표현 작품 안에서 앞 뒤 시제가 일치하지 않거나, 화자가 일치하지 않거나, 내용에 일관성이 없거나 논리적 설득력이 없는 등 불일치의 표현이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시인 의 시적 사고가 성숙되어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5. 알맹이가 빈약한 표현 대상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여러가지 내용을 다각적으로 관찰하고 그 의미를 깊이있게 사유하지 않은 탓으로 시으 내용이 가볍고 단순하게 된 경우를 말한다. 물론 작품의 길이와 내용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어서 외형상 짤막한 시도 중후한 무게를 지닐 수 있다. 문제는 작품의 알맹이 이며, 그것이 지니는 밀도이다. 6. 지나치게 건조하거나 또는 과잉 감정을 드러낸 표현 표현 대상과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작품이 메마르고 딱딱해지기가 쉽다. 그런데 그 반대로 대상과 화자와의 심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감정 노출이 심해지게 된다. 표현 대상과는 언제난 적절한 심적 거리 조정이 필요하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외치고 싶다/ 바다를 향해/ 바그너의 악보처럼,고호의 붓끝처럼/ 봄으로 채색된 나의 필통 속에/ 이십 년을 잠자는 오직 하나의 펜으로/ 호반 아래 앙금처럼 가라 앉는/ 우리의 오색 언어들이/ 땀과 눈물과 마지막 피 한 방울에 섞여/ 하늘에 파도칠 때까지/ 막차 떠난 플랫포옴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노래하고 싶다 -- 이 시는 시인과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감정적으로 처리된 경우 이다. 여기서 외치고 싶다는 것은 욕망의 감정적 표현이다. 그 욕망의 감정을 나 로 노래할 때 그 노래가 어떤 양상을 보여줄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그 노래는 욕망과 감정의 극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감정적으로 밀착해 있는 경우에는 작품이 피상적인 인식의 세계만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495    시쓰기 네가지 류형 댓글:  조회:4499  추천:0  2015-05-13
  시 쓰기의 네 가지 유형     —오세영 시집 표4의 글                다음은 최근에 출간한 오세영 시집 『바람의 아들들』표4의 글입니다. 깊이 새겨 음미해 볼 내용입니다. 특히 신기(新奇)와 효빈(效顰)의 유행에 민감한 요즘의 신진들에게는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지표가 될 만한 내용입니다.             산문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시 쓰기에도 네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쉬운 내용을 쉽게 쓴 시.       둘째 쉬운 내용을 어렵게 쓴 시.       셋째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쓴 시.       넷째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쓴 시.           첫째는 산문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 아직 유치한 단계이다.       둘째는 능력 부족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자의 작품이다.       셋째는 자기도 모르는 것을 쓴 것이니 의욕은 과하나 머리가 아둔한 경우이다.       넷째는 시에 대해 나름으로 달관한 경지에 든 시인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이여, 어떤 시가 훌륭한 시인지 분명치 않은가?                                                                                                      __ 오세영           과연 그렇습니다. 나는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꼭 들어맞는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교사와 학생으로 비유해 보고 싶습니다. 다음은 내 37년 간의 고등학교 교직생활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입니다. 교사인 내가 확실하고 분명히 아는 단원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매우 쉽고 즐겁게 가르쳐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사인 내가 어렵게 깨친 단원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학생들에게도 어렵게 가르쳐 주고 만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만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 속에 들어있는 중요한 가치나 내용 혹은 정서가 어떻게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야 할 것인지를 우리 시인들은 그와 같이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의 문장 하나하나 그 자체가 무슨 말인지 그것을 쓴 시인 자신조차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예 시가 아닙니다. 그렇게 외계(外界)의 언어로 쓰는 것이 그 시인의 필연일 수밖에 없다면, 그는 시인이 아니라 가엾은 정신분열자이거나 아마도 초월적인 존재 즉 주술사일 것입니다. 그는 제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평소와 달리 신기(神氣)에 접해서 자기 입으로 내뱉은 바를 본인 스스로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도저히 알지 못합니다.       
494    시쓰기와 정신 치유법 댓글:  조회:4827  추천:0  2015-05-12
시쓰기와 치료                                                                                                                                                           이언 김동수       1. 시쓰기와 치료   글쓰기는 정신병과 우울증에도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것은 글쓰기가 혼란스런 현실에서 우리의 삶에 질서와 감정의 분출구를 마련하여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나서 후련한 느낌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글쓰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요즘 나의 고민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내가 ......을 하게 된다면....’ 등과 같이 처음엔 기본적인 감정에 대해 글을 써 보면서 내부적 저항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좋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 안에 내재된 불안과 고통을 서사적 혹은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해 보게 하거나, 자기의 감정과 닮아 있는 시를 읽게 하여 내적 갈등을 완화시켜 가도록 한다. 그것은 글쓰기라는 감정의 전이와 공유를 통해 그간 무의식 속에 억압된 심리를 해방, 고통을 소산(clean up) 시키는 정신의학적 치료효과(abreaction)가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어느 가을 여학생 한 명이 내 연구실을 찾아왔다. 직장 생활을 하다 그만 두고 글이 쓰고 싶어 우리 과(문예창작과)를 찾았던 학생이었다. 대뜸 “교수님, 저 외로워요 했다” 느닷없는 그의 발언에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다가, 평소 그의 남달랐던 인상,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우울해 보였던 모습이 떠올라 정호승의 「수선화에게」 라는 시를 꺼내 읽어 주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전문     시를 다 읽고 난 후, “너도 외롭고, 나도 외롭고, 생명을 가진 것치고 이 세상에 외롭지 않는 것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 교수님, 인제 됐어요” 하고 밝아진 표정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연구실 문을 나가던 일이 있었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를 통해 그는 어느새 이처럼 힐링이 된 것이다. ‘외로운 것’은 자기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에 외롭지 않는 것이 없다’는 통찰, 곧 정서적 동일시(同一視)로 세계와의 화해를 이루게 된 셈이다.   어둠은 출발이다 깊은 나락에서 즈믄 밤을 뒤척이다가도 끝내 홀로 일어서야 하는 침묵 그것은 안으로 안으로 덮쳐오는 어둠을 살라 먹고 산처럼 다가오는 아픔을 살라 먹고 때가 되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빛살의 물결 어둠은 결코 어둠이 아니다 길고 긴 인고의 세월 끝에 쌓이고 모인 말씀과 말씀들이 이렇게 두 손 털고 일어서는 생명의 숲이다 찬란한 탄생의 눈부심이다   - 김동수 「어둠의 역설」 전문     실패 그리고 패배라는 객관적 사실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주관적 자세가 더 중요함을 깨닫는 순간,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었고.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요, ‘찬란한 탄생의 눈부심’이라는 깨침(覺)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선언적 아포리즘(aphorism)으로 그간 어둠의 고투를 딛고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시쓰기는 이처럼 자기 콘트롤(super-vision), 자기 정화로 자신의 삶을 순화시키고 강화시켜 가는 힘이 있다.   2. 정신질환 시(詩)로 고친다.       -임상실험   노이로제·조울증 환자 자작시 낭송 -시작(詩作) 동기 등 발표 유도로 불만·갈등 해소하다.     문학의 한 장르인 시가 정신질환을 진단, 치료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연극 음악 그림은 임상예술로서 정신질환진료에 활발하게 응용돼왔었으나 국내에서 시(詩)가 정신과 환자의 진료수단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 아직 일반인에게 생소한 시치료에 관해 최근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B병동 시화전」을 펴낸 정신과 전문의 김종주 박사(인천 기독병원 정신과 과장)로부터 정신질환과 시 치료에 관해 들어본다.   국내에서 최초로 시 치료를 시도 한곳은 몇 년 전 김종주 박사가 근무했던 원광대병원, 김 박사는 정신질환으로 범죄를 일으켜 감호를 받는 50명의 환자에게 시치료를 시도 하여 빠르고 높은 치료효과를 거뒀다. - 이후 연세대 의대에서도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시치료가 소개돼 앞으로 정신과 진료에 널리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박사에 따르면, 시치료는 개인치료에도 응용되나 보통 집단치료에 활발하게 이용된다. 집단치료의 경우, 우선 잘 짜인 시치료팀을 구성해야 한다. 시치료에 대한 충분한 이론과 경험을 가진 정신과 전문의가 치료를 주관하게 되는데, 환경 요법 등 임상경력 2년 이상의 정신과 전문의 1명, 간호원 2명, 봉사원 1명의 보조를 받는게 보통, 치료대상은 노이로제 약물 및 알콜중독,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 광범위한 영역의 정신질환에 적용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못 참는 환자는 제외된다.   즉 기질성 뇌증후군 환자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 급성정신병원의 환자에게는 시치료가 적용이 안 된다. 치료대상이 정해 있지만 치료팀은 시간을 충분히 주어 환자들에게 가능한 10행이내의 시를 짓게 한다. 환자가 시를 다 지으면 각자의 시에 그림을 그려 별도의 치료실 벽에 붙이도록 한다. 치료 시간이 되면 환자들을 모아놓고 작품을 낸 환자가 직접 시를 낭송토록 한다. 환자의 시낭송에 앞서 명상의 시간이나 기성 시인의 시를 함께 낭송케해 분위기를 조성한다. 환자에게 자신이 쓴 시를 낭송하게 한 다음, 다른 환자, 의사, 간호원이 다시 낭송을 해준다.   시를 쓴 환자에게 시를 쓰게 된 동기, 시 해설을 하도록 한다. 그 다음 치료팀은 참석자들에게 자유토론을 유도한다. 치료팀은 토론내용을 정리하는 한편 시를 쓴 환자에게 토론결과에 대해 의견을 말하도록 하고 다시 스스로 쓴 시를 낭송케 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가슴속 깊이 감추고 있던 갈등을 표현함으로써 정신적 통풍, 즉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시를 통해 불안 분노의 물꼬를 트는 한편 죄책감이나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고도 고백 욕구를 해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시낭송 토론과정에서 환자에게 자신감과 의사소통능력 정신집중력을 증진시켜줄 수 있다. 자신의 문제가 자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주고 자기 성찰을 통해 갈등을 풀 수 있는 능력을 키워 환자 스스로 병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치료 의사는 환자들의 시작(始作)과 낭송·토론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진단정보를 얻게 된다. 환자의 적나라한 감정 표출, 때로는 교묘하게 감춰진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는 마치 X선 사진같이 확실한 진단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를 근거로 약물치료 환경요법 그리고 다음 시치료 때의 처방을 보다 정확하게 내릴 수 있다.   시치료는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의 정신과의사 엘리 그라이퍼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 처음에는 10대 미혼모들의 선도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실제 임상실험을 통해 이론이 정립됨에 따라 정신과 영역에서 진료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1989, 6,24, 경향신문 노영대 기자)   3. 시치료는 해석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억압 심리를 은유나 상징으로 포장하여 표현한 경우가 많다. ‘환자가 자신의 자존심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로 여과된 언어, 곧 과장과 왜곡, 흥미유발을 위한 이차 가공 등 기술적인 언어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꿰뚫어 해독하는 능력이 시 치료의 본질이다’(김종길) 시치료사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기호화된 그들의 잠재의식을 해독하면서 심리 상태에 접근, 오랫동안 심연에 웅크리고 있던 감정을 글로 표출케 함으로써 자율적 면역체계를 갖추게 한다. 그래서 문학치료는 해석이라고 주장한 이들도 있다.          혀끝에 머물던 격렬함이 사라지자 그는 무덤처럼 입을 다문다   그의 침묵 속에는 그가 겨누었던 대상을 향해 파르르 떨며 날아간 그러나 결코 적중하지 못한 흔적이 우울한 갈증에 섞이고 있다   그의 꿈은 바깥을 향하지만 한 때 그를 긴장시켰던 오금 저리고 팔뚝마다 소름 돋았던 몸 밖의 세상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거미줄에 걸린 거미처럼 축축한 사유의 달팽이처럼 제 몸이 바로 존재의 집이라는 것   모든 언어에는 제 몸을 쥐어뜯은 상처가 있다   - 강연호, 「언어의 꿈은 바깥에 있다」 전문     ‘입을 다문’ 그의 ‘언어에는/ 제 몸을 쥐어뜯은 상처’ 아니 ‘무덤처럼 입을 다문’ ‘침묵’들이 들어 있다. 이처럼 행간에 감추어져 있는 침묵의 언어들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내어 풀이해 주는 일이 시치료사의 임무이다. 다시 말해 기표(記表) 아래 감춰져 있는 기의(記意)의 숨은 그림을 찾아 환자의 심리 상태를 해독하여 처방하는 일이다. ‘프로이드학파에 의하면 시와 심리치료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내면의 감정을 탐색하기 위해 전의식과 무의식적인 요소를 끄집어 내, 그것을 형상화하여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때 상징화와 치환 이 두 가지가 다 쓰인다. Pattison은 상징화가 자기(self)를 조직화하고 통합하여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시는 심리 치료적 의사소통의 상징 매체로써 강력한 방법이 된다’고 발표(한국시치료연구소)한 바 있다.   은유는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이기 때문에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영어 ‘metaphor’의 어원(그:metapherein)도 ‘다른 곳으로 전이하다’, ‘옮겨가다’의 뜻을 지니고 있어, 이 또한 자신의 감정을 비유적으로 숨겨 에둘러 표현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욕망이 상징으로 재현된 것이 꿈이다. 때문에 해몽을 통해 내담자의 심리 상태를 풀이하듯이, 환자의 복합감정이 그대로 응축된 문장을 통해 시치료사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환자의 심리 상태를 읽어 내야 한다.   예컨대 ‘직선은 곡선이다’라는 하나의 은유로 된 문장을 보면, 여기에는 정 반대의 두 속성(직선/곡선)이 하나의 등가(等價)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환자가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면 그의 속내를 알아내기가 쉽게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은유를 보다 심층적으로 들어가 해독해 보면, 그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직선이 아닌, 구불구불한 것들이 어떤 물리적 강압에 의해 당겨지고 뽑혀져 나와 본의 아니게 휘어진 곡선들의 전신(前身)이었음을 알리고자 하는 시인의 억압 심리가 내재·함의 되어 있음을 간취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시인의 메시지(신호)이다.   그러기에 묵묵히 뽑혀져 나와 가지런하게 늘어선 저 직선들의 침묵 속에서 ‘길게 잠들어 있는/수많은 곡선들의/휘어진 함성’(김동수의「직선」), 곧 곧게 뻗어 있는 직선의 침묵 속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수많은 곡선들의 내재된 신음 소리를 읽어내는 것이 시치료사의 임무요 해독법이다.   4. 시와 통찰(通察)   미국의 경제학자인 제레미리프킨은 이 세상의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눈 바가 있다. 세상을 이끄는 0.1%의 천재와, 천재를 보고 다음 세상을 준비한 0.9%의 통찰력을 가진 사람, 그리고 나머지 99%는 잉여 인간, 곧 유기물 덩어리이다.   ‘통찰’을 영어로 ‘insight’, ‘vision’이라 하는 데 그 뜻이 ‘안을 본다’, ‘꿰뚫는다’, ‘미래를 예견하거나 꿰뚫어 본다’ 이다. 때문에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눈앞에서 수시로 변해가고 있는 현상(change)에 얽매어 복작이지 않고, 그 밑바닥에서 사태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본질, 곧 항상성(constant)을 깨달아 내적 고민을 스스로 풀어가고 있다. 이러한 자가 치료 원리를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시쓰기 치료의 근본 원리이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행복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은 또 그리워지는 것이다.   -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고달프고 힘든 오늘도 일순간에 지나간다. 그러고 나면 이처럼 고달펐던 오늘의 순간도 훗날에 가서는 다시 그리워지는 추억의 하나가 된다는 생(生)의 통찰, 그로인해 필자 또한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 시를 통해 큰 힘을 얻곤 하였다.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은 눈앞에 닥친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건의 시말(始末)과 그 변화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꿰뚫어 보면서 그에 따른 정보의 취합과 분석 그리고 예측력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객관적 시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현실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일을 설계하여 상황을 돌파해 가는 자기 제어 능력과 추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적 체험(actual emotion)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시적 체험(art emotion)은 통찰을 통해 현상을 뛰어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진입하는 생성(生成)의 계기가 된다. 그러고 보면 결국 시쓰기란 내 안에 숨어 있는 사태의 숨어 있는 본질을 꿰뚫어 그것을 표현해 냄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자기 고양(高揚), 자기 정체성( identity) 회복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관조와 성찰에 따른 통찰의 세계요 시쓰기가 아닌가 한다.  
493    詩의 첫줄은 神이 주는것... 댓글:  조회:4466  추천:0  2015-05-12
● 좋은 시쓰기 비법  ●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  ● 바늘 가는데 실이 가게 적지 말라.  ● 시는 바늘 가는데 뱀이 와야 한다. 즉 붙어 다니는 말을 버리고 장난을 쳐야 한다.  ●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어라.  ● 꼬리가 길면 밟힌다.  ● 섣불리 아는 지식은 시에 인용하지 말라. 사전을 찾고, 직접가서 보고... 어려운 한문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특히 제목을 한문으로 사용하려면 정확해야 한다. 보충 설명이 없도록...  ● 시 쓰기는 연설문처럼 적어서는 안된다 .  또한 사실을 사실대로 적지 않는 것도 좋은 글을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산사람 같이 나타내면 글 맛이 훨씬 좋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전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 축시는 절대 과거형으로 풀어 나가지 마라. 미래형을 택해야 새로운 글, 살아 있는 글이 된다.  ● 같은 말을 자꾸 다르게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한 대상에 자꾸 다른 이미지를 대입시켜 나가면 잘 어울리는 이미지가 나타나게 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면 교직에 계시는 분의 경우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사랑스럽고 예쁘고 가르침에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고...  이 경우는 절대 시를 적을 수 없다.  그 기분 그대로를 글로 나타내는 것은 누구나 다 가능하다.  다만 시인이라면 낯설게 봐야한다.  즉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연히 바라보니  내 자신이 학생들 틈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다던지...  ● 글을 지어 나갈 때 시대상황을 알 수 있게 구체화 시켜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인터넷이란 낱말을 사용한다면 최근임을 알 수 있다.  ● 사물에도 계절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접동새, 즉 두견새는 봄을 나타내며 진달래와 어울리는 이미지화 되어 있다.  계절을 나타내려면 그 계절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것을 찾아서 나타내야 한다.  ● 글을 쓸 때는 나만 천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내가 알 고 있는 것은 독자도 알 수 있다. 또한 설명으로 묘사해 주지 말아야 한다.  ● 자목련은 잎과 함께 피어나고 백목련은 꽃이 먼저 피어난다.  철쭉과 진달래도 같다. 하지만 무릇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백목련에서 한복입은 여인을,  자목련에서는 드레스 입은 신부를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 시를 지을 때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하지 마라.  이미지화에 주력하라.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미지화가 더 높은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묘사에 치중해서 글을 쓰도록 하라. 이미지가 좋으면 독자가 따라온다.  ● 경쾌한 선율.. 이와같은 표현은 죽은 이미지다.  즉 시인이 아닌 일반인도 이런 말을 일상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 사물을 묘사 할 때는 입체적으로 풀어 나가라.  그래야 독자가 호기심을 갖고 따라 들어온다.  예를 들면 봄은 고양이를 사색하게 한다라고 표현하면 금새 독자들이 식상해 한다.  해서 차라리 고양이 눈속에서 봄이 온다 라던지 봄은 고양이 눈속으로 들어 간다라던지  입체적으로 나타내는 편히 훨씬 더 글 맛이 좋다.  ● 사물의 형태보다는 행동을 묘사해야 한다.  예를 들면(산수유 피고 매화가 향긋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산수유가 어떻게 피고  매화향기는 어떤 짓 을 하다는 그 행동을 이미지화 해야 한다.     
492    시쓰기와 기타... 댓글:  조회:4738  추천:0  2015-05-12
  나의 시 쓰기  오세영  시 쓰기에 대한 내 나름의 태도나 습관 같은 것을 이 기회에 한번 생각 해 보기로 한다.  시와 생활: 다 아는 바와 같이 나는 교수로서 시인이다. 나로서는 이 두 가지 일 그 어떤 것도 소홀할 수 없고 소홀히 해 오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 나의 완벽주의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의 전부를 바쳐 시 쓰기에 몰두한 적이 없다. 그 절반은 항상 학문하는 일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50대 이전까지는 오히려 학문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단에서는 반쪽의 나만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인생이란 누구나 성공에 목적을 두며 성공이란 결국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 역시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하여 나름으로 부단히 힘써 왔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여러 가지로 자질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시간을 황금같이 쪼개 쓰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정된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란 결국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가능하면 모임이나 술자리를 피하는 것 이외 별 다른 묘책이 있을리 없다. 교수 생활 30년을 통해 내가 아직까지 단 한 번의 보직 - 하다못해 학과장까지도 - 을 갖지 않은 이유, 내게 가까운 문인이 별로 없고 성격적인 이유도 많이 있으나 내가 문단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소위 인류대학 교수인 것은 내 시를 위해서는 다소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 쓰는 시간: 전업 시인이 아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나 역시 일상 생활인으로부터 시인으로 즉 생활하기에서 시 쓰기로 전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직업이 학문을 하는 대학 교수인 까닭에 더 그러할 것이다. 학문이란 이성과 논리에 의해서, 시 창작이란 감성과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양자는 본질적인 상반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학문과 같은 이성적 사유는 오른쪽 두뇌가, 시 창작과 같은 감성적 사유는 왼쪽 두뇌가 지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평소 직장 생활에서 - 예컨대 논문 쓰기나 강의와 같은 지적 활동을 하는 생활에서 -- 오른쪽 두뇌에 의존해 있다가 갑자기 시를 쓰기 위해 왼쪽 두뇌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기계가 아닌 한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오랜 시작 생활을 통해 나름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다음과 같다.  생활하기와 시쓰기 사이에 시간적으로 일정한 공백을 둔다. 두뇌활동을 잠시 멈추고 아무런 지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내는 일이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멍한 상태에서 텔레비전만을 본다든지, 무념무상의 상태로 음악을 듣는다든지, ---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 폭음에 시달려 본다든지, 혼자 멀리 여행을 다녀온다든지 하는 것 따위이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만나는 일도 아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란 놀면서 일하는 사람, 시란 놀면서 쓰는 어떤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나이가 들면서 습관화된 것으로 겨울 한철을 山寺산사에서 보내는 일이다. 그 동안 내가 자주 머물렀던 산사 들로는 두타산 삼화사, 치악산 구룡사, 달마산 미황사, 설악산 백담사, 금강산 화암사 등이 있었다. 엊그제는 백담사 만해 마을에서 20여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시쓰기 : 어떤 시인들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시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즉 아무 때나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일단 생활의 시간에서 시 쓰는 시간으로 전환이 되면 나는 아무 때나 시를 쓸 수가 있다. 생활의 시간에서 시를 쓰는 시간으로의 전환이 어떤 유연이나 신비스러운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조작된 행위이므로 ‘아무 때나 시를 쓸 수 있는’행위 역시 의도적이고 인위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시를 쓰려고 마음으로 작정을 하면 아무 때나 시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만들어진 시가 훌륭한가 혹은 훌륭하지 않은가는 물론 별개이다. 어차피 영감을 받아 시를 쓴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시가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시인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작품이든 아니든 누구나 시를 쓰면 모두 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단 등단이라는 어떤 독특한 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을 우리가 관용적으로 특별히 시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그가 이제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단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문단 등단이란 지금부터 그가 아마추어로서의 위치를 버리고 프로페셔널할 시쓰기의 차원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공인하는 절차이다. 그것은 잘 쓰고 못 쓰는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느냐의 차원이다. 실제 작품의 우열을 따질 경우라면 문단에 등단하지 못한 사람들 -- 아마추어가 쓴 시가 문인으로 등재된 사람의 작품보다 더 훌륭한 예는 수없이 많다.  프로페셔널한 사람은 그 분야의 전문인이다. 프로페셔널한 운동선수가 어디 자신의 기분이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경기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시 창작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요구가 있고 - 가령 원고 청탁과 같은 - 그것이 필요한 일이라면 그 즉시 한편의 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감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탓해야 할 것이다.  시와 발상: 시적 발상을 얻는 일은 일종의 선과 같은 행위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 쓰기가 선과 동일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종국적으로 선은 대상도 긍정도 부정도 벗어나 완전한 자유 혹은 무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지만 시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대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다만 그 초기 단계에서 양자 모두 대상을 부정하거나 대상을 무화시킨다는 점만큼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하므로 나의 시 쓰기는 대상에 대한 조용한 명상에서 시작하여 나와 이 세계를 무화시킨 후 마침내 어떤 결정적인 순간, 하나의 깨우침을 엊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깨우침이 있게 되면 남는 것은 다만 그것을 언어를 통해 미적으로 형상화 시키는 단계일 뿐이니까 깨우침이야말로 바로 시라 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도 시 쓰기는 또한 선에 비유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적 형상화란 수십 년의 시작 경험을 통해 얻은 내 자신의 어떤 비법으로 이루어지는것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시적 발상을 얻기 위한 이같은 명상에는 물리적인 환경도 대단히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가지로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공간적, 시간적 환경의 조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대개 심야의 밀폐된 공간에서 시를 쓴다. 부득이 낮에 시작해야 할 경우는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 하더라도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린 후 등불을 켠 후에 실행한다. 이 밀폐된 어두운 공간에서 한두 시간 눈을 감고 명상에 집중하다 보면 최소한 한편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와 같은 방법의 시작에 임해서 실패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여기에 한 가지 부연할 것이 더 있다. 내가 또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장난 삼아 혹은 유희삼아 시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때, 그 어느 작품이든 나는 나의 최선을 다 기울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시를 쓰다 내는 파지나 내 시 구절이 적힌 원고를 절대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항상 불에 태워 허공에 날리는 습관아 아마 이같의 나의 시작 태도의 무의식적인 반영이라 할 것이다. 내 시가 좀 답답하다는 평, 너무 진지하다는 평도 여기서 빚어진 내 시의 특성을 지적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의 시작 태도를 바꾸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시 : 시도 예술이냐고 묻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시가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과는 본질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시가 다른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매재에 있다. 음악이 청각을, 미술이 시작을 매재로 하는데 비해 시가 언어를 매재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매재로서 청각이나 시각이 시각이 그 자체 하나의 감각이고 언어란 - 감각이 아니라 - 어디까지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미술에서 붉은 색은 색 그 자체가 감각적으로 인지시켜주나 시의 경우 ‘붉다’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붉은 것이 아니라 ‘붉다’라는 발음을 ‘紅’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자는 단지 약속체계일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관념적이요 기호전달적이다. 음악이나 미술의 기준에서 볼 때 문학이 예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학(=시)이 예술의 일종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의미의 예술이 아닐 뿐이다. 그리하여 미학에서는 문학처럼 매재가 기호(=언어)인 예술을 관념예술, 미술이나 음악처럼 매재 그 자체가 감각인 예술을 물질 예술이라 불러 구분한다. 여기에 바로 문학 혹은 시가 지닌 숙명이 가로 놓여 있다. 즉 시는 본질적으로 미학적 차원의 영역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예술의 감각적 매재와 달리 언어란 본질적으로 의미를 수반한 기호체계이고 그 의미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사상 즉 철학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시는 감각 즉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 의미 즉 철학의 영역에까지 진임하지 않는 한 도저히 쓰여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소위 ‘무의미’라 하여 의미의 해방을 부르짖는 시 쓰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것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가 어렵고 또 아무리 굿을 해도 미술이나 음악을 시봉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결코 훌륭한 작품의 반열에 올라서기가 어렵다. 다만 그 스스로 시의 위의를 자해하는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모든 훌륭한 시가 궁극적으로 미학과 철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와 진실 :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많다. 또 시는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시어는 일상어와 달라 본질적으로 난해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론에서는 이같은 시의 본질적 난해성을 혹은 애매성(ambiguity - 언어에서 야기되는 필연적인 난해성), 모호성(obscurity-존제론적 조건에서 기인된 난해성), 막연성(vaguenes-거짓말에서 오는 난해성)따위로 구분하기조차 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시는 가능한 쉽게 쓰여져야 한다. 적어도 교양 있는 지식인에게조차 난해하여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를 지닌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난해한 시들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시라는 것은 난해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읽어 보면 뻔한 내용인데 그것을 일부러 어렵게 조작한 시들이 - 기왕에 조작하려면 독자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조작할 일이지 -- 의외로 많다. 무두 시적 사기로 부엇인가 이득을 보려는 행위이다.  시 쓰기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쉬운 것을 쉽게 쓴시, 둘째, 쉬운 것을 어렵게 쓴 시, 셋째,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쓴 시, 넷째,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쓴 시가 그것이다. 첫째는 산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아직 유치한 단계이다. 둘째는 능력 부족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시인의 작품이다. 셋째는 자기도 모르는 것을 쓴 것이니 의욕은 과하나 머리가 아둔한 경우이다. 넷째, 시에 대해 나름으로 달관의 경지에 든 시인의 작품이다. 이 네 가지 유형에 우열의 순서를 매긴다면 우수한 것부터 ①넷째, ②첫째, ③둘째, ④셋째가 될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시야말로 시의 상지에 속한다.  시에 대한 태도 : 시를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만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주장하는(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일 시를 잃게 되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또 가장 고귀한 것도 아니다. 시는 인생의 일부이자 동시에 인간의 삶이 추구하는 가치들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경우엔 시대나 상황에 따라, 개인적인 경우엔 어떤 특별한 계기에 따라 나는 시를 버릴 수도 있고 다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가난으로 처자식이 굶고 있는 상황임에도 시를 붙들고 앉아 무위도식하고 있다면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때는 시 쓰기를 접어두고 우선 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 국권이나 인권이 짓밟혀 인간다운 삶이 빼앗긴 상황이라면 시를 버리고 나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싸울 능력이 없는 자라면 시를 무기로(수단으로)삼아 투쟁해야 한다. 문학의 본질이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그 때 그 상황에서는 하나의 순수한 예술로서 작품을 쓰는 것보다 사회에 뛰쳐나가 현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전체 삶의 가치라는 기준에서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나 깨나 시에만 매달려 시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 시만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사람, 시를 쓰는 까닭에 자신을 훌륭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내가 시를 쓴 시인인 까닭에 훌륭하다. 굳이 시를 쓰려고 고심하지 마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무엇인가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인간에겐 이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이 많다. 시는 무작정 시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재능이 있어 할 수 없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쓰는 삶의 일부일 뿐이다. 
491    시쓰기 즐거움 댓글:  조회:5102  추천:0  2015-05-12
시 쓰기의 즐거움 -시와 함께 사는 사람       1.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너는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느냐?’ 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나의 삶을 위해 쓴다고 대답할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이 생계의 수단은 되지 못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가슴앓이를 해온 것이 벌써 55년째, 남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인이 걸어야 할 길을 돌아보지 않고 걷다 보니 어느덧 저녁놀이 코앞이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고 남은 삶이 보다 아름답다고 보장할 수도 없잖은가. 여나믄 권 삶의 발자국을 찍으며 때로는 기고만장하여 험한 산길도 마다않고 단숨에 기어 오르기도 했으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도 넓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하는 일에 늘 만족해하지 않는가 보다. 그러면서도 하던 일을 중단하지 못하고 잠시 뒤면 후회할 일을 되풀이 하는가 보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의 경우, 쓰고 찢고 뜯어 고치기를 열 번, 스무 번 되풀이 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지금까지의 노동을 원점으로 돌려 버리기도 한다.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 지루한 삶의 오후, 배달된 몇 권의 시집을 들추며 일상적 삶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그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시를 쓰는 즐거움도 시를 읽는 행복도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새롭게 창조된 세계를 아무리 거닐어도 가슴이 설레지 못하는 법이다. 이 기회에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잠시 눈을 감고 돌아보고 싶다.     2. 몸에 밴 넋두리   1) 시가 뭐길래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 「不學詩면 無以言」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아들을 가르치는 대목이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에게 할 말이 없다’라는 뜻이야 뉘라 모를까만 시가 타인과 아우르는 인간관계의 바탕에 널찍하게 깔려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시를 익히는 일이 말을 배우는 일임을 가르치고 있다. 시는 언어예술인 문학적 영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양식이다.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 했던 T.S. Eliot의 말처럼 시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여섯 사람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정의를 내렸다는 이야기처럼 관점과 방법에 따라 다양한 정의와 해명이 가능해 진다. 굳이 시가 무어냐고 묻는달지라도 쉽게 질문에 대한 정확한 정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이해하고 즐기는 과정을 어렴풋이 내비치고만 있기 때문이다. 시가 무엇이길래 동양과 서양에 있어서 이토록 인문적 전통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을까. 시를 지어 인재를 등용하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인간 이해에 대한 타당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동양에서는 공자의 「詩三百一言而 蔽之曰 思無邪」(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악함이 없다)라는 가르침을 시의 정의를 말하는 경전經典처럼 활용하고 있다. 얼마나 명쾌한 결론인가. 또한 미국의 E. A. Poe는 ‘시는 미의 운율적 창조다’.라고 정의하고 있고, Aristoteles는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 그리고 영국의 K. H. Hudson은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시는 언어로 되어 있고, 운율이 있으며,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사상을 표현하는 문학이라고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시는 작가의 사상과 정서를 상상력을 통해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문학’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의를 예시하면서 정답에 접근하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시를 이해하고 즐기는 과정을 겉만 핥고 있을 뿐, 아직까지 시원스럽게 가려운 곳을 긁어 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두고두고 연구 노력을 해야 할 과제로 남겨야 한다. 그러나 현명한 독자는 자기 몫의 정의나 시의 정의에 대한 결론을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위임하지 않는다. 다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즐기면서 해답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2) 왜 쓰는가?   내 경우 즐거워서 쓴다. 하루하루의 삶이 즐거운 것은 시가 있기 때문이요, 시가 있기에 삶이 풍요롭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시를 떠난 적이 없으며 시 또한 항상 내 안에서 형성되고 성장하며 나를 변화시키고 즐거움을 주어 왔다. Aristoteles는 시는 인생의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가장 조화적이며 자연스러운 쾌락을 주는 예술이라 했다. 그 즐거움은 곧 감동이며 쾌락으로 일종의 카타르시스이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의 해소요, 욕구의 실현으로 나에겐 삶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쾌락적 기능의 극단화는 커다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으며, 관능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적 쾌락만을 문학이 추구하게 될 때는 상업주의, 소비문학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일침을 잊지 않는다,   나는 평소 ‘시는 나의 삶이요, 구원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시가 내 삶의 버팀목이 되고, 삶의 구실이 되며 자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시인이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피가 뛰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시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묶어 두면서도 스스로 ‘나는 시인이다!’라는 말을 뱉어본 적이 없다. 됨됨이가 우둔하고 고집스러워 학문에 대한 의욕을 앞세울 뿐, 깨우치는 속도가 매우 늦다. 그러면서도 남을 감동시키기는 시를 쓰기는커녕 나 자신도 머리를 흔드는 경우가 많으니 누구 앞이라 감히 가리워진 베일을 벗길 수 있겠는가. 남들은 심심할 때 쓰는 시를, 한두 달만 장난 삼아 끄적이면 내노라 하는 시인(?)이 되어 나오는데 멍청스럽게 시인에 대한 미련을 대학까지 몰고 가 싱갱이를 쳤고, 또 평생을 짧은 혀끝으로 삶을 노래해야 할 터이니 바보가 따로 없을 모양이다. 열 여덟 해 동안 멍청한 짓을 하면서 바보의 의미만을 깨우쳤고, 인내를 배웠고 모든 욕심을 비워 남의 앞에 서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다만 학창시절 동경하던 ‘시인’에 대한 열망을 항상 가슴에 묻고 내 스스로 ‘나도 시인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올 때까지 시와 함께 시와 더불어 시 곁으로 꾸준히 접근해 갈 것이다.     3) 어떻게 쓸 것인가   ① 시의 본질   시는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은 기우杞憂다. 쓰는 사람은 시인 자신 뿐이지만 독자는 수 십, 수 백,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수를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시인의 생각을 넘어서 보다 많은 감동을 되돌릴 수도 있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산문은 걸어가는 것이라면 시는 춤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시는 운율에 의한 창조행위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우리 일상 주변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일들을 산문적으로 서술하는 일을 몇 가지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면 시가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몇 가지 형식적 절차란 운율, 행과 연의 가름, 문장의 길이, 쓰이는 어휘의 됨됨이를 가리킨다. 산문으로 쓰면 쉬울 것을 시로 쓰려니까 힘들고 어려워진다. 즉 줄글로 쓰면 충분히 독자가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내용을 억지로 시처럼 행을 가르고 연을 가르다 보니 멋만 부리다 망치는 경우가 되고 만다. 좋은 시는 독자로 하여금 큰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 누군가가 얘기했던 좋은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말은 공감과 감동을 말하는 것이다. 감동을 받았을 때, 누구나 나도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것이고 그 충동, 느낌을 거짓 없이 옮겨 놓으면 한 편의 훌륭한 시가 된다. 물론 감동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일도 아니요, 욕심을 앞세운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동이란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가슴을 치고 파고드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천박스런 감동이 아니라 아주 잘 정제된 매우 고급스런 감동 그것이다.   ② 시의 성격   어쩌다 여행길에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보시게, 시 한 편 나옴직하지 않은가?” 가끔 지인들의 농담을 듣는 경우가 있다. 맛 있는 음식을 취한다고 바로 피와 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자신의 지성이나 능력에 알맞은 것을 취해 모르는 척 머리 속에 저장해 두어야 한다. 저장하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것이 얼마만큼 저장될 것인지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른다. 능력이란 많은 체험을 통해 얻은 그릇의 크기다. 저장할 수 있는 그릇이 크면 새로운 많은 체험을 축적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훗날 한 편의 시로 형상화 되는 소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 저장된 체험은 훗날, 아니면 아주 먼 훗날 유사한 체험을 만나게 될 때,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의 확인하게 될 것이며 억지로 쓰려고 밤잠을 설치지 않더라도 그 감동은 오랫동안 희열을 안겨 줄 것이다.   원칙은 아니지만 필자가 작품을 얽을 때 관심을 두는 몇 가지 이야길 참고삼아 이야기 하면,   첫째 소재에 대하여: .시인은 사물을 응시함으로써 시적인 능력을 기른다. .시인에게 필요한 상상력은 어떤 사물을 응시함으로써 이미지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시인이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말은 그만큼 생활(직,간접경험)이 넉넉함을 의미한다.   둘째 주제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이야길 말한다. 시의 요소 중 하나다. 먼 산 바라보듯 질서없이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행을 가르고 연을 가르는 것이 아니 라 자신과 현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맺고 꼭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찾 는다.   셋째 동기에 대하여: 시의 소재를 동원 작품으로써 시를 결정시키는 계기이다. 소재와 주제를 결합시키는 중개역할을 하는 모티브를 말하는데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거 나 황혼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는 등 일연의 자극을 준 사실이 자신의 마음속에 오랫동 안 사라지지 않아 자신의 문제로 간주되어 고민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깨닫게 될 때 일어 나게 된다.   넷째 영감에 대하여: 개인의 능력을 초월하여 작용한다.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나기도 하며 일상적인 체험과 는 동떨어진 특수하고 신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섯째 제목에 대하여: .시 전체를 설명하려 하면 안된다. .함축성이 있어야 한다. .간단 명료해야 한다 .신선한 맛이 있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매력이 있어야 한다.   4) 쉬운 시와 어려운 시   짧고, 읽기 쉽고, 누구나 쓸 수 있어 자신이 속한 장르가 모든 문학 중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장르라고(시가 아니지만) 일갈하던 어느 문학인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는다. 짧고, 이해하기 쉽고, 아무나 쓸 수 있다면 밤 새워 머릴 굴리고 애를 쓸 필요가 있을까.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이래서 나는 또 한 번 바보가 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의 손’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뒤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면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뜯어 고쳐야 할 모양이다. 문학은 내용이 독자를 사로잡는 법이지 형식이 장르의 우수성을 판단하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난해시다.’ ‘현대시가 어렵다.’라는 불평을 자주 듣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독서경험이 적은 이들이다. 자신의 지적 태만에 대한 자각증상이 없는 몰주체적 트집이요 원망이요 자기변명이다. 남들이 떠드니까 덩달아 춤추는 꼭둑각씨다. 이런 사람들은 쉬운 동요나 동시에 대한 감식력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 결국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이해가 될 때까지 열 번, 스무 번 계속해서 읽어 보라. 그래도 모르겠거든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을 두고 읽어 보라.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 시가 자리 잡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1930년대 쓰인 김해경의 「오감도」를 보면 나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의 작품을 엉터리라고 떠드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를 연구하기 위해 대학에 연구소가 설치된 곳도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부분은 앞으로 과제로 남겨 두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또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는 르나르고의 「뱀」이라는 작품으로 알려졌었는데 우리나라 황지우 시인의「묵념5분 27초」는 제목만 있을 뿐 본문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이 형편없는 시라고 머리를 흔드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려운 시와 쉬운 시가 있는 것일까? 시인의 가슴에 쌓였던 많은 체험들이 오랜 세월동안 고독과 싸우며 숙성되고 용해되어 다른 새로운 체험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동을 형상화한 것이 한 편의 시인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속단을 바라는가? 어려운 시와 쉬운 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가 있을 뿐이다. 물론 감상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시인의 고뇌를 헤아려 보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시의 경우 결코 짧다고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시 몇 편 인용해 보면,   뱀, 너무 길다 르나르고 -「뱀」 전문   내 귀는 한 개의 조개 껍데기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 쟝 꼭도 -「소라」전문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전문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 밤 쌓았다 헐었다 긴 萬里城. 김소월의 -「萬里城」전문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한하운 -「전라도 길」전반 한 연   짧기 때문에 과연 쉬울까? 시인의 심오한 생각을 겉만 슬쩍 훔쳐만 보고 단정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쟝 곡도의 「소라」는 국어 교과서에서 익혔을 것이며 이 짧은 시를 보고 나도 저 정도는 쓸 수 있다고 의기를 펼쳤으리라. 안도현의「너에게 묻는다」도 씹어 보면 이해에 앞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는가? 김소월의 「만리성萬里城」도 어려운 말은 없다. 그렇지만 불면의 밤, 시인의 무수한 속생각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시대적인 배경이나 개인이 처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어휘만으로 판단하려는 감상 태도는 재고해야 할 것이다. 뒤의 시는 한하운의 「전라도 길」 앞 부분이다. 한하운은 문둥이 시인이다. 나병이 혐오의 대상이던 시절,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함경도에서 소록도로 걸어서 가던 도중 전라도에서 마지막 고통을 호소하던 시다. 몇 개의 시어만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문드러지는 문둥이 한하운의 고뇌를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어휘 이해가 문학의 목적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은 내용을 붙들기 위해 언어와 구조와 형식을 따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휘가 쉽다고 쉬운 시가 아니며 어휘가 좀 까다롭다고 반드시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물론 짧다고 쉽고, 길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적절하게 자신의 처지에 이입시켜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정서를 되살릴 수 있어야 참된 독자다.     5) 좋은 시를 쓰려거든   시를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주위에 널려 있는 자연현상 모든 것이 체험의 대상이요 시적 소재다. 서둘지 마라. 그러나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억지로 쓰려 애 쓰지 말고 평소 쉬지 않고 쓰는 습관을 길러라. 말을 아껴라. 그리고 사람의 생각도 방치해 두면 녹이 슨다. 진실하라. 남에게 감동을 주려면 진실해야 한다. 순간적인 피해자가 될지라도 진실을 감추어선 안된다. 기억하기 어렵거나 깊이 새겨 두었더라도 급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메모해 두면 편리하다. 이 메모의 습관은 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안내해 줄 것이다. 모름지기 남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 좋은 시를 가려 읽어라. 좋은 시를 식별할 안목은 자신의 시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 준다. 도서관을 찾아 시집의 뒷꼭지만 훑어도 마음이 살찐다고 하지 않던가. 현대를 살면서도 과거 선배 시인들의 우수한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은 책 속에서 그들의 사상과 경험과 이상을 만나고, 그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우리들의 그것에 비교하며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자극이 되고 행복한 체험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사는 이웃들의 작품을 찾아 읽는 것도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안겨 줄 것이다. 생활양식이 달라도 추구하는 목적이 비슷한 것처럼 서로의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도 소중한 지적재산이 될 것이다.     3. 이야기를 마치며   청탁서를 앞에 놓고서야 붓을 잡는 행위는 절대로 자기변명이 되지 못한다. 자기 비하다. 이런 시인이 유력한 잡지나 신문에 이름 석 자 큼직하게 올렸다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바보짓이다. 독자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아니 속아주지도 않는다. 독자의 눈은 현명하여 당장은 아니라도 훗날 곱빼기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문학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자신을 위하고 문학을 위해서 일치감치 마음을 바꾸어라. 문학은 심심풀이 소일하는 놀이터가 아니다. 본적도 주소도 없는 몇 줄 내 갈겨 놓고 나도 시인이네 하는 행위는 자기 기만이다. 항상 겸손하라. 능력이 모자라 글은 서툴더라도 혼신을 다 해서 최선을 다 할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산모의 진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식에 대한 참 사랑을 모르는 법이다. 과거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작품을 빛내지는 못한다. 허나 좋은 작품은 그 사람의 인격을 한 단계 끌어 올릴 것이다. 출산하는 산모의 심정으로 생명을 바쳐 내 영혼을 되살린다는 각오를 가지고 창작에 임한다면 자식 아끼듯 작품을 책임지는 시인이 될 거라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알맹이 없는 이야길 끝까지 들어 준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모든 관심을 가질 때 예향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필자. 전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중앙일보 신춘문예/월간 시문학 추천완료 . 국제펜회원/한국문협 목포지부장 역임 .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 한정동아동문학상/한국현대시협상/대한민국향토문학상/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문학부문)/녹조근정훈장 수훈 . 시집;「표구속의 얼굴」/「종이비행기」/「이승기행」/ 「가슴으로 쓰는 시」/「풀잎위에 머무는 바람」/「한 편의 시로 남고 싶다」등10권    
490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댓글:  조회:5140  추천:0  2015-05-12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김찬옥]   '좋은시란 어떤 것이다' 라고 감히 정의 내릴 수는 없다. 다만 그동안 읽고 쓰는 과정에서 느끼고 깨달았던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미쳐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사사로운 일들을 끊고 오직 시 하나에만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독은 차면 넘치게 되어 있다. '궁하면 열릴 것이다.' 부유한 생활 속에선 정신을 딴 곳으로 빼앗길 수가 있다. 그렇다고 처절한 아픔을 겪은 자만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러 가지 많은 것은 체험한 자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뇌하지 않아도, 좀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시의 소재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보면 관조만 하지 말고 직접 참여하고 가담하라는 것이다. 사물이나 상황 속으로 거침없이 다가가 말을 걸면 그것들은 답하게 되어있다. 이때 서로 눈빛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면 첫눈에도 느낌이 좋은 사람의 관계처럼 시상이 반짝이기 마련이다.  시의 소재란 저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다. 시의 소재가 궁한 것은 사물을 보는 혜안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널려있는 시의 소재를 찾지 못하고 뒷골목에서 방황할 때가 있다.  불교에서 '늘 깨어있으라' 하듯이 시인은 언제나 깨어 시를 맞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대하듯 늘 가슴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면, 시는 길을 걷다가도, 밥을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변기 위에서도 언제든지 내 속으로 들어 올 수가 있다. 헌데 우리는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욕심만 앞설 뿐이지 그 길목에 현실이란 거미줄을 쳐 놓았다.  상상으로만 쓴 시는 공감대를 주지 못한다. 작가가 겪고 있는 상황을 시로 풀어낼 때 시가 가장 진솔하고 투명해질 수가 있다. 시인은 때로 바람둥이가 되어야 한다. 뭔가 찡하니 가슴을 울리게 하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다가가 말을 걸고 그것들과 내통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시인의 생활 속에서 찾은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 시 한편으로도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 밭에 덮어 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 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이덕규 [어처구니] 전문 이덕규 시인은 경기도 화성에서 농사를 짓는 시인이다. 이 시는 어느날 마늘 밭에 덥힌 비닐하우스를 들치다가, 막 땅을 뚫고 나온 마늘 싹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여자로 의인화해서 쓴 시이다. 얼마나 시가 재치있고 자연스럽고 재미있는가. 어떤 사물을 관조만 하고 쓴 시는 깊어질 수가 없다. 그의 생활의 터전인 마늘밭에서 노란 싹에 맺힌 물방울을 감히 겁탈했기에 이런 좋은 시를 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시는 거짓말을 못한다.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시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달콤한 사랑에 빠져있으면 절로 연시가 나올 것이고, 고통에 처해 있다면 아픈 시가 나올 것이다. 또 시를 보면 그 사람의 연배를 알 수가 있다. 꽃은 가만히 있어도 향기가 우러나듯이 자신도 모르게 몸의 울림은 퍼져나가게 되어있다. 낙타를 타고가리라. 저승 같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낙타]전문 낙타를 통해 시인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말한다. 이젠 서서히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너머에 있는 죽음의 길도 이젠 생각해 보아야 할 길목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이승에서 수없이 많은 것들을 겪으며 전쟁을 치르듯 한 생을 치른다. 이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선 다 부질 없는 짓이다. 얼마나 할 말이 많았으면 낙타를 통해 눈을 닫고 입을 다물어야 했을까. 낙타처럼 태연하게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는 다시 세상에 나가라 한다 해도, 다시 낙타가 되어 나올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가엾은 사람 (자신)하나 길동무해서 떠난다고 한다. 몇 생을 살아도 결국 죽음 앞에서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인 듯 하다. 언젠가는 우리 앞에도 다가 올 그날이 느껴져 좀 허탈하기도 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지막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대화하듯이 자연스럽게 쓴 시 한 편을 더 소개한다. 시가 너무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경직되기가 십상이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가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 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여 이정록 [의자] 전문 평상시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이다. 실제로 어머니께서 모든 사물을 받쳐주고 있는 것들을 의자라고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허리 아파 병원에 가는 일과, 참외 호박 밭에 지푸라기를 깔자는 것만으로 시인은 의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대화체 그대로 써서 어찌 보면 가벼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시이다. 얼마나 주제가 선명하고 따뜻하고 여운이 남는 시인가. 이런 의사소통 하나에서도 시의 소재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다.  위 세편의 시는 내가 좋아하는 유의 시이다. 내가 좋다고 해서 모두가 좋을 수는 없다. 시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시를 만나면 좋은 시가 되는 것이다. 이정도의 시라면 편향되지 않고 모두에게 감동을 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읽기 쉽고 여운이 남는 시를 골라 본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간에 좋은 시를 읽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 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듯, 시인들도 시론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쓰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습관이란 하루아침에 깰 수 없기에 이 자리를 비롯해 다시 한번 복습해 보자는 뜻이다.  O.시란 낯설게 하기, 몸 바꾸기이다. 어떤 사물을 그대로 보지 말고 시적 이미지로 몸을 바꿀 때 시의 몸이 형성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보아 낼 때 신선한 시가 될 수 있다. O.하이데거의 '시간의 이론'을 보면 "모든 사물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내가 사물대신 말하지 말라. 사물이나 상황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 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이 통제 되지 않아 내가 사물대신 다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 보니 시가 객관성을 잃고 자신의 넋두리나 하소연하는 관념시, 추상적인 시가 되고 만다.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사물이나 상황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O.시인은 독자에 대한 과잉친절이 문제이다. 시가 가지고 있는 상징을 시인이 다 설명해 버리면 독자는 너무 심심해 진다. 독자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그 방법만 일러주면 되는 것이다.  O. 원관념이 가져다주는 메타포 보다 더 강한 메타포는 없다. 원관념을 그대로 쓰면 왠지 시가 되는 것 같지 않아 문장 하나하나에 에두르기를 한다. 보조관념인 악세사리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으면 사물이나 상황이 보조관념에 치어 말을 못한다. 한 두 개의 보조관념을 조화롭게 받쳐줄 때 시가 투명해질 수가 있다.  O. 지나친 과장이나 꾸밈은 시를 유치하게 만들 수가 있다. 天衣無縫, 시란 짜깁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사람의 옷처럼 바늘로 꿰맨 자국이 없어야 한다. O. 시는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도 그 시와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아깝다고 해서 이말 저말 다 집어넣다 보면 시가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O. 시인은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시가 경직될 우려가 있다. O. 시에선 밑그림이 선명해야 해야 한다. 무얼 얘기하고 싶은지 핵심이 투명하게 드러나야만 전달이 된다. O.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통속적인 시가 되고, 너무 멀면 난해한 시가 될 수 있다. O.사물이나 상황을 꼼꼼히 묘사하고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노력이 남달라야한다. O. 시를 쓰는 시점을 현재로 하는 것이 훨씬 리얼하다. 꼭 과거로 해야 할 경우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에 서있는 형태로 쓰면 된다. O.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작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에게 분명한 질문을 하는 것이 좋다. 내가 왜 이 시를 쓰려하는지? 무엇을 쓰려 하는지? 어떻게 쓰려는 것인지? 목적이, 그 주제가 분명할 때 창작에 들어가면 시의 주제가 선명할 것이다. 어떤 시는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무슨 목적으로 그 시를 썼는지 주제도 없는 시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시들은 독자를 우롱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중요한 사항 몇 가지만 골라 보았다.  손자병법에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선 내 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보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문제점을 알고 있다면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시 쓰기도 사람이 하는 짓이라 사람의 관계를 너무나 빼 닮았다. 아무리 좋은 사람의 관계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할 때 아름다운 법이다. 시도 그 적절한 거리가 형성될 때 시의 주제가 선명해진다. 예쁜 사람보다는 매력있는 사람이 마력이 있다. 시가 투명해야 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속이 다 보이면 마력을 끌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거나 난해한 시는 독자가 한쪽으로 치우칠 수가 있다. 나는 중간을 참 좋아한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적절하게 배려한 시가 읽히기도 쉽고 여운도 남아 나는 그 경계에 서있다. 중심을 지키는 것은 양쪽을 다 어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489    시쓰기 넋두리 댓글:  조회:5061  추천:0  2015-05-12
시 쓰기에 대한 넋두리                          /전형철/시인,문학평론가  시란 보이지 않는 사물을 글로서 형상화 시켜. 눈앞에 움직이는 생명으로 재탄생 시키는 고도로 승화된 예술의 정점, 일컬어 문학의 꽃이라 부른다. 정제된 단어들을 함축된 기법으로 두드리고 단련해 내는 언어의 연금술이다. 현실에 와서는 애석하게도 모더니즘의 시어에 밀려 간결하고 운율에 맞춰 심도 있는 글. 운문.  즉 마디 글이 시조로 밀려나고. 산문. 줄 글이 시로서 어엿하게 행세하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시란 내재율. 외재율. 운율. 삼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져야 만이 비로소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주입된 지식을 나열하고 짜 맞추는 것이 어찌 시가 될 수 있으랴.  가슴으로 쓴 시만이 독자에게 가슴으로 읽혀진다, 는 불변의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여 필자는 개인적인 관조적 시념으로 표방한 시의 완성 작법을 삼 단계로 나누어 본다.  삼 단계 까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새를 화두로 인용하는 글을 작법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기실 어떠한 사물에 접목 시켜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몽매한 한 생각이지만 넓은 아량으로 받아 들여 주기를 바라며...  첫 단계  눈앞의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인용한다.  예제/ 잎 새  (바람은 불어  하늘거리는 가지 끝에  햇살은 눈부시게 반짝이고.)  시의 정점은 은유와 비유가 골고루 접목되는 상황에서 함축적이고 의미 있는 간결한 이미지로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나 여기에서는 직서적인 표현과 직유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물론 직유법과 직서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구어체의 현대시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독 두드러지게 돌출되고 시단이 독자에게서 외면 받고 시인들만이 뭉쳐진 이상한 단체로 전락해버리는 독단의 길을 걷게 한 모더니즘의 시가 여기에서 출발하여 언어유희로 흘러간 것이다.  두 번째 단계.  눈앞의 사물에 조금 더 관조의 깊은 뜻을 풀어 놓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새를 의인화 시켜 자신의 내면에 잠겨져 있던 의식 구조를 밖으로 표면화 시키는 단계이다 .  예제 / 잎 새  (푸르른 가지 끝 바람이 둥지를 틀면  아렸던 마음 바람인양 하늘로 오르는 날  눈부신 초록의 웃음으로 그대 웃도록  음습의 그늘 속에서도 꼿꼿한 갈기 세워 ....)  시어에 대한 의미와 자조의 뜻을 조금씩 깨우치면서 관념의 벽을 허물고 사물을 의인화 시켜 자연과 자신이 혼연일체의 기를 느끼게 하는 단계이다  이쯤이면 사물은 관망하는 의식의 세계도 깊어져 흔들리는 잎새에도 양면성이 있다는 깨닫는 깊이 있는 관찰의 눈을 갖게 된다.  한 면은 태양을 향해 반짝이며 매끄러운 연초록의 빛으로 눈부시지만 그 연초록 잎의 구조를 형성하고 늘 음지의 빛을 흡수하며 억센 구조체를 형성하고 말없이 다른 한 면을 떠받히는 잎의  양면성을 간과하지 않는 심미안을 갖게 되는 초입의 단계에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  시에 대한 절정에 오르는 단계이다 모든 사물을 쉬이 보아 넘기지는 않는다.  끝없이 사유하고 번민하며 스스로에게 되묻는, 시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시의 구체화에 대해 눈을 뜨는 절정의 시기에 달하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침체의 늪 속에서 빠져들면  한번쯤 좌절을 맛보거나 영원히 절필해 버리는 험난한 단계이기도 하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색조 뚜렷한 시적 감각이 새로운 장르로 발전하기도 하고  자멸해 버리기도 하는 주로 등단 3~5년차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병목 현상이기도 하다  시적 탈출구를 찾으려는 마음과 달리 시어의 부재현상을 느끼며 스스로 자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시점이기도 하다,  필자는 말하고 싶다, 자연의 노래에 귀 기울이며 다작을 하기보다, 뚜렷한 화두 하나  가슴에 걸어 놓고 누에가 실을 뽑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  사유의 아픔과 고뇌하는 영혼의 울림을 들어 보라 말하고 싶다,  예제/잎 새  (어린 날엔 불지 않는 바람에도 몸 부비며  솜털 올올이 일깨워 하늘을 향해 피었건만  이제는 불타던 바람의 가지 끝에 온몸을 내맡기며  가뭇없이 떨어지는 한해살이 서러운 삶의 격랑........)  이렇듯 사물이 의인화 되면 시인의 눈에는 잎새는 더 이상 고정관념의 틀에 매이지 않는다.  사유의 그늘이 깊어질수록 잎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 받은 연인의 아픈 상처로 도져 낙엽의 빛으로 불타오를 수도 있으며, 애환으로 가득 차, 쓸쓸하게 지는 낙엽의 눈물로 떨어져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단순한 감정이 지배하는 감성시가 아닌,  서정과 서경 그리고 감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야  독자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어려운 길, 하늘에 죄를 지어 죄업을 씻기 위해 태어나 끝없는 외로움의 길을 걸어야 하는 자들의 천형이다,  사물을 직서적으로 보는 관점을 피하라 말하고 싶다.  물론 직서적인 기법이나 직서의 표현 방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  시는 언어의 연금술.. 두드리고 다스려 내려면 무엇보다 은유와 비유의 형이상적인 화합이 맞물려야 시다운 감흥을 불러온다 ,  화자의 마음이 감성과 서정 서경 그 모두가 고루 겸비 되어 있다는 것에 다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어 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눈을 기르라는 것이다 ,  필자는 누누이 강조 해 왔다, 문학의 으뜸이요, 이천년 면면이 이어 온 시 ,  시가 문학의 정점 예술의 꽃으로 피어난 이면엔 시인의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관점이 자연을 시인의 가슴으로 불러와. 옥고 속에 탄생시킨 절대미학이란 점을...  깊은 가을 날  하늘을 보라 층층이 흐르는 구름의 방향에도 다른 길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바람의 길을 따라 흐르는 구름의 길도 다르듯 ,  깊은 사유의 뜻에서 바라보는 자연을 위주로 작품에 몰두할 때.  작은 나뭇 가지 하나에서도 만가지의 언어의 꽃이 피어난다 .  처음 습작의 시기에 서경과 감성이 어우러져야 끊임 없는 시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은 상대로 연시를 쓰게 되면 자칫 진부하고 천편일률 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오류에 빠진다. 시로 존재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없는..  사유하라 , 언제나 깊이  길위를 구르는 휴지 한 조각에도 의문은 부여하고 끝임없이 질문하라 스스로에게...  화두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관조의 눈..  보이는 사물을 그대로 옮기지 말 것이며.  햇살에 반짝이는 잎에도 양면성이 있음을 기억할 것 ,  서정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내적인 것의 단순한 자기 표백이 아니다.  즉, 사물의 존재를 서사적으로 다루는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단어가 아니라  시적인 마음의 예술적인 표현인데, 이것은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가슴 속의 단순한 자기 집중이 다면적인 감정과 포괄적인 성찰로 전개하여, 이미 명백하게 산문적 특성을 띄고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시적 내면성을 점점 더 인식하기 때문에 서정시는 예술에 대한 문화의 체득을 요구한다, 이문화는 완전하게 개발된 주체의 천부적인 재질 및 독립적인 작품으로 현현해야 한다,  서정시가 한 민족의 정신적 발전의 특정기간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시기에 풍성하게 꽃피울 수 있는 것도 ,그리하여 모든 개인이 각자 다른 사람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견해와 감각방식을 가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현대의 서정시이다 
488    五感의 詩쓰기 댓글:  조회:4596  추천:0  2015-05-12
오감(五感)의 시, 긍휼(矜恤)의 시 쓰기 ㅡ시의 이미지즘과 영혼 ​​ ​ ​ ​ ​ ​     ​   ​                                                                                   전해수(문학평론가) ​ ​ ​​ ​ ​​       정민나의 시는 푸르다. 젊다. 지천명이 한참 지난 시인이 이처럼 푸르고 젊은 시상(詩想)을 펼쳐 보인다는 점은 주목된다. 아무 시나 무작위로 끄집어내어 함부로 읽어보아도 시인의 시에는 손아귀에서 팔딱거리는 푸른 고등어의 매끈한 촉감과 생동하는 저 바다의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들리고, 보인다. 바다를 소재로 한 시가 아닌데도 이처럼 선명한 색채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짠 소금 맛과 비린 냄새가 전신을 휘감는 듯한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인이 주로 사용하는 오감(五感)의 시는 거칠고 메마른 현실세계를 아름다운 몽환의 세계로 이끈다. 그 세계는 매우 선명해서 이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실세계인지 시간을 무화시킬 뿐만 아니라 시간 너머 미래의 갈망까지 불어넣는다. 시인이 지향하는 감각적 이미지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자유영혼의 세계는 마치 샤갈의 그림 속 색채의 미학을 마주할 때의 놀라운 환상 체험처럼 이미 저만치에 가 사라지고 없는, 잃어버린 동심을 그리워하게 하면서도 오색 창연한 미지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아마도 이처럼 예견할 수 없는 생경하나 선명한 이미지의 원천은 정민나 시의 이미지즘이, 독자에게 잊혀진 시간의 기억들을 뜻밖의 순간에 재생시켜 유년으로 되돌아가 보게도 하고 청년의 뜨거웠던 열망을 다시금 떠올리게도 하며 중년의 현재에서 바라봐야 할 현 지점을 깨닫게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한마디로 그것은 영혼과 만나는 이미지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정민나 시의 특징은 오감이 작동하는 그의 시적 배경에 ‘긍휼의 시 쓰기’가 내장되어 있어 더욱 이채롭게 다가온다. 정민나의 시는 몽환적 이미지즘을 드러내면서도 현실 밖에 존재하는 떠도는 비현실적 환각의 세계를 막연하게 추구하지는 않는다. 긍휼. 세계를 어여삐 여기며 따뜻한 시선으로 껴안으려는 어미의 마음이 정민나 시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것은 정민나의 시에서 매우 개성 있는 특징이다. 요컨대 시인 정민나가 지향하는 시는 오감을 통한 생생한 이미지즘이 시의 외연에 흐르면서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를 대면하게 하는 긍휼의 시세계라 할 만한 것이다.     싸이렌 울긋불긋 폭발하는 밤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누군가 신고한 모양인데     저 리얼한 演技는 안개 낀 날 솟아오르는 煙氣라서     그 벽 아래 물에서 자라는 속새는 얇은 대궁이 가는 막대기처럼 흔들 리네     불도 나지 않았는데 시내 소방차가 다 쏟아져 나온     이 시간엔 똑바로 등을 세운 속새는 말도 하지 말아요     노를 저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카누처럼     자기가 가고 싶은 날 자기가 먹고 싶은 날 푸른 잎을 복사한 봄은 짙 은 연무 속으로     누가 손바닥을 탁 쳐서 이 한 밤 울긋불긋 사라지네   ㅡ「연기緣起」전문     시집(詩集) 맨 끝자리에 놓인 위 시는 정미나 시가 오감(五感)을 잘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즘 시임을 제대로 보여준다. 시인이 의존하는 공감각적 이미지는 “울긋불긋”이란 시어처럼 의태어나 때로 의성어를 통해 더욱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를 연출해낸다.     위 시에서 연기(緣起)는 연기(煙氣)에서 비롯한다. 연기(煙氣)에서 발생한 “싸이렌” 소리는 “리얼한 연기(演技)”를 생생하게 재연시킨다. 시끄러운 싸이렌이 울려 퍼지고 소방관이 출동하는 모습이 쉽게 연상된다. 이처럼 정민나의 시에서 청각은 시각화를 동시에 유발하여 공감각적 이미지를 끌어내며 그러한 공감각적 이미지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전 신경계를 더듬는 촉각으로 이어진다. 촉각은 딱딱하게 무디어 가는 우리의 영혼을 일순간 긴장하게 만든다. 최소 세 가지 이상의 감각적 이미지를 한꺼번에 사용하는 시인의 시는 오감과 색채, 첩어의 빈번한 사용으로 이미지즘적 성향이 강한 시들을 자주 선보이며 이를 통해 영혼의 죽은 목소리를 오감의 이미지를 통해 회생시킨다.     위 시에서 시제로 사용된 ‘연기(緣起)’의 단어적 의미는 모든 현상이 생기고 소멸하는 원인이자 법칙을 말하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연기(緣起)는 “싸이렌 울긋불긋 폭발하는 밤”에 불길이 내뿜는 붉은 색채의 “리얼한 연기(煙氣)”를 감각적 이미지로 선명하게 재현하여 ‘연기(緣起)’의 발생을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 화재(火災)의 상황은 급박하기 마련이며 시끄러운 싸이렌 소리는 우리의 청각을 넘어서서 말초신경계의 모든 감각을 흔들어 깨운다. 위 시에서 화재는 실제로 확인되지 못하고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사그라진다. 그런데 화재진압에 사용되는 ‘물’의 이미지는 “불”의 도전적 속성에 반(反)하는 것인데 위 시에서는 “속새”의 이미지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시인이 싸이렌 소리를 듣고 화재진압 현장을 상상하며 “그 벽 아래 물에서 자라는 속새”가 “얇은 대궁이 가는 막대기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은 독특한 대조를 이룬다. 물의 이미지가 푸른 “속새”의 이미지와 융합하고 있다. 다만 폭발적인 불의 속성에 비하여 물은 싸이렌의 요란한 청각적 이미지에 의해 ‘연약하게’ 유추될 뿐이다.     시인은 위 시에서 실제의 화재진압 행위를 배제하면서 “자기가 가고 싶은 날 자기가 먹고 싶은 날 푸른 잎을 복사한 봄”의 푸른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찬미하는 심정으로 연기(煙氣)의 상황을 연기(緣起)로 승화시키고 있다. 실제로 싸이렌 소리는 그저 “짙은 연무 속”에서 “울긋불긋” 화려한 (불의) 색채를 띠지만 “탁”소리와 함께 무대조명이 꺼지듯 일시에 헛소문으로 “사라지”고 만다. 청각에 의해 상상된 시각적 연출이라 할 수 있겠다. 다급한 “싸이렌 소리” 하나로 움튼 시상(詩想)이 공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감각의 이미지즘 시로 재탄생되었다.   뇌의 두 돌기는 맞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만분의 이 센티 정도 시냅스 공간이라는 간격이 있지요        뇌의 두 돌기는 맞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만분의 이 센티 정도 시냅스 공간이라는 간격이 있지요     마음이 명랑하면 저절로 태양과 빗소리가 저절로     구름과 꽃들도 번갈아 말이 달려요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될 때 급등 종마가 탄생하지요 악어가 점점 입을 벌리듯이   간격이 멀어지면 당신은 점점 무거워져요     무작정 뛰어 가면 안 돼요 천둥소리에도 베팅을 하는, 당신 몸속의 말들은 중독된 지 오래     검사를 한 번 해 보세요 당신 몸에 어떤 적혈구가 섞여 있는가 세포가 어떻게 감각의 판을 건너가는가     뜨거운 탕에 오래 몸 담그면 쪼글쪼글해 지는 날씨 불안하게 휘감기는 저 운동장 마음부터 고치려면 진눈깨비 휘날리듯 징검다리 건너뛰듯     꽃샘바람으로 놔두는 게 좋겠어요 이 시간이 지나 삼박 사일이 지나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유리조각의 담장을 넘어     고양이도 사뿐, 4월 꽃봉오리에 착지할 거예요   ㅡ「선천성 면역에 관한 보고」전문 ​   뇌의 피돌기와 적혈구의 흐름을 증가시키는 사건에는 무엇이 있을까. 증상과 처치와 면역에 이르는 병마와의 싸움이라든가 선천성 면역이 절실해지는 이별의 후유증같은 치유의 불가능성 혹은 위 시에서 이미지화된 무릇 경마장의 흥분된 열기를 문득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흥분과 불안, 분노와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뇌의 피돌기가 거꾸로 도는 듯한 아찔한 찰나를 겪는다.     위 시는 사람들의 함성 속 “불안하게 휘감기는 운동장”의 포효하는 흔들림과 “베팅하는 당신 몸속의 말”들을 중독된 “적혈구”의 예민한 촉수로 대비시키고 있다. 위 시에 등장하는 “악어”와 “고양이”의 이미지는 정민나의 다른 시에도 자주 보이는데 매우 대조적인 이미지의 대립적 상관물로 작용한다. 악어는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될 때” “입을 벌리”며 다가오는 “적혈구”가 섞여있는 불안의 감각적 이미지로 작동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공격하고, 고양이는 이 시간이 지나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4월의 꽃봉오리”에 기대어 부드럽고 순한 털과 순결한 눈동자로 우리에게 안식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 때로 고양이 이미지는 ‘아이’의 모습에 견주어지거나 ‘악어’로 표상되는 공격적 생존의 세계를 제거하는 순수의 세계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애는 눈밭 위 고양이로 앉아 있고요   먹을 것 없는 덤불 속을 헤매다가 추위 속을 뛰쳐 나왔구요   아무도 아랑곳 하지 않는 개울가를 노려보고 있고요   그러나 우리 애는 햇살의 계단 거꾸로 내려오며   계단의 햇살 뒤집는 까치들 공격하지 않아요   어느 새 우리 애는 조용히 얼음 밑 소라로 걸어가고 있고요   하얀 물의 뼈로 자라고 있고요 얼마 전부터 물챙이 다리   우리 애는 자잘한 꼬챙이를 엮어 엄마인 나를 촘촘히 걸러내고 있습니다   더는 못 가겠어 소리를 질러도   우리 애는 빨간 통로에서 하얀 미끄럼틀을 주르르 내려가고 있고요   겨울 음수대는 단수되었습니다 눈의 꼭대기에서   엄마는 여기 갇혔어 소리를 지르면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입장권을 뽑아오는 물챙이 방죽   우리 애는 호루라기를 불고요 얼음 밑 물고기를 잠그고 있고요   그러면 꽁꽁 언 빙판 위에도 더 이상 헐벗은 고양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 애는 초고속 범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활처럼 휘어지는 만국기 휘날릴까요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냇물 고단한 우리 애는   아랫마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엄마가 보이지 않나 봐요   꼼꼼히 물챙이만 칩니다   ㅡ「물챙이 여울」전문       고양이는 시인의 시에서 ‘아이(애)’의 순수하고 호기심어린 동심과 치열한 생존의 천지간에 놓인 순결성과 상통하고 있고, 그리하여 “고단한 우리 애”는 “눈발 위의 고양이”처럼 아찔하게 위험천만의 위기를 맞닥뜨리기도 한다. “꽁꽁 언 빙판 위”의 “헐벗은 고양이”는 그러나 동심이 오래도록 남지는 못한다. 동심은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꽁꽁 얼어붙은 “단수대”의 그것처럼 시간 속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며 마침내는 소멸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동심을 놓친 세계. 그것은 악어가 살고 있는 준호의 그림 속에서 이미 예견된 어른들의 치열한 생존의 동물적 세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만 표현의 방식이 오감의 선명한 이미지로 동심에 의해 채색되어 있다는 점이 좀 다르다.         악어가 사는 이글라우로 가 보지도 못한 준호는 책에서 본 악어를 색과 선으로 잘 이어 놓습니다     배가 고플 때 아장아장 걸어서 물가에 도착한 악어   물을 마시는 사슴을 사냥해 사뿐사뿐 뜯어 먹는 악어   초롱초롱 빛나는     -중략-     준호는 악어를 본 적 없고 바람이 불어서 모자가 날아간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놀이터에 악어가 나타나자 아이들에게 ‘빨리 달아나’ 말한 뒤   자기도 곧장 주루주룩 도망갑니다   ㅡ「준호의 만화」중에서 ​   아직 순수의 세계 속에 놓여있으므로 악어를 본 적 없는 준호의 악어 그림은 “아장아장 걸어서 물가에 도착”하거나 “사슴을 사냥해 사뿐사뿐 뜯어 먹”는 모습으로 비치는데, 이것은 현실과는 다른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다. “초롱초롱” 빛나는 악어라니! “악어가 사는 이글라우”로 가 보지도 못한 준호는 “책에서 본 악어를 색과 선으로 잘 이어” 새로운 ‘예쁜’ 악어를 탄생시킨다. 그것은 아수라장 적자생존의 동물의 왕국에서 보던 잔혹한 세계와는 매우 다른 “만화(漫畵)”같은 세상이다. 준호가 그린 소리나 모양을 흉내 낸 악어의 그림은 “아장아장”, “사뿐사뿐”, “초롱초롱”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뿡뿡거리고 뚝딱거리며 하루 종일” 준호가 만들어낸 만화의 세계는 두 세계(동물성과 식물성으로 나뉘는)의 차이와 공존의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질문처럼 던지고 있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도 현재 상영 중인 환타지 공상 영화도 에로스를 탐색한   미학 여행도 메뉴판에 있는 것은 너무 자주 먹던 것     뭐 새로운 느낌이 드는 맛난 것은 없나요 말하자면 데리다의 경첩 같은 것 보르헤스의 알랩 같은 것 연암의 코끼리 기호학 같은 것     메뉴판에 있는 것만 시키세요 식당 주인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어제의 신작시 샐러드와 다시 쓴 명상록 조림과 희망의 경제학 무침이 기본으로 놓인 식탁 앞에서     젓가락을 들고 한참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식욕이 되살아나질 않아 기운이 푹 죽은 언어의 비름나물 한 가닥 질겅질겅 씹고 있는 여름 한낮     툭 밀어놓는 물병 속에 죽음은 어떻게 사는가 메디컬 에세이가 출렁이지 않는가     마지막 감동 한 컵 따라 마실 때 목 줄기를 타고 퍼지는 죽음 한 줄기 쌉싸롬한 이 맛이 원기가 될까 비릿한 죽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ㅡ「뭘 먹을까?」중에서 ​   시인의 상상세계는 시 속에서만은 모두 현실로 가능해진다. 즉흥 환상곡, 환타지 공상 영화, 에로스를 탐색하는 미적 세계는 ‘시’라는 요리의 마지막 미각이 되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20세기 해체시나 아방가르드, 무의미의 시, 모던한 실험시들은 “너무 자주 먹”어 이미 새롭지 않은 것.   그러나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세계는 데리다의 형식으로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경첩 같은” 오래된 진리탐구이며 그렇다고 해서 쾌쾌 묵은 전통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르헤스의 알랩”같은 이단적 새로움도 있고, 연암의 실용성 뒤편의 “코끼리 기호학”같은 참신한 형식미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마치 시인이 천착하고 있는 시세계 즉 오감을 자극하는 상상력의 세계와 닿아 있는 “쌉싸름한” 세계라 하겠다. 시고 맵고 짜면서도 달콤한 시 맛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죽은 우리의 말초신경들을 깨어나게 하는 ‘오감의 시 쓰기’로 시도된다.     위 시에서 “메뉴판에 있는 것만 시키”라는 주인장의 말에 “어제의 신작시 샐러드와 다시 쓴 명상록 조림과 희망의 경제학 무침이 기본으로 놓인 식탁 앞에서” 시인은 한참동안을 “도무지 식욕이 되살아나질 않”아 “뭐 새로운 느낌이 드는 맛난 것은 없나” 이런 저런 시어들을 살핀다.   시제 ‘뭘 먹을까’는 시인의 시세계가 이러한 시적 탐색을 겪으며 얻어진 열매라는 사실을 제시해준다. 구태의연한 메뉴판(‘詩板’)에 식욕(‘詩慾’)이 되살아나질 않아 “죽은 언어의 비름나물 한 가닥 질겅질겅 씹고 있는” 순간에도 시인은 “죽은 언어”를 살리는 방법을 곰곰 모색하고 있으며, 시인의 충천하는 치료법이 내장된 “메디컬 에세이”를 고안하여 시원한 “감동 한 컵”으로 건조한 목 줄기를 적시고 죽음의 시를 되살리려는 고군분투를 보여주고 있다. 무작정 달콤하지만은 않을 “쌉싸롬한” 시적 고뇌의 대가(代價)는 그렇게 ‘오감의 시’로서 다시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민나 시의 근원에는 죽음에 이른 시의 피돌기를 재생시켜 인간으로 혹은 시인으로 살아있음의 의미를 살피고, 처연한 긍휼의 정신을 끊임없는 시적 고민과 이미지즘의 재구성으로 시화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걸어 나온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千態萬象이다     시천동 입구에서 토마토 함지박을 인 아주머니 빨강 한 분이 올라타고 유성전기 모터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 회색 두 분이 내리신다     사자를 물리치고 먹이를 구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좌동마을 입구에서 선두고물상의 기사 빨강 두 분이 올라타고 아파트 광고 전단지를 말아 쥔 청년 검정 한 명이 더 오른다     그들은 알고 있다 파피루스의 사자들 압박의 붕대를 조이면서 물소를 좇는 거인들 간격이 좁혀지는 물살 사이로     방향 전환이 필요할 때, 사자들   손발이 맞지 않는 허름한 틈새를 공격한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으로 마른번개가 지나가고   비석을 깎는 할아버지 주황 한 분이 내리신다     향동 입구에서 해맑은 약국의 노랑 한 분이 머뭇거리는 찰나,   물소는 목덜미를 물린다 비틀, 붉은 살점이 뜯겨져 나간다     풀꽃들이 어두워질 때   고대의 파피루스지를 달리는 사자와 물소들     버스는 마을 입구에서 정차했고 물길을 건너온 사람들 몸 안에서 뛰어내린 저마다의 비릿함     자세히 보니 그것은 초록동색이었다   집요하게 물소를 좇아가는 일 집요하게 사자를 따돌리는 일   ㅡ「파피루스의 기록들」전문             위 시에서 빨강, 회색, 주황, 노랑은 파피루스지에 새겨진 이름들 즉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이 다양한 색채들은 그들이 입은 옷의 색깔이거나 특징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초록(은)동색”이듯이 구분이 실상 필요치는 않은 것들이다. 파피루스지를 통해 오색창연한 색으로 변신한 즉, “빨강, 회색, 주황, 노랑”으로 물들은 모습의 사람들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길을 건너온 사람들 몸 안에서” 짙게 나는 파피루스지의 “비릿함”이 같기 때문이다.     다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초록동색이었다”는 깨달음을 만나는 지점이 “집요하게 물소를 쫓아가는 일”과 “집요하게 사자를 따돌리는 일”의 연속되는 궁극의 삶의 지난함으로 새롭게 투시되고 있다.     너는 검은 흙을 묻히고 검은 햇볕을 입히고 던지면 검은 돌이 되는 웃음을 네 귀퉁이 울퉁불퉁 펼쳐놓고     너는 모래 같은 어머니를 쌓고 텐트 같은 아버지를 매고 자갈밭에 앉아     발가락에 묻은 모래알 염기의 바람 속 너는 휘어지고 너는 넘어지고     뻘의 딸이라도 된 것처럼 질척질척 허리를 잡고 끈적끈적 씨름을 하고     번쩍 들린 여름을 털썩 뻘 안으로 던져 놓고 한쪽 눌러놓은 섬이 뻘 밖으로 튕겨 나가면 두 손 두 발로 기어가 신발 속 꽉 찬 매미울음을 털어놓고     빙빙 돌다 힘이 들면 뻘 묻은 신발을 높이 하늘로 차올리고 기러기처럼 뻘 바닥이 가볍게 날아오를 때     갯벌 돛자리에 떨어지는 햇살은 펄떡이는 아이들 금 밖의 세계를 보일 듯 말 듯 밀어내고 뻘의 손자손녀처럼     가족사진을 찍다가 물이 미는 오후 누군가 지나가다 돌맹이를 툭 차면 펄럭 뻘 한쪽이 저물고     물고기를 잡는 가장자리 촘촘한 말뚝을 내려놓고 이제 옷 갈아입자 뻘 묻은 팔을 떼어놓고     너는 이 검은 섬 놓고 가야지 뻘 속에 빠져 더듬거리는 길을 건져 뻘 묻은 손으로 새들을 다 날려 보내고 ㅡ「마음 갯벌」전문     마음 갯벌에서 바라보는 “너”는 ‘나’고 ‘나’는 “너”다. 그것은 객관적 투시의 대상으로 “너”를 ‘나’로 지시했다기보다는 궁극의 ‘너’는 ‘우리’자신이며 그것은 ‘하나’라는 의미로 작용하는 “너”라고 할 수 있다. “가족사진을 찍다가” 마음 갯벌에 빠져 “더듬거리는 길”을 찾아 “모래 같은 어머니를 쌓고 텐트 같은 아버지를 매고” “휘어지고” “넘어지”는 마음 갯벌을 뒹구는 “뻘의 딸”들의 마음을 읽어보려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잘 느껴진다.         뿌리인 듯 올려다보기 새싹 돋듯 바람 불기 꽃피듯 젖어들기 열매 맺듯 열어보기   (다음 주 해맑은 동물 병원 옆 크로커다일에서 만나자구?)     안마하며 뒤집어 보기 시청하며 돌아눕기 청소하며 다시 펴기 통화하며 문 잠그기   (그래 알았어 유천 산부인과 앞 새천년 장례식장 왼편으로?)     귀 아프게 바라보기 손 떨리게 걸어보기 배터지게 잠자기 눈부시게 소리 지르기   (엘림 순복음 교회 앞 큰 대문 보살집은 이사 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문 닫고 하늘보기 어둠열고 낙서하기 꿈속에서 기도하기   (침, 뜸, 부항의 달인 희천 한의사님이 내려다보는 가보시끼 맥주 집 앞으로)     집을 짓듯 너를 지우기 시를 짓듯 밥 짓기   (아래 역에서 숨차게 올라온 익스프레스 대형차가 지나가네)     뜸들이듯 밥을 짓기란 이다지도 힘이 드는구나   (유리창 앞 가판대에 사기 전문 도박꾼 얼굴들 지워진지 오래인데)     푸근하게 익어가는 쌀밥 속으로   (해맑은 동물 병원 보이지 않고…… 새 옷을 줄까 헌 옷을 줄까…… 악어도 보이지 않고)     축산물 도매 센타 지나  본스 삼계탕 지나 해피 돼지방 지나……   ㅡ「딴전」전문 ​   ‘딴전’은 ‘집중’과는 영 다른 말이지만 ‘집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생소하나 주의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시선이 정미나의 시에는 존재한다. 딴전부리듯 모른 척하는 시인의 내면에는 관심과 고민의 자리가 깊고 넓다. 그의 시는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지 않는 시적 깊이와 “힐끗”거리며 지나치는 듯이 보이나 결코 모른 척 지나가지 못하는 ‘자기 앞의 생’에 대한 ‘긍휼’이 숨겨져 있다. 이 긍휼을 통해 내 생에 대한 긍휼의 마음은 점차 넓어지며 세상과의 소통을 끊임없이 노크하게 한다.   시인은 오십 이후의 생이 결코 “딴전”으로 사라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듯 “뜸들이며 밥 짓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지워지고 지우려 해도, 지나가고 지나치려 해도, 그의 시 속에는 한시도 정신을 놓을 수 없는 ‘악어’가 어슬렁거리는가 하면 ‘종마’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달리고 있고, ‘고양이’가 반짝이는 여리고 선명한 눈알을 굴리며 시의 위대한 순수성을 주시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언어의 진폭, 시적 상상력은 시적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시인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오감(五感)’의 생생한 이미지화를 통해 생동감 있게 출렁이고 있다. ​ ​                 ​ 전해수 문학평론가 ​ ​ ​ 본명 전영주. 1968년 대구에서 출생.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학위 취득. 2005년 계간 《문학 선》을 통해 문학평론 등단. 저서로는『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가 있음. 동국대학교 한국어교육센터 한국어 강사, 同 대학 문화학술원 연구교수, 同 대학 BK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강남대학교, 용인대학교 출강 중.    
487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댓글:  조회:4454  추천:0  2015-05-12
오픈지식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여러분! 문학을 좋아하는 많은 애독자 여러분! 이 자리에는 저처럼 시를 쓰면서 이 이승에서의 삶을 꾸려가는 분들이 있는 줄로 압니다. 지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저의 가장 큰 소망은 지금까지 썼던 그 어떤 시보다 더 좋은 시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단 한 편이라도 길이 남을 명시를 쓰고 싶은 소망 때문에 낮에는 전전긍긍하고 밤에는 전전반측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이 시를 쓰고 계신 여러분께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10가지 전수입니다. 제가 1984년에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7권의 시집을 내면서, 또 1992년부터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시작법을 가르치면서 익힌 노하우를 전해 드리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할까 합니다. 거창한 강연이 아니라 아주 소박한 내용이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시를 감상하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인용하는 시는 졸저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시와시학사)에서 다루었던 것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즉, 그 책을 통해 했던 말을 중심으로 강연을 해볼까 합니다.    1. 시는 우리말의 보물창고이다    여러분과 함께 감상해볼 첫 번째의 시는 김진완이란 젊은 시인의 등단작인 [기찬 딸]입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꽤나 옛날 일이겠지요. 시적 화자의 외할머니가 딸을, 즉 자신의 어머니를 분만하는데, 바로 그 장소가 달리는 기차 속이었습니다.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고 춥고 떨리는 거기서 엄마 에라 나도 몰라 으왕! 터지는 울음일 수밖에요.      박수 박수 "욕 봤데이." 외할아버지가 태우신 담배꽁초 수북한 통로에 벙거지가 천정을 향해 입 딱 벌리고 다믄 얼마라도 보태 미역 한 줄거리 해 먹이자, 엄마를 받은 두꺼비상 예편네가 피도 덜 닦은 손으로 치마를 걷자 너도나도 산모보다 더 경황없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만 연신 주억였던 건 객지라고 주눅든 외할아버지 짠한 마음이었음에랴 두말하면 숨가쁘겠구요. 암튼 그리하야 엄마의 이름 석 자는 여러 사람들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즉석에서 지어진 것이라.    多惠子.    성원에 보답코자    하는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의 엄마 다혜자씨는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    여장부지요    기찬,    기―차― 안 딸이거든요.                             ―김진완, [기찬 딸] 전문    승객이라고는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을 가진 농투성이들뿐이지만 이들은 낯선 아주머니의 차내 분만에 한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아낙들은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고, 남정네들은 뜨신 물을 구해오고, "벙거지"는 미역 살 돈을 내놓고, 두꺼비상 여편네는 산파 노릇을 해 무사히 한 생명은 "으왕!"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합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은혜로 태어났다 하여 엄마 이름이 다혜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3연이 보여주는 여성적, 혹은 모성적인 건강함은 가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꽤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연과 3연 사이에 위치한 "으왁!"이란 의성어가 환기하는 생명 탄생의 고통과 경이로움, "기찬"과 "기―차― 안"이라는 비슷한 음을 이용한 유머 센스 등은 이 시를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 데 합심하여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가 소주 한잔 마시고 내뱉는 말,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에 있습니다. 참 한국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서민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어머니의 힘, 아니 한국 아줌마의 힘을 나타내는 그 말이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도 되어 있다면 이 시의 맛은 반 이상 줄어들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시야말로 사투리와 순우리말의 보물창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월과 영랑이, 백석과 정지용이 왜 위대한 시인인가 하면 한국적인 정서를 한국적인 어투와 어조, 사투리와 순우리말로 표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료인 언어를 구사할 때, 사투리와 순우리말이 지금은 쓰지도 않는 낡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 찾아내어 시에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역만리에서 모국어를 구사하는 문화의 파수꾼이며 창고지기입니다. 언어 학대가 시인의 특권인 양 언어를 못살게 구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미국에서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습니까?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시인인 이상 모국어를 잘 갈고 닦는 언어의 세공사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2. 시는 특이한 체험의 산물이다    김광림이란 시인이 있지요. 1929년생이시니 올해 연세가 일흔여섯입니다. 함경남도 원상 출생이신 시인은 이른바 이산가족의 일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남북분단의 아픔을 남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시가 전개되는데, 시인이 겪었던 일이 어떤 영감이나 상상력, 혹은 비유와 상징의 도움 없이 그야말로 곧이곧대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    마지막 대작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    반세기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    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느닷없이 들고 나온 한마디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    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금방 가슴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    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    ……'제 에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하긴 그래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말렸을까    남행열차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    아버지의 노여움에    모두가 모른다고 잡아뗀 모양이다.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    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    기세가 등등해진 녀석은    취기까지 가세하여 사뭇 심문조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    그만 울먹이는 소리가 돼버렸는지    '야' '자' 하던 친구가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아냐 잘했어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    이승에선 다시 못 뵈올 부모님 생각에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싶어    상기된 얼굴을 들이대자    이번엔 '야' '자'가    잘못 눈물단지 건드렸나 싶었던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어쩌랴.                             ―김광림, [괜한 소리] 전문    제목 '괜한 소리'는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중학 동창의 입에서 나온 두 가지 질문인 동시에, 시인 스스로 자신의 대답을 '괜한 소리'로 규정한 자탄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동창생 노인은 마지막 대작이겠다, 술을 마신 김에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늙은 시인 친구는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고,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릴 듯 상기된 얼굴이 됩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라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시의 제목이 '괜한 소리'가 된 것이겠지요.    두 가지 질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을 치고, 쓰리게 하고, 결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 눈시울까지 뜨거워집니다. 수백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물음은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입니다. 청년 김광림은 아버지한테 탈향(脫鄕)의 이유를, 이향(離鄕)의 전말을 말씀드리지 않고서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춘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고자 딸을 앞세워 아들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시인인들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귀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지, 그것이 영원한 생이별의 순간임을 알았더라면 작별의 인사도 고하지 않고 떠나왔겠습니까.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이 한 행 속에는 아버지의 정이 소복이 담겨 있는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흘러 넘치는 그 부정(父情)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입니다.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친구는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혹은 시를 쓰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도 안 드리고 고향을 떠난 시인 친구를 공박하며, 살아 계시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묻습니다. 시인은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는 살아 계실 확률보다는 돌아가셨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쪽에서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라고 자탄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가서는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라고 자학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는 별다른 시적 기교를 동원하지 않고서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을 솔직히 털어놓아 깊은 감동을 준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가운데 가슴아픈 경험이 있으면 솔직하게 고백해보십시오. 수치심을 동반한 기억도 좋습니다. 그 체험이 소소한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체험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입니다.    3. 시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산가족으로서의 뼈아픈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지만 늙어가면서 느낀 쑥스러운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김광림의 시에는 민족사가 담겨 있지만 박남수의 시에는 일상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 박남수는 미국에 이민을 와 작품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라 여러분 중에 교분을 나눈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박남수, [훈련] 전문    시인의 아내는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을 예감하고서 홀아비가 될 남편을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던가 봅니다. 그런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아내를 눈을 감았습니다. 이 작품은 흡사 일기를 시행으로 나눈 듯 시적 기교는 없지만 읽는 이의 가슴을 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의 젊은 날의 시 가운데 [아침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같은 눈부신 감각을 보여준 시를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노년에 들어서서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지사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함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4. 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아야 한다    저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순수한 본성은 나한테 잘못을 한 타인을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 타인의 불행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넓게 말해 사랑이지요. 여러분은 신문을 읽으면서 혀를 차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혀를 차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마음이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오불관언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음에 감상해볼 시는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일가족 동반 자살의 뉴스가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해마다 정말 자주 듣는 뉴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한 결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났지만 살아난 사람도 중태란 소식, 부도를 막지 못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가족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 또 어른은 살아나고 아이들이 죽었으니 이건 동반자살을 아니라 비속살해라는 등등. 자, 시를 읽어봅시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이상국, [물 속의 집] 전문    어린아이들이야 자살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리 없고, 부모가(흔히 아버지가) 자식을 일단 살해한 뒤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밝혀놓지 않았는데, 1995년 1월에 서른세 살의 남자가 빚 때문에 고민하다 그의 아내와 두 자식의 손을 잡고 영랑호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뛰어들었으니 그야말로 '동반' 자살입니다. 타인의 죽음이므로 시인은 1연에서 이 사실을 담담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담담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4행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에 이르면 시인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확, 다가옵니다. 그 겨울의 눈보라는 영랑호를 눈앞에 둔 한 가족을 얼마나 떨게 했을까요. 이 비정한 세상에 남편 없이 팽개쳐질 두 새끼의 목숨까지 거둘 결심을 한 젊은 가장의 굳어 있는 얼굴까지 확, 다가옵니다. 인간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제2연을 쓰게 합니다. 시인은 자살의 현장인, 네 사람의 목숨을 삼키고도 여전히 고요한 영랑호에 고리와 청둥오리들을 보내 조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합니다.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즉, 이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가족을 시를 통해서나마 한 번 부활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 속에다 집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한때는 단란했을 그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빚이 없었던 그 가족의 지난날을 생각하니 하느님이 다 무심하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상국은 시를 구상하는 동안, 초고를 쓰는 동안, 퇴고하는 동안, 신이 되었습니다. 시밖에 쓸 수 없는, 언어의 창조주가 말입니다.    미국에서도 폭탄 테러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적이 몇 번 있었지요. 이런 소식을 접하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어쩌지 못해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상국 시인은 자신의 무력감이 서글퍼 제3연을 썼을 것입니다. 제3연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인 자신이 느닷없이 등장해 울고 있습니다. 죽은 가족이 시인이 아는 사람들이라 비보를 접하고서 울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는지, 혹은 신문 기사를 보고서 울고 싶었는지, 뭐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자가 이 시를 평하면서 센티멘털리즘이니 감상 과잉이니 하며 비판하는 것도 시인은 개의치 않기로 한 듯합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시작 행위를 하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렇게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일가족 동반 자살 소식을 접하면 아이들을 살해한 부모의 비정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정 죽고 싶으면 자기네들이나 죽지 왜 애들을 죽여,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개탄한 뒤, 욕을 몇 마디 덧붙이고는 남의 일이기에 곧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국 시인은 젊은 부부가, 혹은 젊은 가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으랴 하는 생각에 이어진 연민의 정을 억누를 수 없어 물 속에다 집을 지어주고, 물 속의 집 뜨락에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게끔 하고, 화암사 중들에게까지 부탁하여 목탁을 치게 합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이 우리가 어찌 문학을 한다고 운위할 수 있겠습니까.    5. 시는 유머 감각의 산물이다    이상국의 시가 너무 비감하여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이번에는 유쾌한 시를 한 편 감상해봅시다.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비장미, 숭고미, 순정미, 우아미 외에 골계미가 있고, 또 하나 미와 반대개념이면서 미의 일종인 추(the ugly)가 있습니다. 우리 시는 너무 점잖고 엄숙한 경향이 있습니다. 언중유골이라고,  엄숙한 가운데서도 농담을 할 줄 알고, 농담을 하는 중에도 뜻을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도 시를 읽다가 미소를 짓거나 씩 웃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팔순을 넘기신 우리 할머니 경주이씨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는 의좋은 오누이 모습으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 나누시네. 때는 봄날,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고 백발 장모가 권하는 일배 일배에 취한 눈멀고 귀먹어  가는 사위는 아주 오랜 옛날도 어제처럼 가까워 흥이 나네. 기억하시는교 빙모님요 막내 처제 낳고 제가 가물치 한 마리 사 가지고 찾아갔지요. 하모 김서방 그 달이 윤삼월 참으로 큰 가물치였제.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갓난애기 처제를 본 우리 큰고모부 선한 눈가 웃음도 보이네. 金粉으로 부서지는 두 분의 옛날 이야기 곁에 버릇없이 누운 나는 살아보지도 못한 저 먼 세월 어슬렁어슬렁 거슬러 올라가는 귀 큰 당나귀,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百年 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新羅瓦當의 웃는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득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정일근, [흑백사진―가물치] 전문                                  이 시는 상황 설정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촉매제가 바로 가물치입니다. 장모가 마흔이 넘어 처제를 낳았으니 본인은 백년 손님인 맏사위 보기가 민망하고, 장인은 사위 맞기가 멋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위는 그래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엄청나게 큰 가물치 한 마리를 사 들고 처갓집에 갑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상황입니까. 그런데 시인의 재능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아름다운 금빛으로 도금하는 언어의 연금술에 있습니다.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퍼져나가고", "新羅瓦當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같은 표현도 그렇거니와, 화자의 팔순을 넘기신 할머니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정겨워 독자는 감동하게 됩니다. 시 한 편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따듯한 정감을 이렇게 듬뿍 담을 수 있다니, 아니 흘러 넘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6. 시는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소재와 주제일지라도 표현 방법이 너무 진부하면 시의 맛이 사라져버립니다. 시를 쓸 때는 어느 정도의 실험정신이 시를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날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시도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기로 한다.    그―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    날―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    통합적으로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나의 알 수 없는 우울증은 조금 더 강도를 높인다. 다음 단계로 그날의 사건과 정황을 그려보기로 한다. 이 단계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육신이 제거된 영혼의 교만함이 고개를 쳐든다는 점이다.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두 번째 시도로 들어간다.        정말이지,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가 떠오른다. 정말 어찌 하라는 건지, 나 부끄러움 넘어선 견디기 힘든 굴욕감에 별들도 차가운 눈빛으로 가슴 깊이 얼음 송곳  밀어 넣는다. 바람에 상처받기 쉬운 겨울나무는 땅의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단단한 겨울에 완강히 저항한다. 그런 잠 못 들기 몇 날인가, 핏발 서린 눈에선 자꾸 마른 눈물 흘러, 말라비틀어진 흔적이 영혼 깊숙이 각인된다.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영혼의 기막힌 알리바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 더 나아가 내 몸 구석구석 굴욕의 상처들이 바람에 제 존재를 알리는 풀잎처럼 우우, 일시에 일어나 실개울로 흘러 비굴한 시 쓰기를 관통하여 뜨거운 태양이 그대의 오만함을 녹여줄 회복기의 봄을 고대하도록 한다. 이쯤 되면 영혼의 교만함이 육체의 단순성을 비웃듯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강성철, [그날] 전문    시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지요? [그날]이란 제목을 보고 '그 어느 날'이라고 생각한 저의 기대지평은 초장에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시인은 '그날'을 달리 생각해보고자 '그'를 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로, '날'을 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으로 해석해본 뒤, 통합하여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봅니다. '그'는 ①번을 선택했으나 '날'은 세 개 중 마땅한 것이 없어 면도날을 연상한 것입니다. ①번 '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에서 날카롭기 짝이 없는 면도날을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면도날이라니요. 여기서 독자는 시인의 장난에 우롱 당했다는 당혹스런 느낌과 시인의 계산을 못 따라잡았다는 허탈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제2연에 접어들어서도 강성철은 계속 독자에게 미지의 덫을 놓습니다.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는 면도날을 휘둘러대는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불시에 가한 자네의 행동에 나는 괴롭고 서러워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겨울에 저항하는 겨울나무처럼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냅니다. 고통과 설움은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는 2연 중반 끝 부분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뒤엉킴의 실마리는 아마도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시인이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영혼의 불멸 또한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화두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설사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은 이 현실사회에서도 얼마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온 사람이 죽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제 대충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육신을 계속 괴롭히는 영혼의 병이 나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늘 상처받는 내 영혼의 병인 우울증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인은 "굴욕의 상처들"과 "비굴한 시 쓰기", "그대의 오만함"과 "영혼의 교만함" 등 온갖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하면서 굴욕과 비굴, 영혼의 교만함에서 벗어나기를, 고통과 설움이 끝나기를, 그 무엇보다 우울증이 완치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제2연 끝 부분에 이르러 '그날'이란 글자의 분석에 몰입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불면증 환자가 잠을 청하기 위해 숫자를 백,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하면서 밤이 깊도록 세고 있듯이 강성철은, 아니 [그날]의 시적 화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그날'이라는 글자를 분석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글자 분석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화자의 우울증이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니까요.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이 괄호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늘 어긋나기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숨은 세계에서 승냥이처럼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나와 타인은 다들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고, 나의 우울증은 심화되기만 합니다. 읽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시,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 동안 뜻이 풀리는 이런 시가 오히려 매력적인 시일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한국 시단을 풍미했던 이른바 해체시라는 것에 대해서도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갖고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호 풀기나 미로 찾기 같은 시 읽기이지만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들어 있거든요.    7. 시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노래한다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체의 동일한 운명은 태어난 이상 마땅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가장 보편적인 소재요 주제입니다. 제게 소설작법을 가르쳐주신 김동리 선생님은 "소설로 쓸 만한 소재가 없어 고민하는 학생은 '죽음'을 갖고 써보게. 우리에게 죽음만큼 친숙한 것은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텔레비전 뉴스나 조간신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보도하지 않는 날이 있던가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죽이는,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작품을 쓰다가 소재나 주제가 고갈되었다고 여겨지면 누군가의 죽음을 갖고 시를 써보십시오. 죽음이 아니면 탄생과 늙음과 질병 가운데 하나를 택해 써보셔도 좋겠습니다.    묘비들 사이로    아이가 달려온다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히 건너간 생애들이    몇 줄 글자로 남아    무릎 키 세우고 있는 사이        네 살배기 아이가 무어라 소리치며    저쪽에서 뛰어 온다    Beloved Wife and Mother 1939-1980    이국 땅에서의 크고 작은 기쁨    설레임과 회한의 날들    꿈결같이 아득히 사라지고    조국 하늘 아래 한 여인의 평생은    한 줄 이국 글자 묘비명으로 남았는데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칭호만이    한 남자의 사십 년 생애가 남긴 모든 것이어서    의·학·박·사    이름 위에 새겨놓은 네 글자    살아남은 자의 애달픈 마음    그 옆의 묘비는 전하는데    내가 지상에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풍경처럼    줄지어 선 비석들 넘어    딸아이가 온다    팔랑팔랑    꿈속 나비 같다                             ―김기중, [공원 묘지에서] 전문    김기중은 외국의 한 공원 묘지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사뭇 처연한 심사에 사로잡혀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시에 나타난 가족사는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40년을 살아 지상에 남겨놓은 것은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호칭이 전부였습니다. 즉, 의학박사의 신분으로 외국의 묘지에 묻혔으니 한 남자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공부가 차지한 세월이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조국의 하늘 아래 남아 있던 아내의 '평생'이 남편의 묘비에 한 줄 이름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니 그 감회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착잡한 감회가 마지막 연에 담겨 있습니다.    딸아이는 아마도 성묘하러 온, 죽은 이의 자식이겠지요. 줄지어 선 비석들, 즉 수많은 주검을 뛰어넘으며 가장 최근에 죽은 이의 한 점 혈육이 꿈속 나비같이 팔랑팔랑 옵니다. 사서 중 하나인 {장자}에는 장주가 꿈속에서 본 나비의 고사가 나옵니다. 장주가 꿈에서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호랑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물화(物化)'를 설명하는 고사가 생각납니다. 사람의 생이란 일장춘몽이며 남가일몽이란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생에 아무리 집착한들 저승사자의 방문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며,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예술은, 시는 우리 목숨을 부활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사후에 우리가 써놓은 시를 읽고 누군가 감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 독자의 마음속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영원 회귀를 꿈꾸는 것입니다.    8. 시는 문명비판을 지향한다    20세기를 풍미했던 가장 강력한 시적 사조는 모더니즘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표방하고 있는 정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문명비판입니다. 영화는 기술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문명과 친화가 잘 이뤄지는데 문학은 이상하게도 문명하고는 좀처럼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정보를 제공하고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며 오락의 기능을 다하는 컴퓨터를 갖고 쓴 시가 있습니다. 어언 10년 전 일이 되었는데, 러시아의 한 해커가 인터넷을 통해 시티뱅크에 침투해 1천만 달러를 훔쳐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잘 다루면 복면을 하고 은행털이 강도로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미국의 10대 해커들이 뉴저지 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 침투한 일이 발생, 미국 사회를 경악케 하기도 했고, 1997년 초에는 호주와 에스토니아의 해커들이 3만 통이 넘는 전자 메일을 쏟아 부어 버지니아 랭글리 공군기지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마비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정보 전달이라는 약과 함께 시스템 파괴라는 병을 주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머리와 손발을 대신하여 정보사회의 중요한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계에서는 '테크노 의존증' 혹은 '컴퓨터 중독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명병이 등장하여 급속히 확산되는 중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기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문제이지만 컴퓨터를 너무 오래 사용하는 바람에 시력장애·경근완 질환(목·어깨·팔에 통증이 오는 병)·두통·소화불량 등의 신체장애는 물론 대인기피증·광장공포증·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컴퓨터를 많이 다루는 현대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컴퓨터를 소재로 한 시를 젊은 시인들이 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 대다수는 사실 눈만 뜨면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를 꺼야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이 기억력 나쁜    고물 PC를 새 걸로 바꾸기로 결심.    언젠가 PC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삼성 알라딘을 사리라 마음먹는다    내 글이 안 되는 건 순전히    도구가 용산 조립품 286AT이기 때문이라    밤마다 기도하며 써 보았지만    고매해야 할 내 시들은 언제나 날림 조립식인 걸    알라딘을 사야지!    그의 자판을 요술 램프처럼 살살 만져 주면    나만의 유능한 종이 나타나    내 명령어들을 충실히 실행할 것이다    넘치는 하드 용량,    풍만한 그의 언어는    이 미궁에서 나의 탈출을 도우리라    사실 이 느림보 286AT에도 요정이 있다    언젠가 치약으로 열심히 PC 본체를 닦다가    난 보고 말았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    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를,    나를 비웃으며 다시 제 집인 양 기어 들어가는    그 자식을 향해 재빨리 플로피 디스크를    몇 번이나 쑤셔 넣었다 뺐다 하며    압살을 노렸지만 디스크만 에러났던 기억.    가끔 모니터 속의 내 글 위로    그 바퀴들이 지나가지는 않을까,    그는 너무 두렵다    내가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어쩌면 이전에 헥사를 지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는 것도    그 요괴임에 난 짙은 혐의를 두었다    베네치아 워드게임에서    '바퀴벌레'란 단어가 내려와 나를 덮칠 때,    난 확신하였다    나의 체제는 이미 위협받고 있었다    놈은 밤마다 용량 작은 하드를 기웃거리며    내 글을 비웃을 거 아닌가?    무슨 시가 이래, 하면서도    내가 방심한 사이 내 연애시를 도용해    행여 또래 암컷들을 사귀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의 신성한 작업실에서……    온갖 상스런 상상들이 아!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    아, 나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김창진, [알라딘을 사야 한다] 전문    컴퓨터는 우리의 친구이자 원수이고 상관이자 부하입니다. 컴퓨터를 소재로 한 이 시를 유심히 읽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술 램프를 문지르면 '유능한 종'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천일야화} 속 유명한 이야기의 그 유능한 종이 알라딘이죠. 이 시에서는 삼성전자에서 만든 신형 컴퓨터의 제품명이 알라딘이므로 알라딘은 중의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형과 구형의 차이가 아닙니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들"에 대한 이해가 이 시를 이해하는 요체가 됩니다. 요정·바퀴벌레·요괴는 같은 존재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놈들은 시인이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고, 내 연애시를 도용해 암컷들을 사귀고, 나의 약한 정신을 도굴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의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해악을 준다고 알려져 있는 발 빠른 곤충인 그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 있는 정보를 파괴하고, 제 마음대로 침입해 남의 정보를 빼 가는 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존재입니다.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라는 구절로 보아 그들은 증식까지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인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힘주어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타인을 향해서는 경고를 주고, 스스로는 각성하자고 다짐해본 것입니다.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등장해 암약하는 해커와 바이러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저는 이 시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시이며 일종의 현실풍자시입니다.    9. 시는 독자 감동을 지향한다    근년에 들어 저는 광고 문구 속에 '고객 감동'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들었습니다. 광고인들도 이제는 광고주가 만든 제품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어 있으니 쓰던 것을 버리고 우리 제품으로 바꿔 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지요. 향상된 기능으로 당신들을 감동시킬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시가 지향하는 최고의 미덕이야말로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격렬한 감동이든 잔잔한 감동이든 시를 읽으며 느낀 감동은 우리의 뇌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바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령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 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 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문인수, [풀뽑기] 전문    아버지를 따라가 묵정밭을 맸던 어린 날의 추억에서부터 시는 전개됩니다. 쇠비름풀·여뀌·바랭이 같은 잡초들을 수없이 뽑아 던져야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태어나는데,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논 서른 마지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이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고 기진맥진한 아버지는 노을녘에 서서 빈 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슬픈 초상은 빈 들, 즉 당신의 피땀으로 일구었건만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가 된 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삶의 비애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버지는 일흔도 중반이 넘어 노인성 치매를 앓는 환자가 되셨는데, 증세가 나날이 심해져 자기 아내도 못 알아볼 지경에 이릅니다. 망령은 들었어도 아버지는 소몰이며 땅을 일구는 일에 인이 박인 농투성이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논도 없는데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서고,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리는 망령을 보입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그간 가족의 녹아 내린 애간장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윤회를 믿는 불가에서는 전생의 원수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나를 아들로 보아주지 않는 슬픔, 죽음을 목전에 두고 헛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마냥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슬픔이 목젖을 차고 오릅니다. 이 슬픔은 은유나 상징 같은 시적 기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문인수는 그저 뭉툭한 필묵으로(평이한 필체로) 아버지의 초상화를 스케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잡초를 수없이 뽑아 던졌던 아버지는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을 끝내는 뽑아서 땅에 던집니다.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눈물을 감추고 있어 오히려 눈물겨운 마지막 연입니다. 한평생 풀 뽑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마지막으로 땅에서 뽑아 반듯하게 관에 드러누움으로써 생애가 완성되었습니다. 뽑혀진 풀이 흙의 일부가 되듯이 인간의 육신도 흙의 일부가 됩니다. 문인수는 아버지의 초상을 이 시에 그려놓은 것일 테지만, 저는 땅을 파며 한 생을 살다 땅으로 들어가 마감하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의 모습을 [풀 뽑기]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봅니다. 아버지의 풀 뽑기도 개간을 위한 창조 행위였고, 아들의 [풀 뽑기]도 '시'를 이룬 창조 행위였으니 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인은 이 시에서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뭇 독자의 심금은 그것 때문에 울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장미를 미의 하나로 취급해온 것일 테지요.    영화며 컴퓨터 게임 등 재미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진 오늘날 시의 기능, 시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기상천외한 실험과 발명 및 파괴로 과학적 언어로밖에 대화할 줄 모르는 우리의 인식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첫째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대끼느라 무뎌진 우리의 가슴에 서정의 물살을 와 닿게 해 잠시나마 감동하게 하는 것, 그 기능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서정의 물살이 워낙 약해 비록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감동하거나 감격할 일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감동적인 시는 이렇듯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슬픔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0.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거짓말이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의 제목은 '정동진역'입니다. 가운뎃부분에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보이는 시입니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김영남, [정동진역] 전문    김영남은 등단작의 제목을 그대로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그 첫 시집의 해설을 제가 썼기에 이 시의 생산 과정을 본인한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래시계'이던가요,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 장소가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정동진역은, 1996년까지만 해도 해돋이 관광 명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 경치가 제법 괜찮다는 것 정도가 몇몇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지요. 어느 신문기자가 누군가로부터 정동진역 풍광이 좋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갔다와서는 '알려지지 않은 곳, 그러나 가볼 만한 곳'이라며 그곳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김영남은 그 기사를 읽고 일필휘지하여 이 시를 썼습니다. 물론 가본 적이 없었지요. 신문기사 한 쪼가리도 유심히 읽는 관찰력이 그에게 시인이란 타이틀을 붙여주었습니다. {죄와 벌} {테스} {여자의 일생} 등 세계명작 가운데 짧은 신문기사를 읽고, 그것을 갖고 쓴 것이 아주 많습니다. 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관찰하고 기록하기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든 영화든 관찰의 안테나를 세우고 유심히 보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친구의 이야기든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든 유심히 들으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체가 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는 열려 있는 총체입니다. 시는 그 어떤 인접예술과도 교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되 시적 진실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정동진역에 전혀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시를 썼다고 하여 우리는 시인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저는 시가 시인 자신의 체험의 산물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문기사를 읽은 간접체험에다가 상상력을 보태어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혹은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안 보고도 본 척, 안 겪고도 겪은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또한 시인입니다. 시인은 신문기사를 보고도, 책을 읽고도, 영화를 보고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직접 체험한 양 둘러칠 수 있는 능력이 시인됨의 기본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시인의 자격으로 왔으니까 마지막으로 제 시를 한 편 낭송해 드릴까 합니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졸시,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솔직히 말씀드려 이 시는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제 아버님은 이날 이때껏 입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만 올해도 고향에서 밭농사를 짓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많은 독자가 대부분 실제상황인 줄 알고 제게 물어왔습니다. 부친을 간병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는 위로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재미교포 2세인 루이스 최가 쓴 {생명일기}(김유진 옮김, 김영사 간행)라는 간병기를 보고 제 체험인 양 가져와서 쓴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성기 운운하는 대목은 그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식물인간의 상태가 된 어른을 간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을 보고 만약 제 아버지가 저런 상태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해보면서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이 시가 시적 진실을 추구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을 통한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슬쩍 바꿈으로써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간접체험과 상상력은 그 한계를 무한정 확장해 줍니다.    자, 그럼 이것으로써 제 강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얘기를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열 가지 방법론에 입각하여 전개한 제 얘기가 여러분의 시작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작품 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486    좋은 시를 쓰려면 댓글:  조회:4714  추천:0  2015-05-12
             좋은 시를 쓰려면            -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서 써야 한다.  - 적어진 글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문맥의 흐름을 다듬는다.  - 우연한 기회에 스치는 영감을 메모해 두었다가  - 적당한 시어로 옷입히기를 한다.  - 메모하는 습관을 가진다.  - 추상과 구상을 적당하게 배분한다.  - 직유보다는 은유에 치중해서 글을 쓴다.  - 일상화된 언어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만든다.  - 독자의 몫을 배려한다.  - 이미지 중복을 피한다.  - 즉흥적으로 시 쓰기 연습을 한다.  ㅇ 수식어는 극약이다. 수식어를 비유법으로 정리함이 절대 필요하다.  ㅇ 감춤과 드러냄이 절묘하게 짜여져야 글이 산다.  사랑이라면 사랑의 내용은 드러내 적지만 사랑이란 말은  감추어야 한다.  ㅇ 글의 말미는 명사형이나 종결의미로 끝내라.  단정적, 확정적으로 끝내지 말라. 차라리 의문으로 끝내는 것이  더 효과를 가져온다.  ㅇ 호흡을 너무 길게 잡지 않도록 소리내어 읽어보고,  단락이 너무 길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를 때에는  2-3행 어딘가서 끊어 줘야한다. 가능하면 3행 정도에서  단락을 짓는 것이 호흡에 적당하다.  ㅇ 좋은 시행은 적시 적소에 종결의미와 명사형으로 막아줘야 한다.  ㅇ ㅂ으로 종결지으면 답답하고  ㄴ 으로 끝나면 차단하는 의미를  ㄹ 로 마무리되면 벗어나는 이미지를 준다.  ㅍ 으로 결론 나면 답답함이 앞선다.  ※ 참고로 이름은 차단없이 터져 나가도록 지어야 한다.  ㅇ 하늘 안의 붉은 얼굴 : 안의 ㄴ과 붉은의 ㄹㄱ에는  받침이 들어가 있어 읽기도 힘들고 리듬도 깨어진다.  ㅇ 글을 적을 때 비유를 앞세우지 말라. 글에서는  1차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  1차적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2차적으로 비유법을  사용해 부연해야한다.  비유법이 첫머리에 나오면 재미가 없다.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ㅇ 주격  ...은 : 따로따로 느낌  ...이 : 곁에서 함께 하는, 연관성 있는 표현  !?,. : 표현에 해당  ※ 말은 아끼되 조사 사용은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ㅇ 시작, 전환, 상승, 결구로 시를 전개해 나간다.  ㅇ 단락의 종결의미를 모두 명사형으로 나열하면 변화의 맛이 없다.  ㅇ 글을 적을 때 사실묘사에 의존할 경우 혼자만의  감동, 작가만이 감동하는 글이 되므로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즉 시적화자의 메시지가 없다.  ㅇ 한 단락 내에서 나열로 적어 나갈 때는 두 행이 이질적인  이미지를 주도록 적어나가야 이미지가 산다.  시쓰기 참고사항(2)  ㅇ 시 쓰기에서 정형에 너무 지우치면 깊이가 없고,  변화가 없어 단조로움을 준다.  ㅇ 어머니는 내용물을 토한 헝겊자루처럼 무너졌다 : 무너지는  의미로 적어야 하는데 너무 설명적이다.  가급적 처럼이라는 비유는 아껴야 한다.  ㅇ 벽이란 절망의 의미를 주기 때문에 제목으로서는  낱말사용이 합당하지 않다  ㅇ 시를 적을 때는 대상을 이미지로 감추었다 풀어주고  감추었다 풀어주고 그러면서 감추어 진 것을 다른 이미지로  나타내면 극적 이미지 효과를 줄수 있다.  이미지 개발, 동원이 약하면 좋은 시가 되지 못한다.  ㅇ 한자는 가급적 사용하지 마라, 막히는 듯한 의미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시의 전개는 막힘이 없이 진행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ㅇ 구체적 시어가 많이 동원되면 단어의 맛이 어설퍼진다.  ㅇ 회색이란 단어는 가급적 시에서 피해야 한다.  의미만으로 볼 때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회색이라 한다.  ㅇ 시행, 호흡조절이 완벽할 때는 산문시로 자신 있게 적을 수 있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  먼저 행 같이, 시를 적어 두고 산문시로 적어야 한다.  ㅇ 사물을 묘사할 때 너무 사실적으로, 상세하게 나타내 주면  독자에 대한 배려 결여로 글 맛이 없고 긴장감이 떨어진다.  ㅇ 가급적 작가자신, 즉 '나'는 글에서 감추어야 한다.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도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야 한다.  ㅇ 낙엽과 사라지는 초라한 모습 : 낙엽은 마지막, 쓸쓸하고  초라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표현이다.  감추기를 해야한다. 낙엽의 이미지 묘사로  쓸쓸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ㅇ 시인은 정신병적인 아픔이 있어야 아픈 만큼 깊이 있는 글을  적을 수 있다.  ㅇ 글 적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글을 적게 된다. 이는 자기 독백에 불과하다.  자기속에 흩어져 있는 거품, 안개, 잡생각, 즉 쉽게 표현하면  경험, 추억 등을 쏟아내 멀리 버리고 참된 고민, 엉뚱한 상상,  낯선 사고를 글로 적을 때 진정한 글적기 시작이 될 수 있다.  내가 낯설면 독자도 낯설게 생각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ㅇ 시에 있어서는 주석도 시(詩)다. 각주는 본문에 얘기되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 밝히기로, 지방에 나오는 지명 등은  각주를 달 수 있다.  ㅇ 습작초기 :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적는다.  쓰는 순간에 나는 없고 그 상황에 맞게 충실히 적는다.  나라는 생각을 버려야 시간 산다.(김소월)  ㅇ 멀리보는 만큼이나 내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노력도  시 쓰기에 서는 필요하다.  즉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불안의 목소리도 글로 표현해 내야 한다.  ㅇ 시와 언어에 있어  - 언어에 경제성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언어의 질감이 생기면 중복을 이용해도 된다.  즉 나에게 어울리는 언어의 질감을 찾아야 한다.  - 꼭 수식어를 사용해야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상만으로도 리듬을 타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ㅇ 리듬  - 리듬은 반복이다.  - 시는 만들어지는 순간 죽는 것이다.  - 시는 뭉쳐졌다 사라진다.  - 시는 뼈가 없으면 무너지고 리듬이 없으면 맛이 없다.  ㅇ 모든 배설은 아래로 해야 자연스러운데 구토를 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무엇인가 낯설기 때문에 구토가 난다.(이승훈 교수)  - 반드시 건전한 사고가 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비합리적이면서도 합리성을 가질 때 시가 적혀진다.  ㅇ 시는 순수해야 한다는 관념을 버려야 발전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결벽증을 깨뜨릴 필요가 있다.  ㅇ 읽기는 쓰기다. 좋은 글은 읽다 보면 멈춤이 생긴다.  ㅇ 시 쓰기는 부분을 회생시켜 전체를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시점이 중요하다.  ㅇ 시는 상승시키고 독자들을 정신 없이 몰아 부쳐야 산다.  숨쉴 틈도 없이 긴장감을 주면서....  *** 시쓰기 참고사항 3편에 이어짐***  시쓰기 참고사항(3)  ㅇ 익히 알고있는 사실, 진실 등 관념의 표현은 절대 금물,  다만 극적반전을 가할 때는 예외도 있다.  ㅇ 한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리듬을 깨게 하고  상상의 폭을 좁게 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작가 50%, 독자 50%의 상상력이 합해 진정한 작품의 자리  메김을 할 수 있다.  ㅇ 시는 추상으로 적지말고 구체적으로 이미지화 해서 적어나가야 한다.  ㅇ 고향을 어머니로 표현하는 것은 죽은 의미이다.  시로서 설명하지 말고 표현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ㅇ 시를 시(詩)처럼 적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  그 상황 그대로를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머니를 만나면  만남 그 상황을 묘사해야지 어머니, 모든 사람의 어머니를  추상적으로 나타내면 글이 살지 않는다 즉 어머니 전체를 보지말고  어느 한 부분만 나타내라.  ㅇ 닮게 표현하면 죽은 비유라 할 수 있다(이근배시인).  최근에는 다르게 나타내는 비유를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에서 처럼으로 묘사하지 말고  아름다움 자체를 비유로 나타내야 한다.  ㅇ 시 쓰기에 있어 상식을 뛰어넘는 시를 쉽게 쓰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사항을 더듬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풀어놓은 언어들이 조화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통일성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을 낳을  우려가 있다.  ㅇ 문학(文學)이란 사고(思考)의 천착(穿鑿)이다.  천착이란 구멍을 뚫는 다는 의미로 생각을 뚫어야 함을 의미한다.  ㅇ 무릇 모름지기 시인이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로  글을 적어서는 되지 않는다. 낯설게, 전혀 엉뚱하게,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지어야 한다.  ㅇ 처음 시 쓰기를 시작하면 대부분 설명적 나열을 많이 사용하는데  시는 과정이 아니고 순간의 느낌을 포착해서 새로운 시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ㅇ 제목에서 너무 분명한 얘기를 해 주면 본문 내용이  재미가 없어진다. 내용을 읽고 입맛을 다시며 제목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시쓰기 참고사항 4편에 이어집니다.  시쓰기 참고사항(4)  ㅇ 짧은 글일수록 절정이 커야한다.  즉 선명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묘사해서 강한 인상을  주도록 해야 한다.  ㅇ 화자의 생각에 독자들이 동감하고 따라 올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세소리를 표현할 때는 독자가 만세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비유해서 나타내야 한다.  ㅇ 공인 즉 세상이 다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존칭을 생략하고  이름만 적는 것이 통례이다.  즉 선생이라 쓰지 않아도 결례가 되지 않으며 존칭을 사용하면  깔끔치 못한 인상을 준다.  ㅇ 친숙해 보이던 것이 낯설게 보일 때 시가 된다.(이승훈 교수)  ㅇ 창조에서는 광기가 사라지면 안된다.  광기 때문에 시는 쓰지만 지배당해서는 안된다.  ㅇ 시는 영혼, 정신을 노래해야 하는데 최근 한국에서는  몸에 대한 시를 많이 쓴다.  ㅇ 시는 아름답게 쓰려 하지 말라.(이승훈 교수)  ㅇ 문학은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 한다.  과정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내면의 깊이 있는 바탕글을  찾아내기 어렵다.  ㅇ 시란 문법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ㅇ 웃을 수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있을 수 있다.  ㅇ 촉각에서 후각으로 오려면 뭔가 깔아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ㅇ 추상은 가능한 구상, 구체화해서 이미지화 해야 한다.  시쓰기 참고사항(5)  ㅇ 상상의 폭은 가감하게 치고 나가야 한다.  ㅇ 시를 쓸 때 의미를 찾지 말라. 시란 존재하는 것이다.  ㅇ 시는 사물과 말걸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다 사물과 몸 바꾸기가 된다.  알고 싶은 사항이 있으면 스스로에게 물어서 깨달아라.  ㅇ 선사는 깨우치면 그만이지만 시인은 깨우침을 언어로 나타내야 한다.  ㅇ 달은 여성, 잉태를  해는 남성을  바다는 여성, 모성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관념화 된 기존 이미지를 타파, 뒤집는 것이 시 쓰기다.  예를 들면 "파도의 사내"  ㅇ 은유가 너무 많으면 어렵다. 은유대신 의인법, 직유로 풀어주고  정서, 느낌으로 올 수 있게 조여주고....  ㅇ 하늘과 강은 푸르다는 유사어로 해석된다.  ㅇ 제목을 정할 때는 가능하면 엉뚱하게 선택해 보자.  ㅇ 막연한 단어의 사용은 자제해야 한다.  즉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  예를 들면 표정이라 적기보다는 얼굴, 눈빛 등으로  구체화 시켜야 내용의 의미전달이 확실해 진다.  또한 생이나 삶 같은 단어 역시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  어떤 삶 어떤 생인지.  ㅇ 시창작의 지름길은 따로 없다.  많이 적고 많이 읽고 많이 수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중견작가 신동엽 시인에게 한 고등학생이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지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열심히 읽고,  써보는 수밖에 없지"라고 말하시면서  "그 방법을 알게 되거던 내게도 가르쳐 다오"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임영조교수)  ㅇ 시는 감정으로 쓰지 말고 이성으로 써야 한다.  ㅇ 주석은 가능하면 간단하게 달아야 한다.  ㅇ 시를 적을 때는 일상적인 진술식 나열이 아닌 시어를 사용해서  긴장감을 주도록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  ㅇ 당당하게 나와 비교해서 나타내고 사실대로 느낌을 표현하고  상징으로 바꾸어서 써야 한다.  ㅇ 한자로 적어서 그 뜻을 보충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가급적  한자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생"은 생활,  탄생, 생명 등으로 다시 유추해서 생각해야 한다.  ㅇ 시는 갈길이 바쁘다. 그러므로 가급적 간단하게 축약해서  나타내야 하고 이미지를 사용 압축해서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으려면 전체를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코끼리 코만 잘 묘사해도 냉장고 속  코끼리를 나타낼 수 있다.  ㅇ 대화를 인용할 때는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지 알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  ㅇ 시는 모두 창조물이어야 한다.  관념화된 비유는 죽은 비유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 시쓰기참고사항6편에 이어집니다.  시쓰기 참고사항(6)  ㅇ 글을 읽다가 좋은 시어가 나오면 메모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시간이 나면 다시 읽고 비슷한 시어로 흉내내기 연습을 하는 것도  좋은 시어를 찾는 방법이 될 수 있다.  ㅇ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는  경험, 지식, 추억 등에 의존해서 적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 추억은 누구나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처음 글 적기를 할 때는 장황하게 나열 식 추억담을  적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유리잔에 담은 맥주 거품 같은  추억을 빨리 걷어내야 한다. 적어보고, 수정하고 또 적어보고...  열심히 적다보면 더 이상 적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고  그때부터 방황을 하게 된다. 더러는 1-2개월 길게는 6개월에서  1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를 지나면 유리잔에 담긴 진짜 맥주처럼 주옥같은  맛난 글을 지을 수 있다.(선배 시인의 추억담)  ㅇ 시를 지을 때는 자기 굴레에서 벗어냐야 한다.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실패하게 되는 데  가정주부는 가정을 소재로 한 글에서,  선생님은 학교의 굴레에서, 간호사는 병원에서...  벗어난 낯선 글 쓰기를 해야 발전이 있다.  물론 어느 수준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 다시 자기 굴레로  들어가 전문적인 시 쓰기, 즉 남들이 흉내도 못내는  참 좋은 글을 적을 수 있게 된다.  ㅇ 시 속에 인물을 등장시키려면 구체적인 묘사가 필요하다.  ㅇ 글의 말미(마지막행)는 설명이 아닌 치고 올라가는 기법을  사용해야 글이 살고 맛이 난다.  ㅇ 시의 첫줄은 전체를 이끌어 가는 생명이다.  따라서 첫줄을 긴장감 있게 이끌어 가야한다.  단어 하나가 시 전체를 살릴 수도, 오염시켜 버릴 수도 있다.  ㅇ 시를 아름다운 말로만 나타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한 자, 한 단어, 한 줄에 의미를 부여하여 신중하게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ㅇ 제목을 지어놓고 스스로 점수를 매겨 볼 필요가 있다.  포장마차 하나라도 함부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시의 세계도 넓게 보면 상업경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집이 발간되어 서점에 나가면 독자들은 제목으로  책을 선택하고, 선택된 책도 펼쳤을 때 마음에 드는  제목이 있어야 읽어보게 된다.  한달에 출간되는 시집들이 100여권이나 된다니...  ㅇ 제목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아니라면  단순하게 명사형으로 적지말고 설명적으로 적어야 재미가 있고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여운을 주게 된다.  ㅇ 가상체험을 소재로 한 글보다는 직접 체험에 의한  글을 적어야 한다.  가상으로 적은 글은 직접 체험한 독자를 설득시킬 수 없으며  내용 또한 허구, 추상에 가깝게 될 우려가 있다.  또한 소문이나 들은 얘기를 유추나 추상해서 쓰지 마라.  자칫 잘못하면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수 있다.  ㅇ 햇볕은 열도(熱度)를, 햇빛은 광도(光度)를 나타낸다.  바꾸어 적게 되면 문맥의 흐름이 막히게 된다.  ㅇ 글 내용 전개에 있어 강조, 감추기 등을 위해 순리에 맞지 않은  흐름으로 적을 때는 반드시 이유, 상황이 이해 되도록 풀어서  적어줘야 한다.  이 경우는 어렵게 적는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  시쓰기 참고사항 7로 연결 됩니다.  시쓰기 참고사항(7)  ㅇ 새로운 시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막무가내로 짜집기 식으로 말  만들기를 하지 마라.  ㅇ 글은 우연히 적어진다.  하지만 결코 쉽게 적어지지는 않는다.  쉽지 않고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어려운 맛에 사람들은  글쓰기를 한다.  맛과 묘미가 어려움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적어지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계단이 없어지거나 거꾸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거나  뭔가 갑자기 낯선 경우가 일어난다.  그 때 그 낯선상태를 시어를 이용해 나타내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면 교직에 계시는 분의 경우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사랑스럽고 예쁘고 가르침에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고...  이 경우는 절대 시를 적을 수 없다.  그 기분 그대로를 글로 나타내는 것은 누구나 다 가능하다.  다만 시인이라면 낯설게 봐야한다.  즉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연히 바라보니  내 자신이 학생들 틈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다던지...  ㅇ 글을 지어 나갈 때 시대상황을 알 수 있게 구체화  시켜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인터넷이란 낱말을 사용한다면 최근임을 알 수 있다.  ㅇ 사물에도 계절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접동새, 즉 두견새는 봄을 나타내며  진달래와 어울리는 이미지화 되어 있다.  계절을 나타내려면 그 계절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것을  찾아서 나타내야 한다.  ㅇ 글을 쓸 때는 나만 천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내가 알 고 있는 것은 독자도 알 수 있다.  또한 설명으로 묘사해 주지 말아야 한다.  ㅇ 자목련은 잎과 함께 피어나고 백목련은 꽃이 먼저 피어난다.  철쭉과 진달래도 같다.  하지만 무릇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백목련에서 한복입은 여인을,  자목련에서는 드레스 입은 신부를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ㅇ 시를 지을 때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하지 마라.  이미지화에 주력하라.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미지화가  더 높은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묘사에 치중해서 글을 쓰도록 하라.  이미지가 좋으면 독자가 따라온다.  ㅇ 경쾌한 선율.. 이와같은 표현은 죽은 이미지다.  즉 시인이 아닌 일반인도 이런 말을  일상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ㅇ 사물을 묘사 할 때는 입체적으로 풀어 나가라.  그래야 독자가 호기심을 갖고 따라 들어온다.  예를 들면 봄은 고양이를 사색하게 한다라고  표현하면 금새 독자들이 식상해 한다.  해서 차라리  고양이 눈속에서 봄이 온다 라던지 봄은 고양이 눈  속으로 들어 간다라던지 입체적으로 나타내는 편히 훨씬 더  글 맛이 좋다.  ㅇ 사물의 형태보다는 행동을 묘사해야 한다.  예를 들면(산수유 피고 매화가 향긋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산수유가 어떻게 피고 매화향기는 어떤 짓을  하다는 그 행동을 이미지화 해야 한다.  **********  시쓰기 참고사항 8  ㅇ 좋은 시쓰기 비법  -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  - 바늘 가는데 실이 가게 적지 말라.  시는 바늘 가는데 뱀이 와야 한다.  즉 붙어 다니는 말을 버리고 장난을 쳐야 한다.  -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어라.  - 꼬리가 길면 밟힌다.  ㅇ 섣불리 아는 지식은 시에 인용하지 말라.  사전을 찾고, 직접가서 보고...  어려운 한문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특히 제목을 한문으로 사용하려면 정확해야 한다.  보충 설명이 없도록...  ㅇ 시 쓰기는 연설문처럼 적어서는 안된다  또한 사실을 사실대로 적지 않는 것도 좋은 글을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산사람 같이 나타내면 글 맛이 훨씬 좋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전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ㅇ 축시는 절대 과거형으로 풀어 나가지 마라.  미래형을 택해야 새로운 글, 살아 있는 글이 된다.  ㅇ 같은 말을 자꾸 다르게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한 대상에 자꾸 다른 이미지를 대입시켜 나가면  잘 어울리는 이미지가 나타나게 된다.  **********  제가 글을 보고 의견을 제시 한 부분이나  다른 분들이 의견을 제시 한 부분을 메모해 둔 곳입니다.  용어 사용 등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ㅇ 미련한 손놀림 : 미련한 상태를 묘사한 설명으로 피해야 할 기법  ㅇ 꿈이 잠긴 마을 : 꿈이란 말이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어떤 꿈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다  ㅇ 못해서 : 자동사,  않 는 : 타동사  ㅇ 평화, 슬픔, 행복 : 구체화 시켜야 할 단어들이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시어를 나열하면 야무진 시맛이 나지 않는다.  글이란 감탄, 독자가 맞아! 하고 무릎을 치는 소리가 들리도록  적어야 하며 가슴으로 듣도록 써야한다.  ㅇ 한에 떨었다 : 한은 한자이므로 가능하면 한자를 사용하지 말고  구체적인 이미지로 써내야 한다.  ㅇ 그리움, 서러움, 사랑.. : 이런 추상적인 말은 자제해야 시가  감칠맛 나고 살아난다.  ㅇ 불씨, 씨앗 : 어떤 불씨인지, 어떤 씨앗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ㅇ 제목 : 꿈이 잠긴 마을  → 제목에 뒷 내용이 미리 알 수 있게 정하는 것은 무게없는 글이  되므로 가급적 피해야 한다.  ㅇ 물안개 수놓다 : 어떻게 수놓았는지 구체화가 필요하다.  ㅇ 이명의 아픔, 칠흑의 밤, 봄의 소리, 새의 날개  명사 뒤에 의는 구태의연한 표현, 설명적 표현으로 버려야 한다.  ㅇ 오래된 흔적 : 흔적이 어떤 흔적인지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ㅇ 환장하게 미쳐 가는 : 환장과 미쳐는 중복, 같은 의미로 피해야 한다  - 빨간 피, 앉전뱅이 채송화, 따사로운 볕, 먼 태고적, 더 넓은  창공, 불평속 투정, 목이타는 갈증, 획획 요동을, 별빛이 반짝,  보글보글 끓는.....  ㅇ 행복이 시간을 자꾸만 먹는다 : 행복, 시간은 둘 다 추상이다.  ㅇ 강물에서, 강가에서 : 전자는 물 속이고 후자는 물 밖을 나타낸다.  ㅇ 한 낮의 풀벌레 : 풀벌레가 어떤 벌레인지, 어떻게 우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나타내야 한다.  ㅇ 굶주린 들개 떼처럼 : 상투적이고 너무 쉬운 표현이다.  처럼의 비유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ㅇ 어느새, 어느 듯 : 신문에서 사용하는 표현들, 시에서는  절대 금해야 할 표현들이다.  ㅇ 뭉클한 내리사랑 : 내리사랑이 무슨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ㅇ 재빨리 낙엽 속으로 숨는 다람쥐 : 재빨리는 동작을 나타낸 설명  ㅇ 까치는 두 발 딛고 서서 : 너무 당연한 사실, 까치는 두발이다.  ㅇ 몇 년의 기다림을 깨고 난 매미 : 시에서는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매미가 몇 년만에 깨어나는가?  7년 혹은 8년으로 정확하게 적어야 한다.  ㅇ 거리의 악사는 노래를 부른다 : 실제 거리의 악사가 있는지,  현재 적합한 표현인지를 미리 감안, 계산하고 글을 풀어 나가야 한다  ㅇ 뼈를 분지르는 소리 : 분지르다는 내가 분지르는 것이고  부르지다는 부르짐을 당하는 의미다  ㅇ 기쁘게 : 시에는 자제하는 표현이다. 기쁜 자체,  즉 어떻게 얼마만큼 기쁜지를 이미지로 나타내야 한다.  ㅇ 내사랑의 시를 : 나의 어떤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적데,  사랑이란 말없이 풀어 나가야 한다.  ㅇ 소낙비....늦가을 : 소낙비와 늦가을은 계절적으로 맞지 않는다.  ㅇ 비가 와서 쓸쓸하다 :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낮인지, 저녁인지, 무교동인지, 덕수궁인지...  화자가 구체적인 사람이면 구체적인 시가 나오게된다.  ㅇ 먼 태고적, 더 넓은 창공 : 멀다와 태고적, 넓다와 창공은 같은  의미. 중복으로 봐야한다.  ㅇ 청맥 보리알에서 청맥은 푸른 보리라 볼 수 있다.  무녀로 신내림 받고 싶어에서 신내림 받으면 무녀가 되기  때문에 무녀가 되고 싶어나 신내림 받고 싶어로 해야한다      
485    시는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댓글:  조회:4944  추천:0  2015-05-12
- 김병수   시를 쓰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시를 쓰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시를 쓰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건만 시는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시를 쓰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건만 시는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머리속을 떠다디는 공허한 상념들을 녹여 내야 하는데 뭉쳐지지 않고 여전히 진눈깨비처럼 흩날린다.   눈사람 같은 흰소금 가득한 달콤하며 순결한 그런 시를 쓰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눈사람 같은 시를 쓰고 싶은 계절이 찾아왔다. 따사로운 햇살이 눈사람을 녹이기 전에 눈사람을 만들어야 하는데 눈사람 같은 시를 써야하는데   눈사람은 어디로 간건지 보이지 않는다. 어스름 달이 떴을 때 달빛 안에 있었던 토끼가 눈사람으로 보인다.   시를 쓰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진눈깨비는 모두 날려버리고   아니 진눈깨비를 모두 모아서 눈사람 같은 시를 쓰고 싶은 계절이 찾아왔다.      
484    <개미> 시모음 댓글:  조회:4795  추천:0  2015-05-10
이진숙의 '개미를 위하여' 외  + 개미를 위하여 보도블록 갈라진 틈새로  개미들이 어디 이사라도 하는지,  그들을 방해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피하다 보니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오오,  세상을 바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라고? (이진숙·시인, 1972-) + 개미  태양을 지고  나뭇잎 만한 그늘 지나는 일  끝 모를 여로  한 걸음이 이토록  먼 길인지  낯가리는 내게  세상은 너무 넓어서  평생 햇빛 모르는  구멍 속 내 집인 것을  사랑을 위한 집념  허리 휘어 물고 오는  노동 멈추지 않고  가슴으로  하늘도 감출 수 있는  사랑,  사랑아 (장미숙·시인, 1957-) + 개미 지리산 피아골 입구 노을을 받아 빛나는 섬진강 모래톱 강물의 沿革으로 살고 있는 개미 한 마리 굽은 등 위에 산 한 자락 져 나른다 너와 나를 지나 세상 안과 밖을 돌아 올려다보면 너무도 큰 험산 준령 내려다보면 너무도 깊은 골짜기 지고 가는 것은 무엇이든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된다 (이창수·시인) + 개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좁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강연호·시인, 1962-) + 나팔꽃과 개미  나팔꽃 속을 들여다보니 그 속  개미 서너 마리가 들어 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너희들에게 나팔을 불게 하시니  나팔꽃은 천천히 하늘로 기어오르고  그 하루하루의 푸른 넝쿨줄기,  개미의 걸음을 따라가면  나팔꽃의 환한 목젖  그 너머  개미는 어깨에 저보다 큰 나팔을 둘러메고  둥둥, 하늘 북소리를 따라  입안 가득 채운 입김을 꽃 속에 불어넣으니  아, 이 아침은 온통 강림하는  보랏빛 나팔소리와 함께 (고영민·시인, 1968-) + 개미 개미는 시작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일을 한다 개미는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이다 개미는 허리가 가늘다 아름답다 별도로 다이어트가 필요치 않다 하늘은 일하는 생명에겐 건강과 아름다움을 주노라고 했다 개미는 이 세상 어디에도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도 그는 거기서 일하고 있다 개미는 저주받지 않는다 영원한 축복이 있으리라 (황금찬·시인, 1918-) + 개미 멈추지 않는  삶의 현장을 본다.  땡볕에 검게 탄  역군들을 본다.  산 같이 쌓아 놓은  저 거대한 土城  미물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미력한가.  허물어지면  제방을 쌓고  무너지면 제방을 쌓고,  지구의 한 모퉁이  개미는  삶을 포기한 한 주검을 찢고 있다.  그 어리석은 죽음  그 미력한 주검을  개미들이 물어뜯고 있다. (박덕중·시인, 전남 무안 출생) + 개미 한 마리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기어가는 건지 걸어가는 건지) 영하 수십 도의 안데스 설원 한 마리 개미  또박또박 간다 (눈 속에 묻혔다가 다시 헤쳐나왔다가)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설원을 벗어난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삶이 아름다운 건지 희망이 목숨인 건지) (허형만·시인, 1945-) + 여왕개미  몸은 좁쌀만 해도  꿈은 원대했다  끊어질 듯 가는 허리는  떨어지는 꽃잎에 묶어놓고  사내들 세상을 지배하려  비단 날개는  날카로운 이빨로 끊어 버렸다  힘들었던 과거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구차한 미래가 두려워  이팝나무 고목 등걸에  아담한 보금자리 틀고  유성이 되어 떨어지는 별똥별에  날아가는 꿈 매달고  긴 안테나를 뽑아  우주에 전파를 보낸다  단 하나의 가벼운 좌우명을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가겠노라고 (김정호·시인) +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  빵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개미  개미 가는 길을 신발로 가로막지 마라  끓어질 듯 가는 허리에 손가락을 얹지 마라  죽을 때까지 시동을 끄지 않는  개미 한 마리가 손등으로 오른다  언젠가 허리띠를 졸라매던 아버지  바짝 마른 허기가 만져질 것이다  아버지가 털털거리는 생선 트럭을 끌고  돌무지 비탈길을 누비고 다녔다  생선 상자 위로 쏟아지는 땡볕  신경질적으로 바퀴를 두드리는 돌덩이들  왕왕거리는 메가폰 소리를 뚫으며  식식거리며 아버지는 나아가고 있었다  거친 시동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괜찮아, 내 허리띠를 붙잡아라  그날도 아버지는 덜컹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손등에 오른 개미를 가만히 내려놓는 당신  개미 앞길에 놓인 돌멩이를 치워준다  멀어져 가는 아버지,  당신의 눈 속으로 기어든 개미가  시동을 건다 여섯 개의 다리가 붕붕거린다 (정경미·시인) + 개미의 바느질 개미가 많은 집에 살았네  장판과 벽 사이  문턱과 바닥 사이  일렬로 늘어선 개미 행렬은  어머니 바늘을 뒤따르는 실처럼  개미 개미 개미 개미 --------  벌어진 사이를 꿰맸네  아껴야 잘 사는 것이여,  날마다 허리를 졸라매던 그녀도  한 마리 붉은 개미  그래도 허기를 벌리는 입은  쉽게 봉할 수 없었네  날마다 늘어나는 틈새를  독하게 기워내는 바늘,  녹슬 틈 없던 그녀의 믿음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을 그 집에서  나 그녀로부터  바람 하나 들지 않는  옷 한 벌 얻어 입고 살았네  (길상호·시인, 1973-) + 개미 탑     몸집 작은 개미들이  제 모습 돋보이려  너른 대지 속을 파고들어가  땅의 허물을 하나하나 물어다가  높이 굴뚝을 세우니  개미 탑이라더라  제 잘난 것 하나 없어  아무것이나 물고 뜯어 높이 쌓고  보아라 보아라 외치며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귀한 양 뽐내더라  하루는 개미탑 앞에  제 말만 하는 아저씨와  남의 말은 하나 듣지 않는  아줌마가 있더니  또 하루는 돼나가나 지껄이는 이와  아무 말에나 상처입고  남을 미워하며 눈물짓는 여인이 있더라  아마도 개미는  사람들이 튀긴 침과 눈물을 발라  높이 더 높이  굴뚝 같은 탑을 쌓는지도 모르겠더라  (최범영·시인, 1958-) + 개미  돌담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까맣고 좁은 통로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통로 속에 두근거리며 매달려 있을 흙내 물씬한 방들을 생각한다 햇볕 쨍쨍 작렬하는 일터에서 땀에 절어 몸이 새까맣게 타버린 개미 허리가 부러질세라 휘어도 어쩔 수 없이 금방 죽은 개미도 떠메고 간다 사인은 무엇일까 사망진단서엔 분명 일하다가 쓰러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나는 괜찮다." 손사래 치며 일터로 나가신  아버지가 "업무과로"로 누워 있을 게다 한 뼘의 여유도 숨 돌릴 틈도 없는 삶들의 저 슬퍼할 틈도 없는 절실한 몰두 더듬이를 다듬으며 입술을 꼭꼭 깨문다 (문근영·시인) + 개미 이야기  날씨가 추워지자  작은 개미들이 방으로  몰려들어 왔다.  이리저리 기어다니다가  한 떼의 개미가  노트 속으로 기어들어 와  한 편의 시(詩)가 되고.  검게 쓴 글씨가  일렬로 줄지어 서서  개미 뒤를 따라가더니  시(詩)를 이끌고  노트 밖으로 기어나간다.  방바닥에 온통  개미처럼 기어다니는  詩,詩,詩.  가족들이 쪼그리고 앉아  시(詩)를 읽는다.  (양수창· 목사 시인) + 개미집은 詩다 시 붙잡고 끙끙대고 있는데 뭐가 움직인다 신경 쓰여 돋보기를 끼고 보니 개미다 제 몸보다 몇 십 배 큰 과자부스러기를 짊어진 건지 미는 건지 끙- 끙-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순간, 아팠던가 신경이 개미집 가는 미로처럼 느껴졌던가 갑자기 쿵! 소리가 난다 개미가 짐을 부리며 하는 말 - 어쩔라고, 이 양반 오늘도 공쳤군 가슴이 뜨끔한데 새끼들이 식탁에 둘러앉으며 마악 웃는 중이다 참 아득한 풍경이었다  그 詩의 집 (이성이·시인) + 개미나라  개미나라는 땅속에 있었네 누가 엿볼까  표식도 없는 미로 속에 있었네  한해살이 삶마저 망가져버린 베짱이의 여름동산  한눈 팔 줄 모르는 개미나라는 봉건적이면서 민주적인  이기적이면서 현실적인 햐, 살맛 나는 별천지네  여왕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았고  국민은 여왕에게 저항하지 않았네  언제나 개미끼리 오순도순 사는 나라 그 누구의  망명이나 이민도 받아주지 않는 나라  나라 밖 땅위에서 일을 하지만  모든 수확을 땅속으로 물고 가는  저 끈질긴 개미들의 노동을 보라  비록 모두가 가는허리지만 언제나 배가 부른  문지방 너머 흙벽 틈새 또는  마당가 담장 아래 개미나라를  오늘도 병정개미들은 촉수를 세워 파수를 보고  정말 개미나라는 땅속에 숨어 있었네  (한승필·시인) + 개미·1  집채만한 우박이 떨어집니다  떠내려가는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다행히 강 저쪽에서  손을 내미는 이가 있습니다  가랑잎이었습니다  간신히 둑에 올라 젖은 몸을 말렸습니다  또 한차례 폭우가 쏟아집니다  나는 가랑잎과 함께 숲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랑잎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습니다  첫눈이 내리자  가랑잎은 포근한 이불이 되어주었습니다  해마다 그 자리에 가면  가랑잎 한 장 달랑 덮고  손을 내미는 이가 많습니다 (박정원·시인, 1954-) + 개미와 꿀병  부주의하게 살짝 열어둔 꿀병에  까맣게 들앉았네 개미떼들  어디서 이렇게 몰려들었을까  아카시아 단꽃내가 부르는  저 새까만 킬링필드  꿀에 빠진 개미떼를  몸에 좋다고  뚝, 떠먹는  저 오랜 숟가락들  꿀병에 꽂힌 숟가락을  靑春의 가는 손가락에 쥐어주는  저 시린 입술  (정끝별·시인, 1964-) + 개미의 반란 설거지를 하다가  싱크대에 서성이는 개미를 발견했다  황당한 사건에 놀라  꼼꼼히 추적을 해보지만  미궁 속에 빠진 개미,  빠른 손놀림에 생과 사를 넘나든다  은밀한 살생에 희열을 느끼며  완전범죄를 꿈꾸지만  날이 갈수록 병력을 이끌고  나의 공간에 나타난 개미는  음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펼친다  드디어 개미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다니는 길목을 차단하고  살상 무기를 이용하여  몇 일만에 개미의 반란을 잠재웠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죄명은  화약약품 과다 사용,  무차별 과잉 진압이었다 (김경숙·시인, 전남 해남 출생) + 개미에게       너의 노트엔 너의 백지엔 너의 원고지엔  너의 책엔 너의 시집엔 너의 논문엔  너의 평론엔 불안이 없다 그림자도 없다  너의 시엔 바람소리도 없다 너의 노트엔  증오도 없다 상처로 얼룩진 밤들도 없다  스산한 저녁이면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개미여 네가 속삭이는 말을  나는 들을 수 없다 무식한 무식한 무식한  인간인 나를, 치사한 인간인 나를, 아는 게  없는 선생인 나를 좀 도와다오 (이승훈·시인, 1942-) + 개미처럼 베짱이처럼  동네 걱정하고 살자니  나 살기 바빠서 못하겠고  세상 걱정하고 살자니  속이 뒤틀려서 못하겠고  어제도 오늘도 이래저래 바쁘니  인생고 해결에 하루해가 짧은데  쥐꼬리만한 한달 월급  자고 나면 천정 부지 아파트값  가슴만 동동거리다  밤마다 내려앉는 허무  고급 승용차에 골프 회원권이면  저 하늘에 별이라도 딸 줄 알았는데  옆집 떼부자 할아버지  통장마다 보험마다 노후대책 화려해도  힘없는 다리에 지팡이만도 못한 배추이파리  아들 며느리 의리만 상하더라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여보시오.  구름 같은 인생 나그네들이시여  베짱이처럼 노래도 할 줄 아시구려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짐 잠시 내려놓고  지나는 바람에 땀이라도 거두시구려  내 걱정만 하지 말고  동네 걱정  세상 걱정 좀 하고 사시구려 (이채·시인)  + 코끼리와 개미의 우화  보라!  에베레스트와 K2  몽블랑과 킬리만자로  다 내 발 아래 있도다  부지런히 꼭대기에 깃발을 꽂는다  목이 터지게 만세! 만세! 만세! 외쳐댄다  코끼리는  등에 올라탄 개미가  환호작약 만세 소리 지르는 것쯤이야  언제나 관대하다 (고명·시인, 전남 광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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