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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전세계 사진계 가장 중요한 10인 中 - 데이비드 라샤펠 댓글:  조회:2548  추천:0  2016-12-19
세계적인 사진작가이면서 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의 애제자로도 잘 알려진 데이비드 라샤펠 !   최근 아메리칸 포토 매거진에서 '전세계 사진계에서 가장 중요한 10인' 에 선정되기도 했죠.     Alexander McQueen & Isabella Blow, Burning down the House, 1996 ⓒ David LaChapelle       앤디워홀에 의해 발탁되어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애제자 데이비드 라샤펠.   그가 찍은 이 흑백의 앤디워홀 사진이 앤디워홀의 생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해요.   앤디워홀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라샤펠의 사진속에는 팝아트 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것 같아요.   데이비드 라샤펠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일것 같아요.   릴킴을 모델로 작업한 작품으로 루이비통 광고사진으로 쓰인사진이예요.   데이비드 라샤펠의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고 하죠^^         안젤리나 졸리와 작업한 욕망의 봄 , 그녀의 이미지와 너무 잘 부합되는 사진이 아닌가 싶네요^^       인형의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카메론디아즈의 모습이 재미나죠?? 초현실 주의의 모습을 띄는 작품입니다.     대홍수 시리즈는 라샤펠이 상업성을 띄지 않고 오로지 예술적 표현을 위해 작업한 첫번째 시리즈로 라샤펠 작업의 전화기로 평가되는 작품이예요. .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대홍수'에서 영감을 얻은 라샤펠은 자신만의 홍수테마사진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액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고해요.   이사진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왔는데, 사진의 내용이 자본주의 시대가 홍수에 쓸려가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그는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과 중독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온정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어떤 상황에서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힘을 합쳐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해내고 있어요.         물질의 중독이 마치 마약과도 같음을 표현해낸 작품이예요.   코에 다이아몬드를 넣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소비와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수 있는 작품들이예요.   소비가 인생의 원동력인 욕망을 움직이고 , 개인들을 재화구입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고 압도되게 만드는 현대사회의 절대적 압력을 표현했어요.   과도한 물질적 풍요와 소비가 인간을 망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죠?^^         라샤펠의 예수는 나의 친구 시리즈.   일상에서 느낄수 있는 종교적인 존재에 대해 표현한 작품들이예요.   최후의 만찬을 재해석한 사진도 눈에 띄네요^^     ' 피에타 ' 의 모습으로 분한 휴트니 러브가 매우 인상적이고, 절망의 순간에도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희망을 표현합니다.     “누군가는 내 작품이 예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관계없다. 나는 글래머, 뷰티, 플래시를 수긍한다. 육체는 상품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써 이것을 조명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서울(그는 ‘소울 Soul'이라고 했다). 재미있고 기분 좋다. 예측하지 못했던 미래다. 여행을 많이 해 보니 사람은 어디가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알고 예술에 공감한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연결된다. 내 전시를 보는 이들이 일부나마 마음이 동하길 기대한다. 전시를 본 후에 당신에게 어떠한 울림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러한 전시를 통해 ‘연결’되는 게 중요하다.”            [출처] 예술의 전당 < 데이비드 라샤펠 한국특별전>     데이비드 라샤펠 ⓒDavid LaChapelle [사진=아라모던아트뮤지엄 제공]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다르게 판단하고, 보고, 해석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고 다른 이들은 또 다른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지요." 전 세계 광고·미술·패션계를 아우르며 최고의 아티스트로 인정받은 데이비드 라샤펠(53·미국)이 한국을 다시 찾았다. 지난 2011년 서울 예술의 전당, 2012년 부산 벡스코 전시 이후 5년 만이다. 아라모던아트뮤지엄(대표·총감독 최요한)은 내년 2월 26일까지 데이비드 라샤펠의 사진전 '인스케이프 오브 뷰티'(INSCAPE OF BEAUTY)를 선보인다.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기획으로 접근한 이번 전시는 라샤펠의 작품 180여 점을 4개 층(2314m²)에 걸쳐 소개한다. 특히 작품의 압도적 크기, 컴퓨터그래픽(CG)과 포토샵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실사'라는 점 등으로 라샤펠전은 전시 개막일인 지난 19일 이전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My Own Marilyn'(2002) ⓒDavid LaChapelle [사진=아라모던아트뮤지엄 제공] 라샤펠은 독특한 극사실 미에 심오한 사회적 메시지를 혼합하는 것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80년대 뉴욕 갤러리에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사진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으며,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1928~1987)의 총애를 받아 매거진 '인터뷰'의 포토그래퍼로 활약했다. 그가 당시 촬영한 유명인들의 사진은 미국 사회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이끌어 냈고, 그는 이를 발판으로 보그, 배니티페어, 롤링스톤 등 전 세계 내로라하는 매체들과 작업하며 인상적인 광고 캠페인들을 제작했다. 라샤펠은 그를 일으켜 세운 워홀뿐만이 아니라 무하마드 알리, 랜스 암스트롱, 데이비드 베컴, 안젤리나 졸리, 리어나도 디카프리오, 마이클 잭슨, 마돈나, 레이디 가가, 에미넴, 제이지, 칸예 웨스트 등 유명인들과 세대를 넘나들며 작업했고, 더 나아가 뮤직비디오·라이브 공연·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서의 명성도 이어갔다.    'Elton John: Never Enough, Never Enough'(1997) ⓒDavid LaChapelle [사진=아라모던아트뮤지엄 제공] 그러다 지난 2006년 라샤펠은 상업성 짙은 작업을 축소하는 대신 순수예술 사진에 집중함으로써 그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며, 이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전 세계 주요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 등에서 전시돼 왔다.  얼핏 보면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은 실제로는 CG·포토샵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직접 모든 세트를 제작해 촬영됐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인 '비너스의 재탄생'(Rebirth Of Venus)은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미술관에서 진행된 기획전 '보트첼리 리이매진'에 출품된 작품들 중 가장 주목 받은 것으로, 열대 우림 절벽에서 온종일 촬영해 모델들의 피부가 까맣게 탄 것으로도 유명하다.    'Land Scape Green Fields'(2013) ⓒDavid LaChapelle [사진=아라모던아트뮤지엄 제공]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랜드 스케이프'(Land Scape) 시리즈는 디지털 조작이나 편집 효과 없이 재활용품과 공산품으로 제작한 모형을 캘리포니아에 설치해 촬영됐다. 이 중 '에메랄드 시티'(Emerald City)의 실제 세트가 전시장에 재현돼 눈길을 끈다. 또한 가로 길이만 7m에 달하는 작품 '델루지'(Deluge)도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을 만하다.  최요한 총감독은 "광고·패션·순수예술 등 198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라샤펠의 거의 모든 것을 담은 방대한 전시이기 때문에 작가 본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작품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공간감을 삭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최 감독은 또 "인간의 탐욕, 과대망상적 소비 등 인류가 짊어져야 할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는 이 전시를 통해 우리가 얻을 것과 버려야 할 것 그리고 유지할 것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데이비드 라샤펠 독특한 극사실 미와 초현실주의에 심오한 사회적 메시지를 혼합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가이다.   그의 사진가로서의 경력은 1980년대 뉴욕의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시작 되었고, 그의 작업은 앤디 워홀의 시선을 사로잡아 ‘interview’ 매거진의 포토그래퍼로 기회가 주어졌다. 그가 촬영한 interview 매거진의 유명 셀러브리티 사진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곧 여러 정상급 매체들과 작업하며 그의 세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광고 캠페인들을 제작하였다. 그는 광고분야에서 이례적인 사진작가이고, 광고 이미지에 비판을 담아내거나 종교와 도덕적 은유를 담아내고 있다. 독창성에서 결코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작품은 이미 패션과 광고계의 전설로 불려왔다.   VOGUE(이탈리아, 프랑스) Interview, Vanity Fair, Rolling Stone, i-D 매거진 등 정상급 매거진 커버와 내지를 장식했으며 앤디 워홀, 제프 쿤스, 필립 존슨, 랜스 암스트롱, 힐러리 클린턴, 무하마드 알리, 데이비드 베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안젤리나 졸리, 투팍 샤쿠르, 마돈나, 에미넴, 파멜라 앤더슨, 릴 킴, 우마 써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브리트니 스피어스, 아만다 르푸어, 케이티 페리,휘트니 휴스턴, 레이디 가가, 제이지, 니키 미나지, 칸예 웨스트 등 유명 셀러브리티와 작업하며 눈길을 끌었고, 더 나아가 뮤직비디오, 라이브 공연,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독을 맡으며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2006년, 데이비드 라샤펠은 상업 사진 작업을 축소하고 순수 예술 사진에 집중함으로써 그의 근원으로 돌아갔으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상업 갤러리와 전 세계 주요 박물관,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하게 되었다.   30년이 넘는 그의 활동은 대중문화, 미술사, 스트리트 문화, 사회적 규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으로부터 지속해서 영감을 받았으며 21세기 팝 문화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그의 작품에 투영한다. 언제나 사회적 영향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물질세계를 초월한다.         Secret 3  ⓒ David Lachapelle _ Red Hot Chili Peppers; In Pink, Venice Beach. Los Angeles 2001 증거 : 아라모던트 미술관의 M2 전시실은 만 19세 이상만 관람할 수 있다.  핫핑크로 뒤덮인 위 사진 속 남자들은 다름 아닌 ‘레드 핫 칠리 페퍼스’다. 다소 충격적이지만 유쾌함이 듬뿍 묻어나는 그의 사진 중 몇몇 작품은 성인만 관람할 수 있는 M2 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데이비드 라샤펠은 “사람들은 폭력적인 게임이나 영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면서 우리의 몸을 들여다보는 일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고 말하는 것으로 ‘19금 사진 전시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라샤펠은 사람의 ‘몸’을 순수하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하는 작가다.  Secret 4 톱스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뭔가 특이하다 ⓒ David Lachapelle _ Still Life : Heath Ledger Hollywood, California 2009-2012, ? David Lachapelle _ Still Life : Michael Jackson 01 Hollywood, California 2009-2012 증거 : 왁스 박물관에 전시됐던 스타들의 부서진 밀랍상을 촬영했다.  라샤펠은 수많은 톱스타를 자신의 카메라 앞에 세웠지만, 그 중 평범한 사진은 단 한 컷도 없다. 어느 날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국립 왁스 박물관(National Wax Museum of Dublin)’의 밀랍 조각상이 파손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부서진 스타들의 얼굴을 촬영한 독특한 작품을 완성했다. 스타가 가진 ‘권력’의 속성이란 결국 순간적인 것임을 직유하는 작품. 강렬한 이미지와 구도가 인상적이다.  Secret 5 이번 전시의 준비기간은 무려 3년이다 ⓒ David LaChapelle _ This is My House; New York, 1997, ⓒ David LaChapelle _ What Was Paradise Is Now Hell; New York 증거 : 작가 데이비드 라샤펠에게도 이번 전시는 아주 중요하다.  같은 작가의 전시라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펼쳐지게 된다. 한국 아라모던아트뮤지엄에서 11월 19일부터 내년 2월 26일까지 열리는 는 무려 3년에 걸쳐 준비한 결과물. 덕분에 이 전시에서 1980년대 초기작부터 1990년~2000년대 초반까지 그가 꾸준히 작업해온 결과물을 대부분 만날 수 있게 됐다. 전시 작품의 수가 총 180여 점으로, 총괄 디렉터 최요한은 “데이비드 라샤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라고 밝혔다. 뉴욕, 포틀랜드, 로스앤젤레스, 베를린, 프라하 등에 흩어져 있는 전 세계 라샤펠 팀과 함께 준비한 이 전시라니, 데이비드 라샤펠 작가 본인에게도 무척 중요한 전시일 수밖에 없다.  ==========================   데이비드 라샤펠의 전시를 보는 세 가지 키워드. 하나, 그의 사진이 특별하다는 것 라샤펠은 어릴 적부터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그는 이것을 어떤 '부름'이 있었다고 했다). 사진을 공부했고, 생계를 잇기 위해 앤디 워홀을 찾아갔다.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만든 잡지 < 인터뷰 > 에 그를 소개한다. 데이비드 라샤펠이 패션 사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보그' 'GQ' '롤링스톤'... 패션 잡지와 맺은 인연은 십 년 넘게 지속된다. 운이 좋았고, 감각이 있었으며, 빨리 자리를 잡은 그는 쉬지 않고 일한다. 안젤리나 졸리, 레이디 가가, 우마 서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이클 잭슨, 힐러리 클린턴까지.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그의 피사체가 되었다. 그는 셀러브리티를 촬영했기 때문에, 유명 인물을 촬영할 만큼 실력자이기 때문에 유명했다. 라샤펠은 이 시기를 술회했다. "패션 잡지 일을 하면서 사진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고민했던 것 같다. 나는 약 15년 간 패션 잡지 일을 했고, 점차 내 작업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것이다. 패션 잡지 일을 하면서 세계를 다각도로 보게 된 덕분이다. 패션 잡지에서의 일은 일종의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등장인물만으로도 눈에 띈다. 생전의 마이클 잭슨, 알렉산더 맥퀸과 나오미 캠벨을 위시한 당대 최고의 모델들이 있다. 사진은 철저히 계산된 세트에서 촬영되었고, 초현실적이다. 때론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비현실적으로 공존하는 사진 속 이미지들은 때론 신비롭고 때론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현실을 기록하되 비평의 시각을 함께 담고 있다는 것'. 라샤펠은 이번 전시를 컨설팅한 이정용 이사의 말처럼 "대중에게 전달력 있는 몇 안 되는 세계적인 작가"다. 관객은 강렬하고 흡입력 있는 작품들 앞에서 속도를 늦추게 될 것이다. 둘. 그의 코멘트, 내러티브를 읽어라 한창 패션 잡지 일에 열을 올리던 1990년대, 라샤펠은 미국의 모든 것을 사진에 담으려고 했다. 여기서 미국의 모든 것이란, 미국이 추구하는 본질과 사고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담으려 했다는 얘기. 그의 작품은 작업 초반부터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의 사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생전의 마이클 잭슨이다. 그가 대천사 미카엘이 되어 악마를 정복한 모습이다. 그런데 정복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웅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외로운 전사의 모습에 가깝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우상을 필요로 하다가도 그들이 추락하는 것을 목격하려는 비뚤어진 쾌락을 가진 대중을 향한 일침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유명한 작품 '비너스와 마르스'를 패러디한 것이다. 마르스를 정복하는 미의 여신 비너스가 원작이라면 이것은 마르스에게 정복당하는 비너스를 보여준다. 여기서 좌측 나오미 캠벨은 유럽에 정복당한 아프리카를 상징한다. 유럽에 침탈당한 아프리카를 표현하기 위해 소품 선택에 고심한 라샤펠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사진 속 세 아이는 양이 있는 곳에서 위협적으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고, 마르스 옆에는 정복의 부산물로 보이는 황금십자가와 데미안 허스트의 해골을 연상시키는 낡은 다이아몬드 해골이 뒹굴고 있다. 르네상스 회화에 매료된 라샤펠의 영감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셋. 그의 결행, 전후의 차이를 느껴라 그에게는 2006년이 중요한 시점이다. 패션 잡지를 위한 작업을 모두 내려놓고 무작정 하와이로 건너가 농장을 일구던 해다. 이후의 사진들은 좀 더 조밀한 메시지를 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패션 잡지보다는 갤러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난 일중독이었다. 들어오는 모든 일을 거절하지 않고 수락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경쟁에 실패할까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을 2006년에 그만두었다. 패션 잡지 일을 하지 않기로 했고, 하와이로 가 농장을 일구며 자연 안에 있었다. 자연은 피난처다. 나는 마음의 균형을 찾았다. 그런 삶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돈의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할머니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용기를 가져라. 편지의 마지막에 늘 그녀는 이렇게 써 주었다. 나는 정말 용기를 얻었고 삶을 바꿨다." 그는 이곳에서 앞으로는 갤러리를 통한 작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을 라샤펠은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표현했다. 위 작품은 1997년에 작업한 것이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데이비드 라샤펠의 작품은 패션 세계나 할리우드 시스템보다 종교적 숭고함과 같은 내면적인 것에 치중한다. 2005년 작품으로 '파괴' '재해'라는 주제를 담았다. 폐허가 된 배경을 뒤로하고, 오뜨꾸뛰르 의상을 입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있다. 이 작품은 물질만능 강박증에 대한 라샤펠의 풍자가 신랄하다. 작가는 말하려는 메시지를 초현실적인 세트 연출과 비현실적인 크기 대비, 강렬한 색채 스펙트럼을 통해 전하고 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다. '아름답지 못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이를 기록하여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이것이 라샤펠이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 명작들이 파괴되어 물속에 잠긴 모습이다. 강렬한 이미지 안에 담긴 미술시장을 향한 날선 비판이 읽힌다. "누군가는 내 작품이 예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관계없다. 나는 글래머, 뷰티, 플래시를 수긍한다. 육체는 상품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써 이것을 조명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에 확신을 가진 작가의 단호함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라샤펠이 한국 관람객에게 전하는 말이다."한국에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서울(그는 '소울 Soul'이라고 했다). 재미있고 기분 좋다. 예측하지 못했던 미래다. 여행을 많이 해 보니 사람은 어디가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알고 예술에 공감한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연결된다. 내 전시를 보는 이들이 일부나마 마음이 동하길 기대한다. 전시를 본 후에 당신에게 어떠한 울림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러한 전시를 통해 '연결'되는 게 중요하다."  
252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 로드니스미스 댓글:  조회:4092  추천:0  2016-12-19
[출처] 포토그래퍼 "로드니 스미스 Rodney Smith" - 필름으로 찍다|작성자 Slamming Owner       마치 상상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기묘한 느낌. 반할만하지 않나요? ㅎㅎ 멀리 문 사이로 보이는 인영이 신비스럽기도.. 약간 섬짓하기도 하죠.ㅇ     첨엔 몰랐는데 밑에 쏘나타라고 써있는 걸 보고, 아.. 이번 신형 쏘나타 옥외광고로 로드니 스미스 사진이 쓰였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네요. 왜 이제 알았지? 로드니스미스 팬 자격이 없네요 헛..     이렇게 펜스 전시된 로드니스미스의 작품들 +0+ 이건 공짜로 로드니 스미스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아직 못 보신 분들은 꼭 한번 가서 보세요. 삼성역 지하철에서도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근데 어쩐지 제가 아끼던 사람이 막 모든 사람에게 유명해지는 싫은 기분..모다?! ㅎㅎ     로드니 스미스는 이쪽에 관심 없는 분들에겐 조금 생소할 수 있으니, 사진을 좀 찍는 분이거나 사진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대부분 들어보았을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사진작가죠.     그냥 가기 아쉬워서 코엑스에서 한 작품, 한 작품 담아봤어요. 발로 찍은거라..양해를;;;ㅋㅋ     이 옥외광고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면에서는 로드니스미스의 작품은 사진이라기 보다 추상화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않나요??     초현실주의적인 로드니스미스의 작품들은 마치 하이패션 잡지를 보는 듯…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인위적인 사진이지만 작가의 재치와 의도를 파악하는 재미가 있어요 ㅎ   쏘나타 광고 카피와 로드니스미스의 작품의 조화 역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자동차의 본질에 대한 컨셉을 표현하려 한 거 같아요~   사실 그의 사진에는 항상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의 시선은 사진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며, 로드니 스미스 광고의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열쇠로 작용하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잘 정돈된 느낌의 배경과 인물이 등장하지만 흔한 화보의 시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로드니스미스는 촬영을 시작할 때 항상 모델에게 “모델이 되지 말고 당신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인위적인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 안의 모델들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이유랍니다.   모델이 가장 자연스러운 시선을 보낼 때나 행동을 포착할 때 그의 사진은 예술이라고 불립니다. 실제로 이번에 쏘나타 광고에 쓰인 작품에서도 그런 그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죠. 본질을 나타내는 RUN, TURN, STOP, PROTECT 각 단어의 컨셉에서 광고 속 모델은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본질을 표현합니다.       “떨림 없는 손이 텅 빈 심장을 대체할 수 없다.”   로드니 스미스가 했던 유명한 말인데요. 이는 훌륭한 사진은 결코 ‘기술의 결과’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떨림 없는 손으로 카메라를 잡고 있는 듯한 유려한 기술 역시 중요하지만 진정한 예술가라면 기술은 사진작가가 가지고 있는 영혼과 심장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죠,   즉 본질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다는 이야기인데… 쏘나타 광고 역시 자동차의 기술보다는 기본기에 대해 강조하고 있고, 결국 자동차의 본질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 찾아 보니까 로드니스미스가 자신의 사진을 쏘나타 광고에 쓰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고 하네요~~         45년 이상의 일러스트 경력의 뉴욕출신 사진작가 로드니 스미스는 세련되지만 다소 엉뚱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진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상상적이고 꿈을 연상케하는 사진임에도  매우 아름다운 그의 작품은 99%가 직접 셧터를 누른 것들이다.   스미스는 예일대를 나와 뉴욕타임즈와 같은 회사들과 함께 일했다.                   출처; 데일리건설뉴스       Remembering the Legendary Rodney Smith (1947-2016)   전설적인 패션 사진작가 '로드니 스미스(Rodney Smith)'   지난 12월 5일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필자- 죽림@*;ㅡㅡㅡ 사진을 정리하던중 하직소식 접하고 깜짝!!! 뭉클... 인젠 그의 사진작품을 볼수 없다니...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또한 잊지 못하는...)   그는 1975년에 Yale대에서 사진을 전공했으며, 젊은시절, 이스라엘과 인도, 프랑스등을 돌며 수많은 사진을 담아왔다.   그렇게 50년가까운 세월을 자신만의 개성적인 흑백사진으로 커리어를 쌓아온 사진 작가다. (2002년쯤에야 처음 컬러필름 사용)    그는 독특하게도 Hasselblad 501카메라에 120mm(medium format)필름, 80mm렌즈를 고집해 왔다.   그의 사진에 대한 개인적 느낌은;ㅡ   고전적인 재료와 미니멀한 구성으로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감성을 주며, 기발하거나 낯선 효과가 한가지쯤 섞여있어 보는 재미를 주는 사진이라 말할 수 있다.   예일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The NY Times, Vanity Fair, Esquire, New York Magazine, Ralph Lauren 등과 작업을 해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 경험은 작가에게 있어 안주인과 같다.   빈센트 반 고흐 : > 언젠가는 내 그림이 내 생활비와 물감값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줄 때가 올 것이다.   >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화가를 두려워한다.   뚤르즈 로트렉 :  > 보는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적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더욱 적다.   "그림이란 비례와 균형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수직선은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를 향한  인간의 의지가 담긴 것이며,  수평선은 모든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포용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연의 외형을 버리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 그림속의 수평과 수직선들은  어느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표현이다." -피에트 몬드리안-     "중요한 것은 감수성밖에 없다.  이 길을 통해 절대주의 예술은 순수 표현에 이르게 된다." "연기처럼 사라질 형상을 바라지 말고, 진실만을 보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다." -파울 클레-       "그림이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대상이란 대상들이 서로 조화되고,  나 자신 그 대상들과 조화될 때 이외에는 내게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조화를 얻게 되면  모든 것을 가능하고 옳게 만들 수 있는 지적 무존재에 도달하게 된다." - 조르쥬 브라크-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 "작품이라는 결과보다도 예술가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신세계가 진정한 예술의 본질이다."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 -마르셀 뒤샹-   사실주의 쿠르베  -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  ->사실주의를 대표할만한 명언으로 천사는 본적이 없고 사실이 아니기때문에 그릴수 없다는 지극히 사실주의적발언입니다.   "Art is either plagiarism or revolution. "미술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다 - Paul Gauguin(폴 고갱)[프랑스 화가, 1848-1903]   "Art is the lie that makes us realize the truth"   "Still, there is a calm, pure harmony, and music inside of me." ("아직도 내 안에는 고요하고 순수한 조화, 그리고 음악이 있다.") - Vincent van Gogh(빈센트 반 고호)[네덜란드 화가, 1853-90]   L'amour de l'art l'essence meme de la vie [라무흐 들 라흐 엘 레썽스 멤 들 라 비] 예술에 있어서의 사랑은 삶의 본질 그 자체이다.    
250    러시아 추상파미술의 선구자 화가 - 바실리 칸딘스키 댓글:  조회:4627  추천:0  2016-12-19
  칸딘스키, 까마귀 Vassily #Kandinsky,"Les Corbeaux" (1907)   칸딘스키, 모스크바 1 Kandinskii, Mosca I, 1916. buona giornata a tutti 칸딘스키, 우월한 곡선 Dominant curve -1936 Wassily Kandinsky 칸딘스키, 얕고 깊은 것 Vasily Kandinsky, Shallow-Deep, 1930, Private collection 칸딘스키, 푸른 하늘 Sky Blue, Wassily Kandinsky, 1940       칸딘스키, 몬티의 아마조네스 Wassily Kandinsky - 'Amazzone Sui Monti' c.1918 칸딘스키, 두 개의 타원, 1919. 에르미따주 미술관 Wassily Kandinsky, Due ovali 칸딘스키, 빨-파-노 "Yellow-Red-Blue" (1925), Wassily Kandisnky (Dessau-alten, Germany) 칸딘스키, 겨울풍경 Vasily Kandinsky, Winter Landscape, 1909, The State Hermitage Museum 칸딘스키, 균형화 Vasily Kandinsky, Balancement, 1942, Private collection 칸딘스키, 편지 Wassily Kandinsky - 'Littera'   칸딘스키, 블루 2 Joan #MIRÒ, "BLUE II" 1961 칸딘스키, 하얀색 2 Vasilij Vasil'evič #KANDINSKIJ, "ON WHITE II" 1923     칸딘스키, 구성 GOOD NIGHT by Vasilij Vasil'evič KANDINSKIJ         칸딘스키, 검은 선들 Vassily Kandinsky, Black Lines, 1913,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바실리 칸딘스키(러시아어: Василий Кандинский, Wassily Kandinsky, 1866년 12월 16일~ 1944년 12월 13일)은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art theorist)이다.      피카소와 마티스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  일반적으로 그는 최초의 현대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 - 그 작품은 1910년에 그려진 수채화로서 무제이나 그 그림 뒤에 추상수채화라는 문구가 있다.  몇몇의 역사가나 예술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구성VII(1913)의 스케치와 비슷하다는 구실로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작자로서의 자격을  손에 넣기 위해 이 수채화의 날짜를 앞당겨 쓴 것이라고 추측했다.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University of Dorpat) 교수가 되었다.  거기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다.   1896년에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school of Anton Ažbe)와 미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에서 수학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1922년에서 1933년까지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나치로 인해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에 프랑스국적을 취득하였고 1944년 Paris 근교 Neuilly-sur-Seine에서 사망하였다.   바우하우스에서 강의록을 기초로 하여 1926년에 그의 제2 이론적 저작인 《점·선·면》이 출판되었다.  회화의 기초적인 평면에 대한 기본적인 조형요소의 관계에 대하여 기술한 것인데,  제1의 저작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무미건조하게 되기 쉬운 조형의 기본적인 사고에  직관과 상상의 비합리적인 내용을 기술한 독특한 저작이다.   당시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려던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그와 같은 존재는 매우 귀중했다.  바우하우스에서 배운 조각가 막스 빌은 ‘칸딘스키는 청년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확실한 판단력을 길러 주어,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 비판을 환기시킨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의 제작에 있어서 1910년 ~ 1920년의 기간에는 색채와 형태의 격렬한 다이너미즘이 1920년 ~ 1924년의 시기에는 자취가 없어지고,  대신 명확한 형식에 의한 구축적인 콤퍼지션(구성)이 현저해진다.  이는 모국에서 구성주의와 절대주의(쉬프레마티슴)를 체험한 성과이다. 1925년 ~ 1928년까지는 이 경향이 더욱 순화되어 이른바 원(圓)의 시대에 들어간다.  1931년 그는 이집트·그리스·터키로 여행하여 동양의 풍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이 여행에서 얻은 인상이 익어서 다채로운 형태 가운데에 동양의 여정(旅情)과 향수를 표현한 것은 1933년 파리에 이주한 뒤의 일이었다. 이 만년의 제작으로 그는 원의 시대의 기하학적인 추상을 탈피하고 형식과 색채에 의한 서정적 내지는 환상이 넘치는 음악적 해조(諧調)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내면의 표출을 주안점으로 하는 추상의 이념은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인 제작에서도 그에 의하여 기초가 닦여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칸틴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출처]ko.wikipedia.org/wiki/바실리_칸딘스키   오컬트가 추상미술의 탄생에 끼친 영향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지는 추상미술. 추상미술의 탄생에 크게 기여한 칸딘스키를 통해 추상미술의 배경에 흐르는 영혼과 초감각적 세계,        바실리 칸딘스키 (Vasily Kandinsky-1866-1944)   바실리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 정치, 경제를 전공하고 그 대학에서 강사를 지냈다. 30세에 오르파트 대학 교수직을 사양하고 뮌헨으로 옮겨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된 그는 '팔랑스' '청기사' '푸른 넷' 등 그룹을 결성했고 연간지 『청기사』를 간행했으며, 저서로는 『점 선 면』 『회고』 『음향』 등이 있다.      Counter Gravitation (embossd)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11x14 inches 3   ``흑색은 죽음 뒤의 육체의 침묵, 생명의 끝과도 같다..''  -- 바실리 칸딘스키, 1911   Mit und Gege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0x24 inches 4     Small Yellow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0 inches 6     On White II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4x37 inches 7         Heavy Red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10     In Blue (on special paper)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0x16 inches 11     Hommage to Grohmann (on special paper)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15   Study for Composition No. 7 (gold foil text)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1x24 inches 16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바실리 칸딘스키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미술에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866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으나, 법률가의 길 대신, 1896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창작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숨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 르오! ……" 칸딘스키는 1944년 사망할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사라 캠블   Study for Improvisation No. 7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3x30 inches 18     Improvisation #29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4x37 inches 19     Abstract Variations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21     Kleine Welten IV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24     Standhaftes Gru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25   Yellow - Red - Blue Wassily Kandinsky 16x12 26     Parallel Diagonals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11x14 inches 27     Successio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0x16 inches 28   Mood Line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12x16 inches 32       Decompose Tensio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1 inches      Ho Capito Che Ti Amo / Wilma Goich            순수 추상화의 탄생을 이끈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아버지, 혹은 청기사파의 창시자인 동시에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이론가로도 꼽힌다.   “색채는 건반, 눈은 공이,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Vasily Kandinsky-1866-1944)   바실리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 정치, 경제를 전공하고 그 대학에서 강사를 지냈다. 30세에 오르파트 대학 교수직을 사양하고 뮌헨으로 옮겨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된 그는 '팔랑스' '청기사' '푸른 넷' 등 그룹을 결성했고 연간지 『청기사』를 간행했으며, 저서로는 『점 선 면』 『회고』 『음향』 등이 있다.      Counter Gravitation (embossd)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11x14 inches 3   ``흑색은 죽음 뒤의 육체의 침묵, 생명의 끝과도 같다..''  -- 바실리 칸딘스키, 1911   Mit und Gege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0x24 inches 4     Small Yellow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0 inches 6     On White II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4x37 inches 7     A Place to Walk in Murnau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9   Heavy Red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10     In Blue (on special paper)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0x16 inches 11     Hommage to Grohmann (on special paper)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15   Study for Composition No. 7 (gold foil text)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1x24 inches 16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바실리 칸딘스키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미술에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866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으나, 법률가의 길 대 신, 1896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창작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숨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 르오! ……" 칸딘스키는 1944년 사망할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사라 캠블   Study for Improvisation No. 7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3x30 inches 18     Improvisation #29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34x37 inches 19     Abstract Variations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21     Kleine Welten IV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24     Standhaftes Gru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2 inches 25   Yellow - Red - Blue Wassily Kandinsky 16x12 26     Parallel Diagonals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11x14 inches 27     Successio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0x16 inches 28   Mood Line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12x16 inches 32       Decompose Tension Artist: Wassily Kandinsky Size: 24x31 inches      Ho Capito Che Ti Amo / Wilma Goich                  [출처] 12월 13일 - 난징 대학살, 1937 / 바실리 칸딘스키, 1944|작성자 idreamup      
249    "마술적 초현실주의"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통하다... 댓글:  조회:3750  추천:0  2016-12-18
  Rob Gonsalves   Gonsalves  /Toward the Horizon Gonsalves / As Above And So Below Gonsalves / A Change Of Scenery Gonsalves / Acrobatic Engineering Gonsalves / A stral Projections Gonsalves / Autumn Architecture Gonsalves / Bedtime Aviation Gonsalves / Candle Power   Gonsalves / Carved In Stone Gonsalves / Castle On The Cliff Gonsalves / Cold Comfort Gonsalves / Community Portrait Gonsalves / Deluged Gonsalves / Flight Plan Gonsalves / Here Comes The Flood   Gonsalves / House By The Railroad   Gonsalves / In Search Of Sea Gonsalves / Ladies_Lake Gonsalves / Listen ingFields Gonsalves / Making Waves Gonsalves / Medieval Moonlight Gonsalves / Mosaic Moat Gonsalves / New Moon Eclipsed Gonsalves / Nocturnal Skating Gonsalves / On the Upswing. Gonsalves / Performer and Public Gonsalves / Pulling Strings Gonsalves / Roots And Wings Gonsalves / SteppingStones Gonsalves / Still Waters Gonsalves / Sun Sets Sail Gonsalves_TableTop_Towers Gonsalves_The Labyrinth   Gonsalves / The Light Of ALate Night    http://www.sapergalleries.com/Gonsalves.html   Rob Gonsalves는 195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주된 취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상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12세 때 그는 건축학에 깊이 빠져들었고 원근화법을 배워가며 상상의 건물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Dali와 Tanguy 등 초현실주의 작가의 소개 이후, 16살의 Rob Gonsalves는 그의 첫 작품을 그렸다. 마그리뜨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에셔의 정밀한 환상의 투시도화는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학에서 그는 건축학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고,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미술 활동을 했다. (해석 부정확..) 1990년 토론토 실외 미술 전람회에서 그의 작품들은 고무적인 찬사를 받아냈고, 덕택에 Rob Gonsalves는 전업 화가가 되길 결심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분류하지만 Rob은 신중한 계획과 의식적 사고가 만들어낸 그의 작품은 순수한 초현실주의와는 차별된다고 믿는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외부 세계 (대부분의 초현실 화가가 외면하는) 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인식 가능한 인간 활동을 내포한다; 정밀하게 고안된 환상주의적 기법을 통해 말이다. Rob은 일종의 '마술'을 사실적 풍광에 도입하기를 시도했다. 그 결과, '마술적 사실주의'란 용어는 그의 작품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불가능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Rob의 작품들은 현재 세계의 수많은 개인 수집가, 기업, 대사관, 미 상원의원들에 의해 수집되고 있다.    [출처] Rob Gonsalves 1 / 롭곤살베스 / 랍곤살베스|작성자 orangeheejoo        랍 콘살베스   Rob Gonsalves was born in Toronto, Canada in 1959. His main childhood hobby was drawing from imagination in various media. By age 12 his interetst in architecture developed as he learned perspective drawing techniques and began to do his first paintings and renderings of imagined buildings. After an introduction to the surrealist styles of Dali and Tanguy he began his first paintings at age 16. 랍 콘살베스는 1959년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의 주요한 취미는 상상력에 의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였다. 원근법에 의한 드로잉 기술을 배우면서 그의 나이 12살 즈음에는 건축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고, 그는 첫번째 그림과 상상의 건물 도면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달리와 탕기의 초현실주의 스타일을 접한 후 그는 16살에 첫번째 그림을 시작했다.   The "magic realism" approach of Magritte along with the precise perspective illusions of Escher came to be huge influences in his work.  에셔의 정확한 원근법에 바탕한 환상과 맥을 같이 하는 마그리트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접근은 그의 작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In his post college years, Rob worked full time as an architect, painting trompe l'oeil murals, theater set painting and other projects in his spare time. 대학졸업후, 롭은 정식 건축가로 일했으며 남는 시간에는 로이으 벽화의 송풍기를 채색하고, 무대 세트에 그림을 그리고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After an enthusiastic responce in 1990 at the Toronto Outdoor Art Exhibition, Rob decided to paint continually. 1990년 토론토 야외미술제의 열렬한 반응 이후, 롭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했다.     Although most people categorize his work as surrealism, Rob believes his work differs from pure surrealism due to the fact that his work is deliberately planned and results from conscious thought.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분류함에도 불구하고, 롭은 그의 작업이 착실히 계획되고 의식적인 생각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순수한 초현실주의와는 구분된다고 믿는다.   His ideas are largely generated by the external world (which many surrealists tried to ignore) and involve recognizable human activities, using carefully planned illusionist devices. 그의 아이디어는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시하려 애쓰는) 외부세계에서 많은 부분 유래되고, 신중히 계획된 환상가의 장비들을 사용하면서 알아볼 수 있는 인간 활동들을 수반한다.     Rob tries to inject a sense of magic into otherwise realistic scenes. As a result, the term "magic realism" describes his work more accurately. Rob's work is an attempt to represent the human desire to believe in the impossible. 롭은 마술의 느낌을 현실적인 장면에 주입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명칭이 그의 작업을 보다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롭의 작업은 불가능 속에서 믿어지는 인간의 욕구를 대변하려는 것이다.   Educated at the Ryerson Polytechnical Institute and The Ontario College of Art, Rob's original work and Limited Edition Giclees are collected by numerous individuals, corporations, embassies, and a US Senator. 라이어슨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와 온타리오 칼리지에서 교육받은  롭의 원본작업과 한정판 Giclees는 많은 개인,회사,대사관,미국 의원들에 의해 소장되고 있다.          
248    화가, 그림그리기, 그리고 "앉을 자리, 설 자리 없는 세상" 댓글:  조회:1583  추천:0  2016-12-18
  ^오^   게시물 스크랩 신고하기 광고
247    미국 천재소녀 화가, 시인 - 아키아나 댓글:  조회:5677  추천:0  2016-12-18
246    "시간의 상자"를 열어제껴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라... 댓글:  조회:2030  추천:0  2016-12-18
주말의 여유, 휴식이 필요합니다. ^^  그림책 한 권을 꺼내 본 후 조용히 눈을 감고 상상의 시간을 보내기...  보통 책은 읽는다고 이야기들 하죠. 이 책은 글이 없는 그림책이라 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시간상자, 어떤 그림책 일까요?     표지 디자인은 카메라 렌즈 주위를 물고기들이 유영합니다. 많이 특이하죠?     한 소년이 바다 갑각류(소라게)를 관찰하다 큰 파도에 휩쓸립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닷물을 뒤짚어 쓴 소년은 마침 수중카메라 하나를 발견합니다.      소년은 카메라의 필름을 "빨리 뽑는 사진관"으로 가져갑니다. (번역이 위트있어요. ^^) 인화된 사진속에는 현실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세상이 담겨 있습니다.  용궁, 외계인 등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환타지적 장면들을 모두 그려 놓았습니다.     소년은 여러장의 사진 중 특이한 한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양의 소녀가 한 장의 사진을 들고 찍은 사진입니다. 그 사진속에는 또 다른 소년이 사직을 찍고, 또 다른 소녀가 사진을 찍고. 결국 현미경으로 사진을 들여다 봅니다. 끝없는 사진, 사진, 사진들. 그 속에는 베레모를 쓴 100년이 넘은 듯한 소년까지 담겨 있습니다.             소년도 사진을 찍은 후 수중 카메라를 바다 멀리 힘껏 던집니다.       카메라는 다시 왕오징어, 해마, 페리칸, 펭귄이 어디론가 옮기고, 옮기고.       마지막 장에는 남태평양의 한 해안가에서 혼자 외로이 앉아 있는 한 아이가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 택배를 보낸 듯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끝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듯 한 이런 장면. 한편의 영화에서나 본 듯 한데요.       작가 데이비드 위즈너는 만화의 컷 장면을 이 그림책에 녹여 놓았어요. 그리고 판타지적 요소는 마그리트,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그림책 중 한권. 오늘은 "시간 상자" 였습니다.  
245    모든 것, 그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댓글:  조회:2185  추천:0  2016-12-18
  오늘은 marcel caram작가님의 작품속으로 여행하세요.       그림에 그려지는 이미지들은... 마치...암호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해골은 삶의 무의미함을 표현할때 쓰는 이미지입니다.   아름답기만 할것같은 생명을 가진것들은 언젠가는 시들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ㅠ     ​ ​ 환한 달빛아래 화초를 돌보는 사람들이 몽환적인 느낌입니다. ​ ​ ​ ​ ​연약한 꽃잎이 잠겨있는 자물쇠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 부드러운 꽃잎과 대조되는 차가운 자물쇠의 무게가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 ​ ​   ​먼지를 털기에는 너무 높은 의자를 어떻게 올라가야만 할까요...??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돌맹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출처] 부천 취미미술 화실_초현실주의 그림 그려보기|작성자 그림이좋은사람들  
244    러시아 초현실주의 화가 - 블라디미르 쿠쉬 댓글:  조회:3772  추천:0  2016-12-18
초현실주의 그림    
243    현실에서 볼수 없는 모습을 실제처럼 나타내게 하라... 댓글:  조회:2133  추천:0  2016-12-18
      노르웨이의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의 작품이다.    그는 일단 합성한 작품이 나올 것을 염두해두고 합성할 이미지나 사물을 의도적으로 촬영하여 작업한다.   순간적으로 포착된 사진이 아니라 계산된 아이디어를 환상 속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하나의 사진에 수백개의 레이어가 있지만 합쳐진 사진은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게 한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실제처럼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출처: 아트리셋 갤러리        
242    상상의 결과물은 "독학"에서 나온다... 댓글:  조회:1942  추천:0  2016-12-18
2016-08-03 16:41:00.0     상상력 끝판왕 ‘방구석 초현실주의’ 등장!  초현실주의 작가 이기택     사진을 보는 순간 ‘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비상한 상상력에 한 번, 그 상상을 현실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실력에 또 한 번. 스물세 살 대학생의 작품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모든 게 ‘독학’의 결과물이라면?      △ 작품명 '거인'   ‘초현실주의’. ‘이걸 돈 내고 보나’ 싶을 정도로 난해하며 굉장히 기괴하고 어려운 미술. 우리는 보통 ‘초현실주의’를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기택 작가(영남대 산업디자인 3)의 작품에서 비춰지는 ‘초현실주의’는 재미있다. 빨래를 걷으며 하늘에 떠 있는 해도 함께 걷어내고, 거울 속의 내가 거울 밖의 나에게 물을 따라 주기도 한다.    배경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일상이고, 한번 쯤 상상했을법한 유쾌한 발상이 실현된다. 이 작가는 “나도 초현실주의를 잘 몰라서 공부하고 있다”라며 “나의 작품은 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을 연출해 보여주는 것”이라 설명했다.    내 작품이 초현실주의라고? 그게 뭔데?   이 작가가 초현실주의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은 군 복무 중이다. 자기개발시간에 딱히 할 게 없던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입시미술을 공부하고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할 만큼 미술에 대한 애정이 컸던 그의 즐거운 취미 생활이었다. 완성한 그림은 휴가를 나와 SNS(페이스북 '작은전시공간' 페이지)에 업로드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초현실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했다. ‘초현실주의가 뭔데?’                          △ 작품명 '형'. 지친 회사원의 모습을 표현했다.   “도베르만이 넥타이를 매고 있고, 그 밑으로는 축 처진 손을 그렸어요. 회사원인 형을 생각하며 완성한 그림이죠. 흔히 회사원을 ‘개처럼 일한다’고 하잖아요. 축 처진 손은 지친 몸과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요. 그런데 이런 작품 몇 개를 올리니 ‘초현실주의 그림이네’라는 반응이 있더라고요. 그게 뭔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에릭 요한슨’이라는 스웨덴의 예술가를 알게 됐어요. 초현실주의 사진 작품 활동을 하는데, 거기에 완전 꽂혔죠. 그때부터 그분의 모든 작품과 인터뷰, 강연 영상을 섭렵했고 저도 한국에서 비슷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작품명 '22살 부를 가지고 싶은 욕망'. 좋은 구두가 부의 상징이라 생각하던 시절 그린 작품.    군 전역 후에는 본격적인 사진 작업에 나섰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촬영을 하고 편집해 작품을 만들었다. 사진도 배운 적 없고, 포토샵도 독학으로 익힌 것이라 ‘고퀄’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기발랄한 연출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가 거인이 된다면?’이라는 발상으로 만든 ‘거인’이라는 그의 첫 작품은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었고, 다음 작품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졌다.    “사실 전문가가 보았을 때는 형편없는 실력이죠. 그때는 카메라도 없어 휴대폰으로 촬영했거든요. 포토샵도 독학으로 배운 실력이고요.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힘든 줄 몰랐어요.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사진 찍고 바로 작업해 SNS에 업로드 했죠.”    거인이 돼 담벼락을 넘고, 두루마리 휴지산에 오르다 이 작가의 작품은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일상 속 흔한 풍경이 배경이 되고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상상이 구현된다. 이 작가의 집 안, 화장실, 아파트 앞 주차장, 학교 등이 단골로 등장하고 개미만큼 작아지는 일, 상어 등에 앉아 출근하는 일 등이 현실처럼 표현된다.    △ 작품명 '마그리트 사과'   “‘아이처럼 생각하자’가 제 작업의 슬로건이에요. 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그 시간에 휴대폰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대신 일상의 사물을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하죠. 가을 풍경을 보면서 ‘요정이 나무를 몰래 염색시킨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 ‘풍선이 가라앉고 내가 공중에 뜨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봐요.”   실제 작업을 하는 과정은 단순하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촬영에 대한 콘티를 대략적으로 짠다. 촬영도 모델도 편집도 모두 혼자서 하다 보니 오히려 작업은 더 수월한 편이다. 머릿속에 있는 그 위치에 서서 원하는 포즈를 취해 촬영을 하고, 마음에 드는 컷이 나오면 바로 PC와 연결해 편집을 하면 된다. 사진 작업의 경우 편집은 보통 3~4시간 정도 걸리는 편.    정작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일이다. 그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작품이 나오는 건 금방이다”라며 “한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 1주일에서 2주일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 작품명 '화장실'   이 작가의 작품에는 모두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거인처럼 커져 아파트 담벼락을 넘기도 하고, 총으로 변하는 삼각대를 들고 진지하게 방아쇠를 당기기도 한다. 그는 “인물 없이 작업한 사진을 올릴 경우 무단으로 도용되는 경우가 많아, 저작권을 위해 작품 속 모델이 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효과를 통해 초현실주의 사진이 완성됐을 때는 그 모습이 그럴싸해 감탄하게 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심오한 연기를 하고 있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작품명 '휴지산'   “처음에는 사진 찍는 게 정말 부끄러웠어요. 집 안에서 찍은 사진 작품이 많은 이유 중 하나죠.(웃음) 용기 내 밖에 나가도 아파트 주차장 정도? 제가 사는 아파트가 좀 오래된 곳이거든요. 그래서 밖에서 삼각대 놓고 찍고 있으면 주민들이 와서 ‘측량하는 거냐’, ‘땅 보러 왔냐’고 많이 물어보셨어요. 재개발되는 줄 알고 기대하신 건데, 제가 그냥 사진 찍는다고 하면 실망하고 가시더라고요.(웃음) 워낙 아파트 앞에서 많이 찍어 ‘아파트 홍보대사냐’는 말도 들었고요. 요즘은 1인 크리에이터가 많아져 부끄러움이 덜해졌어요. 조금씩 활동 반경을 넓히는 중이에요.”    독학으로 배운 영상, 히트다 히트~  그림으로 시작해 사진으로 인지도를 쌓은 그는 최근 영상 작업물을 통해서도 히트를 치고 있다. 사진보다 초현실주의가 더욱 극대화된 영상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재미있고 독특한 효과와 설정이 더욱 눈에 띈다. 종이에 슥슥 그린 종이비행기가 실물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기도 하고, 휴대폰 액정을 툭툭 두드리면 물처럼 찰랑찰랑 거리는 놀라운 모습이 연출된다. 이런 다양한 영상 촬영 및 편집 기술 역시도 그가 독학으로 익힌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외국 실무자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따라했어요. 제가 필요한 특수 기술 위주로 배우다가 나중에 기본기를 익히는 방식으로 했죠. 워낙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다보니 딱 필요한 것만 배우는 게 좋더라고요.”                   △ 작품명 '빨래해치우기'. 빨래 후 하늘의 '해'까지 치워버리는 모습을 재치있게 연출했다.   영상 작업은 기존의 사진 작업에 비해 훨씬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꼬박 1주일을 작업해야 30초 분량의 영상물을 완성할 수 있다. 사진보다는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반응이 좋아 요즘에는 영상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기택’ 이름 석 자가 알려지자 기업에서도 협업 제의를 해오기 시작했다. 자사 제품 포스터 시안을 제작하거나, 온라인상에 노출된 재미있는 영상 광고 등을 만드는 것이다. 모 피자 브랜드에서는 전단지의 피자 사진에서 진짜 피자를 꺼내 먹는 장면을 연출해 화제가 되었고, 휴대폰에서 일회용 렌즈가 떨어져 나오는 신기한 장면도 연출했다.    “인지도가 적을 때는 한 맥주 회사의 광고 시안 작업을 하면서 맥주를 받은 적도 있어요. 너무 많이 받아 아직도 집에 남아 있습니다.(웃음) 아무래도 이런 방식의 작업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 비용 책정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제 뒤를 따라올 후배들을 위해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는 작업을 하지 않으려고요.”                           △ 이기택 작가의 프로필 사진    페이스북이 VR을 지원하면서 그는 VR작업도 시작했다. 사진을 마우스로 누르고 돌리면 360도로 사진 속 장소를 모두 볼 수 있다. 그는 “앞으로는 VR영상에 집중할 예정”이라며 “한국의 VR작가로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VR은 초현실주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소스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VR관련기업에서 협업 제의도 오고요. 외국에서도 많은 연락이 와요. 특히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제 한국적인(?) 배경에 많이 관심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한국을 알린다는 책임감도 막중합니다. 에릭 요한슨에게 제 작품 활동을 소개하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어요. 아직 답장을 받지 못했지만 제가 한국에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그 분에게 검증받고 싶기도 하고요. 답장이 올 때까지 열심히 해볼래요.”    /글 박해나 기자  사진 이기택 제공   
241    동심을 자극하는 초현실주의 사진들 댓글:  조회:2061  추천:0  2016-12-18
      ▲ ©Vincent Bourilhon 동심을 자극하는 아름답고 따뜻한 초현실주의 사진이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며 사랑받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 빈센트 뷔리옹(Vincent Bourilhon)은 여섯 살 때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해 이후 매일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사진으로 풀어내며 인기를 모으고 있다.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 ©Vincent Bourilhon  
240    정해진 길 아니라 자신만의 길 만들어 나가라... 댓글:  조회:3208  추천:0  2016-12-18
포토샵으로 만들어내는 초현실주의 아티스트 포토샵으로 만들어 낸 초현실주의 작품들= 사진 속 장면을 보시면 아이들이 비행기의 날개에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오늘의 초현실주의 아티스트는 바로 아이들의 아버지 아드리안 솜메링(Adrian Sommeling)은 포토샵으로 이런 상상력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냅니다. 포토샵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최고의 편집들이기 때문이죠. 창조적인 생각과 탄탄한 편집실력 덕분에, 보시는 것 처럼 사막의 피라미드를 한 손으로 들 수 있는거죠.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를 타고 들판에서 요트를 타면서 관람차 자전거도 타고다니고 마블의 실버서퍼마냥 건물을 타고다닐 수도 있습니다.  강아지처럼 점프하면서 원반을 물려고 하는 장면...   거인으로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임을 드러내는 아버지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포토샵으로 패러디하는 모습 미술관에서 명작에 손을 대는 모습 (사실 이 장면은 초현실주의 사진이라고 느껴지기엔 좀 약한 것 같은데...) 지하철을 잡고 날아가는 모습 이건 일상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아버지 솜멜링(Sommeling)은 예술가로 교육을 받아서, 직접 브러쉬나 캔버스에 익숙해져야 했지만, 컴퓨터로 디지털 그래픽(CG)작업을 20년 동안 계속해왔습니다.  그 결과 이런 재미있고 유쾌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정해진 길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간 멋진 아버지이자, 아티스트였습니다. 지금까지 포토샵으로 만들어내는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였습니다. [출처] 포토샵으로 만들어내는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작성자 리뷰양  
239    잘 알려지지 않은 초현실주의 화가들 댓글:  조회:12497  추천:0  2016-12-18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초현실주의 화가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고전 신화들은 부친 살해, 영아 살해, 근친상간 등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욕망이 저지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죠.  프로이트는 이런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신화가 실제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오이디푸스나 엘렉트라 등의 이야기를 연구해 자신이 규명한 정신분석학인 ’콤플렉스’ 증세에 이들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프로이트는 문학과 미술 작품을 연구해 작가의 잠재의식이 작품에 드러난 것으로 보고 그 의미를 분석하고자 했습니다.  초현실주의란 프로이트의 이런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꿈과 무의식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 문학, 예술 사고를 말합니다. 초현실주의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1921년 빈을 여행하던 중에 프로이트를 만났습니다. 1924년 브르통의 을 기점으로 결성된 초현실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촉발된 다다이즘(Dadaism)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성과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서구문명 전반에 대한 반역을 꿈꾸었던 예술 운동이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이성에 속박되지 않는 상상력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인간정신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들은 의식적인 정신을 개입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손을 놀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초현실주의는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합니다. 초현실주의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화가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죠.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인 르네 마그리트는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띄워놓는다든지, 낮이 밤으로 변해 있는 등의 정신의 전위(데페이즈망)를 보여 줍니다.  그는 과거 유럽의 정치•문화를 이끌어온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며 자신만의 차별화된 작품 스타일을 구축했습니다. 당시의 ‘문학예술운동’은 기존질서와 가치를 거부하고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탐구하여 기성미학과 도덕에 관계없이 표현의 혁신을 꾀한 운동이죠.    오늘은 전에 여러 번 포스팅을 했던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를 제외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당시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초현실주의’를 형성했던 화가들, 사실 그들이 작품은 매우 다양하여 초현실주의적 양식으로 범주화해서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각자 나름대로 자지탐구의 수단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죠. 이들은 ‘자동기술법’을 사용해 거의 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제작하거나 꿈의 세계에 대해 편집증적 탐구를 했습니다. 이제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만나볼까요?    폴 델보 Paul Delvaux 1897~1994    폴 델보(Paul Delvaux 1897~1994) 는 벨기에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입니다. 그는 신비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 못박혀 있는 듯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는데요, 마치 꿈 속에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델보는 처음에는 건축을 공부하였으나 1920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 입학 화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이탈리아의 조르조 데 키리코, 그리고 나중에는 같은 벨기에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에게 감명을 받아 1935년 초현실주의 대열에 합류했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데 키리코처럼 고대 건축물에서 영향을 받았고, 형태와 공간을 자유롭게 다룬 16C 초의 마니에리슴 양식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근대 미술 작품의 대가였던 델보의 세계는 ‘마술 같은 리얼리즘’이었습니다. 데보는 신화만 바꾸면서, 계속해서 같은 장면만을 그렸는데요, 이는 달빛 속에서 엄숙하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의 벌거벗은 여자가 창백한 얼굴에 무관심한 표정으로 있는 모습입니다.  고전적인 스타일을 활용하여 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황량한 풍경 속을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는 여인들, 폴 델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입니다. 배경에는 그리스 신전이 자주 쓰이지만, 이것은 순결 그대로의 나부(裸婦)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증표이죠.    어두컴컴한 밤하늘, 여인의 피부에 와 닿은 하얀 달빛, 푸르스름한 밤의 공기, 어딘지 모르게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폴 델보의 그림은 한없이 스산하고 섬뜩한, 아찔한 냉기를 뿜어냅니다.   이브 탕기 Yves Tanguy 1900~1955   이브 탕기(Yves Tanguy 1900~1955) 역시 초현실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한 화가입니다. 젊은 시절 배를 타고 항해를 하다가 24세 무렵 파리의 한 화랑에서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는데요, 1925년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그룹에 참여하게 되죠. 이브 탕기는 그 후 주요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모두 참가하며 의욕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1927년 파리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열어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고요.    이브 탕기는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1927년경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개발합니다. 그 해 파리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열어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고요. 그의 작품은 무척추 해양동물이나 조각 같은 바위 형태의 신비하고 기이한 물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호한 형태들은 부드럽고 매우 자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 배경에는 끝없는 수평선과 시간을 초월한 몽상적 요소가 있는 황폐하고도 밝게 빛나는 풍경이 보입니다. 미국에 정착한 뒤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은 더욱 금속적인 성질을 띠었습니다. 탕기는 기괴하고 비논리적인 그림으로 초현실주의 원칙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미술가가 되었죠.      앙드레 마송 Andre´Masson 1896~1987   앙드레 마송(Andre´Masson 1896~1987)이 회화에서 의도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의 자동기술과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그려지는 자동묘사 그림입니다. 마송은 주로 드로잉적 회화 물감과 모래를 혼합한 모래 그림 작업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앙드레 마송은 헤라클레이토스, 니체,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저작으로부터 자신의 예술형성의 원천을 얻어냈습니다. 1912년 파리에 건너가 옛 거장들의 주요 미술장르에 속하는 프레스코 벽화를 공부한 마송은 1922년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그 후 초현실주의자들과 합류하여 자동기술에 의한 데생을 시도합니다. 마송은 강렬한 제스트로 젊은 세대의 미국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죠. 앙드레 브르통과 알게 된 직후인 1924년에 마송은 재빠른 선묘에 의한 드로잉 작품을 통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감성을 격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의 드로잉에는 기이한 동물, 신화적 이미지가 자주 등장합니다.  1947년 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에 정착한 이후로는 격렬한 운동감을 버리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유연한 조형언어를 구사, 초현실주의와의 연관은 사라지게 되었죠. 그 후 마송은 소묘와 판화가로서의 주요 작품과 더불어 많은 무대장치와 의상, 삽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삶은 세상의 ‘상식’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신비하고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 화가들, 이들의 그림은 난해하기 짝이 없고 언뜻 보아서는 비정상적으로도 보입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물과 공간 사이에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관계를 끊어 버렸습니다. ’조금만 다르게 보아도 현실은 신비롭게 다가올 수 있다’ 는 르네 마그리트의 말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상식에 도전하고 고정관념을 뒤집는 독특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이었습니다.  ===================================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탐구하여 기성 미학과 도덕에 관계없이 표현의 혁신을 추구한 1920년 중반에 일어난 예술 운동.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 문예 운동으로 문학, 회화, 영화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합리성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반예술 운동인 다다이즘에 기원을 두고 있으나 초현실주의는 적극적 표현과 창조적 태도, 내적 충동의 표현을 강조하여 다다이즘과 구별된다. 1924년과 1929년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자신이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예술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과 논리와 도덕을 초월한 정신으로 예술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현실주의는 순수 정신의 자동성 또는 잠재의식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자유 연상을 말하며 이성이나 미적·도덕적 선입견에 의한 통제가 부재한 상태에서 행해지는 내적 사상의 표현이다. 초현실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이다. 무의식 이론과 꿈에 대한 몰두, 성적 상징체계를 강조하는 프로이트 사상은 당시 영화감독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은 인간의 외적 행동을 통제하고 있는 무의식의 원천에 들어감으로써 좀 더 진실된 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현실주의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의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 1929)이다. 이 영화는 면도칼을 든 두 남자가 한 여인의 눈을 베어내는 클로즈업, 피아노 위에 죽은 채 엎어져 부패하고 있는 당나귀와 피아노를 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한 남자의 손바닥에 나 있는 구멍으로 무리를 지어 나오는 개미 떼, 이유 없는 살인이나 신체 절단, 상징적인 변태 행위 등 충격적인 자극을 통해 관객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일련의 격렬한 반항심을 끌어내기 위한 초현실주의 영화의 전형이다. 부뉴엘은 꿈과 리얼리티가 그 어떤 속박도 없이 자유로운 제스처가 뒤섞인 극렬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영화에서 장면을 구성하는 논리는 제시되지 않으며 그것의 정당성도 모호하다. 관객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장면에 직면하여 그 이유를 스스로 규명해야 한다. 초현실주의 영화감독으로 또 다른 중요한 인물로는 장 콕도(Jean Cocteau)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오르페의 유언〉(Le Testament d'Orphée, 1960)을 통해 문자와 그림, 스틸 사진과 슬로 모션, 이중 노출, 몽타주, 역모션 등 많은 특수 효과를 사용하는 한편 스스로 카메라를 향해 말하고 기묘한 형상의 인체 인형을 등장시키는 등 진기한 형상들로 가득 찬 공간을 만들었다.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 1929), 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 공감하는 많은 미술가들이 새로운 전위적 미술운동에 동참했다. 키리코(Chirico, 1888~1978), 마그리트(Magritte, 1898~1967), 달리(Dali, 1904~1989), 에른스트(Ernst, 1891~1976), 바로(Varo, 1908~1965), 미로(Miro, 1893~1983), 델보(Delvaux, 1897~1994), 탕기(Tanguy, 1900~1955), 칼로(Kahlo, 1907~1954) 등을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미술가로 꼽을 수 있다. 낯선 장소에 현실의 사물을 조합시켜 환상을 창조 브르통은 “한 마리의 말이 토마토 위를 달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은 백치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이상의 소재를 뒤섞으라고 한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주요 표현 방법인, 데페이즈망(depaysement)을 강조한 내용이다. 전치, 전위법 등으로 번역되는데, 사물을 본래 용도 · 기능 · 의도에서 떼어내어 엉뚱한 장소에 나열함으로써 초현실적 환상을 창조한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Lautreamont)의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해부용 탁자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아름답다!”라는 구절이 제공한 영감을 적극 수용하면서 대표적 표현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에른스트는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용도가 정해진 하나의 현실(재봉틀)이 제자리가 아님을 느낄 장소(해부대)에 있으면, 또 다른 현실(우산)은 소박한 용도나 신분을 모면할 수 있다. 그러면 기존 현실은 거짓 절대성에서 상대를 우회하여 새로운 진실된 시적 절대성으로 자리를 옮긴다.”각주1) 의식이 만들어낸 합리성과 상식에서 벗어나 우연과 무질서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사랑의 찬가〉 키리코, 1914년 키리코의 〈사랑의 찬가〉는 새로운 표현 방법을 회화적으로 개척한 작품이다. 생뚱맞게도 아폴론 석고 두상과 빨간색 장갑이 함께 걸려 있다. 배경도 서로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앞에는 고대 양식의 건축물이, 뒤로는 현대식 건물이 낯설게 서 있다. 커다란 녹색공도 그 자리에 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어디 한 군데 논리적인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비상식적 · 비논리적 상황이 만들어내는 황당함 자체가 화가의 의도일 것이다. 야페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대 회화에서 의식의 역할 문제는 회화 제작의 한 수단인 ‘우연적 그림 그리기’와 관련된다. ··· 키리코 작품에 등장한 대리석 두상과 빨간 고무장갑의 우연적 조합을 떠올릴 수 있다.”각주2) 키리코는 근대 합리주의 전통에 반기를 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공감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나에게 인생의 무의미함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녔는지를 가르쳐 주고, 이 무의미함이 예술로 변용될 수 있음을 깨우쳐 준 사람들이다. 그들이 발견한 무서운 공허야말로 물질에 바쳐진 영혼 없는 아름다움, 마음을 혼란케 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체다” 그의 그림은 의식 위에서 합리성의 견고한 성을 쌓고 있던 근대 서양 미술 전통에 내던져진 통쾌한 도전장이다. 키리코가 초현실주의 회화의 새 장을 열었고, 에른스트 · 달리 · 마그리트 등 대표적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무의식 세계에서 끌어낸 모습을 도발적 변형을 통해 표현 사물을 원래 모습에서 벗어나 전혀 다르게 묘사하는 것도 초현실주의 미술이 즐겨 다루는 방법이다. 특히 화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표현할 때 의도적 변형이 자주 나타난다. 사물 고유의 모습을 파격적으로 바꾸는 작업 자체가 합리주의 전통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의 의미를 사실적 표현, 인위적 균형과 조화에 맞춰온 회화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도발적 변형에서 찾았다. 그래서 브르통은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아름답지 않다.”라고 한다. 정신분석 이론이 강조하는 상징의 역할을 회화에 적극 도입하기 위해서도 변형은 유용한 방법이다. 〈작은 사슴〉 칼로, 1946년 칼로의 〈작은 사슴〉은 파격적 변형이 무의식 표현에서 얼마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칼로의 얼굴을 한 사슴이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린다. 목에서 엉덩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의 화살을 맞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바닥에 꺾여 널브러진 나뭇가지는 다가올 운명을 암시한다. 오른편 나무는 굵은 가지가 무자비하게 꺾여 나간 흉한 몰골이어서 그녀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내면의 표현이 외부 세계를 압도한다. 자신의 몸에 화살을 꽂아두고 응시하는 화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단순한 과장이라면 신기한 느낌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과 내면이 그림 속에 진솔하고 소박하게 표현되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낀다. 유아기와 청소년기에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등 계속되는 신체적 고통으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저병 증세로 오른쪽 발가락 절단 수술을 했고, 척추 수술 중의 세균 감염으로 6차례나 재수술을 받았다. 상당기간 의료용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살았다. 병원에서 칼로는 침대 천장에 큰 거울을 붙여 파괴된 자신을 응시하며 자신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나는 항상 혼자였고,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인 자화상을 그린다.”는 그녀의 말은 가장 인간적인 신음이다. 〈작은 사슴〉은 운명적 고통이 일상을 지배하는 그녀에게 일기장과 다름없는 그림이다. 아니 몇 점을 제외하곤 자화상으로 가득한 그녀의 그림 전체가 더 이상 솔직하기 힘든 자서전이고 일기장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동시 배치를 통한 초현실적 환상 현실과 비현실을 그림 안에 뒤섞음으로써 의식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무의식의 입구로 안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여기에 확실성을 부여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의 인간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적 작용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형성된 어떤 마음 상태를 반영하여 사물을 본다. 그 마음에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공존한다면 현실은 이미 비현실과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빛의 제국〉 마그리트, 1954년 마그리트는 이러한 이율배반적 이미지를 통해 현실과 의식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빛의 제국〉은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 언뜻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밤풍경이다. 짙은 밤인 듯 집과 주변의 나무는 세부 형체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시커멓다. 다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과 가로등 빛에 비친 대문이나 담벼락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하지만 하늘은 화창한 한낮의 풍경이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넘실댄다. 태양빛이 작렬하는 낮 시간의 야경인 셈이다. 시간이 그림 안에서 뒤죽박죽 섞여 있다. 우리는 밤 풍경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낮 풍경을 보고 있는가? 이미지와 시각의 배반을 통해 인식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마그리트의 설명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세상이 단지 정신적 표현으로서 내부에서 경험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을 외부의 것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현재 발생하는 일을 과거에 놓는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은 일상의 경험이 고려하는 단 하나의 정제되지 않은 의미를 상실한다.” 마그리트는 확실한 대상과 확실한 주체라는, 서구의 근대적 인식 틀 자체에 근원적 의문을 던졌다. 우리는 흔히 감각과 의식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고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세계를 구분한다. 마그리트는 의식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는 뿌리 깊은 사고방식에 비웃음으로 답한다. 정신분석 이론이 강조하듯이 무의식에서 시간 구분은 의미를 상실한다. 유아기의 경험, 심지어 아득한 옛날 초기 인류의 경험이 최근의 마음을 지배하기도 한다. 마그리트는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합리주의 전통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또한 낮이 상징하는 의식과 밤이 상징하는 무의식이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지닌다. 신화를 통한 초현실 세계의 묘사 프로이트나 융을 비롯해 많은 심리학자들은 신화를 통해 인간이 처한 조건과 마음 상태를 통찰할 수 있다고 여겼다. 프로이트가 부친 살해, 영아 살해, 근친상간 등 인류에게 각인된 억압된 성적 욕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신화에 관심을 가졌다면, 융은 집합적 무의식의 원형을 탐구하기 위해 신화에 주목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 역시 빈번하게 그리스 · 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신화적 소재를 통해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달리의 〈나르시스의 변모〉도 그러한 시도 중 하나다. 나르시스 역시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다.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피우는 것을 도와준 괘씸죄로 에코에게 다른 사람의 말 가운데 마지막 음절만 반복하는 무서운 형벌을 내린다. 이 저주로 인해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여위어 가던 에코는 나르시스도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달라고 복수의 여신에게 빈다. 그리하여 나르시스는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 샘만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탈진하여 죽는다. 그가 죽은 자리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이후 ‘나르시스(수선화)’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르시스의 변모〉 달리, 1937년 그림을 보면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을 하염없이 응시한다. 물에 몸의 일부를 담가서 사랑하는 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하다. 응시를 넘어 물에 비친 자신과 일체화된 느낌이다. 두 가지 모습인데, ‘나르시스의 변모’라는 제목답게 이미지 변형 과정이 나타난다. 왼편의 어렴풋한 실루엣에서 오른편으로 오면서 머리는 달걀로, 머리카락은 수선화로, 몸은 손가락으로 변형이 이루어진다. 뒤편의 벌거벗은 사람들은 인간의 본능적 속성으로서 나르시스 현상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신화를 빌어, 자기 육체나 자아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상태인 자기애(自己愛) 경향을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 부른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인간은 유아기에 자신을 관심이 집중되는 1차 나르시시즘 단계에 있다가 점차 외부 대상인 어머니나 이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애정생활이 위기에 직면하여 상대를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2차 나르시시즘 단계에 들어간다. 달리가 어렴풋한 실루엣에서 더 견고한 사물의 형태로 나르시스의 변모 과정을 묘사한 것이 나르시시즘 단계 변화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2차 나르시시즘 단계는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1차 단계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정상적 과정에서 이탈하여 자아의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장애에 이른 상태, 자아 감각의 인플레이션 상태라는 점에서 병리적 증상이다. 나르시스는 화가 자신일 수도 있다. “나는 일생 동안 정상성에 익숙해지는 게 몹시 어려웠다.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간이 보여주는 정상적인 그 무엇이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달리 스스로 정상적 인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정신적 장애를 인식했다. 하지만 자신의 비정상적 측면과 장애를 사랑했고 심지어 자랑했다. 브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을 때 “나는 초현실주의 자체니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고 말한 것도 자아 감각의 인플레이션 상태를 보여준다. 기호를 통한 조형적 초현실주의 상징은 프로이트 특히 융의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연히 초현실주의 미술작품 안에는 다양한 방식의 상징이 등장한다. 히스테리 증상을 분석하기 위해 심리학자들이 꿈을 분석해야 하듯이, 초현실주의 미술작품은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을 분석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치가 도형을 비롯한 추상화된 기호다.   〈어릿광대의 사육제〉 미로, 1924년 미로의 〈어릿광대의 사육제〉는 기호가 벌이는 축제와 같다. 수많은 종류의 도형과 직선, 곡선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꼼꼼하게 살피면 몇몇 군데에서 새와 물고기, 곤충, 기괴한 모습의 어릿광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알 수 없는 도형과 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놀이하듯 자유롭게 미끄러지는 검은 선과 강렬한 원색의 추상적 기호가 인상적이다. 이 그림은 미로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시절, 굶주림에 혼미한 의식 상태에서 천장 위에 떠다니는 초현실적 환상을 그림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브르통은 미로를 “가장 초현실주의적 화가”라고 극찬했다. 브르통이 강조한 초현실주의 표현 기법에 가장 근접한 화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브르통은 억압된 욕망과 꿈, 잠재의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사고의 실제 과정을 표현하려고 의도하는 순수한 심적 자동주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토마티즘(automatism)으로 알려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 떠오른 대로 받아쓰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자동적 묘사를 말한다. 무정형의 기호로 가득한 미로의 그림은 자동주의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점에서 브르통의 구미에 가장 잘 맞았을 것이다. 미로는 스스로도 브르통과 연관된 자기 그림의 특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림은 지적인 숙고도 아니고, 느낌이나 감정도 아니며, 오직 나의 신체에 물결치는 에너지, 드로잉의 모든 경험, 손의 자성이다.”   =============================================== 초현실주의 그림은 참 재미나다. 한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는 시계가 달리의 그림에서 쭈욱 늘어져 과연 제대로 갈까 싶고, 마그리트의 구름무늬 박힌 비둘기,  키리코의 썬글라스 낀 조각상, 이브 탕기의 해저세계, 무한 순수 선의 세상 후앙 미로 등 무한대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 초현실주의는 재미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뭔가 기발한 것을 그려보자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서 탄생된 사조이다.  먼저 이 초현실주의의 기원이 된 것은 다다였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이 터져 더 이상 한가롭게 몽마르트에 모여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예술가들이 스위스로 가 기존의 세상을 뒤엎고 싶은 절망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다다는 스위스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지만 너무도 극단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몇 년 뒤 끝나게 된다. 왜냐면 이들은 전쟁이라는 그 사태 앞에서 기존의 모든 질서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부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이 다다가 해체되고 나서 이를 조금 다른 방향에서 시작한 것이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이다. 먼저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피카소의 친구였던 시인 아폴리네르가 1917년 만들었고, 당시 시인이었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14살부터 시를 쓴 브르통은 의대생으로 1차 대전 중 각지의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공포로 고통받는 병사들을 보며 분명 여러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 때 나온 프로이트를 탐독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자각하는 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 초현실주의는 이렇게 프로이트와 짝을 이루게 된다.                            원래 초현실주의는 문학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또 어려운 단어 하나가 등장하는데, 자동기술법(오토마티슴)  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아닌 우리들은 사실 이것이 어떻게 되는 건지 잘 이해는 안되지만, 암튼 이것은 글을 쓸 때 의식적으로 뭔가를 정해놓고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 가는데로 쓰는 거라고 한다. 좀 더 전문적으로는 의식적인 통제를 거치지 않은 창조행위...  이런 무의식적 행위가 어.. 멋진데..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면 더 좋다.    가장 단순하게 보면 이런 게 오토마티슴이다. 걍 손 가는데로 그린다. 어..이런 건 나두 잘 하지^^   인상파, 표현주의, 야수파, 입체파 등등 있었지만,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그림 그리는 방법이 탄생한 것이다.   이 자동기술법이라는 건 당시 작가들과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브르통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쓴 시나 그림이야 말로 진실의 과정이 기록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 그룹에 몰려들었고, 당시 다다(다다는 1922년에 해체된다)보다 오히려 더 나은 사회 변화 방법이라고 느꼈다. 사회 변화? 그들은 이 초현실주의가 단순히 예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개인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면에서 인간의 경험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전쟁이라는 불가해한 일을 일으키는 이러한 사회의 기존 관념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 (나중에 그들은 공산주의와도 접촉했지만, 결국 합치점을 찾지 못해 그들과는 결별하게 된다. )                               1925년 미로, 만레이, 클레 등이 참여한 제 1회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렸다. 1926년에 모임은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키리코, 달리, 자코메티가 가입했다. 당시 가장 큰영향력을 가진 예술가 중 한사람인 피카소는 가입하지 않았다(샤갈의 그림도 초현실주의풍이지만, 그는 자신은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1929년 드디어 달리가 모임에 가입하여 1930-1935년 사이 일련의 유명작품들을 발표하면서 , 초현실주의는 1930년대 황금시대를 이룩한다.  지금도 우리가 초현실주의 대표로 보는 달리와 마그리트가 초현실주의의 황금시대를 연 것이다. 아무리 이론이 좋으면 뭐하나... 달리나 마그리트 그림은 사람들에게 초현실주의에 대해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마그리트는 공룡알만한 벨 3개를 이렇게 공중에 띄워놓는 그림이나 파이프를 그리고선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를 쓴 그림을 통해 달리와 창작력을 겨루게 된다(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창작은 이때부터 무려 30년간이나 계속된다 )   이렇게 초현실주의 그림은 후앙미로와 막스 에른스트의 오토마티슴에 의한 자유로운 화법과 마그리트와 달리처럼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하지만 일상적인 것을 깨는 방법이 있다.     1930년대는 프랑스 뿐 아니라 영국, 뉴욕에서도 대규모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리고, 또 2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많은 예술가들은 비교적 안전한 땅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브레통도 1941년에 미국으로 감으로써 초현실주의의 무대는 미국으로 옮겨졌다. 이들의 영향은 폴록등의 추상표현주의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초현실주의의 끝을 어디로 보는가는 학자들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2차대전으로 이미 초현실주의는 거의 끝물이라 보기도 하고, 1966년 브르통의 사망을 끝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초현실주의의 영향력은 상당히 막강하다. 전쟁 이후 예술가치고 적든 크든 분명 이 초현실주의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이 초현실주의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세계의 유수 박물관에서의 초현실주의전시는 수많은 관람객을 모으고 있다.       
238    [쉼터] - 물, 빛, 소리 그리고 령혼... 댓글:  조회:1786  추천:0  2016-12-14
                                                                          아름다운                           
237    독일 화가 - 막스 에른스트 댓글:  조회:13061  추천:0  2016-12-06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이상한 나라의 코끼리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루통(Andre Breton)을 통해 주창된 초현실주의 운동은 시인과 같은 문학가를 중심으로 출발하였다. 브루통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에 따르면 초현실이란, 이성에 의한 모든 통제에서 벗어난 인간의 순수한 사유작용이 가능한 절대적 현실로써,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 심리적 자동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정상적인 태도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합리성이나 윤리 등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정신의 진정한 해방. 브루통은 예술이 인간정신의 본래적인 힘을 회복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브르통은 꿈이나 최면상태에서 벌어지는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깨닫고 언어이외의 다른 표현방식, 즉 이미지를 통한 순수한 창조물을 필요로 하게 된다. 어떤 상식적인 해석도 불가능한 상태의 묘사. 결국 초현실주의는 입체주의의 뒤를 잇는 새로운 미술운동 또한 등장시키게 된다. 막스 에른스트, , 1921    최초의 초현실주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는 브루통으로 부터 가장 위대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은 막스 에른스트(1891.4.2-1976.4.1)의 작품이다.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 문학에 상응하는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기이한 형상들을 탄생시키며 초현실주의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 시켜 나갔다.     “꿈처럼 전개되는 환상적이고 모순적인 이미지의 전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1900년에 발간한 은 인간의 꿈을 통한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열면서 문학과 미술등 사회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도 공유된 이 새로운 논리는 초현실주의가 주창한 ‘인간 무의식으로의 접근‘에 걸 맞는 무 이성 적이고 무 논리 적인, 꿈과 같은 이미지를 전개시키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막스 에른스트, , 1924    언뜻 평온하고 목가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는 찬찬히 들여 다 볼수록 여러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아이들은 나이팅게일 소리에 놀란 것일까?’  ‘앞쪽으로 열려진 대충 붙여놓은 문짝은 무얼 뜻하는 걸까?’  ‘마치 그림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붕위의 사람은 초인종이라도 누르려 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림의 제목과 그림이 연관이 있기는 한 걸까?’  이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은 분명 추상화는 아니지만 누구도 이 액자 속 세상의 일을 분명하게 파악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막스 에른스트, , 1927    에른스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숲의 풍경과 새의 모습은 어릴 적 경험한 아끼던 새의 죽음과 그가 자주 가던 숲에서 느낀 고독과 정적에서 연유한다.  불길하고 쓸쓸한 숲의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산란시키며 기묘한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에른스트의 상상의 세계가 가장 강렬하게 표현된 작품은 1930년대부터 제작한 콜라주 소설에서 나타난다. 막스 에른스트, , 1934 막스 에른스트, , 1934    판화 연작으로 찍어 만들어낸 에른스트의 그림소설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다가오는 충격만이 존재할 뿐이다. 에른스트의 정밀한 손끝에서 탄생한 이러한 그림소설들은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정상적인 해독의 습관을 전복시며 오늘날 까지도 그 충격효과를 보는 이에게 전달시킨다.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나뭇잎이나 동전 등 질감 있는 사물위에 종이를 깔고 연필 등으로 문질러서 상을 얻는 프로타주(frottage) 미술놀이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프로타주는 ‘문지르다’라는 뜻으로, 하얀 종이위로 연필이 지나가면서 생겨나는 물체의 형체는 원래의 그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신기하게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실행함에 있어 우연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프로타주를 처음으로 작품에 도입하게 된다.   막스 에른스트, , 1926 막스 에른스트, , 1926    어떠한 대상물에 화폭을 얹고 문질러서 얻어지는 생경한 형체는 에른스트에게 있어 프로이트적인 잠재의식을 화면에 정착시킨 결과물로 보여졌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 이외에도 데칼코마니, 꼴라쥬, 그라타주 등 무의식의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방식을 시도했다.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작품으로 인간의 내재된 본성과 충동을 탐구하고자 했던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의 출발이자 그 자체인 예술가였다. DA 300    ==================================================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세계 Ⅰ[1909~1929]- Max Ernst [German-born French Dadaist / Surrealist Painter, 1891-1976]   ​ 미술에서 불합리성을 주창한 주요인물로서 초현실주의 운동의 자동기술법을 창시했다. 젊은시절에는 정신의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졌었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본대학교를 그만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으로 복무한 뒤 허무주의적 미술운동인 다다이즘으로 전향하여 쾰른에서 다다 예술가 그룹을 결성했으며, 미술가이자 시인인 한스 아르프와 함께 잡지들을 편집했고 공중변소에서 다다 전람회를 열어 스캔들을 일으켰다. 다다 콜라주들과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여기 아직도 모든 것이 표류하고 있다 Here Everything Is Still Floating〉(1920, 뉴욕 현대미술관)라는 작품은 곤충이나 물고기의 사진들과 해부도들을 오려내어 교묘하게 배열함으로써 묘사된 이것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한 매우 비논리적인 구성작품이다. 1922년 파리로 이주했으며, 거기에서 2년 뒤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환상을 통해 작품을 창조한 미술가·문인들이 모인 초현실주의 그룹의 발기인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에른스트는 무의식에서 생겨나는 심상을 자극하기 위하여 1925년 프로타주 기법(나뭇결이나 직물 또는 잎사귀와 같은 것들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문지르는 기법)과 데칼코마니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한 기법들에서 나온 우연한 무늬들과 질감들을 관찰하면서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여러 이미지들을 떠올린 뒤, 그것들을 〈Histoire naturelle〉(1926)와 같은 소묘 연작이나 〈대삼림 The Great Forest〉(1927, 스위스 바젤 미술관)과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The Temptation of St.Anthony〉(1945, 독일 뒤스부르크, 빌헬름-렘부르크 미술관) 같은 많은 회화 작품들에 이용했다. 이 그림들에 나오는 늪지대와도 같은 광대한 풍경들은 궁극적으로 자연신비주의적인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1934년 이후로 에른스트의 활동은 점점 조각에 집중되었으며, 조각에서도 회화에서와 같은 즉흥적인 기법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오이디푸스 2세 Oedipus Ⅱ〉(1934, 뉴욕 시, 개인 소장)는 호전적으로 보이는 남근상을 나타내기 위해 균형이 불안정한 상태로 쌓아올린 나무 양동이들에서 주조해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으로 가서 수집가이자 화랑 주인인 3번째 아내 페기 구겐하임과 화가인 아들 지미 에른스트와 함께 살았다. 뉴욕 주의 롱아일랜드에 살다가 1946년 이후로는 미국 화가인 4번째 아내 도로시 태닝과 함께 애리조나 주 세도나에 살았는데, 그동안에는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받은 〈왕비와 놀고 있는 왕 The King Playing with the Queen〉(1944, 뉴욕 현대미술관)과 같은 조각들에 전념했다. 1949년 프랑스로 되돌아간 뒤로는 실험적인 작품보다는 전통적인 조각 재료를 이용하여 양감 표현법을 숙련하는 데 주로 힘썼다. 초현실주의회화 기법 1 오토 마티즘[Automatism] 자동기술법 또는 정신 자동법을 의미 이성의 통제나 미적, 도덕적 선입관이 배제된 경지에서 행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의 한 방법 미술의 영역에서는 자동적 소묘(외계의 대상과는 관계를 맺지 않고 무념 무상의 상태에서 순수하며 무한한 현상을 무의식의 정신 현상으로 표현하는 방법)라고 불림 ​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정신의 실체를 노출 시켜 주고 또한 그 정신을 사상과 분리 시키기 위한 방법 즉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유스럽고 논리적인 무의식의 세게를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순수한 심리의 자동 현상을 중요시 함 ​ 초현실주의에 있어서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즘의 '우연의 법칙' 에서 발전, 확대 되고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추상적 형태성을 부여하였음 에른스트에 의해 시작된 프로타쥬,  데칼코마니 도 오토마티즘의 일종이며 오브제도 그와 같은 것임 (오토마티즘을 자신의 표현 방법으로 선택하여 화면에 정착 시킨 대표적인 화가-안드레 마쏭, 호안 미로, 이브 탕기 등) 2. 프로타쥬[Frottage] 문질러 나타내는 표현 방법으로 에른스트에 의해 초현실주의 에 채용된 기법 나무조각, 돌, 나뭇잎 등 무늬가 있는 표면에 종이를 대고 목탄이나 연필등으로 위에서 문지르면 사물의 무늬가 베껴지므로 작가의 의식이 작용하지 않은 차원에서 우연히 나타나는 흥미로운 효과를 얻을수 있음 3. 데칼코마니[Decalcomanie]  1935년 오스카 도밍게스가 이 기법을 발명 유리판이나 아트지 드의 비 흡수성 소재에 그림 물감을 칠하고 거기에 다른 종이를 덮어놓고 위에서 누르거나 문지른 다음 떼어내면 기이한 형태의 무늬가 생김 무의식, 우연의 효과를 존중하는 비 합리적인 표현  우연성 속에서 여러가지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흥미에 이끌려 제2차 세게대전 직전에 에른스트가 종종 이용한 후 쉬르레알리즘의 작가들이 이 기법을 즐겨 쓰기 시작한 후에는 중요한 표현수단의 한 방법이 됨   4. 데뻬이즈망[Depaysement]   데뻬이즈망이란 '사람을 타향에 보내는 것'또는 '다른 생활 환경에 두는 것'을 의미 물체나 영상을 그것이 놓여 있던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나 배경, 분위기에서 떼어내 전혀 그 사물의 속성과는 연관성이 없는 엉뚱한 장소에 놓음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외관상 이질적인 상황으로 인한 심리적인 충격을 일으켜 마음속 깊이 은폐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초현실주의적인 데뻬이즈망의 원리는 입체파의 꼴라쥬로부터 출발하여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과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확대 됨   5. 꼴라쥬[Collage]   '붙이기'로서 1910년경 피카소,브라크가 시작한 큐비즘의 한 표현 방식 그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포장지, 신문지, 우표, 기차표, 상표, 인쇄물 등의 작은 것에서부터 모래, 깃털, 철사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발라 붙여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조리한 충동이나 아이러니컬한 연쇄 반응이 일어나도록 함 다다이즘에 있어서는 이 방법이 한층 대담하게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꼴라쥬로 발전 꼴라쥬가 초현실주의로 전해지면서부터 그 응용의 영역이 더욱더 확대되어 갔음 꼴라쥬는 첫째로 비유적, 상징적, 연상적인 효과를 거둠 꼴라쥬를 이용한 대표적 작가로는 막스 에른스트가 있음   Landscape with Sun. 1909. oil on canvas.60 x 80 cm . Private Collection 막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기법등 기존에 시도하지 않앗던 기법을 자신의 미술에 도입하여 흥미로운 작품을 다수 만들어 냈다. 초현싫주의라는 개념응 현제에도 통용되고 있는 단어로서 이성으로는 통제 할 수 없는초현실성을 지닌 무의식의 세계를 말한다. ​ 초 현실주의라는 개념은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에의해 주창되었는데 그는 "예술은 무의식이나 과거의 체험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제공한다"라는 말을 남긴다. 일후 프랑스의 철학자안드레 부르통은 1924년 호현실주의를 선언하는데. 그는 "해부용 테이블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라고 할한다. 현대 미술사에서 바질수 없는 초현실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Self-Portrait. 1909.oil on canvas.60 x 80 cm . Private Collection   Untitled. 1909, oil on canvas. ​   Crucifixion. 1913.oil on canvas.67.5 x 80 cm . ​   Immortality. 1913. 1913.oil on canvas.67.5 x 80 cm ​ Untitled, 1913.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   Towers. 1916. oil on canvas. 43 x 60 cm .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UK ​    Fish fight. 1917. oil on canvas. ​   Ambiguous Figures (1 copper plate, 1 zinc plate, 1 rubber cloth...). 1919. collage, gouache, indian ink, paper ​   Aquis submersus. 1919. oil on canvas. 43.8 x 54 cm.  Städtische Galerie, Frankfurt am Main, Germany ​   Family Excursions. 1919. oil on canvas.26 x 36 cm ​   Fruit of a Long Experience. 1919. oil on wood. 38 x 45.7 cm. Private Collection ​   Hat in Hand, Hat on Head. 1919. oil on panel. 29.2 x 36.8 cm .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UK ​   La Grande Roue Orthochromatique…. 1919.  gouache oi paper ​    A little sick horse's leg. 1920. collage, gouache on paper.  23 x 16 cm . Galleria Civica d'Arte Moderna e Contemporanea, Turin, Italy ​   Above the clouds. 1920. collage on paper.  Private Collection ​   Cormorants. 1920. collage, paper Dada-Gauguin. 1920. gouache, ink, paper. 40 x 30.5 cm .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 USA     Hydrometric Demonstration. 1920. collage, gouache on paper ​   Katharina Ondulata. 1920. gouache, pencil, ink, paper. 27.5 x 31.5 cm .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UK ​   Pleiades. 1920. collage on paper. 8 x 25 cm . Private Collection ​   Punching Ball or the Immortality of Buonarroti. 1920. gouache, photomontage, ink ​   Stratified Rocks, Nature's Gift of Gneiss Lava Iceland Moss…. 1920.  gouache, pencil, cardboard. 24.1 x 19.1 cm .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Switzerland, Birth-Place of Dada. 1920.  collage on paper.  ​   The Chinese Nightingale. 1920.  photomontage . 8.8 x 12.2 cm ​    The Gramineous Bicycle Garnished with Bells the Dappled Fire Damps and the Echinoderms Bending the Spine to Look for Caresses. 1920. gouache, paper. 99.7 x 74.3 cm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    The hat makes the man. 1920.  gouache, pencil, cardboard. 45.1 x  35.2 cm .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   The slug room. 1920. collage, gouache, tempera, ink, paper. 22.2 x 31.2 cm . Private Collection   The Small Fistule That Says Tic Tac. 1920. gouache, paper. 24,5 x  35.2 cm .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 The Young Chimaera. 1920. collage, gouache, watercolor, paper. 8.5 x 25.5 cm . Private Collection ​   Untitled. 1920. collage, paper ​    Untitled. 1920. collage, paper ​   Untitled. 1920. gouache, indian ink, pencil, cardboard. 25 x 30 cm .Private Collection. Birds also Birds, Fish Snake and Scarecrow. 1920. oil on canvas. 62.8 x 58 cm . Staatsgalerie Moderner Kunst, Munich, Germany   Chimera. 1920.  collage, gouache, indian ink, paper ​    Seascape. 1921. oil on canvas, 81 x 66 cm .Private Collection   The Elephant Celebes. 1921. collage, oil, canvas. 107.9 x 125.4 cm . Tate Gallery, London, UK ​ 이상한 나라의 코끼리-“꿈처럼 전개되는 환상적이고 모순적인 이미지의 전개”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루통(Andre Breton)을 통해 주창된 초현실주의 운동은 시인과 같은 문학가를 중심으로 출발하였다. 브루통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에 따르면 초현실이란, 이성에 의한 모든 통제에서 벗어난 인간의 순수한 사유작용이 가능한 절대적 현실로써,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 심리적 자동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정상적인 태도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합리성이나 윤리 등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정신의 진정한 해방. 브루통은 예술이 인간정신의 본래적인 힘을 회복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브르통은 꿈이나 최면상태에서 벌어지는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깨닫고 언어이외의 다른 표현방식, 즉 이미지를 통한 순수한 창조물을 필요로 하게 된다. 어떤 상식적인 해석도 불가능한 상태의 묘사. 결국 초현실주의는 입체주의의 뒤를 잇는 새로운 미술운동 또한 등장시키게 된다. 최초의 초현실주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는 브루통으로 부터 가장 위대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은 막스 에른스트(1891.4.2-1976.4.1)의 작품이다.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 문학에 상응하는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기이한 형상들을 탄생시키며 초현실주의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 시켜 나갔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1900년에 발간한 은 인간의 꿈을 통한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열면서 문학과 미술등 사회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도 공유된 이 새로운 논리는 초현실주의가 주창한 ‘인간 무의식으로의 접근‘에 걸 맞는 무 이성 적이고 무 논리 적인, 꿈과 같은 이미지를 전개시키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아무런 상관없는 두 대상이 화면에 그려진다. 그림의 상부에는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있고 코끼리의 코는 진공청소기 튜브 형사을 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이성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호모순적인 형상를 취하고 있다. ​ 언뜻 보면 코끼리 같기도 하고 대형 보일러(?) 같기도 한 이 기묘한 그림 〈셀레베스〉 역시 전쟁의 기억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림을 가득 채운 이미지들은 말 그대로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우선, 화면 가운데를 가득 채운 이 거대한 회색 오브제는 무엇일까? 기계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생물일까? 언뜻 보면 화면 왼쪽에 물소의 뿔 같은 것이 달려 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이 화면에 잡힌 모습은 ‘코끼리의 뒷모습’이다. 왼쪽 아래에 두 개의 상아가 삐죽 솟아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생물체는 코끼리 같다. 작품 제목인 〈셀레베스〉 역시 이 오브제가 코끼리임을 암시한다. ‘셀레베스’는 독일 전래 동요에 등장하는 단어다. “셀레베스에서 온/코끼리는 끈적끈적해/노란 엉덩이는 미끌미끌해······.” 에른스트는 아프리카 수단에 있는 옥수수 탱크를 보고 이 괴상한 생명체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물체는 단순히 코끼리나 옥수수 창고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어두운 회색 화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회색 덩어리에서 저절로 ‘탱크’나 ‘군복’을 연상하게 된다. 화면 오른편에 서 있는, 목이 잘린 채 팔을 휘두르는 여자의 모습도 전쟁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하늘에는 전투기가 막 격추된 듯, 검은색 연기의 꼬리를 끌며 떨어진다. 결국 〈셀레베스〉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어두운 기억이나 악몽이다. 결정적으로 이 그림의 장면은 꿈이 분명하다. 왼쪽 하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록색 물고기 두 마리가 나란히 헤엄쳐 가는 모습이 보일 듯 말 듯하다. 물고기가 헤엄치는 하늘, 그것은 꿈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화가들이 최전방에서 겪은 전쟁의 충격은 사실적인 테크닉으로 재현해 내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것들이었다. 이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화가들의 기법은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추상표현주의 등 근대에서 모던(modern)으로 급격히 이동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술사에서도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에른스트는 〈셀레베스〉를 통해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그저 악몽 속에서나 존재하는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른스트의 바람과 현실은 반대로 흘러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불과 20년 만에 더 잔인하고 더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으로 에른스트는 두 번이나 체포되어 생사의 고비를 넘었고, 그의 첫 번째 아내 루이즈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죽고 말았다.   The Word (Woman Bird). 1921. collage, gouache, paper.10.6 x 18.5 cm . Private Collection ​   A Friends' Reunion. 1922. oil on canvas.95 x 130 cm .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   Illustration for "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1922.  ​Series-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   Illustration for "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1922.  ​Series-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   Oedipus Rex. 1922. oil on canvas. 102 x 93 cm . Private Collection ​   The Arrival of travellers (Illustration for "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1922.  Series-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collage, gouache, paper. 11 x 14 cm. Private Collection    The Harmonious Fagot (Illustration for "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1922. Series-The Misfortunes of the Immortals ​   Untitled (Dada). 1922.  oil on canvas. 31.5 x 43.2 cm .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Lugano-Castagnola, Madrid, Spain ​   At the first clear word. 1923. oil on canvas.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 최초의 언어(1923) 에른스트는 1922년 파리에 나와 시인 폴 에류아르와 공동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그가 시도한 작업은 묶은 책자들을 잘라 여러 가지로 구성하여 공상적인 하나의 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물의 시적인 재해석은 다다의 기본 이념을 지속한 것으로 '무관계한 두 개의 내용을 무관계한 하나의 화면에 같이 부착함에 의해 강렬한 시적 경이'를 일으킨다는 콜라지의 테크닉으로서의 쉬르레알리즘의 중요한 방법으로 발전되고 있다. ​ 에른스트는 바로 이러한 방법의 천착에 의해 쉬르레알리즘에 대표적인 작가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개의 사각형으로 뚫려진 판자와 손, 이상한 식물, 도마뱀 같은 곤충이 한 화면 속에 공존하고 있는 이 작품은 곧 어떤 불안한 드라마가 연출될 것 같은 기묘한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화면 왼쪽 판자에 붙어 있는 도마뱀과 가운데 뚫려진 창을 통해 나와 있는 여인의 손이 끈과 구슬에 의해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구슬과 도마뱀 꼬리와 연결된 줄이 무언가 예기치 않은 사태를 곧 빚어낼 것 같은 예감을 주는데, 두 개의 이상한 식물도 이 기묘한 장면을 효과있게 연출해 주고 있다​ ​ 실에 곤충에 매갈리고 맞물려 교미하는 듯한 모습을 취한다.또한 동그란 물체를 쥐고 있는 여인의 김 손가락이 사각의 창 밖으로 살짝 드러나 있다. 이로 보아 작 품은 관객들로 하여금 섣적인 상상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서로의 형상이 매우 이질적이다. ​    Castor and Pollution. 1923. oil on canvas. 100 x 73 cm. Private Collection ​   Enter, Exit. 1923. Enter, Exit. 1923.   Long Live Love. 1923. Saint Louis Art Museum, St. Louis, MO, USA Of This Men Shall Know Nothing. 1923. oil on canvas. 64 x 81 cm .  Tate Gallery, London, UK   Pieta (Revolution by Night). 1923. oil on canvas. 88.9 x 116.2 cm . Tate Gallery, London, UK ​ 이작품은  막스 에른스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중의 하나이면서  자신의 자화사으로 불리기도 하느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연상되는 것이 미켈란제로의 피에터 상 조각인데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듯이 중절모를 쓴 아버지에게 안겨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   Saint Cecilia (Invisible piano), 1923. oil on canvas. 82 x 101 cm . Staatsgalerie, Stuttgart, Germany ​   The wavering woman. 1923. oil on canvas. 97.5 x 130.5 cm .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 ​ Ubu Imperator. 1923. oil on canvas. 81 x 100 cm . Georges Pompidou Centre, Paris, France ​    Woman, Old Man and Flower Femme. 1923. 130.2 x 96.5 cm .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Dadaville. 1924. oil on canvas.    Gala Éluard. 1924. oil on canvas.65.4 x 81.3 cm ​   The letter. 1924. ​   Two Children are Threatened by a Nightingale. 1924. oil on wood. 57.1 x 69.8 cm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    언뜻 평온하고 목가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는 찬찬히 들여 다 볼수록 여러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아이들은 나이팅게일 소리에 놀란 것일까?’  ‘앞쪽으로 열려진 대충 붙여놓은 문짝은 무얼 뜻하는 걸까?’  ‘마치 그림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붕위의 사람은 초인종이라도 누르려 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림의 제목과 그림이 연관이 있기는 한 걸까?’  이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은 분명 추상화는 아니지만 누구도 이 액자 속 세상의 일을 분명하게 파악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장미 빛깔의 새들(1924) 쉬르레알리즘은 이들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작품임에 틀림없다. 조형면에서 새로운 테크닉의 개발에 단연 앞장을 선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에른스트라고 할 수 있다. ​ 플라스터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도 에른스트의 적극적인 재료 체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플라스터는 많은 작품에 나타나는 재료로서, 물질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이미지의 개발을 의도했던 에른스트의 향물성을 만날 수 있게 한다. 늘어 붙은 새는 에른스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동물군의 하나인데, 특히 자신과 새를 혼동했다는 점에서 그의 새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캐낼 수 있을 것 간다. ​    인간은 오직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으로 치달려 온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혁명에 대한 인간도 다른 동물과 똑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휴머니즘에 대한 조소가 스스로 새(鳥) 인간 에른스트를 유도해냈는지도 모른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새로운 광대한 체험의 영역'이 새 인간 에른스트로 등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   Eve, the Only One Left to Us. 1925. oil on cardboard. 35 x 50 cm .  Private Collection   Leaf customs. 1925.   Paris dream. 1925. 54 x 65 cm . Yale University Art Gallery, New Haven, Connecticut, USA ​   Sea and Sun. oil on canvas.37 x 54 cm.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UK   She keeps her secret. 1925. gouache, pencil, frottage, paper.26.5 x 43 cm .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UK ​    The Beautiful Season. 1925. Private Collection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나뭇잎이나 동전 등 질감 있는 사물위에 종이를 깔고 연필 등으로 문질러서 상을 얻는 프로타주(frottage) 미술놀이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프로타주는 ‘문지르다’라는 뜻으로, 하얀 종이위로 연필이 지나가면서 생겨나는 물체의 형체는 원래의 그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신기하게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실행함에 있어 우연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프로타주를 처음으로 작품에 도입하게 된다. ​ 어떠한 대상물에 화폭을 얹고 문질러서 얻어지는 생경한 형체는 에른스트에게 있어 프로이트적인 잠재의식을 화면에 정착시킨 결과물로 보여졌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 이외에도 데칼코마니, 꼴라쥬, 그라타주 등 무의식의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방식을 시도했다.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작품으로 인간의 내재된 본성과 충동을 탐구하고자 했던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의 출발이자 그 자체인 예술가였다 The Blue Forest. 1925. oil on canvas.73 x 116 cm .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 USA      The Couple in Lace. 1925. oil on canvas. 142 x 101.5 cm .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Rotterdam, Netherlands ​    The large forest, 1925. oil on canvas. 초현실주의 화가인 에른스트는 요철(凹凸)의 물체 표면에 종이를 얹고 연필이나 콩테 같은 재료로 문질러 요철의 물질 표면이 찍혀져 나오게 하는 프로타주라는 기법을 고안하였다. 탑본과 같은 수법으로 목과 돌의 표면 등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결과 무늬가 찍혀져 나와 전혀 예상치 못햇던 기이한 표현을 얻고 있다. 이 그림은 프로타주 기법을 이용하여 제작한 '거대한 삼림'이라는 작품이다.1927년 작품. 바젤미술관 소장. Pomegranate Flower. 1926. oil on canvas.  The Great Lover. 1926. crayon, oil on canvas. 81.2 x 100.3 cm .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UK The Virgin Spanking the Christ Child before Three Witnesses: Andre Breton, Paul Eluard, and the Painter. 1926. ​oil on canvas. 130 x 196 cm.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는 1926년에 ‘아기예수의 엉덩이를 때리는 성모’의 모습을 회화로 보여주었다. 성모는 우아하고 교양 있는 아름다운 여인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무너트리고 인정사정없이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고 있는 무지하고 상스러워 보이는 여인을 성모라고 소개하고 있다.   얼마나 매질이 독한지 아기예수의 후광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상상으로는 아기예수가 평범한 아이들과 분명 다르게 의젓하고 어른스러웠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말썽을 부리고 장난을 쳤기에 이렇게 맞고 있는 것일까. 아기예수가 성모에게 맞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는 목격자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이끈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문학가인 폴 엘뤼아르, 그리고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아마 에른스트 자신일 것이다.   에른스트는 독일 퀼른에서 활동하다 1922년에 파리에 도착한 후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에 참여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현실주의자란 문학과 미술에서 이성과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꿈, 무의식, 잠재의식 등을 탐구하는 예술운동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이론가, 문학가, 미술가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증언한 성서 속의 동방박사들처럼 아기예수가 성모에게 맞았다는 것을 증언하며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다.   에른스트는 왜 아기 예수가 엉덩이를 맞고 있는 수치스런 장면을 그렸을까. 혹시 성모와 예수를 야유하고 모욕하기 위해 무례하고 불경스러운 그림을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성모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로 성장시키기 위해 엄격하게 교육시켰을 것 같기도 하다.   에른스트가 이 그림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성경의 이야기 혹은 성모와 아기예수의 초상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위의 성자인 아기예수가 엉덩이를 맞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아카데믹한 규범 속에서 타성에 빠진 회화에 매를 들이대는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을 은유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내리치는 매가 전통적인 회화에 씌워졌던 후광을 땅바닥에 떨어트린 것이다.   전통적이라는 것이 결코 낡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초현실주의가 유행한 1920~30년대에 유럽인들은 원자핵 분열, X-ray 등 과학기술의 발달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성과 논리, 실증과 실험으로만 증명될 수 없는 우연과 불확실성의 신비적인 세계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당연히 전통적인 회화는 더 이상 이 시대의 미적 가치를 대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에른스트의 그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현실주의적 은유로서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모와 아기예수의 위엄과 권위를 비틀면서 구세대의 낡은 가치관과 개념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They have slept in the forest too long. 1926. oil on canvas. The Wheel of Light, 1926 박물지(Histoire naturelle)>, 1926 A Night of Love. 1927. oil on canvas. 130 x 162 cm . Private Collection . After Us Motherhood. 1927.  oil on canvas. 114.5 x 146.5 cm  :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Cage, Forest and Black Sun Cage. oil on canvas. 146 x 114 cm . Private Collection Child, Horse, Flower and Snake. 1927. oil on canvas. 82 x 71.5 cm. Galerie Daniel Malingue, Paris, France Fishbone Forest. 1927. ouil on canvas.65 x 54 cm . Private Collection. 갈색의 숲은 대각선의 선들이 매주 자극적으로 전달되고 하늘은 수평의 선들로 질감을 표한한다. 에른스튼 마른 곷 잎. 생선의 뼈 등 거친 질감을 형성하는 물체라면 어떤 것이든 사용하여 자신의 작품에 표현하였다. Forest. 1927. oil on canvas. 146 x 114 cm .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Germany     Forest and Dove. 1927. oil on canvas.82 x 100 cm .Tate Gallery, London, UK   에른스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숲의 풍경과 새의 모습은 어릴 적 경험한 아끼던 새의 죽음과 그가 자주 가던 숲에서 느낀 고독과 정적에서 연유한다.  불길하고 쓸쓸한 숲의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산란시키며 기묘한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에른스트의 상상의 세계가 가장 강렬하게 표현된 작품은 1930년대부터 제작한 콜라주 소설에서 나타난다.     Max Ernst Showing a Young Girl the Head of his Father. 1927. oil on canvas. 146.8 x 114.3 cm .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Edinburgh, UK ​ The gray forest. 1927. The Kiss. 1927. oil on canvas. 161.2 x 129 cm .   Peggy Guggenheim Foundation, Venice, Italy Vision Induced by the Nocturnal Aspect of the Porte St. Denis. 1927.   oil on canvas, 82 x 66 cm . Private Collection 막스 에른스트 - 파상의 지진, 1927 1919년에 시도한 콜라지의 테크닉 역시 그 중의 하나인데, 사진과 판화를 한 화면에 부착시킨 이 새로운 시도는 큐비즘의 파피에 콜레 기법을 뛰어넘어 그것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에른스트의 가장 독창적인 기법의 창안은 프로타지이다. 나무 위에 종이를 덮고 그 위를 연필로 문질러서 만들어 낸 이 새로운 기법은 '물질의 촉감과 내적인 환상을 직결시키기 위한 것으로 콘트라스트와 이중영상을 나타내는 이미지의 환상적인 화면'의 창조이다. 이 화면에서 시도하고 있는 그러타지 역시 프로타지와 같이 물질의 촉감과 내적인 환상을 직결시키려는 수법으로 볼 수 있다. 유채 안료를 붓에 묻혀 길게 끌어나가는이 수법은 안료와 바닥의 촉감과 여기서 파생하는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것으로 바닥을 문질러서 이미지를 얻는 프로타지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같은 간격으로 물결치는 대지 위에 사행의 이미지가 멀리 지평선 상에 떠 있는 달과 구성적인 대치를 보이고 있다. Landscape with shells. 1928. Flowers of seashells. 1929. oil on canva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패각의 꽃(1929) 쾰른 다다를 주도하다 1923년 파리로 진출하면서 쉬르레알리즘의 중심적인 조형 작가가 된 에른스트는 반 예술과 그것의 심화 현상으로 잠재 의식을 일깨우는 초현실의 맥락에 있어 가장 정통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에른스트가 쉬르레알리즘 예술 발전에 끼친 영향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콜라지 수법의 발전과 프로타지 기법의 창안은 환상과 꿈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가장 독창적인 수법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광대한 체험의 영역을 탐구하기 위한 지성의 필요'(에른스트)에서 창안된 새로운 수법은 쉬르레알리즘의 미학의 수립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되었다. 에른스트는 자신이 창안한 이 새로운 수법 이외에도 오스카 도밍게즈에 의해 시도된 데리코마니의 수법을 자주 원용했으며, 때로는 이 여러 가지 수법을 혼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수법의 탐구를 보여 주고도 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패각 모양의 꽃도 아마 데리코마니 수법을 써서 얻은 우연적인 얼룩들을 기조로 해서 그 주변을 강한 색조로 대비시킨 것으로 보인다. 우연적인 효과에서 어떤 구체적인 영상을 포착하는 쉬르다운 착상을 엿볼 수 있다. 같은 계통에 속하는 작품으로 '눈꽃'(1927)이 있다. Petrified Forest. 1929.  oil on canva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Snow Flowers. 1929 . oil on canvas.130 x 130 cm .   Private Collection ​ The Hundred-headless Woman Opens her August Sleeve. 1929.  collage.16.9 x 37.2 cm .  Menil Collection, Houston, Texas, USA   The Inner Vision: The Egg. 1929. oil on canvas. 79.4 x 98.5 cm  ​ Menil Collection, Houston, Texas, USA . 에른스트 예술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연의 신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자연의 신화는 분명히 독일적인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른스트의 작품을 관류하는 것은 독일 낭만주의의 전통이며, 그러한 전통의 현대적 변주 속에 에른스트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자연적 이미지, 그리고 동물과 식물을 다른 쉬르화가들에게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북구적 사실주의의 일맥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화면 네 귀퉁이에 장식 문양을 배치하고 가운데 타원의 알 속에 새의 이미지를 그려 넣고 있다.  화면은 마치 장식을 단 거울 같기도 하고, 또 근세에 들어와 흔히 볼 수 있는 초상화의 액자 같이도 보인다.  타원 속에 그려진 새는 알 속에서 부화되고 있는 새끼새를 나타내고 있는데, 명제가 시사하듯 보이지 않는 알 속을 들어가보는 내면적 시각의 예이다. 보이지 않은 내면을 보이게 하는 것, 잠재되어 있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어느 의미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쉬르의 방법이라 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화되고 있는 새는 단순히 한 마리이기보다는 여러 마리가 얽혀있는 것 같이 보이며, 그런 점에서 보편적인 새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라고도 하겠다. '시각의 내측'이란 명제는 시인 엘류아르가 1947년에 출판한 시화집의 이름이기도 한데, 에른스트의 작품에 엘류아르가 시를 붙인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이다” 살바도르 달리, , 1938      따뜻한 노란색 빛 석양이 드라마틱하게 드리운 전원의 풍경에 난데없이 나타난 커다란 전화기. 작은 돌멩이 그림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선명하게 보일만큼 사실적이고 세세하게 묘사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마주 한 사람을 어쩐지 어리둥절하고 당황하게 만든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한 번에 알아 챌 수는 있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초현실’적인 그림이다. 이 작품의 작가는 무의식의 탐구를 작품화하여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5.11-1989.1.23)이다.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이다. 따라서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 초현실주의를 이끌던 시인 앙드레 부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을 당시 달리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일상’이 어려운 사람, 달리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보였던 달리는 가족들의 후원 속에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다소 히스테리 적이고 자만심에 가득 찼던 어린 달리는 미술아카데미에 진학하지만 곧 퇴학당하는데, 이유는 “교수진보다 내가 더 완벽하다”며 테스트의 답안 작성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온갖 기행으로 가득 찬 그의 인생에서는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달리는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지인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고 자신보다 10살 연상이었던 갈라와 결혼하였고, 이일로 가족들과도 인연을 끊게 된다. 어쩌면 달리는 그의 작품처럼 평생 ‘일상’속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실제로 달리는 “나는 ‘정상성’이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하기야 ‘정상적’인 달리에게서는 그가 남긴 환상적인 초현실 작품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입체주의와 다다이즘을 거치며 합류하게 된 초현실주의 운동은 “미친놈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라는 달리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달리는 만일 세부묘사를 극한까지 추구한다면 사실주의에 의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현실감각이 전복될 수 있음을 깨닫고 그가 가장 무시하던 아카데미적인 사실주의 기법을 그의 작품에 적용시킨다. 살바도르 달리, , 1931    달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에 등장하는 녹아내리는 시계 이미지처럼 평범한 이미지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는 기법은 스스로 “편집증적 비평행위”라 부른 제작방법에 의한 것으로, 한 물체 안에서 다른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 깊이 응시하는 방법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 1936    달리의 독창적이고 상상력 가득한 작품들은 우리에게 스스로 상투적인 시각을 깨고 세상을 새롭게 다시 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달리 다운’ 종교화      스스로 제작한 그림과 영화 등에서 신성모독을 일삼고 괴상한 사생활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달리에게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20세기 가장 유명한 종교화도 남겼다. 살바도르 달리, , 1951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한 예수님을 상징하는 형상을 가리키는 ‘십자고상’은 기독교 예술을 지배해온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약속받은 구원을 상징하는 십자고상은 예술사에 있어서도 수많은 명작을 남기며 이어져 현대에 이르러서도 항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지지 않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달리의 는 예수의 고난을 어떻게 묘사할까 하는 근본적인 생각부터 깨버린 작품이다. DA 300      달리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스페인 북부의 어촌풍경을 배경으로 상처하나 없는 젊고 아름다운 몸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시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오는듯하지만 전경의 배경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이 또한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1951년 12월 런던 갤러리에서 처음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들과 종교계에서는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누드를 고집하던 사람이 갑자기 장사 밑천을 미사카드로 바꿨다”라고 비꼬는 비평가도 있었고, 전통적인 십자고상속의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이에 대한 달리의 답변은 1951년 발간한 ‘신비주의적인 선언문’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까지 그려져 왔던 것과는 달리 좀 더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으로 그려낼 것이다.” 달리는 여태껏 그려지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 그리스도 이미지에 반대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달리가 원한 것은 그저 아름다운 모습의 예수가 아니었을까.    달리의 종교를 향한 진정성이야 어쨌든 는 20세기에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종교화로 남았으며 그림이 소장된 글래스고의 미술관은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달리의 그림을 보기위해 방문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기억의 영속성(Remorse or Sunken Sphinx, 1931 )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괴짜 예술가.오만한 천재.괴팍한 광인 등 이름 앞에 언제나 따라오는 수식어 만큼이나 그의 인생은 삶 자체가 광기에 가득 찬  예술이었고 또한 평범하지 않는 초 현실이었다.   1904년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지방유지의 아들로 태어난 달리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4세 때 부터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방탕하고 광적이고 과격한 그는 재학중 학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 년간 정학처분을 받기도 하고 국기 방화 사건등으로 재판을 받으며 반정부 활동혐의로 단기간 투옥되기도 한다. 결국 1926년 미술사의 답안 제출을 거부,마드리드 미술학교에서 제적되고 만다.   하지만 이 괴팍한 청년 달리는 마드리드 미술학교 퇴학쯤으로는 눈 하나 꿈뻑하지 않았을 듯 싶다. 그는 일 년 뒤인 1927년 파리로 가서 피카소를 만나고 독창성을 나타낸 그림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그때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그외에도 큐비즘이라든가 미래파,형이상 회화파등에서 얻은 영향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그의 화풍을 이루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내란의 예감(Permonition of War,1936)   영화를 보다 보면 거물급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쏠쏠한 눈요기와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 가끔 있는데 살바도르 달리의 인생을 잘 만들어진 하나의 영화라고 한다면 이 영화에는 역시  프로이트라던가 라캉,샤넬,피카소등 당시를 주름잡던 지식인.예술가들이 단역 출연을 하며 그의 화려한 인생을 더욱 예술적으로 돋보여준다.   그중에서는 단지 단역으로 끝나지 않고 달리에게 평생을 두고 영향을 주었던 세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달리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와 그토록 오만한 달리가 '내가 존경하는 당대의 두 인물은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뿐이다'라고 드러내놓고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던 프로이트.그리고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기도 했던 그의 영원한 여인 갈라-이 세 사람이다.   달리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는 부유한 공증인이었는데 음악과 그림을 좋아했고,집을 멋지게 꾸미고 자신이 멋지게 꾸민 집에 예술가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며 인생을 즐기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총명했던 첫 아들이 7살에 병으로 죽자 그 아들을 잊지 못하고 그 후 삼년 뒤에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첫 아들과 같은 이름을 지어준다.   워낙 첫 아들을 총애했던 그의 아버지는 달리를 첫 아들의 부활로 믿을만큼 첫 아들의 그늘 속에 달리를 가둬두고 매사에 그에 맞추어 교육시켰으며 예술적 재능을 일찍이부터 드러낸 달리에게'큰애였다면 더 잘 그릴 수 있었을텐데'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정도로 달리의 재능마저도 죽은 첫 아들과 비교했다.달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아무리 잘해도 둘째아들로서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가 없었으며 반면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난폭하게 굴어도' 큰 애짓이니까..'하면서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도 있었다.         내 아버지의 초상 ,1925   보기드문 조숙아였던 달리.아니,어쩌면 조숙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살바도르 달리. 그의 난해한 인생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심이라든가 동정심을 갖게되는 시기가 바로 그의 어린시절인데 '나는 결코 죽은 형이 아니며 살아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 '는 훗날의 그의 고백처럼 죽은 형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어린 달리가 혼자서 카다케스 바닷가를 거닐고 하얀암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 고통의 깊이가 조금은 이해되며 어떤 안쓰러운 마음마저 인다.   소녀라고 믿었던 6세의 달리,바다 그림자 안에서 잠자는 강아지를 보기 위하여 물의 표면을 듦-1950   달리는 성장하면서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자신에게서 형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심한 반발의식을 갖게되며 그런 아버지의 비위를 건들고 약을 올림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러한 달리의 강요된 주체성의 혼동은 후에 그의 그림에서 이중상,혹은 다중상의 특징을 낳게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한 달리의 초현실적 성향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달리가 1923년에 알게된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는데 오히려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달리의 작품들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마드리드 미술학교 시절 프로이트의이라는 책을 읽은 21살의 달리는 일생일대의 발견이라며 그 책에 매료되었고 그때부터 프로이트에 향한 짝사랑이 시작된다. 여기서 짝사랑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21살의 달리가 34살이 될때까지 프로이트를 만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는데 그때마다 프로이트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번번히 헛탕을 칠 때마다 오만한 성격의 그가 얼마나 비위가 상했는지,또 그 상처가 얼마나 컷었을까에 대해서는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 34살의 달리는 프로이트와의 첫 약속이 정해졌을 때 프로이트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프로이트의 집에 방문한다. 하지만 실제 프로이트와의 만남의 자리에서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두 사람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초조해지고 흥분한 달리는 자신의 논문을 가져가 제발 좀 읽어주십사하고 여러번 청하지만 프로이트는 논문에는 눈도 주지않고 달리만 계속 노려보듯 쳐다보았다.싸늘한 무관심과 냉대에 달리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가는 방문 직후에 그린(죽음의 그늘이 너무나 명백하게도 드리워진)프로이트의 초상화에 잘 나타나있다.     1938년 달리가 그린 프로이트 초상   하지만 프로이트는 사실 그 반대였다. 프로이트가 다음 날 그들의 만남을 주선했던 작가 스테판 쯔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보호자겸 성자로 모시는 초현실주의 멍청이들을 보았었지요.하지만 어제 본 그 스페인 청년은 솔직하고 열렬하며 뛰어난 솜씨로 내 판단을 바꾸어 놓았습니다.그가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가를 분석적으로 조사해볼만 하군요'    달리에게 있어서 그의 아버지와 프로이트. 어떻게보면 이 두 사람은 그의 인생과 작품에(동류의)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긴 했지만 달리가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의 영원한 여인-갈라가 달리에게 끼친 영향은 앞의 두 사람과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   “한 번의 입맞춤이 나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했다. 갈라는 내 인생의 소금이며 내 인격을 강하게 해주는 목욕, 나와 꼭 닮은 사람, 바로 나이다.” 1929년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만났을 때 달리는 안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1934년 달리와 결혼한 갈라는 그의 열정대로 평생동안 '달리의 모든 것'이 된다.      Portrait of Gala with a Lobster (Portrait of Gala with Aeroplane Nose), circa 1934   갈라는 달리 그림의 가장 탁월한 해설자였고, 초현실주의의 뮤즈로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최고의 모델이었다. 달리의 수 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출현하게 되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이 갈라로 변신되었다.그녀는 달리의 정신 분열증적 광기를 다스리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또 그의 모든 것을 전담했던 활달하고 영리한 매니져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경제문제까지 전담했던 그녀는 달리가 주문받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작업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기까지 했다고 한다.또한 달리보다 12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늙어감의 공포를 잊기위해 미소년들과의 성관계에 병적으로 집착하기까지 했는데 갈라의 성적 방종을 채워주기 위해 달리는 쉴 새 없이 작업해서 돈을 벌었다.     폴 엘뤼아르의 초상   갈라는 1982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가 사망한 후 달리는 그녀에게 선사했던 카탈루냐 푸볼성의 지하 납골당에 유해를 안치한후 모든 창작활동을 멈추고 그곳에서 7년동안 칩거하며 양분주사를 맞아가며 인공적으로 생을 연명하다가 1989년 결국 갈라의 뒤를 따라갔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이 달리에게 가면 일반적이 되는걸까.달리와 갈라,이 두사람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정말 달리는 사랑도 달리답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달리자체를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상식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때로는 달리의 초 현실적 작품들이 그의 오만과 광기를 넘어선 걷잡을 수 없는 열정의 하나의 발산에 지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인생자체가 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보고 겪었던 것 들을  추억하며 그것은 진짜로 진짜이고 나 자신의 이미지를 이루는 속살,나의 자화상을 이루는 석회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달리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등에 있는 점을 벌레로 생각하여 그것을 떼어내기 위해 면도기로 살갗을 베어 내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가파른 돌 계단 위에서 곧장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허공으로 몸을 날리고 마는 광기.자신의 전시회에 수영복 차림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엉뚱함과 거울이 달린 인조 손톱 이라던가 등에 다는 보충 유방등 그가 만들어 낸 기괴한 발명품들.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1941   40m짜리 빵으로 세계를 뒤엎을 생각을 했던 자유로운 상상가 이기도 한 달리는 또한 자아도취의 전범이라고도 할 수있다. 22살때 자신의 재능을'각별히 출중한 내 실력'이라고 떠들어대고 자신을 곧 세계의 배꼽이라는 나폴레옹식 선언을 한다.   이 오만한 예술가 달리는 1942년 38세의 나이로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 출간 역시 파격적이다.'작가들은 보통 일생을 다 산 다음에 말년에 가서 회고록을 쓴다.모든 사람들과 반대로 가는 나는 회고록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사는 것이 더 지적인 것으로 보였다.산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인생의 반을 다 청산할 줄 알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어떤것이 지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보면 그는 그의 말대로 인생의 반을 청산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달리는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 고전주의로 복귀하려했고 초현실주의 화가모임에서 제명당했으며 미국에 귀화한 후 작품 활동을 왕성히 전개해 왔기 때문이다.그런 달리를 두고 이미 획득한 명성에 기대어 미국식의 자본주의적 예술형태에 매몰돼 예술성을 달러와 맞 바꾸었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그 부분에선 아마 그러한 비난도 달리에게는 라디오 채널을 돌릴 때 주파수 사이에서 생기는 잡음보다도 더 하찮게 들리지 않았 을까.   현대 화가 중에 달리만큼 광범위하고 왕성한 예술 활동을 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달리의 창작에 대한 광적인 열망은 그의 생애를 통해 회화에 그치지 않고 소설을 출판하고 발레의 대본을 쓰며 영화 제작이라던가 연극이나 발레의 무대장치 디자인,조각등 다양하게 전개된다.심지어는 백화점의 디스플레이, 가구와 보석세공등 창작에 대한 달리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돈 밝히는 화가였지만 그만큼 돈 잘버는 화가이기도 했던 달리.그의 생활은 화려했고 그리고 그는 그 생활을 충분히 즐기며 살았다.   달리의 인생과 그가 추구했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는 정말로 시대를 잘 타고 난 몇몇 안되는 예술가 중의 한 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만약 달리가 20세기가 아닌 19세기나 18세기에 태어났더라면,또 그가 성장하며 느끼던 환경이 석양이 불타고 바닷물이 바위사이를 넘나드는 유럽의 아름다운 카타퀘스 해안이 아니라 황량하고 먼지이는 중동의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못 말리는 꼴통 아니면 세상에 둘 도없는 미친놈쯤으로 전락해서 그의 주위의 몇 몇 만이 그를 기억하고 그나마 그를 기억한다는 것도 마침 안주가 떨어진 선술집의  어둑한 술자리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되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다행히 그는 20세기에 태어났고 현 시대에 와서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린 그를 두고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히려 사람들은 현대인의 지성과 이성으로 포장된 억압된 현실 속에서 본성에 대한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내어 유감없이 표현해낸 달리의 그림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그의 자유스러움을 더 이상 방종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의 오만은 배짱으로 이해되며 또한 그 앞에서  유머와 여유를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그가 그리는 것은 결국 통상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의식의 위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순결을 뿔로 범하게 될 젊은 처녀 '(Young virgin Autosodomized by her own chastity,1954)   현실속의 무의식의 세계-그것은 때로는 꿈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잠결이나 술 기운이 도는 몽롱한 상태에서 쉽게 의식의 범위를 침범한다.그리고 누구나 경험하는 것 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어떤 악몽을 꿀 때 가위에 눌린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 부터 유난히 가위에 잘 눌리곤 했다.사실 어린 시절의 현실에 내포되어있는 내 무의식 속의 공포라는 것은 티브이에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나 남량특집 수사반장의 여운 따위 정도였었을 것이다.   어린시절.그런 드라마들을 보고 난 날이면 어김없이 그것이 꿈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나에겐 그건 꿈이 아니라 반 무의식 상태.즉,옆에서 잠들어있는 언니의 얼굴이 창을 뚫고 들어 온 달빛에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라던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그런 상태에서 어느 순간 그날 저녁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그 무시무시한 구미호가 내 머리맡에서 소리를 죽이며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숨막혀오는 공포.그리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순간.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환상이라고 하기엔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위눌림은 지금도 계속된다.물론 더 이상 꿈 속의 등장 인물이 구미호라든가 수사반장에 나왔던 최면술 걸린 장미희는 아니지만 몸이 엿 가락처럼 늘어지며 내 몸의 한 부분이 이상하게 변해간다던가 누군가로 부터 목이 졸리워지는 듯한 느낌들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꿈   그렇다고 내가 꾸는 비 현실적 이지만 분명히 의식하게 되는 꿈들이 전부 공포스러운 꿈만인 것은 아니다.때로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이가 없을만큼 격렬한 쾌감으로 몸 전체가 나른해지는 꿈을 꾸기도 하고 또는 가슴 언저리를 붙잡아야 할 만큼 물리적인 아픔까지 느끼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그리고 밤 새 시달렸던 어떤 꿈이 그 이미지는 생생한데 그것을 확실한 존재로 붙잡을 수가 없을 때도 있는데 그 때는 영락없이 하루 종일 제 이름을 까먹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답답하게 지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환상과 현실의 중간 지점에서 헤메이는 것 같은 느낌은 꿈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일상 속에서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예를들면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가 보았을리도 없는 어떤 장소가 마치 전생에 어느 한 순간 내가 그곳에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거리의 돌맹이 하나까지 아주 익숙한 분위기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또는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때 들려오는 음악이나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그런 것들이 전에 한번 똑같이 경험했던 것 처럼 느껴져 어떤 당혹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던 일들.-물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반대로 늘 다니던 길목이 어느 순간 아주 낯설게 느껴져 나 혼자만이 세상과 동떨어진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어느 날 문득 집안의 한 가운데 서서 나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생소하고 바뀔리가 없는 방의 크기마저 제 멋대로 줄어들어 보이거나 아니면 너무 황량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앞 서 말했 듯 이 모든 경험은 누구나 했을법한 경험일 것이다.   하프의 명상 1932-33년   내가 달리의 그림을 좋아하고 그의 그림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은 달리의 그림을 보고있노라면 나에게 있어서 어느 한 순간 꿈이나 잠시의 환상으로 표출되던 공포와 절망,슬픔,고민,쾌락 같은 것이 그의 비현실적인 그림 앞에서 오히려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달리는 회화의 목적은'의식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내적세계와 외적세계 사이의 육체적 장벽을 동시에 제거하고,현실과 비현실 및 영상과 행위를 서로 합하여 혼합되어 전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달리의 창작수법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편집광적.비판적방법' 이라던가 나름대로 그의 그림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달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누가 그의 그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던 달리 자신도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이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지 않았았을지도.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며 어머니 뱃속의 태아 적의 이야기하는 달리를 두고 어느 누구도 그 말에 대한 진실성의 여부를 거론하지 않 듯 그의 그림은 그냥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느끼고 즐기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그의 그림을 두고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그림보다 초 현실적인 그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벅찬 일이 되지 않을까.         The Sick Child (Self-portrait in Cadaquйs), circa 1923     Remorse or Sunken Sphinx, 1931       Automatic Beginning of a Portrait of Gala (unfinished), 1932       Necrophilic Fountain Flowing from a Grand Piano, 1933        The Phantom Cart, 1933       Portrait of Gala with Two Lamb Chops Balanced on Her Shoulder, 1933       Apparition of My Cousin Carolinetta on the Beach at Rosas, 1934          Masochistic Instrument, circa 1934       The Tower, 1934     Archaeological Reminiscence of Millet's Angelus, 1935       Face of Mae West Which May Be Used as an Apartment, circa 1935       The Anthropomorphic Cabinet, 1936       Sleep, 1937       Composition - Portrait of Mrs. Eva Kolsman, 1946           The Madonna of Port Lligat (detail), 1950       The Queen of the Butterflies, 1951       dalн Nude, 1954       Soft Watch at the Moment of First Explosion, 1954       The Grand Opera, 1957       Modern Rhapsody - The Seven Arts, 1957       The Ascension of Christ, 1958       Birth of a Divinity, 1960       Meditative Rose, 1958         The Hallucinogenic Toreador, 1968-70       Dalн Lifting the Skin of the Mediterranean Sea to Show Gala the Birth of Venus (stereoscopic work, right component), 1977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1904.5.11~1989.1.23)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라고 정의한 달리. 그는 자신의 그림 만큼이나 비합리적인 삶을 살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모습으로 누구보다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 생전 많은 비난과 칭송을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달리는 성공한 화가로서의 화려한 이면 뒤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림과 그의 연인 갈라가 없었다면 아마도 달리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강철로 만들어 붙인 듯한 콧수염, 검은 정장에 빨간 넥타이, 황금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 살기 번득이는 눈빛 등 독특한 생김새와 옷차림, 행동 그리고 말로 인하여 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자극했던 화가, 달리는 그 자체가 초현실주의적 설치 작품으로 보여졌다. “나는 성적 쾌감을 위해 어머니 초상화에 침을 뱉는다” 라는 등의 거침없는 괴변들과 같은 화가, 예술가들에게 퍼붓는 욕설과 같은 비난은 그의 곁에서 사람들이 떠나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린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다른 화가들의 영감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달리 만의 독창적 상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진실과 거짓, 현실과 상상,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예술 스페인의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동북부 지방으로 프랑스, 지중해와 접해 있어 활발한 교역과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다. 그 지방 만의 언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독특한 지방 문화를 가지고 있는 카탈루냐였기에 개성넘치는 화가들도 많이 배출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화가 호앙 미로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 이들도 태어나고 자라면서 개성과 자부심이 강한 고향의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달리 또한 자신을 스페인 화가이기 보다는 카탈루냐 화가인 점을 늘 강조했다. 달리는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화를 시작했을 만큼 미술에 대한 천재성을 보였고,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25살이 되어 숙명의 여인 '갈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청년 화가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달라지는 지 알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결정된 운명은 인생을 결국 종착점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1929년 파리로 갔던 달리는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다다이즘-우연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지는 무의미함의 의미를 중시한 예술-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결국 초현실주의로 이끌어 내게 되었다.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그는 피카소, 미로 등과 같은 화가들과 교류하였는 데, 달리 미술의 결정적 영향은 한 여인으로부터였다.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의 선구자인 시인 '폴 엘뤼아르'를 만난 달리는 그의 부인, 갈라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을 벌이게 된다. 결국 갈라는 달리 곁에 머물며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달리를 아기처럼 다루면서, 인생의 반려자이자 예술혼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갈라는 등, 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 주인공으로 그려졌으며, 달리는 이라는 책을 지어 그녀에게 헌정했다. 또한, 1930년 이후에 제작된 그의 그림 속 사인에는 ‘살바도르 달리’ 앞에 '갈라'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지독히 상업적인 모습으로 예술 활동을 했던 달리이기에 그는 살아 생전에 고향인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이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해졌다. 심지어 거짓말로 가득찬 그의 자서전 조차도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을 위해 고민하였고,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권위적인 순수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분노를 느끼며 혹평과 비판을 가했지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나 등 그의 창조적인 작품들을 보면서 억압되었던 상상력의 해방을 느꼈다. “언제나 가장 진짜처럼 보이고 가장 빛나는 것이 가짜이게 마련 아닌가!”라는 그의 고백처럼 달리의 그림은 실제 속에 녹아드는 상상, 허위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을 엿보게 한다. 잠시라도 힘든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의 진실 같은 거짓의 세계는 또다른 휴식이 될 같다.  ================================   작품명  : 이젤 앞에 있는 달리의 자화상,카다케스  제작년도  : 1919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달리의 첫 번째 초상화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는 두텁고 풍부한 질감의 사용에 있어 숙달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그림이 성숙해짐에 따라 포기하게 되는데 드로잉을 더욱 중시여기는 엄격하고 정확한 표현 기법들을 선호하게 된다. 작품명  : 엘 야네의 수욕도  제작년도  : 1923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엘 야네는 카다케스 해변 선박창고로서 그 주변에 달리의 집이 있었다. 이 자가품은 그 때까지 지속되는 라몬 피조트의 영향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미 그의 개인적인 양식이 나타난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지배하고 있는 고전주의적인 경향은 피카소와 같은 표현 방법으로 보인다. 작품명  : 라파엘 풍의 긴 목을 가진 자화상  제작년도  : 1920-21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달리는 스승인 피조트로부터 주황색과 보라색의 병치 기법을 배웠는데, 이런 색상들은 초기 작품에서 많이 사용된다. 자화상의 신비적인 모습은 라파엘에 동화된 상징주의적 느낌을 준다. 달리의 특별한 성격인 깊은 에고이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 년이 지나면 이러한 성격은 그의 편집광적인 표현을 형성하는 열쇄가 된다. 작품명  : 등을 보이고 앉은 소녀  제작년도  : 1925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창가에 서 있는 소녀  제작년도  : 1925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달리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의 두 초상화는 1925년의 전시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데 이 전시회에는 파카소도 방문하였다. 정확하고 차가운 이미지의 색조는 이 시기의 몇몇 글에서 논의되었던 "성스러운 객관성"이라는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감상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주제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로부터 차용된 것인데 불과 일 년 후 초현실주의의 그림 안에서 왕성하게 표현되는 꿈의 해방을 예고하는 것이다. 작품명  : 곱슬머리 소녀  제작년도  : 1926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절벽  제작년도  : 1926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달리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등장하는 암푸르단 평원이나 이 그림에서 표현한 카다케스 부근의 노르페우 케이프와 같은 친숙한 풍경들은 이 시기에 그의 초현실주의적인 시각하에 환영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작품명 : 비너스와 어린 큐피드 제작년도 : 1925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불확실한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 시기 피카소에 의해 실행되었던 지중해적 고전주의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달리는 아직까지도 이런 종류의 주제를 큐비즘의 기법과 더 나아가 인상주의의 풍경화 기법으로 신중히 실험하고 대치시키고 있다. 작품명 : 입체주의적 자화상 제작년도 : 1926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런 종류의 작품에서 달리가 사용한 모델들은 1910년 피카소에 의해서 그려진 칸바일러나 볼라르드의 초상 작품을 기억나게 한다. 작품명 : 알게르 항구 제작년도 : 1924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피카소의 작품으로부터 받은 뚜렷한 영향은 무엇보다도 사실성이 뛰어난 회화적 기법 습득과 세련된 표현 방법의 수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감과 공간, 형상과 색채의 질서정연하고 통제된 배치는 특정한 양식을 뛰어너머 매우 탁월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작품명 : 비너스와 어부 제작년도 : 1926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바르셀로나의 인형 제작년도 : 1927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불과 일 년의 세월이 이 두 그림을 가르고 있다. 이 그림들 안에서 인간의 형상들은 큐비즘적 요소가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그림에서의 마네킹과 미래주의에서 유래된 기계-인물(형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미 초현시리주의에 감염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작품명 : 화가의 아버지의 초상 제작년도 : 1925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아름다운 형태란 둥근 모습의 수직적 평면이다. 아름다운 형태는 완고함과 충만함을 가지고 있는 그런 형태들로, 세부 묘사들이 커다란 덩어리의 양감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앵그르의 이 어구는 달리가 1925년 바르셀로나 달마우 화랑의 전시에서 이 작품을 비유로 나타내기 위하여 인용한 말이다. 작품명 : 달빛 아래의 정물화 제작년도 : 1927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달리는 탁자 위에 놓인 두상과 화병, 또는 물고기와 괴상한 기타와 같은 초현실주의적 전통의 요소를 도입시키기 위해 큐비즘적 화면을 이용하고 있다. 달은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 세계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로 직각으로 배치된 두 개의 선을 통하여 우리의 시선을 펜으로 인도하는데 이 펜은 시인을 직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작품명 : 소름의 시작 제작년도 : 1928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초기 작품들 중에서 완전히 초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띤 작품 중의 하나. 달걀 노른자처럼 끈끈하고 내장과 같이 부드러운 형태는 도망가는 선들, 글자, 그리고 숫자에 의해 표현된 엄격한 기하학적 공간의 도식 안에서 분배된다. 사물들의 정확한 표현과 재현된 내용 안에서의 비현실성의 혼합은 달리의 이후 모든 작품들에 있어서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한다. 작품명 : 끝이 없는 수수께끼 제작년도 : 1938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때부터 달리는 프로이드의 다양한 초상을 제작하는데 그 이후에 그는 이와 같은 그림 안에서 프로이드의 죽음이 임박함을 무의식적으로 형상화하였다라고 말한다. 이중 이미지의 놀이는 이 작품에서는 마치 만화경 안에서처럼 증가되어 있다.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주의를 집중시킴에 따라 그림은 마치 프로이드의 흉상, 정물, 비스듬히 누어있는 남자, 그레이하운드와 같은 결정되지 않은 많은 이미지로 읽힐 수 있다. 작품명 : 보이지 않는 남자 제작년도 : 1929-33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달리는 형상을 다양한 오브제의 묘사로 대체하여 그림을 그린 16세기 매너리즘 화가 아르침몰도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이중 이미지 또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주제를 접목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1933년 완성하지 못하고 포기하였으나,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을 인용하면서 꿈의 내용을 적용시킨 완전한 예이다. 작품명 : 위대한 편집광 제작년도 : 1936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달리의 설명에 의하면 "이 얼굴의 용모는 위대한 편집광자들인 암푸르단 사람들로 형성되었으며, 호세 마리아 세르트와 아르침몰도에 관하여 대화한 후에 그려졌다." 이들 그림의 이중 이미지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감상자의 편집광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데, 다시 말해 꿈의 산물인 환상들을 체계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숙련도에 달려 있다. 작품명 : 나르시스의 변모 제작년도 : 1937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나르시스의 신화는 특별히 달리에게 흥미로운 주제었으며 달리의 나르시시즘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더욱이 연못의 물 안에 반사되어진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 사이의 혼동은 그 배경에 깔린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이러한 이중 이미지 뒤에 감추어진 거의 불가사의한 상징이다. 작품명 : 달러를 숭배하는 정신속에서 갈라를 그리는 달리 제작년도 : 1965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사람들은 달리의 돈에 대한 넘치는 열정에 대해 비방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비방에 대해 달리가 약간은 과장되게 그린 그림이다. 이것으로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서 "달러에 굶주린" 화가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고, 이 별명은 달리라는 본래 이름에 철자를 바꾸어 만들어졌다. 1939년 이후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 그림 왼편을 보면 마르셀 뒤샹이 루이 14세로 변장한 모습이 보이고, 베르미어풍의 커튼 뒤에는 비록 보이지 않으나 프락시텔레스의 헤르메스의 기념비적인 얼굴이 있다. 작품명 : 보이지 않는 거울을 보면서 등을 돌리고 있는 갈라 제작년도 : 1960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에서 달리는 그의 젊은 시절에 제작한 여동생 안나 마리아의 초상에 보이는 초혼의 힘과 순수함을 회복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거울을 바라보는 갈라의 뒷 모습은 신비감을 나타내고 있다. 거울 속에서 갈라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이와 같은 동일한 소재로는 15년 전 라는 작품에 나타났다. 작품명 : 초봄의 나날들 제작년도 : 1929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수평선과 원근법으로 처리된 두 개의 거대한 선 또는 레일에 의해서 결정된 공간의 분리, 그리고 유리와 같은 깨끗함과 이미지들의 자의성과의 대비는 어린 시절 꿈의 결과이다. 절단된 배경과 풍경 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형상들의 대비는 불협화음으로 표현되어 있다. 작품명 : 현기증, 또는 쾌락의 탑 제작년도 : 1930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키리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가장 대표적인 형이상학적 그림이다. 그림의 외부에서 투사된 검은색 그림자와 신비스러운 형상은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며, 이것은 불안전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공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 한 쌍의 부부, 사랑과 죽음의 상징, 그리고 사자의 머리는 와 이 시기 다른 그림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작품명 : 풍경 속의 신비적인 요소들 제작년도 : 1934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젤 앞에 앉아 있는 화가는 베르미어로, 그의 망령은 책상으로 변하여 같은 해 다른 그림에서 나타난다. 왼쪽의 성탑은 달리가 예술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유년의 한 여름을 보낸 피조트 소유의 몰리 데 라 토라를 연상하게 한다. 굴렁쇠를 가지고 있는 소년의 형상은 다른 그림에서도 역시 나타나는데 이는 달리 자신으로 그의 환영을 증언하는 어린 목격자이다. 작품명 : 비온 뒤의 격세유전의 흔적 제작년도 : 1934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공동을 가지고 있는 매끄럽고 꽉 짜여진 형태들은 크레우스 케이프를 기억하게 한다. 화면 전반부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성인 남자와 소년 위에는 유기적 형태가 목발에 지탱되고 있으며 신비스러운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작품명 : 기사의 죽음 제작년도 : 1935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성탑은 다시 한번 피조트의 소유지임을 알리고 있다. 30년대에 있어서 달리의 독특한 조형 언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돌로 변한 삼나무와 폐허의 잔재물은 이 작품에서 기사와 말을 유령적 상태로 감염시키고 있는 듯 한다. 작품명 : 이해할 수 없는 5m 길이의 손잡이를 가진 날아다니는 거대한 찻잔 제작년도 : 1944-45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1932년 그림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하여 그린 그림으로서 이 그림에서는 찻잔에 붙어 있는 손잡이가 과도하게 늘어져 있다. 달리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이 그림처럼 찻잔의 손잡이로부터 비롯된 대수학적 나선형에서 발전되어 나타난다. 배경에 있는 바위섬은 크레우스 케이프 앞에 있는 라타 섬을 연상케 한다. 작품명 : 저물어가는 밤의 그림자 제작년도 : 1931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은 또 다시 이탈리아의 형이상학파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소재로 그려진 것이다. 황폐한 풍경 위에 위협스럽게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는 크레우스 케이프를 기억나게 한다. 작품명 : 흰색의 고요 제작년도 : 1936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흰색의 고요함이 화면 전체에 나타난다. 유령이 등장할 듯한 정체된 분위기이다. 리갈 항구의 바위가 묘사되어 있으며 공기부족으로 모든 사물들이 질식할 것처럼 보인다. 작품명 : 리갈 항구의 풍경 제작년도 : 1950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천사의 존재와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의 웅대함은 화면 속에 불안정한 비결정적 색조와 함께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명 : 정거장의 때이른 석화 제작년도 : 1930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일 년 전 부드러운 시계가 표현된 첫 작품이다. 앙상한 인체는 기차역이 연상케 하는 동적인 특징과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형이상학적 풍경화로 변화하는 작품은 1930년대 초반에 많이 나타난다. 작품명 : 메조키스트적인 도구 제작년도 : 1933-34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대상의 부드러움은 꿈이 생산해 내는 변형이다. 실제적 대상의 환상으로 보편적 기능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임시한다. 이렇게 하여 이 작품에서는 상처받은 삼나무와 연관된 상처받은 바이올린 이미지가 나타난다. 작품명 : 꽃의 머리를 가진 여인이 콜라 나무로 만든 피아노 껍질을 바닷가에서 만나다 제작년도 : 1936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마치 산호나 해조류 같은 식물의 머리를 한 여자들은 막스 에른스트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앞 작품의 이미지처럼 피아노나 첼로는 불안정하고 꿈 속에 나타나는 환상적 존재의 증거물이다. 작품명 :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 제작년도 : 1941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받침대는 얼굴을 환각적인 흉상으로 변화시켰다. 얇게 썬 베이컨 조각은 미국의 음식문화가 그의 작품에 베푼 회화적 재료로, 이 시절 미국에서 달리의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작품명 : 천사가 있는 풍경 속의 부드러운 괴물 제작년도 : 1977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에서의 특징은 불구의 모습 같기도 하고 어쩌면 신발이나 바나나 껄질과도 같은 환영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괴물과 그 괴물이 놓인 단단한 받침대 사이의 대조에 있다. 작품명 : 4차원을 찾아서 제작년도 : 1979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아인슈타인의 공간과 시간은 이 작품에 있어서 볼록하고 오목한 굴 옆의 바퀴와 부드러운 시계에 의해 암시된다. 등을 돌리고 있는 한 쌍의 인물들은 라파엘의 작품 에서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케 한다.     총 획득 메   추천추천 0 답변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 1989년 1월 23일 (향년 84세)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흘러내리는 시계죠.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블라디미르 쿠쉬, 마크 로스코 등 아주 쟁쟁한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화가죠. 초현실주의를 연 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살바도르 달리는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이름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녹...blog.naver.com
235    사진이란 "어느 순간", "시간적 압축"의 드러남이다... 댓글:  조회:2393  추천:0  2016-12-05
  듀안 마이클 (Duane Michals)   진실을 찍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찍지 않는 것이다. "나의 경우 그것은 내면의 대화였지 외부의 대화가 아니였다.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무엇때문에 끝없는 시야에서 이러한 진화론적 여정이 발생하며.. 왜 내가 스스로를 정의 내려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흥분해야만 하는가? 이다. 많은 사진가들은 그들이 찍는 사진뿐만 아니라 그들 삶과 감정까지 표면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바라본다. 사진가들은 항상 일관된 상황만 찍는다 그들을 결코 그 상황의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안는다. 일단 당신은 그 상자를 연다면 그것은 상자속에 다른 상자가 들어있어 좀처럼 끝을 볼수 없는 중국의 마술상자 같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내용물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촬영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다고 생각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는지... 나는 나무와 자동차와 사람들이 그 자체의 현실로 출현하는데 혼란을 가졌고 이러한 출현의 사진은 그것의 사진이어야 한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실패이다. 나는 거울안에 반영된 다른 반사물을 사진촬영으로 다시 반영하고 있었다. 진실을 찍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찍지 않는 것이다." - 듀안 마이클 분신의 그림자 - 두 명의 듀안 듀안 마이클은 1932년 2월 18일 펜실베니아주의 맥키스포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Andy Warhol)과 마찬가지로 체코 출신의 미국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성(性)을 미할(Mihal)에서 마이클로 바꿨고, 듀안 마이클의 어머니는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가정부로 일했다. "듀안"이란 이름은 원래 그녀가 일하던 집의 아들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원래의 "듀안" 때문에 어린 듀안 마이클은 난처한 일들을 많이 겪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름을 빌어온 듀안은 그 이름의 원래 주인이었던 "듀안"이란 청년이 막 시작한 대학 생활 첫 해에 자살을 해 버리는 바람에 실제로는 원래의 "듀안"이란 이름을 쓰던 사람을 만날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예술사를 찾아보면 이와 비슷한 선례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경우에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형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지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무덤을 보면서 자라야 했다. 우리들도 간혹 인터넷상으로 자신과 같은 아이디나 이름을 사용하고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자신의 부모가 정해 준 이름이 먼저 죽어 버린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들이 느끼게 될 감정이 어떤 것이었을 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름에 얽힌 이런 에피소드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가 평생 펼쳐나갈 예술 세계가 심상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보다 더 정당한 듀안이 존재했던 세계에 남겨진 "사라진 듀안"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함 말이다. 듀안 마이클은 그의 작품 에서 거울 앞에 선 영혼으로 하여금 이렇게 묻도록 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듀안 마이클의 작업은 평생동안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의혹을 풀고, 자신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연한 기회로 사진 작가가 된 듀안 마이클 듀안 마이클은 원래 디자이너로서 출발했다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사진 작가가 되었다. 1958년 「타임」지 재직시 러시아 여행길에 오른 마이클은 당시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만 가지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여행길에 찍은 마이클의 사진은 기념사진이라고 하기에는 보통이상의 사진으로 평가받았다. 이 시점을 계기로 마이클은 그래픽 디자이너에서 사진가로 전업하게된 것이다. 사진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마이클의 초기 사진작업은「쇼」지의 전속 사진가로 입사하면서 시작되었다.   Self portrait as if I were dead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을 선택한 마이클의 첫 개인전은 1963년부터 65년에 이르는 사이에 뉴욕의 자하화랑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소재는 미용실이나 지하철역, 또는 극장 대합실등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를 대상으로 촬영에 들어갔지만 실상 내부는 텅 빈 상태를 유지하는 표현을 위주로 하였다. 이후 유명한 전시회는 66년에는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가 개최한 『사회적 풍경을 향해서』라는 5인전을 통해서 알려졌다. 개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 리 프리들랜더(Lee Friedlander), 브루스 데이비드슨(Bruce Davidson), 대니 라이온(Danny Lyon)과 함께 듀안 마이클이 합류하여 5인이 참여한 「사회적 풍경을 향해서」전시회는 1960년대의 새로운 사진계 판도를 집약적으로 정리하려는 기획전으로써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걸친 현대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 전시회를 통해서 듀안 마이클은 가장 스포트라이터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마이클의 표현방식이 매우 특이했으며 그의 사진속에 내재된 소재나 주제면에서 추상적인 것을 추구했다는데에 관람자로 하여금 깊은 인상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전시회는 현대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이한 형식과 초현실적 내용을 담아 관람객과 비평가들의 이목을 끈 사진 작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듀안 마이클이었다. 현대사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여 자기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듀안 마이클은 연속사진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이자 그 중심 인물이 되었다.   I Remember the Argument 초기에는 유명인사들을 대상으로 인물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마이클은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슬며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58년 화가인 르네 마그리뜨(Rene Magritte)를 대상으로 하나의 사진집으로 펴낸 것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할스만이 초현실주의 대표적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를 집중적으로 찍은 것처럼 마그리뜨에게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의 사진형식은 전통적인 형식의 낱장사진이었고, 그의 사진이 연속사진이란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1969년부터였다. 그는 "지금까지 사진가들이 모두 외적 대상에 대한 관찰자나 기록자들이었지만, 나는 내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심화시켜 시각적으로 영상화하겠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듀안 마이클 = 연속 사진 = 시간의 사진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의 작업은 설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의 작업은 마치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그것은 허구적인 공간의 이미지와 시간의 연출이 연속적인 사진과 텍스트들의 결합에 의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을 우리는 "시퀀스 포토"라고 한다.   I Build a Pyramid 영화에서는 허구적인 공간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침범하고 잠식하여 결국 롤랑바르트식으로 이야기하면 "그 어떤 푼쿠툼(punctum)도 제공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만, 사진에서는 시퀀스 형식이라 할 지라도 즉, 마이클의 사진은 사진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성격을 드러내는 서술적인 구조의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푼쿠툼"이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진은 연속된 이미지의 나열이라 하여도 앞 장면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진과 사진 사이의 간극에서 파생되는 상상의 여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전체가 마치 한 장의 이미지로, 말하자면 서로의 이미지를 따로 떼어놓고는 그 의미가 상실될 것 같은 상호 보완적인 전체로서의 한 "회기"를 연출하는 것을 말한다. 번역 불가능한 이 "회기"라는 뜻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인 "데리다"가 사용한 철학적 용어인데, 이 낱말은 공간적 뉘앙스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지 않고 공동의 "매듭"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결의 두 측면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Who am I ? 동심원처럼 중심이 있는 텍스트(하나의 작품으로서 읽혀 질 수 있는 모든 것,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글"로 이해해서는 곤란함)가 아닌 여러 가지 기호들의 짜집기로 인한, 시간적으로 앞뒤의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들과 끊임없는 연결에 의해 분리될 수 없는 "회기" 속에서 어떤 형태를 맺으면서 이루어진다. 즉 텍스트는 시공의 텍스트들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적 요소를 가미하면서도 사진의 본질을 잃지 않은 마이클의 작품에서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넘나드는 상상적 시간의 자유로움은 그가 강하게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에서와 같이 마술적이고도 낯선 두려움에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한다.  그의 작품 중에 < 사물의 기이함>이라는 9개의 연속된 장면이 있다. 이 작업은 마치 마그리트의 회화처럼 현실의 공간과 허구의 공간을 구분하기 어려운 묘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일상적인 사물의 크기와 놓여진 위치의 뒤바뀜으로 인한 충격,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했던 사물들의 고유한 가치와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만드는 "낯설게 하기" 기법등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 기법을 디페이즈망(depaysement)이라 한다.    사물의 기이함 또한 이 작품이 퍼즐 게임처럼 재미있는 것은 마이클의 다른 대부분의 작업이 그러하듯이, 영화처럼 스토리화되어 있어 첫 장면과 끝 장면을 동일하게 처리함으로써 관객이 수수께끼 같은 함정에 빠져들게 했다가, 맨 마지막에서 그 의미가 들어 난다. 지금까지 전 맥락을 거꾸로 뒤집어버리는데서 오는 허구와 본질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눈속임의 기법이 즐거운 유희를 맛보게 하는 것이다.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암전과도 같은 간극이,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의 유희를 "창작"하게 한다. 이러한 수법은 작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서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어떤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관람자는 자신의 상상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구성해 간다.  바르트는 마이클의 사진 중 의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워홀의 초상사진을 보고, "그의 넙적하고도 납작한, 못생긴 손톱"을 그의 푼쿠툼으로 읽어냈다. 역시 의 초상사진에서도 괴로운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장면을 볼 때에 마이클의 의도는 무언가 "가리면서 들어내"는 흔적으로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히 머리를 심하게 흔드는 모습의 "워홀의 시퀸스 초상사진"은 거의 다 지워지고 뭉개져서 단지 워홀의 행위의 흔적만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강한 의도만을 표출하기 위한 제스처의 강도와 감각만을 느낄 수 있다. 들뢰즈가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 할 때 언급했던 감각의 흔적으로 인한 형태의 해체를 보는 것과 비슷한 원리 말이다.   약을 한 알 드시고 후지산을 보십시오   1. 아주 더운 여름 날이었다. 책도 재미가 없고 따분하기만 했다. 2. 누군가가 문틈으로 봉투를 밀어넣었다. 3. 봉투 위에는 뭔가 이상한 말이 적혀 있었다.  4. 봉투 안에는 초록색 알약이 들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약 한 알을 삼켰다. 5. 그는 마치 바람이 새어나가는 풍선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그의 키는 엄지 손가락여섯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6. 문이 삐걱리며 열리더니, 그가 이제껏 본 어떤 여자보다 큰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7. 가까이 올수록 그 여자는 더욱 커졌다. 이내 그녀는 그의 위에 와서 섰다. 8.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키에 넋이 빠져 버렸다. 9. 그러나 그녀가 자기 위로 앉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의 흥분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10. 엄청나게 큰 엉덩이가 그의 위로 덮쳐 내리는 사이에 그는 도망치려 허둥댔지만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그의 연약한 다리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11. 그는 흥분에 휩싸였다. 어마어마한 음부는 점점 더 가까이 덮쳐내려왔다.  12. 그녀가 그위로 걸터앉았다. 13.14.15. 놀랍게도 그 어둠 속에서 눈덮힌 후지산의 정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이란 "어느 순간"의 절단면을 얇게 저며낸 이미 거기에는 없는 과거의 그 순간을 현재의 이 순간, 또는 미래의 어느 순간과 동시에 만나게 하는 "시간"의 "압축"의 드러남이다.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사진은 항상 "그것은 = 일찍이 = 있었다."라는 "과거시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과거로서의 사진은 또한 "그것은 = 결국 = 죽을 것이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상기시킨다. 시간의 정지 곧 "죽음"은 사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인지, 사진은 특히 인물사진은, 바라보는 우리를 왠지 모르게 우울하게 한다. "과거"가 현존하는 기묘한 만남, 그리고 미래로 이어진 어떤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시선의 어긋남을 연출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작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the Human Condition 프로이드는 "과거란 항상 새로운 현재에 의해 변형되고 각색되어 현재의 사건이 과거를 재구성한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베르그송이나, 들뢰즈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과거는 과거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즉자적 존재"이며, 현재와 동시에 "공존"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현재는 불확실성 혹은 잠재적으로 생성하기를 그치고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과거로 가기 위해서 회상, 혹은 기억의 심리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는 동시에 공존한다. 이것은 사진과 닮아 있다. 즉 사진을 보는 현재의 우리는 단번에 기억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은 찍혀진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기억 속의 그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의 작품세계에서 나타나는 과거와 미래의 만남은 사후세계와 과거가 현재 시점에서 기억-이미지로서 종종 표현된다. , , , 그리고 등과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은 죽음 이후의 시간과 과거로의 회상이 뒤섞이는 순환의 흐름 속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나 등과 같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윤회와 순환의 시간은 근원으로서의 어떤 기원을 뜻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어떤 시원도 없이 흐르는 시간 중에 잘려진 단면의 존재함이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과도 같은 이미지이다.  그의 작업은 단지 사진들만이 나열되어 있지 않다. "나레이션" 식으로 덧붙여진 글쓰기와 함께 가미된 작품이다. 그것은 또 다른 이미지를 발생하게 함으로서 사진이미지와 텍스트(글)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사진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따라붙는 보충적인 것이 아니라, 사진이미지라는 텍스트와 글이라는 텍스트의 직조된 견직물이다. 그의 글을 정확히 알아보기 어려울 경우나, 혹은 이미지와는 다른 하나의 독립된 글쓰기로 읽혀질 때 그것은 일종의 "타이포 그래픽"으로도 보이기까지 한다.  사진 위에 직접 쓰여진 흔적과 같은 이 글쓰기는 단 한 장밖에 만들어질 수 없는 속성을 가지게 된다. 사진은 본래 복제예술로서 오리지날 프린트를 가지기 어렵다. 즉 하나의 네가티브에서 똑같은 여러 장의 인화를 복수 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 진품과 가짜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의 이러한 특성에 착안하여, 사진이 발명 되면서 기존예술의 아우라(AURA)가 상실될 것을 예견했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사진 위에 자신의 글을 직접 적어 넣음으로서 사진의 복제성을 지워버린다.    우연한 만남 1970 마이클은 더 나아가 79년에 와서는 사진과 회화의 접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진 혹은 이미 고전이 된 까르띠에 브레송(Cartier Bresson)이나 케르떼즈(Kertesz), 안셀 아담스(Ansel Adams)의 작품들을 붓을 가지고 채색하거나, 개작한다.  이렇듯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개작할 경우에도 마이클은 유명한 선배 작가들의 서명 위에 자신의 서명을 덧붙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러한 마이클의 입장이 자신의 작품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매우 상업적인 전략이 숨어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사실 사진 위에 채색을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초창기 회화주의 사진(Pictorialism)시대(1840 - 1910년 초반)부터 있어왔던 진부한 방법이다. 그러나 마이클이 시도하는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흔적을 사진 위에 남기는 일종의 자서전적인 행위로서 다른 사진 작업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두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다른 사람은 아무나 언제라도 사진을 다시 뽑을 수야 있겠지만 , 그러나 아무도 나의 필치를 다시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Dr. Duanus" famous magic act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cault)도 마이클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진책 한 면에 실린 이 글들은 나로서는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흡사 내가 남겨 놓은 발자국과도 같다. 명확하지도 않고 다소 기이하기까지 한 그 흔적들은 내가 그곳을 통해서 지나왔음을 증명해 준다."  사진도 현실의 흔적의 일종인데, 마이클은 흔적 위에 또 다른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이클의 사진은 연출된 "픽션"이지만 말이다.  "누군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와 똑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고, 지금 그는 죽고 없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었고, 나는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나의 이름을 지어준 이는 나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죽은 그 사람의 유모였다."  - 당신이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듀안 마이클은 바로 이와 같은 불안한 정체성을 경험한 인물이었다. 그의 과거의 이러한 경험은 다분히 작품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 "르노 카뮈"는 『Photo Poche불어판』에서 마이클이 그의 작업에서 끈질기게 자신의 정체성에 의혹과 조바심으로 얼룩져 있다고 말한다.   flowers_portrait 사실상 사진은 "페티시즘적" 성향을 띠고 있다. 카메라의 프레임에 선택된 "발견된 오브제"로서의 피사체는 사진가에 의해서 포획된 대상이다. 그러나 대상 그 자체는 아니다. 현실의 대상물을 닮은 이미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대상은 언제나 늘 여기에 없는 "부재"된 상태에 놓여지게 된다. 즉 소유하자마자 곧 사라지는 욕망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충족"(찍는 순간) 되자마자 다시 "결핍" (찍은 직후)속으로 빠져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반복 속에서 사진가는 끊임없는 이미지를 채집을 한다. 이것은 성적충동과 닮아 있다.  그의 작업에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에로틱한 경향이나, "물신"으로서의 오브제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마이클이 집착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234    시인, 녀인, 화가, 그리고 삶... 댓글:  조회:3346  추천:1  2016-12-05
                                                    폴 엘뤼아르의 초상       살바도르 달리,1929                   해안선이 불분명한 암갈색의 해변, 외롭게 떠있는 커다란 절벽과 붙어 늘어져 있는 여자의 머리채 위로 악수하고 있는 앙상한 두 손,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초상이 있다. 폴 엘뤼아르이다. 옆으로 사자의 얼굴과 대면하고 있는 여자, 그녀의 절개된 머리 속에 벌레에 파먹힌 살점이 뚝뚝 듣는다. 폴 엘뤼아르의 가슴 한 견에 있는 숲 위로 갈기를 휘날리고 있는 야수와 어깨에 걸린 겁에 질린 남자의 소리없는 절규가 보인다. 폴  엘뤼아르의 이마 위, 깍지가 벌려진 완두콩을 덮고 있는 허기진 손. 오른쪽 어깨에 접착된 잠자고 있는 남자, 그의 머리의 반은 날카로운 작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물고기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 해만 더 지나면 이 전쟁(1차세계대전)은 끝날 거야. 온 힘을 동원해 이 악몽에서 살아남아야 해. 당신은 결코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찬란하고 멋진 삶을 살 테니까.   몸조심해. 더할 수 없이 귀중하고 더할 수 없이 값진 당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줘. 당신의 생명은 내겐 전부야. 그건 나 자신이야.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어."                                                                                                                     - 갈라 엘뤼아르가 폴 엘뤼아르에게                   슬픔의 파수꾼들처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내가 그 밤을 넘어서 온 하늘    내미는 내 손길 안에 담긴 들판    생기도 잃고 무감각해진 그 들판의 지평 안에서    슬픔의 파수꾼들처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나는 너를 찾아 헤맨다. 기다림을 넘어서서    나 자신을 넘어서서    그리고 나 알 수 없을 만큼 그대를 그토록 사랑하는데    우리 둘 중에서 떠나 있는 그대를                                                                                           -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폴 엘뤼아르                나는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깊이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내 육체 속에서 한순간 욕망이 진동하면서 갑자기 내 모든 관능의 '파르시팔'이  깨어났다. 이가 서로 부딪치고 혀가 서로 얽힌 첫 키스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깨물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먹어치우게 부추기는 허기의 시작일 뿐이었다.                                                                                                  - 살바도르 달리           흥분의 절정에서 살바도르 달리는 갈라 엘뤼아르에게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소?"   그녀가 대답한다.   "날 죽여줘."                '폴 엘뤼아르의 초상' 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기시절 작품이다. 프로이트를 감동시켰던 유일한 화가이기도 했던 달리는 주로 자신의 꿈 속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화가이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의 전위에 서 있었던 폴 엘뤼아르는 어느 무명 화가의 초대를 받고 아내와 함께 스페인으로 향한다. 그가 바로 달리이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폴 엘뤼아르는 왜소하고 우스꽝스러운 스페인 촌뜨기가 그림에 재능이 있음을 인정했다. 폴 엘뤼아르 같은 대시인에게서 인정을 받은 달리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하지만 정작 달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달리는 폴 엘뤼아르의 아내를 보고 첫눈에, 자신보다 열살이나 더 많은 그녀에게서 운명을 느꼈다. '폴 엘뤼아르의 초상' 에는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알려진 바로는 달리와  갈라 엘뤼아르의 관계가 숙명임을 감지한 폴 엘뤼아르가 이에 순응하고 돌아섰다고 한다. 갈라와 달리는 잠적했고 얼마 안 있어 결혼했다. 남의 부인을 가로챈  아들의 행동에 분노한 달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절연을 선고했고 달리는 고향의  해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묻었다.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은 평소 갈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갈라에게 등을 돌렸다. 이념적인 성격이 짙은 초현실주의 운동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달리와 맞지 않았다. 게다가 달리의 히틀러 옹호 발언과 돈에 대한 집착으로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된다. 갈라는 강한 여성이었다. 폴 엘뤼아르와 달리를 제외하곤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갈라는 일생동안 친구를 사귀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많은 것이 베일에 쌓여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고 지나칠 정도로 사람들 앞에서 과묵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시선이었다. 러시아 태생이라는 이국적인 느낌에다 귀여움이나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그녀의 얼굴, 작지만 균형잡힌 몸매를 제외한다면 그녀는 추녀에 가까웠다. 그녀의 고집스런 턱은 그녀가 강한 의지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갈라의 매력은 눈에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눈은 턱을 치켜 들고 오만할 정도로 사람들을 내리 깔아 보았다. 지독한 에고이스트인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의 일상을 혐오했지만 그렇다고 속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예술을 사랑했고 일상을 지루해 했다. 엄청난 독서광에다 몽상가였던 그녀는 불행히도 창조의 재능이 없었다. 그녀는 예술가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삶의 변화를 꿈꿨다. 달리를 만나기 전에 이미 폴과 갈라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폴 엘뤼아르의  시는 더 이상 갈라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막스 에른스트에 있었다. 다다이즘을 얘기할 때 막스 에른스트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영향을 끼친 화가이다. 폴 엘뤼아르는 그의 그림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금세 친형제처럼 가까워졌다. 갈라 역시 그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기묘한 동거관계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막스 에른스트와 갈라의 공공연한 밀애 장면을 목격했고  폴 엘뤼아르는 애써 이 사실을 외면했다.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 중 '혼란, 내 누이' 라는 그림이 있는데 누이는 갈라를 암시하고 있다. 셋 중에서 가장 상처받았던 사람은 오히려 갈라였다. 갈라는 그당시 유행하던 자유연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기를 원했고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대방에게서 확인받고 싶어했다. 막스 에른스트는 이미  기혼자였고 그의 정신세계는 그의 그림에 대해 어느 누가 평한것처럼 '지옥으로 가는 여행' 이었다. 폴은 이미 여러 여자를 즐기고 있었다. 갈라가 달리를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달리는 그 당시 완전한 무명이었고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없었다. 갈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달리의 그림에 대한 확신 뿐이었다. 달리는 절대적으로 그녀를 숭배했고 그 숭배는 평생 이어졌다. 달리만큼 자신의 아내를 많이 그린 화가도 드물다. 달리의 그림에서 그녀는 성모 마리아로 표현될 정도였다. 심지어 작품에 남기는 자신의 서명에다 갈라의 이름을 같이 끼워 넣었다. 자신의 그림은 혼자 그린 것이 아니라 아내와의 공동제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갈라는 달리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 넣었다.  '폴 엘뤼아르의 초상'에서 폴 엘뤼아르 옆으로 보이는 사자와 여자는 달리 자신과 갈라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사자는 그의 야수성을 상징하고 그에 직면하게 된 갈라를 드러내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달리 그림에는 카니발리즘이 자주 등장하는데 달리가 좋아하는 음식, 베이컨, 완두콩, 양갈비와 갈라를 모두 먹어치울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작품에서 여자가 흘리고 있는 살점을 사자가 응시하고 있다. 갈라와 폴은 이혼한 후에 삶의 궤적을 달리했다.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  으로 건너간 달리와 갈라는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부와 명성을 쌓은 반면 폴 엘뤼아르는 독일 점령 치하 파리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였다. 그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자유' 라는 시는 그 무렵에 나왔다.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폴 엘뤼아르는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갈라에게 보내는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폴 엘뤼아르에게 갈라를 대신할 수 있는 여자는 없었다. 폴 엘뤼아르를 헌신적으로 내조했던 그의 두번째 부인 뉘쉬를 폴 역시 소중히 아꼈지만 갈라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달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시나 그림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열정 그리고 외곬적인 지지는 영감과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폴 엘뤼아르는 갈라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갈라는 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자신과 폴 사이에 난 딸을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녀는 친구도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녀가 폴에게 보낸 편지는 폴이 죽기 전에 모두 불태워졌다. 단지 편지 몇 통만이 폴의 딸에 의해 공개되었다. 하지만 갈라는 죽을 때까지 폴의  편지를 간직했다.                                  보이지 않는 거울을 보면서 등을 돌리고 있는 갈라 살바도르 달리, 1960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살바도르 달리, 1954                              (갈라 엘뤼아르가 성모 마리아로 표현되어 있다)               거울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표현한 달리와 갈라 살바도르 달리, 1973 (여섯개의 거울을 실제로 바꾸어가며 제작된 이 미완성의 작품은 반복되는 반영속에 달리와 갈라는 영원히 존속됨을 암시한다)                                                 갈라의 기도                  살바도르 달리, 1935             양의 갈비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갈라 살바도르 달리, 1933 먹을 수 있는 것의 아름다움. 나는 갈비를 좋아하고 나의 아내를 좋아한다. 나는 이것들을 함께 그리지 말아야 될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라고 달리는 말했다.                                                  원자의 레다              살바도르 달리, 1949 [출처] [펌] 폴 엘뤼아 ==================================================       예술가들에게 여인은 끊임없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입니다. 오늘은 오만한 천재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녀 갈라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달리 포스팅만 벌써 세번째이니 제가 이 초현실주의 화가를 꽤나 좋아하나봅니다^^      달리하면 "엉뚱하고 오만한 천재화가" 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죠. 그런 그를 확 사로잡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갈라입니다.    사실 그녀는 달리의 친구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습니다. 결혼생활당시,  집에는 남편인 폴 엘뤼아르 말고도 독일인 화가 막스 에른스트가 살고 있었는데요,  남편도 인정한 셋의 오묘한 연애가 계속되었었죠 ⊙⊙;;. 친구와 여인 둘다 포기할수 없었던 그의 기묘하고도 아슬아슬한 삼각 관계. 이거 놀랍다고 해야하는 거죠?^^;;;;    그때 엘뤼아르에게 지쳐있는 갈라를 달리가 낚아채간 것이죠^^ 달리보다 10살이나 많았던 그녀. 서로 운명의 상대임을 알고는,  남편과 딸을 버리고 달리에게. . . .    친구의 부인을 빼앗은 부도덕한 짓을 했다고 꾸짖은 달리아버지의 일화또한 유명합니다.    아버지가 먹다만 성게껍데기를 달리에게 보냈습니다. 이에 어린 시절부터 형의 그림자로 살아야했던 그의 멍애에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않던 그는 성게 껍데기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섞어 흙속에 파묻으며 아버지와 절연을 선언합니다. 그로서 갈라는 온전히 달리의 여자가 되는 거지요.    갈라는 그 누구도 제어할수 없는 그를 아기 달래듯 다루면서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의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모든일을 도맡아하게 된거죠. 내성적이었던 달리는 성적인 공포심으로 갈라 외에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부부간에도 원활한 관계를 가질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유에서인지 갈라의 혼외정사도 눈감아주는 듯 했습니다. 늙어감의 공포로 성형수술도 많이하고, 젊은 청년에게 집착하기도 한 그녀. 젊은 애인에게 달리의 그림을 갖다 바치기도 했다죠. 그녀는 60이 되던해 펑크 록 가수 제프 팬홀트에게 홀딱 빠져버리기도 한답니다. 그런 갈라를 눈감아준 달리.    역시 남의 부인을 뺏어오려면 저 정도의 사랑은 각오해야되나 봅니다.^^    여러 예술인의 사랑을 받은 갈라. 하지만 달리는 갈라만을 사랑했습니다. 오만한 천재화가, 사랑도 달리답게 했습니다.      그의 달리다운 사랑이야기  잘 보셨나요? 그의 갈라그림과 그들의 사진 같이 올라갑니다. 행복한 시간 되세요.     ​폴 엘뤼아르를 기리며       --- 파울 첼란     죽은 이의 무덤에 말들을 두어라, 살기 위하여 그가 말한 말들을. 그 사이에 그의 머리를 눕히고 그리움의 언어를, 집게를 느끼게 하라.   죽은 이의 눈꺼풀 위에 말을 두어라, * 그에게 너라고 말 걸었던 이를 거절하는 말을, 그의 손처럼 가난한 손 하나가 그에게 너라고 말 걸었던 이를 미래의 나무들 안에 수놓을 때, 그의 고동치는 가슴의 피가 그 옆을 지나가던 그 말을.   그의 눈꺼풀 위에 말을 두어라, 어쩌면 여전히 푸른 그의 눈동자에 또 하나의 더욱 신기로운 푸르름이 나타나고, 그에게 너라고 말걸었던 이가 그와 함께 - 우리를 - 꿈꾸리라.     *:폴 엘뤼아르의 시 의 첫구절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서 있다"의 차용   [출처] 폴 엘뤼아르를 기리며 --- 파울 첼란|작성자 다리오75  
233    19세기 러시아 대표 화가 - 일리야 레핀 댓글:  조회:6365  추천:0  2016-12-04
      자화상. 일리야 레핀(러시아어: 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1844년 8월 5일 ~ 1930년 10월 29일)은 러시아의 화가이다. 주요 작품[편집]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로서 동시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바깥 고리[편집] ");"> "); padding-right: 13px;">민중의 삶과 꿈을 붓칠한 일리야 레핀   * 레핀의 작품         [ 천개의 얼굴, 천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1844~1930) ]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처음 일리야 레핀의 작품을 접했을 때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니다. 숨이 멎을 만큼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을, 책장에서 책을 뽑듯 정확하게 뽑아내어 묘사해낸 그의 능력은 단연 압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리야 레핀은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초를 연 선구적인 작가입니다. 특히 그는 세밀화, 인상주의, 성화, 역사화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련의 공통점은 세밀한 표정의 묘사와, 찰나의 순간을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리야 레핀은 1844년 우크라이나 추구예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때 고향 추구예프의 이콘 화가 부나예프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는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19세 되던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예술장려협회의 미술학교에서 데생 교육을 받았습니다.     * 레핀의 작품         이듬해인 186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의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를 만났습니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를 이끈 지도자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가로 그는 레핀에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각인시켰습니다.       * 이동파       ‘이동파’란 레핀이 속했던 미술가 단체로 러시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농민 계몽을 목적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명칭이 이동파로 된 것입니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 말년의 레핀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매달렸습니다. 3년 뒤에 탄생한 은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레핀은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 , 등 러시아적 가치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1882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습니다. 이동파는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 레핀의 작품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는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간의 긴장된 심리 상황이 날카롭게 포착되어 있습니다.레핀은 초상화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 레핀의 작품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습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습니다.         * 레핀이 마지막을 살다간 레피노의 저택           그리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로 개칭되었습니다.         [ 대표 작품 감상 ]               *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쥐에 코사크들                 이 작품은 코사크크족의 다음과 같은 전설을 소재로 해서 그려졌습니다. 17세기 중엽 터키의 술탄 마호멧 4세가 드네프르 강변에 사는 코사크족에게 자기 밑에 들어와 일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코사크족은 용맹성과 대담성으로 명성을 날렸고, 뛰어난 전사로 알려져 있었죠. 그래서 터키 술탄에게는 자기 군대에 그러한 병사들이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독립, 그리고 명예를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던 코사크인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터키 술탄에게 모욕적인 말과 조롱으로 가득 찬 편지를 썼습니다.       레핀은 바로 편지를 쓰고 있는 코사크인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한 가운데 서기가 이 사람 저 사람이 불러 주는 대로 편지를 받아 적고 있고 주위의 코사크인들은 터지는 웃음을 못 이겨 배꼽을 잡고 껄껄대고 있습니다.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온화한 파스텔톤의 벽과 피아노, 아이들이 둘러앉은 식탁. 화목한 분위기가 흐르는 평범한 가정의 거실에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간 냉랭한 정적이 흐릅니다. 추레한 외투를 걸치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어색하게 집으로 들어서는 이는 바로 이 집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다가 오랜 형기를 마치고 지금 막 집으로 돌아왔습니다.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일리야 레핀)은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통해 혁명의 시대에 개인들이 겪어야 했던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을 보여줍니다. 혁명가였던 그림 속의 아버지는 사회 개혁을 향한 원대한 포부와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의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남겨진 채 고난을 떠안았던 가족들에게 그는 단지 무책임한 가장일 뿐이었습니다. 힘겹게 되찾은 평온 속에서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던거죠.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감격의 드라마는 없었습니다. 어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고, 오래전에 아버지 얼굴을 잊은 아이들은 오히려 겁에 질린 표정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아버지들 역시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그림 속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아버지들은 세파에 시달리느라 정작 가족에겐 무심했고, 남은 가족들은 각자 알아서 그의 빈자리를 메워버렸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겐 퇴근 후 무뚝뚝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가 불편한 존재랍니다. 지금 '혁명'이 필요한 곳은 바깥이 아니라 집안일지도 모릅니다.        * 볼가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일리야 레핀 하면 유명한 작품이 입니다. 이 작품을 그린 것이 1870~1973년 사이인데 당시 러시아에는 강에서 밧줄로 배를 끌어 올리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레핀이 1860년대 말 네바 강변을 산책하다 목격한 것이 ‘더럽고 해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거운 하역선을 끌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레핀은 큰 충격을 받았고, 1870년 볼가강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하고 수많은 스케치를 했다고 하네요. 이 작가가 얼마나 일꾼들의 내적인 세계를 경외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인 힘이 힘든 노역에 의해서조차 굽혀 질 수 없다는 작가의 신념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체념한 듯 밧줄을 몸에 걸치고만 있는 사람, ‘뭐 구경났소?’하는 눈빛으로 힘을 주고 있는 사람, ‘에이 제기’하며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젊은 사람,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떼는 맨 뒷사람, 괴로운 듯 제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 등 여러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레핀이 이들의 내적 세계를 경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은 듯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니라는 겁니다. 세계는 ‘배와 배 끄는 사람들’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고, ‘배 끄는 사람들’속의 사람들은 배 끌기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마다의 삶의 이야기와 생각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나타납니다.      얼굴 표정이나 상체의 모습뿐만 아니라 다리와 발 모습을 보면 작가가 얼마나 이들을 열심히 관찰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울 뿐입니다.         * 이반 뇌제, 자신의 아들을 죽이다             이 작품의 역사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533년 고작 세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에 오른 후 러시아 최초의 차르가 되었던 이반 4세는 ‘그로즈니(잔혹한) 이반’, ‘이반 더 테러블’, ‘뇌제’라는 별칭이 함의하듯 거의 정신병자에 가까운 폭군이었습니다.       친위부대 오프리치니키를 조직해 ‘살인면허’를 하사한 후 무자비한 강압정치를 펼친 최악의 군주. 오프리치니가 반대세력을 처형하는 광경을 직접 관람하며 희열을 느끼던 사이코 패스이기도 했고, 황궁 자문관들이 구국의 심정으로 시정을 촉구하자 그들은 물론 가족과 친지, 심지어 마을주민까지 씨를 말려 학살해버린, 전두엽 기형 장애를 앓고 있었던 게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 말종이었습니다.       노브고로드에서만 6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학살했고, 이반 4세는 “아무리 나쁜 놈도 제 세끼한테는 좋은 부모일 수 있다”는 생물학적 질서까지 파괴해버린 패륜 황제이기도 했는데, 사연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며느리가 임신을 한 까닭에 세 겹 이상의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황실 전통을 어기고 한 겹의 치마만 입은 것을 목격한 이반 4세. 태자비가 황족의 품위에 먹칠을 했다며 쇠지팡이를 휘둘러 폭행하려 하자, 임신부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황태자가 나서 이를 만류합니다. 격노한 이반 4세, 휘두르던 쇠지팡이로 아들의 머리를 내리쳤고, 황태자는 즉사합니다.       황제는 뒤집힌 눈을 뒤늦게 다잡은 후 제 세끼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에 절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휘둘러버린 쇠지팡이, 끊어져버린 숨통일 뿐. 1581년 11월 러시아의 황태자는 그렇게 사망했고, 현장에서 이 충격적인 살육을 목격한 황태자비는 유산하게 됩니다.      위의 그림은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겁니다.  ===========================================   그의 작품들은 극적인 구성과 긴장감의 조화, 표정의 세밀한 묘사가 뛰어나다.       Tsarevna Sophia Alexeevna in the Novodevitchy Convent. 1879 노보제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소피아 알렉세에브나 황녀       티티야나 마몬토바의 초상 (1882) Oil on canvas 창백한 얼굴과 퀭한 눈, 그녀의 우울한 표정 묘사가 뛰어나다.     숲에서 쉬고있는 톨스토이 (1891) 60x50cm oil on canvas. 이 작품을 통해 레빈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수있다. 톨스토이   Portrait of Modest Musorgsky, 1881 Oil on Canvas, 69 x 57 cm,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음악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   술에 취했음에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날 유쾌하게 한다.   A Fisher-Girl. 1874. Oil on canvas, The Irkutsk Art Museum 소녀의 지친 표정에서 슬픔이 느껴진다.       A Shy Peasant. 1877     A Peasant with an Evil Eye. 1877.   나쁜 눈빛의 남자 1877년 캔버스에 유채 60x49cm     Refusal from the Confession. 1879-1885.                       화가 일리야 레핀 딸 초상화.     나쟈 레피나 1881  캔버스에 유채 66 x 54cm   일리야 레핀의 둘째딸 나제쥬다 레피나의 일곱살때 초상이에요 화가분이 그린 아이들의 초상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생각에 잠긴 귀여운 까만 눈동자, 아버지의 사랑의 시선으로 잡아낸 장면이라서인지 따뜻합니다   아이들이 이런 자기만의 골똘한 생각에 잠긴 표정 지을때 퍽 귀여워요 "무슨 생각하니?" 하고 괜히 간질이거나 장난치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귀여운 얼굴 가만히 계속 들여다보고싶은 생각도 들구요 : ) 화가분도 아마 그런 마음이셨겠죠 그림 전체에 아버지 품같은 포근함이 감돕니다       베라 레피나의 초상 1874 캔버스에 유채 73 x 60cm   화가분의 큰 딸 베라 레피나의 초상입니다 두 살 아기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자신의 첫 아이를 커다란 의자에 앉혀놓은채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분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어린 아기가 과연 몇분이나 얌전한 자세로 앉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사진찍는것도 쉽지 않은데 아기의 초상을 그리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으셨을 거에요   아기의 두 손이 각각 장난감을 쥐고 있는 것만 봐도 ^^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리면서 몇번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을 것 같아요   이 사진은 특히 부모님들이 아기들 사진관에 데려가 찍어주던 예전의 우리나라 기념사진들과 그 느낌이 비슷해서 더 정겨워요 최고의 화가를 아버지로 둔 베라 레피나는  아기때부터 어른이 된 후에도 아버지에 의해 퍽 많이 그려졌답니다         유리 레핀의 초상 1882 캔버스에 유채 110.4 x 55.5cm   유리 레핀은 누나인 베라와 나쟈 다음에 태어난  일리야 레핀의 세번째 아이로 이 그림을 그렸을 때는 다섯살이었어요 세밀한 직물묘사도 감탄스럽지만 역시 제일 시선을 끄는 것은 다섯살 아이의 귀여운 눈빛 : )       고기잡는 소녀 1874  캔버스에 유채 74x50 cm   주로 당시 러시아 최고의 유명인사들의 초상화들을 그리던 일리야 레핀은 ( 그가 그린 초상화에는 톨스토이를 비롯 러시아의 유명예술가들의 초상도 많아요)  자신의 자녀를 제외하고는  어린이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그 몇 안되는 그림중의 하나입니다   가난한 고기잡는 소녀의 모습 헝클어진 머리와 남루한 옷, 지친표정이지만 애틋하게 아름다워요       베라 레피나와 아이들, 화가의 가족  1879 캔버스에 유채  61,5x48 cm   화가의 아내 베라 레피나 그리고 큰 딸 베라 작은 딸 나쟈가 어머니를 앞서 가며 들꽃에 시선을 팔고 있어요 어머니는 허리에 손을 얹고 "  뛰어다니다 넘어질라, 새 옷 더러워질라 "  어머니들 특유의 애정어린 잔소리를 하시는 듯도 하구요 아직 아기인 유리는 맨 뒤에서 유모의 품에 안겨있는듯하네요         화가의 딸 1884  캔버스에 유채 111 x 84.4cm   갸름한 눈매가 열두살의 베라 레피나의 초상인듯 해요        Ilya Yefimovich Repin 1844 -1930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러시아에서 활동한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분이에요   그의 작품중에는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듯이 그려내어 바라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 많아요 특히 대표작중에는 역사적인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한 작품이 많은데요    화가 나서 자신의 아들을 때려죽이는 이반뇌제라든가 자신의 지지자들이 창밖에 목매달리는 것을 보아야 하는 소피아 황녀같은 지나간 역사부터  뜻밖에 살아돌아온 유형수를 맞이하는 가족의 놀라움을 담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같은  현대사를 기록한 대표작들이 그것입니다 그림의 극적인 분위기가 무서울 정도로 사람을 사로잡죠     레핀의 강렬한 그림을 보다보면  우리나라에도 사도세자라든가, 장희빈을 다룬 드라마는 수없이 만들어지는데  어째서 그런 장면을 그린 회화작품 혹은 현대사를 다룬 걸작이 없을까 조금 아쉬워지기도 했었는데요 ( 그런 소재를 다룬 화가분들이야 계시겠지만,  레핀처럼 전세계인, 혹은 우리나라국민들만이라도 알정도의 작품은 없으니까요)   레핀의 역사를 기록한 박력넘치는 대작들도 근사하지만, 저는 초상화가로서의 일리야 레핀도 좋아합니다 톨스토이의 초상으로 유명한 레핀은 수많은 유명인사의 초상뿐 아니라 여인의 초상도 퍽 많이 그렸는데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러시아 여인의 초상화들은 무척 사랑스럽답니다 그 작품들은 다음에 소개해드릴게요    오늘은 그가 자신의 아이들을 모델로 그린 초상을 중점적으로 소개해드립니다 자신의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애정이 담겨있어서 부드럽고 따뜻한 작품들이에요                  꽃을 든 소녀 1878년 캔버스에 유채     갸름한 눈매를 보면 역시 화가분의 큰 딸 베라의 모습 같아요       베라 레피나의 초상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34.5 x 63.5cm   아내의 이름과 똑같은 큰 딸 베라의 14살때의 초상이에요 화가분은 아이들이 어릴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된 후에도,  베라와 나쟈 레피나의 초상을 즐겨 그려서 귀여운 아기부터 어른이 된 후의 성숙한 부인의 모습까지 딸들의 초상이  퍽 많이 남아있답니다         소년의 초상 1867 캔버스에 유채   일리야 레핀은  자신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아이의 초상화를 그린 작품이 많지 않은데 이 작품은 스물 세살때 그린 초기의 작품이에요    일리야 레핀은 러시아 최고의 화가로 꼽히고 있지만  처음에는 황실 아카데미의 입학을 거절당했었어요 큰 꿈을 안고 고향 우크라이나를 떠나왔건만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한 해 재수해야 했었죠     하지만 워낙 그림을 사랑할 뿐 아니라 굉장한 노력파이기도 했던 레핀은 아카데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해외유학의 기회가 주어지는 금메달을 수상하고   이십대에 이미 화가로서 성공한답니다     심리 묘사의 대가 러시아 출신 화가 'Ilya Repin' (1844 - 1930)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사람들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은 전시되는 순간부터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던 작품인데 지금도 그림을 보고 있으면 러시아다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배를 끌고 있는 사람들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온몸으로 힘을 써야 하는 일을 하기에는 나이 든 사람과 어려 보이는 사람이 뒤섞여 있습니다. 얼굴은 햇빛에 그을렸는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얼굴은 더욱 검어 보입니다. 짙은 체념과 권태 그리고 무기력함이 모두에게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모두였다면 아마 이 작품은 보여지는 첫 느낌 그대로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우리 옆에 서 있는데 그 생명력의 정체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의 배를 끄는 두 사람은 웃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그림 속의 모두는 울지는 않고 있다.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좌절하지 않는 노동의 신성함을 묘사했다는 평도 있지만 과연 그런가요? 세상에는 여러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작품의 인물들도 한 세계를 이루고 있겠지요. 각자의 세계는 우열을 정할 수도 없고 정해서도 안 됩니다.   어쩌면 레핀은 이런 세계가 당신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모양은 이렇지만 당당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달밤   레핀은 졸업작품으로 금메달과 함께 3년간의 여행경비를 포함한 6 장학금을 받습니다. 이탈리아를 돌아본 후 파리에 머물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레핀은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봅니다. 많은 화가들이 인상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레핀의 작품과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열렬한 인상주의 추종자는 아니었습니다.   심지가 굳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은 인상주의 화풍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기치 않은 방문객   레핀이 미술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작품에 심리적인 묘사가 대단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레핀의 작품을 제대로 느끼려면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은 레핀의 심리 묘사가 화폭에 그대로 펼쳐진 작품입니다.   마치 영화의 포스터 같습니다. 1883년 알렉산더 3세가 즉위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를 갔던 사람들에 대해 사면령이 내려집니다. 니콜라이 체르니세프스키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니콜라이를 맞는 식구들의 표정과 시선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긴장감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유형지에서 고생을 한 주인공은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를 유형지로 몰아넣은 이념이 아직도 그의 눈빛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이 그를 지켰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문을 열어준 하녀의 표정은 놀람과 황당한 표정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늙은 어머니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피아노 앞의 아내는 아직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이 안 된 듯한 표정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낯선 사람, 그러나 처음 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표정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밝은 표정의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빛입니다.     파티     1901년 5월 7일 제국회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레핀은 역사화에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초상화와 풍경화 등에서 뛰어났는데 그 분야가 좀 묻힌 듯합니다. 이 작품에서 나타난 사실적인 묘사는 컬러사진을 옮겨놓은 듯합니다.     공포에 질린 이반과 아들 이반   이 섬찟한 장면의 주인공은 이반 4세(이반 뇌제라고도 합니다)와 그의 아들 이반 왕자입니다. 이반 4세는 오늘날 러시아의 기틀을 세운 사람으로 처음 차르(황제)라는 호칭을 붙인 사람으로도 역사에 남이 있습니다. 잔인했지만 용맹하고 현명한 황제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의심이 많았습니다.   한 번은 이반 4세가 왕자의 집을 저녁에 방문했던 모양입니다. 황제를 맞는 왕자비는 겉옷을 한 벌만 입고 있었습니다. 당시 풍습은 손님을 맞이할 때는 세 벌의 옷을 입어야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황제는 며느리를 폭행합니다. 왕자가 이를 말렸고 황제는 순간적으로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왕자의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이 장면은 바로 머리를 후려치고 난 그 다음 장면입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깨달은 아버지 이반 4세와 한 팔로는 아버지 어깨를 잡고 한 팔로는 바닥에 팔을 기댄 아들 이반의 비극적인 모습이 펼쳐 있습니다. 실제로 아들 이반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이반 4세가 죽고 나서 왕조는 바뀝니다. 연극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레핀이 얼마나 많은 장르에서 재능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숲에서 쉬고 있는 톨스토이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작곡가)   레핀이 남긴 초상화는 그 숫자가 대단합니다. 그는 당대의 음악가, 문학가, 과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초상화를 두고 평론가들이 하는 말이 있는데 최상의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결코 얼굴만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모델, 세상과 교유하는 방법이 나타나 있는 진정한 사람을 그렸다.”     화가의 딸                                                            화가의 딸   화가의 딸                                                                   화가의 딸   화가의 딸                                                           화가의 딸   레핀의 초상화 작품 중에는 비제-르브룅(Élisabeth Vigée-Lebrun, 1755-1842)처럼 자신의 딸을 그린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놓았습니다.     베라 라피나 - 화가의 아내                            베라 라피나 - 화가의 아내     나탈리아 노르망   아내 베라 라피나와의 사이에 대해서는 별 기록이 없습니다. 아내를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나쁜 관계는 아니었겠다 싶은데, 나중에 파리로 가서 그의 삶을 사랑한 나탈리아라는 여자를 만나 살게 되었을 때 아내와는 별거 중인 것으로 나옵니다.   레핀과 나탈리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로 1시간쯤 떨어진 나탈리아의 집 페나티에서 살면서 당시 러시아의 엘리트들이 가입한 수요모임을 조직합니다. 14년 뒤 나탈리아가 죽으면서 이 집을 아카데미에 기부하지만 레핀은 그 뒤로 16년 동안 이 집을 비워주지 않고 삽니다.   말년에 소련 정부는 그를 초청하고자 여러 번 그에게 대표단을 보냈지만 그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고 핀란드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또 오른손 쇠약이라는 장애를 입어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다시는 예전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고, 그 때문에 금전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태로 말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허무주의에 빠진 학생   젊었을 때 한번쯤 지어봤을 표정이 저기에 있습니다. 그의 눈에서 허무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보이는 듯 합니다.     푸시킨     미하일 글린카(작곡가)     안톤 루빈스타인(작곡가-피아니스트)     사드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Sadko)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담은 것 같습니다. 흔히 보는 레핀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르네요. 환상의 세계입니다.     방랑하는 순례자들   남루한 옷차림의 두 여인의 모습이 한 장의 오래된 빛 바랜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묘사와 색채가 놀랍습니다. ‘가난한 민중’ 연작 중 하나입니다.
232    전쟁, 력사, 그리고 평화야,- 놀자... 댓글:  조회:1864  추천:0  2016-12-04
     독가스 공격후 진격하는 영국군                개스탄 공격으로 눈에 상처를 입은 군인들  개스탄 공격후 치료를 받고있는 부상 군인  갈리폴리 전투 구역 지도      갈리폴리 해전  갈리폴리 상륙을 기다리는 연합군  터키의 독립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와 작전 참가 장교들      구르카 용병  독일군 포로  러시아군  루마니아군  벨기에  불가리아  세르비아                      영국군  오스트리아  이태리  인도군                               일본군    캐나다  터키  포루투갈  프랑스  호주군                        
231    멕시코 최고 녀류 화가 - 프리다 칼로 댓글:  조회:2759  추천:0  2016-11-29
  프리다 칼로 Frida Kahlo(1907~1954)           정면을 응시하는 깊은 눈길, 오똑한 콧날 그리고 하나로 붙은 듯한 굵고 짙은 눈썹의 얼굴. 초현실적인 상상의 이미지들로 가득찬한그림. 68운동 이후 급격히 대두된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 속에서 새롭게 조명된 자의식의 화가 프리다 칼로.   '일생 동안 나는 두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   프리다는 삶이 아니라 고통과 고독을 살아낸 비범한 인물이다. 고통 그리고 고독은 삶의 본질이 아니던가!   1097년 프리다는 이 해, 7월 6일에 19살 나이로 독일에서 멕시코로 이민온 유태계 독일 출신 사진 작가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와 멕시코 원주민 혈통의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의 네 딸중 셋째딸로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원래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이라는 긴 이름을 받지만, 그는 프리다 칼로라는 간결한 이름을 썼고, 프리다라고 불렀다. 프리다(Frida)는 평화를 뜻하는 독일어 말 Friede를 바꾸어 만든 말이다.   그가 태어난 집, '푸른저택'이라 불리는 이 집은 나중에 프리다 기념관이 된다. 프리다 자신은 멕시코 혁명이 발생한 1910년에 태어났다고 사람들에게 즐겨 말하곤 했다는데, 이는 당대 공산주의의 지향에 동질감을 느끼던 자신의 정서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우울한 눈빛의 유태계 독일인 사진사로 예술적 감수성이 강했고,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은 스페인과 토착 원주민의 피를 이어 받은 강인하고 현실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프리다의 삶에서 결정적인 요소 둘, 즉 예술과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셈이다.   디아스 시절 관공서의 사진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 직장을 잃었고, 간질을 앓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 시티 중싱부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낡은 휘장을 배경으로 영성체 받는 여인들의 모습이나 신혼 부부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갔다.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을 뿐더러 몽상적이었던데다가 간질마저 앓고 있던 아버지를 프리다는 깊이 흠모하고 헌신적이었으며, 아버지 기예르모도 자식들 가운데 프리다를 가장 사랑했다.   1952년 프리다 칼로가 그린 이란 작품 하단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다.   유태계 독일 출신으로 예술가이자 전문 사진사였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명석했던 나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초상이다. 그는 성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60년 동안 간질로 고생하면서도 결코 일을 멈추지 않았고, 히틀러에 맞서 싸웠다. 깊은 애정을 담아 ... 딸 프리다 칼로.'   나의 탄생, 1932, 금속판에 유채, 30.5x35cm   1913년(6세) 젖 먹던 어린시절, 동생 크리스티나를 돌보느라 유모에게 맡겨져 자라난 프리다는 6살이 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 동안 방에 갇힌 채로 생활하게 된다. 어린시절 겪어야 했던 병과 외로움은 그녀의 자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평생 오른쪽 다리를 혐오해, 말라비틀어진 이 다리를 감추기 위해 긴 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외로움은 그의 삶의 방향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고통과 고독은 그에게 언제나 함께 있으며, 무엇이든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마냥 평생을 동행한다.   고통과 고독은 프라다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태워야 할 삶의 에너지이자, 일용할 양식이나 다름 없었다. 고통과 고독은 내면에 있는 자신의 또 하나의 모습을 찾도록 이끄는 인도자가 된다.   프리다의 그림에는 자화상이 유별나게 많다. 자화상은 고독이라는 호수의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분신의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둘로 설정한 그림, 를 보면 고독은 그의 자의식의 형성에서 핵심적인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는걸 알수 있다.   프리다는 육신의 고통과 영혼의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평생에 걸쳐 자기내면의 또 하나의 자기와 가장 은밀하고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눈 셈이다.   유모와 나 , My Nanny and I, 1937, 금속판에 유채, 30.5X34.5cm   1921년 (14세)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한다. 2000여명에 달하는 신입생들 가운데 여학생은 프리다를 포함하여 30여 명에 불과했고, 이곳에서 프리다는 첫사랑이었으며, 평생 이어가는 우정의 친구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난다.   1925년 (18세) 9월 17일, 프리다와 알레한드로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대형사로를 맞게 된다. 알레한드로 고메스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프리다는 온 몸의 뼈를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야 할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버스기사의 실수로 발생한 순간적인 이 사고로 인해 프리다는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고통의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된다.   손잡이들이 달린 쇠파이프로 그의 몸은 한복판 관통당한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골절, 세군데의 골반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군대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이사고로 프리다는 오랜 동안 석고로 만든 전신 깁스 틀 속에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수 없는 일이었다.   프리다는 이처럼 고통이 전신을 덮고 있을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몰핀으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을 프리다는 그림작업으로 이겨냈다. 이시절의 고통과 행복을,    '나는 병이 난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했다' 고 훗날 술회한다.   부서진 기둥, 1944년, 캔버스에 유채, 40X30.5cm   뒷날 가죽 코르셋으로도 더이상 지탱할수 없어 철제 코르셋으로 바꾸어 착용해야했고, 무너져 내리는 척추의 교정과 , 통증때문에 수차례의 거듭된 수술을 감내해야 했던 시절에 그린 이 그림은 바라보는 눈을 아프게 할 정도로의 직관적 통증을 가져와 온몸을 감는다.   1926년(19세)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통의 나날을 지내며 첫사랑 알레한드로에게 끊임없는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한 나머지 무언가 해보기로 결심한 그에게 가족들은 침대의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주고 침대에 부착할수 있도록 특수 이젤을 제작해 설치해준다.   첫번째 그림 '자화상'을 완성후 알레한드로에게 보내지만, 그는 나중에 결국 파리로 떠나게 된다.   붉은 옷을 입은 자화상, 1926, 캔버스에 유채, 79.7x60cm   1928sus (21세) 그의 집의 손님으로 드나들었던 좌익계 활동가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 조직에 참가한다.   이때 디에고 리베라와 두번째 만나게 된다. 처음 그를 만난것은 1923년 당시 벽화화가로서 이미 명성을 얻고있던 디에고가 프리다의 학교 국립예비학교에서 교육부 주문으로 라는 타이틀의 프레스코 벽화작업을 하고있을 무렵이다. 최초의 만남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 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디에고의 초상 Portrait of Diego Rivera,1937 목판에 유채,18x12.1/2 in                           프리다와 디에고, 1931, 캔버스에 유채, 100x78.8cm   1929년 (22세) 22살이 되던 이 해 8월 21일, 프리다는 42세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여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된다.   스므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프리다의 치료비 지출로 심한 재정압박 을 받고 있던 아버지의 동의로 혼인을 결행한다.   같은 해에 디에고가 공산당에서 제명당하면서 프리다도 당적을 버린다.   헨리포드병원 Henry Ford Hospital 금속판에 유채, 30.5x38cm   1923년 (23세) 첫번째 임신으로 아이를 가지지만,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선천성 자궁이상으로 낳을수 없어 임신 중절을 한다.   이해에 록펠러 재단와 벽화제작 초청을 받은 디에고와 미국으로 이주한다.    영혼을 바쳐 디에고를 사랑한프리다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 아이의 출산을 간절하게 기구하지만 아이를 낳을수 없는 자신의 상태에서 깊이 실망하고, 이로 인한 좌절감에서 떨치지 못한다.     프리다와 유산 혹은 유산, 1932, 종이에 리도그래피 31.7x23.5cm 1923년 (25세)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지만 유산하고, 이해에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망한다.  필경 천성이엇을 디에고의 악명높은 방탕한 성정이 다시 발동하면서 디에고를 향한 사랑에서도 프리다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며 겹쳐지는 불운과 불행에서 비롯된 우울증의 늪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1934년 (27세)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뒤 세번째로 임신을 하게 되지만, 디에고는 출산을 원하지 않는데다 난소 발육부진으로 임신한지 석달 만에 결국 다시 중절 수술을 거쳐 출산을 포기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디에고는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이사실을 알게된 프리다는 이전의 그 어느때와는 비교할수 없늘 만큼 큰 충격을 받고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잘라내고, 그를 떠나기로 작심하여 별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별거는 불과 수 개월에 그치고 얼마지나지 않아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와 합류한다. 하지만 이때 프리다의 정신적 고통과 상실감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사랑으로 그녀의 모든것이자 삶 그 자체와 동격인 존재인데다 크리스티나는 어린 시절부터 애증의 관계로 얽혀 있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있는 어려운 가족 상황속에서 프리다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혈육이면서 마지막 친구이자 믿을을 맡기고 싶은 동지나 다름없는 사람인 셈이었다.   이시절의 깊은 상실감과 고통도 프리다는 그림으로 묘사해낸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그림에서 배반의 칼날로 자신의 후벼 쑤셔대는 그 남자를 가리키며 프리다는 이렇게 묘사한다.   침대앞에 서있는 남자는 자신의 옷소매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번도 안 된다구요.'   몇달의 별거 생활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가고, 디에고는 이일을 자랑삼아 떠벌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것은 아니었다.    몇개의 작은 상처들. 1935, 금속판에 유채, 29x39.5cm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 1940, 캔버스에 유채, 40x27.9cm           여동생 크리스티나, 1928   1935년 (28세) 디에고에 비할수는 없지만 프리다의 연애 이력에도 언급할만한 것들이 적지는 않다. 이 해 프리다는 일본 태생의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마침 디에고는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를 청산한 후였고, 그는 프리다와 이사무의 비밀스런 만남을 눈치챈다. 프리다의 연애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디에고의 협박으로 결국 그들의 만남은 마감된다.   1937년 (30세) 스탈린의 숙청과 암살 위험을 피해 망명객의 신세로 떠돌던 러시아의 풍운의 혁명가 트로츠키 부부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일시적이나마 그의 활발한 교제 끝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시절 프리다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한다.   두 세계 사이에서. 1932    내 치마가 저기 걸려있다, 1933, 목판에 유채, 46x50cm   죽음의 마스크와 소녀, 1938   1938년 (31세) 이 해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갖게 된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거장으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앙드레 브루통과 만난다. 브루통은 아래에 소개된 그림, 을 보고 격찬을 아끼지 않고 프리다를 파리로 초청한다.   뉴욕에서 프리다는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를 알게되어 사랑에 빠지고 수개월간 함께 지내면서 학생시절의 밝고 신명찬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니콜라스 머레이가 이 시절에 프리다 칼로를 촬영한 사진들에서 프리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아름다움의 표현들을 많이 찾아볼수 있다.   이시절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에 대해 애써 무관심한 척하고 있었지만. 프리다가 자신의 일기장에 적은 심경의 표현을 보면, 그가 디에고를 얼마나 절절하게 사랑하고 그리워 했는지, 그리고 그녀 앞에 펼쳐진 현실이라는 망망대해의 파도에 휩쓸린 자신의 존재의 고독감이 얼마나 무겁고 비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프리다는 삶을 거부하지도 피해가지도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이 않으리라. 당신은 지친 나를 안아주었고 어루만져 주었지. 너무나도 작은 이세상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나? 너무 넓고 깊어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1937년 프리다는 더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물이 내게 주는것. 1938. 캔버스에 유채. 91x70.5cm   1939년 (32세) 앙드레 부르통의 후원으로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이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칸딘스키와 피카소 등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칸딘스키는 그녀를 포옹한 채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런 활동의 성과로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녀의 그림을 구입하는 성과를 얻기도 한다.   한때 몰두 했던 머레이와의 연정도 식어 이별을 고하고, 디에고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결국 이혼에 이른다. 그리다는 그림에 한층 더 몰두한다.   꿈, 1941   이 작품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앙드레 브루통의 집에 머물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이브 탕기, 피카소 등과 같은 저명한 화가들에게 열렬한 찬사와 환대를 받았고, 바실리 칸딘스키는 그녀의 그림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전시장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포옹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리다는 디에고와 함께 했던 뉴욕의 생활에서와 같은 행복감을 파리에서는 느끼질 못했다.   그녀를 맞이하는 브루통의 준비도 소흘했고, 그의 집에서 마난게 된 초현실주의자들에게도 실망한다.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대한 깊은 혐오감을 프리다는 머레이에게 보내는 편이에서 이렇게 적는다.   '그들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더이상 참기 어렵군요. 정말 너무 심한 편입니다. 파리에서 예술가인 척하는 이 멍청이들과 일을 하느니 차라리 롤루가 시장바닥에 앉아 옥수수전이나 부쳐 파는게 나을겁니다. 나는 디에고나 당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수다와 현학적인 토론에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어요...   무엇때문에 유럽이 이지경으로 곪아 터지게 되었는지. 무엇때문에 이 무능력자들이 히틀러나 무솔리니 일당을 불러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젠 정말 잘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내 마음속의 디에고. 1943   온몸을 얽어매다시피 꽁꽁 둘러싸 보는 이로 하여금 당장 절로 단추 하나를 풀게 만들것 같은 질식감을 주는 복식과 분노를 감추고 있는 듯 무심하지만 섬뜩한 눈초리, 게다가 일체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듯 완강하게 닫혀진 태도. 코밑의 선명한 수염자국과 더불어 단정하지만 짙게 부각된 눈썹 위 이마한가운데 자리잡은 디에고의 얼굴.   갓 잡아 올려져 퍼덕이는 물고기의 비늘에 반사되는 햇살의 번뜩이는 광채마냥 이토록 선명하게 삶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의식을 표현해낸 그림은 드물다.    두명의 프리다. 1939, 캔버스에 유채. 173.5x173cm    희망의 나무, 1946      Roots (Raices), 1943, 금속판에 유채, 11 7/8 x19 3/8 in   1953년 (46세) 멕시코에서 회고전이 열린다. 침대에 실린 채 개막식에 참석한다. 이미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고, 오른쪽 발이 썩어들어가 무릎 아래까지 절단한 프리다의 몸은 그림(부서진 기둥)에서 보는 것처럼 무너질 때로 무너져 더 이상 추스르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불타는 투지와 열정을 가로막을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리다는 1950년과 51년 사이에 오른쪽 발이 썩기 시작하여 무릎 아래까지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영국에서 골수 이식수술을 받다가 세균감염으로 1950년 3월부터 11월까지 무려 여섯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시절 디에고는 프리다의 곁에 머물면서, 그녀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것이건 다 해주려고 했다.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다리가 왜 필요하겠는가?"   프리다의 육신은 자신의 말마따나 부서질대로 부서진 처참한 몸뚱아리 였지만 그녀의 영혼은 삼의 그 어느순간보다도 맑게 그리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부서진 기둥. 1943 ' 을 그리는 프리다    - 영화 에서   프리다는 고독을 채워야할  캔버스였으며, 고통은  곧 물감이었으며, 그림은 사랑이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새로이 출산하는 탄생이었으며, 삶 그 자체였다.   프리다는 물감 대신 자신의 몸의 피를 쥐어 짜내었으며, 그녀가 화필을 휘저은 공간은 캔버스 위가 아니라 고독의 허공이었다. 태어난 그림은 프리다의 삶을 향한 열정의 과실. 곧 사랑의 출산이다.   프리다의 기념회고전은 멕시코 전역에서 쏟아지는 열광에 젖을 만큼 큰 성공으로 마무리 되었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이 전시회를 계기로 서로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가슴아픈 기억 Recuerdo. 1937. oleo sobre tela. 40x28.3cm   1954년 (47세) 페렴에 걸렸지만 6월에 접어 들면서 프리다의 건강은 이시적으로 호전된것처럼 보였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함께 6월 2일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한다.   이 반미 시위는 미국의 과테말라 정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지만 공산주의체제라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와 확산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시위가 있던 날 내리는 비를 피하지 못한 프리다는 발병한 폐염을 더이상 이겨내지 못한다. 세상을 떠난 프리다는 화장되었다.   상처 입은 사슴. 1946. 캔버승에 유채. 22.4x30cm   프리다의 사망일은 1954년 7월 13일인데, 마침 그녀가 전 날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세상을 떠나기 전 날은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일로부터 25주년 기념일을 17일 앞둔 날이다. 프리다는 17일 뒤에 다가올 결혼 25주년 기념 반지를 디에고에게 미리 건넨다.   왜 반지를 미리 주는가를 디에고가 묻자 ' 머지 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 라고 말한다.    지구와 나, 디에고, 솔로들이 어우려지는 사랑의 포옹,  1949, 캔버스에 유채, 70x60cm   ==================== 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작품세계  
230    불후의 걸작 건축물 옆에서는 염소떼들이 뛰놀더니... 댓글:  조회:1744  추천:0  2016-11-02
안토니 가우디의 불후의 걸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Baslica de la Sagrada Fam?lia]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로,  기존 성당 건축의 특징을 잘 계승하면서도 가우디 특유의 개성이 잘 융합된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이래 1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건축되어 지고 있고  가우디 서거 100주기인 2026년으로 완공이 예정되어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물은 너비 150 미터, 높이 170 미터로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영광을 주제로한 조각과, 믿음,소망,사랑을 주제로 한 파사드, 12제자를 상징하는 첨탑,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가우디가 완성한것은 '그리스도 탄생'의 장식과 지하 성당 뿐입니다.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1852~1926).스페인 건축가                       " />
229    개인적으로 7개의 건축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댓글:  조회:1735  추천:0  2016-11-02
세계문화유산(399)/ 스페인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Works of Antoni Gaudi)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가 바르셀로나 시내와 인근에 지은 7개의 건축 유산은 그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건축과 시공 기술의 발전에 매우 창조적으로 기여했음을 보여 준다. 이 기념물들은 건축뿐만 아니라 정원, 조각, 모든 장식 예술의 디자인을 자유롭게 시도하면서도 절충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스타일이 표현된 것이다. 7개 건축 유산은 카사 비센스(Casa Vicens),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의 가우디 작품인 예수 탄생 파사드(Nativity facade)와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예배실, 카사 바트요(Casa Batllo), 콜로니아 구엘(Colonia Guell) 성당의 지하 예배실 등이 있다.    주택이든 공공건물이든 가우디의 작품은 20세기 초의 건축 발전에서 의미 있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당대 건물의 유형을 보여 주는 탁월한 사례이다. 또한 19세기 말에 도시인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전원 도시의 탁월하고 잘 보존된 사례이다. 작품은 카탈루냐(Cataluna; Catalonia)의 모데르니스메(Modernisme; 모더니즘) 양식으로 표현된 가우디 당대의 문화 예술적 흐름과 밀접한 가치들이 의미 심장하게 상호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근대 건축의 발전에 적합한 양식과 기법을 예측하고 영향을 미쳤다. 가우디는 1852년 바르셀로나(Barcelona) 남부의 작은 도시 레우스(Reus)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 말 카탈루냐 지역의 지성적 지향은 1880년 무렵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지속된 모데르니스메 운동이 특징인데 이 운동은 자연주의, 미술과 공예, 아르누보와 같은 예술 조류와 함께 유행했다. 이런 유행은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전통 회귀 운동에 의해 촉발되었고, 여기에 현대적인 기법과 재료를 도입하기도 했다. 카탈루냐의 모데르니스메 운동은 대중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다른 운동과는 달랐다. 이 운동은 회화, 조각, 장식 예술, 건축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으로도 표현되었다. 카탈루냐 인들은 비올레르뒤크(Viollet-le-Duc), 존 러스킨(John Ruskin), 매킨토시(Macintosh)와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다. 특정 유파로 분류하기 힘든 가우디를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건축가로는 루이스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Lluis Domenech i Montaner)가 있는데 그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주요 건축물들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가우디의 작품은 물결치는 것 같은 선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다양한 색과 재료를 통해서 독특한 공간적 특성과 조형성을 건축의 표면과 조각에 표현한 건축가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그의 주요 작품은 라틴 십자를 평면 바탕으로 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다. 이 작품은 1882년에 건축가 프란세스크 데 P. 델 비야르(Francesc de P. del Villar)가 고딕 부활 양식으로 착공했다. 1883년에 가우디는 처음 계획을 근본적으로 바꾼 뒤 죽을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지하 예배실은 1884~1889년에 만들어졌고, 예수 탄생 파사드는 1905년에 완성되었다. 환상적인 4개의 종탑은 1925~1930년에 완공되었다. 예수 수난 파사드의 수랑 축대는 1960년에 착공된 이래 아직도 건축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교외에 있는 주택인 카사 비센스는 가우디가 처음으로 혼자 설계한 것으로 1883년과 1888년 사이에 완공되었으나 1925년에 세라 마르티네스(Serra Martinez)가 가우디와 상의하여 확장했다. 카사 비센스의 디자인은 벽돌과 다양한 발렌시아 타일을 노련하게 결합한 것이다. 이 작품의 연철을 사용한 작업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내부에는 섬세하게 그려진 벽장식이 있다. 산탄데르(Santander) 주 코미야(Comillas) 인근에 있는 호화 별장인 엘카프리초(El Capricho)는 부유한 기업가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이 건축은 카탈루냐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카사 비센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1884년에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교외에 있는 구엘 단지[Guell estate]에 짐꾼들의 숙소와 마구간을 갖춘 별관을 설계했다. 가장 장관인 것은 상상력이 맘껏 발휘된 ‘용의 문’이다. 60가구로 구성된 전원주택 단지인 구엘 공원(1900~1914)은 19세기의 절충주의를 꽃피운 것으로 논의의 여지가 없는 걸작이다. 가우디는 1887년 아스토르가(Astorga)에 새로운 성공회 궁전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에 초대를 받았다. 내부가 둥근 천장으로 된 이 화강암 건물은 근처에 있는 고딕 성당의 중세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테레시아나스(Teresianas) 대학의 건축 공사는 가우디가 프로젝트에 초대받았을 때 이미 시작된 후였는데 이 건물은 수수하면서도 긴 직사각형 벽돌 모양이다. 가우디는 1902~1904년에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에 있는 고딕 성당 ‘라 세우(La Seu, 1300~1600)’를 개조하고 복구하는 것을 검토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가우디의 설계에 따라 공간과 구조가 변경되었으며, 특히 중앙 제단 주변을 세밀하게 새로 디자인했다. 그는 커다란 전통 성가대석을 철거해 양쪽으로 배치하고 중앙 신랑(身廊)을 툭 트이게 만들었다. 1898년에는 바르셀로나 외곽의 섬유 공업 단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 콜로니아 구엘(Colonia Guell)에 교회를 설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이 일은 1908년에 시작되었지만 1914년에 예배실만 완공된 채 중단되었다. 이 독특한 건물은 가우디가 전통적인 카탈루냐 건축 구조의 가능성을 벽돌과 돌로 시공하는 실험을 했던 곳이다. 세계유산에 속하는 다른 건물들은 카사 데 보티네스(Casa de Botines; 1892), 카사 칼베트(Casa Calvet; 1898), 피구에라스(Figueras) 별장[카사 베예스구아르드(Casa Bellesguard)라고도 함; 1900], 바르셀로나의 도심 주택인 카사 바트요(Casa Batllo; 1904~07) 등이 있다.  
228    스페인 건축가 ㅡ 안토나 가우디 댓글:  조회:2144  추천:0  2016-11-02
가우디의 전체 이름은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Antoni Placid Gaudí i Cornet, 1852년 6월 25일 - 1926년 6월 10일)로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건축가입니다.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원어이름 Antoni Placid Gaudí i Cornet 본명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 출생 1852년 6월 25일 스페인, 레우스 사망 1926년 6월 10일 (73세)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적  스페인 분야 건축 직업 건축가 대표작 카사 밀라,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바트요 웹사이트 Gaudi And Barcelona Club   기록된 그의 정식 이름은‘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이다. 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이다. 아버지쪽 가문은 프랑스계의 가우디 집안이고, 어머니쪽이 코르넷 가문이다. 안토니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74세를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단명한 것은 아니나, 젊어서 가족의 대부분을 잃고 쓸쓸한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19세기말 카탈루냐 지역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을 벗어나, 건조한 기하학 만이 강조된 건축이 아닌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사그라다 피말리아 성당       까사바트요       구엘공원       구엘공원       구엘성당                
227    아내의 도움으로 20세기 미술 거장 되다... 댓글:  조회:5758  추천:0  2016-10-29
달리, 갈라를 만나다     *아내 도움으로 20세기 미술 거장 우뚝   정경애 미술읽기 - 살바토르 달리·갈라        살바토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마을인 피게라스의 엄격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인 외아들을 위해 많은 투자를 했으나, 달리의 머릿속에는 죽은 형(살바토르 달리의 이름으로 태어나기 3년 전에 죽음)과 자신을 혼동, 비교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강한 반발이 싹 트고 있었다. 후에 달리는 어떤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온갖 기행과 지리멸렬한 행위는 내 인생에 따라 다니는 비극입니다. 나는 결코 죽은 형이 아니며, 살아있는 동생이란 것을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달리가 유년기에 보인 신경쇠약과 성적 집착증세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친구들의 많은 도움과 연인이며 후에 부인이 된 갈라 엘뤼아르의 도움으로 정신질환에서 벗어나 20세기 미술의 한 획을 긋는 거장이 되었다.    갈라는 예술에 대한 본능적인 탁월한 심미안과 통찰력으로 시인 폴 엘리아르, 초현실주의의 대가 막스 에른스트, 살바토르 달리 세 예술가의 연인이자 누이이자 어머니로서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자신은 한 점의 예술작품도 창조해내지 못했지만, 세기적인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한 매혹적인 여자였다.     달리는 1929년 카다퀘스의 집에서 갈라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는데, 당시 엘리아르와 갈라 부부는 서로에게 지쳐있는 상태였다. 갈라를 만난 순간부터 자신이 찾고 있는 여자임을 알아본 달리는 히스테리적 발작에 가까운 웃음과 집중적인 응시로 갈라를 공략했다.      갈라 또한 달리의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환상의 세계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해 두 사람은 결국 두 달 동안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나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는 폐쇄된 호텔 방에서 갈라와 지낸 시간을 통해 태아의 아늑한 꿈을 만끽했고, 그녀로 인해 참다운 달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40년이 넘는 부부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갈라는 병적이고 소심했던 달리를 어린아이처럼 배려했고, 지나칠 경우에는 달리의 에너지를 노련하게 통제하여 그림 속으로 이끌었다.     아마 수많은 화가들 중 달리만큼 여자의 내조와 영향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갈라는 달리의 수많은 작품에 등장하는데 심지어는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하기도 한다. 정신적 노이로제에서 고통 받는 그를 구하고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반자, 모델, 초현실주의의 뮤즈로 달리의 삶과 작품에 영감을 불어 넣어준 갈라가 존재하지 않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수호천사 갈라는 89세로 생을 마치고 남편 달리가 선물한 푸볼성의 지하 납골당을 영원한 안식처로 정했다. 갈라의 죽음 이후 자발적으로 푸볼성에 칩거하던 달리는 이듬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양실조, 정신착란, 중증의 파킨스병으로 건강상태가 최악이었으므로 독방에 완전 고립된다.      항온으로 유지되는 방에서 인공적으로 양분을 보충해가면서 희귀식물처럼 연명하다가 1989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살아 있을 동안에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달리의 예술세계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도 그의 위대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1904.5.11~1989.1.23)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라고 정의한 달리. 그는 자신의 그림 만큼이나 비합리적인 삶을 살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모습으로 누구보다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 생전 많은 비난과 칭송을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달리는 성공한 화가로서의 화려한 이면 뒤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림과 그의 연인 갈라가 없었다면 아마도 달리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강철로 만들어 붙인 듯한 콧수염, 검은 정장에 빨간 넥타이, 황금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 살기 번득이는 눈빛 등 독특한 생김새와 옷차림, 행동 그리고 말로 인하여 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자극했던 화가, 달리는 그 자체가 초현실주의적 설치 작품으로 보여졌다. “나는 성적 쾌감을 위해 어머니 초상화에 침을 뱉는다” 라는 등의 거침없는 괴변들과 같은 화가, 예술가들에게 퍼붓는 욕설과 같은 비난은 그의 곁에서 사람들이 떠나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린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다른 화가들의 영감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달리 만의 독창적 상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진실과 거짓, 현실과 상상,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예술 스페인의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동북부 지방으로 프랑스, 지중해와 접해 있어 활발한 교역과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다. 그 지방 만의 언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독특한 지방 문화를 가지고 있는 카탈루냐였기에 개성넘치는 화가들도 많이 배출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화가 호앙 미로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 이들도 태어나고 자라면서 개성과 자부심이 강한 고향의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달리 또한 자신을 스페인 화가이기 보다는 카탈루냐 화가인 점을 늘 강조했다. 달리는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화를 시작했을 만큼 미술에 대한 천재성을 보였고,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25살이 되어 숙명의 여인 '갈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청년 화가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달라지는 지 알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결정된 운명은 인생을 결국 종착점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1929년 파리로 갔던 달리는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다다이즘-우연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지는 무의미함의 의미를 중시한 예술-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결국 초현실주의로 이끌어 내게 되었다.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그는 피카소, 미로 등과 같은 화가들과 교류하였는 데, 달리 미술의 결정적 영향은 한 여인으로부터였다.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의 선구자인 시인 '폴 엘뤼아르'를 만난 달리는 그의 부인, 갈라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을 벌이게 된다. 결국 갈라는 달리 곁에 머물며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달리를 아기처럼 다루면서, 인생의 반려자이자 예술혼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갈라는 등, 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 주인공으로 그려졌으며, 달리는 이라는 책을 지어 그녀에게 헌정했다. 또한, 1930년 이후에 제작된 그의 그림 속 사인에는 ‘살바도르 달리’ 앞에 '갈라'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지독히 상업적인 모습으로 예술 활동을 했던 달리이기에 그는 살아 생전에 고향인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이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해졌다. 심지어 거짓말로 가득찬 그의 자서전 조차도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을 위해 고민하였고,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권위적인 순수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분노를 느끼며 혹평과 비판을 가했지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나 등 그의 창조적인 작품들을 보면서 억압되었던 상상력의 해방을 느꼈다. “언제나 가장 진짜처럼 보이고 가장 빛나는 것이 가짜이게 마련 아닌가!”라는 그의 고백처럼 달리의 그림은 실제 속에 녹아드는 상상, 허위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을 엿보게 한다. 잠시라도 힘든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의 진실 같은 거짓의 세계는 또다른 휴식이 될 같다.  =====================================================       이번엔 널리 알려진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의 그림들을 볼께요~     살바도리 달리의 작품들을 보면 정말 괴짜천재같은 느낌을 받는데요.   뼛속부터 독특했던 화가로 유명해요       우선 살바도리 달리 라 하면 가장 유명한 그림~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흘러내리는 시계로 유명하죠   사물을 과감히 변형해 제멋대로 인듯 하지만, 무기력함이 느껴지고 몽환적이죠   햇볕에 녹아 흐늘거리던 치즈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 하는데 기존의 시계를 파괴해버린 정말 독창적인 그림인듯해요               그외 살바도르 달리 의 그림들..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 정말 많으니 꼭 한번 찾아보시면 좋을것 같구요~!   그림을 보다보면 근접할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가 보이면서 상상력이 엄청나게 느껴져 우와 우와 하며 보게 되더라구요       사람으로 봐도 살바도르 달리 이분은 정말, 평범함을 극강히 거부하던 남자 였음을 알수있는데요-       "나는 인간이 어쩌면 그토록 환상를 품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수가 없다. 버스 기사들이 이따금씩 버스를 몰고 프리쥐닉 슈퍼마켓 진열장으로 돌진해서 그참에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나눠채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늘 똑같은 짓을 하고 또하는 인간의 맹목적 습성은 나를 경악케 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자서전 내용中             살바도르 달리 의 부인 갈라     달리 보다 10살 연상이였다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사랑은 서프라이즈에서도 방송 된적이있는데요   살바도르 달리 는 갈라를 처음 만났을때 무명화가였고 미치광이로 손가락질 받기도 했다고.. 갈라는 달리의 잠재된 영혼을 흔들었고 내부의 열정을 예술로 승화하도록 이끌어낸 뮤즈였다 전해져요     갈라덕분에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한 달리.              
226    달리 추상화 작품모음 댓글:  조회:2672  추천:0  2016-10-29
225    소녀 뒷모습 보는 순간, 그 누군가가 또 그 뒷모습 보기까지... 댓글:  조회:3624  추천:0  2016-10-29
살바도르 달리 〈창가의 인물〉 1925, 카드보드에 유채, 105x74.5cm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는 인기가 많은 화가다. 그도 그럴 것이, 미술관에 가 보면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옛날 사람들만 그려져 있질 않나, 추상화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려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처럼 단순해 보이기 일쑤인데, 달리의 작품을 보면 정교한 그림 솜씨는 기본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하고 들여다볼수록 신기하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미술 애호가, 혹은 예비 미술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처음 사로잡았던 달리의 작품은 그가 스물한 살 때 그린 여동생의 뒷모습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은 참 묘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면 나도 그녀가 보고 있는 강변(혹은 바다의 만(灣)일 수도 있겠다)을 더 넓게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살짝 보이는 볼살이 꽤 통통하기 때문이다) 소녀와 여인의 중간인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창밖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 그러다 보면 이 소녀를 보고 있는 나를 누가 뒤에서 또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등으로 한참 동안을 이 앞에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훗날 달리는 같은 자세로 서 있는 부인 갈라(Gala)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는데, 여동생을 그릴 때와는 달리 꽤 선정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달리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피게라스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다가 마드리드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그 후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로 유명한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극작가이자 시인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 달리와 가르시아 로르카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루이스 부뉴엘과는 함께 영화 제작도 할 정도였는데, 결국에는 셋 다 서로 사이가 멀어졌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국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는데, 그가 동성연애자였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몇 년 뒤 달리는 파리를 방문해서 호안 미로의 소개로 피카소와 알게 되었고, 당시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면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림을 그렸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을 기반으로 한 예술, 즉 계산하고 측정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기존의 방식에 반대하여 예술가의 무의식 세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을 의식 밖으로 꺼내기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최면 상태 또는 수면부족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시를 쓰기도 하고, 카다브르 엑스키(cadavre exquis, ‘우아한 시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라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종이를 사람 수만큼 접고, 각자 주어진 한 칸에만 그림을 그려 나가되, 다음 칸으로는 연결선만을 남겨둔다. 다음 사람은 앞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연결된 선에서부터 다른 그림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음 칸으로는 연결선만을 남겨둔다. 이렇게 해서 참여자가 각자 그림을 그린 후 펼쳐 하나의 완성 작품을 만드는 것이 ‘카다브르 엑스키’라는 놀이인데,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방식이 집단 무의식, 우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림이므로 그들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달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에 가까운 것을 꺼낸 그림이 〈위대한 수음자의 얼굴〉이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달리의 얼굴과 흡사하다. 머리에서는 금발 여인이 솟아나고 여인의 얼굴은 남자의 사타구니 근처에 머물러 있다. 달리는 자신의 성적인 집착을 그림으로 그려서 내놓았다. 어떤 초현실주의자도 달리만큼 대담하게 스스로의 집착과 무의식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혼자서 시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작가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공개한 것으로 보아서는 달리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남자의 얼굴은 건축 장식의 일부처럼 생긴 것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여인의 몸과 꽃은 은근슬쩍 합쳐졌다. 앞서 말한 카다브르 엑스키의 달리 버전이다. 달리는 꿈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를 그렸지만 정교한 화법으로, 진짜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그려서 꿈과 실제 세계의 사이를 모호하게 흐려 놓았다. 살바도르 달리 〈위대한 수음자의 얼굴(Rostro del Gran Masturbador)〉 1929, 캔버스에 유채, 110x150cm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좌파였던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에 비해 달리의 정치적 입장은 모호했고, 이로 인해 초현실주의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그를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쫓아냈다. 이에 대한 달리의 반응은 ‘내 자신이 초현실주의다’였다. 달리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오브제 등의 다양한 시각예술, 영화, 연극, 사진, 패션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심지어는 초콜릿 광고에 출연하기도 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책은 그를 화가로 소개하지만 사실 달리는 회화라는 것을 뛰어넘은 특별한 존재였다. =============================       ▲ 달리 극장박물관 전경. 건물의 붉은 빛과 지붕 위의 달걀 모양이 시선을 끈다 스페인의 유명 화가로는 고야,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를 꼽고 그 차세대로는 입체파로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 야수파 화가인 호안 미로를 손꼽는다. 모두가 세기를 빛낸 화가들로 이들의 이야기들이 영화, 소설로 다뤄졌지만 그중 달리와 갈라의 사랑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달리가 나고 죽은 스페인 피게레스에는 ‘달리 극장 미술관’이 있다. 기괴한 창조성 집대성…달리 극장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 도심을 걷다 보면 피카소, 후안 미로, 그리고 콧수염을 기르고 포마드 기름으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가운데 가르마를 탄, 독특한 모습의 달리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그런 스타일을 가진 달리다. 히로나(Girona)에 숙소를 정하고 피게레스(Figueres)로 여행을 떠난다. 순전히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를 만나기 위해서다.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나 주의 피게레스는 달리의 고향이며 히로나에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다. 역에 내렸을 때, 급작스레 비가 내린다. 4km 떨어진 ‘달리 극장 박물관’(Teatre Museu Dali)까지 빗 속을 가르며 달려간다. 박물관에 도착하기 전, 성 페레 교회(Esglesia de Sant Pere)가 눈길을 끈다. 9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어진 이 교회는 펠리페 5세와 왕비 마리아가 결혼식(1701년)을 올린 곳이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화재로 역사적 기록들도 많이 사라졌다. 이후 1941~1948년 사이 네오고딕 스타일로 재건축됐다. 이 교회는 달리와도 무관치 않다. 그는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장례식도 치렀다. 오래전, 이 교회 바로 맞은편에는 피게레스 공립 극장이 있었으나 스페인 내전 때 불타버렸다. 극장 재건 당시 피게레스 시장은 달리에게 전시실을 하나 마련해 줄테니 작품을 기증해 달라고 제안한다. 당시 달리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극장 옆에 있는 탑(토레 갈라테아)에 살고 있었다. 이때 달리는 본인의 작품 전체를 기증하겠다고 말했고 그것이 계기가 돼 1974년에 ‘달리 극장박물관’이 오픈하게 된 것이다. 박물관이 완공되기까지 달리는 전시실 전부를 관여했다. 심지어 살기까지 한다. 이후 갈라-달리 재단의 소장품을 전시할 공간의 필요성에 의해 점차 박물관이 확장돼 현재는 두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 형태가 됐다. 달리가 살던 집의 탑도 달리 극장 박물관의 일부가 됐다.  박물관 입구부터 달리의 기괴한 창조성이 보여진다. 건물의 붉은 빛과 지붕 위의 달걀 모양이 시선을 끈다. 그래서 ‘계란의 집’이라고도 부른다. 건물 벽에는 피게레스의 전통 빵 모양이 붙어 있다. 박물관 건물 속 야외 공간에는 ‘대부’ 알카포네의 캐딜락과 고기잡이 배가 놓여 있고 쇠줄에 감싸인 큰 여인상이 있으며 담장이 넝쿨이 올라간 사이사이로 눈코입이 없는 금색의 나녀상이 마치 영화 ‘오스카 상’을 시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캐딜락 몸체에는 거대 여인상이 비춰지고 깨진 차 유리 안으로는 잘생긴 남자 운전자 디오라마가 있다. 그 어떤 것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창조적이다. 달리 시각의 ‘링컨(1977년)’의 작품은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갈라의 뒷모습을 놓치게 될 것이다. 또 ‘바람의 궁전’의 작품들 또한 경이롭다. 달리의 유명 작품인 ‘기억의 고집(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년)’은 물론 그가 53년간이나 해로했던 갈라의 모습이 아주 많다. 또 1930년대에 세계적 섹스 심벌이었던 여배우 메이 웨스트의 입술을 본떠 만든 ‘메이 웨스트 입술 소파’(Mae West lips sofa,)라는 작품은 차라리 경이롭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사각틀 액자 안에 얌전하게 있지 않다. 정형화를 거부하고 있다. 달리의 삶은 어땠나?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달리. 그의 작품들은 커다란 명성을 얻었고, 그의 기벽들은 전설이 됐다. 살아생전 그는 스스로를 천재라 했으며 최고의 그림 값을 받으며 생을 누리고 살았다. 살바도르 달리는 피게레스에서 공증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달리는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입체주의를 실험하고 마드리드의 아방가르드 모임에 참가했다. 시인 로르카와 동성 연인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리틀 애쉬(Little Ashes, 2008)가 있다. 달리는 이후 파리로 여행을 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그리고 194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41년에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다. 달리는 뉴욕에서 영화, 연극,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히치콕 감독이 만든 ‘스펠바운드’(1945)에서는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달리 인생의 영원한 뮤즈, 갈라 달리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인이 갈라(Gala)다. 갈라의 본명은 엘레나 디미트리예브나 디아코노바(1894∼1982)로 볼가강 근처에서 태어난 슬라브계 여인이었다. 그녀는 폴 엘뤼아르(1895∼1952)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슬하에 세실이라는 딸을 두었다. 하지만 갈라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아이 돌보는 것을 싫어했고 거기에 남편의 동료인 독일 출신 화가 막스 에른스트(1891∼1976)와는 불륜관계였다. 엘뤼아르를 따라 스페인에 갔다가 젊은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게 됐다. 스물다섯살 달리는 카다케스(Cadaques) 해변에서 반라(半裸)의 갈라를 보고 홀딱 반했다. 갈라는 달리보다 10살 연상의 유부녀였다. 긴 이야기가 있지만 그 둘은 53년간을 해로했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였다. “나는 갈라를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피카소보다도, 심지어 돈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달리의 시신은 피게레스 극장 미술관 제7전시실에 있다. 또 시간의 여유를 갖고 달리가 갈라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카다케스 바닷가에서 낙조까지 본다면 더 행복한 여행이 될 것이다.      
224    전쟁은 싫다 싫어... 댓글:  조회:2126  추천:0  2016-10-28
  팔레스타인 예술가 부슈라 샤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때 찍힌 사진을 합성해 만든 작품. ============================= 내 둘레에 둥근 원이 있다                                   - 나나오 사카키 - 일 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할 수 있다 십 미터 크기의 집 안에서는 편히 잠들 수 있고, 빗소리 또한 자장가처럼 들린다 백 미터 크기의 밭에서는 농사를 짓고 염소를 키울 수 있다 천 미터 크기의 골짜기에서는 땔감과 물과 약초와 버섯을 구할 수 있다 십 킬로미터 크기의 삼림에서는 너구리, 찌르레기, 나비들과 뛰어놀 수 있고 백 킬로미터 크기의 산골 마을에서는 한가롭게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일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여름엔 남쪽의 산호초를 구경할 수 있고 겨울엔 북해에 떠다니는 얼음산을 보러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지구의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으리라 십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반짝이는 별들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백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더없이 환상적인 오렌지색 우주 공간에 동쪽엔 달이 떠 있고 서쪽엔 해가 떠 있을 것이다 백억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태양계의 여러 행성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고 일만 광년 크기의 원 안에서는 은하계가 봄날의 꽃처럼 피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억 광년 크기의 원 안에서는 안드로메다 성운이 흰 벚꽃처럼 회오리치고 있으리라 이제 천억 광년 크기의 원을 그려 보라 그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조차 사라진다 그곳에서 당신은 다시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게 되리라.     [출처] 내 둘레에 둥근원이 있다 - 나나오 사카키-|작성자 알렉산드리아  
223    ..... 댓글:  조회:3074  추천:0  2016-10-26
  Mauritz C. Escher(1898-1972)의 작품세계     에셔 자화상                                                                 유리 구슬을 든 손                                                                                                                  웅덩이                                                                                                                                                                                                           도마뱀    1943       네덜란드 출신 판화가인 에셔는 동물, 새, 물고기들을 반복적으로 대칭 배열하여 일정 단위로 반복되는 패턴 구도를 사용함으로서 이 세상이 보이는 것 그대로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평면적인 패턴과 명확한 3차원적 질감 사이의 모호한 시각적 환영을 통해 현실은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되며 객관화되는 동시에 상대화됨을 그의 작품들은 확연히 보여준다.  그리하여 1944년 경부터 그의 작품은 시각적 비현실성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띄게 된다.   초기의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그의 작품세계가 차가운 분위기와 팽팽하게 긴장된 생소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겨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의 작픔들에서는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 그리고 낮과 밤이 공존한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져 물고기는 하늘을 나는 새로 변화해 가지만  그 배경과 형상의 구분은 여전히 모호하다. 수평의 벽은 어느 순간 수직의 천장이나 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처음에 물이 떨어지는 곳에 도달하는 식이다.   이렇게 평면과 3차원이 서로 부딪히는 이율 배반적인 공간으로 자주 형상화되는 가상과 현실 결합의 기묘한 세계는 보는 이에게 혼란을 주어 50년대까지는 예술적 정감이 별로 엿보이지 않는, 지극히 정적인 차가움만 감도는 수학적 세계와 같다는 시큰둥한 평가 일색이었다. 하지만 50년대 중반을 고비로  에셔의 '유희적'인 작품 의도에 공감하는 관객층이 늘어났다.   그 유희는 확실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에 대해 딴지를 걸고, 불가능하다 여겼던 고정관념들을 비틀어보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놀이였다. 무한히 반복되며 작은 극한으로 수렴하는 형상들로 평면을 분해하거나, 평면과 공간을 혼합하고 심지어는 중력까지 무시하는 그의 놀이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보이며 찬탄하는 매니어 관객들이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었다.   이제 에셔의 놀이와 즐거움에 공감하고 열광하는 매니어들은 전세계적으로 수 백만에 달하며, 여기에는 미술가는 물론이고 수학자, 심리학자 들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현대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그의 작품 컨셉들은 끊임없이 응용되며 업그레이드되는 영감의 원천 역할을 수행해 오는 중이다.     3개의 세계(1955)   거울이나 물방울, 유리구슬에 비친 반영상은 에셔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 하나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  3개의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나뭇잎이 떠있는 수면이 나무가 서있는 물 바깥과 물고기가 헤엄치는 물 속을 동시에 비춤으로서 2개의 공간이 하나로 통하게 된다.   무한원형: 천국과 지옥(1960)   1926년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을 방문하여 벽과 마루를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한 아랍풍의 타일 모자이크 조형에 커다란 감흥을 받은 에셔는 이 문양을 자신의 무한공간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했다. 이 그림에서는 천사와 악마의 형상들을 4중 및 3중 회전축에 의해 중심에서 주변으로 무한히 축소 복제하며 무한세계를 보여준다. 에셔는 선과 악으로 대립되는 관계를 'Tessellation' 이라는 대칭적 기법을 통해  "대립의 짝들은 파괴적이 아닌 서로 공존하는 관계"라는 자연의 이원성적 우주관을 자주 드러내었다.     원형 극한 3(1959)   한쪽 방향으로 향한 물고기들의 끝없는 행렬은 중심으로 접근할수록 커지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작아진다. 에셔는 여기에서도 6중 및 3중 회전축을 사용하며 자기복제적인 'Fractal'을 생성하여 또 다시 무한에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물고기와  새(1938)   에셔는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어느 새 하늘을 나는 새로 변형되는 것을 보여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라는 자신의 사상관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펼친다.    낮과 밤(1938)   초기 목판화 중 가장 걸출하다 평가받는 이 작품에서 에셔는 모자이크 양식과 형태심리학의 모티브를 적절히 구현하고 있다. 네델란드풍 마을 사이에 있는 직사각형 밭은 점차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거위의 실루엣으로 교묘하게 바뀌고, 검은 거위는 왼쪽으로 하얀 거위는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형상을 이룬다. 또 왼쪽에서는 흰 실루엣이 융합하며 낮의 하늘을, 오른쪽에서는 검은 실루엣이 용해되며 밤의 배경을 형성해 '거울 이미지'를 보이며 서로에게 흘러든다. 한편 하얀 거위 무리가 지각될 때 검은 거위 무리들은 배경 역할을 하게 되어 인지되지 않는다. 명도와 명암 대비를 절묘하게 구사하여 형태심리학적 효과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망루(1958)   그림 하단에 앉아있는 소년은 입방형의 퍼즐을 손에 들고 있고, 이것은 앞에 펼쳐진 그림 속 입방체 윤곽의 2가지 가능성이 혼합되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입방체의 윗면과 아랫면은 서로 모순되는 '불가능한 대상'이다. 뒤쪽의 망루 역시 동일한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망루 건물 중심에 있는 사다리는 원근법에 따라 올바르게 그려진 듯 하지만 아랫 부분은 망루 내부에, 윗부분은 외부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사다리 위 두 사람의 관계는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한 관계가 된다.        낙수폭포(1961)   이 작품 역시 영국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제시한, 부분적 오류는 발견할 수 없으나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펜로즈 삼각형'의 개념을 빌려와 불가능한 패러독스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걸작으로 꼽힌다. 폭포의 물결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놀랍게도 처음 출발 장소로 되돌아오게 된다. 고리 각 부분에서는 한 곳도 잘못된 점이 발견되지 않지만 전체적 시각에서 보면 고리 전체가 존재할 수 없는 자가당착성을 내포하기에 패러독스를 느낀다. 우리의 시선이 물체의 선을 따라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물체와 관찰자의 거리 관념이 변화한 것을 뒤늦게야 깨닫기 때문이다.        높고 낮음(1947)   이 작품의 상단에서 우리는 야자수가 서있는 마을 광장을 3층 높이에서 내려다 보고, 하단에서는 동일 광경을 1층의 시각에서 보게 된다. 지상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바닥에 있는 것과 동일한 타일이 천장에도 붙어있음을 감지한다. 중앙부분을 좀 더 확대적으로 보면 오른쪽 집이 보여주는 시각적 모순을 알게 된다. 소년이 앉아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상의 바닥에 닿지만, 창문을 보면 다시 집의 맨꼭대기 층에 있게 되는 역설을..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   에셔는 중세 수도원을 그린 이 그림 속의 '끝없이 순환되는 계단'을 통해 펜로즈 삼각형의 역설을 또 다시 보여준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경건한 신앙심을 보여주듯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하지만 아래쪽에 있는 두 수도사는 계단 의식 첨여를 거부하는 듯이 따로 앉아있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이 패러독스적 트릭에 빠져 신심도 뭐도 아닌 어리석은 일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 믿기 때문이다.    상대성(1953)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바닥과 계단에서 서로 교차하며 걷고 있는데 이는 3개의 중력이 서로 교차작용함을 나타낸다. 이들은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하기에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 한쪽의 사람에게 바닥인 것이 다른쪽에서는 벽으로 변모되는 상대성의 개념을 통해 에셔는 중력까지도 무시되는 새로운 유희를 보여준다.   볼록형과 오목형(1955)   그림 우측 상단에 깃발 하나가 다리 아래 걸려 있다. 깃발 속 3개의 다이어몬드는 정육면체의 형태를 보이는데 보는 방식에 따라 왼쪽 또는 오른쪽이 그늘진 3개의 정육면체로 지각된다. 이러한 오목과 볼록의 역전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그림 전체를 왼쪽에서부터 3등분하면 왼쪽과 오른쪽 부분은 서로 반대쪽 면을 보여주는 실제처럼 여겨진다. 반면 중앙 부분은 전체적으로 불확실한데, 바닥은 천장으로 내부는 외부로 볼록면은 오목면으로 보여지는 동시적 시각성 때문이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3개의 집 또는 예배당에서 왼쪽은 바깥, 오른쪽은 안쪽에서 본 시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중간 부분 플룻을 부는 두명의 소년을 쳐다보면 헷갈리게 된다. 예배당의 십자지붕을 내려다보며 플룻을 부는 왼쪽 소년은 창문을 내려가 지붕을 건너 집앞 어두운 땅바닥으로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른쪽 소년의 경우 왼쪽 소년에게서 지붕이었던 것이 머리 위 천장으로 되었고, 그의 아래는 바닥이 아니라 발을 내딛으면 바로 추락하는 심연인 것이다.                                Castrovalva(1930)   1920년대 남부 이탈리아 거주 시절 제작한  현지 건축물과 풍경에 대한 작품 중 하나이다. 좁은 시골 길 가장자리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아브루치의 풍경 전망을 에셔답지 않게 최대한 충실히 재현하려 한 초기 목판화이다. 그럼에도 뭔가 기괴한 분위기를 에셔 특유의 조망도 속에 은은히 풍기고 있다.        Print Gallery(1956)   평면과 입체공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작품에서 에셔는 왼쪽에 있는 한 젊은 관람객이 실재이자 판화의 일부가 되는 이미지의 중첩성을 보여준다. 즉 화면의 평면성을 깨는 중심부 확대 기법을 사용하여 환영(幻影)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중간의 비어있는 중앙에서 시계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가게 하다보면 저 젊은 관람객 역시 그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의 일부라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끔..      또 다른 세상(1947)   이 작품은 수평면과 수직면이 모종의 상대적 관계를 보여주는 '평면 기능의 상대성'이라는 주제 시리즈의 첫번째이다. 벽에 있는 아치형 창문으로 세가지 다른 풍경이 보이고, 위쪽 창문을 통해서는 가파른 땅바닥의 모습이 나타난다. 중앙 창문으로는 눈높이의 지평선을 보고, 아래쪽 창문으로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볼 수 있다. 이처럼 한 시점에서는 바닥이, 다른 시점에서는 천장이 되는 각면의 상대적 기능을 이용하여 심연과 지평선, 하늘을 결합하는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에셔는 절묘하게 통합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유대의 끈(1956)   3차원성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소재로서 사용한 나선형 띠로 에셔는 인간관계의 따뜻한 유대감을 표현했다. 이 그림속의 두 남녀는 에셔 부인과 그 자신이다. 둥둥 떠다니는 공들은 무한한 시공간을 상징하며 액체는 생명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변치않게 영원히 보존하는 불멸의 묘약 같아 보인다. 명성을 얻기 전 30년간 궁핍한 시절을 함께 한 반려자에 대한 에셔 나름의 고마움과 애정의 표출이 잔잔하게 배여있는 훈훈한 작품이다.       그림 그리는 손(1948)   이 그림은 미국의 더글라스 홉스테더가 자신의 베스터셀러 '괴델, 에셔, 바하'(1979)에서 3인의 천재가 추구한 '영원한 황금실'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에셔적 순환고리를 설명하는 데 인용한 작품이다. 홉스태더는 여기에 나타난 두 손을 그리는 에셔의 실제 손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에 자신을 언급하는 주체와 객체가 뒤섞여 나타나는 '무한역행'의 순환 패러독스를 보인다고 했다. 이 점에서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진중권은 이 그림의 원형은 이상한 순환고리의 일종인 '뫼비우스의 띠'라고 단언한다.                                            여기에서 대칭 형상속에 움직이는 도마뱀은 상상력을 표현하는 동물적 매체를 상징하는 듯 하다. 그리하여 현실속에 살면서도 상상력을 통해 사고의 힘을 키우는 지적 유희가, 꼬리가 끊임없이 자라는 도마뱀이 그림속에서 연차적으로 옮겨가는 이동놀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Stars(1948)   온갖 종류의 정다면체들이 별처럼 공중에 떠다니고 중심에 3개의 정팔면체가 결합한 구성물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2마리의 카멜레온이 들어앉아 죽은 세계에 생명의 기운이 깃들게 한다. 카멜레온이 선택된 이유를 에셔는 이 짐승의 발과 꼬리가 공간 속을 선회하는 정팔면체의 뼈대를 잡고 있기에 가장 최선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뫼비우스의 띠 1(1961)   가도가도 결국은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는 악마의고리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에셔는 인간만사의 그 어떤 벗어날 길 없는 숙명을 나타내는 모티브로 즐겨 다룬다. 결과가 뻔한 쓸데없는 일을 하는데 대한 허망함이 아닌, 숙명적 순환고리를 돌면서 우리 인간의 지성은 더욱 풍성해진다는 희망적 메시지 전달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뫼비우스의 띠 2(1963)   뫼비우스의 띠를 좀 더 실감나게 그린 이 그림에서 개미들이 한 면을 계속 기어가다 보면 어느 듯 원점으로 회귀한 뒤  다시 왔던 길로 끝없는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무한역행의 패러독스가 재삼 확인된다. 어허.. 우리 인생도 어쩌면 저럴지도...   Snakes(1969)   우주를 뱀으로 상징하는 것은 여러 문명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우주의 무한성을 양립할 수있는 해답을 찾는 것은 헤겔을 비롯한 모든 철학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이 그림에서 원의 중심쪽과 가장자리쪽으로 고리들은 무한히 작아진다. 에셔는 이런 식으로 유한한 평면에 뱀의 또아리를 통해 우주의 무한한 과정을 담으려 했다. 진중권의 물음대로 '원시적이면서도 영원한' 그 무언가에 접근하는데 어찌 좀 성공한 것 같은가?..        
222    "영원한 황금실" 中 뫼비우스의 띠 - 에셔 댓글:  조회:3384  추천:0  2016-10-26
  에스허르 또는 에셔의 작품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직업 : 그래픽 아티스트, 판화가 국적 : 네덜란드 출생지 : 네덜란드 프리슬란트주 레이우아르던 활동년도 : 1898년 6월 17일 ( 네덜란드 ) - 1972년 3월 27일   기하하적 원리와 수학적 개념을 토대로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내적이미지를 표현한 네덜란드의 판화가 이자 화가입니다. 평면의 규칙적 분할을 통한 무한한 공간과 그 속의 원과 회전체 등이 작품의 중심을 이룹니다.   수학과 논리학의 난제를 다룬 독특한 작품 세계로 유명합니다. 그는 교묘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작품 활동을 했는데, 특히 '이상한 고리 (뫼비우스의 띠 )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습니다.   미국의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룬 괴델,에셔,바르 라는 책에서 에셔의 '이상한 고리,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바흐의' 무한히 상하는 카논'을 함께 묶어 '영원한 황금실'이라 불렀습니다.       테셀레이션이라 불리는 평면의 규칙적 분할은 일정한 형태의 타일을 사용해서 겹치지도 않고 틈을 남기지도 않으면서 바닥을 완전하게 덮는 배열 방식을 의미합니다.   통상 이공간분할에 사용되는 대상은 바닥에 까는 타일과 같은 정다각형이나 그에 준하는 도형들입니다. 그러나 에셔는 수학적 도형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상적 형태들의 공간 분할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그는 '변태-어떤 형태가 다른 형태와 얽혀 서서히 변해가면서 심지어는 2차원 평면을 벗어나는 2차원 형태들-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특별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는 주변에 있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자기의 상상에 기본을 두고 내적 이미지를 표현하였습니다. 평면의 규칙적인 분할을 바탕으로 한 무한한 공간, 공간 속의 원과 회전체 등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때로 에셔의 작품들은 미학적 예술작품이라기보다 수학적, 기하학적 연구결과 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에셔가 높은 수준의 수학이나 물리학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합니다.   에셔의 대표작으로는 서클리미트라는 목판화 연작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960년에 발표한 서클리미트-악마와 천사입니다. 현대 건축의 공간 인테리어에 자주 표현되는 패턴화 기법인 테셀레이션 방식으로 천사와 악마의 연속된 이미지가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입니다.   어쩌면 현실세계를 부정하듯한 그의 작품들은, 실제로 방안에 있으면서 지루한 잇랑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문제 풀이를 하는듯이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줄을 모른답니다. 이상한 점을 찾아 낼 수도 있고, 찾지 못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여행을 좋아해서 이탈리아나 스폐인등지를 평생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그이유로는 네덜란드가 지루해서라는것도 있습니다.하지만 그가 만들 네덜란드의 풍경들, 특히 델프트를 그린 그의 작품역시 정감이 많이 가는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에스허르 또는 에셔의 작품들을 보셨는데요! 보면서도 저도 눈을 의심할만큼 재미있고 일상적이지 않아 헤쳐나가고 싶은 마음까지 든답니다 ! 재미있는 착시 사진 많으니 담아 가시거나 소중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ㅡ^  
221    수학과 미술과 그리고 미술가 - 에셔 댓글:  조회:3742  추천:0  2016-10-26
  미술가 에셔의 작품과 수학 네덜란드의 미술가 에셔(Escher)는 미술에 문외한이 필자가 그림만 보고 누구의 작품인지 판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술가 중의 하나이다. 에셔는 반복되는 기하학적 패턴을 이용하여 대칭의 미를 느낄 수 있는 '테셀레이션' 작품을 많이 남겼다. 테셀레이션이란 동일한 모양을 이용해 평면이나 공간을 빈틈이나 겹쳐지는 부분 없이 채우는 것을 말한다.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라는 단어는 4를 뜻하는 그리스어 'tesseres'에서 유래했는데,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사각형을 붙여 만드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삼각형이나 정육각형 등 다양한 모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해서도 테셀레이션을 만들 수 있다. 테셀레이션의 예로는 욕실의 타일, 보도블록, 조각보, 전통 문양 등을 들 수 있는데, 테셀레이션이라는 생소한 용어 대신 '쪽매맞춤'이라는 정감 넘치는 순 우리말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요즘 초등학교 수학 교과서에는 '옮기기', '돌리기', '뒤집기'라는 새로운 내용 요소가 포함되었다. 이는 각각 '평행이동', '회전이동', '반사'라는 수학 용어에 대응되는 일상적인 표현으로, 테셀레이션의 기초가 된다. 평행이동(옮기기)은 도형을 일정한 거리만큼 움직이는 것이고, 회전이동(돌리기)은 한 점을 중심으로 도형을 회전시키는 것이며, 반사(뒤집기)는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모양을 뒤집는 것이다. 조개껍질과 불가사리를 반복적으로 배치한 에셔의 그림은 회전이동을 이용하여 면을 채운 테셀레이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에셔의 작품 ‘도마뱀’에는 도마뱀이 2차원 평면에서 나와 3차원 입체로 옮겨갔다가 다시 2차원 평면으로 되돌아가는 순환 과정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배경은 개구리 모양으로 채워진 테셀레이션으로 되어 있다. ▲ 에셔의 테셀레이션(左)과 도마뱀(右)  ⓒ ▲ 에셔의 천국과 지옥  ⓒ 에셔의 그림에서는 부분이 전체를 닮으면서 자기 유사성을 갖는 프랙탈(fractal)의 아이디어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천국과 지옥’에는 검은색 박쥐와 흰 천사가 중심에서 주변으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면서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프랙탈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흰색을 위주로 보느냐 검은색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느낌이 달라진다. 전문적인 수학을 배우지 않은 에셔가 다분히 수학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을 보면, 미술과 수학의 상상력은 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네덜란드 출신 작가 M.C 에셔의 작품들은 사후 44년이 지난 지금도 무한 반복되는 패턴과, 수학과 예술이 교차하는 작품 세계로 사랑받고 있다.  네덜란드의 에셔 박물관이 1924년 그려진, 잊혀진 에셔의 스케치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제목이 없는 이 귀한 작품을 소유하고 있던 것은 에셔의 가족이지만, 이 그림이 그려진 장소는 분명치 않았다. 그런데 큐레이터 미키 필러 덕분에 이 미공개 작품이 공개됐고, 덕분에 에셔가 어디를 그린 건지가 밝혀졌다. 에셔가 그린 것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약 20km 북동쪽의 도시 몬테첼리오였다.   1924년 3월 에셔는 결혼 전 로마를 방문했다. 미키 필러에 따르면 에셔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작품의 모티브를 찾아 자주 산책을 다녔다. 그동안 에셔가 그린 것이 서기 998년에 건설된 몬테첼리오였다. 필러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처럼 화가가 죽은 지 상당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작품이 발견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에셔의 다른 작품과 기술적으로 비슷한 부분도 있고, 또한 만년의 작품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된 요소도 있다. 중요한 발견"이라고 설명했다.    
220    네덜란드 "이상한 고리" 화가 - 에셔 댓글:  조회:1933  추천:0  2016-10-26
MC 에셔의 약력: 이름은 Maurits Cornelis Escher로 보통 엠씨 에셔(M.C. Escher)로 통합니다. 네덜란드 사람으로 1898에서 1972까지 살았던 사람이요. 통상 이 사람 작품은 5개의 시간대로 구분하는데 초기 2기간은 정물이나 풍경에 치중한 반면 후기에는 기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예를 들어 초공간의 분할이나 시각적 파라독스 혹은 지그소우 퍼즐을 맞추는 듯한 작품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그의 작품은 석판화(lithograph)라는 미술기법으로 표현된 게 대부분입니다.  ------------------------------------------------------------------------------------  오늘 님들께 보일 작품은 바로 이 '지그소우 퍼즐'을 주제로 한 작품들입니다. 보통 테슬레이션(tessellation)이라고 불르고요. 요즘과 같이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한 시대에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작품들이지만 1930, 40년대에 오로지 자와 연필 그외 작도에 필요한 몇몇 기구만 가지고 이 작품들을 도안했다고 상상해보면 그 정성에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환상적인 아이디어에 의미가 있다고 보면 되고요 ^ ^.  첫번째 작품은 '변형 I'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테슬레이션 시리즈 중에서 상당히 초기것인데 짐작하시다시피 '변형 II'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우로 너무 길어 이 자리에 올리기 힘드니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지중해의 한 동네를 묘사한 것과 같은 모습이 좌측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집들이 점점 기하학적인 무늬로 변하다가 종래에는 한 사람의 모습(중국인이나 베트남인 같아 보이오)으로 '변형'을 하게됩니다. 직접 두꺼운 종이위에 이 모습을 전사해서 퍼즐로 만들어 보아도 재밌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Metamorphosis I (1937)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하늘과 바다'라는 작품입니다. 어떤 과정으로 물밑의 물고기가 하늘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로 되는 지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이고요. 이 두 작품은 똑같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I은 좌우대칭의 모습이고 II는 좌우비대칭의 모습으로 작가의 면밀한 도안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Sky and Water I & II (1938) 네 번째 작품 역시 같은 구성인데 이번엔 가장 밑의 무늬가 올라갈수록 두 가지 서로다른 형태로 변형하게 됩니다. 하나는 집을 구성하는 블럭이 되고 나머지는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구요.  Cycle (1938) 다섯번째는 'Verbam'이라는 작품으로 화면상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가운데 Verbam이라고 써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구요. 제가 갖고있는 책으로 쌔운 스캔은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에 가는 선들이 많아 므와레의 압박이 심합니다. 그래서 그냥 밑에 그림으로 만족하기 바라옵니다. 이 작품은 위의 주제의 총정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운데부터 시작해서 가장자리의 여섯 부분으로 이동해 가면서 총 여섯가지의 패턴으로 변하게 되는 거요. 새, 물고기, 개구리가 각각 흰색과 검은 색의 무늬로 되어 여섯 면과 만나게 되는 거요.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겠구요.  Verbam (1942) 여섯번 째 작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디자인 학도를 꿈꾸며 미술공부를 하던 시절 이 작품을 보고 수없이 따라 빼끼던 작품이었습니다. 잘 보시면 선인장과 술병, 술잔 그리고 뻣뻣한 재질의 종이(혹은 오래된 탓에 수분을 살짝 머금고 있는 종이라고 봐도 좋소)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우측 상단 책 등 너무나 잘 그린 한 폭의 정물데생이라고 생각한 탓이었구요. 하지만 당시엔 이 작품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몰랐었습니다. 2차원의 스케치북에 빼곡히 있는 도마뱀 무늬가 3차원상을 가지는 실제 도마뱀으로 변형되는, 그리고 다시 2차원상으로 되돌아가는 끝없는 저 순환을 보시기 바랍나다 (다시 보니 악어에 더 가깝넹^ ^).  Reptiles (1943)  이번 주제는 ‘공간왜곡’입니다. 에셔는 수학적인 분할을 통해 왜곡된 공간을 많이 작품에 반영하였습니다.  1. 손에 든 반사된 구  보통의 미술가들도 자신의 자화상정도는 하나쯤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에셔는 독특하게도 자신의 모습을 손에 들고 있는 금속구에 비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실제로 이렇게 구를 들고 몇 시간씩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또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그린다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먼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한 뒤 캠버스를 볼록한 형태로 표현되도록 분할한 뒤 거기에 자신의 모습을 그린, 면밀하게 3D 기하학적으로 디자인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비교적 초기작중 명작에 속하는 것이구요.  Hand with Reflecting Sphere (1935) 2. 발코니 이 작품은 지난 번에도 올렸던 것으로 마치 볼록렌즈가 중심에 있는 평면거울에 비친 상을 사진으로 찍은 듯한 작품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찍은 사진을 그대로 빼껴 그린 게 아니라 평면을 모눈종이 그리듯이 수많은 선으로 분할한 뒤 중앙의 곡선을 디자인하여 거기에 보통의 그림을 그리듯이 그린 것입니다.  Balcony (1945) 3. 세 개의 공 I 아마도 그래픽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님들은 이런 작품 정도는 쉽게 컴퓨터 상에서 쌔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든 1945년이라면 그게 그다지 쉽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온전한 형태의 원을 그린 후에 잘게 원을 분할하여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내었이 (가장 위의 공). 그 다음은 원을 약간 잘라낸 형태의 도형을 만들고 다시 분할하여 이번엔 한 부분이 잘려나간 형태의 입체적인 구를 표현한 것이 (두번째 세번째 공). 말이야 이렇게 쉽다만 실제로 이걸 펜, 자, 컴파스같은 원시(?)적인 도구로 작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Three Spheres I (1945) 4. 세 개의 공 II 이번엔 세 개의 공을 그리되 첫번째는 투명한 유리구슬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모습이 반사된 금속구라고 보면 되겠고 세번째는 이도 저도 아닌 구슬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미술공부하던 시절 저 세번째 공이라도 빼껴볼려고 안달을 하던 때가 아련히 생각이 나는군요.  Three Spheres II (1946) 5. 이슬방울  나뭇잎 위에 떨어진 이슬방울입니다. 위에 올린 반사된 구와 일맥상통하나 반사된 형상(창문으로 보이오만)과 투영된 잎맥까지 표현한 작품입니다. Dewdrop (1948) 6. 물결이 있는 표면  쓸쓸한 겨울밤, 달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비친 물웅덩이에 물방울이 두 방울 떨어진 모습을 포착한 듯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스케치가 있습니다. 먼저 나뭇가지와 달을 정상적으로 그린 뒤 두 개의 타원을 겹쳐 그리고 그 아웃라인에 맞게 나뭇가지를 표현한 것이구요. 기회가 되면 그 스케치들도 올리겠습니다.  Rippled Surface (1950) 7. 화랑  에셔 자신의 작품이 걸려있는 한 화랑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잘 보면 위에 소개한 “세 개의 구 I”도 보일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작품들과는 또 다르게 전체적인 구도가 가운데를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비틀린 왜곡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Gallery (1956)  
219    .... 댓글:  조회:7952  추천:0  2016-10-26
      두마리의 달팽이 ( Two snails)          딸기 해변 (Strawberry Beach)              나의 소중한 비애 (My beloved melancholy)          버섯 왕 (The mushroom king)            수족관 (Aquarium)           피아노 (The piano)          타워의 잠재의식 (Tower of subconsciousness)             조류 (Tide)            사과 케이크의 요리법 (The apple cake recipe)           도시 착륙하다  (The city is landing)          길가의 벽장 (Wayside cupboard)            겨울 파도 (The winter wave)              S.A.D.              안방 ( Boudoir )               탄제린의 꿈 ( Tangerine dream )          시간이 요구하다 ( The time has asked )             The Sargass sea bishop               객실 위층 ( Room upstairs )           Saint Grall찾기 ( Finding Saint Grall )         야첵 예르카는 1972년에 첫 포스터 일러스트에 대한 수상을 받고   1980년도 밀라노에서 좋은 평판을 얻게 되면서 점점 유명해 졌어요오.   그래서 바르샤바 여러 미술관과 협약하여 전시도하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데 전념했하는 풀타임 아티스트의 길을 가게 되었죠오   1990년대 중반에는 헐리우드의 Renee Daalder 감독의 제안으로  '스트로베리 필드' 라고 하는 공상과학 영화 제작에도 참여 했어요오    작가의 작품중 Creation of life(삶의 창조)나Technobeach(테크노비치]나 Broken picnic(망쳐진 소풍이]   이때 그려진 거라고 하네요~               꿈 ( The dream )         국가 그리고 동쪽 (Country and Eastern )            사계 ( Four seasons )           체스섬 ( Chess on island )            성경책 댐 ( Bible dam )         바다로 ( By the waters )           문닫지마 (Don't slam the door)           가득찬 그릇 ( Full bowl )           정원사의 정원 ( Gardener's Garden )          게임 보이 ( Gameboy )         습지 차 (Swamp tea)           여름 도시 ( Summer in a city)           거주하기 좋은 나무 (Residential oak)          미친듯이 날뛰는 추수 (Amok Harvest)          Amonit           동틀녘에 침범 (Attack at dawn)           천개(天蓋)( Baldachin ) (제단이나 옥좌 위에 금속·돌 따위로 만든 닫집)            Cloudbreaker           브론토사우루스 구성원  (Brontosaurus civitas)         베게너의  이론 ( Wegener's theory )   베게너 (1880-1930) : 독일의 지구 물리학자·기상학자         이중 생활 2 ( Double life II )           항구 ( The harbour )           Cowan city            드레곤의 즐거움 ( Dragon's pleasure )          부식 ( Erosion )          심연에서 ( From the abyss )           Hesia 2           농가주택 (Homestead)            집의 근원으로 ( House at source)          저비행 항공사들 (Low cost airlines)          버섯 골목 ( Mushroom alley )           야간 근무 ( Night shift )          폴란드 분제 ( Polish bonsai )           특급 배송 (The Express Delivery)             돌과 벽돌 ( The stone and brick )          걸어다니는 수업시간 (The walking lesson)                     뿅       [출처] 야첵 예르카|작성자 공주 은  
218    자신만의 그림세계에 빠지다... 댓글:  조회:1973  추천:0  2016-10-26
    Back to Home     2004         Enclave    2002         Strawberry tree     1995           야첵 예르카  Jacek Yerka          1952년 폴란드 북부 토루니 출생   야첵 예르카의 부모님 모두 미술을 전공, 어릴 적 과민반응적 행동,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싫어했고 주로 혼자서 연필을 들고 앉아 현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로 빠지곤 했다. 때때로 공포스러운 현실에서의 탈출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길 즐겼으며 유년시절엔 할머니의 아파트에서 놀거나 숲을 함께 걸은 기억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그의 작품엔 부엌과 숲의 이미지가 많다.    1980년 전업화가가 되기 이전, 회화와 그래픽을 공부.     판타지 소설 작가인 Harlon Elliso와 함께 'Mind Fields'라는 책을 출판. 1995년 World Fantasy Award Artist 부분 수상 사이언스픽션 예술의 대표자로 호평. 'The Strawberry Fields'의 몬스터머신 및 비현실적인 풍경을 디자인하는 프로덕션에도 참여, Creation of Life, Technobeach, Broken Picnic 은 이 프로젝트에서 창조. 보쉬, 피터 브뤼겔, 구스, 얀 반 아이크 등의 영향을 받았다        Her Majesty pearl telephony   2011          Young Hadron, 2011         Tornado alley     2005           Garden    2000         International Children's Day     1977          Sun Spots           The Moonlight Bed     2002             Grandma's Kitchen     2003           Bible dam,2006                   Street     2006           Cowan City     1993      
217    폴란드 추상미술가 - 야첵 예르카 작품모음 댓글:  조회:4724  추천:0  2016-10-26
                                                                                                        ▣ '폴란드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야첵 예르카 (Jacek Yerka)의 작품 세계와   ♣ 자유로운 상상력의 환상적인 세계, 야첵 예르카 (1952년~ )    
216    일상품도 작품으로 변용될수 없다?... 있다!... 댓글:  조회:2143  추천:0  2016-10-26
'샘'의 재구성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1984년 단토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물론 당시 단토(Arthur C. Danto)가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기 위해 들었던 사례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워홀(Andy Warhol)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1964)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단토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예술의 종말’ 사례로 들었던 것일까? Brillo Box, 1964. Andy Warhol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은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예술 종말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겔의 진술을 따른다면, 헤겔이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1820년대 이전의 예술은 정신의 최고 욕구, 즉 (헤겔식 표현을 따른다면) 절대적 진리에 이르는 형식이었다. 그렇다면 헤겔의 ‘예술 종말론’은 플라톤(Platon)의 ‘예술 추방론’, 즉 예술을 평가절하한 플라톤에 똥침을 놓은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헤겔의 진술을 따른다면, 헤겔은 예술에 대한 철학의 우월성을 해체시킨 셈이 된다.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도 절대적 진리를 인식하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철학과 예술은 적어도 옆으로 나란히 위치한다. 근데 문제는 그 예술이 끝장났다는 것이다. 헤겔 왈, “예술은 최고의 규정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과거지사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술은 더 이상 진리가 실존하는 최고의 방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럼 진리가 실존하는 최고의 방식으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헤겔의) 철학이다. 만약 우리가 헤겔의 논의에 동의한다면, 헤겔 이전의 철학은 예술과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헤겔의 철학이 등장함과 동시에 철학은 예술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지게 되는 셈이다. 그쵸? 이건 순전히 약주고 병주는 격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헤겔은 자신의 철학이 예술보다 우월하다고 씨부리는 것일까? 헤겔이 생각한 예술은 인식이 아니라 직관(Anschaunung)에 있다. 말하자면 철학은 인식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반면, 예술은 직관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고자 한다고 말이다. 그럼 인식이 직관보다 우월한 것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헤겔의 답변은 간단하다. 예스!  와이? 헤겔의 ‘절대자’는 직관이 아닌 오직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이성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조타! 헤겔의 진술에 동의한다고 하자. (물론 대뽀는 헤겔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 예술이 직관이 아닌 인식을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면? 예술은 철학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근데 바로 이 점에 주목한 이가 다름 아닌 단토다. 단토는 헤겔의 진술을 따라 직관이 아닌 인식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사례(작품)를 찾기 위해 거대한 탐사를 한다. 우선 단토의 진술을 들어보자. “1905년부터 1964년까지의 위대한 철학적 시기의 현대예술은 자기 자신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거대한 탐사를 하였다. 그 거대한 탐사는 예술로서 지나치게 순수한 자신의 형태를 추구함으로서, 처음 이런 탐사를 시작하게 한 것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단토의 진술을 따른다면, 위대한 철학적 시기의 현대예술은 1905년부터 1964년까지다. 그럼 단토는 59년 간의 시기를 하나의 내러티브, 즉 헤겔이 1820년대 예술이 ‘중단했다’고 말한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추구한 시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글마들의 논의를 따른다면, 예술의 철학적 의미 추구는 1828년부터 1905년까지인 77년간 중단한 셈이 된다.  근데 왜 단토는 위대한 철학적 시기의 현대예술을 1905년과 1964년으로 못을 박은 것일까? 단토의 말을 빌리자면 1905년은 추상미술과 함께 수많은 선언문이 등장한 시기이다. 그리고 1964년은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제작 전시된 해이다. 도대체 단토는 어떤 점에서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작품으로 보았던 것일까? 단토 왈, “왜 상점에 있는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워홀이 만든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고 불리는가?”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상점에 있는 브릴로 박스를 재현한 것이다.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뒤샹의 〈샘〉처럼 기성품이 아니다. 그것은 워홀이 합판으로 만든 박스에 물감으로 작업한 워홀의 ‘브릴로 박스’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볼 경우 별 차이가 없다. 그럼 무엇으로 그들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 사이의 차이는 시각이 아닌 인식, 즉 철학적 사유가 개입되어야만 구분이 된다는 것이 단토의 요지다.  그럼 단토가 예술의 종말 사례로 들었던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예술 자체의 죽음’이라기보다 차라리 ‘시각미술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닌가? 근데 대뽀가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시각미술의 종말’은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아닌 그보다 47년 전에 제작(?)된 뒤샹의 〈샘〉에서 볼 수 있잖은가? 뒤샹의 〈샘〉은 (단토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작가의 손으로 직접 제작되지 않은 “일상품도 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사례다. 그리고 (다시 단토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간단한 손도구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고, 상품 상자나 쓰레기 더미나 한 줄의 벽돌, 속옷 무더기, 도살된 동물 등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술의 역사가 입증”한 것은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아니라 오히려 뒤샹의 〈샘〉이 아닌가? 머시라? 그래도 아직 접수가 되지 않았다고요? 조타! 그럼 이번엔 아예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사례로 들었던 워홀의 〈브릴로 박스〉에 관한 진술을 그대로 빌려 되돌려 먹이기를 해보겠다.  왜 상점에 있는 소변기는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뒤샹이 전시장으로 옮겨 놓은 소변기는 예술이라고 불리는가? 뒤샹의 〈샘〉은 상점에서 판매하는 소변기를 전시장으로 단지 자리바꿈시킨 것이다. 뒤샹의 〈샘〉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처럼 제작한 것이 아니라 기성품이다. 따라서 상점의 소변기와 전시장의 소변기 사이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볼 경우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 무엇으로 그들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 사이의 차이는 시각이 아닌 인식, 즉 철학적 사유가 개입되어야만 구분이 된다.  그럼 단토가 주장한 ‘예술의 종말’은 워홀의 〈브릴로 박스〉보다 47년 전에 출현한 뒤샹의 〈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토는 ‘예술의 종말’ 사례로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들었을까? 혹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전통적인 미술(박스에다 물감으로 작업했다)의 형태를 고수했기 때문에? 뒤샹의 〈샘〉이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토는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위원들처럼 뒤샹의 〈샘〉을 ‘작품’으로 판단내리지 않았나/못했나?    
215    "짝퉁미술"과 "예술의 종말 댓글:  조회:2052  추천:0  2016-10-26
   질투와 짝퉁과 그리고 종말과...     1917년 뒤샹은 리처드 머트(Richard Mutt)라는 가명으로 〈샘〉을 ‘독립미술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전에 출품했는데, ‘전시위원회 위원들’은 〈샘〉을 전시 보이코트했다. 따라서 1917년 뒤샹의 〈샘〉은 ‘작품’이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당시 뒤샹의 〈샘〉은 분실되었고, 흥미롭게도 워홀이 〈브릴로 박스〉를 제작한 1964년 복제(?)되었다. 뒤샹의 〈샘〉은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전에서 보이코트 당한 이후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다가 1960년대 적잖은 작가들로부터 넘어야 할 산으로 간주되었다. 1960년대 미술계에 등장한 프랑스의 BMPT와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 이태리의 누보레알리즘(nouveau realisme)과 아르테포베라(arte pobera), 독일의 (요셉 보이스를 주축으로 한) 사회조각, 미국의 미니멀 아트(minimal art)와 개념미술(conceptual art), 일본의 모노파 등은 넓은 의미로 보자면 뒤샹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에게 뒤샹의 〈샘〉은 질투의 대상이었다고 말이다. 단토가 사례로 들었던 워홀의 〈브릴로 박스〉도 뒤샹의 〈샘〉에 대한 질투의 반응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혹자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1960년에 발랜틴 맥주 캔을 브론즈로 만들어 채색한 재스퍼 존스 Jasper Johns의 〈채색된 청동 Painted Bronze〉과 문맥을 이루는 것으로 읽기도 한다.) 만약 워홀이 상점의 브릴로 박스를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들지 않고 그 자체를 전시장으로 그대로 옮겨놓았다면? 십중십 워홀은 뒤샹의 스딸을 흉내낸 ‘뒤샹의 아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물론 뒤샹의 〈샘〉은 동시대의 작가들에게도 질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제프 쿤스(Jeff Koons)의 〈뉴 쉘턴 웨트/드라이 더블 데커(New Shelton Wet/Dry Double Decker)〉(1981)나 하임 스타인바흐(Haim Steinbach)의 〈관계와 차이(Related and Different)〉(1985) 그리고 기욤(Guillaume Bijl)의 〈새로운 슈퍼마켓(Neuer Supermarket)〉(1990) 또한 실비 플러리(Sylvie Fleury)의 쇼핑카트 작품인 〈Easy, Breezy, Beautiful〉 (2000) 등을 들 수 있겠다. (뒤샹의 〈샘〉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고 간 작가들로 대뽀는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의 〈살아있는 조각 sculpture vivante〉(1961)과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바네사 비크로프트Vanessa Beecroft의 ‘퍼포먼스’ 그리고 스펜스 튜닉Spencer Tunick의 ‘인간 인스톨레이션’을 든다. 와이? 그들은 뒤샹처럼 ‘상품’을 넘어 아예 ‘인간’을 ‘작품’으로 전이시켰으니까.) 버뜨(but), 뒤샹의 〈샘〉을 복제(?)한 작가의 작품도 있다. 무엇보다 뒤샹의 〈샘〉을 복제(?)한 작가는 뒤샹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구요?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뒤샹은 1964년 〈샘〉을 복제(?)했다. 뒤샹은 1917년 제작(?)한 〈샘〉과 동일한 소변기를 찾았을 것이다. 허나 1964년에는 1917년 생산된 소변기가 생산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 뒤샹은 오리지널(?)과 유사한 소변기를 찾았다고 한다.  Fountain, 1917. Marcel Duchamp(photographed in 1917 by Alfred Stieglitz) Fountain, 1917/1964. Marcel Duchamp Fountain(After Marcel Duchamp 1), 1991. Sherrie Levien Fountain(After Marcel Duchamp 5), 1997. Sherrie Levien     오늘날 우리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뒤샹의 〈샘〉은 바로 1917년 오리지널(?)이 아닌 1964년에 복제(?)한 소변기이다. 그럼 뒤샹의 〈샘〉(1964)은 〈샘〉(1917)의 ‘짝퉁’이 아닌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셰리 레빈(Sherrie Levien)의 〈샘(뒤샹의 모작 1) Fountain(After Marcel Duchamp 1)〉(1991)은 이미 제목에서 읽어 볼 수 있듯이 뒤샹의 〈샘〉을 모작한 작품이다. 물론 레빈의 ‘샘’은 도자기로 제작된 뒤샹의 ‘샘’과는 달리 청동으로 제작한 짝퉁이다.    근데 흥미로운 점은 레빈의 ‘샘’도 이후 다시 복제(?)되었다는 점이다. 레빈의 〈샘(뒤샹의 모작 5)〉(1997)는 1917년 ‘샘’을 1964년 복제한 뒤샹의 〈샘〉처럼 1991년 제작한 레빈의 ‘샘’을 1997년 약간 다른 형태로 제작한 것이다. 물론 뒤샹의 1917년판 ‘샘’은 분실되어 1964년 복제(?)되었지만, 레빈의 1991년판 ‘샘’은 분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1997년 복제(?)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 단토가 ‘예술의 종말’ 사례로 들었던 워홀의 〈브릴로 박스〉에서도 뒤샹의 〈샘〉에서 볼 수 있는 ‘짝퉁’ 놀이(?)를 볼 수 있다.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진짜 ‘브릴로 박스’를 모델로 삼아 제작했다는 점에서 ‘짝퉁’이다. 근데 워홀의 브릴로 박스‘들’ 중에도 짝퉁이 있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1964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단토는 단지 1964년판 〈브릴로 박스〉에만 주목했다.) 허나 워홀은 ‘브릴로 박스’를 1964년만 아니라 1968년에도 제작했다. 열분들이 1964년판과 1968년판을 옆으로 나란히 위치시켜 보면 그들 사이의 차이를 담방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1968)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의‘짝퉁’이 되는 셈이다. Brillo Box, 1964. Andy Warhol Brillo Box, 19641968. Andy Warho Not Warhol(Brillo Boxes, 1964), 1991. Mike Bidlo   오잉?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복제(?)한 또 다른 작품이 있잖은가. 마크 비들로(Mike Bidlo)의 〈워홀이 아니다(브릴로 박스들, 1964) Not Warhol(Brillo Boxes, 1964)〉(1991)는 워홀의 1968년판이 아닌 1964년 ‘브릴로 박스’를 모델로 삼아 복제(?)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뒤샹의 〈샘〉을 복제한 레빈의 ‘짝퉁 샘’이 비들로의 ‘짝퉁 브릴로 박스’와 마찬가지로 1991년에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거, 우연의 일치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혹 그건 뒤샹의 〈샘〉에 대한 질투 때문이 아닐까? 그럼 질투는 작가의 힘?    
214    13년간이나 그렸거나 애장해온 자신의 그림 전부 불사르다... 댓글:  조회:1981  추천:0  2016-10-26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발데사리 1970년 미국 화가 존 발데사리는 13년간 자신이 그리거나 애장해온 그림 전부를 불태웠다. ‘화장 프로젝트’로 기록된 이 퍼포먼스를 통해 당시 39세 발데사리는 개념미술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 ...발데사리는 ‘보는 것’과 ‘읽는 것’의 상관 관계에 주목한 그림들로 개념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대중매체에서 나온 이미지들의 사회 문화적 영향을 직시한 작업들로 명성을 얻었다.  ‘맥락없음’이 그의 작품의 맥락이다.  전시되는 ‘스토리보드(Storyboard)’ 시리즈도 그 하나다. 책장 옆 책상, 프로텍터를 한 포수, 칼라 차트, 그리고 ‘사다리를 옮기는 남자’라는 문구 등 서로 관계 없는 네 개의 이미지와 텍스트 조각을 던지며 관객에게 ‘생각하라’고 한다. 그는 미술의 권위도 비틀었다. ‘이중노트(Double Bill)’ 시리즈에서는 마네·샤르댕·고갱 등 대가들의 명작 중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한구석의 이미지를 확대해 출력하고 여기 대중가요 가사 같은 문구를 결합시켰다. 주류 미술과 대중문화 양쪽의 ‘전형’을 결합시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든 경우다. DA 300   존 발데사리, 스토리보드(네 부분): 사다리를 옮기는 남자, 캔버스에 잉크젯 프린트, 유화와 아크릴, 191.8×196.9㎝. [사진 PKM갤러리]  1970년 칼아츠(CalArts )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 2007년 UCLA에서 은퇴할 때까지 발데사리는 리처드 프린스, 데이비드 살르, 셰리 레빈 등 미국 현대미술의 주인공들을 양성했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평생업적 부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미술 시장과는 거리가 있었던 이 84세 개념미술가는 요즘 대중문화의 조명을 받고 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그레이의 집엔 그의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고, 올 초 생로랑의 파리 컬렉션 또한 발데사리에서 영감을 얻은 요소들로 런웨이를 채웠다.  권근영 기자 [출처: 중앙일보]  ===================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거장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ㆍ1931~)의 대규모 개인전...발데사리의 근작과 신작(2008~2015) 20여점... 발데사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자유와 진보의 상징인 웨스트코스트(West coast)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들의 ‘구루’로 칭송받는 작가다.  Double Bill…And Chardin,Varnished inkjet print on canvas with acrylic and oil paint, 178.4×137.2㎝, 2012 Courtesy Marian Goodman Gallery, New York[사진제공=PKM갤러리] 1960년대 이미지와 텍스트간의 상호관계에 주목한 회화들로 개념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개념미술은 완성된 예술품 자체보다 과정이나 아이디어를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확산된 현대미술 사조 중 하나다.  발데사리는 대중매체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한 작품들을 통해, 미디어 이미지가 전하는 메시지를 관습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주목 받았다.  1970년 ‘화장프로젝트’ 퍼포먼스를 통해 지난 13년 동안(1953~1966) 자신이 해 왔던 모든 전통적인 회화 작품을 불태워버리면서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예술세계의 시작을 알렸다. 누벨바그 거장 장 뤽 고다르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말하는 발데사리는 영화 스틸 컷에 텍스트를 조합시키는 작업을 통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현재 발데사리는 설치, 조각,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실험적인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존 발데사리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현대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발데사리는 사실 1990년대까지 시장의 야인(野人)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상업갤러리들이 앞장서서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미술시장이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작품값도 급등했다. PKM갤러리에 걸린 발데사리의 작품 가격은 3억5000만원에서 5억원에 이른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Quality Material(1968)’는 미술경매에서 440만달러(약 45억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발데사리는 후학을 양성한 공로도 크다. 리처드 프린스, 데이비드 살르, 셰리 레빈 등이 그의 제자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는 그에게 평생업적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김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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