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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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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기적적인 살빼기 성공 댓글:  조회:2366  추천:0  2015-03-04
52    초현실주의와 나와 또한 보는 너... 댓글:  조회:2906  추천:0  2015-03-04
    ㅎㅎ 단체사진찍을때 하던 포즈!!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욧   저만 프라이머리가 생각난 건 아니겠죠..?ㅎㅎ   이 사진작품만 보면  엄지공주가 생각나더라구요ㅎㅎ 로빈슨도 귀여워보이구요ㅎ     해외 애니메이션에서 본듯한 느낌을 받았어요ㅎ   뭘까했는데 알고보니 세계지도였어요ㅎㅎ 작은 배도 왠지 크게 느껴지네요   가장 신기한 작품이었어요!! 역시 컴퓨터그래픽의 힘이란..   트루먼 쇼 느낌이에요ㅎ 짐 케리가 서있는 것 같아요!   왠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화나라로 들어가질것같아요ㅎ 무섭기도하고 흥미진진 하기도하네요   이건 E.T? ㅎㅎ       ㅎㅎ 어떠셨나요? [출처] 부천미고입시의 초현실주의사진작가 Joe Robinson 이야기|작성자 AnB  
51    백석 시와 그림 댓글:  조회:2439  추천:0  2015-02-24
  개구리네 한솥밥  백석 글,                     강우근 그림                 말이 곧 몸인 시세계, 백석의 시를 읽으며 든 생각입니다. 추상과 관념 없이 내가 속한 이 세계에 고스란히 몸담는 맛, 잘 잦힌 흰밥 앞에 코를 벌름대며 앉는 때만 같습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나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을 소박하고 투명하고 명확하고 간소한 언어에 그토록 풍부하게 담은 시인은 또 보지 못했습니다.               백석은 시와 철학을 바탕으로 동화를 써야 한다며 이 땅의 아동 문학에 대해 많은 생각과 글과 논쟁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린이에게는 산문보다 시가 더 맞다고 생각하여 운율이 있는 ‘시’의 형식에 ‘서사’를 담은 동화시를 썼습니다. ‘개구리네 한솥밥’은 백석이 쓴 동화시 가운데 하나로 1957년에 북한에서 발표한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에 실린 글입니다. 공동체적 삶의 친밀함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간결하고 리듬감 있는 문장을 반복하고, 독특한 의성어와 의태어로 감각적인 우리말을 풍부하게 구사하여 서로 돕고 사는 살맛나는 세상을 그렸습니다. 맨 첫 문장만 읽어 주어도 입에서 “시잖아!”라는 소리가 튀어나오도록 입에 척척 감기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운율에 절로 신명이 실립니다. 이는 4·4조의 가락에다 각 동물이 곤경에 처한 상황이 반복되고 또 도움을 주고받는 반복 형식이 전체적인 짜임과 리듬감을 살려내면서 그러합니다. 거기다 동물들의 특성에 꼭 맞아떨어지는 장치들이 재미를 더합니다. 옛날 어느 곳에 가난하나 마음 착한 개구리 하나 살았습니다. 하루는 이 개구리 쌀 한 말 얻어 오려 벌 건너 형을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누군가 우는 소리 들립니다. 개구리는 발 다친 소시랑게, 길 잃은 방아깨비, 구멍에 빠진 쇠똥구리, 풀대에 걸린 하늘소, 물에 빠진 개똥벌레를 차례로 만납니다. 개구리는 이때마다 바쁜 길 잊어 버리고 모두를 도와줍니다. 착한 일 하느라고 길이 늦은 개구리, 형네 집에 왔을 때는 길이 저물고, 쌀 대신에 벼 한 말 얻어서 지고, 형네 집을 나왔을 땐 저문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어둔 길에 무거운 짐 진 터라 디퍽디퍽 걷다가는 앞으로 쓰러지고 뒤로 넘어졌지요. 밤은 깊고 길은 멀고 눈앞은 캄캄하던 터에 어디선가 날아온 개똥벌레, 등불을 받고 앞장서니 어둡던 길 밝아집니다. 이렇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개구리에게 도움을 받았던 친구들이 하나씩 나타나 돕습니다. 등에 진 무거운 짐 하늘소가 들어 주고, 길 막은 소똥 더미 쇠똥구리가 치워 주고, 방아깨비는 이 다리 찌꿍 저 다리 찌꿍 벼 한 말을 다 찧어 줍니다. 불을 땔 장작 없어 쓿은 쌀을 어찌하나 걱정하자 소시랑게 비르륵 기어오더니 풀룩풀룩 거품 지어 맛난 흰밥 한솥 잦힙니다. 장작 없이 밥을 지은 개구리는 좋아라고 뜰에 멍석 깔고 모두들 앉히더니 정답게 한솥밥을 나누어 먹었답니다. 내남없이 어려움을 나누며 서로 돕는 순박함, 방아깨비가 방아를 찧어 벼를 쓿고 소시랑게가 거품을 지어 밥을 잦히는 유쾌한 천진함,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시어의 정경을 따라가는 그림의 정겨움이 덩달아 즐거운 그림책입니다. 투박한 듯 보이지만 따뜻한 느낌을 잘 담아낸 목판화로 만들었습니다. 세부까지 빈틈없이 꼼꼼히 표현한 동물들이 미더운 반면, 개구리를 두 발로 걷는 것으로 표현하고 각 동물들의 크기를 비슷하게 설정하여 상상의 몫을 더했습니다. 거기다 곁들인 익살스러운 표정과 각 개체의 특성을 잘 살린 동작의 천연성이 더욱 미쁩니다. 목판화와 담채로 색을 입혀 완성한 그림은 푸르고 싱그러운 들판과 깊고 푸른 밤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옹골찬 볏모 싱그러운 논가에는 냉이며 질경이며 민들레며 온갖 들풀들 푸릇푸릇합니다. 이게 다 목판의 양각, 검은 형상인데도 푸릇하게 느껴지는 건 배경의 오묘한 색감 때문입니다. 푸른 들판과 붉은 흙, 푸른 연못, 깊고 푸른 밤이 그대로 느껴진답니다. 멍석 깔고 둘러앉은 한솥밥 앞으로 당장 숟가락 들고 뛰어들고 싶어지네요.                    책 소개    시인 백석의 동화시집『집게네 네 형제』에 실렸던 동화시를 고운 그림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는 글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일의 소중함과 기쁨을 전하고 있어요. 덥적덥적, 뿌구국, 디퍽디퍽 등 재미있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돋보입니다. 목판화 느낌의 정겨운 그림이 개구리와 동물 친구들의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모습을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웃는 표정, 곤란한 표정, 기쁜 표정 등 동물들의 얼굴 표정이 생동감 있으면서 귀엽게 잘 표현되었답니다.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개구리 한 마리가 형한테 쌀 한 말 얻으러 갑니다. 덥적덥적 길을 가다가 바쁜 길도 잊고, 봇도랑에 우는 소시랑게 발 고쳐주고, 방아깨비 길 찾아 주고, 쇠똥구리 구멍에서 꺼내 주고, 하늘소 풀대에서 풀어 주고, 개똥벌레 물에서 건져 줍니다. 형에게 벼 한 말 얻어 집에 오는 길, 밤이 깊고 짐은 무겁습니다. 개구리가 도와 주었던 생물들이 차례로 나타나 개구리를 도와 줍니다. 그리고 따뜻한 한솥밥 지어 사이좋게 나눠 먹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동물들의 모습이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올 만큼 포근합니다.               작가 소개    백석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기행이며,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서 일하다가 1935년 시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출간했고, 같은 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에서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만주를 거쳐 안동, 신의주에 머물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 정주로 돌아가 글을 썼습니다. 어린이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어린이 문학에 대한 평론을 여러 편 발표하였고, 어린이에게는 산문보다 시가 더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서사성을 지닌 시, ‘동화시’를 썼습니다. 6·25 전쟁 후에도 북한에 남아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고,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발표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으나, 지금은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우리나라 대표 시인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본문 읽기     옛날 어느 곳에 개구리 하나 살았네. 가난하나 마음 착한 개구리 하나 살았네. 하루는 이 개구리 쌀 한 말을 얻어 오려 벌 건너 형을 찾아 길을 나섰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가 봇도랑에 우는 소리 들렸네. 개구리 닁큼 뛰어 도랑으로 가 보니 소시랑게 한 마리 엉엉 우네. 소시랑게 우는 것이 가엾기도 가엾어 개구리는 뿌구국 물어보았네. “소시랑게야, 너 왜 우니?” 소시랑게 울다 말고 대답하였네. “발을 다쳐 아파서 운다.” 개구리는 바쁜 길 잊어버리고 소시랑게 다친 발 고쳐 주었네. (본문 4~9쪽) 
50    두만강 따라 댓글:  조회:2151  추천:0  2015-02-21
                          
49    사진에서의 기호학 댓글:  조회:2444  추천:0  2015-02-19
사진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 기호학의 전체는 무엇인가 ? 기호는 언제나 의미를 띈다 는 말은 기호학의 전체가 된다 즉 우리 문화 속에 있는 모든것이 기호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경우에도 그것은 순수함 무의미함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문명 사회에서 통용되는 모든것은 기호가 되며 누군가가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모든 기호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왜 기호학이 필요한가 전통적인 작품의 범주에 들지 않는 텍스트나 이미지 대중 문화의 현상들이 가지는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덧붙여진 의미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기호학은 이러한 필요 즉 겉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듯이 보이는 텍스트 이미지 대중문화의 현상들의 의미를 분석해 내는 아주 유용한 도구이다 롤랑 바르트는 소쉬르가 개발한 구조주의 언어학과 기호학을 자가 나름의 기호학으로 발전시켜 최초로 만화 사진 영화 패션 음식 스포츠등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의 의미들을 해석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 시켰다 그는 이러한 문화 현상들에 덧 씌워져 있는 이데올 로기가 무엇인가를 밝혀냄으로써 기호의 명증성 뒤에 숨어있는 다층적 편파적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롤랑 바르트의 연구를 이어 받은 것이 영국에서 문화연구 라는 분야를 발전시킨 버밍햄 그룹 이다 이들은 대중 문화를 읽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기호학과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방법으로 마르크스 주의를 도입하였으며 양자를 합하는 작업을 진행 시켰다 대중 문화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정치적 의미란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를 떠 받치는데 이것이 기여하는 바는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리는 것이다 ~~기호학의 제 1 전제는 의사 소통의 기본 구조로 다음과 같다 발신자 sender ====▶ messang ======▶ 수신자 receiver 발신자 sender ◀==== feedback ◀====== 수신자 receiver 발신자란 기호를 내 보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을 하거나 이미지를 제시하는 사람 여러가지 신호를 보내는 사람 등이 포함 된다 메세지란 전달하는 내용으로 인쇄물 표정 의미 있는 물건을 주는 행위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낸다 수신자란 전달된 내용을 받는 사람을 가르킨다. 피드백이란 전달된 내용에 대한 반응을 말한다 이때 최적의 의사 소통이란 무엇인가? 특정 신호에 대한 발신자와 수신자가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약속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즉 코드가 있는 경우이다 반면 방해되는 의사 소통이란 이러한 코드가 잘 전달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이며 또는 코드에 대해 입장 차이로 인해 다른 해석을 내리는 경우이다 예 남한에서 붉은색은 정지 위험 을 지시하는 기호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붉은색은 전진 을 가르키는 기호이다.  
48    미술에서의 기호학 댓글:  조회:2120  추천:0  2015-02-19
미술기호학으로 본   기호와 문화    오늘날 문화예술 비평의 한 축에서 우리는 분석의 출발점을 언어기호에 위치시키는 일련의 움직임을 찾을 수 있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개인적 목소리나 사회화된 의식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비평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텍스트가 지니는 내적 구조를 밝히려는 이러한 노력은 소쉬르가 창안한 기호학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후반 이후 비평의 중심을 이루었다.   전통적인 학문의 비창조적인 보수성에 대한 반성으로 현대 문화와 예술의 여러 현상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호학 비평의 적용 범위는 인문학은 물론 음악·미술·건축·영화 등 각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분석방법론     미술기호학은 프랑스의 바르트, 이태리의 에코, 러시아의 타르투 학파에 의해서 제안, 후학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바르트의 이론은 회화 특유의 언어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그 기준을 세울 장치를 발견하기 어려우므로 우선 개별적인 미술작품을 하나의 체계로 보고 분석·검토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 에코는 도상기호 A가 지시대상 B와 닮았다는 것은 양자가 제공하는 시각 효과와 기능이 우리의 경험적 인식구조에 의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 도상기호가 지시대상과 유연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하면서 회화의 도상이론을 비판하고 시각적 텍스트의 어떤 미시적 기호론도 포기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비해 타르투 학파의 로트만과 우스펜스키는 개별 작품보다도 일정한 시기의 일정한 문화권에 있어서 한 작품이 다른 동계열 작품과 공유하고 있는 특징의 보다 넓은 의미구조에 대해서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처럼 비평가에 따라 달리 접근되고 있는 미술기호학적 방법론은 어떻게 미술 텍스트에 적용될 수 있는가. 도상기호의 개념에 대해 초기 구조주의자들은 현상의 뒤에는 잠재적인 구조가 숨겨져 있으며 현상은 단지 구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구조를 이루는 계열체적 요소와 그 결합 양상인 통합체 관계에 일차적 관심을 가졌다.    시·지각 현상을 대했을 때 기호학자들이 최초로 부딪히는 문제는 이 현상에서 어떻게 언어적 구조를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였다.   60년대의 바르트가 “연속적인 표현이 단순한 심볼의 덩어리가 아니라 진정한 기호 체계를 생산할 수 있는지, 이산적이지 않은 연속적 ‘코드’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90년대의 그룹 뮈도 “시각 현상은 연속적이고 비균질적인 성질을 가지는데 비해, 기호학은 이산적이고 균질적이어서 양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면 좀처럼 적용되지 못한다”는 고백은 이 문제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초기의 기호학자들은 ‘연속체’와 ‘이산체’의 간격을 메우려는 시도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각기호가 아니라 연속체인 시각 메시지를 계량적인 단위로 분절하는 것은 메츠의 말대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시각 기호학은 시각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메타언어 행위이며 그 연구의 시작점은 ‘도상 연속체'임을 밝히는 작업이 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시각 메시지는 말이 곁들여진 영화, 글이 곁들여진 만화처럼 실제로는 혼합텍스트이며 외견상 혼합텍스트가 아닌 것도 구조상으로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상기호와 문자기호가 공존하는 문인화는 텍스트의 내적 구조를 밝히려는 미술기호학적 방법론의 구체적 실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김정희(1786~1856)의 는 글씨와 그림의 경계 위에 있는 추사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림이 있는 부분과 글의 내용으로 구별할 수 있다. 우선 그림 텍스트는 가운데 여백을 중심으로 화면 오른쪽의 소나무와 왼쪽의 잣나무가 두 그루씩 배치되어 있으며 이들 나무 사이에 집 하나가 위치한다.   동양화에서 중시되는 여백은 이 작품에서 세 군데에 걸쳐 사용되는데, 화면 우측에서부터 좌측으로 갈수록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텍스트의 또 다른 요소인 글은 여백이 가장 좁아진 곳 뒤에서 이어진다. 이렇게 볼 때 는 소나무, 전나무, 집, 배경, 여백 등의 도상기호와 더불어 발문, 화제(畵題) 등의 문자 기호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기호들은 자신들이 속한 계열체 중에서 작가에 의해 선택되고 다른 기호들과의 통합체 관계를 맺게 된다.   이들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선 텍스트 속 도상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은 외부 현실에 존재하는 지시물이 아니라 작가의 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주석이 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에 대한 회화적 오류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기호학적 비평을 시작할 수 있다.   이들 오류들에는 집을 그린 시점이 우측인데 둥근 창문의 벽 두께는 좌측인 점, 직사각형 벽에 이등변 삼각형 지붕의 시점은 우측이 아니라 정면인 점, 지붕의 우측 사선이 앞에 비해 뒤쪽이 가파른 점, 뒤쪽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지붕과 높아지는 벽의 원근법적 모순 등이 찾아진다. 이러한 오류들은 우리로 하여금 김정희가 에서 표현한 것이 단순한 지시대상으로서의 집이 아니라 의미가 담겨진 기호임을 역설한다. 그는 자신의 거주 공간인 집을 활용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전면의 반듯한 창, 역원근법으로 점차 넓어지는 듬직한 벽, 가파른 지붕선의 가파름 등이야 말로 추사가 의 집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진정한 기의인 것이다.     분석틀의 적용 및 미술기호학 연구의 현황   따라서 그 뿌리를 대지에 굳게 박은 채 하늘로 뻗쳐 있고 집을 감싸 안은 집 앞의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는 나무 라는 지시대상이 갖는 계열체적이고 본질적 특성 이외에 추사가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자신의 신념과 의지에 대한 기의를 지닌다.   노송 옆의 곧고 젊은 소나무를 그려낸 필선에서 우리는 영락한 옛 스승을 생각해주는 제자 이상적을 향한 추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짙고 강한 묵선의 기표는 제자의 젊고 푸른 기상을 담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모질고 험한 세태 속에서도 변함없는 제자의 정성이라는 기의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텍스트를 구성하는 도상기호를 통해 꿋꿋이 역경을 견뎌내는 선비의 올곧고 견정한 의지라는 기호적 가치의 해석은 발문의 문자기호와의 통합체적 연관성에서 볼 때, 설득력이 있다.   ‘자한편(子罕篇)’의 구절인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즉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는 글귀에서 우리는 ‘날씨’, ‘추위’라는 언어기호가 당시 추사가 처한 외로운 상황의 기표임을, ‘소나무’와 ‘전나무’라는 지시대상이 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그 푸르름 을 잃지 않는 기의를 암시함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자기호인 화제는 텍스트 우측 상단에 바짝 붙어 있다. 이 위치가 발문과 더불어 도상기호를 좌우로 감싸 안고 있다는 점과 가장 넓은 여백에 위치하여, 오히려 이 여백은 더욱 텅 비게 느껴진다. 이러한 텅 빈 느낌은 절해고도 유배지에서 늙은 몸으로 홀로 버려진 추사가 나날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씁쓸한 감정을 상징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문인화의 정수로 평가되는 에는 문자와 이미지라는 기호를 통해 추사의 뜻과 이념을 구현해내고 있다. 하지만 미술 작품에 대한 도상학과 도상해석학의 비평적 흐름과 사진, 광고, 영화 텍스트에 대한 활발한 연구에 비해 미술 기호학은 시각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는 기호학 중에서도 그 적용과 발전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고 평가된다.   왜냐하면 미술기호학은 텍스트를 구성하는 도상적 기호와 그 지시 대상 사이의 유사성 설정의 어려움, 즉 회화언어의 분절에 대한 규정이 아직도 확립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회화 텍스트의 가치에 관계된 분석자간 의견의 혼란, 이른바 미술 기호학의 확립에 있어 회화 텍스트는 부차적인 문제로 남겨진 상황이다. 따라서 순수하게 도상기호로만 구성된 텍스트에 관한 기호학적 연구는 칸딘스키, 성화, 현대미술 등을 분석한 플로슈, 파블리오, 베이아 등과 같은 기호학자들의 연구를 계속 주목해야 할 것이다.     김기국 / 기호학자, 경희대 프랑스어학과 교수     
47    그림은 있고 향기는 없고... 댓글:  조회:2556  추천:0  2015-02-19
  물 위에 둥지를 튼 꽃 한송이 흔들흔들 넘어질듯   주름진 키위 얼굴에 검버섯 피어있듯 쭈글쭈글 검은 블루베리 둘이 붙어 서로 몸을 의지하듯   하얀 오리는 색깔이 없고 아무도 색칠하려 들지 않고   꽃이 활짝 피어도 향기를 맡을 수 없고 [출처] 시로 쓰는 다이어리) 하루가 삼천육백 오십일 곱하기 이가 되면|작성자 소나여우  
46    ? = ! 댓글:  조회:2115  추천:0  2015-02-16
추천 정말로 웃긴 사진 웃긴실화  
45    가장 비싼 명화 모음 댓글:  조회:4094  추천:0  2015-02-16
세계에서 가장 비싼그림들 모음 명화의 가격은 천문학적입니다. 그러나 전세계의 주요 명화는 실제 시장에서 거래가 되지 않으므로 정확한 시세를 매길 수가 없죠.   예를 들어 거래가 되지 않기에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그림 중 평가금액 최고의 그림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라고 합니다. 그 가치가 40조원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니 프랑스는 망해도 모나리자는 영원할 듯 하네요..ㅎ   다음은 최근까지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매매된 그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순위가 되겠습니다.     1위, 잭슨 폴록(1912~1956)의 , 1948년작 1,800억원  (1. No. 5, 1948 by Jackson Pollock - $150.6 million)    잭슨 폴록은 2자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로 추상표현주의를 이끌었던 미국 미술계의 슈퍼스타였습니다.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는 크고 정력적인 폴록의 작품들은 그를 추상 표현주의의 선구자의 자리에 올려놨습니다.  내적인 정신성의 표출뿐만 아니라 엉클어진 실타래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폴록의 드리핑 회화는 현대 회화의 방향을 급속도로 변화시킨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작품, 그의 행동 자체가 미국 미술로 대변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폴록.  하지만 천재의 삶은 짧았고 1956년 음주사고로 즉사합니다.  2위, 윌렘 드 쿠닝(1904~1997)의 , 1953년작 1780억원 (2. Woman III by Willem de Kooning - $147.9 million)  이 작품은 쿠닝이 1951년부터 1953년 사이에 작업한 6부작 중 중심테마 작품입니다. 쿠닝 역시 잭슨 폴록과 함께 가장 미국적인 회화로 일컬어지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액션 페인팅’ 계열의 선구자였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쿠닝은 뉴욕을 이주한 후 1940년대 내내 폴록과 함께 추상표현주의 그룹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영향력을 행사했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리즈는 피카소의 과 비교되면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모습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자유롭고 격렬한 붓질에 의해 형태가 해체되고 침범되었지만 형태를 암시하는 흔적들도 엿보입니다. 여인의 인체를 연상시키는 형상들과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형태와 공간, 색채 등이 한 화면 위에서 만나고 있다고 평가 받는 작품입니다. 3위,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 1907년작 1720억원 ( 3.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by Gustav Klimt - $144.2 million)  관능적인 여성 그림으로 유명한 클림트, 그의 미술은 세기말과 완벽하게 어울렸습니다. 작품 속에 탐미주의와 쾌락예찬에 빠진 빈의 상류층 사회의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에로틱하게 표현한 클림트는, 섬세한 기교와 화려한 장식,상징으로 가득 찬 작품을 창조했습니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빈의 부유한 은행가 모리츠의 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의 초상화를 당시 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클림트에게 의뢰를 했죠. 클림트는 바우어의 신분과 재력을 상징하기 위해 작품의 재료로 금은박을 입혀 정교하게 장식하여 3년 여에 걸쳐 완성합니다.  그녀는 클림트와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나눈 여성으로도 유명한데요,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 의 주인공도 그녀랍니다.    4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1660억원  (4. Portrait of Dr. Gachet by Vincent van Gogh - $138.4 million)  20위에 속한 그림중에 가장 안면이 많은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고흐가 자살하기 전에 남긴 작품들 중 하나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파리를 시작으로 전 유럽을 돌아 뉴욕에 도착 그리고 일본까지 긴 여행을 합니다. 그림 주인도 13명이나 바뀌었다고 합니다.  1897년 당시 이 그림의 가격은 고작 58달러 하지만 1990년 8.250만 달러에 낙찰되어 전 세계인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당시의 경매는 예술 시장의 황금기를 알리는 동시에 일본의 엄청난 경제력을 전 세계에 과시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구매자인 로에이 사이또는 이 작품을 엄청난 보안 속에 도쿄로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작품을 공개하지 않은 채 기온과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되는 특수 전시실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5위, 르누아르(1841~1919)의 물랭 드 라 갈레트 1570억원 (5. Bal du moulin de la Galette by Pierre-Auguste Renoir - $131 million)  우리 이름으로는 '물랑 드 갈레트의 무도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파리인들의 일상을 담은 풍속화 기능을 하며, 사실적인 화풍이  한층 도드라져 보이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입니다. 반짝이는 햇빛 아래 노천 카페의 분주한 정경을 담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햇빛을 받으며 즐겁게 춤추는 청춘 남녀들의 모습을 교묘한 소용돌이 구도 속에 배치 시킴으로써,경쾌한 왈츠의 리듬이 화면 곳곳에 울립니다.  6위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 1905년작 1430억원 (6. Gar__n __la pipe by Pablo Picasso - $119 million)  이 작품은 피카소가 전성기 때인 장미 시대 그린 명작으로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답고 강한 필치를 느낄 수 있는 그림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화관을 쓴 소년이 그려진 이 빛나는 유화는 2004년 당시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고흐의 아성을 무너뜨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구입자인 존 훼이 휘트너는 19세기에 늘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아름다운 명화들로 저택을 꾸몄다고 하네요. 7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1210억원++추가 예상  (7. Portrait of Joseph Roulin by Vincent van Gogh - $100.9++ million)  아를 체류 시절 유일한 친구로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돌봐주었던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화. 8위,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1220억원 (8. Dora Maar au Chat by Pablo Picasso - $101.9 million)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피카소 특유의 표현법이 잘 드러난 피카소의 걸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도라 마르를 반추상형으로 화폭에 담은 초상화입니다.  검은 고양이와 함께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르가 보이네요.  주인공인 도라마르는 지적이고 교양 있는 여인으로 고통스러운 시기에 피카소에게 큰 힘이 되어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걸작 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요, 피카소에게 버림받은 뒤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자살을 했습니다. 9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1210억원 (9. Irises by Vincent van Gogh - $101.2 million) 이 그림은 아를 주민들의 비난을 피해 요양원에 와서 안정을 얻게 된 고흐의 푸근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위, 앤디 워홀의 1200억원 (10. Eight Elvises by Andy Warhol - $100.1 million)  팝아트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앤디 워홀의 작품인데 엄청난 가격입니다.       11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1130억원 (11. Portrait de l'artiste sans barbe by Vincent van Gogh - $94.5 million)  12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I by Gustav Klimt - $94.5 million. 1130억원  13. Massacre of the Innocents by Peter Paul Rubens - $92.3 million, 1100억원 14. Triptych, 1976 by Francis Bacon - $86.3 million,1030억원  15. False Start by Jasper Johns - $85.9 million,1030억원 16. A Wheatfield with Cypresses byVincent van Gogh - $85.7 million, 1020억원 17. Les Noces de Pierrette by Pablo Picasso - $84.9 million,1010억원  18. Yo, Picasso by Pablo Picasso - $83.8 million,1000억원  19. Turquoise Marilyn by Andy Warhol - $83.4 million,1000억원    20. Le Bassin aux Nymph__s by Claude Monet - $79.8 million,958억원      현대에는 미술시장이 미국이 가장 커서 그런가요? 미국 현대화가들의 그림이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네요. 잭슨폴록, 윌렘 드 쿠닝, 앤디 워홀 등 다수가 미국 화가들이고 그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고호, 다음 전통 미술 강국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와 입체파 화가 등이 뒤를 잇는군요.. 피카소는 스페인 출신이지만 프랑스로 이주했고 프랑스에서 활동했죠...         다음은 또다른 기관에서 조산한 것인데 좀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로 보세요^^              
44    휴지 모음 댓글:  조회:2121  추천:0  2015-02-16
  세상에서 제일 기발한 화장실     휴지 모음!                  
43    세상에서 제일 2 댓글:  조회:2101  추천:0  2015-02-16
        인도 라자스탄 주(州) 자이푸르에서 태어난 61세 남성 람싱 차우한(Ram Singh Chauhan)은 콧수염 길이가 무려 18피트 (약 5.5m)에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수염을 가진 자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42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 2 댓글:  조회:1959  추천:0  2015-02-16
    함께 살아온 자매의 인생, 그리고 빈자리...               다시만난 전차와 노병               시위도중 경찰에게 하트모양의 풍선을 건네는 꼬마               은퇴했지만 신념을 지키고자하는 경찰 (2011년 월스트리트 시위에서 체포되는 前 경찰서장)               터미널에서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고인을 기리는 스님               끔찍한 산사태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애견은 주인의 무덤을 지킨다.               1968 올림픽   그들의 인권을 위한 싸움               1945년 전쟁과 함께 멈춘 죽음의 열차   (죽음의 열차 : 세계2차대전 당시 일본이 태국에 전쟁물자,군인소송목적으로 만든 철도로 강제징용자20만명 중 11만여명이 사망)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아들의 경례               자유를 위한 투쟁, 종교의 차이는 문제되지 않는다.   (시위도중, 이슬람교도의 예배시간동안 이슬람교인들의 주위를 지켜주는 젊은이들)               1997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또 다시 이별               죽음의 파도 후, 어렵게 다시 만난 주인과 애견               전쟁터로 떠나는 아버지, 전송하는 아내와 아들               죽어가는 군인의 마지막 기도               시위와 진압, 연인은 두려움을 이겨낸다                 모든 걸 앗아간 토네이도, 하지만 모자는 살아남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상이군인               사랑과 열정은 나이와는 관계없다   (2011년 뉴욕시 최초로 결혼한 동성커플)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아이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점령당할 당시               나치장군에 맞서는 연합군포로               불타버린 숲과 살아남은 생명 (2009년 호주 산불)               끔찍했던 테러, 아버지는 아들을 기억한다   (9.11테러 10주년 추모행사)               대통령은 쓰러지고 새로이 자리를 물려주지만 영부인의 옷은 아직 피로 젖어있다.   (케네디 피살 후 영부인 앞에서 대통령 취임선서하는 린드존슨 부통령)               태풍 카트리나, 손을 맞잡은 생존자들               격리된 주인과 애견 (동일본 대지진 후 방사능 검사대)               전쟁에서 돌아온 어머니               시위장에 피어난 꽃 한송이   (1967년 베트남 반전시위 당시)               전차를 막아서는 사나이   (1989년 천안문 시위)               끝내 돌아오지 못한 군인, 그리고 남겨진 가족...               참혹했던 전쟁은 끝나고 아버지는 살아 돌아왔다.               아버지의 전사소식을 접한 아이, 그의 아버지는 귀국을 단 몇주만 남겨두고 있었다.               스포츠로 해소되는 인종갈등   (1970년 펠레와 바비무어의 셔츠교환)                 인류가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          
41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들 댓글:  조회:1814  추천:0  2015-02-16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      
40    그림위에 누워서... 신비한 그림 댓글:  조회:2236  추천:0  2015-02-15
          [출처] 그림 위에 누워- 신기한 사진들|작성자 수위
39    화가 다빈치 댓글:  조회:2397  추천:0  2015-02-15
          그에게는 그에게 중요한 과학적인 발견들을 하게했던 날카로운 눈과 빠른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의 생각들을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전쟁을 경멸했던 친절한 채식 주의자이었다. 그래도 그는 선진이고 치명적인 무기들을 발명하기 위해 군 엔지니어로서 움직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 중의 1명이었다  그래도 그는 소수의 완료되었던 그림들만을 남겼다. * 예술가로서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다빈치는 1452-1519의 사이에서 살았던 이탈리아의 예술가와 과학자이었다. Leonardo는 배역들이 발명자, 엔지니어, 건축가, 수학자, 지질학자를 포함했던 원시의 르네상스 남자이었다, 그리고 천문학자. 그가 가장 잘 화가로서 알려지는 동안,탱크들, 비행기들과 잠수함들의 수많은 해에 그런 전쟁 기계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디자인들을 생산하고,Leonardo가 주되게 군대를 위해 일을 했었다. 그는 또한 인체에서 근육들과 뼈들의 그의 밑그림들로 유명하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 생각한다면,어떤 개념도그를 규정짓기에 충분치 못하다. 그는 특정 시대와관련지을 수도, 일정한 범주로 묶을 수도 없는, 알아갈수록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이다.바로 이러한 점이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레오나르도는 바타칸의 아첨꾼과 떠버리, 연설꾼 그리고 궁정 안의 독선적인 지식인을 조롱했다. 그들의 빈약한 재능을 경멸하고, "자기 생각도 없이 단순한 기억력에 의존해 선례만을 차용한다."며 비웃었다. 반면 레오나르도의 동료들은 그가 단순한 발명가일 뿐이며,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사실 레오나르도는 대학교육은 물론 고등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그의 지식은 순전히 관찰과 독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조금씩 습득해 나간 것이다. "화가는 자연에 대해 대화와 경쟁 관계에 있다." 레오나르도가 한 말이다. 그는 자기 주변의 세계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자로서 회화를 과학으로 간주하고 그 영역을 단순한 재현 이상으로 확대시켰다. 자신의 회화와 소묘속에서 인간 지식의 미개척 분야를 역전시키고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레오나르도는 소묘를 통해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으며,이것이 결국 과학적방법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가지 질문의 해답을 발견하면 즉시 또 다른 문제를 향해 돌진하는 탐구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등등 어는 명칭에도 해당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떤 한계도 훌쩍 뛰어 넘어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인체해부 및 빛과 그림자의 연구를 비롯한 과학연구는 새의 비행이나 지질, 지지학, 식물학, 입체 기하학을 거쳐 슈류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등에 이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많은 업적을 이룩한 것은 그의 뛰어난 창조성에 기인한다. 창조성이란 상당히 복합적인 개념이다.거기에는 유동성, 유연성, 준비성,그리고 독창성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유동성은 수많은 생각들을 안출해 내는 능력이고, 유연성은 서로 다른 원천들로부터 유래하는 매우 다양한 응답들을 제공하는 능력임에 반해, 독창성은 뻔한 것,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과 연관되지 않은 생각들을 인출해 내는 능력이고, 준비성이란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개선하는 능력을 뜻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명화를 그린 단순히 위대한 화가로 불리우진 않는다. 레오나르도 자신 역시 '로도비 코스포르자공'에게 보낸 36가지 안건에서 볼 수 있듯이 판화, 대리석, 금속, 미술 분야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과학의 한 분야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레오나르도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보면서도 한편, 그 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 어떤 개념으로도 그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며 시대의 대표작을 배출해 낸 위대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동시에 규정불가의 위대한 인물 이었다고 본다. * 과학자로서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르네상스인이라고 불렸던 예술적이고 지적인 업적의 회복에 공헌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다빈치보다 주목받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미 르네상스의“아버지”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 그는 무엇을 하던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현대 과학과 그림, 데생, 조각과 심지어 건축학의 예술에서 보이는 물질계에 관한 호기심. 긴 세월에 걸쳐 그에게 명성을 가지고 왔던 다빈치의 재능은 그의 데생들에서 가장 잘 보인다. 그의 많은 데생들과 노트들, 최소한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현대 과학의 일러스트, 특히 해부학의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다 빈치는 예술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 발명가였습니다. 위대한 상상력으로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비행선, 대포, 전차 등 현대인이 사용하는 각종 장비들을 그는 벌써 생각해내고 자세하게 스케치 해두었습니다. 또한 당시 종교적 이유로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도 그의 인체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아주 정교합니다. 사람의 몸에 혈액이 흐른다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유럽인입니다. 그의 연구결과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있습니다.그의 방대한 수기는 평생에 걸친 여러 과학(물리학, 역학, 광학, 천문학, 지리학, 해부학, 기계공학, 토목공학, 식물학, 지질학 등)의 연구 및 예술론과 인생론이 비롯된 것입니다. 다 빈치가 죽은 후에 그의 방대한 수기는 애제자인 Francesco Melzi의 소장이 되었고, 후에는 점차로 흩어져 지금은 밀라노의 암브로지아나 도선관, 투리브루치오 백작가, 파리의 앙스티튜드 드 프랑스, 영국의 윈저궁, 대영 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 산재되어 있으며, 남아 있는 것만도 4쳔 페이지가 넘습니다. 현재는 서구 각지에 분산 소장되어있습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과학사에 있어서 그 선구적 의의가 큽니다. 전 분야에 걸친 그의 지칠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 '全人(L'uomo universale)의 최고 전형이라 할만 합니다.       [출처]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사이트|작성자 수위  
38    세계 개선문 댓글:  조회:2737  추천:0  2015-02-15
      개선문 짓다가 나라가 망한 황제를 아시나요?     카레라이스빛 개선문이랄까? 거대한 문이 눈 앞에 버티고 서있다. 정말 큼직한 덩치다. 인도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인디아게이트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가장 넓은 길인 대통령궁 앞길 끝에 이 거대한 문이 서 있다. 절로 떠오르는 파리의 개선문과 비교해보자.     개선문계의 간판스타, 통칭 파리 개선문, 정확히 에투알 개선문이다. 1836년생이니 지은 지 170년 넘은 근대의 산물이다.   나폴레옹의 똥고집과 과시욕이 만들어낸 거대한 문이다.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문이다. 과연 높이는 얼마나 될까? 한번 가늠해보시라. 정답은, 49미터. 저 개선문을 직접 봤을 때 개인적인 느낌은 `뭐 그냥 그렇군'이었다.  예상 이상으로 감동이 적은 건축물이었다.   우선 비현실적인 크기 자체가 감동적이지 않았다. 무조건 크게 짓자는 강박만 느껴진 탓이다. 그리고 모양도 그리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선전용 건축물의 한계다. 물론 뜯어보면 멋진 구석은 가득하다. 문 몸체에 새긴 조각들은 그 포스가 대단하다. 제대로 보면 꽤 들여다볼 것이 많은데, 전체로서의 모양새는 그저 무난하다고 하겠다.   그러면, 파리 개선문와 저 인디아게이트 중 어느것이 더 높을까? 그래도 파리 개선문이 조금 더 높다. 인디아게이트의 키는 42미터. 7미터 작다.                 인디아게이트는 모양이 파리 개선문에 견주면 상당히 단순해지면서 현대적이다. 1930년대에 만들어 그 사이 디자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비록 웅장하고 멋질지 몰라도 저 문은 실은 무척 슬픈 문이다. 저 문을 만든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죽은 인도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인도 군인들이 왜 죽었겠는가? 식민지배를 한 영국을 돕다가 죽었다. 그 수가 무려 9만명.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끌려가 희생된 한국인들이 떠오르는 문이다. 그래서 저 문의 몸체에는 당시 희생당한 인도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러니까 인디아게이트는 개선문이 아니라 추모의 문이다. 모양은 개선문과 같으나 전쟁의 승리보다는 전쟁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인 것이다.   파리의 개선문과 델리의 인디아게이트가 보여주듯 문은 국가적 조형물로 애용된다. 도시의 최고 중심부, 광장에 주로 들어서곤 한다. 이 개선문 또는 기념문 문화는 서양에서  그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것이다.   동양문명과는 다른 서양의 문화, 건축적 특징이기도 하다. 서양의 오랜 기념문 역사에서 보면 파리 개선문과 인디아게이트는 거대한 기념문의 역사에서 거의 신생아 수준이다.           __시리아 팔미라의 문 유적.         이 기념문 문화가 가장 널리 자리잡았던 것은 로마시대로 추정된다. 로마제국은 곳곳에 개선문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로마시대 개선문은 황제의 공적을 기리는 것들미 많다. 저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로마를 통일한 것을 기념해 312년에 만든 것이다. 그러니 1800살 먹은 문이다.   파리 개선문이 문 하나 짜리 개선문이라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문 3개짜리의 대표선수다. 저 문보다 더 오래된 로마시대 개선문으로는 티투스 황제 개선문이 있다.                 로마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고대의 개선문들은 이후 잠잠하다가 이후 다시 부활한다. 유럽을 휘감은 민족주의 열풍속에서다.   제국들이 쪼개지면서 민족국가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포장하고 국민들을 민족국가의 기치 아래 모이도록 강조하기 위해 개선문들을 경쟁적으로 지었다.   저 파리 개선문이 그 대표라 하겠다. 나폴레옹은 저 지독하게 큰 개선문을 만든 것에서 볼 수 있듯 개선문을 무척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에투알 개선문만 아니라 또다른 개선문도 만들었다. 파리의 카루젤 개선문이다.                 이 카루젤 개선문은 그 모양이 앞서 소개한 로마시대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나  티투스 개선문과 거의 흡사하다. 고전의 리바이벌, 아니면 카피, 또는 오마주 쯤 되겠다. 저 문은 1808년이 지었다. 그러니까 저 개선문을 먼저 짓고 보기 좋았던지 나폴레옹은 다시 에투알 개선문을 화끈하게 지은 것이다. 이런 개선문들은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브뤼셀에 있는 개선문이다. 옆의 날개처럼 건물이 이어졌을뿐 역시 고전주의 개선문의 전형적인 모양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 이 개선문은 어떤가?                 문 모양이야 뭐 다르게 하기가 어렵겠지만 그 꾸미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유럽은 유럽인데, 정작 유럽 문화권에선 비유럽으로 여겨지는 나라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와 축구 클럽 바르샤로 유명한 도시 바르셀로나에 있는 개선문이다.   역시 가우디의 도시다. 이런 거대 조형물이 꼭 있을 법한 나라라면 역시 웅장한 것 짓기 좋아하기로 빠지지 않을 러시아를 꼽지 않을 수 없겠다. 당연히 모스크바에도 개선문이 있다.                 이 모스크바 개선문달고도 러시아에는 개선문이 많다. 바르셀로나 개선문처럼 그 나라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블라디보스톡 개선문을 보자.                 이 블라디보스톡 개선문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지은 것이다. 보기만해도 러시아 건축임을 알 수있을 정도로 나라색이 강하다. 그런데 이 문을 지은 니콜라이2세는  `개선문 업계에선 꼭 기억해둬야 할' 인물이다.   나폴레옹이 개선문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 황제도 개선문 마니아였다.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으니 개선문을 지으라고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방문한 모든 도시에 똑같은 개선문을 지었다.   그래서 전세계에서 가장 길고 넓은 러시아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톡부터 서쪽 끝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이 양반 개선문이 있다. 하지만 이 양반은 정작 개선문 세울 일은 하지 않고 개선문만 세웠다. 결국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이 니콜라이 2세를 마지막으로 망하고 말았다.    아, 정말 중요한 개선문을 빼먹을뻔 했다. 파리 개선문 다음으로 유명한 문,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이다.                 베를린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은 1788년 지었다. 그런데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고 베를린도 양쪽으로 쪼개졌을 때 이 문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가 됐다.   그래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이 문은 통일 이후에는 통일의 상징으로 180도 바뀌었다. 이렇게 민족주의 국가 탄생과 함께 몰려왔던 개선문은 20세기 들어서도 각광 받으며 세계 주요도시에 지어졌다.   그 이유는 인디아게이트가 들어선 것과 같은 이유, 그러니까 이전에는  없었던 거대 전쟁인 세계대전이 벌어진 결과였다.                   얼핏 보면 파리 개선문과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이 문은 루마니아 부큐레슈티 개선문이다. 1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해 지은 기념문이다.   사진으로 보면 무지하게 웅장해서 파리 개선문 못지않아 보이는데, 실제 규모는 높이 27미터로 에투알 개선문보다는 훨씬 작은 편이다.   그러면 현대의 개선문과 기념문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런 거대한 문들은 대부분 국가 기념 조형물들이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짓는 경우가 많고 그 모양도 심히 촌스럽거나 지나치게 크기만한 것들이기 쉽다.                 이런 거대 기념 건축에 빠지지 않는 북한의 간판 건물, 평양개선문이다. 그래도 평양의 다른 촌스런 건물들보다는 덜 심각한 편이라고 치자. 북한과 남한의 공통점이 세계 최대, 동양 최대 이런 것들을 심하게 좋아하는 것이라고 앞서 말한바 있다.   저 평양개선문도 규모에 무지하게 집착한 건축물이다. 파리 개선문보다 더 크다. 높이가 60미터다. 가운데 아치 모양 문 높이만 27미터, 폭이 18미터다.   김일성 칠순 생일에 맞춰 1982년 지었고, 화강암 재질이다. 우리나라 전통 석탑의 디자인 특성을 따왔다고 하는데, 판단은 각자에게 맡기겠다.  저 개선문은 기둥 양쪽에 `1925', `1945'란 숫자를 대문짝 만하게 달아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1945는 조국 해방을 이룩한 1945년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러면 1925년은 김일성이 조국 광복을 위해 만경대 고향을 떠났던 해라고 한다. 그것도 14살 나이에.   다른 현대적인 문으로는 여러가지들 있는데,  이슬람권의 문은 못봤으니 이 문도 하나 소개한다.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있는 문이라고 한다. 조형성이 좋게 말해 화끈하다.                 바그다드의 문으로는 저 호떡 먹을 때 쓰는 종이집게 모양 문보다는 요 문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규모가 훨씬 큰 문이다.                 문 제목을 맞춰보시라. 쉽다. . 평가는 엇갈리겠으나 전공자들의 평가는 일치할 듯하다. 심히 촌스러운 사실주의적 표현주의적 국가주의적 조형물이라 평할 것같다. 그런데 저 문을 보고 이 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이번에도 평양에 있는 문이다. 통일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라크 `승리의 손' 문보다도 증상이 훨씬 심각하다. 실제로 본다면, 정말 웃길 것 같다.   좀 잘 좀 짓지 원. 그럼 우리는 어떨까? 우리나라는 개선문이 없다.  다행이다. 왜 다행이냐고? 전쟁해서 국민들 죽어나간 것을 기념하는 문은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개선문 세울 일이 없는 것이 국민들에겐 좋은 법이다.   물론 우리도 많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개선문이 아니라 추모기념문이 없는 것은, 우리나라는 기념조형물을 문이 아니라 탑으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거대한 기념문이 전혀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한테도 있다.                 다행히 전쟁기념문이 아니라 이름부터 `평화의 문'이다. 평화와 가장 먼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서 좀 어처구니없는 문이긴 하다. 저 문을 만든 이유는 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탑'을 좋아한다. 다른 나라도 문 또는 탑을 좋아하긴 마찬가지다. 올림픽을 한 나라들은 대부분 탑을 지었다. 그걸 우리도 따라하기로 했다. 그래서 당시 정권은 외국 올림픽탑들을 살폈다. 1900년 파리 올림픽. 에펠탑 지었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앞에 기념문 지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탑을 세웠다. 1972년 뮌헨과 1976년 몬트리올, 연달아 텔레비전중계탑을 도시 랜드마크로 지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의 차례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이란 양대 행사를 앞두고 상징조형물건립소위원회를 구성했다. 86 조형물은 조각가 김세중(광화문 이순신  동상의 작가), 88 조형물은 건축가 김중업에게 맡기기로 했다.         [출처] 세계의 개선문|작성자 수위  
37    화가 마티스 댓글:  조회:3451  추천:0  2015-02-15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1869~1905     1906~1916   1917~1929   1930~1940           1941~1954   마티스의 생애 프랑스의 화가.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는 1869년12월31일 밤 9시 북부 프랑스 르카토 캉브레지의 외가에서 곡물상을 하는 부친과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지냈다. 앙리 마르탱 고등학교 시절 그림에 소질을 보였는지는 몰라도 마티스가 미술사가 피에르 쿠르디옹에게 1941년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그렸다고 한다. 1887년 파리로 나가 법률을 배우고, 이듬해 법과 자격시험에 합격, 잠시 생캉탱의 법률사무실 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률사무소를 잠시그만두어야 했다. 마티스는 회복기를 보앵에서 보냈다. 그는 병실을 같이 있는 옆 병상의 남자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마침내 병상에 그림도구를 가지고 오게 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티스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감통을 들고 가서 물방앗간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시작했다. 스무 살이 넘도록 자신의천부적 자질을 깨닫지 못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다. 마티스 역시 그런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다.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통해 그는 어떤 형태의 예술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1891년 이제는 앞날을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갔고, 그는 푸생과 샤르댕 등의 작품을 모사하는 인습적 보수적 경향의 그림을 따라 했었고, 이듬해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하였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마티스가 주물로 된 고대 조각품을 그리고 있을 때, 학생들의 작품을 검사하고 있던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를 끌게 되어 1895년부터 모로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티스는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모로는 '너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는 부단히 자기의 창작과정을 밝혀 나갔으며 자기 예술의 원천, 방법,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비범한 지성을 동원하였다. 마티스는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마티스(프랑스, 1869-1954)의 말에 의하면 포비즘 운동은 어디까지나 표현수단의 순수한 것을 재발견하는 용기의 고취이며 추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티스는 표현에 있어서 화가의 주체성에 의하여 화면에 나타나는 구성을 뜻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긴밀한 질서를 지목하였다.  프랑스인들은 말한다. 물감은 보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읽히기 위해서 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색채, 구조, 도안 따위의 특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적 세련이라는 것에 대해 미묘한 이화감을 보이는데 , 그것은 '회화의 자율성' '대상으로부터 완전독립'이라는 19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형성된 관념에 대한 이화감으로 표현할 수 있다.  1898년 만년에 이른 피사로는 여러 건물의 위층 창문을 통해 파리의 가장 찬란한 풍경을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그리고 있었으며, 아울러 필법과 감수성의 양면에서 1870년대 개척기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되돌아간 일련의 작품으로 일생을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이 작품들이 그 뒤 몇 년에 걸쳐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왔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잔느의 그림을 사들인 것은 마티스는 자기의 습작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하기 이전에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당대 화가의 작품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보여준 셈이었다.  1896년 소시에테 나시오날의 살롱에 4점을 출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인상주의적 수법을 채용, 근대회화의 주류에 합류했고, 이어서 코르시카와 툴루즈에 반년씩 머물면서 지중해와 남프랑스의 밝은 햇빛 아래서 그림을 그렸다. 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  《외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책을 읽고 시냑과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책은 원래 그가 파리를 떠나있던 1898년에 《르뷔 블랑슈》에 연재되었다가,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매력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에 그가 들라크루아의 작품 (1899년)를 펜과 잉크로 모사한 습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티스는 이 습작을 통해서 인물들을 이례적으로 넓고 아주 짙은 그림자로 에워쌈으로써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부조감을 강조하려고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야수파 회화의 흑백판이 되는 드로잉 양식으로서 그것은 마티스가 공인된 거장의 작품을 놓고 그때까지 만들어낸 습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신인상주의의에 관한 한 그 궁극적인 결과는 마티스가 시냑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었던 1904-5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 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98∼99년에는 후기인상파에서 유래하는 한층 강렬한 색채의 실험에 착수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 결과 1900년 전후의 마티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적인 필치와 색채의 대담한 대비 등, 일종의 야수파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1901년 무럽에는 일단 종식되고 곧 이른바 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그는 색채문제에서 벗어나, 잔손질이나 구성에 마음을 쓰게 된다. 마티스가 다시 색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04년의 여름을 남프랑스의 생트로페에서 P.시냐크·H.크로스 등과 함께 지낸 뒤부터였다. 이듬해인 1905년의 앵데팡당전(展) 출품작 《호사(豪奢)·정적(靜寂)·일락(逸樂)》은 모자이크모양의 선명한 색채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어 전보다도 훨씬 명쾌한 신인상주의적 스타일을 나타내고 있다. 1897년까지 브르타뉴 지방을 여행하여 반 고호풍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으나, 1898년 남불의 강력한 햇빛을 발견한 이후로 환한 색채가 강력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해 여름 그는 남프랑스의 콜리우르에 머물러 신인상주의의 규칙적인 점묘(點描)를 초월하여 강렬한 색채를 아울러 사용하는 야수파 스타일로 돌진한다. 그 해의 살롱 도톤은 야수파를 탄생시켰는데, 그는 이때 《열린 창문》 《모자 쓴 여인》을 출품했다. 빨강과 녹색, 오렌지와 파랑을 기축으로 한 채색법은 긴장된 화면에서 강렬한 빛을 반사하는 듯한 효과를 냈다. 1910년 뮌헨의 이슬라믹 대전시회를 보러 갔던 마티스는 그해 가을 남부 스페인의 유적을 탐사했으며, 이듬해에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이콘화와 벽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또한 이 같은 그의 관심은 1912년부터 1913년 겨울까지 모로코 행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모로코에서 마티스는 화가로서 마치 천국을 부여받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강렬한 태양과 원색의 꽃들, 낯선 이국의 빛깔과 문화에 마티스는 감동했다.  '색체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야수파. 야수파 화가들은 캔버스를 자신들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충분히 활용하였다. 그들은 회화의 질서를 위한 표현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주관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것에 문제점을 드러냈고, 통일된 강령을 갖고 체계적으로 운동을 펼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불과 2, 3년 정도의 수명만 유지했을 뿐, 그 후 야수파 화가들은 입체파 등 다른 운동에 가담하며 활동하게 된다.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는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체와 거친 붓놀림 등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예술이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을 위한 예술로 나아가길 추구했다. 이를 위해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했으며, 전통적인 방법에서 일탈한 매우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수많은 시도 속에서 마티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표현이다.  이처럼 마티스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마티스는 색채에 관해 “내가 녹색을 칠할 때 그것은 하늘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미술운동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이어 그의 색채는 더욱 강렬한 것으로 되어 1905년 살롱 데 엥데팡당전을 기화로 본의 아니게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의 작품은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06년 발표한[삶의 환희]는 단순화한 형태, 대담한 색의 사용, 종교성을 배제한 신화의 원용 등의 성격으로 다시 한번 물의를 일으킨다. 당시 마티스는 프랑스 내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반면, 미국의 스타인, 러시아의 모로조프와 후슈킨 등 외국이 소장가들이 그를 지원하게 된다. 특히 후슈킨은 그의 아파트를 장식할 대형 장식화를 주문해, 형태를 더욱 단순화하고 단일 색채를 강조한 [춤]과 [음악]을 낳게 된다. 마티스가 지닌 색채의 자유로움은 이미 고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국적이고 상상의 색으로 현실적인 색채를 벗어나면서 색채의 자유로움을 제시한 고갱. 또한 내면 세계를 그리기 위해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했던 화가 고흐. 이들의 영향으로 야수파는 현실이나 형태로부터 색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비현실적이고 주관적인 색채 표현은 후에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주며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7년 무렵부터 질서와 균형 있는 청랑한 예술을 찾아 평탄한 장식적 스타일을 거듭 시도했다. 이렇게 하여 탄생된 《빨강의 조화(1908∼1909)》는 야수파 스타일에 최종적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성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무역상 S.시추킨의 의뢰로 제작한 장식화의 기념비적인 대작 《댄스(1910)》 《음악(1910)》은 야수파의 유산인 격렬하고 풍부한 색채로 빛나고 있다. 10년대에 들어와, 기하학적 구성에 의한 추상적·구축적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입체주의의 영향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엄한 내성적 감정의 반영이 엿보인다. 17년부터 30년 무렵까지를 보통 이라 한다. 그때까지의 눌리는 듯한 답답함에서 해방된 마티스는 이 시기에 주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우미하고 관능적인 오달리스크를 비롯하여 매우 느긋한 작품을 제작했다. 화풍은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 화면도 작아졌으나 을 창출하여 그 속에서 데생과 색채를 융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 뒤 의 수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여 빛과 공간에 의한 추상적·비물질적 감각을 추구하게 되고, 나아가서 단순화와 순수화를 추구했다. 48년에 착수하여 51년에 완성한 20세기 최고의 모뉴먼트의 하나로 평가되는 남(南)프랑스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은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으며 니스에서 죽었다.  야수파 동료들과는 달리 마티스는 당시에 갓 태어난 입체파 화가들의 기법에 빠져 외도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찬 선의 장식적 율동을 창출하고 넓은 평면적인 색면과 명암을 강력하게 대비시키면서 인물에 살을 붙이는 모델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듯하다. 그의 목표는 입체파 화가의 목표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수단은 정반대였다 (그 목표는 내재적으로 모순되는 두 가지 문제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실재와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입체 환각, 적어도 그리려는 인물의 입체감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전체 구도를 통하여 화폭의 평면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구성요소가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 그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 있어서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도 副的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 또 어떤 것이 主的이라고 할 수도 없다. 多樣相에서 단일화로 질서와 조화가 이루러졌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었다. 사실 그도 "나는 균형이 잡히는 무구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이 불안해 지거나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표현이 아니라 피곤에 담긴 사람들에게 휴식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콤포지션은 화가가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로이 다루는 여러 가지 요소를 장식적으로 어레인지 하는 기술이다. 나는 자신의 감각을 제어할 줄 아는 화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념을 가진 그는 선에 있어서 특유한 연구를 하였다. 종래에 있어서 선은 대상의 윤곽을 묘사하는데 쓰여졌다. 이러한 묘선은 대상에는 충실하고 정확한 선인 것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선이지, 선 그 자체를 화가 자신이 만들어낸 선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 그 자체로는 어떠한 표현도 없고 기능도 없는 죽은 선이다. 마티스의 선묘에서는 1890년대의 유겐트양식인 곡선을 特長으로 한 것과 같은 선을 구성하고 성숙시켜, 장려한 극치에 이른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선에는 움직임을 갖는 부드러움을 나타내 늘 유동하고 波動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표면을 한정하는 선이며, 자기자신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선이다.  그러므로 마티스의 선은 대상의 모방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대상의 선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로 그의 주관의 움직임의 생생한 표현력을 가진 선이다. 더욱이 그 선이 아무리 대상의 묘사에 있어서 부정확하고 간략한 선이라 하여도 그것에서는 생명의 약동을 볼 수 있다.  그는'그림은 지나쳐가는 일순간의 감각적 정치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화가는 '현실의 보다 영속적인 번역'보다는 본질적인 성격을 추구해서 '감각의 응집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않된다고 말해다.  이렇게 하여 마티스는 기본적으로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정진하였으며, 또 그는 변화, 데상, 판화, 조각과 같은 광범위한 부분의 시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많은 성과를 냈다. 따라서 그는 원시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림을 그렸다. 이에 따라 그의 그림은 비극적이 아니고, 명랑한 그림으로 죽음도 허무도 멸망도 절망도 없는 아니 그러한 것이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예술이었다. 결국 포비즘의 중심적 화가인 마티스는 장식성을 강조하는 화가로 평가되었다. 마티스가 색체의 단순화를 통하여 달성한 장식성은 자칫하면 화면을 경직시켜 단순한 무늬의 작품으로 변질시킬 수 있으나 , 그는 반대로 이 단순성의 세계에 리듬을 맥동시켜 일종의 모뉴맨틀한 성격을 갖춘 생기있는 세계로 변화시킨다.  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야수적인 정신을 요약하고 이으며 ,그 단조로운 색면, 심한굴곡을 보이는 윤곽선 , 그리고 는 분명 고갱의 여향을 받은 것으로서 , 그주제까지 고갱의 자연인으로의 모습을 닮고이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스페인, 모스코바, 모로코 등지를 여행함으로써 더욱 리듬감있고 유연한 선의 형태와 더욱 강렬한 색채의 장식예술(세라믹, 성화, 옷감)을 발견해 그의 그림에 이를 도입한다. 1913년 아모리 쇼에 출품한[푸른색의 누드] (1906년작)가 큰 물의를 일으킨다. 1차대전 기간 중에는[노란색 커튼](1914~1915),[모로코 사람들](1916), [피아노 교습](1916)과 같은 걸작을 그린다. 1919부터 10년간 니스에 머물면서 오달리스크, 실내 풍경과 여인, 창문으로 본 풍경 등의 소재를 다루는 작품에 임한다. 색채의 효과, 장식 요소의 극대화,복잡한 공간 구성 연구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을 특징짓는다. 끊임없이 다루는 여인의 형체도 "나는 여자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한 폭을 그릴 뿐이다" 라는 작가의 말처럼 다른 요소들과 어울려지는 구성을 모색하게 위한 구실을 주는 것일 뿐이다. 1933년에는 미국 메리온의 반즈 재단을 장식할 작품[춤]을 같은 제목으로 두 번에 걸쳐 제작한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적인 내용이 완전히 제거된 "일반화된"신체의 모습을 통해 볼륨이나 원근법의 표현을 배제하면서도 그림으로 칠해진 화면을 초월하는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모뉴멘트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1943년부터는 과슈를 칠한 종이를 "가위로 데생을 하듯이" 잘라내어 콜라쥬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 기법을 통해 "데생을 중시하느냐 채색을 중시하느냐 하는 영원한 대립의 문제"에 해결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마티스는 몸을 거동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기법으로 제작된 색종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 관절염 관절염으로 인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병상에 누워 종이 자르기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71세에 내장 장애로 수술을 거듭하면서 거동을 못하게 된 후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색종이 그림은 계속되었다.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만큼 평면적이고 자유로운 색채가 강조되었다. 그의 종이 자르기는 마치 조각가가 직접적으로 새기는 방식과도 같았다. 그는 색채도 혼합하여 마치 가위를 연필처럼 사용해서 색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 효과는 방법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마티스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 명확한, 그리고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이라 할 만큼의 질서감과 절도감을 보여준다. 어쩌면 선과 리듬, 색채와 공간의 자율적인 세계 속에서 마티스는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확증시켜 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선에 대한 마티스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고갱의 영향 속에 있었던 것이며. 고갱에서의 상징성이라기보다는 리얼리스트의 면모가 더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 그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예술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1910-13년경 까지의 여행은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에 독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일련의 주요한 작품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온 뒤 그때의 인상이 화실에서 다른 작품을 구상하는 영감의 구실을 했다. 이 시기에 (1916년)을 그렸는데 이례적으로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그림에서 화가는 1914년 시작된 입체파의 수법을 시도하고, 그 시각적 이미지에 불연속 효과를 투사한다. 그는 이 그림의 세 부분 사이에 명목상의 이음새를 잘라버리고, 각 부분을 공간적으로 불확실한 검정색 영역에 걸어놓는다. 여기서 하나의 장식면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마티스가 때늦게 입체파의 개념에 일부나마 동화했던 사실을 나타내주는 고안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중요한 작품의 상당수는 이러한 집착의 흔적을 거의 보이지 않지만 다른 몇몇 작품들에는 1907년을 전후한 초기 단계에서 마티스의 개인적인 기법의 유기적인 성장에 유해했던 입체파 양식을 터득하려는 직접적인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1914년에 이르면, 입체파의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양식은 평면적인 장식과 단순화 경향(후기에 와서는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린다)으로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입체파 화가들은 단편화된 평면과 뒤틀린 양감의 작품들에 강력한 색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다 단색적 경향을 띠고 있었던 초기 입체주의와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발전한 모든 기법들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1914년경에 후한 그리가 내놓은 그림이라 생각되며, 여기서는 생생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색채가 평평하고 무늬진 화면을 형성했다. 이런 현상이 계기가 되어 마티스는 자기 고유의 화법을 버리지 않고 입체파의 고안들을 실험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를 잡았다. 어쨌든 1914년 직후의 주요 작품들과 아울러 수많은 이차적 작품들에는 입체주의의 성향이 배어 있으며, (1916-17)이 완성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1916)은 수평, 수직과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에 에워싸인 평면의 덩어리이고, 마티스가 입체파의 유산을 가장 일관성 있게 수용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이 그림은 입체파 운동에 힘입은 바 크지만, 단순히 그 기법을 불완전하게 빌어오거나 재해석한 집합체가 아니다. 얄궂게도 을 제작하고 있을 동안, 혹은 그 직후에 마티스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을 무르익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홍, 초록과 회색이라는 동일한 기본색으로 그려져 있어, 일단 입체파의 문제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파는 그 뒤의 마티스 예술-후기의 자른 색종이 그림이나 대형 벽화 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1920년대 낸 그는 하렘들과 그들을 잘 돌봐주는 수동적인 하녀들을 재현한 작품을 그리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따라서 드라크루아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연관되는 앵그르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앵그르는 입체파 세대의 화가들이 재발견하여 새로이 평가를 내린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1915년에 피카소는 위대한 프랑스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의 양식과 기법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듯한 소묘를 제작하고 있었다. 마티스가 을 그리고 있을 당시 또는 그 직후에 앵그르의 를 알고 있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1920년대말 이후로 마티스가 앵그르에게 보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직한 조짐으로 볼 만한 유사성이 그의 작품에 뚜렷이 드러난다. 마티스 예술의 신고전적 요소는 대체로 깊숙이 숨겨져 있고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화면에 깊이와 부조적 특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과 언제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말을 바꾸면 공간적인 입체 환각과 인체의 모델링이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하나의 공식으로 이러한 필요와 욕구를 모두 결합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1907년의 작품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과 및 를 비교하면 얻는 바가 있다. 누워있는 푸른 인물상은 땅에 고착되어 있고 육중하고도 근육이 우람하다. 나체의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푸른 풍경의 단편이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는 듯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감촉할 수 있는 부피감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도에 있어서는 인체의 겉모양이 지닌 단순하면서 장식적인 윤곽선들을 반영하고 있다.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마티스의 경쟁자를 꼬집어 낸다면, 피카소가 으뜸이었다. 이들 두 예술가들이 반세기에 걸쳐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심지어 1945년에 그들은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에는 충동적인 천재성, 무서운 속도로 과제를 빨아들이는 그의 감수성이 번득인다. 하지만 마티스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뚜벅뚜벅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이따금 현학적인 기미마저 보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기예의 전통에 자리잡은 그의 기반은 지나치다고 하리만큼 단단했다.  미국화가들은 마티스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입체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대항 수단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엘스워스 켈리나 프랭크 스텔라와 같은 젊은 화가들은 서로 다른 활동 시기에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톰 웨셀먼과 같은 팝아트의 화가는 자기 작품의 구성안에 일종의 장식으로 마티스의 회화를 그대로 복사했다. 보다 최근에 와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이전까지 피카소와 몬드리안에게서 이미지를 차용해오다가 그 뒤 1973년에 화실을 소재로 한 작품과 정물화를 위한 도상학의 바탕을 거장 마티스의 주제 처리법에서 찾았다. 마티스의 마지막 작품들은 1960년대초에 문헌과 전시를 통해 널리 소개되어 20세기 후기의 새로운 세대에게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마티스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가미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 나갔다. 이 같은 장식성은 이슬람교와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마티스가 비서구적인 예술 형식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에서 기인한다. 마티스는 1954년 사망했다. 마티스에게는 너무나 많은 찬사가 주어져 이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켄버스라는 한정된 투기장위에서 마티스 만큼 훌륭하게 감각의 모든 광휘를 해방하고, 동시에 으지와 이성의지배, 질서의 승리를 실현해낸화가는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생애의 목표를 두었던 화가에게색종이작업의 재즈씨리즈는 , 참으로 경쾌하고 고뇌의 색조을 띄지않는 비상한의지의 집중과 감각의연마의집적이 이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출처 : www.pohangart.com/moogi007/art30-_25B8_25B6_25C6_25BC_25BD_25BA.htm 색채, 영혼의 빛을 발하다 - 마티스의 생애와 예술에 대하여  임근혜 |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1.창을열며 생의 마감을 2년 앞둔 1952년 어느 날 '방대하고 진지하며 다난했던 노력의 결실이자 일생동안 이끌어온 작업의 정점'이라 스스로 일컬은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을 방문한 마티스는 하얀 타일 위의 검은 드로잉과 대조를 이루는 파랑, 초록, 노랑의 간결한 원색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생명으로 충만한 빛을 바라보며 곁에 서있던 손자에게 말한다. “나는 북부 출신이란다. 내가 어두운 교회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할 게다.”  마티스의 고향 까또 깡브레시스는 벨기에에 인접한 프랑스 북부의 변경으로, 그가 태어난 1869년을 전후로 산업화의 거센 물결이 전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무자비한 토지 개발로 풍차와 종루가 평화로이 늘어서 있던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고향 풍경은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 간다. 이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은 밝고 푸른 정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이 지역은 국경 분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는데, 마티스는 첫 돌을 맞이하던 해부터 프러시아 군대의 점령으로 인한 긴장과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정치적 군사적 상황 속에서 어린 마티스를 지배하던 굴욕감과 중압감은 황폐한 자연과 더불어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으로 남는다.  먼 훗날 마티스는 1941년 평론가 쿠르숑과의 대화에서 “내 작업의 주요 목적은 명료한 빛을 획득하는 것”이라 말했다. 19세기 말 격변기의 침울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의 유년 시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 이전부터 빛의 가치를 사무치도록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깨달음이 그를 혼의 빛을 발산하는 찬란한 색채 화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전부터 전 생애에 걸쳐 즐겨 다룬 소재 중 하나가 자연의 빛을 한껏 머금은 ‘열린 창’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 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던 10대 말,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건네주신 물감으로 소일삼아 유화를 그린 경험을 계기로 화가가 천직임을 깨달은 마티스는 회복 후 서류 여백에 낙서를 자주 끄적거니다. 이 중에 자신이 근무하는 사무실 입구를 그린 드로잉 한 장이 향후 마티스의 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운명처럼 드러낸다. 안과 밖의 경계를 살짝 허물고 미지의 바깥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열린 문’은 실내외 풍경을 동시에 담은 ‘창’이라는 소재와 동일한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광선의 변화에 주목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룬 소재이기도 하지만, 특히 자신의 그림이 색채를 통해 강렬한 빛을 발산하기를 원했던 마티스에게는 더욱 의미심장한 소재였음이 틀림없다. 야수주의 시기의 작품 ‘꼴리유르의 열린 창’)1905), 장식적인 화풍을 성립한 1910년 전후의 대표작 ‘붉은 색의 조화(저녁 식가)’와 ‘대화’ 그리고 생의 후반 니스 시기의 실내 풍경을 그린 작품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창’이라는 소재는 마티스가 전 생애에 걸쳐 천착한 ‘빛’의 담지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색채의 복권과 그 정서적 환기력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운명으로 끌어안기까지는 녹록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현실과 타협하기보다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만의 길을 추구한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25세에 파리로 상경하나 데생위주의 고답적인 미술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결코 제대로 된 데생을 배우지 못할 것’이라는 보수적인 스승 부게로의 실망스런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재도전하던 중에, 에콜 드 파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주류에서는 벗어난 진보적인 사고의 소유자이자 상징주의 화가인 구스타프 모로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한다. 고전의 중요성과 더불어 대상의 내면을 강조한 모로는 “색채는 상상을 통해 사고되어야 한다. 상상이 없다면 아름다운 색채를 결코 만들 수 없다. 영원히 남게 될 그림은 생각과 꿈 그리고 마음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 손재주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마티스는 이러한 가름침을 통해 어렴풋이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인식하게 된다.  2. 색채의 복권과 그 정서력의 복원 에콜 데 보자르에 어렵게 합격한 후, 마티스는 지금까지 자신의 회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거장들의 작품에서 표현되지 못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1898년 신혼여행을 겸해 런던으로 건너간 마티스는 피사로의 권고에 따라 터너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색에 대한 열정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서서히 자각하고 본격적인 색채 혁명을 준비한다.  자연의 모사를 회화의 미덕으로 삼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은 전통적으로 데생에 우위를 두었으며, 상대적으로 회화의 또 다른 주요 구성 요소인 색은 드로잉의 부차적인 요소 즉, 선으로 이루어진 윤곽을 채우는 보완물로서 인식되어 왔다. 아방가르드 미술은 그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여야 한다는 회화의 대전제를 파기하고, 회화 평면에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율성을 부여한다. 회화의 기본 요소, 즉 색과 형을 자연 대상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생명체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초월하려는 것이 모더니즘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다음 세대의 색채는 재현의 대상과는 별개로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힘을 지니게 될 것’이며 ‘색채의 기능은 빛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마티스의 진보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인식은 사실 회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모로의 화실 시절부터 그는 고전 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충실히 모사하였으며, 이후 전 생애에 걸쳐 한 새대 앞서 색채 혁명의 길을 열어준 선배 작가들의 작품들, 이탈리아 여행 중 경험한 르네상스 벽화 들을 연구하며 끊임없이 이들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그리고, 회화 요소 자체의 물질성으로 환원되다가 결국 형상을 버리고 추상으로 귀결되는 모더니즘 회화의 초석을 다져놓으면서도, 형상에 기초한 회화 전통을 끝까지 고수한다는 점은 그와 더불어 아방가르드 미술의 양대 거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피카소와 일치한다. 그러나, ‘구성적 언어’를 구사하며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 피카소와는 달리, 마티스는 색채에 의해 구사되는 빛으로서 새로운 회화 공간을 형성하는 점에서 차이를 이룬다. ㅇ이는 이 두 거장이 회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색과 형을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킨 아방가르드 미술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함께 이끌어냈다는 점을 의미힌다. 이처럼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를 관통해온 구상 미술의 형식적 구성요소를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현실에 뿌리를 둔 추상’이라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점에서 전통을 단절하지 않고 그 연속선상에서의 발전을 이룬 견고한 혁명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런던 여행 이후 코르시카와 툴루즈에서 머물던 1898~99년 사이에 그려진 정물화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식탁 위의 과일과 식기들의 색채는 묘사적이라기보다는 색채들 간의 상호 효과를 고려해서 인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자연의 빛을 모방하지 않고 회화 내의 질서와 균형을 위해 창조된 색은 색채 화가 마티스의 예술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된다.  언제나 극단으로 치닫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을 추스르는 신중한 성격의 마티스는 견고한 형태감각을 익히기 위해 세잔느를 거울삼아 조각을 연구하기도 하고 과학적 색채이론에 기초을 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실험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며 자신의 작업 방향을 스스로 이끌어간다. 이렇게 선배 화가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종합하고 넘어서면서 빛을 발산하는 그림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사치, 고요 그리고 관능’ (1904~5)은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시냐크의 영향 아래 점묘법을 이용해 제작한 작품으로서, 여기서 마티스가 주의를 기울인 점은 단순히 과학적인 색채이론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고요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기쁨 등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신인상주의 실험에서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색채의 힘’에 대한 확신을 얻은 마티스는 1905년 역사적인 살롱 도톤느에서 ‘야수파’라는 이름을 유래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내의 초상화 두 점 ‘모자를 쓴 여인’ 때문에 고민을 해온 주최측은 심사위원들에게 그 작품을 거절하라고 설득했었고 우여곡절 끝에 전시장에 걸리고 나서도 관람객의 비웃음과 평론가의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는 당시의 상황은 순수한 회화 수단으로 돌아가 새로운 미술사를 시작하겠다는 아방가르드적 이상을 예술의 동기로 삼는다는 것이 과감한 결단과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을 말해준다.  3. 구성, 표현 그리고 장식 짧지만 강렬하게 타올랐던 야수주의 시기를 일단락 짓고 마티스 그 자신으로서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할 무렵 발표한 ‘작가 노트’(1908)는 그의 일관된 예술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로서는 맹목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자연을 해석하고 이를 회화 정신에 따라 재구성해야 한다. 색채 간의 관계로부터 음악적 구성과 유사한 살아있는 색채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는 그의 기본적인 회화관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견지된다. 이는 현실을 회화의 출발점으로 삼되 이를 단순한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감성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그로부터 받은 감흥을 순수한 색들 통해 표현함으로써 내적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렇듯 ‘회화적 수단의 순수성’에 입각한 그의 작품은 결과적으로 단순미와 장식성으로 귀결되는데, 자칫 시각적 즐거움에 경도된 듯이 보이기 쉬운 결과물에게 마티스는 오히려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마티스가 자신의 화화를 가리켜 “편안한 안락의자처럼 안식을 줄 수 있는 그림”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이 피상적인 장식이나 눈요기감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으로 영혼을 고양시키는 매개체로서의 미술”이라는 좀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일상 속에 존재하는 자연과 사물에서 순수한 회화적 수단, 즉 선과 색을 통해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며, 이러한 장식적인 회화를 통해 ‘현실에 보다 지속적인 해석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대상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내러티브를 버리고 회화 수단의 순수함, 즉 색채의 순수성을 통해 마티스가 도달하고자 한 궁극적인 목적은 ‘숭고와 미의 더높은 이상’ 이었다.  한편, 마티스는 1945년에 저술한 에서 자신의 회화에서 장식성은 작가 내면의 ‘표현’을 전제로 한 ‘구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표현은 인간의 얼굴이나 과격한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열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표현적인 것은 내 그림의 전체적인 배열이다. 인물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그를 둘러싼 빈 공간, 각 부분의 비례 등 모든 것에 각자의 역할이 있다. 구성은 작가의 뜻에 따라 다양한 요소를 장식적인 방식으로 배열하여 화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라는 대목은 자신의 회화을 이루는 표현, 구성, 장식성의 의미와 상호 관계를 밝히는 동시에, 서로 다른 색상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림 표면의 고유의 빛을 발산시킴으로써 회화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 또는 반응을 전달하려는 마티스의 회화관을 잘 설명해준다.  ‘수단의 순수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즉 조형 예술에서 가장 단순한 수단이 가장 직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그의 생각은 1909년 러시아의 콜렉터 슈추킨의 주문으로 제작한 ‘춤’과 1910년 작 ‘음악’에 본격적으로 반영되며, 이는 ‘음악’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은 하늘의 파랑과 땅의 초록 그리고 몸의 주홍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세 가지 색으로 조화로운 빛과 순수한 색을 구성한다…. 색은 형과 비례하며, 형은 이웃하는 색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수정된다. 채색된 평면에서 비롯된 표현성은, 총체적으로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색채가 묘사적인 기능을 버리고 독자적인 기능을 버리고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질 때 화면은 자연적으로 3차원의 환영을 잃고 평면 위에 배열된 색이 창출한 새로운 공간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감은 ‘단순화’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야수주의 이후의 장식성이 강한 화풍으로 발전된다. 마티스의 회화에서 단순화 과정은 단지 그림을 순수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집약된 형과 색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강렬한 표현력을 가지게 한다.  서양 미술의 전통적인 원근법을 거부하고 단순화를 지향하는 마티스의 입장은 1903년과 1910년 각각 파리와 뮌헨에서 열린 대규모 이슬람 미술전에서 세밀화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이슬람 미술을 접하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마티스 자신의 말대로 ‘페르시아의 세밀화는 감각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으며, 이 예술품의 도안은 보다 거대한 공간, 진정으로 조형적인 공간을 암시한다.’ 식물 문양의 장식적 패턴으로 뒤덮힌 ‘붉은 실내’)1908)이후, ‘화가의 가족’(1911)및 ‘붉은 화실’(1911)등의 작품에서 공간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실내가구와 인물은 장식적 패턴처럼 순전히 색과 형으로 이루어진 조형 요소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된다.  표현성과 동일한 의미로서의 장식성은 1912년 모로코 여행의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한 일련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1913년~1917년 사이 일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와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입체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추상을 실험하던 시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 시기에 잠시 마티스의 그림에 나타난 기하학적 추상의 경향 역시 순간적이고 외적인 겉모습 이면의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화가로서의 기본 임무에 충실하여 사물의 구성을 해체하여 더욱 단순화시킨 단계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1917년부터 1930년까지 소위 ‘니스 시절’의 작품은 다소 현실 도피적인 장식적인 실내 풍경 및 나른하면서 유혹적인 오달리스크 풍으로 연출한 인물화가 주를 이룬다. 마티스는 1934년까지 이젤화를 잠시 중단하고, 1930년 미국의 반스 재단이 주문한 벽화 제작에 전념한다. 이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점은 형상과 배경에 동등한 비중을 둠으로써 확장된 평면 패턴을 형성시키는 문제였다. 마티스는 반스 재단의 벽화를 위해 미리 채색해 좋은 종이를 오려 자유롭게 패턴을 배치하며 작업했는데, 이는 1940년대 초 독립적인 종이 작업을 하는데 기초가 된다.  1930년대 중반 이젤화로 복귀하였을 때, 마티스가 주로 다룬 소재 역시 여성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드에서 점차 장식적인 의상을 입은 착의의 초상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그 단순성과 장식성은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 (1939~1940)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이전에는 다른 화가 뿐 아니라 마티스 자신의 그림 중에서도 볼 수 없었던 평면적이고 눈부시게 밝은 색면이 이 시기를 수놓는다.  4. 색과 형의 구분을 넘어서 ‘자신의 예술의 정점을 이루는 운명적인 작업’인 로베르 예배당에 관하여 쓴 글에서 마티스는 화가로서 지나온 날들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자연을 모방하라’는 복종할 수 없는 관습적인 견해를 평생 동안 반박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사실적인 모방을 넘어선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변화를 겪으면서도 내 작업의 근원을 이루었다. 이러한 저항심으로 인해 나는 드로잉, 색상, 구성 등 각 구성요소를 별개로 연구하게 되었도…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결합시킬 때 서로를 침해하거나 풍부한 표현력을 상쇄하지 않고 고유한 특질을 감소시키지도 않은 채 구성하게, 즉 회화 수단의 순수함을 존중하게 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마티스는 평생토록 색채의 표현력을 집요하게 탐구해오면서도 조각 작업을 통해 양감을 익히는 등 형태 연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1899년 결혼 지참금으로 화상 볼라르에게 구입한 세잔느의 작품 ‘목욕하는 세 여인’을 두고두고 관찰했으며, 회화를 보완하려는 시도로서 조각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마티스에게 드로잉과 색채의 대립과 조화는 영원한 과제였다.  그의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이러한 회화의 두 가지 기본 요소들의 상호관계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1930년 반즈 재단의 벽화를 제작하면서 그 준비작업에 사용했던 종이 작업이다. 그는 1941년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은 후 하루에 한 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는데, 더 이상 이젤 앞에서 유화를 그릴 수 없게 되면서 그 대안으로 십여 년 전 처음 시도했었던 종이 작업을 택한 것이다. 윤곽선을 그리고 색을 채워 넣는 방식 대신, 가위로 윤곽을 오려내는 동시에 색면을 만들어내는 이 작업을 마티스는 ‘가위로 드로잉하기’라 불렀다. 기성 제품으로는 원하는 색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선택한 색을 과슈로 종이 위에 바른 후 의도한 형태를 오려내어 서로 어울리도록 배치하는 방식으로 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형태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빈 공간에도 동등한 무게가 주어진다. 즉, 형상과 바탕 사이, 형상이 점하고 있는 포지티브한 공간과 그 사이의 네거티브한 공간 간의 균형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더욱 율동적인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1947년, 몇 년 전부터 잡지에 발표해왔던 종이 작업을 본격화하여 스텐실로 인쇄한 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됨으로써 마티스의 예술 영역이 한층 더 확장된다.  종이 작업을 주로 하던 1940년대 마티스의 화실 벽에는 나뭇잎, 해조, 산호 등의 모티프로 이루어진 색종이 조각들이 가득히 걸려있었다. 1946년에 종이오리기 기법으로 대형 작업 ‘오세아니아’ 연작을 시도하는데, 이는 린넨 위에 실크 스크린으로 옮겨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티스가 이제까지 천착해온 예술적 탐구의 결실을 집대성할 수 있는 ‘건축학적 그림’이라고 여겼던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의 창문 및 사제의 제복 디자인에도 종이오리기를 이용한다.  마티스는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디자인을 위한 준비작업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완성작으로서 종이 오리기 작품을 왕성하게 제작한다. 1952년 파란 종이로 오려낸 ‘푸른 누드’ 연작은 새로운 기법에 조각적인 양감까지 더하게 되며, 큼직한 색면들이 듬성듬성 배치된 ‘달패잉’(1953)는 매우 단순한 수단을 통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시켜주며, 초기 시절부터 견지해왔던 회화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사항을 그 무엇보다도 완벽히 총족시켜준다.  5. 색채, 생명의 빛 1953년 한 잡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마티스는 현대미술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빛’이라고 말했다. 마티스의 예술관을 토대로 해석할 때, 그가 말한 빛은 물리적인 빛 뿐만 아니라 물질적 구속을 벗어난 인간 내면의 빛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티스의 예술 세계를 포괄하는 ‘색채 혁명을 통한 회화의 해방’은 곧 ‘영혼의 빛을 향한 구도의 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티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줄곧 꿈꾸어왔던 찬란한 빛과 색은 마침내 스테인드 클라스창이라는 건축적 요소를 통해 실현된다.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인 1945년, 자신의 간호사였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건 장식 작업에 대한 종교적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당신처럼 온 힘을 다해 영적인 지평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내 작업의 진로는 당신처럼 영적인 신앙심을 향하고 있답니다.”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화업을 시작하기 전,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 위에 끄적이던 열린 문의 낙서와 그 후 평생 동안 그의 회화의 주제 또는 소재로서 연속적으로 등장한 ‘열린 창’이라는 모티프가 빛을 발하는 실제의 창으로 귀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창과 캔버스는 직사각형의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마티스에게 창을 향해 들어오는 빛은 캔버스이며 파랑, 초록 그리고 노랑 세 가지 색의 빛을 발산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물감으로서 ‘일곱 개의 음계로 이루어진 음악’처럼 순수한 수단 그 자체로서 완결된 교향악을 연축한다.  마티스는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는 못 견디는 정리벽으로 유명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타고난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스로 부여한 것’이라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순수한 형과 색의 조화를 통해 화면에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것도 혼탁한 세상사로 어지럽혀진 인간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기말의 혼란과 두 차례 세계 대전의 격동 속에서 ‘피로를 풀어주는 편안한 안락의지와도 같은 예술’을 꿈꾼 마티스에게 균형과 조화의 추구를 통해 도달한 ‘빛’은 곧 ‘치유’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마티스가 회화에서 색채를 해방시키고 이를 통해 내면의 빛을 발산하고자 치열하게 작업한 이유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빛은 모든 선한 것, 모든 치유하는 것의 상징이며,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그러하듯이 빛은 내적인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티스 연대기 1869 12월 31일 북부 프랑스 피카르디의 까또 깡브레시스(Cateau Cambresis)의 외가에서 앙리-에밀-브느와 마티스(Henri-Emile-Benoet Mattise) 태어나다. 아버지 에밀-이폴리트-앙리 마티스(Emile-Hippolyte-Henri Mattise)는 잡화 및 곡물 상인, 어머니 안나 엘로와즈 제라르(Anna Heloese Gerard)는 예술적 기질이 있어 모자를 만들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림.  1872 남동생 에밀-오귀스트(Emile-Auguste) 7월 9일 태어나다.(1874년 4월 4일 사망)  1874 다른 남동생 오귀스트-에밀(Auguste- emile) 6월 19일 태어나다. 1882-87생 퀜틴(Saint-Quentin)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 수학하다. 1887-88파리에서 1년간 법룰 공부를 하다. 8월에 첫 번째 자격 시험 통과하다. 이후 곧 피카르디로 돌아가다.  1889 생 퀜틴에서 변호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아침에 에꼴 퀜틴 드 라 투르(Ecole Quentin de La Tour)에서 드로잉 수업을 듣다. 이후 건강이 나빠 여러 해 병석에서 지내다, 1889년 7월 군대에서 면제되다. 맹장염에서 회복되는 동안 다색석판인쇄법으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다. 첫 작품인 을 1890년 6월에 그리다. 건강회복후 다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새벽에 생 퀜틴의 미술학교에 다니다.  1891 법률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다. 부모를 설득해 미술 공부를 위해 10월에 파리로 떠나다.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William Adolphe Bouguereau)와 가브리엘 페리에(Gabriel Ferrier)가 교수로 있던 아카데미 쥴리앙(l'Academie Julian)에 등록하다. 여기서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입학시험을 준비하다.  1892 2월 에꼴 데 보자르 시험에서 떨어지다. 잠깐 피카르디에 돌아갔을때, 릴(Lille)의 뮤제 데 보자르(Musee des Beaux-Arts)에서 고야의 를 보고 감명받다. 노트르담 근처의 생 미쉘로 이사하다. 부게로의 교수법에 환멸을 느끼다.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의 눈에 띠어 그의 수업을 들으며 조르쥬 데발리에(Georges Desvallieres), 앙드레 루베이르(Andre Rouveyre), 조르쥬 루오(Georges Rouault), 시몽 부시(Simon Bussy), 앙리 에벤에풸(Henri Evenepoel), 앙리 망귄(Henri Manguin)을 만나다. 10월에 장식미술학교(Ecole des Arts Decoratifs)에 등록해 기하학, 원근법, 구성 수업을 듣고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를 만나다.  1893 모로의 권유로 4월부터 루브르에서 명화 모사연습을 하다. 주로 푸생, 와토, 프라고나르, 샤르댕 같은 17, 18세기 프랑스 회화를 모사하다.  1894~5 9월 3일 캐롤린 조블로(Caroline Joblaud)에게서 딸 마르게리뜨 에밀리엔느가 태어나다.  1895 3월 에꼴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합격해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모로의 수업을 듣게 되다. 코로의 100주기 기념전을 보다. 여름에 화가 에밀 웨리(Emile W?ry)와 함께 브리따니의 벨 일(Belle-Ille)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다. 여기서 첫 야외 작업을 시작하다. 볼라르 화랑에서 중요한 세잔 전시를 보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세잔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다.  1896 4월에 상징주의 저널인 La Plume가 조직한 Salon des Cent에서 첫 번째 공식 전시회를 하다. 한 달 후 보수적 성향의 화랑인 Salon de la Societe de Nationale des Beaux-Arts(관장 퓌비 드 샤반느)에서 5점의 회화 전시하다. 브리따니 벨 일에 두 번째 여행을 가 오스트레일리아인 존 러셀(John Russel)을 만나다. 이 시기 주로 풍경, 정물, 실내 그림을 그리다. 10월에 파리로 돌아와, 대형 구성작품인 을 시작하다.  1897 뤽상부르 미술관(Musee du Luxembourg)에서 인상주의를 접하다. 이 중 모네에게 큰 감명 받다.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첫 작품인 을 Salon de la Societe de Nationale des Beaux-Arts에서 전시하다. 후에 좋은 조언자가 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알게 되다. 벨 일로 세 번째 여행을 떠나 모네풍의 그림을 그리다. 딸 마르게리뜨의 어머니 캐롤린과의 관계가 끝나다.  1898 1월 8일에 아멜리-노에미-알렉산드린 파레이르(Amelie-Noemi-Alexandrine Parayre)와 결혼하다. 런던으로의 신혼여행에서 터너를 공부하다.(피사로의 조언) 코르시카의 아자치오(Ajaccio)에서 2월부터 8월까지 머무르다. 코르시카에서 분방한 풍의 풍경화를 그리며 폴 시냑의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D'Eugene Delacroix au neo-impressionisme)』를 읽다. 4월 18일에 구스타프 모로가 죽다.  1899 1904년까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다. 첫 아들인 장 제라르(Jean Gerard)가 1월 10일 툴루즈에서 태어나다. 화상 볼라르에게서 세잔의 를 사다. 이 그림은 이후 마티스의 사상과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다. 같은해 로댕의 앙리 드 로쉐포르 석고흉상, 고갱의 소년두상그림, 반고흐의 드로잉도 구입하다. 2월 파리로 돌아와 생 미쉘 부근에서 가족과 함께 살다. 환조 조각 시작하다. Salon de la Societe de Nationale des Beaux-Arts에서의 마지막 전시를 하다. 유진 까리에르(Eug?ne Carriere) 스튜디오에서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장 비테(Jean Biette), 오귀스트 샤보(Augueste Chabaud)등을 만나다. 1900년 파리 박람회를 위해 그랑 빨레(Grand Palais)에서 장식 패널 작업을 마르께와 함께 하다.  1900 첫 번째 에칭작업을 하다. 오딜롱 르동의 파스텔화 2점 구입하다. 6월에 둘째 아들 피에르 태어나다. 저녁에 l'Ecole d'Art Municipale에서 조각 수업을 듣고, 부르델의 스튜디도에서 일하다. 모로 스튜디오 시절의 친구들과 연락을 유지하다. 오귀스트 로댕에게 드로잉 보여주다.  1901 1901년 초 심한 기관지염을 앓다. 베른하임-준(Bernheim-Jeune) 갤러리에서 열린 반 고흐 회고전에서 드랭이 모리스 블라맹크(Maurice Vlaminck)를 소개하다. 살롱 데 엥데팡당(Salon des Independants)에서 처음 전시를 하다. 화가로서의 아들에 불만품은 아버지 원조를 끊다. 샤또에 있는 드랭과 블라맹크를 방문해 그들의 작품에 감명받다. 1902년 2월에 베르뜨 웨일(Berthe Weill) 갤러리에서 5명의 다른 작가와 함께 그룹전하다. 웨일을 통해 작품 중 하나를 팔다.(화상을 통한 첫 판매) 1903년 살롱 데 앙데팡당에서 전시. Pavillon de Marsan에서 이슬람 미술전시를 보다. 그해 가을 살롱 도톤느에서 첫 전시하다.  1904 폴 시냑과 친해지다. Pavillon Marsan과 biblioth?que Nationale에서 프랑스 원시주의자들의 대형 전시를 보다. 6월에 볼라르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회화 45점, 드로잉 1점)을 열다. 이 전시 서문 로저 막스(Roger Marx)가 씀. 준비 시작하다. 다른 화가 오귀스트 마티스와 구분위해 이름에 하이픈 넣기 시작하다. (Henri-Mattise)  1905 다른 7점의 작품과 함께 신인상주의풍 회화 을 엥데팡당 전에 출품하다. 이 작품 시냑이 구매하다. 콜리우르(Collioure)에서 드랭과 여름을 보내면서 야수파 스타일작품 시작하다. 그해 살롱 도톤느에서 드랭, 망귄, 마르께, 퓌, 블라멩크와 함께 한 전시가 비평가 루이 보셀르(Louis Vauxcelles)에 의해 "야수들(fauves)"이라고 불리며 스캔들을 일으키다. 거투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과 레오 스타인(Leo Stein)의 을 구입하다. 이후 스타인 가문은 마티스 작품의 주요 컬렉터가 되다. 상상의 낙원을 그린 을 그리기 시작하다. 이 작품은 그의 가장 큰 대형작이 되다.  1906 석판화, 목판화 첫 작업 시도하다. (이후 생의 기쁨으로 보통 언급됨) 3월에 엥데팡당전에 내다. 큰 크기와 현란한 색채로 인해 화제가 되다.(이 작품 역시 스타인 형제가 구입) 엥데팡당전의 부회장이었던 시냑 이 그림 비판하다. 3-4월에 드루에(Druet)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하다. 4월 거트루드 스타인의 아파트에서 피카소를 만나다. 비슷한 시기 브라크 만난 것을 추정되다.  1907 1월 콜리에르에서 , 를 그리다. 엥데팡당전에 전시하고 스타인 형제에게 팔리다. 이것이 스타인 형제가 구입한 마티스의 마지막 주요 작품. 이후 스타인 형제는 피카소의 그림을 주로 구입함.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최초로 좋은 판매고 올림. 이후 이 갤러리가 그의 주된 화상이 됨. 앙드레 메쎄(Andr? M?they)의 아뜰리에에서 도자기 타일을 만들기 시작하다. 여름에, 부인과 이태리로 가 스타인형제를 방문하고 거기서 미국 비평가 월터 파흐(Walter Pach) 만나다.(이후 마티스 후원자 됨) 아레쪼, 라벤냐, 파두아, 베니스 여행하면서 지오토, 두치오,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 카스타뇨, 우첼로 등에 감명받다. 12월에 기욤 아폴로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마티스에 대한 첫 저작 출간하다.  1908 세브르 56번가 Couvent des Oiseaux에서 마티스 학교(Acad?mie Mattise) 1월에 개교하다. 3년간 120여명의 학생을 가르치다. 이 시기 , 등 제작. 거처 엥발리드 33번가의 Biron 호텔로 옮기다. 봄에 독일 여행. 4월에 뉴욕 291 갤러리에서 첫 미국 전시. 두 명의 러시아 수집가 슈슈킨(Shchukin)과 모로소프(Ivan Morosov) 이때 그의 주요 수장가 됨.(1913년까지 슈슈킨 마티스 작 36점, 모로소프 11점 소장) 살롱 도톤느에서 회화 11점(포함), 조각 13점, 드로잉 6점 포함한 중요 전시 염. 12월에 『화가의 노트(Notes of a Painter)』 출간. 이 책 그레타 몰(Greta Moll)에 의해 독어로 번역.  1909 1월 모스크바에서 Salon of the Toison d'Or 두 번째 전시에 출품. 3월 슈슈킨이 주문. 4월 샤를 에스티엔느(Charles Estienne)가 마티스와의 인터뷰 출간. 파리 남쪽 외곽에 있는 집 정원에 대형 스튜디오 짓기 시작. 여름동안 까발리에르(Cavaliere)에 있다가 가을에 집으로 돌아옴. 파리의 베른하임-준 화랑과 3년간 전속계약 체결함.  1910 2,3월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회고전 개최.(1893년부터의 65점의 회화와 25점의 드로잉) 뉴욕 291갤러리에서 두 번째 전시. 세점의 마티스 드로잉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됨.(마티스 작품 첫 소장한 미국 미술관이 됨) 그해 여름 친구 마르께와 푸르만과 함께 이슬람미술관련 대형 전시를 보러 뮌헨에 감. 을 살롱 도톤느에 전시해 혹평을 받음. 마티스의 부친 10월에 사망. 이런 저런 일에 지친 마티스 11월 스페인으로 떠남. 세빌레, 그라나다, 코르도바, 마드리드, 톨레도 등을 방문하여 다음해 1월까지 머뭄.  1911 파리로 귀향. 봄에 마티스 학교 문을 닫음. 같은 해 봄, 엥데팡당 전의 41호실(Salle 41)에서 대형 큐비즘 전시가 열림. 이 해 내내 4점의 대형 장식 패널 제작.(, , , ) 콜리우르에서 여름 보내고 슈슈킨의 초대로 11월에 러시아 여행. 여기서 성화들을 연구하고 러시아의 이국성에 감명받음. 12월에 돌아와 에른스트 골드슈미트(Ernst Goldschmidt)와 인터뷰함.  1912 1월부터 4월까지 모로코에 머물다.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이탈리아 미래파 전시 열림. 마티스 조각에 대한 첫 전시가 뉴욕에서 열림. 6월부터 10월 사이 Mus?e des Arts Decoratifs에서 열린 페르시아 미니어쳐 전을 연구하다. 가을에 다시 모로코로 돌아가 겨울 내내 머뭄. 베른하임-준 화랑과의 계약 3년 더 연장하다. 장 메칭어(Jean Metzinger)가 『큐비즘(Du Cubisme)』출판하다.  1913 모로코에서 돌아오다. 아폴리네르의 『큐비즘 화가들(Les peintres cubistes)』출간되다.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조각작품 일부와 모로코시기 회화를 전시하다. 베를린 분리파(Berlin Sezession)과 뉴욕, 보스턴, 시카고의 아모리 쇼(Armory Show)에서 전시하다.(17작) 작업하다. 을 완성해 이 작품만 살롱 도톤느에 보내다.  1914 에칭과 석판화 작업을 하다. 봄에 을 그리다. 7월 베를린 구르릿(Gurlitt) 화랑에서 전시. 일차대전이 터져 그림 반환 안 됨. 입대 지원했으나 거부됨. 9월 콜리우르로 가서 후앙 그리(Juan Gris)와 친해짐. 그림. 10월에 파리로 돌아 월터 파흐와 함께 레이몽 뒤샹-비용(Raymond Duchamp-Villon)> 만남.  1915 뉴욕 몬트로스(Montross) 화랑에서 개인전.(미국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 겨울 내내 생 미쉘과 이시(Issy)에서 작업하며 보냄. 작품 점점 추상적이고 간결해짐.  1916 , , , 제작. 사라 스타인과 미쉘 스타인의 초상 제작. 이탈리아인 롤레트(Lorette)가 모델 서기 시작함.  1917 롤레트를 모델로 해 그린 연작 점점 더 자연주의적이고 관능적이 되어가다. 5월에 마르께와 함께 늙은 모네를 방문하다. 베른하임-준 화랑과 3년 재계약 체결. 12월에 마르세이유를 거쳐 니스로 가 Beau-Rivage 호텔에 머물다. 이때 Cagnes-sur-Mer에 사는 르누아르 방문하다.  1918 호텔 Beau-Rivage에서 그림 그리다. 1-2월에 마티스와 피카소 파리의 폴 기욤(Paul Guillaume) 화랑에서 2인전 하다. Villa des Allies, Issy등을 방문하고 가을에 니스로 다시 돌아오다. 앙티브(Antibes)에 사는 피에르 보나르 방문. 아폴리 나르가 11월 9일 파리에서 사망하다. 러시아 혁명이후 슈슈킨과 모로소프 소장 마티스 작품이 소련 정부에 의해 압류당하다.  1919 작품 점점 자연주의적이 되어가다. 새 모델 앙토안느 아르노를 모델로 한 시리즈를 제작하다. 5월에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개인전을 하는데, 이는 1913년 이후 파리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이나 니스 시기 그림 첫 선 보인 것. 라그너 호프(Ragnar Hoppe)와의 인터뷰. 런던의 레이체스터(Leicester) 화랑에서 Maillol과 함께 전시. 런던에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가 감독하고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맡고, 레오니드 마신느(Leonide Massine)가 안무한 발레 의 의상 및 무대배경 맡음. 의상 디자인으로 자른 종이(cut paper)를 사용.  1920 마티스의 어머니 1월 25일 사망. 니스에 거주하며 관계로 런던을 드나듬. 7월에 노르망디의 에뜨레따(Etretat)에 가 모네의 모티브들을 그림. 마티스에 대한 첫 모노그라프 Marcel Sembat가 씀. 베른하임-준 화랑과의 4번째 3년 계약 체결. 1927년까지 마티스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된 앙리에뜨 다리까레르(Henriette Darricarrere)가 모델 서기 시작. 10월-11월에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58점의 신작 전시. 대부분이 니스와 에뜨레따의 신작.  1921 니스 부근의 풍경 그림. 니스에서의 호텔 생활 접고 아파트 빌림.(1928년까지 유지)  1922 2-3월에 니스 그림으로 베른하임-준에서 전시. 석판화 시리즈 작업 시작. Musee du Luxembourg에서 를 구입. 이것은 프랑스 미술관에서의 첫 작품 구입. 를 그르노블의 미술관에 기증. 이 시기 일련의 관능적 오달리스크 그림 그림. Claribel과 Etta Cone, Albert Barnes이 본격적으로 마티스 수집 시작. 초기 후원자였던 Marcel Sembat가 9월에 사망.(Sembat 컬렉션 1923년에 그르노블 미술관에 기증됨)  1923 Barnes의 수집품 미국으로 이송 전 폴 기욤 화랑에서 전시되다. 베른하임-준 화랑과의 마지막 계약 체결하다. 슈슈킨과 모로소프의 컬렉션 모스크바의 Museum of Modern Western Art에 귀속되다.  1924 2-3월에 뉴욕의 조셉 브루머(Joseph Brummer) 화랑에서 전시하다. 이때까지의 가장 큰 회고전이 코펜하겐에서 열리다.(이어 스톡홀름과 오슬로로 순회) 아들 피에르 두덴싱(Dudensing) 화랑에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다.  1925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 니스에 머물며 오달리스트 석판화 시리즈를 하다.(1927년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앨범으로 출간). 근년간 첫 조각작품인 시작하다. 자끄 귀엔(Jacques Guenne)과의 인터뷰.  1927 아들 피에르 마티스에 의해 기획된 마티스 회고전이 뉴욕 발렌틴 두덴싱 화랑에서 열림. 1890년부터 1926년까지의 작품 망라. 피츠버그의 카네기 국제전(Carnegie International Exhibition)에서 로 1등상 받음. 앙리에뜨 다리까레르 모델 그만둠  1929 주로 소품을 그리다. 1935년까지 이젤 페인팅 거의 하지 않고, 판화와 조각에 주력하다. 베른하임-준 화랑에서 폴 기욤의 개인 소장품 전시 열리다.(회화 16점, 조각 2점) Claribel Cone 9월에 사망하다. 플로렌트 펠스(Florent Fels)에 의해 모노그라프 출간되다.  1930 2-3월, 베를린의 탄호이저 화랑에서 대형 개인전 열다(회화 83점이 포함된 265점 출품) Albert Skira가 말레르메의 시집『Poesies』 삽화 의뢰하다. 3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타히티 여행. 파나마 등을 거쳐 마르세이유로 돌아옴. Teriade와의 인터뷰. 가을에 카네기 상 심사위해 미국행. 여기서 펜실베니아 메리온의 바르네스(Barnes) 재단과 메릴랜드 발티모어에 있는 에타 콘 재단 방문. 바르네스가 재단 건물에 벽화 그려줄 것을 제의. 마티스 이를 수락함.  1931 6-7월 파리의 조르쥬 쁘띠 화랑(Galleries Georges Petit)에서 회고전 열림(141점의 회화) 바젤의 쿤스트할레(Kunsthalle)(111점)과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78점)에서의 개인전. 잡지『Cahiers d'Art』와 『Les Chroniques du Jour』에서 마티스 특별판 냄. 마티스 바르네스의 벽화위해 파두아의 지오토 프레스코 등을 연구함. 니스 귀향 후에도 계속 벽화관련 작업함. (캔버스에 색종이 조각붙여 구성상 변화의 용이성 시도)  1932 바르네스 벽화 초안이 거의 끝났을때 스케일 잘못 알았다는 것을 알고 재작업 결정. 10월에 말라르메의 시집 출간.(마티스의 29점의 에칭 수록) 11-12월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드로잉 전시.  1933 바르네스가 벽화를 위한 오린 종이 구성(cut-paper composition)을 보러 니스로 오다. 5월에 벽화 작업 끝남. 바르네스 재단에 벽화 설치를 감독하기 위해 메리온으로 감. 이해 말까지 바르네스 벽화의 첫 구상을 재작업, 마무리하다.  1934 피에르 마티스 뉴욕의 자신의 갤러리에서 아버지 작품으로 일련의 전시회를 구상하기 시작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미국판에 삽화를 그리다.(1935년 출간) 약간의 망설임 끝에 『거트루드 스타인에 대한 항의(Testimony Against Gertrude Stein)』에 거트루드 스타인이 그에 대해 한 말에 대한 반박글 기고.  1935 2월 조수였던 리디아 들렉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 모델 서기 시작. 이후 마티스의 메인 모델 및 협력자가 됨. , , 그림. 종이 오리기 기법 계속 사용.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와 계약함. 선 드로잉 시리즈 시작. 피에르 보나르 방문. 「모더니즘과 전통에 대하여(On Modernism and Tradition)」 씀. 이것은 1908년이래 처음 출간된 에세이.  1936 런던 라이체스터 갤러리에서 최근 드로잉 전시. 파리 폴 로젠버그 갤러리에서 27 최근 회화작품 전시. 바르네스 벽화의 첫 번째 구상작이 Musee du Petit Palais의 관장 레이몽 에숄리에(Raymond Escholier)의 노력으로 파리시에 의해 구매됨. 마티스 자신이 소장했던 세잔의 쁘띠 팔레에 기증. 마티스 드로잉 선집이 『Cahiers d'Art』의 특집으로 출간. 장식 작업용 모형으로 종이 자르기와 붙이기 기법 쓰기 시작. 이 시기 그의 그림 점점 평면화되고 밝아졌으며 패턴화 경향이 짙어짐.  1937 쁘띠 빨레의 엥데팡당전의 거장들(Maietre de l'art Ind?pendent)전시에 마티스에게 특별 전시실 할당됨.(회화 61점) 에숄리에의 전기적 모노그라프 『Henri Matisse』 4월에 출간. 몬테 카를로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 de Monte Carlo)에게서 레오니드 마신느가 안무하고 쇼스타코비치의 1번 교향곡이 음악으로 쓰이는 의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주문받음. 이 무대 디자인 바르네스의 의 이미지 자유롭게 차용.  1938 오슬로 전시 참여(피카소, 브라크, 로랭 포함). 폴 로젠버그 화랑에서 최근작 전시. 이전에 장식 프로젝트의 모형으로만 쓰던 종이 오리기를 하나의 독립작으로 만들기 시작. 파리의 폴 로젠버그 갤러리에서 개인전, 뉴욕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개인전. 뉴욕의 넬슨 록펠러의 개인아파트 벽난로 장식선반을 위해 주문받은 을 그리다. 드로잉 작업 계속하다.  1939 몬테 카를로에서 발레 첫 공연 열림. 「드로잉에 대한 한 화가의 생각(Notes of a Painter on his Drawing)> 펴냄. 8월말 스페인 회화전을 보기위해 제네바로 여행.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곧 파리로 돌아옴. 독일 9월 1일 폴란드 침공. 프랑스 이틀후 참전 선포. 10월에 파리 떠나 니스로 돌아가 호텔 레지나에 머뭄.(파리 떠나기 전, 모든 작품 프랑스 은행 지하금고에 맡김)  1940 4월에 부인과의 별거문제 정리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독일군 파리 진입 직전 파리 떠나 니스에 머물다. 피카소, 마르께, 보나르와 교류하며 지내다. 장에 종양이 생기다.  1941 1월에 리용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수술을 받다. 마티스 자신이 삽화를 그린 자서전을 출간할 목적으로 피에르 꾸르씨옹(Pierre Courthion)과 4월에 인터뷰 시작하다. 속기본이 완성되었으나 이후 출간하지 않기로 결정하다. 수술과 계속되는 병으로 건강 악화되어 누워 지내게 되다. 드로잉과 회화도 침대에서 작업하다. 작업 시작하다. 같은 대담한 정물화를 그리다. 카르코(Carco)와 인터뷰하다. 니스에 살던 루이 아라공을 만나다.  1942 영초에 비쉬(Vichy) 라디오 방송국과 두 번의 인터뷰를 하다. 루이 아라공이 서문을 써주기로 하다. 피카소와 그림을 교환하다. 담낭에 문제가 생겨 8월 중순까지 작업하지 못하다. 샤를 도를레앙(Charles d'Orl?ans)의 시집에 삽화를 그려주다.  1943 6월말까지 니스의 레지나 호텔에 머물며 침대에서 작업하다. 간호사였던 모니크 부르주아(Monique Bourgeois)가 모델을 서주다. 모니크 부르주아는 이후 방스의 도미니칸 수녀원의 수녀가 되어 마티스의 방스 예배당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다. 롱자르(Ronsard) 시집의 삽화를 그리면서 종이 오리기 작업을 시작해 결국 『Jazz』라는 책으로 출간하다.(1947). 공습이후 방스로 옮기다.(1949년까지 머뭄) 『데생: 주제와 변주(Dessins:Th?mes et variations)』출판하다.  1944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마티스 부인과 딸 마르게리뜨가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다. 삽화를 그린 『Pasiph??』5월 출간. 레다와 백조(Leda and the Swan) 주제로 세폭화(triptych) 주문받다. 독일점령 해방 기념 살롱 도톤느전에 마티스 출품위해 피카소 애쓰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 삽화 작업을 하다.  1945 7월부터 11월까지 파리에 머무르다. 살롱 도톤느의 명예의 방(Salle d'Honneur)에서 마티스 회고전(회화37점) 열리다. 마티스와 피카소,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동시에 개인전 열다.(이 전시 1946년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Palais des Beauz-Arts)로 옮겨져 그대로 전시) 11월 말 방스로 돌아오다. 프랑스 정부가 새로 건립되는 국립근대미술관(Mus?e National d'Art Moderne) 소장품으로 마티스 그림 6점 구입(,, 포함) 가스통 딜(Gaston Diehl)이 마티스의 「색채의 역할과 양상」출판. 테리아드(T?riade)가 마티스의 1941년-1944년 작품이 담겨 있는 「색채로부터(De la Couleur)」 출판하다.  1946 방스에서 강렬한 색채의 실내장식을 그리기 시작하다. 이것들 48년에 『열정(Verv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다. 피카소와 프랑소와즈 질로가 니스로 방문하다. 프랑소와 깜포(Fran?ois Campaux)가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다. 종이 오리기 기법으로 , 등의 대형 작품 제작하다.  1947 피에르 보나르 1월 사망. 마티스가 삽화 그린 『악의 꽃』출간. 회화보다 장식 프로젝트에 몰두. 알베르 마르께 6월 사망. 12월 방스의 도미니칸 수도회의 예배당 장식 프로젝트를 제의받음. 『색채의 길(The Path of Color』 출판.  1948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헨리 클리포드(Henry Clifford)가 기획한 마티스 전시 열리다.(회화 93점, 조각 19점, 드로잉 86점, 도록에 마티스 자신의 글 실림) 여름을 파리로 보내고 방스로 돌아가다. 방스의 도미니카 수녀원의 로사리오 성당 디자인 관련 종이오리기 작업을 하다.  1949 니스의 레지나 호텔로 돌아가 방스 성당 관련 작업을 하다. 뉴욕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최근 회화와 종이오리기 작업을 전시하다. 파리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종이오리기 작업과 다른 최근작 전시하다. 루체른에서 회고전 열리다. 콘(Cone) 컬렉션이 발티모어 미술관에 기증되다. 방스 성당의 기초석이 놓이다.  1950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모형이 파리의 프랑스 사상의 집(Maison de la Pens?e Fran?aise)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다.(
36    피카소와 마티스 댓글:  조회:5889  추천:0  2015-02-15
장난꾸러기 피카소와 얌전둥이 마티스   그림공부를 시작한 피카소와 마티스는 세잔의 그림을 보고 답을 찾아냅니다. 피카소가 찾아낸 답은 면 이고, 마티스가 찾아낸 답은 색 이였죠.   피카소 피카소 피카소 피카소 피카소     피카소는 주로 밤에 그림을 그렸대요. 그래서 회색빛의 그림이 많다네요. 피카소는 장난꾸러기 어릿광대처럼 살았지만, 평생 마티스의 그림을보고 감탄하며 자극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티스 마티스 마티스 마티스 마티스           마티스는 피카소와는 반대로 주로 낮에 그림을 그렸대요 그래서 환한 색이 가득한 그림이 많다고 합니다. 마티스는 진지한 모범학자처럼 살았지만, 평생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며 자극을 받았다고 하네요.   닮은 듯 닮지않은 두사람. 피카소와 마티스의 그림이야기였습니다~           -    - 마티스           - 피카소 [출처] [본문스크랩] 마티스/피카소의 그림자료|작성자 수위     [출처] [본문스크랩] [첫인물그림책'이담에'] 장난꾸러기 피카소와 얌전둥이 마티스.|작성자 수위     [출처] [본문스크랩] [첫인물그림책'이담에'] 장난꾸러기 피카소와 얌전둥이 마티스.|작성자 수위  
35    화가 피카소와 녀인들 댓글:  조회:4927  추천:0  2015-02-15
피카소는 여인들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지만, 정식 결혼은 일생에 두 번만 했다. 여러 여인들 중 7명은 피카소의 작품에 영감을 준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림의 암살자'라고 불리는 너무 나도 유명한 피카소, 그에게도 예술가로서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지만, 여성편력 또한 그의 생애에 걸쳐 이어졌다. 그는 80여점의 여인들,친구들,시인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피카소가 여인들의 영혼을 양식삼아 작업한 벰파이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 이해하기 힘든 피카소의 그림을 모델이 되어 주었던 여성들을 따라 성장해가는 피카소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한 하다. 피카소는 숱한 여자들을 사랑했다. 많은 여인들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중에서 올가 코클로바, 도라 마알, 마리 테레즈, 프랑스와즈 질로, 쟈클린 등이 피카소와 결혼을 하거나 동거 생활을 했던 여인들이었다.     그는 열정적인 삶을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 여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그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친구였던 화가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충격을 받아 푸른 계통의 어두운 그림(청색시대)만 그리던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그림 스타일을 바꾼다. 화려한 입체파풍의 작업을 많이 했고, 밝은 복숭아 색으로 어릿광대와 곡예사(장미빛 시대)를 주로 그렸다. 첫사랑 페르낭드 올리비에와는 8년간의 동거 끝에 헤어진다. 피카소는 곧 바로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본명 마르센 움베르)과 만난다. ‘기타’란 작품에 ‘나는 에바를 사랑해’라는 글을 써넣을 만큼 적극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에바 구엘은 그가 만난 여자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여성스러웠지만 만난 지 4년 만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 번째 여인은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 1917년 러시아 발레단 공연 무대장식을 맡은 피카소는 우아하고 고전미 넘치는 코클로바에게 끌렸다. 1년 연애 끝에 이듬해 결혼했고, 그때부터 ‘고전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와 사이에 첫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카소는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17세의 어여쁜 소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팔등신의 이 늘씬한 소녀에게 홀려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델이 돼달라고 부탁하고, 그녀는 이후 10년간 피카소의 연인이자 최고의 모델이 된다. 부인 코클로바가 이혼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피카소는 발터와 오랫동안 몰래 사랑을 나눠야 했다. 발터는 주로 그의 작품에서 ‘잠자는 여인’이나 ‘꿈꾸는 여인’으로 표현됐으며, 주로 화려한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발터는 1935년 딸 마야를 낳았으나 피카소는 발터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같은 시기에 부인 코클로바와도 이혼한다. 이듬해인 1936년 피카소는 친하게 지내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로부터 사진작가 도라 마르(본명 마르코비츠 앙리에뜨)를 소개 받는다. 그는 스페인어가 능통하고 지적인 여자였다. 그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했으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우울한 2차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마르는 피카소 작품에서 주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여섯 번째 연인은 법대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던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는 질로의 첫 전시회에서 그를 만났다.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는 동안 피카소는 가족, 삶의 기쁨, 평화 등을 주제로 작업을 했으며, 주로 ‘꽃여인’으로 그려졌다. 전형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피카소와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를 차버린 유일한 여자. 그는 피카소와 헤어진 후 ‘피카소와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 그와의 10년 동거생활을 낱낱이 폭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다.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마지막 여자 자클린느 로크는 피카소가 80세 되던 해 만난 여인이다. 그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이혼녀로, 피카소와 8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 피카소와 함께 한 7명의 여인들은 어머니이자 아내, 친구, 모델로서 그의 작품 열정을 자극했지만 그가 원할 때는 조용히 떠나야 했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극장 로얄석에 앉아 세기의 거장이 만들어 가는 창작의 무대를 구경했던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 그의 연극에 동참해야 했던 것이다. 피카소에 있어 7인의 연인들 중 65세의 피카소와 만나 10년간 동거생활을 했던 질로는 피카소와의 생활을 회고한 회상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 책에는 피카소의 인격이나, 성격, 대인관계, 복잡한 여자관계들이 꾸밈없이 담겨져 있다.  피카소는 한 여인과 결혼이나 동거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고, 이러한 그의 고질화된 습벽은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인들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피카소 주변에는 그의 명성에 현혹된 여인들이 언제나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는 그러한 여인들과의 일시적인 사랑을 자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한 피카소의 사랑을 진실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책을 저술한 존 버거의 말대로, 그러한 피카소의 여자관계는 여인에 대한 끝없는 욕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인관계에 있어서 그가 보여준 자세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다. 여인들은 그의 욕정, 고독, 공허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즐거움을 건네주지 못하고 시들한 모습을 보이거나 고뇌를 드러내고 인간적인 위안을 요구하는 여인에게 그는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다.    피카소와 함께한 여인들 집중연구 첫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 만났다. 그녀는 '야성미'가 돋보이는 여성으로 알려졌다. 암울한 '청색시대' 그림을 '장미빛 시대'로 바꾼 연인이다.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두번째 연인 에바는 '청순 가련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으로 1911년(30세)에 만났다. 이 시기는 '분석적 큐비즘'을 넘어 '종합적 큐비즘'이 자리잡는 시기였다. 그녀를 그린 그림 아래 '나의 졸리(애칭:Ma jolie)'라는 글귀도 보인다. 가냘프게 생긴 이 여인은 피카소가 차갑고 날카로운 분석적 큐비즘을 버리고 격정과 선율에 가득 찬 종합적 큐비즘으로 들어설 때 인도자 역할을 맡았다.  청순 가련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으로 1911년(30세)에 만났다. 피카소는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는1차 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는다.  피카소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피카소를 비난했다. 그 이유는 육체적으로 허약한 마르셀을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그녀가 병을 얻었을 때 피카소는 전염될까 봐 혼자 이사를 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에바가 병석에 있을 때 파리 태생의 가비 레스피나스라는 또 다른 애인을 두기도 했다.     세번째 연인 올가는 발레리나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1917년(36세)에 그녀를 만난 피카소는 종합적 큐비즘을 벗어나  상류 사회 '사실주의' 화풍으로 바뀌기도 했다. 사티의 음악에 디아길레프가 안무를 맡은 장 콕도의 발레 페레이드에무대미술을 맡은 피카소는 36살에 25살의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결혼을 한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버림을 받는다.피카소는 곧 바로 열일곱 살 난 처녀 마리 테레즈 발터에게 눈을 돌렸다. 그시기에 피카소는 그의 동료들로부터 큐비즘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큐비즘/여러 시점이 하나의 평면에 그려져있는걸 말한다.     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는 '천진난만'한 아름다움(18세 연하)을 지녔다고 한다. 피카소가 1927년(46세)에 만난 그녀는 '초현실주의'영향을 받았던 시기에 만났다. 피카소는 특별하게 마리 테레즈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 많은데 그녀는 연인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녀를 6개월 동안이나 쫓아다닌 끝에 마리를 작업실로 데려와 초현실주의 때의 걸작 의 모델로 세울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순정에 가득 찬 청순한 여인이었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피카소를 보살펴야 한다며 자살한 여인이 바로 마리 테레즈였다.  그러나 그녀가 스물두 살 때 딸 마리아를 낳자마자 피카소는 몰래 앙리에트 마르코비치를 만나고 다녔다. 앙리에트는 마리 테레즈와 달리 성격이 급하고 날카로운 여자로 프로급 사진가이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앙리에트와 함께 스페인 내전 시기를 보냈다. 생애 최대의 걸작 는 앙리에트와 살 무렵에 그린 것이다.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르는 '지성미'가 돗보이는 여성으로  1936년(55세)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다. 그녀가 대표작 '게르니카'(1937년 작)를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친구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만난 화가이며 사진작가. 현대 미술에 열중했으며 특히,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여섯 번째 연인인 프랑스와즈 질로를 1943년(62세)에 만났을 때  그녀는 22세 젊은 미술학도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술학도였으며 피카소가 63세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의 작업실에 살림을 차렸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 때에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의 작업실에 살림을 차렸다. 이 무렵 피카소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상을 세계에 고발한 로 명성이 드높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뿐" 이라며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이 극적인 사실을 취재하기 이해 열 일곱 살 난 여기자 주느비에브가 찾아왔고 그녀는 취재가 끝난 뒤에도 자주 찾아왔다. 친구 사이인 프랑수아즈와 주느비에브는 서로 이 사실을 모른 채 지냈다. 결국 피카소의 애정 행각을 알게 된 프랑수아즈는 피카소의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먼저 그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늘 자신이 여자 관계를 결정짓던 피카소로서는 이러한 사실이 몹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와중에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 딸을 법정투쟁을 통해 피카소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녀의 자식들은 뒷날 어마어마한 피카소의 재산을 물려받게 됐다. 프랑수아즈가 떠난 뒤 피카소는 더욱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을 만났다. 이미 70살이 넘은 피카소였지만 젊은 여인에 대한 열망은 그칠 줄 몰랐다.      일곱 번째 연인인 자클린은 1953년(72세) 만났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로 피카소 말년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이 때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 그녀는 커다랗고 짙은 눈망울을 지닌 지중해 풍의 여인이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로 그녀는 피카소가 말년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 줬다고 한다.  이혼 경험이 있는 자클린은 1961년 피카소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훗날, "서른 살의 젊은 여인이 어떻게 곧 여든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나였지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언제나 "나의 주인님"이라 부르며 헌신적이고 절대적인사랑을 바쳤다.  또한, 그녀는 피카소의 사후  유산을 둘러싼 법정투쟁과 다른 여자들이 낳은 피카소 후손들과의 핏줄 싸움까지도 책임졌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그가 만났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자클린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가 남긴 작품은 무려 4만 5000점에 달한다.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  3만 점에 달하는 판화 작품 등... ========================= 파블로 피카소가 사랑한 여인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짐 없이 그가 사랑했던 7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는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현대미술의 커다란 기둥인 피카소는 여인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던탓인지 그의 작품수는 무려 4만 5000점으로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과 3만 점에 달하는 판화 작품 등을 남겼다.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인과 작품속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첫번째 연인 - 페르낭드 올리비에 (Fernande Olivier)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올리비에는 회고록 에서 피카소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그를 모른다면 피카소는 그리 특별나게 유혹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수상쩍게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집중이 되긴 했다. 여러분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에게서 감지하는 이러한 열정, 내면의 불꽃은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석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어 하자,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어졌다."     두번째 연인 - 에바 구엘 (Eva Gouel)       피부가 무척 하얗던 여인. 피카소는 구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 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이 젊은 여인은 결핵으로 죽는다.     세번째 연인 - 올가 코클로바 (Olga Kokhlova)       공연 때 만난 러시아 무용수, 피카소가 서른 여섯 살 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여인이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네번째 연인 -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 Therese Walter)         피카소가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27년 당시 열일곱 살의 건강하고 관능미 넘쳤던 소녀 마리를 6개월동안 쫒아 다닌 끝에 작업실로 데려와 초현실주의때의 걸작 의 모델로 세울 수 있었다. 페르낭드와 에바, 올가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과 달리 그녀는 금발이였다. 그녀가 스물두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리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피카소를 보살펴야한다며 자살한 여인이 바로 마리테레즈였다.     다섯번째 연인 - 도라 마르 (Dora Maar)         1936년 피카소는 친하게 지내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로부터 사진작가 도라 마르(본명 마르코비츠 앙리에뜨)를 소개 받는다. 피카소의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로 몇시간 그와 예술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이었다. 936년(55세)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다. 그녀는 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했으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진으로 기록했다. 우울한 2차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마르는 피카소 작품에서 주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도라 마르는 우울증 때문에 심리 치료를 받아야만 했는데, 피카소의 친구이자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오랫동안 받게 되었다     여섯번째 연인 - 프랑스와즈 질로 (Françoise Gilot)       2차 세계대전 중에 만난 그녀는 아주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류화가이다. 피카소가 예순세 살 때인 1945년부터 함께 살게 되는데 이 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대에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매혹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여기서 아이들은 때로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습으로, 때로는 자기들끼리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훗날 프랑스와즈는 당시를 솔직하게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이렇게 올가,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와 관계가 계속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피카소와 나의 삶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나는 그들이 피카소의 '푸른 수염 콤플렉스'의 표현이며, 그것이 또 자신이 수집한 이 모든 여자들을 개인 소유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하고자 하는 피카소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그녀들의 머리를 완전히 베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삶이 계속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한 때 그와 함께 살았던 여자들은 나약하게 기쁨과 고통의 소리를 질러댔고, 부서진 인형들처럼 발작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에게 여전히 생명의 숨결이 이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생명은 피카소의 손이 잡고 있는 끈에 매달려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희극적인, 또는 비극적인 허영을 보탰고 피카소는 그것을 이용했다."     일곱번째 연인 - 자클린 로크 (Jacqueline Roque)         피카소의 말기 작품들은 외재적으로나 내재적으로 성애가 두드러진다.이 때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마지막 여자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가 72세 되던 해 만난 여인이다.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이혼녀로, 피카소와 8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  자클린은 요리를 잘하고 가사일도 잘 돌보았으며 피카소와 에스파냐어로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또한 피카소를 돌보며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는 매력적인 안주인 역할을 했다. 자클린은 피카소보다 13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동안 사심 없이 피카소의 복잡한 재산 문제들을 처리했다.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열흘 앞두고 그녀는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자 그가 만났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자클린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와 연인들에 관한 내용은 2편의 영화로도 나왔다. 첫번째는 1956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다큐멘트리 The Mystery of Picasso (피카소 출연)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베니스영화제 최우수다큐상을 받았으며, 두번째 영화는 1996년 제임스 아이버리 감독의 Surviving Picasso (안소니홉킨스 출연) 이다.     "피카소에게 여자들이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며,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첫연인이었던 올리비에 비드마이어 피카소는 훗날 이렇게 회고 했다고 한다. 과연 피카소의 연인들은 피카소의 회화에서 붓과 같은 존재였을까....       < 자료출처 : 중앙일보>     [출처] [본문스크랩]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한 여인들|작성자 수위  
34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댓글:  조회:2660  추천:0  2015-02-15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피카소(1881 - 1973)가 생전에 남긴 작품 수는 5만 점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화가 1885점이고 복제가 가능한 판화. 조각. 도자기의 작품 수가 많습니다 그중 도자기 그림(도자 그림)은 약 2280점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한 도자기에 에디션이 50점 부터 500 점 짜리 까지 있으니 대략 400 점 정도의 원판 도자기 그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PABLO PICASSO 1881-1973 높이 250 mm 에디션 85/200 1958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전시회를 한적이 있습니다     2003년 9월부터 10월말까지 60일간 열린 제2회 경기도 여주     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 피카소 도자기  별전을 열어 70여점의 작품이소개됐습니다 그때 많은 관람객들은 피카소가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고 도자기 위에그려진 수준 높은 그림에 감탄했습니다     30 by 22.5cm  에디션 495/500  1968   높이 21.5cm  에디션 12/300  1952     서양의 화가 중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피카소뿐이 아닙니다     샤갈과 호안 미로 등 여러 화가들이 도자기 그림을 남겼습니다       도자기라는 또 하나의 예술형태에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보다     넓은 예술세계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고대시대부터 동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만들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위에 무늬나 문양을 새겼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후 오랫동안 도자기에 대해 소홀했고     동양에서는 도자기를 생활화 시키면서 그 위에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 색도 변형시켰습니다!  그런데 유럽과 동양 사이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건너갔고 유럽 귀족사회에서는    동양 도자기 수집 열풍이 불었습니다 아울러 도자기 제작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 공장들이 활발하게 가동되기 시작했고    훗날 일부 근현대화가들이 자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피카소도 그중의 한명입니다      지름 385 mm 에디션 127/200  1947     피카소가 도자기에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47년 여름이고 위의 작품이 첫번째 작품입니다 그가 도자기 그림 작업을 한곳은 프랑스의 도자기 도시인 발로리(vallauris)인데 당시 그는 평화 운동(peace movement)에 참가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발로리 성당에 라는 대형 벽화를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에서 발생한 내전때문에 조국에 등을 정도로 평화에 대한 신념이 투철했기에 한국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의 평화를 특별히 염원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벽화 중 평화 부분에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을 그렸고 그 당시 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지름 18.5cm  에디션 500  1956     피카소는 발로리로 온 이후 25년동안 도자기 그림에 열중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말년의 예술혼을 도자기 그림에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래서 그의 도자기 그림에는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도자기 그림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마지막 연인이자 생의 마지막 동반자인 쟈클린 로끄(위의 그림)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쟈클린 로끄는 피카소 보다 40년 연하인데 발로리에 있는 도자기 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서 공장의 뒷일을 돌보는 젊은 이혼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피카소에게는 자신과 같은 여인의 헌신적 뒷바라지가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피카소가 80살이 되던 1961년에 결혼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도록 내조를 했고 피카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위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 점을 그렸습니다       지름 42cm  에디션 25/50  1959     피카소는 투우의 나라인 스페인의 말라가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미술교사였으니 그의 그림 재주는 내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가 어린 아이때 부터 소질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문화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의 론잔 미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스페인의 거의 모든 미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스페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일 뿐 아니라 19살 때인 1900년에 바르셀로나에서 화가로서의 첫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번듯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것이 아니라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선술집에서 150점의 스케치를 전시한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전시히를 하고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에게 바르셀로나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시회를 끝낸 후 유럽화단을 쥐락펴락하는 화가들이  모여있는 프랑스의 몽마르트로 가서 그곳 빈민촌에서 폴 고갱. 고흐. 드가등과 어울리며 그의 청년기를 시작합니다          지름 253 mm  에디션 455/500  1963 파리에 도착한 피카소는 프랑스어도 못해 고생을 많이 하면서 방황을 했지만 몇년이 지나 화가로서 이름을 얻은 그는 왕성한 창작력과 함께  화려한 여성 편력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등장하고 여자가 바뀔 때 마다 그림의 화풍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자와 그림에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예술적 영감은 그 여인들과의  열정에서 얻어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높이 22cm  에디션    261/300!   1959 피카소는 생전에 7명의 여인과 결혼을 하거나 동거를 했습니다 물론 중단중간에 잠시 사위었던 여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첫번째 연인은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인으로 피카소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스무살 때 만나 사랑을 했는데 그녀는 야성형 여인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을 그렸습니다 은 현대미술에서 입체파의 출현을 알리는 작품으로  그때까지의 그림이 평면적 관점에서 그린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기하학적인 입체감을 표현한 새로운 표현방식이라 당시의 많은 화가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그는 첫번째 연인인 페르낭드를 위해 1908년에 을 그렸습니다         높이 31.5cm  에디션 500  1955  피카소의 두번째 연인은 에바 구엘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청순가련형' 여인으로 피카소가 매우 정열적으로 사랑을 했습니다   1912년 피카소는 에바를 위하여 를 그렸는데 그녀가 병이 나자 그는 잠시 다른 여인을 사귀어 '여자가 곁에 없으면 못 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하게 여자에게 집착을 했습니다       높이  735 mm  에디션 29/75  1951 피카소의 세번째 연인은 발레를 하는 올가 코홀로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귀족적 풍류를 즐겼고 피카소는 그녀를 따라 파리의 상류사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당시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추구하던 입체파 풍의 그림을 버리고 상류사회 사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친구들에게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피카소는 1917년 다른 연인들에게도 그랬듯이 그녀를 모델로 해서 를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떠났습니다         SERVICE VISAGE NOIR>  지름  24.5cm  에디션 100  1948     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는 천진난만형 여자로  피카소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을 때 만났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입곱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그의 연인들 중 그녀를 가장 많이 그렸는데 1930년에 그린 과 1939년의   가 대표적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한명 낳았지만 그녀가 너무 천진난만해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훌쩍 떠났습니다    36.5 by 18.5cm  에디션 66/100  1955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는 지성형 여인으로 피카소가 파시즘과  투쟁할 때 만난 여인입니다 그녀는 1937년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를 그리는데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는 히틀러가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을 돕기 위해 바스크라는 작은 마을을 융단폭격해 7천명의 주민 중 1천명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독재와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표작입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당시 연인이던 도라의 도움을 받으며 한달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또 다른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서 떠났고   그녀는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에 이르렀습니다    375 by 310 mm  에디션 400  1953     위의 그림은 피카소의 여섯번째 연인 프랑스와 질로인데   그녀는 피카소의 연인들 중 유일하게 피카소를 버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스물 한살 때인 1941년 피카소를 만났는데  법학대학을 나왔지만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라  법학을 포기하고 미술 석사 과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했고 그녀의 부모는 딸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피카소와의 연애를 심하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1944년! 집을 나와 63세의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그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자 그녀는 피카소에게 결별을 선언합니다   피카소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여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하여 네가 떠나면 나는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바로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리고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피카소 호적에 입적시켜 그가 사망한 후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떠났는데도 피카소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훗날까지 그녀의 모습을 그렸으니, 이것이 피카소의 인간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지름  35.5cm  에디션 72/100  1962   위 그림의 여인은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자 부인인 쟈클린 로끄로 그의 남은 여생을 행복하고 편하게 해준 헌신적인 여인입니다 그리고 피카소로부터 버림도 받지 않았으니 그가 만난 여인 중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피카소가 80세 때인 1961년에 젊디 젊은 쟈클린과 결혼신고를 하자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는 앞을 다퉈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세상의 눈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잘 살려서 피카소가 도자기 그림에 심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피카소는 말년에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도자기 그림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피카소의 말년을 함께한 쟈클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에게 남겨져있던 상당수의  도자기 그림들을 피카소가 첫 전시회를 열었던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에 기증해서 헌신적인 남편 사랑을 다시 한번 세상에 보여줬습니다       지름 45 cm 에디션 16/200  1957   피카소는 이렇게 자신의 예술혼을 활짝 펼치며 세상을 품었습니  데상에서 시작해서 유화.조각.판화.도자기그림 등 모든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원없이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에 하늘을 향해 날았습니다     뱀의 다리  현재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가격은 한점당  5천 ~ 8천 달라 정도 합니다     [출처]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작성자 수위  
33    가마우지 댓글:  조회:5675  추천:0  2015-02-15
가마우지    great cormorant(Phalacrocorax carbo)   많은 새들이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살지만 가마우지 처럼 물고기를 잘 잡는 새는 없을 것 같다. 가마우지는 바닷속 3-40 미터씩 잠수하여 물고기를 잡는다. 오리류는 잠수할 때 깃털이 젖지 않도록 수시로 꼬리의 기름샘에서 나오는 기름을 깃털에 고루 바르지만 가마우지는 기름샘이 없어 잠수하면 젖어 버린다. 대신 부력이 줄어 물 속 깊이 잠수할 수 있다. 물 밖에 나오면 날개를 펴서 젖은 깃털을 위처럼 말린다.   Little Cormorant (Phalacrocorax niger)        가마우지는 다른 물새와 달리 몸의 대부분이 물에 잠기고 목만 내어 놓는다. 잠수함의 잠망경 처럼.                   주-욱 삼키는 이 맛!   씹지도 않고 삼켜도 맛있나 보다.     물고기 크기는 상관없다.       빨간 얼굴 가마우지(red faced cormorant)    날지 못하는 가마우지 (Nannopterum harrisi)   갈라파고스섬에 사는 유일하게 날지 못하는 가마우지이다. 야생에 1500마리 정도가 남아 있어 멸종이 우려된다. 날지 못하는데 왜 날개가 있을까? 진화론자는 안다.     < 가마우지 고기잡이 >   이는 전통적인 고기잡이의 한 방법으로 어부들은 길들인 가마우지를 이용하여 강에서 고기를 잡는다. 가마우지를 이용한 고기잡이는 역사적으로 일본, 중국, 마케도니아 등 전세계에 걸쳐 행하여 졌는데 우리나라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가마우지(P. capillatus)를 사용하고 중국에서는 흔히 큰가마우지(great cormorant)를 사용한다.   가마우지를 조종하기 위하여 어부는 새의 목 아래쪽에 올가미로 묶어 둔다. 이때문에 가마우지는 잡은 물고기 중 작은 것은 삼킬수가 있지만 큰 물고기는 삼키지 못한다.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으면 어부는 가마우지를 배로 회수하여 잡은 고기를 뱉게 한다. 가마우지는 워낙 물고기 잡이에 능하여 아주 쉽게 잡는다. 오늘날에는 물고기 잡이 보다 관광 차원에서 행하여 지는 수가 많다.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게 목이 묶인 가마우지.     가마우지는 령리하여 주인을 알아본다고 한다.         중국 리강(Li River)에서의 가마우지 고기잡이     계림(Guilin)의 리강(Li river)에서의 가마우지 어부들, 이들은 저녁 무렵 가마우지 고기잡이를 시연해 보이고 돈을 받는다. 또 가마우지를 촬영할 때에도 약간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        
32    국화 스케치 댓글:  조회:2673  추천:0  2015-02-15
    ---  ㅡ 시; >     인고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피어난 한 송이 국화.. 깊이 담긴 우주의 인연의 보다는...  국화 한 송이 피기가 저리도 힘든것을.. 살아가는 일이 그 보다 편할 수 있을까..        팡탱라투르, 1871           모네, 1878             모네, 1880-1881         모네, 1897             에밀 칼슨, 1893             존 로스 키, unknown             Tryon, 1890            카유보트, 1893             마티스, 1902             [출처] [본문스크랩] 국화 옆에서|작성자 수위  
31    손그림자 놀이 댓글:  조회:8946  추천:0  2015-02-15
                                    [출처] [본문스크랩] 손그림자 놀이|작성자 수위  
30    재미있는 사진 모음 댓글:  조회:2298  추천:0  2015-02-15
       
29    그 어느 날 한마리 개는... 댓글:  조회:3006  추천:0  2015-02-15
 그 어느 날, 한 마리 개는                                                  -가브리엘 뱅상   세상은 책이 존재하는 까닭에 존재한다고 하는  출판계가 한눈에 반해 몽땅 먹혀 한 권의 책에게 소유당한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책의 분류를 책임 맡은 사람이 습관적으로 하는 물음을 잊어버리게 하고도 남았다.  어느 장르에 넣을까? 어떤 독자를 겨냥할까? 정말 날벼락 같은 단 하나의 명령밖에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 책의 수난을 함께 공유하게 할것!! 은 벨기에 예술가, 화가이자 데생 소묘 화가인 모니끄 마르땡이 그린 64페이지의 연필화 스케치이다. 64페이지의 데생은 어느 가족이 바캉스를 떠나며 길에 버린 개 한 마리의 갈 곳 없어 헤매는 긴 방황을 절망의 몸짓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  절망은 사랑의 시작임을 생각케 한다. 모든것이 말해졌고 보여졌고 표현되었다.  단 한줄의 쓸데없는 선도, 과장이란 극히 작은 틀린 음 하나 없이.... 그녀의 데생들을 발견한 친구 한 사람이 모니끄에게 말했다.  도저히 불가능해~ 이것을 스케치하기 위해 네가 개가 되지 않고서는.... 정말 그렇다. 단숨에 졸지에 모든 수식어들은 필요치 않고,  모든 설명은 헛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저역시 헛된 설명을 하지 않을래요... 그저 그림들을 보시져,,^^         를 보면 할말을 잃게 된다. 글이 없는 그림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들은 한 장 한 장의 그림과 장면으로 마주한다.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용한 박력이 있다. 차창 밖으로 내버려지고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개. 마침내 힘이 다 빠져 포기하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멈춰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가득찬 포효를 한다. 글이 없는 만큼 그림에서 직접적으로 전해진다. 슬픔, 외로움,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깊고 깊은 고독이.  떠도는 개의 모습은 우리들이 가슴에 안고 있는 고독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사랑하고 사랑 받았는데 그 모든 것을 갑자기 잃어버렸다. 뻥하고 뚫린 구멍을 메울 도리도 없이 방황하는 마음. 언젠가 아픔이 옆어진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이미 또렷하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조금 `후-'하고 안심하지만 잔재하는 슬픔을 여전히 느낄 수밖에 없다.// [출처] 그 어느날, 한 마리 개는 -가브리엘 뱅상 |작성자 수위    
28    그림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상 댓글:  조회:2976  추천:0  2015-02-15
        그림 속의 사람들이 대부분 웃고 있는 모습들이죠..   삶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기분 좋은 웃음이 많이 들어있어서 좋군요..  ^-^       [출처] [본문스크랩] 그림으로 보는 조선 시대 생활상..|작성자 수위  
27    웃기는 사진 몇장 댓글:  조회:2961  추천:0  2015-02-15
        개를 찍는 사진가가 있었다. 그가 찍은 개 사진은 보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그런데, 웃고 나서 다시 보면 그의 사진에는 분명 다른 것이 있었다. 무엇이 다른 걸까?   바로 `눈높이'였다. 그는 개의 눈 높이에서 개를 바라봤다. 개가 보는 세상은 어떨까. 그는 개처럼 낮은 곳에서 개를 바라보며 찍었다.       우리는 자기 눈높이로만 세상을 본다. 그러나 십몇 센티미터만 눈높이가 달라져도 세상은 달리 보인다. 계단 한 칸 위에서 본 세상은 한 칸 아래와는 전혀 다르다. 만원 지하철 속, 사람들 사이에 파묻힌 키 작은 사람의 시야와 괴로움을 키 큰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 작은 눈 높이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사진을 찍어본 사람은 안다. 조금 몸을 낮춰 아이 눈 높이로 바라본 세상이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사진작가는 아예 눈 높이를 개의 눈 높이로 낮췄다. 그의 사진에 사람들은 웃고, 감동했다. 사진은 웃기면서도 어딘가 묘한 슬픔이랄까, 때론 조롱 같기도 한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눈높이를 사진으로 체험하면서 작고 왜소한 개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런 여러가지 이전에 그의 사진은 일단 웃겼다. 그런 것을 굳이 안느껴도 좋았다.       개의 눈높이로 찍은 사진으로 전세계 사람들을 웃긴 사진가, 그가 바로 엘리엇 어윗이다. 엘리엇 어윗은 지금 우리 시대 세계에서 가장 인기 높은 사진가로 손꼽힌다.   그는 192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열 한 살에 미국으로 이민 간 어윗은 할리우드에서 십대를 보내면서 이미지와 사진을 만났다. 그리고 서른살에 에드워드 스타이켄과 로버트 카파를 만난다. 사진에서 카파와 스타이켄이란 이름은 축구에서 마라도나와 펠레 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어윗은 본격적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되고, 1953년 드디어 매그넘포토스의 회원이 된다.   매그넘포토스는 또 뭔가? 사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진가들이 모여 만든 세계 최강의 사진가 그룹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어 등 20세기 사진계의 수퍼스타들이 모여 매그넘을 만들었다. 이후 극소수 정예회원들만 받아들여 사진의 역사를 주도했다. 어윗은 3년 동안 매그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며, 1980년대에는 홈박스오피스(HBO)사에서 영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것도 18편이나. 무슨 영화였을까? 코믹 사진의 달인답게 당연히 코미디 영화였다.   그는 웃기고 부담없는 사진으로 다가가서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웃겨서 가벼워보이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어윗은 개 사진 말고 인물 초상 사진에도 달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찍은 인물 사진을 보면 역시 웃음, 미소, 독특함이 배어나온다.       맞다. 바로 그 사람, 아놀드 슈월제네거다. 1977년, 그가 보디빌더로 전성기를 달리던 그 시절이다.   어윗이 찍은 유명 스타의 사진으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사진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많이 찍었던 그 모델, 마릴린 몬로의 독사진이다. 1955년작.       그가 찍은 유명한 사람 중에는 이 사람도 있다. 이제는 팝스타 같은 아이콘이 되어버린 20세기의 전설, 게바라다. 1964년에 찍었다.       어윗말고도 여러 유명 사진가들이 게바라를 찍었다. 그 중에서도 어윗의 사진은 특히 게바라가 매력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내 눈에는 너무 예쁘게 찍어 약간 상업적으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것이 어윗 풍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의 사진 최고의 미학, 특징, 강점은 역시 `유머'다. 그의 작품 중 웃기는 것은 하도 많아서 다 나열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다. 혹시 더 보고 싶으신 분들은 어윗 홈페이지(http://www.elliotterwitt.com/lang/index.html)에 들러보시면 좋겠다.       그의 웃기는 여러 사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아래의 이 사진이다. 그 유명한 고야의 그림 그리고 의 두 초상화 앞에서 벌어지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1995년, 스페인 마드리드.       그러나 어윗표 유머의 압권을 보여주는 사진은 바로 이것이다. 어윗의 코믹한 여러 사진들 중에서도 베스트 3위 안에 들어갈 법한 사진다. 나 역시 처음 이 사진을 봤을 때는 웃겨서 뒤집어졌다. 일단 보시라.       얼핏 보면 왠 아주머니가 가슴을 드러낸 망측한 사진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닌 것을 알게 되고, 절로 웃게 된다. 사진의 제목은 . 어윗이 1957년 니카라과의 마나과에서 찍은 사진이다. 연출인지, 우연인지 지금도 궁금한 작품이다.   매그넘 모든 회원들의 사진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거대한 사진화보집 은 매그넘 회원들이 각자 다른 회원들의 사진 중에서 대표할만한 것을 6점씩 골라주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진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 엘리엇 어윗의 사진을 골라준 사진가 페르디난도 시아나였다. 그는 "엘리엇의 (그 수많은) 사진 중에서 6장만을 고르라는 것은 고문이었다"며 그 중 한 장으로 위의 저 니카라과 아주머니 사진을 골랐다.   노골적으로 웃기는 사진으로는 이런 것도 있다. 도대체 어윗에겐 가는 곳마다 이런 웃기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런 장면이 그에게만 귀신 같이 보인단 말인가?       은근히 웃기면서도 시적인 사진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진으로는 바로 이것. 플로리다 키스 제도란 곳에서 1968년 찍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어윗의 작품으로는 이런 것도 있다. 무슨 하이틴 로맨스 소설 표지 그림처럼 좀 작위적으로 보여서 내 맘에는 별로인데, 그래도 보편적인 강력한 힘은 분명 세긴 세다. 이런 사진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여러 사진들이 있다고 해도 역시 어윗이라고 하면 역시 개 사진이 트레이드 마크다. 개는 그에게 인간 못잖은 주제다. 물론 모든 사진을 개의 눈높이로 찍은 것은 아니다. 그는 개 사진집도 여럿 냈다. 그가 1974년 펴낸 첫 개인 사진집이 바로 개 사진 책이었다. 그 첫 사진집의 제목은 , 그러니까 이었다.       2000년 뉴욕에서 찍은 사진.       저 올려다 보는 녀석의 표정을 보라. 참, 어윗은 여성의 다리를 무척 좋아한다. 개와 여성의 다리만 찍은 사진이 수두룩하다.       개인적으로 웃긴다고 생각하는 개 사진 하나 더.       하도 개를 잘 찍다보니 어윗은 개를 이용한 광고사진도 찍은 적이 있다. 주류업체 광고였는데, 개들이 그 회사 술을 보고 아주 환장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개그맨들을 보면 알겠지만 남을 웃긴다는 것은 결국 관찰력에서 나온다. 어윗이 웃기는 것은 그가 피사체를, 인간을, 개를, 그리고 광경을 정말 세밀하게 들여다보기에 가능할 것이다. 어윗 스스로도 자신은 남을 웃기는 사진을 찍는 것이 좋고 자랑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게 어렵기 때문에 더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윗이 그렇게 웃기는 자기 사진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그가 결코 비판처럼 가벼운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다른 매그넘 작가들은 사회성과 시사성, 그리고 저널리즘의 무게가 팍팍 묻어나느데 어윗은 안그렇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가벼워서 훨씬 쉽고 부담없이 사진을 접할 수 있어서 좋다는 사람과, 가벼워서 별로라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래도 공통점은 `가볍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웃기는 것이라고 가벼운 것은 아니다. 무거워 보이는 것이, 당위적인 것, 진지한 것, 정답이 보이는 것은 실은 뻔하기 쉽다. 그래서 뻔한 진지함은 찍기도 쉽다. 반면 웃기는 것은, 정말 어렵다. 웃기는 것은 절대로 예상 가능해서는, 뻔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남들에게 유머있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어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지 않는가.   어윗이 자신이 웃기는 사진을 찍는 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또 잇다. 그는 웃기는 사진이 아니라 무거운 사진, 묵직한 사진에도 달인이다. 그의 사진 중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고발 사진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의 하나인 바로 이 사진이 그의 작품이다.       저 사진은 1950년 미국 노스캘로라이나에서 찍은 것이다. 백인들과 유색인종의 차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저 사진은, 보고만 있어도 슬퍼진다. 인간이란 참 더러운 동물이다. 어윗은 그래서 개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웃기는 면과 저런 진지한 면, 두가지 면이 모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어윗을 좋아한다.   또한 어윗의 서정성을 대표하는 사진으로는 이런 것들도 있다.       엄마가 아기를 바라보는 정겨운 모습을 잘 포착해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사진이다.   어느새 어윗은 현존 매그넘 작가 중 최고령이 됐다. 여든살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속 유머는 잔잔해진 편인데 대신 대가들 특유의 툭툭 기교 부리지 않는 듯, 그러나 본질을 짚어내는 사진이 되어 가는 듯하다.   어윗은 자기 얼굴 사진은 잘 찍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공식 프로필 사진을 유치원 나이 때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을 쓴다. 그렇다고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렇게 소개하고도 공개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하다. 어윗은, 바로 이렇게 생겼다.       그런데, 어째 사진을 찍은 장소가 낯익어 보인다.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이다. 지난해, 어윗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기적으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항의 집회인 수요 집회 모습을 취재하는 모습이다. 사진기자가 어윗의 의뭉스럽기도하고, 귀엽기도(죄송)한 표정을 잘 잡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어윗이 저기서 사진을 찍었던 걸까?   어윗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여성'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그가 한국을 주제로 찍은 작품으로 전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이 재미난 사진작가 어윗이 찍은 한국 사진이 올 여름, 한국팬들과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어윗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그 전시회는 놀랍게도 어윗만큼 유명한 작가들이 어윗말고도 19명이나 더 참가하는 초대형 전시회다. 오는 7월4일부터 8월2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다.   매그넘 코리아는 창간 20주년 기념사업으로 매그넘 회원 50여명의 절반 가까운 20명이 한국이란 나라를 주제로 삼아 새로 찍은 신작 2400점 가운데 400여점을 골라 보여주는 전시회다. 어윗은 현대 사진계의 전설적인 존재들인 쟁쟁한 후배 마틴 파, 엘라이 리드, 스티브 매커리, 르네 뷔리, 알렉스 웹 등과 함께 한국 사회를 들여다봤다. 이들 작가 20여명은 한겨레신문사의 초청으로 지난 1년 동안 한국을 각각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   어윗은 무엇을 찍었을까? 살짝 귀띔하면 어윗의 기존 작품세계의 연장선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수요집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미리 만나본 그의 사진은 할머니들이 슬픔을 이겨내는 밝은 모습을 포착하고 있었다.   앞으로 한달 쯤 뒤면 어윗을 비롯해 세계 최고 사진가 20명이 찍은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을 전시회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팬의 한 명으로 전시를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그의 잔잔한 유머가 빛나는 사진 한 장 더 소개한다.     [출처] 세계에서 가장 웃기는 사진가- 한겨레|작성자 수위
26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발 댓글:  조회:2730  추천:0  2015-02-15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발 Michel Tcherevkoff _ photographer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발. 그러나 불행히도 이 신발은 착용하지는 못하고 단지 감상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포토그래퍼인 Michel Tcherevkoff 직접 꽃잎과 풀잎, 그리고 줄기만으로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가장 아름다운 신발을 직접 만든 후, 이제 곧 시들어 없어지고 말 작품을 사진 앵글에 담아 둔다. 그의 작품이 단 한장의 사진으로 남을 수 밖에 없기에 그의 사진이 더욱 빛나 보인다.   다양한 신발뿐 아니라 핸드백까지 여성과 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들... 지금부터 숨죽여 감상해 본다 .             [출처] [본문스크랩]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발|작성자 수위
25    우표에 오른 중국 소수민족 댓글:  조회:2205  추천:0  2015-02-15
24    어탁(魚拓) 댓글:  조회:4197  추천:0  2015-02-15
낚시꾼들은 그들이 잡은 여러 물고기의 크기를 기록하기 위해 여러 세기 동안 어탁(魚拓)을 떠왔는데, 어탁이란 물고기에 직접 먹을 칠해 종이에 대고 찍어내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탁본의 일종이다. 어탁본▼ [출처] [본문스크랩] 어탁|작성자 수위    
23    미리 써보는 弔詞 댓글:  조회:2939  추천:0  2015-02-15
  아틀란타가 낳은 유명한 두사람...   흑인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무폭력 저항 운동을 인도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가렛 미첼...   대조적으로 다른 삶을 산 두사람...       이번 아틀란타 여행 길에   마틴 루터 킹의 생가, 그의 무덤과 기념관, 그의 흑인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 다큐멘타리를 보고, 그의 연설을 녹음한 육성을 들을수 있었다.         ***   나에게 "미국" 하면 "자유의 나라"라는 인상이 깊다.         그러나 이번 전시관에서 본 사진들, 다큐멘타리를 통해서 1960년대 말에도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들을 법적으로 인종차별했을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죽이고 학대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     1968년 2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에브네저에서  마지막으로 한 연설 중 일부인데 그는 예언적으로 그의 장례식에서 할 조사 (고인을 기리는 연설)를  본인이 직접 준비했다.           ***   그후 2달뒤 1968년 4월 4일 멤피스에서 무폭력 저항 운동을 인도하다가 암살되었고...   그의 장례식에서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의 육성을 녹음한 이 설교가 조사를 대신했다.     ***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쓴 본인에 대한 조사 ***   제가 저의 날을 만나야될 때 만일 여러분중 그누구가 살아계시거든, 저는 긴 장례식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누군가가 조사(고인을 기리는 연설)를 하게되거든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요.   저는 가끔 그분들이 무슨말을 하기를 원하는지 생각해봅니다.   제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그분들에게 전해주십시요  -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삼, 사백개의 상을 받았다는 말도 하지말라고 전해주십시요 -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학교를 다녔다는 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전해주십시요.     그날에 어느분이 이렇게 언급해 주었으면 합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그의 생명을 남을 섬기는데 바치기를 힘셨노라고...   그날에 어느분이 이렇게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그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고...   그날에 여러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길 원합니다. 제가 (월남)전쟁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고 고심했노라고...    그날에 여러분이 이렇게 말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를 노력했다고...    그날에 여러분이 이렇게 말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의 생애에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려고 힘셨다고...   그날에 여러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길 원합니다. 저의 생애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방문하려고 애셨노라고... . 제가 인류를 사랑하고 섬기기를 힘셨다고 말씀해주십시요.                   ...     내가 죽으면 나의 주위 사람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스스로 를 미리 써보고 그리 살아야겠다...     [출처] [본문스크랩] 내가 죽거든... 마틴 루터 킹 목사|작성자 수위  
22    사람처럼 보이게 그린 <란> 그림 댓글:  조회:2827  추천:1  2015-02-15
장일순 선생 13주기를 맞으며     ▲ 무위당 장일순 .         ▲ 무위당 장일순 .       5월 22일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돌아가신 1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선생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그 사람은 한 때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생의 이름은 그런 이름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지성' 리영희 선생은 밤을 새우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떠났다며, 선생의 영전 앞에서 울먹이며 조사를 읽으셨습니다. 세상이 온통 적막하여, 숨소리를 내기조차 두려웠던 지난 30여년 동안, 선생님은 원주의 그 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자에게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셨고, 방향을 잃은 사람에겐 사상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공과 영예를 후배에게 돌리시는 민중적 선각자이시고 지도자셨습니다. 원주의 그 잡초가 무성한 집은 군부독재 하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지친 동지들이 찾아가는 오아시스였고, 선생님은 언제나 상처받은 가슴을 쓰다듬는 위로의 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은 남들이 추켜주면 우쭐해질 수 있다며, 조 한 알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자신을 다스리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 선생이 저희 곁을 떠난지가 벌써 13년이 되기에, 선생께서 남기신 난초 그림들을 통해 선생의 가르치심을 돌이켜봅니다.  조 한 알, 땅 속에 묻혀 무성하게 자라날      ▲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선생은 1928년 원주시 평원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전에 여러가지 호를 사용하셨으나, 가장 알려진 호는 70년대에 사용한 '무위당'과 80년대에 사용한 좁쌀 한 알 ('일속자, 一粟子')입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여운 장경호 밑에서 한학을 익힌 것이, 훗날 난을 치고 글씨를 쓰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40년 원주초교를 마치고 배제고·경성공전(현 서울공대)에 입학했지만, 해방 후 미군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됐습니다.  그 후 선생은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경을 겼으셨고, 감옥에서 나오신 후에는 원주에서 난을 치며 마음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원주가 '7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되는 산파 역을 묵묵히 수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선생을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숨은 지도자'라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80년대에 광주가 있었듯 70년대에는 원주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신독재 시절에 있었던 천주교 원주교구의 선구적 저항, 가톨릭농민회의 민중운동을 선생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무위당 장일순 .         ▲ 무위당 장일순 .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유인태·이철 등이 공산주의 단체로 부터 공작비를 받아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내가 학생 단체에 돈을 줬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활동 자금이었다, 공산주의 단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공산주의라니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라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 주교는 '자금책'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자 국내외  여론이 들끓었고, 유신정권은 학생들을 먼저 석방하고 며칠 후 지학순 주교도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선생은 학생 들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지학순 주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지 주교님이 나서주 셔야겠습니다'라며 눈물로 호소했고, 지 주교는 선생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감옥으로  갔습니다.  징역살이를 해달라고 부탁하신 선생이나, 징역을 살겠다고 가신 지 주교님이나 모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었고, 이 사제단은 훗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면서, 6월항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혁명에서 출발하는 생명운동     ▲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우리나라 생명운동의 창시자이십니다. 그러나 선생의 생명사상은 혁명론에서 출발합니다.  "혁명은 따뜻하게 보듬는 것이다.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방을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선생의 사상은 훗날 생명사상으로 이어지면서 김지하 시인에게 전달되었습 니다. 그래서 선생에게 난치는 마음을 배우고 생명사상을 배운 김지하 시인은, 자신의 시 '남'에서 "혁명은 보듬는 것, 혁명은 생명을 한없이 보듬는 것" 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선생은 민주화 인사나 명망가들만 상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웃들의 경조사·대소사를 챙기시고, 그들의 기쁘고 슬픈 일을 모두 들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위의 그림은 원주시내 한복판에서 밥집을 하는 이영순이라는 분이 일생에서 가장 힘든 일을  당하자 주신 작품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밥집하는 아주머니가 한문을 잘 모르실 것 같아 다른 종이에 해설을 써주셨고, 이영순이라는 분은 용기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선생의 섬세함과 자상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밥집 아주머니 뿐 아니라, 원주의 창녀도 소매치기도 모두 선생의 자식이고 동생이었습니다. 아는 아주머니 돈을 훔친 소매치기를 찾아 돈을 돌려 주게 하고는, 영업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밥과 술을 사주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선생의 난을 보면, 난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당 난'의 특징이고 선생의 마음입니다.  "난을 치되 반드시 난이 아니라 이 땅의 산야에 널려있는 잡초에서부터 삼라만상이 다 난으로 되게 해서, 시나브로 난이 사람의 얼굴로 되다가 이윽고는 그리고 부처와 보살의 얼굴로 되게끔 쳐보는 게 내 꿈일세." - 무위당 장일순 어록 중에서  선생은 이런 마음으로 난을 치셨기 때문에, 그림을 줄 상대의 이미지와 비슷한 난을 치셨고, 글의 내용도 받을 사람에게 어울리는 내용을 써주셨습니다.  '무위당 난'에는 사람이 있네      ▲ 무위당 장일순         ▲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말년에 노자에 심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자적인 그림과 경귀를 많이 쓰셨고, 노자에 대한 책도 출판하셨습니다. 이런 선생의 모습을 리영희 교수는 이렇게 회상하셨습니다.  "저는 장 선생님의 삶이 노자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삶 그 자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것은 인간도 자연의 현상이지 자연과 대립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성찰에 따라 자연과 무한으로 합일하고 살아가는 아주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지극히 어려운 것을 체현한 삶이지요." - 리영희· 소식지 제2호에서(2001년 11월 1일)  선생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집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이 작품은 혜선보살이라는 분에게 국화주 한잔 마시고 그려주셨습니다.  "유가(인가 하면 불가요, 불가인가 하면 노장이며, 노장인가 하면 또 야소의 참얼을 온 몸으로 받아 실천하여 온 독가였던 선생은, 무엇보다도 진인이었다." - 김성동(소설가)  선생은 이런 분이셨기에 젊은 사람들과 육담도 하셨습니다. 광주 출신의 소설가 송기원이 선생에게 "광주는 남자고 원주는 여자"라며 손으로 남녀 성기의 모습을 만들며 "광주 민주화 세력이 원주보다 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께서도 손으로 여자 성기의 모습을 만들며, "이보게, 여기에 이것이 들어가면 어느 것 하나 살아나 올 수 없어. 뭔 소리하는 거여?"라며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흔쾌히 그리지만 팔지는 않았던 난     ▲ 무위당 장일순           ▲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이 작품의 화제는 '날마다 날마다 세 가지 반성하면서 마음을 씻는구나'입니다. 그래서 난의 모습도 반성하는 듯한 표정입니다. 선생은 난이나 글씨를 파신 적이 없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반가워 그려주시고, 써주셨습니다. 젊은이들이 찾아와 운동자금 마련하려 한다고 부탁드리면 몇 장이라도 흔쾌히 그려주시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난과 글씨 뿐 아니라, 추천장을 써달라면 즉석에서 써주셨고, 빚 보증을 서달라면 서주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선생은 이렇게 한 생을 사시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선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고, 매해 추모행사를 열며 선생의 가르침을 회상합니다. 올해 5월 22일에도 어김없이 추모행사가 열리고, 행사 후에는 문화행사도 곁들입니다. 많이들 가보시길 바라며, 다시 한번 무위당 장일순 성생님의 영전에 고개를 숙입니다.   [출처] [본문스크랩] 그가 그린 건 '난'이 아닌 '사람'|작성자 수위
21    그림같은 사진 댓글:  조회:2497  추천:0  2015-02-15
                                                                                                                                                                                            [출처] [본문스크랩] 그림같은 사진입니다|작성자 수위  
20    존 레논의 삽화 댓글:  조회:2650  추천:0  2015-02-14
                                                                                                                                                                                                                                        부인 오노 요코과 예술적 동반자로서 남자 대 여자로, 또 인간 대 인간으로 한 차원 높은 단계를 위해 죽는 날까지 지속적인 대결을 펼쳤던 존 레논. 그는 음악 뿐 아니라 그림이나 글쓰기,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했다. 베스트 셀러 톱을 기록한 그의 저서 'In His Own Life'는 그의 타고난 글쓰기 능력과 예리한 지적 능력을 말해 주고 있다. 또 그가 남긴 90여점 가량의 그림과 '비틀즈' 멤버로 활동 하던 중 펴냈던 시집의 삽화 등은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본문스크랩] 존 레논의 그림과 삽화들|작성자 수위  
19    연필의 이미지 댓글:  조회:1902  추천:0  2015-02-14
                             
18    아름다운 길 댓글:  조회:2892  추천:0  2015-02-14
  大 賞(대통령표창)/억새꽃과 삼나무 숲이 아름다운 도로(제주 지방도  1112호선 : 비자림로)/! 제주도 제주시 봉개동~북제주군 평대리 / 제주도청 박용현   최우수상(국무총리표창)/산과 물이 어우러진 호반 속의 도로(국도 6호선)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 / (주)유신코퍼레이션 오의진   최우수상(국무총리표창)/푸른 바다 위 구름다리(고속국도 15호선 : 서해대교)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충남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 /  한국도로공사 서해대교관리소 김정학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내장산 오색 단풍길(국지도 49호선) /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 정읍시청 김우술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바다 위에 세운 건설 미학(고속국도 130호선 : 영종대교) /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 / 신공항하이웨이(주) 노명일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도심속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도로(제주시도 중2류1호선) / 제주도 제주시 일도1동 중인문로 / 제주시청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길(태안군도 14호선) /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 태안군청 김동영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문화가 있는 벚꽃 길(지방도 819호선)/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영암군 학산면 독천리 / 전라남도청 김정선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한강위의 飛上(고속국도 130호선 : 방화대교) /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경기도 고양시 강매동 / (주)삼안건설기술공사 정규봉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지나치기에 아까운 장회재 구간(국도 36호선) /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 건설교통부 충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 강창구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아름다운 샘골다리(정읍시 대로3류4호선) / 전라북도 정읍시 시기동 / 정읍시청 김우술   우수상(건설교통부장관표창)/ 바람과 계곡의 교차로(고속국도 102호선)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 / 한국도로공사 창원지사 이연수   AG 상징거리/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 R∼동래구 미남 R   가로수길의사계/충북 청주시 강서동(석소동)   걷고싶은거리/전북 전주시 고사동   과거와 현대/경북 김천시 다수동   광안대로/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동 49호 광장∼해운대구 센텀시티 부근   사계가있는 가로수/전남 담양군 담양읍(담양,남산∼금성,원율)   세계로 미래로/경기도 고양시 강매동∼인천시 중구 운서동 /노선번호:고속국도 130호!   신비로운 문/서울 강서구 방화동∼경기 고양시 강매동  /노선번호:고속국도 130호선   친환경적인 한강 물갓도로/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노선번호:국도 6호선   태고적 신비/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봉선사∼국립수목원) /노선번호:군도 14호   하늘에 닿는 길/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지방도 737호선   [출처] [본문스크랩]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 |작성자 수위
17    세계 거장들 명화 댓글:  조회:2596  추천:0  2015-02-13
세계적 화가들 명화   고갱 Paul Gauguin1848~1903) 원시(原始)의 세계를 찾아 나선 예술가 레오나르도 Leonardo da Vinci(1452~1519) 인류의 역사가 낳은 천재(天才) 고야 Francisco Goya1746~1828) 서민(庶民)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表出) 렘브란트 Van Rijn Rembrandt(1606~1669) 영적(靈的) 세계를 표출(表出) 달리 Salvador Dali1904~1989) 무의식의 위력(威力)과 기상천외의 발상 로트렉 Taulouse Lautec(1864~1901) 작품을 통하여 인생(人生)의 이야기를 드가 Edgar Degas(1834~1917) 철저하게 집착하는 데상의 명수(名手) 루벤스 Pater Paul Rubens(1577~1640) 숭고한 통속성(通俗性)의 샘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1483~1520)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巨匠) 루소 Rousseau, Henri1844~1910) 환상과 전설의 소박파(素朴派)   루오 Rouault - Henri1871~1958) 신(神)을 찬미한 현대의 단테 모딜리아니 Amedo Modigiani(1884~1920) 고독한 혼의소리와 관능미(官能美) 르노와르 Pierre A Renoir(1841~1919) 감각적(感覺的)인 즐거움의 경지(境地) 뭉크 Edvard Munch1863~1944) 생(生).사(死).애(愛).증(憎)에 넓은 공감대(共感帶) 마네 Edouard Manet1832~1883) 이상미(理想美)를 뒤엎은 생활속의 미 미로 Joan Miro(1893~1974) 꿈의 세계를 보인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화가 마티스 Matisse Hemi1869~1954) 정신성을 높여주는 선(線)과 리듬 미켈란젤로 Buonarroti Michelangelo(1475~1564) 조각적(彫刻的) 회화공간의 창조(創造) 모네 Claude Monet1840~1926) 빛 위주의 자연을 창조(創造) 밀레 Jean F. Milet1814~1875) 토속적(土俗的)인 방언(方言)으로 영원한 지평을   반고호 Vincent w. Gogh(1853~1891) 태양(太陽)과 해바라기에의 정염(情念) 위트릴로 Maurice Utrillo(1883~1955) 백색(白色)속에찌든 서민(庶民)의 감정 샤갈 Marc Chagall1887~1985) 혼(魂)의 고향(故鄕)을찾는 색채(色彩)의 대교향곡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i(1866~1944) 추상(抽象)창조의 선구자 세잔 Cezanne Paul1839~1906) 자연(自然)의 재현(再現)을 넘어서 쿠르베 Gustave Courbet(1819~1877) 초자연적(超自然的) 즐거움을 자신감(自信感) 넘치게... 쇠라 Georges Seurat1859~1891) 신인상파의 진로와 완성의 대변자 클레 Paul Klee(1879~1940) 태초(太初)의 형(型)을 찾아서 와토 Jean A. Watteau1684~1721) [격조높은 사랑]의 아취(雅趣) 피카소 Picesso, Pablo Ruizy(1881~1973) 마르지 않는 조형(造形)의 샘   [출처] [펌] 세계 거장 명작 모음 |작성자 수위
16    竹林圖 댓글:  조회:3195  추천:0  2015-02-12
죽림(竹林)/대나무 그림모음| **★그림 감상★**   ※ 현대 중국화가 윤석(尹石)의 (2001年作)   萬頃琅?接檻前  淸風四節送琴絃 此君鬱密通?志  影掃階中塵自然 (만경낭간접함전 청풍사절송금현  차군울밀통소지 영소계중진자연) 드넓은 대밭이 난간 앞에 닿아 있어 사철 맑은 바람 거문고소리 보내주네 차군은 울밀하여 하늘의 뜻과 통하고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일세 ☞ 나옹혜근(懶翁慧勤),   ※ 현대 중국화가 서한(徐寒)의 (2004年作) ※ 차군(此君)은 직역하면 '이 친구'라는 뜻으로 대나무의 별칭이다. 대나무를 '차군'으로 부르게 된데는 유래가 있다.   동진(東晉)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다섯 째 아들 왕휘지(王徽之/王子猷)가 한때 친구의 집을 잠시 빌려 살게 되었다.  그는 하인을 시켜 그 집 정원에 대나무를 심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휘지는 대나무를 가리키며 " 이 친구(此君)가 없으면 어찌 하루인들 살 수 있으랴" [何可一無此君邪!(하가일무차군야)]라고 대답했다. ≪진서(晉書)≫ 에 나오는 얘기다.    대나무는 '차군'말고도 고인(故人)이라고도 부른다. 당나라 시인 이익(李益)의 시(詩) 에서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開門復動竹  疑是故人來(문 닫으니 다시 대나무 흔들리길래 혹여 옛 친구가 찾아왔나 했네)라고 읊고 있다.       대나무는 군자(君子)로도 지칭된다. 최초의 기록은 ≪시경(詩經)≫에서 볼 수 있다.  ≪시경(詩經)≫ 에 瞻彼淇奧   綠竹??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첨피기욱 녹죽의의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라는      구절이 나온다. ※ 奧(욱): 따뜻하다. 덮다/후미 굽이         여기에서 匪君子(비군자)는 빛나고 고아한 군자라는 뜻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을 가리킨다. 높은 학덕과 인품을 대나무의 고아한 자태에 비유하여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에서 대나무의 속성으로  여물고(固), 바르고(直), 속이 비어 있고(空), 곧은(貞) 네 가지를 제시하고  여기에서 각각 수덕(樹德)·입신(立身)·체도(體道)·입지(立志)라는 네 가지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 현대 중국화가 임중(任重)의 . 화제(畵題)로 "含情傲 ?慰心目  何可一日無此君"이라 써놓고 있다.   ※ 이익(李益): 당나라 때의 시인. 대표작으로 , , 등이 알려져 있다. 다음은 의 전문.   微風驚暮坐  窓?思悠哉  開門復動竹  疑是故人來 時滴枝上露  稍霑階上苔  幸當一入幌  爲拂綠琴埃 cf: 月移花影動 疑是故人來      開簾風動竹 疑是故人來   ※ 근현대 중국화가 사치류(謝稚柳)의     ※ 근현대 중국화가 장대천(張大千)의  
15    중국 10개 별난 집 댓글:  조회:2313  추천:0  2015-02-12
외국인이 뽑은 중국의 이상한 건물 10개       중국에서는 매년 엄청난 기세로 기괴한 모양의 건축물이 세워지고 있다. 이런 기세를 반영하여 중국 전문가인 영국인 벤 헤지스(Ben Hedges)가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중국의 이상한 건물 탑 10’을 소개해 화제가 ...        
14    괴상한 건축 모음 댓글:  조회:2684  추천:0  2015-02-12
1. Mind House (Barcelona, Spain) 스페인-바르셀로나 2. The Crooked House (Sopot, Poland)폴란드 3. Stone House (Guimar?es, Portugal)포르투갈    4. Lotus Temple (Delhi, India)인디아-델리  5. Cathedral of Brasilia (Brazil)브라질    6. La Pedrera (Barcelona, Spain)  ??/FONT>스페인-바르셀로나   7. Atomium (Brussels, Belgium)벨지움-브루셀    8. Museum of Contemporary Art (Rio de Janeiro, Brazil)리오데자네이로    9. Kansas City Library (Missouri, USA)미국   10. Low impact woodland house (Wales, UK)     11. Guggenheim Museum (Bilbao, Spain)스페인   12. Rotating Tower, Dubai, UAE - 아랍에미리트-두바이   13. Habitat 67 (Montreal, Canada)카나다-몬트리올     14. Casa da musica (Porto, Portugal)포르투갈    15. Olympic Stadium (Montreal, Canada)카나다-몬트리올   16. Nautilus House (Mexico City, Mexico)멕시코-시티   17. The National Library (Minsk, Belarus)벨라시아-민스크   18. National Theatre (Beijing, China)중국-베이징 19. Conch Shell House, Isla Mujeres, Mexico-멕시코     20. House Attack (Viena, Austria)오스트리아-비엔나   21. Bibliotheca Alexandrina (Egypt)   22. Cubic Houses (Kubus woningen) (Rotterdam, Netherlands)네델란드-로테르담     23. Ideal Palace (France)프랑스-파리    24. The Church of Hallgrimur, Reykjavik, Iceland BR> 25. Eden project (United Kingdom)    26. The Museum of Play (Rochester , USA)   27. Atlantis (Dubai, UAE)두바이    28. Montreal Biosphere (Canada)카나다    29. Wonderworks (Pigeon Forge, TN, USA)   30. The Basket Building (Ohio, USA)    31. Kunsthaus (Graz, Austria)오스트리아-잘즈    32. Forest Spiral (Darmstadt, Germany)독일    33. Wooden Gagster House (Archangelsk, Russia)러시아 щ같寃쎌?Midnight Bluo  / Louise TuckerBR>     6 7   8 9  10  11  12  13  강화도의 꺼꾸로 세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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