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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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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쉼터] - 치매방지용 글씨그림 그리기 댓글:  조회:2115  추천:0  2016-10-23
나송주     강소희       임단비       김미란       윤향윤       오영주     최은진         김효진         임다빈    윤종아       김대성   김종진    
212    한국 추상미술의 한 폭을 찾아보다... 댓글:  조회:4215  추천:0  2016-10-21
박서보  朴栖甫        박서보(1931년/경북 예천 ~ )는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다.   1950년대 후반 프랑스의 앵포르멜 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를 바탕으로 〈원형질(原形質)〉 연작을 발표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허상(虛像)〉 연작을 통해 현대인의 번잡스러운 형상을 다루었으며, 1970년대부터 묘법 회화를 추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원형질(原形質)〉·〈허상(虛像)〉·〈묘법(描法)〉 연작이 있다.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      ...박서보는 역사적 변화의 시기에 한국미술의 주역으로서 오랜 시간을  ‘묘법’이라 불리는 모노크롬 작업을 지속해온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의 작업을 바라보는 관점은 작가가 추구하는 미적 영역의 폭에 비하여 왜소함을 부인할 수 없다. 박서보가 갖고 있는 작품에 대한 철학적인 가치관과 작품에 드러난 표현방식은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될 기회를 갖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번 전시는 박서보의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최근작을 통하여 작가의 새로운 가치를 탐색하고자 기획되었다.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색채의 발견을 통한 변화의 시도는 박서보를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즉, 무채색의 모노크롬에서 색채의 모노크롬으로의 전환은 박서보의 오랜 작업에 하나의 축을 긋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 ⓒ뉴스한국   묘법 -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고자 하는 수신(修身)  올 해로 55년의 화업을 이어오고 있는 박서보(76)는 1950년대 말 국전에 반기를 들며 전위적인 미술운동을 이끌었고 50~60년대 ‘원형질’과 ‘유전질’로 불리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면서 한국 추상미술의 주역으로 각인되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모노크롬 회화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서양에서처럼 다색화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모노크롬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정신세계로 승화시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중성적 논리를 펼친 것이 특징이다. 모노크롬이란 단색 사진이나 단색 영화를 모두 일컫는 말로, 미술에서는 한 가지 색이나 같은 계통의 색조를 사용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단색화로 번역되며 다색화인 폴리크롬(polychrome)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 ⓒ뉴스한국 한국형 모노크롬 추상회화로 한국현대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박서보도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묘법’이라 불리는 모노크롬(monochrome)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묘법’은 그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우고 긋는 행위를 반복하는 ‘박서보의 회화방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고자 하는 ‘수신’의 의미가 담겨 있다.  1970년대부터 탈이미지, 탈논리, 탈표현 등을 주장해 왔던 박서보는 자신에게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자문했다. 그리고 역시 스스로 얻은 답은 “수신(修身)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수신을 위한 수단이며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도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수신의 결정체다. . ⓒ뉴스한국   색, 그 오랜 기다림  1960년대 앵포르멜 계열의 표현추상회화에서 1970년대 초부터 백색묘법시리즈를 거친 박서보의 작업방식은 한지를 반죽해서 질감을 내는 것이다. 그의 회화적 실험은 근자에 들어 선홍색, 분홍색, 파란색, 연두색 등 색채를 과감하게 사용하는 ‘색채 모노크롬’의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다. 이전의 백색을 주조로 하는 백색모노크롬에 대해 일본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색채보다는 형태를 지우고 감축하는 조직적 요소로 평가했다.  평론가 이일은 백색을 색채에 대한 반색채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무채색으로 간주했다.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선구적 이론가들 논리 체계에 따르면 백색을 위시한 무채색이 바로 한국적 자연주의와 정신주의에 근거한 모노크롬 회화의 정수이자 미학적 근거라고 말한다.  무채색의 정신성과 함께 ‘기계적 반복’, ‘절제된 행위’, ‘자기 성찰적 극기의 미학’이라는 치열한 조형논리에 입각한 박서보의 모노크롬 회화가 색채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색채는 자연이고 일상이고 속세다. 흑백이라는 인위적, 미학적, 금욕적 색채로부터 벗어나 작가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색채를 수용함으로써 정신적, 심리적 해방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 ⓒ뉴스한국   피카소 말년 드로잉이 표출하는 성적 판타지, 몬드리안의 후기작 가 암시하는 도시적 활력과 마찬가지고 이완, 해탈의 경지와 함께 인생의 환희를 감지케 한다. 또한 ‘색을 사용한다’는 본 뜻과 함께 속어로 ‘색쓰다’라는 선정적 함의를 담고 있는 부제의 이중적 의미가 암시하듯이 우리는 그가 사용하는 색채를 통해 색과 성(섹스), 색과 생(라이프)의 은유적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박서보의 색채는 강렬하면서도 우아한 조형의 미를 소유하고 있으며 자연에서 기인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승화된 사유의 색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색채는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세련되지 못한 색들을 캔버스에 안착 시킴으로서 예술적 정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박서보가 다루는 색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그 이름조차 명확히 할 수 없는 그만의 색이다.  박서보는 잠들기 전에 시각적인 것을 정신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색을 조합해 본다. 머릿속에서 조합된 색채들은 미리 준비된 캔버스 위에서 서서히 현실과 만난다. 그는 색을 한 번에 만들어 바르지 않고 같은 색을 반복해서 여러 번 덧칠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색을 만들어간다. .  ⓒ뉴스한국   칠(Painting)이 아닌 긋기(Drawing)  캔버스 위에 발라질 겹겹의 한지는 물속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박서보의 작업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다. 단지 그리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한지를 다루는 시간은 수련의 도구로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박서보의 작품을 위한 재료는 캔버스에 한지를 입힌 혼합재료다.  한지는 물속에 담기는 며칠 동안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시간을 견뎌낸 한지는 더욱 강해지고 동시에 유연해진다.  성숙해지기 위한 이러한 과정은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박서보는 이렇게 변형된 한지를 캔버스에 올려 틀을 잡는다.  한지는 마르기 전에 반복되는 선으로 인하여 들어간 선과 솟아난 선으로 형상을 갖추게 된다. 굵은 4B 연필은 골을 그어내는 도구가 된다. 하나의 골에 최소한 100번 이상의 선이 그이지는 시간은 박서보에게 수신의 시간이다. . ⓒ뉴스한국   그는 골을 만들기 위해 선을 그어내지만 결국 그 골에서 밀려난 부산물은 새롭게 돌출된 선을 만들어낸다.   골로써 마음을 비워내면서 새로운 사유의 공간을 창조해 내며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영역을 창조한다.  작고한 평론가 이일은 1967년부터 시작된 박서보의 묘법연작은 ‘그린다’는 행위를 ‘지운다’는 행위로 역전시켰다고 말한다.   그의 묘법은 물감을 바르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시 연필로 선을 그어감으로서 서양식의 칠하는 행위인 ‘화(?, painting)’가 아닌 동양의 긋는 ‘화(畵, drawing)'의 경지로 선회한 것이라고 말했다. . ⓒ뉴스한국   숨구멍 - 숨 쉬는 공간  그는 어느 날 숲의 거대한 고무나무와 높게 자란 덤불 속에 싸여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불안감에 휩싸여 가슴이 두근거리던 순간 갑자기 탁 트인 벌판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숨을 길게 천천히 내쉬었다. 벌판으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헐떡이며 가쁜 숨을 쉬었는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트인 공간에 서서 지평선을 보고 나서야 그의 허파가 활짝 부풀려지는 것 같았다.  박서보는 자신의 묘법시리즈에 ‘숨구성’을 마련해 놓았다. 작품에 다양하게 위치하는 숨구멍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여러 개가 되기도 하며 그 위치도 위, 아래, 좌우, 중앙으로 다양하게 설정된다. 작품이 어느 순간에 숨을 쉬는가에 따라 종형적인 미적 변화를 이루게 된다.  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시선을 멈추도록 하는 여유 공간이 된다. 그 트인 공간이 그의 페인팅에서는 멈춤의 공간이다. 박서보에게 있어 미술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인가를 채워 넣는 것이 아닌 비워내는 행위다. 그렇게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워낸다. . ⓒ뉴스한국   이번 전시에는 그의 작품과 더불어 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와 사진이 함께 전시되며 작품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실제 작업과정이 소개된다. 전은 박서보의 현재를 통하여 작가의 과거와 미래의 세계까지도 재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흔히 예술 활동은 창작활동이라고 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변화를 위한 노력 없이는 얻기 힘들다. 박서보는 뼈를 깎는 아픔, 극기를 통해 변화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하는 것을 외면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남의 생각에 슬쩍 끼어들거나 표절, 또는 정신적 윤간을 일삼으며 변화하려 들면 더더욱 비참하게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급함이나 서두름 때문에 추락이 기다린다는 것을 모르고 범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다른 사람과 다를 때 예술은 삶을 얻는다고 말하는 박서보의 이번 전시는 강렬하고 우아한 색채를 통해 박서보가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미학의 그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박서보(1931, 11, 15~)            체질이란 대단히 중요하다. 작품은 들어냄이 아닌 체질의 소산이어야 한다.   60~70년대 미술은 체질을 죽였다. 아이디어 즉 개념(관념) 때문에 체질이 추방되었던 것이다.     67년 탈이미지    위/아래 작품은 그의 초기작입니다, 앵포르멜이라고하여 한창 서구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미술운동이었습니다. 한국미술사에 의미를 둘수있는 작품경향이긴 하지만 솔직히 작업에 대한 평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67년 탈이미지      극소화 / 패턴화 / 반복   70년대 평면      70년대 평면      70년대 평면      70년대 평면   위에 그림 4점은 그의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작품들로서 주로70-90년대까지 작업하였던 것들입니다. 벽지로 보일수도 있고 장난한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실제 그림을 보면 아래에서 우러나오는 색채와 반복되는 (마치 빗살무늬 토기보는듯하죠?) 규칙선인 선의 드로잉이 마음을 편안하고 몽환적으로 만듭니다. 역시 단순화와 패턴화로 미미멀 아트의 성격을 나타내고 잇습니다.                Ecriture(描法)No. 050910, 260cm x 200cm, Mixed Media with Korean Paper on Canvas, 2005        Ecriture(描法)No. 050613, 130cm x 162cm, Mixed Media with Korean Paper on Canvas, 2005       Ecriture(描法)No. 050603, 220cm x 330cm, Mixed Media with Korean Paper on Canvas, 2005      위에 그림 4점은 그의 후기작입니다. 이전작업은 주로 무채색으로 하였는데 본격적인 칼라작업을 하고있습니다.   패턴화경향이 더욱 도드라져서 규격화되고 경직되어 보이기조차 합니다. 단순한 선과 색채로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박서보 개인전 입구          본인의 작품앞에서    박서보는 엄청난 작업량과 노력하는 작가로 유명합니다. 지금것 살면서 설악산 단풍구경한번 안해봤다는 사람 입니다. 그가 40년이상을 한가지 작업에 집중했다는것은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격체로서도 존경하고 배울덤이 많은 사람인것은 분명합니다.       Ecriture No. 081007,’ by Park Seo-bo             ECRITURE No.22-79-81    1981       Ecriture No. 100509       No. 070405       No. 050319       Ecriture No. 051128                                 Seo-Bo Park, “Ecriture(描法)No. 040323,” (b) “Ecriture(描法)No. 040306,” ? “Ecriture(描法)No. 040312,” (d) “Ecriture(描法)No. 040305” (2004). Mixed Media with Korean Paper on Canvas. 53.5cm x 46cm. Courtesy of the Artist.                       Artist: Park Seo-Bo, Korean (1931 - )  Title: Ecriture Year: 1988 Medium: Lithograph, signed and numbered in pencil Edition: 300 Paper Size: 27 x 35 inches From the Complete Set of 22 fine art prints comprising the Official Arts Portfolio of the XXIIVth Olympiad, held in Seoul, Korea in 1988       Park, Seo-Bo | Ecriture No. 111211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30x200cm, 2011                     Empty the Mind by Park Seo-Bo 朴栖甫《空出意念》 Known as a pioneer of Korean Contemporary art, Park Seo-Bo gained international fame after he worked on monochrome series called Ecriture(描法). Since the 1980s, he continuously used the theme of repetition by drawing numerous lines on the big canvas of Korean paper. Park represents highly moderated yet harmonized modernism and oriental spirit.                  
211    수억원짜리 <<점>> 하나 그림 댓글:  조회:4229  추천:0  2016-10-21
이우환 '점으로부터'(1976년) 점 하나에 수억 원                       /- 이우환의 그림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를 꼽자면, 뭐니 뭐니 해도 백남준입니다. 백남준의 영향으로 독일 뒤셀도르프는 미디어 아트의 중심지가 되었고, 미디어 아트는 어엿한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다음을 꼽자면, 이우환 작가일 것입니다. 이우환 작가는 아마 생존하고 있는 한국 작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입니다. 일찍이 일본에서 먼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는데요, 지난해에는 나오시마에 작가의 이름을 딴 ‘이우환 미술관’이 세워질 정도입니다. 지난 6월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생존 작가가 구겐하임에서 회고전을 여는 일도 드물거니와, 우리나라 작가로서는 백남준에 이어 2번째여서 더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게다가 정말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전 세계인이 ‘이우환’ 하면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 정도이니까요.   그런 이우환 작가가 오랜만에 고국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대화(Dialogue)' 시리즈 10점을 선보였습니다.                                              Dialogue, Oil and mineral pigment on canvas, 291×218cm, 2011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작품은 커다란 점 하나가 찍힌 하얀 캔버스입니다. ‘설마 저게 다는 아니겠지’ 하고 옆을 돌아다보면, 더 가관입니다.                                          Dialogue, Oil and mineral pigment on canvas, 22×27.3cm, 2011 마치 ‘티끌’ 같은 점이 찍힌 하얀 캔버스가 떡하니 걸려 있습니다.   전시장을 다 둘러봐도 온통 점뿐입니다. 점이 찍힌 위치와 캔버스의 크기만 달랐지, 10점 모두 다 점입니다.   ‘어라, 저게 뭐야.......’, ‘저런 건 나도 하겠다.’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럴 것입니다. 점이 세계적인 작품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작품의 가격입니다. 대부분이 억대를 호가하는 작품들입니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국내 경매에서 낙찰된 이 작가 작품의 낙찰 누적가는 467여 억으로, 1위에 올라 있습니다.   도대체 저 점이 뭐기에, 전 세계인은 환호하는 것이며, 작품 가격은 왜 비싼걸까요.   이 작가는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시장에 들어서면 볼 것이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볼 게 없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이 작가는 전혀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이게 뭘까’ 생각해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우환 작가. 사실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가가 이 점을 하나 찍기 위해서는 무려 2달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 캔버스를 앞에 놓고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점을 찍을 위치를 정합니다. 위치가 정해지고 나면, 돌가루를 섞은 물감을 붓에 발라 붓질을 시작합니다. 붓질도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붓 자국이 살아나는 순간까지 또 말려야 합니다. 그 기간만도 열흘 정도가 걸립니다. 붓 끝에 모든 생각과 모든 기운을 모아서 캔버스 위에 점을 찍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 작업실에 클래식 음반을 틀어놓는데, 즐겨 듣는 곡은 없습니다. 명반을 듣지도 않습니다. 음악이 너무 좋으면 그걸 듣느라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작가는 생각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잡음을 막아주는 그런 음악을 선호합니다.   점을 그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입니다. 호흡이 흐트러지면 점도 함께 일그러집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는 자세를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도를 닦는 과정인 것입니다.                                          작품 크기를 쉽게 알기 위해 손 크기와 비교해 봤습니다.  티끌처럼 보이는 작품도 무려 11번이나 실패를 한 뒤 나온 작품입니다. 서너 살 먹은 아이도 할 수 있을 법한 ‘터치’이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캔버스 11장을 버렸습니다. 갖다 버린 재료값만 해도 2백만 원이 넘지만, 맘에 들지 않는 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비싼 캔버스가 아까워서라도 꽉 채워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의문도 듭니다. 하지만, 이 작가에게는 ‘여백’-이 작가는 ‘여백 효과’라고 부릅니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작가의 점은 모든 에너지가 모인 ‘극한’의 순간입니다. 그렇다고 이 점이 관객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점 밖에 있는 여백이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점은 단지, 이 여백에 울림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종을 치면, 그 울림이 ‘은파’처럼 퍼져 나가죠. 점도 여백으로, 또 캔버스 바깥으로, 전시회장으로 울림을 가져다주는 꼬투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구겐하임 전시 때에도 맨 마지막 전시실은 하나의 방이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떡하니 걸린 그림은 또 점 하나가 찍힌 그림입니다. 관람객들은 그 방에 앉아서 그림을 보게 되는데요, 그 순간 그 울림을 느껴보라는 의도였습니다. 실제로 관람객들은 울림을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그 방에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참동안을 서 있어야 했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린 아이도 그릴 법한 그림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데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오직 점만 생각하고 그려온 그의 철학을 그림 속에서 느끼면, 그 때는 그 점이 ‘걸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도저히 모르겠다 싶으면, 그 때는 그냥 보고 스치면 됩니다. 내 마음과 머리에서는 ‘아니’라고 하는데 자꾸 ‘맞다’고 강요하는 건 ‘폭력’이니까요.   누구나 한 번쯤 직접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워낙 유명한 작가의 전시이기 때문에 전시장에는 항상 사람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전시만큼은 이왕이면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그림을 감상하기를 추천합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어쩌면 산사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조용한 종소리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 이우환 개인전  ========================================================     이우환   현대미술…단순함에서 빚어진 최고의 미학 한국 '미니멀리즘' 대가 이우환의 점, 선, 면 그리고 여백         이우환은 국제무대에서 동서미술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이론가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미술평론가로 등단, 당시의 모노하(物派) 태동을 주도하고 창작과 비평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그의 작품세계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과 작업에 대한 해석과 검증은 작가 자신에 의해 그리고 그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다른 작가들과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끊임없이 검토하면서 사상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점 또는 선으로 이뤄진 그의 작품 속에서 미니멀한 간결함은 부여해 주지만 그러한 단순한 이미지들에게서 오히려 보는 이들로부터 복잡한 사고를 느끼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선과 점들이 어찌 보면 통일성 있고 간결한 것 같지만 그러한 선과 점들이 현란하게 사방에 펼쳐져있어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것이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특징이다.           이우환은 1936년 경남 함안 에서 태어나 사실상 한국의 전통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어린 시절 그는 서당에서 소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문인으로 알려졌던 황동초로부터 유년기를 통해 시서화를 배웠다. 중, 고교 시절 이우환이 관심을 가진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치 보이는 것처럼 음으로 짜 올리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끊임없는 독서 그리고 문학 창작이었다.  1956년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하던 해 여름, 숙부 병문안 차 일본에 간 이우환은 1961년 니혼대학 철학과를 편입해 졸업했는데, 그가 철학을 선택한 이유는 미학이나 사회 사상사를 튼튼하게 알아 놓아야 나중에 무엇이든 제대로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독자적인 사유체계와 비평방식은 재일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전환기 일본현대 미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고교 교과서에 그의 산문이 실릴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우환 - 조응  /  17억에 팔렸다고 해서 화제가 된 그림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 작업에서 모노크롬 회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대상임이 인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비로소 우리 미술계가 서구 미술의 모방과 아류라는 비난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미술활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응       이우환은 1990년대부터 `조응’시리즈를 선보였다. 커다란 획이 즉각적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이 시리즈의 특성은 아주 적은 수의 획만을 가진 공간을 주제로 한다는 점이다. 그는`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는데, 시작과 끝이 분명한 가운데로 뻗은 이 선은 화면 전체에 긴장감과 동세를 부여한다.         이우환 '바람'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바람에서, 조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이 또한 작가의 인생역정을 보는 것 같아 근원적인 우리네의 모습을 한번은 돌이켜 보게하고, 균형과 조화속에서 살고자하는 모습들이 평면적인 공간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작품을 볼때, 우리는 우선 기본적으로 작가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가와 함께, 이 시대성을 잘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도 이우환 선생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좋은 작가인 것 같다.               바람과 함께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바람과 함께’라는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를 형상화하면서 동시에 바람으로 대변되는 물질의 속성과 자연의 원리를 함께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우환 '조응'        빈 공간, 허공에 선 하나를 긋듯이 점 하나를 찍는다. 단지 그럴 뿐이지만 어느 것은 예술이라 하고, 어느 것은 장난이라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대가들의 무심한, 그러면서도 능숙한 한 행동의 결과가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는데, 똑같은 행동을 초보자들이 했을 때, 왜 그것은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가? 대가들의 이름값 때문인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허공에 점 하나를 찍는 단순한 행위도 어떤 것은 예술이 되고, 어떤 것은 예술이 못되는 이유는 작품의 품격과 가치이다. 팽팽한 긴장과 균형이 있는 작품과 단순한 흉내만으로 그냥 베낀 작품과는 분명히 그 격이 다르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편하고 아름답다. 그렇듯이 점 하나 선 하나라도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빈 공간과 그런 주위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야 한다. 관계와 변화의 진리는 예술에서도 공유하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Relatum- a rest, 2005, stone, iron pole, photo Andre Morin           판화작품                     水彩               이우환 '점으로부터'    그런 면에서 한국적인 정감과 공간감각, 그리고, 정신성을 잘 드러내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중의 하나가 바로 이우환선생이다. 처음 이우환선생의 작품을 보았을 떄, 그저 선하나를 길게 늘여 놓은 것이 과연 무슨 예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다보면, 우리들의 의식처럼 명료함과 사그러짐이 같이함을 알게되고, 매일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의 인생처럼 반복되는 의식속에서 흐트러짐없이 살려고자 하는 또렷한 정신성이 있음을 알게된다.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우리네의 삶이 되듯이 말이다. 그런면에서 어찌보면 가장 한국적인 질감과 느낌을 잘 구현했다고 볼 수가 있다.                                                         동풍/1984년           점에서/1980년 点(점)에点(점)에서s80_24/1980/90.9x72.7/ oil on canvas 서s80_24/1980/90.9x72.7/oil on canvas           with winds/1987년           with winds/1987년           바람과함께/1991년               하나의 점으로부터..하나의 선으로 부터...   시각예술이 이제껏 봉사해온 인간중심의 재현이나 표상작용으로 부터 벗어나 최소한의 예술적개입으로 현실과 관념사이를 중재하면서 사물에 대한 미적관조와 여백의 세계를 보여주려한다...이우환         With winds, 1988, oil on canvas, 72.5×91㎝              점으로부터, 1978, Pigment suspended in glue on canvas, 33.3×45㎝           선으로부터, 1978, oil on canvas, 100×80㎝   이우환선생의 '선으로부터'   `선으로부터’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을 동양적 사고와 감성에 근거하여 재해석한 작품이다. 밑칠을 하지 않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 청색의 선들을 반복적으로 그어 내리는 과정 속에서 작가의 존재는 무의미해지고 궁극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탈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61년 일본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91년에 한국·일본·유럽 등지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과 국제전에 참가했으며, 1968년 미술출판사 주최 평론 모집에서 〈사물에서 존재로〉가 당선되면서 평론작업도 병행했다. 그리고 1973~90년에 다마미술대학[多摩美術大學] 교수로 있었다.  그의 작품제작과 이론 활동은 1970년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형성된 모노파(派)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모노파의 성립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미술론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대상화하는 표상작용의 비판에서 시작한다. 그에게 예술작품은 '만든다'라는 창조개념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만남'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세계와 일체감을 지각시켜주는 구조이다. 모노파 시기의 작품 〈관계항 關係項〉 연작은 이질적인 사물들의 위치를 변경하면서 결합하는 것으로 사물의 물질적 특성이나 존재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외에 〈점에서〉·〈선에서〉 등의 평면작업과, 돌과 철판을 결합한 입체작업은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저서로 〈만남을 구하여 出會ムお求めて〉(1971)·〈이우환 전판화(全版畵) 1970~1986〉(1986)가 있고, 화집으로 〈이우환〉(1986)·〈시간의 진동 時の震え〉(1988) 등이 있다.             이우환은 경상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4남매의 외아들로 태어나 전통적인 유교가문에서 성장하며, 고전과 문학에 뛰어난 어머니의 교육아래 5살 때부터 시서화를 배웠다. 그는 서울대 미대를 한 학기동안 다녔고, 1956년 일본 니혼 대학 문학학부에서 하이데거 니체, 현상학, 구조주의 등 다양한 현대철학을 두루 공부하였으며, 주로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여 왔다. 모노하를 바탕으로 한 이우환의 미학과 창작활동은 그 동안 한국과 일본 국내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대단히 주목을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 미술계뿐 아니라 서양의 미술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는 대단한 화가이자 이론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우환은 문학으로부터 미술에 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학도답게 ‘사물의 존재에로’라는 평론으로 일본 미술계에 등단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작업과 예술철학 그리고 미술비평을 함께 접목시켜 비평과 회화 조각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그의 예술에 부합되는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국제적으로 전개시켜왔다. 그가 여느 작가들에 비해 더욱 돋보이는 것은 1970년 초부터 일본 안에서 전개되는 모노하에 이우환만의 예술철학으로 다른 작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인 작가라는, 당시 일본 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론과 작업을 바탕으로 서양의 모더니즘의 경향을 탈피하고 동양적 요소들로서도 현대미술의 양식을 새롭게 전개 시킬 수 있다는 확신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우환의 예술세계와 예술론은 참신성과 논리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동양적인 사유 형식과 예술방법이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철학이나 과학, 심리학 등 모든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사유가 인간중심이라는 점을 자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예술 방향을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우환은 인간들의 사유가 중심이 된 창조보다는 자연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 열린 세계로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사유는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기타로의 철학에 공감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삶과 동양적인 인생관이 내재되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우환의 예술적 사유방법은 존재 그 자체를 절대적 진리로 인정하는 하이데거식의 사유방법과 유사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노장적 사유 방식과 선적인 사유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다시말해 그의 작품에는 무위속의 정중동(靜中動)과도 같은 최소한의 예술적 행위외에, 모든 것은 절제된 행위속의 간이(簡易)와 같은 상호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특징들이 있다.   그의 작품은 물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각각의 대상을 새로운 공간과 형태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를 절대적 진리에로 조응시켜 나간다. 이처럼 그의 작업의 주된 관심사는 새로운 시공 속에서 새롭게 대상화된 하나의 작품이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어떠한 생명력을 확보하느냐의 여부에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태어난 생명력을 지닌 존재는 작가의 언어적 행위나 표현적 의미 가운데 존재하는 예술적 공간만이 아닌, 타자가 느끼고 공감하며 참여하여 이루어내는 열려진 세계를 의미하며, 작품과 타자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에 내재된 본질적인 문제를 의미한다. 그의 작품이란 세계와의 만남을 이끄는 하나의 구조라고 보고, 자아와 사물이라는 양자가 서로 교차하며 만남이 실현 될 수 있는 장소가 미술영역이나 언어의 영역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우환은 만남이 실현될 수 있는 장소는 곧 관계와 결합이 되는 바로 그곳으로서 구조와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관계가 형성되고 내용이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도록 객관화하는 방식의 일환으로 열린 의미의 글다듬기의 작업을 병행하였다.   이우환의 작업세계를 위한 재료들은 유리와 철판, 돌, 강철, 목재 등 다양하다. 그는 이러한 제재들이 갖는 서로 다른 특성들을 조화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혹은 한 공간 안에 전시한다. 조각난 유리판과 돌 혹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철판과 돌, 듬성듬성 연속적인 붓 자국으로 이루어지는 2차원적 평면의 캠버스등은 이우환의 창작세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가 이우환은 일본속의 한국인이자 이방인으로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돌이나 깨어진 파편을 지닌 유리판, 철판들도 모두 서로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물질들이다. 일단 이우환은 이들의 물질을 사용하여 새로운 속성을 지닌 물질로서 현장상황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우환에게 있어 이들 물질들은 물질 원래의 상태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의도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에서 물질들도 아니다. 오히려 이우환이 전시장에서 관계항으로 제시한 이들 물질들은 그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제시해주며, 또 우리는 그의 작품을 상이한 상황에서 각각 다르게 느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해란 생산적 노력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의 선입견은 의미에 맞게 수정될 수 있는 것이다. 개별성과 단독성을 지닌 그것들의 고유한 공간은 새로운 관계를 구축, 형성하며 우리의 고유한 영역인 이해를 입맛에 맞게 새롭게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이우환에게 있어서 공간이란 역동성을 담는 관계들의 교융이자 울림과 조율의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공간속에서의 교융과 울림은 예를 들자면 조그마한 붓 자국 하나하나에서부터 시작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질서가 아닌, 인간도 하나의 점처럼 미약한 존재로 볼 수도 있는 그런 의미에서 공간에서 보여주는 서로 다른 붓 자국 하나하나가 갖는 위상은 마치 거대한 우주 공간 속에서의 하나의 작은 우주와도 같다. 사람은 우주속의 작고 미약한 점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 하므로 우주자연은 인간의 위대한 모성(母性)과도 같은 것이다. 그 품으로 회귀한다고 볼때 한국인 인 그에게는 우주 자연의 원리에 인산을 접목시키고 교융 시키는 동양적 사고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작품세계는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특성 때문에 잘못이해하거나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히코사카 나아요시는 이우환의 작업과 예술철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비난하였고, 미국MIT대학 철학박사인 한국인 홍가이는 이우환의 작품세계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하였다. 어떤이들은 그의 작품을 외적경향이나 화풍으로만 파악하여 서양의 모더니즘미술이나 한국의 미니멀아트 정도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우환의 예술철학과 작품에 내재된 의미와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우환은 한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 이우환의 작품세계를 자로 잰듯하여 선적, 동양적, 허무주의적, 무학적, 사상가적 등 어는 한쪽으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과 예술철학에는 이 모든 것들이 잠재적 또는 비 잠재적으로 담고 있고 상호보안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현대의 작가들 중에서 이우환처럼 체계성이나 논리성을 지니고 밀도 있는 작업을 하는 작가가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는 점이다. 여느 작가들과는 달리 냉철한 이론적 접근을 꾀하며 풍부하게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그의 작업세계를 보면서, 국제적 흐름에 민감하게 눈치를 보거나 자신의 예술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단순히 감성적이거나 모방적인 작업을 하는 일부국내 작가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회화건, 설치 작품이건 이우환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답고 깊이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그 고요한 느낌의 작품 속에는 수십 년간 고뇌한 작가의 치열함이 아우성친다. 국내에서 여는 6년 만의 개인전. 국제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사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모델처럼 포즈 취하길 극도로 싫어하는 거장은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고 언론도 이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우환은 백남준과 ‘동급’으로 거론할 수 있는 유일한 작가다.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등 세계 4대 미술 시장에서 통하는 것도, 각각 비디오 아트와 ‘모노하もの派’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사에 의미 있는 한 획을 그은 것도 그 둘이 유일하다. 작품가에서는 이우환이 오히려 앞선다. 노老 작가는 “옥션에서 돌려가며 내 작품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혐오한다”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이우환의 마스터 피스는 거의 매년 최고가를 갱신하며 약 20억 원까지 치솟았다. 그의 작품이 한국은 물론 세계 시장에서도 활발히 소비되는 이유는 그 누구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단단한 철학 덕분이다. 언뜻 그저 점 하나, 선 하나 그려놓은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미처 함께 그리지 못한 수많은 부재不在의 언어가 존재한다.   , , 같은 저서를 읽으면 미처 화폭에 표현하지 않은 사상과 철학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데(그의 글은 때로 암호 같아서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 언어는 한결같이 ‘여백의 미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려 40년 동안 이 한 가지 화두를 파헤치고 또 파헤치는 작업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지난 10월 9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인 돌과 철판을 주요 소재로 삼은 설치미술 역시 1960년도부터 천착해온 작업이다. 예술이란 결국 누가 더 단단하고 매혹적인 철학을 갖고 있느냐의 싸움인데 그 점에서 이우환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공력을 보유한 것이다. 더구나 그 철학은 아름답다. 일본에서 40년 넘게 살아서 그런지 일본 고유의 단시형短詩形 하이쿠의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작품 속에 내재한 철학을 작가에게 직접 설명 듣기란 쉽지 않다. 이우환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 기자들은 “작품이 얼마에 팔렸는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미술가는 모델이 아닌데 이렇게 서봐라, 저기에 앉아봐라 주문이 많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가 도일해 대학을 나오고 활동도 하는 나를 한국은 도망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작가는 와의 사진 촬영에서도 “나는 포즈 잡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버럭’ 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는 많은 말을 토해냈다. 여자 친구 얘기가 나올 때는 아이 같은 미소도 스쳤다. ‘까칠한 예술가’란 세간의 평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우환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한편의 미학적 철학이다. 설치 작업 역시 극도로 단순하고 함축적이어서 신비롭다. 그런데 심오한 철학을 모르고서는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겁이 난다. 철학을 알아야 작품이 보일 것 같아 적잖이 부담되는 것이다.   - 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철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다. 길 가는 아낙네, 초등학생 어린이도 내 작품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지식인이나 미술 전문가는 이해 못할 수도 있다. 그전에는 내 작품을 이해했으나 직접 보면 헷갈릴 수도 있다. 나 자신조차 허우적거리기 일쑤인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이해하겠나. 내 작품은 현장에 직접 와서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이 놓인 공간 역시 작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주변 공기가 울리는 막연한 진동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그걸로 된 거다. 주변 여백과 소통하는 것이 내가 천착하는 ‘여백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쉬우나 머리로는 어려운 작품이다. “돌 하나 철판 하나를 갖다 놓고 작품이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  돌과 철판을 이리저리 놓아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다. 작년에 뉴욕에서 전시회를 할 때는 컴퓨터를 통해 수차례 보고 이메일로 컨펌한 것을 현장에서 바꾸기도 했다. 막상 현장에 가보니 괜찮겠다 싶었던 돌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거다. 롱아일랜드 등지를 돌아다닌 끝에 다른 돌로 대체했다. 그럴 때는 애초에 진열한 돌에게 미안하다. 자기가 선택됐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앉아 있는데 방을 빼라고 하니 얼마나 언짢겠는가.  돌 하나, 철판 하나만 있으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셈이니 누구라도 모작을 할 수 있겠다. 누군가 비슷한 작품을 만들면 어쩌나?  -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참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건 내 작품이 아닙니다”라고 할 수밖에.        (왼쪽) Relatum - Dialogue, 2009 (오른쪽) Relatum - Triangle, 2009  예술에서 승부는 누가 독특하고 강력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가에서 갈린다. 때문에 많은 작가가 자신만의 철학을 세우려고 노력하는데 작가에게 철학의 효용은 뭘까?  -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심오함이 없으면 오늘 이걸 하고 내일 저걸 하며 흔들린다. 반짝 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데 아이디어는 철학과 동의어가 아니다. 근대화를 거치며 빨리빨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라 전체의 습관이 되었다. 여기에 휩쓸려서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추기 힘들다. 지난 수백 년간 축적하고 발전시킨 문화에서 나온 것이 철학이기 때문이다. 미술 하는 이에게 철학은 더욱 필요하다. 전쟁터에 나가 수천, 수만 명의 경쟁자와 싸우려면 개념이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귀신이 잡아가도 모른다. 서울대학 입학 당시에는 미술대학에 진학했다가 도쿄의 일본대학에 편입할 때는 문학부 철학과에 들어갔다. 전공을 철학으로 바꾼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 미학이나 사회 사상사를 튼튼하게 알아놓아야 나중에 무엇이든 제대로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생각이나 몽상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탐닉했다는 표현을 쓸 만큼 책을 많이 읽은 것으로 아는데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었나? 더불어 꼭 읽을 만한 명작 몇 권을 추천해주면 좋겠다.  - 고등학생 때, 친구와 도서반을 만들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세계문학전집, 세계 고전 등을 거의 다 읽었다. 일본에 가서는 일본어를 배운다고 그 책을 모두 다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못 읽은 책이 있다는 걸 견디지 못했다. 가장 권하는 책은 성경이다. 기독교가 내 종교는 아니지만 얻을 것이 많다. 너무 이데올로기적이고 정리가 잘된 신약보다는 신화적 측면이 강해 상상력을 동원해 읽을 수 있는 구약이 더 좋다. 나 , 등도 읽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 플라톤의 등은 여러 모로 도움이 되고 헤밍웨이의 , 도스토옙스키의 , 멜빌의 등은 반드시 읽어야 할 최고 작품이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서정주가 단연 으뜸이다.   “왜 친일親日을 했습니까?”라는 언론의 질문에 “나는 천체의 운행을 따랐을 뿐이다”라는 재미있고도 희한한 답변을 한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돌과 철판을 이용하는 작업이 40년째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도 3년이면 싫증이 나는데 이 투박한 오브제가 뭐 그리 예뻐 헤어나지 못하는가?  - 진리를 찾는 과정에는 뭔가 꼬투리가 보일락말락하는 시점이 반드시 있다. 그러면 또 그 옆을 파지 않을 수 없다. 미술계가 넓은 것 같으면서도 좁아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지한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 어떤 작업을 하고 있다는 걸 지속적으로 보이고, 제시하다 보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존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 왜 하필 돌이고 철판인가?  - 돌과 철판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산업사회와 대화를 꾀하고자 함이다. 돌은 자연 그 자체다. 지구보다 오래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과 마주한다는 건 몇백, 몇천만 년 전의 우주적 파편과 만나는 일이다. 반면 철은 산업사회의 부산물이다. 인간이 만든 존재란 말이다. 전혀 성질이 다른 것 같지만 2개의 오브제는 사실 형제나 부자父子 같은 관계이기도 하다. 돌에서 철분을 추출해 만든 것이 철판이기 때문이다. 이제 작품을 다시 한번 봐라. 한 공간에서 돌과 철판이 서로 마주 보고(대결하고), 나란히 서고(화합하고), 어울리며(그의 작품 중엔 돌 위에 기다란 철판을 올린 것도 있다. 마치 돌 위에 노곤한 심신을 누이는 것처럼) 관계를 맺는데 침묵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성하는 것 같기도 하며, 대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돌과 철판 3개를 원 모양으로 하나씩 교차하며 놓은 작품이 있는데 이는 돌과 철판이 한데 모여 회의를 하는 것처럼 왠지 모를 팽팽함이 느껴진다. 돌과 철판의 침묵에 귀 기울여보면 오늘날 사회도 보이고, 자연으로 가는 길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돌과 철판이 있다. 어떤 모양과 질감의 것이 좋은 돌이고 좋은 철판인가?  - 굉장히 뉴트럴Neutral하고 모호한 것을 좋아한다. 너무 잘생기거나 개성이 강하면 공간 속에 어울리지 못한다. 그런데 좋은 돌과 철판 찾기가 어디 쉽나? 뉴욕 공사판, 토스카나, 알프스, 설악산, 일본의 수많은 산, 제철 공장 등 안 다녀본 곳이 없다. 1971년에는 파리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일주일간 몇백 킬로미터를 달려 이곳저곳을 뒤져도 쓸 만한 돌을 찾지 못했다. 당장 내일이 전시 오픈인데 어떡하나, 허탈한 마음에 전시장 공원을 거닐고 있는데 눈앞에 꼭 내가 찾던 돌이 있는 것 아닌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돌을 옮겨다가 설치하고 다음 날 어슬렁어슬렁 전시회장에 갔는데 경찰이 찾아와 “저 돌을 당장 돌려놓지 않으면 교도소에 넣겠다”며 화를 냈다. 거의 울 지경이 되어 사정을 설명하고 파리에 나와 있던 한 일간지 특파원과 예술총감독이 “전시회가 끝나는 대로 꼭 갖다 놓겠다”고 겨우 설득한 끝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돌이 있던 곳은 일본 정원이었다. 개 눈에는 개똥밖에 안 보인다고 자주 봐왔던 돌만 좋아 보였던 거다. 선입견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돌 같은 경우 전문 매매업자에게 부탁하는 경우도 많다. 그들이 좋은 돌을 잘 구해주던가?  - 태반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형태도 없고 동그스름한 돌을 찾는다고 사진을 보여주며 말해도 자꾸 희한한 얼굴을 한 돌을 가져와 “참 잘생긴 놈”이라고 들이대는데 내 얼굴에는 죄다 괴물처럼만 보이더라. 제발 못생긴 돌 좀 구해달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한다.  서양화가 윤석남 씨와 대담에서 작가의 작품에는 사회적 분위기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이번 전시 작품과 연결하면 어떤 분위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인가?  - 자기비판을 통해 사회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대량생산과 소비는 현재 전 인류의 문제다. 중국 같은 나라는 한 해에 7~8%씩 성장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촉발된 환경오염이나 공해 같은 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경제 전문가들이 들으면 욕지거리를 할 소리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성장률도 차라리 마이너스로 갔으면 한다. 그래야 영속 가능한 인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세라나 리처드 롱 역시 작품에 돌과 철판을 많이 사용한다. 그들의 작품과 이우환의 작품은 무엇이 다른가?  - 둘의 작품은 어디에 오브제를 갖다 놔도 작품의 컨셉트가 보인다. 작품의 느낌이 장소에 따라 확 달라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내 작품은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느낌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공사판에 나뒹구는 돌, 철판과 여기 갤러리에 놓인 돌, 철판의 느낌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돌과 철판을 주요 소재로 쓰지만 공간 자체가 내겐 더 중요하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나 오브제가 주변 공간을 무대 삼아 울려 퍼지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캔버스를 포함한 어떤 오브제도 컨셉트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들 나름대로의 신체성身體性을 최대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붓도, 물감도, 캔버스도 제각기 자기 모습이 있는데 이를 일방적으로 강제 동원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나 역시 오브제를 가져와 작품에 활용하지만 가능한 한 돌과 철판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회화나 조각 역시 뭔가를 창조하고 생산한다는 발상을 가능하면 덜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이우환이 창시한 모노하의 핵심인가?  - 그렇다. 1960년대 후반 히피 운동이 퍼지면서 미술도 기존의 틀을 깨자는 운동이 일었다. 석탄을 화랑 공간에 갖다 놓고 작품이라고 하는가 하면 갤러리에 말을 끌고 와 매놓기도 했다. 캔버스를 자기 영토라고 생각해 사상과 물감을 쏟아내는 것을 그만두고 캔버스가 뭔지, 붓이 뭔지 다시 생각하자, 캔버스와 붓의 역할을 일방적으로 규정하지 말고 그들과 대화를 하자는 움직임도 동시에 일었다. 이러한 흐름은 일본에까지 전해졌는데 나무, 돌, 철판, 종이 등의 소재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직접 제시한 이 같은 사조를 통칭해 ‘모노하’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림도 못 그리면서 그냥 물건만 갖다 놓는 놈들’이란 비꼼과 무시, 멸시가 담겨 있었다. 모노하, 즉 물파物派(‘모노もの’란 일본어로 물체나 물건을 뜻한다)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내가 모노하의 창시자라는 건 맞지 않다. 다만 역할을 했다면 미술의 순수성에 관한 글을 많이 썼을 뿐이다. 물건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와 반대로 세상에는 오브제를 찢고, 자르고, 변형해 컨셉트를 표현하는 이도 많다. 데미언 허스트 같은 이는 아예 소나 상어의 피부를 절단, 내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 현대미술은 ‘아름다움’이란 단어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쇼킹한 볼거리 역시 시각예술의 하나로서 제 기능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같은 작업이 내 취향은 아니라는 거다. 무라카미 다카시, 요시토모 나라 같은 젊은 친구들과 40년 가까이 대학에서 어울렸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 세계, 아이디어에도 관심이 많은데 컴퓨터 같은 하이테크놀로지를 많이 사용하는 요즘의 트렌드는 나와 맞지 않는다. 조작을 하더라도 내겐 오브제 자체의 신체성이 중요한 것이다. 최대한 날 것 자체에 가까운 오브제를 씀으로써 긴장감과 리얼리티가 생기는데 요즘의 작업물은 너무 개념적이거나 가볍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소학을 공부하며 ‘금강산도’로 유명한 한국화가 황견용에게 시, 서, 화를 배웠다. 그 솜씨를 한번쯤 현란한 붓 터치와 색채감으로 세상에 뽐내고 싶진 않았는가? 그러면 물건만 갖다 놓는 작가들이라고 폄하되지도 않았을 텐데….  - 단 한번도 뽐내고 싶다는 발상 자체를 한 적이 없다. 이는 사물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뽐을 내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여 나는 ‘뻐기는’ 사람을 안 좋아한다. 특히 확고한 철학 없이 어설프게 작품으로 뻐기는 사람을 보면 비틀어서 박살을 내놓고 싶다.  (위) From Point, 1978           방금 든 생각인데, 글로 박살을 내도 잘할 듯싶다. 같은 에세이집은 전문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될 만큼 훌륭하다. 단편 ‘뱀’, ‘아크로폴리스와 돌멩이’ 같은 작품은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 일본에 가지 않고 한국에 있었다면 문학가가 되었을 거다. 고등학교 때 에서 주최한 문학상에 동시가 가작으로 당선되었고 에서는 소설이 후보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비평가가 내 작품 세계를 인정 안 해주고 답답하니까 계속 글을 썼고 그 과정을 통해 글 실력이 조금씩 늘었다.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나 자서전을 보면 오랫동안 작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는 일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듯하다. 무슨 연유인가?  - 경상남도 함안군 산골짜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할아버지는 유교적 봉건사회의 가장 마지막 세대를 사신 분으로 내게는 ‘꼭 멀리 가서 살아라, 넓은 세상을 봐라’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본인은 평생을 농민으로 한곳에서 살았다. 집안 어른들은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내게) ‘절대 그림은 그리지 말아라, 그림 그리기는 애와 여자나 하는 짓’이라고 얘기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내부에는 ‘내가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있다. “나는 평생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도망자라 했고, 일본에서는 침략자라 했다”고 습관처럼 말한다. 이만큼 큰 성공을 거둔 지금까지도 양국의 냉랭한 시선에는 변함이 없는가?  - 그렇다.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은 밀어내는 것을 포기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 순수 민족에 관한 믿음이 강해 이방인에게는 “바깥 냄새가 난다”는 둥의 이유를 들어 밀어낸다. 웃기는 얘기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물품의 태반이 외국 교역을 통해 얻은 것 아니냐. 그건 수입품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런 것이 다 은연중에 우리의 몸과 정신을 형성한다. 글도 잘 쓰고, 작품도 널리 인정받으니 여자 친구도 많겠다. 어떤 여성상을 좋아하는지?  - 아내가 만날 놀리는 부분인데 주변에 여자 친구가 항상 있긴 했다. 지금도 많은 여자 친구가 있는데 모두와 잘 지낸다. 그런데 좋아하는 스타일을 말하기는 참 어렵다. 여자 친구마다 좋은 부분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나이 먹고 철없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러운데 한번은 여성상 문제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30여 년 전 한 좌담회에서 좋아하는 여성상을 말한 모양인데 그 자리에 있었던 편집자가 그 후 우연히 데이트를 하던 나를 보고는 ‘선생님이 일전에 말씀하신 여성상하고는 많이 다른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참, 뭐라고 대꾸를 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여자들이 쇼핑에 열광한다. 쇼핑 좋아하는 여자는 왠지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 아니다. 나 역시 쇼핑도 잘하고 맛있는 것도 잘 먹는다. 특히 음식에는 욕심이 많은 편이라 해외에 가면 조엘 로부숑이나 알랭 뒤카스 같은 스타 셰프의 음식, 최고급 와인 등을 꼭 챙기려고 노력한다. 럭셔리하고 멋있는 삶을 살려면 습관적으로 ‘하이 퀄리티’를 추구해야 한다. 적게 소비하고 조금만 갖되 갖고 있는 것들은 최고로 좋은 것이어야 한다. 몇몇 여자들을 보면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쇼핑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던데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음식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금 한국에서는 한식의 세계화 바람이 거세다. 소문난 미식가로서 한마디를 보탠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  -한식당이 안 되는 이유는 제대로 된 셰프가 없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한국에서 제일 잘한다는 식당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당신의 레서피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단 한 명도 그 말을 이해해지 못했다. 요리법은 책에 있다는 둥, 엄마의 손맛을 내려 노력했다는 둥, 시골 밥상이라는 둥 엉뚱한 얘기만 하는 거다. 셰프의 독창성이 없는 음식은 음식이지 요리가 아니다. 한식이 세계적인 것이 되려면 무엇보다 셰프를 키워야 한다. 자기만의 육개장, 자기만의 김치를 만드는 요리사가 많아져야 한다. 이렇게 까다롭고 싫고 좋음이 확실한 이우환 작가가 추천하는 한국 작가는 누구일까?  - 김수자 같은 작가는 세계 무대 어디다 내놓아도 통할 작가다. 이동엽과 정상화 작가도 훌륭한데 특히 정상화 작가는 내가 아는 제일 좋은 작가, 제일 훌륭한 작가다. 한국에는 좋은 작가가 참 많다.  
210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고, 어디서 무엇 되여 다시 만나랴... 댓글:  조회:3055  추천:0  2016-10-19
...수화 김환기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된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展’.      ▲ 위에서부터 , < 19-Ⅶ-71 #209 >       최근 매체에서 김환기 작가와 관련된 소식이 자주 회자되었기에 그의 이름에 익숙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지난 4월 작가의 1970년 작 가 48억 6740만원에 낙찰되었다. 1971년 작 < 19-Ⅶ-71 #209 >이 2015년 홍콩 경매에서 박수근 작가의 ‘빨래터’를 제치고 47억 2100만원에 낙찰돼 대대적인 보도를 탄 바 있었는데 이번에도 한국 작품 최고가를 경신하게 된 것이다. 또한 김환기라 하면 아내 김향안(변동림)의 얘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부부의 예술 여정 속에서의 환상적인 협동심과 헌신, 지성적인 사랑으로 유명하다. 전면점화라는 매력적인 추상 장르에도 관심이 갔지만 오래전부터 김환기, 김향안 부부의 이야기에도 매료되어 있었기에 전시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꼭 가야겠다.’하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를 잠깐 소개하자면, 전남 신안 출신으로 1930년대 청년 시절 동경의 일본대학 예술과 미술부에서 수학하는 동안 서양의 전위적인 미술 경향들을 익히고 후기 입체파적 특징과 초현실주의적 경향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일본화단의 전위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전」 창립에 관여하는 등 모더니즘 운동에 몰입하였으며 「자유전」, 「백만회」 등을 통해 추상미술의 기반을 다졌다. 당시의 대표작인 ‘론도’는 한국 최초의 추상작품 중 하나이자 대한민국근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장년기인 1940-50년대에는 활발한 창작활동과 더불어 교육자, 행정가로서 서울대와 홍익대 교수, 미술협회 이사장 등 한국미술계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쌓은 명예와 안정된 지위를 뒤로 하고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 파리와 뉴욕으로 향하게 된다. 막막한 외지에서 김환기는 무명작가의 신분에 불과했고 그림이 팔리지 않는 높은 현실의 벽에 번번이 좌절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점화’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해내는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어마어마한 작품 활동을 하며 대작들을 쏟아낸다. 천부적인 재능도 있었겠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예술적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기도 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선(線)인가? 점(點)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나는(飛) 점(點),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 보자."             그런 그에게 김향안은 아내이자 강인한 예술 여정의 동반자였다. 그녀는 서양화가 구본웅의 이복동생으로,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진 1930년대 문화계의 스타였다. 향안은 20세에 시인 이상을 만나 함께 살다가 그가 27세에 요절한 뒤 김환기를 만나 1944년 5월 결혼했다. 자신 역시도 문필가이자 화가였으나 결혼 후엔 이름도 변동림에서 김향안(김환기의 아명)으로 바꾸며 남편의 내조에 온 힘을 쏟았다. 남편을 위해 남은 생을 살겠다는 다짐을 이름 석 자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끊임없이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어줬으며 김환기가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접고 파리 유학을 결심했을 때, 1년 먼저 파리로 가 어학연수를 하여 언어를 터득하고 집을 비롯한 모든 기반을 다져놓기도 했다. 이후 뉴욕에서 남편이 사망하고 나서는 그의 예술혼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유작과 유품을 모아 환기재단을 설립했다. 바로 그 노력의 결정체가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이다. 김환기의 천재성은 아내 김향안이 있었기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전시회는 그의 초기작부터 작품 구상을 위한 습작, 높이 2m가 넘는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전면점화 시리즈까지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그의 일기장과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어린 편지 그리고 예술적 성찰이 담긴 문구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의 예술관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고 얼마나 깊은 고뇌와 사유 속에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진다. 초창기의 작품들이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자 했던 의지가 강해보였다면 뉴욕시대로 건너가면서 추상성이 짙어지면서 한국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점점 그만의 뚜렷한 색채감과 서정성의 단계가 높아진다. 점차로 단순명료해지는 것이 보인다고 해야할까. 드로잉 습작들을 보면서도 다양한 화면 구성과 재료의 변화를 시도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전시되어 있는 다채로운 실험 과정들은 1970년대 정점을 찍은 김환기의 추상 시대를 예고한 것이었다.       ▲     점, 선, 면의 공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장노출로 촬영한 밤하늘 별 궤적을 따라가는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화로 빛들을 한 땀 한 땀 수놓은 듯한 강렬함이 전해진다. 검푸른 수면이 잔잔하게 빛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둠과 푸른빛의 점 그리고 작고 네모난 면들의 조합만으로도 깊이감과 동감(動感)이 조성되어 놀랍기도 했다. 그가 다루는 마술적인 점, 선, 면의 잔잔한 질감과 그것들이 이루는 질서 속의 미묘한 일탈과 번짐 효과를 보고 있자면 한편의 서정적인 시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가 추구한 ‘시(詩)정신’이 바로 그것일까. 실제로 작가는 고향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보고 싶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하나하나의 점을 찍어나갔다고 하다. 문우(文友)였던 시인 김광섭의 부고를 듣고 그의 시 의 마지막 글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떠올리며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내 작품은 공간의 세계란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주는 것일까. 그렇다. 내 점의 세계.”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 문학, 무용, 연극 모두 다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        ▲새로운 경매 출품작 < untitled 3-V-71 #203 >     김환기의 전성기 대작이 29일에 또 홍콩 경매에 나온다. 이번 출품작은 한 화면에 4가지 색깔이 서로 다른 기법으로 표현된 그의 점화 시리즈 중에서도 독창적인 작품 중 하나다. 그래서 새로운 경매 신기록을 세우지는 않을까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경매가에 대한 기대가 집중되는 만큼 그의 순수한 예술관과 드라마틱한 예술인생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길 바란다.        이번 전시가 김향안 여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라 그 의미가 더 크다. 부암동 특유의 분위기도 좋고 산기슭에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기에 한적하게 산책하며 걷기도 좋다. 미술관에서 버스를 타지 않고 경복궁역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길에 보면 윤동주 문학관도 있어 잠시 가볍게 둘러보기에 좋다.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를 새겼다고 했다. 김환기는 물 먹은 듯한 단색의 수많은 점면을 찍으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이미 세상에 없는 이지만 가난하고 고독한 현실에 치이면서도 먹먹한 그리움으로, 속타는 예술적 목마름으로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보던 그를, 그의 아내 향안을 느끼고 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가고 여기, 그의 예술은 남아 있다.          “내 영혼은 수화의 영혼하고 같이 미술관을 지킬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살고 있는가? 수화의 영혼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김향안 [출처] [Opinion] 2016 환기미술관 특별기획전 <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展 >에 다녀와서 [시각예술]|작성자 해서ly  
209    지구에서 가장 놀라운 풍경 30 댓글:  조회:3391  추천:0  2016-06-30
지구는 매력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곳입니다,다른 사람이 상식의 위반으로 볼 수 있지만, 심지어 너무놀라운 그들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가장 놀라운  지구 풍경 (30)의 다음 컬렉션,그것을 보고 나면 당신은 어떤 감정일가!?....   플라이 간헐천 - 네바다, 미국 천자산  ㅡ 중국  Pamu 갈리 ㅡ 터키   Dallol 화산 - 에티오피아  Danxia 지형 ㅡ 중국   반딧불 동굴 -ㅡ 뉴질랜드       자이언트 코즈웨이 - 북 아일랜드 컬러 언덕 - 미국 Lassen 화산 국립 공원    아브라함 호수의 얼음 거품 - 캐나다 한 노래 동 - 베트남   그랜드 프리즘 스프링스 - 와이오밍   나미 브 사막 - 나미비아   영양 캐년 - 미국  네카 내 크리스탈 동굴 - 멕시코  에메랄드 호수 바이칼의 얼음 - 러시아    살 라르 데 우유 니 - 볼리비아 레드 비치 - 중국 판진   얼음 동굴 - 아이슬란드 마운트 로라 이마 ㅡ 베네수엘라   로즈 호수 ㅡ 세네갈 발광 비치 ㅡ 몰디브  해안 동굴을 가르 베 ㅡ 포르투갈 천연 탄산 소다 ㅡ 탄자니아  어디 Vatnajokull 빙하 동굴 ㅡ 아이슬란드  지옥의 문 ㅡ 투르크 메니스탄   발견 호수 - 캐나다   얼음 동굴 근처 무트 노브 스키 산 화산 ㅡ 러시아                                                                                                얼음 동굴 - 오레곤   호수 힐러 ㅡ 호주
208    [쉼터]- 자연에서 한반도를 보다 댓글:  조회:2834  추천:0  2016-06-23
.bbs_contents p{margin:0px;}      한반도 지형 모음                충북옥천 둔주봉에 한반도 지형   한반도를 닮은 리투아니아 호수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서쪽으로 약 25㎞ 떨어진 옛 수도 트라카이 시에 있는 호수 위를 열기구로 비행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호수의 지형이 한반도를 빼닮은 듯 해 이날 비행을 더욱 맛나게 해주었다.      서강이 굽이쳐 흘러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놓은 강원 영월군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의 전망대 기슭에 심어진 무궁화가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한국선수단의 잇단 승전보를 축하하듯 꽃망울을 터트렸다   강원도 영월 선암마을 한반도 모양.   양구 파로호에 대형 인공습지 `눈길'    강원 양구군 파로호 상류에 국내 최대 규모로 한반도 모양의 인공습지가 조성돼 눈길을 끌고 있다. 30일 양구군에 따르면 북한 금강산댐(임남댐) 건설과 평화의 댐 공사 등으로 물을 빼면서 파로호가 황폐해지자 2004년부터 올해까지 습지를 조성해 자원생태 환경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해 왔다. 이에 따라 양구군은 양구읍 하리와 고대리 일대 총 연장 3km 구간에 걸친 163만㎡에 침사지시설, 생태 숲 등 자연형 하천정화사업을 추진했으며 이 가운데 4만2천㎡ 규모로 한반도 모양 인공습지를 조성했다. 최근 공사가 완료된 인공습지는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어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로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11월 1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제1회 배꼽축제' 기간에는 탄생의 의미를 부여한 닭과 오리 등의 부화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선보일 계획이다. 양구군 관계자는 "물이 빠진 파로호 부지 내에 무단경작으로 농약과 비료 등이 하천으로 유입되는 등 오염이 심각한 상황이어서 이 일대를 습지로 조성, 자연생태를 복원하고자 사업을 추진했다"며 "한반도 모양의 인공습지가 양구의 또 다른 볼거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독도의 한반도 지형    여수 남면 안도리 마을 한반도 지형     뉴질랜드에  대한민국  태극기 모양    일본의 독도 야욕문제로 온국민이 분개하고 있는 가운데 28일 오후 6시30분께 본사옥상에서 바라본 대전 중구 용두동 상공의 장마가 걷힌뒤 눈이 부시도록 파란하늘에 한반도 모양의 구름지도가 나타나 행인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두타연 폭포 DMZ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돼 잘 보존된 두타연 생태를 볼수있다. 50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두타연은 DMZ를 흘러온 북한물과 남한 물이 만난 물이 폭포가 되어 연못을 이룬다.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 모양이 마치 한반도 모양을 이루는 것이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 하다. 두타연은 또 천연기념물 열목어의 국내 최대 서식지이다.      외국인 등산가가 남아메리카의 한 테푸이(로라이마)에 올라가 그 풍경을 찍은는데 우연히 나타난 사진입니다. 우리나라 지도 보이십니까? 제주도도 보이네요   (보은=연합뉴스) 속리산국립공원에서 한반도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한반도 모양의 바위   6월 22일 국립공원관리공단 속리산사무소에 따르면 문장대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의 '작은 문장대'로 불리는 바위 절벽이 한반도 지도를 빼닮았다. 문장대 정상에서 천천히 살펴보면 더 선명하게 이곳을 볼 수 있다.     속리산사무소는 2013년 문장대 일대 송전탑 철거지를 모니터링하다가 이 곳을 발견했다. 속리산사무소의 강성민 행정과장은 "과거 송접탑과 관리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곳인데, 이들 시설이 철거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며 "탐방객들이 자연이 빚은 절경에 감탄하고 있다"고 말했다. 속리산에는 이곳 말고도 가까운 지점에 앉은 고릴라의 뒷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고릴라 바위'가 있다. (글 = 박병기 기자) 속리산 고릴라 바위
207    윤동주 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의 배경 구름다리 댓글:  조회:2665  추천:0  2016-06-13
  교토 우지는 10엔짜리에 나와있는 뵤도인, ...  뵤도인에서 걸어서 20분정도 가면 윤동주 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의 배경이 되는 아마가세 구름다리가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사진 입니다. 동기들과의 송별회를 위해 소풍을 간건데 이 사진 한달후에 잡혀 옥사하십니다..       뵤도인에서 우지강 상류쪽으로 쭉 올라가면 아마가세 다리가 나옵니다...              
206    그림과 녀인세계 댓글:  조회:3010  추천:0  2016-05-22
   블라디미르 볼레고프(Vladimir Volegov)의 그림 세계    러시아 하바르포스크 출신으로 현존하는 인기 작가. 3살 때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청소년기부터 그의 재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1800년대 아카데미화파와 같은 화풍을 부활시키며  묘한 화폭의 매력을 가진 작품 세계를 자랑하고 있다. 아름다운 색채를 대담하고 섬세하게 사용하여 기존의 뚱뚱한 러시아 여인들의 이미지를  조용하면서 우아하며 청순하고 요염하게 다양한 표현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새로운 러시아 여인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창출해 냈다. 그는 다양한 빛을 이용한 선명한 컬러의 팔레트와 대담한 터치감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출처 : 시사코리아저널 홈페이지 참조했음.   * 배경음악은 청년 장교 시절 야외 천막안에서 FM음악을 통해 처음 인연을 맺어 한때 이 음악에 중독되다시피 한 시절이 있었다.  제목 지고이네르바이젠은 집시의 달이란 의미. * 마지막 부분에 이 화가의 붓터치를 고속으로 보여주는 영상이 있다. 장영주 - 지고이네르바이젠 Sarah Chang - Zigeunerweisen    
205    피카소의 그림세계 2 댓글:  조회:2916  추천:0  2016-05-22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92세로 사망) 스페인 태생이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로 20세기 최고의 거장 * 입체파(Cubism 큐비즘 立體派)  20세기 초기에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운동. 기존의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의 사용 등을 지양하고, 대상을 여러 방향에서 본 뒤에 부분 부분의 모양을 분석하고 그 구조를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다시 구성하여 새로운 미를 나타내려 하였다. 피카소(Picasso), 브라크(Braque, G.)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후의 회화, 조각, 디자인, 건축 따위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어느 미술사학자는 그것이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의 발견에 버금갈 정도로 혁명적”이라고 하였다. * 에스파냐와 스페인 국가명의 경우 해당 국가의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에스파냐(España) 또는 스페인(Spain)으로 지칭되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 '에스파냐'이고 '스페인'은 영어 명칭이다. 이 둘 모두를 사용할 수 있지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에스파냐'이다. 그것은 동경 대신에 도쿄, 북경 대신에 베이징, 한성을 서울처럼 그나라의 호칭대로 표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익숙한 스페인으로 표기하겠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것이고 네가 수도사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화가가 되었다.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 파블로 피카소     안락의자의 올가(ㅍl카소의 첫부인) 초상 (1917년)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누드, 녹색잎과 상반신(Nude, Green Leaves and Bust)'은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피카소의 연인이자 그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여러 작품에서 모델로 등장한다 * 2010년 5월4일, 뉴욕 크리스티 = 1억648만달러(1232억원)   도라마르의 초상 $1억 0190만 (1,220억원)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피카소 특유의 표현법이 잘 드러난 피카소의 걸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도라 마르를 반추상형으로 화폭에 담은 초상화. 검은 고양이와 함께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르가 보인다. 주인공인 도라마르는 지적이고 교양 있는 여인으로 고통스러운 시기에 피카소에게 큰 힘이 되어준 여인이었으나 결국 그녀는 피카소에게 버림받은 뒤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자살했다.   피카소 자화상 $8380만(1,000억원)          파이프를 든 소년 '파이프를 든 소년'은 24살의 피카소가 장밋빛 시대에 '가난하고 비관적인 운명 속에서도 세상의 낙오자가 되지 않길 바라는'  애정 어린 시선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파리의 빈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있는 피카소의 작업실에 자주 놀러 오던 루이스라는 소년이다.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소재로 그림 연습을 하던 피카소는 이 가난한 소년의 머리에 반쯤 시든 장미꽃으로 만든 화관을 씌우고 손에 파이프를 쥐여줬다. 푸른색의 단순한 옷과 대비되는 화사한 분홍색의 벽면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그려 넣었다. 가난하지만 청년으로 커가는 소년의 수줍은 듯 신비로운 표정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색감의 표현으로 1천200억원이 넘는  화려한 왕관을 쓴 소년으로 탄생한 셈이다 * 2004년 5월5일, 뉴욕 소더비 = 1억416만달러(1205억원)   피에레트의 결혼 $8490만(1,010억원)     Mozart의 Serenade in G maj, Eine Kleine Nachtmusik, K.525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204    피카소의 그림세계 댓글:  조회:2756  추천:0  2016-05-22
2015.12.11. 10:58 .bbs_contents p{margin:0px;}                 피카소(Picasso,1881~1973)      이 그림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Les Demoiselles d’Avignon] 이다. '아비뇽의 여인들' '아비뇽의 처녀들' 다 같은 작품이다.   243 X 233센티미터의 거대한 화폭 안에 여자 다섯이 그려져 있다. 네 여자는 서 있고, 한 여자는 앉아 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익히 보아왔던 그림들 속 여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때까지 화가들의 화폭 속 여인들은 항상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아름답지 않다. 보기 흉하다. 아니 그런 여자의 모습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큰 눈, 정면의 모습에 담긴 옆 모습의 코, 오른쪽 여자들의 모가 난 얼굴, 엄청나게 큰 발, 도무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오른쪽 여자는 난폭하게 쭈그리고 앉아 몸의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여자의 얼굴은 정면이다. 그것은 가능한가? 아니다. 불가능하다. 하나의 화폭 안에 어떻게 얼굴 정면과 등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 다섯 여자들은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한 화면에 둘 이상의 시점이 동시에 들어간 것이다. 여자들의 육체는 찢어져 있다. 그는 말했다. “비뚤어진 코, 나는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코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1907년은 마땅히 젊은 피카소의 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그 해에 큐비즘이 시작되었고, 현대 미술도 시작되었다. 이 그림은 현대 회화의 첫걸음을 알리는 기록이다.     피카소가 비싼 이유     유명 화가, 비싼 화가 하면 누구나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화가는 당연히 피카소다.   르네상스 미술이 절정이었던 15세기 이후 400여 년 동안 서양미술에서는 원근법과 단일시점이 너무나 당연한 원칙이었다. 멀리 있는 건 작아 보이고 가까이 있는 건 커 보이고, 화가가 바라보는 한곳 시점에서 본 대로만 일관되게 그려야 현실을 잘 표현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렇게 규칙에 맞게 그리는 것만이 꼭 세상을 잘 그려 내는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는 사물을 사방팔방에서 본 시점(視点)을 다 한 화면에 넣어 그렸고, 원근법도 무시했다. 그래서 사물이나 사람이 이상해 보이지만, 그게 사실은 당시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유럽 사회는 이미 전통과 결별을 선언하며 변화와 혼돈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1, 2차 세계대전까지 겪으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겉으로 보이는 현실의 외형을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것만이 예술이 될 수는 없었다.    피카소는 여기에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세상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냈다.     피카소가 1907년에 그린 은 이런 작가의 특징이 처음 발현된 그림이기에,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그림 몇 개를 꼽을 때 꼭 들어간다.   이 그림은 직업여성 다섯 명의 누드를 그렸는데, 우선 이 여성들이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나 빤히 정면으로 관객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부터 이전의 19세기 화가들이 그렸던 전통적인 누드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 태도도 획기적이지만, 기법적인 면에서는 여인의 모습을 앞뒤 양옆에서 본 시점을  마치 한 시점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린 것,   즉 다시점(多視點) 회화라는 게 당시로서는 매우 전위적인 것이었다. 오른쪽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을 보면 이 점이 확연하게 보인다. 얼굴은 정면에서 본 얼굴이지만 코는 측면에서 본 듯 그린 것이고, 엉덩이는 뒤에서 본 시점이다.   그리고 그림 전체적으로 원근법도 무시했다. 이 때문에 뒤에서 천막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성과 천막 안에 앉아 있는 여성들 사이의 거리감도 완전히 없어졌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입체파 미술을 알린 신호로 여겨져 서양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작품으로 남은 것이며, 뉴욕 현대미술관의  핵심 소장품이다.     중요한 건 피카소가 시작한 이런 ‘새로운 미술’이 피카소 혼자에서 그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피카소가 시작한 새로운 미술, 특히 그가 을 완성한 1907년쯤부터 시작한 ‘입체파(Cubism)’ 미술은 당대 유럽 미술계 전체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후 서양미술과 전세계 미술이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눈을 찾아 변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튀는 행동을 해서 혼자 날뛴 것에 그치면 광인에 불과하지만, 그게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되면  ‘역사적인 사람’이 된다. 그래서 피카소는 역사적인 인물로 남은 화가인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지만, 예술에서는 특히 ‘선구자’가 중요하다. 선구자, 즉 ‘처음’이라는 것은 곧 ‘새로움’을 뜻한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세계가 중요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는 게 중요하다. 이전에 유명했던 선배 예술가들의 세계를 잘 배워 답습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이런 예술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영감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전의 것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 예술가들은 그만한 역사적 위치와 수치(작품 가격)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고 하겠다.     ♬ '장밋빛 인생' (La vie en rose) 가수 파트리샤 카스(Patricia Kaas)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대 히트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걸작 샹송의 하나. 가수 에디뜨 삐아프가 작사하고 친구인 피애프 루이기가 작곡했다. 에디뜨 삐아프의 노래는 녹음상태가 별로라서 카스의 것으로 했다.   나를 꼭 껴안고 매혹의 말을 들려 주세요. 이것이야말로 장밋빛 인생입니다. 당신이 입맞춤할 때는 최고로 행복해요.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장밋빛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가슴에 안을 때, 나는 별천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미꽃 피는 세계입니다. 당신이 말할 때, 하늘에서 천사가 노래하지요. 모든 말이 사랑의 노래로 되고 마는 것 같아요. 당신의 마음과 혼을 나에게 주십시오. 인생은 언제나 장밋빛 인생이 되지요.                                                     게르니카 는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던 1937년 나치가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을 담은 그림이다.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좌파 인민전선을 소비에트 연방이, 우파 프랑코파를 나치와 이탈리아가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개된 것으로, 1939년 프랑코파의 승리로 종전될 때까지 스페인 전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때 바스크 족의 수도인 게르니카가 나치에 폭격당하면서 15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피카소가 분노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전투로 인해 군인들이 아니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점.  과 함께 피카소의 2대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세로 349.3cm, 가로 776.6cm의 대작   는 정형적이지 않은 인물과 대상의 표현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거의 흑백 톤의 컬러만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극대화되었다. 캔버스 왼쪽부터 보면 불이 난 집, 죽은 아이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멍한 황소의 머리, 부러진 칼을 쥐고 쓰러진 병사, 광기에 울부짖는 말, 상처 입은 말, 램프를 들고 쳐다보는 여인, 여자들의 절규, 분해된 시신 등등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뒤엉켜있다.   * 다음 회...         2015.12.14. 09:12 .bbs_contents p{margin:0px;}       한국의 평화를 바랐던 피카소(1881~1973)        ♬ 카치니의 아베마리아/이네싸 갈란테     프랑스 남동부의 지중해  지역 두 도시 앙티브(Antibes)와 발로리(Vallauris)에는 각각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이 두 미술관은 특히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인연을 지니고 있는데 피카소의 과 가 이곳 발로리에서 그려졌고 특히 는 이곳 발로리예배당 벽화로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도에 이 그림을 그렸다. 1950년에 발생한 '신천 학살' 혹은 '신천군 사건' 소식을 듣고 나서 그린 작품이다. 신천 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1/4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신천 학살이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당시 서구 사회는 경악했다.  피카소가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렸던 것처럼, 신천 학살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평화주의자였으며 전쟁을 혐오하였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발로리에서 그렸으나 현재는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오랫동안 피카소의 그림 속에 갇혀 있던 신천군 사건이 한국에서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2001년 소설가 황석영이 신천군 사건을 소재로 한 '손님'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이 소설에서 신천군 사건은 기독교 우파와 좌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벌어진 일로 묘사됐다. 지난 2006년 한겨레신문이 인용한 이북5도민회 산하 신천군민회의 '10·13 동지회’는 신천군 사건, 혹은 신천 학살은 '신천군내 반공청년들'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지회 회원 중 한 명은 "미군이 오면 빨갱이를 살려둘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에 나선 것"이라고 증언했다.   신천 학살을 주동한 반공청년단은 신천군 사건보다 먼저 벌어졌던 제주 4.3 사건에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서북청년단'과도 흡사하다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단체들이 모여서 1946년 11월에 창단한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들은 씨를 말려야한다며 제주도로 들어가 학살극을 벌였다. 서북청년단 회원이자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안두희는 1949년도에 백범 김구를 살해했다.   이승만 정부를 대신해 손에 피를 묻히고 날뛴 그들은 한국의 나치친위대였다. 서북청년단은 한국에서 재현된 독일의 나치 친위대라 할 정도로 부끄럽고 끔찍하며 창피한 역사다. 2014년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로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하면서 사회적 우려를 높이기도 했다. 단체는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이 의거’라고 주장하는 글을 극우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일베)에 올려 사회적 비난을 받은 데 이어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를 위한 노란 리본을 철거하려다가 저지당하기도 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이 그림은 프랑스 남부 발로리 라는 마을 예배당 입구에 있는 그림.      피카소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에는 도자기 작업으로 유명한 도시 발로리에서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제작했다. 항상 전쟁과 폭력에 반대한 피카소는 발로리에서 작업하는 동안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 당시 한국전쟁이 막 발발한 때라 기왕이면 예배당을 역사적인 '평화의 전당'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피카소는 12세기에 건축돼 1791년 프랑스 혁명 이후 사용이 중지된 발로리 성의 예배당에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피카소의 대작 (La Guerre et La Paix)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 국립박물관'으로 불리는 이 예배당은 발로리 도자기 박물관 및 피카소도자기박물관과 함께 위치해 있다. 입구로 들어가면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예배당 깊숙이 들어가면 왼쪽의 '전쟁'과 오른쪽의 '평화', 그리고 원래의 예배당 문을 막아버리고 '세계의 4부분'이 전시되어 있다. 검정, 노랑, 빨강, 그리고 하얀 인류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떠받치고 있는 이 패널(Panel)은 '전쟁'과 '평화'를 잇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전쟁'의 하얀 방패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프랑수아 질로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그려져 있고 '평화'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박물관의 안내 팸플릿에는 "이 시기의 피카소는 특별히 한국의 평화를 염원했다"고 적혀있다고 한다.   평화   전쟁 3년이란 긴 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완성된 이 작품은 1954년 이 예배당에 영구적으로 설치되었지만  한국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휴전상태에 있다.   이 조그만 한반도에 180만 명이라는 세계에 유례없는 군사밀도로 60년 동안이나 산업 인력을 낭비하고 있는 어리석은 민족에 대해서  지하에 있는 피카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피카소 찬양하면 반공법 위반 1969년 6월 9일자   한 장의 옛 신문 사진이 요즈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회자되고 있다. 서울지검공안부(최대현 부장검사 김종건 검사)는 9일 상오 불란서 화가 「피카소」를 찬양하거나 그의 이름을 광고 등에 이용하는 행위는 반공법4조1항 (국외공산계열의 동조찬양, 고무)위반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차로 크레온 제조업자인 삼중화학 대표 박진원씨(45)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또한 동사제품「피카소·크레파스」등의 광고를 금지시키고 판매중인 상품의「피카소」이름을 지우도록 지시했다. 검찰에 의하면 삼중화학은 68년 10월부터 크레파스, 포스터 칼러 등을 제조, 「피카소」라는 상표를 붙여 팔아왔다. 검찰에 의하면「피카소」는 좌익화가로서 1944년 국제공산당에 입당, 소련에서「레닌」평화상을 받았으며 한국동란때는「조선의 학살 」 「전쟁과 평화」 등 공산당을 선전하는 작품 활동을 해왔다. 검찰은 이밖에도 코메디언 곽규석씨가 사회를 본 모 민간 TV쇼 프로에서 「피카소」라는 별명의 이름을 등장시킨 제작자들을 조사하는 한편 곽씨가 좋은 그림을 보고「피카소」그림같이 훌륭하다고 말한 이면도 캐고 있다. 곽규석씨는 조사를 받고 훈방되었지만, 삼중화학은 자사의 크레파스 이름을 '피카소'에서 '피닉스'로 바꿔야 했다.  이런 만화같은 일을 벌였던 검찰도 낯 뜨거웠던지 '피카소의 예술을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논하는 것은 괜찮으나, 피카소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찬양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고의가 인정될 때는 반공법 위반이 된다'고 설명했다는 것. 피카소를 좋아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던 시절, 그때의 기사가 지금 누리꾼들 사이에 다시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203    장미 한바구니 댓글:  조회:2296  추천:0  2016-05-22
장미 한 송이 받으세요(신송/이옥천)   얼마나 잃었느냐에 따라 불행의 척도를 잴 수는 없다.   여로의 길섶에 꽃씨 하나 심고 곁순 따주는 것은 튼실한 자방 위함이다.   여명은 오늘의 문을 열고 사고는 등대불을 밟힌다.   여울 격지 않고 바다에 닿을 수 없듯이 비바람 겪지 않고 꽃 피울 수 없다.   여유 있고 예비한 이는 노흐를 우려하지 않는다.   여정에는 반환 길이 없고 오직 가파는 객로만 있을 뿐이다.   역경은 단련의 마중물 인고의 발자국마다 서리꽃이 핀다.   역경 헤집고 쫒다보면 의외의 길섶에서 이연을 만난다.   역경은 성장의 터널 어둔 길을 걸어본 자가 밝음의 감사를 안다.   역경은 행복의 여울목 부서지고 깨저도 하나로 흐른다.               다음 기회 더 좋은 글 빚어 올리겠습니다. 폭염 기승 상상을 초월합니다. 모든 분들, 건강관리 잘 하시기를...  신송/이옥천 쓰고 찍음.    
202    미술과 량심 /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댓글:  조회:3880  추천:0  2016-05-22
조영남 대작 사기혐의 적용         가수 겸 방송인 조영남 씨의 그림 '대작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조씨에게 사기죄 혐의를 적용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춘천지검 속초지청은 실제로 그림을 그린 작가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본다면 조영남 씨는 다른 사람이 그린 작품을 자신의 것처럼 판매한 것이기 때문에 사기죄를 적용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조영남 의 대작 작품이 얼마나 되고, 얼마나 판매했는지, 판매 액수는 얼마인지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할 방침입니다.     가수 겸 방송인 조영남이 화투 그림을 놓고 대작 의혹이 제기되어 춘천지검 속초지청이 수사에 착수했다. 조영남이 그렸다고 알려진 화투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대신 그려줬다는 의혹을 받고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조영남의 갤러리와 소속사를 압수수색했다.       검찰의 말을 인용해 보도한 내용을 따르면 조영남은 강원도 속초에서 활동 중인 무명 화가에게 그림을 부탁, 그가 그려준 그림에 조영남이 조금 손을 본 뒤 마치 조영남이 직접 그린 것 처럼 전시 판매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압수물 분석 작업을 마치는 대로 조영남을 소환하여 조사할 방침이다.     조영남은 지난 2009년부터 대작해준 작가에게 1점에 10만원 안팎의 돈을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 뒤에 전시하고 판매한 혐의도 받고있다.     대작해준 작가는 화투 그림을 중심으로 조영남의 작품의 90%가량을 그려주었고, 그려준 그림에 조영남이 덧칠을 하고 서명한 뒤에 작품을 발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대작을 해준것이 300점 정도로, 조영남이 필요한 주제의 작품들을 의뢰해오면 해당 작품을 똑같이 여러 점을 그려서 전달했다며, 대작 작가는 조영남의 매니저와 작품을 두고 휴대전화 문자를 주고 받은 것이 있다며 메세지 내용도 공개하였다.     대화 내용으로는 그림을 찍은 사진과 함께 20호로 2개 부탁한다는 내용도 있는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조영남의 매니저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대작 작가에게 일부 그림을 맡긴 것은 사실이나, 대작 작가의 도움을 받은 그림은 한점도 판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영남은 대작작가는 내가 시키는 것만 한다며, 내가 그림 샘플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면 똑같이그려주고, 내가 손을 다시 봐서 사인을 하면 내 상품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조영남측은 대작이 아닌 원칙적으로 조영남이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조영남의 그림을 주면서 똑같이 그려오라고 한 다음 조영남이 손질을 했기 때문에 그 작품들은 조영남의 작품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대작을 판매하고 전시회를 해서 이득을 취하면 사실 형법상 사기죄에 속하게 되는데 조영남 측의 해명을 보면 90% 부탁했다 하더라도 그림을 실제 판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식의 해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기죄가 성립되려면 조영남의 그림이 대작여부가 관건인데, 조영남의 경우 모든 작가들이 조수를 두고 있고, 조영남이 시키는대로 조수가 했기때문에 이것은 대작이 아니라는 것 이고, 대작의 문제는 미술계의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작에 해당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설사 조영남이 대작을 받아 팔지 않았고 전시만 했어도 전시장에 미리 공지를 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판매의 목적도 있는 전시작품이라 판명되어 사기 미수가 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조영남은 지난해 방송에서 자신의 그림이 1000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 한다고 밝힌바 있다.     조영남의 그림 대작 의혹과 관련하여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자신의 견해를 SNS에 올렸다.     진중권은 자신의 SNS에 조영남 대작 사건. 재미있는 사건이 터졌네. 검찰에서 '사기죄'로 수색에 들어갔다는데 오버액션입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개념미술과 팝아트 이후 작가는 콘셉트만 제공하고 물리적 실행은 다른 이에 맡기는 게 꽤 일반적인 관행입니다라는 글로 운을 떼며 앤디워홀의 예들 들어 설명했다.   앤디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거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자랑하고 다녔죠. 그림이 완성되면 한번 보기는 했다고 합니다. 미니멀리스트나 개념미술가들도 실행은 철공소나 작업장에 맡겼죠라며 유명 예술가들도 그림의 콘셉트만 제공하는 점을 강조했다.     진중권은 또 핵심은 콘셉트입니다. 작품의 콘셉트를 누가 제공했느냐죠. 그것을 제공한 사람이 조영남이라면 별 문제 없는 것이고 그 콘셉트마저 다른 이가 제공한 것이라면 대작이지요. 하지만 미술에 대한 대중의 과념은 고루하기에 여론재판으로 매장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며 조영남의 대작 의혹에 대한 비난을 경계하기도 했다.     이어 욕을 하더라도 좀 알고 하자며,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갓은 좀 다른 부분인데.... 작품하나에 공임이 10만원. 너무 짜다라며 조영남이 훌륭한 작가는 아닌데,, 그림 값은 그의 작품의 미적 가치보다는 다른 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봐야한다며, 그림 값이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닙니다. 웬만한 작가들 다 그정도는 받아요. 다만, 이 분 작품은 그리는 족족 팔리나 봅니다라며 조영남의 그림 값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답했다.     또 조영남의 작품 대작 논란에 검찰이 개입한 것에 대해 복잡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검찰이 나설 일이 아니라 미술계에서 논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본다며 일단 '사기죄'라는 죄목을 제쳐두고 조영남씨의 '관행'에 대해 두가지 정도를 지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예술 내적 논의였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입장을 전했다.     조영남 대작 사기혐의가 적용되면서 조영남이 대작 논란의 여파로 당분간 활동을 중단한다.     MBC 표준FM 조영남·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제작진은 17일 방송부터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임시 DJ가 조영남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며 임시 DJ는 아직까지 미정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조영남은 10년 가까이 MBC 표준FM 조영남·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매일 오후 4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사실상 조영남이 조영남·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 마이크를 당분간 내려놓는다고 했고, 조영남의 소속사 미보고엔터테인먼트 측은 오늘 서울의 한 전시관에서 열 예정이었던 전시회를 잠정 취소한다고 말했다.      현재 상황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다는 판단이다.     ======================================================= 2016.05.21. 12:33 .bbs_contents p{margin:0px;} "검찰은 더 중요한 사안들을 놔두고 왜 이 사건에 발빠르게 움직이나?" 이번에 검찰이 왜이렇게 빨리 움직인것인지 모르겠지만, 벌써 서울 통의동에 있는 ‘팔레 드 서울’ 등 조영남의 그림을 거래했던 갤러리 세곡 그리고 조영남 소속사 등을 압수수색 했다고 하는군요..     "대작 화가가 조영남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돈은 최소 3000만원." 지금까지 무명화가가 그려준 조영남 대작 그림은 무려 300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장당 10만원이라고 치면, 3천만원 이상은 그려줬군요.. 좀 이상한게 자기도 7년이나 조영남 밑에서 돈받아먹고 그려줘놓고 이제와서 이렇게 터드리는 이유는 뭔지.. 검찰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강력사건 처럼 빨리 움직이는지.. 뭐 여튼 잘못이 있으면 벌을 받는것은 맞지만 한국에 오래 살다보니 당연한것이 이상해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영남은 대작 논란에 대해서 인정을 했습니다. “내 작품 90% 이상 그 사람이 그려준 것이 맞다. 하지만 미술계의 관행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은 관행이다, 다들 조수와 대작해주는 사람을 고용해서 쓴다." 사실 이 말을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일단 유명해지고 나면 작게는 여러명~수십명이 넘는 조수 혹은 대작해주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작업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 업계를 잘 아는 사람들의 글을 찾아봤습니다.   전직 관련업 종사자가 본 조영남 사건의 핵심                                         ================   그리고 진중권이 조영남 그림 대작과 관련해서 글을 썼더군요.. 진중권이 과도한 SNS로 인해서 욕을먹긴 하지만 절대 없는소리 할 양반은 아니죠. 그리고 서울대학교 미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 석사의 학력이 있으니 전문가라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조영남에 대한 그의 트윗 전체     요약해보면 1. "검찰이 조영남 사건을 사기죄로 수색에 들어간건 오버다."   2. "개념미술과 팝아트 이후에 작가는 컨셉만 제공하고, 물리적인 실행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게 관행"   3. "조영남 사건의 핵심은 컨셉이며 누가 작품 컨셉을 제공했느냐가 중요. 조영남이 제공한게 맞으면 문제가 없다."   4. "조영남 그림 대작은 검찰이 나설일은 아니며 미술계의 논쟁으로 해결할 문제다."     "조영남에게 돈받은 화가가 90% 그려주면 조영남은 덧칠만." 한마디로 조영남 뿐만이 아니라, 같은 그림을 여러장 팔아먹는 화가라면 대부분 그리는 손은 따로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 입니다. 앤디 워홀도 자신은 그림을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 하고 다녔다고 하죠. 앤디 워홀이 한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유명해져라 그리하면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 이다.” (물론 이 말은 실제로 한말이 아니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방송에 나와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떠벌였던 조영남에게 속은 느낌." 여튼 그가 저 명언을 남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현실 세계에서 딱 들어맞는 이야기 입니다 조영남 사건만해도 그렇죠. 화개장터로 떠서 유명해진 양반인데 그림도 그리네? 컨셉도 뭔가 재밌네.. 하고 자기 이름값이 있으니 방송에도 여러번 나오고 하다가 전시회도 열고.. ‘조영남 그림’ 해서 팔아먹고 했을뿐.. 애초에 조영남의 그림을 ‘작품’으로 본 사람들의 안목이 바닥인것이지.. 그냥 그 사람도 돈벌기 위해 ‘상품’을 찍어서 판 장사꾼 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조영남이 살아온 인생 자체가 이미 그의 그림처럼 거품덩어리였으니.   "조영남이 대단한 예술가 행세를 하더니만, 결국 만화공장에서 찍어내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네."   "조영남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사건 터지고 나니 몰랐던 사람도 알게 됐다."   "고흐 고갱 세바스찬 미켈란젤로 등 유명한 사람들도 했을 것 이다. 남이 만들어놓은 완성품에 사인만해서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술계가 정치판 보다 더 한 바닥이란걸 알게됐다."                 지금 조영남이 '라디오시대'에서 임시 하차 상태라고 합니다. 제작진과 연락도 되지 않고 있으며, 아직 생방송에 참석할지 여부는 모른다고 하네요. 일부 언론에서는 조영남 대신 임시MC가 한동안 진행할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조영남,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 하차 및 DJ대체 문제에 대해선느 아직 논의 단계는 아니다." 라고 이야기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조영남이가 방송에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연락 두절 상태인것을 보니 이창명 같은 애들처럼 일단 선잠수, 후변명 할 계획인가 보죠?   조용남 그림 대작사건에---    1. "조영남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으며 진짜 그의 말대로 관행이다." 2. "조영남의 그림은 작품이 아니라 이름 찍어서 팔아먹는 상품이다." 3. 도대체 저 조영남 그림을 수백에서 천몇백만원 주고 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나, "아이고 조영남의 예쑬이네~"하면서 구매한 사람은 속았다고 억울해 할 필요없다. 4. 9년이나 돈받고 그려준 당신은 왜 이제와서 이러나? 돈문제로 섭섭했나?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이중섭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이완용을 읽고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B형 남자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열정과 결핍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불구와 성장 정지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카사노바와 실패한 인생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뿅망치에 이마를 들이대는 두더지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자기 노래없이 30년을 버틴 외길 인생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황우석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이 땅의 생각들의 혼선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딸딸이 치는 열일곱살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노래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잃어버린 노래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희망을 읽고 가고 혹은 희망을 잃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딴따라의 내면 없음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바로 그 딴따라의 내면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화투와 바둑과 태극기와 공허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화투와 바둑과 태극기가 만들어내는 웃기는 페이서스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화투와 바둑과 태극기의 내면 없음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빠진 머리카락의 면적과 환갑이라는 나이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잔주름살과 시간이 얹어놓은 가짜 깨달음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늙을 수록 늘어나는 허영과 불안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여자의 그림자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성자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창녀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아무 것도 읽지 않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딴 사람이 무엇을 읽었는지를 확인하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애드립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유명세나 소음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엑스와이프나 두번 이혼한 남자의 고독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정치적 기질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서울대 출신의 오만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그래도 서울대 출신은 뭔가 달라, 그 경탄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충청도의 느림과 이북 출신의 무대뽀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주먹 한번 쓴 적 없는 허풍쟁이 주먹 보스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작고 꿈 많은 아이 하나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몰려든 사람들의 명단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녹색당 이후의 정당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따뜻한 눈빛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사람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괴물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노무현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몇 권의 책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흘러간 유행가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불경스러움과 권력 모독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단군 숭배의 진정한 민족주의자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이 땅의 자유분방이 겪는 성장통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죽은 뒤의 그림값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키치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주변을 서성거리는 수많은 우정들의 수상한 끈적거림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앤디 워홀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백남준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100년 뒤의 인간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인간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이상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골목을 질주하지 않은 아이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조영남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조영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미지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조영남이 아니어서 불만스런 몇 가지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조영남이 아닌 것들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자기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자기 그림자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천경자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우주 소년 아톰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텅 빈 섬을 읽고 가고, 유토피아를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우리 시대의 기어드는 목소리를 게워내는 뱃심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우리 시대의 소란과 정적을 읽고 가고 ========================================================= ■ 방송 : CBS 라디오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조영남 사기혐의? 검찰, 교양 좀 갖추길" -대작은 개념미술의 공공연한 관행 -조영남이 먼저 밝히지 않은건 의문 -대작료 10만원은 너무한 처사 -예술은 작가의 피땀? 낭만주의 관념 조영남 씨의 미술작품 대작논란이 일파만파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한 무명작가가 나타나면서부터인데요. 이 무명작가 송 씨는 '조영남 씨의 작품을 자신이 8년 간 300여 점 대신 그렸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어떤 때는 99%를 자신이 그린 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조영남 씨 역시 대작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을 했습니다. 다만 '대작은 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자신의 콘셉트, 자신의 작품이 맞다는 겁니다.' 대중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고요. 검찰은 수사에 들어갔죠. 그런데요 희한하게도 미술계에서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어떤 얘기일까요? 미학을 전공한 동양대 진중권 교수 연결을 해 보죠. 진중권 교수님 안녕하세요. ◆ 진중권> 안녕하십니까? ◇ 김현정> 그러니까 조영남 씨 말에 따르면 '어떤 때는 밑그림을 그려달라 부탁을 했고 어떤 때는 채색을 해 달라 부탁을 했다'는 거고요. 무명 작가 송 씨의 말에 따르면 ‘어떤 때는 99%를 자신이 그렸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쪽 다 대작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 거예요. 이런 행위가 과연 용납이 되는 건가요? ◆ 진중권> 사실 현대미술에서는 그건 논란거리가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현대예술은 콘셉트가 중요하고, 그 콘셉트를 물질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1%냐 99%냐 양적으로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 김현정> 별로 의미가 없다? ◆ 진중권> 예를 들어서 대표적인 사람, 앤디 워홀 같은 사람도 자기가 그림 그린 것 아니거든요. 대작을 맡긴 작품을 한 번 보기만 하고 사인만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림 같은 것 직접 그리는 사람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고 다녔거든요. ◇ 김현정> 나는 그림 같은 거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 진중권> 그러니까 대중들이 볼 때는 황당하겠죠. 우리 같은 현대미술 아는 사람들이 볼 때는 당연한 건데, 대중들에게는 좀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 김현정> 그러니까 지금 진 교수님 말씀대로 그러니까 '콘셉트가 중요한 거다, 핵심은 콘셉트다' 이 말씀이시군요. ◆ 진중권> 그렇죠. 요즘 미대에서는 데생 시험 안 보는 데도 있어요. 콘셉트가 중요하기 때문에요. ◇ 김현정> 지금 조영남 씨의 주장을 보면 '콘셉트는 100% 내 것이었다'라는 거고요. 반면 송 씨는 콘셉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어서 좀 애매한데요. 만약 콘셉트도 송 씨 것이었다 하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건가요? ◆ 진중권> 그건 문제죠. 그건 빼도 박도 못하는 거고요. 그건 범죄죠. ◇ 김현정> 반면에 만약 조영남 씨 주장처럼 콘셉트는 100% 조영남 씨 거였다라면 그럼 문제가 없는 거고요? ◆ 진중권> 큰 문제는 없는데 그것도 좀 따져봐야 되는데. 대행을 시킨 거잖아요. 그런데 대작이 모든 회화의 모든 장르에서 허용되는 건 아니거든요. 개념미술이나 팝아트 같은 데서 주로 그게 허용이 되는데요. 기계적인 부분, 반복적인 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작가의 터치, 개인적인 터치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부분에만 원래 허용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조영남 씨 같은 경우에는 조금 그걸 넘어섰죠. ◇ 김현정> 바로 그 부분을 제가 질문을 드리려고 했어요. 개념미술이라는 장르. 앤디 워홀의 설치미술이라든지 팝아트라든지 이런 장르만 콘셉트가 중요한 거냐? 아니면 일반적인 순수미술, 풍경화 수채화 인물화 이런 것까지도 콘셉트만이 중요한 거냐? 이 질문을 드리려고 했었는데. ◆ 진중권> 아니죠. 콘셉트만 중요시하는 장르들이 있고요. 다른 부분들은 터치 같은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조영남 씨 같은 경우에는 화투를 그린 데서 볼 수 있듯이 이 분이 팝아트의 제스처를 취했거든요. 그리고 작품을 판매하는 방식도 되게 대량 생산 비슷하게 했더라고요. 이런 부분인데, 사실 앤디 워홀도 실제로 대행시킨 부분은 실크 스크린 복제나 이런 거였거든요. 그런데 실제 대작 작가 같은 경우에는 그거 보다는 더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히 부당하게 여겨질 소지가 있죠. ◇ 김현정> 그러니까 조금 애매한 선에 있는 부분이 있군요? ◆ 진중권> 그렇죠. 애매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문제 삼으려면 문제를 삼을 수도 있지만 또 딱히 문제 삼기도 뭐한 이런 게 있고요. 또 하나의 부분은 대작을 했다는 것을 알리는 거거든요. 보통 개념미술가나 팝 아티스트들은 공공연히 알리고 다니거나…. ◇ 김현정> 뭘 알리고 다녀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 진중권> 대행을 시킨다라는 걸요. 왜냐하면 대행을 시킨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들의 예술의 콘셉트에 들어가 있거든요. 그런데 조영남 씨 같은 경우에는 그걸 안 했다는 말이죠. ◇ 김현정> 그런데 백남준 선생이 TV를 홀로 들 수가 없기 때문에 조수 도움을 받은 거 이해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앤디 워홀이 프린트를 자기가 못하니까 기계의 도움을 받은 걸 이해를 하는데. ◆ 진중권> 조영남씨는 아마 그 이상의 도움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작가한테 10만원 준 거잖아요. ◇ 김현정> 대신해서 그린 작가한테 작품당 10만 원을 줬죠. ◆ 진중권> 조영남 씨는 콘셉트는 내가 제공했고 예술은 내가 한 거고, 저 사람에게 노동을 시킨 거고 그 사람한테 공임을 줬다는 거죠. 그런데 그 작가가 스스로 볼 때는 공임 받은 것 이상의 작업을 한 거잖아요. 거기에 대한 마땅한 대우를 받고 싶은데 여기에 대해서 서로 견해가 다른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사실 아무리 대작 작가의 작품을 그야말로 그냥 노동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하다 못해 저도 조교들한테 PPT 2시간짜리 시키는 데도 10만 원은 주거든요. ◇ 김현정> (웃음) 프리젠테이션 자료 만드는 데도요? ◆ 진중권> 그렇죠. 좀 심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동법 위반이에요. 사기죄가 아니라. (웃음) 그리고 또 한 가지로요. '대행한다는 사실을 왜 알리고 다니지 않았을까?'입니다. 작가들한테 그런 의무는 없지만 알리게 하는 게 맞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윤리적 비판은 할 수 있는데 이걸 사기죄로 묶거나 이건 건 좀 과도한 것 같습니다. ◇ 김현정> 아니, 그런데 조영남 씨가 이 작품을 전시만 한 게 아니라 팔았거든요? 팔았다면 그때도 문제가 없습니까? ◆ 진중권> 당연한 거죠. 작품을 팔기 위해서 만들지, 안 팔기 위해서 만듭니까? ◇ 김현정> 아니, 왜냐하면 조영남 씨 작품을 돈을 주고 산 구매자들은 무명작가가 대신 99%를 그린 작품이라는 걸 모르고 샀을 가능성이 크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 황당할 수 있거든요? ◆ 진중권>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모르고 산 분들 같은 경우에요. 그런데 그 돈을 주고 작품을 살 분들이라면 알아야죠. 현대예술에서 중요한 건 콘셉트이라는 걸 알아야 되는 것이고요. ◇ 김현정> 현대미술, 개념 미술은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진중권> 그걸 알고 샀어야 되는 거고 그 부분을 가져다가 작가한테 책임을 떠맡기는 건, 물론 작가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겠지만 그게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 실망은 할 수 있다고 해요. 그 마음은 내가 이해를 하겠는데, 어차피 현대예술이라는 게, 심지어 페인팅 하는 분들도 반복적인 덧칠 작업 같은 경우에는 미대생들을 사다 쓰거든요. ◇ 김현정> 아니, 이게 진짜 미술계의 일반적인 관행이에요? ◆ 진중권> 현대의 1960년대 이후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데 아까도 말씀을 드렸듯이 모든 분야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라는 거죠. ◇ 김현정> 그런데 온라인 상에서 여러 가지 토론들을 하셨습니다마는 그중에 많은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문학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다 작가가 홀로 고통스럽게 완성해 가는 그 과정을 우리는 높이 사는 거고, 그래서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라고 높여주는 건데 홀로 할 수 있는 그런 작업까지도 바빠서 다른 작가들에게 맡겼다면 그것을 고통스러운 작가의 창작물이라고 봐줄 수 있는 것이냐? 이건 제품에 가까운 것 아니냐?' 이런 의견이 있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진중권> 그 관념은 굉장히 오래된 관념이거든요. 낭만주의적 예술 관념이고 바로 그걸 깬 게 현대미술이거든요. 일반적으로 대중은 예술은 고통스러워야 된다고 하는데 예술가들 중에서 고통스럽게 작업하는 사람 없어요. (웃음) 다들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고흐만 빼고. ◇ 김현정> 그렇습니까? 아니, 그런데 제가 미술에 문외한이고 일반적으로 그림을 못 그리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인데요. 어떤 미술가 한 사람을 잡고 '이러이러한 콘셉트로 작품을 만들어주세요'라고 하면 그게 미술 작품이 되는 건가요? ◆ 진중권> 될 수 있죠. 그렇죠. 그럼요. 얼마든지 할 수 있죠. 그걸 밝히고 한다면. ◇ 김현정> 그렇군요. 그러면 이번에 검찰이 수사를 들어갔어요. 지금 압수수색을 했고 사기죄 적용을 검토 중이라고 하는데 이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 ◆ 진중권> 대한민국 검찰이 좀 교양 수준을 갖췄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거 하기 전에 우리한테 좀 물어보면 되잖아요. ◇ 김현정> 미술계에? ◆ 진중권> 왜 한마디도 안 물어봅니까? ◇ 김현정> 그러면 이게 법적으로 문제될 건 아니라고 보십니까? ◆ 진중권> 문제될 게 없고요. 뭐랄까. 이런 섬세한 예술 문제에 접근할 때는 섬세하게 접근을 했으면 좋겠거든요. 교양수준을 좀 갖췄으면 좋겠습니다. ◇ 김현정> 송 씨라는 분도 예술을 하는 작가인데 이 분이 고소를 해서 이 문제가 시작이 된 거거든요? ◆ 진중권> 그런데 저는 그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를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데 사실 그 콘셉트가 누구의 겁니까? 조영남 씨 거잖아요. 저작권은 조영남 씨한테 있는 겁니다. 할 수 없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가 그 그림을 그렸을 때 그렇게 높은 값에 팔렸겠느냐? 이런 부분도 좀 생각을 해야 되거든요. 다만 조영남 씨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충분히 주지 못한 건 분명해요. ◇ 김현정> 문제가 있다면 노동법에 적용받는 그 문제다, 이 말씀이시죠. ◆ 진중권> 그렇죠. ◇ 김현정> 알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진 교수님 고맙습니다. ◆ 진중권> 네, 감사합니다. ◇ 김현정> 동양대학교 진중권 교수였습니다.   ===================================== 김지윤 기자]‘대작(代作) 논란’으로 세간의 파문을 일으킨 방송인 조영남에 대해 미술계가 ‘미술을 우습게 본다’면서 ‘작가의 겉모습을 어설프게 흉내, 프로인척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씨와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대작이 관행’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미술 전문가들이 상반된 견해를 내놓으며 조수에게 자신의 그림 작업을 맡기고 이를 밝히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다. 17일 미술계에 따르면 춘천지검 속초지청은 지난 16일 조영남의 사무실 등 3곳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무명 화가에게 조영남의 그림 300여점을 대신 그렸다는 제보를 받고 사기죄 혐의에 대해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더구나 조영남은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조수를 두고 작업하는 게 미술계의 관행이라는 발언을 해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미술계에선 이에 대해 조영남이 미술을 우습게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양화가인 한 대학교수는 “그동안 방송이나 언론에 나온 조영남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미술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미술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를 보였다”며 “예술적 고민 없이 기술적인 작업보다 ‘작품의 개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미술의 겉모습만을 흉내낸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다른 미술대학의 교수는 또 “예전부터 루벤스 등 많은 거장도 도제식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전수하기 위해 조수나 제자를 두고 자기 그림의 일부 작업을 맡겼고, 제자들도 자신들의 경력을 위해 영광으로 여기며 기초 작업을 도왔다”며 “그러나 가수와 방송이라는 본업이 따로 있는 조영남은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작품의 내용이 방대하거나, 대규모 인력의 협업이 필요한 설치미술의 경우는 조수나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하지만 조영남씨의 화투 그림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조영남이 유명인이어서 화가로서 이름을 얻은 것이므로, 일부라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면 분명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평도 이어지고 있다.  한 전문가는 “조영남이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화제가 된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프로 작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며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은 조수를 시켜 그렸다는 점을 밝혔지만, 조영남은 평소 조수를 썼다고 말한 적이 없으므로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조영남의 대작 의혹이 철저하게 규명돼야 하지만, 법의 잣대가 아닌 예술계 내부에서 해결돼야 할 문제라는 견해도 상당수였다. 한편 이번 대작 논란에 대해 보조 작가의 완전한 대작이 아니라, 조영남이 작품의 콘셉트를 잡고 핵심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면 처벌하기 어렵다는 게 법률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번 사건은 대작 그림에 조 씨의 의중이 얼마나 반영됐는지, 대작이 어느 수위까지 이뤄졌는지가 초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은 이를 위해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자문하는 한편 대작 그림이 실제 판매됐는지도 수사하고 있다.    
201    미술계 <<공장돌리기>>식 그림, 그 가치를 묻다... 댓글:  조회:2842  추천:0  2016-05-18
| 앤디 워홀은 조수가 제작했다 밝혀 평론가 “조씨, 관례상 허용범위 넘어” 가수 조영남씨가 17일 서울 후암동 U.H.M 갤러리에서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수를 시켜 대신 그린 그림을 자기 이름으로 팔아 왔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수 겸 방송인 조영남(71)씨의 이른바 ‘대작(代作) 사건’(중앙일보 5월 17일자 10면)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조씨의 주문으로 지난 8년 동안 ‘화투 그림’ 등 300여 점을 그려줬다는 화가 A씨의 제보로 현대미술의 제작 공정에까지 불똥이 튀었다. 한국 미술계에 그간 위작이나 표절 시비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그린 작품에 대한 논란은 처음이다. 업계에서 ‘공장 돌린다’는 은어로 통하는 작가와 조수 간의 협업 작업이 대중 앞에 실체를 드러냈다. 미술계에서는 우선 ‘대작’이란 단어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대작이란 미술계에 없는 용어”라고 설명했다. 정씨는 “현대미술 사조인 미니멀리즘이나 팝아트에서 작가의 콘셉트대로 조수가 제작하는 게 관행이라지만 조영남의 그림이 그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를 우선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원격으로 그림이 오갔다는 점이라고 정씨는 지적했다. 보통 조력자를 두면 한 공간에 있으면서 즉각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경우는 조수가 아예 원작자의 통제 또는 감독 없이 그림을 그렸기에 후에 마무리 손질을 하고 사인을 했다고 해도 도가 지나쳤다는 분석이다. "관례라 하더라도 허용 범주를 넘었다”고 강조했다. | 진중권 “콘셉트 제공했다면 괜찮아 작품 하나에 공임 10만원 너무 짜” 미학자인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트위터에 “작품의 콘셉트를 제공한 사람이 조영남이라면 별문제 없는 것이고, 그 콘셉트마저 다른 이가 제공한 것이라면 대작”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작품 하나에 공임이 10만원, 너무 짜다”고 썼다.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갑질’과 ‘열정 페이’에 딱 들어맞는 경우라고 꼬집은 것이다. 예술을 너무 우습게 아는 태도도 도마에 올랐다.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은 “평생 굶고 살아도 자기 작품에 목숨을 거는 다른 예술가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분개했다. 본인이 기존 미술판을 비판하는 글을 썼으면서도, 자기 손으로 사인을 하면 상품이 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그걸 판화에 비유하며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나눈다는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건 억지라는 얘기다. 서구 미술계에서는 미술시장에서 제왕 노릇을 한 앤디 워홀이나 제프 쿤스 같은 대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공장)’라 칭한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은 콘셉트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조수가 제작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조씨의 경우는 그걸 밝히지 않고 ‘유명 연예인이 그린 그림’이라는 프리미엄을 얹어 상업행위를 했다는 점이 비판 대상이 된다. 본업은 아니지만 화가로서도 자기가 100%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한 것처럼 속인 것이다. 한 미술 애호가는 "지금껏 100% 조씨의 그림으로 믿어왔는데 배신감이 크다. 대작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문제다”라고 말했다. | 조씨 “최근 바빠 조수가 거의 다 해 작품 산 사람들 불쾌하다면 환불” 가수와 방송인으로서 조씨의 활동 영역을 감안하면 그의 그림 생산량은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했다. 본인도 이 점은 인정했다. 조씨는 17일 “스케줄이 빠듯해서 최근 작품은 거의 A가 다 했다. 무리한 진행이었다. 내 욕심이 빚은 일이다”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검찰 수사 의뢰가 오면 응하겠다. 내 작품을 산 구매자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 불쾌하다면 환불해주겠다”고 말했다.   ================================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5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댓글 수4 ‘화투’ 연작 등이 대작 의혹에 휘말린 조영남씨. 2011년 자신의 화실에서 작업중인 조씨. 미술품 ‘대작(代作)’ 의혹에 휘말린 가수 겸 화가 조영남씨는 17일 대작이 아니라 자신의 창작품이라고 반박했다. A씨(60)를 조수로 고용해 일부 작품을 그리게 한 것은 맞지만, 자신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창작품이라는 주장이다. 또 ‘대작 논란’과 상관없이 계속 작품 활동을 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언론 인터뷰서 대작 논란 반박 "조수가 한 작품에 90% 그렸지만 내가 그리기 어려운 것 숙제 내준 것" 대작 의혹 제기한 A씨 지인들 “그는 백남준과 일했던 뛰어난 작가 조씨 언행에 모멸감 느꼈을 것” 그는 이날 YTN과 인터뷰에서 “내가 부탁해서 좀 그려달라 한 것도 맞고 한 작품에 90%를 그렸다는 것도 맞는 얘기”라면서도 “내가 그리기 어려운 것을 숙제 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A씨도 인정했지만, (대작 부분은) 전혀 창의력과 관련 없고 100% 내 작품이고, 내 새끼고 내가 창작한 것이다. 조수 개념으로 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대작 논란으로 인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내 그림 산 분 중 불쾌하다면 응분의 반대급부로 처리해드릴 용의가 있다”며 “내가 잘못한 것은 책임지고, 그게 법적으로 사기라 인정되면 그걸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조수나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 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그는 “이걸 계기로 좋은 그림이 나올 거고 내 생각에는 굉장히 도움될 것 같다”며 “이렇게 유명해졌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작 의혹이 폭로된 뒤 조씨는 언론에 얼굴을 내밀고 적극 발언을 한 반면 A씨는 잠적해 대조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본지 취재 결과 강원도 속초에서 작업을 해온 A씨는 현재 전남 해남 쪽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렇다면 왜 조씨와 A씨는 대작 시비에 휘말렸을까. 두 사람이 금전적 갈등을 빚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또 다른 주장이 제기됐다. 본지 취재 과정에서 대작 의혹을 제기한 A씨가 조씨의 언행 때문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고 괴로워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A씨와 함께 강원도 양양군에서 2012년 1년가량 함께 생활한 오모(61)씨는 17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씨가 자신의 지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A씨를 소개할 때 ‘조수가 아닌 3류 화백’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야기를 A씨로부터 들었다”며 “조씨가 A씨에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준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A씨의 지인들은 그가 뉴욕에서 백남준(비디오 아티스트) 선생과 함께 일을 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한 지인(45)은 “A씨는 백남준 선생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아티스트다. 그런 그가 조씨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현재 검찰은 조씨에게 사기 혐의 적용 가능성을 따져보고 있다. 춘천지검 속초지청 관계자는 “실제 그림을 그린 작가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본다면 다른 사람이 그린 작품을 자신의 것처럼 판매했을 경우는 사기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본지 취재 결과 검찰은 사기 혐의 적용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해 해외의 구체적 판례까지 검토를 마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아메리칸 고딕’이라는 중세시대 인물화 작품을 놓고 1992년 미국에서 저작권 문제를 다룬 재판을 검토했다고 한다. 이 판례 속의 작품 의뢰인은 “얼굴을 해골로 그리고 해적선을 그리라”고 작가에게 아이디어를 줬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실제 그림을 그린 작가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판단했다. 검찰 관계자는 “개성과 실력에 따라 그림이 바뀌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더라도 저작권이 아이디어 제공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이유로 사기죄 적용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지만 무엇보다 우선 문제의 그림이 어느 정도 팔렸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    착시 그림의 마력 댓글:  조회:5974  추천:0  2016-05-13
  착시현상은 눈이 받아들이는 실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인지하는 현상이다. 이는 인간에게 항상 일어나고 있으며,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생리적 착시현상은 눈과 뇌에 과도하게 특정한 자극을 받아 발생하는 착시이며, 인지적 착시현상은 무의식적인 뇌의 영향에 따라 원래의 사물에 시각적인 착각을 가지게 되는 현상이다. 실제로는 다른 형태의 사물들이 모인 것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게 되면, 인간의 뇌는 그 이미지만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인지적 착시에는 '오리-토끼' 착시·'얼굴-꽃병' 착시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멕시코의 예술가 옥타비아 오캄포(Octavia Ocampo)의 작품은 '인지적 착시'의 좋은 예다. 초현실주의를 지향하는 그는 스스로를 '변형 예술가'라고 표현한다.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는 '착시 그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디자이너 부모를 둔 오캄포는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1974년 샌프란시스코 예술 학교를 졸업한 이후 현재까지도 멕시코 테포스틀란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그렇듯 오캄포 역시 살바도르 달리의 영향을 받았다. 오캄포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한 가지 모습을 단순하게 그려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세하게 많은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다. 스페인의 고전문학인 '돈 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그림은 멀리서 보면 돈 키호테의 초상화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마리의 말과 함께 앉아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인의 얼굴이 보이는 듯한 작품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 한 그루와 그 옆을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이다. 멕시코의 소도시인 셀라야에는 그가 그린 멕시코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가 벽화로 남아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초상화들 역시 착시 효과를 주는데, 그들과 얽힌 역사적 사실을 떠올릴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오캄포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면 안 된다. 관찰하고, 그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현유 인턴기자
199    점과 선들의 감응으로 물들다... 댓글:  조회:2093  추천:0  2016-05-13
마릴린 먼로, 달항아리, 반가상, 모나리자, 오드리 헵번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미지의 화면임에도 느낌이 강하게 전해진다. 상식과 보편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다. 이러한 오류와 착각, 대비와 충돌을 통해 이루어지는 시각적 자극의 프로세스는 새삼스럽고 기발하기도 하거니와 유쾌하다. 열풍의 시절, 오래 된 온기연한 핑크색 화면의 바탕. 그 위에 진하게 그린 마릴린 먼로의 육감적 입술은 마치 방점 구멍을 열어젖히고 뜨겁게 달려들 것만 같이 생생하다. 은근하고 조심스러운 과정을 통해 포착되는 은밀한 감성이 아니라 오히려 도발적인 열풍(熱風)의 시절이 진하게 풍겨온다. 방점 위 백자. 멀기만 한 시간의 저편. 희고도 아름다운 초록 향기는 오래 된 침묵, 가없는 온기로 다가온다. 블루 섀도(blue shadow) 마냥 가늘게 일렁이는 여인의 고혹적인 앞가슴을 백자 달항아리는 깊고도 은은히 감싸고 있다. 이 질서정연한 공존! 이를 윤우학 미술평론가는 "전체와 개체는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의 존재성을 순환시키는 자세를 가지며 하나의 표현으로서 성립하게 된다"라고 평했다. 원, 홍일점들의 따스한 입김정녕 점들이 이어져 선(線)이 되는가. 무수히 많은 점들이 화면 전반을 뒤덮고 있다. 하나하나의 소중한 홍일점들은 오랜 세월 우리네 마음속에 곰삭혀 있던 순수의 시간을 건져 올리게 한다. 이윽고 선은 현(絃)이 되어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악기로 거듭난다. 비로소 들려오는 소리와 마음의 조화로운 찬미. 작가는 모든 사물과 그 움직임의 존재를 동시대의 상징으로 나아가 부처나 성모 마리아상 등 종교의 세계관으로까지 사유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그러니 저마다의 행로를 떠돌다 만난 형상이며 집합체며 하잘 것 없는 생명체는 결코 가벼운 움직임이 아니다. "둥근 원(圓)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엄마의 뱃속에 있는 것 같고 생명 그 탄생인 것도 같다"라고 작가가 말했듯 원은 그의 작품세계 바탕, 포용의 세계다. 생동하는 숨결소리, 풍부한 감응작가는 대상에 대한 빼어난 묘사력과 표현을 통해 객관의 조건을 대단히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를 김상철 월간 미술세계 주간은 "이러한 조형방식은 분명 재치 있는 영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해석과 번안에 의한 그의 작업이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에서 출발하였지만 주관적이고 독특한 개성으로 귀결되고 있고 현대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 있는 시사라고 여겨진다. '이중주의 하모니'의 명화 인물과 백자는 꿈틀거리며 생동한다. 이들은 우리의 오랜 그리고 소중한 간직들을 살포시 열어 어느새 가슴으로 다가와 풍부한 감응으로 물들인다. 권동철 문화전문 기자
198    모나리자의 비밀 댓글:  조회:5319  추천:0  2016-05-13
(서울=연합뉴스)  =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의 작품 '모나리자'가 원래는 '눈썹 없는 미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눈썹이 500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사라졌다는 것.프랑스의 예술 전문가인 파스칼 꼬뜨는 최근 다 빈치의 그림은 여러 겹으로 돼 있으며, 가장 바깥의 특수표면 위에 그려져 있던 눈썹이 화학적 반응으로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갔다고 주장했다. 이번 분석에는 240 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가 동원됐으며 카메라는 빛을 매우 정확하게 측정해 그림의 바깥면을 관통해 그 아래층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꼬뜨는 이번 연구에서 모나리자의 눈썹 외에도 많은 비밀들을 발견해냈다.다 빈치가 모나리자의 그 신비한 미소와 어울릴 만한 편안한 자세를 잡기 위해 왼쪽 손의 손가락 위치를 바꾼 사실도 적외선 영상 분석결과 드러났다. 그는 작품이 만들어진 500년 전과 지금은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면서 배경에는 푸른 하늘이 있었고, 전체 표면도 지금과 같은 누르스름한 느낌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또 연백안료와 단사가 사용된 안쪽 겹은 모나리자의 미소와 눈길, 얼굴이 지금보다 더 넓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코뜨는 다 빈치가 그림이 3차원으로 보이는 효과를 위해 바탕의 가장 바깥면에 덧칠을 했지만, 지금은 모든 시각적 효과들이 사라지면서 제작 당시와는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무엇보다 르네상스의 거장에게 '모나리자'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해내는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꼬뜨의 '모나리자의 비밀' 연구결과는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에서 공개. ===================================================== [한겨레= ]"안검황색증 등 건강상태 나빠" 주장 제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1503~1506년 작품)의 미소는 미술계의 수수께끼이다. 알쏭달쏭한 미소를 짓는 이 뚱뚱한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말로 '리자 부인'으로 해석되는 모나리자의 미소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모델의 나쁜 건강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이탈리아 팔레르모대학의 비토 프랑코 박사는 모나리자의 움푹 들어간 왼쪽 눈두덩은 콜레스테롤의 피하축적으로 인한 안검황색증, 그리고 부풀어오른 듯한 왼손은 명백한 지방종의 증세가 엿보인다고 주장했다고 이탈리아의 일간지 가 최근 보도했다. 프랑코 박사는 작가가 알든 모르든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은 그의 인간적인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또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알레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속 모델의 길고 가느다란 부자연스런 오른손은 발육이상증후군인 '마르판 증후군'을 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증상은 9·11 테러를 주도한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도 앓았을 것으로 의심된다고 프랑코 박사는 덧붙였다. /류재훈 기자 =========================================   [서울신문 나우뉴스] 지난 1932년, 덴마크의 목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Ole Kirk Kristiansen)은 목공소에서 어떤 나무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2년 후 그는 여기에 '레고(Lego)'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덴마크어 '레그 고트(leg godt)' 즉 '재밌게 논다(play well)'는 뜻으로 부모님들 지갑을 휘청거리게 만든 장난감 계의 신화 '레고'의 창세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레고를 단순한 장난감으로 보면 곤란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봤다면 '헉' 했을 놀라운 예술품이 레고로 구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 온라인매체 허핑턴 포스트는 이탈리아 아티스트 마르코 소다노(Marco Sodano)가 레고로 재현한 '모나리자'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공개했다. 이는 레고의 새로운 슬로건 "모든 아이들은 레고와 함께 예술가가 될 수 있다(All children are artists with LEGO)"에 발맞춘 캠페인의 일부분이다. 장난감 블록이 단순 놀이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아이들의 예술 감수성 개발 측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불린다.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로 수세기 동안 관심의 대상이었고 각종 음모론의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 대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일명 '네덜란드 모나리자'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작품 명성과 별개로 그림 속 소녀가 누구인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이를 소재로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동명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조우상 기자 ==================================   모나리자의 알 수 없는 듯한 미소는 관람자의 시선 바깥쪽인 ‘주변 시야(peripheral vision)’를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 연구자들이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풀었다고 보도했다. 영국 셰필드 할람 대학교와 선더랜드 대학교 연구진은 학술지 ‘비전 리서치’에 낸 연구 논문에서 다빈치가 여러 가지 색깔을 섞는 방식으로 주변 시야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보는 각도에 따라 모나리자의 입술 모양이 달라지게 했다고 설명했다. 모나리자 얼굴을 정면에서 봤을 때 입술 모양은 분명히 아래로 처져 있으나, 입술 이외의 다른 곳을 볼 때는 입술선이 미소를 짓는 듯 위로 올라간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얼핏 눈가에 스친 모나리자의 미소를 찾으려 눈길을 돌리면 미소는 곧바로 사라져 ‘잡을 수 없는 미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구진은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도록 부드럽게 옮아가게 하는 이른바 ‘스푸마토’ 기법을 다빈치만큼 능숙하게 구사한 작가가 없다며넛 이 기법은 다빈치의 ‘아름다운 공주’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덧붙였다. ‘아름다운 공주’에 스푸마토 기법을 적용한 결과 13세에 정략 결혼한 소녀의 때 묻지 않은 표정과 동시에 자궁외 임신으로 곧 죽을 운명임을 예감한 소녀의 속마음을 다빈치가 잘 알고 표현했다고 선더랜드 대학교의 마이클 피카드는 설명했다. 다빈치는 1483년 ‘바위산의 성모’라는 작품에 스푸마토 기법을 처음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의구 기자 =============================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본업은 과학자에 가까웠다. 그러니 다빈치의 미술 작품이 과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자주 오르내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과학자들은 다빈치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모나리자에 담긴 비밀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누구인가? 혹시 다빈치 자신은 아닌가? 모나리자는 미완성인가? 모나리자는 웃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미소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뿌옇게 보이는 스푸마토 기법은 어떻게 그려진 것인가? 이처럼 모나리자에 대한 궁금증은 셀 수 없이 많다. 모나리자의 비밀은 근래 들어 과학의 힘으로 상당수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애초에 모나리자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다빈치는 해부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특히 눈을 이해하기 위해 힘썼다. 다빈치는 안구를 정교하게 해부하기 위해 삶은 달걀에서 형성되는 글루타민산염으로 안구를 고정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다빈치의 방식과 유사하게 안구 해부에 앞서서 파라핀 같은 응고물로 안구를 고정시키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눈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빛의 성질을 파악하는 일에도 힘썼다. 본다는 것은 눈, 즉 생물학적인 부분과 빛이라는 광학이 결합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원근법의 원리를 연구했고, 명암의 미묘한 차이와 빛의 분산을 이해하기 위해 다면체의 각 면에 내리쬐는 빛을 관찰하고 기록을 남겼다. 이 관찰과 연구의 결과물 중 하나가 모나리자로 대표되는 다빈치의 초상화인 것이다. 앞서 기석이 말한 것처럼 어떨 때 모나리자는 웃기는커녕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해 보인다. 하지만 다시 보면 웃는 듯도 보인다. 모나리자는 정말 웃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모나리자가 웃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가? 미국 하버드 의대의 신경과학자 마가렛 리빙스톤은 2000년 모나리자의 미소는 주변에서 볼 때가 정중앙에서보다 미소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연구결과를 밝혔다. 2005년에는 망막에서 대뇌피질의 후두엽에 있는 시각령까지 이르는 경로에 무작위로 끼어드는 노이즈가 미소의 발견 여부를 결정한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최근 스페인의 신경과학자 루이스 마르티네즈 오테로와 디에고 알론소 파블로의 연구에 의하면 그림의 크기와 명도, 위치 등 시각 경로의 조건에 따라 미소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 이는 눈이 복합적인 신호를 뇌에 보내기 때문이다. 망막의 세포들은 사물의 크기, 명도, 위치 정보를 코드화해 각각 다르게 분류된 정보를 뇌에 전달한다. 이 때문에 조건의 변화에 따라 미소를 보거나 볼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같은 연구에서 빛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흰 화면을 30초간 보여준 뒤 모나리자를 보여준 경우와, 검은 화면을 보여준 경우를 비교하자 흰 화면을 본 쪽이 미소를 더 잘 포착했다. 모나리자는 그림의 왼쪽 입술은 일자로 다물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 입술은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입 모양을 하고 있다. 한성대 미디어디자인학부 지상현 교수에 의하면 보통 오른손잡이들은 우뇌를 이용해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전체 표정을 인식하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무표정한 듯하면서 순간적으로 웃는 표정으로 보이게 된다. 만일 모나리자의 그림을 합성해 좌우를 바꾸거나, 좌우 모두를 웃는 쪽, 무표정한 쪽으로 합성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면 어떨까? 좌우 입술 모양을 바꿔 왼쪽 입술의 입 꼬리가 올라가도록 만들 경우 웃는 표정이 더 우세해지지만 신비감은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은 절묘하게 배치된 입술 모양에만 있지 않다. 다빈치가 사용한 안개처럼 뿌옇게 보이는 스푸마토 기법은 그림의 윤곽선을 희미하게 만든다. 최근 프랑스박물관연구복원센터와 그르노블 유럽가속방사광설비 학자들이 X선 형광분광기를 통해 모나리자를 분석한 결과 스푸마토 기법, 즉 안개와 같이 흐릿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다빈치는 여러 번의 덧칠을 했는데, 한 번 덧칠된 막의 두께는 머리카락의 절반 가량인 40마이크로미터 이하이며, 최대 30겹까지 칠했다고 한다. 정교하게 제작된 뿌연 윤곽선은 시신경에 혼란을 부른다. 우리 눈의 망막 뒤쪽 시신경에는 간상세포와 원추세포가 연결되어 있는데, 원추세포는 색깔과 정지한 사물을, 간상세포는 명암과 운동하는 물체를 인식한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유재준 교수는 동물적 감각에 더 가까운 역할은 간상세포가 한다며, 다빈치가 윤곽선을 희마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간상세포를 자극해 다양한 반응을 유도한다고 밝혔다. 모나리자는 어느 순간, 어떤 사람에게는 인자한 미소지만 동시에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과학은 그러한 느낌이 우연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다빈치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의도해 모나리자를 그렸을까? 모나리자에 숨겨진 비밀들이 밝혀질수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에 대한 감탄도 커져만 간다.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피렌체에 머무르던 다빈치는 1503년부터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모나리자〉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작품 속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많다. 이와 같은 의문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빈치의 명성이 워낙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나리자〉에 얽힌 이야기가 아직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모나리자〉의 모델은 그의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이탈리아 화가 열전』에 적은 대로 피렌체의 명사로 부유한 비단 상인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두 번째 아내인 리사 게라르디니(델 조콘다, 1479년생)이라고 알려졌다. 리사 게라르디니의 남편 델 조콘도는 피렌체의 유명한 공증인이었던 다빈치 부친의 주요 고객이었으므로 다빈치가 게라르디니를 알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빈치가 그녀를 그리기 시작한 1503년은 게라르디니가 자식을 잃은 직후였으므로 그림의 제작 초기에 그녀의 남편인 조콘도는 아내를 미소 짓게 하려고 광대와 악사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야릇한 미소는 그렇게 하여 태어났다는 것이다. 다빈치는 그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배경으로 삼은 시모네호를 〈모나리자〉에서도 배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림은 6년이 지났는데도 완성되지 않았다. 다빈치처럼 모든 분야에 능통한 천재가 그림 한 점을 그리기 위해 몇 년이나 걸린다는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다. 심지어 다빈치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다빈치의 애인이 되었다는 억측을 낳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학자들의 의견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다빈치는 동성연애자였으며 섹스를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는 섹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성행위와 이에 사용하는 기관의 징그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인간이라는 씨는 그 인성을 잃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나리자〉를 그리는 데 6년 혹은 그 이상을 지체했다는 이야기는 그림 속 주인공에게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빈치가 〈모나리자〉의 모델에게서 남다른 매력을 느꼈음을 유추해볼 수도 있는데 다빈치의 또 다른 전기 작가인 안토니아 발렌틴도 다빈치가 그의 생애에 만난 어느 여성보다도 〈모나리자〉의 모델에게 깊은 관심을 둔 것이 틀림없다고 적었다. 다빈치는 1505년 플로렌스를 떠날 때 미완성의 그림을 게라르디니의 남편에게 맡긴 후 돌아올 때마다 손질했다. 그러나 1506년에 남편을 따라 여행을 떠난 게라르디니는 여행 중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이십 대였다. 다빈치 역시 밀라노로 길을 떠나 다시는 피렌체에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더는 〈모나리자〉를 그리지 않고 미완성인 채로 화필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종결된다면 미완성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거론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조르조 바사리가 다소 헷갈리는 이야기를 적었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초상화 작업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이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현재 프랑스의 왕 프랑스와 1세의 소유로 퐁텐블로에 있다. 이 문장을 보면 이 그림은 당연히 현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는 이 작품이 완성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바사리가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에 대해 적을 때는 그림 속 모델의 남편에게 그림을 맡긴 지 고작 40년이 지났을 때다. 당대의 부호로 유명한 조콘도가(家)의 조콘도가 이런 걸작을 그렇게 쉽게 남에게 넘겨주었겠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부인을 그렇게 공들여 다빈치에게 그리도록 했는데 그 그림을 어떤 연유이든 다빈치에게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의문점은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완성이 아니라 단기간에 그려진 완성된 작품이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무언가 헷갈리는 점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 반가우이, 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일세. 많은 사람들이 날 보고 ‘르네상스의 거장’이네 ‘시대를 앞서간 천재’네 하며 극찬을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내 능력을 조금 더 썼을 뿐이라네. 미술은 물론 과학, 기술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엄청난 분량의 메모를 남겼지만, 되돌아보니 ‘왜 한 분야에 집중해 내 능력을 쓰지 못했을까’라는 회한도 좀 남는구먼. 그래서 죽기 전 내 조수 살라이에게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기도 했었지. ▲ 모나리자 많은 작품들 중에서 내가 아끼는 작품은 바로 피렌체 공국의 거상 차노비 델 조콘도의 아내 라 조콘다를 그린 ‘모나리자’라네. 부인의 입과 눈에 은근히 남아 있는 미소에 매혹된 사람들이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것 같더군.  사람들이 날 사람이나 사물의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천재 화가라고들 하지만, 난 입과 눈매를 그리는 것을 항상 어려워했다네. 솔직히 모나리자 그림의 입술과 눈꼬리는 유난히 그리기가 어려웠지. 사실 제대로 그리는 데 실패했다고 봐야 할 걸세. 그런데 그렇게 잘못 그린 부분 덕에 도리어 명작으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정말 재미있는 일 아닌가. 어쨌든 인물화를 그릴 때는 상대방 얼굴의 미세한 표정까지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네. 그 미세한 표정을 어떻게 멋지게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명작과 졸작이 구분된다고 볼 수 있지.     자세히보기 CLICK       최근 뇌과학 분야의 국제학술지 중 하나인 ‘뉴로사이언스’ 최신호에서 아주 재미있는 논문 하나를 읽었다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전자 및 컴퓨터공학과 알레이스 마르티네즈 교수팀이 다른 사람의 표정을 읽고 인식하는 뇌 부위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거였어. 마르티네즈 교수팀은 대학생들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표정, 놀라며 좋아하는 얼굴, 화를 내는 모습 등 몇 가지 범주로 나눈 서로 다른 얼굴 표정을 한 1000여명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이라는 기계를 이용해 활성화되는 뇌 부위를 찾았다더군. 그 결과 얼굴 표정을 인식하는 뇌 영역이 ‘후부상측두구’(pSTS)라는 것을 알아낸 거야. 귀 바로 뒤쪽에 위치한 우뇌 부분인 pSTS는 사람의 감각 기능을 제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이타적 행위까지 좌우하는 뇌 영역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여기부터라네. pSTS는 미간과 눈썹, 입꼬리의 변화에 활발하게 반응한다는거야. 사람들은 이 세 부분의 변화가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포착을 해내 상대의 감정상태를 파악해낸다는 말이지.  재미있지 않나. 사람의 뇌가 몇 가지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단서로 상대방의 표정이나 감정을 파악한다는 것 말이야. 이번 연구는 얼굴 표정을 읽어내는 뇌의 움직임에 대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타인의 표정이나 감정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자폐증 환자 등의 뇌 연구에도 도움을 줄 거라고 하더군. 그런데 말일세, 이 사람들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의 표정을 읽고 감정에 반응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할 거란 거야. 만약 마르티네즈 교수가 사람의 표정을 읽고 반응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낸다면 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뛰어넘는 ‘인공지능 천재 화가’가 나오는 것 아닌가 싶어. 사람의 고유한 영역인 예술까지 기계가 침범한다면…. 어이쿠, 이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구먼. 유용하 기자
197    노르웨이 화가 - 에드바르 뭉크 댓글:  조회:2368  추천:0  2016-05-10
Self-portrait with burning cigarette 1895                  The scream (or The Cry) 1893                    Ashes 1894                    Evening on Karl Johan 1982                        Madonna 1984-95                        Puberty 1985                        The dance of life 1899-1900                              
김학철 동상                                                        ㅡ 김학철 소설가
195    ㅋㅋㅋ... 댓글:  조회:2087  추천:0  2016-04-28
194    보리밭 풍경구 - <<쌍용희주>> / 시쌍반나 - 물놀이축제 댓글:  조회:2443  추천:0  2016-04-24
[ 2016년 04월 16일 10시 05분  ]       南京시 六合구 보리밭 풍경구에 ‘쌍용희주(雙龍戱珠)’가 본격 형태를 드러냈다. 이곳의 총 면적은 9.3 핵타르, [ 2016년 04월 16일 10시 05분 ]           [ 2016년 04월 16일 10시 05분 ]             [ 2016년 04월 16일 10시 05분 ]             [ 2016년 04월 18일 10시 58분  ]         4월 15일, 雲南성 시쌍반나(西雙版納) 景洪시에서 중국 태족(傣族)의 포수이제(潑水節, 발수절)   [ 2016년 04월 18일 10시 58분  ]             [ 2016년 04월 18일 10시 58분  ]             [ 2016년 04월 18일 10시 58분  ]             [ 2016년 04월 18일 10시 58분 ]             [ 2016년 04월 18일 10시 58분 ]             2016년 04월 20일 10시 23분  ]         石林峽(석림협)는 베이징 시내에서 동북부로 70km 平谷구에 위치하고 있다. 스린샤는 협곡 안에 있는 4개의 가파른 산봉우리가 석림(石林)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스린샤의 총면적은 12km²이고 전체 길이는 6km에 달한다. 이곳에는 50여 개의 크고 작은 뷰포인트가 있으며 중국의 AAAA급 관광 명소이다. 스린샤 UFO 스카이 전망대는 지면과 떨어져 있고 길이가 32.8m이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에 있는 U자형 돌출 전망대인 ‘스카이 워크’ 보다 11.4m가 더 길고 인원 수용 면적이 434㎡로 세계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전망대이며 관광객들의 재미를 위해 UFO 형태로 제작된 스카이 전망대이다. 스린샤 스카이 전망대의 O자 전망대는 36개의 7cm 두께의 강화유리로 구성되어 있다.   [ 2016년 04월 21일 08시 00분  ]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건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면서 욕심이 생기고 사랑하면 그 욕심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아해서 들으면 가슴 설레는 것이고 사랑해서 들으면 눈물 나는 것입니다 좋아해서 웃는날이 웃는 날이 많고 사랑해서 우는 날이 많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곁에 두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은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의 흔들림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영혼의 떨림이라 합니다 좋아할땐 가슴이 두근두근 사랑할땐 가슴이 시큰시큰... 좋아하는 건 이글을 보고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이고 사랑하는 건 이 글을 보고 누군가가 눈물 날 만큼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193    [강풍이 부는 아침, 사진 한컷]- 오지독 분수 댓글:  조회:2104  추천:0  2016-04-17
   
192    가슴속에 만권의 책 들어 있어야... 댓글:  조회:2637  추천:0  2016-04-16
중국에서 시와 그림의 역사를 논할 때 ‘시는 당(唐)에서 끝나고, 그림은 송(宋)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합니다. 당나라 때는 이백(701년~762년), 두보(712년~770년), 왕유(699년 추정~759년) 같은 걸출한 시인이 등장했습니다. 송대에 들어 그림은 절정을 맞습니다. 이성(919년~967년 추정)과 범관(990년 추정~1027년 추정), 곽희(1020년 추정 ~1090년 추정)가 충국 회화사에 일획을 긋습니다. 곽희는 화론인 를 저술하고 북방계 산수화 이론을 완성합니다. 임천고치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수화의 교과서’입니다. 소식(소동파, 1036년~1101)으로 대표되는 문인화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송은 중국 예술사에서 문예부흥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특히 이 시기에는 화가들의 수양이 강조됐습니다. 붓질의 기교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배경과 경험을 중시했으며 이를 회화비평과 창작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로 인해 산수화·화조화·인물화 등 그림이 꽃을 피웠습니다. 남송의 비평가인 조희곡은 자신이 쓴 ‘고화변(古畵辯)’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눈 앞으로는 진기한 명적(名迹)을 실컷 보며,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만 바야흐로 붓을 댈 수 있다." 여기서 ‘만권의 책’은 인문학적인 소양을 말합니다. ‘진기한 명적’을 실컷 본다는 것은 예술 전통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말입니다. 또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노력과 체험이 밑바탕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디 그림에만 해당되는 말일까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1676년∼1759년). 은 위 세 가지를 몸소 실천한 화가로 생각됩니다. 그는 화원화가가 아닌 양반 출신입니다. 당시 쟁쟁한 문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창협·창흡 형제와 교류하며 학식을 쌓았습니다. 절친인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하면서 한층 더 성숙한 붓질을 선보였습니다. 또 중국의 산수화 이론을 섭렵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새로운 화법을 창안했습니다.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 전국의 이름난 명승지를 누비고 다니며 실제 눈으로 본 우리나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겸재는 생전에 금강산을 세 번이나 올랐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겨우 세 번?”이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간다는 것을 요즘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절입니다. 조선시대 때 금강산을 오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봅니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사람을 물어가던 시대입니다. 곳곳에서 산적이 출몰하기도 합니다.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칼 잘 쓰고, 활 잘 쏘는 호위무사가 동행해야 합니다. 험한 산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산에서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음식과 침구 등을 져 날라야 하는 노복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수십 명이 동원됐을 겁니다.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나귀도 필요할 것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치면 히말라야 등정쯤 되지 않을까요. 세도가의 양반이 아니면 금강산행은 꿈꾸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행히 겸재는 영조의 후원과 함께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지원을 받아 금강산에 세 번이나 오를 수 있었습니다. | 겸재 정선은 위대한 사진가?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부감으로 그려진 ‘풍악내산총람’은 마치 지도를 그리듯 그림 속에 명승지 이름을 써 넣기도 했습니다. 몇 해 전 독일의 과학자들이 최신 장비를 동원해 겸재 정선이 어느 지점에서 금강산을 그렸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돌베개, 2011). 겸재는 자신의 실제 경험했던 금강산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재 조합해 하늘에서 내려다 보듯이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그가 험한 산길을 얼마나 누비고 다녔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겸재는 위대한 사진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진은 시간과 공간의 전략적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시간은 사진을 찍는 시점을 뜻하며, 공간은 사진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시간은 빛을 의미합니다. 빛에 따라 공간은 달리 보입니다. 아침 빛이 다르고, 저녁 빛이 다릅니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간은 공간을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사진 크게보기 위 사진은 울주에서 찍은 다락논 사진입니다. 막 모심기가 끝난 시점입니다. 해가 뜨자 논에 고인 물에 노을빛이 반사됩니다. 판화의 질감과 비슷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산을 깎으며 논밭을 일군 농민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듯 합니다. 논에 고인 무채색의 물과 초록의 모가 아침 빛을 받아 전혀 다른 형태와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시간이, 빛이 공간의 형상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시간과 맞물려 돌아가는 공간의 선택도 치밀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사진은 프레임의 예술입니다. 프레임의 안과 밖, 즉 공간의 취사선택도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온전하게 숲을 보여줄 수도 있고, 나무를 보고 숲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기법도 있습니다. 사진에서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조합을 만들어 냅니다. 사진 작품은 그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시간을 달리하며 수십, 수백 번 찍어 봐야 합니다. 조희곡의 말처럼 사진가의 ‘발자국이 천하의 반’이 되어야 카메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풍경사진은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됩니다. | 아는 만큼 더 보인다 철학·문학·과학·수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진은 보는 것이 반입니다.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탐구이자 자기 성찰입니다. 아는 만큼 더 보입니다. 특히 현대사진은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또 문학과 미술과 음악 등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해야 합니다. 그 감동으로 가슴이 흥건히 젖어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사진으로 이르는 길은 사진 밖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기중 기자  
191    미술시간= 프랑스 화가- 페르낭레제 댓글:  조회:3351  추천:0  2016-04-12
페르낭레제작품           페르낭레제는 프랑스화가로, 1881년 출생했다. 정확한 생일은 알 수 없지만, 1955.8.17에 생을 마쳤다. 건축은 칸에서 , 장식은 파리에서 수료했다. 페르낭레제는 큐비즘 운동에 참가했다.         페르낭레제작품 중 무제, 자화상     그는 입체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그리고 영화제작자이다. 참 다양한 직업을 가진듯. 페르낭레제 작품 중 카드놀이를 하는 병사라는 작품은 이는 인류 신기원을 주제로 선택한 최초의 그림이라고 한다. 기계의 시작을 원통모양의 형상들로 나타낸다고 평가하고 있다.           페르낭레제작품 중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레제는 어린날에 기술과 노동을 찬양했다고 한다. 그리고 좀 지나자, 다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휴식와 오락을 즐기게 됐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노동계층을 그린작품이다. 노동계층이 일을 한 후에 쉬는 모습이다.           페르낭 레제 작품 중 시골의 야유회     이 작품은 어릴 떄 미술책에서도 많이 봤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 에두아르마네의 풀밭위의점심이라는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페르낭레제가 그린 작품은 낭만은 찾아볼 수 없지만,현실적인 느낌이든다고 평가한다. 마네의 작품과의 차이는 마네는 도시를 배경으로, 레제는 시골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다.      
190    땡!~ 미술의 세계로 보는 광고 댓글:  조회:2362  추천:0  2016-04-09
압생트 광고는 빈센트 반 고흐를 술 취한 남성으로 묘사했다. 환각 일으킨 술 모델로 반 고흐 자본주의의 꽃이 광고라지만 압생트 광고는 해도 너무하다. 얼굴보다 큰 술병을 들고 얼굴이 세 개쯤 겹쳐 표현된 광고 속 남성은 누가 봐도 ‘고흐’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화가를 조사하면 늘 손가락 안에 드는 ‘빈센트 반 고흐’ 말이다. “아니, 고흐가 압생트를 그렇게 팔아 줬다는데 술꾼으로 써먹다니.” 그러나 애정에서 비롯된 분노를 잠시 내려두고 광고를 뜯어 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술에 취한 게 고흐라면 셋으로 보이는 건 세상이어야 하는데 셋으로 표현된 건 고흐다. 이 의문은 고흐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 작가라는 사실을 알면 금방 풀린다. 고흐는 왜 압생트를 즐겨 마시게 됐을까? 알고 보니 압생트는 비싸지 않은 가격에다 환각 작용까지 일으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겨 마시곤 했다고 한다. 덤으로 알아가는 지식이다. 이집트의 대형 나이트클럽은 죽어가는 인간을 표현한 '라오콘 군상' 이미지를 광고에 사용했다. 어떤 광고는 그 자체로 미술사이자 삶이지만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해왔다. ‘광고로 읽는 미술사’(2016)는 그런 광고들의 권리 찾기를 주장하며 나왔다. 책에 수록된 이집트의 한 대형 나이트클럽 광고도 흥미롭다. ‘No music no life’라는 카피와 함께 사용된 이미지는 트로이 전쟁 당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들을 표현한 ‘라오콘 군상’이다. ‘무언가를 알리고 팔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난 광고가 잘 사용하지 않는 끔찍한 장면이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복잡하게 돌아가는 이집트 정세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 싶다. 광고 속 인물들은 뱀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현실 사회에서 ‘에라 모르겠다 춤이나 추자’는 처절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책은 광고가 차용한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독자가 미술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독자는 동시에 미술 작품이 탄생한 당대의 삶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작품 소개가 거의 없어 “우리 조상의 삶도 알고 싶어요”라며 서운해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 출간된 ‘조선의 아트저널리스트 김홍도’(2016) 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 '새참'. 특유의 익살스러운 묘사로 유명한 김홍도의 그림은 사실 원근법이나 구도 등에서도 완성도가 높다. 인물 표현은 익살스럽지만 과하지 않고 개 한 마리 묘사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김홍도의 그림은 백성의 삶을 정교하게 표현해 당시 정조의 정치에 지표가 됐다. 김홍도는 화가면서 동시에 백성의 실상을 알아야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한 왕의 기록자였던 셈이다. 왕의 이상정치를 가능케 하는 기록자였지만 정작 김홍도 본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김홍도에 대한 기록은 단 세 줄뿐이고, 당시 최고 대우를 받은 자비대령화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그러니 그 동안 김홍도에 대한 접근은 단편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김홍도가 주변 인물과 ‘했을 법한’ 대화를 통해 그를 풀어낸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오히려 그의 삶을 깊이 있게 살펴 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두 권의 책은 수많은 이미지들을 소개한다. 다루는 대상도 다르고 접근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두 책이 공유하는 메시지 하나는 확실하다. 그림을 읽어라, 세상이 보일지니! 신은별기자  
189    땡!~ 희망을 위하여... 댓글:  조회:2310  추천:0  2016-04-08
희망은 날마다 쑥쑥   신속한 대처는 삶의 지혜 마음의 준비는 위기의 바상약이다. 실눈 흘기면 도끼눈이 오고 도끼눈도 안으면 승리자가 된다.   실수는 거울 반추하면 달콤한 새맛이 우러난다.   실수의 농담 한마디가 친구간에 다툼의 원인이 된다.   실수를 반성하는 것은 더 잘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실오라기의 배려를 기억해 주는 이 있다면 죽어도 그 죽엄은 훌륭한 주검이다.   실천 없는 지식은 무료자 무료자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실천은 꿈으로 가는 징검다리 한 발 한 발 내딛어 뭍에 꿈을 심는다.   실패 그 까달의 연유는 주춧돌 묻음을 방심했기 때문이다.   실패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성공의 디딤돌이며 창작을 만드는 연장이다.   실패가 준 교훈은 허약한 지체에 지혜 심는 일이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만큼 확실한 체험의 산 기술이다.   실패하고도 좌절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의지의 향기다.   실패하지 않는 안목은 섬세한 설계와 피나는 근면이다.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 만큼 크고 모래주머니의 훈련은 승리 켜기 위함이다.
188    삶과 시련과 詩와 그리고 詩人과... 댓글:  조회:2322  추천:0  2016-04-05
이옥천의 "삶의 양식" 중에서       시련은 적토마의 채찍 그 겨루기는 준령에 핀 꽃이다. 시련은 삶의 디딤돌 희망봉 오르는 사다리다. 시련은 지혜를 잉태하고 지혜는 개간하는 삽이요 괭이다. 시련은 다지는 단금질 맞으면 맞을수록 근력이 생긴다. 상사화 잎 시련은 대책을 숙고하고 삶의 유연성을 기르는 도구다. 돌단풍 시련의 아픔이 클수록 피는 꽃의 내는 향기롭다. 시련이 클수록 성장판이 크고 성장판이 클수록 이타나 배려가 깊다. 시야 넓힐수록 내일을 걷는 장족에 근력이 붙는다.   詩는 야크에 소금 싣고 장정 길섶에 물도 그늘도 만나는 일이다. 시인이 캐는 노다지는 몸소 문지리고비벼 버무린 진주다. 시인의 눈에는 꽃은 아픔이고 향기를 향기로 느끼면 시인이 아니다. 詩作한다는 것은 사고가 만들어낸 선물이다.   시장이 반찬이듯이 고통 속에서 피는 맛은 더 값지고 짙다. 식탁의 얼굴은 주부의 얼굴 내 집 화평은 가장의 미소에서 나온다. 보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옥천 찍고 씀
187    벚꽃 中 수양벚꽃 아시는가ㅠ?... 댓글:  조회:2698  추천:0  2016-04-04
      언제부터인지 양재천에 수양벚꽃이 자리를 잡더니 이제는 제법 볼만해졌다.                                                               ...   오늘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86    입과 그림과 그리고 자연과... 댓글:  조회:2307  추천:0  2016-04-03
[ 2016년 04월 02일 07시 26분 ]     캐나다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Andrea Reed는 인스타그램에서 한창 인기몰이ㅡ                                     [ 2016년 03월 30일 10시 50분 ]                
185    땡!~ 무궁무진한 그림의 세계와 동화세계 댓글:  조회:2538  추천:0  2016-03-26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인민망 한국어판 3월 18일] 이 이스라엘의 눈 화장 전문 시각예술가Tal Pegel에 관한 이야기를 보도했다. 그녀는 영화나 동화 속 이야기에서 얻은 영감에 촬영 및 디자인 기술을 결합하고, 자신의 눈꺼풀을 도화지 삼아 고전 동화 속 주인공이나 장면을 재현해 낸다.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 2016년 03월 18일 08시 44분 ]    
184    땡!~ 물을 사서 먹더니 인젠 공기를 사서 마실 때 인가???... 댓글:  조회:2483  추천:0  2016-03-26
[ 2016년 03월 21일 08시 32분 ]         광동성 청원(广东 清远), 시골마을 산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공기를 팔고 있다. 비닐봉투에 넣은 공기는 한 봉투에 10~30원. (공기를 사서 마실 때가 되다?...)...
183    [눈 즐겁게 쉬우기]- 하늘을 날고 있는 공작새 댓글:  조회:2268  추천:0  2016-03-19
[ 2016년 03월 10일 07시 26분 ]     하늘을 날으는 공작새
182    [눈 즐겁게 쉬우기]- 자연의 거대한 美 댓글:  조회:2015  추천:0  2016-03-19
[ 2016년 03월 15일 11시 10분 ]     貴州省 安順市 龍宮관광지역의 8만 제고메터의 유채꽃밭에 콩을 심는 방식으로 만든 거대한 ‘용(龍)’자가 모습, 황금빛 들판에 화려한 수를 놓은듯한 대자연의 풍경...
181    추상미술의 아버지 - 러시아 화가 칸딘스키 댓글:  조회:6079  추천:0  2016-03-18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러시아 태생의 화가.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청기사파의 창시자로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어냈다. 미술의 정신적인 가치와 색채에 대한 탐구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리며, 바우하우스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는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인 1896년 독일로 건너가 아즈베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900년에 뮌헨아카데미에서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에게 사사하며 훗날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동료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를 만났다.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 전시협회 및 미술학교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nter)를 만나 이후 몇 년 동안 그녀와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함께 작품 활동을 했다. 1908년 무르나우로 거처를 옮긴 칸딘스키는 그곳에서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다. 초기에 그는 화려한 색채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들을 그렸으나, 점차 구상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과 상관없이 형태와 색채, 선들 속에서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음악과 철학, 근대미술과 추상작업에 대한 사상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9년 그는 캔버스를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점과 색띠로 뒤덮음으로써 추상을 탐험했다. 칸딘스키는 1911년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인 ‘청기사파’를 결성했다. 그의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는 청기사파 그룹 탄생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년 동안 이 그룹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민족 계몽을 위한 위원회의 회화분과에서 활동하는 한편, 모스크바 아트워크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구성주의에 대해 연구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독일로 돌아왔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은 수학적으로 제한된 엄격한 형태가 지배하게 되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인 원은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색채 사용을 멈춘 적은 없었다. 그는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강제로 폐쇄하자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프랑스 뇌이쉬르센에서 78년의 생을 마감했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음악적이고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이루어냈다. 그는 색채와 선, 면 등 순수한 조형요소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으며, 형태와 색채가 사물의 겉모습을 그려내기보다 작가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각에서 그는 추상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음악에 비유해 설명했다. “색채는 건반, 눈은 공이,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하얀 테두리가 있는 繪畵(회화)를 위한 밑그림 뮌헨의 신 예술가 동맹으로부터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 (靑騎士)에 이르는 시기, 즉 1909년부터 1914년까지에 칸딘스키는 한 작품마다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한 가장 충실한 시기에 해당하며, 추상적 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갔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규칙적인 선과 형태와 색채가 서로 응집과 확산이 교감하는 상황을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의 전개는 내적 감동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오토매틱한 표출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전체의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점이 커다란 특색의 하나이다. 이러한 특색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앙포르멜이라든가 액션 페인팅 등 추상 표현주의가 대두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선구자적 성격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검은 곡선이 있는...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 무대상(無對象)의 추상이 확고하게 성립된 것을 보여준 역작이다. 불규칙적인 작고 큰 선이 교차하면서 불가사의한 형을 안고 있으며, 색채들은 형체를 안고 울려 퍼져 나오고 있다. 화면 구성의 중심은 명제가 말해 주듯이 검은 곡선이다. 칸딘스키는 곡선에 관하여 '점, 선, 면'에서 '임의의 곡선에 주어진 자유 자재인 악센트 한계는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하는 것. 선에 대해 서도 일체가 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점의 경우와 다름이 없다. 절대적인 것도 상대적인 것에 의해서, 똑똑하지도 않고 또한 울림이 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계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이론상으로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제상으로 훨씬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흥 '30'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어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푸가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은 뭐라고 해도 색 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無對 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밝은 바탕 위의 형상 1914년 7월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칸딘스키는 러시아 사람이므로 뮌헨을 떠나야 했다. 뮌헨은 그 의 예술적 자기 발견의 실현과 예술의 성숙과 그의 일생에 하나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도시였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실은 가혹한 충격이었다. 상심(傷 心)한 칸딘스키는 취리히를 거쳐 16년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가브리엘 뮌터와도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화풍도 점점 정적(靜的)으로 변화하고 색채는 더 어두워져 갔다. 이 시기의 칸딘스키는 제작이 적었으나, 이 작품은 몇 점 안 되는 비교적 큰 작 품이다. 불규칙적인 커다란 형상 속에 가두어 넣은 색과 형태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이 무렵의 작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 우수와 상심이 화면에 깃들고 있다.        빨간 달걀 모양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 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파란 활 모양 칸딘스키는 1921년에 모스크바에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등용된 미술가는 말레비치, 타트린, 페브스너, 가보 등 대부분이 구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메카닉한 예술 이론에 비판적인 칸딘스키는 고립하게 되었으며, 소련 예술은 1920년에 페브스너·가보 형제가 '리얼리즘 선언'을 한 것을 고비로 하여 급속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지배로 기울어졌다. 환멸을 느낀 칸딘스키는 21년 12월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브스너·가보 형제와의 교류는 칸딘스키 예술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성적인 요소가 칸딘스키 예술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계기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평면성을 해석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검은 綱版(강판)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윌터 그로피우스는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했다. '모든 예술적 창작의 종합'을 목표로 삼고 그로피우스가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예술가를 교수로 초빙한 것은 유명하지만, 칸딘스키도 '공간과 씨름하는 일, 즉 건축과 협력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바우하우스에 부임하였을 때 나는 이 꿈이 꼭 실현되리라 믿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 생활에 큰 기대와 만족을 가지며 가장 결실이 많은 바우하우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3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개최된 전람회 출품작으로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명확한 윤곽을 갖는 것이 늘고 사각형의 선이 교차한 그물 같은 것이 강조되어 기하학적인 요소가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검은 정방형의 안에서 1917년 니나와 재혼한 칸딘스키는 바이마르에 자리를 잡은 후에 그제서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어 창작 의욕은 고조되었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직선과 원을 기본적인 형태로 하고 조형 단위를 한층 더 승화시키고 공간을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직선과 곡선, 예각과 둔각, 원 등 거의 기하학적인 요소만이 밝은 배경 위에 떠돌아 다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점, 면, 선'의 한 구절에 각(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 가지 각은 저마다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훌륭하게 도면적으로 번역한다. 1. 예각(銳角)-내면의 상면의 날카로움과 극도의 능동성. 2. 직각(直角)-노련한 완성(예술적 구상화) 때의 냉정함과 감정의 억제. 3. 둔각(鈍角)-제작을 완성한 후의 불만 스런 감정과 무력감.'          원 속의 원 원에 의한 구성을 탐구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여러 가지의 원을 들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개시켜 보고 있다. 원 그 자체가 기본적 모티브가 되어 화면 중심에 집중하고 교차, 중단 등으로 '4차원 공간' 즉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은 끝내 각양 각색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변해 가며 점과 선과 원의 조합, 크기를 달리하는 원의 병치, 색채를 달리하는 크고 작은 원의 중첩, 이 중 어느 것인가가 원이 아닌 무엇인가를 여기에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의 세계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곡예사의 공 타기나, 가볍게 떠 있는 애드벌룬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공 위성까지도 연상케 하면서 그 빛나고 선명한 화면은 우주 공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노랑=빨강=파랑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써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데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단단하고 부드러움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앞 끝의 위에 높은 이상을 내세우고 발족한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운동은 바이마르의 보수적인 기풍과 맞지 않아, 데사우 시의 호의로 바우하우스는 1925년 4월에 데사우로 옮겼다. 칸딘스키 부부는 데사우에서 파울 클레 가족들과 이웃에 살았으며,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충실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가 기능 주의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예술 창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중시한 칸딘스키는 끝까지 그의 예술 주장을 밀고 나갔다. 학생들은 칸딘스키가 벽화, 클레가 스텐인드 글라스를 담당한 이외에 1주일에 한 번씩 연 자유화 학급에 참가하였다. 이 작품은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애드벌룬을 지상에 강한 선으로 매고 있는 듯한 중력과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풀이된다.        여러 개의 원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다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것 같은 다리와 그 위의 삼각형도 인체인 것처럼 연상케 하고 있으나, 연상 작용을 유발 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일체를 조형적 해석으로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추상 예술은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추상 회화는 자연의 껍데기는 버리지만 그 법칙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우주적 법칙과 결부하고 또 그것을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우에 말입니다-자연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대상을 사용하는 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답니다. 절대로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점·선·면》등의 저술도 남겼다. Colorful Ensemble (738x550pix,, 96kb)   96kb)  Nymphenburg  (1904, 24x32cm; 904x1275pix, 920kb _ ZOOM to 1704x2403pix, 3420kb,  and admire the texture of the canvas, bare in places,  and which shows through the paint everywhere else,  except in a few spots where the paint is slopped on thickly enough)  Stressed Center (600x1602pix, 467kb) Autumn in Bavaria (1908, 33x45cm)  Improvisation 7 (1910, 131x97cm)  Composition IV (1911, 159x250)  Composition V (1911, (190x275cm)  Composition VI (1913, 195x300cm)  Composition VII (1913, 200x300cm)  Fragment 2 for Composition VII (1913, 88x100cm)  Composition VIII (1923, 140x201cm)  Composition IX (1936, 114x195cm)  Composition X (1939, 130x195cm)  Black Spot I (1912, 100x130cm) 
180    추상파 사진 댓글:  조회:2718  추천:0  2016-03-18
179    추억의 사진 두매 / 끝없는 시공부 댓글:  조회:2751  추천:0  2016-03-01
문학사상사 임홍빈 대표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상(李箱)의 1926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앨범을 최초로 공개했다. 앨범엔 미술실에서 찍은 이상의 사진(위)과 학생들이 졸업을 기념해 한마디씩 적은 글귀들도 있다(아래 사진). 글귀들 오른쪽 위에 ‘李箱’이란 이름과 글귀가 보인다. /  ====================================   - 멸치야! 막걸리야! -  술이 고파 막걸리를 받아 마시면 아주 잘 익은 곡식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더니 금방 한 양재기를 뚝딱 하고 만다   멸치를 몇개 집어 먹고 또 한잔 마셔보니 순간 다가오는 뒷 맛은 역겨운 비린내 그 자체라 멸치 이눔아! 너의 맛이 왜 이리도 형편 없는고   호통치고 째려보고 다시 입맛 다시다 멸치야 막걸리야 미안하구나 니들이 죄가 있더냐 살랑살랑 꼬리치는 혓바닥이 오늘따라 역겹구나.   시 잘 쓰는 법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 손을 계속 움직이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것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 글에 힘이 실리게 된다. 자신의 깊은 자아를 믿게 되면, 이제 그곳에는 글쓰기를 회피하려는 목소리가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습작을 위한 이야깃거리를 묶어 보자 1. 방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성질에 대해 써 보자. 10분, 15분, 30분, 시간을 정해 놓고 멈추지 말고 계속 적어가라. 2. '기억이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만약 막히면 '기억이 난다'라는 첫 구절로 다시 돌아가 계속 적어보라. 3.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아주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을 하나 골라서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적어보라. 다음에는 같은 것을 두고 싫어하는 시각으로 새롭게 써보라. 그런 다음 이번에는 완전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글을 써보라. 4. 한 가지 색만을 생각하며 15분 동안 산책해 보자. 산책하는 동안 주변의 자연과 사물에서 그 색을 발견할 수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자. 그리고 이제 노트를 펼치고 15분 동안 적어보라. 5. 오늘 아침 당신의 모습을 적어 보라. 아침 식사로 뭘 먹었는지, 잠에서 깨어날 때 기분이 어땠는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무엇을 보았는지 등등 가능한 구체적으로 서술하라. 6. 당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를 시각화시켜 보자. 그곳은 주로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는가?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가? 또 어떤 냄새가 나는가? 7. '떠남'에 대해 써보자. 내용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며 단지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8. 당신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9.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10. 당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써보라. 11.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묘사해 보라. 12.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적어 보라. 모호하고 추상적인 표현은 금물이다. 실제로 있는 그대로 적어라. 솔직하고 상세하게 접근해야 한다.(수영하기, 하늘에 떠있는 별, 당신이 경험했던 가장 무서웠던 일, 초록빛으로 기억되는 장소, 性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된 동기 혹은 최초의 성 경험, 신의 존재나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았던 개인적 체험, 당신의 인생을 바꾼 책이나 문구, 육체가 가진 한계와 인내, 당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인물) 13. 시집 한 권을 꺼낸다. 아무 데나 책장을 열고, 마음에 드는 한 줄을 골라 적은 다음, 거기서부터 계속 이어서 글을 써보자. 쓰다가 막히면 첫 줄을 다시 적은 다음 새로 이어서 쓴다. 다시 쓰는 글은 좀전에 썼던 글과 완전히 방향이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써본다. 14. 당신이 동물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어떤 동물인가? 나태함과의 싸움 텅 빈 노트 또한 에고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당신 속에서 싸움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싸우도록 내버려 두라.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회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편집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라 만약 당신이 열심히 창조적 목소리를 내려는데 편집자가 성가시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작업을 진행시키기 힘들다면 편집자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를 한번 적어보라. 편집자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편집자를 무시해 버리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바로 당신 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만일 내가 겁을 낸다면, 내가 쓰는 글도 왜곡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 모든 것을 항상 처음 대하는 기분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당신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라. 내면의 잠재능력에 가 닿아라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목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곧장 나가라.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시인과 시는 다르다 우리가 쓰는 글은 순간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당신은 좋은 시를 쓰고, 그 시에서 떠나라. 시에 들어가 있는 단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 몸을 빌어 밖으로 표출되었던 '위대한 순간'이다. 논리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수용하라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수용적이어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다른 하나를 볼 수 있는 폭넓고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은유는 이러한 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종교적이다. 글쓰기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아니다 글을 쓸 때 모든 것을 풀어주라. 글쓰기는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강박증의 힘을 이용하라 작가란 종국에는 자신의 강박증을 쓰게 되어있다.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강박증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라. 창작에 대한 강박증은 무언가 가치있는 길을 찾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일종의 회피이고 게으름이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 우리의 삶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일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한 모금의 물, 식탁에 묻어있는 커피 얼룩에 대해서까지 "그래!"하고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부묘사는 우리가 만나는 세상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는 것과 같다. 케이크를 구우려면 당신 마음에서 나오는 열과 에너지를 첨가하라. 강에 대해 쓰고 있다면 그 강에 온몸을 적시라.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말라. 열을 가하다 중단한다면 그것은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글쓰기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주고, 많이 써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파리와 결혼하지 말라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마음 속에 무수한 길들이 열리는 법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파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 원한다면 파리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파리와 결혼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기 체면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작품에 대해 보내는 칭찬에 기대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당신의 깊은 꿈은 무엇인가? 소망들을 글로 적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가운데에 그 소망을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꿈은 우리가 삶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때론 문장 구조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사고 방식은 문장 구조에 맞추어져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도 그 안에서 제한된다. 당신이 결국에는 인간이 만든 언어 체계 속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신과 이 세상을 이루고 지탱하며 관통하고 아우르는 그 근원적인 큰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말하지 말고 보여달라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작가라는 사실을 잊고 비판적인 편집자 행세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꽃이 아니라 그 꽃의 이름을 불러주라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 사물의 존엄성을 지켜주라.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꽃' 대신 '제라늄'을 말할 때 당신은 현재 속으로 더 깊게 뚫고 들어가게 된다. 평범과 비범 우리는 세부묘사를 대단하지 않게 여기거나 개미나 파리같은 것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세부묘사와 우주는 서로를 변화시켜 준다.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작가는 어떤 사건에 대해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를 원한다.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사랑하게 되는 능력이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흔들어 깨운다. 그들도 훌륭하고 나도 훌륭하다.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받는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버려라. 동물적인 감각으로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길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 이유인 것이다.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끼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정맥에서부터 곧장 펜을 통해 종이 위에 토해 놓게 만들라. 제일 좋은 글은 당신의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실린 글이다. 자기 마음을 믿어라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의 사고 속에 똑바로 서 있는 훈련이 따라야 한다. 자신의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변덕스러운 마음을 길들이는 법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이 작업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이 백 가지도 넘게 나를 유혹하는 것을 항상 느낀다. 마음은 항상 일과 집중력에 대해 저항하려 든다. '오, 그건 그냥 게으름일 뿐입니다. 어서 가서 일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오히려 당신을 혼자가 될 수 있게 해준다. 성, 그 거창한 주제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긴장을 풀어야 한다. 화제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당신과 그 화제와의 관계를 발견하라.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어를 다루기가 벅차다면, 이렇게 해보라. * 무엇이 당신 몸을 뜨겁게 만드는가? * 성과 관련된 과일 이름을 아는대로 모두 적어보라. *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먹는 음식은 무엇인가? * 당신의 신체 중에서 가장 성적인 곳은 어디인가? * 당신이 맨 처음 성애를 느꼈던 기억은? 글쓰기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렇다. 그냥 쓰라. "그래! 좋아!"라고 외치고, 정신을 흔들어 깨우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 우리가 글쓰기의 심장 안에 있다면 장소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멀리 당신이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최고의 글을 쓰고 있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낀다. 충분히 자신을 밀고 나갔고 철저하게 에고가 깨졌다고 느낄 때조차도 조금 더 앞으로 밀고 나가라. 인생에 대한 연민 우리에게 두려움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지와 암흑의 장소에서 출발한 글쓰기가 결국에는 우리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사물은 그냥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글을 쓰기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라. 그러니 계속 쓰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또는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라고 묻되, 깊이 생각하지는 말라. 작가로서 살아남는 길 작가로서는 강하고 용감하지만 한 인간으로 돌아오면 한없이 무기력하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위대한 사랑과 생활인으로서 우리 등에 달라붙은 불명예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종이에는 멋진 시를 적지만 자기의 삶에는 침을 뱉거나, 자동차를 저주하거나,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매도하지 말라. 책상에서 시를 치우고 부엌으로 돌아가라.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라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즉흥 글쓰기 창구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방랑을 위해 들판으로 나가라 한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버린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당신이 말을 겁내는 사람이라면, 말 한 마리를 사서 말과 친구가 되어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시간이 작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목숨 전체를 기꺼이 그 글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까지 기다리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있는 존재를 향해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심장 전체로 글을 쓰라. 종이에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인생 전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예정되어진 운명이 글쓰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전술의 변화와 상관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글쓰기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외로움을 이용하라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더 큰 자유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라 당신이 내면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당신은 당신으로 된다. 당신이 집에 가는 이유는,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뿌리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뿌리가 묻힌 곳에서 발견되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망치려 한다. 단 한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면서도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독자에게 당신 심장 더 깊은 속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어 주라. 사무라이가 되어 글을 쓰라 만약 그 시에 한 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그 한 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버려도 좋다. 우리의 글이 계속 타들어가 환한 빛을 내는 지점이 결국 하나의 시와 산문이 된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 다시 읽기와 고쳐 쓰기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전사,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   독자를 위한 시 읽기 1) 시란 무엇인가? 시를 읽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문제가 있다.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시 독자들이 시의 정체를 이미 다 밝혀내어 터득하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 알고 싶지 않아서 일까?: 아마도 정확한 대답을 도출해내지 못해서 일 것이다. 시는 정답이 없다 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시인이나 시 연구가들이 시에 대한 각각 자기 나름의 개성 있는 정의를 피력해 왔다. 그러나 그 정의가 시의 얼굴에 각양각색으로 색칠을 해 놓고 있어 어느 한 지점에 통일시키기가 어렵다. 그만큼 통일한 한 개의 해답을 산출해 낼수 있을 만큼 시가 단순하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다. 아주 다양한 무한다면체 또는 철면 조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개의 정확한 해답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시의 특성이다. 동서양의 시의 원조로 알려진 두 사람의 시의 정의를 보자. 먼저 동양의 대 석학인 공자(孔子)는 시를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에 사투함이 없는 것으로 해석했으며 서양의 대 철학자 아리스도텔레스(Atistoteles)는 시를 운율적 언어에 의한 모방 즉 사물의 형상을 운율적 언어에 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보면 동양의 공자는 시의 정신면에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의 기법면에서 치우친 인상이 짙다. 따라서 동양의 그것이 관념적이라면 서양의 그것은 실제적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람만의 해석을 놓고 볼 때도 보는 관점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열사람 의 해석은 열 가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해답은 아니다. 다면체 시의 어느 일면의 해명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면체 시 전면을 해명하는 정의가 나오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일 수 밖에 없다. 시는 시대와 개인의 시각에 따라 편차를 보일뿐 아니라 그 다양한 성질과 요소가 모두 인간의 체험을 담아내는 그릇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시는 인간에 대한 천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의 제재가 자연이든 우주이든 결국 인간 문제에 귀결되며 인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수 많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시인들은 인간존재의 근원인 삶을 탐색하게 되면 그러한 과정 속에 시는 삶을 반영하는 도구로 원용된다. 따라서 시는 인간에게 카다르시스를 제공해야 하며 이러한 정화적용은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고 감동과 진실을 공급하며 상상력을 통한 추경험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에서 시는 궁극적으로 보다 향상된 삶보다 풍요로운 인생을 위한 양식이며 토양이며 자극제가 된다. 그러므로 시가 진정한 생명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삶 속에 표출되는 인간의 진실을 포착하는데 있다. 말하자면 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나아가 카다르시스를 통해 성숙된 의식의 소유자로 완성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는 절제된 언어 속에 인간의 진실을 함축 시켜야 하므로 흔히 시인을 언어의 발견자, 또는 창조가로 지칭한다. 2) 시의 형태 무한다면체의 시는 논작에 따라 여러 갈래의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운율적인 면 내용적인 면 시대적인 면 등으로 대변 될 수 있다. 운율적인 면에서는 정형시, 자유시로 구분할 수 있으며 내용적인 면을 기준으로 대변한다면 서정시, 서사시로 그리고 시대를 원칙4으로 나눌 때는 고대, 근대, 현대등으로 대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고정불변의(관례에 따른) 원칙은 아니다. 구분자에 따라 얼마든지 상이하게 또는 세부적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러나 팔자가 섬세하게 세분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시 읽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혼란스러워 현낙적 세분을 퇴하고 간략하게 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편의상 정형시와 자유시의 형태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가) 정형시 운율을 기반으로 하는 고정된 틀을 갖춘 시를 말한다. 운율은 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요소 중 하나로서 시의 형태미를 이루는 기본 틀이 된다. 이것은 또한 서정시의 기반이 되는 요체이며 언어질서를 제한하는 언어의 율동이다, 정형시의 기반을 이룬 이 운율(음악성)은 고조선 시대의 여성 여옥이 공후라는 악기에 실은 애절한 가락의 노래말로부터 시작된 공무도하가를 출발점으로 삼고 잇다. 이러한 노랫말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형시로 장착이 되었으며 정형시의 자구나 음수율이 일정하게 고정된 것도 노랴 가사에 알맞은 짜임새에 기인한 다고 볼 수 있다. 이 짧은 형태의 정형시는 3 4 4 4, 3 4 4 4, 3 5 4 3 의 자수율을 기본형태로 삼는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기분형태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종창의 초구 3자와 다음의 5자는 지키도록 지키도록 되어있는 것이 시조다. 정형시(시조)의 운율이 오늘날 자유시의 바탕이 되어있다. 자유시의 시행이나 언어배열을 운율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보자들은 정형시를 먼저 익힌 후에 자유시로 가는 것이 운율 훈련을 위해선 자연스런 순서가 될 것이다. 여운과 완결의 면에서 정형시를 능가할 시가 없기 때문이다. (나)자유시 정형시가 전통적인 일정한 형태적 틀에 얽매여 있다면 자유시는 이름 그대로 일정한 형태적 구속에서 벗어난 시를 말한다. 말하자면 외적 형태에 구애 받지 않고 체험내용에 따라 독자적인 형태를 갖게 된다. 즉 정형시가 작은 고정된 형, 고정된 운, 고정된 억양율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시인 각자의 선택에 따라 각자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의 시다. 그러나 시적인 요소를 완벽하게 구비해야 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행이나 연 구 분은 물론 중요한 요소인 운율(내재율)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명의 발달로 인간체험의 폭이 증폭되고 다원화됨에 따라 작은 그릇의 한정된 정형시에 만족하지 못한 시인들이 자유시를 개발해 냈으나 자유시에도 다양한 체험을 완전히 담아 낼 수 없다. 자유시라고 해서 무한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무한히 자유롭고 싶은 사람들로 하여 산문시라는 것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행 연의 구분이나 운율의 구속까지 모두 벗어버린 이름 그대로 가까운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시와 산문 사이의 모호한 위치에 있다. 전혀 시의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시다. 3) 시의 요소 시가 되려면 구유 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이를 자잘하게 세분한다면 역시 삶속에 체험되는 모든 사물에 명칭을 부여하여 열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관례대로 몇 가지 즉 언어, 상상, 비유 등으로 간략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가) 언어 시는 말의 예술이며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라고도 한다. 그만큼 언어가 시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에 의해 죽은 시 살아 있는 시로 가름 된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시속에서 일상어와 시어를 구분하도 있다. 그러나 언어가 처음부터 시어와 일상어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모두가 일상어이고 시에 쓰이는 언어도 일상어로 적조 된다. 따라서 그 일상어는 하나 하나 명확한 독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 속에 도입된 일상어, 그 자체로는 시적가치를 말하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문맥사이에 놓여서 특수한 작용을 하기 위해 다른 언어와 연결되어 특수한 수법으로 특수하게 사용 될 때 비로소 시어로 전이되어 특수한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일상어를 시어화 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독자들은 시어화 된 언어를 통해 시인의 체험을 추경화하게 된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시 읽기 에 있어 시어로 전이 되기 이전의 일상적 의미, 즉 낱말의 외연적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나서 전이된 시어 속의 효과 즉 상징성, 암시성 또는 함축성(내포적 의미)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어로 전이된 언어(시)를 읽을 때 가장 두드러진 현상 즉 표현이 매우 구체적이며 미적기능을 지향하고 있으며 논리적 관계가 표면화되지 않고 표현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 쌓인 비 울이 풀렸다. 터진 실밥이 날리다가 와르르 치마폭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땅 위의 무덤 같은 내 초막을 덮쳤다 졸시 < 봄꿈.1호> 중에서 올 이란 낱말은 일상적으로 실이나 줄의 가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을 일상어로 읽으려면 이 시에선 합리성이 없다. 비는 실이나 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 대신에 빗방울 이라고 쓴다면 합리성은 있어도 암시성은 없어진다. 따라서 올이 풀렸다 라든가 터진 실밥이 날리다가 와르르 치마폭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라는 표현은 폭우가 쏟아지는 현상을 묘사한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고뇌 라는 일상어 대신 비 라는 상징성을 거느린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미적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 심상(Image) 복합 구조물인 시의 몇 가지 요소 중 비교적 비중이 큰 것이 심상이다. 심상을 영상(暎像) 또는 사상(寫像)이라고도 하며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감각적 체험을 해석하는데 사용된 용어 로 풀이 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이 전용한 이래, 문학에서는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로 해석하고 있다. 가령, 백합꽃 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 의식 속에 하얀 꽃송이가 감각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백합꽃 이라는 이 언어가 심삼 곧 이미지인 셈이다. 문학용어 사전에도 이미지를 어떤 사물을 감각적으로 정신 속에 재생되도록 자극하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구상어 는 모두 이미지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두 갈래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포괄적 개념적 개념과 협의적 개념이 그것이다. 포괄적 개념은 모든 대상의 윤곽을 의식 속에 환기시키는 것을 말하고 협의적 개념은 시각적 대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협의적 개념의 그것은 눈썹 이라는 언어는 이미지가 될 수 없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달 같은 눈썹 한다면 이미지가 된다. 눈썹이 반달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체험을 재생시키는 언어는 모두 이미지에 속하지만, 비유적 표현이 시로써는 생동감이 지배하는 이미지에 와 있다. 그것은 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지능도 듣기 보다 보기 쪽으로 발달한 연유로 보인다. 그러므로 보여주는 이미지가 현대시의 육체라 할만 하다. 그리고 보여주는 시는 감각적 체험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가령 비가 온다 라고 하면 이미지가 없는 사실기록의 직접진술에 불과하다. 비가 어떻게 오는지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집 전체를 차지하고도 배가 고픈/ 비가/ 사방으로 갈기를 뻗어/ 떠 내 려오는 비명을 걷어 감키고도 배가 고픈/ 비가/ 등줄기를 치켜들고 바람이 되어 달린다// 라고 한다면 폭우가 쏟아지는 현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시는 직접진술을 피하고 그림을 그려 보여주듯하는 묘사로 일관 시켜야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A사물을 끝까지 A사물로 끌고 가는 것보다 B사물로 바꿔버리는 쪽이 매력을 더한다. 여기서는 비가 바람으로 전이된 사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재구성이나 전이 시키지 않으면 사실의 기록 이 될 수 밖에 없다. 사실의 기록은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재구성과 전이 는 시의 중요한 수사적 기능이다. 여기서 다양한 이미지의 기능을 요약정리 하자면 구체적 묘사를 위한 사물성 환상적 기능 감각적 호소력 개념, 관념, 상사의 산물화 등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지만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다) 비유 우리의 언어는 한정적인데 반해 사물의 종류는 무한정적이다. 게다가 사물은 모두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개성을 제대로 나타내려면 비유법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 비유란 비교를 통해서 사물의 특성을 드러내는 수사의 일종이다. 다시 말하면 비유는 한정적인 언어가 비유에 의해 언어의 한계성을 초월하여 무한한 의미를 표현하는 수사법이라 할 수 있으며 시에서는 중요한 기능으로 꼽힌다. 이러한 방법은 간접표현이기 때문에 매우 암시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사물을 표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알고있는 기지의 사물을(객관적 상관물)끌어와서 비교함으로써 미지의 사물을 파악 하게 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유는 비교를 통한 사물해명의 수사법이다. (유의)이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비유의 요소는 본의, 유의, 유사성, 이질성 등이며 본의, 유의가 유사성, 이질성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비유의 사명은 독특한 인식과 새로운 발전을 기성품인 언어를 가지고 비교를 통해 의미의 변화 또는 언어전이를 모색함으로써 새로움을 획득하는 데에 있다. 또한 비유에는 직유, 은유, 제유, 환유, 인유, 의성어, 의태어, 의인법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은유다. (라)직유 사상(寫像)을 선명히 드러내는 강의적 효과가 있어 명유라고도 하는 이 직유는 유사하지 않은 두 개의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의 언술을 말한다. 이러한 형식은 비교하는 사물과 비교되는 사물이 처럼, 마냥, 같이, 듯이, 만큼, 보다 등이 비교조사에 의해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되는 경우이다. 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비유의 네 요소가 모두 표현화 되며 또한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직유의 종류는 기술적 직유(단일, 확장)와 강의적 직유가 있으며 구성에 있어서는 대체로 3단계의 구성법을 지니고 있다. 그 1단계는 무덤같은 초막 처럼 원관념, 보조관념이 한 단어로 결합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2단계는 바아뒤 점같은 나를 싸악, 쓸어 줘며, / 비가 땅끝으로 가는 중이다, 와 같이 한 문장으로 결합되는 경우이고 3단계는 기둥과 함께 나둥그러져/ 머리에 대못으로 박히는 비의 부리를 / 두 주먹으로 짓 으깼지만 / 머리칼 하난 남기지 않고 / 벌초나 하듯 싸악. 쓸어 쥐며 / 바다 위 점 같은 나를 싸악 쓸어 줘며 / 비가 땅끝으로 가는 중이다, // 와 같이 한 연으로 이뤄지는 경우이다. 따라서 비유는 비교하는 두 사물이 동직성이기 보다 이질성 속의 동질성을 발견하여 연결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다. (마)은유 메타퍼(metaphor)라고도 말하는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연결이 없이 바로 직결하는 수사법이다. 그러므로 암시성이 강하며 암유(闇喩), 간유(肝油)라고도 한다. 그것은 비유의 요소 중 원관념, 보조관념만 밖으로 드러나고 이질성, 유사성은 숨겨져 있기 때문에 매우 함축적이다, 따라서 현대사에서 압도적으로 쓰이는 가장 비중이 큰 요소인 만큼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비유의 세계를 넓게 열어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원형을 유지하지 않는 것도 비유와 다른 점이다. 그것은 보조관념이 원관념을 다른 의미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3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적이 라고 하며 전이된 언어 속에 함축된 상징적 의미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은유야 말로 독자의 상상력 개발에 기여할 뿐 아니라 시인의 능력을 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전이로 이뤄지는 새로운 의미의 언어는 언제나 1회적이란 점이다. 그 속은 같은 언어를 반복 사용할 땐 아무리 새로운 언어였더라도 낡은 언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제나 예리한 언어감각으로 비유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새롭고 참신한 언어를 계속 창출해 내야 한다. 은유의 종류는 병치, 치환, 확장 등 여러 가지가 있다. 4) 시의 경향 시대변천에 따라 인간의 감수성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인간의 감수성에 따라 시의 흐름도 변화를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의 감수성은 낡은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움을 찾아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메마르고 딱딱한 고전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반대되는 몽환적인 감정의 세계인 낭만주의를 발견해 낸 것이다. 이것은 영접을 지향하는 무한의 세계를 노래하며, 이러한 꿈과 이상이 현실에 실현되지 않을 땐 허무에 빠지게 되고 허무의식으로 탄식과 통곡을 거느린 우울한 정서에 탐닉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이러한 세계에 오래 있지 못한다. 또 다른 세계로 비약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서의 강렬성을 작품 속에 담아내던 낭만주의에서 구성의 강렬성을 강조한 이미지즘 시가 고개를 내밀게 된 것이다. 감정이나 관념 등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사물화 시켜서 사물의 유추에 의해 이미지를 전개 시켜 나가는 방법을 사용한다. 여기서 머물지 않고 시인은 새로운 세계를 시도하게 된다. 인간의 경험은 복잡하고 다원적이며 이러한 다원적인 경험을 우리는 모두 정신 속에 저축하게 되는데, 이런 한 이질적인 여러 경험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예술적 정서로 승화시켜 형이상 시를 만들어 내게 된다. 형이상 시는 상상력이 크게 작용한다. 그것은 형이상적 세계, 즉 영적세계를 탐색하게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현실주의 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실 세계와 대비되는 꿈 과 자동연상 의 세계인 것이다. 현실은 거짓으로 가려져 있어 진실성이 없기 때문에 무가치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떠나 초월적인 우주와 관계를 맺는 4차원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엔 의식적인 논리나 계산이 개입될 수 없으며 완전히 무의식이 이미지를 과감하게 그대로 기술토록 방치하는 자동기술법에 의존한 시다. 그러므로 특수한 인간 정신의 내부를 투사한 시로 볼 수 있다. 이어서 단명하지만, 실험적인 경향의 시도 순환궤도를 스쳐 지나가고 있다. 젊은 계층에 유행되던 포멸, 투사, 해체 등의 유형이 그것이다. 해체 시는 한 때 젊은 시인들을 매료시킨 적이 있다. 이름 그대로 형태의 해체, 언어의 해체, 의식의 해체 등으로 기형적인 시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시 속에 단편적인 스토리를 삽입하는 시 소설 이란 시도 시도되고 있다. 어떻든 시는 시여야 하고 시는 결국 인간탐구 라는 인식에 촛점을 맞추어 읽어야 한다.       시 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시고, 시집이다. 그것도 좋은 시고 시집이어야 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집을 권하고 무조건 필사할 것을 숙제로 내준다. 눈으로 읽는 리듬과 손으로 쓰며 배우는 리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도 신춘문예 당선 전까지 참으로 많은 선배시인들의 시를 옮겨 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시인이 되려는 제일 마지막 관문은 선배들의 좋은 시와 시집이 나에게 시가 무엇이며, 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내 친구 최영철 시인은 내 시집 발문에 나를 ‘타고난 시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 일찍 배운 슬픔으로 감성은 타고 났을지 몰라도 나 역시 ‘만들어진 시인’임을 고백한다. 손에 펜혹이 생기도록 좋은 시를 옮겨 적는 연습을 통해 시를 배웠다. 시인이 되는 교과서는 시인들의 시에 있고, 시집에 모여 있다. 시인은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선배 시인들의 인정을 통해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멀리서 혹은 엉뚱한 곳에서 시인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다. 나는 앞에서 많은 것들이 시인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런 것들 중 제일 마지막에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시다. 시인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라 할지라도 좋은 시를 발표하면 한 번 옮겨 적어보며 그 시의 비밀을 찾으려고 한다. 시인을 꿈꾸거나, 시인인 그대여. 시를 읽자. 시집을 읽자. 그것이 시인을 만들고, 시인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체험적 시창작론 최영철 - 제1장 -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시를 쓰는 데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시를 잘 쓸 수 있다'정도로는 안되고 '나는 시를 잘 쓴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습작시절에는 자기 시의 어줍잖음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의 완벽함에 곧잘 절망한다.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자. 안되면 매일 아침 '나는 정말 미치도록 시를 잘 쓰는 놈이야'하는 자기 최면을 반복해도 좋다.   그러나 자만심은 금물이다. 자신감은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만 필요한 강정제 같은 것이다. 일단 다 쓴 작품에는 일이 끝난 뒤 거시기가 스르르 풀이 죽듯이 기가 죽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긍휼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 출판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대학노트 몇 권 분량의 시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천재시인들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 편을 갈겨 쓰며 집에는 이만한 분량의 작품이 또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떠벌린다. 이런 시인일수록 자기 시가 한국시사를 바꾸어 놓거나 출간만 하면 공전의 대히트를 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다. 자기 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흥에 겨워서 계속 써 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천재시인들에게는 약도 없다. 계속 천재로 착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는 방법뿐이다. 그 천재시인 출판사 문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아, 천재는 외로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자신감은 없고 자만심만 있는 엉터리 시인인지 모른다. 아니 나는 아직 그런 알량한 자만심조차 없다. 쓰기 전이나 쓰고 나서나 내 재능에 대한 의심 때문에 주눅이 든다. 그러나 이런 의심조차도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기나 했을까.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계속 턱걸이하며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힌 것이 '나는 도대체 시를 쓸 재주나 있는 놈인가?'하는 의문이었다. 그때마다 나의 자문자답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했다. 10년을 하면 사법고시라도 붙을 판인데 돈도 명예도 안 되는 시인 자격증 하나 못 따는 걸 보면 글렀구나 싶다가도, 사법고시에 되는 것보다 시인이 되고 싶었으니 이런 초지일관이면 뭐가 되도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란 말의 뜻을, 하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는 능력이라고 새롭게 정의 해 버렸다. 즉, 재능은 그 분야의 특별한 재주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여받는 것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것 때문이라면 추위와 굶주림도 참을 수 있고 멸시와 외로움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것, 그것 이외에는 세상 모든 것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것, 이런 경지가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 부여된 경지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그때는 그랬는데, 재능도 세월 따라 닳아 없어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그 믿음이 조금밖에 없다. 그 시절은 시 때문에 겪는 고통이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 고통이 조금씩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요즘 나는 반성하고 있다.       1.자신의 재능을 추호도 의심해 본 일 없는 천재시인들은 이제 부터 자신의 재능을 열심히 의심하라. 2.자신의 재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 같은 어중개비 시인들 은 매일 아침마다 '나는 시를 너무 미치도록 잘 쓴다'는 최면 을 걸어라. 그 최면이 통하지 않으면 계속 절망하라. 시 때문 에 절망하는 한 당신은 누구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시인 이다.   - 제2장 - 시 창작 강좌 같은 데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씨뿌릴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우선 내가 지독히도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내 체형이 숏다리이기 때문이고, 남에게 시를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할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럽게 '시를 못 쓰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한참 떠들다가 말문이 막힐 대는 수강생 중에 누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린다. '야, 그만해라. 너는 뭐 짜다라 잘 쓰니.' 그러나 나도 할말은 있다. '시는 배우는 게 아닙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엉터립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자기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주워섬기고 나는 단에서 내려온다. 이것이 우둔한 강의를 은폐하는 비법이다. 나는 순전히 혼자서 시를 썼다. 그 흔한 문예반도 백일장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 시 잘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은 적도 없다. 유치한 대로 써 나가다 보니 그런대로 최영철적인 언어와 최영철적인 어법이 자리를 잡았다. 남의 시의 장점을 흉내내고 고운 말을 달달 외우기라도 했다면 내 시가 지금처럼 험악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시 잘 써서 100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시는 몸 전체에서 우러나는 것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소설처럼 작업이 될 수 없다. 시를 잘 쓰려는 노력보다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해 노력하는 게 좋다. 자기 몸 전체가, 생의 편편들이, 웅웅거리는 가슴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게 좋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주로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좋다. 남들이 무수히 쏟아놓은 애찬과 탄식의 언어를 동어 반복할 것이 아니라 많고 많은 시인 중에 '내가 또 있어야 하는'이유를 빨리 찾는 게 좋다. 그것이 자기 것이며 자신이 가장 잘 써낼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주제에 어울리는 것이다. 고상하지도 않으면서 고상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다. 1.시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 라. 그래도 시가 안되면 자기 몸에 이상이 있는 것. 2.시를 알기 전에 자신의 주제부터 알아라. 자기 주체가 성스러 우면 성스러운 시를, 자기 주체가 상스러우면 상스러운 시를.      
178    열번, 100번이상 반복해 그려라... 댓글:  조회:3152  추천:0  2016-02-24
프랑스 화가 -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Germain-Edgar Degas) 1834년 7월 19일 ~ 1917년 9월 29일   "나는 령감, 충동, 흥분을 잘 모른다. 똑같은 주제를 열번, 때론 100번이상 반복해 그린다. 그림에서는 그 어떤 대상도 우연처럼 보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 드가.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주로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주로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고전주의와 사실주의색채를 띠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에 앵그르의 제자인 루이 라모트의 소개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다. 1856년부터 1년 간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의 거장, 특히 기를란다요, 만테냐의 작품을 배우고, 또 니콜라 푸생과 한스 홀바인의 그림도 배웠다. 1865년에 살롱에 《오르레앙 시의 불행》을 출품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였으나 뒤에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872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로 떠나 미국의 역동성을 목격했다. 1873년 파리로 돌아와 인상주의 화가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말년에는 지병인 눈병이 악화되어 시력을 거의 잃는 바람에 주로 조각에 몰두했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 모친의 외도와 불륜을 지켜본 상처가 큰 탓에 여성을 혐오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만다. 초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을 그렸으나 후기 그림은 일상 생활을 하는 그림을 그렸다.       발레리나 그림으로 친숙한 화가, 에드가 드가. 드가의 화폭은 우리의 삶의 발자취를 좇는 것 같아. 현대인들이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마주했을 때 여전히 사색(思索)하게 되는 이유 또한 바로 이 때문일거야. ▲ 발레 수업(1873~1876)_오르세 미술관   드가의 작품에서 오늘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삶에 대한 의미 있는 고민 때문일지도 모른다. 드가의 삶과 그 만의 독특한 인상주의 화풍에 대해 알아본다. 예술, 그대로의 삶을 살다 드가의 삶을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예술’이라 말할 수 있다.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과 무용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의 삶 속에는 항상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함께했다.   그의 초기 화폭에는 주로 오케스트라의 모습이 담겨있는데, 이유는 애당초 그는 발레보다 음악에 더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드가는 바순 연주자인 데지레디오와 친분을 나눴을 뿐만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리며, 오페라 등의 공연에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 관현악단의 연주자들(1870)_오르세 미술관   드가의 초기작인 을 보면 작품의 전면에 연주자들을 배치하고 발레리나의 모습은 배경으로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점차 발레에 관심을 드러낸 건 1870년경부터였다. 부유한 은행가의 장남이었던 드가에게 발레는 사치스러운 취미가 아닌 일상적인 사교활동이었다. 그런 그에게 ‘발레’가 화폭의 모티브가 되었던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 공연의 끝, 무용수 인사하다(1876~1877)_루브르 박물관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드가는 실내에서 주로 작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실내 작업 중심의 그의 화풍이 고전주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드가는 고질병인 녹내장으로 인해 빛이 강한 날에는 눈이 아파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외부적 상황들은 그를 발레리나를 화폭에 담는 대표 작가로 성장시켰고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삶의 이면을 냉소적으로 표현해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 장의 스냅사진을 그리다   드가는 마치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작품에 찰나의 순간을 담았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로 주제를 찾아 그림을 그렸다. 드가에게 19세기 파리라는 도시는 아주 좋은 그림의 소재였다. 오스만 남작이 파리 중심부를 재건하면서 오페라 극장, 연극공연장, 공원, 노상카페가 줄지어 있는 넓은 대로가 생겼다.   ▲ 카페-콩세르 ‘앙바사되르’(1876~1877)_리옹 미술관   드가는 당시 사람들의 순간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예기치 않은 피사체의 움직임이나 무심히 지나쳐 버린 19세기의 일상은 드가의 그림에 천연히 드러난다. 이나 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생기 있는 파리지엔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 모자상점(1897~1886)_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그의 그림이 스냅사진 같은 또 다른 이유는 구도 덕분이다.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그림 구도는 드가가 구현하고자 했던 찰나의 순간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내는 데 일조한다. 그가 사용했던 그림 구도는 한쪽 면에 치우쳐 있거나 심지어 피사체가 잘려져 나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 스타(1876~1877)_루브르 박물관   그의 작품 중 를 보면 일본 목판화와 스냅사진의 영향을 받아 주인공이 화면 중심부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뒤로 젖힌 발레리나의 얼굴과 왼쪽 팔의 극단적인 단축법은 우리를 마치 2층의 관람석에서 직접 피사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 압생트 한 잔(1875~1876)_오르세 미술관   이러한 드가만의 독특한 구도는 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서로 고립되어 있는 두 사람을 대각선으로 응시하는 시점이나 중앙에서 벗어난 곳에 인물을 배치하고 그 사이로 전경에 넓게 트인 빈 공간을 남겨두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러한 구성법은 일본의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를 떠오르게 한다. 실제로 드가는 우키요에 작품의 특이한 각도에서 영감을 얻어 이 같은 구성을 즐겨 사용했다. 파이프를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은 프레임에 의해 잘려나갔는데, 이것 역시 드가 특유의 비전통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무대 뒤의 리얼함을 재현하다   당시 발레는 세련된 예술이라기 보다는 파리신사들의 사교적 장소 격으로 이뤄지는 공연에 불과했다. 때문에 무용수들은 노동자 출신 계급이 대부분이었고, 상류층의 후원을 받아야만 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작품 를 자세히 보면 화폭 전면에 위치한 발레리나의 뒤편으로 검은 양복의 남자가 보인다.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남자는 발레리나의 후원자로 아름다운 발레 공연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드가의 미술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이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주한다. 그가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질감과 따뜻한 색감으로 그림을 그렸음에도 그의 작품이 건조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어딘지 오늘날과 닮아있는 씁쓸한 당시의 삶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 하품하는 세탁부(1884)_오르세 미술관   드가 미술은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자, 현재이다. 드가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그가 살았던 시대상이 온전히 보이는 듯하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러도 드가의 작품들이 여전히 오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색(思索)을 주는 이유는 그의 작품 안에 드러난 사회의 이면 때문일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한 장의 사진이 담듯, 드가가 그려낸 생(生)의 순간들은 감춰지지 않고 그의 작품 안에 오롯이 녹아 있다.                                                
177    그림의 마력에 빠지다... 댓글:  조회:2676  추천:0  2016-02-18
  오르세 미술관에서       살아있는 자, 숨쉬고 있는 자 잠에서 깨어난 자, 새로이 태동하는 자 생동을 시작하는 자, 벌떡 일어나는 자 웃는 자, 미소짓는 자, 웃기는 자 축하하는 자 ,축복받는 자 즐거워하는 자, 기뻐하는 자 맹세하는 자, 부르짖는 자 복종하는 자 ,충성하는 자 싸우는 자, 사랑하는 자 아, 천차만별의 얼굴로 출렁이는 나라.             조르주 쇠라의 '서커스(1891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상주의 작가인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다. 쇠라는 인상주의를 혁신하려는 방법으로 점묘화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화폭에 순색의 점을 계속 찍어나가는 기법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수평과 수직의 정적인 구도였는데, 이 작품에서는 원과 타원 나선 등 곡선의 형태를 많이 보이고 있다. 쇠라는 이 작품을 출품한 전시회 기간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방’(1889) 파리생활에 실증을 느낀 고흐는 1888년 남프랑스 아를로 이사를 한 후 자신이 사용하던 방을 그렸다. 1년 후 그는 두개의 그림을 더 그리는데, 이 작품은 세 번째로 그린 것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동생 테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고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고흐는 들뜬 마음에 방을 정리하면서 ‘고흐의 방’을 그렸는데, 이때 고흐는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고흐는 고갱과 심한 논쟁을 벌이다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까지 이어지고 이들은 결별하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고흐는 자유로운 표현을 선보였으며, 그의 예술은 불안한 삶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 그림에서의 극단적인 필치와 색채는 당시의 고흐의 심리상태가 반영된 것이다. 그는 4년간 650여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가 강렬함이 돋보이는 걸작들이었다. 1890년 7월 27일 반 고흐는 평소처럼 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쐈고 이틀후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 1890년 봄 동생 테오는 잦은 신경발작으로 고생하던 고흐에게 도움을 줄 사람으로 오베르 쉬르우아즈에 있는 폴 가셰라는 의사를 소개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그 의사는 미술품 수집가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였다. 고흐는 처음에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생각이 점차 바귀었고, 이 초상화의 내용처럼 고흐는 그에 개하여 신뢰를 갖게되었다.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도 가셰를 진정한 친구, 새로운 형제, 아버지 등으로 불렀다. 이 그림에서 표현한 것은 고흐가 고갱에게서 바랐지만 얻지 못한 완벽한 친구의 이미지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 쉬르우아즈 성당’ 정신병으로 고생하던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권유로 가셰 박사를 만나러 오베르 쉬르우아즈로 가서 1890년 5월 21일부터 7월 27일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60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 중 18세기의 건물 쉬르우아즈 성당을 그린 것은 이 작품 하나 뿐이다. 이 그림에서도 고흐는 빽빽한 필치로 소용돌이치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자신의 직관에 따라 색채를 선택하고 배합했지만 언제나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완벽하다.     빈센트 반 고흐 '이탈리아 여인(The Italian Woman. 1887)'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27세 때였다. 1886년 2월 하순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그 자신의 것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접하게 된다. 그는 이때까지 인상파 미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인상파 화가들과 고갱 등 동료들이 가르쳐 주자 매우 빠르게 이에 빠져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1888)' ‘어느날 밤 나는 산책을 나갔지.’ 고흐는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깊고 푸른 하늘은, 원래의 짙은 코발트 색 보다 더 깊고 파란 구름들과, 우유빛 길처럼 밝은 구름들이 섞여 무뉘를 이루고 있었다. 별들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맑고 초록빛과 노랑, 하얀빛의 그리고 옅은 핑크 빛을 띄며 다이아몬드 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 1863년 낙선작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나체의 여성과 정장을 한 두 남자를 그린 이색적인 주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다. 마네는 자연광을 생동감 있게 살리기 위해 점심시간인 12시 45분부터 1시 30분 사이에 만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올림피아(1863) 풀밭위의 점심식사로 논란을 일으킨 마네는 또 하나의 인상깊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그보다 더한 비난과 물의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모델이 된 여인은 풀밭위의 점심식사의 모델이었던 빅토린 메랑이었는데, 편안한 자세와 당당한 시선, 적나라한 나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나체로 누워 있는 올랭피아와 그녀에게 배달된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여성, 그리고 침대 모퉁이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흑백의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이 밝고 어두운 색을 적절히 배치하고, 색채를 배합하는 그의 세련미가 돋보인다.     에두아르 마네의 'Berthe Morisot with Bunch of Violets(1872)'     에두아르 마네의 발코니(1869)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사람은 모두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고 표정도 다르다. 꽃장식을 한 머리에 양산을 들고 있는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은 부인의 친구이며 화가인 베르뜨 모리조, 남자는 화가인 기르메이며 어둠속에 서있는 소년은 아들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모나리자'가 있듯이, 오르세가 자랑하는 유명한 밀레의 그림 두점도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밀레가 바르비종에 살면서 농민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만종'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얼마 안되는 이삭을(그것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줍고 있는 농촌의 세 여인의 소박한 삶을 잘 표현한 그림이다. 배경에는 추수를 마치고 마차위와 그 옆에 가득 쌓아 올린 곡식단과 여인들의 초라한 모습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 종’(1857~59) 19세기 프랑스 회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저녁 노을에 물든 들판에서 가난한 농부가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평화로운 농촌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밀레는 저녁 종이 울리자 문득 들판에서 저녁기도를 올리는 순박한 농부들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1916-1919)' 빛의 화가라 불리는 클로드 모네는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을 하나의 커다란 색채로 보고 사물이 갖는 고유의 색채가 아닌, 빛에 따라 변하는색채, 눈에 보이는 색채를 표현하였다. 모네는 팔레트에서 색을 혼합하지 않고 캔버스 위에 필요한 색을 겹쳐 점찍듯 그리는 기법을 사용했다.       클로드 모네의 ‘개양귀비 꽃(1873)’ 인상파라는 이름이 붙게된 모네의 초기 작품으로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다. 붉은 양귀비 꽃이 만발해 있는 넓은 벌판을 한 모자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자는 모네의 부인 까미유(Camille)와 그의 여섯 살 짜리 아들 장(Jea)인데, 붉은 양귀비 꽃밭으로 산책나온 부인과 아들을 그린 것이다. 모네와 까미유는 1865년 화가와 모델이 인연이 되어 연인이 되었다. 그들은 결혼 후 행복하게 살았는데 1879년 까미유는 병으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클로드 모네의 소풍 The Picnic(1865)               폴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1891)' 1891년 4월 폴 고갱은 문명사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하여 원시문명을 간직한 타히티로 떠난다. 타히티의 여인들이라는 이 그림에서는 해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그렸는데, 고갱은 다양한 색상의 의복을 입은채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묘사했다.       폴 고갱 Meal or 바나나(1891)     폴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89-90)'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가난과 무관심이었기 때문에 고갱은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를 등지고 원시문명을 간직한 타이티로 떠난다. 그는 이 그림에서 십자가를 메고 있는 그리스도와 고통받는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오퀴스트 르누아르의 작품들             르누아르의 피아노 앞에 있는 소녀들   르누아르의 Dancing at the Moulin de la Galette, Montmartre(1876) 1877년 인상파 작품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몽마르뜨에 있는 ‘믈랭 드 라 갈레뜨’ 댄스 정원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야외 무도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활기차고 다양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린 초기 인상파의 걸작이다.       세잔느의 그림들 세잔느의 '바구니가 있는 정물화(1895-1900)' 세잔느의 말기 작품으로 그의 대표적인 정물화이다. 1890년대 후반에 그린 6점의 정물화 중 하나로 이 그림들에는 꽃병과 도자기 등 똑같은 악세서리가 등장한다. 의자 위에 냅킨을 깔고 과일 그릇과 과일들을 흩어진 듯 그려 넣었지만 가운데를 중심으로 사물의 배치가 잘 정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잔느 작   세잔느 작   세잔느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1890-5) 세잔느는 모두 5편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연작으로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테이블을 양편에 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데, 포도주 병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세잔느의 자화상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시칠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만년 작품이다. 가시관을 쓰고기둥에 묶인채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모습. 눈물과 핏방울, 밧줄의 그림자와 돌출된 매듭과 같이 극사실주의적이고 클로즈업 기법과 더불어 위를 향한 옆얼굴이 강한 인상을 준다.       Dominique Ingres의 Spring -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1820-56)’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앵그르의 만년작품으로, 여체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곳은 1820년 앵그르가 40세이던 피렌체 였는데, 완성한 곳은 1856년 파리였다.       에드가 드가의 ‘무용수업(1874년)’ ‘발레수업’ 등 무용을 내용으로 한 드가의 작품들 중 대표작인데, 그는 발레의 아름다운 동작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무용가의 스튜디오에서 무용수업을 받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표현하고 있다.       에드가 드가( Edga Degas)의 카페에서(1875-76) 파리의 평범한 카페 한구석에 무표정한 여성과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며 앉아 있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급격한 산업화로 가난한 사람들과 술주정뱅이 등 소외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에두아르 마네의 ‘검은 모자를 쓴 여인(1880-1882) 1879년에서 1882년 사이 마네는 우아한 여인들의 초상화들을 계속 그려 낸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흰색과 회색, 검정색이 조화를 이루며 커다란 검은색 모자를 쓴 아름다운 여인을 묘사하고 있다.     헨리 루소(Henri Rousseau) The Snake Chamber(1907)     Henri De Toulouse-Lautrec의 화장실에 있는 여인 또는 붉은 머리(1896)     오퀴스트 르누아르의 '도시의 무도회' 이 작품은 르누아르가 인상주의에 혁신을 원하며 고전주의로 가는 변환기에 그린 작품이다. 화면구성이나 주제는 인상주의적이나 선의 표현에서는 고전주의로 복귀하고 있다. 그림에 나오는 여인은 당시 미술계에서 유명한 모델이었던 쉬잔 발라동으로 그녀는 많은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가 후에 화가가 되었다. 르노와르의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1892)   오르세 미술관에는 그림 뿐만 아니라 많은 조각작품들도 진열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조각작품들 파리의 로댕 박물관에서 본 '지옥문'이 이곳에도 있는데, 복사본이라 한다.             앙리 루소의 1894년작 '전쟁'(La Guerre)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세관원이었던 루소가 본격적으로 전업화가로 작품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을 때의 작품으로 1894년 앙데팡당전에 출품됐다. 당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코뮌 등 정치적 혼란 상황을 '전쟁'이라는 모티브로 표현한 작품이다.   앙리 루소, 전쟁(La Guerre.1894), 캔버스에 유채, 114x195cm    폴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176    그림과 詩와 과학, 그리고 점묘화 댓글:  조회:5005  추천:0  2016-02-18
 “어떤 사람은 내 그림에서 시(詩)가 보인다고 하지만, 내게 보이는 건 과학뿐이다.” 한평생 과학을 벗 삼아 예술에 빠져 살다간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1859~1891)가 생전에 즐겨 한 말이다. 인상주의 화법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그는 빛의 프리즘을 통해 새어 나오는 작은 색점을 활용한 점묘화 기법으로 유럽 화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쇠라의 점묘화는 화려한 ‘빛의 미학’으로 주목받던 인상주의를 단번에 낡은 장르로 만들어 버렸고, ‘신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알렸다.   1891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물리학을 비롯해 광학, 기하학을 색채 미술에 응용한 신인상주의 화풍의 대표작이다. 쇠라는 이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으나 전시회가 끝나기 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결국 완결하지 못했다. 마상 쇼를 벌이는 여성의 동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관객과 서커스 단원들이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수많은 색점을 찍어 명암과 질감을 살려냈다. 부분이 전체가 되면서도 작은 소재들의 특성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 서로 소통을 꾀한다. 생전에 ‘예술은 하모니’라고 했던 쇠라의 말이 실감 난다.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아니에르의 수욕- 습작(1883) 쇠라는 아니에르의 수욕을 그리기 위해 약 15점의 유채화와 10점 정도의 데생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습작은 완성작과 구도면에선 어느정도 일치하지만 채색을 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모네, 드가와 같은 인상파의 수법이 보이기도 한 이 작품은 현재 영국의 국립 갤러리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아니에르의 수욕(1884) 쇠라가 작가활동 초기에 수많은 데생과 습작을 통해 얻은 완성작입니다. 등장인물이나 각각의 사물들이 빈틈없는 구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림 속 대상들은 정지하고 고요함이 가득한 가운데 오른쪽의 소년만이 뱃고동소리를 내며 정적을 깨고 있습니다. 1884년 심사나 시상이 없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으나 좋은 평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런던 국립 갤러리에 걸려있지요.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 습작 (1884) 인물들이 등장하기 전에 배경에 대해 연구한 습작입니다. 하지만 습작이라 하기엔 너무나 잘 완성된 하나의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완성작을 그리기 위해 전체적인 시각을 설정한 것입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 습작 (1885)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리기 위한 습작 중 하나입니다. 오른쪽 전경만을 따로 그린 습작으로 부인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완성작과 마찬가지로 부인은 원숭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수직의 부인과 모에서 떨어지려는 원숭이의 구도가 안정적입니다.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1886) 너무나도 유명한 쇠라의 대표작입니다. 1886년 8회 인상파전에 출품하여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품입니다. 색채학에 근거하여 순색의 작은 점들을 통해 최초의, 그러나 완벽한 분할묘법에 도달하였습니다. 1884년 부터 2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랑드자트섬에 나가 정경을 스케치하고 아뜰리에에서 그림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퍼레이드 (1888) 가스등이 켜진 세기말의 우울한 밤을 그려냈습니다. 한 겨울 해가 진 후에 가두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커스단의 호객행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가스등 조명아래 설치된 공연장 앞 연주대 위에서 트럼펫과 트롬본을 애련히 불면서 관객을 모으고 있는 정경입니다 이 작품은 수학적 황금비례를 적용했습니다. 포즈 (1888) 가로2.5미터, 세로 2미터의 대작으로 앞서 완성된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가 배경의 벽에 걸려 있는 방이 무대가 된 그림입니다. 왼쪽의 여인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가운데 여인은 포즈를 취하고 오른쪽 여인은 일을 마친 후 스타킹을 신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 여인은 모두 쇠라의 애인 마드레느 노브로크가 각각 다르게 취한 모습입니다. 샤이 춤 (1890) 샤이춤이란 우리가 프랑스하면 떠올리는 캉캉춤을 의미합니다. 쇠라는 1888년 이후에는 서커스나 캉캉춤 같은 도회적인 주제를 추구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로 넘어가면서 쇠라의 점묘는 장식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이렇게 동적인 포즈의 무용수들의 표정이 지극히 정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화장하는 여인 (1890) 쇠라의 애인인 마드레느 노브로크를 그린 작품입니다. 인물의 배경과 분위기가 기묘하게 음악적 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 뒤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곡선의 패턴이 환상적인 패턴을 만들고 있습니다. 왼쪽위에 그려진 꽃의 위치에는 원래 쇠라 자신의 얼굴이 그려졌다가 지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서커스 (1891) 쇠라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원과 나선 등 곡선적인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으며윤곽선도 뚜렷합니다. 주로 수평과 수직적인 균형감각이 곡선적인 것으로 전환된 듯합니다. 쇠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커스 메드라노에 열심히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이 작품이 출품된 전시회가 끝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쇠라는 인상주의를 과학적 원리에 따라 체계화했으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다른 그의 회화 양식은 크게 세 가지로 대표된다. 첫째, 순간을 표현하는 이미지의 차이다. 인상주의의 화가들이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쇠라는 정지된 순간, 곧 영원한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듯한 뚜렷한 형체를 띄고 있다. 둘째, 색채 표현의 차이로, 인상파의 작품이 거칠고 즉흥적인 붓놀림을 통해 순간적인 색채를 표현하는 반면, 쇠라는 보다 과학적인 색채 이론에 근거를 두고 일정한 크기의 분할된 색점으로 채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구도나 인물 표현의 차이이다. 쇠라의 작품이 질서정연한 구도를 통해 구축된 것들이라면, 인상주의 경우는 순간에 스치는 느낌을 그렸기에 질서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1886년을 전후한 신인상주의의 정립은 쇠라에 의한 영향력이 가장 컸다. 결과적으로는 신인상주의가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경향으로 귀착되고 말았지만, 신인상주의라는 용어가 말해 주듯 이 양식은 인상주의를 계승하는 동시에 체계화하는 일에도 일조했다. 세밀한 터치로서 묘사하는 회화 기법의 용어로 ‘점태묘법(點態描法)’의 약어이며, 점묘라고 쓰기도 한다. 쇠라에 의해 사용된 색점의 배치는 점묘의 대표적인 보기이다. 이전까지 회화의 구성 요소로 선이 절대적이었던 관념은 쇠라의 점묘법이 등장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점묘를 하기 위한 기법으로는 점태(點苔)라는 것이 있다. 이는 점을 찍는 기법의 한 가지로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이끼 같은 것을 생략되게 표현하는 방법의 일종이다. 즉, 붓의 끝을 수직으로 내려서 찍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완성된 사물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사물의 윤곽을 만들고 그 내부를 점으로 채우는 과정에서도 사용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정리하거나 악센트를 주는 효과를 낸다.   Georges Seurat(1859~1891)  
175    프랑스 화가, 신인상주의 점묘화 - 예술 하모니 댓글:  조회:4446  추천:0  2016-02-18
프랑스 화가 ㅡ 조르주 피에르 쇠라  (1859년 ~ 1891년) 프랑스의 화가로 신인상주의의 창시자. 파리에서 출생했다. 파리의 에콜 드 보자르의 레만의 교실에서 수학하고 병역을 마친 뒤 슈베루르, 샤를 앙리 등의 광학이론이 계발되어 이를 콘테의 데생과 유화에 적용 해서 수년간의 노력 끝에 시냐크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양식과 수법을 창출했다. 1886년의 제8회의 인상파 전에는 대표작 『그랑자드 섬의 일요일의 오후』를 발표하였다. 인상주의에 엄밀한 과학성, 합리성을 더하 면서, 이후에도『포즈잡는 여자들』(1887~1888,『샤유춤』(1889~1890, 오텔로, 크렐라 대작을 그렸으나 1891년의 앵데팡당전에 『서커스』(1891, 파리 인상파미술관) 를 미완인 채 출품한 후 32세에 급사하였다. 조르주 피에르 쇠라는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도자 역할을 했고 신인상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색채의 적용에 대한 과학적 접근법을 발전시킴으로써 반 고흐나 파블로 피카소 같은 주요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활동 초기에 쇠라는 과학자인 미셸 슈브뢸과 샤를 블랑의 색채 이론을 공부했다. 이 색채 이론들은 색채가 그것을 접하는 관람자에게 일으키는 감정적 의미와 인지, 그리고 광학적 효과에 대한 이해를 주로 다뤘다.쇠라는 외젠 들라크루아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연구하곤 했다. 1879년에 쇠라는 1년간 군복무를 했는데, 이때 연필과 크레용으로 수많은 드로잉을 그렸다. 그는 복무지의 중요한 곳을 그릴때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1883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1884)는 쇠라가 그린 대규모 작품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그가 색채 이론을 실제 작업에 어떻게 적용했으며,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점묘법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보여준다. 시카고에서 사는 특혜중의 하나는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미술관이라 할수 있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관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중의 하나는 죠-지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라 하겠다.누구나 손쉽게 알아 볼수 있는 이 그림의 탁월함은 파리 사람들이 물가 공원 에서 일요일 오후를 즐기는 평화로운 모습을 점묘법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쇠라는 1859년 파리에서 태어나서, 미술 학교를 다닌후 19세기 말 그 쟁쟁한 불란서 인상파 화가들속에서 새로운 미술의 경지를 추구하는 중에 소위 과학적인 점묘 표현법을 연구하여 실험하였다. 이 방법은 모든 색채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 연관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는 것으로, 색채를 팔레트위에서 혼합하는 것이아니라, 예를 들면 빨간점과 노란 점을 캔버스에 칠하여 관객의 눈으로 오랜지 색을 감지하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바로 오늘날의 색사진을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았을 때의 색 구성 그대로 인 것이다. 이기법으로 1884년 부터 3년에 걸쳐 제작한 “그랑드 섬의 일요일 오후”는 쇠라의 야심작 으로, 200여점의 스켓취와 27개의 패널을 만들어 완성하였다. 이때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였는데 아쉽게도 7년후 급환으로 사망하였다.이작품이 전시되자 쇠라는 파리에서 혜성과 같이 인정받고, 신 인상주의의 호칭 을 받기도 하였다. 점묘법 기법으로 표현한 이 작품에서 쇠라는 그림속 인물들의 개성을 표현하려 하지않고, 그들을 하나 하나 의 조각 작품처럼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색의 명암을 강조하여, 장소가 시끄러운 공원이지만 그 모든 형체들 이 평화롭게 무언의 합창곡을 이루고 있다.어떤 평론가는 감정이 부족한 인물들의 모습이 딱딱하다고 지적 하지만 불란서 미술사에서 신인상주의의 이정표를 장식하는 대작임에 손색이 없다. 이전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이 본 인상을 그대로 남기기 위하여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작업을 하였다.하지만 쇠라는 스케치를 하기위하여 야외로 나갔지만 작업을 할 때에는 작업실안에서 자신의 스케치 를 토대로 작품을 재구성 하였다.40여점의 스케치와 20여점의 소묘는 이와 같은 과정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2년 동안의 준비 끝에 쇠라는 라는 작품을 완성하였다. 1887 년 개인소장 1887년 반즈 재단 미술관 1883 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조르주 쇠라 조르주 쇠라의 최초의 대형작인 이 작품에서는 센 강가에서 햇빛 아래 휴식 을 취하고 있는 평범한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위적이고 기념비적인 웅장함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보통 '비천한' 노동자의 모습은 크기가 작은 장르화로 많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1884년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후, 쇠라와 여러 화가들이 프랑스 미술의 '주류' 전시회에 대항하기 위해 개최한 '앵데팡당전'에 전시되었다. (포르탕베생) 1888 년 오르세미술관 1889년 샌 프란시스코 미술관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 때 세워졌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 해에 제작 되었다 그러니까 에펠탑을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는 가장 일찍이 그려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펠탑은 건립 직전부터 세워지고 난 한때 굉장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쇠라는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의 개화에 찬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작품 으로 완성된 것이다. (1890) 샤이춤이란 우리가 프랑스하면 떠올리는 캉캉춤이다. 쇠라는 1888년 이후에는 서커스나 캉캉춤 같은 도회적인 주제를 추구하였고 또한 이 시기로 넘어가면서 쇠라의 점묘는 장식적인 것으로 바뀌어가게 된다. 이렇게 동적인 포즈의 무용수들의 표정이 지극히 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1890) 쇠라의 애인인 마드레느 노브로크를 그린 작품으로 인물의 배경과 분위기가 기묘하게 음악적톤을 보여주고 있다. 곡선의 패턴이 환상적인 패턴을 만들고 있으며 왼쪽 위 꽃의 위치에는 원래 쇠라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가 지워진 것 이라고 한다. (1891) 쇠라의 마지막 작품으로, 원과 나선 등 곡선적인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윤곽도 뚜렷하다. 주로 수평과 수직적인 균형감각이 곡선적인 것으로 전환된 듯하다. 쇠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커스 메드라노에 자주 다녔고 아쉽게도 이 작품이 출품된 전시회가 끝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 * * * (감상)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접어 들어서면서 회화형태도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느낄수가 있다. 쇠라는 점을 찍어가며 그림을 그린다는 점묘파(點描派)의 창시자로 불과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 하였는데, 색과 빛의 이론을 연구하여 그것을 그림창작에 적용해서 순수색갈을 붓에 묻혀 찍어가며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것은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질서를 다시 세웠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폴 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장을 열은 화가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색채의 원소들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면 자연의 법칙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기법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주관이라기 보다는 색에 대한 일반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쇠라는 이런 기법을 통해 훨씬 더 확연하고 설득력 있는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림을 반복하여 그리면 서 원하는 색의 조화를 발현해 냈던 것이다. 그는 미술기법뿐만 아니라 최첨단 재료를 사용해서 실험성 을 높였는데, 그 예가 아연에서 노란색을 추출한 물감을 사용해서 풀밭 위에 떨어지는 태양빛을 강렬하 게 표현한 것인데 그의 작품에서 특이한 그의 기법을 엿 볼수가 있다. 일의(Earl) * * * * (미술이해) 신인상주의(Neo impressionism) 신인상주의는 쇠라와 시냑으로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그들은 광학이론과 색채학에 따른 과학적 이론에 기초한 색채분할을 구현하였다. 이들은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였다. 인상주의가 본능적,감각적이라면, 신인상주의는 과학적이며 분석 적이라 할수 있다.  
174    땡!- 미술시간ㅡ 새 두마리로 남은 화가 댓글:  조회:2504  추천:0  2016-02-08
김정 ‘조도(鳥圖, 새)’ 새 두 마리가 있다. 조선 시대에 흔히 그리던 영모화(翎毛畵, 새와 짐승 그림)의 하나로 일견 평범해 보이는 소품 그림이다. 이른 봄 이제 막 잎이 돋아나는 아까시나무에 앉은 곤줄박이이나 딱새같아 보이는 저 새들의 자세는 영락없이 사춘기 소년소녀의 풋사랑을 닮았다. 몸을 아래쪽에 있는 곤순이에게로 기울이는 바람에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아까시 가지에 앉은 곤돌이는 뭐라뭐라 수작을 붙여보는데 여의치 않다. 아래쪽에 다 느긋이 기울어진 아까시에서 잎사귀 몇 개를 쪼아보던 곤순이는 곤돌이의 말을 다 들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 얼굴과 부리를 배에 파묻고는 딴청을 피운다. 곤돌이 재재거리는 소리와 곤순이의 몸 위를 지나가는 봄바람이 털을 부스스 세워주는 모양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조선 중기의 개혁가 조광조와 함께 사화로 사약을 받은 김정(金淨, 1486-1520)이다. 죽음을 맞은 때의 나이는 서른 네살이었다. 10살 때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다 떼고, 과거에 수석합격했으며, 조광조에 의해 젊은 나이에 형조판서의 자리까지 올랐던 '수재 정치인'이다.  김정은 신사임당(1504-1551)과 동시대 사람으로 열여덟 살이 더 많았다. 김정은 당시 관념적인 화조도의 판을 깨고,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구체적인 풍경을 그려 동시대 사람들에게 영감과 충격을 주었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신사임당의 빼어난 초충도도 김정의 화풍이 자극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300년쯤 뒤에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 갔을 때 소주에 살던 호응권이라는 사람이 지니고 있던 조선화첩 하나를 내보여주었다. 누가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면서 연암에게 고증을 해달라고 한다. 연암은 30점의 그림 중에서 그 맨처음 작품을 보고 '김정의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라고 적어주었다. 새 두 마리가 다정하게 짖고 있었을 그 그림은 아마도 저 소품보다는 크고 더욱 공을 들인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도나 느낌은 저 소품의 화의(畵意)에서 더 나아갔을 것이다. 후세 사람인 연암 박지원도 훤히 꿰고 있었던 화가 김정과 그의 그림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저 그림 한 점이 소중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섬나라에 던져져 외로운 귀신이 되었다/어머니를 남기고 가니 이건 천륜이 아니도다/이 세상을 흘러다니다 내 몸은 죽으니/구름 타고 하늘님 모시는 일 하러 가는 거냐/굴원을 따라 높은 곳에서 산책이나 할까/긴 밤이 어두우니 어느 때나 아침이 오리/붉은 가슴은 타올랐지만 풀섶에 묻히는구나/당당하고 장대한 뜻이 중도에 꺾이나니/아아, 천년만년이여 내 슬픔에 응답하라 투절국혜작고혼(投絶國兮作孤魂)/유자모혜격천륜(遺慈母兮隔天倫/조사세혜운여신(遭斯世兮隕余身)/승운기혜역제혼(乘雲氣兮歷帝?)/종굴원혜고소요(從屈原兮高逍遙)/장야명혜하시조(長夜暝兮何時朝)/경단충혜매초채(烱丹衷兮埋草菜)/당당장지혜중도최(堂堂壯志兮中道?)/오호천추만세혜응아애(嗚呼千秋萬世兮應我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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