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http://www.zoglo.net/blog/jinzhe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366 ]

146    중국문명의 특색은 박소하고 실질적이다 댓글:  조회:4335  추천:25  2010-04-16
중국문명의 특색은 박소하고 실질적이다.      당대 유명한 철학자인 당군의(唐君毅) 선생은 중국문명의 특색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중화민족의 생명은 원래 소박하며 실질적이며 화려하지 않다. 그러므로 희랍민족이 처음부터 아름답고 화려하고 처량하고 요염한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고, 또 유태민족이 계속 나라를 잃고 유랑하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 끝도 끝도 없는 들판, 바람에 휩쓸리는 풀밭 위에 소양떼가 보이는” 그러한 땅 위에서 구세주와 천국의 내림(來臨)을 기다리는 것과도 다르고, 또 토착민을 정복하고 인도문화를 창조한 아리안민족이  백성의 질고를 알지 못하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일을 중시했던 것과도 다르다. 고대중화민족의 생명은 대저 먼저 물과 흙을 다스리고 산과 못을 갈라내어 지상의 노동자로서 또 대지의 아들로서 자기를 먼저 인식하였다. 그런 후에 종족을 모으고 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전설 중의 복희, 선농, 황제(黃帝) 등과 같은 성왕들은 민생일용의 기물을 발명한 사람들일 뿐이다. ‘哲’이란 한 글자는 성왕이 사회정치의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먼저 쓰였고 그래서 철왕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 중국철학의 지혜는 중국의 고대인들이 ‘군체생활의 존재’에 대한 책임부담 하에서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삼가는 정감 속에서 하나 둘씩 생기하여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철학사상은 희랍철학사상이 식민지의 실제 사회정치(노예계급)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 철인들이 우러러 보고 굽어보는 기운이 가볍고 영묘하여 다자다채한 것과도 다르고, 또 인도의 베다경이나 우파니샤드의 사상이 원래 제사를 주도하는 승려들이 눈을 감고 명상하는 그윽하고 깊은 현원(玄遠)한 경지에서 생겨나 여몽여취한 것과도 다르고, 또한 유태민족사상이 그 민족의 선지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반성하고 저주하며 오는 것을 희구하고 근심하는 생각의 굴림 속에서 생겨나 여원여모(如怨如慕)한 것과도 다르다. 그러나 이 중화민족의 철학지혜는 이 민족의 사회정치문화가 총체적으로 같이 움직여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산물이라 가히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니, 그 생각의 미치는 바는 항상 그 행동의 미치는 범위내에서 한발자욱 한발자욱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소박하며 실질적이며 화려하지 않는 생명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탄생한 것이며 “해와 달의 빛남이 매일 매일 계속되는 것과 서로 빛나 비치는 철학지혜인 것이다.”     츠우 자이 박사는 “중국의 철학은 물론 예술이나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제적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매우 단순·소박하여 인간진실의 정곡을 꿰뚫는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적이다. 다시말해서 중국문명의 특유한 성격이다.”고 지적했다.  중국인의 인식 속에 상제라는 개념은 있지만 유태인의 여호와처럼 질투하고 분노하고 나만 섬기라고 공갈하고 협박하는 신이 아니라 그저 그냥 아득한 존재일 뿐이며, 중국인은 메시아나 구세주에 나의 운명을 거는 종교사상이 없다.  공자는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 而遠之).”고 했다. 뜻인즉 이 인간세상의 너머에 신이 아득히 존재한다고 믿지 말고 현실에 안주하라는 것이다. 중국인은 공자의 말씀을 잘 들어서인지 하여튼 현실성이 강하고 실리주의를 따진다.  중국인은 ‘신’이란 믿으면 있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은 미신을 많이 믿으면서도 각종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액막이로 토방법을 많이 사용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니 따라 할 뿐이지 누가 효과가 있고 없고를 아느냐!”고 말한다.  아무튼 중국인은 신, 천국, 내세, 구세주 등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이 ‘나만 믿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다.  막스·베버가 <<프로탄스테드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발전한 것은 신의 소망에 따라 미래에 투자하는 프로탄스테드의 윤리에 의한 것이고,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유교의 현실주의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중국인은 이 세상 너머에 대한 동경이 없이 돈이 있으면 주색에 탕진해버리다 보니 미래에 대한 투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막스·베버의 이 논리에 대해 많은 찬반논란이 있었다. 필자는 막스·베버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으면서도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를 한두 마디로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중국문명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다뤄야 만이 정확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45    중국에 '사나이'가 있는가? 댓글:  조회:4441  추천:29  2010-02-27
중국에 ‘사나이’가 있는가? 2월 27일 캐나다 밴쿠버에 또 한 번 오성홍기가 높이 올랐고 중국국가가 울러 펴졌다. 그 주인공은 여자 1000미터 쇼트트랙 우승자 왕멍이었다. 왕멍은 500미터와 3000미터계주까지 3관왕을 달성하여 시상식에서 환하게 웃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주양의 1500미터 우승을 포함해 중국이 한국을 제치고 여자 쇼트트랙 전체 네 개 종목을 석권했으며 세계에서 명실상부한 최강국임을 입증하였다. 중국이 이번 <2010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2월 27일까지 금메달 획득수가 모두 5개인데 그중 4개는 여자쇼트트랙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설/조굉박이 双人自由式滑氷 종목에서 딴 것이다. 그러니까 5개 금메달에서 4.5개가 여자의 몫이었다는 얘기이고 남자들의 단독 종목에서 금메달 하나도 따지 못했다. 사실 중국스포츠는 남자에 비해 여자들의 약진이 주류를 이어왔다. 1980년대 중국여자배구는 배구세계월드컵과 올림픽을 비롯해 세계 정상급 경기에서 여섯 차례나 연속 우승했지만 남자배구는 세계무대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중국여자축구는 미국과 우승을 다툴 정도로 세계 정상급이었지만 남자축구는 아세아도 벗어나지 못해 껑껑 댔다. 여자 만 미터와 마라톤은 세계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남자선수들은 예선에도 나서지 못했다. 등등의 이러한 현상을 두고 당시에 ‘음성양쇠(陰盛陽衰)’란 말이 생겨났고, 남자들이 가정에서 마누라한테 주눅이 드니 밖에 나가서도 기를 못 펴서 그렇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대 후반 중국에서 “사나이를 찾아라.”는 구호가 유행되었다. 이에 대해 가장 먼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 상해였다. 1991년 상해 텔레비전이 제작한 <<상해파 남편을 위한 변주곡(海派丈夫變奏曲)>>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그 주제가의 가사가 다음과 같다. 사나이는 어디에 있나? 남자들은 거리에 가득 찼는데, 젊은 이선생은 장바구니 들고 나오고, 왕씨 아저씨는 연탄을 사러 가네. 젊은 장씨는 우윳병 들고 가고, 조씨 아저씨 간장을 사오네. 아내가 고함을 지르면 남편은 온몸을 떤다네. 월급봉투 보너스봉투 모두 바치고, 먹다 남은 국이랑 식은 밥을 차려먹는 남편. 힘든 일 더러운 일은 혼자서 하고, 얻어맞고 욕을 먹어도 끾소리 못하는구나. 이쯤하면 확실히 사나이를 찾기가 힘들다. 요 몇 년래 류상이 110미터허들 세계챔피언이 되면서 중국남자들의 체면을 살리는 듯싶더니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또 중국‘사나이’가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중국에서의 ‘음성양쇠’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역사가 오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중국역사를 돌이켜보면 송대(宋代) 이전에는 그래도 남성은 대체로 남자다웠으나 송대 이후에는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명대나 청대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못해졌다. 그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홍루몽>>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그렇다. 전통예법에 얽매인 가정(賈政)은 죽은 시체와도 같이 딱딱하기 그지없었고, 가사(賈赦)는 ‘구더기’같은 존재였다. 그나마 가장 훌륭한 남자라고 하는 것이 가보옥과 같은 여성화된 젊은 도련님이었다. 중국역사에서 남자가 남자답지 못한 것은 도가와 불가의 부드러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유교의 경직된 예의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강인했던 이민족도 중화문명에 융합되면 남자답지 못하게 변해버린다. 그 실례로서 본래 누르하치의 자손들은 거의 모두가 용맹하고 강인한 기병이었으나 200여년의 중화문명을 마신 결과 짐도 지지 못하는 나약한 팔기(八旗)의 귀족자제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易中天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한가롭게 차를 마시거나 새장을 들고 산보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조상들이 힘들여 개척해놓은 강산을 일개 여인(자희태후)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중국역사에서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니 따라서 여자도 여자답지 못한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을 중국어로 ‘男不男, 女不女’라 한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영웅이 미녀를 구해주고 사랑을 나누지만 중국에서는 미녀가 나약하기 그지없는 병신 같은 남자를 구해주고 사랑을 나눈다. 이러한 역사가 결국 여자가 남자 위에 설 정도로 여자들이 대가 세게 만들었다. 중국여자들이 가뜩이나 대가 센 데다 모택동이 “여성은 하늘의 절반을 떠인다.”는 말을 해 중국부녀들이 더구나 여성답지 못하게 말이 아니게 변해버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여자홍위병이다. 북경 대원(大院:혁명가 가족들이 모여 살던 곳) 안에서 살던 ‘말괄량이’나 ‘정신 나간 계집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전통교육은 받지 못하고 혁명정신만을 배웠기 때문에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선두에 서서 두 손을 양 옆구리에 찌르고 입만 벌리면 ‘제기랄!’이고 스승이고 선배고 노선만 다르면 두들겨 패는 망나니 계집애들이 모여 여자홍위병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시대정신이 이러한 망나니 계집애들을 요구했으므로 삽시간에 전국 도처에서 그들을 본받아 여자홍위병조직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났다. 비록 여자홍위병조직이 2~3년이 지나자 시들어버렸지만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1980년대 심각하게 나타났던 ‘음성양쇠’ 현상이 여자홍위병조직의 출몰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남녀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평등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특히 여자가 기가 세고 대가 세면 남자들이 기가 죽기 마련이다. 언제 가면 중국에서 ‘양성음쇠’ 세상이 되어 “사나이를 찾아라.”는 말을 듣지 않게 되겠는지?
144    얼빠진 '차오시엔족' 표기 댓글:  조회:6469  추천:38  2010-02-12
얼빠진 ‘차오시엔족’ 표기 주간조선은 2064호(2009. 7. 20)부터 2088호(2010. 1. 11)까지 중국의 소수민족을 소개하는 글을 9기에 나누어 연재하였다. 먼저 제목부터 살펴보자. ⑨ 차오시엔족(朝鮮族·조선족) ⑧ 고산족(高山族) ⑦ 먀오족(苗族·묘족) ⑥ 만주족 ⑤ 좡족(壯族·장족) ④ 몽골족 ③ 티베트족(짱족·藏族) ② 회족(回族·후이족) ① 위구르족(웨이우얼족) 위 아홉 개 제목의 표기법에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ㄱ. 고유한문음독, 중국현지음, 국제표기, 고유호칭의 혼재. ‘고산족’ ‘만주족’ ‘회족’은 우리민족 고유한문음독에 의한 것이고, ‘차오시엔족’ ‘먀오족’ ‘좡족’은 중국 현지음(중국어발음)을 따른 것이고, ‘티베트족’은 중국어에 없는 영어(Tibet)를 비롯해 국제적인 호칭에 근거한 것이고, ‘몽골족’과 ‘위구르족’은 우리민족이 오랫동안 불러온 고유호칭이다. 이렇듯 네 가지 형식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아주 혼란스럽다. ㄴ. 괄호 안의 한문표기와 한글표기 문장에서 괄호는 보충설명역할을 한다. 저자가 ‘만주족’ ‘몽골족’에는 아예 괄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두 민족은 한국인에게 굉장히 친밀감이 있는 모양이다. ‘고산족’의 괄호 안에는 한문만 있고 현지음인 한글표기가 없다. 또 ‘차오시엔족’ ‘먀오족’ ‘좡족’의 괄호 안에는 한문도 있고 고유한문음독으로 표기하였고, ‘티베트족’ ‘회족’에는 괄호 안에 한문도 있고 현지음도 있다. ‘위구르족’의 괄호 안에 한문이 없고 현지음을 따른 한글표기만 있다. 아주 복잡하다. ㄷ. 현지음+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고산족’ ‘위구르족’이란 표현은 우리민족고유한문음독 혹은 고유호칭을 따른 것으로서 보기에 아주 자연스럽다. 이에 비해 현지음인 ‘차오시엔’ ‘먀오’ ‘좡’에다 우리 말 ‘족’을 붙여놓으니 마치 양복을 입은 사람에게 갓을 씌워 놓은 듯 우스꽝스럽다. 차라리 현지음을 따르겠으면 아예 ‘차오시엔주’ ‘먀오주’ ‘좡주’라 하는 것이 훨씬 더 부드러울 것이다. ㄹ. 단모음과 쌍모음의 표기법 박승준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에서 중국현지음표기법에 있어서 쌍모음을 없애고 단모음만 사용하기로 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江:jiang’을 ‘장’으로 표기한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조선일보의 이동훈 기자는 ‘苗族’의 표기에 왜 ‘먀’란 쌍모음으로 표기하였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위 네 가지 폐단으로 볼 때 한국이 중국의 호칭(지명, 인명, 민족)을 표기함에 있어서 통일적인 것이 결여되어 매우 혼란스럽고 심지어 잡탕이라도 한심한 잡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조선일보는 왜 만주족, 몽골족, 회족, 위구르족 및 한국인에게 생소한 ‘고산족’은 고유한문음독전통 혹은 고유호칭전통에 따라 표기하고, 특히 만주족과 몽골족은 한문표기도 하지 않으면서 동족이라 말하는 조선족은 우리 전통을 버리고 중국어발음에 따라 ‘차오시엔족’이라 하고 ‘조선족’을 괄호 안에 집어넣어 표기하는가는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한테 그래 만주족, 몽골족, 회족, 위구르족 및 고산족보다 정서적으로 더 멀리 느껴진단 말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2007. 11. 15일자로 조선일보(A33면)에 <박광석이 왜 피야오광스인가?>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후 한국이 조선족의 민족호칭과 인명의 표기에 있어서 계속 중국어발음을 따르고 있는데, 한국 분위기는 이렇다. “정서적으로는 ‘조선족’ 혹은 민족고유이름(박광석)대로 표기하는 것이 옳겠으나 중국에서 조선족을 ‘차오시엔주’, 박광석을 ‘피야오광스’라 하지 않느냐! 그래서 현지음을 따라 표기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한국이 진정 조선족을 동포로 여기고 있는가? 또 왜 한국은 주체성과 정체성이 없이 자아중심이 되지 못하고 동포마저 상대의 입장에 서서 남의 발음에 따라 표기해야 하는가? 한국의 정신적인 줏대(얼)는 어디에 갔는가? 새로운 사대주의발상이라 말하면 듣기 거북한 일이지만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차오시엔족’과 ‘피야오광스’의 표현은 얼빠진 표기법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143    미녀와 독부 댓글:  조회:4727  추천:25  2010-02-04
미녀와 독부      중국어 속담에 “만 가지 악 중에서 음란함이 으뜸이고, 가장 독한 것은 여자의 마음이다.(萬惡淫爲首, 最毒婦女心)”라는 말이 있다.  옛날 중국인은 일반 부녀보다 미녀는 바람기가 가득하고 음란하고 또 독하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서 <<수호전>>에 등장하는 반금련, 염파석, 반교운, 가씨 등 미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호전>>에서 반금련의 자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른봄 버들잎 같은 눈썹에는 언제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는 듯 한과 시름을 품고 있고, 춘삼월 복사꽃 같은 얼굴에는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었다. 가는 허리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렸고, 도톰한 입은 향기를 뿜어 벌과 나비가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기타 미녀들의 자태도 거의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을 모두 음란한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실제역사사실이든 가공이든 하여튼 모든 남자들이 미녀를 품어보고 싶어 하면서도 미녀에게 이상할리만치 편견을 갖고 있고 또 조건반사적으로 미녀를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눈썹이 이른봄 버들잎 같은”여자를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그녀가 “늘 운우의 정이 그리워 한과 시름을 품고 있다.”고 믿게 되고, “얼굴이 복사꽃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반금련은 자색이 뛰어난데다가 요염한 기운이 넘쳐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서문경은 반금련을 처음 보자마자 그만 몸이 흐믈해졌고 그녀에게 넋을 잃고 말았다. 서문경이 퇴자를 맞을까봐 두려워 머뭇거리자 반금련이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주동이 되어 “공연히 소란스럽게 하실 필요가 없어요, 정말로 저를 꾀어보려고 하세요?”라고 말하자 두 사람은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한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염파석과 장문원, 반교운과 배여해, 가씨와 이고가 간통했는데 모두 남자들이 여자에게 혼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이외에 <<수호전>>에 등장하는 미녀인 이사사와 백수영은 작부와 기생이어서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는 여자였다.  다음 미녀는 대개 독부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 <<수호전>>에서 반금련은 제 손으로 무대랑을 독살하였고, 반교운은 애매하게 석수를 모함하였다. 염파석은 송강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안달하였고, 백수영은 뇌형을 희롱하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그의 어머니까지 구타하였다. 가씨는 관청에 출두하여 남편 노준의를 무고하고 증인으로 나서 자칫하면 노준의는 죽음을 뻔 했다.  한나라 초기 여후(呂後)는 남편인 유방이 죽자 애첩이었던 척부인을 산채로 돼지우리에 처넣었다. 개국공신이었던 한신도 그녀의 꾀임에 빠져 죽었다.  무측천은 더욱 악독했다. “호랑이가 아무리 독해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딸을 제 손으로 죽이고, 태자 이현(李賢)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젊어서는 물론이고 노인이 되어서도 젊은 남자들을 끌어들여 난륜을 하는 등 음란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중국인은 미녀 하면 음란함이 떠오르고 독부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민간에서는 미녀를 며느리로 맞으면 집안에 화를 불러온다고 믿고 있어 설사 당사자들이 마음에 들어 해도 부모나 형제들의 관문을 넘지 못해 혼사가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일등 신붓감으로 신체가 건강해 보이고 엉덩이가 팡팡하고 젖가슴이 풍만하고 입술이 두툼한 여자를 꼽았다. 마치 조선영화<<사과 딸 때 처녀>>에서 600공의 주인공 순희의 어리무던하게 생긴 얼굴에 입술이 두툼해서 말수가 적어 보이고 젖가슴이 풍만하고 엉덩이가 팡팡해서 애내기를 잘할 것 같은 형상이 일등신붓감이었다.  미녀들이 음란하고 독하고 일등신붓감으로 외면당한 데는 그녀들의 탓보다 남자들의 탓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사내다운 호한들은 대개 여자를 가까이 하면 영웅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사내가 아니라고 여자를 멀리했다. 그리하여 미녀들은 할 수 없이 백면서생이거나 병신 같은 남자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백면서생이거나 병신 같은 남자들은 사내다운 면이 없어 그녀들의 생리적 욕구를 포함해 기타 사내에 대한 여러 가지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진정한 호한들이 그녀들을 멀리하므로 할 수 없이 반금련과 같은 미녀는 건달인 서문경(전통관념으로 보면 건달이지만 요즘 시각으로 보면 여러모로 잘나가는 인간이었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문경도 무대랑이 간통현장에 들이닥쳤을 때 놀란 나머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반금련은 이렇게 원망한다. “평소에는 권술과 봉술을 잘한다고 떠벌리더니 급해지니까 종이호랑이처럼 아무 쓸모도 없네. 저렇게 놀라는 꼴이란!”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악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미녀들이 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여 음란하고 독한 마음을 갖도록 만든 장본인은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남분여장하고 무대에 올라 앵앵거리는 여인의 목소리로 관객을 귀신홀리듯 인기 높았던 전통희극을 보면 중국전통사회모습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42    성과 씨의 구분 댓글:  조회:7602  추천:34  2010-01-09
성과 씨의 구분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안재을의 중편소설 <정걸세계에로(도라지 2005.9~10)>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박주국과 류씨 사이에 자식이라곤 수향이라고 부르는 딸애가 하나뿐인데 그마저 벙어리다. 수향이는 시집갈 나이가 꽉 찼지만 벙어리인 탓에 마땅한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에 마누라를 한국에 보내고 홀아비신세로 살고 있는 철민이와 남몰래 재미를 보고 임신한다. 수향이는 배가 불어가게 되자 임신사실을 숨길 수가 없지만 아이아버지가 누구라는 것만은 한사코 비밀에 붙인다. 류씨는 처녀가 임신한 것도 그렇거니와 애비가 불분명한 애를 어떻게 세상 빛을 보게 할 수 있느냐며 떨어버리라고 닦달한다. 허나 주국의 생각은 달랐다. 다 익은 과일이 따먹는 임자가 없이 저절로 땅에 떨어져 썩어간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거니와 손주를 안아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면서 기어코 낳아 기르겠다고 고집부리는 딸애에게 뒷심이 되어준다. 수향이는 방치돌 같은 아들을 낳는다. 철민이는 슬그머니 아이이름을 광(光)이라 지으라고 수향이한테 일러준다. 그리하여 아이가 이름이 있게 되었으나 성이 문제였다. 주국이는 마치 집집마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멋대로 이름을 짓듯이 외손주의 성을 지어주기로 하고 인근마을에 없는 ‘나갈 진(進)’을 선택했다. ‘진광’. 안재을 씨는 이 이야기를 개괄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이렇게 진명촌 밀양 박씨네 집에서 조선족 씨족사에 없는 나갈 진씨가 발족되었다. 참 울다가도 웃을 일이다.” 여기서 ‘조선족 씨족사’라는 말에 상당한 어폐가 있다. 만약 문학에서는 성과 씨의 구분이 없이 혼동하여 써도 문제가 없다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문학도 상식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왜 어폐가 있는가를 말해 보려한다. 조선민족의 성씨는 중국 성씨문화를 본 따 사용해왔기 때문에 먼저 중국의 성씨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朱駿聲의 <<說文通訓定聲)에 의하면 “성이란 것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나타낸다. 女라는 글자와 生이란 글자로 분해되는데 회의자다. 이때 물론 生을 聲字로 볼 수 있다. 옛날의 신령스러운 성인들은 모두 그 어미가 하늘에 감하여 아기를 낳아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칭하여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하는 것이다. <春秋>隱公8년조에 좌씨가 단 주해에 이르기를 ‘하늘의 아들이 덕을 세울 때 그 태어난 바를 따라서 성을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건대 신농의 어미가 姜水에서 살았고, 黃帝의 어미가 姬水애서 살았고, 舜의 어미가 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어미가 산 지명을 따서 그 성을 삼았다. 그러므로 성이란 어미의 생한 바를 따르는 것이다.” 성이 어미가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면 씨도 역시 마찬가지로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 이에 관해선 <<通志·氏族略序>>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삼대(夏商周)에 성과 씨를 구분하였다가 漢代부터 성과 씨의 구분이 없어진다. <<통지·씨족약서>>에 의하면 “삼대 이전에는 성과 씨를 둘로 나누고 귀한 자는 씨가 있고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그러므로 성을 씨라 부를 수는 있으나 씨는 성이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성과 씨의 구분을 없애고 혼동하여 썼다(姓氏之稱,自太史公始混而爲一). 허나 성과 씨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예하면 ‘복희는 성이 풍씨였다.’를 결코 ‘복희는 씨가 풍성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씨는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을뿐 결코 성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민족의 성씨는 중국성씨문화를 본따서 사용해왔지만 중국인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한족들은 조적 혹은 적관이 있기는 하나 조선민족의 본관과는 개념이 다르다. 한족들이 말하는 조적 혹은 적관은 조상들의 고향을 의미할 뿐 조선민족처럼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식으로 ‘무슨 왕씨’ ‘무슨 진씨’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족은 한고향이라는 향토의식이 뿌리 깊지만 조선민족처럼 초면인데도 본이 같다고 해서 벌을 따져보고 환갑이 넘은 노인이 새파란 젊은이를 삼촌벌이나 형님벌이 된다고 당장에서 깎듯이 대하면서 친척을 만났다고 기뻐하는(한국에서 아직까지 이런 기풍이 심하다) 등 유사한 행위가 없다. 조선민족은 이 본관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머리를 무겁게 지배하고 있어 씨를 붙이기를 좋아하며 성문화를 성씨문화라 하거나 상대의 성을 물을 경우 ‘성씨가 무엇인가?’ ‘성씨를 어떻게 쓰는가?’하면서 씨를 붙인다. 한족은 상대의 성을 물을 경우 씨를 붙이지 않으며 대답하는 사람도 자신의 성에 씨를 붙이지 않는다. 조선민족이 성에다 씨를 붙여 ‘최씨’ ‘김씨’라 부르거나 본관에 씨를 붙여 ‘밀양 박씨’ ‘김해 김씨’라고 부를 경우 씨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붙이는 것이지 결코 씨가 성을 대체하거나 본관을 대체하지 않는다. 현재 중국조선족은 대다수가 성과 씨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또 본이란 무엇인지 모르며 아울러 씨를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인이 조선족을 만나 대화할 경우 거개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화룡, 왕청’이라 대답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허나 한국인이 묻는 것은 조상의 고향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니 할아버지(조상을 뜻함) 고향이 어디냐?”고 하면 절대다수가 “모름다.”고 대답한다. “그럼 본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아무리 나 어린 애들마저도 본을 모르는 조선족은 하나도 없다. “그 본이 곧 조상의 고향이자 당신들의 고향이요.”라고 말해주면 “우린 그런 걸 모름다.”고 툭 쏜다.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은 자신이 밀양 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밀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상대가 성을 물으면 ‘경주 최씨’ ‘전주 이씨’라고 대답한다. 혹은 초면에 인사 나룰 때 자신의 성에다 씨를 붙여 통성명한다. 남들 앞에서 ‘우리 최씨네는 여자들이 드살이 세다.’하거나 집안끼리 모여 ‘우리 선산 김씨는 술을 잘 마신다.’는 등 자기네절로 성이나 본에다 씨를 붙여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성 혹은 본에다 씨를 붙이는 것은 대단히 실례이다. 왜냐하면 씨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사용해선 안 된다. 만약 자신에게 씨를 붙이면 자기 스스로 높이고 존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말할 때 절대 씨를 붙이지 말고 ‘김가’ ‘최가’ 혹은 ‘밀양 박가’ ‘전주 이가’라 말해야 한다. 모두어말하자면 씨는 상대를 높이는 존칭이지 결코 성이 아니며 성을 대체할 수도 없다. 때문에 성과 씨, 본과 씨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할 때 될 수 있는 한 씨를 붙이지 말고 그냥 ‘김가’ ‘최가’라 하는 것이 합당하다. 만약 새로운 성이 나타나면 마땅히 객간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조선족 성씨역사에 없는 새로운 0가가 발족되었다.’고 말해야지 안재을 씨처럼 ‘조선족 씨족사에 없는 진씨가 발족되었다.’고 말한다면 상식에 어긋난다. 한 가지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중한일 동양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씨란 말은 원시 씨족사회를 지칭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라는데 대해선 더 의논의 여지가 없다. 중국학자들의 연구(오천명저, 중국신화연구)에 의하면 은상시대까지 중국(중국이란 국호는 3천 년 전 주나라 초기에 생겨났음)에는 2만 여개 씨족이 있었는데 각기 자기네 씨족명칭에 따라 성을 붙이게 되었다(華胥氏란 화서는 성이자 씨족명칭이다). 그러다가 주초에 분봉제와 정전제의 의해 華之諸族과 夏之諸族이 융합되어 화하족으로 통합됨에 따라 씨족이 부족으로 부족이 민족으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본래 혈통을 중심으로 되어 있던 씨족 관념은 점차 희미해지고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관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의 통일국면을 맞게 됨에 따라 부족관념이 거의 사라졌고 또 漢代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통일중앙집권제가 확실하게 자리매김 되었고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함에 따라 본래 화하족이 한족(한족은 수만 갈래 혈통이 문화를 토대로 묶어진 민족임. 민족이란 개념은 혈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를 공통분모로 이루어진 집단공동체이다.)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대통합되었고 또 한족이란 통합민족 개념의 등장에 따라 주초 2만여 개 성씨가 대략 470여 개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백성이란 사회밑바닥에 있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굳어져왔는데 이는 성과 씨의 구분, 즉 성은 혈통을 의미하고 씨는 존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이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절대 ‘百氏’라 말할 수 없다. 중국은 역사기재가 가장 유구하고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완벽하기 때문에 중국인의 씨족, 부족, 민족역사에 대해서 일단 파고들면 일복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선민족은 역사기재가 형편없이 부재하기 때문에 자민족사를 연구하려면 엄청 힘들다. 예하면 한국역사교재나 통사류의 서적이거나 전문 서적을 뒤적거려보면 한반도 상고사에 관해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는 조선민족 씨족사에 관해선 도통 알 수가 없다.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되는 고조선사는 씨족이 아닌 부족사회부터이다. 그리고 삼한(변한, 진한, 마한)의 역사도 대충 78개 부족국가였다는 것과 민속 풍속을 서술하고 있으나 이러한 史實은 전부 중국고전 위서, 한서, 북서, 양서, 당서 등의 기재를 베껴온 것들이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씨족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씨족사란 말의 사용을 삼가라는 뜻이고 더욱이 씨족사가 결코 성씨사가 아니며 양자를 혼동하지 말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이 본격적으로 성씨문화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 겨우 조선조 중후기의 일이기 때문에 씨족사란 말은 상당한 어폐가 있으며 가령 성씨역사, 성씨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에도 우리 머리에는 반드시 씨가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도 이 글에서 성에다 씨를 붙여 성씨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것은 조선민족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141    중국인의 인내 처세술 댓글:  조회:5652  추천:26  2010-01-06
중국인의 인내 처세술 중국인은 화가 날수록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중국인의 인내를 두고 생겨난 것이다. 중국인이 화가 나도 반드시 웃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세상에서 인내심이 가장 강한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국시대 위나라 방연은 귀곡자에게서 함께 병법을 배운 손빈이 자기보다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질투했다. 그의 음모는 바로 손빈의 슬개골을 깎아내어 병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손빈은 반신불수가 되어버렸다. 방연은 이젠 경쟁대상이 아니니 질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시름 놓았다. 허나 손빈은 참지 못할 수모를 당하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유명한 <<손자병법>>을 지어냈으며 방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하게 되자 오나라에 끌려가 부차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 구천은 부차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수모를 당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구천이 심지어 부차의 대변을 맞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허나 구천은 수모를 참고 견디어 훗날 와신상담하여 끝내 부차를 멸망시켰다. 한신은 건달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를 ‘사타구니 아래의 치욕’이라 불렀다. 훗날 한신은 이 일을 이렇게 변명하였다. “나는 장사일지니 나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 내 어찌 그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이름이 드러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참고 오늘의 공을 이룬 것이니라.” 사마천은 사서를 지으려고 여러 차례 한무제에게 원고를 바치면 제는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제는 사마천을 죽이는 대신 궁형(宮刑)을 가했다. 사마천은 남자로서 가장 치명적인 수치를 당하고도 참고 견디어 끝내 <<서기>>를 완성했다. 당대(唐代) 누사덕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남겨 유명해진 인물이다. 여기서 <<자치통감>>에 실린 그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말해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누사덕은 동생이 대주자사에 임명되어 부임지로 떠나게 되자 동생에게 물었다. “나는 재상의 자리에 있고 네가 주목(州牧)이 되었으니 우리 집안에 대한 황제의 은총이 지극하여 필시 사람들의 질시를 받을 것이다. 너는 앞으로 사람들의 질시를 어떻게 피할 것인가?” 동생이 대답했다. “지금부터 어떤 사람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내거나 싸우지 않고 얼굴에 묻은 침을 닦기만 하겠나이다.” 이 말을 들은 누사덕이 얼굴빛을 흐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 어떤 사람이 네 얼굴에 침을 뱉는 까닭은 너에게 단단히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가 침을 닦으면 그의 뜻에 반감을 품는 것이므로 그의 분노를 더욱 크게 하는 것이니 침을 뱉으면 닦지 말고 스스로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웃어넘겨야 한다.” 후세 사람들이 누사덕의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지 않고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들먹인다. 누사덕이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촌놈’ ‘멍청이’이라고 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누사덕은 겉으로는 ‘촌놈’ ‘멍청이’인 것처럼 보였으나 속내는 아주 교활한 사람이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무측천이 조서를 내려 온 나라에서 가축도살을 금지한 적이 있다. 당시 누사덕은 공무 수행 차 섬서 지방에 갔는데 연회석상에 양고기 요리가 오른 것을 보고 주방장에게 “웬 일인가?”고 물었다. “이것은 늑대에게 물려 죽은 양으로 만든 요리이나이다.” 주방장이 대답했다. 잠시 후 또 물고기 요리가 나오자 누사덕이 따져 물었다. “이것은 표범에게 물려 죽은 물고기입니다.”는 주방장의 말에 누사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이 멍청한 녀석아, 왜 수달에게 물려 죽은 물고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주방장이 시켜주는 대로 말을 바꿔하자 누사덕이 그 요리들을 다 먹어치웠다.
140    그 때 그 시절 해프닝 댓글:  조회:5124  추천:23  2010-01-04
그 때 그 시절 해프닝 2007년 2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대만 모 신문사 기자가 강원도 스키관광을 왔다가 갑자기 맹장이 터져 복막염 때문에 서울 00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국어 한 마디도 모르는 대만기자는 영어를 잘하지만 의사나 간호사들이 회화가 되지 않아 내가 아침저녁으로 회진시간을 맞춰 중한, 한중 통역을 해주었다. 보름간의 치료를 거쳐 귀국하게 된 그 분이 나에게 사례금도 푼푼하게 주었고 귀국 전날 저녁 근사하게 한 턱 쏘았다. 그 분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대륙이 궁금했고 나도 대만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고 싶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나랏일을 얘기하다가 서로 지나온 인생 얘기로 화제가 돌았다. 나는 그 분한테 시골소학교 3학년 때 문화대혁명을 맞아 학업이 중단을 맞다시피 했고 초중부터 요구촌 시골학교에 민족연합반을 만들어 한어로 수업(초중이지만 과목이란 어문과 수학밖에 없었음.)받다가 동불사고중졸업을 반년 앞두고 다시 조선반으로 옮겨져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 만날 이불짐을 둘러메고 농사일을 지원했던 굴곡 많은 학창시절을 얘기해 주었다. 그 분은 나보고 10년 동란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대학을 나왔는가? 고 물었다. 나는 급해 말고 차분하게 나의 과거사를 들어보라고 권했더니 흥미 있다고 얘기를 이어가라고 달라붙는다. 나는 1975년 7월 12일 동불사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시기 학생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명색이 고중졸업이지만 편지 한 장 변변히 쓸 줄 모를 정도로 수준이 영 개판이었다. 중학교시절 남들이 다 드는 공청단조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낙후분자였다. 실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폐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명색이 고중졸업이라고 정치 대장이 하는 말이 나의 졸업을 은근히 기다렸단다. 생산대 회계로 써먹을 계획이란다. 나는 회계사업이 골머리가 아파날 것 같아 거절했다. 화가 난 정치 대장이 나보고 5년 동안 양치기를 하란다. 내가 왜 아까운 청춘을 양과 같이 5년을 보내야 하는가? 고 대들었더니 김 서기 막내아들이 정치 각오가 덜돼 먹었다고 비판한다. 아무튼 나는 한 달 양치기 하고 그만 두었다. 정치 대장이 당의 호소에 거부하는 나를 괘씸해 기양저수지전투대에 보냈다. 보름 만에 나는 또 당의 호소를 거슬러 집에 돌아왔다. 그 후 농촌에서 멀쩡한 밭을 사다리 식 제전을 만들고 벼 가을걷이 지나자 조전을 만드는 일선에서 전전하다가 1976년 2월 운이 좋게 촌위생소에 취직했다. 본래 타고난 체질이 약해 농사일이 버거웠던 나는 남들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그 해 10월 19살에 용정현 제4기 맨발의사학습반에 입학하게 되어 이불짐을 메고 용정현병원에 가서 1년 간 의사공부를 하는 행운을 맞이했다. 맨발의사직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민감한 반응이 있는 환자에게 어떤 주사는 금방 알레르기 때문에 급사하는 의료사고가 생길 위험이 커 늘 속이 조마조마했다. 한밤중에도 거리가 먼 이웃마을에 왕진을 다녀야 했다. 병보고 처방 떼고 약을 짓고 계산하고 돈 받고 주사 놓고 약 구입하면서 일인 다역을 소화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밤중에 한족마을에 왕진가면 수고했다고 요리를 볶고 술상을 갖추는데 위생이 불결해 입에서 거리가 멀지도 않은 목구멍에 도무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먹지 않으면 성의를 무시한다고 곱지 않는 눈총을 받아야 한다. 께름직한 기분으로 귀가해 몸이 고달픈데 잠은 자꾸 도망간다.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나는 19살 때부터 아기 낳는 장소에 많이 다녔다. 당시 도시에 시집간 여성들도 대다수가 본가인 시골에 와서 몸을 풀어 더군다나 내가 다니는 차수가 많아졌다. 나는 산파가 아니지만 정맥주사조차 놓지 못하는 산파들 때문에 내가 나타나야 했다. 산모가 힘이 떨어지면 정맥에 포도당을 밀어야 하고, 쇼크하면 구급치료를 해야 했다. 시골에 위생시설이 엉망이라 새파란 총각이 해산장소에 나타난다고 산모음부를 가리느라 먼지가 풀풀 나는 탄자를 가리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기왕에 맨발의사 얘기가 나온 김에 두 가지만 더 말해보겠다. 우리 마을에서 7리 떨어진 상촌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되게 순진하다. 내가 21살 때 있었던 일이다. 한 부녀가 17살 먹은 자기 딸애가 아래가 끄는 병을 앓고 있으니 치료해 달라고 청을 들었다. 가렵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적충병(滴蟲病)을 시골 아낙네들은 아래가 끈다고 표현한다. 내가 중의처방책을 뒤적여 여섯 첩을 지어주었는데 병이 치유되었다고 닭 한 마리 들고 인사 왔다. 이 일이 한 입 두 입 입소문을 탔다.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졌다. 21살 되는 총각이 일시에 부녀병을 잘 치료하는 ‘명의’로 부상했다. 나는 겁이 났다. 이러다가 장가도 못 가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나는 재간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천진하고 우둔했다. 만약 그 재간을 계속 써먹었더라면 지금쯤은 이렇게 애타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애쓸 필요 없이 큰 재산을 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맨발의사 하느라 상상도 못할 일들이 많아 지금까지 그때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2살 되는 해 무더운 한여름에 타지에 시집 간 한 여인이 시골본가에 와서 몸을 풀었는데 산후출혈이 심했다. 친정엄마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생명이 위급하단다. 내가 그 집에 도착하니 미쳐 출혈을 수습하지 못해 온돌에 온통 피투성이었다. 지독한 피비린 냄새가 진동했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산모가 정신이 말짱하기에 총각을 꺼려할 것 같아 눈에 흰 천을 가리고 붕대로 아래를 틀어막고 25% 포도당을 정맥에 밀고 지혈제를 근육에 놓는 등 구급치료를 했다. 다행이 생명에 지장 없었다. 새파란 총각이 산후출혈을 처리하고 나니 그날 저녁 나는 밥을 먹지 못했고 싱숭생숭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후 그 산모는 나와 마주치면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도 민망하기 마찬가지였다. 1977년 말경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도전해 보았지만 중학시절 공부를 너무 허술하게 했기에 인식분해나 방정식이 떠오르지 않았고, 오른손 왼손 법칙을 배운 기억은 있는데 가물가물했고, 역사는 진시황을 배우다 말았고, 지리는 아예 한 폐이지도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시험을 연거푸 해마다 보았으나 기초가 너무 빈약해 번번이 낙방이었다. 1978년 12월부터 나는 중학시절 한 마디도 배우지 못했던 외국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진전이 빨랐다. 그래서 일본어 전공에 도전했다. 해마다 일본어성적은 문제없었으나 총점이 몇 점씩 모자랐다. 그 주요 이유는 중학교를 한족반에 다녔기에 한어로 시험 보니 어문성적이 120점에서 50점을 넘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3년 처음 조선어로 시험을 봤는데 입시제도 회복 7년 만에 성공했다. 그 과정이 복잡했다. 1979년 봄 전주 맨발의사시험에 합격했으나 1981년 맨발의사직업을 때려치우고 입시에 뛰어들었는데 또 낙방했다. 소학교 교사를 하란다. 한 학기 하고 또 그만두고 입시에 매달렸다. 졸업분배는 연변1중이었다. 운이 좋게 첫 해부터 담임교사를 맡았다. 3년 동안 모든 정력을 아낌없이 제자들에게 쏟아 부었다. 경험이 전무 한 상황에서 신입생을 맡아 큰 차질이 없이 무난히 졸업시키니 학교지도부에 신임을 얻어 재차 담임을 맡게 되었다.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 두 번째부터는 담임사업을 멋들어지게 해재꼈다. 학년 일이 등이 나왔고 체육제일 위생제일 우수반급 등 하여튼 한 학기에 상장을 무려 11개나 탔다.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과가 컸다. 그렇게 ‘잘 나가던’ 내가 당시 거세게 불어치는 하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겨 1990년 4월 초경 사표를 제출했다. 학교지도부의 거듭 만류권고를 뿌리치고 1990년 5월 20일 교단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 20년간 별로 해낸 일도 없이 바쁘게 보내느라 제자들을 잊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지난 9월 중순 중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제자 이설화(부반장)입니다. 10월 4일부터 5일까지 연변1중 졸업20주년 동창만회를 열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참석할 수 있습니까?” “두 말이면 잔소리지 10월 3일 내가 비행기로 날아가겠다.” “아이고 큰 시름 덜었습니다. 근데 꼭 약속을 지켜주세요.” “암, 그렇게 하구 말구” 나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제자와 한 약속을 지켰다. 20년 만에 제자들을 만나 감개무량했다. 일본 도시바에 아시아담당으로 근무하는 제자, 광동 일본기업에서 연봉 인민폐 30만원을 받는 제자, 교수가 된 제자, 정부 국장 부국장으로 승진한 제자. 불혹의 문턱에 가까운 제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한창 중견역할로 빛을 발하고 있어 가슴이 뿌듯했다. 3박4일 동안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나는 연변1중 교사생활이 3년 10개월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입생을 맡아 졸업시킨 행운이 있다. 이는 나에게 있어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재산이다. 나는 본래 7년 대학입시를 본 의지와 의력을 가장 큰 재산으로 간주하고 살아왔다. 즉 무슨 일이나 내가 마음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고 좌절에 부딪힐 때마다 헤쳐 나아가는 동력이 되어왔다. 제자들의 동창만회에 다녀온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7년 대학 입시는 내가 인생을 걸어가는 힘이 될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해 놓은 재산이 아니다. 연변1중제자들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남겨놓은 가장 큰 재산이리라. 앞으로 가령 지금 내가 한창 몰두해 쓰고 있는 역사소설이 세상의 빛을 본다 해도 제자를 남긴 재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변문학(2009.12)>>
139    중국인이 정확함(精確度)을 무시하는 이유 댓글:  조회:9975  추천:49  2009-12-25
중국인이 정확함(精確度)을 무시하는 이유 김정룡  100년 전 미국선교사 아더·스미스는 산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에서 22년을 생활하면서중국인의 인상에 대해 <<중국인의 소질(원제 지나인의 기질)>>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이 책이 미국에서 먼저 출간된 후 서구 여러 나라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반응이 좋았다. 이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당시까지 구미의 대중(對中) 전문가들이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하고 책을 많이 출간했으나, 아더·스미스가 최초로 중국인이 정확함을 무시한다고 지적해 중국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더. 스미스는 이 책에서 “중국인은 매사에 있어서 ‘차뿌둬(差不多:차이가많지 않다. 한국어 괜찮다와 비슷하다는 뜻.)’라는 말을 매우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표현이다.”라고 지적했다.  ‘차뿌둬’는 일상생활에서 차이가 많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됐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차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됐다는 뜻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웬만큼 차이는 따질 필요 없이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쏴라 쏴라! 짱꼴라(算啦�啦中國人)’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쏴라 쏴라’는 웬만하고 어지간한 일은 따지지 않고 “됐어, 됐어!” 라는 의미이다. 중국인은 일상생활에서 “쏴라 쏴라, 차뿌둬 쥬씽라(算啦�啦 差不多, 就行啦!”는 말을 많이 쓰는데, 확실히 아더·스미스의 지적한바와같이 중국인은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아더·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설명했다, 즉 중국인은 상대가 나이를 물을 경우 똑 부러지게 정확한 나이를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이 먼저 물어온 상대에게 얼마 되어 보이는 가고 되묻는다. 그리고 나서 겨우 하는 대답이 “불혹의 나이요, 환갑이 지났소, 고희에 가갑지요.”라고 대충 나이를 말한다. 노인들은 흔히 61세이면서도 “올해 60~70 먹었어요.”라고 나이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국인은 일반 사물에 대해 정확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자적인 것에까지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그렇지만 남이 나의 흉을 보면 용납 못하듯이 중국지식인들은 아더·스미스의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지적하자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이청조(李淸照)는 “아더·스미스는 중국인에 대해 유(流)만 말했을뿐 원(源)을 짚지 못했으니, 편견이다.”라고 비판하고 나서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모든 사물을 머리로 따지지 않고 맘으로 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인의 정신>>의 저자인 고홍명(辜鴻銘)은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심령미를 추구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중국인이 사물에 대한 태도, 분석, 처리 등 다각도로 종합해 보면 “중국문명은 두뇌의 문명이 아니라 맘의 문명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싶다.  맘의 문명이란 곧 정(情)의 문명이다. 그러므로 중국문명은 곧 정의 문명이다. 이 면에 있어서 조선반도도 중국인처럼 마찬가지로 정의 문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정이 많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중국인처럼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대충대충, 어지간히, 건성건성,’과 ‘괜찮아’가 정확성을 무시하는 증거들이다.
138    명분과 예의 댓글:  조회:6525  추천:30  2009-10-16
명분과 예의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없을 것이다. 명분을 알고 보면 일종 체면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였다. 우리민족은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 민족이므로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명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중국역사에서 부권제사회의 확립에 따라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 또는 소유의 대상이 된 뒤로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마치 음식이나 재물을 나누듯이 일정한 계획과 방식에 따라 여자를 분배하였다. 그러한 분배의 근거를 ‘명(名)’이라 하고, 분배의 규칙을 ‘예(禮)’라고 하였다. ‘명’은 ‘명분’의 의미이며 ‘이름’에 따라 나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자면 ‘명분’이란 곧 지위라고도 할 수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많이 차지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적게 차지하거나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는 음식이나 재물이나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를 분배할 때에도 이런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지위가 있는 권력자들은 백성들보다 여자를 많이 차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명분을 만들어 냈다. 예기(禮器) 중의 하나가 옥으로 만든 ‘규(圭)’인데 그 모양이 마치 남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규의 크기는 지위에 따라서 달랐다. 천자의 것은 ‘진규(鎭圭)’라 하고 길이가 한 자 두 치였다. 공작(公爵)의 것은 ‘환규(桓圭)’로 길이는 아홉 치이고, 후작(侯爵)의 것은 ‘신규(信圭)’로 길이는 일곱 치였다. 그리고 백작(伯爵)의 것은 ‘궁규(躬圭)’로 다섯 치였다. 이는 남자가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남근도 크고 거꾸로 지위가 낮으면 낮을수록 남근도 작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남근의 크기에 따라 여자를 차지하는 것도 달라야 한다. 백성들의 남근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여자를 여럿 거느릴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례(周禮)>>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천자는 1명의 왕후와 3명의 부인, 9명의 빈(嬪), 27명의 세부(世婦), 81명의 어처(御妻)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제후는 다만 1명의 부인과 9명의 빈, 대부는 1명의 아내와 2명의 첩, 사(士)는 1처1첩, 백성은 한 명의 처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통사회의 명분과 예의는 모든 분야에서 등급과 상하 질서를 정해 놓고 존귀비천(尊貴卑賤)을 적용해 놓았다. 이를테면 대종은 존귀하고 소종은 비천하고, 양반은 존귀하고 상인(常人)은 비천하고,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고, 처는 존귀하고 첩은 비천하고, 적자는 존귀하고 서자는 비천하고 ······ 등등이다. 전통사회에서 뭐니 뭐니 해도 명분이 가장 불합리했던 것이 바로 인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비천한 존재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녀유별’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등등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명분이란 결국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이 없는 자와 약한 자들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였다. 우리민족은 조선조 500년을 통해 유교를 본산지인 중국보다 뼈가 절도록 받아들인 데는 명분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에 없는 명분을 만들어 사회질서를 더욱 세분화했다. 예하면 중국에서는 무릇 양민이면 전부 과거급제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았던데 비해, 조선은 양반가문만 그것도 서자는 안 되고 적자만 응시자격을 갖게끔 법으로 규정했다. 이는 극소수 양반과 그들의 적통(嫡統)들만 권력과 학문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137    두부 한 모 12원? 댓글:  조회:6066  추천:36  2009-08-19
며칠 전에 백두산에 다녀왔는데 17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에 비해 시설이 많이 개선되었고 관광객도 많이 늘어 하루 평균 3,000여명이 된다고 한다. 요 몇 년 사이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 내원을 보면 17년 전에는 주로 한국인관광객이 많았으나 지금은 중국 내(관내 사람 80% 좌우) 손님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중국인도 경제성장에 따라 소비관념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필자는 관내 관광객단체에 끼워 백두산에 갔는데 가이드가 한족이었다. 17년 전 연변에는 가이드가 조선족 일색이었는데 한족가이드를 만나게 되어 기분이 미묘했다.가이드가 비록 한족이지만 관내 관광객을 상대로 연변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90%이상의 내용이 조선족에 관한 것들이어서 필자의 마음이 뿌듯했지만 가이드의 해설 중 유머적인 어느 한 대목을 듣고서 기분이 착잡해났다. 가이드 왈, 연길시는 생산도시가 아니라 소비도시라는 것, 시민소비물가가 전국에서도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 그런데 연길시 소비물가급상승이 조선족 때문이라는 것, 조선족이 한국 등 해외에 노무로 진출해서 몇 년 간 벌어 와서 와장창 소비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밖으로 나간다는 것, 이 때문에 연변 경제가 그들의 외화벌이에 의해 지탱하고 있는 점은 좋은 것이나 반면에 물가가 엄청 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이드가 조선족소비관념을 말하는 대목에서 좌중에 향해 당신네 지방에서는 두부 한 모에 얼마인가고 물으니 대체적으로 1원씩이라는 대답이었고 가이드는 연길에서는 두부 한 모에 12원이라 말한다. 관광객 모두와 필자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실 조선족두부는 모가 커 2원인데 이는 합리적이지만 2원짜리 두부 한 모 사려고 택시를 타는데 왕복 10원 해서 두부 한 모에 12원이고 이것이 곧바로 조선족 소비관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길시의 소비물가 급상승이 확실히 조선족들의 어처구니없는 과소비 풍조 때문이고 연길시에 사는 한족들은 이 때문에 조선족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지 않을까?
136    社會와 會社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4502  추천:37  2009-08-06
會社와 會社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 조선족 칼럼니스트 수년 전부터 중국정부가 농촌과 도시의 최소 행정구획을 ‘사회구역’으로 나누고 있는데 필자는 여기서 ‘社’문화의 유래를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허신이 <<설문해자>>에서 ‘社’를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 깃든 함의는 심오하다. 다시 말해 김정룡이 고향 동불사에 가서 흙을 쌓아놓기만 하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인류가 부족사회에 진입해서 대지의 일정구역을 자기네 부족민의 삶의 터전으로 간주했는데 그 일정구역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타부족에게 알릴 징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최초에 부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한 곳을 선택해 흙을 뫼어놓는 것으로 징표로 삶았다. 그러다가 단순히 흙을 쌓아놓는 것으로 부족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부족하게 인식되어 쌓아놓은 흙 위에 나뭇가지를 꼽아놓기도 하고 또 일정 세월이 흘러 집을 짓고(사당) 부족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한 개 부족의 족장은 이 ‘사’ 내에서 부족민을 거느리고 제사를 맡고 농사를 책임지고, 부족민은 족장의 인솔 하에 ‘사’에 모여 제사를 올리고 농사를 짓는다. 대체적으로 한 개 부족이 공동한 ‘사’ 내에서 같은 언어, 종교, 생활관습을 갖고 공동한 생활을 영위한다.  ‘社會’란 부족민들이 ‘사’에 모여 공동생활을 영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社’란 글자가 흙 ‘土’에 볼 ‘示’ 변이 붙었을까? 허신의 해석에 의하면 ‘示’는 갑골문에서 위에 하늘을 의미하는 가로에 하늘에서 뭔가 내려오는 뜻을 나타내는 세로 세 줄로 형성되었는데 이는 종교적인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示’ 변이 붙은 모든 글자(祈, 禱, 福, 祖 등) 전부가 종교적인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社’란 인류가 부족을 형성하고 일정한 땅을 차지하고 그 땅 내에 모여 제사 같은 종교 활동과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영위해 간다는 뜻이다.  고대 인류는 ‘社’ 내에서의 제사를 매우 중시했는데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란 ‘福’이 본래는 제사음식이며 고대사회에서 제사음식 차원을 따져 빈부를 가늠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한족들은 ‘福’자를 출입문이나 창문에 붙여놓고 행복을 빌고 있다.  동양 삼국에서 ‘社’문화의 발원지는 중국이지만 근대문명이후 ‘社’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것은 일본이다.  ‘社會’를 거꾸로 말하면 ‘會社’인데 일본인들이 서양으로부터 근대기계문명과 유통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만들어 낸 경영성적인 기업을 ‘회사’라 이름 지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란 부족민이 ‘사’에 모여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원시적인 문화형태를 의미하는데 비해 ‘회사’란 근대문명이후 인류가 새로운 생존방식으로 모여서 ‘사’를 형성하고 삶을 영위하는 인위적인 문화형태를 뜻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이 말하는 ‘股分’을 일본인은 ‘株式’이라 하는데 말 그대로 여럿이 모여 포기 식으로 ‘사’를 운영한다는 의미이다. 
135    한반도에 세계적인 석학이 없는 이유 댓글:  조회:6445  추천:49  2009-04-29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들로부터 “세상에서 유태인이 가장 총명하고 그 다음으로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참말로 그럴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한민족과 유태인의 공통점이라면 두 민족이 주변 국가와 민족들로부터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는 동네북과 같은 불운의 역사로 흘러왔다는 것일 뿐, 한민족은 유태인처럼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 사건도 없었고, 국제적으로 명함을 올릴만한 인물조차 없다. 우선 유태인은 세계를 뒤흔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예수라는 인물을 배출했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와 칼`맑스, 막스`베버, 니체 등 세계적인 사상가 및 미국정치, 금융, 언론을 장악한 위대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이에 반해 한민족은 말로는 반만년의 문화역사를 갖고 있고 유태인에 비견해서 자화자찬하지만 실상은 과학과 문학분야의 노벨상수상자가 단 한 명이라도 없을 뿐더러 국제적으로 명함을 내밀만한 석학조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름 있는 유태인을 제쳐놓고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노벨과학상과 문학상수상자가 수두룩한데 유독 우리민족만 제로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가 있는 민족과 종교가 없는 민족> 인류문화를 논함에 있어서 종교를 떠나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인류역사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따라서 자체종교가 있는 민족은 정체성과 주체성이 뚜렷한데 반해 자체종교가 없는 민족은 정체성과 주체성이 희미하다. 세계 3대종교로 꼽히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가운데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모두 유태교에서 파생되어 생겨났을만큼 유태교는 뿌리가 굳건하며 유태인은 유태교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유태인답게 만들어왔고 살아올 수가 있었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태인의 지혜를 탈무드지혜라고도 하는데 탈무드는 유태종교의 핵심인 율법을 풀어 쓴 유태인의 삶의 지침서이다. 그래서 유태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태인의 총명과 지혜는 탈무드에서 온 것이라고 진단한다. 멀리 말고 이웃나라인 중국은 4천년의 문자역사와 사대발명과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할만한 문화가 뚜렷하며 특히 유교와 도교는 중국인을 중국인답게 만든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양대 문화이다. 아울러 중국인은 후한 말에 불교 를 도입하여 도교식 불교로 만들었는데 이를 격의불교라 한다. 중국은 불교의 도입에 따라 언어를 발달시켰고, 변문을 통해 문학과 예술이 크게 발전했고 유교와 도교와 어울려 중국인의 삶을 풍부케 했다. 일본은 자체종교인 신도가 있고 일본인의 인간타입은 신도적이라는 지적이 이미 8세기 초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 밝혀졌다. <문명이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 세계문명을 크게는 중국문명, 인도문명, 기독교적인 서방문명 등 세 가지로 나누고(이는 양숙흘의 나눔법이다), 작게는 유교문명, 불교문명, 기독교문명, 이슬람문명, 유태문명, 아프리카문명, 남미문영, 일본문명 등으로 나눈다. 과거에는 일본을 유교문명권인 중국문명에 포함시켰다가 미국 인류문화학자 루드`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이란 책을 출간해낸 이후부터 서방에서 일본을 중국문명과 분리해서 단독문명으로 취급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 문명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한 문명이 물어야 할 것은 고층빌딩의 건립이나 도로건설이나 대학설립이 아니라 그 문명이 형성시킨 인간타입이다.” 이는 고홍명이 그의 <<중국인의 정신>>에서 밝힌 대목이다. 물론 고홍명은 서양문화의 병폐를 꼬집고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한 말이지만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다는 말은 진리라 나는 생각한다.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는 견지에서 볼 때 한민족도 필경 중국인과 일본인과 구분되는 자체인간타입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아울러 한민족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자체 종교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문명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것이 바로 한민족의 풍류도이고 신라시대 화랑도였으며 통속적으로 말해서 바람문화였다. 단재`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화랑을 모르고 조선민족을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처럼 우둔한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화랑도야말로 우리민족의 인간타입을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해석이다. 사실 고려 중기까지만해도 우리민족은 자체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자체문화가 뚜렷했다. 그러다가 신채호의 지적처럼 “국수파인 묘청집단을 숭송파인 김부식집단이 쓸어버리는 바람에 우리 것을 잃기 시작했고,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신유학 외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조선반도는 경직될 대로 경직되었고 우리 것을 철저히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선조 초기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민간에 흝어져 있는 민속, 풍속을 수집해 들이라고 명하였으나 그 후 유교일변도로 번지면서 민속, 풍속을 유교에 위배되는 이단이라 취급하고 전부 없애버려 현재까지도 우리민족자체인간타입을 형성시킨 문화뿌리를 캐낼 수 없을 정도로 소실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직된 조선조는 희망이 없었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유학자들이 학문을 독점했고, 심지어 가령 누가 도교서를 번역작업시도를 하려고 해도 이단으로 몰아부치고 불교를 철저히 배격했고 조정으로부터 민중의 삶에 이르기까지 전부 유교패턴으로 도배될 정도로 유교단일화로 되었다. 거기다 조정은 왜군의 침입을 눈앞에 두고도 당파싸움에 휘말렸고, 명과 청의 교체시기에 만주족을 배척하고 명을 받들고 소중화로 자칭할 정도로 공자왈 맹자왈에 빠져 있었다. 더욱이 고려 말까지 개성을 비롯해 상업이 발달해 주변국은 물론이고 멀리 페르시아 상인들까지 드나들 정도로 대외교역이 활발했으나 조선조는 유교에 빠져 사농공상의 서열을 철저히 지키면서 상업을 경시하는 바람이 불어 대외교역은 물론이고 국내 상업이 얼어붙어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고단하게 되었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쳐 1860년대에 이르러 만주땅에 이주하는 바람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정은 무능하다못해 동학혁명을 진압하지 못해 청군의 요청을 바랐고, 이것이 기회라 엿본 일본이 끼어들어 중일갑오전쟁이 발발했고, 급기야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사유람단> 16세기 포루투갈과 에스빠냐가 대외식민지 개척에 나설 때 일본은 위기를 느끼고 1580년대 초 소년견구단을 유럽해 파견했다. 그들이 8년 간의 학업을 마치고 세계지도를 작성해 풍신수길에게 바쳤는데 풍신수길은 그 세계지도를 보고 조선과 중국침략의 야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은 많은 유학생을 서구에 파견하였고 서구문명을 수입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시켰고 1868년에 이르러 명치유신을 통해 서구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과거 일본이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던 시기는 옛말이 되었고 꺼꾸로 중국이 일본을 배우러 떼를 지어 갈 정도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겪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1860년대에 이르러 구미에 소년유학생과 성인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엄복은 과학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을 중국에 전파했고 서구사상을 중국에 전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유학생들은 구미 데모크라스와 사이언스를 중국에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인문분야에서는 고홍명은 9개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정도였고 최초로 <<논어>>를 서양에 번역전파했으며 서구문명을 비평하고 중국문명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중국인의 정신>>이란 책을 써 서구를 놀라게 했으며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다.”는 이론을 내놓아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고홍명의 뒤를 이어 임어당은 <<중국인>>, <<생활의 발견>>등 저서를 통해 서구문명을 비평하고 중국문명을 서구인들에게 정확히 인식하게끔 하는데 정력을 몰두했다. 고홍명과 임어당은 구미에서 생활하면서도 종래로 양복을 입지 않았고 줄곧 중국 전통복장인 다부산자를 입고 살아왔다. 임어당은 제2차 세계대전기간 노벨상이 중단을 맞는 바람에 노벨상수상기회를 놓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공인하는 석학이다. 임어당과 동시대에 양숙흘은 <<동서양철학과 문명비교>>를 통해 세계문명을 새롭게 포괄적으로 진단해냈다. 채원배, 호적등은 소장파학자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고 강유위, 양계초 등도 서구에서 인정하는 대학자들이었다. 일본유학을 거친 노신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문인이다. 자아, 일본은 중국보다 한발 앞서 개화했고, 중국은 비록 일본보다 뒤졌지만 그래도 중국적인 것을 지키면서 서양 것을 도입하는 작업을 통해 세계적인 석학을 많이 배출해냈다. 허나 조선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미국과 일본에 유학생을 보냈으나 그들은 거기서 뭘 어떻게 배워야할지를 몰라 놀다가 귀국했다고 해서 그들을 신사유람단이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에 못간다> 어떻게 일이 있었을까? 우리말 속담에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에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무슨 말이냐! 과거 중국학자들은 학자라면 유불도에 모두 정통했다. 주자는 본래 도학에 심취해 있다가 불학에 흥미를 느꼈고 급기야 구국처방으로 내놓은 것이 신유학이었듯이 중국학자들은 모두 주희처럼 세 가지 학문에 통달한 사람들이다. 이는 한 가지 학문만 고집하고 다른 학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학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머리가 열려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중국 학자들은 구미에서 새로운 학문을 접촉하고 접목하기가 쉬웠고 아울러 문명비평가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도 에도시대에 낮에는 주자학을 배우고 밤에는 양명학을 학습하는 이른바 “주주야명”을 견지하므로써 다른 학문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머리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반해 조선은 조선조 500여 년을 통해 우리 것을 전부 잃어버리고 주자학 하나에만 매달리다 보니 마음과 머리가 경직될 대로 경직되어 개화기 구미나 일본에 막상 가보니 마치 도랑물 고기가 망망대해를 만나 어떻게 헤염치고 어떻게 적응하고 바닷물 고기들의 장점을 어떻게 배워야할지를 몰라 그냥 죽어버리거나 도랑물이 그리워 되돌아는 격이 되고 마는 꼴과 같았다. <문화의 단절> 역사란 흐름이다. 마치 물이 발원지에서 발원하여 강을 이루고 바다에 흘러가듯이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우회곡절을 겪는다. 이 지구상의 모든 부족과 민족은 초창기에는 모두 자체인간타입을 형성시킨 문화내지 문명이 있었다. 하지만 물이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듯이 문화내지 문명은 강하고 우수한 것이 약하고 낙후된 곳에 흘러들어 본문화내지 본문명을 파괴하며 소실되게 만든다. 이것이 인류문명의 역사흐름이며 본문화내지 본문명이 파괴되고 소실되는 것을 문화 혹은 문명의 단절이라 한다. 서구는 본래 찬란한 고대그리스와 로마문명이 있었는데 기독교 유입에 따라 천년 동안 신이 통치하는 암흑시대를 맞아 문명이 단절시기를 겪다가 오늘의 서구가 있기까지는 많은 진통을 겪었다. 브루노와 갈릴레오가 지구가 돈다고 말해 종교재판소의 재판에 의해 통닭이 되었거나 될 뻔했던 사건이 말해주듯이 기독교는 과학을 철저히 배격했다. 16세기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인간의 존엄을 주장했고, 과학자들을 살리기 위해 “신은 이 지구를 만들 때 마치 시계에 탑을 감아놓고 저절로 돌아가게끔 해놓고는 손을 뗐다.”는 주장을 하여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도 신을 모독한 행위라고 종교계에서 큰 반발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서구는 종교와 과학, 종교와 정치의 분리시대를 맞아 근 200년 동안 크게 활발하게 움직여왔던 것이다. 중국은 서구와 같은 암흑시대가 없었고 유불도 3교통합을 추구해오듯이 줄곧 열린 사회로 흘러왔다. 비록 중국이 문혁을 통해 전통문화와 단절되는 시기가 있었으나 이는 근근이 10여 년의 일이다. 일본도 신도를 지키는 동시에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경직된 사회는 아니었고, 문화의 단절시대가 없었다. 이에 비해 유독 조선만 조선조를 통해 문화의 단절시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개화기를 맞이한 조선학자들은 세계적인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석학도 배출할 수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넓이와 깊이에 대하여>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문화도 유구하여 인간타입이 넓이와 깊이가 있다. 일본인은 초창기 각박한 자연생활환경 때문에 넓이는 없지만 깊이는 있다. 이에 비해 한반도는 산수가 좋고 먹을 것이 딸리지 않아 인간타입은 낙천적이지만 넓이와 깊이가 없다. 거기다 조선조 경직된 사회를 500여 년이나 겪고나서 넓이와 깊이를 더욱 상실했다. 노벨상이라든가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하자면 그 민족의 역사적인 넓이와 깊이가 있어야 된다. 현재 한반도와 해외 700만 겨레를 포함해 노벨상수상자가 없고(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수상은 여기서 제외로 함) 세계적인 석학이 없는 주요 이유가 바로 우리민족이 넓이와 깊이가 없기 때문이라 나는 진단하고 싶다.
134    중국과 조선족을 비하하는 한국작가 댓글:  조회:7798  추천:36  2009-03-02
중국과 조선족을 비하하는 한국작가 한국작가 박명호 씨가 <만주일기>를 한국 내 모 신문과 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의 글 제6편(심양과 봉천의 아이러니)을 보고 저자는 중국을 모르면서 주관억측으로 중국을 비하하는 형편없는 글이기에 <<코미디 같은 글>>이라 비판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그가 조선족을 비하하는 느낌이 들어 또 싫은 소리를 해야겠다. 아래 <만주일기> 제21편(하리파인-용정 외이담) 중의 일부를 발췌한다. 한족 아가씨 "개조지 쓰지마!"- 조선족 노인 "젊은 처자가 욕지거리를 …" 말과 문화 다른 이민족끼리 섞여 살며 웃음 참지 못할 해프닝 일상화된 용정 용정은 이민족인 한족과 어울려 살다 보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해프닝도 많다. 그 재미있는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한다. ■해프닝 하나 한 여인네가 빈 소달구지에 딸을 태우고 가고 있었다. 이웃에 사는 한족 사내가 5위안을 내밀며 소달구지를 좀 빌려 달라고 했다. 소달구지는 한족말로 '처뉴(車牛)'였다. 한족말을 전혀 모르는 여인네가 듣기에는 '처녀', 곧 딸을 빌려 달라는 줄 알고 너무 어이없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족 사내는 돈이 적어서 그러는 줄 알고 자꾸 따라오더니 10위안을 내밀며 '처뉴'를 빌러 달라고 했다. 결국 참지 못한 여인네가 한족 사내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해프닝 둘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서로가 채소를 사려고 이리저리 밀치고 있었다. 조선족 여인네 뒤에 있던 한족 사내가 그 여인네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빼조지, 빼조지' 했다. 화가 난 조선족 여인네가 누굴 희롱하느냐며 달려들었다. 그것은 '서둘지 말라(別着急)'는 한족말이었다. ■해프닝 셋 주로 조선족 노인들만 탄 버스가 산골 마을에서 장날 시내로 가다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 버스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이래저래 손을 써보지만 쉽게 해결되지가 않았다. 시간이 급한 노인 승객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보다 못한 한족 차장 아가씨가 "따쟈, 빼조지" 했다. "여러분, 서둘지 마세요"라는 말인데 한족말을 모르는 노인네들이 듣기에는 욕으로 들렸다. '저 간나 봐라. 뭘 따고 뭘 빼?' 아니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노인들은 새파란 젊은 차장 아가씨에게 욕까지 먹었으니 감정이 격화돼 삿대질을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 한족 차장 아가씨는 더 큰소리로 "개조지 쓰지마!"라고 외쳤다. 그 문장은 "오히려 바쁜 사람은 운전기사입니다"라는 뜻인데 결국 노인들에게는 더 심한 욕설이 되고 말았다. '개 무엇이 쓰다'라고?' 그제는 노인 승객들이 차장 아가씨에게 달려들어 큰 소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필자는 중국에서 살아오면서 소달구지(소수레)를 ‘車牛’라 부른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 있는 주변 한족과 조선족들에게 ‘車牛’라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자문을 구해보았으나 모두 처음 듣는 소리란다. 박명호 씨는 중국용정에서 조선족들한테서 들은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고 있으며, 이는 분명히 조선족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해프닝 둘과 셋, 그리고 한 조선족 할머니가 시장에서 닭을 팔고 있는데 한족할아버지가 닭 값을 물으니 “니디 이양디 우쾌이, 워디 이양디 싼쾌이”라는 이야기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한족과 어울려 살면서 언어소통장애를 상소리로 웃기는 말을 지어낸 것으로 알고 있으며, 결국 이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데 일상화된 해프닝이 아니며, 이러한 이야기는 용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연변조선족사회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저자에게 충고하고 싶다. 중국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글을 쓰려면 많은 공부를 해야지 그렇지 않고 주관억측이나 개인감정으로 써낸다면 결국 한국사회에 중국과 조선족 이미지가 흐리게 되고 중국과 조선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것을.
133    천주교와 기독교의 구분 댓글:  조회:7792  추천:44  2009-02-05
천주교와 기독교의 구분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황하대륙에서 한 때 ‘멸종’했던 종교가 개혁개방의 흐름을 타고 부활하고 있으며 현재 전통종교인 불교(後漢시기 중국에 유입되었음)와 도교가 주류이고 천주교와 기독교가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천주교와 기독교는 완전 다른 종교라 인식하거나 같은 종교이지만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 필자가 알고 있는 바를 나열해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주교와 기독교는 모두 예수교로서 본래 뿌리는 크리스트교(기독교)이고 같은 <<성서>>를 사용하고 있지만 교리교의해석과 예배의식상에서 차이가 많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크리스트교(기독교)의 유래와 전파 및 교파 분리과정을 살펴보자. 크리스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구세주)란 뜻이며 2,000년 전 멸망에 직면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망명 간 유태인들이 민족을 구해줄 메시아를 바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라는 인물을 각색해냈고 하나의 ‘종교’로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는데 당시 예수교는 유태인 내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사도바울에 의해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이방인의 세계 즉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전체 유럽에서 자리매김 되었고 세계종교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크리스트교는 본래 그리스를 중심으로 동유럽 러시아에까지 뻗어져 나아간 것을 동방정교라 하고 이것이 정통인데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서로 갈등이 생기면서 로마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보편적이라는 뜻)이 분리되어 하나의 교파를 형성했고 서유럽이 동유럽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크리스트교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AD324년 로마제국이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정함에 따라 전체유럽에 급속히 전파되었고, 그 후 천여 년의 유럽을 신이 통치하는 암흑시대라 말한다. 1517년 독일인 말틴·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켰는데, 그 배경은 로마교황청이 죄를 지은 사람은 면죄를 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이른바 면죄부를 팔아먹는 것이 크리스트교의 윤리에 어긋난다고 루터가 저항했고 종교를 개혁한다는 의미로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교(개신교)를 설립한다. 후에 캘빈이 루터의 손을 들어주고 교리교의 확립작업을 한다. 최초 히브리어로 된 <<성서>>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고 후에 가톨릭의 <<성서 >>는 유태인의 역사인 구약46편에 예수생애를 반영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를 위주로 여러 편지들로 묶여진 신약27편 총 73편인데, 개신교의 <<성서>>는 구약37편에 신약29편 총 66편으로 되어 있다. 다음 크리스트교가 동아세아에 전파된 과정과 종교 명칭을 살펴보자.당나라 때 지금의 이란을 거쳐 크리스트교의 한 개 교파인 일명 경교(景敎)가 장안에 들어왔고 교회도 세웠고 신도도 수 천 명이 되었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이 크리스트교가 동아세아에 가정 먼저 들어온 사례이다. 강희 연대에 이탈리아 천문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인 마테리오치(중국 명 利瑪竇)가 북경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는 동시에 중국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 서양에 전했고, 크리스트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데는 <<성서>>를 한어로 번역하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당시 그가 ‘하느님’을 한어로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는 문제에 봉착했는데 기왕에 중국에 上帝라는 개념이 있으나 어쩐지 신통치 않게 느껴져 결국 ‘하늘의 주인’이란 의미로 ‘천주’라 번역했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크리스트교를 천주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 초반부터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 목사들이 대량 중국에 밀려들면서 기왕의 천주교와 구분하는 의미로 개신교를 기독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고 이 케이스가 한반도에 전파되었다.천주교와 기독교는 본래 같은 크리스트교(예수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고 눈에 보이는 간단한 차이점들을 말하자면, ㄱ.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동아세아에서 가톨릭을 천주교,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를 기독교라 부른다. 천주교를 舊敎, 기독교를 新敎라 부르기도 한다. ㄴ. 하느님과 하나님중국에서는 천주교의 하느님을 ‘천주’,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제’라 부른다. 한반도에서는 천주교는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 부르는데 사실 우리말 하나님은 어법에 맞지 않는 것이지만 개신교에서 유일신을 주장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다(여호와, 알라 , 천주, 상제 혹은 하느님, 하나님 등 그 어떤 호칭으로 부르든 신은 하나이다). ㄷ. 신부와 목사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교단의 설교자를 천주교는 신부, 기독교는 목사라 부른다. 신부는 장가를 가서는 안 되지만 목사는 일반인과 같이 장가도 가고 애새끼도 낳을 수 있다. 신부가 장가를 가지 않는 이유로서, 첫째 하느님도 독신이고 예수도 독신이기 때문이고, 둘째 범인(凡人)이 하는 일(섹스를 추잡스런 일로 여김)을 내가 하지 않으므로 초인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고, 셋째 가정을 이루면 신성한 이미지에 짐이 된다는 것이다. ㄹ. 성당과 교회신도들이 모여 설교를 받는 곳을 천주교는 성당(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성스러운 곳), 기독교는 교회(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이는 곳)라 부른다.성당은 정문을 들어가면 성당건물 옆에 예수의 엄마인 마리아상이 있고 신도들이 먼저 마리아에 향해 십자를 긋는 굿을 한다. 교회건물엔 마리아상이 따로 없다.성당 건물 문 앞에 물 항아리가 있고 신도들은 그 물을 손가락에 뭍이고 십자를 긋는데 이는 손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성당 밖은 더러운 俗世이고 성당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곳 聖世이기 때문에 속세로부터 성세에 들어가자면 반드시 세례를 뜻하는 정화의식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이러한 의식이 없다. 천주교 여신도들은 성당에 들어가서 반드시 머리에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데 이는 여성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자식이 아니고 직접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수 없는 천한 존재라는 의미로 유래된 것이지만 현재도 이 룰을 고수하고 있다. 또 여신도들은 치마를 입고 성당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교회는 여신도들이 베일을 쓰지 않는다. 성당에서는 신도들이 포도주와 빵을 맞보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포도주는 예수의 피, 빵은 예수의 살을 상징하며 이것을 먹고 마시므로 하여 나와 예수는 동일체가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일부교회에도 이러한 의식이 있다. 그리고 밥상에 마주 앉아 십자를 그으면 천주교 신도이고 눈을 지그시 감고 뭐라 중얼거리면 기독교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를 후세 크리스트교인들이 세로는 하나님과 신자들의 수직관계를, 가로는 인간의 평등을 의미하고 어쩌고저쩌고 해석하는데, 플라톤 시대의 십자가는 네 끝이 각기 흙, 물, 공기, 불 등 자연을 형성하는 네 가지 기본원소를 뜻하며 이는 흙은 인간의 육체적 단계, 물은 심적 단계, 공기는 영적 단계, 불은 영지적 단계를 상징하며 한 단계씩 승화하여 최후 구원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연구가들은 최초 크리스트교가 플라톤시대의 십자가를 빌려다 써먹었는데 후세 크리스찬들이 본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제멋대로 풀이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천주교는 각종 전통예배의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는 ‘거추장스러운 의식’들을 제거해 버렸다. 천주교는 아직도 교리교의를 중심으로 설교를 많이 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예수만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죽는 사람도 살아나는 등 복을 많이 받는다는 이른바 祈福신앙이 위주이다(한국과 연변의 경우 더욱 심하다). 예수만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이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본래 유대인이 최초 크리스트교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영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했고,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전도할 때도 영지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영지는 한자로 靈知라 적는데 말 그대로 영적으로 앎(깨달음)을 뜻한다. 영지주의란 쉽게 말해서 그냥 무턱대고 무작정 믿지 말고 영적인 경지에 도달해야만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최초 영지주의 크리스트교인들은 교회가 따로 없고 여럿이 모인 곳을 아무장소 관계없이 교회로 삼고 지정된 목사도 따로 없고 서로 번갈아가면서 목사를 하고 전도사를 하고 집사를 하고 하면서 아주 민주적이었으며 참말로 영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다가 로마를 중심으로 서유럽 쪽으로 전파됨에 따라 크리스트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교회에 권위를 부여하고 <<성서>>에 의문이 있으면 절대 용납하지 않고 무작정 문자 그대로 믿기만 하라는 쪽으로 흘렀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으라는 것을 문자주의라 하는데 이는 영지주의와 대조되고 상반되는 뜻에서 나온 개념이다. 사실 <<성서>>도 인간이 지어냈으면서도 불구하고(신약성서는 AD2세기경 완성되었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의를 갖지 말고 무작정 믿으라는 것이 문자주의이다. 문자주의자들이 한 술 더 떠 예수만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본래 최초 크리스트교의 영적인 구원의 취지에 위배된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문자주의광신도들에 의해 역사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AD645년 모하메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했는데 그 뿌리는 역시 아브라함이고 <<코란(받아 적으라는 뜻) >>의 전반 부분은 크리스트교의 구약성서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이 세 종교의 뿌리는 하나라는 뜻이다. 뿌리가 하나인 세 종교는 역사적으로 서로 적대관계로 수 없이 싸워왔다. 최초로 크리스트교와 유대교의 싸움은 크리스트교권에서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하나님의 역사(구약)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고 마땅히 죄 값을 치러야 한다면서 유태인을 심하게 박해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조상을 모시고 살지만 땅 싸움을 수 없이 해왔고 현재도 싸우고 있고, 유대교는 아예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데 비해 이슬람교는 예수를 그저 설교를 괜찮게 하는 랍비(신부, 목사) 정도로만 인정한다.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는 중세기 200년 전쟁을 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이슬람교는 ‘알라’신 하나만 믿는데 반해 크리스트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받드는데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트교가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미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두 종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생겨날 때는 하나이지만 후에 추종자들에 의해 수 없는 교파와 종파가 생겨났다. 불교는 소승불교(남아, 동남아)와 대승불교(동북아)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교파가 있고 조계종이요 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종파가 있다. 이슬람교는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고, 크리스트교는 크게 동방정교, 가톨릭(천주교), 개신교(기독교) 등 세 개 교파 로 나누고 각기 내부적으로 또 수 없는 종파가 생겨났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모두 4만 7천여 개 종파가 있다고 하며 각 종파마다 자기네들이 정통이고 다른 종파를 이단이라 주장하고 또 교회마다 자기네들만 정통이고 다른 교회를 모두 이단이라 선전하면서 신도를 긁어모으기에 분주하다. 본래 본 주제를 갖고 책 한 권 분량의 정도로 풀이해야 하는데 편폭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데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필자는 그 어느 종교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로서 다만 역사문화공부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계 주요종교에 대한 공부도 따라서 하게 되었을 뿐이다.  
132    나와 나의 아버지 누가 더 행복할까? 댓글:  조회:5906  추천:55  2009-01-28
나와 나의 아버지 누가 더 행복할까?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사람들은 흔히 사회는 발전하고, 역사는 전진하고, 현재는 과거보다 낫고, 오늘이 어제보다 좋고, 미래는 오늘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공식’ 대로라면 나는 나의 아버지보다 더 행복하고 나의 딸은 나보다 행복해야 한다. 참말로 그럴까?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17년 10월 18일(음력) 함경도 명천군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3개월 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등에 엎여 만주로 오게 되었다. 그 때 용정현 동불사 요구촌에 자리잡은 것이 장장 77년을 그 고장에서 살아왔다. 나의 아버지는 14세에 장가가서 우리 8남매를 낳았고, 나는 막내였다. 우리 집은 전통유교가문으로서 남존여비사상이 뿌리 깊었다. 어머니는 맛난 음식이 생기면 아버지를 공대했고, 매년 봄이면 개를 잡아 엿을 대려 아버지를 공대했고, 평상시에도 미숫가루를 떨구지 않았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내가 대여섯 살 때부터 남자들의 밥상에 끼웠고 밥식기를 따로 챙겨 받았으며 내가 밥을 먹고 나면 누나들이 양치물을 떠다 바쳤다. 아버지는 토지개혁에 앞장서 공산당원에 가입했고 민정, 당지부서기를 역임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야학을 다녀 대충 글을 때웠다. 하여 민정을 맡으면서 나보다 10세 전후의 온 동네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지부서기를 맡으면서 26명의 공산당원을 배양하여 <<연변일보>>에 실리기까지 했다. 공산당사업에 충실해서 문화혁명 전에 주덕해와 함께 사진까지 찍었다. 문화혁명 기간에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투쟁 받고 매를 맞아 한 때 정신이 이상해졌다가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정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토록 심한 풍파를 겪고 나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따져볼 생각도 해보지 않고 오로지 공산당사업에 충실했다. 무식이 유식보다 덜 머리가 아프고 행복하다는 말이 진리인 것 같다. 아버지는 인품이 좋고 싫은 소리를 모르고, 누구네 부부가 말썽이 생기면 화해시켜주고 하면서 덕을 많이 쌓아 온 동네에서 ‘양반대접’을 받아왔다. 70이 넘어 노동력을 상실하고 가끔 몸이 편치 않으면 동네 사람들이 돈 5원을 들고 오는 사람, 닭 한 마리, 혹은 차입쌀을 몇 근 들고 문병을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당시 도시사람들이 관직에 높이 계시는 분들에게 아부로 본첨을 하는 것보다 나의 아버지한테 드리는 동네사람들의 정성은 참으로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깊게 받았다. 아버지는 가문의 좌장이어서 매년 생일이 되면 수십 명의 친인척과 동네사람과 먼데서 온 친히 배양 받았던 후계자손님들까지 합치면 100여 명이 넘게 모여 큰 잔치를 벌렸다. 아버지가 77세 되던 해에 내가 연길에 모셔와 살다가 79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5년 뒤에 돌아가셨다. 물론 추도식도 굉장하게 치뤘다. 아버지는 태어나서 3개월 만에 만주에 온 후 돌아가실 때까지 서쪽으로 가장 먼 곳은 돈화, 동쪽으로 도문, 동북쪽으로 왕청에 가보았다. 물론 일생 동안 침대기차를 타보지 못했고, 비행기는 구경도 못했다. 아버지가 장가가서 1942년 나의 둘째 형을 낳았을 때, 우리 집 식구는 17명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이래저래 분가하다보니 아버지 어머니에 우리 형제들만 살게 되었으나 역시 식구가 많았다. 나를 포함해 현대 사람들은 우리부모세대들은 조롱조롱 그 많은 식구들을 눕혀놓고 섹스를 어떻게 했을까는 것이 궁금하다. 물론 어떻게라도 섹스를 많이 했기 때문에 물렁 여덟 형제나 낳지 않았는가? 더욱이 우리부모세대들은 절대다수가 오로지 ‘한 구멍, 한 작대기’만 파고, 바라보고 살아왔다. 나는 연변일중 교사로 있을 때까지 오로지 사업과 가정밖에 몰랐다. 그러다가 1990년 5월 당시 하해(下海)바람의 물결을 타고 철밥통을 버리고 ‘상업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여행사가이드를 하면서 한국 관광객을 모시고 가라오케나 나이트 가서 아가씨들을 만나면 불쌍하다고 돈을 주면서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매우 천진했다. 그러다가 중국의 연해도시와 내지 관광도시를 돌아다녔고, 동남아를 비롯해 한국 등 외국나들이를 하면서부터 차차 순진했던 내가 ‘부화타락’하기 시작했다. 나는 적어도 나의 아버지가 향수 못했던 비행기도 지구를 몇 바퀴 돌 정도로 뻔질나게 타보았고,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도 많이 묵어보고, 산해진미도 많이 먹어보고, ‘여러 구멍’도 파보았다. 거기다 한 때 자가용까지 몰고 다니면서 세상을 주름잡았다. 맨발의사도 해보고, 소학교 선생도 해보고, 연변1중 교원도 해보고, 기업법인대표도 해보고 정부관원도 해보았다. 이 세상의 향수란 향수는 거의 다 해보았다. 그런데 그 ‘호화로운 향수’ 속에서도 늘 마음은 공허하고 허전했다. 나는 늘 나에게 “네가 대학시험을 7년을 봐서 성공한 것이 기껏해야 잘 먹고 잘 놀기 위해서였던가?” 만약 나의 딸애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는 일생 동안 뭘 해놓았는가?”고 묻는다면 “응 그래 한때 잘 먹고 잘 놀았다.”는 대답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100여 편의 글을 발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곧바로 한때 잘 먹고 잘 놀았던 시절이 아니라, 애를 금방 낳고 열심히 출근하여 사업에 몰두하고, 집이 차려져 열심히 가꾸고, 올해는 녹음기를 사놓고, 내년에는 자동세탁기를 사고하면서 열심히 사업을 하고 가정을 위해 열심히 신경을 썼던 시절이다. 그다음 행복한 것은 돈을 떠나 내가 지금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사는 것이다. 나의 지금까지 생애는 겉으로는 나의 아버지에 비해 훨씬 호화롭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모든 면에서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삶이 아버지에 비해 너무 공허하고 너무 허무하다. 앞으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걱정이 크다. 적어도 나의 아버지는 나와 형제들의 노력에 의해 마감까지 참 행복하게 보내다 돌아가셨다. 이에 비해 내가 늙으면 나의 딸에게 기댈 수 있는 보장이 없다. 아울러 나의 아버지세대는 죽으면 자식들이 적어도 청명과 추석에 아버지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흙을 올리고 술을 부으면서 제사를 올린다. 허나 내가 죽으면 이러한 전통을 나의 하나밖에 없는 딸애에게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나의 답은 나의 일생이 결코 나의 아버지보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세상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변해버려 전통적인 ‘경(經)’ 이 깨져 사회가 혼란스럽고, 가정윤리가 바닥났고, 사람마다 자기만의 편함을 추구하고, 부질없는 경쟁만 부추기고 해서 현대사회는 사람이 살기가 참으로 피곤하다. 중국어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세상의 기풍이 못해가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아, 오늘이 과거보다 못하구나!(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나는 늘 이 격언으로 나와 나의 아버지 삶을 비추어본다.
131    조국이란 뜻을 알고 살자. 댓글:  조회:7716  추천:43  2009-01-18
조국이란 뜻을 알고 살자.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현대사는 역사다.”고 말했는데, 뜻인즉 오늘의 우리의 삶은 역사의 관성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왕조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삶을 형성시킨 문화 역사를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왕조역사 따위엔 관심이 없고 문화역사에 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여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국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국이란 ‘祖’는 본래 갑골문의 표기에 의하면 ‘且’로 되어 있으며 이는 본래 남자의 성기인 남근을 뜻한다. 이는 김정룡의 외설이 아니라 갑골문연구 전문가였던 곽말약의 이론이며 현재 중국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연세대 중문 학과 최영애 교수는 “음운학적으로 조상의 ‘조’는 남근의 속어 ‘좇’ ‘조지’와 연관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혼이란 ‘혼’자는 본래 양기와 음기가 만나는 황혼 무렵에 혼례식을 거행한다고 해서 황혼이란 ‘昏’인데 후세 사람들이 여자 변을 붙여 ‘婚’자로 되었듯이, 조국이란 ‘조’자도 남근을 상징하는 상형문자인 ‘且’인 것에 후세 사람들이 볼 시(示) 변을 붙여 ‘祖’로 되었다. 왜 볼 示를 붙였을까? <<설문해자>>에 의하면 ‘示’는 갑골문에 위에 가로 ~의 모양은 하늘을 뜻하고 하늘에서 뭔가 내려오는 뜻을 나타내는 세로 세 줄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따라서 볼 시 변이 붙은 ‘祈’禱’福(제사 음식)’禮’ ‘社’ 등 모든 글자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祖’는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는가? 옛날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고 사당 안에 남근의 모형 ‘且’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의 대상이 곧바로 ‘且’이며 이것이 곧 ‘祖’이다. ‘祖’는 ‘石祖’ 혹은 ‘陶祖’가 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을 금기시 하는 바람에 ‘石祖’ ‘陶祖’가 ‘木牌’ 혹은 ‘石牌’로 바뀌었다. ‘祖’는 조상을 뜻하며 조상숭배는 곧 남근숭배이고 조상문화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모든 일은 조상과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이고, 심지어 남녀가 좋아서 결혼해도 가문을 잇기 위해서이고 아이를 낳아도 조상을 위해 대를 잇는 것이라 하고, 사업이 실패하면 조상을 욕되게 했다고 탄식한다. 그렇다면 ‘조’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조’는 부계 씨족사회의 성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토템이 ‘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씨족이 출현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일이 곧 조상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며, 이 조상의 사당을 중심으로 족장이 씨족을 거느리고 주거했고, 이 주거지를 ‘籍’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祖籍’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본관’이라 부른다.또 사당을 중심으로 군주가 백성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형태를 ‘國’이라 했고, ‘국’은 ‘조’로 인하여 생겨났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조국’이란 말이 이렇게 생겨났다. 이는 역사적 맥락의 거시적인 개념이고 우리 개개인은 할아버지(조상) 나라를 ‘조국’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라마다 공동조상을 신화 혹은 신화적으로 지어내고 이를 구심점으로 백성을 뭉치게 만들었다. 삼황오제요, 태양신이요, 단군이요, 아브라함이요 모두 ‘조국’이란 개념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웃기는 것은 남근을 의미하는 ‘조국’이란 말은 있어도 나는 분명 아버지 남근에 의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父國’이란 말이 없다는 것이며, ‘국’은 본래 ‘조’로 인하여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부국’이 아닌 ‘母國’이란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姓’은 여성이 낳는다는 의미로서 ‘성’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본래 ‘성’은 여성을 따르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성과 씨의 구분> 글 참조) . 인류역사를 모계사회와 부계사회로 나누는데, 시간적으로 보면 하루 24에 비유해 부계사회는 근근이 23시 59분 59에 해당되도록 극히 짧다. 비록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남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모계사회잔재를 없애려고 발버둥 쳐 왔고, 큰 성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姓’이란 글자가 보존되어 왔듯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모계사회에서 아이들은 엄마만을 알고 아버지는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았다. 부계사회에 들어 주나라 초기 첫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불분명하다고 殺首子란 관습이 있었듯이 사실 아이란 낳아준 엄마는 분명하지만 아버지는 불분명한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실시 된지 오랜 현재도 많은 아버지들은 아이가 나의 아이인지를 의심하면서도 어영부영 살아가는 현상들이 존재하고 있다. 또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젖을 먹여 키우고 말을 배워주고 입히고 하는 것이 엄마이기 때문에 나를 낳은 실체로서 엄마는 확실하지만 아버지란 존재는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 온다. 엄마는 땅과 같은 존재로서 땅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엄마라는 실체는 변함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 개인이 나라라는 개념과 연관될 때 내가 몸담고 살고 있는 실체인 국가를 말하자면 ‘조국’이란 개념은 막연한 느낌이고 ‘부국’이란 말을 쓰지 않고 ‘엄마의 나라’라고 표현한다. ‘엄마의 나라’인 ‘모국’이란 개념 속에는 국에 대한 개인의 애정(민족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과 자녀교육이란 큰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 조선족을 예를 들어 말하자면 조선말을 할아버지 나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엄마의 혀를 통해 배웠다. 영어로 모어를 ‘엄마의 혀(마더팅)’라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기본언어를 엄마의 혀를 통해 배운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언어를 비롯해 여러 기초적인 교육은 엄마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태인은 해외거주하고 있는 동포가 이스라엘국적을 신청할 경우 부모 양방이 모두 유태인이면 시험을 면제하고, 가령 엄마가 유태인이고 아버지가 이민족이면 시험을 면제하지만 아버지가 유태인인데 엄마가 이민족이면 반드시 시험을 봐야 하게끔 정책으로 규정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세아 국가들에서는 귀화문제에 있어서 아버지 혈통이 우선인데 비해 유태인은 자녀교육의 주체가 엄마라고 엄마의 혈통을 더 중요시하는 이 규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모국’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130    유태인은 좋은가? 나쁜가? 댓글:  조회:7890  추천:65  2009-01-09
유태인은 좋은가? 나쁜가?   김정룡 kzl0917@naver.com    중국학자들은 20세기는 두 유태인 간의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뜻인즉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 인물인 칼·맑스와 자본주의진영을 대변하는 예수(종교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와 칼·맑스 외에도 19세기와 20세기 근 200년 역사무대에 등장한 막스·베버, 니체, 아인슈타인, 챠플린, 키신져 및 노벨과학상 수상자 12%를 점한 유태인을 포함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인재들이 많다. 이런 명백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총명하고, 똑똑하고, 장사 잘하고, 어쩌고저쩌고 특수민족이라 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유태인 찬양에 나서고 있다. 허나 최근 구미일부에서는 유태인은 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이라는 평가도 있으니 이들의 견해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필자는 이 글을 쓴다. 한 민족을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는 근래에 보이는 현상만 논하지 말고 그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현존해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민족 치고 2000년 전의 正史만 있고, 그 후 2000년 동안 자기네들의 正史가 없는 것이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유태인이다. 구약성서(실제로 유태인 역사서인데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세기부터 유태인의 역사라 하지만 실제로 유태인의 정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지금의 이라크 한 시골마을에 아브라함이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하루 밤 잠결에 하나님이 나타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 정착하면 너의 후대들이 번창해진다.”는 계시를 준다. 이튿날 아브라함은 즉시 행동에 옮긴다.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를 끼고 농사를 지어먹을 만한 땅인데 지금의 팔레스티나 땅이다. 아브라함은 우리 단군과 비슷하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정착하여 건국한다. 그런데 후대들이 번창해 질 것이란 하나님의 계시와 달리 그가 환갑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토착 여종과 잠자리를 해 이스마엘이란 남아를 보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정실의 자식이 아니기에 계약을 맺을 수 없다고 생떼를 쓴다. 이스마엘이 14살 되던 해 아브라함은 다행으로 100세 가까운 노년에 본처와 이삭이란 아이를 낳는다. 본처와의 자식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자 여종과 이스마엘은 쫓겨나게 되었고, 이들의 후대가 아랍민족으로 되었고 이삭의 후대가 유태인이 된다. 이것이 유태인과 아랍민족 사이 반목의 단초가 되었고, 그 싸움이 4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아랍민족은 자기네가 아브라함의 장자직속후손들이고 팔레스티나 땅은 당연히 우리 것이라는 주장이고, 유태인은 자기네가 아브라함의 적통후손들이고 팔레스티나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의 싸움은 형제간의 다툼인 셈이다. 이 ‘쟁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히 훑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를 끼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간 지점에 있는 나라이며 가나안, 이스라엘, 유대, 주이시, 팔레스타인 등 다양하게 부르는데 마치 조선반도를 코리아, 조선, 한국 등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자식을 낳는다. 유태인은 12라는 수자를 중히 여기는데 솔로몬시대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나뉘었다든가 예수의 제자도 12명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유래는 큰 원의 둘레에 12개 작은 원을 맞닿아 놓으면 큰 원과 작은 원 사이 및 작은 원끼리도 서로 변이 맞닿고 이는 인간사회 끈끈한 단합을 상징한다. 기원 전 1800년경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이집트에서 파라오왕의 오른팔 노릇을 하며 200년 동안 그의 후대가 수백만으로 늘어나자 이집트정부가 축출에 나섰고, 유명한 모세의 출애급기가 그때 있은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후대들이 이런저런 곡절을 겪다가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 중국이 미신사회로부터 인문사회로 전화되는 주나라 건국시기와 비슷한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다윗의 이스라엘 건국이다. 다윗은 왕위를 솔로몬에게 넘겨주었고, 솔로몬이 노환으로 죽게 되자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북쪽에 있던 10개 지방이 한데 묶여 이스라엘이란 왕국이 되고, 남쪽 두 지방이 유대라는 왕국이 되어 둘로 나뉜다.이스라엘 역사는 이민족에게 정복당한 역사이다. BC922년 이집트인에게, BC732년 앗시리아에게, BC586년 바빌론에게, BC332년 그리스에게, BC198년 시리아에게, BC63년 로마에게 정복당했고, AD112년에는 유대라는 나라는 흔적도 없이 완전히 멸망한다. BC63년 로마에게 정복당하자 유대인은 세상 사방에 뿔뿔이 흩어졌고, 기원 전후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국제도시에 망명 갔던 유대지식인들이 후세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예수라는 인물을 각색해 냈고, 이것이 후에 기독교로 발전한다. 기독교 탄생배경은 이렇다. 유대라는 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일부 지식인들이 2000년 동안 선택된 민족이라 굳게 믿었던 하나님은 어디서 잠자고 있는지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상의 메시아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고, 당시 지중해연안을 중심으로 디오니소스, 오시리스라 불리는 메시아가 성행했고,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도 메시아로 불렸는데 그들은 모두 지상에 복음을 주고 죽었다가 부활해 승천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예수의 행적과 실로 비슷하다. 그래서 신화연구가들은 예수를 이들의 복사물이라 판단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를 만들어낸 것이 유대인들이지만 당시 유대인들 내에 먹혀들지 않았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시 멸망에 직면한 유대인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민족을 구해줄 메시아를 바랐는데 맥없이 십자가에 못 밝혀 죽는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식일에도 보리이삭을 훑어먹는다든가 창녀와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는 예수는 유대고유 율법으로 말하자면 법을 어기는 망나니이기 때문에 상놈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는 운이 좋게 유대계 로마인인 바울이란 인물이 나타나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는데 대성공을 이루었고 전체 유럽은 물론이고 아메리카 내지 아프리카 및 20세기에 들어 남조선 땅에서 신도를 1200만이나 확보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종교로 발전했다. 기원 324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자 그때부터 유태인 탄압이 본격화 된다. 기독교권에서 본래 도리라면 예수를 배출한 유대인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며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탄압이라니? 그 내막은 이렇다. 예수는 정치적으로 로마인에게 죽음을 당했으나 종교적적으로 기독교권에서는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를 죽인 유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놈들이고 씨도 못 받을 종자이고, 피 값을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억지 같은 주장이 중세기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어 유태인은 세상천지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아왔다. 고대 로마제국과 그 식민지 국가들에 사는 유태인은 자신들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가야 했다. 쉐익스피어의 <<베니스상인 >>에 고리대를 놓고 채무자가 갚지 못하게 되자 살 1파운드를 도려내는 지독한 주인공이 유태인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당시 가톨릭 나라들에서 고리대는 기독교윤리에 맞지 않는 세상에 이런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유태인이며 그들은 박해를 받아 마땅하다는 당위성을 반영한 작품이 바로 <<베니스상인 >>이다. 우리는 문학작폼을 읽으면서 그 작품이 반영된 내용만이 아니라 그 시대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맹인이 기와장 펼치는 격이 되고 만다. 기독교 한 갈래인 동유럽 동방정교국가들에서도 유태인 박해가 심했다. 그 일례로 러시아에서 1883년부터 쓰탈린 정권 전까지 다섯 차례 유태인 축출운동이 있었다.히틀러는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게르만민족제일주의를 표방하는데 장애가 되는 유태인을 종자를 남기지 말고 모두 말살해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도대체 무엇이 장애가 된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유태인들이 주장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네 민족만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이 괘씸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공정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만약 하나님이 진짜로 있다면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모두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태어난 것이지 특정민족만이 선택되었다는 주장은 타민족에게 미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이 세계1차, 2차대전을 통해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머리 좋은 자들이 자유의 땅인 미국으로 건너가 세력을 확장했고, 2차대전이 끝나자 영국의 두둔 하에 1948년 떠난 지 2000년이 지난 팔레스티나 땅에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팔레스티나 땅은 유태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공백 땅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 땅에 2000년 동안 아랍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태인들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니 왜 유태인들과 싸우지 않겠는가? 유태인과 팔레스타인들의 분쟁의 초점은, 팔레스타인들은 자기네가 2000년 살았으니 당연히 우리 땅이라 주장하고, 유태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았던 땅에 돌아왔을 뿐이어서 정당하다는 것이며 토지문서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토지문서란 바로 인류역사이래 가장 많이 팔린 <<성경>>을 의미한다. 두 민족 간의 또 하나의 분쟁은 가자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땅마저 유태인들은 영토확장욕심 때문에 현재까지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전체 중동국가 아랍인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힘을 갖고 있으며 그 힘을 바로 미국이 키워주었고 핵까지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힘이 막강하다. 이스라엘은 이 힘의 논리로 팔레스타인을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유태인들이 나쁜 놈들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우물에 향해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를 구한다든가, 길가에 정신 잃고 쓰러진 사람을 엎고 병원에 달려간다든가 이런 정의는 믿어도 나라와 나라 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정의를 믿지 않는다. 빈곤한 사람이 금덩어리를 갖고 있다고 하자. 부자가 그 금덩어리가 욕심나서 빼앗겠는 데는 너는 나쁜 놈이라는 여론을 일으켜 명분을 얻고 나는 최신식 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 정당하고 너는 식칼도 갖지 말라 윽박지르고 나와 한 판 붙자고 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마구 갈겨대고 하는 것이 힘의 논리이고 정의를 부르 짓고 하는 것이 미국이고, 이스라엘이다. 자기네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까불고, 영국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고, 미국을 그늘로 삼고 영토 확장에 나선 유태인이 과연 좋은가? 나쁜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나 개인적으로 유태인에 대해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대교라는 종교이고 그들의 율법을 풀어 쓴 탈무드이다. 유태인은 2000년 동안 유랑민으로 살면서도 자기네들의 종교와 탈무드를 지켜왔기 때문에 오늘날 여전히 민족이 생존하고 있다. 만약 우리민족이 유태인처럼 2000년 동안 흩어졌다면 민족생존이 가능할까? 묻고 싶다.  
129    중국에 법률이 있었는가? 댓글:  조회:6677  추천:40  2009-01-02
중국에 법률이 있었는가?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법(法)이란 글자는 죄인을 가죽포대에 담아 강물에 띄워 보내는 데서 유래되었다. 갑골문에 ‘법’이란 글자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 ‘법’이 생겨난 지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팔조법’으로 조선을 다스렸다는 역사기재도 있다. 허나 팔조법은 형벌에 관한 것일 뿐 모세의 ‘십계명’처럼 형법과 민법이 구비된 그러한 ‘법률’이 아니다. 법률은 법이 율(律)로서 하나의 체제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학자들은 고대 중국에 법은 있어도 법률은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주나라 초기 주공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제도 등 다양한 체제를 담은 내용의 책 제목을 <<주례(周禮) >>라 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법보다 예를 더 중시해왔고 심지어 법에 해당되는 것마저 예로 취급했다. 그러므로 중국역사는 법치가 아니라 예치로 흘러왔다. 물론 조선반도 역사도 법치가 아닌 예치의 역사이다. 더욱이 우리민족은 예와 법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다. 이를테면 “저 집은 법이 많다.” “중국인은 조선사람보다 법이 더 많다.”는 말에서 법은 풍속습관을 뜻하거나 예의, 예절을 의미한다. 중국과 조선이 법치가 아닌 예치의 역사로 흘러오게 된 이유는 두 나라가 모두 정의 문화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딱딱하고 무시무시해서 인간의 정을 메마르게 하는 반면에 예는 정의 문화와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과 조선인은 법치보다 예치를 더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주나라 때 주공이 세운 ‘주례’ 때문에 사회는 정의 문화로 전화됨에 따라 법이 바르지 못해 천하가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라 하는데 저마다 천하를 바르게 하는 처방을 내놓게 되었으며, 이를 제자백가시대라 한다.제자백가 중에 한비자, 상앙 등을 비롯한 법가가 있었다. 이들 학파는 인의예지지신을 주장하는 유교 정의 문화가 천하를 구할 수 없으므로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가의 대표적 인물인 상앙은 그의 변법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정했다.가. 인민을 십, 오의 단위로 조직하여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 나. 간사(奸事)를 관에 고발하지 않고 숨기는 자는 엄형에 처하고 간사를 상고하는 자는 적의 목을 벤 것과 동등한 상을 준다. 다. 남자가 둘 이상 있는 집은 분가독립 시킨다. 만약 분가를 하지 않으면 부세를 두 배로 징수한다. 라. 군공이 있는 자는 그 정도에 따라 작위를 수여한다. 마. 사사롭게 싸움을 하는 자는 경중에 따라 벌을 준다. 바. 농사와 방직을 본업으로 삼아 일가 협력하여 곡식과 비단을 많이 산출하는 자는 부역을 면제한다. 사. 상공업의 이익에 힘쓰거나 또 게으름을 피워 가난하게 된 자는 모두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아. 종실의 귀족이라도 군공이 없으면 속적에서부터 제외시켜버린다. 자. 존비와 작질(爵秩)의 등급을 명료하게 서열지우고 그 서열에 따라 전택(田宅)의 명의가 있게 하고 또 신첩(臣妾)·의복도 그 가격(家格)에 따라 질서 지운다. 차. 군공이 있는 자는 영화를 누릴 수 있으나 군공이 없는 자는 재력이 있어도 화려한 생활을 못하게 한다. 상앙이 제정한 이 변법내용을 보면 법률의 맛이 난다. 진(秦)나라는 법가들의 이러한 변법들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진시황은 이를 토대로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 허나 진시황이 천년만년을 이어갈 것이라는 진제국은 16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너무 딱딱하고 정이 메마른 법가 사상과 제도에 사람들이 지쳐버려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법가를 버리고 무위를 주장하는 도가로 치세하여 태평성세를 이룬다. 무제 때부터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또 다시 예치사회에로 진입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천하가 혼란하고 이민족 정권이 병립하여 법가가 설 틈이 없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도교로, 중기부터는 불교로 나라를 다스렸다. 송나라 때 왕안석이 변법을 시도해보았으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청 말까지 유교가 득세하여 또 다시 예치국가로 흘러왔다. 중국과 조선은 법치가 아닌 예치로 흘러왔기 때문에 현재 국민들은 법제의식이 매우 희박하다. 그렇지만 법치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나 정이 없는 두뇌 문명에 속하고 예치는 단점이 많으나 정이 있는 마음의 문명에 속한다. 사회발전추세를 보면 법치가 불가피하고 역사적으로 정서적으로 보면 예치가 마음에 와 닿는다. 이 법치와 예치의 갈등은 중국과 한국에서 앞으로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라 생각한다.
128    세상에 자동이혼이란 법이 없다. 댓글:  조회:9960  추천:35  2008-12-28
세상에 자동이혼이란 법이 없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한 재한중국인들 사이 자동이혼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며 세상에 자동이혼이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률에 의하면 이혼은 대체적으로 협의이혼과 법정기소이혼 두 가지이다. 협의이혼은 혼인 두 당사자가 재산에 관한 분할문제, 위자료문제, 사건본인(부부사이 낳은 자녀)의 친자행사권지정(양육권)문제, 양육비부담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합의 본 전제에서 향후 서로 모든 법적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약정서(구두로 하는 경우도 있음)를 작성하고 거주지 법원에 가서 이혼신청을 제출한다. 한국 법에 의하면 혼인당사자들이 내국인일 경우 협의이혼신청을 제출하면 3주간의 조정기일을 주는데 이 사이 이혼을 철회하는 경우도 있고, 여전히 이혼을 하려고 하면 3주되어 법원에 가면 이혼조정서를 발급받는다. 혼인당사자 일방이 외국인일 경우 3주 조정기일이 필요 없이 협의이혼신청당일에 이혼이 된다. 기소이혼은 혼인당사자 간의 어느 일방이 원고로서 상대를 피고로 청구취지와 청구원인을 밝히고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소이혼은 원고가 피고를 알게 할 수도 있고, 몰래 제출할 수도 있다. 원고가 소장을 법원에 제출하면 법원에서 피고에게 소장부본을 송달하고 1개월 답변시간을 주는데 피고가 반소를 제기하거나 묵인하거나 인정할 경우에 따라 사건처리가 달라진다.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한 외국인들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결혼 후 얼마 지나야 이혼을 제출할 수 있는가는 것인데, 법적으로 제한된 시간이 없이 아무 때건 이혼소송은 자유이다. 이렇게 이혼은 대체적으로 협의이혼과 기소이혼 두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재한중국인들 사이 자동이혼이란 법적으로 없는 말을 들먹이게 되는 것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부류 국제결혼자들이 주관억측으로 지어낸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가.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생활을 보내다 가출했거나 쫓겨난 자들.이 부류 사람들은 자신이 이혼되었지의 여부도 모른 채 그냥 막연하게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없으니 자동이혼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외국인 배우자가 스스로 가출했거나 한국인 배우자가 외국인 배우자를 내쫓고도 가출했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서에서 발급한 신고서를 증거자료로 법원에 혼인파탄사유로 이혼소송을 제출하면 이혼판결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인 배우자가 법원에 기소해야만 이혼이 되는 것이지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것이 아니며, 만약 한국인 배우자가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혼이 되지 않는다. 나. 위장결혼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 위장결혼으로 입건되어 법원으로부터 벌금(100~500만원 사이) 혹은 징역6~8개월 집행유예 1~2년이란 실형을 선고받은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면 한국인과의 혼인이 무효가 되고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것 아니냐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위장결혼은 형사사건에 속하고, 이혼은 민사사건이기 때문에 가령 실형을 선고받아도 혼인 두 당사자 중 어느 일방이 호적정리를 하지 않으면 이혼이 되지 않는다. 다만 위장결혼으로 실형을 선고받을 경우 법무부에서 혼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호적을 정리해야 하나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법원의 위장결혼 판결문을 갖고 관할 법원에 직접 호적정정신청을 제출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외국인 배우자는 한국인의 호적에서 말소된다. 다.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생활을 보내다가 갑자기 무작정 한국생활을 접고 중국에 가버리는 자들. 이 부류 사람들은 본인이 한국에 있지도 있고 중국에 가서 수년 지나면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도 역시 자동이혼이 존재하지 않고 한국인 배우자가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출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혼이 되지 않는다. 라. 한국에 혼인신고가 되어 호적이 한국에 올라 있으나 비자가 기각되어 한국에 오지 못한 중국인들. 한국인과 혼인하고 한국에 오지 못한 자들에 관한 공식적인 통계가 없어 그 수가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7~8천 명이 된다고 한다. 이 부류 속하는 사람들도 사람이 한국에 오지 못했으니 수년 지나면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에도 역시 혼인당사자 중 어느 일방이 법적으로 이혼소송을 제출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혼이 되지 않는다. 이혼법은 한국과 중국이 비슷비슷하다. 다만 세부적인 문제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하면 중국은 법원의 이혼판결을 중요시하고 호구정리는 차요적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협의이혼일 경우 3개월 이내 호적정리를 하지 않으면 이혼이 무효가 되며, 기소이혼일 경우 확정일 1개월이 지나 호적정리신고를 하면 벌금을 납부해야 한다. 뜻인즉 중국은 법원의 결과를 중시하고 한국은 법원의 결과보다 호적정리를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든 한국이든 자동이혼이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기 여러 부류에 속하는 자들은 막연하게 자동이혼이 된다고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혼정리에 나서야
127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 댓글:  조회:9640  추천:41  2008-12-16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노신은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고 말했다. 노신 이후의 중국학자들은 모두 노신의 이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교는 인문적인 학설일 뿐이고, 중국의 문화예술, 기공, 무예, 의학, 과학, 방중술, 민속, 풍속에 이르기까지 도교를 근저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왔다. 중국문화를 도교와 유교(불교가 유입되기 전의 토착적인 것) 양대 산맥으로 으로 보고 있는데, 도교는 모계사회의 잔재문화이고 유교는 부권제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문화였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선 도교 후 유교이다. 중국학자들은 도교의 원조를 황제(黃帝)라 보고 한나라 때부터 황제와 노자를 묶어서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 불렀다. 또 한나라 때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삼대계열서(황제·소문경, 황제·영추경, 황제·소녀경)는 모두 황제와의 문답체로 되어 있다. 중국의학은 도교에서 유래되었고 도교의 원조는 황제이며 노자는 황제 때부터 흘러온 ‘도학’을 재정비하여 도를 만물의 본체라 보았고 무위자연론을 주장했다.맹자가 공자의 유지를 계승했다 하여 유학을 공맹지도라 부르듯이 장자가 노자의 뒤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노장학파’ ‘노장철학’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한나라 이전에는 공맹을 하나의 학파인 유가라 불렀듯이 노장도 하나의 학파인 도가였다. 그러다가 한나라 때부터 경학통치가 확립됨에 따라 유가가 유교 즉 종교(국교)로 전환되었듯이 도가도 도교 즉 종교로 전환되기 시작했다.도교는 도를 우주의 본체로 모시고 도를 닦아 신선이 되는 것을 제창했다. 수도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복식(服食)복식에는 영단묘약을 먹고 장수해지는 것과 음식을 절제해 먹는 두 가지가 있다. 진시황이 만세를 살려고 신하들을 바다건너에까지 보내 장생불로초를 구하게 했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듯이 중국인은 장수약에 신경을 많이 써왔다. 과식은 불식(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먹지 않기보다 못하다는 뜻)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도교는 음식을 절대 과식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도교는 배가 불러 있는 여자와는 성교도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당나라 때부터 영단묘약이라 해서 먹고 죽은 사례가 많아 복식 장수법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대신 기공수도법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둘째 기공(氣功)중국인은 숨을 기라하며 우리말 ‘화를 내다’를 중국어로 ‘썽치(生氣)’라 하는 등 중국인이 말하는 기는 숨, 정신, 영혼 등을 의미한다. 한국 국어사전에 의하면 기를 바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는 바람이고 바람을 곧 기라 말할 수 있으며 기공이란 바람을 잘 잡고 조절하고 저장하는 등 수련법이다. 기공은 체내의 기를 조절하여 건강에 이르는 것을 뜻하며 수도(修道)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기공은 또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과도 있다. 셋째 방중술고대사회에 있어서 중국처럼 방중술이 발달한 곳이 없다. 이는 중국인 식과 색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가장 충실했다는 증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세상에서 요리를 가장 발달시켰으며 심지어 중국인은 먹는 멋에 산다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잘 먹고 섹스를 잘하고 참 즐거운 인생이다. 고대사회에서 종교가 보급됨에 따라 수많은 민족들이 성을 단순한 후대번식의 필요로만 인식하였거나, 성을 담론하는 것을 터부시해왔다. 이에 비해 중국인은 섹스를 ‘양생지도’로 여기고 방중술을 연구하고 발달시켰다. 중국인의 방중술을 일명 ‘도교 섹스법’이라 한다. ‘도교 섹스법’을 다룬 책으로서 <<황제·소녀경>>이 있다. 이 책은 남녀 간의 섹스는 건강을 위한 행위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황제와 소녀가 대화하는 형식을 빌어서 다종다양한 체위, 전희부터 성교과정과 사정 및 완성단계까지 자세하게 묘사했고 또 이러한 건전한 섹스를 통해 어떤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까지 제시되어 있다. 중국인이 식과 색에 특별히 신경을 써왔던 것은 임어당의 말대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하지만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든다.”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처음  이전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