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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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댓글:  조회:3380  추천:11  2020-01-06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진나라 서울 함양으로 치달아 들어간 항우는 이전에 유방에게 항복한 진왕 영(瓔)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석 달을 두고 탔다고 한다. 항우는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으며 진나라의 재물들을 모두 거둬 갔다. 부녀자들도 모두 붙잡아 갈 만큼 항우의 군사는 갖은 잔학한 짓을 다하고는 함양을 떠났다. 그때 한생(韓生)이란 사람이 항우에게 말했다. “진나라 땅은 지리가 좋고 땅도 길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의 패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잿더미가 된 진나라 궁궐들이 보기에도 싫었을 뿐 아니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한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이 부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밤에 비단 옷인지 누가 보고 알아 줄 것이냐.” 한생은 기어이 고향으로 가려는 항우를 보고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감투를 쓴 꼴이다.’고 했다가 항우의 노염을 사서 잡혀 죽었다. 항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굉장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이 고사가 후세에 전해지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행위를 빗대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속담으로 전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속담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재한조선족사회 상황에 신통하게 하모니가 되어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00한국 분이 필자에게 왈, “한국에 온 조선족 분들이 평균 수준이 굉장히 높네요.” “무슨 말씀인지?” “저마다 선생(교사) 했다는 분들이 엄청 많네요.” “아~, 그래요.” 뻥이다. 뻥도 보통 뻥이 아니라 한심한 강냉이 뻥 튀기 식의 뻥이다. 10년 전에 한국에 온 조선족 중에 교사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다. 00단체장의 우스운 이야기다. 자신은 조선글, 조선말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연길에서 00중학교에서 선생 했다고 자랑한다. “그 학교가 조선족중학교인데”라고 말했더니 “아, 잘못 말했는데 xx중학교요.” “그 학교도 조선족학교인데요.” 얼굴이 원숭이의 궁둥이가 되어 머뭇거린다. 선생 해 본 적이 없는 단체장이 자신이 있어 보이기 위해 선생 했다고 뻥 친다. 조선족사회 리더라고 하는 단체장이 이 정도로 뻥 치고 있으니 일반 구성원들이야. 또 법원이나 검찰원에서 일반 직원으로 심부름이나 하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자신은 중국에서 판사 혹은 검사였다고 뻥친다. 왜냐? 한국에서는 판사나 검사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기 때문에 자신을 최고 엘리트로 포장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재일조선족사회와 재한조선족사회 최대 구분이 바로 전자는 유학생 주류로 형성된 것인데 비해 후자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온 조선족은 머리 쓸 필요 없이 팔다리가 멀쩡하면 모두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85만이나 밀려 온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다. 민간단체 설립이 굉장히 쉽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슬쩍슬쩍 한두 마디 변경해서 정관이나 만들고 회원 명단만 작성하면 되고 활동 내역도 어지간히 만들어 넣으면 00협회란 법적 등록이 가능하다. 재한조선족사회 00협회 이름으로 된 단체가 한 때 가장 많을 때 60여 개나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80년대 연길에 실체나 실속 없는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가 너무 많아 당시에 ‘무슨 놈의 꿍쓰(회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들이 똑 마치 그때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를 신통하게 닮았다. 구체적인 일은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일단 단체장이라는 감투만 쓰면 능력은 없어도 자신이 큰 벼슬을 한 것처럼 개폼을 잡는다. 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이들 ‘회장님’들은 중국에 있을 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더욱이 단체장 가운데 대학문을 나온 사람이 거푸 한두 명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재한조선족단체와 재일조선족단체의 큰 차이다. “저희들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재한조선족사회 리더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00사법기관 동포 관련 간담회에서 나온 조선족 단체장의 발언이다. 한국공무원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정말 창피하다. 창피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가이고 동포밀집지역 관공서와 서울시청 등에서 다문화(이럴 때면 조선족도 다문화에 포함시킨다.) 관련 간담회가 많다. 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에서 선생 했다거나 언론 관련 기관에 종사했다거나 혹은 자신을 지식인이라 폼 잡는 사람들이 회의에서 하는 발언들을 들고 있노라면 한국어가 서툰 것은 허물도 아니다. 회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길게 늘여놓고 게다가 목소리도 크고 악센트도 세서 동네망신이다. 참다못한 사회자께서 마이크를 놓으라고 제지한다. 단체장들은 스스로 재한조선족사회를 대표한다고 자랑한다. 문제는 대표라는 사람들이 이 수준이니 한국공무원들이 이쪽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는가? “중국에 있었을 때 같으면 함께 같은 밥상에 마주 않지도 못했을 ‘빈 깡통’들이 한국에 와서 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정말 못 봐주겠다.” 조선족출신 00공무원의 말씀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정말 불가사의한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중국에서 경찰한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조선족들이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한국경찰한테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경찰을 무시하고 을러멘다.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면 둘이 갈 일을 넷이 가고 넷이 갈 것을 여덟이나 갑니다. 동포들이 군중영웅심리가 강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동포들이 경찰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어 많이 출동해야 합니다.” 동포밀집지역 경찰공무원의 고충이 담긴 고백이다. 왜, 이럴까? 중국에서 돈고생 하다가 한국에 와서 얼마간 돈을 벌었으니 세상이 녹두 알만해 보이고 자신이 영웅이나 된 것처럼 행세한다. 이런 조선족이 굉장히 많다. 일하기 싫어 입에 풀칠도 곤란한 동포들이 한군데 모여 빈둥대면서도 트럼프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중국정치부터 일본우익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를 논하는데 한다하는 정치논객들을 뺨 칠 정도다. 서로 제 말이 옳다고 우겨대는 목소리는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든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진짜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말이 실감난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 ‘모든 일은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자.’ 이것이 필자의 일관된 신조이다. 언제 가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지적으로 변화되어 한국사회로부터 환영받는 집단으로 거듭날까? 지금으로서는 막연해 보인다. 참고로 모든 단체장이 다 그런 것처럼 이 글을 오해할 수 있는데 일부 조선족단체장들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다수의 재한조선족은 묵묵히 열심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 밝히고 싶다.
75    조선족, 이상한 한국 때리기 댓글:  조회:2922  추천:15  2019-07-22
조선족, 이상한 한국 때리기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조선족이 남조선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토록 너무도 굳게 닫쳐 있어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양국의 문호가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빠금히 열리더니 1992년 양국 수교를 통해 많은 조선족이 한국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한국정부의 방문취업비자(H-2) 실시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이 30여 만으로 증가되었다. 이 30여 만에 이르는 조선족은 노무일군으로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사례만 보아도 한국에서 번 돈을 중국에 송금한 액수가 연간 자치주 재정수입 2배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었다. 혹자는 3배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확한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아니었다면? 이런 질문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문제일 것이다. 2008년부터 시행된 재외동포비자(F-4)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더니 지금은 국적취득자까지 포함해서 85만이 된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200만이 안 되는 조선족 중에 85만이 한국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해볼 문제이다. 중국조선족은 한국에 떠날 때는 모두 ‘몇 년간 돈을 벌어 고향 중국에 돌아가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그 굳센 다짐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빛이 바래더니 급기야 한국에서 뿌리박을 태세이다. 나의 조카는 2008년 한국에 금방 와서 하는 소리가 ‘5년(H-2만기가 5년)이 되면 무조건 중국에 간다. 그저 가는 것이 아니라 여권을 쫙쫙 찢어버리고 갈 것이다.’ 뜻인즉 죽었다 깨도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 강철 같은 의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5년이 지날 즘에 나보고 한국에 장기체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묻더니 후에 영주권을 취득했고 지금은 국적신청까지 해놓은 상태이다. 한국에 온 조선족 다수가 나의 조카 같은 패턴이기 때문에 85만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장기체류하려고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미 수년 전에 잡지에 기고했다. 혹자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하층민 대우를 받으며 머물 이유가 없지 않느냐? 고 떠들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무시당하고 차별 받아도 한국이 좋으니까. 과거 돈벌이에만 치중하던 재한조선족사회는 이제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이 좋다는 것은 삶의 질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일이 있다. 한국이 좋아서 살면서도 불구하고 입으로 한국을 욕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적지 않다. 10년 전 연길공항 흡연실에서 겪은 일인데 담배 태우는 조선족 중 반 넘는 사람이 한국나들이 경험자들이다. 이들은 거의 똑 같이 한국을 욕한다. 담배 끊은 지가 5년이 넘어 연길공한 흡연실에 들르지 못해 요즘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으나 그 전에 내가 받은 인상은 ‘연길공항 흡연실은 한국을 욕하는 성토장’이었다. 조선족 밀집지역인 가리봉이나 대림동 음식점을 비롯해 조선족이 모이는 곳은 흔히 한국을 욕하는 성토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욕은 자유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욕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누구를 욕한다는 것은 미움의 발로인데 남을 미워하려면 그만큼 나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나는 이면에서 채널A 프로에 출연하는 탈북자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욕하는 사람들은 진정 한국시민으로 살아갈 자세가 안 된 사람들이다. 시민으로 살아갈 자세가 안 되면 의무감 책임감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쓰레기처리, 노상방뇨, 무단횡단, 시끌벅적 떠들기, 길에서 가래침 뱉기 등등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조선족이 무시당하는 데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크게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돈을 벌며 살아가는 과정에 스트레스가 심해 한국을 욕할 수는 있다. 이주민 생활이 만만치 않고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다. 떠나기는 싫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을 욕한다면 삶이 괴롭다. 조선족 한국 때리기는 한국에서 장기체류하는 조선족이 있고 중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때리는 현상이 있다. 전자는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정말 불가사의다. 중국조선족엘리트에 속하는 일부 조선족을 만나면 한국의 이것도 저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스스럼없이 비난하고 매도한다. 최근 몇 년래 조선족학자 중에 한국에 교환교수로 오거나 연구과제가 있어 한국에서 6개월 이상 체류하는 조선족엘리트들이 있다. 이분들 중에 중국관련 혹은 중국조선족 관련 주제로 세미나에 발제자나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혹은 중국에서 초청받아 한국에 와서 세미나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학자는 공개석상에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경상도와 전라도는 쪼개지고, 여당과 야당이 맞서 서로 무조건 상대를 부정하는 한국정치가 엉망이다.” 그래서 “한국은 문제가 많은 국가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공격적으로 비난한다. 남북분단은 조선족학자가 거론하지 않아도 민족의 최대 아픔으로 남아 있고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이다. 만약 조선족학자 신분으로 남북분단을 거론하려면 한반도통일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옳지 않을까?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갈등도 어느 나라든지 모두 지역갈등이 있는 것처럼 그런 맥락에서 볼 문제이지 조선족학자가 떠들 일이 아니고 떠들어서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다. 중국도 땅덩이가 하도 커서 지역감정이 심각한 나라이다. 북경사람은 정치중심의 시민이라는 우월의식이 강하고, 상해사람은 중국 내 모든 타지방사람을 썅쌰런(鄕下人, 우리말로 촌놈)이라 비하하고, 남방 사람은 북방사람을 깔보고, 비동북지역 사람은 동북사람을 업신여기고, 하남성 사람은 타지방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다. 한국정치에 있어서 여당과 야당 문제는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관계 그런 차원이 아니라 조금 비약적인 논리이기는 하지만 마치 1949년 전 공산당과 국민당이 도저히 공존 불가능했던 것처럼 문제가 심각하다. 그렇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국제적으로 부러워하는 정치로 발전했고 여야대치국면도 대한민국발전에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전반 사회시스템이 그럭저럭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때문에 조선족학자 신분으로 깊은 관찰이 없이 함부로 한국정치에 ‘감 놔라, 밤 놔라’ 떠들 일이 아니다. 한국의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비공개석상에서는 얼마든지 담론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개석상에서 이런 문제를 거론한다면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나의 뒷좌석에 앉은 한국인 왈, “조선족학자들이 이상하다. 본국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면서 왜 한국을 비난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저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무슨 기여를 했기에 저러지?” 조선족학자나 엘리트들이 한국 때리기는 고국에 대한 충정? 사랑? 내가 보기에는 다 아니다. 이분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우월성의 발로인 것 같다. 물론 대한민국은 문제가 많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다. 미국은? 이상한 대통령 때문에 미국 내도 그렇거니와 국제적으로도 가장 시끄러운 시기를 맞은 것 같다. 유럽나라들도 일본도 만찬가지. 세상에 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도 마치 투명한 진공 속에서 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유치한 행위가 아닐까! 거창하게 할아버지가 살던 고국이라는 명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수가 85만이라면 중국에서 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자신의 형제자매 혹은 조카, 혹은 사촌, 혹은 처가직계가 한국에 오지 않은 조선족엘리트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피붙이’가 먹고살아가는 나라를 비난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닐까! 내가 어릴 적에 해박한 마을 유지한테서 배운 말이 있다. “사람이 똑똑하다는 기준이 뭔지 알아? 앉을 자리 설 자리 아는 자가 똑똑한 사람이야.”
74    H-2와 F-4 연구(2) 댓글:  조회:3260  추천:0  2017-07-27
1.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 1.1. 왜곡된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 2017. 3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776,726명이고 중국동포의 수는 650,094명으로서 83.7% 차지하고 있다(법무부 외국인정책본부 통계자료). 조선족출신 국적취득자(13만) 합치면 78만 명 조선족출신이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왜 이 많은 조선족이 한국에 왔을까? 다시 말하자면 이들의 한국입국목적이 무엇일까?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알아야 재한동포사회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 알려진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이 ‘중국에서 차별받고 무시당했기 때문에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전달된 이유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일부 기자들이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한 허위정보를 전파를 타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뷰에 응한 중국동포에게 “중국에서 차별당하고 무시당해 당당하게 살고 싶어 한국에 왔는데 정작 와보니 한국 역시 우리를 차별하고 무시한다.”는 내용을 기자들이 미리 자기네 입맛에 맞게 각본을 짜서 외우게 하고 그대로 말하게끔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중국동포는 중국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키는 서방질처럼 시키면 시킨 대로 따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왜곡된 허위정보가 전파를 타게 되어 중국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허위를 진실인줄로 착각하고 중국동포들이 진짜 중국에서 차별받고 피해를 받아온 것, 그래서 한국에 온 줄로 잘못 알게 된 것이다. 일부 지각 있는 한국학자들조차 이와 같은 허위정보에 동조하여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에 대해 역시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동포들은 식민시기에 중국에 가서 이산 트라우마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으로서 문화혁명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반혁명, 우파분자, 주자파 등으로 분류되어 비판받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으며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정치적 폭력이 난무한 문화혁명은 그 시기를 산 중국인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체험이었고 중국현대사의 커다란 정신적인 상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최병우 P416).”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이어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며 살아가던 중국 소수민족들은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자신의 고유문화가 비판받고 자신들의 삶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이중적인 고통을 받았다(최병우 P416).” “중국의 동포들은 이러한 아픈 기억을 해소하고 치유하는 길로서 한국이주를 감행하였지만 같은 민족이라고 상상하면서 동일성을 가꾸어 온 한국과 한국민으로부터 차별과 배제를 당하면서 이중 삼중의 트라우마를 겪게 되었다. 트라우마의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길은 트라우마가 된 사건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를 통해 진정으로 그 시대를 애도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있다(최병우 P439).” 최병우 선생의 이 주장은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의 아픔, 영혼 깊이 상처를 겪은 조선족은 일부 지식인 및 당 간부들이었다. 필자의 부친은 시골 당지부 서기였는데 문화혁명시기에 주자파로 몰려 비판투쟁 받았으나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채 1995년 생을 마감했다. 당시 문화혁명의 피해를 입은 조선족 간부 중에 필자의 부친과 같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처 깊었던 조선족 지식인들은 문화혁명이 끝나고 금방 중국정치에 동조하였고 현재도 마찬가지로 문화혁명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국행을 택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조선족 절대다수가 지식인이 아닌 농민출신과 도시 노동자 출신들이다. 이들이 한국에 온 목적은 문화혁명의 상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들의 한국입국목적은 경제적 이득 추구이고, 문화회귀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1.2. 경제적 이득 추구가 주요목적 개혁개방 전 중국조선족사회는 80%가 농경에 종사하며 농부의 삶을 살아왔다. 연변의 상황을 돌아보면 개혁개방 전 사회주의집단생산 시기 조선족마을들이 보편적으로 한족마을보다 경제적 수입이 높았고 따라서 삶의 질도 높았다. 배달민족의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미덕 덕분이었을 것이다(《은둔의 나라 조선》저자 그리피스(1843년 ~ 1928년)는 그의 저서에서 조선인의 미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조선 사람의 커다란 미덕은 인간은 모두가 한형제임을 충실히 존중하고 매일 실천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민족성은 상부상조하고 후덕한 인정을 베푼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성과 구분된다.”). 그러던 데로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하자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의 상황이 반전되었다. 즉 조선족마을이 못 살기 시작하였던 비해 한족마을들이 잘 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3년 호도거리생산 실시 이후 이와 같은 반전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외관상으로 보아도 조선족마을들은 겨우 한두 채의 벽돌집이 들어서는데 비해 한족마을은 해마다 벽돌집이 쑥쑥 올라가고 있었다. 조선족마을총각들은 장가가지 못해 마을에 아이 울음소리가 아주 드물었던 데 비해 한족마을총각들은 장가 잘도 갔다. 왜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 사이 이런 상반된 현상이 일어났을까? 필자의 고향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불사 요구촌이다. 이 촌은 조선족마을 4개, 한족마을 1개로 이뤄졌다. 개혁개방 전에는 한족마을이 째지게 가난했고 조선족마을, 특히 필자의 마을은 잘 살았다. 그런데 개혁개방하자마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한족마을 청년들은 갓 가정을 이루고 신혼부부가 담배 1만 포기 재배하고 다른 농산품도 심었다. 담배 1만 포기 재배하려면 수확 철에 하루 평균 두세 시간만 잠을 자고 일해야 한다. 한족청년들은 그 고되고 힘든 일을 이겨내고 한해 만원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변농촌은 농망기와 농한기가 거의 반반인데 한족들은 겨우 내내 쉬지 않고 싸리로 광주리 결었고 빗자루 틀어 도시에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마을은 그 긴긴 반년 동안 끼리끼리 모여 화토치기, 마작놀이, 술놀이에 빠져 돈 벌 궁리가 없었다. 이렇듯 한족들은 당지에 머물면서 천연자원을 이용하여 부자가 되었던데 비해 조선족은 부를 창조하는 루트로서 한국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도시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낙후된 공업이 새로운 생산 수요에 부응하지 못해 실업자가 급증하고 한편 직장 있어도 소비가 수입을 능가하는 현상이 심각해 한국행을 선택하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너도나도 한국바람에 가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족이 한국에 온 목적은 돈 벌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일차적인 한국입국목적이었다.
73    H-2와 F-4 연구(1) 댓글:  조회:3714  추천:0  2017-07-24
방문취업비자(H-2)와 재외동포비자(F-4) 연구(1) 2017세계한인학술대회 발제 논문 연재 서론 2017년은 한중수교 25주년, 방문취업비자(H-2, 이하 H-2로 칭함) 실시 10주년을 맞는 해로서 재한동포사회에 있어서 자못 중요하고도 매우 의미 깊은 한해이다. 조선족이 한국에 입국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 계기가 되었으나 당시는 매우 산발적이고 매우 적은 숫자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친척방문을 명분으로 한국에 왔다가 체류만기일(최장 90일)을 넘기고 한국에 남아 불법 취직하여 돈을 버는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나 이 시기를 재한조선족사회 혹은 재한동포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직후 중국조선족사회에 ‘한국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너도나도 한국에 가는 경쟁에 뛰어들어 1999년에 이르러 불법체류자만 6만 명이었다. 2004년 고용허가제 실시 전에는 소수 국제결혼자, 산업연수생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장기체류한 조선족 다수는 여권위변조, 밀입국, 위장결혼, 가짜친척초청이 많았고 또 관광, 상무고찰 등 단기비자로 입국하였다가 체류만료일을 넘기고 귀국하지 않은 불법체류자였다. 한국정부는 조선족불법체류문제가 사회이슈로 불거지자 2002년 3월 불법체류자종합방지대책을 마련하고 불법체류자 자진신고를 받고 출국유예 조치로 재입국 후 취업기회 제공하였고, 2004년 고용허가제를 실시하였고,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 을 실시하여 3만여 명의 불법체류자를 구제하여 합법화 시켰지만 한국입국루트를 개방하지 않아 여전히 불법입국이 점점 더 늘어났고 불법체류 하는 수가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재한중국동포사회에 햇볕을 비추기 시작한 제도가 H-2 실시였다. 1992년 한중수교가 중국조선족사회에 한국출국붐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면 2007. 3. 4.부터 실시된 H-2 제도는 조선족이 한국에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 루트를 개방하였고, 자유왕래가 보장되었으며, 따라서 재한동포사회는 음지에서 양지에로 나올 수 있었고, 수많은 단체들과 동호회가 생겨났고, 인간다운 인간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재한동포사회는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문화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H-2 실시를 재한동포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큰 변혁의 전환점을 가져온 획기적인 제도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정책제도가 없듯이 H-2도 당시 중국동포에게 전부 재외동포비자(F-4, 이하 F-4로 칭함)를 부여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실시한 정책제도인 만큼 체류기간 제한과 취업업종범위제한 및 한해 한 번씩 연장수속을 밟아야 하고 동포를 동포로 대하지 않고 외국인인력범주에 포함시켜 일련의 제도를 마련하는 등 단점이 많고 허점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H-2 실시가 재한동포사회발전에 지대한 기여가 있었기 때문에 재한동포사회 성장을 논하는 관련 학술대회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H-2 실시 10주년을 맞으며 과거 10년을 돌아보고 재한동포사회 미래를 전망해 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H-2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재외동포법과 관련된 F-4 실시에 대해 조명함으로써 재한동포사회를 한층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도록 논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H-2 실시가 재한동포성장과 발전의 초보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면 F-4는 재한동포사회가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데 큰 기여가 있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재한동포사회에서 체류의 수가 가장 많은 H-2(2016.12.31. 기준 232,580명)와 F-4(2016.12.31.기준 275,342명) 현황과 개선과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재한동포사회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끔 노력하였고, 지역커뮤니티에 대한 논의를 통해 재한동포사회가 대한민국에서 처하고 있는 현실을 짚어보았다. 재한동포사회 일선에서 사업하고 있는 본인의 직업적인 특성에 의해 본고의 논거들은 이론적인 논거보다 사실적인 논거에 치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딱딱한 이론에 치중하는 학술연구보다 재한동포사회 살아 숨 쉬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여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 진실한 삶의 현장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본고에서의 조선족, 동포 호칭을 일관성 있게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시기와 환경 및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72    불법체류딱지는 뗐으나 합법장기체류, 합법취업 안 돼 댓글:  조회:4426  추천:1  2016-08-06
불법체류딱지는 뗐으나 합법장기체류, 합법취업 안 돼 55~59세 사이 구제 받은 조선족 여성들 고충   불법체류 신분은 언제 어디서 단속에 걸릴지 몰라 다수 조선족여성은 양지에서 활동하기엔 손발이 묶여 인적이 드문 ‘폐쇄된 곳’ 즉 가정집 가사도우미,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절간의 식모 등 직종에 종사해왔다. 용정출신 김모 여인(57세)은 10년 전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상무고찰이란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한국에서 10년 동안 불법체류로 살아왔다. 음식점 같은 인적이 붐비는 곳에 근무하면 단속에 걸릴 위험이 커 서울근교 00절간에서 밥 짓는 일을 8년 동안 해왔다. 부지런한데다 음식솜씨가 좋고 인격도 괜찮아 절간에서 “다시 오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녀도 절간에 8년 동안 머물면서 정이 들어 돌아가고 싶지만 걸림돌이 있다. 오상에서 온 박모 여인(58세)은 14년 전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친구의 소개로 한 부잣집인 가정집 가사도우미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지난 5월말까지 쭉 일 해왔다. 박모 여인이 14년 전 그 집에 들어갔을 때 태어난 지 3개월 되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 아빠와 엄마가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고 불장난으로 임신하고 출산을 고집하여 난 아이인데 엄마가 신분이 명확하지 못한 여인이라 그 집에서 쫓겨났고 아이는 남자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3개월 되는 핏덩이가 박모 여인의 손에서 14살 먹은 중학생이 되었고 키는 박모 여인이 올려 볼 정도로 훌쩍 자라버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이 진리라면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것도 또 하나의 진리이다. 이모는 내 자식처럼 끔찍하게 키웠고 아이는 이모를 엄마처럼 따르고 있다. 박모 여인이 자진출국 하니 마치 모자의 생이별처럼 심각해진 아이는 불과 1개월 사이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어서 지난 6월 말 아이가 박모 여인이 있는 중국에 따라 갔다가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박모 여인은 현재 장기합법체류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한숨짓고 있다. 심양에서 온 강모 여인(57세)은 대한민국 부자들이 모여 사는 서울 성북동 00대기업 회장님 댁에서 16년 동안 가사도우미로 일 해왔다. 불법체류 신분이라 맘대로 오갈 데가 없어 처음엔 엄청 힘들었으나 참고 견뎌 3년이 지난 시점부터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왔다. 강모 여인은 내집이라 생각하고 맡은 바 일만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시키지도 않은 울안 공터를 밭으로 가꿔 야채농사를 지어 해마다 풍성하게 수확하고 있다. 회장님 댁은 일가족이 어찌나 박모 여인을 아끼는지 자진출국 할 때 임시지만 마치 다시 못 보는 이산가족처럼 눈물로 이별했다. 상기 세 명의 조선족아줌마들은 모두 다음과 공통점이 있다. 일단 한곳에서 오랫동안 일 해온 것이고, 자기 가족처럼, 내집처럼 진심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주인들은 모두 조선족아줌마들이 다시 한국에 오면 꼭 자기네 집에 올 것을 열 당부도 더 했던 것이다. 어떤 주인들은 월급 인상 조건을 걸면서까지 기어코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가정부나 식모는 회사 직원처럼 수시로 바꾸거나 아무나 대체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오래면 오래 될수록 서로 정이 들고 헤어지기 싫어한다. 어찌 보면 요즘 세월엔 부부가 이혼하는 것보다 가사도우미가 바뀌는 것을 더 힘들어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인들은 간절히 그녀들을 바라는 것인데 법무부 출입국정책이 그들의 바람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을 한시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첫 3개월 간 1만7천 명 불법체류자가 자진출국 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중 다수가 조선족이다. 조선족불법체류자가 자진출국 했다가 재입국하게 되면 55세 이하는 C-3-8 비자로 입국하고 6주 기술교육 이수하면 방문취업비자(H-2)로 변경되고 단순노무 직종에 취업이 가능하다. 60세 이상 조선족은 재입국하게 되면 재외동포비자(F-4)를 발급받는다. 문제는 55세~59세 사이 분들이다. 이 연령대 구제받은 조선족은 불법체류 딱지는 뗐으나 장기합법체류신분을 얻으려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면 조금 지나친 표현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현행 정책에 따르면 이 연령대 구제받아 재입국한 조선족은 한국생활이 불안하여 취업도 문제가 되고 있다. 즉 구제받은 55세~59세 사이 조선족은 일단 C-3-8 비자로 한국에 입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자는 90체류 복수비자이지 장기체류 할 수 없다. 장기체류를 바라려면 반드시 국가인정 기술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여야 F-4로 변경하고 장기체류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석 달 머물고 다시 출국했다가 재입국을 반복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게 된다. 문제는 이 연령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도 엄청 힘든 기능사자격증 취득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정말 죽을 맛이다. 한국주인들은 간절히 바라지만 이 연령대 조선족아줌마들은 장기체류 비자를 해결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석 달 한번 씩 재입국을 반복하다가 만 60세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왕에 구제했으면 이와 같은 구체적인 형편과 실제적인 사정들을 감안하여 이들에게 장기체류비자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조선족사회에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도 간절히 바라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신경을 써 주기를 바란다.  
71    ‘정통편’ 중국은 일반약품, 한국은 반입금지 대상 댓글:  조회:4531  추천:1  2016-06-21
정통편 휴대하고 입국하다가 큰 문제 될 수도 있어 중국 사람이라면 정통편을 복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감기에 걸려도 복용하고 이빨이 아파도 복용하고 관절이 아파도 복용하고 두통을 비롯해 몸 어느 부위를 막론하고 통증이 있으면 절대다수 사람들이 정통편을 복용한다. 무릇 통증이 있으면 복용하여 즉시 효과 있다고 하여 정통편을 중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부른다. 장기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하루에 3~4알(정), 심하면 7~8알씩 복용하는 사례가 흔하다. 중국에서 정통편에 대한 수요량이 너무 많아 개혁개방 전 인민공사 합작의료 시절 시골 위생소(한국 보건소에 해당함)들에서 정통편만은 한 알 1전씩 현금 받고 판매하였다. 중국 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정통편 복용이 일상화 될 정도로 보편화 되었고 소비량도 엄청 많다. 중국에서 이렇듯 가장 보편화된 일반약품으로 취급되고 있는 정통편이 한국에서는 금지약품으로 조치하고 있다. 이유는 정통편이 마약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마약 성분을 포함한 향정신성의약품은 사람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기 때문에 잘못 섭취하거나 습관적으로 복용할 경우 인체에 큰 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며 정통편이 이에 속하기에 금지약품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마약에 굉장히 민감한 국가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가 잘 되어 불과 20년 전까지 마약안전지대였다. 하지만 구미(歐美)에 유학 갔던 한국인과 한국에 입국하는 서양인들이 대마초를 갖고 오기 시작하여 요 몇 년래 북한 마약이 조선족과 탈북자를 통해 한국에 반입됨에 따라 한국은 우려스런 지대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한국정부는 마약퇴치 의지가 굉장히 강하다. 이런 맥락에서 구미에서 문제가 되지 않아 습관적으로 피우는 대마초를 한국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마약사범으로 취급하고 법적 조치를 취한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아주 정상적이고 가장 보편화된 일반약품인 정통편을 한국에서는 마약으로 분류하고 반입을 금지한다. 정통편 반입이 금지됨에 따라 70만에 이르는 재한조선족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 중국에서 정통편 복용이 습관화 된 조선족은 한국생활에서도 역시 정통편을 자연스레 찾게 된다. 조선족 다수가 중국에서 해 보지도 못했던 건설현장, 제조업, 음식점, 가정부, 간병인 등 고된 중노동에 종사하여 몸 여기저기 탈이 생겨 통증이 많이 발생한다. 조선족은 한국에서도 치통, 두통, 관절통은 물론이고 무릇 몸에 탈이 생기고 통증이 오면 정통편을 복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습관적으로 복용해온 이유도 있고 한국진통제가 조선족 체질에 맞지 않아 효과가 덜 한 원인도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조선족은 한국에 처음 입국하든 자주 드나들든 올 때면 보편적으로 신주단지 모시듯 정통편을 갖고 오게 된다. 자신이 복용 목적도 있고 가족 및 주변 친척과 친구들의 부탁에 의해 적으면 수백 알 많으면 수천 알씩 갖고 온다. 한국에 와서 판매 목적으로 정통편을 갖고 오는 조선족은 매우 드물 것이다. 문제는 정통편을 휴대하고 한국에 입국할 때 세관에서 적발되면 마약류의 약품이라고 몰수당한다. 몰수당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양이 많을 경우 판매목적으로 휴대하여 입국하는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으면 곤란해진다. 판매를 통해 이득을 챙기는 금전은 얼마 되지 않지만 마약류의 약품을 시중에 유통시킨 범죄 혐의를 받으면 더욱 곤란해진다. 이쯤이면 그나마 또 괜찮은 편이다. 개별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이긴 하지만 정통편을 많이 휴대하고 입국하다 입국거부당하고 강제퇴거조치를 받을 수도 있다. 정통편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여러모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 처음 입국하거나 비자만료로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는 조선족은 한국에 와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으려면 신체검사해야 하는데 만약 정통편을 복용하고 검사에 임하면 마약성분이 검출되어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신체검사를 앞둔 조선족은 적어도 1주 전부터 정통편 복용을 금지해야 한다. 중국에서 지극히 정상인데 한국에서 마약류약품으로 취급되는 정통편, 조선족은 한국생활에서도 복용해야 하는데 한국세관에서 반입금지 되는 정통편, 서로 모순되는 이 정통편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 즉 한국정부가 조선족사회 실제 상황을 감안하여 정통편 반입금지를 해제하고 휴대를 허락하든지, 아니면 조선족들이 한국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여 모두 정통편 휴대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반입을 금하든지 하야 한다.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계속 속출 할 것이다.
70    진달래꽃 필 때까지(3) 댓글:  조회:4316  추천:0  2016-06-09
  진달래꽃 필 때까지(3)   3. 발가벗기는 면접 후보자 면접심사를 두고 나의 맘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듣는 말에 의하면 정치인이 되려면, 특히 국회의원이 되려면 비밀스런 개인사까지 발가벗겨야 한다. 학력, 가족상황, 사업상황, 재산, 전과경력까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왠지 나체로 대중 앞에 서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조선족출신이 한국과 같은 ‘나체’가 되는 정치풍토에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를 부르고 강가에 가면 강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속담이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려면 홀딱 벗기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싫든 좋든 말이다. 사실 홀딱 벗기여 봤댔자 별로 맘에 꺼리 끼거나 사회가 알아도 얼굴을 쳐들고 다니지 못할 수치스런 일은 없지만 한국정치풍토에 적응되지 못한 것이 은근히 걱정이 되었고 명색이 국회의원 면접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면접을 앞두고 이 걱정 저 근심에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 엄마는 “너는 20대 초반부터 이미 ‘정치’ 했었다.”고 뜬금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그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의아해 물었다. “그때 그 사건 말이다.” 엄마는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온가족이 사회적으로 온역 취급당하는 왕따였고, 그야말로 풍비박산을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죽지 못해 살던 추억을 떠올리기 싫었지만 한편 이 딸이 철없이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정의를 외치며 올곧은 가치관을 갖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습만은 지금까지도 아주 대견하게 간직해 오셨던 것이다. “그 당시 너 뿐만 아니라 온가족이 홀딱 발가벗은 것 마냥 창피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돌이켜보면 네가 실화를 토대로 정의를 구현하여 사회를 바꾸려고 했던 것이 옳았고 대가 바른 가치관이 그 험악하고 살벌하고 삭막한 사회를 헤쳐 나오는 동력이 되어 지금 한국정치에 뛰어드는 자격을 갖게 된 것이지.” 평소 말씀이 적던 엄마, 특히 이 딸이 20대 초반 꽃 같은 나이에 ‘사고’를 친 이후 정치와 멀리하려고 애쓰셨던 엄마께서 고무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다니!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엄마는 계속해서 편달한다. “나도 요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난 엄마가 20여 년 전에 너무 큰 상처를 입어 속으로 은근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요.” “뭐 나쁜 일도 아닌데 왜 반대하겠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해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 아니겠니. 그리고 추천받은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단 입증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 비록 별로 사회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연로한 조선족할머니의 말씀이지만 가족이고, 특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모성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씀이라 나에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힘이 솓구치는 느낌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하늘을 날듯 몸이 가벼워졌다. 엄마께서 기분 좋게 이 딸을 바라보더니 “다만 그때 그 심정으로, 그때 그 맘가짐으로, 그때 그 가치관으로 오늘 대한민국정치에 임한다면 될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어제와 그제께처럼 또 한강을 건너 여의도로 향했다. 요즘 연 며칠 여의도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매일 간다. 구로구에서 여의도에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한다. 나는 한국생활 20여 년 동안 수없이 한강을 건너보았다. 그때마다 별다른 느낌이 없이 그냥 차바퀴가 굴러가는데 몸을 맡기고 아무 감각이 없이 건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매번 한강을 건널 때면 번마다 강물을 주시해보곤 한다. 차창을 열어 강바람을 들이마신다. 요즘 저도 모르게 강바람이 나에겐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의 꽉 막힌 답답한 생활에서 특히 잡생각에 빠져 있는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열어주는 것은 강바람이 유일한 것 같다. 면접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 난 간이 큰 편에 속하지만 대한민국정치 중심인 국회의사당에서 면접을 보게 되니 조금 긴장해났다. 오전 9시가 넘자 한 두 사람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4년 전 면접 본 경력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다지 긴장해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사가 경험이 중요하고 체험이 소중한 것 같다. 다수는 나처럼 긴장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초보자들이 틀림없었다. 서로 묻지 않고 알려주지 않아도 얼굴에, 이마에 ‘난 초보요.’라는 문구가 그려져 있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습관적으로 얼굴에 뭐가 불미스런 이물질이 묻지를 않았나,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지 않았나 하고 거울에 비춰보고 옷매무시를 다듬고 문을 떼고 면접관 앞에 나타났다. 이력서에 자세히 밝혔는데 학력을 묻는다. 면접관 분께서 나의 학력을 사전에 알고 계시지만 아마 나의 표현력을 테스트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했다. 20여 년 전의 그때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석·박사 공부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큰 꿈은 그 사건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와서 회사에 근무하다가 자영업을 하여 돈을 좀 만져보았지만 공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나는 어릴 적 꿈이 선생이었고 대학교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는 예고 없이 불행이 닥쳐온다더니 진짜 인생을 망칠 사건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과거 품었던 꿈이 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무척 괴로웠다. 그 괴로움을 달래보려고 돈을 버는데 매진하였다. 나는 무엇이든 맘만 먹으면 해낸다는 자신감이 강했다. 물론 자신감으로만은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남보다 노력을 더 경주해야 성공의 여신이 나를 맞아준다. 한국에서 여행사도 운영하고, 학원도 꾸리고, 음식점도 개업해보고, 중국식품도매도 해보았다. 때로는 투잡이 아니라 쓰리잡, 포잡까지 하면서 죽기내기로 돈을 버는데 정력을 집중하고 살았다. 신은 노력하는 자에게 보상을 베푸는 것 같다. 나는 밤잠을 덜 자면서 동분서주하여 한 때 기껏 소비하고도 일 년 남는 돈이 남들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는 돈을 벌었다. 사회관계도 굉장히 발이 넓었다. 그러나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젊어서 이루지 못한 공부에 대한 꿈을 달랠 수가 없었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하자면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정신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하는 법이다.” 중국 최고 성인인 공자는 당시 사회인간을 ‘소인’과 ‘군자’ 두 계층으로 나누고 “소인은 이해(利害)에 밝고 군자는 의리를 중히 여긴다.”고 말했다. 이해란 사소한 이해득실을 말하는데 소인은 이해득실에 연연하여 대범하지 못해 소위 소인배라 불린다.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일변도 사회로 됨에 따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분화가 심했다. 여기서 사는 선비이고 농은 농경에 종사하는 농부이고 공은 장인(匠人)을 뜻하며 상은 장사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농부보다 더 천대 받은 가장 천한 계층이었다. 왜냐? 장사꾼은 이해득실을 따지고 쫓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유식한, 특히 유교사상의 지배하에 있는 집안은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심각하다. 아울러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사소한 상업에 종사하는 인간을 ‘소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내가 장사를 해보니 자연스레 이해득실을 따지고 쫓게 된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공자가 말한 ‘소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인’도 나름대로 삶의 보람이 있으나 나는 젊어서의 꿈을 잊지 않고 또 천성이 대범하여 그냥 ‘소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소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자께서는 “소인이 군자가 되려면 배우라”고 했다. 첫 편은 ‘학이편(學而篇)’이며 첫머리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라는 말로 시작된다. 나는 위대한 군자가 되려는 이상적인 포부는 아니더라도 이해득실을 쫓는 ‘소인’에서 벗어나려고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2011년 서남대학교 외국어학부에 이름을 올렸다. 돈을 벌면서 공부하려니 정말 힘들었다. 한편으로 단체도 이끌고 열심히 봉사활동도 진행하면서 공부하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개발을 위해 공부는 필수라고 다짐하고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2015년 2월 졸업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2015년 8월 CEO리더스교육, 2015년 9월 인생지도자1급, 2015년 10월 명강사 최고위 과정 등 수료하였다. 확실히 배우니 사람이 달리지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확실하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눈앞의 이익에 많이 연연하였는데 지금은 멀리 보는 안목이 크게 자랐다. 과거 간혹 남들과 사소한 일에 따지고 지지고 볶고 했으나 지금은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곤 한다. 과거에는 상업에 대한 정보나 생활에 필요한 정보에 연연했다면 지금은 정치, 문화 등 다 방면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과거엔 대한민국 상류계층 분들과 만나면 대화가 딸릴 때가 많아 창피했었는데 지금은 대화가 자연스러워 스스로도 자부심이 생긴다. 이것이 자신의 가치상승이 아니겠는가! 배움의 효과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다음호에 계속  박옥선 중국동포타운신문 320호  
69    진달래꽃 필 때까지(2) 댓글:  조회:4934  추천:1  2016-05-18
진달래꽃 필 때까지(2)   2. 후보자등록과정 번갯불에 콩 볶듯 얼마 전에 5월 5일 어린이날 목요일이어서 이튿날인 5월 6일 금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는 과정에 논란이 있었다. 임시공휴일을 끼워 넣어 4일 연휴 같은 국가적인 사항을 적어도 미리 수개월 전에 결정해야 국민들이 해외여행을 잡든지,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의미 있는 관광이나 뜻 깊은 이벤트를 마련할 것인데 불과 며칠 앞두고 부랴부랴 결정하니 국민들이 몹시 당황해 하였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공휴일은 미리 적어도 연초에 몽땅 정해놓고 움직인다. 한국처럼 며칠 앞두고 공휴일 정하는 사례는 기본상 없다. 일본사람들은 뭐나 자세하고 세밀하게 움직이는데 비해 한국은 뭐나 대충대충, 빨리빨리 하는 관습이 심각하다. 중국인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느긋한 편이어서 ‘만만디’라는 별명이 있다. 한국인은 무슨 일을 착수하는데 있어서 준비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다그치는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무슨 일이나 빨리빨리 결과를 보기를 원한다. 한국지하철역에서 오르내리는 손님들을 보면 저마다 마치 집구석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뛰어다니듯 빨리빨리 움직인다. 국회의원 후보자 등록과정도 번갯불에 콩 볶듯 불과 며칠 사이에 머리가 쥐나고 다리가 마비될 지경으로 빨리빨리 다그친다. 3월 16일 나는 비례대표 추천전화를 받고 그날 오후 이력서를 휴대폰으로 먼저 전송하고 나서 비례대표 후보 관련 서류를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튿날인 3월 17일 여러 관공서를 돌면서 후보자등록 관련 서류를 발급받았다. 관련 서류로서 기본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 범죄경력증명서, 납세증명서, 재산증명서(가족 전체 포함)들이 있었다. 그래서 동사무소, 세무서, 경찰서를 찾아다니면서 서류준비를 하여 여의도 정당사무실로 달려갔다. 아무리 대한민국 관공서들이 민원처리가 잘 되어 있어도 이곳저곳, 이 서류 저 서류 발급 받으려면 하루 종일 걸린다. 잔등을 땀에 흥건히 적시며 이리저리 뛰어다녀 겨우 완성된 서류를 갖춰 갖고 여의도 정당사무실에 달려갔다. 내가 조금 약빠른 성격이니 망정이지 느릿느릿한 성격이면 하루 내내 뛰어다녀도 다 발급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고생고생 준비한 서류를 사무국직원에게 보였더니 전부 퇴자를 맞았다. 이유는 공직자 후보등록 관련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데 일반 서류를 갖췄기 때문이란다. 헐~, 나미아비타불! 다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새롭게 여러 서류를 발급받아야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새카매 났다. 그러나 아무래도 해야 하는 일이라면 즐겁게 하는 것이 나의 생활철학이다.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동사무소, 경찰서, 세무서 등 여러 관공서를 쳇바퀴 돌듯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지 못한 일이 나를 괴롭혔다. 공직자후보등록 관련 서류는 신청하여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나절 기다려야 한다. 세무서에서는 가족 전체 서류를 신청했는데 이튿날 찾을 수 있다고 한다. 18일까지 모든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시간은 촉박하고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속이 타기 시작하였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이 중대한 일을 사전에 여유를 두고 미리 한두 달 시간차, 적어도 2주쯤의 여유를 갖고 준비하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리 빨리빨리 하는 대한민국이라지만 여느 마을 동네 통장을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반장 선출도 아니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선출하는 아주 중대한 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 지지고 볶아대니 머리가 휑해 나기 시작하였다. 어찌되었든 모든 요구서류를 들고 여의도 정당사무실로 달려갔다. 나절로 차를 운전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무리시간을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엔 서류들이 문제없겠지. 이렇게 혼자 스스로 자아위안하면서 사무국 직원에게 서류뭉치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문제가 생겼다. 사무국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더니 ‘재산신청서류가 불합격이니 다시 작성하라’고 한다. 즉 자세하게 재산이 10원이라도 모두 기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배기량 1600CC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단다. 자동차등록증에 보면 나의 차 쏘울 1590CC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가족들 한 명 한 명 보험부터 통장까지, 그리고 합산 계산~ 그리고 법인회사, 투자회사, 타인명재산 등등은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참빗질해도 또 빠진 것이 있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그날 정당사무실에 오후 3시 도착하여 준비해간 서류를 바쳤다. 아침부터 그 때까지 나는 곡기 구경 못해 위를 굶겼다. 굶주린 위는 강력한 항의를 제기한다. “빈곳에 빨리 ‘내용물’을 채워 포만감을 달라고.” 나의 몸에 달린 위이지만 제때 채우지 못하고 굶겨서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래서 서류접수 완료되면 금세 여의도 근사한 음식점에 달려가 폭식할 계획이었다. 하나님, 맙소사! 내 딴에는 빈틈없이 준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잘못된 것을 수정하고 또 새로 보충하고 하느라 서류 두께는 마치 중·장편소설 분량이었다. 머리는 속여도 배는 속이지 못한다. 배가 고프다 못해 현기증이 났다. 벽시계를 쳐다보니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었다. 굶주림에 시달린 위는 쉼 없이 항의해온다. 빨리 밥 달라고. 그렇지 않고 계속 몰라라 방치해두면 심한 위경련을 일으키겠다고. 하루 종일 곡기를 끊은 이유도 있고 또 처음해보는 일이고 게다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서류를 손보느라 긴장감에 휩싸여 머리가 어지러워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있다. 국회의원도 먹고 살자고 하는 노릇이 아닌가? 이렇게 배를 굶겨가면서까지 하필! “아무리 바빠도 저는 밖에 나가 식사하고 돌아와 계속 서류를 완성하겠습니다.” 정당사무국 담당 직원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빵과 샌드위치를 주문했으니 그냥 여기서 드시면서 서류를 마무리 하세요.” 나는 구세대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닌 40대 여자다. 빵과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운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빵과 샌드위치는 서양음식으로서 나에겐 배가 그토록 고프지 않을 때 간혹 간식으로 맛보는 식으로 먹는 것은 괜찮겠지만 당금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내가 서양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남들이 모두 불만의 소리 없이 동의하는데 나만 티 나게 놀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날 저녁 먹기는 먹었는데 뭘 어떻게 먹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위에 미안하지 않게 채우는 임무를 완성한다는 사명감으로 먹은 것 같다. 막바지에 후보자들이 몰려 컴퓨터 한 대씩 차지하고 서류준비에 분주했다. 그나마 경험 있으신 후보자들은 잘해 왔지만 나와 같이 초보자들은 당연 기각될만했다. 후보자들이 많으니 서류준비에 나타난 폐단들이 각양각색이었다. 오후 4시경 00후보는 서류를 행정관리 하는 분께 맡겼는데 여러 차례 자꾸 기각되니 화가 나서 “저 내일까지 전 재산 청산하고 서류접수를 하든지 포기를 하던지 할 겁니다.”고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저녁 10시경이 되어서야 서류가 완성되었다. 손에 쥐니 두툼하게 느껴졌다. 1990년대 초반 내가 흑룡강신문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원고 분량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내가 컴퓨터 다룰 줄 알아 그나마 그 시간에 완성한 것이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면 혼자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아예 할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녁 10시 되어 서류는 완성하였으나 다른 후보자들과 그 과정 경험담을 수다 떨다보니 어느덧 시계바늘은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귀가하려고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데 손이고 발이고 감각이 나의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나의 몸에 달린 손과 발이 마치 동네 사람의 손과 발처럼 느껴졌다. 긴장이 풀리니 눈까풀이 처지고 온몸이 나른해나 운전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한강을 지나며 차창을 내렸더니 시원한 강바람이 무겁던 머리를 자극하여 조금 정신이 들게 만들었다. 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강바람을 여전히 변함없이 일으키고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변함없이 여전히 깜박인다. 자연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나만이 지쳐 파김치가 되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되어간다. 연로하신 엄마는 잠들지 못하고 이 딸이 귀가하기를 고이 기다리고 계신다. 작년에 중병을 앓고 난 엄마는 맘이 굉장히 여려지셨다. 웬만한 일에도 큰일 난 것처럼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곤 하신다. 천근만근의 몸을 끌고 겨우 집에 들어선 이 딸을 보시던 엄마는 놀라서 묻는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나?” “아니요.” 나는 대답조차 할 힘이 없어 들릴까말까 하게 모기소리로 한마디 했다. 엄마는 나를 전장에서 패배한 패장을 바라보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금방 시작인데 그토록 지쳐서야 버틸 수 있겠나? 관두는 것이 좋을 듯 싶구나.” 엄마는 이 딸의 지친 모습을 보고 그만두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도 내가 뭐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음이 생겼다. 답은 하나였다. 나는 남들(재한조선족사회)이 경험해보지 못한 좋은 공부를 한 것이 나의 자산이 될 것이며 영원히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렇게 좋게 생각하니 맘의 위로가 조금이나마 생겼다. 물론 자아위안으로 그치겠지만 말이다. 내일이면 면접 보는 날이다. 육신이 힘들고 정신이 힘들어도 좋은 일이니 견뎌내야지 하는 결심을 갖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며 힘내야 한다는 도리는 빤하지만 잠이 쉽게 들지 못한다.  글 박옥선  중국동포타운신문 319호  
68    진달래꽃 필 때까지(1) 댓글:  조회:4901  추천:1  2016-05-03
진달래꽃 필 때까지(1)   편집자 주 : CK여성위원회 박옥선 회장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조선족 출신으로서 처음 한국 정당 비례대표 순번(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최종 35명에서 31번 배정 받았음) 안에 들어 1개월 동안 한국정치에 입문하여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박옥선 회장과 같은 정치경험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금후 한국정치에 출마하려는 조선족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어 길라잡이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돈 팔고도 살 수 없는 그 귀중한 경험을 재한조선족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본지는 이번호부터 박옥선 회장의 체험담을 연재하오니 독자들께서 적극 읽어보기 바란다.   1. 느닷없이 찾아온 기회 서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하게 잘 닦여져 있다. 춘삼월 청정한 날씨에 봄기운마저 완연하다. 바깥 시원한 대지의 뻥 뚫린 우주의 세계와 달리 성냥갑처럼 답답한 자동차 안은 숨 막혀 온다. 차창을 열어 재꼈다. 아침 9시경이라 주야기온의 교차가 이뤄지는 시각, 조금 쌀쌀한 꽃샘추위가 살랑대지만 태양열의 발산에 힘 업은 양기에 실려 오는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을 매만지고 사라졌다 또 찾아오기를 반복한다. 기분이 더 없이 상쾌해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 년 사시절 매일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으면······. 날씨가 좋으면 기분도 따라서 좋아진다. 기분이 좋으면 일도 잘 풀린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자는 아니지만 미리 며칠 전부터 날씨를 체크하고 날씨가 좋을 때 사업 건을 상담하고 추진하는 습관이 있다. 오전 10시, 6월에 있을 250명 단체 중국관광객 제주도 투어 건으로 중국00여행사에서 온 거래처 부장과 상담일정이 잡혔다. 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는 거래처라 은근히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사업에 있어서 우리백의민족은 이것저것 세심하게 따지지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지만 깐깐하기로 소문난 중국 상인들과 사업담판을 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상대는 나의 사업에 대한 진정성과 성실성을 믿어 거래가 쉽게 이뤄졌다. 한국생활 20여 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업상 나름대로 성취도 있었으나 서울의 쳇바퀴 같은 리듬에 지치고 찌들었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 따라 예기치 못했던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따르릉, 따르릉” 휴대폰이 울린다. 하루에도 수십 통 전화가 걸려오니 일일이 받는 것도 귀찮다. 그러나 기분이 좋을 때면 전화통화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오늘 따라 왠지 걸려온 전화마다 잘 받고 싶어진다. 기분이 꿀꿀할 때면 걸려온 전화번호를 체크하고 받을 지 안 받을 지를 결정하고 대충 응수할 때가 많다. 아침 해는 시간에 쫓기는 듯 어느새 11시 되었다. 정오를 향해 달리는 태양은 마음껏 양기를 발산하여 대지를 훈훈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며 걸려온 전화번호도 보지 않고 대뜸 상투적으로 “네, 박옥선입니다.”라고 응수하였다. “00의원입니다. 요즘 잘 지내시죠?” 야당 00중진의원님께서 걸려온 전화다. 정신을 가다듬고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날 00의원님과의 통화에서 내가 유일하게 길게 말한 대목이다. 나머지는 “아, 네.” “아, 네.” 마지막엔 “알겠습니다.”는 단마디로 통화를 마쳤다. 한국생활 20여 년 통해 터득한 한 가지 사실은 한국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추천할 때면 이력서를 보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느닷없이 나한테 이력서를 요구할 때면 다수의 경우 나를 어디에 추천하는 경우라는 것이다. 00의원님의 “이력서를 보내주실래요.”라는 말에 나는 요즘이 20대 총선을 20여일 남겨둔 시점이라 무슨 뜻인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통화하면서 나의 가슴은 널뛰기를 하고 있었다. 준비가 덜 된 내가 느닷없이 비례대표 추천 소식을 접하게 되다니! 정말 내가 비례대표에 나설 자격이 있는지를 반문하니 마음이 평온치 못했다. 머리가 새하얘 난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생겨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긴 말을 못하고 짤막한 ‘아’와 ‘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나를 추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전화통화하면서 순식간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굴리다 보니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중국에서 정치하는 사람은 탐오, 회뢰 등 착오를 지지 않고 맡은바 사업에서 성과가 있으면 평온하게 승진할 수 있고 탄탄대로를 걷게 되며 여생이 보장이 된다. 한국은 정치풍토가 중국과 전혀 다르다. 선거정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에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정치인은 세간의 욕을 먹는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해도 성과는 보이지 않고 나쁜 일 마이너스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씹히기 일쑤이다. 특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다면 온몸이 성할 데 없이 씹힐 것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듯이 세간의 눈총이 두려워 정치입문을 주저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선택이어서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학교 문을 나와 사회에 진출한 20대 초반 나이에 이미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동네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고 사랑하던 연인한테 버림당하는 아픔과 시련을 겼어보았다. 물론 내 딴에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이었으나 세상사는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나는 ‘나쁜 년’이란 딱지를 달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고향은 흑룡강성 탕원이다. 평온하던 마을에 아이 셋(4살, 6살, 8살)이나 딸린 과부가 우리 마을 노총각한테 재가로 오게 되었다. 노총각은 심성이 착하나 조금 지력상수가 모자라 더하고 빼는 인생살이에 서투다. 하지만 노총각은 노모를 잘 모셔 효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렇듯 평온하던 모자의 생활에 과부가 들어옴에 따라 풍파가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동네 말썽꾸러기 가문이 되고 말았다. 시어머니인 노모는 예의범절이 무엇인지 모르는 막무가내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해 잔소리가 잦았다. 이에 위아래가 없는 철부지 막가파 며느리는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니가 80세를 훌쩍 넘기자 거동이 불편해 자립이 곤란해졌다. 며느리는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던 데로부터 손찌검을 자주 했다. 점점 폭력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어느 하루 며느리가 손가락으로 시어머니의 입을 짜개놓았다. 그때 중국마을들은 지금과 달리 법률의식이 형편없이 결핍하였고 가정폭력을 법에서 제재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아마 있었을 수는 있었어도 법에 신고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불의를 목격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너무 분개하여 이란 제목으로 흑룡강신문에 시리즈로 막가파며느리 행위를 지탄하는 내용의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신문 글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나를 찬양하는 편지가 날아왔다. 불의를 과감하게 파헤치고 정의를 사회에 외치는 나의 행위에 감탄한다는 내용의 서신들이었다. 나는 처음 쓰는 소설이 신문에 연재로 게재되는 일만해도 성취감에 휩싸이게 되었던 데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정의 수호천사라는 명예를 받아 안아 한없이 기뻤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얼마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번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마을 온역’ 취급까지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글 장르는 소설이었으나 남편을 ‘황00’, 부인을 ‘이00’라고 주인공들을 거의 실명에 가까운 실체를 밝힌 것이 문제였다. 남의 가정사를 함부로 사회에 터뜨리는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루건너 협박이 들어왔다. 당돌하기로 소문난 나였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처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공안국에도 찾아다니고 정부도 찾아다녔다. 내 딴에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인데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또 호소하였다. 결국 경찰들이 나서서 ‘소설 속’ 주인공들을 찾아 협박행위를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협박을 멈추지 않으면 법에 따라 엄벌하겠다고 하니 그들 부부는 협박을 멈췄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는데 이번에는 엉뚱하게 생각지 못한데서 일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세상천지에 ‘동네 망신시킨 나쁜 년’으로 취급하고 길거리에서 나를 만나면 사람들은 마치 온역이나 만난 것처럼 슬슬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당시 학교교사였던 나는 교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고 친구나 동창생들 중에 고무격려의 편지를 보내오는 자도 있었으나 나를 나무라는 자도 적지 않았다. 더 슬프고 참기 어려운 것은 ‘나쁜 딸’을 둔 나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당당히 쳐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장 슬프고 비극의 늪에 빠진 사건은 바로 사랑하던 연인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었다. 나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이었는데 ‘나쁜 년’이 되어 일락천장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정말 죽고 싶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해져 백골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지옥을 헤매고 있던 와중에 어느 하루 짜개바지 친구가 찾아왔다. 죽도록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눈물이 말라 더 흘릴 눈물이 없었던 것이다. “난 죽고 싶어. 지금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적게 겪고 죽을 것인가를 매일 연구하고 있단 말이야.” 친구 왈, “죽는 사람은 남에게 죽겠다는 말 안 하고 죽는단 말이야, 너 내 앞에서 죽겠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아 너 진짜 죽지는 않을 것 같아 시름 놓인다.” 나는 슬퍼서 죽겠는데 친구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얄미웠다. 그러나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의 말이 맞았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하나, 바로 정든 고향이지만 그 고향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달리 살아가야 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때는 봄이 시작되는 계절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별사라도 읊고 싶은 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옛사람들은 산을 찾아 고백을 잘했건만 나의 고향은 허허벌판이라 산이 없다. 해가 지고 인가가 드문 초저녁 고향 오솔길을 걷고 또 걸었다. 숨을 길게 들이 쉬고 한바탕 하소연 하려는데 코를 간질이는 무엇이 날아들었다. 길가에 듬성듬성 피고 있는 진달래가 있었다. 처량해 보였다. 나의 처지처럼 가련해보였다. 그러나 자연은 누가 뭐래도 섭리대로 돌아간다. 꽃망울을 깨고 만개를 준비하는 진달래꽃에서 향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자연의 계절이 어떻게 가고 오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 속이 재가 되니 모든 게 귀찮아서였다. 진달래꽃 향기는 고목이 물을 만나 살아나듯 순간 나를 힘차게 자극하고 있었다. 나의 오장육부를 비롯한 장기가 꿈틀거리고 말초신경 감각이 돌아섰다. 아~ 인간세상이 나를 버려도 자연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지옥을 헤매던 나를 인간으로 그 기능을 회복시켜 준 것은 진달래꽃향기였다. 나는 나를 인간으로 회복시켜준 고향의 진달래꽃이 활짝 피면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한다고 약속하고는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 후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너무 일찍 나이에 너무 심한 풍파를 겪고 나서 불의를 목격하면 참견하지 말자고 골백번 결심하고 또 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고치지 못하는 법. 그 후 나의 인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는 과정에 매번 또 불의를 만나면 참지 못하고 까밝힌다. 인간세상의 옳지 못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정의이다. 정치란 바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어찌 보면 정치가 나의 체질에 맞는 것 같다. 그래서 20대 총선 비례대표 추천에 응했던 것이다.   다음호 계속   중국동포타운신문 318호    
67    한국정치 우습게 보지 말자 댓글:  조회:4836  추천:9  2016-03-24
한국정치 우습게 보지 말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기적은 없었다   한국4.13총선 22일 앞두고 지난 22일 여야 양당에서 비례대표 순번을 공개하였다. 조선족출신들이 새누리당에 공개된 신청자가 5명이고 비공개 된 수까지 합치면 일여덟 명 된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추천에 의해 박옥선 CK여성위원회 회장이 홀로 이름을 올렸다. 공개에 의하면 더불어민주당은 35명을 발표했으나 20위까지 당선안정권이고 새누리당은 45명을 발표했고 25위까지 당선확률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순번을 보면 박옥선 회장이 그나마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순위에서 35명 안에 들었던데 비해 새누리당의 일여덟 명의 조선족출신들은 아예 45명 내에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가 혹시나 한 명쯤은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그동안 국회에서 오랫동안 재외동포를 대변한 여야의 대표적인 심윤조 의원과 김성곤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재외동포사회가 한국정치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조선족 비례대표도 한 물 건너 간 것 아니냐고 짐작했었는데 결과는 예측대로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2·8 전당대회에서 '재외동포 전문가를 비례대표에 우선순위 추천한다.'는 당헌 규정을 신설했지만 이번 20대 총선에서는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에 대해 여야 정당들을 원망하거나 나무랄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에게서 잘못을 찾고 4년 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선거는 전략이다. 이번 조선족 비례대표가 배출되지 못한 것은 여야정당의 홀시가 중요하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조선족사회 선거 전략이 없었던 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패요인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비례대표는 선출직은 아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중앙위원회 투표를 거쳐 최종 35명의 순위를 확정했다. 투표를 거치든 여당처럼 선거공관위 위원들이 압축하든 눈에 들어야 한다. 새누리당에 신청한 조선족 일여덟 명이 최종 45명에 들지 못했다는 것은 눈에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눈에 들게 만드는 것이 곧바로 선거 전략이다. 비례대표의 개념은 그 사람이 소속된 분야의 전문가를 뜻한다. 정당은 각 분의야 전문가들을 섭외하여 의정활동을 펼치게 함으로써 정치가 역동성을 갖게 만든다. 조선족후보는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재한조선족을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전문가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국정치를 가볍게 보거나 우습게 여기고 나도 신청하면 되겠거니 하는 하늘에 대고 막대로 재이는 식으로는 죽었다 깨도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가 없다.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한국정치권에 향해 왜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이 필요한지, 의정활동을 어떻게 펼칠 것인지를 강력하게 어필하고 집단적으로 특정 대표성적인 후보를 선발하여 여야정당에 추천해도 될까 말까인데 제각각 서로 라인이나 타서 비례대표가 되려는 이번과 같은 이런 식으로는 4년 후 아니 40년이 지나도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없다. 한국정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가볍게 보이고 우습게 보인다. 한국인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개나 소나 다 국회의원이 된다. 정말 그럴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꿈조차 꿀 수 없는 조선족들이 이런 표면적인 한국정치현상에 유혹되어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정치인들이 막말 하고 다니고 주먹다짐이 아니면 삿대질하고 상욕을 해대는 등 얼핏 보면 수준이 낮고 소질이 형편없이 보인다. 그래서 조선족들이 한국국회의원이 별거 아니네라고 여기고 나도 자격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국회의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따져보면 대한민국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엘리트이며 적어도 조선족에 비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우선 대한민국은 사농공상의 유교적인 전통에 의해 아직도 학력을 매우 중시하는 풍토가 짙다. 한국국회의원들의 보편적인 학력이 매우 높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삼성전자 상무 출신 양향자 씨의 학력이 고졸이지만 대한민국사회에서 그녀처럼 성공한 사람은 로또 1등에 당첨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며 예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처럼 매우 드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비례대표로 공천된 사람 중에 논문표절 논란이 일고 있지만 정치하려고 나선 조선족출신들이 표절이든 무엇이든 논문 근처에나 가 보았는가? 비례대표에 나서는 자가 반드시 논문 쓴 경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대학 나왔다고 큰소리 칠 수 있겠으나 한국에 와서 석·박사에 버금가는 커리어를 쌓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재한조선족사회 분위기는 흔히 이자스민을 들먹이며 웬만한 조선족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제발 이와 같은 천박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자스민이 국회의원이 된 것은 찬스가 잘 맞아떨어진 케이스이기 때문에 다시는 같은 경우가 나올 확률이 제로다. 때문에 차기 21대 총선에서 조선족 비례대표를 배출하려면 철저한 준비를 마련해야 한다. 이번 실패는 각자가 제각기 논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비례대표가 되려면 학식 도덕 재원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재한조선족사회 엘리트들이 모여서 공약도 함께 만들고 연설문도 함께 작성하는 등 집단의 힘이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각자가 제 잘난 멋에 논다면 영원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3월 18일 중국동포타운신문 4층에서 진행되었던 동포사회현안 공개토론회에서 재한동포연합회 이선 이사의 제안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동포사회 단체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하려면 지식인들로 뭉친, 마치 중국 당교와 비슷한 조선족인재양성기관이 세워져 거기서 훈련 받고 추천된 자를 여야 정당에 밀어주면 당선 확률이 높을 것이다.” 현재까지 재한조선족사회 분위기는 지적인 마인드나 동포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이 곽재석 원장의 말대로 완장 찬 분들이 축제나 둬번 하고 자원봉사나 좀 나서면 국회의원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4년 후에도 국회의원 배출은 역시 천방야담이 될 수밖에 없다. 4년 후 진정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되려면 이선 이사의 제안이 십분 맞는 얘기이다. 현재로서는 이 길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관건은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렸다.    
66    불편한 진실 댓글:  조회:4733  추천:10  2016-01-27
불편한 진실   서울에서 알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강남 청담동에 유명한 불고기집이 있다. 음식점 치고는 규모가 커 종업원도 많다. 홀에만 여덟 명의 서빙이 있고 주방에 요리사와 참모 및 설거지 아줌마까지 합쳐 20여 명이 뱅뱅 돌아친다. ‘조선족아줌마가 없으면 서울 음식점들이 문을 닫는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3명 이상 종업원이 있는 아무 음식점에 가보아도 조선족아줌마가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다. 음식점 규모가 클수록 내국인종업원 구하기 힘들어 조선족아줌마를 많이 채용하고 있다. 구인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불고기집에도 전체 종업원 30여 명 가운데 조선족아줌마가 삼분의 일이나 된다. 한국아줌마든 조선족아줌마든 돈 벌기 위해, 한국인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 음식점에 취직하여 근무한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목적은 똑 같으나 한국아줌마들과 조선족아줌마들이 지나온 문화 환경이 달라 자주 마찰을 빚고 갈등을 일으킨다. 매일 점심때면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손발이 나른해나고 배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배는 심하게 고프지만 매일 반복해 먹는 식당 음식이 질려 힘들어도 때론 자기네절로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먹는다. 재미나는 것은 음식 해 먹을 때면 가재는 게 편이요 오리가 오리무리 따르듯 한국아줌마들과 조선족아줌마들이 두 무리로 쫙 갈린다. 조선족아줌마들은 한국에서 기름기 번지르르한 음식을 먹지 못해 속이 사막이 되는 느낌이어서 ‘차오차이(볶음요리)’를 해 먹는다. 한국아줌마들은 기름이 번지르르한 ‘차오차이’를 보고는 처음에는 “니글니글 거리는 음식 어떻게 먹느냐?”고 주춤거리다가도 정작 맛보고는 볼이 미여지게 잘도 먹는다. 한국아줌마들은 흔히 해먹는 음식이 바로 쌈 싸 먹는 것이다. 어느 하루 한국아줌마들이 호박잎을 데쳐 쌈을 싸 먹는 모습이 마치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기분으로 맛나게 먹고 있었다. 처음 이와 같은 광경을 목격한 한 조선족아줌마가 못마땅하다는 눈길로 째려보면서 낮은 소리로 “한국 것들은 잘 산다고 하면서 별 것 다 먹네.”라고 말한다. 언어표현에 굉장히 서툰 조선족아줌마의 ‘한국 분’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닌 ‘한국 것들’이라는 말은 굉장한 실례였다. 한국 사람들은 ‘00것들’이란 말을 매우 혐오한다. 왜냐하면 양반과 상놈의 차별문화가 심각했던 조선시대에 양반가문 사모님들이 일반백성들을 쩍하면 ‘상것들’이라고 욕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아줌마들이 자기네끼리 하는 소리였는데 한국아줌마들이 홀깍 들어버려 크게 화나게 만들었다. 한국아줌마들이 화 난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즉 “별 것 다 먹네.”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기가 세고 말발이 센 한 한국아줌마가 매우 흥분되어 묻는다. “임자네 중국에서 호박잎을 안 먹노?” 평소에 괜히 자격지심으로 피해의식에 젖어 있던 조선족아줌마는 단 1초의 머리회전도 거치지 않고 툭 한 마디 내뱉는다. “우리 중국에서는 이런 걸 돼지 먹여요.” 이 말을 들은 한국아줌마들이 열이 상투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한국인 자기네들이 졸지에 돼지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굴러온 돌들이 배긴 돌한테 큰소리 빵빵 치니 더 참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식하고 야만스럽게 머리채 잡아끌면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고 하여 한 마디 뼈 있게 쏘아붙인다. “임자네 그렇게 잘 살믄서 와 한국에 돈 벌려 왔디야?” 이 말을 들은 조선족아줌마들은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되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위 사실을 필자는 일명 ‘호박잎 사건’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자아, 이 ‘사건’에서 조선족아줌마가 한국아줌마들을 ‘한국 것’들이라고 비하하는 식의 표현이 잘못되었으나 “중국에서는 호박잎을 사람이 먹지 않고 돼지 먹인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고 진실이다. 필자도 연변 동불사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어릴 적 집터 주변에 호박잎이 흔해 빠져 있었으나 먹어본 기억이 없고 데쳐서 돼지 먹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니까 조선족아줌마의 말은 사실이고 진실이었다. 동시에 한국아줌마의 “임자네 그렇게 잘 살면서 왜 한국에 돈 벌려 왔느냐?”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고 진실 된 표현이다. 그 환경에서는 맞는 대응이라는 뜻이다. 조선족아줌마와 한국아줌마 사이 오고간 말들이 서로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진실을 진실대로 표현해 버리면 서로 불편해지고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불러온 화근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호박잎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있는데 일명 ‘김치 사건’이다. 물론 필자가 지어낸 사건명이다. 조선족종업원아줌마가 음식점에서 밥 먹으면서 배추김치 푸른 잎을 가려내 버리고 흰 것만 골라 먹는 것을 보고 한국종업원아줌마가 “임자, 푸른 잎이 영양가가 많은데 왜 버리는 거요?”라고 하자 조선족종업원아줌마가 “우리 중국에서는 김치 담글 때 푸른 잎을 잘라내어 돼지 먹여요.”라고 대포처럼 쏘아댄다. 이 말을 듣는 한국인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까? 아무 고려도 없이 말이다. 이 말을 들은 한국종업원아줌마는 “임자,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을 돼지 취급하는 거요?”라고 거칠게 나오자 조선족종업원아줌마는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난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왜 화를 내요?”라고 맞받아친다. 맞는 말이다. 사실 중국조선족은 김치 담글 때 푸른 잎을 쳐내고 맨 흰 잎으로만 담근다. 이것이 진실일지언정 진실을 진실대로 말해버리면 서로 불편해지고 갈등을 빚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이다. 현시대에 있어서 진실을 진실대로 말해버리면 불편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KBS2 채널에 이란 개그코너까지 생겨났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불가사이한 일들이 많고도 많다. 사실이 아닌 일이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사회에 널리 퍼지면 그것이 사실이 되고 진실처럼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 노무일군들이 한국에 밀물처럼 몰려들자 한국사회에 다음과 같은 말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조선족들이 한국에 돈 벌러 와서 아무리 돈을 쫓는 돈벌레라고 하나 단 돈 5만원 더 준다고 철새처럼 일자리 옮겨버리는 것은 너무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족은 돈이라면 오금 못 쓰고 의리도 지키지 않는 못 믿을 족속이라는 것이다. 이 ‘유행어’ 때문에 조선족이 일자리 옮기는 것이 단 돈 5만원을 위해서라는 것이 진실이 되어버렸다. 어느 한 번 술자리에서 대한민국 권위 있는 매체 기자조차 필자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조선족이 한국직장문화에 적응 못해 부득이하게 자주 직장을 옮겨 다니는데서 생겨난 거짓풍문이라고 해석해 주었다. 즉 한국에서 노무에 종사하는 조선족 다수가 농민 출신이고 가령 도시출신이라 해도 직장체험을 해보지 못했거나 혹시 도시 직장문화를 경험해보았다 해도 그것은 사회주의 큰가마 밥 직장에서 세월을 보냈을 뿐이어서 일을 더 해도 그만 덜 해도 그만, 정해진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경쟁이 무엇인지? 내가 일을 열심히 하면 회사가 수입이 증가되고 나중에 나에게 그 만큼 한 보수가 더 차려진다는 직장의식이 없었다(요즘에는 중국도 많이 변했지만). 또 한국처럼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일이 없고 상사가 부하직원을 자기 동생이나 자기 자식을 대하듯 내리 막 대하는 직장문화가 중국에서는 없는 일이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직장을 자주 옮기는 이유는 한국직장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월급 더 준다는 조건에 유혹되어 직장을 옮기는 사례가 있긴 하겠지만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 돈 5만원 때문에 돈 쫓는 돈벌레이기 때문에 직장을 자주 옮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직장에서는 오너가 직원보고 그만두라는 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진짜 그만두게 될 경우에만 말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한국직장에서는 오너가 직원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밥 먹듯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영업 구멍가게 사장님들은 아무 말이나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음식점들은 점심 한때와 저녁 한때, 이렇게 시간 때에 따라 갑자기 볶아친다. 한국인들의 말대로 하면 “진짜 정신없다. 미치겠다.” 사장은 정신없이 미치겠는데 시골출신 조선족아줌마 종업원은 손님들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사장님의 전라도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외래어도 알아먹지 못해 얼어붙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종업원이 이쯤 되면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주문하고 요구하기도 하고 서비스가 따라가지 못해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사장은 진짜 미친다. 그래서 사장은 홧김에 “아줌마 내일 당장 그만둬!”라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이튿날 점심 손님이 들이닥칠 시간이 되었는데도 조선족아줌마 종업원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사장은 진짜 미치겠다. 전화로 “이게 몇 시인데,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사장님 어제 저보고 그만두라 했지 않았나요?” 사장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참, 기가 막혀!” 사장의 입장에서 진짜 직원을 그만두게 하려면 퇴근 시간에 불러 여차여차하여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라, 그 동안 보수는 내가 알아서 얼마 챙겨줄게.” 합의가 되면 사장이 한마디 보탠다. “미안하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다시 함께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그냥 해보는 말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직장문화를 모르는 조선족아줌마들은 흔히 사장이 홧김에 한 말도 진실로 받아들이고 이튿날 바로 실행에 옮겨버려 말없이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사직을 알리는 것이다. 사직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해보자. 한국직장에서는 직원의 의도이든 고용 측의 뜻이든 하여간 직원이 그만두게 될 경우 사직서를 작성하여 상사에게 바친다. 이와 같은 직장문화를 모르는 조선족아줌마들은 사직서는 고사하고 그냥 말없이 출근하지 않는 행위로 사직을 알리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사장님들이 이 때문에 숱한 골탕을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계는 돌려야 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렵사리 전화 연락되면 돌아오는 대답은 진짜 골 때린다. “저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였어요.” 사장이 새로운 일군을 모집할 틈도 주지 않고 일방적인 통보로 이직한다. 코리안드림 바람을 타고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아줌마들, 건설업이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선족남자직원들도 말없이 그만두는 일은 마찬가지로 비일비재하다. 이래저래 한국직장문화를 모르고 있는 조선족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지만 한국인은 조선족사회 이와 같은 사정을 모르고 그냥 단 돈 5만원 더 줘도 철새처럼 직장을 쉽게 옮겨버린다고 말하고 있고 또 이 말이 진실처럼 한국인들은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크든 작든 세 사람 이상부터 모인 직장에서는 처세술이 능해야 한다. 사장님에게 적당히 잘 보여야 하고 직원과 직원 사이 각을 세우지 말고 두리뭉실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조선족들은 너무 직설적이고 자기 감정을 숨길 줄 모르고 보면 본대로 말해버리다 보니 미움을 살 때가 많다. ‘호박잎 사건’도 ‘김치사건’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족직원과 한국인직원 사이 마찰을 빚고 갈등이 생겨나면 손해 보는 쪽은 십 중 팔구 조선족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굴러온 돌이 배긴 돌을 이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니는 이유가 주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과 조선족 직원 사이 갈등이 생겨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서로 상대방의 과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호박잎 사건’과 ‘김치사건’은 조선족아줌마들이 직설적인 성격문제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은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조선족아줌마들이 한국음식점에 근무하면서 이 ‘두 사건’ 외에 목격한 ‘사건’들이 많고도 많았고 때론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중국에서 사람이 먹지 않고 돼지를 먹이는 무 이파리, 돼지비늘 풀, 고양이풀 등등의 식물들을 한국에서는 사람이 다 먹는다. 조선족아줌마들의 눈에는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신기하다는 눈길로 바라본다. 한국의 과거사를 모르는 조선족아줌마들에게는 실로 수수께끼였다. 한국은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끝나고 국토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고 먹을 것이 턱 없이 부족하여 나무껍질 벗겨서 먹을 지경이었다. 아무 식물이든 독이 없으면 다 먹었을 만큼 어려운 세월을 겪었다. 그러므로 호박잎쯤은 어찌 보면 좋은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김치 담글 때 배추가 없어서 문제이지 푸른 잎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 김치 담글 때 푸른 잎을 쳐내지 않고 그대로 담그는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호박잎을 데쳐 쌈을 싸 먹거나 무 이파리, 돼지비늘 풀, 고양이풀 등등을 먹는 것은 현재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옛날 먹었던 추억을 되살리고 또 매일 하루 세끼 쌀밥만 먹기보다 어떤 음식은 가끔 먹으면 맛이 있을 때가 많다. 보리밥을 가끔 먹으면 별미이지만 하루 세끼 먹으면 진짜 미칠 지경이다. 서울에 보리밥집이 여러 곳 있는데 먹을 것이 풍부한 요즘 손님들이 가끔 먹으므로 하여 과거 맛을 되새겨 보고 추억도 해보는 장소여서 장사가 꽤 잘되고 있다. ‘호박잎 사건’과 ‘김치 사건’의 두 주인공 여성인 조선족종업원아줌마들이 만약 한국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온 과거사를 알고 있었더라면 불편한 진실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인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직장을 옮기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같은 도리로 거꾸로 한국종업원아줌마들이 중국에서 조선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과거와 그들의 문화를 알았더라면 그토록 갈등을 빚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인과 같은 문화뿌리를 두고 있지만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중국문화가 몸에 배어 한국인과 생활방식, 생활방법, 생활양식이 다른데서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완전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직장생활이 어설플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몸에 배인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못한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올바르게 정착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걸려야 해결될 것 같다.  
65    조선족 국회의원? 아직은 천방야담 댓글:  조회:5401  추천:3  2016-01-21
조선족 국회의원? 아직은 천방야담   “비례대표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먼저 나오진 않았을 거다. 여당도 야당도 쉽사리 중국동포를 공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당장 선거구에서 동포들에게 과도하게 친화적인 정책을 실시했을 경우 내국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전략상으로 보면 망하는 수가 있다. 동포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의 여론이 꼭 좋지는 않다. 지역구가 슬럼화 된다고 해서 떠난 분들도 많다. 다문화 사회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시점이 지금이냐고 물으면 ‘아직 시기상조다’고 말할 수 있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한국00언론 기사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권은 여당과 야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 얘기는 여당과 야당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도 없고 또 발표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이것이 현실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비례대표 얘기가 들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말부터 올해 들어 4.13총선을 앞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부 후보들(후보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사회와 인맥이 닿는 한국인을 지정)이 재한조선족사회 표를 의식하여 개별단체장들을 찾아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또 귀가 솔깃한 공약을 던져준다. 일부 단체장들이 확인을 거치지 않고 확정되지 않는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을 떠들고 다닌다. 많은 내용의 空約 가운데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당 차원에서 거론조차도 되지 않은 일을 마치 이미 확정된 것처럼 공공연하게 ‘홍보’한다. 한 표라도 더 얻으려는 얄팍한 전략에 의해 생겨난 풍문이 사실처럼 되어가고 있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이 空約이 公約처럼 잘 먹혀드는 이유가 있다. 이자스민 때문이다. 수십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이 1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4년이 지난 지금 70만 조선족사회에 당연히 국회의원이 한 명쯤은 공천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일각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보는 경향이 짙다. 미안한 일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한국정치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적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필리핀 사람들은 적지만 단합이 잘 되어서 국회의원을 배출한데 비해 조선족은 머릿수만 많았지 단합이 되지 않아 국회의원을 배출 못한다고 떠들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당신들 언제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고 그들이 단합된 것을 눈으로 보았느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근거도 없고 사실도 아닌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19대 총선에서 여당이 이자스민을 비례대표로 공천한 것은 당시 한국정부가 다문화에 지원한 예산이 연간 2,800억원이 배경이었다. 천문학 숫자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지원한 예산은 서민 한 사람의 연봉의 반밖에 안 되는 1,200만원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또 여당의 입장에서 천문학적인 정부예산을 퍼부으니 당연히 이를 대변할 국회의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자스민이 공천 받은 것이지 단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방인’ 대표를 국회에 입성시키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이자스민은 명분이 있었던데 비해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은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4년 후 지금에 와서 조선족출신을 비례대표로 공천하는 것이 전혀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숫자적으로 70만 명이니 정부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고도 많다. 따라서 국회에 한 명쯤 입성하여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만 정치는 단순히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의 논리로 움직일 수도 있고 국민을 설득시킬 확실한 명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떠한 방식을 떠나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를 공천했다가 내국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당 차원에서 믿지는 장사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면 가만히 앉아서 되는 일이 아니다. 피동적으로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국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 60여개 단체가 뭉치고 있다는 움직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실제로 뭉치지도 않고 또 뭉칠 수도 없다). 또 더욱이 한국정치권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중시하는 일부 조직들은 마치 4.13총선용으로 존재하는 듯이 한국정치권에 비취지고 한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00후보를 지지하고 그 대가를 바라는 식의 조직은 더욱 곤란하다.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는 이런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눈앞의 이익을 쫓는 움직임에 의해 공천되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인 움직임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힘의 형성은 단순히 숫자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이 있는 조선족사회 단체장들과 엘리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왜 조선족출신국회의원이 필요한지? 국회에 입성하면 무엇을 대변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현안이 무엇이고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중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충분히 논의하고 연구를 거쳐 문자화 해 갖고 여당과 야당을 찾아다니며 설득 작업을 발이 닿도록 해야 한다. 한편 재한조선족사회에 국회의원이 될 자격을 갖춘 인물이 있는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국회의원 자격 기준에 대해 정해진 것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역사문화를 비롯해 다방면 지식수준을 갖춰야하고, 도덕적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일정한 자금력도 있어야 하고 재한조선족사회발전과 한국사회에 기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언변능력도 있어야 하고 리더십도 있어야 하고······ 등등,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감각이다. 정치란 ‘ㅈ'자도 모르는 조선족이 국회의원이 된다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정치 감각을 익히려면 좋기는 구의원, 시의원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자산이 될 수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 입성하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사람이 대학생이 되는 꼴이 되면 의정활동을 제대로 못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망신만 남기게 될 것이다. 혹자는 한국문화에 서툰 이자스민도 국회의원을 맡고 있는데 조선족이 못해내겠는가고 반문할 수 있는데 사실 한국인은 외국인에 비해 동족인 조선족에 대해 모든 면에서 기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조선족은 다른 외국인에 비하지 말고 스스로 자질제고에 힘써야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철저한 준비 과정이 없이 가령 운이 좋게 비례대표가 된다한들 안 되기만도 못하다. 어떤 루트의 라인을 타서 자격이 되지 않는 속이 텅 빈 00가 비례대표로 공천되면(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나 100% 배제할 수는 없다) 조선족 수준과 자질이 도마 위에 올라 여론의 물매를 맞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한 사람의 수준과 자질이 전체 조선족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동네 망신만 남길 것이고 추후 총선에선 비례대표는 더는 바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사회를 대변하는 일군인 비례대표를 바라겠으면 조직적인 준비도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후보가 되려는 사람들도 자신의 자격을 스스로 검증하고 또 객관적인 검증도 거치고 나서 철저한 준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족 국회의원 얘기는 천방야담으로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64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댓글:  조회:6570  추천:23  2016-01-02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우리 조선족역사가 각 가문의 이주시간이 보편적으로 100년도 채 되지 않지만 1세대·2세대들의 뼈를 묻은 정든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조선족농촌마을이 개혁개방의 거센 파도에 의해 농민들이 뿔뿔이 도시로 해외로 진출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있다. 조선인1세대들이 만주에 와서 피땀으로 토지를 개간하고 삶의 터전을 이뤄놓았던 고향이 사라져가고 있으니 매우 안타깝고 따라서 공동체 해체위기이니 뭐니 하면서 대서특필하고 떠들고 있지만 이농에 따른 농촌의 황폐는 새로운 경제시대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젠 고향이란 개념과 고향에 대한 의식 및 관념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향은 농경문화의 산물 고향이란 자신이 태어난 곳, 혹은 조상이 살던 곳을 의미하며 과거 전통사회에서 90%이상 사람들이 농경에 종사해왔기 때문에 고향은 흔히 농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전통문화 맥락에서 하는 말). 고향의 다른 표현인 고구(故丘), 고리(故里), 고산(故山), 고원(故園), 구리(舊里), 모향(母鄕), 전리(田里), 향관(鄕關), 향리(鄕里) 등등의 어휘가 시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고향은 곧 농촌을 의미하고 농촌은 곧 우리 선조들의, 아니 불과 30년 전의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이 이동이라면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다. 전통사회에서 절대다수 사람들은 세세대대로 한곳에서 정착하여 살아왔다. 농촌마을문화는 아침에 본 사람 점심에 만나고 점심에 만났던 사람 저녁에 또 마주치고 오늘 본 사람 내일 또 부딪힌다. 매일 반복되는 이와 같은 삶 속에서 자연스레 마을 구성원들 사이 서로 유대감이 강해진다.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마을문화는 서로 한우물의 물을 마시고, 농번기에는 서로 일을 돕고, 색다른 먹을 것이 생기면 서로 나눠 먹고, 서로 허물없이 마실 다니고, 누구네 집 두지에 쌀 얼마 있고를 알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등 정(情)의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한반도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지리적인 환경특징 때문에 우리민족은 지구촌에서 정의 문화가 가장 발달되었고 따라서 고향문화가 가장 발달되었으며 가장 끈끈해졌다. 한국전통노래가사에 고향이란 어휘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우리는 고향을 말할 때 흔히 정든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된 고향은 정이 많아 살맛이 나지만 농사일이 그 어느 일 보다 고되다. 일의 고달픔도 심각하지만 주나라 이래 3천년 동안 백성이 농사일에 종사하여 부자가 된 사례가 가뭄에 콩 나 듯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일도 고달프고 게다가 가난하고, 이것이 우리 전통농촌의 현실이었다. 현대문화에서는 都와 市, 혹은 城과 市를 하나로 묶어 都市 혹은 城市라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市는 都 혹은 城과 鄕 사이에 설치하여 시골농산품을 도시에 판매하는 장소였다. 都와 城은 고귀하고 鄕은 비천하고 시는 잡배들이 모이는 곳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전통사회에서 士農工商 신분서열문화가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으나 예로부터 농부가 대접받아 본 역사는 없다. 농촌현실이 이러했기 때문에 농촌을 벗어나면 출세했다고 온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먼 전통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진출이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에 농촌미녀들이 5전짜리 공인(노동자)이라도 도시총각한테 시집 갈수만 있다면 역시 온 마을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공부하여 농촌을 벗어나든, 군대 갔다가 도시에 진출하든, 병신 같은 도시총각한테 시집가든 듣기 좋게 말하면 출세였고 나쁘게 말하면 고향을 버리는 행위였다. 바꿔 말하자면 고향을 버려야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왜 고향을 그리는가? 인간은 그토록 고향을 버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는 돌아서서 고향을 그리는 간사함이 강하다. 인간이 고향을 그리는 것은 추억 때문이다. 어릴 적 먹던 음식, 어릴 적 다니던 유치원과 학교 모두 추억의 대상이다. 임어당은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하지만 따지고 보면 개개인이 어릴 적 먹던 음식의 기호를 지켜내려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도시에 진출했거나 특히 외국에 나가 있으면 어릴 적 먹던 음식이 더 그리워난다.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은 살고 있는 집이 한국 집이냐, 중국집이냐 의식하지 않고 생활한다. 옷도 굳이 한국복장이냐, 중국옷이냐를 의식하지 않고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먹는 것만은 다르다. 한국에 오래 있어도 중국음식이 생각나고 조선족밀집지역 사무실에 근무하는 조선족은 매일 점심 거의 중국음식점에 다닌다. 저녁 회식도 기본상 중국음식점을 찾는다. 중국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에 진출했던 사람이 가끔 고향에 가면 고향을 떠날 때 살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지 않고 있어 반갑게 맞아준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의 음식대접을 받는데 어릴 적 먹었던 음식 맛이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진짜 고향을 그리는 멋이고 맛이다. 그런데 요즘은 고향에 가면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없고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 혹은 한족들이 이주해 와서 고향을 찾아간 사람은 매우 생경하다. 반갑게 맞아줄 사람도 없고 맛있는 음식대접은 먼 옛말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향에 갈 멋이 없다. 한국 실향민들이 아직도 고향을 몹시 그리는데 그들은 고향을 갈 수 없기 때문에 꿈의 고향으로 남아 있어 더욱이 사무치게 그리게 되지만 조선족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고향에 가면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고 남은 것은 허탈한 한숨뿐이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확 사라져버리고 만다. 필자는 용정시 동불사 요구촌 출신인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및 삼촌들의 묘가 있어 가끔 가는데 예전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이집 저집 음식을 권하여 고향 맛이 났었는데 요즘은 청명에 보토(補土)하고 추석에 벌초하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삽을 빌기가 힘들고 낫을 얻기가 어려워 연길에서 갖춰갖고 가야하는 상황이다 보니 ‘고향’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20·30대 조선족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1990년대 초반 한국인관광객이 백두산투어에 나섰을 때 가이드가 전부 조선족이었다. 한국인관광객들이 같은 핏줄 젊은이들을 만나 몹시 반가워했고 흔히 “고향이 어딘가?”고 물었다. ‘왕청’, ‘화룡’이라고 대답하면 한국인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들어보지 못했던 지명이기 때문이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연길에서 얼마 가고 어떤 방향이라고 말하면 그때서야 알아차리고 “아니 할아버지 고향 어딘가?”라고 다시 재차 묻는다. 한반도 조상의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질문은 아직도 농경문화의 산물인 고향의식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태어난 곳이 고향인 줄 로 만 알고 조상고향이 곧 나의 고향이라는 의식이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고향을 물으면 다수가 모른다.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 아이들이 방학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시골할아버지 집 혹은 시골외갓집에 가서 방학을 보냈다. 도시에서 태어난 이들 세대까지는 조상고향의식이 있었는데 나의 딸애가 소학교 다닐 때 방학에 시골할아버지 집에 가라면 죽어라 가지 않았다. 아무리 어떻게 달래도 가지 않았다. 나의 딸애 세대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조상고향이라는 개념이 아예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딸애가 연길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삭막한 도시생활이 과연 그들에게 전통고향의 의미가 존재할까? 이 세대들은 기껏해야 타도시 사람들이 연길 흉을 보면 화날 정도이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재한조선족들 앞에서 중국 흉을 보면 화내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중국 내 타성이거나 해외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들은 이젠 어디가 살기 편하면 그곳이 곧 ‘고향’이란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다.   고향을 버려야 잘 살 수 있다. 과거 고향을 버리는 사람이 출세였고 모두 농민에 비해 생활이 윤택했던 건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세월 도시진출이 어렵다 보니 고향을 버리고 싶어도 버리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요즘은 고향을 버리는 행위가 매우 쉽다. 쉽다 못해 식은 죽 먹기이다. 도시에 진출해 짠지 팔아도 살 수 있고 자전거수리해도 먹고 살 수 있고 하다못해 인력거를 끌어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 아무 일 해도 농사일만 덜 고달프고 수입이 더 좋을 수 있다. 도시에 진출해 창업하면 금상첨화이고 해외에 출국하면 더욱 ‘출세’이다. 재한조선족 70만 중에 농촌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자식을 공부시키고 중국에 집 사놓고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을 ‘소강’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한국바람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부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바람에 자녀공부문제 어떻고, 이혼문제가 어떻고 하면서 만약 한국이 아니었다면 조선족사회가 잘 살 것처럼 심각하게 떠들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만약 한국에 오지 않고 돈을 벌지 않았더라면 빈곤한 처지에서 자녀공부는 저절로 잘 될까? 돈이 없어도 부부가 여전히 이혼하지 않고 화목하게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을까?   농촌공동체는 사라져가고 있으나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개혁개방 전까지 농촌공동체마을이 조선족전통문화의 근거지였다. 이 근거지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새로운 경제시대에 어쩔 수 없는 추세였다. 농촌을 떠나 중국 내 도시생활하거나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 출국해 있거나 하는 조선족들에게 농촌에 돌아가라고 호소하는 행위는 소귀에 경 읽기이다. 최근 중국에서 도시호구보다 농촌호구를 더 선호하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는 토지를 확보하여 예측불허의 미래에 보증수표를 만들어 놓으려는 목적일 뿐 정작 지금 농촌에 가서 농사지으라면 지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무리 농촌을 중시하고 혜택을 베풀어도 조선족공동체마을 해체는 막을 수 없는 추세이다. 일각에서는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해체를 조선족사회 실종과 등식화하고 있는데 글쎄 이런 결론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 중국 내 도시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사회는 각종 협회와 동호회 및 이런저런 모임을 통해 조선족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게다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는 한국인이 그만큼 많이 살고 있는 것이 정비례 되어 함께 하나의 새로운 문화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기타나라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공동체들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나는 조선족이란 끈을 유지하게끔 만들고 있다. 나의 딸애가 대학 졸업하고 광주에서 취직하게 되어 아빠인 나는 은근히 한족남자를 신랑감으로 데려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걱정은 기우였다. 광주에도 조선족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연길총각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였다. 요 몇 년래 한국에 오는 조선족젊은이들 중 적지 않은 자가 우리말을 모른다. 안다 해도 매우 서툴다. 한족이나 다름없던 이들이 한국생활 수년을 거쳐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전통문화를 알아가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실례는 우리민족의 조상도 모르고 살아온 조선족이 다수였던 것이 한국생활 통해 조상을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어쩔 수 없어 한국에 오긴 하였으나 한국생활 수년을 거치고 나면 한국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부류는 중국에 있을 때는 90% 한족처럼 생활해 와서 무늬만 조선족일 뿐이었는데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점차 ‘조선족’으로 회복되어가고 있다. 위 사례들을 살펴보면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은 해체되어도 또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고 고국이란 끈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63    재한조선족은 노무일군이 아닌 이주민 댓글:  조회:5426  추천:17  2015-12-11
재한조선족은 노무일군이 아닌 이주민   재한조선족 노무일군의 형성과정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조선족 코리안드림의 붐이 일어났고 10년 동안 한국정부가 손 놓고 있었던 탓에 10만에 이르는 방대한 집단이 불법체류 신분으로 한국에서 머물면서 돈을 벌었다. 2002년부터 한국정부가 심각성을 느끼고 접수받기 시작하였고 2004년 고용허가제 실시, 2005년과 2006년 연속 두 차례 동포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4만여 명의 불법체류자를 구제하였다. 2007년 3월 4일 방문취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는 한국에 올 수 있는 입국루트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가짜 비자가 살판 치게 되어 빚지고 와서 금방 불법체류로 전락되었다. 재한조선족1세대들은 빚 갚으려고 휴무도 없이 죽기내기로 일하였다. 재한조선족 불법체류자를 다른 말로 보기 좋게 부르면 노무일군이다(물론 노무일군이란 합법적 신분을 뜻하지만). 한국정부는 조선족이 같은 핏줄이라는 인식의 작용에 의해 할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합법체류 방법이 곧 한국을 방문도 하고 한국에서 일해 돈을 벌라는 의미로 ‘방문취업비자(H-2)'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방문취업비자는 체류시간이 4년 10개월이다. 본래 5년인데 세계적으로 거주국에서 5년만 체류하면 귀화신청 할 수 있다는 룰이 있다. 한국정부는 이 법을 교묘하게 피하기 위해 3년 되면 외국인등록증을 반납하고 중국에 출국했다가 다시 재입국하면 1년 10개월 연장해 주었다. 방문취업비자는 체류시간을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제한하였다. 즉 중국조선족과 러시아 및 CIS지역 고려인 합쳐 30만3천이란 쿼터제를 실시하였다. 이런저런 이유에 의해 숫자가 줄어들면 추첨의 방식으로 30만3천을 채운다. 이렇게 체류시간도 제한하고 숫자도 제한 있으니 그들의 신분은 분명히 노무일군이다.   노무일군으로부터 이주민으로 과도 그런데 방문취업비자가 4년 10개월 되면 한국정부는 나 몰라라 한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출국하였다가 일정유예기간(6개월) 주고 재입국이란 제도를 실시하여 또 합법체류로 한국에서 거주하게끔 만들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에 입국하여 불법체류로 있다가 구제받았고 재입국 여러 차례 거쳐 한국에서 합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이 10여 만에 이르는데 이들은 한국생활 10년이 넘는다. 10년이 넘는 이들은 앞으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 없이 한국에 정착하려고 한다. 과연 이들을 노무일군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인가? 2008년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재외동포비자(F-4)는 현재 수혜범위가 확대되어 20만에 이르는 조선족이 혜택 받고 있다. 재외동포비자는 3년에 한 번씩 별 조건 없이 연장수속을 밟으면 계속 체류할 수 있다. 이외 영주권자, 귀화자, 결혼이민자, 유학생 등 합쳐 전체 재한조선족 수는 69만5026명(2015. 1. 1. 통계)이다. 법무부에서 2016년 1분기 기술교육추첨 7,500명 선발하기로 기획하였는데 접수자가 4,910명밖에 되지 않아 추첨할 의미가 없어 통째로 패스시켰다. 이는 한국에 더 입국할 조선족 수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현재 이미 체류하고 있는 70만에 육박하고 있는 수는 앞으로 수년간은 이 수치로 유지될 것으로 짐작된다. 70만에 이르는 재한조선족사회를 살펴보면 이제는 노무일군의 시대를 벗어나 정착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중국에서 직장이 있어도 그만두고 한국에 오는 자녀가 증가하고 있다. 또 한국정부의 정책이 좋아져 중도입국자녀가 4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자녀를 중국에 두고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하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동창모임 열면 중국에서 보다 한국에서 더 모인다는 사실은 벌써 수년 전부터의 일이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처녀총각이 결혼하면 혼례식을 한국에 와서 올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한국에 더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명절이면 한국에 있는 부모가 중국에 가던 상황이 반전되어 자녀들이 명절이면 한국에 온다. 재한조선족사회문화생활도 풍부해졌다. 축구, 배구, 배드민턴, 민속장기 등 동호회 혹은 협회가 활성화되어 있고 요즘 제기차기 동호회가 수십 곳이나 되어 하나의 단체로 통합하고 있다. 산악회도 활발해져 등산을 즐기는 문화가 한국인 못지않다. 낚시문화도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문화가 활성화 되고 있는 것은 임시 수년간 돈 벌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노무일군이 아니고 이주민으로 정착의 움직임이 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직도 재한조선족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한테 앞으로 거취를 물으면 중국에 간다고 대답하지만 정작 가라고 하면 가지 않는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에 남기를 바란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입국한지 2년 내지 3년 되는 젊은 조선족, 혹은 중년 조선족들은 5년 만기 되면 때려죽여도 한국에 남지 않고 고향에 돌아간다고 큰소리 빵빵 치다가도 정작 5년이 될 즈음이면 한국에 계속 남을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다. 6개월 재입국유예기간도 싫어 F-4비자를 취득하느라 분주하다.   재한조선족 다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 왜 절대다수 재한조선족은 고향에 돌아가려 하지 않을까? 일각에서 지적하고 있는 재한조선족이 중국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H-2만기 되어 돌아가지 않으면 불법체류가 되기 때문에 고향에 갈 것이라 했는데 이 지적은 오류이다. H-2만기 되면 재입국, 또 재입국 제도를 실시하여 불법체류를 없앤다. 특히 한국정부는 조선족한국입국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있는 추세인데 만기되어 돌아가지 않으면 불법체류가 되기에 부득불 귀국할 것이란 지적은 현실을 떠난 얘기이다. 그리고 창지투(長吉圖) 어쩌고, 한중FTA 어쩌고 재한조선족한테 기회라고 하는데 돌아가 그 혜택에 의해 자아개발하거나 좋은 일자리 찾아 안정된 생활 보낼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또 이 두 가지 환경이 마련되면 거기서 창업하여 사장님이 되려는, 사장님이 될 수 있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 지적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 재한조선족 다수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자녀공부뒷바라지 하고 가족에게 생활비 보내고 중국에 집 한 채 사놓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남은 돈이 있으면 한국에서 수천만원 전세 살면 괜찮은 편이다. 한국에서 노무로 번 돈으로 중국에서 창업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물론 소수자가 한국에서 번 돈을 갖고 중국에서 창업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 한편 창업은 돈만 있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머리가 잘 돌아야 하고 시세도 잘 볼 줄 알아야 하고 박력도 있어야 하고 인간관계처리도 잘해야 하고 등등의 소질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에 극소수자가 하는 일이다.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노랫말처럼 “창업은 아무나 하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다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 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단순하게 경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일자리가 보장된다고 해도 돌아가지 않는다. 왜? 일자리란 한 달 벌어서 2~3개월 살 수 있는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한국에선 가능하다. 일자리 외에도 생활환경이 좋아야 한다. 사회치안문제, 공공기관 서비스문제, 기후문제, 주변 인간들의 소질문제 등등의 환경이 안정된 생활에 미치는 영향요인들이다. 재한조선족 다수는 이젠 단순하게 돈을 더 벌려고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고자 남는 것이다. 재한조선족다수가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면 무시당하는 ‘하층영세민’으로 전락한다는 일각의 지적은 맞는 얘기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양반’이 될 수 있는가? 고향에 돌아가도 ‘상놈’이요, 한국에 남아도 ‘상놈’일 바엔 이미 적응이 되어 있는 한국에 체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2010년 5월 벌써 이란 글에서 그 이유를 여덟 가지로 짚었었다. 여기서 중복하지 않고 그 글에서 지적하지 못한 요소 하나를 추가로 말하려 한다. 인간의 몸에는 관성의 체계라는 것이 있다. 오른손으로 밥 먹고 글 쓰고 등등의 일상생활을 오른손으로 영위한다. 가령 오른손을 다쳐 왼손을 사용하게 되면 습관이 되지 않아 불편하다고 항의를 제출하고 반항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몸의 관성체계에 의해 우익, 좌익이란 어휘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기존의 체제를 답습하고 조금만 손을 보아 개량의 목적을 이루려는 집단을 우익이라 하고 기존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고 혁명을 일으키는 집단을 좌익이라 부른다. 아울러 우익은 보수요, 좌익은 진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조선족1세대들은 만주에 가서도 한반도문화를 오른손처럼 활용하다가 2세~3세 내려오면서 학교를 다니게 되고 중국문화 함량이 몸속에서 비중이 높아가게 되어 처음엔 어색하던 것(왼손)이 점차 오른손처럼 몸에 배이게 되어 오히려 오른손과 왼손이 바뀌어 적응하면서 살아왔다. 사과배처럼 조선반도문화도 있고 중국문화도 소유하고 있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한국인과 비록 같은 문화뿌리이지만 이중문화구조 때문에 갈등을 빚게 되었고 또 5년 넘어 10년 이상 살아오는 과정에 처음엔 낯설던 한국문화가 또 오른손처럼 자리잡아왔는데 또다시 중국에 가게 된다면 또다시 새로 적응해야 하는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몸의 관성체계가 파괴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이 재한조선족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주민으로 살아가려면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계속 정착하여 살아가려면 획기적인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재한조선족 다수가 노무일군을 벗어나 이주민생활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을 임시 거주하는, 잠시 스쳐지나가는 둥지쯤으로 여기고 있어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주민으로 살아가려면 세금납부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하지만 재한조선족사회 다수는 세금납부의식이 매우 박약하다. 세금뿐만 아니라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등 4대 보험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이다. 김00는 중국에 임시출국하면서 거소신고증(F-4)을 바치고 가겠다고 한다. 한국에 다시 올 생각이 없는가 물으니 발끈하며 “왜 안 오겠는가?” 화낸다. 다시 올 거면 왜 등록증을 반납하려고 하느냐?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7년간 낸 국민연금을 환급받으려고.” 한국국민연금법은 10년 혹은 120차례 납부하고 나이가 되면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조선족은 방문취업비자(H-2) 만기일이 되어 귀국하게 되면 돌려준다. 만약 H-2비자에서 F-4비자로 혹은 영주권으로 변경되면 처음부터 납부한 국민연금을 돌려주지 않고 누적계산 되고 나중에 120차례 차고 나이가 되면 혜택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조선족들의 책임 없는 의식이다. 즉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겠다면서 국민연금도 환급받으려 하고, 뜻인즉 좋은 일은 다 챙기고 책임과 의무는 전혀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주권 신청하려면 2천만 원의 재산도 있어야 하고 일정 수입도 보장되어야 하고, 소득세납부증명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법이 바뀌었다. 일부조선족들은 “돈 있으면 왜 한국 오겠는가?”면서 제쪽에서 한국정부에 불만 갖고 화낸다. 고객 중에 같은 조선족으로서 듣다못해 “아저씨 돈을 벌면 되고 정부에서 하란대로 하는 것이 순리이지. 무슨 불만이요. 정 싫으면 중국에 돌아가면 되지. 누가 한국에 오라고 했어요?”라고 면박 준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을 바라면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62    중국동포, 한국시민 아니지만 댓글:  조회:5403  추천:7  2015-06-06
중국동포, 한국시민 아니지만   지난 22일 저녁 19시 가리봉동에 위치한 진달래식당 웨딩홀에서 서울시가 후원하고 재한동포연합총회가 주최한 가 첫 개강을 맞이하였다. 필자는 영광스럽게 라는 주제로 개강 특강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타이틀이 맘에 걸렸다. 즉 중국동포는 대한민국 시민이 아닌데 왜 중국동포와 시민을 한데 묶어 타이틀을 정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네이버 선생의 해석에 따르면 시민은 민주 사회의 구성원으로 권력을 창출하는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공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시민이란 정치참여의 일원이어야 하며 쉽게 말하자면 투표권이 있는 도시거주자를 뜻한다. 중국동포는 70만 되는데 그 중 10만쯤 한국국적을 취득했거나 회복한 조선족출신들은 투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민이 맞다. 그 나머지 60만은 투표권이 없어 한국정치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중국동포는 국적취득자 제외하고 등록증에 한글이름도 아닌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고 30만3천 되는 H-2소지자들은 외국인등록증을 부여받고 있다. 정서상 시민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시민의 개념을 투표권 하나를 갖고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시민이란 그 도시에서 사는 사람을 일컬을 수도 있다. 즉 그 도시에 살아가려면 책임과 의무를 다 하면서 생활해야 한다. 세금납부는 물론이고 쓰레기처리와 횡단보도 지키기 및 공공장소에서 떠들지 않는 등 한국사회 공공질서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대한민국의 제반 법규도 잘 준수하고 대한민국국민에게 미안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이쯤하면 시민의 자격으로 생활한다는 의식을 갖고 한국사회에 융합되어 공존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공공질서도 잘 지키지 않고 입만 벌리면 한국과 한국 사람을 욕하고 등 행위로 살아간다면 시민의 자격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은 차치하고 무시와 기시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무시당하는 이유가 곧바로 낙후한 농경문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울과 같은 현대화 도시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 변변히 해보지 못한 다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직장생활하려니 적응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며 이로하여 한국인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몸은 현대화 도시에 살고 있지만 머리는 여전히 육칠십년대 중국농촌사람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도시시민으로 살아가는데 괴리가 큰 것이 사실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수 재한조선족은 서울과 같은 현대화 도시생활이 어쩌면 머슴이 비단옷을 빌려 입은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서 억지로 살아가고 있어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 다수는 현대화 도시시민이 되기엔 아직 먼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의식전환 노력이 없이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재한조선족사회는 희망이 없다. 너무 야박한 판단이라고 비판할 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말이 나온 김에 시민이란 용어의 유래를 알아보기로 하자. 시민이란 용어는 중국문화권에는 없었다. 19세기 일본이 중국과 조선보다 발 빠르게 서양을 따라 배우면서 많은 서양의 어휘를 한자어로 번역하였는데, 예하면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시민 등등이다. 일본인이 서양어휘를 한자어로 번역해낸 것이 중국과 조선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일본인이 서양의 어휘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리(物理)라는 어휘는 먼저 일본어 한자로 ‘궁리학(窮理學)’으로 번역되었는데 궁리는 일본어로 きゅぅり라 발음하는데 야채 오이도 きゅぅり로 발음되어 잘못하면 오이학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 다시 연구 끝에 물체의 운동원리라는 의미를 요약하여 물리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시민이란 용어가 서양의 산물임에 틀림없는데 그 유래를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希臘)는 민주화가 잘 되어 있었다. 물론 현시대의 서양의회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민주화가 활성화된 사회였다. 그런데 당시 민주화는 시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시민에는 외국인, 여자, 노예가 배제되어있었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시민이 된 것은 1920년 미국 대선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여자가 시민이 된 시간을 따져보면 기껏해야 100년의 역사도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에 노예라는 신분이 사라졌지만 외국인은 점차 더 늘어나는 추세인데 아직도 나라마다 외국인을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찬란했던 문화는 기원 324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함에 따라 서구는 신이 통치하는 1천년의 암흑의 세계에로 빠져든다. 그 시기 신의 노예만 있을 뿐 시민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유럽에서 시민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 계기였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국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졌으나 경제발전에 기여한 중산층 이상 부르조아들은 목소리를 낼 힘이 없었다. 이들이 혁명을 주도하여 시민역량을 강화시켰다. 이때부터 서구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서구는 시민사회가 민주화를 주도할 만큼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시민이란 개념이 없었고 대신 공민이란 어휘를 사용하였다. 공민이란 개념의 등장은 제국의 시작에서 비롯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함에 따라 천하의 모든 것은 공공의 것인데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 부른다. 따라서 모든 귀족세습제를 타파하고 관원대리제도를 실시하였고 나라의 것은 공가의 것,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공무원, 국가의 공공문서를 공문(公文), 나라에서 닦은 도로는 공로, 나라의 구성원인 백성은 공민 등등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공민이 아니라 황제의 신민이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시(市)’란 개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중국은 성(城)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하다는 사상이 뿌리 깊었다. 북경을 말하자면 가장 중심은 궁성(宮城), 궁성을 둘러싸는 황성(皇城), 황성 외곽이 바로 경성(京城)이다. 성 안에 사람들이 곡식을 먹어야 하고 야채도 먹어야 하며 과일도 먹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고귀한 성 안의 어르신들이 먼 시골에 가서 직접 구매해 올 수가 없어 시골 사람들이 성 가까이에 시를 펼쳐놓고 매매가 이뤄졌던 것이다. 후에 성 안의 인구가 부단히 증가함에 따라 성과 시는 하나가 되어 성시라 불렀다. 시의 탄생은 이렇게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도시를 성시라 부른다. 한국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차별을 도농차별이라 표현하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성향차별이라 말한다.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하다는 사상이 뿌리 깊기 때문에 중국역사에서는 시민이란 어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문화가 중국에 수입되고 중국도 민주혁명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현대화시기에 시민이란 어휘를 사용하긴 하지만 아직도 중국에서는 유렵처럼 한국처럼 시민문화가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북경사람들이 자신을 首都人라는 우월의식은 있으나 기타 지방 사람들과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유독 상해 사람을 굉장히 무시한다. 이유는 북경은 전통적인 城이기 때문에 고귀한데 반해 상해는 순수한 市이기 때문에 자기이익만 따지는 소시민의식이 팽배한 집단이란 것이다. 공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북경은 전통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군자의 세상이지만 상해는 사사로운 이익을 따지는 장사치 소인배 세상이라는 것이다. 상해사람도 무든 기타지역 사람들을 鄕下人이라고 깔보고 업신여기지만 유독 북경사람만은 무시하지 못하고 비교적 客氣한 태도로 대한다.    
61    재한조선족사회 완장바람 댓글:  조회:6688  추천:4  2015-02-25
재한조선족사회 완장바람   완장이란 신분이나 지위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팔에 두르는 표장(標章)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완장을 흔히 권력이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완장을 찬 사람들은 개 잡은 포수마냥 무소불위 식으로 으스댄다. 안내원은 특정장소에서 질서유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완장을 차는데 일단 완장을 차게 되면 그 장소에서는 갑의 횡포를 부리려고 든다.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넘어지게 생긴 허약한 녀석일지라도 반장 완장만 찼다 하면 백팔십도로 달라져서 으레 남들을 호령하는가 하면, 머리가 텅 비어 있는 자들이 완장을 차면 민폐가 심각해진다. 완장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곧바로 중국의 홍위병일 것이다. 홍위병은 붉은 정권의 수호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혁명을 파괴로 이해하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문물을 때려 부수는 등 황하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북경 사합원(四合院 : 장정간부들이 모여 살던 곳)의 어린 계집애들이 여성홍위병 조직을 결집하여 혁명 일선에 앞장서 설치면서 허리에 손을 잡고 입만 벌리면 “제기랄” 질러대더니 여자다운 맛을 다 잃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이상한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이 북경에서 출범한 여성홍위병 조직이 전국에 전파되어 황하대륙의 여성들이 매력을 상실한 이상한 여인으로 변해 벌렸다. 완장이란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게 되면 사회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재한조선족사회는 현재 각종 단체가 40여 개나 되니 완장이 넘쳐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이 가운데 5년 이상 꾸준하게 활동을 진행하고 탈이 없는 종합단체로는 조선족연합회, 한마음협회, 재한동포연합총회 등이고 전업단체로서 축구협회, 배구협회, 장기협회, 교사협회, 외국인자율방범대 정도이다. 나머지는 거의 모두가 최근 연간 생겨난 단체들이며 대다수는 별 활동도 없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회원들이 모여 먹고 노는 단체들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단체들이 이렇듯 많이 생겨난 원인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로서 단체 조직이 자유롭고 쉬우며 등록도 매우 간편하고 수월하다. 비영리 단체 세무서 등록은 땡전 한 푼 들지 않는다. 둘째 재한조선족사회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엘리트집단이 사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나서 아무 단체를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완장을 찰 수 있다. 완장을 찬다는 것은 책임감과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 책임감과 의무감은 주관적인 생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남들이 인정할리 만치 지식도 있어야 하고 도덕도 갖춰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룰을 지키고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일부 재한조선족사회 완장을 찬 사람들 가운데 사회 룰조차 모르고 인간집단의 대인관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설쳐대니 조선족 이미지를 까먹고 재한조선족사회에 먹 칠 하고 있다. 자기가 만든 조직의 범주에서 조용히 활동하는 것은 괜찮지만 소질이 형편없는 사람이 괜히 나서 크게 설쳐대면 민폐를 끼치게 되며 한 마디로 “조선족은 요지경”이란 평가받기가 일쑤이다. 단체가 많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일부 완장을 찬 사람들이 잘못 설쳐대는 것이 문제이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 상황은 선진국은 더 들먹일 필요가 없고 중국에 있는 연해지역이나 대도시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단체들에 비해도 형편없는 수준에 처해 있는 것이 재한조선족사회 현주소이다. 중국 연해지역이나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단체 완장을 찬 분들은 대학졸업생들이 많고 오너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엘리트 출신이 많다. 재한조선족사회 완장을 찬 사람치고 명문대는 고사하고 대학 문이 어디 어떻게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이니 지금의 현주소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계 4대성인 중 한 사람인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람마다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라”는 명언을 남겼다. 재한조선족사회 완장을 찬 사람들도 자신의 푼수를 알고 설쳐댔으면 하는 바람이다.  
60    조선족 동거녀 살인 왜? 댓글:  조회:6989  추천:13  2015-01-23
조선족 동거녀 살인 왜?   다사다난했던 2014년을 한 달 남짓 앞둔 11월 26일 수원 팔달산에서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살인자는 조선족 박춘봉이었다. 이 사건이 언론을 비롯해 세간의 주목을 크게 끈 것은 2년 전 같은 지역에서 같은 토막 살인이 있었고 같은 조선족이 범인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를 크게 떠들썩하게 만든 박춘봉 살인사건이 있은 한 달여 되는 12월 29일 저녁 9시 10분경 김포 통진읍의 한 다방 앞길에서 여자를 흉기로 2차례 찔러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범인은 조선족이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2015년 새해 벽두인 1월 3일 저녁 10시 40분경 경기도 부천 한 아파트에서 역시 조선족이 자신의 동거녀를 살해하였다. 위 세 살인사건의 공통점은 범인이 모두 조선족이라는 것, 피해자는 모두 가해자들의 동거녀들이라는 것이다. 왜 예전에 보기 드문 조선족 동거녀살인 사건이 최근 들어 부쩍 늘고 있을까? 필자는 코리안 드림 20여 년의 흐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았다.   계약동거시기엔 동거녀 살인사건이 없었다. 2007년 3월 4일 방문취업비자(H-2)가 실시되기 전, 그 후 한국어능력시험에 의해 무연고동포 한국입국을 허락하기 전에는 한 가구에 한 사람, 즉 남편 혹은 아내 일방이 한국에 와서 체류한 사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족이 한국에 떠날 때 “몇 년 동안 감옥에 간 셈 치고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눈 지긋이 감고 돈만 벌고 돌아오겠노라.”고 맹세한다. 그러나 한국은 감옥이 아니고 자유개방적인 나라이다. 또 대한민국은 스님들만 모여 사는 절간이 아니라 아주 세속적이고 인간의 욕구를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자유세계이다. 한국에 온 조선족들은 처음엔 결심대로 살다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몸속에 꿈틀거리는 욕망과 욕구가 그 비장했던 결심을 팽개치고 세속생활을 추구하게 만든다. ‘먼 곳의 물이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고향에 두고 온 남편이나 아내들이 타향살이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지 못하고 고독과 외로움을 말려주지 못한다. 더욱이 인간의 지극히 본능적인 생리상의 욕구를 해소하려면 가까운 데서 물을 구하여 불을 꺼야 한다. 재한조선족사회 서로 다른 외간 남녀끼리 동거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재한조선족사회 외간 남녀끼리 동거가 단순히 생리적인 욕구해소라고만 볼 수 없고 그 외에 경제문제가 깊숙이 개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색을 제공하고 남자는 반표(飯票)를 보장하는 삶이 수천 년 인류사회 패턴이었다. 재한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향 동창생 사이, 고향 선후배 남녀 사이 동거가 많았고 한 직장에서 만나 동거하거나 소개에 의한 동거도 있었고 한 울안 여러 쪽방에 살고 있는 ‘홀아비’와 ‘과부’가 동거하는 등 모든 동거 남녀들의 생활패턴이 하나 같이 비슷하였다. 남자가 집세 책임지고 생활비 부담하고 여자에게 생일 선물하고 간단한 용돈만 챙겨준다. 여자는 남자 집에 얹혀살면서 집 거두고 밥 짓고 빨래를 책임진다. 동거생활 보내다가 어느 일방의 아내나 남편이 한국에 오게 될 경우 서로 마찰이 없이 자연스레 헤어진다. 절대다수 동거 남녀들이 이 정도 조건이면 쌍방이 서로 오케이였다. 왜냐하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 이자 돈을 빚지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빨리 빚 갚아야 하고 한편으로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 송금해야 하고 자녀 공부뒷바라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번 돈을 맡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여자도 그것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서로 약속대로 지키면서 다툼이 없이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당시 재한조선족사회 외간남녀간의 동거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제한되어 있었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약속한 선을 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남남도 살 섞고 살아가노라면 정이 들기 마련이나 당시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리어 남자나 여자나 사랑타령이 개입될 틈이 아주 적었다. 사랑은 서로 상대를 소유하려고 들기 마련이고 이것은 지극히 인지상정이다. 당시엔 서로 정이 들 수 있었으나 사랑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소유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일방의 배우자가 한국에 오게 되면 쉽게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임시동거가 가희진작(假戲眞作)이 되어 서로 깊이 사랑하여 중국에 있는 배우자한테 연락도 끊고 사분(私奔)하다시피 한 경우도 있었으나 다수는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상대를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동거녀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랑동거는 소유가 목적인데 이뤄지지 않으면 상대를 해칠 수 있다. 중국어에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증오한다.”는 말이 있다. 남녀 간에 미움은 사랑이 전제한다. 사랑이 없는 미움이 없다. 또 사랑의 기본 속성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는데 소유하지 못한다면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기에 이른다. 좋아하는 여자와 혼인이 이뤄지지 못하면 혼사를 말리는 여자 부모를 가해한다든지 당사자인 여자에게 화풀이로 가해하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흔하게 발생하고 있다. 소유 때문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20여 년의 코리안 드림을 거쳐 이젠 계약동거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 한국에서 생활하는 비례가 급증하였고 가족이 모여 사는 경우가 많은 것도 계약동거가 사라진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요즘 재한조선족 여자들이 다수가 먹고 살만한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굳이 돈을 아끼려고 사랑이 전제하지 않는 계약동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홀로 사는 여자들은 이젠 정식으로 부부로 살 수 있는 남자를 원하고 있다. 돈 좀 아껴보려고 부평초 같은 떠도는 불안정적인 생활보다 상대에게 돈 좀 쓰면서 여러모로 헌신하더라도 이젠 안정적인 부부연을 맺어 가족생활을 보내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계약동거가 사라진 결정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남이 만나 혼인에 이르자면 서로에 대한 요해가 충분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도리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 알고 하는 혼인은 없다. 더욱이 상대를 만나 눈에 콩깍지가 끼면 상대에 대한 요해를 하고 말고 없이 금방 동거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 부류 사람들은 처음엔 공주가 백마 탄 왕자를 만난 것처럼 서로 좋아하다가 이런저런 문제가 드러나게 되면 또 금방 갈등을 빚게 된다. 박춘봉의 동거녀가 살해된 것은 그녀가 6개월 동거하는 과정에 박춘봉이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불법체류자라면 안정적인 일자리 찾기도 힘들고 따라서 보장된 수입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싫어지고 이를 계기로 기타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녀가 헤어질 것을 통보하였으나 박춘봉은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계속 살기를 원했고 여자는 기어코 헤어지려고 결심하자 내가 소유 못할 바엔 상대를 해치려는 반발 심리가 작동하여 여자를 가해한 것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탈북녀들이 조선족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보편적 김포 통진읍과 경기도 부천에서 발생한 조선족 동거녀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두 여자는 모두 탈북녀이고 범인 두 명의 진술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여자가 나를 무시하여 홧김에 흉기로 가해하였다.” 다수 탈북녀들은 조선족남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그녀들은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잊는 것처럼 중국에서 조선족남자들의 신세를 헌신짝처럼 여긴다. 이북에서 배고픈 고생을 죽도록 하다가 중국에 와서 조선족과 살면 최저한도로 배불리 먹고 살았다. 조선족남자와 아이도 낳고 살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남한에 가려한다. 본래 탈북녀들의 목적지가 중국이 아니고 중국은 남한으로 가는 건널목쯤으로 여기고 임시 배고픈 고생에서 벗어나고 나중에 때를 기다렸다가 남한에 간다. 이 과정에 아이도 낳고 또 한국에 올 때 남자의 경제적인 도움도 받는다. 중국에서 조선족 남자와 살던 탈북녀들 중 한국에 온 후 처음에는 그래도 중국에서 낳은 아이를 잊지 못하고 남자에게 신세진 ‘빚’을 잊지 못해 한국에 호적을 올리고 데려오기 위해 초청한다. 이 과정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 수개월 혹은 1년여 걸린다. 그런 와중에 탈북녀는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정착금을 받아 아파트도 해결하고 직장도 구한다. 이쯤 되면 남한의 넥타이부대 사내들이 집적거리는 자가 많아지고 중국에 있는 시골 남자는 너무 촌스러워 헤어지려는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필자는 한 탈북녀가 애 아빠가 남한에 온지 3일 만에 촌스런 조선족 남자를 중국에 돌려보내기 위해 경찰에 위장결혼이라 신고한 사례를 상담한 적이 있다. 굳이 조선족 남자를 중국에 돌려보내려는 악의 선택은 하지 않아도 남한에서 만나 살게 되면 탈북녀들은 자신의 우월감으로 조선족남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와 같은 탈북녀들의 행위에 조선족남자들은 중국에 있을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해주었고 또 한국에 올 때 돈까지 대주었건만 나를 무시할 수 있느냐면서 격분해하고 종당에 가서 홧김에 동거녀를 가해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되는 말로 표현하자면 탈북녀들이 중국에 있을 때는 형편없는 을의 위치에 있다가 한국에 오면 갑이 되고 중국남자는 중국에 있을 때는 갑이 되었다가 한국에 오면 형편없는 을의 위치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갑이 된 탈북녀들이 을이 된 조선족남자에게 갑질의 횡포로 무시하고 있다. 참고로 탈북녀들이 중국에 두고 온 자기 아이한테 생활비를 보내는 사례가 절반도, 아니 십 중 팔구는 아이한테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여론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30대 중반 조선족 남자 한 분이 찾아왔다. 탈북녀가 중국에서 사경을 헤맬 때 구해주었고 의지할 곳 없는 그녀와 부부(법적 등록이 안 됨)로 동거하였고 한국에 오게 되니 인민폐 3만 위안에 한화 580만원 대주었다. 탈북녀가 한국에 와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 남자보고 한국에 오라 하여 왔는데 오자마자 헤어지자면서 피해 다닌다는 것이다. 위 당사자인 조선족 남자의 심정이 어떠할까? 독자들이 상상으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59    개가 사나우면 술장사 망친다 댓글:  조회:5324  추천:2  2014-12-16
개가 사나우면 술장사 망친다 구맹주산(狗猛酒酸)   전국시대 송(宋)나라 사람 중에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는 술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고 손님들에게 친절하며 항상 양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보다 술이 잘 팔리지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마을 어른 양천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양천이 물었다. “자네 집에 개가 있는가?” “있습니다만” “그 개가 사나운가?” “네!” “그래서 술장사가 안 된다네.” “아니 개가 사납다고 술이 안 팔리다니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어린 자식을 시켜 호리병에 술을 받아 오라고 했는데 술집 개가 덤벼들어 그 아이를 물었소. 그리고 맛은 점점 시큼해지는 거요.” 한비자(韓非子)의 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나라를 위해 어진 신하(臣下)가 기용되지 못함을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즉, 아무리 옳은 정책을 군주께 아뢰어도 조정안에 사나운 간신배가 있으면 불가능함을 강조한 말이다. 여기서 간신배는 옳지 못한 실세를 의미한다. 요즘 전체 대한민국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다. 이른바 ‘땅콩 리턴’ 사건이다. 이번 사건은 재벌가에서 벌어진 못마땅한 일이라 국민들은 아마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싶다. 지난 12월 5일(금) 저녁 뉴욕발 인천행 대한항공 KE086 여객기가 게이트를 떠나 활주로로 향하고 있던 그 시각 VIP좌석에 앉은 한 40세 되는 여인에게 스튜어디스가 땅콩을 건넸는데 그 땅콩 때문에 세계 항공역사에 없는 지구촌을 웃기는, 아니 웃긴다는 표현보다 경악케 한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40세 되는 VIP여성은 다름 아닌 대한항공이 소속되어 있는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맏딸이자 대한항공 기내식을 관리하는 조현아 부사장이었다. 그녀는 승무원이 땅콩을 접시에 담아 손님에게 건네지 않고 봉치 채로 가져왔다고 한바탕 고함을 질렀다. 곁에 있던 다른 승무원이 저의 불찰이라 말하자 “넌 또 뭐야? 사무장을 불러 와.”고 또 크게 소리쳤다. 사무장한테 영문을 따지니 사무장이 긴장하여 대답이 어눌하자 그녀는 “이 XX야, 기장한테 비행기를 돌리라 하고 넌 내려.”라고 입에 담지 못할 상욕을 해대며 명령을 내렸다. 결국 비행기는 머리를 돌려 게이트로 돌아갔고 사무장이 내리고서야 다시 비행기가 뉴욕공항을 떠났다. 이 간단해 보이는 사건에 얽히고설킨 사연이 많고도 많다. 또 법과 관련된 문제제기가 만만치 않아 대한항공이 후폭풍을 거세게 맞고 있다.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언론은 한겨레였다, 사회적인 여론이 뜨거워지자 대한항공은 8일 저녁 늦은 시간에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사과문은 사과가 아니라 사단을 일으킨 조현아 부사장이 당연히 할 일을 했기에 아무 잘못이 없다고 두둔한 내용으로 가득 찼다. 그러니까 사과문이 조현아 부사장을 위해 변명하는 하나의 지극히 옳지 못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9일 하루 종일 대한민국이 떠들썩하게 여러 분야에서 대한항공을 공격하고 나섰다. 진중권 진보논객은 “여기가 북조선이냐?”고 발끈했고, 공지영 소설가는 “그 땅콩이 불쌍하다.”고 조현아 부사장의 행실을 꼬집었다. 국내언론들이 메인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CNN, 영국 BBC 등 유명 외신들도 한바탕 떠들었고 일본은 만화를 그려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비꼬았다. 어떤 외신은 심지어 “대한항공이 고려항공(북한 국영항공)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말레시아 에아아시아 항공 페르난데스 회장은 “우리 항공사는 땅콩을 봉지채로 승객에게 나눠주겠다.”는 말로 대한항공을 우회적으로 비꼬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사과문을 발표하지 않은 것보다 못했다. 옳지 못한 사과문은 오히려 국민들의 정서를 건드리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늘 그래왔듯이 사고는 총수일가가 치고 직원들의 입을 단속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건을 몰고 가려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 또 비행기를 돌린 것은 기장과 협의하고 내린 결정이었다느니 앞뒤가 맞지 않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다 여론의 물매를 맞은 9일 저녁 늦게 조현아 부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국제 IOC회의를 마치고 국내에 도착하자마자 인천공항 사무실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사과를 하고 동시에 조현아 씨의 대한항공 부사장 직무를 보직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매일 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문제는 조현아 부사장이 대한항공 기내식을 관리하는 부사장 직에서 물러났을 뿐 등기이사 자리와 호텔관리직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관심은 조현아 싸기 어떤 직에서 물러나고 어떤 직을 유지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사건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관심은 대통령도 할 수 없는 비행기를 함부로 회항시켰고 비행기 내 책임자인 사무장을 내리게 함으로써 250명 승객의 안전을 우습게 여긴데 대한 사과가 전혀 없다는데 있는 것이다. 요즘 조사에 의하면 이른바 ‘땅콩 사건’은 승무원이 매뉴얼에 따라 했기 때문에 잘못이 전혀 없고 조현아 부사장이 직권을 남용하여 생떼를 써 사단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과도 한 마디 없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는 것이다. 테러위협이나 갑자기 생긴 기상악화 등 승객의 안전위험성을 대비해 기장의 판단에 의해 비행기를 돌리는 사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비행기를 회항시킬 권리가 없다. 그래서 국토부가 이미 조사에 착수했고 참여연대는 조현아 부사장을 기장만이 갖는 권리를 월권하여 항공법과 항공안전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만약 위법행위로 판결나면 10년 징역도 가능하다고 한다. 국토부가 12일 조사에 응하는 출두를 하라고 통보하였으나 출두가 곤란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11일 오후 검찰이 대한항공 사무실을 압수수색을 실시하자 조현아 부사장이 12일 출두하겠다는 뜻을 검찰에 전했다. 매일 여론이 뜨겁게 들끓고 국민들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큰딸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리턴' 사건과 관련해 1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직접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조 회장은 "저의 여식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대한항공 회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국민께 진심으로 사과한다"면서 "너그러운 용서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이어 "조현아 전 부사장이 부사장은 물론 계열사 등기이사와 대표 등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국민들이 이번 사건에 분노하는 것은 재벌가의 고질적인 ‘갑의 횡포’ 때문이다. 조현아 부사장의 남동생인 조원태 부사장도 수년 전 70대 할머니를 밀쳐 넘어뜨려 고소당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갑의 횡포가 단지 대한항공의 총수 일가의 문제일까? 전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수 굴지의 기업문화가 직원들을 종을 부리듯 대하고 언어폭력은 기본이고 정신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총수 일가의 보편적인 횡포행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40년 내지 50년 전 정주영 회장시대 부하를 마음대로 발길질 하던 갑의 횡포가 요즘 조금 양식이 바뀌었을 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곧바로 양반과 상놈의 문화가 재벌가의 DNA로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조현아 부사장에 대한 형사적 책임추구가 결론이 어떻게 나든 대한항공은 그녀의 사납고 못마땅한 실세의 행실에 의해 대한항공뿐만 아니라 조현아 씨가 책임지고 추진 중이던 경복궁 부근 7성급 호텔 건설계획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큰 등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예측은 삼척동자도 빤히 알고 있는 사안이다. 요즘 재미한인사회에서 대한항공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후폭풍이 심각하다는 증거이다. 이번 사태는 기실 처음부터 잘 대체하였다면 이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줄 모르고 뻣뻣한 태도를 취하다가 여론의 물매를 맞아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요즘 들어 승무원은 폭언, 폭력을 당했다고 하고 조현아 씨는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여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려 한다는 지탄을 받고 있다. 대한항공의 잘못된 대응에 의해 사태는 갈수록 심산이다. 한비자의 개가 사나우면 술장사를 망친다는 ‘구맹주산’ 고사가 마치 조현아 씨의 사나운 행실이 개인 한공사가 아닌 대한민국 얼굴을 대표하는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사건을 두고 생겨난 것 같아 이 글을 정리해보았다.  
58    한국바람 너무 매도하지 말자 댓글:  조회:7937  추천:11  2014-12-07
한국바람 너무 매도하지 말자 재한조선족사회 현황과 전망 강의고   현실 떠난 허황한 구호들 6`7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연길아리랑방송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여성시대 심리상담 생방송 프로가 있었다. 방송에 출연한 심리상담자는 최선생이라 부르는 양반이었다. 청취자들이 전화 오면 해답해주고 조언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프로는 당시 처음으로 이와 같은 진행방식을 도입하여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청취자들이 자기 가족이 한국에 가 있다는 말과 자신도 한국에 갈 타산이란 얘기만 나오면 최선생이란 양반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한족들은 한국에 안 가도 당지에서 잘 살고 있는데 왜 조선족들은 한국에 가나? 당지에 남아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문화혁명 때 구호를 외치듯 소리높이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최선생이란 양반은 한국에 공무로 나들이 했던 분이고 자신은 한국에 가서 노무에 종사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여유가 있지만 절대다수 백성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한국행이 최선이란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소리만 치고 있는 모양새가 굉장히 아니꼽게 느껴졌다. 필자는 그 방송을 듣다가 ‘한국에 가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말리고 나선다면 당신이 그 집 아이 공부뒷바라지를 해줄 거냐?’는 생각이 떠올라 라디오를 꺼버렸다. 당시 최선생이란 심리상담자의 설득에 의해 한국행을 포기하고 당지에 남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정말 아라비안나이트(천방야담)와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족사회 분위기는 한국 때문에 중국조선족사회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정 파탄이 증가하고 자녀교육 문제가 발생한 핵심주범으로 한국을 꼽으며 한국이 ‘나쁜 나라’로 지목되는 분위기였다. 분명한 것은 한국정부에서 조선족 보고 한국에 오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행에 나선 것은 어디까지나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봇물처럼 한국행에 목숨까지 거는 상황에서 최선생이란 양반처럼 한국에 가지 말고 당지에서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주장은 진짜 호랑이한테 고기를 탐하지 말고 풀 뜯어먹고 살라는 권유와 같이 황당무계하다. 최선생이 방송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조선족의 한국행을 말릴 때 한국에 체류하고 있은 조선족이 10여 만밖에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70만에 육박하고 있다. 방송이 조선족의 한국행을 저지하는데 실패했고 메아리 없는 허무한 외침뿐이었다.   만약 한국바람이 없었더라면 조선족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20여 년의 코리안 드림에 의해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정파탄이 증가하고 자녀교육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바꿔놓고 생각한다면 만약 한국바람이 없이 농촌에 현재까지 묶여 살고 있다면 조선족생활수준이 어떤 형편일까? 소위 지각이 있는 양반들이란 분들이 흔히 한국바람 얘기만 나오면 이혼율을 들먹이는데 농촌이나 도시 밑바닥 조선족들이 한국행에 나서지 않고 가난 속에서 계속 헤맨다면 가정을 지킬 수 있었을까? 1990년도부터 연길에 가라오케와 나이트 바람이 불었다. 당시 유흥업소에 종사한 아가씨들은 농촌에서 온 처녀이거나 도시여성이라면 갓 결혼하였으나 경제사정이 너무 안 좋아 먹고 살기 위해 가난을 벗어나려고 천한 것을 알면서도 그 직업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결혼한 지가 오래지 않는 신혼신부가 유흥업소에 종사할까!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자기가 먹고살만하니깐 이와 같은 현장의 실제요해도 없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아가씨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 그녀들의 가정은 한국바람이 아니었다면 100% 깨졌을 것이다. 그나마 코리안 드림 덕분에 부부 일방이 먼저 한국행에 나서고 아이가 큰 다음 따라서 한국에 가서 합류하여 잘 살고 있는 부부도 있다는 것이다. 자녀교육문제도 마찬가지, 밑바닥 인생살이에서 헤매던 부모들이 한국바람이 아니고 째지게 가난하다면 자녀를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 있는 조선족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자녀교육이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경제시대에 한국바람 덕분에 자녀를 대학공부까지 마친 조선족이 수없이 많아졌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왜 못 보고 있을까? 경제시대에 가만히 농촌을 계속 지킨다 해서 조선족사회가 과연 행복했을까? 도시에서 구조조정에 의해 직장을 잃은 조선족들이 경제사정이 굉장히 어려운데 한국행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정이 저절로 지켜질 수 있었을까? 돈이 없는데 자녀교육은 부모가 곁에 있다고 해서 잘 되었을까? 흑룡강신문 연길 주재 00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필자는 동감을 표한다. “조선족은 한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런 일이며 마땅히 고마워해야 한다.” 몰론 부정적인 문제들을 무시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소질문제로 취업분야가 단순노무 위주 필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조선족사회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고향을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관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조선족이 고향을 떠나기 시작한 루트로서 우선 관내 진출이었다. 김치나 짠지 장사로부터 시작한 것이 부의 길을 창조하는 선택이었다. 그 후 1980년대 중 후반부터 러시아진출 바람이 일었고 1992년 중한수교를 계기로 한국기업 중국진출에 의해 취업길이 대폭 열렸고 한국관광객이 중국여행이 급증함에 따라 여행업종사자가 부쩍 늘었었다. 관내 진출이든 러시아진출이든 몸으로 때우는 품팔이 아니고 머리로 하는 일이 절대다수였기 때문에 그 당시 고향을 떠난 조선족들은 지능지수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여기도 저기도 가기 힘든 조선족들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때우면서 품팔이로 돈벌이 할 수 있는 루트는 오로지 한국행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재일조선족사회는 1980년 초반부터 유학생 주류로 형성되었던데 비해 재한조선족은 시골 농민 출신과 도시 밑바닥 생활하던 조선족들이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소질이 그 어느 사회에 비해 보편적으로 낮은 편이다. 재한조선족사회의 취업실태를 살펴보면 여성들은 음식점, 가사도우미, 간병인이 많고 남성들은 건설현장 일명 노가다 종사자가 가장 많고 제조회사에 근무하는 수가 많다. 요즘 3세들이 시청 구청 경찰공무원, 은행공무원, 연구기관, 학계, 대기업, 무역회사, 여행사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아직도 단순노무종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재한조선족 1세대들은 한국 올 때 보편적으로 10만 위안 정도 빚지고 왔기 때문에 한 달 두 번 휴무 직업을 선택하였고 그 두 날도 아까워 쉬지 않고 다른 직장에 파출을 뛰면서 정말 피땀으로 돈을 벌었다. 아무리 육신이 힘들어도 조선족사회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그 길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원망 없이 참고 견뎌 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요 몇 년래 재한조선족사회도 먹고 살만하니깐 한 달 4회 휴무 아니면 취직하지 않고 심지어 남편이 숙련공으로 돈을 잘 버는 아내들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정집에 출근하여 월급 100만원쯤 받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다. 일부 중국에서 교사했던 분들이 한국에서 교사로 채용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의 목소리가 있지만 필자는 한국에서 교사하려면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 및 소질 문제에 의해 시켜도 감당이 되지 않는 조선족이 절대다수라고 본다. 삼사십 대 결혼이민 조선족출신 여성들 중 일부가 한국에서 교사하는 사례가 꽤 되는데 그들은 한국에서 교대를 다녀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 교단에 서는 것이다.   문화차이와 소질문제로 직장생활이 어려워 문화차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자면 두 집단 사이 살아온 삶의 방식, 방법, 양식이 서로 다르다는 뜻인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간단명료하게 ‘활법(活法)’의 차이라고 표현한다. 조선족은 한반도 조상들의 문화도 소유하고 있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중국문화도 몸에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한국인과의 문화차이이다. 또 재한조선족은 다수가 농민출신이고 도시에서 왔다 해도 밑바닥 인생살이였기 때문에 서울과 같은 현대화 도시문명에 적응이 잘 될 수가 없다. 중국에서 비행기 타보지 못하고 한국에 온 수가 90% 이상 된다. 돈을 벌었으니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다녀오겠는데 비행기표 한 장 예약하려면 직원을 정말 짜증나게 한다. “중국 가는 비행기표 있나?” “언제 가시려고요?” “중국 어디로 가시는데요?” “편도를 요구합니까? 아니면 왕복입니까? 한 달 이내 아니면 6개월 이상짜리로 예약해 드릴까요?” 조선족한테 비행기표 한 장 팔아먹으려면 이렇듯 직원들이 수많은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좌석이 없다고 하면 서서 가는 표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한국 올 때 검은 배 타고 밀입국했다가 돈을 벌어 처음 비행기 타기 때문에 기차처럼 서서 가도 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종합 소질이 낮은데다가 한 때 중국에서 큰가마밥 먹던 의식이 몸에 배어 자본주의경제와 직장생리를 이해하지 못해 직장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한국 업주들이 조선족직원을 채용하면 가장 힘든 문제로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억양이 다른데다가 한국인은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말귀를 알아먹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눈치가 빠른 조선족은 빨리 적응하고 다수 조선족은 눈치조차 무뎌서 자꾸 직장을 바꿔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조선족은 다수가 성향이 직설적이어서 한국인직원들과 어울리는데 애 먹고 있다. 가령 한국음식점에서 한국아줌마들이 호박잎을 데쳐 쌈을 싸 먹으면 조선족아줌마들이 “한국 사람들은 잘 산다면서 별거 다 먹네, 우리 중국에선 호박잎을 돼지를 먹이지 사람이 먹는 법이 없다”고 쏘아댄다. 조선족아줌마의 말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상대와 불편해진다. 한국개그코너에 ‘불편한 진실’이란 프로가 있었듯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말하는 것은 트러블이 생기기 쉽다. 한국아줌마들이 조선족아줌마의 말을 듣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게 잘 살면서 왜 한국에 돈 벌려 왔나?”고 맞받아친다. 한국아줌마의 말도 사실이다. 앞뒤 말이 모두 진실이지만 이를 통해 서로 간에 앙금이 생기고 결국 힘든 쪽은 강 건너에서 굴러온 돌 신세인 조선족아줌마들이다. 또 조선족은 직장에서 가뜩이나 언어표현이 어눌한데다 중국은 전통 유교 국가이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쳐 예의 문화가 많이 깨져버려 언어를 비롯해 예모예절이 차해 흔히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문화에 적응 잘하려면 조선족밀집지역이 사라져야 필자가 아는 친구의 13세 되는 딸애가 중국 지방 교육국에서 조직한 방학 한국방문의 혜택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 친구의 집은 남구로역 근처였다. 딸애가 3일 지나서 서울에 가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아빠가 여기가 바로 서울이라고 하니 딸애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해불가의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다. 그 딸애의 상상 속의 서울은 가는 곳마다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고 굉장히 깨끗하고 굉장히 호화로운 현대화도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구로역 부근은 어떠한가? 고층 빌딩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50%가량 되는 조선족이 복장도 깔끔하지 못한데다 길거리에서 떠들어대고 가래침을 뱉고 술 마시면 길가에서 소리 질러대고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큰길을 중국처럼 맘대로 가로지르고 도처에 쓰레기들이 무단 방치되어 냄새가 진동하니 그 딸애가 상상하던 서울과는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차이가 컸던 것이다. 조선족밀집지역 일번지인 가리봉, 요즘 대한민국에서 조선족이 가장 북적거리는 대림동을 비롯해 중국음식점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섰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중국명칭으로 하면 복무원들이 음식그릇을 손님에게 던지는 식이고 서비스 질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음식 먹는 손님자체도 다수가 중국 사람들이며 먹고 난 식탁이 지저분하고 바닥도 담배꽁초를 비롯해 휴지조각들이 사처에 널려 어지럽기 말이 아닌 음식점들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쩍하면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은 음식점에서 자기네끼리 다투고 싸우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 속에 홀로 생활하는 조선족은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한다. 가리봉에 모임이 있어 간혹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생활에 물젖은 조선족이 남구로역 3번 출구에서 내리막길로 100미터 내려오면 가리봉3거리 횡단보도가 있는데 빨간불이어서 기다리면 맞은편에 마중 나온 친구가 “왜 빨리 건너오지 않고 뭐하냐?”고 소리친다. “빨간불인데 어떻게 건너느냐?”고 하면 “이 동네는 빨간불도 괜찮다. 그냥 무시하고 빨리 와라.”고 조른다. 이것이 조선족밀집지역 공공질서의 현주소이다. 대림역 7호선을 낀 대로 양측은 쓰레기가 지저분하기로 말이 아니다. 저녁마다 특히 주말마다 조선족 주정뱅이 너무 많아 택시 기사들은 이곳에서 손님 태우기를 매우 꺼려한다. 택시 안에서 금연인데 담배 피워 기사와 싸우는 사례는 흔한 일이고 심지어 택시 안에서 해바라기를 까고 바닥에 껍질을 버리는 조선족도 있다. 여러모로 볼 때 밀집지역 조선족은 앞으로 십년 이십년 더 살아도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릿고개를 넘어 소강수준(小康水準)에 이르러 이주민사회(재한조선족)가 타자세계(他者世界:한국)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우선 조건으로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재한조선족의 경제형편을 살펴보면 먹고 살만한 보릿고개를 넘어서 ‘소강’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코리안 드림에 나선 조선족이 중국에 집 한 채쯤은 거의 다 마련해놓았고 자녀공부뒷바라지, 가족 생활비를 대고 있었다. 조선족노무일군의 매년 송금액이 정부 재정수입을 초과한다는 얘기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있은 일이다. 문제는 한국 내에서 조선족들이 아직도 지하 혹은 반지하나 지상이라도 쪽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그 분들이 조금 더 쾌적한 방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여건이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체류문제가 확실히 온정 되지 못해 대한민국은 임시 스쳐지나가는 둥지이기 때문에 대충 엉덩이나 붙일 보금자리로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따라서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도 현대화 새것으로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건이 충분하나 아직도 중고를 사서 사용하는 수가 다수이다. 올해 여름 필자가 큰방 세 칸 1억2천만짜리 전세로 이사하니 주변사람들이 식구 둘이서 왜 그 큰집에 이사했는가? 못 마땅하다는 표정들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중국에, 그것도 살지도 않고 비워두면서 아무리 큰집을 사놓아도 아무 말들이 없는데 비해 한국에서 근사한 집에서 살면 이해불가라는 식이다. 뭘 말해주는가? 아직도 조선족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그냥 임시 돈벌이 하는 곳으로서 진정한 둥지의식이 없다는 증거이리라. 갓 입국한 젊은이들 전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닐 정도로 여유로워졌지만 현재 한국에 내로라하는 조선족기업가, 사업가가 없는 실정이다. 기껏해야 음식점운영으로 돈을 꽤 번 조선족의 수는 많을 수 있으나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큼 성장한 기업가나 사업가는 없는 실정이다. 이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취미생활이 풍부해져 이주민사회가 타자세계서 성공하는 두 번째 조건이 바로 문화적으로 적응이 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적응은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이주민집단의 문화생활이 풍부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타자세계 문화에 적응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먹고살만한 여유가 생기면 취미생활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기 때문에 각종 취미생활이 풍부해졌다. 가령 축구를 좋아하는 자는 축구단체, 배구를 즐기는 자는 배구협회, 민속장기를 좋아하는 자는 장기협회에 가입하고 등산, 낚시, 심지어 제기차기 동호회까지 생겨나 주말이면 각자가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가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동포축구협회, 동포배구협회, 동포장기협회 등세 가지 단체이다. 축구협회는 산하에 30개 축구단이 있고 해마다 리그에 참여하는 팀만 해도 14개나 된다. 배구는 한국 측 생활체육에 포함되어 각종 시합에 많이 참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민속장기는 올해로 5회째 큰 대회를 치렀는데 해마다 참석자가 120명에서 150명이다. 조선족장기수준이 너무 높아 한국 프로9단들을 가볍게 누르고 해마다 공식적인 시합에서 우승을 싹쓸이 하고 있다. 한국문화 적응은 주로 공공질서문화 지키기인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재한조선족은 공공질서의식이 굉장히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정치참여가 저조하다 정치참여가 활발해야 한다는 것이 이주민으로서 타자세계에서 성공조건의 세 번째 요소이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의 정치참여는 어떤 형편일까? 한국은 선거정치이다. 선거는 투표에 의해 이뤄진다. 재한조선족의 정치참여, 즉 투표정치가 저조하다. 현재 대선이나 총선 선거권이 있는 자를 유권자라 표현하는데 한국국적 취득자를 의미한다. 그 외 영주권자나 재외동포비자로서 3년 이상 주소변경(타시 타구) 없이 거주자는 지자체단체장 선거권이 있다. 현재 조선족출신 국적자는 대략 13만이고 영주권자가 7만, 재외동포비자 20만 정도이다. 국적자 가운데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갔다가 후에 한국에 와서 국적을 회복한 조선족 분들 가운데 대한민국을 진짜 사랑해서 국적을 회복한 경우가 많지 않고 수년 전까지만 해도 자녀들이 한국에 오기 힘드니까 초청자격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국적 회복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 분들 중에는 차남이 한국에 있다면 장남은 몇 해 전 밀입국 혹은 위명여권 사용경력 때문에 입국규제에 걸려 한국에 오지 못해 속 태우는 분들이 꽤 된다. 그리고 이 분들의 거주환경은 거의 다 지하 반지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언제 재한조선족문제에 관심 갖고 신나서 양복에 넥타이 챙겨 매고 투표장에 갈 겨를이 없다. 또 결혼이주민 조선족출신여성들은 다수가 한국 속에서 살고 있으며 재한조선족사회에 아예 관심이 없다. 이 부류도 투표에 관심이 별로 없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투표에 나서는 수가 극히 저조하다. 문제는 선거 때마다 조선족출신 유권자들의 표가 선거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다면서 정치권에서 조선족사회를 이용하고 있거나 일부 조선족들이 정치권을 이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의 정체성 재한조선족은 입국한 지가 오래지 않은 자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10여 년 살아도 한국을 할아버지 고향, 한국인을 같은 핏줄이란 의식이 아주 미약하며 한국과 한국인을 보는 입장이 다수가 중국과 중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아직도 한국에 오랫동안 살아도 중국에 대한 감정이 한국에 대한 감정보다 더 깊다는 것이다. 그 주요 이유가 아마 중국소수민족정책 덕분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 다수는 대국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김호웅 교수는 ‘사과배’ 논리로 풀이하였고 정판룡 교수는 ‘며느리론’을 주장하였다. 두 분 모두 훌륭한 분이고 또 모두 조선족정체에 맞는 이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한국 분들은 필자에게 조선족정체성에 대해 많이 질문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한다. 5년 전 연길에서 족저안마(足底按摩)방에 간 적이 있다. 큰 가게였는데 마담한테 조선족아가씨가 있는가? 물었더니 40여 명 아가씨 중에 조선족 둘 있긴 한데 일하고 있는 중이라 대답하였다. 그럼 한족아가씨도 좋다고 말했다. 필자는 한족아가씨 안마사 앞에서 한마디 입을 연 적이 없는데 10여 분 지나 “당신 조선족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네가 어떻게 아냐?” “행동거지를 보면 한족인지 조선족 손님인지 안다.” 그 아가씨의 말에 의하면 한족 손님은 보편적으로 윗옷과 바지를 벗어 빈 침대에 던져 놓거나 아무렇게 놓고 싶은 곳에 놓는데 비해 조선족 손님은 옷을 반드시 옷거리 찾아 걸어놓는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 행위만을 보더라도 어느 민족인지 자신은 쉽게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정체성이란 거창하게 풀이하자면 거창해지고 쉽게 풀이하면 쉬워진다. 필자는 한국인들 앞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정체성이라고 대답해준다.   재한조선족사회 전망 과거 재한조선족 1세대들은 거리에 나서거나 공공장소에 나타나면 촌스러운 티가 물씬 풍겨 입을 다물고 있어도 한 눈에 조선족이라고 짚어낼 수가 있었다. 현재 젊은이들은 한국젊은이들에 비해 외관상 차이가 없다. 외모만 보고 한국젊은이인지 조선족젊은이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어릴 때부터 안방에서 한국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성장하였고 가령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도시에 가서 자랐거나 일부는 한국회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 1세대들과 달리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외관상 세련되었다고 해서 머리까지 세련된 것은 아니다. 한국문화에 적응하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구해 근무하는 사례는 늘고 있지만 한국 주류사회 진출은 아직도 먼 이야기이다. 그리고 재한조선족이 70만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이는 굉장한 집단이다. 문제는 이 굉장한 집단을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이다. 70만의 집단을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되려면 도덕적으로 검증이 되어야 하고 학식도 갖춰야 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리더가 현재 없다는 것이다. 한 이주민사회 리더는 유학생출신, 언론인, 기업가, 종교계에서 배출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수교 직후 조선족출신유학생(석`박사)을 한국에 남을 수 있게 만든 시점이 겨우 2008년 1월부터이니 6년이란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6년 동안 무슨 큰 인재가 배출될 것인가? 다음 재한조선족을 상대로 하는 언론들은 보편적으로 학벌이 낮고 경제적으로 아침을 먹으면 점심 걱정을 해야 하는 경제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배출되려면 아직도 먼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재한조선족사회에 리더다운 리더가 나타나고 기업가다운, 사업가다운 훌륭한 분들이 배출되려면 아직도 삼사십 년의 세월이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한국생활에 정착하려면 의식전환이 이뤄져야 재한조선족 다수한테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냐 물으면 중국에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돌아가는 조선족은 극소수일 것이다. 3년만 벌고 간다. 5년 만기 되면 때려죽여도 한국에 있지 않고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던 조선족도 만기가 도래하면 어떻게 하면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을 수 있는가는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다. 2012년 4월 11일부터 실시한 국가공인 기술자격증을 취득하면 재외동포비자로 변경해준다는 정책이 발표되자 재한조선족사회는 천지개벽이 일어날 정도로 학원가에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2012년과 2013년 말 금속재창호 자격증시험에 도전한 조선족이 2만4천명이고 합격률이 50%미만이었으니 1만 명쯤 이 한 가지 항목으로만 재외동포비자를 발급받게 되었다. 그 외 요리, 미용, 제빵제과, 세탁 등 많은 항목에 도전하여 재외동포비자 자격을 얻은 수도 수만 명에 이른다. 재외동포비자변경에 힘쓰지 않는 조선족이라 해서 만기가 되면 고향에 돌아갈 것인가? 아니다. 한국정부는 재입국정책을 계속 실시하여 본인이 원한다면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다. 수년 전 필자는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조선족이란 주제로 연변여성 잡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때 돌아가지 않는 이유에 관련해 상세하게 밝혔기 때문에 여기서 중복하지 않겠다. 사람들은 흔히 재한조선족사회에 국회의원이 배출되면 마치 획기적으로 바뀔 것처럼 부풀어 있는데 필자는 국회의원이 5명 10명 나와도 재한조선족사회는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재한조선족사회가 바뀌려면 국회의원 배출보다 개개인의 의식전환이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우리를 무시하면 자꾸 한국 사람이 나쁘다고 나무라지 말고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고 무시당하지 않도록 자질제고에 힘써야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영원한 진리이리라. 개개인의 자질제고 동시에 한국에서 살아갈 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한조선족사회는 보험가입의식이 미약하다. 노후나 갑자기 병이 나는 것을 대비해 각종 보험가입에 준비하는 등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다수가 모임만 있으면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양꼬치집 가고 그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여가문화 즐길 거리를 개발하여 옛날 코스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문명한 삶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클 것이다. 또 재한조선족은 이제는 한국에 돈 벌러 왔다는 생각에만 빠져버리지 말고 한국인처럼 돈을 버는 동시에 나의 삶을 어떻게 하면 보다 문화적이고 질적으로 보내겠는가에 신경을 쓸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으면 정신적으로도 여유로울 줄 알아야 삶이 보람이 있을 것이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이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 최선의 길이리라. .  
57    중도입국은 중간낭패 댓글:  조회:5620  추천:0  2014-10-18
재한중국동포 자녀의 조기 적응을 위한 교육방안 동덕여대와 재한동포교사협회 공동 주최한 재한조선족 자녀교육 관련 세미나 발표문 학생교육은 학부모, 학교, 사회 등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삼위일체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가령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어느 한 가지가 부실해도 교육을 망칠 확률이 높다. 학생교육이란 이와 같이 엄밀한 구조를 요구하지만 현재 재한중국동포 자녀교육은 세 가지가 모두 결핍해 있으니 조기 적응하는데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소질문제 우선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은 절대다수가 농민 혹은 도시 밑바닥 생활환경에서 지내다가 코리안 드림에 의해 대한민국에 왔기 때문에 그들의 소질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비록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를 공부시킨다,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키는 민족 교육전통 정신은 확고하나 현대화 교육에 따른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중도 입국 자녀의 부모들이 한창 방황하기 쉬운 연령대 자녀가 한국에 와서 부모의 도움으로 조기 정착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들은 조리 있게 자녀 안착을 돕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니들 중국에 가든지 한국에 남든지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는 식의 닦달에 의거해 억지춘향 식으로 남게 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부모가 자녀를 한국에 데려왔는데 아이가 3일 지나 서울이 어디 있는가? 물었다. “여기가 서울이다”라는 대답에 아이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고 한다. 동포밀집지역이 고층건물도 별로 없는데다 더럽고, 어지럽고, 떠들고 하는 환경이 아이들이 꿈에 그리던 서울과는 십만팔천 리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부모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는 어설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많이 발달해 있다는 것을 많이 부각시켜주어 아이를 안착케 해야 한다. 이런 교육이 따라 가지 못해 아이 눈에 비친 어설픈 한국모습이 머리에서 맴돌아 안착하지 못해 공부는 더 말할 것 없이 떨어지고 있다.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소통문제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로서 소통을 들 수 있다. 조선족 학부모들은 자녀를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보내놓고 학부모끼리 소통이 이뤄져야 자녀교육에 도움이 되겠으나 그렇지 못해 아이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통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조선족 학부모들이 한국여성에 비해 지적 수준도 떨어지고, 사회를 인지하는 능력도 부족하고 언어수준도 부실하기 때문에 한국학부모들과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소통이 없는 상황이다. 간혹 같은 조선족학부모끼리 소통하고 있으나 이는 자녀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또 학부모끼리 소통도 문제이거니와 교사와의 소통도 문제가 있어 자녀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대안제시 : 조선족학부모들에게 소양교육과 소질제고 교육을 정기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재한동포교사협회가 꾸린 주말학교는 학생교육만 진행하지 말고 마땅히 학부모교육을 병행해야 중국동포 자녀 조기적응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신문사와 같은 언론기관의 도움으로 학부모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사회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다. 주거환경문제 코리안 드림 20여 년이 되어 재한조선족사회는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한 보릿고개를 넘어 조금 여유로울 뿐 쾌적한 주거환경을 마련하여 자녀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선족의 수가 아직도 극히 적은 숫자일 것이다. 중도입국 자녀의 학부모 중 적지 않는 수가 아직도 쪽방이나 원룸, 심지어 반지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마이너스 작용을 하고 있다. 자녀교육은 학교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정거주환경도 매우 중요하다. 쪽방이 탐탐한 분위기이고 햇빛 보지 못하는 반지하 방은 아이들이 흔히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아이를 한국에 데려다 공부시키려면 적어도 아이 공부방을 따로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온 집 식구가 한방에서 뒹굴면서 아이한테 공부 잘하라고 닦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 아니 다수 조선족은 아직도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중국에 돌아갈 것이냐는 방향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중이 종치듯 하루하루 그럭저럭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인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쾌적한 집에 이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심지어 아이는 데려왔으나 비좁은 방에서 TV를 비롯해 중고 가전제품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구차한 생활을 보내 자녀한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안제시 : 자녀를 한국에 데려온 재한조선족 부모들은 하루 빨리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중국에 돌아간다면 하루속히 돌아가 자리 잡든가, 아니면 한국에 남아 생활하고 싶다면 하루 빨리 쾌적한 주거환경을 마련하고 아이 조기적응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맞춤식 교육이 효과적 교육방식 한국에서 태어난 중국동포자녀의 경우 한국학교에 다니는 것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점차 성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을 수 있겠으나 조기정착이 문제로 대두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중도입국 중국동포 자녀들이다. 이들은 중국 문화 환경과 생활환경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한국 적응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학교가 따로 설립되어야 한다. 그 명칭은 조선족학교 혹은 동포학교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립 가능성 여부가 중요하다. 필자가 조선족 학교를 고집하려는 이유는 중도입국 자녀들이 한국학교에 입학하면 문화적인 갈등과 생활상 갈등을 겪는 외에 중국어를 배우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지 못해 안달 떠는 마당에 중국국적 아이가 한국에서 중국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을 것이다. 또 중국국적 아이가 중국역사를 배우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중국국적 조선족 아이가 한국에서 중국어와 중국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면 장차 중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로 거듭날 수 있다. 맞춤식 교육의 성공사례로서 화교학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화교들은 자녀가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민족의 문화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화교학교를 설립하여 대대로 교육을 진행하여 뿌리의식을 키우고 이중 언어 및 삼중 언어교육을 받아 우수한 인재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 대안제시 : 정부와 관련가관을 설득하여 주말어울림학교를 필두로 점차 확대되어 조선족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 불안정한 체류문제가 조기 적응에 있어서 걸림돌 재한중국동포 학부모들의 다수는 체류자격이 방문취업 비자(H-2)이다. 2012년부터 국가공인 기술자격증 취득자는 재외동포비자(F-4)로 변경해주어 대폭 증가하여 현재 조선족 재외동포비자 소지자가 2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 외 결혼이민자, 영주권자와 국적취득자 등등인데 이 또한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방문취업비자는 만기가 있어 재입국정책에 의해 일정기간 중국에 가 있어야 하는 유예기간이 있어 자녀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친다. 재외동포비자 다수는 불법취업에 종사하고 있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언제 단속에 걸려 벌금내야 할지, 두 차례 넘으면 강제추방 당한다는 불안감으로 살아가고 있는 학부모가 적지 않다. 국적자를 제외한 모든 비자 중에 과거 위명여권 사용 전례가 있는 학부모들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언제 강제퇴거조치를 받을지? 적어도 재입국 정책에 따른다 해도 중국에 가서 1년 혹은 6개월 머물러야 한다. 국적자 중에도 과거 신분과 현재신분이 일치하지 못하면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결론적으로 학부모들의 체류가 보장되지 않는 시점에서 자녀를 한국에 데려와 공부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안제시 : 한국정부는 자녀를 데려온 학부모에겐 재입국정책을 적용하지 말고 체류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함이 마땅할 것이다. 또 F-4소지자에게는 취업을 자유롭게 하는 정책이 시급히 필요한 실정이다. 부모가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이가 어찌 시름 놓고 공부할 수 있겠는가? 정부당국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왕따문화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단일민족, 단일혈통 의식이 강해 배타심리가 심각한 수준에 있다. 피부색이 다르거나 언어가 다르거나 심지어 억양이 달라도 왕따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성인사회 왕따 분위기가 학교에서 그대로 체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양부모가 모두 중국국적이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잘 나가는 아빠지만 한국어가 어눌하면 학부모 회의에 가지 않는다. 한국어가 능한 엄마가 가야 한다. 결혼이민자라면 엄마는 학부형 회의에 가지 않고 한국인 아빠가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양부모 중 누가 회의에 가든 문제는 중국에서 왔다는 것과 조선족이거나 조선족출신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알면 위축되고 주변 어린이들이 알게 되면 왕따 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안 학부모들이 중국조선족출신 신분을 속이지 말고 떳떳하게 우리 아이는 한국아이들이 갖지 못한 두 가지 언어우세를 이용하여 아이의 기를 살려 주어야 조기적응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결론 사람들은 흔히 부모가 한국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아이를 중도에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이들이 중도입국하면 교육을 망칠 수 있으며 망칠 확률이 매우 높아 데려오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중국에서 나고 자라 그 문화와 생활환경에서 교육 받고 그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또 중국에서는 그나마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주거환경도 쾌적하고 이미 교육환경도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방황이 적겠으나 한국에 중도입국하면 위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에 의해 자녀를 망치기 쉽다는 결론이다. 만약 부모들의 체류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되고 안정적인 체류가 이뤄지고, 언어가 어눌하다고 왕따 당하지 않는 환경, 부모들의 거주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중국어와 중국역사를 마음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려된 학교가 설립되고 그 수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자녀를 한국에 데려오는 것이 마땅하며 자녀에게 유익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의 환경이라면 아이를 오히려 중도입국이 중간낭패를 보게 할 확률이 매우 높아 중국에 두는 것이 한국에 데려오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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