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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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巫女와 祈雨祭 댓글:  조회:6620  추천:63  2008-06-12
巫女와 祈雨祭      무당(무속)이란 무(巫)자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주자가어(朱子家語)>>에 의하면 “무는 춤으로 신을 섬기는 바, 무란 공(工) 양 옆에 인(人)자를 붙인 것인데, 그 춤추는 모양에서 취한 것이다. 무는 신을 받들고 춤추는 따위가 모두 통창화기(通暢和氣)하여 신명에 이른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한국 유동식 교수가 “무(巫)는 위 가로가 하늘을, 아래 가로가 땅을 뜻하며 양 옆의 인(人)은 사람이 춤추는 모습이며 내리 줄은 가무강신을 통해 하늘의 신을 맞아 지상에 교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필자는 유동식 교수의 해석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무(巫)란 개념을 간단하게 이해하면 곧 귀신을 섬기는 일이다. 중국학자 강천(江灥)의 말을 들어보자.    고대의 관(官)은 단지 巫와 史일 뿐이다. 후에 학술의 분기가 천만갈래에 이르지만 그 발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결국 巫와 史로 다 귀결된다.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관이 史이며 이는 <<설문>>에 史를 해설하여 ‘記事者也’라고 한 것으로 방증된다. 그리고 귀신을 섬기는 관을 巫라고 한다. 이는 <<서경>>의 이훈(伊訓)을 보라. 옛사람은 제사를 중히 여기고 귀신을 받들었기 때문에 史와 巫의 두 직책이 동시에 같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올수록 합리적 지식이 증가하고 귀신의 일이 묘막(渺漠)하여 근거가 없고 또 사람의 일만큼 귀중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史가 성하고 巫가 쇠했으며 일체의 관직을 모두 史가 독점하게 되었다. 史로서 巫의 자리를 빼앗게 되었으니 祝史 · 卜史 등의 명칭은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巫는 부녀로서 충당하였다. ······周末에 이르면 巫의 도는 거의 종식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무(巫)의 도가 가장 성했던 시기는 은 나라였고 주나라 때부터 문(文)의 도가 완전히 자리매김 됨에 따라 무(巫)가 완전히 쇠락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한반도처럼 무당, 특히 여무가 근세말기까지는 고사하고 2천 년 전부터 일찍이 쇠락하고 말았다.  세계역사를 살펴봐도 무당, 특히 여무가 근세말기까지 발달하고 활발하게 또 왕성하게 활동한 사례는 한민족이 으뜸이다.  한반도에서 남격수(男覡數)보다 여무수가 많았던 이유에 대해 임동권 씨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를 하나의 직업으로 보면 남녀의 구분이 필요 없는 것이나 무직은 신과의 교섭을 갖는 것이요, 또 감수성이 예민해서 신빙이 쉬운 여성이 적합하였다. 따라서 고대의 무는 여성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또 “기우에 여무가 주역을 맡은 것은 신과 교섭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니 사제자의 기능에 속하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지적에 일정한 이치는 있겠으나 해석이 요해를 짚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당의 역할은 주로 가무강신이며, 즉 하늘에 계시는 신(천신은 남성성을 지닌 신)을 여무가 가무를 통해 지상의 인간과 교감시키기 때문에 천지조화, 음양조화, 남녀조화의 원칙에 의해 여무가 많았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가뭄은 음기가 약하고 양기가 성한 때문이라 인식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동남지역 어떤 소수민족들은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로 소녀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했다. 소녀들이 씨름으로 땀을 많이 내고 왕성한 음기를 발산 하면 하늘의 양기와 만나 비가 생긴다고 믿었다.   한반도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말기까지 조정에서 조직하여 치르는 기우제에 수백 명의 여무가 동원된 것이 곧바로 천지조화, 음양조화, 남녀조화의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김별아 씨는 그의 <<미실>>에서 고대한민족의 기우제 때 있었던 여무들의 굿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마르고 곡식이 타들어갈 때, 궁중에서는 엄숙한 천제의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민간의 처방을 병행하여 기우제를 치렀다. 무당들은 속옷을 벗고 치마만 걸쳐 입은 채 굿판에 섰다. 물기 하나 없는 바람이 함부로 그녀들의 통통한 허벅지와 가로퍼진 엉덩이를 매만졌다. 무녀들은 분노한 신령들과 교접하며 영신했다. 치마를 들추어 바람을 희롱하며 가랑이를 번쩍번쩍 들어 한바탕 음란한 춤을 추었다. 가뭄이야말로 양이 음을 이겨 눌러 음력이 부족해 빚어진 탓이었다. 그래서 무녀들이 지닌 음력의 발산을 통해 신령을 위로하고 천기를 다스리려 한 것이다.  
105    연변은 아직도 '문화혁명 중?' 댓글:  조회:8018  추천:71  2008-06-04
연변은 아직도 “문화혁명 중?” 1970~80년대 연변에 “연변은 중앙 직속이요, 마레고향이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이 유행어는 건국 후 1957년 반우파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1960년대 초 공산공식(共産共食)운동,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 1970년대 산아제한운동시기 다른 소수민족 대다수가 이 일련의 운동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남의 일로 대했던데 반해 조선족은 매 차례 운동 때마다 가장 혁명의 선두에 섰고, 그 결과는 자기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행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이를 민간에서는 ‘조선족은 째빨갛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럼 조선족은 왜 째빨간가? 필자는 이 현상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았다. 동북아시아의 문화역사중심은 황하중하류유역인 이른바 중원이었고, 조선반도는 중원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수천 년 동안 줄곧 중원문화를 수입해왔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조선반도는 중원문화에 대한 절대적 동경과 흠모와 존경과 숭배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이념적으로 오히려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이념화시킨 사례도 많다. 그 일례로 조선반도는 조선조 500년을 통해 삼강오륜을 비롯한 유교와 주자학(신유학)을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경직되게 이념화했다. 학계에서는 동북아시아를 유교문화권이라 칭하는데 필자는 중국, 일본, 조선의 유교를 아래와 같이 명명한다. 중국은 한조이래 유교가 주축이었으나 유불도가 엎치락뒤치락했고 삼교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유교가 사람들의 근육에까지만 침투되어 ‘근육유교’라 부르고 싶다. 일본은 ‘晝朱夜明’, 즉 낮에는 주자학을 배우고 밤에는 양명학을 공부하는 이중적이었고 유교를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유교가 기껏해야 피부에만 스쳐지나갔기 때문에 ‘피부유교’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조선은 조선조 500년 동안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듯 조정으로부터 민간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부 유교로 규범화시켰고 유교가 사람들의 뼈속까지 침투되었으므로 ‘뼈속유교’라 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근대화 이후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후 조선반도에는 두 가지 ‘중원문화’가 앞에 놓여 있었고, 이남에서는 미국을 중원문화로 받들고 숭배해왔으며, 이북에서는 마레주의를 숭배하고 실천해왔다. 필자는 이 지구상에서 남의 문화에 대해 가장 이념화가 심한 것이 조선반도라 본다. 이를테면 이 지구상에서 밤에 동서남북 어디에 눈길을 돌려도 십자가가 흔하게 보일 정도로 기독교열기가 가장 뜨거운 것이 조선의 남쪽땅이요, 아직까지 문을 걷어 닫고 자본주의문화와 ‘룰’을 거부하는 국가는 조선의 북쪽땅이다. 이런 결과는 결국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을 만큼 서로 쪼개져 있고 통일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참으로 비극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으로 풀이해보면 조선족은 1860년대부터 속칭 만주땅에 이주해 처음에는 땅을 개간하고 생계에만 몰두해오다가 토지소유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약속을 믿었고 그때부터 예로부터 중원에 매달려온 역사의 관성이 <<문학과 예술>>의 조일남 사장이 지적했듯이 ‘공산당의 영도 하에’를 바짝 쫓는 새로운 이념이 자리 잡게 되었고, 누가 ‘공산당의 영도 하에’ 더 충실하느냐는 경쟁이 생겨났고 따라서 서로 죽고 줄일 정도로 사상과 이념이 ‘째빨겨졌다’. 물론 조선족이 ‘째빨간’ 것이 나름대로 이와 폐가 있다. 중국공민의 일원으로 빨리 자리 잡게 된 것은 ‘이’요,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것은 ‘폐’다. 조선족은 문화혁명을 거치고 나서 서로 물고 뜯고 하는 바람에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이 전혀 단합이 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조선족의 ‘째빨간’ 사상이 조선족사회에 피해가 컸다는 것을 마땅히 반성하고 단합을 도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조선족사회 엘리트에 속하는 지식인들이 아직도 문화혁명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조선족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사상과 이념이 개방되지 못해 아직도 한 때 떠들썩하게 받았던 이념과 사상의 교육 틀에 맞춰 남이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는 소위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조선족사회가 아직도 문화혁명 중이라는 근거로서 아래와 같은 실례를 들어보자. 첫째 흑백구의 논리 우리민족이 세상에서 가장 흑백논리가 강하게 된 것은 조선조 500년에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붙인 데서 생겨났다고 필자는 본다. 누가 든 비유였던지 기억에 남지 않지만, 아무튼 <<추한 중국인>>의 저자 백양은 흑백구의 논리로서 중국인의 흑백논리를 지적했다. 즉 커다란 흑백구가 있는데 흑 측에서 공을 본 사람은 축구공은 검은 것이라 주장하고, 백 측에서 공을 본 사람은 축구공은 하얀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흑 백 양측에서 서로 자기주장을 하다 보니 둘 다 틀렸으면서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남을 이단이라 취급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상대편의 입장에서, 한국의 한자 어휘인 ‘易地思之’해야만 남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문화혁명 때 받았던 사상과 이념 교육 틀에 맞춰 타인을 대한다면 남의 문장에 대한 독해력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폐쇄된 언저리문화수준을 뛰어넘을 수가 없고 기껏해야 인신공격밖에 더 있겠는가! 둘째 푼수를 알고 살자.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 한마디로 더 유명해졌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인간은 앉을 자리 설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진정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마다 나름대로 제 잘난 멋에 살기 때문이다. 허나 집단을 놓고 말하면 푼수를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조선족은 한 때 제 노릇도 하기 힘든 중국이 마치 구세주인양 “전 세계 삼분의 이 인류를 해방하자.”는 등 거창한 교육을 받은 탓에 사유가 따라서 거창해졌고 자신의 푼수를 모를 정도로 거창하게 문제를 들먹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영전 선생을 모른다. 그저 그에 대해 말썽이 많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시시비비에 휘말릴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고 또 그를 모르고 있어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다. 다만 일부 그를 비평하는 문인들이 “남영전은 7,000만 겨레 앞에서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사이트에서 보고 한마디 하려고 한다. 우리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서 중국법을 지키며 착실하게 살아가면서 조선족공동체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정도이지, 일개 조선족이 가령 어떠한 일을 저질렀다 해도 어떻게 거창하게 7,000만 겨레를 들먹일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좀 자신들의 푼수나 알고 살자. 셋째 김문학의 현상에 대하여 내가 김문학에 대해 들은 것은 2006년 02월 <<연변여성>>잡지사 이선희 사장을 만나고 나서 처음이었다. 그때 나도 조선족사회폐단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7편의 문장을 그 잡지에 시리즈로 발표하게 되니 김문학의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 그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국인이 <<추한 미국인>>을, 일본인이 <<추한 일본인>>을, 중국인이 <<추한 중국인>>을 썼다 해서 국가와 민족의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만 작가 백양이 그의 <<추한 중국인>>에서 “중국유교문화를 ‘장독구더기’로 비유하고 중국인의 추한 면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지만 백양은 대륙에 와서 대환영을 받았고 중국인은 그의 작품을 통해 반성의 계기로 삼았다. 김문학의 <<이야기 삼국지>>인지 뭔지 나는 보지 못해 할 말이 없지만 최근에 또 ‘조선족대개조론’인지 뭔지 하면서 그를 들먹이고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누가 어떤 글을 썼던지 있으면 반성하고 고치고 없으면 참고하려는 태도와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임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 본다. 그리고 그러한 글에 대한 흑백 ‘평가’에 열을 올리느라 시간을 허비할 거면 차라리 <<삼국유사>>나 한 페이지라도 읽는 것이 더 생산적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김문학에 대해 얼마나 민감했으면 일부 조선족 지식인들이 나의 글을 읽고 김문학을 들먹이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해 비평의 발언을 하면 민족의 역적이란 말인가? 이는 순전히 문화혁명 때 흑백논리라 볼 수밖에 없다. 넷째 지와 식의 문제 조선족사회 일부지식인들이 나보다 결코 책을 적게 읽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들보다 책을 적게 읽었다고 인정한다. 지식이란 독서를 통해 얻어지고 또 사회생활을 통해 습득한다. 고로 지식은 ‘지’와 ‘식’으로 나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지’는 풍부할지 모르겠으나 ‘식’도 풍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지’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인데 반해 ‘식’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 우리는 주변에 공부를 못한 사람이 판단력과 결단력 및 언변이 좋고 논리가 정연하고 타인의 존중을 받는 사례를 많이 본다. 이것이 곧 ‘식’의 문제이다. 예로부터 ‘有知之士’란 말은 쓰지 않는데 반해 ‘有識之士’라 하고, “저 사람이 유식하다.”고 말하지 “저 사람이 유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보다 ‘식’이 더 중요함은 더 의논의 여지가 없다. 내가 조선족지식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던 발언도 그들의 ‘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부조선족문인들의 치명적인 폐단은 한때 받았던 이념과 사상의 교육 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비록 책을 많이 읽었다 해도 현대사회에 대한 ‘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認’만 있고 ‘知’가 따라가지 못하거나, ‘學’은 있어도 ‘問’이 결핍하기 때문에 타인의 글을 읽을 때 왜 그렇게 썼을까에 대한 독해력이 부족하고 아울러 엉뚱하게 풀이하고 매도한다. 그들은 타인을 나뭇잎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고 평가하지만 자신들이야말로 그런 폐단을 안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 학문적으로 ‘식’이 매우 결핍하여 남의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에 대한 독해력이 문제가 있어 자신이 모르면서 오히려 타인을 모른다고 함부로 꼬집으니 참으로 비극이다. 이를테면 내가 “우리선조들이 역사기재를 남기지 않아 민족역사를 연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발언에 대해 어떤 지식인은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을 거론하고 대조영 드라마제작에 조선족지식인들이 발해사자료제공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나를 남의 역사만 알고 우리민족역사를 모른다고 꼬집는 것은 천박한 발언이다. 나의 발언의 취지는 중국에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상서>>, <<춘추>> 같은 사서가 등장하고 기원전 한무제 때 사마천이 완벽한 사서를 지어냈고, 일본은 702년과 712년에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펴냈던데 비해 우리선조들은 기원 11세기에 이르러도 사서다운 사서가 없어 김부식이 송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배우고 연구하여 중국 사서를 모방하여 겨우 써낸 것이 <<삼국사기>>이며 1145년에 출판되었다. 그 후에도 현재까지 <<삼국사기>>를 뛰어넘는 사서가 등장하지 못했다. 1280년에 출판된 김일연의 <<삼국유사>>도 첫머리가 “魏書云”으로 시작했듯이 중국 사서를 떠나서는 우리민족역사연구가 이뤄질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포괄적인 역사맥락도 모르고 남의 글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태도라 나는 생각한다. ‘지’와 ‘식’, ‘인’과 ‘지’, ‘학’과 ‘문’의 문제는 물론 사상해방부터 앞서야 해결될 문제이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한족 지식인들은 한때 문혁교육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반해 일부조선족지식들은 아직도 그 틀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 전에 지적했던 봉건이란 용어에 대해 한족지식들은 되도록 봉건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데 비해 일부조선족지식인들은 아직도 봉건이란 용어를 반성하자는 나의 발언에 대해 마치 하늘땅이 뒤번져지는 듯 호들갑을 떨고 있다. 서양인이 제작한 <<금단의 도시, 자금성으로 가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봉건이란 말이 단 한번이라도 출현하지 않고 세계 어디를 보아도 과거 중국역사를 말함에 있어 봉건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 고국 한국도 마찬가지로 역사를 논함에 있어 봉건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봉건이란 용어가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상서>>에 등장하는데 명사로서의 의미보다 동사에 가깝다. 분봉제를 일컬을듯 봉하고 건설한다(封土建國)는 동사적의미로 나타난다. 서구에서 말하는 봉건은 중세기 농노제이며 그 성격은 장원영주제를 뜻한다. 우리 중국 진나라 때부터 통일중앙집권제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문제는 앞서 지적했던바와 같이 칼·맑스의 역사오단계설의 도입에 따라 중국에서 봉건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고, 거기다 두들겨 맞추고 교육시킨 결과 조선족마저 아직까지도 봉건이란 용어에 껌뻑 죽을 정도로 깊이 침투되고 뿌리박혔다. 여기서 1930년대 곽말약이 처음으로 칼·맑스의 역사오단계설에 근거하여 <<중국고대사회연구>>를 통해 중국역사시대획분의 시도를 했고, 呂振羽 측과 중국역사시대획분에 대한 논쟁과 그 과정을 생략하고 말하자면 결국 곽말약이 득세함에 따라 그의 학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논쟁을 하지 않기로 결론 냈다. 만약 봉건이란 용어가 청말까지 중국역사와 딱 맞고 똑 떨어진다면 굳이 논쟁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더 이상 논쟁을 금하고 막 밀어붙이기 식으로 결론지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현시대에서 봉건이란 용어의 남용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나는 일부조선족지식인들에 대해 충고할 자격이 없지만 ‘지’만 추구하지 말고 ‘식’을 넓히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울러 이념과 사상을 해방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폐쇄된 언저리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104    그네는 왜 여자만 뛸까? 댓글:  조회:6785  추천:58  2008-06-02
그네는 왜 여자만 뛸까?      그네는 고대 아세아지역에서 널리 전파된 오락놀이였으나 우리민족처럼 단오 날에 남자들의 씨름놀이와 함께 활기찬 문화행사로 자리매김 되어왔던 사례는 없다.  그네는 본래 여성들만의 오락놀이가 아니라 남자들도 뛰었다. 한반도 그네뛰기 풍속에 대해 <<송사(宋史)>>에는 “단오유추천(端午有鞦韆)”이라 하였고, 한반도 문헌에 최초로 보이기는 <<고려사>>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단오추천에 문무4품 이상이 모여 사흘 동안 하였다 하였고, <<최이전(崔怡傳)>>에는 천 수백 명이 모여 기악백희(伎樂百戱)를 하였는데 그네도 뛴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양반층에서는 그네뛰기가 천한 놀이로 간주하고 금지했으나 민간에서는 단오 날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그네를 즐겼으며, 그네는 여자들만의 놀이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네뛰기가 여성들의 전용놀이로 자리매김 된 데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비상의 욕망  인류는 동물보다 원초적인 본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동물을 닮으려고 애써왔다. 그 중에 인간이 새처럼 날고 싶어 하는 환상과 욕망이 강열했다. 새는 부권제시대가 확고해짐에 따라 남성신의 성격을 띄게 되었으나 본래는 여성신이었다. 즉 조신은 본래 여성신이었다.  조류의 특징은 날음이다. 인간이 새처럼 날고 싶어 하는 환상과 욕망을 실현하는 데는 같은 성격을 지닌 여성이 적격자다.  둘째 치맛바람 원리  조류의 날음은 바람과 연관되어 있다. 고대인들은 조류가 바람을 일으키고 또 조류가 날을 수 있는 것은 바람을 마스터한 때문이라 믿었다. 여성은 치마를 입는다. 치마는 바람을 일으킨다. 고대인들은 여성이 창공을 날을 수 있는 것은 치맛바람의 덕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민간에서는 그네뛰기를 구경하는 남자들이 여자들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하늘높이 날을 때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전설이 있다.  현대인들은 여성의 치맛바람을 많은 남성을 정복하는 일종 ‘부정행위’로 간주하지만, 본래 여성의 치맛바람은 새처럼 비상하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가 음양사상이 심화됨에 따라 여성의 치맛바람은 천신을 ‘유혹’하는 일종 무기로 간주되어왔다. 무당이 치마를 펄럭이며 굿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셋째 영신의식(迎神儀式)  단오 날에 여자들이 그네를 뛰는 것은 양신을 맞이하는 하나의 종교적 의식이다.  단오 날부터 양이 왕성해지는 바, 일조량이 많아져 곡식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런데 인간이 그 어떤 종교적 의례로서 양신을 맞이하지 않으면, 곧 양신은 노여워서 심술을 부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양신을 맞이하는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그네뛰기가 포함된다.  양신은 천신이자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 남성성을 지닌 양신을 맞이하려면 여성이 나서야 한다. 그런데 여성이 선 자리에서 치마를 펄럭이거나 가랑이를 번쩍번쩍 쳐드는 춤을 추는 등 굿으로만은 양신을 모시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여자가 직접 하늘에 올라가 양신을 모시고 지상에 내려오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 의식이 곧 여자들이 그네를 뛰는 것이다. 하늘공중에 방울을 달아매놓고 여자가 발로 차게끔 하는 것은 천신과 교접했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우리민족이 그네뛰기가 줄곧 흥행해왔던 것은 한복의 매력이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한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아울러 고운 한복을 입고 하늘공중을 나는 여인은 흡사 선녀와 같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그 어느 민족에 비해 신선사상이 강했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들의 그네뛰기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을 것이다.  단오 날에 여성들이 그네뛰기를 하는 외에 또 널뛰기도 한다. 그네뛰기는 밧줄을 이용하여 수십 미터 높이를 날을 수 있으나 널뛰기는 나무의 탄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십 여 미터를 초과하지 못한다. 널뛰기의 높이는 비록 그네뛰기 높이에 못 미치나 여성들이 공중에서 다양한 동작을 펼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네뛰기는 하늘공중에 매달아놓은 방울을 차는 것이 묘기이지만, 널뛰기는 가랑이를 가위처럼 벌렸다 모았다 한다든가, 두 다리를 앞뒤로 벌렸다 모았다 한다든가, 손에 훌라호프를 쥐고 두 다리를 넣었다 뺐다하는 등 그 동작이 매우 다채롭다.  널뛰기도 그네뛰기처럼 첫째는 비상의 실현이요, 둘째는 치맛바람의 원리이요, 셋째는 양신을 영접하기 위함이다.  
103    "왜 재입국정책이 없어요?" 댓글:  조회:6409  추천:78  2008-05-25
왜, 재입국정책이 없어요? “따르릉, 따르릉!” “재입국정책이 나왔다면서요.” “아닙니다.” “신문에도 나고 TV뉴스에도 보도했다던데요.” “그런 게 아니라 ······” 요즘 재한조선족관련신문사와 단체들은 이러한 내용의 문의전화가 빛발치고 상담원들은 그에 정확한 답변을 해주느라 기타 업무가 마비될 지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이다. 사건의 발단 계기는 이렇다. 한국법무부는 중국사천지역의 강진피해를 간접적으로 도우려고 재한중국인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오는 6월 15일까지 합법체류자가 출국할 겨우 재입국비자를 발급하는 수속비(3만원)를 면제하고, 불법체류자가 자진귀국 할 경우 벌금을 면제하고 입국규제를 없애고 초청이나 한국어능력시험을 거쳐 재입국할 수 있다는 ‘임시조치’를 내놓았다. 법무부의 상기 임시조치를 조선족들이 잘못이해하고 재입국정책이 나왔다고 헛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재입국정책을 바라던 불법체류자들은 사실여부를 확인하려고 관련단체에 부지런히 전화를 걸어오고 있다. 지난 3월 14일 모 교회단체의 주체로 장충동체육장에서 법무부에 중국동포에 대한 완화정책을 펼칠 것을 바라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 때도 역시 요즘처럼 불법체류자들이 그 행사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관련단체에 “재입국정책이 나왔다면서요.”라는 문의전화를 많이 했다. 상기 두 사례는 조선족들의 이해력부족으로 빚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법체류자들이 재입국정책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증거라 필자는 본다. 법무부는 불법체류자들이 그토록 바라고 있는 재입국정책을 왜 시행하지 않을까?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공개석상에서 “만약 조선족에게만 재입국정책을 시행하면 다른 외국인들이 불만이 있을 것이고 그들과 형평성을 맞추려면 앞으로 일정기간 재입국정책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을 결과적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는 조선족을 다른 외국인과 같이 취급하고 특별한 우대정책을 펴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실 노무현정부로부터 이명박 정부로 과도할 당시 수많은 문필가들이 기왕에 이회창 씨가 보스로 있던 한나라당이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이었던 것을 감안하여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시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인 정책을 시행할까봐 우려하여 <<이명박 정부에게 바란다.>>는 내용으로 된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고 우려했던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는 확실히 조선족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만약 노무현정부가 계속 집정한다면 적어도 2005년, 2006년 두 차례 동포자진귀국지원정책을 시행한 것과 같이 금년에 역시 제3차 프로그램을 꼭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동포들의 생각이고, 이명박 정부는 불법체류동포들에게 합법적으로 길을 열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강경수단인 단속을 통해 강제퇴거 수단으로 불법체류자를 줄이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차이나타운으로 불리우는 가리봉동 시장 일대를 보더라도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단속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매우 심해 그 일대 살고 있는 동포들은 물론이고 한국 상인들마저 장사에 지장이 있을까 한숨을 짓고 있다. 만약 합법적인 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단속을 가강한다면 누구나 찬성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고 단속에만 의존하는 방침은 이명박 정부가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재입국정책과 단속방침만 갖고 이명박 정부가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이라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으나 어느 나라 정부든지 혹은 어떤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이념과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조선족은 이명박 정부에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언제 가면 조선족이 고국에서 진정 ‘동포취급’을 받고 살게 되겠는지? 그 길이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102    생식숭배와 박(匏) 신앙 댓글:  조회:6511  추천:73  2008-05-18
생식숭배와 박(瓢)신앙      임동권 씨는 그의 저서 <<한국민속학논고>>포포편의 서두에서 “가을에 농촌을 여행하면 지붕위에 희고 둥근 박이 복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한국적인 정취를 한층 돋우거니와······”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러한 풍경은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마을에서도 볼 수 있다. 즉 한족(漢族)마을에서는 가끔씩 보이는 현상이지만 조선족마을에서는 가가호호 빠짐없이 보이는 풍경이다. 따라서 이러한 풍경이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을 구분하는 요소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박에 대한 숭배의식이 도대체 조선민족에게서 먼저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한족에게서 먼저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선 단언하기 어렵다(일설에 의하면 박 신앙은 동남아에서 먼저 생겨났고 후에 중국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 왜냐하면 중국천지창조신화에 박씨(朴氏) 부부가 천지를 개벽했다는 전설이 있고, 복희와 여와가 박에서 나왔다는 신화도 있고, 또 맹강녀(孟姜女)가 박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이러한 박에 대한 굵직한 신화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박에 대한 민속이 발달하지 않았다.  박에 대한 민속, 풍속이 가장 풍부하고 또 뿌리 깊은 것은 아마 세상에서 한민족이 으뜸일 것이다. 한민족은 박의 실용성을 초월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 실례를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농촌의 도로 세거리목이나 사거리 변에 판류가 산포되고 식도가 꽂혀 있으며 그 옆에 바가지를 엎어놓은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가정에서 발병이 있을 경우에 간단한 고사, 동토 잡이, 푸닥거리 또는 사망이 있을 적에 하는 짓이니 병역을 예방하고 악귀를 축출하려는 양귀법의 일종이다.  둘째 치질, 황달, 소아의 태독에는 바가지 파편을 불에 태워서 그 분말을 환부에 바르면 완치된다고 한다.  셋째 역병이 유행할 때에는 무녀나 가족이 바가지를 마룻바닥에 엎어놓고 소리 나게 문지르며 또는 바가지를 장간(長竿) 끝에 매어 세워두면 무병하다고 하며 <<동국세시기경도잡지>>의 상원조에 의하면 남녀 유아들은 겨울부터 박 삼편을 청, 홍, 황색으로 물들여 배용했다가 상원 전야 중에 남몰래 노변에 버리면 소액이 된다고 하였다.  넷째 민간에서 바가지의 파편이 아궁이에 들어가는 것을 극히 꺼려하고 또 식탁 위에 바가지를 엎어놓으면 가내 불화가 생긴다고 한다.  다섯째 장사(葬事)가 있을 때 출장할 관을 실내에서 외부로 운반해 나올 때 문턱 밑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관을 들고 맨 앞에 나오는 사람이 토족으로 밟아 깨어지도록 한다.  여섯째 혼사 때 의식에 앞서 납폐를 드릴 때 채단을 든 자의 앞에 바가지를 놓고 토족으로 깨어지도록 하며 또 신랑의 가교가 신부 집 문전에 도착하면 신랑 집 가족의 한 사람이 박이나 호박을 통째로 가져다 땅에 던져 깨트린다.  일곱째 전승민담에 입에 붙은 표주박이야기가 있다. 요약해서 적으면 옛날에 어른의 명을 받고 급수에 간 소년이 물을 어른에게 올리기 전에 제가 먼저 물을 마신 바, 표주박이 입에 딱 붙어버리고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덟째 고대소설 흥부전에 의하면 바가지 속에서 신기한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흥부네 바가지에는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지만 놀부네 박 속에서는 무당, 사류(蛇類), 오물이 속출하였다.  아홉째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난생으로 되어있으나 민담에 의하면 신라의 박혁거세는 박 속에서 탄생했다고 하며 그래서 성을 박의 음을 따서 박 씨라 했다 한다.  열째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동분서주할 때 함께 모의에 가담하려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한다는 결의를 맺을 시에 표주박으로 술을 권하고 받아 마시는 수작(酬酌)을 했다고 한다.  열한째 한민족은 타향살이 길에 나설 때 반드시 몸에 쪽박을 차고 다녔다.  열두째 조선족은 신혼 첫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가친척이 모인 앞에서 신랑이 부엌에서 온돌에 앉아 있는 신부를 향해 바가지를 던진다. 만약 바가지가 하늘을 향하면 남아를, 땅을 향하면 여아를 생산한다고 한다.  열셋째 조선족은 잔칫집에서 바가지를 물독에 엎어놓고 반주하면서 오락을 한다.  위 열세 가지 실례로부터 우리는 한민족이 세상에서 바가지에 대한 민속이 가장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왜 인간은 박을 숭배하게 되었을까?  <<생식숭배문화사상>>의 저자 조국화(趙國華) 선생은 중국역사에서 박에 대한 신화전설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박 혹은 과류의 인간탄생신화가 실제로는 여성의 자궁이 인간을 탄생시킨다는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 “여자가 생산 시에 양막이 파열되어 양수가 흐르고 태판이 벗겨지고 또 양수가 혈액과 혼합되어 흘러나온다. 자궁의 오물 특히 분만 시의 양수는 일단 분만 시에 신생아가 흡수하면 곧 질식하여 죽는다. 옛사람들은 양수와 혈액이 태아의 생존에 일종 위협이 된다고 착각했다. 이러한 원시적인 연상사유가 여성이 분만 시에 흐르는 양수와 혈액을 과장하여 홍수로 상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아의 무사강생은 곧 그들을 박 혹은 과류로 상징되는 자궁이 보호한 결과라 생각했다.”고 논증했다.  한민족의 박에 대한 숭배의식도 생식숭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101    아버지가 없는 어버이날(김정룡) 댓글:  조회:5301  추천:104  2008-05-11
아버지가 없는 어버이날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우리는 나라를 국가라고 부르는데 국가란 ‘國’과 ‘家’가 합쳐진 개념으로서 나라를 형성하는 기본세포가 가정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흔히 나라가 바르게 서려면 가정부터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가정을 매우 중시해왔다. 나라가 바르게 서려면 ‘왕’이 현명하게 바른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권위가 있어야 한다. 가정도 마찬가지로 바르게 서려면 가장인 아버지가 아버지다운 권위가 있어야 한다. 우리 동양 삼국에서는 아버지의 권위를 유교를 통해 수립시켰고 아버지는 가정에서 예수처럼 받들리었다. 필자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가정에서 절대적인 존재였고, 아버지의 말씀이면 모택동 어록처럼 받들었고, 어머님은 귀한 음식이 생기면 아버지에게만 대접시키고 기타 가족들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아마 우리민족의 절대다수 가정에서는 다 그러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던 시대에는 이혼율이 극히 낮았고, 자식 교양도 올바르게 되고 있었다. 필자는 아버지 권위를 ‘經’에 비유하고 싶고 ‘經’이란 실사 변에 뿌리 경자가 합쳐진 것으로서 ‘권위’, ‘원칙’, ‘원리’, ‘규칙’, ‘법칙’, ‘기본’, ‘기준’, ‘기둥’ 등등의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교적인 ‘經’으로 아버지 권위가 섰고 따라서 올바르던 가정문화가 서양의 물질문명과 민주화바람이 스나미처럼 동양을 휩쓸어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經’이 사라짐에 따라 아버지가 권위는커녕 아버지 존재마저 찾아보기 힘든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현재 대다수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중심이 아니고 아이가 중심이 되었고 아버지보다 엄마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아버지는 출근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승진해야 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막중한 의무에 시달리면서 집에 와서 편히 축구구경 하려고 해도 TV 채널을 드라마를 보려는 아내에게 혹은 만화를 보려는 아이에게 빼앗기고 허탈하게 한숨만 짓고 있고, 맛 나는 음식이 생기면 애들 몫이고, 간혹 영화구경이나 야외에 놀러가도 마누라와 애들의 의도에 따라야 하고 뭐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별로 없는 불쌍한 신세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재미나는 얘기를 해보자. 한국에서는 5월 5일을 어린이날,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정했다. 그런데 어린이날은 정부에서 정한 공휴일인데 반해 어버이날은 휴일이 아니다. ‘금고’를 쥐고 있는 여성들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에 소비하는 자금도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유명한 ‘아리랑 갈비탕’ 음식점 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에 비슷하게 문전성시이지만 매출을 비하면 어버이날이 어린이날보다 반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린이날에는 한우 등심, 한우 갈비 등 비싼 것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데 반해 어버이날에는 싼 돼지갈비나 갈비탕만 팔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두 날의 매출을 비교하면서 어버이날은 여성들이 형식적으로 대충 넘기려는 경향이 짙어 어버이날에 아버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만약 아버지가 완전히 사라져간다면 가정은 ‘經’이 없어지고 사회는 말세에 접어들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 한국은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5월의 가정의 달을 맞아 방송, 신문매체에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필자는 요즘 매일 KBS아침마당을 보는데 주제가 거의 다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대다수가 ‘사라진 혹은 사라져가고 있는 아버지를 찾으려는 강의와 토론’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있는 시대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이는 사회적으로 깊이 있게 숙고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100    부처님이 오신 날 성교를 금지한다? 댓글:  조회:6683  추천:64  2008-05-08
부처님이 오신 날 성교를 금지한다?      음력 4월 8일은 석가탄생일이다. 민간에서는 사월초파일을 부처님이 오신 날이라고 한다. 물론 이 날에 모든 절간에는 부처님을 뵈러 간 불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일부 기특하신 불도들은 그날은 물론 전날부터 불경(佛經)에도 없는 한 가지 ‘계율’을 철석같이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곧 사월초파일 부처님을 뵈러 가기 위해 전날부터 성교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교를 하면 불결하고 그래서 부처님이 노여움을 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불도들이 부처님이 성교를 불결행위로 여기신다고 하면서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부처님에게 비는 기자(祈子)신앙행위는 웃기는 일이 아닌가? 또 평소에 보살상을 모신 방에서 성교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기 이러한 ‘금기계율’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아무튼 불경에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 여기서 고대인들은 성교행위를 어떻게 성스럽게 보았고 보살의 본래 모습은 어떤 이미지였나에 대해 살펴보자.  당대(唐代) <<속현괴록(續玄怪彔)>>, 송대(宋代) <<태평광기(太平廣記)>> 등 여러 문헌에 <연주부인(延州婦人)>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옛적에 연주에 한 부녀가 있었다. 그녀는 살결이 희고 자태가 매우 고왔으며 스물네댓 되는 나이에 홀로 도시를 떠돌며 살았다. 어린 소년들이 그녀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그녀와 잠자리를 요구하면 그녀는 스스럼없이 받아주면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수년 후에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술잔치를 벌리고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뤘다. 그녀가 집(가족)이 없었으므로 길 왼편에 묻었다. 구정 즈음에 홀연히 한 오랑캐 스님이 서역(西域)에서 와 묘지를 보더니 방석을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예를 올리고 향을 피우면서 수일 동안 찬탄을 올리며 떠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의아해 스님에게 물었다. “이 여자는 음탕해서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았으며, 이 여자가 의지가지 할 데가 없는지라 여기에 묻었는데 왜 스님께서는 경이롭게 대하시는 겁니까?” 스님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 여자는 대단한 성인이올시다. 자비를 베풀어 세속지욕을 마다하지 않고 잠재웠으며, 이 여자의 쇄골이 보살처럼 순연(順緣)을 다 하였기에 성인이라 부를만하지요. 믿지 못하겠으면 열어서 검증해 보시지요.” 사람들이 그 즉시로 묘를 파헤쳐보니 과연 전신의 뼈가 쇠사슬 모양으로 얽혀 있었으므로 스님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경이롭게 여기어 제단(齎)을 설치하고 탑을 세웠다.    당나라 시기는 유교문명이 뿌리내렸고 따라서 정조가 매우 강구되었다. 당연히 연주부인처럼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은 여자는 방탕하고 음탕한 여인으로 취급되기 마련이었다. 허나 오랑캐 스님은 오히려 연주부인을 성인이라 치하하고 보살에 비견했다. 현대인의 인식으로 말할 때 이는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로 여길 수 있으나, 이것이 곧 불교의 본래 모습이었으며, 고대문명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편 관음보살은 본래 인도에서는 남성상이었으나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여성상으로 인식되어왔는데, 이는 음양조화를 추구하는 중국문화 본질에서 유래되었었다. 즉 보살은 여와나 서왕모와 같은 인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여와나 서왕모는 성교를 많이 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여중 여이며 여신이자 성녀였다. 비너스도 본래 모습은 여와나 서왕모와 같은 이미지였다. <<중국신화연구>> 저자 오천명의 지적에 따르면 “보살은 본래 많은 ‘아주(阿注:성상대)’가 있는 존재였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녀의 본질은 본래 성교를 많이 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여인상징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금욕적인 여인의 이미지로 변모되었다.
99    여자가 꿈에 오줌을 싸면? 댓글:  조회:7008  추천:74  2008-05-05
여자가 꿈에 오줌을 싸면?      하나님은 실수였는지 의도적이었는지 하여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생리구조를, 남자는 하나의 ‘쟁기’로 오줌배설과 생식을 하게 만들었고 여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오줌도 누고 성교도 하고 애도 낳게 만들었다.  이러한 생리구조 특징에 의해 사람들은 흔히 오줌과 생식을 연관시켜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를테면 남자나 여자나 오줌발이 세야 성교도 잘하고 생식력도 강하다는 것이다. 변강쇠는 오줌발이 세기로 아름드리나무가 꺾어지고 옥녀는 오줌을 누면 땅이 파여 큰 움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실생활에서 이루지 못하는 일들을 꿈에서 이루는 현상이 많고, 따라서 우리민족은 분뇨와 연관되는 꿈을 길서의 꿈(吉瑞之夢)이라 해몽한다. 꿈에 분뇨가 옷에 묻어도 대길, 분뇨통을 지고 집에 들어와도 대길, 분뇨를 싸도 대길이라고 한다. 인동권 씨는 “분뇨에 관한 것은 복록, 부귀, 재부에 관계된다고 믿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분뇨몽의 실제적 의미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멋대로 풀이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분뇨몽은 실제로는 생식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의 민속에 나타난 여러 방뇨몽을 살펴보자.  <<삼국유사>>태종춘추공편에 보희와 문희 자매의 방뇨몽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그 이튿날 아침에 동생과 꿈 이야기를 하매, 문희가 듣고 가로되 내가 이 꿈을 사겠다 하였다. 언니가 “무엇으로 사려하느냐?” 가로되 “비단치마를 팔면 되겠오?”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하니 언니가 “어제 밤 꿈을 너에게 준다.” 하였다. 동생은 비단치마로 갚았다. ······ 문희는 춘추공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고 진덕왕이 돌아가자 영미 5년 갑인년에 춘추공이 즉위하였다. ······태자 법인과 인문, 문왕, 노단, 지경, 개원,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서 나타났다.    김춘추는 체격이 엄청 큰 거인이었다. 이러한 거인과 맞을 상대는 생식력이 강한 여인이어야 한다. 문희는 비록 거녀로 등장하지 않지만 언니 보희의 방뇨몽을 사서 ‘음력(陰力)’이 강해졌다.  이와 같은 유형의 방뇨담이 <<고려사>>에도 실려 있다.  보육의 둘째 딸 진의는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아름답기로 이름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언니가 꿈에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천하에 가득 찼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언니는 동생 진의를 보고 꿈 이야기를 했다. 진의는 그 꿈이 길몽이라는 것을 알고 비단치마를 주고 꿈을 팔기를 청했더니 언니는 승낙하였다. 꿈을 산 진의는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었다.  당시 당숙종(唐肅宗)은 아직 잠저에 있을 때에 천하 산천을 유람코자 송도에 이르러 보육의 집에서 기숙하게 되었다. 숙종은 보육의 두 딸의 미모에 반하여 옷 떨어진 곳을 꿰매 달라고 청하였다. ······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진의는 숙종과 인연을 맺고 임신하게 되었다. ······진의를 후에 정화왕후라 불렀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경종과 사별하고 사제에서 과거하는 헌정왕후는 어느 날 조령에 올라가 방뇨 하여 국중이 물바다가 되어 은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이때에 헌정왕후는 안종과 몰래 정을 통해 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아이는 8대인 현종이었다.  위 방뇨몽담은 여자들의 생식운이 왕후가 되었거나, 아이를 많이 낳거나, 낳은 아이가 왕이 되는 등 대운(大運)으로 나타났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중국이나 일본에는 우리민족의 방뇨몽담처럼 짜임새나 내용면에서 멋들어진 방뇨몽담이 없다.      
98    여자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댓글:  조회:5285  추천:55  2008-04-28
여자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인류가 부권제사회에 진입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는 주동이고 여자는 수동이요, 남자는 압박자이고 여자는 피압박자이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천함이요 ······ 등 이원론으로 흘러왔다. 그런데 동양과 서양은 이러한 이원론을 성립시킨 종교적, 철학적 근거에 분명히 차이가 있다.  먼저 서양의 종교적 근거를 살펴보자.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먼저 흙으로 아담이란 남자를 빚어 만들어 놓고, 그가 심심해 하니까 그를 잠들게 하고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이브라는 여자를 만들어 짝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하나님의 <창세기>설화가 서양에서 선남후녀(先男後女)의 관념을 성립시킨 강력한 근거로 되어왔다.  우선 어학적으로 보면 영어에 중국어 女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 영어로 여자를 WOMAN이라 하는데 이는 사람이자 남자를 뜻하는 MAN 앞에 WO를 덧붙여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서 아리스토델레스의 말을 들어보자.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태이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성을 자연 상태의 결함으로밖에 간주할 수 없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1장 7~9절에 다음과 대목이 있다.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고, 이에 반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서워서라도 그 머리 위에 그들을 초월하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항상 베일을 덮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니라.    현재까지도 천주교에서는 여신도들이 성당에서 베일을 쓰고 있다.  <<구약성경>>에 이브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무화과를 뱀의 유혹에 의해 따먹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을 먹게 함으로써 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양에서는 이 이야기를 2천 동안 물고 늘어져 여자들을 압박해왔다. 즉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 원흉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음문은 죄를 창조하는 지옥의 문이므로 교회에서 설교를 받고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양다리를 꼭 오므려 음문을 가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월경이 불경하므로 월경 중의 여성은 교회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또한 여자들을 마녀로 둔갑시켜 처벌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 여성사는 동양에 비해 훨씬 잔혹하고 처절했다. 서양의 여성해방은 겨우 1920년대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함에 따라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음 동양여성사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여자를 범죄의 원흉리라든가, 여자의 음문은 지옥의 문이라든가, 여자를 악마(혹은 마녀)로 취급해온 사례는 없었다.  그렇지만 동양에서도 여자를 천시하고 천대해왔으며, 남존여비사상을 음양이라는 철학적 근거에 의해 성립시켰다. 이에 관해서 <<중국의 남자와 여자>>의 저자 역중천은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우선 남자와 여자의 생리적, 심리적 특성에 근거하여 양의 성질은 굳세고 음의 성질은 부드러우며, 양의 특징은 동적이고 음의 특징은 정적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남성은 거칠고 열정적이니 이는 강(剛)이라고 할 수 있고 여성은 온화하니 이는 유(柔)라고 할 수 있으며, 남성은 싸우기를 좋아하니 동적이라 할 수 있고 여성은 내향적이니 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은 강하고 동적이며 음은 유하고 정적이다. 이를 일러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에는 상도(常道)가 있으니 강과 유가 판명된다.”고 하였다.  다음 음양의 범주를 확대하여 모든 영역에 이를 널리 적용시켰다. 예를 들어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며, 해는 양이고 달은 음이라는 것이다. 하늘은 햇빛을 비롯하여 비와 이슬 등을 내려주니 이는 남자가 정액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땅은 동식물 등 만물을 낳으니 이는 여자가 분만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또 햇빛은 강열하므로 양에 속하고 달빛은 부드러우므로 음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다음 철학적인 범주를 윤리학적인 범주로 전환시켰다. 예를 들어 철학적인 범주에서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므로 ‘천존지비(天尊地卑)’ 라고 했다. 천지의 관계도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리하여 하늘과 마찬가지로 양과 강에 속하며 동적인 남자는 존귀하고, 땅과 마찬가지로 음과 유에 속하며 정적인 여자는 비천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존여비’의 논리이다. 따라서 강하고 동적인 자는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지만 유하고 정적인 자는 다만 집안에서 빨래나 하고 밥이나 지을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남자는 바깥일을 주도하고 여자는 안의 일을 관장한다(男主外, 女主內).’는 말도 생겼다. 이렇게 하여 비천한 자는 고귀한 자의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고, 유순한 자는 당연히 강건한 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인류의 큰 변화 중에 여성해방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남권중심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또 남자와 여자의 포괄적인 평등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국가나 민족은 없다. 어쩌면 남자와 여자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일지도 모른다.
97    강강술래는 섹스의 축제였다. 댓글:  조회:6148  추천:65  2008-04-23
32. 강강술래는 섹스의 축제였다.      한국인은 대재다난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되어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속학자인 임동권(任東權)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강강술래를 억지춘향으로 ‘强羌水越來’라고 한문으로 적고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고 어쩌고저쩌고 풀이하는 것은 견강부회의 표현이므로 이는 강강술래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그러므로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문장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놀이라 한다. 임동권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 <<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었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96    정책은 좋았으나 혼란도 많았다.(김정룡) 댓글:  조회:5650  추천:85  2008-04-20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8. 정책은 좋았으나 혼란도 많았다.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제2차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이 남긴 ‘아쉬움과 바램’ 이제 며칠 후이면 동포사회를 크게 들끓게 만들었던 법무부의 제2차 불법체류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이 곧 막을 내리게 된다. 필자는 중국동포타운센터에서 동포들의 자진귀국에 관한 상담을 맡으면서 이번 정부정책이 획기적으로 좋은 점도 많지만 동시에 또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과거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등 불법입국자들에게 자진출국을 할 경우 재입국이 되게끔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한국정부가 동포들에게 베푼 큰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허나 한국정부가 이렇듯 좋은 정책을 내놓으면서 사전에 주도면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대충 큰 틀만 잡아놓고는 세부적인 면을 홀시한 탓으로 동포들이 혼란스러워 우왕좌왕하고 불이익을 크게 당하고 심지어 동포들이 한국정부에 대해 실망하는 결과를 낳아 몇 가지 아쉬움과 바램을 남기게 되었다. 첫째 프로그램 성격이 애매모호하다 법무부는 이번 프로그램에 포함되는 대상을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등 불법입국자라고 하였다. 이번 프로그램은 불법체류동포를 위한 특별사면정책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이해각도에 따라 불법입국한 자 중 포함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어 많은 혼란이 조성되었다. 예를 들어 불법입국이란 개념은 본인의 여권에 정상적인 비자를 받아 입국한자를 제외하고 모두 불법입국에 속한다. 이를테면 호적세탁을 거쳐 허위친척초청으로 불법입국한자들도 구제대상에 포함되어야 마땅하지만 재입국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장결혼도 불법입국에 속하는데 법무부는 역시 재입국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고집한다. 이리하여 일부 허위친척초청과 위장결혼으로 입국한 자들이 자진귀국을 하려고 경찰에 자수하고 검찰로부터 기소유예를 받아 자진출국을 하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 경찰 검찰 법원 등 관계기관에서는 동포의 자진귀국을 도와주려고 나서지만 오히려 법무부가 발목을 붙잡는 현상도 볼 수 있다. 둘째 여권위변조동포들 상황을 잘 몰랐다 여권위변조자는 경찰조사를 받아야만 재입국이 가능하다. 그런데 조사를 받으려면 입국 시의 위조여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런저런 원인으로 인하여 입국 시의 여권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이 대략 삼분의 일이나 된다. 그 이유는 여권위변조자는 100% 브로커를 통해 출국수속을 밟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권사항에 관해 잘 모르거나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브로커가 나타나 여권을 몰수해 버리거나 혹은 부주의로 분실했거나 또는 과거에 본인의 이름으로 여행증을 발급받을 때 영사관에서 몰수해버린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경찰조사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동포들이 매우 많다. 이럴 경우 법무부의 관계부문에 문의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그럼 집으로 갈 수 없지요.”라는 한마디뿐이다. 결국 입국 시의 여권을 소지하지 않고 있는 동포들은 이번 프로그램에서 제외된 셈이다. 셋째 정부관계부처간 이해 및 협조체제가 미흡했다. 한 예로 위장결혼자가 5월초에 자수하여 경찰조사를 마쳤는데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검찰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해두고 있다. 이리하여 호적정정신청을 제출할 수가 없어 당사자는 애간장만 태우고 있다. 그리고 제 발로 경찰서에 찾아가 조사받은 여권위변조자 동포에게 300만원이란 거액의 벌금을 내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초 법무부는 불법체류동포들이 자수하면 그 어떤 불이익이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법무부의 정책이 그 산하기관인 법원과 검찰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넷째 동일한 사건이 지역에 따라 처리방식이 달라 혼돈을 야기했다 본센터에서 위장결혼자를 경상도지역과 전라도지역에 각각 수십 명씩 자수하여 경찰조사를 받게 하였는데, 경상도지역에서는 전부 검찰에서 불기소유예처분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은데 반해 전라도지역에서는 법원에까지 넘겨져 100~300만원의 범칙금을 내게끔 판결을 내린 사례가 허다하다. 왜 똑 같은 사건인데도 지역에 따라 이렇듯 엄청나게 처리결과가 다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결론은 하나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곧 법무부의 일관된 정책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다섯째 정책실시기간이 너무 짧다 이번 정책은 그 포함된 대상이 광범위하고 수속절차가 복잡한데 반해 실시기간이 너무 짧은 것이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같은 경우에 포함된 대상이 단순하기 때문에 프로그램 실시기간이 짧아도 자진출국 수가 법무부가 예기했던 목적에 도달하였으나 올해는 마땅히 정책실시기간을 늘려 더 많은 동포들이 자진귀국 할 수 있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주어야 한다. 실제로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위장결혼자들은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가 숨어 지내고 있어 자진귀국프로그램이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가 8월에 이르러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들이 집에 가려고 할 때는 이미 시간이 그들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위장결혼자에 대한 적극적인 구제정책이 필요하다 본센터에서 여지껏 160여 명의 위장결혼자를 접수하여 수배대상은 경찰에 협조를 구하여 수배를 풀어주었고 호적정리가 안 된 자는 호적정리를 마치게끔 도와주었으며 그 중 100여 명이 이미 출국확인서를 받아갖고 귀국하였다. 출국확인서만 발급받으면 재입국이 된다는 뜻이며 그들은 확실히 구제대상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명백한 사례가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위장결혼자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바라건대 위장결혼자도 확실하게 구제대상이 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규명하기를 바란다. 이상 이번 법무부 정책에 대해 동포들의 평가는 ‘정책자체는 좋으나 정부가 동포들에 대해 성의가 없다.’는 것이 대체로 지배적이다.  
95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6005  추천:103  2008-04-18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역사는 발전하고 시대는 전진한다(歷史在發展, 時代在前進.)라는 말을 쌔빠지게 해왔다. 우리는 한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가슴이 아닌 머리로 앵무새처럼 하던 말들을 유치하게 느끼고 멈추는 것과 같이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도 멈추는 것이 좋을 듯싶다. 결론을 말하자면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화할 뿐이다. 이것이 나의 소견이다. 우리는 역사에 대해 논의하려면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 는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淸末 유명한 사상가 江천의 <<독자치언(讀者巵言)>> 중의 아래와 같은 대목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고대의 官은 단지 巫와 史일 뿐이었다.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관이 史이며 이는 <<說文>>에 史를 해설하여 “記事者也”라고 한 것으로 방증된다. 그리고 귀신을 섬기는 관을 巫라고 한다. ······관은 또 吏라고도 부르는데, 吏라는 글자는 史에서 나온 것이다. 관이 있으면 반드시 관장하는 일(事)이 있게 되는데, 이 事라는 글자도 또한 史에서 나온 것이다.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란 지나간 일들이다. 즉 선조들이 겪었던 ‘값어치’가 있는 지나간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구전으로 전해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나간 일들이 다 역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세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건만이 역사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김정룡이 외간 여자와 간통하다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들켜 맞아죽는 일이 일어난다면 재한조선족신문에서 보도하고 이것을 조선족 관련 사이트나 카페들에서 시끌벌쩍하게 떠들지는 몰라도 역사로 남을 가치는 없다. 만약 클린톤이 나와 똑 같은 일을 저질러 사망한다면 당연히 역사로 남는다.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 김정룡과 클린톤은 신분적 차이가 하늘과 땅과도 같기 때문이다. 후세사람들도 이 때문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헌데 역사란 것은 김정룡과 클린톤을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지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불변지식과 가변지식이다. 가령 사각형의 내합을 북경에서 재이면 355이고, 서울에서 재이면 365이고, 동경에서 재이면 370이고, 뉴욕에서 재여야만 360이라는 법이 없다. 만천하 어디 가도 사각형의 내합이 360인데 우리는 이런 지식을 불변지식이라 한다. 이에 비해 역사라는 것은 어제 영웅이 오늘의 개똥이 되고 오늘의 개똥이 내일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역사란 가변성이 너무 많아 필자는 역사지식을 가변지식이라 부르고 싶다.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역사임에는 틀림없지만 같은 일도 어떤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주관적인 견해로 기록하고 평론을 다는가에 따라 일(事)이 달라지고, 또 후세사람들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일(事)을 보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 지게 되고 시비가 생기고 심지어 피비린 싸움까지 일어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란 수학공식처럼 천편일률적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사관이 천차만별이어서 재래시장만큼이나 아니 훨씬 더 복잡하고 시끌 벌쩍 하게 말썽이 많다. 말썽 많은 여러 가지 사관을 아래와 같이 귀납해서 풀이할 수 있다. 첫째 正史와 外史(野史)의 문제 중국에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二十五史>를 정사, <<산해경>>을 비롯한 많은 서들을 외사로 취급하고, 한국에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정사, 김일연의 <<삼국유사>>를 외사로 취급해왔고, 일본에서는 <<日本書紀>>를 정사, <<古事記>>를 외사로 보아왔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 바 정사란 왕조중심의 역사를 의미한다. 한 민족 혹은 국가가 왕조중심을 정사로 취급하는 것은 그 민족 혹은 국가가 자신들의 왕조역사를 빌어 타민족 혹은 타 국가에게 ‘힘’을 과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개념은 왕의 세습제 역사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신화로 조상을 ‘지어 낸다’. 예하면 중국에서 공자시대에는 조상을 요, 순으로 보았는데, 전국시대에 오제를, 한조에 이르러 삼황을 조상으로 지어냈다. 조선반도의 단군신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민족 혹은 한 국가로 말하면 왕조역사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인은 다문화시대에서 반드시 왕조역사를 중심으로 하던 것을 재야역사 즉 여태까지 취급해왔던 이른바 외사를 중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회전시켜야 함이 옳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인류역사는 대지의 역사이고, 대지위의 인류역사는 왕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 아니라 인류의 삶을 닮고 있는 역사야말로 진정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 선조들이 정사로 높이 받들어온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한 번만 읽어보고 팽개쳐 버렸다. 거꾸로 외사로 취급해온 김일연의 <<삼국유사>>를 한문과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적어도 열 번 정도는 읽어보았다. 내가 <<삼국유사>>를 중시하게 된 이유는 본서가 우리민족의 민속, 풍속, 경제, 신화, 민간이야기 등등이 잘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으며 역사문화이야기를 써내는데 훌륭한 참고서로 활용하게 되었다. 결론을 말하면 여태까지 취급해왔던 정사가 외사로, 외사가 정사로 회전되어야 하며 정치판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여당이 야당으로, 야당이 여당으로 되는 것처럼 바꿔야 만이, 그리고 왕조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절대다수를 차지해온 백성들의 삶이 단긴 역사를 알아야 만이 진정한 인류역사를 알 수가 있다. 여태까지 각국에서 왕조역사를 중시해 온 데는 제도라는 괴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제도는 정치라는 물건과 짝지어 따라 다닌다. 둘째 제도사에 관한 문제 인류가 산에서 대지에 내려오면서 군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집단마을을 형성한 것을 우리는 자연취락이라 한다. 세월이 흘러 도시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자연취락에도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게 되고 정부(조정)의 주도로 이뤄진 인위취락도 생겨난다. 상앙변법 10조목의 앞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인민을 什 · 伍의 단위로 조직하여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 당시 진나라 조정은 촌락까지 통제하려고 했으나 간섭이 자연취락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자 마을사람끼리 서로 감독하고 감시하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즉 마을의 한 사람, 한 가정이 죄를 지면 인근 什·伍의 가정이 전부 함께 처벌을 받게 하는 제도였다. 이웃이란 낱말과 중국인이 말하는 臨居가 곧 여기서 유래되었다. 연대 책임을 지는 什·伍의 가정은 굳은 일, 좋은 일 모두 동고동락하면서 한 집안 식구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먼 사촌이 이웃보다 못하다는 우리말 속담도 여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伍長이란 군대말단직급이 있는데 역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2) 姦事를 관에 고발하지 않고 숨기는 자는 엄형에 처하고 간사를 상고하는 자는 적의 목을 벤 것과 동등한 상을 준다. 서주시기까지 첫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리는 ‘殺首子’란 풍속이 있었다. 뜻인즉 여자가 시집와서 낳은 첫 아이는 누구 아이인지를 알 수가 없고, ‘종자’가 불분명한 아이한테 재산을 물려줄 수 없다는 데서 첫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이는 당시 그만큼 정조관념이 희박하고 처녀들이 시집가기 전에 성생활이 활발했다는 방증이다. 하기야 자연취락에서 밭을 갈고 베를 짜고 밥 먹고 잠자는 외에 별로 할 일이 없었고 정치적으로 간섭이 덜 했던 자연취락 사람들이 할 일이란 무엇이었겠는가? 성생활밖에! 당시 정부가 민간의 성생활까지 간섭했던 이유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진나라는 기타 6국보다 힘이 약해다. 그래서 힘을 키우려고 서북쪽의 무인 황무지를 개간하여 군량도 해결하고 인민의 머리수를 늘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인위취락을 건설해야 한다. 인위취락은 자연취락과 달리 방방곡곡에서 사람이 모여들기 때문에 강력한 질서의 통제가 필요했고, 만약 자연취락의 사람들처럼 남녀가 성생활에 자유롭다면 기강이 약해지고 또한 남녀불륜이란 사회갈등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에 姦事를 엄하게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3) 남자가 2인 이상 있는 집은 분가시킨다. 만약 분가를 안 시키면 부세를 두 배로 징수한다. 이는 물론 세금징수를 늘리려는 목적이 있겠으나 도가와 유가적인 자연취락의 대가족문화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부국강병을 도모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내린 조치였고 제도였다. 우리는 상앙변법을 기존의 자연취락을 중심으로 하던 분권제시대로부터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어 집권시대에로 이행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실제로 상앙의 덕분에 매우 촌스럽고 힘이 없었던 진나라가 부국강병 하여 최후 천하 대통일을 이루었다. 하지만 상앙을 비롯한 법가들의 운명은 비참했고, 그 후 중국역사는 도가와 유가적인 삶과 제도적인 틀에 얽매어 사는 갈등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제도를 만들어 인간을 속박하는 정치를 한사코 반대했다. 공자도 仁으로 세상을 다스리자고 호소했다. 도가와 유가의 삶은 인간이 가슴으로 사는 것인데 반해 법가의 제도적 삶은 머리로 살아야한다. 이것을 필자는 ‘마음의 문명’과 ‘두뇌의 문명’으로 명명하고 따라서 넓은 범위에서 말하자면 중국문명은 ‘마음의 문명’이라면 유럽문명은 ‘두뇌의 문명’이라 진단한다. 아울러 필자는 중국문명을 ‘情의 문명’으로 본다. 이는 거창한 문제여서 그 입증과정을 여기서 생략하고 금후 별도의 주제로 써낼 작정이다. 분권제시대로부터 집권제시대로 이행하게 된 주요 요소가 곧바로 일련의 제도의 확립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계급, 계층, 신분의 문제 서두에서 말한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는 계급문제일까? 계층문제일까? 신분문제일까? 당연히 계급문제도 아니고 계층문제도 아니며 단순한 신분문제이다. 왜냐? 김정룡과 클린톤을 말할 때는 단순히 개체를 의미할 뿐 집단의 개념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렇게 신분은 개개인의 개체에 사용되는 것이다. 만약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에 기어코 집단을 개입시키려 한다면 계층이란 개념사용까지는 가능할 수 있다. 클린톤은 엘리트층 중의 최고 엘리트이고 김정룡은 엘리트층 중의 최말단 엘리트에 속하기 때문이다. 허나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에 있어서 계급이란 개념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계급이란 집단과 집단의 개념이 개입되고 따라서 계급과 계급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냄새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이란 말의 사용에 조심해야 한다. 10년 동란 때 14살짜리 철부지 김정룡이 2,500년 전 공자와 적대적인 계급관계로 설정되고 싸리 꼬챙이에 실을 똘똘 말아 “공자를 타도하자!”는 대자보를 써야했다. 과연 김정룡과 공자 어른이 적대적인 계급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일부 보수파 어른들은 아직도 그렇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 얘기를 좀 해보자. 중국과 조선에 士·農·工·商의 분화가 있었다. 이에 굳이 집단개념을 주입하자면 네 개 계층의 분화였지 사계급분화가 아니었다고 나는 본다. 이 네 개 계층의 분화는 각기 그들의 직업과 사회분공을 의미할 뿐이지 서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양반, 중인, 상인, 노비의 분화도 계층분화일 뿐 계급분화는 아니었다고 본다. 임어당이 “만약 중국에 계급이 있었다면 아문계급과 피아문계급만 있었을 뿐이다.”고 지적한 데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문계급과 피아문계급은 서로 세금을 바치고 그 세금에 의해 살아가는 관계인데 그 시대에 있어서 현재와 달리 서로 적대관계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계급이란 개념은 맑스가 지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불합리적인 사회현상을 파헤치면서 계급이란 개념을 도입했고 이것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유럽의 계급투쟁 모델이 중국에 도입되어 “계급투쟁을 절대 있지 말자!” “계급투쟁은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날마다 말해야 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부부, 부자, 형제, 친척 친구 간에도 두 개 계급으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넷째 직선발전관과 정체관의 문제 19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벽두에 중국학계에서 막스·베버를 중시하는 바람이 일었다고 한다. 막스·베버는 칼·맑스, 니체와 함께 3대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본다. 막스·베버의 대표작을 말하라면 나는 그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유교와 도교>>라 생각한다. 그는 “왜 유교국가인 중국에서는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중국학계에서 그를 중시하게 된 데는 아마 그의 어처구니없는 이 질문과 해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학자들은 그의 질문에 해답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여기서 막스·베버의 홍두께 같은 질문을 부정하고 기독교와 유교를 대비해 가며 논술하기엔 편폭상 무리가 있어 제쳐놓고 그의 이러한 사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려 한다. 고대 그리스는 찬란한 문화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 피타고라스 등 유명인을 배출해냈다. 그리스의 전통사관은 순환론이었으며 중국의 맹자의 일치일란의 사관과 비슷한 것이었다. 역사에서는 그리스문화를 헬레니즘이라 한다. 그토록 찬란했던 헬레니즘이 기원 후 1세기로부터 중동에서 생겨난 히브리즘의 도전을 받았고, 이윽고 기원4세기 초반에 이르러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 함에 따라 헬레니즘을 비롯한 모든 이교문화가 말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서구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 천년의 역사는 신이 통치하는 암흑세계였다. 미국 신화연구학자 <<예수는 없다.>>의 저자 피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는 “서구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천년 동안 벽돌집 하나조차 제대로 지어보지 못했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서구의 신이 통치한 천년의 역사는 말 그대로 정체의 역사였다. 실제로 중국은 18세기 말까지 전 세계 경제총생산량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었다.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 등 기타 면에서도 찬란했다. 막스·베버의 말을 거꾸로 빌려 말하자면 중국이야말로 발전의 역사로 흘러왔다. 그러다가 17세기후반부터 서구에서 기계문명이 탄생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때를 빌어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을 빌어 중국정체론을 들고 나왔고 중국인은 전부 사기꾼이라 나발 불었다. 헤겔 이후 서구의 사상가들은 대체로 두 개 파로 나뉘었다. <<서구의 몰락>>의 저자 슈펭글러, “신이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 등은 헬레니즘의 순환론으로 역사를 보았다. 이에 비해 칼·맑스, 막스·베버는 헤겔의 직선발전사관을 이어받았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다윈의 ‘적자생존론’, 막스·베버의 기독교윤리와 자본주의정신론, 헤겔의 ‘중국정체론과 게르만민족 제일주의’는 제국주의의 대외 식민지개척에 크게 이론제공과 명분이 아닌 명분을 제공했다. 이 가운데서 특히 헤겔의 중국정체론은 일본의 제국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즉 일본인들은 일본역사는 발전적인데 반해 중국역사는 정체적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중국인을 ‘동아병부’라 부르고 위대한 일본민족이 왜 섬에 머물러야 하나? 마땅히 북평(北平) 정도가 大和민족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륙침략에 나섰다. 발전이 이디에 있고 정체가 어디에 있는가? 역사란 어떻게 여행지를 정하고 티켓을 끊어 갖고 출발하여 일정기간이 경과하면 도착하기 마련인듯 직선적으로 발전한단 말인가? 나는 역사란 발전도 없고 정체도 없다고 본다.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중국은 발전이란 말에 얽매이고 목이 말라 모주석은 건국 초기에 15년이면 영국을 초과하고 2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허황한 슬로건을 내놓았고 그의 열정이 이성을 초월하여 무리한 대약진 운동과 문혁 같은 운동을 일으켜 오히려 국민경제를 파탄의 변두리에 이르게 만들었다. 문혁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발전했고, 모든 것이 세상에서 가장 선진적이라고 배웠다. 그러던 데로부터 개혁개방 후 우리가 한때 입이 아프도록 반대했던 자본주의문화와 ‘룰’이 도입되고 있고 이로서 이룩한 업적을 또 발전이라 한다. 과연 발전일까? 나는 발전이 아니라 변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 비해 발전했는가? 아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보다 변화된 사회에서 살아갈 뿐이다. 다섯째 역사유물주의와 역사유심주의 문제 우리는 애들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면 공통적으로 받는 질문이 있다. 즉 애들은 영화 속의 인물을 “저 사람이 좋은 편인가? 나쁜 편인가?”고 묻는다. 좋은 편이라 말해주면 눈동자가 반짝반짝 해지면서 앗싸 사기 나 하고 거꾸로 나쁜 편이라 하면 얼굴에 웃음기가 가셔지고 증오 심리를 드러낸다. 우리는 한 때 애들이 나쁜 편, 좋은 편을 가르고 무작정 애증을 나타내듯이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무릇 유물주의는 다 좋고 유심주의는 전부 때려 죽일 놈으로 보았고 행동했다.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개념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자연과 인간의 수많은 것들이 풀이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수천 년 전의 인간은 자연과 인간의 현상이 모두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천 년 전의 인류는 이 우주는 필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 창조주를 본체라 보고 그 본체를 물질로 보느냐? 아니면 정신으로 보느냐? 하는 데서 유물주의와 유심주의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 중국은 서양의 이러한 이원론적인 철학을 도입해 자국역사를 해부 했고 따라서 무릇 유물주의는 다 좋고 모든 유심주의는 전부 나쁘다는 이분법을 적용하고 전통문화마저 다 때려 부수기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자- 맹자- 동중서- 왕필- 한유- 주돈이- 이정- 주희- 육왕계의 도통은 전부 유심주의로 분류하고 타도하고, 왕충- 구양건- 범진- 유종원- 유우석- 왕안석- 왕부지- 대진 등 계열의 인물들이 유물주의로 취급되고 각광받았고 찬양의 인물로 되었다. 이외 도가 계열의 노자- 장자- ··· 등도 유심주의로 분류되고 타도당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중국은 전통문화와 단절을 맞게 되었고 그 후유증은 말치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서양사는 서양이고 중국사는 중국사이다. 我의 역사를 他의 역사에 꿰맞추고 규정해버린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고 비극이 초래되기 마련이다. 현대중국에서 곧바로 이러한 우를 범해왔다. 즉 봉건의 개념을 확대해석하고 군현제역사마저 서양의 ‘feudalism’에 두들겨 맞추고 봉건이란 낡은 것이고 낡은 것이면 다 나쁘다는 렛델을 붙여놓고 타도하는 ‘혁명’바람이 곧 중국역사와 문화를 단절시키고 전통의 미아가 되는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 중국이 개학개방 이래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데 대해 러시아학자들이 “중국에 두 가지가 부럽다. 하나는 공부자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화교자원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 중국은 공자를 부활시키고 있다. 역사란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순환론이 맞는 것 같다. 여섯째 종교와 역사의 문제 인류역사는 종교를 떠나서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종교가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실제로 유태인과 같은 민족은 종교와 역사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즉 그들은 그들의 종교가 곧 그들의 역사이고, 그들의 역사가 곧 종교이다. 종교란 신을 섬긴다는 뜻이 아니라 으뜸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역으로 으뜸의 가르침을 종교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은 A종교를, 어떤 사람은 B종교를 으뜸의 가르침이라 믿고 따른다. 그래서 인류역사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고 신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기번은 그의 <<로마흥망사>>에서 “백성은 모든 종교가 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정치가는 모든 종교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고, 철학자는 모든 종교는 사기라고 여긴다.”고 지적했다. 리차드·닉슨은 그의 <<미래의 영수들에게>>에서 “백성은 영원히 백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발바닥 아래 흙만 볼 수 있을 뿐 지평선 너머의 세계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역사 이래 백성은 정부가 주도하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왕이 무슨 종교에 흥미를 느끼거나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국교로 정하면 백성은 그에 따르기 마련이다. 기독교는 본래 유럽의 산물이 아니다. 아시아 중동에서 생겨난 것을 유럽이 수입해서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순수한 중동문화로만 형성된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예수는 신화다.>>의 저자는 기독교는 플라토이즘의 복사판이라고 주장한다. 뜻인즉 기독교의 교리교의의 핵심이 플라톤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서양철학의 거장인 버트란트·럿셀은 플라토이즘은 하나의 종교라고 말했다. 화이드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이 맞는다면 헤겔이나 맑스 철학도 그 뿌리는 플라톤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막스·베버는 근대화의 개념을 ‘탈주술적 시대’로 명명한다. ‘탈주술적 시대’란 신이 통치하는 종교시대로부터 이성적인 사고의 시대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인류사회는 점차 탈종교화시대로 가고 있는 추세이다. 허나 종교란 신의 통치만 종교인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가 곧 종교인 경우가 많다. 예하면 중국의 도교와 유교는 중국인의 종교이자 전통문화이다. 그러므로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차원에서 도교와 유교를 중시해야 한다. 일곱째 문화의 성취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보는 사관 대만국립대학 철학교수였던 方東美 선생은 그의 <<중국인생철학>>에서 중국철학의 일반특성을 역설하면서 “중국인의 깊은 사유의 삼대 중심문제는 ‘자연’과 ‘사람’과 ‘인간의 문화적 성취 즉 역사’라고 말했다. 방동미 선생은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제도사보다 문화에 비중을 많이 두었다. <<역사의 연구>>의 저자 토인비는 그의 저서에서 “인류문화를 도전과 응전의 패턴으로 흘러왔다.”고 지적했는데, 그는 이 이론으로 유명해졌다. 토인비도 역시 인류의 역사를 문화역사에 역점을 두었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文은 紋에서 왔고, 紋은 자연의 특징을 의미하며 인류가 자연을 파악한 상식을 뜻한다. 인류가 파악한 자연의 상식으로서 인간사회를 깨친다는 의미이다. 또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점차 자연의 특징을 인간사회특징과 연관시켜 인위적인 상식, 규칙, 법칙, 제도 등등을 만들어 낸 것이 문화이다. 문명이란 紋으로 인간사회를 밝게 한다는 의미이며 문화와 문명을 상대적으로 말하면 문화는 하위 개념이고 문명은 상위 개념이며, 문화는 개체적인 것에 쓸 수 있지만 문명은 집합적인 개념이다. 이를테면 고대 사대문명을 고대 사대문화라 하지 않고, 1993년 미국의 샤무엘·헌팅턴 교수는 미래 사회 각 종교와 종교, 문화와 문화 간의 충돌을 예측하는 글의 제목을 <<문명의 충돌>>이라 했다. 인류역사를 언급할 때 5천 년의 문명사라 말하는데, 뜻인즉 인류가 5천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문화를 소유하고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고로 인류역사는 문화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문화라는 개념은 그 사용 범위가 넓고, 내포하고 있는 의미도 광범위하다. 종교문화, 제도문화 등 거창한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성문화, 음식문화, 거주문화 등등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인류가 문화를 발견해서부터 문화 속에서 사는 것이 동물과의 구분이다. 아울러 민족마다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 전통문화란 한 민족의 관성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혁 때처럼 다시는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여덟째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이 명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이해한다. ㄱ. 역사의 관성 인간의 몸에 관성의 체계라는 것이 있는데 육체적인 관성뿐만 아니라 의식상의 관성도 있다. 한 민족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적인 패턴이 모두 역사의 관성에서 온 것이다. 즉 역사적인 축적관성이 현재의 삶에 표출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은 만만디 성격과 깊고 넓은 사고방식 등등의 민족성, 일본인의 세심하고 진지하고 아끼고 인내심이 강한 등등의 민족성, 우리민족의 멋을 좋아하고 음주가무를 즐기고 낙천적인 등등의 민족성은 모두 각기 초창기 마을이 형성될 때 처한 지리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을 里制문화라 하며 한 민족의 문화는 대다수가 이제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ㄴ. 역사를 중시하는 것은 오늘의 삶을 위해서이다. 역사는 오늘의 삶의 거울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역사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문혁 때 중국은 전례 없이 역사를 중시했고 동시에 역사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淸末의 疑古風은 역사를 재조명하여 조백을 가리는 작업이었는데 당시 궁극적인 관심은 역사에 있은 것이 아니라 홍수처럼 밀려드는 서양의 문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였다. 현대 중국에서 맑스의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반영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도입하여 전례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했고, 역사유물론을 도입하여 전례 없이 중국역사를 해부했다. 이렇게 전례 없이 역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이란 대과제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아이를 목욕시키는 것이 아이 몸의 오물을 씻어 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결코 아이를 버리려고 목욕시키지 않는다. 허나 현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목욕시키면서 통째로 버리는 우를 범해왔다. 그 우의 핵심과 근원이 곧바로 역사는 발전한다는 터무니없는 논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4    섹스하기 좋은 여자와 싫은 여자 댓글:  조회:13282  추천:125  2008-04-17
섹스하기 좋은 여자와 싫은 여자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고대 중국에는 섹스를 통해 남자에게 도움을 주는 여인을 ‘입상여인(入相女人)’이라 했다. 입상여인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천성이 온순하고, 기와 음성이 부드러우며, 가는 머리칼은 검고 약하며, 근육은 약하고 뼈는 가늘며, 키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맞춤해야 한다. 뚫어진 구멍이 높고, 음문 위에 털이 없고, 분비물이 많은 여자로 나이 5x5=25 사이에서 30세 이내로 아직 출산의 경험이 없는 여자이다. 교접할 때 분비액이 흘러넘치고, 몸이 요동치면 스스로 진정이 안 되고, 땀이 흘러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상대남자에게 잘 순응하는 행동을 취한다. 남자가 가령 방중술의 법도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여인과 교접하면 손상되지 않는다.  <<황제·소녀진경>>에 섹스하기 좋은 여자와 싫은 여자의 조건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여자와 섹스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젊고 아이를 안 낳은 여자, 근육과 살이 탱탱한 여자, 실같이 가는 머리카락에 눈이 작은 여자, 동자의 희고 검음이 분명한 여자, 얼굴과 몸매가 부드럽고 매끈한 여자, 언어와 음성이 조화롭고 낮은 여자, 24지와 백 마디의 뼈가 다 같이 굴곡이 제대로 된 여자, 뼈가 굵지 않고 그 음부와 겨드랑이 아래에 털이 없거나 있더라도 가늘고 매끄러운 여자를 취하라.  가령 교접해서 좋지 않는 상은 쑥대머리에 노린내 나는 얼굴, 망치처럼 굵고 맺힌 여자, 이가 보리처럼 누렇고 목소리가 걸걸한 여자, 입은 크고 코가 높은 여자, 눈의 정기가 혼탁한 여자, 입과 턱이 높고 수염 같은 털이 나고, 뼈마디가 높고 크고, 머리칼이 노랗고 살이 적고, 음모가 굵고 억세고, 털이 많고 거꾸로 나있는 여자, 이런 여자와 교접을 하면 모두 사람을 해친다.  여자의 근육과 피부가 거칠면 교접하지 않는다. 몸매가 마른 여자와 교접하지 않는다. 남자 목소리에 기고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음부가 냉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정강이와 넓적다리에 털이 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질투하는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쾌감을 못 느끼는 여자와 교접하지 않는다. 여자 나이 40이 넘으면 교접하지 않는다. 몸이 항상 냉한 여자와 교접하지 않는다. 음모가 거꾸로 난 여자와는 교접하지 않는다. 뼈가 강하고 단단한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겨드랑이에 냄새나는 여자와도 교접하지 않는다. 음수(淫水)가 계속 흐르는 여자와는 교접하지 않는다.  위 섹스하기 좋은 여자의 조건은 그렇다 치고 섹스하기 싫은 여자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상기의 조건을 다 따진다면 이 세상에서 ‘좋은 여자’가 극히 적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인이 여성을 보는 기준과 현대인이 여성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고대인은 양귀비처럼 키가 자그마하고 아담지고 야무져 보이고 오동통한 몸매를 가진 여인을 최상의 미인으로 꼽았다. 이와 다르게 현대인은 키가 쭉 빠지고 조금 마른 몸매가 있어야 미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또 고대인은 머리카락이 노란 여자를 매우 꺼려했으나 현대인은 일부러 검은 머리를 노랑으로 염색하기에 분주하다.  더욱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은 고대인은 한 때 음부에 털이 없는 여자를 선호했으나, 과거 장시기 동안 특히 현대인은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가 없다’는 관념이 뿌리 깊다. 그리고 옛날에는 여자 나이 40 대면 아이를 보통 예닐곱 많게는 열 명 정도 낳기 때문에 여자는 섹스에 대한 감각이 무디고 남자는 재미를 덜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래서 돈깨나 직위가 있는 남자들은 젊고 예쁜 여자를 첩으로 들이거나 기방출입을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사회 여성들은 기껏해야 아이를 하나 내지 둘밖에 낳지 않기 때문에 성적 기능이 별로 떨어지지 않고 또 옛날처럼 고된 시집살이를 하지 않고 있고 아이가 이미 컸고 해서 할 일이 적어 상대적으로 섹스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다. 그래서 여자 나이 40 대면 ‘호랑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고 바람 피우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대가 바뀌움에 따라 여성에 대한 기준도 변하는 것 같다.       
93    섹스는 양생지도이다. 댓글:  조회:5057  추천:66  2008-04-14
섹스는 양생지도(養生之道)이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중국춘추전국시대의 고자(告子)는 “식과 색은 인간의 본능이다(食色, 人之本也.).”라고 말했다. 이는 인류가 먹고 성교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자 기본 본능이라는 뜻이다.  다종다양한 생활패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류도 먹고 성교하는 것이 가장 큰 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너도나도 좋아하는 성교가 종교의 출현과 보급에 따라 천한 대상으로 취급되었고 심지어 ‘금구(禁區)’로 터부시되어왔다.  세계 4대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불교는 모두 정도가 다르게 성(性)을 금기시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을 담론하는 것을 회피하고 성을 천한 대상으로 여겨왔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불교는 독신주의를 제창했고, 이슬람교와 유교는 여성을 천하게 여기고 가령 성교를 하더라도 여성은 주동이 되어서는 안 되고 남자가 하는 대로 피동적으로 따르기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을 단순한 후대번식의 수단(중세기 유럽에서 남녀가 섹스할 때 살과 살이 닿지 못하게 옷을 입은 채로 여인의 하체에 남자의 거시기를 들이밀만한 구멍만 빼고 했음.) 으로 여겼을 뿐 성을 통한 인간의 쾌락을 몰랐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대 사회에서 성을 인간의 쾌락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섹스를 건강을 추구하는 ‘양생지도(養生之道)’로 여기고 제창한 사례도 있는바,  도교가 바로 그러했다.  도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황제소문경(黃帝·素問經)>>, <<황제영추경(黃帝·靈樞經)>>, <<황제소녀진경(黃帝·素女眞經)>>이 있다. <<황제소문경>>과 <<황제영추경>>을 합쳐 ‘황제내경(黃帝內經)’이라 하며 한의학의 가장 중요한 의서이다. <<황제소녀진경>>은 방중술에 관한 ‘연구서’이다.  <<황제소녀진경>>은 <방중술의 비결과 이해>와 <교접의 체위와 병고침>으로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방중술의 비결과 이해>에는 ‘많은 교접과 적은 배설’, ‘애무의 필요와 성감대의 마찰’, ‘애무의 예술적 표현’, ‘성교의 규칙’, ‘성기의 지켜야 할 윤리’, ‘여성의 성감의 측정’, ‘여성의 생리수요’, ‘여성욕구의 징표’, ‘발가락 운동에 따른 성생활의 관찰’, ‘방중술의 중요성’ 등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을 알고 성교를 해야만 남녀가 모두 진짜 성의 즐거움을 맞볼 수 있다.  <어울림의 체위와 병고침>에는 9법, 8익, 7손이 소개되어 있다.  9법(九法)이란 용, 호랑이, 원숭이, 매미, 거북이, 봉황, 토끼, 물고기, 학 등 동물의 동작을 모방하여 성교를 하는 아홉 가지 체위를 소개하고 아울러 이 ‘9법’을 통해 각종 부녀 병이 치료된다.  8익(八益)은 부동한 체위를 통해 정액을 진하게 하고, 기를 편안하게 하고, 장(腸)을 이롭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고, 맥의 조화를 이루고, 혈을 쌓고, 정액을 더하고, 온몸을 다스리게 한다.  7손(七損)은 여러 가지 체위를 통해 정기가 끊어지고, 정액이 흘러넘치고, 전신의 맥박이 불순하고, 기가 배설되고, 기관궐상(器官闕傷)하고, 모든 것이 닫혀 있고, 피가 마르는 등 일곱 가지 병 증세를 고친다.  이렇듯 세상에서 도교처럼 체계적이고 심도 있게 방중술을 연구한 사례가 없다. 이로부터 중국인이 얼마나 성교를 중시했는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교생활을 원만하게 하려는 분들은 한 번쯤은 <<황제·소녀진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92    동포귀국정책과 고용허가제는 빛(明)과 어둠(暗) 댓글:  조회:5392  추천:82  2008-04-09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 7. 동포귀국정책과 고용허가제는 빛(明)과 어둠(暗)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작년(2005년)에 자진귀국 하여 6개월 혹은 1년 뒤에 재입국한 동포들 중에 상당수가 현행 고용허가제 때문에 또 다시 불법체류자로 전락되고 있다. 이런 명백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법무부가 좋은 정책으로 내놓은 동포 자진귀국지원프로그램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따라서 자진출국을 망설이는 동포들은 “1년 후에 재입국하더라도 역시 불법체류자로 전락될 거라면 아예 그냥 불법으로 있다가 잡혀갈지언정 뻗힐 수 있을 때까지 뻗혀보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고용허가제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면치 못할 거면 자진출국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럼 고용허가제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살펴보자. 우선 재입국한 동포들은 1주 뒤에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해야 한다. 2주 뒤에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으면 취업교육신청을 해야 한다. 취업교육신청을 하면 곧바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1주를 또 기다려야 한다. 3~4일간 교육을 받고나면 곧바로 취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다수가 저절로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또 고용주와 고용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고용계약을 갖고 다시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E-9로 변경해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려면 3개월이 수요 된다. 문제는, 첫째 이 3개월 동안 만약 일을 하다가 단속에 걸리면 100만원 벌금을 내야하며, 둘째 취업교육을 받고나서 일자리를 찾았다 해도 고용주가 고용계약을 해주지 않아 대다수가 또 불법체류자로 전락된다. 물론 고용안전센터에서 2개월이란 재취업 시간을 주지만 고용계약은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재입국한 동포들이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는데 4만원, 취업교육비 10여 만원, 4대보험비와 귀국담보, 비행기표값 80여 만원, 고용계약이 된 분들은 E-9로 변경하는데 6만원, 방세, 생활비까지 합치면 도합 300여 만원 정도는 입국 시에 들고 와야 하며 일하다가 단속에 걸려 벌금까지 내려면 400여 만원을 준비해야 한다. 이는 재입국한 동포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까먹더라도 취업이 보장되고 꾸준히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괜찮지만 많은 동포들이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고용허가제가 여러모로 이미 재입국한 동포들의 목을 조이고 있기 때문에 불법체류동포들이 이번 좋은 정책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법무부의 제2차 자진귀국 프로그램이 좋은 정책이라는 것은 동포들이 한결 같이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부의 고용허가제는 분명히 법무부의 좋은 정책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으며 수많은 동포들을 불안과 혼란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법무부는 이번에 자진귀국하는 동포들이 내년 재입국할 경우 F-1-4가 아닌 방문취업비자(H-2)를 실시하여 지금보다 자유로운 정책을 펼치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래의 그림의 떡일 뿐 동포들의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91    동포들이 자진출국에 소극적인 다섯 가지 이유(김정룡) 댓글:  조회:5683  추천:80  2008-04-0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 6. 동포들이 자진출국에 소극적인 다섯 가지 이유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법무부는 지난해(2005년)부터 불법체류동포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펼치고 있다. 즉 지난해는 동포들에게 자진출국 할 경우 6개월 혹은 1년 후에 재입국이 보장되는 제1차 동포 자진귀국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올해는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혼인해소자들에게 8월말까지 자진출국 할 경우 1년 후에 재입국할 수 있는 획기적인 좋은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실시한 제1차 동포 자진귀국 프로그램에서는 5만8천 명 귀국, 그 중 불법체류자가 2만6천여 명이 동참하여 정부정책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올해 정책에서는 8월 4일 현재까지 자진귀국자가 1만2천여 명을 웃돌아 당초 법무부가 목표한 3만 명을 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어 걱정이 앞서는 상황이다. 본래 이번 정책에 상상도 못했던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위장결혼자가 포함되어 그들이 구제받을 수 있어 동포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동포들이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법무부는 그 이유를 단순하게 정부정책에 대한 반신반의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강압적인 수단 즉 ‘단속강화’방침으로 급선회하여 동포들이 자진귀국길에 오르도록 바람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이는 법무부가 동포들의 실태를 외면하고 억지로 선택한 궁여지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지난 4월 24일 시행 때부터 중국동포타운센터에서 2000여 명(실제 귀국자는 1100명)의 불법체류동포들을 상대하며 자진출국에 관한 상담을 해온 필자는 동포들이 이번 정부정책은 좋다고 인정하고 있으나 실제로 자진출국에 소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집중 분석해보았다. 첫째 죄인의식에서 비롯된 반신반의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위장결혼자들이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구제를 받아 재입국할 수 있다는 것에 쉽게 믿음이 가지 않고 정부정책에 반신반의하는 심리가 동포들의 자진귀국을 가로막고 있다. 실제로 본센터를 방문하여 자진출국의사를 밝힌 동포 중 절대다수가 반신반의하는 심리를 밝혔다. 그러면서 재입국이 보장된다는 증거가 확실해야만 자진신고를 하겠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둘째 중국현지의 각종 ‘괴소문’ 영향 커 동포들이 중국현지에서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위장결혼 등 위법자들을 재입국할 수 없게끔 가로막을 것이라는 억측, 입국 시에 벌금을 심하게 때릴 것이라는 두려움 등이 자진귀국을 저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진귀국에 관한 상담을 맡으면서 이 방면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받아왔다. 셋째 1년이란 시간이 너무 지루하다 작년에 재입국조건으로 귀국했던 동포들이 이번에 자진귀국하려는 동포들에게 귀국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냐하면 1년 동안 집에 가서 할 일은 마땅치 않고 돈만 까먹고 또 술판 노래방 마작 판에 빠져 물심양면으로 피폐해진다는 것이다.  연길시 염모 씨는 지난해에 자진귀국 하여 1년 동안 이래저래 까먹은 돈이 천만 원이었다. 대다수 동포들이 500만원을 까먹는 것이 상례이며 1년 동안 벌지 못한 것까지 앞뒤로 계산하면 보통 천만 원에서 2천만 원을 손해 본다는 것이 동포들의 생각이다.   넷째 경(검)찰조사와 신고서 작성이 부담스럽다 밀입국자는 출국 시에 공항, 항만에서 신고서를 작성해야 하고 진술서를 써야 한다. 문제는 학력이 낮은 동포들이 이런 간단한 신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여권위변조자는 경찰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찰서가 동포들에게 잘 대해주어 대한민국 경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 경찰들의 무뚝뚝한 태도와 A경찰서에서는 조사가 가능하지만 B경찰서는 조사가 되지 않아 이리저리 축구공처럼 여러 경찰서에 굴러다녀야 하는 경우도 발생해 부담이 컸다. 심지어 여권위변조자가 자수할 경우 불이익이 전혀 없다고 법무부가 말하고 있으나 요녕성 영구시에서 온 윤모 씨는 지난 5월 23일 서울 모경찰서에 자수하여 조사를 받았는데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300만원의 벌금을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 위장결혼자 중에 자수하여 구제를 받으려 하였으나 100~300만원이란 벌금이 내려진 경우도 여러 명이다. 만약 동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가 자수하려 하겠는가? 가뜩이나 경찰조사가 싫어서 자진출국을 망설이는 동포들이 많은 현실에서 말이다. 다섯째 현행 고용허가제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내년에 재입국이 보장되더라도 고용허가제 때문에 일자리도 그렇고 또 다시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에 자진귀국 했던 동포들이 현재 거의 다 재입국했으나 그들 중 상당수가 합법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이미 불법체류자가 되어가고 있다. 3년 간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가 낭패를 본 동포들이 다수 발생하면서 ‘뭣하러 자진출국하려 하느냐’는 불만이 동포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요즘 동포밀집지역인 가리봉 일대 음식점에 모인 동포들이 고용허가제의 이런저런 폐단 때문에 자진귀국 해야 할지 말지를 의논하는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한 예로 흑룡강성 목릉시에서 온 석모 여인은 4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견출 일을 하여 두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주고도 남음이 있어 자진귀국 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나 현재 건설 분야의 취업교육이 정지된ㄴ 사실을 알고 만약 내년에  재입국하여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역시 불법체류자가 될거라면 아예 귀국을 포기하고 1~2년은 더 버티다가 집에 돌아가는 편이 유리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 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동포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상담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이상 다섯 가지 이유가 동포들의 자진출국을 발목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90    일본여인의 보자기와 일본인의 정조관 댓글:  조회:9542  추천:84  2008-04-04
역사문화이야기 일본여인의 보자기와 일본인의 정조관념  김정룡 재한 조선족 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한국여성단체 어떤 ‘유식’한 여성이 일부 여성을 시기하는 뜻을 가진 어휘를 폐지하고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그 한 예로 ‘올케’란 말이 오빠의 계집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버려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여성의 주장에 따를 경우 수많은 고유어휘들을 버리고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행하고 있는 관습과 복장 등 그 유래가 현대인의 생활과 맞지 않기 때문에 다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악수하는 인사법은 서양에서 생겨난 것이 동양에 전해졌는바, 본래 호전적인 서양인들이 상대에게 나의 손에 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밝히려고 손을 내밀어 잡는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므로, 살상무기를 지니고 다니지 않는 현대인, 특히 동양인은 악수하는 인사법을 폐지해야 할 것이다.  일본여인의 복장(와후쿠:和服)은 등 뒤에 보자기가 달려 있다. 이는 예로부터 위생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일본인이 아무 곳에서나 섹스를 하는데  편리하기 위해 여성들이 항상 보자기를 등 뒤에 달고 다녔던 것이다. 허나 현대일본인이 보자기를 달고 다니면서 섹스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전통복장에서 보자기를 떼어내야 할 것인가? 만약 보자기를 떼어낸다면 전통복장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건 그렇고 일본인은 왜 아무 곳에서나 수시로 섹스하기 위해 여성들이 보자기를 달고 다닐 정도로 성에 열광하고 있었을까?  일본열도는 예로부터 땅이 척박하고 메말라 경작지가 매우 적었다. 그런데다 태풍이 많고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일본인의 삶의 환경이 극히 열악했다.  일본인은 굶어죽고, 태풍에 죽고, 지진에 죽고,······ 하여튼 인구 증장이 매우 환만(繯慢)했다. 고로 일본인은 후대번식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후대번식을 늘리려면 열심히 남녀가 성교를 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들이 아무 곳에서 또는 수시로 남자들부터의 ‘공격’을 받아들이려고 등 뒤에 항상 보자기를 갖춰 갖고 다녀야 했다. 이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내려오면서 전통복장인 와후쿠(和服)에 보자기가 달려 있게끔 만들었다.  일본인은 후대번식의 다급함 때문에 섹스를 많이 하고 또 아무데서나 하는데서, 하나는 여성윤리교육이 강화되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은 중국과 조선에 비해 정조의식에 희박해졌다.  일본여성의 윤리교육은 정조를 지킬 데 대한 것이 아니라 몸을 어떻게 거두고 남성을 어떻게 잘 모시고 남성들을 즐겁게 해주는가는 것들이었다.  예로부터 세상에서 유일하게 복장을 입는 정규교육을 시킨 것은 일본여성뿐이다. 이것도 그녀들의 윤리교육 내용 중의 하나였다.  우리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일본남성들이 여자가 바람피우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아 하면서도 마누라가 잠자는 자세가 곱지 못하다고 이혼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일본인의 정조관은 우리와 다르다. 일본에 <<이민(移民)>>이란 소설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 주인공인 나츠코(夏子)라 부르는 여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공장에 취직했다. 직장 상사인 반장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며 접근하니 그녀는 별 주저 없이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러던 와중에 브라질에 이민 가는 바람이 불었다. 정부는 부부가 함께 이민에 나설 경우 장례한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한 어리무던한 남자와 임시 결혼하고 이민 길에 나서게 되었다. 브라질에 향하는 도중 여객선 선장이 그녀에게 접근한다. 하여 그녀는 선장과 ‘풋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브라질에 도착해서는 역시 법적인 남편으로 함께 이민 간 남자와 그럭저럭 어영부영 살아간다.  우리민족의 관념으로 말하자면 나츠코는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치는 ‘화냥년’이다. 허나 일본인은 그녀가 매번 처한 환경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한다. 따라서 일본 독자들도 주인공에 대한 평가가 매우 관대하다. 이것이 일본인과 우리민족의 정조관념 차이이다.      그리고 일본인은 남녀혼탕이 있을 정도로 정조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녀들은 아내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교육(훈련)이 잘 되어 있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에 남지 않지만 “남자들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프랑스식 격조의 건물에서 일본마누라를 꿰차고 중국요리를 먹고 사는 것”이 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일본여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성으로 꼽히고 있다. 
89    이해력 부족으로 유언비어 확산(김정룡) 댓글:  조회:5565  추천:72  2008-04-01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 5. 이해력 부족으로 유언비어 확산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필자는 중국동포타운센터에서 불법체류동포 자진출국에 관한 상담을 맡으면서 여러모로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이번 자진출국 프로그램에 있어서 여권위변조자는 경찰조사를 받는 절차가 있지만 밀입국자는 경찰조사를 받지 않는다. 일부 여권위변조자들이 정부의 이러한 정책을 이용하여 경찰조사를 피하려고 밀입국자로 신고하는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런데 밀입국자는 경찰조사를 받지 않는 대신 출국 시에 공항, 항만에서 신고서를 작성해야 하고 개별적으로 조사를 받기도 한다. 만약 밀입국 경험이 없는 자가 조사를 받을 경우 어김없이 허위라는 것이 들통나 출국확인서를 발급받지 못한다. 이들은 할 수 없이 경찰조사를 다시 마치고 출국해야만 재입국이 된다. 실제로 지난 7월 5일 길림성 반석시에서 온 김모 여인(여권위변조자)은 공항에서 밀입국에 관한 조사에 걸려 출국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경찰조사를 받는 절차를 밟고 있다.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의 말에 의하면 밀입국자로 신고한 사람들 중에 매일 3~5명이 조사에 걸려 출국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여권위변조자로서 밀입국으로 신고하였다면 이제라도 솔직히 여권위변조로 신고하고 절차를 완벽하게 마치고 출국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번 자진출국 프로그램에 여권위변조자, 밀입국자, 위장결혼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한 것은 물론이고 동포들이 이해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더욱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예하면 자진출국신고기간이 분명히 오는 8월 31일까지인데도 TV자막을 잘못 이해하고 7월 31일 전으로 귀국하는 자만이 재입국이 된다는 헛소문이 나돌아 8월에 출국하려는 동포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또 친척, 친구들이 귀국자를 배웅하러 공항에 갔다가 8월 15일부터 한국인이 출국 시에 출국신고서가 필요하지 않다는 자막을 잘못 이해하고 불법체류동포들이 8월 15일까지 출국하지 않으면 재입국이 안 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동포들이 이해력 부족으로 매번 혼란을 일으킬 경우 동포사회가 크게 술렁이고 또 동포를 돕는 단체의 사무원들이 불필요한 대답과 해석을 하느라 무척 애를 먹고 있다. 일부 동포들은 00단체에 회원가입만 하면 여행증도 발급받고 경찰조사도 대신해서 받아준다든가 결혼자는 가만히 앉아서 이혼절차를 다 해준다든가 불법체류자는 합법으로 만들어준다든가 합법체류자는 국적까지 따준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하고 있다.  예전에 조선족이 문화가 제일이라고 모두들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는 이미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얘기로 되어버렸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무시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과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조선족이 타향에서 떳떳하게 살아가려면 스스로 자질을 높이기에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88    외나무다리에서 우왕좌왕하는 동포들 (김정룡) 댓글:  조회:5283  추천:79  2008-03-30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 4. 외나무다리에서 우왕좌왕하는 동포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이번 제2차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에 중국조선족과 러시아고려인이 포함되었으나 러시아고려인은 그 수가 매우 적어 사실상 중국조선족을 위해 마련한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실로 한국정부가 중국조선족을 위한 한차례의 큰 배려와 관심을 보인 실질적인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허나 유감스러운 것은 불법체류동포들은 마땅히 기뻐하고 따라야 할 대신 정부정책에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6월 30일까지 만 명도 안 되는 적은 수가 귀국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 또 필자가 자진출국을 원하는 동포들과의 상담과정에서 정부정책에 반신반의하는 심리를 확연하게 읽을 수 있었다. 불법체류동포들이 한국정부정책을 믿지 못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믿음을 가로막게 하고, 다른 하나는 조선족과 한국인이 비록 같은 핏줄이라고는 하지만 필경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보다 불법체류동포들이 자진출국을 망설이게 하는 더 큰 용인은 중국 측에 대한 온갖 억측이 헛소문으로 퍼지고 또 각종 유언비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자진출국자가 중국해관심사원에게 출국확인서를 내보일 경우 그들이 찢어버리는 사례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악의적인 태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한글을 모르고 또 입국심사에 불필요한 종이짝이라 판단해서 찢어버린 것이지 결코 조선족을 미워서 취한 행위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이 결국 조선족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소문이 잘못 퍼지고 있다. 둘째 자진출국자가 여행증을 갖고 귀국하였을 경우 중국 측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헛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4월말부터 귀국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여권을 신청한 사례가 극히 적거니와 중국공안당국에서 여권을 발급하지 말라는 조치가 없는데도 그냥 불법체류동포들이 자신들의 억측으로 하는 말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밀입국자는 나라를 배반한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중국 측에서 다시는 그들을 출국시키지 않는다는 소문이 동네방네 떠돌고 있는데 이는 실로 한심한 억측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헛소문이 자진출국자들의 발목을 크게 잡고 있다. 요즘 들어 8월에 자진출국 하는 자는 재입국이 될 수 없다는 황당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7월 3일 하루에만 이런 내용의 전화를 십여 통이나 받았다. 분명히 자진출국 프로그램 실시일이 8월 31일까지인데도 일런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8월에 자진출국을 원하는 동포들을 크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한국 내 불법체류동포들 사이에 퍼지고 있던 각종 헛소문이 중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지금은 중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이 만일 귀국하면 다시는 출국할 수 없으니 오지 말라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귀국을 가로막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조선족은 분명히 한국인과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너그러운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를 믿지 못하고 각종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있는데 있다. 만약 조선족이 지금 상황처럼 한국정부도 중국정부도 믿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다면 자신을 외나무나리에 몰아넣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앞으로 동포들이 떳떳이 살아가려면 자신을 샌드위치로 여기지 말고 ‘주인공’의식을 갖고 한국정부와 중국정부를 믿고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87    ‘혼란’과 ‘안타까움’(김정룡) 댓글:  조회:5458  추천:78  2008-03-26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 3. ‘혼란’과 ‘안타까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법무부에서 제2차 불법체류 동포 귀국지원 프로그램이 불안 속에서 살아오던 수많은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지만 혼란과 안타까운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정부가 사전에 주도면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추진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이번 정책을 내놓은 주역인 법무부는 큰 틀만 마련해 놓았을 뿐 세부적인 부분을 홀시한 탓으로 여러 가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 실례로서 자진출국대상자들의 이런저런 의문에 A출입국관리소의 말과 B출입국관리소의 답이 다르고 또 같은 출입국관리소의 공무원에 따라 말이 다르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권위변조자 가운데 입국하자마자 브로커한테 여권을 빼앗겨버렸거나 분실한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입국 시의 여권이 없어 경찰조사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밀입국으로 신고해서 출국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 그런데 A출입국관리소는 그렇게 하라 하고 B출입국관리소 어찌되었든 경찰조사 절차가 없이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결국 인천공항자진출국신고 카운터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출국을 포기하고 그냥 불법체류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위장결혼자들은 이혼절차와 공증 인증절차를 마치지 않고 귀구하면 ‘흑인(黑人)’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어떤 출입국관리소의 상담실무자들은 이러한 상식마저 모르고 재입국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출입국관리소의 상담실무자라면 반드시 동포들의 출입국에 관련된 세부적인 문제까지 파악하고 실수 없이 확답을 주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심지어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를 경우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연변에서 온 서모 여인은 번역공증을 마치고 외교부에 가서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모르고 출입국관리소에 잘못 찾아갔다. 출입국관리소의 상담실무자는 이에 관한 절차를 모르고 그냥 출국하면 된다고 했다. 이에 좀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본 센터에 전화문의해서 출국해도 되냐고 물어서 출국하지 않고 나머지 절차를 마저 마쳤다. 만약 그대로 믿고 따랐더라면 중간낭패가 될 뻔했다. 또 묘하게도 지난 4월 24일이면 체류만료일이 되는 실례가 있는데 인천출입국관리소의 A와 B의 상담원이 답이 상반되게 “된다.”와 “안 된다.”로 나타났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다음은 이번 프로그램에 있어서 여권위변조자와 위장결혼자는 반드시 경찰조사를 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는데 실제로 경찰조사에서도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여권위변조라는 개념은 이름, 생년월일, 거주지 가운데 어느 한곳만 고치면 여권위조에 속한다. 그러나 많은 경찰서에서는 이름만 같고 생년월일 혹은 주소가 엉뚱하게 틀리는데도 여권위조가 아니라고 취급하면서 조사를 접수하지 않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들은 재입국이 보장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특히 구로경찰서와 금천경찰서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경찰서에서는 조사를 마치고는 사건사고사실확인원을 끊어주지 않는다. 어느 지방경찰서에서는 사건사고사실확인원을 끊어주는 것은 편법이라 말하면서 기어코 발급해주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지방경찰서는 이번 정책을 모르고 있어 동포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는 실례도 발생하고 있다. 수원, 천안 등 일부지방경찰서에서는 비행기표와 여행증을 갖고 와야만 조사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곳도 있다. 동포들은 법무부와 경찰서 일선 공무원들이 이번 정책을 잘 모르고 있다는데 대해 매우 의아해하며 불안함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법무부와 경찰청은 하루속히 통일적인 정책을 마련하고 세부적인 문제까지 파악해서 자진출국하려는 동포들에게 혼란과 불편을 해소해 주는데 관심을 기울여 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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