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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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풍요속의 빈곤 댓글:  조회:6552  추천:2  2011-10-10
    “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효(孝)’와 ‘예(禮)’는 중화문명의 산물이며 아울러 동방문화에 있어서 비중 높은 전통이다. 특히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는 우리민족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효’와 ‘예’를 매우 중시해왔다. ‘효’는 자식이 부모에게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이며, ‘예’는 사회적으로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존경하는 태도로 깍듯이 대하는 것이다. 우리선조들은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확립을 통해 ‘효’와 ‘예’의 정신이 타민족에게 비해 굉장히 밝았다. 19세기 60년대부터 만주에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인은 낯설고 물선 땅에서 선조들의 ‘효’와 ‘예’의 정신을 지키고 살아왔기에 신중국 건립 후 56개 민족가운데서 가장 사리가 밝은 민족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렇듯 ‘효’와 ‘예’의 정신이 으뜸이던 조선족이 문화혁명이란 10년 동란을 거쳐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린 사람이 연장자를 존경하는 예의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말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함에 따라 조선족은 돈을 쫓는 사회로 전환되어 전통적인 ‘효’와 ‘예’의 정신이 크게 타격을 입어 현재는 위·아래의 사회질서가 말이 아니게 변해가고 있다. 1992년 중한수교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불어친 한국바람, 일명 코리안드림을 살펴보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얼마나 ‘예’에 굶주려 있는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난 9월 12일 우리민족전통명절인 추석날에 서울구로고등학교운동장에서 하나은행 주최로 ‘추석맞이중국동포노래자랑’이 열렸다.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에서 새로 무섭게 스타로 떠오른 백청강이 출연하여 노래자랑무대가 한결 빛났고 수천 명의 관객이 환희에 휩싸여 들끓었다. 이 행사는 실로 재한조선족에게 큰 명절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렇듯 좋은 행사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의자에 버젓이 앉아 구경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는 불편한 할머니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구경하고 있는 광경이 동북아신문 장헌국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잡혔다. 필자는 이 사진 한 장이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정신적으로 빈곤하게 살아가는 우리재한조선족사회를 가장 잘 반영하였다고 진단하고 싶다. 혹시 젊은이들이 자리를 양보해드렸는데 할머니가 괜찮다고 거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할머니를 땅바닥에 방치해둔 결과만으로도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 알다시피 코리안드림은 우리조선족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를 안겨주었다. 부모들이 한국에서 돈을 벌어 자녀들의 공부뒷바라지를 하고 심지어 유학까지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아파트까지 장만해주고, 자신들의 노후에 쓸 돈을 마련하였다. 한편 경제적인 부를 쌓은 동시에 우리는 정신적인 것을 너무 많이 잃었다. 이를 잘 나타내는 물증이 바로 노래자랑에 있었던 광경이다. 중국어에 다음과 격언이 있다. “세상기풍이 날로 못해 가고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오늘이 과거보다 못하구나(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이 구절이 곧바로 우리 재한 조선족사회현실을 말하는 것 같아 맘이 서글프다.
225    변화하고 있는 차이나타운거리 댓글:  조회:6633  추천:3  2011-09-16
한국엔 1990년대 후기부터 2000년대 초반을 계기로 서울가리봉동, 가산동, 독산동, 대림동, 안산, 안양 등지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왔다. 본래 이 여러 곳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산업화시기에 공단집거지로서 지방에서,  시골에서 상경한 공돌이와 공순이들이 발붙인 쪽방촌이었고 한강기적창조에 기여한 역사를 남겼다. 한국이 산업화에서 정보화시대로 이행하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 여러 곳은 썰렁해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 텅텅 비어 있는 상황을 맞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코리안드림에 나선 조선족들이 이 여러 곳에 모이기 시작해 현재는 차이나타운으로 형성되고 있다. 한국 땅에서의 차이나타운은 그야말로 조선족들의 애환이 깊이 묻어 있는 곳이다. 낮에는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3D업종에서 피땀을 흘리고 저녁이면 친구끼리 모여 한잔 나누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고향을 그리는 곳이었다. 차이나타운은 조선족에게 있어서 실로 고향 같은 안식처였다. 한편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불법체류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에 인권적으로 침해를 당하고 살던 조선족들이 차이나타운에 모여 술을 마시고 사건을 많이도 일으켰다. 가리봉시장 거리엔 하루 저녁에 세 건 정도 굵직한 폭행으로 인한 상해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라 말할 만큼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 시절에 차이나타운에서 사건이 많았던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서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남자들이 홀로 한국 땅에서 살면서 서러움과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어 술만 마시면 스스로 절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가족단위로 한국에 많이 와 있고 형제자매 및 가까운 삼촌조카나 사촌까지 따지면 집집마다 10여 명이 한국에 와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군일을 치르면 적게 모이는데 반해 한국에서 모임을 가지면 흥성흥성하게 모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추석과 구정이면 가족단위로 친척단위로 차이나타운거리가 미어지게 모여들어 음식을 나누면서 웃고 떠들고 명절을 즐겁게 보낸다. 친구끼리 모여들던 시기엔 술을 마시면 절제가 되지 않아 싸움이 많았던데  비해 가족단위, 친척단위로 모이니 절제가 되어 싸움이 예전보다 많이 적어진 것이 차이나타운의 큰 변화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남자들이 하루저녁 수십만 원의 돈을 이리 팔고 저리 팔면서 바보처럼 소비하던 것이 요즘 들어 소비관념이 많이 바뀌고 있다. 쓸 만큼 쓰고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되도록 쓰지 않는 변화가 보인다는 것이다. 또 예전엔 명절이면 새벽까지 조선족 주정배들이 밤새 떠들고 다니던 것이 지금은 새벽 1시~2시면 길거리가 조용한 변화가 있다.  그러나 가리봉 시장골목 차이나타운은 여전히 명절저녁이면 무시무시한 분위가 가득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추석날 저녁 22시~23시경 길이 좁다하고 쓸고 다니면서 길손들에게 불편과 불안을 안기고 실없이 가게 문을 걷어차거나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과 걸고 들고 심지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길손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자도 있고 또 가끔 술에 만취해 치고 박고 싸움을 벌이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타향에 왔으면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착실히 벌어 앞날을 알차게 준비하는 것이 상책이건만 아직도 바보스럽게 부질없이 싸움하는 자가 있는 것이 유감이다.         
224    55세 이상 조선족의 비애 댓글:  조회:7954  추천:5  2011-09-06
1990년대 중반부터 연길에서 은행, 우체국을 비롯해 이른바 철밥통이라 믿었던 공직자들이 45세가 되면 내부퇴직을 강요받았다. 육체노동이 필요한 기업에 근무하던 45세 이상 노동자는 대량 퇴직을 면치 못했다. 연길골목마다 ‘노인활동실’ 간판을 건 마작청이 수백 개 업소가 있었는데 도박행위로 신고 되면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여 신분증검사를 한다. 45세 미만자는 연행하여 조사하고 벌금을 안기는데 비해 45세 이상자는 연행도 벌금도 없다. 연길시교에 새로 일떠선 양로원이 여러 군데 있는데 45세 이상자는 입주가 가능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선족사회는 45세가 되면 노인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이다. 40대는 불혹의 나이로서 안정된 일자리와 고정수입으로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녀를 키워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짊어지고 인생에서 고비를 맞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사회는 45세가 되면 노인취급을 받으면서 일자리를 잃게 되자 이들은 일가족의 생계를 위해 코리안드림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정부의 변덕스런 정책에 의해 55세 이상 조선족의 코리안드림에 비상이 걸려 조선족사회가 크게 술렁이게 되었다. 여기서 한국정부가 55이상 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정책에 대해 지적하려 한다. 한국정부는 무연고동포들을 한국어능력시험을 보게 하고 입국시키는 정책을 2007년부터 펼쳐왔다. 하지만 이 정책은 로또식 추첨이 문제였다. 즉 제비노름처럼 추첨에 걸린 자는 직접 방취제비자인 H-2를 발급받고 한국에 올 수 있는 반면에 똑 같이 성적은 합격되었으나 ‘로또’에 탈락되어 C-3단기종합비자를 발급받고 한국에 와서 기술교육이수 과정을 걸쳐 H-2로 변경 받는다. 문제는 지난 2010년 1월 13일부터 55세 이상자는 기술교육이수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55세 이상자는 한국에 올 수는 있어도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정부에서 시험에 참가하라 하여 머나먼 남방도시에까지 장거리 여행을 걸쳐 시험 보는 고충을 겪으면서도 한국에 입국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정책의 변화에 의해 한숨만 짓고 있다. 55세 이상자가 결국 한국정부한테 농락된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 지난 8월 17일 법무부와 고용노동부의 합의 하에 H-2만기자에 대한 후속정책이 확정되었는데 55세 미만자는 재입국유예기간을 1년(제조업과 농축수산업에 종사하는 자는 6개월로 하였음)으로 규정하고 재입국하면 역시 H-2비자를 발급해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찬반양론이 떠들썩하지만 어찌되었든 재입국하여 또 4년 10개월 체류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55세 이상자이다. 이번 정책에 의하면 55세 H-2만기자는 재입국할 수 있되 C-3단기종합비자로 한국에 왕래할 수는 있으나 한국에서의 취업을 불허하여 결국 그들은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55세 이상 H-2만기자 중에 자녀들이 한국에 있어 그들은 중국에서의 생활기반을 상실하고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가야 하는 처지인데도 한국정부는 한국정착을 불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55세 이상자 중에 한국회사에서 숙련공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있고 한국회사도 그들을 수요하고 있으나 한국정부는 이런 구체적인 사실을 전부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55세 이상자에게 또 다시 H-2비자를 발급하면 5년 후 이들이 전부 60세 이상 노인이 되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부담으로 여기고 한국정착을 불허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45세 이상자는 중국에서 노인취급 받고 55세 이상자는 한국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조선족사회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223    H-2재입국유예기간 1년에 따르는 고충 댓글:  조회:6573  추천:2  2011-08-18
지난 7월 말경 한국 법무부와 고용노동부의 합의에 의해 올해 말부터 있을 H-2만기자는 일단 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재입국유예기간을 1년 이내로 하자는 초안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해 동포사회는 재입국이란 후속대책을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이지만 1년이란 유예기간이 너무 길어 이런저런 고충이 많다는 불평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흑룡강성 해림에서 온 손모씨(39세)는 지난 2월경 자가용을 구입해 출퇴근에 사용하고 있다. 내년 3월이면 만기가 되어 정부정책에 따라 중국으로 가긴 가야하는데 1년 동안 차를 고스란히 세워두는 주차도 문제이거니와 차를 움직이지 않아도 세금을 바쳐야 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차를 처분하고 재입국하여 다시 구입하려고 해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스럽다고 토로한다.   현재 H-2소지자 중 승용차, 봉고차, 화물차를 구입해 사용하고 있는 자가 굉장히 많다. 이들은 재입국할 시 모두 손모씨와 같은 고충을 안게 된다.   연길에서 온 김성남씨(49세)와 장선녀씨(46세) 부부는 한국생활이 어언간 10년이 넘었다. 부부가 손 맞잡고 벌다보니 두 자녀를 공부시키고 연길에 아파트를 구입하고도 현재 한국에서 보증금 4천만 원, 월세 30만 원짜리 빌라를 맡아 살고 있다. 부부의 체류만료기일은 전후 보름 차이다. 그래서 함께 귀국하고 함께 재입국해야 한다. 만약 1년 동안 집을 비워두면 360만원의 집세를 살지 않고도 고스란히 지불해야 한다. 집을 빼자니 계약기간이 맞지 않아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지가 의문이다. 가령 집을 뺄 수 있어도 가재도구며 온갖 집기를 처분한다는 것도 힘들고 재입국하여 다시 집을 맡고 가재도구와 집기들을 갖춘다는 것 또한 물심양면으로 웬만히 힘든 일이 아니다.   H-2만기자는 아마 90% 이상이 이 부부와 같은 고충을 안고 있을 것이다.   또 많은 조선족이 우려하는 것은 한국인 집주인들이 만기자들이 부득이하게 귀국일자에 맞춰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점을 노리고 보증금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돈도 떼이고 정신적으로 엄청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H-2비자소지자 중 일부 사람들이 중국식품가게나 음식점을 남의 명의로 등록하고 실제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재입국유예기간 1년에 대해 한숨을 짓고 있다.그러므로 현재 초안으로 된 재입국유예기간을 1년을 길어서 6개월로 줄였으면 하는 기대가 동포사회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다.   한편 이런저런 고충이 만만치 않지만 정부에서 재입국기회를 부여하니 가긴 가겠으나 정말 재입국이 보장되는지를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2005년과 2006년 재입국정책실시 시 귀국비행기티켓을 구입하고 여권을 비롯한 관련서류를 갖고 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재입국실시 기간엔 인천공항에 별도로 카운터를 설치함)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 받으면 재입국이 보장된다.
222    재한조선족은 한국경찰을 존중해야 댓글:  조회:6779  추천:8  2011-08-17
“중국동포 분들이 한국경찰을 너무 무시하고 있어 참 난감합니다.” 이는 중국동포 밀집지역인 구로구와 금천구에서 16년 동안 경찰업무에 종사해온 00경장의 말씀이다.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대다수 조선족은 한국00경장의 이와 같은 말씀에 공감할 것이다. 두 달 전 어느 일요일 저녁 서울시 구로구청 부근에서 벌어진 일이다. 젊은 조선족 셋이 00음식점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있었다. 주차한 차를 빼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소리로 세 번 알릴 때까지 모른 체 하고 술을 마신다. 네 번째 만에야 ‘씨팔’하면서 움직였다. 술을 많이 마신데다 탐탁치 않는 기분으로 핸들을 잡다보니 뒤차를 들이받았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차주가 경찰에 신고했다. 한국은 음식점에서 손님끼리 말다툼하거나 손님과 주인이 언쟁이 생겨도 경찰에 신고한다. 부부끼리 손찌검해도 경찰에 신고한다. 집 키를 분실해도 경찰에 신고한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어도 경찰에 신고한다. 하다못해 가게 앞마당이거나 주택가에서 조선족들이 장기를 두어도 시끄럽다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렇듯 대한민국국민은 조금 불편이 생겨도 경찰에 신고하는 의식이 투철하다. 한국경찰은 중국경찰에 비해 ‘권력행사’가 크지 못하고 사소한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일일이 참견해야하니 참으로 피곤해 보인다. 남의 차를 들이받은 조선족 청년이 차주에게 “우리끼리 해결하면 될 것을 왜 경찰을 불렀느냐”고 입에 담지 못할 상욕을 해댄다. 음주운전에 폭언을 쏟아 붓는 청년을 경찰이 연행하여 조사하려고 하자 그 청년은 “경찰이 다 뭐야.”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잡은 경찰을 밀어 넘어뜨린다. 결국 연행된 청년은 경찰서를 뒤엎을 태세로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 경찰에게 폭력을 감행하였는데 공무집행방해죄, 폭행죄, 음주운전죄 등 형사사건에 걸려 벌금 500만원을 납부하게 되었다. 날이 지는 어슬녘, 서울 남구로역 3번 출구 부근 노래방에서 경찰이 아가씨 두 명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우려 하자 대낮부터 고주망태가 된 조선족남자 셋이 경찰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서는가 하면 마치 자기차라도 되는 것처럼 아예 차 앞체에 걸터앉는다. 같은 조선족아가씨를 붙잡아간다는 불만으로 취한 행동이다. 경찰이 두 아가씨가 위법행위가 있어 연행하여 조사할 사항이 있다고 설명해도 네 명의 조선족은 막무가내로 듣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공무집행방해죄로 연행되어 갔고 형사처벌을 받게 되었다. 경기 안산원곡동 주택가에서 조선족들이 10여명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다. 떠들어 시끄럽다고 한국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 술을 마시고 장기를 두고 있던 조선족이 “우리가 장기를 두는 것이 위법인가? 한국경찰은 별 거 다 상관한다.”면서 경찰이 그만두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그냥 장이야, 멍이야 하면서 놀고 있었다. 경찰이 재차 그만두라고 권고하자 이번엔 “당신들이 뭔데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 야단이야.”고 소리를 지른다. 오가는 목소리가 커지자 주택가가 시끌벅적하여 경찰이 연행하려고 하자 상욕을 하면서 경찰을 밀치는 등 몸싸움을 일으켰다. 결과는 빤하다. 공무집행방해죄로 벌금을 납부하게 되었다. 일부조선족은 ‘중국경찰은 무섭다, 한국경찰은 만만하다.’는 심리가 있어 중국에 있을 땐 경찰한테 어쩌지 못하다가 한국에 와선 안하무인으로 경찰을 대하다가 공무집행방해죄를 범하는 사례가 굉장히 많이 발생하고 있다. 공무집행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게 되면 전과자가 되고 체류연장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경찰을 존중하는 맘만 있다면 피할 수 있는 범죄이다. 쓸데없이 날뛰다가 화를 자초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지침이 아닌가! 한편 조선족들이 천방지축으로 한국경찰을 대하지 말기를 바라는 동시에 한국경찰은 이국땅에서 고달프게 생활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조선족을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너그럽게 대해주었으면 바람이다.  
221    옌볜아줌마를 왜곡하지 말자 댓글:  조회:7613  추천:12  2011-08-04
일 전에 한국일요신문에 실린 ‘옌볜아줌마’…“돈 되는 일이면 뭐든”라는 글이 조선족지식인이 많이 보는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간칭 조글로)에 전재(轉載)되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한편의 한국기자가 조선족을 모독한 글이다.” 한국기자는 국내 조선족 여성의 ‘충격’ 실태라는 포인트를 잡고 글을 전개하였다. 그 충격실태란 것이 한국사회 깊숙이 포진 ‘옌벤 아줌마’…“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서술을 들어보자. “이제 식당에서 조선족 종업원을 보는 것은 한국인 종업원을 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됐다. 몇 해 전부터 돈을 벌기 위해 타향살이를 선택한 조선족 여성들은 식당, 모텔 청소부, 가정부 등 한국인들이 꺼리는 직종에 포진해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노래방, 티켓다방 등 유흥업소나 성매매업소에 발을 들이는 조선족 여성도 크게 늘고 있다. 그러면서 퇴폐와 타락에 빠지는 조선족 여성도 느는 것이 현실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적은 수년 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서 새로운 충격이 아니다. 또 한국인이 조선족아줌마를 가정부로 고용할 경우 이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어린이들의 말투가 조선족 형태로 바뀌고 있어 고민이라는 지적도 벌써 10년 전부터 논의가 있었다. 최근 년래 중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에서 중국어 배우는 열풍이 불고 있다. 한국인 부유층은 가정부 겸 어린 자녀한테 중국어 강의가 가능한 조선족아줌마를 고용하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어 이른바 옌볜아줌마가 가정부로 인기상품이 되고 있다는 것을 한국기자는 간과하고 있다. 다음 한국기자가 ‘조선족 여성, 오직 돈만 보고 타향살이’이란 소제목에서 “조선족 여성들은 거의 100% 오로지 ‘돈’ 때문에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면 단돈 10만원에 자리를 옮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배신’이라는 것에 민감한 한국인들은 그들의 행태를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매도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조선족 여성들의 코리안드림의 동기는 100% 돈벌이를 위한 것이라 말한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코리안드림이 스무 살을 넘긴 현재 상황에서 ‘조선족 여성들은 거의 100% 오로지 돈 때문에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는 주장은 실제를 떠난 허황한 얘기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만약 10년 전에 발표된다면 맞는 것일 수 있다.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여성들의 절반 이상은 한국생활경력이 5년 이상으로서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갖고 있다. 그녀들의 정서는 돈보다 주인이 편하게 대해주는 것을 우선조건으로 삶는다. 단돈 10만원에 비둘기처럼 쉽게 자리를 옮기는 현상은 지나간 옛말이다. 많은 조선족여성 가정부는 돈보다 안정된 일자리를 요구하고 따라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기를 원하고 있다. 강남부촌에서 입주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한 조선족 여성은 한 집에서 8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아이 둘을 키웠다. 그 아이들은 부모를 떠나 지낼 수는 있어도 ‘이모’가 없으면 못 살 지경에 이르렀다.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월급을 후하게 줄 테니 우리 집으로 오라는 섭외가 들어온다. 허나 그녀는 돈을 적게 받더라도 이미 정이 들 대로 든 아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어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눌러 있을 타산이다. 필자와 안면이 있는 가정부로 일하는 여러 조선족여성은 일자리가 안정되자 짬짬이 공부하여 운전면허도 따고, 한식자격증도 취득하고, 통역자격증도 손에 넣으면서 돈보다 여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다. 또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원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옌볜아줌마를 돈벌레로 취급하는 것은 케케묵은 지나간 얘기다. 그녀들은 결코 100% 돈을 쫓는 치졸한 인간집단이 아니다.  
220    한류의 문화기원(3) 댓글:  조회:6151  추천:1  2011-08-03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도 다지고 외왕도 장식해왔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물이 없듯이 한민족의 내성외왕은 곧 내성보다 외왕 쪽에 무게를 더 두어왔다. 그래서 속보다 겉을 더 챙기는 관습이 지속되어왔다.   단군신화에서 홍익인간사상이란 고귀한 문구를 ‘멋’의 내성에 대한 추구라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확실히 기타 민족에 비해 매사에 사리가 밝다. 조선족이 사리가 밝은 것은 곧 홍익인간사상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조에 들어서 유교의 영향 때문에 ‘멋’은 외왕보다 내성 쪽에 기울려졌다. 당시 유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멋’보다 내심의 ‘인(仁)’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러저러하게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이 서로 엇바뀔 때가 있었으나 대체로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 추구가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들어왔다.   한민족의 외왕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한다면 한민족은 겉으로는 멍청이가 매우 적어 보인다. 이는 상대적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곧 실속 없이 겉만 꾸미는 내빈외화라 할 수 있겠으나 긍정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곧 한민족은 상향의식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의 이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의 추구가 한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정체성을 갖게 만든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한민족은 모든 사물을 ‘멋’을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민족은 일본인을 ‘쪽발’이라 부르고 중국인을 ‘때놈(汚垢)’이라 한다. 일본인은 중국인을 ‘지나인(支那人)’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그냥 ‘죠센징’이라 했다. 물론 ‘지나인’은 중국이 이미 늙었다고 얕잡아 보는 호칭이고 ‘죠센징’은 힘없고 가난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를 볼 때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해 비하하는 호칭에 비해 훨씬 신사적이다. 중국인은 일본인을 ‘작은 일본(小日本)’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까오리빵즈(高麗捧子:고려 몽둥이)’라 한다. ‘작은 일본’이란 곧 일본은 사람도 작고 땅도 작고 나라도 작고 인심도 야박하다는 등등의 뜻을 나타내는 호칭이며 조선인을 ‘까오리빵즈’라 하는 것은 아마 옛날에 고려인(고구려인)과 싸울 때 고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써 혼났던 모양인데 이로서 유래되었다. 아무튼 중국인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뉘앙스도 한민족에 비해 많이 점잖은 편이다.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호칭이 매우 신사적이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돌이켜야 할 것은 곧 한민족은 ‘멋’을 통해 타민족과의 특징의 구분을 부각시키려는 데서 비신사적인 호칭이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내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다름이’ 곧 ‘멋’에서 유래된 것이며, 아울러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든 주체성과 정체성이다.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어도 꿋꿋이 살아남게 된 가장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던 것이다. 중국이란 거대한 문화용광로 속에서도 조선족은 뚜렷한 교리교의가 있는 자체종교가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민족정체성을 잘 지켜온 것이 곧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크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강력한 종교를 갖고 있는 회족(회교도:무슬림)마저 한족과 통혼이 잘되고 있는데 비해 조선족은 한족과의 통혼이 매우 드물다. 한족은 조선족과의 통혼을 원하지만 조선족부모들이 만약 자식이 한족과 연애를 하면 망종으로 취급할 정도로 통혼을 반대한다. 그 주유 이유가 바로 ‘우리(조선족)는 당신(한족)들과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한민족의 고유한 ‘멋’ ‘맛’ ‘판’ ‘넋’ ‘얼’의 문화로서 이미 중국대륙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았다.   이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비록 한국 내에서는 이러저러하게 역사적으로 당파싸움도 유난히 많았고 지금도 역시 영남과 호남을 대변하는 당파싸움을 비롯한 사회 각 영역에서 갈등이 심각하게 드러나게 만들고 있다. 허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타민족과의 구분을 부각시켜 일치 단합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대한민국을 세상에 크게 홍보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예하면 1997년 말 IMF 직후에 전체 국민이 동원되어 장롱 속의 금붙이를 나라에 바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때에는 7백만의 붉은 악마가 세상을 또 한 번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필자는 그 힘이 곧 한국인의 특유한 ‘멋’과 ‘판’에서 온 신바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도 그 어떠한 문화도 때에 한국인이 세상에 보여주었던 그러한 멋진 장관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세상은 그때 그 사건 때문에 크게 놀랐으며 대한민국을 크게 부러워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멋’을 이미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웠고 몸에 배였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힘의 표출은 나라가 가르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단군시대부터 ‘멋’에 대한 터득의 결과이며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우고 실천한 결과이며 한국인의 몸속에 깊이 배어 있는 신바람이 표출된 결과이다.   만약 외국인이 한국과 한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멋’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중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도교를, 일본인을 알려면 반드시 신도를 알아야하는 이치와 같다. 만약 일본문명을 독자적 문명으로 취급하는데 동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도리로 ‘멋’이란 독특한 문화도 역시 독자적 문명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멋’ ‘맛’ ‘판’ ‘넋’ ‘얼’ ‘신바람’이야말로 한류의 문화기원이다.
219    한류의 문화기원(2) 댓글:  조회:6405  추천:1  2011-08-03
중국동포사회연구소 김정룡 소장은 한류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사문화시각으로《한류의 우와 열》, 《신바람과 한강기적》등 장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본지는 그의 한류문화에 관한 글《한류의 문화기원》을 3부로 나눠 연재한다.   한반도에서도 바람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삼국유사》에 신라불교를 서술함에 있어서 풍교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고유토착신앙 가운데서 풍교가 으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삼국유사》에 신라의 불교를 논하는 장절에서 ‘석씨풍교(釋氏風敎)’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곧 불교를 의미한다. 신라인들은 왜 불교를 그냥 불교라 하지 않고 ‘석씨풍교’라 했을까?   신라인들은 바람을 우주의 본체라 여기고 풍교신앙이 뿌리 깊었다. 따라서 모든 외래종교를 풍교의 일종일 뿐이라 여겼다고 볼 수 있다.《삼국유사》에 ‘예의풍교, 불류우상(禮儀風敎, 不類于常)’란 구절이 있는데, ‘禮儀風敎’는 곧 공자교 즉 유교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신라인들은 유교든 불교든 모두 풍교이며 다만 그 구분을 말하고자 ‘석씨풍교’ ‘예의풍교’라 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왕은 법흥왕(법은 불교, 흥은 발흥하고 흥기시킨다는 뜻으로서 불교를 발흥하고 흥기시킨 왕이란 의미)이며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그다음의 왕을 진흥왕이라 했다. 그런데 진흥왕은 천성이 풍류(風味)적이어서 젊고 예쁜 낭자를 원화로 삼고 국선으로 받들었으며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선행시켜야 한다(幇興國, 須先風月道)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진흥왕은 ‘석씨풍교’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있어서 재래의 전통 풍교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고유토착신앙인 풍교와 풍월도를 불교와 아주 조화롭게 접목시켜 화랑도를 흥기시켜 나라를 일으켰다. 화랑도는 신라인의 정신지주이자 넋이었다.   《삼국유사》에서 화랑도의 명부를 ‘풍류황권(風流黃券)’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를 풍류도의 산물이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화랑도가 풍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최치원은 화랑역사를 회고하면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일컬으며 그 뿌리는 선사(仙史)에 있다.”고 했다. 선사란 곧 풍교의 역사이며 그것을 또한 풍류도로 표현했다.   연세대 유동식 교수는《풍류도와 한국인의 종교사상》에서 “풍류도는 하나의 종교라 불수는 없지만 한국인의 신앙사상을 강력하게 지배해왔으며 아울러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멋’이다.”고 지적하였다.   필자는 한국인이 흔히 잘 사용하는 낱말 ‘맛’과 ‘판’ 및 ‘넋’도 역시 풍류도문화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는 저서《추한 한국인》에서 “멋이란 낱말은 중국어와 일본어에는 없고 유일하게 한국인만 사용하는 어휘이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그의 이 한마디 지적에서 큰 힌트를 얻었다. 즉 필자는 중한일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멋이란 낱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해보았으나 대충 의역은 될 수 있으나 완벽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멋이란 낱말이야말로 한민족의 민족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어휘이다.’ 이것이 곧 나의 결론이었다. 어떤 한국학자 분은 ‘멋’이 곧 ‘맛’이고 ‘맛’이 곧 ‘멋’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필자는 ‘맛’이란 낱말에 대해서 연구해본 결과 ‘멋’과 마찬가지로 역시 한민족만이 사용하는 특수용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맛’에 해당되는 ‘아지(味)’, ‘워이따오(味道)’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말 맛의 뜻을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한다.   또 노래판, 춤판, 도박판, 놀음판, 술판, 오락판, 싸움판, 난장판, 개판, 심지어 X판을 포함해 한민족은 ‘판’이란 낱말을 풍부하고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판’을 경우에 따라 ‘場’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한민족이 말하는 ‘판’의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판을 깨다.’ ‘판이 깨지다.’ ‘판이 사라졌다.’ ‘판을 유지하다.’등등의 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쉽지 않다.   한국고전음악에 ‘판소리’라는 것이 있는데 최근 중국문학작품을 보면 ‘盤瑟里’라고 중국어로 옮겼는데 이는 음역에 따라 억지공사로 번역한 것일 뿐 한민족의 진정한 생활정서가 배어 있는 ‘판소리’ 의미가 아예 전달되지 않는다. ‘판소리’가 중국음악과 일본음악에 비해 독특한 한민족의 특성을 반영하는 민족음악이라 할 때 우리는 한민족이 얼마나 ‘판’의 문화를 중시해왔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저 ‘판’이란 무엇인가? ‘판’이란 낱말은 분명히 어떤 행위의 장을 의미하지만 중국어와 일본어에서 말하는 ‘場’과는 엄연하게 구분된다. 정확히 말해서 ‘판’은 바람이 몰고 오는 일종 유형무형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판의 문화’가 풍류도에서 유래되었음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멋’ ‘맛’ ‘판’이란 낱말이 바람문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며 이는 곧 한민족의 풍류도의 정수이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규정하는 말이 곧 ‘멋’이라고 지적했다. 이 말을 바꿔하면 ‘멋’은 곧 풍류도의 기본정신이며, 풍류도의 기본사상이며, 풍류도의 기본 넋이다. 풍류도가 고대한민족의 기본종교사상이었다면 넋은 곧 ‘멋’이며 ‘멋’은 곧 한민족의 넋이다.   ‘멋’을 한민족의 넋이라 말하는 것은 한민족은 수천 년 동안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내성외왕이란 말은 본래 에서 유래되었다. 장자는 인간의 이상적 경지가 곧 내성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중국유교비평가들이 지적한바와 같이 중국인은 내성에 대한 추구에만 치중해왔을 뿐 외왕을 홀시해왔기 때문에 중국인은 외모가 초라해보이게 되었다. 중국인은 확실히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이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도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은 중국인에 비해 나으나 한국인에 비해 조금 떨어진다.  
218    한류의 문화기원(1) 댓글:  조회:6538  추천:1  2011-08-03
편집자 주:  중국동포사회연구소 김정룡 소장은 한류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사문화시각으로《한류의 우와 열》, 《신바람과 한강기적》등 장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본지는 그의 한류문화에 관한 글《한류의 문화기원》을 3부로 나눠 연재한다.     한반도는 일본과 함께 한자와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명권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은 신도라는 자체종교가 있고 따라서 일본인의 인간타입과 민족특징은 신도적이며 신도가 일본인의 영혼과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데 비해 한반도는 자체종교가 없는데 무엇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케 하였을까? 다시 말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해온 기본요소는 무엇이며 한반도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쳐왔을까? 이에 관해 한국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00년 전 세계적인 석학인 중국인 고홍명은 그의 저서 《중국인의 정신》을 통해 “한 문명이 그 문명을 안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케 하고 정신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내놓아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고홍명의 문명과 인간타입관계 이론에 대해 흥미를 갖고 한반도 공동체 인간타입의 형성기원 및 민족특징에 관해 살펴보기로 결심하고 지난 수년간 이에 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려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중국에서 문화혁명 때 불륜을 저지른 남녀에게 새끼줄 양 끝에 헌 신발을 달아놓고 그것을 목에 걸게 하고 대중비판을 하였다. 그런데 비판대회에서 한족들은 불륜을 저지른 남녀를 “따따오까아오퍼쎄!(打倒搞破靴:헌 신발을 건드린 자를 타도하자!)”고 외쳤고, 조선족은 “비람피우는 자들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그러니까 불륜이란 한 가지 같은 사실, 같은 포인트를 한족은 ‘헌 신발’로 표현하는데 비해 조선족은 ‘바람’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상의 차이가 곧 두 민족 간의 문화차이를 말해주는 좋은 증거이다.   그 후부터 필자는 우리민족이 일상생활에서 한족에 비해 ‘바람’이란 낱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말(네가 오는 바람에 내가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럴 경우 타민족은 바람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에도 ‘바람’이요, 무엇을 희망하는 뜻에도 ‘바람’으로 표현한다. 1980년대 이북사람들과 접촉해 보았는데 그들도 ‘바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1990년부터 한국인을 접촉해보니 역시 만찬가지였고 특히 한국가요에 ‘바람’이란 어휘가 굉장히 많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의 말 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논리에 따르면 우리 한민족이 일상생활과 가요에 ‘바람’이란 낱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필시 역사적인 문화와 연관성이 있을 것이고,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언어표현은 과거역사문화의 관성에서 온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신라계통의 경상도사람들이 집권하고 경상도 천하를 이루게 되자 유행가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휘가 ‘바람’이라는, 이 한 마디라는 사실은 결코 단지 우연한 잠시적 유행현상으로만 간주할 수가 없다. 국제적으로 유행가요를 분석해보아도 바람이라는 단어는 특히 우리나라가요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을 무의식적으로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신앙의 메모리체계의 작동으로 보아야 하며 ‘바람’이야말로 잃어버린 우리자신의 ‘야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현상을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 즉 한 1500년 정도의 시간단위는 좀 거시적 혜안을 갖게 되면 몇 십 년 정도의 압축된 연속성의 체계로 간주할 수도 있고 해야 하는 것이다.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이나, 최치원의 난랑비서의 바람이나 화랑·미륵의 바람이나《시경》의 바람이나 모두 한 가지 ‘바람’의 연속된 아키타입일 뿐이다.   중국에서는 바람에 연관된 원시종교사상을 개괄해 ‘풍교’라 지칭하고 바람(기)을 우주의 본체라 인식하고 바람의 흐름에 ‘도(道)’가 있다는 이른바 풍류도를 발명하였으며, 이 풍류도는 한대(漢代)부터 하나의 고등종교인 도교로 승화되었다. 이른바 도교란 중국모계씨족사회에서 자발적인 여성숭배를 특징으로 하는 원시종교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고로한 무사(巫史)문화, 귀신숭배, 민속전통, 여러 방기술수(方技術手)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임과 아울러 도가의 황로지학을 기치와 이론지주로 하고 유불도의 음양, 신선제가학설 중의 수련사상, 쿵푸(工夫)경계, 신앙성분과 윤리관념을 포섭하여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구하고 장생하고 신선이 되며, 따라서 몸과 도의 합진(合眞)을 목적으로 신학화, 방술화한 다차원의 종교이다.   도교는 중국의학, 과학, 예술, 무술, 방중술, 수련, 장생술,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의 발견과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다. 임어당 선생은 그의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본질적으로는 도교를 받들어왔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풍류도가 신도로 변이되고 발전해왔다. 200년 전 사대국학자에 속하는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는《고사기》와《일본서기》를 연구하고 나서 “일본역사는 하→상에로 흐르는 헌신과 충성 및 봉사의 구조로 흘러왔고, 이것이 곧 일본인의 신도의 기본정신이라고 말했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저서《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일본인의 하→상에로 흐르는 충성과 헌신과 봉사의 구조는 카미(神)의 길이며 바람의 길이다.”라고 지적했다.  
217    동포관리 전담부처 설립이 필요하다 댓글:  조회:6187  추천:7  2011-07-02
법무부는 10년 이상 불법체류와 10년 미만 불체 중 인도적사유가 있어 구제받은 동포들(55~63세)에게 H-2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가 ‘이들은 국내 체류 5년 이상 자’라는 이유로 취업 교육대상에서 제외하고 취업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는 기사가 본지 200호에 발표된 이후 동포사회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동포관련 여러 신문과 한국연합뉴스 등 묵직한 언론들이 잇따라 법무부와 노동부의 불협화음으로 동포들만 피해보고 있는 사실을 꼬집었다. 지난 10년 동안 재한중국동포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힘을 기울인 동북아신문은 6월 15일자로 는 글을 머리기사로 다뤘다. 여러 언론의 기사요지를 귀납하여 말하자면 법무부는 중국동포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비해 고용노동부는 중국조선족을 재외동포로 보지 않고 순수 외국인인력으로 취급하는데서 이번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고용노동부는 법무부가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존심 싸움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중국동포정책을 놓고 법무부와 고용노동부가 엇박자를 치고 있고 고용노동부는 법무부에 강력한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같은 ‘용마루’를 쓰고 사는 법무부와 고용노동부의 엇박자로 인해 고충을 겪고 있는 동포들의 사례를 통해 한국정부의 동포관리부실문제가 야기되는 원인을 지적하고자 한다. 중국은 중앙정부인 국무원산하에 해외화교 및 귀환화교를 전담 관리하는 화교사무실(챠오판:僑辦이라 간칭 함)이란 정부부처가 있고 그 직속기구로서 각 성 및 현·시급까지 하나의 위·판·국(委辦局) 부서로 설치되어 있다. 1960년대 말기 이북이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아 3만 명이 넘는 재조화교(在朝華僑)가 조국에 밀려왔는데 중앙정부화교사무실의 지시에 의해 각 현·시급 화교사무실에서 발 빠르게 적극 조치를 취해 전부 안치했다. 이들 화교후대들은 현재까지도 취업에서 우대를 받고 대학입시에서 20점이나 가산점수를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해외화교가 중국에 관광 오면 비행기티켓요금과 호텔숙박요금 및 여행사의 종합서비스요금을 10% 할인하라는 중앙정부의 지시가 있었다. 해외화교가 조국에 투자할 경우 세제혜택을 주는 등 여러모로 화교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한국은 4,800만 명 인구에 해외동포가 70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비례가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에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없다. 재외동포재단은 비정부기구로서 동포정책제정과 국내체류관리는 할 수 없다. 이런 일을 법무부가 하고 있는데 법무부도 관리전담부처가 아니어서 고용노동부가 심기가 불편하면 태클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이미 재한동포관리문제가 대두되고 외국인 백만 명 시대에 접어들자 이민청설립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이민청이 설립된다면 재한동포와 외국인관리는 수월해질 수 있으나 해외동포관리는 여전히 손을 뻗힐 수 없을 것이며 이민청은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아니어서 700만 명의 재외동포를 아우르는 기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도 중국의 화교사무실에 해당하는 동포관리전담부처를 설립하여 재외동포정책을 제정하고 재한동포관리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설립된다면 할 일이 많고도 많을 것이다. 중국심천라호부두에서 홍콩을 건너가는데 입국심사대에 전문귀향통로를 설치하여 홍콩시민이 대륙에 나들이하는 것을 관리하고 있다. 인천공항은 국제선에 내국인과 외국인의 통로가 있고 동포는 외국인에 속한다. 하루에 수백 명 나들이 하는 조선족과 재외동포들에게 귀향통로를 따로 설치해준다면 그들은 대한민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고국의 정을 듬뿍 느끼게 될 것이다. 돈의 투자가 필요 없이 머리만 조금 쓰면 쉽게 해결할 일이지만 동포관리전담부처가 없는 탓에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큰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216    아리랑의 수난 댓글:  조회:10338  추천:7  2011-07-01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대표적 민요이다. 아리랑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흔히 아리랑을 고개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아리랑은 고개이름이 아니라 가슴이 아리다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쓰리랑은 가슴이 쓰리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아리랑 쓰리랑은 가슴이 아리고 쓰리다는 말이다. 왜 아리고 쓰리다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 되었을까?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몇 번이 모자라는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 너무나도 빈번하게 외침을 받다 보니 항상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심리로 인해 늘 불안한 삶을 살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무사한가?’가 우리민족의 인사말이 되어왔다. 중국인이 ‘밥을 먹었느냐?’가 인사말이 된 것에 비하면 참으로 우리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조 518년을 통해 양반과 상놈의 문화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몹시 고달파졌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민족을 한(恨)의 민족으로 만들었다. 일제치하 시대인 1930·40년대 만들어진 가요 절대다수가 가사가 슬프고 멜로디가 느린 것이 특징이며, 이는 곧 우리민족의 한 많은 정서를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수많은 노래 중에서 우리민족의 비참한 역사 및 이로 인해 한의 민족이 된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가요가 바로 아리랑이다. 이런 맥락에 의해 한국에는 아리랑가요 대표적인 정선아리랑 외에 진도아리랑, 홀로아리랑, 울산아리랑 등 수십 가지가 있다. 해외에 이주한 우리민족도 ‘전통아리랑’ 정서를 갖고 있었고 타향에서 정착하는 과정에 또 수많은 한이 싸이게 되었다. 이를테면 해외동포 700만 명 중 고국전통문화를 가장 잘 보존해온 조선족은 만주이주 초창기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하느라 고생과 고통이 가슴을 짓눌러 왔으며 한의 역사가 계속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 한의 정서가 담긴 아리랑을 비롯한 전통가요를 부르며 고달픈 맘을 달래 오곤 하였다. 신중국 건립 후 소수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하라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의해 조선족은 전통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고 새로운 민족정서를 반영하는 가요도 많이 창작하게 되었다. 아울러 전통 민요를 조선족의 실생활을 토대로 새로운 연변아리랑을 창작해냈다. 중국56개 민족 중 조선족은 가장 능가선무(能歌善舞)한 민족으로 소문나 있다. 따라서 조선족의 농악무는 2009년 이미 중국무형문화재에 등록이 되었고 제3차 중국무형문화재등록에 조선족 씨름, 회혼례, 가야금, 판소리와 함께 연변아리랑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 6월 21일 길림신문을 비롯한 언론이 이 소식을 보도하자 이튿날인 6월 22일 한국의 지상파방송 3사와 조·중·동을 포함해 수많은 언론들이 떠들었다. 그런데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에 “중국이 아리랑을 약탈했다”는 주장이 있어 중국정부와 조선족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아리랑은 한국만의 자산이 아니라 전체 백의민족의 공동소유이다. 쉽게 말해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소유할 자격이 있다. 조선족의 경우 거주국의 공민으로서 자신들의 문화가 국가무형문화재에 등록되는 것은 영광이며 고국인 한국은 이를 마땅히 지지하야 할 입장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 언론이 왜 약탈을 들먹이며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수천 년 동안 외침을 받아온 피해의식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전체 백의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아리랑이 한국 언론에 의해 또 한 번 수난당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215    천년고도경주의 아쉬움 댓글:  조회:6277  추천:21  2011-06-16
천년고도경주의 아쉬움     관광은 유쾌하고 재미있고 소득이 있어야한다. 이를 논하는 기준은 각자 나름대로 주관의 느낌에 달려 있으나 객관적으로 식(食), 주(住), 행(行), 유(遊), 구(購), 오(娛) 등 여섯 가지 요소를 갖고 평가한다.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있듯이 관광의 첫 번째 요소는 식(食:먹는 것)이다. 관광에 있어서 식은 당지전통음식을 먹어보는 것이 필수 코스이다. 필자는 며칠 전 중국손님 한 분을 모시고 2박3일로 천년고도경주에 다녀왔다. 첫날 저녁 19:30 경주에 도착해 마침 만찬을 먹을 시간 때였다. 경주시 고속터미널 부근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밥 먹으러 거리에 나섰다. 전주비빔밥, 춘천닭갈비, 수원왕갈비 하는 식으로 경주의 지방특색음식을 이리보고 저리 살펴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늦은 시간인데도 천마여행사사무실이 불이 켜져 있어 방문하여 직원에게 물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경주는 특색음식이 없다고 말한다. 이튿날 가이드한테 물으니 대답은 여전히 없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타지에서 친구들이 경주에 오면 뭘 대접해야 하는 것이 걱정거리란다. 욕은 듣는 자가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필자가 천년고도에 지방을 대표하는 음식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하니 가이드는 가볍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주(住)는 어느 도시를 가나 고급호텔부터 시작해 민박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레벨로 갖춰져 있어 고객이 수요에 따라 고르면 그만이기 때문에 현대관광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행(行)도 어디를 가나 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고 교통수단이 잘 구비되어 있어 문제가 없다. 다만 관광코스시간안배만 잘하면 행에 불편이 없다. 관광에 있어서 유(遊)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유(遊)는 구경이다. 경(景)은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으로 나눈다. 자연경관은 말 그대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해준 자연경치이고 인문경관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건축물 혹은 고물이다. 자연경관은 나름대로 특이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인문경관은 역사문화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관광객의 눈길을 끌어야 한다. 중국의 계림산수나 운남의 시쐉빤나(西双版納)가 자연경관이고 만리장성과 자금성 및 서안의 병마용과 비림 등은 인문경관에 속한다. 한국의 경우 제주도가 자연경관이고 천년고도의 경주는 인문경관이다. 중국 서안에 가면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도중 도시성벽이 한눈에 안겨와 고도라는 느낌이 확 안겨온다. 병마용과 진시황능묘, 비림, 화청지 등 관광지를 유람하면 진시황이 떠오르고, 당태종이 보이는 듯하고, 양귀비를 상상하게 된다.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구경하면 2천 년 전 진시황의 스케일이 떠오르고 자금성을 돌아보면 명·청역사가 회억된다. 리차드·닉슨이 1972년 북경을 방문했을 때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보고 “중화민족의 깊이와 넓이를 알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고도라면 역사적인 숨결이 살아 있어야 한다. 유럽에 가도 신전이나 궁전이 바로 고도를 증명하며 아울러 그 민족의 역사를 증명한다. 경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웠고 935년 제56대 경순왕이 왕건에게 종묘와 사직을 바칠 때까지 8년이 부족한 천년의 고도이다. 물리적인 역사는 분명하지만 오늘날 관광객이 그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유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마총, 첨성대, 안압지, 김유신장군묘, 분황사, 국립박물관, 불국사, 석굴암 등이 경주의 관광코스인데 다 구경하고 나서 천년의 고도가 살아 숨 쉬는 것을 피부로 확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황룡사가 살아 있다면, 만약 옛 신라궁궐이 잔존해 있다면 그나마 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약소민족으로서 천 번에 이르는 외침에 의해 고대문물이 회손 되고 약탈당하는 뼈아픈 역사를 겪어왔다. 경주도 이와 같은 역사맥락에 의해 천년고도가 숨이 끊겼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구(購)도 관광내용 중 중요한 요소이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먹고 나면 없어지기 때문에 남는 것이 없다. 관광하여 물리적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특산품이나 기념품을 구입하여 보존하거나 타인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현대관광은 코스요금을 줄이고 고객의 쇼핑으로 이익을 남기는 장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중국관광은 고객쇼핑이 지나쳐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어찌되었든 이에 의존해 외화를 척척 벌어들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관광은 서울명동에서 화장품과 의류쇼핑이 잘되고 있는 외에 기타 구(購)가 활성화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관광의 경우 구(購)가 말이 아니게 죽어 있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경주시내에 경주빵가게가 백여 개가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거리마다에 물론이고 관광지마다 경주빵가게가 다닥다닥하게 줄지어 있다. 이것이 경주관광에 있어서 유일한 쇼핑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빵이 경주의 대표브랜드인 것은 좋지만 먹고 나면 사라져 버려 기념으로 남길 수가 없다. 천년고도로서 옛날 신라를 알리는 특산품이나 기념품이 없다는 것은 정말 유감이다. 오(娛)는 오락이다. 태국에 가면 전통태국무술을 볼 수 있고 트렌스젠더(人妖)의 문예공연을 관람할 수 있고 여성생식기기공표현을 관광코스로 지정하여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중국에 가면 서커스를 보고 발안마를 받는 코스도 있는데 이는 관광에 있어서 오락이다. 오락코스를 만드는 것은 고객의 호주머니 돈을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손님이 즐거우면 돈 파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천년고도의 경주는 오락이 전무하여 관광이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1993년 필자가 태국관광을 다녀왔다. 사실 태국은 자연경관이나 인문경관이 별로다. 그런데도 5박6일 관광코스를 만들고 식·주·행·유·구·오가 유기적으로 잘 구비되어 손님을 즐겁게 한다. 경주는 천년고도이고 태국에 비해 볼거리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구·오 등 관광의 주요 삼대요소가 부실해 국제관광객 유치를 활발하게 진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중국동포타운신문 201호
214    차이나타운이 조선족에게 미친 영향 댓글:  조회:6541  추천:25  2011-06-16
차이나타운이 조선족에게 미친 영향     평일 저녁 22:00부터 23:00사이 서울 지하철7호선 남구로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가 많은데 십중팔구는 조선족(지금은 한족도 일부포함)이며 다수가 여성이다. 이들은 강남지역을 비롯해 서울 여러 곳의 음식점에서 퇴근하여 귀가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풍경은 대림역, 가산디지털단지역(가리봉역), 구로역, 독산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주말이면 가리봉시장 골목과 대림 중앙시장 거리는 자정시간까지 조선족들로 욱실거리고 있다. 여기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다. 조선족이 집결해 사는 곳엔 조선족을 상대로 발행하는 무료 신문(20종 신문이 있음)이 많이 배포되어 있고, 행정사사무실, 여행사 및 조선족을 상대로 하는 교회와 여러 단체들이 즐비하게 많다. 그리하여 이곳에 사는 조선족은 새로운 정부동포정책을 비롯해 출입국관련정보를 빨리 알 수 있고, 고충이 있으면 해당 업체를 쉽게 찾을 수 있고, 하다못해 외국인등록증연장수속이 편리하고, 비행기티켓을 구하기가 아주 편리한 이점이 많다. 한편 조선족 집거지에 사는 분들은 한국문화에 적응이 어렵고 소질제고에 문제가 많이 존재하고 있는 폐단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에 수년간 살다가 고향에 가면 우스운 일에 부딪칠 경우가 있다. 도시에서 길을 건널 때 한국생활에 적응되어 횡단보도를 살펴 찾아가면 당지사람들은 바보로 본다. 중국에서는 굳이 횡단보도가 있는 곳에 갈 필요가 없이 그냥 무단횡단하거나 가령 횡단보도라 할지라도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일이 한국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가리봉시장 골목에 조선족이 많이 모이는데 타지방에서 이곳에 오는 조선족은 삼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지키고 있으면 맞은편에서 마중 나온 사람이 기다리지 말고 빨리 건너라고 소리친다. 실제로 이곳 사람들은 빨간불이 켜져도 무시하고 건너고 있기 때문에 신호등은 있으나마나다. 부부가 함께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삼거리근처에서 10여 년 동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은 처음엔 못마땅해 제지하다가 나중에 자기 자신도 물들어 무의식적으로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근 수년간 일부 한국 언론이 흑사파의 개념도 모르고 조선족 집거지를 마치 범죄의 소굴로 모는 듯한 기사를 발표했다. 이에 필자도 반박기사를 쓴 적이 있다. 물론 일부 한국 언론의 기사들이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한편으로 살펴보면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에 범죄행위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2010년 서울구로경찰서에 신고 된 조선족이 저지른 형사사건만 76건이며 9할 이상이 폭행사건이다. 사건발생 단서를 살펴보니 절대다수가 음주에서 비롯되었다. 술을 마시면서 타인이 자기를 본다고 시비를 걸고 때리고, 옆 상에서 떠든다고 싸우고, 어깨를 부딪쳤다고 패는 등 하여튼 싸움거리가 되지 않는 걸 갖고 폭행사건을 저지른다. 이 외에 택시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주먹을 쓰고,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 사소한 일로 자존심 다툼을 하다 나중에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행각을 벌인다. 사건의 8할 이상이 조선족이 자기네끼리 싸운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이 하도 시끄러워 일부 사람들은 집거지를 떠나 조선족이 드물거나 아예 없는 곳, 즉 한국인 속에 이사 가는 경우도 있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같은 한국 땅에서 살고 있으나 비집거지의 조선족은 한국어를 빨리 배우고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하고 있는 반면에 집거지 조선족은 때를 벗지 못해 소질이 확연한 차이가 난다.   중국동포타운신문 201호
213    백청강의 효과 댓글:  조회:6587  추천:35  2011-06-06
백청강의 효과     지난 5월 27일 저녁 22시 한국고려대화정체육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한국MBC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그랜드파이널이 이태권이란 한국청년과 백청강이란 중국인(연변조선족)젊은이의 대결로 펼쳐졌다. 사실 결승전이 있기 전에 수많은 재한조선족이 백청강이 결승전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우승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 시청자투표가 70%나 차지하는데 관건시각에 한국인이 역시 한국청년 이태권에게 몰표를 줄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허나 사회자가 백청강이 우승자라는 발표가 쏟아지자 이런 유치한 생각은 정말 기우여서 멋쩍게 느껴졌다. 그날 시청자투표수는 68만이었다. 멘토 점수 3할이고 시청자투표가 7할인 점을 감안하고 실제 이태권이 백청강보다 멘토점수가 0.65를 앞선 것을 계산하면 백청강이 우승할 수 있은 것은 시청자투표가 적어도 40만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재한조선족 시청자투표수가 많게 잡아 3~5만이 된다고 치자 그래도 나머지 많은 수가 한국인이 투표한 것이 아닌가! 한국사회는 우리한테 편견 없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옹졸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반성해볼 사건이다. 물론 한국인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과 조선족이 한국인을 멀게 생각하는 벽이 백청강의 효과로 하루아침에 전부 해소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으리라 짐작되어 매우 고무적이다. 중국인은 이명박 대통령을 몰라도 장나라는 알고 있다. 한국인은 조선족 지도자를 모르고 있어도 백청강을 알고 있다. 중국에서 한류를 알리는데 장나라가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면 한국에서 조선족의 존재를 알리는데 백청강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젊은 층 다수는 조선족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다가 이번 한국 MBC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 프로그램에 조선족 백청강의 출현을 통해 많이 알게 되었고 그가 우승하는 바람에 더욱 많은 한국인이 조선족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또 하나의 백청강의 효과이다. 지난 20년의 코리안드림은 실로 상처투성이다. 부부이혼으로 가족이 해체되고 양부모가 신변에 없거나 혹은 편부모자녀가 나쁜 길을 걷는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백청강의 부모도 코리안드림의 바람에 뛰어들어 아버지는 한국에 온지 10여 년이 되었고 어머니는 얼마 전에 한국에서 수년간 체류한 적이 있다. 양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성장한 백청강은 여느 아이들처럼 나쁜 길을 걷지 않고 꿈을 키웠고 그 꿈을 위대한 인간승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백청강이 우승하는 그 자리에 그의 부모가 나란히 지켜보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백청강의 가족이야말로 진정 코리안드림의 성공케이스며 수많은 조선족가정이 따라 배워야할 본보기다. 다 아시다시피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3D업종에 종사하고 있고 음식점, 간병,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설령 중국에서 교직에 있었거나 언론에 몸담았던 엘리트들도 한국에 와서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역시 막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결과는 한국사회가 조선족을 배타하는 현상에 의해 초래된 것도 있거니와 조선족자체가 새로운 노력이 없이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하는데서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족도 이젠 한국에서 노력만 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백청강의 효과에 의해 생겨났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특히 한국에 진출한 젊은 조선족청년들이 꿈을 가지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조선족청년 백청강이 한국에서 200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하리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허나 그의 꿈이 실현되었고 그의 성공이 현실로 나타났다. 조선족젊은이들은 백청강을 따라 배워 꿈을 갖자. 꿈이 생기면 반드시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자. 중국동포타운신문 200호
212    차이나타운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댓글:  조회:6167  추천:45  2011-06-02
차이나타운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실례되는 말이 되겠지만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다. 그 일례로 차이나타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동남아와 미국의 차이나타운은 그렇다 치고 속이 좁은 일본마저도 차이나타운이 흥성하고 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이 차이나타운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만 명이 넘는 한국의 화교는 다수가 산동반도 출신이며 그들은 광복 이후 한국과 한국인으로부터 정치적·경제적으로 제한을 받았고 인격적 질시와 무시를 받으며 살아와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인접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따스한 안식처가 없이 불편하게 지내왔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특히 중한수교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많아짐에 따라 인천에서 차이나타운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조선족이 집결해 사는 가리봉, 대림, 안산원곡동 등 차이나타운에 비해 시간적으로 늦게 형성되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중한교류의 필요에 따라 인위적인 계획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면 기타 차이나타운은 조선족이 한국에서 생존의 몸부림에 의해 계획 없이 자연스레 이뤄진 것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 두 부류의 차이나타운이 세워진 배경이 다르다 보니 한국인이 바라보는 눈길도 자연히 다르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중국전통문화를 복합적으로 한국에 전파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에 한국인은 불편 없이 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타 차이나타운은 중국음식문화가 한국에 전파하는 역할이 조금 있을 뿐 기타 역할이 미비하고 오히려 조선족(현재는 적지 않은 한족들이 섞여 살고 있음)이 한국인에 비춰진 이미지가 나쁜 효과를 초래하고 있어 부작용이 크다. 가리봉동을 예로 들면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한 조선족이 값싼 방을 구하려고 이곳에 찾아오고 그들 절대다수는 불법체류였다. 첫 시작부터 한국인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불법체류 무리였다. 이곳 조선족은 한국 땅에서 출발부터가 불안해 자기네끼리 모이면 술을 잘 마시고 떠들고 싸우고 폭행하고 심지어 살인사건도 종종 일으켰다. 2000년대 중반까지 이곳 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하루건너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한국인의 인상속의 가리봉은 조선족의 범죄자들이 살고 있는 온상으로 비쳐졌다. 물론 다수 조선족은 이곳에서 점잖게 살아가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에 의해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봉동의 원주민들은 공돌이·공순이들이 비어놓고 떠난 쪽방을 조선족들이 메워주어 감지덕지였다. 조선족을 상대로 식품가게를 운영하거나 노래방 등 유흥업소 업주들은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이와 반면에 한국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상인들은 조선족이 가게를 찾아오면 중국에서의 복잡하게 떠들고 싸우는 문화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반감을 갖게 되었고 그에 적응하지 못하여 나중엔 가게를 그만두고 타지역에 이사 가는 폐단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가리봉시장 골목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한국인 상인이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가리봉시장 골목에 24시 운영하는 한식점이 있다. 아침 6시에 조선족 2명이 가게에 와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점심이 지날 때까지 마시고 있었다. 얼핏 술병을 세어 보니 대여섯 병이 되어 보인다. 술에 취하자 떠들어 시끄럽다. 주인이 그만 마시고 자리를 뜨라고 권하자 시비가 붙었다. ‘내가 나의 돈으로 먹는데 당신(주인)이 뭔데 가라마라.’는 배짱이다. 주인이 경찰을 불렀다. 경찰이 사건의 전후과정을 들어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중국인(한국인은 조선족을 중국인이라 함)이 시끄럽다고 불평부리면 이곳에서 장사할 생각을 접는 것이 좋다.”
211    차이나타운이 왜 형성되나? 댓글:  조회:8852  추천:46  2011-05-13
차이나타운이 왜 형성되나? 인류문명은 그 형성토대와 특징 및 성격에 따라 나눔법이 각양각색이다. 필자는 기왕의 인류문명의 나눔법에 없는 발상을 해보았는데, 즉 두뇌문명과 정의문명(맘의 문명과 동일한 의미)으로 나눠본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뇌와 맘의 씀씀이가 모두 필요한 것이나 두뇌 중심을 위주로 삶을 영위하느냐, 아니면 맘의 중심을 위주로 삶을 영위하느냐에 따라 두뇌문명과 정의문명이 생겨난다. 따라서 두뇌문명이 주로 기독교문화권이라면 정의문명은 주로 유교문화권으로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인류역사는 각양각색의 문명에 의해 이합집산이 생겨났지만 그 문명에 따라 나타나는 표현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유목문화에 의해 생겨난 두뇌문명의 소유자인 서양인과 유태인 등은 이주에 직면해서 자기 문화를 지키면서도 타자세계에 쉽게 적응하고 융합된다. 이와 반대로 농경문화에 의해 생겨난 정의문명(유교문화권을 지칭함)의 소유자인 중국인과 한국인은 이주에 직면하면 타자세계와의 적응이 어렵고 녹아들지 못해 토착인과 마치 물과 기름처럼 분리현상이 극명하여 어울리지 못한다. 이른바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의 실례를 보면 두뇌문명의 소유자인 다문화집단이 모여 오늘의 미국을 이뤄냈다. 이 두뇌문명의 다문화집단에 정의문명의 소유자인 동양의 중국인과 한국인이 진출하면 그 세계에 적응이 어렵고 쉽게 녹아들지 못해 자기네끼리 뭉치는 이른바 차이나타운과 한인타운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한다. 미국에 일본인이 적지 않지만 그들은 같은 유교문화와 한자를 공유해온 중국인과 한국인에 비해 정이 약하기 때문에 타자세계에서 자기네끼리 뭉치는 현상이 차하다. 그런고로 미국에서 저팬타운이 차이나타운과 한인타운에 비해 흥성하지 못하다. 중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정이 많고 한국인이 중국인에 비해 정이 더 많다. 필자는 우리민족을 정의민족이라 부르고 싶다. 미국에서의 차이나타운과 한인타운이 각자 자기네 민족전통문화를 그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반대로 타운이 흥성하면 흥성할수록 중국인과 한인이 그 사회 속에서 고립적인 삶을 보내는 역작용도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문명이 농후하면 농후할수록 자기네 울타리 안에서는 정이 넘치고 있으나 타자세계에 대한 배척도가 강하다. 현재 한국에서의 차이나타운은 엄밀히 말하자면 인천의 차이나타운이 진짜 중국인(노화교와 신화교를 포함)을 대표하는 타운이고 가리봉과 대림 같은 차이나타운은 엄밀히 말하면 조선족타운이다. 그렇지만 형성초기에 조선족의 존재는 중국이란 나라와 밀착성이 강해 그냥 차이나타운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한국에서의 조선족타운은 조선족이 정이 많기 때문에 타향에서 자기네끼리 뭉치기 좋아하는데서 쉽게 형성되고 쉽게 흥성해졌다. 유감스런 것은 조선족의 정의문명이 타자세계를 대하는 맘의 씀씀이가 아주 인색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족이 한국사회에 쉽게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단해본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9호
210    한국아이를 중국아이로 만들려하다니 댓글:  조회:8085  추천:48  2011-04-29
한국아이를 중국아이로 만들려하다니 중국 흑룡강성에서 온 김모 여인(38세)은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하여 자녀 둘을 낳고 사는 데 요즘 그의 한국인자녀가 중국아이로 전락될 위기에 몰려 가슴을 동동 구르고 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김모 여인은 1998년 유학생비자로 한국에 입국하였는데 유학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였다.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 취직하던 중 2001년 3월경 한국인 정모(39세)를 사귀게 되었다. 둘은 처녀총각신분으로 결혼을 염두에 두고 동거에 들어갔다. 2002년 5월 아들애를 낳았으나 불법체류신분이라 혼인신고도 못하고 있어 아이를 남편의 친척호적에 올렸다. 2004년 6월 또 둘째를 출산했으나 여전히 체류신분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남편의 친척호적에 올렸다. 한국아이를 둘씩 낳았지만 불법체류신분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에게 봄이 왔다. 자진신고로 중국에 출국하면 벌금도 없고 입국규제도 면제되고 한국인배우자 혹은 친척초청으로 재입국이 가능하다는 법무부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먼저 혼인신고 하고 결혼식까지 거행하고 나서 가벼운 맘으로 중국에 귀국했다. 김모 여인이 귀국한 후 남편이 아내의 초청편리와 앞으로 안정된 가정을 위해 두 자녀를 유전자검사를 통해 자신의 호적에 자녀로 등록을 마쳤다. 이듬해 아내도 두 자녀와 유전자검사를 거쳐 생각대로 무사히 결혼비자를 발급받아 재입국하게 되어 가족이 안정되고 단란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배우자와 결혼한 외국인배우자는 한국에서 실제 체류가 만2년이 넘으면 국적 혹은 영주권 취득신청자격을 부여받는다. 자녀 둘이나 낳고 사는 김모 여인은 귀화신청서류를 작성해 갖고 당당하게 남편과 동행하여 출입국을 방문했다. 들뜬 심정을 안고 출입국을 찾았던 부부는 서류를 검토하던 직원의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청정한 날씨에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았다. 출입국직원이 귀화신청서류접수를 거부하면서 왈, “불법체류신분으로 자녀를 낳았고 호적을 타인 앞으로 올렸다가 찾았기 때문에 자녀를 중국에 보냈다가 아버지가 다시 초청해서 한국에 데려오라. 그때 가서 귀화신청이 접수가 가능하다.” 자녀 둘은 한국에서 출생했고 비록 호적을 타인 앞으로 올렸으나 어찌되었든 한국아이다. 만약 두 자녀를 중국에 보낸다면 한국국적을 취소하고 중국국적으로 변경한 다음 초청으로 한국에 데려와 다시 한국국적을 회복해야 한다. 일제 때 만주 땅에 갔다가 한중수교 이후 일세들이 고국에 돌아와 한국국적을 회복하는 그런 모양새도 아니고, 한국에서 출생하고 한국국적인 아이들을 한국국적을 버리게 만들고 중국국적으로 내몰려는 출입국직원의 행위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처사이다. 대한민국은 저출산국가로서 정부에서 이런저런 다출산정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를 대변하는 관공서 직원이 한국아이를 중국아이로 내몰다니? 중국동포타운신문 198호
209    차이나타운의 利와 弊 댓글:  조회:7737  추천:41  2011-04-29
차이나타운의 이(利)와 폐(弊) 기회연재 1. 차이나타운의 이와 폐               2. 차이나타운이 왜 형성되나?               3. 차이나타운이 한국인에게 미치는 영향               4. 차이나타운이 조선족에게 미치는 영향 인류역사에서 이주문화가 생겨난 이래 이주민들은 민족문화(里制文化:원시적 마을문화)를 바탕으로 집거지를 형성하고 생활을 영위해왔으며, 그 집거지를 영어로 ‘타운(TOWN)’이라 한다. 중국에서의 우리민족의 경우 연변을 조선인타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물론 산재지구 조선족마을도 소형의 타운으로 인정된다). 중국 땅에서 조선인은 타운을 이루고 한반도의 민족문화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생활을 영위해왔다. 이러한 흐름은 민족문화 향수 속에서 편한 삶을 살아가는 자부심이 있는 반면, 타자(중국인사회) 속에서의 적응을 어렵게 만들고 타자세계에 녹아들지 못해 소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폐단도 있다. 한편 아무리 타운을 형성하고 선조들의 민족문화를 고수하면서 살아왔지만 필경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거주국의 문화, 사상, 이념에 물들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결국 조선족은 한국인과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집단으로 구분된다.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은 1990년대 중반부터 그 수가 급증함에 따라 서울 가리봉동, 독산동, 구로동, 대림동, 안산, 안양 등 곳에서 60·70년대 한국산업화시대 공돌이 공순이들이 살다 빠져나간 빈 쪽방들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따라서 차이나타운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한국 땅 차이나타운을 살펴보면 먼저 중국음식점이 생겨나고 따라서 고향식품을 판매하는 중국식품가게들이 즐비하게 생겨났다. 이국땅에서 고향음식을 먹을 수 있고 고향식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한 것이나 따지고 보면 개개인이 어릴 적 먹던 음식기호를 지켜내려는데 불과하다.” 중국인 석학 임어당의 명언이다. 이국땅에서 고향음식과 고향식품을 제공하는 차이나타운은 조선족에게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차이나타운이 더욱 흥성해진다. 한국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혹독한 고독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다가 차이나타운에서 친척, 친구, 동창들과 만나 고향음식을 먹으면서 회포를 푸는 것 또한 크나큰 희열이며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차이나타운은 고향 같은 분위기가 짙어 조선족에겐 이국땅에서 새로운 안식처가 되는 이점이 있는 반면에 다음과 같은 폐단도 있다. 우선 가리봉동과 같은 차이나타운에 들어서면 길옆 가게간판이며 다니는 사람들 및 익숙한 조선어와 중국어가 쏴라쏴라 쏟아져 나온다. 한국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중국연길의 한 골목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중국음식점들에 가면 손님전체가 중국인(조선족과 한족) 일색이다. 음식 먹으며 큰소리로 요란하게 떠들썩하는 분위기는 연길의 여느 음식점과 똑 같다. 하다못해 두 세상 손님이 있어도 동네가 떠들썩하게 요란하다. 조용한 한국음식점의 분위기는 상상도 못한다. 술에 취하면 자기네끼리 싸우고, 옆 손님과 걸고들며 싸우고, 모를 사람이 마주봐도 싸우고, 주인이 서비스 요리를 올리지 않는다고 싸우고, 너무 요란해 서빙아가씨가 듣지 못하면 간나새끼라고 싸우고, 외상놀음 하자고 싸우고, 계산할 때 꼬리를 떼라고 싸우고, 하여튼 싸움이 빈번하다. 한밤중의 호프집들의 싸움은 쩍하면 병으로 컵으로 칼로 치고 찌르고 피터지고 쓰러지고 영 말이 아니다. 주말이면 가리봉시장 골목은 조선족 주정배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다. 가리봉삼거리 신호등은 저녁이면 있으나마나다. 여느 중국의 도시 신호등과 똑 같이 지키지 않고 무단횡보 한다. 차이나타운에 사는 조선족의 가장 큰 폐단은 자기네끼리 얽히고설키고 중국에서의 생활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월이 길어지면 결국 한국이란 나라에서 살면서도 불구하고 한국인 속에 들어가지 못해 한국의 선진문화를 흡수하지 못하여 한국인과의 벽이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폐단이 결과적으로 조선족이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아도 한국인으로부터 소외당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요인이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주민은 타자세계에 적응하는 자는 성공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실패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진단이다. 차이나타운의 이와 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208    영주권자 친척초청 혼란스럽다 댓글:  조회:8566  추천:50  2011-04-15
영주권자 친척초청 혼란스럽다.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하여 살고 있는 자, 한국인배우자의 귀책사유로 이혼한 자 및 결혼으로 국적취득한 자의 자녀는 2년 전만해도 국적취득자격만 부여되었다. 한국국적 취득자는 친척초청이 가능하고 미국이나 일본 등 나라에 가는 것이 수월한 등 이점이 있는 동시에 폐단도 있다. 중국 측의 퇴직금과 양로보험 혜택을 포기해야 하고 부동산 매매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 한국정부 입장에선 국적취득자가 많이 증가되면 될수록 그만큼 정부부담이 증가된다. 이런 폐단을 최소화하여 누이 좋고 매부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곧 국적취득을 줄이고 대신 영주권취득을 증가하는 것이다. 영주권취득자도 초기엔 친인척초청이 가능했다. 기술연수교육정책이 실시된 이후로 피초청자는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기술연수이수과정을 거쳐 D-4→H-2로 변경할 수 있었다. 초청할 수 있는 비자종류는 F-5-E, F-5-7이며 한국인배우자와 혼인하여 영주권을 취득한 자들은 F-5-B 혹은 이혼자의 다수가 F-5를 발급받는다. 2011년 11월부터 출입국관리법 시행령이 개정되어 영주권자격을 취득한 재외동포도 국적취득자와 동일하게 친족을 방문취업(H-2)자격으로 초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건은 초청자가 30주세 이상이고 피초청자는 25주세 이상일 경우는 방문취업(H-2)비자로 초청된다. 그런데 현재는 결혼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자는 친인척초청이 불가능해졌다. 초청할 수 있는 비자종류는 F-5-E, F-5-7인데 결혼자는 현재 F-5-B로서 초청자체가 안 되고 이혼자는 다수 F-5로 제한되어 있어 배우자(재혼)초청만 가능할 뿐 기타 친인척초청은 불가능하다. 결혼자가 한국체류 2년이 되어야 국적신청 혹은 영주권신청자격이 부여되고 신청일로부터 또 2년 내지 2년 반이 걸려 입국일자부터 계산하면 4년 내지 4년 반 걸리는데 비해 영주권은 체류 2년 후 신청일로부터 6~7개월, 전후 2년 반 정도 걸린다. 시간도 단축되고 친인척초청이 가능하여 국적보다 영주권취득신청자가 훨씬 많아졌다. 헌데 최근 들어 이들이 친인척초청을 할 수 없는 F-5를 다수 발급받으니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연길에서 온 황 정자(가명 39세) 씨는 4년 전 한국인과 결혼했고 1년 지나 아들애까지 낳고 잘 살고 있다. 2년 지나 국적취득조건이 되지만 한국 오기 전 중국에서 사회보험에 가입하여 10년 동안 납부해온 것을 포기하려니 아쉽고 또 본인의 명의로 된 아파트 한 채가 있어 국적취득신청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주권취득정책이 시행되어 중국 측의 사회보험도 살리고 아파트도 살릴 수 있고 하나뿐인 남동생의 초청이 된다고 하여 영주권을 발급받았다. 얼마 전 초청서류를 밟으려고 관련업체를 찾았더니 F-5-B비자여서 초청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정책이 바뀔 줄 알았으면 국적취득을 신청하지 왜 영주권을 선택했겠느냐면서 후회스럽다고 한다. 결혼으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영주권취득신청 혹은 국적취득한 자의 자녀가 영주권신청을 제출할 경우 초기엔 F-5-E 혹은 F-5-7로 발급받았었는데 현재는 F-5-B 혹은 F-5로 나온다. 이 네 종류의 비자는 어떤 구분이 있으며 무슨 기준에 의해 다르게 발급하고 있는지? 상기 사례와 비슷하게 지난 몇 년 동안의 법무부중국동포정책을 살펴보면 일관성이 없이 변경되는 경우가 많아 동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7호
207    老子聖像단상 댓글:  조회:7348  추천:38  2011-04-02
노자성상(老子圣像) 단상 중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하·상·주 단대공정 거대 프로젝트가 가동된 이래 현재까지 중화민족시조와 중화문화조상을 깍듯이 모시고 있다. 우선 미국자유여신상 높이를 초과하는 黃帝성상(106미터)이 있고 이와 비슷하게 염제성상과 치우성상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삼조당(三祖堂)’건설 프로젝트다. 2010년에는 공부가(孔府家) 고향 곡부를 비롯해 지방 여러 곳에 모셔졌던 공자를 중국심장부 천안문광장에 성상으로 모셨다. 2011년 3월 18일 하남성 영보시 함곡관에서 노자성상 낙성의식을 가졌다. 노자성상은 높이 28미터, 무게 60톤, 총투자가 2588만 위안이 들었다고 한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서 본명은 이이(李耳)이고 자는 담(聃)이며 하남성 고현(苦縣:지금의 鹿邑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이 아닌 함곡관에 성상을 세운 이유는 이렇다. 노자는 초나라 수장실사(守藏室史: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중앙도서관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공자에게 예의를 가르칠 만큼 학문수준이 대단했다. 그런 그가 무너져가는 주나라정치에 불만을 품고 현세를 도피하여 서방으로 발길을 옮기던 중, 함곡관에서 후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남긴《도덕경》을 집필했다. 또 함곡관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노자성상을 세운 것은 군사문화와 노자문화를 일체(一體)로 아우르는 인문경구를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중국문화를 도교와 유교(불교가 유입되기 전의 토착적인 것) 양대 산맥으로 보고 있는데, 도교는 모계사회의 잔재문화이고 유교는 부권제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문화였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선 도교 후 유교이다. 중국학자들은 도교의 원조를 황제(黃帝)라 보고 한나라 때부터 황제와 노자를 묶어서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 불렀다. 또 한나라 때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삼대계열서(황제·소문경, 황제·영추경, 황제·소녀경)는 모두 황제와의 문답체로 되어 있다. 중국의학은 도교에서 유래되었고 도교의 원조는 황제이며 노자는 황제 때부터 흘러온 ‘도학’을 재정비하여 도를 만물의 본체라 보았고 무위자연론을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의 유지를 계승했다 하여 유학을 공맹지도라 부르듯이 장자가 노자의 뒤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노장학파’ ‘노장철학’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노장철학’의 핵심은 ‘무위자연론’이다. 한나라 초기 난세를 수습하는 치국방침이 곧 ‘무위자연론’이었고 당나라 초기에도 역시 ‘무위자연론’을 실시하여 태평성세를 이뤄냈다. 노자로부터 기원된 도교는 중국정치, 철학, 사상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예술, 기공, 무예, 의학, 과학, 방중술, 민속, 풍속에 이르기까지 도교를 근저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왔다. 임어당은 “중국인은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따르고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노신은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노자는 공자 버금으로 추앙 받아 마땅하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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