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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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 모습은? 댓글:  조회:7799  추천:40  2008-11-28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 모습은?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전하는 말에 의하면 중국산동성의 한 시골마을에서는 60여 년 동안 마을 사람들끼리 다툼이 없었고, 그 어떤 분쟁이 일어난 적도 없이 평화로우며 노인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어른을 존경하며 타인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도와주는 등 화기애애하게 지내왔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도연명(陶淵明)이 그리던 도화원의 모습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한집안 식구끼리도 마찰이 생겨 다툴 수가 있는데 하물며 남과 남이 모여서 사는 마을에서,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60여 년 동안이나 말이다. 중국현대 일부 유학자들이 이 소문을 듣고 직접 그 시골마을을 방문하여 당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았는데 답이 의외로 간단했다고 한다. 즉 60여 년 전 한 유명한 유학자가 오래 동안 머물면서 보수도 받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유교경전을 강의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60여 년 전의 그 시골마을 사람들이 들었던 유교경전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받들고 지키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 시골마을 사람들의 삶을 통해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이 곧바로 그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유교의 어떤 힘이 그들로 하여금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이 화기애애한 삶을 영위하게끔 만들었을까? 필자는 그것이 바로 인의예지신 오상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인(仁)’을 한국학자들은 어질다고 번역하는데 이는 애매모호한 번역이다. 그래서 필자는 ‘인’을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예수가 본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순한 계약관계였던 것을 사랑의 관계로 전환시켜놓았듯이 공자는 사람마다 먼저 내 몸을 다스리고 가족 내의 ‘인:사랑’을 사회에 넓히고 이렇게 하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했는데 이것이 곧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이다. 인간이 평화를 이루고 평등을 이루자면 우선 먼저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맘을 갖춰야 한다. 예수의 사랑법은 동양인에게 있어서 실천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즉 예수는 나보다 못한 자의 발을 씻겨주라고 했으며 이것이 곧 진리라고 했다. <<성경 >>을 읽노라면 “쩍하면 쳐 죽여라, 저주를 받는다.”는 등 무시무시한 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법도 동양인에 비해 극단적이다. 예수는 나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이 시각 즉시 따라 나서라고 호소했다. 공자는 나의 문하에 들어오겠으면 부모와 처자식과 인사도 나누고 적당히 밥도 먹고 오라고 했다. 예수는 나보다 못한 자의 발을 씻겨주라고 한데 비해 공자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不所欲, 忽施於人).”고 했다. 예수는 타인을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베풀라고 했지만, 공자는 “내가 남한테 바라는 것만큼 남을 도와주어라.”고 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사랑법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실천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것이었던데 비해 공자의 사랑법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다. 그렇지만 공자의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교시를 실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사람마다 이 공자의 교시를 따르고 실천한다면 기필코 산동성의 그 시골마을처럼 60여 년 동안 아무 말썽이 없이 태평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는 중국인의 발명품이다. 기독교문화는 의는 있으나 예가 없다. ‘지(智)’는 지혜, 지식, 지능 등을 말하는데, 공자는 배움을 통해 군자의 도에 이르는 것을 지라 여겼다. 그다음 믿음이다. 인간사회에서 서로 서로 믿음이 없으면 소원해지거나 원수로까지 변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산동성의 그 시골마을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한결 같이 인의예지신을 잘 지켜왔기 때문에 60여 년 동안 도화원 같은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125    봉사(奉仕)와 복무(服務)는 어떻게 다른가? 댓글:  조회:6893  추천:60  2008-11-19
봉사(奉仕)와 복무(服務)는 어떻게 다른가?  중국과 북한에서는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심부름군’을 복무원, 복무원동지라고 하며, 상하계급과 관계없이 A가 B한테 무엇을 해주거나 헌신하는 것을 복무라 한다.  이 중국과 북한의 복무에 해당되는 개념을 한국에서는 봉사라 한다. 봉사는 일본의 한자어에서 유래되었으나 중국어족보에는 없는 말이고 일본인이 자체로 지어낸 어휘이다. 그렇다면 복무와 봉사는 어떻게 다를까?  복무는 상하계급적인 구분이나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봉사는 본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시중을 드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며, 이는 일본인의 신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200년 전, 일본사대국학자에 속하는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연구한 결과 “신도는 아래에서 위에로 흐르는 ‘카미(神)의 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와 같은 신도의 정신과 연관해서 “중국인과 조선인은 미개해서 ‘인’이 필요하나 일본인은 소질이 좋아서 ‘인’이 필요 없고 ‘충’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망발이긴 하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일본학자가 자기네 신도를 이해하는 입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즉 일본의 종교, 정치, 문화,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에서 상에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카미의 길이다.  고대 일본정치는 천황과 쇼오군의 이중통치구조였다. 천황은 쇼오군을 임명하고 쇼오군은 천황일가를 보호하는 동시에 지상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하지만 쇼오군은 자신이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행위를 통치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천황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라 간주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다른 나라 정치와 다른 점이며, 이것이 곧 일본인의 신도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봉건사회는 실제적으로 중국 주나라 봉건제와 유럽의 중세기 장원영주봉건제 및 일본의 장원영주봉건제 등 세 곳에만 봉건제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중국과 유럽의 봉건제는 왕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통해 점령한 이민족 혹은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친인척과 수하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제후 혹은 영주로 봉하면서 생겨난 것인데, 반해 일본의 봉건제는 최하층민들이 개척한 땅을 층층이 올리 ‘주군’에게 헌납한데서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장원영주봉건제마저 일본의 고유한 아래로부터 위에로 올리 흐르는 구조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아랫사람은 반드시 주군에게 맹세를 다짐하고 봉사한다. 설사 주군이 주군답지 못해도 신하가 주군을 떠나는 법이 없이 자신들이 해야 할 봉사의무를 완벽하게 한다. 신하들이 주군에게 철저한 봉사를 이행하기 때문에 주군들은 주군자격이 있게 처사하기에 백배의 노력을 기울인다. 일본인은 어떻게 아래로부터 위에로 올리 봉사하는 신도적인 개념이 형성되었을까? 일본은 예로부터 땅이 척박하고 메말라 농사를 지어먹을 만한 땅이 극히 적었다. 거기다 지진과 태풍의 피해가 자주 발생해서 생존이 매우 어려웠다. 극히 한정된 진(津)과 포(浦)의 변두리에서 경작지를 일구고 농사를 짓다보니, 또한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못하여 가령 단합하지 않고선 너도나도 살아남을 수가 없으므로 모두들 유능한 보스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는 정신이 뿌리 깊게 머리에 박히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이러한 아래로부터 위에로의 봉사개념이 일제 36년을 거쳐 우리민족에게 전달되었고 아직도 무분별하게 봉사라는 말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24    풍류문인과 청루여인들 댓글:  조회:7921  추천:49  2008-11-09
<풍류문인과 청루(靑樓)여인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   김정룡 kzl0917@naver.com   방송이나 출판매체가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 당송시(唐宋詩)와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어떻게 사회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을까? 중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기녀들이 유명작품을 널리 전파하는데 크게 한몫을 했다고 한다. 성당(盛唐)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왕창령(王昌齡), 고적(高適), 왕지환(王之煥) 세 사람이 함께 청루에 들렀다. 그때 마침 10여 명의 궁중악사가 네 명의 예기와 함께 주연을 열고 있었다. 네 명의 예기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 시인은 기생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서 누구의 노래가 많은지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당시 세 시인의 작품은 노래로 많이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한 예기가 왕창령의 작품을 노래했다. 왕창령이 기뻐했다. 다음의 예기는 고적의 작품을 노래하자 고적이 기뻐했다. 또 다른 예기가 다시 왕창령의 작품을 노래했다. 왕창령이 더욱 기뻐했다. 그러자 왕지환이 네 명의 예기 중에서 가장 용모가 뛰어난 한 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만약 저 예기가 나의 작품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평생 당신들과 시의 우열을 논하지 않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예기는 과연 왕지환의 <양주사(凉州詞)>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하는 멀리 흰 구름 사이로 올라가고, 만 길의 높은 산에 외로운 성 하나. 오랑캐 피리의 ‘절양류(折楊柳)’ 이별가를 어찌 원망하랴? 봄바람은 아직 옥문관을 넘지도 않았거늘! 청루의 여인들은 시를 읊었을 뿐만 아니라 남송의 명기 엄예(嚴蘂)와 같은 기녀는 춤과 노래는 물론이고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 등 문인들이 좋아하는 분야까지 두루 통달했으며 시도 잘 짓는 재녀였다. 그녀가 지은 <복산자(卜算子)>란 시를 감상해보자. “풍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전생의 인연이 잘못된 때문인가 보오. 꽃이 지고 꽃이 피는 것은 자연히 때가 있으니, 모두 봄의 신에게 맡겨두세요. 가는 것은 끝내 가야하겠지만, 멈추는 것은 어떻게 멈추어야 할까요? 산에 핀 꽃을 머리에 가득 꽂을 수 있다면, 이 몸이 돌아간 곳은 묻지도 마오.” 청루여인들이 이렇듯 다재다능했기 때문에 풍류문인들은 그들을 지음(知音)으로 삼았다. 그리고 풍류문인들이 청루에 드나든 것은 단순히 그녀들과 잠자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안식처로 여겼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루는 고객들로 하여금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휴식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청루여인들의 품위가 높았기 때문에 황제조차 그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북송말기 풍류황제였던 휘종(徽宗)이 처음 이사사(李師師:당대의 가장 유명한 기생)의 집을 찾아가서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기까지에는 상당히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차가 나왔고, 차를 다 마시자 다시 과일이 나왔다. 과일을 먹고 난 뒤에는 산보를 하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다음에는 시장해져서 다시 야식을 먹었다. 야식 뒤에는 향을 섞은 물에 목욕을 했으며, 목욕을 끝내고 한참 동안을 쉬고 나서야 이사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사사를 만나고 나서도 휘종은 그녀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한 곡조 들었을 뿐, 이사사의 손가락 하나 만져보지도 못하고 궁궐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데도 휘종은 이와 같은 이사사와의 만남이 대단히 즐거워 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휘종은 이사사를 만나기 위해 지존의 체면을 무릅쓰고 궁궐부터 그녀의 집까지 땅굴을 팠다고 한다. 풍류문인과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황제조차 기생들을 품위 있게 대했다는 것은 그녀들이 도도한 기품과 다재다능한 소질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서양기생문화는 남자들이 화대를 지불하고 옷 벗고 섹스만 하면 끝인데 반해, 중국의 청루와 같은 기생문화는 남녀가 서로 육체보다 마음의 소통에 비중을 더 두었다는 것이다. 허나 중국도 명나라 때부터 청루의 여인들과 같은 예기(藝妓)가 사라지고 색기(色妓)만 남게 되었다. 이는 기생문화의 퇴화이다.  
123    코미디 같은 글 댓글:  조회:7651  추천:46  2008-11-05
코미디 같은 글   요즘 한국 소설가 박명호의 만주일기가 한국 내 00사이트에 연재 중이다. 저자는 글 중 제4편<만주의 봉천, 심양 아이러니>을 아래와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심양역 역사(驛舍) 위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서울역과 흡사한 웅장한 돔 형식지붕 위로 해가 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해가 지다’는 이 도시의 이름(沈陽)과 기가 막히는 어울림이다. 아니, 차라리 아이러니에 가깝다. 인구 1000만 명에 가까운 만주 제일의 도시로 발전한 이 도시의 이름이 ‘해가 지다’는 지극히 패배적이고 감상적인 이름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심양의 옛날 이름이 ‘하늘을 받들다’는 뜻의 봉천(奉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째서 ‘하늘을 받든다’던 도시가 그 정반대의 뜻을 지닌 ‘해가 침몰하는’(沈陽)이라는 이름이 되었을까. ‘심양’이라는 이름에는 한족들의 배만민족주의(만주를 배척하는 민족주의)가 담겨져 있다. 사실 그들은 봉천뿐만 아니라 만주라는 이름도 사용하지 않는다. ······   이 구절을 보면 저자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즉 첫째 봉천을 舊稱, 심양을 新稱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둘째 심양이란 지명유래를 주관억측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고, 셋째 만주를 찬양하고 현재 중국을 비방하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심양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重鎭이었고, BC221년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36郡으로 나누고 심양을 요동군에 예속시켰다. 서한시기 심양은 이미 도시윤곽을 갖췄고 ‘侯城’이라 불렀고, 당나라에 이르러 ‘沈洲’라 개칭했다. 금나라 때 금태조가 심주를 공략하고 ‘심주’란 도칭을 계속 사용했다. 1296년 원나라 때 심주를 ‘沈陽路’로 고치고 遼陽관할에 넣었다. 심양은 沈水이북에 위치해 있는 까닭에 중국전통方位論 ‘山北爲陰, 水北爲陽’에 의해 심주를 ‘沈陽’이라 개칭했던 것이며 따라서 그때부터 심양이란 도칭이 史料에 등장하고 702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1643년 청태종 황태극이 심양을 ‘盛京’이라 개칭했고, 이듬해 북경에 천도한 후 심양을 ‘陪都’라 불렀으며, 1657년 청나라는 ‘奉天承運’의 뜻으로 심양에 ‘奉天府’를 설치하고 그때부터 심양을 봉천이라고도 불렀다. 1929년 장학량이 동북을 지배하면서 ‘봉천시’를 옛 이름인 ‘심양시’로 고쳐 놓았는데, 1931년 일제가 심양을 공략하고 다시 ‘심양시’를 ‘봉천시’로 바꿔놓았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심양이란 도칭이 702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비해 봉천이란 이름은 341년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 지명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그 유래가 있는 법이고 유래는 대다수가 전설에 의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당연히 심양이란 지명도 유구한 유래를 갖고 있고 이에 관련된 전설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심수(沈水, 강 이름)북안의 石嘴頭山 기슭에 沈哥라는 총각이 있었다. 그 해 심수가 갑자기 범람하여 사처에 홍수가 졌고, 본래 심수의 용왕인 三頭蛟의 작간이었다. 沈哥가 三頭蛟를 찾아 백성을 위해 악귀를 없애려고 결심했다. 바로 그때 東梅용왕의 셋째 딸 羊妹의 부모가 그녀를 외사촌오빠인 三頭蛟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부모 모르게 심수용궁에 친히 외사촌오빠의 성품을 알아보려고 달려왔는데, 三頭蛟는 한참 ‘童男宴’을 크게 베풀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나 沈哥를 도와 三頭蛟를 없애려고 결심했다. 그녀는 龍衣를 沈哥에게 입히고 “이 옷을 입으면 하늘에 날아오를 수 있고 불바다에 가서 태양오빠를 옮겨올 수 있으며 오로지 태양오빠가 三頭蛟를 태워버릴 수 있사옵니다.”고 아뢰었다. 沈哥가 불바다에 뛰어들어 몸이 타 연기가 나고 있었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태양을 지고 달렸다. 심수에 돌아왔을 때 三頭蛟는 羊妹를 필사적으로 물에 밀어 넣고 있었고, 그는 황급히 태양을 물에 향해 던졌다. 三頭蛟가 태양에 그을려 재가 되었으나 그도 더는 지탱할 수가 없어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羊妹가 다급해 “沈哥!”라 부르면서 강물에 뛰어들었다. 허나 그녀는 자신의 龍衣를 이미 沈哥에게 준 것을 까맣게 잊었다. 마을 사람들이 백방으로 심수에서 沈哥와 羊妹의 시체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심수북안에 비석을 세우고 “沈羊”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후에 이 비석을 중심으로 촌락이 수건되고 城池를 마련했으며 이곳을 ‘沈羊’이라 불렀는데, 마침 沈水陽面에 위치한 까닭에 후세사람들이 沈哥, 羊妹, 三頭蛟의 이야기를 모르고 ‘沈羊’을 ‘沈陽’이라 잘못 불러왔다고 한다. ‘沈羊’은 전설이고 ‘沈陽’은 심수양면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전설이든 심수양면이든 모도 ‘沈’은 심수란 강에서 유래된 것이지 결코 박명호 씨의 지적처럼 ‘침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심양이 ‘해가 진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느니,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한족들이 만주족에게 당한 패배의식에서 심양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느니, 옛날‘하늘을 받든다’던 봉천이 그 정반대로 ‘해가 침몰하는’ 뜻인 심양으로 바꿨다느니, 이 코미디라도 수준이하의 코미디 같은 글을 소위 소설가란 양반이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 개인 생각으로는 저자가 중국역사에 대해 무지한 탓이고, 유래가 있는 지명을 글자 그대로 ‘望文生意’하여 주관억측으로 자의적으로 코미디 식으로 풀이한 결과이고, 저자의 의중에 만주를 찬양하고 현재 중국 한족에 대한 편견이 마음속 구석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코미디 같은 글들이 발표되면 한국 내 독자들에게 피해 될 뿐만 아니라 중한관계에도 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알기를 바란다.
122    중역한(中譯韓)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 댓글:  조회:7807  추천:46  2008-10-30
중역한(中譯韓)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 자민족어를 타민족어로, 타민족어를 자민족어로 옮기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때문에 번역은 십분 정확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대학 교수의 평가에서 번역물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번역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원생들이나 하는 노릇, 혹은 교수가 번역을 맡아도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시켜먹고 자기 이름을 역자로 박아 넣기가 일쑤이다. 때문에 한국인의 번역수준은 매우 차하다. 아래에 세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첫째 천자문식의 번역한국도교학회 회장이신 최창록 교수는 도교계열서인 <<황제·내경>>과 <<황제·소녀경>>을 번역해냈다. 그런데 그의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한문을 한 글자씩 하늘 천, 따지 식으로 옮겨놓아 원의(原意)가 거의 전달되지 못해 한마디로 엉망이다. 이를테면 최창록 교수는 옛날 천자문 식으로 한문을 알고 있을 뿐 현대한어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가령 ‘立刻’이 현대한어에서 ‘즉시’라는 뜻을 글자 그대로 ‘세워서 조각하다’로 옮겨 놓았다. 또 ‘摸不淸’이 현대한어에서 ‘올바로 만지지 못하다.’라는 뜻을 글자 그대로 ‘깨끗하지 못한 것을 만지다’로 번역했다. 최창록 교수의 번역물은 전부 이런 식이어서 90%이상이 오역이다. 출판사는 오역이란 것을 모르고 교수분의 번역물이라고 그대로 믿고 출판한다. 이런 오역 투성인 출판물을 독자들이 보게 되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둘째 중국역사문화에 대한 상식 부족<<단군은 실존했다>>는 저자 강무학 씨는 ‘魯司寇’가 공자를, ‘周柱史’가 노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상식을 몰라 엉뚱하게 “寇가 본래 徒인 것을 선생(최치원)이 잘못 썼지 않느냐니, 주나라 역사를 꾸미는 것이 어쩌고저쩌고, 주나라 문화를 숭상해서 ‘주주사’란 언사를 썼다느니”, 하여튼 번역이 아예 개판이다. 그가 원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주의학자인 최치원을 오히려 사대주의자로 몰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들이 ‘단군의 실존’을 운운하니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셋째 언어 환경의 문제언어란 그 언어 환경의 체험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전공으로 대학을 나오고 석, 박사를 졸업해도 그 언어 환경의 체험을 해보지 못하면 타민족의 언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를테면 “車到山前必有路”란 속담이 있는데, 나의 딸애가 소학교 때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허나 <<장자>>라는 소설의 역자인 이선옥(李先玉) 씨는 서울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교 석, 박사를 나왔으나 이 속담을 “수레가 산에 오르려면 길이 있어야 한다.”라고 옮겼다. 원의가 한심하게 왜곡된 한심한 번역이다. 이 속담의 원의는 “수레가 산 밑에 이르면 길이 나지는 법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우리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한국인의 번역물을 읽어보면 “이것 아닌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거나 아예 머리를 가로 젓게 될 때가 많다. 일본인은 자신이 모르는 고전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파고들어 알고 난 다음 인용한다. 이것이 학자가 갖춰야할 자세이다. 그렇지 않고 한국의 일부학자들은 자신이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작정 남의 것이 맞는지 틀린 것인지도 모르고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리고 출판사들에서는 책을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관련된 전문가들을 청해 교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엉뚱한 번역을 그대로 내보내 애꿎은 독자들을 피해보게 만들고 있다.
121    한국에서 보는 연변의 의미와 가치(김정룡) 댓글:  조회:6932  추천:90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 한국에서 보는 연변의 의미와 가치김정룡 한국 신화보사 기자      오늘 모임의 주제는《중국 조선족에게 연변의 의미와 가치》인데, 현재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가 긴밀히 얽혀 있는 상황을 감안하여《한국에서 보는 연변의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이 제목을 선택하게 되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연변하면 조선족을 떠올리고, 조선족하면 연변을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연변은 조선족의 대명사’이다.   ‘연변이 조선족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은 고국인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인들의 인상 속에 한국에 온 조선족은 연변에서 온 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이런 각인이 있어 흑룡강성, 요녕성, 내몽골 등 산재지구에서 한국에 온 조선족도 자기네 고향을 말하면 한국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대답의 편리를 위해 그냥 연변에서 왔다고 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연변은 조선족의 대명사’인만큼 조선족인재도 많고, 민족을 대변하는 브랜드도 많다.  한국 내 중국동포타운으로 알려진 가리봉일대 음식점, 노래방, 호프, 미용실 등 자영업을 하고 있는 조선족 경영자들의 대다수가 연변출신이다. 따라서 연변을 대변하는 브랜드인 진달래냉면, 연변냉면, 초두부, 모두부, 콩장, 순대, 개고기 등이 인기가 높다. 이 면에서 볼 때 산재지구에서 한국에 온 조선족은 연변출신에 비해 자체 브랜드가 없고 경영자도 많지 못하다. 우스운 얘기지만 흑룡강성 아성시(조선족 5만명)에서 온 한 40대 후반 조선족이 초두부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이는 산재지구가 필경 조선족전통음식문화에 대해 요해가 부족하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상기조선족 특유의 브랜드를 한국 내에서 활발하게 경영함으로서 이국타향에서 당지 한식에 적응되지 않은 재한조선족에게 고향음식을 먹으며 살 수 있고, 음식문화도 풍부해져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또한 한국인들도 중국음식을 찾는 수가 늘어나고 있고, 동대문에서 조선족이 운영하는 양고기뀀점에 오는 고객 중 한국 사람이 많다는 뉴스가 보도된바도 있고, 나도 한겨레신문 기자를 따라 처음으로 대림역 근처에 있는 풍무뀀점에 가보기도 했다. 풍무뀀점 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용납좌석이 80석인데 보통 목,금,토에 만원이며 한국인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중국음식점, 조선족특색음식점, 양고기뀀점을 찾는 한국인은 주로 중국생활경험이 있거나 조선족과 결혼한 한국인배우자, 혹은 젊은 한국청년들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연변출신 조선족들이 언론부문에 근무하거나 사무실에 종사하는 수가 산재지구에서 온 조선족들보다 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국어판 신화보사는 사장이 도문 출신 조선족이고 직원 전체가 조선족이다. 한국 내 대기원신문, 看中國 등 간행물이 있으나 법륜공을 대변하는 신문이거나 혹은 정규화 된 신문이 아니다. 사실 연변 출신 조선족이 해외에서 정규화한 중국어판 신문을 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노화교 2만여 명과 재한 한족 12만 명이 자기네 말 신문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재한 연변출신조선족들이 이러한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 또한 치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재한조선족은 단합이 되지 않아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다. 즉 재한조선족을 대변하는 정규화한 단체가 없고 리더가 없다. 이 면에 관해 이유를 과거 저희가 이미 글로 발표했기 때문에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연변출신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 정도를 말하자면 취직 면접 볼 때 한국인 사장들도 연변출신 조선족을 꺼리고 있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연변출신들이 자신의 고향을 속이고 흑룡강성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예전에는 산재지구에서 온 사람들도 연변에서 왔다고 대답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연변출신이 사실을 말하면 창피하다고 속이는 이런 불미스런 일이 생긴 원인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연변출신조선족들이 한국 내에서 너무 약게 놀고,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있고, 둘째 특히 흑룡강성 조선족들이 예로부터 연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편견이 한국에 와서도 똑 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흑룡강성 조선족들이 연변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드는 사례가 허다하고 심지어 연변에 와서 살고 있는 흑룡강성 출신 조선족들도 실제로 한국인 앞에서 연변사람을 헐뜯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한국 생활에서 흑룡강성 조선족이 연변사람을 헐뜯는 사례를 직접 목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연변은 흑룡강성에 비해 경작지가 적어 인심이 박하고 정치 배경에 의해 사람들이 약아빠진 것만은 사실이고 대다수가 생존력이 강하고 머리가 빨리 돌지만 반면에 너무 계산적인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는 연변출신 조선족들이 반드시 고쳐야 할 단점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판단하건대 연변출신 조선족들이 한국 내 나쁜 이미지는 흑룡강성출신 조선족들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여튼 연변사람을 헐뜯고 다니는 데서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일이 어떤 계기로 어떻게 발생했던지 연변출신 조선족은 자신의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인간이 타향에서 자신의 고향을 속이고 산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다.     다음 한국 언론인과 개별 교수님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연변일보보다 흑룡강신문이나 길림신문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첫째 흑룡강신문과 길림신문이 연변일보보다 한국에 관한 보도거나 재한조선족의 흐름을 싣는 글이 많고, 둘째 흑룡강신문과 길림신문이 연변일보다 한국에 와서 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길림신문은 조선족코리안드림에서 발생한 희노애락을 담은 글을 80여편 실었고, 그것을《넘어야 할 산, 그것은 삶의 희망》이란 책을 만들어 출간했고, 중한수교1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했고, 재한조선족활동에 관한 인물탐방을 발표했다. 나는 연변일보가 흑룡강신문과 길림신문에 비해 어떤 제약성을 갖고 있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흑룡강신문이나 길림신문이 활발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조선족 수부에 있고, 조선족을 대변하는 연변일보가 활발하지 못한 점이 참 유감이다.    문학지도 연변 내 것보다 장백산잡지가 더 선호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산재지구에서 조선족문화가 활발하게 전개 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나 지나친 얘기이기도 하고 당치도 않는 말이 되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문화중심 이동론이 거론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다음 연변은 조선족을 대변하는 곳이고 따라서 기타 소수민족보다 문화, 체육 등 여러 방면에서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고, 이로 하여 조선족의 위상도 많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는 과거 묵은 터에서 이밥 먹던 얘기고, 현시점에서 보면 조선족의 문화는 세계화시대에 적응하는데 거리가 있다고 본다.     조선반도는 역사적으로 줄곧 변방문화였고, 이 변방문화를 전수받은 우리 후대들 역시 언저리문화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특히 10년 동란을 거치고 나서 우리 연변문화수준은 많이 파괴되었다.     인류사회는 주류와 비주류 문화가 있고 따라서 문화범식이 생겨났고, 비주류는 주류문화범식을 쫓아왔다. 서구는 고대그리스, 로마문화가 있었지만 AD4세기 이후부터 중동발 유태인문화로 문화범식이 바뀌었다. 유태인문화와 고대 플라톤철학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기독교문화가 2천년 동안 서구문화범식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이로 파생된 칼·맑스의 철학이, 중국이 말하자면 수천 년 동안 자체 문화범식을 갖고 있었고, 전체 동아세아에 문화범식을 수출하던 중국에 20세기를 거쳐 수입되면서 문화범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었다. 중국대가족의 일원인 조선족도 중국 새로운 문화범식을 그대로 따랐다. 결과 조선족은 자체 문화를 상실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졌고, 지금도 조선족은 문혁 때 전수받았던 문화범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변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낡은 문화범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고수한다면 우리의 앞날은 밝지 못할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이 우리보다 앞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주로 새로운 문화범식을 받아들인 것이 관건요소로 작용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 것을 지키는 전제에서 하루빨리 새로운 문화범식에 적응해야 하고 이것이 우리 조선족의 생존의 길일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연변대학 50대 중반 교수, 중국 내 여러 신문과 잡지사 편집과 기자분들이 정년퇴직 전에 한국에 온 수가 꽤나 되고, 그들도 한국에서 자신이 중국에서 배우고 다루어왔던 밑천을 활용하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아 좌절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 주요 이유는 새로운 사회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문화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연변이란 울타리 문화를 그대로 갖고 한국사회에서 활동하기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연변에서 많은 글을 써왔지만 그 수준이 한국사회에 맞지 않기 때문에 좌절이 더욱 심하다. 우리가 고국인 한국사회에 진출해서 자신의 장끼를 발휘하려면 이제부터라도 이 방면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 따른 이념문제, 언어문제, 사상문제 등 제반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연변의 사회풍기문제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상해나 심천에 가서 음식점, 노래방을 운영하는 조선족들의 말에 의하면 연변처럼 환보부문, 위생부문, 공상 세무부문, 심지어 경찰까지 자주 드나들면서 시끄럽게 구는 일이 매우 적어 편하게 영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연변을 떠난 사람들 중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으나 연변은 반드시 이 면에서 개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변을 떠나 코리안드림에 성공하여 돈을 번 사람들이 현재 대련, 청도, 북경, 남방도시에 집을 사놓고, 영업을 하는 수가 적지 않는데 역시 연변의 이러한 사회풍기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한국에서 자영업을 해본 사람들은 외부간섭이 아주 적어 편하게 운영하다 연변환경에서 자영업을 하자면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 아니고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느라 영업취미를 잃게 된다고 한다. 이 부류 사람들은 한국에서 영업을 그만두면 연변에 돌아갈 생각을 포기하고 중국 내 연해도시에 진출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돈을 번 연변출신들이 연변에 돌아와 자영업을 할 경우 외국인투자자에게 세금혜택 주는 것처럼 여러 정책상 혜택을 주어 될 수 있는 한 연변에 돌아오도록 그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조치라 생각한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인지상정이다. 고향이 매력이 있다면 굳이 타향에 진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 나가 있는 연변출신과 산재지구조선족들이 연변에 돌아오게끔 매력을 갖추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연변은 조선족의 대명사이다. 연변이 살아야 조선족이 살 수 있고, 연변이 사라지면 조선족의 존재의미가 상실될 정도로 조선족에게 있어서 연변의 의미와 가치가 중요하다 하겠다.                                                       2008.10.2 서울에서                            
120    모어의 유래와 조선어논쟁에 대하여 댓글:  조회:6284  추천:95  2008-09-16
母語의 유래와 조선어 논쟁에 대하여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1997년 여름 필자 일행 셋이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우리말로 너스레를 떨었더니, 기사가 “당신네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고 물었다.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요.”라고 했더니, 그는 연변오동축구팀을 들먹이며 반갑다는 표정이었는데, “당신네 母語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모국어란 말은 근세유럽에서 중세기 유일한 문자였던 라틴어가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과 다른 언문불일치현상에서 유래된 것이며, 영어로는 ‘마더 팅(mother tongue)’ 즉 ‘엄마의 혀’라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국어란 본래 ‘엄마의 혀’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태어나서 언어를 국가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혀를 통해 배운다는 사실, 고로 ‘엄마의 혀’를 ‘모국어’가 아니라 ‘모어’로 표현함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도올·김용옥, 저, <<여자란 무엇인가?>> 서문 참조). 일본과 한국에서 ‘모국어’라 하고 중국인은 ‘모어’라 하는데, 이는 일본과 한국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그늘 하(특히 한문의 영향으로 빚어진 언문불일치 현상)에 흘러오다가 중국을 앞지르기 시작해서 자기네를 중국과의 차별화를 내세우기 위해 ‘국’이란 용어에 무게를 두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네 말을 유일하게 ‘국어’라 표현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뿐인 것이 좋은 증거이다. 남한의 갑돌이, 북조선의 갑순이, 연변의 김정룡이 같은 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국가로부터 배운 언어가 아니라 각기 자기 엄마의 혀를 통해 배운 것이므로 모국어가 아닌 모어라 함이 십분 정확하다. 그런데 우리가 순수하게 엄마의 혀로부터 배운 언어는 세계 정치, 경제형세의 변화에 따라 싫든 좋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변화하게 마련이다. 쉽게 말하자면 힘이 약한 군체는 여러모로 힘이 센 집단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며 언어도 예외일 수가 없다. 조선족은 이주민으로서 조선반도에서 엄마의 혀로부터 배운 언어를 유대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지만 필경 약소집단이기에 부단히 대륙언어인 한어와 본가인 반도언어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의 본가는 남북이 쪼개져 있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매우 이질적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모어도 매우 혼란을 겪고 있다. 현 시점에서 조선족의 언어는 개혁개방 전보다 많이 변화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변화해야만 민족이 생존할 수 있다는데 대해선 의논의 여지가 없는듯하다. 문제는 엄마로부터 배운 조선어를 계속 살리는 전제하에서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조선족문인학사들이 나름대로 견해를 피력하고 있고, 더 뜨거운 논쟁을 위해 나의 생각도 말해보려 한다. 첫째 조선어를 한국어로 바꿔야한다는 주장에 대하여이 주장을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은 류연산 교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류연산 교수의 이 주장은 시기상조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현재 재한 조선족이 30만이 넘고 이미 한국에 장기체류하다 돌아간 수가 10만~20만이 될 거고, 단기비자로 한국에 왕래하는 조선족 수를 합치면 어마어마한 조선족이 직접적으로 한국어의 영향을 받고 있고, 중국 내 조선족 가정들에서 한국위성을 시청하고 있고, 한국도서의 유입으로 한국어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해방이후 하나의 체계를 갖춘 조선어를 한국어로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비현실적이다. 조선어와 한국어는 비록 같은 민족어이지만 A에서 B로 바꾸자면 이에 따르는 경제적 지출도 문제이거니와 더욱 관건 문제는 인재이다.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전부 한국인을 불러들여 교단에 세울 수는 없고, 현재 조선족교사들에게 아무리 한국어 훈련을 시켜도 그들은 죽었다 깨도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다. 류 교수는 연변대학을 제외한 다른 대학에서는 조선어 아닌 한국어과를 설치하고 있는 것을 이유로 드는데, 그들 대학에서 가령 교재는 한국 것을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하더라도 강의를 전부 한국 교수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와 유학했거나 국내 조선어전공 졸업자들인 조선족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를 완벽한 한국어라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인을 접촉하는 일을 해왔고 한국에서 독서를 많이 해 한국식으로 글을 쓰는 데는 문제없다. 하지만 말은 아직도 조선족 티를 벗지 못하고 있어 강의한다면 한국어도 아니고 조선어도 아닌 밥도 죽도 아닌 언어로 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 여러 대학 한국어과 조선족 강의자들이 가르치는 언어는 나는 한국어도 아니고 조선어도 아닌 그냥 우리민족의 모어일 뿐이라 나는 본다. 대학이 이럴진대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조선어를 한국어로 바꾼다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이라는 결론이다. 둘째 한국어수용반대 주장에 대하여세월의 변화에 따라 언어도 부단히 변화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사실이다. 현재 조선어논쟁에 있어서 일부 조선족 지식인들은 한국어 수용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들의 주장 중에 한국어는 잡탕언어로서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한국어가 잡탕언어라는 견해에 공감한다. 우리민족의 모어는 한어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와 어휘 중 70%이상이 한자단어이고 일본인처럼 한자에 대한 훈독이 없고 음독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은 음독마저 ‘리’를 ‘이’, ‘라’를 ‘나’, ‘류’를 ‘유’라 발음하는 두음법칙인지 뭔지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실제로 이 때문에 ‘柳’, ‘李’, ‘羅’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법정소송사태까지 있었다. 한국인은 이상하게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하고, 외래어 사용에도 내적으로 시비가 없는 것이 아닐 정도로 한국어가 많은 논란을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잡탕언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일본어도 平假名와 한자를 섞어 쓰고 片假名으로 외래어를 표기하고 일상생활에서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잡탕언어이지만 일본은 세계 두 번째로 꼽히는 선진국이고, 한국도 잡탕언어이지만 중진국으로 발전했고, 현재 우리조선족사회는 특히 경제적으로 한국에 매달려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르듯 언어도 역시 선진적인 곳에서 후진적인 데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조선족의 언어도 알게 모르게 한국식으로 많이 변화해가고 있다. 한국어가 잡탕언어라 해서 배격하고 싶어 배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언어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놈의 언어인 미국식영어(영국인의 입장에서 하는 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세계 공용어로 된 것이 아니고, 옛날 장안 사람들의 눈에 촌놈의 언어로 인식되었던 燕京말이 표준화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한국어가 비록 많은 폐단을 안고 있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용하고 있고 앞으로도 수용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일부 지식인들의 고집처럼 조선어어문조례를 들먹이고, 서사규범을 내세우고, 조선족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어수용을 극단적으로 반대한다면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 서사규범은 문법 중심을 의미하는데, 문법이란 것은 우리민족 역사에서 끽해야 반세기밖에 되지 않으며, 입시기준을 위해 강조되는 것이고 실생활에서는 아무런 역할이 없다. 다시 말해서 문법을 알아도 그렇고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나의 경우 시골소학교 3학년 때 문화혁명이 일어났고 초중부터 한족반을 다녀 조선어를 매우 엉터리로 배워 문법을 모르고 서사규범이 뭔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말로 글 쓰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일본인 谷岐潤一郞은 그의 저서 <<문장독본 >> 서문을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이 반드시 명문은 아니다. 그러므로 문법에 갇히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가 존재하고 출판물이 존재하는 한 문법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규범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것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이다. 조선족사회가 한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고, 한국어로 의사소통할 일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조선어문조례나 낡은 서사규범에만 매달리지 말고 한국어를 수용해야 한다. 나는 흑룡강신문이 이 면에서 잘하고 있다고 본다. 즉 한국어를 수용하는 동시에 외래어에 해석을 달아주는 등 조치는 비교적 현명한 처사라 생각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모어를 살리는 동시에 한국어를 적절하게 단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한다.
119    中혐한증은 韓의 부메랑 효과 댓글:  조회:6840  추천:112  2008-09-03
<論과爭>中 혐한증은 韓의 부메랑 효과   김정룡 kzl0917@naver.com   지난 일요일 동네 책가게에 갔는데 <<삼족오>>란 책이 눈에 들어와 습관적으로 서문을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따라서 나로 하여금 왜 중국인이 한국인을 싫어하는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떠올리게 했다. <<삼족오>>의 저자 임영기 씨는 자신을 격조 높은 작가라 자평하고는 중국인을 ‘장쾌(짱개)’라 욕하고, 되도록 오줌을 중국 쪽에 향해 누고, 침을 중국 쪽에 향해 뱉는다는 저질스런 말을 했다. 나는 직업적으로 재한한족들을 많이 접촉해 한국인이 직장에서 한족을 ‘때놈, 짱개’라 욕한다는 것을 심심찮게 들어 알고 있지만 한국 지성인이 책에서 노골적으로 이런 욕을 하리라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너무 경솔한 처사다. 만약 중국인이 책에서 한국인을 ‘까오리빵즈(高麗棒子)’라 욕한다면 한국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소위 대한민국의 얼굴인 방송사 아나운서와 기자들이 중국과 중국인을 논할 때 너무 경솔하게 언행을 내뱉는 사례는 허다하다. 2004아테네올림픽 때 여자양궁개인전에서 한국이 1점차로 중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건 사실을 MBC가 보도하면서 “보시오, 그래도 고구려가 중국 것입니까? 한국 것입니까?”고 아나운서가 흥분하며 말했다. 이 아나운서의 논리대로라면 양궁의 승패에 따라 고구려가 한국 것이 되었다가 중국 것이 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아닌 게 아니라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양궁이 한국을 이겼으니깐 뭐라고 해야 할까? 자못 궁금하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앞둔 며칠 전에 중국 전 국가 주석 강택민이 장백산에 놀러갔는데, KBS는 “강택민이 백두산에 간 것은 동복공정을 노골화하는 행위다.”고 보도했다. 등소평이 장백산에 가서 일출을 보려고 다섯 번 등산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장백산에 갔던 등소평도 동북공정 때문이었을까? 자국의 관광지를 자국지도자가 유람 가는 사실을 두고 외국인의 입장에서 가볍게 떠드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언론들은 중국산 비하에 꾸준하게 열을 올려 왔다. 국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하는 보도라 짐작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재한조선족들의 한결 같은 반응이다. 문제는 재한한족과 조선족도 따라서 ‘값 싼 중국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은 돈 벌기 좋은 나라, 하지만 한국인은 싫다.” 현재 재한한족과 조선족 수를 합치면 4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들이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한 사실이 중국에 있는 가족, 친인척, 친구들에게 전해진다면 수백만에 이르는 중국인이 혐한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다음 한국인은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떠들고 있지만 사실 한국인의 역사왜곡수준이 중국과 일본을 뺨칠 정도로 도가 심각하다. 임영기 씨는 그의 <<삼족오>> 서문에서 “한국으로부터 문화와 숱한 문명을 가르침 받기 전의 중국은 원시시대 야만족이나 다름없었다. 저 유명한 치우천황이나 중국인이 존경해마지 않는 복희씨, 신농씨, 그리고 중국에서 불신으로 추앙받는 염제가 한국의 환인이 중국에 보내어 교화토록 한 역사적 사실이 이미 정설로 되어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뿌리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이듯이 삼족오의 뿌리가 하나이며 그것은 한국이다.”고 썼다. 이 주장대로라면 한국이 동아세아 문명의 뿌리이고 따라서 고대4대문명국에서 중국을 빼고 한국으로 바꿔야 마땅하다. 중국에서는 이미 삼족오가 원고하인(遠古夏人)의 창조품이라는 역사고증을 마쳤고, <<생식숭배문화사상>>의 저자 조국화(趙國華) 선생은 “삼족오가 나타나기 전의 이족오는 모계시대 여성태양신을 상징하고, 까마귀가 다리 세 개인 것은 그 중 하나는 남근을 상징하며 이는 모계시대로부터 부계시대로 이행한 역사과정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삼족오에 대한 해석은 이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일봉 씨, 임영기 씨를 비롯해 보편적으로 삼족오를 천부인 세 개에 꿰맞추고, 고구려 신라 백제에 짝짓기 하는 등 주관 억측으로 해석하며, 시간적으로 겨우 고구려벽화에 나타난 삼족의 뿌리를 중국이 아닌 한국이라고 우겨댄다. 이일봉 씨는 그의 <<환단고기>>에서 “전체 아세아 땅은 한국인의 것이었고, 전체 아세아인은 한국인의 후대이고, 도교는 한국인이 지어낸 것을 중국이 수입해 발전시켰다.”는 등 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들을 잔뜩 늘여놓았다. 2002한일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홍색이 한국인의 조상인 치우에서 비롯되었다고 김지하를 비롯한 지성인들이 주장하고 있다. 중국인은 치우를 戰神으로 추앙하고 있고, 묘도 있고 민간인이 관리하고 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이 치우를 자기네 조상이라는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사람(공자는 노나라 사람이었고, 노나라는 동이족의 후손들이 살았고, 한국인도 동이족의 후예이기 때문에, 고로 공자는 한국인이라는 주장이다. 아리스토델레스의 삼단논법에 근사한 결론처럼 보이나 어처구니없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다. 한국인이 동이족의 후예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동이족의 후예는 수백 갈래로 나뉘었기 때문에 공자와 한국인을 연결시키는 것은 아무런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이라는 여론이 떠들썩하다가 결국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공자가 한국사람이라는 주장에 이어 한때 한문도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한문은 은나라 때 만들어졌고, 은나라는 동이족이 지배했고, 한국인의 선조는 동이족이고, 고로 한문은 한국인이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요즘 한국00교수가 중국인이 개국아버지로 받드는 손중산을 한국인혈통이라 발언해 시끄럽다. 이 외에도 한국인의 역사왜곡사실이 수두룩하며 중국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석자 얼음이 하루아침에 얼소냐!는 속담이 있듯이 중국인의 혐한감정은 하루 이틀에 생겨난 일이 아니다. 오스트리아(오지리) 황태자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피살된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폭발의 도화선이 되었듯이 SBS의 베이징올림픽개막식리허설 도둑촬영방송사건은 중국인이 혐한감정을 폭발하는 도화선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118    할례와 진담(김정룡) 댓글:  조회:6004  추천:105  2008-08-1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할례와 진담     김정룡 kzl0917@naver.com   할례(割禮)란 남자의 귀두 껍질을 제거하는 것과 여자의 음핵이나 처녀막을 제거하는 의식을 말한다. 할례의 원조는 아마 유태인일 것이다. 유태인의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라고 하니 대략 4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유태인의 할례는 모든 남자애들이 다 하는데, 태어나서 8일이 되는 날 랍비(기독교의 목사에 해당함)를 청해서 가위로 자지 끝의 깝질을 쏙딱 베어버린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자. 즉 왜 8일 만에 할례를 할까? 영아가 엄마뱃속에서 나와 7일이 지나면 ‘물기’가 가신다고 하며 또 산모도 7일이 지나면 음부와 자궁이 ‘원상태’로 수축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일을 하고 7일이 되는 날 쉬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서양의 7일문화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무릇 유태인남자라면 아무리 2천년 세월을 세상 산지사방에 흩어져 살아도 빠짐없이 할례를 한다. 2차 대전 시 히틀러의 어명에 의해 유태인을 대량 학살할 때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가려내는 방법이 바지를 벗겨보고 구분했던 것이다.현시대 청소년들이 포경수술을 하는 것도 역시 유태인 할례문화의 하나의 변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는 포경수술을 하면 성교 시 쾌감이 떨어지니 어쩌니 하면서 주춤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준 원장(原裝)이 제일이지 인위적으로 손을 대면 ‘맛’이 못한 것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대 어떤 민족들은 여자가 남편에게 불충하고 외간 남자와 바람피울까봐 음핵을 제거해버리는 관습이 있었다. 아마 고대인들도 여성의 음핵이 가장 민감한 성감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믿기 어려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는 아직도 여성의 음핵을 제거해내는 관습이 있다.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후진주(後進州)여서 의료기술과 위생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 그리하여 음핵을 제거당한 여성들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어찌되었던 음핵을 제거당한 여성은 성욕이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성적 즐거움을 맛볼 수 없으니 쾌락은 운운할 여지가 없이 그저 여자로서의 ‘구멍’만 유지하고 살아가게 되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유교문화권에서는 ‘자연’을 숭상해왔으므로 예로부터 남자의 할례나 여자의 할례의식이 없었다. 다만 타문화권에 비해 도덕적으로의 정조를 매우 중시해왔다. 쉽게 말해서 유교문화권에서는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 처녀막을 보존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이와 반대로 어떤 민족들은 처녀막을 제거하는 의식을 결혼식보다 더 정중하게 취급했으니 유교문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것이 곧 문화차이이다.원나라 성종 때 중국사신으로 크메르(캄보디아의 당시 중국음역)에 갔던 주달관(周達觀)이 당지 사람들의 생활을 반영한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 designtimesp=9104>>란 책을 지었다. 이 책 제9장 실녀(室女:시집가지 않은 처녀)편에 처녀들의 처녀막을 제거해내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항상 결혼할 때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매우 우스꽝스러운 풍속이 하나 있다. 앙코르사람들은 딸을 낳아 9세가 되면 곧 스님을 청하여 송경(誦經)하고, 범법(梵法)에 따른 제식을 행하게 된다. 그 제식이란 승려가 손가락으로 처녀의 음문구멍을 휘저어 처녀막을 파손하고 거기서 흐르는 피를 취하여 그 처녀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다. 뿐만 아니라 그 처녀의 엄마의 이마에도 피를 취하여 도장을 찍는다. 이것을 리시(利市:기쁨, 축복)라 부른다. 이렇게 하면, 이 여자가 훗날 시집을 가서 남편과 사이가 좋아지며, 사람이 밝고 부드러우며, 가정에 행복이 가득 차게 된다고 한다. 이 의식을 ‘진담’이라 하고 그날 친인척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베풀고 그 처녀의 피를 술에 타서 참석자들에게 돌아가며 마시게 한다. ······모든 여자는 만 10살이 되면 지체 없이 시집을 간다. 만약 아내가 손님과 합방하게 되면 남편은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타인에게 말하곤 한다. “내 아내는 용색이 아름답고, 게다가 총명하다. 그래서 딴 남자들이 내 아내를 흘겨보는 것이다. 인도여자들이 아직도 이마에 빨간 점을 찍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처녀가 월경이 왔으니 시집가도 된다는 표식이다. 그리고 옛날 인도 엄마들은 딸애가 경도가 시작되었는데 시집보내지 못하면 대신해서 그 피를 마셔야 했다. 우리민족여성들이 옛날에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는 것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지역에 따라 민족에 따라 처녀막에 대한 인식과 아내의 정조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이는 문화상의 차이일 뿐 어느 민족은 문명하고 어느 민족은 야만이란 판단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유교문화의 잣대로 고대타민족의 문화를 임의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117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 댓글:  조회:6970  추천:95  2008-07-22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방방곡곡, 오호사해(五湖四海), 츠츠우라우라(津津浦浦) 민족문명이 형성된 가장 원초적인 토대(바탕)는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것이 바로 마을문화라고 생각한다. 즉 인류가 산에서 대지에로 내려와 마을을 이루고 군거생활(群居生活)을 시작한 이제문화(里制文化)가 민족문명의 형성토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역사연변(歷史沿變) 과정에서 한 개 집단이 본래 소속되어 있던 군체를 이탈하여 새로운 곳에 마을을 이루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면서 세력이 커지면 또 새로운 민족을 형성해온 사례도 허다하다. 그렇다면 민족과 민족 간의 문명 차이가 생겨난 근원이 무엇일까? 필자는 한 군체가 마을을 정착시킨 지리적 환경이라 판단한다. 쉽게 말해서 지리적 환경이 민족과 민족 간의 문명 차이를 생성케 했다는 의미다. 한중일 삼국은 각기 동서남북 여러 곳에서 모여들거나, 전국 곳곳을 말할 때 한국인은 ‘방방곡곡’, 중국인은 ‘오호사해’, 일본인은 ‘츠츠우라우라’라고 표현한다. 이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가 곧 한중일 삼국 세 민족의 초기 마을이 처한 지리적 환경특징에서 비롯된 개념들이다. ‘방방곡곡’은 ‘방곡(坊曲)’의 확대적 표현이며 ‘방곡’을 한자로 ‘坊谷’이라고도 한다. ‘방곡’의 지리적 특징을 알려면 먼저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부터 살펴보아야 한다.한반도는 삼분의 이가 산이지만 산세가 험하지 않아 비산비야의 모습이며, 산 속 수풀 진 곳에 샘물이 있고 샘물이 내를 이루고 내가의 양 옆에 마치 미끈하게 쭉 뻗은 여인의 다리처럼 생긴 작은 산이 있고 산 아래 내가의 양 옆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이 곧 ‘방곡’이다. 우리민족이 이 ‘방곡’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기 때문에 장풍득수(藏風得水)처럼 성격이 온화하며 오손도손하고 화평하면서도 매우 낙천적이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이러한 ‘방곡’이 8만 여개가 있었다고 한다.중국인은 초창기에 주로 황하중하류유역에서 마을을 이루고 문명을 형성해왔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흔히 중국문명은 황하의 다스림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또 마치 이것이 정설인 것처럼 떠들고 난리다. 필자는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문명은 ‘소택지(沼澤地)’를 다스려 옥토로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나의 견해(見解)이다. 중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원은 본래부터 비옥한 땅이었던 것이 아니라 4천 년 전에는 물이 가득한 ‘소택지’였다고 한다. 중국인은 초창기에 이 ‘소택지’에 마을을 이루고 치수를 통해 옥토로 만들면서 삶을 영위해왔다. 우(禹)임금이 치수에 필생의 정력을 소모했다는 전설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국인이 전국 곳곳을 ‘오호사해’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초창기 마을이 처한 지리적 특징, 즉 물이 가득한 ‘소택지’에서 얻어진 호칭이다. 중국인의 이러한 지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민족성격에 관해서 할 말이 많으나 여기서 잠시 접어두고 제4부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겠다. 일본열도는 본래부터 땅이 메마르고 척박하며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았다. 그래서 일본인은 초창기에 매우 한정된 ‘진(津)’과 ‘포(浦)’의 변두리에서 개울물을 막아 알뜰살뜰 땅을 가꾸면서 겨우겨우 삶을 영위해왔다. 일본인은 그러한 각박한 삶을 통해 알뜰하고 진지하고 정확하고 투입적이고 근검하고 절약적이고 진취적이고 또 독한 성격이 형성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은 ‘진’과 ‘포’의 고인 물처럼 조용하고 고독하고 남의 신세를 거부하는 등 성격이 형성되었다. 일본인이 친구끼리도 밥을 먹고 나서 비용을 똑 같이 분담하는 ‘와리끼리’ 문화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본인은 초창기 삶의 터전이 ‘진’과 ‘포’의 변두리였기 때문에 전국 곳곳을 ‘진’과 ‘포’를 뜻하는 의미로서 ‘츠츠우라우라’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는 한중일 삼국 세 민족 문명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고도 매우 귀중한 요소이다.  
116    "엄마, 난 한국국적이 싫어요." 댓글:  조회:7209  추천:74  2008-07-13
function openPop(){ window.open('http://ec.512.co.kr/web/link.jsp?mcode=23208&nid=8252','elis','width=710,height=685,top=0,left=0,scrollbars=no'); }   "엄마, 난 한국국적이 싫어요"   김정룡 kzl0917@naver.com   1992년 중한수교 이후 2007년 말까지 조선족출신 동포1세·2세와 한국인과의 국제 결혼자 및 그들의 미성년 자녀들을 합쳐 한국국적을 취득한 수가 7만여 명, 귀화신청을 제출해놓고 허가를 기다리는 조선족이 3만 5천여 명, 한국 내 체류기간이 2년(결혼자)과 3년(동포2세)이 차지 않아 귀화신청을 기다리고 있는 잠재적인 귀화신청자 3만 여명이다. 그들은 한국국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필자가 알아보았다. 절대다수 한국국적취득자 조선족출신들은 다음과 같은 이중생각을 갖고 있다. 즉 한국에서 영원히 뿌리내리고 살려고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체류가 편하고, 한국인으로부터 무시를 적게 당하고, 부모형제자매 및 친인척들을 초청하기 위해, 한국에서 사업하는데 편리하고, 일부 젊은 여성들은 미국이나 일본에 쉽게 왕래하기 위해 한국국적을 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다수 조선족 출신들은 한국이 비록 중국보다 여러모로 발전하여 살기 좋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나, 그래도 나고 자란 정든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잊지 않고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살려는 낙엽귀근 의식이 뿌리 깊으면서도 임시 삶의 방편을 위해 한국국적을 원한다는 것이다. 한국국적을 원하는 조선족출신들이 이와 같은 이중생각을 갖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농경문화가 주류였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은 한국이 비록 할아버지의 고국이나 고향은 중국이라는 향토의식이 뿌리 깊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둘째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은 말로는 조선족을 자기네와 동족이라 하면서도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차별하고 무시하고 시기하는 등 이방인 취급하며 여러모로 불편하게 만든 것도 이중생각에 크게 한목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미국이나 일본 등 잘 사는 나라에 시집 간 ‘딸’만 자식 취급하고, 중국과 러시아 등 못사는 나라에 시집 간 ‘딸’은 자식으로 대해주지 않고 있다. 쉽게 말해서 선진국에 이민 간 교포는 내국인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해주고 있는데 반해, 후진국에 살고 있는 동포는 완전히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은 한국에 대해 정이 가지 않아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조선족 기성세대들은 상기 이중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한국국적을 갖기를 원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개방시대에 태어난 조선족신세대들은 한국국적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1980년대 말 이후 태어난 조선족신세대들은 기성세대들과 같은 정의 문화라든가, 향토의식이 매우 취약하며 그들은 대다수가 계산적이고 실리적이며 앞날을 따지는 미래형이다. 흑룡강성 해림시 윤모 여인(40시)은 1994년 04월 단기상용비자로 한국에 입국했다가 불법으로 체류하던 중 2003년 02월 한국인과 결혼했고 현재 한국국적 소지자이다. 03개월 전 그녀는 중국에 있는 딸애(17세)를 한국에 데려와 한국국적을 신청할 타산이었다. 그런데 딸애는 한사코 한국국적이 싫다고 한다. 엄마는 딸애의 이런 당돌한 태도에 놀랐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딸애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중국을 떠난 지가 14년이 되고, 가끔 중국에 와도 고향에만 들러보고 하기 때문에 중국, 특히 남방이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를 모르고, 또 한국이 잠시 중국보다 앞서있지만, 필경 작은 나라이자 반도인데 비해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며 필경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을 것이고, 또한 우리 세대는 앞으로 고향이요, 민족이요, 국적이요, 이런 것들을 떠나 어디가 실리적이면 어디를 원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에요. 그래서 한국국적이 싫어요.”하고 엄마를 설득했다고 한다. 필자는 현재 조선족신세대들은 거의 대다수가 그녀의 딸애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는 조선족 코리안드림의 열풍도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뚜렷하게 식을 것이라는 결과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고국, 조국, 모국, 고향, 민족 등 정체성이라는 ‘골치 아픈 허상’에 연연하지 않고 실리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 짐작된다.  
115    종교와 미신은 어떻게 다른가? 댓글:  조회:5607  추천:77  2008-07-08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종교와 미신은 어떻게 다른가?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무한한 본체에 대한 신앙이 종교이고 유한한 물체에 대한 믿음이 미신이다. 이것이 곧 종교와 미신의 구분이다. 무엇이 무한한 본체이고 무엇이 유한한 물체인가?무한한 본체란 가시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세계의 존재로서 하나님, 도, 상제, 천주, 천지신명 등등이다. 유한한 물체란 가시세계의 존재로서 흔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무한한 본체가 인류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은 ‘물활론(物活論)’에 의해서이다. ‘물활론’이란 모든 물체는 활(活)의 가능태라는 것이다. 원시인류는 밤이 가면 낮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식물이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살아나고, 개구리가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살아나는 등 모든 물체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가능성이 있으며,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대지에서 만물이 생겨나는 데는 필시 인류가 모르는 자연의 ‘힘’에 의해 그렇다고 믿었다. 그 ‘힘’이 처음에는 바람이었다. 고대사회 여러 민족에게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발상이 모두 있었다는 것을 종교학자들이 누누이 지적해왔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토대는 샤머니즘이며 샤머니즘은 종교의 원시태인 것이 아니라 종교의 근본태이다. 예수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성령으로 난 것은 다 그러하느니라.”고 말했듯이 <<성경>>에도 바람이 자연의 형성과 인간의 영혼과 관련이 있다는 암시가 여러 곳에 있다. 원시인류는 차츰 사유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의 ‘힘’인 바람을 ‘신(神)’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힘’ ‘바람’ ‘신’은 모두 추상적이어서 감을 잡을 수가 없고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구체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즉 정신적으로 인식되는 ‘신’을 구체화시켜 ‘귀(鬼)’라 불렀다. 이렇게 신을 구체화시킨 것이 곧 귀신(鬼神)이다. 귀신가운데서 인귀(人鬼)가 가장 세고 두렵다. 무한한 본체인 상제, 천주, 하나님을 인격화 시킨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유래된 것이다. 유태인은 구체적으로 여호와라는 이름까지 붙여 하나님을 인격화 시켰다. 종교도 결국 알고 보면 귀신놀음이지만 귀신가운데서 가장 센 귀신을 선택해서 믿고 따르고 할 뿐이다. 미신은 이를테면 복숭아나무로 활을 만들어 땅에 묻어두면 진사(鎭邪)한다든지, 꿈에 오줌을 싸면 생식력이 강해진다는 등 유한한 것을 믿고 실천에 옮겨 액막이를 한다든가 그 어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꿈에 나타나면 그것이 현실로 되기를 믿는 행위이다. 종교와 미신의 다른 점은, 종교는 인간에게 ‘경(經)’을 부여함으로서 인류사회를 참된 삶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미신은 아무런 ‘경’이 없는 일시적인 행위에 그치고 만다. ‘경’이란 실‘사(糸)’와 뿌리‘경(莖)’이 합쳐진 글자로서 본래 씨줄을 뜻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옛날 구차할 때 벼짚가마니를 짜보았거나 천을 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잘 알고 있듯이 틀에다 날줄을 먼저 세우고 들줄을 끼워놓는다. 그 날줄이 곧 ‘경’이다. 이 날줄에서 유래된 ‘경’은 무수한 뜻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기본, 원칙, 규칙, 원리, 진리 등등이다. 종교는 이러한 ‘경’을 갖고 있기에 인간을 교화시킨다. 종교는 또 인간에게 안전성과 영원성을 부여해준다. 이에 비해 미신은 일시적인 방책에 불과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종교와 미신은 모두 귀신놀음이라는 점은 같으나 종교는 귀신가운데서 가장 센 귀신을 믿는 것이고, 미신은 ‘새우귀신’을 믿는 것이 다를 뿐이다.
114    한국 언론 '조선족 동포 때리기' 이제 그만 댓글:  조회:6354  추천:104  2008-06-24
한국 언론 '조선족 동포 때리기' 이제 그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한국 내 조선족 체류자가 30만을 훌쩍 넘어 도박, 살인, 마약 등 중대범죄 사례가 증가되고 있으니 재한조선족사회가 시끌벅적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일부 한국 언론들이 사실을 부풀려서 마치 조선족은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거대한 악의 조직이라도 된 것처럼 요란하게 떠들고 있어서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사례 1]     1년 전에 한 조선족이 구로구 가리봉동 남구로역 부근에서 술을 마시고 칼로 한국인을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고, 같은 시기에 조선족끼리 가리봉시장에서 싸우다 수십 명이 검거된 일이 있자 일부한국 언론들이 조선족들이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들이 이렇게 개별적인 사실을 보편화시키면 조선족동포들은 위험한 인간 취급을 당하게 된다. 당시 00방송국 기자도 필자를 찾아왔었다. 나더러 조선족들이 일상적으로 칼을 갖고 다니는 행위를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알기로는 칼을 갖고 다니는 조선족 동포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가리봉일대 상인들이 ‘연변 흑사파’들이 도끼와 칼을 차고 설치고 다니면서 돈을 뜯어내고 있어 언제 당할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방검복을 입고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가리봉시장 일대에서 여러 해 살다보니 노래방과 음식점 주인들을 두루 알고 있어 그들에게 물었더니 처음 듣는 소리라면서 마치 내가 아라비안나이트를 꾸며대는 듯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물론 유사한 사건들이 한두 건 있었을 수는 있겠으나 마치 가리봉일대 상인들이 모두 ‘연변흑사파’ 때문에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여 살아가는 듯 보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때부터 네이버에는 ‘연변흑사파’라는 블로그가 생겨났고, 일부 한국 언론들은 재한조선족사회 범죄사실이 발생하면 곧 ‘연변흑사회’와 연관시켜 보도하곤 했다. [사례 2] 얼마 전에 일부 한국 여러 일급 일간지들에서 일제히 “中 최대 범죄조직 ‘흑사회’, 강남까지 세력확장”이란 제목으로 ‘중국인’의 범죄사실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은 기사를 발표했다. 이 기사는, <kbs뉴스 앵커 맨트>, <리포트>, <녹취>, <인터뷰> 등으로 나뉘어졌는데 제목이 굉장히 거창한데 비해 내용은 빈약해 주로 조선족 범죄 사실을 다루었다. 이를테면, "kbs뉴스 앵커 맨트: 흑사회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암흑세계를 다룬 영화제목 같이 들리는데, 말 그대로 중국에 근거를 둔 범죄조직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들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집단폭력은 물론 도박, 마약, 보이스핑 등 신종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합니다. 외국인 밀집지역을 근거로 하는 이들 범죄조직은 서울 강남 유흥가 등으로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암흑가에서 날로 확산되고 있는 이들의 범죄 실태를 취재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기사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이 식당, 다방 등을 위장하여 도박을 한다는 것, 둘째 기계마작을 논다는 것, 셋째 마약장사를 하던 탈북자 부부와 한 조선족이 기계마작을 하는 도박장에서 검거되었다는 것, 넷째 30명이 넘는 중국인이 밀입국하다 붙잡혔다는 것, 다섯째 조선족들이 전화금융사기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 여섯째 연변흑사파로 불리는 이들이 30여 명 검거되었다는 것, 일곱째 국정원 수사관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는 중국 흑사회 조직이 직접 국내로 마약을 밀반입해오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고 불법체류자와 일부 조선족들이 국제특송- 배나 항공기 편으로 몸에 지니고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 등등이다. 위 기사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우선, 한국 언론들이 ‘흑사회’에 대한 개념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흑사회(黑社會)’는 중국에서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이른바 깡패사회를 일컫는 총칭이다. 예를 들어 대륙의 유명했던 청방과 홍방, 홍콩의 삼합회, 유럽의 마피아 등은 하나의 조직이며 그들을 총칭하여 ‘흑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중국 최대 범죄조직 흑사회’라는 표현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음 기사 제목과 내용이 거리가 십만팔천리나 된다. 제목은 거창하게 중국 최대 범죄조직 ‘흑사회’를 밝혔으나 내용을 보면 이와 관련된 근거가 전혀 없이 조선족들의 범죄사실을 열거만 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 식당과 다방 등을 위장하여 도박장을 벌이거나 기계마작실을 운영하는 조선족들은 대다수가 깡패도 아니고 건달도 아니며 더욱이 ‘흑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인데 ‘흑사회’와 연관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약판매와 전화금융사기에 가담한 사람들은 깡패조직과 연계시킬 수 있겠으나 중국 최대 범죄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때문에 한국 언론은 국내 조선족에 대해 보다 진정성이 있는 기사를 발표해야 한다. 필자는 재한조선족사회에 각종 범죄사건이 불어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일부 국내 언론들이 이를 부풀려서 중국 최대 범죄조직과 연관시키는 잘못된 보도 태도는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지적할 것은 재한조선족 50만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 언론들은 조선족 동포와 내국인의 문화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이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113    한류의 優와 劣(김정룡) 댓글:  조회:6287  추천:112  2008-06-16
 제8부 부  록 한류의 優와 劣김정룡  한류라는 말을 얼핏 보면 문자 그대로 현재 중국을 비롯한 아세아지역에서 한창 거세게 불고 있는 한국바람의 현상을 지칭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기실 그 유래를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선 한류라는 말은 한류의 주역인 한국인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수년 전에 중국인이 지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자. 즉 왜 중국인은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일본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가 서서히 중국에 밀려들기 시작했고, 특히 1978년에 중국이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을 선포한 후 일본의 가전제품을 비롯해서 자동차, 영화, 소설, 잡지 등이 봇물처럼 밀려들었는데도 그 당시 중국의 그 어느 지식인도 그러한 현상을 ‘일류(日流)’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중국에서 ‘일류’라는 말을 지어내지 않았던 이유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급속히 자본주의대국으로 부상하였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의 장개석, 노신, 곽말약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재들이 일본유학을 다녀왔고, 또 근세부터 일본인이 서양의 것을 번역한 철학,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등 술어들이 중국에 역수입되었으며, 그리고 뼈아픈 일이기는 하나 일본침략을 받는 것까지 경험한 중국인의 머릿속에는 ‘일본제품’이 중국에 밀려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모든 것에 대해 별로 신기하지 않을 정도로 면역력이 생겼기 때문에 ‘일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한국드라마, 가요, 전자제품, 자동차, 라면을 비롯한 식료품 및 대중국투자붐 등 일련의 중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바람이 마치 1970년대 말부터 약 20여 년 동안 중국대륙에서 불고 있던 일본바람과 똑 같은 현상이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에 대해선 ‘일류’라는 말을 쓰지 않은데 비해 한국에 대해 ‘한류’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부터 풀지 않고 한류를 운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빈종이장만 놓고 군사를 논하는(紙上談兵) 것에 지나지 않는다. ‘류(流)’란 일종 시대적 흐름이거나 시대적 현상을 나타내는 말인데,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실로 대단하다. 우리는 그 파급효과를 영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 ‘류’가 내적으로 산생된 것이 아니고 외적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라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자(일본)에게 ‘류’를 붙이지 않고 후자(한국)에게 ‘류’를 붙이는 것은, 전자의 영향은 필연인데 반해 후자의 영향은 우연이라고 인식하는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즉 일본이 그만큼의 실력을 갖춘 것은 필연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중국에 흘러들어온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는 당연한 일인데 비해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별로 볼꼴이 없는 것으로 인식해왔고 따라서 최근 몇 년 사이에 흘러드는 한국바람은 생각 밖의 우연이라 인식하는데서 ‘한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인지상정으로 말하자면 갑자기 흘러드는 한 흐름이거나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필연이라고 인식할 때는 충격을 적게 받거나 받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을 우연이라고 인식할 때는 충격이 크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류’라는 말은 중국인이 한국인에 대한 콤플렉스 및 그로 인하여 받은 충격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중국 측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역시 한국 측의 생각이기도 하다. 즉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 측과 한국 측 모두가 한국의 것이 그토록 빨리 중국시장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므로 받는 입장에 있는 중국이든 주는 입장에 있는 한국이든 한국바람에 대해 당황해하는 분위기에서 서로 다른 각도로 한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한국의 문화전통에 대해 매우 낯설다. 그리하여 한류연구에 있어서 한국인의 고유한 민족적인 소질보다 한국이 어떻게 단시간 내에 빨리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는가에 대해 포커스를 맞추고 연구하다보니 온전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정작 한국인은 자기네 민족적인 문화전통과 민족소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필자가 보기엔 매우 부정적이다. 한국인은 기껏해야 한류에 대해 ‘현대기업경영 마인드와 노하우, 제품의 질과 브랜드, 몇몇 배우의 인기, 중국시장에 대한 성공적인 답사’ 등등의 요소를 갖고 연구하다보니 역시 온전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중앙대 총장이신 박범훈 교수는 “한류 속에 한국이 없다.”고 지적하고 본대학에 한류아카데미를 설치했다. 이는 실로 정곡을 찌른 지적이며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박범훈 교수처럼 실질적인 태도와 조치가 있는가 하면 또 한류연구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발언을 하는 분들도 있다. 이를테면 00교수 분은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한류’는 일시적인 유행을 뜻하기에 한류를 살리려면 ‘한류’를 죽여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한류’라는 말이 일시적인 유행이라는 뜻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결코 ‘한류’의 전부의 뜻이 아니다. 중국인이 ‘한류’라는 말을 지어낼 적에 한국 것이 중국에서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류가 일시적일 수도 있고 얼마동안 지속될 수도 있고 또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한류를 일부러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분이 한류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고 마는 것을 막자는 의도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이다.  중국이 수천 년 동안 주변국에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수출해왔으나 종래로 ‘한류(漢流)’ 속에 중국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이 20세기를 통털어 주변국에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수출해왔으나 종래로 ‘일류(日流)’ 속에 일본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구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식민지를 개척해왔으나 ‘구류(毆流)’ 속에 그들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일까? 중국은 유교와 도교라는 문화전통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신도(神道)적 신념이 강하기 때문에, 서구는 기독교의 이념이 강하기 때문에 모두 나름대로 민족적인 전통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왔기에 자기네들의 대외영향은 당연한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이와 반면에 유감스럽게도 한국과 한국인은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종래로 역사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적이 없으며 또 자민족의 종교문화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한국인의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연구가 매우 인색할 정도다. 그리하여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한류열풍에 대해 당황해할 뿐만 아니라 한류의 힘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명확히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곧 한류의 열세이자 비극이다. 필자는 한류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데는 필경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숨은 힘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으며 아울러 그 힘이 한국인의 문화전통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세상의 그 어느 민족보다 못하지 않는 훌륭한 문화전통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류 속에는 필경 한국이 있다.” 이 명제를 증명하자면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한류의 루트를 두 가지로 나눈다면, 그 하나는 한국 땅에서 벌어진 ‘사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대외수출이다. 전자의 경우 <2002년한일월드컵> 시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붉은악마의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고, 후자의 경우 현재 중국을 비롯한 아세아지역에서 불고 있는 한류열풍이다. <2002년한일월드컵>에 앞서 있었던 <88서울올림픽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 지구촌에 전해지자 수많은 나라들이 쇼크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수많은 나라들에서 코리아란 나라가 도대체 지구의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크를 받은 나라들에서는 코리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면밀하게 분석했다. 특히 구쏘련을 비롯한 동구공산권에서 가장 크게 쇼크를 받았는데, 왜냐하면 코리아는 자본주의 길을 잘못 선택한 탓으로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주제에 무슨 자격과 힘으로 국제적으로 가장 큰 잔치인 올림픽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가는 의문 때문이었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자기네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운동선수보다 각 분야의 전문가 고찰단 성원을 더 많이 파견했다. 실제 눈으로 확인한 결과 전에 소문으로 들었던 것은 전부 거짓이었고 자기네들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는 것을 보아냈다. 당시 그들은 귀국하여 사실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나라에 바쳤다. 결과는 한마디, 즉 “<88서울올림픽대회>는 구쏘련을 비롯한 동구공산권의 몰락을 불러오는 촉매제였다.” 다른 한 측면으로부터 볼 때 한국인은 <88서울올림픽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므로 인하여 세상에 이름 없던 코리아가 국제무대에 명함을 올리게 되었다. 코리아민족은 본래 훌륭한 문화전통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왕조정치의 탄압과 군사정권의 압제 하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민주화바람이 정착하기 시작해서 드디어 21세기 벽두에 <2002년한일월드컵>을 통해 자신들의 장끼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었다. <88서울올림픽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2002년한일월드컵>을 순리롭게 치를 것이라는데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월드컵을 통해 코리아를 세상만방에 잘 알려지게끔 하는가는 것이 당시 한국인의 중심과제였다. 결과는 붉은 악마의 사건을 통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한류열풍의 기폭제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다면 붉은악마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먼저 표면에 드러난 형식적인 것부터 살펴보자. 첫째 붉은색의 의미 월드컵 당시 운동장에 직접 가서 응원하는 붉은악마만 홍색유니폼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응원에 나선 무려 700만에 달하는 축구팬들도 전부 일색으로 홍색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니까 붉은악마의 대오는 700만인 셈이다. 이는 인류역사 이래 최초의 사건이다.  붉은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코리아민족은 복식선택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흰색 옷을 입기를 즐기기 때문에 백의동포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투에 임하여서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동양의 색문화전통에 있어서 붉은색은 생명의 색이며, 승화의 색이며, 상승의 색이며, 발전의 색이며, 전진의 색이며, 투쟁의 색이며, 의지의 색이며, 분투의 색이며, 승리의 색이다. 축구는 일종 평화적인 전투이다. 그러므로 전투의 승리를 바라기 위해 붉은색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악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함이 없고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이므로 역시 전투의 승리를 바라기 위해 선택된 호칭이다. 둘째 응원구호의 의미 “대~한 민국! 짜자장 짱짱!”의 율동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대’를 길게 뽑아 2박으로 하고 ‘한’과 결합시켜 본래 2박이던 ‘대한’을 ‘대~한’인 3박으로 만들고, ‘민국’을 2박으로 만든 것은 3박과 2박의 조화인데, 3박의 율동은 코리아전통에 있어서 천지인삼재사상에서 유래된 것이고, 2박의 율동은 음양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서구지역에서 온 축구팬들이 “대~한 민국! 짜자장 짱짱!”하는 율동에 감동을 먹고 따라 외쳐보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왜일까? 서구지역의 음악전통은 4박이 위주이며 또 코리아민족음악처럼 굴절이 심한 율동이 없기 때문에 갑자기 따라 외치자니 입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인은 3박과 2박의 조화율동을 쉽게 따라 외칠 수는 있으나 왜 하필이면 중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코리아민족이 3박과 2박의 조화율동으로서 응원열기를 북돋았을까? 당시 동시개최국인 일본의 응원구호의 율동은 코리아에 비해 참으로 초라했는데, 이것이 곧 일본인과 코리아민족의 음악예술기교의 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코리아인의 응원구호의 율동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이었다. 셋째 붉은악마의 자발적인 참여 의미 이북에서는 쩍하면 10만 명이 동원된 집단체조행사를 펼친다. 그 예술기교를 놓고 보면 역시 세상에서 가장 멋진 표현이다. 하지만 이북의 집단체조행사는 타의(他意)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에 반해 붉은악마의 경우 수백만의 팬이 거리응원에 참여하였으나 정부의 간섭도 없었고, 그 어느 단체의 동원활동도 없이 순수하게 자발적인 참여였다. 이는 인류역사 이래 초유의 사건이었으며 당시 전파를 타고 그 열광적인 모습이 세상만방에 알려져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그 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정말로 인류역사 이래 최초의 기적이다. 이 사건을 통해 코리아민족은 얼마나 문명한 민족인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축구종가인 영국, 터밭이 없이는 살아도 축구장이 없이는 못산다는 브라질, 국내리그로 세상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프랑스에서도 여태까지 한국인과 같은 그렇듯 멋진 광경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필자는 붉은악마의 사건에 대해 한국의 일부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일시적인 유행이다.”, “할일이 없는 젊은이들의 소행이다.”, “군국주의의 부활조짐이다.”, “파쇼의 위험이다.”, “천시 지리 인화가 그러했기에 한국인은 천지개벽을 이루어냈다.”는 등등의 견해와 달리하고 싶다. 즉 붉은악마의 기적적인 사건은 코리아민족문화전통의 힘이 표출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연세대 유동식 교수는 저서 <<풍류도와 한국인의 종교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풍류도는 비록 종교는 아니지만 한국인의 사상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해왔으며 풍류도의 핵심의미내용이 곧 ‘멋’이다.” <<추한 한국인>>의 저자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는 “‘멋’이란 어휘는 같은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필자는 한중일 삼국언어에 익숙한바, 확실히 ‘멋’이란 말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말 ‘판’이란 어휘도 역시 우리민족만 사용하는 특수용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민족은 ‘멋’을 추구하고 ‘판’을 벌리기를 즐기는 민족이라는 것을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붉은악마의 사건도 역시 코리아민족의 특유한 ‘멋’과 ‘판’의 문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코리아민족은 일상생활에서 무엇이든 멋지게 하려하고 ‘판’에 대한 참여도가 그 어느 민족보다 높고 또 기왕에 판을 벌리는 바엔 한바탕 떠들썩하게 하는 것이 생활특징이다. 붉은악마는 확실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관을, 가장 떠들썩한 판을 탄생시켰다.  확실히 붉은악마의 사건은 한류를 절정에로 끌어올리는 견인차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학계에서 그렇듯 멋진 한류를 일으켜놓고도 그것을 한류라고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벼라별 당치도 않은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것이 또 하나의 한류의 비극이다. 얼마 전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중국의 청년남녀들이 한국에 관광갔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2002년한일월드컵> 때에 감동을 먹고 일부러 배우러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서 열심히 연마해서 2008년북경올림픽 때에 써먹을 타산”이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붉은악마의 사건이 중국대륙에서 불고 있는 한류열풍에 얼마나 큰 견인차역할을 하고 있는가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한류열풍에 관해 논의해보자. 한국의 것이 외국에서 호평 받는 이유는, 한국음식은 맵고 얼큰해서 쨍하게 위까지 자극하는 ‘멋’이 있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제품은 브랜드가 ‘멋’이 있고, 한국가요와 드라마는 연예인들의 세련미와 한민족의 특유한 미, 즉 한민족의 특유한 ‘멋’이 있기 때문인데, 그 ‘멋’은 중국인과 일본인 및 기타 여러 민족에게서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멋’이다. 한국드라마가 중국에서 인기 있는 이유는, 중국이 문화혁명 때문에 전통적인 유교식 가족분위기가 깨지고 또 1970년대 후반부터 한 자녀만 낳게 하는 산아제한정책 때문에 한국인과 같은 가족적 분위가 사라졌으므로 한국드라마를 통해 잃어버린 전통가족분위기를 심리상에서나마 되찾아보려는 마음에서 매우 즐겨보고 있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력과 미적 감각 및 스토리가 재미있는 등 요소들도 인기 있는 요소들이다. 한국역사극, 예하면 <대장금>이나 <명성황후>가 중국에서 인기 높은 이유는 중국역사극은 매우 딱딱한 분위기가 짙은데 반해, 한국역사극은 활발한 분위기가 있으며 인간미가 돋보이고 또 배우들의 패션도 아주 ‘멋’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 높은 이유는, 주로 일본여성들이 냉혈동물과도 같이 정이 메마른 남편들과의 생활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가족분위기로 살아온 심리상의 고통을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멋지게 반영한 한국드라마를 통해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의 고유한 물처럼 따분한 생활분위기에 비해, 한국인의 활기 있는 멋진 생활에 도취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과거시대와 달리 그 어느 특정민족이 지어낸 특정종교에 열광하는 시대가 아니다. 거꾸로 사람들은 삶의 질을 다지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그 어느 민족보다 한국인이 외모를 가꾸는 멋진 세련미가 가장 돋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아울러 한국인의 역사적인 외왕(外王)과 내성(內聖)을 중시하는 ‘멋’의 전통이 중국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한국인의 외왕 추구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돈깨나 있다고 폼 잡고 중국인이 가난하다고 시기하거나, 체면의식 때문에 없는 게 있는 체, 못난 게 잘난 체, 모르는 게 아는 체하는 등 허세를 부리는 부정적인 면이 한류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으나, 이러한 현상은 개별적인 것으로서 한류에 있어서 극히 미세한 열세일 뿐 큰틀에서 말하자면 역시 중국인은 한국인의 세련된 멋진 삶을 본받으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류가 장기간 계속 지속되게 하려면 물질적인 상품에 동반하여 그 만큼의 정신적인 상품이 따라서 수출되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 한류열풍이 아무리 거세다고 하지만 필경은 물질적인 것에 치중되어 있을 뿐 정신적인 것이 매우 취약하다. 혹자는 가요,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으나 필자가 말하는 정신문화는 곧 한국인의 문화전통을 반영하는 서적이다. 중국은 서구와 일본의 정신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그에 대한 대안도 마련해왔다. 그러나 현재 한류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한국문화전통에 관한 연구는 미미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한류의 주역인 한국인이 자신들의 문화전통을 많이 연구하고 아울러 수출해야 한다. 중국이 일본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후 서점가들에는 일본에 관한 서적이 한 개 코너를 거뜬히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에 비해 한중국교정상화가 된지 13년이 넘는 오늘날에도 중국서점가에는 한국에 관한 서적이 한 개 코너는커녕 달랑 몇 권정도 뿐이다. 중국 젊은 대학생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류, 한류하고 떠들지만 정작 한국문화전통을 알 수 있는 책이 보이지 않으니 한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는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지난해 <<동아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중국대학생관광단이 한국에 갔는데, 간판, 푯말, 비문 등에 한자가 적혀 있는 것을 목격하고 “엉, 한국에서도 한자를 쓰고 있네!”라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중국인이 한국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거꾸로 일본에서 한자를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중국대학생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한국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을까? 2003년 일본고등학교 부분적인 민의측험(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본고등학생 중 30%가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여기고 있고, 무려 50%가 한국은 대만처럼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20%만 한국을 독립국가로 알고 있다는 답이 나왔다고 한다. 반세기 동안 한국인이 철석 같이 우방이라 믿어왔던 미국도 고등학생과 대학생 30%가 한국은 대만처럼 중국의 일부분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한류열풍이 어쩌고저쩌고해도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 및 한국인이 종주국처럼 50여 년이나 받들어왔던 미국이 한국에 대해 그 정도로 생소하게 느끼고 있다면 기타 나라들이야 더 말치 않아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중국이 낙후하고 어떻다할지라도 한국에서 학교 문을 나왔다는 사람치고 <<삼국지>>를 읽지 않은 자가 없고, 일본에서는 <<삼국지>>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상대도하지 말라는 유행어가 있다. 현재 일본에서 <<삼국지>>를 만화, 영화, 소설 등을 통해 해마다 2억 엔에 달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한국도 매년 수억 원에 달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한국과 일본에서 <<서유기>>와 <<수호지>>가 <<삼국지>> 버금으로 읽히고 있다. 이 삼대소설 속에 중국의 전통문화가 다 담겨져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중국이 어쩌고저쩌고해도 절대 무시 못한다. 서구각대학교 도서관과 국립도서관에는 중국책이 수없이 많다. 일본책도 적지 않다고 한다. 허나 한국 책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고 한다. 지난해에 미국하버드대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영국옥스퍼드대에서 한국학과를 폐지하느니 마느니 하는 풍파가 있었다. 멀리 말고 일본 동경대학에조차 한국철학과가 없는 실정이다. 총적으로 말하면 한류열풍은 근근히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으며 정신적인 것이 전무한 상태이며, 한류가 앞으로 계속 장기간 지속되게 하려면 한국문화전통과 전통문화를 많이 수출해야 한다. 한류는 낙관적이면서도 앞으로 걸어 갈 길은 멀고도 험악하다. <<문학과 예술(2006.1)>>                         
112    나는 왜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쓰는가?(김정룡) 댓글:  조회:7295  추천:114  2008-06-16
 2. 나는 왜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쓰는가?-칭찬과 반성에 대하여 김정룡  미국에서 두 학자를 유럽에 파견하여 미국이 유럽한테서 뭘 배워야 하나를 고찰케 했다. 그 중 A란 사람은 전체유럽을 고찰하고 나서 돌아와 유럽은 우리미국보다 많이 낙후되어 있어 배울 것이 전혀 없다고 회보했고, B란 사람은 우리미국은 유럽한테서 여러모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추한 미국인>>이라는 책을 지어냈다. 결과는 A란 사람은 밥통을 잃게 되었고 B란 사람을 승진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곧 미국인의 열린 도량이며 오늘날 왜 미국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이야기꺼리다. 1960년대 아르헨띠나 대사를 지냈던 일본인이 <<추한 일본인>>이란 책을 지어서 파직 당했다. 이유는 일본인은 체면을 중히 여기므로 스스로 자기얼굴에 먹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한 미국인>>의 저자는 승진하고, <<추한일본인>>의 저자는 파직 당했다. 이것이 곧 열린 미국인의 도량과 막힌 일본인의 속 좁은 표현이 아니겠는가! 1986년 대만작가 백양이 <<추한 중국인>>을 대륙에서 출간하였는데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외국의 선진적인 것을 배우려 한 동시에 국민들이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는 도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추한 미국인>>을 썼고, 일본인이 <<추한 일본인>>을 지었고, 중국인이 <<추한 중국인>>을 펴냈다. 이에 반해 한국인을 포함해 우리민족은 스스로 ‘추한 한국인’을 쓰지 않았다. 아예 쓸 생각마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국인이 스스로 쓰지 않으니 1990년대 초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란 일본인이 <<추한 한국인>>을 썼는데 일본 내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었고 한국 내에서는 굉장히 반발이 심했다. 같은 시기에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를 지어 <<추한 한국인>>에 맞불을 놓아 한국 내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우리민족은 수천 년 동안 남의 속국 혹은 식민지로 살아왔으나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는 데 대한 스스로의 반성이 없이 오로지 남만을 탓해 왔다. 가령 누가 민족문제에 대해 반성의 글을 좀 쓰면 공격의 표적이 되어 매장된다.  한국인과 같은 피를 물고 난 조선족도 체면의식이 강해 한때 56개 민족가운데서 뭐가 제일이었고 하면서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개혁개방 이래 낙후민족으로 전락한데 대한 반성이 적다. 가령 그 누가 반성의 글을 써내면 조선족을 팔아먹는 자로 몰아붙인다. 물론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 말이 있듯이 칭찬이 일시적인 진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허나 칭찬은 남한테서 받아야 하고 반성은 스스로 해야 한다.  인간은 본래부터 내 주제는 어떻든 간에 남이 나의 흉을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반발심이 생기는 법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근 나의 글 <<답답한 재한조선족>>이 발표되자 어떤 조선족 관련 사이트에서 독자들이 전부 나를 한국인으로 착각하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만약 한국인이 이런 글을 썼다 해도 우리는 마땅히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참고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글의 저자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분들 중에 “왜 같은 조선족으로서 조선족을 욕하는 글을 많이 쓰는가?” “더 한심한 한국인이 많은데 왜 한국인의 추한 것을 쓰지 않고 조선족만 욕하는가?”라고 나를 공격하는 분들도 있다. 물론 내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분들 중 나의 글을 찬성하는 비례가 훨씬 더 많다. 독자들의 관점이 찬이든 반이든 어떻든지 나의 글에  관심 있게 읽어준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 기회를 빌어서 나는 왜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쓰는가는 입장을 밝히려 한다. 나는 2006년 3월부터 현재까지 신문과 잡지에 85편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58편이 조선족문제를 주제로 한 글이다. 이글들이 독자들에게 읽히면서 찬반양론이 많았다. 문제는 나의 글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고 현실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당신의 말이 맞지만 너무 꼬집는다.”고 말한다. 나는 ‘너무 꼬집었기 때문에 맞는 것이 아닐까?’고 생각한다. 내가 조선족문제를 꼬집는 이유는 이렇다. 조선족은 한때 확실히 중국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고 살아왔다. 허나 오늘날 조선족은 확실히 낙후민족으로 전락되었는데 나는 조선족의 일원으로서 이 점에 대해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과거 우수한 민족이었다는 타이틀을 되찾을까? 이것이 나의 가장 큰 고민이며 고민 끝에 조선족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꼬집는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다음 나도 조선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이 안고 있는 공통된 열근성이 나의 몸에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도 ‘답답한 것’들을 고쳐보려는 마음에서 글을 많이 쓴다. 지난주에 가리봉의 00노래방에 갔는데 한 아가씨가 나를 보더니 “어마나, 김선생님도 이런 장소에 다니세요?”라고 마치 희한한 일을 발견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작년 자진출국 때 나의 손을 거쳐 갔다가 무사히 재입국했다. 그녀 외에도 손님들은 나를 신문사에서 근엄하게 글을 쓰고 정직하게 일만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천만에 말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겨우 지난해부터이고 과거는 옛날사람들이 “남자는 지랄 외에는 다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면, 나는 마약을 대지 않은 외에 벼라 별 ‘지랄’을 다해보면서 살아왔다. 그날 저녁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밤 12시경에 우리 일행 중에 나와 이견(異見)이 있어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리봉시장 안이라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면서 나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본다. 한 가게 주인(조선족)이 나를 보고 “김선생님도 답답한 조선족이구먼!”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벌떡 들었다. 아차, 그렇지! 내가 <<답답한 재한조선족>>이란 글을 썼지만 오히려 내가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구나! 사돈이 남말을 하고 있었네.  내가 이런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재한조선족들이 차원이 낮고 나는 차원이 높아서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도 똑 같은 조선족의 일원으로서 나의 몸에도 조선족이 안고 있는 공통된 열근성을 갖고 있기에 공동으로 고쳐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다는 입장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나는 1990년도 여행업으로부터 현재까지 줄곧 한국인과 생활해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추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인관광객들이 중국에 가서 아가씨를 잘못 건드려 대신해서 사과하러 다녔고, 효도관광으로 중국에 가신 할머니들이 호텔의 타올(수건)을 몰래 훔쳐 대신 사과하러 다니는 등 중국 땅에서의 한국인의 추태상을 쓰자면 정말 책 한 권은 족히 써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데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개별적인 한국인의 추태를 떠벌려봐야 우리에게 차려지는 실리가 무엇인가는 것이다. 멀리 말고 우리 센터입구에는 매일 한국인 노숙자들이 술을 마시고 오줌을 갈기고 하면서 거처하고 있다. 대낮에 내가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면서 담배를 피우면 한국인 노숙자들이 네댓 명씩 담배를 빈다. 여지껏 가리봉에서 조선족노숙자를 보지 못했으며 낯모를 조선족이 나한테 담배를 빈 적이 없다. 자아, 그렇다면 개별적인 한국인의 추태상을 마치 전체 한국이 형편없는 것처럼 떠벌려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한국과 한국인이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조선족사회보다 많이 앞서 있다는 것을 과감하게 인정해야 하고 배울 것은 허심하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조선족문제에 대한 글만 쓴다고 해서 조선족은 우수한 면이 없는가? 천만에! 조선족도 우수한 면이 많다. 다만 칭찬은 남이 해주고 우리 스스로는 반성을 하는 것이 민족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꼬집는 글을 쓰는 것이다. 또한 백양이 <<추한 중국인>>을 쓴 것이 중국인이 미워서 그렇게 했을까? 아니다. 중국어에 “恨鐵不成鋼”이란 격언이 있듯이 나는 조선족도 ‘철’이 ‘강’으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선족문제를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글을 씀에 있어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를 고수하고 있다. 첫째 나는 정치나 거창한 글을 쓰지 않는다. 둘째 나는 뉴스에 보도되었거나 남들의 손을 거쳐 흘러가는 글을 쓰지 않는다. 셋째 나는 현실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넷째 나는 내가 쓴 글에 대해선 누가 뭐라든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책임진다.  조선족문제는 민감한 문제다. 허나 건드릴 것은 건드리고, 꼬집을 것은 꼬집고, 파헤칠 것은 과감하게 파헤쳐야 한다. 상처가 아프다고 덮어두면 점점 더 곪아 간다. 곪아 터지기 전에 손을 보아 상처를 고쳐야 한다. 이것이 우리조선족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111    ‘생감자’의 엉뚱한 고민 (김정룡) 댓글:  조회:6601  추천:83  2008-06-16
제7부 수  필 1. ‘생감자’의 엉뚱한 고민  김정룡   지난해 나는 잡지나 신문 지상에 48편의 글을 발표했다. 서울의 중국동포타운신문사에 취직해 글도 쓰고 동포들의 자진출국도 도와주었으며 중국동포정책민간연구소에서 동포들의 고충도 들어주고 해결해 주었다. 꽤 바쁜 한해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의 별 볼꼴이 없는 이름이 재한조선족사회에 조금 알려짐에 따라 나름대로 고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조선족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어떤 기대를 갖고 찾아왔으나 내가 들어주지 못해 본의 아닌 실망을 안겨주었거나, 혹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데 대해 대답이 시원치 못하다고 나를 건방지다고 뒷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보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중국에서 온 연세가 지긋한 분이 한국00단체의 소개에 의해 나를 찾아와 한국에서 책을 내려고 하는데 도와달라는 것이다. 무슨 내용의 글을 쓰셨냐고 물었더니 조선족사회 문제와는 상관없이 한국사회의 어떤 현상(경제방면)을 갖고 썼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냐고 했더니 아예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잔 글을 써본 일이 없이 문뜩 장편을 세상(한국)에 발표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명색이 고중졸업생이란 렛델을 달고 있었으나 이과는 인식분해가 뭔지, 1·2차방정식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고, 문과는 지리를 한 페이지도 배우지 못해 해와 지구 중 어느 것이 더 큰지조차 모를 정도였고 또 학교 때 외국어를 한마디도 배운 적이 없지만 일본어를 독학해서 대학(일본어 전공)에 가다보니 대학시험을 7년 본 경력이 있고, 지금은 동서양의 역사, 종교, 문화, 철학 등 다방면의 지식을 악착같이 공부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려고 하는 분들이 찾아오면 정말 내심으로 존중하고 반갑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책을 낸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이 조선족사회와의 교류의 필요성, 또 40여 년 헤어져 있던 해외동포를 ‘귀엽게 봐주는 차원’에서 조선족들의 글을 한국에서 출간해준 일이 꽤나 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특히 IMF이후 호황을 누리던 출판업계가 1/3이 파산되었고, 이젠 조선족이 한국인한테 더는 ‘신기’하거나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최근 들어 극히 개별적으로 정말 탄탄한 글을 제외하고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책을 낸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졌다. 하물며 중국에서 쟁쟁했던 조선족학자나 작가도 아니고 더욱이 잔 글조차 발표해본 적이 없는 분이 한국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라비안나이트’와도 같은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글을 전혀 발표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갑자기 세상을 놀래 울만한 명작을 내놓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과거 명함’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글에 대해 아무 경력이 없는 조선족이 책을 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한국출판업계의 몇 분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지만 그분한테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래도 나를 믿고 찾아온 분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참으로 미안함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 중국조선족사회에서 글을 꽤나 쓰시던 분들이 여러 명 나를 찾아 왔는데, 그분들은 통상적으로 나보고 처음 하는 얘기가 “조선족작가 중 누구누구를 아느냐? 누구누구와 친하느냐?”고 묻는다. 이러한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굉장히 난감하다.  왜냐하면, 노실하게 말해서 나는 14년 전에 ‘연변일보’에 세 편의 글을 발표하고는 10여 년 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6년에 갑자기 운이 좋아 48편의 글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쓰는 글에 대해 내용은 확실하게 알고 있을 뿐 무슨 문체에 속하는지조차도 모른다. 글쓰기 공부를 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겁도 없이 무턱대고 그냥 쓴다. 분명한 것은 나는 평생 시 한 구절, 수필 한 편도 써본 적이 없고 소설에 신경 써본 적도 없다. 문학에 대해 제로라는 뜻이다. 그래서 ‘문학의 물’에서 놀아본 일이 없기에 중국조선족사회 문학인들을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내가 문학을 모르거나 문학인들을 모른다고 콤플렉스를 가져본 적도 전혀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  설사 앞으로 내가 어느 날인가 문학에 뛰어든다 해도 그것은 나의 인생전환점을 추구하기 위한 것일 뿐 결코 문학에 대한 콤플렉스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지난 해 ‘연변여성’과 ‘문학과 예술’이란 잡지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지만 나는 잡지사의 주필님들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나는 나의 글을 발표하기 위해 제3자를 찾아 인맥을 통해 나의 목적을 이루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냥 무턱대고 찾아가 내가 이런저런 글을 몇 편 썼는데 맞으면 그렇고 맞지 않으면 말고······. 결국 그분들이 나의 글을 발표해주었으나 나는 그분들과 술 한 잔 나눈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와도 그분들을 안다거나 친한다(실제로 친하지 않다)고 말한 적이 없다. 지금 중국동포타운신문사도 내가 제3자를 통한 일이 없이 무턱대고 김용필 편집국장을 찾아 인연이 되어 같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렇다.  그런고로 나를 찾아오는 분들한테 사실대로 ‘문학인들을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면 나의 개성을 모르고 있기에 ‘나를 건방지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흐리며 다음 대화가 껄끄러워진다. 또 나는 문학에 대해 제로이기 때문에 문학인들처럼 감성적이지 못하고 온화하지도 못하다. 나의 성격표현은 나의 글처럼 직설적이므로 문학인들과는 거리가 멀다. 뭔가 잘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문학인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생감자’인 나에 대해 실망을 갖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약점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나의 개성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막무가내라 생각하고 일부러 고치려고 들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나의 개성을 고친다면 나는 죽은 사람과도 같기 때문에·····.  그다음 내가 쓰는 글은 대다수가 조선족문제와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에 찬반양론이 많다. 혹자는 직접 나를 비판하기도 하고 혹자는 독자끼리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이는 독자들이 나의 글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어떤 방식이든 나는 반갑게 생각하고 있다. 더욱 나는 작년부터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 ‘생감자’이므로 부족한 점이 많아 타인의 지적이 매우 필요하다.  유감스러운 것은 내가 ‘중국동포타운신문’에 <김정룡의 역사문화 이야기> 시리즈를 싣고 사이트에 올리고 있는데 여태껏 독자들로부터 이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역사문화 이야기는 역사, 종교, 문화, 민속, 철학 등 다방면의 지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만은 사실이다. 사실 내가 역사문화 이야기를 기획시리즈로 잡고 시작하게 된 것은 우리조선족이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말들의 유래와 민속, 풍속 및 생활전통의 유래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 또 역사와 종교지식이 많이 결핍하기에 100편을 예상해서 써낸다면 조선족사회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필을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헌데 나는 학자도 아니고 문학인도 아니므로 내가 써내고도 확실한 신심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로부터 많은 지적이 필요하나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이 ‘생감자’의 고민이다. 만약 이 방면의 스승이 나타난다면 나는 겸허하게 지도를 받고 나의 수준을 제고하려고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첫째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글을 쓰고 싶으면 현실적인 것과 실리적인 내용을 담아 쓰시면 하는 바램이다. 그렇지 않고 이 경제적 시대에 ‘엉뚱한 글’ 수십만 자에 정력을 몰붓는다면 발표가 힘들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수지가 많지 않는다. 둘째 조선족 문학인들이 물론 우리민족의 정 많은 전통 때문에 그럴 수는 있겠으나, ‘누구누구를 아느냐? 누구누구와 친하느냐?’는 구태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현실 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셋째 재한조선족지성인들은 분발하여 조선족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에 적극 동참해주시길 바란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 ‘생감자’가 참으로 웃기는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오뉴월에 참외를 거꾸로 먹는 것도 제 나름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남이야 어떻게 살아가던 무슨 자격으로 왈가왈부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사실 아무런 할 말이 없다.    
110    ‘목자가 없는 양떼’…‘영모’는 수수방관? (김정룡) 댓글:  조회:5993  추천:79  2008-06-13
3. ‘목자가 없는 양떼’…‘영모’는 수수방관?   -H-2무연고동포시험장소 선정에 대하여   김정룡   작년부터 현재까지 조선족사회를 한바탕 요란스럽게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방문취업제가 난산 끝에 드디어 시행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특히 지난 3월 28일 이후 방문취업제에 관한 가장 큰 화두는 시험장소 선정문제이다. 즉 한국정부와 중국고시당국이 협상해서 지정한 시험 장소에 조선족이 집결되어 있는 연변과 흑룡강성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조선족 과련 신문과 인터넷신문들에 수많은 문인학사들이 그 폐단을 지적했으며, 그 대다수는 한국정부를 비판공격하고 일부는 중국고시당국의 잘못된 처사를 지적했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여타 조선족문인학사들의 보귀한 지적에 찬성하는 전제하에서 조금 견해를 달리하고 싶다.  조선족에게는 ‘양모(중국)’, ‘생모(고국)’, ‘영모(領母-필자의 신조어, 조선족을 이끄는 행정지도자를 지칭함)가 있는데 이번 시험장소 선정문제에 있어서 한국정부와 중국고시당국이 ‘영모’를 홀랑 빼놓고 임의로 결정해버렸다.  그런고로 시험장소 선정이 조선족 실제정황이 고려되지 않고 배제되어 결국 방문취업제는 조선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그래서 조선족 문인학사들이 떠들고 있는 것이다.  허나 예로부터 ‘소인’의 백 마디가 ‘군자’의 한마디를 당하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듯이 조선족들의 이익을 직접 대변해야할 ‘영모’가 잠자코 있는데 문인학사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무슨 효과가 있는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정부와 중국고시당국이 조선족 관련 신문과 인터넷신문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간에 기별이나 가겠는가는 것’이다. 만약 ‘영모’가 나서서 한국정부도 찾아다니고 중국고시당국도 찾아다니면서 불합리적인 것을 직접 제출한다면 조선족의 실제이익에 맞게끔 상황이 반전될 가능도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상황이 변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가장 큰 관심거리인 방문취업제에  ‘영모’가 실제행동을 보여준다면 조선족들은 그나마 우리를 이끌어주고 우리이익을 대변하는 믿을 곳이 있다는 위안이라도 갖고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번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한국정부와 중국정부가 조선족에 관련된 새로운 정책마련에 있어서 ‘영모’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수년 전에 연변대학 00교수가 ‘조선족은 목자가 없는 양떼와도 같다’는 글을 발표했다. 필자는 이번 방문취업제의 시험장소 선정논란을 통해 조선족은 확실히 목자가 없는 양떼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그리고 매우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다.  현 시점에서, 이제는 영모-지도자가 나설 때라고 나는 본다.    
109    고용허가제의 십폐(十弊)(김정룡) 댓글:  조회:5829  추천:71  2008-06-13
2. 고용허가제의 십폐(十弊)   김정룡  우리 중국동포정책 민간연구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용허가제가 존재하고 있는 폐단에 대해 아래와 같은 열 가지 사례를 임시 지적하니, 동포 분들은 이와 같은 사례에 해당되거나 혹은 여기서 지적한 것 이외의 사례가 있어 고충을 받고 있다면 속히 방문하여 반영해주시기를 바란다. 첫째 입국한 동포들이 2~3개월 가까이 일을 못하고 있다.  고용허가제의 규정에 따르면 입국한 동포들은 1주지나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고 3주 뒤에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으면 취업교육신청을 해야 한다. 1주지나 3~4일간 교육을 받고나서 구직신청을 해야 한다. 일자리는 물론 고용안전센타에서 알선해준다. 허나 고용안전센타를 통해 일자리를 해결한 동포는 실제로 10%도 되나마나 하다. 연길에서 온 박모는 고용안전세타에서 알선해준 회사 수십 곳에 알아본 결과 절대다수가 사람을 이미 구했다는 대답이거나 혹은 일자리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동포들은 이런저런 연줄을 달아 저절로 일자리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려면 2~3개월이란 시간이 걸려야 한다. 동포밀집지역인 가리봉시장 일대에는 고용허가제의 이러한 폐단으로 인하여 놀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둘째 벌금문제  동포들이 한국에 오는 목적이 그 절대다수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고용계약이 없이 일을 하다가 단속에 걸릴 경우 100만원이란 범칙금을 내야 한다.  산동성에서 온 최모는 4개월 동안 가리봉시장 동네에서 놀고 있다. 영문을 물었더니 3개월 전에 고용계약이 없이 일을 하다가 잡혀 120만원의 벌금을 물고 나니 겁나서 일을 감히 못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최모는 작년 자진귀국 전에 2년간 취직했던 회사에서 취업교육을 받기 전에 고용계약이 없이 일을 하다가 단속에 걸렸다. 본래 회사 사장이 고용계약을 해줄 생각이였지만 사장도 함께 120만원이란 벌금을 물고나니 열받아 최모를 내쫓았다고 한다. 한국말이 잘 통하지 않는 최모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 고용계약을 얻기가 너무 어려워 놀고 있다는 것이다.  강남의 모 음식점에서는 교포 일꾼 10명 쓰고 있다. 주인은 불법체류자를 고용하지 않으려고 작년에 쓰던 교포들을 동원해서 자진귀국 시켰다. 그들이 금년에 재입국하자마자 그 음식점에서 일을 하였고 동시에 취업교육과 E-9로 변경하고 있는 와중에 단속에 걸려 일꾼과 주인이 모두 벌금을 물었다. 사실 주인과 일꾼들이 모두 정부정책에 호응하려고 노력하였는데도 벌금을 문다는 것은 너무한 일이라고 그들은 하소연하고 있다. 셋째 고용계약이 너무 어렵다.  대다수의 고용주들은 웬만해서는 고용계약을 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고용주들이 부담하는 비용도 그렇거니와 계약이 이루어지면 노동부문의 간섭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설사 고용주가 계약 의사가 있다하더라도 일정 기간 테스트가 필요한데, 이 기간 단속에 걸리면 주인과 일꾼이 다 벌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서로 불안하다.  대련에서 온 설모는 테스트기간에 잡혔는데, 주인은 이 때문에 “니는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 계약하고 쓰려고 해도 앞으로 계속 재수없는 일만 생길 것 같다.”면서 그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후 설모는 이곳저곳 일자리는 쉽게 찾았으나 고용계약은 끝내 손에 쥐지 못했다. 고용계약이 너무 어려워 많은 동포들은 아예 포기하고 되는대로 일을 하고 있고 주인들도 그냥 F-1-4비자를 갖고 있는 일꾼을 더 선호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넷째 건설업에서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 문제  필자가 알아본데 의하면 현재 건설업에서 일꾼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공급할 수 있는 인력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국제노동재단에서 건설업종 취업교육을 받은 수자를 갖고 건설업이 수요하는 인력이 넘쳐났다는 통계를 기준으로 수개월 전부터 건설업종 취업교육을 중지 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취업교육을 받은 자가 전부 현장에 투입되어 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문제는 작년에 자진귀국 하였다가 올해에 재입국한 동포들 중 건설업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는 자가 굉장히 많지만, 그들은 건설업에 갈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일부고용주의 악덕행위 일부 고용주들은 고용계약을 악용하여 동포들을 착취하고 있는 사례도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동포들의 입장에서는 한번 계약을 얻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라 여기고 억지로 참고 견디다 보면 물심양면으로 망가진다.  임모 여인은 주인과의 계약에 하루 노동시간이 10시간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주인은 매일 14~16시간 노동을 시켰다. 그녀는 엄청 힘들고 또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겨우겨우 얻은 계약 때문에 4개월 뻗히고 나니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병 치료하고 재취업을 신청하니 고용안전센터에서 하는 말, “아주머니는 직장무단이탈자이므로 현재 불법체류자입니다.” “하느님 맙소서.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쓰러졌건만 끝내 역시 불법체류자로 전락되고 말았구나!”  여섯째 2개월이란 재취업시간이 너무 짧다.  동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본래 일자리를 그만두면 2개월이란 재취업시간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2개월 동안에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으나 고용계약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본신문사에 2개월 안에 고용계약이 되지 않아 곧 불법체류가 될가봐 발을 동동 구르는 동포들이 매우 많다. 일곱째 병이 나면 곤란하다.  노동부는 한번 E-9로 변경한 자는 가령 병 때문에 다른 비자로 고쳤다가 다시 E-9로 재변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강모는 E-9로 변경하고 일을 하고 있는 중 위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한국에서 치료받으려면 1000만원이란 거액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국에 돌아가서 치료하려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청하였더니 G-1(사유로 재입국할 수 있는 비자)비자를 받았다. 다행히 위암이 아니라 위게양수술을 받고 건강이 빨리 회복되어 재입국하여 E-9로 고치고 일을 하려니까 노동부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허락하지 않는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책이 도대체 무슨 놈의 정책인지?” 이것이 강모의 하소연이다.  여덟째 일단 E-9로 변경하면 임시귀국이 어렵다.  E-9로 변경하지 않고 F-1-4로 있는 자는 단기임시귀국이 쉽지만 일단 E-9로 변경하고 나면 단기임시귀국이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E-9는 고용주의 허가서가 있어야만 임시귀국이 가능하다. 실제로 대다수의 고용주들은 일꾼이 떠나면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임시귀국 하려면 일자리를 그만두고 고용계약을 해제하고 가라고 한다. 만약 고용해제를 하고 2개월이란 재취업 동안에 임시귀국할 수 있어도 괜찮지만, 이것도 불가능하다.  연길에서 온 박모 여인은 오는 10월 1일 딸의 결혼식 때문에 집에 잠깐 다녀오려고 주인과 얘기했더니 주인은 일자리를 그만두고 가라고 하길래 고용계약을 해제하고 재취업 기간에 다녀오려고 고용안전센터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찾아 갔더니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아홉째 E-9자는 쩍하면 출국명령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번 신문에 <<동포들과의 약속을 깨버린 정부정책>>이란 글에서 든 실례의 채모 여인의 경우와 E-9로 일하다가 화상을 입고 병원 치료중인 성모 여인은 갑자기 출국명령을 받았다. 본인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출입국에 문의하면 절차상에 문제가 있다는 대답뿐이다. 이럴 경우 동포들이 출입국관리사무소나 고용안전센터에 찾아가 하소연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좀 심한 말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정책당국에서는 꼬투리 아닌 꼬투리를 잡고 동포 한 명이라도 집에 돌려보내지 못해 안달을 떨고 있는 듯하다.  열 번째 3차 이상 일자리를 옮기면 불법 고용허가제의 규정에 따르면 E-9로 변경을 해도 3차 이상 일자리를 옮기면 불법이다. 실제로 많은 동포들이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일자리를 여러 차례 옮겨 다니게 된다. 특히 건설업과 간병 일을 하는 동포들은 더구나 일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흔하다. 기타 업종도 한 일자리에 오래 종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현실성을 무시하고 관련당국에서는 위와 같은 정책을 펼치고 있다.  재입국한 탁모 여인은 간병 일을 하면서 환자들의 단기입원 때문에 5개월 동안에 이미 3차례 일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앞으로 2년 반이나 더 체류해야하는데 고용허가제 때문에 불법으로 체류하면서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위에서 나열한 열 가지 폐단 외에도 존재하는 문제가 많다고생각된다. 이렇듯 폐단이 많은 정책이 왜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고용허가제로 인하여 동포들의 불법이란 터널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08    동포들과 약속을 깨버린 정부정책(김정룡) 댓글:  조회:5451  추천:67  2008-06-13
제6부 고용허가제와 H-2에 대하여 1. 동포들과의 약속을 깨버린 정부정책김정룡  법무부는 2005년 제1차 불법체류동포 자진귀국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6개월 혹은 1년 후 재입국하는 동포들은 한국에서 3년 동안 체류가 보장된다고 하였다. 허나 법무부의 이러한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노동부의 고용허가제 때문에 재입국한 동포들이 3년 체류보장은 고사하고 6개월 혹은 1년 사이에 무더기로 불법체류자로 전락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지난 제2차 불법체류동포 자진귀국프로그램이 실시되는 기간에 F-1-4로 재입국한 동포들이 재차 자진출국을 원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그 이유는 재입국 할 때는 3년 합법체류라는 꿈을 안고 왔으나 고용허가제로 인하여 이미 불법체류가 되었거나 곧 불법으로 되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입국 한 동포들이 일자리를 찾았다 해도 업주들이 고용계약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고 어렵게 고용계약이 되었다 해도 단기간 내에 일이 끝나버리거나 고용주와 피고용인사이에 이런저런 갈등이 생겨 일을 그만두면 또 새로 취직하고 다시 고용계약을 맺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그리고 노동부는 재취업 재계약 시간을 보통 2개월로 제한해 놓아 동포들은 그 기간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혹시나 하고 기대하고 있다가 역시나 하고 불법체류가 되어버리고 만다. 현재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포들이 본센터에 하루 평균 3~4 정도 방문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용안전센터는 동포들을 안전하게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포들을 불안 속에 몰아넣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요녕성 철령시에서 온 채모 여인은 서비스업종 취업교육을 받고 E-9로 변경하고 1년 동안 식당일을 하다가 다시 건설업종취업교육을 받고 건설현장에서 잡부일을 4개월 남짓이 하는 도중에 지난 8월 30일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불러 이튿날 가보았더니 9월 14일까지 무조건 귀국하라는 출국명령서를 받았다. 오는 10월 13일까지 체류연장이 되어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출국명령은 청천벽력이었다. 허나 본인절로 고용안전센터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아무리 억울하다고 따지고 들어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결국 본센터 고충상담실을 찾아서 도움을 청하여 문제해결을 받을 수 있었다. 흑룡강성 아성시 강모 여인은 E-9로 변경하고 가정집에서 일을 하다가 10월1일에 있을 딸 결혼식 때문에 잠간 중국에 다녀오려고 하였는데 업주가 허가를 주지 않아 할 수 없이 고용계약을 해제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고용안전센터에 신고했더니 “아주머니는 출국하면 재입국이 안 된다”는 대답뿐이었다. 다시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문의하였더니 역시 재입국이 안 되다는 대답이었다. 문제는 본신문사에서 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에 문의해보았더니 고용주와 함께 고용안전센터에 고용해제를 신고하고 2개월이란 재취업 기간에 잠깐 중국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고용허가제가 이렇듯 재입국한 동포들에게 까다롭다보니 일부 동포들은 아예 E-9로 변경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F-1-4로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합법체류자라 하더라도 E-9로 변경하지 않고 일을 하다가 단속에 걸리면 1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하므로 늘 불안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재입국한 동포들은 F-1-4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보통 1년이므로 체류만료가 다가오기 전에 E-9로 변경해야하는데 변경이 쉽지 않거니와 어렵게 변경되어도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불법체류자로 전락될 확률이 매우 높다. 때문에 F-1-4로 일하고 있는 동포들은 하루하루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정부는 말로는 불법체류를 해소하기 위해 자진귀국지원정책 프로그램을 실시한다고 하지만 현실상황은 한쪽으로는 불법체류를 양산해내고 있으며, 결국 동포들로 하여금 고국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없게끔 만들고 있다며 동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107    단편기사모음(김정룡) 댓글:  조회:6232  추천:87  2008-06-13
9. 단편기사 모음 김정룡  <1>어느 불법체류동포여성의 복잡했던 사연  중국 길림성에서 온 장도 여인은 2001년 3월 결혼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3개월 만에 가출하여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그 후 2002년 1월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했다.  그녀는 2003년 7월 다른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하여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재입국에는 성공했지만 남자가 체류연장을 해주지 않아 또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이번 자진귀국정책에 호응하여 자진출국 하려니깐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즉 위조여권에 대해 경찰조사를 받아야 하고 위장결혼사건에 관해서도 조사를 받아야 한다. 또 위장결혼상대와 이혼정리를 해야 한다. 또한 첫 번에 결혼했던 한국인 남자와의 호적정리까지 마쳐야 한다.  이러한 복잡한 절차에 겁먹고 까무러칠 지경으로 심경이 혼란스러워 그녀는 처음에 자진귀국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살아가려고 생각했었다. 허나 본센터의 자세한 상담을 받고나서 그녀는 자진귀국 하기로 마음먹고 복잡한 절차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그녀는 모든 절차를 마치고 재입국을 보장받을 수 있어 “숨 막힐 듯 가슴이 답답했었는데, 이제는 마치 목을 조이던 멍에를 벗어버린 듯 홀가분하네요.”라고 말하면서 밝게 웃었다.    <2> 어느 위장결혼자의 ‘喜’와 ‘悲’  중국연길에서 온 차모 여인은 한국생활을 포기하고 무작정 귀국하려고 지난 6월 20일 인천공항에 갔었는데 출국금지를 당해 발길을 되돌리는 순간 하늘땅이 뒤집어지는 듯 앞이 캄캄해났다.  그녀가 출국금지를 당한 이유는 이렇다. 2001년 12월에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입국한 후 3개월 만에 브로커가 잡히는 바람에 경찰서에 체포되어 갔다가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해버렸다.  출국금지를 당한 그날 저녁 그녀는 맥 빠진 기분으로 안양에 있는 동생 집에 머물면서 밥 한 술,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동네 중국식품가게에 먹거리를 사러 갔다가 우연히 중국동포타운신문에 위장결혼자들이 자진출국에 관한 절차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부랴부랴 본센터에 달려왔다. 이리하여 그녀는 본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혼절차도 마쳤고 경찰수배도 풀리어 1년 후 재입국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당초에 그녀는 불법체류라는 딱지 때문에 늘 숨어살아야만 했고 더욱이 수배자라는 멍에가 싫어서 아예 한국생활을 포기하고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모든 것이 풀리고 나니 1년 전에 빨리 한국에 올 수 있는 길이 없느냐고 필자에게 묻고 있다.  그녀는 지난 1개월 동안 복잡했던 한국생활을 회상하면서 “참으로 ‘희’와 ‘비’가 엇갈리고 마치 천당과 지옥을 오간 심정입니다. 어찌되었든 결과가 좋으니 기분이 참 좋네요.”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3> 불법체류 결혼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말  필자는 현재 불법체류동포들의 자진출국에 관한 상담을 맡으면서 생각 밖으로 불법체류로 전락된 결혼자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불법체류 결혼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이혼이 된 줄도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족여성들이 한국남자와의 결혼생활을 접고 가출했을 경우 남자 측에서 가출신고를 하고 3개월이 지나 이혼소송을 제출하고 또 3개월이 지나면 이혼판결이 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본센터에 찾아온 가출여성들 가운데 90%는 이미 이혼된 상태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혼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즉 남자의 본적지와 주민등록번호를 알아가지고 대한민국의 아무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을 떼어보면 이혼 여부가 드러난다.  만약 이미 이혼이 되었으면 이혼한 법원에 가서 이혼판결서(혹은 이혼확인서)를 받아갖고 호적등본과 함께 중국어로 번역하고 공증하고 외교통상부와 중국영사관의 인증을 받아야 절차가 끝난다. 만약 이혼이 안 되었으면 이혼소송을 제출하고 나머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4> 두 위장결혼자의 ‘천당’과 ‘지옥’  중국동포 이모 여인과 장모 여인은 서로 친구사이이자 같은 브로커를 통해 3년 전에 위장결혼으로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그들은 한국에 온지 1년 만에 브로커가 잡히는 바람에 수배자가 되어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매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왔다.  그러던 와중에 마침 제2차 자진귀국프로그램이 실시되어 그들 두 여인은 중국동포타운센터에 출국신고를 해놓아 구제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모 여인은 중국동포타운센터의 역할에 대해 반신반의 하고  있다가 검찰청의 거듭되는 출국명령에 못 이겨 그냥 무작정 귀국하였고, 장모 여인은 운명을 중국동포타운센터에 맡기기로 마음먹은 결과 모든 것이 잘 풀려가고 있는바 그 내막을 자세하게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장모 여인은 중국동포타운센터의 안내로 경찰서에 자수하여 조사를 받고 수배가 풀렸으며 현재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한 결과 장모 여인은 1년 후 재입국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법적으로 다른 남자와의 결혼도 가능해졌다. 이에 비해 이모 여인은 검찰청의 압력에 못 이겨 무작정 귀국하다보니 이혼절차와 나머지 공증, 인증절차를 밟지 않은 탓에 재입국의 길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黑人’, 즉 어느 나라 공민도 될 수 있으며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모 여인은 이제 20대 후반으로 너무 일찍 ‘黑人’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인간의 삶을 잃고 말았다.  허나 한국경찰과 검찰 및 법무부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동포여성들의 미래 운명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강제추방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5> 헛소문만 믿고 자진출국을 망설이는 한 여인  흑룡강성 목릉시에서 온 김모 여인(여권위변조자)은 본센터에 자진출국신고를 하였다가 취소하는 행위를 세 번이나 반복하던 끝에 끝내 귀국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그녀가 이렇게 오락가락 망설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한국정부정책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고, 두 번째는 여권위변조자와 밀입국자가 귀국할 경우 중국 측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헛소문을 믿게 된 것이고, 세 번째는 이번 제2차 자진출국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귀국하는 모든 동포는 아예 재입국이 되지 않도록 중국 측에서 일률로 막아버린다는 얼토당토한 헛소문을 믿게 된 탓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불법체류동포들이 중국동포타운센터에 자진출국신고를 하는 수가 매일 늘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결국 귀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현재 김모 여인처럼 이런저런 헛소문을 믿고 자진출국을 망설이고 있는 동포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불법체류동포들은 마땅히 한국정부와 중국정부를 믿고 또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모든 절차를 완벽하게 마치면 재입국이 보장된다는 것을 믿고 이번 기회에 귀국하였다가 1년 후 재입국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한국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6>“두 번 울고 있는 국제결혼 이혼자들”   한국인과 조선족 간의 국제결혼건수가 폭증함에 따라 한사람 건너 헤어질 정도로 이혼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 국제결혼으로 왔다가 이혼한 조선족들은 그 이혼사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겪게 된다. 문제는 이혼자들이 한 번의 울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서 이혼만 하면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라 이혼서류(판결문, 호적등본)를 중국어로 번역공증하고 대한민국외교통상부와 중국대사관영사부의 인증을 받아 중국에 돌아가서 중국호구에 적힌 한국인과의 결혼기재를 정리해야 전부 정리가 된다.  그런데 연변을 제외한 기타 지방에서는 이혼자들이 판결문과 호적등본 중 어느 하나만 번역공증인증을 받아 가면 호구정리가 된다. 허나 연변에서는 판결문과 호적등본 두 가지를 반드시 번역공증인증을 받아와야만 호구정리가 된다고 강요한다. 당연히 하나보다 둘이 비용이 곱절로 든다. 그러므로 연변출신 이혼자들은 타지방 이혼자들보다 돈을 배로 써야한다.  중국은 지방마다 자체 ‘토정책(土政策)’이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연변주법원의 아래와 같은 일 처사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 법에 의하면, 이혼은 대체로 협의이혼과 소송이혼 두 가지이며, 위장결혼의 경우 법적으로 위장이란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혼인무효소송 혹은 호적정정허가신청을 제출하게끔 되어 있다. 만약 혼인무효소송을 제출하여 이혼되면 판결문이 나오고 호적등본에 말소로 기재되며, 호적정정허가신청을 제출하면 재판을 열지 않기 때문에 판결문 대신에 ‘결정문’이 나오고 호적이 말소된다. 이럴 경우 ‘결정문’도 판결문과 똑같은 법적인 효력을 갖는다.  그러나 연변주법원에서는 위장결혼자들이 이혼 ‘결정문’을 번역공증인증을 받아갈 경우 “우리 법원에서는 판결문만 접수할 뿐 ‘결정문’은 접수하지 않는다. 다시 판결을 받아 와라”고 하면서 처리해 주지 않아 일부 조선족 이혼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럼 왜 연변을 제외한 타지방에서는 ‘결정문’을 판결문과 똑같이 취급하고 호구정리를 해주고 있는데 하필 연변만은 안 되는가? 도리대로 말하자면 조선족집거지인 연변주가 마땅히 타지방보다 조선족에 대한 일련의 정책조례가 더 완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타지방보다 가슴에 멍까지 든 조선족들을 울리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고집하고 있는 처사에 대해 지방정부는 이제 마땅히 참다운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7> 한국 ‘스승의 날’ 맞아 살펴보는 중국 ‘교사절’  한국에서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중국은 9월 10일이 교사절이다. 교사절이란 말 그대로 스승의 날이다. 이 날은 학교에서 행사도 하고 TV에서도 하루 종일 스승과 제자에 대하여 다룬다. 참고로 유네스코가 선포한 세계 스승의 날은 10월 5일이다.  중국의 교사절은 중국의 3대 전문직업과 관련된 명절 중의 하나인데 다른 두 개는 간호사절(護師節)과 기자절(記者節)이라고 한다. 그 중 1200만의 방대한 대오를 구유하고 있는 교사절이 가장 각광받고 있다.  중국교사절은 1983년에 출범했으며 매년 9월 10일로 제정되었다. 그 유래와 의미를 간단히 짚어본다면, 중국은 공자의 집도수학(聚徒授學) 행위를 본격적인 교육의 출범으로 간주하여 중국교육역사를 2500년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인 유교국가로서 교육을 매우 숭상해왔으며 따라서 스승도 가장 존경의 대상으로 취급되어왔다. 이러한 우량한 전통이 문화혁명을 맞아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 당시 교사를 ‘고린내 나는 아홉째(臭老九)’라 몰아붙이고 타도대상이 되었다. 스승과 제자는 한 전호 속의 전우라 하여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도 없어지고 심지어 제자들이 스승을 때리는 한심한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교사의 위망은 바닥으로 완전히 추락하고 말았다.  1978년부터 개혁개방 노선이 추진되면서 상황이 급전한 것이다. 교육의 중요성이 주목받게 되었고 따라서 교사를 우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이윽고 1983년에 첫 교사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해마다 교사절이 오면 학교별로 제자들이 스승을 윌ㄹ로하는 행사가 있고, 또 학교마다 그리고 행정구역에 따라 층층이 위로 중앙교육부에 이르기까지 우수교사를 선출하고 표창한다.  교사절이 오면 학부모들도 선생님에게 고마운 맘의 성의를 전달하는 의미에서 정도가 부동하게 선물을 증송한다. 중국은 교사절의 출범을 계기로 교육을 숭상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옛 전통이 회복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코리안드림’의 여파로 교사직을 버리고 한국에 나온 조선족 ‘선생님들’이 많다. 이로 인해 조선족사회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교사부족난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또한 출산율의 저하와 도시로의 대이동으로 인하여 조선족학교에 학생 수가 줄고 폐교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교사절이면 한국에 나와 일을 해 돈을 번 학부모들이 선생님에게 촌지를 바치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건전한 교사절의 의미가 퇴색해 가고 있다. ‘교사가 떠나고 아이들도 사라져가는 조선족학교의 미래를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 다 같이 고민해봐야 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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