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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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음력설을 어떻게 쇨것인가? 댓글:  조회:6981  추천:9  2011-05-13
음력설을 어떻게 쇨것인가?    음력설은 중국에서는 춘절이라하며 최대의 전통명절로 하고 나라에서도 법적 으로 7일 련휴일하고 있으며 조선, 한국에서도 전통명절로하고 3일간 휴식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통명절 음력설을 어떻게 의의있고 즐겁게 쇠겠는가하는 저의 소견을 말한다면 매 가정마다 정황에 따라 5.1절, 국경절 련휴일을 리용하여  가정유람을 하는것처럼 가정유람을 조직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시대의 발전에따라 자식들이 모두 부모를 떠나 외지에 나가 사업하다나니 한집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을 기회가 매우 적은것입니다. 사람은 늙을수록 친인을 더 그린다고 특히 부모, 조부모되는 분들은  자기의 자손들을 몹씨 그리워하고 있는데 우리의 전통명절 음력설 련휴일 기간에는 한집 식구 혹은 친척들끼리 한자리에 모여앉아 그리운 정을 나누면서 즐겁게 설을 쇠는 것이 좋지않는가하는 생각입니다.     예로부터 설날아침이면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오래오래 앉으세요.》,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는 형식으로 절을 올리면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간단한 생활소비, 혹은 학업에 유리한것들을 사라고 약간의 세배돈을 주는것으로써 어른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우리 조선민족의 전통풍속이 내려왔는데 지금도 많은 집들에서는 이 풍속을 지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집들에서는 어린이들 에게 세배돈을 주는것이 몇백원, 몇천원 지어는 그 이상으로 되고 있는데 어린이들 은 또 설이 지나면 학교에 나가서 나는 이번 설에 세배돈을 얼마 받았다. 너는 얼마를 받았니 하며 서로 비기고 있는데 이러한것들은 우리의 전통 풍속과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세배돈은 그 아이의 지배능력만큼 주는것이 합당하지 않는가? 기 실 어린아이들이 몇백원, 지어는 몇천원이상의 돈을 지배할 능력이 없는데 그 많은 돈을 준다면 전통풍속 의미를 떠날뿐만 아니라 세배를 하여 많은 돈을 가지려는 사상을 키워 줄수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학습에 유리 한 그 어떤 도구를 사라고 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세배돈이라는 명목으로 주지 말고 직접 학업에 유리한 도구를 사주면서 학습을 잘 하라고 한다면 그 아이에게 는 더 큰 고무가 될수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릴때에는 방학기간의 활동으로 그믐날이면 동네 학생들이 모여서 렬군속, 오보호가족을 방문하고 렬군속영광패에 꽃을 달아주고 집뜨락을 청소하고 땔나무를 패 준다든가하는 유익한 일들을 하고 설날아침이면 동네 년세가 많은 로인들을 방문하고 세배를 올리는 활동을 하였는데 지금은 우리 조선민족의 이런 전통 미량풍속이 많이 사라지고 있지않는가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가끔 이런것들을 듣거나 보게 되는데 야—설이 돌아 오는데 상급 령도에 어떻게 인사를 하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인사는 몇백원을 놓고 말하는것이 아니라 몇천원, 몇만원 지어는 그 이상을 말하는것이며 일부 부패한 령도간부들은 이런 인사를 받는것을 응당한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 와는 10만 8천리 떨어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설이면 집단적으로 윳놀이, 상모춤, 널뛰기, 썰매타기 등 민속놀이와 레포 츠활동을 많이 벌리였는데 지금은 이런것들이 전부 살아지고 친척끼리 모여않아 트럼프치기, 마작판을 벌리고 잇는데 그것도 돈이 엄청나게 나들어 설뒤끝에 출근하면 나는 이번 설에 몇백원 땃다는둥, 나는 이번설에 몇백원 잃었다는 등 이런 말들을 듣게 되는데 이런 도박성적인 눌음은 금지하고 집단적인 민속놀이 레포츠활동은 하지 못하더라도  집안끼리 앉아서 노래와 춤, 윳놀이 등 활동을 벌 린다듣가 스케트장, 스키장 등 곳에 가서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영원한 기념으로 남길수 있는 가족사진같은것을 찍는것이 좋지않는가하는 소견입니다.   2006.1.27.금요일 6:30 연변인민방송에서 생방송 2006.10.25. 수요일 10:10 아리랑방송《녀성시대》에서 생방송  
42    연변인민방송국 성립60주년 축하 댓글:  조회:7781  추천:10  2011-05-13
연변인민방송국 성립60주년 축하    지금 연변인민방송국 성립60주년을 맞는 이때 저는 연변인민방송국 령도동지 들과 전체 임직원들에게 축하를 드릴니다.     우리 나라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연변인민방송이 제일 처음으로 자기 민족 언어로 방송되였다는것은 연변인민방송국의 자랑이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랑이 며 나아가서는 해내외 조선족동포들의 자랑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곧 위 성방송을 개시한다고 하니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저의 하루일과는 아침에 깨여나 라디오를 켜놓고 연변인민방송을 듣는것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특히 소식보도와 사회교육프로는 저의 하루일과에서의 필수과로 되고 있습니다.     연변인민방송이 60주년의 력사를 갖고 있다면 제가 이 방송을 들은 력사는 소 학교때《과학할아버지와 꽃분이》프로부터 시작하여 들었으니 50년의 력사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일생에서 소학교로부터 대학까지의 이 학교가 제1학이고 연변인민방송이 제2학교인것입니다.제가 이렇게 말할수 있는것은 제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외의 절 때대부분의 지식은 독서와 연변인민방송을 통하여 장악한것이고 학교에서 배운지 식과 독서는 정력을 집중하여 학습하여야 하지만  방송은 아침에 깨여나서 잠자리 에서도 들을수 있고 또 밥먹고 일하면서도 들으며 학습할수 있기에 저의 제2학교 이자 제일 좋은 교실이라고 할수 있으며 연변방송의 매 프로는 저의 훌륭한 교재 로 되고있습니다.  제가 연변인민방송을 즐겨 듣는것은 또 소식전파가 제일 빠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보다도 빠르고 신문보다도 빠른것입니다. 오전에 발생한 사건이 점심이면 방송되고 생방송을 통하여 청취자들과 아나운서가 직접 대화하고 교류할수 있기 때문입니다.《법제사회》이 프로는 청취자들에게 법제선전교육도 되고 이프로를 통하여 백성들이 민사분규에서 법을 몰라 해결 하지 못하던것을 이 프로를 통하여 해결하는것입니다.《김대용열선》이 프로는 백성들이 어려운일을 해당부문을 찾아 여러번 다녀도 해결을 받지 못한것을《김대용열선》에 전화를 걸면 기자들이 직접 현장 혹은 해당부문을 찾거나 전화로 련결하여 해결해 주어 백성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프로입니다.     그리고 조선족의 문화를 학습하고 잘전시키자면 그래도 연변인민방송을 들어 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조선족력사의 발자취거나 조선족문예프로들은 연변방 송 이거나 연변TV에서만 듣고 볼수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연변인민방송을 더욱 잘 꾸려 우리 조선족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가꾸 고 발전시켰으면 하는것입니다. 2006년7월1일6:30연변인민방송《사회교육》프로와 12시《연변뉴스》프로에서 방송  
41    부패현상ABC 댓글:  조회:7707  추천:11  2011-05-13
부패현상ABC 주청룡   지난해8월, 중앙규률검사위원회에서는 제2차전체회의를 가지고 《반부패투 쟁》을 벌릴것을 정식으로 호소하였다. 뒤이어 금년2월, 중앙규률검사위원회에서는 또 제3차전체회의를 열고 반부패투쟁을 지구적으로 심도있게 전개할것을 강조하였 다. 하다면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내는 부패현상에는 구경 어떤것들이있는가?   A.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현상 공금으로 마구 먹고 마시는 바람은 력사가 오래고 뿌리가 깊은 부패현상인데 지금 줄어들대신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어떤 지도간부들은 손님을 접대한답시 고 마구 먹고 마시는가 하면 경축활동을 한답시고 마구 먹고 마시는데 여하튼 무슨 명 목을 대서든지 매일이다 싶이 고급술, 산해진미로 만포식하고있다. 자료에 의하면 재작년에 우리 나라에서 도합 1,000억원의 공금을 허비하였 는데 그중 절대대부분이 먹고 마시는데 처넣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들의 배를 가 리키며 이렇게 풍자하고있다.《〈만삭〉이 된 저 배속에는 공금이 꽉 들어 찼다 오!》 B. 공금으로 유람하는 바람 지금 지도간부들이 참관, 학습이란 턱을 대고 공금으로 전국 각지를 유람하 거나 지어는 외국고찰이요 하는 미명하에 공금으로 외국까지 유람하는 바람이 일 고있다. 진짜로 참관, 학습에 열중했다면 그건 나무랄바가 못되지만 숱한 공금을 팔아 참관, 학습햇다는 사람이 머리속에는 명승지인상뿐이고 들가방에는 유람사진 뿐이니 이거야말로《개대가리를 내 걸고 양고기를 파는》격이 아니고 뭔가. 그래서 룡정시 모 단위의 공회주석은 공회주석회의에서 이렇게 유모아적으로 불만을 터놓았다. 《〈장〉자가 붙은〈나으리〉들은 유람길에 흥이나고 우리 공회 주석들은 화장터﹝본 단위거나 관계단위에 사망자가 나면 공회에서 책임지고 연길 화장터로 간다.﹞다니기에 바쁘다오.》고.   C. 회뢰, 수뢰하는 바람 지금 개인일을 처리하거나 집체일을 처리하거나를 막론하고 회뢰,수뢰라는 이 매개가 굉장한《배역》을 놀고 있는듯 하다. 룡정시 모 진의 어느 기업소에서는 성 해당부문의 공인을 맞으려고 몇번이나 찾아가 비나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쓴외보듯 랭대만 받았다. 그런데 5,000원짜리 현금봉투를 내미니 일이 그렇게도 쉽사리 풀릴줄이야.   D. 주택분배에서 한목 보는 현상 이 몇년간에 룡정시에서 많은 주택들이 즐비하게 일떠섰다. 이런 살림집의 면적 은대부분이 70,80평방메터, 90평방메터쯤 되는데 120평방메터되는 살림집도 있다. 평 방메터당 1,000원도 넘는 살림집을 백성들이 사기에는 힘에 부친 일이 아닐수 없다. (1) 파가이주호들도 엄청난 웃돈을 물 엄두를 못내고 시내밖으로 쫓겨나 가는 형편이다. 하지만 실권을 틀어쥔《나으리》들은 손쉽게 이런 집을 손안에 넣는다. 그들 은 단위에서 헐값으로 처리한 이런 주택을 쓰고 살다가도 전근이나 하게되면 그 집을 고가로 팔아버리기도 한다. 군중들의 반영에 의하면 룡정시 모 국의 국장어른 은 300여 평방메터나되는 집을 쓰고 산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유족한 생활수준 에 이르러 우리나라 도시의 인구당거주면적은 8~10평방메터에 달한다고 한다. 그 렇다고 할 때 이 국장어른은 진작 유족한 생활수준을 벗어난 주택에서 호강생활을 누리고있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E. 관혼상제를 돈벌이하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는 현상 지금 일부 지도간부들은 생일잔치, 결혼잔치, 환갑잔치 지어 부모의 장례식 까 지도 돈벌이하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기회에 자기와 관계가 있는 모든 단위와 개인에게 청첩을 보낸다. 그러면 청첩을 받고 오는 단위 나 사람들은 청한 사람의 직위가 높고 낮음에 따라 례물이나《부조》를 들고 온다. 룡정시 모 단위의 한 지도간부는 련속 일주일이나 식당에서 어린애의 돌잔치를 차 렸는데 여기에 요청된 손님이 얼마이며 들어온《부조》가 얼마인지 누구도 알수 없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째지게 곤난한 현인 하북성 량수현의 현위서기 류청방은 어머니 상사를 치르는 기간에 당지 각 단위와 개인으로부터 실물외《부조금》 30 여만원을 받아들엿는데 1,000원이하되는《부조금》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한 다. 하기에 백성들은 어느 간부가 잔치나 상사를 치르게되면《또 목돈을 벌게 됐!》라고 개탄하고있다.   F. 고급승용차에 앉아 호강하는 현상 지금 기업소, 사업단위의 부분적인 지도간부들은 단위의 경제가 어떻든간에 승용차만은 남한테 짝지려 하지 않는다. 불경기상태에 처한 룡정시의 어느 기업소 에서는 일거리가 없어 대부분 종업원들이 집에서 놀거나 거리에서 인력거를 밀고 다니지만 공장장만은 날마다 고급승용차를 타고 출퇴근하고있다. 그리고 기자가 하루아침 정주시 모 소학교문앞에서  관찰한데 의하면 단위의 승용차로 제집아이를 학교까지 실어다준 실례가 176여차에 달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연변농학원의 장기건원장은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마땅한 일이지 만 날마다 보통 교원, 종업원들과 함께 뻐스에 앉아 출퇴근하고 있으며 남경군구 모부《주덕경위퇀》은 1985년부터1993년까지의 8년사이에 선후로 다섯명의 정위가 바뀌였지만 모두 제일임 정위가 남겨놓은 자전거를 타고《하향》하고잇다. 얼마나 선 명한 대조를 이루는가! 이상에서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내는 몇가지 부패현상에 대해 두루 렬거해 보았 다. 그럼 이뿐인가? 아니다! 이밖에도 공금으로 가라OK, 사우나 출입을 하는 현상, 의례 국가에 들어가야 할 세금으로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는 현상, 직권을 리 용하여 가족, 친척의 직업, 주택을 해결하는 현상 그리고 또…   《지부생활》1994년제6기에 발표
40    모아산 남쪽비탈 흰돌을 메울수 없을가? 댓글:  조회:7625  추천:12  2011-05-13
모아산 남쪽비탈 흰돌을 메울수 없을가?   평균 해발150m인 연길분지에 해발 517m의 높이로  우뚝솟은 모아산 국가삼 림공원은 우리 연변에서 관광코스의 하나로 될수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다.  모아산은 산봉우리 모양이 모자모양이 같다하여 모자모양의(帽儿)자를 써서 모아산이라고 하였을것이다. 모아산도 해발517m의 높이므로 매우 높다고는 말할수 는 없지만 모자모양으로 분지에 우뚝솟아 상대고도가 높아 보이기에 유람객들의 마음을 끌수 있는것이다. 그리고1962년6월23일 경애하는 주은래총리께서 연변시 찰시에 연길에서 연변농학원을 시찰하러 가실때 모아산을 지나면서 모아산이 록 화가 잘 되지않은것을 보시고 의미심장하게《우리는 자손후대를 위하여 생각을 하 여야 합니다. 절때로 삼림을 잘 보호하여야 합니다. 이는 나라의 경제와 인민의 생 활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삼림을 잘 보호하지 못하면 자손 후대들이 우리를 욕합 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여 연변에서는 주총리의 지시를 받들고 모아산에 식수 조림을 하고 봉산육림을 잘하여 오늘에는 아름다운 국가삼 림공원으로 가꾸었다. 해마다 봄이면 백화가 만발하고 가을이 되면 여러가지 나무 들이 울긋붉긋 단풍이 들어 북경 향산공원의 가을 풍경을 구경하는듯한 감이 든다. 모아산은  모자모양 으로 분지에 우뚝 솟아 보기에도 가관이지만 또한 이렇한 력사적 의의도 갖고 있 는 국가삼림공원이다.     뻐스를 타고 연길—룡정으로 다녀온 분들은 모아산을 지날때 옥에 티라할가 남쪽비탈에 돌을 캐낸자리 같은 흰 돌들이 보이는것을 보았을것이다. 이것은 예쁜 색시가 구멍이 뚫린 꽃저고리를  입은듯한 감을 주고있다. 연룡도(延龙图)도시 발전협조사업지도소조 판공실에서 제공한데 의하면 연룡도로(延龙道路)의 모아 산구간을 조선민족특색이 있는 유람구를 건설한다고 한다.(지부생활 2006년 제10 기에서) 이런 아름다운 삼림공원에 조선민족특색이 있는 유람구를 건설한다 할 때 이러한 흠집이 보인다면 아주 서운한 감이 들게 된다. 금년도 9월22일 연변일보에 최병태 림업고급공정사가 모아산 생태림 환경조절을 할것을 제기하였는데 아주 좋은 건의였다. 그렇 다면 어떻게 좋은 방법을 대여 허물로 되고있는 이 흰 돌들을 메울수는 없을가? 필자는 건축부문의 여러 전문가들을 찾아 의론하여 보았는데 그 흰 돌이 내놓인 부분을 뒤벽으로 하고 금자탑식의 건축물을 지으면 그 허물을 지우기도 하고 미관에도 하주 좋지 않는가하는 구상들이였다. 그렇게되면 연변에도 라싸 부다라식의 건축물이 있어 보기에도 좋고 모아산이 주은래총리의 배례하에 오늘은 력사적 의의를 가진 국가삼림공원으로 가꾸어졌는데 그 건축물을 조선민속 박물관이나 그 어떤 전람관 같은것으로 하여 모아산을 연변의 관광코스의 하나로 하면 유람객을 더 끌수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다. 필자의 졻은 견해를 이렇게 내놓으니 여기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아 이렇게 력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모아산삼림공원을 잘 보호하고 가꾸어 연변의 아름다운 조선민족특색이 있는 풍경유람구로 건설하자는 마음이다.   2007年3月23日星期五연변일보제4면에 실렸음  
39    맹인도로를 가로 막지 말았으면 댓글:  조회:7779  추천:12  2011-05-13
맹인도로를 가로 막지 말았으면    주청룡 우리나라 맹인들도 중화민족 대가정의 한 성원으로서 그들도 공민의 모든 권리 를 향수할수 있으며 거리에 나와서도 그들이 가야할 길을 걸을 권리를 가지고있습 니다.《중화인민공화국 장애자 보장법》제46조에는 《국가와 사회에서는 점차적으 로 장애인들이 편리하게끔 도시도로와 건축물설계를 규범화하고 무장애조치를 대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여 연길시 정부에서도 거리에 맹인도로를 만들어 그들의 걸음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차량운전수들과 영업업 주들은 맹인도로에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차를 세우거나 물건을 가로 놓아 맹인 들의 걸음에 불편을 주고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도로교통안전법》제56조에는 《기동차는 반드시 규정한 지 점에 세워야 하며 인행도에 기동차를 세우는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고  제59조에는 《비기동차는 반드시 규정된 지점에 세워야 하며 차를 세우는 지점을 정하지 않은 곳에 비기동차를 세울때에는 기타 차량과 행인의 통행에 방애를 주어 서는 않된다.》고 규정하였으며 제 46조에는 《맹인이 도로에서 통행할때에는 반 드시 지팽이(盲杖)를 사용하거나 기타 맹인을 부축시키는 수단을 써야 하며 차량들 은 반드시 맹인들에게 양보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때 보면 한 화물차(吉H-07487)가 연길시 모 음식점(海兰路 1450-13)앞의 맹인도로에 가로 세워  있는것을 보게 되며 매일 점심때면 해란 로의 미식거리의 음식점 앞을 보면  각종 승용차들이 전체 미식거리의 맹인도로 에 한줄의 횡대로 가로 세워져 있는것을 보게 되는데 한번은 한 맹인이 지팽이를 더듬으며 길을 가다가 맹인도로에 가로 놓여 있는 자동차에 막히게 되였는데  그 옆에 있던 행인이 인차 그 맹인을 부축하여 그 차량을 에돌아 다시 맹인 도로까지 모셔 가는것을 보게 되였습니다. 이 얼마나 고상한 행위입니까? 성한 사람도 길을 가다가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불편한데 앞 못보는 맹인들이 길에 장애 물이 있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하지만 맹인도로에 차를 세워 놓고 음식점에 들어 가 식사를 하는 운전사들은 자기들의 차로하여 맹인들의 걸음에 얼마나 불편을 주 는지 알고나 있는지?     그리고 또 해란로에 있는 모 미발청(绿世界美发)에서는 영업간판을 맹인들에 대한 붉은 교통신호등마냥 맹인도로에 세워 놓고 밤낮으로 영업을 하고 있으며 다른 거리를 돌아 보아도 상업운수를 하는 각종 기동차와 인력거들이 아무런 꺼리 낌도 없이 맹인도로를 가로 막고 있는것을 보게 되는데 앞으로 차량운전수거나 영 업간판을 맹인도로에 세워 놓고 영업을 하는 영업업주들은 이 방면에 중시를 돌려 다시는 맹인들에게 불편을 주지 말고 정상적인 교통질서를 유지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006년 10월18일 연변일보 제2면 2006.6.30 일요일 연변인민방송 《일요칼럼》에서 방송 2006.10.25. 수요일 아리랑방송《녀성시대》에서 생방송     //    
38    례식사회자의 자질을 높였으면 댓글:  조회:7966  추천:11  2011-05-13
례식사회자의 자질을 높였으면   지난해 12월21일 연변일보에 송철운선생이쓴 《사회자 책임감 높여야》란 문 이 실린후《연변의 사회자들도 장춘의 사회자들처럼 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응당 사회자증서제를 실시하여 사회자의 자질을 높여야 한다.》는 독자들의 반향이 아주 컷다. 지금 연변의 례식사회자들은 하루에 여러집의 사회를 맡아 보다니 첫집의 사 회는 10시전부터 하다니 대부분의 하객(贺客)들이 도착 하였을 때에는 이미 례식이 끝난 때여서 희사를 축하하려 갔다는것이 례식을 보지도 못하고 음식만 먹고 오는 때가 많으며 마지막집은 하객들이 다 모인 다음에도 사회자를 기다리는것이 두시 간 더되니 주인측과 하객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 얼마전 필자는 은사님의 회갑잔치에 참석하였는데 사회자가 와락와락 나그네 말죽먹이듯 대충 해치우고 례식장을 떠나는 바람에 은사님의 가속은 물론 모든 하 객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필자는 은사님의 회갑잔치라 례식장을 찾는데로부터 거들어 주었는데 여러 례 식장을 돌아 다녔지만 명절대목이라 례식장이 모두 예약이 있었다. 어쩌다 우리의 행사날에 예약이 없는 례식장을 찾았는데 그나마 사회자와 가수, 악사를 모두 자기 들이 지정한다는것이였다.(알아본데 의하면 명성이 없는 사회자들은 보스에게 수수 료를 주고 보스는 또 수수료를 주는 사회자만이 추천하는 희극까지 논다고 한다.) 사실 그 집안에는 단위에서 각종 행사에 사회를 맡아 하던 사람이 있어 그집 회 갑잔치에도 얼마든지 사회를 맡아 할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또 전국성적인 노래콩 쿠르에서 대상, 금상을 받은적이 있는 가수도 있었지만 그 례식장을 쓰기위해 례식 장의 보스가 추천한 사회자가 사회를 맡도록 하였다. (만약 문장이 길면 붉은부분을 삭제)예약한 날이 오래되니 혹시나 날짜를 잊지 않나하여 회갑날 이틀을 앞두고 사회자 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책임지고 간다는것이였다. 그런데 회갑날 예약된 시간이 썩 오래된 후에야 사회자가 왔으며 예약은 박모모와 하였는데 박모모는 다른 몇집의 사회를 맡고 이때까지 사회를 맡아 보았다는 말을 들어 못본 김모모 가 나타나서 이집의 사회를 맡아 한다는것이였다. 사회를 시작하여서부터 매우 서 투른 인상을 주었는데 그나마 주인측의 의사(많은 하객들은 다 자기들의 명목으로 절을 올리려 하였다.)에 따라 하는것이 아니라 친자식, 친척, 사돈, 친우, 제자 이렇 게 다섯번에 나누어 절하는 순서를 끝내려 하며 빨리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였다. 단 독 명목으로 절을 하려던 사람들이 막 나서서 따로 절을 하려고 하니 그럼 집체행 사가 끝난 다음 개별적으로 하라며 례식도 끝을 맺지 않고 부랴부랴 례식장을 떠 나는것이였다. 아마 또 다른 사회를 맡은것 같았다. 너무나도 한심한 일이였다. 례 식장은 은사님에 대한 축수의 희열로부터 삽시에 사회자에 대한 분개로 번지여졌 다. 례식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 집안에서 한 사람이 나서서 사회를 마지막까지 원 만하게 진행하여 나갔다. 송선생님이 쓴 문장을 보면 장춘에서는 사회 자가 9시전에 례식장에 찾아와 주인측과 인사순서와 인사형식 등을 구체적으로 토론하며 자기의 다년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여러가지 좋은 건의도 내놓으며 회갑례식을 정식 시작하기 전까지 함께 준비사업에 바삐 보낸다고 한다. 보통 약속한 시간이 훨신 넘어서야 땀을 뿌리면서 부랴부랴 달려오는 연변의 적지않은 사회자들 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례 식이 정식 시작되면 사회자는 마지막까지 열렬 하면서도 질서있게 행사를 리드해 나간다고 한다. 모든 인사순서가 끝나고 식사도 끝난 뒤 친척들의 오락판이 시작 되면 장춘의 사회자들은 그 오락판을 사회해 주고 가수와 악사도 마지막까지 노래 를 불러주고 연주해 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도 그들이 받는 보수는 연변의 사회 자들이 받는 보수보다 높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연변의 일부 사회자들은 우에서 말한것처럼 나그네 말죽먹이듯 대충 해치우고 례식장을 부랴부랴 떠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것은 하루에 두세집, 지어 너덧집의 사회를 맡으니 그렇게 되지 않을수 있겠는가? 장춘의 사회자들은 한번에 여러 집에서 사회를 맡아달라는 청탁이 들어 와도 하루에 한집의 사회밖에 맡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연변의 일부 사회자들은 전혀 되지도 않을 승낙을 하면서 청탁이 들어오는대로 다 맡아놓으니 돈은 돈대로 챙겨넣어도 행사뒤끝은 서운하기만 하다. 례식이 어떻게 되든 그들의 머리속에는 돈밖에 없는것 같다. 이렇게 하는 사회자들이 자책감이 없는지? 한번 검토하여 보 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 일부 사회자들은 사회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여 그저 웃기려는데서 저 속적인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지구촌이 도래되면서 섭외혼인도 있고 외국에서 친 척들이 와서 결혼, 환갑잔치에 참가하고 있는데 이렇게 저속적인 말로 사회를 한 다면 우리 연변의 이미지에 손상을 준다고 본다. 사회자들에 대한 문화시장관리부 문의 감독도 필요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다.   2007년5월23일 연변일보 제2면에 실림
37    기자절 축하 댓글:  조회:7375  추천:12  2011-05-13
기자절 축하오늘 일곱번째 기자절을 맞으면서 방송국의 전체 기자선생님들과 방송인들에 게 충심으로 되는 명절의 축하를 드립니다. 저는 기자들의 사업을 동경하면서 기자들의 사업이 영광스럽고 성스러운 사업 이면서도 간고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선생님들 정말 수고 많습니다. 기자선생님들은 당의 후설로서 당의 방침, 정책을 선전할뿐더러 그 어떤 로고도 마다하고 가장 빠른 속도로 사건 헌장에 달 려가 진실한 뉴스를 그 자리에서 발송하기때문에 가장 빠른 속도로 뉴스가 청취자 들에게 전달되므로 청취자들의 환영을 받고있습 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어려운 문제들을 해당부문을 여러번 찾아 다녀도 해결을 보 지 못하였지만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면 기자들이 직접 현장 혹은 해당부문을 찾아가거나 전화로 련결하여 해결하여 주므로 백성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것입니다. 기자들의 사업은 필을 들고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가는 아주 사치스러운 사업 이 같지만 거기에는 생명의 위험도 병존하고 있는것입니다. 례하면 큰 홍수 혹은 화재현장취재를 할때에도 생명의 위험이 존재하고  범죄자를 나포할 때 현지 보도 나 촬영같은것은 그 범죄자가 총기 혹은 그 어떤 흉기를 휘대하고 있기에 공안전 사들과 마찬 가지로  수시로 생명의 위험이 존재하고 이라크전쟁과 같이 전쟁마당 에서의 현지보도 같은것은 어느때 어디에서 어떤 총탄이나 포탄이 날아올지 모를 생사판가리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분자들의 범죄사실에 대한보도도 기자들 이 어느때 어디에서 보복당할지 모를 일인것입니다. 하여 매년 기자들이 이런 불법 분자들에 의해 중상을 입거나 피살되는 일도 적지 않은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자들의 사업을 아주 존중해여 할뿐더러 그들의 업적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하 여야 할것입니다.   2006년11월 8일 6:30. 연변인민방송 사회교육프로에서 방송
36    금장신구에 대하여 댓글:  조회:7402  추천:15  2011-05-13
금장신구에 대하여    금은장신구가 딱히 어느때부터 나왔는가하는것은 똑똑한 력사적 기재가 없지 만 그 유래를 보면 금과 은이 화페로 사용되면서부터 부자들의 재부의 상징으로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 금은장신구들이 사용되여 온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금과 은 이 많고 적음은 낡은 사회에서는 빈부의 차이를 말하여 주며 존귀와 비천을 의미 하고 있었다. 하여 부자들은 자기가 부유하고 권세가 있다는 위풍을 보여 주려는 데서 금은장신구를 몸에 걸치게 된것이다. 근은장신구의 유래가 이러할진대 력사적 으로 보면 구중국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은 금은장신구를 몸에 거는것으로써 자기 들과 비천한 사람들의 상대적 지위를 나타내고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30여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금은장신구들이 개혁개방이래 일부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짐에 따라 또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나라 녀성들이 금은 장신구를 몸에 거는것은 구사회와는 달리 빈부의 차이나 존귀와 비 천의 상대적 상징으로 거는것이 아니고 녀성의 매력에 이채를 돋구려는데서 걸 겠지만 전통관념으로 하여 황금이 재부의 상징으로 표현되는것만큼 금장신구를 몸 에 거는것도 저그나마 하게는 빈부의 차이가 상징되고 잇는것이다.     금은 전자공업과 장식품에서의 그 실용가치는 대단하지만 금장신구로서의 인 체에 대한 작용은 조금도 없는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금장신구의 실용가치 에 대하여 물으면 병을 예방치료한다고 하는데 그럼 정말 금장신구가 병을 예방 치료할수 있는가하는것은 금의 원자구조와 화학적 성질로부터 알수 있는것이다.     금은 원소주기표에서 제6주기 제IB족에 속하는 원소로서 원자반경이 매우 작 고 핵전하수가 많은 원소이므로 그 화학적성질이 극히 안정하여 왕수거나 시안화 칼륨, 혹은 시안화나트륨용액에 용해할뿐 염산, 질산, 류산 등 강산에도 용해 되지 않으며 심지어 렬화속에서도 산화되지 않고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고잇다. 그 러므로 피부에 약간 접촉한 금장신구가 화학반응을 진행할수 없거니와 더구나 병 을 예방치료한다는것은 천만 불가능한것이다. 다만 분말상태에서의 금만이 인체내 에서 일정한 작용을 할수 있는것이다. 오히려 어떤 자료에는 황금을 제련하는 과 정에 미량의 방사성물질이 함유되기 때문에 그 방사성원소의 방사성으로 하여 인 체에 해롭다고까지 한다. 그리고 손을 씻을 때에 손가락과 금반지사이가 잘 씻기지 않기에 그 사이에 세균이 번식할수 있기에 인체에 유리한 점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국제화페기금기구는 1978년에 법적으로 황금의 화페역할을 취소하였 고 그후의 국제황금회의는《황금은 국제금융에서 퇴출하고 있으며 단순한 상품속 성으로 전화하고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금장신구는 실용가치가 거의 없다싶이 되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국제적 특수화페의 역할도 할수 없게된것이다. 다만 황금이 그어떤 상 품에 비해 가치보존이 상대적으로 안정하고 관념상에서 녀성미를 돋군다 할뿐이 다.     그러므로 금장신구의 가치는 모종 의미에서 부호와 상징에 지나지 않는것으 로서 마치 하느님에 대한 종교신앙처럼 사람들의《신념고조》에 의해 수립된것이 지 객관적 실용성에 의해 수립된것이 아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부 젊은 녀성들은 아무런 실용가치도 없는 금장신구에 대한 신경과민으로하여 녀성의 가장 보귀한 정조까지 서슴없이 바치고있다. 그리고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인데 한 젊은 녀성이 열손가락에 모두 금반지를 낀것을 깡패들이 보고 그것을 탐내여 이 녀성을 죽이고 그 열개의 반지를 빼앗았던것이다. 사건발생후 이자들이 인차 공안경찰에 의해 붙잡혔는데 공안부문에서 검증한데 의하면 열개의 반지가운데서 진짜 금반 지는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이녀성이 그 진짜 금반지 하나만 끼였었다면 목숨은 잃지 않았을것이다. 금장신구가 녀성의 매력에 이채를 돋구고 있으므로 금 장신구에 대한 녀성들의 욕구는 리해를 할수 있지만 불필요한 허영심과 신경과민 으로 하여 정조를 바친다든가 생명까지 잃는것은 이 얼마나 미련한가? 이런 녀성 들에 대하여 참으로 가소 롭게 생각된다. 그러므로 젊은 녀성들에게 권고하기 싶 은것은 불필요한 허영심을 버리고 가정경제형편을 보아 금장신구를 거는것이 좋고 금장신구를 살 형편이 못되면 그것에 대하여 너무 신경을 쓰지말것을 권고하는 바 이다.  2000年12月25 日
35    굳센의지, 의력, 막을수 없는 금호의 인생행로 댓글:  조회:7778  추천:17  2011-05-13
굳센의지, 의력, 막을수 없는 금호의 인생행로 —《금호의 삶의 이야기》를 보고서   연변TV방송국의 다큐멘터리 《금호의 삶의 이야기》를 보고  금호의 현재의 정황을 알게 되였습니다. 30여년전 《연변일보》에 금호가 고압선에 의해 두팔을 잃은 기사가 실린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신문을 보면서 두팔이 없이 어떻게  생 활하여 나가겠는가하는 동정의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와보니 두팔이 없이 두발로 밥짓기, 저가락질, 바느질, 가정용전기기구수리 등 일들을 하면서 생활하여  나간다 는것은 참으로 인간기적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두손 두발을 다 가지고도 금호가 하는 기술적인 일들을 하지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금호가 두팔이 없이 글을 쓰고 컴퓨터를 다루는 것을 보고 저도 낯이 뜨거워 났습니다. 한평생 교육사업을 하였다는 나의 글씨가 금호의 글씨보다 못하 고 커퓨터도 아직 익숙히 다루지 못하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아마 노력 이 부족한 탓이라고 봅니다. 금호가 두팔이  없이 두발로 모든 생활을 자립하여 나가고 있다는것은 상상만 하여도 얼마나 고생스럽겠는가? 하지만 우리 사회에 일부 사람들은 두손 두발을 가지고도 일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워 생활을 자립하지 못하고 남의 신세에 살아 가려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도적질, 강탈을 일삼다가  살인까지 저질러 징역살이 지어는 사형에까지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가? 호금도 총서기께서 제기한 영욕관으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아주 수치스러운 사람들이며 금호의 깨끗한 삶이야말로 아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을 보면 금호에게 사랑의 뜨거운 손낄을 뻗치고 금호 역시 자기의 재능으로 가정용전기기구를 무상으로 수리해 주며 서로 관심하고 도 우며 살아 가는것이 얼마나 따뜻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인가?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올해 전 주 범위내에서 《학습, 창의, 창업》교육실천 활동을 잃으킬것을 제창하였는데 《금호의 삶의 이야기》가 바로 훌륭한 산 교재 로 되여 이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활의 활력소로 되여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 관을 수립하여 더욱 아름다운 사회를 가꾸어 갓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006.8.9. 연변일보 제2면에 실림 2006.10.25수요일10:10아리랑방송《녀성시대》에서 생방송
34    공공뻐스에서의 공중도덕을 지키자 댓글:  조회:7884  추천:20  2011-05-13
  1. 공공뻐스에서의 공중도덕을 지키자                                               주청룡 지금은 교통조건이 좋아서 뻐스가 오면 서로 밀고닥치고하는 현상은 그리 없 지만 뻐스안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공중도덕과 질서방면에서 차한 점들이 좀 있다고 봅니다.     한번은 제가 직접 목격한 사실인데 공공뻐스에 한 젊은 녀인이 올랐는데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배가 만삭인것을 보아 임신부 같아서 자리에 앉아던 50대의 한 남성이 자리를 내여 앉으라고 하니 그 녀인은 아무말도 없이 앉아습니다. 목적 지에 도착하자 그 녀인은 내리면서 그 남성에게 다시 앉으시라든가 감사합니다란 말 한마디 없이 내리였습니다. 하여 뻐스에 앉은 많은 승객들이 그 녀인을 흘겨 보게 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 남성의 행실은 아주 문명스러운 행실인데 이때 그 녀인은 최저한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 말은 있야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연변일보에서 본 기사인데 운남성 소통시의 한 80대의 할아버지가 곤 명시에 가서 공공뻐스를 타게 되였는데 년세가 많아 몸을 제대로 가눌수 없게되자 녀운전수가 급히 운전실에서 뛰여 내려와 이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안전하게 빈자 리에 모셧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목적지에 도착한 이 할아버지는 차에서 내린 뒤에 야 비로서 녀운전수가 부축하여 오르는 바람에 뻐스표값 1원을 현금통안에 넣지 않은것이 생각났습니다. 집에 돌아온 이 할아버지는 그 1원때문에 량심의 가책으 로 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여 이 할아버지는 궁리하던끝에 1000리 떨어진 곤명시 뻐스회사에 편지와 함께 뻐스표갑 1원을 부쳐 보냇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호금도 총서기가 제기한 영욕관으로 볼때 녀뻐스운전수, 할아 버지, 임신부에게 자리를 내여준 남성의 행실은 모두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 임신 부의 행위는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여러해 전에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인데 항주에서 온주로 가는 야간행 뻐스 안에서 한 녀인이 한 불한당한테 두번이나 강간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 이 녀인이 애절한 구원을 바랏지만 뻐스안의 승객이거나 운전수, 승무원은 모두 모르쇠를 놓았습니다. 이때 만약 운전수나 승무원의 지휘하에 승객들이 단합하여 제지시켯더라면 그 불한당은 감히 그 녀인을 강간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여기에서 승객들이 모르쇠를 놓은것은 공중도덕과 정의감이 없는것이고 운전수와 승무원은 공중도덕이나 정의감보다도 려객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운송하지 못하였기에 법 률적 책임을 져야 하는것입니다.    또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인데 공공뻐스에서 한 녀인이 돈지갑을 도적마쳣다 고 소리를 치며 안달아 하였습니다. 이때 운전사는 아무일이 없는듯이 차를 몰고 가다가 어느 한 파출소 문앞에 가져다 차를 세우고 파출소에 들어가 사건제보를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민경들이 차에 올라와서 의심스러운 사람을 검사하여 그 도 적을 붙잡았던것입니다. 또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인데 어떤 도적놈이 뻐스안에서 한 중년남성의 호주 머니에 손을 넣으려는것을 한 젊은녀인이 보았는데 자기의 힘으로 제지시킬 힘이 없자 기발한 생각을 굴려 그 중년남성을 다치면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를 모르겠습니까? 저는 아무아무개인데 선생님의 제자애요.》그러자 그 도적놈은 자기 의 행동을 지켜보는 이 녀성과 그 중년남성이  사제간인것으로 알고 손을 쓰려던 것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이 중년남성은 자기가 선생이 아닌데 선생이라고하니 이 녀인이 자기를 잘못 보고 선생이라고 한다고 생각하고 어물어물하여 지냇는데 뻐 스에서 내린 다음에야 그 녀성이 힘으로 도적의 행위를 제지시킬수 없으니 지혜로 도적의 행위를 제지시킨것을 알게 된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파출소로 뻐스를 몰고 간 운전수와 이 녀성은 자기의 힘으로 해결 할 방법이 없을때  머리를 써서 지혜로 미연히 방지하거나 이미 발생한 문제 를 해결한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녀성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지혜로써 도적사건을 방지한것 은 얼마나 고상한 일인가?     그리고 뻐스에 앉으면 가끔 승무원이 담배불을 끄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승 무원이 담배불을 끄라고하여  끌것이 아니라 우선 승객 자신이 자기가 담배를 피 우면 다른 사람의 건강에 해로우므로 뻐스안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 는 공중위생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기 싶은것은  지금 일부 뻐스운전수와 승무원들은 교 통경찰의 눈을 피하여 유격전을 하면서  지정된 정차지점이아닌 곳에서 손님을 마 구 싣거나 초과하여 싣는것을 보게 되는데 이렇게 아무곳에서나 승객을 실으니 승 객들도 지정된 정차지점이 어디인가 하는것을 모를고 아무곳에서나 손을 들고 있 는데 이는 교통질서의 혼란늘 가져오므로 앞으로 이런 유격전을 더는 벌리지 말았으면 하는것입니다.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주청룡 2006.5.14.일요일 6:30 연변인민방송 《일요칼럼》에서 방송 2006.10.25.수요일 10:10 아리랑방송《녀성시대》에서 생방송
33    ‘비암산’인가? ‘벽암산’인가? 댓글:  조회:8379  추천:32  2011-05-10
 ‘비암산’인가? ‘벽암산’인가? 청해 한국의 지명 ‘智異山’을 한자어 발음대로 읽으면 ‘지이산’이어야 맞는데 왜 ‘지리산’으로 읽는가? 이는 필자가 오래 전부터 의문을 갖고 오던 문제인데 오늘 정인갑 선생님이 글 “지리산(智異山)”을 읽고 그 의문을 풀게 되였다. 이외에도 몇가지 더 의문되는 지명들이 있다. 1. ‘비암산’인가? ‘벽암산’인가? 룡정시의 서남쪽에 위치한 ‘碧岩山’을 우리말로‘비암산’이라고 하는데 한자의 뜻대로 하면 푸를 ‘벽(碧)’, 바위 ‘암(岩)’, 메 ‘산(山)’이기에 응당 ‘벽암산’이라고 하여야 맞겠는데 무엇때문에 ‘비암산’이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렇다 하여 필자는 이때까지 불러오던 ‘비암산’을 ‘벽암산’라고 부르자는 뜻은 전혀 없고 다만 어떻게 되여‘비암산’이라고 부르게 되였는가 하는 의문스러움을 제기할 뿐이다 2. ‘개산툰’인가? ‘개산둔’인가? 두만강변에 자리잡고 있는‘开山屯’을 우리말로는 ‘개산툰’이라고 한다. ‘开山屯’도 한자어로 하면 ‘개산둔’이라고 하여야 맞겠는데 무엇 때문에 ‘개산툰’이라고 하는지? 이외에도 중국에 ‘屯’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데 모두 ‘둔’이라고 하지 않고 ‘툰’이라고 한다. 례하면 ‘皇姑屯(황고툰)’, ‘马家屯(마가툰)’, ‘柳家屯(류가툰)’ 등 이다. 우리말의 한자사전을 보면 ‘屯’을 진을 칠‘둔’이라고 하지 ‘툰’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 ‘屯’을 ‘둔’이라 하지 않고 ‘툰’이라고 하는 것은 한어발음을 그대로 음역으로 부르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가지여 보았는데 음역으로 하면 세글자를 모두 음역으로 하지 않고 왜‘屯’자만을 음역으로 하였는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3. 굳어진말을 써야 하는가? 한자어를 써야 하는가? 조선족들이 오랜 세월 한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한자의 음역으로 써온 지명이 인젠 그 말이 굳어져 한어발음 그대로 부르는 지명들이 있다. 례하면 ‘大蒲柴河’를 ‘다푸차이허’, ‘夹皮沟’를 ‘쟈피거우’라고 한어발음 그대로 부른다. 그런데 일부 지명들을 보면 음역도 아니고 한자어도 아닌것도 있다. 례를 들면 화룡시의‘头道’를 한자어로 하면 ‘두도’라고 하여야 맞는데 예전부터 완전한 음역도 아니고 한자어도 아닌 ‘투도’라고 하였고 룡정시의 ‘老头沟’를 한자어로 하면 ‘로두구’라고 하여야 맞는데 이것도 완전한 음역도 아니고 한자어도 아닌 ‘로투구’라고 불러왔다. ‘투도’, ‘로투구’는 이미 오랜 세월 내려오면서 굳어진 말이다. 그런데 지금 어떤 언론매체에서는 한자어로 ‘두도’, ‘로두구’ 등으로 말하는데 구경 ‘투도’냐, ‘두도’냐? ‘로투구’냐, ‘로두구’냐? 하는것이다. 하나의 지명을 언론매체마다 서로 다르게 부르니 매우 혼란스럽다. 구경 굳어진 말을 그대로 써야 하는가? 아니면 한자어로 써야 하는가? 하나의 지명을 두가지로 말한다 하여 기성세대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새시대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는 혼란스러울수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명들을 구경 어느것으로 써야 하는가 하는것을 해당부문에서 통일적인 규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의 글을 읽어보면 큰 의미 없는 글 같다. 다만 필자의 의문스러운 점들을 지성인들을 통하여 해결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는 해당부문의 통일적이 규정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다.
32    한글나라에서 외면당하는 한글 댓글:  조회:8421  추천:21  2011-05-02
한글나라에서 외면당하는 한글  청해 어느 나라를 가든지 도시의 거리를 나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우는 것이 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간판을 보노라면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요해가 얼마간은 갈 것이다.   한국에서 거리의 간판들을 보면 우리말 간판, 한자간판, 영문간판, 영어를 한글로 표기한 간판, 영어와 한글을 섞어 쓴 간판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쓴 간판 등을 볼 수 있다.   모회사를 지나다가 “XX엔지니어링㈜”란 간판(완전호칭을 밝히지 않고 한자어로 되여 있는 앞부분을XX로 표시)을 보았다. 그 회사의 직원들과 엔지니어링이란 무슨 뜻 인가고 물어보았더니 10여명 되는 직원가운데서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럼 이 많은 회사직원들이 모르고 누가 아는가?”고 물으니 “사장이나 알겠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행이 그 간판 옆에 “XX 機械工業(株)”라고 한자로도 표시되어 있어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것이 모모 기계공업 회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란 “1. 공학(工學) 2. 재료, 기계, 인력 따위를 일정한 생산목적에 따라 유기적인 체계로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하였으며 중국어로는 ‘系統工程’라고 하였다.   필자는 여러 회사의 사장들과 “무엇 때문에 간판을 우리말로 표시하지 않고 영문 혹은 영어를 한글로 표시하는가?”고 물으니 대부분 회사사장들의 말은 “우리말로 하면 어딘가 촌스럽다. 그래도 영어로 명칭을 달아야 국제화 시대에 발을 맞추는 것 같다.”라고 하였고 일부 사장들은 “남들이 그렇게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한다.”라고 하였다. ‘통구이’는 순수한 우리말의 고유어이다. 하지만 거리에서 ‘통구이’란 간판을 쓰지 않고 ‘바베큐’라고 쓴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바비큐’라고 표기하여야 맞는다. 영어를 한글로 표기한 간판들은 영어발음과 차이가 있어 영어를 잘 아는 외국사람들도 한글로 표기된 영어는 무슨 뜻인지 모른다. 본국사람도 모르고 외국사람도 모르는 그런 간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조선일보’가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선 세종로의 간판을 조사한 결과, 총 58개 간판(중복 제외) 중 약 3분의 1인 18개가 한글 없이 영어로만 돼 있었다. 필자가 관찰한데 의하면 영어를 한글로 표기한 간판이 대부분이었는데 어쩌다 순수한 우리말의 간판을 보게 되면 아주 정답게 느껴졌다.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세종문화회관조차 복도와 게시판에 'SEJONG CENTER'라는 표기를 한글 없이 적었고 서울시 산하기관에서 운영하는 건물에 세종대왕의 이름이 한글보다 영어로 더 많이 적혀 있다고 하니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 죄송스러운 일이 아닌가고 생각된다.   안내 문구도 영어로만 쓰인 경우도 많다. 얼마 전 한 할머니가 백화점에서 계단으로 나가는 문인 줄 알고 문을 열었다가 "할머니 여기는 들어오시는 곳 아니에요"라는 직원의 말에 무안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거기에는 영어로 'Staff Only’이라고 씌여 있었지만 할머니는 그것이 ‘직원전용'란 뜻을 몰랐던 것이였다. 지금 대부분 담배갑에는 영어로만 씌여 있어 영어를 배우지 못한 젊은층들도 상표명을 몰라 손으로 가르키며 “이걸 주세요.”라고 하고 있다. 이런 간판, 상표 외에도 각종 언론 매체와 출판물에서 우리의 고유어가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외국어, 외래어를 많이 쓰고 있다. 예하면 순수한 우리말인 흰색을 ‘화이트’’안해’를 ‘와이프’ ‘열쇠’를 ‘키’ ‘힘내라’를 ‘파이팅’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24가지 자모로 이루어진 우리글이 그 표기가 제한되어 외국어나 외래어 를 원음대로 표기 할수 없는 것이다. 례하면 힘내라는 ‘fighting’을 원음 대로 발음은 할 수 있으나 우리글의 문자로는 어떻게 하여도 정확히 표기할 수 없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파이팅’, 어떤 사람들은 ‘화이팅’으로 표기한다.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음이 왜곡된다.    지금은 중국의 조선족들도 한국나들이를 많이 하면서 한국사회에 습관되어 외래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렇게 하면 이제 몇 세대 후에는 우리의 고유어가 점차적으로 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우려된다. 외래어를 많이 쓰는 것은 국제화시대에 발맞추기 위한 것 이라고 하는데 몇가지 외국어 단어를 장악하여 가지고 국제화시대에 발을 맞출 수 있겠는가? 우리말의 고유어거나 귀화어(귀화어란 한자어를 포함 하여 남의 나라에서 들여온 글이나 말이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하면서 차용한 글의 原地의 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우리글처럼 되어 우리글로 탈바꿈된 글이나 말)가 없는 말은 외국어거나 외래어를 써도 무방하겠지만 우리 겨레의 고유문화를 보존하려면 고유어가 있는 단어들은 고유어를 쓰면 좋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지금 조선(한국)어 사용인구는 7739만 명으로 세계 언어 중 13위에 이르고 세계지식재산권기구는 조선(한국)어를 9번째 국제 공개어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올해 인도네시아 부톤섬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자기 말을 적는 공식 문자로 채택하고 초등학교에서 한글 교과서로 찌아찌아어 교육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인구대국인 중국에서도 한국어 학원을 설치한 대학이 점차적으로 늘어 나고 있는 추세이다. 지금 세계언어학자들은 한글을 세계통용 문자로 하자는 주장도 나 오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것이다.  24가지 자모로 우리말의 모든 문자를 다 표시할 수 있고 가, 나, 다, 아, 야, 어 등 기본음에 몇가지 받침을 넣으면 그 계렬의 음을 다 문자로 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이유는 컴퓨터 문자입력에서 육필의 필순에 따라 건반을 치면 모든 글자들을 순조롭게 쳐 내려간다는 것이다. 컴퓨터 사용에서 그 어떤 다른 글보다 우월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여 세종대왕이 600년 뒤에 올 디지털시대를 예견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는가 하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렇듯 우리말 우리 글이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이런 뛰어난 우월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본국(한국)에서 자기의 글을 촌스럽다며 도외시 하고 우리글로 정확히 표기할 수도 없는 외국어에 집착하고 있는지? 이것도 국제화 시대에 맞추어 간다고 할 수 있는지? 자기 나라의 우월한 문화를 보전하고 자랑하며 국제화시대에 맞추어 나가야지 이런 우월한 문화를 도외시 하면서 국제화시대에 맞추어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은 간판·현수막·벽보·전단 등에 반드시 한글 표기를 곁들여야 한다고 정해두고 있지만 처벌 규정이 모호해 법이 있으나 마나 한 실정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 거리의 간판들을 보면 한가지 간판을 두 가지 문자로 표시하였는데 우에는 조선문자 아래에는 한자로 표시되어 있도록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행정수단으로 강제철거를 시킨다. 조선문자를 첫 자리에 놓는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런 글은 본적이 있다. “우리가 한국어와 한글을 더욱 사랑하 고 가꾸지 않는다면 한국어와 한글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00년 내지 200년 후에는 박물관에서나 한글을 찾아보겠지...... 온통 영어만 쓰고...... 이제 대한민국은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한글을 사랑 하고 지키어 세계화하자.” 이는 외국어에 집착하고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가운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우리말,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하자’고 웨치고 싶다.   [주] 이글은 지난해 한국의 조선일보, 동북아신문, 한민족신문 한글학회 잡지에 게재된 글이다.   
31    국기게양관리를 잘 하자 댓글:  조회:7860  추천:25  2011-04-24
국기게양관리를 잘 하자 청해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고 오성붉은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고 표징이다. 필자는 용무로 하여 모시에 가 며칠 체류하게 되였는데 지난 일요일(4월17일)거리를 지나다가 모 학교의 국기게양대에 국기가 그냥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또 다른 학교를 지나다가 역시 국기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필자는 ‘이런 학교들에서 정말 국기게양관리가 잘 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침 일요일이라 시내구경도 할 겸 다른 학교와 기관에서는 국기게양관리가 어떤가 하는 것을 알아보려고9개의 중소학교와 시정부, 인대, 정협, 법원, 검찰원 등10개의 기관을 돌아보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법》제6조에는 《국무원 각 부문, 지방 각급 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인민정부, 인민법원, 인민검찰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지방 각급 위원회는 사무를 보는 날에 반드시 국기를 게양하여야 한다. 전일제 학교들에서는 겨울방학, 여름방학, 일요일을 제외하고 반드시 매일 국기를 게양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여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학교나 지방 각급 기관들에서는 사업일이 아닌 일요일에 국기를 게양하지 말아야 한고 본다. 그런데 필자가 돌아본 10개의 기관, 9개의 학교 가운데서 4개의 기관과 3개의 학교들에 국기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법》 제16조에는 《파손, 오손, 퇴색하였거나 규격에 맞지 않은 국기를 게양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돌아본 가운데 한 학교의 국기는 붉은색 바탕과 황색 오각별 색갈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퇴색하였고 심지어 기발 끝자락이 바람에 찢겨진 그대로 펄럭이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법》 제12조에 의하면 《국기를 게양함에 있어서 반드시 아침에 게양하고 저녁에 내리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일부 학교와 단위들을 보면 아침에 게양한 국기가 밤새도록 그냥 걸려 있으며 어떤 때에는 일주일 내내 걸려 있을 때도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국기법》에 대한 인식이 결핍하다는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국기의 존엄을 수호하고 국기정신을 선양하며 학생들의 국가관념, 책임감과 사명감을 강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학생들에게 《국기법》에 대한 지식을 잘 전수하여야 하며 특히는 국기반(기수, 국기호위자)에 대한 엄격한 훈련을 하여 국기게양제도를 똑똑히 알게하며 국기게양과 강하에 대한 관리를 잘 하여 국기의 존엄을 수호하여야 한다고 본다.   
30    《촌촌통》 내 고향을 바라보며 댓글:  조회:8689  추천:20  2011-04-20
  《촌촌통》 내 고향을 바라보며                       청해  해마다 청명, 추석이면 어김없이 부모님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올리던 내가 몇 년간의 출국으로 하여 이번 청명은5년 만에 향하는 고향길이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는 마음도 있었지만 5년 만에 가는 길이라 내 고향마을이 어떻게 변모 하였는가 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다.   룡정에서 출발한 뻐스가 남양령에 올라서자 내 고향 덕신이 한눈에 안겨왔다. 마 을마다 적색, 청색지붕을 얹은 하얀집들이 줄지어 들어 앉았고 《촌촌통》콩크리 트포장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놓았으며 홍수가 지면 경작지를 볼품없이 뜯어 가던 팔도하 량안은 담회색의 콩크리트 제방으로 쌍곡선을 이루어 그야말로5년 전에 볼 수 없었던 한폭의 그림이였다. 덕신정류소에 내리니 택시 여러대가 손님 들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인차 택시를 타고 부모님께서 누워계시는 내고향 뒤동산에 올랐다.   우리는 부모님의 분묘에 정성들여 가토를 한 다음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렸 는데 나는 공손히 술잔을 올리며《아버님, 어머님 몇 년간의 출국으로 하여 부모님의 산소에 찾아오지 못하였습니다. 불효한 이 자식 늦게나마 오늘 와서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오니 이 절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인사말을 하며 절을 올리였다.   청명절이라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온 고향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제사를 다 올린 다음 제사상을 물려놓고 산소에 온 고향친구들을 청하였다. 친구들도 반갑다며 너도 나도 자기가 차려온 제물들을 꺼내놓았는데 제법 산해진미가 다 오른 고향친구들의 모임이였다. 그것도 조상들을 모신 고향마을 동산에서의 모임이라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들이라 서로 권커니 작커니 하며 술을 마이면서 고향마을 내려다 보노라니 추억과 현실, 그리고 미래를 엇갈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벽돌집 한채 없던 그제날의 우리마을, 지금은 줄지어 앉은 적색, 청색의 지붕을 얹은 새하얀 주택들, “안까이(안해)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 못산다” 던 내 고향 덕신, 인제는 콩크리트포장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서로 이어놓았고 마을안도 몇갈래의 콩크리트포장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홍수가 지면 5리밖의 철교로 에돌 아 다니던 팔도하도 인젠 나무다리가 자취를 감추고 아치형의 콩크리트다리가 덩 실하게 팔도하에 가로놓여 있었다. 도시의 진출, 출국바람으로 가구수가 많이 줄 어들어 어딘가 서운한 점은 있었지만 고향의 새농촌건설의 변화들을 보노라니 그래도 우리고향 앞날의 발전에 대하여 희망이 보였다.   본 지방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 친구의 말이다. 《그전에는 소로 받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맸지만 지금은 기계로 받을 갈고 살초제로 기음을 대체하니 혼자서 몇 쌍의 밭은 어렵지 않게 다룬다. 지금 집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도시진출과 출국한 사람들의 밭을 다 다루고 있지만 그전처럼 그렇게 바삐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른 한 친구는 《그전에는 진흙길이여서 농산물 운수에도 곤난이 많았지만 지금은 나라에서 《촌촌통》계획을 실현하여 콩크리트 포장도로로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놓고 국도와 이어져 아무리 큰비가 내려도 농산물을 싣고 씽-씽- 시장으로 달리수 있으며 길이 좋으니 농산물 수구를 오는 차들도 많아 어떤 것은 앉은자리에서 처리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남아서 농사를 짓는 친구들은 농업세 면제와 우량종자보조, 농기구구입보조, 디젤유보조 등등 나라의 《삼농보조금》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항목이 너무 많아 그들도 다 말하지 못하였다. 자기의 밭을 남에게 임대주고 도시에 들어가 막벌이를 하던 한 친구도 나라의 《삼농》정책이 좋아 인제 돌아와서 농사를 지으려는 의사도 밝히였다.   내고향의 이러한 변화들은 바로 11차 5개년계획기간의 성과들이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였지만 내고향은 반 10년에 벌써 이렇게 변하였으니 이제 12차 5개년 계획이 실현되면 내고향이 또 어떻게 변화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더듬어 보게 되니 우리나라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의 희망이 확 트이는 듯 하였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아래를 내려다보니 《촌촌통》도로에서 승용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아마 산소로 오가는 자가용과 택시들 같았다. 우리는 이렇게 한시간 남짓이 고향정을 나누고 마을로 내려왔는데 오가는 택시들이 많아 어렵지 않게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29    몇가지 호칭문제에 대하여 (주청룡) 댓글:  조회:108039  추천:16  2011-03-07
몇가지 호칭문제에 대하여 -주청룡 지금 인터넷이나 일부 사람들 가운데서 ‘香港’을 ‘홍콩’, ‘澳门’을 ‘마카오’, ‘朝鲜’을 ‘북한’, ‘朝鲜半島’를 ‘한반도’ 라고 하는 표현들을 많이 보거나 듣게 된다. 오늘 조글로에서도 어느 한 문장에 댓글을 올린 네티즌(누리꾼) 가운데서도 서로 ‘향항’이냐? ‘홍콩’이냐? ‘오문’이냐? ‘마카오’냐? 하는 쟁론도 보았다. 이 몇가지 호칭문제에서 각자 제나름대로 말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자기의 주장대로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이 없이 되는대로 말하고 있는데 필자는 오늘 이 몇가지 호칭에 대한 견해를 말하려 한다. 먼저 ‘香港’과 ‘澳门’에 대하여 말하여 보자. 우리나라는 1997년 7월 1일香港을 영국으로부터, 1999년 12월 20일澳门을 포도아로부터 도로 찾아 우리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 각각 중화인민공화국의香港特別行政区,澳门特別行政区로 하였다. 그리하여香港과澳门은 외국의 식민지나 조계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신성한 령토이고 우리나라의 특별행정구이다. ‘홍콩’은 영어 ‘Hong Kong’에서 온 말이고 ‘마카오’는 포르투갈어 ‘Macau’에서 온 말이다. 때문에 ‘홍콩’, ‘마카오’하면 아직까지 이 두곳이 외국에 예속되여 있는 감을 느끼게 된다. 엄격하게 말하면 약간의 정치적 의미도 띠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이 두곳의 명칭을 말할 때 반드시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본다. 즉 한어로 말할 때에는 ‘香港’, ‘澳门’으로 우리민족의 말로 할 때에는 한자어로 ‘향항’, ‘오문’이라고 하여야 한다고 본다. 다음으로 ‘朝鲜’, ‘韩国’에 대하여 말하여 보자. 한중수교 이전에 우리는 ‘朝鲜’을 ‘북조선’, ‘韩国’을 ‘남조선’이라고 불렀다. 1991년 9월 17일 유엔에서는朝鲜과韩国을 합법적인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동시에 유엔에 가입시켰다. 국제사회에서朝鲜과韩国을 다 합법적 주권국가로 인정하자 1992년에 우리나라는韩国과 외교관계를 건립하였다.‘북조선’, ‘남조선’하면 전체 ‘朝鲜半島’가 ‘朝鲜’이라는 뜻이 되고 ‘남한’, ‘북한’하면 전체 ‘朝鲜半島’가 ‘韩国’이라는 뜻으로 된다고 본다. 국제사회가朝鲜과韩国을 다 합법적인 주권국가로 인정하는것만큼 우리도 두 나라의 국제적 지위를 존중하여 ‘朝鲜’을 ‘북한’이라고 하지 말고 ‘조선’이라고 부르고 ‘韩国’을 ‘남조선’이라고 하지 말고 ‘한국’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그다음 ‘朝鲜半島’에 대하여 말하여 보자‘朝鲜半島’를 조선에서는 ‘조선반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한반도’라고 한다. ‘朝鲜半島’란 명칭은 이 반도가‘檀君朝鲜’, ‘李氏朝鲜’이라는데서 력사적상 장기적으로 ‘朝鲜半島’라고 불리워 왔다. 우리말로는 ‘조선반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조선반도’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력사적인 관습에 따라 ‘朝鲜半島’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도 ‘朝鲜半島’ 라고 한다. ‘한반도’란 말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립되면서 한국에서 이 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주권국가는 대한민국이라는데서 나온 말이다. 필자의 견해로 말하면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응당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에 따라 ‘朝鲜半島’의 한자어로 ‘조선반도’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28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 댓글:  조회:9053  추천:28  2011-02-20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 김재범 주청룡 토지는 하늘이 무너져도 버티고 일어설수 있는 가장 튼튼한 밑천이자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억척스레 닦아놓은 삶의 터전이 1990년대에 들어서 조선족들이 대도시, 연해도시, 해외로 진출하면서부터 토지의 경영권을 타민족에게 임대 혹은 양도하여 점차 누에 뽕잎 먹듯이 타민족 에게 잠식(蚕食)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이런 현상들은 모종 의미에서 보면 농경인들로부터 도시인으로 전변되는 좋은 현상이라 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이 닦아놓은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이 더욱 가슴아픔 현실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우리는 주농업위원회를 찾아 농촌조선족의 현주소에 대하여 깊이 있게 료해를 하고 농업위원회에서 많은 자료들을 제공받았으며 또 일부 현지조사자료, 연변일보, 흑룡강신문에 게재된 이 방면의 기사들을 선진적 자료로 하여 토지문제에서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위기와 해결대책에 대책에 대한 약간의 견해를 제기하는데 우리 조선족사회 구축에 도움이 되겠는지? 1. 조선족의 분포정황(림시로 대도시, 연해도시에 진출한 것을 제외) 1860년대 후반기 22만 km²의 제한된 조선반도에서 련속되는 자연재해로 하여, 특히는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 평안도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생계를 위하여 조선정부의 월강금지령, 청정부의 무단월경자들에 대한 처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의 삶의 터전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우리 조선족(강제이주민을 포함하여)은 80만 km²에 달하는 전 동북지역에 산재하여 있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만 하여도 42,700 km²의 땅에 약 82만명에 달한 인구가 살고 있으며 연변의 면적만 하여도 조선반도의 1/5, 전 동북지역을 말하면 조선반도의 3.6배에 달하는 땅에 산재 혹은 집거해 있다. 이것은 우리 조선인들이 조선반도로부터 만주에로의 생활령역의 확장이였다. 지금 길림성에 한 개 조선족자치주(연변주), 한 개 조선족자치현(장백현)이 있으며 동북3성에는 42개조선족향(련합향을 포함)이 있는데 길림성에 11개, 료녕성에 12개, 흑룡강성에 19개가 있다. 2. 토지문제에서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위기 우리 조선족들은 앞선 의식, 빠른 실천으로 개혁개방의 앞장에서 달리고 있다. 중-한수 교 이후 한국기업의 중국진출로 하여 조선족들이 대도시, 연해도시에로 진출하게 되였으며 특히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출국하면서 지금 농촌의 조선족 마을들이 옛날의 아담한 모습과는 달리 스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전에는 우리가 살던 마을과 그 주변 마을들은 순 조선족 마을로서 다른 민족이 한 가구도 없었다. 그렇지만 조선족들이 대도시, 연해도시, 한국에로 진출하면 서 토지경영권을 다른 민족 에게 임대 혹은 양도하면서 한족들이 들어 오기 시작하였는데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인제 한족호수가 절반을 넘어 차지하고 있으며 어떤 이웃마을들에는 조선족이 한두호 지어는 한호도 없이 전부 한족이 차지하고 있다. 하여 우리의 토지, 우리의 터전이 완전히 타민족 에게 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 하여 우리 조선족들이 모두 한평생 지구의 껍질을 허비면서 피와 땀으로 이 땅을 적시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능력에 따라 떠나 갈수 있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과학적으로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한 농업으로 가꾸고 지키면서 도시에 진출한 사람들보다 못지않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토지를 임대한 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며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이다. 지금 외국에 갔다 온 적지 않은 조선족 농민들은 토지는 타민족에게 임대하고 소비가 큰 도시에 들어와서 아무런 창업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몇 년간 뼈를 갈아 벌어온 돈을 물쓰듯 다 써버리고 다시 출국행을 선택하여 또 다시 리산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것도 로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수 있지만 노동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로후의 생활보장마저 없는 신세로 되고있다. 3. 위기해결책에 대한 약간의 견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도시화가 추진되면서 농업인구가 점차적으로 도시인구로 전화되고 이전의 작은 자연부락이 감소되는 것은 필연적 추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삼림, 우리의 농경지, 우리의 삶의 터전을 가꾸고 지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다. 아래에 토지문제에서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위기해결책에 대한 약간의 견해를 말하려 한다. 첫째로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는것이다. 지금 일부 지방을 보면 외지로 나간 농민들이 촌민위원회를 거치지지 않고 사사로이 타지방 사람들과 토지임대 또는 양도계약을 맺었기에 촌민위원회에서 토지경영권이 타지방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기 바쁘다. 길림성 룡정시 지신진(원 광신향) 동흥촌은 60헥타르의 경작지에 85호가 전부 조선족으로 되여 있는 룡정시 교외에 있는 마을로서 97%의 농호가 출국하였는데 처음에는 촌민위원회의 동의도 없이 사사로이 외지인들과 토지임대계약을 맺었기에 토지임대 금액도 낮거니와 법률적 효력을 상실한 계약이 많아 나중에는 법률보호도 받기 어려운 실정이였다. 이러한 실정에서 이 촌의 촌민위원회에서는 무릇 본 촌민이 부치지 않는 토지는 촌민위원회에서 회수하여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자지방 혹은 타지방 사람들에게 임대하여 주기로 하였다. 하여 처음에는 헥타르당 400원씩 임대를 주었던 토지를 모두 거두어 들여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며 지금 헥타르당 한전은 2500원, 수전은 2700씩 임대를 주고 촌민위원회에서 그 돈을 받아서 토지를 내 놓은 사람들에게 분배하여 주고 있다. 토지임대비가 자꾸만 오르는 것을 고려하고 촌민들이 아무 때든 다시 돌아와서 농사를 지을것을 고려하여 임대계약을 1년에 한번씩 맺고 있으며 임대 면적은 3헥타르 이하는 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촌에는 국가의 기본건설로 하여 7헥타르의 토지가 징용되였는데 헥타르당 100만원씩 700만원의 수입을 얻게 되였다. 촌민위원회에서는 이 돈에서 80%는 촌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20%는 촌의 공적금으로 하여 6층으로 된 아파트를 두채를 지어 차액은 본인이 내고 85호의 촌민이 전부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현지 조사자료) 흑룡강성 동녕현 량동구촌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조상의 뼈가 묻힌 이 마을을 우리가 굳게 지켜야 한다"면서 외지로 나간 촌민들의 농지를 전부 본 마을 사람들이 부치고 촌민위원회는 통일로 빈집에 자물쇠를 잠그고는 외지인들에게 팔지 않고 있다. 이 촌의 고춘길 촌민위원회 주임은 "눈앞의 리익만 보고 마을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땅과 집을 린근농민들에게 주었다간 후손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된다"며 "앞으로도 우리땅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한다. (흑룡강신문 2010.12.3) 둘째로 과학적인 규모화 농사를 짓는것이다. 규모화농업은 기계화를 할수 있는 경작지에는 단일한 작물을 다면적으로 기계화 작업을 하여 생산원가를 줄이고 다수확을 따낼 수 있는 훌륭한 영농법이다. 도문시 량수진 석두촌의 강태수 농민은 여러가지 농기계를 사놓고 지난해에 혼자서 농망기에 일군을 쓰면서 옥수수와 콩을 85헥타르를 다루어 74만원의 수입을 올리였다고 한다. 그는 새해는 100헥타르의 밭을 부치려 하고 있다. (연변일로 2010.11. 18. 흑룡강신문 2010.11.21) 길림성 훈춘시 마천자향 포태촌 3조에 살고 있는 최창선(49세)씨 역시 그러하다. 그는 일본에서 벌어온 돈 30만원으로 농용뜨락또르, 수확기, 이앙기, 파종기 등 각종 농기구를 구전히 갖추었고 또한 포태촌과 부근 마을의 유휴지 10헥타르(포태촌 1가구 평균 수전면적 4무)를 임대맡아 규모화한 농업을 해 지난해 10만원의 순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그는 또 자기집 모내기나, 가을이 끝나면 마을의 곤난한 가정과 일손이 모자라는 집을 돌아다니며 기계를 사용해 무료로 모내기와 가을을 해준다고 한다. 그 외 타지방 농가의 삯가을 돈벌이에도 나서고 있는데 해마다 평균 50헥타르(헥타르당 1200원)의 기계화 수확을 하고 있다. (2010년 10월 22일 흑룡강신문) 셋째로는 생태농장을 꾸리는 것이다. 편벽한 산골마을들에는 기계화농업을 할 수 없는 25°이상의 비탈밭이 적지않게 있는데 이런곳에는 나무들을 심어 림지로 만들거나 (이번 조사자료에서 보면 이미 기본상 에서 실현되였다.) 초지를 만들어 거기에 목축장을 앉히는 것이다.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촌의 박금철(40세)씨는 한국에 가서 일하는 동안 소를 사양하면서 소사육기술을 장악하고 본 고장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번 돈 42만원을 투자하여 “룡정시구구(九九) 생태농장”을 세웠다. 그는 초창기에 소 60마리, 닭 800마리를 길렀는데 지난해에 소 30마리를 팔고 새해에는 160마리의 소를 기를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도급맡은 밭에 사료작물을 심어 가축, 가금의 사료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소를 사양하면서 배워온 발효사료기술로 옥수수대를 분쇄하여 발효시켜 소사료를 가공하여 자기 집 소사료로 하는 외 동업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연변일보 2010년 12월 1일, 흑룡강신문 12월 2일) 화룡시 투도진 룡평촌의 김홍준농민도 해외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규모화양돈업을 벌렸는데 이미 년간 2000마리의 발전규모를 형성하였으며 이 촌의 리홍화씨도 해외에서 벌어온 돈을 양돈업에 투자하여 이미 년간1500마리의 사양규모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모두 해마다 10만원이상씩 순수익을 올리고있다고 한다. (연변일보 2011년 1월 4일) 넷째로 당지의 자연우세를 충분히리용하여 수출형 농업을 하는것이다. 곳곳마다 자기의 자연우세를 갖고 있다. 례하면 연변에는 위만주국시기 강덕황제에게 올리 바치여 어곡미로 불리웠던 하천평벌 어곡전의 유기농업입쌀, 연변사과배, 검정귀버섯, 인삼, 록용, 송이버섯 등 농산물과 특산품들이 있는데 이런것들을 잘 가공, 포장하여 명브랜드로 창출시켜 국내외 시장에 진출시켜 높은 경제적 효익을 보고 있다. 길림성 룡정시 덕신향의 김영호는 당지에 잡곡이 많이 나는 우세를 리용하여 잡곡을 가공하여 명브랜드로 하여 수출형 농업을 하고 있다. 그는 건축면적이 4600m²달하는 페교된 집을 사들여 잡곡가공공장을 앉히고 150만 원을 투자하여 년간 만톤 가공능력을 갖춘 여러가지 잡곡가공기계들을 사놓고 농민들과 계약을 맺고 봄에 농민들에게 잡곡종자를 나누어 주고 가을에 전부의 잡곡들을 수구하는 방식으로 잡곡을 가공하여 《팔도하(八道河)》, 《덕신골(德新沟)》, 《두만강(豆滿江)》 등 여러가지 브랜드로 하여 북경, 상해, 천지, 청도, 광주, 심지어 한국에까지 수출하고 있다. (현지 조사자료)   길림성 화룡시 복동진의 박명자씨는 해외에서 벌어온 돈을 밑천으로 검정귀버섯 재배업을 벌렸는데 지난해에는 재배규모가 30만주머니로 늘여 이 항목에서 40여만원의 순수입을 창조하였다. (연변일보1011년 1월 4일) 다섯째로 농민전업합작사를 조직하여.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훈춘시 마천자향 하남촌은 경작지 면적이 293헥타르(수전 240헥타르, 한전 53헥타르), 13개 촌민소조, 417가구, 농업인구 1129명(조선족 811명, 한족 182명)으로 된 촌인데 분산된 농업으로는 다수확을 따낼수 없다고 의식하고 2008년 초로부터 촌민위원회에서 이끌어 반수이상의 촌민들이 자원의 원칙으로 농기구, 토지, 혹은 화페입고의 형식으로 농기복무전업합작사를 조직하였다. 목전 이 합작사는150여 만원 자산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일본 588형 벼수확기 2대, 이양기 7대, 파종기 1대, 복토기(覆土机)1대, 농용자동차 1대, 3대의 대중형 뜨락또르와 거기에 따른 농기구, 300m²의 차고(车库)를 가지고 있다. 이 합작사에서는 ‘다섯가지 통일’을 합작운행과정에 관통시콌는데 즉 통일관리, 통일생산, 통일수확, 통일가공, 통일판매하여 작년에 전촌200여 헥타르 수전을 몽땅 기계화를 실현하여 10만kg을 증산하였으며 매무의 수전에서 70여원의 성본을 감소시켰다. 농민전업합작사를 조직하니 농촌산업구조를 조정하고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 할 수 있어 더 많은 수입을 올릴수 있었다. (연변 주농업위원회의 추천자료) 전국 10대농민전업합작사의 하나로 5만무의 수전에 210호의 회원호를 거느리고 있는 흑룡강성 밀산시 록영고려미농민전업합작사에서는 합작사의 우세를 발휘하여 지난해 국가 해당부분으로부터 200만원어치의 최신 일본 이앙기, 콤바인 등 대중형 농기계들을 지원받았으며 지난해도 150만원을 지원받아 현대식 육모하우스 6만평방미터, 현대화 일광온실 600평방미터를 건설하는 등 현대화 시설들을 구전히 갖추어 놓았다. 2009년에는 '록영향벼연구개발보급중심'을 설립하고 동북농업대학 벼육종전문가인 김정훈교수가 자신의 모든 새품종개발연구항목을 가지고 합류함으로 협회의 과학기술함량을 크게 제고시켰다. 합작사에서는 또 회원농가들의 품종선택으로부터 육모, 전간관리, 가을걷이 및 판매에 이르기까지 통일적으로 책임짐으로써 농사비용을 대폭 줄이고 수입을 늘여 각종 혜택을 톡톡히 보게 하고 있다. (2010년 12월 31일 흑룡강신문) 여섯째 향진(혹은 촌)기업을 잘 꾸리여 공업화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이다. 흑룡강성 '녕안시 강남명성조선족집거구'가 최근 흑룡강성 해당부문의 비준을 얻어 '녕안시 명성조선족소진(小镇)'으로 승격하여 우리 조선족들의 본보기로 되고 있다. 이 진의 제1기 규획부지는 50만평방미터에 달하며 규획가구수는 1500가구에 달하는데 이미 1년남짓한 동안에 총 600만원을 투자해 상하수도공사, 중심도로공사, 전기공사, 주민시범주택공사, 부분 록화공사를 마무리했다. 한편 현재 건설중에 있는 항목으로는 6000평방미터에 달하는 두동의 아파트, 3200평방미터에 달하는 양로원, 명성조선족소진 사무봉사센터, 유치원, 레저오락광장, 중심도로 가로등설치 등이 있는데 총 투자가 2140만원에 달한다. 그리고 또 새롭게 생태농업관광구건설, 농업전시구, 조선민속풍경구, 조선족식품가공 등 항목을 본격적으로 시동고 있다. 이렇게 집중촌을 건설하게 되면 각급 정부로부터 정책, 자금 등 면에서 파격적인 혜택을 받을수 있다고 한다. (2010년 7월 28일 흑룡강신문) 강소성 강음시 화서촌의 경험은 전 촌의 제한된 경작지를 30여명의 감농군들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확대하여 그외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킨것이다. 촌서기 오인보는 화서촌이 부유하여지자 주변의 16개 촌을 화서에 합병시켜 공동치부하여 촌민들의 년 평균 수입을 7만여 원에 달하게 하였고 나이 많은 농민들은 달마다 1000여원의 퇴직휴양금을 받을수 있게 하였으며 몇천세대의 촌민들 이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하고 대부분 촌민들이 자가용차와 별장을 갖고 있으므로 많은 대학생들이 이 촌에 몰려 들고 외지에 시집가는 처녀는 없고 시집 오는 며느리와 장가드는 사위들이 날로 늘어나니 인구가 자연히 증장하게 된다. 새로 들어 오는 사람은 대부분 학력이 대학이상의 연구생이거나 귀국류학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여1500여명 인구를 가지고있던 소화서가 3만여명 인구를 가진 소도시 —대화서촌으로 건설한것이다. 하여 농업소촌으로부터 공업강촌으로, 농민들은 로동자로, 촌락은 도시로 변하게 하였다.   우리도 이렇게 하자면 과거의 분산된 자연툰을 합병하여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고있는 곳을 선택하여 공업이 일떠 선 집중촌건 설을 하여야 한다. 일곱째 집중촌의 우월성 1)분산된 로동력을 집중시켜 통일배치를 할수 있다. 2)분산된 토지를 집중하여 규모화한 농업을 할수 있다. 3) 여유의 로동력을 집중하여 촌 기업을 꾸리는데 유리하다. 4) 인구가 밀집되여 있기에 거기에 따른 생활소비품을 경영하는 상점들이 앉아 농민들이 도시에 가지 않고 앉은자리에서도 생활소비품을 살수있다. 5) 인구가 집중된면 거기에 따른 문화시설을을 앉히여 농민들도 도시부럽지않은 문화생활을 할수 있다. 6) 공업화된 집중촌을 건설하면 도시에 시집가는 처녀들이 적게되며 따라서 조선족 총각들의 혼인균형파괴도 효과적으로 막을수 있다. 7) 인구가 증가되면 자연히 학생수도 늘어나 조선족학교의 페교위기도 해결할수 있으며 우리민족 교육도 보장할수 있다. 총적으로 조선족 집중촌을 건설하면 우리 조선족공동체를 더욱 건전히 구성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할수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본 고장에서 집중촌건설에 투자하여 과학적인 규모화농업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본다. 4. 맺는 말 이상에서 모두 토지를 둘러쌓고 조상들이 가꾸어놓은 삶의 터전을 어떻게 가꾸고 지키겠는가 하는것을 거론하였다. 이번 조사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은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들이 한평생 토지를 떠나지 말고 땅과 씨름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의 락후한 소농경제 안광으로 문제를 본다면 그렇게 생각될 수는 있겠지만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을 알아야겠다. 우리 조선족들은 문화, 교육방면에서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선진적인 문화, 과학기술을 장악하여 나라의 인재로 등용되여 국가공무원, 문화, 과학, 교육, 위생 등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울러 농업과학기술을 장악하여 가지고 현대화한 농업을 하는것도 역시 나라의 과학기술인재라는 점을 지적하여야겠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족 엘리트(우수한 인재)들이 전국의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떨쳐 우리 민족을 위하여 영광을 빛낼 뿐만 아니라 농업과학기술을 장악한 인재들도 이 땅에서 과학적으로 현대화한 농업을 한다면 우리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지리라고 굳게 믿어진다.   이 글을 마무리면서 우리의 조사를 적극지지하고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준 연변조선족치주농업위원회와 우리의 현지조사에 적극 호응한 많은 농민형제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김재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9기인민대표대회 대표, 룡정시 지신진(원 광신향) 당위서기 주청룡: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퇴직교원
27    《兩彈一星》이란? 댓글:  조회:8688  추천:27  2011-02-20
《两弹一星》이란? 우리 나라에서는 1964년10월16일에 첫 원자탄 폭발에 성공 하였고 1966 년 10 월 27일에 첫 핵탄두(核弹头)를 실은 유도탄(地地导弹)비행 폭발에 성공 하였다. 1967년6월17일에 첫 수소탄폭발에 성공하였고 1970년 4월 25일에 첫 인공지구위성발사에 성공하였다. 이로 하여 우리 나라는 자체로 《량탄일성(两弹 一星)》의 연구, 설계, 제조에 성공하였다. 그 뒤를 이어 우리나라는 신주5호, 신주6호 유인인공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였고 또 상아1호, 상아2호도 성공적으로 발사되면서 사람들은 우리 나라 항공첨단과학기술의 거족적인 발전에 몹시 흥분하여 《량탄일성﹝两弹一星﹞》에 대하여 의논이 분분하다. 요즘 CCTV-1에서 저녁 8시에 TV련속극《五星红旗迎风飘扬》이 방영되고 있으며 이 련속극 에서 《량탄일성(两弹 一 星)》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개념에 대한 시청자들 의 인식이 혼란스럽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량탄(两弹)》이 란 원자탄과 수소탄 을 말하고《일성(一星)》이란 인조지구위성을 말한다고 그릇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에는 원자탄, 유도탄, 인조지구위성을 《两弹一星》이라고 하였는데 후에는 원자탄, 수소탄을 합하여 核弹이라하고《两弹一星》 의《一弹》은 核弹 이고 다른《一弹》은 导弹으로 연변(演变) 하였다. 원자탄은 핵분렬(核裂变)반응원리를 리용하여 핵무기를 만드는것이고 수소탄은 핵융합(核聚变)반응 원리를 리용하여 핵무기를 만드는것인데 원자탄, 수소탄은 모두 핵탄에 속한다. 유도탄은 근근히 하나의 운반 기구인데 核弹을 운반할 수 있는 기구이다. 유도탄은 무기가 아니며 유도탄의 위력은 주요하게 그가 실은 弹头 에서 온다. 이상의 것을 귀납하여 보면 《两弹一星》에서의 《两弹》은 핵탄 (核弹)과 유도탄(导弹)을 말하고 일성(一星) 은 바로 인조지구위성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两弹一星》에 대한 정의다. 다시말하면 《两弹一星》이란 核弹(원자탄, 수소탄)과 导弹(유도탄) 그리고 인조지구위성을 말한다.   주청룡
26    한일,군사교류협력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댓글:  조회:9414  추천:18  2011-01-15
한 - 일, 군사교류협력 어떻게 보아야 할까? 주청룡 김관진 한국 국방부 장관과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 일본 방위상은 10일 서울에서 한-일 국방장관회담을 갖고 우선적으로 양국 간 상호군수지원협정 체결을 추진하기로 했고 아울러 양국 간 정보보호협정 체결도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   상호군수지원협정은 유엔평화유지(PKO) 활동과 인도적 지원 및 재난구조, 해군간 수색. 구조훈련 등의 분야에서 양국간 물자와 식량, 연료 등을 상호 지원할 수 있는 국가간의 구속력을 갖는 협정을 말한다. 즉 무기를 제외한 군수 물자와 수송 등 서비스 분야에서 상호협력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리해 할수는 있겠지만 이와 달리 군사비밀보호협정으로 불리는 '정보보호에 관한 협정'은 조선의 군사적 긴급사태에 대비한 한-일간의 군사교류협력 수준이 최고 수준에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조선, 중국, 로시아는 물론, 한국 국민들마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군사적 협정이다. 일본은 군사적으로 조선반도를 침략하고 강점했던 과거사가 있고 그 과거사 반성에 미흡하고 독도 령유권을 계속 주장하고있다. 이러한 일본과 심도 있는 군사교류를 한다는 것에 대해 한국국민들도 수용하기 어렵고, 한-일 또는 한-미-일 군사교류가 북(조)-중-로 동맹을 가속화해 오히려 한(조선)반도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각계 인사들의 반발적인 론란도 있다. 아래에 “한·일 군사협정 체결 논의 반대한다”라고 한 《평화재향군인회 성명》 의 한 단락을 들어보자. “군사협력강화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한 국가와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종종 다른 국가에게는 군사적 경계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질서는 수년 내에 미국 중심에서 중국과의 2국 중심체제로의 변화가 예상되며, 이러한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 사실 중국과의 군사협력강화 필요성은 날이 갈수록 그 필요성이 증대되는 실정이다. 이런 때에 남북간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야 할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분위기를 이용해서, 그 목표가 북한과 중국, 러시아라는 것이 명백한 한일군사협력강화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을 부추기는 것이고, 오히려 정반대로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 것이며, 정작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위협은 가중시키는 것이다.” 한국이나 조선이나 할 것 없이 조선반도는 우리 한겨레의 신성한 령토이다. 무엇 때문에 한국 국방부는 력사적으로 철천지의 원쑤였던 일본과 협력하여 한 혈통인 조선을 대처하려 하는가? 우리는 력사의 쓰라린 교훈을 명기하여야 한다. 조선력사에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3국을 통일하여 어느 만한것을 얻고 어는만한 것을 잃었는가? 많은 력사학자들은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광채롭지 못한 력사로 보고 있다. 우리민족은 일본의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결속의 산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된 두 개의 나라로 되였다. 만약 2차세계대전 결속시에 조선반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조선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고 통일된 하나의 민족, 통일된 하나의 국가로 된다는 것은 세인이 다 아는바가 아닌가? 미군이 지금도 한국에 주둔하여 있고 한국에서 전시작전권도 아직까지 환수하지 못한 것이 현실인 아닌가? 조선반도에서의 비핵화도 미국의 조선에 대한 위협이 있는 이상 조선에서 핵을 완전히 포기할수 없다. 때문에 핵문제의 초점은 미국과 조선이다. 조선을 포함한 6자회담 당사국들이 조선의 비핵문제는 공동한 인식이다. 만약 미국이 9.19 공동성명을 준수하고 조선이 제기한 평화협정을 받아들인다면 조선에서도 핵을 포기할것이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과 군사협정을 맺어 조선을 대처할것이 아니라 미군의 한국에서의 철거와 전시작전권의 환수를 하는것으로써 조국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미, 일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조선을 대처하려 하는 것은 외세의 힘을 빌어 자기 혈통을 멸망하려는 것이기에 이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며 천추에 용서 못할 짓이다.
25    태산에 오른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10) 댓글:  조회:10349  추천:21  2010-12-29
태산에 오른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10) 주청룡 다음 우리는 호텔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태산 천가(天街)의 상가(商街)를 거닐면서  여러가지 관광상품들을 구경도 하고 기념으로 될만한것들을 사면서 남천문까지 왔다. 케이블카를 타고 태산의 전경을 구경하는것도 또 다른 멋이라 내려올 때에는 도보로 하산하지 않고 케이블카를 타기로 하였다.    케이블카 남대문역 케이블카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마침 10월 한창의 단풍계절이여서 태산의 경치는 울긋불긋 한폭의 그림과도 같이 자못 아름다웠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태산 중천문에서 도보로 남천문까지 오르는데 네시간이 거의 걸렸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니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중천문 케이블카 표지석    중천문 뻐스정류소 중천문에서 다시 셔틀뻐스를 타고 천외천(天外村)으로 내려오면서 보니 경사도가 너무 강하여 갈지(之)자를 이루며 내려왔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도보로 등산할때에는 남천문까찌 7시간 더 걸렸지만 내려올 때에는 케이블카와 셔틀뻐스를 타니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태산려행을 기꺼이 다 마친 우리는 태산역에 와서 다시 북경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끝                          
24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9) 댓글:  조회:10319  추천:23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9) 주청룡   태산의 저녁노을까지 흔상 하였으니 이제는 숙소를 잡는것이였다. 태산에는 대묘로부터 시작하여 일천문, 중천문, 남천문, 천가, 옥항정, 일관봉 등 곳에 여러 개의 호텔들이 있었는데 신계호텔(神憩賓館)은 태산극정에서 유일한 3성급 대외개방 호텔이였다. 신계호텔은 벽하사(碧霞祀)를 앞에 두고 옥황정(玉皇頂)을 뒤로 하고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일관봉(日觀峰) 있다. 호텔은 태산벽하원군(泰山 碧霞元君)의 후침궁(后寢宮)인 신계궁 (神憩宮) 원래의 위치에 건축하였다하여 신계호텔(神憩賓館) 이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주숙처를 신계호텔에 잡았다.    신계호텔(神憩賓館) 호텔복도에는 일출시각표를 커다랗게 붙여 놓았는데 10월 10일의 일출시간은 6시 6분이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일출시간을 놓칠세라 명심하여 일어났는데 시간을 보니 5시가 좀 넘었다. 신계호텔에서 일관봉까지는 걸어서 몇분 정도의 거리기에 우리는 천천히 일관봉으로 향하였다. 일관봉에는 일출을 구경하려 나온 유람객들로 붐비였는데 10월의 태산의 새벽 기온이 너무 차기에 모두 호텔에서 빌려주는 초록색 솜외투를 입고 일제히 동녘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6시가 거의 될 무렵 동녘하늘이 훤히 밝아 오더니 차츰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남색 등 여러가지 색깔로 바뀌면서 하늘을 물들였다. 텔레비죤에서만 감상할수 있었던 아름다운 장면을 오늘 대자연에서 직접 감상하게 되였다. 이 시각 나는 미리 주비하였던 카메라로 이 아름다운 정경을 렌즈에 담았다.     태산의 려명 6시 6분이 되여 해님이 구름속으로부터 서서히 얼굴을 올리 밀기 시작하자 남색, 보라색은 다 사라지고 붉은색, 귤색, 황색으로 동녘 하늘을 물들였으며 우리의 발 밑은 잔잔하게 파도 이는 망망대해로 변하였다. 마침 마술사가 요술은 피우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될수 있는 이 장면을 영원한 기념으로 남기려고 사진촬영사와 미리 약속이 있었는지라 사진사는 우리를 촬영 하기 좋은 위치에 세워놓고 찰각찰각 샤타를 눌렀다. 몇분 후에 사진이 나왔는데 참 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였다. 태산의 일출 태산의 일출은 바다의 일출과 매우 흡사하였는데 다른 점이라면 바다의 일출은 노을 빛이 바다물에 빛껴 대칭으로 물들어 똑 같은 영상이 수평선의 아래 우에 나타나는데 태산의 일출은 대칭영상이 없었다. 우리의 이번 태산려행은 참 운수가 좋았다. 태산 일군들의 말을 들으면 태산에서 이런 아름다운 일출을 보기는 드물다고 한다. 태산의 기상조건을 보면 높은 산이여서 구름이 많거나 흐린 날씨가 많기에 가시거리가 작아 태산유람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가는 유람객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헌데 우리의 려행은 10월의 가을날씨여서 그런지 모든 기상조건 다 우리의 요구를 만족 시키였다. 참으로 행운인 것 같았다.   일출구경을 나온 유람객들   려명을 맞은 옥황정 태산의 일출까지 흔상하고 보면 우리의 태산려행은 원만히 결속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이번 태산려행이 우리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옥황정에 올라 천하를 내려다 보고싶은 생각을 억제할수 없었다. 하여 우리는 다시 옥황정에 올라 태산의 정경을 다시 한번 흔상하였는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유람객들도 우리와 마찬가지 심정으로 태산의 일출을 구경한다음 다시 옥황정에 올랐다.   일출을 구경한 유람객들 옥황정에 오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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