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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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남명학 부 주장과 같이 일하던 하루 댓글:  조회:10543  추천:50  2011-05-23
남명학 부 주장과 같이 일하던 하루 청해 오늘, 조글로에서 연변작가협회 허룡석 주석의 《부 주장을 〈비판하다〉》 를 읽면서 내가 존중하여 오던 거의 40년 전의 남명학 부주장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1973년, 내가 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허룡석주석이 말한 것처럼 그때 우리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 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부장이 우리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대대에 와 있었다. 그해 여름의 어느날 리휘부장은 대대의 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콩기음을 매였다. 그날 오전 우리가 한창 기음을 매고 있는데 지프차 한대가 우리가 기움을 매고 있는 밭머리에 와서 발동을 끊는것이였다. 지금은 지프차라면 보잘것없는 차이지만 그때 세월에는 지프차라면 현급 이상의 간부들이 타고 다니는 차였기에 지프차 한대 지나가도 모두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우리 밭머리에 와서 서다니, 우리는 모두 서서 그 차를 보고 있는데 한 늙은이가 차에서 내리자 리휘부장이 마중나가 그와 반가이 악수를 하는것이였다. 나는 틀림없이 주의 간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리휘부장이 우리에게 이분이 주정부 남명학 부주장이라고 우리에게 소개를 하였다. 나는 남명학이란 분이 주정부 부주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본적은 없었다. 그런데 남명학 부주장이라고 하니 내 마음은 정말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새나 모든 행동거지를 보면 허룡석주석이 말한것처럼 주의 간부다운데는 한곳도 없이 보통 백성과 같아 보였다. 그때 우리 실험소조에는 로농 한분에 계셨는데 남명학 부주장께서는 인사가 끝나자 자기가 왔기에 일에 지장을 준다며 그 로농의 호미를 앗아 쥐고 자기부터 엎드려 기음을 매였다. 그의 기음솜씨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쉼시간에 우리는 남주장을 에워싸고 둘러앉았는데 그이는 노래 한수씩 부르며 즐겁게 쉬자고 하셨다. 그때는 지정된 몇수의 혁명가요만 부르는 시절이라 모두 혁명가요 한수씩 불렀다. 그 자리에서 누가 이번에는 남주장님의 노래를 들어 보자고 하였다. 남주장께서는 기다렸다는듯이 인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는데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내 한말 들어보소》하며 첫마디를 떼시였는데 《농부가》였다. 모두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왜 이 노래가 나쁜가?  농부의 소박하고 랑만적인 마음을 담은 노래인데 왜 못 부르겠는가?》하며 끝까지 불러 내려갔다. 그러자 모두《야, 듣기 좋은 노래다.》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때 내가 지금 이런 노래를 불러 되는가고 묻자 《이 노래가 우리조선족의 민요인데 왜 자기 민족의 민요도 못 부르겠는가?》고 하시는것이였다. 그리고나서《농사철에 대해서는 로농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 상급의 지시라고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로농들의 말을 들어야 하오.》 그러면서 《조이 홰지는 곡우를 끼고 해야 하고 콩갈이는 립하를 끼고 하면 되오.》 라고 하시며 곁에 앉은 로농을 보시며《로인님 제 말이 어떤가요?》라고 물으시니 그 로농은 《글쎄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하였으면 좋겠는데 상급에서 어찌나 일찍이 파종하라고 하는지, 우리는 리해가 되지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남주장게서는 《지금은 군대 대표요, 반란파 대표요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올라앉아 맹목적으로 지휘한다니까.》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앞으로 로농들을 존중하여 로농들의 말을 잘 들으라고 분부 하셨다. 어쩌면 허룡석 주석이 일하던 생산대에 내려가 하신 말씀과 똑 같았다. 그리고는 인차 《자, 또 한 쉼 매여봅시다. 》하며 호미를 들고 일어나 선줄로 나가시는것이였다. 점심때가 되자 공작대들은 우리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불의에 닥친 일이라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우리지방은 한전고장이라 그때 시절에는 입쌀 한줌도 없어 그저 조밥을 대접하였다. 그런데 남명학 주장은 오후에도 계속 나가 기음을 매고 하루 밤 우리 집에서 묵을 타산이였다. 그런데 우리로 놓고 말하면 저녁식사 대접이 문제였다. 어떻게 저녁에 또 조밥만 대접하겠는가? 농촌이라 어디에 가서 돼지고기도 사올 형편이 못 되였다. 그렇다고 하여 돼지를 엎어놓는다는것도 말이 않되였다 그래서 실험소조의 조장은 우리어머니더러 저녁에 두부를 앗아 대접하자고 하였다. 쟁글쟁글 끓는 뙤약볕에서 남주장은 우리와 같이 온 하루 일하시고 저녁에 해가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오셨다. 조장이 나를 시켜 술을 사 오려는 것을 눈치 챈 남주장께서는 친히 자기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나를 주면서 이 돈으로 술을 사 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한사코 안받자 그이께서는 호미자루로 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왜 小朱 내 말을 안들어?》하면서 기어이 그 돈으로 술을 사 오라고 하시는것이였다. 그렇게 되여 나는 남주장에게서 호미자루에 엉덩이를 한매 얻어 맞았다. 어쩌면 그 한매가 나의 마음을 그렇게도 기쁘게 하였던지? 나는 그런 매는 자꾸만 맞고 싶었다. 저녁식사 때 조장이 《남주장께서 모처럼 우리 실험전에 오셔서 온 하루 이렇게 수고를 하셨는데 우리 농촌에는 아무것도 대접할것이 없습니다. 저녁에 두부를 준비하였는데 서거픈(소박한) 음식이지만 많이 잡수십시오.》라고 말하자 남주장께서는 “두부만치 좋은 음식이 어디에 있소. 자 어서 가져오오. 그럼 오늘 농촌 아주머니가 직접 앗은 두부를 먹어 보지.”라고 말씀하시며 술잔을 들고 《자, 우리 같이 한잔 들어봅시다.》하며 음식상의 기분을 돋구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다 가고 남주장께서와 비서, 그리고 리휘부장이 남아서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되였다. 사실 그날 남주장께서는 사업토론을 하려고 리휘부장을 찾아 왔었는데 리휘부장이 공작대를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기음을 매자 그이도 우리와 같이 온 하루 일하시고 저녁에 리휘부장과 사업토론을 하시는것이였다. 사업토론이 끝나자 나도 그 자리에 끼여서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이가 리휘부장(한족)과 이야기를 할 때 한어를 아주 류창하게 하여 완전히 한족 같은 감를 느끼여 어떻게 되여 한어를 그렇게 류창하게 하시는가고 물었더니 어릴 때에 연길현 동성용의 한 한족지주의 머슴으로 들어가서 돼지를 먹이다가 후에 공산당을 만나 혁명에 참가하였다고 하시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그에게서 많은 혁명이야기를 들었다. 이튿날 아침식사가 끝나고 그들이 떠날 때에 비서가 식비를 계산하여 내놓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장 어른께서 여기에 오셔서 일하신것만 하여도 대단히 감사한 일인데 어떻게 식비를 받을수 있습니가?》하며 한사코 받지 않았다. 며칠 후 우리 어머니가 재봉기을 쓰려고 재봉기에 덮었던 보를 드니 그 밑에는 식비명세표와 현금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보지 않은 틈에 어느새 비서가 재봉기보를 들고 식비를 넣었던것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도 감격되여 눈물까지 훔치였다. 2011년 5월
82    숭엄한 중산릉(2) 댓글:  조회:8193  추천:55  2011-05-23
숭엄한 중산릉(2) 청해 5. 비정(碑亭) 릉문으로 나오면 바로 비정(碑亭)이다. 비정은 변의 길이가 12메터, 높이 17메터 정방형의 화강암으로 된 건축물이며 네면에 모두 아치형 문이 하나씩 있고 두층의 지붕은 남색의 오지기와로 되여 있다. 비정(碑亭) 비정안에는 너비 4메터, 높이 8.1메터의 석비(石碑)가 있는데 비면에는 "中國國民黨葬 / 總理孫先生於此 /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이란 국미당 원로인 담연개(譚延闿)의 친필로 된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정안에 있는 석비(石碑) 6. 돌층계 비정에서 나와 북쪽으로 오리다 보면 멀리 제당이 보이는데 비정으로부터 제당까지는 세줄로 된 돌층계가 있는데 가운데 줄은 넓고 계단은 여러 가지 색갈의 화분으로 장식되여 화원을 이루었으며 량 옆의 돌층계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데 패방으로부터 모두 392개 계단이라고 한다. 화분으로 장식한 돌층계 7. 제당(祭堂) 392개의 돌층계를 다 오르면 바로 손중산 선생의 제당이다. 제당(祭堂)은 중국식과 서양식을 결합하여 건축하였으며 길이가 30 미터, 너비가 25 미터, 높이가 29미터로 되여 있는데 전부 대리석으로 건축하였으며 지붕에는 남색의 오지기와가 얹혀 있다. 제당 정면은 3개의 아치형 문이 있고, 문미(門眉)에는 국민당 원로 장정강(張靜江)의 친필로 된 손중산 선생이 생전에 제출하였던 삼민주의 즉 “民族(민족)”, “民生(민생)”, “民權(민권)”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중간문 제일 상단에는 손중산 선생의 친필로 된“天地正氣”라는 글자가 세로 새겨져 있다. 중산릉의 제당은 해발176메터의 높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첫 어구부터의 직선 거리고 700메터이고 상차 고도는 70메터라고 한다.   제당(祭堂)   제당내부는 흑백색의 운남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고 12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동서 량쪽 벽에는흑색대리석 바탕에 손중산 선생의 유작인 《建國大綱》 전문이 새겨져 있다. 제당 내 중앙에는 4.6메터 높이로 불란서 조각가 保羅. 朗特斯가 한백옥으로 조각한 손중산선생의 좌상(坐像)이 모셔져 있다.   손중산 선생의 좌상(坐像)   8. 묘실(墓室) 제당 뒤면에는 묘실(墓室)로 통하는 문이 있다. 묘실은 제당과 이어 지었는데 반구(半球) 모양의 봉페식 건축물로서 직경이 18메터, 높이 11메터이고 벽은 담홍색의 인조석(人造石)을 붙이였고 바닥은 백색의 대리석을 깔았다. 묘실 중앙에는 직경 4.3메터, 깊이 1.6메터의 대리석을 붙인 묘혈(墓穴)이 있는데 체코의 조각가 高琪가 조각한 중산복을 입은 손중산 선생의 한백옥 와상(臥像)이 모셔져 있다. 이 와상 밑에 적동(赤銅)관에 모신 손중산 선생의 유체가 깊이 매장되여 있다고 한다.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손중산 선생의 와상에 향해 한참 묵도를 드리고 돌아섰다. 손중산 선생의 와상(臥像) 2010년 10월
81    이제 30년이 지나면 어떤 시대가 될까? 댓글:  조회:10011  추천:51  2011-05-13
이제 30년이 지나면 어떤 시대가 될까? 일상 사업과 생활에서 보는 과학기술 청해    중국에서 개혁개방 이전 7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재봉기, 손목시계, 자전거, 라디오 이 네가지를 중기(四大件)라 하였다.  한 가구에 한두 가지는 있었지만 네가지를 다 갖추어 놓고 사는 집은 드물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은 자전거가 오토바이나 자가용차로 바뀌고 핸드폰의 시계가 손목시계를 대체하고 라디오가 텔레비전에 밀리우고 재봉기가 고물로 되여 버렸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하여 집안에 않아서 ‘국내외 뉴스’, ‘TV연속극’, ‘동물세계’ ‘세계각지’ 등 프로를 통하여 세상 구경을 다하며 지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서 진행하는 올림픽실황을 구경하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하여도 집집이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다. 하여 모든 소식전달은 우편으로 편지거래를 하였다. 그러나 급한 소식(례하면 부고같은것)은 인편으로 전하였는데 인편이 없으면 직접 사람을 띄워서 전달하였는데 그것도 교통이 불편한 때라 몇십리길을 걸어 다녀 와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화한통이면 다되고 그것도 너나없이 핸드폰을 갖고 있는 시대라 언제 어디에서나 수시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 받고 한다. 컴퓨터로는 화상채팅까지 한다.   70년대까지만 하여도 하늘에서 날아 가는 비행기를 지상에서 올리쳐다 볼뿐 그것을 타리라곤 생각조차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자무식인 80고령의 나의 장모님도 비행기를 타고 중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한다.   현재의 과학기술에서 생산력을 가장 크게 해방한 것은 아마 컴퓨터라 하겠다. 30년 전에는 컴퓨터라는 명사마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컴퓨터의 보급으로 하여 사람이 하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하여 많은 기계가 자동화 되여 작업효율이 신비하기만하다. 간단한 례를 하나 들면 과거에는 통신원이 원고를 육필로 써서 우편으로 신문사에 보내면 편집원이 그것을 수개하여 다시 육필로 써서 조판(排版)에 보낸다. 조판에서 조판본을 인쇄공장에 보내면 인쇄로동자들이 활자를 주어 맞추어 인쇄판본을 짜서 인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통신원이 원고를 컴퓨터로 쳐서 인터넷으로 신문사에 보내면 신문사에서는 그자리로 원고를 받을 수 있고 편집원이 수개를 하거나 수개를 할 것이 없으면 그 원고가 그대로 컴퓨터로 인쇄된다. 그러니 이 과정을 보면 육필, 우편, 인공조판, 활자줏기 등 과정이 없어지었다.   지금 내가 일하는 회사의 일도 CNC(computer numeric control컴퓨터로 숫자를 제어하는 장치)루타로 인테리어에 사용되는 가지각색의 목조판(木彫版)들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기계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기계를 움직인다. 지금 우리의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금인출, 계좌송금도 켬퓨터화하여 온라인으로 하지않는가? 이것은 고객에게 편리를 줄뿐만 아니라 수많은 은행직원들이 하던 일을 컴퓨터가 대체하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의 사업과 생활에서 컴퓨터기술의 응용이 많고도 많다. 얼마나 큰 생산력을 해방하였는가?   나의 부모님들은 80년대 초에 모두 돌아가셨는데 그때에 도시에는 텔레비전,세탁기, 가스레인지. 전기밥솥, 전기랭장고가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나의 부모들은 평생 시골에서 고생하며 생활하다나니 이런 것들은 구경도 못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시였다. 문화생활이란 어떤 것인걸 모르시고 평생 고생으로 살아 오시다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들 참으로 가엽게 생각된다.   교통, 통신의 발달, 특히는 컴퓨터기술의 보급으로 하여 21세기는 글로벌시대로서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되여 가고 있다.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기하급수마냥 발전하고 있는데 이제 30년이 지나면 과연 어떤 시대가 될까?    
80    朱氏東國始祖의 묘소를 찾아서 댓글:  조회:7944  추천:53  2011-05-13
朱氏東國始祖의 묘소를 찾아서   주청룡   나의 오래 전부터의 소망이 조상이 누워 계시는 고국 땅을 밟아 보았으면 하였는데 이번에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고국으로 친척방문을 오게 되여 고국 땅을 밟게 되였으며 시조의 사당과 묘소도 참배하게 되여 오매에도 그리던 나의 소원을 풀게 되였다.   나는 중국에서 족보를 정리하느라 많은 자료를 찾으면서 끝내 우리 조선족(한국에서 말하는 朝鮮族과 韓族을 다 말함) 신안주씨(조선족 주씨는 일본)의 始租묘소가 전라남도 和順郡 綾州面 千德里 懷德洞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내였는데 이번에 한국에 와 보니 전국 여행지도 책에도 천덕리에 주자묘(朱子廟)가 표시 되여 있었다. 3월 15일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광주행 열차를 타고 광주에 가서 또 버스를 갈아 타고 천덕리로 갔다. 천덕리에 내리니 朱子廟 → 길안내 표시가 있었다. 길안내 표시에 따라 약간 굽이 돌아 걸으니 약 500m가량 거리에 나의 시조사당과 묘소가 한눈에 안겨 왔는데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정말 기뻤다. 아! 끝내 찾았구나. 저곳이 바로 나의 시조 할아버지가 누워계시는 곳이구나! 우리는 절반 뛰고 걸고 하면서 사당으로 향하였다. 사당에 도착하니 사당관리 일군이 우리를 보고 마중 나왔다.   우리는 사당관리일군과 인사를 나누고 찾아온 사연을 말하니 그는 우리를 반가이 맞이 하고 사당으로 안내하면서 사당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사당의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敷地面積이 2000평(6667평방메터)이고 정면에는 54개의 돌계단을 올라 崇禮門을 방불케하는 承敬門이 왼쪽에 있었고 오른쪽에는 懷德門이 있었는데 承敬門으로 곧추 들어가면 朱子廟이고 懷德門으로 곧추 들어가면 東源祠였다. 朱子廟와 東源祠는 모두 청와대처럼 청색의 기와가 얹혀진 사각으로 된 고대 건축물 모양으로 되여 있었는데 朱子廟의 건평은 21평(69.3평방메터), 東源祠의 건평은10평(33평방메터)으로서 1976년 6월 23일에 착공하여 1977년 12월 30일에 준공 하였다 한다. 담장밖에는 잘 생긴 소나무들이 옛 선비들의 자태로 서 있었다. 우리는 그의 안내 하에 먼저 사당을 참배하였다. 朱子廟는 우리 신안주씨의 一世祖上인 중국 南宋때의 저명한 정치가, 교육가, 철학가, 朱文公(1130~1200) [注解1]의 사당이고 東源祠는 우리 조선족 주씨의 시조 즉 東國始租[注解2] 청계공(淸溪公) 주잠(1194~1260) [注解3]의 사당이였다. 朱子廟 왼쪽에는 1.50m 높이의 직방체 돌 위에1.50m로 된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주문공의 銅像이 있었는데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이가 학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당에 들어 서서 우리는 속으로《第33世孫(朱熹로부터)이 조상님께 절을 올립니다.》하며   정중히 참배하였다. 사당에서의 참배를 마치고 나서 관리원의 안내 하에 청계공(주잠)의 묘소로 향하였다. 사당 왼쪽 산기슭에는 웅장한 분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朱文公의 증손이며 우리조선족 주씨의 시조인 청계공 할아버지의 묘소였다. 분묘는 60개의 돌계단을 10개씩 끊어 올라가 있었으며 돌로 울타리를 만들어 둘렀는데 고려시대에 군왕들이 무덤을 조성할 때 쓰는 방법으로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의 형상을 12방(十二方)에 새겨 넣어져 있고 좌우에는 말과 양, 그리고 사자와 장군석, 문인석 등이 도열해 있었다. 그 뒤로는 조개 껍질 마냥 능선(稜線)이 오르다가 적당한 눈 높이에서 멈췄는데 그 위로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반달모양으로 둘러 있었다. 분묘 옆에는 3.5m 높이로 된 新安朱氏東國始祖南宋翰林學士淸溪公朱濳之事績碑 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碑文略함) 우리는 여기에서 또 조상님께 정중히 절을 올렸다. 1224년 청계공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고려땅을 밟음으로 하여 오늘의 내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천백번 무릅을 꿀고 절을 하고 싶었다.     청계공의 묘소에서 아래로 내려 오면 또 문절공(1227~1287) [注 解4] 의 묘 소도 있었는데 묘소는 소박하게 가꾸 어져 있었고 묘 앞에는 2.25m로 된 高麗知都僉議府事謚文節朱公悦之墓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으며 주위는 소나무들이 둘러 서 있었다. 우리는 문절공의 묘소에 가서도 참배를 하였다. 이로서 조상들에 대한 모든 참배가 끝났다. 참배가 끝나자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사당과 묘소의 이곳 저곳을 렌즈에 담아 많은 역사자료들을 남기였다. 저녁에 사당관리일군은 우리를 열정스레 접대하였다. 식사 후 나와 사당관리일군[注解5]은 신안주씨에 대하여 흥미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도 중국에 있을 때 새로 족보를 정리하면서 많은 자료를 보았기에 이 방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 아는 것이 퍽 많아 그날 저녁 그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적지 않은 력사자료들을 수집하였다. 1224년 청계공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고려땅을 밟아서부터 784년 후 그이로부터 30세손인 내가 오늘 또 다시 고국땅을 밟아 조상님들을 참배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호감을 느끼게 되였으며 오매에도 그리던 소원을 풀게 되였고 또 적지 않은 력사자료들을 얻은 것으로 하여 무등 기뻤다. 이제 나의 후세에서 누가 다시 고국에 와서 조상님들을 참배할는지? (우리 후대들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문장격식과 편폭의 제한으로 하여 이 글에 올리지 못하므로 앞으로 다른 책으로 편찬할 예정이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다시 한번 사당과 묘소를 돌아 보고 아쉬운 심정으로 리대우씨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능주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돌아 왔다.   [주해] [1]  朱文公은 諡號로서 임금이 追贈한 이름이고 字는 元晦, 號는 晦庵, 이름은 熹이며 중국 남송때에 복건성 尤溪에서 출생, 漢族, 性理學을 集大成한 孔子, 孟子 다음의 大儒學者로서 그의 사상이 봉건통치계급의 수요에 적응 되였으므로 宋, 元, 明, 淸 시기를 내려 오면서 統治理念으로 승화 되였으며 조선과 일본에도 전파 되여 官學으로 되였다.     [2] 朱熹 앞의 8대 조상인 朱瑰를 신안주씨의 元始祖로, 朱熹를 一世租로, 주잠을 東國始租로하고 있다. 東國始租란 중국에서 동방의 나라 高麗로 처음 온 조상이란 뜻임       [3] 朱濳은 주문공의 증손으로서 1220년, 남송때에 浙江 烏程의 縣令으로 있다가 杭州로 옮겼다. 그때 몽고가 침입해 들어오자 조정의 대신들은 主和論과 투항주의를 주장하자 나라를 구하려는 그이는 그들과 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니 1224년, 고려 고종11년에 고려로 망명하여 全羅道羅州에 정착하여 조선족 신안주씨의 시조로 되였다.   [4] 文節公은 고려 충열왕이 追贈한 諡號고 청계공의 장손이며 이름은 열(悦), 자는 이화(而和), 호는 죽수(竹樹)며 충열왕에게 글을 가르친 스승이시였고 고려가 元나라의 지배를 받아 해마다 많은 금과 軍船을 바치는 무거운 부담을 가져 임금이 원나라 황제에게 부담을 덜어 달라고 몇 차례 간청하였으나 해결을 못 보아 나라가 곤경에 빠졌을 때 문절공이 원나라와 교섭하여 금과 軍船을 바치는 것을 취소하여 나라를 구한 救國大臣이다.   [5] 사당 관리는 주자의 제27世孫 朱炳演(71세)과 李大雨(56세) 두분이 한는데 주병연은 그날 서울로 가시고 리대우씨(56세)가 우리를 안내 하였는데 그는 비록 주씨성은 아니지만 주자학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자원봉사로 여기에 와서 관리를 한다는 것이였다.    
79    KBS와 함께하는 송년의 밤 댓글:  조회:10749  추천:52  2011-05-13
KBS와 함께하는 송년의 밤   오늘은 고국에 와서 보내는 두 번째 송년의 밤이다. 오늘의 이 밤은 작년 송년의 밤보다 완전히 다른 기분이다. 작년 송년의 밤은 고향을 떠나 이국(고국이라지만 국적이 다름으로 하여 이국으로 밖에 될 수 없다.)땅의 한 회사 기숙사에서 북녘하늘을 쳐다보면서 친인(親人), 친척들을 그리고 고향 연변을 그리는 쓸쓸한 송년의 밤이었지만 오늘의 이 밤은 KBS와 함께하는 즐거운 송년의 밤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외국국적 동포 한국취업생활수기’ 공모전의 수상자들인 천진에서 온 정향미, 심양에서 온 홍정의, 그리고 나 셋은 KBS라디오 ‘한민족 하나로’ 프로에서 진행한 ‘송년특집’에 출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우리 셋은 ‘한국취업생활수기’공모전에 입선되어 9월28일 안산에서 있은 ‘‘2008 외국인 근로자 함께하는 한마음축제’’의 국제적 무대에 올라 수상하는 영광을 지니었고 오늘은 또 라디오 스튜디오에 앉아서 KBS와 함께 즐거운 송년의 밤을 보내니 기쁘기만 하다. 오늘 프로의 진행은 원종배 선생님이 하셨는데 아주 따뜻하고 친절한 분위기였다. 서로의 인사를 나눈 뒤 원종배선생님은 우리들이 수기공모전에 입선된 것을 축하하였다.   다음으로는 아나운서의 명랑한 목소리로 우리들의 수기가 낭독되었다. 중국동포들의 뜻을 담은 우리들의 수기가 전파를 타고 지구촌 각 곳에 전하여 지는 이 시각 우리들의 마음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격동되었고 한국생활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자호감을 느끼게 되였다.   아나운서의 낭독이 끝나자 우리들의 수기 심사평의위원회의 책임을 맡으셨던 참 미디어연구소 박상주 소장님이 우리들의 수기가운데서 감동적인 대목을 읽어 가면서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전향미의 수기에 대하여서는 “자기 스스로를 잘 들여다 보는 자아의식이 굉장히 잘 들어난 작품’’이고 홍정의의 수기에 대하여서는 ‘‘굉장히 따뜻하고 전문 작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묘사력이 띄어난 작품”이며 나의 수기에 대하여서는 ‘‘중국동포뿐만 아니라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땅을 밟는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 가운데서 고학력자들의 마음의 갈등을 고스란히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셨다.     원종배선생님은 우리 셋은 모두 중국에서 온 동포라는 공통점이 있고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글을 잘 쓰는 분들이어서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와서 일하는 중국동포들을 대표할 수 있기에 이 자리에 모시였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이렇게 평가하고 믿어 주시니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하여 우리는 지난 한 해를 회고하고 희망찬 새해를 바라보며 한국생활에 대한 체험도 이야기 하였고 중국동포들을 대표하여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배려에 감사를 드릴 수 있었으며 중국동포들의 절절한 목소리를 담은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원종배 선생님은 우리 개인들의 정황에 대하여서도 나이는 얼마이며 언제 한국에 왔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일들을 하며 어떤 어려운 점들이 있는가를 자상히 물으셨다. 이렇듯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와 친절하게 이야기를 나누시었기에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뜨거워 났고 이야기는 할수록 더 흥이 났다.    마지막으로 원종배 선생님은 우리더러 새해의 소망을 담아 중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새해의 소망과 부탁의 말을 하였는데 전파를 타고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전하여 졌으며 오늘 ‘송년특집’은 ‘’지구촌 각 곳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세배로 막을 내리었다.   주청룡기자 2009년 1월 17일 에 게재 2009년 2월 4일 KBS 에서 방송
78    "베이징 쇼제"가 전파를 타기까지 댓글:  조회:11275  추천:31  2011-05-13
"베이징 쇼제"가 전파를 타기까지  주청룡 작곡가 정원수(왼쪽)와 필자   나는 원래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중국에 있을 때부터 , 등 작곡가 정원수가 창작한 노래만은 어쩐지 특별히 나를 매료시켜 이 노래의 창작자 정원수를 만나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었는데 지난 5월 2일 ‘한민족신문 창간 2주년 기념행사’에서 정원수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였다.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잠간 례의적인 말이 오간다음   원래부터 궁금하였던 ‘베이징쇼제’의 창작으로부터 가수 김월녀를 찾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묻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이 노래를 창작하게 된 계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는 1993년1월 KBS “전국은 지금”이라는 프로로 한반도(조선반도) 전체의 환경보고 프로를 록화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와서 연길, 대련, 장춘, 할빈, 장백산을 둘러보며 방송프로를 구상하던 중 중국에 매료되여 1993년에 중국 대련에서 중한합자 회사 天天宮 (한국식당, 가라오케, 커피숍 등 )을 대련시 개발구 구청옆 발전공사빌딩 1층과 2층 전부를 임대해서 꾸렸다.   1년 뒤 조선의 김일성주석이 서거하여 한반도(조선반도)에 긴장상태에 들어갔을 때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께서 전쟁이 날지 모르니 빨리 돌아오라고 울며 독촉하는 바람에 그는 어머님의 의사를 존중하여 경영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귀국하게 되였다.   그때 함께 일하면서 정이 들었던 한 녀인과 갈라지게 되였는데 그 녀인은 너무도 갈라지기 아쉬운 심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공항까지 배웅하였다. 정원수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에 앉아서 대련시를 내려다 보는 그 순간, 아직도 공항에서 사라져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눈물로 자기를 그릴 그녀, 1년간 같이 사업하면서 인상 깊었던 추억들이 주마등마냥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러한 추억들은 작곡가로서의 그에게 창작의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자이젠바 다롄쇼제 / 오늘의 이별이 / 우리의 사랑에 / 시작일 수 있잖아 / 언제 다시 돌아온단 / 기약은 없지만 / 울지는 마라 / 워 아이 니 / 영원한 내 사랑 / 자이졘바 다롄쇼제 / 그의 흥분된 심정으로 가사와 선률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비행기가 한국으로 나는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다 완성되였다. 그는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중국말을 섞어 하는 것이 습관적이여서 가사에서도 그 습관이 표현 되였으며 멜로디에는 중국풍을 짙게 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였다.   본래 가사를 쓸 때에는 ‘다롄쇼제’였는데 가사전달에서 순통스럽지 못하여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인 수도 ‘베이징’이 좋을까 싶어 ‘베이징쇼제’로 고쳤다. 그런데 귀국하여 다사분주하게 보내다니 누구를 통해 음반을 취입할까 하는 이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그는 1996년12월,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한중 수교 4주년 기념공연 ‘友谊之夜’을 어렵게 성사시켰는데 그때 알게 된 중국 국제방송국 서창술 부장과 함께 국제방송과의 교류를 계속하면서 한국노래 음반들도 공급해주고 서창술 부장과의 인연을 계속 맺어오던 중 1997년에 그가 중앙민족가무단의 조선족 가수 김월녀를 소개 하였다. 그러나 김월녀가 계속 외국공연 중이라서 만나지 못하다가 1999년 정원수의 형격인 정우혁씨가 북경에 갔다가 서창술 부장이 김월녀를 만나게 해주면서 한국의 정원수에게 얘기해 달라고 하여 정우혁은 한국으로 정원수에게 전화하여 김월녀를 만났으니 곡을 보내달라고 하여 서울에서 북경아가씨악보를 팩스로 중앙민족가무단으로 보냈다. 김월녀가 불러본 즉 너무나 맘에 든다고 하여 정원수가 그녀를 서울로 초청하여 급하게 록음시키는데 그날따라 김월녀가 노래하는데 록음실의 스피커가 터져버렸다. 그 순간 정원수는 "이건 히트다, 좋은 징조다" 라고 예감하였다. 그후 록음을 끝내고 음반을 냈으며 그 당시 정원수는 한국에서 현철, 설운도, 남진, 심수봉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의 전국순회콘서트를 기획하여 김월녀를 함께 출연시키며 한국인들에게 김월녀를 알리고 KBS 열린음악회와 2001년 12 월 31일 밤, KBS의 “가는 해 오는 해”라는 프로에서 2002년 새해 재야의 종소리 타종후 0시 15분 KBS를 통해서 중국동포가수 김월녀의 가 차이나복을 곱게 차려 입은 40여명의 무용수와 함께 전파를 타고 고고성을 울렸다. 이 노래는 이렇게 세상에 태여나자 인차 무섭게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정원수는 곧바로 CD 200장을 둘러메고 북경으로 날아가 국제방송국 서창술 부장에게 전해주어 서창술은 중국 전역의 방송국과 심지어 평양중앙방송까지 전해주었으며 중국 전역에서 동시에 울려퍼지게 되였다. ‘베이징쇼제’가 이렇게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자 한국과 중국의 음악계와 대중속에 급속히 펴졌으며 대중속에서 히트곡으로 되였고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있는 세계 곡곡에서 널리 불려지는 애창곡이 되였다, 이로부터 정원수와 김월녀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를 타고 더욱 널리 퍼지게 되였다.      2010년 5월 10일 한국에서     한민족신문 2010년 5월 13일, 흑룡강신문 2010년 5월 27일     [주] 이 글은 최종 정원수가 심열하고 동의 한다음 투고 되였음      
77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 댓글:  조회:9679  추천:39  2011-05-13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께서 국무사업에 매우 분망히 보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대통령님께서 집정하시는 기간 중한관계가 더욱 돈독히 발전하리라고 믿으면서 이 편지를 올립니다, 저는 중국 연변에서 온 동포 주청룡입니다. 저는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지난해에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와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도 하고 일도 하면서 한국의 경제가 놀랍게 발전한 것을 보고 고국에 대한 경모의 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유감스러운 점이 있어서 아래의 이 글을 대통령님께 올려 일반 국민들을 비롯한 전반 한국사회가 우리 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여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로 돼 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한 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 합니다.   저의 오래 전부터의 소망이 조상이 누워계시는 고국 땅을 밟아 보았으면 하였는데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지난해에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오게 되였으며 또 조상의 묘소를 참배하여 오매에도 그리던 소원을 풀게 되였고 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도 하고 일도 하면서 한국생활을 체험 하여 보았습니다. 출입국 관리소, 취업교육장, 노동부 고용지원쎈터, 중국동포타운 등 국가기관, 사업소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고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1992년 중한수교 이래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 생활이 많이 펴여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있을 때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 일을 하면서 많은 멸시, 모욕, 학대를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하여 왔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저도 이번에 한국에 와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부리면서 노예처럼 여기고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가정에서는 가정부를 종으로 여기여 고용인들이 최저의 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습니다.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개의치 안습니다. 하지만 인격만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채소농장에 가 보면 동포들의 기숙사가 곧바로 채소하우스 안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동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 차이가 있으므로 하여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도구를 연장, 쇠줄을 반생이라고 하는데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연장이나 반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에 그 말을 알아 못 들으면 60세 이상의 고령동포들에게도 “반생도 몰라” 하며 반말을 써가며 욕하고 어떤 때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스러운 욕을 퍼붓고 있습니다. 표준말을 하는데 우리가 알아 못 들으면 욕해도 무방하겠지만 반생이란 한국국어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를 쓰면서도 우리가 알아 못 듣는다고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돈벌이 온 것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한국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주변인이라면서 아무런 정치권리도 인권도 없는 인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중국에서 모든 정치권리를 다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변에는 조선족인구가 전주 인구의 37.7%밖에 안되지만 나라에서는 연변을 조선족자치주로 정하고 민족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하여 중대한 회인 《당대표대회》와 《인민대표대회》도 조선말로 진행하고 학교에서도 조선족 언어. 문자로 교육을 받으며 거리의 모든 간판도 조선문자와 한자 두 가지 문자로 표시하는데 조선문자를 위에 한자를 아래에 놓고 있습니다. 산아제한정책에서도 대민족인 한족은 한 쌍의 부부가 아이 하나밖에 나을 수 없지만 우리 소수민족은 아이 둘씩 나을 수 있도록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민족이라 하여 소외를 당하였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 겨레의 고국에 와서 일부 고용주들에게서 아무런 인권도 없는 노예나 종살이 같은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중국에서 살길이 없어서 한국에 온 것으로 여깁니다. 한국에 와서 취업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서민들이지만(중국에서 국가공무원, 문화, 교육, 의료, 과학기술 등 분야에서 사업하다가 정령퇴직을 한 후 친척방문 또는 고령동포비자로 한국에 와서 취업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집도 100 여 평방미터 되는 아파트에서 고급 가정전기기기들을 갖추어 놓고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모두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싸기에 그에 따라 인건비가 높고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고 따라서 인건비가 낮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은 상대적인 이 차이를 이용하여 한국에서의 높은 인건비로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가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아 생활소비가 적게 들기에 한국에서 번 돈을 값있게 쓸 수 있으므로 모두 한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에서도 우리 동포들을 생각해 범위를 확대하여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는 중국과 구 소련지구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친척 없는 동포들에게도 무연고 방문취업제를 실시하였다고 봅니다. 우리 동포들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우리 동포들도 고국에 와서 열심히 일을 잘 하여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려 합니다. 하지만 일부 하류 계층의 고용주들이 동포들에 대하여 너무나도 멸시, 모욕하고 학대하여 한국에서 일하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게만 느껴집니다. 여러 가지 역사적 원인으로 하여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이국 땅에서 생활을 하지만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우리 조선족은 모두 한 겨레의 핏줄로 이어진 동포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정부의 배려 하에 우리 재외 동포들도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고국에 와서 일하는데 모든 일터에서 한 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일개 서민으로서 감히 대통령님께 편지를 올려 죄송스럽게 생각됩니다. 참고로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통령님의 옥체건강과 국무사업이 순리롭게 진행 되여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중국동포 주청룡 2008년 8월 1일 부록   아래에 중국동포들이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에서 갖은 멸시와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열거합니다. 1. 시화공단의 모 화학공업사의 플라스틱필름공장의 공장장이 금년 1월 30일 새벽 2시에술을마이고중국동포기숙사에뛰어들어아무런연고없이“너희들 중국 놈 새끼들 다 없애 치워야 한다.”하며 마구 욕설을 퍼부어 할 수 없이 그 공장을 떠난 일, 2. 포천시의 모 건축현장에서 오야지가 중국동포들에게 늘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욕설을 퍼붓고 한 동포가 안전벨트 사용에 대하여 합리 한 건의를 제기 하였는데도 그것을 불만과 반발로 여기고 늘 그를 욕하며 냉정하게 대하다가 나중에는 내 쫓은 일, 3. 화성시의 모 형광등공장의 생산과장이 중국동포에게서 검은 돈봉투를 받다가 다른 한 중국동포에게 발각되자 그 후부터는 그를 볼 때마다 그 돈봉투를 받은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위협적인 눈총으로 보면서 늘 생트집을 잡아 그를 마구 욕하여 나중에는 공포증까지 걸려 공장에서 쫓긴 일, 4. 중국동포까지 다하여 근로자가 7,8명 밖에 안 되는 가평의 모 두부공장의 사장이 중국동포가 그에게 전화를 하였다 하여 어찌 삯꾼이 감히 사장에게 전화를 거느냐 하며 욕설을 퍼부으니 그 동포가 말대꾸를 하자 삯전도 주지 않고 내 쫓으려다 한국의 언론매체에 공개를 하겠다고 하니 겁에 질려 삯전을 주고 내 쫓은 일, 5. 숙식을 해결한다 하여 상일동의 모 채소농장으로 일하러 갔는데 가보니 쌀만 대여 주고 그 외의 것은 자체로 해결하여야 하며 잠자리는 하우스 안이었다. “쌀만 대여 주고 하우스 안에서 자는 것도 숙식을 해결한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도 사람이지 않는가? 사람이 어찌 짐승의 자리보다 못 한데서 생활할 수 있는가?”고 하니 농장주는 “다른 교포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왜서 당신만은 그리 불만이 많은가? 못 하겠으면 가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은 일. 6. 서울시 서초구의 한 집에서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쓰는데 음식도 한자리에서 먹을 수 없고 과일 같은 것은 사와 껍질을 깎아 올려 바쳐도 저들끼리 않아 먹으면서도 하나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고 어른들이 마구 욕하고 천시하니 아이들도 어른들을 본받아 그 모양새로 마구 욕하여 종살이 같은 고용생활을 하는 일, 7. 정모, 황모 씨는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전라남도의 모 김 양식장으로 갔는데 일이 너무 고되고 월급이 낮아 빠져 나오려 하여도 바다 한가운데라 도망쳐 나올 수도 없는 처지라 X X 일에 취업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교육을 받고 다시 오겠다고 하니 주인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할 수 없이 배로 건네어 주어 일한 삯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도망하여 나온 일. 8. 중국 용정에서 온 박모씨(59세)는 모 건설현장에서 몇 달 일하고도 오야지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삯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금년 1월 순천시 모 돼지 농장에 가서 일하다 3월 16일, 돼지 축사가 불이 나자 불 끄려 들어 갔다가 불에 타 죽은 일. 이상의 사례들은 이번에 한국에 와서 제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가까운 친척,친구들이 직접 겪은 사실들입니다.   (2008년 9월 1일 동북아신문에 게재)
76    남북관계 정상화는 우리 민족의 공동한 념원 댓글:  조회:10330  추천:50  2011-05-13
남북관계 정상화는 우리 민족의 공동한 념원 청해   최근에 들어서 남북관계 경색으로 하여 개성공업단지와 금강산관광지역상주 한국측 인원과 차량 축출, 개성관광중단, 화물열차 운행중지, 한국측 인원 들의 개성과 금강산 등 지역 출입제한 등 조치들이 실시 되였다. 이는 우리민족이 바라는 념원이 아니다. 크지 않은 땅, 그리 많지 않은 인구를 가진 우리 민족이 응당 통일된 민족,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할 것이 일본의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결속의 산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된 두 개의 나라로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비록 반 파쇼전쟁의 승리로 결속되고 일본침략자를 우리 땅 에서 물리쳤지만 1945년 2월 소, 미, 영 3국의 정상들의 모인 소련의 얄따회의와 1945년12월《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에 관한 결정은 우리민족에게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 하고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조선(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단 된 가슴 아픈 결과를 가져 왔다. 우리 민족은 그 후 3년간의 가열처절한 6.25전쟁을 겪었고 정전 이후 반세기 동안 냉전상태에서 한민족끼리 서로 싸우는 불행한 일들이 있었다..   구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국제적인 냉전시대가 결속되고 남북관계도 김대중전대통령의방북에서체결한‘6.15남북공동선언’으로부터 냉전이 중지 되 였으며 이산가족상봉, 금강산, 개성관광개발, 개성공업단지 입주, 경의선, 동해선 철도개통 등 남북관계에서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으며 서로의 좋은 효과를 가져 왔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방북 ‘10.4남북공동선언’은 ‘6.15 공동선언’의 정신 을 재확인하고 ‘6.15 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켰다. 두 개의 ‘공동선언’은 서로 이해를 증진하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지며 통일을 갈망하는 우리민족의 공동한 념원이다. 한국과 조선 두 정부는 두 개의 ‘공동선언’을 남북관계 발전과 조선(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 하는 강령성 문서로 간주하여 왔다.   하지만 금년에 들어 한국 정부는 ‘잃어버린 10년’론을 제기하면서 두개의 ‘공동선언’을 보류하는 태도를 취하고 ‘무핵, 개방, 3000’의 대북 ‘실용’정책을 제기했다. 즉 조선의 핵문제 해결과 조선의 개방실시를 전제로 10년내에 조선의 인당 국민소득을 3000딸라에 도달하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대북 ‘실용’정책은 실지상 ‘포용 없는’ 비 현실적인 대북정책 으로서 조선이 제창하는 ‘자주’, ‘민족공조’, ‘화해협력’정책과 리념 상에서 서로 저촉되는바 이는 남북관계경색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되고 있다. 이러한 한류(寒流)로 하여 남북관계가 얼어 붙기 시작하였다.   남북관계경색의 다른 한가지 주요한 원인은 보도매체의 조선에 대한 비하적인 보도와 엄숙하지 못한 보도이다. 지난 여름 한시기 한국의 주요한 보도매체들에서는 김정일위원장의 건강이상설에대하여 련속되는보도를하였는데 근거있는 확실한긍정적인 보도를 하는것이아니라 동네집말을 하기 좋아 하는 아낙네들의 근거없는잡담처럼 근거가 확실하지 못한 허실상몽 (虛實相蒙)한 엄숙하지 못한 보도에 집착해 북측의 감정을 엄중히 손상시켰다. .   남북관계경색의 또 다른 한가지 주요한 원인은 한국 보수단체의 비방적인 대북전단살포이다.‘10.4선언’에는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 하지 않고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관계 문제들을 화해와 협력, 통일에 부합되게 해결해 나가기로 한 내용이 담겨 있다. 북측의 경고로 하여 정부에서도 대북전단 살포에 대하여 일정한 제지도 있었지만 민간보수단체는 이를 고집 하여 민간진보단체와의 충돌도 있었다. 이상의 원인으로 하여 현재 남북관계가 최악의 경색에 이르렀다. 이로 하여 직접적 피해를 보는 것은 그간 대북지원을 지속해온 남한의 민간단체들과 개성공단에 입주한 한국기업,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을 학수고대하던 남북양 측의 이산가족이다.   10년간의 이산가족 상봉은 육친의 만남, 육친의 정을 이어 놓았으나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상봉의 그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일루의 희망이 이산가족상봉의 중단으로 하여 생전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할 기약 없는 미래로 되여 또 다시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동일한 언어와 문화, 혈통을 지닌 한 민족끼리 서로 비방하며 대방의 감정 을 상하게 한다면 남북관계의 경색을 초래할 뿐 그 어떤 좋은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한다. 남북경색으로 하여 결국은 개성공단을 비롯한 북측에 파견 된 상주인원의 대폭 감축과 10년 동안 활발하게 추진 되였던 조 한 정부간 대화와 적십자회 교류, 경제 협력 및 육로 통행이 차단되었고, 남북경협협의사무소 등이 잠정 철페 되였고 분단 후 56년 만에 재 개통된 경의선 철도가 1년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운행을 멈추고, 금강산, 개성관광,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된 결과를 가져 왔으며 10년 동안 쌓아 올린 남북평화의 공든탑 을 무너뜨린 결과를 초래 하였다   물론 현재의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의 원인은 한국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북측의 대남 강경책 단행과 ‘통미봉남’의 극단적 대남정책도 남북관계 경색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된다.   한집안끼리 싸워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듯이 우리민족도 서로 싸우면 서로의 상처를 가져 올뿐 유익한 점이 없다. 우리민족과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일정한 타협도 필요하다고 본다.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대통령 집정시기에 서로의 타협으로하여 서로의 좋은 효과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남북경색을 풀어가는 해결방안은 오직 ‘6.15선언’과‘10.4선언’을 드팀 없이 리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선언’을 리행하여 상호신뢰, 상호 존중한다면 쌍방은 우리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치여 민족번영의 새 시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갈 수 있다. .   註解: 두 개의 ‘공동선언’에는 명확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이란 국호를 썼다. 이는 실지상 남북간의 정상들이 서로 대방 정부를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1991년 9월 17일 유엔에서도 두 개의 나라를 다 인정하고 유엔에 가입시켰다. 하여 필자는 본문에서 두 개의 ‘공동선언’과 유엔의 결정에 근거하여 ‘남한’, ‘북한’,‘남조선’, ‘북조선’등 명사를 쓰지 않고 ‘조선’, ‘한국’이란 국호를 썼다.   2008년 12월 20일 동북아신문에 실림
75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않은 기쁨 댓글:  조회:9591  추천:43  2011-05-13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않은 기쁨 나는 3년 전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왔다.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등록하고 두 주일이 지나 받아 안은 것이 외국인 등록증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니 한국에 와서는 외국인으로 인정되어 외국인등록증을 받는 것은 이상할 것 없이 응당한 것으로 생각 되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몇 달간의 생활을 하여보니 내가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있는데 대하여 어딘가 서운한 감을 갖게 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 겨레들은 재외동포비자이지만 방문취업제로 온 중국과 구 소련의 우리 겨레들만 기타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같은 한 겨레에서도 차별시하는 감을 느끼게 되다. 어떤 사람들은 동포로 인정받고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지? H-2비자는 F-4비자에 비하여 출입국, 취업 등 방면에서도 일정한 제한을 받고 있었다. 능력이 있어도 사무직이나 기능직에 취업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중국에서 교원사업을 하였으므로 한국에 와서 어느 학원에 들어가서 중국어를 가르치려 하였는데 안 된다는 것이었다. F-4비자는 될 수 있지만 H-2비자는 단순노무에만 취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외동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할 수 없이 직업소개소에 찾아가서 인사를 올리고“나는 외국인인데 일자리를 찾으려고 찾아왔어요.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를 하여 주세요.”라고 하였다. 나를 접대한 분은 내가 찾아 온 사연을 다 듣고 나서 나에 대한 동정어린 마음으로 “분명히 중국동포인데 왜서 외국인이라고 하는가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도 고국에 와서 재외동포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분명히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으니 스스로 동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아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분도 정부의 동포정책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나에게 형광등조립회사란 좋은 일자리를 소개하여 주었다. 나는 그분의 우리 동포에 대한 포용과 동정심에 매우 고마웠다.  한국국적 외의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겨레들을 외국국적이므로 외국인이라 하여도 별로 개의치 않게 생각되지만 같은 우리 겨레로서 재외동포로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에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며 감정문제이다.   금년에 법무부에서는 H-2체류자격으로 있으며 취업신고를 하고 한 사업장에서 1년 이상 일한 자에게는 4월 26일부터 F-4자격으로 변경시켜 준다는 새로운 정책이 제정 되였다. 나도 이 조건에 부합되었기에 변경수속을 하였더니 F-4자격으로 변경되었다. 나는 변경된 체류자격증을 보고 또 보았다. 여권에는 재외동포비자가 확연히 찍혀있었다. 거소신고증에는 확연히 왹국국적동포라고 하였다.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안은 순간 나는 얼마나 감격되고 기뻤는지 모른다. 오매에도 그리던 재외동포비자였다. 인제야 고국에서 동포로 인정받고 스스로 동포라고 말할 수 있고 동포의 위치에 설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고국의 동포포용정책에 감사하였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여 고국을 건설에 나의 자그마나 한 힘이라도 더 보태어 보자는 결심도 들었다. 주청룡기자2010년 7월 10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74    아름다운 월미도 댓글:  조회:8240  추천:39  2011-05-13
아름다운 월미도 주청룡 4월13일 일요일 우리 일가 친족일행 8명(나의 처제 한명만 한국적이고 모두 중국적)은 장모님을 모시고 택시 두대로 월미도로 바다 구경을 떠났다. 택시요금도 비싸지 않았다. 인천서구 가좌3동에서 떠났는데 한대에 요금 7500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 흐리고 비가 내리던던 날씨도 그날따라 구름 한점 없는 쾌청한 맑은 날씨였다. 택시가 월미도부두에 도착하자 푸른 바다가 한눈에 안겨왔다. 나의 장모님은 80고령이 되도록 평생 중국 연변에서 살다나니 바다구경 한번 해보지 못하다가 오늘 처음 바다를 보는지라 매우 흡족한 마음이였다. 오늘 우리가 월미도로 유람을 온 것도 장모님께 바다구경을 시켜 생전 바다구경을 한번 해봤으면 하는 평생소원을 풀려는 데서였다 1.  월미도 명칭의 유래와 약력 월미도란 이름은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모양처럼 휘어졌다 하여 달月자에 꼬리尾자, 그리고 섬島자를 써서 월미도라 하였다 한다. 원래는 인천역에서 서쪽으로 1km 거리에 있는 둘레 4km, 면적이 0.66㎢의 섬이었으나, 1920년대 초 돌축대를 쌓아 내륙과 연결되다 한다. 8.15광복후 미군의 "해양경찰대"기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시 인천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이 되였고,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여 개방되기까지 50여년 동안 시민의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2001년9월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인수하고 도시자연 공원으로 결정한 후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되였다 한다. 2.  문화의 거리 부두에서 바다를 내다 보니 영종도와 작약도가 보였고 갈매기들이 끼륵 끼륵하며 푸른 바다위를 날아예고 여러가지 선박들이 오가고 있었다. 월미도부두 남쪽켠은 문화의 거리로 되여 있었는데 우리는 문화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바다와 문화의 거리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렌즈에 담아 많은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1200m의 짧은 문화의 거리는 거리 오른편으로는 바다가, 왼편에는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게 늘어 섰는데 어떤 간판들은 괴이하게도 있었다. “곧 망할 집”, “허벌나게 많이 드립니다”, “돈 내지 맙시다.” 정말 곧 망하게 되거나 돈을 받지 않고 공짜로 손님을 대접하려고 이런 간판을 걸 수야 없지 않는가? 아마 판촉수단이겠지, 판촉경쟁이라 별이 별 수단이 다 있는가 보다.   문화의 거리에는 해변을 따라350m 구간에 높이 10m, 직경이0.8m로 된 15개 조명탑 형식의 '빛의 열주(列柱, 줄지어 늘어선 기둥)’ 가 23m의 간격으로 마치 사열 하듯 세워져 있었는데 밤이면 바다와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고 한다. 10여 m 높 이의 오색분수까지 설치돼 있어 마치 하늘에서 빛을 받아 물과 땅으로 내려주는 듯한 모습이란다. 우리는 낮에 갔기에 오색영롱한 야경은 불 수 없었지만 줄지어 선 기둥과 무색의 분수는 볼 수 있었기에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은 찍을 수 있었다. 3. 코스모스호 유람선 문화의 거리를 다 산책 하고나니 11시가 좀 넘었다. 그다음으로는 코스모스호 유람선을 타는 것이였기에 우리는 배에 올랐다. 11시30분이 되니 코스모스호는 서서히 출항하기 시작하였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스피커에서는 유람객들에게 인사의 말을 하고나서 코스모스호 유람선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는데 1,500톤급 코스모스호는 선장 74m, 선폭 13m, 높이 14m, 4층으로서 – 승선인원이 954명 이며 1, 2층은 공연장으로서 각국 공연단의 열정적인 공연과 연주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날은 우크라이나의 전문 발레공연단과 중국곡예단의 선상공연이 있었다.   3층은 각종 이벤트, 결혼식, 회갑연, 돌잔치, 가족모임, 친목모임 등의 특별한 모임을 할 수 있는 장소였는데 그날은 몇몇 가정들에서 유람삼아 가족모임을 가진겄 같았다.     4층은 갑판 전부가 전망대로서 바다와 섬, 륙지의 월미산 등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할수 있었다. 우리는 1,2층에서 하는 공연에는 그닥 흥취가 없었고 목적이 바다 구경이였기에 4층 갑판 전망대에서 시원한 바다바람을 쏘이면서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하였다. 코스모스호는 지금 한창 건설중인 인천대교까지 갔다 오는 것이였기에 월미산, 작약도, 영종도, 건설중인 인천대교를 구경할수 있었다. 배가 떠날 때 륙지를 바라보니 월미산이 바라보였는데 산에는 가지각색의 꽃들이 울긋불긋 피여 있어 아름다운 봄경치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영종도는 비교적 큰 섬이였기에 섬의 전체를 다 구경할수 없어 어떻다하게 묘사할 수 없었지만 작약도는 륙지와 영종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였는데 스피커에서 소개한데 의하면 둘레의 길이 1.5km, 면적이 0.065평방키로미터로서 섬모양이 작약의 꽃봉오리(작약꽃을 우리 연변에서는 함박꽃이라고 한다.)와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정말로 함박꽃봉오리 같았다. 배에서 그 작은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가 좋았다. 4층 전망대에서는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하며 유람선을 에돌면서 날아 예는 것이 한결 더 기분을 돋구었다. 아이들이 새우깡을 뿌리면 새우깡이 떨어지기전에 갈매기들이 날아 와서 문다. 아이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새우깡을 하나씩 뿌리면 갈매기들이 서로 제가 먼저 먹겠다고 몰려 드는데 아마 약삭 빠른놈이 먼저 받아 무는 것 같았다. 이때면 유람객들은 서로 다투어 갈매기가 모여드는 것을 배경으로 사진기 샤타를 찰칵, 찰칵 누르고 있었다. 우리도 갈매기들이 몰려드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빠른 동작으로 포즈를 잡아 카메라렌즈에 담았다. . 배가 한창 건설중인 인천대교쪽으로 거의 다달을 때 스피거에서는 인천대교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는데 송도 신도시와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인천대교는 총길이 21.48km(해상구간만12.3km)로서 한국에서 가장 길며, 세계에서도 5번째로(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대교는 금년 5월1일에 개통된 상해와 절강성 녕파를 이어 놓은 중국 항주만대교인데 총 36킬로메터로서 그중 32킬로메터는 바다에 건설되였다.) 긴 다리가 되는데 2009년 10월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대교는 그리 웅위(웅장)로와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가장 길고 세계에서 5번째로 되는 해상대교라는데서 유람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코스모스호가 인천대교까지 갔다 돌아 오는데 1시간20분이 걸렸다. 4.  신비스러운 생회 월미도에 와서 회를 맛못면 유감이라 한다. 우리는 유람선에서 내려 한 회집을 찾아 점심식사하려 들어 갔다. 식탁에는 여러가지 해산물회가 많이 올랐는데 거기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것은 낙지다리(촉수)를 토막내여 회를 한것이였는데 산것처럼(아마 촉수신경이 죽지 않은 모양이다.)꿈틀거렸으며 어떤 것은 접시밖에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이런것은 난생 처음으로 보는것이였다ㅣ 여성들은 무서워서 한저가락도 집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남성들은 용기를 내여 소주 한잔에 그것을 하니씩 입에 넣었다. 아마 정신자극이겠지 배안에서까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5.    월미놀이공원 점심식사 후 우리는 월미 놀이공웜으로 향하였다. 놀이공원에는 여러가지 놀이기구들이 많고도 많았는데 그가운데서 가장 인끼를 끄는 것은 바이킹과 아폴로디스코였다. 바이킹은 조각달과 같은 쪽배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앉으면 30 여 m 높이까지 그네타는 모양으로 왕복운동을 하는 놀이기구였는데 왼쪽으로 75도, 오른 쪽으로 75도의 각도로 왔다갔다하며 진자운동을 하였다. 이때 움직이는 속도는 시속 40~50km라고 한다. 이 기구는 늙은이들은 아예 탈 엄두를 못내고 젊은층들은 “전국 에서 가장 짜릿하기로 소문난 바이킹, 월미도에 왔다 바이킹을 못 타고 돌아가 면 후회막급”이라는 DJ(라디오방송이나 디스코텍에서 레코트를 틀어 주고 그 사이 사 이에 짧은 해설이나 즉흥적인 화제 등을 곁들어 이야기 하는 담당자.)의 말에 귀가 솔 깃하여 한번 타볼 충동을 느낀다. 우리 일행에서도 젊은이들은 그것은 탔다. 정말 짜릿 하단다.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에는 엉덩이가 완전 들리고 가슴 이내앉는 무서운 감을 느낀단다.  또 아폴로 디스코 역시 그러하다. “아폴로 디스코를 모르면 당신은 원시인”이라는 입담 걸쭉한 DJ의 유머가 섞인 구술이 젊은이들의 마음 을 끌었다. 우리 일행에서도 “월미도에 왔다 원시인이라는 말을 듣겠나.”하며 아폴로디 스코에 올랐다. 이놀이 기구는 둥근 체모양으로 되여 있었는데 체바퀴 안에 몇십명이 앉을수 있었는데 쌀을 체로 치듯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을 탄 사람들은 너무 무서워 체바퀴모양의 손잡이를 꼭 잡아 쥐였지만 둬자 높이로 엉뎅이를 들추어 놓는 것는 면 치 못하였다. 더욱 바빠난 것은 짧은 치마를 입은녀성들이였다.   6, 월미공원 월미공원은 아직 건설중에 있었는데 최근에 개방을 한 월미산(해발 108m)을 중심 으로 공원을 한다고 하는데 공원 앞쪽은 아직 조성중이지만, 월미산과 전망대는 이미 개방되였었다. 월미산은 50년 이상 주둔한 군부대가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였기에 서 해안의 생태계 특징이 온전히 잘 보전돼 있었다. 우리가 간 때는 3월 중순 백화가 만 발한 한창의 계절이여서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였는데 그 많고도 많은 꽃들 가운데서 아는 것이 고작해야 벚꽃, 개나리꽃, 진달래꽃 등 몇가지 뿐이였다. 여하튼 이름모를 여러가지 꽃들이지만 하도 예쁘기에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는 참말로 좋은 기분이였다. 산책도로를 따라 정상으로 올라 가면서 보니 생태환경이 아주 잘 보존된 산이라 나무가지에 얹혀있는 새둥지들을 수두룩히 볼수 있었으며 여러가지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 소리는 생태공원의 아름다운 멜로디로 되여 우리들의 기분을 한결 더 돋구었다. 정상에 이르니 유리전망대가보이였는데 2005. 10월 준공되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었다., 전망대는 25m 높이의 철제와 투명유리로 건립되였는데 바닥면적 150㎡, 건축면적 450㎡, 라고 한다. 라선형의 계단(장애인들을 위한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여 있었다.)을 걸어 3층에 오르니 인천항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었고 영종도, 작약도, 시내가 시야에 들어 왔는데 전망대의 망원경으로 영종도를 보니 아주 똑똑이 보이였다. 전망대에서 사면팔방을 다 둘러본 우리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오늘의 관광을 마치고 산책길을 따라 내려와서 택시를 잡아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월미도 전망대   
73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열렬히 축하 한다 댓글:  조회:11392  추천:42  2011-05-13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열렬히 축하 한다 주청룡   금년 8월23일은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 6년간 《중국동포타운신문》은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 공존의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온 6년이였으며 중국동포들의 한국생활 에서의 길잡이자 가장 친근한 벗으로 지내 왔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법무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출입국정책, 동포들에 대한 안내문(조선족동포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미래에 대해서 올바르게 준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글), 동포들의 한국생활 수기, 등 중국동포들이 가장 관심 갖고 즐겨 읽는 문장들이 많이 실리기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며 가장 즐겨 읽는 신문으로 되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법무부에서 중국동포들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나올 때마다 신문에 새로운 정책을 싣고 그에 대한 해석을 가하며 또 직접 중국동포들의 모임을 갖고 동포들에게 상세하게 해석을 하여 주고 있다. 지난해 말 H-2-A동포들 이 3년 만기 되여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게 될 때에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을 못한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었는데 이때에 신문사는 이에 대한 해석을 신문에도 싣고 동포들에 대한 직접적인 모임을 갖고 상세한 해석을 하여 동포들이 안심하고 중국에 갔다가 다시 입국하게 하였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보도매체의 작용을 할뿐만 아니라 또 중국동포 사회를 위하여 실질적 일들을 많이 해 왔다. 2005년, 2006년 법무부 는 불법체류중인 중국동포를 위한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불법체 류중인 중국동포들이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면 합법체류로 한다는 정 책을 반포하였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안내상 담을 해주었으며 정부의 이런 정책이 나왔어도 불법체류자들이 정부의 정 책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면서 자진출국을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중국동 포타운신문》사는 신원담보를 서면서 불법체류자들을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여 합법체류자로 되게끔 설득하였으며 이로 하여 이 신문사에 등록하고 자진 출국한 사람은 2년에 무려 7천여 명이나 된다. 이 신문의 홍보를 통하여 자진 출국한 동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로 하여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중국동포들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되였다. 그때 불법체류자로 있다가 《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신원담보로 자진 출국하였 다가 재입국하여 인젠 합법체류로 있는 많은 사람들은 “중국동포타운신 문은 정말로 우리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이다. 만약 그때 중국동포타운 신문사의 신원담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불법체류자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문사의 <법률구조본부> 에서는 동포들이 일하고도 고용주한테서 임금을 받지 못한 문제, 일하다 상하여서도 산재보험을 받지 못하는 등 문제들을 해당부문을 찾아 해결하여주고 있으며 매주 일요일이면 무료로 컴퓨터교육 을 실시하여 컴맹이던 중국동포들도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게 하고 있다. 그리고 전문의(할빈대학의료원에서 30여년간 사업해온 김설송교수)를 배치하여 무료건강상담을 하여 중국동포들이 병 보이기 어려운 문제도 해결하여 주고 있다.   신문사는 중국동포밀집구역에 외국인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대비해 가리봉, 대림동 지구대와 련합해 외국인 자율방범대를 조직하여 범죄를 대폭 감소시키고 있다.   지난해에는 또 법무부, 로동부, 외교부 정책담당자가 참석한  ‘방문취업제 시행 1주년, 중국동포정책 새 정부에 바란다’란 공개 토론회 등 큰 행사를 조직하여 중국동포들의 리익을 대표하여 새 정부에 제기하기도 하였다.   지난해 말에는 KBS TV와 함께 고용주와 중국인 근로자 간담회도 조직하여 많은 사람들이 중국동포들의 리익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으며 금년에는 또 전국농업기술자협회를 협조하여 두 차례의 “재한중국동포농업교육”을 진행하여 중국동포들이 고향에 돌아가 새 농촌건설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학습의 기회도 마련하여 주었다.   이외에도 중국도포들을 위하여 취업소개, 고충상담, 출입국수속대행, 한국생활안내 관, 중국동포<사랑의모금함> 활동, 등등의 많은 일들을 하여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며 지역주민들과 동포들이 함께하는 설맞이, 추석맞이 등 한중문화대잔치를 개최 하여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과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뉴대(紐帶)작용을 하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6주년을 열렬히 축하하면서 앞으로《중국동포 타운신문》이 한국사회와 동포사회를 화합공존의 사회로 만드는데서 더욱 큰 기여를 하며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 더욱 친근한 벗으로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2009년 8월 5일 중국동포타운신문 156호에 게재  
72    경복궁을 참관유람 하고서 댓글:  조회:11799  추천:18  2011-05-13
경복궁을 참관유람 하고서   한국에 와서 어느때부터 조선왕조의 궁전인 경복궁을 참관하고 싶었었는데 지난 일요일(9월 6일) 경복궁을 참관할수 있는 기획가 있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왕조 개국 4년째인 1395년에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처음으로 세운 으뜸 궁궐이다. “하늘이 내린 큰 복”이란 뜻으로 경복궁(景福宮)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경복궁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담장 둘레의 길이는 1,933m, 평균 높이는 5m, 두께는 2m이고 총면적은 343,888㎡였다. 담장의 사방에는 각각 대문 하나씩 있는데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이 있었다. 정문인 광화문은 지금 수건 중이어서 원래의 모습을 볼수 없어 좀 유감스러웠다. 광화문 안쪽은 넓은 광장이었는데 유람객들로 삼삼오오 흩어져 거닐고 있었다. 광장 북쪽으로는 거대한 고대건축물인 흥례문(興禮門)이 장엄한 모습을 보이었다.   흥례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었다. 흥례문으로 들어서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永濟橋)를 지나 근정문(謹政門), 근정전(勤政殿)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근정문은 정면 3칸, 측변 2칸의 중층(重層) 누문(樓門)으로서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우진각 지붕(네 개의 추녀마루가 기와로 쌓아 올린 지붕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건물로 세부 수법은 근정전과 큰 차이가 없다.     1. 근정전(勤政殿) 근정전은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하는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國家) 의식(儀式)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근정(勤政)이라는 이름은 천하(天下)의 일을 부지런하여 잘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근정전은 상하의 기단(基壇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의 월대(月臺, 궁전이나 누각 따위의 앞에 세워 놓은 섬돌.)를 갖추었고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欄干柱)에는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서 훌륭한 솜씨로 조각한 12지상(十二支像)을 비롯한 동물들을 배치하였었다. 근정전은 밖으로 보면 2층 건물이나 안에서 보면 층 구별이 없이 통층으로 되여 있었다.   2. 사정전 (思政殿) 사정전은 근정전 뒤에 있는 편전(便殿)으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던 건물로서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사정전은 왕이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국정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 다고 한다. 사정전 그 이름에는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사정전 좌우에 있는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온돌방을 갖추어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보조 편전인데 원래는 사정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사정전의 기능을 보조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복도가 없어졌다고 한다.   3.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사정전을 지나 뒤로 북쪽을 향해 가면 강녕전이였다. 강녕전은 경복궁 안에 있는 왕의 침전(寢殿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으로서 앞면 11칸, 옆면 5칸의 55칸 규모로 단층 팔작집이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하였다.  특히 뒤에 있는 왕비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를 양성하지 않음으로써 침전임을 상징했다. 교태전은 앞면 9칸, 옆면 4칸으로 모두36칸의 규모로 되여 있으며 왕비가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4. 흠경각(欽敬閣) 흠경각은 강녕전의 서쪽에 위치하여 있다. 흠경각에는 앙부일구(仰俯日晷),옥루기륜(玉漏機輪) 등의 시간 측정기 구 와 천문관측기구인 간의(簡儀)를 만들어 설치했었다.   앙부일구(仰釜日晷)는 해시계로서 솥 모양의 그릇 안쪽에 24절기를 나타내는 눈금을 새기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을 꽂아, 이 바늘의 그림자가가리키는 눈금에 따라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옥루기륜(玉漏機輪)은 물의 힘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시간과 하늘의 천체현상이 나타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물을 먹인 종이를 발라서 높이가 7자 되는 인조산을 만들었고, 그 속에 옥루(옥으로 만든 물시계)와 기계 바퀴를 설치했다. 금으로 만든 탄환만한 크기의 태양에 다섯 빛깔의 구름이 둘러싸고 산허리 위를 지나가게 했다. 이 태양의 입출이 시각이나 절기가 모두 실제와 같았다. 또 네 옥녀(玉女)와 방위를 가리키는 사신(四神)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으며, 다른 인형이 때를 맞추어 종·북이나 징을 치도록 만들었다.   이외에도 세자가 거처하였던 동궁(東宮), 선정왕후가 거처하였던 자경전 (慈慶殿),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후궁영역인 흥복전(興福殿), 연못가운데 있는 향원정(香遠亭),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였던 집옥재(集玉齋), 제례의 공간으로 사용됐던 태원전(泰元殿), 경사가 있을 때 왕이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절들을 접대하던 경회루(慶會樓) 등 330 여채의 건물들을 들어 있었다. 경복궁내의 모든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하여 전부 불에 타 훼손되었던 것을 1868년부터 시작하여 복원을 했으며 아직도 복원 중이라고 한다.   경복궁 참관유람하면서 500년 조선왕조의 궁전을 직접 참관한데 대하여 기쁘기도 하였지만 일본침략자들의 만행에 대하여 분노를 가라 앉힐 수도 없었다.   중국에 있을 때 여러 번 북경 고궁을 참관하였는지라  경복궁을 참관하면서 자연히 북경고궁과 비교하게 되였다. 경복궁은 북경고궁(면적은 72만㎡, 담장높이는 10m, 800채의 건물과 9999개의 방)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다고는 하지만 국가의식을 거행 하는 곳, 정사를 처리하는 곳, 일상생활을 하는 곳 등의 건물 구조와 배치가 대체적으로 비슷하였다. 전체적인 건물구조들을 보면 중국의 고대 건축물구조와 비슷했는데 중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경복궁을 다 참관하고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나 오게 되면 청와대를 정면으로 볼수 있었다. 경복궁을 참관유람하면서 많은 력사적인 고대 건축물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것도 좋았지만  청와대 정문에서는 현대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것도 왕궁과 현시대의 대통령부라는 시대적인 상대적 비교가 있어 그것도 별다른 의미였다   주청룡      2009년9월9일 동북아신문에 게재  
71    김대중대통령 추도사 댓글:  조회:9661  추천:33  2011-05-13
  김대중대통령 추도사 《중국동포타운신문》사 김대중대통령 추도식에서 한 추도사   오늘 우리는 매우 비통한 심정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에 접한 우리 중국동포들은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비통을 느낍니다.   대통령님께서는 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여 나 청년시절부터 민주주의를 꿈꾸었고 그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하셨으며 그 분투과정에는 랍치, 사형 등 다섯 번의 죽음의 고비와 6년 수감 생활, 10년간의 연금, 망명을 한 파란만장한 인생의 곡절을 겪어 왔으며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오뚝이정신으로 네 번 도전하여 끝내는 대통령보좌에까지 올랐습니다. 하여 대통령님께서는 '인동초[忍冬草]'라는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대통령님의 일생은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해 온 일생이였습니다. 만약 대통령님의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아직까지 인권자유, 민주화가 없는 독재정권의 나라로 있거나 오늘의 민주주의가 이보다 더 긴 시일이 걸려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길을 개척하셨으며 집정기간에는 한국경제를 빠른 시일 내에 IMF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이로 하여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님의 공적을 영원히 있지 않을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남북의 화해와 남북통일을 위해 크나큰 기여를 하시였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2차세계대전의 결속의 산물로 우리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가슴 아픈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로 하여 반세기 동안 서로 적대시하는 랭전상태에 있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응당 통일된 민족,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할 우리 민족이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고 랭전상태에 있는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시고 2000년 6월 북을 방문하시여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하고 남북의 50년의 랭전상태를 종말지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하시고 두 정상이 손을 잡고 높이 쳐드는 장면은 온 세계에 알리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의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이 감격적인 장면을 보는 순간 우리 중국동포들도 같이 기뻐하고 같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방북하실 때 김정일 위원장과 력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6.15공동선언을 채택하시여 남북의 화해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 하여 금강산 관광, 리산가족의 상봉, 개성공단의 입주와 개성관광, 남북적십회 교류, 경제 협력 및 육로 통행이 진행되였고 56년 만에 경의선 철도가 재 개통된 아주 거족적인 성과를 가져 왔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지난 2000년 일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와 남북화해 협력에 노력한 업적을 평가 받아 우리민족으로 첫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대통령님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때에도 우리 중국동포들은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기뻐하고 대통령님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하여 축하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민족의 자랑이였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대한민국의 거목이시고 우리민족의 새별 이였습니다. 대통령님의 서거로 하여 대한민국의 거목이 쓰러지고 우리민족의 새별이 사라졌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집정기간과 퇴임후에도 관용과 포용으로 자신과 대립되는 정적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드넓은 포부와 인격을 가지였습니다. 이는 대통령님의 인간수양과 대통령님의 리더십을 보여 주셨습니다. 때문에 대통령님의 서거를 슬퍼하고 추모하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고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으며 남북이 따로 없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중국인민의 오랜 벗이며 생전에 중한 관계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셨습니다. 중국 정부와 인민들도 이를 잊지 않을것입니다. 중한관계의 발전으로 하여 특히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더 없는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기업의 중국연해도시의 진출로 하여 중국의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취직하고 있으며 방문취업제 등 중국동포들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고국에 온 중국동포들은 30만 명을 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동포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대통령님과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우리 중국동포들은 고국에 와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사화와 동포사회를 서로 어울리는 화합, 공존의 사회로 되게끔 노력하며 대통령님과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려 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안심하시고 편한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가십시오.         주청룡 2009년 8월 23일 2009년 8월 25일 중국동타운신문 157호,  2009년 8월 28일동북아신문에 게재
70    중국동포와 함께 하는 BM우드의 즐거운 야유회 댓글:  조회:6321  추천:36  2011-05-13
중국동포와 함께 하는 BM우드의 즐거운 야유회       인천서구의 가구 생산회사인‘BM우드’는 5월 30일 장봉도 야유회를 조직하였다. 기자는 중국동포들과 함께하는 BM우드의 야유회에 동행하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영종도 부두에 도착하자 사람을 실은 그대로 유람선에 들어 섰다. 유람선에는 장봉도로 가는 크고 작은 차량들이 30여대나 들어 서 있었다. 10시가 되여 유람선은 출발을 알리는 고동을 울리더니 장봉도를 향해 떠 났다. 관광객들은 모두 3층 갑판에 올라 바다와 주위의 많은 섬들을 구경하며 유람의 즐거움을 느꼈다.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하며 유람선을 에 돌면서 날아 예는 것이 한결 더 기분을 돋구었다. 아이들이 새우깡을 뿌리면 새우깡이 떨어지기전에 갈매기들이 날아 와서 물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새우깡을 하나씩 뿌리면 갈매기들이 서로 제가 먼저 먹겠다고 몰려 드는데 아마 약삭빠른 놈이 먼저 받아 무는 것 같았다. 어떤 애들은 손에 새우깡을 쥐고 높이 쳐들고 있으면 그것을 납작 집어 가기도 했다 이때면 유람객들은 서로 다투어 갈매기가 모여드는 것을 배경으로 사진기 샤타를 찰칵, 찰칵 누르고 있었다. 우리도 갈매기들이 몰려드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빠른 동작으로 포즈를 잡아 카메라렌즈에 담았다. 배가 출항하여 거의 40분 되여 장봉도에 도착하였다. 장봉도(長峯島)는 인천에서 서쪽으로 21km, 강화도(江華島)에서 남쪽으로 6.3km 해상에 위치해 있으며 섬이 길게 뻗어 있고 봉우리가 많이 있다고 해서 장봉도라고 한다. 섬은 전체적으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면적 6.68㎢, 해안선 길이 26.9㎞, 인구 810, 가구 297(2003년 통계). 주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여 하고 있으며 지금은 1박 2일 휴가를 보내려 오는 사람들이 많이 흘러 들어 많은 민박들을 꾸려 놓아 민박업도 하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유람선에서 내려 관광코스를 따라 한바퀴 돌았기에 장봉도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할수 있었다. 선착장에 내리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인어동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어부가 그물을 낚았는데, 인어 한 마리가 그물에 걸려 나왔다고 한다. 어부는 인어를 측은히 여겨 산채로 바다에 넣어주었는데, 그 후에 그곳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봉도는 소나무숲이 무성하고 옹암해수욕장, 한들해수욕장, 진촌해수욕장 등 이름 있는 해수욕장이 있었고 썰물 때 드러난 갯벌에서는 낙지와 조개, 굴, 등을 잡을 수 있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랑부리백로와 괭이갈매기가 집단 서식하는 곳이며 많은 낙시터가 있어 관광보다는 여름철 휴가를 보내기 좋은 곳이였다. 점심때 되여 회사 전체 직원들은 한자리에 단란이 모여 앉아 돼지고기 삼겹살이며 낙지 등 가지각색의 맛나는 음식들을 차려놓고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중국 근로자들은 중국에서 가지고 온 몇 가지 명주도 내놓았다. 점심 식사는 윤도현 사장의 “이번 야유회는 회사 사원들이 휴일의 하루를 즐기며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의 마음의 소통으로 되는 좋은 기회이므로 단결 우의 증진을 위하여 건배”의 제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은 서로 돌아가며 술을 부으며 건배를 하였다. 음식상에서 중국인들에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낙지를 산 것을 통채로 먹는것이였다. 8가닥의 다리(촉수)가 너불거리는 것을 먹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안아 칼로 토막을 내였는데 토막을 낸 촉수도 산 것처럼 꿈지럭거리였는데 어떤 것은 접시밖에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이런것은 난생 처음으로 보는지라 여성들은 무서워서 한저가락도 집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남성들은 용기를 내여 소주 한잔에 그것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아마 정신자극이겠지. 배 안에서까지 꿈틀거리는 것같았다. 술좌석에 이어 노래와 춤판이 벌어졌는데 한국가요, 중국가요, 연변가요, 등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였는데 그야말로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의 마음의 소통의 장으로 되였다. 오락회를 마치고 갯벌에 내려가 조개 줏기를 하였는데 이미 다 주은 뒤여서 눈에 띄우는 것이 얼마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 둘씩 줏는 것도 재미였다. 금방까지 갯벌이던 것이 오후 두시가 넘으니 밀물이 들어오면서 갯벌이 바다로 되였다. 조개줏기를 하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밀물에 쫓겨 륙지로 올라오는수 밖에 없었다. 장봉도에서 일몰이 가장 유명한 곳은 진촌해수욕장 이라고 한다. 1박2일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은 일몰을 볼수 있었으나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해가지기 전에 돌아 왔으므로 저녁노을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으로 되였다. 버스가 돌아오는 유람선에 들어서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한국인과 중국 근로자들이 함께하는 BM우드의 즐거운 야유회는 막을 내리였다. /주청룡 기자 2009년 6월 5일 한민족신문
69    서울에서의 동창모임 댓글:  조회:9039  추천:42  2011-05-13
서울에서의 동창모임 3월 28일 서울에서 중국동포들의 동창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 제10중학교(지금의 룡정시 덕신중학교) 1967년 졸업생들이였다. 이들은 모두 본직사업에서 정령퇴직을 하고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나와 일도 하고 고국의 명승고적들도 유람하면서 몇 년간 한국생활을 해보려고 한국에 나왔던 것이다.  이번 모임은 당년의 반장이었던 김광석씨가 발기하여 고국에서의 동창모임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 40년 전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교통, 통신이 아주 불편한 때라 통신주소도 없이 그저 갈라지고 말았다. 이들은 졸업한 후 갈라져 각자가 서로 다른 사업터에서 일하였는데 그래도 연변지구에서 사업한 동창들은 몇 번씩은 만난적이 있지만 어떤 동창들은 통신주소도 없이 몇천리 떨어져 사업하다 나니 졸업한 후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와서 동창모임으로 하여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다. 그어간 한두 번씩 만난 동창들이 서로 인사를 시키니 그렇지 인사를 시키지 안으면 누가 누구인지 알수 없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이팔청춘의 꽃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갈라진 것이 인젠 모두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할머니로 되여 처음으로 만났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장장 42년만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에서였다. 만약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이 없었다면 한평생 만나지도 못할 동창모임이었다.   동창모임은 정말 뜻 깊었다. 추억의 노래를 부르면서 잊지 못할 40여년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사랑속에서 즐겁게 공부하던 이야기,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이야기, 40년 전의 우리의 선생님들 인젠 칠팔십 고령의 할아버지로, 또 저세상으로 가신 선생님들도 많으시리라 하며 그 시절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되 새겨 보았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며 하나 둘씩 동학들의 이름도 불러 보았고 자기들의 사업에서 거둔 알찬 성과도 이야기하며 하루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그러면서 이들 외에도 한국으로 나온 동창들이 더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서로 서로 수소문하여 다음 번에는 더 많은 동창들이 모여 즐겁게 보내자고 약속하였다.   주청룡 기자 2009년 4월 10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68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BM우드 댓글:  조회:7770  추천:46  2011-05-13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BM우드   BM우드는 한족을 포함한 중국 근로자를 9명을 고용하는 20여명의 회사직원을 갖고 있는 가구생산 회사이다. 이 회사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하였는데 처음에 외국인을 채용하여 쓸 때에 한국인과 외국들 사이에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많은 애로를 겪었다. 하여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언어장애로 하여 서로 오해를 가져 분기가 쌓이어 가면서 나중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서로 손찌검까지 하는 싸움도 있었다. 이런 정황을 노(老)회장이 알고 회사의 관리자들에게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갈이 다름으로 하여 문화적 차이도 있고 또 언어가 다름으로 하여 의사소통이 잘 안되지만 그들은 모두 우리 회사에서 근무를 하는 것만큼 서로에게 담겨 있는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여 닫힌 마음을 열고 그들을 우리 한집사람처럼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부터는 회사 관리자들이 노회장의 말씀을 받들고 회사직원들에게 외국인들과의 관계에서 엄격한 요구를 제기하였으며 노회장께서는 중국 한족들과 대화는 안되지만 중문으로는 교류는 되는지라 한족들과 중문을 써 가면서 의사소통을 하여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고 닫힌 마음을 열자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양해를 해주니 언어 장애로 하여 서로의 의사를 잘 못 이해를 할 때도 있었지만 서로 웃고 지내었다.   지금은 다른 외국인은 쓰지 않고 중국의 한족과 조선족근로자들을 쓰고 있는데 한족들은 몇 년간의 생산실천 속에서 현장에서의 생산용어들을 다 장악하였고 어떤 복잡한 말들은 중국의 조선족들이 통역을 하기에 언어장애로 하여 크게 곤란을 받고 있지 않다.   BM우드와 이웃으로 있는 한 회사에는 60세의 한 중국인 고령동포가 있었는데 그 회사는 불경기 상태라 외국인을 쓰던 것을 내여 보내게 되였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만 고령동포들은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BM우드의 회사의 규정에 의하면 나이 많은 사람을 채용하지 않기로 되여 있다. 하지만 윤도현 사장은 이 고령동포의 취직이 곤란한 사정을 감안하여 회사의 규정을 타파하고 이 고령동포를 BM우드에 취직시켰으며 고용지원 센터와 출입국관리소에 취업신고까지 하였다. 이 회사의 김정배 차장은 중국인 근로자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려 언제나 웃음으로 대하며 새로 온 직원이 있으면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고 잘못한 것이 있어도 언제 한번 짜증을 내지 않고 친절히 대하였으며 무거운 짐은 자기가 골라 메였다. 박종열 차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 새로 온 그 고령동포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그 고령동포는 어떤 일에서나 젊은이들에 비해 못했다. 그렇지만 언제 한번 짜증을 내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으며 늘 그에게 웃음으로 대하였디.   관리자들이 중국인들을 한집사람처럼 대하자 아래 회사전체 직원들도 친형제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휴식시간이면 한자리에 모여 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회사에 가지고 와서 서로 같이 나누어 먹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하여 중국근로자들은 참으로 이국 땅에서 동포다운 따사로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주청룡 기자 2009년 3월 25일 한민족신문
67    고국에서의 동창모임 댓글:  조회:8874  추천:38  2011-05-13
고국에서의 동창모임   2월 22일 가리봉동에서 중국동포들의 동창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 제10중학교(지금의 룡정시 덕신중학교) 1968년 졸업생들이였다. 이날 모임에는 우인순, 오순희 서해금 청해 네 사람이였는데 이들은 1968년 연길현 제10중학교를 졸업하고 갈라진 것이 장장 40년도 넘는 41년만의 만남이였다. 그것도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에서였다. 만약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이 없었다면 한평생 만나지도 못할 동창모임이였다. 40년전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교통, 통신이 아주 불편한 때라 통신주소를 남길수 없어 그저 갈라지고 말았다. 이들은 졸업한 후 서로 갈라져 각자가 서로 다른 사업터에서 일하다나니 어떤이들은 혹시 한두번은 만난적은 있었지만 청해와 우인순, 서해금이와 오순희, 오순희와 우인순이는 장장 41년 만의 첫 만남이였다. 그어간 한두 번씩 만난 동창들이 서로 인사를 시키니 그렇지 인사를 시키지 안으면 누가 누구인지 알수 없었다. 동창모임은 정말 뜻 깊었다. 추억의 노래를 부르면서 잊지 못할 40년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사랑속에서 즐겁게 공부하던 이야기,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이야기, 40년 전의 우리의 선생님들 인젠 칠팔십 고령의 할아버지로, 또 저세상으로 가신 선생님들도 많으시리라 하며 그 시절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되 새겨 보았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며 하나 둘씩 동학들의 이름도 불러 보았고 자기들의 사업에서 거둔 알찬 성과도 이야기하며 하루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그러면서 이들 외에도 한국으로 나온 동창들이 더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서로 서로 수소문하여 다음 번에는 더 많은 동창들이 한데 모여 고국에서의 동창회를 구성하기로 하였으며 통신련락은 010-8226-9466에 하기로 하였다.   청해 2009년 3월 10일 146호에 게재
66    한국에서의 중국동포들의 3.8절 기념모임 댓글:  조회:8017  추천:39  2011-05-13
한국에서의 중국동포들의 3.8절 기념모임                                                             청해 3월 8일 의정부에서 중국동포들의 동창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제10중학교(지금의 룡정시덕신중학교) 1967년 졸업생들이었다. 이들이 이날을 동창모임으로 택한 것은 마침 일요일이자 3.8국제 노동부녀 절이어서 동창모임에서 3.8절 기념활동도 겸하여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념모임은 당년의 반장이었던 김광석씨의 사회로 진행 되였는데 3.8절의 유래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 유래를 보면 1909년 3월 8일 미국의 섬유 여성노동자 15,000여명이 뉴욕에서 근무 시간 단축, 임금 향상, 투표권, 아동공사용 금지 등을 요구 하는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이것이 미국과 세계 각국 여성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았다. 한편 이듬해인 1910년 8월에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국제 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독일의 로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의 제의하에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킨 3월 8일을  국제부녀절로 정하였고 유엔에서는 1975년에 매년3월 8일을 국제부녀 절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중국에서는 1949년12월,중앙인민 정부 정무원에서 매년 3월 8일을 부녀절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 이번 기념모임의 의의와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감에 따라 지금은 3.8부녀절 기념활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데 한국에 와 일하는 우리 동포들도 고국건설에 한 목을 담당하고 있으며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우리 동포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데 있다고 하면서 여성근로자들에게 명절의 축하를 표시하고 한국에서도 1985 년부터 서서히 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진행 되였는데 지금은 그 기념 행사가 더 중시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그들은 또 추억의 노래를 부르면서 잊지 못할 40여년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사랑속에서 즐겁게 공부하던 이야기,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이야기, 40년 전의 우리의 선생님들 인젠 칠팔십 고령의 할아버지로, 또 저세상으로 가신 선생님들도 많으시리라 하며 그 시절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되 새겨 보았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며 하나 둘씩 동학들의 이름도 불러 보았고 자기들의 사업에서 거둔 알찬 성과도 이야기하며 하루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이날 모임에는 당년 이팔청춘의 꽃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갈라진 것이 인젠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할머니로 되여 처음으로 만난 이들도 있었다. 장장 42년만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에서였다. 만약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이 없었다면 한평생 만나지도 못할 기념모임이였다.   주청룡기자 2009년 3월 12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65    중국 사람들에게는‘중국산식품’이 ‘신토불이’이다 댓글:  조회:8277  추천:36  2011-05-13
중국 사람들에게는‘중국산식품’이 ‘신토불이’이다 ― “중국산과 신토불이”를 보고   필자는 본 신문에 실린 김범송 박사의 “중국산과 신토불이”를 보고 아주 동감을 느끼면서 이 글은 아주 현실적으로서 실제적으로 평론한 글이라고 생각되면서 나도 한마디 나의 견해를 말하여 보자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사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한국산이지만 지금 한국의 시장들을 돌아보면 식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중국산 상품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산을 신토불이라고 하면서 선호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중국산을 대량으로 수입해 들이면서 중국산=싸구려=저질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마땅치 못한 것이다 수요량이 없는 물건을 가득 들여 올 장사꾼은 없을 것이다. 한국시장에 중국산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그만큼 중국산에 대한 수요량이 많고 중국산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김박사가 제기한 것처럼 한국 언론은 ‘중국은 형편없는 환경에서 식품을 비위생적으로 만든다.’는 식의 보도를 일관하면서‘중국산은 무조건 저질·비위생적’이란 인상을 준다면 그것을 사먹는 서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중국산을 비하적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것으로 된다. 중국산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들이면서 언론매체와 일부 한국인들이 ‘중국산’에 대하여 저질이라고 비하하는 것도 중국인들이 반한 감정이 생긴 원인의 하나이라고 본다. 값이 싸다 하여 다 저질인 것은 아니다. 한국도시의 거리를 돌아보면 ‘中國食品商店’ 이란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사람들을 대상한 상점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상점과 시장을 돌면서 중국산을 많이 사먹는다. 이것 역시 한국 사람들이 신토불이를 선호하는 것처럼 중국 사람들은 중국산이 입에 맞기에 중국산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런 중국산을 일부 한국 사람들은 저질이라고 비하 하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는 한국산보다 더 구미에 맞고 우질적으로 느껴지며 중국산이 곧바로 ‘신토불이’이다. 물론 중국산 식품에 멜라민 함량이 표준을 초과한 것과 같은 것은 중국산 식품의 대표적이 가짜 식품이다. 이는 불법분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가짜 식품이지 저질식품이 아니다. 이것으로 중국산 전체를 대체하면 안 된다. 필자는 시장을 돌다가 어떤 고객이 “국산이요, 국산이요.”하며 소리치는 상가를 지나면서 “중국산을 놓고 국산이라고 한다.”라고 비꼬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그것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전에도 어떤 장사꾼들은 중국산을 한국산으로 둔갑하여 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지금 한국 사람들의 인식에는 한국산=우질, 중국산=저질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필자는 중국을 다녀온 한국의 여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국의 돼지고기 맛과 한국의 돼지고기 맛을 비교하면 어떤 가고 물으면 그들 모두가 그래도 중국의 돼지고기 맛이 퍽 낫다고 말한다. 소고기도 그렇다. 한우고기보다 연변소고기가 맛이 퍽 낫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범송박사가 제기한 것처럼 현재 한국인들이 소위 ‘신토불이’를 고집하면서 우리농업을 살리려는 애국사상은 비난할 바가 못 되지만, 무턱대고 ‘국산이 최고다.’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 법칙으로 보면 소비자들의 수요에 따라 시장을 개발하기 마련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조선(한국에서 말하는 북한)과 거래를 하면서 많은 의복들을 조선에 가지고 간다. 그런데 장사꾼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모두 저가, 저급 의복인 것이다. 한것은(그 까닭은) 값이 비싸고 질 좋은 의복은 조선의 서민층에서 살수 없고 값싼 것을 요구하기에 중국 사람들이 입지 않는 전문 조선을 대상한 원가가 낮고 저급품 의류공장이 생기게 되였다. 한국으로 들어온 중국산품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서민층의 소비수준에 맞게 수입해 들인 것이기에 원가가 낮은 저급 산품이 많이 들어 왔다고 본다. 원가가 높고 우질적인 상품을 들여온다면 서민층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김범송박사가 제기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21세기는 국제화 시대로서 모든 국제무역과 교역은 WTO룰(rule)이 지배하는 경쟁시대이므로 국제화시대에 걸 맞는 경쟁의식과 열린 마음가짐이필요하며 한국의 신토불이로 명 브랜드를 창출하는 한편 서민층의 생활수요로 중국산품들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실정에서 이런 것을 비하하기보다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2009년 1월 21일<<한민족신문>> 2월 14일 <<흑룡강신문>>에 게재  
64    전철 안 게시판의 구인카드를 심중이 대하자 댓글:  조회:7880  추천:37  2011-05-13
전철 안 게시판의 구인카드를 심중이 대하자   방문취업제로 하여 해마다 중국의 조선족들이 몇만 명씩 한국으로 나오고 있다. 이들이 처음 한국땅을 디디어서 가장 조급한 것이 구직이다. 일자리를 얻어야 거처도 정하고 빈 몸으로 온 것이 일하여 돈을 벌어야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낯선 땅을 디디어 어디에 가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하여 전철을 타고 직업소개소를 찾아 다닌다. 그러다 보면 전철 안 게시판에 붙은 구인카드가 눈에 띄운다. 구인카드를 보면 대부분 ‘직원모집’, ‘사원모집’, ‘급구’ 등으로 적혀 있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포들에게는 그저 보고 지날 일이 아니다. 하여 그것을 뽑아 들고 보면 보편적으로 ‘내근직’, ‘사무직’, 대상: 35세~65세, 교포가능, 시간: 8시~5시, 월수입 120만~200만원으로 되여 있다. 이런 내용을 보면 힘도 들이지 않는 마음에 드는 일자리이다. 특히 일자리를 얻기 힘든 고령동포들에게는 이 이상 더 좋은 일이 없다. 하여 카드에 적힌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면 사무실이 아무 아무 곳이니 찾아 와서 면담하라는 것이다. 이런 구인카드의 공통점이라면 전화번호와 연계인의 이름(이름 대부분은 가명)이 있을 뿐 주소가 없다. 하여 전화에서 찾아 오라는 곳으로 가서 보면 마중 나온 사람은 있는데 대부분은 회사의 간판이 없다. 아래에 이런 구인카드를 보고 일자리를 찾은 몇 사람의 사례를 들어 보자.   사례1: 길림에서 온 정씨는 구인카드에 따라 찾아가니 모 정수기 판매회사였다. 면접은 본부장이 하였는데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원래 모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있었는지라 사실 그대로 말하니 참 좋다며 며칠 동안 회사의 업무에 대하여 학습하고 학습성적이 좋으면 사무실에 앉히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회사에서 중국 광주에 대리 판매처를 앉히는데 중국말을 잘 하는 사람을 거기에 파견하는데 잘하면 거기에 파견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중국에서 공무원 사업을 한 경력이 있는지라 모든 것이 자신이 있었다. 하여 이튿날부터 ‘실무학습’에 참가하였다. 일주일간의 ‘실무학습’을 하고 시험을 쳤는데 순조롭게 통과 되였다. 정씨는 몹시 기뻤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관이 면접할 때 말이 없던 이 회사의 200만 원짜리 정수기 한 대를 사든지 팔든지 해야 이 회사의 정식사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그것을 사자니 돈이 아깝고 그만두자니 광주는 둘째로 치고 그 사무실 자리가 아까웠다. 하여 우유부단해 있자 본부장과 국장(본부장 위에 국장)이 앞으로 사무실에서 사업하다가 중국 광주대리 판매처에 주요 책임자로 파견하겠는데 이 좋은 직업을 그 200만원 때문에 버리겠는가 하는 끈질긴 설득에 200만원을 주고 정수기 한대를 샀다. 그런데 며칠 가도 사무실에는 앉히지 않고 이일 저일 창고정리 등 잡일만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본부장과 물어 보니 한달 기한을 주며 한달 내에 정수기 열대를 다 팔면 사무실에 앉히고 다 팔지 못하면 파는 수량에 따라 돈을 계산하여 준다는 것이었다. 기가 딱 막힌 일이었다. 이미 산 그 한대도 그저 안고 있는데 산 설고 물 선 이국 땅에 와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어디에 가 한달 기간에 10대나 처리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 사무실자리가 욕심나서 한달 동안 사처로 뛰어 다녔지만 그 안고 있는 한대도 처리 못하고 그만 두었다. 결국은 200만원을 허망 떼인 셈이다. 독신으로 고정거처 없이 제한 몸 건사하기 바쁜 신세에 그 큰 정수기를 어디로 들고 다닌단 말인가?    사례2: 흑룡강성에서 온 김씨는 구인카드에 따라 찾아가니 금은장신구 회사였다. 이 회사도 사람을 끌어 당기는 수법이 [사례2]의 수법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먼저 ‘실무학습’을 거친 다음 낮은 가격으로 회사의 금은장신구들을 사서 시장 격으로 팔라는 것이었다. 김씨는 이미 ‘실무학습’을 걸쳤는지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여 200만 원어치의 금은장신구들을 샀다. 그것을 가지고 시장에 나와 ‘실무학습’ 할 때 말한 가격대로 팔려 하니 하나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지나도 안 팔리니 회사에서 내온 본전에 팔려고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김씨는 지금도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본인도 모르고 있다. 그도 결국은 200만원을 떼인 셈이다.   사례3: 연변에서 온 이씨도 그런 구인카드에 따라 찾아가니 그것은 투자회사라고 하였다. 한꺼번에 500만원 투자하면 매달 이자가 50만원씩 저금통장에 입금되며 한 사람을 가입시키면 또 50만원 상금, 과연 해볼만한 일이었다. 어마 안 가서 본전을 다 뽑고 부자가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자기도 500만원 투자하고 친척, 친우들을 끌어 들였다. 처음 두 달은 이자와 상금이 저금통장에 어김없이 입금되던 것이 세 번째 달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전화를 거니 전화가 안 통하고 회사를 찾아가니 문은 자물쇠를 잠근 채로 있었다. 그도, 친척, 친구도 따 돈을 떼우고 말았다.   이상의 사례들로부터 보면 전철 안의 구인카드를 그렇게 쉽게 믿을 것이 아니다. 동포들이 일자리 찾기에 너무 급해 하지 말고 모든 구인광고에 대하여 심중이 대하기를 바란다.  주청룡기자 2008년 12월 19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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