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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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민생문제 해결, 정부 기업 고용주 함께 나서야 댓글:  조회:7963  추천:22  2013-01-25
민생문제는 백성들의 가장 관심사로 되는 문제로서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고도로 중시를 돌리고있는 문제이다. 지난해 12월 11일, 16명의 로무일군들이 화룡시의 조모를 피고로 화룡시인민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밀린 로임을 정산하여줄것을 요구하였다. 조모는 2011년 3월 15일, 돈화시에서 16명의 로무일군을 고용해 로시아에서 경영하는 자기의 농장에서 도마도를 재배하게 했다. 허나 도마도수확작업이 끝나서 1년이 넘도록 로무일군들의 부분적 월급을 지불하지 않아 로무일군들은 할수 없이 조모를 법원에 기소하였던것이다. 화룡시인민법원에서는 조모에 대한 일련의 조치를 대여 그의 행방을 찾아 그에게 해당 법률과 정책을 해석하고 사상공작을 하여 끝내 그로 하여금 로무일군들의 밀린 로임을 전부 지불하도록 하였다. 지금 고용주들의 로임체불사건이 많다. 지난해 돈화시에서 로임체불신고사건을 접수 처리한것만 해도 67건, 그 금액은 860여만원에 달한다. 로무일군들의 로동은 그야말로 생계를 위한 로동이다. 그들이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일년내내 꾸준히 일하여온것은 오직 내 한 가족을 위해서였을것이다. 그들의 처자들 역시 그 돈을 바라고 집에서 눈이 까맣게 기다리고있었을것이다 고용주들의 경제적 수입도 로무일군들의 신근한 로동으로 얻어지는것이다. 그러므로 고용주들이 자기들의 리익은 챙길 궁리만 하지 말고 일군들의 로동성과를 존중하여 그들이 피땀으로 벌어온 대가를 제때에 주는것을 최저한 갖추어야 할 인성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겨울철에 들어서서  백성들의 관심이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열공급문제이다. 많은 열공급회사에서는 열공급을 보장하고있지만 일부 회사는 아직도 열공급을 보장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다. 설비가 낡은것도 있겠지만 문제는 석탄을 절약하기 위해 열량을 인위적으로 표준이하로 조절하고있다는 점이다. 일부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정부를 찾아가거나 열공급회사를 법에 기소하려고 한다고 하니 가히 문제의 엄중성을 알수 있다. 이런 문제는 정부와 열공급회사에서 하루빨리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문제이다. 오늘날 중앙에서 크게 결심을 내리고 민생문제를 해결하고있으며 각급 정부에서도 이 방면에 대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기층에서도 기업인과 고용주들이 정부의 이런 노력에 발맞추어 민생문제를 잘 해결해나간다면 나라가 번영하고 백성이 안정한 생활을 하는 조화로운 사회로 구축될수 있다고 본다. 길림신문
142    조선관광(3) 댓글:  조회:8138  추천:0  2013-01-19
조선관광(3) 구룡연구역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주위를 빙 둘러보니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남쪽이 약간 틔여있었다. 호텔 남쪽으로 하여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높다란 층집으로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리산가족면회소라고 하였다. 리산가족들이 면회를 할때에는 남북의 한 혈육들이 이 면회소에서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사진설명(1): 리산가족사무소   우리는 8시에 관광뻐스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하였는데 관광안내원은 금강산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나는 슬며시 호주머니속의 휴대용 극소형 록음기를 틀어놓고 안내원의 해설을 록음하였다. 금강산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천하명산으로서 조선의 동해안 중부 태백산줄기 북부에 자리잡고있다.금강산구역은 세개 군의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그 동서의너비는 40km, 남북의 길이는 60km에 달한다. 동서폭 40㎞, 남북길이 약 60㎞, 면적은 약 1,400km²이다. 금강산은 주봉인 비로봉(해발 1,639m)을 비롯하여1만 2천개의 수많은 기묘하고 아름다운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의 바위들로 이루어졌는데 1,5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10여개,1,000m이상 되는 봉우리는 100여여 개 된다. 금강산은 돌과 물, 나무들이 천만가지 재주를 부리고 재롱을 피우며 천하절승이 여기에 다 모인 것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 명산을 가장 굳고 빛나는 아름다운보석 금강석에 비유하여 그 이름을 금강산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사진설명(2): 금강산전경   금강산은 동북쪽으로 외금강·서남쪽으로 내금강·동쪽으로 해금강 지역으로 나뉘는데 우리의 코스는 외금강과 해금강이였다. 외금강은 또 구룡연구역, 만물상구역, 수정봉구역,천불동구역 온정구역 등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데 우리의 관광코스는 구룡연 구역과 만물상구역이였다. 사진설명(3): 외금강전경도   이날 우리는 먼저 구룡연구역으로 등산하였다. 장쾌한 산악미와 경쾌하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구룡폭포는 사시장철 푸르른 담(潭)과 소(沼) 등으로 이루어진 외금강을 대표하는 관광코스라고 한다.   사진설명(4): 구룡연 등산로   사진설명(5): 구룡연과 만물상구역 코스→: 온정리→ 신계사터→ 목란관→ 앙지대→ 삼록수→ 금강문→ 옥류동→ 연주담→ 비봉폭포→ 은사류→ 구룡폭포→ 상팔담. 흔히들 구룡연 코스는 그 아름다움이 녀성스럽고, 만물상 코스는 기암괴석 등으로 인한 산악미로 인해 남성스럽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구룡연 코스는 오르는 곳마다 계곡에 물이 넘쳐나고 비교적 험하지 않은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되여있다. 신계사(神溪寺) 외금강호텔에서 8km 가면 금강산 입구였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발길이 멈추는 것이 신계사(神溪寺)이다.신계사는 519년, 신라23대 법흥왕(法興王 514~540 재위) 때에 보운이 창건한 오랜 력사를 가진 금강산 4대절의 하나인데 그 후 여러 차례 파손된 것을 손질하였으며 1597년에 중건한 신계사에는 대웅보전, 만세루,극락전 등 2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난 조선전쟁시에 폭격당하고 3층 돌탑만 남은 것을 2004~2007년 사이에 다시 원 상태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진설명(6): 신계사 목란관(牡丹馆) 신계사에서 좀 올라가면 주차장이다. 우리는 뻐스에서 내려 이제부터는 등산을 하여야 했다. 안내원은 뻐스에서 내려 길을 안내하면서 금강산에 오면 두가지를 아끼라고 한다. 하나는 감탄사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 필림이란다. 산어구에서 감탄하며 사진필림을 다 쓰고나면 절승경개에 이르러 사진필림이 없어 입만 벌리고 만다는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진기는 디지털 카메라여서 그럴 근심은 없었다. 뻐스에서 내려 올리 등산을 하면서 보니 단풍이 그리 진하게 물들지 않았다. 나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 보고 단풍계절을 맞추어 왔는데 왜 단풍이 그리 들지 않았는가?”고 안내원에게 물으니 안내원이 하는 말이 “더 올라가면 다를겁니다. 금강산은 단풍이 우로부터 내리 드는데 여기는 산기슭이여서 그렇지 더 올라가면 단풍이 한창의 계절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차장에서 좀더 올라가면 목란관이다. 이 부근은 봄이 되면 화사한 목란이 활짝피여 절경을 이루기 때문에 목란꽃 이름을 따서 목란관, 목란다리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목란관은 일종의 휴게소이자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다. 이곳에는 조선음식으로 산채비빔밥과 랭면, 단 두가지의 메뉴뿐인 목란관은 하루 350그릇만 판매하므로 미리 식권을 구입해 두어야 맛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룡연코스 관광을 마친 후 내려오면서 점심식사로 하고있다.   사진설명(7): 목란관   수림대(樹林帶)와 앙지대(仰地帶) 목란관을 벗어나면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길이 시작된다. 목란관에서 약 200여m 오르면 삼림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숲이 우거진 빽빽한 소나무에 뒤덮혀 하늘이 안 보이는데 이곳은 금강산 지역에서 가장 공기가 맑다는 수림대이다. 수림대를 지나서 앙지교라고 불리는 다리에서 200m 가량 오르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평평한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를 '앙지대'라고 부른다 사방이 빽빽한 소나무에 뒤덮혀 산행을 하다 이곳에 서서 살펴보면 사방이 절벽으로 막혀있고 우로 하늘만 보인다 하여 앙지대라고 하였단다. 산진설명(8): 앙지대에서 안내원과 함께   안내원이 왼쪽에 높이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키였다. 올리다 보니 산봉우리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었다. 하늘나라의 토끼가 옥황상제에게 보름말미를 맡고 금강산에 왔는데 금강산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기한내에 돌아가지 못하고 뒤 늦게야 돌아 갔는데 옥황상제는 너무 노여워 네놈은 거북처럼 느지다고 거북딱지를 토끼의 잔등에 붙여 다시 내려 보냈는데 토끼는 여기에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굳어져 거북바위로 되였다고 한다. 사진설명(9): 거북바위를 배경으로   삼록수(參鹿水) 산삼과 록용은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최고의 약재로 불리여 왔다. 삼록수라는 샘물은 산삼과 록용이 녹아 흐르는 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존봉에서 흘러내리는 이 물은 정말 깨끗하기 이를데 없다. 올라갈 때 한번 마시면 10년 젊어지고 내려올 때 한 모금 마시면 또 10년 젊어지니 욕심 끝에 너무 마시면 도로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하여 관광객들은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이 좋은 세상에 태여나자.” 하며 우스개를 피우며 너도 나도 삼록수를 받아 마시느라고 야단법석이였다.   어머니가 없는 배속은 어떻게 들어 가랴만 금강산에 왔다가 한번 마시면 10년 젊어 보인다는 물을 왜 안마시랴 하면서 나도 한병을 다 마시였다. 마시고나니 정말 물맛 좋고 시원하였으며 한결 거쁜한감을 느꼈다. 사진설명(10): 삼록수를 마시다   금강문(金剛門) 삼록수를 지나 만경다리를 건너 좀더 올라가면 옥류동의 입구인 금강문에 이르게 된다. 금강문은 큼직큼직한 바위들이 길을 가로막은 한가운데 ‘△’자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돌계단으로 빠져 나오게 되여있다. 이 돌문은 가장 기묘하게 생겼으며 이 문을 나서면 새로운 금강산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여 금강문이라고 하였단다. 사진설명(11): 금강문   옥류동(玉流洞) 금강문에서 한굽이 꺾어들면 앞이 환히 트이면서 아름다운 옥류동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 하여 불러오는 이름이다. 옥류동 골짜기 안은 사면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에 의해 골안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수정을 녹여서 쏟아 부은듯한 푸른 늪이 바로 옥류담이며 무늬 고운 흰비단을 편듯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같이 흐르는 폭포가 옥류폭포이다. 옥류 폭포의 길이는 50여 미터, 옥류담의 면적은 600평방미터이며 물깊이는 5-6미터에 이른다. 사진설명(12): 옥류폭포와 옥류담   련주담 (連珠潭) 무지개 다리 옥류교를 지나 한참 가면 왼쪽 계곡에 아담한 두개의 늪이 련속 나타나는데 두개의 파란 구슬을 련달아 꿰매놓은듯 하다하여 련주담이라고 하였다. 련주담은 그 옛날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실수로 흘리고 간 두 알의 구슬이 인제는 못이 되여 구 슬처럼 파란 물이 고였다가는 다시 넘쳐 흐른다. 우의 작은 늪은 너비 6미터, 길이 10미터, 깊이 6미터 가량되고, 아래의 큰 늪은 너비 9미터, 길이 30미터, 깊이 9미터 가량된다. 손을 담그면 금방이라도 푸 른물이 들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것이 련주담이다. 올라오면서 보니 과연 안내원이 말이 틀림없었다 올라오면서 단풍이 점점 진하게 물들었는데 울긋불 긋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든 그 경치가 한결 더 아음다웠다. 사진설명(13): 련주담    비봉폭포(飛鳳瀑布) 련주담에서 100m정도를 더 오르다 보면 세존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높이 139m의 거대한 폭포가 보 이는데 이것이 바로 비봉폭포이다.비봉폭포는 구룡폭포, 옥영폭포, 십이폭포 등과 함께 금강산 4대 폭포 중 하나로 꼽힌다. 세존봉에서 샘솟아 벼랑을 따라 내려 오는 비봉폭포는 수량은 적으나 쏟아지는 모양이 갈래갈래 비단 실로 되어 흘러내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봉황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모습 같기도 하여 비봉폭포라고 한다. 비단필을 펼치듯 하던 폭포줄기가 나중에는 직경 20m, 깊이 5-6m 되는 봉황담으로 쏟아져 떨어 진다. 이 비봉폭포 우에는 높이 20m의 무봉폭포도 있다고 한다.   사진설명(14): 비봉폭포 은사류(銀絲流) 비봉폭포를 지나 좀 올라가면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골짜기의 마주선 두 벼랑사에에 기다란 허궁다리 가 걸려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노라면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춤추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무용교라고 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 오른편 서북쪽 방향으로 좁은 골짜기가 보이는데, 이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마치 가느다란 은실처럼 곱게 흐르는 같다고 하여 은사류라(銀絲流)고 하였다.   은사류에서 더 올라가면 두갈래의 길이 있는데 오른쪽으로는 상8담(上八潭)을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는 구룡폭포로 가는 길이다. 우리팀은 구룡폭포쪽으로 향하였다.  구룡폭포(九龍瀑布)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관폭정(觀瀑亭)이 있는데 구룡폭포를 마주하고 커다란 무대마냥 아츨 하게 높은 벼랑우에 건축되여 있었다. 모든 관광객들이 모두 이 정자에서 폭포를 건너다 본다고 하여 볼관(觀), 폭포 폭(瀑), 정자 정(亭)자를 써서 관폭정이라고 한것 같았다. 사진설명(15): 관폭정(觀瀑亭)   높이 74m, 너비 4m의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조선의 3대폭포로 꼽히 는 금강산 제일의 폭포이다.   폭포벽과 바닥의 못이 하나의 화강암괴로 되어 있으며, 옥녀봉의 아름다운 련봉을 배경으로 화강암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웅장하고 기세가 있다. 폭포 아래에는 거센 물줄기로 패여 자연 형성된 깊이 13m 정도의 구룡연이 있는데 옛날 이 못에서 금강산을 지키던 9마리의 룡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설명(16): 관폭정에서 내리 찍은 구룡폭포   관광객들은 모두 비단처럼 곧게 드리운 구룡폭포를 바라보며 너도나도 정말로 절승경개로구나 하며 서로 구룡폭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여 카메라 샤타를 찰칵찰칵 누른다. 그러다가 어느 연길에서 왔다는 중년패들이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아”하며 노래를 부르자 전체 팀원들은 너도 나도 같이 흥에 겨워 이 무대와 같은 관폭정에서 “금강산골안에는 보물도 많네/ 비로봉밑에서 산삼이 나고/ 옥류동 골안에는 백도라질세/ 아-인민의 금강산/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네”하면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폭포 우에는 바로 올라오면서 갈라진 상팔담(上八潭)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나무군총각과 선녀”의 전설이 바로 이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옛날 금강산 아래에 나무군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살림이 어려워서 날마다 금강산에서 땔감을 해 팔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깊은 산 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사슴 한 마리가 사냥군에게 쫓기어 총각이 있는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었다. 총각은 얼른 사슴을 자신의 나뭇짐 속에 숨겨 주었다. 잠시 후 사냥군이 와서 사슴의 행방을 묻자 다른 방향을 가르쳐 주어 그를 따돌리고 사슴을 살려주었다. 그러자 사슴은 “저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보아하니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신것 같은데, 이 달 보름께 상팔담으로 가보세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한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면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총각과 결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뒤 아이가 셋이 생기기 전에는 절대로 날개옷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나무군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상한 마음에 사슴이 말하던 그날 밤 상팔담으로 가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총각은 얼른 날개옷 하나를 감추고 큰 나무 뒤에 숨어있었고 시간이 흘러 선녀들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한 선녀가 자신의 날개옷을 잃고 우는 것이었다. 총각은 그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아이도 둘이 생기자 나무꾼은 이제는 사실을 말해 주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날개옷을 감춘 것이라는 얘기를 하자 선녀는 날개옷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나무군이 숨겨둔 날개옷을 보여주자 선녀는 날개옷을 입어보는 체하다가 아이들을 양팔에 하나씩 끼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사슴이 아이를 셋 낳기 전까지는 절대로 날개옷을 보여주지 말라고 한 이야기를 잊었던 것이다. 한순간에 안해와 자식을 잃고 넋이 나가 있는 나무군 앞에 어느날 옛날의 그 사슴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자 나무군은 사정 얘기를 하자 사슴은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참 안됐군요.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름달이 비추는 날밤 상팔담으로 가보면 한밤중에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올 것입니다. 날개옷을 잃어버려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제는 하늘에서 직접 선녀들이 내려오지 않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목욕을 합니다. 그 두레박이 내려왔을 때 그곳에 올라앉으십시오. 그러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슴의 말대로 나무군은 그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안해와 아이들을 만나 선녀와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나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해 나무군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금강산에 내려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상팔담 주위에는 화강암의 암추(岩錐)와 계곡이 어우러져 폭포의 절경을 더해주고 있어 금강산의 여러 승경 중에서도 가장 맑고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구룡연 등산로를 보면 관폭정에서 좀더 올라가 서쪽으로 돌아 내려오면 세존봉, 1167봉, 목란담, 합수목, 동석동으로 하여 다시 원 주차장으로 내려올수 있는데 우리의 등산로는 관폭정까지여서 올라오던 길로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우리 팀에는 연변출판사에서 퇴직한 김욱선생님(79세)네 량주가 따님의 배동으로 이번 관광길에 오르셨는데 그도 글을 쓰는 분이라 우리 둘은 그 팀에서도 특별이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관폭정에 오르고 보니 그이가 보이지 않았다. 내려 오면서 보니 그이는 관폭정을 한 200m 사이두고 너무 지쳐 못 올라 오셨던것이다. 금강산에 왔다가 금강산의 제일 폭포를 못 구경하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감스러운 일이였다. 그다음부터 나는 아무리 험한 봉일지라도 꼭 이 선생님을 모시고 기여 오르리라고 마음 먹었다. 후일 계속
141    조선관광(1) 댓글:  조회:9178  추천:0  2013-01-12
조선관광[1] 평양에 도착 주청룡   중국에서 나서 중국에서 자라 수도 북경과 여러 대 도시들을 가보고 중국의 제일 명산 태산에도 가 보았으며 조선족으로서 고국인 한국의 수도 서울, 한국의 최대의 관광명승지 제주도에도 가 보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국인 조선의 수도 평양과 세계적인 명산으로 불리는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여 어느때 꼭 기회를 타서 가 보려고 하였는데 마침 금년 7월부터 연변천우국제려행사에서 전세기편 평양-금강산 관광을 개발하였다. 하여 우리 부부는 관광의 제일 좋은 단풍계절을 택하여 10월 7일 연길공항에서 고려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는 11시에 리륙하였는데 그날 마침 날씨가 좋아 비행기에 않아 조선의 산천들을 다 구경할수 있어 내려다 보니 온통 산으로 되여 있었으며 산마다 경사도가 약한 곳은 개간지로 만든 곳이 많았으며 평안남도에 들어서면서부터 평지로 되여 논과 밭이 보였다. 비행기는 약 한시간 반 날아서 평양시간으로 오후 한시 반에 평양순항공항에 착륙하였는데 입국수속을 다 마치고 공항을 나서니 조선의 관광안내원들이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하였으며 금강산국제려행사의 3대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뻐스에 앉으면서 보니 우리 관광팀은 60명으로 구성되였다. 뻐스는 관광객들을 싣고 평양시내로 들어섰는데 우리 뻐스에는 전체 관광팀을 책임진 남성 지도원과 처녀안내원이 같이 앉았다. 지도원은 조선과 수도 평양의 개황에 대하여 약간 소개를 하였는데 나는 안내원의 소개를 하나도 빼놓을세라 노트를 꺼내여 하나하나 적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면적은 123,138 km²로, 전체 조선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토의 약 80%가 산지라고 하였다. 인구는 약 2,500만 명이라고 한다. 수도 평양의 면적은 약 1,100㎢이며 시내로는 대동강이 흘러 지나는데 강 너비는 400m라고 한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약 325만 명이였으나 2010년 행정 구역 축소에 따라 250만 명 선으로 줄었다고 한다. 순항공항에서 평양시내까지는 16km였으며 약 20분 달려 평양시내에 들어섰다. 뻐스가 시내에 들어서면서 지도원은 주체사상탑, 류경호텔, 개선문, 삼대헌장기념탑, 5.1경기장 등 주요건축물들을 소개하였다. 주체사상탑(主體思想塔) 사진설명(1): 주체사상탑   주체사상탑(主體思想塔)은 평양 시내 대동강기슭에 있는 김일성주석이 창립한 주체사장 을 상징하는 탑으로서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맞추어 1982년  4월 15일에 완공되였다고 한다. 높이는 17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라고 한다. 탑신은 150m 높이로 화강암 으로 만들어졌으며 승강기로 150미터까지 올라갈 수 있고 평양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최상부의 20m 정도에는 홰불 모양의 붉은색 봉화가 있어, 밤에는 빛이 나는 한편 불빛이 흔들거리기 때문에 마치 실제 불길과 비슷하다고 한다. 또 주체사상탑의 정면에는 분수가 있는데, 높이 170미터의 분수를 뿜어 올리고 있다고 하였다. 류경호텔(柳京大厦) 사진설명(2): 류경호텔   류경호텔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봉화거리에 위치하여 있는데 '류경(柳京)'은 '버드나무의 도시'라는 의미로 조선새대에 평양에 바드나무가 많아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평양의 옛이름의 하나이기도 하다. 류경호텔은 삼각 금자탑식의 건축물로서 경사도가 75도이고 높이는 330m이며 105층에 총 부지면적 43만㎡, 총 건축면적은 36만m², 3,000개의 객실 일곱개의 회전식당, 2000석 규모의 대 회의장과 연회장, 프레스센터(新闻中心) 등의 부대시설을 갖춘 수용인원 6,000명 규모의 대형 건축물로 설계되였는데 이미 내부장식까지 다 하였지만 개업은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한다. 3대헌장기념탑(三大憲章紀念塔) 사진설명(3):3대헌장기념탑 3대헌장기념탑의 정식명칭은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祖國統一三大憲章紀念塔)”인데 평양의 관문인 락랑구역 통일거리 입구에 있는 기념탑으로서 평양시와 개성시를 련결하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높이는 30m, 너비는 61.5m인데 너비 61.5m는 6.15 남북 공동선언을 뜻한다. 이 기념탑은 2001년 8월 14일 준공되였다. 여기서 말하는 조국통일3대헌장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1980년 10월 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결의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1993년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채택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말한다. 조각상은 한복(조선옷)을 입은 남(대한민국)과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명의 녀성이 조선반도 지도가 그려진 구를 마주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기념탑은 60kg이 넘는 화강암 2,560개를 붙여 제작되였다고 한다.   릉라도 5월1일 경기장(綾羅島 5月1日競技場) 사진설명(4): 릉라도 5.1 경기장   릉라도 5월1일 경기장(綾羅島 5月1日競技場)은 대동강 가운데 섬인 릉라도에 있는 경기장으로 1989년 8월에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해 1989년 5월 1일 완공되였다. 5.1 경기장이라는 이름은 준공식이 5월 1일 국제로동절에 진행된 점을 감안한데서 비롯되였다고 한다. 이 경기장의 지붕은 16개의 화판을 방불케 하며 경기장 면적이 2만5,000 m², 잔디면적이 8,300 m², 총 건축면적은 20만 7,000 m²로서 15만명의 관중을 용납할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목적 경기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80개의 출구가 있어 15만명이 15분이면 전부 나올수 있다고 한다. 체육장은 8층으로 되여 있으며 1,300여개의 칸이 있는데 체육훈련실, 수영장, 초음파욕실, 증기욕실, 휴식실, 체육과학연구실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뻐스를 타고 평양시내 가로 찌르면서 차창밖으로 평양시내를 내다보면서 말타고 꽃구경식으로 스쳐지나갔다. 조선관광(2) 금강산으로 가다   뻐스는 평양시내를 벗어나서 3대헌장 기념타을 지나 강원도 소재지 원산으로 향하였는데 리정표를 보니 원산200km라고 씌여 있었다. 뻐스가 원산길에 들어자 지도원은 우리 함께 노래 부르며 즐겁게 보내자고 하였는데 모두 만장일치로 박수를 쳤다. 그런데 오락장소라면 뒤구석부터 찾는 내가 지도원의 해설을 빠짐없이 필기를 하다니 지도원에게 주목되여 나를 보니 어쩌면 자기가 대학을 다닐 때의 선생님의 모습과 비슷하다며 나부터 부를것을 제의 하였다. 그러자 나를 아는 분이 나를 선생님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두 나부터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박수를 치는것이였다. 내가 못하겠다고 하자니 처음부터 정서를 흐리우는것 같아서 못하는 노래지만 “동포여러분 형제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 얼싸안고 좋아 웃음이요 절싸 안고 좋아 눈물 일세”이렇게 부르자 지도원이 중국동포들을 끌어 않고 춤까지 추었다. 그러자 모두 같은 동포의 심정으로 너도 나도 다 같이 부르다니 결국은 합창으로 되였다. 이렇게 시작되여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하여 뻐스안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번씩은 다 불렀다. 이때 나는 뻐스안의 간단한 오락판을 통하여 우리 중국동포들은 조선, 한국을 다 다니면서 서로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는데 조선반도의 분단으로 하여 조선과 한국은 서로 리산가족을 이루고 있는 그 안타까운 심정, 언제 전체 반도가 통일되여 자유로이 래왕하면서 서로 끌어안고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무거워 났다. 달리는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밭은 얼마 보이지 않고 대부분 산들이였으며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다. 뻐스는 장장 네시간 달려 조선의 항구도시이며 강원도 소개지인 원산에 도착하였는데 오후 7시가 되였다. 우리는 원산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그리 풍성사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돼지고개 볶음 물고기튀김 김치 등 여러가지 반찬들이 올라 입맛에 당기였다. 저녁 8시에 다시 뻐스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뻐스는 동해안을 따라 달렸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져 바깥경치를 구경할 수는 없었다. 원산과 금강산의 거리는 100km였는데 두시간 달려 외금강호텔에 도착하니 저녁 10시가 되였다. 외금강호텔은 지하 1층, 지상 12층으로 1984년도에 "김정숙휴양소"로 이름지어 조선의 공무원들이 연수원으로 사용하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후 2006년에 내부시설을 개조하면서 "외금강호텔"로 이름지어 지금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는데 시설이 매우좋았다. 사진설명(6):외금강호텔 (후일계속)
140    《중국산은 가짜 》라는 인식 고쳐야 댓글:  조회:13897  추천:20  2012-12-14
[칼럼] 《중국산은 가짜 》라는 인식 고쳐야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릴신문 ] 발표시간: [ 2012-12-14 14:56:35 ] 클릭: [ ]   주청룡 《길림신문》에서 발표한《[특별기획] 한국속의 중국, 그 불편한 진실》을 읽으면서 《길림신문》특별취재팀에 감사를 드리고싶은 마음이 든다. 아마 중한관계를 론한 글가운데서 제일 통쾌한 글이라고 보아진다. 필자는 이 글에 대하여 아주 동감을 느끼면서 이 글은 아주 실질적으로 현실을 반영한 글이라고 생각되면서 나도 한마디 나의 견해를 말해보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필자도 한국에 가서 몇년 체류하고있는기간에 한국시장을 많이 돌아보았는데 확실히 중국상품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있었다. 경제 법칙으로 보면 소비자들의 수요에 따라 시장을 개발하기 마련이다. 수요량이 없는 물건을 가득 들여올 장사군은 없을것이다. 한국시장에 중국산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것은 한국사회에서 그만큼 중국산품에 대한 수요량이 많고 중국산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산을 가득 들여놓고 중국산을 저질 혹은 가짜라고 비하하는것이다. 취재팀은 십여년간 장춘에서 음식업을 해온 한국인 김모(67세)는 《중국산 품질이 못하다구요? 그건 무역업자들 탓입니다. 한국산보다 좋은 물건도 얼마든지 있지만 무역업자가 더 많은 리익을 위하여 싸구려제품을 들여간것에 불과합니다. 한두가지를 보고서 중국산 전체를 평가하는것은 잘못입니다 . 다만 같은 제품이래도 한국제품보다 저렴할뿐입니다. 그 리유는 생산원가의 차이때문이죠》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대련에서 한국수출식품가공업을 하고 있는 량씨(47세)는 《한마디로 중국에 좋은 농산물이 얼마든지 있지만 1급은 일본상인들이 가져가고 2급과 3급을 한국상인들이 가져간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사실 한국에서도 서민층의 생활은 그리 부유하지 못하다. 무역상들이 한국서민층의 소비수준에 맞게 수입해 들여간것이기에 한국의 시장에 들어간 산품은 대부분이 원가가 낮은 저급산품이다. 질 좋고 갑이 비싼 중국산품을 한국에 들여가면 저소득층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바쁠것이다. 또 값싼 중국산이라고 하여 다 저질인것이 아니다. 주요하게는 중국에서 인건비가 싸고 재료비가 싸기때문에 산품의 질이 좋아도 한국의 산품에 비해 싸다고 본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산을 신토불이라고 하면서 선호하는것은 마땅하지만 중국산을 대량으로 수입해 들이면서 《중국산=싸구려=저질》이라고 비하하는것은 마땅치 못하다 만약 중국산품이 한국의 시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소비자들의 수요량을 만족시킬수 있겠는가? 물론 중국산 식품가운데 멜라민 함량이 표준을 초과한 식품은 당연히 가짜식품이다. 이는 불법분자들이 자기들의 리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가짜식품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중국산 전체를 대체하면 안된다. 그리고 한국시장에 중국의 갑진 량질 산품들도 류통되고있다. 그런데 일부 장사군들은 이런 중국산을 한국산으로 둔갑시켜 팔고있다. 필자는 시장을 돌다가 한 고객이 《국산이요, 국산이요.》하는 장사군의 웨침소리를 들으면서《중국산을 놓고 국산이라고 한다》라고 비꼬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그것의 사실여부는 확인할수 없었지만 그전에도 어떤 장사군들은 중국산을 한국산으로 둔갑하여 판다는 말을 많이 들은적이 있다. 특별취재팀은 현재 중한 통관시스템에서 세계적 선진수준의 검사검역시설과 엄격한 질 검사로 한국에 수입되는 중국산 농수산물의 질과 안전성이 뚜렷이 높아가고있다고 하면서 한국 농수산식품류통공사 품질안전 T/F팀 김문규팀장은 《통관시스템도 엄격하게 되여 있어 가짜라거나 저질제품들이 들어올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또 국제입찰과 공증을 거쳐 들여오기때문에 품질과 안전성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놓고 볼 때 확률적으로 중국식품은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장사군들은 또 자기의 산품을 더 팔기 위해 중국산을 비하하여 저질 혹은 가짜라고 떠들고있는데 여기까지는 리해를 할수 있겠지만 제일 유감스러운것은 한국의 보도매체에서도 이런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거기에 부채질하면서 《중국산=싸구려=저질》이란식으로 편파보도를 하고있기에 중국산은 저질의 대명사로 되고있으며 이로 인하여 한국 사람들의 인식에는 《한국산=량질》, 《중국산=저질》로 각인되여있다. 이런 보도는 사실 중국산식품에 침을 뱉아놓고 자국사람들더러 먹으라는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저소득층에서 중국산식품을 먹고있는데 이런 보도를 듣는 서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필자는 한국에 있으면서 이런 보도를 듣거나 볼 때에는 중국공민으로서, 또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라는 감정에서, 한국의 저소득층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매우 가슴 무거웠다. 중국사람들의 《반한》감정이 생기게 되는 원인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는 말과 같이 서로 신뢰하고 서로 합작을 잘 한다면 량국의 리익에도 유리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더 안정적인 보장을 줄수 있으며 《반한》감정, 《반중》감정도 서로 해소될수 있다고 본다. 취재팀은 한국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기획조정과 이병권 수의사무관은 《나는 중국산을 아주 잘 먹고있다》며 《나와 같은 공무원들은 실질을 알기때문에 언론에서 나쁘다고 보도해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중한수교후 지금 중국은 한국의 제1위 교역대상국으로, 한국은 중국의 제3위의 교역대상국으로 되여 있으며 한국의 서민층의 수요로 대량의 중국산품이 한국시장에 들어가는 실정에서 한국매체에서는 이것을 비하하기보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부채질을 하지 않는것이 량국의 리익에도 유리하고 서민층들의 마음을 더 안정시킬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다.
139    우리 민족 전통의례를 품위있게 댓글:  조회:16278  추천:6  2012-12-13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9)   우리 민족 전통의례를 품위있게 청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 민족의 전통의례를 품위있게.”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금 사회생활수준이 제고됨에 따라 결혼식, 환갑연, 돌잔치 등 례식이 그전의 초라한 살림집에서 진행되던데로부터 황홀한 례식장에서 진행되고있습니다. 황홀한 례식장에서 진행하는것만큼 사회자도 따라서 그만큼 높은 차원으로 진행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례식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얼마전에 저는 동사자의 회갑잔치에 참석하였는데 사회자가 와락와락 나그네 말죽먹이듯 대충 해치우고 례식장을 떠나는 바람에 주인측은 물론 모든 하객들의 불만을 자아냈습니다. 동사자의 말에 의하면 례식장을 찾으려고 여러곳을 돌아 다녔지만 명절대목이라 례식장이 모두 예약되여 있었습니다. 어쩌다 환갑날인10월 2일에 예약이 없는 례식장을 찾았는데 그나마 사회자와 가수, 악사를 모두 자기들이 지정한다는것이였습다. 알아본데 의하면 명성이 없는 사회자들은 례식장 경영자에게 수수료를 주고 보스는 또 수수료를 주는 사회자만이 추천하는 희극까지 논다고 합니다. 사실 그 집안에는 단위에서 각종 행사에 사회를 맡아 하던 사람이 있어 그 집 회갑잔치도 그가 맡아 하기로 하였고 또 전국성적인 노래콩쿠르에서 대상, 금상을 받은적이 있는 가수도 있었지만 그 례식장을 쓰기위해 례식 장의 보스가 추천한 사회자와 가수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예약한 날이 오래되니 혹시나 날짜를 잊지 않나 하여 회갑날 이틀을 앞두고 사회자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책임지고 간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런데 회갑날, 예약된 시간이 썩 오래된 후에야 사회자가 왔으며 예약은 박모모와 하였는데 박모모는 다른 몇집의 사회를 맡고 이때까지 사회를 맡아 보았다는 말을 들어 못본 김모모가 나타나서 이집의 사회를 맡아 한다는것이였습니다. 사회를 시작하여서부터 매우 서투른 인상을 주었는데 그나마 절하는 순서를 주인측의 의사 에 따라 하는것이 아니라 친자식, 친척, 사돈, 친우, 제자 이렇게 다섯번에 나누어 절하는 순서로 끝내려 하며 빨리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단독 명목으로 절을 하려던 사람들이 막 나서서 따로 절을 하려고 하니 그럼 집체행사가 끝난 다음 개별적으로 하라며 례식도 끝을 맺지 않고 부랴부랴 돈을 챙겨넣고 례식장을 떠나는것이였습니다. 아마 또 다른 사회를 맡은것 같았습니다. 너무나도 한심한 일이였습니다. 례식장은 동사자에 대한 축수의 희열로부터 삽시에 사회자에 대한 분개로 번지여졌습니다. 례식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 집안에서 원래 사회를 맡으려던 사람이 나서서 새로운 분위기로 사회를 마지막까지 원만하게 진행하여 나갔습니다. 제가 오늘뿐만 아니라 이미전에도 이런 엉터리없는 례식사회를 여러 번 보아왔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서 례식사회자들에 대한 불만을 많이 들어왔는지라 례식사회자로서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례식문화를 계승하고 발양할수 있겠는가를 알아보려고 우리 민족의 전통례절문화의 전승인이인 연변민족전통례절문화원의 홍미숙원장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홍미숙원장은 지금 많은 례식사회자들은 자신의 자질을 높이고 조선족의 전통례식문화에 따라 사회를 진행하기에 힘을 쓰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례하면 혼례식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혼례의 절차로 전안례 [奠雁禮](전통혼례에서 신랑이 혼례청에 입장하여 기럭아비로부터 기러기를 받아 작은 상우에 놓고 부채로 세번 밀고 기러기를 신부어머니에게 드린다.), 교배례 [交拜禮](전통 혼례식에서, 초례상(醮禮床) 앞에서 신랑과 신부가 절을 주고받는 절차.), 합근례 [合巹禮](전통 혼례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두쪽으로 된 조롱박에 술을 따라서 주고받는것으로 교배(交拜) 후에 행한다.) 순서로 진행하는가 하면 축하마당에서는 조선민요, 퉁소연주, 장고춤, 신랑신부를 복판에 넣고 강강수월래처럼 원을 그리며 추는 원무는 우리 민족의 전통례절문화, 례식문화가 다분히 표현되여 하객들의 마음을 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홍미숙원장은 또 일부 사회자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례식에 대하여 장악한 지식이 부족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례식으로 이끌어 가지 못하는데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하였습니다.  지금 일부 사회자들은 사회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여 그저 웃기려는데서 저속적인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지구촌이 도래되면서 섭외혼인도 있고 외국에서 친척들이 와서 결혼, 환갑잔치에 참석하고 있는데 이렇게 저속적인 말로 사회를 한다면 우리 조선족의 이미지에 손상을 준다고 봅니다. 그런데다가 하루에 여러 집의 사회를 맡아 보다니 첫집의 사회는 10시전부터 하다니 대부분의 하객(贺客)들이 도착 하였을 때에는 이미 례식이 끝난 때여서 희사를 축하하려 갔다는것이 례식을 보지도 못하고 음식만 먹고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마지막집은 하객들이 다 모인 다음에도 사회자를 기다리는것이 두시간 넘어 오후 잔치를 보게되여 주인측과 하객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부 사회자들은 전혀 되지도 않을 승낙을 하면서 청탁이 들어오는대로 다 맡아놓으니 돈은 돈대로 챙겨넣어도 행사 뒤끝은 서운하기만 합니다. 례식이 어떻게 되든 그들의 머리속에는 돈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회자들이 자책감이 없는지? 한번 검토하여 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조선족전통례식에서 전통혼례, 환갑연, 회혼례 등은 이미 국가급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습니다. 때문에 이 세가지가 법적보호를 받는것만큼 우리는 이것을 전승하고 보호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례식사회자라면 반드시 우리 민족의 전통 례절, 례식문화를 익숙히 장악하고 례식에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가 다분히 표현되도록 하여야 하며 사회자의 자질을 높여 언어표현에서도 저속적인 말들을 엄금하고 례식을 정중하게 이끌어 가야한다고 봅니다. 그러자면 앞으로 례식사회자들에 대한 배양훈련을 거쳐 자격증제도를 실시하여 문화시장관리부문의 감독도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가져보게 됩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11월 19일
138    집안 고구려유적지를 찾아서 댓글:  조회:7779  추천:0  2012-12-07
집안 고구려유적지를 찾아서 주청룡   지난 8월 20일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에서 집안 고구려유적지 탐방을 조직하였다. 나도 이 탐방팀의 일원으로 함께 가게 되였는데 탐방팀은 회장 김현순, 부회장 권중철, 비서장 황희숙, 사학자 허성운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으로 구성되였는데 이러고 보니 우스개말로는 4명의 군관에 한명의 졸병으로 조직된 셈이였다. 8월 20일 오전 9시 반에 뻐스가 연길에서 떠나 안도, 돈화, 정우, 백산, 통화를 지나 장장 10시간을 달려 저녁 7시 반에야 집안에 도착하였다. 뻐스에서 내려 숙소를 찾느라고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하여 승리로를 거닐고 있노라니 조양거리와 교차되는 지점에 커다란 돌에다“高句麗遺址公園”라고 새긴 글씨가 눈에 띄였다. 이것을 보는 순간 이곳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고 온 고구려수도의 옛터이였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하지만 이미 밤이 되였는데다 장장 10시간 뻐스를 탄 피로로 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먼저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부터 하여야 하였기에 고구려유적지 공원 구경은 이튿날로 하기로 하였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본지 사람들에서 알아본데 의하면 개방한 고구려 유적지로는 국내성, 환도산성. 호태왕비, 태왕릉, 장군총, 우산귀족묘지(五盔坟이라고 한다.) 등 곳이며 국내성터는 이 성 안에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시민들의 레저활동을 할수 있는 공원으로 되여 있어 원래의 면모는 찾아볼수 없지만 회손된 일부 성벽은 볼수 있다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9인승 소형뻐스를 세를 내여 고구려유적지를 탐방하였다. 국내성   사진설명(1): 고구려(국내성)유적지공원   국내성은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건립한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서 기원3년에 고구려의 제 2대 국왕 유리왕(琉璃王)이 수도를 료녕성 卒本川(오늘의 료녕성 환인현)의 흘승골성(紇升骨城)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국내성(지금의 집안시)로 이사해 와서 기원 427년에 고구려 제20대왕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에 옮길 때까지 장장 425년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였다 국내성은 압록강과 통구하가 합류하는 통구분지의 서부일대로 북쪽(1km)에 우산(禹山), 동쪽(6km)에 용산(龍山), 그리고 통구하를 건너 서쪽(1,5km)에 칠성산(七星山)에 있어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천연 요새이다. 오늘날 국내성내의 고구려 건축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사라져 버렸고.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시민들의 레저활동을 할수 있는 공원으로 되여 있기에 고구려 시대의 성안 시설물 포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성안의 서북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주추돌과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나온것으로 보아 당시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말하여 주고 현존의 많이 회손된 성벽들의 흔적을 보아 국내성의 대략적인 규모를 추측할수 있다. 국내성은 방형이지만 각 변의 길이는 서로 다르다고 한다. 1980년에 조사, 측정된데 의하면 국내성은 동벽이 555m, 서벽이 665m, 남벽은 750m, 북벽은 715m로서 총 길이가 2,685m인 방형으로 된 성이다. 원래는 성벽의 높이가 5 ~ 6m, 밑부분의 너비가 10m, 성안벽 높이가 3~5m이다. 성문은 총 6개였는데 동쪽은 집문문(輯文門), 서쪽은 안무문(安武門), 남쪽은 금강문(襟江門)이였다고 한다. 국내성은 우로부터 가로로 선을 그어 성의 내부를 3구역으로 구분하였으며 궁전지역은 방어를 위하여 궁성의 제일 안쪽, 북벽에 붙여 지었고 한다. 위급한 경우에는 우산으로 올라가거나 환도 산성으로 쉽게 대피할수 있게 한것이다. 그 다음에는 공공건물과 관청구역이 있고, 마지막 남벽에 가까운 곳에는 일반인들의 거주지역과 시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국내성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이 일정하지 않으나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서벽의 남쪽 부분은 높이가 3∼4m가 되고 북벽은 2m정도이나 서쪽으로 갈수록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사진설명(2): 국내성 성벽   국내성은 2001년 6월 25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국내성은 지금은 공원으로 되여 나무숲이 우거지고 각종 화초들이 어여쁨을 자랑하고 각종 운동기재들과 문화오락시설들이 있어 시민들의 레저활동공간으로 되고 있어 옛날의 그 모습을 회손된 성벽외에는 찾아 볼수는 없지만 국내성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옛날에는 나라지간의 싸움이 많았으므로 도읍을 앉힐 때에 담벽을 튼튼히 높이 쌓는것으로서 적의 침입을 방지하였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사진설명(3): 고구려유적지 공원    환도산성 사진설명(4): 환도산성 문물보호비   환도산성은 국내성 북쪽 2.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서로 보완(相輔相成) 할수 있도록 건축한것이며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환두산성은 전시 때 사용하는 산성이라고 한다. 위치와 지형으로 보아 환도산성은 방위성(防衛城)으로서 가장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천험의 요새로 되였다. 동서북 3면의 성벽은 평면으로 보면 둥근 릉선 우에 쌓았는데 성밖은 깎아 내린듯한 절벽이고 성안은 비교적 넓은 경사지로 되여있다. 남쪽은 통구하(通溝河)가 흐르고 지세가 비교적 낮지만 밖에서 성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는 산성이다. 환도산성은 국내성과 압록강까지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동태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공격로는 남문 한 곳 이다. 성벽들은 대부분 무너져 내려 않았지만 동쪽, 북쪽서단, 서쪽 북단이 비교적 보존이 잘 되여 검푸른 이끼가 화강암들 틈새에 끼여 있는 5~6m 높이의 성벽을 볼수있다. 성의 규모는 동벽이 1,716m, 서벽이 2,440m, 남벽이 1,786m, 북벽이 1,009m로서 총길이가 6,951m에 달한다. 성문은 모두 5 개인데 동과 북에 각각 2개씩, 정문 겸 남문은 1개 그리고 서벽에는 워낙 지세가 험해서인지 문이 없었다고 한다. 성안에는 샘물이 두곳이 있는데 한곳은 서북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동쪽 산기슭에 있는데 다 통구하로 흘러 들어간다. 성안에는 건축터 3개, 저수지 1개(저수지는 전망대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약간한 흔적으로 보인다.)가 있는데 3개의 건축터 가운데 하나는 동쪽 산기슭에 있는 궁전터(남북이 92m, 동서가 62m 인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이고, 하나는 점장대 [(点将台)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城), 보(堡), 둔(屯), 수(戍)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 터이며, 하나는 전망대(瞭望台)이다. 전망대는 남문 안의 200m되는 곳에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12m이고 정단부분(顶部)는 매변의 길이가 약 6m되는 평대(平台)로 되여있었다. 사진설명(5): 환도산성 전망대   전망대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집안시(국내성)와 앞록강이 다 내려다 보이였는데 당시에는 적정을 아주 똑똑히 관찰할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성안에 고분(古墳)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37기(基) 만이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산성아래 골짜기와 산기슭에는 수많은 돌로 쌓은 고분들이 군데군데 많이 있었다. 사진설명(6): 산성아래 고분군(古墳群)   1982년 2월 23일에 환도산성을 전국 중점보호단위로 비준하였다. 우리는 환도산성을 돌아보면서 정말로 삼면이 깍아지르듯한 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은 통구하가 있어 정말로 군사상에서 천연요새로 되며 평시에는 국내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위급한 시기에는 이 산성에 올라 와서 적들과 싸웠구나 하는 생을 갖게 되였으며 옛 무덤들을 돌아보면서 옛날 귀족들은 죽은 다음의 무덤에 대하여 아주 중히 여겼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그리고 그때의 궁전은 다 허물어지고 지금은 밭으로 변하였지만 점장대, 전망대 같은것들은 기본상 완연한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우산귀족묘지 사진설명(7): 5회분 5호묘 문물보호비   우산귀족묘지(禹山貴族墓地)는 집안역(集安站) 북측에 다섯 개의 높고 큰 봉토석실묘가 동서로 배열되여 있다. 본지 사람들은 큰 봉토분 다섯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 (예전에, 군인이 전쟁 때 갑옷과 함께 갖추어 쓰던, 쇠로 만든 모자.)같다 하여 '투구 회'자를 붙여 5회분(五盔墳)이라고 한다. 그 중 다섯번째 묘가 바로 5호묘(五號墓)이다. 5호묘는 이 일대의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다섯 무덤중의 하나이며, 5회분 가운데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5호묘는 4호묘와 정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일명 '쌍둥이묘'라고도 한다. 5호묘는 1945년 이전 일본인 학자에 의한 1차 조사와 1962년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에 의한 전면 발굴 및 조사가 있었는데 집안의 20여 기의 고분 벽화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개방 되였다. 무덤은 널길[(羨道) 고분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과 묘실[(墓室) 옛 무덤 속에 관이 들어 있는 네모형의 방. 유해(遺骸)와 함께 부장품도 들어 있으며 무덤 안에 길을 내어 밖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으로 묘실의 방향은 동남향이다. 널길은 남북길이 3.56m, 동서너비 4.37m의 장방향이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94m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은 잘 다듬은 화강암제 판석으로 쌓았다. 널방 천장구조는 크기가 다른 삼각석을 겹으로 쌓아 올린 2단의 삼각굄 구조이다. 묘실에 들어서 계단을 세 걸음만 내려가면 시원함이 느껴지고, 벽, 천장이 모두 습기 때문에 물이 배어 있었으며 벽화에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부에는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피장자(被葬者)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첩의 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묘실에 들어서자 관광안내원이 손전지를 비추어 가면서 벽화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나는 극소형의 유대용 록음기를 틑어놓고 안내원의 해설을 전부 록음하였다. 벽화는 석면에 직접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널길의 좌우벽에는 묘실을 지키는 문지기 힘장수를 그렸다. 묘실 네 벽의 사신은 모두 오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였다. 동쪽 벽의 청룡[(靑龍) 四 神 의 하나로 동쪽 방위를 맡은 태세신(太歲神)을 상징하는 짐승. 룡 모양으로 무덤속과 관의 왼쪽에 그렸다.]과 서쪽 벽의 백호[(白虎) 서쪽 방위의 金 기운을 맡은 太白神을 상징하는 짐승]는 널방 입구를 향하여 덮쳐내리며 포효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였고 남쪽 벽의 한쌍의 주작[(朱雀) 남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으로 여겨진 짐승. 붉은 봉황으로 형상화하였다.]은 커다란 련화좌(련꽃 모양으로 만든 불상의 자리) 우에서 막 날아오르려는 자세로 묘사되었다. 북쪽 벽의 현무[(玄武) 북쪽 방위의 물 기운을 맡은 태음신을 상징하는 상상의 짐승.]는 서편을 향하여 우뚝 서 있으며 몸이 얽힌 상태에서 머리를 틀어 서로 마주보는 거북과 뱀의 입에서는 불꽃이 뿜어나오고 있다. 사신이 표현된 공간배경은 인동무늬, 불꽃무늬, 연꽃무늬가 들어 있는 사방연속무늬로 장식되였다. 묘실 네벽 모서리는 우로 치솟는 자세의 룡면인신(龍面人身)과 괴수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우로 젖힌 룡이 만나면서 이루는 기둥형태의 그림으로 장식되였다. 묘실 천장부는 주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신앙과 관계된 표현들로 채워졌다. 굄받침에는 교룡무늬(交龍紋)와 릉형(菱形)무늬가 이어지고 있다. 3각굄 제1단의 각 삼각석 밑면에는 활짝 핀 련꽃무늬를, 옆면에는 각기 해와 달을 받쳐들고 있는 복희녀와형 일월신(伏羲女媧形日月神), 하늘세계의 신선들, 상서로운 동물 등을 묘사했다. 굄석 동북면에는 일월신을, 서북면에는 면류관을 쓴 채 룡을 타고 하늘을 나는 천인(天人)과 깃발이 달린 창을 든 채 기린(麒麟)을 타고 그뒤를 따르는 천인을, 서남면에는 수레바퀴를 다루는 제륜신(製輪神)과 절구질을 하는 천인(賤人), 씨뿌리는 천인(賤人)을 묘사했으며 동남면에는 신농(神農)으로 여겨지는 소머리에 사람몸을 한 천인(賤人)과 춤을 추는 천인(賤人)을 표현했다. 3각굄 제2단 각 삼각석 밑면에는 힘있게 꿈틀거리는 룡을 그렸고, 옆면에는 룡을 탄 채 비파, 거문고, 피리, 장고 등의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기악천(伎樂天)과 해·달·별자리들을 표현했다. 천장석에는 청룡과 백호가 서로 감기고 얽힌 채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그렸다. 벽화 중의 상서동물과 일부 짐승머리 천인의 눈은 본래 청옥(靑玉)과 같은 푸른 보석류로 상감하고 벽과 천장굄부 곳곳에 금빛 꽃장식을 했으나 현재는 소머리 천인의 오른쪽 눈에 상감된 록송석(綠松石)과 금빛 꽃장식의 흔적만 남아 있다. 5회분 5호묘는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사진설명(8): 5호묘실의 벽화 (복희녀와)   우리는 이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풍부한 문화와 생활을 상상할 수 있었으며 묘실안이 그렇게도 습하여 천정과 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있었지만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그림들이 선명하게 나나타나는 것은 그때의 벽화기술이 얼마나 높았게는가하는 것을 알수 있었다. 호태왕비(好太王碑) 호태왕비는 집안시구역에서 동북쪽 4km지점 우산(禹山)기슭 통구(通沟)평원에 자리 잡고있는데 4면이 유리벽으로 된 사각형 기와집안에 장중히 세워 있었다. 비는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여 있으며 비의 모양은 불규칙한 장방형 기둥 모양으로 되어 있고 높이는 6.39m, 면의 너비는 1.34 ~ 2.00m이고, 측면은 1.35m~1.46m 이며 무게는 약 37톤이나 된다고 한다. 이 비는 고구려 제 19대 왕 광개토왕이 사후 2년 뒤에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비로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하였는데 광개토왕비라고도 하며 “동방제1 비(东方第一碑)로 불리운다. 사진설명(9): 호태왕비   비의 4면에는 예서체(隶书体)로 된 44행 1775자에 달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여 있는데 서두에는 서문격인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건국설화,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 대왕까지의 세계(世系)와 략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고, 그 다음은 신라 내물왕을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등 대왕의 령토 확장에 관한 주요 내용이 년도별로 새겨져 있으며, 국경 지대의 통치권 확인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끝으로 대왕의 릉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비는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우리는 이 비를 보면서 당시의 그 생산력수준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37t이나 되는 돌을 운반하여 오고 세웠는가 하는것은 수수께기로 남아 있었다. 태왕릉(太王陵) 호태왕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는데 고구려 제 19대왕 호태왕의 릉묘이다. 호태왕은 기원391년,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사망하였으며 즉위 22년동안 고구려력사에서 전례없던 발전을 가져왔으며 강대한 경제와 군사실력으로 동정서벌하면서 고구려의 령토를 확장하였다. 릉묘는 기원 391년에 건축되였으며 현존하고 있는 고구려왕릉가운데서 유일하게 건축년대가 똑똑히 알려져 있는 왕릉이다. 1984년 집안시 박물관에서 왕릉의 환경을 청리 할 때에 출토된 벽돌과 기와에 새겨진 문자로부터 호태왕의 릉묘라는 것을 단정하였다고 한다. 왕릉은 고구려의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서 방형(方形)계단식 석실묘(石室墓 돌로 널방을 만들고, 널길을 갖춘 고대의 무덤)로 되여 있으며 묘실 제 8급 계단에는 묘실치옥형 석곽 (墓室置屋形石椁)이 있으며 안에는 두구의 석관상(石棺床)이 있고 묘성(墓城)에는 조약돌이 넓게 깔려 있으며 동쪽에는 대형의 제단이 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6m이며, 높이 약 14.8m이며 태왕릉이라는 명칭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벽돌에 새겨진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에서 따 온것이라고 한다. 사진설명(10): 태왕릉   장군총(將軍塚) 사진설명(11): 장군총 문물보호비   장수왕릉은 호태왕비에서 동북쪽으로 약 2km 가량 떨어져있는 룡산(龙山)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안에는 고구려 제 20대왕 장수왕의 돌로 쌓은 무덤이 있는데 장군분(將軍坟)혹은 장군총(將軍塚)이라고도 하며 이집트의 금자탑과 비슷하다고 하여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리우고 있다. 무덤은 22 층의 화강암 장대석(長臺石 계단의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이는 네모지고 긴 돌. )으로 일곱계단의 금자탑모양으로 방형석실묘(方形石室墓)를 쌓았다. 제4계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돌방[石室]을 설치했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3.1m, 밑변 한 변의 길이는 31.58m, 밑면적 997㎡. 묘꼭대기의 면적은 27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고 한다. 무덤축조에 쓰인 석재의 부피는 총 6,000㎥에 이며 무덤의 기초부는 지면을 깊이 5m가량 파내고 자연석을 다져넣은 후, 그 우에 큰돌을 깔았는데 제1층 기단부의 바깥으로 4m가량 나오게 하여 무덤돌이 내리누르는 힘에 견딜 수 있게 했다. 무덤의 제1층은 4단으로, 2~7층은 모두 3단으로 장대석을 쌓았다. 이중 제1단에 쓰인 장대석 중 큰것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0m 무게는 32톤 좌우라고 한다. 천장돌의 넓이는 약 60㎡, 무게는 50t가량이다. 묘실은 다섯번째 계단의 중간에 있으며 안에는 두구의 석관상(石棺床)이 있으며 제1층의 각면에는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5m가량의 대형 석재로 세개씩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지탱하게 했는데,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사진설명(12): 장군총 앞에서의 탐방팀원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묘실 내의 귀중한 문물들이 잃어졌다고 한다. 무덤둘레에는 잔자갈을 깔고 그 바깥에 돌담을 둘러 묘역을 구분했다. 돌담은 모두 무너져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묘역의 북편 50m 지점에는 동서로 나란히 5기의 배총(陪塚. 한 무덤 옆에 딸려 있는 조그마한 무덤)이 마련되였으나 현재는 1개의 후궁묘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장군총은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다. 우리는 장군총을 돌아보면서 그 건축구조가 이집트의 금자탑과 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정말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리우기에 손생이 없구나하는 생각과 당시의 생산력수준으로 어떻게 이런 구조를 설계하고 그 많은 커다란 돌들을 특히는 50톤이나 되는 천장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운반하여 쌓았는가하는 것은 호태왕비와 함께 수수께기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상 고구려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를 더욱 깊이 료해를 하였으며 또 지금 풀수 없는 적지 않은 수수께기를 남긴채 고구려유적지 력사탐방을 마치고 시내로 내려와서 압록강반에서 조선 만포시를 바라보면서 고구려유적지에 대한 탐방소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차로 귀로에 올랐다. 사진설명(13): 앞록강변에서 2012년 8월 30일  
137    시신기증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댓글:  조회:9193  추천:26  2012-11-30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7) 청해   시신기증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시신기증은 영광스러운 일이다.”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의학과 의료사업에 대량의 시신이 수요된다고 하는데 연변대학 의학원에서만 하여도 매년 많은 시신이 수요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신기증수량이 얼마 되지 않아 학생들의 해부실험 요구에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시신기증이란 본인의 유언이나 유가족의 뜻에 따라 아무런 조건과 어떤 보상도 없이 의학과학사업을 위하여 사망 후 시신을 내놓는 행위를 말합니다. 전통적 관념으로 하면 시신을 학생들의 해부실험에 내 놓는다거나 장기를 내 놓는다것은 접수할수 없는 일이지만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 사망 후에도 자신의 시신을 조국의 의학사업에 바치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박철원 선생이 연변조선족자치주당사연구실에서 리직한 한무길(79세)로인과 연변종양병원에서 퇴직한 안해 김희숙(75세)로인이 사망후 연변대학 의학원에 시신을 기증하기로 하였다는 기사를 언론에 공개한 후 지금 박철원선생한데 시신기증수속을 하겠다는 전화가 적지 않게 걸려오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5월 5일 박철원 선생의 안내하에 연변대학 의학원 김범학 박사, 그리고 맹인 김봉숙 할머니와 함께 유체기증수속을 하려는 원 룡정시 태양향 문화소 소장 서광억선생의 집으로 갔습니다. 서광억선생은 다년간 향문화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전향의 문화보급사업에 힘을 이바지 한 분인데 사상이 매우 해방된 분이라“죽은 다음 직접 불에 태우기보다 조국의 의학사업을 위하여 시신을 기부하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면서 안해 리옥금과 함께 웃으면서 시신기증수속을 하였습니다.   유체기증수속을 마친 사람들   그날 시신기증수속을 서광억선생 부부외에도 연길시 건공가두의 유부자녀사와 연길시 장수양로원의 네분의 로인들을 하였는데 장수양로원으로 갈때에는 두분이 예약이 들어와서 두분의 수속을 하려고 갔었는데 옆에서 수속을 하는것을 보던 올해 91세의 김보옥 할머니는 죽은 다음 의학원에 해부실험용으로 유체기부를 하는 일도 있는가? 자기는 이런 것을 몰랐는데 이런 좋은 일을 왜 안하겠는가하며 자기의것도 수속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곁에 있던 할머니도 따라서 자기의 것도 수속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생각밖으로 두분을 더 수속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지금의 로인들이 사상이 많이 해방되였고 각오가 높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의학부문에서의 인체해부, 의료부문에서 인체기관이식은 대량적으로 시신래원이 수요된다고 합니다. 해방된 사상으로 말하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령혼이 존재하던 안 하던 시신이 자기 본인에 대하여 아무런 의의도 없는것이며 시신기증이야말로 나라의 의학, 의료사업에 대하여 공헌을 한다는 의의가 있는것입니다. 귀주성에서 심수에 온 토가족인 원덕진녀사는 (40세)은 올 1월, 남편과 11살의 아들애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한달 후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애는 뇌사상태에서 호흡기와 약물로 넉달째 생명을 유지하고있었습니다. 치료에 기적을 기대할수 없었던 그녀는 죽어가는 아들애를 보며 아들애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여 그녀는 아들애의 기관 전부를 사회에 기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새 생명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기관 이식전문가들은 자세한 검사를 거쳐 아이는 이미 뇌가 사망상태에 있기에, 기관 이식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리고 5월 13일, 적십자회의 배치로 광주시 중산 제1병원에서 아이의 여러 기관을 성인 5명에게 의식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그 아이로 하여 어른 5명이 새 생명을 찾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원덕진녀사는 사상이 크게 해방되고 각오가 대단히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 한 아이의 시신기증으로 하여 다섯명의 새 생명을 찾았다는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고 부상당한 사람을 돕는 인도주의를 선양하는데서 크나큰 의의를 가진다고 봅니다. 지금 사회가 발전하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의 사상이 해방되고 의식이 전변을 가져와 각오가 매우 높아가고 있습니다. 연변대학 의학원 김범학 교수에 따르면 지금 연변대학 의학원에 시신기증수속을 마친 사람가운데는 20대의 청년으로부터 90대의 로인에 이르기까지 다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여나서 종당에는 죽게 마련입니다. 지금 보편적인 장례는 화장입니다. 시신을 화장하면 결국에는 남는 것은 골회뿐입니다. 시신을 기증하엿다면 해부절차가 하나 더 들어갈뿐이지 시신처리에서 륜리에 어긋나거나 비 도덕적 행위가 없으며 고인이나 유가족에 있어서 그 어떤 명예손상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기증하였다 하여도 의학연구가 끝이 나면 화장을 하여 유가족의 요구에 따라 골회를 돌려 줄수도 있고 의학원에 장기 보존을 하여 유가족이 추모활동도 할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사망하는 사람은 900만명 좌우되며 그중 뇌출혈, 교통사고, 의외중독 등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사망자 총수의 40% 좌우로서 그들의 기관들은 이식사용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리론상으로 보면 우리 나라에서 기관을 기증해 이식에 사용할수 있는 인수는 5만명에 달하지만 전국적으로 1년에 기관을 기증하는 사람은 도합 100명도 안 된다고 합니다. 시신기증은 기증인의 고상한 품성이고 고귀한 인격의 체현이며 자신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더 나아가서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태도이고 가치관의 표현이며 이는 사람이 죽은 후 나라의 의학사업과 의료사업에 큰 공헌을 하는것이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10월 29일
136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 댓글:  조회:9136  추천:10  2012-11-09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6) 청해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라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람이 이승에서 태여나 종당에는 저승으로 가는것은 필연적이며 인생의 법칙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사람이 죽게 되면 장사를 지내는것으로써 저승으로 가는 고인을 바래고 있으며 어느 민족이나 모두 자기 민족의 장례풍속에 따라 장사를 지내는것으로써 자기 민족 전통문화를 전수하고 있습니다. 하여 국무원의 장의관리조례 제 6조에는 “소수민족의 상장습속을 존중하여야 하며 자원적으로 상장습속을 개혁하는것을 다른 사람들이 간섭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족장례풍속》은 2009년 6월에 길림성정부의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여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무형문화유산인 “조선족장례풍속”의 전승인이인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의 현룡수 회장을 찾아 조선족의 장례풍속이 길림성 무형문화유산에 들어간 형편에서 이것을 어떻게 전승하고 보호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현회장은 조선족 장례문화의 핵심은 “효도”이며 주체는 “례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많은 세월을 내려 오면서 우리민족 장례문화를 창조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많고 복잡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시대에 와서 이러한 장례문화들이 많이 소실되였지만 고복(皐復: 혼을 부르는것), 렴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싸는 일), 명정[銘旌: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姓名) 따위를 적은 조기(弔旗)], 안신제(安神祭), 소상(小祥: 돌제), 대상(大祥: 3년제), 청명제(淸明祭), 추석제(秋夕祭) 등 몇가지 기본적인 풍속들은 아직 보존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회장은 또 조선족장례풍속이 길림성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것만큼 법적보호를 받고 실시되여야 하는데 연변 각 지방의 장의관에 모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 맞춘 시설과 복무항목이 없어 조선족들이 자기 풍속에 맞추어 장례를 치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안타까운 점도 이야기 하면서 연변은 조선족자치주인것만큼 의례히 조선족 장례문화에 맞는 시설과 복무항목이 있어야 하므로 지금 해당부문과 교섭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족의 장례풍속을 보면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운데 이런 것을 모두 다 그대로 회복하기는 불가능 하며 또 절주가 빠른 현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통장례의 기본정신을 계속하여 전승하여야 하지만 이미 간소하여진 우리민족의 현재 장례방법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전통민족특색을 첨부하는것이 바람직 하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족의 장례풍속에는 조상의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내는 면례(緬禮)도 포함되여 있습니다. 면례는 원래 조상들의 묘를 써서 십여년이 지난 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파 헤치여 해골을 점검해 보아 깨끗하고 노란색이면 그 자리가 풍수가 좋다고 인정되여 해골을 잘 정리한 후 다시 그 자리에 묻는다던가 혹은 다른 좋은 자리로 옮길수도 있고 만일 해골이 깨끗하지 못하고 검은 색이면 그 자리가 풍수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 곳을 선택하여 묻는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효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은 면례가 개장(改葬) 혹은 이장(移葬)과 동의어로 되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이사하고 부유하면 묘를 옮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조상의 묘소를 마음에 드는 명당이나 릉원에 옮겨 모시는것도 일종의 미덕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나라와 사회의 기본건설의 수요로 묘지를 옮기게 되면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면례가 많습니다. 현회장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나라의 기본건설 수요에 의하여 연변 모 지방의 낡은 공동묘지의 묘들을 몽땅 옮기게 되였는데 많은 유가족에서는 조상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껏 우리민족 장례문화 례의를 지키면서 허용범위에서 새로운 장지(葬地) 에 옮겨 묻거나 화장터에 가서 화장한 다음 납골당(骨灰堂)이나 릉원에 모시지 않으면 하천이나 적당한 곳을 선택하여 살포(撒布)하고 있지만 일부 유가족들은 아예 파묘부터 우리의 장례문화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낮은 비용으로 맏기고는 해골을 화장하는 것을 지겨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해골을 맡은 사람들은 여러구의 해골을 한데 무져놓고 디젤유를 뿌리고 쓰레기 처리하듯이 대강 태워서 여기저기 뿌려 던지여 보기가 민망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현룡수 회장은 “조상의 해골을 쓰레기처럼 처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명과 인륜도덕의 차원에서 참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반드시 정규적인 화장터에 위탁하여 문화적으로, 위생적으로, 존엄이 있게 화장하여 처리하는 것을 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면례를 어떤 방식으로 하던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가족의 의사에 따라 하는것이기에 이렇다 저렇다 할 수는 없지만 면례는 조선족 장례풍속의 한 부분으로서 돌아간 조상에 대한 일종 효성의 도덕적인 행위라는것만은 잊지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은 자기의 전통장례규범을 몰라 일단 상사가 나면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장례를 치러 남들을 웃기는 일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현회장은 현시대에 와서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하는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정부차원에서 하기 곤난하면 민간차원에서라도 조선족 장례복무 전업대를 조직하여 일단 조선족 가문에 상사가 나면 전화 한통으로 전반 장례사무가 원만하게 해결을 보도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시 조선족 장례문화를 장기적으로 이어 나갈수 있는 보증으로 되므로 지금 여러방면으로 준비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10월 22일
135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5) 댓글:  조회:8487  추천:52  2012-09-24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5) 청해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5)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전번시간의 계속으로 금후의 전망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4. 금후의 전망 중한수교 후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를 보면 한국과의 래왕으로 하여 선진적 문화를 많이 받아드렸고 한국로무로 하여 조선족들의 생활이 많이 펴이게 되여 여유로은 생활을 하고 있으며 자지방의 경제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인구이동으로 하여 토지류전, 조선족공동체의 해체의 위기 등 문제점들도 존재하고 있는데 중한관계가 날로 조선족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하여 이러한 문제점들도 점차적으로 해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마다의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경제가 발달한 곳, 돈을 많이 벌수 있는곳을 떠나가려 하고있으며 이것은 법률과 정책의 허용범위 내에서 각자의 자유선택입니다. 조선족들이 경제가 발달한 대도시, 연해도시 해외로 나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제가 5년전에 한국의 방문취업제 문이 금방 열렸을 때 《농촌조선족 인국의 이전을 어떻게 볼것인가?》라는 문장에서 “떠날수 있는 사람은 모두 떠나서 세상과 접촉하고 돈도 벌고 선진적 문화도 배우고 돌아와 새로운 창업을 하여 고향건설을 할것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해외로무만이 치부의 길이 아니라고 봅니다. 농촌은 땅이 넓고 할일이 많습니다. 자신이 머리만 쓰면 얼마든지 치부의 항목을 찾을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가족과 헤여져 해외에 나가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고되게 일을 하느라고 말고 먼저 나간 사람들은 인제 돌아와서 고향건설을 하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개혁개방이래 특히 근 10년간의 변화가 아주 뚜렷하며 이미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농촌도 이전에는 농업세를 내면서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중국에서 2600년 내려오던 농업세제도를 페지하였을 뿐만이니라 우량종자보조, 농기구구입보조, 디젤유보조 등등 여러가지 나라의 《삼농보조금》 혜택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있으며 그전에는 소로 받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맸지만 지금은 기계로 밭을 갈고 살초제로 기음을 대체하니 어렵지 않게 농사를 짓고 있으며 받을 임대하고 도시에 들어갔던 사람도 다시 농촌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촌촌통》계획을 실현하여 콩크리트 포장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이어놓고 국도와 이어져 도시에 집을 잡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고향건설에 투자하여 과학적인 규모화농업도 하고 다각경영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봅니다. 2009년에 국가전략으로 격상된 “장길도선도구”개발계획과 금년에 국무원에서 비준한 중국두만강구역(훈춘)국제합작시범구건설은 동북진흥의 핵심프로젝트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 지정학적 우세를 리용하여 연변을 동북아물류기지를 건설하여 연변은 세계에로 세계는 연변으로 하는 전략을 실시하여 국내외의 선진기업을 인입하여 경제를 더 활성화 하면 농촌의 잉여로동력이 도시에 들어올수 있고 외지에 나간 조선족들이 되돌아 올수 있으며 연룡도 일체화를 하여 경제가 발달한 길림성의 동부중점도시로 변혁시키고 연성환경건설을 잘하여 봉황이 오동나무숲으로 날아들게 한다면 외지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조선족 기술일군들이 연변으로 돌아와 연변진흥에 기여할수 있고 연변에서 간 대학생들과 석사, 박사학위를 딴 류학생들이 우리 연변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이바지 할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중국조선족은 조선족이란 이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더욱 건전한 조선족동체를 구축할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 5번에 나누어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에대하여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이상의 글은 근근히 저 개인의 인식과 견해를 말씀드린것인데 청취자들의 많은 의견과 건의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9월 24일
134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4) 댓글:  조회:8453  추천:16  2012-09-17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4) 청해 54.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4) .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전번시간의 계속으로 농촌총각들이 자가들기 어려운 문제와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 합니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게 되였습니다 지금 농촌에 30대, 40대, 지어 50대의 로총각들이 수두룩한데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려운 원인을 분석하여 보면 아래의 네가지로 볼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여 도시에 제 3산업이 대폭 증가하면서 녀성인력이 많이 수요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농촌처녀들이 초중이나 고중을 졸업하고 도시에 들어가 일자리를 구하면서 농촌에 처녀총각비례가 불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두번째로는 한국으로 시집간 녀성이 많아지면서 더욱 처녀총각비례가 파괴되였습니다. 농촌조선족처녀들의 대량적인 류실로 하여 총각과 처녀의 비례가 대부분 마을에서 20:1, 지어는 그 이상에 달하는 마을도 있습니다 셋째로는 농촌총각들이 자립자강의식이 약한데 있습니다. 한족총각들과 조선족총각들을 비교하여 보면 한족총각들은 자지방에 뿌리박고 튼튼한 내 살림을 꾸리려는 의식이 강하여 자기에게 차려진 토지를 알뜰히 가꾸어 높은 수학을 따내면서도 다각경영을 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고 있는 반면에 조선족총각들은 뿌리박는 의식이 약하여 한해 벌어 한해 사는 들뜬 사유로 살아가니 굳건한 살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새도 안온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마련인데 처녀들도 굳건한 살림에 튼튼한 기초를 갖고 있는 총각한데로 시집가려 하지 빈 털털이인 총각에게로 시집가려 하지 않습니다. 넷째로는 처녀들의 의식에 또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A 농촌처녀들이 사치한 도시생활을 동경하면서 도시에 들어갔지만 이들 대부분은 일정한 문화수준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비록 도시생활이라 하지만 낮은 로임으로 고달프게 최하층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B 큰 도시에서 같은 조선족 총각을 만나기 힘든 상황이라 일부 조선족 처녀들이 한족과 결혼을 하고있습니다. 이러한 통혼은 민족적 풍속습관 차이로 생활상에서 부부간의 모순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어 그닥 재미있는 혼인생활이라고 할수 없으며 좀 심하면 리혼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C 한국으로 시집간 녀성들 가운데서 극 소수는 남편을 잘 만나 행복한 살림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것은 극 소수에 지나지 않고 방문취업제문이 열리기 전에 한국에 가기 어려웠던 세월에 시집간 녀성들가운데서 대다수는 아무런 감정기초 없이 내가 시집가서 부모, 형제자매를 초청하여 한국에 오게 하면 모두 잘 살수 있다는 소박한 감정으로 브로커를 통하여 7,8살 지어는 10살 이상의 차이로 섭외혼인을 맺었습니다. 감정기초가 없이 이러한 소박한 감정으로 시집을 갔기에 대상자들을 놓고 보면 대부분은 한국에서 밑바닥생활을 하는 장가가기 어려운 남성들이였기에 시집간 녀성 역시 밑바닥생활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녀성들은 술주정뱅이거나 변태적 심리를 가진 남성을 만나 가정폭력, 성폭행을 당하여 집을 뛰쳐나왔거나 뛰쳐나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목숨까지 일은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금년 7월 2일에도 서울에 시집간 중국동포출신 리모녀성(57세)이 남편의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습니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리모녀성은 평소 식당에서 일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남편 홍씨(67세)의 생계를 책임졌다고 하였으며 홍씨는 평소 알콜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술을 자주 마셨고, 상습적으로 아내를 폭행해 왔으며 이날도 홍씨는 술에 취해 안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까지 잠그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건의 혼인문제를 신중히 대하여 한국에 시집을 가면 잘 살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을 버리고 내막을 잘 아는 자지방의 조선족총각을 만나 힘을 합쳐 잘 살아보자는 인식을 갖고 결혼을 한다면 중국조선족의 인구감소에도 일정한 미봉을 할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농촌총각들은 자기의 능력을 잘 판단하고 도시에 들어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기 바쁠 때에는 농촌에 뿌리박는 의식을 갖고 농촌의 광활한 무대에서 농사를 짓는 외에 다각경영을 잘 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는것이라고 봅니다. 농촌처녀들 역시 맹목적으로 도시에 들어가서 낮은 로임으로 고달프게 최하층생활을 하기보다 농촌에서 사랑하는 총각을 만나 맞들어 벌면 능히 부유한 생활을 할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방문취업제 이전에 한국에 간 중국조선족은 대부분 불법체류로 있었기에 수시로 중국과 한국을 나들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남녀사랑의 갈증으로 하여 일생이 얼마라고 고독하게 내 혼자서 외로이 보내겠는가 하며 이성을 친하여 한집에서 부부처럼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나중에는 본국에 있는 배우자한테 소식이 가서 ‘네가 거기에서 그렇게 하는데 내라고 여기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내겠는가?’ 하며 그도 이성친구를 사귀어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련쇄반응으로 하여 그들의 가정은 종당에는 파멸로 되여 버렸으며 이로 하여 결손가정자녀수가 늘어 났습니다. 최근 연변조선족자주 교육국의 통계에 의하면 결손가정학생수는 5만 여 명으로 전체 학생수의 30%를 넘어섰으며 그 중 조선족 결손가정학생이 3만 여 명으로서 61.3%를 차지하였습니다. 조선족학생 중 결손가정학생은 50%를 웃돌고 어떤 학교는 70, 80% 이상이며 지어 어떤 학급은 90%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녀들은 부모사랑의 결핍으로 하여 사회상의 어중이떠중이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범죄행위를 저질러 파출소에 련행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여 항간에서는 해외로무로 하여 돈은 벌었다지만 자식농사는 흉년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건의 해외 로무의 가장 큰 우점은 짧은 시간내에 돈을 많이 벌수 있는것입니다. 지금 한국에 나가 일하는 사람가운데 갓 결혼하여 한창 재미있게 혼인생활을 하여야 할 나이에 사랑하는 처(남편)자와 갈라져 일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해외에 나가 많은 돈을 버는것도 좋지만 가정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3D업종에서 고달프게 일하는것보다 새로운 창업을 하는 의식을 갖고 머리를 써서 자기 고장에서 부부간에 함께 창업을 하여 행복한 가정살림을 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바라건대 한국정부에서도 중국동포들에게 다른 해외동포들과 같이 재외동포비자(F-4)비자 발급을 확대하여 자유로이 래왕을 한다면 불법체류가 없어질수 있고 조선족사회에 더욱 안정성을 줄수 있다고 봅니다. 부부가 갈라져 타향에 가서 일하더라도 오직 지금의 안해(남편)을 일생의 동반자로 하고 내 한 가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열심히 일하여 돈을 많이 벌어 본 고장에 돌아가서 행복한 가정살림을 하겠다는 사상을 수립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리혼률도 낮추고 결손가정도 줄일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고 다음시간에 계속말씀드리려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9월 17일
133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3) 댓글:  조회:8514  추천:6  2012-09-10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3) 청해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3)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전번시간의 계속으로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 합니다.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대량적인 인구이동으로 하여 조선족 집거지의 인구가 감소되면서 조선족사회의 해체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 주요 현상들을 보면 1) 조선족집거지 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2010년 제6차 인구보편조사에는 중국내 조선족 인구는 총 183만 929명으로, 1990년 제4차 인구조사 당시 192만 597명보다 8만 9,668명(4.7%)이 줄었습니다. 1996년도부터 조선족인구가 마이너스 장성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산아제한으로 하여 아이를 적게 낞은것도 있겠지만 다른 한 방면으로는 한국에 시집가거나 국내 타민족과 결혼한 원이도 있다고 봅니다. 한국 법무부의 2011년 9월30일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 결혼이민한 중국조선족이 2만9,894명이고 그중 녀성이 2만2,284명입니다. 이 3만 명이 섭외혼인을 하지 않았다면 중국조선족 인구가 그만큼 감소 되지 않았을것이고 그들이 아이 하나만 나아도 조선족 인구가 3만이 불어날것입니다. 거기에다 국내에서 대도시에 들어가서 타민족과 결혼한 녀성들이 조선족총각들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조선족 인구가 그만큼 더 불어날것입니다. 연변의 경우 1995년 조선족 인구가 86만명이였지만 2009년에는 80만명으로 7%가량 줄었습니다. 지금 한국에 귀화 혹은 국적회복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비자로 한국에 체류한 중국의 조선족이 50만이 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구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그전의 아담하던 조선족마을이 한산하게 되였으며 농촌의 많은 조선족학교들이 페교되고 조선족공동체해체의 위기를 겪고있습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농촌의 조선족 마을들이 옛날의 아담한 모습과는 달리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살던 마을과 그 주변 마을들은 순 조선족 마을로서 다른 민족이 한 가구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기업의 중국진출로 하여 조선족들이 대도시, 연해도시에로 진출하게 되였으며 특히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출국하면서 토지경영권을 다른 민족에게 임대 혹은 양도하면서 다른 민족들이 들어 오기 시작하였는데 제가 살던 마을에는 인제 한족호수가 절반을 넘어 차지하고 있으며 어떤 이웃마을들에는 조선족이 한두호 지어는 한호도 없이 전부 기타 민족이 차지하고있습니다. 하여 우리의 토지, 우리의 터전이 완전히 타민족에게 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고장뿐만 아니라 조선족 집거지의 농촌마을이 다 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토지를 임대한 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며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입니다. 지금 외국에 갔다 온 적지 않은 조선족 농민들은 토지는 타민족에게 임대하고 소비가 큰 도시에 들어와서 아무런 창업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몇 년간 뼈를 갈아 벌어온 돈을 물쓰듯 다 써버리고 다시 출국행을 선택하여 또 다시 리산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로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수 있지만 로동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로후의 생활보장마저 없는 신세로 되고있습니다. 건의 우리의 토지, 우리의 터전이 타민족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자면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거나 전문농장 혹은 전문합작사에 들여놓아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이 아무때건 본 고장에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토지가 타민족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굳게 지킬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 하여 우리 조선족들이 모두 한평생 지구의 껍질을 허비면서 피와 땀으로 이 땅을 적시라는것이 아닙니다. 조선족이 농경사회로부터 도시화로 넘어가는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합니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능력에 따라 떠나 갈수 있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과학적으로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한 농업으로 가꾸고 지키면서 도시에 진출한 사람들보다 못지않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고 다음 시간에 계속말씀드리려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9월 10일    
132    47년만에 만난 담임선생님 댓글:  조회:5081  추천:2  2012-08-30
47년만에 찾은 담임선생님 주청룡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이 몇분 계시는데 그 가운데 한분이 나의 계몽스승이신 소학시절의 담인교원이신 김순애선생님이시다. 1963년 내가 소학교 4학년에 올라올 때에 공사(지금의 향)에 중심소학교가 서면서 우리 마을은 중심소학교 학구에 속하게 되여 중심소학교에 전학을 하였는데 나는 김순애선생님의 반에 편성되였다. 그때 나는 학급에서 중하급에 속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나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한 학기 지나 나는 도덕품성에서도 많은 전변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학습성적도 많은 제고를 가져왔다. 4학년 2학기에 들어서자 선생님께서는 나를 중대장에 학습위원까지 시키는것이였다. 그때 나의 어린 심령에는 중대장표식을 달고 학습위원까지 하니 뿌듯하기만 하였다. 5학년에 올라와서 전교 문예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단독으로 콰이반(快板儿)을 출연시키는것이였다. 난생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서 출연하는데다 한어로 하니 너무 긴장하여 표현효과가 선생님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니 선생님께서는 나를 쓰다듬어 주면서 잘 하였다고 칭찬을 하여 주시는것이였다. 선생님의 사랑을 떠 올리니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5학년 학기말 때에 6학년에서는 졸업식을 앞두고 졸업행사의 한가지로 룡정에 가서 영화구경을 하게 되였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에서 나를 대표로 뽑아 상급학년의 졸업행사에 참가시키셨다. 대표로 뽑히여 상급학년의 졸업행사에 참가한다는 것은 아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였다. 그때 덕신에서 기차를 타고 룡정으로 가자면 새벽 2시에 타야 했다. 아마 새벽 2시에 기차를 타기 힘든것을 고려하여 그랬던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그랬던지 상급학년의 일이라 모르겠지만 기차를 타지 않고 도보로 50리 길을 걸어 룡정에 갔다. 그렇지만 그때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지? 지금 기억에 아마 룡정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좀 지난것 같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싸고 온 도시락을 풀어놓고 나무그늘 밑에 모여 앉아 먹었는데 우리가 사는곳은 한전고장이라 도시락이라야 모두 조밥에 야채볶음, 닭알 두개씩이였다. 간혹 국가배급쌀을 타는 학생들에게는 이밥이 있었다. 우리는 오후에 영화를 구경을 하고 저녁 9시에 기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덕신(팔도하역)에 도착하니 9시 반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부모들이 마중 나오는것이 없이 3,4리 길을 모두 한 동네 아이들끼리 함께 집에 갔다. 6학년에 올라와 나의 학습성적은 더 우수하였고 도덕품성도 더욱 큰 발전을 가져와 모든 방면에서 돌출하여 우수졸업생으로 동학들이 일제히 나를 선거하였다. 나는 이렇게 우수졸업생의 상장을 않고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였다. 그 시기에는 중학교가 공영중학교와 농업중학교 두가지로 있었는데 공영중학교는 국가에서 꾸리는 전일제 중학교였고 농업중학교는 농민들이 자체로 꾸리는 반농반독의 학교였으며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을 골라 공영중학교를 한개 반을 모집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농업중학교로 가게 되였다. 공영중학교와 농업중학교의 학생모집 비례는 1:3이였다. 소학교에서 우리는 두개 반이였는데 나는 2반이였다. 중학교입학시험에서 공영중학교에 1반에서 4명이 붙고 김순애선생님이 맡은 2반에서 10명이 붙었다. 원래도 학교에서 김순애선생님에 대하여 평가가 높았지만 그번 입학성적으로 하여 학교나 사회상에서도 김순애선생님에 대하여 평가가 대단하였다. 나도 운이 좋게 김순애선생님의 반이였기에 우수한 성적으로 공영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나의 어린 생각에도 만약 내가 1반이였다면 공영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을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1반에서 공영중학교에 붙지 못한 우수한 학생간부들이 여럿이 있었으니 말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김선생님을 만나보려고 모교를 찾아갔었는데 그때는 이미 선생님께서는 부군(夫君, 선생님의 남편)님을 따라 료녕성 무순시로 조동하셨다는것이였다. 그다음으로는 더는 찾을 길이 없었다. 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원사업을 하면서 그 선생님이 더욱 그리웠다. 하여 그 선생님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아도 모두 모른다는것이였다. 몇십년이 지난 어느 때 선생님께서 부군님을 따라 도문에 오셨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단위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몰라 찾을 수 없었다. 또 여러 해 지난 다음 선생님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을 만나 물어보니 그도 그저 지금은 연길에 와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다는것이였다. 여전히 묘연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 선생님과 한 마을에서 살던 한 친구와 물어보니 자기가 그 선생님의 시집편으로 친척이 되는데 지금 그 선생님의 소식은 모르나 그 선생님의 동서를 자주 만나는데 그 분과 물어보면 알수 있다는것이였다. 아주 기쁜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하여 그에게 꼭 알아봐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더니 며칠 후 전화번호 둘을 알려주면서 하나는 그 선생님의 전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생님의 따님의 전화번호라고 하였다. 너무나도 기쁜 일이라 그 즉시로 먼저 선생님의 전화번호에 따라 전화를 걸었더니 가석하게도 空号 (빈 전화번호)라는 음성으로 들려왔다. 그다음 따님의 전화번호를 누르니 자기는 그런 선생님을 모른다는것이였다. 혹시나 하여 이튿날 다시 그 번호를 누르니 여전히 모른다는것이였다. 또 절망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다시 확인하여 보니 마지막 한 수자를 잘못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로 갈수 밖에 없지않는가? 이렇게 알만한 사람과 다 물어보아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지난 4월 14일 또 한 차례의 친구모임에서 소학교 때의 두 동창생을 만나서 물어보았더니 자기네는 그 선생님께서 도문에 계실때에 그 선생님의 집에 놀려 갔었는데 그때 이미 부군님께서는 세상을 떴더라는것이였다. 그것도 인제는 10년이 넘어서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는 것이였다. 내가 꼭 찾아야겠는 안타까움을 말하자 한 친구가 딱 찾자면 한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자기가 그 선생님의 시조카며느리를 자주 만나는데 거기를 통하면 가능하게 알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분의 전화번호를 꼭 알려달라고 또 부탁하였다. 3일 후 그 친구가 그 분의 전화번호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즉시로 그 분과 전화통화를 하였더니 그 선생님 따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것이였다. 나는 그 즉시로 그 번호에 따라 전화를 걸었더니 김순애선생님의 딸이 옳다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 “아! 끝내 찾았구나!” 하며 외치다다싶이 말하며 선생님의 문안을 하였더니 지금 병으로 도문병원에서 입원치료중이라고 하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선생님을 찾게 되니 기쁘면서도 한 방면으로는 입원치료중이라니 마음이 쓰리여 났다. 나는 한시 급히 선생님을 만나 뵈려는 생각에 도문으로 행하였다. 도문에 가 병원의 침대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나는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 한데 섞여 왈콱 쏟아져 나왔다. 47년만의 만남이였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 주청룡입니다.”라고 하니 선생님께서는 인차 나를 알아보시고 몸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못하시고 아주 똑똑한 의식과 정기도는 눈으로 나를 보시며 눈물이 글성하시였다. 말씀도 아주 힘들게 하셨다. 나는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선생님을 47년만에 만나다는것이 어쩌면 이렇게 병실서 만나는가? 어찌하여 선생님을 일찍이 찾아뵙지 못하였는가? 76세에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계셔야 할 선생님께서 너무나도 일찍이 병상에 누워계신다는 서러운 생각에 또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려 선생님의 이불우에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 옆에는 아들과 딸이 다 있었다. 나는 그들과 선생님께서 무슨 병으로 입원하였는가고 물으니 뇌위축으로 몇 년 알으셨느데 금년 1월에 또 설상가상으로 허리를 상하여 이렇게 입원치료를 한다는것이였다. 선생님의 지나간 정황에 대해서는 자기들의 아버지가 북경석유학원을 졸업하고 무순시에 배치받았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무순조선족소학교에 전근하였다는것이였다. 그 후에 아버지가 길림화학공장에 전근하시자 어머니께서는 또 길림 화학공업공사의 자제학교에 전근하셨고 후에는 도문에다 석유제련공장을 앉히게 되자 아버지께서 그 공장을 창설하는 임무를 맞고 도문에 오시게 되니 어머니가 또 아버지를 따라 도문에 오셨다는것이였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의 사업을 이어받아 직업중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후에는 학교에서 령도사업을 하다가 정령퇴직하고 지금은 글을 많이 쓴다는것을 이야기 하였더니 선생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매우 기뻐하셨다. 비록 47년만에 선생님을 찾아 평생 소원은 풀었다지만 선생님의 건강상황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것이 유감이였다. 나는 선생님께서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게 되면 선생님을 모시고 동창모임도 하면서 소학시절의 추억으로 돌아갈수 있다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랴 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이 시각도 빌고 빈다.
131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2) 댓글:  조회:17303  추천:6  2012-08-29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2) 청해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2)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전번시간의 계속으로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 합니다.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 중국조선족은 중국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잘하는 이중 언어우세와 중화민족이면서도 한국인과 같은 겨레라는 어느쪽에서도 떨어지거나 멀리할수 없는 민족적 감정으로 하여 중국과 한국간의 각종 교류에서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한수교 후 중국조선족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기업이 중국의 연해도시, 대도시에 진입하면서 중국인 로동력이 많이 수요되였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족들도 한국기업에 취직하였는데 같은 민족적 감정과 언어소통으로 하여 한국인들이 조선족을 더 선호하게 되였으며 조선족을 통역이거나 관리인원으로 많이 채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인구가 많고 취업하기 곤난한 현실에서 조선족들에게서는 일정한 취업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기회였으며 이러한 현실은 조선족들이 집거지를 떠나 연해도시, 대도시로 이동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으로 되였습니다. 과거에는 조선족인구가 연변을 위주로 하여 동북3성에 많이 분포되여 있었지만 최근 국가통계국의 통계에 의하면 지역별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속한 길림성이 104만 167명으로 가장 많았고, 흑룡강성 32만 7,806명, 료녕성 23만 9,537명으로 이들 동북 3성의 조선족이 전체 조선족의 87.8%를 차지했습다. 다른 지역은 산동성(6만 1,556명), 상해시(2만 2,257명), 내몽골자치구(1만 8,464명), 천진시(1만 8,247명), 광동성(1만 7,615명), 하북성(1만 1,296명)으로 나타났습니다.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중한수교로 하여 친척방문기회가 더 많아졌고 그에 따라 취업활동도 할수 있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싸기에 그에 따라 인건비가 높습니다. 이런 높은 인건비는 중국조선족들이 짧은 시간내에 많은 돈을 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그렇게 번 돈을 중국에 돌아와 쓰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아 생활소비가 적게 들기에 한국에서 번 돈을 값있게 쓸 수 있으므로 여유로운 생활을 할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에 가기만 하면 많은 돈을 벌어 잘살 수 있다는 “코리안드림”을 갖고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한국에 가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위장결혼” “신분위조”, “밀입국” 등 다양한 수단으로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3) 외화수입은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코리안드림’으로 한국에서 몇 년간 3D업종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일을 하여 뭉치돈을 쥐고 중국에 돌아와 도시에 아파트를 사놓고 새로운 창업을 하면서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돈으로 고향마을에서 여러가지 농기계들을 사놓고 규모화한 농업을 하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서 일할 때에 농장에서 배운 사육기술로 고향에 돌아와서 생태축산전문농장을 꾸리여 년간 몇십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해외에 진출하여 적지 않은 외화를 벌어들여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연변의 정황을 보면 11차5개년 계획기간에 조선족들이 외화(대부분은 한국으로부터)를 벌어들인것이 41.3억 딸라로서 주 재정수입의 총액과 비슷하며 외화수입이 가장 많을 때인 2006년도에는 10.6억 딸라로서 그 해 주 재정수입의 2배를 초과 하였으며 국민생산총액(GNP)은 전성에서 첫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11차 5개년 계획”기간의 연변조선족자치주 GDP, 재정수입, 해외로무수입과의 관계표 년도 GDP(억원) 재정수입(억원) 해외 로무수입(억딸라) 2006 243.4 32.3000 10.6 2007 307.2 54.3000 10.0 2008 379.6 64.000 7.5 2009 450.0 72.500 5.2 2010 540.0 88.000 8.0   오늘은 이만 끝이고 다음시간에 계속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8월27일
130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1) 댓글:  조회:18108  추천:5  2012-08-28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 청해 51.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 목록 1. 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2.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사회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3) 외화수입은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1) 조선족집거지 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게 되였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4. 금후의 전망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란 내용으로 몇번에 나누어 말씀 말씀드리려 합니다.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1)   19세기 중엽부터 광복 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조선반도로부터 만주땅에 건너와 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고 만주의 벼농사는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였으며 그 기술은 전 만주에 보급되였습니다. 그리고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우리 조선족은 공산당을 따라 참군, 참전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민당 반동정권을 뒤엎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였으며 중국 땅에 뿌리를 깊이 박고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우리 조선족은 예로부터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인즉 소가 하는 일을 사람이 하면서라도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시킨다는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후대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한 꿈이였으며 우리들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이렇게 하였기에 우리 조선족들은 괭이 메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닦았고 오늘은 그 후대들이 국가 공무원이나 문화, 교육, 과학, 위생 등 지식분야에서 크나 큰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통계자료를 보면15세 이상의 인구문맹률을 볼 때 전국 평균수준은 22.21%인데 조선족은 7%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자료에 의하면 대학수준 소유자가 전국 평균수준은 매 만 명당 122명인데 조선족은 381명에 달하고 석사, 박사는 전국 평균수준이 매 만명당 8명인데 조선족은 17명입니다. 교육에서 이렇게 전국의 평균수준을 훨씬 초월할뿐만 아니라 방송, 출판, 문예, 체육 등 방면에서도 전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여 1993년 10월 20일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아침 뉴스에서도 조선족은 우생우육(优生优育)에서 돌출한 성과를 취득하였으며 문화교육이 세계선진수준에 접근하였다고 방송하였습니다.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사회 그전에 농촌에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토지를 집체경영을 하여 큰 가마밥으로 살아가면서 먹을 고생, 입을 고생을 하던데로부터 개혁개방 후 마을마다 호도거리를 하여 자신들에게 차려진 토지를 알뜰히 가꾸면서 온당한 경제적 수입으로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였으며 조선족 농촌마을마다 다분한 조선족색채로 화목하고도 온당한 살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농촌의 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먹고 입는 문제는 해결한다지만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는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시조선족들을 보면 대부분 소도시에서 생활하였으며 개혁개방후 많은 중소기업들의 체제개혁이나 파산 등으로 하여 정리실업인원이 점차 늘어났으며 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개체경영자로 되여 중등생활수준에 이르렀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삯군으로 일하면서 먹고 입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였습니다. 중한수교 전 중국의 조선족은 도시나 농촌을 물론하고 그리 부유하지는 못하였지만 조선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안온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랭전시대에 중국과 한국도 실제상에서 랭전상태에 처하여 량국간의 래왕이 없었습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에 와서 랭전시대가 완화되면서 중국의 조선족들이 친척방문의 기회가 이루어져 몇십년 갈라졌던 혈육을 찾게 되면서 한국을 래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에는 단순한 친척방문이라 취업은 없었고 친척방문길에 한국에서 수요하는 약들을 가지고 가서 파는것으로써 왕복 려비를 해결하는 정도였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고 다음시간에 계속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8월 20일
129    찰떡을 붙인다하여 소망을 이룰수 있을가? 댓글:  조회:12120  추천:50  2012-07-27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50) 청해   찰떡을 붙인다하여 소망을 이룰수 있을가?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찰떡을 붙인다하여 소망을 이룰수 있을가?”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자식이 대학에 붙고 좋은 대학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일것입니다. 처음 누가 기발한 생각을 갖고 찰떡처럼 철썩 대학에 붙으라는 의미로 시험장 문어구에 찰떡을 붙여 놓았는지는 모르나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이런 바람이 불기 시작한것이 해마다 대학시험 때 보면 연변의 조선족 학부모들이 시험장 문어구에 찰떡을 갖다 부쳐놓는것이 일종 류행으로 되고 있으며 지금은 그 바람이 더 성행하는것 같고 그 바람이 한족 학부모들에게 까지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찰떡을 아무데나 질서 없이 마구 붙이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학교측에서는 전문 찰떡을 붙이는 떡판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시험장 대문어구에는 학부모들이 남의 자식보다 앞서 더 좋은 대학에 붙으라는 의미에서 전날 밤에 12시 전에 와서 기다리다가 시험을 치는 날 0시가 되자 제일 꼭대기에 남 먼저 붙이느라고 서로 경쟁을 벌리였다고 합니다. 어떤 학부모들은 제일 높은 대학에 붙기를 소원하면서 학교 대문에 올라가서 붙여놓기도 하였습니다. 붙여놓은 찰떡들을 보면 거기에는 기차표, 뻐스표, 그리고 소망의 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학부모들이 자식이 대학에 붙고 좋은 대학으로 가기를 바라는 그 심정은 어디까지나 리해를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찰떡을 붙인다고 하여 대학에 붙는다는것은 어디까지나 비 과학적 표현이라고 봅니다. 찰떡이 아무리 점착력이 강하다고 하여 그 점착력이 학생들이 대학에 붙는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것입니다. 찰떡의 점착력은 물리적인 힘이고 학생들이 대학에 붙는것은 그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달성할수 없는 성적의 우렬(優劣)에 의한 선택인것입니다. 찰떡의 점착력에 의해 대학에 붙는다고 하는 그런 사유방식으로 한다면 자기가 지망을 하는 대학에 갔다가 붙여야 하지 시험장 대문어구에 붙여 놓으면 자기가 지망하는 대학에 붙는것이 아니라 시험을 치고 있는 그 학교에 붙을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지난해 저의 이웃에서 두 학생이 대학시험을 쳤습니다. 한 학생은 부모들이 기관, 사업단위에서 사업하였는데 유식한 가정이라 대학시험를 치는 날 아침 딸에게 정신적으로 안정될수 있는 격려의 말을 하여 시험장으로 보내였을 뿐 그 어떤 비 과학적인 행위가 없었지만 시험결과 중점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다른 한 학생은 부모들이 한국에 가서 일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대학에 붙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치는 날 이른 새벽 남 먼저 시험장 대문어구에 다 찰떡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시험결과는 어느 대학에도 붙지 못하고 락방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례에서 보면 찰떡을 붙였다 하여 그 소망이 이루어는것이 아니였습니다. 과학이 발전한 문명한 시대에 점착력이 강한 찰떡을 붙이면 대학에 붙을수 있고 그것도 남 먼저, 더 높은 곳에 붙여 놓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고 서로 경쟁하면서 학교 대문어구에 갔다 찰떡을 붙여놓는다는것은 너무나도 가소로운 일이고 비 과학적인 행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다 그 민족의 풍속이 있습니다. 풍속이란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지역에서 력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 오는 사람들의 관습적인 생활규범이나 방식을 말합니다. 이런 풍속가운데 대부분은 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에 사람들이 자기의 소망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실제적인 행위가 장기적으로 내려오면서 풍속으로 되여 습니다. 례하면 우리 민족은 동지날에 팥죽을 쑤어먹는 풍속이 있는데 그 유래를 보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정 널리 전하여지고 있는것이 옛날 진나라의 공공(共工)이라는 사람에게 늘 말썽을 부리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동지날 그 아들이 죽었으며 공교롭게도 죽은 아들은 그만 역질(疫疾)귀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서 마을에 돌면서 마을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공공은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어 아들이라 해도 그 귀신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하여 생전에 아들이 붉은 색을 띤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쑤어 대문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습니다. 그 후 역질은 점차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팥죽을 뿌렸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그 후부터 역질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었다고 합니다. 어떠한 류행이나 그것이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지역에서 지속적을로 내려오면 풍속으로 될수 있습니다. 대학입시에 찰떡을 붙이는 이러한 비 과학적 행위도 해마다 지속적으로 전하여 내려가면 그것이 우리 민족의 일종 풍속으로도 될수 있습니다. 자식이 대학에 붙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리해되나 과학이 발전한 문명한 시대에 비 과학적인 행위는 삼가하여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풍속으로는 되지 말아야 한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7월 23일
128    가는 정 오는 정 댓글:  조회:8279  추천:6  2012-07-18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 청해 49. 가는 정 오는 정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가는 정 오는 정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 속담에는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다른 사람에게 정을 베풀어야 자기에게도 그만큼 정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인정이란 주고받는것이지 일방적일수 없다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자기가 각박한줄 모르고 대방을 야박하다고 원한다든가 자기의 가는 말이 곱지 않으면서도 대방에게서 오는 말이 곱지 않다고 생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한 이웃사이에 있은 일입니다. 이 이웃에는 두 집 다 같은 또래의 소학교에 다니는 남자애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 애들이 놀다가 싸움을 하게 되였는데 작은 애가 큰 애에게 맞아서 울며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애의 엄마가 달아나가서 그 남자애를 때리면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더니 네 아비가 술 마시고 늘 싸움질이더니 너도 아비를 닮아 그 모양새구나.”하며 그 애의 아버지까지 곁들어 욕을 퍼 부었습니다. 그 말이 그 애의 부모에게 들어가자 그 애의 엄마도 나와서 지려 하지 않고 “아이들의 싸움에 왜 부모들까지 곁들어 욕을 하는가?”며 있는 흉, 없는 흉까지 다 하면서 대판싸움을 벌리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보면 작은 애의 엄마는 아이들의 싸움에 저쪽 애를 때리면서 그 애의 아버지까지 곁들어 욕할것이 아니라 그 애에게 “싸움을 하면 나쁜 어린이므로 싸우지 말고 서로 좋게 지내야 한다.”며 그 애를 타일러 집에 돌려보냈다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과 같이 큰 애의 엄마가 그것을 알았을 때 작은 애 엄마에게 미안하다며 사과의 말을 할것이고 그러면 두집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을것이며 오히려 두 집사이에 화목하게 지낼수도 있을 것인데 가는 말이 곱지 않으니 오는 말도 곱지 않아 지금도 두집 사이는 고양이 개 보듯 하고있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마을 이야기이입니다. 이 촌의 박촌장은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부터 로무로 몇번 외국에 다녀왔습니다. 손에 쥔 돈이 있자 인제 고향마을을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촌민들을 이끌고 부유의 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김씨 성을 가진 한 농민이 있는데 안해가 시름시름 앓다나니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지만 아들은 또 공부를 잘하여 남방의 어느 한 명문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생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기쁘기는 그지없지만 아들의 입학등록금으로 하여 벙어리 랭가슴 앓듯 말은 못하고 속만 태웠습니다. 이런 사정을 모를리 없는 박촌장은 주동적으로 그 집을 찾아와서 “어쩌다 개천에 룡이 났소. 김철이 대학에 붙은 것을 축하하오. 내 이 집 정황을 손금보든 알고 있으니 김철의 등록금을 근심마오. 내가 대 주지”라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가? 천만 뜻밖이였지요. 이리하여 김철이는 기쁨을 안고 대학에 갔습니다. 첫해는 박촌장의 덕분으로 대학에 갔다 하지만 그 후의 일은 계속 근심거리로 되고 있었습니다. 손에 쥔 돈이 있으면 브로커를 통하여 한국에 가서 몇 년 벌면 뒤일은 해결할수 있으려만 손에 쥔 돈이 없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박촌장은 김씨보다 한수를 먼저 쓰는 사람이였습니다. 벌써 김철의 등록금을 대여줄 때부터 생각이 있었던것입니다. 고기 한 마리만 주고 고기잡는 방법을 대여 주지 않으면 그 상이 장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박촌장은 자기가 돈을 대여 주면서 김씨를 외국로무에 보내려 하였던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김씨는 여러 해 외국에서 돈을 벌어 아들의 공부 뒤바라지도 하고 안해의 병도 치료하였으며 생활도 많이 펴이였습니다. 김철이도 인젠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출근하고 있으며 부모들에게 자기가 박촌장을 양아버지로 모시는 것이 어떤가는 의사를 제기하였더니 부모들도 네가 정말 좋은 생각을 하였구나 하며 선뜻이 동의 하였습니다. 박촌장에게서는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김철이가 아들로 되여 주겠다니 지금은 대학생아들 얻은 기쁨으로 들떠 있으며 두 집에서는 서로 큰집 작은집으로 지내고 있으며 김철은 박촌장을 큰 아버지라며 동네분들을 청하여 박촌장의 환갑까지 치러주었습니다. 박촌장이 김철이에게 입학등록금을 대여 주고 김씨를 돈을 대여 주면서 한국에 보낼 때에는 이런것을 바래서가 아니였습니다. 그저 김철의 전도를 생각하여서였고 빈곤호를 부축하여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가는 떡이 크면 오는 떡도 크다고 박촌장이 이렇게 그들을 도와 나서자 빈곤에서도 해탈되고 아들이 출세까지 한 그들은 그보다 더 갑진 은혜를 갚으려 하고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활동을 토대로 하여 서로 련계를 가지고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사회란 인간의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는 우리는 서로 정을 주고 배려를 하는 마음으로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돕고 한다면 화목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가꿀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7월 16일
127    컴퓨터를 학습의 도구로 삼읍시다 댓글:  조회:10503  추천:18  2012-06-19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 48. 컴퓨터를 학습의 도구로 삼읍시다 주청룡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컴퓨터를 학습의 도구로 삼읍시다.”란 내용으로 말씀 드리려 합니다.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먼곳에 있는 친구와 서신거래를 한다든가 화상채팅을 한다든가 하는것은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활동공간이 마련되였다고 봅니다. 옛날어린이들의 놀음을 보면 줄뛰기, 제기차기, 숨바꼭질, 군사놀음 등 밖에서 여럿이 같이 노는 신체건강에 유리한 운동성적인 놀음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놀음은 모두 지나간 옛말로 되고 하학 후에 이어지는 과외보도반의 학습, 전자유희청, 컴퓨터게임 같은것들은 스스로 초롱속으로 들어간 새로 되여 활동공간이 좁아지고 운동량이 극히 적어져 어린이들의 신체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만능공구로서 어린이들이 그것을 잘 리용하면 학습의 아주 훌륭한 도구로 사용될수 있지만 잘못 리용하면 심신건강을 망쳐먹는 해로운 도구로 됩니다. 제가 연변텔레비 청소년프로의 여러가지 지식경연에서 1,2등을 한 몇몇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떻게 이런 경연에서 이렇게 우수한 성적을 따낼수 있었는가고 물었더니 모두 “학교에서 과당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집중하여 듣고 많이는 집에 와서 독서도하고 컴퓨터에서 정치, 력사, 자연, 지리 등 여러가지 지식을 학습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것들을 학습하면 학습할수록 재미나고 더 학습하게 되며 이런 지식이 머리속에 축적되면 여러가지 지식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낼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컴퓨터는 이렇게 아주 훌륭한 학습의 도구로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하루에 몇시간씩 련속 게임을 하면 게임중독에 걸릴수 있습니다. 어느 한 신문에서 “한 어린이가 아버지 어머니가 한국에 돈 벌려 가고 할머니와 같이 생활을 하는데 하학 후이면 곧장 PC방으로 갔다. 처음에는 그래도 저녁이 되면 집에 꼭꼭 들어갔는데 점점 게임에 빠져들어가자 나중에는 집도 학교에도 가지 않고 밤낮 PC방에서 간식으로 요기를 하거나 아예 끼니를 거르면서 련 며칠 PC방에서 게임에 빠져들어갔다. 할머니와 담임교원은 아이가 잃어졌다고 사처로 찾아다녔으며 이 애는 련 며칠 바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하다나니 컴퓨터앞에 쓰러졌는데 PC방 관리일군에 의해 발견되였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제한이 없이 게임을 한다면 게임중독에 걸리게 되고 이렇게 침식을 잃어가면서 놀다보면 나중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룡정시 공안국의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소녀가 컴퓨터로 채팅을 하면서 한 남성친구를 사귀였는데 좋은 직업을 해결 해 준다는 솔깃한 말에 부모들이 한국에서 부쳐온 돈을 여러 번에 나누어 인민페로 30만원을 그의 저축통장에 입금시켰습니다. 다행히 공안기관에서 이 사건을 제때에 조사하고 그 사기군을 나포하여 돈은 도로 찾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컴퓨터게임이거나 인터넷채팅에서 자제를 하지 못하면 악성후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아직 좋은 사람과 나쁜사람에 대한 식별능력이 약하므로 될수록 면목을 모르는 사람과 인터넷친구를 사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면목을 모르는 사람과 친구를 사귀다가는 이 소녀처럼 나쁜 사람의 꼬임수에 걸려들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어린이들이 컴퓨터게임이나 인터넷채팅을 하지 말라는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인것만큼 놀음은 놀아야 하지요. 놀되 자제력을 키워 자기절로 억제할줄 알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연변인민방송국 《소년아동》프로 일요일 《연변의 어린이》에 나오는 어린이들을 보면 과외활동을 자기절로 스케줄은 짜고 그 스케줄에 따라 진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컴퓨터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채팅을 하는것을 자기절로 시간을 장악하고 한시간을 초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모두 이런 학생들을 따라배워 컴퓨터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채팅을 한시간을 초과를 하지 말고 컴퓨터란 이 만능도구를 잘 리용하여 그것을 어린이들에게 유리한 학습의 도구로 사용합시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6월 18일  
126    인민교원이란 책임감이 두 생명을 구하였다 댓글:  조회:8600  추천:8  2012-06-11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 청해 47. 인민교원이란 책임감이 두 생명을 구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인민교원이란 책임감이 두 생명을 구하였다.”란 내용으로 말씁드리려 합니다. 인민교원은 후대양성사업에 몸을 담근 원예사입니다. 인민교원들은 이 성스러운 사명감을 안고 초불정신으로 자신의 일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최근 가목사시 제19중의 장려리선생이 자아희생정신으로 학생을 구한 영웅적사적이 전국인민들을 감동시키고 있으며 연변에서도 요즘 최봉녀선생이 드높은 책임감으로 두 생명을 구한 사적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4월 25일 아리랑방송 《FM88좋은 세상》 생방송을 통하여 연길시 흥안소학교 3학년 2반의 담임 최봉녀교원(38살)이 가스중독에 쓰러진 학생과 로인을 사경에서 구한 이야기가 방송되였습니다. 사연은 이러하였습니다. 지난4월 19일 아침 연길시흥안소학교 3학년 2반의 담임 최봉녀교원(38살)은 첫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데도 김향미학생 보이지 않았으며 첫 수업이 끝이 나서도 여전히 등교하지 않습니다. 아주 성실한 학생이라 이런 일이 종래로 없었고 또 전날까지도 별다른 사유있다는 말없이 하교하였는데 아무런 련락도 없이 등교하지 않자 최선생님은 별다른 생각이 들게되였습니다. 최선생님은 급히 김향미학생의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신호가 가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향미한테 쳐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일산화산소중독사고가 생기기 쉬운 요즘 불때는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단둘이 살고 있는 그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았을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쳐지났습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속탄 마음으로 첫 수업을 마치고 교도주임한테 정황을 알리고 집을 잘 알고 있는 두 학생과 함께 부리나케 대성촌에 자리잡은 향미학생네 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2층짜리 주택 1층에 자리잡은 향미네 집은 문이 꽉 잠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치고 두드리고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침 웃층에서 내려오는 이웃집 리덕수 할아버지와 물어보니 어제 저녁에 그 집에서 불을 땔때에 불길이 잘 들지 않아 “석탄가스중독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조언까지 하였다는것이였습니다.  한 시각도 지체할수 없는 상황이라 즉시 110에 긴급구조전화를 하였습니다. 리덕수 할아버지가 모든 책임을 다 진다는 보증을 서고110구조대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안에는 향미와 그의 할아버지가 가스중독에 쓰러져있었습니다.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순간이라 더 지체할새 없이120구급차를 불러 이들을 연변병원에 긴급호송했습니다. 향미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고모까지 다 한국에 나가있어 입원수속을 하려 해도 가까운 친척을 찾을수 없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최봉녀교원은 눈앞의 불부터 꺼야 한다는 생각에 고모의 수술비용으로 준비하였던 돈 1,400원을 내여 입원수속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온 하루 병원을 떠나지 않고 향미와 할아버지의 생명이 위험에서 벗어나기만을 빌고 빌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수시로 병원을 오가며 그들의 곁을 보살폈고 학급 아이들을 동원하여 과일이랑 편지랑 가지고 병문안을 가기도 했습니다. 엿새동안의 입원치료를 거쳐 향미학생은 퇴원하고 그의 할아버지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자리를 옮기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연에서 최봉녀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드높은 책임감을 알수 있습니다. 그날 이웃집 리덕수 할아버지도 이미 간암진단을 받고 치료중이면서도 최봉녀선생님과 함께 자기집 일처럼 달아다니면서 모든 일 처리를 하고 뒤수습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생방송 진행을 맡은 담당자가 그 두분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할아버지는 제집 일이면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며 최봉녀선생님은 “담임교원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하면서 당시 리덕수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110, 120구조대원과 병원의사들에 이르기까지 사경에 처한 학생과 로인을 구하느라 일심협력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며 자기에 대한 칭찬보다 다른 사람들의 헌신정신을 더 높게 칭찬하는것이였습니다. 아리랑방송국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최봉녀교원은 평소에도 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대단하였다고 합니다. 수시로 부모들과 련계를 가지기도 하고 가정방문도 하면서 학생들에게 친자식다운 사랑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선생님은 교수연구활동에서도 국가급 1등상을 받고 시 사덕모범, 시 우수담임교원 등 많은 영예를 받아 안았다고 합니다. 만약 최봉녀교원이 학생들에 대한 드높은 책임감이 없었더라면 학생이 제때에 등교하지 않아도 그저 방임하고 말았을것입니다. 그렇지만 평소에도 교원의 자질과 학생들에 대한 드높은 책임감이 있었기에 그날에도 김향미학생이 제때에 등교하지 않자 여러가지 생각을 굴리던 끝에 이런 불길한 예감까지 하면서 더 지체할새 없이 그 학생의 집으로 달려갔다고 봅니다. 최봉녀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지극한 사랑, 사업에 대한 드높은 책임감이 바로 죽음의 경각에 이룬 두 생명을 구한것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하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이며 우리 공민이 반드시 준수하여야 할 사회공덕이라고 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5월 6월 11일
125    장려리의 영웅사적 전국인민을 감동시킨다 댓글:  조회:7942  추천:10  2012-06-08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   46. 장려리의 영웅사적 전국인민을 감동시킨다 청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장려리의 영웅사적은 전국 인민을 감동시키고 있다”이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금 우리 이 사회에서 생명의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를 잊고 남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지나가 버리는 사람들도 있어 사회적 여론으로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장려리(张丽莉) 교원이 자기를 잊고 당금 차에 깔릴 학생들을 구한 영웅적 사적이 전국 인민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지난 5월 8일 저녁, 가목사시 제19중학교 학생들은 저녁자습을 마치고 교문밖으로 몰려나갔습니다. 이때 갑자기 학교 문앞에 있던 버스가 통제를 잃으면서 다른 두대의 차와 충돌한 후 교문어구의 학생들을 덮쳤습니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 3학년 3반 담임교원인 장려리선생(28세)은 차 앞에서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 한 학생을 밀어냈고 또 몸으로 옆에 있는 한 학생을 다른쪽으로 밀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맹렬하게 돌진해오는 차에 깔리여 정신을 읽고 쓰러졌으며 요추, 골반, 미저골, 륵골 등 여러 곳이 골절되였습니다. 그는 병원에 호송되였지만 두 다리는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21일에 두번째 수술을 받았으며 병세가 많이 호전되고 있으며 24일부터는 의식이 맑고 언어가 류창하며 자가호흡도 한다고 합니다. 장려리교사가 위급한 관두에 자아희생 정신으로 학생들을 구한 영웅적 행동은 평소로부터 학생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갖고 있던 감정의 순간적인 표현이라고 볼수 있으며 인민교사의 도덕품성과 위대한 인간성을 충분히 체현하였다고 봅니다. 그는 평시에도 업무에 심혈을 기울여 사생과 학부모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아니라 실제행동으로 무엇이 고상한 품덕이고 용감한 정신인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학생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실제 행동으로 표현하여 새로운 시기 인민교사의 빛나는 이미지를 수립하였습니다. 하여 5월 14일 교육부에서는 장려리선생에게 '전국우수교사'칭호를 수여였으며 5월14일 흑룡강성 부련회는 장려리교사에게 전성 '3.8'붉은기수 영예칭호를 수여하였습니다. 그는 진정한 녀영웅이고 인민교사의 대표적 인물이며 우리들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이와 반면에 지난해 10월 13일 광동성 불산시에서 2살짜리 녀자애가 거리에서 마주 오는 9인승 소형뻐스(面包 車)에 부딪쳐 앞바퀴에 하반신이 깔리였습니다. 운전기사는 차를 세우고 아이를 구할 대신 오히려 뒤바퀴로 뭉개여 놓고 줄행랑을 놓았으며 한참 후 뒤에 오던 트럭도 보지못하고 그애의 두 다리를 깔고 지나갔습니다. 그 애는 고통스레 허우적 거렸지만 선후로 18명이나 되는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보고도 구조에 나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넝마주이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들어서 길가에 옮겨놓으며 구조를 바라서야 아이어머니가 알고 달려와서 병원에 이송되였으나 7일만에 결국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소형뻐스 기사는 아이가 앞바퀴에 깔린것을 알고도 뒤바퀴로 마저 뭉개여 놓고 뺑소니 쳤다는것은 사람의 생명을 파리목숨보다 못 여긴 인피를 쓴 야수라고 할수 있으며 그 광경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은 행인들은 최저의 인간도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30일 산서성(山西省) 삭주(朔州)시 회인(懷仁)현의 한 길 복판에서 정신상태가 좋지 못한 한 남성이 칼로 지나가던 녀성을 마구 찌르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수많은 행인들 가운데서 제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10분 후 경찰에 의해 병원에 호송되였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결국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만약 그 많은 행인들이 단합하여 그 정신질병환자의 행위를 제지시켰더라면 그 녀성을 얼마든지 구하였으려만 모두 외면하여 버렸기에 그 녀성은 결국 무고하게 보귀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프라기라도 잡는다고 내가 물에 빠졌을 때 나는 누군가가 바줄을 던져 줄것을 바랄것이고 목격자는 반드시 바줄을 던져주어야 하고 내집에 불이 났을 때 나는 모두 같이 불을 꺼 줄것을 바랄것이고 주변 사람들은 강건너 불보듯 할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여들어 불을 꺼 주어야 하고 내가 길을 가다가 발목을 접질럴을 때 나는 그 누가 부추켜 줄것을 바랄것이고 목격자는 반드시 그를 부추켜 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사는 사회 공동체입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공동체라고 말할수 없으며 사회공동체를 떠나서는 나도 너도 살수없습니다. 이러한 사회공동체의 구성인원은 서로 관심하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간다면 아름답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할수 있으며 조화로은 사회를 구성한다면 너도 나도 다 잘 살수 있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구조의 손길을 뻗칠 대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듯이 지나가버린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장려리선생이 자기를 잊고 학생들을 구한 행동에 비교하여 볼수 있을가? 비교하여 본다면 어떤 느낌이 있을가? 하는생각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6월 4일
124    6.1국제아동절의 유래와 경축의미 댓글:  조회:10566  추천:16  2012-05-29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 주청룡   6.1국제아동절의 유래와 경축의미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6.1국제아동절의 유래와 경축의미”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해마 6.1절이 돌아오면 소학교들에서는 기념행사를 벌이고 몇 년에 한번씩 현, 시적으로 크게 경축활동을 진행하고있습니다. 저는 이럴때마다 집체무련습에 땀동이를 쏟고있는 학생들을 보고 6.1절이 무슨 명절이며 이 명절이 어떻게 온것인가를 물어보면 그저 6.1절이 어린이들의 명절이라는것만 알뿐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 유래에 대하여 모르는 선생님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까지도 모르니 유감스러운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이 모르니 학생들이야 더 말할나위 있겠는가? 6.1국제아동절의 유래를 보면 1942년 6월, 독일파쑈는 체스꼬슬로벤스꼬 수도 프라하부근의 리디츠촌을 포위하고 16살 이상 남성공민 140명을 살해하였으며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도젤로 마을을 밀어 평지로 만들었으며 어린 아기와 부녀들은 집중영으로 압송하였고 90명 아동은 뽈스까의 한 집중영에 가두었는데 이들 중 전쟁이 끝날 때까지 17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리디츠촌의 희생된 아동과 전쟁중에서 희생된 전세계 아동들을 추모하고 제국주의 전쟁범들이 아동을 학살, 박해하는것을 반대하며 전세계 아동의 생존권, 보건권과 교육을 발을 권리를 보장하고 아동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1949년 11월 쏘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국제 민주부녀련합회 리사회가 열렸는데 회의에서는 정식으로 리디츠촌대학살이 시작된 6월의 첫날을 전세계 아동의 명절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1925년 8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54개 나라의 대표들이 모인 “아동행복국제대회”에서 《제네바아동보장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이 회의 후 여러 나라들에서 자기 나라의 아동절을 제정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1931년 중화아동자선협회에서 매년 4월 4일을 우리 나라 아동절로 하였었는데 새중국이 건립된 후 1949년 12월23일에 중앙인민정부 정무원에서는 매년 6월 1일 국제아동절을 중국아동의 명절로 결정하고 하루 휴식과 함께 경축활동을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지금 6.1절 경축활동을 보면 대부분은 우수한 어린이, 우수보도원들을 표창하고 집체무, 운동대회 등 다양한 형식으로 즐겁게 하루를 보내지만 일부 지구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구체적인 혜택을 가져다 주는 활동으로 전개되고있습니다 . 석가장시 정정(正盯)현에서는 2010년 6.1절 전날 부련회에서 “사랑의 손길’을 뻗쳐 전현의 빈곤아동들에게 130건의 옷을 발급하여 6.1절에 입고 나서도록 하였으며 현 지도간부들은 특수빈곤학생가정을 찾아 조학금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해 산동성 림술현 청운진 제장(临沭县青云镇齐庄)소학교에서는 6.1절을 맞으며 교탁과 학생들의 책걸상을 전부 새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원래 이 고장에 있다가 외지에 나간 민영기업가들이 서로 돈을 기부하여 고향의 교육발전을 지원하엿던것이입니다. 림술현 금류공예품유한회사 부총경리 주숭욱(朱崇旭)은 “오늘 우리는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향의 형제자매들을 잊을수 없으며 고향의 어린이들을 잊을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학교 선생님들은 이렇게 지원을 준 기업가들에게 고향을 떠나서도 고향의 교육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고 있는데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고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후대배양사업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산동성 평읍현 지방진 금지(平邑县地方镇金池)소학교에서는 지난해 6.1절에 애심봉사단으로부터 2000여 권의 도서를 기증받아 도서실에 진렬하여 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오랫동안 바라던 도서가 오자 너무도 기뻐 시간만 있으면 도서실에 달려간답니다 이 현의 애심봉사단에서는 도서 외에도 1000여 원어치의 학용품을 가지고 와서 생활이 곤난한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애심봉사단의 공뢰(巩磊)는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에게 더욱 신심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더욱 많은 학교에 도서실을 앉히여 모든 아이들을 다 기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금년 6.1절을 맞으며 류가승이 모교에 학생들의 통학차를 기증한것이 미담으로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 룡정시 천우건축회사 대상경리 류가승은 어린시절에 룡정시 세린하소학교를 다니였으며 지금은 한 건축회사의 대상경리로 있지만 자기의 모교를 잊을수 없으며 고향의 어린이들을 잊을수 없으며 고향의 어린이들이 왕복 28리의 거리를 힘들게 통학하는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다며 자기의 돈 5만원을 내여 통학차를 사 학교에 기증하여 어린이들이 인제는 비오나 눈이오나 아무런 근심없이 제시간에 등교할수 있어 어린이들의 통학난을 해결하여 학부모들은 그의 선심에 각격해 마지않았으며 학교 선생님들은 “류경리가 모교를 위하여 이렇게 선심을 페푸니 우리는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에서 더욱 큰 결심과 용기가 나온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사회각계에서 지원하고 선생님들이 고무를 받고 학생들을 기쁘게 하는 6.1절 경축활동은 더욱 의미를 띤다고 봅니다. 아동은 조국의 꽃봉오리이고 우리의 희망이며 미래입니다. 연변텔레비의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에서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는 활동이 전개되고 있지만 각 학교의 6.1절 경축활동에서도 사회 각계에서 학교의 설비갱신에 지원을 한다든가 부모없는 아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쳐 그들도 부모와 같이 생활하는 어린이들처럼 웃음꽃을 피우며 행복하게 생활하도록 심리적 안정을 주는 그런 내용이 많이 내포되였으면 어린이들을 더욱 기쁘게 하고 어린이들의 미래를 더욱 밝게 비추어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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