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위본(以人爲本)”이란 “만물에 근본이 있고 그 근본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근본으로 사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모택동동지는 “사람이 많으면 힘이 세다(人多力量大)”고 하였고 우리 말에는 “가난에서 제일 큰 가난이 사람가난이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는 “약이 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귀하다”고, 경로원의 로인들은 “음식이 구섭(귀함)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섭다(그립다)”고 하는지….
필자는 “사람욕심”이 특별하다.
필자의 “사람욕심”은 백부님한테서 배운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필자가 2살(1949년)에 어머니를 잃은 후 아버지가 재혼하여 1950년에 동부이모인 둘째 아들 오기용을 출생했다.
그때 천보산동광에서 기술원으로 출근하던 계모가 27살 나이에 필자보다 한 살이 위인 아들까지 데리고 농민인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그러니까 계모는20대 나이에 3녀3남을 가진 어머니로 구차한 농촌에서 가정을 꾸려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계모가 너무나도 측은하였던지 두 딸을 시집 보낸후에 다시 결합하기로 합의하고 동네손님들까지 청하여 술상을 차리고 “합의리혼식”을 마련했다. 하여 아버지와 감정이 깊었던 계모는 눈물을 흘리며 돌생진도 쇠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천보산으로 돌아 갔다.
그후 얼마나 되였을가, 하루는 백부님이 오셔서 하는 말씀이 “기용이는 밀면 남이 되고 당기면 우리식구가 된다”며 큰 누님더러 당금 동생을 찾아 오라고 강박 하였다. 그리하여 큰 누님은 이틑날로 천보산에 가서 동생을 업어왔다. 그 후 몇 년이 안 되여 아버지가 사망되다 보니 계모의 재결혼이 무산되고 몇 년후부에 우리형제도 큰집에 얹혀서 한집에서 살았는데 그때50평도 안되는 초가에서 한집식구가 많을 때 열 다섯, 필자가 결혼후 분가할 때까지9명이살았다
웅일이로 하여 행복을 만끽하는 조광훈네 가정
그때 백부님은 농촌에서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여러가지 부업을 벌려 “자력갱생”을 하면서(백부님은 모주석저작4권까지 통독 했음) 동생을 심봉쟁이 계모한테 보내지 않았다.
이런 배경으로 자란 필자는1980년대부터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릇 친근한 사이의 외자식부모에게 성별을 불문하고 자식들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형제가 있어야 자식들이 형제사랑, 부모사랑이 있는 감정인간이 된다며 아이를 하나 더 낳으라고 “못살게”굴었다.
그 례로 당년에 연변일보사 왕청주재기자 김철영, 연변인민방송국 도문주재기자 최학철, 도문시공상은행 박순만, 도문시민족비닐공장 공장장 조광훈네가 둘째를 낳은 것이다.
당년에 이들 가정 모두가 이미 “독생자녀”증을 수속했기에 둘째를 못났는다고 할 때 필자는 그때는 하나만 낳으라고 했으나 지금은 조선족들이 둘을 낳을 수 있다고, 김철영은 안해가 처음아이를 제왕절개수술을 하였다며 둘째를 못낳는다고 하니 필자가 서방에서는 산모들이 아름다운 체형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부러 제왕절개수술을 한다고, 박순만은 둘째도 딸일가봐 겁나다고 하자 필자는 성별을 관계치 말고 자식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라고, 최학철은 안해가40이 넘었다고, 조광훈이 자기네 부부가 형제가 많아서 쾐 둘째가 없어도 찮다고…해도 필자는 여하튼 둘째는 낳아야 한다고 설득을 시켰다. 그래서 이들이 낳은 두자식들의 년령 차이가7년이상 , 심지어 12년까지 되였다.
사람의 일은 생각하는 대로 되는가 본다.
첫째가 모두 딸이였던 김철영, 최학철, 조광훈은 모두 둘째로 아들을 보았고 또 딸일가봐 걱정하던 박순만은 걱정 그대로 딸을 낳았는데 둘째 딸이 체격이 훌륭한 미녀로 유치원부터 연변서 모델로 인기몰이를 하였다.
특히 조광훈은 량부모에 장인까지 교원출신인데도 아들을 출생하여 한 달이 지나도 이름을 안 짓고 필자더러 이름을 지으라고 부탁하기에 필자는 조씨가문의 장손이라는데서 조웅일(趙雄一)이라고 작명을 하였다.
이렇게 춝생한 조광훈의 아들 웅일이는 소학교 3학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꼴프를 배우더니 17살에 첫 조선족으로 국가꼴프팀에 입대할 줄이야! 그래서 조광훈은 지금도“웅일이 없었더면 어쨌을가?!” 하며 기뻐서 입이 째질지경이다.
지금 필자의 형제들은 모두가 자식이 둘이상이다.
그에 따라 1984년 생인 며느리까지 2013년 1월 6일에 딸을 순산한 계속으로 2014년 12월 29일에 아들을 순산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손녀의 돌생일에 며느리에게 특제한 사랑패를, 손자의 돌생일에는 특제한 공로패를 드렸다.
공로패는 이렇게 씌여있다.
功 勞 牌
며느리 鄭明淑은 2013년 1월 6일에 손녀 吳佳睿를, 2014년 12월 29일에 손자 吳秀敏을 출산하였다.
吳秀敏은 海州吳氏高祖할아버지 吳昌範의 5대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 오창범은 1920년대에 朝鮮 咸境北都穩城郡穩城邑美浦面長德洞 長德里에서 세 아들인 吳光俊, 吳浩俊, 吳亨俊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中國 吉林省 汪淸懸石峴鎭大磊子에 정착하였다.
吳昌範 ㅡ 吳浩俊 ㅡ 吳基活 ㅡ 吳茂松 ㅡ 吳秀民 順으로 후대를 이어가는 吳秀民의 출생은 海州吳氏가문에 혈통을 이엇고 우리 민족에 族口를 더하여 주었다.
도문시 차세대관심위원회 許相健주임은 “鄭明淑녀사는 출산의 고통을 마다하고 우리 민족에 뜨거운 혈액을 보충한 현대녀성의 본보기이다”고 80후 산모를 칭송하였다.
우리 량주는 손자 吳秀民의 첫돌생일에 즈음하여 特制한 當 功勞牌를 장한 며느리에게 드리며 며느리의 고상한 “녀성정신”을 기린다.
吳基活 金今福
2015년 12월 29일
필자는 아들며느리에게 공로패에 담겨있는 참뜻을 해석해 줌과 동시에 장차 손군들이 공로패에 씌여진 조선글과 중국글을 익숙히 읽고 쓸 줄을 알게 가르키는 것으로 조부들에게 효도를 표하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끝으로 필자가 가문의 일까지 밝히면서 이 글을 올림은 독자들 모두가 가족과 민족의 붉은 피에 끓는 피를 충혈하면서 우리 민족의 넋을 잊지 말자고, 그리고 나라에서 새로 제창하는 “한쌍의 부부 두자녀출생” 정책의 시달에 도움이 되고저 함임을 부디 밝힌다.
“최대의 가난은 사람가난이다”
이 글을 빌어 필자의 싱거운 참견으로 자식농사를 잘한 상기 4가정의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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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팍팍 힘을 넣고 오만한 콧대를 세우고 으시대는 소위 글쟁이들의 수준이...
쓸만한 인재라 싶으면 금방 꼭뒤를 꼭꼭 눌러 애초에 숙청해버려야 지가 사니까.
그래서 중국조선족 사회는 맨날 요 모양 요 꼴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