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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세상은 참 "아이러니"한 세상
2018년 03월 12일 23시 38분  조회:5450  추천:0  작성자: 죽림

 
"인간쓰레기를 청소했을 뿐입니다"
[백범 56주기 추모 인터뷰] 김구 암살범 안두희 응징한 박기서씨
     박도(parkdo) 기자   
 
 
▲ 택시기사 박기서씨
 
ⓒ2005 박도
"우리 나라 독립의 화신이요, 국부(國父)이신 백범 선생을 시해한 그 자는 인간 쓰레기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만고역적 안두희,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다 누린다면 다시는 이 땅의 교육이 안 되지요. 후손을 볼 낯이 없는 일이지요.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무렵 저는 천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왜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랄까 대의랄까, 국가 정의를 위해 그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모든 벌을 받을 각오하고 단죄하였습니다."

백범 선생 56돌 기일을 아흐레 앞둔 지난 6월 17일 오후 2시,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나무 그늘 의자에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56·택시기사)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박기서씨는 지난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안두희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몽둥이로 절명시켰다. 

백범 묘소, 여기만 오면 아주 편해요

 
▲ 백범 김구 선생 존영
 
ⓒ2005 백범기념관
기자는 올 봄 조문기 선생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씨를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에게 안두희의 이 세상 마지막 모습과 그 뒷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에 면담을 부탁드렸는데 박기서씨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서로 사는 곳이 멀고, 그는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어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범 선생의 기일을 넘길 수 없어서 6월 17일로 어렵게 날짜를 잡았다. 우리는 효창원 백범 묘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지인과 점심을 나누면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법치국가에서 개인이 사형으로 보복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와 헤어진 뒤 백범 묘소로 가기 위해 신촌에서 택시를 탔다. "효창동 백범묘소로 갑시다"라고 하자, 기사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는 박기서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안가지만(그 기사의 이름은 안 아무개였다) 그 놈을 제 명대로 못 살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안두희가 제 명대로 다 살고 죽었다면 이 땅에 정의와 양심은 모두 다 땅에 묻혔을 테지요. 같은 택시기사로 박기서씨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 분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합니다." 

백범 묘소 앞에서 박기서씨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대담에 앞서 먼저 묘소에 참배코자 산소로 갔다. 내가 앞장서고 박기서씨가 뒤따랐다. 묘소 앞에 이러르자 박기서씨는 묘소 어귀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았다. 마치 당신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는양.

"여기만 오면 마음이 정화되고 아주 편해요."

절을 두 번 드리고 일어난 박기서씨의 첫 마디였다. 

"제가 지난번 백범 선생 암살 배후 관련 기사를 연재할 때, 몇몇 네티즌들이 '박기서는 미 정보부 끄나풀이 아니냐?'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쪽의 사주를 받아서 안두희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저 세상으로 보낸 거 아니냐? 마치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를 다른 자객들이 죽여 버린 거나 아키노를 암살한 하수인들을 또 다른 총잡이들이 사살해 버린 거와 같이 말입니다." 

기자의 말에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입을 닫지 못했다. 

"우와! 정말, 정반대 생각이네요. 야아 참, 안두희가 미국 정보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이 왜곡된 데는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안두희는 살려둬 봤자 더 이상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살려뒀다가 자연사하면 우리의 민족 정기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뒷날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이며 나중에 백범 선생을 어찌 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청소부 심정으로 안두희 '처단'했다"

 
▲ 안두희
 
 
- 안두희를 처단한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때 저는 버스기사였습니다. 버스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미리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속에 넣고 안두희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 무렵이더군요.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청 기다려도 아침 내내 문이 안 열려요. 그래서 틀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11시 무렵에야 문이 열려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두희 처가 슈퍼에 가려고 문을 따고 나왔다더군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두희 처를 밀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고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일어나서 노려보더라고요. '네가 백범 선생님을 암살했느냐?'라고 다시 다그치자 안두희가 뭐라고 말하는데 분명치가 않더군요. 

사실 그때 나도 무척 흥분돼 있었기에 안두희의 말이 제대로 들릴 리도 없었지요. '내가 오늘 너를 처단하러 왔다'고 하는데 안두희 처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내 뒤를 쳐다 보더라구요.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그 순간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안두희는 키도 크고 주먹도 크더라고요. 그의 덩치와 큰 손을 보는 순간 위압감이 느껴지고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적개심이 불타오르더군요. 그래서 몽둥이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더군요. 

안두희 처가 말로 하지 사람을 치느냐고 달려들더라고요.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해 간 끈으로 안두희의 처 손을 묶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당신도 다친다'고 위협한 뒤 다른 방으로 데려가자 안두희 처가 그제야 제 눈에서 살기를 눈치 채고는 벌벌 떨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다시 안두희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냥 복날 개 패듯이 팼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줄 게 아니라 아예 끝장을 내려고 작정하고 갔었지요."

"백범 선생 살아계셨다면 6·25 일어나지 않았을 것"

 
▲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박기서씨
 
ⓒ2005 박도
 
- 그 뒤 안두희가 꿈에 보이거나 응징에 대한 죄의식은 없는지요? 
"안두희가 나타난 꿈은 한번도 꾸지 않았어요. 저도 피와 눈물이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제나 이제나 나는 안두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요.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6·25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단정'을 세웠던 이승만 일파가 백범 선생을 암살하자 민심이 7할 이상은 돌아 버린 거예요. 김일성이 그 반이(反李, 반이승만) 정서를 자기 지지로 오판하여 밀고 내려온 거지요. 또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백범 선생이 계셨더라면 아마 전선으로 달려가서 온몸으로 막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백범 선생을 깔아뭉개고 남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안두희와 그 일당은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죄를 진 반역자들입니다."

- 그 일로 형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살고 청주에서 6개월 정도 사는데 3·1절 특사로 풀어주더군요. 그런데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더라고요."

외람되지만 이는 마치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독립전사들이 감옥이나 형장에서 느끼는 행복과 같을 거라고 했다. 마침 가까운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원생들을 데리고 왔다. 언저리가 소란하여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묘소 언저리를 거닐었다.

 
  백범이 살아계셨더라면...  
 
 
 
▲ 1949. 7. 5. 백범 장의 행렬이 서울 소공동을 지나고 있다.
ⓒNARA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받아준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 (1948. 2. 10.)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 김구 주석 '남북동포에 격(檄)' (1948. 4. 21.) 


우리 나라 근현대사를 살펴 보면, 일년 열두 달 가운데 슬프고 아프지 않은 달은 없다. 그 가운데 6월은 가장 슬프고도 가슴 아픈 달이다. 1950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일까지 3년여를 끌었던 동족상잔의 이 전쟁은 남북한 동포 5백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울러 1백여만 명의 외국군인(유엔군과 중공군)도 희생되었지만,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여태 쉬고 있는 '휴전' 상태로 있다. 어느 미국인 종군기자는 "한국전쟁 기간 중, 폭격으로 한반도 전역은 마치 석기시대로 되돌아간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해방 후 국토가 분단되자 백범 선생은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미리 예측했다. 백범 선생은 국토의 영구 분단을 막고 동존상잔의 전쟁을 막고자 38선을 넘나들며 온몸으로 겨레의 비극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반통일 세력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만일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만은 막아 내지 않았을까?
 
 
 
 
 
 
"백범 선생은 내 삶의 나침판"
[백범 56주기 추모 인터뷰] 김구 암살범 안두희 응징한 박기서씨
     박도(parkdo) 기자   
 
 
▲ 백범 묘쇼 앞에 선 박기서씨
 
ⓒ2005 박도
 
박기서. 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시 산외면 참시내(진계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일찍이 전봉준 장군이 머물기도 했고, 마을 뒷산에는 동학농민전쟁의 김개남 장군 묘소도 있다.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전주로 유학 갔지만 그는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내렸다고 했다. 

기자가 뒤늦게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지고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독립운동 관련 책을 펼쳐보거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독립전사로 앞장서거나 독립운동 성금을 보낸 이들은 의외로 가난하고 못 배운 무지렁이들이 더 많았다.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이는 하와이나 멕시코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태반이었다. 기자가 연전에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성금을 모을 때도 대부분 서민들이 쌈짓돈을 보내 주셨다. 독립전선의 선봉장에 선 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포수에서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이 된 홍범도 장군, 소작농에서 조선혁명군총사령이 된 양세봉 장군, 신돌석 장군 등…. 

단군 이래 이 나라를 지켜온 이는 기층 민중들이었지 결코 지배 계급은 아니었다고 한 역사학자는 말했다.

시간 되돌려도 안두희 응징할 것

 
▲ 박기서씨(백범 묘쇼 앞에서)
 
ⓒ2005 박도
- 출감 후의 전과자로서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출감 후 취직이 잘 안 되더라고요. 박기서라는 사람은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던 모양이에요. 운전대로 먹고 살려면 오너가 되는 수밖에 없데요. 그래서 개인택시를 샀습니다. 여태 그 빚 갚는다고 허리가 휘어집니다."

- 가족 관계는? 
"처와 두 딸과 아들입니다. 제가 안두희를 처단할 때가 맏딸이 대입 수능 시험을 20일 앞둔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유치장이다 교도소다 재판 받는다고 마음 고생이 많았나 봐요. 늘 그 점을 미안케 생각합니다. 지금은 출가했고 네 식구가 살고 있어요."

- 요즘 택시 요금이 올라서 손님이 없어서 어렵다고 하던데요. 
"서울에는 올랐지만 제가 사는 부천에는 아직 오르지 않았습니다. 택시기사가 가장 경기에 민감하다고 하는데 어려운 때가 어제 오늘이 아니지요. 외환 위기 후 늘 어려웠어요. 우리들 어려운 것보다 젊은이들이 일감이 없는 게 더 걱정이지요."

- 택시 손님들 중에 박기서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요? 
"하루에 50분 정도 손님을 모십니다. 개중에는 앞좌석에 이름도 있으니 알아 보는 이도 있습니다. 격려해 주시는 분도 있고,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분도 있습니다."

-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회개 반성하는 삶이 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박기서, 그는 <백범일지>를 줄줄 외웠다. 백범(白凡)은 '백정(白丁) 범부(凡夫)'의 준말로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출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백범을 알고부터는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지 않고, 못 배워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늘 백범의 진정성과 역사관, 겨레와 나라에 대한 헌신적인 백범 정신에 감격한다고 했다. 또 백범을 통해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면서 백범은 겨레의 스승이요, 우리 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다.

-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동학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나라가 달라졌을 겁니다. 백성들이 깨어 있어서 다시 민족 반역의 무리나 그 후손들이 지도자가 되거나 외세에 빌붙는 이들을 이 땅에 지도자로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백범 선생은 내 삶의 나침판이었습니다. 그 어른을 위하는 일이라면 남은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 효창원 백범 묘소
 
ⓒ2005 박도
 
- 다시 그런 기회가 와도 안두희를 몽둥이로 내리치겠습니까? 
"그러믄요. 마음 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인데, 제 행위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긴 겁니다. 그를 처단하고 내 발로 자수해 교도소도 갔지만 복역 기간 내내 제 행동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교도소에 있었던 그 기간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기뻤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피는 좀 묻혔지만 민족정기를 말살한 인간 쓰레기를, 젊은이들의 정신을 썩게 하고, 고약한 냄새로 세상을 더럽히는 자를 자기가 처치했다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었다. 

기자에게 굳이 밥 한 끼를 대접하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뿌리쳤다. 그러면 전철역까지 당신 택시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그마저 거절할 수 없어서 남영동 역까지 신세를 졌다. 그 때문에 택시를 타고도 요금을 내지 않고 내리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암살범 안두희는 어떻게 살았나?  
  소령 예편 후 군납공장 차려 부 쌓아  
 
 
 
▲ 안두희의 수기 <시역의 고민>
 
R 중위는 이번 나의 형을 무기징역 정도 예언하면서, 복역 중 후견인이 되어 주마하며 만약 사형이 되면 '후일 저승에서 다시 만나자'는 농담 아닌 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나는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밤이 깊었는데 "안 소위 자는가?"하며 R 중위가 또 왔다. 들고 온 종이조각을 내민다.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 "안두희 만세!" "무죄석방 만세!"라고 쓴 아직도 풀이 마르지 않은 벽보였다. 


안두희가 썼다는 <시역의 고민> 끝부분이다.

백범 암살 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3개월 후인 그해 11월에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마침내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곧이어 그해 7월 10일, 국방부 특명 4호에 의해 육군소위로 복귀하였으며, 육군 특무대 문관 및 포병교육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1951년 2월 15일자로 육군고등군법회의 명령 제56호에 의해 형 면제조치를 받았다. 

암살범 안두희는 1951년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했다. 그 후 1956년까지 서울 명동에서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그 뒤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차려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소득세를 많이 내는 부자가 되었다.

그런 중, 안두희는 가족들을 몰래 미국으로 보낸 다음, 1981년 자기도 이민 가기 위해 몰래 여권 발급을 받았다. 하지만 독립유공단체들이 이를 알고서 법무부와 미대사관에 항의하여 출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출처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 오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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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이 지난 오늘에서 감회라면.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가 다시 없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그때 안두희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안두희는 아마 자연사했을 것이라는 얘기임). 하늘이 도왔는지 그때 다행히도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자(死者, 안두희)에게는 인간적으로는 미안하고 또 가슴 아픈 일입니다만, 저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 혹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인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죽일 작정을 하고 간 것인가요?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처단할 작정을 하고 찾아갔었습니다."

- 안두희를 왜 처단하려고 했습니까?
"국부를 시해한 자가 세 치 혀를 놀리며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안두희를) 처단했습니다."

- 언제부터 안두희를 처단할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권중희 선생이 마포구청 앞에서 안두희를 구타한 사건을 접하고서 저렇게 때릴 게 아니라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때부터 마음먹었습니다."

▲  백범 시해범 안두희
안두희는 생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응징을 당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 후 '김구 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안두희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잠적했는데 그 무렵 길거리에서 몇 차례 테러를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4월 18일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습니다. 1965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던 중 백범독서회장 곽태영(2008년 작고) 선생에게 발각돼 목을 찔렸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그는 20여 년간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숨어 살다가 1987년 3월 28일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2007년 작고) 선생에게 붙잡혀 몽둥이 응징을 당하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이후 그는 또다시 행방을 감춘 채 인천에서 숨어살다가 15년 전 박 선생의 '정의봉'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 정의봉은 언제, 어떻게 준비한 것입니까?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도구로 뭘 사용할까 고민하다가 부천시장 내 그릇가게에 가서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40cm 크기) 하나를 4000원을 주고 샀습니다. 머리 부분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고 써서 거사 때 사용했습니다."

지난 23일 그는 15주년 기념모임 때 정의봉 실물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만져 보았더니 나무 재질이 단단해 가격할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줄 만했습니다. 거사 후 현장에 두고 온 것을 경찰이 증거물로 수거했다가 재판 후 되돌려줘 현재는 그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안두희 마주하자 두려움 사라져... 조폭이 물었다 "얼마 받았소?"

▲ 안두희를 응징한 '정의봉' 15년 전 안두희를 응징할 때 사용한 '정의봉'과 그 때 썼던 안중근 의사 글귀를 들고 있는 박기서씨
ⓒ 김선기

 


- 안두희를 처단할 때 두렵지 않았나요?
"처음엔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상 안두희를 마주치게 되고 또 백범 선생 생각을 하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 천주교 신자인데…, 인간적인 갈등 같은 건 없었나요?
"집안의 어린 아이들도 생각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이고 또 기회는 이 때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곧바로 자수했다고 들었습니다.
"안두희가 절명한 것을 확인하자 성공했다는 생각도 하기 전에 제 자신이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잠시 멍하니 마루에 섰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집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삼정동성당으로 행했습니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만나 뵙고 싶었던 신부님이 안 계셔서 다시 심곡동 본당 성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한 신부님을 뵙고 고해성사를 하였으며 그 신부님이 경찰서로 연락하여 그날로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 사전에 거사를 상의하거나 또 도움을 받은 분이 있습니까?
"평소 다니던 성당에서 1년에 몇 차례씩 고해성사를 하곤 했는데, 하루는 신부님에게 '백범 시해범 안두희를 제 손으로 처단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만일 그런 일이 실지로 일어난다면 그건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신부님은 저를 잘 모르는 분이었지만 그 신부님의 말씀이 작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구속, 기소돼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선고를 받았으며, 2심에서 5년 구형에 3년 선고를 받고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이후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청주교도소에서 6개월가량 옥살이를 하다가 범행동기가 정상참작이 돼 1998년 3·1절 특사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 감옥살이는 어땠습니까? 일화 같은 건 없습니까?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에 부담은 별로 없었던 데다 독립유공자 조문기(2008년 작고) 선생님, 저보다 앞서 안두희를 응징하신 곽태영 선생님, 권중희 선생님 등이 자주 면회를 와주셔서 큰 힘이 됐습니다. 우스개 같은 일화 하나를 소개해 드리자면, 그때 조폭 출신이 방장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제게 '얼마를 받기로 했느냐?'고 묻더군요. 아마 그들은 대가를 조건으로 그런 일도 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  작년 5월 리영희 선생이 입원해 있던 병실을 찾은 박기서씨
ⓒ 김용삼

 

제가 알고 있는 그의 감옥시절 일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박 선생이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어느 날 박 선생 앞으로 엽서가 한 통 배달됐습니다. 발신자는 '리영희'. 그런데 그때 박 선생은 리영희가 누군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같은 감방에 있던 한총련 출신 청년에게 리영희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알려 주더라는 겁니다. 그 엽서에서 리영희 선생은 박 선생을 '의기 남아(義氣男兒)'라고 칭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박 선생은 출감 후 연희동으로 리 선생을 찾아뵈었고, 지난해 말 리 선생 빈소에 조문을 오기도 했습니다. - 감옥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생활하면서 피해를 본 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우선 취직이 잘 안 됐습니다. 15년 전 거사 당시 부천에서 버스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출감 후 복직은 바로 됐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거길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로 취직이 안되더라구요. 이유는 제가 '살인'을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로 가서 한동안 버스 운전을 하다가 개인택시 자격을 따서 지금의 택시를 하고 있습니다."

안두희 처단자는 160cm의 단신... "배운 사람이 잘못해서"

어떤 이는 박 선생이 안두희를 처단했다고 하니 덩치도 크고 힘깨나 쓰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160cm의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왜소한 편입니다. 또 60대 초반의 육체노동자치고는 얼굴도 맑으며 곱상한 편입니다. 게다가 그는 무슨 '학습' 같은 걸 통해 이념이나 주의주장에 매몰된 사람도 아닙니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도 초등학교밖에 다니질 못 했다고 합니다. 대체 그런 그가 어떻게 범인(凡人)이 하기 쉽지 않은 일을 하게 됐을까요?  

- 성장기와 집안사정이 궁금합니다.
"전북 정읍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했습니다.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올라 왔는데, 셋째 형이 먼저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배웠습니다. 부족한 공부를 보강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이런저런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느낀 생각 중 하나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 학식에 걸맞은 바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 들자면요?
"안두희가 썼다는 <시역(弑逆)의 고민>이라는 책의 복사본을 우연히 하나 구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을 시해할 당시 안두희는 장교였으니 엘리트라면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 자가 돈과 권력에 취해 이승만의 하수인을 자처하며 주구 노릇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근대 이후 우리 역사를 보면 저 같이 못 배운 사람들보다는 배운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입에서 돌연 '이승만' 석 자가 튀어 나오길래 최근 이승만을 둘러싼 몇몇 논란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KBS의 '이승만 특집방송'과 자유총연맹에서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 일 등 말입니다. 

- 최근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네, KBS가 '이승만 특집방송'을 한다고 할 때 다른 동지들과 함께 KBS 앞에서 열린 농성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4·19혁명으로 이미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물에 대해 공영방송에서 미화작업을 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뉴라이트 진영의 역사교과서 왜곡 작업도 알고 있습니까?
"언론보도를 통해 들어서 조금은 압니다. 차마 입에 담기도 뭣한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주장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선열들의 항일투쟁사를 조금이라도 배운 자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선엽-이승만에 이어 머잖아 박정희 미화 작업이 뒤따를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는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음모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종로1가 한일관에서 열린 박기서씨 석방 환영 모임(1998. 3. 24). 오른쪽부터 박기서씨 부인, 곽태영 선생, 박씨, 진채호 선생
ⓒ 정운현

 


그는 요즘 작은 '감투'를 하나 쓰고 있습니다. '효사모 대표'가 그것입니다. '효사모'는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약칭인데요, 효창원에는 백범 선생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의사, 그리고 임정 요인 세 분(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묘소가 있습니다. '효사모'는 효창원 성역화작업 등 효창원 묘역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백범 묘소에는 자주 가십니까?
"요즘은 택시일 하느라고 수요일, 일요일밖에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가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더러 짬을 내서 찾기도 합니다. 백범 관련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때는 가능하면 참석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 효사모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뜻있는 분들 몇 분이 모여서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무얼 실행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효창원 선열 묘역의 역사성과 의미를 널리 알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관계당국에 촉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효창원 성역화는 단순히 묘역 세 군데를 정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선 묘역 앞에 있는 효창운동장을 이전하고 이 일대를 백지에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묘역 정비와 함께 후세 교육의 장으로 삼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시일이 걸리더라도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일본 장교 스치다 처단한 백범... 그를 따랐다

▲  박기서씨 의거 15주년을 맞아 23일 낮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린 기념모임
ⓒ 김선기

 


그의 의거 15주년인 23일(2014년 8월), 오전 11시. 애국선열후손인 차영조, 유종하, 신창우, 황의형 선생, 4월혁명회 정동익 회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효사모 회원, 청년백범 회원 등 남녀노소 20여 명이 백범 묘소 앞에 모였습니다. '청년백범'의 조선동 회장 사회로 간단한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국민의례에 이어 사회자의 요청으로 김삼웅 전 관장이 박 선생 의거의 의의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습니다.

"백범 선생이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처단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국모(명성황후)를 살해한 원수가 버젓이 활보하는데도 이를 보고 그냥 놔두는 것은 조선 백성으로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맨손으로 백주에 스치다를 처단하고는 떳떳하게 황해도에 사는 김창수(백범의 아명)가 이런 이유로 죽였노라고 써서 붙였습니다. 

그런 백범 선생이 이승만 권력의 사주로 암살되고 암살범 안두희는 한동안 살아 있었습니다. 안두희가 우리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것을 분노하면서도 그 누구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바 있는데 행동하지 않고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옮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기서 선생이 15년 전에 안두희를 처단한 것은 스치다를 처단한 백범의 정신을 이은 것으로, 수많은 애국청년과 지사를 대신해 결행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 안두희 응징 1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패
ⓒ 김선기

 

이어 이날 참가들을 대표해 임시정부 비서장 차이석 선생의 자제 차영조 선생이 박기서 선생에게 작은 기념패 하나를 전달했습니다. 기념패엔 세로로 쓴 '유방백세(遺芳百世)' 한자 네 글자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遺芳百世

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
박기서 선생님의 의거 15주년을 기념하여 백정범부들이 드립니다.

2011년 10월 23일 

* 참고로, '유방백세(遺芳百世)'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애국정신이 영원히 겨레의 가슴 속에 이어지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 네 글자는 백범이 해방 이듬해 일본에서 3의사의 유해를 봉환해와 이곳 효창원에 묘역을 조성한 후 손수 써서 묘역 계단석에 새긴 글자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 유해를 발굴하지 못해 나중에 유해를 봉환해 올 것에 대비해 허묘(빈 무덤)을 조성했습니다. 그때 이후 안 의사 묘소는 여태 유해를 모시지 못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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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맞고 , 군복 차림의 괴청년들이 안두희를 데리고 사라지기까지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은 ,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 중

 

 

백범이 1945년 경교장 2층 창가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이 자리에서 안두희의 저격을 받았다. <한겨레>자료사진.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하자 정치적 배후 세력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안두희는 알려지지 않은 ‘배후 세력’의 비호 속에 거처를 옮겨 다니며 숨어 지냈다. 이 때문에 백범 살해 진상 규명을 위해 나선 건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었다.

 

정확히 52년 전인 1965년 12월 22일, 한 청년의 끈질긴 추적 끝에 암살범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지 16년여 만에 처음으로 응분의 죗값을 치르게 됐다. ‘역사 속 오늘’은 그날과 그날의 주인공인 29살 청년 곽태영의 이야기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 피습 당일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많은 사람들이 경교장을 찾아 문상하며 통곡했다. 남북협상을 추진한 김구는 이승만 세력에게 사실상 ‘빨갱이’와 같은 존재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네가 백범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암살범이지”

 

 

1965년 12월 22일 당시 29살이던 청년 곽태영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와 마주했다.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살해된 1949년 6월 26일, 곽 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백범 살해 소식에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집에서는 아버지와 독립운동가셨던 숙부가 구슬피 울었다. 곽 씨는 “애국자인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를 죽여야겠다”라는 각오를 마음 깊이 새겼다. 그리고 약 16년이 지난 1965년, 드디어 안두희와 마주하게 됐다.

 

안두희 피습 소식을 담은 <경향신문> 1965년 12월 22일치(왼쪽). 시민들의 곽태영 씨 석방 요구 소식을 담은 <경향신문> 1966년 1월 12일치.
곽 씨는 미리 준비한 돌과 흉기를 안두희의 목과 머리에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곽 씨는 안두희가 숨진 것으로 보고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 만세! 남북통일 만세! 삼천만 국민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피격 직후 경찰에 체포되자 “3천만 (국민)의 원한을 풀어서 통쾌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두희는 두 차례의 수술 끝에 결국 목숨을 건졌다. 곽 씨는 구속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울고법 형사부는 1966년 7월 30일에 열린 항소심에서 곽 씨의 범행 동기가 ‘공분’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이로써 곽 씨는 수감된 지 220일 만에 석방됐다.

 

 

안두희를 쫓던 추적자들

 

곽 씨는 전국적인 석방 운동에도 200여 일을 넘게 구속 수감됐다가 풀려났다. 반면,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도 합당한 죗값을 받지 않았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암살한 뒤 곧바로 연행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뒤 15년형으로 감형됐다. 그마저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포병장교로 복귀한 안두희는 1951년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했다. 1953년 2월 15일에는 완전히 복권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두희는 4·19혁명 이후 <백범 살해 진상 규명 투쟁 위원회>가 발족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잠적했다.

 

 

<경향신문> 1961년 4월 18일 치.
안두희의 잠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잠적 이듬해인 1961년 그를 쫓던 <백범 살해 진상 규명 투쟁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 의해 결국 붙잡힌 것이다. 김용희는 안두희를 다그쳐 사건 전말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녹취록을 검찰에 넘겼다. 하지만 검찰은 암살범의 자백을 담은 명백한 녹취 증거에도 공소시효를 핑계로 안두희를 풀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4년 반이 지난 1965년 청년 곽태영이 안두희를 응징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곽태영의 피격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안두희는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을 쓰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지냈다. 하지만 22년이 지난 1987년 3월 <민족정기구현> 권중희 회장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돼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권중희는 안두희로부터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게 하는 등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안두희가 국회 법사위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 소위';에서 증언하고 있다. 1994.01.04 진천규 기자
안두희가 국회 법사위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 소위'에서 증언하고 있다. 1994.01.04 진천규 기자
그럼에도 안두희는 1994년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의 증인으로 출석한 자리에서 끝내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께, 안두희는 인천시 중구 신흥동 집에서 당시 버스 기사였던 박기서에게 피살당했다. 박 씨는 경찰에 연행돼 “의로운 일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진술했다.

 

 

청년 곽태영이 안두희를 응징했던 이유

 

<동아일보> 1997년 6월 26일치.
곽 씨는 석방 뒤 30여 년이 지난 1997년 6월 2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석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그는 “재판에서 실형을 구형받았지만 120만 명의 탄원서 덕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이후의 내 삶은 백범의 발자취를 찾고 백범 살해의 진상을 캐는 데 바쳐졌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곽 씨의 안두희 피격 기사가 보도된 당시 전국적으로 곽 씨 석방 운동이 거셌고, 재판장에는 많은 방청객이 몰리기도 했다.

 

<동아일보> 1979년 9월 27일 치.
“천인공노할 민족의 역적이 버젓이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그놈을 징치했지요 ”

 

- <동아일보 > 1979년 9월 27일자 ‘그 사람 지금은 ’ 안두희 살해 미수 사건 곽태영 씨 편

 

 

 

곽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두희를 응징한 이유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혔다.

 

곽 씨는 앞서 얘기했듯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숙부와 애국심이 남달랐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곽 씨의 아버지는 곽 씨가 안두희를 피격하고 구속 수감됐을 때,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 잔재 청산과 곽태영

 

 

안두희 피격 이후 곽태영 씨는 일제 잔재 청산 등 사회 운동에 앞장서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도 부당한 것에 불복해 민족의 정기를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2000년 박정희 흉상 철거

 

주종환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공동대표(왼쪽에서 두 번째)와 홍익대민주동문회 회원 등이 홍익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6쿠데타 주범의 흉상을 시민들의 쉼터에 버젓이 세워놓은 잘못된 처사를 바로잡기 위해 흉상을 철거했다”며 홍익대 쪽이 흉상을 전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00년 11월 7일 곽윤섭 기자
주종환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공동대표(왼쪽에서 두 번째)와 홍익대민주동문회 회원 등이 홍익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6쿠데타 주범의 흉상을 시민들의 쉼터에 버젓이 세워놓은 잘못된 처사를 바로잡기 위해 흉상을 철거했다”며 홍익대 쪽이 흉상을 전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00년 11월 7일 곽윤섭 기자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있던 박정희 흉상이 철거될 때에도 곽태영 씨는 현장을 주도했다.

 

이 흉상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군 제6관구 사령부가 있었던 문래공원 자리에서 박정희가 쿠데타를 지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6년에 홍익대가 기증한 것이다.

 

홍익대 민주동문회는 34년이 지난 2000년 11월 5일 앞장서 흉상을 철거했다. 5개 시민단체와 정당 회원 등이 함께 한 이 자리에서 <4월 혁명> 회장이 된 곽태영 씨는 “5.16 쿠데타 주범의 흉상을 시민들의 쉼터에 버젓이 세워놓은 잘못된 처사를 바로잡기 위해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곽태영 <4월 혁명> 회장은 박정희 흉상 철거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1년 박정희 탑골공원 현판 삼일문 철거

 

곽태영 민족정기소생회 대표(가운데)와 우경태 한국민족청년회 집행위원장(오른쪽) 등이 서울 중구 향린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탑골공원의 삼일문 현판을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떼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1년 11월 23일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곽태영 민족정기소생회 대표(가운데)와 우경태 한국민족청년회 집행위원장(오른쪽) 등이 서울 중구 향린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탑골공원의 삼일문 현판을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떼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1년 11월 23일 강창광 기자 
이에 그치지 않았다. 박정희 흉상이 철거된 이듬해인 2001년 11월 23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쓴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 정문 현판인 ‘삼일문’을 떼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도 곽태영 씨가 주도했다. <민족정기소생회> 대표가 된 곽태영 씨와 <한국민족청년회> 우경태 집행위원장 등 5명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중구 향린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족정기가 서린 탑골공원에 일제시대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글이 올라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며 “그동안 삼일문 현판을 교체해 달라고 서울시와 관계 당국에 수차례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직접 나섰다”고 철거 이유를 밝혔다.

 

곽태영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글씨를 쓴 탑골공원 `삼일문' 현판을 떼어 사건과 관련 기자회견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2001년 11월 23일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곽태영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글씨를 쓴 탑골공원 `삼일문' 현판을 떼어 사건과 관련 기자회견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2001년 11월 23일 강창광 기자 

 

이들은 삼일문 현판을 떼어낸 자리에 “박정희가 쓴 현판을 민족정기의 이름으로 철거함”이란 글을 붙여놓았다.

 

곽 대표 등은 기자회견 뒤 교회 주차장에서 삼일문 현판을 불태우려 했으나 출동한 경찰에 제지당하고 공공물건 손상 혐의로 연행됐다.

 

 

-2004년 박정희 기념관 건립 무산

 

 

“일제에 아부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했던 대통령을 기념하는 건물을 짓기 위한 한 치의 땅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된 곽태영 씨는 2000년 9월에는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를 꾸려 꾸준한 운동 끝에 2004년 건립을 최종 무산시켰다.

 

곽 대표는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조국을 배반하고 한반도를 침략했던 히로히토에게 충성했던 만주국 장교였다”며 “독립군을 탄압했고 4·19 혁명을 짓밟고 18년 동안 독재를 하면서 총칼로 민주주의를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겨레> 2004년 11월 3일자.
곽 대표는 박정희기념관을 짓기로 했던 정부 지원금 200억 원을 환수해 다른 사업에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독립군 위령탑 하나 없고, 또 일제 침략에 맞서 싸웠던 의병기념관도 없다”며 “후손들을 위해 이 두 가지 사업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5년 4.19 박근혜 화환 짓밟기도

 

<한겨레> 2005년 4월 20일 치(왼쪽). <한겨레> 2005년 3월 26일 치.
“박정희의 딸이 여기가 어디라고 건방지게 헌화를 하느냐. ”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4·19 혁명 45돌을 맞아 서울 수유리 묘지에 화환을 보냈다 . 이를 본 곽태영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재야단체들이 참석한 ‘4·19 혁명 민중통일단체 합동참배’ 기념식 도중 앞으로 나갔다. 그는 박근혜가 보낸 추모 화환을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짓밟았다. 그러면서 곽씨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화환을 없애버리자”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진 행사에서 “4·19 혁명 정신을 살려 친일독재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렇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곽태영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2008년 12월 1일 지병인 당뇨로 숨을 거뒀다.

 

 

 

참고문헌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 선우진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 박태균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 권중희

 

백범김구기념관 공식 누리집

 

<경향신문 > 1965년 12월 22일치 , 1966년 1월 12일치

 

<동아일보 > 1997년 6월 26일치

 

<한겨레 > 2004 11월 3일치 , 2005년 3월 26일치 , 4월 20일치

 

 

 

/강민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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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출판기념회를 마치고(오른쪽부터 박기서 의사, 권중희 선생 부인 김영자 여사, 저자 박도, 서평을 써준 고상만 시민기자,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2013. 3.> ⓒ 박도

 


안두희, 그는 누구인가?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초창기에 토지측량기사로 떼돈을 번 졸부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모든 재산은 공산당에게 몰수당했다. 게다가 반동분자로 몰려 가족은 거주지 신의주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그의 가족은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7년 서울에 정착한 안두희는 곧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그 무렵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 백의사(白衣社) 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11월, 안두희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하여 3개월 교육을 받은 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 4월, 안두희는 동향 홍종만의 주선으로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를 통해 당원이 되었다. 이는 김구 살해사건의 원인을 한독당 당내 내분으로 조작하려는 사전의 치밀한 음모였다. 마침내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한낮 경교장에서 소지한 미제 45구경 권총으로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네 번이나 당겼다.

 안두희의 흉탄에 운명하신 백범 김구 선생.
▲  안두희의 흉탄에 운명하신 백범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범행 이후 안두희는 줄곧 단독 범행이었다고 주장하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배후 없는 단독 범행이다. 국가를 위하여 (백범) 선생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결심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1949년 8월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43조(정치관여)와 제48조(살인)를 적용받아 총살형을 구형 받았다. 하지만 곧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종신형을 판결 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안두희의 배후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당시 권력의 최고 실세였던 김창룡.
▲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당시 권력의 최고 실세였던 김창룡.
ⓒ 고 권중희

 

안두희는 복역 3개월만인 1949년 11월,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상신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안두희에게 종신형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조치를 내렸다. 

그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틀 뒤인 6월 27일, 육군정보국 김창룡 소령이 안두희가 수감 중인 대전 육군형무소에  찾아왔다. 

그는 육군형무소장에게 국방부장관의 잔형집행정지처분 명령서를 전했다. 그러자 안두희는 그날로 즉시 석방되었다.

안두희가 석방되자 곧  신성모 국방장관은 1950년 7월 10일 자 국방부 특명 제4호로, 안두희를 현역(육군 소위)에 복직시켰다. 

1952년 12월 25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이기붕이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이기붕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두희를 그대로 두면 민심이 더욱 흉흉하다고 건의했다. 이 국방장관은 이 대통령의 재가 후 그 후속조치로 국방부 특명 제229호로 안두희를 1계급 특진시켜 육군 소령으로 전격 예편시켰다. 

이후 안두희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김창룡 육군 특무대장의 비호로, 김창룡 사후에는 자유당 실세인 이재학, 김진만, 이상철 등의 후원으로, 기세 등등하게 살았다.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다 군납공장을 차렸다. 그러자 당시 군부대장들은 알아서 기며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다. 그의 재산이 늘아난 만큼 국군 병사들은 악식에 시달렸음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안두희 추적자, 권중희는 누구인가?
 권중희 선생(2003. 11. 서울서대문형무소 3.1 기념탑 앞에서)
▲  권중희 선생(2003. 11. 서울서대문형무소 3.1 기념탑 앞에서)
ⓒ 박도

 

권중희는 경북 안동 태생으로 1983년부터 10여 년간 안두희를 끈질기게 추적 응징했다. 

권중희는 미국으로 몰래 출국하려는 안두희의 소재를 파악한 뒤 끈질기게 추적하다가 나중에는 그만 바둑 친구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권중희는 안두희를 구슬러 백범 암살 배후를 캐물었으나 안두희는 정색을 하며 그때마다 묵비권을 행사했다. 

권중희는 좋은 말로는 백범 암살 진상을 규명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1987년 3월 27일 외출하는 안두희를 미행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마포구청 앞 버스정류장에 이르렀을 때 권중희는 미리 준비한 '정의봉' 몽둥이로 안두희의 온몸을 흠씬 두들겨 팼다. 

그때 안두희는 머리가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혔다. 이 일로 권중희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교도소에 수감된지 37일만에 풀려났다. 이후에도 안두희는 계속 입을 굳게 다무는 모르쇠 작전으로 일관했다. 

그런 가운데 박기서 의사가 안두희를 처단해 버리자 권중희는 크게 낙담하던 가운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나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그 기사가 온라인에 뜨자 여러 누리꾼들이 백범 암살 진상을 규명하라고 열화와 같은 성금을 보내줬다. 그 성금으로 2004년 1월 나는 권 선생을 모시고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문서를 찾고자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갔다.

그때 나는 권중희 선생과 한 숙소에서 47일간 기거(동침)했다. 그래서 권 선생으로부터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한 얘기는 아주 귀에 익도록 들었다. 안두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안두희가 '권중희' 앞에서는 벌벌 떨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사연인즉, 권 선생은 10여 년간 안두희를 끈질기게 뒤좇으며 감언이설로, 때로는 갖은 협박으로 다그쳤다. 하지만 안두희는 줄곧 단독범이라고 우기며 모로쇠로 일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권중희는 1992년 9월 23일을 최종 D데이[작전개시일]로 정하고, 두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인천 안두희 집에서 그를 결박한 뒤, 승용차에 태워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에 있는 한 농장으로 데려갔다. 권중희는 그 농장에서 안두희의 결박을 푼 다음 처음에는 말로 좋게 타일렀다. 

 백범 김구 선생
▲  백범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너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네 (재혼한) 처가 자꾸만 방해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이곳에서 너의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 데려 온 것이다. 이제 사건 전모를 속 시원하게 모두 털어놓아라."
"나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오늘이 내 제삿날로 각오하고 있으니 네 맘대로 하라."

안두희의 첫 마디가 권중희의 성질을 건드렸다. 하지만 권중희는 그의 진심어린 자백을 받아내고자 꾹 참고 계속 안두희를 설득했다.

"너의 가슴 한구석에 털끝만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모든 것을 실토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속죄해야 할 것 아니냐."
 "…."

 백범 묘소 앞에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안두희
▲  백범 묘소 앞에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안두희
ⓒ 고 권중희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한 '대침'

권중희의 애소에도 안두희는 계속 입을 굳게 닫았다. 안두희는 암살 배후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 모르쇠 작전으로 일관할 심산이었다. 이에 화가난 권중희는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을 썼다. 

권중희는 평소 침술을 공부했던 바, 생명에는 지장이 없게 안두희의 엉덩이에다가 준비해 간 대침을 8~9차례 꽂았다. 그러자 그렇게 고집 부리던 안두희는 마침내 그 대침에 굴복하여 곧 입을 열어 백범 암살사건 진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날  안두희는 네댓 시간에 걸쳐 백범 암살 진상을 술술 이야기했다. 그때 안두희는 중풍으로 발음이 시원찮고 속도도 느렸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아주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안두희는 권중희가 묻지도 않는 얘기까지도 술술 쏟아냈다.

마침내 안두희의 입에서 백범 암살지령 바로 윗선은 그의 직속상관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어 묻지도 않은 그의 저서 <시역의 고민>은 대필했다는 얘기, 그리고 사건 1주일 전쯤,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자기를 경무대(현, 청와대)로 데리고 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높은 사람 말 잘 듣고 일 잘하라"는 치하의 말까지 들었다는 얘기까지도 털어놓았다. 

▲  안두희 수기로 출간된 <시역의 고민>
ⓒ 박도

 

권중희는 그 말이 백범 암살 배후 진상 규명에 매우 민감한 발언이기에 안두희의 경무대 방문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자 안두희는 역정을 내면서 자기는 평소 커피를 좋아하는데 그날 경무대 접견실에서는 접대용으로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스를 내놔서 또렷이 기억한다는 얘기까지도 토로했다. 

하지만 이튿날(1992년 9월 24일) 안두희는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밝힌 사실을 죄다 번복하면서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신문들은 안두희를 두둔하며, 그를 불법 감금한 권중희를 공박했다. 

도하 언론들은 백범 암살 진상 규명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안두희가 증언을 번복하게 된 내막이나 자백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확인 취재할 생각보다 안두희 말만 대서특필했다. 

암살 지령의 ABC

사실, 암살 지령은 똑 떨어지는 말이나 문서가 있을 수 없다. 그 말이나 문서는 뒷날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 확실한 증거를 남길 어수룩한 지령자는 없다. 또한 그 지령 단계는 점조직이기 마련이고, 그 지령은 이심전심의 비법을 쓰기 마련이다. 

"나 요즘 그 친구 때문에 골치가 아파!"
"그 자는 국가 건설에 훼방자야!"
"그 자식 국내 문제를 왜 외국에 나가서 나발 불어."

그 말을 들은 부하나 하수인들은 지령으로 알고 그때부터 알아서 기게 마련이다. 그런 뒤 그들은 떡도, '떡고물도 챙기면서'(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말) 그동안 우리 사회의 주류로 살아왔다. 대부분의 암살지령은 그렇게 내려진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후 증거를 찾기도 매우 어렵다. 심한 경우는 암살자를 제3의 하수인으로 암살시켜 버리기도 한다. 그게 비정한 암살 세계다. 케네디 암살범 오스왈드도 또 다른 하수인의 저격으로 죽었고, 아카노를 암살한 롤란드 갈만도 또 다른 하수인의 총에 피격되었다. 

2004년 2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때 나와 권중희 선생은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로엘(Laurel)의 한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늦은 밤 권중희 선생은 고국의 부인과 거주하는 집 문제로 한참 통화를 한 뒤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쓰레기통에서 찾아 물었다. 그는 담배를 두어 모금 빤 후 옆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 한 맺힌 말을 했다. 

"우리네 가정에서는 집 앞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에게도 수고비를 주는데, 대한민국은 나에게 수고비는커녕 쇠고랑과 냉대, 그리고 가난을 줍디다."
"네에?" 

아마도 현재 거처하고 있는 집의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는 독촉 얘기를 전해 들은 때문이었나 보다.

"내 인생은 안두희 때문에 삐끗했지만 그래도 힘이 자라는 한, 백범 암살 진상을 밝혀 다음 세상을 위해서 정의와 양심이 살아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 네에."

2007년 11월 17일 나는 권중희 선생의 부음을 받고 곧장 가톨릭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마침 그때 입관식이라 이승에서 권중희 선생 마지막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은 끝내 많은 한을 풀지 못한 비원이 서린 표정이었다.  

[관련 기사: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 (1)~(8)]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의사
▲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의사
ⓒ 박도

 


안두희 저승사자 박기서 의사 이야기

나는 권중희 선생의 대담에 이어 이태 후인 2005년 6월 17일, 안두희의 저승사자였던, 현재 경기도 부천시 개인택시 기사인 박기서 의사도 효창동 백범 묘역에서 만났다.

박기서 의사는 1948년 전북 정읍 태생으로, 안두희 처단 당시에는 경기도 부천에서 시내버스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항일유적답사 길에 만난 의병장이나 의사, 독립전사들은 대부분 평범한 생활인으로, 대체로 학식은 그리 많지 않은 분이었다. 

내가 공부하고 역사 현장을 답사해 본 바로는 이 나라를 지켜온 이는 임금이나 사대부 출신이라기보다 그저 이름없는 들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구한말 전남 보성의 안규홍 의병장은 담살이(머슴) 출신이었고, 상해 홍구공원의 윤봉길 의사는 채소장수였다.

박기서, 그는 의협심이 대단히 강한 운전기사로 안두희를 더 이상 살려둬도 암살 배후를 자기 입으로 자백치 않는다는 판단이 섰다. 그게 정보 요원들의 불문율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박 의사는 그를 자연사만은 시켜서 안 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천수를 다 누린다면 이 땅에는 민족정기가 완전히 말살된다고, 당신이 그 일만은 막아야 된다고, 그를 처단하고자 나섰다. 그리고 행동에 옮겼다. 

"만일 안두희가 자연사한다면 조금이나 남아있는 민족정기조차도 먹칠하는 일로, 이는 후손들에게 볼 낯이 없는, 떳떳치 못한 조상이 될 것이 불을 보는 것처럼 명약관화한 일이지요." 


 정의봉을 든 박기서 의사
▲  정의봉을 든 박기서 의사
ⓒ 박기서

 

박 의사는 그런 대의명분으로 1996년 10월 23일 안두희 집에 잠입했다. 그는 안두희를 보자마자 준비해간 '정의봉'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휘둘러 그를 처단했다. 


역대 대한민국 공권력도, 그 잘난 금판사도, 국회의원들도, 언론들도 죄다 좌고우면하면서 차마 건드리지 못한 안두희를 일개 버스기사가 아주 통쾌하게 응징했다. 


그는 이 시대의 영웅이요, 의사(義士)다. 



박 의사는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한 뒤 스스로 경찰서로 갔다.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고,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받았다. 


박기서는 청주교도소에서 6개월여 복역 중, 1997년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인간쓰레기를 청소하다


그는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과 부패한 극우 무리들이 활개치는 세상보다 오히려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했다.


"사람이면 다 사람입니까? 안두희 그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요, 한낱 쓰레기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들이 제대로 숨 쉬고, 물도 마실 테지요. 


못 배우고 무식한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쓰레기를, 그것도 가장 더러운 인간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담담히 쏟아내는 말에 그보다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많이 배운 내가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는 세링게티 초원의 독수리다. 세링게티 초원에는 사체 청소부 독수리가 있기에 싱싱한 풀들이 자라고, 뭇 생명들은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고 산다.


[관련 기사; 인간쓰레기를 청소했을 뿐입니다]



 백범 김구 장례 행렬이 한국은행 앞을 지나고 있다. 1949. 7.
▲  백범 김구 장례 행렬이 한국은행 앞을 지나고 있다. 1949. 7.
ⓒ NARA

 



====================덤으로 더 더...


그때그사람-
1992년 오늘 그가 털어놓은 배후…범행후 군납 사업하며 떼돈

안두희

"김창룡 특무대장의 사주를 받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김창룡이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등 대한민국에 해를 끼칠 사람이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나를 세뇌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4년 전인 1992년 4월 12일,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는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암살의 배후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안두희는 1949년 범행 직후 줄곧 단독 범행을 주장해 왔고 배후에 대해 얘기한 것은 43년 만에 처음이었다.  

당시 안두희에게 증언을 받아낸 이는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권중희씨였고 취재진을 동반해 이 사건은 다음날 신문 1면 톱기사로 보도됐다. 보도에 따르면 안두희는 "범행 직후 특무대 영창으로 면회를 온 김창룡으로부터 '안의사 수고했소'라는 칭찬을 들었고 수감 중 술, 고기, 담배 등을 차입 받는 등 특혜를 누렸다"고 했다. 또 안두희는 OSS(CIA의 전신) 소속 모 중령과도 만나 백범 암살에 대한 강한 암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김구 선생을 백주에 살해한 안두희는 어떻게 40년 넘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 안두희는 현장에서 붙잡혔지만 1년 7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났고 석방 뒤에는 진급해 군에 복귀했다. 제대한 다음에는 군납 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 암살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라는 책을 통해 "암살 배후는 김창룡과 신성모를 비롯한 군부세력, 해방 후 친일파 척결을 주장해온 김구에게 위협을 느낀 친일세력, 그리고 단독정부 추진세력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중략) 당시의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이승만의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승인' 또는 '암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썼다. 

안두희도 범행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으며 이후 치하를 받았다고 1992년 9월에 추가 증언했다. 하지만 이 자백에 대해서 안두희는 다시 "권중희 회장이 자신을 가평으로 납치, 구타해 시키는 대로 한 거짓증언"이라고 번복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나마 암살의 배후를 밝히는 데 근접했던 것은 국가가 아닌 권중희 회장 등 개인의 노력 때문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았고 이후에는 공소시효 등을 이유로 법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김구 선생 암살 배후를 조사하고 안두희를 추적하는 것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4ㆍ19혁명 이후에 개인들에 의해 비소로 시작됐다. 2013년 출판된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라는 책에는 안두희를 추적해온 4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4명은 권중희를 비롯해 김용희, 곽태영, 박기서 등이다. 

우선 광복군 출신으로 백범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던 김용희는 1961년 치열한 추격전 끝에 안두희를 붙잡아 사건의 전말을 녹취한 뒤 그를 검찰에 넘겼다. 하지만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1965년에는 김제 출신 청년 곽태영이 안두희를 찾아내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그는 극적으로 살아났다. 권중희 회장은 10년 넘는 추적 끝에 1987년 서울 마포구청 앞 버스 정류장에서 안두희를 찾아내 응징했고 1992년에는 안두희의 자백을 받아냈다. 결국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인천시 중구 자택에서 당시 버스 기사였던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사망했다.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의 마지막 대사다. 영화에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데 16년이 걸렸지만 현실에서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죗값을 받는 데는 47년이 걸렸다. 


///김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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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6 [동네방네] - 고향 아버지가 팔간집 이엉을 잇던 때가 그립다... 2018-03-07 0 5614
2055 [록색문학평화주의者]-푸대접 받는 동물들,남의 일이 아니다... 2018-03-07 0 5095
2054 [동네방네] - 도심공원에 웬 불길 "활활"... 2018-03-07 0 5017
2053 [쉼터] - 세계 이색 자연호텔 2018-03-07 0 27569
2052 [회초리] -애완동물 염색, 남의 일 아니다...역시 이는 아니야... 2018-03-06 0 3520
2051 [회초리] - 인재류실, 남의 일 아니다... 그는 "상품"이었다... 2018-03-06 0 5240
2050 [이런저런] - 132년 = 바다로 던진 병 = 세계 가장 = 욕심 2018-03-06 0 5704
2049 [동네방네] - 현대판 여러 종류 "청명상하도" 2018-03-06 0 6229
2048 [쉼터] - "주은래호" 기관차 2018-03-05 0 5524
204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호랑이 죽음,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3-05 0 3361
2046 [동네방네] - 한반도 상반대쪽에서 아리랑 울러 퍼지다... 2018-03-05 0 5031
2045 [별의별] - 37년 = "돼지형 주택" 2018-03-04 0 6079
2044 [별의별] - 호랑이 셀가... 곰이 셀가... 2018-03-04 0 5462
204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최후의 한마리",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3-04 0 6078
2042 [새동네]-김치찌개, 부대찌개, 평양냉면으로 "통일" 먼저 하기 2018-03-04 0 4880
2041 [별의별] - "돼지화가" 2018-03-04 0 3332
204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호랑이들아, 맘껏 뛰여 놀아라.... 2018-03-04 0 4960
2039 [타산지석] - 혼자 놀줄 알아라... 2018-03-04 0 4893
2038 [쉼터] - 귀밝이술 = 귀 밝아지기, 좋은 소식 듣기 2018-03-01 0 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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