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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프랑스를 한 마디로 집약해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적합할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열에 아홉은 '혁명'이라고 외칠 것이다. 정치도, 경제도, 예술도, 철학도, 그 당시 프랑스에서 변화를 위한 최고의 방법은 오로지 혁명뿐이었다. 혁명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많은 사람이 굳게 믿었고, 그래서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군화에 짓밟히고 총칼에 쓰러지면서도 거리로, 광장으로 나갔다.
혁명은 프랑스의 모든 것들을 전염시키듯 번져나갔고, 미술에도 변혁의 기운이 뻗쳤다. 미술을 변혁으로 이끈 건 다름 아닌 태양이었다. 화가들은 저마다 캔버스와 이젤을 들고 어두운 작업실을 나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곳에는 강렬한 햇빛이 있었다. 컴컴한 작업실에서는 물감을 섞기 전까지 결코 변하지 않았던 색들이 햇빛을 받아 새로운 빛깔을 내뿜으며 캔버스를 스펙트럼 가득한 프리즘으로 만들었다. 색과 빛의 오묘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색채'를 발산시켰던 신세대 화가들이 미술계에서 이른바 '혁명군'이 되어 변화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인상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새로운 사조는 모네(Clande Monet, 1840~1926)의 그림 〈해돋이〉를 '인상'이라는 말로 풀어내면서 '인상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인상파'라 불리는 혁명군을 이끌었던 마네는 강렬한 햇빛을 인물의 초상화에까지 투영시켰다.
마네가 그린 초상화 가운데는 검은색이 유독 강렬하게 발산하는 그림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동생의 아내를 그린 〈베르테 모리소의 초상〉이다. 여류화가인 모리소(Berthe Morisot, 1841~1895)는 이 그림 말고도 마네의 여러 작품에서 모델이 되어 주었다. 〈베르테 모리소의 초상〉은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해서 모델을 배치하던 기존 초상화와 달리 배경을 밝게 그리고 그 안에 검정색 의상을 입은 모델을 그렸다. 아들을 모델로 그린 〈피리 부는 소년〉에서도 밝은 배경에 검정색 모자와 상의를 입은 소년의 자태가 돋보인다. 소년이 입은 붉은색 바지 옆에도 검정색 무늬 선을 그려 넣음으로써 밝은 배경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화가는 〈팔레트를 든 자화상〉의 배경은 어둡게 그렸다. 노년에 그린 이 그림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민첩하면서도 화려한 붓놀림으로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 검정색의 배경이 화가의 얼굴 및 외투의 밝은 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빛과 색채의 순간적인 효과를 표현하느라 형태가 흐트러질 수도 있었으나 화가의 뛰어난 소묘 실력이 그림에 안정감을 불어넣고 있다.
자화상을 비롯한 마네의 초상화에는 입체성이 배제돼 있다. 즉,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평평하게 묘사돼 있다. 마네는 이처럼 그림 속 모델을 평평하게 2차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람자가 인물의 내면을 유추하는 것을 차단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마네의 초상화는 인물의 속마음을 느낄 수 없는 인간미 없는 그림"이라고 투덜대기도 한다. 이에 대해 마네는 "그림 한 점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억지인가"라고 되묻는다. 그림은 빛을 통해 색깔의 물리적 침투까지는 허용하지만, 사람의 속마음까지 비춘다고 믿는 것은 예술가의 지나친 허영심이라고 마네는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마네는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란 그림에서 거울을 배치함으로서 입체성을 배제하고 평면성을 강조한 그만의 화풍을 다른 방식으로 돋보이게 장식한다. 이 그림은 마네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완성한 역작이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종업원은 가슴에 꽃 한 송이를 꽂고 목에는 검은 벨벳의 목걸이를 걸고 향락으로 가득한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와 카운터 위의 술병, 과일은 현실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배경은 뚜렷한 형태 없이 흐릿한 몽환의 세계를 보여준다. 가스등 불빛은 파리지앵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매우 낭만적으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실물 크기의 그림 속 모델은 도통 그 속을 알 수 없게 무표정하다. 마네는 여전히 관람자의 시선이 그림 속 인물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은 오히려 등 뒤의 거울을 통해 관람자의 내면을 바라보는 듯하다. 이를 두고 평소 마네의 그림에 까다롭게 반응했던 평론가들마저 "마네의 승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네가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에서 화가로 성공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살롱전이었다. 프랑스 전역의 수많은 화가들은 살롱전을 위해 파리로 모여들었고, 이곳에서 저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꿨다. 마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스무 번이나 살롱전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밥 먹듯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그나마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얻는 것은 두세 번에 불과했다. 마네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살롱전에서 시련과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특히 1863년은 프랑스 화가들에게 역사적으로 매우 아픈 해였다. 그 해 살롱전 심사에서 무려 4천 점이 넘는 작품이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심사의 기준도 모호했을 뿐더러 살롱전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거래도 횡행했다. 화가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문제가 커질 것을 두려워한 당국은 국왕의 힘을 빌려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봉기와 집회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떨어진 작품들만 따로 모아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이라는 전시회를 열도록 주선했다. 이 패자부활전에 나간 화가 중에는 세잔이나 피사로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패자부활전에서의 뜨거운 감자는 단연 마네였다. 마네가 출품한 〈풀밭 위의 식사〉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풀밭 위의 식사〉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두 신사와 온몸을 그대로 드러낸 여인 이렇게 세 사람이 풀밭 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속옷 차림으로 물놀이를 하는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마네는 전통적인 구도를 적용하면서도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저속하고 음탕하기까지 한 단면을 대담하게 묘사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후원을 받고 있던 기성 화단이 이 그림을 가만둘 리 없었다. 여기저기서 혹평이 쏟아져 나왔고, 그 중에는 회화의 기본기도 갖춰지지 않은 그림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거기다 이 그림은 표절 혐의에까지 휘말렸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가 그린 〈전원에서의 합주〉를 제재와 구도 면에서 그대로 차용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풍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자 전시회를 개최했던 나폴레옹 3세까지도 이 그림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심지어 왕비는 전시회를 둘러보다가 이 그림 앞에서 등을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 평론가들은 〈풀밭 위의 식사〉를 두고 마네의 최고 역작이자 인상주의의 포문을 알린 근대 회화의 이정표라는 찬사를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표절 혐의에 대해서도 논의의 실익조차 없다고 여겼다. 마네와 조르조네는 활동 시기 자체가 수백 년이나 차이가 난다. 마네가 조르조네에게 보내는 오마주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 햇빛으로 색이 어떻게 바뀌고 또 주변 사물 색깔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를 실험했다. 이처럼 그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큰 관심을 둔 것은 그림의 제재나 플롯이 아니라 색채의 조화였다. 즉, 햇빛이 나뭇잎 사이를 통과하여 나체에 반사되어 나타나는 밝고 경쾌한 효과에 주목했다. 화가는 녹색을 주조로 하고 여기에 흰색의 점을 칠해서 전체적인 색조의 조화를 꾀했다. 물론 낙선전의 심사단이 이런 부분까지 유심히 관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이 그림에 담긴 주제가 불쾌했을 뿐이다.
〈풀밭 위의 식사〉가 발표된 직후 마네 그림에 대한 논란과 혹평은 〈올랭피아〉에서 절정을 이룬다. 매춘부를 모델로 그린 이 누드화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 그림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떠오르게 한다. 만일 마네가 매춘부가 아닌 비너스라는 신화의 주인공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면 이 그림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매춘부를 모델로 하게 되면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를 모델로 했는가에 따라 고급한 명화가 될 수도 있고 저속한 음탕화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림 속 모델은 최음제의 효과가 있는 난초꽃을 머리에 꽂고 있고, 순결을 파는 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듯 한쪽 슬리퍼를 침대 밑으로 잃어버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로써 이 그림을 보는 남자 관람자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매춘부를 찾아온 손님이 되고 만다. 당시 많은 남자들을 불편하게 만든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꽃을 들고 서 있는 흑인 노예도 놓칠 수 없는 상징이다. 마네는 왕족과 귀족, 성직자들의 계급성에 반기를 든 부르주아들이 돈을 주고 흑인 노예를 사들이는 또 다른 계급주의적 행태를 꼬집었다. 올랭피아라는 이름의 매춘부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흑인 노예는 숨기고 싶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인 것이다.
법무성의 고급 관리였던 마네의 아버지(오귀스트 마네, Auguste Manet)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다. 그는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게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어린 마네는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법률가까지는 아니더라도 해군장교가 되는 것으로 아버지와 타협하고 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마네는 재응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수련생의 신분으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게 된다. 이 역시 아버지의 뜻이었다. 마네는 재응시의 자격을 얻은 뒤 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다시 도전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완고했던 아버지도 손을 들고 말았다. 이로써 마네는 정식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1815~1879)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마네는 1858년에 그의 첫 살롱전 출품작인 〈압생트(Absinthe)를 마시는 사람〉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듬해 살롱전에서 입상하지 못한다. 이를 시작으로 마네의 살롱전 도전 분투기가 시작된다. 마네는 거듭되는 낙선에도 불구하고 살롱전에 계속 출품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의 작품들에 대한 혹평과 조소뿐이었다. 평소 게으른 한량 기질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마네는 살롱전 입상으로 단번에 신뢰를 만회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네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온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로 유명한 화가가 되긴 했지만 고명한 화가가 되지는 못했다. 마네는 기성 화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웃사이더 화가였다. 그의 주변에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천성이 사교적인데다 좌중을 압도하는 매력까지 지닌 마네는 가난한 예술가들과 편하게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마네의 작업실은 젊은 마이너 화가들의 사교 장소로 변해갔다.
마흔 중반에 접어들면서 마네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특히 왼쪽 다리에서 시작된 류머티즘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갈만큼 심각했다. 훗날 일부 미술사가들은 마네가 방탕한 생활로 매독과 같은 성병을 달고 살았고, 그 탓에 건강이 나빠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881년, 마네는 평생을 고대하던 살롱전에서 2등으로 입상한다. 이로써 심사 없이도 살롱전에 출품할 자격이 주어졌지만 마네에게 살롱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1882년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출품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살롱전과의 인연도 끝을 맺었다. 그리고 1883년에 견딜 수 없이 악화된 지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미술사 전체를 보건대 마네의 작품이 남긴 족적은 대단하지만 말년의 마네는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화실의 뒷방 늙은이였다. 마네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인상주의 혁명군의 화실에는 몇몇 동료와 후배들이 그린 그의 초상화만이 텅 빈 공간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