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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로 미국 추상 표현주의, 색면 추상화가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본명은 마르쿠스 로스코비츠(Marcus Rothkowitz)였으나 유럽에서 나치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일반적으로 추상 표현주의 작가로 분류되지만 정작 자신은 추상 표현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등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미술을 이끌었다.
마크 로스코는 러시아 드빈스크(현재는 라트비아 영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3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예일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엘리트주의와 인종 차별에 실망하고 2년 만에 자퇴했다. 이후 연령, 학력의 제한 없이 누구나 등록해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 입학해서 미술을 배웠다. 이곳은 학교라기보다는 예술가 공동체에 더 가까운 곳으로 사실상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이때 로스코는 유명 미술관과 갤러리를 돌아다니면서 미술을 공부했다. 특히 근대 유럽의 화가들인 마티스, 몬드리안 등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뛰어난 색감 표현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고자 했다. 1928년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었지만, 그뿐이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 갔다. 1930년대에는 사실주의 스타일 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형태, 공간, 색채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무명 화가로 살며 늘 생활고에 시달렸기에 부인과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러다 결국 1944년에 이혼했는데 나눌 재산이 거의 없어서 부인은 로스코의 작품을 몇 점 가져갔다. 1945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팔았는데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 가격이 고작 750달러에 불과했다. 로스코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도 자주 등장하는 추상화가인 바넷 뉴먼, 클리퍼드 스틸과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다. 이들과의 교류는 로스코가 자신의 색면 회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48년 2미터가 넘는 세로로 길쭉한 대형 캔버스에 경계가 모호한 색으로 이루어진 그만의 스타일을 처음 선보였다. 그는 감상자와 그림 사이의 영적인 교감을 중요시했고, 감상자를 압도할 만한 대형 캔버스만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 추상 표현주의 미술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딜러 베티 파슨스의 도움으로 1946년 모티머 브랜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회가 성공을 거두면서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대 받을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친구였던 바넷 뉴먼과 클리퍼드 스틸은 로스코가 성공한 이후 부르주아적 생활을 동경한다는 이유로 절교를 선언했다. 그들의 관계는 평생 회복되지 않았다.
자신의 예술 세계에 대한 평가와 오해에 극도로 민감했던 로스코는 말년에 자신의 심사를 통과한 고객에게만 그림을 팔았다. 1969년에는 미국 예술문학인 협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젊은 시절 무력감과 모멸감으로 자퇴했던 예일 대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 대동맥류로 인해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으며, 1970년 슬럼프와 건강 악화를 비관하여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16위. 〈오렌지, 레드, 옐로〉
• 28위. 〈넘버 1(로열 레드와 블루)〉
• 29위. 〈화이트 센터〉
• 38위. 〈무제〉
• 61위. 〈넘버 15〉
• 70위. 〈넘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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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마크 로스코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큐레이터와 공동 기획으로 첫 미술관 개인전을 열었다. 〈넘버 1〉은 이 전시 때 로스코가 직접 고른 여덟 작품 중 하나였다. 로스코는 그렇게 고른 여덟 작품에 직접 가격을 매겼는데 이 작품이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그는 미국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딜러이자 컬렉터인 시드니 재니스와 인연을 맺었다.
이 작품은 이듬해인 1955년에는 뉴욕의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전시됐다.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는 사업가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시드니 재니스가 1948년 세계적인 화랑들이 밀집한 뉴욕 57번가에 문을 연 갤러리다. 이곳에서는 미국 현대 미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전시가 많이 열렸다. 폴록이 첫 개인전을 연 베티 파슨스 갤러리 못지않게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도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발전에 공을 세웠다. 이 작품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갤러리에서 추상 표현주의가 한창이던 1955년에 열린 로스코 개인전에 나온 것이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이 밖에도 이 그림의 전시 기록은 훌륭하다.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 이후에는 워싱턴 코코란 갤러리, 워싱턴 국립 미술관, 뉴욕 휘트니 미술관 등에서 전시됐다. 특히 1998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열린 로스코 회고전 때에는 전시 작품 백열여섯 점 중 이 작품이 플래카드, 안내 책자 등 회고전의 모든 홍보물에 메인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전시에 수시로 나온 작품이 시장에 나오면 파는 딜러들은 흥분하게 마련이다. 소더비는 이 그림의 경매를 앞두고 이런 사실을 강조했다. 워싱턴 국립 미술관 회고전 당시 〈넘버 1〉이 들어 있는 전시 배너가 미술관 앞에 설치되어 있는 모습을 찍은 현장 사진을 경매 도록에 넣기도 했다.
〈넘버 1〉은 빨강, 분홍, 파랑 띠가 포개져 있다. 로스코는 붉은 계열이나 따뜻한 색을 좋아했는데, 이 작품에는 특이하게 붉은 톤과 대비를 이루는 파란 띠가 그림 하단에 들어가 무게를 잡고 있다. 이 그림을 비롯해 로스코의 대표작들은 크기가 엄청나게 크다. 로스코는 큰 그림이 작은 그림에 비해 더 친밀하고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그림을 그릴 때는 작가가 한 발짝 떨어져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지만, 큰 그림을 그릴 때는 작가가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1958년 뉴욕의 미술 대학인 프랫 인스티튜트 강의에서 남긴 말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작은 그림은 소설과 같고 큰 그림은 드라마와 같아서 관객이 직접 그 그림을 해석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가가 큰 작품을 작업할 때는 작가의 마음만 캔버스에 빠지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캔버스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로스코는 페인트칠을 할 때 쓰는 큰 붓을 종종 사용했기 때문에 몸 전체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을 위탁한 사람은 앤 매리언이라는 컬렉터로 소더비 회장이자 수석 경매사이던 존 매리언의 부인이다. 1982년에 50만 달러(5억 2460만 원)도 안 되는 값으로 구입한 작품을 7512만 2500달러(788억 2000만 원)에 팔았으니,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더라도 30년 동안 값이 엄청나게 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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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상 표현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색과 형태의 관계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현대 미술에서는 ‘서블라임(Sublime)’과 ‘키치(Kitsch)’라는 개념이 자주 나온다. 보통 ‘키치’는 유치하고 질 낮은 이미지를 뜻하고, ‘서블라임’은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즉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재현한 듯한 예술, 한 차원 더 높은 예술을 가리킬 때 ‘서블라임’이라는 단어를 흔히 쓴다.
“나는 아주 큰 그림을 그린다. 역사적으로 큰 그림은 대개
1954년 마크 로스코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큐레이터와 공동 기획으로 첫 미술관 개인전을 열었다. 〈넘버 1〉은 이 전시 때 로스코가 직접 고른 여덟 작품 중 하나였다. 로스코는 그렇게 고른 여덟 작품에 직접 가격을 매겼는데 이 작품이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그는 미국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딜러이자 컬렉터인 시드니 재니스와 인연을 맺었다.
“큰 그림은 관객을 그 그림 속으로 이끈다. 스케일은 내게 아주 중요하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화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여섯 점이나 들어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은 가격도 비싸고 소장한 사람도 많다.
“성스러운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이 거래된 2007년 5월은 세계적으로 미술 시장 경기가 좋을 때였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그림이 7284만 달러(764억 2000만 원)에 팔려 당시 현대 미술품 가운데 최고가 기록을 찍은 것은 큰 뉴스였다. 현대 미술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비싸게 팔릴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마크 로스코 작품의 이전 최고 기록이 2241만 달러(235억 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세 배나 높은 금액으로 작가의 기록을 깨면서 동시에 현대 미술 전체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이는 이후 벌어질 신기록 행진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 그림 경매 이후 로스코의 그림 경매 기록은 계속해서 깨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로스코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어 보인다.
“내 그림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종류의 그림은 아니다.
노란빛이 감도는 오렌지색 바탕의 한가운데에 흰 띠가 있는 이 그림은 16위에 오른 〈오렌지, 레드, 옐로〉나 61위에 오른 〈넘버 15〉와 비슷한 톤의 작품이다. 아주 조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에너지를 많이 담고 있는 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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