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청전쟁후 일본인이 교사로서 중국인을 가르친데 대해 일본인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당연한 이치로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굴욕적인 일이기도 했다. 옛날 일본인이 제자였던 기억이 중국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는 까닭이다. 특히 師弟관계를 따지는 중국인이였기에 그 굴욕감은 일본인의 상상을 추월할것이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이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대변신을 아무렇지도 않은듯(중국인의 눈에서 볼 때) 이룩한 일본은 확실히 믿을만한 하나의 기적이였다. ㅡ이대로 나아간다면 중국은 구제불능이다. 19세기말 중국의 식자는 누구나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같은 시대에 일본의 선례는 큰 마음의 지주로 된것이다.”
저명한 재일 화교작가이며 문명비평가인 진순신(陳舜臣)(《일본적인것 중국적인것》)의 말이다.
19세기말, 20세기초, 100여년전 청국이 근대화 추진의 일환으로 서양문물을 흡수한 방책에는 일본유학생 파견과 일본인 교사 초빙고용의 두가지를 병용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는 기술이 있으나 일본인 교사초빙에 대해서는 거의 누락돼있다. 그런데 역사는 흔히 그 누락됀 공백의 구석에 수많은 진실이 숨겨져 있는 법이다.
1901년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는것도 좋지만 일본인 교사를 청국으로 초빙, 고용하여 청국 청년들을 교육하는게 더 재정적으로도 효율적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한것이 당시 일본 문부대신 키구이케(菊池)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였다. 그리하여 1904년부터 다수의 일본교습(教習)을 중국 본토에 파견하는데 통계상 그 수자가 2천명에 이른다. 파견된 지역도 중국대도시뿐만아니라 몽골의 칼라친 등 전 중국지역에 파급된다. 유치원선생에서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학자, 지식인에다 군인까지 포괄되었다.
일본 근대 문학거장으로 알려진 후타바데이 시메이(二葉亭四迷), 사상가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 하버드대 교수 경력자이며 동양학 거장인 핫토리 우노키치(田岡嶺雲) 등 쟁쟁한 인물도 그속에 있었던것이다.
당시 교습(敎習)이라 불린 일본인 전문가들은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강의하였으며 교과서, 교재도 중국 학생들을 위해 그 수준에 맞추어 편찬, 자작한것이 많았다고 한다. 북경 경사법정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마츠모토(松本龜次郎)은 훗날 1905년에 近代 여류혁명가 추근(秋謹)을 가르친 중요한 교습이기도 했다. 그가 편찬한 《일본어교과서》나 이노우에(井上翠)가 편집한 《東語會話大成》은 중국전국의 학교에서 보편적으로 교재로 채용되며 중국 젊은이들의 일본어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북경대학 왕향영교수의 《청국에 고용된 일본인》에 따르면 많은 교습들은 초빙기한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좋아서 재임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법학사 이마이(今井嘉幸)는 (그뒤 일본국회의원이 됨) 청국이 멸망한뒤에도 중국에 남아서 교수에 전념했다고 한다. 구국열에 부푼 젊은 중국 청년의 가슴에 지식과 근대화를 가르친 일본인 교습들의 기여는 괄목할만 하다.
핫토리(服部宇之吉)교수는 1900년 의화단운동에 조우한 인물이기도한데 그는 1902년 북경대학당 속성사범에 총교습(교장)으로 초빙된다. 그는 사범관, 사학관 컬리큐럼(課程), 규칙제정에 참여하고 교실, 실험실, 기숙사 등 설비, 도서구입 등에도 주도하게 배려를 한다. 핫토리 등 일본인 교습이 중국의 북경대학 창설에 큰 기여를 한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뒤 1909년 일본으로 귀국한 핫토리교수는 동경재국대학 교수로 취임되며 “중국철학”의 제1인자로 대활약한다. 일본의 교수와 중국의 제자의 훌륭한 심벌적인 존재는 타오카와 왕국유를 들어야 한다. 근대 중국의 대학자 나진옥이 상해에서 설립한 “동문학사”라는 학교에서 당시 동서양교류사학계의 태두인 후지타(藤田豊八)와 타오카를 초빙하였다. “세계 인류로서 인간은 천하의 인도(人道)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품은 타오카는 중국에 대한 깊은 리해와 애정을 품고있는 지성이였다. 타오카가 지대한 영향을 준 중국의 젊은이가 바로 왕국유이다.
왕국유하면 중국 근대의 학술거장으로서 문학, 미학, 사학, 철학, 고문학, 고고학 등 제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세계적 거물이다. 1911년 신해혁명후 일본에 망명하는 친일적인 지식인이기도 한 그는 일본과 깊은 인연을 갖고있었다. 귀국후 1927년 북경의 의화원 곤명호에 투신자살한 기인으로서도 유명하다.
그런 왕씨가 쇼펜하우어적 철학사상을 갖게 되고 서양철학에 심취하게 된데는 타오카스승의 가르침으로 기인된다. 그는 《靜庵文學續編》의 서문에서 타오카의 문집을 통해 쇼펜아우어철학을 습득하고 심취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타오카라는 일본의 奇才는 린국 중국의 기재 왕국유의 생애를 관철할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작가 진순신은 깊은 감명을 토로한다.
이밖에 원세개의 군사고문 아오키(靑木官純), 그 후임으로 청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된 시바고로(柴五郞)는 의화단사건시기 세계에 이름을 날리며 청국의 경찰교습소를 창설하고 중국 근대 경찰학교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근대 백년을 조감할 때 발견되는 새로운 사실은 일본은 사제관계에서 역전시켜 중국인의 근대화로정에 길잡이가 되였다는것이다. 근 백년래 중국이 가장 많이 배우고 흡취한 상대가 바로 “원쑤” 일본이였다.
중국 학자 호평(胡平)은 그의 저작 《100가지 리유. 일본과 중국》(2006년)에서 이렇게 갈파한다. “근대의 일본이 없었다면 근현대의 중국도 없었을것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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