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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33의 신사유》
문화대담(7)
문학의 최고봉은 무엇으로 사는가?(상)
가평요(贾平凹)+ 김문학
들어가면서
가평요(贾平凹)는 당대 중국 최고봉의 작가이다. 작품의 양이나 질이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학의 거대한 산맥을 이룬 작가라는 정평이 나 있다.
당대 문학사에서 가장 쟁논이 많고 명성을 떨친 작가로서 “가평요를 모르면 중국인이 아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는 중국문학계에서 “귀재”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거물이다.
저명한 문학평론의 대가이며 복단대학 교수인 진사화(陈思和)선생은 나의 외우이기도 하다. 내가 서안에 가서 가평요와 만나 대담을 나누도록 알선을 해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쪽의 귀재와 서쪽의 귀재의 상봉은 하나의 뉴스꺼리가 된다.” 뉴스가 될지 사건이 될지 나는 관심 없지만, 가평요씨와의 만남은 내 생애의 사건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7월12일 저녁 8시경, 비행기 연착으로 늦게 도착한 나를 찾아 서안 대담서시호텔까지 가선생이 비서와 함께 오셨다.
내가 “가선생님, 제가 절을 올릴까요?” 하면서 인사하자, 웃음으로 반기면서 그는 나를 악수한 다음 끌어 안았다. 따스한 선생의 가슴이 나를 포옹해주었다.
“아, 너무 반갑습니다. 이렇게 가선생님을 뵙게 되니…”
내 말에 가선생은 이렇게 반기면서 답했다.
“나도 옛날부터 김선생의 책을 좋아했어요. 일본에 오래 계신 선생을 이렇게 일찍 만날줄을 몰랐지요.”
가선생은 나와 함께 동행한 동생을 이미 예약한 호텔안 고금 중국요리점으로 안내하셨다. 가선생은 손수 갖고 온 모태주와 산도의 황주로 우리를 관대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선생의 비서장인 마리여사는 나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우리 가선생님은 김교수님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좋아했어요. 이번에 오신다니까 꼭 잘 환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답니다. 술도 그렇게 많이 못 마시는 편인데 오늘 기뻐서 평소보다 잘 드시고 말씀도 많이 하시는겁니다. 귀재는 역시 귀재를 알아보는거에요.”
당대 문학의 대가인 왕증기(汪曾祺)는 가평요와 좋은 사이였으며 그를 “귀재”라고 불렀다. 나는 가평요선생은 “귀재”라는 차원을 넘어선 문학의 태두, 일대 산맥이라 평하고 싶다.
가평요는 이미 틀림없이 “국민적 작가”의 대표로, 당대 문학의 산맥에서 최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다.
15일까지 나와 가평요선생은 그의 서재에서, 호텔에서, 가평요문화연구원에서 세차례나 장시간의 대담을 나누었다. 우리는 오랜 지기처럼 화기애애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 심적 코드가 잘 맞았다. 키도 비슷하고 취미도 똑 같았다.
서예, 골동품 컬렉션으로서 “전통적문인”취미로 애호가 동일했다. 대담기간에 가선생은 내가 요청을 하기도 전에 흔쾌히 붓을 들어 내 서재의 재명”文华堂” 3자를 휘호해 선물했다. 동생 김명학에게도 《静而远观》이란 4자를 휘호해 선물했다. 서예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한 가선생의 붓글씨를 거금으로 사는 사람도 많았다.
한중일 3국에서 출판과 영화사업을 하는 동생은 가선생의 묵보(墨宝)를 가보(家宝)로 소중히 하겠노라 싱글벙글했다.
가평요선생의 작품, 창작, 재질, 그리고 사상과 교양, 인품은 모두 일급이다. 가평요가 없었더라면 중국문학은 얼마나 허전했을까고 나는 늘 생각하군 한다.
사실 나는 가평요와의 대담을 한권의 책 《김문학, 가평요와의 대화》로 묶을 예정이며, 종합적 논평서 《가평요의 문학제국》을 집필 출간예정으로 있다.
올 가을께 가평요선생의 초청으로 문화강연을 하게 되며, 또 계속하여 대담을 나누며 가선생과 함께 가선생의 창작무대로 된 그의 고향, 상주를 일주하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3차례 대담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외부의 일체 지장을 차단하기 위하여 서다. 아래 대담은 3차례의 장시간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 한 것임을 밝혀둔다. 상, 하 두편으로 구성된다.
1. 당대문학의 기적은 어떻게 창출했나?
김: 가선생님, 제가 지금 이렇게 선생님과 동석하여 대화를 나눌수 있는 자체도 저는 신비로운 영성의 힘이 도와주었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은 30여년 중국 당대문학의 살아 있는 증인이기도 하며, “중국문단의 기적”이라는 정평이 있어요. 지금까지 110권의 작품집에 한자로 천만자를 넘는 거대한 한어문학을 창출해냈습니다. 소설, 시가, 문론, 서법, 회화,등 여러 영역의 예술장르에서 모두 걸출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이는 목전 세계 중국어로 글쓰는 문화권에서는 전인미답의 쾌거입니다.
개혁개방후 많은 문인작가들이 하해(下海)를 하여 중도하차를 했지만, 선생님은 서안이라는 이 고도에서 독실한 신도같이 문학에 생명을 걸고 종시일관하게 창작을 견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룩한 실적도 경이로운 기적 그 자체이지요! 무엇이 선생님의 창작을 지탱하게끔 했습니까?
가: 사실 여러가지 현란한 껍데기를 한층한층 베끼고 나면 나는 결국 “농민”입니다. 잘 생긴 미남도 아니요. 그렇다고 남들과 같이 청산유수의 웅변가도 아니지요. 어눌하고 사교를 좋아하지 않고 고독을 좋아 하는게 내 성격입니다.
그래서 나는 늘 자신을 “계란광주리를 들고 붐비는 장마당을 걷는 사람”이라 비유해요. 사람들속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사람들을 피할수밖에 없지요.가장 큰 자유는 마음의 자유이거든요. 나는 글쓰기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고, 또 제가 사교도 못하고 장사도 못하고 아첨도 못하니 장끼는 글쓰기, 그림그리기 밖에 없으니 할수 있은건 이것밖에 없지요. 아무영역이나 혼신을 다해서 전념하고 고집하다보면 물론 공 드린 만큼 성과도 나오게 됩니다. 글쓰기는 내 삶의 전부이고 또 삶 자체이기고 하지요.
2. 귀재. 그리고 미문(美文)의 탄생
김: 아, 기적은 이렇게 이루어졌군요!
선생님은 문단에서 이미 “천재”를 초월한 귀재, 기재, 괴재라는 별명으로 통합니다. 저는 소년시절 문학공부를 할때 선생님의 산문, 수필을 너무 좋아했어요. 선생님은 소설에 앞서 산문으로 우선 문명을 날렸으며 산문은 그야말로 미문이었습니다. 일테면 《月迹》(1982년)에 나오는 “丑石”라든가 “访兰”과 같은 명수필은 제가 습작시 많이 모방해온 범문이었지요.
가: 1972년부터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서북대학 중문계시절인데 주로 문예이야기를 쓰다가 산문창작으로 넘어 갔어요. 당시 제가 가장 큰 영향을 받든 작가는 천진에 계신 손리(孙犁)선생입니다. 표지가 없는 산문집을 탐독하다보니까 작자가 손리였지요. 제가 선생님께 팬레터를 써보내면 꼭꼭 답장을 해주었고 우린 망년지교로 되었어요. 1982년 첫 산문집《月迹》을 손선생의 추천으로 백화문예출판사서 간행하게 되었고, 손선생님은 또 손수 머리말까지 써주셨지요. 그해 천진에 손선생님을 찾아갔을때 선생님은 친히 물만두까지 빚어서 환대를 해주는데, 작별할때는 내게 물만두를 싸주기도 했습니다.
김: 선생님은 어느 글에서 손리 다음엔 심종문(沈从文),장애령에 심취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시기 굉장한 독서광이었지요?
가: 예. 그때는 사실 뭐 읽을꺼리가 없었거든요. 내가 소학 4,5학년땐가 삼촌집에 놀러 갔다가 3권으로 된 《홍루몽》을 발견하고 그걸 읽다가 몰래 훔쳐서 집으로 갔고 왔어요. 보풀이 일도록 읽다가 결국 책도둑이 발각돼 삼촌이 와서 책을 회수 해 갔지요(웃음)
김: (웃음) 소년 “공을기”이시군요!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책도둑을 했지요. 문학 소년은 다 비슷한 체험을 갖고 있는것 같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작품에는 《홍루몽》이나 《수호전》의 서사양식이 깔려있어요.
3. 전통과 현대사이에서 글쓰기
가: 그래요. 근대, 현대 중국문학의 근저에는 《홍루몽》《수호전》의 전통서사모델이 있어요. 명청 백화소설의 전통이 농후한것은 중국의 사정이고 전통이기도 해요. 심종문, 장애령, 폐명, 그리고 임어당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들의 전통이 내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 선생님의 산문, 소설에는 중후한 중국전통이 관철돼 있으면서 때로는 서양 현대양식을 조합한 양상이 보이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관찰한데 따르면 가선생님은 “의식의 흐름”이나 “모더니즘”등 새로운 전위적 수법, 조류에 대해 대항하거나 의도적으로 가늠하는 태도로 조심함을 보이고 있는것 같습니다.
가: 예를 들어 먹는것으로 말하면 난 안 먹기로 하면 죽어도 아니 먹고, 먹는다 하면 죽도록 많이 먹는 타입이에요. 작가란 지식, 정보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하지만, 중요한건 독립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는 지혜가 아니죠. 서양의 사조가 중국에 들어오면 쉽게 작아지고 영혼을 잃어버릴수 있어요.
80년대 나는 서양 신사조에 열중했는데 내 문학관념은 거의 다 미술이론에서 힘을 입었어요. 중국 미술계가 문학계보다 서양문화를 수용하는데는 언제나 한걸음 앞었으니까요. 나도 현대적 글을 더러 쓰기도 했지만, 거기에 푹 몰두하진 않았습니다.
김: 관찰자적 아웃사이더란 말씀이네요?
가: 그래요. 나는 영원히 신 사물을 환영하지만, 나는 늘 그것을 관찰, 연구하면서 강기슭에서 관찰하고 관망해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물을 건너는가 세심히 보면서 내가 어느 곳이 깊고 옅은가를 눈여겨 보는거예요.
4. “자기 자신의 독특한 길을 걸어라”
김: 제가 보건대 선생님은 산문에서 소설로 전향한 다음 1980년대 후반 장편소설《浮躁》로 부터 이미 자신의 독자적 문학의 길을 형성하고 걷게된것 같아요. 중국 작가로서 이 장편소설로 최초로 미국의 美孚飞马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가: 국제문학상을 받은건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내가 이것으로 내 독자적 문학의 길을 걷게된 심벌이기도 합니다. 1985년의《浮躁》이후 나는 농촌과 상주(商州)이야기를 시리즈로 소설 창작함으로써 내 자신의 유니크한 풍격, 방향을 형성하게 되었지요. 나는 지금도 내가 택한 길이 옳았다고 확신을 합니다.
김: 1987년 작가출판사에서 간행한《浮躁》를 읽으면서 저는 작가의 언어적 매력과 현실중국의 농촌개혁묘사에 탄복했어요. 장차 노신과 같은 대작가의 탄생이라고 혀를 차면서 읽었답니다. 노신화가 《伤痕》 으로 당대문학의 “상처문학”의 장을 열었다면, 선생님은 이《浮躁》로 들떠 있는 중국 80년대의 시대를 귀납했지요.
가: “浮躁”라는 단어가 내 소설로 인해 중국에 널리 사용된건 사실입니다. 현실 개혁와중의 들뜬 심경을 포착했지만 저는 여전히 이 작품에 대해 맘에 안들어요. 나 역시 이 작품을 쓸 무렵 마음이 浮躁해 있었거든요.(웃음)
5. 작가는 무엇인가?
김: 가선생님은 작가로서 글쓰기의 프로패셔널중의 프로패서널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1979년 겨울 결혼날에 원고지를 신령으로 제단에 모시고 손수 경례를 했다는 에피소드는 너무 감격적이었어요. 문학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혹애와 적자(赤子)의 마음이 잘 나타냈습니다.
가: 어떤 문단 호사가들이 날 두고 “글쓰기를 위해 글 쓰는 작가”라고 투정 대지만, 난 결국 작가니까 글쓰기에 전념하는게 내 일이잖아요. 목공은 가구를 만드는게 목공이고 요리사는 요리를 만드는게 요리사가 아닌가요!
작가가 글 아니쓰고 딴거 하면 작가가 아니지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하는게 아닙니까? 나는 숫벌이지만 여왕벌은 아니지요.여왕벌은 맛있는걸 먹을수 있으나 여전히 하는 일은 후대번식이니까요!
김: 《四十岁说》이란 수필에서 선생님은 글쓰기의 “문도”(文道)에 대한 감오나 많은 작가의 프로적 학견을 피로했어요. 참 멋있는 명문입니다.
가: 거기서도 내가 쓰다시피, 작가란 사실 수공예인과 같아서 글을 잘 쓰면 수공일을 잘 한것과 마찬가지지요. 내 일이 잘 되면 스스로 기쁘고 또 남을 유열(愉悦)시킵니다. 아주 간단한 도리에요. 만약 작가란 직업이 가장 마음이 자유롭다 한다면 또한 상반대로 가장 겉모양을 꾸밀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작가와 저열한 작가는 여기서 갈라지는거죠.
6. 먼 이계(异界)를 위하여
김: 우연인지 필연인지 잘 모르겠습니만, 선생님과 저는 글쓰기의 작법과 관념에서 많이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어요. 수년전 제가 요녕신문 기자의 인터뷰에서 조선족 글쓰기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닫혀진 감성의 폐역(闭域)에서 끌어내어 이적인 세계 즉 이계(异界)를 보여주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안주하고 있는 세계에서 귀렬(龟裂)을 뚫고 참신한것들이 거기서 분출돼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공포와 불안같은 경험이기도 하며, 또한 해방, 해탈, 유쾌, 괘감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동시에 가능케 해주는게 곧 문학이나 사상의 힘이다.”
가: 아주 멋진 말입니다. 작가, 좋은 작가라면 사회인생에 대한 태도를 표현해야 하며 이 태도는 자신의 것만 아니라 보다 많은 인간, 내지 인류의 것을 표달해야 합니다. 근대 중국에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学为体,西学为用)이란 관용어가 있는데, 문학에서 말하면 서양의 글쓰기 기교만 수용한다는 뜻이 되겠지만, 난 이 말에 늘 결함이 있다고 여겨요. 중국의 종교철학이나 서양의 그것은 구경 다 최고의 경계는 일치합니다.
김: 그렇죠. 따지고 보면 최고차에서는 거이 동일한 차원을 이루고 있지요.
가: 그래요. 구름위에는 다 찬란한 해빛인것과 같지요. 문제는 그 양광아래 각양각색의 운우나 풍설이 제각기 다채로운 양상과 미학을 자랑하고 있는겁니다. 여기서 동서양인의 사유방법수준을 분석해야 하죠. 수묵화와 유화, 희곡과 화극, 중의와 서의… 동양의 정체감 중시와 서양의 실험분석 중시를 인식해야 하며 그 독립성과 풍부성을 알아서 구름층을 넘어서 인류지고의 상통한 경계로 가야하지요.
“ 가장 민족적인게 세계적이다”는 언설을 난 그리 찬성하지 않아요. 이 “민족적”인게 인류 최후의 상통한 경계를 갖춰졌나가 관건 포인트입니다.
김: 맞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것, 내것만 고집하여 그것을 쓰는것도 좋지만 열린 작가라면 먼 이계, 이성을 위해 그들을 겨냥하여 글발을 쓴다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멀리 후세에도 100년뒤. 500년뒤에서 남을 작품을 탄생시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봤을 때 중국작가들이 정치적 대환경하에서 쓰고 있는것은 안일한 현실터치에 가미된 이데올로기입니다. 아이러니 하게 이런 이데올로기적 작품은 더 좁은 폐색(闭塞)화 시키고 타자, 세계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수 없지요. 작가라면 의례 우선 ”아득히 먼 독자”에게도 전해질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는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시, 공간적으로 떨어진 독자들에게도 읽힐수 있는 그런 리더블일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사고와 저의 생각은 잘 일치되고 있어요. 앞으로도 “국민적작가”로서의 가선생님의 텍스트는 중국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가장 선구적인 표징이 될거라 확신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믿어주셔서
7. 《废都》는 왜 당대 최고의 위대한 소설인가?
김: 중국 당대문학을 거론 할때 가평요를 빠칠수 없고, 가평요의 문학에서 《폐도》는 누락시킬수 없는 이정비적인 거작입니다. 농촌 소재를 쓰다가 도시 지식인의 생태를 재현한 작품으로서, 민국이래 소설중에서 최고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히트작이었지요. 93년 여름 방학 일시 귀국했다가 심양 평론가 친구의 소개로 《폐도》를 사서 읽게 되었는데 저는 정말 열독의 쾌감을 만끽하면서 읽었지요. 일본에 갖고 와서도 또 세번 읽었습니다.
선봉파 작가의 대표적 인물인 마원(马原)은 《폐도》는 당대 최고의 위대한 소설이라고 격찬했는데 저도 그의 관점에 동감입니다.
가: 《폐도》는 1992년에 출간했지만, 1990년에 쓴겁니다. 지금도 재판되고 있는데 해적판만 해도 내가 장악한것만 무려 70여종이나 되며 불완전 통계에 따르면 8천만부이상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나는 지식인의 부조(浮躁)를 통해 당대 문화의 溃败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 溃败를 초월할수 있는 성문화를 통하여, 그리고 그 문화적 전승의 맥락에서 1990년대 전통문화 부흥운동과 결합하여 뿌리를 찾고 싶었지요.
김: 그런데 세인들, 더구나 문학을 업으로 하는 평론가들까지도 시선이 《폐도》의 성적묘사, 너무 리얼리티한 성묘사에 쏠려 그만 선생님의 깊은 속심, 의도를 간과했던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큰 관심사도 쟁론이 일어난 것도 성적묘사에 대해서였습니다.
가: 맞아요. 성묘사에 눈길이 쏠리면서 내 작품의 모든것을 부정해버렸어요. 사실 지금 이 소설이 나왔더라면 별거 아닌데 말입니다. 일본에서 이 소설이 번역 출판되자 히트를 쳤고 번역자이며 문학평론가인 요시다교수는 “《폐도》야 말로 중국 5.4 이래 진정하게 인간을 쓴 장편소설”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인성과 인간의 약점을 묘사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 했어요. 그 뒤 프랑스에서 《폐도》가 프미나(费米那)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도 이것이었습니다.
8. 배설의 상징세계
김: 《폐도》는 현,당대 중국 최대의 쟁론을 일으킨 최대의 문제작으로 부상된것에는 성적묘사에 대한 쟁론, 곡해가 많았기때문이라고 봅니다. 《금병매》나 서양의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애인》,나버코프의 《로리터》와 비견할수 있는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폐도》는 완전히 봉살당하는 불운에 처해있었지요.
지금까지 대체로 주인공 장지접(庄之蝶)의 여러 여성과의 성접촉을 그냥 퇴폐,무료, 성에 대한 모독…등으로 편협된 관점으로 편향되여있지만, 나는 《폐도》를 수차례 정독하면서 작가의 경의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했어요. 흔히 사물을 바라볼때 두가지가 있지요. 오감(鸟瞰 )과 충감(虫瞰 )
그러니까 새들이 공중에서 지면의 물체를 바라보는 시점과 개미나 벌레가 지표에서 기면서 바라보는 시야가 전혀 틀리지요.
가: 그렇죠. 세인들 시선이 성묘사에 쏠려서 내가 진짜 의도했던 주제를 외면해버렸지요!
김: 지금까지 절대다수 평론가들은 그냥 충감으로 바라봤기때문에 작품중의 성묘사문 자체에만 확대경으로 바라보고 문제삼고 비판했지요. 좀 더 다른 이차원 (异次元)에서 이를테면 오감의 시야가 필요 하거든요.
저는 문화인류학, 비교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순문학평론가의 시각에서 이탈하여 보았어요.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클리포오드 기얼즈의 유명한 해석 인류학 내지 상징인류학 이론이 있습니다. 그의 상징, 해석학적 이론을 빌어서 보면, 선생님이 쓴 《폐도》의 주인공 장지접은 지식인, 작가로서 물욕이 팽창되고 정신적으로 들뜬 90녀대(지금은 더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썼어요.
직언하면 장지접의 성적 배설, 복수(复数)의 이성 파트너와 빈번히 행해지는 성적행위는 작가의 또 하나의 정신적배설행위를 상징하는것입니다.
가: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정신적 배설행위, 정채롭습니다.
김: 지식인, 작가로서 주인공은 두가지 펜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손으로 글쓰는 펜이고 또 하나는 남성의 심벌인 페니스, 이것도 신체적 펜으로서 자신의 글쓰기 배설의 펜이지요!
가: (웃음) 이런 발견은 그 누구도 한적이 없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비교문화학자만 할수 있는 해독이지요.
김: 감사합니다. 그래서 들뜬 인문환경하에 지식인의 적응, 내지 대항상태로 자신의 두가지 펜으로 배설을 통한 울분풀이를 하는거지요. 여기서 성교는 퇴폐이기보다는 당대 지식인의 이 부세(浮世)의 홍역을 치르면서 자발적인 적응, 또는 정신적 향유, 반항의 배설이기도 한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 김선생의 귀재다운 정채로운 해석에 나도 나 자신을 재발견한 느낌입니다. 문학비평은 역시 문학텍스트의 글발에 매달리는게 아니라 보다 넓은 지적(知的)시야에서 관찰, 비교, 해석하는게 너무 필요하다고 봅니다.
9. “언어폭력”의 야만이 사람을 키운다
김:《폐도》는 기념비적인 명작이지만, 이로 인해 선생님은 당대 최대의 비난과 중상을 받으시면서 인내해야 할 경우를 겪었습니다.
가: 벼라별 욕을 다 먹었지요! 그렇다고 나는 한번도 그런데 대응한적도 없었어요. 작품이 나간 다음 타자가 의논하고 비평하는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봉살이든, 격상이든 쌍방에서 밀어올리는 동력이 있지요. 이것도 다 나의 타고난 복이지요. 나를 긍정하면 난 더 잘 써서 보여줄꺼고 나를 비난하면 난 불복하여 더 잘 써서 내 실력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물론 내가 강해야죠. 수화상제 방능연단(水火相济 方能炼丹)이지요.
사실 나 본인은 여러가지 언어폭력에 많은 심적 상처를 받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폐도》의 대논쟁은 이미 문학비평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대 사건으로 비약발전 되었고, 내 일상생활, 신변의 사람들까지도 누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편견, 누명, 이미지는 개변하기 어렸웠고 문학밖의 많은 부조리, 곡해, 폭언이란 야만이 나를 괴롭히는 존재였지요. 그러나 《폐도》를 거치면서 나는 홍역을 무사히 치르게 되듯이 나를 단련시켰고 아무리 큰 일이 나한테 닥쳐도 나는 늠름할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은 감옥 가는 거 빼고 다 겪었지요!
김: 저도 조선족과 동족내부에서 수많은 중상과 비방을 당한 “수난의 지식인”으로서 선생님의 심경을 너무 잘 이해합니다. 한편 저는 그런 비방자에게 감사하고 싶어요. 적어도 마이너스적인 내 열성팬이니까요. 나늘 관심하고 주목하는 정열은 높이 봐줘야 그런 사람들의 지극감천의 정열에 걸맞는거니까요!(웃음)
모종삼(牟宗三)선생의 말이 생각나네요. “모든것을 용서해야 모든것을 승인할수 있고 모든것을 초월해야 모든것을 소탈할수 있다.”고
가선생님은 그런 초탈한 인간, 무욕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 초탈 무욕의 경계
가: 한 개인의 정신세계는 자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지요. 난 원체 키도 작고 형상도 별 볼것 없고 나서서 활보할 것도 못되는데다가 그 시기 가정 정치성분이 나빠서 부친이 반혁명으로 몰렸지요. 그래서 뭇사람들 앞에서 잘난척도 못하고 교제도 싫어했습니다.내가 말해 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었고 다들 비웃기만 했어요. 마치 샹린아주머니(祥林嫂)처럼 억울함을 하소연해도 다들 번거러워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년시절부터 말수 적고 어눌하고 묵묵히 독서만 하는 소년이었으며 성격도 우울하고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한 고독을 즐겼습니다. 고독은 인간, 특히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문인, 작가에게는 더 없는 낙원입니다.
그리고 나는 책욕심, 글욕심외엔 큰 욕심이 없어요. 금전도, 이성도, 명예도 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연”(缘)의 세계니, 구태여 안깐힘을 써서 추구한다고 얻어지는것도 아닙니다.
김: 선생님의 작품중에도 불교, 선종의 초탈한 이미지와 분위기가 늘 농후하게 잠재해있고 선생님의 서재에도 그런 느낌이 다분히 들어요. 선생님의 50세를 기념하여 쓴 수필《50大话》에서도 선생님이 말한 “人生一片心, 不因人热;文章千古事, 聊以自娱”란 귀절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가: 내가 원래 병약한 체질이라, 체약다병과 과언과욕(寡言寡欲)은 내 인생의 셋트처럼 따라 다녔어요. 내가 다병하니까 여기저기 기묘하게 아픈데는 많지만 그게 또 나로 하여금 많은 재난과 거북함을 무난히 넘기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 날 보고 무슨무슨 직위에 올라야 하고 무슨무슨 문학상을 받아야 하는데 하면 난 그냥 난 병꾸러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무연하다고 한마디로 답한면 그만이니까요!
인간이 욕심이 과다하면 여러가지 병, 정신질환에 걸리고 자신을 괴롭히지요. 문인, 작가, 지식인은 으례 욕심을 누르고 자신의 글쓰기나 연구에 몰두하는게 편하다고 봐요. 너무 과욕은 본말전도의 위험성을 자초하거든요. 작가는 글만 쓰고 평가는 타인에 맡기면 그만입니다.
11. 문학은 자유로운가?
김: 외견에는 연약해 보이나 내심은 강직한게 선생님이지요. 제가 선생님의 수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하나의 발견이라 할까, 정확히 말하여 놀란 사항이 있는데요. 선생님의 1970년대 초부터 수필, 산문이나 지금까지 장편거작을 쭉 읽어보아도 많은 작가, 문인에게 보이는 체제에 영합하거나 시류에 발라 맞추는 그런 글이 한편도 없는겁니다.
중국문학자체가 “文以载道” 의 전통을 전승하면서 또 흔히 정치나 정치포부와 밀착되어 영위해왔지요. 특히 현대,당대에서 혁명의 테제가 늘 개인 일상의 삶을 독차지 했으며 정치가 인간의 모든 정신세계 내지 글쓰기의 주제가 되지 않을수 없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건 1920년대 심종문, 장애령과 판이한 한계죠. 그러나 경의로운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에는 혁명이나 정치에 영합한 인소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고중시절인 1979년에도 습작시 4인방을 비판하고 개혁을 가송하는 그런 정치적요소를 듬뿍 넣었거든요.
1980년대이후로 중국문학은 전례없는 서양의 사조와 시야의 충격으로 가장 활약하게 됩닌다. 문학이 문학다운 80년대시대가 열리고 인간, 인성을 쓰는 문학이 열리게 됩니다.
가: 사실 말씀하다시피 나와 같은 연배의 작가들은 80년대에 들어서서 문학의 본연에 개안하고 문학을 하게 됩니다. 서양의 여러 유파나 사조들이 쉴새없이 밀려오고, 문학은 실험이 거듭되고 반짝 스타도 나타나고 어떤 작가들은 또 자발적으로 글쓰기를 포기하기도 했어요. 최초 전국문학상 수상자들인 王蒙,刘心武,卢新华, 张承志,张洁등등 많았지만 현재 그 중에서도 남은 작가가 많지 않아요.
30여년이 지나서 주요하게는 사고양식의 변화가 많았는데 물론 문학사유가 아직 철저하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출판사나 작가나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관념은 각가지로 분화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것은 여전히 5,60년대의 관념이 농후합니다.
이를테면 시대의 거울이요 사회의 기록자요, 인민의 대변인이요, 문학의 몇개 대요소요, 무슨 환경중의 전형모델성격이요 하면서 문학관의 집단무의식의 요소가 너무 굳어 있지요.
제가 30여년동안 해온 일도 이런 굳은 관념을 부수고 글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쓰기와 정치는 연관시키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12. 독립하라, 누구도 없는것 처럼
김: 문학은 자유로운가 하면 예스라는 대답이 어렵지요. 글쓰기의 대환경도 그러하거니와 가장 요긴한건 작가의 사유와 관념이 스스로 자신에게 정신적 족쇄를 무의식중에 채우고 글쓰고 있어요. 이를테면 위에서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작가든 편집이든 겁이 나서 스스로 자주 검열을 해버리는거예요. 이러니 작가는 많아도 고수준의 순문학작품이 태어날수 없지요.
선생님의 독립작가적 기품에 또 한번 놀란것은, 사실 오늘 낮 중앙에서 내려온 간부들과 회의를 하고 저녁만찬은 중앙어른들과 같이 하셔야 하는데도 선생님은 그들을 뿌리치고 저와 함께 식사하시고 말씀을 나눈것입니다. 선생님이 관장을 싫어하는 문인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오늘 직접 체험했네요. 《폐도》가 나온 뒤 중국작가협회에서는 중선부, 조직부에 건의하여 선생님더러 남방을 체험하면서 중국의 개혁형세에 대하여 써보라고 했지만 가선생님은 섬서의 화서촌에 가서 부서기직을 걸고 개혁을 반영한 작품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정치적 칭화이(情怀)가 결여하고 문단의 관장에 관심없음을 보여주었지요. 현재 중국의 대학의 학자나 문인들도 관장에 비집고 들어가기에 여념없는데 선생님같은 독립적 문인은 “희귀종”에 속하지요. 제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독립인격과 자유정신을 갖춘 지식이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모종의 의미에서 지식인의 약점은 바로 용기가 부족하고 독립성이 결여한것이지요. 이 민족이 너무나 많은 고난의 역사를 겪었기때문에 중국인의 정치칭제 (情结)는 꼭 강렬하면 사명감도 있고 기회주의자나 영합, 아첨하는자들도 많습니다. 위기에 닥치면 그냥 뿔뿔이 흩어지고 독립성이 없거든요. 현실생활에서도 늘 볼수 있는게 독립정신이 결핍한 사람이 너무 많은것입니다.
그러니 중국 지식인은 가장 매수당하기 쉽고 초안 (招安)당하기 쉬운 무리이예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맨날 글을 써서 관을 욕하다가도 일단 관직을 주면 곧바로 변절해요. 사탕발린 소리를 하는거죠.(웃음)
작가가 이 현실과 충돌되는건 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충돌이 없으면 명작이 탄생될수도 없습니다.
김: 사실 작가나 지식인은 반시류의 독립정신이 그의 영혼이니까요!
가: 그래요. 내가 문학에서 작품의 “두터움”(厚)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사실 정신측면을 가리키거든요. 내가 간부가 되어 누구를 간섭하거나 하는건 내 적성에도 안 맞습니다. 중국의 정치적 현실을 작가가 도피하기는 어려워요. 문학이 여러가지 풍격, 스타일로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 작가에게 중요한건 독립인격, 독특한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독립적 정신사상과 글쓰기가 주어지는게 요긴하지요. (이하 하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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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퇴직하고 조선어 가르치는 알바를 하면서 할일이 없는 찬밥신세로 알고있다.
그래 니 잘한다.김교수를 위하여 자동적으로 열심히 팬으로 뛰고있으니 정성이 갸륵구나.
임마,노익장하여
더 열심히 뛰여라!할일 없는 자식이 이 일에서나 보람을 느껴야지 ㅋㅋ
니가 누군지 다 알고 있다.졸렬한 소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