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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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62) 1910년 8월 29일의 광란
2014년 06월 14일 09시 13분  조회:4701  추천:21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2)

1910년 8월 29일의 광란      
 
김문학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조약》이 일본과 한국 량국의 “관보(官報)”에 동시 공포된다. 이날은 그뒤 “국치(國恥)기념일”로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래 동안 깊숙이 각인되게 되는 가장 슬픔의 날이 된다.

 순종황제는 “칙유”를 발표하여 국가를 일본제국에 빼앗기는 비극에 대해 감내하면서 겸양한 태도로 그 비참한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담담히 표현했다. 망국의 설음을 직설적으로 표현도 못하는 그 심정, 얼마나 가슴이 터졌을가. 상상만 해도 비분강개해진다. 이 칙유탓인지 병합시 표면상으로는 한국에서 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경찰과 군을 동원하여 계엄령체제하에 어찌 감히 란동이 있으랴.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혈사(血史)》에 따르면 망국에 못이겨 자결로 순국한 자가 28명이나 된다고 한다. 자결한 순국지사중에는 경세의 시구를 써서 유서로 남긴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8월 29일은 희열과 광란이 시작되는 날이였다. 일본 각지에서는 경축의 불도가니로 변했다. 일장기를 게양하고 손에 휘두르며 기념의 꽃전차에 서로 오르려고 다투었다. 《동경아사히신문》은 8월 31일, 그 광란을 이렇게 보도했다. “(히바야공원에 집합한 약 수만명 군중) 오후 7시반 3발의 호포(號砲)가 울리자 음악, 노래소리에 맞춰 홍백 아롱다롱한 초롱불을 든 수만명이 홍수같이 정문을 나왔다…  
   
2렬의 대행렬은 군가와 만세를 일제히 부르며 야마시타교에서 긴자4정목으로 흘렀다. 길 량측에 모인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가족총출동으로 나와 전기불꽃을 터치고 금속대야를 요란히 두드리며… 제례보다 엄청 법석을 피우면서 만세소리로 서로 호응하는 소리는 천지를 진감할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쵸칭교레츠(提燈行列)”라 칭해지는, 승리를 경축하는 야단법석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이 일청갑오전쟁때나 일로전쟁 승전때도 동경에서 10만명 대중의 축승회가 있었던것이다. 성대한 초롱불대렬의 열광장면은 가히 문화대혁명때 천안문광장의 열기와 비견할수 있었으며 그보다 더 법석이였을것이다.

  8월 30일 《동경아사히신문》 7면에 흥미로운 광고가 실렸다. “2천년래의 현안을 해결하였으니 기뻐해야 할 오늘, 일한합병! 초롱불행력=축화회. 마음껏 법석이고 마음껏 마시고 취해야 할 이 경사를 기념하자. 아무리 마셔도 먹어도 ‘재무’만 있으면 걱정없노라.”  이 “제무”란 일종의 청량제드링크이다. 기업광고까지도 한국병합의 광란에 편승하여 광고를 버젓이 냈던것이다.

  같은 날 《중외상업신보(中外商業新報)》는 “만일 국가의 팽창발전을 국력왕성의 사실적 결과라 한다면 대일본제국의 이같은 팽창에 대해 우리 나라 국민은 누구나가 만강의 환희를 금할길 없을것이다”고 전했다.

  당시 일본 전국은 병합에 의한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고 거국일치하게 일본정부의 식민지정책을 지지하였다.

  신문에서 발신하는 병합례찬론은 “한국령토 1만 4천방리”의 획득에 따라 원래 국토의 1.5배나 되는 땅을 얻게 되였다고 국민들은 모두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 “대륙웅비” 즉 침략의 미몽에 취해있었다.

  9월 1일의 일본 전국 소학교에서는 개학식을 리용하여 “일한합병에 관한 강화” 등을 통해 일본제국판도의 확장을 경축했다.

  자유주의자이며 유명한 《무사도 》를 집필한 지식인(일본 현행 5천엔 지페에 초상이 그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니이토 베이나즈(新渡戶稻造)까지도 한국병합에 대해서는 에누리없이 례찬했다. 그는 9월 13일 제일고등학교 입학식의 교장연설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잊을수 없는 일은 조선병합이다. 이것은 실로 문자그대로 천재일우의 일이다. 우리 나라는 일약 독일, 프랑스, 에스빠냐 등 나라보다 더 광대한 면적을 유(有)하게 됬다… 아무튼 우리 나라는 유럽의 제국(諸國)보다도 더 큰 대국으로 됐다는것이다. 제군(諸君)은 급격히 성장했던것이다.”

  그는 앞서 1906년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통감부 요청으로 한국 농업사정을 시찰하고 “조선에 대한 정체사회관과 민족멸시관을 품고 일본에 돌아왔으며 병합을 단순히 기뻐하였으며 제국팽창에 기대를 걸었다”고 일본인 타다카 신이치가지적한다.

  일본이 조선병합의 침략을 호도하고 찬미하고 있을무렵 흥미로운 일이 조선의 학교에서 일어난다. 1910년 9월 9일 《동경아사히신문》 2면에 실린 기사다. “동맹휴교선동, 6일 경성특파원 발. 어떤자의 장난으로 공화문우체국 도장이 박힌 각 관공립학교 생도들에게 불온한 격문을 우송했다. ‘대한국은 멸망하고 우리가 일본인의 통치에 감내하고있을수 없으니 남자라면 당당하게 동맹휴교하자’고 선동했다. 하여 관립사범학교 생도들속에서 이미 동요하고있으며 다른 학교 생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행적이 보인다. 그래서 비상경계를 함과 동시에 사범학교 생도 20여명을 검거하고 엄탐중이다.”

  7일 경성특파원 보도에 의하면 5일 밤 11시, 북부경찰소가 수모자 황재희를 연행했는데 황재희가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로써 동맹페학을 선동했다고 전한다.

  당시 일본의 신문보도에서 조선 열혈학생의 이같은 저항이 발견된다. 삼엄한 계엄체제속에서도 나라를 수탈당한 조선동포는 이런 방식으로 반항을 표달했던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안중근식의 단지동맹과 윤동주식의 암울한 저항의식을 로출한 조선의 동포가 어찌 한둘이였으랴!

  1910년 10월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 테라우치는 시정방침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판도는 바다를 건너 동아대륙에 미치고 새롭게 1천만이상의 인구를 포괄하게 되였다만 조선의 개선을 도모하는건 제국의 안녕과 동양평화의 결실을 획득하려고 한 까닭이므로 그 승패에 따라 국위(國威)의 소장(消長)에 영향을 끼칠것이다… 현하 급선무는 신령토의 질서를 유지하고 부원(富源)을 개척하는것이다.”

  조선침략의 기쁨과 함께 그 목적을 적라라하게 실토한 “제국의 야심”이였다.

  조선인에게는 국치의 날이 된 1910년 8월 29일. 그러나 일본에게는 꺼리낌없이 침략을 찬미한 광란의 날이였다. 이어서 36년의 조선지배, 특히 테라우치의 가혹한 무단정치지배가 막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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