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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1910년 8월 22일. 한국 근대사상 가장 암흑의 날이였다.
이날 황혼과 함께 바야흐로 락일(落日)무렵 무시무시한 계엄체제하에서 《한국병합조약》조인식이 진행되였다.
바로 이날 일본천황은 조선의 테라우치통감이 보내온 《한국병합조약》을 추밀원에 자문한 뒤 즉각 재가했다. 22일 한국의 어전회의에서도 병합에 반대한 이용식 학무대신이 결석한 외 이완용, 조중응, 박제순, 고영희 및 김윤식, 민병석, 윤덕영, 이병무 등 대신이 참석했으며 순종황제가 통치권양도를 선지하고 서명과 국인을 박은 전권위임장을 총리 이완용에게 넘겼다. 이완용이 조약안을 배포하고 설명을 한데 대해 출석자들은 찬동하였으며 순종도 이에 재가했다고 한다. 김윤식의 《속음청사》에 보면 “제신(諸臣)들은 서로 묵묵히 바라보며 안색을 읽었다”고 하며 자신은 “불가”로 반대를 표했으나 모두 묵인하고 슬픔에 잠겨있었음을 알수 있다.
오후 4시경, 이완용, 조중응이 통감부에 찾아가 조약체결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일한 량국어로 된 조인서 2통을 테라우치와 이완용이 서명, 조인했다. 자신의 플랭대로 일이 성사된것에 대해 테라우치는 일기에다 “합병문제가 여차하게 쉽게 조인될줄이야. 하하”라고 기쁜 심정을 적고있다.
한국병합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는 용의주도한 기획을 거듭해왔던것이다. 이토 암살전인 1909년 4월 10일, 당시의 카츠라(桂)수상, 고무라(小村)외상은 “대한방침”, “대한시설”을 이토에게 제시했는데 외무성 정무국장 쿠라치(念地鐵吉)에게 그 초안을 작성케 했던 문서였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병합한다”는것이 그 골자였다. “병합”이란 단어는 쿠라치가 고안한 신조어인데 합병(合倂)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극적이 아닌 이 말을 만들었던것이다. 합병(合倂)도 병탄(倂呑)도 아닌 병합(倂合)으로 평등, 공정한 뜻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다.
이토가 죽은 뒤 병합정책은 장애물이 없어진것으로 성급히 진척된다. 국제적승리의 합법성의 빌미를 획득하기 위해 우선 1910년 2월 고무라외상이 로씨야와 교섭하여 로씨야정부의 동의를 얻는다. 한국병합승인을 대가로 로씨야의 청국침략을 일본에게 협력을 기대했던것이다.
이어서 1910년 5월 19일 고무라외상은 영국 주일대사 맥드날드와 병합을 타진하여 영국리익을 보장하는것으로 일본의 병합에 찬성한다.
이렇게 약소국 조선은 세계렬강이 유린하는 상대로 되였으며 병합은 렬강의 “공범”이기도 했다.
1910년 5월 륙군대장 테라우치(寺내正毅)가 아라소네 2대 통감을 제치고 제3대 통감으로 임명되는데 그는 가츠라수상의 오른 팔이 되여 한국병합기획에 적극 투신해온 인물이였다.
7월 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병합조약, 조칙안(詔勅案), 선언안(宣言案)을 승인하였다. 국명을 “조선(朝鮮)”이라고 결정했다. 조선은 옛 호칭이기도 하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동국여지승람》)에 유래되며 그 리유에는 또 특별한것이 있었다. 병합한 뒤 량국이 한 나라로 합방되므로 병합후에도 일국이 존속하는 인상을 주는 “한국(韓國)”이란 명칭은 그 “국(國)”자때문에 일본정부가 기피했던것이다.(《한국병합》 운노후쿠쥬)
한편 한국에서는 정부의 경찰기구를 통감부에 흡수시키고 일본의 헌병, 경찰 제도를 군사경찰과 일체화시킨다. 일로전쟁에서 간첩전을 전개한 아키이시(明石元二郞)가 통감부 경무총장을 겸임한다.
7월 23일 한국에 부임한 테라우치는 8월 16일, 이완용수상을 불러 병합조약의 수락을 강요한다. 우선 병합은 “합의적조건”에 따라 진행해야 된다고 하면서 《병합방침각서》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이완용은 “국명은 의연히 한국으로 존속시키고 황제에게는 왕의 존칭을 주기 바란다”고 강하게 나왔다. 1909년 11월 이토의 추도식에 참가했던 이완용은 그때 역시 가츠라수상을 만나 한국 국왕의 존속, 한국정부 수반을 한국인으로 할것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이완용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국왕존속 등 요구는 형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럼 《한국병합조약》, 정식으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의 내용은 어떤것인가? 그 전문(全文)을 보자.
한국 황제페하와 일본국 황제페하는 량국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지 못한것을 확신하여 이에 량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일본국 황제페하는 통감 테라우치를, 한국 황제페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이 전권위원은 회동합의한 뒤 아래와 같은 내용의 조약에 협정하였다.
1. 한국 황제페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페하에게 양여한다.
2. 일본국 황제페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함을 승인한다.
3. 일본국 황제페하는 한국 황제페하, 태황제페하(고종), 황태자페하와 그 후비 및 후처(부인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에 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그리고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페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과 그 부인들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것을 약속한다.
5. 일본국 황제페하는 훈공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을 행함이 적정하다고 인정하는 자에 대하여 영작(귀족의 지위)을 수여하고 또 은금(하사금)을 준다.
6. 일본국정부는 위와 같은 병합의 결과로서 모든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일본국에 려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7. 일본국정부는 성의와 충실로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관리로 등용한다.
8.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페하와 한국 황제페하의 재가를 받은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그 증거로 두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조인하는것이다.
용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명치 43년 8월 22일 통감자작 테라우치 마사타케
《한국병합조약》 이후 1주일 동안 비밀에 붙였다가 국내외에 대한 정식 발표는 8월 29일이였다. 이리하여 조선왕조는 멸망하고 일본국의 일부가 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된 청조가 신생의 한족중심의 공화국 중화민국으로 된데 비해 조선왕조는 일본인에게 멸망당하며 그것은 조선민족의 비극이였다. 외국에 의해 강제병합의 형식으로 기나긴 36년의 식민지지배가 시작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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