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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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아시아의 "공적"으로 전락한 일본
2014년 02월 16일 16시 39분  조회:4851  추천:10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7)

아시아의 "공적"으로 전락한 일본

김문학
        


  동아시아 근대를 읽으면서 발견되는 일본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악(惡)”으로만 일축하지 못할 긍정적인 일면과 역시 백번 강조해도 과언이 아닌 “악”이 엇갈리면서 아시아 근대무대에 로정되는것이다. 
                                                    
  환언하면 일본이 서양에 비해 “후진적”인 아시아에서 솔선 근대화에 개안함으로써 그 성공에 따른 지(知)적 결절환(結節環) 으로서 아시아를 련결시키고 유신, 개혁, 서양문물수용, 근대사상, 독립의식, 애국주의 등 인류의 학지(學知)를 아시아에 전퍄, 련결시킨 축면은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이 책에서 필자가 노린 포인트의 하나가 동아시아의 100년 근대를 일국이 아닌 토탈적인 복합체계로서 감안할 때 아시아의 최선진국이였던 영향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향하에 있었던 우리 자신의 과거적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부정하는 “우(愚)”를 범하게 될것이다.

  한국의 현대 문명비평가이며 작가인 복거일씨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직언한다. “1854년대의 개항이후로 일본의 발전은 그대로 눈부셨다. 1867년 봉건체제인 바쿠후정권을 무너뜨리고(중략)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크게 성공해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쉽게 승리했다.     

    환언하면 일본이 서양에 비해 “후진적”인 아시아에서 솔선 근대화에 개안함으로써 그 성공에 따른 지(知)적 결절환(結節環) 으로서 아시아를 련결시키고 유신, 개혁, 서양문물수용, 근대사상, 독립의식, 애국주의 등 인류의 학지(學知)를 아시아에 전퍄, 련결시킨 축면은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이 책에서 필자가 노린 포인트의 하나가 동아시아의 100년 근대를 일국이 아닌 토탈적인 복합체계로서 감안할 때 아시아의 최선진국이였던 영향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향하에 있었던 우리 자신의 과거적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부정하는 “우(愚)”를 범하게 될것이다.

  한국의 현대 문명비평가이며 작가인 복거일씨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직언한다. “1854년대의 개항이후로 일본의 발전은 그대로 눈부셨다. 1867년 봉건체제인 바쿠후정권을 무너뜨리고(중략)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크게 성공해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쉽게 승리했다. 이어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단숨에 국제무대의 주역들가운데 하나가 되였다. 로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이 얻은 국제적 명성과 지위는 20세기 동아시아의 력사전개과정을 리해하는데서 본질적 중요성을 지닌다.”(복거일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로일전쟁의 승리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지대했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 인도의 독립운동가 리더 네일은 물로 토이기, 벌가리아, 웽그리아, 핀란드, 아프리카 여러나라의 사람들에게 큰 고무격려가 되였다. 영국의 사학자 찰스 플러는 《서양전사》에서 “유색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우위에 도전함으로써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일깨웠고 모든 식민제국들에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가했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일본의 승리는 거의 모든 식민지국가들에서 독립운동을 환기시켰다는것이 주목된다.

  세계 근대사료를 두루 보아도 알수 있지만 당시 로일전쟁에서 로씨야를 전승한 일본에 대한 표상은 월등 긍정적, 고무적이였다는것이다. 지금껏 백인종의 우월성에 짓눌린 유색인종들, 그리고 로씨야의 압박을 지속적으로 당해온 주변국가들, 또한 로씨야내부에서의 민족적, 종교적 억압을 받아온 유태민족이나 이슬람교도들에 대해 일본의 승리는 희망을 안겨준것이였으며 이런 증언과 사례는 무진장히 존재한다.


  청년시절의 모택동이 어드워 스노에게 술회한 “황해해전”의 노래를 일본귀국 류학생교원에게 배워 일본에 동경심을 품었다는 에피소드나 필리핀에서 명치천황을 “황색인종의 영웅”으로 례찬한 소리가 높았다는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립헌제가 전제국가에 대한 승리로 인식한 청국의 지식인들이 제창한 “일본학습”은 량계초나 강유위의 신문, 언설에서도 잘 표현되고있으며 지어 무술변법탄압의 장본인인 서태후 역시 의화단운동후 국가체제의 변혁이 청조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수단이라고 깨달았으며 일련의 개혁, 이를테면 1905년의 과거제도페지, 일본의 학문을 관리등용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립헌제를 배워 자유와 개인권리존중의 노력이 일본인의 애국심향상에 이르고 결과 일청, 일로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리해가 생성된다. 이를테면 김진성(金振聲)은 “립헌은 문명부강의 주물(主物)이며 또한 문명부강은 립헌의 종물이다”고 말한다.(대한흥학교(大韓興學報) 제4호)

  그러나 그뒤 일본의 행위는 아시아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1905년 로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로씨야를 막아버리고 대신 조선을 보호국화의 미명으로 손아귀에 완전히 넣고 지배하게 된다.

  “보호국”이란 대체 무엇인가? 일본 사학자 운노 후쿠쥬교수에 따르면 근대 제국주의의 보호국지배란 전근대의 종속관계와는 이질되며 전통적 종속관계를 부정하는것으로 출발한다. 청국이 그동안 종속관계적인 보호국이였으나 일본이 행한것은 근대 제국주의적인 보호국지배로서 보호를 해주는 나라(일본)가 피보호국의 외교권의 일부나 그 전부를 박탈하고 외교기능을 대행하는 관계이다.

  국가의 국제법에서의 최대의 주권으로서의 외교권의 상실은 결국 그 국가주체의 상실과 함께 본질상 “독립국”이 아닌것이였다. 1905년 조선보호국화에 이어 일본은 1906년 만철회사를 선봉으로 만주에 진출한다.

  이에 대해 아시아사람들은 착잡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당시 동경에서 류학중인 유명한 진천화(陳天華)는 “솔직히 고백하여 일본의 이번 전쟁은 동아에 있어서 전혀 공로가 없은것은 아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즉각 일본과 동맹하려는것은 중국을 조선식으로 하는것이며 일본과 분리시키려는것은 동아시아를 멸망시키려는것이다”고 지적한다. 조선을 망국화시키고 중국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경계하면서 구미렬강의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일본의 군사력을 무시할수 없다는 고삽한(씁쓸한) 비평을 한다.(《절명서》1905)

  진천화가 위구했던대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동아시아에서 식민침식적인 권익확대에 서슴지 않는다. 1907년 청정부를 리용하려 한 일본정부는 손문을 국외추방시키고 기관지 《민보》의 발행을 정지시키는 명을 발한다.     

    불과 2년사이에 일로전쟁의 승리로 아시아 및 세계 식민지독립운동을 고무격려했던 일본은 1907년에는 구미렬강의 식민제국과 손잡고 아시아에서의 식민제국으로 자진해나선다.

  일본이 조선에서 행사한것은 로씨야제국이 기도했던 식민화를 대신해서 한것이며 중국 만주 등에서 선택한 길은 결국 구미렬강과 같이 “영국의 국기를 휘두르며” 감행한 국미제국의 식민지 분할의 길이였다.

  이리하여 당시 일본에서 류학중인 류사배(劉師培)는 1907년 이렇게 갈파한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조선의 적일뿐만아니다. 이제 인도, 윁남, 중국, 필리핀의 공적(公敵)이다.”(《아주현세론(亞洲現勢論)》)

  로일전쟁을 계기로 세계적렬강의 반렬에 올랐다고 오만해진 일본은 웃으면서 칼을 휘두르며 아시아의 맹주, 왕자로 군림한다. 에누리없이 아시아의 “희망”으로부터  “공적”으로 전락된 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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