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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일본인의 해외 동경, 특히 서양에 대한 동경심은 전근대에도 엄청컸다. 서양으로 간다는 “양행(洋行)”이란 신조어까지 탄생시키면서 막말(幕末)로부터 붐이 됀 서양행은 일본인이 보편적으로 품고있는 “서양동경심”을 잘 로정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있어서 서양은 동경해도 당시의 도항사정, 경제사정으로 려행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양려행 대신 만족시켜준것이 바로 조선, 만주(중국대륙) 려행관광이였다. 당시 이를 “동아려행권(圈)”으로 불렀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동아려행권은 서양권과 비교해 아직은 미개발상태였으나 일로전쟁직후인 1906년부터 동아려행의 붐이 시작된다. 왜 일거에 조선과 만주중국려행관광의 붐이 형성됬을가?
그 리유로는 일로전쟁승리의 력사적배경이 있다. 1905년 9월 일로전쟁승전에 의해 일본은 로씨야로부터 청국의 “만주남단, 관동주의 조착권”과 “동청({1C?철도의 대련ㅡ장춘사이의 권익”을 양도받는다. 일본정부에서도 이 지역 보호국으로 조선에 일본국민의 려행주유를 개방하였기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리유는 1906년부터 조선이나 만주로 통한 철도가 개통되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려관들도 많이 생긴것이다. 특히 1906년 설립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이라 략칭했음)의 설립으로 철도설비가 구전되며 철도연선의 구역에도 일본인관광에 편리를 도모한 인프라가 정비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만철회사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함)
“가자, 가자, 바다로 나갈바엔 인천항, 대련항, 아직 보지 못한 곳으로 나가보자. 보라, 보라, 산을 구경할바엔 만주전토, 한반도, 보지 못한 산봉우리를 보러 가자.” 유아사라는 시인이 1906년 6월 22일 동경 아사히신문에 쓴 “만한순유가”의 한토막이다.
그해 아사히신문에서 선국적인 기획 “일청, 일로 전적견학 단체려행”을 조직하여 처음으로 일본대중들이 조선, 만주땅을 밟게 된다. 그리하여 7월 25일, 특별선으로 요꼬하마를 떠나 만주에 도착하자 려순, 봉천 전장터, 무순탄광시찰, 만주의 넓은 땅을 그들은 친눈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조선, 만주 려행의 선코를 떼자 잇따라 붐이 형성된다. 당시 만주, 조선의 산업, 지리, 국토, 력사, 교통, 민속, 동식물채집 등 실정파악과 력사학습의 목적으로 관광이 전례없는 호황을 이룬다.
1909년 9월 3일부터 30일까지 실시된 “만한관광단” 일행 34명은 1개월동안 만주, 조선에 대한 려행시찰을 통해 이듬해 《만한관광단지》라는 려행체험담집을 간행한다.
그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만주, 조선에서 그 어디를 가도 국빈급 환대를 받았으며 일반 현지인들과 직접 회화를 하기도 , 교류를 하기도 했다고 쓰고있다. 인천에서 일본인들은 일로전쟁시 드리야투호전함이 침몰된 장소를 돌아보고 신사참배를 했으며 평양에서는 일로전쟁 전사자의 묘지를 참배하기도 했다.
실업가, 민간인의 만주, 조선 관광은 로일전쟁승전의 전적지를 관광함과 동시에 이곳에다 관민이 협력하여 식민개척을 하며 일청, 일로전쟁에서 승리를 취득한 일본의 지대한 자존심을 확인하여 미개의 나라, 후발국 조선, 만주를 식민지로 하는 필연성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 한국병합후 조선반도에 려행한 일본인의 수자가 급격히 늘어나며 만주뿐만아니라 북경, 상해, 천진 등 대도시에도 많이 드나들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유명 문사들의 조선, 중국려행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것도 특기할만 하다. 일본 근대의 국민적작가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만철의 초대로 조선, 만주를 려행하고 유명한 체험기 《만한 이곳저곳》을 발표한다. 유명 문사들의 필을 빌어 만주철도회사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뒤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등 유명 작가들이 만주려행의 길에 오른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당시 학생들의 수학려행으로 조선, 만주를 택한것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교육에서 학생들의 “원족”은 군인의 “행군”을 본따서 행해진것인데 1884년 7월에 벌써 “생도의 원족”이 탄생한다. 지금까지 일본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수학려행, 원족은 사실 백여년전의 전통을 갖고있다.
1906년 7월 문무성과 륙군성이 공동으로 주최한 “전국중학교 합동만주려행”이 실행되였는데 그 목적은 역시 일로전쟁 전적지 순방이였다. “장래 국민교육에 종사할 인물, 미래의 교사들에게 일로전쟁승리의 자존심과 제국일본령토의 광대함을 체험하고 제국신민을 육성하는” 려행이였다.(이양희) 조선으로의 수학려행은 1920년대에 들어서 대폭 증가한다. 1920년 7월 《조선》에 의하면 그해 5월, 1개월간 기차리용 단체객이 21,408명인데 그중 학생단체가 16,900명이였다.
당시 만주, 조선이 일본려행자들의 인기를 끈 리유는 섬나라 일본에는 없는 광활한 지평선이 보이는 대자연이였다. 당시의 일본인 만주려행체험에는 “기차의 차창을 통해서 바라본 만주평원”의 묘사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료양, 길림도 좋고 려순도 좋았으나 당시 려행체험에서 보아낼수 있었듯이 일본인의 최고인기의 려행지점은 대련, 봉천, 신경(장춘), 할빈 이 4대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최고인기도시는 할빈이였다고 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이중이국정서가 풍기는 도시였기때문에 일본인들이 선호했던것이다.
1930년대에 만주려행은 철도의 정비에 의해 세계 최고속의 “아시아”특급이 달리고 시내에는 관광뻐스가 질주하는 등 사정으로 보아 피크에 달한다. 특히 1932년대 “만주국”창설과 전시체제하에 일본군화의 발걸음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일본인의 만주도항은 급증한다. 1936년부터 히로다내각의 “만주이민계획”책으로 32만의 일본인이 북만을 중심으로 정착한다. 1945년 155만의 일본인이 만주에서 살고있었다.(군인과 민간인 합계)
오늘 일본인의 중국동북려행과 한국려행의 뿌리는 100년전의 “동아시아려행권”에서 비롯된것임을 발견하면서 그 식지 않는 려행의 열에서 일본인의 또다른 “이문화 동경심”을 읽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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