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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근대 조선사에서 가장 참혹한 회상사를 당한 인물은 김옥균과 명성황후를 꼽아야 한다. 개화파 수령 김옥균은 민비(즉 명성황후)가 파견한 동족암살자에게 상해에서 총탄에 쓰러지지만 민비는 일본인에게 참살을 당한다.
“력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으로 칭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한일량국의 근대사 및 동아시아 근대사의 루락할수 없는 일대 사건이였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5시반, 경복궁 담을 넘어 광화문을 열어젖힌 괴한들은 북단의 건천궁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고종의 처소인 장안당과 왕비(명성황후)의 처소인 곤녕합을 점령한다. 고종이 그 괴한들을 가로 막지만 그들은 왕까지 밀쳐버리고 방약무인으로 전진한다. 곤녕합에서는 한 녀인이 궁녀들과 함께 장안당과 련결된 복도에 나타났다. 이때 뒤를 쫓던 괴한중 하나가 그녀의 덜미를 잡고 뒤뜰안으로 끌어내린 뒤 힘껏 칼로 내리쳤다. 비명속에 쓰러진 녀자는 바로 왕비였다.
그 칼을 휘두른 자가 일본 륙군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였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일왕의 명령에 따른 일본군부가 을미사변을 일으킨것이다.”(2010년 1월 11일 조선일보) 서울대 이태진명예교수가 현장에서 명성황후의 살해된 상황을 설명한 말이다.
그뒤 괴한들은 왕비의 시신을 곤녕합의 옥호루로 옮겨 사진과 얼굴 대조를 마치고는 그중 한 남자가 “동포로서는 차마 쓰기 거북한 행위를 감행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민비암살》(1988년)을 집필한 일본 녀류넌픽션작가 츠노다 수하코(角田房子)씨가 기술하고있다. 그 쓰기 거북한 행위란 바로 시간(屍姦)=시체릉욕을 가리킨다. 이렇게 약소국의 조선의 국모는 죽어서도 릉욕을 당하는 비운을 면치못했다. 참 슬픈 일이다.
“이어서 시신을 곤녕합 옆의 록산(鹿山)으로 운송되여 나무더미를 쌓고 그우에 올려 불로 태웠다. 타다남은 시신의 일부분을 건청궁앞 련못 행원정에 던졌지만 곧 수면으로 떠올라 다시 거두어 록산기슭에 묻었다.”(이태진. 전게신문)
최근 재일교포이며 녀류사학자인 김문자(金文子)씨가 풍부한 외교자료와 군부자료를 섭렵하여 펴낸 연구서 《조선왕비살해와 일본인》(2009년 2월)에서 지금까지 일본의 랑인, 장사(壯士)들이 민간차원에서 추진했다는 정설을 뒤엎고 일본의 군부 참모부가 관여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구명했다.
이 사건에는 당시 참모본부의 지휘관 가와가미(川上操六)와 조선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결탁하여 면밀한 계획하에 그것을 이토 히로부미수상, 무츠(陸奧宗光)외상이 묵인승인후 륙군의 일부, 해군 첩보장교 그리고 민간의 “장사”를 동원하여 정예군단을 결성해서 결행했던것이다. 즉 군부, 정부가 획책한 모략사건이였다는것을 실증하였다.
필자가 이 책을 통독하면서 느낀 감상은 철저한 실증주의의 립장과 방법으로 력사의 진상을 밝히는 연구자의 진지한 태도였다. “지금까지 륙군중장인 조선공사 마우라를 수모자로 한 우발적사건으로서 치우쳤던 사건이 실은 일본 정부와 군부의 합작에 의한 용이주도한 음모사건이였다는것을 실증한 이 책은 일한 량국의 근대사 연구에 큰 투석으로 되여 이 사건을 근대 한일관계를 사색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력사사건을 바라봄에 있어서 사건만큼 중요한것이 왜 그 사건이 발생했냐하는 원인, 리유 규명이다. 1895년 10월이라면 일본이 청일갑오전쟁에서 승전을 거둔직후라는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일본이 승리했지만 “3국간섭”으로 인해 료동반도를 다시 로씨야측에 양보하고 로씨야와의 대립이 가시화되였다.
한편 당시 조선의 반일기운이 세차게 일어났으며 궁정과 정부에서도 반일움직임이 보이면서 왕비를 비롯한 조선은 로씨야쪽으로 인심이 기울어지고 친로정권이 탄생되였다. 왕비에게 추방당한 친일파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왕비를 제거하는 모략을 획책하게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으로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의 수모로 일본군과 친일세력이 함께 계획, 실행하게 된다. 왕비가 청국의 서태후와 비슷한 모략에 뛰여난 인물이라는 평도 있을정도이니 일본측에게 있어서 그녀는 자신들의 조선지배책을 가로막는 중심인물인것은 사실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어난것이 참혹한 왕비시해사건이다.
1897년 대한제국선포후 왕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며 지금 우리가 흔히 아는 “명성황후”가 탄생된다.
서태후와는 달리 명성황후는 우리 민족에게는 그 얼굴 모습조차도 확인되지 않은, “얼굴없는” 국모다. 교과서나 많은 서적, 자료에 “민비”,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게재되군 하는 사진은 김누자씨나 여러 사학자들이 고증에 의하면 실은 황후 본인이 아니라는것이 판명되였다. 미국, 프랑스, 이딸리아에서 출판된 서적, 잡지까지 추궁하여 본 결과 그 최초의 게재 잡지는 일청전쟁중 발행한 일본의 사진화보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 촬영된 녀성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궁정의 궁녀였음이 판정되였다.
명성황후의 모습이라고 지칭된 사진이나 그림은 여러장 있으나 그 진가에 대한 론난 역시 치렬하지만 지금까지 황후의 진짜 얼굴을 확인할수 없다. 황후가 살해된후 고종이나 조선황실에서 그녀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어 수소문했으나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황후를 가까이에서 접견했던 언더우드녀사는 “얼굴이 갸름하며 약간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반짝이는 총명스런 눈빛이 인상적이였다. 시선을 끄는 미모는 아니였지만 지적이고 예리함이 풍기는 용모였다”고 그녀의 체험기 《상투와 함께 15년》에서 황후의 모습을 묘사하고있다.
비숍녀사 역시 “약간 창백한듯한 얼굴에 몸매는 마른편인데 날카로와보이는 용모에 예리한 통찰력의 눈매는 강한 개성이 있었다”고 기술하고있다.
100여년전 유린당한 민족과 나라와 같이 얼굴모습도 확인되지 못한채 잃어버린 얼굴로 남아있는 국모의 용모, 조선민족의 깊은 슬픔을 대변하고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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