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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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2012년 12월 01일 22시 51분  조회:5101  추천:25  작성자: 김문학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1.
그대는 이런 풍경을 보았는가?
소 한 마리가 풀을 뜯어먹고 있다. 유유자적 하게 소는 열심히 풀을 먹고 있다. 멀리 숲으로부터 봄바람이 노래같이 불어온다. 그리고 전원(田園)의 어디선가 목동의 피리소리도 들려온다. 소는 봄바람 노래와 피리소리를 흠상한다. 소는 경 읽기는 싫어하나 피리소리 노래 가락은 즐긴다. 음〜매〜 하고 짖는 소리는 좋다〜 하는 기쁨의 말이다.

소등위에는 등에가 내려앉아서 봉봉거리며 소를 깨문다. 그러나 소는 등에를 내쫒지 않고 그냥 둔다. 등에가 가려운데를 긁어주기라도 하듯, 소는 여전히 유유자적 풀만 뜯는다. 이따금 시누런 오줌을 줄기차게 배설한다. 그리고 빵 같은 커다란 똥도 눈다. 분뇨는 다시금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유와 함께 분뇨는 소가 大地에 남기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소가 되고 싶다.
나는 십우지도(十牛之圖)의 선화(禪和)에 나오는 소가 되고 싶다. 明禪師의 放牛圖頌(방우도송)그림이 뇌리에 떠오른다. 소와 목동으로 인간의 깊은 깨달음을 상징한 선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소가 망아(忘我)의 세계인에 진입하여 유유자적 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부럽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화나 근대 극화의 대화백 李苦禪(이고선) 선생의 소의 방목도는 선의 사상을 활사 하고 있다. 제백석(齊白石)도 무척 좋지만, 선우(禪牛)도 만큼은 천하의 제백석도, 오창석(吳昌碩)도 이고선을 따르지 못한다.

이 유연한 소의 망아(忘我)지경을 서양의 근대 철학자 니체까지도 동양사상으로서 크나큰 매력을 느꼈으며 너무 선망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니체가 살았던 독일의 시골에도 소가 풀 먹는 광경이 흔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나도 어렸을 적 심양 근교의 마을에서 자라면서 소가 풀 뜯는 풍경을 자주 보아왔다.
만약 내가 저 소였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풀을 열심히 먹을까 하고 중학생인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 기억이 있다. 풀 뜯는 소를 바라보면서 풀판에 누워서 책장을 번지던 소년시절은 꿈도 많았다.
 
2.
철저하게 시간에 쫓기는 삶, 공리성과 실리성을 따지고 物慾에 팽배된 인간사회에서 인간은 소의 유유자적한 자유, 여유를 빼앗긴지도 오래다.

그리고 지견과 관점이 다른 他者를 포용이 아닌 공격으로 자신의 모종의 실리, 공리를 절취하려고 필사적으로 목숨을 건다.
그게 신물 나도록 질린다. 공격성에 노출된 암퍅스러운 앙심을 품은 앙칼지고 방정스러운 모습이 나는 싫다. 타자에 대한 공격, 그 공격성을 인간의 또 하나의 지대한 “추악”이다. 인근의 타자와의 싸움을 불교, 기독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모든 종교는 “악”으로 간주한다.
“공격성”을 인간이 짊어진 “본능”이라고 한 철학자,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그리고 근대란 극한의 생활 속에서 숙명적 반응으로서 “공격성”을 설명한 서양사상가들이었다.

1920년-30년에 프로이트, 로렌츠, 등 세계적 연구자들이 획기적인 연구업적을 쌓았다. 구조주의적 정신분석의 시각에서 잭크ㆍ라칸은 인간의 공격성이 본능으로부터 아마고으로의 매트릭 변화에 있음을 갈파한다.

즉 인간의 공격성은 공격의 지향으로 노정된 신체해체의 심상(心像)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로렌츠 역시 인간의 공격성은 友情이 잠재돼 있으며, 우정은 공격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나는 이 가설이 설립된다면 공격성은 우정과 같이 소실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훗날 미국의 EㆍO 윌슨은 <<사회생물학>>에서 로렌츠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평화적 포우류라고 했으나, 그래도 인간은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때로는 동물이상으로 상상을 절(絶)하는 공격과 살육과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가.
전쟁이 그렇고 폭력이 그렇고 국가적 정치폭력, 문화인의 언어폭력, 인신공격.... 이 모두가 우리 인간 스스로를 괴롭히는 공격성의 “추악”이 아닌가!

“악은 악으로 치고 독은 독으로 뺀다.” 라는 격언(格言)이 있으나, 다른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나는 지식인 사이의 상호인식공격을 말한다면 오히려 이전투구와 가치 없는 소모전으로 비생산적이고 우리 모두의 지적생활과 지적 생산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데 섣부른 대응이 아닌 소가 풀 먹는 식으로 유유자적 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면서 지적생산, 지적창조의 삶을 즐기고 있다.

당연히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에 知的으로 오만불손의 경향이 있는 흠 많은 미완의 인물이다. 소가 오만해서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등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풀 뜯기에 여념이 없기에 등에 한 마리 쯤 하등 자신의 집중력을 환산시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역시 나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는 상대를 나는 “등에”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에는 때로는 소가 손이 못 닿는 가려운 부분을 따끔하게 긁어주는 쾌감을 가져다주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공격자든 피격자든 다 안전요해의 “합작성(合作性)” 공모자의 운명에 있다고 본다.
 
3.
생태학과 문화 인류을 결합시킨 학제적 연구에서 양의 동서 思想을 초식(草食)과 육식(肉食)의 사상으로 규정한 학자가 있다. 일본의 저명한 비교사학자 사바타 토시유키(鯖田豊之ㆍ1926-)교수는 <<육식의 사상>>등 일련의 저작에서 인간중심의 기독교에 기반을 둔 서양인이 목축문화 풍토에서 걸러낸 동물과 인간의 단절된 인간절대주의 사상을 지적했다.

동시에 비교되는 동양의 미식(米食)문화, 즉 초식문화(한반도, 북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 포괄)는 자연에 의존한 자연과 조화된 자연숭배사상, 자연파괴 공격성 원리가 아닌 조화, 융합사상을 창출했다.

실제적으로 벼농사일은 인간의 개인적 활동이 아닌 여럿이 일손을 맞추어 어우러져서만 되는 합동, 협력, 융합의 과정이기도 하다.
서양적 원리주의에 대치된 동양적 조화, 융합의 사상에 대해 나는 요즘 심대한 공감을 느낀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융합, 공론에서 인류 문명의 미래 비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이분법 원리 아닌 조화, 융합만이 인류의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수년전 쿄토에서 있은 나와의 문명대담에서 이어령선생은 이솝우화의 <개미와 베짱이>를 지금 21세기에서는 일하는 것 (work)과 노는 것( play), 생산자 대 소비자의 흑백구도가 아닌 양자의 상호결합의 상태를 주장했으며 그것을 가리켜 “개짱이”로 불렀다.

서로 대극에 있는 노동과 놀이를 노동〓놀이를 일직선으로 연결하여 “뽕도 따고 님 도 본다”는 속담같이 “쉬엄쉬엄 일하다” 라는 말과 같이,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같은 리듬 안에서 공존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래서 개미와 베짱이가 하나로 매시업되어 ”개짱이“란 新造語를 탄생시켰다.

나는 고희를 넘으신 이어령선생의 유연한 사고에 경복을 금치 못했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일찍 1980년, 쿄토대학의 서양사학자이여 문명비평가로 명성을 떨친 아이다 유지(會田雄次) 교수는 <<역설의 논리>>에서 생화양식을 민족적으로 보아 유럽인은 육식동물적 생활, 라이온(사자)처럼 생활을 하고 있으나, 일본인은 원숭이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서양인은 일을 할 때는 집중적으로 지력, 체력, 의지력을 전부 가동시킨다. 그런 다음 잠자는데 열중한다. 노동, 놀이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동양인)은 옛적부터 쌀밥이 주식이며, 백인종에 비해 장(腸)이 긴 체질로 되었다. 원숭이적 생활이란 원숭이가 늘 먹는 나뭇잎인데, 절반은 놀면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먹는다. 채식(採食)에 전력 집중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일본인은 이처럼 무한히 질질 끄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구미인 수렵 목축민족으로 육식동물 삶을 해 온 것에 반해, 채집 순농(純農)적 생활을 해온 까닭이라고 밝힌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인은 질질 끌면서 근무하는 근무적 민족이다.
이리하여 일본인의 사고방식도 일하는 육체동작과 같이 질질 끌고 손발을 쉬고서 생각 하는 것이 아닌, 일하면서 사고하는 양식이다.
20년전, 아이다교수가 미처 어떤 수준의 학자라는 것을 모른채, 그의 탁발한 비교 문화론 저작을 읽었을 무렵에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워낙 일본을 대표하는 당대의 문명비평가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과 놀이, 이 둘은 나를 나름대로 “일놀이”로 신조어를 만들어 본다. 그때 이미 다 선생이 원숭이적 “일 놀이”의 삶을 일본인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일하면서 사고하는” “하면서 사색” 하는 것이야 말로 일본인의 사고방식이라고 상찬했다.
“하면서 사고하는 것”은 육체와 도구가 함께 움직이는 것 그리고 사색사고 하는 것이 융합, 조화된 통일체이다. 그중에서 비약, 아이디어가 탄생된다.

“하면서 주의”-- 나는 일본에서 언제나 전차 안에서 독서하며, 통근하면서 독서, 사색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고착시켰다. 그리고 서재에서 나는 음악 CD. 테이프를 틀어놓고 귀로 들으면서 독서 집필한다.
명상을 즐기는 나는 아예 책장을 접어놓고 전차 안에서, 화장실에서 사색에 잠기곤 한다. 그리고 글을 구상하기도 한다.
사실 늘 이런데서 아이디어, 발상이 떠오른다. 글감, 쓸거리가 생긴다. 롤댕의 “사색하는자”를 패러디해서 말하면 “사색하는 자는 항상 화장실에 앉아 있는다” 이다.

나의 서재의 고물 탁상위엔 책, 원고지, 필묵, CD, 레코오트 이외에도 음료수, 과자, 캔디, 크림, 티슈, 휴대전화, 카메라 등이 잡다하게 널려있다. 탁상위의 “일상용품 잡화점”이다. 색연필, 볼펜, 만년필, 연필로 필만해도 수십개를 놓고 쓴다
왜 그런가 하면 일하면서 사고 하늘, 또는 보면서 들으면서, 또는 먹으면서 마시면서 하는 보조적 필수품들이기 때문이다.
 
4.
땔나무를 지게로 지고 걸어가면서 독서하는 동상이 있다. 니노미야의 동상이다.
니노미야 손도쿠(二 宮尊德 1787-1856), 일본인과 식민지시대 조선인에겐 익숙한 인물이다.
에도(江戶)시대의 農政家이며, 도덕과 경제의 융합사상을 전 일본에 보급시킨 위대한 괴짜이다. 일하면서 공부를 하는 그의 “일놀이” 사상적 실천은 가히 동양 스타일의 우수성을 구현한 인물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 딱딱한 합리주의적 사고보다 융합법, 조화법 사고가 보다 유연적이다는 것은 서양의 결함을 메울수 있는 대안이 된다.

괴테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 신비한 역량이여! 둘이면서도 하나인 동얀의 나무 은행잎이여!”
서양과 동양의 전통적 문화를 레토릭으로 표현하면, 서양의 문화는 돌(石)이고 동양의 문화는 나무(木)이라 할 수 있다. 또 동양의 문화는 물(水)이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 유동하는 것, 돌같이 금속같이 굳어 있지 않은 부드러운 사고양식의 문화이다.
유교가 주장하는 인은 언제나 두 사람, 상대적인 것이고 부드러운 화(和)의 사상이다. “1아니면 2다” 하는 대립, 충돌의 이념이 아닌, 대립을 넘어서는 유연한 역학이다.

같이 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유연한 공생, 공존의 사상엔 칼날같이 이질적인 타자를 베 버리는 차갑고 무서운 사상이 아니, 그것을 초월한 공존학이 있다.

5.
다시금 소의 이야기로 돌아선다.
만약 서두에 등장하는 “십우지도”의 그 풀뜻는 소에 대하여 식민지를 찾아 혈안이 돼서 서두르는 서양인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영락없이 서양인들은 소를 잡아서 식용의 스테이크로 요리해서 먹어치웠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구로부네(黑船)”라 불린 상선을 이끌고 일본에 상륙 했을 때, 그들은 무조건 일본인들에게 소 십여마리를 요구했다.

왜서 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쇠고기, 돼지고기를 肉食으로 하거나 우유를 먹는 식생활이 더구나 없었던 일본인들은 “풀도 없는 배안에서 어찌 소를 기를 수 있느냐?” 라고 의아쩍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 뒤 서양문물을 신속히 수용, 소화시킨 그들은 쇠고기, 육식과 우유를 식생활의 당당한 메뉴로 정착한다. 서양식 문명대로 서양을 본 따서 식민주의의의 칼을 물고 이웃나라를 우마처럼 지배하지 않았던가!

한국이 기나긴 육식문화를 자랑하면서도 한 번도 서양적 근대의미의 침략을 하지 않은(못한)것은 비운일까 행운일까?
육식문화의 원리와 초식문화의 원리를 융합시킨 것은 한국 문화의 원리가 아닌 원리이었다. 구운 쇠고기에 상추를 싸먹는 한국문화는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중국문화와 한국문화의 내실에는 일본과는 달리, 서로 유사한 친근성이 존재하는 것은 육식문화를 공유해온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동양 3국이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문화를 공유한 문화적 콘텐츠는 소와 소등에 앉아 피리를 부는 목동과도 같은 자연중앙의 묵가적인 또는 天人合一의 사상과 불교, 도교적 요소들이 다분히 유교와 함께 들어있다.

서양적 근대의 합리주의와 속력을 추구하는 “드로몰로지”(질주학)논리에 지금은 소들마져도 꼬리를 깃발로 추켜들고 말처럼, 자동차처럼 질주해야 하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자칫하면 그런 드로몰로지의 무한한 경쟁, 배제사회에서 소의 뿔은 타자를 공격하는 문명충돌의 예리한 칼로 변할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사고, 사색의 절주를 한 박자, 두 박자 줄여서 천천히 일하면서 사고하고 싶다.

悠然하게 우보(牛步)를 걸으면서 사고하고 지식의 풀을 섭취하여 소화시켜서는 유연한 아이디어, 발상의 여과를 거쳐 정신적 우유로 배설 하고 싶다.

피자 같은 지짐 같은 우분(牛糞)도 맥주, 막걸리 같은 우뇨(牛尿)도 도도하게 배설하면서.
섭생도 배설도 소와 같은 유연(悠然)과 유연(柔軟)이란 “쌍유”의 라이프 스타일 이어야 한다.
소처럼 즐기면서 놀면서 책을 읽고 사고(思考)하고 글을 부지런히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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