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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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수목장(樹木葬) 댓글:  조회:4262  추천:81  2005-12-03
수목장(樹木葬)인간의 생로병사, 태어나서 자라다가 늙으면 쇠약해져 병이 생기고 죽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태어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동서고금, 그리고 종족, 민족을 막론하고 죽음에 대해 신경을 써왔다. 이로부터 시신처리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土葬, 火葬, 水葬, 風葬, 平葬, 天葬... 인간은 실로 다양한 시신처리를 구사해왔다. 유교문화권에서는 부모로부터 받은 모발 하나 흐트릴세라 잘 다듬어 땅에 묻고 봉분을 하는 土葬을 많이 했다. 불교문화권에서는 불로 더러운 육신을 태워 열반의 경지를 창출한다는 火葬을 많이 했는데 일반인들은 골회를 모셨고 스님들은 사리를 모셨다. 물을 인간의 기원과 귀의처로 신비화한 중국 남방의 일부 종족들에게는 水葬이 행해졌고 꽁꽁 잘 싼 시신을 나무판자에 태워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낸다. 사막의 일부 족속들에게는 風葬이 행해졌는데 건조한 기후조건에 시신이 많이 미아리가 된다.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유목민족은 땅에 묻되 남에게 알리지 않도록 봉분을 하지 않는 平葬을 많이 했다. 일대의 영웅호걸 칭키스칸은 바로 이런 平葬을 해서 지금도 그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인간의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보는 티벳에서는 시신을 칼탕쳐 까마귀떼나 독수리에게 먹이는 天葬을 한다. 土葬, 火葬, 水葬, 風葬, 平葬, 天葬...은 각 종족이나 민족이 자체의 전통문화나 민속신앙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창조한 장례문화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현 시점에 있어서 이런 장례문화가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土葬, 이른바 많은 ‘명당’자리에 시신이 들어섬으로 산 인간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 한국과 같이 좁은 국토에서는 이것이 보다 심각한 문제로 부상된다. 그리고 水葬, 風葬, 天葬은 시신에 대한 ‘무책임’한 ‘폐기처분“ 같은 맛을 풍겨 인간존엄에 대한 논란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실로 시신에 대한 처리문제, 현대인간들의 골치덩어리의 하나다. 현대는 이 시신과 싸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현재 각 민족, 각국에서는 나름대로의 새로운 합리적인 장례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전통적인 장례문화에서 합리적인 면은 받아들이고 불합리한 면은 제거하거나 다른 종족이나 민족의 합리적인 장례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아예 제3의 새로운 장례문화 창출에 고심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넓은 땅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土葬을 근절하고 火葬을 권장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근간에 火葬을 전제로 한 가족납골당이 유행하는 듯 하다. 그러다가 가족납골당이라는 것이 봉분형식보다 자리는 덜 차지하되 50보에 100보라,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족납골당이라는 새로운 ‘봉분’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요 최근간에는 새로운 장례문화로 樹木葬에 사람들이 눈 뜨고 있다. 사실 樹木葬이라는 것은 스위스나 독일 같은 일부 선진국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다. 樹木葬은 간단하다. 시신을 火葬하고 골회만 추려 특정 나무 밑에 묻는 것이다. 독일은 법적으로 土葬을 근절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선을 공동묘지에 최장 20년밖에 묻어둘 수 없게 한다. 그러나 樹木葬의 경우는 99년간 묻어둘 수 있게 한다. 이로부터 법적으로 樹木葬을 권장하고 유도한다. 독일의 경우 樹木葬은 樹木葬을 할 수 있는 전문 국립수목림이 정해져 있고 국가의뢰의 전문 樹木葬장례회사가 전담한다. 독일의 樹木葬은 국민들의 공감대속에 새로운 장례문화로 굳혀가고 있다. 한국은 얼마 전에 김장수 할아버지의 樹木葬이 치러져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김장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최초로 樹木葬을 치른 사람이다. 그는 명문 고려대학교 교수로 몸담고 있다가 정년퇴직을 했다. 그는 교육자답게 樹木葬을 유언함으로써 새로운 장례문화를 선도했다. 김장수 할아버지의 樹木葬은 지극히 간단하다. 골회를 한 그루의 나무 주위에 뿌려묻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나무에 ‘김장수 할아버지의 나무’라는 표말이 붙을 뿐이다. 소박해서 자연스럽다. 요 얼마 전에는 한국 TV에서 평범하면서도 멋진 한 사나이를 보게 되어 흐뭇했다. 그 사나이는 자기가 죽어 묻힐 나무를 자기로 손으로 심는 것이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바로 樹木葬을 유언한다. 자기는 죽어 그 나무의 밑거름이 되어 자손들의 쉼터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청명이나 추석이 되어 자손들이 찾아오면 자기가 심고 자기가 묻힌 그 나무 그늘 밑에서 땀을 들이고 쉬며 놀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혼은 기뻐서 웃을 것이다는 것이다. 樹木葬, 落葉歸根의 자연스러움이 있어 좋다. 진실로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경지를 창출해서 좋다. 그러니 거추장스럽게 火葬을 해서 골회를 추르니 어쩌니 하지 말고 아예 통째로 묻히자. 그래야 나무에도 온전한 밑거름이 된다. 나무에 밑거름이 되어 후대에 乘凉의 놀이터를 마련해주기, 인간세상의 아름다운 릴레이. 그리고 자기가 심은 한 그루의 나무에 귀의하기, 새로 태어나기, 멋지다. 樹木葬,현재까지 우리 인간이 창출한 가장 합리적인 장례문화로 손꼽힌다인간의 생명은 일반 동물보다는 길데 일반 나무보다는 짧다. 우리가 좋아하는 소나무의 평균수명이 300년 좌우라 할 때 우리 어찌 소나무로 되어 보고 싶지 않으랴! 그래서 ‘백설이 만건곤할 때/독야청청’해 보자꾸나!2005. 12. 2
50    세상인심-貧者富者화합편 댓글:  조회:3982  추천:52  2005-12-03
세상인심-貧者富者화합편사람이 살아가다보면 貧者, 富者가 생긴다. 貧者, 富者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거, 인간역사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어진 여건, 개개인의 능력 차이에 따라 이것은 필연적이다. 富者에 대한 貧者의 혁명, 이것이 맑스가 말한 유혈적인 계급투쟁의 역사다. 바로 이런 貧者와 富者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맑스가 내건 대안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다. 다 같이 잘 사는 사회,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이다.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눠먹는 거, 니 좋고 내 좋잖아.자본주의는 애초에 貧者, 富者의 나뉘어 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논리다. 富者-자본가가 貧者-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을 조직하는 형식이 자본주의다. 중국에서 금방 개혁개방을 했을 때 ‘讓一部分人先富起來’, ‘讓一部分地區先富起來’도 자본주의의 貧者, 富者 갈림, 차이의 논리를 받아들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貧者, 富者의 갈림, 차이의 조성은 사회의 가장 큰 불안요소이다. 현재 원 사회주의진영에서 다 같이 잘 사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을 포기하고 이른바 개혁개방이라는 것이 貧者, 富者의 골을 파는 것만 같아 서글퍼난다. 사실 많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로부터 사회복지개념을 배우고 도입했다. 그래서 원시자본축적의 피비린내 나는 富者의 착취에 의한 貧者의 아픈 마음을 무마하고 있다. 사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라는 것도 놓고 보면 貧者, 富者 사이 중화작용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貧富균일의 중산층을 많이 양산하는 것이 사회의 바람직한 모델이 된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중화작용은 주로 세금이라는 메커니즘에 의해 진행된다. 사회를 상류층 富者, 중산층, 서민층 貧者로 나눌 때 수입이 많은 상류층에 세금을 많이 먹이고 수입이 적은 서민층에게는 세금을 적게 먹이기. 그리고 극빈층에는 세금을 안 먹일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생활보장금을 지불한다. 현재 한국의 경우는 35~40만원의 최저생계비를 책정하고 있다. 그리고 상류층 내지 재벌들에게 재산이나 이윤의 사회환원을 유도한다. 재산세를 높이 책정할 뿐만 아니라 고액의 재산상속세를 책정한다. 이른바 자식들에게 물려 줄 경우 재산의 40~6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줘 불로소득의 편안한 삶을 살게 하겠다는 부모들의 생각을 원천봉쇄한다. 절발 가량을 떼우니 차라라 기부라는 영예로운 길을 선택하도록 한다. 그리고 재벌이나 기업들의 이윤 사회환원의 메커니즘 및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컨대 어느 재벌이나 기업에서 어떤 공공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증한다든지 어느 대학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한다든지 할 때 세금감면조치를 해주거나 그 시설이나 도서관을 그 재벌이나 기업의 이름으로 명명하여 영원히 그린다든지 등 여러 조치를 취하는 것은 그 보기가 되겠다. 상류층 내지 재벌들의 치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자신들의 노력도 노력이겠지만 워낙 사회적 혜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상류층 富者들의 부동산투기 막기, 돈이 돈을 굴리는 불로소득의 비리를 차단하는 것도 빈익빈, 부익부의 골을 좁히는 효과적인 한 방편이다. 한국에서 이번에 실시한 8.31부동산정책은 전형적인 그 한 보기다. 그리고 서울에 집중된 국가행정의 지방분산계획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방분산으로부터 힘의 균형 및 균형적인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다. 홍보슬로건 ‘행정도시 지방이전 특별법 입헌, 국가균형발전의 초석입니다.’는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이외에 富者 상류층의 자원봉사 및 불우이웃돕기는 사소한 일 같지만 貧者들이 체감적으로 느끼는 貧富 한마당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IMF 후 급속하게 늘어난 무료급식소, 그리고 무의탁어린이들이나 노인들에게 밥보내기, 김치담가보내기, 그리고 매번 겨울이 되면 달동네연탄보내기 같은 행사는 실로 감격적이다. 특히 이번 겨울철을 맞이하여 한국야쿠르트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주관하여 11월 16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사랑의 김장나누기’ 행사는 말 그대로 사랑이 넘치는 행사이다. ‘야쿠르트 아줌마’ 2500여명이 담은 김치 5만7000여포기가 10kg씩 포장되어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1만3000여 가구에 전달되었다. 이런 행사들이 정말 1회적인 행사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貧者와 富者는 동심원을 그려 나갈 수 있다. 사실 貧富 문제는 그 어느 한 개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국가 사이, 지역 사이 문제로도 비화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래서 UN의 기본 역할의 하나가 바로 富者 선진국과 貧者 후진국의 차이를 줄이는데 있다. 중국에서 현재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西部大開發工程은 좁은 의미에서의 중국 국내 동서지역간의 貧富차이를 줄이기 위한데 있다. 개혁개방의 초입에 ‘일부분 사람’, ‘일부 지역’을 먼저 발전시키면서 생긴 편차를 바로 잡기 위해서다. 貧富문제, 특히 절대적 빈곤, 상대적 빈곤을 떠나서 貧문제의 해결은 사회적 안정, 세계적 안정을 가져오는 키포인트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맑스, 엥겔스의 계급론은 또 적중할 것이고 폭력혁명은 또 일어날 것이다.2005. 11.28
49    손님이 왔습니다 댓글:  조회:4164  추천:57  2005-12-03
손님이 왔습니다.한국 대학생들이나 중국대학생들 강의 듣기 싫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교수들 밥통 떨어질세라 고안해낸 것이 출석 체크하기. 1순이, 2순이, 3순이... 이렇게 이름 부르다 나면 한 5분 잡아먹기. 그리고 평상시 학습자세요, 학습 태도요 하며 평시 성적 몇 %, 그리고 이런 성적들을 장학금과 매치시킬 때 학생들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출석을 잘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런 것이 안 먹혀들어갈 때가 있다. 예컨대 아프거나 집에 불상사가 났을 때 청가서를 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 내가 강의를 하고 있는 배재대학교 강의에서 좀 색다른 안 먹혀들어감에 나는 좀 놀라다가 이제는 그 식이 정상이 되어 있다. 3순이:교수님, 내 청가서입니다. 내일 강의 내 못 나옵니다. 교수 우:어, 그래청가서를 받아드는 순간 나는 좀 이상해났다. 공결이유, 뭐, 손님이 왔다구? 이마에 내 川자를 그리는 교수 우.손님이 왔다구? 얘, 손님이 왔습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3순이. 그래, 손님이 왔는데 니하고 관계가 뭐야? 니 공부 니 하면 되지. 아이 참, 교수님도. 손님이 왜 나하고 관계없어요. 여자들 손님인데... 우둔한 우교수는 그제사 좀 깨도가 되는 듯 하다. 아, 그거~ 월~경 아니아니, 달거~ 아니아니 거시기... 깨도가 되면서도 제풀에 주눅이 들어 얼굴이 붉어지고 꺽꺽 거리는 우교수. 그렇지요, 월경 말이지요. 한 수 가르치는 듯한 3순이. 우리 여기서는 생리휴강제도라는게 있어요. 여자들만의 휴강제도! 3순이는 어깨가 으슥해났다. 아, 그래. 그럼 쉬어야 되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속은 켕기어, 임마, 손님, 아니 월경이 뭐 그리 대단해. 부끄럽지도 안 해. 그 잘난거 갖구 쉬겠다구? 우리 엄마는 밭에서 나를 낳고 그 대로 호미자루 잡고 일했단다. 지금 기집아이들은, 참, 못 말려!그런데 이튼 날 배재대학교 신문의 ‘바탕화면’이 전부 핑크색으로 된 톱기사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문화기획/생리휴강(핑크색 1호 글자로, 필자 주)]-제목:월경, 당당히 말하자(진붉은 월경색 2호글자로, 그리고 옆에 알락달락 예쁜 생리대 아이콘을 줄 세워 놓음. 필자 주) 소제목:‘그날’ 아닌 ‘월경’으로 새로운 도약(검은 색 3호 글자로, 필자 주). 호기심에 끌려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숨을 죽여 가며 주~욱 훑어보니, 아닌게 아니라 월경 소리다. 사회에서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여성들에게 생리휴가가 주어지는데 대학생이나 청소년들에게 생리휴강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대학권에서 최초로 생리휴강제도를 정규적으로 실시한 부산에 있는 동아대학교의 경우를 부러운 사례로 꼽고 있다. 그리고는 요즘 들어 경희대학교 총여학생회에서 생리휴강을 시범실시 한다고 발표하게 되면서 대학권에서 생리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니 順理成章 격으로 우리 배재대학교도 여대생들의 생리휴강제도를 실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문조사를 하니 여학생 100% 찬성, 인터뷰를 하니 남학생들도 여성들에게 배려를 하는 것은 신사에티켓의 기본이라고 하며 좋다고 한단다. 그러다가 마침 11월 한국 대학교 학생회장 선거시즌이라 배재대학교 여학생회 출마후보들은 너도나도 생리휴강제도 정착화를 공약으로 내건다. 이 공약이야 말로 學心, 특히 女心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생리, 그것은 어느 새 여성만의 독특한 존재가치로 부상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당당히 말해지는 붉은 원색의 월경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긋지긋하고 우울만 안겨주던 반갑지 못한 손님으로부터 즐겁고 반가운 손님으로 변해간다. 여권이 그 만큼 신장되고 현대사회가 그 만큼 신사화되었다는 말이 되겠다. 신사가 되자면 여성에 대해, 특히 여성의 손님에 대해 배려를 해야 한다. 이로부터 무신경하던 나는 어느새 ‘손님’에 대해 신경이 많이 쓰이고 공손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 배재대학교 강의 때 생리휴강 신청서를 들고 오는 여학생에 대해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OK, OK 연발했다. 그러면서 나는 맹세했다. 이제 중국에 돌아가 우리 연변대학교 강의 때는 여학생들이 생리 기색만 보여도 내가 알아서 척척 생리휴강을 배려해 주리라고. 우리 여학생들은 여자가 아닌가, 무엇이 모자란데 말이다하고 생각하면서. 그러다보니 손님이 반가운 줄 모르고 무신경하게 아무렇게나 지내 보낸 우리 어머니가 불쌍해났다. 2005. 12.1
48    세상인심-富者편 댓글:  조회:4198  추천:45  2005-11-14
세상인심-富者편나는 맑스주의교육을 받으면서 자란지라 프로레타리아를 가장 고상한 존재로 알았다. 가난하면 가난할 수록 고상하다는 그런 논리를 철칙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소학교에 다닐 때 大公無私한 工人階級이 못되고 自私自利한 農民階級이 된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니꼬운 눈길로 나를 보며 뇌까린다. 자식아, 工人이 좋기는 뭐가 좋다고 그래, 사람은 다 같은기라, 다 배가 불러야 사람노릇 하는기라. 그러나 나의 貧者편에는 드팀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에 사람들 좀 살만하게 되면서 내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어. 富者의 편으로 간 거야.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나한테 먹혀들어간 거야-진리로. 사람들 니 것 내 것 따지고 쫀쫀하던 데서 통이 커지고 대범해진 것이 나한테 와 닿은 거야. 적어도 손님접대에 각박하지 않고 호쾌해질 수 있는 것이 너무 멋있다 말이야. 나는 富者가 좋았어. 1990년대 초반 한국유학생활은 나의 이런 심지를 더 굳혔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서는 알게 모르게 맑스주의계급론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앉았다. 貧者상놈은 좋은 사람, 富者양반은 나쁜 놈 식. 그런데 내가 유학생활을 하는 한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貧者상놈의 각박함, 富者양반의 너그러움이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내가 다니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의 ‘공산주의대학’. 학비무료, 잠자리무료에 식비 거의 무료에 가까운 유로. 그러니 학비부담이 어려운 한국의 貧者상놈자제들이 많이 모여든다. 여기에 우리 중국유학생은 貧者상놈의 상농자제. 그런데 우리 중국 유학생들은 바로 이 한국의 貧者상놈자제들한테 더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른바 없는 놈들끼리 同病相憐이 아니라 서로 시기하고 암투하기,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아르바이트를 좀 하면 공부하러 왔는가 돈벌러 왔는가 하며 용속하게도 자꾸 돈 쪽으로 몰아붙이기. 원래 貧者는 돈에 민감한 법. 그러다가 ‘거러지’ 같은 중국유학생들이 자기네보다 돈 좀 잘 쓰는 거 같으면 배가 아파나기. 그때 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중국유학생과 러시아유학생에게 특혜로 한 끼 식대 5백 원도 면제해 주었다. 그러니 돈 잘 벌고 돈 잘 쓰는 저 사람들한테 왜 무료지, 하며 뒤 공론이 숭숭.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일 가지고 대환지 뭔지 하는 것도 둬 서너 번 했지. 이런 와중에 오히려 鶴 立鷄群격으로 가물에 콩나듯 한둘이 와 있는 富者양반자제들이 어른스러웠다. 그들은 우리를 이해했고 아픈 우리의 마음을 많이 위로해주었다. 연구원을 벗어나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접한 한국 사람에 한해 볼 때 대개 貧者타입은 각박하고 富者타입은 너그러운 논리가 그대로 통했다. 꼭 富者라야 인심 쓰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富者의 넉넉한 인심에 많은 감복을 받았다. 富者들은 잘 베푼다. 어떤 富者들은 정말 멋있다. 가난한 중국 유학생의 자존을 건드릴세라 세심한 배려를 해가며 베푼다. 돈을 주어도 무조건 막 주는 것이 아니고 우선생, 이것은 우선생 장학금에 얹어주는 축하금이요 하며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준다. 한번은 내가 서울에 갔다가 버스역에서 연구원 들어가는 공중버스를 기다리느라고 안절부절 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수업 볼 시간이 각일각 닥쳐왔던 것이다. 나의 불안한 정상을 본 귀부인스타일의 부인이 영문을 물어왔다. 여차여차해서 그렇다고 하자 그는 다짜고짜로 고급승용차 한대를 손을 흔들어 세웠다. 그리고는 나의 여차여차한 사정을 말하며 좀 태워주라고 했다. 그러자 신사스타일의 승용차운전수는 흔쾌히 나보고 타라고 했다. 그리고는 죽 강의실까지 태워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운 김에 이름자나 남겨달라고 하자 그 신사남자는 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하며 게면쩍어 하였다. 나는 냉혹한 금전관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活雷鋒’을 만날 수 있어 좀 어안이 벙벙해났다. 그때만 해도 중국의 승용차운전수들은 승용차운전하는 거 차체만으로 기고만장하여 시도 때도 없이 뿡뿡 경적소리 울리고 흙탕물 튕기며 내 보란 듯이 내달릴 때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본 한국사람’해서 어느 잡지에 대서특별해 내었다. 그리고는 방학 간에 집에 와서 이 얘기를 흩뿌리며 다녔다. 그러자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내 친구 하나가 피익 웃으며 한 마디 내깔렸다. 그거, 아무 것도 아니지, 미국에는 공중 교통도구가 없는 산속 같은 외딴 곳에 갔다가 길가에 서서 눈은 외딴 곳으로 팔아도 한 손만 들고 있기만 하면 태워주려는 승용차들이 척 앞에 와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짓부리, 그 개인주의가 팽배가 미국에서... 하면서 부정은 하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졸부가 아닌 진짜 富者들은 마음이 그만큼 넉넉하다. 인심과 인간의 물질적 생활수준은 같이 가는 법. 쌀독에서 인심 나온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 중국의 고대 지성 맹자도 인간은 배부른 후에 부모를 알고 도덕을 알게 된다고 했다. 세계 제3차 심리학물결을 일으킨 미국의 심리학가 마쓸로는 인간의 심리 층차를 피라미드식으로 상승하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아래 부분이 생리수요인데 이것이 만족을 받을 때 안전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안전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귀속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귀속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존경의 수요가 생겨난다. 그리고 존경의 수요가 생겨날 때 자아실현의 수요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심리수요의 최고경지는 자아실현의 경지다. 이 경지는 생리수요→안전수요→귀속수요→존경수요로 진행되는 한층한층 높은 차원의 수요를 만족 받을 때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현 단계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그 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너무 고지식하게 기계적으로 본 허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쓸로의 이런 심리층차설로 볼 때 그래도 富者들이 자아실현의 경지로 나아갈 바탕을 갖춘 셈이다. 溫飽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貧者는 애초에 이 바탕이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몸에 배인 富者들의 베푸는 문화, 남한테 주고야 기쁜 마음, 자연재해 든 곳에 이름자 하나 남기지 않고 무조건 주기, 여기에 富者들의 자아실현의 경지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신사라는 것도 이런 베푸는 자아실현의 경지가 몸에 밴 모든 것이 넉넉한 富者여라!2005. 9.13
47    세상인심-貧者편 댓글:  조회:3764  추천:79  2005-11-08
세상인심우리가 공산주의를 지향했듯이 다 같이 잘 살면 좋겠는데 세상은 자꾸만 貧者와 富者로 나뉘어 진다. 그래서 역대 농민봉기의 기본모토의 하나가 바로 ‘濟貧富’. 현 단계에 와서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사이 이런 나뉘어 짐은 더 가속화되고 더 심해진다고 한다. 貧者와 富者의 갈등, 현 단계에 있어서도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이다. 이른바 거창한 정치하는 사람들 여기에 신경 쓸지고. 별 볼 일 없는 문학을 하는 나는 貧者와 富者의 좀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도록 하지.세상인심-貧者편貧者와 富者, 누가 더 마음 좋지? 貧者? 富者? 아무래도 나는 貧者가 더 마음 좋다고 생각한다. 무슨 심사숙고해서 얻은 결론은 아니다. 그저 가다오다 얻어 들은 풍월이 그런 거 같다. 김삿갓, 19세기 조선의 희대의 풍류남아. 조선의 山山水水, 村村落落 안 돌아다닌 곳이 없는 방랑객. 그가 접촉한 貧者와 富者는 지천에 깔렸다. 그러니 그에게 貧者와 富者의 세상인심을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排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김삿갓이 지은 한시 ‘吾愛靑山倒水來’다. 현대 우리말로 옮기면 ‘개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주인이여, 미안해하지 마오/나는 원래/물에 비치는 청산을 사랑한다오’. 김삿갓이 허기를 면코자 허름한 초가를 찾아 들어 한 끼 식사를 부탁하니 주인네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개다리 소반에 멀건 죽 한 그릇 내온다. 김삿갓은 기꺼이 죽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런데 그 죽이 얼마나 멀건지 푸른 하늘과 산이 비쳐들어 온다. 이에 주인은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그래서 김삿갓은 장대 휘둘러 거칠 것 없는 가난한 살림이건만 죽이라도 내어주는 주인의 고마운 마음을 위로코자 일필휘지 ‘吾愛靑山倒水來’를 읊는다. 二十樹下三十客四十村中五十飯人間豈有七十事不如歸家三十飯김삿갓이 지은 한시 ‘二十樹下三十客’다. 현대 우리말로 옮기면 ‘스무나무 아래 서른 나그네/마흔 마을에 쉰 밥/인간 세상에 어찌 이른 일이 있을소냐/집에 돌아가서 서른 밥을 먹기만 못 하리’. 김삿갓이 부자동네에서 밥 한 끼를 청했는데 차례지는 것은 고작 쉰밥이다. 이에 그는 괘씸함을 느껴 ‘四十村’ 즉 ‘마흔 마을’을 ‘망할 마을’로 슬쩍 환치하여 부자동네를 저주하고 있다. 단순히 수자유희 같은 시지만 따지고 보면 실은 부자들의 들되 먹은 인심을 꼬집고 있다. 김삿갓은 분명 貧者의 인심을 긍정하고 富者의 인심을 부정했다. 그는 貧者편이였다. 그럼 다시 현대판 貧者와 富者 인심판을 보도록 하자.주병진, 한 때 한국에서 잘 나가던 TV 토크쇼 진행자. 지금은 도박인지 무언지 하는데 말려들어 TV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이 친구도 괴짜기는 괴짜. 세상인심 알아본다고 한번은 서울 성북 어디 못사는 동네 지하철입구에 머리를 옷으로 뒤집어 쓴 채로 땅에 처박고 돈구럭 앞에 놓고 하루점도록 비락질을 해봤다. 돈이 제법 들어왔다. 그 이튼 날 똑 같은 방법으로 서울 강남 어디 잘 산다는 동네 지하철입구에서 비락질을 해봤다. 그런데 돈이 영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친구 결론:貧者 후하고 富者 깍쟁이. 이 친구 貧者편이였다.세상 많은 사람들, 김삿갓, 주병진 貧者富者인심풀이에 동감할 것이다. 옛날에는 못 살았지만 세상인심이 ... 하는 人心不如古하는 한탄은 바로 그 동감의 목소리다. 그러니 다 貧者편인 셈이다. 나도.그럼 富者들, 왜 그리 인심 박하냐? 잘 살면서 말이다.富者들, 마음이 貧者기 때문.富者들, 너무 힘들게 富者가 되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서 너무 힘들게 벌었기 때문이다. 富者종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제 애비 잘 만나 된 놈 별도. 아글타글 해야 富者가 된다. 그러니 그 富라는 것은 자기 피나 살점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 자기 피나 살점을 쉽게 남 줄 놈이 어디 있나. 그래서 富者는 쉽게 자기의 富를 지키는데 연연하는 守錢奴가 되는 것이야. 세계명작의 3대 守錢奴를 비롯한 많은 守錢奴적 富者들은 다 이런 경우야. 베푸는 자린고비는 이런 守錢奴의 역설적인 이야기고.富者들, 자기네 가난한 때를 잘 모른다. 대개 건망증을 가지고 있다. 또는 가난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貧者들이 가질 수 있는 同病相憐의 동정심이 없다. 富者들, 끝없는 욕망에 놀아난다. 이 세상 富를 다 안고 다 가지고 싶어한다. 욕심의 과대팽창, 다람쥐 채바퀴 돌 듯 피곤하기만 하다. 知足者常樂을 모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在於 福中而不知福인 셈이다. 富者들, 자아실현의 인생최고 경지를 잘 모른다. 베풀고 자원봉사자가 되는 그런 樂, 인생최고 경지의 樂을 잘 모르고 천민富者, 속된 富者로 남기 때문이다.富者들, ... 2005. 9.8
46    걸어다니는 회사 댓글:  조회:4226  추천:61  2005-08-29
걸어다니는 회사회사의 규모 살리기,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경제논리.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어느 단계에서 이것이 유행이였다. 한국, 일본의 문어발식 그룹화, 중국의 합병식 集團化는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그러나 아세아의 금융위기 때 대기업의 거품화, 비둔함이 드러나면서 규모의 경제추구가 한풀 꺾이는 듯 하다. 한국에서 문어발을 자르는 빅딜을 비롯한 구조조정은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대만을 비롯한 대기업 중심보다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해온 지구와 나라들은 끄떡 없었다. 그들은 작지만 내실을 기하는 쪽으로 신경을 썼다. 그래서 한국은 문어발식 거품경제의 안티테제로 김대중대통령 시기에 작지만 강한 기업을 육성하는 데로 경제정책방향을 돌렸다. 그것의 구체적 방안으로 논의된 것이 이른바 벤처기업 육성이였다.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최신 경제아이템창업을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IMF 때 우후죽순마냥 생겨난 벤처기업들.사실 세계에서 벤처기업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은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 마이크로소프트 아이템 하나로 성공한 기업. 현재 세계 곳곳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곳에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그것은 단연 컴퓨터왕자. 그래서 빌게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적은 사무실이나 작업장을 가지고 가장 큰 갑부가 되었다. 프로그램개발이라는 것이 워낙 머릿속의 아이템에다가 한번 개발되면 손쉬운 복제로 얼마든지 가지 뻗어나갈 수 있으니깐. 사실 자기의 장끼 하나로 세계무대를 주름잡으며 연간 거액을 벌어들이는 스타들도 하나의 기업체로 보아 무방하다. 한국 IMF 때 박세리 골프채 하나로 미국 우먼리그챔피언라운더를 주름잡으며 수억을 벌어들여 답답했던 한국인의 가슴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주었던가. 요새는 강수연이 그 뒤를 잇는 듯 하고. 박찬호, 선동열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일본의 야구계에 선풍을 일으키며 그들은 몸값은 몇 년간 천정부지로 뛰었던 것이다. 요새 잘 나가는 박지성, 이영표도 마찬가지다. 작지만 고 다구진 우리 동양인의 몸매로 덩치 큰 몸집의 유럽선수들을 제치고 활약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에 좋다. 스포츠계 뿐만 아니라 문학예술계도 스타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록가수 마이클젝슨, 그가 어디 가면 대통령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한번 공연 간다 하면 사람 실어 나르고 무대장치를 실어 나를 전세기 전용비행기만 둬서너대 뜨고 그가 드는 호텔은 대통령급 호화전용룸이다. 그가 먹여 살리는 인원은 매니저 , 보조출연자 및 스탭들 해서 저그마치 몇 백 명이나 된다. 한국의 나훈아, 조용필도 이에 못지 않는 것 같다. 문학의 경우를 보면 멀리는 그만두고 한국의 경우만 보아도 대단하다. 박경리, 16부의 대하소설『토지』를 쓴 한국의 1류 여작가. 그녀는 자기가 20여 년간 산 강원도 원주의 집터에다 토지문학공원을 꾸려 문학의 향훈을 일반 사람에게 풍기고 있다. 그리고 토지문학관을 꾸려 무료로 후학들을 키우고 있다. 이문열도 박경리와 같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줄로 안다. 사실 이들 스포츠계 스타도 좋고 문학예술계 스타도 좋고, 그들이 받는 게임챔피언료든 출연료든 원고료든 실로 어마어마한 수자. 어간한 중소기업의 연간수입을 웃돈다. 그래서 이들을 가히 걸어 다니는 기업이라 말할 수 있다. 현대는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되면서 스포츠, 문학예술 등 문화산업이 뜬다. 이런 스포츠, 문학예술은 인류보편의 정서와 맞아 떨어져 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쉽게 다른 민족이나 나라에 문화적 상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노래, 드라마가 선두주자가 되어 중국대륙에 한류의 붐을 일으킬 수 있은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문화산업은 개인의 장끼발휘가 관건적 요소로 작용한다. 현대는 경제전쟁을 치른다. 문화산업도 만만치 않은 한 몫을 한다. 그러니 하루 빨리 자기의 독특한 장끼를 가진 문화인재들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 이것이 바로 투자가 가장 적은 걸어다니는 회사를 키우는 것이다. 이런 문화인재들을 키우자면 일단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받는 특성화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현재 중국에서 많이 운운하고 있는 이른바 創新교육이라는 것도 이런 특성화교육을 논외로 할 수 없다. 개성을 무시한 획일적인 교육은 제품을 찍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은 사실은 획일적인 인재제품을 만드는 교육공장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 전통이라고 할 얘기가 아니고 얼마 전 우리의 교육이 바로 이랬다. 그래서 이런 교육제도에 반발한 괴짜들이 자기의 장끼를 나름대로 알아서 발휘하며 걸어다니는 회사가 되기도 했다. 빌게이츠, 대학 2~3년 땐가 컴퓨터에 미쳐나는 자기의 적성, 장끼와는 전혀 안 맞는 학교교육에 반발하며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자기 친구와 더불어 다른 사람의 창고를 빌어 초라하나마 자기 적성에 맞고 자기 장끼를 발휘할 수 있는 컴퓨터회사를 설립한다.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출발이다. 박세리, 어릴 때부터 지겨운 영어단어 외우기나 가감승제를 한 것이 아니고 골프치기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골프놀음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골프가 재미있고 적성에 맞고 하니 푹 빠져 골프끼가 넘쳐나는 박세리가 되었다. 이문열, 한국의 명문 서울대학교에 다니다가 자기의 글 쓰는 적성, 장끼와 안 맞다 하여 중퇴한다. 그 다음 자기의 끼를 기껏 발휘하면서 소설 쓰기에 전념하니깐 오늘의 이문열로 되었다. 특성화교육, 사회발전의 한 표지. 특성화교육을 진행하는 데는 일반학교보다 전문학교를 많이 세우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학생들이 자기의 적성과 끼에 맞게 선택할 여지가 많아진다.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 전문인재, 장끼가 있는 특수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며 튈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되자면 쓸데없이 넓은 博의 어중쩡한 ‘博士’보다 한 가지만이라도 뚝 부러지게 잘 하는 인재가 진짜 인재, 그리고 모난 돌이 먼저 징 맞는 그런 옹색함이 아니고 톡 튀는 괴짜가 천재만재라는 관념갱신이 필요하다. 2005. 8. 29
45    감정교육 댓글:  조회:4208  추천:71  2005-08-28
감정교육인간은 감정과 이성의 통일체. 이 양자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룰 때 완미한 존재로 됨. 그런데 전반 인간의 이른바 발전 역사를 보면 이런 조화는 점점 깨여져 왔다. 과학으로 대변되는 이성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감정은 메말라간다. 인간의 비극. 그래서 18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계몽운동가 루소는 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감정교육을 주장했다. 그는「감정교육」이라는 계몽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이것을 감정교육의 기본 도경의 하나로 삼았다.루소는 선견지명의 계몽철학가임에 손색없다. 보라, 현재 우리는 자연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메말라 있는가? 나는 요새 그 제일 행복할 것 같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불쌍해 죽겠다. 괜히 큰 눈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메마른 그들. 핵가족에 달랑 하나만 생겨나는 그들. 아니 달랑 하나만 낳는 부모들. 부모들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아니, 곱다고 할매할배처럼 키운다. 그래서 언젠가 중국중앙TV에서 때린 것처럼 그들은 무소불위의 ‘중국의 작은 황제’들이다. 그들은 唯我獨尊의 존재. 이른바 청소년범죄의 급증도 이런 ‘작은 황제’나 唯我獨尊 때문. 그들은 할매할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형제자매도 모른다. 할매할배형제자매의 사랑도 못 받아보고 또 줄줄도 모른다. 좀 더 지나면 사촌이고 무어고 친척도 없다. 그들은 진짜 달랑 외톨로 남는다. 황제나 唯我獨尊은 원래부터 외로운가? 아니 계획생육의 죄. 자연의 순리대로 생기는 대로, 나올 대로 낳아야 되는 법. 여자들의 유방암이고 자궁암이고 하는 것도 이 순리를 어긴데 원인이 많다. 이 순리대로 낳을 때 우리의 아이들은 형제자매와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감정적으로 풍부해진다. 이런 거 다 아는데 뭐 살기가 어렵고 중국에 사람이 너무 많고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런 실제적이고 거창한 논리만 들이대면 내사 할말은 없지만. 우찌 우리 인간이 요 꼬라지가 되었노? 요새 어쩐지 자꾸 할매할배가 생각키운다. 빈가슴이나마 언제나 벌려주고 축 늘어진 젖가슴이나마 마음대로 만지게 하는 할매, 막내라 불쌍해서 그런지 항상 나하고만 겸상을 하던 에험에험 할배. 엄마아버지는 할매할배보다 자애롭지 못했으라. 할매보다 만지기 좋은 젖가슴 좀 만질라고 손만 뻗치면 다 큰 애가 하며 손을 탁 치내던 엄마, 그리고 거기는 왜 손 가, 내껀데 하고 눈썹을 치켜세우는 듯한 아빠, 그리고 좀 울어볼까 하면 항상 사내라는 놈이 하며 기압을 주던 아빠. 그래도 할매할배가 없는 이 마당에 엄마아빠가 생각키운다. 나에게 그렇게 많은 형제자매를 만들어 준 엄마아빠. 정말 그때 우리 집은 ‘사회주의대가정’이었어. 할매할배는 지고무상의 모택동 같았고 엄마아빠는 위의 눈치보기에 아래 눈길 주기에 바빳던 성장이나 시장 같았고 우리 형제자매들은 밥 먹고 똥 싸며 왁자찌껄 살아가는 인민들 같았다. 나는 이 ‘사회주의대가정’에서 ‘세상에 부럼 없이’ 아니, 모르는 것 없이 자랐다. 나는 누이동생과 할매할배엄마아빠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경쟁도 해보았고 형하고 욕을 먹으며 사나이의 의리도 배웠으며 동생에게 주먹 하나로 보스노릇도 해보았다. 우리는 찧고빻으면서 고운정 미운정 다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아빠 따나 저 멀리로 갈 때, 나는 이미 희노애락의 다정다감한 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갑돌이갑순이, 정옥이, 영애, 길남이, 맹추 내하고 놀던 애들이 다 그리워난다. 그리고 그 똥개도 그리워난다. 뿔뿔이 다 흩어졌구나. 지금 너희들 시집살이장가살이에 바쁘고 바쁘겠구나. 그 달랑 잘 난 아이 하나 우생아인지 무언지로 키운다고. 그리고 꼬리를 흔들며 나를 졸졸 따라 다니던 똥개는 아무데서나 해제끼던 그 버릇 못 고쳐 애들은 몇 배나 낳았는지 아니면 언녕 어느 나리님의 단고기나 보신탕이 되었는지... 꼭꼭 숨으라 머리카락 보일라, 바따꿍! 길남이, 니 나하고 정옥이, 영애 고무줄 뛸 때 정옥이영애꺼 거시기 많이 훔쳐보았지. 그리고 정옥이, 영애 너희들은 맹추꺼 거시기 잘도 뒤졌지~ 그래서 맹추를 많이 울렸잖아. 우리는 갑돌이갑순이 장가시집갈 때 첫날 저녁 한 없이 울었지... 아,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우리 한 번 더 놀아볼까. 아이들을 데리고. 책보만 벗어던지면 전자유흰가, 아니 요새는 컴퓨터게임만 하는 아이들, 사람도 없는 컴퓨터세계에 빠져 어른들보고 인사할 줄 모르는 아이들, 지네들끼리는 제 잘 났다고 서로 픽픽 하며 콧대 세우기만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말이다. 나는 우리 엄마아빠에게 한 가지 한이 맺혀 있다. 나에게 누나 하나 만들어 주지 않은 거.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누나 없는 콤플렉스에 누나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 날은 열 받아 밥도 안 먹고 옷 입은 채로 그대로 뒤져 잔다. 빨리 죽어버리라고. 그래서 나는 사회에 나와 누나 하나를 삼았다. 그 누나는 나의 누나 없는 빈구석을 잘도 채워주었다. 나도 동생노릇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나는 음심을 품었다. 姐姐姐姐解決問題라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그래서 나는 넌지시 옛날이야기 하나 했다. ‘달래나 보지’. 옛날 옛적에 오랍누이가 앞뒤로 서서 길을 떠났다. 누나가 앞에 서고 동생이 뒤에 서서. 그런데 갑자기 삼단같은 비가 쏟아 부었다. 누나고 동생이고 옷이 다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뒤에서 걷던 동생은 누나의 착 젖은 바지에 그대로 드러나는 방둥이윤곽에 그만 음심이 발동되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되, 내 친누나잖아, 개돼지만도 못한 자식. 그는 돌맹이를 주어들더니 자기의 거시기를 찧 쪼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누나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누나가 한 소리가 ‘달래나 보지’였지. 그리고 누나도 죽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먼 얘기가 아니고 우리 연변의 달래자전설이라고... 내 이야기가 끝나자 나의 누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달래나 보지’하고 묘한 웃음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달래’ 가지고 갈 데로 다 가보았다. 그러다가 ‘연상의 여인’바람에 편승하여 우리는 결혼인지 무언지 해서 요까지 왔다. 정말 남녀지간에는 우정이 없는가봐. 아니, 맺은 남매지간에도. 아니, ‘달래나 보지’의 피를 나눈 남매처럼 그런 치열한 혈육의 정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누가 나빠서가 아니고 서로의 합의 속에 그런 ‘패륜’도 쉽게 이루어진다. 오히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발전인지도 모른다. 요즘 애들 바로 이런 치열한 혈육의 정을 맛볼 수 없다. 그들은 바로 내 같이 어정쩡한 ‘姐姐’의 맛은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묽은데다 쉽게 희석되고 흘러가기 쉬운 맛. 불쌍다.그래도 요새 아이들 행복한데가 있다. 그리고 희망적인 데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행기’‘자동차’ 쾅, ‘돌격총’ 뚜르르, ‘칼’ 번쩍... 산비둘기 와삭와삭 뼈도 안 남기고 먹어 치우기... 마구 마스고 죽이기만 하더니 언제부터 부처님의 자비심도 깃드는가 放生할 줄도 안다. 그리고 겨울에 먹을거리 없어 삑삑 우는 저 산새들에게 좁쌀을 뿌려줄 줄을 알고. 우리가 클 때보다 낫다. 우리는 살기 바빠 放生이 무엇인지 몰랐고 좁쌀 죽 끓여먹기 바빳다. 저 放生하러 가는 아이, 우리 같이 가자!2005. 8. 28
44    애완동물 댓글:  조회:4055  추천:64  2005-08-26
애완동물애완동물 키우는 붐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란다. 좀 먹고 살만 하면 애완동물이란다. 요새 중국도 좀 먹고 살만 하니까 너도나도 애완동물. 짱~짜-짜- 애완동물 만화경→날아다니는 새로부터 땅위의 개, 돼지, 거미, 땅속의 쥐, 뱀, 물속의 고기, 그리고 땅속, 땅위, 물속을 아우르는 개구리, 두꺼비... 실로 이 세상 모든 동물이 애완동물로 되는 듯 하다. 역사는 돌고 도는가, 역사의 아이러니. 언젠가는 인간들이 먹을 것은 다 잡아먹고 해로운 것은 다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씨종자 마른 동물들도 적지 않았지. 그런데 이제는 곱다고 싸돌고 지랄을 하니 알고도 모를 얄궂은 사람들의 마음. 곱게 보아 별 볼일 없는 현대인간들, 각양각색의 애완동물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다양한 취미와 개성을 선보인다고 하겠다.애완동물 키우는 심리투시☞사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동물을 좋아하게 생겨 먹었다. 옛날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와 가장 닮은 동물들을 조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토템이란 것이다. 그래서 동물에 대한 친연성은 개화되고 똑똑해진 현대에 있어서도 인간의 무의식속에 남아 자기도 모르게 동물에게 친밀감을 나타내게 한다. 여기에 만물평등, 衆生平等에 윤회설을 풀이하는 불교신앙이 가미될 때는 그 도가 더 해진다.거창한 의미에서의 사명감. 멸종되고 씨종자가 말려가는 동물들, 보기에 애처롭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 먹이사슬의 한 고리일 때 이런 동물들의 멸종은 생태평형을 깨고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결국 인간에게 해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동물보호운동, 생태환경보호운동을 펼치는 거룩한 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인간들의 비극을 나타낸다. 현대인간은 외롭다. 너무 똑똑하다보니 자기 주의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개성만 고집하다 보니 남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혼자로 남는다. 시집장가 못 간 많은 善男善女, 아니 孤男孤女들은 그 전형적인 보기. 瞬時萬變하는 현대사회에 세대간의 차이, 이른바 代溝, 그리고 핵가족은 노령화사회의 노인들을 영원한 외로운 존재로 만든다. 애완동물은 현대 孤男孤女나 만년의 노인들의 외로움의 상징. 현대는 인간지간의 신뢰, 情義를 그 어느 때보다도 따지면서도 못 믿을 것은 바로 인간. 인간지간에 불신의 장벽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두터워지는 듯 하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동물에 대한 믿음으로 바꾼다. 사람은 배반하지만 동물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옛 신조를 굳건히 믿으면서. 그리고 현대는 이래저래 불안하다. 이 불안을 애완동물에 대한 집착으로 잊어버리려 한다. 애완동물 매니아가 되면 이 세상에 애완동물밖에 안보이니깐. 현대인간들의 허영심리를 만족 받는다. 무슨 애완동물을 키우면 다른 사람은 다 바빠도 내만은 여유로운 듯함을 나타내며 다른 사람은 먹고 살기 바쁜데 나만은 일 안하고 놀아도 먹을 것이 절로 생기는 귀족인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며 지대한 허영만족을 받는다.... ...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애완동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프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연인이나 부부나 되듯이 껴안고 자기. 애를 못 낳는 부부가 마치 자기 아이를 키우듯이 키우는 것. 우유 먹이고 꼬까옷 입히고 놀이감 사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금이야 옥이야... 애완동물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고 죽으면 마치 자기 부모나 죽은 듯이 울고불고 무덤을 만들고 명복을 빌며 야단을 피우기. 그래서 어떤 애완동물보다 못한 신세의 사나이 광고를 냈단다. 귀부인님, 나는 그대가 요구하는 모든 애완동물이 되고도 남으니 나를 데리다 키우세요. 나는 말하는 애완동물!하고. 一言蔽之하면 사람처럼 키우기. 한국의「동물농장」TV프로그램을 보라. 그 많은 종류의 애완견(때로는 돼지 같은 것도 있음)들을 멀쩡한 아파트에서 키운다. 그들은 아파트를 저 들판의 농장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 집이 없어서 아우성인데 그래 이거 말이 되냐 말이다. 그들은 한술 더 떠 그 개새끼들한데 꼬까옷을 입히고 사람 말을 시키고 사람 흉내를 내게 하고 사람처럼 먹고 싸도록 하기에 바쁘다 바뻐. 그 개새끼들 불쌍도 하다. 개는 개처럼 털이 부스스하고 컹컹 짖고 아무데나 똥을 싸야 행복하겠는데... 그런데 개는 개라 아무리 털을 깎아주고 씻어주고 해도 개털은 부스스해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짖지 말라 해도 짖기 마련이고 아무리 아무데나 똥을 싸지 말라 해도 싸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돌연발색하고 괜히 사람들한테 신경질이다. 나는 그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피익 나왔다. 언젠가 한번 나는 내 친구놈하고 대판 싸움이 붙었다. 그 친구 역시 개매니아가 될 정도로 애완견을 안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지라 나도 모르게 고 강아지새끼 고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랬더니 이런 천둥벼락이라구야, 그 친구 붉으락 푸르락 두 팔 걷고 나한테 달려들었다. 그때 나는 정말 개처럼 잘 달아나서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더라면 오늘 여기 앉아 이 글도 못 쓸 것이다. 그래도 우리 동양종자들은 서양종자들에 비해 개는 개처럼 키우는 편이다. 애초에 야생개가 크다고 유전자를 조종하여 고만조만한 애완견들을 생산해낸 것도 그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씨종자를 마구 뿌려댈가봐 애초에 거세를 해버리거나 컹컹 짖는 것이 듣기 싫다고 아예 성대수술을 하거나 할퀴고 찢고 한다고 발톱을 다 뽑아내기도 한다. 이래가지고도 동물보호니 생태환경보호의 선구자인양 애완견을 안고 다니는 데는 실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자아풍자다. 이것은 동물학대다. 이런 사람들이 희한한 동물고기까지도 희한하게 다 먹으면서도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을 한다니깐 ‘개고기먹’는 소동의 개판을 벌리니 실로 개판이 아닐 수 없다. 거창한 논의로는 문화제국주의, 문화침략주의가 되겠다. 정말정말 ‘오래 살다보니’ 별 일 다 보게 되는 해괴망칙한 일들이네. 빨리 죽어야지!동물은 동물이다. 애완동물도 동물이다. 그러니 동물처럼 키워야지 사람처럼 키워서는 안 된다. 사람처럼 키우는 애완동물은 동물학대적 변태다. 그것은 愛玩이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일방적인 인간의 자아중심적이고 독선적인 다른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동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느니 ‘잃어버린 우리 미미 찾아주세요...’할 것이 아니고 미아들을 찾아 나서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 한분이라도 더 찾아봐라! 애완동물들의 먹이를 사들이고 옷을 입힐 것이 아니고 저 태국과 라오스사이 오갈 데 없는 몽족난민이나 아프리카의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을 돌봐라! 그러면 천당에 가느니라! 믿습니까? 믿습니다. OK! 사실 전통적으로 한민족은 개는 개처럼, 동물은 동물처럼 키워왔다. 무슨 애완견이요, 애완동물이요 하는 궁색은 요 그간에 분 ‘양놈’들 바람 때문이다. 똥개,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이든 사람의 똥이든 아무거나 먹고 제멋대로 뛰어다니면서 무럭무럭 잘만 자라기. 개에게 절대의 자유를 준다. 클 대로 커서 다 크면 안스러워나마 잡아먹기. 물론 그 새끼는 받아놓고. 그러면 개는 그때까지 거두어준 주인의 은공에 보답을 하는 듯 달갑게 희생이 되는 것이다. 고기단백질이 귀했던 시절, 우리에게 귀중한 보신이 되어준 개. 이는 똑 마치 아이누족들이 곰을 토템으로 모시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곰을 잡아먹는 사정과 같다. 아이누족들은 곰이 자기네들을 위해 일부러 영양원의 희생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곰가죽을 나무에 걸어두고 곰족에 대한 미안함을 나타내고 곰족의 번성을 기원하며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바로 인간과 동물의 共生을 기하는 여기에 진정한 동물사랑이 있다.2005. 8. 25
43    불안 댓글:  조회:4129  추천:69  2005-08-25
불안현대인간들은 물질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지수가 높다. 반면에 정신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행지수가 높다. 불안, 외로움, 소외... 현대생활의 哈哈鏡으로서의 현대파문학은 바로 이런 것을 다루어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현대인간들의 불행지수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불안이다. 우리는 인간을 자유의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학예술의 기본 주제의 하나가 자유에 대한 노래이다. 生命誠可貴 愛情價更高 若爲自由故 兩者皆可抛무상의 가치로 알려진 웽그리아의 베타뮨(裴多雯)의 자유에 대한 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어 일으켰던가? 그런데 인간은 사실 자유를 포기할 만큼 이 불안이 더 심각한 경우가 있다. 언젠가 미국의 어느 한 유명한 학자가「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저서를 쓰서 세상사람들을 놀래웠다. 노예,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어느 하루아침에 이런 노예에게 해방을 선언하고 자유를 주어보란다. 그러면 노예는 어리둥절해하며 어쩔 바를 몰라 한단다. 똑 마치 사람이 잡아서 올가미를 채우고 집에서 키우던 짐승을 광활한 야생 숲으로 놓아주었을 때 미련이라도 있는 듯 머멎거리는 것처럼. 노예에게는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행해야 되는 자유의 감미로움을 맛보기에 앞서 익숙치 못하고 막연하기만 한 자유가 불확실하여 불안했다. 그래서 이 부담스러운 자유를 주인에게 반납하고 달갑게 원위치로 복귀하게 되는데 주인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는 밥이나 먹으며 불안이 없는 노예생활에 자족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유로부터의 도피’ 행각에 다름 아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운동시기 실제로 이런 행각을 벌인 노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안은 불확실성에서 온다. 그러니 전현대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불안이 적다. ‘日出而作, 日沒而息’, 자연의 이듬에 맞추어 돌아가는 생활, 여기에 ‘少人寡國’식 끼리끼리의 공동체생활은 그만큼 단순하고 안정적이다. 그리고 부모가 무슨 일에 종사하면 자식이 그 일을 따라하며 이어 받아 생업을 삼는 세대물림은 그만큼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전기, 전등의 개발로 밤낮 따로 없이 돌아간다. 불안의 도를 넘어 피곤하다. 여기에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은 서로 모르는 사람을 한데 뒤섞어 놓았다. 이리 봐도 낮선 사람, 저리 봐도 낮선 사람... 불안. 문 꽁꽁 닫아걸기. 그리고 직업이라는 것도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고, 투자를 하고 아글타글 노력을 해서 ‘他人就是地獄’, ‘適者生存’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이긴 자에게만 차례진다. 이제 곧 사회에 진출할 대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이런 직업적 불안을 많이 느낀다. 나름대로 사회에 크게 쓰일 지식과 능력, 재간을 갖췄다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정작 사회에 들어서 보니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취업면접에서 풀이 죽어 나오는 대학생들의 그 얼굴에는 불안과 실망의 빛이 역연하다. 그렇다하여 직업이 차례졌다 해서 불안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鐵飯碗’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런데 열심히 해도 ‘優生劣敗’의 시장원리에 의해 직장이 망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망하’는 수가 있다. 중국의 ‘下崗’이 이런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직장이 안 망한다 해도 ‘長江后浪推前浪’이라 밀리워 나오는 수가 있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이요 하며 행하는 ‘정리해고’에는 이런 경우가 많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신조어는 이런 세태를 잘 말해주고 있다.현대사회는 오픈된 경쟁사회이다. 무한한 경쟁참조계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남과의 비교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상대적 빈곤감, 상대적 무력감, 상대적 학벌... 무수한 ‘상대적’이 현대인간을 울린다. 이런 ‘상대적’ 때문에 불안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질투, 시기 등 인간의 고질병이 발동하며 살기가 힘이 들다. 자족을 맛을 알면 행복하겠는데. 知足者常樂이 아닌가. 현대사회는 활력이 넘치는 역동성을 보인다. 산업화사회, 정보화사회...라는 큰 흐름 틀 속에서 말 그대로 瞬時萬變, 離合集散을 거듭하며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사회다. 과학이라는 가장 확실한 기치는 들었으되 많은 우연성과 개연성이 난무한다. 민주화라 각기 제 목소리를 내라고 하지만 그것은 곧 대중문화의 거세찬 흐름에 함몰되고 만다. 인권의 만인평등을 고취하되 패권의 총칼의 논리가 통한다. 패션 하나만 놓고 보아도 오늘은 길어졌다 내일은 짧아졌다, 그러다가 긴 것과 짧은 것이 뒤죽박죽이 된 것, 실로 헷갈리게 놀아난다. 많은 현대인간들은 隨大流에 어리뻥뻥, 어리둥절. 아무리 똑똑한 현대인간이라 해도 한치 앞이 잘 안 보일 때가 있다. 현대인간들은 이래저래 불안하다. 바로 이 불안 때문에 미래를 대비한다. 그래서 현대의 ‘만능파스워드’인 돈을 벌기에 급급하다. 현대에 극성하는 복권, 투기, 도박, 강도... 이른바 ‘대박’을 잡으려는 요행주의, 한탕주의 등등의 사행 내지는 범죄는 바로 이로부터 기인된다. 돈을 많이 벌어야 장가시집가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이런 하나하나의 확실함속에서 마음은 든든해지고 불안은 해소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불안 때문에 관상쟁이에, 점쟁이를 찾아다닌다. 자기의 사주를 걸고 확실한 팔자를 알아 마음의 불안을 떨어버리려는데 있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왔을 때 심심찮게 눈에 띠는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보고 흥미가 동했다. 한국도 이제 먹고 살만 하니깐 이 세계를 아우르는 높은 경지의 철학을 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웬걸, 관상에 사주팔자 봐주는 것이 ‘철학’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관상에 사주팔자 봐주는 관상쟁이, 점쟁이들이 자기 스스로 철학가로 자부하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고 그들 앞에 부복함에라! 심지어 대통령 후보자들이 찾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노무현대통령 취임 후에 한국에 와서 가장 인상적으로 눈에 띠인 것은 관상쟁이, 점쟁이들이 대거 길거리로 나와 영업판을 벌인데 있다. 종로3가 지하철 에스켈레터를 타고 가다보면 눈에 띠는 이들의 영업판, 그리고 인천 주안지하상가, 주안영화관매표소 옆 등 많은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서울 탑골공원이나 종묘 쪽에 저녁이 되면 얼마간 눈에 띠던 것이 말이다. 그리고 놀란 것은 선남선녀들이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이들 장사가 문전성세를 이루고 있다는데 있다. 옆의 공산품가게들은 장사가 안 되서 인상을 쓰고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다. 이런 관상쟁이나 점쟁이를 찾아 미래에 대한 어떤 답이라도 얻어야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데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이 허황할지라도. 인간이 하느님과 같은 절대자에 기대는 종교요 뭐요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논의로 인간은 아직도 어디서 왔으며 와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 자체에 대해 불안해한다. 죽음 자체는 더 없이 큰 어두운 그림자로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도 죽음의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도 이 불안에서 우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손쉽게 하느님이나 부처나 알라가 약속하는 ‘천당’을 믿는다. 정말 ‘안 믿으면 지옥, 믿으면 천당’하는 식으로 우리의 죽음의 불안도 해소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보면 행보다는 더 잘 띠는 많고 많은 불행이 언제 나에게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나의 운명을 맡기는 편안함속에 종교적 경지의 절대자를 광신하게 된다.사실 1950~60년대 현대파극 유리시스의「고더를 기다리다(等待戟多)」가 유럽에서 그렇게 센세이숀을 불러일으킨 것도 바로 현대인간들의 불안에 있다. 이 극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두 친구가 고더라는 사람이 오니 안 오니로 쟁론을 거듭하다가 결국 온다는 데로 합의를 보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초라한 극이 히트를 치다니 현대인간들도 정말 별 볼일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대인간들의 정상을 보면 지극히 그럴만도 하다. 유럽에서 보면 인간은 중세기 종교적 맹신에서 벗어나 문예부흥시기부터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 스스로의 가치를 만물의 영장으로까지 고양하며 인간 자체를 믿었다. 그런데 바로 자유, 평등, 박애를 고취하는 인간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러 서로 사람 잡이를 했다. 인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산산 조각이 났다. 인간은 믿을 바가 못 되었다. 인간은 새로운 불안에 빠졌다. 그래서 부정에 부정의 논리로 현대인간들은 다시 종교에 빠지면서도 하느님과 같은 막연한 절대자에 성차지 않아 한술 더 떠「고더를 기다리다」에서와 같이 보다 좀 더 구체적인 존재를 믿고 싶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고더’인 줄로 안다. 여기서 ‘고더’는 누구든지 관계없다. 그는 온다는 확신만을 주는 구체적인 희망의 메시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보다 확실한 현대인간들의 메시아이다. 현대인간들은 바로 이 보다 확실한 메시아를 믿고 기다린다는 희망 속에 불안은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2005. 8. 24
42    인간의 自虐 댓글:  조회:3947  추천:72  2005-08-23
인간의 自虐인간은 분명 자기애적인 나르시시즘적 존재이다. 그래서 중국에는 自私自利의 극단적인 합리화로 人不爲己天誅地滅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런 나르시시즘이 변태적으로 나타날 때 공주병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긍정적인 생명의식으로 나타나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이런 자기애적인 나르시시즘적 존재와는 분명 다른 自虐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자기 스스로가 밉고, 밉다 못해 못살게 구는 것-이것이 우리의 부정적인 생명의식으로 나타나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바로 긍정적인 생명의식과 부정적인 생명의식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생의 무대에서 놀아난다. 술,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고 과음하면 독이 된다. 그런데 마시다, 마시다보면 과음하기 일쑤. 담배, 백해무익. 담배갑에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어떻게 나쁘다고 번연히 쓰박아 두었는데도 아직도 풀풀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무슨 금연의 날이요 하며 시끌벅적하다. 술담배 같은 기호품은 말 그대로 기호품이기 때문에 각자의 기호에 맡길밖에. 그런데 그 기호품 애용자들은 과음하고 폭음하고 골초가 되는 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술로 인한 간암유발, 담배로 인한 폐암유발 등등 의학적 경종이 수시로 울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기에 골인하는 데는 바로 인간의 무의식 깊숙이까지 자리 잡고 있는 自虐심리가 크게 한몫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술담배 같은 기호품은 1차적으로 바로 인간의 무의식적인 自虐심리에 영합하여 시장을 확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自虐심리는 성애에서 마조히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히스테리적인 정신병 발작에서 나타나기도 한다.人生不如意, 人生如意보다 잘 불러지는 인생타령. 바로 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自虐심리가 발동되기도 한다. 에라, 모르겠다, 꾸르륵 술병을 들이키기. 푸-푸- 줄담배 내뿜기. 그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그 극단적인 상황의 한 보기. 그러나 이런 차원은 동물과 별로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 바다가 극심하게 오염되자 돌고래들이 집단적으로 모래사장으로 나와 자살을 한 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적 파탄을 전제로 한 自甘墮落의 自虐로 나아가는 것이 동물과 다르며 무서운 것이다. 일종 사회적 암이다. 얼굴에는 땟국이 흐르고 머리는 삼검불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옷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고. 현재 세계적으로 골머리 아픈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많은 浮浪者-노숙자홈리스(Homelesser), 그 한 보기다. 1950~60년대 미국의 히피들은 自甘墮落의 해괴망칙한 自虐 스타일로 경직된 기성문화에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다. 요새 세계적인 패션으로까지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입는 바지통에 구멍이 뻐끔뻐끔 난 乞丐服도 바로 기성세대들의 자애적인 正裝에 自虐墮落적인 散裝으로 맞선 데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사람 되기를 거부하고 自甘墮落적인 自虐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비극적이다. 술담배의 自虐로 육체가 망가지는 것은 일회적이고 그 자신에 국한된 것이지만 自甘墮落적인 自虐로 정신적인 망가짐은 파급적이고 반사회적으로 흐르기 쉽다. 인생을 이판사판으로 보고 ‘막가파’식 인생을 사는 인간들이 바로 이런 부류다.인간은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존재다. 人生이 아무리 不如意하더라도 열심히 살려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의 自虐는 여기서 기인되기도 한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간은 반성한다. 그 반성이 성차지 않을 때 인간은 스스로 쥐어뜯고 처박고 한다. 이것이 성차지 않을 때는 기꺼이 자살까지도 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자살을 말이다.보편적 인간애로 넘치는 성인들의 인생경지는 한없이 높고 고상하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미몽에 허덕이며 죽어갈 때 살아 있는 자체를 한없이 죄스럽게 생각한 성인들, 그래서 그들은 항상 自虐속에 모대기며 인간구제의 심성을 키웠다. 나는 예수, 석가모니를 떠올려본다. 남이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더 때리라고 가르친 예수, 施虐보다는 분명히 自虐를 가르치고 있다. 그 자신은 결국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못박혔다. 달갑게 自虐의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뭇중생들의 죄를 赦하기 위해. 석가모니, 그는 왕자다. 그러나 그는 普渡衆生의 길을 터득하기 위해 칠칠에 사십구라 사십구일 보리수 밑에서 自虐의 가부좌를 했던 것이다. 예수도 좋고 석가모니도 좋고 이들 성인들은 自虐의 아픔 속에서 인간구제의 종교-사랑이나 자비를 터득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나 불교를 창립한 예수나 석가모니 말고도 진정한 종교인들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금식기도를 하거나 금식일을 정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톨스토이나 윤동주와 같은 위대한 문호들도 이들과 마찬가지다. 톨스토이는 대지주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자아완성’이라는 부활을 가져오나 주위의 따가운 시선 속에 힘겨운 自虐에 모대겼다. 결국 그는 가출하여 객사하고 만다. 윤동주, 그는 십자가를 매고 민족의 제단에 달갑게 머리를 드리울 각오에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가슴을 아파했고’, ‘죽어가는 모든 것을/사랑해야지’로 더 높은 보편애적 경지를 창출하고 있다. 그는 항상 이런 각오와 보편애적 경지에 조금이라도 그 마음이 일그러질까봐 조마조마하고 조심스러우며 自律적인 自虐에 모대겼다. 이런 自虐는 도덕적 깔끔함이 돋보이고 있다. 예수도 좋고 석가모니도 좋고 톨스토이도 좋고 윤동주도 좋고 그들의 自虐를 통한 새로운 삶의 경지추구는 진실로 인간적인 경지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이 동물과 다른 근본 특성이 있기도 하다. 2005. 8. 18
41    감정노동 댓글:  조회:4074  추천:76  2005-08-09
감정노동육체노동, 정신노동 소리는 많이 들어 보았쟈? 그런데 요새는 뭐 감정노동이란 것이 있단다. 요새는 별란 세상이쟈? 사람들이 육체노동, 정신노동 열심히 해서 먹고 살만 하니깐 제3산업 서비스업이 많이 생겼잖아. 감정노동은 바로 이 서비스업의 메카래. 벤처경영학인지 뭐인지 최신경영학에서 이렇게들 말하고 있어. 항상 얼굴에 웃음 찰찰 흘러 넘치고 손발 다소곳이 가다듬고 공손한 태도를 나타내기, 이른바 웃음봉사. 한동안 우리 중국에서 ‘顧客是上帝ꡑ즉 고객을 황제로 모신다고 떠들어 댄 것이 바로 이런 거야. 사실 웃음뿐이 아니고 사람 죽은 집에 가서 맏상주 맞잡이로 울어주기도 하기, 그리고 돈받기. 요새 사람 사는 새 풍경이란다. 여하튼 자기 감정을 잘 컨트롤해서 고객의 기분에 맞추기. 항상 생글생글 웃는 밝은 모습의 스튜디어오-空中小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래서 돈이 없는 주제에 나는 비행기를 자주 타는가... 사실 그렇다. 할 일 없이 거리바닥을 빙빙 돌다가 물건을 파는 아가씨의 정겨운 웃음 하나에 자기도 모르게 하나 사주기, 그리고 집에 마누라한테 욕먹고 어쩌다가 이런 서비스아가씨한테 한번 분풀이 해볼가 하면 그 마냥 생글생글한 웃음에 제풀에 싱거워 물앉고 만다. 웃는 낯에 침을 못 뱉는 법. 웃음은 이런 신비로운 힘이 있다. 현대경영학에서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업종경영에 표정관리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요새 표정관리사, 매너관리사들이 뜬다. 신입사원 교육에 너도나도 이런 관리사들을 부른다. 적재적소의 경영 표정, 매너가 업체의 이윤효과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법관은 객관적이고 근엄한 중립적인 표정, 카드사 빚재촉을 하는 사람은 허스키하고 위엄이 있는 목소리, 서비스업 종사 인원은 웃음천사로 만들기가 표정관리사, 매너관리사들의 몫이다. 머리는 어떤 스타일, 표정은 어떻게, 손발은 어떻게 하는 식으로 나의 의지, 뜻과는 관계없이 다듬어 나가야 한다. 가령 서비스업에서 속에서는 천불만불이 나도 겉으로는 웃는 친절봉사를 하란다. 말로는 쉽지만 사실 쉽지 않다. 인상을 쓸 판에 웃음기를 나타내야 하니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이들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대하는데 내내 신경을 써야 하고 자기의 진실한 감정보다는 노상 지어낸 감정에 매여 놀다보니 대인기피증이나 자기의 진실한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인격분열 비슷한 증상을 많이 나타낸다. 이른바 새로운 직업병이 생겨난 셈이다.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신경정신과를 많이 찾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대의 선진적인 많은 기업들은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의 이런 고충을 헤아려 세심한 배려를 한다. 종업원들의 당연한 복지의 한 내용으로 된다. 한국의 삼성에베랜드 같은 경우를 보면 종업원들의 기숙사는 꼭 1인1실을 원칙으로 한다. 낮에 시끌벅적하게 사람들과 북적이며 지어낸 표정, 매너를 짓는다고 쌓인 스트레스를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개성적인 표정, 매너를 마음껏 짓고 가지며 확 풀어버리라는 것이다. 내일의 웃음천사가 되기 위해 새로운 충전을 하는 셈이다. 감정노동,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간이 자기 마음을 어기고 산다는 거, 너무 힘들다. 그렇다해서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기, 이것은 너무 야성적이고 야하다. 그러니 이 양자의 가운데 줄 타기-中庸之道, 우리 인간의 삶의 지혜가 아니겠는가?2005. 8. 1
40    하루살이 댓글:  조회:4307  추천:59  2005-07-20
하루살이나는 하루살이를 알게 되어서부터 하루살이를 대단히 불쌍히 여겨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아무리 내 얼굴에 매여달리며 성가시게 굴어도 곱게 봐주었다. 인간은 백년도 못산다고 아우성인데 하루살이는 하루를 겨우 살까말까 하니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하루살이가 더 행복해보이고 부러워났다. 하루살이는 이 세상에 올 때 입도 귀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단지 생식세포만 가지고 왔다. 그도 자기의 운명을 너무도 잘 아는 것 같다. 하루밖에 못사는 인생, 무엇을 해야지? 먹고 싸고 듣고 말하고 찧고 빻고 할 사이가 없다. 이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다. 종의 번식이 지고무상, 절대절명의 과제다. 그래서 그는 사랑, 섹스, 교미밖에 모른다. 고상하게 말하면 사랑을 위하여 존재하는 그다. 그는 생겨나자마자 짝, 짝짜쿵을 찾아 헤맨다. 그의 퍼덕이는 날개는 사랑의 메시지다. 둘이 눈이 맞아 날개짓을 하며 부딪치며 찧고 빻고 한바탕 사랑의 농창질을 하고 나면 숫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모든 날개짓을 접고 서서히 추락하여 생을 마감한다. 암놈은 사랑의 열매를 가득 품고 물가로 날아간다. 그리고는 물속에 스르르 알을 쓸고 ‘革命事業後繼有人’의 낭만 속에 죽어간다. 그 다음 정말 하루 밤 자고나면 그들을 닮은 하루살이가 무데기로 태어난다. 나는 정말 하루살이가 되고 싶었다. 뒤구멍으로 뱉아낼거면 왜 앞구멍으로 먹어제끼지? 일어날거면 왜 드러놉지? 눈을 뜰거면 감기는 왜 또 감지? 벗을거면 왜 또 입지?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왜 이 지랄인가 말이다... 나는 인간이 참 자기당착적이고 요지경이라고 생각되었다. 워낙 인간은 복잡하게 생겨 먹었다. 생식세포만 가지고 온 단세포가 아니다. 다세포, 오관에 사지에 오장육부에 ♀♁... 그것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하고 분열하고 확장하고... 그러니 인간은 문턱 넘을 때 생각이 다르고 넘어올 때 생각이 다르다. 인간의 얄궂은 변덕에 우리는 어릴 때 이런 변덕도 부려보았다. ‘울다가 웃으면 궁디(엉덩이)에 털 난다.’ 그러면 울음을 뚝 그치고 웃고 만다. 인간은 복잡하게 사니깐, 자꾸 변덕을 부리니깐 삐꺽하고 힘들다. 하루살이처럼 좀 단순하게 살 수 없을까. 사실 많은 문학예술에서는 이런 단순, 변함없는 것들을 추구하고 노래해왔다. 멀리 우리문학사의 윤선도의 「오우가」, 내 벗이 몇인고 하니-달, 물, 바위, 소나무, 대, 변덕스럽지 않고 변함없어 단순한 것들로 친구를 삼았다. 우리와 가까이 있는 김종환, 두꺼운 안경알에 안경태, 그리고 좀 어눌한 말투에 느린 동작에 뛸 데 없는 ‘書呆者’상. 그에게는 폴짝폴짝 뛰며 이리 설치고 저리 설치는 멋도 없다. 거저 덤덤히 서서 좀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를 뿐이다. 단순=진실-그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들하고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존재의 이유」, 완, 투, 쓰리, 포, 아무리 불러도 너무 간단하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거는 니가 있기 때문이야. 「사랑을 위하여」, 하루를 살아도 진정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남고 싶은 사랑. 현실의 사랑의 변덕, 배신하고는 거리가 멀다. 단순함의 순정이 순정파들을 녹인다. 사실 인간은 복잡하고 힘든 일상에서의 삶을 단순하고 진실한 예술세계에서 훨훨 떨쳐버리고 홀가분함을 느낀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흥얼대게 되는 「존재의 이유」, 「사랑의 노래」... 인간은 다세포적인 양가가치에 놀아나니깐 힘들다. 眞, 善, 美만 있으면 되겠는데 假, 醜, 惡가 또 있으니 골치 아프다. 하루살이의 단순한 삶이란 다름이 아니다. 변함없이 眞, 善, 美만 추구하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하루만을 살기에 하루살이 같은 眞, 善, 美 삶을 살았다. 씨종자 뿌리기, 그것이 삶의 모든 명분이고 眞, 善, 美다. 인간은 인간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살아가는 많고 많은 하루하루를... 그래서 인간은 힘든지도 모른다. ‘好死不如懶活’, 무조건 사는 것, 살아남는 것이 장땅이 아니다. 개돼지 같이 백년을 살아 무엇 하냐 말이다. 하루를 살아도 사람 같이 사는 거, 이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백년의 약속」, 바로 이런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나는 거짓의 옷을 벗어버렸다’, 하루를 살아도 진실하게 살고픈 그 몸부림, 차라리 백년을 사느니 너하고 하루를 살고픈 그 절절함... 우리 민족에게는 하루살이 같은 단순함과 眞, 善, 美의 삶의 기질과 취향이 있다. ‘好死不如懶活’하고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거리가 멀다. 우리에게는 깔끔함과 지조가 있다. 우리는 단순하다. 옴니암니 따지는 이해득실보다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많이 놀아났다. 그래서 우리가 얕은 지도 모른다. 시장경제의 냉혹한 금전관계가 팽배한 속에서도 한국은 아직 정이 있어 좋다. 이 정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오아시스다. 목마른 현대야말로 더욱 그렇다. 우리는 하루살이의 씨뿌리기 같은 眞, 善, 美의 명분에 몰입하고 혼신을 다 한다. 일제의 식민지침략, 독립이 우리의 절대절명일 때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수많은 의열의 사나이들이 땅, 땅, 땅, 꽝... 들고 일어났다. 군바리들의 독재에 전태일... 수많은 열혈의 젊음이 분신자살로 민주화의 꽃을 피웠다. 사실 우리에게는 확실한 眞, 善, 美의 명분만 주어지면 신들린,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신바람이 난다. 그래서 온 민족이 하나처럼 궐기할 수 있다. 미국이 백년가도 전쟁의 상흔을 복구하지 못한다 할 때 민족자존 하나로 우리는 3년을 겐도하여 원상회복했을 뿐만 ‘천리마운동’으로 ‘대동강기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의 분발 속에 30년의 짧은 시간에 유럽에서 300~400년 세월이 걸려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거창한, 머리 아픈 정치논리 떠나 역시 우리 민족의 명분의식의 다른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때 ‘당’이 정말 眞, 善, 美의 명분만 잘 부여하면 ‘우리’는 이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일당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악바리’들이다. 眞, 善, 美의 명분만 서면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우리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헤덤비는 데가 있다. 하루살이가 자기 죽을 줄 모르고 짝짓기 하듯이. 그리고는 꼭 해내고야 만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지 않으면 恨으로 남는다. 고만고만한 체격에 별로 우세가 없는 ‘붉은 투혼’들이 악으로 딱 버티며 마지막 몇 초 꼴을 잘 넣는 것은 바로 하루살이의 마지막 전격 사정과 같다. 나는 심심하면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도 하루살이처럼 하루만 산다고 한다면. 그렇 너는 뭘 하지? 에라, 하루밖에 못사는 인생, 될대로 되라고 술이나 칵 들이마시겠다고. 그러면 안되지. 내가 뭐라 캐노? 하루를 살더라도 하루살이처럼 절실하고도 확실한 명분을 찾아서 사람처럼 살아라고. 그렇쟈?대자연은 우리의 스승.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많이 배운다. 인간은 동물로부터 왔다. 그러니 동물과 인간은 비근한 데가 많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로부터 많이 배운다. 하루살이, 하루를 살까말까 하는 미물이지만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는 많다. 2005. 7. 20
39    동아리 ・ 동호회 ・ 매니아 댓글:  조회:5119  추천:69  2005-07-18
동아리 ・ 동호회 ・ 매니아나는 한국의 대학이 중국의 대학과 무엇이 다르냐 하면 단연 동아리를 드는 것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한다. 학생들 끼리끼리 모여서 놀아나는 거 그거 말이다. 무슨 풍물, 댄스, 기타, 축구, 농구, 스트라이크, 하모니카, 연설... 그야말로 동아리는 대학문화에 팔방미인이 되어 안 비치는데 없는 것 같다. 동아리는 팔방미인이 될 수밖에. 동아리는 워낙 누구 요구에서도 아니고 강요에서도 아니고 단지 내가 좋아 하는 노릇임에라. 그것은 워낙 취미나 흥취의 모임이니깐. 그래서 동아리는 재미 그 자체. 한국 대학생들의 집단적인 조직생활이란 아마도 이런 동아리모임이 가장 활발하고 압권을 차지할 줄로 안다. 전학교 학생회 못지 않게 무슨 총동아리협회 같은 것이 있어 활약하는 것 같다. 한국 대학에도 중국 대학처럼 과(系)학생회, 대학(학원)학생회, 전교학생회가 있다. 그러나 이런 학생회가 학생들을 강력하게 규합하고 조직하는 중심체로 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학생회에서 조직하는 활동에의 참가여부는 각자 의사에 따른 자유지 ‘꼭’이라는 코멘트는 없다. 한국 대학의 학생회의 주요 기능은 학생을 향한 대내적인 작용보다는 학교 당국을 향한 대외적인 작용이 더 큰 것 같다. 그렇다 하여 한국 대학은 중국 대학처럼 공청단 내지 공산당 조직이 있어 학생들에게 조직귀속감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대학생은 어디까지나 자유선택의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런데 개인주의는 외로운 법. 인간은 귀속감을 느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법. 한국 대학생들은 바로 동아리를 통해 이런 귀속감을 느끼는 듯 하다. 사실 이 동아리가 취미나 흥취 본위의 모임이니깐 개인주의하고 그리 충돌될 것도 없다. 인간의 취미, 흥취라는 것은 실로 다양하다. 그러니 이런 동아리도 다양할 수밖에. 나는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배재대학교의 많은 학생들 동아리 가운데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농활’동아리. 죽어가는 농촌을 살린다는 거창한 취지 하에 뭉친 사람들. 거창한 ‘취미, 흥취’에 머리 숙이게 된다. 더럽고 힘들면서 돈 안 되는 농촌 일을 많은 사람들이 피하지 못해 아우성인데 제 발로 찾아 가다니. 그것도 젊은 대학생들이 말이다. 괴짜는 괴짜다. 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런 젊은이에게서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봄철에 ‘우리 농활 가요!’ 하는 포스트를 부치고 떠나갈 때 공부는 어쩌지 하면서도 그 대견스러움에 일단 수긍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이 농활 갔다 와서는 학교신문에 정말 농촌 살리기나 한 듯한 자부심에서 자기네들의 농활체험을 대서특필하는 데는 나는 그만 두 손 들고 말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대학생활 한 토막이 생각키웠다. 1980년대 초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중국은 이제 방금 개혁개방을 했다. 농촌에서는 농촌호도거리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다. 매번 모내기철이나 가을철이 되면 우리 반에는 근심걱정에 싸이는 친구들이 몇이 있었다. 농촌에 집이 있는 친구들인데 집에 일손이 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해 모내기 땐가 누가 선코를 뗏는지 ‘우리 농촌지원가자’고 선동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몇 패로 나누어 그 일손이 딸리는 동창들 집으로 욱 몰려갔다. 모심기는 웃음꽃 속에 끝냈다. 워낙 책 보는 일 외에는 별로 재미나는 일이 없는 우리의 대학생활에 이 모심기가 동아리노릇이나 한 셈이다. 그런데 학교에 와 우리는 큰 코 다쳤다. 대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조직의 아니꼬운 눈길에 우리는 두 어깨가 축 처지고 말았다.한국 대학가는 매년 봄철 신입생이 들어오는 새 학기가 되면 각종 동아리유세가 대단하다. 같은 취미, 흥취의 동아리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각 동아리들이 자기를 홍보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면서 유혹적인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배재대학교 국문과의 ‘문향’이라는 문학창작동아리의 새내기모집 프랑카트를 좀 보자. ‘너하고 하고 싶다. 문향에 오지 않는 것은 미친짓이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배재대학교 국문과 그리고 문향 출신의 이만교가 쓴 장편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패로디한 것이다. 자극적이고 눈이 펀쩍 뜨인다. 그래서 문학에 취미나 흥취가 있는 사람은 한번 가보게 되는 법. 한 사람이라도 더 모집하여 세를 확장하고 재미나고도 알찬 내용으로 활동을 조직하여 돋보이는 존재로 되려는 것이 한국 대학의 동아리. 나는 이 동아리들의 선을 몇 번 보았다. 무슨 풍물놀이패의 꽹과리, 비호응원단의 라~라~라~라 물결파도, 기타동아리들의 연주회, 손재간동아리의 수공예품전시회... 정말 수준급이고 대단하다. 공부도 공부겠지만 자기의 개성을 살리고 끼를 마음껏 발휘하는 것이 이 동아리다. 사실 대학문화는 이 자유로운 개성과 끼의 문화다. 전공하면 따분하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것도 개개인의 취미나 흥취, 끼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취미와 흥취, 개성적인 존재다. 이런 것이 존중을 받을 때 인간은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런 것을 추구한다. 대학교에서 동아리라면 사회에서는 동호회. 등산, 낚시, 수석, 골프, 테니스, 시조... 현대는 동호인 천지다. 그 만큼 취미생활, 개성적인 생활이 돋보인다. 사회가 그 만큼 발전했다는 말이 되겠다. 세속의 먼지를 훨훨 털어버리고 자연의 품에 마음껏 안기는 등산, 한 찰나의 미묘한 낚시대의 손떨림을 찾아 한나절 죽은 듯이 앉아 있을 수 있는 낚시, 오밀조밀한 기암괴석에서 인간의 정취를 느끼려는 수석... 한국의 많은 문학동인은 문학동호인들의 모임이다. 그들이 꾸리는 문학동인지는 서로의 작품을 교류하며 감상한다. 그리고 이런 문학지를 통하여 문학기량을 키우고 실제로 많이 등단하고 있다. 그리고 무슨 아침포럼이요, 주말포럼이요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중요한 이슈나 시사거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아침이나 주말에 모여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의견이나 관점을 교류하는 동호인 모임이 아닌가. 사회참여적인 시민단체(NGO)와 자아도취, 자아개발의 동호회가 평형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현대사회의 정상이다. 동아리, 동호회와 같은 선상에서 현대사회의 다른 한 현상은 매니아(mania)-다른 사람의 눈치, 생각 같은 것은 전혀 관계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고 도취하는 거. 컴퓨터게임매니아, 만화매니아, 골프매니아... 무슨 신드름이나 중독증하고는 다르다는 것이다. 신드름이나 증후군이 자아도취나 중독에 빠져 不知所以然이라면 매니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무조건 빠지면서도 之所以然을 아는 경지다. 예컨대 한국 박세리의 경우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골프채를 쥐면서 골프가 좋아 골프매니아가 되었단다. 그러면서 골프의 특성, 원리를 환히 꿰뚫으면서 달인, 프로가 되는 거,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내노라고 할 수 있는 제1인자, 바로 이런 경지란다. 매나아는 일종 괴짜문화다. 발명, 창조의 온상이라고 한다. 현대사회의 많은 발명창조는 이런 매니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한다. 그러므로 이런 매니아들의 양산, 현대사회의 푸른 신호등이다.현재 우리 조선족들의 생활도 이런 동아리, 동호회, 매니아문화현상을 많이 나타내고 있다. 우리 연변대학만 보아도 학생들 속에는 불사조, 하얀넋, 극놀음 등 많은 동아리들이 활약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백두산문인산악회’니 ‘어머니수필회’니 ‘수석협회’니 하여 많은 동호인 모임들이 있다. 우리 연변대학 조문학부 ‘탁상모’동호회만 해도 ‘탁구를 사랑하는 모임’이라 수시로 모여 탁구를 치니 심신건강에 좋고 동료들 지간에 우의를 나누고 시합 나 가 이겨서 좋다. 알 먹고 꽁 먹기. 우리의 생활이 그만큼 개성적이고 여유롭고 윤택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매니아가 부족한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지면서 발명창조로 이어지는 거, 우리에게는 아직 아쉽다. 천편일률적이나 획일적이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탈중심의 다양화, 다원가치 속에 매니아는 생성된다. 정상에서 벗어나는 이상, 괴짜, 지켜보고 보듬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2005. 7. 17
38    한국 대학교의 학생회 댓글:  조회:5140  추천:82  2005-07-01
한국 대학교의 학생회‘김XX 필승! 필승 김XX!’... 선거운동원들이 주술처럼 외워대는 슬로건. 똑 마치 월드컵 때 ‘필승 코리아!’를 신들린 것처럼 외쳐대는 모양. ‘안녕하세요? XX학과 XX학번 XX입니다. 좀 밀어주세요. 꼭 잘 할 겁니다! 공약 좀 봐...’, 학생들이 많이 나드는 길목 같은 데 서서 직접 전단을 발부하는 외로운 후보들. 남자 후보들이 좀 허스키한 목소리에 무게감과 카리스마스를 살리려 한다면, 여자 후보들은 ‘좀 쩍어주세요. 오돌찬 XX랍니다...’로 애교성에 똑똑함과 당당함을 살린다. 여하튼 학생회 회장 선거철이 되면 선거유세에 시껄벅적이는 한국 대학교 캠퍼스. 대통령 선거의 축소판. 회장에 출마하는 조건도 보면 별로 제한이 없는 것 같다. 우리처럼 사상 붉어야 되고 공부 잘 해야 되고 또 뭐 잘 해야 되고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이것이 이른바 민주선거란다. 일단 선거만 되면 그 기세나 파워는 대단하다. 학생회회장 사무실이 하나 떡 차례지고 사무책상 위에는 ‘제X대 XX대학교 총학생회 회장 XXX'라는 명찰대가 놓인다. 여기에 누구든지 사무책상 안쪽의 회전의자에 척 앉아 있으면 폼이 절로 잡힐 줄로 안다. 회장은 취임하는 즉시로 학생회 각 부처의 부장들을 임명한다. 제X대 학생회를 구성한다. 여기에 선생들의 눈치나 입김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완연히 대통령의 각 부서 장관들 임명하는 맞잡이다. 그리고는 자기네 나름대로의 모토를 내건다. 현재 내가 와 있는 배재대학교의 총학생회는 ‘제21대 실천총학생회’란다. 총학생회는 회장이 내세운 공약을 실현하기에 바쁘다. 공부는 좀 뒤전인 것 같다. 예컨대 통학버스를 증설하겠다고 했으면 뻔질나게 학교 총무과로 다니며 교섭한다. 말로 잘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농성을 부린다. 심할 때는 총장 사무실까지 점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답복을 받아 내거나 자기네 의지를 실현해내는 것이 훌륭한 회장이고 학생회로 꼽힌다. 철저히 학생들 입장에 서기, 당당하게 학생들 권익 보호하고 신장하기, 이것이 한국 대학교의 학생회의 철칙이다. 학생은 대학교의 주인, 우리 돈으로 학교가 영위된다. 그러니 우리 뭐 꿀릴 것 없다. 사립대학교일 수록 이런 경향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래서 학생회관을 지어 달라, 기숙사 증축하라, 방학 간에 도서관 문 열어라, 그리고 또... 여하튼 학생들이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최선을 다 하도록 학교당국에 촉구한다. 그래서 한국의 대학교는 학생회관을 비롯하여 학생편의봉사시설이 없는 것이 없다. 수시로 언제든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인터넷, 학생증 하나로 곳곳에 드나들 수 있고 모든 것이 결재 가능한 시스템-프린터, 복사... 그리고 은행, 슈퍼, 이발실 등 시시껄렁한 생활세말사에 이르기까지 應有盡有. 내가 현재 있는 배재대학교는 복도마다 더운물, 찬물 나오는 정수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에 룰로 된 화장지까지 비치해둔다. 그러니 학교 문을 나서지 않고도 충분히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다. 그래도 다른 학교와 자꾸 비기면서 또 뭐 뭐... 한다. 학생회에서 장애인전용주차장, 휠체어전용로, 장애인도서이용편리 등 장애인학생의 권익에 이르기까지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존경스럽다. 학생회에서는 축제요, 스포츠대회요, 무슨 경색이요 하며 1년 사시절 학생들의 전반 생활을 조직하기도 한다. 무슨 행사 때마다 학생처를 비롯한 관련 부서에 협찬을 요구한다. 학생회에서 자꾸 문제를 제기해오고 권익을 신장해 오니 학교당국은 골치 아파한다. 그래서 쩍 하면 총장이나 관련 인사들이 나서서 대화하거나 해명하기에 바쁘다. 특히 민감한 등록금인상 같은 문제는 사전에 학생회에 아무런 해명 없이 혹은 통보 없이 혹은 결정했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친다. ‘돈만 아는 대학’, ‘엄마, 아빠 등 휜다’, ‘못 참겠다, 등록금!’ 하며 학교는 삽시에 일촉즉발의 팽팽한 분위기에 잠긴다. 교수들도 은근히 학생회를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한국 대학생 개개인들 모두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안녕하세요!’, 그저 한 1년 별 볼일 없이 와 있는 나를 만나도 항상 밝은 얼굴에 인사들을 한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너도나도 ‘안녕하세요’다. 그러면 인사 받을 준비가 잘 안된 나는 좀 당황해난다. 나는 원래 중국 대학교에서 학생들의 인사를 적게 받다보니 체질적으로 인사받기에는 습관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우리 학과에 교환교수로 와 계시던 정통적인 선비스타일의 한국 교수 한분이 생각키운다. 이 교수는 항상 우리 학생들이 인사성이 없다고 불만이다. 그래서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이 복도 같은데서 스쳐 지나면서 인사를 하지 않을 때는 꼭 세워놓고 인사를 시키고는 놓아주었다. 여기에 비기면 한국 학생들이 얼마나 깜찍하고 사랑스러운가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학생들에게 매서운 데가 있다. 교수의 강의시간 언어구사가 상스러울 때는 언어폭력이요, 술자리일지라도 교수의 손발이 점잖지 못하고 너덜댈 때는 性騷擾요 하며 들고 일어난다. 여기에 학생회가 나서고 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교수의 운명도 ‘경각’에 달릴 때가 많다. 그러니 교수는 학생들, 학생회 앞에서는 항상 근엄하고 조심할지고. 내가 가르키는 클라스에 학생회 간부 두 명이 있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바쁘다는 핑계로 강의를 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말에 가장 낮은 점수 ‘D'를 주었다. 그리고는 은근히 이제 똥줄이 달아 나를 찾아오겠지 하고 깨고소해 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생회 간부들은 저렇게 낮은 점수를 맞고는 간부노릇 못하는데 하면서 다른 한국 학생들한테 물어보았다. 제들 저렇게 공부 못해서 어떻게... 그런데 홀가분한 그들의 대답에 그만 내가 아연해지고 말았다. 걔들은 원래 공부는 땡이고 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하여 활동하면서 행정력과 조직력을 키우는데 주목표가 있고 그것이 또한 학생들에게 플라스적인 긍정적인 이미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사회에 나가 정치활동을 하며 국회의원 내지 대통령직에도 출마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직업적인 시각으로 학생회간부를 평가하고 있다. 전면적으로 발전한 학생회간부를 요구하는 우리하고는 애초에 좀 다르다. 한국 대학교의 학생회는 자기네 학생들 자체의 이해득실에만 매인 학교 내의 區區小事에만 국한되어 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장 발랄하고 순수한 대학생의 양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 엄혹한 군사정권 때 대학정의, 대학성역의 차원에서 어용교수들을 쫓아내기도 했으며 민주화를 위하여 많은 피를 흐렸다. 얼마 전에 전남대학교에 학술회의 차 갔다가 우연히 학교 5.18민주항쟁전시관을 들르보게 되었다. 학생들의 민주항쟁을 조직하고 앞장서 나가는 학생회 간부들. 그리고 분신자살을 해 5.18민주항쟁의 불길을 지피는 학생회회장... 나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실로 한국 대학교의 학생회는 자기네 말대로 ‘싸우는 학생회’, ‘투쟁하는 학생회’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나는 우리의 대학교 학생회를 떠올려본다. 우리는 ‘싸움’, ‘투쟁’보다는 말을 잘 듣는 온순함에 더 가깝다. 학생들 말보다는 선생들 말을 잘 듣는 듯 하다. ‘학교 가 공부 잘 하고 선생님 말 잘 듣으’라는 소학교 때 엄마의 가르침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이제 斷乳, 정신적인 斷乳를 해야 한다. 자주독립적인 생각과 내밀성이 있어야 한다. 선생들 말보다는 학생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나는 우리 연변대학 정문 앞에만 서면 머리칼이 쭈빗 선다. 학교와 기숙사 사이를 가로지른 큰 길을 건너라고 오락가락하는 학생들, 여기에 택시를 비롯한 차량들이 큰 길을 따라 가로지르기에 바쁘다. 교통신호등이 있다고 하기는 하나 무질서와 난맥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님. 우리의 학생회 주석, 간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단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라도 우리와 생명과 관계되는 이 무질서와 난맥상을 없애야 한다. 육교든지, 지하도든지, 우리의 학생들이 안전하게 오락가락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달라고 학교지도부에 건의하고 요구하고 이것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는 항의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럴 때 진짜 학생들로부터 환영받는 학생회가 될 줄로 안다.2005. 6. 30
37    닐리리-태극기, 인공기, 애국가 댓글:  조회:4843  추천:57  2005-06-24
닐리리-태극기, 인공기, 애국가남북이 갈라진지도 어언 60년에 가까워 온다. 그간 반목, 질시의 질곡만 깊어간 것 같다. 사실 남북은 한 민족이고 한 형제였다. 태극기, 인공기,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공동 닐리리이다. 태극기, 인공기, 風馬牛不相及한 것 같다. 태극기는 음양팔괘의 태극도설에 기초한 우주자연의 원초적인 원리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반해 인공기는 혁명선열의 붉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깔에 현실적인 정치담론을 많이 담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둘도 따지고 보면 공히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사상이나 신앙을 바탕에 깔고 있다. 태극기의 주요색인 흰색과 인공기의 주요색인 붉은 색, 모두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숭앙하여 마지않는 색들이다. 우리는 태양숭배족이다. 아세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아침의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조선이라 했잖아. 우리는 우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는 우리 몸에 와 닿는 강렬한 태양빛을 좋아했어. 그래서 한 낮에 밝다 못해 흰색으로 안겨오는 태양빛을 우리는 태극기에 새긴 것이야. 백의민족이라는 것도 그 뿌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야.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뜨고 지는 작열하는 듯한 붉은 색을 인공기에 새긴 것이야. 태극기의 중간 태극무늬에서 陽을 나타내는 붉은 색깔도 마찬가지임. 동지팥죽을 쑤어서 먹기 전에 먼저 그것을 대문에 뿌렸다는 우리민속. 우리는 붉은 색깔의 辟邪하는 주술적인 힘을 믿은 거 같애. 태양숭배로부터 우리는 둥근 모양을 좋아한 거 같애.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신화모티프의 하나인 난생모티프는 이것에 대한 좋은 주석. 우리의 시조들은 태양을 닮은 알에서 태어난다. 주몽, 김알지, 박혁거세... 알, 둥근 모양은 원초적인 생명의 집. 어머니 자궁도 둥글단다. 그래서 태극기, 인공기는 가장 중간에 이 알을 모신 줄로 안다. 태극기는 그 알에 陰陽을 담았다. 陽이 하늘, 陰이 땅이라 할 때, 그리고 一陽一陰謂之道라 陰陽의 돌고 도는 이치로 이 우주만물이 이루어진다 할 때 태극기의 알은 정말 우주 자체의 상징체다. 인공기의 둥근 알 모양에는 별을 담았다. 별도 우주자연의 원초적 심상의 하나다. 별은 우리 인간에게 방향감각을 주고 희망의 상징체임에 다름 아니다. 북두칠성은 전형적인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인공기의 별도 일단은 이 원초적 심상에서부터 출발한다. 태양, 별은 하늘의 기본 심상들이다. 태양, 별에 대한 숭앙은 전반 하늘로까지 확장된 줄로 안다. 우리 「단군신화」의 기본 모티프의 하나가 바로 천강형이다. 우리 조상의 뿌리는 바로 하늘에 닿아 있다. 창천아...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는 억울할 때면 하늘을 부른다. 하늘은 정의와 진리의 화신으로 우리한테 군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푸른 하늘’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줄로 안다. 우리는 생명의 녹색도 푸른색이라고 하지 않는가? 태극기의 중간 陰을 나타내는 태극무늬의 푸른 색, 인공기 아래위 테의 푸른 색은 바로 드높은 기상의 하늘의 색, 생명의 색이다. 태극기와 인공기는 태양의 기, 하늘의 기로 민족의 기본 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닮은꼴이 많다. 통일KOREA의 국기는 여기서 출발할 수 있다. 나는 남과 북의 國歌를 자주 떠올려본다. 남과 북에서는 중국에서 ‘奏國歌’하 듯이 國歌라 하지 않고 다들 「애국가」라 칭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반만년 오랜 력사에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몸과 마음 다 바쳐 이 조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길이 받드세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근로의 정신은 깃들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진리로 뭉쳐진 억센 뜻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온 세계 앞서 나가리 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인민의 뜻으로 선 날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한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길이 빛내세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남의 「애국가」는 4절, 북의 「애국가」는 2절로 되었으나 사실 편폭 상 거의 비슷하다. 남의 「애국가」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형식으로 되었고 북의 「애국가」는 남의 「애국가」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 다 바쳐 이 조선/길이 받드세’와 ‘한 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길이 빛내세’가 후렴구 맞잡이로 쓰이면서 사실 후렴구 형식으로 된 것이나 다름없다. 시적인 심상에 있어서 ‘백두산’과 ‘백두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과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길이 보전하세’와 ‘길이 받드세’, ‘길이 빛내세’ 등 전적으로 같다. 시적 경지전개에 있어 남의 「애국가」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고려가요」에서와 같은 전통적인 우리 민족의 마조히즘적인 정서로 영원에 대한 기원과 더불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로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토로하고 있다면, 북의 「애국가」는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은금에 자원도 가득한/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이라는 지리적 특성, ‘반만년 오랜 력사에/철갑을 두른 듯/찬란한 문화로 자라난/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으로 역사문화적인 위대함으로 민족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남의 「애국가」 2, 3절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에서는 ‘불변함’과 ‘일편단심’의 ‘우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면, 북의 「애국가」 2절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근로의 정신은 깃들어/진리로 뭉쳐진 억센 뜻’에서도 역시 우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다음 남의 「애국가」가 제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로 애국의 뜻을 직설했다면, 북의 「애국가」는 제2절 ‘온 세계 앞서 나가리/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인민의 뜻으로 선 날’로 애국의 뜻을 고양시키고 있다. 보다시피 시적 경지도 전적으로 같이 흐르고 있다. 남북의 「애국가」가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시적 정서에 있어서 남의 「애국가」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마조히즘적인 내향적 경향,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의 제3자 의존적인 뉴앙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등이 일종 悲願, 여기에 반복적인 후렴구가 조응되면서 일종 悲願의 색채가 진한 반면, 북의 「애국가」는 ‘온 세계 앞서 나가리/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인민의 뜻으로 선 날’ 등 일종 사디히즘적인 외향적 경향이 ‘몸과 마음 다 바쳐 이 조선/길이 받드세’, ‘한 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길이 빛내세’와 조응되면서 喜願의 색채가 진하다. 그리고 시적 표현에 있어서 남의 「애국가」가 ‘동해물과 백두산’,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가을하늘’, ‘밝은 달’에서처럼 비, 흥의 메타포, 상징 등 우회적인 수법을 많이 구사했다면, 북의 「애국가」는 ‘아침’, ‘은금’, ‘내 조국’, ‘반만년’, ‘찬란한 문화’, ‘슬기론 인민’, ‘백두산 기상’, ‘근로의 정신’, ‘억센 뜻’, ‘인민의 뜻’ 등 주요 핵심어에 대한 서술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많이 흘렀다. 남북의 「애국가」, 다 멋지고 부르기 좋다. 장중하고 뜻 깊다. 悲願이든 喜願이든 민족의 소원을 잘 담았다. ‘삼천리’ 통일된 민족의 소원을! 남북통일의 「애국가」도 여기서부터 이루어질 줄로 안다.
36    편집광 횡설수설 댓글:  조회:4486  추천:60  2005-06-23
편집광 횡설수설니, 네 우리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편집광적인 증상이 다소나마 있는 것 같애. 그 무엇에 집착하는 거 말이야. 그 도가 문젠 거 같애. 사람마다 자기 흥취가 있잖아. 거기에 너무 빠져도 편집광이 되는 거야. 가령 요새 애들 공부 안하고 전자게임이나 컴퓨터에 빠져 무슨 중독, 중독 하는 거 말이다. 그리고 인간이 살다보면 직업을 가지고 되고 그 분야에서 배트랑이 되기 위해 또한 專하는 거야. 여기에 사회라는 것이 부채질하지. 직업미니 專門家니 운운하면서.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편집광이 발동되 제 정신이 아니야. 1980년대 초에 유명한 수학가 진경윤이 자나 깨나 수학계산을 하다보니 길을 가다가 전보대에 부딪치고 연애 같은 거는 할 줄도 몰랐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거야. 편집광은 대단한 힘으로 작용하여 인생을 성공시키는 한 비결인 것 같기도 해. 진경윤이 세계적인 수학가로 된 거, 바로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볼 때 편집광이 전적으로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거야.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였어. 나는 81학번이었지. 그때 우리 반에는 대학입학시험이 회복된 1977년부터 시험을 보아 들어온 친구들이 많았지. 그러니 몇 년 재수 했나 말이다. 77, 78, 79, 80, 꼭 대학 하나 졸업할 시간을 재수했다 말이야. 굳이 대학이냐, 인생에 대학뿐이냐, 이렇게 생각하면 허구픈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그래도 그 당시 대학엘랑 가야 사람구실하고 사람대접을 받으니 기를 쓸 수밖에 없지. 나는 그 친구들, 아니 그 형들이 대단해 보였어요. 지금 그 형들 얼마나 멋지게 사는데. 그 형들은 바로 편집광적인 집착으로 성공한 거야. 이렇게 놓고 볼 때 편집광의 공과의 갈림길은 그 도에 있는 거 같애. 자기를 잃지 않는 그 도. 수전노는 왜서 수전논가? 바로 身外之物인 돈에 집착하여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간주하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야. 요새에 참, 돈에 집착하는 거, 돈 밖에 안 보이는 거, 돈 때문에 살인나고 죽자살자 하는 거, 다 도가 지나친 편집광적인 증상 때문이야. 노신은 자기의 소설 「백광」이라는 데서 돈의 환영에 미쳐나다가 결국 몸숨까지 잃게 되는 변태적 인간을 잘 보여주었어. 도가 지나친 강박관념, 역시 편집광의 과의 하나야. 나는 꼭 무엇이 되어야 된다, 그런 거. 내 공무원 친구 놈 하나 있는데 짜석 국장 자린지 무슨 자린지를 競選 나갔다가 떨어진 거야. 그러니 정말 垂頭喪氣가 되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한 상을 하고 다니지. 이번에는 꼭 내가 되었어야 하는데 내가... 하면서 말이네. 그리고 밤에 자꾸 국장 자리에 앉아 있는 꿈을 꾸고 낮에 자기가 국장 승용차를 타고 막 달리는 환영에 잠긴데. 이 정도면 정신병 일보직전이야. 정신병이라는 것이 따로 있냐. 현실감각을 잃어버리면 가는 거지. 편집광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 집착하던 바가 현실로 다가 올 때 쇼크도 큰 거 같애. 노신의 유명한 「범진이 과거에 급제하다」, 알지? 범진이 재수, 재수, 재수에 과거에 급제하는 순간 ‘범진이 과거에 급제하다’로 미쳐나지 않는가? 도적놈 눈에는 경찰 밖에 안 보이고 개 눈에는 몽둥이 밖에 안 보인다는 거, 이것은 이들이 자기의 ‘적수’에 대해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내 말로 하면 도가 지나친 편집광적인 요주의 때문이야. 두말할 것 없이 병적인 편집광은 떨어버려야 해. 다시 말해 이성을 잃는 도가 지나친 편집광. 그래 이 세상에 꼭 내가 된다는 법, 이번에 꼭 내가 되어야 한다는 법, 어디 있지? 세상은 요지경, 복잡한 거야. 자기 뜻대로 안되는 거 너무 많아. 이걸 알아야 되. 그리고 내가 집착하는 바를 우습게 볼 줄 알아야 되. 편집광자들은 대개 자기가 집착하는 바를 인생의 전부인양 착각해.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 미쳐나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제정신이 아니라 말이야. 나는 그 국장되겠다고 지랄발광하는 친구보고 말했어. 임마, 그 국장 자리 무언되 말이야... 정 하고 싶으면 우리 집에 와서 해라! 나는 안 하도 잘 살자나. 편집광은 외고집이야. 수전노 좀 봐.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자린고비가 수전노와 다른 점, 바로 그 외고집을 떨쳐버린 데 있다. 자린고비도 수전노처럼 아껴 먹고 아껴 쓰며 돈을 모으는데 집착한다. 그러나 자린고비는 성스러운 일에 목돈을 척 내놓는 멋진 데가 있다. 돈을 떨쳐버리는 데가 있다. 한평생 소학교 문 앞에서 아이스크림 장사해서 아글타글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척 내놓는 할머니, 숙연히 머리 숙여진다. 편집광은 집착, 꽁한 것, 어디에 매이는 것. 나는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모든 고민,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한다. 그래서 집착을 떨쳐버리라 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넓나니, 여유작작 그 자체!2005. 6. 23
35    결벽증 댓글:  조회:5375  추천:54  2005-06-21
결벽증사람이 동물하고 무엇이 다른가 하면 깨끗한 거. 사람이 깨끗하다 보니깐 병도 적게 걸리고 오래 살게 된다. 그런데 너무 깨끗한 것을 따지다보면 그것은 병적인 결벽증으로 나타난다. 내가 어렸을 때 먼 친척 벌 되는 할머니 한분 바로 이런 결벽증에 걸렸다. 할머니 일과는 눈만 뜨면 손 씻기. 빠드덕 빠드덕 소리가 날 정도로 손을 비벼댄다. 너무 손을 막 비벼대어 손에 껍질이 벗겨질 정도. 옆에서 보기에 참 안쓰러웠다. 노인성 치매가 결벽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강간, 치사한 사회악. 그 악성 후유증의 하나가 결벽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성을 그렇게 聖스럽고 깨끗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렇게 치사하고 더러운 것일진대 그것은 談虎變色의 몸서리치는 악몽. 성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 이것이 相反相成의 성 결벽증으로 나타난다. 이제 이것이 심할 때는 성냉담증으로 나타나며 결혼 장애가 혼다. 우리 일반사람들의 정상적인 생활에서도 결벽증에 가까운 ‘증상’은 쉽게 눈에 띈다. 다른 사람 얘기는 그만두고 우리 집사람만 놓고 보자. 우리 집사람도 눈만 뜨면 집안 털어내고 닦기. 아이도 없는 집에 무엇이 털어내고 닦을게 그리 많다고. 그리고는 세탁하기. 우리 집 옷은 씻어서 다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항상 핀잔을 준다. 박사한다는 사람이 무슨 시간이 있어 그 지랄인가고. 결벽증 ‘증상’이 있는 사람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은 다 더러워 보이는 법. 그래서 공공장소를 싫어한다. 聚餐하는 식당, 여러 사람이 엇갈아드는 여관 내지 호텔 같은 잠자리도 질색. 식당밥은 메스껍고 여관, 호텔 이불은 데데하고 이런 식. 이런데 부딪치면 괜히 신경이 예민해나고 경계심까지 발동됨. 그래서 괜히 닦고 씻고 하기. 사실 이런 생리적인 결벽증은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주로 자기만의 문제이지 남한테 그리 폐를 주지 않는다. 성결벽증이면 결혼 안하면 될 거고 털고 닦고 씻기 좋아하면 털고 닦고 씻으면 되고 식당이나 여관, 호텔이 싫으면 가지 않으면 그 뿐이다.그러니 문제는 이제 정신적인 결벽증이 문제다. 문화대혁명시기 좌익소아병-뛸 데 없는 정신적인 결벽증. 밥 먹고 할일 없으니깐 누가 연애를 하나, 누가 바람을 쓰나 눈이 화잔등만 해가지고 돌아다니기-우리의 자화상. 그러다가 누가 바람이라도 쓰는 걸 붙잡으면 ‘狗破鞋’라 하여 정말 두 신짝을 목덜미에 걸고 조리돌림시키기. 남의 사생활까지 사사건건 신경 쓰고 문제화하기-좌익소아병적인 결벽증. 우리는 이런데 너무 많이 시달림을 받아 왔다. 그래서 개혁개방 후「사랑의 사각지대(被愛情遺忘的角落)」란 영화를 보고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공감했던가. 우리의 교육에도 결벽증적인 증상이 많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문화대혁명시기 우리 교육의 흥분점은 ‘붉은 사상’을 키우는데 있다. ‘紅孩子’ 키우기는 전형적인 한 보기. ‘紅’에 감염된 결벽증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결벽증은 ‘紅’의 ‘괴짜’들을 왕창세일한다. 따라 배우기 효과를 노려. 뢰봉, 유호란, 황계광, 왕수, 장철생, 그리고 두 구씨-구양수, 구소운,... 주어 대기에도 바쁜 그 거창한 이름들. 물론 이 속에는 쭉정이들도 있고. 여하튼 우리는 ‘紅’의 ‘괴짜’들을 따라 배우기에 바빳다. 제 장신 없이. 그래서 우리는 ‘紅孩子’가 되었고 자기도 모르게 사상은 ‘빨가’ 있었다. 우리는 빨간 결벽증에 걸렸다. 유심무의「담임선생(班主任)」에서 고 빨간 여자아이, 진짜 혁명소설인 장편소설『쇠파리』의 연애장면만 보아도 낯이 새빨가지면서 황색소설 운운하며 쫙쫙 찢어제끼려 하는 사이비 혁명의 빨간 결벽증, 무섭다. 변태다. 그래서 노신이 중국 현대사에서 ‘아이들을 구하라!’가 웨친 이래 중국 당대사에서 유심무가 다시 ‘아이들을 구하라!’고 웨친다. 그럼 지금 어떤가? 우리는 다른 한 극단에 와 있다. ‘공부만 잘 해라!’-‘專’.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專’의 결벽증에 걸려 있다. ‘專’이 장땅이다. ‘專’으로 모든 것을 가름한다. 공부 잘 못 한다, 반에서 몇 등이야, 2등. 왜 1등 못해? 이 머저리야! 빨리 공부해, 빨리 빨리... 과외 과외... 우리는 아이들을 공부‘專’으로만 내몬다. 우익소아병? 그들은 유희도 놀아야 하고 TV도 보아야 하고 스타족도 되어야 하건만... 그래서 애들은 피곤해하고 학교가 무섭고 어른들이 무섭다. 극단은 결벽증의 전형적인 표현형태. 중국 당대교육사에 있어서 ‘紅’ 혹은 ‘專’으로의 극단, 좌익 혹은 우익 소아병의 극단적인 결벽증임에 다름 아니다. ‘又紅又專’, 영원히 우리의 교육방침이다. 문화대혁명시기 그 극좌적이고 실속없는 거품만 빼면 ‘又紅又專’은 극단적인 교육결벽증 치료제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지금도 법치, 법치하고 웨친다. 인간이 천사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악마적인 존재이기도 한다고 할 때 법은 영원히 필요하고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은 법만으로 못 산다, 법대로만 못 산다 하는 사실. 법만으로, 법대로만 한다는 자본주의문명이 일찍 꽃핀 프랑스, 법치의 나라. 그런데 그것은 ‘비참한 세계’였다. 19세기 낭만주의 대문호이며 인간을 한품에 안는 인도주의자 빅또르.유고의 장편소설『비참한 세계』를 보라. 어린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도 허기져 빵 한 조각을 훔쳐 먹는다. 무자비한 법은 그를 10 몇년의 도형에 떨군다. 이제 그에게 남는 것은 악에 바친 사회에 대한 보복뿐이다. 그는 감옥을 탈출해서 선의로 대하는 신부의 집에서 은촛대를 훔치고 魔의 경찰관하고는 惡魔의 처절한 대결을 벌인다. 피는 피를 부르고 악은 악을 부르는 형국.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주고 포옹해주는 신부 앞에서 그의 영혼은 감화되고 승화된다. 그래서 그는 착한 장발장으로 재생한다. 법이 아니라 종교적 고상한 영혼이 그를 재생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착한 영혼은 魔의 경찰관을 감화시킨다. 빅또르.유고가 말하고자 한 것은 법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사랑을 말했다. 결벽증에 감염된 법보다는 모든 것을 보돔고 감싸는 사랑을. 법보다 한 수 높은 사랑을. 미국, 아메리카드림을 꿈게 하는 선망의 땅. 그러나 나는 싫다. 된장국 좀 끓여 먹는다 해서 옆집 사람이 신고한다는 곳, 그래서 경찰이 출동한다는 곳. 뛸 데 없는 법치결벽증. 너무 삭막하다. 된장국 좋아하는 나는 싫다. 미국은 미국이야말로 법치가 가장 잘 된 법의 천국이라고 떠든다. 다른 사람들도 여기에 많이 부응한다. 법조목이 가장 세분화되고 법이 가장 발달했다고. 그런데 세계적으로 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도 미국. 쩍 하면 총기난사사건 터지는 미국. 법의 天羅之罔을 늘여놓고 걸리기만 하면 시시콜콜 법의 잣대로 들여대니 사람들 꼼짝달싹 못한다. 사람들 환장해난다. 그래서 정신병자 제일 많은 나라가 미국. 그런데 미국은 똑똑하다. 법치결벽증에 걸린 자기 주제를 안다. 그래서 각종 사회복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종교단체까지 동원하여 사랑캠페인을 벌리며 사랑을 베푼다. 인권, 인권, 기본 인권하며 인권을 가장 많이 외우는 것도 미국이 아닌가. 타국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자국민에 대해서는 이런 인권이 그래도 잘 보호되고 행해지는 나라가 미국이다. 범죄인에 이르기까지 인권을 들먹이며 어쩌고 저쩌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미국은 미국 내 범죄인에 한해서도 인권을 충분히 존중하고 가장 넓은 인도주의를 베푸는 줄로 안다. 물론 이 모든 것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그것은 이미 법의 결벽증을 떠난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치다.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에도 스팸메일이 얼마나 날아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결벽증에 많이 놀아나는 사람들은 스팸메일을 반갑지 않은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스팸메일 차단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스팸메일을 매우 반갑게 여긴다. 나도 언제부터인가는 메일중독자인가봐. 하루에도 메일체크를 네댓 번 해야 마음이 놓이는 나라면 중증인가봐. 사실 나한테는 메일이 그리 오지 않는다.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한테 누가 자꾸 곱다고 메일 띄우겠어. 그러나 나한테는 분명 메일천사가 있다. 스팸메일천사! 그것은 대개 내게 무엇을 알리는 광고. 나는 이 광고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멋과 맛을 알고 오고 또 오는 광고와 넘쳐나는 광고들에 사람들이 얼마나 살기 어려우면 하나라도 더 팔아먹자고 그렇게 신경을 써는가 하며 측은해나기도 하다가도 그래도 나는 행복해! 하며 눈을 사르르 감기도 한다. 요새는 그 황색, 아니 색깔 스팸메일에 도취되어 있는 나다. 주제요, 형상화요, 이미지요하는 따분한 것들을 주어된 책들을 보다가 재미없으면 나는 색깔들을 본다. 그림에 떡이라고? 요새 '僧房’ 생활을 하는 내게는 그 그림에 떡이라도 얼마나 좋은지... 침이 질질 흐른다. 나는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에 즐기며 논다. 워낙 깔끔하지 못하고 결벽증하고는 거리가 먼 나다. 그래서 나는 그만큼 인생을 즐긴다. 아~ 디디하고 태태한 나여! 不干不淨吃了沒病!야, 아자아자-멋 있다~맛 있다.2005. 6. 21
34    소비자본주의와 절약사회주의 댓글:  조회:4583  추천:51  2005-06-15
소비자본주의와 절약사회주의나는 자본주의하면 뭐니 뭐니 해도 소비제일주의라 생각한다. 그래서 소비자본주의라 이름 붙여본다. 돈 잘 써는 놈이 장땅이고 멋지고 미덕. 그러니 수단방법을 가르지 않고 기를 쓰고 돈 벌기. 그래서는 돈을 잘 쓰기. 돈 못 벌고 돈 잘 벌지 못하고 돈 잘 안 쓰는 놈은 기죽고 초라하기. 소비자본주의는 소비유혹의 천국이다. 鳥爲食而死, 人爲財而死가 그대로 들어맞는 세상. 인간세상의 수많은 눈물, 비극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소비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쾌거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봉건주의, ‘자업자득’의 자연경제. 내 한 손으로 이것저것 갑자르기. 그러니 한정된 제품에 내 먹고 써기도 바쁜 신세. 그러나 자본주의는 기계로 나름대로 찍어내기. 요즘은 카피해내기. 기계, 카피문명의 대량생산. 여기에 무계획적으로 경쟁적으로 너도나도 찍어내고 카피하기. 그러니 남아도는 물품. 하나라도 팔아먹어야 산다. 곳곳에 일떠서는 상가, 쇼핑몰. 이에 맞장구를 쳐 과소비가 조장된다. 소비가 마치 미덕인 것처럼. 소비를 해야 생산을 촉진시키고 생산을 촉진해야 소비를 발전시킨다는 그럴듯한 경제변증법을 내걸고. 여기에 內需니 外需요 하는 것들이 가세하여. 절대적인 소비, 절대적인 생산이 미덕이 될 수 없다.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지는 소비와 생산이야말로 미덕이다. 이로부터 무자비한 자원개발로부터 오는 지구의 생태평형파괴도 막을 수 있고 공기오염도 방지할 수 있을 줄로 안다. 소비자본주의는 자본주의기계문명이 부정했던 봉건주의수공업작업의 생산품조차도 기꺼히 상품화한다. 그 제품에는 정성이 깃들고 개성이 깃들어 인간적 냄새가 난다고. 그러면서 은근히 찍어내고 카피해내는 자기네 물건은 천편일률적 멋대가리 없다고 자기 폄하도 스스럼없이 내비친다. 그러면서 기계로 짠 니트보다 손으로 짠 니트를 훨씬 비싸게 받는다. 그리고 요새는 대량물량보다는 개개인의 개성과 취향에 맞게 주문생산 쪽으로 나아가는 추세라 한다. 양복점에 가서 옷을 맞춰 입듯이 말이다. 깜찍이 일본이 이 면에서 선편을 잡아 한 몫 톡톡히 보고 있다 한다.명품, 새 패션 따라가기 바쁜 요즘 소비형태. 아직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펀펀한 물건들을 그대로 내다 버리기. 관광을 가도 쇼핑코스, 쇼핑하기는 필수에 필수. 이로부터 쇼핑을 하기 위해 쇼핑을 하는 쇼핑족, 쇼핑중독증이라는 신조어들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난단다. 1987년 미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10대 소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소일거리로 쇼핑을 꼽은 사람은 전체의 93%에 이르렀다. 절약은 주눅이 들고 베풀기는 내몰라라 하고. 소비자본주의의 쇼핑문화의 맹목성, 비도덕성이 드러난다. 여기에 시장경제의 공급과 수요의 원리-안 보이는 손에 의해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도태되는 것도 비일비재. 적자생존의 피비린내. 세우고 부스고 번복을 거듭하는 난장판. 소비자본주의의 맹목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소비자본주의는 절약사회주의로부터 한수 배우게 된다. 공동부유, 적어도 빈익빈, 부익부의 차이를 줄이는 분배정의 차원에서 사회주의이념의 힌트를 받는다. 그래서 자본주의 복지제도 및 조치가 확립된다. 그리고 계획경제, 적어도 자원의 효과적인 배분 및 불필요한 중복투자를 줄이기 위해 사회주의경제운영체제를 배운다. 한국 박정희 경제개발시기 1차5개년계획 등등은 독재개발로 운운되지만 사실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의 냄새가 짙다. 소비자본주의는 강유력하면서도 세련된 판매전략을 세운다. 여기에 광고가 그 첨병이 된다. 소비를 자극하고 부추기기 위하여 봄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 광고다. TV, 라디오, 신문, 잡지... 정말 광고천지다. 그리고 홍보물 다이어리, 카란다 같은 거는 무료 배포. 매일 퇴근하고 오면 문에 다닥다닥 붙은 전단지, 스티커 떼기에 바쁜 것도 요즘 세상의 한 진풍경. 참 귀찮다. 그런데 이것이 소비자를 위한다시고란다. 아이러니. 광고에 쏟아 붓는 돈이 상품생산가격보다 웃돌며 그것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역설도 난무하는 요즘 세상이 아닌가. 여기에 요새는 글자보다 이미지광고가 판치는 세상이라 광고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화한다. 당신을 위한 명품, 당신의 품위를 높여 줍니다. 그 달콤한 말과 허영을 기껏 자극하는 미사여구에 뽕 가지 않을 수 없다. 그 명품을 소비했을 때 아니 단지 소유하는 것만으로 신사숙녀가 되고 품위가 올라간 듯한 착각 속에 빠진다. 아, 나도 이젠... 그래서 최고급 양복을 사서는 팔소매에 유명매이커 브랜드도 떼지 않은 채 남보란 듯이 입고 다니는 촌놈들이 속출한다. 그리고 광고에 코웃음을 지어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광고를 때린 상품에 슬그머니 손이 가는 광고중독증의 세태가 아닌가. 그 다음 멋진 디자인에 멋진 포장하기. 쓰기에 편리하면 되는 물품에도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모양새, 겉모양 즉 디자인에 신경 쓰기. 상품의 내용미보다도 형식미가 더 돋보이는 세상. 그리고 별 볼일 없는 물건에다가도 요란한 포장을 하여 겉포장만 보고도 사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넘쳐나는 것이 포장쓰레기. 이런 포장쓰레기 같은 쓰레기남발을 막기 위하여 쓰레기종량제니 하여 쓰레기 버리는 데도 특정 쓰레기봉투를 소비하도록 한다. 이것은 소비자본주의의 멋진 아이디어. 소비자본주의는 손님이 왕이란다. 顧客이 기울어 볼 客이 아니라 높이 모실 高客이란다. 철저한 서비스정신을 고취한다. 손님을 하나라도 더 끌어야 산단다. 그래서 찾아오는 손님은 왕이지만 찾아주지 않는 손님은 개 무엇이라는 반대급부도 성립된다. 나는 식당 같은 데 가서 마지막 음식값 계산 때 몇 호 테이불 계산 하면 제일 기분이 잡친다. 손님 왕이라는 기분이 싹 잡친다. 풍부한 나는 거세되고 단지 메마른 수자부호로만 남는 내가 아닌가. 나는 또 얼마 전에 은행에 갔다가 ‘웃음도 대출합니다’라는 서비스슬로건을 보고 묘한 감회에 젖었다. 그렇다. 소비자본주의는 웃음 뒤에 독소가 서려있다. 그 웃음에 반해 대출을 했다가 대출을 갚지 못 할 때 은행은 너한테 웃음이 아니라 무자비한 차압이 들어간다. 하루아침에 거지신세 떼놓은 당상. 돈 안내는 듯한 착각 속에 소비를 조장하는 카드 북북 긁어대다가 신용이고 뭐고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로 찍혀 오도가도 못 하는 한국의 많은 멀쩡한 거지들 바로 이 신세다. 문제는 이런 신용카드가 도저히 신용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 내지는 10대 연령층에까지 남발되는데 있다.소비자본주의의 판매전략 가운데 가장 판치는 것이 세일폭탄. 그야말로 세일폭탄의 무자비한 융단폭격에 정신이 아찔해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4계절에 따른 대형백화점들의 바겐세일, 몇%몇% 세일, 무슨 명절에 따른 바겐세일, 몇%몇%세일, 무슨 기념일에 따른 바겐세일, 몇%몇%세일... 그러다가 요새는 아예 대형할인마트들이 1년 사시절 떡 뻗치고 있다. 그리고 장사군 제 아비도 속인다 하건만 ‘눈물 젖은 왕창세일’이요, ‘피 말리는 창고정리’요, ‘무조건 골라잡아 얼마’요 시도 때도 없이 하는 일반가게들의 세일 식 판매세례에 그 식이 정상이라고 세일에 식상해하면서도 한번쯤은 발목이 잡히는 것이 인지상지. 그리고 요새 새로운 아이디어 및 최신기기를 동원한 판매방식-회원제 다단계판매, 체인점 및 TV홈쇼핑, 인터넷온라인판매, 통신판매, 방문판매... 그리고 도처에 들락날락하는 세일즈맨들. 유통마진을 줄인 이런 판매들이 잘 먹혀 들어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소비자본주의는 또 무슨 데이데이 하며 부산을 피운다. 이른바 바람잡이 판매전략이다. 위의 세일, 할인 판매도 이런 바람잡이 냄새가 다분히 풍긴다. 고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銅臭가 풍긴다. 나는 금년 초 한국에 와서 ‘장미꽃방’이라는 데서 문 앞에까지 와서 무료로 주는 책상용 ‘2005 FLOWER CALENDAR' 하나를 얻어가졌다.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문제는 매달 면을 넘길 때마다 거기에 빨간 색으로 유표하게 표시해놓은 무슨 특수한 ‘데이’들이다. 심심해서 좀 찬찬히 들여다보았더니 한국 국정명절이나 전통명절 말고도 빨간 색깔로 표시된 날이 대단히 많았는데 매달 14일에는 꼭 빨간 색깔로 표시되어 있고 설명까지 곁들었다. 재미있는 내용들이라 여기에 적어본다. 1월 14일 다이어리데이-사랑하는 연인에게 예쁜 수첩과 꽃바구니를 선물하는 날,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여성이 남성에게 초코렛 꽃바구니를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 3월 14일 화이트데이-남성이 여성에게 사탕 꽃바구니를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 4월 14일 블랙데이-연인이 없는 사람끼리 자장면을 먹으며 위로의 꽃다발을 주고 받는 날, 5월 14일 로즈데이-친구, 연인끼리 장미를 선물하며 우정과 사랑을 표현하는 날(백장미-우정, 빨간장미-사랑), 6월 14일 키스데이-연인들 사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꽃바구니를 주고 정열적인 키스를 하는 날, 7월 14일 실버데이-은반지를 주고 받으며 꽃과 함께 장래를 약속하는 날, 8월 14일 뮤직데이-사랑의 하모니 CD를 꽃과 함께 선물하는 날, 9월 14일 포토데이-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사랑의 꽃다발을 안고 추억의 사진을 찍는 날, 10월 14일 와인데이-와인 꽃바구니를 선물하며 와인잔을 기울이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날, 11월 14일 무비데이-꽃을 들고서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꼭 잡고 야한 영화를 보는 날, 12월 14일 머니데이-사랑하는 연인을 위하여 꽃과 함께 아낌없이 베푸는 날. 무슨 데이, 무슨 데이... 참 많기도 하쟈. 금시초문인 것도 많쟈. 그런데 분명 알 수 있는 것은 이 많은 데이가 다 연인들 명절이라네. 이런 명절들이 죽음의 ‘블랙13’일을 넘긴 14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유럽에서 생겨난 것이 분명하네. 그리고 CD요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요즘 생겨난 것도 분명하네. 그런데 이 명절에는 연인들 사이 꼭 꽃을 주고받게 되었다는 거네. 14일 날짜 옆에 붉은 꽃술에 푸른 꽃잎을 돋친 꽃모양 표시만 보아도 알만하네. 꽃가게 상술이 엿보이네. 사실 이 카란다에는 꽃하고 관계되는 날은 다 빨간 색깔로 표시하고 설명해 놓았다. ‘(음)7월7일 칠월칠석-사랑하는 이에게 77송이 장미꽃을 선물하는 날’, ‘11월 11일 빼빼로데이-사랑하는 연인끼리 꽃을 들고 빼빼로를 나눠먹는 날.’하는 식으로 말이네. 여하튼 꽃을 좀 많이 사달라하는 말인데 나는 정말 이 한국에 연인도 없고 무엇도 없어 꽃을 살 건덕지가 없었다. 그래서 꽃가게 주인한테는 얼마나 미안하고 민망스러운지. 우리는 이런 명절 픽 하고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연인절은 어느새 우리를 찾아와 몸에 감긴다. 연길의 2월 14일 풍경을 좀 봐라. 오빠~ 초코렛, 오냐~ 장미 한송이. 여기에 요새는 3월 14일까지 가세한다. 2월 14일, 3월 14일-연길 초코렛 값이 뛰는 줄은 잘 모르겠지만 장미 한 송이 값은 분명 뛴다. 이런 연인절에 장미아가씨뿐만 아니라 장미아주머니에 장미할머니, 장미아저씨까지 가세하는 연길의 진풍경이요. 정말 이런 날에는 돈을 안 쓸 수 없다. 우리는 연인인데, 우리는 애인인데 혹은 연인이라는 게, 애인이라는 게... 초코렛이 아까울손가. 장미 한 송이가 아까울손가. 금반지라도 사주겠는데. 아이 무서워. 나는 이런 날만 되면 저 머나먼 촌구석으로 피해 달아나고 만다. 오늘은 키스데이-정열적인 키스를 위해서도 꽃바구니 장사가 잘 되겠구나. 소비자본주의의 데이데이 함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이런 생각도 해본다. 소비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흐를 때 의사들은 사람들이 병이 나을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병이 나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장의사는 사람이 살기보다는 죽기를 바란다고. 채플린은 일찍「도시의 빛」이라는 영화에서 유리맞춤쟁이가 아이를 시켜 남의 집 유리를 깨게 하고 유리를 맞춰주고는 돈을 버는 형태를 통해 이런 소비자본주의를 풍자하고 꼬집었다. 절약사회주의는 소비자본주의하고 딱 반대. 사회주의모태는 자본주의. 맑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주체인 자본가들이 많은 무산계급들을 양산하여 자기의 무덤을 파게 한다고. 이것이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법칙. 그런데 역사할아버지도 술 한 잔 하면 陰差陽錯하는가, 사회주의는 식민지, 반식민지, 봉건, 반봉건사회라는 엉뚱한 胎에서 생겨났음. 怪胎지. 역사발전의 한 단계를 뛰어넘은 早産兒이야. 수공업이 주요 작업형태인 식민지, 반식민지, 봉건, 반봉건사회는 물산이 빈약하여 상품으로 화할 소지도 그리 없음. 무산계급이 주체인 사회주의는 바로 이런 유산을 고스란히 넘겨받았음. 사회주의는 가난해. 그래서 낭비는 최대의 죄악이라는 것이 기본 구호의 하나. 사치성 소비는 부패한 자본주의생활방식의 하나로 타매. 나는 소학교 때 무순에 있는 뢰봉전람관에 가서 깁고 또 기워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뢰봉의 양발을 보고 얼마나 가슴 설레이며 흥분했는지 모른다. 나의 자린고비정신은 아마도 이때부터 형성된 거 같애. 그러나 좌익소아병적인 소비거부는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 반대급부로 물신숭배는 더 팽팽해짐. 그래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補課할 필요가 나진거야. 사회주의공업화, 그리고 요 근간에 사회주의나라들에서 너도나도 하는 개혁개방-자본주의시장경제도입은 바로 이런 거야. 시장경제는 優勝劣敗야. 질 나쁘고 비싼 제품 그대로 도태되는 거야. 소비의 질은 시장경제로부터 올라가는 거야.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시장경제 덕택에 멋진 소비를 하고 있잖아. 그러나 그 속에는 소비자본주의의 함정도 있는 거야. 참 요새는 포스모더니즘시대라 흑백논리로 소비자본주의 좋다, 절약사회주의 좋다 말하기 힘들다. 짬뽕에 같이 가는 세상이니깐. 그러나 아직 세상에 못사는 사람, 소비자본주의에 열 받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래도 절약사회주의쪽에 마음이 더 간다. 아껴 먹고 아껴 써 세계 못사는 사람들을 지원할 신성한 사명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서「따라 배우자 뢰봉을」계속 부르도록 했다. ‘따라 배우자 뢰봉을 양발 뚜겁게 깁어신고...’2005. 6. 14
33    장애인 댓글:  조회:4820  추천:67  2005-05-30
장애인내가 한국에서 중국말을 가르치다가 장애인을 殘疾人이라고 한다고 하니 단방에 학생들 속에 질의가 들어왔다. 교수님, 너무 하지 않나요? 장애인을 어떻게 殘疾人이라고 불러요? 나는 처음에 어안이 벙벙해 났다. 장애인 殘疾人 아니고 뭐야... 그러나 다음 순간 이해가 되었다. 머리가 좋은 내가 아니더냐! 한국어로는 殘疾人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동의어반복, 시간낭비? 천만에! 두 지칭은 뉴앙스가 전혀 다르다. 변소와 화장실의 뉴앙스차이 같은 거. 殘疾人. 주체에게 결과적으로 차례진 殘하고 疾한 쪽으로 비중이 실리면서 불구, 병신이라는 뉴앙스가 확 풍긴다. 그러나 장애인, 장애를 당한 혹은 받는 혹은 느끼는 ‘인’, 그러니 객체의 원인 쪽으로 비중이 실리면서 불구, 병신이라는 뉴앙스가 없다. 殘疾人과 장애인의 뉴앙스의 차이, 중국과 한국의 ‘불구자’들의 현주소다. 한국은 장애인들의 천국이다. 장애인들이 활개치며 다닌다. 정상인들보다 더. 인행도에는 언녕 맹인전용인 점자형 혹은 작대기형 볼록도가 깔려있다. 그리고 아파트, 공공시설에 휠체어전용장치가 다 되어 있다. 주차장이나 화장실도 늘직하게 장애인전용이 다 되어 있다. 휠체어 탄 모양새를 그려 놓아 전용임을 표시한다. 화장실의 경우는 난간을 비롯 전문 편리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지하철의 경우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입구에서 버튼 하나 누르면 도움을 주는 전문인원이 출동할 뿐만 아니라 휠체어승강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장애인전용승강장 및 전용좌석이 있어 지하철이용도 별 불편함이 없다. 이로써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된다. 그리고 사회적 평등이 보장된다.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평등하다. 교육받을 권한 하나만 놓고 보자. 한국에서는 장애인들도 정상인이 다니는 학교를 자기의 소원대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한국의 각 대학교도 보면 장애인수용시설이 다 되어 있다. 대학 캠퍼스 내에서 이동의 자유, 편의시설이 충분히 보장된다. 그래서 그런지 장애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인다. 내가 교환교수로 있는 자그마한 지방대학교인 배재대학교의 경우만 놓고 보아도 도서관에 맹인전용 점자 도서, 컴퓨터, 프린트가 다 비치되어 있는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저 교육을 중시하는 나라가 다르긴 다르구나 했다. 어떤 대학교에서 신입생모집에 자기 학교는 모든 장애인시설이 갖추어졌으니 장애인들도 환영입니다하고 광고를 냈단다. 그래서 어떤 지체장애인이 입학해 왔는데 도서관서가 위 부분의 책을 빌리기에 불편한지라 법원에 기소를 했단다. 학교가 허위광고를 했다고. 법원에서 이 장애대학생의 편을 들었단다. 그래서 그 장애대학생은 승소했단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선생, 교수 노릇도 곧잘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대학교수 가운데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고 한쪽 손이 비틀어진 사람도 있다. 배재대학교 국문과의 모모 교수는 바로 한쪽 손이 비틀어진 사람인데 강의만 잘 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중국에서는 장애인들의 대학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1980년대 말까지 줄곧 그랬다. 특수한 케이스로 입학하는 경우는 간혹 있겠지만. 그리고 장애인이 선생 노릇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노릇이다. 지금은 많이들 좋아졌겠지. 배우고 가르칠 권리, 인간의 기본권리의 하나. 나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장애인에 많은데 놀랐다. 한국은 왜 장애인이 많지? 자그마한 땅덩어리에 말이다. 사람도 많지 않은데...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다니기 편리하니 그 만큼 나다니기 마련이고 장애인들도 할 일이 있으니 나다니기 마련이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당당한데가 있다. 장애인이라 해서 주넉드는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집이나 장애인복지센터 같은데 죽 처져 앉아 주는 밥이나 얻어먹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자기 밥벌이를 한다. 한국의 길거리를 가다보면 엉치 부분에서부터 두 다리에 걸쳐 고무‘바지’를 입은 하지 불구나 마비자가 가슴부분에 밀착된 바퀴차를 간신이 밀며 움직여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 머리맡에는 돈구럭이 달리고 녹음기를 탑재한 조그마한 다른 밀차가 있다. 그들은 분명 돈을 구걸한다. 그러나 누구보고 거저 달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노래를 못할망정 녹음기에 노래를 띄워놓는다. 그 노래는 대개 우리 모두의 영혼을 ‘구원’할 찬송가이다. 좋은 노래를 들었으니 주고 싶으면 좀 달라는 것이다. 합리적이다. 그리고 주는 쪽에서도 불쌍하고 가련한 그 무엇보다는 ‘들었으니깐’하는 명분이 선다. 한국의 지하철을 타도 마찬가지다. 쩍 하면 눈에 띄이는 광경은 한손에 지팽이를 들고 다른 손에 돈구럭을 든 맹인이 목에 건 소형녹음기를 틀어놓고 지하철 안을 걸어가는 것이다. 역시 같은 합리적인 이치로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리 중국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상에 동정심을 유발하여 거저 돈을 구걸하는 경우하고는 전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얼마 전에 어느 대학교에서 장애인동아리에서 휠체어댄스를 선보인다는데 두 눈이 번쩍 띄었다. 장애인이 노래하는 것은 많이 보았으되 춤, 그것도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춘다니 희한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사실 춤이야 별로다. 한국에서는 장애인들 할 수 있는 껏 농구, 축구 등 각종 스포츠대회도 진행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연변에 장애인가무단이 있어 참 인기가 있었다. 전국적인 공연에도 출연해 대상을 휩쓸었다. 지금은 왜 볼 수 없는지? 아쉽다. 한국에도 중국의 殘疾人協會와 같은 단체가 있다. 이들 단체는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해 당당하게 정부와 협상하기도 하고 요구하기도 하며 맞서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은 사회제도나 법적으로 장애인권익이 충분히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생활보장도 잘 되는 셈이다. 한국에는 벙어리들의 의사전달을 맡는 手話종사들도 상당히 있다. 정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육성한다. 그리고 여러 단체들에서 휠체어타기 등 장애인생활 체험을 통해 장애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각종 캠페인도 잘 벌인다. 장애인들이 일반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련한 동정이나 방조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육체적 인격적 自活을 추구한다. 사회나 정부 차원에서는 이런 自活을 위한 여건을 마련해달라는 것이다. 당당한 인격체로서의 자립, 존중을 그들은 추구해 나간다. 전반 사회적인 분위기도 장애인인격체로서의 존중이다. 그래서 장애인을 무능한 아이취급을 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도울 때도 무조건 돕는 것이 장땅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존을 살려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자원봉사자나 옆의 사람들이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장애인에 대한 호칭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병신’, 아니 이것은 우리 중국에서도 안 부른다. ‘불구자’, 殘疾人의 우리말 번역-절대 안 부른다. 장애인들의 아픈 데를 더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장 무난한 ‘장애인’인데 이것조차도 부르기 굉장히 민망스러워 한다. 특히 장애인이 자리에 있는 장소에서. 이렇게 장애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슴배인 여린 마음이야 말로 정말 우리가 본받아할 바다. 바로 여기에 한 사회의 여유로움, 문명의 척도가 나타난다. 저, 학교캠퍼스에서 장애인들과 일반대학생들이 한데 어울려 스스럼없이 환히 웃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다. 2005. 5.30
32    中餐과 西餐과 韓食 댓글:  조회:5130  추천:62  2005-05-26
中餐과 西餐과 韓食음식 먹는 식을 대개 중국식 中餐과 서양식 西餐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中餐은 일괄적으로 주문된 요리를 점입가경식으로 맛보는 형태이고 西餐은 개개인이 알아서 주문한 요리를 자기 나름대로 맛보는 형태이다. 그래서 中餐은 여러 사람이 먹는 몰개성적인 共食형태이고 西餐은 혼자서 먹는 개성적인 个食형태이다. 그래서 中餐이 두루두루 구미에 ‘맛’는 요리이라면 西餐은 비푸-소고기구이 하나만 놓고 보아도 분명히 하이(완숙), 미들(중간), 리틀(조금)하는 식으로 개개인의 구미에 맛는 요리이다. 그래서 中餐은 질탕하고 희희락락하고 西餐은 단촐하고 조용하다. 그리고 中餐이 色, 香, 味 두루두루 골고루 따진 요리라면 西餐은 정확히 칼로리, 비타민 등 과학성을 따진 요리다. 그래서 中餐은 이것저것 동시다발적으로 냠냠 맛으로 먹는 요리라면 西餐은 육류에 센드위치 그리고 후식에 디지트 하는 코스식에 營養食이다.中餐은 중국사람, 西餐은 서양사람이 선호한다. 동의어반복이라 두말하면 잔소리. 우리 연길에 中餐이 잘 먹혀들어가고 西餐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은 그 한 보기. 中餐과 西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어느 한쪽에 기울어져 편식만 하면 문제점 야기. 요즘 우리 애들 햄버거니 피자니 뭐요 하며 西餐에 편식하더니 다리는 휘청휘청하고 키만 비쩍 큰 ‘기형아’가 되고 있단다. 전통적으로 키는 작지만 단단한 우리 체구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체형뿐만 아니라 체질, 체력이 모두 문제된다는 것이다. 내가 괜히 위협적으로 허튼 소리 치는 것이 아니고 한국 모 건강단체에서 통계수치로 이 점을 피력하고 있다. 그래도 못 믿겠으면 날 찾아와. 그러니 中餐, 西餐 두루두루 다 먹기, 삶의 지혜다.그리고 中餐, 西餐의 내용물 떠나서 그 먹는 방식도 두루치기를 하면 더 없이 이상적이다. 특히 때와 장소에 맞게 中餐, 西餐의 적절한 구사는 삶의 지혜의 멋진 표출. 결혼, 회갑, 여하튼 우리는 많은 사람을 접대하는 잔치를 한다면 中餐이다. 많은 낭비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中餐은 분명 共食의 盲食점이 있다. 요새는 먹고 남은 음식을 싸 간다고는 하나 그것은 100보다 좀 낳은 50보에 지나지 않음. 이럴 때는 中餐의 대안으로 西餐을 한번 떠올려본다. 西餐은 个食의 明食적인 장점이 있다. 자기 식성에 맞는 음식을 자기 먹을 만큼 갖다 먹기-뷔페, 전형적인 西餐의 共食의 형태다. 그러나 그것은 中餐共食의 鋪張浪費가 없다. 사실 뷔페는 中餐보다 훨씬 많은 음식가지수를 마련한다. 그래서 个食의 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 그리고 공용 숱가락이나 젓가락으로 들어먹는 만큼 또한 더 없이 위생적이다. 그리고 매인당 얼마 얼마의 표준으로 결코 中餐보다 비싼 것은 아니다. 내가 시시콜콜 뷔페의 좋은 점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뷔페가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우리 연길에 한두 집 뷔페집이 서는가 싶더니 안쓰럽게도 곧바로 문을 닫고 만다. 그럼 문제는 어디에?뭐니 뭐니 해도 식생활습관문제로 보아야 하겠다. 사실 식생활을 포함한 인간의 생활습관문제는 합리성, 과학성을 떠나서 그리 쉽게 고치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 우리의 식생활습관은 어떤가? 우리는 共食-한가마밥솥 집착적이다. 콤플렉스에 가까운 편집광을 보이기도 한다. 한가마밥솥 먹었다 할 때 우리는 형제고 자매고 한 집식구가 아닌가 말이다. 한가마밥솥의 共食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되는 동질감을 느껴려 한다. 中餐식 團圓의 圓卓에 우리는 둘러 앉았다. 말 그대로 衆餐이다. 共食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는 말을 주고받는다. 대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덕담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친해진다. 여기에 이제 안주가 오르고 술병이 아구리를 열면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알딸딸하게 되며 우리는 하나로 녹아들고 만다. 우리는 이런 경지를 좋아한다. 이런 경지가 진짜 團圓의 경지니 正餐이라는 것이다. 뷔페는 개개인이 따로따로 놀아나니 散食라 별 볼일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中餐을 못 벗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中餐에 대해 미신에 가까운 맹목적인 숭배심을 가지고 있다. 요리는 그래도 중국요리하는 식... 독일집에서 일본마누라가 해주는 중국요리 먹으면서 운운의 잠꼬대 같은 근거를 확실하게 내비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 韓食은 아예 뒤 전에 가라 하는 식. 사실 음식과 趣味는 無可爭辯! 각 민족 나름대로의 일장일단이 있음. 사실 요즘 같은 다이어트음식에 한술 더 떠 웰빙食을 좇아가는 세월에 우리 전통음식은 더 없이 돋보인다. 暈食보다는 蔬食, 蔬食에서도 청정무공해의 산나물 선호... 콜레스트롤이 생기지 않는 콩류의 식물단백질을 중심으로 하는 韓食. 똥배가 불러나 고민인 현대인간들에게 있어서 韓食은 그야말로 보약맞잡이. 알딸딸하게 술을 많이 마셨다. 골치 아프다. 콩나물, 선지 해장국, 아니 해장국 말고 된장국만 훌훌 마셔도 속이 후련하게 시원하다. 이것이 바로 身土不二이라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그래도 우리 음식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는 그 옛날,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잔치를 할 때 우리 음식천지의 식단이 아련한 향수로 안겨온다. 우리 전통적인 식단은 이것저것 다 갖추는 영양가 넘쳐나는 ‘海陸空’ 산해진미식 中餐하고는 달리 신선로만 신선로, 설렁탕이면 설렁탕, 아구찜이면 아구찜하는 식으로 한 가지 주메뉴에 조금조금씩 갖가지로 올라오는 밑반찬이 따르는 안성맞춤식이다. 中餐의 共食-한가마밥솥 형태이되 그것은 한 가지 주메뉴를 공격하는 만큼 훨씬 경제적이다. 그러니 中餐의 낭비벽을 막을 수 있다. 다이어트食에 웰빙食에 身土不二食에 經濟食이라 나는 우리의 잔치에 韓食을 한번 초대해보고 싶다.2005.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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