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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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내려다보기 댓글:  조회:5747  추천:5  2012-11-07
인간은 동물에 비해 눈이 대단히 발달했다. 발달한만큼 많은 문제도 야기시킨다. 그럼 인간의 보기를 보도록 하자.  인간의 보기는 대인관계차원에서 대개 내려다보기(俯瞰), 우러러보기(仰看), 대등하게 보기(平视), 이 세가지로 나누어볼수 있겠다. 내려다보기―우월감을 가지고 아래로 내려다보기. 귀족이 하인을 안하무인 격으로 내려다보듯이. 우러러보기—부러움을 갖고 우로 올리다보기. 하인이 귀족을 흠모하여 우러러보듯이. 대등하게보기―평등의식을 가지고 서로 정답게 보기. 련인이 정답게 눈맞추기를 하듯이. 그럼 세가지 보기가운데서 어떤 보기가 가장 바람직한가? 두말할것도 없이 대등하게 보기. 이 보기는 내려다보기와 우러러보기의 문제점을 갈무리하고있다. 이를테면 귀족적인 내려다보기를 다운하고 하인적인 올리다보기를 업그레이드하여 평준화시켜 대등한 눈맞추기를 했기때문이다.  사실 이런 보기는 개인간의 사소한 문제만이 아니고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도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세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른바 근대화는 분명 서방이 우리 동양보다 앞서나갔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러 서방에서는 유럽중심주의가 형성되고 우리 동양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반면에 우리 동양은 서양에 부복요절하며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서방국가의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득의양양(趾高气扬)과 외국의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아첨하는것(崇洋媚外)이 한 보기가 되겠다. 모택동이 중국인민을 이끌고 3대 큰 산을 뒤엎고 새 중국을 건설한것은 우리 중국사람들을 기를 펴게(揚眉吐氣) 한 장거.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진영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충천하는 열의로 혁명, 혁명, 문화대혁명까지 갔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아침에 우리는 개혁개방을 하게 되였다. 세계로 눈을 돌려보니 우리는 초라하게도 빈털터리가 되여있었다. 제3세계 대 제1세계, 후진국 대 선진국 콤플렉스가 우리를 엄습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외국의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아첨하고 우러러보기를 하게 되였다. 일반적인 외국인을 보아도 그렇게 돈이 있어보이고 그 일거일동조차도 멋져보였다. 요새 젊은 애들이 노랑머리를 하고 햄버거를 먹으며 “양놈”이 못되여 안달을 하는것도 심상치만은 않다. 이것이 단지 호기심에서 출발한 일시적인 재미만이 아니라 할 때 여기에 우러러보기의 서글픔이 도사리고있음은 더 말할것도 없다.  현재 포스트모던시대가 열리고 탈중심화가 이루어지고있다. 유럽중심주의가 서서히 무너지고있다. 우리 동양의 목소리도 높아간다. 중심보다는 주변부가 부상한다. 우리 변강도 부상한다. 우리 변강도 다른 하나의 중심이 될수 있는 열린 세계가 되고있다. 다원문화공존, 변강의 각성은 시대의 기본흐름의 하나가 되였다. 여기에 탈식민주의는 하나의 돋보이는 존재이다. 탈식민주의는 바로 서방국가의 득의양양을 전복하고 외국의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아첨하는것을 제거하는데 있다. 우에서 거론한 보기문제도 바로 이 탈식민주의에서 제기한 문제인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식민지, 반식민지들에서 정치적으로 그 예속을 벗어나고 대등하게 보기의 립장에 섰겠지만 경제적인, 정신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우러러보기를 못 벗어나고있기때문이다. 이런 식민지, 반식민지 잔재를 떨쳐버릴 때 우리는 진정 세계와 대등하게 보기의 립장에서 대화를 할수 있다.  현재 우리 중국은 개혁개방 30여년에 초보적으로 성과를 거두며 GDP 세계 2위를 차지하고있다. 중화민족 웅비의 꿈이 이제 곧 이루어지는듯하다. 민족자부심과 애국심이 그 어느때보다도 고양되는 듯하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대등하게 보기를 해야 한다. 평등호혜, 호상 존중의 우리 나라 외교원칙은 바로 이런 대등하게 보기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된다. 이것은 상당히 바람직한것이다. 현재 우리가 세계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것도 사실 세계와 이런 대등하게 보기를 하며 대화하기 위한데 있다. 온 세상이 이런 대등하게 보기를 하며 대화할 때 거기에는 사랑이 넘치며 살만하게 될것이다.
150    인간의 부모사랑 댓글:  조회:9025  추천:1  2012-10-12
인간의 부모들은 내 새끼 하나 미운게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모마음이고 부모사랑이다. 그래서 부모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것 같다. 그런데 사실 부모들은 “편애”한다. 분명 제일 못난 자식을 가장 사랑한다. 그리고 막내를 가장 사랑한다.  그럼 못난 자식 사랑을 보자.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병신자식 하나 낳았다고 하자. 부모들은 바로 정상자식보다 이 병신자식을 “편애”한다. 왜서? 첫째, 병신자식에게 항상 죄스럽다. 병신자식 병신책임은 추호의 변론할 여지도 없이 전적으로 부모들 스스로에게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부모는 한평생 죄인으로 산다. 그래 속죄를 위해서라도 병신자식 더 사랑한다. 짐승은 병신새끼가 생기면 가차없이 버리는것이 상례다. 소가 송아지를 낳았다고 하자. 송아지가 어미소 몸에서 떨어져 일어나 걷지를 못하면 어머소는 병신새끼라 판단하고 그대로 간다. 짐승에게는 이런 죄의식이나 속죄의식이 없다. 둘째, 부모들 눈에 병신자식은 항상 불쌍해 보인다. 정상자식들한테 밀려 먹을것도 옳게 못 얻어먹는것 같다. 그래서 항상 병신자식을 더 챙겨주며 병신자식을 잘 챙겨주라고 정상자식들을 닦달하기도 한다. 셋째, 부모들은 여러 자식들 가운데 자립하지 못했거나 제일 못사는 자식, 그리고 이른바 출세하지 못한 자식을 “편애”한다. 부모들에게 있어서 이런 못난 자식들은 하나의 보듬어야 하는 아픈 가시다.  다음, 막내사랑을 보자. 두말할것도 없이 부모들은 막내를 “편애”한다. 형들한테 밀려 먹을것도 못 얻어먹을가봐. 6형제에 막내로 태여난 나는 이 점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아버지하고 항상 겹상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시내에 나갈 때면 항상 나만 데리고 갔다. 그리고 식당에 데려가서는 만포식시킨다. 그리고 내가 형들과 싸울가 싶으면 항상 형들을 꾸짖는다. 짐승은 맏이고 막내고 하는 개념이 없다. 철저한 양육강식이 적용된다. 어미새가 벌레를 물어와 새끼들을 먹인다. 그런데 어머새는 먼저 낳고(형) 늦게 낳고(동생) 관계없이 벌레를 받아먹겠다고 가장 열심히 입을 크게 벌리고 앞으로 갖다 대는 놈에게 벌레를 먹인다.  한마디로 짐승의 인간과 다른 새끼사랑 어미돼지에게서 전형적으로 보게 된다. 가슴에 주렁주렁 젖꼭지를 단 어미돼지가 새끼들한데 젖을 먹이는 광경을 보라. 간단하다. 덜렁 드러누우면 다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주제가 먹고싶으면 먹고 말겠으면 말라는 태도다. 돼지새끼들은 거저 자기가 알아서 재량껏 챙겨먹기다. 그래서 병신새끼나 “막내” 같은 약한 새끼들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항상 젖을 옳게 못 얻어 먹어 비실비실하다.  그럼 왜서 인간과 짐승의 다른 새끼사랑의 갈림길이 생기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은 랭철한 리성적인 존재이고 짐승은 비리성적인 본능적 존재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천하의 부모마음은 다 똑같다는(可憐天下父母心) 가장 비리성적이고 맹목적일것 같은 부모의 사랑도 실은 아주 랭철한 리성적인 사랑이 밑받침되여있는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런 랭철한 리성적인 사랑이 집단무의식화 되여 있기때문에 무릇 인간으로 태여난 존재에 대해서는 인격평등의 보편적인 인도주의사랑을 베풀수 있다. 그리고 어른에 비해 어린이, 정상인에 비해 장애인에 대해서 보다 뜨거운 사랑을 베풀수 있다. 그래서 죄인에 대해서도 그 죄는 미워할수 있어도 그 사람은 미워할수 없는것이다. 인간은 구경 우주의 정화, 만물의 령장. 분명 동물보다 고상하고 위대한 면이 있다.
149    우리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것 댓글:  조회:5780  추천:2  2012-09-19
인간은 가치론적인 존재. 그 어떤 사물이나 현상은 인간의 가치판단에 따라 중요하고 안 하고 혹은 얼마나 중요하고가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분명한것은 물질적인것보다 정신적인것, 사사로운것보다 거창한것이 더 중요함은 말할것도 없다. 어제는 “9.10 교사절”, 나는 사랑스러운 학생들로부터 축하의 메시지도 받고 선물도 받았다. 정말 훈장 노릇하는 자부감을 만끽했다. 그러면서 나는 환상의 나락에 빠졌다. 이제 밤이 되면 축하의 례포가 빵빵 울려 퍼지고 축하의 불꽃이 흩날릴것이라고. 그런데 밤이 되여 초저녁, 자정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다. 원래 오늘 밤은 여느 때와 같이 잠잠한것이였다. 례포는커녕 피리소리 하나 없다. 다음 순간, 나는 머리가 갸웃해졌다. 교사절 며칠전, 왜 례포가 하늘을 밝히며 올라가며 빵빵하고 요란스러웠지? 아, 원래 다름 아니라 그날이 재물신의 생일이였다네. 그럼 그렇겠지! 재물신이 누구냐? 귀신까지도 마음대로 부려먹는다는 재물신이 아니더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돈, 돈, 돈… “돈을 많이 버세요!”, “부자가 되세요!”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재물신을 모신다. 의리의 사나이 관우가 아이니켈하게도 어느새 재물신의 화신이 되여 사람들의 향불을 받는다. 어디 사람뿐이랴! 그 우둘투둘 징그러운 두꺼비도 돈을 물어온다니 어느새 재물신으로 둔갑하여 모심을 받는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 그  노란빛의 두꺼비를 볼 때마다 역겨워서 먹었던 음식물을 게워내고만다. 사실 재물신에 대한 숭배는 어제 오늘날의 얘기가 아니고 동서고금 예로부터 있은줄로 안다. 고금중외 문학사에 나오는 수전노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오늘날 향전간(向前看)에 차노(车奴), 방도(房奴)도 이것을 잘 말해준다. 교사, 인민교사가 아무리 신성하고 어떻다하더라도 이 유구한 전통이 있고 고금중외로 확산되여 있는 재물신의 위력에는 비길 바가 못된다. 문화대혁명시기 우리는 “구린내 나는 아홉째”가 아니였던가.  우리 모두 교사절의 중요성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매년 “8.15”가 되도 감회가 새롭다.“8.15”는 우리 중국의 항일전쟁승리의 날. 력사의 한획을 그은 뜻 깊은 날. 얼마나 많은 항일의 건아들이 이 날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가?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우만 놓고 볼 때 전반 항일열사 90% 이상이 우리 조선족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리야 한다. 천백번, 이 세상이 다 가도록 기리야 한다. 력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우리가 피 흘려 따낸 결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결실은 영원히 우리 삶의 감로수가 되거늘! 그런데,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너무도 “8.15”의 이런 뜻을 잊고있다. 우리는 “8.15”로인절에 겸해 항전승리의 날을 기려야 할것이다.  우리는 이런 항전의 승리가 오늘날 로인절도 있게 된줄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런 승리는  로인절의 뿌리로 볼수도 있다. 우물을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우리는 항전의 의 영령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는 “8.15”항전승리를 축하해야 하고 로인절도 축하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가치관 정립이 필요하다.
148    소외콤플렉스 댓글:  조회:12840  추천:3  2012-09-05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동물이다. 혼자서는 못 산다. 항상 그 어떤 귀속감을 추구한다. 그래서 제3차 현대심리학 사조를 몰고온 마셀로는 귀속감에 대한 추구를 인간의 기본 욕구의 하나로 보았다. 이런 귀속감에 대한 추구를 바꾸어 이야기하면 바로 소외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외콤플렉스로 나타난다.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어머니품을 파고드는것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을가봐서이다. “어머니가 있는 아이는 보배덩어리(有妈的孩子象块宝)”라고 하지 않던가. 버림은 바로 소외콤플렉스를 유발한다. 고아, 어버이를 잃은 고아는 불쌍하다. 그는 항상 어버이가 없는, 어버이 있는 아이가 부러운 소외콤플렉스에 싸여있다. 우리는 그 누구 하나를 머저리 만들기 대단히 쉽다. 왕따시키면 된다. 한국과 일본의 중고등생들 사이에 문제가 되고있는 왕따현상이나 이지메현상이 바로 그런것이다. 이 왕따나 이지메 현상은 바로 소외현상에 다름 아니다.  죄인들이 감옥살이를 함에 가장 고통스러운것도 바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소외콤플렉스에 있다. 감옥에서 죄질이 심한자들은 독감방에 가둔다. 죄인들은 감옥이라는 부자유스러운 소외속에서 부러운 눈길로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사회에 귀속되기를 바란다.  사실 인간은 이래저래 외목에 나고 처절하게 혼자 남은 소외콤플렉스만 쌓일 때 정말 미쳐버리고만다. 그런데 인간세상은 유유상종이라 자연스럽게 소외의 골이 패인다. 우리 사회를 좀 보자.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이 계층 사이에 소외콤플렉스가 형성된다. 례컨대 서민층은 중산층에 대해, 중산층은 상류층에 대해서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상류층은 중산층을 따돌리고 중산층은 서민층을 따돌리면서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스포츠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서민층이 탁구를 하면 중산층은 테니스를 하고 중산층이 테니스를 하면 상류층은 골프를 한다. 이로부터 서민층은 중산층을 바라보면서, 중산층은 상류층을 바라보면서 소외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  우리 사회가 잘되자면 이런 소외콤플렉스를 없애야 한다. 일찍 2000여년전 유교의 성인 맹자도 이 세상에 과부홀아비가 없고 외로운 로인이 없는 사회가 덕치의 사회라고 했다. 현단계 우리 사회에서 뭐니뭐니 해도 약소군체들이 소외콤플렉스를 가장 많이 느낀다. 례컨대 개혁개방 초기 좀 혜택을 입는가싶더니 개혁개방이 심입됨에 따라 변두리로 왕따당한 농민들 그리고 도시로 진출한 풀뿌리인생의 농민공들 그리고 도시빈민층은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현재 우리는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농업세 전액면제 및 새농촌건설 추진은 농민들의 소외콤플렉스를 많이 해소해주었다. 그리고 농민공들의 보험 및 자녀들의 입학문제 등을 해결 그리고 도시빈민층에게 최저한의 생활보장비를 제공해줌으로써 이들의 소외콤플렉스도 많이 해소해주었다.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것은 그 누구든지 외목나거나 왕따되지 않게 하는데 있다. 이로부터 결국 소외콤플렉스에서 자유롭게 하는데 있다. 이런 소외콤플렉스를 해소하는데는 물질적인 혜택도 혜택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사랑이다. 그래 나는 한국의 “사랑으로”의 노래가 생각난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그렇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사랑의 손길로 어두운 곳을 밝히자. 그러면 약소군체들은 정녕 사랑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감을 느끼며 소외콤플렉스—마음의 성에장도 녹아내리리라. 그럼 우리 사는 세상은 더 밝아지리라!
147    9.3 축제를 앞두고 댓글:  조회:14624  추천:14  2012-08-30
에루화 둥둥… 연변조선족자치주 세웠네! 올해는 자치주 창립 60돐!  9.3축제, 우리의 가슴은 진작 흥분으로 들떠있다. 사실 연변은 두만강축제, 진달래축제, 배꽃축제… 벌써 축제로 들끓고있다. 우리는 벌써부터 손님맞이 준비에 바쁘다. 길가의 건축물들은 의포단장을 하고 환한 웃음을 짓고있다. 가로수들은 푸르싱싱 여름의 열기를 몰아내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저장한다. 9.3, 이제 곧 천고마비의 계절이 아니더냐. 여기에 우리는 구라파거리, 한국거리, 현대프라자, 조선족민속촌… 우리는 고금중외를 아우른다. 볼거리, 들을거리, 먹을거리도 지천에 깔려있다. 우리 모두 조화로운 사회의 형제들이 아니냐. 오시라! 연변은 그대를 환영한다. 우리 연변은 이번 60돐 9.3축제를 계기로 정말 때벗이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한다. 형상공정이 은을 내는것이다. 낮의 깔끔하고 화려한 현대도시의 모습은 더 말할것도 없고 밤에도 오색령롱한 불야성으로 빛난다. 연길의 밤은 하늘의 별과 땅우의 네온싸인이 서로 맞웃음 짓는다. 연길의 강은 하늘의 별이 내려왔는가, 땅우의 네온싸인이 어렸는가 신비한 룡궁세계를 펼쳐보이고있다. 우리는 이제 더는 촌놈이 아니다. 하늘에는 국내선, 국제선이, 땅우에는 고속도로가 쭉쭉 뻗었다. 이제 고속전철도 곧 룡트림한다. 우리는 북경과 직통하는 일일생활권속에 살것이다. 여기에 인터넷고속망을 타고 우리는 세계 곳곳에 가닿고있다. 도시미학으로 볼 때 연길은 훌쩍 커있다. 선남선녀 단계를 넘어 바야흐로 성숙된 어른의 모습을 나타내고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겉의 형상미보다는 실속이 더 중요하거늘! 심령미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 연길, 연변은 아직 촌스러운데가 있다. 1전이라도 더 받아먹으려고 아득바득하는 택시기사들 그리고 신호등 무시하고 건널목 건너기 그리고 아직도 흥청망청하는 유흥문화… 우리에게 모자라는것은 시민의식, 문명한 시민의식이라는 말이다. 그럼 시민의식이란? 나는 우리 중국의 북경올림픽때 내건 한 모토 “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를 떠올려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고대 성인들이 얘기한 인류보편의 가치. 이것을 풀이하면 바로 남에 대한 배려심이 되겠다. 항상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한것이다. 사실 우리가 여직 말해온 “대공무사”,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와 같은 마음 보다 높은 경지에로의 승화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차원의 “대공무사”, “전심력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의 경지에는 못 도달할지라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소박한 마음을 갖도록 하자. 전화 한통 하더라도 남에게 소음이 되지 않도록 빵빵 클랙슨도 좀 적게 울리고 술 마셔도 큰길을 쓰느라 비틀거리지 말고. 연길, 연변은 아직 크고있다. 크고있어 흐뭇하다. 연룡도, 선도구,  두만강, 금삼각구! 우리의 마음은 열려있다. 가자, 모든것을 품어주는 저 바다로! 연변호는 세계로 나아간다. 우리의 뜻은 세계에 있거늘! 조선, 로씨야, 일본…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모두 잘사는 세상을 이루자! 60회갑 청춘이라, 우리네 자치주 청춘 만세! 60갑자 돌고 도나니 우리네 자치주 영원하라!
146    우리에게는 할 말도 많더라 댓글:  조회:2465  추천:2  2012-07-31
우리에게는 할 말도 많더라  조글로포럼209.7~2010.6 칼럼평 우상렬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조글로는 조선족 글로벌화를 지향하는 중국조선족의 주요 사이트답게 좋은 글도 많더라. 여러 종류의 글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실로 인터넷사이트의 언권, 언론 민주화의 향연을 맛보게 한다. 필자가 조글로 책임자로부터 부탁받은 ‘조글로칼럼평’ 대상-조글로포럼 2009년 7월~2010년 6월까지의 글들만 보아도 거기에는 통계해내기에 바쁠 정도로 많은 글들이 실려 있다. 말 그대로 ‘포럼’의 열린 토론의 장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조글로 "포럼글마당"에 추천되어 있는2009년 7월~2010년 6월까지 글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그 외의 글들은 참조에 기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필자가 ‘칼럼평’을 부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들을 단지 칼럼의 시사성, 의론성, 간단명료성 등의 잣대로 재단하여 많은 좋은 글들을 배제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단지 칼럼만에 국한되지 않고 이런 좋은 글들을 아우러는 조글로 ‘포럼글’들을 대상으로 하여 논의를 전개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지난 1년사이 발표된 천여편의 글속에서 여기 "포럼글마당"에 추천되어 있는 2009년 7월~2010년 6월까지 글들을 보더라도 200여편을 훨씬 웃도는 수자가 된다. 내용상으로 볼 때 너무 다양하여 갈피를 잡기 힘들다. 그래서 글 조직의 편리상 논의의 대상을 중심으로 하나의 카테고리를 마련해보았다. 근간에 많이 말하는 ‘담론’의 개념을 끌어들여 담론의 대상 차원에서 조선족 말하기, 한국(조선 포함) 말하기, 중국 말하기, 그 관계 말하기로 짜보았다. 본고는 이런 카테고리속에서 대표성적인 글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画龙点睛 방식을 취하도록 하겠다. 2. 담론 대상 1)조선족 말하기 (1)존재의 이유 주지하다시피 조선족은 이주민족이다. 그렇다해서 조선족은 남의 땅에 와서 借花献佛하는 철면피상을 보였거나 얹혀서 얻어먹는 가련한 상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족은 与天斗,与地斗,与人斗하며 휘황찬란한 개척사, 혁명사, 건설사를 선보였다. 그래 ‘산에 산마다 진달래, 마을에 마을마다 열사비’라 했던가. 이런 조선족의 역사는 두고두고 외워지고 읽히워져야 한다. 그것은 조선족의 가장 확실한 존재이유의 하나로서 민족의 구심점과 자부심이 되기 때문. 이수산의 “조선족사회 현안진단과 대책연구”로 기획된 세 번째 편인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와 김성룡의 “영원한기념비--해방전쟁시기조선민족의 투쟁사 답사(1)(2)”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앞의 글을 보면 ‘이 글을 쓰게 된것은 항일련군의 비장한 력사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며 왜곡된 력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항일련군에는 바로 조선족의 항일건아들이 많았다. ‘유난히 가렬처절한 항일투쟁속에서 조선족 전사들이 한족, 만족, 몽골족, 회족 등 형제 전사들과 함께 생사를 함께 하면서 맺은 계급적, 형제적, 동포적, 고향적 우의는 선혈로 맺어진것으로서 그 어떤 감정과 우의보다도 끈끈했다. 당시 3-5명 항일련군 전사속에 1명 조선족 전사가 들어있었는데…’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북항일련군기념관에 진렬된 60여명 항일장령과 저명한 렬사가운데 허형식(…필자 약함. 이하 동) 등 20명 조선족렬사의 영웅이름들이 기재되여있다. 동북항일련군 제2 군단에서 조선족 전사가 절대다수를 차지했고 제1, 제7 군단에서도 조선족 전사가 절반 가량이나 차지했었다.’ ‘문헌의 기재에 따르면 동북에서 6만 2942명 조선족 청장년들이 참군했는데 선후로 항일전쟁, 해방전쟁 등에 참가하여 3만여명이 희생되였다. 연변지역만도 1만 3450명 렬사를 갖고 있다. 해방전쟁시기 몇십만 조선족 해방군 전사와 군중들이 전선을 지원하는 전시복무사업과 중국 전역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뒤의 글을 보면 “‘8.15’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까지, 중국내 이주해 살아오던 조선이민들이 중화민족의 일원인 중국조선족이 된 이 거창한 력사를 밝혀내고 방송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공적을 알리기 위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처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방송센터는 공동제작을 기획하고 답사진을 구성하여 자유와 해방을 위해 중국의 거창한 력사대하속에서 자주적으로 자기의 립지를 다져놓은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재조명하고저”한데 있다. 이 글에서 보면 ‘8.15’광복 후 ‘동북각지의 조선족은 조선독립동맹을 통해 공산당의 정치주장을 지지하면서 공산당부대에 적극 참가하여 흑룡강성 할빈지역, 목단강지역, 가목사지역, 길림성의 길림지역, 연변지역에 대량의 조선족 독립대대, 경찰대, 경비퇀, 보안퇀이 나타났다. 이들은 토비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사회치안을 유지했으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할 준비를 했던것이다.’ 당시 “목단강군구뿐만 아니라 북만의 합강군구(合江军区)에도 유명한 조선족부대인 ‘동철부대’가 있었다. 합강군구 1퇀 2영에 편입된 이 부대 영장은 한족인 류곤(刘坤)이였고 교도원 김동철(金东哲), 참모장 김해정(金海静)이하 600여명 장병은 모두가 조선족이였다./이밖에도 허태동(许泰东)이 조직한 목릉현조선독립영을 비롯해 빈현(宾县)(…) 등 많은 현에 모두 200여명 규모의 조선족 독립대대가 있었고 동흥(东兴)(…) 등 현에 100여명 규모의 조선족중대”가 활약했던 것이다. 이수산과 김성룡의 글은 각기 항일투쟁시기와 해방전쟁시기 조선족의 혁명업적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던 간거한 항일 투쟁 역사를  절때 잊지말아야하며 오늘날의 행복한 생활이 어떻게 왔는가를 더구나 잊지 말고 갑절 더 소중히 여기고 애호해야한다.’(이수산 글에서)와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의 거울로 비춰보지 않으면 자기를 알수없고 오늘을 사는 자세를 바르게 가질수없다. 력사를 망각하는것은 배신을 의미한다고도 한다.’(김성룡의 글에서)고 호소한다. 이런 글은 쉽게 씌어지는 글이 아니다. 실로 두 발로 열심히 뛰며 힘들게 쓴 글이다. 이수산은 ‘항일련군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수차 할빈 동북항일련군기념관을 참관하여 항일련군 장령과 렬사들의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김성룡은 ‘로인분들의 베개가에 귀를 대고 마지막 숨결을 느끼면서 그 격정의 나날들을 알아야했고 력사의 현장을 검증해야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다. 그럴진대 조선족 내지 그 역사에 대한 비방이나 왜곡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수산의 “조선족사회 현안진단과 대책연구”로 기획된 두 번째 글 ‘조선족, 역사와 현실바로잡기에 나서야’는 이 방면에 바쳐진 글이다. 작자는 이 글에서 ‘지금 중국의 주요한 매체 사이트에서 한국 조선에 빗대고 우리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평가 심지어 비하 중상 목욕이 범람하고 있음을 10만명도 넘는 조선족 지성인들은 간과하거나 묵인하고 있다. 요사이 이러한 오해 비방과 목욕으로 가득찬 문장이 홍콩의 (凤凰网)(新浪网)홈페이지에서 공공연히 나돌고 있어 독자가 이미 10만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민간 요언과 비방이 나돌며 간부들과 국책에도 엄중한 영향을 준다는 점’에 대해 심한 우려를 나타낸다. 그리고 ‘후에 안일이지만 우리조선족의 항일투쟁 해방투쟁 신중국창설과 건설에 관한 역사는 우리만 알고 있지 중국사회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것도 사실’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에 단지 감성적인 의분이나 안타까움이 아닌 대책도 내놓고 있어 더욱 좋다. ‘각급정부의 민족간부들, 천여명을 해아리는 연변대학교수님들, 소수민족의 최고학부인 중앙민족대학과 중소학교 교원들, 민족일보사 잡지사 출판사 방송국 문화관 연구소 및 사업단위와 기업의 전업일군 등 우리민족의 지성인들이여, 우리들만이 자랑하고 흥분하며 옥신각신하시지 말고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서 중국땅에서 떳떳히 발 붙이고  국어인 한어나 영어로 우리의 역사와 공적을 더 많이 홍보하여야할것이며 (新华网)(人民网)(光明日报网)(凤凰网)(新加坡早报)(搜狐网)(新浪)(雅虎)망 등 주요한 신문매체 사회여론과 민족사업에 더 많은 관심을 돌리며 참여하고 홍보를 한어로 된 문장을 모두다 (百度) (谷歌)등 검색 사이트와 중요한 홈페에지에 올려서 에 적극 나서야 할것이니 이것이 바로 역사 현실과 미래의 주인공정신이고 중국공민으로서 참다운 인간의 삶의 자세일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항상 하며 수수방관하면 언제가면 제 발등에 불덩어리가 꼭 떨어지게된다.’고 민족의 지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필명 思考民族을 단 ‘有尊严的中国朝鲜族农民’도 같은 맥락의 글이다. 조선족은 실로 깔볼 족속이 아니다. 당하면 ‘무지랭이’ 농부도 당당히 나선다. 이런 글들은 투철한 역사의식 및 민족적 사명감과 의무감이 흘러넘친다. (2)조선족은 지금… 개혁개방 후 조선족은 눈을 세계로 돌리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중한수교 후 한국에 드나들면서 많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세계적 범위에서의 탈이념적인 민족성 및 뿌리의식, 그리고 디아스포라논의의 확산은 여기에 부채질을 한 셈이 된다. 이로부터 조선족의 민족성과 국민성 간의 이중정체성 갈등문제가 야기되기도 했다. 민족정체성에 대한 쟁론문제는 단지 학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민족의 입지나 주체문제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단 학술적으로 잘 밝혀져야 할 문제인 것인만은 틀림없다. 조성일('조선족과 조선족문화 이중성재론'), 김호웅('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과 황유복(‘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 ‘中國 朝鮮族의 文化共同體’, “‘조선족’은 누구인가”, ‘100% 조선족’, ‘게임을 하겠으면 룰을 지킬 줄 알아야’)의 조선족 정체성문제를 둘러싼 쟁론은 언술상에서 일부 문제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학술적으로는 상당히 수준급이다. 특히 김호웅의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에서는 조성일과 황유복 논쟁의 문제점을 치밀하게 살펴본 후 통속성을 기하면서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이중문화신분, “제3의 영역” 및 “접목의 논리” 등에 대해 학술적으로 깊이있는 천명을 하고 있다.그리고 김호웅은 계속해서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에서는 주로‘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를 둘러싸고 중국 주류민족과 조선족의 갈등과 화해의 논리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과 중국 사이에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중국조선족 군체(群體)가 모국의 문화와 중국의 중심문화 사이에서 겪는 이중정체성 갈등과 그들의 민족적정체성 찾기는 다문화주의담론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야 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수산은 ‘조선족의 정체성물음과 간명해답’에서 도표형식으로 조선족과 화교(한족)의 경우를 일목요연하게 비교학적으로 제시하여 조선족의 정체성문제를 인식하는 하나의 참조계를 제공하고 있어 좋다. 이런 조선족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우리의 역사와 민족적 정체성 및 향후 생존과 발전전략에 관한 원론(原論)적인문제’(김호웅의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의 ‘1.머리말’에서)로서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이런 쟁론은 워낙 중요하고 민감한 사항이라 네티즌들도 많이 참여한 기꺼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선족이야말로 与时俱进. 역동성이 넘친다. 그래서 ‘신조선족’이란 말이 나왔던가. 김문학의 시리즈글‘《신조선족》월경론(越境论)’은 그 대표적 논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논의의 허점과 문제점들이 많다. 하나하나 보도록 하자. ‘1.신조선족의 탄생’, 새‘패턴’, 새‘경계’에 놓인 ‘신조선족’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어 새로운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긍정적인 ‘신조선족’에 부정적인 비월경의 ‘구조선족’을 떠올리게 하는 문제점을 노정한다. 실은 ‘조선족디아스포라’에 다름 아닌 것을 가지고 굳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는 줄로 안다. 하물며 ‘신조선족’이란 중국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조선족 문화와 많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국인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는 한 개념의 혼돈도 초래하니 말이다. 그리고 ‘2.포스트 개조론’, 일단 자기의 지지자들을 이용한 자화자찬이 문제고 근거와 설득력이 결여한 아집과 독단, 그리고 상대를 진짜 ‘타자화’하는데 문제가 있다. ‘3.방법으로서의 조선족’, “방법적 프리즘에는 큰 결함, 함정이 있다는 것을 필자는 ‘발견’하”고 “동일성속의 ‘이질성’팩터”를 강조하고 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조선족을 굳이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야 되나, 하물며 현 단계 많이 같이 가고 있는 조선족들임에라!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4.조선족의 異時代的文化群’은 ‘3.방법으로서의 조선족’의 연장선에 놓이는 글로서 “2010년 현재에서 区分化하여 바라본 조선족사회는 그 특점을 필자는 ‘共時적 이질문화권’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조선족문화를 지역적인 변화는 있을지라도 ‘이질문화’로 풀이하는데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5.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 중국이 우리 생활의 장이고 그것이 공기와 같은 것일진대 정치, 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사실 조선족의 생활문화도 한족文化을 비롯한 다른 민족문화와 얽히고설키여 있다. 이것이 연변, 전반 조선족의 실존이기도 하다. 그럴진대 ‘중국이 없는’ 논의는 근본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다. ‘6.小盆地型 문화’, 개혁개방 전 연변의 일부 문화적 특성을 짚어내고 있는 듯하나 그래도 地定적 냄새가 풍긴다. “7.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도 민족성을 전제로 하고 일정한 국적을 가지고, 예컨대 조선족의 경우 ‘중국심’이나 ‘한국심’, ‘조선심’ 사이에서 좀 헷갈림뿐이지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일까 하는 자문자답을 수도없이 해보’고 “나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할’ 정도의 무지각적이지는 않다. 그런 ‘자문자답’이나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운운은 잠꼬대나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8.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차원에서 조선족에 대한 연구시각을 좀 진척시킨듯하여 긍정적이다. 물론 재론의 여지는 있다. ‘ 9.동아시아의 3국어 사용자’, 조선족의 이중언어, 혹은 삼중언어사용자로서의 우세를 잘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이 개혁개방 초기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한 것은 ‘배우기 쉬운’데 있은 것이지 “식민제국 언어의 ‘기억’이 재생”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10.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 ‘11. ‘신조선족'의 국제적위상과 의미’도 역시 자화자친 투성이다. “12. 월경하는 ‘신조선족’의 新生活文化圈’”도 편파적인 논리가 관통되어 문제점이 야기된다. ‘13.조선족에게 정체성은 있는가’, 주요 문제는 비껴가면서 은근슬쩍 자기의 유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신조선족’론에 김정룡의 ‘신조선족 개념 문제없다’의 긍정론과 주청룡의 “‘신조선족’論에 대하여 ”라는 부정론이 있어 언론의 민주적인 양상을 보는듯해서 좋다. 물론 네티즌도 긍정론과 부정론을 나타내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부정론이 우세인듯하다. 이외에 이수산의 ‘’도 있다. 그런데 그는 김문학과는 다른 변화된 현실에서의 조선족이 국내외로 웅비하며 새롭게 거듭날 ‘신조선족’을 기원하고 있다. 그런만큼 이수산은 ‘주류의식과 변두리의식’에서 ‘’, ‘’, ‘’적인 ‘마음가짐과 자세’를 불식하고 ‘’, ‘ ’, ‘’적인 ‘주인공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논술하고 있다. 특히 민족자치지역일수록 더욱 그래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문제는 ‘공부를 많이해 학자가 된 대학교수들과 우리지성인들은 많이 심사숙고해야할 사회과제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조선족의 ‘주류의식’을 촉구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중심은 연변-조선족의 상징은 연변. 우리는 이렇게 여기고 느끼고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김정룡이 우리의 달아오른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 제 정신이 들게 하여 좋다. ‘연변사람, 안쪽 사람 뭐가 다를까?’, 지정학적으로 본 연변사람, 참 문제가 많다. 특히 안쪽 사람에 비겨.  ‘맞아죽을 각오’로 쓰는 이런 글들에 나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연장선상에 놓인 그의 ‘연변사람 우월의식?’은 일부 현상들에 치우쳐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감을 주어 아쉽다. 나는 조선족은 官보다 民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민족간부. 이런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오기활의 ‘민족지도자의 인격’에서 모든 민족간부들의 좌우명과 민족간부를 식별하는 시금석으로 추천한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민족간부는 자격이 없다》’는 우리 모두의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조선족은 용감하고 슬기롭고 위대한 민족. 한마디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주청룡). 박복선 특약기자의 ‘1.조선족 과학자들 중국 우주비행에 큰 기여’를,  차철구의 “《조선족 대외개방 3부곡》”에서 ‘1.조선족 산업민족’으로 거듭나는 모습, 윤운걸의 ‘조선족 한국행 잃은 것보다 얻은 것 많아’, 강순화의 ‘우리민족 녀성형상의 시대적 변천’에서 항일전쟁시기인 1930년대로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한 8-90년대와 근년에 이르기까지 잘난 우리여성을 이야기하고 있어 기껏다. 그리고 세상은 돌고도는가, 장정일의 ‘인구의 이동과 역이동’은 귀국, 귀향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어 좋다. 그리고 “‘선족’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정인갑)는 조선족지성인의 조선족에 대한 옳바른 정명의 주장을 하고 있어 눈에 띈다. 이외에 김범송의 ‘재한중국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은 2010 경인(庚寅)년 새해를 맞이하여 재한 조선족들의 한국에서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새해에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위의 글들이 조선족 스스로가 조선족을 말했다면, 아래의 글들은 한국인들이 따뜻한 동포의 정으로 말하는데는 달던 쓰던 모두 좋다. 홍건영의 ‘조선족 사회의 어제와 오늘’,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을 일반 독자를 위해 조선족 사회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고 현재 조선족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한 ‘코리안 드림과 조선족 공동체의 소멸’, ‘민족 정체성의 위기’, ‘위기 대응 능력이 부족한 조선족 지도층’은 몸에 와 닿는다. 작자가 2년 동안  연변에서 살았고10년 가까이 조선족과 부대끼며 살았고, 그리고 8년가량 ‘조선족과 한국인의 상호 이해와 교류’를 표방한 사이트 ‘연변통신’을 운영한 한국인이라 할 때 그의 조선족에 대한 이해는 비교적 정확하다. 심양백제원 여태근 사장의 ‘재중한식당, 조선족전통요리협회 보고 배우자’- 결함투성이인 듯한 조선족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니 기분 좋은 소리. 한인네트워크( 2010년 5월호)에 실린 ‘새로운 시대를 맞는 중국동포들’, 긍정적인 눈길로 한중수교 후 조선족의 현실,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고 있어 고무적이다.   (3)우환의식 중국은 아직도 격변기. 이 와중에 조선족은 흔들리고 휘청한다. 그래서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이로부터 민족 지성인들의 우려를 자아낸다. 특히 요 근간에 무슨 연룡도요, 선도구라, 연변은 기회이면서 심한 도전을 받기도 하는 듯하다. 자치주가 휘청하니 말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이룡희는 얼마전 전국인민대표대회회의에서 ‘자치주’를 ‘시’로 고칠 의향을 제출한다. 심히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연구소 교수 정신철이 나섰다. “’연변시’의 구상은 ‘연변조선족자치시’인지 아니면 일반 지구급’시’인지?” 정곡을 찌르는 물음이다. 그것은 ‘소위 경제발전구상만 강조하고 연변의 특수성, 즉 민족성을 회피한 감을 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현시점에서 보면 ‘자치시’설치가 아주 어려운 점, 그래서 첫째, 연변이 소수민족지역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 따라서 행정구역변경을 거론할 때 항상 ‘민족’을 빼놓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강조하여야 한다. 두번째는 ‘민족자치시’ 설치 가능성을 잘 파악할 것. 만약 연변자치주가 ‘민족자치시’로 개칭되지 않고 ‘연변시’로 개설된다면 이를 극력 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법은 민족자치를 약화 내지 취소할 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만 대표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200만 조선족의 중심역할을 하여야 하므로 자치주 책임자라면 ‘연변’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안목으로 전체 조선족사회 이익의 대변인으로 되어야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지역의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호남성의 장가계시나 료녕성 봉성시의 경우. 마지막으로 가령 ‘민족자치시’가 아닌 ‘연변시’가 사실로 된다면 중국 기타 소수민족의 미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로 晓之以理,动之以情, 천만지당한 말이다. 진정한 조선족지성인의 참여의식 및 이성이 빛발치고 충정이 넘쳐난다. 이룡희 주장의 견해에 많은 조선족 네티즌들도 한마디 한다. 주장어른도 무서워하지 않고. 3월 9일, 인터넷 “길림신문” ‘연변《주》를 《시》가 아니라 《구》로 만들수는 없는가’‘를 보라. 조선족인민들은 축소지향의 ‘시’가 아니라 확대지향의 ‘구’다. 연변의 네티즌들과 독자들의 반응을 보자. 네티즌들은 부동한 각도, 부동한 측면에서 단마디명창으로 자기들의 견해를 표했다. 그중 다수가 ‘주’를 ‘시’로 만드는데 반대다. 모두들 오히려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그립다’,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세워야 한단’다. 실로 ‘모두가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의 자치주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라 하겠다.’ 民은 정의롭고 똑똑하다. 교육은 백년대계. 약소민족에게 있어서 교육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족의 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조선족 지성인들에게 일단 교육 문제가 지대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현 단계 ‘필자로부터’에서 지적하다시피 ‘산해관이남지역으로 조선족인구의 다량적인 이동은 이 지역에 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초래하였지만 현재까지 산해관이남지역의 조선족사회현황과 민족교육현황에 대한 파악과 연구는 아주 결핍’한 상황하에서 정신철의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은 적시적이고 현실적이여서 좋다. 이 글의 ‘목차’만 보더라도 ‘서언’으로부터 시작하여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족교육의 역사 및 현 단계 새로운 문제와 도전, 그리고 그 대책과 가능성에 대해 소상히 서술하고 있다. 실로 이 글은 ‘우리사회에서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사회와 민족교육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과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줄로 안다. 정신철의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이 그래도 희망적이라면 정인갑의 “‘새집거지역’조선족교육 비관론”은 이와 전적으로 다른 반대 견해를 피력하고 있어 재미있다. 아니, 단지 재미보다는 우리의 사색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실제 학교를 꾸려본 작자의 肺腑之言일진대 더욱 그렇다. 좀 구체적으로 보면, 작자는 ‘1.새집거지역에 대한 국가정책의 결여, 2.조선족교육에 대한 학부모 열정의 부족, 3.조선족교원 업무수준의 低下, 4. 조선어교학 점점 어려워져, 5.조선어의 실용성 점점 약해져’에 걸쳐 비관론을 펴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안타깝기도 하다.                                  이수산의 “조선족경제문화발전대안 시리즈”는 조선족교육의 관념전환을 이야기하고 있어 돋보인다. “1. ‘돌아오는 교육’으로 조선족사회가 궐기한다”를 보면 작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여태껏 인재교육에서 빠져나가는 ‘출세교육’에만 전념하면서 만족해왔다. 대학을 졸업해도 고향건설엔 별로 도움이 되지못했지만 북경 상해등 대도시와 해외에서 사업한다하니 부모들은 자랑스레 생각했고 마을사람들은 부러워하기도했다. 이러한 대세와 흐름이 우리고향마을과 민족공동체의 황페화를 가속화했다. 언녕 멀리내다보며 반성하고 수정해야했다.”로 조선족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로부터 “하나는 승학교육 즉 ‘출세교육’을 ‘돌아오는’ 교육으로 전환시키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 사업을 펼쳐야한다. 즉 ‘조국(고국)을 가슴에 안고 발 붙이며 세계를 내다보’(立足祖国,放眼世界)는 발전방향이 세워져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현대농업을 구축하는과정에서 신농촌건설이 다그쳐지고 ‘돌아오는 교육’으로 도농통합발전이 추진된다는 점을 우리민족간부들은 이념과 발상으로부터 몸소 사회적 실천에 옮겨야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3.‘자주창신형’ 창업학교를 세우자”에서는 창신, 창업학교에 대한 일반적 논의 및 국외의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조선족들에게도 ‘하이테크연구개발이 전공이였고 경영에 익숙하며  실무 경험이 있는분들은 고향에다 창업학교를 꾸릴 필요와 가능성이 있다. 연변과기대학과 연변과학원에서도 혹은 을 꾸릴수있다.’고 지적하며 ‘각급정부와 조선족사업단위 기업 등 민간단체에서도 후원해주어야한다’고 모를 박았다. 이외에 강순화의 ‘현시대의 가정교육은 어떻게 할것인가?’는 ‘가정교육의 새로운 개념’으로부터 ‘우리의 가정교육’문제를 끌어내오고 ‘우리부모들이 할수 있고 또 해야하는 몇가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역시 강순화의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5)’에서는 이미 ‘조선족교육의 엄중한 실태’를 반영한 전제하에서 교사자질, 정부지지, 민족교육의 발전방향에 걸쳐 ‘조선족교육에 관한 몇 가지 건의’를 확실하게 하고 있다. 관본주의유습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나마 民은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더 진귀하다. 정경락의  ‘연변주 인대 대표들에게 부탁한다’를 보라. 주인대 대표들에게 정부재정예산보고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그 중시도가 부족한 문제에 대해 첫째, 정부예산보고의 심의시간이 짧다. 둘째, 예산방안은 전문성이 너무 강하다. 셋째, 대조해보지 않는다. 넷째, 대표들의 책임성문제이다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재정예산에 대한 심사 문제를 풀자면 첫째, 예산보고를 통속하게 구체화하는것이다. 둘째, 심사에 충족한 시간을 주는것이다. 셋째,재정예산에 대한 중시도를 높이며 대표들의 전문지식수준을 높이는것이다로 세가지에 중시를 돌릴데 대해 국내외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제목소리를 내는 民은 민주주의의 표상. 이 글은 민생에 중요한 문제를 투철한 기자의식으로 반영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족 담론은 위기의식이 많이 내비친다. 려호길의 ‘조선족사회의 위기와 위기의식’ , 조선족은 중국혁명에 커다란 희생을 내고 기득권을 얻었음에도 타민족에 비해 위기의식을 갖고 산다. 이같은 위기의식은 첫째, 과거 중국공산당의 거듭되는 정풍운동과 잔혹한 문화대혁명을 치른 결과이며 둘째, 당내인사들의 ‘사상의 고도의 일치성 유지’를 강조하는 공산당작풍(共産黨作風)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고 셋째, 소수민족 중에서 유일하게 ‘모국을 둔 민족’, 즉 역사적으로 2중국적자라는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그래도 사고해볼만한 점도 많다. 홍순범의 ‘깨여지는 가족공동체’에서는 주객관 원인으로 온전치 못한 조선족가족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허동식의 ‘잡담117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에서는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을 경제발전 후진성과 침체성에서 찾고 있으며 경제발전저수준이 가져다주는 사회발전저수준과 밀접히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러가지 기성조건의 결핍과 민간자본운영저수준은 연변경제의 변연화를 개변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또한 지역문화결구의 급변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보다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나 그래도 사색의 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출국인들’(김정룡)은 조선족의 많은 문제를 노정한다. 이를테면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로 출국의 문제점이 노정된다. 그러면서 조선족의 새로운 가치관 및 생활경향을 잘 포착한 점이 돋보인다. 같은 김정룡의 ‘연변문화메카론 재고’는 조선족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연변의 문제점에 대해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한 치명적인 한계점, 그리고 많은 편견과 독설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 스스로 자성케 하는 일고의 가치는 있다. 이외에 주봉의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자’에서는 ‘지난 90년대를 잡으며 한국노래의 부단한 충격은 우리 노래로 하여금 그만 활기를 잃고 시들어가게 한’데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장연하의 “‘통이 커진’ 고향사람들”에서는 조선족농촌의 낭비벽 등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 김광석의 ‘언어는 인격의 거울’은 일부 조선족들한테서 보게 되는 무례한 언어구사를 꼬집고 있다. 나름대로 모두 귀를 귀울여볼만한 얘기다. (4)생존전략 위의 ‘(3)우환의식’을 나타낸 글들에서 우환의식과 더불어 대책이나 방안 같은 것들도 많이 제기하고 있는 내실을 기한 글들도 많았다. 그러나 살아남기, 그것도 잘 살아남기가 더 중요한만큼 전문 ‘생존전략’과 많이 매치되는 글들을 다루어보도록 한다. 황유복과 이수산의 글이 돋보인다. 황유복의 “중국 조선족의 문화공동체”의 ‘4. 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에서 일단 ‘21세기에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다음,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민족문화문제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교육을 들고 조선족단체들의 활약을 들고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상응한 시스템 도입’문제를 들고 있다. 지당한 말이다.  황유복은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에서는 ‘조선족 사회가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탈피하고 도시경제에로 진입하는 과정’에서의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를 진단해낸다. 즉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실현하기 위해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많은 귀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있다. 그리고는 생존전략으로 ‘우선 사회와 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 나가기’, ‘조선족 기업인들은 자기들의 생존공간을 한국관련 기업으로 제한시킨 현실을 극복하고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기’, ‘조선족기업인들은 우선 형제민족기업인들과 같이 ⟪중국특색⟫에 따라 ⟪중국 돈⟫을 벌기’, ‘조선족 기업들은 한국계기업들과 차별화된 ⟪중국특색⟫의 기업발전공간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계기업들과 생존을 함께하는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기’를 제시한다. 그 넓은 시야에 손들고 만다.    이수산은 “사회 현안진단과 대안연구”의 한 사색의 갈래인 ‘창업은 가장 중요한 민족사업’에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창업은 우리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부상하는것 같다.’고 하며 창업의 가능성, 도경 및 조치에 대해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조선족경제문화발전대안 시리즈” “2. ‘창조적 경영’ 민족으로”에서는 “우리민족 특유의 ‘가교형’ ‘의존형’의 고정된 발전모델”에서 벗어나 ‘창조적 경영’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 맞는 그럴듯한 얘기다. 무명씨의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구상’은 현재 산해관이남도시에 조선족인구가 널리 분포되면서 도시민족교육실행문제와 민족정체성유지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못하고 있다. 그래서 산해관이남 여러 도시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하여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필요한 조건, 당면한 문제 등을 파악하고 도시공동체구축방안을 탐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실로 지상공론이 아닌 차곡차곡 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있다. 이승률의 ‘조선족사회대망론(待望論)’, 이 시대를 이끌 조선족의 대망론을 펴고 있어 기분이 좋다. 이를테면 ‘실제로 조선족은 태어나면서부터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습득하는 환경에서 자란다. 그리고 고등학교 이후에는 일본어 또는 영어까지 교육받는다. 이와 같이 중국과 한반도 양대 국가 사이에 끼어 있는 변경 소수민족으로 이중 문화를 무리 없이 융합하고 재창조하는 유연한 문화적•감성적 특질을 생래적으로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변연복합문화(邊緣複合文化)형의 구역 가치와 경쟁력을 갖춘 집단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인정이 많고 우애롭다. 남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미덕을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근면한 성품과 명석한 두뇌로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로 조선족이 지니고 있는 우세를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旁观者清이라 했던가, 한국인로서의 知中派, 知朝鲜族派인 이승률의 지론은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대한뉴스 국제부 이명근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이승률 회장은 ‘동북아시아 集團知性 조선족을 주목하라!’고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교육을 받은 조선족은 중국 식자들사이에서도 앞으로 큰 역할을 할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집단지성’으로서 앞으로 ‘한.중,일 간의 역사.문화.생활.경제등 여러분야內 이질적인 갈등요소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풀어나갈 집단은 조선족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국은 ‘이제 닫힌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 차원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조선족에 대한 인재경영철학은 이제 더 이상의 '선택'이 아닌 ‘필수’”로 되어야 한다고 모박았다. 이외에 전정옥의 ‘관광업 브랜드산업으로 육성 절실’도 한 번 읽을만 하다. 2)한국(조선 포함) 말하기 한국은 조선족의 고국. 두말하면 잔소리. 그래서 조선족에게는 이래저래 할 말이 많다. 려호길의 ‘역사를 괴롭히지 말아라’에서는 미우나 고우나 조선족은 한반도사람들과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동포이며 어쩌면 ‘고국에 돌아와 살 수도 있는 민족’으로서 결코 미움으로 일관되어야 할 무리들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조선인들의 후예로서 암울했던 한반도사이며 일제치하 서러웠던 한민족사이기 때문이다. 자기 역사를 괴롭히고 민족과 인권에 미성숙한 국민이 선진국 국민이 될 수 있다는 세상이 요상할 뿐이다고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심각한 편견문제를 꼬집고 있다. 주청룡의 “적절한 명칭은 ‘재중동포’ 혹은 ‘중국동포’”는 한국에서의 조선족에 대한 호칭에 대해 나름대로 주장하고 있다면, 김정룡의 “얼빠진 ‘차오시엔족’ 표기”에서는 한국에서 ‘주체성과 정체성이 없이 자아중심이 되지 못하고 동포마저 상대의 입장에 서서 남의 발음에 따라 표기해야 하’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주청룡이 ‘漢字교육의 필요성’에서는 한국에서 한자교육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간자체로 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면, 김정룡의 ‘한국이 간자체를 거부하는 이유’에서는 한국이 간자체를 거부하는 국내외적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수산이 ‘한국어의 선진성’을 이야기했다면 주철룡은 ‘영어 발음을 대체할 새 문자를 만들려는 것은 찬성할 바 아니다’로 새 문자창제를 반대한다. 그리고 주청룡은 ‘두음법칙의 페단’에서 ‘(1)서로 다른 성들사이에 혼돈이 생긴다,  (2) 한 사람의 성이 경우에 따라 두가지로 된다,  (3) 친 형제사이에도 서로 다른 성을 가지게 되다,  (4) 성명권 침해로 된다, (5) 자전을 찾기에 불편을 준다. (6) 두음법칙은 한자어와 한자어단어의 원래의 의미가 상실된다’에 걸쳐 우점보다 폐단이 많은 한국의 두음법칙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주청룡이 ‘한국의 중국 인명,지명에 대한 나의 견해’에서 김광림 교수가 제기한 것처럼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우리의 한자음으로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 한자를 병기하거나 원음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안이라고 지적한다. 방흥국은 “‘만주’를 없앱시다”는 한국사람들이 중국 동북3성을 ‘만주’라고 부르는데 대해 일제 식민지 잔재로 보며 시정할 것을 촉구한다. 박문희의 ‘아름다운 발’은 한국의 예체능계에서 성공한 인물들인 강수진, 김연아, 박지성의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발을 통해 성공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경호의 ‘생식숭배문화로 보는 단군신화’는 생식숭배문화 차원 및 역사적 맥락에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 운사, 우사를 풀이하여 고대한민족의 문화 본질과 정체성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고저 집필된 것이다. ‘역사와 정체성’은 2009년 11월 17일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교육이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개정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역사의식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조선족을 옳이 활용하고 있는가’에서는 조선족을 한국, 특히 한국 “‘관광업의 보석’으로 활용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무명씨의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는 중국의 농촌 개혁개방 전후의 경우를 이야기하면서 ‘연변에서 근심하는 조선의 농사’, 그러면서 조선의 농촌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주청룡의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내가 바라는 마음’에서는 한국인과 비통한 마음을 같이 나누면서 더 큰 비극을 우려해 제발 원인규명에서 북측의 소행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는 정치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소박한 혈육의 감정에서이다. 워낙 남이나 북에는 모두 ‘나’의 혈육지친(血肉之親)들이 있고, 북이나 남이나 ‘나’에게는 모두 고국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북이 화목하고 조화롭고 같이 잘 살기만 바라는 마음뿐이다. 전반 조선족의 마음을 잘 나타냈다. 한국인 스스로도 한국에 대해 할 말은 있다. 특히 조선족과의 관계속에서 할 말이 많은 것같다. 석일진은 ‘한국인은 조선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에서 이제 한국인은 '중국의 조선족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로 고민하지 말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말로만 '동포'라고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며 '동포'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한국인에 대해 실질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이광표는 “동아일보” 기자신분으로 ‘다문화 정책, 이젠 조선족 동포에 주목할 때’라는 제목하에 高大 윤인진 교수의 논문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다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윤 교수의 논지의 핵심은 ‘그동안 국내의 다문화 연구와 다문화 정책이 비(非)한국계 외국인에만 주목했다면 앞으로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 동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윤 교수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강조한다. 90일 이상 장기체류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는 2009년 7월 현재 44만3000여 명. 장기체류 전체 외국인 110만6000여 명 가운데 40%를 차지한다. 인구가 많을 뿐 아니라 노동 결혼 육아 주거 소비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내국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윤 교수는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조선족 동포들이 빠진 상태에서 주로 동남아 등지에서 온 비한국계 외국인 이주민들의 적응과 사회통합에 대해서만 논의해 왔다’고 지적한다. 조선족 동포들을 한국 다문화 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로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윤안진 교수의 지론에 공감되는 바가 많다. 한국인하대 교수 이진영의 ‘화교•조선족포용 역지사지 정책을’ 은 태국의 '화교화인' 전인대 직접 취재를 거론하면서 한국정부가 역지사지로 화교•中동포 포용정책을 펴 진정 행동으로 상호 신뢰를 보여줘야 한-중 공동번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중, 조선족에 모두 플라스가 되는 지론. 3)그 관계 말하기 조선족과 한국은 불가불리의 관계를 가진다. 운명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이들 간의 관계는 하나의 주요 담론으로 된다. 김정룡의 ‘한자논란과 만주논란’은 ‘재한조선족은 한국에서 글을 쓰되 조선족의 이익에 관련된 내용이거나 기타 삶의 체험 혹은 그 어떤 분야의 지식을 담은 글을 쓰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 조선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한국정부거나 언론 나아가서 한국정치에 향해 감 놔라 밤 놔라는 식의 글들은 조금 도에 맞지 않은 것 같다’로 재한조선족의 글쓰기 자세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이유로 ‘조선족은 필경 중국공민이지 한국인이 아니다’는 대전제하에 구체적으로 ‘한자논란과 만주논란’을 들어 설명하였다. 한국과 중국 사이 조선족의 입지를 생각할 때 수긍되는 바도 많다. 이수산은 “중한‘문화분쟁’해소법”으로 먼저 중한 양국국민간에 쌓인 오해와 갈등이 무엇인가 분석하고 그것의 해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그 오해를 ‘(1)다같이 을 쇠고 즐기는 해법, (2),옛날 옛고향이 그리워 중국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감, (3)역사는 두나라가 함께 풀고 써내려가야, (4)먼저개발과 공동발전’으로 풀고 ‘2,상부상조, 3,콘텐츠시대의 인터넷과 네티즌, 4,공동분모와 밝은 미래’로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김범송의 “안중근과 손중산, 그리고 '동북아공동체'’”는 현대에 있어서의 한국과 중국의 위인들의 공동한 사상을 짚어본다. 이경호는 ‘홍익인간과 중국공산당의 종지’로 한국의 전통사상과 중공의 매치점을 풀이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이수산의 ‘한중미(韩中美)함께 약동할 수 있는 시대’는 한중관계뿐만 아니라 미국을 아울러 일단 미국과 중국의 장점과 제한성을 파악한다면 자연히 다양성과 우월성을 잘 결부할 수 있어 창의력을 부단히 창출하게 된다. 그리고 ‘(韩中美)’는 한류속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과 함께 협동, 질주, 약진, 약동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는 것이다. 이상 논의가 조선족의 시각이었다면, 李成日의 ‘한중관계와 중국조선족의 역할’은 한국인의 시각으로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 글에서 작자는 한중 간의 바람직한 협력과 세계한인경제문화네트워크 구축 및 이것을 위한 조선족의 역할 활용에 관하여 피력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글로벌 코리언 네트워크에 조선족 기업들이 보다 많이 동참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하고 유도할 것, (2)중국 내 조선족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중 양국 간의 협력 체제를 적극 구축해야 할 것’, (3)한국을 비롯한 중국 이외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해외 네트워크 이용 방안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고 ‘3.한중관계 발전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역할’에 대해 (1)한중 간의 경제협력에서의 가교역할, (2)한중 간의 문화교류에서의 매개역할, (3)남북관계 개선에 있어서의 중개역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한국 뉴스타운 이동훈 기자의 “비판의 규칙과 ‘경계'”에서는 “요즘 한글의 ‘두음법칙'과 한자의 ‘간체자', 그리고 한국인들의 문화, 역사적 '인식체계', ‘언론행위'를 놓고 한국의 매체, 중국 내 교포 매체들과 네티즌, 여기에 한국인들까지 가세한 논란”을  거론하면서 ‘토론과 비판에는 반드시 규칙과 경계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는 관계를 확인한다. 그리고 ‘한국어와 조선어 中고유명칭 표기문제’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4)기타 위의 ‘1),2),3)’의 담론이 조선족과 한국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특정 민족과 국가를 벗어난 보편적인 차원의 담론을 보도록 하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서기 등개와 주장 이룡희의 ‘연변은 당신의 성공을 기대합니다’는 2010년 연변자치주 대학졸업생영입사업에 즈음하여 ‘대졸생들에게 고하는 글’이다. 고위급 간부들의 성근하고 낮은 자세가 좋다. 이수산의 ‘와 ’는 우리에게 아직 생소하고 낯설어 몸에 베이지 않은 ‘민주주의’와 왜곡되고 빗나가기 쉬운 ‘국가주의’에 대해 옳바른 개념을 심어주며 이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역시 이수산의 ‘개혁개방과 자주창신은 필승 비법’에서는 ‘1,선진적인 정치, 2,선진적인 생산력과 경제발전, 3,선진적인 국방, 4,선진적인 과학 교육 문화와 생활’에 걸쳐 ‘나라와 민족발전의 필승 비법’을 논의하고 있다. 무명씨의 ‘엄마의 지혜는 어디에 ?’는 ‘5월9일 어머니절을 맞이하여’ 엄마의 바람직한 모습과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역시 이수산의 “불루오션과 ‘연장선’”에서는 항상 남다르게, 심지어 엉뚱하게 생각하고 과감히 실천해보는 생각을 강조했다. 그리고 강순화의 ‘《혼외련》현상에 대한 몇 가지 사고’가 정통적인 담론을 진행했다면, 이 글의 질의로 쓰어진 정인갑의 ‘애정,혼인,가정문제를 좀 더 과학적으로 보았으면’은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담론을 보이고 있어 재미있다. 허상림의 ‘조글로는 쟁론자리와 여건을 마련해야’는 조글로의 바람직한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면, 네티즌의 ‘조글로는 조선족 똘똘 뭉치게 해야’는 허상림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심사광의 "’인터넷 정치’의 역할과 그 한계”는 인터넷정치에 대한 안목을 넓혀준다. 연합뉴스 기자 이상원의 ‘인터넷문화 이제는 바꾸자’는 ‘욕설, 비방 등 저질댓글 자정 노력 절실’과 ‘인터넷 윤리교육 통해 풍토교정 나서야’함을 필설하고 있다. 김정룡의 ‘조글로가 개인사이트인가?’도 인터넷문화의 본령을 짚고 있다. 강순화의 ‘직업녀성의 이중배역에 관하여’는 여성의 가정배역과 사회배역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강순화의 ‘희망을 만드는 유쾌한 실천’에서는 우리에게 아직 좀 생소한 연변대학교 민족교육원의 ‘생명열선, 녀성열선 상담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룡의 ‘누가 김문학을 뜨게 했나?’는 ‘김문학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판단을 떠나 ‘반대파’라는 안티에 의한 현상적인 ‘상반상성’의 표피적 효과만 논하고 있어 별로 의미가 없다. 이외에 안병렬의 ‘돈의 수치와 가치’, 강순화의 ‘녀성들의 삶의 변화를 보면서’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정인갑의 “문학의 ‘비애’”는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문학의 비애, 무명씨의 ‘남북통일은 천국의 이야기’는 안타까운 한반도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3. 나가는 말 조글로는 조선족의 열린 토론의 장. 우리는 할 말이 많다. 아니, 우리는 할 말을 하고 산다. 속시원할시구! 대명천지 인터넷세상 고마울시구! 우리는 말을 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래서 기호학의 대가 헤데겔은 말(언어)은 인간의 존재의 집이라 했던가. 조글로의 담론에는 조선족의 미디어답게 조선족의 지성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물론 네티즌들도 심심찮게 참여한다. 그런만큼 조선족 스스로에게 할말이 제일 많더라. 모두들 문제의식이 투철하고 문제포착이 예리하다. 우환의식에 참여의식, 대책마련에 고심이다. 그래서 참 희망적이다. 담론도 각양각색이다. 중심과 주변, 다수와 소수, 내국인과 외국인… 百花齐放, 百家争鸣의 기꺼운 국면. 우상렬의 시시껄렁한 콤플렉스에 관한 글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일부 문제점도 노정하고 있다. ‘중국 말하기’에 우리는 失语症을 앓고 있는 듯하다. ‘중국 말하기’는 네티즌의 ’汉语该如何对待外来语’ 한 편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 말하기’에는 시시콜콜 캐는듯한 감도 주는데 말이다. 그리고 일부 관점들도 좀 고루하고 신선한 감을 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글들은 좀 방만하고 딱딱하며 재미가 없다. 본고는 어디까지나 대표적인 혹은 전형적인 글에만 치우친 画龙点睛은 했으되 面 즉 전반적인 면모는 그리 고려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니 미완의 글이다. [끝] 2010-11-15  
145    인터넷결혼 댓글:  조회:4766  추천:1  2012-07-31
요새 우리 고중생이나 대학생 사이 인터넷결혼이 류행한단다. 인터넷 가상세계에서 실제 결혼흉내를 내며 놀아난다는것이다. 결혼에 대한 몽롱한 신비감을 갖고있는 고중생이나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인터넷결혼은 매력을 발산하기에 족하다. 그래서 한번쯤 “금과”를 따먹는것도 리해할만하다. 옛날 우리가 소꿉놀이를 하듯이. 그런데 인터넷결혼에는 분명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다. 인터넷결혼은 결혼과 리혼을 너무 밥 먹듯이 쉽게 한다. 신성한 결혼이나 신중해야 할 리혼을 클릭 한번으로 할수 있으니 결혼과 리혼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고만다. 현실세계에서의 결혼과 리혼에 있어서의 책임이나 의무 같은것은 찾아볼수 없다. 홀가분함 그 자체 그리고 인터넷결혼은 어디까지나 가상세계에서의 결혼인만큼 얼마든지 나의 화려한 집, 나의 멋진 차를 손쉽게 장만할수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한평생 노력해도 못 누릴 물질적부를 순식간에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백만장자가 된듯한 착각에 빠질수 있다. 물론 착각은 자유 그러나 그것이 신기루 같은 착각에 불과할 때 결국 남는것은 허전함과 허망함 그 자체 그리고 인터넷결혼 사이트에는 분명 상술이 깃들어있다. 결혼과 리혼을 마음대로 하고 착각은 자유이되 머니충전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집 한채 날릴만한 돈은 아니되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만만치 않은 부담인줄로 안다. 인터넷결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게 잘못된 결혼관을 심어주는데 있다. 사회인이 되기전에 결혼의 “금과”를 따 먹되 그것도 설익은 “금과”인만큼 현실세계에서의 결혼을 오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인터넷결혼 차원에서 현실의 결혼을 대할수 있기때문이다. 내 멋대로 놀아나는 결혼(我行我素)—천치 아니면 오만의 극치, 랑만적인 핑크색으로만 보는 결혼—보기 좋은 비누방울… 현실에서의 결혼은 장난이 아니라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랑만도 랑만이겠지만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만큼 그것은 무거운것이다. 그런데 인터넷결혼은 이 모든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 인터넷결혼은 가상의 화려한 결혼생활을 할수 있는만큼 쉽게 빠져들게 한다. 컴퓨터중독가운데 인터넷결혼중독이야말로 중증의 중증이 아니겠는가. 이 중증은 전적으로 현실감각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세월아, 네월아 내 사랑 인터넷 핑크색 사랑에 빠지다보면 현실적 결혼은 더 말할것도 없고 결국 정상적인 현실생활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이성애의 순수한 첫 감정을 이런 인터넷결혼에 대상화하고 몰입할 때 결국 그 허무맹랑함에 상처를 입어 신성한 결혼에 원천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결혼, 무조건적인 닥달이나 금지는 금물하지 말라면 더 하는 법—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의 역반심리. 그러니 일단 리성의 칼을 벼려주어야 한다. 인터넷결혼은 우리의 얄팍한 감성이나 감정에 자극하고 호소한다. 그래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헛갈리게 한다. 랭철한 리성으로 그것을 대할 때 그것은 한낱 신기루 같은 유토피아. 바로 신기루의 허상, 유토피아의 도피성을 알도록 하는것이다. 그리고 유도가 필요하다. 인터넷결혼, 하나의 소꿉놀이로 보면 안되겠는가? 컴퓨터세대들의 인터넷세계에서의 소꿉놀이 말이다. 소꿉놀이쯤이야 하나의 연극으로 볼수 있고 그 연극속에서 미래사회에서의 결혼생활을 체험하는 가운데 상상력을 키우고 어른의 “멋”을 피워 앞으로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됨은 더 말할것도 없다.그러니 한번쯤 재미로 놀아보면 그만인걸 그리고 법적으로 인터넷결혼을 이런 소꿉놀이 차원으로 룰을 제정하면 좋겠다. 요새 인터넷결혼 사이트들에서 스스로 나름대로의 규정제도를 내온다 하던데 법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잘 유도할 필요가 있다. (연변대학 교수)
144    슈퍼맨콤플렉스 댓글:  조회:5405  추천:0  2012-07-31
인간은 약하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만큼 인간은 슈퍼맨콤플렉스를 가지고있다. 강한 인간—초인은 인간의 꿈. 인간의 력사는 어쩌면 알게 모르게 이 슈퍼맨콤플렉스를 발산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유럽은 애초에 슈퍼맨콤플렉스가 강했던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전설만 놓고보더라도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주고 신의 왕 제우스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우는 끝없는 고통의 징벌을 받지만 굴복을 모르는 프로메디우스 그리고 끊임없이 굴러내리는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서지푸스, 운명의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깐힘을 쓰는 오디푸스… 14세기—16세기 문예부흥시기 유럽의 인문주의자들은 아예 인간을 우주의 정화, 만물의 영장이라고 웨친다. 이로부터 신의 시녀에서 벗어나기를 선언한다. 문예부흥시기는 실제로 거인들이 많이 나타났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후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과학문명의 창달은 인간의 슈퍼맨콤플렉스를 발산하는 하나의 확실한 경로가 되였다. 이로부터 과학만능사상이 싹트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현대철학의 개척자 니체르는 아예 “하느님은 죽었다”를 선언한다. 그리고는 서로 잘났다고 하는 세상에서 “초인”철학을 주장한다. 이 “초인”철학은 곧바로 권력의지로 련결된다. “초인”이 장땅이고 권력의지만이 최고라는것이다. 이것이 히틀러에게 잘못 리용되여 게르만 우월주의로 나아갔고 세계를 재패하려는 야망으로 미쳐나게 했다. 제2차세계대전후 랭전구도하에 미국과 구쏘련은 초급대국이 되여 서로 니 잘났니, 내 잘났니 다투었다. 미국은 이민개척의 나라로서 슈퍼맨콤플렉스가 농후하다. 칼 한자루로 식민세력을 놀린 졸라전설이 유전될수 있은것도 이런 슈퍼맨콤플렉스에 기인하는것인줄로 안다. 서부대개발시기 카우보이 모자, 청바지에 달랑 권총 한자루를 차고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린 사나이들도 여기서 례외는 아니다. 헤밍웨이의 싼티야고를 비롯한 일련의 강자형상이 미국에서 그렇게 공명을 불러일으킨것도 이런 슈퍼맨콤플렉스의 기대시야에 들어맞았기때문이다. 미국의 이런 슈퍼맨콤플렉스는 대개 초급(超級)개인영웅주의로 나타난다. 현재도 슈퍼맨은 확대, 재생산된다. “초인(超人)”, “박쥐협객”(蝙蝠俠), “거미협객”(蜘蛛俠) 등 미국의 영상매체에는 일련의 초급개인영웅주의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문제해결의 키를 쥐고 신출귀몰하며 대개 단독으로 행동한다. “미국대장(美國隊長)”을 보면 신비한 호르몬을 주입받은 미국대장이 히틀러를 일거에 제거하는 쾌거를 보이고있다. 슈퍼맨콤플렉스는 우리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신선도사나 협객 이미지로 나타난줄로 안다. 일반무술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일종 신비한 도술, 환술까지 구사하는 미국의 현대과학기술 및 미래 예측적인 과학환상소설속의 이미지와는 다른 이미지. 향항 김용의 무협소설이 우리 중국사람들속에서 그렇게 인기를 누린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슈퍼맨콤플렉스가 신선도사나 협객 이미지로 나타나는데도 특색이 있겠지만 소프트적인 권력지상주의로 나타나는데 더 특성이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유교를 배워서 출세한다는—출세주의를 지향해왔다. 이런 출세주의는 곧 권력지상주의에 다름 아니였다. 너도나도 한자리 하기, 쥐꼬리만한 장자라도 붙어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는단다. 이로부터 관리에 대한 숭배 그리고 어떻게 해서나 한자리 하기는 바로 우리의 슈퍼맨콤플렉스의 발산행태가 되겠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자기의식이나 주체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관리 및 권력에 기생하는 기생충이 되고말았다. 학문도 관리 및 권력의 시녀가 된 비극을 면할수 없었다. 현재 우리 대학가만 놓고보더라도 쥐꼬리만한 처장자리 하나 놓고도 교수라는분들이 서로 하겠다고 벌떼처럼 달라붙는다. 가련할시구! 우리의 슈퍼맨콤플렉스는 현대라는 이 시점에서도 “공부하여 출세한다”는 출세주의, 관리숭배 및 권력지상주의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심각한 비극이 도사리고있는것이다. 슈퍼맨콤플렉스의 발산에 있어서 유럽이나 미국식의 초급개인영웅주의적 추구도 문제가 되겠지만 관리숭배 및 권력지상주의 행태도 문제가 된다. 슈퍼맨콤플렉스가 인간의 하나의 무의식적 콤플렉스라 할 때 이것을 잘 발산시키는것도 삶의 지혜.
143    삶의 질 댓글:  조회:5783  추천:2  2012-07-11
삶의 물량화가 확보되면서 삶의 질문제가 심심찮게 얘기되어온줄로 안다.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일으키는 법, 그럼 삶의 질이란 무엇인가? 갓 결혼한 젊은 인도부부와 미국부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골인, 그런데 그 양상은 전혀 달랐다. 인도부부는 아껴 먹고 아껴 쓰며 아글타글 돈을 모았다. 집을 사기 위해서이다. 미국부부는 은행대부금을 내여 애초에 마음에 드는 그럴듯한 집을 장만한다. 그런데 재미나는것은 인도부부가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게 되자 그만 병에 걸려 죽게 되였다는것이다. 미국부부는 좋은 집에서 살면서 죽게 되자 은행대부금도 거의 다 갚았다는것이다. 이는 두 나라 사람의 다른 인생가치관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즉 각기 소유욕과 사용욕에 집착하는 부동한 인생살이, 이로부터 삶의 질문제가 제기된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너무 쉽게 소유욕에 놀아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긁어모으기가 장땡, 내것이 되여야 직성이 풀리는 법, 바로 이 소유욕에 놀아나 수전노가 되고 고뿔도 남에게 주기 싫어한다(铁公鸡一毛不拔). 우의 인도부부도 바로 소유욕에 놀아나 인생을 즐기기는커녕 좋은 세월을 그만 아글타글하다가 볼일을 다 보고말았던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부부는 사용욕을 충족시키며 인생을 즐겼던것이다. 두말할것 없이 미국부부가 삶의 질이 높은 것이다. 나는 우리 배달민족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하루를 살아도 좀 사람같게 살자!”,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수 있다면”의 의식이 강하다. 죽은 정승이 산 강아지보다 못하다(好死不如赖活). 무조건 살아남기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노예적근성이 적다. 우리는 일제식민지가 되자 독립군이 떨쳐 일어났고 의렬단이 활약했으며 의용군, 광복군이 총을 들었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기라성 같은 의사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우리 연변만 해도 항일렬사 90%  이상이 조선족이 아니더냐?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가 되려 하지 않는다(不爲瓦全, 寧爲玉碎). 개, 돼지 같은 노예적인 삶보다는 독립자주의 자유로운 삶—사람 같은 삶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것이다. 삶의 질의 최고경지를 실현하는것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좀 사람 같게 살자!”,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수 있다면”의 삶의 질 의식이 너무 강해 문제가 되는듯도 하다. 한국 IMF때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되여 길가에 나앉게 되자 가족동반자살을 택한다든가 그리고 우리의 무계획적이고 무절제한 흔전만전의 소비풍조, 그리고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의 난립하는 유흥업소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나는 우리 연변을 참 좋아한다. 일단 깨끗해서 좋다. 나는 지금도 1980년대까지도 심심찮게 볼수 있었던 버섯대가리 같은 초가지붕에 흰 회칠을 한 벽이 인상적인 초가집이 그리워날 때가 있다. 단지 노스텔지아적인 정서때문에 아니다. 물론 그 초가집에는 가난의 때국이 흘렀다. 그런데 그 초가집은 그렇게 아담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집안에 들어서면 선반에 반짝반짝 포개여놓은 꽃양푼들 그리고 기름기 흐르는 가마솥 그리고 사람의 그림자가 어리는 티끌 하나 없는 노란 장판…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포근하고… 정말 사람 사는 집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좀 달리 해보기도 한다. 이른바 삶의 질이란 굳이 물질적인 풍요속에서 웰빙이요, 다이어트요 하는데서만 생겨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사실 우리는 현재 물질적으로 살만하게 된줄로 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물질적으로 어려웠던 못 살던 옛날을 생각하게 되고 그리워하게 된다. 왜? 그때 우리는 마음이 편했기때문이다. 누구나 다 고만고만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현재는 욕망이 팽창할대로 팽창해 내가 잘 났나, 니가 잘 났나 서로 비기기, 이른바 경쟁의식에 멍들어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인간소외의 현대병이 곳곳에 만연하고있다. 물질과 정신의 괴리에서 삶의 질은 떨어졌다고 볼수 있다. 현대는 멋진 아빠트들이 쭉쭉 일어서고 승용차들이 쌩쌩 달린다. 그런데 그 아빠트에서는 맞은켠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 승용차들이 인도를 마구잡이로 달릴 때 그것은 빛좋은 개살구의 이른바 현대의 물질문명에 다름 아니다. 정신문명이 서지 않은 현대의 삶은 삶의 질을 운운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삶의 질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같이 갈 때만이 정녕 확보될줄로 안다.
142    연변 댓글:  조회:5754  추천:0  2012-06-29
우리 연변사람들은 연변밖의 쪽을 “안쪽”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 스스로 “바깥쪽”이라는 말이 되겠다. 이렇게 놓고볼 때 우리에게는 변두리의식 내지는 소외의식이 앙금처럼 서려있음을 알수 있다. 이에 나는 우리 “연변”의 한자어새김을 음미해보며 이런 앙금을 녹여본다. 연변(延边)—변두리를 넓힌다, 어쩌면 우리는 확장주의. 사실 우리의 꿈은 저 푸른 하늘로 나래치거늘. 우리는 언녕부터 연변이 좁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개방의 봄바람과 더불어 잘도 나갔다. 김치—짠지장사, 연길냉면—불고기→관내진출, 조선족도 잘 모르는 관내에서 우리는 연길랭면브랜드를 심어놓았고 우리 맛을 전파했다. 그리고 우리 연변 “코신아줌마”들, 중국어도 잘 안 통하는 중국 대륙끝 도시인 광주까지 허휘허휘 달려가서 천이요, 전자시계 같은 물품을 구입해와서는 동북에서 제일 큰 연길서시장을 형성하지 않았던가. 농경문화에서 상업문화에로의 화려한 변신! 사실 우리는 중국이 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으로, 로씨야로 뻔질나게 다니지 않았던가. 조선명태는 연변의 맥주안주브랜드! 그러다가 세계랭전구도가 깨여지면서 우리는 한국으로, 일본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갔다. 이로부터 중국 심양의 서탑, 북경의 망경(望京), 상해의 룡백(龙伯)… 새로운 코리아타운의 주역을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는 연변거리까지 형성하고. 연변은 택시천지. 손만 들면 언제나 쉽게 택시를 탈수 있다. 개혁개방 교통첨병으로 나타난 택시—우리 “연변아가씨”들 손에서 먼저 쌩쌩 달렸다. “규방”이나 “안방”에 앉아있어야 할 우리 “연변아가씨”들의 당찬 택시기사모습들이 한동안 얼마나 인상적이였던가. 음유지미(阴柔之美)와 양강지미(阳刚之美)의 하모니. 연변은 노래방천지, 연변노래, 조선노래, 한국노래, 일본노래, 영어노래… 줄기차게 울려퍼진다. 국제적인 노래하모니, 여기서 피여난다. 연변은 술 한잔 들어가면 춤노래가 절로 나온다. 음유지미(阴柔之美)가 넘친다. 연변은 축구의 고향. 조선족으로 구성된 길림성축구팀, “연변오동팀”, 언젠가 전국을 석권하지 않았던가. 양강지미(阳刚之美)가 넘친다. 음유지미(阴柔之美)와 양강지미(阳刚之美)의 하모니. 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우리 중국과 조선반도, 로씨야 3국 접경의 바다를 낀 금삼각구에 위치해있다. 개혁개방 글로벌화시대에 그 어느곳보다도 돋보이는 존재. 연변은 조선사람, 한국사람, 로씨야사람, 일본사람…이 모여든다. 그리고 우리는 조선으로, 한국으로, 로씨야로, 일본…으로 나간다. 외국의 패션이 실시간대로 류행하는 곳이다. 여기에 정치든 무엇이든 우리는 시대와 함께 발전한다. 그래서 우리는 문맹도 가장 일찍 퇴치했고 교육보급률도 가장 높았으며 대학생비률도 가장 높았다, 연길역, 연길공항은 항상 만원, 바쁘다, 바빠! 연변은 글로벌, 적어도 동북아 물동량 및 금융 그리고 관광의 중심으로 부상하고있다. 현재 추진중인 연룡도, 선도구 내지 훈춘특구건설 등은 여기에 박차를 가할것이다. 연변은 말 그대로 다이내믹—력동적이 될수밖에 없다.  연변은 술문화가 발달했다. 전국 각 곳의 술이 연변에서 란무한다. 아직도 새벽에 “뚜—푸”할 때까지 마시는 족속들이 있다. 손님이 오면 권커니작커니는 기본. 여기에 2차, 3차… 전근대적인 시대락후자—“촌놈”들이 사는 곳 같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들이 잃어버린 정이 있다. 일종 “정 하나로 맺어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정이 있다. 그래서 연변을 떠나간이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지 않던가. 술문화는 일종 하나로 되는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의 세계. 쪼개고 나누는 아폴로적인 리성의 세계와는 정반대. 인간은 리성적인 존재. 우리는 이 점을 너무 많이 강조해온듯하다. 그래 오히려 많은 현대병이 생긴줄로 안다. 이로부터 결과적으로 인간은 리성만으로 못 산다는 결론이 자연적으로 도출되였다. 요새 IQ보다 EQ가 더 강조되는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현대화와 더불어 많이 잃어버린 우리 인간의 디오니소스적인 정과 감성, 바로 우리 연변사람에게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물론 그것은 과잉로출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이 디오니소스적인 정과 감성이 아폴로적인 리성과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인간은 전인(全人)이 되고 미래세계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우리 연변사람에게는 그 원동력의 기본바탕이 마련되여있다.  
141    뢰봉, 봉사형의 전형 댓글:  조회:6628  추천:1  2012-03-14
3월이면 우리는 지난 40여년간 줄곧 “뢰봉을 따라배우는 월간”활동을 전개하여왔다.  한것은 1963년 3월 5일 뢰봉이 타계하자 당시 모택동주석이 “뢰봉을 따라배우자”라는 제사를 쓰고 뢰봉을 따라배울것을 호소한것이다. 이로부터 전국적으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붐이 일어났다. 1970년대 초반 내가 소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처음 배운 노래도 아마 “따라배우자 뢰봉”이다. 그리고 새 천년에 들어선 2000년에 단중앙에서는 3월 5일을 “중국청년 자원봉사날”로 정하였다. 보다싶이 3월 5일은 자원봉사와 련결이 된다. 뢰봉정신의 주요한 내용의 하나가 바로 자원봉사정신인줄로 안다.  뢰봉은 사회주의 새 중국이 키워낸 성심성의로 인민을 위해 봉사한 전형이다. 뢰봉은 사회주의가 얼마나 고상한 사람을 만들어낼수 있는가를 보여준 한 케이스가 되겠다. 뢰봉은 부자가 아니다. 매달 근근이 몇원의 생활비를 받는 군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는 아껴 먹고 아껴 쓰며 일전, 이전 아글타글 모아 어려운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뢰봉은 신구사회의 대조속에서 사회주의사회의 우월성을 페부로 느꼈고 광범한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고 또한 인민대중을 위한다는 사회주의의 취지에 더없이 공감했다. 그래서 그의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데는 티끌만한 사심도 없고 생색도 없다. 그것은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것이였고 전력투입이였다.  현대 제3차 심리학사조를 몰고온 미국 마슬로의 인간 수요층차설에 의하면 인간의 수요는 저급수요로부터 고급수요로 나아가는데 가장 높은 경지의 수요가 바로 자기실현의 수요라고 한다. 이를테면 의, 식, 주 및 안전, 귀속, 존중 등의 수요가 만족되면 자기실현의 수요가 생겨난다는것이다. 그럼 자기실현의 수요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원봉사정신의 실현이 아니겠는가.  먼저 남을 생각하고 무조건 베풀고 남을 돕는데서 인생의 최대희열을 느낀다는것이다. 이 최대희열이 바로 고봉체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저급수요를 쉽게 만족 받는 선진국에 이런 자기실현 및 고봉체험을 추구하면서 인생의 최대희열을 맛보는 사람들이 많다는것이다. 선진국에 자원봉사자가 많은것은 바로 이때문이라는것이다. 현재 우리 중국도 상당히 살만하게 되였다. 그래서 자원봉사자가 용솟음쳐나오는줄로 안다.  몇년전 문천대지진이 일어나자 누구의 호소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달려가고 기부를 하지 않았던가. 우리 중국도 자원봉사자, 기부문화의 형성에서 기꺼운 국면이 나타나고있음을 알수 있다. 마슬로의 인간 수요층차설은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너무 배가 부르고난후 례의도덕을 알게 된다는 도리로만 흘러 문제점을 로정하고있는것도 사실이다. 사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것이 아니다. 인간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일수가 있다. 동물은 남아도는 먹을거리가 모자라지만 인간은 모자라는 먹을거리가 남는 법. 뢰봉은 바로 이런 마음의 부자인 사람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한평생 떡볶이나 오뎅 장사로 일푼이푼 모아 림종에 평생 모은 돈을 교육사업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쾌척하는 여느 할머니도 이런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다. 이런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은 물질적부의 여하를 떠나 항상 무조건 남을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가짐이 갖추어져있다. 물론 뢰봉이나 이런 할머니 같은 마음이 부자인분들의 자원봉사나 기부는 그 어떤 사적인 동기나 그 어떤 생색을 내는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대재벌이 생색을 내면서 몇천, 몇억을 낸것보다 이들의 순수한 마음에서 기부한 얼마 되지 않는 돈일지라도 훨씬 돋보인다.  나는 인간을 천사와 악마의 이중성으로 본다. 뢰봉이나 이런 할머니들이야말로 인간의 아름다운 천사들이다. 물론 인간의 이런 천사적 모습은 타고난 면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교육이나 훈련으로도 키울수 있다. 그래서 현재 많은 국내외 대학교들에서 자원봉사 학점을 수료해야만 졸업할 수 있도록 되여있다. 우리 중국 남방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자원봉사 학점은행을 운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학생자원봉사자란 말이 이미 낯설지 않은 친절한 말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여있다. 오늘 물욕이 넘쳐나고 물질적으로 풍부한 반면 마음이 가난한자들이 많은 이 시점, 뢰봉정신을 한번 더 되새겨보자. 뢰봉정신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영원히 되새기고 행동에 옮겨야 할 정신적좌표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좌표야말로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기본바탕이 되기때문이다. 
140    “먹는다”는데 대한 소론 댓글:  조회:5564  추천:1  2012-02-22
새해 들어 양력설부터 먹고 마시며 놀기 시작한것이 음력설, 보름이 지났다. 하지만 3.8녀성의 날을 계기로 “3.8절맞이, 3.8절경축, 3.8절 보내기”라고 하면서 3월달도 다 지나야 시름을 놓는다. 지난날에는 우리들이 워낙 어렵게 살았었다. 한끼 해결이 막막할 때가 많았었다. 물론 아직도 절대빈곤에 처해있는 곳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것은 “먹음”대한 집착—못 먹은 콤플렉스! 원래 재래로 “인간은 먹는것을 기본”으로 하였으니. 의, 식, 주 가운데 먹는것이 으뜸, 먹는것이 장땅이다. 어지간하면 “먹다 죽는것은 한이 없다”는 격언까지 등장하였겠는가.   먹는데 유난히 신경 쓰기. 인간도 동물인만큼 이 세상에 왕림하자마자 젖부터 먹어야 산다. 그래선지 커서도 이 세상에 먹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온것처럼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이 적지 않다. 요새는 그래도 살만하게 되였다. 해서 어디 더 맛 좋은데 없는가 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새로 나온 식당은 한번쯤 다 가보기. 끊임없이 새로운 먹을거리를 탐색. 새로운 먹을거리, 새로운 술... 그러니 무슨 단골손님하고는 인연이 멀다. 단골손님이 없는 연길 식당, 오래 가기 힘들다. 보기에 안스럽다.   못 먹는것이 없다.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와 땅우의 책상다리 내놓고 모든 날아다니는것과 모든 네다리 가진것을 다 먹는다는 광동사람들. 광동사람들 웃을 일이 아니다. 참새, 비둘기, 개, 뱀... 먹는데 이골난 우리다. 광동사람과 우리 100보에 50보라 피장파장. 여하튼 중국사람들 먹는데 2등이라면 서럽다.  공짜 먹기. 이 세상 공짜 먹기만큼 맛좋은 음식은 없다. 누가 “손님접대”한다는 소리에 두귀가 벌쭉 열리고 군침이 스르르 돈다. “손님접대”는 항상 반가운것. 이 공짜 먹기가운데도 그래도 공금 먹기가 가장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은걸. 누이 좋고 매부 좋기 아닌가. 여하튼 공짜 먹기는 흥분의 극치. 냠냠∼, 공짜는 양재물도 마신단다.   많이 먹기. 배 터지도록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먹을 때는 혁띠 풀어놓고 먹기. 여기에 짝짝꿍으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음식이 남아야 그럴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부페에 가서라도 “먹고 먹으면 못 먹을리 없거늘 사람들 제 아니 먹고 먹기만 싫다 하더라!”를 뒤집고 배 터지도록 먹기. 그리고 집에 와 또 소화제 먹기. 똥배가 밉지만은 않은 우리다.  똥배도 무슨 인격이라나.  똥배를 내밀고 끄르렁~끄르렁~룡트름하며 이 틈,  저 틈 이발을 쑤셔대야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래서 못 먹은 콤플렉스를 순 기능으로 승화하기도 한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고 먹는것이 약 맞잡이란다. “병종구입(病從口入)” 다시 말하면 병은 입으로부터 침입한다, 그러니 먹을거리를 조심하란다. 그리고 “적게 먹고 소식하고 깨끗한걸 먹으라”라고 한다. 듣던중 반가운 소리. 먹기를 “도(道)”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한다. 먹기, “미기명왈식도(美其名曰食道)”가 아니더냐. 그래서 무슨 미식이요, 미식거리요에 미식가요, 식도락가요 하는 말이 생겨난줄로 안다. 그래 대식가보다는 미식가, 식도락가 소리가 듣기 좋지. 중국은 먹거리천국. 동서남북 8대 료리, 먹어내기에 바쁘다. 그래 먹어 조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년간 얼마, 얼마 먹어치운다는 우리가 아닌가. 우리는 먹는 맘모스. 그럴진대 아무리“식약동원”이요, “식도(食道)”라 하더라도 한번쯤 되돌아보는것이 필요하다.  먹는 문제 간단치가 않다. 물론 이젠“인간은 먹는것을 기본”으로 하는  저차원의 빈곤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고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 인간실존의 철학적명제가 제기된다. 동물은 분명 먹기 위해 산다. 먹는것이 동물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살기 위해 먹는것이 정식. 먹고선 일을 하고 가치창출을 한다. 그러니 좀 살기 위해 먹는 인간이 되자! 우리 좀 신사가 되여보자. 보다 높은 정신적차원의 경지를 추구하는 신사! 우리는 현재 배고파서 아무거나 집어먹는 그런 초라한 단계가 아니다. 그러니 보기에 좀 거북스러운 못 먹은 콤플렉스도 한방에 날릴수 있는 단계에 와있는줄로 안다.  
139    영생콤플렉스 댓글:  조회:5725  추천:0  2012-02-08
영생욕구와 아침이슬 같은 우리의 실존의 모순, “100세도 못사는 인생에 1000년을 우려한다‘人生不满百,常怀千年忧’”고, 중국 고대문학사의 고시 19수 첫 수의 시구,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다‘人生譬如朝露’”고 한다, 조조의 유명한 시구—백년도 못사는 인생, 아침 이슬 같은 인생… 결국 죽는다는 실존은 우리를 인생허무에 빠뜨리기에 족하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래도 항상 영생, 영생에 가있다—인간의 비원. 그래서 생겨나는것이 영생콤플렉스. 우리는 평시에 죽음을 떠 올리기조차 싫고 주검을 보기조차 싫다. 죽음이나 주검을 떠올리거나 보게 되는 병원이나 화장터 가기도 꺼림직하다. 이것들은 우리의 영생콤플렉스만 자극하기때문이다. 우리는 제 명을 제대로 못살고 죽은 요절을 가장 불쌍히 여긴다. 그런데 인간은 리성적인 존재—똑똑하다. 그래서 안다—사실 영생하기 힘들다는것을. 그래서 차선책으로 불로장생을 추구한다. 불로초, 웅담—보신약 열심히 집어먹기다. 진시황이 서복더러 3000 선남선녀를 데리고 동해 삼선산에 가 불로초를 구해오게 한 이야기 아직 삼삼하다. 십장생이 부럽다. 우리는 십장생에 주술을 걸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만세!’, ‘위대한… 영원하라!’”라고 주술을 외운다, 건다. 우리는 현실생명의 연장선상에서 실제로 미이라를 만들기도 한다. 고대 애급 왕들의 미이라, 현대 위대한분들의 미이라… 그런데 현실은 “십중팔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十有八九不如意’”, 영생은 그림의 떡—쌓여가는것이 영생콤플렉스. 이로부터 종교의 존재리유가 생겨난다. 종교는 우리의 영생콤플렉스를 발산시켜준다. 우리의 삶은 현세로 끝나는것이 아니다. 이승과 저승, 영원한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당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던가. 그런데 저승—극락이요, 천당이요 하는 것들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도교에서는 아예 현세적인 영생을 만들어낸다. 신선이 바로 영생적인 존재. 신선은 현세에서 수양과 수련을 하거나령단묘약을 고아먹으면 된단다. 그래서 더 매달리고싶은것이 신선.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잘 살려는것도 영생콤플렉스를 달래는데 있다. 그래 영양가 있는 음식, 웰빙식단, 건강식품에 항상 신경이 쓰이지 않던가. 한국 KBS TV방송국의 “생로병사의 비밀”프로는 영원히 인기만점. 우리가 열심히 등산을 하고 헬스클럽에 다니며 건강을 챙기는것도 사실 영생콤플렉스를 기저에 깔고있다.  그럼 어떻게 이 영생콤플렉스를 발산하지? 우리의 선인들은 “공을 세워 나라와 가정의 태평을 도모한다‘立功—修 身齐家治国平天下’”적인 “풍공립업‘丰功伟业’”, “덕을 쌓고 의리를 취한다‘立德—舍生取义’”적인 “뭇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는 ‘为人师表,立言—著作等身’”적인 저서로 영생콤플렉스를 날린다. 바꾸어 말하면 “립공, 립덕, 립언 ‘立功, 立德, 立言’”적인 대상화로 영생을 추구한다. 미술, 조각, 사진… 등 문학예술도 결국 따져보면 내 삶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영생콤플렉스를 발산하는것에 다름 아니다.  몸과 육체는 가도 정신과 령혼은 영원히 남는 그런 경지를 창출해야 한다. 결국 정신적인 영생, 이른바 “구비‘口碑’” 즉 구구전승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초유록,  뢰봉, 장지신… 같이 되여보는거다! (연변대학 교수)
138    캉가루족 댓글:  조회:6931  추천:4  2011-12-14
현대사회는 직업난의 세상. 직업 하나 얻기가 점점 하늘의 별 따기 맞잡이다. 속되게 말하면 밥통 하나 얻기가 그렇게 어렵게 되였다는 말이 되겠다. 속담으로 말하면 “중은 많은데 죽은 적다(僧多粥少)”는것이라고 할가. 그래서 얼마전 한국에서 생겨난 신조어가 캉가루족. 여기에 중국도 뒤질세라 생겨난 신조어가 “늙은이를 갉아먹는다(啃老族)”는것이 나타났다. 캉가루족도 좋고 삽로족(啃老族)도 좋고 다 제에미, 제애비 등쳐먹는다는 말이 되겠다. 직업을 갖고 독립을 해서 자기절로 살아가거나 부모에게 경제적보탬이 되여야 하나 오히려 그 반대라는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직업은커녕 오히려 부모에게 얹혀살아가는, 지어는 호의호식한다는 말이 되겠다. 자식 덕에 살기는 다 긇은 사회, 한국의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내가 너네만 할 때 범 때려잡고” 어쩌구, 우리 할아버지대 얘기는 헛된 호기이나마 어느새 다 구중천에 날아가버리고 들을수조차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20~30대 젊은이들의 취업난, 현대사회의 고민.  현재 지구상 인간의 수는 벌써 70억을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 무슨 컴퓨터화요, 자동화라인이요 하다보니 사람이 들어설 곳이 적어졌다. 그러니 캉가루족도 좋고 삽로족도 좋고 어쩌면 리해가 간다는 얘기다. 그렇다 하여 이런 사정으로만 눈 감아줄 일이 아니다. 캉가루족이나 이런자들가운데는 호기를 부리는자들이 많다. 나르시시즘적으로 자기 스스로는 대단하게 보는데 실제 그렇지 못하다는것이다. 뭐 일 하나 시켜보면 제대로 해내는것이 없으니 말이다. 결국 자기 스스로를 모르는 맹점에 놀아난다는 말이 되겠다. 그리고 캉가루족이나 삽로족들의 마음가짐도 문제인줄로 안다. 이들가운데는 일획천금 날아가는 큰돈을 잡으려거나 언제 하늘에서 큰 떡이 허망 떨어지겠는가고 기다리는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중 직업의식도 문제가 되는 친구들이 상당히 있는줄로 안다. 어느새 직업의 귀천의식이 팽배해 3D업종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블루업종도 우습게 본다. 오직 화이트업종만이 장땅이란다. 그리고 돈 많이 주는 직업만이 좋은 직업이란다. 나의 개성, 흥취는 무시한채.  이런 세대의 출현에는 우리 기성세대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응아~응아~  밥을 떠먹여주고 옷을 입혀주는 그런 공주, 왕자들 양상, 자연히 공주병, 왕자병 증후군이 만연되기마련. 그래 공주나 왕자들이 직업이 뭐 필요하냐 말이다. 이래저래 캉가루족이나 삽로족들은 직업하고는 인연이 멀어지기마련이다. 현대사회의 캉가루족이나 삽로족들의 직업적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우리 기성세대들이 자기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들을 위해 선뜻이 자리를 내주는 그런 정신 말이다. 늙은 령양들이 젊은 령양을 위해 희생하는 그런 정신 말이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은 스스로 창업정신도 있어야 한다. 뜻이 있으면 성사되는 단계가 아니더냐. 젊음은 아침 8~9시에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다. 젊은이들은 생각이 발랄하고 아이디어가 뛰여나고 힘이 넘치는만큼 창업정신과 가장 쉽게 매치되고 성공할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있다. 세계 성공적인 벤처기업은 거의다 젊음의 패기로 일궈낸것이다. 세계 갑부 퍼소널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시자 빌게이츠는 한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정부차원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실제적인 정책이나 경제적혜택을 기울여야 한다. 례컨대 현재 문화대국을 건설하는 마당에 구체적인 문화산업정책을 립안하는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활약할수 있는 문화콘텐츠면에서 적어도 방향성을 확보할수 있을줄로 안다. 그리고 벤처기업 창업시 저리자로 대금을 대출해준다든가, 세금을 면제해주든가 등 혜택을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정부차원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물론 젊은이들의 창업정신이나 정부차원의 지지 및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성공여부는 미래사회발전의 추향을 잘 읽는데 있다.    
137    공산당원의 본색 댓글:  조회:7477  추천:3  2011-11-25
나는 며칠전 혁명전쟁영화를 보면서 재미나는 장면을 하나 목격했다.  우리 공산당부대와 국민당부대가 돌격에 림하면 지휘관들의 행태가 정반대임을 알게 되였다. 우리 공산당부대의 지휘관은 "동지들, 나를 따라 앞으로 돌격!" 하는데 국민당부대의 지휘관은 "형제들,  나를 위해 돌격!" 한다. 공산당부대의 지휘관은 전사들의 앞장에 서서 달려가고 국민당부대의 지휘관은 병졸들 뒤에 서서 개 쫓듯한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 공산당부대가 보잘것없는 "좁쌀에 보총"(小米加步槍)으로 신식무기로 발끝까지 무장한 몇배나 되는 국민당군대를 전승할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생을 남 먼저 하는 희생정신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산당원의 본색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희생정신을 솔선수범으로 실천할 때 사실은 웅변보다 낫다는 설득력으로 무한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 조선족 문학대부 김학철이 쓴 《격정시대》도 보면 조선의용군의 돌격에 림해 "공산당원들,  한발 앞으로!"의 공산당원의 형상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던가. 구중국을 뒤엎고 새 중국을 건립한 근간에는 바로 중국공산당원들의 이런 희생정신이 있었던것이다.  그럼 오늘날 평화시기에 고생은 남 먼저하는 그런 희생정신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전심전력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데서 나타난다. 초유록이나 뢰봉은 바로 이런 공산당원들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주변에는 이런 공산당원들이 좀 적은게 아쉽다. 나는 대학교에서 학생당원 발전사업을 좀 책임지고있다. 입당하겠다는 친구는 많고 조직에서 내려보낸 인원수는 적어 참 골치가 아프다. 그런대로 엄한 심사를 거쳐 당원으로 발전시킬 경우에도 솔직히 말해서 그 입당동기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  입당동기가 불순하다는 말이 되겠다. 이른바 대학교기간에 얼렁뚱땅하여 당적을 얻으면 사회에 나가 직장을 찾는데 플라스가 되게 한다는것이다. 사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공산당원의 신분을 하나의 우월감 또는 특권으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특히 공산당간부들가운데도 수중의 권력을 사유화하여 자기 배를 채우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저자세로 군중속으로 들어가 군중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의 대변인이 되는 경우가 적다. 반대로 머리를 우로 들고 줄서기에 바쁘며 웃사람의 눈치만 보고 새로운 출세가도의 길을 노린다. 현재 우리의 많은 부정부패도 사리사욕에 들떠 당의 근본취지를 망각하고 정도를 벗어났기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많은 간부들은 포화가 흩날리는 전쟁의 나날에는 공산당원의 본색을 잃지 않을수 있었다. 그것은 적아가 분명한속에서 정신을 차렸기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의 시기, 특히 오늘날 개혁개방의 시대에 쉽게 공산당원의 본색을 잃을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각종 욕망이 팽창하는 현대라는 시점에 와있으며 시장경제가 가동된 상황에서 돈이라는 사탕폭탄이 란무하기때문이다.  모택동의 "사탕폭탄"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한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욕망의 노예가 되고 사탕폭탄의 달콤한 공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닐 때가 많다. 공산당원들도 오장륙부를 가진 인간인이상 여기서 자유로울수 없다.   현시대 우리 공산당원들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는줄로 안다. 그럼 "여기서" 자유로움을 얻고 우리의 "고민"도 떨쳐버릴수 있는 경로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머리 숙여 유자의 소가 되고"(俯首甘爲孺子牛)" 천하 사람이 우려하기 먼저 우려하고 천하 사람이 즐긴후에 즐기는"(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데 있다. 바로 고생은 남 먼저하는 자기희생정신에 기반한 공산당원의 본색을 찾는데 있다. 이로부터 진정으로 대서특기할만한 공산당원의 숭고한 형상이 수립될수 있는것이다.
136    등산의 묘미 댓글:  조회:7074  추천:2  2011-11-09
등산붐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 사람들은 오늘도 이 산 저 산 오르느라고 야단법석이다. 등산의 리유는 야밤에 불보듯, 신체단련하기, 그럴듯하다. 등산의 건강효과 자타가 공인하니 말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의지력을 키우련다고.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거늘 사람들 제 아니 오르고 태산만 높다 하더라!" 그렇다. 오르고 오르면 산은 정복되는 법. 사람들 정상에 올라 나는 이 산을 정복했노라, 야호∼ 히말라야산정복은 영웅대우. 그래 나의 의지가 태산같이 높거늘 아니더냐! 물론 건강도 좋고 정복도 좋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이나 인간우월감의 맹점이 도사리고있다.  이런 맹점은 부메랑이 되여 우리에게 톡톡히 경종을 울려주었다. 생태고리파괴, 환경오염, 오존층빵구…결국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있다. 우리는 현대라는 이 시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반성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래서 우리 중국의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고방식 및 가치관이 더없이 돋보이게 되였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건설도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현대적표출에 다름 아니다. 현단계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은 상호보완하는 조화의 관계이지 그 누가 중심이고 우월감을 느끼는 관계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새삼 등산의 의미를 되묻는다. 등산, 우리는 등산을 하면서 자연에게서 먼저 한수 배워야 한다. 그래 우뚝 솟은 양강지미(陽剛之美)의 산을 닮아 굽실굽실하기에 바쁜 세속의 나의 허리를 한번 쭉 펴보는것이 어떤가. 그래서 TV드라마 “수호전” 주제곡에서 '영웅의 풍격 뭇산과 같어라' 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저 불평불만 없이 뚫리고 막히고 높고 낮고 넓고 좁은 대로 흘러가는 음약지미(陰柔之美)의 물을 닮아 아글타글하지 말고 우리네 인생도 둥둥 띄워보는것이 어떤가. 그래 우리의 성인들이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던가. 그렇다. 산수자연은 말없는 우리의 선생이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성인들이 산수자연에 노닐은줄로 안다. “인자약산, 지자약수”(仁者樂山, 智者樂水). 멋있다. 여기에 양강지미(陽剛之美)와 음약지미(陰柔之美)의 어울림에 기기괴괴-기암괴석, 기화이초는 보기만 해도 좋은 자연의 눈요기.  산은 말없이 거기에 서있고 물은 끝없이 흘러간다. 나는 산수의 근엄함과 영원성에 기가 죽고 만다. 그래서 아침 이슬 같은 인생 주제에 뭐 그리 촐랑대며 "정복" 운운할수 있느냐고 말이다. 산사태, 아니 산길을 갈 때 락석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우리가 아니냐! 그리고 니가 야후∼할 때 산은 항상 맞받아치지 않던가. 사실 우리는 산이 못되여 안달이 나하기도 한다. 갑순이, 갑돌이 다정히 손잡고 어느 명산에 올랐다. 그들은 금지사항을 무시한채 아스름한 벼랑턱에 "갑순이, 갑돌이 모년 모월 모일에 여기에 왔다 감" 따위를 새긴다. 그들은 산의 영원성에 부쳐 자기 사랑의 영원성을 기탁한다. 사실 어디 이들 민초들뿐이랴. 명산이면 명산일수록 명인이나 위인들이 더 극성을 부리며 자연훼손이구 뭐구를 떠나 자기의 어구를 새기거나 이름을 새기기에 바쁘다. 그들은 자기들의 존귀함이나 존함을 그 누구보다도 더 영원한 이 산에, 이 자연에 남기고싶었던것이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지 않던가? 가련할시구 인간이여! 그래 영원한 자연 앞에 "정복"이 가당할소냐! 그래 모시기에 벅차면 자연하고 친구나 되고말아라. 우리 조선 고대문학사의 윤선도의 "오우가"처럼. 그래 바위, 물, 솔, 대, 달-이래저래 친구가 될만하지 않던가. 사실 우리는 죽어서도 산에 묻히고싶어한다. 그래 죽어 북망산에 간다고 하지 않던가. 산은 우리의 죽음의식과도 련결된 우리와 친밀한 존재. 산만이 아니라 물도 마찬가지. 우리는 어머니 배속의 양수에서부터 물과 친해졌다. 산수, 아니 전반 자연은 우리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원초적인 친밀한 고향이다.  산은 아버지고 물은 어머니다. 그럼 산수자연을 찾아가는 우리는 누구냐? 우리는 산과 물의 자식들. 그럴진대 산수자연은 우리의 영원한 따뜻한 품. 등산은 바로 그 품을 찾아가는 길.  
135    명정언순 댓글:  조회:6335  추천:2  2011-10-12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명분이다. 명분에 따라 움직이는것이 바로 인간이다. 지난세기 90년대 내가 한국에서 류학할 때다. 그때도 많은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벌이를 했다. 그런데 그들은 거개가 불법체류 신분이였다. 그래서 식당에서 조선족아줌마를 만나 반갑다고 반기면 그 반가운 마음은 순간뿐 안절부절못한다. 어떤 아줌마들은 조선족티가 물씬 나는데도 극력 조선족이라는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워낙 불법체류라는 신분이 반가운 존재가 아니였던것이다. 당시 나의 친구들중에 "노가다"를 뛰는 불법체류자들도 많았다. 어쩌다 만나 술 한잔을 나누어도 매우 조심스런 눈치다. 말을 해도 목소리를 낮추고 누가 들을세라 소곤소곤, 일을 해주고 돈을 못 받아도 벙어리 랭가슴앓기, 이것이 이른바 공자님이 말한 명불정언불순(名不正言不順) 꾀죄죄한 몰골이 3D업종에 종사하는 불법체류자임을 말해줌이라! 불법체류면 언제 잡혀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안스럽다. 그런데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노무현대통령시기 불법체류구제정책을 많이 펼쳤다. 많은 조선족불법체류자들이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한다. 이젠 살았다고 허리를 쭉 편다. 할 소리도 한다. 돈 꽤나 번 사람들은 한국에서 식당, 려행사, 무역회사 등 사업을 벌리고 조선족상권도 이룬다. 그리고 떳떳이 구로, 가리봉 등에 조선족거리도 형성한다. 명분이 있으니까. 그래 “명정언순(名正言順)”이 좋다. 그런데 이것이 왜곡되고 외곬으로 흐를 때 많은 문제점을 야기함은 더 말할것도 없다. 나는 얼마전까지 한국에 있으면서 우리 조선족의 꼴불견에 얼굴이 붉어졌다. 신호등 무시하고 길건너기,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핸드폰주고받기, 식당에서 안하무인격으로 왁작 떠들며 먹고 마시기... 사실 이것은 약과고 녀자들이 유흥업소에 뛰여들고 남자들이 도박판을 벌리는 등 불법까지 스스럼없이 저지를 때 문제는 심각하다. 명분이 있다하여 중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제멋대로 놀아나서는 안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나는 한술 더 떠서 우리 조선족의 보다 본질적이고 거창한 정체성 관련 “명정언순”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중국조선족이다. 중국은 우리를 낳아 키운 요람. 그러나 우리는 과경민족으로서 한반도와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있다. 우리는 분명 이중정체성을 가지고있다. 이것이 우리의 올바른 정체성-명정(名正)이다. 그런데 이중성은 우리를 좀 헷갈리게 한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한국인인양 행세를 한다든가, 중국에서 조선족의 자각을 상실한 행세를 하는것은 모두 명불정(名不正) 행태. 몇년전에 일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국적소동을 벌린것은 이런 꼴불견의 전형적인 한치보기.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중정체성의 조화를 가져와야 한다. 례컨대 중국과 조선반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민족적인 인연을 리용하여 중국의 조선반도 진출에 앞장설수 있으며 중국의 우세를 리용하여 조선반도의 중국 진출에 도움을 줄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중국과 조선반도 교류에 있어서 가교역할을 충분히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명정언순”. 조선과 한국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사실 우리는 남북을 모두 체험했으며 남북을 아우를수 있는 리념적인 정체성바탕도 가지고있다. 그리고 남북을 정녕 상생의 윈윈관계로 바라볼수 있는 있는 립지를 가지고있는것도 바로 조선족. 이것이 바로 우리가 통일마당에 남북에 내세울수 있는 명분-명정(名正). 이런 명정을 가지고 우리가 실천에 림할 때 그것이 효과적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언순(言順). 이것은 결국 우리의 이중정체성의 “명정언순!” 이런 “명정언순”이야 말로 우리 삶의 옳바른 지표. 그러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잘못하면 이런 “명정언순”에서 빗나갈수 있기때문이다. 그만큼 실제생활에서 “명정언순”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되겠다. 연변대학 교수  
134    욕망의 시대 댓글:  조회:6657  추천:8  2011-06-24
                욕망의 시대                                      우상렬  현대는 소비시대란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사실 이 소비시대는 욕망시대의 부산물에 다름 아니다. 욕망,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욕망이 없을 때 인간은 죽은 인생. 그렇다하여 굳이 욕망시대라 할 정도로 인간이 맘모스적인 욕망을 부리거나 그 욕망의 적나라한 표현을 하는 것은 적어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비시대가 문제되듯이 욕망시대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위가 제일 큰 동물하면 단연 인간. 인간은 못 먹는 것이 없다. 땅속에 나고 생기는 물건에서부터 땅위의 오곡백과, 기어 다니는 벌레, 뛰어다니는 동물, 그리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에까지 인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廣東식 먹기는 그 전형적인 한 보기. 식욕의 팽창은 먹이사슬결단, 생태환경파괴까지 불러온다.   지금 세월은 참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다. 표현자유, 드러내기 자유를 만끽하는 시대. 자기의 욕망에 솔직한 시대. 그래 억압적인 우울증이나 정신병자는 적은 편. 너무 자유롭고 솔직하다보니 좀 상스럽고 천박한 감을 주기도 한다.   상호(본고에서 말하는 상호는 특정 상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특히 밝히는 바이다)를 좀 보도록 하자.   ‘愛得’(백화점 이름), 서비스업체로 얻기 좋아한다는 상호를 가졌을 때 좀 어불성설이고 웃기는 얘기다. 물론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얻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놀부집’, 놀부, 누구냐? 놀고먹기 좋아하는 ‘흥부전’의 놀부가 아니냐? 그는 형제정의도 모르는 욕심쟁이 폐륜아. 상호가 그 폐륜아집이라 할 때 이미지가 너무 흐려진다. 놀고먹기 좋아하는 욕심쟁이 폐륜아집에 너무 성큼 발을 디뎌놓겠는가 말이다. 그런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내가 놀부가 될지도 모를 일.近墨者黑이 아니더냐. ‘玩吧,酒吧’, 술 마시면 자연적으로 놀고 싶어진다. 그럴진대 굳이 선정적으로 ‘玩吧’했을 때 주춤해지고 무엇해진다. 잘 하던 짓거리도 멍석 펴놓으며 놀아보라 하면 안 놀지 않은가. 그리고 술 마시고 노는 술집이라 할 때 어떤 야한 난잡한 감도 없지 않아 준다. 이런 천민자본주의의 천박한 냄새가 풍기는 상호에 비해 요새 TV에서 심심찮게 보게 되는 ‘舍得’상표 술 광고가 멋있다. ‘舍得’, 버려야 얻는다는 얘기 같은데 변증법적인 묘미와 깊이가 있다. 그래서 며칠 전 설이랍시고 비싸기는 하지만 ‘舍得’ 술 한 병을 사 마셔보았다.   이런 상호나 상표만의 얘기가 아니고 슬로건에도 욕망은 묻어난다. 작년 설날 저녁 동아시아 4강 축구경기에 2등자리를 두고 항상 ‘앙숙’인 한국과 일본이 붙으면서 고맙게도 명절의 좋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런데 운동장 주변의 한 프랑카트에 이런 슬로건이 내붙었다. ‘rush러시(중간에 축구공 차는 동작을 한 사람의 아이콘) cash캐시’, 뭐 밀치고 닥치며 공을 잘 차 이겨서 돈을 챙기라는 말 같다. 역시 좀 거칠고 천박하다. 그런데 이런 슬로건 때문인지 그날 한국이 이겼다. 돈욕망을 자극하는 슬로건은 주술적인 마력이 있는가보다. 그래 돈을 얼마나 챙겼는지...   지금은 경제시대라 돈이 하느님이다. 그래 사업을 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배 속의 아이도 손을 내밀고 돈~돈~ 한단다. 그러나 너무 돈, 돈 할 때는 어쩐지 밉다. 설날 아침, 손군들이 와서 절을 한다. 나도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었다~ 기분이 흐뭇해진다. 참 귀엽다, 기특하다. 그런데 절 한다 꿇어 엎드린 허리를 펴기도 전에 ‘할아버지, 돈, 세배 돈!’하며 손을 내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똑 바로 쳐다볼 때는 정말 구린내가 물씬 난다. 젖내가 날 네놈한데銅臭의 구린내가 나다니. 어허, 다음 순간 등골이 서늘해나기도 한다. 어린이는 돈을 몰라야 하는데... 노신선생의 ‘어린 아이를 구하라!’의 말이 가슴에 와 딱 맺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내 학생들도 이런銅臭의 구린내를 풍길 때는 머리가 아찔해나며 질색이다. 아르바이트랍시고 나는 학생들을 잘 부려먹는다. 그런데 그 아르바이트비용이 참 문제다. 물론 돈으로 계산해줄 때도 있지만 맛있는 술 한 잔, 밥 한 끼 사주는 것으로 떼우기도 한다. 스승과 제자 간에 옴니암니 1전2전 따지기보다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으로 아기자기하게 술 한 잔, 밥 한 끼 같이 하며 정담을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냐 말이다. 그런데 이 술 한 잔, 밥 한 끼보다는 고 1전2전으로 정확히 계산되는 돈을 좋아하는 학생이 있다. 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르바이트비용을 청구할 때는 정말 정나미가 싹 떨어진다. 학생은 돈과 거리가 먼 것이 좋은데...   인간의 욕망을 논할 진대 돈도 돈이겠지만 성도 매우 강렬한 것이다. 우리 시대는 확실히 개방되었다.性感, 섹시, 섹스... 뒤안길에 숨겨져 있던 성적 담론들이 어느새 공중담론으로 부상하였다.性感, 섹시는 현대여성의 아름다움의 불가결의 요소로 되었고 섹스도 거추장스러운 아이낳이보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암컷수컷의 니 좋고 내 좋은 성희가 되었다. 성적 욕망의 거침없는 분출, 시원해서 좋기는 좋겠다. 그런데 애짤잘하거나 애모쁨이 없어 좀 동식물적인 수준이다. 화사하게 핀 꽃이 자기 성기를 활짝 드러냄이나 발정기의 동물들이 흘레 하나만을 바라고 흑흑 거리듯이. 성적 개방에는 우리 대학생들이 뒤지지 않는 것 같다.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하면 둘둘, 끼리끼리 앉은 남녀 커풀들이 머리를 수굿하고 밀애를 속삭이기에 바쁘다. ‘오늘 강의 이상 끝!’하기 바쁘게 학생들이 교실문 좁다하게 비집고 나간다. 나가는 순간 둘이둘이 좋아하는 남녀 커풀들이 남에게 빼앗길새라 서로 손을 잡아 쥐거나 허리를 감아 안고 나란히 걸어 나간다. 이것이 우리 학교 여름 계절학기 강의 및 하학 모습. 이뿐이랴, 요새 대학생들은 그 좋은 기숙사조건도 마다하고 커플끼리 아예 나가 집을 잡고 새살림을 한다. 돈에 좀 쪼들리는 놈들은 한 아파트에 넷 대 쌍 한 칸씩 나누어 든다. 내 집 맞은 켠에 이런 몇 쌍이 들어 있다. 이들은 연애고 결혼이고 무어고 속도전에 짬뽕식 일사천리로 해제끼는 것 같다. 이들은 자기네 학교 선생인 나를 보아도 한 점 부끄럼없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이를 때면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나며 알은체 인사를 한다. 사실 당당하고 떳떳할밖에. 둘이 좋아서 하는 짓에, 국가 법적으로도 대학생혼인을 허용하는 바에야!   나는 요새 대학생애들이 은근히 부러워나기도 한다. 내 대학교 때 잘 난 계집애들 눈 한 번 똑 바로 뜨고 쳐다보지 못했고 손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신세를 생각하면 내가 가련해나기도 했다. 내가 요새 대학생들을 좀 피탈하며 까다롭게 구는 것은 나의 무언중 질투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桑田碧海,海枯石烂, 그렇게信誓旦旦이도령, 춘향 같이 놀던 요새 대학생들이 그렇게 쉽게 하루아침에 빠이빠이를 주어댈 때는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만다. 그들은 워낙 연애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결혼까지도 재미, 장난으로 하고反掌如云의 홀가분한 것으로 하는 듯하다. 아니, 속도전에 짬뽕식 일사천리는 쉽게 신물이 나고 빨리 끝나는 법. 그래 나는 그들이 부러워나다가도 그들이 불쌍해났다.   ‘육예’고 어쩌고 그것은 봉건냄새가 나니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쉽게 홀가분하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버리’기 때문. 사랑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에도 목청이 떨려나고 입안이 말라난다. 그 애짤잘함과 애모쁨이여! 어쩌다 손을 한 번 쥐게 되면 짜릿짜릿 온 몸은 감전된 듯. 키스는 어질어질 아찔해서 못하고. 그러나 달구며 달래며 기다린다-절대절명의 그 순간을. 결국洞房花燭夜까지 골인-아, 신비하고 황홀한 그 밤이여. 동굴은 오픈되어 있다. 꽃은 피어있다. 그런데 좀 어둡다. 손으로 더듬기. 오, 어딘가에서 꽃의 애모쁨 소리는 나는데. 그럼 그렇겠지. 그 애모쁨 소리에 맞춰 샘물은 찰찰 흐르고... 작대기로 찍어보니 그 맛 감미롭기 짝이 없으라! 사랑, 연애, 혼인, 우리는 한 수의 시고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니들은 뭐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에 조루, 음위라 욕망시대의 슬픔, 비극이여!   행복의 기본 원리의 하나는 욕망이 쉽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옛날 소차를 타고 세월아, 네월아 석 3년을 걸려 친구 집에 도착했다. 이 아니 반가울소냐, 온다, 온다하는 네가 이제야 오너냐? 한 3년 놀다 가라!孔子님이 말한 ‘有朋自遠來不亦樂乎!’란 바로 이런 경지다. 현시대, 비행기, 아니 우주비행선이 날아다니는 시대. 비행기를 타고 옛날 석 3년 걸리던 거리를 씨잉 날아 3시간 만에 친구를 만났다고 하자. 반갑기는 하겠지만 너무 쉽게 자주 만나는 친구, 그렇고 그렇지 뭐. 한 3시간 만 놀다 가라. 그리고 맥 빠진 소리로 다음에 또 와라. 그렇다고 다음에 또 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친구 속으로 조용히 되뇌이는 말이, 짜식, 진짜 또 올게 뭐라, 멍텅구리 같은 짜식, 그말 그대로 곧이 듣기는... 인간은 쉽게 이루어지는 욕망에知足者常樂할 줄 모르고 싸가지 없이 이 욕망, 저 욕망으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쉽게 욕망의 노예가 되는 법.
133    어두운 서사:“황해” 댓글:  조회:5045  추천:58  2011-05-19
                어두운 서사:“황해”                                                        우상렬 연변대학교수   영화 “황해”는 너무 어둡다. 마음 어딘가 찜찜하고 개운하지가 않다. 첫째, 우리 조선족의 삶이 너무 스산하게 그려졌다. 연길 시가지나 시교의 모습들은 삶에 찌들고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지저분하다. 그리고 조선족은 무지막지하게 거칠고 용감하다. 마치 순화되지 않은 야성 그 대로다. 경찰의 층층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주인공 구남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며 종횡무진하는 면가, 그리고 거침없이 치정에 빠지는 구남이 아내... 이 모든 것은 돈, 돈, 돈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 한국인의 시각이 녹아들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인의 ‘집단적 상상’에 의한 ‘타자’화된 우리 조선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가난한 조선족 대 잘 사는 한국인, 더러운 조선족 대 깨끗한 한국인, 거친 조선족 대 세련된 한국인... 이런 비교급부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각을 좀 달리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상업성이 강해 주로 흥행을 노린다. 시장경제의 관객소비에 기초한 이윤 추구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황해”에 나타난 초라한 조선족이미지 부각은 굳이 우리 조선족이 미워서가 아니라 한국 관객들의 우월의식이나 엽기심리, 노스텔지아를 자극하는 안티로 작용한다. 일종 한국의 대중심리에 영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황해”는 성공적인 관객몰이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황해”는 대중문화의 흐름을 탄 통속영화일 다름이다.   우리는 문학예술작품을 보는 시각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 이때까지 우리는 문학예술작품에 대해 한국의 흥행이나 재미 위주보다는 너무 가치나 의의를 따져왔다. 우리는 꼭 전형성을 따지고 굳이 사상교육을 받으려 했다. 문학작품의 심미나 오락 작용보다는 교육작용에 집착해왔다고 할 수 있다. “황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볼 때 “황해”에서 조선족이미지는 전형성을 기하지 못했다. 연길에 사는 내가 볼 때도 영 말이 아닌 것 같다.       현재 연길은 작은 도시이나마 그만하면 깔끔하고 활력이 넘친다. 그 주변도 새 농촌건설로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청부살인에 건 6만원도 그리 큰 돈이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황해”는 어제의 연길 및 그 주변 이미지에는 맞을지 몰라도 오늘의 연길 및 그 주변 이미지하고는 너무도 다르다. “황해”는 연길 및 그 주변의 뒤안길이나 어두운 곳만을 찾아 짜깁기한 듯한 감을 준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막연한 ‘집단적 상상’을 연길 및 그 주변에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은 중국식 논의에 따른 사실주의의 본질적인 전형화반영보다는 자연주의의 지엽적인 반영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문학이 꼭 전형화반영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비주류나 비본질 및 개연성도 얼마든지 취급할 수 있다 할 때 “황해”는 진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는 분명 아직 살기 어렵고 거칠고 더러운 초라한 면이 있다.   문학예술은 자연주의적인 사진기식 반영이 아니다. 어쩌면 사실주의적인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 진실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의 긴가민가의 묘한 줄다리기다. 이 점에서 “황해”는 그럴듯하다. 그러면서 “황해”는 거기에 알심을 넣어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욕망서사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좀 홀가분하게 문학예술을 접할 필요가 있다. 보다 많이 문학예술의 예술성에 치우쳐 감상하자는 것이다. 예술성은 심미나 재미를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황해”를 보자. 캐릭터, 주인공의 성격부각이 상당히 성공적이라 본다. 아직 인간의 순진무구함을 잃지 않은 구남이, 그에게는 아직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독하지도 못하다. 그리고 사랑에도 연연한다. 그러나 빚에 쫓기고 사랑의 끈에 의해 그는 한국행을 한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긴다. 그는 우리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면가와 김태원, 그들은 사회독버섯-악마의 화신. 그들은 철저히 돈, 치정에 놀아난다. 최저한의 인간의 의리나 정도 없다. 그래서 사람도 서슴없이 죽인다. 그런데 그들의 표현형태는 정반대다. 면가가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나아간다면, 김태원은 하느님의 간판을 건 허위적인 모습을 보인다. “황해”는 일단 이 세 주인공의 캐릭터로 성공한다. 그리고 “황해”는 이런 주인공들 사이 얽히고 설킨 관계로부터 전개되는 얽음새가 미궁 그 자체다. 금욕에 치정에, 중첩되는 청부살인… “황해”의 얽음새 전개는 추리소설의 묘미가 있다. 한참 미궁을 헤매다가 끝에 가서水露石出,柳暗花明. 그리고 “황해”는 액션스릴리러 장르답게 말보다는 행동이 넘쳐난다.   한마디로 “황해”는 우리에게 볼거리-눈요기를 만끽하도록 한다. “황해”는 적어도 예술성이 뛰어난다. 문학예술은 예술성으로 승부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한 편의 영화를 이런 예술성에 치우쳐 감성하는 것도 진정 문학예술의 본령에 가닿는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황해”는 욕망서사. 등장인물들이 모두 욕망에 놀아난다. 돈에, 치정에… 끝없는 욕망에 놀아나는 주인공들, 결국 욕망의 팽창에 서로 부딪치고 죽이고, 이것은 조선족이나 한국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어쩌면 우리 현대인간들의 전반 자화상. 그래서 “황해”의 욕망서사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와 닿는 욕망의 현대서사가 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 ‘황해’는 상징성을 띤다. ‘황해’는 욕망의 바다. 돈에, 치정에 놀아나는 인간 욕망의 바다이다. 인간은 결국 이 욕망의 바다에 빠져 죽는다. “황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지 않던가. 구남이도 죽고 면가도 죽고 김태원도 죽고… 구남이는 결국 황해의 고기배 위에서 죽게 되고 그 아내의 골회함과 더불어 황해에 내쳐진다. 황해는 더럽다. 생이 넘치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오염된 죽음의 누른 바다다. 사실 “황해”는 바로 죽음의 욕망에 의한 우리 인간들의 오염을 귀뜸하고 있어 좋다. 그래서 “황해”를 단지 자극이 넘치는 액션스릴리러로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묵직함이 깃들어 있다.
132    身因性과心因性 (우상렬) 댓글:  조회:4730  추천:60  2011-04-15
 身因性과心因性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우리 인간은 잘난체 하지만 이래저래 참 살기가 힘든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다. 나는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내 어릴적 가난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기억을. 육형제, 걸신에 걸린듯한 우리 형제들을 어머니, 아버지는 먹여주기에 대단히 힘들어하신 것 같았다. 항상 두 콧구멍으로 시누런 콧물줄기를 들이마시기에 바쁜 우리. 들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어머니는 우리의 콧물 닦아주기에 바쁘시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 일과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 어머니 치맛자락은 항상 우리의 콧물로 얼룩져있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콧물은 시도 때도 없이 더 열심히 흘러내린다. 그러면 우리는 집안에 죽 들어앉아 경쟁이라도 하듯이 후르륵 쩍-쩍. 여하튼 그때 그 시절 콧물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후에 안 일이지만 못 먹어서 그렇단다. 코흘리기도 하나의 병이란다. 몸에 영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 그렇단다. 그런 거 같다. 그래 요새 아이들 시누런 콧물 훌쩍이는 거 보았더냐. 그렇다. 절대적 빈곤시대 절대적 영양부족으로 인간은 많은 병이 생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무슨 영양부족으로 간염에 결렸소, 폐렴이 왔소, 시력장애요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 당시 누가 간염에 걸렸소하면 잘 먹게 되었군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간염은 잘 먹으면 낫는 줄로 알았다. 그래 간염을 부귀병이라고까지 했다. 이른바身因性병이 난무했다.   인간은 워낙 정교하고 맘모스 같은 존재라 많은 것을 먹으며 이런저런 많은 영양분을 흡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육체적 생명 유기체가 잘 돌아간다. 그런데 절대적 빈곤의 시대 이것이 어려웠다. 입고 먹고 자는 문제, 좀 세련된 말로 하면 의, 식, 주문제가 우리를 괴롭혀 왔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배 부르고 등 따뜻하기를 바랐던가. 혁명의 수령들도 그 무슨 이밥에 쇠고기국에 기와집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외우던小康사회건설이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의, 식, 주의溫飽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간단한듯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만 발전하면 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달과 발전에 힘 입어 의, 식, 주의 절대적 빈곤문제를 많이 해결하기도 했다.   그래서身因性병도 많이 근절시켰다. 간염과 같은 부귀병이 많이 사라졌지 않은가. 그래 요새 간염이라는 것이 못 먹어서 생겼다는 소리 들어보았는가. 술 많이 처먹어 그렇지. 이래저래 우리는 그만하면 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발생. 우리가 배가 불러 태평세월이다고 쾌지나 칭칭 나네,하기도 전에 말이다. 새로운身因性병이 우리를 괴롭힌다.   배가 부르면 만사대길인줄 알았는데 바로 배가 불러 생기는 병 말이다. 인간은 배가 불러 죽을 수 있다. 배불러 죽겠다는 말이 허망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 조선족 작가 박선석이 쓴 장편소설 “재해”를 좀 보라. 그 속에 어떤 인물이 그 어려웠던 세월 어쩌다 먹자판이 터져 너무 많이 먹어 정말 창자가 터지고 배가 아파 죽는 해프닝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공것이 사람 죽인다는 말도 틀린 것 같지 않다. 뷔폐, 촌놈이 어쩌다 온통 먹을천지 뷔폐에 갔다. 돈은 좀 내기는 냈으나 거저 공거로 먹는 것 같다.   그래 열심히 먹는다. 정말 먹거리산 정복하기다. 그래 눈이 뒤번져지도록 먹고나니깐 문제다. 배가 아프다. 배가 터지도록 아프다. 소화불량. 그래 다시 열심히 소화제먹기. 그래도 배는 잘 꺼지지 않는다. 그래 온 밤을 끙끙 거리며 엎치락뒤치락하기. 정말 요새는 좀 살만하기 되어 너무 많이 먹어 문제다. 새로운身因性병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똥배가 나오고 체형이 기울어지는 것은 약과. 비만으로 인한 심장병, 고혈압, 고혈지... 말 그대로 비만은 만병의 근원.過猶不及이란 말이 이때도 통하는 줄로 안다. 그래 다이어트란 말이 나오고 비만과의 전쟁이 시작된 줄로 안다.   사실 요새는身因性병보다도心因性병이 더 기승을 부리는 줄로 안다.身因性병은 신, 육체의 병이니 눈에 유표하게 잘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치료하기도 좋다. 그런데心因性병은 심, 마음의 병이니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 현대인간들이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스트레스. 현대라는 개방된 사회, 그리고 물욕이 넘치는 사회,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욕망은 팽창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산수를 낀 전원 가든식 아름다운 별장, 그리고 길거리를 질주하는 벤츠, 오디, 보마... 그리고 밤에 도처에 번쩍이는 네온사인... 우리의 잠재된 원초적 욕망까지도 자극한다. 여기에人不爲己,天誅地滅가 작동하면서 우리는 뛸 데 없는房奴,車奴가 되고 네온사인을 좇아 다니기에 바쁘다.   그런데 이런 욕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쌓이는 것이 스트레스. 우리 현대인간들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이 모든 것이 귀찮고 거저 그렇고 그렇다는 식의 인상쓰기. 여기에 먹고 살만 한데도官大一級壓死人에 학벌을 비기고 니가 돈 많냐, 내가 돈 많냐를 비기고 니 집이 크냐, 내 집이 크냐를 비기고 니 차가 좋냐, 내 차가 좋냐를 비기고 또 무슨 무슨을 비기는 온통攀比로 가득 찬 현대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영원히 상대적 빈곤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이 산에서 저 산보면 저 산이 높고... 우리는 영원히 헐떡이며 살수밖에. 가련한 현대의 우리의 자화상.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心因性병에 노출되어 있다. 노이르제, 신경쇠약, 정신병... 현대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들. 그래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병원에도 무슨 심리자문실이요, 뇌신경과요하는 새로운 치료분야가 생겨났다. 실로心因性, 마음이 문제다. 자연적으로 불교의一切唯心造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급선무. 그래서 우리는 도교의適可而止,知足者常樂의 경지도 떠올려본다.   사실 인간의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은 따로따로 놀아나는 것이 아니고息息相通. 서로 긴밀하게 통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은 어쩌면唯物과唯心의 논리와도 통한다. 몸이 아픈身因性때문에 마음이 아파나고 마음이 아픈心因性때문에 몸이 아파나지 않던가. 이것이 우리 인간의 얽히고 설힌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의 유기적 섭리. 그럴진대 우리는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을 같이 다스려야 한다.身因性의唯物과心因性의唯心그 어느 한 쪽에 치우쳐 극단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唯物에만 치우치면 기계적이 되고唯心에만 치우치면 고무풍선이 되고 마는 법.   요새 우리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주력하고 있다. 조화로운 사회는 뭐니뭐니 해도 일단은 내 일신의 몸과 마음,身因性과心因性의 조화를 가져와야 하느니. 내 몸이 편안할 때 다른 사람도 생각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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