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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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甘食 댓글:  조회:4542  추천:84  2005-05-18
甘食의, 식, 주,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이 가운데서도 식이 가장 중요하다. 열대지방 같은데서야 배만 부르면 의, 주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줄로 안다. 그래서 조선식으로 식, 의, 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 줄로 안다.인간에게 있어서 배부르게 먹는 거, 이것이 원초적이고 일반적인 가장 소박하고도 절실한 욕구였다. 그래서 우리는 줄곧 多食을 해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배불리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면서 多食에 식상해 지고 그것이 별 볼일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제는 甘食이란다. 甘食, 달달한 음식. 그러니 잰내비(원숭이)들이 좋아하지 않는가. 아니,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음식이라니 맛 좋은 음식쯤으로 되겠지. 참, 멋진 말이다.그럼 甘食풀이 한번 해보지. 小食이 甘食이라. 누구나 다 잘 아는 거. 배터지게 먹지 말라는 것이다. 過食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똥배 나온다는 말이 되겠다. 아니 똥배는 약과고 배터지면 죽는다는 것이다. 옛날 정말 배터져 죽는 일이 비일비재 했단다. 먹을거리가 항상 부족할 때 기껏 배가 고파 있는데 생각 밖으로 공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행운 차례졌다. 그래서 기를 쓰고 기껏 먹는다. 그리고는 정말 창자가 터지고 배가 터져 죽고 만다. 물론 배가 고파 죽는 줄은 알았지, 배가 불러 죽는 줄은 몰랐지. 사실 항상 먹을거리가 적을 때 인간은 過食하게 되어 먹었다. 過食을 해야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 한번에 영양분을 습취할 수 있는 양은 제한되었음. 그리고 이미 상응한 영양분을 축적했을 때는 더 흡수하지 않는 법. 그래서 過食한 것들이 이른바 消食되어 영양분으로 전이되지 못하고 배속에 남아 있을 때 그것이 똥배로 된다. 요새 한자리 하고 잘 먹어대는 똥배어른들의 똥배는 거의 다 이래서 불어난 것이다. 참 보기 싫쟈? 아직도 못 먹어 겔겔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제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무슨 모양이냐? 꼴볼견이지. 그래서 옛날 어른들 항상 過食不如不食이라 했지. 小食, 少食하라는 것이다. 똥배어른들, 진짜 어른들 말 항상 귀담아 들을지어. 그래서 자연히 素食이 甘食이라는 말이 성립될 줄로 안다. 素食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다. 바로 주로 육붙이를 먹는 葷食와의 반대의미. 사실 전통적으로 농경민족인 우리는 素食를 많이 해왔고 유목민족인 ‘양키’들은 葷食을 많이 해왔다. 땅 속에서 나는 穀物類에 蔬食이 우리를 키워왔고 땅위의 짐승들에게서 얻는 肉食이 ‘양키’들을 키워왔지 않은가? 素食과 葷食,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단다. 素食은 영양분이 적은 대신에 깔끔하여 피를 맑게 하고 葷食은 영양분이 많은 대신에 콜레스토롤이 많아 피를 걸죽하게 한단다. 그래서 素食을 주로 하는 우리 동양인은 몸집이 작은 대신에 비만증이나 뇌출혈 같은 증상이 적고 葷食을 주로 하는 ‘양키’들은 몸집이 큰 대신에 비만증이나 뇌출혈 같은 증상이 많다고 한다. 현재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의 하나가 비만증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그러니 극단적인 素食 혹은 葷食은 금물이다. 그래도 中庸의 길이 합리. 素食, 葷食의 적당한 +가 이상적인 줄로 안다. 그런데 요새 육붙이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 葷食편향으로 나아가는 세월에는 素食이 甘食이고 건강에 좋다는 말이 그대로 통하는 줄로 안다. 이른바 녹색음식운운은 素食의 ‘별미’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미 열반한 한국의 유명한 성철 스님은 생쌀 몇 알에 솔잎 몇 가치를 常食하는 것으로 건강을 챙겼다 한다. 불교의 교리를 言敎身行한 전형적인 素食주의자. 성철 스님은 이른 훨씬 넘게 장수한 걸로 안다. 요새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된 줄로 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됬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 밥맛이 떨어지고 뭐 별로 먹을 것이 없단다. 내내 上食만 하다보니 입이 고급이 되나서 그 꼬라지인 줄로 안다. 배부른 흥타령이지. 그럼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맛있지? 수수께끼 하나. 골치 아프게 머리 쓰지 마. 좀 있다 알려 줄께. 그런데 나는 밥 맛 있어 죽겠다 말이요. 열 받지? 열 받지 마. 밥 맛 있는 비결 공짜로 알려 줄게. 말만 잘 들어, 이. 아주 간단해. 첫째 배굼기기. 그 다음 배가 고플 때 먹기. 이때는 아무거나 주어먹어도 다 맛있어. 지푸라기, 돌, 똥... 그것은 알아서 해. 그래서 배고플 때가 甘食이라는 말이야. 또 이 배고플 때 먹어야 進食한 것이 속에 뿌딛하게 남아 있지 않고 消食도 잘 된다 말이야. 그러니 끼에 따라 먹는 바보짓은 절대 하지 마. 스스로 코뚜레 꿰인 소가 되어 끌려 다니지 말라는 말이다. 바로 그 끼에 따라 먹으라는 엄마들의 노파심에 우리 식욕은 머저리 다 됬어. 망가졌다 말이야.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끼만 되면 괜히 배가 고픈 거 있지, 바로 그거 말이야. 나의 생물종은 내 식대로 움직이고 놀아야 되. 괜히 시간에 따라가고 끼에 따라갈 필요가 없는 거야. 내가 언제 고프면 언제 먹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내 시간에 찔끔찔끔 무엇을 먹어도 나쁘게 안 봐. 食者 매개인의 大本이니깐. 무슨 시간에 맞추어, 끼에 맞추어 먹으라는 것은 8시간씩 일하고 놀고 쉬고 하는 식의 획일적인 논리야. 이런 획일적인 논리에 맞추다 보면 다채롭고 풍부하고 독특한 나는 마멸되고 변태가 오고 기형이 오는 것이야. 사실 사회라는 ‘괴물’이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거야. 그래야 사람들 몰고 다니기 좋지. 그런데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시대라 일단은 나 하나부터 잘 챙겨야 되. 나 살고 남 챙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우리는 減食할 수도 있고 疏食할 수도 있고 零食할 수도 있고 귀찮으면 아예 禁食할 수도 있단 말이야. 여하튼 배가 고파 맛있게 甘食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땅! 나만의 맛있는 끼니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니 역시 잘 먹고 잘 살자는 노릇. 그럼 언제 배가 고프지? 그것은 자기 스스로 알아야 할 일. 自知之明이 세상에서 가장 총명하다 하지 않나 말이다. 알았지? 얘. 말 잘 들으니 보나스로 비결 하나 더 알려주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小食과 素食이야. 小食과 素食을 해 빨리 배를 꺼지게 하고 배가 꺼져 꼬르륵 할 때 또 小食과 素食을 하고. 이런 進食, 消食를 반복하는 가운데 식욕은 살아나고 몸은 건강해지고. 生命在於運動이 아닌가 말이네.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으면 천당입니다. 자 그럼 小食이 甘食이라, 素食이 甘食이라, 배고플 때가 甘食이라는 하느님만 믿읍시다. 자, 기도합시다.2005. 5. 18
30    피, 물 댓글:  조회:4383  추천:66  2005-05-17
피, 물피는 물보다 진하다, 피는 못 속여,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되어 먹었다. 한국TV 입양아들 친부모찾기 프로를 보라. 외국에 입양되었던 애들이 줄줄이 자기의 낳아준 부모를 찾아 한국으로 모여든다. 인간의 짓궂은 원초적인 뿌리의식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우리는 부모들도 피를 나눈 내 자식, 내 새끼 한다. 내 자식, 내 새끼가 있어야 죽어 제사라도 받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내 자식, 내 새끼 낳기. 그런데 내 자식, 내 새끼가 생기지 않으면 당황. 뗌빵 식으로 입양하기. 그런데 우리는 형제자매들, 특히 남자형제들 자식들 가운데서 입양할 애를 선정한다. 대개 간접적으로 나마 그래도 피를 나누었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리고 입양할 경우 여자아이보다는 남자아이를 한다. 제사를 받들게 하기 위하여. 제사 받들 아이만 되었지 그 외에 아이는 입양 안한다. 그리고 또 입양된 아이로 하여금 입양사실을 모르게 하기 위하여 아주 어릴 때 한다. 마지못해 남의 집 아이를 입양할 경우 입양아 부모들로부터 아이포기나 찾아보지 않거나 되찾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내기도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저 멀리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다. 입양사실을 자타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다. 원초봉쇄를 하는 셈이다. 그리고 입양을 했는데 어쩌구려 피를 나눈 자기 아이가 생길 경우 그 입양아이는 개밥에 도토돌이신세가 되고 만다. 우리의 감정은 왜 요리 가볍고 옹졸하게 얄궂게 되어 먹었지. 나는 그 쑥 들어간 꺼진 눈확 속에 눈이 파랐고 콧대가 서고 모가 난 ‘양키’놈들을 사람을 잡아먹는 듯한 괴물로 무서워했었다. 그런데 요새는 사람 좋게 두리뭉실하게 생긴 우리가 미워난다. 그 ‘양키’들이 자꾸만 돋보여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당신네들’이라고 부르도록 했다.마구 찧고 박고 하다나니 세계상에서 사생아 최고란다. 대한민국의 수치란다. 사생아처리 문제가 사회의 큰 골칫거리. 그래서 한국의 정부는 물론, 민간단체, 자선단체들에서도 발 벗고 나섰단다. 홀터아동복지센터를 비롯한 각종 고아원운용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여기에 버려지는 불구아이까지, 여하튼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다 수용한단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입양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부모들을 찾아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韓민족의 한 핏줄을 나눈 한국 부모들은 가물에 콩 나듯 한둘이 찾아오는데 반해 당신네들은 심심찮게 찾아온단다. 우리 부모들은 애가 없어서 입양하고 싶어도 그런 사생아, 버려진 아이들은 질이 나빠서, 종자가 나빠서 거들떠보기 싫단다. 그리고 그 불구 아이는 왜 긁어 부스럼 만들겠나 하는 식이란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 그들이 ‘어리석어’ 그런지 생각이 단순하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좋아하니깐’, ‘우리 부부는 아이 키우기가 재미있으니깐’, ‘저 아이들이 불쌍하니깐’... 좀 구체적 얘기를 한다는 것이 ‘우리는 한국 아이가 좋으니깐’, ‘우리는 아이 낳이를 못하니깐’, ‘우리는 남자애 혹은 여자애만 있으니깐’... 그들은 이렇게 간단 솔직하다. 그래서 어떤 부부들은 자기들이 키울 수 있는 만큼 데려가거나 어떤 부부들은 나름대로의 선호에 따라 남편은 여자아이, 아내는 남자아이 식으로 남자아이여자아이 다 데려간다. 그리고 한국부부들이 이리 튕겨보고 저리 튕겨보고 가장 똑똑해 보이는 남자애들을 데려가기가 보통인데 그들은 이런 것을 떠나 있는 것으로 어떤 부부들은 전문 불구 아이들만 데려 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한국아이’, ‘남자애 혹은 여자애’ 하는 식으로 자기 선호, 취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똑똑해 보이는 남자애’를 점찍어 출세시켜 제사 잘 받들게 하려는 그런 옹졸하고 용속한 이해타산은 없다. 그들은 순순한 인간애, 약자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같은 博愛, 인도주의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어린아이에 대한 책임과 의무 같은 사회적 사명에 의한 것이다. 초라한 우리의 자화상을 비추어보는 좋은 거울이다.애들을 데리다 키우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당신네들은 입양애들을 친자식처럼 키우지. 그 애가 너무 고와서 동네방네에 ‘방송’하지. 이 아이, 참 곱지? 내가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인데... 물론 그 애한테 성도 이름도 달아주지. 그렇다 해서 굳이 피를 확인시키는 그런 것은 아니지. 거저 편하게 부르기 좋도록. 우리도 애를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지. 그런데 우리는 입양사실 절대 비밀에 붙이기. 그리고 어느새 소유욕이 발동해 내 피의 도장 찍기. 내 성을 따르고 내 호적에 올리고... 당신네들은 친자식들이 수두룩해도 입양애를 박대함이 없이 똑 같이 대하지. 그런데 우리는 ‘어쩌구려’ 할 경우 개밥에 무엇이 되는 거야. 그리고 당신네들은 애가 다 크면 정중히 입양아사실을 알려주고 우리는 피가 다른 인종, 민족임을 확인시켜 주고 태어난 고국에 가서 부모들을 찾아보도록 하지. 입양지, 입양일시, 부모들의 선색까지 제공하면서... 그래서 인간의 뿌리의식에 만족을 주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입양된 자식이 입양된 사실을 할까봐 겁나고 제 부모를 찾아갈까봐 겁나다. 그래서 우리는 갓난애만 입양하고 이사를 하고 어쩌고 하는 추태를 보인다. 그래 그 아이가 친부모를 찾았을 경우 당신네들은 같이 기뻐하고 그 친부모들과 친구가 될 수 있고 막연한 사이가 될 수 있지. 그리고 그 아이가 친부모를 찾아 가겠다 하면 홀가분하게 보내줄 수도 있지. 그렇지? 그런데 우리는 그럴 경우 당황하고 불안하고 경계심만 살아남. 그러다가 그 아이가 친부모한테 다니기만 해도 우리는 욱 하는 배신감에 울고불고 야단을 피운다. 내(우리)가 니를 혹은 저 아이를 얼마나 손발이 터지도록 키웠는데 니 혹은 당신네들이 이럴 수 있냐 말이다. 그러다가 잘 안 된다 싶으면 사생결단하고 이판사판에 피를 보게 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우리는 너무 탁 하게 옹졸하게 산다. 좀 홀가분하게 살 수 없냐?가계, 사업, 재산 상속도 마찬가지. 당신네들은 피를 안 본다지만 우리는 피를 본다. 글로벌화된 대재벌, 회장이 죽게 되었다. 당신네들은 피에 관계없이 가장 유능한 인재를 뽑아 대재벌의 사업을 계승하도록 한다지.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야. 피, 피~ 피가 중요하다 말이야. 현대 정주영에 정몽구, 삼성 이병철에 이건희, LG 구자홍에 구본무... 우리가 우습게 보는 ‘쪽발이’만 해도 이 면에서 대범하다. 그래서 그네들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네들은 우리처럼 그리 피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들도 ‘씨’, ‘종자’가 마를 때면 입양을 한단다. 물론 딸이 있을 경우에는 데릴사위를 해 친자식 맞잡이로 데리고 있지. 그리고 사업계승은 당신네들 스타일로 따라간단다. 재산 상속도 그렇다. 당신네들은 굳이 자식들한테 물려준다는 개념보다는 자기 쓸 만큼 쓰고 기증, 기부 등의 형식으로 사회환원한다는 개념으로 더 통한다. 그래서 당신네들은 애들이 18세라는 성년이 되면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거지. 당신네들은 재산상속세라는 것이 있어 사회시스템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도록 유도하고 분위기를 잡는다고 했지. 당신네들은 물 같이 덤덤하고 차갑다 못해 매정한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전인류적이고 보편적인 인도주의 맛이 있음. 그런데 우리는 안 되. 우리는 무슨 환원이고 다 떠나 내 피, 내 새끼한테 다 챙겨주고 물려줘야 눈을 감을 수 있어. 우리는 피의 끈끈함과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한치보기의 옹졸함이 있어. 요새 한국도 재산세를 때리고 있다니 세계보편의 논리로 노는가봐. 피는 물보다 진해, 피는 못 속여. 그렇다 해서 우리가 피에만 매몰되면 우리 삶은 오히려 옹졸해지고 살벌해질 수 있어. 우리는 물의 담담함, 차가움도 알아야 되. 그 담담하고 차가움이 우리의 피가 끓는 더운 여름의 갈증을 식혀주지 않는가? 2005. 5. 17
29    대동제와 문화예술절 댓글:  조회:4599  추천:47  2005-05-13
대동제와 문화예술절배재대 축제분위기에 녹아들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배재인이 된 느낌이 몸에 와 닿아 좋았다. 이리 빈둥 저리 빈둥 긴장된 탕개를 훨훨 풀어 버릴 수 있어 좋았다...베재대 대동제, 말 그대로 대동의 경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배재인이 하나가 되고 지역주민들이 동참하고 사회 관련 인사들이 참가하고 학부모들이 오고해서 들끓던 배재대 대운동장특설무대. 우리 연변대도 이쯤이면 ‘문화예술절’이라고 해서 축제분위기로 달아오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동적인 모습은 없다. 순전히 우리 학교 학생들만의 문화예술활동이다. 배재대 대동제에서처럼 첫날 여러 대학의 응원단은 물론, 마지막 날 연예인들을 초청하여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그런 잔치는 없다. 그리고 배재대 대동제는 3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화끈하게 놀아난다. 줄줄이 이어대는 이벤트에 저녁마다 펼치는 화려한 무대는 들끓는 분위기 그 자체. 한국 사람들의 快快地(빨리빨리)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 연변대 문화예술절은 1달이라는 긴 시간. 5월달을 아예 文化藝術月로 부르기도 한다. 이 기간 학교의 강의수업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띄엿 띄엿 쉬어가면서 하는 듯 마는 듯, 중국 사람들의 慢慢地(느릿느릿) 기질이 그대로 묻어난다. 배재대 대동제는 운동장주위로 돌아가며 각 학과별로 쭉 천막을 치고 그 중간 노천무대를 설치해서 모든 행사를 밖에서 행하는 형태. 그리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놀고 즐기자는 분위기가 농후. 그런데 우리는 교실이나 대강당 같은 집안에서 행하는 형태. 배재대 대동제도 가요시합을 하든데 우리는 주로 문화예술 관련 시합을 많이 조직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예컨대 서예전시, 웅변대회, 카라OK대전, 歌詠시합, 백일장, 智力경색 등등. 예선, 본선에 때로는 직접 챔피온쟁탈전에... 우리는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문화예술소양을 높이고 문화생활을 다양하게 하자는 공리성 목적 강함. 배재대 대동제나 우리 학교 문화예술제는 다 같이 학교학생회에서 조직하고 주최하는 면에서는 같다. 그런데 교수들의 참여도에서 보면 배재대이 약하고 우리 쪽이 강한 것 같다. 배재대 교수님들 축제를 애들만의 놀이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학생들의 각종 시합에 평심위원으로 참가한다. 그래야 시합의 공정성과 정중성을 기한다나.배재대 대동제에서 각 학과별 나름대로의 독특한 먹을거리를 마련하여 ‘호객’을 하며 ‘먹자대동’을 이루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별로’인 ‘상품’을 손에 들고 다니며 애교스럽게 파는 예쁜 여학생들도 인상적이다. 학생들 스스로의 장끼를 발휘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그리고 공연을 하고 이벤트에 참가하는 학생들마다 그렇게 당당하고 발랄하고 개성적이어서 정말 현대대학생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어 좋았다. 우리는 문화예술절 기간에 캠퍼스 내에 천막도 치지 않고 먹을거리도 마련하지 않는다. 먹을거리는 밖에 나가 사먹기.배재대 대동제에서 나는 오늘날 이 대학생들하고 이질감도 많이 느꼈다. 아직도 젊은 편이라고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 그런데 나는 그 젊음의 혈기가 넘치는 대학생들하고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듯한 거부감조차 느끼기도 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꽝-꽝~, 꽝-꽝~ 귀막을 잡아 째는 듯한 고성스피카, 노래라는 것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게스리 거저 막 주어 넘기기, 여기에 춤이라는 것은 찧고박고 펄쩍펄쩍 뛰고 휘둘러대기. 재즈, 록 스타일? 그리고 초대가수고 댄스들도 여기서 50보에 100보. 그러니 이들이 서로 호흡이 맞아 돌아가고 열광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음. 나는 마음이 늙어서 그런지 그래도 ‘흘러간 옛노래’ 같은 서정적인 노래가 좋고 춤도 리듬을 밟아가며 유연한 사위가 좋다. 참, 이번 대동제에 이런 민족적인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 곱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 안 보인다. 한복만 입었어도 내가 뭐 좀 많이 사주겠는데. 대동제 사흘째 오후 2시, 대운동장특설무대에서 ‘우리나라 전통성인식 체험하기’ 이벤트가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배재대 善男善女 몇 쌍이 이 체험에 참가했다. 보기에 참 좋았다. 나한테는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그때 이벤트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흘려듣고 연구실에서 부랴부랴 달려갔다. 사람이 많으면 내 설 자리가 없을가봐. 그런데 무대 앞 그렇게 많은 의자는 텅텅 비어 있었다. 관람석에는 맨 앞줄 귀빈석에 나하고 학생들 몇 명이 있을 뿐이다. 주위 먹을거리 천막에 학생들 제법 되던데 여기에는 신경을 써는 같지 않았다. 원래 알고 보니 요즘 애들 이런 전통적인 민족행사 같은 것에 그리 흥취 못 느낀다 하더라. 그러데 우리 학교는 민족대학이라 해서 그런지 아직도 민족적 정취가 많이 남아있다. 우리 학교의 문화예술절 클라이막스는 우리 조문학부의 문예공연으로 장식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善男善女의 우리 말 사회로부터 韓민족의 민족적 색채가 짙은 화려한 무대가 펼쳐진다. 배재대 대동제, 우리 연변대 문화예술절 좋기는 좋은데 요즘 애들 못 말리는 가운데 하나, 뒤풀이의 마실거리-술통에 빠지는 거, 문제다 문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나딩구는 술병, 이쯤은 약과고 여기에 술김에 사단이라도 치면 큰일이다, 큰일. 우리 학교 애들은 무슨 시합 하나 끝날 때마다 학교주위 식당으로 몰려가 술술 하기다. 참 잘 넘어가는 술이다. 너무 잘 넘어가서 문제다.그리고 학교의 정상적인 강의수업과정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오전에 강의수업을 한다고 하지만 전날 저녁 녹초가 되었거나 축제분위기에 탕개가 풀린 마음들에 싱숭생숭 몸만 자리를 지킬 뿐. 그러니 이런 축제를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마당에 마련했으면 適時適心의 화끈한 한 마당이 되지 않겠는가. 이때쯤이면 배재대, 우리연변대 합동축제 한 마당도 벌릴 수 있으련만! 2005. 5. 13
28    인간의 생명의식과 예술 댓글:  조회:5208  추천:63  2005-05-08
인간의 생명의식과 예술인간은 의, 식, 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제2차원의 가상세계인 예술을 추구한다. 이것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럼 인간은 왜서 예술을 추구하냐 하는 원초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예술,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생명의식의 담지자다. 인간의 생명의식은 무한하고 유상하고 실속 있게 살고 싶다. 그런데 현실적 삶은 생, 노, 병, 사에 우리에게 유한하고 무상하고 허무만 안겨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죽는다. 그래서 유한하고 무상하고 허무한 것, 그리고 죽는 것의 안티테제로 인간의 생명의식이 싹트고 고양된다. 차라리 죽어 바위가 될가... 옛날 끔찍하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한다. 그런데 남녀칠세부동석에 사람들의 눈이 무서웠고 총각은 병역에, 부역에 끌려 다니다 보니 그들은 도저히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겨우 한번 만났다. 자기도 모르게 서로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는 자기네들이 부둥켜 안은 그 모습을 바위에 새겼다. 그 다음 둘이 동시에 그 바위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두 사람의 피는 그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볼 때 그들 사랑의 얘기를 외웠다. 이로부터 그 바위는 그들 사랑의 징표로 되고 그들 사랑의 얘기는 구구전승 되었다. 그들 짧았던 사랑은 영원한 예술적 사랑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한국트로트 도 인간의 이런 절규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인간의 유한을 무한으로, 인간의 무상을 유상으로, 인간의 허무를 실속으로 갈무리했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긴단데 나는 무엇을 남기지? 제2의 나-나의 씨종자, 나의 후예를 남기기. 이로부터 카사노바바람기는 발동되고 계획생육은 무색해진다. 인간의 고상한 사랑이라는 것도 원초적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을 하자면 무드가 무르익어야 한다. 그래서 손발을 놀리게 되고 엉치를 흔들게 된다. 이른바 춤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많은 예술 가운데 춤은 인간의 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많은 춤 및 그 사위는 직접 성적인 유혹이나 즐거움을 나타내는 데서 기원하고 있다. 一進一退하고 덮치면 눕는 탱고, 그리고 둔부 비비꼬고 흔들기가 키포인트인 룬바, 삼바는 뛸 데 없는 성희적인 춤. 그리고 중동이나 애급, 인도의 肚皮舞, 하와이민속춤인 草裙舞는 남자들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한 여자들의 비애 어린 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남자들의 성적 즐거움 및 생명의식을 고양시키는 춤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인간은 일회성적이고 한시적으로 끝나는 이런 춤만으로 성차지 않는다. 인간은 나 자신을 직접 새기고 그리고 찍어낸다. 조각, 미술, 사진, 촬영은 이로부터 생겨난다. 고대 애급 법왕들의 조각상, 그리스 올림픽 챔피언들의 조각상, 중국 진시왕릉의 병마용 등은 법왕이나 챔피언, 시황제로서의 영원함을 꿈꾼 소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유럽 중세의 교황이나 군주들의 그림, 그리고 우리 동양의 왕후제상이나 명인들의 영정들도 마찬가지다. 현재도 우리는 새기고 그린다. 여기, 여기 무엇을 새기거나 그리서는 안된다는 경고표지판이 버젓이 세워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승지나 유적지에 가보면 곳곳에 ‘갑돌이와 갑순이 모모일에 여기에 왔다갔음’하는 것들을 새기고 그린 ‘낙서’들, 그들은 명승지나 유적지의 영원함에 편승하여 영원함을 같이 누리려 한다. 그래서 ‘낙서’라 하기에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의식을 무시하는 것 같아 좀 안쓰럽다. 어떤 괴짜들은 사람의 손이 가 닿기 힘든 벼랑턱이나 아짜아짜한 곳에다 새기거나 그린다. 영원한 자기의 생명흔적을 남기려는 짓궂은 생명의식에 머리가 숙여진다. 사실 권력자나 명인들은 자기의 권력을 턱대거나 이름에 기대어 공권력으로 명승지나 유적지에 새기고 그리고 하지 않는가? 태산, 묘향산... 그게 그것이 아닌가 말이다. 현대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사진이나 촬영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진을 찍거나 촬영을 하기 좋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생명의식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자기 모습을 많이 남기는 것이 마치 이 세상에 자기의 생명연장이나 되기나 하는 듯한 착각 속에 우리는 산다. 결혼 사진, 번쩍번쩍, 촬영 쭉~ 그래서 렌즈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얼굴을 내밀고 싶다. 특히 한 자리하는 사람들은 사진이나 촬영에 더 집착이다. 사진을 찍으면 항상 모심을 받으며 앞줄 가장 중간자리에 앉게 된다. 촬영을 할 경우라도 클로즈업되는 가장 멋진 모습을 찍어주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맨모습보다도 더 멋진 모습을 사진이나 촬영에 담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진을 찍거나 촬영을 할 때 우리는 각도를 잡거나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화장을 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우리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예술화된다. 그러니 자연히 사진이 본 사람보다 낫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요새는 컴퓨터디지털이 알아서 예술처리를 해주니 정말 미운 사람 없더라. 고운, 멋진 모습만 남기게 되니 우리의 생명의식은 배가로 고양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 그러니 영원한 예술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본능인가봐. 굴원, 현실의 美政이상이 좌절되고 인생에 남은 것은 비탄뿐. 그래서 그는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자기 한생을 총화하는 장편서정서사시 를 남긴다. 주관의 대상화를 가장 직실히 실현하는 시인만큼 온전한 굴원 자체를 이 세상에 남긴 셈이다. 그래서 사마천의 말처럼 굴원은 갔으나 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뿌리고 있다. 사마천, 남자한테는 최대의 치욕인 궁형을 당했다.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도 그렇고 그 치욕을 설할 무엇을 남겨야 했다. 그는 ‘發憤著書’를 택했다. 는 이렇게 산생되었다. 그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멀리 얘기는 그만 두고 우리 조선족문단의 거인 김학철옹을 보도록 하자. 그는 원래 군인이나 정치가나 되려고 한 듯하다. 그런데 불행이도 다리 한 짝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문학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그는 희대의 필회사건에 말려들어 좋은 세월 다 감옥에서 보내고 말았다. 그가 출소했을 때는 인생 60고개도 퍼그나 지난 시기.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무용자출입금지에 그의 문학금자탑 쌓기는 시작되었다. ,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리숭하게 사라져 가기만 하는 조선의용군 위용을 그리는 문학적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회적 불의에 도전하는 비수 같이 예리한 잡문들... 그리고 20세기 독재자들한테 안긴 직격탄 -. 그의 글들은 그의 인생체험에 가장 근접하고 있는 만큼 그의 생명의식의 직접적 승화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의 이런 글들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그는 우리 조선족의 노신으로 빛을 뿌리고 있다. 예술의 영원성에 대한 추구 내지 숭배는 인간의 생명의식까지도 포기해 가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 몰입하게도 한다. 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 순수예술은 바로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이로부터 예술가들은 ‘미치광이’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런 예술에 몰입한 예술가들은 현실세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예술 사이를 오락가락하거나 전적으로 예술세계 속에서 사는 경우도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반•고흐, 예술에 너무 몰입하다보니 마지막에 정신이 오락가락. 자기 귀를 칼로 베어내고도 아픈 줄 몰랐다 한다. 그리고는 귀 한 짝 떨어져 나간 자기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지 자화상을 그렸다. 우리 현대문학사의 김동인도 마찬가지다. , 딸이 불에 타서 죽는 모습에서 멋있는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는 아버지, 예술세계에서 망정이지 현실세계에서 이것은 분명 범죄다. 실제로 순수예술가들은 이른바 영원한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 범죄라는 의식도 없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를테면 실제로 강간을 해보며 일종 원초적인 생명 충동이나 힘을 느끼기, 그리고는 예술세계에 그 충동, 힘, 느낌을 담으며 생명의식을 영원함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이 지경이 되면 그 예술가의 현실적 생명의식은 종식을 고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의식에 위협을 주고 손상을 주기 때문.현대의 많은 예술들도 생명의식의 고양에 다름 아니다. 현대문명의 인간소외를 다룬 모더니즘, 몸에 올가미가 씌워지도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다는 흑색유모아, 황당한 현실은 황당하게 맞설 수밖에 없다는 황당파, 喜皮笑臉의 다다이즘... 이들 예술은 비비꼬인 예술세계로 생명의식의 한 숨통을 찾았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무의식의 진실에까지 파고들면서 의식의 흐름, 자동기술법으로 무의식의 생명의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요새 포스트모더니즘이요 하는 것은 뒤죽박죽이 된 후기공업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생명의식의 고양으로 된다. 예술이 아무리 모더니즘, 한걸음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왔다고 하지만 인간은 제2의 가상세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하는 것 같다. 문신, 보디페인팅-알몸 자체의 예술화. 많은 종족이나 민족에게서 보게 되는 문신, 몸이 예술세계로 영원히 고착되는 한 보기. 문신의 연장선상에서 현대의 보디페인팅, 거추장스러운 옷은 필요 없단다. 몸 자체가 옷이고 예술이란 것이다. 요새는 종족,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적인 바람을 몰고 온다. 퍼포먼스, 행위예술, 인간의 포즈가 예술 자체로 승화된다. 인간이 예술 자체로 굳어지고 싶은 몸부림의 현대적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생명의식은 끊임없는 표출을 요구한다. 이래서 예술의 대상화니 발산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난다. 이런 대상화나 발산을 가져올 때 인간의 심신은 건강해진다. 적어도 꽁 해서 오는 암 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예술은 우리 인간의 영원한 제2의 생명체이다. 범은 배가 고프면 짐승을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잔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예술을 하고 배가 불러도 예술을 한다. 인간은 예술적인 삶을 살게 되어 먹었다. 직접 창작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예술을 감상하거나... 물론 배가 부르면 자기가 직접 참여하거나 여유로운 예술세계에서 노닐고 싶어 한다. 수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 인간들이 너도나도 수필의 세계에 한번 쯤 빠져 보는 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우리 연변의 ‘어머니수필회’를 비롯한 수필의 보편적인 대중적 인기도 이것을 잘 말해준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으로서 자기 스스로와의 속삭임이다. 이런 속삭임에 제3자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참여할 때 생명의식은 더 없이 고양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허구다. 소설의 픽션적 특성이 그 전형적인 보기다. 그런데 사실 이런 픽션도 생명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방편임에 다름 아니다. 현실에서 진, 선, 미의 생명의식이 도저히 충족되지 못할 때 인간은 픽션의 이상주의, 낭만주의로 나아간다. 1이면 1, 2면 2식의 사실적인 묘사가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을 때 인간은 이백 식 의 비흥, 상징, 과장, 의인 등등의 수사법이 생겨난다. 인간의 생명의식과 예술은 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니가 있어 완연히 하나로 녹아들은 경지. 인간의 삶은 이 경지에서 노닐 때 정녕 생명의식은 고양되고 예술은 영원한 것으로 된다.2005. 5. 8
27    나르시시즘 댓글:  조회:4752  추천:62  2005-05-02
나르시시즘나르시스,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얼마나 잘 생겼는지 어느 날 호수에 비낀 자기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 황홀한 나머지 그 모습을 잡으려고 호수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단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맹목적인 자기애적 경향을 가리켜 나르시시즘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단다. 나르시시즘, 인간은 의, 식, 주의 육욕의 동물이라 본능적으로 나 먼저, 나 먼저 살고 보자는 自私自利한 자기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이 아무리 진화해도 이 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동물성은 우리의 胎志이기 때문. 엥겔스도 이 점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옷을 입는다, 왜서? 추워서. 천만에! 인간의 나르시시즘 때문에 옷을 입는단다. 사실 추워서 입는 경우에도 자기 한 몸을 보호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이 옷을 입는 보다 중요한 요인은 자기를 더 멋지게, 곱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멋으로 입는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깨를 기껏 살린 남자들 정장, 화려한 색상에 줄무늬, 주름잡기에 花姿招展의 여자들 옷, 분명 남성, 여성의 자기적 특성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화장, 치장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머리발을 구름발처럼 살리고 버들눈섭을 그리고 눈초리를 살리고 연지곤지 바르고 립스틱 분홍입술의 여자들 화장, 그리고 요새 와서 눈 잡아 째고 쌍겹풀 눈 만들기를 비롯한 각종 성형수술, 그리고 문신, 나아가서 보디페인팅, 그리고 귀걸이, 목걸이, 반지 각종 악세사리 반짝반짝, 찰칵찰칵, 이 모든 것은 나르시시즘적인 외형적 표현이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신경을 씀으로 여자들은 보다 많이 나르시시즘적인 허영으로 흐르는 이미지로 비친다. 그래서 영국의 대문호 쉑익셔피어도 말했던가, 여자들은 허영의 화신이라고, 허영에 옷을 입혀놓은 것이라고. 이런 愛美之心, 人堦有之식 멋 부리는 자기애, 전형적인 나르시시즘의 표현. 이런 것은 도에 지나치지 않고 적재적소적일 때 멋진 나르시시즘이 될 수 있다.그러나 돈을 흔전만전 천민자본주의의 과소비의 풍조, 그러면서 남한테 전혀 베풀 줄 모르는 것, 베풀 경우라도 자기 과시욕에 놀아나거나 施惠적인 자세, 그리고 우리 집은 옛날 양반이었는데 하며 흘러간 옛노래 부르는 것, 그리고 귀족적인 독선과 안하무인격, 이런 것은 뛸 데 없이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나르시시즘의 표현. 예컨대 어디에 돈을 좀 기부하고는 곳곳에 다니며 자랑하는 것, 이른바 고상한 자기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여기에 우리는 잠간 진짜 종교인들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머리를 까까머리로 깎은 스님, 비구니, 그것은 멋의 거세. 회색의 僧服, 그것은 무욕의 상징. 이들은 나르시시즘적인 도취경지보다는 어쩌면 자학적인 무아경지인 것이다. 바로 이 나르시시즘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긍정해주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 그것이 입에 발린 소리라도. 사실 잘 나지도 못했는데 잘 났다고 하면 과히 기분 나쁘지 않으며 잘 못 했는데 잘 했다고 칭찬소리를 들을 때도 괜히 기분 좋아진다. 서양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스치고 지나갈라치면 ‘Hi~’하며 알은체, 그리고 여자들 보기만 하면 거저 ‘Beautiful', 별 볼일 없는 보통일에 'Wondful' 연발하는 긍정적인 제스처는 상대방의 나르시시즘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해준다. 이런 면에서 인색한 우리는 대인관계가 서먹서먹하고 경색해질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에 비해 아이들이 훨씬 나르시시즘적이라 한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은 칭찬중심의 긍정적인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효과적이라 한다. 이런 나르시시즘은 자기의 긍정적인 대상화로 나타난 것에서도 표현된다. 남의 아이보다 내 아이가 고운 것, 자기 생명의 연장체로서의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문학예술에 있어서 작가예술가들의 분신인양 창작된 작품들, 부정적인 비평보다는 긍정적인 만세비평에 더 귀가 솔깃한 것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 나르시시즘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공정한 평가를 하기에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잘 나도 내 청춘, 못 나도 내 청춘, 내 멋에 내 사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잘 난 사람'들한테 기 죽지 말고 이렇게 사는 멋도 있어야 한다. 얼마 전에 탤런트 김자옥이 전 한국에 몰고 온‘공주병’바람은 자아 감각이 좋고 자아도취적인 나르시시즘의 전형적인 한 보기. 사실 연애, 사랑에 있어서 남자들은 다 백마왕자병, 여자들은 다 백설공주병적인 데가 있다. 자기 스스로를 은근히 연애, 사랑의 가장 이상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우리 사회에 시집장가 못가는 노처녀, 노총각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런 나르시시즘이 하나의 심리적 원인으로 된다. 그리고 마스트베이션, 남녀간 소통이 잘 안되고 외롭고 고독한 우리 현대인간들의 나르시시즘적인 자화상의 한 보기다. 이로부터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아는 것, 즉 自知自明이 총명중의 총명함, 가장 똑똑하다는 것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2005. 5. 2
26    웬디콤플렉스 댓글:  조회:4549  추천:79  2005-05-01
웬디콤플렉스세상은 요지경, 漫畵景이라 하지만 사실은 남녀간의 사랑이 요지경, 漫畵景. 웬디콤플렉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웬디는 다름 아닌 J.M 베리의 희곡 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 철부지 남편 피터팬을 어머니처럼 돌봐주는 웬디. 그러니 웬디콤플렉스란 남편을 아들, 동생처럼 모든 것을 다 챙겨주며 사랑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랑타입을 말하는 것이 되겠다.세상에는 정말 이런 타입의 사랑이 없지 않아 있다. 옛날 우리 역사에 조혼습속이 있었다. 사랑의 비극을 읊은 노래 가운데 하나가 조혼에 관한 것이다. 한창 뛰놀며 놀아야 할 나이에 남의 집 밑며느리(童養媳)로 들어간 여자애들의 서러움, 콧물 질질 흘리는 어린애에게 시집간 숙성한 처녀의 한탄. 연령적으로, 생리적으로 바란스가 맞지 않는 혼인에 무슨 사랑이요 하는 것이 생겨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콧물 질질 흘리는 어린애를 신랑으로 챙긴 그 숙성한 처녀의 마음이 알고 싶다. 그 챙길 수 있는 마음의 바탕, 남의 눈이 무서우니깐,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어린 동생이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여러 가지 가운데 웬디콤플렉스가 크게 한몫 하지 않았겠나 생각된다. 자식처럼 생각할 때 그 사랑의 정이 가장 끈끈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이나 다 챙겨줄 때 모성애적 사랑에 도취되기도 하지 않겠는가? 정상적인 사랑이 통하지 않을 때 이런 변칙적인 사랑의 대리만족이 생겨나는 법. 이제 문제는 그 코흘리개가 다 커서 숙성한 총각이 되었을 때 사랑의 메아리는커녕 쪼글쪼글 어머니 같은 原配 마누라가 싫다는데 있다. 그래서 웬디콤플렉스적 헌신적 사랑을 기껏 배푼 原配 마누라가 남성 외도나 축첩제도의 희생품이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조혼에서의 웬디콤플렉스가 애초에 연령, 생리적으로 바란서가 맞지 않는 남녀사랑의 한 보기라면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외우는 ‘맏며늘감’은 대가족제도하에서의 웬디콤플렉스의 확장된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올망졸망 한 줄에 쫙 달려 있는 동생들의 맏이, 정말 맏이노릇하기 힘들다. 이런 집에 누가 딸을 주자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웬디콤플렉스가 강한 여자들은 이런 집에 별로 거부감 없이 시집온다. 이 경우 맏이가 웬디콤플렉스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디히즘적인 카리스마스적 존재일 때 맏며느리의 웬디콤플렉스는 남편 동생들한테 錯位, 전이되어 나타날 소지가 많다. 이 경우 맏며느리는 맏이가 할 부모노릇을 헌신적으로 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본다. 그래서 맏이는 설사 애초에 그리 마음에 드는 색시감이 아니었더라도 맏며느리의 이런 웬디콤플렉스발산에 적어도 도덕적으로 감복하며 ‘아내에게 드리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사랑은 이론적으로 순수한 사랑 대 사랑의 교류니 대화니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이론에 거치고 마는 것이고 사실에 있어서는 이러저러한 ‘궁합’이 중요하다. 마마보이(MaMaBoy), 어머니의 과잉보호로 장가 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정신연령으로는 애 같은 남자. 장가가기 힘들다. 일반 여자들이 싫어하니깐. 그런데 헌신짝도 짝이 있다고 이런 남자들이 웬디콤플렉스의 여자를 만나면 더 없이 멋진 사랑의 향연이 배풀어진다. 하나는 받고 싶고 하나는 주고 싶고, 짝짜쿵이 아닌가 말이다. 웬디콤플렉스, 남자들 참 편하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거친 풍랑의 힘든 항행의 종착점은 언제나 포근한 항구. 남자들, 웬디콤플렉스 본능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인 고향-어머니자궁 같은 거. 그래서 그것은 남자들의 자궁회귀본능을 자극한다. 요즘 소프트시대. 남자들 살기 어려운 세상. 그래서 ‘연상의 여인’을 찾아 헤매는가. 姐姐, 姐姐가 칭얼대는 阿妹보다 쉽게 문제를 해결해주지. 飯來張口, 衣來伸手라 이런 신선놀음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나 말이다. 옛날 엄마한테서나 느껴보았을 사랑을, 행복을... 그래서 남자들은 이런 사랑이나 행복이 충족되지 않을 때 허전한 감을 느끼며 대리만족을 찾아 나선다. 혼인에서 웬디콤플렉스 여성선호는 그 전형적인 보기다. 나도 ‘연상의 여인’을 얻었다. 그런데 나는 요새 유행에 따라 간 것이 아니고 ‘연상의 여인’이라는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때 그만 ‘연상의 여인’의 ‘덫’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우리 그때 연상의 여인한테 장가들면 좀 이상하게 볼 때다. 우리는 그때 만나는 순간에 서로 좋아했다. 뛸 데 없는 一見鐘情. 나는 그녀의 생김생김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박색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 같은 포근함에 빠졌다. 그녀의 가슴에 안기면 안도의 숨이 나오고 어찌 그리도 편안한지. 그런데 우리의 궁합이 맞아떨어질라 그런지 그녀는 분명 웬디콤플렉스형 여자였다. 나는 그때 그녀의 나이도 똑똑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신분증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네 댓살 위였다. 나는 그때 별로 이상한 감을 느끼지 않으며 위면 위지뭐, 좋지뭐, 그러니 그녀가 그렇게 잘 해주지, 어험. 나는 콧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그녀가 좀 당황해하는 기색이었다. 신분증을 챙기기 바쁘게 봤어 하며 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어, 좋아. 그래, 그럼 되, 내 잘 해 줄께! 그래서 우리는 오늘까지도 끄떡없이 그녀는 배 풀고 나는 받는 식으로 남부러운 사랑을 해왔다. 오늘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분명 웬디콤플렉스가 필요했어. 우리 어머니는 나한테 그리 사랑을 못주었다. 내 어릴 때 기억에 우리 어머니는 시시콜콜 아프기에 바빳다. 그러다가 내가 중학교에 갈 임박에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억대우 같은 육형제에 막내로 자랐다. 내가 어릴 때 제일 시샘이 나 했던 것은 내 또래들이 누나가 있는 거. 나는 누나가 한이 맺히도록 부러웠다. 그래서 나의 아내는 엄마 같은, 누나 같은 웬디콤플렉스존재.웬디콤플렉스는 헌신적이기에 고상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매력이 있고 힘이 있는 듯 하다. 우리 학과에 내가 가장 존중하는 학술카리스마적 교수 한분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체 우쭐대도 그 교수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되고 만다. 그런데 언젠가 그 교수도 그 누구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만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럼 ‘그 누구’의 장본인은 누구? 다름 아닌 사모님. 가만 보니 사모님은 분명 ‘연상의 여인’형 떠나 웬디콤플렉스형 타입. 당신, 당신 거저 학술만 하오. 나머지는 내 다 할게. 아이 낳는 거, 밥 하는 거, 옷 씻는 거... 그래서 그 교수는 전격 학술에 몰입하여 대성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대성을 하기 위한 노력, 분투 그리고 카리스마스적 고봉은 피곤하다, 힘들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남자 강자에게는 웬디콤플렉스의 포근히 감싸주는 어머니 같은 품이 더 그리워. 안 그래도 언젠가 이 교수가 내심의 진실을 토로한 수필에서 사모님을 ‘마마’로 부른다 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자기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여자는 웬디콤플렉스의 소지를 충분히 갖고 태어난다. 여자는 어머니대지. 모든 것을 품어주고 감싸고 키워주는 품. 여자는 부드러운 물. 무엇이나 촉촉이 적셔주고 보듬어준다. 여기에 자란 환경이 맏딸쯤 되면 이런 것이 한결 더 강화될 소지가 있다. 여기에 다시 프로이드의 오디푸스콤플렉스를 떠올려 본다. 남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를 짝사랑한단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어머니 같은 여자를 찾아 헤매며 대리만족을 추구한단다. 웬디콤플렉스형 타입의 여성선호는 이것의 한 보기가 아니겠는가? 프로이드의 말대로 오디푸스콤플렉스가 무의식적 본능이라 할 때 우리 남자들은 웬디콤플렉스형 타입은 우리의 영원한 여인상인지도 모른다.우리는 우리 조선 사람의 전통적인 여인상을 外柔內剛으로 개괄하고 있다. 보다 외향적이고 발랄한 漢族 여인들에 비기면 그럴 듯하다. 특히 근간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아 중심적이고 직설적인 현대 여인들하고 비기면 이 점은 더 돋보인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전통적인 여인상은 웬디콤플렉스형 타입에 많이 가깝다는 말이 되겠다. 겉으로는 무의지적이고 무엇이나 다 주며 따라주는 모성, 너무 독단적인 자사자리성에 빠져 있는 우리 남자들이 초라하다. 그런데 우리의 여자들은 웬디콤플렉스에 빠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內剛, 나름대로의 주견이 있었고 쏘는 데가 있었다. 춘향이 사랑의 고삐를 끌고 가듯이. 그래서 멋 있다.웬디콤플렉스, 사랑의 한 타입. 여기에 이렇쿵 저렇쿵 구설수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요지경, 나름대로의 ‘궁합’을 맞춰 다양한 사랑의 멜로디를 엮어가는 것이 현명한 삶의 지혜이고 선택이고 이것 또한 우리 삶의 滿花景이다. 2005. 5.1
25    카사노바콤플렉스 댓글:  조회:4068  추천:81  2005-04-29
카사노바콤플렉스카사노바, 전설화된 유럽의 희대의 바람둥이. 바람둥이임에 도덕적 질타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카사노바는 심심찮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뿐만 아니라 은근히 부러움의 대상으로까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사노바는 워낙 우리의 무의식심층에 있는 생명의식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식이 의식 차원으로 표출된 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바람기이다. 바로 이 주책할 수 없는 바람기를 일명 카사노바콤플렉스라 한다.우리는 누구나 다 죽는다. 相反相生, 이것이 우리의 생명의식을 기껏 고양시킨다. 남자사형수들이 죽음을 받는 순간에 생명의 씨앗을 뿌린다는 보고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초탈을 의미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추구, 우리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다. 신선, 열반, 천당이 바로 이런 경지다. 종교라는 것이 다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선, 열반, 천당이라는 것이 실제로 가닿기 힘들고 몸에 와 닿지 않은 지라 우리는 가장 쉽게 본능적으로 와 닿는 ‘제2의 나’만들기에 몰입하게 된다.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긴단데 나는 무엇을 남기지? 내 새끼, 바로 그것이야! 그게 바로 ‘제2의 나’야. 그럼 이제부터 ‘제2의 나’만들기 출발. 아버지, 엄마, 오빠, 누나, 동생... 마구잡이로 싸잡아 하기. 난혼, 인류역사의 한 폐지. 고대 그리스신화는 전형적인 한 보기. 그런데 난혼은 근친상간에 의한 기형적인 악과로 우리의 생명의식을 좌절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시도를 해본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그럴듯하다. 특히 男少女多, 女少男多, 이런 특정적인 상황 하에서는 그럴듯하다. 우리 한민족이 전통적으로 알게 모르게 묵인해온 축첩제도, 그리고 현대 중동 아랍권에서의 이런 혼인방식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그런데 이런 혼인방식은 남자만의 혹은 여자만의 일방적인 생명의식의 고양밖에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도덕률에 저촉되어 통로가 막힌다. 사실 인간의 생명의식과 현대적 도덕률 내지는 법은 상충일로를 걸어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팔팔한 원초적인 생명의식은 많이 위축되고 고갈되어 왔다. 현대적 도덕률 내지는 법으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은 우리를 문명한 현대인간으로 만들면서 무맥한 퇴물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현대문명의 약과 독이다. 물론 인간은 현대문명에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적인 필사적 반항이 이어진다. 중국이나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不孝無后爲大, 남아선호사상에 기인한 애낳기 내지 씨받이, 그리고 현재 중국 계획생육 무색할 정도로 줄줄히 낳아대기는 그 보기. 여기서 不孝無后爲大, 남아선호사상은 우리 조상들의 끈질긴 생명의식에 다름 아니다. 子孫滿堂을 보아야 흐뭇하게 눈 감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조상들이 아닌가. 그리고 많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법적으로는 매음을 허용하지 않지만 사창가를 비롯한 음성적인 매음을 허용하는 것도 이런 생명의식의 발산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런 생명의식에 의한 강간이라는 악의 발생을 원천봉쇄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식은 한 민족의 독특한 풍속도나 시대상을 이루기도 한다. 세계를 휩쓴 거인-칭키스칸을 배출한 몽고종, 옛날 남자들 씨종자가 별로였다 한다. 그래서 타민족 건장한 남자가 손님으로 오게 되면 술과 안주의 향연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저녁 잠자리에 집주인의 아내나 딸을 동침시킨다는 것이다. 씨를 받기 위해서란다. 종족 보존을 위한 피의 논리를 떠난 안쓰러운 고육지책의 풍속도에 다름 아니다. 남의 얘기는 그만두고 우리 민족의 얘기를 좀 해보자. 6•25전쟁이 끝나 조선에서는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한다. 性比의 불균형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남아도는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깔끔하고 근엄한 사회주의도덕률에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얼마간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현대도덕이나 법이라는 것은 운운할 여지도 못 된다. 미국의 권위성적인 혼인리셔얼츠의 앙케이트 조사에 의하면 인간의 이혼주기는 현대로 오면 올수록 짧아지는데 현재는 3년 좌우로 잡혀 있다 한다. 그러면서 이혼의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사랑의 권태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은 황금으로 만든 집이야. 안의 사람은 나오고 싶어서 발광이고 밖의 사람은 들어가고 싶어서 발광이다 말이야’고 무심코 하는 농담은 바로 이것에 대한 좋은 주석으로 된다. 이것이 이른바 喜新厭舊에 다름 아니다. 우리말로 하면 바람기, 여기서 말하는 카사노바콤플렉스가 되겠다. 그럼 사람들은 왜 일부일처제의 사랑에 권태감을 느끼고 카사노바콤플렉스에 빠지는가? 역시 발랄한 생명의식의 充溢으로 풀이할 수밖에. 인간은 자기 밭, 자기 씨종자를 발광적으로 찾아다니다가 이것이다 하는 순간 자기 밭, 자기 씨종자에 꾸벅꾸벅 열심이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아침에 이거 별거 아닌데 하며 자기도 모르게 남의 것에 눈이 가게 된다. 인간은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 이것을 사랑의 역학으로 풀이해보면 남자들은 항상 남의 밭이 좋아 보이고 여자들은 항상 남의 씨종자가 좋아 보인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 한다는 ‘여보당신’을 만났을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새로운 ‘여보당신’을 만나 또 한참 열심히 씨 뿌리고 받고 하다가 식상하고 멋쩍은 감이 들면 또 새로운 ‘여보당신’을 찾아 나선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것이 잘 안 된다. 얽히고 섥힌 ‘여보당신’ 관계에 새끼들이 중간에 쇄기처럼 떡 박혀 새로운 ‘여보당신’한테로는 寸步難行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고 해야 옳겠다. 봉건시대의 3천궁녀를 거느린 황제나 현대의 사담후세인같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잡은 자들만이 실제로 이 꽃 저 꽃의 탐화봉접이 되어 자유자재로 날아보는 것이다. 요새는 돈의 시대라 돈 많은 사람들도 살판 만났다고 납 뜬다. 돈 많은 老板에 착착 붙는 ‘여비서’들, 고 얼굴 밑천으로 깜짝 한번 출연에 몇 만원, 몇 억원 버는 탤런트들, 오늘 만났다가 내일 갈라지는 것이 요즘 세태가 아닌가. 대개 별 볼일 없는 일반사람들보다는 황제요, 수령이요, 老板이요, 탤런트요 하는 지금 말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카사노바콤플렉스가 많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카사노바콤플렉스가 잘 발동된다는 말이 되겠다. 내 이 좋은 종자, 많이 만들어야지 하는 식으로... 사실 이 좋은 종자들이 흘레 할려는 개들처럼 서로 찾아 헤매다보면 바지치마 벗겨지는 줄 모르고 자기네들끼리 쉽게 의기투합이 이루어진다.그럼 일반 사람들은 침 질질 흘리며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천만에. 이들은 문학예술을 통한 대리발산의 통로를 찾는다.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카사노바콤플렉스를 발산한 문학예술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왔다. 이른바 ‘프로노’는 그것의 노골적인 적나라한 보기가 되겠다. 사실 전반적으로 볼 때 서민의 노래인 민요라는 것은 성적인 요소를 떠나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카사노바콤플렉스의 문학적 전개를 좀 구체적으로 보면 서양에 있어서 카사노바 자체가 문학적 형상으로 승화되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중세기 가혹한 마녀사냥이 횡행한 마당에도 성모•마리아에 대한 사랑으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위장발산을 꾀했고 단떼의 경우에는 자기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짝사랑으로 ‘신곡’을 읊어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 자산계급 고전주의,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는 몰리에르의 , 로렌스의 으로 성의 해방, 성의 아름다움을 고취했고 20세기 초 로댕의 ‘키스’조각은 영원한 사랑의 금자탑을 빚어놓았다. 중국이나 한민족의 경우를 보더라도 男女七歲不同席의 엄혹한 세상이건만 2☓8=16 청춘들의 一見鐘情의 사랑을 엮은 염정소설들이 그렇게 유행을 본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사랑의 백팔반기술, 기교를 전시한 , ‘남자는 흙으로 빚고 여자는 물로 만들었으니 여자가 좋다’고 하며 내내 여자들 속에서 놀아난 가보옥을 부각한 같은 중국의 세정소설, 그리고 양소유의 팔선녀-여성편력을 기껏 펼친 , 조선판 - 같은 조선의 세정소설은 당시 사람들의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전형적인 발산이다. 사실 이런 소설들뿐만 아니라 조선조말기 화가 김홍도의 世俗圖를 비롯한 春畵의 유행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전문 프로노 소설이나 그림이나 영화, 특히 요즘 세상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인터넷 사이트상의 색정이요 하는 것이 근절되지 않고 유행되는 것도 그 심층적인 무의식 차원에서 바로 카사노바콤플렉스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현대는 인간의 생명의식이 많이 존중되면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발산 기회나 장치도 많다. 세월이야 참 좋은 세월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카사노바콤플렉스에 한번 잘 못 놀아나 ‘狗破鞋’라는 누명을 쓰고 신세조지는 선남선녀들을 생각하면 참 불쌍도 하지. 이혼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 참 어렵다. 당사자끼리 이혼하겠다는데 무슨 시시콜콜 시비가 그렇게 많은지. 同床異夢, 貌合神離보다 낫지 않으리. 그리고 가령 이혼했을 경우에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존재로 취급받아 왕따를 당하거나 사회적 출로가 막힌다. 오늘날 젊은이들 보면 이혼을 식은 죽 먹기로 하는 듯하다. 미국의 경우는 5쌍에 3쌍이 하는 꼴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연길만 보아도 이혼율이 5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 개망태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보면 同床異夢, 貌合神離보다는 속궁합이 맞는 진실한 인생을 추구하는 현대 인간들의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이 합리적으로 가미될 때 오히려 그것은 생기발랄한 바람직한 삶이 될 것이다. 사실 현대 인간들에게 있어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이 그리 묵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것이다. 씨종자를 뿌렸으니 꼭 열매를 맺고 거두어 들이야 하는 법은 없다. 현대는 사이버 세계라 카사노바콤플렉스도 사이버 세계를 통해 기껏 발산할 수 있음은 물론 실제로 둘이 만나 맛있는 밥 한 끼 먹듯이 해제끼는 獵色雜技에 좋았어, 어, 좋았어 하며 홀가분하게 갈라지는 요즘 N풍경. 그들은 굳이 사랑의 결과물로서 쏟아져 나오는 그 새끼들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을 확인하려는 전통적인 발상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그 새끼들의 출현을 막는다. 사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단지 씨종자의 배설과 받아들이는 과정만으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을 발산하고 있다. 목적, 결과보다는 과정, 기술이 더 중요한 시대, 이로부터 현대의 사랑은 일종 즐거움의 추구 그 자체다. 물론 이 즐거움에는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도사리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獵色雜技, 현대의 사랑, 즐겁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부럽다. 마음껏 사랑을 하며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을 발산할 수 있으니. 그런데 무엇이나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긴다. 中庸之道는 영원한 진리! 에이즈, 다름 아닌 무절제한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의 발산을 절대절명의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일종 징벌이다, 경고다. 그러니 아무리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의 발산이라도 진, 선, 미의 합법칙성,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절대 자유라는 것이 없으니 카사노바콤플렉스의 생명의식의 발산도 문학예술을 통한 대리만족을 받는 것도 현명한 처사가 아닌가 한다. 2005. 4. 27
24    직업적 변태 댓글:  조회:4011  추천:71  2005-04-26
직업적 변태흐름식 온라인작업에서 자기 앞에 차례지는 나사조이기가 바쁜 주인공, 퇴근해서도 나사와 비슷한 모양새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조이기 동작으로 달려들기. 그러다가 어느 중년여성의 가슴팍으로 달려들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는 주인공-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챠프린의 의 주인공. 무심코 웃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데는 정말 ‘왔다리 갔다리’하는 내 마음에 나도 헷갈린다. 의 주인공은 우리의 실존, 직업적 실존을 일깨우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 챠프린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인간은 직업적 존재다. 사회라는 것은 유기적인 직업적 네트 속에서 형성되며 발전한다. 그럴진대 직업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기본 표지의 하나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직업을 갈구한다. 현재 우리 대학생들이 졸업해서 직업이 주어지지 않을 때 느끼게 되는 허전함은 그 욕구불만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나 정작 직업이 주어질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직업적 변태를 가져온다. 인간 실존의 딜레마, 비극.나는 얼마 전에 국제적 레벨을 자랑하는 한국 삼성그룹의 수원에 있는 TV공장을 참관 갔었다. 몇 분만에 TV 한대가 조립되어 나온다는 말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직접 흐름식 온라인작업장에 들어서는 순간 두 줄로 앉은 깨끗한 작업복의 깔끔한 처녀애들이 자기 앞에 차례지는 일감을 주무르기에 바쁜 모습들을 보고는 그만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챠프린의 의 21세기판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단순노동, 반복적인 단순한 육체적 노동은 인간육체의 변태를 초래한다. 의 주인공처럼 시도때도 없이 조건반사적인 행동의 편집광적인 증상을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적 직업관은 이것을 더 조장한다. 준확하게, 빨리-숙련공, 월급인상... 그래서 우리는 다람쥐 채바퀴 돌 듯 하면서 이런 편집광적인 증상을 더 보이고... 정신노동도 마찬가지다. 정신노동자들이 육체노동을 깔보며 어깨에 힘을 주고 있지만 실은 100보에 50보. 어쩌면 더 정신병자 같은 증상을 보인다. 소학교 선생노릇을 하는 부모들을 만난 애들은 꾀나 골치 아플 거. 시도때도 없이 하는 공부타령에 지겨울 것이고 이것저것 다 간섭하는 ‘愛管閒事’에 정말 너들머리가 날거다. 내 꼬라지도 사람웃기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대학교수랍시고 조금은 시뚝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남 말 할 기회는 주지 않고 혼자 씨벌이기 좋아함. 그것도 으흠으흠, 훈계투에. 그리고 교단에 서서 강의를 할라치면 학생들이 듣든말든 자든말든 제멋에 좋아 입에 거품을 물면서까지 찧고빻고. 이 세상에 천상 말을 하기 위해 온 사람처럼. 나는 위에서 한 자리하는 우리 샌님들을 우숩게 보는 모모한 분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항상 위계질서 속에서 아래위 눈치보기에 바쁜 그들, 그리고 권위를 세우느라고 더워서 땀을 쫄쫄 흘리면서도 넥타이를 졸라매고 머리를 빠빳이 쳐드는 그 자세...세상은 요지경이요, 변태의 요지경. ‘三句不離本行’이 아닌가. 그리고 직업은 사회적 수요요, 그러니 직업은 평등이요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같은 수 없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러니 공자가 말하지 않았든가. ‘勞力者力於勞心者’. 그래 똥 퍼는 사람과 나라 주석이 같을 수 없는 변태. 직업은 변태다. 무섭다. 이 세상 자기 직업에 만족해하는 사람 없다. 다른 사람의 직업에 비긴 상대적 만족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으로는 敬業정신이요 뭐요 하며 직업의 신성성을 기저로 한 직업도덕을 고취한다. 그러니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호박 쓰고 돼지우리에 기어드는 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해방, 직업적 변태에서의 해방이 최종 목표가 아니겠는가? 인간은 우선 지겨운 단순노동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많은 일하는 로봇들의 개발, 현실적으로 이런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농민들의 시커멓게 탄 얼굴, 장알 박힌 손과 화이트칼라 사무원들의 백지장 같이 흰 얼굴, 말랑말랑한 손,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에서 오는 변태. 이로부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가 아닌 하나가 되는 그런 경지의 직업을 창출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사회적인 노동분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전근대적인 노동, 육체와 정신 노동을 아울러 하는 경지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현대 노동분공으로부터 오는 직업적 변태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육체와 정신이 전면적으로 발전하는 全人이 깨여지지 않는 그런 경지의 새로운 직업적 경지를 창출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세계 보편적으로 행하는 주5일 근무제, 직업적 변태에서 오는 육체와 정신의 이탈을 하나로 아우르는 실제적인 시간적 여유를 주고 있다. 이 시간에 육체노동자는 육체적으로 푹 쉬면서 정신적 식량을 습취하고 정신노동자는 스포츠를 비롯한 팔다리를 많이 놀리는 활동을 하여 육체적으로 다져 가도록 한다. 그리고 요즘 휴가시간에 많이 하는 여행을 비롯한 레저붐은 우리의 다양한 개성을 살려 나감과 아울러 직업적 변태를 치유하는 효과적인 방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직업관을 가지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FreeLance, 자기의 글쓰기 적성에 기초한 자유기고가, 말 그대로 자유로운 직업이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쓰고 싶을 때 쓰는 글쓰기의 자유로운 경지다. 물론 돈의 냄새를 빼면. 변태 운운할 여지없다. Jod-Nomad, 직업유목민. 요즘 직업 찾기 힘든 세월에 생존의 한 방편으로 전락한 초라함이나 玩世不恭이지 않을 때 그것은 정말 멋있다. 어느 든든한 대기업이나 철밥통 같은 공무원 자리에 죽치고 앉아 변태고 타성이고 무엇이고 착착 들어오는 월급에 맛을 들이고 연금에 연연하며 한평생 살아간다는 종전의 직업관하고는 전혀 다르다. 인생은 나그네 길처럼 이들은 직업 나그네들이다.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아무 직업이나 다 해본다. 언제 쫓겨나거나 싫어지면 미련 없이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난다. 직업적 변태가 올 소지가 적다. 요즘 우리 대학생들 졸업해서 직업 없다 아우성치지 말고 이런 느긋한 직업관도 한번 가져봤으면.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직업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 초라하다. 按勞分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살기 위해 직업을 갖게 되는 초라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하루빨리 먹고 살기 위한 단계를 초월한 按需分配의 공산주의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이런 경지에 도달할 때 직업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되고 고봉체험의 자아실현이 된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 도달할 때 직업은 정녕 유희화, 예술화된다. 우리가 소꿉놀이할 때 하던 일처럼 말이다. 나는 정말 배우들이 부럽다. 배우들은 배우인 만큼 정말 이 직업, 저 직업 배역을 다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직업은 체험적이며 일회성적이며 말 그대로 ‘연극’이다. 이런 배우들의 직업‘연극’이 바로 고봉체험의 자아실현의 경지이고 유희화, 예술화된 경지이다. 이런 경지에서 노닐 때 직업적 변태는 우리와 거리가 멀어지고 우리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2005. 4. 27
23    작용과 반작용 댓글:  조회:4196  추천:68  2005-04-26
작용과 반작용작용과 반작용, 관성, 질량(에너지)보존-대물리학자 뉴턴이 발견한 운동의 3가지 기본법칙, 이것은 우주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들임. 그것이 우주보편적인 법칙일진대 보편적용의 가치를 갖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여기서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만을 풀이해 보도록 한다. 뽈을 벽에 냅다 뿌렸다. 튕겨서 도로 나온다. 눈에 확연히 띄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머리를 솜뭉치에 들이박았다. 그대로 들이박힌다. 머리의 작용이 돋보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머리를 벽에 냅다 부딪쳤다. 퍽 머리가 터졌다. 벽의 반작용이 돋보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사실 작용이 돋보이든지 반작용이 돋보이든지 작용과 반작용의 힘은 대등하게 작동한다. 인간은 바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이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한다. 집채 같은 윤선, 바다에 깔아 앉지 않고 잘만 뜬다. 물론 배는 부력의 원리를 이용했다. 아르키메데스가 모욕하다가 발견했다는 그 부력 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이 부력을 발견하고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져 발가벗은 채로 거리로 뛰어 나가 나는 발견했어, 나는 발견했어 하며 웨쳤다니 좀 우습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서 보면 그렇게 ‘간단’한 원린데 말이다. 부력의 원리라는 것이 물은 밀어내는 만큼 떠받치는 힘을 생성한다는 것일진대 그것은 작용과 반작용법칙의 구체적인 한 양상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수영도 마찬가지다. 몸이 풍덩 물에 작용하는 순간 물은 같은 힘으로 풍덩에 반작용하며 몸을 물 밖으로 밀어낸다. 그래서 사람 몸은 물 위에 뜨도록 되어 먹었다. 모택동이 잘 하는 손발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仰泳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팔로는 물을 걷어내고 발로는 물을 냅다 차는 일반 수영의 원리는 사람의 손발과 물의 작용과 반작용법칙을 본능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구사한 것에 다름 아니다.나는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것을 믿는다. 그럴진대 우리 인간에게도 언젠가는 꼬리가 있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 인간의 조상-類人猿이 꼬리가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현대 우리 인간에게는 분명 꼬리가 없다. 그럼 왜서 꼬리가 없어졌는가? 그것은 꼬리가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됨으로 인간으로 되었다. 네발 가진 동물에게 있어서 꼬리는 뒤로부터 오는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 그리고 몸의 간지러운 곳을 쳐서 시원하게 하는데 주된 존재가치가 있다. 그런데 사람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몸놀림이 빨라져 몸을 획 돌리는 것으로 뒤로부터 오는 공격에 대적할 수 있고 앞발이 다양한 용도의 팔로 승화됨으로써 손으로 등을 비롯한 간지러운 데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정말 꼬리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적의 공격이나 몸의 간지러움 같은 외계의 작용을 받아 반작용을 계속 했어야 그 꼬리는 꼬리로서 재구실을 하면서 계속 존재하게 되는데 그런 반작용의 계기를 상실했으니 그것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이 앉는 자세의 생활방식을 취하니 꼬리는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우리의 ‘몽고반점’이라는 것이 그 꼬리의 흔적은 아닌지? 나는 종종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니 사실 꼬리에 한해서 인간의 진화 운운은 좀 어불성설이다. 꼬리는 분명 도태되었다. 쓸모없어 안 쓰게 되니 도태되었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서 벗어났으니 그것은 도태되었다. 우주만물은 다 이렇다. 오래 동안 캄캄한 속에 있다가 갑자기 햇빛 밝은 곳으로 나와 보라. 눈이 보이지 않는다. 빛의 작용을 받으며 눈이 보는 반작용을 오래 동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잠시 ‘도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눈은 빛의 작용에 차츰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무리하게 반작용을 하게 할 때 거기에는 고부하가 가해지면서 정말 도태가 생겨난다. 그래서 구조대원들이 오래 동안 햇빛을 못 보는 캄캄한 곳에서 사람을 구조할 때는 그 사람의 눈부터 가리워주는 것이 기본상식으로 되어 있다.사실 인간의 오관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진화와 도태의 과정을 거쳐 왔다. 인간이 아직 진짜 인간으로 되기 전, 그러니 네발로 걸어 다닐 때 코가 고도로 발달하는 대신 눈은 맹점 투성이다. 흑흑~ 코로 냄새의 작용에 끊임없이 반작용하다보니 코는 발달할 수밖에. 지금의 개코들처럼 말이다. 대신 눈은 땅에 처박은 말 그대로 ‘한 치 보기’니 상하좌우, 그리고 저 멀리 바라보기에는 그야말로 땡이다. 그러다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이런 상황은 역전된다. 직립보행은 그야말로 시야를 탁 틔웠다. 거창한 빛의 작용을 통해 세상만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로부터 눈의 본격적인 반작용이 작동된다. 그래서 눈은 점점 더 커지고 동공은 점점 더 확장되며 눈빛은 점점 더 빛난다. 그래서 결국 현재 오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했다. 대신 우리의 코는 냄새의 작용에서 많이 벗어나고 냄새와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니 자연 코의 반작용도 뜸해졌다. 우리의 코는 이렇게 도태되었다. 그래서 결국 개보다 발달하지 못한 사람 코가 되었다. 귀도 마찬가지. 우리가 네발로 기어 다닐 때는 귀바퀴를 쫑긋하며 외계의 소리작용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귀까지 가세해야 생존이 그만큼 수월하게 되는 단계다. 그러다가 직립보행하면서 삶이 그만큼 수월하게 되면서 귀는 그리 신경을 안 써도 되니 그 쫑긋하는 기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불행인지 행운인지?우리의 두뇌도 마찬가지다. 왜서 똑똑한 사람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아둔한 사람은 점점 더 아둔해지는가? 두뇌의 쓰고 안 쓰고에 달렸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논할라치면 오관의 사령탑으로서의 두뇌가 오관을 통한 외계의 많은 작용에 쉬임없이 반작용을 하며 작동할 때 그 두뇌는 발달하고 똑똑해진다. 책은 두뇌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외계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니 책을 많이 보고 적게 보고가 두뇌의 반작용을 결정한다. 그러니 책을 많이 보는 것이 두뇌개발의 기본 한개 도경이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두뇌가 외계의 작용을 거부하거나 외계의 작용에 대해 이렇다 할 반작용을 못할 때 그것은 식물인간으로 되거나 식물인간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분명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 육체와 영혼의 조화로운 발전,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이상이다. 우리의 교육방침에 덕, 지, 체, 노, 미 여러 방면에서 전면적인 발전을 가져온 인간을 키운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상의 구체적인 실천형태로 보아 무방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조화는 항상 깨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의 실존적 비극의 하나. 보라, 노지심과 무송 아바이를 좀 보라. 이들은 무지무지 완력의 장사다. 노지심 술 한 잔 하고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도 말 그대로 송두리째 뽑아 버린다. 무송 술 한 잔 하고는 맨주먹으로 호랑이 때려잡는다. 육체적 힘의 논리가 통하는 하드시대, 육체적 힘의 작용과 반작용에 놀아난 그들은 육체적 힘의 강자들임에 틀림없다. 아, 무섭지만 부러운 존재들! 그대들 앞에만 서면 작아지기만 하고 초라해지기만 하는 우리. 맨주먹으로 나무를 뽑기는커녕 파리조차도 못 때려잡는 우리가 아닌가? 그런데 잠간, 노지심, 무송은 우둔하고 미욱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영혼, 정신적 개발이 많이 뒤떨어져 있다. 그러니 그만큼 머리가 아둔하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에 비해서. 우리가 사는 세월은 육체적 힘의 논리보다는 영혼, 정신적 힘이 더 통하는 소프트시대다. 영혼, 정신적 작용과 반작용에 많이 놀아나는 세월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 정신적으로 더 없이 풍부하고 다양한 세계에 살고 있다. 노지심, 무송은 분명 이 면에서 우리를 따르지 못한다. 이들 컴퓨터키보드 치내나 말이다. 보다시피 시대의 작용과 반작용의 흥분중심이 다름에 따라 우리의 모습, 삶의 양상도 달라진다. 현재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따로 노는 작용과 반작용을 갈무리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나는 더 없이 미욱스러운 놈이다. 엄마, 아버지한테도, 아내한테도 이런 소리를 밥처럼 먹으며 살아왔다. 좀처럼 약을 안 먹으니 말이다. 아무리 아파도 약을 안 먹으니 말이다. 약을 비상으로 여기니 말이다. 사실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신조가 있다. 내 몸에 병이 났다고 하자. 그것은 내부로부터의 바이러스 침입이나 외부로부터의 바이러스 생성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이런 바이러스를 죽일 킬러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면역력이다. 이로부터 우리 몸은 생리평형, 생태평형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이런 면역력은 바이러스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이른바 작용과 반작용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커간다. 그래서 잔병을 많이 하는 사람, 오래 하는 사람이 오래 살고 병 하나 없이 건강하고 펀펀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잔병을 많이 하는 사람, 오래 하는 사람의 몸에는 그만큼 면역력도 많이,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 되겠다. 반면에 병 하나 없이 건강하고 펀펀하던 사람의 몸에는 면역력이 바이러스의 작용을 받아 반작용을 할 소지가 없기 때문에 안 쓰면 도태되는 원리로 면역력이 그만큼 떨어져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일단 바이러스가 침입하거나 생겨날 때 면역력이 제대로 반응이나 작동을 못하게 되며 ‘죽을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무슨무슨 예방주사나 백신을 맞는 것은 외부로부터 특정 바이러스를 주입하여 이런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약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별란 것이 아니고 몸에 침입했거나 생긴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몰아내는 킬러나 면역력에 다름 아니다. 그럴진대 이런 약을 많이, 자꾸 복용할 때는 우리 몸에 고유한 상응한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몰아내는 킬러나 면역력이 작동할 사이가 없어지면서 도태되고 마는데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에이즈라는 것이 우리 몸에 면역력이 쏵 떨어진 극단적인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 몸에 이런 킬러나 면역력이 도태될 때 우리는 점점 더 약물 면역력에 의지하게 되고 어느 때부턴가는 약물 없이는 못 사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이런 약물에 바이러스들이 면역이 생기거나 보다 강한 신종 바이러스들이 생겨날 때 우리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공포의 암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약물복용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는 인간의 약물개발과 바이러스 사이에 작용과 반작용 법칙을 기본으로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듯하다. 인간이 무슨무슨 신종 약물개발-무슨무슨 바이러스박멸하고 개선가를 부르게 바쁘게 신종 바이러스들이 기를 쓰고 생겨난다.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지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던 사스, 아직도 미스테리인 사스는 그 전형적인 보기다. 그렇다 해서 인간은 약물을 나처럼 전적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 약물이 우리 몸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고 건강하게 해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이 약물의 덕택에 그 어느 동물보다도 강하다. 그러나 절대 ‘亂投葯’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몸에 고유한 면역력까지 사장시키면서 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몸에 고유한 면역력의 주체성을 살리고 그것을 보다 원활히 작동시키거나 보강하는 차원에서 약물을 투입시켜야 한다. 이른바 의사들의 분부나 사용설명서에 따라 복용하라는 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사실 우리 先人들은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을 소박한 의미에서나마 잘 알았던 거 같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그렇쟈? 밟히는 거 하고 꿈틀거리는 거-작용과 반작용.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은 거창한 혁명의 논리에도 그대로 통한다. 어디에 압박이 있으면 어디에 반항이 있다, 잘 아시지요? 위대한 수령 모택동동지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압박 대 반항, 뛸 데 없는 작용과 반작용의 작동원리. 그렇게 잘 이해되지 않던 혁명의 도리도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 풀이하니 그렇게 간단한 걸 내내 학습회니 저작학습이니 뭐요 하며 사람을 달달 볶았으니 기가 차기도 했지. 그런데 요새는 시장경제요 뭐요 하면서 아리숭한 말을 많이 풀이하든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수요와 공급이라는 아담 • 스미스의 ‘안 보이는 손’의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에 다름 아니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법칙으로 세상을 보면 이렇게 간단명료하다.2005. 4. 26
22    유감주술 댓글:  조회:4811  추천:99  2005-04-20
유감주술(類感呪術)사냥을 나가기 전 원시인들이 짐승을 잡는 동작 및 성공적인 노획의 흉내를 내며 한바탕 열광의 ‘연극’을 논다. 그 다음 출정한다. 그들은 사냥의 성공을 이 ‘연극’으로 확신한다. 가상적인 세계 속에서 그 어떤 특정한 모방행위를 통하여 자기 소원이 진짜 성취되는 것으로 그들은 믿었다. 이것이 이른바 유감주술이다. 동일한 생각이 동일한 생각을 부르고 동일한 행동이 동일한 행동을 부른다는 사물현상의 표면적인 유사성에 착안점을 둔 것이 이 유감주술이 되겠다. 이런 유감주술은 우리 인간의 지성이 낮은 단계일수록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원시유목민족들이 칩거하던 동굴 벽에 창에 찔린 짐승을 그려 놓고 ‘축제’파티를 벌인 것이나 원시농경민족들이 봄씨붙이에 앞서 남녀광란의 섹스‘파티’를 벌인 것, 그리고 깃털을 머리에 꼽음으로써 새처럼 날 수 있다는 믿음, 뿔을 머리에 장식함으로써 그 뿔이 달린 짐승의 위용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 얼굴이나 몸에 특징적인 화장이나 문신을 함으로써 그 화장이나 문신이 나타내는 효과를 소유할 수 있다는 믿음 등등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사실 어떤 원시종족들은 꿈에 대해서도 유감주술적인 신비성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꿈에 내가 옆집 사람의 물건을 훔쳤다. 그러면 이튼 날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서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원시인들이 언어의 신비성을 믿어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유감주술은 인간의 생명의식에 기초한 모방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의 무의식적인 유전인자로 되어 면면히 흘러내려 왔다. 한국 대하역사드라마에서 왕궁의 여인네들이 시기와 질투에서 상대방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저주를 퍼부으며 죽음의 침세례를 가한 것도 중세기에 있어서 그 단적인 일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고대문학사를 보면 가락국에서 하늘이 내리보내는 임금을 맞이하기 위해 신의 계시에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가 춤을 추고 땅을 파며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들어라/머리를 들지 않으면/구워서 먹으리!’라고 부른 노래, 그리고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해가던 길에 문득 바다의 용왕이 나타나 그 부인인 멋진 수로를 납치해 바다 속으로 사라졌을 때 속수무책인 그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 ‘옛 사람의 말에 입은 무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속의 짐승이 어찌 많은 사람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써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가르침을 받고 불렀다는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라고 부른 계통의 노래는 분명 무속적인 유감주술에 기초한 위협적인 언어주술의 한 보기로 되겠다. 사실 원시니 고대니 중세니 할 것도 없이 이런 유감주술은 우리의 민속이나 생활습관, 그리고 예의범절 같은 것을 이루어왔다. 우리 민속습관에 첫날 상차림에 닭에 대추를 물리는 것은 음양, 남녀화합의 유감주술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임신부 미역국 잘 먹인다. 영양가치 떠나서 그것은 미역처럼 미끌미끌하게 아이를 순산하라는 유감주술적 배려가 깃들어 있다. 우리가 미역이라면 漢族들은 닭알이라 한다. 이것도 그 어떤 영향가치를 떠나 짐승이 알을 쉽게 낳듯이 아이를 순산하라는 유감주술적 祈願이 깃들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임신부포함해서 우리는 평시 미역을 선호하는 미각이지만 고중입시나 대학입시에 나선 애들에게는 미역을 먹이지 않는다. 미역처럼 미끌어질가봐. 대신 엿이나 찰떡을 먹인다. 엿이나 찰떡처럼 붙으라고. 요새 우리 연길에서도 입시생이 들어가서 시험을 보는 학교대문에 찰떡서니 없이 안쓰럽게 붙어있는 엿이나 찰떡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리고 예의범절, 이를테면 ‘웃어른의 그림자는 밟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림자를 웃어른의 형상과 표면적인 동일시를 함으로써 그 웃어른으로 취급하는데서 기인한 유감주술적인 사고패턴을 기저에 깔고 있다. 가장 지성을 자랑하는 우리 현대 인간들은 이런 유감주술을 심할 경우에는 미신으로 치부하여 비판이요 근절이요 하며 야단법석을 피운다. ‘문화대혁명’ 같은 소아좌익병이 발작할 때 바로 그렇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별 볼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는 가벼운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정신적 유전자 및 민속이요, 습관이요, 예의범절을 이룰 때 우리는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 인간들은 언어의 망망대해 속에 산다. 언어를 떠나서는 한시도 생활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언어 속에 유감주술적 사고패턴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로부터 언어주술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갓난아이를 축하하러 갔다. 아이가 잘 생겼건 못 생겼건, 건강하게 생겼건 약골로 생겼건 떠나 무조건 잘 생겼고 건강하게 생겼다고 하는 것이 정상이고 근사하다. 반대로 못 생겼고 약골이다 했을 때 그것은 듣는 사람 차원에서 정말 거북스럽다 못해 저주로까지 들린다. 왜서? 사실 언어라는 것은 객관적인 지칭이요, 주관적인 표현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언어 자체를 그 언어가 나타낸 사물현상이나 사상감정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언어는 소리와 문자로 된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가치판단을 따나서 그것이 지칭하고 표현한 내용에 함몰되고 만다. 누구한테 열을 받았을 때 ‘개새끼, 죽어라!’하고 저주를 퍼부었을 때 마음은 후련해진다. 정말 그 ‘개새끼’가 죽거나 죽은 듯한 착각 속에. 사실 이런 언어주술은 비일비재하다. 諧音이 많은 漢語의 경우가 돋보인다. 언어적 유감이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漢族들 손님을 칠 때 정통적인 상차림에 있어 蛋類를 그대로 상에 올리지 않는다 한다. 구을 蛋이 곧 滾蛋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사이 배도 갈라먹지 않는단다. 分梨가 곧 分離와 통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사발이나 그릇 같은 것을 부주의로 깨었을 때 碎碎를 歲歲로 연결시키고 歲歲平安을 갈구한 것은 그들의 삶의 지혜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들 혼속에 시어머니가 신부한테 대추를 뿌려주는 것은 대추 棗가 早와 통하는 지라 早生貴子의 기원이 깃들어 있고 매년 年畵에 복성스럽게 생긴 아이가 물고기 큰 魚를 타고 있는 모습은 年年有余라 그들의 재미나는 민속임에 다름 아니다. 보다시피 언어주술은 언어에 대해 일종 마력적인 힘을 부여하고 그것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오~ 필승코리아! 오~ 필승...’, 2002년 월드컵 때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시도때도’ 없이 외운 주문. 한국 사람들은 분명 착차차 속에 ‘오~ 필승코리아!’를 믿었다. 이 믿음 속에는 ‘오~ 필승코리아!’의 언어마력이 내비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이 아세아 출전에 16강, 8강에 이어 4강 진출을 하게 되자 믿음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지는 듯하다. 이로부터 ‘한강의 기적’으로부터 믿게 된 ‘하면 된다’와 어우러져서 ‘오~ 필승코리아!’는 오늘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외우는 언어마력에 다름 아니다. 군인들의 ‘필승!’ 경례, 같은 맥락이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종종 가지는 결의대회나 데모 때 萬衆一口로 웨치는 구호, 그리고 어떤 캠페인을 벌릴 때 내거는 슬로건은 은근히 衆口鑢金의 언어마력적 힘이 발산되는 듯한 무의식을 내비치고 있다. 바로 이런 언어주술 때문에 우리는 언어구사에 있어서 ‘입에 발린 소리’이나마 때와 장소에 맞게 긍정적으로 듣기에 좋은 말들을 골라 사용하기를 자기도 모르게 강요받고 있다.사실 인간의 우상숭배도 이런 유감주술적 무의식을 기저에 깔고 있다. 약한 인간으로서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믿어’볼만 함.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을 때 믿는 것이 좋겠지. 하느님, 천당을 믿어 하느님 같이 되고 천당에 갈 수 있다 할 때 그것은 유감주술적 따라 배우기, 닮아가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자아의 小乘적 경지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누구누구 대학에 붙게 해주소, 누구누구 시집장가 가게 해주소, 누구누구 병 낫게 해주소!’라는 大乘적 경지의 기도도 확실한 믿음으로 할 수 있게 된다. 불교에서 석가모니 사리 봉송을 진행한 것은 유감주술적인 따라 배우기, 닮아가기를 불러일으키며 불교의 획기적인 전파를 가져왔다. 이런 유감주술은 현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신격화한 우상숭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속에 나의 유감주술적 무의식심리는 충분한 만족을 받는다. 중국의 극좌적인 우상숭배가 팽배하던 ‘문화대혁명’시기 모택동을 한번 보는 것으로, 한술 더 떠 손 한번 잡아 보는 것만으로 감격에 목이 메이고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유감주술의 지대한 촉발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우상들의 題辭를 써 받았을 때 그것은 그대로 ‘성경’이 된다.유감주술은 우상보다 좀 떨어지는 명인 숭배 및 따라 배우기, 닮아가기 효과추구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사실 이런 명인들도 센세이숀의 물결을 잘 타 우상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명인들의 무엇을 공유하거나 얻어가졌을 때 그로 인해 바로 그 명인과 닮아간다는 그런 유감주술 말이다. ‘문화대혁명’시기 우리 연변에 모택동저작 학습붐이 일었다한다. 무조건 많이 외우기가 장땅이었단다. 그래서 이제 겨우 소학교 눈을 틔웠을가 하는 한 촌아주머니가 얼음위에 표주박 밀 듯 모택동저작을 줄줄 외워 이름을 드날렸을 뿐만 아니라 크게 출세했다고 한단다. 그럼 무엇이 이 촌아주머니에게 기적을 창조하게 했는가? 물론 의식적인 차원에서 모주석에 대한 열애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는 바로 모택동저작외우기를 매개로 한 모택동 따라 배우기, 닮아가기의 유감주술적 마력의 발동으로 보아 무방하리라. 우리 사회에서 많이 진행하는 긍정적인 본보기 따라 배우기 운동은 사실 우리 인간들의 무의식심층의 유감주술을 동원하는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명인 따라 배우기, 닮아가기 유감주술은 스포츠연예계스타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숭배나 도취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이런 스타들의 사인받기는 전형적인 한 보기. 이런 사인들은 그 스타를 새겨 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월드컵 때 한 나이 지긋한 사나이가 한국팀이 출전하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당시 한국축구팀감독 히딩크의 사인을 받는 것을 세상 최고의 낙으로 여겼다. 나는 TV에서 소개하는 이 사람을 보았다. 이런 스타들과 사진을 같이 박는 것도 마찬가지다. 같이 사진을 박았을 때 마치 우리는 같이 있는 한 사람과도 같은 유감주술적 착각 속에 빠진다. 사실 이런 스타좇기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 특히 사춘기 純情少男少女쪽에서 더 발광이다. 이른바 ‘오빠부대’, ‘追星族’가 그들이다. 이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오빠, 오빠’하고 追星을 한다. 침실의 벽에, 침대맡에, 그리고 책가방에, 필통에... 그들이 수시로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는 다 이런 스타들의 클로즈업된 다양한 모습의 이미지 바라보기 세상을 만든다. 그들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그들은 스타들의 일투수 일투족을 모방하는 것으로 직성이 좀 풀리는 듯 하다. 그래서 헤어스타일로부터 화장, 패션에 이르기까지 정말 스타투성이로 변한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자기가 마치 그 스타가 된 듯한 착각 속에 마음이 스르르 녹아나는 자아도취에 빠진다. 이쯤 되면 뙬 데 없는 무의식 차원의 유감주술의 포로가 된 셈이다. 스타들은 바로 사람들의 이런 유감주술적 숭배 및 따라 배우기, 닮아가기 심층심리에 영합하여 시합이 끝난 다음 땀투성이에 절은 자기의 유니폼을 관중석으로 날린다든가 뽈을 날리기도 한다. 그리고 가수들은 관중을 향해 멋진 윙크 한번 해주거나 관중석으로 내려와 손을 한번 잡아주는 것으로 미칠 듯한 감동의 도가니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벼룩시장에 내놓은 명인이나 스타들의 유물이나 물품들이 값 비싸게 불티나게 팔리는 것도 바로 무의식적 유감주술추구에 기인하는 것이다. 낡은 만년필이나 신, 별 볼일 없는 물건 같지만 그것을 사서 집에 잘 모셔두고 보고 외우는 것만으로도 자기 내지는 자손들이 그 명인이나 스타를 따라 배우게 되고 닮아가게 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은연중 그들은 믿고 있다.사실 이런 우상, 명인이나 스타 같은 거창한 얘기 말고 극히 일상적인 생활에도 유감주술은 비일비재하다. 현대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부상한 패션, 광고를 보도록 하자. 쭉쭉 잘 빠진 미스 세계들이 한 일자를 그으며 들썩들썩이는 자세로 걸어 나오는 패션쇼. 여기에 현란한 조명, 조화로운 음악. 아무 옷이나 입혀 놓아도 보기 좋은 것이 패션쇼다. 바로 여기에 바이어나 관객들의 유감주술을 자극한다. 나도 입으면 멋지겠지! 그래서 절구통 같은 제 주제도 모르고 기를 쓰고 패션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리고 당신을 위한 名牌, 브랜드, 당신은 고귀한 귀족!하며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도 마찬가지다. 광고마다 자기네 상품이 최고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로부터 광고는 가장 쉽게 소비를 유도하며 유감주술적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이를테면 광고에 난 상품을 사용했을 때 선택된 차원으로의 따라가기, 닮아가기를 느끼게 된다. 너도나도 이런 따라가기, 닮아가기를 하는데서 현대대중문화라는 것이 형성된다.이만하면 우리 삶에서의 유감주술적인 허와 실이 확연히 드러난 줄로 안다. 허, 실의 선택은 각자 나름대로의 명지한 소관에 맡긴다. 2005. 4. 20
21    카인콤플렉스 댓글:  조회:4125  추천:73  2005-04-14
카인콤플렉스카인, 에 보면 우리 인간 최초로 형제간에 살인을 저지른 자다. 형제간에 우애해야지 죽이고 저쩌고 피를 보다니, 고약할시고!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형제자매 사이에 서로 보듬고 돌보는 사랑도 있지만 분명 미워하고 시기하며 증오하는 감정도 있다고 한다. 심층심리학에서 보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은 보통 二律背反의 대립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이 성립된다 할 때 형제자매 사이 사랑과 증오, 이것이 곧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의 당위성적 논리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증오의 패륜적인 감정의 二律背反의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야누스적인 존재라는 말이 여기에서도 적중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종종 나도 모르게 자꾸만 갈마드는 형제자매 사이 증오의 감정응어리인 카인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사실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으로 이런 카인콤플렉스를 알고 있다. 내가 코 질질 빠는 어릴 때다. 아버지는 시내에 나갈 때마다 위의 형들이 아무리 따라 가겠다 고 떼를 써도 다 떼어놓고는 나만 딱 데리고 간다. 그리고는 식당에 데리고 가서 무얼 먹을래 하고는 내가 좋아하는 걸로 가득 사준다. 그리고는 먹어, 먹어 하며 자꾸 조진다. 나는 그 맛나는 것을 코를 훌쩍이며 목구멍으로 넘기기 바쁘게 쑤셔 넣는다. 요렇게 형들 모르게 혼자 얻어먹는 것이 얼마나 맛 있는데, 냠냠... 아마 지금 내 이 똥배는 그때 너무 먹어 불어난 후유증도 없지 않아 있으리라! 아버지 눈에 위에 다섯이나 있는 형들 때문에 내가 항상 잘 얻어먹지 못하는 비실비실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항상 눈이 맞아 돌아가는 엄마 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부모들의 유별난 막내사랑인 것이다. 나는 6형제 막내인데 어릴 때 위의 형제들하고 잘 싸웠다. 특히 내 착 위에 있는 형하고 잘 싸웠다. 물론 내가 억대우 같은 내 형들을 당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전략전술은 항상 선제공격. 먼저 손에 쥐이는 대로 냅다 뿌리고는 내빼기. 그리고는 형이 저 멀찌감치에 나타나면 삑 돌아서서 한마디 내뱉기-니 늙은 다음 보자! 그리고는 다리야 날 살리라 하고 똥집이 빠지라고 줄행랑 놓기. 아마 내가 지금도 달리기에 ‘몇 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그때 단련해낸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때 내 짜개바지 친구 한 놈도 쩍하면 자기 형하고 싸움질 하는데 그 자식도 나하고 전략전술이 비슷. 좀 다르다하면 그 자식은 한 참 내빼다가 삑 돌아서서 씩씩하며 자기 형이 저 멀찌감치에 나타나기를 기다려 자기 발밑 땅에다 금을 찍 긋고는 이 금을 건너오면 개새끼, 개새끼 하며 다시 줄행랑 놓기. 그러면 우리의 형들은 자식 하고 씩 웃으며 돌아선다.카인콤플렉스, 형제자매 사이 불거져 나오는 악연,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적인 본능이라 할 때, 그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불거져 나왔다. 왕권이나 재산을 둘러싼 이해득실에 얽혀 형제자매지간에 죽일 내기를 한 것은 비일비재. 먼 것은 그만 두고라도 한국의 대하드라마 에서 보았겠지만 왕위를 둘러싸고 이방원을 비롯한 형제자매지간에 피를 보는 각축전, 쟁탈전. 이로부터 아비의 낳은 죄이런가 이성계-용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던가? 중국도 마찬가지다. 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중국 삼국시기 魏의 권력을 쥔 曹丕가 재간 많은 동생인 曹植을 시기질투하고 위협감을 느껴 자기가 일곱보를 갔다왔다 할 사이 시 한편을 지어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죽이겠다고 한다. 이에 콩과 그 콩을 닦는데 사용된 콩깍지의 관계를 통해 형제 相殘을 안타까이 읊은 曹植의 가 탄생한다. 멋진 명작이 굳이 이런 피비린내 나는 데서 탄생해야만 하는가? 인간의 비극. 우리의 고전적 명작 도 형제지간의 相殘을 얘기하고 있다. 부모가 넘겨준 재산에 눈이 어두워 형이 동생네 일가족을 엄동설한에 쫓아낸다. 동생이 뭘 좀 구걸해도 듣기는커녕 오히려 문전박대.여자형제들 사이 카인콤플렉스, 신데렐라이야기 전형적이다. 물론 그것은 이붓엄마 자매들사이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친자매들 사이 벌어지는 이야기의 다른 한 변종에 다름 아니다. 왕자 혹은 귀인이 여러 자매들을 무도회에 초청한다. 그것은 왕자 혹은 귀인과 좋은 인연이 맺어지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자매들이 이붓 동생만 뽈끗 빼놓을 뿐만 아니라 고역을 시키고 자기네들만 간다. 그래서 그 이붓동생은 서럽고 맥이 빠진다. 그런데 결국 이 이붓동생이 神助로 역전을 하여 왕녀가 되는 영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우리 고대문학사에 도 이와 같은 맥락의 얘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은 다른 한 양상의 여자형제들 사이 카인콤플렉스 얘기를 톺아내고 있다. 카인콤플렉스, 여기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놀아날 때 우리는 형제자매지간의 패륜 내지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꼬락서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욕이 넘치는 요즘 세상 이런 카인콤플렉스가 자극받아 뿜어져 나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先人들은 언녕 형제지간에 悌하라는 가르침을 거듭 해온 줄로 안다. 그리고 그 보기로 형제지간에 우애를 배푼 많은 감동적인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先人들은 참을 忍자 君子라고 형제자매지간에 충돌이 생겼을 때 서로 참고 감정을 눅잡을 줄 알아야 된다고 권했다. 우리 속담에 손벽도 마주 쳐야 소리난다고 한 것도 역시 참을 忍을 가르친 삶의 지혜로 보아야 하겠다. 나는 우리의 이 너무 멋있다. 놀부 못되게 놀다가 쫄딱 망한다. 이때 부자가 된 우리의 흥부는 落井下石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괘씸하고 서러웠던 모든 감정을 참을 忍으로 참고 눅잡고 형님 하며 놀부네 일가를 포옹한다. 그래서 은 형 좋고 동생 좋은 대단원으로 막을 내린다. 우리 先人들은 바로 이렇게 살아 왔다. 좀 찧고빻고 했더라도 조만간에 마음을 풀고 하나가 되는 형제자매의 우애를 나누었던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인 차원의 형제자매들 사이의 우애로써 카인콤플렉스를 컨트롤 내지는 승화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삶의 지혜다. 내나 내 짜개바지 친구의 경우처럼 어릴 때 멋모르고 ‘니 늙은 다음 보자’나 ‘이 금 건너오면 개새끼’ 했을 때 우리 형들이 자식 하고 씩 웃으며 돌아선 것은 너무 멋있다. 카인콤플렉스의 컨트롤보다 차원 높은 승화다. 그래서 내나 내 짜개바지 친구가 내뿜은 동년의 치기어린 카인콤플렉스는 아름다운 회억으로 남아 오히려 우리 형제들 사이 우애를 돈독히 하는 삶의 감로수가 되고 있다. 요새 애들 달랑 혼자에 카인콤플렉스 무언지 모르고 살아 좋겠다. 동생 하나 더 가질까 하면 도리머리를 흔드는 요즘 아이들, 카인콤플렉스를 원천봉쇄하는 듯하다. 인생은 塞翁之馬라 형제자매들 지간에 끈끈한 사랑의 우애도 못 받는 요즘 아이들, 불쌍도 해라! 인생은 찧고빻고 시껄벅쩍, 사랑도 하고 증오도 하고 곱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가 증오나 미운 감정을 사랑이나 고운 감정으로 컨트롤하거나 승화시켜 나갈 때 삶은 더 그럴 듯하고 재미있다. 2005. 4. 14
20    사디히즘과 마조히즘 댓글:  조회:4672  추천:73  2005-04-08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인간의 심층심리에는 주동적으로 공격하고 정복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만족하는 사디히즘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만족하는 마조히즘 경향이 있다 한다. 이것이 표층심리적 경향으로 표출될 때 외향적이요, 내향적이요 하는 것이 되겠다. 성별적으로 볼 때 대개 남자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여자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거시기 자체가 그렇게 되어 먹었다 한다. 남자는 노출형이고 고사포식인데 반해 여자는 숨긴형이고 벌린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남자가 주동이 되고 여자가 수동이 되면서 남자는 삽입의 배설로 만족을 보고 여자는 받아들이는 포만감의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개인성향에 있어 일반적으로 리더심이 강한 사람은 사디히즘적이고 일반 愚衆은 마조히즘적이다.한국정치의 거물들이였던 박정희, 깡마른 체구에 냉랭한 냉기, 전두환, 독기 서린 눈에 꼭 다문 입, 이들 독재자들은 실로 카리스마적인 사디히즘자들이다. 이에 반해 일반 愚衆들은 개인숭배에 눈이 먼 마조히즘자들이다. 이런 마조히즘자들은 카리스마적인 사디이즘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인종적으로 볼 때 대개 서양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동양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 서양의 동양에 대한 무자비한 피비린내 나는 식민지, 반식민지 침략 및 奴化는 거창한 정치, 경제적인 요인이 주된 원인이 되겠지만 그들의 사디히즘적인 호전성도 무시못할 요소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반해 거듭되는 실패에 동양의 자기기만적인 아Q식 정신승리법 대응양상은 변태적인 마조히즘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문학작품만 놓고 보아도 서양 사람들이 높게 사는 인물들은 고대 희랍 [오디세이]의 오디세이, 중세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현대 [노인과 바다]의 샨타야고... 이들 모두 뛸 데 없는 사디히즘적 영웅들이다. 오디세이, 10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10년간 갖은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자기 마누라에게 집적거리는 불한당들을 일거에 무찌른다. 파우스트,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추구하고 정복하는 거인, 하늘이 감동하여 천사들이 그를 모셔간다. 샨타야고, 어깨는 처지고 허리는 굽고 한물 간 노인인 듯하다. 그런데 그는 늙음에 不服輸하는 젊음의 기백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젊음을 증명하려는 듯 허술한 쪽배에 작살 하나 달랑 들고 파도가 사품 치는 허허 바다로 상어를 잡으려 나간다. 끝내 잡고야 만다. 그래서 뼈만 남은 다 뜯기운 상어만 달고 돌아왔어도 그는 한량없이 기쁘기만 하다. 우리 문학작품을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고대 [단군신화]의 곰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자신와의 힘든 극기 싸움을 한다. 그래서 그는 끝내 성공하여 韓민족의 始祖母가 된다. 중세 고려가요, 모래에 심은 닦은 밤이 싹이 나고 철소가 풀을 다 뜯을 때 유정하신 임과 갈라지겠다는 불가능한 상황설정의 애절함, 일연의 ‘戀君之詞’로 대변되는 임노래, 현대 한용운의 ‘임의 침묵’, ‘임은 갔습니다./.../그러나 내가 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운운, 윤동주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우리는 문학의 主調는 마조히즘적이다. 정말 우리는 [애국가]라는 國歌에서조차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상징인 동해물과 백두산을 마르고 닿는 축소지향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로 거론하는 거지? 몸에 배인 뛸 데 없는 너무나도 마조히즘적인 발상. 문화유형 상에서 생계수단 차원에서 볼 때 유목문화, 상업문화, 해양문화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농경문화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유목문화, 수초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동물살상을 기본으로 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호전성, 공격성, 정복성이 몸에 배인다. 멀리꺼는 그만두고라도 우리와 가까운 칭키스칸 몽고 鐵蹄의 동서양 종횡무진, 그리고 동북산간벽지에서 일어난 누르하치 만주족이 일거에 중원지구를 휩쓸며 대원, 대청제국을 세운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상업문화, 일정한 코스에 따라 나다니며 장사를 생계의 기본수단으로 하는 상업문화는 ‘장사군 제 아비도 속히’는 매정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사가 잘 안 될 때는 날강도로 변하는 무지막지함이 있다. 중국 실크로드의 길이 평화의 길만이 아니고 근대에 서양 사람들이 장사, 무역의 기치를 내걸고 결국 전쟁의 불꽃을 튕긴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해양문화, 바다의 생물에 대한 살상을 기본으로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면에서는 유목문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럴진대 이들도 호전적이고 공격적이고 정복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유명한 중세 북유럽의 亦貿亦盜, 아니 실은 貿의 간판을 걸고 盜의 행각을 벌인 바이킹은 말 그대로 海盜, 해양문화의 사디히즘적 성향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된다. 농경문화는 유목문화, 상업문화, 해양문화와는 다르다. 농경문화, 日出而作日落而息, 순응적이다. 그리고 春耕夏耘秋收冬藏, 한 자리에서 맴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며 때를 기다려 행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은 수동적이고 받아들이는 생활양식에 안주할 수밖에. 문화유형 상에서 지정학적 차원에서 볼 때 섬문화 쪽이 사디히즘 성향이 강하고 대륙문화은 마조히즘 성향이 강하며 반도문화는 그 중간으로 보면 된다. 섬문화, 고립된 외로움 그 자체. 밖의 세계는 항상 호기심을 유발하는 유혹의 존재. 그리고 단절된 세계는 항상 무엇이 모자라고 부족한 듯한 허전함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유혹의 세계로, 모자람이 없는 풍성한 세계로 짓궂은 진출을 시도한다. 중세 한반도와 중국에 대한 倭寇들의 소란, ‘도자기전쟁’이라고도 일컫는 조선조의 임진왜란, 그리고 현대사에 있어서 조선조병탄, 나아가서 중국대륙침략, 그리고 동남아, 더 나아가 태평양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침략의 마수를 뻗친 일본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대륙문화, 地大物博 모자라고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부러울 것도 없다. 여기에 知足者常樂의 생활철학이 가미되니 더 이를 데 있는가. 그러니 눈을 밖으로 돌려 신경을 쓰며 남을 공격하고 정복하고 할 필요가 없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평화주의가 싹튼다. 중국이 전형적인 보기. 중화주의, 내가 세계의 중심. 大海는 百川을 받아들이는 법이라, 오너라 내게로 스타일이다. 大智若愚식 배포유한 큰 스케일의 마조히즘. 그래서 동서남북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라고 얕잡아 보면서도 굳이 무력으로 공격하고 정복하자고는 안는다. 물론 공격하고 정복하더라도 그것은 諸葛亮식 ‘七擒七縱孟獲(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어 진심으로부터의 감복을 얻어내는데 있다. 오히려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 시끄럽게 자꾸 집적거릴 때는 만리장성을 쌓아 못 들어오게 막아버린다. 그러다가 일단 들어오면 마조히즘적인 醬독문화로 흔적도 없이 녹아낸다. 만족에게 당하면서 오히려 만족을 녹여낸 漢族이 아닌가. 반도문화, 대륙문화와 섬문화 사이. 섬문화적인 막힌 데가 있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되어 숨통이 틔워있다. 한반도가 전형적임. 韓민족은 외래 침략세력에 대해 가만히 앉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의병, 의렬단, 독립군, 의용군, 광복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말 그대로 사디히즘적인 줄기찬 항전이다. 여기서 잠간 인도민족과 대비해보도록 하자. 근대에 들어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런데 인도는 사디히즘적인 폭력이 아니라 마조히즘적인 비폭력 즉 깐디 식의 무저항주의로 저항했다. 여기서 폭력에 대한 韓민족과 인도민족의 부동한 대응양상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국의 틈서리에서 부대껴왔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사대주의라는 것이 싹트기도 했다. 조선조시기 중국을 대중화라 하고 스스로 소중화라고 자처한 것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된다. 사회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볼 때 정치, 도덕, 종교는 묘한 사디히즘이나 마조히즘 양상을 드러낸다. 정치라는 것은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이끌고 있으며 그것은 노선, 정책, 방침으로 현실성을 확보한다. 여기에 군대, 경찰, 법 등 강경한 조치들이 밑받침되어 있다. 그러니 정치라는 것은 사디히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종교라는 것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카리스마 앞에서 마조히즘적 심성을 키우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신자들이 수시로 기도하고 설교를 들으며 주기적으로 절대신과 교감하는 것은 이러한 심성을 키우는 구체적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청해의 라마교도들이 몇 천리를 몇 보 안팤에 절을 해가며 티벳에 가서 달래라마 발등에 입술을 맞추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는 것, 천주교에서 고해성소를 하는 것, 이슬람교에서 천신만고 종교성지-메카를 순례하는 것은 그 심성의 가장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도덕이라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중간양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다 갖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도덕, 사람의 기본 징표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도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도덕은 다분히 사디히즘적이다. 그런데 이 도덕이라는 것이 일단 한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히 생리화되어 내재적인 도덕률로 화할 때 그것은 마조히즘적이다. 톨스토이의 도덕적 자아완성이나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그 전형적인 보기로 된다. 사디히즘이나 마조히즘이 위와 같이 직설적인 도경을 통해서도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승화된 대리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쟁, 전형적인 인간의 사디히즘의 집단적 발로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더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발로를 보게 된다. 포로 학살 내지는 노예화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된다. 포로문제에서 문명해졌다고 하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현대전쟁이라는 것도 인간의 광적인, 비이성적인 사디히즘의 발로임에는 틀림없다. 어찌 보면 그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동원되기에 더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도 전쟁의 암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특히 냉전이 종식된 현 단계에 있어서 교류, 이해, 평화가 시대의 주요흐름으로 돋보이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인 전쟁은 점점 뒤안길로 사라지고 스포츠게임 같은 것이 부상되면서 새로운 사디히즘 발산통로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스포츠게임이 전쟁을 통해 발산하던 사디히즘을 발산하는 합리적인 대체통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문명이라는 것이다. 올림픽, 월드컵은 ‘세계전쟁’에 다름 아니다. 그 출전선수는 ‘전사’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런 ‘전사’들을 통해 싸움을 하고 있다. 여하튼 이기는 것이 장땅. 1등, 슛... 우리 ‘전사’들 장하다. 나도 이긴 기분. 그러면 ‘전승’축제. 온 나라가 들끓는다. 현대 인간들은 바로 이런 게임을 통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 아닌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대단함, 자부심을 느껴보려 하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스포츠, 축구팬, 광들을 양산하는 소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시기 우리 연변의 ‘오동’축구팀도 마찬가지다. 조그마한 촌구석에서 출범하여 전국 갑급 레벨에서 맹활약하고 1, 2강을 육박하며 맹위를 떨칠 때 우리 얼마나 속시원했던가? 천년 묵은 스트레스가 사디히즘적인 발산을 통해 하루아침에 깡그리 싹 풀린 개운함 그 자체다. 우리 연변 어렵고 스트레스 많이 쌓이는 곳인데 우리 연변축구팀 한 번 더 떨쳐보지. 요새 안 그래도 좋은 소식 들리던데...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이 스포츠게임을 통해 발산될 때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구잡이나 自虐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병적인 극단적인 표현이다. 히틀러, 게르만종족 우월론에 빠져 나치스로 나가 마구잡이식 사람 잡이는 사디히즘의 전형적인 병적인 표현이다. 현재 담배의 해독을 번연히 알면서도 自虐적으로 계속 피우는 것은 마조히즘의 전형적인 병적인 표현이다. 사실 인간은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을 같이 갖고 있다. 그것은 때와 장소에 따른 차이 및 많고 적게, 강하고 약하게, 주도적으로 부차적으로, 노골적으로 우회적으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치라는 것이 사디히즘적으로 많이 흘러왔다고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민주화의 물결이 일면서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때에 따른 부동한 표현양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적인 영웅도 돌아서서는 외로운 눈물을 흘릴 때가 있고 정에는 약한 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의 경우만 놓고 보아도 전반적으로 그들이 사디히즘적이라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마조히즘적 성향이 대단히 강하다. 기독교문화가 바로 그렇다. 왼쪽 뺨을 맞았으면 오른쪽 뺨을 더 때리라고 내밀라는 교리, 따지고 보면 마조히즘적인 깐디 식 비폭력무저항주의. 사실 이 기독교 자체도 사디히즘적인 데가 있다. 중세기 몸서리치는 마녀사냥, 종교재판소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전반 역사를 보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분명 채찍과 당근 즉 사디히즘적인 武와 마조히즘적인 文의 논리로 행세해 왔다. 중세기 기사와 신부, 그리고 11~12세기 3차례에 걸쳐 아랍세계에 대한 기독교 십자군원정, 그리고 근대 한 손에 총, 다른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우리 동양에 대해 행한 침략은 그 전형적인 보기들이다. 일본사람의 경우도 보면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세 직접 사람머리를 베여보는 것으로 칼날을 실험해본다는 일본 사무라이, 그리고 하라기리(할복자살), 현대 ‘가미가제’자폭기, 남경대학살, 수많은 만인갱... 히틀러 못지 않는 광적인 사디히즘 발산. 일본사람 정말 무섭다. 그런데 일본인 개개인을 만나보라. 정말 순하디 순한 양 같다. 무얼 드시겠어요 하면 무엇이나 좋다고 하는 일본사람. 무의지적이다. 여기서 한국 사람과 갈림길이 생긴다. 한국사람 의지적이다. 무얼 드시겠어요 하면 이것, 저것 자기 의사를 분명히 나타낸다. 일본 사람 ‘곤니찌와’ 동시에 90도 허리 굽힙, 그리고 ‘이락샤이마세’ 입에 안 떨어진다. 일본 사람 분명히 마조히즘적인 데가 있다. 일본사람 겉과 속이 다른 이중얼굴이라는 말도 들을만 하다. 서양 사람도 좋고 일본 사람도 좋고 이들에게 있어서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극단으로 달리며 물과 기름처럼 조화되지 못하고 따로 따로 노는 인격분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좀 안스럽다. 사실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이라는 것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같이 놀아날 때 멋있다. 우리 민족의 고전적 민요 [이라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임은 ‘나’를 뿌리치고 무정히 떠난다. 잡아둘 수 없는 임. 소박맞는 ‘내’ 신세. 한 없이 서럽다. 그래도 원망 하나 없이 임을 보내는 듯한 애잔한 마조히즘적인 [아리랑]. 그런데 서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 발병이 난다’고 저주한다. 여자의 저주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단데... 이것은 사디히즘적인 사랑의 역설적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다. 김소월은 우리 전통 민요풍의 현대시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시가 운율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 정서면에서 우리와 더 닿아 있다. [진달래], ‘나 보기가/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역시 소박당한 여인의 비애를 읊는 듯하다. 그런데 그녀는 비애에만 잠긴게 아니고 가장 아름답다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꼿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며 가시는 걸음걸음 사분히 즈려밟고 가시라 하며 축복을 하는 듯하다. ‘즈려밟고’의 마지막 육체적 사랑갈구 운운을 떠나서도 전형적인 마조히즘적인 사랑이미지다. 사랑에 있어서 한 없이 착하기만 하고 무의지적으로 거저 따르기만 하는 마조히즘. 그런데 여기서 사랑의 매서운 빛발은 번뜩이고-‘나 보기가/역겨워 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첫 구와의 조응 대조 속에서 툭 쏜다. 갈 테면 가라, 미련도 두지 않겠다, 그러니 눈물도 없다 하는 식이다. 사랑의 사디히즘. 순하기만 순한 그런 숙맹에 가깝고 눈먼 사랑은 아니다. [아리랑], [진달래]-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의 動靜이 어울리는 멋진 여인상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사실 이런 멋진 여인상은 우리의 고전적 여인상-춘향에게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당겼다 놓았다 사랑의 고삐를 요리조리 요량하며 이몽룡과 사랑의 스토리를 엮어가는 춘향, 사랑의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을 너무나도 잘 갈무리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마디로 外柔內剛의 향긋한 춘향이라 한다. 사실 우리의 여자들은 다 이런 外柔內剛의 멋진 데가 있다. 행주치마, 외적이 침입할 때는 행주치마까지 동원하여 떨쳐나서는 우리네 여인들. 그러나 독수공방하며 그렇게 그리던 임이 오는 순간에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다가도 어마, 옷고름만 쫑긋 물며 돌아서는 여인들. 사랑 안할 수 없다. 드센 기에 뻔뻔하기만 한 대국여자들, ‘하이하이’ 하며 한 없이 굽실거리기만 하는 섬나라 여자들에 비기랴!2005. 4. 8
19    성도착증 댓글:  조회:4679  추천:59  2005-04-07
성도착증우리는 이 세상에 남자나 여자로 온다.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러니 부모들의 낳아준 ‘은공’에는 그리 감지득지할 필요가 없다. 그네들이 자기네 좋아서 어쩌구려 하다가 우리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달갑지 않은 우리가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실존적 고민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은데 왜 여자가 되었지? 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데 왜 남자가 되었지? 남자가 되고 싶고 여자가 되고 싶은 엇갈린 인생멜로드라마. 한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자기 뜻대로의 남자나 여자가 되어 살았으면 원이 없겠쟈! 나는 정말 여자가 되고파. 너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그럼 우리 한번 되어 보는 거야. 가장 손쉽게는 나는 여자 옷 입고 너는 남자 옷 입는 거야. 짱~ 내가 치마 입으니 그럴 듯 하지? 음, 그런데 수염, 그 꺼칠한 수염... 맞아, 수염 깔끔히 밀고 한술 더 떠 연지꼰지 립스틱 바르고 퍼마머리에 그로테스크하게 여색만들기. 이만하면 록왕 마이크젝슨 뺨칠 정도 되지 않냐?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아예 정형외과에 가서 거세해버리자. 그리면 한국의 하리순지 허리순지 뺨치지 않으리! 너도...지금 참 세월 좋다. 인간실존에 대한 존중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 모든 것을 정상, 적어도 이상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니 말이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중국의 경우 봉건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전만 놓고 보아도 남자가 여자의 옷 혹은 여자가 남자의 옷만 입어도 이상한 눈길은 약과고 性倒錯症이라 하여 병적으로 취급했다. 우리 엄마의 경우는 그 어려운 세월에 남편 모실내기에 6형제 키우느라고 내내 우리 남자들 옷만 주어 입다보니 별명도 어느새 ‘남자’로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 엄마는 너무나도 여성스러운 여린 마음가짐의 여잔데 이런 ‘왕청’ 같은 별명이 척 씌워지니 마음고생 오죽 했겠습니까! 그때 정말 바지만 놓고 봐도 남자의 것은 앞으로 타졌고 여자의 것은 옆으로 타졌지. 그리고 井水不犯河水라 男女바지受授不親했지.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자 여자들 바지 어느새 앞이 타진 남자바지로 둔갑하고 말았지. 진 청바지 하나만 놓고 보시오. 거기에 무슨 남자바지 여자바지 따로 있는가? 거저 입으면 다지. 사실 바지만의 얘기가 아니다. 머리모양새만 보아도 남자가 장발을 하든가 여자가 단발을 하든가 하는 것이 이제는 희한한 일이 아니고 요새는 젊은 애들 남여 공히 알락달락 염색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화장도 여성점유물인가 했더니 어느새 남자화장품세트들도 출품하면서 남녀 공히 깔끔하고 화사한 화장발을 추구한다. 그리고 남자애들도 귀걸이, 목걸이에 요란하다. 이 모든 것 性倒錯症? 단마디로 결론짓는 것은 무모. 현대는 탈중심에 획일적인 것이 무너지고 흑백논리보다는 다원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성적이고 편리일변도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로부터 남여 성구분에 있어 옷이나 화장 같은 전통적인 형식적 구분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형식적 구분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현대정형외과의술을 통한 진짜 남자 혹은 여자가 되는 방도를 취한다. 멀리 얘기는 그만두고 한국의 하리수, 우리 연변의 모모양... 이들의 요술 같은 여성변신 그리고 당당하고 화려한 노래춤판, 현대과학과 개성적 삶 추구의 개가에 다름 아니다. 나는 언젠가 태국에 갔다가 게이들의 쇼구경을 보게 되었다. 게이, 남자들이 여자로 변한거. 중국말로는 人妖라 한다. 좀 섬뜩했다. 그런데 직접 그녀들을 접하는 순간 나는 그만 입을 짝 벌리고 말았다. 그녀들은 하나 같이 미끈하게 잘 빠지고 쭝쭝쫑쫑 여성적 性徵도 뛸 데 없는 비너스. 人妖가 아니라 진짜 귀신이라도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들이 관광객들의 돈을 노려 폼 잡고 서 있거나 쇼를 하고 지어 몸까지 판다고 하니 좀 서글퍼났고 씁쓸해났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들 가운데는 돈을 떠나서 정말 여자가 좋아서, 여자로 사는 것이 부러워서 게이로 된 순정의 여자가 있다는데 대해 나는 눈을 새롭게 크게 떴다. 그럼 그렇겠지. 나는 보아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우고 당당하고 멋지게 포즈를 취한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 나는 그녀들과 사진을 빵, 빵, 빵 찍었다. 이런 게이들은 수명이 짧다고 한다. 30~40대가 인생막판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또 서글퍼났다. 좀 안타까워났다. 그 꽃 같은 여자들... 그러나 또 다음 순간 好死不如懶活보다는 ‘하루를 살아도’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한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코마루가 찡해나며 몸에 와닿는 데가 있었다. 우리는 다 好死不如懶活라 두더지 같은 삶을 살진데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사람 사는 것이 참 안 쉽다.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눈 하나 찍 감고 대개 過一天算一天 되는대로 살아간다. 세상 만화경에 요지경이라 어떤 사람은 딱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혹은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만 여자 혹은 남자로 태어나 버렸다. 우리 주변에 천성적으로 남자같이 생긴 여자 혹은 여자같이 생긴 남자 그리고 목소리에 몸가짐 자체도 그 식이 정식인 여자 혹은 남자가 없지 않아 있다. 한국에 탤런트 이정섭씨 키꼴은 장대하되 전형적인 이 케이스. 그는 오히려 이 케이스를 십분 활용하여 크게 뜨는 것 같다. 내 짜개바지 친구놈 하나는 장가를 들기만 하면 한발에 차인다. 생김생김도 그렇고 노는 것도 그렇고 여하튼 남자 맛이 하나도 없다고.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그 모양새다. 그래서 그 자식 살맛이 죽을 지경이라면서 내내 인상 쓰고 다닌다. 나는 그 자식 보기가 하도 딱해서 야, 니 그 하리수처럼 카 해버리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 자식 처음에는 어, 놀라운 표정을 짓더니 다음 순간에는 정말 그럴까 하며 환한 표정을 짓더라. 사람들 살아가다보면 남자로 태어난 것이 힘들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힘들 때가 있다. 그래서 자연히 남자가 되고 싶고 여자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임을 생각할 때 이것이 비극적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가능성 차원에서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의 하리수, 우리 연변의 모모양, 태국의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 모두들 무난히 이런 삶의 지혜를 잘 구사한 모델들이다. 인생은 선택이고 창조이며 이것이 값있는 것이라 할 때 삶의 지혜를 구사하는 性倒錯적인 삶의 추구도 멋진 인생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성을 바꿔 입는다는 性倒着이라 부르고 싶다. 그럴진대 이것은 남자가 여자 브래지어를 끼거나 란제리를 입는 것 같은 그런 해프닝을 피우는 症적인 性倒錯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현대 한국이나 미국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性倒錯症을 錯을 着으로 바꾸고 症을 거세해버린 性倒着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의 경우는 지난 세기 90년대에 이미 性倒着적인 논의가 매스컴에까지 오르면서 무엇 이상할 것 없는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동성애자들의 천국. 동생애자들의 근본 심리기초의 하나가 바로 性倒着에 있다. 생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리도 진짜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는 동성애가 성립되지 않는다. 동성애가 성립되자면 동성애 사이 적어도 한 사람이 이성의 심리적 경향을 가져야 한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갈등 및 불화, 불편을 커버해줄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인류의 이성애에 못지 않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근한 예로 고대 희랍, 로마는 넘쳐나는 인구조절을 위해 의식적으로 동성애를 조장했기에 현대 미국보다 더한 동성애천국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동성애는 지난 세기 50~60년대까지만 해도 불법적인 변태적 존재이고 사람들의 눈에 나는 이상한 존재였으며 동성애자 자체도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 주눅 들고 꾀죄죄한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70년대부터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너그러워지고 포용력이 커지면서 그리고 동성애자 자체가 당당하고 떳떳이 사회에 진출하여 자기네들의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현재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해 정상으로 보게 되는 시각교정을 했고 일부 州에서는 동성애를 합법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것이 점점 미국식 인권의 한 내용을 이루는 추세로 뻗어가고 있다. 고대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 임금의 ‘3천궁녀’들 사이 그리고 궁의 太監이나 內侍들 사이에 특정한 환경 하에서 ‘꿩 대신 닭’이라는 식으로 동성애의 ‘향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말에 ‘가시나’라는 말도 고려 공민왕 때 왕궁에서 곱게 생긴 남자애들을 男扮女妝시켜 동성애 파트너로 삼은 ‘假戱男’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동성애는 일개인의 향락에 부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생긴 비극적 색채가 농후하다. 사실 중국고전이나 한국고전에 동성애를 취급한 내용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국 에서 조조 군사들의 낭패상 서술장면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인간은 분명 이상애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도 있는 듯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실존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자세, 그러면서 중국식으로 理解萬歲의 풍조가 일어나면서 동성애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보편적인 시각교정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의 시원 및 주류를 이룬 중국에서조차 몇 년 전 동성애를 다룬 라는 영화가 히트 칠 정도니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개방, 이해 내지는 포용으로 나아가고 있다.동성애를 포함한 성도착증이 무의식적인 性倒錯症이 아니고 의식적인 性倒着일 때 그것은 적극적인 바람직한 인생자세로 보아 무방하다. 고대 희랍에 재미나는 신화 하나가 있다. 우리 인간은 원래 남녀동일체였다 한다. 그래서 그때 총명과 힘이 넘쳐났다 한다. 그러니 신의 왕 제우스가 위기감을 느껴 칼로 우리 인간을 내려쳤다고 한다. 이로부터 인간은 남녀가 각기 반쪽으로 떨어져 나갔는데 우리가 이성을 그리워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은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으로의 회귀라는 것이다. 性倒着, 어쩌면 이런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입는 것이다. 유명한 심층심리학자 칼 • 융의 관점에 의하면 남자의 무의식속에는 아니마라는 여성적인 요소가 있고 여자의 무의식속에는 아니무스라는 남성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사나이대장부가 남이 안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로 무의식속의 아니마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다시피 우리의 무의식세계의 남성 혹은 여성은 의식세계와 다른 성적 경향을 추구한다. 심층심리학 차원에서 무의식적인 性倒錯症은 바로 여기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의식적인 차원에서 컨트롤하고 승화시킬 때 性倒着적인 추구가 될 줄로 안다. 性倒着, 말이 쉽지 현실사회에서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통념은 생리적 특징에 바탕하여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의 역할분담을 강요받아 왔다. 여기에서 벗어날 때 그 사람은 이상한 존재로 지목되어 왔다. 이로부터 정신적 압력 내지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적인 의학기술도 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단계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놓고 볼 때 남성이 여성에로의 형식적인 생리적 전환은 쉽지만 여성이 남성에로의 그것은 어렵다. 이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하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태국의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처럼 생명감소의 후유증 같은 것도 감수해야 하는 희생도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 차원의 性倒錯症을 의식차원의 性倒着으로 대체, 승화시키는 만큼 간단하거나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性倒着, 정말 자유자재로 성을 선택하고 소신껏, 마음껏 살아보는 삶은 살 수 없는지? 나는 불교, 아니 내 나름대로의 윤회설을 믿고 싶어졌다. 이 세상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저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났으면 저 세상에서 남자로 태어나는 윤회설 말이다. 이로부터 나 자신의 ‘반쪽’ 성을 다 살아보는 멋지고 완미한 인생이 되었으면 한다. 2005. 4. 8
18    노출증과 관음증 댓글:  조회:5110  추천:73  2005-04-06
노출증과 관음증 우상렬ㅣ연변대학 부교수 화사한 봄기운이 몸을 감싸고돈다. 흑흑, 동물들 발정한다. 1년껏 기껏 장재 두었던 사랑의 봄물이 쏴쏴 터져 나온다. 아, 나도 발정한다. 누가 사람은 발정기 없다 했어? 뭐, 인간은 4계절을 사랑한다고. 그런데 봄이 되면 괜히 싱숭생숭해나고 지네들 흘레하는거 보아도 열 받고 사람새끼들 찧고빻고(♀♁) 하는거 보면 더 열 받고. 이것 또 왜 그런거지? 뭐, 사람들 옛날 발정기때 하는 짓의 조건반사적 유전이라고. 아, 여하튼 나는 벗고 싶다. 벗는 계절. 사랑의 계절. ^0^ 봄 얘기 떠나서 인간들은 벗어 보여주기 싶어 하는 노출증이 있단다. 인간에게 있어서 입는 것이 정상일진대 이것은 분명 비정상이다. 이것이 고질화되어 시도 때도 없이 벗을 때 그것은 의학에서 말하는 병적인 노출증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정상적인 노출증이 있다고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하다고 한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의 옷을 비교해볼 때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여자들의 옷이 노출도가 훨씬 심하고 여자들이 대개 치마를 입는다고 한다. ☞ 보라, 여자들 어느새 바지 벗고 치마 입는다. 그리고 날이 점점 더워짐에 따라 치마길이도 점점 짧아지다가 어느 날에는 달랑 앞뒤만 가린 천쪼박-미니만 남는다. 그리고 위도 점점 더 패이는 심각한 V로 내리닫고 배꼽 위로는 점점 밀리워 올라가다가 어느 새 배꼽티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좀 대담한 여석들은 브래지어만 달랑 걸고 활보하기. 또 좀 더 간이 큰 여석들은 노팬티도 한번 살짝 시도해보기. 그러다가 서늘한 가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바지 입기. 그러나 타이트한 바지-듣기에 좋은 健美褲에 팬티 막 찍어내기. 추운 겨울이 되면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아래위 옷 많이 껴 입기. 슬픔의 계절. 그런데 요새는 치마에 스타킹만으로도 견딘다. 밍크코트에 곳곳에 설치된 난방시설 덕택. 여자들 살고 난 세상. 이래저래 여자들은 못 벗어 안이 달아난단다. 왜 그럴가???... 여자들은 자기네 몸덩어리가 남자들보다 여쁘다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단다. 사실 이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따져도 여자들 육체는 훨씬 아름답다. 남자들 게임이 안 될 정도로.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 쫑쫑빵빵 들어가고 나오고, 지그재그 곡선미에 변화무쌍-짱. 오, 나의 비너스요. 그러니 여자들 벗고 싶고 보여주고 싶을밖에. 이것은 정상-人之常情. 오히려 안 벗고 싶고 안 보여주고 싶은 것이 비정상-이상. 그리고 여자들 몸짱은 남자들을 위해 벗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법. 이것은 무의식심층의 생명의식과 관계된다. 싱싱하고 준비된 몸짱을 짱~ 드러낼 때 남자들은 눈이 빛구리 된다. 순간 자기가 씨 뿌릴 터밭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서로 자기가 뿌리겠노라고 지랄발광 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에 여자들은 깨고소해 한다. 그럼 그렇겠지. 그리고는 싸움에서 이긴 가장 센 남자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제일 좋은 종자임에라! 이것이 여자들의 무의식 진풍경이다. 이것이 이제 의식세계에서 나타날 때 자기의 몸매자랑을 전제로 이 남자, 저 남자 튕겨보는 연애행각을 거쳐 일단 이거다 싶으면 결혼으로 골인한다. 첫날밤 은근한 내숭을 떨기는 하지만 몸짱 열어주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여자. 그러니 첫날밤 신랑이 신부한테 안 덮쳐보라,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죄’ 어디 있으랴! 맞쟈, 여성동지들! 정말 여자들은 몸짱 노출증에 각고의 노력을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여자들의 가장 매력포인트인 一个中心, 兩个基本点을 돌출히 하는데 신경을 쓴다. 一个中心, 이것은 매력포인트 가운데 포인트. 옛날 중국에서 여자들의 纏足-三寸金蓮, 그것이 남자들 시각의 강요라고 하기도 하지만 실은 三寸金蓮 때문에 오리걸음처럼 뒤똥되똥 느린 걸음걸이가 처녀막을 잘 보존하고 여성성을 돋보이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 스스로 선택한 산물이기도 하단다. 요새 여자들이 처녀막을 정형수술로 복원하기도 한단데 이것은 현대과학을 동원한 一个中心지킴이. 兩个基本点, 一个中心 못지 않은 신경이 쓰임. 일단 고봉으로 키우기. 이것이 잘 안되면 다른 수단과 방법 취하기. 일찍 서양에서 나왔다는 여자들의 하이힐-高跟皮鞋, 신기에 편하지 않고 불편하다. 그런데 그것을 신으면 힐이 높아 윗몸이 앞으로 기우는 긴장감을 주기에 오히려 윗몸은 뒤로 꼿꼿이 젖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둔부 쪽은 앞으로 내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兩个基本点을 고봉으로 키우기에 좋고 둔부는 처지지 않고 오돌차져 좋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힐은 덤으로 三寸金蓮 같은 이점도 있다고 한다. 현대 兩个基本点 확대 내지 고봉 정형수술, 그리고 브래지어 쪽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봉 만들어 눈가림하기 등등은 현대과학을 이용한 여자들의 안스러운 노출증의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一个中心, 兩个基本点외에 여자들의 화장끼도 뛸 데 없는 노출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연지꼰지 바른 화사한 얼굴, 요렇게 조렇게 요란함을 자랑하는 헤어스타일, 그리고 생눈섭 밀어내고 눈썹심기에 생눈 잡아 째고 아이도새로 광내기, 그리고 섹시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립스틱 바른 빨간 입술, 그리고 반짝반짝 매니큐어 바른 손톱발톱... 이외에 달랑달랑 반짝반짝 귀걸이, 반지, 손목걸이, 배꼽걸이, 발걸이... 여하튼 눈이 헷갈리도록 아롱다롱한 악세사리들을 동원한 그로테스크한 모양새 갖춤은 나는 여자, 멋진 여자라는 것을 나타내고 주지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무의식적인 육체미 자부심에 기초한 노출증은 여자들로 하여금 각종 모델이나 쇼 같은데 단골손님이 되게도 한다. 여자들, 미술, 조각 등의 누드모델이나 패션쇼, 스트립쇼-裸体表演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三點式 미인선발대회를 독무대로 휩쓴다. 원래 중성적인 뜻을 가졌을 ‘미인’이라는 단어가 전적으로 여자들한테만 전용된 것만 보아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노출증, 물론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남자들. 터들터들, 부시시 껄껄 원숭이상 못 벗어나고 멋대가리 없이 밋밋하고 단순-몸짱이 되기엔 꽝. 그러니 여자들보다 우수한 쪽으로 승부를 걸어본다. 울끈불끈 근육질-보디빌딩, 위통 벗어 제끼기. 그러고 남성 그 자체 노출하기. 어릴 때 죽죽 서서 누가 오줌줄기 더 멀리 갈기는가 비기기, 그리고 사춘기가 되면 자꾸만 내놓고 보여주고 싶은 남성, 특히 여자들에게... 요원의 불길마냥 거침없이 돋아나는 뽀드라지(여드름)-靑春美麗豆도 이런 노출증의 무의식심리차원에서의 생리적 표출. 요새 남자 애들, 여자애들처럼 머리 요란하게 가꾸고 염색하는 것도 신세대 노출증의 다른 한 광경은 아닌지? 노출증이 있으면 관음증이 있는 법. 인간은 바로 이런 이율배반적으로 되어 먹음. 다른 사람의 엄밀한 곳이나 사생활을 은근히 보고 싶어 하는 것-관음증. 동서양을 막론한 전통적인 春畵, 그리고 현대 누드그림, 황색소설은 전형적으로 인간의 이런 관음증인 욕구에 만족을 준다. 특히 春畵 같은 경우는 대개 주문을 받아서 그리게 되는데 주문자의 관음증 취미에 가장 잘 영합한다. 현대 감상심리학에서는 연극이나 영화 감상의 심리적 메커니즘도 인간의 관음증에서 찾고 있다. 관중석은 어둡고 무대나 영화화면은 밝고, 이런 명암이 엇갈리는 속에서 관중은 엄밀히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근간에 한국 가족형 TV드라마가 인기상승선을 달리고 있는 원인도 인간의 이런 관음증 욕구를 충족시키는 잠재적 요소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인간의 이런 관음증욕구는 商術에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春畵의 경우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浮繪라 하여 그림뿐만 아니라 판각 등으로 나아가며 일종 미술산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나이트클럽이나 스탠드바 같은 밤술집에서 야한 옷을 입은 여자를 곁들여 쇼를 하는 것은 일단 관음증 차원에서 남자들을 끌어들이기 족하다. 성의 절대적 개방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진짠지 가짠지 어떤 술집에서 써빙아가씨들이 치마를 입었으되 바닥의 반사재를 통해 노팬티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구멍 통한 섹스장면 구경하기는 정말 남자들의 관음증욕구를 만끽시킨다. 사실 이런 관음증욕구는 여자몸매를 나타낸 술병이나 라이타, 그리고 일부 토크쇼에서 외설적인 얘기를 통한 대리만족 행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남자들은 야한 여자가 옆에 없어도 여자몸매의 술병을 쥐는 것만으로도 관음증의 만족과 더불어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보기에 안스럽네! 관음증의 경우 대개 내향적이고 안주적인 여자들보다는 외향적이고 공격적인 남자들의 경우가 더 심하다 한다. 남자들 사춘기에 들어 여자들 꽁무니 졸졸 따라 다니는 ‘꼬락서니’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호기심이거니와 이런 관음증의 전형적인 한 발로로 볼 수 있다. 근간에는 페미니즘이요 뭐요 하며 여성들의 잠재되었던 관음증도 많이 살아나는 듯 하다. 일본 같은 경우는 람보 같은 보디빌딩 남자들을 삼각팬티 하나 달랑 입혀가지고 무대위에서 이런저런 섹시한 포즈를 취하거나 쇼를 시키고는 여자들이 무대위로 올라가 남성을 이러구저러구 하는 여성들만을 위한 밤의 쇼무대가 등장했다고 한다. 노출증과 관음증, 우리 인간의 타고난 욕망이라 할 때 그것을 정상적으로 발산시키거나 잘 유도할 때 그것은 우리 심신에 좋은 약이 된다. 사춘기 때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나타나는 노출증과 관음증, 청소년 성교육의 키포인트의 하나다. 우리처럼 근엄한 척 혹은 부끄러운 척 하며 막고 회피하고 숨기고 시치미를 떼는 그런 자폐증적이고 공포증적인 성교육은 무식하고 전근대적이다. 선진국에서 행하는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보고 하는 오픈된 성교육은 노출증과 관음증을 대리만족시키며 알 것도 알게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온다. 우리한테 계시주는 바는 없는지? 노출증과 관음증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니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잘 유도하고 발산시켜야지 막고 회피하고 숨기고 시치미를 떼서는 문제가 생긴다. 변태가 온다. 강간이라는 것도 이런 변태의 하나에 다름 아니다. 나는 사춘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지났다. 그만큼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는 말이 되겠다. 내가 1980년대초 대학교에 다닐 때다. 우리 학교 남학생 하나가 여자변소에 들어가기 좋아했는데 결국 그 친구는 ‘류망’, ‘건달’이니 하며 전학교적으로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깜방놀음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친구를 비판하는 마당에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해 났는지 몰랐다. 그때 그 친구는 워낙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음매라! 나는 그때 영화에서 어쩌다 한번 나온 처녀총각 키스씬에 그만 혼이 빼앗겨 몇날며칠 잠을 설치던 기억이 오늘까지도 새록새록하다. 못난이같으니라구! 물론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며 度가 지나친 노출증과 관음증, 그것은 정말 병적인 증상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비도덕적 내지는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질 소지도 있다. 명인들의 사생활을 쇠똥에 쇠파리떼처럼 묻어 다니며 도처에 몰카(몰래 찍는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는 파파라치들, 돈이 눈이 어두운 파렴치한 인간쓰레기들이다. 영국의 다이엔나 왕비는 바로 이런 파파리치의 희생품의 하나. 노출증과 관음증을 컨트룰하고 활용함에 있어서 그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度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설명하기에는 워낙 복잡하고 어렵고 골치 아픈 일. 그러니 가장 손쉬운 방편으로 우리민족 전통한복 여자들 옷과 만족 旗袍를 비근한 예로 설명할 수밖에. 우리민족의 여자들 옷 진짜 멋지다. 다른 거 다 떠나서 노출증과 관음증 차원에서도 고혹적이다. 兩个基本点을 겨우 살짝 감싸는 윗 도리, 고봉의 멋을 살리며 아슬아슬하다. 여기에 휙 당기면 다 드러날 것 같은 옷고름, 그리고 은근 슬쩍 틔워놓은 치마옆구리... 여자들 노출증 발산하고 남자들 관음증 만족받기에 충분. 그런데 모든 것을 감싸는, 특히 一个中心을 깊숙이 감싸는 모성적인 아래 도리 치마는 위 도리의 드러내는 오픈을 커버한다. 우리 남자들의 관음증은 이로부터 병적인 淫心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마침한 度에서 머문다. 그럼 旗袍를 좀 보자. 旗袍하면 희번덕희번덕 하는 신다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一个中心도 희번덕희번덕 한다. 여기에 兩个基本点을 비롯하여 여성적 특성을 그대로 찍어내는 착착 달라붙는 옷무맵시... 너무너무 육감적이다못해 아찔하도록 육감적이다. 노출증이 커버되지 않는 거침없는 노출 그 자체다. 그래서 여자들의 노출증을 남성유혹의 관능으로 발산함과 더불어 남자들의 관음증은 淫心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旗袍는 일상평복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 입고나서기에 적합한 옷이다. 이에 비해 우리 여성 한복은 언제 입어도 좋은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옷이다. 지루하쟈, 그럼 끝! 2005. 4. 5
17    선배와 후배 댓글:  조회:4325  추천:59  2005-04-04
선배와 후배 우상렬 혈연, 지연, 학연은 한국 인간관계의 끈끈한 정들이다. 선배와 후배는 학연의 확실한 위계질서로서 그 끈끈한 정의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선배 온다. 차렷!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음, 너희들도 잘 있니? 한국대학에서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고 후배한테 베풀며 후배가 선배를 깍듯이 모시는 것, 한국 대학의 진풍경의 하나. 선배는 후배보다 대학입학을 먼저 했다. 그러니 나이에 상관없이 선배다. 선배는 선배고 후배는 후배,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을 선배라고 모시는 韓민족 전통적인 의식하고는 좀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일제 식민지시기 군국주의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대학위계질서의 유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좀 껄꺼름하다. 그러나 현재 그것이 분명 한국식으로 새롭게 그 내연이 채워졌음에라 한국대학문화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신입생입학, 대학생활에는 아직 숙맥인 신입생. 어리뻥뻥. 이럴 때 선배가 나선다는 것이다. 얘들아, 모여. 내가 한턱 쏠께! 대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여차여차... 알았니? 그러면 한잔 해. 그리고 어떤 ‘세심’한 선배들은 학과 교수님들의 성미, 습관, 수준 등에 대해 일일이 거론하며 수강신청에 학점 따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에헴, 에헴 해가며 ‘훈계’한다. 정말 대학생활 기본원리부터 구체적인 방법, 요령에 이르기까지 ‘가르침’받게 되니 후배들 도정신하여 들으며 고마워할 수밖에. 그것도 선배들 술 얻어먹으며 말이다. 고마울시고, 선배님이여! 이때는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나.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전통적으로 아랫사람이 위 사람을 모시는 것과는 좀 달리 일반적으로 나이 더 먹은 선배가 나이 적은 후배한테 밥이나 술을 사주는 식으로 잘 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배니까 돈도 우리보다 많겠지 하는 식의 합리주의가 작동해서인지, 아니면 삼촌, 삼촌 하면서 짐 하나 더 지워주는 식인지... 여하튼 후배들은 선배들꺼 냠냠 잘 받아먹으면서 선배님, 예예, 알았습니다하며 말 잘 듣고 거저 잘 모시거나 혹은 흉내만 내도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후배들은 담배를 피우다가도 선배들이 오면 당황해 하며 혹은 당황해하는 척 하며 담배를 비벼 끄거나 담배를 등 뒤로 가져간다. 어려운 존재로서의 선배에 대한 예의의 표시다. 이럴 때 선배들은 대개 어깨가 으쓱 올라가며 선배로서의 존재가치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대개 기분이 붕 떠서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괜찮아, 괜찮아 피워! 한다. 그러면 후배들은 못이기는 척하고 피운다. 멋진 광경이다. 禮尙往來의 한 경지! 선배와 후배, 아니, 우리 쪽에서는 아래위 학년 사이 막 치고 박는 ‘아수라장’하고는 좀 다른 데가 있다. 물론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또 고향선배, 고향후배 하는 식으로 지연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개개인 사이에 더 끈끈한 정을 쌓아간다. 그리고 이들 사이 후배들은 평시에 무슨 고민거리가 있을 때도 선배들을 찾아가 털어놓으며 조언을 받기도 한다. 한국 대학에는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고 혹은 선배와 후배 사이 관계를 돈돈히 하는 모임이 학기 초에 학과일정에 공식적으로 잡혀 있다. 오리엔테인, MT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모임은 신성한 것으로 대개 학교를 벗어난 어떤 뜻 깊은 장소를 택한다. 그래서 대개 학과교수들도 참가한다. 오리엔테인, 신입생환영회가 되겠다. 오리엔테인, 선배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며 신입생들 사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면목을 익히는 모임이 되겠다. MT-Member ship of Training, 단체성원들의 훈련 및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모임이라 해야 되겠다. 이것은 매 학기 시작 때마다 가진다. 나는 이번에 내가 교환교수로 와 있는 배재대학교 국문과의 학생들과 MT를 갔다. 나한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선후배 및 교수가 한잔 하며 허심탄회하게 속말을 터놓고 노래에 춤사위에 하나로 어울리는 것도 좋았지만 초봄의 냉기가 냉냉하게 감도는 식전 아침에 벌어졌던 광경은 더구나 인상적이다. 선배들이 앞에 서고 후배들이 뒤에 선 상태로 학생들이 줄을 짓더니 바지가랭이를 올리붙이고 하나하나 둘, 하나하나 둘 하며 그대로 해변가로 달려가 바다로 뛰어들기! 그리고는 우리는 해냈다는 듯이 허허로운 바다지평선을 향해 야호!를 웨친다. 찬 바닷물에서 한참 물장난을 치던 학생들은 선후배 할 것 없이 물참봉이 되고 말았다. 뭍으로 나왔을 때는 모두 낯이 새파래지고 입술을 들들 뜬다. 그러나 그들은 즐거운 기분에 들떠 희희작작 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그들은 선후배가 하나가 되어 해냈다는 기분에 들떳다. 선배들은 투정 하나 부리지 않고 잘 따라준 후배들이 고마웠다. 후배들은 그 살을 에이는 찬물 속을 앞장서 뛰어든 선배들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선배와 후배, 서로서로 고마운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이렇게 ‘통과의례’를 잘 치러냈다. 이로부터 그들은 하나가 된 새 출발을 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마음은 흐뭇하고 얼굴마다에는 미소가 어린다. 한국대학의 선배후배문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국유학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다. 우리 과의 한국 친구 하나 나를 초청. 우선생, 오늘 저녁 한잔 합세. 귀맛이 당겼다. 안 그래도 궁굼하던 차. 여기에 선생이라고까지 불러주니 기분이 더 붕 떳다. 그래서 저녁이 되어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밥도 먹지 않고. 식사시간 퍼그나 지났는데도 이 ‘자식’ 감감 무소식. 나는 밸이 상투밑까지 치밀었지만 이 새끼 보자고 벼르며 꾸르륵 하는 배는 달래느라고 열심히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리고는 방법 없이 애매한 책하고만 씨름하기. 그런데 밤 한 11시가 되었을가 하는데 그 ‘자식’ 문을 뚝뚝 노크 하더니 얼굴을 삐끔히 들이밀고 우선생, 한잔 하세 그래, 한잔 하세 그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붙인 ‘손술잔’을 주둥이로 가져가며 술 마시자는 내색을 냈다. 임마, 알았어. 나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속으로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며 걸상에서 기신기신 일어났다. 얻어먹는 놈 방법 있나, 나는 그 자식 따라 수걱수걱 기숙사문을 나섰다. 어디 밖의 식당으로 가는가부다 생각을 했는데 이 자식 학교운동장으로 나를 끌고 가는게 아닌가. 그때 이제 금방 가을에 접어들었는지라 학교운동장에는 잔디가 아직 파릇파릇 돋아 있다. 이상한 낌새가 드는 판에 그 자식말로 우선생, 내 막걸리 한 통 받아 왔네, 오늘 달 밝고 날씨 좋으니 여기서 막걸리나 마시며 밤이나 세우세. 나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식’, 정말 막걸리 한통에 마른 오징어오리들에 당콩알들이며 그럴싸하게 신문지 위에 벌려 놓았다. 그런데 그 막걸리라는 것을 보니깐 기숙사에서 손빨래할 때 쓰는 물통-바께쯔에 담은 것이였다. 우리 기숙사에도 그런 바께쯔가 있으니 뛸 데 없다. 나는 좀 꺼림직해났다. 그런데 이것은 약과였다. 술잔이 없어 어떻게 하지 했는데 자식 자기가 싣고 있던 흰 고무신, 아니 너무 오래 신어서 그런지 아니면 오래 동안 안 씻어서 그런지 이제는 좀 누르께레한 한 짝을 척 벗더니 거기에다 대고 막걸리를 들이 붇는다. 그리고는 자, 우선생 먼저 한잔 하게, 아주 정중하게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아이, 이 사람아, 어찌 그런데다 술을 마신다 말이요? 나는 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지, 아무래도 선배! 가 솔선수범을 하는 법이니깐. 그러면서 그는 고무신에 담김 막걸리를 쯥 소리를 내며 다 들이킨다. 그리고는 카, 술맛 좋네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손등으로 입 가장자리를 쓱 닦는다.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사람 좋게 히죽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 고무신에 막걸리를 붇는다. 그리고는 나한테 내민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어망결에 받았다. 우선생, 달리 생각 말게. 막걸리는 이런 데에 마셔야 맛있소. 나는 고려대학교 출신인데 우리는 다 막걸리패요. 내가 학부생 입학을 하니 선배들이 이런 고무신에 척 막거리를 따라 주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지, 지금 생각만 해도 꿈같애, 꿈같애.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제날의 아름다운 꿈을 되새겨 보기 위해서 오늘 이 장소를 마련한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찍 감고 단순에 쩍 들이켰다. 그는 확실히 한국식으로 나의 선배가 되기에 족했다. 그는 벌써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집필중이였다. 그리고 그는 나이도 나보다 한두 살 위였다. 나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그리고 그의 고마운 마음에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쩍 들이켰다. 그리고는 카, 술맛 좋네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손등으로 입 가장자리를 쓱 닦았다.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 며 사람 좋게 히죽 웃었다. 다음 다시 그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었다. 그는 기분 좋게 얼굴에 웃음을 환히 피우며 그 고무신을 받는다. 또 쩍 내기. 그 다음은 내 차례. 나는 두 번째 고무신잔을 받으면서 말했다. 김선생, 우리 중국말에 好事成雙이라고 이것만 마시고 그만 두기오, 내 네일 수업있다 말이요. 아, 그래, 그래. 그는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인다. 그런데 두 번째 고무신잔을 비우고 난 다음에도 세 번째, 네 번째 잔... 계속 이어졌다. 우선생, 아니 이번에는 친구다. 야, 싸나이대장부라면 이만한 술은 다 마시야지. 둘이서 요만이 술이 다 무엇이냐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지, 친구, 그렇지 않나 말이다. 나는 정말 선배의 들뜬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끝내 그 한 바께쯔 막거리를 꽝냈다. 물론 이튼 날 수업은 아침 잠으로 말아먹고. 그 후 내가 이 일을 한국 친구들한테 재미거리로 얘기했더니 선배 따라 울며 겨자 먹기가 어디 그뿐입니까 하더라. 그렇겠지. 나는 알았네. 한국대학의 선배와 후배 관계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은 정말 약과다. 진짜 울며 ‘독약’ 먹기는 신참침례식의 기죽이기다. 이른바 선배의 억지 강권 내지 명령이나마 신참후배는 찍 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한 강술 한 사발씩 부어놓고 단모금에 마시기. 이 정도 되면 멋진 상징적 의미의 신참침례가 아니고 이것은 정말 ‘독약’ 먹기에 다름 아니다. 정말 언젠가 한국에서 이런 신참참례에 신입생후배가 죽어나갔지 않았던가? 그래도 선배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의 권위를 확보하련단다. 웃어울시고. 이런 식은 후배들 겉으로 되는 ‘존경’은 살지 몰라도 속으로는 반감만 살뿐. 이것은 上行下傚라 선배에게 당했던 후배들이 그 다음 후배들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기죽이는 노릇을 되풀이하며 ‘분풀이를 하’는 악성순환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한국대학에서의 선배와 후배 관계는 정말 우리 중국 유학생들이 농담 삼아 얘기하는 前肚后背 즉 앞 배와 뒤 등의 관계 다름 아니다. 前肚가 가는데 后背가 따라가기 마련. 선배가 어떤 정치선거유세에 나선다고 하자. 그럼 후배는 무조건 선배 찍기. 선배가 당선되면 선배는 또 자기후배부터 챙기주기. 선배와 후배는 서로 싸고 감돌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노릇하기. 사회 정의니 정도니 하는 것은 다 팽개친체. 중국식으로 走後門의 전형적인 한 보기. 선배니 후배니 하는 한국대학문화가 어느새 우리 대학가에도 불어 닥쳤다. 위에서 말한 선배와 후배 사이 합리적이고 멋진 情적인 주고받음,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사실 대학교라는 것이 아래위학년의 관계를 못 떠나는지라 선후배 관계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럴진대 선배후배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따름이지 우리에게도 이런 문화는 있다. 예컨대 신입생환영모임이나 재학생들과 신입생좌담회조직 등등.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국에 없는 멋진 선후배문화가 있다. 위 학년 학생들이 신입생 마중가기, 정말 멋지다. 나는 지금도 내가 1981년 9월 연길역에 내렸을 때 나의 이불짐 보따리를 받아 안은 그 위 학년 선배님을 잊지 못한다. 그때 그 선배님의 열정적인 마중에 초라한 연길역이나마 나한테는 그렇게 멋지게 안겨왔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그 따분한 대학생활에 위 학년 선배들이 우리 반에 와서 사교무를 배워준다고 땀을 뻘뻘 흐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그리고 ‘안쪽’에서 온 나에게 조선춤을 배워주던 그 복성스럽게 생긴 선배처녀동지도 그렇고. 그런데 요새 우리의 이런 멋진 대학 선후배문화가 좀 일그러져 가는 것 같아 안타갑다. 선후배문화에서도 좋은 것 보다는 나쁜 것을 따라가기에 바빠하는 우리의 대학생들이 더욱 안쓰럽다. 우리 대학생들 속에서도 한국대학교 신참침례식 기죽이기가 기승을 부린다 한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는 우리 대학생 선배 둘이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야밤삼경에 후배들 기숙사에 뛰어들어 후배들 차렷시켜 놓고는 ‘체조’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손찌검을 해가며 선배의 권위와 지엄함을 내보이려 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것은 일종 범죄다. 남의 사생활침범, 인명상해죄 나아가서는 사회질서교란죄... 무서울시고. 다 이 선생된 자의 잘 못으로 칠 수밖에. 우리 친구들 남의 것 흉내 내도 무엇 좀 알고 흉내 내야 하지 않겠는가? 신참침례식 기죽이기, 말만 들어도 끔찍하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우리 韓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민족들에게도 이런 풍속이 있었다. 기독교에서 목사나 신부가 신참자 머리나 몸에 물을 뿌리거나 그 머리를 맑은 물에 살짝 담그었다 꺼내는 침례식도 그 한 보기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신참자의 몸을 진짜 상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재미나는 멋진 상징적인 과정으로 거뜻이 끝나고 만다. 위에서 나타난 한국대학교 신참침례식은 도가 지나친 무지막지함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신참침례를 총장훈시, 학과장훈시, 담임선생훈시 층층이 훈시하는 멋대가리 없는 식으로 대체해왔다. 그러니 우리 학생들이 한국식을 배울 수밖에. 신참침례식, 합리적이며 멋진데가 있다. 그러니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나름대로 상징적으로 승화시킨 합리적이고 멋진 모습이여야 한다. 사실 한국대학교 MT는 따져보면 선배들이 주동이 되고 앞장에 서서 후배들을 이끌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간다는 신참침례를 포함한 단체결속의 멋진 데가 있다. 그러니 이런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따라 배워도 좋다고 생각된다. 2005. 3. 25
16    자아실현 댓글:  조회:4221  추천:86  2005-03-31
자아실현 우상렬ㅣ연변대학부교수 자아실현, 액면대로 이해하면 그것은 자기의 무엇을 실현하는 것이 되겠다. 좋은 의미에서 혹은 나쁜 의미에서. 인간은 야누스적인 존재-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 천사적 존재는 좋은 의미에서의 자아실현을 할거고 악마적 존재는 나쁜 의미에서의 자아실현을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아실현이란 그 무슨 남에게 말 못할 음흉한 자사자리한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악마적 의미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의 반대급부인 천사적 의미에서의 자아실현인 것이다. 이것을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줄로 안다. 사회나 다른 사람에게 누나 폐가 되지 않는 전제 조건하에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는 것 또는 사회나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앞의 것은 자기 내부를 향한 자아실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인생을 알차게 멋지게 사는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진짜 학자들이 책보는 재미에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못 놓는 것은 이 경지라 하겠다. 뒤의 것은 자기 외부의 남을 향한 자아실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더 없이 고상한 경지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선진국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행위가 바로 이 경지라 하겠다. 이런 자아실현은 그것이 자기 내부를 향하든 자기 외부의 남을 향하든 大乘적인 경지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大乘적인 경지의 인생이 가장 이상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얼마 전 잡지에서 접하게 된 한국의 유명한 연극배우 이주실 여사가 전형적인 이런 인생의 한 모델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10여 년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인생의 회의나 비애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종전대로 연극활동에 불우이웃 돕는 자원봉사를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요새는 암말기로 60세가 넘은 연세에 전격적인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평생의 소원인 대학까지 졸업했으며 계속 연극활동을 하고 자원봉사를 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자기가 좋아서 한단다. 그녀는 바로 이런 인생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자아실현의 감동적인 인생을 퍼포먼스 한다. 이런 자아실현 인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디까지나 자기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의욕에 따른 자발성, 주동성 및 스스로의 즐거움에 있다. 그것은 이미 몸에 배인 생리화 그 자체다. 그래서 이런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인생의 더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들은 자기네들의 결혼식이나 결혼기념일을 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원봉사하는 것으로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 또는 고아원이나 노인정 같은데 무명으로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 거기에 무슨 생색을 내는듯한 티, 배푸는 듯한 자세, 남에게 보이기 위한 쇼나 홍보, 광고같은 것은 끼일 사이가 없다. 이로부터 좋은 일을 좀 했다고 해서 도처에 자랑을 하거나 기부금이나 의연금을 내면서 성함 밝히는데 신경을 써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인생은 어디까지나 小乘적인 인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이 아주 살맛이 나는 멋진 나라라고 생각된다. 한국 어느 곳에 꽝 자연재해가 터졌다고 하자. TV에 때리며 성금 한번 호소하면 기하급수로 몇 억씩 올라가는 지원금모금은 안 보이는 사람들의 전화 다이얄 덕택이다. 진짜 순수한 의미에서의 의연금이다. 훈훈한 인정, ‘사랑의 리퀘스트’가 있는 한국. 그럼 우리의 행태를 좀 보자. 우리도 어디에 자연재해 터졌다고 하자. 역시 의연금 호소하기는 마찬가지. 그런데 내는 사람 미미. 그러니 월급에서 무조건 얼마얼마씩 해서 떼여내기. 이것이 이젠 고질로 되다시피 하여 당비까지도 이런 식으로 납부하기. 그러니 떼내는 사람 기분 좋을지 몰라도 떼운 쪽에서는 항상 당하기만 하는 기분. 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은 일하기’를 제3자가 부여하는 당위성적인 논리로 많이 해왔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가 좋아서 하는 자아실현의 경지와는 다르다. 우리도 어쩌면 좀 자기 스스로 기분 좋아서 하는 자아실현 식을 못 해보겠는가? 제3차 심리학 사조를 몰고 온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가 마쓸로의 인간수요 층차설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주의 생리적 요구를 우선시하는데 이것을 만족 받게 되면 안전의 수요가 생겨나고 이 안전의 수요가 만족되면 집단귀속의 수요가 생겨나고 이 집단귀속의 수요가 만족되면 존경의 수요가 생겨나고 이 존경의 수요가 만족되면 고봉체험의 수요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고봉체험의 수요란 바로 필자가 말하는 자아실현의 수요에 맞먹는다. 보다시피 고봉체험 즉 자아실현의 수요는 일단 앞의 생리수요, 안전수요, 귀속수요, 존경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리수요, 안전수요, 귀속수요, 존경수요를 가장 잘 만족시키는 선진국에서 자아실현자가 많이 나타난다는 말이 되겠다.미국의 9.11테로 사건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주동적으로 달려온 것은 그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자원봉사신청자수를 비교해보아도 선진국 쪽이 월등히 많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소박한 말로서 개괄해볼 수 있겠다. 그러니 우리사회도 하루빨리 小康사회를 지나 인간의 생리수요, 안전수요, 귀속수요, 존경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킬수 있는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잠간 공산주의도덕품성 교육에 대해 좀 보도록 하자. 좀 때 지난 고리타분한 얘기 같지만 사실 공산주의도덕품성은 정말로 고상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실현의 경지와 통하는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아실현의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아실현이 어디까지나 내 좋아서 남을 위하는 경지라면 공산주의도덕품성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위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자아실현경지가 자아중심적이라면 공산주의도덕품성경지는 타자중심적이다. 그러니 사실 자아실현경지는 조건만 구비되면 마쓸로의 심리수요 층차설로부터 놓고 보아도 스스로 쉽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도덕품성의 실현은 절대절명의 무조건성을 전제로 한 인위적인 각고의 노력을 요구한다. 雷鋒, 공산주의도덕품성의 화신이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助人爲樂가 雷鋒의 경지다. 자기가 안 먹고 아껴 쓰며 모은 돈을 익명으로 수재지구에 보내는 것, 쉽지 않다. 자기의 생리수요를 우선시 하는 우리 일반사람에게는 이것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보통사람들귀에는 이런 공산주의도덕이요 뭐요 하면 그것은 허황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현재 물욕이 팽배하는 시장경제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존재보다는 정신적인 존재라 할 때, 물질성에서 벗어나서 정신적인 자유로운 경지를 추구하는 존재라 할 때 助人爲樂의 경지를 창출할 수 있다. 雷鋒은 전형적인 그 한 보기다. 그리고 현대 순수한 의미에서의 종교인들도 이런 경지에서 노닐고 있다. 항상 사회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사랑으로 대할 때 그것은 가능하다. 雷鋒, 구사회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새사회는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감사한 존재다.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현대 순수한 의미에서의 종교인들, 물론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그런데 하느님은 서로서로 사랑하란다. 니 원수까지도. 이것이 절대절명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논리로 그들을 이끈다. 현대학교교육에 있어서 우리 중국에서 중소학생들에게 ‘좋은 일 해오기’, 그리고 요즘 어느 남방에 있는 대학에서 “학생‘좋은 일 하기’저축은행”을 만든 것, 그리고 미국의 일부 대학에서 실시하는 자원봉사학점따기 등 시스템은 결국 따지고 보면 助人爲樂의 경지를 습관화하여 몸에 배이게 하려는 하나의 조치로 볼 수 있다. 몸에 배이게 함으로써 자아실현 내지는 공산주의도덕품성 경지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데 있다고 볼수 있겠다. 2005. 3. 22
15    혈연, 지연, 학연 댓글:  조회:4469  추천:71  2005-03-31
혈연, 지연, 학연 우상렬 한국 사람들의 끼리끼리 똘똘 뭉치는 情實주의를 나타내는 키워드는 뛸 데 없이 혈연, 지연, 학연이다. 그것은 이 혈연, 지연, 학연이 인간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편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혈연, 지연, 학연에 울고 웃는다. 한국 사람들은 이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종친회니 동문회요 하는 삶의 보금자리를 틀기도 한다. 사실 한국재벌기업이라는 것도 놓고 보면 이런 혈연으로 똘똘 뭉친 가족체에 다름 아니다. 아버지가 기업을 창업하고 그 다음 아들이 이어받고 그 다음 손자가 이어받는 식. 그러면서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나가는 혈연의 장강. 몇 년 전 부턴가 한국은 민주화가 속속들이 퍼지면서 지역자치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은 모종 의미에서 전통적인 지연을 더 확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혈연, 지연, 학연의 얘기는 한국만의 얘기만 아니고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親戚, 老鄕, 同學가 전형적인 그 보기가 되겠다. 그런데 중국은 군이 중시되는 세월에는 戰友도 여기에 가세한다. 중국에서도 이런 親戚, 老鄕, 同學 관계를 이용하면 살아가는데 훨씬 편하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 많은 인구들이 부대끼며 사는 중국에서 오히려 이런 관계가 더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생판 모르는 외딴 곳에 떨어졌는데 老鄕을 만났다고 하자. 그 어디 안 반갑겠는가? 중국 사람들도 親戚, 老鄕, 同學를 통해 자기의 귀속감을 확인하고 삶의 둥지를 틀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혈연, 지연, 학연은 불교의 무슨 緣 소리를 떠나서 우리 삶의 동심원으로서 그 누구도 이것을 떠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에 혈연을 가지게 되며 고향 땅에서 살다보면 지연이 이루어지고 학교에 다니다 보면 학연이 맺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연들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인간관계로서 현대 인간들의 많은 동호인 관계와는 다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항상 귀속감을 느껴야 마음이 편해지는 지라 이런 연들을 기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특히 현대 인간들은 따로따로 노는 외로움을 이런 모임에서 삶의 귀속감을 만끽하면서 달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연들의 외연은 신축성이 있는 것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그것은 우리에게 달리 안겨온다. 예컨대 우리가 연길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경우 연길은 우리의 혈연, 지연, 학연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연길을 떠나 중국 남방에 가서 사업하게 될 때 우리의 혈연, 지연, 학연은 확장을 가져와 적어도 연변, 길림성, 동북, 북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남방에서 조선족이나 연변, 길림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동북사람이나 북방사람만 만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령 또 우리가 누구도 모르는 외국에 갔다 하자. 여기에서 같은 중국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중국 사람은 혈연, 지연, 학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정다운 존재가 된다. 여기에 만약 그 중국 사람이 조선족이라 할 때 그것은 더 진한 정다운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 어떤 緣을 따지며 情實主義에 많이 매이고 官尊民卑의 관료주의로 많이 흘러온 우리 동양에서는 이런 혈연, 지연, 학연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신라향가 와 같은데서 보게 되는 군은 어버이여신은 어머니여백성은 그 자식이요...’하는 전근대사회의 얘기는 그만두고라도 현대에 들어와서도 나라를 세운 건국주들을 모두 어버이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 國父 이승만, 조선에서 어버이 수령님 김일성, 중국에서 중화민국의 國父 孫文, 대만의 國父 蔣介石... 여기에 이들의 부인을 國母로 인지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조선에서 1960년대부터 잘 불러진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 즐겁다손풍금 소리 울려라사람들 화목하게 사는내 조국 한없이 좋네우리의 아버지 김일성원수님우리의 집은 당의 품우리는 모두다 친형제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집체작)는 혈연, 지연, 학연을 모두 아우르는 情實主義에 다름 아니다. 상대적으로 놓고 볼 때 서양은 보다 많이 개개인 중심의 개인주의와 情實主義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살아왔기에 이런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것들이 음성적으로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보다시피 인간은 혈연, 지연, 학연의 존재다. 우리가 구정 같은 명절이 되면 기를 쓰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끊을 수 없는 緣 때문이다. 외딴 곳에서 부모친척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동창들이 그리워나는 것은 바로 이런 緣 때문이다. 인간은 바로 이런 緣 때문에 항상 정감이 촉촉이 솟아나고 젖어들며 행복감에 잠긴다. 한국의 종친회조직 같은데서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가문의 자제들을 공부시킨다거나 동문회 같은데서 자기네 출신학교 발전을 위하여 기금을 마련한다든가 하는 것은 정말 보기에 좋고 멋지다. 그렇다 하여 우리는 이런 緣을 아무 때나 마구 드러내서는 안 된다. 진승이 왕좌에 앉았을 때 고향 친구 하나가 무모하게 뛰어들다가 화를 입은 것은 그 보기의 하나가 되겠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여 얄팍한 삶의 한 편법으로 삶을 때 그 달콤한 緣의 맛은 싹 가시고 만다. 예컨대 한국에서 봉건시기 관료들이 四色黨爭에 빠지거나 현대 이런 緣 때문에 기업지성을 말아먹든가, 緣을 통해 지역주의를 조장하거나 선거 때 표 하나를 더 낚으려고 광분하는 것은 씁쓸해난다. 그리고 이것이 전근대적인 붕당냄새가 풍기는 종법주의, 지역주의 같은 극단적인 파벌로 나아갈 때 이것은 심히 경계해야 될 인간 삶의 독버섯으로 된다. 모택동이 중국혁명을 영도함에 있어서 가장 경계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현재 중국에서 이런 緣을 통해 기승을 부리는 走后門은 세상의 정의와 공정함을 싹 말아먹으며 정말 사람들 열 받게 한다. 세상만사 독과 약 같이 가는 법이라 우리는 이 緣을 약이 되도록 잘 써먹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적어도 때와 장소에 맞게 도에 어긋나지 않게 써먹을 때 그것은 생의 감로수가 될 것이다. 2005. 3. 25
14    신조어, 류행어 찧고빻고 댓글:  조회:4470  추천:63  2005-03-31
신조어, 류행어 찧고빻고 우상렬ㅣ연변대학 부교수 짱, 한국 짱은 짱이야. 뭐니뭐니 해도 신조어, 류행어 만드는데 짱이야. 나도 이런 신조어, 류행어 하나 만들어보자-신류어. 다름아닌 신조어와 류행어를 찧고빻은것. 이것은 사전에도 없는거야. 새롭쟈? 나는 한국사람 사는 재미 하나, 아니 재치 하나가 이런 신류어 만들어내는것이라고 생각해. 전에는 한두개 신류어 달랑달랑 사람들 입에 오르고 내리더니 언제부턴가는 동시다발적으로 우후죽숙마냥 막 생겨나고, 어리뻥뻥할 지경. 짱, 한국 신류어 차렷-우리도 잘 살아보세, 유전무죄무전유죄, 아메리카드림, 코리아드림, 고개숙인 남자와 남자들 기 살리기,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Well-Bing, DINK, Job-Nomad, 혈연, 지연, 학연, 공주병, 연상의 녀자, 영계, 막가파, 오렌지족, 폭주족, 야타족과 나타족, N세대, 붉은 악마, 오- 필승코리아 짝짜짜, 꿈은 이루어진다, 물태우, 386세대, 못나서 죄송합니다, 얌체족, 핸드폰, 컴맹, 신드림, 홈리스, 프리랜스, 프로그래머, 짱, 아자아자... 이런 신류어들은 뭐니뭐니 해도 그때그때 특정적인 시대적무드의 상징코드가 됨. 이것은 시대적공감대를 형성하며 가장 빨리 확산되여 나감. ‘우리도 잘 살아보세’- 한국 1960년대 새마을운동 때 내건 슬로건. 정부의 거창하고 의미심장한 정책 슬로건을 누구나 몸에 와닿는 소박한 말로 풀이한 류행어. 이것이 당시 현실집착적인 한국사람들의 신바람을 불러일으켜 한강의 기적을 일떠세우는 가장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였음. 유전무죄무전유죄-탈옥자들이 죽어가면서 자기의 억울함을 有錢無罪無錢有罪로 호소하여 1960-70년대 독재시기 법치를 내건,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人治를 꼬집은 류행어. 아메리카드림-한국 GNP 100불도 안되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잘 사는 미국을 바라고 거기서 꿈을 이루려고 돈벌이를 가거나 이민을 간 시대적상황을 얘기한다면 이에 반해 코리아드림은 지난 세기 말부터 한국이 좀 잘 살게 되자 우리 조선족뿐만아니라 동남아쪽 사람들이 한국으로 물밀 듯이 밀려드는 시대적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신조어. 고개숙인 남자와 남자들 기 살리기-'고개숙인 남자’는 한국 IMF때 구조조정으로 남자들이 줄줄이 정리해고 되여 기 가 죽은 상태를 말하고 ‘남자들 기 살리기’는 녀자들 차원에서 이런 ‘고개 숙인 남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킨 류행어.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요새 한국경제가 불경기의 늪에서 헤매게 되면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삼팔선-38세를 넘기기 어려움,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해먹으면 도둑놈이라 취업하기 어렵고 취업했더라도 화이트칼라같은 좋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며 곧바로 정년이 잇따르는데 늦게까지 오래하면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신조어. Well Bing, DINK, Job Nomad,-이것은 한국 말로 웰빙이니 딩크니 쟘노마드라는 신조어. 이것은 요새 한국 사람들의 전반 변화된 의식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Well Bing, 보다 많이 물량공세에 치우친 이전의 ‘잘 살아보세’보다는 정신적인 삶에 많이 치우치고 삶의 질을 따지는 ‘잘 살기’. DINK는 Double Income-부부 맞벌이하니깐 수입은 두배, 그러나 No Kids, 아이는 가지지 않는다의 합성어, 완전히 부부 자아중심적인 현재적인 달콤만 삶만 추구한다는 족속들. Job-Nomad는 한 직업에 매이지 않고 철새처럼 이 직업 저 직업 두루두루 섭렵하며 편안하게 살겠다는 직업 유목민, 이것은 대개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여 확실한 직업을 보장받아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직업의 흐름에 맡긴다는 편안한 직업관, 그러면서도 마음대로 안되는 직업선택에 자아안위적인 직업관으로 봐야 하겠지. 이런 신류어는 세태풍속도의 한 단면을 여실히 나타내기도 한다. 혈연, 지연, 학연-한국 사람들이 많이 외우는 經久不衰의 류행어. 사람들이 살아가다 보면 어쩔수 없이 이런 연에 매이게 된다. 그러나 끼리끼리 똘똘 뭉쳐 정실주의삶을 추구하는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유별남. 그래서 사회적문제로 비화되여 대통령선거때 지연 어떻고 하며 공약의 한 내용으로 내걸기도 함. 공주병-은근히 새로운 신데렐라콤플렉스에 빠져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에 도취되여 환상적기분에 들떠 있는 녀자들의 작태를 나타낸 신조어. 년상의 녀자-陰盛陽衰의 세월에 남자들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녀자한테 기대여 편안하게 살려고 남자들 자존 다 뭉개며 추구하는 녀자들을 나타내는 류행어. 공주병과 년상의 녀자, 희극적이고 서글픈 세태의 한 풍경. 영계-작은 닭, 아니 병아리가 낫겠다. 남자, 특히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섹스파트너로 선호한다는 세대차가 날 정도로 어린 여자애들을 나타내는 류행어. 그런데 요새 풍경은 녀자들, 특히 나이 지긋한 녀자들도 섹스파트너로 선호한다는 세대차가 날 정도로 어린 남자애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나. 다 무슨 페미니즘인지 덕택때문이란다. 막가파-언젠가 한국에서 이판사판으로 부자들 상대로 살인강도질을 하며 막가는 인생을 산 한 범죄조직. 한국사회에 있어서 빈부대립의 암적인 불안한 요소를 말해준 신조어. 신류어는 사회특정계층의 세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오렌지족, 폭주족, 야타족과 나타족, N세대, 우리,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신조어. 오렌지족-한국 서울 강남의 일부 부자집 자제들이 커피숖같은데서 마음 맞는 녀자애들이 눈에 뜨이면 오렌지쥬스나 사주며 꼬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폭주족-저녁이 되면 고성능 오토바이로 고속도로 시가지를 질주하며 스트레스를 풀거나 놀아나는 일군의 젊은애들. 야타족과 나타족-남자애들쪽에서 ‘야, 타’, 녀자애들쪽에서 ‘나, 타도 되’에서 나왔다는 짝짜쿵, 한국 젊은 애들의 개방된 혹은 외도로 흐르는 교제풍속도. N세대-요새 무슨 오렌지족이고 폭주족이고 무슨 야타족과 나타족이고 다 뒤로 가라하며 컴퓨터사이버세계같은데 도취하며 가장 최신식을 자랑하는 젊은 애들, 배꼽티에 한술 더 떠 머리염색 그리고 긴 뾰족구두에 전반 이미지가 그로테스크한 미를 추구하는 젊은 애들. 이런 신류어는 사회정치적 풍향계로 잘 나타난다. 물태우-6공시절에 주대없이 이리저리 왔다리갔다리하는 노태우 대통령을 물에 비겨 놀린 신조어. 386세대-1960년대 생에 1980년대 대학입학에 현재 30대 나이에 현재 한국 정계를 주도해나간다는 현임 노무현 대통령 밑에 있는 측근들, 그런데 컴퓨터 586도 아닌 구닥다리 386에 비겨 비꼬고 있으니 정치적 해프닝의 한 보기에 다름 아닌 신조어. 이 정치적신류어는 바로 민심, 그러니 정치하는 사람들 눈여겨 볼지고! 이처럼 신류어는 무드고 세태풍속이고 풍향계고 민심이다. 그러니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것은 해프닝이며 대단히 재미있다. 그런데 그것은 별볼일없는데서 쉽게 가볍게 만들어진다. 심각한것이 아니다. 이런 신류어는 전반 민족적인, 나아가서는 국가적인 행사를 치를 때 공감대를 형성하며 반복적으로 인지된 언어표현구들도 될수 있음. 붉은 악마-오- 필승코리아 짝짜짜, 꿈은 이루어진다, 퍼포먼스를 하는듯한 한국의 멋진 응원문화의 키워드들을 장식한 류행어. 한국은 ‘악마’같은 끈기에 ‘필승코리아’의 신념으로 4강의 꿈을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신류어는 이렇게 막강한 긍정적인 힘도 가지고 있다. 신류어는 어느 유명세를 타는 특정 탤런트가 몰고 올수도 있다. 못나서 죄송합니다-고 한국의 유명한 개그 이주일이 어느 출연에 사람들 너무 옷지 않으니 자기도 모르게 한다는 소리가 이 한마디. 그래서 와 사람들 웃음을 자아내자 이 말이 뜨고 류행어가 되자 이씨도 떴다고 한다. 우의 공주병이라는것도 한국 배우 김자옥이 바람을 부어넣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다. 신류어는 ‘족’과 같은 특징적인 단어조성 접속어만 붙여도 쉽게 감칠맛이 살아나며 형성되기도 한다. 우에서 무슨 웰빙이니 딩크니 쟘노마드라는것에 족을 부쳐 웰빙족이니 딩크족이니 쟘노마드족으로 둔갑하여 새로운 신조어가 되는것도 그 한 보기가 되겠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염치’라는 말을 낯설기의 신이한 효과를 살려 ‘얌체’로 바꾸고 여기에 다시 ‘족’을 붙이면 ‘얌체족’이 되는데 이것은 사람줄이나 차줄에 새치기하는 염치없는 족속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로는 제격이다. 신류어는 콩그리스, 이를테면 한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데서도 형성된다. 핸드폰, 컴맹, 신드림은 전형적인 신조어. ‘핸드’는 'hand', 영어의 ‘손’이고 ‘폰’은 ‘phone’, 영어의 ‘전화’라는 말이라 이 두 영어단어를 조합하여 ‘손전화’ 즉 ‘핸드폰’을 만들어냈던 것임. 이것은 분명 영어에 없는 말. 그런데 너무 멋진 합리적인 조합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좋아하는 미국 ‘아즈바이’들도 good 하며 잘만 알아듣더란다. ‘핸드폰’이 순 영어 단어의 새로운 조합이라면 ‘컴맹’이나 ‘신드림’은 영어와 한국어 혹은 한국어와 영어의 이중언어조합. 컴맹, computer 대가리 컴에 文盲 맹의 조합, 한국 ‘신드림’증후군의 ‘신드림’은 新 신에 dream 드림이 조합된것. 신류어는 영어에서 새롭게 조합된 말이 그대로 흘러들어와 류행을 이루기도 한다. 홈리스, 프리랜스, 프로그래머, 각기 영어의 'homeless', ''freelance', 'programer'에서 온것으로서 보편적인 현대사회 삶의 한 양상 및 직업적 특징들을 잘 개괄하고 있어 공감대를 형성하며 류행되는 류행어. 신류어는 뭐니뭐니 해도 발랄한 사유의 산물. 그러니 머리가 팽글팽글 잘 도는 N세대들의 점유물의 하나임은 더 말할것도 없음. 그러니 이들한테서 가장 튀고 멋진 신조어가 나오고 있다. 요새 제일 잘 나간다는 짱, 바로 이들이 만들었다. 무슨이 ‘짱’이냐? 어른 ‘長 ’, 뛰어날 으뜸 ‘長’에 여하튼 최고라는 것. 그래서 ‘얼짱’, ‘몸짱’에 여하튼 이 ‘짱’만 붙으면 최고. 눈짱, 코짱, 입짱... 그런데 ‘長’에 장이면 장이면 무슨 ‘짱’이냐? 그것은 어른들이 세련된 척 하고 순한 소리 쓰는것에 반발해 일부러 뙨소리 ‘짱’이라 한다나. 맞아, 그러니 이 ‘짱’이 튀는 거야. ‘아자아자’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아자아자’냐? ‘아자아자 화이팅’이란다. 그러니 좀 알만해. ‘화이팅’이라는것은 ‘힘 내라’는 말이 되겠고, ‘아자아자’는 정신 차리라는 ‘야, 자’가 ‘아자’로 둔갑한 것이 아냐? 그리고 너희들 깜찍하게 반복하는거 좋아하니 ‘아자아자’한거 맞지? 그래요, 욤. 음, 그러면 그렇겠지, 요, 순전히 장난꾸러기들. 여기에 N세대들 컴퓨터에 빠져 서로 주고받는 채팅에 몰입하다보니 짧게 간편하게 그리고 톡 튀게 쓰는 원칙에 놀아나다 보니 이들이 ‘짱’이나 ‘아자아자’같은 신조어를 가장 자연스럽게 많이 만들어 낼 소지가 있음. 이제 이들 신조어의 규범어에 대한 충격을 우리 어른들 어떻게 감당할고? 가공할시고! 이런 신류어, 특히 신조어는 일반적으로 한 시기 반짝 하다가 사라짐. 그러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음. 마치 이런 신류어를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같고 한물 간 세대처럼 기가 죽을 필요는 없음. 기를 쓰며 이런 신류어를 알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밤잠을 못 자는 그런 강박관념도 필요없음. 기억 되는대로 기억하고 흘리듣는 대로 흘리들어라지. 여하튼 편안할 대로. 혈연, 지연, 학연같은 몸에 와 닿는 신류어는 자연히 기억속에 남을것이고 ‘짱’이나 ‘아자아자’같은 별로 심각한 의미가 없는것들은 자연히 뒤안길로 짱,하고 만다. 요즘 중국사람들도 신류어를 제법 많이 구사하는듯하다. 몇년전 애들의 新新人類로부터 근간에 귀족적인 새로운 삶의 패턴을 표방하는 月光族, 그리고 작년에는 지극한 사랑의 로맨스를 나타낸 82/28... 사람사는데는 다 같은 법. 그러니 같은 신류어도 있게 되는 법. 이런 新新人類니 月光族라는것은 한국 신류어의 N세대니 웰빙족과 같은것임. 워낙 우리의 일상적삶이 따분하고 무미건조할진대 이런 신이한 신류어를 만들어 좀 정신적인 자극소나 활력소가 된다면 그리 나쁘지도 않으리. 우리 조선족들의 신류어를 좀 보자. 水肉, 물에 사는 고기, 그러니 물고기. 우리 조선족 개그들만이 만들어낼수 있는 신류어. 水肉, 그 개그 아주머니의 水肉소리 듣고싶다.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아직도 水肉를 팔고 있는지... 이 한심한 세상에. 姐姐, 解決問題, 야 이거 너무 하다. 한국 ‘년상의 녀자’ 뺨치자나. 이런거말고 좀 좋은거... 야, 알았다. 2세낳기, 그럴듯해. 조선족종자 적어니 현재 1세 하나에서 하나 더 낳기. 그런데 많은 사람 이거 아직 잘 모르는것같애. 그러니 캠페인이라도 벌려 ‘2세낳기’를 주어넣어야지. 그럼 ‘2세낳기’가 더 쉽게 되는거야. 야, 또. 생각 안난다. 우리 조선족 신류어 너무 적다. 그만큼 우리 생활이 여유없고 따분하다는 그 자체네. 신류어를 만들어 좁 비꼬고 웃고 떠들썩하며 놀면 못쓰냐? 뭐 신류어 모자라면 좀 빌려 오지 뭐. 한국꺼. 그러나 마구잡이로 빌려오면 안되. 좋은거 빌려와. 그럼 고개숙인 남자와 남자들 기 살리기, 어때? 그거 참 좋! 네, 우리 여기 남자들도 많이 下崗하자나, 그러니 딱 맞는다 말이다, 그런데 녀자들이 문젠데, 기 센 우리 여기 녀자들 ‘남자들 기 살려’주겠나 말이다, 한번 빌어나보지뭐! 자, 얘들아, 짱, 아자아자, 화이팅! 신조어, 류행어 찧고빻고, 신류어 놀아보세나! 2005. 3. 21
13    자궁회귀본능 댓글:  조회:5869  추천:65  2005-03-18
자궁회귀본능 우상렬 "응아"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모두들 좋다고 손벽을 치며 축복해주지만 실은 우리 자체는 고통스러운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운다. 아이러니한 인생. 우리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가 너무 편했기 때문이다. 가만 있어도 모든 것이 주어지는 세상, 먹고싶을 때 먹고 자고싶을 때 자면 되는 세상. 그리고 그 속은 얼마나 포근했다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기억을 胎志로 본능적으로 갖고 나온다. 그래서 세상의 탁한 공기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나오기 싫어지며 어머니자궁속으로의 퇴행심리가 생겨난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이 세상 살아가는 판에 조금이라도 힘들고 피곤할 때면 우리는 어머니자궁으로의 향수에 젖어든다. 밉게 훨쩍 커버린 우리는 다시 그 속으로 돌아갈수 없는 안타까움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것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크기 싫어하는 퇴행성심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자궁회귀본능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일종 歸巢본능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子不嫌母醜, 자식된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되여 먹었다. 그런데 일단 태여나서는 실제적으로 어머니자궁속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한 우리는 보상심리 차원에서 그것의 대리만족체를 찾는다는 것이다. 동년, 우리는 대개 어머니, 아버지의 無微不至한 관심과 보살핌속에서 보낸다. 飯來張口, 衣來伸手. 어머니자궁과 가장 비슷한 상사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른이 되여 힘들 때 그 누가 동년 하기만 해도 그것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안겨온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일종 감회에 젖어든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나서자란 고향이 있을거다. 바로 이 나서자란 인연으로 고향은 어머니자궁과 동년과 클로즈업되면서 우리에게 있어서 더 없이 정다운 존재다. 고향은 부모형제, 정다운 사람들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고향을 떠나면 외롭고 자기도 모르게 일종 향수에 젖어든다. 거저 향수정도가 아니고 심할 때는 향수병으로까지 ‘악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리 껄껄한 사나이라도 나그네길은 외로운 법. 물론 이런 동년이나 고향은 우리가 그 속에 잠겨있을 때 그것이 어머니자궁같은 행복의 시절이나 보금자린지 잘 모를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두 번 다시 되돌이켜 보기 싫은 악몽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훨쩍 커 버리거나 고향을 떠났을 때 그것은 우리와 심미적거리를 형성하며 ‘보기 싫은 악몽같은 존재’는 어느새 퇴색해버리고 신기루마냥 아름다운 존재로 부상된다. 싫어서 떠났던 고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꾸 가보고싶은 곳으로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보다싶이 우리가 나서 자라고 살면서 숙명적으로 맺어진 삶의 보금자리는 모두 어머니자궁같은 존재. 이로부터 가장 큰 삶의 넓은 단위인 ‘내가 나서 자란’ 조국이라는것도 마찬가지다. ‘祖國啊! 母親’은 그 전형적인 보기다. 우리 조선족 1세대들이 이 땅에 와서 코리아고국을 한없이 그린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내 님을 싣고 떠나는...’ 설음, 술이 한잔 되면 자기도 모르게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타령, 그리고 눈물 없이는 읽어내리가기 힘든 ‘망향의 무덤’ 전설... 수많은 화교들이 ‘落葉歸根’이라 대륙으로의 귀향, 이것도 같은 맥락. 중국에서 나서 자란 우리 조선족 3, 4세, 이중 자궁회귀본능에 부대끼며 헷갈린다. 조상들의 뼈가 묻히고 우리 부모들이 태여나기도 한 곳-코리아고국. 피는 못 속여, 우리는 같은 피줄의 코리아를 우리의 어머니자궁으로 여겼다. 1, 2세들의 자궁회귀본능은 여기에 더 부채질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 잘 산다는 한국의 문이 열리기 바쁘게 왁 달려갔다. 벌떼처럼! 그 좁은 문을 닥치고 설치며. 그런데 그 어머니자궁은 우리가 있기에 그리 포근하고 안온한 곳은 못되는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우리. 그제서야 알게 되는 우리의 다른 한 어머니자궁-차이나중국. 나는 현재 여기서 잘 먹고 잘 놀아난다. 그런데 나의 자궁회귀본능은 차이나를 자꾸 떠올린다. 그러니 이른바 불법체류의 멍에를 쓰고 하루하루 마음을 조이며 그 잘난 돈에 속이 바질바질 타는 우리의 불법체류자들, 그들의 자궁회귀본능은 불이 붙는다-차이나로. 歸心似箭 그 자체다. 그 누구든지 애국자로 만들려면 출국을 시켜라, 지당할시고! 자궁회귀본능, 인간은 이것을 충분히 만족받을 때 행복하다. 그러니 무슨 잘못 혹은 죄를 저질렀을 때 그것에 대한 징벌로 고향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조국으로부터의 추방은 더 없이 비참한 것으로 된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이런 자궁회귀본능을 만족받지 못할 때 바로 어머니, 동년, 고향, 조국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것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문학예술창작을 통하여 후련한 대리만족을 받는다. 오 고향이여,그래도 너는 나에게 무엇이기에!2005. 3. 18
12    꼬끼요 댓글:  조회:4383  추천:73  2005-03-17
꼬끼요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꼬끼요, 닭은 낮과 밤이라는 우주의 기본 두 질서의 력동적인 순환을 명시해준다. 만물은 낮과 밤이라는 우주의 이 두 질서에 길들어져 있다. 夜伏晝行이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夜伏이란 밤이 되면 자고 晝行이란 낮이 되면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동물은 전형적으로 夜伏晝行한다. 물론 박쥐, 부엉이같은 이례적인 夜行性 동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夜行이란 晝行의 반대 개념으로 낮이 되면 자고 밤이 되면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夜伏晝行하는 晝行性 동물이다. 밤이 되면 눈이 감기고 낮이 되면 눈이 뜨이는 것이 우리의 생리다. 모종 의미에서 옛날 日出而作, 日落而息도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晝行性으로부터 夜行性으로 점점 넘어가는듯하다. 적어도 에디슨이 전등불을 발명한 다음부터라 해야 되겠다. 전등불은 인간에게 너무도 많은 혜택을 주었다. 晝行에만 국한되지 않고 夜行도 할수 있게 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수 없이 많은 물질적부를 창조할수 있게 되였다. 인간은 물질적 궁핍함에서 벗어날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른바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현란한 밤생활을 즐길수 있게 되였다. 여하튼 우리는 고상한 일을 한다그래, 즐거운 놀이를 논다그래, 전등불에 잠을 빼앗긴다. 그런데 이런 夜行에 우리의 몸은 항상 고단하다. 夜伏, 밤에 쉬고픈 것이 우리의 생리인데 우리는 이것에 역행한다. 이것이 과도하면 생리적인 신경쇠약이 오는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대인의 많은 생리적인 신경증은 夜伏가 부족한데서, 잠을 빼앗긴데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신경쇠약증을 막기 위해서도 晝伏, 낮에 밤잠을 미봉하기에 안스러운 몸부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이 출근길 차안에서 꺼벅꺼벅 조는 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이로부터 夜伏晝行의 생리적평형을 이루고자 한다. 그래서 형식상에서 晝伏비중이 夜伏에 량적으로 근접해간다. 그런데 현대 수면의학의 연구에 의하면 晝伏와 夜伏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夜伏는 인간생리의 夜伏가 우주자연의 夜伏에 맞춘 정상적인 잠으로서 숙면이 되지만 晝伏는 이와 반대의 경우로 숙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밤잠 한시간이 낮잠 몇시간과 맞먹는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 건강관리학에서는 잠은 낮잠보다는 밤잠을 취하되 취침은 될수 있는 한 자야 즉 밤 12시를 넘기지 않는 것이 건강비범의 하나로 되여 있다. 晝伏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이 습관화, 고질화되여 낮에는 전혀 정신없이 흐리멍텅해지고 밤에는 정신이 새록새록 맑아지는 夜行晝伏이 몸에 배여 夜伏晝行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 방해를 받게 된다는데 있다. 현실적으로 정신로동을 하는 인테리들에게 이런 증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언젠가 어떤 대학에 갔더니 박사생들을 싸잡아 夜猫子라 부르고 있었다. 그 영문을 물었더니 박사생기숙사는 온 저녁 불이 켜져 있는데, 박사생은 낮에 자고 저녁에 공부하는 夜行晝伏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夜行晝伏는 우리의 夜伏晝行의 생리적질서를 180도로 바꾸어놓는다. 이로부터 우리 몸의 생태평형이 뒤바뀌며 파괴된다. 현대인들이 입버릇처럼 외우는 피곤하고 힘든 것은 1차적으로 여기서부터 온다. 주지하다싶이 우리 현대인간은 과학문명의 결정체다. 이 과학문명이 무소불능의 ‘만행’을 감행하고 있다. 세상만물은 얽히고 설힌 가운데 더 없이 교묘하게 짜여진 생태평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만물의 령장운운하며 만물을 모두 인간을 위한 존재로 만들어 왔다. 그래서 돼지는 마치 이 세상에 인간에게 잡수어주십소하고 온듯하고 소는 제새끼보다는 사람들을 위해 젖을 짜주러 온듯하고 닭은 인간을 위해 알을 낳아주러 온듯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른바 과학문명을 리용했다. 육식할 가축들은 일단 생장소를 많이 넣은 사료를 대량 먹여 가축의 자연적인 생장주기를 파괴해가면서 빨리 크게 한다. 이때 이런 가축은 허우대가 크고 보기 좋게 커지지만 그 육질은 부실하고 맛이 없다. 이 정도는 그래도 배부른 타령에 그치고 말 괜찮은 편인데 앞으로 이런 육질이 무슨 독소로 변할지는 모를 일이다. 안 그래도 요새 어느 잡지에서 사양장닭의 계란이 닭의 스트레스 배설물이라는 것을 보고는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닭이 알을 잘 낳게 하자면 닭의 호로몬생장촉진제를 많이 먹이는 것은 물론 잠을 재우지 말아야 한다는 론리이다.그래서 이런 사양장에서는 24시간 전등조명으로 자극을 주며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닭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며 이런 스트레스배출의 방식으로 알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게 있어서 스트레스는 잠재적인 病源에 다름 아니다. 닭이 이렇게 쌓이는 스트레스로부터 알을 낳게 될 때 그 알이 사람몸에 좋으면 얼마나 좋겠나 말이다. 억지 신부노릇을 하는 닭은 자기의지와는 관계없는 괴로운 ‘산고’를 치른다. 그러니 이런 가축들은 자기들이 죽을 각오로 우리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지도 모른다. 광우병, 조류독감은 어제, 오늘의 저 먼 곳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코 앞의 얘기다. 가공할시고! 보다싶이 전등 및 과학지식을 비롯한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약도 주고 독도 주었다.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약이 되거나 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것들을 우리몸의 생리평형 내지는 우리 몸밖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지 않는 전제 조건하에서 활용할 때 그것이 우리한테 약이 됨을 알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 그 자체다. 이로부터 人定勝天보다는 天人合一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요새 한국에서 삶의 질을 따지는 웰빙 삶의 추구도 결국 따져보면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낮잠을 우습게 보던 미국에서도 얼마전부턴가는 인간의 식곤증 그 자체를 인정하여 잠정오의 잠간잠을 제창하고 있는 것도 같은 차원의 얘기가 되겠다. 꼬끼요, 금년은 을유년 닭의 해입니다. 닭이 울었으니깐 일어납시다. 점심에는 식곤증이 오니깐 잠간 눈을 부칩시다. 저녁에는 해가 졌으니깐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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