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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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학교설립은 그에게 숙명적인 과제였던가 댓글:  조회:6281  추천:96  2006-04-11
학교설립은 그에게 숙명적인 과제였던가 황유복교수의 경력을 듣고나면 한생을 쭉 학교를 설립하는데에 바쳐온분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난다. 그만큼 그는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사업을 열애하고있음을 알수 있다. 그의 첫 학교설립은 대학시절에 이미 완성되였다. 1961년 길림시 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며 전국대학통일시험에 합격한 황유복교수는 문과생으로는 유일하게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 민족사전공. 입학하고보니 소수민족학교졸업생이 대학입시에서 면제받은 고대한어와 외국어 과목이 문제로 제기되였다. 외국어란 별로 접촉 못해본 그를 외국어교원까지 다른 학과로 옮길것을 권고하는 상황에서 그는 반발심이 생겼다. 그는 첫 한달을 로어과 고비를 넘기는것에 투자하였다. 악을 물고 노력한 결과 한달만에 로어 6년과목을 끝내는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였으며 두 번째 달은 고한어과를 돌파하는데 매달려 기중시험에서 만점을 따내였다. 그것은 듣는것처럼 쉬운일이 아니였다. 소수민족학생으로서 그섯은 피타는 노력이 요청되는 일이다. 선생과 동학들을 깜작 놀래운후로 그의 외국어과성적은 줄곧 최우수점수를 지켰으며 고대한어에도 악착스런 집념을 보여 갑골문을 혼자 자습하고 전각(篆刻)에까지 재간을 피우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대학생활 몇 년간 그는 모든것에 열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이였다. 일찍 받은 할머니의 바른 교육과 꿈을 키우고 문학에 가까이한 경력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가지게 하였고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게 하였던것이다. 대학 4학년 황교수는 이족지구의 편벽한 산골에 사회주의교육공작대로 내려가게 되었다. 동하향 칙립사란 곳은 째지게 가난하고 환경이 험악한 곳이다. 이족자녀들이 학교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것을 보고 또 문화가 없어 사업에서 많은 난관에 부딪치는 이족간부들을 대하며 그는 꼭 이곳에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포부를 세웠다. 그는 상급에 청시하고 이족군중들을 동원하여 끝내 학생 20여명을 갖춘 학교를 세웠으며 사회주의교육공작대일을 해나가는 한편 솔선하여 이족말을 배워가며 그애들에게 문자를 가르치였다. 그가 학교를 세운 일은 실습내려간 전체 동학들중에서도 전형적인 사적으로 되었다. 대학에서 줄곧 우수한 성적을 따낸 황교수는 1966년 7월초 학생신분으로 학교에 남게 되었으며 1969년 중앙민족대학 당위판공실에 정식 배치를 받았다. 대학에서는 1970년부터 학생(공농병학원)을 모집하였다. 당시 민족출판사에 조선문조가 있는걸 감안하여 민족대학에도 조선어학과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황교수는 최재우선생님과 함께 학교지도부에 강력하게 신청하였다. 결과 1972년 9월 소수민족언어문학계에 조선어문학과가 정식 성립되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그는 1기생을 직접 가르치였으며 조선문학사에 최초로 《춘향전》등 작품을 강의하였다. 1기생을 졸업시키고 황교수는 자기 전공과 맞는 민족연구소롤 자리를 옮겼으며 그후 쭉 민족학계 교수로 지내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족을 연구하는 한편 조선어학과 학생들에게 줄곧 조선력사를 가르치였다. 1977년말부터 1979년 1월까지 황교수는 북경군구 공병련대에 내려가 《단련》하게 되었다. 그 기간 그는 영어를 자습하였으며 로어, 일어, 이족어, 한어, 조선어 등 다종 언어를 장악한 능수가 되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민족연구소 지도사업을 책임지면서 그는 행정보다는 학문적으로 일을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학술연구로 들어갔으며 북방민족연구에 진력하였다. 1984년 황유복교수는 미국 코네티컷대학에 초청되여 처음으로 출국의 길에 올랐다. 그렇게 출국의 길이 열린 그는 선후로 미국, 일본, 한국, 카나다, 쏘련, 몽골, 홍콩 등 나라와 지구에 수십차 다녀오며 학술을 연구하고 강의를 하게 되었다. 특히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초빙되여있는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한차례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시야를 넓히고 학술적으로 자신을 풍부히 살찌운건 물론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 여러개 대학들에서 초청강의를 하는 한편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교연구(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황교수는 조선민족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실제로 황교수는 그전에 이미 우리 조선족사회에 유익한 일을 많이 해오고있었다. 1984년 첫 출국에서 그는 외자를 인입하여 연변대학에 200만딸라를 지원해 공학계층사를 짓게 하였고 할빈조선족병원에 현대의료의기를, 길림시조선족예술관과 료녕민족출판사에 현대선진인쇄기를, 길림시 조선족중학교와 료녕성 조선족사범학교에 정밀선반기를 기증하였다. 당시로 놓고보면 이는 하나의 큰 움직임이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런 물질적지원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보아냄과 동시에 조선족 전반 사회를 위해 뭔가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였다. 갈수록 동화되고있는 조선족사회를 살리고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강화해야함이 급선무로 제기된다는것을 그는 보아냈다. 당시 미국의 한인(韓人)은 모국어를 잊어가는데 비해 중국 조선족은 자기 언어를 보존하고있는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는 그. 그러나 중국에 들어와서 현실을 보는 순간 엄청난 변화가 안겨왔다고 한다. 대도시의 80%정도의 조선족 청소년들이 우리 말과 글을 모르고있는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는 조선어학교를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미국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모은 1만달러를 그는 그대로 학교설립에 넣었다. 교실마련, 교재와 학용품 구입, 교원초빙 등 모든 절차를 위해 친히 뛰며 하나하나 해결한 황교수는 1989년 4월 북경조선어학교를 정식 성립, 어린 아이로부터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제한 없이 조선글을 배울수 있는 북경조선어 주말학교는 설립되자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교원이 성의껏 가르치고 학생들이 열심히 배운 보람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한국회사인, 대사관직원, 번역 등 여러 업종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황교수는 차츰 그 영향을 지방에까지 넓혀 심양, 장춘, 할빈, 길림, 목단강, 단동, 석가장, 위해, 해남도, 내몽고 등 전국 10개도시에 북경조선어학교 분교를 설립하였다. 지금껏 졸업해나간 학생은 2000여명, 그중 한국과 미국에 류학보낸 학생만 해도 130여명이다. 가나다라도 모르던데로부터 번역을 척척 해내고 민족감이라고는 모르던 그들이 조선족임을 자랑스레 여기는 제자들을 대하며 황교수는 삶의 보람을 느끼고 의욕을 키웠다. 이 기간 황교수는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에 민족반을 꾸려 조선족 후예들이 어릴때부터 우리 말, 우리 글을 익히며 민족정서를 키우게 하였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 머리에 흰 서리까지 내렸건만 황교수는 여전히 정력왕성하고 탄력있다. 그가 이렇게 나이보다 젊어보임은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부지런히 뛰며 의욕에 넘치게 인생을 엮어가는것에 그 비결이 있지 않을가. 그에게는 부단히 새로운 꿈이 만들어지고 그는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한생을 뛰고 있다. 지금 황교수의 앞에 가장 큰 꿈으로 제기되는건 벤처(風險)창업교육을 위한 사립대학을 설립하는것이다. 학교설립은 여전히 그의 꿈이였다.
58    삶의 원동력 댓글:  조회:5609  추천:42  2006-04-07
삶의 원동력 황유복(黃有福), 글자 그대로 축복받은 생명이라는 뜻으로 소학교 입학 때 선생님이 지어준 이름이란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유복(有福)이 아닌 유복자(遺腹子)로 태여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 그럼에도 그를 꼭 축복받은 생명이라고 말하련다면 아마도 농장을 운영하여 모은 적지 않은 돈을 독립운동에 지원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씨,그리고 악렬한 환경속에서도 엄한 교육으로 견강하게 성장시켜준 할머님의 사랑, 이 두가지를 선사받은때문이라고 할수 있겠다. 황교수는 1943년 2월 2일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한 농민가정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쌀쌀한 북풍은 방안 가득 추위와 가난을 더해주었고 아빠없이 태여난 새 생명의 불행을 짙게 물들였다. 더구나 갓 남편과 한 아들을 잃은 젊은 엄마의 심정은 납덩이에 눌린듯 아팠다. 이를 누구보다 환히 꿰뚫어 본 할머니는 그가 두 살 잡던 해 두 손자와 어머니를 불러앉히고 며느리의 개가를 권고하였다. 두 손자를 자기가 맡을테니 나이 젊었을 때 어서 개가하라며 젊은 청상과부의 앞길을 틔워주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절대 뒤로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아직 기억이란걸 익히지 못했던 황교수는 그로부터 유복자로 태여난 신세에 이어 엄마의 얼굴마저 모르는 억울한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값진 선물이였다. 인격이 높고 의지가 굳센 할머니는 홀로 막내아들과 두 손자를 거느리고 생활을 억척스레 개척하였다. 어느 한번 동네 잔치집에 가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어린 그에게《우리는 이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다.너를 데리고 가면 남들은 저 할멈은 얻어먹이려고 손자를 데려왔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거지로 보는것과 다름없다. 가난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겨낼수 있지만 그러나 가난하다고 인격마저 지킬줄 모른다면 구제불능의 정신장애자로 될것이고 그럴수록 영원히 가난해질수밖에 없다.》고 할머니는 도리를 설명하였다.그 당시는 그 말뜻을 다 새기지 못했지만 자라면서 되새기는 과정에 그 참뜻을 깨달을수 있었고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수 있었다. 자존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타이르고 격려해주신 할머니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가난을 이기고 견강한 의지와 강한 진취심, 높은 인격을 갖추게 하였다. 할머니의 그때 년세보다 더 높은 나이를 잡은 황교수는 지금도 이렇게 말하고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내 가슴속에 찡하게 남아있는 그리운 할머니의 초상은 조금도 멀어져 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리해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이 합쳐져서 하나로 된것이다. 언제나 엄격하면서도 때로는 너그러운 위대한 부성의 사랑과 자애로우면서 항상 강인한 모성의 사랑을 함께 읽을수 있는 초상이 바로 내 가슴에 새겨진 할머니의 초상이다.》 황교수에게 있어서 할머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아니, 그 이상이였다. 남호댁이라 불리웠던 할머니를 영원히 기리는 마음에서 황교수는 자신의 서재를 남호서재로 명명하고 자신의 호를 남계라 하였다. 그 뜻은 남호에서 흘러내린 내물이라는것이다. 황교수에게 있어서 할머님은 실로 정신적원천이였고 생명의 원동력이였다. 할머님의 엄격함과 자애로움은 황교수로 하여금 일찍 자립하고 철들게 하였다. 철부지 어린 시절, 그는 놀라울 정도로 조숙하고 집념스런 면을 보였다. 할머님이 삼촌과 형님을 데리고 일밭으로 가면 혼자 집에 남게 된 그는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울지 않았고 대신 창문에 매달려 새들이 재롱부리는걸 구경하고 울안에서 꽃이 피고 지는걸 지켜보았다. 그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남은것은 지는 저녁노을, 매일매일 그 황홀경에 빠져있노라면 배고픈것도 외로움도 잊고만다. 바로 그때의 집착이 집념스런 그의 성격을 결정지었는가보다. 저녁노을이 신기하고 그것에 매혹되다못해 옥년이란 년상의 여자에게 서산에 걸린 저녁노을을 따러 가자고 졸랐고 결국 옥년이는 그의 손을 잡고 서산에 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노을은 너무나 아득한 멀리로 달아나있었다. 그래도 꿈은 어린 가슴속에서 깨여지지 않았다. 동내 어른들이 홰불을 들고 어둠을 가르며 잃어진 아이들을 찾아 란리를 피울 때 그의 생각은 오직 따지 못한 노을로 아쉽다는 한가지뿐이였다. 그렇게 그는 매일 말동무도 없이 홀로 창가에 매달려 창문밖의 세상을 대하는속에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키우고 정감을 키우고 감수성을 키우고 사색을 키웠다. 그것은 훗날 그가 문학을 특별히 애호하게 된 기초로 되었다. 중학시절부터 그는 조선 명작과 세계명작들을 걸탐스레 탐독하는 속에 문학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래서 과묵한편인 그의 내면세계는 외롭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풍부하였다. 그는 시로 일기를 쓰고 글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운명에 도전하였다. 문학을 가까이하는속에 그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였고 인생에 대해 사색하였으며 주위의 모든 것들에 대해 애착을 느끼였다. 그리고 노을과 돌과 새들과 친구하는속에 그는 누구보다 꿈이 많은 동년과 소년, 청년으로 자랐다. 그가 어른으로 성숙하고 성과로 인생을 장식하는 과정은 바로 맘속에 간직한 하나하나의 꿈들을 현실로 실현하는 과정이였다.
57    영원으로 뻗은 꿈의길 댓글:  조회:5707  추천:54  2006-04-05
영원으로 뻗은 꿈의길중앙민족대학 황유복교수를 만나다 김홍란 섣달 그믐날, 그제야 보던 일을 마무리 짓고 서울-북경행 비행기로 총총히 귀국의 길을 줄이는 중년사나이가 있다. 그러나 일의 성취감을 감지할새도 없이 이튿날로 그는 설날의 폭죽소리속에 쓰러지고만다. 무리와 과로가 드디여 건장한 그를 허물어뜨린것이다. 사람들이 명절을 맞는 축제의 분위기속에 가족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시각, 그는 불덩이가 된 몸을 식히기 위해 모지름을 써야 했다. 그러나 나흘이 지나 겨우 허탈에서 빠져나온 허약한 몸을 가누며 또다시 집문을 나서는 그, 이 시각 그의 머리속에는 오직 자신의 결책을 기다리는 중대한 과제가 맴돌뿐이였다. 이렇듯 언제나 의욕적으로, 왕성하게 사는 그가 바로 오로지 우리 민족사업을 위해 몇십년을 로심초사하고 우리 사회에 유익한 일을 수없이 해온 중앙민족대학 민족학 교수이고 한국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박사생지도교수인 황유복교수이다. 학구적으로뿐이 아닌 실제적인 일을 결부하며 쉬임없이 뛰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행동하는 지성인》,《민족적량지의 학자이며 실천가》라고 칭하고있다.
56    만남 (5): 《도라지》의 부탁을 받고 댓글:  조회:5421  추천:45  2006-04-03
만남 (5): 《도라지》의 부탁을 받고 도라지잡시사의 부탁으로 취재를 위해 황교수님을 만나 그의 가슴속에 아직도 매듭처럼 남아있는 하나의 오랜 숙원을 알게 되였다. 북경에다 《기술전문대학》을 세우려는것이다. 일찍 그가 스무살 되는 해 중국 역사상에서 지식분자를《홍, 백》 색으로 획분하던 시기, 정치운동에 대한 열정보다 인간의 순수함을 더욱 사모했던 그에게는 홍색도 아니고 백색도 아닌 그 중간색에 속하는 중간파학생으로 중국 대서남의 이족자치주에 재교육 받으러 내려 갔다. 인간의 인격은 그렇게 물감칠하듯 인위적으로 칠해놓고는 3인조를 무어 지방으로 내려 보냈는데 뜻밖에도 워낙 한곳으로 함께 가야 할 그 3인조가 두곳으로 나위여 가야 할 형편이 되여 부득불 홍색은 백색을 책임지고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함께 가고 중간 색갈인 황유복학생은 단독으로 가게 되였다. 극빈으로 참담한 이족들의 생활모습에 놀랐다. 특히는 그곳의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들도 교육을 받지 못하여 온 마을이 문맹이였다.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귀중함이 그의 젊은 마음을 들끓게 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이족 언어를 배운 동시에 창고를 빌려 교실을 만들고 집집마다 동원하여 애들을 오전만 학교에 나와 배우고 오후는 집에서 일손을 돕게하는 반공반독의 학교를 개설했다. 세세대대로 가난과 몽매속에서 살아온 이족인민들은 공부하는 자식들 모습에 감개무량하였고 중앙민족대학 당위에서는 전국각지로 재교육받으러 나간 학생중에서 소수민족지구에 가서 학교를 설립한 황유복학생의 전형사적을 대서특필로 홍보하고 《화선》입당까지 시켰다. 일년후 귀교하여 자신의 사적을 그림 련환화로 만들어 대학가에 붙혀놓은것 앞에서 그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정치에 대한 열정으로 인정받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든 학교였고 그 학교를 만들고부터 뒤이어 중앙민족대학에 졸업 배치 되여 일하면서 본 대학에 조선어문학부가 없는것을 보고 1972년에 조선어문학부를 설립했으며 연변대학에 공과대학을 만드는데 일조했고1989년에는 북경에다 북경한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한중 수교후에 또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교육 자로서 민족문제전문가로서 그는 조선족사회 문제중 중요한 고리의 하나가 젊은이들에게 기술교육을 진행해야 함을 보아냈다. 중국에 조선족기술학교를 세워 한국축협, 농협, 그리고 산업기술학원 등과 손잡고 우리 민족 젊은이들에게 현대화한 양식업기술, 가공공예기술, 현대화농법 등을 가르치려는것이다. 바로 이미 조상이 닦아놓은 삶의 터전을 현대적 과학기술로 새롭게 가꾸는 길을 열어주려는 선각자의 노력이고 꿈이고 바램이다. 2005년 7월, 《경제생활》잡지사가 귀국한 조선족로무자들의 재정착문제 특별 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흑룡강성에서 온 한 젊은이가 발언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자리를 빌어 우선 황유복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번 장춘회의에 제가 참석해서 저의 인생이 바뀌여 졌습니다.. 교수님께서 중국조선족 농촌 청년들에 대한 간곡한 부탁과 기대의 말씀은 저의 맘속에 불씨로 심어졌습니다.》그는 제 9회 학술 심포지엄참석자로서 그번 회의에서 계시를 받고 후날 오리농법을 시작하여 《김씨미업》이란 브랜드를 창출해낸 장본인이다. 황교수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대학에서 일생을 제자를 키우는데 힘을 바쳐온 나에게 참말로 자랑할만한 제자들이 많지만 그날 《김씨미업》이란 브랜드를 가지고 대도시로 진출할 앞날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을때 얼마나 기쁘던지⋯기실 그번 회의에서 나는 그 젊은이를 알지도 못했지만 강단에서 한시간도 안되는 연설에서 이런 수확이 생기다니⋯참말로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앞날은 그런 우리민족의 젊은이들로 조상이 걸구어놓은 땅을 지키고 그 땅에서 나는 소산과 함께 우리민족문화을 만들어갈것임을 보는듯했으며 믿어마지 않는다.》. 김씨미업은 조선족농촌경제의 출로를 찾는 좋은 시작이 아닐수 없다. 문화의 21세기에 민족교육으로 조선족문화를 번영시키고 민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려는 그의 주장과 노력은 그의 《숙원》을 현실로 변화시킬줄 믿어마지 않는다. 유복자로 태여나서 이순의 오늘까지 그의 생명의 주선률은 멈출줄 모르는 탐구와 노력으로 연주된 교향악을 방불케한다. 취재의 마감을 황유복교수님의 글로 끝내고싶다. 《그 언제나처럼 때가 되면 20세기는 마감되고 21세기가 저절로 열린다. 그렇다 해서 우리 민족의 미래도 저절로 주어지는것은 절대 아니다. 바람직한 미래는 우리 민족 모두의 엄청한 노력과 지혜를 통하여 만들어지는것이다.》 (황유복:〈조 선족 벤처산업 인재육성과 21세기 조선족사회의 미래〉) 2005. 8
55    만남(4) 커피숍에서 댓글:  조회:5398  추천:56  2006-03-31
만남(4) 커피숍에서 타자에 익숙하지 못하니 아예 만나서 이야기 할가요? 하는 황교수님의 메일을 받고 커피숍에서 만난것이 흰눈이 많이 내리고 난 뒤의 푸근한 오후. 많은 이야기중에서도 얌치없이 그냥 알고싶은것이 그 《첫 사랑의 주인공 ㅡ 진명》이란 여성에 대한 에필로그였다. 《아직 한번도 못만났어. 아니 안만나려고 했어⋯》황교수님의 그말씀에 진짜로? 설마…헌데 과연 그랬다. 지식이 새롭게 숭상을 받고 학술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때, 《진명》은 언녕부터 옛 련인을 찾고싶었다. 그녀의 불행한 혼인은 그녀로하여금 첫사랑을 잊어본적이 없게 하였다. 그의 곁으로 갈수 있는 유일한 길, 현실을 탈출할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연구생시험을 치러서 중앙민족대학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였다. 황교수님은 그녀가 필요로하는 참고서와 도움을 청하는 모든것에 대하여 그 바쁜 와중에도 하나하나 다 챙겨서 보내주고 시험을 잘 치를것을 고무격려하였다. 하지만 황교수님은 진명이가 자기곁으로 오는것은 바람직 하지 않음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광주에 있는 중산대학 문화인류학 학과에 추천하여 입학시켰다.그후 그녀는 중국민족학학회 년회에서 만날수 있을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회의에 달려왔지만 황교수는 그것을 알고 다른 곳으로 출장갔다. 《옛날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깨고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인생을 이만큼 살아왔고 각자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는데⋯이제 만나서 남은 인생과 사회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될것이 없는줄을 압니다. 더구나 이미 많은 보귀한 시간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중년의 방황으로 랑비하게 해서는 안되지요. 나는 아직도 완벽주의자입니다. 순간이라도 자기한테 한 약속을 어기고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 황교수님은 지금도 누가 보든가 말든가 술을 마시지 않으신다. 젊은 날에 우파로 몰리여 비참한 마지막을 마치면서 조선족은 술을 먹고 망치니 너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스승의 그한번 부탁때문에 지금껏 술을 마시지 않는 그는 결벽증있는 사람마냥 완벽할것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다. 20대후반에 대학교교단에 섰을때, 누가 북경군구 사령원의 《천금아가씨》를 그에게 소개해 왔다. 조건으로 말하면 흠잡을데 없었지만 첫 사랑이 민족문제로 깨여지면서 타민족한데는 장가들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뚜렷하게 밝혀 대방을 놀라게 했다. 조선어학과를 설립한후, 교수영입을 위해 인사권을 위임받고 동북3성으로 갈 때, 학교령도는 조선어학과 자료관리원 명액을 주면서 안해감을 골라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명액으로 결혼후 장시간 견우직녀 생활을 하고있는 나이 많은 조선족선생님의 부인을 모셔왔다. 1972년, 북경에서 만나 곧바로 련인이 되여버린 처녀가 바로 지금의 부인ㅡ 최명희씨이다. . 황교수님 슬하에 아들 한분을 두고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부인 최명희씨는 국가기관에서 국장으로 임직하였고 지금 리직휴양중이다. 처녀시절의 그 어여쁘던 모습으로 결혼해서 오늘까지 변함없이 사업터에서는 우수한 간부로 가정에서는 사랑스런 아내로 학자와의 인생길을 함께 걸어왔다. 가진것을 쉽게 남을 위해 내여줄수 있는 그 마음, 행복은 바로 그가 즐거이 남을 위해 베푸는 맘에 대한 갚음의 선물이리라. 그래서 학비를 받지 않는 북경한국어학교를 설립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것이 어떤 학교인지도 모르면서 부모가 버린 고아를 황교수님한테 무조건 보내와서 교수님이 그애을 받아 길렀던 이야기나, 조선족 졸업생들중 엘리트를 한명이라도 북경에 더 남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나, 200여명의 조선족학생들을 미국과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면서 여러모로 되는 배려와 도움을 주는데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듯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와 명망을 자신이나 가정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서보다 조선족의 앞날을 위해 이바지하는데 바치였다. 이것이 황교수님의 성품 이고 인격이며 그의 민족적 사명감뒤에 짙게 깔린 생명의 원색이다. 그래서 그날 커피값은 워낙 약속을 해온 황교수님의 몫이였지만 얻은것이 많은 쪽에서 내기로 했다.
54    만남 (3): 온라인ㅡ e- mail. 댓글:  조회:5463  추천:56  2006-03-29
그 귀중한 깨달음과 감동을 황교수님과 나누고싶어 만난것이 바로 온라인 ㅡ 이메일에서였다. 《청나라 아극돈의〈봉사도〉에 대한 초보적연구》란 론문 을 역사소설을 읽듯이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학계에서 《봉사도》내용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더군요. 특히 그림속의 기발이 태극기의 원형이 아닌가하는 학계의 주장은 지금까지 1882년 박영효가 처음 만들어 1883년 조선의 국기로 제정했다는 태극기의 역사가 기실 1725년 조선 영조의 장남 왕세자 책봉례에 파견됐던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그린 화집 《봉사도》에 나와 있으니 태극기의 기원은 교수님의 발견으로 인해 그 역사를 새롭게 써야할것 같습니다. .학술계의 지대한 관심과 높은 평가 읽으면서 민족사학자로서 교수님의 위치와 명망에 재삼 숙연해졌습니다. 한중 불교문화교류 천년 집대성이란 평판을 받고 있는 《중한불교문화교류사》와《해동입화구법고승전》이란 저서 그리고 〈중한불교교류사 연구〉란 론문도 승려들의 활동과 그 종파 및 불교사상을 년대기식적인 기술보다는 독립된 주제를 중심으로서술하였는데 천년사이 그 많은 승려들이 두나라 사이를 오가면서 구법활동을 했던 력사모습을 한눈에 보도록 하여 라고 했던 모택동의 시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두나라 사이 이와같은 교류활동을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불교사학계의 오랜 과제이자 바람이였었다고 하는데 교수님은 과연 거시적인 조명으로 천년의 불교문화교류사를 집대성했습니다. 《세녀성에 의해 놓여진 다리》란 글을 읽으면서 역시 아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이곳 내몽골까지 그 《다리》는 교수님이 아니였더면 그렇게 멋지게 놓여질수가 없었을것입니다. 그 문장을 번역하여 어느 잡지사에 추천하고 싶은데 동의하시는지요? 《이름도 없이 이세상을 살면서》를 읽기 전에 교수님 이름의 《그룹성격》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선생님이 부모없이 컸다고 말씀하실 때 놀랐습니다. 수필을 읽으면서 그 놀라움을 지나 이름을 선사받고 살구나무숲으로 달려가는 장면 에서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메일을 하면서 그 장면을 보는것같아 가슴이 찡-합니다. 그 감동은 남들과 다른 감동, 교수님께서 어린 시절 부모없는 것이 한이였다면참말로 그것은 교수님으로서는 개변할수 없는 운명이였습니다저는 제 인생에 늘 는 한이였습니다. 그것은 저의 운명 때문이 아닌 저의 잘못때문인가고 자문해본적이 골백번, 하지만 더욱 색다른 감동은 김선생님의 그 사랑이 넘치는 부탁대로 교 수님이 오늘까지 그 이름자를 고스란히 지켜오신 것, 엥겔스로 부터 결국은 성경에 있는 이름임을 발견하기까지 고스란히 지켜 오신 교수님께 아름답고 순수하신 그리스도인 김선생님의 축복 이 시종 교수님과 함께 해준 력사였을수도 있다는 그점에 대한 감동이였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때 그 노을을 따러 산정까지 간 소년이 훗날 미국 일류대학의 교정에서 그 노을을 보다 그것은 기나긴 세월의 흐름, 그 공간을 지워버리면 완벽하게 하나로 된 그림, 가난했던 동년의 동글동글한 꿈과 오늘 학자의 짙은 사색이 함께 어울어져 있는 앞에서, 그리고 참으로 고독하고 부족함이 너무 많았던 동년이 피운 그 의 아름다운을 이제 이순의 나이에 조금도 이순의 내음이 없이 그렇게 펼쳐보이는 재간만이 아닌 심경을 더욱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교수님의 수필은 허무궁씨가 표현한 대로 읽을때 《속도를 공제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다 읽어 내려가 버립니다. 절대 급히 일어서는 안되》는데 어느새 다 읽어버립니다. 《학구적 치밀성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학자수필》(서영빈)이여서 그렇게 빨리 읽어버리지 말고 《새김질》하며 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군자지교 담여수》나 《잘못 채워진 첫 단추》는 읽는자로 하여금 은연중에 박식해지고 즐거움과 겸손함을 함께 수확하게 했습니다.《사랑의 언어학》, 《사랑의 신화학》, 《사랑의 민족학》,《사랑의 사회학》, 그리고 《원일아침수상록》 등은 글자체에 담고있는 고금중외의 그 많은 이야기와 성구가 수필이란 쟝르속에서 만났다는것 만으로도 짙은 미감을 주고있어 읽고난 감수가 너무 신선하고 산뜻한 합니다. 《첫사랑의 이야기》등 주인공의 인생에피소트와 관련된 글들에서는 작자가 삶에 대한 진지함과 솔직함 그리고 하냥 드팀없는 모습때문에 멋지고 다정하고 존경스러울 뿐 조금도 《신사》의 《자격》에 손상이 없습니다. 학구적으론 추호도 모호하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와 서정은 동년의 순수함과 젊은 날의 사색같이 조금도 색바램이 없이 《들국화》와 《저녁노을》처럼 눈부시고 찬연합니다. 그러나 학자의 량지, 민족사학가의 사명감으로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사랑과 관심을 토로할 때는 《사상가》이며 《정치가》입니다. 장춘식씨가 남계(황유복의 호)수필을 평론하면 서 《정체성 리론을 장황하게 설명한데는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 이유를 알듯 합니다. 《도라지》잡지사의 칼럼이 아니였더면 남계수필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생각이 이젠 남계수필은 기실 《조선족사회의 문화 재창조》를 위한 리론연구와 실천활동을 재천명하기 위해서 작가가 쓰지 않고서는 안될 글이였음을 알았습니다. 사마천 《사기》의 예술적 특색에 《호견법》이라고 있는데 바로 황교수님의 론문과 수필은 완전히 다른 분야지만 서로가 너무 잘 보완해주며 주인공이 인생철학, 조선족이란 민족집단에 소속된 삶, 그리고 삶의 의미가 정의되는 공동체의 활로를 찾기위한 《박학다식한 인생 선배의 잠언》(서영빈)을 독자의 맘속에 재확인해줍니다.
53    만남(2). 백문불여일견. 댓글:  조회:5719  추천:54  2006-03-28
만남(2). 백문불여일견. 중앙민족대학 황교수님 사무실로 찾아간것은 그날 그 미안함의 약속과 무관한 또 다른 하나의 사업에 관한 일때문이였다. 헌데 두벽을 꽉채운 서가에 총총이 꽂혀진 책들과 사무상 우아래 없이 쌓여져 있는 책들을 보면서 먼저 학자의 진솔한 모습과 그 풍요로움에 존경의 맘을 금할수가 없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속에는 《인도불교문화사》,《유교문화가 동양3국에 준 영향》,《리퇴계》등과 같이 한때 뿌리찾기 문화열조에 인기를 누렸던 서적들이 있는가하면 종래로 읽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책들이 즐비했는데 주인공의 연구분야와 그 성취에 대한 국내외 언론매체들이 《세계적인 석학》,《조선족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한중문 화교류사연구의 1인자》,《민족적 량지의 학자이며 실천가》,《겨 레와 함께 숨쉬는 지성인》,《오로지 민족에 바치는 일편 단심》이라고 평가했던 그 이미지를 알듯했다. 이야기도중에 쉴새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때문에 대화는 자꾸 동강났지만 그 틈새로 상우에 놓인 책들을 이것저젓 뒤적여 볼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았다. 그날 교수님의 사무실을 나올 때 책을 한구럭 들고 나왔다. 이야기에서 다 못한것들을 책을 통해서 직접 보는것이 훨씬 더 나을것이라는 생각에 교수님도 동감이였다. 귀가하는 차안에서 책구럭속에서 골라 펼쳐든 책이 론문집.《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이였다. 황유복교수님의 인기와 그 사회적활동반경을 잘 보여준 그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 밤, 그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개혁개방의 급물살이 조선족들의 재래식 삶에 준 충격은 민족의 운명을 관심하고 그 미래를 우려하는 조선족 지성인들 에게 조선족공동체의 새로운 비전과 민족정체성의 재확립에 대한 리론적 연구와 발전방향 제시를 기대했다. 민족사학자로서 황유복교수님은 시대와 민족의 기대앞에서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학계의 시각을 모으는데, 그리고 .《우리는 누구이며 조선족문화는 무엇인가》에 대한 민족구성원들의 바른 인식을 가질수 있도록 하는데 정력을 몰부었다. .《조선족이란 바로 국적과 민족출신을 동시에 표시한 중국국적의 조선민족에 대한 전문 호칭으로서 그들은 전통적인 조선민족 문화를 근간으로 새로운 중국조선족 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이다. .《한세기가 넘는 시대적인 시련을 극복하면서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형성된 조선족공동체가 이 시대 사람들의 방황으로 해체된다는것은 결코 바람직한 귀추가 아니다. 》 오늘날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민족문화창달을 위한 문화의 재창출은 자기문화에 대한 확신과 긍지,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확립을 우선으로 요구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바로 1994년부터 시작한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과 우리민족의 언어를 상실해가는 우리민족의 도시청소년들을 위해 한국어학교를 세운 그 거사들은 한 학자로서 민족의 활로를 열어가기 위해 몰부은 정열이다. 미국하버드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있을 때 모은 강의비용을 자본금으로 북경한국어학교로 시작하여 지금 전국각지 10개도시에 한국어학교를 세우고 10년간을 운영해 오기도 하고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오동나무를 심자》등 글을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의 고급인재류실과 기술인재부족 등 시급히 보완하고 중시해야 할 문제들을 깨우치기도 했다. 10회에 걸치는 조선족발전 학술 심포지엄에서 제기한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농촌총각들의 결혼문제, 한국진출로 인한 리혼과 가정의 해체문제, 도시청소년 민족언어상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민족교육. 벤체산업과 인재육성. 중국조선족 록색민족문화경제 기반 구축과 농촌경제발전전략 등 굵직한 주제들은 학자로서 그의 선견지명뿐 아닌 지성인으로 그 자신에 속하는 조선족 사회와 그 앞날에 대한 지대한 열애와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파워는 이와 같이 개혁의 격변기 조선족사회가 그 정체성이 도전받고 이미 이뤄놓은 공동체사회의 경험과 습관에 의심과 회의를 느낄 때 민족공동체의 귀중함과 필요성을 긍정하고 새로운 비전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리드해 온 그 점이다. 민족을 위한 그의 일편단심을 그가 쓴 저작과 론문에서 만나뵙게된것, 미상불 그것은 만남(2)의 귀중한 깨달음이고 경하 할 행운이였다.
52    만남(1)-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 댓글:  조회:5486  추천:53  2006-03-27
만남(1)-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 그날 북경거리는 명절을 위해 피워놓은 꽃들이 가을 태양 아래 찬란이 웃음짓는 환락의 분위기로 넘쳤다. 명망있는 예술가의 소개로 사업차 만난 분이 황유복교수님이실줄이야. 북경서사환에서 동륙환을 왕복하는 동안 장장 5시간을 차안에서 사업이야기는 고작 10여분으로 끝내고 사업과는 관계없는 동서남북, 고금중외의 화제로 시간가는줄 몰랐다. 왕징 옥류관에서 저녁식사를 마치면서 기실 황교수님을 6년전 어느 회의에서 뵙은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없으세요? 하고 작별인사 대신 재차 말씀을 드렸는데 교수님은 의연히 조금도 기억에 없으시단다…귀인은 잊음을 좋아 하신다고 옛사람의 말이있으니…그럼 저 혼자만 귀한 기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교수님은 그 기억못한것으로 인한 미안함을 다음번 만남을 약속하는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니 결국 사무실이나 커피숍도 아닌 달리는 차안에서 명절분위기 젖어있는 북경거리를 바라보며 끝없이 나눈 무주제의 화제와 의연히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첫만남때문에 결국 그날 만남이 초면이 된 그것, 그것이 만남(1)의 포인트였다.
51    생명의 원색 댓글:  조회:5692  추천:56  2006-03-24
생명의 원색-중앙민족대학교 황유복교수님을 만나다 장경숙(소설가) 《설사 죽음이 래일아침에 찾아 온다 해도 나는 오늘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고싶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나의 래일은 또다른 하루의 오늘이될것이다. 》 -황유복:《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황유복 약력:1943년 2월 2일,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신농장에서 유복자로 태 여남. 1950년~1961년, 쌍하진, 길림시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1950년~1961년,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졸업. 1961년~현 재, 중앙민족대학 강사, 부교수, 교수, 박사생도사황유복저서및 론문:1)저서:《중국조선민족연구(중문)》,《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연구》,《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봉사도(중문)》, 《중조 불교문화교류사(중문,공저)》,《China's Minorrity Nationalities (공저) 》등 28권의 연구저서 및 역저. 그외 10권의 국제학술지 주필, 《사해(辭海)》등 2권의 사전편찬 참여.수필집: 《사랑의 사회학》2)론문: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 등 130여편.황유복사회활동 1964년, 사천성 량산이족자치주 희덕현 동하향 측립사 이족 소 학교 설립, 8개월간 강의.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 학부 창설.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소장역임).1989년, 북경조선어학교 창설 교장역임 (현 전국 10개도시에 분 교 설립). 1987년~1988년, 미국하버드대학 교환교수.1983년부터, 미국, 카나다, 쏘련, 몽골, 일본, 한국 등 나라와 홍콩 등 지역의 16개 대학 특강담당.1994년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제1회부터 2004년 제 9회까지 장장 10년을 이끌어왔음.중국조선사연구회 회장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중국민족학회 리사중국도시인류학회 리사 조선족발전연구회 부회장구미동학회 학장북경하버드클럽 회원남호장학회 회장동북민족장학회 집행회장 《중국민족》잡지사 고문 《도라지》잡지사 고문 중앙인민방송국 고문한국독립기념관 해외연구위원중, 일, 한 3국 T.V제작자포럼 조직위원회 자문위원 상기 적은 바와 같이 한사람이 일생동안을 이같이 여러분야 의 탐구와 그 결실을 맺는다는것은 생의 그 매 하루하루마다를 진지한 노력과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할것이다… 오늘도 황유복교수님은 왕성한 열정과 지성인의 책임감으로 쉼없이 우리 민족의 문화, 교육, 나아가서는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데 선각자의 의무와 직분을 다하고있다. 우리민족에 지극히 귀중한 그분을 처음 만나뵙기는ㅡ 타이틀이 《작가가 만나본 사람》이니 만남을 써야 하지 않을가 싶다.ㅡ 일년전 북경 향산의 단풍이 빨갛에 물들던 가을이였다.
50    (서평) 의미화의 매력 댓글:  조회:5239  추천:51  2006-03-23
5. 의미화의 매력 수필은 고백적인 글이다. 그러나 자아의 독백에서 독백으로 끝나는 글은 마치 메아리 없는 산울림과 같아서 수필의 경지로 오를수 없다. 수필에 나오는 한 사람의 독백이 여러 사람의 독백과 혼연일치가 되여야 참수필이 되는것이다. 남계의 수필은 한사람의 고백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고백이여서 참수필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작자의 고백을 어떻게 모든 사람의 고백으로 전환시키는가, 즉 어떻게 남들에게 공감시키고 감동을 주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수필의 매력은 어떤 인생철리나 보편화된 진리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생철리를 독자에게 공감시키는 매력에 있다. 때문에 수필에서 기의보다 기의에 도달하는 기표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설득력인것이다. 이를테면 참사랑, 참인생에 대해 누구나 큰 도리로 설명할수 있고 리론적으로 풀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감동과 미감을 주면서 공명을 불러일으켜야 수필이다. 황유복의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 여기에 있다. 그의 수필속에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감시키고 설득시키는 매력이 있고 자석처럼 독자를 이끄는 힘이 있다. 여기서 구성을 비롯한 형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성이란 수필의 주제를 담는 방식인데 흔히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라 한다. 어떤 형식의 구성이든 수필의 구성은 크게 예시(例示)의 부분과 일반화의 부분으로 나뉜다. 예시의 부분은 구체적 사례를 드는 부분이요 일반화의 부분은 구체적 사례가 의미하는것에 대한 필자나름의 해석이고 평가이다. 수필은 곧 개개의 사례를 귀납추상하고 의미화하여 보편성을 얻는 작업이다. 인생, 사랑, 민족, 사회⋯ 이는 상당히 보편화된 주제이다. 인생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인생의 아름다움, 인생의 진지함, 인생의 진실, 인생의 타락, 인생의 행복 등 상당히 보편화된 주제들을 많이 도출해낼수 있다. 남계 수필 역시 전형적인 인생수필로서 참인생, 참사랑, 민족애 등 보편화된 담론이다. 문제는 누구나 즐겨다루는 인생수필인데 우리는 그속에서 중복이 아닌 개성을 볼수 있고 많은 깨달음과 풍부한 지식을 얻을수 있고 감동을 받는다. 그것은 다름아닌 소재의 구체성과 개성성 및 보편적주제에로의 의미화과정의 설득성에서 온다. 남계 수필은 항상 자기만의 개성적이고 구체적인 소재를 화두로 이야기를 이끌어낸후 대비, 비유, 유머, 풍자, 점진, 반전, 역설, 렬거 등 다양한 수법으로 읽는 사람의 주의력을 모으기도 하고 분석 확대시키기도 하면서, 인생에 대한 어떤 리치와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때로는 명구, 잠언, 명시, 명작, 신화, 고사 등을 다양하게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심화, 확산, 설득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명확한 수치와 사실적 근거로 설득력을 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의 수필이 다양한 문학적수법을 활용하여 최대한의 설득력을 꾀하고 있음을 발견할수 있다. 때문에 남계수필처럼 설득력이 강한 수필도 드물다. 이런 다양한 수법의 활용은 수필의 설득력을 강화할뿐 아니라 지식정보의 질과 량을 확대하고 수필의 철리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그것이 남계의 상당수 수필이 지적이고 사색적이면서도 문학이 되는 리유이고, 수필이 지니는 문학성이다. 문학성과 설득력을 획득하기 위한 다양한 수법가운데서 렬거와 점층, 유머와 위트, 대조적인 서술, 생동한 비유가 가장 돋보인다고 할수 있다. 《상혼에 절어진 사랑의 축제》는 엉뚱하게도 《사랑의 날》을 앞둔 메스컴들의 기사를 뽑아 렬거하는 수법으로 고도로 상업화된 《사랑의 날》축제의 리면을 들여다 보는가 하면《사랑의 날》에 10억장의 카드와 1억 1000만 송이의 장미 그리고 11억 달러어치의 쵸콜릿을 판 미국시장, 《사랑의 날》을 계기로 젊은층 집중공략의 판촉전을 벌리는 일본의 상점들, 대방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수치로 알려주는《사랑탐지기》개발에로 확대해나가면서《상혼에 절어진 사랑의 축제》의 외곡된 현실을 까밝히고 있다. 여기서 《사랑탐지기를 개발한 회사는 떼돈을 벌어 좋겠지만 사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탐지기를 사용해서라도 진짜 사랑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탐지기⟩소비자들은 어딘가 측은해 보인다.》는 유머적인 표현은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수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밸런타인데이》의 력사는 500여년밖에 안되지만 우리에게는 3000여년전부터 전해내려온 명실공의 《사랑의 날》-칠석이 있다는것, 문명의 고국 인도에서는 《밸런타인데이》를 서양에서 들어온 문화오염으로 배척하고 저항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고대문명을 갖고 있는 중국은 무조건 서양문화만 흉내낸다고 꼬집으면서 《조상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전통문화의 현대적 재개발에 게으름을 피워왔》다고 반성하고 있다. 수필은 구체적이고 생동한 사례들을 소재로, 렬거, 점층, 비교, 유머, 강조 등 다양한 수법을 활용하여 작가가 노린 주장에로 설득시키면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사랑의 사회학》은 사랑에 대한 텔레비전 특별토론장면에서 중국남자들은 사랑한다는말을 너무 아낀다는 중국 녀자들의 불만으로 시작되는데 반전과 역설, 풍자와 유머, 점층과 확대 등 다양한 수법을 재치있게 도입하여 설득력을 획득한 수작이라 할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풍자와 유머의 재치있는 도입은 작품의 생동성과 설득력을 훨씬 높여주고 있다. *《어쩌면 숙녀들에게 저토록 친절할수 있을까》고 감탄할 정도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아이 러브 유》 를 곱씹어대는 미국남자들은 결혼후 쉽게 리혼한다. * 요즘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주변의 눈들을 개의치 않고 포옹하고 싶으면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으면 뽀뽀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 며칠전 신문을 보다가 상해, 북경, 청도 등 대도시 에서 《누드 신혼사진 붐》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놀란 나머지 이제는 누가 공공장소에 서《라체결혼식》을 치렀다해도 놀라지 않기로 작심했다.* 이제 리혼에 한해서만은 중국조선족이 미국을 향해 세계화개방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싶다.* 사랑이 모자라 《사랑실조(失調)》를 앓고 있다는 하소연도 아니고 남자들이 사랑한다는 말에 너무 나 린색하여 달콤한 사랑의 표현에 굶주리고 있다 는 그녀들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사랑도 어쩔수 없이 세계화되여가고 있구나》하는 기우지 심(杞憂之心)이 짙어진다. 《사랑의 사회학》은 풍자와 유머로 점철된 수필로서 작가의 문학적 기량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다. 남계 수필에서 비유는 아주 생동하고 인상적이다. 4월에 들이닥친 더위를《온화해야할 해님이 마치 첫사랑에라도 빠진것처럼 갑자기 뜨거운 정열을 퍼붓기 시작했다.》고 비유했고 《문화대혁명》의 동란을《그때도 붉은 태양이 너무 많고 뜨거운 빛을 뿌리고있었다.》고 비유하며 조선족의 위기를 《중국의 대륙에서 유유히 흐르던 조선족이라는 이 큰 강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고있는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감소현상때문에 원천에서부터 고갈되여 가고있다.》고 비유하고 있다. 이밖에도 《사회전반이 열병을 앓고있던 그 시대》,《박경식의 사랑은 이다.》, 《금주(禁酒)라는 호신부(護身符)》등 생동한 비유를 작품 곳곳에서 보게 된다. 남계수필에서 대조적인 서술 내지 대조법의 적절한 운용도 수필의 설득력을 높이고 주제를 심화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군 감자와 》에서 작가는 겨울날, 콩기름 등잔불아래서 화로불을 쪼이고 군감자를 먹고 《옛날옛적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할머니들의 《이바구》를 들으면서 전통문화의 감각을 체험할수 있었던 자신의 어린시절과 온돌도 없고, 화로도 없고, 군 감자도 없는 아파트 방 침대에서 한어로 우리의 옛말을 들으면서 자란 아들의 어린시절과 대조시키고 있다. 만약 지난날의 추억으로만 끝났다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로 전락되였을것이나 대조법을 재치있게 사용함으로써 평범성을 뛰여넘어 훌륭한 수필로 승화할수 있었고 강한 설득력을 기할수 있었다.《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내 아들은 정녕 어느 정도 우리 전통문화의 정서를 리해하고 있을가?》는 반문은 위트가 넘치는 결말이다. 이밖에도 《리혼률은 하늘 높이 치솟고 있고 가정의 해체와 녀성의 류실로 인한 출산인구의 감소는 바닥을 내리치고 있다.》 (《원일 아침 수상록》에서)등 대조법의 재치있는 활용들을 수필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다. 언어의 철학성은 남계수필의 다른 한 특징이라 하겠다. 남계수필은 철리성으로 특징되는데 그것은 인생에 대한 달관에서도 나타나며 언어의 철학성에서도 나타난다. 남계 수필을 펼쳐들면 전편이 인생에 대한 철학으로 점철되여 있으며 마디마디가 인생에 대한 명언이고 진리이다. * 《꿈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있을수 없 다》,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잘 살면서 꿈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면》)* 《성공으로만 이어지는 인생이나 반대로 실패로만 이어지는 인생은 있을수 없다》,《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성공의 기쁨이 기대 될수 있다.》(《내가 만들었던 눈사람》) * 부족함과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뜻의 넉넉한 삶을 살아갈수 없다.(《가남이 선물하 는 삶의 지혜》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불치병이다.》(《상혼에 절 여진 사랑의 축제》) 만약 학자로서의 박학다식, 사물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관찰력과 사회활동가로서의 세계적인 안목, 높은 문학적 소양이 없었다면 작가는 여러 가지 문학적수법을 그토록 다양하게 활용할수 없었을것이다. 남계 수필에는 철학이 있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민족에 대해⋯ 남계 수필에는 인간정신이 담겨져 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사랑을 느끼고 책임감을 느끼고 사명을 느낀다. 남계 수필에는 풍부한 지식이 담겨있다. 때문에 독자들은 인생에 대한 깨달음속에 동서고금의 풍부한 지식을 섭취할수 있다. 2005. 7
49    (서평) 학자수필의 매력 댓글:  조회:5487  추천:63  2006-03-22
4. 학자수필의 매력 남계의 수필은 개인적 인생체험을 고백한 수필이든 사랑, 사회, 민족 문제를 담론한 수필이든 모두 인생에 대한 투철한 감오와 삶의 참의미에 대한 진지한 탐색으로 달관의 경지에 이르고 있으며 해박한 지식과 심오한 사상, 섬세한 관찰과 차분한 분석,《학구적인 치밀성과 사고의 집중성》 등으로 학자수필의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특히 그의 수필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사색적인 수필들은 개인 고백적이고 체험적인것에서 벗어나 사변적이고 론리적인 사고를 펼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며 지적인 정서속에 어떤 리치를 터득하게 한다. 남계의 사랑계렬 수필은 학자수필의 전범이라 할수 있다. 《사랑의 언어학》에서 《사랑》이란 낱말의 어원찾기도 상당히 치밀하고 학구적이지만 거기에서 도출해낸 문화적 비교는 더욱 독창적이다. 영어의《아이 러브 유》나 한어의 《워 아이 니》는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된 공업제품 같》이 개개인의 개성이 완전히 함몰된 규격화된 사랑표현이며 《조화(造花)와 같이 생기도 향기도 없는》 사랑표현인데 반해 우리 민족어에는 그런 규격화된 사랑표현이 없기때문에 두 사람만의 언어로 두 사람만의 사랑을 표현할수 있는 우리 민족의 사랑표현은 진한 생기와 향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랑표현에 대한 사색을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와 민족애로 승화시킨 위트가 아주 돋보인다. 《사랑의 민족학》에서 《사랑을 주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과는 비할수 없을 정도로 충일하고 지순하다.》는 작가의 주장은 그대로 명언인데 그것이 상식적인 리론으로가 아니라 아랍계, 유태계, 조선계 민족의 비슷한 모티프의 고사에 대한 생동한 비교속에서 도출해냈다는데 위트가 있고 설득력이 있다. 세 민족의 고사비교를 통해 아랍공주는 철저하게 아랍민족의 상업주의원칙을 사랑에 적용시켰고 유태공주는 계약에 대한 실천을 선택의 가치기준으로 삼았고 조선처녀는 참사랑을 가치기준으로 삼았다는 결론을 내린후 《사랑은 문화적 산물이다. 사랑이 구성되는 방식은 사랑의 주인공들이 소속된 그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특성에 좌우된다》고 맺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참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가운데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체득하게 하며 민족애를 심어주는 수필이다. 《사랑의 사회학》은 현실사회에 눈길을 돌려 현실에 류행하는《사랑병》들을 들추어내여 그 반면에서 사랑에 대한 답안을 찾고 있다. 작가는 사랑의 자유가 확대되는 반면에 사랑의 안전성은 반비례로 축소되여 가고 리혼, 외도, 불륜 등 사랑의 타락이 만연되여 가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리혼과 외도의 확산이 부추기는 가정의 해체와 사랑의 황폐화는 이제 우리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지성인으로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 관찰의 예리성과 분석의 치밀성이 안받침되여 한편의《사회의 사랑학》을 낳았다. 《사랑의 신화학》은 고대신화로 거슬러 올라가 사랑의 기원을 찾고있다. 사랑을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결합하려고 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해석하는 플라톤의 사랑 기원설에서 사랑을 인간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큐피드의 금화살에 명중되여 일어나는 피동적인 행위로 해석하는 오비디우스의 사랑기원설에로, 다시《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으며 인간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기억을 정신내면에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과 닮은 반쪽을 만나면 결합하려 한다는 융의 기원설로 확대된다. 수필은 계속해서 신화적 시각과 명언을 인용하면서《로맨틱한 사랑》의 가능성과《성숙된 사랑》의 의미를 차분히 비교분석한후 《두사람이 합일을 이루는 진정한 사랑은 성숙된 사람들의 몫》이란 결론을 도출해낸다. 신화-기원학적 시각에서 사랑신화를 개성적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역시 학구적인 치밀성과 론리성을 띠면서도 문학으로서의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혼에 절어진 사랑의 축제》는 고도로 상업화된 《사랑의 날》축제를 비판하면서 《아무리 현대인들의 사랑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날》만큼은 돈과 관계없는 순수한 《사랑의 축제》가 되었으면 싶다고 고백하여 독자들의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사랑에 대한 진지한 사색, 투철한 감오, 절실한 체험, 학자로서의 학구적인 치밀성과 박학다식이 없었다면 사랑에 대해 그렇게 다양한 시각에서 개성적으로 생동하게 풀이하지 못했을것이다. 위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여타 수필에서도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 주제의 엄숙성, 분석의 치밀성, 풍부한 지식성과 설득성 등으로 학자수필의 향기를 풍긴다. 《고섬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는 착상부터 기발하다. 고섬도치는 몸의 가시침때문에 0거리 접촉을 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빌어 인간지간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담론을 《고슴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는 사실로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진정한 친구란 어떤것인가를 한수의 시로 생동하게 일깨워주는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와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이웃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한 인간을 그린 스벤 레게너는 장편소설《레만씨 이야기》는 서로 대조되면서 진정한 친구를 가진 인생은 보람있는 인생임을 더욱 설득시켜주고 있다. 수필은 계속해서 부부사이의 적정거리에 대한 반론을 심화시키면서 마음의 합일을 이루지 못했다는것은 《거리》를 없애지 못했다는 말인만큼 《거리》가 리혼을 부추긴것이지 《0거리》가 리혼을 불러온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수필은《사람지간의 관계나 사랑이나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그릇된 담론을 명언, 명작, 명시, 속담 등의 다양한 인용과 비유, 점진, 역설 등 수법의 다양한 활용으로 반박하면서 최대한의 설득력을 기하고 있다. 《군자의 교제는 물처름 담담하고》에서는 《군자지교 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를 《군자들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있》다고 엉뚱하게 해석한 어느 수필을 화두로 《장자(庄子)》의 《산목(山木)편》에 나오는 원문-《군자의 교제는 물처럼 담담하고, 소인의 교제는 감주처럼 달콤하다. 군자는 담담하게 친분을 돈독히 하고, 소인은 달콤하게 그 친분을 끊는다.》를 풀이하고《군자는 리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교제를 하기때문에 뜻을 같이 할수 있고 따라서 친교가 돈독해진다.》는 해석을 붙혀 군자는 서로 교제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이른바《도합(道合)》이라는 최고경지의 합일을 이루어야 함을 주장한것이라고 바로잡아주고 있다. 이어서 수필은 동서고금 성현들의 명언들을 통해 참된 우정에 대한 리해를 심화시키고 있다. 수필은 리해타산을 앞세운 《소인》배들의 교제보다 계산이 없이 뜻을 같이 하는《군자》의 교제를 소망하면서 잠언을 인용할 때 아전인수식의 해석은 절대 금물이란 충고도 잊지 않았다. 수필 《잘못 채워진 첫 단추》에서는 수필 정의에 대한 남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어 흥미롭다. 작가는 원문에 대한 어원적풀이를 통해 《뜻하는 바를 앞뒤 가라지 않고 기록》한다는 말과 《붓 가는대로 쓴》다는 말은 서로 다른 뜻임을 피력하면서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고 김광섭이 잘못 채운 첫 단추때문에 우리 수필문학이 오랜 세월동안 비뚤어지게 옷을 입고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결말에서 작가는 《글 쓰기라는 업보가 원쑤 같다》(최인호), 《글을 쓴다는것은 누구에게나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란 말을 빌어 수필이란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의 령혼으로 씌여지는 글임을 강조한다. 작가의 진지한 사색과 수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이 감미롭다. 《술과 수필이 만난다면》에서 술을 마시고 《취기를 빌미》로 쓴 수필이 많은 론리적, 철학상식적 오류를 범하고있음을 들추면서 《수필은 술을 마시고 흥분된 상태에서 쓸수 있는 글이 아니》라 가슴에서 생겨나고 머리에서 정리된 글이며 정서와 지성의 융합으로 구성되는 글임을 강조하고있다. 《수필과 진실》은 한 중국인이 외국에 나가 남의 안경을 빌려 중국을 들여다보면서 많은 상식적인 오류를 범한 수필을 읽고 쓴 수필이다. 수필은 오류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나서 가짜상품은 일차적으로 그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데 그치지만 잘못 씌여진 작품은《이와전와(以訛傳訛)》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루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그 위해성을 강조하며《진실은 수필창작의 본질이자 작품의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필과 보고서》는 출장가는 남편의 가방에 콤돈을 넣어준 이야기를 쓴 수필을 보고 쓴 수필인데 그 글에서는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글쓴이의 노력을 읽을수 없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보고서와는 달리 수필은 나름대로 진실을 해명하고 어떤 정신과 운명을 제시하려 하는것이기때문에 삶의 진실을 해명해보려는 몸부림이 없이는 좋은 수필을 기대할수 없다고 모를 박고 있다. 위의 수필들은 학자로서의 박식과 학구적인 철저성, 진지한 사색과 지성, 수필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그대로 돋보인다. 《박대정심(博大精深)의 대륙적기질》, 《중국문화의 다양성》,《노랑, 빨강과 중국인》,《중국사람과 숫자》,《글로벌 에티켓과 중국인들의 예절》,《중국인들의 욕과 한국인들의 욕》 등 수필들은 문화비교학적인 시각에서 한국문화와의 비교속에서 중국문화를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을 리해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수 있는 수필들이다. 아주 상식적이면서도 또 홀시할수 있는, 그러면서도 중요한것들을 한국인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작가의 연박한 지식과 지적인 판단력을 보여주는 수필이다. 남계의 수필은 말 그대로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몸부림》이다. 우리는 그의 수필에서 삶의 진실을 탐색하려는 작가의 지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가슴으로 느낄수 있다. 그의 수필속에는 인생을 진실되게 천착하는 안목이 있고 인생에로의 새로운 해석과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얼음같이 랭철한 비평정신도 있으며 지성의 번뜩임도 있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가르치는 학자의 글이라고 할수 있다. 남계의 학자수필적 특징은 어느 한두편의 글이나 수필의 한두 대목에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모든 수필에 슴베여 있다. 학자수필적 풍격은 그의 수필의 기본바탕이라고 할수 있다. 학자수필로서의 매력때문에 그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더욱 많은 사색을 던져주고 더욱 많은 지식을 주고 더욱 많은 일깨움을 주고 더욱 많은 즐거움을 준다.
48    (서평) 사랑의 미학 댓글:  조회:5087  추천:68  2006-03-21
3. 사랑의 미학 남계 수필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또 다른 한 매력은 수필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랑이다. 그의 수필은 사랑으로 충만되여 있다. 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인생에 대한 사랑, 이성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등이 《감동의 바이러스》가 되여 독자들을 감염시킨다. 추억속에 담은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과 저녁노을처럼 봉사하며 사는 인생이 아름답다는 주장은 물론,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지순하며 계산되지 않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랑관, 어렵게 사는 사람이 자기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수 있을 때 모두가 행복해질수 있다는 인도주의 정신은 인간애가 날로 쇠퇴되여가는 우리 생활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멜로디로 안겨온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에서 작가는 《사랑은 동사》라는 담론을 화두로, 전신화상을 입는 12살의 최려나를 도와나선 대학생들의 쌈지돈 모금에 그토록 감동하며《그들의 자그마한 사랑이 나를 행복해지게 한다》고 기뻐하면서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확신한다. 인간애와 민족애의 감동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남계의 민족애는 유별나다. 어린시절 고향의 《담장마을》집에서 할머니들의 구수한《이바구》를 들으면서 전통문화의 감각을 체험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긍지감을 키워온 작가는 동란의 년대에 겪었던 첫사랑의 실패에서《민족》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되였고 그때의 깨달음이 《조선족》에 대한 사랑의 씨앗이 되였다고 한다. 일생을 민족을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고민하고 실천해온 작가의 헌신적인 삶과 같이 그의 수필에도 애틋한 민족애로 가득차 있다. 민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눈물겹도록 진지하여 진한 감동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와닿는다. 《사랑의 언어학》 계렬수필은 사랑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투철한 리해를 바탕으로, 언어학, 사회학, 민족학, 신화학 등 다각도에서 사랑의 참의미를 추적하여 그 가치를 파헤치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와 민족애로 귀결되고 있다. 사실상《사랑의 언어학》, 《사랑의 민족학》은 사랑의 비교학을 통한 민족애라고 할수 있다. 위의 수필은 여타 민족 문화와의 비교속에서 본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와 사랑을 표현했다면 《선택》 등에서는 민족의 단점을 들춰내서 비판과 기대속에 절실한 민족애를 담고 있다. 수필《선택》에서는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출산률의 급하강, 조선족처녀들의 섭외혼인과 유흥업 진출, 조선족남자들의 타락 등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제 《조선족호》라는 배도 방향없이 표류하다 침몰하느냐 아니면 여타 55개 민족호 배와 함께 시련을 극복하면서 앞길을 열어나가는것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서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200만 조선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선택한 미래상이 합쳐져서 조선족공동체의 미래선택이 되기에 조선족 모두가 책임성 있는 인생길을 선택하여야 조선족 공동체의 발전과 번영이 담보될것라는 일깨움은 읽은이로 하여금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민족의 출로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사색과 뜨거운 민족애가 그대로 가슴에 와 닿는다. 《원일 아침 수상록》에서는 《나무군과 선녀》이야기를 빌어 돈벌이때문에 수많은 《리산가족》이 생기는 현실을 가슴아파하며 과연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 번 돈이 래일의 행복을 기약할수 있을가고 의문을 제기하는가 하면 을유년에는 우리 민족의 《리산가족》들이 하루 빨리 《통일가족》으로 되기를 기원한다. 작가는 또한 한족문화에서 닭띠해가 불길한 《과부의 해》라는 민간속설과는 달리 우리민족에게 닭띠해는 광복을 맞은 행운의 해라고 긍정하면서 60년만에 다시 돌아온 을유년 닭의 해에 조선족 모두가 힘을 합쳐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면 싶다고 간절히 바란다. 진정어린 민족애, 동포애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항상 조선족의 발전과 출로를 고민하고 모색해오던 작가는 인재를 중시하지 않아 들어왔던 인재도 날려보내고있는 연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재인《금봉황새》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지금이라도《오동나무》를 심자고 충고하는가 하면 (《오동나무를 심자》) 입시교육 중심의 조선족교육 문제를 지적하면서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우라고 귀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 《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며 힘과 용기를 주기도 하고 실패했던 사람이나 성공했던 사람이나 《또 다른 새로운 시작》(《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이 중요함을 일깨우기도 하며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 때 우리는 민족의 발전을 운운할수 있다.》(《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족에 대한 절실한 사랑과 진지한 사색에서만이 우러나올수 있는 민족애의 고백이다. 작가의 민족의 출로를 위한 끊임없는 모색,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애타는 노력, 민족구성원 모두가 행복해질수 있는 삶을 지향하는 마음은 읽는이로 하여금 숙연해지게 하며 저도 모르게 민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을 가지게 한다.
47    (서평) 깨달음의 미학 댓글:  조회:5093  추천:75  2006-03-20
2. 깨달음의 미학 남계의 수필은 그대로 깨달음의 미학이다. 작자는 온화하고 유려한 필치로 자신의 인생체험을 잔잔한 정서속에서 속삭이듯 말하기도 하고 지적인 필치로 인생, 사랑, 민족, 사회, 수필에 대해 자기나름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데 그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사색의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인생에 대한 어떤 리치와 깨달음을 전해주기도 하며 지식의 샘물을 흠뻑 마시게도 한다. 때문에 그의 수필을 읽고나면 《얻는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계 수필이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매력은 우선 인생에 대한 투철한 감오와 인생을 아름답게 볼수 있는 긍정적인 자세와 진취적인 태도에 있다.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에서 학기말시험에서 일등을 했지만 옷이 람루하다고 담임이 다른 학생을 대신 올려보내 상을 타게 하고 기념사진에도 빼놓은 아픈 추억속에서 《가난은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바가 더욱 많》다는것, 가난은 《세상을 바로 볼수 있는 혜안(慧眼)을 선물해주고 인간에게 의욕을 선물한다》는것,《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꿈이 있》고 《꿈은 인내심을 갖게 한다》는 명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생에 대한 투철한 감오가 있기에 가난을 힘으로, 긍지로까지 여길줄 알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볼수 있는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에서 《성공으로만 이어지는 인생이나 실패로만 이어지는 인생은 있을수 없》으며《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실패는 고통의 대가보다 더 값진 깨달음을 선물해준다. 그 깨달음이 있기때문에 우리들은 성장할수 있다.》는 그대로 인생철리이고 명언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인 설교가 아니라 눈사람에 깃든 이야기, 첫사랑의 실패 등 절실한 인생체험을 통한 고백이여서 설득력있고 감동적이며 독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면서》에서는 갑자기 들이닥친 더위때문에 아름다운 꽃들이 화기도 못채우고 때이르게 지고만 《한순간》을 포착하여 문화대혁명의 혼돈속에 청춘을 묻고만 지난날을 반추하여 청춘도 《한순간》이기때문에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일깨우고 있다. 《태항산기슭에 핀 들국화》에서는 《가을이란 계절은 모순투성이다.》로 운을 뗀후 가을례찬론과 가을혐오론에 대해 차분히 분석하는가 하면 가을의 이미지에 대해 자기나름의 사색을 펼친다. 락엽은 풍성한 열매들을 미련없이 인간과 동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이불을 덮지 못한 어머니대지의 라신을 가려주기 위해 땅우에 떨어진것이라고 상상하며 늦가을,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와 락엽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있는 들국화을 찾아내여 가을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다시《찬서리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여있는 태항산기슭의 들국화》로 옮겨져《조국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선렬들의 넋》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즉 세계를 아름답게 볼수 있는 작가의 마음의 눈은 진한 감동을 준다.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에서는 이름에 담겨져 있는 자신의 인생경력을 통해 《나만의 이름은 없어도 나만의 인생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개성적인 인생관과 《이름이 없는 대신 나는 좀 더 개성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있다고 생각해 보니 그런대로 살맛이 난다.》는 락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너무 밝고 진지하여 감동을 준다.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는 두살 때 화상을 입고 할머니의 사랑으로 겨우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이야기, 1996년에 학술조사차 강소성에 갔다가 차사고로 사선을 넘나들었던 체험을 통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행운》이라고 고백한다. 살아있기때문에 할수 있는 일, 누릴수 있는 행복들을 렬거하면서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고 토로한다. 생명의 소중함과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텅빈 설교가 아니라 생생한 인생체험을 통해 얻은 철리여서 더욱 마음으로 공감하게 된다. 삶에 대한 투철한 감오가 있기에 작자는 살아있는 오늘에 의미를 부여하며 충실하게 살아간다. 일생을 민족을 위해, 학문을 위해, 남을 위해 헌신해온 그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수필에서《생명은 죽기 위해 태여나지 않는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지 삶의 목표가 아니다. 죽음을 위한 삶은 있을수 없다.》는 또 하나의 명언이다. 《이순의 인생》에서 늙음에 정신적성숙이란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여, 삶의 의미를 찾는 정신적 탐색을 멈추지 않을 때 이순의 경지를 이루어갈수 있다는 락관적인 인생관, 20대나 이순의 로인이나 《오늘의 하루는 모두 24시간이기에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의 하루는 뜻있고 값질수 있다》는 인생풀이는 참으로 값진 조언이다. 남계수필은 인생에 대한 절실한 체험과 투철한 사색에서 걸러낸 인생수필이다. 때문에 그의 수필에는 철학이 있다. 만약 남계의 수필이 일상의 체험을 서술하는데 그치거나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쳤다면 모두가 평범한 이야기로 남았을것이나 도덕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보다 심원한 미학적인 세계에로 끌어올렸기에 읽고나면 현실세계에서는 접할수 없는 정신적인 만족을 얻게 되고 많은 지적정보를 얻을수 있는것이다. 유복자로 태여나 두살에 어머니까지 여의고 할머니손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올곧은 교육으로 가난속에서도 세상을 밝게, 아름답게 볼수 있는 바른 마음을 키울수 있었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의 유명한 학자로 성장할수 있은것이다. 때문에 그의 남다른 인생경력은 후세들의 훌륭한 거울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데, 수필에 담고있는 인생철리와 올곧은 인생관에 대한 일깨움은 그대로 한부의 인생교과서라고 할수 있다. 시장경제로 들어서면서 인간은 날로 리기적으로 변해하고 인간정신은 날로 황페화되여가는 오늘, 그의 수필은 우리에게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가르치는 수필임에 틀림없다. 특히 유복자로 어렵게 살아오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볼수 있는 마음가짐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수 있는 불굴의 인간의지, 참인생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수필 전반을 관통하면서 진한 감동을 준다.
46    (서평) 순수성의 미학 댓글:  조회:5363  추천:51  2006-03-17
깨달음의 미학, 학자 수필의 매력 -- 남계 수필집 《사랑의 사회학》읽기 오상순 (문학평론가, 교수) 조선족 사회는 물론 한국을 망라한 세계 조선민족 사회에서 황유복 교수 하면 으레《국제적인 학자》,《사회활동가》,《민족사학가》란 이미지를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학문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의 일생이였고 조선족 사회를 위해 고민하고 헌신해온 일생이였고 없는 자, 불행한 자. 약한 자를 동정하고 사랑하는 인도주의적인 삶이였다. 놀라운것은《세계적 석학》으로 불리우는 황유복 교수가 이순의 나이에 수필가로 변신하여 문단의 이목을 끌고있다는 사실이다. 남계 수필집에 실린 글 43편중《군 감자와 이바구》, 《옥년이와 봇나무》,《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 《첫사랑 이야기》 등 15편은 자신의 인생체험을 바탕으로 쓴 수감(隨感), 수상(隨想)류 수필이고 “사랑의 언어학”, “사랑의 민족학”, “사랑의 신화학”, “중국사람과 숫자”, “군자의 교제는 물처럼 담담하고”, 《선택》, 《고슴도치도 0거리 접촉을 한다》, 《노랑, 빨강과 중국인》 등 28편은 사색적인 명상에 속하는 글이다. 유복자로 태여나 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동년시절, 민족사학가, 사회활동가의 특이한 인생경력때문인지 그의 수필은 시작부터 남다른 개성으로 돋보인다. 남계 수필의 특징을 서영빈은《리성의 혼, 자유의 옷》, 장춘식은 《정체성과 삶의 참의미》, 김훈은 《인간의 향기와 철학이 있는 글》, 최순희는 《흑백사진과 컬러사진》, 남복실은 《인생달관자의 여유》로 이름했다. 남계의 수필을 읽으면서 필자는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에 다시 한번 깊이 공감하게 되였다. 1. 순수성의 미학 남계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은 순수함이다. 우리는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동년의 꿈, 자연의 아름다움, 할머니의 사랑, 아리숭한 첫사랑 등 순수성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자가 꾸준히 추구해온 순수한 인생, 순수한 사랑, 순수한 행복, 순수한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감동하기도 한다.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순수함》이란 말의 진미를 남계의 수필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고 할수 있다. 흔히 저녁노을은 인생의 만년으로 상징되는데 반해 수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에서 저녁노을은 인생의 꿈과 희망으로 상징된다. 유복자로 태여나 두살에 어머니까지 여의고, 들일을 나간 할머니의 귀가를 학수고대하던 어린 소년은 언젠가부터 저녁노을의 황홀경에 빠져 배고픔도, 초조함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되였단다. 그때로부터 《노을을 찾아 저 하늘 끝까지》 가려는 소년시절의 꿈은 가난과 고독에 쪼들리던 어린 가슴에 행복을 가득 채워주었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갈수 있는 능력과 의지력을 키워주었단다. 여기서 저녁노을을 꿈과 희망의 상징으로 상상한것도 개성적인데 그것을 참삶의 가치로 승화시키고 있어 수필의 무게를 더욱 실어주고 있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날의 맑은 날씨를 기약하여 혼신을 불태우는 저녁노을과 같이 사회와 민족, 나라에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란 인생체험이다. 그래서 《저 하늘 끝까지》 찾아가기 위한 능력과 의지력의 양성도 중요하지만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속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날로 리기적고 개인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오늘의 사회에 청순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전해진다. 그의 수필의 순수성은 《군 감자와 이바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화롯불에 둘러앉아 군 감자와 같이 구수한 할머님들의 《이바구》를 듣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독자들에게 지난날 고향의 오붓한 마을, 이웃간의 훈훈한 인정, 따스한 우정, 달콤한 사랑, 소박한 꿈을 되살려줄뿐 아니라 금전만능주의 풍조에 물젖은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너무나 청신한 공기를 가져다준다. 수필 《옥년이와 봇나무》에서 작가에게 봇나무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안겨오는것은 흰색의 줄기와 무수한 잎과 가지들로 수관(樹冠)을 이룬 미인형 《체형》때문이라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아름다움때문이란다. 가공된 아름다움보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단다. 그래서 쉰살이 넘으면서 흰머리가 많아지자 주변에서 《머리염색만 하면 십년은 젊어지겠다.》고 권고하나 단 한번도 염색해본적이 없단다. 젊어지는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젊어지고 싶지 않았기때문이란다. 작가는 계속해서 지금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때문에 미쳐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칼로 째고, 깎아내고 붙이고 해서 현대인들의 외모가 더 예뻐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때문에 싸우고 리혼하고 자식을 내다버리고 ⋯술로 자신을 마비시키고⋯ 그래서 우리들 생활속의 아름다움은 분명히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고 모를 박는다.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살아가고싶다는 인생관, 내실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역시 순수하기만 하다. 자신의 인생체험을 통해 체득한 참사랑에 대한 추구 역시 순수하고 청초하기만 하다. 첫사랑 이야기속에 담은 《계산되지 않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란 진솔한 고백, 여타 민족과의 비교속에서 《사랑을 받기 위한 사랑보다는 사랑을 주기 위한 사랑이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충일하고 지순》(사랑의 민족학)하며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사랑의 표현은 진한 향기로 되여 상대에게 전해질수 있다.》(사랑의 언어학)는 참사랑에 대한 사색, 로맨틱한 사랑보다는 두사람의 합일로 이루어지는 성숙된 사랑이 참사랑(사랑의 신화학)이란 주장, 《사랑의 날》만큼은 돈과 관계없는 순수한 《사랑의 축제》(상혼의 절여진 사랑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돈에 외곡되고 타락에 찌든 오늘의 사랑관과 대조되여 동년의 꿈과 같이 아름답기만 하다. 남계 수필의 순수성은 소재선택에서도 나타난다. 수필에 등장하는 할머니, 옥년이, 군감자, 《이바구》, 봇나무, 눈사람, 들국화 등은 그대로 《한장의 흑백사진》과 같이 순수함의 아름다음을 나타내며 노을을 찾아 저 하늘 끝까지 가려던 동년의 이야기, 화로불을 마주하고 할머니들의 구수한 옛말을 듣던 어린시절의 아련한 추억,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와 락엽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있는 들국화 이야기, 가슴속을 스쳐지나간 아리숭한 첫사랑 이야기도 아련한 추억속에 소박하고 청순한 향기를 풍긴다. 남계 수필의 순수성은 또한 꾸밈없이 진솔한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진솔성은 수필의 생명이며 수필이 갖는 첫째 특성이라 할수 있는데 우리는 그의 수필에서 구김살 없이 진솔한 고백을 대하게 된다. 첫사랑의 느낌과 사랑의 실패에 대한 솔직한 고백, 유복자로 태여나 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란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 할머니의 눈물겨운 사랑, 자기만의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온 인생체험, 두번이나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면서 깨달은 생명의 소중함, 참인생, 참사랑에 대한 사색, 이순의 인생에 대한 사색, 민족에 대한 사색⋯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진솔하고 소박할수가 없으며 그의 사색은 그렇게 진지할수가 없다. 진실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진솔한 고백속에 일깨움이 있기에 독자들은 잔잔한 감동속에서 참삶의 가치란 어떤것인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진실성, 순수성때문에 그의 수필은 더욱 인격적 품위가 돋보이고 감동이 크다 순수성은 남계수필의 기본바탕이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항상 청초하고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순수한 삶,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추구해온 남계만이 쓸수 있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수필이다. 그속에는 독자의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다. 우리는 그의 수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를 그대로 느낄수 있다.
45    (수필)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 댓글:  조회:5547  추천:49  2006-03-16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라 왜 조선족 사회가 살아남아야 되는가. 중국의 200만 조선족 사회가 있었기에 한⦁중 수교 1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 중국과 한국은 급속한 경제교류의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통하게 했고 인맥을 닿게 하여 중국과 한국의 기술교류, 무역투자에 크게 기여를 했다. 이는 일본과 중국의 수교가 20년이나 빨리 이루어졌지만 그 관계가 중⦁한간 관계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00만 조선족이 있었기에 중국은 한국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고, 한국은 일본보다 빨리 IMF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조선족의 존재는 중국에도 한국에도 유리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족의 존재 가치인 것이며 중국과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개국 언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은 조선족뿐이다. 동북아시대에 대단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95년부터 기술대학설립을 추진해 오고 있다. 조선족 처녀들이 한국에 시집가는 이유는 설문조사 해보면 돈 때문에 시집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 총각들이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럼 왜 조선족 총각들이 돈을 벌지 못하는가. 심양 서탑의 노무시장에서 조사해 보니 조선족 교육이 입시교육으로 일관돼 기술학교는 공부 못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 고 인식하고 있어 기술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족청년들은 기술자격증을 가지고 사회에 나와 취직하게 되지만 조선족 청년들은 기껏해야 고중졸업장 하나밖에 없어 취직이 어려운 것이다. 95년에 베이징에서 대학진학도 못하고 취직도 못한 총각들에게 기술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취지로 기술대학교설립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족 사회의 많은 변화가운데서도 조선족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흐트러진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잘 사는 것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도이치뱅크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2년 중국의 GNP는 7.5%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다른 보고서에서는 중국이 세계6위에서 프랑스를 따돌리고 제5위로 올라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상당히 빨리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이 중국경제권으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이 미국경제권, 일본경제권에서 중국경제권으로 바뀐다는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 와서 성공해 중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족들이 늘고 있다. 조선족 기업가 중에는 인민페 1억 위엔 이상 가진 기업인들은 10여명 정도다. 중국에서도 조선족들만이 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젊은 청년들은 기술을 많이 배워야 한다. 한 청년은 시골 출신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기술을 배워 중국에 가서 특허를 내 천진에서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청년은 기술력은 한국이 뛰어나지만 일하기는 중국이 훨씬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 조선족 청년들은 한국에서 기술을 배우라. 자기의 진로를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중국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02. 5. 6
44    (수필) 수교 10년 댓글:  조회:5450  추천:61  2006-03-15
수교 10년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먼 나라였다. 나는 1983년에 서울대학교의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한국이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갈수 없는 나라로 분류되던 시절이어서 한국 행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1990년에 다시 초청을 받고 어렵사리 한국 행 인가를 받을 수 있었으나 북경서 서울까지 가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먼저 홍콩으로 가서 다시 한국 행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10년 전에 '갈수 없는 나라' 내지 '멀고 먼 나라' 이던 한국과 중국은 한. 중 수교10년 사이에 '우호협력관계의 나라'를 거쳐 이제는 '동반자관계의 나라'로 되었다. 한∙중 수교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중국은 등소평의 "남방담화(南方談話)"를 계기로 개혁, 개방의 속도에 박차를 가할 시점에서 주변지역 환경의 안정이 필요했고 한국수준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와 동시에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한국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냉전시대의 분단국가로서 한반도 평화환경의 조성과 경제발전 차원에서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중∙ 일 수교보다는 20년 뒤늦었지만 서로가 모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때 자연스럽게 수교를 단행했다. 때문에 근 반세기동안 막혀 있던 교류의 물고가 트이면서 두 나라간의 선린관계는 재빨리 복원 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간 두 나라는 냉전시대의 거리감을 극복하면서 '소이(小異)'를 접어 두고 '대동(大同)'을 지향하면서 서로의 필요를 상호 충족시켜 주는 '동반자의 관계'로 발전해 왔다. 그 중 경제협력관계의 발전은 가장 뚜렷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001년 중국은 한국의 첫 번째 투자대상국과 두 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부상 되였고 한국도 중국의 세 번째 무역대상국이 되였다. 두 나라의 무역규모는 이미 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두 나라의 문화교류도 해마다 약진하고 있는 추세이다. 수교10년간에 중국에서 유학하는 외국 유학생 중 한국유학생이 제1위를 점하게 되였다. 지난한해만 해도 1만 여명의 한국학생이 중국으로 유학 왔으며 그 추세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10년간 30여 개의 중국대학에서 한국어학과나 한국학연구소를 개설했다. 한국대학에서도 중국어학과가 호황을 부리고 있다. 수교 후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 리펑 전인대상무위원장, 주룽지 국무원총리 등 최고위급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두 나라 정상들의 상호방문으로 정치교류관계도 좋은 결실을 거둔 셈이 된다. 두 나라 국방부(부장) 장관들의 상호방문으로 초보적인 군사교류가 진행되고 있지만 경제, 문화, 정치교류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셈이다. 수교10년 간 두 나라는 이렇게 큰 결실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해결해야 한 여러 과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경제협력분야에서 무역수지 불균형의 극복, 산업협력관계개선 등이 꼽히고 있다. 중국의 통계에 따르면 2001년 한중무역에서 한국은 1백20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 문제는 흑자폭이 해마다 늘어난다는 점이다. 무역수지의 불균형 때문에 '마늘분쟁' 같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해결책은 두 나라가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한 성의를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산업협력관계의 계선은 두 나라의 수요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이기도하다. 한국은 중국의 시장점유만 생각하고 중국은 한국의 기술이전과 투자유치만 생각할 때 산업협력관계의 개선은 빈말로 될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문화 분야의 교류에서 해결 되여야 할 문제는 교류의 상호성이다. 한국이 계속 중국인들의 한국입국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문화교류의 상호성은 비뚤어 질 수밖에 없다. 지난 월드컵 때 상황이 바로 그렇다. 마지막으로 정치교류분야에서 두 나라는 동북아의 평화안정과 한반도 평화안정에 대한 인식의 공동분모를 넓혀 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동북아 평화안정을 기하는 데는 두 나라의 대미관계, 대일관계 그리고 미국주도하의 동북아시아 TMD체제형성의 움직임 등 상당히 민감한 부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안정과 평화통일에 관해서 두 나라는 상당한 국익일치와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별다른 갈등이 없이 인식을 같이 할 수 있다. 지난 10년간 한⦁중 두 나라는 상호의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 왔다. 때문에 앞으로의 관계설정은 두 나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말고 전체 동북아국제평화환경구축의 주역관계로 부상시켜야 한다. 가장 좋은 대안을 한⦁중 두 나라가 동북아경제공동체형성을 위한 주역과 협력동반자로 되는 것이다. 2002. 8. 19
43    (수필) 중국인들의 욕과 한국인들의 욕 댓글:  조회:5768  추천:86  2006-03-14
중국인들의 욕과 한국인들의 욕 어릴 적 일이지만, 어른들이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아이들을 '양반'이라고 칭찬해주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애들을 '상놈'이라고 욕하는 것을 자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커가면서 친구들 간에 싸우게 되면 '개새끼', '상놈새끼', '빌어먹을 놈' 하는 식의 욕이 거침없이 오가곤 했다. 몇 달 전 한국 신문에서 모 국회의원이 술을 빙자해서 남을 '×새끼'라고 욕했다가 여론에 몰리자 사과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반세기가 지나갔지만 한국인들의 욕의 기본은 변한 것 같지 않다. 역시 어릴 적 이야기다. 내가 자라난 길림시 부근의 쌍하진이란 마을은 꽤 큰 마을이었는데 마을 주민의 절반은 조선족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한족이었다. 소학교 다니던 시절, 등교나 하교 길에서 같은 또래의 한족 애들을 만나면 멀리 마주서서 욕을 교환하다가 갈 길을 가곤 했었다. 그때 배운 중국(한족)식 욕은 섹스를 의미하는 동사 뒤에 '너 에미'라는 말을 붙인 '×니마'나 자라나 거북이의 '알' 혹은 '새끼'라는 뜻의 '왕빠따안', '왕빠고우즈' 따위였다. 중국의 대 문호인 로신 선생은 상대방의 '에미'를 등장시킨 그 욕에서 동사를 생략 시킨 '타마디'라는 욕을 중국의 '국욕(國罵)'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지금도 중국인들 가운데 말끝마다 그 '국욕'을 난발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옛날 한국인들이 언짢을 때 내뱉은 '제기랄'이라는 말보다 더 많이 쓰는 셈이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국욕'에 등장하는 인물은 '에미'에서 '할미'로 승격하거나 더 심각할 경우 8대 조상에까지 누가 미친다. 중국인들의 '국욕'에 버금가는 욕이 바로 상대방을 거북이 '알' 내지 '새끼'로 몰아 부친 것이다. 중국 고대문화에서 거북이는 4대 영물(기린, 봉황, 거북, 용)중의 하나로서 선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신성시되던 거북이의 위상은 원 나라 이후 하늘에서 땅 밑 끝까지 굴러 떨어졌다. 송나라 때 유명한 문인이었던 소동파(蘇東坡)가 거북의 등뼈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녔던 기록이 있어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거북이를 신령한 동물로 섬겨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몽고인들이 통치했던 원 나라 때부터 중국 민간에서는 거북이를 비하시키는 '유언비어'들이 무성해졌다. 암 거북이는 수뱀과 교미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들이다. 교미하기 전 암 거북이는 둥근 원을 그리며 방뇨를 한다. 그 원 안에서 수뱀과 교미를 할 때 수 거북이가 그 것을 발견하고 노기충천하여 달려온다. 그러나 암 거북이가 오줌으로 그어놓은 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혼자서 복장을 터뜨린다고 한다. '유언비어'의 근원은 한 나라 때 성행했던 '사신도'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방신인 '현무'의 그림은 거북이와 거북이를 칭칭 감고 있는 뱀이다. 따라서 '꿔이얼즈(거북의 아들)'이나 '왕빠따안(자라나 거북의 알)'이라는 중국인들의 욕은 '사생아'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욕의 문화적 의의를 욕하는 사람이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상대를 공격해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자신의 울분을 해소하려는데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욕이 뿌리내릴 수 있는 문화적 풍조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이어령 선생은 한국인의 욕이 아무리 심한 것이라 해도 그 핵심적 의미는 '나쁜 놈' 유형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상대방을 부도덕한 것이나 더러운 것으로 몰아감으로써 도덕적인 것을 중시해온 사회가치를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욕은 그들 의식구조에 고질화되어 있는 수직적 서열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상놈새끼', '빌어먹을 놈', '개새끼' 그 모두가 상대방을 비천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왕조가 실시했던 신분제도 하에서 최하층 천민들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은 주변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이다. 따라서 '상놈'을 욕에 등장시킨 것은 상대방의 '비천'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빌어먹을 놈'이나 '거지 발싸개 같은 놈'도 마찬가지이다. 거지는 '상놈'보다 더 비천한 존재였고 거지 몸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발싸개라 할 수 있다. 옛날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개고기는 제사상에도 못 올라갈 만큼 '천'한 것이다. '개자식' 역시 비천한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욕은 사람의 신분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 대신 중국인들의 욕은 그 핵심적 의미가 '섹스'에 있다. 중국의 '국욕'은 상대방의 '에미'나 '할미' 혹은 8대 조상과 상간했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곤경으로 몰아간다. 거북을 등장시킨 욕들도 상대방이 '사생아'라고 몰아 부치기 때문에 역시 간접적으로 상대방 어머니의 부도덕한 성행위를 부각시키고 있다. 성행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중국인들의 욕은 그들의 성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의 고전명작 《금병매》나 《홍루몽》을 읽으면 중국 옛날의 성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오게 되는 한국인들이 꼭 주의해야 할 점은 한국에서는 문제되지 않지만 중국인들에게 선물을 할 때 거북이 모양이나 거북이 그림이 있는 물건들은 삼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2002. 7. 1
42    (수필) 글로벌 에티켓과 중국인들의 예절 댓글:  조회:6844  추천:65  2006-03-13
글로벌 에티켓과 중국인들의 예절 10여 년 전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 출신의 한 교수가 한국 신문에 중국 사람들은 '며느리와 시아버지도 악수로 인사'한다는 이상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의 예의 하면 곧잘 '며느리와 시아버지'를 들먹인다. 악수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사법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의 수인사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 간의 인사로 악수를 하게 된다. 또 특별히 감사 드려야 할 사람에게 두 손으로 상대방의 한 손을 덥석 잡으며 감사의 말을 연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집식구 간에 악수하는 에티켓은 없다. 다시 말해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악수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부자지간, 형제지간,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들은 흔히 중국을 한국과 같은 '예의지국'으로 생각하다가 정작 중국에 와 보고 '예의를 잃어버린 나라'라고 놀라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인들이 예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한국과 다른 에티켓 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나 민족이든 간에 각자의 에티켓 문화를 갖고 있다. 따라서 글로벌 에티켓 문화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 다양한 문화들 간에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의 에티켓 문화는 선진적이라든가 좋은 것이고 어느 민족의 에티켓 문화는 낙후하거나 나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에티켓 문화가 정착되기까지는 그 나라나 민족의 전통문화와 생존환경 등 복잡한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에티켓 문화는 상대적이다. 이러한 문화의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을 인정하는 것이 세계화 시대에 갖추어야 할 글로벌 에티켓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한국인들의 주거문화는 온돌방이나 마루방 중심으로 되어 있지만 중국인(중원지역)들의 주거문화는 침상과 의자 중심으로 되어 있다. 큰절인사는 온돌이나 마루에서는 적합하지만 침대나 의자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큰 절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중국 사람들은 '에티켓이 없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중국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 것은 한국인들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비방하는 일부 서양인들의 편협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선 자세로 몸을 굽혀 남에게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법은 중국에도 있다. '국궁(鞠躬)' 법이 그 것이다. 그러나 '국궁' 법은 윗사람이나 죽은 사람 시신이나 위패 앞에서 행하는 극히 제한된 예절이다. 조문을 빼버린다면 중국인은 일생동안 세 번 국궁 예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결혼식 때 천지신명에 한번, 부모님께 한번, 그리고 부부 대배 하는 것이 그 것이다. 서양의 악수법이 중국에 전해지기 전 중국인들의 인사는 '공수(拱手)' 법이었다. 두 손을 맞잡고 팔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면서 상대방에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법이었다. 지금도 일부 노자(老者)들 사이에 공수 인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근대화과정에서 서양식 악수에 밀려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 중국식 인사법이었다. '한국식 예절과 인사를 그대로 갖고 가서 중국인들에게 가르쳐주면 중국인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많이 배우리라고 믿는'다는 생각은 자기 문화의 '우월성'에 도취된 편견일 뿐이다. 근대화 이전에도 중국인들은 한국의 큰 절이나 '국궁'식 절과 완전히 다른 '공수' 인사법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일부 문화의 상대성을 무시하는 중국인들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인사하는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의 인사법을 비생산적인 허위허식이라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 가운데 중국인들의 남녀, 상하 관계의 설정도 '에티켓이 없는' 못마땅한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가족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의 대인관계가 한국인들은 수직관계인데 비해 중국인들은 도리어 수평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든가, 교사가 학생을 체벌한다든가, 군에서 새로 입대한 병사에게 기압을 준다든가, 회사 상사가 부하 직원을, 공장 관리인이 노동자를 욕한다든가 하는 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심지어 집주인이 가정부를 함부로 욕하지 않으며 길가다가 시끄럽게 손을 내미는 거지도 욕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남과 여, 노와 소, 상급과 하급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대인관계를 나타내는 기본단어는 '너(你)', '나(我)', '저 사람(他)' 식으로 간단하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아들과 손자도 다같이 '나'고 '너'고 '저 사람'이다. 사실 한국어와 같이 까다롭게 상, 하, 존, 비를 구분하여 '나는 밥을 먹고', '아버지께서는 밥을 잡숫고', '할아버지께서는 진지를 드시는' 식으로 표현하는 언어는 세상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 해서 중국인들이 부모에 대한 효도나 윗사람에 대한 존경, 친구 간의 의리와 우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윤리관은 한국인들과 별 차이가 없다. 중국 속담에 '일일위사, 종신부모(一日爲師, 終身父母)'라는 말이 있다. '하루의 선생이라도 죽을 때 까지 부모같이 섬긴다. '는 뜻이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오래간만에 만나 악수를 청하고 '로우스 니호우(老師你好)'라고 인사를 해오지만 그들이 나에 대한 관심과 존경은 언제나 변함없다.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서비스 정신의 부재는 예절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가치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예절문화는 옛날부터 차이가 있었다. 근대화 과정과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중국인들은 인권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와 서양식 인사법(악수)을 선택하여 에티켓 문화의 세계화를 앞질러 가고 있다. 2002. 8. 26
41    (수필) 중국사람과 숫자 댓글:  조회:8312  추천:79  2006-03-10
중국사람과 숫자 요즘의 중국 매스컴에 따르면 이번 북경 국제모터쇼(자동차전시회)에서 중국의 부자들이 영국 산 벤트리(Benteley)차 "구입경쟁"을 벌렸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불티나게 팔린 그 차의 가격이 888만 위엔(미화 111만 불 정도) 고가였다는 점이다. 영국 여왕이 타고 다니는 차라는 것 자체가 중국 부자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했겠지만 중국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8'이라는 숫자를 가격에 이용한 마케팅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숫자에 음양의 개념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은 《주역(周易)》이라는 책에서부터이다. "천1, 지2, 천3, 지4, 천5, 지6, 천7, 지8, 천9, 지10", "홀수는 천수로서 양수라 하고 짝수는 지수로서 음수라 한다." (《주역·계사》) 그러나 홀수에 대한 기호는 《주역》보다 앞서 상나라 때부터 시작된다. 상나라를 건립한 민족은 '은'민족이고 은민족은 '동이'계였기 때문에 알타이계 고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은민족이 홀수를 좋아했다는 증거로는 상나라 때부터 사용된 태음력을 꼽을 수 있다. 태음력에서 명절날은 거의 모두 홀수 달과 홀수 날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춘절(1월 1일), 유두절(3월 3일), 단오절(5월 5일), 칠석절(7월 7일), 중양절(9월 9일)이 그렇다. 짝수 달에 홀수 날로 정해진 명절은 중추절(8월 15일)밖에 없다. 짝수를 기피하려 했으나 8월은 수확의 달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태음력은 중국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홀수 기호의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해야 하겠으나 현실적으로 중국인들은 홀수를 기피하고 짝수를 좋아한다. 한국에서 선물을 주고받을 때에는 흔히 한 개로 준비한다. 넥타이 한 개, 시계 한 개, 구두 한 켤레 하는 식으로 선물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동료들의 파티초대를 받았을 때 주인의 특별한 부탁이 없으면 와인 한 병쯤 들고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보통 선물을 준비할 때 2개를 갖춘다. 와인이나 빼갈일 때는 2병을, 시계일 때는 신사용과 숙녀용으로 짝을 맞추어 준다.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숫자는 아마도 '4'일 것이다. 호텔에 가면 '4'층은 없고 'F'층이 있거나 '4'층을 빼버리고 '3'층에서 '5'층으로 연결시켜 놓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4'자를 가장 안정된 숫자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숫자로 시작되는 단어에 '4'자로 시작되는 것이 제일 많아 자주 볼 수 있는 단어만 해도 '4계' (춘, 하, 추, 동), '4방' (동, 서, 남, 북), '4군자' (죽, 난, 매, 국), '4예' (금, 기, 서, 화)등 30여 개가 있다. '6'자는 '순조롭다'는 뜻을 대표하고 있고 '8'자는 '돈을 많이 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중국인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숫자들이다. 그런데 《주역》에서 해석하다시피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짝수들은 모두 '음수'에 속한다. 한국인들은 유교문화의 전통 때문에 '양수'인 홀수를 선호하고 있는데 그와 반대로 유교문화의 본 고장인 중국에서는 '음수'인 짝수를 한결같이 좋아하고 있다. 그 원인을 청 말, 민국 초의 대학자인 주자청(朱自淸)이 《경전상담(經典常談)》이라는 글에서 무속의 유풍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여하튼 간에 중국인들은 상나라 때부터 사용해온 태음력에서 시작되는 양수(홀수)선호의 문화전통에 등 돌리고 음수(짝수)를 선호하고 있다. 3년 전 대학에서 교수아파트를 분양할 때, 6층과 7층중에서 내가 7층을 선택하니 다음 차례의 한족 교수가 내 손을 덥석 쥐면서 "나는 교수님이 6층을 선택 할 가봐 조마조마했었는데 6층을 남겨주어서 너무나 고맙습니다."라고 기뻐해 하던 일이 잊혀 지지 않는다. 조선족과 한족 교수 간에 숫자문화의 차이로 생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또 한 번은 내가 젊은 교수들을 상대로 강의했던 전통문화강좌에서 중국의 숫자문화 이야기가 나와 "너희들은 중국의 여자 축구가 세계의 정상수준에 올랐는데도 남자 축구수준은 그냥 부진한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는 소위 '음성양쇠(陰盛陽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질문 한 다음 "그것은 한족이 음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 겠는가?"라고 말해 모두가 웃었던 적이 있다. 중국에 진출했거나 중국 진출을 기획하고 있는 한국 경제인들도 벤트리 회사의 마케팅 전략에서 무엇인가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2002, 6. 17
40    (수필) 노랑, 빨강과 중국인 댓글:  조회:6148  추천:80  2006-03-08
노랑, 빨강과 중국인 이번 한·일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 팀이 유럽 축구의 강호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고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 축구 인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 팀의 선전에 못지않게 한국 팀 스포터스인 '붉은 악마'도 '매너와 열정의 붉은 응원'으로 축구응원문화의 새 장을 열어 세인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중국의 방송사는 생방송에서 가끔 '붉은 색의 바다'라는 표현으로 '붉은 악마'의 응원물결을 소개하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을 지켜보다가 무의식중에 중국으로 착각할 때도 있다. '붉은 색의 바다'는 중국에서 자주 보아온 광경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기호 색은 단연코 노랑과 빨강이다. 빨간 바탕에 노란 별 다섯 개로 디자인되어 있는 중국의 국기만 보아도 수긍이 될 것이다. 중국 전통문화에서 노랑은 지존의 색으로 황제와 황실 그리고 황궁의 독점 색이었고 그 대신 빨강은 민간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색이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의 자손들이라 생각한다. 중국의 신화에서 '황제'는 화하(華夏)계 민족의 최초의 제왕이다. 한국으로 말하면 '단군'인 셈이다. 초주(譙周)의 《고사고(古史考)》에 따르면 '황제는 토덕왕(土德王) 인데 흙의 색이 황색이기 때문에 황제라 한다.' 염제는 황제의 이부형제인데 '화덕왕(火德王) 이고 불은 붉은 색이기 때문에 염제 혹은 적(赤)제라고 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가 '황은 땅의 색이다'라고 해석했듯이 황색은 중원지역 흙의 색에서 유래된다. 북경의 중산(中山)공원에 가면 중국 국토를 상징하는 '사직단(社稷壇)'이 있는데 중앙은 노랑, 북은 검정, 동은 청색, 서는 흰색, 남은 빨강으로 되어 있다. 한족의 발상지인 황토고원의 흙은 황색이고 황토고원을 흘러내리는 물은 누런 흙을 씻어 내리기 때문에 황하라 부르며 심지어 그 물을 받아들이는 중국 동쪽 바다도 누렇기 때문에 황해라고 한다. 그러한 자연환경에서 생활하는 중국인들은 당연히 황색을 천하의 중심 색으로 이해한다. 중국 전통문화에서 황색은 고귀하고 상서로운 색, 색 중의 지존 색으로 추대된다. 따라서 황제들은 황색을 독점했고 민간의 사용을 금단하였다. 신해혁명에 의해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쫓겨나면서부터 황색은 금단의 색에서 해방되어 지금까지 중국 민간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제인들이 회사의 귀족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심벌 색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붉은 색은 서민들에 의해 널리 선호되는 색상이다. 《설문해자》는 '적색은 남방의 색이다'라고 해석한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남방은 빨간 색으로 표현된다. 사실 중국의 남방을 다녀보면 중원의 황색 토질이나 북방의 흑색 토질에 비해 남방은 거의 홍색 토질에 속한다. 그러나 전통문화는 붉은 색을 염제의 심벌 색, 불의 색과 태양의 색으로 해석한다. 옛날 중국 부자들은 집의 대문이나 기둥을 붉은 색으로 선정해 왔다. 지금도 중국의 서민들은 빨강계열의 색으로 페인트 된 자동차를 선호한다. 또 중국인들이 '촌지'나 '떡값'을 건널 때는 붉은 색 봉투에 담아주기 때문에 '훙보우'라고 한다. 보통선물도 빨간 색 포장지를 많이 사용한다. 중국 여자들이 시집갈 때는 붉은 옷을 입고 붉은 색 가마를 타고 간다. 중국인들은 빨강을 벽사(僻邪), 경희(慶喜), 길상(吉祥)의 심벌 색으로 간주 한다. '붉은 악마'들의 응원물결을 지켜보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경제인들이 '레드' 아이디어를 마케팅 전략에 응용한다면 무슨 효과가 나타날까 생각해 보게 된다. 200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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