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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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수필)사랑의 민족학 댓글:  조회:5025  추천:49  2006-02-07
사랑의 민족학 가령 한 처녀가 자신을 사모하는 세 총각가운데서 어떻게 자신의 신랑감을 선택하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시되였다고 하자. 《세계화》에 중독되지 않은 서로 다른 민족출신의 처녀들의 선택기준은 같거나 비슷할수 있을가? 아랍계, 유태계 그리고 조선계 민족의 전통적 가치관의 해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랍민족 고전인 《아라비안나이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국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사촌 녀동생인 공주를 사랑하게 된다. 국왕은 세 왕자에게 충분한 돈을 주면서 공주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을 구해온 왕자가 신랑이 될것이라고 했다. 세 왕자는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 함께 돌아오기로 하고 헤여졌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큰 왕자는 망원경을, 둘째는 요술담요를 그리고 막내는 사과를 구해가지고 왔다. 큰 왕자가 망원경(아무리 먼 곳도 볼수 있는)으로 왕궁을 살펴보니까 공주가 병으로 곧 죽게 되여 있었다. 세 왕자는 둘째의 요술담요(씽하고 날아다니는)를 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막내의 사과(무슨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는)를 먹여 공주를 살려냈다. 공주는 세 왕자 가운데 누구에게 시집가야 하는가? 맏이의 망원경이 없었다면 공주의 병이 위독함을 알수 없었고 둘째의 요술담요가 아니면 그렇게 빨리 병자곁에 도착할수 없었으며 사과가 없었으면 도착했다 해도 치료할수 없었다는 리유로 선물 구해오기 게임은 승자 없이 끝난다. 《유태인의 얼이 담긴 유태인의 문화유산》이라고 하는《탈무드(Talmud)》에는⟨마법의 사과⟩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왕국의 시골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맏이는 망원경을 둘째는 요술담요를 그리고 막내는 사과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국왕의 외동딸인 공주가 갑자기 죽을병으로 앓게 되였는데 유명하다는 의사들이 모두 와서 치료했으나 병은 점점 악화되였다. 임금님은《공주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방문(榜文)을 작성하여 성문 입구에 붙여놓았다. 하루는 큰 형이 망원경으로 서울 장안을 살펴보다가 성문에 나붙은 방문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삼형제는 둘째의 요술담요를 타고 순식간에 왕궁에 도착하여 막내의 사과로 공주를 치유시켰다. 공주는 방문에 제시된 조건을 따져 막내에게 시집간다. 조선 평양에서 출판된 《옛말》이라는 책에는 조선민족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한 고을에 예쁘고 일 잘하는 처녀가 살고 있었고 조선팔도에서 구혼자들이 몰려왔다. 예선에서 세 총각이 뽑혔는데 처녀는 그들에게 선물을 구해오라고 한다. 일년후 세 총각이 지정 장소에서 만났을 때, 총각 갑은 동경(구리로 만든 거울)을 구해왔고, 총각 을은 천리마를 그리고 총각 병은 사과를 각각 구해왔다. 갑이 거울(아무리 먼데 있는 사람도 비쳐볼수 있는)을 꺼내보니 처녀는 병으로 다 죽어가고 있다. 세 총각은 을의 천리마를 함께 타고 일순간에 처녀네 집 앞에 도착했고 병의 사과로 처녀를 살려내게 되었다. 처녀는 세 총각을 마주하고 앉아 조용히 결론부터 이야기하였다. 《저는 세분의 선물가운데 한분의 선물을 이미 접수하였습니다.》거울과 천리마는 선물 받은 사람이 선물한 사람을 아무 때나 비추어 볼수 있거나 그의 옆으로 쫓아 갈수 있는 좋은 선물이다. 다만 선물을 선택한 사람의 립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랑받기 위한 사랑의 선물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사과는 받은 사람이 위독할 때 치료하고 나면 남는것이 없는, 사랑을 주기 위한 사랑의 선물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처녀는 그 《주는 사랑》의 선물은 접수하였고 총각 병과 결혼하게 되였다. 아랍공주는 철저하게 아랍민족의 상업주의 원칙을 사랑에 적용시켰다. 투자 자금의 규모와 관계없이 지분의 비례에 따라 리익금이 분배되여야 하듯이 세 왕자의 선물이 공주의 병을 치유하는 과정에 크고 작던 간에 각자의 작용이 있었기때문에 공주는 어느 한 왕자의 손을 들어줄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유태 공주는 계약주의 원칙에 따라 사랑을 선택하고 있다. 아버지 국왕이 방문에서 《병을 고쳐주는》사람을 사위로 삼겠다 했지 공주의 환병사실을 발견했거나 빨리 쫓아온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한적이 없기때문에 막내를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민족 처녀의 선택은 아랍공주와는 다르고 유태공주와는 같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가치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 처녀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수밖에 없다. 유태공주는 계약에 대한 실천을 선택의 가치기준으로 삼았고 조선처녀는 참사랑을 가치기준으로 보았다. 사랑을 주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충일하고 지순하다. 그래서 프랑스의 4대 랑만파 시인중의 한사람인 라마르틴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인간이지만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천사이다.》라고 했고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세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영혼의 가장 고귀하고 바람직한 경지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주는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참사랑은 없다. 조선처녀는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총각을 자연스럽게 선택한것이다. 사랑도 인간들의 문화적인 행위인만큼 그 행위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귀속되는 그 민족의 전통문화와 가치관의 영향을 받을수밖에 없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자주 들어오던 말이다. 요새와 같이 쩍하면 《섭외혼인(국제결혼)》이 말밥에 오르내리는 《세계화시대》에는 좀 색바래진 말같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까지만 해도 꽤나 진지한 말로 간주되였다. 사랑은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녀자 사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때문에 민족출신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능하다는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시사하는것뿐일것이다. 《가능성》과 《합리성》 사이는 거리가 한참 멀다. 가령 성장과정의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부동한 민족이나 국적의 남과 녀가 서로 사랑을 약속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요즘 세상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적당한 기간 내에 서로 《사랑》을 즐기다가, 심지어는 《사랑》을 리용하다가 언제 그랬더냐 하듯 깨끗이 헤어지려는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으로 잘 가꾸어나가려 한다면, 그들이 건너야 할 외나무다리와 넘어야 할 가시밭 고개는 너무도 많다. 일반 련인들이 겪게 되는 성격, 취향, 생활습관 등의 차이로 빚어지는 갈등외에도 세속적인 편견, 문화적 갈등, 가치관의 충돌 심지어 민족이나 국가의 리익을 표방한 정치적 간섭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사랑은 문화적 산물이다. 사랑이 구성되는 방식은 사랑의 주인공들이 소속된 그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특성에 좌우된다. 2003. 8
18    (수필)사랑의 언어학 댓글:  조회:5504  추천:56  2006-02-06
사랑의 언어학 내가 미국 하버드 대학 교환교수로 가 있던 1987년 가을이였다. 칼·메세이라고 하는 하버드대 언어학 박사과정생이 자신이 작성한 《 IN ABOUT 310 LANGUAGES (310가지 언어로 말하는 )》라는 론문을 갖고 나의 연구실을 찾아왔다. 그 론문은 310개 민족언어와 방언으로 된 사랑을 전달하는 말들을 수집한뒤 적당한 문법해석을 가한 글이였다. 그의 글에 따르면 사랑을 고백하는 말들은 어순의 형태로 보아 아래와 같은 두가지가 주종을 이루었다. ①《나 사랑 너》류형 인도-유럽어족의 다수언어와 한-장어족 다수언어가 본 류형에 속한다. 《아이 러브 유》(영어), 《워 아이 니》(한어). ②《나 너 사랑》류형 알타이어족 언어와 우랄어족언어가 본 류형에 속했다. 《비 심베 하이람비》(만주어), 《마 알마스탄 신드》(에스또니아어). 그 외에도 《사랑 나 너(사랑해 내가 너를)》류형 (아프로아시아티크 어족 일부), 《너 사랑 나(너를 사랑해 내가)》류형 (오스트로네시안 어족 일부), 《너 나 사랑(너를 내가 사랑해)》류형 (오마하어) 등 여러가지 류형이 있어 세계 언어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어란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로 되여 있어 론문이 수집한 언어들의 신빙성을 의심케 하였다. 《조선어는 어떻게 수집했습니까?》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한국 류학생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를 지적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영어 ⟨아이 러브 유⟩에 대한 번역문으로는 인정이 되나 조선말로 사랑을 나누는 련인들이 사용하는 말로는 적합한 말이 아닙니다.》 《왜 적합하지 않습니까?》 조선말을 전혀 모르는 칼에게 왜 우리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가를 설명하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리였다. 《그렇다면 코리언 남녀들은 어떤 말로서 사랑을 주고받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금방 말문이 막혔다. 사랑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 우리 민족 련인들은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종래로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얼버무려 《우리 민족 련인들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자 나름대로의 말로써 사랑을 고백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돌아간 후 나는 곧바로 옌칭도서관으로 쫓아가서 《춘향전》을 찾아놓고 리몽룡과 성춘향이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을 훑어보았다. 우리 민족의 《로미오와 쥴리엣》이라고 하는 고전 《춘향전》에서 《사랑한다》라는 말은 한마디도 찾을바 없고 《이성지합(李成之合, 二姓之合) 조흔 년분(緣分) 평생동락(平生同樂)하여 보자…》(리몽룡), 《한번 탁졍(託情)한 연후의 인(因)하야 바리시면 일편단심 이 내 마음 독숙공방(獨宿空房) 홀로 누워 우는 한(恨)는…》(성춘향) 그리고 《우리 두리 인연 매질 져그 금석뇌약(金石牢約) 매 지리랴》(리몽룡) 등 우회적 언어로 사랑의 관계설정 과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고전의 《금병매(金甁梅)》로 일컬어지는 《가루지기타령》에서도 변강쇠가 옹녀에게 《당신은 과부지요? 홀아비니 둘이서 살면 어떠하겠소?》라고 말하면서 두사람의 관계가 이루어 진다. 결국 양반계층이나 최하층의 천민계층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셈이다. 우리가 현재 널리 사용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낱말이 자전(字典)이나 자학서(字學書)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1583년에 석봉 한호가 왕명을 받들어 《석봉천자문》을 편찬하면서 《애(愛)》를 《사랑 애》라고 주석한것이 처음이다. 그후에 편찬된 《왜어류해》(1720), 《신증류합》(1756), 《전운옥편》(1799)에서 1908년에 간행된 《자전석요》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랑 애》라는 한석봉의 주석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그러나 《석봉 천자문》보다 더 앞서 편찬된 《훈몽자회》(1527)에서는 《애(愛)》를 《다슬 애》라 주석을 달았는데 《닷다》,《닷을》은 《사랑》이라는 낱말에 밀려 지금은 없어진 사랑이란 뜻의 우리 민족 고대어이다. 만주어에도 《총애한다》의 뜻으로 《도손》, 《도소롬비》라는 낱말이 있어 《다슬》은 알타이어 어원임을 간파할수 있다. 《사랑》이란 낱말의 어원은 《생각하여 헤아린다》는 뜻의 《사량(思量)》에 두고있음을 《광주본 천자문》이 《사(思)》를 《사량(思量) 사(思)》라고 한 주석에서 읽을수 있다. 그런데 그 《사량(思量) 사(思)》가 《룡비어천가》,《월인석보》, 《목우자》 등 문헌에서 《사랑(思) 사(思)》로 변모되였다가 《석봉 천자문》에서 《다슬》을 쫓아내고 《사랑 애》로 뜻이 바꿔지고 그 대신 《사(思)》는 《생각 사》로 주석이 변해졌다. 영어의 《아이 러브 유》나 한어의 《워 아이 니》는 가장 간편하게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최적(最適)의 언어라 할수 있다. 《나》와 《너》 사이에 《사랑》이란 단어가 아무런 문법적 수식이 없이 끼여진 그 말은 사랑을 전달하기 위하여 특별히 규격화된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마치 규격화되여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된 공업제품과 같아 개개인의 개성이 완전히 함몰된 상태일수 밖에 없다. 남과 녀, 로와 소, 허와 실 그리고 상하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아이 러브 유》이고 《워 아이 니》이다. 아주 쉽게, 그래서 애쓴다거나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련발할수 있는, 한번 구해놓으면 변하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쓸수 있는 조화(造花)와 같은 언어, 그러나 그기에는 생기도 향기도 없다. 그 대신 우리 민족 언어에는 그런 규격화된 사랑 전달어가 없기때문에 우리 말로 사랑을 전달해야 하는 남과 녀는 개개인의 문화적 개성을 추구할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우리에게는 《사랑을 어떻게 전달할것인가?》라는 물음에 모범답안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사랑에 한해서만은, 어떻게 표현할것인가를 묻지 마라》라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사람만의 언어로 두 사람만의 비밀이나 즐거움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을 때이다》라고 한 괴테의 눈으로 보았을 때도 누구나 입만 벌리면 튀여나올수 있는 규격화된 사랑 전달어보다 개성이 있는 두 사람만의 언어로 사랑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남녀가 훨씬 돋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동포인 피터 훼셜레는 《코리언은 사랑을 곡선적으로 은밀하게 표현할 줄 아는 슬기를 지니고 있다. 녀자 친구와의 은밀한 사이를 아무에게 알리지 않으면서 사랑의 편지를 봉하고 나서 뒷면에 나 라는 봉인을 살짝 누를수 있어 슬기롭다》라고 우리 민족 남녀들의 사랑 표현법을 극찬했다.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사랑의 표현은 진한 향기로 되여 상대에게 전해질수 있다. 2003. 7
17    (수필)남자 · 술 그리고 약속 댓글:  조회:5080  추천:63  2006-02-05
남자 · 술 그리고 약속 나는 조연현과 피천득의 수필을 즐겨 읽는다. 조의 수필은 지성(知性)적인 개성이 강한 대신 피의 글은 좀 더 정서적이지만 그들의 글에는 당신들의 삶의 정취와 여운이 흠뻑 배여 있어 읽을 때마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한잔의 차를 마주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술을 못 마신다. 《나의 무주도(無酒道)의 변》을 읽다보면 조연현은 《생리적으로 술이 받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고, 피천득은 《술》이라는 글에서 《체질》 때문에 술을 못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모두 술을 례찬했고 주당(酒黨)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술을 먹지 않는다. 나는 나의 체질이 술을 받아주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약속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않게 되었다. 60대 이상의 년륜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1957년 《반우파투쟁》으로부터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1970년대 말까지, 중국의 사회생활 전반에 만연되였던 좌경적 정치, 사상풍토를 쉽게 잊을수 없을것이다. 《반우파투쟁》이 시작되던 그해 나는 15세의 초중 3학년 학생이였다. 그 투쟁의 결과로 내가 존경하던 몇몇 선생들이 《우파》로 몰려 학교교정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선생들을 불행에로 내몬 결정적인 《죄장》들이 대부분 술좌석에서 나온 말들이였다는 사실을 나는 시간이 좀 지나서 알게 되였다. 고중 2학년 때, 나는 나를 많이 관심해주던 은사님이 입원한 병원에 병문안을 간적이 있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는 조선족 남자들은 술이 몇잔 들어가면 호언장담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것이 조직에 보고되여 당사자를 불행에로 몰아가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억압분위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술에 의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게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앞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하자.》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던 나는 선뜻 선생님의 손을 잡으면서《약속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후 은사님은 술이 남긴 화근때문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선생님이 나에게 씌워 준 약속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점차 깨닫게 되였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학생 식당에서는 명절 때마다 술을 공짜로 제공해주었다. 그때의 학생식탁은 《팔선탁(八仙卓) 》이라는 정방형 식탁이였는데 식탁마다 포도주 한병, 그러니까 매 8명에 술 한병씩 차려진 셈이다. 그리고 그때의 포도주라는것도 지금 흔히 볼수 있는 《중국건홍(中國乾紅)》이요 《장성건백(長城乾白)》이요 하는 식의 꼬냑형 와인이 아니고, 당분 함유량이 높고 알콜 함유량이 낮은 술이여서 누구라 할것없이 무난하게 마실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입학식이 끝나고 저녁 만찬 때 포도주가 나왔다. 대학생이 되였다는 긍지에 부푼 학우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 잔을 들고 《건배》의 짜릿한 맛과 멋을 함께 즐기였다. 그런데 나만은 그 금주(禁酒)의 약속때문에 학우들과 함께 휩쓸릴수 없었다. 그때 나는 완전히 따돌림당한 기분이였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 동학들은 술이 생길 때마다 반에서 유일하게 술을 안 마시는 나에게 술을 권하면서《술도 안 먹으면 어찌 사나이 대장부라 할수 있느냐》라고 빈정거리는것이였다. 대학 5년 동안, 그것도 멋 모르게 자존심이 한참 강했던 그 시절에, 술을 안 먹기때문에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라는 야유를 들을 때마다 찐하게 다가오는 치욕감을 고스란히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엄청난 고역을 치르게 되였다. 그러한 고역이 지속되면서 나는 무의식중에 《내가 진짜 사나이로서 무엇이 부족한것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에 빠져 쉽게 해탈할수 없었다. 그러다가 졸업을 맞이하게 되였고 학우들은 학교부근의 음식점에서 작별을 위한 마지막 만찬을 마련하였다. 5년간의 우정과 오늘의 리별 그리고 내일의 행운을 위하여 60명의 동학들은 차례로 건배하게 되였다. 모두가 함께 하는 건배가 끝난후 친구였던 고(顧)군이 술잔대신 찻잔으로 건배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내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놓고 맥주잔을 쥐여주면서 래일 서장으로 떠나가는 자신을 축복해달라는것이였다. 대학시절 테니스를 함께 치면서 친구가 된 고군은 광서출신의 한족동창이였는데 자진해서 서장으로 가게 되였다. 지금과 달리 그때에는 대학졸업생 전원이 국가의 통일분배를 거쳐 직장이 결정되던 시절이였다. 나는 본 대학의 조교로 발탁되여 좋은 직장이 차려졌고 친구인 고군은 삶의 환경 조건이 가장 열악한 서장으로 배치되였던것이다. 그때 나는 술을 안 먹는다는 리유로 고군의 부탁을 거절한다는것은 돌아올수도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친구에게 축복해주기를 거절하는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선생님과의 약속이 제동을 걸기 전에 나는 고군을 축복하여 맥주잔을 들었고 고군을 위해 그리고 북경을 떠나 멀리 변방으로 가게 되는 동창들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동창들을 축복하여 단숨에 500CC짜리 맥주잔 3개를 비웠다. 문자 그대로 일명경인(一鳴驚人)의 순간이였다. 놀라서 눈이 둥그레졌던 동창들은 한결같이 기립 박수를 쳐주었다. 이렇게 나는 평생 처음 술을 경험하게 되면서 선생님과의 약속을 깨쳤고 술에 대한 동정(童貞)도 잃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더 귀중한것들을 얻게 되였다. 우선 나는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킬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도 남 못지않게 술을 마실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였다.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5년간 내 가슴속에 묻어온 치욕감(술을 못 먹기 때문에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라는)을 훌훌 털어 버릴수 있었으며 불주(不酒) 콤플렉스에서 해탈할수 있었다. 《나도 술을 마실수 있다. 다만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시지 않을 뿐이다. 남들이 사나이 대장부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술의 유혹을 이겨내면서 약속을 지키는것이야말로 사나이대장부가 아니면 해낼수 없는 장한 일일것이다.》 그후부터 나는 긍지를 갖고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수 있었고 다시는 그 약속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였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나는 약속을 주문하신 선생님의 참뜻을 올바르게 읽어낼수 있었다. 사회전반이 열병을 앓고 있던 그 시대를 살면서 무사히 살아남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생님은 금주(禁酒)라는 호신부(護身符)를 나에게 달아준것이였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고중 동창 10여명이 북경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한달에 한두번정도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술좌석에 모였던 사람들이 국외에서 밀반입된 소책자를 돌려가며 읽은것이 화근이 되여 그들 다수가 감옥에 수감되여 옥고를 치르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술을 안 먹는 나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할수 있었다. 반우경(反右傾), 사회주의 교육운동, 문화대혁명 등 운동을 차례로 겪으면서 선생님의 본뜻대로 금주의 약속은 여러번 나를 위기상황에서 보호해주었다. 투쟁의 철학이 사회생활의 기본가치로 인정되던 그 시대가 사라지면서 선생님과의 약속도 존재의 가치를 잃게 되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 술을 먹지 않는다. 《술도 모르고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애주가들의 말을 귀 아프게 들으면서 대학 때부터 술과 관계없는 곳에서 인생의 재미를 찾기 시작한것이 40대가 되면서 고칠래야 고칠수 없는 습관처럼 되어버린것이다. 남들이 술을 마시면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을 사귈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취향으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을 사귀였다. 자신의 전공외에 음악, 미술, 문학에 기웃거리기도 했고 테니스, 배드민턴, 수영, 스케이팅, 등산, 낚시 등 스포츠를 선호했으며 카드놀이, 바둑, 장기에서 마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임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술 외에도 삶의 정취는 어디서나 찾을수 있다고 믿게 되였다. 한문으로 쓴 시가 신문에 발표되거나 전각(篆刻) 작품이나 작사, 작곡한 노래가 발표되였을 때 아마추어답게 희열을 느끼면서도 그 분야의 친구들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지는것도 어쩔수 없었다. 《외도》중에서 내가 가장 긍지를 느끼게 된것은 미술에 대한 사랑이 밑거름되여 세번이나 800만원 이상 가치의 예술품 감정(鑑定)을 해낸것이고, 내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은 문혁초기 별 볼일 없어 의학공부를 좀 한것이 문제되여 군 부대농장에서 로동단련을 할 때 《맨발의사》자격으로 주변 농민들의 병을 봐준적이 있고, 1985년에는 할빈시 위생국으로부터 할빈시조선족병원 명예원장으로 정식 임명받은 것이다. 선생님과의 약속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술의 자리는 완전히 비여있다. 그 빈자리를 꽉 채워메운것이 바로 여러가지 취향이다. 그 취향들을 쫓아버리고 자리를 다시 비워 술을 쏟아붓는다는것도 당초에 술의 자리를 비우던것 못지 않게 어렵다는것을 불혹의 나이에 터득하게 된것이다. 그렇다 해서 나의 인생에서 술이 전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입으로 먹는 술의 자리는 비여 있지만 글로 읽는 술의 자리는 남 못지 않다. 술에 대한 글은 대체로 세가지로 구분되는데 예찬론, 혐오론 그리고 중용론이 그것일것이다. 예찬론의 백미는 《가장 좋은것이 뭔지 아나? 술에 취해 물가 모래밭에서 잠자는 것이야》라고 한 아르튀르 랭보의 명언일것이고, 혐오론중에 가장 정곡을 찌른 사람은 《모든 악덕중에 음주만큼 성공을 방해하는것은 없다》고 한 영국시인 월터 스코트일것이다. 중용론으로는 우리가 평시에 자주 듣게 되는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요, 과음하면 독약이다》라는 말이겠지만, 그보다 더 해학적인 속담을 1992년 몽고를 방문했을 때 울란바또르의 한 애주가가 들려준적이 있다. 《술을 마시면 죽는다, 그러나 마시지 않아도 죽는다》. 한국시인 조지훈은 술 마시는 사람들을 18등급인 9급 9단으로 나누고 있다. 나는 9급인 불주(不酒)급에나 속할는지 모르겠다. 아주 못 마시진 않으나 잘 안 마시는 사람이니까. 2003. 5
16    (수필)이순의 인생 댓글:  조회:5164  추천:52  2006-01-27
이순의 인생 나는 남들보다 좀 일찍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셈이여서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반에서 제일 어린 축에 속했다. 고중까지는 그런대로 모르고 지냈으나 대학에 진학하여 한족 동학들이 나를 부를 때 성씨 앞에 《소(小)》자를 붙여 호칭하면서부터 나는 부지불식간에 《꼬마 콤플렉스》를 앓게 되였다. 그것도 열여덟살 때부터 한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기를 련 42년간이나 지속해 왔기때문에 교환교수나 객원교수로 국외대학에 가있던 몇년을 제외한다해도 내 인생의 3분의 2라는 긴 시간을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였다.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선배나 동창 출신의 교수들이 계속 성씨앞에 《소》자를 붙혀 호칭하는 바람에 그 호칭은 40여년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게 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서 살아온것 같다. 누가 회갑을 치른다는 말을 들을 때에도 그것은 으레 나와는 관계없는 남의 일로만 여겨왔고 언젠가 나도 회갑을 치르게 될것이라는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소》자를 붙여 나를 호칭해주던 마지막 동창출신 교수가 은퇴하면서부터 나는 서서히 늙음을 지각하게 되였다. 회의장이나 회식장소에서 나는 좌상자리에 앉게 되였고 나에 대한 호칭도 《로(老)》자 일색으로 변했다. 그러던 중에 나는 달갑지 않은 회갑을 맞이하게 되였다. 나의 생일이 음력으로 1943년 2월 2일이니까 금년의 양력 3월 4일이면 만 60세가 된다. 종래로 생일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몇몇 제자들이 찾아와서 회갑을 치르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단연히 거절했다. 우선 회갑을 맞이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가까이 있는 석, 박사생들이 정성껏 마련한 생일잔치로 회갑연을 대체하게 되였다. 60세가 되였다는 것은 바로 늙는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 아무리 현대인들의 자연년령이 옛날 사람들보다 10여년이 더 연장되였다고 해도 60이 넘으면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생물학적으로 나타나는 육체의 로쇠현상은 어쩔수 없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늙음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관념과 문화적습관인식은 거의 부정적이다. 로인은 더 이상 쓸모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인식은 정년퇴직과 맞물려 더더욱 뚜렷해진다. 따라서 늙음은 두려움과 저주, 혐오, 기피의 대상으로 될 수밖에 없고, 많은 사람들은 60이후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인생이나 부록과 같은 인생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늙음의 문화적표상을 거슬러 생각을 달리 해볼수도 있다. 생애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면서 정신적 성숙을 내포한 늙음에 긍정적의미를 부여해보는것이다. 공자는 《론어》에서 《60이 이순(六十而耳順)》이라 하여 60대를 이순으로 정의했다. 나이 예순에는 어떠한 말을 들어도 억지가 없이 만사를 사리대로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여유로워졌다는 뜻이다. 이순의 인생경지에 이르려면 세상살이의 다양성을 인식할수 있어야 하고 원숙한 인생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년륜이 60만 되면 누구나 자연히 이순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반백이 된 머리칼을 염색해서 늙음을 감추려 애쓰는것보다는 반백을 자연스럽고도 아름답다고 생각해보는것이 훨씬 슬기로울수 있다. 생물학적인 로쇠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정신적 탐색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이순의 경지를 이루어 갈수 있을것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이상 누구라 할것없이 자기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갖게 된다. 젊은이들은 과거가 짧은대신 미래가 까마득할 만큼 길다. 그러나 60년 이상의 과거를 갖고있는 로인들은 자연히 미래가 짧을수밖에 없다. 자연의 섭리가운데서 모든 인간에게 가장 공평한것은 현재를 뜻하는 오늘이다. 생기발랄한 20대 청년에게 있어서나 래일이면 죽을지 모르는 로인에게 있어서나 길고 짧음이 없이 오늘의 하루는 모두 24시간이 된다. 과거는 돌이킬수 없는 시간들이다. 아무리 권력있고 돈있고 재간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거를 고쳐 살수는 없다. 그대신 미래는 불확실하다. 누구나 미래를 예측할수는 있겠으나 모든 것이 예측대로 될수는 없다. 때문에 인간이 확실하게 지배할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어제도 아니고 래일도 아닌 오늘을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간을 조물주(가령 조물주가 있다고 한다면)는 남과 녀, 로와 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있다. 그러한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각자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젊은이의 오늘은 반드시 값진것이고 늙은이의 오늘은 꼭 허무한것만은 아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관계없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사회생활에 참여하면서 크든 작든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의 하루는 뜻있고 값질수 있다. 영국의 철학가 베이컨(Bacon) 은 《고목은 불을 때기에 좋고, 오래 묵은 술은 마시기에 좋고, 오랜 친구는 믿을수 있어 좋고, 로련한 작가의 작품은 읽을만 해서 좋다》라고 해서 오랜 세월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원숙해지고 로련해진 늙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60평생은 《문화대혁명》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자족하게 된다. 끈질긴 노력으로 불민한 나도 대학의 교수로 될수 있었고 동료교수들 못지않은 연구업적도 쌓아왔다. 가족생활에서 훌륭한 아내를 맞이할수 있었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도 무난하게 자라나 이제는 자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에게도 생각조차 떠올리기 싫은 과거가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없이 자라면서 인간세상의 온갖 고초를 겪어보았으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는 가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겪게 된 10년이나 지속되였던 《문화대혁명》은 내 인생의 황금시절을 빼앗아갔다. 그렇지만 나는 자유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기때문에 삶의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낼수 있었다. 누군가가 60이후의 인생은 죽음을 준비해가는 인생이라고 했던 글을 본적이 있다. 자신의 생애를 어떻게 정리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것인가를 각오하는 시간이라는 것이였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을 리해할만하다. 개혁개방을 맞이하여 7개 나라의 10여개 대학에 쫓아다니며 가르치고 배우고 했던 《불혹(不惑)》의 40대 인생과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여 20여권의 책을 출판하고 6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면서 민족의 발전을 위한 현실참여로 눈코뜰새없이 보냈던 《지천명(知天命)》의 50대 인생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이제 이순의 인생을 맞이하였으니 죽음도 지척가까이 와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는 한 나의 귀중한 삶의 시간을 죽음과 련관시키고 싶지 않다. 비록 죽음이 래일 아침에 찾아온다해도 나는 오늘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고 싶다. 《인생을 산다는것은 리허설이 아니며, 장담할수 있는것은 단지 오늘뿐이라는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인생이 얼마나 멋진것인지 늘 잊고 산다는게 아이러니지요. 살아갈 날이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많이 해야 할텐데, 까맣게 잊고들 지냅니다. 삶의 여백을 만들고 진짜로 사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라고 애너 퀸들런이 《어느날 문득 발견한 행복》이라는 책에서 지적한것처럼 확실하고 멋진 오늘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제 회갑을 보냈으니 몇년 더 지나가면 나도 정년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여도 삶의 희망과 용기를 갖고 하루하루, 한해한해를 충실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될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가장 귀중한 시간은 내가 살고있는 오늘 이 순간이고, 가장 귀중한 사람들은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삶의 참뜻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충실해질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의 래일은 또 다른 하루의 오늘이 될 것이다. 2003. 2
15    (수필)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댓글:  조회:4840  추천:59  2006-01-26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나는 항상 삶을 하나의 행운으로 생각한다. 빈곤과 풍요,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 이 모든것을 떠나서 나는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봄날, 눈 녹은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풀들의 싱그러움에 취해버릴수 있는것도, 여름날 땀을 흘리며 등산한 끝에 산등성이의 고목 그늘에 누워 시원한 바람으로 목욕하면서 내 자신도 이 아름다운 자연에 녹아 들어간듯한 느낌을 느낄수 있는것도, 가을날 락엽이 쌓여있는 공원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드높아진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흰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볼수 있는것도, 그리고 눈 오는 겨울날 숲속 오솔길을 걸으면서 리유없이 기분이 상쾌해질수 있는것도 우선 내가 살아있기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어서 한 오리의 연기가 되여 대기속에 사라지고 한 줌의 재가 되여 어디인가에 뿌려진다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볼수도 느낄수도 없을것이다. 살아있기때문에 나는 강의를 할수 있고 제자들을 가르칠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수 있고 쓰고 싶은 글을 쓸수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의 애환에 따라 울수도 웃을수도 있다. 또한 여행을 다닐수도 있고 등산을 하고 수영을 하고 스케트를 탈수도 있다. 내 가족이나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할수 있고 나를 관심하는 사람들에게 때아닌 성을 낼 경우도 있으며,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구에게 들이닥친 불행때문에 슬퍼할수도 있고 또 옛 동창이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수도 있다. 살아있기때문에 나는 사랑할수 있다. 나는 내 안해와 자식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가 일하고 주거하는 생활공간과 주변 자연환경, 인문환경도 사랑한다. 내 민족과 내 나라도 사랑한다. 나는 항상 사랑할수 있어 행복하다. 만약 내가 죽어서 한 오리의 연기와 한 줌의 재가 되였을 때 나는 분명히 이 모든것들을 할수 없을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삶을 우리는 수십년정도밖에 누리지 못한다. 간혹 백살을 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너무나 드물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귀중히 여길수밖에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죽음은 수시로 우리의 삶을 빼앗아갈수 있다. 전쟁, 질병, 재해와 사고 등 수없이 많은 함정들이 인간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이나 그러한 함정에 빠져든적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서 두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갑자기 일어난 화재로 나는 머리에서 손에 이르는 부위까지 중화상을 입게 되였다. 지금도 내 얼굴의 왼쪽 부분과 왼쪽 손등에는 그 때의 화상흉터가 력력히 남아있어 나는 추남(醜男)으로 일생을 살아왔다. 사고 당시 마을에 유일한 한의사가 와보고 살릴수 없는 애니까 포기하라고 할머니에게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온갖 정성을 몰부으시면서 나를 지켜주셨다. 약이 없어 상처에 된장을 발라 감염을 막아주었고 오직 사랑이란 약으로 나를 치유시켰다. 아무리 추남의 삶이라 해도 나는 저승사자의 손에서 생명을 다시 찾아준 할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삶에 충실하려고 한다. 또 한번은 1996년에 학술조사를 나갔다가 강서성 경내에서 내가 타고 가던 승용차가 마주 오는 차와 정면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사태여서 《아차!》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나를 구조하여 근처 병원에 옮겨주었고 병원에서 이마 가장자리에 난 상처를 봉합하여 지혈시킨 후 구급차로 남창시에 있는 성립병원으로 옮겨갔다. 이튿날 나는 비행기로 북경에 이송되여 치료 받게 되였다. 첫 이틀동안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간간이 의식이 회복되는 상황을 반복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있었던것이다. 흉터투성이인 나의 얼굴에 그것도 이마의 가장자리에 초승달모양의 흉터를 추가시킨 이번 사고로 나는 매일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았다는 인도의 어느 국왕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삶과 죽음사이는 《아차》 할 겨를도 없는 순식간일수도 있다. 죽음이 접근한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상황에서 죽어간 사람들에게 《준비된 죽음》 이라든가 《죽을 때 후회가 없도록》한다는 식의 설교는 아무런 련관성도 없는 빈말일수밖에 없다. 설사 불치병으로 장기 투병하다가 죽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림종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건강할 때부터 《죽음을 준비》 한다면 그러한 삶은 너무나 소극적일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매일 죽는 련습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죽을 때 후회가 없을가를 생각하거나 매 하루를 인생을 마감하는 날처럼 산다 할 때, 그러한 삶에 무슨 꿈이 있겠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을수 있으며 원대한 계획과 도전이 있을수 있겠는가. 죽음과 관계없이, 살아있는 오늘의 삶에 충실하다보면 살아있든 죽게 되든 언제나 떳떳해질수 있다고 생각된다. 종교인들은 래세가 있다고 믿고 있기때문에 짧은 인생을 어떻게 리해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종교인이 아니기때문에 내 삶의 시간적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럴수록 삶의 귀중함을 더 자주 되새기게 되고 살아있는 한 그 귀중한 삶을 죽음과 련관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열심히 일하면서 진실된 사랑을 나누면서 생활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할뿐이다. 설령 내가 래일 아침 죽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살아있는 오늘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꾸준히 일하겠지만 결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일은 하지 않을것이다. 《비록 래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한 루마니아 문학가 게오르규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태여난다. 모든 생명의 최종 귀추는 죽음이지만 한 마리의 쥐에서부터 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은 죽기 위해 태여나지 않는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지 삶의 목표가 아니다. 때문에 죽음을 위한 삶은 있을수 없다. 《우주에는 많은 생명이 있다. 생명의 본질은 살고자 하는것이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은 고귀한것이다》.《아프리카의 태양》 으로 불리우던 노벨평화상 수상자 프랑스 의사 시바이쩌의 명언이다. 의사였으며 동시에 철학가였던 그는 아프리카의 꺼져가는 생명을 구제하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나는 살아서 숨쉬는 동안만은 죽음을 거부하고 싶다. 죽음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죽음에서 공상적인 요소를 제거해버린다면, 자연적인 현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그렇다면 보귀한 삶의 시간을 죽음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을 갖고 호들갑떠는데 랑비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삶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 나는 영원한 죽음으로 귀의하게 될것이지만 그러나 나의 생물적 생명은 유전자 형태로 자식을 통해 연연해질것이고 나의 학문의 생명은 나의 글과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것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여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금방 피여난 꽃에서 찾아볼수 있는 삶의 발랄한 생기를 만끽하게 된다. 그래서 살아있는 나의 하루하루는 즐겁기만 하다. 2002. 6
14    (수필)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 댓글:  조회:4924  추천:55  2006-01-25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나는 지금까지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왔다. 《이름 없다》라는 말을 사전에서《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라고 풀이하고 있는것만 보아도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기 혼자만 사용하는 이름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간혹 례외가 있을수도 있다. 보통 이름하면 본명(本名)을 가리킨다. 《호(號)》,《자(字)》, 《필명》등 본 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름은 역시 본 이름이다. 본질적으로 따지면 이름은 남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한 사람, 한 사람마다의 기호(記號)이다. 그런데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의 문화수준과 취향, 그리고 시대적 영향때문에 우리는 주변에서 중복되는 이름을 자주 듣게 된다. 례를 든다면 1960년대 이전에 작명된 이름가운데 《춘자》, 《영자》, 《숙자》하는 식의 이름이 자주 중복되였으나 《문화혁명》기간에 지어진 이름에는 《설매》, 《홍매》하는 《매》자가 든 이름이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중복되는 이름도 역시 남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개인의 이름이다. 《춘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이름이 중복되는 녀성이라는것외에는 아무런 련관성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춘자》들을 한 개 무리로 묶을 수 있는 아무런 공동분모도 없다. 그 대신 어느 《개인》보다도 어떤 특수 부류에 속하는 《그룹(群體)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호칭이 있다. 우리 민족 습관에서 《남편이 죽어서 혼자 사는 녀자》들을 《과부》라 하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어난 자식》들을 《유복자(遺腹子)》라고 부른다. 유복이란 뜻은 아버지가 자식을 어머니배속에 남겨두고 죽었다는 뜻이다. 《과부》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유복》이란 이름도 어느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룹인》호칭일 뿐이다. 그래서 《유복》도 태여나서 남들과 구별하기 위한 개인의 이름이 지어지게 되고 다만 어릴 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아명(兒名)》처럼 《유복》이라고 불리우는 경우가 가끔 있을뿐이다. 그런데 나는 시골에서 유복자로 태여나서 이름 지어주는 사람이 없어 어려서부터 막연하게《유복》으로 불리였다. 내가 살던 동네에 또 다른 《유복》이 있었지만 그 소년은 개인의 이름이 따로 있어 학교 다닐 무렵에 《유복》이란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러나 남들과 구별하기 위한 개인 이름이 따로 없는 나는 《유복》이란 이름을 학교에까지 갖고 갔다. 그때의 광경이 가끔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오른다. 1950년 초봄, 일곱살 생일을 갓 지낸 나는 고향인 쌍하진에서 제2완전소학(조선족 소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때만 해도 봄학기에 학생모집을 할 때다. 시골에서 소학교 입학 등록하는 날이 되면 명절을 지내는 기분이 된다. 학부모들은 새 옷으로 차려입은 애들을 데리고 학교에 나와 운동장이나 현관에 삼삼오오 몰려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애들은 교도주임 사무실 밖 복도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한 사람씩 불려 들어가 입학 등록을 하게 된다. 등록할 때 신입생들의 지능(IQ)을 검사하기 위하여 본인 이름과 부모의 이름, 고향 그리고 10이나 100까지의 수를 세게 하는데 그것도 시험이라고 우리는 무척 긴장해져 있었다. 드디여 차례가 되여 사무실에 불려 들어간 나는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교도주임 앞에 서게 되였다. 테이블 옆 의자에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들인 젊은 녀자선생이 앉아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선생이라고 하는 그 녀는 나의 첫 학기 담임선생이였다. 교도주임이 낀 각테 안경때문인지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에 눌린 나는 겁에 질려 버렸다. 《성이 뭐냐?》교도주임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하셨다. 《황가예요.》 《이름은?》 《유복이예요.》 그 동안 등록부에 무엇인가를 적던 교도주임은 머리를 들어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또 다른 이름이 있을 것 아니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 물음을 도무지 리해할수 없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였다는 느낌이 앞서면서 《이제는 퇴짜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옆에 앉아 있던 김선생이 종이에다 무엇인가 적어서 교도주임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교도주임이 머리를 끄덕여 수긍하자 김선생은 일어서서 그 종이 장을 나에게 건네주시면서 《있을 유(有)》자에 복《복(福)자, 너의 한자 이름이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후에 있은 일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등록을 마치고 사무실 문을 나설 때 김선생이 따라 나오면서 《축복 받을 이름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고치지 말아라》고 당부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어 고맙다는 인사말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사람들을 피해 교실 뒤에 있는 살구나무 숲으로 뛰여 들어갔다. 부들로 삼아 신은 신발자국과 함께 눈물자국이 채 녹지 않은 숲속 흰 눈 위에 뚜렷이 찍혀졌다. 두 살 때 여의게 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던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가끔 김선생을 어머니로 생각해 보군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 김선생은 어디론가 멀리 시집갔고 그후 에는 종무소식이였다. 좀 더 커서 나는 입학 등록 때 있었던 대화의 뜻을 깨우치게 되였다. 내가 주장했던《유복》이란 이름은 어느 개인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여난 자식》들 모두가 사용하는 《그룹인》의 이름이였고 설사 어느 개인이 류용하더라도 배《복(腹)》자를 한자 이름으로 쓰기에는 너무나 고민되는 일이였기때문에 교도주임이 그렇게 나를 쳐다보았던것이였다. 그리고 김선생은 《有福》이라는 우리말 동음 한자로 《遺腹》을 대체시키는 방법으로 내가 계속 《그룹인》 의 이름을 빌려 쓸수 있도록 배려해준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글자가 변했기 때문에 적어도 한자 이름만은 내 개인의 이름을 갖게 된셈이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나는 이름으로 인한 새로운 갈등을 경험하게 되였다. 1961년 9월, 중앙민족대학 력사계에 입학한 후 친하게 된 동창들이나 은사들로부터 《有福》이란 이름은 너무 촌스러우니 고치라는 종용을 자주 받게 되였다. 그들은 하다못해 《有》자를 한어에서 동음자인 《友》자로 고치라고 권고해 왔다. 그들의 호의를 받아드린다면 이름의 한어 음은 변한게 없지만 우리말 발음은 《우복》으로 변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지금까지 없었던 내 개인의 이름이 생기게 되고 다시는 《그룹인》의 이름을 빌려 쓰지 않아도 되는 리점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이 생길 때마다 이름을 고치지말라고 당부하던 김선생의 말씀이 떠올라 나는 한족들이 촌스럽다고 하는 이름을 그대로 고집해 왔다. 1966년 6월,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문화혁명》이 발발하면서 나는 이름 때문에 생각 밖의 시련을 겪게 되였다. 《문혁》초기의 《홍위병》들은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 (破四舊)》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의 숙소 문 밖에 홍위병들의 《대자보》가 붙여졌다. 《봉건주의 악취가 물씬 풍기는《有福》이란 이름을 24시간 내에 고치라. 그렇지 않을 경우 《혁명적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최후 통첩이였다. 그 당시 소위 《혁명적 조치》라는것은 사람의 머리에 종이로 만든 고깔을 씌우고 거리에 끌고다니거나 《투쟁대회》를 열어 《투쟁》하는것이였다. 고민끝에 나는 그 어떤 가혹행위가 가해지더라도 이름만은 고치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시간을 보내느라고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 어록》이라는 작은 책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엥겔스 어록가운데서 《가난한 사람은 유복하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였다. 《맑스, 엥겔스 전집》제1권 제561페이지에 수록된 《런던에서 온 편지⟫라는 글에서 발췌한 어록이였다. 나는 흥분되여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 대여섯명의 홍위병들이 찾아왔다. 나는 그들 두목에게 《어록》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나서 《너희들은 혁명도사의 가르침을 무엇으로 여기느냐. 엥겔스께서 가난한 사람은 유복하다 하셨는데 너희들은 도리여 봉건주의로 몰아부치고 있으니 도대체 어쩌겠다는거냐》라고 기분 좋게 훈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안》과 《용서》를 련발하면서 물러갔다. 그 후 나는 《궁인시유복적(窮人是有福的)》이라는 여섯 한자로 전각 인장을 만들어 호명(護名)용으로 사용하게 되였다. 다시 십여년이 지나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였다. 1980년, 나는 중국 조선족 종교문제 현지 조사를 해보았다. 조사 보고서는 국가 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 종교국에 제출되였고 일년이 지나 《중국 조선족 종교문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였다. 보고서에 우리말 성경출판의 필요성이 제기되였고 그 후우리말 성경 출판과 관계되여 국가 종교국의 도움으로 《성경》을 입수할 수 있었다. 짬이 나는 대로 조금씩 읽어보다가 나는 또 한번 깜짝 놀라게 되였다. 《성경》의 《누가 복음⟫제6장에서》 가난한 자는 유복하나니》라는 구절을 읽게 된 것이였다. 다시 엥겔스 어록과 대조해 보니《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라는 전 구절을 엥겔스는 《성경》에서 인용했던 것이였다. 그것이 확인 되는 순간 나는 우선 김선생을 생각하게 되였다.《아, 그 분은 크리스천이셨구나. 그래서 부모 없는 가난한 어린이를 위하여 《有福》이라는 한자 이름을 쉽게 생각할수 있었고 《축복 받은 이름이니 고치지 말라》고 당부하셨구나.그후 나는 여러 사람을 통해 수소문 해보았으나 김선생을 다시 찾을수 없었다. 《성경》에서 한자 이름의 원류를 찾았을 때의 흥분이 가라앉고 차분해진 나는 《그래도 한자 이름만은 내 개인의 이름》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꿈에서 깨여나고 말았다. 2000여년 전에 생긴 유대민족의 신화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들을 축복하여《有福》하다 하였으니 나의 한자 이름 역시 《그룹인》이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우리 말 이름도, 한자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불혹지년》을 코앞에 두고 뒤늦게야 이름이 없음을 깨닫게 되였으니 어딘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그 나이에 이름을 새로 짓는다는 것도 싱거운 일이고 또 왜서인지 김선생의 당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나는 계속 이름도 없이 살아가고있다. 이름은 어디까지나 한사람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니까 없다 해서 못살것도 아니고 이름없는 대신 나는 좀 더 개성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있다고 생각해 보니 그런대로 살맛이 난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이름은 없어도 나만의 인생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2001. 9
13    (수필)택호 댓글:  조회:5053  추천:59  2006-01-24
택 호 20세기와 함께 사라진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가운데서 가장 아쉽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택호》라는 호칭문화이다. 어릴 때 나는 동내 할머니들이 우리 집이나 우리 할머니를 《남호댁》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자주 들어왔다. 《남호댁이 뭐예요?》라고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우리집 택호란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내가 택호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은 수십년이 지나고서였다. 거의 모든 이민일세들이 다 그랬겠지만 할머님은 꿈에서도 당신의 그리운 고향을 잊지 못했다. 아들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왔지만 10년도 않되는 사이에 아들과 며느리를 여의고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가고 계시던 할머니는 당신께서 생전에 고향땅을 밟지 못 하더라도 손자가 커서 뿌리를 찾아가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집에 떡이나 별미가 생기면 할머니는 나를 불러 놓고 먼저 고향과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의 성함을 줄줄이 외우게 하였다. 거침없이 선친의 성함과 함께《강원도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지금은 울진군이 경상북도에 소속되지만 광복전에는 강원도에 속했다)》하고 고향주소를 외우게 되면 상을 주듯이 떡을 먹게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의도적으로 내 머릿속 뇌세포에 새겨넣어준 그 정보로는 뿌리를 찾을수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생전에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방문초청을 받은 것은 1983년 서울대학교 문화인류학과가 주최하는 학술회의 초청이였다. 그런데 그때는 《남조선》이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지구상에서 중국공민이 갈수 없는 나라로 지정되여 있었기 때문에 나의 한국방문 꿈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서독의 보홈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독일학자 휜들링그씨가 서울대학교의 학술회의에 참석했다가 나를 대신해 선친의 고향을 방문하여 산골마을에서 하루밤을 자면서 나의 소식을 그쪽 친척들에게 알려주었고 고향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 나에게 보내왔었다. 휜들링그박사는 1982년에 처음으로 나를 유럽한국학학계에 소개한 학자였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나의 서울행기회가 좌절된 사실을 알게 된 휜들링그는 편지를 통해 나의 선친 성함과 고향주소 등 필요한 정보를 갖고 갔던것이다. 그런데 그는 족보에서 나의 위치를 찾아내는 일만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접하고 나는 그가 독일학자이기 때문에 한자에 익숙하지 않아 족보를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88년초에 나는 두 번째 한국방문초청을 받게되였다. 88서울올림픽개막식전야에 개최될 올림픽국제학술회의의 초청이였다. 그때 나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환교수로 보스턴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뉴욕주재 중국 총령사관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리붕(李鵬) 국무원 총리가 직접 사인한 한국방문 공식허가를 받을수있었다. 서울에서 학술회의와 올림픽개막식에 참석한 후, 올림픽국제학술회의 조직위원회는 한국의 10개 대학의 특강부탁을 하면서 한국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나는 주저 없이 선친의 고향이라고 했다. 그들의 배려로 나는 대학특강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타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을 떠나 승용차로 대전, 대구, 경주를 거쳐 포항까지 도착했고 포항에서 다시 동해안을 따라 흥해, 영덕을 거쳐 평해에 도착하였으며 평해에서 좌회전하여 백암온천쪽으로 가다가 다시 좌회전하여 덕산리에 도착할수 있었다. 덕산리는 아직도 황씨 친족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황씨문중의 최년장자의 집을 찾아갔더니 반시간도 않되여 온 마을사람들이 다 모이였다. 몇년전 키가 큰 독일인이 대신하여 왔다간 적도 있었고 또 중국 북경의 어느 대학 교수로 알고있었는데 이번에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명찰까지 달고 왔으니 고향사람들에게 비쳐진 나의 이미지는 《금의환향》한 《선비》정도가 아니였나 싶다. 나의 첫 고향방문은 이렇게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저녁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하는 푸짐한 잔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집안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앉아 족보를 앞에 놓고 나의 위치를 찾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성함은 족보에서 전혀 찾아볼수가 없었다. 결국 휜들링그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을 한자에 상당히 익숙한 나도 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집안어른들은 이전 사람들이 평소에 쓰던 이름과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은 다르다고했다. 그리고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은 할머니도 모르실거라는 것이 였다. 족보는 족인의 일종의 신원보증서이기 때문에 족보에서 위치를 찾아낼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정체성은 확인될수 없게 된다. 고향사람들과의 촌수도 따질 수 없고 상하 세대관계도 계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과 《우리》라는 일체를 이룰수도 없다. 나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말문이 막혀 옴을 느끼게 되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그나마 탈출해 보려고 나는 될수록 화두를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몰아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할머니의 택호가 《남호》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밖에《기적》이 일어났다. 좌석에 앉아계시던 아저씨뻘(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되시는 세분 로인께서 이구동성으로 《남호댁아지매!》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급히 족보를 뒤적이다가 《여기 있다》라고 하였다. 나도 목을 길게 빼고 족보를 들여다보았는데 할아버지 족보 성함자아래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수자돌림의 낱선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고 아버지함자아래에는 만주로 이민 갔다고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다. 혼돈은 사라지고 천지개벽이 일어난것처럼 모든 질서가 순식간에 정립되였다. 앉아 계시는 모든 분들과 나 사이의 상하 세대관계와 촌수관계가 금방 확정된것이다. 고향에는 나의 7촌, 9촌 숙부님들과 8촌, 10촌 형제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6촌형님 두분이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음을 알수있었다. 《택호》에 대한 사전적해석은 《장가든 곳의 땅 이름을 붙여 그 사람의 집을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고 있다. 쉽게 말한다면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오기전에 남호리라는 마을에서 살았는데 결혼후 그 친정마을이름이 시집의 이름으로 된것이다. 옛날 호칭법이 까다롭던 시절, 결혼을 하여 어른이 되면 아무리 웃 세대라도 그냥 이름을 부를수 없었다. 그러한 호칭상의 불편을 덜수 있었던 지혜가 바로 택호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결혼하여 어른이 된후 개인의 이름보다는 할머니의 친정마을 이름으로 된 《남호댁》이란 택호로 통했기때문에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마을 로인들은 할아버지의 성함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택호는 기억하고 있었것이였다. 택호가 그렇게 중요한 문화적 기호라는것을 나는 첫 고향방문에서 절실하게 체험했다. 2005. 7
12    (수필)태항산 기슭에 핀 들국화 댓글:  조회:4702  추천:37  2006-01-23
태항산 기슭에 핀 들국화 가을이란 계절은 모순투성이다. 적어도 수필가들의 눈에 비춰진 가을은 그렇다. 우선 가을은《풍요로운 계절》,《열매의 계절》,《수확의 계절》이고 《희열이 넘치는 보람찬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그 많은 나무의 잎들에 황금빛의 도금(渡金)을》 시킨 《생애의 황금기인양 잘 성숙된 숲》(마숙현)의 계절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가을은 《외적인 찬란함과 그보다 더 값진 내적인 성숙을》(이지엽) 선물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례찬론자들은 《사시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사랑》(정비석)한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가을의 《숲속에서는 고즈넉함이 있을뿐이고 외로움은 없다》(한흑구)고 한다. 그런데 가을 혐오론자들에게 느껴지는 가을은 《텅빈 들판》의 《한없이 쓸쓸한 계절》이고 《락엽이 굴러다니는》 《리별의 계절》이자 《외로운 계절》이고 《고독한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고 《우울한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철중에서 가을을 제일 싫어한다》(노천명)고 그 심정을 토로한다. 차분히 음미해보면 례찬론자들은 수확전의 황금들판과 단풍이 곱게 물든 락엽 지기전의 숲을 이야기하고 있고 혐오 자들은 수확후의 텅빈 들판과 잎들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을 련상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풍성한 결실을 위한 합일의 계절인 봄이나 여름과는 달리 가을은 성숙과 분리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함께 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대지는 눈부시게 찬란한 색채와 내실을 이룬 성숙으로 황금기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대지는 그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당신의 소산인 풍성한 열매들을 인간과 동물들에 미련없이 나누어주고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겨울이 가져올 흰색의 이불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이불을 덮지 못한 어머니대지의 라신을 가리여주기 위해 아름다움을 뽐내던 단풍잎들은 나무에서 분리되여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분리는 사라짐이 아니다.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온 락엽들이나 추수가 끝난 논밭에 남아있는 곡식의 그루터기들도 봄이 오면 거름으로 되여 새로운 잎이나 열매로 태여나게 된다. 그런데 가을을 쓸쓸한 계절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늦가을의 산과 들에서 무엇인가를 간과해버린것이 분명하다. 기운이 쇠잔해진 가을햇살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찬 서리를 걷어낼 때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과 락엽들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 있는 들국화의 매력을 잠깐만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나 《서글픈 계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여섯살 때 처음으로 들국화를 알게 되였다. 나의 고향인 영길현 쌍하진에서는 보통 10월초에 벼가을을 하게 된다. 가을걷이 때가 되면 나는 할머님을 따라 논밭으로 나가 추수를 마친 논바닥에 흘리어진 벼이삭을 줍거나 빈병을 갖고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아 모으기도 했다. 바람이 좀 쌀쌀해질 때 할머니는 금방 베어낸 벼단을 세워 바람막이《집 》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 속에 들어앉아 햇볕을 쪼이곤 했다. 뛰여다니는 메뚜기를 쫓다보면 논밭이 끝나는 논둑까지 가게 되는데 바닥까지 말라버린 작은 도랑을 건너면 자갈들이 뒤섞인 들판이 펼쳐지게 된다. 들판에는 내 키 정도로 자라나 시들어버린 쑥대들과 잡초들이 무성한데 그 사이사이에 이름모를 꽃들이 무더기로 피여있었다. 노란 꽃술을 중앙에 두고 연한 보랏빛 꽃잎들이 동그랗게 둘러있는 야생화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꽃들이 숨막힐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꽃을 한줌 꺾어서 열심히 낫질을 하시는 할머니곁으로 뛰여가 《할매요, 꽃》했더니 《응, 들국화꽃이구나》 하면서 계속 일손을 놀리시였다. 점심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린 들국화꽃묶음을 발견하시고 《아무리 임자없이 들판에 피여있는 꽃이라도 일단 꺾었으면 함부로 버릴것이 아니라 집에 가져가 병에 꽂아 두든지 아니면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타이르셨다. 나는 그 꽃다발을 다시 주워 들고 집에 돌아와 몇 개의 병에 나누어 꽂아 창턱에 놓아두었다. 언젠가 할머니는 꽃받침대에서 말라버린 꽃을 따서 내 베개속에 넣어주셨다. 그날부터 한 겨우내 나는 들국화의 특이한 꽃향기에 취해 잠들게 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들국화를 할머니의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꽃중에서 들국화를 제일 사랑하게 되였다. 고향을 떠난후 타향에서 들국화를 볼 때마다 할머님의 사랑으로 커온 어린시절과 고향의 들녘을 회상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 당고구에 주둔하던 해방군부대에서 《단련》할 때, 나는 어느날 홀로 들국화가 활짝 피여있는 바다가 들판에 누워 인생을 반추해 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날 저녁에 쓴 한시 한수를 인용해본다. 七絶---野菊有感渤海碧濤連天涌,幽州素雲接地隱.叢菊兩開兒時願,孤魂一系南湖心.(1967年10月20日) 그날 나를 울게 한 들국화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방황하던 나에게는 분명히 망향초(望鄕草)였다. 지난해 10월 중순, 태항산 항일 반소탕 전투승리 60주년을 기념하여 태항산 오지에 위치한 산서성 좌권현에서 개최될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기 위하여 태항산을 간적이 있다. 회의가 끝난후 나는 회의참석자들과 함께 태항산에 묻힌 조선의용군렬사들의 전적지와 묘소들을 찾아 참배하게 되였다. 산서성 좌권현과 하북성 섭현, 찬황현의 태항산기슭에 고이 잠들어있는 조선의용군렬사들의 묘소를 찾았을 때, 가는 곳마다 묘소주변에는 한결같이 들국화들이 만개해 있었다. 처음 나는 들국화로 꽃다발을 만들어 렬사들의 령전에 헌화하려고 마음먹었다가 가을바람에 설레이는 들국화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바꿀수밖에 없었다. 태항산은 이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들국화를 무더기로 선렬들에게 봉헌해 놓았는데 내가 왜 그 꽃들을 꺾어가면서 꽃다발을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국화의 숲속에 엎드려 렬사들의 묘소에 재배(再拜)의 큰절을 드렸다. 참배가 끝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무엇에 홀린듯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찬 서리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여있는 태항산기슭의 들국화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선렬들의 넋으로 내 눈에 다가왔다. 2004. 1
11    (수필) 태항산 기슭에 핀 들국화 댓글:  조회:4706  추천:55  2006-01-20
가을이란 계절은 모순투성이다. 적어도 수필가들의 눈에 비춰진 가을은 그렇다. 우선 가을은《풍요로운 계절》,《열매의 계절》,《수확의 계절》이고 《희열이 넘치는 보람찬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그 많은 나무의 잎들에 황금빛의 도금(渡金)을》 시킨 《생애의 황금기인양 잘 성숙된 숲》(마숙현)의 계절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가을은 《외적인 찬란함과 그보다 더 값진 내적인 성숙을》(이지엽) 선물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례찬론자들은 《사시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사랑》(정비석)한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가을의 《숲속에서는 고즈넉함이 있을뿐이고 외로움은 없다》(한흑구)고 한다. 그런데 가을 혐오론자들에게 느껴지는 가을은 《텅빈 들판》의 《한없이 쓸쓸한 계절》이고 《락엽이 굴러다니는》 《리별의 계절》이자 《외로운 계절》이고 《고독한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고 《우울한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철중에서 가을을 제일 싫어한다》(노천명)고 그 심정을 토로한다. 차분히 음미해보면 례찬론자들은 수확전의 황금들판과 단풍이 곱게 물든 락엽 지기전의 숲을 이야기하고 있고 혐오 자들은 수확후의 텅빈 들판과 잎들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을 련상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풍성한 결실을 위한 합일의 계절인 봄이나 여름과는 달리 가을은 성숙과 분리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함께 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대지는 눈부시게 찬란한 색채와 내실을 이룬 성숙으로 황금기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대지는 그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당신의 소산인 풍성한 열매들을 인간과 동물들에 미련없이 나누어주고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겨울이 가져올 흰색의 이불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이불을 덮지 못한 어머니대지의 라신을 가리여주기 위해 아름다움을 뽐내던 단풍잎들은 나무에서 분리되여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분리는 사라짐이 아니다.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온 락엽들이나 추수가 끝난 논밭에 남아있는 곡식의 그루터기들도 봄이 오면 거름으로 되여 새로운 잎이나 열매로 태여나게 된다. 그런데 가을을 쓸쓸한 계절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늦가을의 산과 들에서 무엇인가를 간과해버린것이 분명하다. 기운이 쇠잔해진 가을햇살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찬 서리를 걷어낼 때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과 락엽들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 있는 들국화의 매력을 잠깐만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나 《서글픈 계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여섯살 때 처음으로 들국화를 알게 되였다. 나의 고향인 영길현 쌍하진에서는 보통 10월초에 벼가을을 하게 된다. 가을걷이 때가 되면 나는 할머님을 따라 논밭으로 나가 추수를 마친 논바닥에 흘리어진 벼이삭을 줍거나 빈병을 갖고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아 모으기도 했다. 바람이 좀 쌀쌀해질 때 할머니는 금방 베어낸 벼단을 세워 바람막이《집 》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 속에 들어앉아 햇볕을 쪼이곤 했다. 뛰여다니는 메뚜기를 쫓다보면 논밭이 끝나는 논둑까지 가게 되는데 바닥까지 말라버린 작은 도랑을 건너면 자갈들이 뒤섞인 들판이 펼쳐지게 된다. 들판에는 내 키 정도로 자라나 시들어버린 쑥대들과 잡초들이 무성한데 그 사이사이에 이름모를 꽃들이 무더기로 피여있었다. 노란 꽃술을 중앙에 두고 연한 보랏빛 꽃잎들이 동그랗게 둘러있는 야생화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꽃들이 숨막힐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꽃을 한줌 꺾어서 열심히 낫질을 하시는 할머니곁으로 뛰여가 《할매요, 꽃》했더니 《응, 들국화꽃이구나》 하면서 계속 일손을 놀리시였다. 점심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린 들국화꽃묶음을 발견하시고 《아무리 임자없이 들판에 피여있는 꽃이라도 일단 꺾었으면 함부로 버릴것이 아니라 집에 가져가 병에 꽂아 두든지 아니면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타이르셨다. 나는 그 꽃다발을 다시 주워 들고 집에 돌아와 몇 개의 병에 나누어 꽂아 창턱에 놓아두었다. 언젠가 할머니는 꽃받침대에서 말라버린 꽃을 따서 내 베개속에 넣어주셨다. 그날부터 한 겨우내 나는 들국화의 특이한 꽃향기에 취해 잠들게 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들국화를 할머니의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꽃중에서 들국화를 제일 사랑하게 되였다. 고향을 떠난후 타향에서 들국화를 볼 때마다 할머님의 사랑으로 커온 어린시절과 고향의 들녘을 회상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 당고구에 주둔하던 해방군부대에서 《단련》할 때, 나는 어느날 홀로 들국화가 활짝 피여있는 바다가 들판에 누워 인생을 반추해 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날 저녁에 쓴 한시 한수를 인용해본다. 七絶---野菊有感渤海碧濤連天涌,幽州素雲接地隱.叢菊兩開兒時願,孤魂一系南湖心.(1967年10月20日) 그날 나를 울게 한 들국화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방황하던 나에게는 분명히 망향초(望鄕草)였다. 지난해 10월 중순, 태항산 항일 반소탕 전투승리 60주년을 기념하여 태항산 오지에 위치한 산서성 좌권현에서 개최될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기 위하여 태항산을 간적이 있다. 회의가 끝난후 나는 회의참석자들과 함께 태항산에 묻힌 조선의용군렬사들의 전적지와 묘소들을 찾아 참배하게 되였다. 산서성 좌권현과 하북성 섭현, 찬황현의 태항산기슭에 고이 잠들어있는 조선의용군렬사들의 묘소를 찾았을 때, 가는 곳마다 묘소주변에는 한결같이 들국화들이 만개해 있었다. 처음 나는 들국화로 꽃다발을 만들어 렬사들의 령전에 헌화하려고 마음먹었다가 가을바람에 설레이는 들국화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바꿀수밖에 없었다. 태항산은 이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들국화를 무더기로 선렬들에게 봉헌해 놓았는데 내가 왜 그 꽃들을 꺾어가면서 꽃다발을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국화의 숲속에 엎드려 렬사들의 묘소에 재배(再拜)의 큰절을 드렸다. 참배가 끝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무엇에 홀린듯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찬 서리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여있는 태항산기슭의 들국화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선렬들의 넋으로 내 눈에 다가왔다. 2004. 1
10    (수필)《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면서 댓글:  조회:4927  추천:44  2006-01-19
《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면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로 평가되는 토마스 엘리엇 (Tomas S.Eliot)의 장편시《황무지》제1부 《죽은자의 매장》의 머리부분이다. 평론가들은《황무지》가 제1차 세계 대전후의 시대적 환멸과 한번 황폐해진 인간의 심성은 더는 영적생명 을 새롭게 피워낼수 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린다는 현대문명의 불모성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 러나 정작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시인 본인은 도리여⟪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쓴 시⟫일뿐이라고 평론가들의 해석을 일축하였다. 하지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구는 나름대로 여러 맥락에서 자주 인용되여 왔다. ⟪황무지⟫라는 시와는 전혀 관계없이, 금년 북경의 사월은 우리에게 진짜 ⟪잔인한 달⟫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해마다 북경의 봄은 소리없이 조용히 찾아온다. 봄을 알리는 전령사(傳令使)는 단연코 양지바른 땅에서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며 흙을 비집고 돋아오르는 파란 봄풀들일것이다. 살 구꽃과 산도화(山桃花)가 활짝 피면서 계절감각이 무딘 사람들도 봄을 느끼게 된다. 봄바람에 민감한 버드나무는 수관 꼭대기에서부터 초록빛 잎이 피여나 서서히 아래가지로 번져 내려가고 땅기운에 예민한 백양나무는 땅에서 가까운 아래 가지에서 윗가지 로 연두빛을 옮겨간다. 황금빛 개나리가 눈부시게 피여 나고 흰빛과 연자줏빛의 목련꽃이 고고한 자태를 선보이며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여나면서 봄은 서서히 짙어간다. 이어서 복숭아꽃, 사과꽃, 배꽃, 홍매, 자등, 박태기, 해당화, 오동, 모란 등 꽃들이 줄줄이 화려한 봄의 화폭에 흰빛, 노란빛, 연분홍빛, 보랏빛, 자줏빛, 빨간빛, 연두빛의 물감을 칠하여 문자 그대로《만자천홍(萬紫千紅)》 의 계절을 성숙시킨다. 그러다 가 오월이 되여 노랑가시장미 와 라일락 그리고 아카시아가 다투어 향기를 자랑할 때 봄날은 조용히 물러간다. 봄날이 만들었던 다양한 색깔의 화려한 화폭을 하나의 진록 색으로 덮어버릴 때 여름은 우리 앞에 바싹 다가온다. 그런데 북경의 이번 봄날에는 이변이 생겼다. 그 끔찍한 일 들이 일어나게 된것은 모두가 해님탓이였다. 화사한 봄날이여 야할 사월을 《잔인한 달》로 만들어버린 장본인도 물론 해님 이였다. 사월의 시작은 여느해처럼 꽃의 물결을 몰고 서서히 찾아 왔다. 그런데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온화해야할 해님이 마치 첫사랑에라도 빠진것처럼 갑자기 뜨거운 정열을 퍼붓기 시작 했다. 섭씨30도를 넘나드는 날씨가 지속되면서 봄날은 리듬을 잃고 말았다. 북경의 매스컴들은 《이상(異常) 고온 때문에 꽃 들이 10일정도 앞당겨 피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문제는 화신(花信)보다는 화기(花期)였다. 꽃소식이 열흘정도 앞당겨 진다는 것은 초여름에 피여야 할 꽃들도 봄에 피게 했다는 말 이겠지만 동시에 그 많은 꽃들의 화기를 줄여서 락화를 재촉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경식물원이 기획한 봄꽃축제들은 플 래카드를 내걸기 바쁘게 꽃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엉망진 창이 되여버렸다. 목련축제가 그랬고 벚꽃축제, 튤립축제, 모 란축제도 마찬가지였다. 4월 7일, 나는 안해와 함께 식물원의 목련축제를 구경하러 갔 다. 목련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만개한 목 련꽃무리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환희로운 감정도 잠깐이였다. 해님의 때 아닌 성화에 못이겨 피여난지 오래되지 않는 싱싱한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기때문이였다. 아무리 오래 필 수 없는것이 꽃의 숙명이라 할지라도 그 《오래 필수 없는》 화기도 못 채우고 지고있는 락화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심정이 짙어진다. 대여섯명의 젊은 녀성들이 손 수건을 펼쳐놓고 나무 아래 떨어진 목련꽃잎을 주어모으고 있었다. 무엇에 쓸려고 줍 고있느냐고 물었더니 ⟪때아니게 떨어진 꽃잎들이 애처롭다는 생각도 안드세요?⟫라고 반문해왔다. ⟪홍루몽⟫의 주인공 림 대옥이 떨어진 꽃잎들을 주어모아 장사를 지내던 그때의 심정 을 어느 정도 리해할것 같기도 하다. 식물원을 돌아나서는데 대추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초여름 에 가서야 늦잠에서 깨여나는 잠꾸러기 대추나무도 뙤약볕을 방불케하는 따가운 해빛을 견뎌낼수 없었던지 긴 기지개를 켜면서 철갑같이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고 연두빛 새싹들을 삐 죽삐죽 내밀고있었다. 그러니 그 연약한 꽃잎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나 싶었다.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시인 이형기는 락화를 청춘에 대한 송별사로 노래했다. 바람에 휘날리며 한잎 두잎 떨어지는 꽃잎은 얼마나 아쉬운가. 동양철학가인 김근선은 락화를 심리적 감상(感傷)으로 나타 냈다. 그들이 말하는《하롱하롱》,《한잎 두잎》 지는 꽃잎은 화기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지고 있는 락화이지만 내가 이봄에 본 락화는 그것이 아니였다. 이번 사월은 봄꽃과 초여름꽃들을 함께 모아 화기도 못채운 그 아름다운 꽃들을 《대량학살》시 킨것이다. 늦가을 락엽처럼 목련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게 했고 겨울날 눈보라를 방불케하는 살구꽃, 벚꽃, 복숭아꽃, 사과꽃, 배꽃의 꽃보라가 일게 했다. 지나간 사월은 그렇게도 《잔인》했다. 해는 이 세상 모든 생물들의 생명의 원천이고 만물을 키워주 는 어머니의 품이다. 해는 모든것에게 젖을 주었나보다 동무여, 보아라 우리의 앞뒤로 있는 모든것이 햇살의 가닥-가닥을 잡고 빨지 않느냐. (이상화:⟪비 갠 아침⟫) 그 따스한《햇살》이라는《젖》을 먹고 들판의 봄풀들이 자라 나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여나며 모든 농작물과 기타 식물들이 성장하고 영글어간다. 그러나 생명의 상징으로 되는 그 해가 때에 맞지 않게 과다한 햇빛을 발산하게 되면 그에 의해 자라난 생명들도 말라죽어버리게 된다. 이번 4월에 화기를 못 채우고 분분히 떨어진 꽃들이 바로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뜨 겁게 내리비치는 햇살에 의해⟪끔찍⟫하게 ⟪대량학살⟫된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집착때문에 꽃은 아름다움, 사랑, 청 춘, 화려함, 즐거움, 번영, 영화로움 등 긍정적인 의미의 상징 물로 선택되여 왔다. 그 많은 비유나 상징가운데서 《청춘은 한순간이며 아름다운 꽃이다》라고 한 M. 오닐의 명제가 가장 설득력있게 나의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내가 제일 마뜩찮 게 생 각하는것은 《녀성은 꽃》이라는 비유이다. 그 비유에 는 남성 중심주의적 사고의 냄새가 너무 짙게 풍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프랑스의 플로리스트(꽃 장식가?)인 다니엘 피숑이《꽃은 왜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에 《꽃은 금세 시들어버리기때문에 아름다운겁니다. …뭐든지 영원하다고 하면 아름답다고 할수 있을까요.》라고 대답한 것 처럼 인생에서 청춘도 《한순간》이기때문에 아름다운것이 아 닌가 싶다. 이번 사월의 락화를 보면서 나는 지나간 나의 청춘 을 반추해 보게 되였다. 1966년, 나는 23세의 나이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발발한 《문화대혁 명》은 10년이나 지속되였고 나는 그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다가 청춘을 혼돈의 언덕에 묻고 말았다. 그때도 《붉은 태 양》이 너무 많고 뜨거운 빛을 뿌리고있었다. 이제 봄은 바야흐로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다. 해가 바뀌면 봄은 다시 오겠지만 그 봄은 또 다른 한 해의 봄일것이다. 금년의 봄은 묻혀버린 나의 청춘의 한 순간과 같이 두 번 다시 만날수 없다. 인간의 청춘이 단 한번뿐이듯이 봄도 그리고 그 봄에 피였다 사라진 꽃들도 단 한번뿐이다. 아무리 이 애틋한 봄날의 옷자락을 붙들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이 봄을 만날수 없다. 2004. 5
9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 댓글:  조회:4564  추천:53  2006-01-18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 나에게는 시작한 어떤 일이 잘 마무리되였거나 성공했을 때, 혹은 그와 반대로 좌절되거나 실패했을 때 쉽게 생각나는것이 하나 있다. 내가 어릴 때 난생 처음 만들어 본 눈사람이다. 이른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날이였다. 오후 늦게 눈이 그치고 하늘도 개이면서 날씨는 꽤나 포근해졌다. 나는 인적이 드문 집 뒷들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에 얼어서 벌겋게 된 두 손을 가끔 겨드랑이에 끼워 녹여가면서 추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작업했다. 눈사람의 머리에는 낡은 맥고자를 주어다 씌워 주고 숯덩어리로 눈썹과 눈을 만들고 할머니 몰래 움에서 빼내온 당근을 깎아 코와 입을 만들어 주었다. 어른들이 만든 눈사람보다는 왜소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눈사람이였다. 그 날 밤 나는 혼자서 예쁜 눈사람을 만들었다는 성취만족감에 도취되여 달게 잠들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뒷들에 쫓아갔다. 그러나 나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뒷들에 있던 반쯤 무너져버린 담장까지도 간밤에 기승을 떨며 몰아치던 눈보라에 묻혀 있었고 내가 만든 눈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한동안 허탈감에 빠져 울먹이였다. 나는 지금도 마음에 드는 글이나 론문을 마감했거나 학생들이 만족해하는 강의를 끝냈을 때, 혹은 남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때 가끔 나름대로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소년시절 처음 눈사람을 만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희열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또한 하던 일이 좌절되거나 실패했을 때 가끔 느끼게 되는 실의도 눈보라에 묻혀진 눈사람을 두고 울먹이던 그때의 허탈감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은 실패와 성공 그리고 그에 따르는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점철된 것이기도 하다. 자연인으로서 한 사람이 태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일지라도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실패한 사람의 경우라도 역시 나름대로의 크고 작은 성공의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성공으로만 이어지는 인생이나 반대로 실패로만 이어지는 인생은 있을수 없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가 두어발쯤 떼여 놓다가 넘어진다. 아기는 울면서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는 두팔을 벌려 아기를 안아줄 자세를 취하면서 《걸음마-쩍쩍》 아기를 격려해 준다. 아기는 다시 일어나 엄마의 품을 향해 걸음을 익힌다. 넘어지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걸음걸이를 배운 사람은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외에는 없을것이다. 크고 작은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성공의 기쁨이 기대될수 있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생겼을것이다. 젊었을 때 나는 스케이팅을 무척 즐겼다. 그런데 스케이트를 처음 배울 때 잘못 넘어져 뒤통수에 달걀만한 혹이 생긴 적도 있었고 심지어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가장 크고 아픈 실패는 첫사랑이 깨여진 결말이였다. 대학을 다닐 때 나는 내가 신명(晨鳴)이라고 부르던 사천성에서 온 녀자애와 첫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2년 정도의 열애관계는 《계급투쟁》이 사회생활 전반을 좌우하기 시작하던 불행했던 그 시대를 맞이하면서 삐꺽거리게 되였다. 내가 조선족출신이였기때문이였다.《문화대혁명》을 경험해 본 조선족사람이라면 《조선수정주의특무(朝修特务)》라는 《모자》가 란무하던 그 시대를 잊을수 없을 것이다. 《조선》이나 《남조선》과 멀리 떨어진 북경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였기때문에 나 자신이《조선특무》로 지목되거나 의심받은것도 아니다. 다만 그 많은《조선특무》들이 득실거리는 《조선족》중의 한사람이였기 때문에 신명이의 집식구들은 모두 우리의 사랑을 반대해 나섰다.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우리는 갈라졌다. 나는 거의 두달정도 숙소침대에 누워 두문불출하면서 《로신전집》을 읽었다. 그것은 첫사랑의 실패가 몰고온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나의 안간힘쓰기였다. 첫사랑의 실패는 가장 참담한 방식으로 나에게 《민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그것도 내가 중앙민족대학 《민족리론과 민족정책》이라는 학과목에서 배울수 없었던 심층적인 것을 터득케 했다. 그때의 깨달음이 《조선족》에 대한 나의 사랑의 씨앗이 되였고 나의 학문의 에너지가 되였다. 암울했던 그때 내가 썼던 시 한수를 인용해본다. 한문으로 썼던 그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번거로워 그대로 적는다. 怨 艾 记得那是童年时代的一天 我在屋后的雪地里塑起雪人, 二月里雪后的天气温和而安谧, 我玩得好生高兴,独自一个人。 傍晚寒冷的暴风雪呼啸而至, 卷来一堆堆冰雪埋没了我的雪人。 我心里怨艾: 这暴风雪是有意来夺走我的欢乐的,它的一切恶意都是对我而来的。 如今寒冬的不眠之夜孤寂而悠长, 消失的甜蜜使我的世界变得倍加惨淡。当我把败者的怨艾锁入心底时, 突然记起了埋没在暴风雪中的雪人。 (1967.2) 실패는 우선 우리에게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실패가 클수록 우리가 감수하게 되는 불행과 고통도 커진다. 그러나 그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실패는 우리가 감수했던 고통을 위해 치러는 대가보다 더 값진 깨달음을 선물해준다. 그 깨달음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2002. 10
8    (수필) 첫 사랑 이야기 - 둘 댓글:  조회:5201  추천:50  2006-01-17
첫 사랑 이야기 -- 둘 영국의 추기경이자 시인이였던 뉴우먼(New man)은 《신사론》에서 《신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남계인생수필》코너가 《도라지》에 개설되면서부터 나는 줄곧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첫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쓰다 보니 나는 이미 신사로서는 자격상실이 된것 같아 은근히 후회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가 있고《둘》이 없을수 없어 《살신성인》(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뜻이 아닌, 신사로서는 죽되 보통사람으로 된다는)의 각오로 계속 필을 들게 된다. 첫 사랑은 나의 인생에서 문화적 환경이 완전히 바뀌여지는 대변혁의 시기에 찾아왔다. 북경의 한 대학 력사학부에 입학하면서 나는 줄곧 몸담아오던 조선족학교의 조선족문화환경을 떠나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한족문화환경에 들어서게 되였다. 정원이 60여명이던 우리 반은 거의 전부가 한족학생이 아니면 만족, 회족 등 한족문화권의 소수민족이였고 유독 나만이 소수민족 학교 출신이였다. 그때까지는 아직 소수민족문자로 대학입시에 응할수 있는 제도가 없었고 다만 소수민족학교 학생들에게는 외국어와 고대한어를 시험에서 면제시켜주는 혜택이 있었을뿐이였다. 대학생활 첫주일에 나는 먼저 자신의 외국어와 고대한어 수준이 다른 학생들보다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체험하게 되였다. 고대한어는 그런대로 혼자서 노력할수 있겠으나 로어는 청강도 할수 없는상태였다. 담당강사가 학부에 상황보고를 했고 학부 교학 담당주임은 나를 불러 다른 학부로의 학적이전을 권유했다. 나는 내 전부의 자존심을 내걸고 따라잡기 위한 시간을 요청했다. 한정 시간내에 계속 청강수준 미달일 때 학부이전을 약속한 상황에서 학부주임은 흔쾌히 한 학기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로어를 자습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 바로 내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중경시에서 온 진명이라는 녀동학이 나를 찾았다. 입학후 실시된 로어실력 검정고시를 거쳐 로어과 과대표로 지정된 그녀는 나에 대한 과외지도를 자진해 나섰다. 그때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그녀가 고마웠다. 우리는 매일 아침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운동장 남쪽 숲에서 만나 한족학교 고중 로어교과서에 따라 공부하기로 약속했다. 진양은 엄격히 잘 지도해주었고, 나는 열심히 따랐다. 덕분에 석달이 지나 나는 6권의 고중 로어교과서를 독파하고 담당강사의 검정을 거쳐 정상적인 청강에 림할수 있었으며 제3학기가 마감할 때는 진양과 나란히 최우수성적으로 로어과를 마칠수 있었다. 로어 과외지도가 끝나는 날 진양은 향후 고대한어 지도를 제의해왔고 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마침 학기 중간시험 성적이 발표되면서 나의 고대한어 성적은 이미 만점으로 알려졌고 담당교수도 종합평가시간에 나를 특별히 칭찬해 주셨던 터라 그녀는 다시 과외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후 나는 한족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교수들과 동급생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한어구사능력과 외국어, 고대한어수준을 재빨리 향상시켰고, 남들이 별로 관심하지 않는 갑골문(甲骨文), 동정문(銅鼎文)에까지 관심을 갖고 공부했으며 전각(篆刻)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9개월이라는 시간이 나도 모르게 흘러갔다. 이듬해 5월, 교정의 라일락꽃이 유난히 향기를 발산하던 어느 주말에 진양은 나에게 데이트를 요청해 왔다. 북경전시관 극장에서 개봉되는 쏘련 영화 《부활》의 관람권을 구입해 온것이였다.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금방 본 영화와 레브 · 똘스또이의 원작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야기는 거의 나혼자 한 것 같다. 그후 좋은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우리는 토요일저녁을 골라 함께 영화를 보게 되였고 함께 산책하면서 영화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한 관계가 일년 넘게 지속되면서 주변에서는 우리가 련인관계라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하루 진양이 동석한 자리에서 짓궂은 한 급우가 나에게 진양과의 련애관계를 공개하라고 떠들어댔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당장 진양에게 데이트신청을 하겠다는것이였다. 나는 급급히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3-4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학교주변 우체국을 거쳐 보내온 두툼한 편지를 받게 되였다. 진양의 편지였다. 《2년전 로어과외로 시작된 당신과의 만남과 접촉은 어려운 사정에 처한 소수민족동학에 대한 나의 동정심에서 출발된것입니다.》그러나 《당신에 대한 리해가 깊어지면서 나는 그때의 〈동정심〉이 얼마나 유치한 선입견이였는지를 깨닫게 되였습니다.》《식을줄 모르는 탐구욕, 깊이를 잴수 없는 지혜, 해박한 지식, 문학과 예술의 재능 그리고 선량하고 정직한 인품, 당신의 그 모든것들이 하나의 항거할수 없는 힘이 되여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나는 2년동안 당신이 언젠가 저에게 사랑을 선언할것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당신이 영원히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때문에 불안해지고 있습니다……》진양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무엇인가 잘못 되였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답장을 썼다. 《당신은 내가 존경하는 선생이였고 은인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저는 조선족출신입니다. 조선족남자는 타민족 녀자와 결혼하지 않는 전통적인 풍속이 있습니다.》 편지가 전달된 다음날 진명은 청강하러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빈자리를 보는 순간 나는 죄장감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진명의 친구들이 그가 몸져누웠다고 알려주었다. 그녀의 자리가 이틀, 삼일째 비여지면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처음 나는 그것이 어려운 고비에 나를 도와주었던 은인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죄책감으로 생각하여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고민이 깊어지면서 나는 그것이 아니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녀가 있어야할 자리가 비여져있을 때 내 마음속에 와닿는 허전함과 불안함은 과연 무엇일까? 《타민족과 결혼할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동안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쉽게 사랑과 무관한 친구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나는 그녀가 이미 내 가슴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였다. 진명이 결석한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 《당신이 겪고 있는 그 엄청난 마음의 고통이 나로 하여금 〈고정관념〉의 가면을 벗을수 있게 하였소,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의 진실을 찾을수 있었소.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소. 다만 그 가면때문에 볼수 없었던것이였소.》고통으로 창백해졌던 그녀의 얼굴이 행복으로 새롭게 피여날 때의 그 예쁜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랑을 약속하면서 우리는 《약법3장(約法三章)》을 채택하였다. 《①사랑은 두 사람의 학업에 장애가 될수 없다. ②사랑은 분수에 넘는 소비나 사치와 련관될수 없다. ③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결혼과 같은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였다. 우리의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누군가가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것 같다. 우리가 열애하면서 함께 본 영화가운데 《2×2 =5》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웽그리아 영화가 아니였나 싶다. 계산으로 말하면 완전히 틀린, 그래서 계산되지 않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뜻이였을것이다. 《약법3장》과 함께 약속된 우리의 첫사랑이 《계산》이란 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관계없이 우리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2003. 1
7    (수필) 첫 사랑 이야기 - 하나 댓글:  조회:4450  추천:38  2006-01-16
첫 사랑 이야기 - 하나 인류가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낱말가운데 《사랑》이란 단어보다 더 다양한 해석이 란무하고 있는 낱말은 없을것이다. 굳이 다른 《사랑》은 다 제쳐놓더라도, 사전에서 남녀가 서로 애틋이 그리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는 남녀간의 《사랑》만 해도 수천수만가지 《해석》들이 범람하고 있다. 철학가들은 《사랑》이 정신적인것이냐 육체적인것이냐를 갖고 수많은 주장들을 펼쳐왔고, 인류학자들은 남방(열대지역)인들의 사랑은 《정감형》으로, 북방(온대지역)인들의 사랑은 《리상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소설가나 시인들은 세상에 알려진 모든 아름다운 말과 모든 오탁한 말들을 등장시켜 사랑을 노래하거나 저주하고 있다. 사실 《사랑》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약속이기때문에 누구도 그 사랑을 모방하거나 복제해낼수 없는것이다. 따라서 열사람의 사랑은 열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수 있다. 아니 열가지 이상의 해석도 가능하다. 가령 한 사람의 《더없는 행복》으로 체험되던 사랑이 형언할수 없는 고통으로 전환되였을 경우, 그 사람의 사랑에 대한 리해는 달라질수밖에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랑》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각도 다양하니 말이다. 한국의 법정스님은 《오해》란 글에서 《사랑》을 《오해》라고 규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리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따라서 그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지도 모른다고 꼬집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랑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의 정답을 찾기 위해 인간들은 전혀 식을줄 모르는 《탐구심》을 과시하면서 끝없이 새로운 주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사랑》에 서수사 《첫》자를 붙였을 때 쉽게 풀이할수 있는 사람 또한 드물것이다. 어떻게 보면 첫 사랑은 한 인간이 사랑할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이성을 찾기 위한 선택과정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그 한 사람의 이성을 찾아 우리는 사랑의 인생 려행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첫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사이의 소중한 약속으로 시작될수도 있고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될수도 있다. 또한 어느 특정 이성에 대한 소년기의 사모를 사랑으로 간주할수 있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첫 사랑의 상대는 달라질수도 있다. 때문에 첫 사랑이란 말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첫 사랑이 누구였는가 라는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는지 의문스럽다. 소년시절에 나의 가슴속을 질러간 사랑은 늘 혼자만의것이였다. 소학교 3학년 때 나는 H양이라는, 반에서 제일 예쁘게 생긴 소녀와 나란히 한 책상을 쓰게 되였다. 그녀의 빨갛게 상기된 동실한 얼굴에는 항상 맑은 웃음이 어리여 있었던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자리를 같이 한 그날부터 H양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든가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때의 《사랑》은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자라나서 덤덤한 상태로 존재했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그 《사랑》의 흔적은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그녀는 고향에서 살고 있고 나는 늘 언젠가 꼭 만나보아야 되겠다고 그리워하면서도 단 한번이라도 만나려고 노력해본 적은 없다. H양에 대한 나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할수 있는지는 나도 판단하기 어렵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였다면 H양은 나의 첫 사랑이였을것이다. 고중 1학년 때 학교 앞 송화강변에서 가끔 만나는 소녀가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의 미인인 S양은 주일날 오후 2시부터 송화강변을 따라 한시간쯤 산책을 하군 했었다. 그런데 S양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항상 수심에 잠겨 있는듯 하였다. S양을 만나기 위하여 나는 같은 시간에 그녀의 산책길에 나타나군 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를 따라 산책해보기도 하고 좁은 산책길에서 마주지나쳐 보기도 했으나 그녀의 관심을 모으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언젠가 그녀는 산책길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몇주일째 나가 기다렸으나 헛수고였다. 후에 우연히 알게 된 일이지만 S양은 페결핵으로 장기치료를 받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때 내가 느꼈던 마음의 허전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춘기에 생긴 사랑의 감정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첫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자신이 없다. 고중 때 친구중에 C군이 있었다. 어느 한 겨울방학에 C군은 나에게 녀자친구를 소개해주었다. 서란조선중학교에서 공부하는 E양은 문학소녀였고 C군과는 한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수수한 용모였지만 C군은 문학에 대한 취향이 같다는 점을 력설하면서 련애대상자로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서너번 문학에 관한 편지를 교환하였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될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소개받은 첫 소녀였지만 첫 사랑과는 인연이 없었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첫 련애편지를 받게 되였다. 음악과 무용에 특별한 소질이 있었던 고중동창 K양은 학교 무용서클의 안무였다. 졸업하고 헤여진지 2년만에 그녀는 내 고향의 소학교에서 음악과 무용선생으로 취직하게 되였다는 소식과 함께 뜨거운 련애편지를 보내왔다. 가령 K양이 2년전에 그러한 편지를 나에게 전해주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완전히 다른 인생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K양이 편지에서 형용한 현명하고 다감한 그리고 열정적인 인간이 아니라오. 력사학도의 생활을 K양은 잘 모를것이오. 2년동안 나는 옛 선비들이 남긴 고서더미에 묻혀 바깥세상을 잊고 공부에 전념해왔다오. 누렇게 변질한 책들의 숨막히게 하는 오탁한 공기가 일으킨 화학반응으로 마음의 감정은 분해되여 찾을바 없고 두뇌의 리지만 남아 있는 상태라오. 지금도 나는 지난날 K양의 구애편지와 그것을 거부한 나의 답신을 읽을 때마다 그녀가 그 후에 겪었던 모든 불행에 대해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수가 없다. 나의 사랑다운 첫 사랑은 앞에서 이야기한 일들이 있은 후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한 첫 사랑들을 경험하지 않았었더라면 나의 《완전》한 첫 사랑이 있을수 있었을가 의심이 간다. 세계적 정신분석학자인 융의 리론에 따르면 남자들의 정신내면에는 《애니마(anima)》라고 하는 녀성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애니마를 이성에게서 찾는다. 즉 자기 마음속의 애니마와 닮은 녀성을 찾았을 때 금방 반해버린다는것이다. 융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애니마를 밖에서 찾아헤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H양도, S양도, E양도, K양도 내가 내 마음속의 애니마를 밖에서 찾아헤매일 때 우연히 만났던 소녀들일 것이다. 바로 그녀들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사랑은 소년기와 사춘기의 헤매임을 거쳐 좀 더 성숙된 첫 사랑을 찾아낼수 있었을것이다. 그래서 그들과의 만남을 나는 《첫 사랑》으로 마음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2. 10
6    (수필)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 댓글:  조회:4835  추천:58  2006-01-13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황유복 를 읽다 보면 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김선달이 람루한 옷을 입고 한 부자집 잔치에 갔는데 문지기가 들여놓지 않아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다시 좋은 옷을 빌려입고 갔더니 이번에는 들어갈수 있었다. 음식상을 마주한 김선달은 우선 맛있는 음식들을 집어 소매속으로 넣으면서 많이 먹으라고 중얼거렸다. 주인과 옆자리 손님들이 놀라서 물으니 ⟪잔치에 초대된것은 내가 아니고 이 옷이지 않느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위그르족의 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보다 사람이 입고 있는 옷(재부)을 더 중요시하는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를 뼈저린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학교 1학년을 마감할 무렵이였다. 학교강당에서 시상식이 있었다. 나는 학년말 시험에서 1등을 했던터라 교도주임이 1학년 수상자이름을 부를 때 수석으로 호명되였다. 내가 일어서려는 순간, 반주임선생이였던 H선생은 나의 어깨를 손으로 눌러 제자리에 주저앉혀놓고, 다른 학생을 대신 단상에 올려보내 상장과 상품을 받아오게 하였다. 시상식이 끝난후 H선생은 상을탄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거리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물론 수석을 차지했던 나는 그들과 함께 사진관으로 갈수 없었다. 그때 내가 당한 수모는 나의 람루한 옷때문이였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쉽게 짐작할수 있었다. 그들이 사진관으로 갈때 나는 조용히 우리 집부근에 있는 냇가 버드나무숲을 찾았다. 홀로 숲속에 앉아 실컷 울고난 다음 차분히 지난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 가난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설날 설빔으로 단장한 동네애들과 어울릴수 없었던 고독함, 가끔은 끼니를 걸러야만 했던 굶주림의 고통, 처음 학교를 가게 되는 어린 손자에게 옷 한벌 못해 입히는 안타까움 때문에 밤새 소리없이 눈물 흘리시던 할머님의 아픈 심정…… 나는 가난을 그런 정도로 리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해 보고나니 그것만이 아니였다. 가난은 학교에서 1등을 한 어린 학생이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을수 있는 기쁨마저 빼앗아가는 괴물이였다. 그때 나는 세상에 가난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것이라고 생각하게되였다. 그날 나는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옆집 친구들로부터 그날 일을 전해들은 할머니는 저녁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귀가한데 대해 할머니는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으셨다.저녁식사가 끝난후 할머니는 밥상을 마주하고 나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가장 중요한것은 네가 1등을 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밖의 일들은 있어도 없어도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네가 좋은 옷을 입고 단상에 올라가 상을 탔다 하더라도 너의 1등에 뭔가 더 보태질것도 없고, 남이 너 대신 상을 타다 주었다 해서 너의 1등에 무엇이 부족해진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오늘 일에서 너는 무엇인가 깨달아야 한다. 가난은 가끔 사람들의 마음을 군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가난의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의 자세를 가질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사람이다. 때문에 가난이란것은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것처럼 불행한것만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아쉬움일뿐이다. 아쉬움이 없는 넉넉함을 지향하면서, 너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어른으로 크게 된단다…⟫그날밤 나는 할머님의 품속에서 달게 잠들수 있었다. 그후에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가난은 줄곧 딱친구처럼 나의 인생을 동무해주었다. 남들이 입는 좋은 옷을 입을수 없었고, 남들이 먹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없었으며, 보고싶은 영화도, 사고싶은 책도 불가능케 했다. 한마디로 가난은 나의 생활에 제동을 걸어놓고 불편을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불행중의 다행이라면 나에게 공부할수 있는 외길만은 열어놓고 있었던것이다. 가난은 결코 ⟪문화대혁명⟫당시의 관념처럼 자랑거리로 되거나 행복한 일로 될수는 없다. 가난은 사람에 따라 어쩔수 없는 무능함이 될수도 있고, 게으름과 직결되는 부끄러움으로 될수도 있다. 그러나 가난은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바가 더욱 많다. 우선, 가난은 인간에게 불편함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주면서 세상을 정확하게 볼수 있는 혜안(慧眼)을 선물해준다.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속에서, 세상을 보는 인간의 눈은 밝아진다. 그리고 가난은 인간에게 의욕을 선물한다. 불편함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노력을 자극하기때문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꿈이 있기 마련이다. 그 꿈은 인간으로 하여금 눈앞의 가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심을 갖게 한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는⟪굶어 보아야 세상을 안다(굶주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참으로 알았다 할수 없다는 말)⟫거나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 산다(젊어서 고생하며 열심히 일하면 잘 살수 있다는 말)⟫등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할것 없이 짧은 인생을 부족함 없이 잘 살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함과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뜻의 넉넉한 삶을 살아갈수 없다.2002. 5
5    (수필) 옥년이와 봇나무 댓글:  조회:5963  추천:53  2006-01-12
옥년이와 봇나무황유복 나는 가끔 꿈에서 고향마을 뒷동산 언덕에 서있는 봇나무를 만난다. 어릴 때부터 봇나무를 무척 좋아했기때문일것이다.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여러 종류의 나무와는 달리 흰색의 줄기와 수없이 많은 작은 잎들과 잔가지들이 모아져서 무성한 수관(樹冠)을 이룬 미인형 ⟪체형⟫때문에 멀리서도 한눈에 구별된다. 닭 무리 가운데 한 마리의 학이 서있는 광경은 본적이 없지만 고향의 산기슭에 서있는 봇나무를 볼 때면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말을 실감나게 상상할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젊은 시절 련인에게 주는 ⟪시⟫에서 가끔 봇나무를 읊조리기도 했다. 신명에게 너는 내 꿈속의 언덕우에 홀로 서있는 봇나무 , 너의 우아하고 유연한 모습에서 나는 아름다움의 참뜻을 깨닫게 되였다. 너는 내 꿈속의 하늘가에 붉게 피여 나는 저녁노을, 너의 불타는 마음에서 나는 사랑의 참뜻을 깨닫게 되였다. (1963)(给晨鸣 你是在我的梦之山岗上伫立着的白桦在你那优雅的婀娜多姿里我悟到了美的真谛。 你是在我的梦之天际里 漂浮的晚霞 在你那燃烧的心里 我悟到了爱的真谛。) 한문으로 작성되였던 원문도 그렇지만 다시 우리 글로 옮겨보니 시라고 하기에는 꼴불견이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얼마나 봇나무를 좋아했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용해본다. 열여덟살 때 고향을 떠나 북경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나는 줄곧 북경에서 살게 되였다. 그런데 북경주변의 들이나 산에서는 봇나무를 찾아볼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 교구에 주둔하던 해방군부대에서 ⟪단련⟫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트럭을 타고 북경시 통현역에 가서 동북에서 실려 나온 원목을 부리게 되였는데 내가 하역작업을 하던 차량에는 전부 봇나무 원목이였다. 쉬는 시간에 봇나무 껍질을 적당히 벗겨 간직했다가 병영으로 갖고 왔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서 책갈피에 끼워뒀다가 여가 시간에 오리고 붙이고 해서 그림을 만들면서 고향생각을 달래기도 했다. 그때 썼던 산문시를 옮겨본다. 미란다에게 내 고향의 산에는 봇나무가 많습니다. 줄기는 새하얗고 무성한 잎은 파랗습니다. 푸른 소나무나 사시나무와 함께 섞여 서있을 때 수려하고 우아한 풍경은 절경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기억되지만 어린 시절 해빙계절이 되면 어린 친구들과 함께 삼삼오오 산에 올라 신나게 놀다가 손칼로 봇나무 껍질을 짜개면 수정 알 같은 즙액이 뚝뚝 떨어지는데 컵에 받아 모았다가 단숨에 마시면 시원하고 향기롭고 감미롭기 그지없었습니다. − 기유년 세말 천진을 떠나 북경시 통현역에 도착하여 화목하역작업을 하면서 고향생각이 나 봇나무 껍질을 벗겨 돌아오다. 《백모녀》의 발레무용자세를 그림으로 만들어 미란다에게 주노라. (1969) (给米兰达 余之家乡山岳多桦矣。桦之树干洁白,茂叶油绿。或与青松翠杨参差并立,秀丽高雅绝此景致耳。尚记得孩童时,每遇解冻节气,三五童友上山玩耍,置利器于桦皮,晶莹滋液滴答而下,适盛于皿,一饮而尽,清凉芬芳,甘美可口。 巳酉年季,离津来京,抵通县车站卸货,遇此桦木,唤吾乡念。乃取其皮而归。绘制《白毛女》舞姿赠于米兰达。1969. 12. 天津塘沽) 이렇게도 나의 가슴깊이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간직된 봇나무를 접하거나 생각할 때마다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첫사랑의 련인이 아닌 어릴 때의 친구 옥년이다. 그런데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옥년이의 모습은 가무잡잡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꾀죄죄한 옷차림, 그 어느 하나도 이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옥년이는 내가 어릴 때 사귀였던 첫 번째 친구였다. 댓살 나던 해, 나는 할머님으로부터 혼자 옥외에 나가 놀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어느 날, 집 마당에서 혼자 놀던 나는 싸리울타리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내가 입고 있는 옷보다 더 람루한 옷을 입고 신뒤축이 꺽인 부들신을 신은 처녀애였는데 왼쪽 옆구리에는 싸리로 엮어 만든 광주리를 끼고 있었다. 내가 좀 놀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건네 왔다. 우리 같이 놀지 않을래? 고독했던 우리는 쉽게 가까운 사이로 될수 있었다. 나보다 대여섯살 우인 그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온갖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고 람루한 옷차림때문인지 마을 애들에게 따돌림받고 있었다. 나는 떼를 써서 옥년이와 함께 저녁노을이 피고 있는 서산에 오를 수 있었다. (수필:《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도라지)2001년 제4기)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동무해주곤 했다. 들이나 냇가에 가서 달래를 캐거나 미나리를 꺾을 때도 그랬고 산에 올라 더덕을 캐거나 참취를 뜯을 때도 그랬다. 옥년이는 아는것이 무척 많았다.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냇가에서 자라는 참쑥, 냉이, 달래, 미나리, 방가지똥, 고들빼기, 두릅, 참취, 고사리, 더덕, 도라지⋯⋯ 등 식용할 수 있는 나물 그리고 꽃과 열매, 풀과 나무에 대한 많은 상식을 나는 옥년이에게서 배웠다. 강에 나가 가재를 잡다가 으슥하게 후미진 곳에 소용돌이치는 물이 있으면 거기에는 물귀신이 있어 생사람의 머리를 잡아 물밑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접근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산에 갈 때면 끄트머리에 담뱃진을 바른 나무 막대기를 지팡이처럼 갖고 다니게 했는데 뱀이 담뱃진냄새를 제일 겁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봇나무에 대해서도 그는 많은 것을 배워주었다. 봇나무는 잔가지가 무성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큰 가지 하나만 짜르면 마당빗자루로 쓸 수 있다. 이른 봄날 산에 올라 더덕을 캐다가 목이 마르면 손칼로 봇나무 껍질에 Y자형 상처를 내고 흘러내리는 즙을 그릇에 받아 마시면 시원한 음료수가 된다. 그런데 옥년이는 나에게 봇나무에 대한 상식보다 더 중요한 삶의 리치를 가르쳐주었다. 사귄지 일년 남짓하여 옥년이네는 어디론가 이사가 버렸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녀에 대한 소식을 모르고 있다. 비록 짧은 사귐이었지만 옥년이는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친구였고 스승이였다. 가난과 계모의 학대때문에 열살이 넘도록 남들이 다 다니는 학교 문앞도 못가 본 옥년이였지만 그녀는 나를 대자연이라는 《학문》에 입문시킨 훌륭한 계몽 선생님이였다. 옥년이는 대자연과 더불어 욕심을 버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순수한 아름다움에로 인도했다. 길림을 떠나 북경의 한 대학에서 생활해 온지도 사십여년이 되지만 그동안 나는 인생의 수많은 고비들을 옥년이에게서 배운 《학문》으로 풀어왔다. 처음 대학에 진학하여 한어수준이 너무 낮아 마음이 초조해 졌을 때, 첫사랑의 연인과 헤어지면서 마음의 상처가 깊었을 때,《문화대혁명》에 대한 몰리해로 심리적 갈등이 심해졌을 때⋯⋯ 나는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하였다. 가까이는 자죽원(紫竹園)이나 오탑사(五塔寺)의 숲을 찾았고, 멀리는 이화원북쪽의 서산에 올라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나뭇잎들의 속삭임속에서 산책하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수 있었다. 스트레스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는 최선의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것이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첩경은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였다. 그것은 어릴 때 옥년이가 나에게 터득시킨 삶의 리치였다. 나는 지금도 봇나무를 무척 좋아한다. 봇나무는 내가 평생을 살면서 찾았던 아름다움의 상징이였기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욕심에 따라 보탠것도 빼버린것도 없다. 쉰살이 넘으면서 나의 머리에 내린 흰 서리는 점점 짙어가고 있다. ⟪머리염색만 하면 십년은 젊어지겠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나는 단 한번도 염색해본적이 없다. 젊어지는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젊어지고 싶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살아가고 싶었기때문이였다. 지금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때문에 미쳐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짙은 화장으로 겉모습을 돋보이게 하려는 정도가 아니고 수술칼을 들이 대여 쌍거풀을 하고 코를 높이고 턱뼈를 깎아내고⋯⋯ 수많은 돈을 쏟아부으면서 성형수술로 얼굴이나 신체의 근본을 고치려 하고 있다. 칼로 째고, 깎아내고, 붙이고 해서 현대인들의 외모가 더 예뻐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때문에 싸우고, 리혼하고, 자식을 내다 버리고, 자신의 무능과 비겁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술로서 자신을 마비시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 생활속의 아름다움은 분명히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만들어진 아름다움보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봇나무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그렇고 역경을 이겨나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어린 옥년이의 삶의 모습이 그렇다. 2002. 1
4    (수필) 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 댓글:  조회:5148  추천:62  2006-01-11
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황유복 아직도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적셔지는 일이 있다. 대여섯 살 때 일로 기억된다. 하루는 마을 어느 집에서 잔치에 나오시라고 할머님께 기별이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잔칫집에 가서 떡 하나 얻어먹는다는것은 지금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홍콩미식성(香港美食城)에 가서 800원짜리 랍스트 한 마리 대접받는 것보다 더 큰 유혹을 받게 되던 시절이였다. 물론 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따라나서려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의 손을 떼여 놓으면서 못 따라나서게 했다. 울고불고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때 흐느끼고 있는 나를 타이르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다. 너를 잔칫집에 데리고 가면 남들은 〈저 할멈은 얻어먹이려고 손자까지 데려왔다〉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거지로 보는것과 별 다를것 없다. 가난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겨낼수 있지만, 그러나 가난하다고 자기의 인격과 자존심마저 지킬줄 모른다면 너는 구제불능의 정신장애자로 될것이고 그럴수록 영원히 가난해질수밖에 없다.》 할머니 말씀의 참 뜻은 내가 초중 3학년 다닐 때, 할머니께서 세상 뜨시면서 더욱 절실히 깨달을수 있었다.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과 싸우면서 자랐지만, 자존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타이르고 걱정해주신 할머니의 사랑이 항상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자신으로 클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Yates)는 인간은 멀어져 가는 과거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내 가슴속에 찡하게 남아있는 그리운 할머니의 초상은 조금도 멀어져 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리해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이 합쳐져서 하나로 된것이다. 언제나 엄격하면서도 때로는 너그러운 위대한 부성의 사랑과 자애로우면서 항상 강인한 모성의 사랑을 함께 읽을수 있는 초상이 바로 내 가슴에 새겨진 할머니의 초상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권위와 도덕적인 기준, 강한 자부심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 그리고 기본적인 가치 판단기준들이 해체되고 있는 가치혼돈의 시대를 살면서 할머니의 초상은 나에게서 결코 멀어지지 않는다. 일년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음력으로 정월 초닷샛날이 아닌가 싶다. 장백에서 무한으로 출장간다는 낯모를 사람이 훈이라 하는 아홉살짜리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그 사람은 훈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청에서 살던 훈이 부모가 리혼하면서 훈이는 아버지쪽에, 훈이 형은 어머니쪽에 맡겨졌다. 그런데 훈이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훈이의 불행은 점점 켜져갔다. 계모는 훈이를 심하게 구타하고 학대했다. 어느날 아버지는 훈이를 데리고 장백현으로 갔다. 그리고 속임수를 써서 훈이를 어느 집에 떠맡기고 돌아갔다. 훈이는 낯선 집에 버려져 학대 받다가 장백 교회에 옮겨졌다. 그때 마침 북경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어린이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몇 사람들과 함께 우리 대학 부설소학교에 조선족 기숙반을 설치했던 터라 잡지에서 그 소식을 접한 장백교회는 훈이를 나에게 보내 온 것이다. 내가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 낯선 사람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떠버렸다. 어린 훈이는 오랜 기차려행끝에 멀리 낯선 집에 맡겨졌다는 사실에도 별로 충격받은 기색이 없었다.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후 이집 저집 옮겨지는 일에 습관된듯 했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체념해버린 무감각 상태였다. 어린 훈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먼저 할머니를 생각해 보게 되였다. 할머니는 이런 일을 어떻게 처사하셨을가? 나는 훈이를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훈이의 죽어버린 기를 살려주고 자존심을 찾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에게 돈을 넉넉히 맡기면서 옷과 신발, 그리고 학용품에 이르기까지 주변 학생들이 갖고있는 그대로 훈이에게 사주라고 부탁했다. 어린 훈이 가슴속을 꽉 메우고 있는 자비심(自卑心)부터 말끔히 가셔버려야 했기때문이였다. 그러면서 담임선생님은 친어머니 못지 않게 훈이에게 사랑을 쏟아부었다. 두달정도 지나면서 훈이 얼굴에는 생기가 되살아났고 전에 볼수 없던 웃는 모습을 가끔 볼수 있게 되였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부모가 없는 시대를 살고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의 어린이들이 여기저기 버려지고 있기때문이다. 그것도 어린애들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10년간 출산아 수가 4분의 3이 감소된 시점에 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이 높은 리혼률때문에 훈이와 같이 버려지는 애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돈벌이라는 미명아래 애들을 할아버지 할머니나 친척집에 맡겨놓고 한국으로 가거나 도시에 몰려가는 사람들도 갈수록 흔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부모가 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그것은 얼마나 많은 사랑이 몰부어져야 하는것이며 얼마나 지속적인 관심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저 애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만 안겨주면 좋은 부모로 될수 있는것인 줄 알고 있는가 보다. 훈이를 학교에 입학시키는 동시에 나는 훈이 부모들을 찾기 위해 《길림신문》사 와 《연변일보》사 기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 학기가 지나 훈이 부모들을 가까스로 찾을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훈이의 보호자인 아버지는 기자의 련락을 받자마자 잠적해버렸고 기별을 받은 훈이 엄마는 지체 없이 북경으로 쫓아왔다. 두 아이를 키우기 힘들면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더니 어려워도 자기 힘으로 키우겠다면서 훈이를 데려갔다. 시골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순박한 아줌마인 훈이 엄마와 엄마의 품에 안긴 기쁨에 도취 되여 엄마의 손을 꼭 쥐고 따라가고 있는 훈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할머니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2001. 11
3    (수필) 군 감자와 <<이바구>> 댓글:  조회:6223  추천:60  2006-01-10
군 감자와 황유복 내가 태여났던 신농장 마을은 전쟁과 홍수로 말미암아 폐허로 되여버렸고 우리 집은 쌍하진에 들어와 곁방살이로 전전하다가 1947년 쌍하진이 해방되면서 비로소 내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1948년 봄에 실시된 토지개혁과정에서 우리 집은 적빈호로 평가되여 논밭과 함께 쌍하진에서 제일 큰 부자가 살던 집을 분여받게 되였다. 원래 집주인은 국민당군 장교인 아들을 따라 남방으로 도망간 대지주였다. 남향으로 된 3칸짜리 집과 동서 두 줄의 행랑방이 높은 토담에 둘려있어 우리는 어릴 때 ⟪담장마을⟫이라고 불렀다. 우리와 함께 여덟 집이 담장마을에 이사들었다. 식구가 기중 적은 우리가 넓은 남향집을 차지했는데 지금의 표준으로 말하면 우리 집의 인구당 주거면적이 가장 큰 셈이였다. 그래서인지 겨울날 저녁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이 저녁밥상을 물리고 우리 집에 모여들었다. 소학교에 다니던 나는 저녁밥술을 놓기 바쁘게 콩기름 등잔아래서 숙제를 하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주방에 나가 설거지하는 동안 숙제를 끝마치고 나면 동네 할머니들이 한둘씩 들어선다. 할머니들은 화롯불을 중간에 놓고 둘러앉아서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면서 마을뉴스들을 교환한다. 그러다가 내가 ⟪할매요, 옛말 들려주세요.⟫라고 요청을 하면 ⟪응, 그래 이바구 해주마.⟫하고 이야기 주머니를 끌러놓기 시작한다. 나는 할머님들의 옛말을 듣기 위해 담뱃불을 붙여드리고 화로에 감자를 묻어 잘 구워서 대접하기도 했으며 시원한 찬물을 펌프에서 잣아다 드리기도 했다. 도깨비야기나 귀신이야기를 금방 듣고 찬물주문을 받게 되면 나는 어두컴컴한 주방으로 들어설 때 무서움 때문에 머리칼이 쭈뼛해지지만 그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물을 떠다 바친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거의 모두 ⟪옛날옛적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로 시작된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태고적 호랑이는 할머님들처럼 담배를 무척 좋아하는 줄로 알고있었다. 고중을 다니면서 조선력사를 공부하다가 임진왜란(1592년~1599년)때 담배가 조선에 전래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고, 대학시절 미술사 공부를 하다가 ⟪범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토끼⟫라는 조선조말기의 민화를 보면서 할머님들이 옛말 서두에 쓰고 있던 말의 유래를 파악하게 되었다. 여하간 어릴 때 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 주머니는 밑도 끝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듣고 들어도 끝이 없는 할머니들의 옛말은 한결같이 화롯불에 둘러앉아 나누어먹던 군 감자와 같이 구수하였다. 부모의 병구완을 위해 벼랑중턱에 자라는 산삼을 캐오는 효자, 효녀의 이야기, 가난하거나 벼랑 끝에 몰린 약자를 도와주는 정의로운 사나이의 이야기, 사랑에 충실한 남과 녀의 이야기, 힘은 약하지만 지혜로 강자를 이겨내는 해학적 이야기, 나쁜 일만 골라하다가 벌 받는 교훈적 이야기⋯⋯ 할머니들의 이야기동산에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즐거움과 함께 꿋꿋한 힘, 반짝이는 지혜, 따스한 우정, 달콤한 사랑, 소박한 꿈, 훈훈한 인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러한 우리 민족전통문화의 풍속, 습관, 생활, 사상, 신앙, 가치관, 꿈과 소망, 웃음과 지혜, 사랑과 인정이 가득 차있는 ⟪담장마을⟫집에서 다섯살에서 열다섯살까지 10년을 살아왔다. 그 집에서 구수한 군 감자를 먹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으면서 우리 전통문화의 감각을 체험할수 있었고, 올바른 삶의 자세를 터득할수 있었으며 심미감, 정의감, 의지력, 책임감, 동정심, 상상력을 키울수 있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이켜보아도 나는 그때가 너무나 행복했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는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정신적으로 민족문화의 모유(母乳)를 마음껏 흡수하면서 자랄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나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갖고 대학에서 한족(漢族)의 주류문화를 더욱 진취적으로 배울수 있었으며, 미국이나 카나다와 같이 완전히 다른 문화권 나라들의 대학 연단에 섰을 때도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감 때문에 태연하게 강의를 림할수 있었다.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여 질수록 우리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래야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을수 있고 세계화에 대응할수 있는 용기를 갖출수 있게 된다. 나는 가끔 저녁이나 주말에 부모들과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거나, 혼자서 치고 박고하는 전자게임을 하고 있는 애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른들을 위한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의 동심은 구겨지고, 폭력을 내용으로 하는 전자게임을 탐하면서 어린 나이에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아들애가 태여난 후, 어릴 때부터 나는 애에게 할머니들의 옛말을 더듬어 자기 전에 들려주었다. 그것이 버릇처럼 되여 우리 애는 항상 나와 같이 자야 했다. 그런데 한어로 들려주는 우리의 옛말, 그리고 온돌도 없고 화로도 없고 군 감자도 없는 아파트 방 침대에서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내 아들은 정녕 어느 정도 우리 전통문화의 정서를 리해하고 있을까?2002. 3
2    (수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댓글:  조회:6387  추천:70  2006-01-09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황유복 나는 열다섯 살 나던 해 시골고향을 떠나 도시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줄곧 도시생활을 해왔다. 도시생활은 모든 것이 편이하다는 리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시골생활을 해본 사람에게는 아쉬운 점도 많기 마련이다. 우선 맑은 공기와 만휘군상의 고요함이 아쉽고 인간의 번뇌를 가시여주고 사람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주는 대자연-고기들이 헤엄치는 맑은 냇물, 꽃들이 피여 있는 파란들, 새들이 지저귀는 무성한 숲과 그 숲에 덮여 있는 산들이 그립다. 그중에서도 40년이 넘는 도시생활에서 내가 가장 아쉽다고 생각해온 것은 저녁노을이다. 시골에서 볼수 있었던 아름다운 붉은 노을을 도시에서는 볼수 없다. 도시먼지와 대기 오염물질들이 태양광선을 산란시키고있어 도시에서 볼수 있는 저녁노을은 그저 희뿌옇다. 그렇다 해서 빨간색과 희뿌연 색의 색상의 차이를 탓하는 것도 아니다.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은 어릴 때부터 나의 꿈이였기때문이다. 나는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북쪽에 위치한 신농장이란 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고 두살 때는 어머님까지 여의게 되여 할머님슬하에서 자라났다. 나의 두뇌세포에서 짜낼수 있는 인생의 최초 기억이 바로 서너살 때부터 저녁노을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다. 농사철이 되면 할머니는 날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밥을 지으시고 내보다 8살 이상인 삼촌과 4살 위인 형님을 깨워서 함께 들로 나가신다. 나는 혼자 집에 남아 자신을 돌봐야 했고 집을 지켜야 했다. 나는 거의 창가에 붙어 앉아 창밖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기나긴 하루를 보내군 했다. 하루시간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때가 바로 저녁무렵이 가까워 올 때다. 배고픔을 참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할머니의 귀가를 기다리는 초조함과 가나긴 고독이 불러오는 불안한 심정이 뒤범벅되여 울음을 자아내게 되는것도 바로 저녁무렵이다. 우리 집에서 서쪽으로 백보쯤 나가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버드나무숲이 있고 숲 뒤에는 송화강의 지류인 오룡하가 남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강 너머에는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논밭이 펼쳐져 있고 더 서쪽에는 우리가 어릴 때 서산이라고 부르던 산들이 이어져 있다. 혼자서 울면서도 눈길은 자연히 집 앞에 난 오솔길을 따라 강가의 버드나무숲에 멈추게 되는데 그것은 할머니가 돌아오실 때 당신의 익숙한 모습이 항상 숲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울음을 뚝 그치게 된다. 강과 논밭은 숲에 가리여 보이지 않고 숲의 꼭대기에는 서산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 지나가던 해가 서산 꼭대기로 내려와서 서서히 산뒤로 숨어버리는 과정에 둥근 해와 그 주변은 아름다운 빨간색으로 물들고 서쪽하늘도 형언하기 어려울만큼 예쁜 오렌지 빛으로 변해버린다. 그 황홀경에 빠져 나는 배고픔도, 기다림의 초조함도, 고독과 불안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고있는 가난한 어린이를 동무해 주기 위해 저녁노을은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찾아주었다. 《내가 좀 더 크면 저기 서산에 올라가 아름다운 노을과 만나볼테야.》 그때부터 노을은 어린 내 가슴속에 간직된 행복이였고 다정한 친구였다. 네댓살 나던 어느 하루, 나는 새로 사귄 옥년이라는 이웃집 누나에게 억지를 부려 그의 손에 이끌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서산에 등산할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밖에 서산 정상에서 나는 노을과 만날수 없었다. 서산너머에는 첩첩청산이 이어져 있었고 저녁노을은 수줍은 처녀애처럼 저 멀리 하늘가에 있는 산 뒤에 숨어있었다. 왜 노을이 나를 피했는지를 옥년 누나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크면 노을을 찾아 저 하늘 끝까지 갈거야.》라는 결심을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남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어려움을 이겨낼수 있는 강한 의지를 키우면서 《저 하늘 끝까지》찾아갈수 있는 능력과 의지력을 준비해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리치를 터득하게 되였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그 다음날 날씨가 맑아진다. 쉽게 말하면 저녁노을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날의 맑은 날씨를 기약하며 혼신을 불태우는것이였다. 그렇다면 《저 하늘 끝까지》찾아가기 위한 능력과 의지력의 양성도 중요하겠지만 우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 저녁노을과 같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드디여 저녁노을은 찾고 싶은 《친구》나 《행복》의 차원을 넘어서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스승》으로 승화되였다. 어린 시절에서 젊은 시절에까지, 곱게 물드는 저녁노을은 내 전부의 꿈이였다. 사람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나 꿈을 갖기 마련이다. 그 꿈은 어릴 때 찾아올 수도 있고 좀 더 커서나 젊어서 생길수도 있다. 우리는 꿈이 없는 사람을 상상조차 할수 없다. 왜냐하면 꿈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지금은 가난하더라도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살면서도 꿈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수 있다. 마음속 구석구석에 꿈이 희망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놓이거나 벼랑 끝에 몰리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재기할수 있다. 소년시절의 꿈은 가난과 고독에 쪼들리던 나의 어린 가슴에 행복을 가득 채워주었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갈수 있는 능력과 의지력을 키워주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의 꿈이 나의 인생항로 설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부모 없이 가난에 쪼들리며 자라난 시골 소년이 대학교수로 클수 있었던 것도 어릴 때의 그 꿈과 련관되지 않을수 없다. 미국의 최고 명문 대학인 하버드 대학에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1987~1988)도, 나는 때가 되면 버릇처럼 숙소였던 데이나스트리트 10번지(DANA st, No.10) 아파트 창문가에 서서 노을을 감상하면서 숙연해지군 했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아름다운 삶, 쾌적한 삶, 보람 있는 삶에 대한 가치 판단기준은 돈과 권력지위와 사회적 지명도에 따라 판가름되는것이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가치기준은 물질적인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다시 말해서 마음의 풍요로움에 있다. 사회와 민족 그리고 나라에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저녁노을과 같이 아름다운 삶에는 풍요로운 마음이 안주할 수 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다음날 날씨가 맑아진다. 저녁노을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날의 맑은 날씨를 기약하여 저 멀리 하늘가에서 혼신을 불태우고 있다. 2001. 7
1    (수필) 원일 아침 수상록 댓글:  조회:6035  추천:60  2006-01-05
(수필) 원일 아침 수상록남호손 1설날 아침이다. 내가 나서 자라난 시골 고향 같으면 이 시각에 수탉의 세번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질것이다. 이제 한창 도시의 빌딩숲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있다. 수십마리로 무어진 비둘기떼가 아빠트사이 공간과 푸른 하늘을 누비면서 빙빙 원무를 출연하고있다.가까운 창밖에는 두마리의 까치가 앙상해진 자귀나무가지를 오르내리면서《까-악》,《까-악》요란스럽게 울어대고있다. 어제밤 자정, 요란스럽던 폭죽소리에 놀란 원숭이해는 꼬리를 감추고 영원속으로 사라졌고 을유년 닭의 해의 시작을 알리는 눈부신 태양이 빛을 발산하고있다. 12년만에 딱 한번 찾아오는 《조류(鳥類)》의 해여서인지 뭇새들이 유난스럽게 극성을 부리고있다. 닭의 해 벽두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나무군 총각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있는데 포수에 쫓기는 노루 한마리가 쫓아와서 살려달라고 한다. 마음씨 좋은 나무군은 노루를 나무짐속에 숨겨두고 뒤쫓아온 포수를 속여 보내였다. 살아난 노루는 나무군을 인도하여 산속의 맑은 호수까지 간다. 그리고 래일이면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하게 되는데 그중 세째 선녀의 옷을 숨겨놓았다가 그 선녀를 안해로 삼되 네 아이를 낳기전에는 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행복에 도취된 나무군은 세 아이를 낳은 선녀에게 옷을 돌려주었고 선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홀로 남아 고독해진 나무군은 수탉으로 변해버렸다. 수탉이 지붕이나 담장 높은 곳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우는것은 하늘에 있는 선녀 안해를 못잊어 그러는것이란다. 오늘, 우리는 주변에서 21세기판 《나무군과 선녀》의 이야기가 만연되여있음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수없이 많은 《선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몰려가고 그런 가정에서는 《나무군》만 고독하게 홀로 남아 안해가 돈보따리를 이고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고있다.2년전 나는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서 조선족《선녀》를 만난적이 있다. 함께 간 한국교수들이 음식주문을 하면서 《이 분은 멀리 중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니까 맛있는것으로 잘 대접해주세요.》라고 서비스 부탁을 하니까 주인아줌마가 30대 후반의 박씨라고 하는 조선족 웨이트리스를 보내 음식시중을 들게 했다. 식사하면서 갈비를 구워주고있는 박씨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는데 그녀는 길림성의 어느 작은 현성에서 왔다고 한다. 남편은 현정부산하 기관의 공무원이고 자신은 소학교 교사로 교직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돈을 벌기 위해 브로커에게 5만원의 돈을 지불하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였다고 한다. 첫 2년동안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달고도 억척같이 일하여 한국에 나오기 위해 빌렸던 빚을 몽땅 갚았고 금년(2003년)초에는 합법로무자의 자격을 취득하였는데 명년 5월까지 애 학비나 벌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집에 남아있는 남편외에 외지에서 대학 다니는 딸애까지 세식구가 세곳에서 생활을 하고있어 지금도 박씨는 혼자 있을 때 집생각때문에 가끔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건강하시고 열심히 돈을 벌어 될수록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덕담을 남기고 박씨와 헤여졌다. 지난해 여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박씨가 일하던 음식점에 들려 식사하게 되였다. 그런데 생각밖에 박씨를 다시 만나게 되였다. 《5월에는 집으로 가시겠다고 했잖아요》라고 하니까 돌아가도 할일도 없을것 같고 그래서 2~3년 더 일해 집 살 돈까지 마련해가지고 가기로 하고 눌러앉았다고 한다. 돈이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버리면 개도 안물어간다는 그 돈, 그러나 그 돈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수 없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다. 먹고 살만한 돈이 생기면 가전제품들을 갖추어야 하고 그것이 마련되면 좀 더 큰 내 집을 갖고싶고 그다음에는 자동차… 그리고 끝없는 소유욕때문에 우리는 돈의 노예로 되고있다. 그래서 수많은 가정들은 《나무군과 선녀》처럼 《리산가족》생활을 하고있다. 과연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 번 돈이 래일의 행복을 기약할수 있을가?떠오르는 을유년의 저 밝은 해를 바라보면서 우리 민족의 《리산가족》들이 하루 빨리 《통일가족》으로 되기를 기원해본다. 2 《이아(爾雅)》는 주나라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지은 책이라고 전해지는데 혹자는 공자의 제자들이 편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아》의 《익(翼)》조에는 닭의 다섯가지 덕목을 기록해놓았다. 《머리우에 관(冠)을 썼으니 문(文)이요, 발에는 큰 발톱이 있으니 무(武)요, 적을 만나 필사적으로 싸우는것은 용(勇)이요, 먹이를 얻으면 서로 불러오는것은 인(仁)이요, 때를 맞추어 우는것은 신(信)이다.》(《首戴冠者, 文也; 足博距者, 武也; 敵前敢鬪者,勇也; 得食相告者, 仁也; 鳴不失時者, 信也.》)닭이 머리우에 볏을 달고있는것을 관을 썼다고 했고 관을 썼다는것은 벼슬을 하는것과 같은 뜻이니 문덕이 있다거나, 큰 발톱이 있어 무덕이 있다고 한것은 닭의 외관적 모양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별반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용, 인, 신은 닭의 행위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인간에 시사하는바가 크다. 수탉은 적을 만나면 처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운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자기보다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용감하게 싸워서 쫓아내고만다. 영어에서도 《싸움닭과 같은 느낌이 든다》라는 말이 《투지에 불타다(feel like a fighting cock,》라는 관용구로 정착되여있다. 싸움에 림하는 수탉은 오직 투지에 불탈뿐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이아》에서 말하는 용(勇)이다.그다음 수탉은 먹이를 발견하면 꼭꼭거리며 처자를 불러 함께 먹게 한후 새 먹이를 찾아나서는데 그것을 인(仁)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탉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려주는 광명의 예언자이기때문에 신(信)이라 했다. 옛성인들이 수탉을 극구 칭찬하여 수탉은 처자와 가정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와 식구들에게 먹이를 배려해주는 어진 품성을 구비했을뿐만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벽을 온 천하에 알려주는 지혜와 신의를 갖추고있다고 하면서 수탉을 리상형 남성의 화신으로 보았다.다산 정약용은 《제변상벽모계령자도(題卞尙璧母鷄領子圖)》라는 시에서 암탉의 행위를 실감나게 묘사했다.목털은 곤두서서 고슴도치 닮았고/제 새끼 건드리면 꼬꼬댁 쪼아대네/....../낟알을 찾아내면 쪼는체만 하고서/새끼 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네시에서 제 새끼를 잘 보호하고 배고프더라도 먹이를 먼저 새끼들에게 먹이는 암탉은 모성의 사랑과 보호본능을 가진 리상형 어머니의 화신으로 그려졌다.닭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닭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한해 연길시 조선족의 리혼률은 68.4%, 즉 3:2를 훨씬 초과한 상태이고 리혼녀성의 50%가 해외돈벌이를 나갔다고 한다.(《흑룡강신문》05.1.26) 이제 우리는 조선족가정의 해체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리혼률은 하늘 높이 치솟고있고 가정의 해체와 녀성의 류실로 인한 출산인구의 감소는 바닥을 내리치고있다. 중국의 대륙에서 유유히 흐르던 조선족이라는 이 큰 강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고있는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감소현상때문에 원천에서부터 고갈되여가고있다.미국의 작가이자 음악가인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가족(FAMILY)》의 서문에서 《가정은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우리의 마지막 기적이다. 가족의 사랑은 바람과 같다. 본능적이고 꾸밈이 없으며 부서질듯 연약하지만 아름답고 때로 서로에게 화를 내도 결코 멈출수 없는 사랑, 그것은 우리 모두의 숨결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다.》라고 피력했다.우리 민족 남자들은 이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마지막 기적》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도, 능력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 민족 녀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의 근원인 모성의 보호본능을 상실했단 말인가?옛 선비들이 칭찬한 닭의 덕목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반성해야 하지 않나싶다. 3한족(漢族)문화의 뿌리는 지신(地神)계렬에 두고있다. 염제(炎帝)는 그의 어머니가 화양(華陽)이란 곳에 놀러 갔다가 신룡(구렁이)의 머리에 교감이 되여 염제를 낳았다. 황제(黃帝)족은 곰도템씨족(有熊氏)과 뱀도템씨족(蛇氏)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염황자손(炎黃子孫)인 한족은 한나라 후기 이전에는 구렁이를 룡이라 하여 도템동물로 숭배하다가 불교가 전해오면서 인도의 룡과 구렁이룡을 결합하여 오늘의 룡을 만들어내였다.우리 민족 문화는 천신(天神)계렬에 뿌리를 내리고있다. 단군은 천제(天帝)의 아들과 웅녀사이에서 태여났고, 주몽은 천제의 아들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여났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여났고 그의 왕후 알영은 닭의 화신이였다. 김알지왕의 탄생도 흰 닭과 관련된다.그래서 한족문화에서는 땅의 색갈인 검은 색이 숭상(한나라때까지도 황제의 면복은 검은색이였다)되였고 땅에서 기여다니는 구렁이(불교가 전해진후에는 룡이)가 도템동물로 숭배되였다. 그대신 우리 민족은 하늘을 대표하는 밝은 색갈인 흰색(백의민족의 옷, 조선조의 백자)을 선호하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숭배하며 조상이 알에서 태여났다(삼국시대)고 하거나 새를 수호신으로(솟대, 목안, 닭) 모시는 문화를 창조하였다. 중국 고대에 만들어진 천간(天干), 지지(地支)의 12지에는 뱀과 룡이 동시에 선정되여있지만 그 많은 새들가운데서 유독 닭만 선정된것도 한족의 지신숭배문화와 관련되지 않을수 없다.어제까지도 닭의 해가 시작되기전에 결혼을 서두르는 커플들이 몰려들어 결혼등록기관이 붐비고 결혼례식장, 웨딩 포토 스튜디오 등 결혼과 관련되는 업체들이 호황를 누렸다고 한다. 을유년에는 립춘이 빠졌기때문에 불길한 《과부의 해》라는 민간속설때문이였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시작되고있는 을유년은 미래형이여서 단언할수는 없지만, 어제밤에 사라진 갑신년 원숭이해는 《립춘》이 두번이나 있어 《대길(大吉)》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불길한 해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수만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전쟁의 해였고, 쓰나미 지진해일로 25만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중국에서만 해도 지난 한해 각종 사고로 13만7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개의 립춘을 가진 원숭이해에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생겼을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원숭이해가 마감하기전까지 결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것을 보면서 한족들에게 있어서 전통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게 된다.한족문화의 속설과는 달리, 을유년 닭의 해는 우리 민족 민족사나 민족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운의 한해였다. 60년전, 그러니까 지난번 을유년 닭의 해에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우리 민족은 34년11개월 보름만에 나라를 찾았고, 식민지시대에 금단되였던 우리의 성씨와 우리 말, 우리 글도 함께 찾았다. 중국 조선족도 일제와 위만주국의 통치에서 해방되여 처음으로 자신들이 개간한 땅의 주인으로 되였고 정권수립에 참여하여 나라의 주인으로 되였다. 60년만에 다시 돌아온 을유년 닭의 해를 맞이하여 조선족 모두가 힘을 합쳐 희망의 홰불을 다시 밝히고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격감 등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면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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