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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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수필) 중국문화의 다양성 댓글:  조회:6419  추천:56  2006-03-07
중국문화의 다양성 중국과 ‘중국인’을 공부하기 위해 중국대륙을 여행해본 사람들은 중국문화의 다양성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큰 나라에서 다양성은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다양성은 미국의 그것과 다르다. 소수의 인디언 원주민을 제외한다면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이민들로 구성된 ‘이민대국’이다. 따라서 미국문화의 다양성은 ‘와스프(WASP-백색 영국계 개신교도)’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세계의 여러 인종과 민족들의 문화가 섞여서 만들어지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식의 문화로 대표된다. 중국문화의 경우는 55개 소수민족의 문화를 계산하지 않더라도 한(漢)족이라는 ‘단일민족’ 문화 속의 다양성만으로도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할 때가 많다. 내가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 클라스 정원은 60명이었는데 한족이 52명, 소수민족 출신이 8명이었다.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만족, 회족 등 자기 민족언어가 따로 없는 민족이었고, 나 혼자만 대학 입학 전 소수민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었다. 처음 나는 중국어가 너무 서툴어 남들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를 걱정했다. 그런데 중국의 동서남북에서 모여온 학우들이 서로의 악센트에 익숙해지고 상대방의 말을 별 어려움이 없이 알아듣게 되기까지는 한 학기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도 그 시간을 이용하여 열심히 북경말을 배웠기 때문에 남들이 눈치 채기 전에 북경 출신 학생들 다음으로 중국어(북경말)를 유창하게 하는 학생이 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에는 수많은 지역 방언들이 난립해 있다. 다 같은 중국어(漢語)이지만 한국의 영남, 호남 정도의 차이가 아니고 타 지역 사람들이 완전히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음식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비행기를 빼고는 날아다니는 모든 것을, 배를 빼고는 물에서 헤엄치는 모든 것을, 상(床)을 빼고 뭍에서 네발 가진 모든 것을 먹는”다고 자랑하는 중국이야말로 ‘음식문화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산초와 고추를 조미료로 사용하여 혀끝이 아리고 매운 사천요리, 단 맛을 돋보이게 하는 상해요리, 지독하게 매운 맛을 자랑하는 호북, 호남요리, 파를 많이 사용하는 산동, 북경요리, 생선 중심의 광동요리와 양고기 중심의 서북요리……지역에 따른 다양한 맛의 요리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지역별 음식들의 맛 차이가 너무 커 ‘단일민족’의 음식이 과연 이럴 수 있나 의심할 정도이다. 나는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 어디 가서든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나를 울게 한 음식들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광서 유주(柳州)부근 농가에서 주인이 올챙이가 둥 둥 떠있는 쌀죽을 대접했을 때 쩔쩔 맨 적이 있다. 또 호북성의 어느 시골서 어린이들이 고추를 과일처럼 먹고 있어 나도 따라 흉내 내다가 너무나 매워 눈물을 짰던 일도 있다. 중국의 음식문화를 체험하면 할수록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체질인류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시각에서 봤을 때도 중국인(漢族)이나 그들의 문화는 다양하다. 우선 남방의 한족들은 체질인류학적으로 따지면 ‘인도네시안 말레이(Indonesian malay)’계열이고, 북방 한족은 ‘아시아티크 몽고로이드(Asiatic mongoloid)’계열이다. 북방인은 보편적으로 키가 크고 체질이 강한 대신 사유방식이 간단하고 순박하며 어려운 생활환경에의 적응성이 강하다. 그에 비해 남방인은 체구가 왜소하고 두뇌가 발달되었으며 안일한 생활을 좋아하고 상인(商人)적인 기질이 강하다. 남방인들도 지역에 따라 또 다르다. 임어당(林語堂)에 따르면 양자강하류 사람들은 문학가기질과 상인기질이 강하고, 광동인들은 성미가 급하고 모험을 좋아하고 개척정신이 강하며, 호북인들은 음모술수에 능하다고 한다. 정치인들에 의해 부추겨지는 지역감정만 빼면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지역문화의 차이를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서울을 다녀온 중국인이 한국을 보고 왔다고 한다면 적어도 50%의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경을 다녀간 한국인이 중국을 보고 왔다고 한다면 10%정도의 신빙성이 있다고도 평가하기 어렵다. 중국과 중국인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중국문화의 다양성을 파악해야 한다. 2002. 6. 10
38    (수필) ‘박대정심 (博大精深)’의 대륙적 기질 댓글:  조회:6672  추천:73  2006-03-06
‘박대정심 (博大精深)’의 대륙적 기질 동아시아 삼국인의 기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중국인의 대륙적 기질’, ‘한국인의 반도적 기질’, ‘일본인의 섬나라 기질’하는 따위의 말들을 자주 쓰게 된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중국인의 대륙적 기질이냐”라고 물었을 때 시원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중국인의 기질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넓다’, ‘크다’, ‘정밀하다’, ‘깊다’라는 뜻을 아우르는 ‘박대정심 (博大精深)’이란 말을 바르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나라가 크며 문화의 뿌리가 깊다. ‘중국인’이라는 말 자체도 한국인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에서는 ‘한(韓)민족’과 ‘한국인’ 을 동의어로 쓰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중국인’은 56개 민족을 포함시킨 복합적 의미로 쓰이고, 한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중국인’은 정확히 ‘한(漢)족’이라 부르고 있다. 40여 년 전 내가 중앙민족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했을 때 《중국민족사》강의를 담당하신 교수님이 첫 시간 강의에서 "한족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잡종(雜種) 그룹"이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다. '화(華)'족과 '하(夏)'족을 근간으로 형성된 한족은 수천 년 발전과정에서 수많은 주변 민족들을 끊임없이 흡수 통합시키면서 한어와 한자문화 그리고 유학사상으로 결집된 거대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글로벌 식구 5명 가운데 1명이 중국인이라 할 규모의 인구그룹과 한반도 면적의 44배나 되는 국토를 갖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스케일은 모든 것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오게 되면 먼저 찾게 되는 자금성이나 만리장성 그리고 진시황의 무덤 그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먼저 '크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지만, 서구식 근대화바람이 불기 이전 한국인들은 핵가족중심의 가족제도 하에서 생활해왔지만 중국인들은 확대가족제도를 고집해왔다. 같은 쌀(중국 남방의 경우)과 젓가락으로 특징지어지는 음식 문화권이라 할지라도 대가족의 많은 식구들이 모여서 먹게 되는 중국의 식탁은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사이즈가 크기 마련이다. 따라서 큰 식탁에 둘러앉은 중국인들은 먼 곳의 요리를 집기 위해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큰 젓가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처음 중국에 도착한 한국인 여행객들은 회전판이 부착된 큰 식탁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이렇게 젓가락에서부터 자금성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대국인’답게 ‘큰’것을 선호한다. 크다는 것은 작은 것에 대한 수용성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고시대 중국의 두 번째 국가인 상(商) 나라를 지배했던 동이계 은(殷) 민족은 한족에 흡수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중국의 북 반부를 통치했던 거란(료나라)인, 여진인(금나라) 들도 마찬가지다. 좀더 가까이는 중국전역을 지배했던 몽고인(원나라)들도 대부분 한족에 흡수 동화되었고, 만주족(청나라)의 경우 언어와 문화는 한족에 동화되고 지금은 혈연주의에 의한 민족그룹만 보존하고 있다. 때문에 ‘중국인’을 이해하려면 우선 큰 스케일을 지향하는 그들의 문화적 특성과 그들 문화의 강력한 수용성을 이해해야 한다. 2002. 6. 3
37    (수필) 문화의 상대성과 수필 댓글:  조회:6459  추천:68  2006-03-03
문화의 상대성과 수필 중국과 한국의 음식문화가운데 공통점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개고기식용이 그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료리방법은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식용한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개고기기호인구를 어림잡아 중국에서 년간 식용되는 개의 수자는 한국에 비해 60배는 넘지 않나싶다. 그런대 좀 이상한것은 서양인들이 개고기 식용을 문제 삼아 중국이나 중국 사람들을 비방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지만 한국이나 한국 사람을 매도하는 경우는 가끔 보게 된다. 2001년 한일 월드컵 때 프랑스의 녀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를 먹는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한국인들을 욕했고, FIFA(세계축구련맹)의 블라터회장은 월드컵 기간에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한국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에 앞서 1988년 서울올림픽 전야에, 미국 보스턴에 본부를 둔 《세계동물애호가협회》가《개를 먹는 나라에서 어떻게 올림픽을 치를수 있는가》라면서 서울올림픽보이콧을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였다. 그 사건을 한국인들은《보신탕 악령》이라고 한다. 그때 나도 우연히 개고기 론쟁에 휘말려든적이 있다. 1988년 이른 봄의 어느 하루, 나는 보스턴한국학학회로부터 리셉션에 참석해 달라는 통지를 받았다. 지정되 시간에 케임브리지의 어느 음식점에 도착하여 나는 그날 리셉션은 한국 전남대학교 송기숙교수의 래방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되였음을 알게 되었다. 소개에 따르면 송교수는 《어머니의 깃발》등 여러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출간한 이름있는 소설가였다. 만찬회에 참석한 10여명중 두분의 한국교수와 나 외에는 모두 보스턴지역 각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백인교수들이였다. 식사도중에 화제는 자연스럽게 몇 달후에 개최될 88서울올림픽에 관한 이야기로 련결되였다. 그런데 연회의 주인측에 동물애호가협회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개를 식용할수 있는가?》라면서 흥분했다. 송교수는 한국인들이 식용하는 개는 미국인들이 기르는 애완용개가 아니고 식용하기 위해 기르는 똥개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미국 교수는 개면 개지 식용할수 있는 개가 어디 있을수 있느냐며 반박했다. 이 정도 되니 송교수는 궁지에 몰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는 들러리로 연회에 초대된 만큼 조용히 밥이나 먹고 있었는데 송교수의 처지가 너무 딱해 말참견을 했다. 《남의 이야기 같지만 우리 중국에서도 개고기를 먹기 때문에 한마디 하겠습니다.한국이나 중국에서 개를 식용하는것은 문화인류학적인 문제가 아닙니까? 서양인들은 말고기를 먹지만 한국인들은 먹지 않습니다. 서울올림픽을 보이콧하기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도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뉴욕타임〉지에 난 기사를 보셨겠지만 미국인들의 쇠고기 소비량은 다른 나라의 3배 이상입니다. 나도 돈과 시간만 있다면 한달안에 세계에서 쇠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미국인들을 지탄하는 1000만명의 서명을 받아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인들은 소를 신으로 모시지 않습니까? 인도에 가면 인구도 많겠다⋯ 소도 개도 모두 동물입니다. 사랑하겠으면 다 사랑해야 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송교수를 괴롭히던 미국인 교수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서울올림픽 개최전야에 나는 서울올림픽국제학술회의에 초청되여 평생처음 한국을 갔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회의 조직자측의 요구에 응하여 한국의 10개 대학을 순방하면서 특강을 하게되였는데 마지막 강의를 전남대학교에서 하게 되였다. 특강이 끝나자 나는 송기숙교수에 끌려 광주 무등산정상에 있는 한정식집에 마련된 리셉션에 참석하게 되었다. 송교수는 20여명의 친구교수들에게 몇 달전 미국 보스턴에서 있었던 개고기 론쟁을 소개하면서 그때 내가 당신을 궁지에서 구해주었다며 재삼 감사하다고 했다. 개고기 론쟁에서 내가 응용한 리론은 문화의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원리이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간에는 그 어느 민족의 문화가 더 좋고 옳은것이며, 또 어떤 민족의 문화는 더 나쁘다거나 틀린것이란 평가를 할수없다는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민족문화만 우수하고 타민족문화는 렬등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문화중심주의에 빠지게 되거나 자민족문화가 렬등하다고 주장하는 민족문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는것은 문화간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있는 이른바 《세계화시대》에 수필 쓰는 사람들이 갖추지 않으면 안될 덕목중의 하나이다. 북경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나젊은 한족교수가 몇 일전 추천서를 받아가기 위해 나의 연구실에 왔다가 어느 조선족문인이 쓴 국호에 관한 수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갔다. 저녁에 시간을 내여 한족교수가 지적한 글(《연변문학》2005년 제5기)을 읽고 나는 그 교수가 흥분한데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의 수많은 조대들의 국호는 모두가 한글자이고 조선의 조대들의 국호는 모두가 두글자, 혹은 세글자이다.》라고 서두를 뗀 글쓴이는 《국호를 한글자로 쓰고있음은 내세움이 아닐가? 이 세상은 나 하나다.나 하나만이 영원하다. 드팀 이 없는 쇠소리나는 최강음은 둘 아닌 하나이다. 말하자면 하나는 으뜸이요 제일이다. 나는 이 세 상에 둘도 없는 천자(天子)이다. 반면에 하나는 고독하고 외롭고 안전하지 못하 다. 둘만이 서로 보완하며 의존되여 평형이 이루 어지고 그래서 안전감이 있다. 고려(高麗), 거룩 하고 아름다운 나라, 조선(朝鮮), 아름답고 싱싱 한 아침의 나라, 이름만 봐도 마음이 느긋하고 푸 근하다.》라는 주장을 폈다. 내가 보건대는 글쓴이의 전문 지식의 결핍으로 생긴 문제이지만 한족교수는 자기 민족문화중심주의의 문제, 즉 문화 상대주의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 3국시대, 남북조시대, 5대(五代)시대 등 력사시대에는 《이 세상은 나 하나》가 아닌 여러나라들이 각축을 벌리며 공존했지만 그 나라들의 국호도 모두 한 글자였다. 중국의 한자는 뜻글이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모두 독립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한자를 최초에 만들어 쓸 때(상나라) 거부기의 등뼈나 소뼈에 칼로 새겨 넣었고 그후 주, 진, 한 나라 때에도 대나무쪽(竹簡)이나 나무쪽(木簡)에 써야 했기 때문에 글쓰기가 너무나 불편했다. 따라서 그때에는 될수록 한 자로 표현할수 있는것을 두 자로 쓰지 않았다. 곡식, 과일이나 동물 등 원산지가 중국인것는 다 한 자로 이름지어져 있다. 벼(稻), 기장(黍), 조(稷), 콩(豆),밀(麥), 배(梨), 대추(棗), 감(柿),소(牛), 돼지(豚), 닭(鷄) 등이 그렇다. 그러나 외부에서 전래된것들은 두자 나 두자이상으로 되는데 그원인은 원산지 사람들이 만든 이름을 음역하거나 형용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옥수수(玉米), 사과(萍菓), 포도(葡萄), 석류(石榴), 바나나(香蕉), 락타(駱駝), 앵무새(鸚鵡) 등 많은 이름들이 그렇다. 국호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한 글자인데 조선은 왜 두 글자인가?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이나 국가 이름을 적을 때 그들의 자칭(自稱)을 비슷한 한자음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몽골(蒙古), 주르친(女眞), 로씨야(俄羅斯-俄國), 잉글랜드(英格蘭-英國), 아메리카(美利堅-美國),프랑스(法蘭西-法國) 등이 모두 그렇다. 고려는 고구려라는 이름가운데서《구》자를 생략한것인데 당나라 때부터 이미 그렇게 사용했다. 고구려(高句麗)라는 한자(漢字)가 당시 고구려인들의 어떤 자칭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아직 정설이 없다. 나는 그것이 수리(높다는 뜻)구루(성)를 한자음으로 기록했다고 본다. 조선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조선》이라는 이름을 최초에 기록한 문헌은 중국의《관자(管子)》라는 책이다. 때문에 조선도 우리 조상들이 《조》자와《선》자를 골라서 지은 이름이 아니고 고대 중국인들이 고조선인들의 자칭을 비슷한 음의 한자로 기록했을 뿐이다. 국호를 한글자로 썼다고해서 《 이 세상은 나 하나다. 나 하나만이 영원하다⋯. 말하자면 하나는 으뜸이요 제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 주(周)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국호가 어떻게 변하던지 관계없이 중국인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두 글자로 자기 나라를 자칭해 왔는데 그 두 글자에는 《세상의 중심의 나라》라는 뜻이 있어 도리어《자기중심》이라 할수있다. 그리고 《고려(高麗)》나《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은 고대 중국인들이 비슷한 한자음으로 우리 조상들의 발음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아름다운》혹은《아름답고 싱싱한 아침》이라고 자화자찬할 문제가 아니다. 민족문화의 비교는 아니지만 하위문화(subculture)의 비교에서 문화의 상대성을 거부하는 수필도 가끔 보인다.《나는 촌스러움으로 승부한다》(《연변문학》2005년 제4기)라는 수필은 글쓴이가 농촌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도시학교에 진학하면서 경험하게 된 농촌문화와 도시문화의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시도한 비교가 처음부터 평형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글쓴이는 시작부터 작심하고 도시인들의 단점을 골라 농촌인들의 장점에 비교시키고 있다. 도시사람들의 리기적 심리와 행위, 천박함을 들어 자신(농촌사람)의 정직함, 진솔함과 비교하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촌스럽다.〉 나는 이 냄새를 고양하고 〈촌스러움으로〉 승부한다. 그때면 우리들의 이 세상은 훈풍의(이?) 도시의 가로수에, 거리에, 아빠트에가득 매달리고 그래서 세상은 칼라가 물결칠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다. 도시문화는 그렇게 부정적인것들로만 구성된것이 아니다. 그리고 농촌문화도 그렇게 긍정적인것으로만 구성된것 역시 아니다. 도시사람들 가운데도 정직하고 진솔하고 인정이 있고 남을 돕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정직함, 진솔함, 인정미 등도 시골사람들의《특허품》이 아니다. 어느 지역에 재해가 들어 피해가 막심할 때, 농촌의 실학어린이들을 위한 《희망공정》그리고 어느 개인이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치료비가 없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사회적인 모금운동은 거의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 진행된다. 《난로에 도시락을 차례로 올려놓고 훈훈한 누룽지냄새를 맡아가며 둥그렇게 삥 둘러앉아 서로 권하며 아기자기 나누어먹던》시골인정도 좋지만 도시에는 평생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모아온 거금을 《희망공정》에 희사하는 더 큰 도시인정이 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장점을 《촌스러움》으로 정의한 자체도 도시문화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이 생활하던 문화 환경을 떠나 새로운 문화 환경에 진입했을 때 《내것만이 좋다》는 자기 스펙트럼을 통해서《남의 문화》를 바라볼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장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빨리 습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도시환경에 와서 농촌문화만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옛날에 머물 수밖에 없다. 《때밀이군》,《구두닦이》,《웨이터》나 《웨이터리스》도 부동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의 직업에는 상하귀천이 없고 인간으로서 그들 또한 평등하다. 그들에 대한 글쓴이의 《촌스러움》의 리해도 바람직한것이 못된다. 도시문화에는 발전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도시화는 사회발전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도시문화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는 《촌스러움》의 고집은 나젊은 학도에게 있어서 현명한 인생 선택이라 할수 없다. 부동한 문화간의 교류가 부단히 빈번해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다른 문화권의 문화를 리해하고 존중할수 있는 문화 상대주의의 정신이 아쉽다. 2005. 8
36    (수필) 술과 수필이 만난다면… 댓글:  조회:5451  추천:45  2006-03-02
술과 수필이 만난다면… 10년전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함으로써 세인들을 경악케 했던 프랑스의 철학가 질 들뢰즈는 《천의 고원》에서 만남의 기술을 이야기한다. 가령 독은 사람을 죽이기때문에 《사람》과 《독》의 만남은 나쁜 만남이지만, 독사는 독을 필수로 하기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좋은 만남이라는것이다. 그렇다면 술과 문학의 만남은 어떤 만남일가? 중국에서 시성(詩聖)으로 불리우는 두보(杜甫)는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라는 시에서 《리백두주시백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고 하여 시선(詩仙) 리태백과 술의 만남은 좋은 만남임을 시사했다. 그리고 요즈음 우리 문학지들에 발표되는 조선족 시인이나 소설가들에 대한 문단회고록 같은 글에는 거개 술이 빠질수 없다. 그래서 나는 술과 시인, 술과 소설가의 만남은 좋은 만남일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리태백이 술을 마시면서 시를 썼듯이, 술을 마시면서 수필쓰기를 시도한 사람이 있어 나의 주목을 끌었다.《서재에서 술을 마시며》(《연변문학》2004년 9월호)라는 제목의 수필은 글쓴이가 《급한 회의재료를 쓰다가 자정이 넘어》서재에서 《사색을 안주로 삼아》《반컵 정도 흰술을》 마시면서 쓴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면 취기를 빌미로 사유는 더욱 활발해지고 사색은 마치도 날개를 단듯 동서남북의 넓디넓은 상공으로 빙빙 선회하군 하여 매우 흐뭇하다》고 하면서 글쓴이는 첫 모금을 마시고 《서재의 책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많은 책중에서 《로사의 ⟨참회록⟩》과 《한 지도자》가 《그의 슬하에서 일》한 적이 있는《나》에게 준 《헤겔사전》의 입수과정을 소상하게 밝히였다. 그리고 두번째 모금을 마시고 《옛사람은 ⟨만권의 책을 읽으면 만리 길을 간다⟩라고 했다》면서 자신의 독서경력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컵에 남은 술을 다 마시자 나의 사유는 굴레를 벗은 말처럼 광활한 상공을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철학가 디카르는 라고 했다.》《하여 나는 아무 생각이나 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나는 필을 들고 내 사상의 기록의 쪼각들을 적기 시작하였다.》《이튿날 다시 이런 문장을 읽어 볼 때 나는 실소하지 않을수 없다. 어떤것은 의미가 똑똑했고 내용도 괜찮았고 어떤것은 조금 관련되지 않고 자유산만하다. 그러나 내가 참답게 자세히 전날 저녁의 사유를 돌이켜보면 그런 주요한 사로와 관점은 점점 똑똑히 도드라지게 되어 나는 기쁘고 흥분한다. 이렇게 나는 한편의 문장을 얻게 되는것이다.》수필은 《서재에서 술을 마시면 락이 무한하다!》라는 말로 끝난다. 글쓴이는 마시고 싶은 술도 마셨고《취기를 빌미로》글도 쓰고 했으니 《락이 무한》하겠지만 그렇게 씌여진 글을 읽는 나로서는 괜히 먹지도 않은 술에 취해버린것처럼 오락가락하여 좀처럼 갈피를 잡을수가 없다. 우선 《로사의⟨참회록⟩》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북경의 향토작가중에 로사라는 유명작가가 있었지만 그는《참회록》을 쓴적이 없다. 아니면 중국에서《 루숴(盧梭)》로 번역하고 있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루소(Rousseau)와 그의 《고백록》(Confessions)을 말하는것인가? 그렇다면 《로사(盧梭)》는 루소의 한어번역어를 다시 우리식 한자어발음으로 옮긴 것이라 하겠는데 그러면 뒤에 나오는《헤겔》도 같은 방식으로 《흑격이(黑格爾)》라고 해야 할것아닌가? 그다음《헤겔사전》을 준 사람도 알쏭달쏭하다.《 슬하》라는 말은 우리말이나 한어에서나 다 부모의 곁을 뜻한다. 그렇다면 《헤겔사전》을 준 《지도자》는 글쓴이의 아버지나 어머니란 말인지? 그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주었다고 하면 더 쉽게 리해할수 있지 않을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재 중국의 사회풍토에서는 전혀 리해할수 없는 말이 되여버린다. 두번째 모금을 마시고 인용한 옛사람의 《만권의 책을 읽으면 만리길을 간다》라는 말도 그렇다. 왜 《책을 읽으면》 꼭 《길을 가》게 되는가?《읽는다》와《간다》라는 두개의 개념사이에는 절대적인 련관성이 있는것이 아니다.《만권의 책을 읽고》《만리길을》갈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가고 안 가고는 책을 읽은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그래서 《옛사람》은《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길을 가라》고 권유했을 따름이다. 술을 다 마시고 사유가 《굴레 벗은 말처럼 광활한 상공을 질주》할 때, 글쓴이가 인용한 《프랑스의 철학가 디카르는 ⟨나의 사색은 나에게 있다⟩》라는 말은 나를 더욱 당혹케 한다. 프랑스에는 《디카르》라는 철학가가 없다. 글쓴이가 말하는 《디카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 철학가이자 과학자, 수학가인 데카르트(Descartes)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 사색은 나에게 있다》는 말도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그런 말을 한적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명제로 내세울 철학가가 이 세상에 있겠는지도 의심이 간다. 한사람의 머리는 그 사람의 몸을 떠나(참수당했을 때) 잠시 존재할수도 있겠지만 한사람의 사색(思索) 은 그 사람을 떠나 잠시도 존재할수 없다는 사실을 철학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알수 있는 리치일것이다. 글쓴이가 인용하려 했던 데카르트의 명언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아닌가 싶다. 1637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방법론서설》제4부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하는 자아》만을 철학의 기반으로 삼은 데카르트는 관념론(유심론)철학의 선구자이다. 사실《술》과《문학》의 만남은 들뢰즈가 지적한 《독》과《사람》, 그리고《독》과 《독사》와의 만남과 같은 그런 절대적 관계가 아니다. 술을 기호하는 시인, 소설가나 수필가가 있듯이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시인, 소설가나 수필가도 있다. 그리고 리백(李白)과 같이 주선(酒仙)이 시선(詩仙)으로 된 경우도 있고 영국의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처럼 술을 혐오한 유명시인도 있듯이 술은 한 문학인이 문단에서 차지하는 위상과는 전혀 무관하다 할수 있다. 《서재에서 술을 마시며》라는 수필이 나의 관심사로 될수 있은것은 그 글이 《술을 마시면서 시를 쓸수 있다면 같은 상황에서 수필도 쓸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풀어줄수 있는 키워드로 될수 있기때문이다. 물론 그 글은 사회학학자들이 말하는 보편성을 확보할수 있는 선택된 샘플은 아니다. 다만 내가 볼수 있었던 술을 마시고 《취기를 빌미》로 쓴 유일한 수필이였다. 그런데 그 수필은 나를 《수필은 술을 마시고 흥분된 상태에서 쓸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인도했다. 가령 글쓴이가 술을 마시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수필을 썼다면, 수편의 《철학론문》을 발표한적이 있는 지성인이 과연 그 많은 론리적 오류와 철학상식적 우를 범할수 있겠는가? 수필은 가슴에서 생겨나고 머리에서 정리된 글이라고 한다. 한편의 좋은 수필에서는 정서와 지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일것이다. 시는 단적인 정서의 발로이기때문에 술을 마시고 흥분된 상태에서도 쓸수 있겠으나, 수필은 정서와 지성의 융합으로 구성되는 글이기때문에 아무리 뜨거운 가슴에서 생긴 뜨거운 열정이라 할지라도 랭정을 잃지 않은 머리에서 차분하게 정리되여야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 그리고 사색은 흥분된 상태의 정서보다는 세련된 지성에서 기대될수 있을것이다. 한사람의 생각이 《취기를 빌미》로 《넓디넓은 상공으로 빙빙 선회》하거나 《굴레를 벗은 말처럼 광활한 상공을 질주》하는 이상, 그것이 다시 인간들이 살고있는 지상으로 돌아와 차분한 상태로 전환되기 전까지, 독자들에게는 그 《사유》를 따라 다닐수 있는 재간이 없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주당(酒黨)이라 하더라도 술에 취해버린 수필을 읽으려는 사람이 있겠는지 의심이 간다. 《열》이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져 식어버린 가슴과 달아오른 머리에서는 좋은 수필이 씌여질수 없다.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한가로운 기분을 지니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한편의 문장을 쓸 때, 그것은 곧 수필이 될것이다.》(김광섭:) 그렇게 씌여진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피천득:) 그래서 《시가 말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며, 소설이 인물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라면 수필은 마음을 놓는 자리에 놓는 글이다》라는 말이 생겼을것이다. 수필은 술로 흥분된 상태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씌여지는, 따스한 사랑의 마음이 담긴 지적인 글일것이다. 2005. 5
35    (수필) 수필과 진실 댓글:  조회:6488  추천:63  2006-03-01
수필과 진실 문화인류학에서 연구자와 연구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두 가지 색다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연구자가 연구대상으로 되는 그 사회의 구성원일 때 그의 연구는 그 사회를 《안에서부터 보여주는(emic approach)》 연구이고 연구자가 외부인일 때는 그 사회를 《밖으로부터 들여다보는(etic approach)》 연구로 된다. 최근에 문화인류학의 방법론을 도입한 수필이 발표되여 나의 시선을 이끌었다. 《밖에서 들여다본 ⟨중국식 1등주의⟩》(《연변문학》2004년 12월호)라는 글은 글쓴이가 40년간 중국에서 살다가 《최근 몇년간 중국밖에서 살》면서 《중국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는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던것들 중 새롭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라는 담론으로부터 시작된다. 국외에서 행해진 그의 중국들여다보기는 《중국》이라는 나라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5천년문명사》에서 《중국이라는 나라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여 진》것은 1912년에 성립된 《중화민국》인데 《머리글자와 꼬리글자를 취한 약자가 중국이 되였다》했고 그러나 조선에서는 세종대왕이《훈민정음》을 만들 때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라고 한것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쓰여왔다》는것이다. 글쓴이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조선이나 한국의 법률전공자들에게 있어서 그의 관찰은 중국정부에 대한 《국명지적소유권》을 주장할만한 소재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다음 관찰은 고대 중국인들이 5방 개념에 따라 동, 남, 서, 북 4방의 중앙에 중국이 있다고 주장했고 중앙의 대표색은 노랑(黃)인데 그들 황제의 황(皇)자와 누를 황(黃)자가 발음이 같기때문에 《고전언어학에서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어휘는 같거나 비슷한 사물을 지칭한다⟩는 등식을 세울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보완하기 위하여 《임금은 누런 곤룡포를 입었다》는 보충설명도 잊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자기중심》주의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사고로 비판할수도 있지만 《자존자강》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했다. 이어서 글쓴이는 《요즘 중국의 대학가에 나타난 ⟨중국식 1등주의⟩ 역시 이런 자기중심주의의 현대판이라고 볼수 있다》라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중국안에서 관찰했으면 훨씬 더 편리하고 좋았을텐데 하필이면 외국에 나가 남들의 안경을 빌려 쓰고 《들여다보》면서 진실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글을 썼는지하는 유감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중국》이라는 명칭이 나라이름으로 쓰여진 력사는 주(周)나라 때까지 소급된다. 유학(儒學)의 경전중의 하나인 《례, 중용(禮, 中庸)》에는 《(명성이) 중국에서 널리 떨치다(洋溢於中國)》는 구절이 있고 《한서(漢書)》43권에는 한고조 류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고 중국을 다스렸다(統天下, 理中國)》라는 말과 함께 《중국의 사람수는 억으로 계산되고 땅은 사방으로 만리나 된다(中國之人以亿計, 地方萬里)》라는 말이 있어 《중국》은 이미 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등장했음을 알수 있다. 사실 《중국》이라는 명칭은 주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대가 어떻게 바뀌는가와 무관하게 변함없이 사용해온 중국의 나라이름이였다. 나는 전공자가 아니여서 《고전언어학》의 정체는 파악할수 없다. 그러나 글쓴이가 인용한것처럼 《고전언어학》에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어휘는 같거나 비슷한 사물을 지칭한다》는 《원리》가 존재한다면 그 학문은 사이비학문일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원(辭源)》에 올라있는 황(黃huang)자와 같은 발음의 뜻글만해도 무려 58개나 있다. 그 많은 어휘가 《같은 사물을 지칭》한다면 한어는 수십배로 위축되여 의사소통의 기능을 담당할수조차 없을것이 분명하기때문이다. 거칠다(荒), 두려워하다(惶), 다급하다(慌), 노랗다 (黃), 임금(皇) 등등의 어휘들이 어떻게 《같은 사물》을 지칭할수 있단말인가? 기원전 221년 진왕(秦王) 정(政)이 전국시대후기의 제후국들을 통일하고 진제국을 건립하였으며 하, 상, 주 시대의 국왕과 달리 자기가 황제의 시원(始原)이라는 의미에서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하였는데 그가 력사상의 진시황이다. 진시황으로부터 한(漢)나라 때까지 황제들의 면복(冕服)은 노랑이 아닌 검정이였다. 그리고 훗날《곤룡포》에 수놓은 룡도 한나라 때까지는 없었다. 때문에 글쓴이가 주장한 《황(皇 )=황(黃)》의 등식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허상일뿐이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를 보다가 중국의 대학들이 저마다 제각기 1등이란 표현을 쓴다는 기사를 읽》고 글쓴이는 《중국식 1등주의》가 《자기중심주의의 현대판》이라는 담론을 전개하였다. 글쓴이가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라면 중국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아전인수식으로 중국을 《들여다보았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중국에서 40년 이상 살아온 사람이라면 중국의 대학교육시스템은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있어야 했다. 일본과 한국의 대학교육시스템은 종합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소수의 특수대학을 제외한다면 모든 대학들이 규모와 관계없이 모두 문, 리, 공, 의, 예, 체능이 갖추어진 종합대학이다. 그러나 중국은 1949년 이후 특성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교육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때문에 최근에 《211프로젝트(211工程)》가 실시되면서 대학합병 붐이 일어나기전까지 중국에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흔히 볼수 있는 종합대학이 한개도 없었다. 북경대학이라해도 공과, 의과, 예능, 체능 등 학과가 빠진 문리종합대학이였을뿐이다. 북경의 대학들만으로도 중국의 고등교육시스템을 충분히 설명할수 있다. 북경음악학원, 북경무도학원, 중앙미술학원 그리고 중앙공예미술학원은 북경에서 음악, 무용, 미술, 공예미술 분야의 유일한 예능특성대학이다. 그중 어느 하나도 중점대학은 아니지만 그들 분야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예능학과가 개설조차 되여 있지 않은 북경대나 기타 중점대학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것이 분명하고, 유일한 그 대학은 각자의 《제일》대학일수밖에 없다. 교육자들은 북경사범대학을, 법조계는 중국정법대학을, 외교관들은 북경외교학원을, 무역인들은 대외경제무역대학을 그리고 예비공무원들은 중국인민대학을 《제일》의 대학으로 대접하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공업대학은 더더욱 세분화되여있다. 항공항천대학에서 식품공업학원에 이르기까지 특성공대는 수십개나 된다. 어떻게보면 북경대학을 제외한 70여개가 넘는 북경의 모든 공립대학들은 남들이 흉내낼수 없는 자신만의 특별한 전공분야를 갖고 있기때문에 그 분야의 세계에서 《제일》대학임은 너무나 당연한 리치이다. 가령 연경맥주공장의 총공정사가 되고 싶은 수재라면 시험점수가 아무리 높더라도 청화대학을 가지 않고 북경식품공업학원을 간다는것이다. 중국의 대학들이 《저마다 제각기 일등》이라한다면 그것은 중국의 고등교육시스템의 문제이지 《자기중심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수필은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때문에 수필작품은 허구를 배제한 진실한 자기 삶의 리얼한 이야기일수밖에 없다. 수필작품에서 《진실》이란 작가의 주관과 객관이란 두 개의 층면에서 해석될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생활, 체험, 행위, 생각, 느낌을 진솔하게 서술함으로써 당신의 인생관, 사상, 감정을 작품에 투영시켜 주관적 진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수필을 《고백적인 글》 ,《개성의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객관에 대한 진실은 작가의 투철한 통찰력과 달관에 따른 객관세계나 지식, 학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서 확보될수 있다. 가령 지식이나 학문을 론하는 한편의 수필작품에 진실과는 거리가 먼 사이비지식이나 학문으로 충만되였다면 그러한 작품이 독자들에게 끼치는 유해성영향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나의 가짜상품은 일차적으로 그 상품을 구입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데 그치지만 틀린 관찰이나 지식으로 쓰여진 작품은《이와전와(以訛傳訛)》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루가 파급될지 모른다. 진실은 수필창작의 본질이자 작품의 생명이다. 2005. 4
34    (수필) 수필과 보고서 댓글:  조회:5485  추천:67  2006-02-28
수필과 보고서 미국의 녀성학 학자 매릴런 앨룸은 1997년에 《유방의 력사》라는 녀성의 젖가슴에 관한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앨룸은 녀성의 유방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고 했다. 가령 유방을 보게 되였을 때, 아기는 음식을 생각하고, 남성은 섹스를 생각하고, 의사는 병을 생각하며, 장사군들은 그것을 달러의 기호로 보고,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것을 변함없는 무의식의 가장자리에 유치시키려 한다는것이다. 하나의 객관적 존재나 사회적 현상에 대한 접근방법이나 관조의 시각은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다. 수필과 보고서는 모두 픽션이 아닌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진실을 보는 시각이나 접근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다르다. 사회학 학자나 문화인류학 학자는 제3자의 시각으로 관찰된 진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하지만 수필가는 감정이입이 된 자신의 느낌에 따라 나름대로 그 진실을 해명하고 어떤 정신과 운명을 제시하려 한다. 제1회 중국 조선족 어머니 수필공모 대상 수상작인 《콘돔을 넣으며》(《도라지》2003년 제6기)는 글쓴이가 생활하는 그 지역 성(性)풍속담론이다. 옛적(글쓴이가 어릴 때)에는 동네아줌마들이 모여서 불륜을 저지른 녀성을 집단 구타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 인간》들 사이에는 《내 안해 아닌 다른 사람의 녀자를 ⟨훔치고⟩ 내 남편 아닌 다른 사람의 남편을 ⟨도적질⟩하는것이 80년대 나팔바지 류행하듯 류행시세를 타고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만연되고 있다.》 그래서 《애인》을 《내여 놓고 자랑하는 축들도 많》아 그만큼 《그 ⟨붐⟩은 보편성과 정당성을 띠고 있다는 말로도 통한다고 보아야 겠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이렇게 《가정하나 남편(안해)하나 건사하기도 퍼그나 힘든》 세월에, 글쓴이의 돈타령에《질린 남편이 자기도 돈 벌러 나가봐야겠다》고 한다. 《녀자는 돈 없으면 못쓰게 되고 남자는 돈 좀 벌면 못쓰게 된다던데 내가 돈돈하다 못쓰게 될가봐 남편은 근심인것이고 나는 그렇게 돈 벌러 떠나는 남편이 또 걱정이다.》 결국 남편도 외지에서 《 남의 녀자를 ⟨훔칠⟩것이》 뻔한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남편의 짐에 콘돔을 넣어준다. 글쓴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작품에 자신을 개입시키면서 사적인 생활의 가장 은밀한 치부까지 리얼하게 토로했다.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필요여건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품에서 삶의 진실을 해명하려는 글쓴이의 노력을 읽을수 없다는것이다. 작품의 전개는 시대의 《류행》에 따라 흘러가기이다. ① 옛적에는 민간에서 불륜을 엄하게 벌주었다. ② 그런데 요즘은 불륜이 《빠른 속도로 만연되고 있다.》 ③ 심지어 《애인 없다》면《축에 들지 못하는 사람으로 통하고 있다.》 ④ 남편이 돈 벌려 나선다. 결국 남편도 외지에서 불륜을 저지를것이 《불 보듯 뻔한것이다.》 ⑤ 남편의 행장에 콘돔을 넣어준다. 《왜서 우리들은 이런 생활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일가?》라는 질문을 하면서도 (사실 그런 ⟨생활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안될것도 없고, 또 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지 않나 싶다) 더 이상 답안을 찾으려는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이러하니 나도 《류행》에 따를 수밖에 별도리 없다는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류행을 따른다》기 보다는 한 술 더 떴다는 인상을 준다. 가령 남편이 외지에서 다른 녀자와 간통을 했는데 그것을 《시대적 류행》으로 보고 그 불륜을 너그럽게 봐주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시름없이 자고 있는 아들애를 위해서라도 얇은 유리컵같이 쉽게 깨여지는 요즘 가정들을 본받지 않으려고》 아직 떠나지도 않은 남편에게 《간통면허증》을 먼저 만들어 준다는것은 아무리 불륜이 《류행》되는 시대라 해도 비약이 아닐수 없다. 《콘돔을 넣으며》는 삶의 진실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없기때문에 수필보다는 수필의 형식을 빌린 지역 성풍속보고서에 가깝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가령 글쓴이가 콘돔을 남편의 짐에 넣은 다음이라도 《내가 성관계의 배타적 독점권을 일방적으로 포기했을 때 우리 가정은 지켜질수 있을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다시 《그렇게 지켜진 가정은 행복할 수 있을가?》라는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해 보았다면 글의 결말은 확 달라질수도 있을것이고 《보고서》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한 좋은 수필로 탈바꿈할수도 있었을것이다. 혼외정사가 아무리 《사회적 류행》으로 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글쓴이는 관찰했어야 한다. 고대 로마제국말기 로마의 성풍속은 극도로 문란했었다. 그러나 초기기독교인들은 그런 《생활방식》을 거부했었고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기독교는 흥기했다. 《콘돔을 넣으며》가 작성될 그 무렵 세인들에게 큰 감동을 준 사랑이야기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1971년 조선에서 류학하던 베트남 청년 팜응 옥카인은 조선 처녀 리영희와 사랑을 나누게 되였다. 그런데 1979년 베트남과 조선의 국가관계가 악화되면서 두 련인은 통신마저 끈긴 상태의 생리별을 하게 되였다. 2002년 베트남국가주석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두 련인은 서로가 기다리고 있었음을 확인할수 있었고 그해 10월달에 결혼식을 치르게 되였다. 그들이 31년간 생사마저 알길 없는 기약 없는 사랑을 인내하고 기다릴수 있은것은 오직 사랑에 대한 신념 하나뿐이였다고 당사자들은 말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부부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듯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을것이다. 후자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외도나 불륜을 간단하게 매도할 수 없다. 부부간의 성행위 일지라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라면, 그것은 동물적인 성교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할수밖에 없다. 반대로 혼외정사라 해도 사랑의 진실이 확보되여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행위로 리해될수도 있다. 그런데 《콘돔을 넣으며》는 성욕에 관한 담론이면서도 사랑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도 아닌 긴 시간을 주체할수 없이 밀밀 치미는 욕구를 자제하라고 요구할수도 없고 또 자제하라고 해도 자제가 아니 될것이다. 결국 남편도 자기것 아닌 남의 여자를 ⟨훔칠⟩것이고 나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 심신이 ⟨도적이 들⟩것은 불 보듯 뻔한것이다.》 성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끈질긴 욕망이다. 그러한 욕망은 통제가 없거나 제약이 없이 표출될 경우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올수도 있지만, 인간의 사랑을 통해 승화될 때는 창조의 에너지로 될수도 있다. 사랑의 유무에 따라 성욕은 두 개의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팜응 옥카잉과 리영희는 31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수도 있었지 않는가? 떠나는 남편의 행장속에 콘돔을 넣는 행위는, 사랑이 식지 않은 부부사이라면 그것은 남편에 대한 모독이나 불신으로 해석되기 십상이고,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린 부부사이라면 그것은 화사첨족(畵蛇添足)보다 더 쓸데없는 군일일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식기 시작한 부부사이라면 《엷은 유리컵같이 쉽게 깨여지는 요즘 가정》을 위해서 그보다 더 위험한 불장난은 없을것이다. 2005. 3
33    (수필) 잘못 채워진 첫 단추 댓글:  조회:5904  추천:54  2006-02-27
잘못 채워진 첫 단추 이순의 나이에 수필쓰기를 배우다 보니 쓰고 있는 한글자한글자마다에 조심이 간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과연 수필인가 하는 의구심때문일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필가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으면서 수필리론공부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수필쓰기 공부를 하다보면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많이 접하는 말이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이다. 수필가들은 원고지를 앞에 놓고 필만 들면 저절로 글이 씌여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초보자여서 그런지 아무리 필을 들고 앉아있어도 붓이 가주지 않아 글이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나는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경지에 이르는 첩경을 찾기 위해 《붓 가는대로 따라간》다고 풀이되고 있는 《수필(隨筆)》이라는 한자어 단어의 원류를 더듬어보기로 했다. 내가 쉽게 찾아 읽을수 있었던 수필리론가들의 글을 아래에 인용해본다. 《남송(南宋)시대의 홍매(洪邁:1123~1202)가 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그의 저술의 서문에서, 저술제목에 이란 말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민병덕 등:《현대문학》, 제 384페지 (동아출판사) 《수필이란 명칭은 중국 남송대에 홍매가 쓴 용제수필(容齊隨筆)에서 비롯되였다. 그는 수필이란 명칭을 쓰게 된 연유를 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수필을 이라 풀이하는 것은 아직도 약 800년전 홍매에 머물러 있다 할것이다.》 (김형진: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며, 《송화강》2003년 제5기) 앞의 두 인용문에서 홍매의 말에 대한 번역글의 차이는 있지만 《뜻하는 바를 앞뒤 가리지 않고 적었기》때문에 《수필》이라 한다는 기본 뜻은 거의 같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는 바를 기록》한다는 말과 《붓 가는대로 쓴》다는 말은 조금도 닮은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김형진의 글은 아무른 해석도 없이 《붓 가는대로 쓴 글》이란 말의 책임을 《800년전》의 홍매에게 전가시키고 있어 아둔한 나로서는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제는 뼈마저 진토(塵土)로 되어 있을 홍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억울함을 호소할 것을 기다릴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도서관에 쫓아가 홍매의 《용재수필》원본을 찾아보았다. 우선 김형진의 글이 《용재(容齋)》를 《용제(容齊)》로 잘못 쓰고 있음이 확인되였다. 홍매의 수필론 원문은 아래와 같았다. 《予老去習懶, 讀書不多, 意之所之, 隨卽記彔, 因其先后, 無复詮次, 故目 之曰隨筆. 》 (《容齋隨筆》序) 《나는 늙어가면서 게을러지게 되여 책은 별로 읽지 않으나 생각이 닿는대로 곧바로 기록하게 되였다. 그 기록의 선후를 다시 가려내거나 목차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수필이라고 이름하게 되였다.》 (《용재수필》서문) 홍매가 주장한 수필론의 키워드가 《수즉기록(隨卽記錄)》임은 첫눈에 나타난다. 중국의 권위적 고대한어사전인 《사원(辭源)》에 따르면 《필(筆)》자는 ①붓 ②서사, 기록 ③산문(散文)등 3가지로 해석되기때문에 홍매가 사용한 《수필》의 《수》는 《수즉(隨卽)》의 《수》로, 《필》은 《기록》의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수필》은 《수즉기록》을 두글자로 줄여 표현한것이다. 《수필》에 대한 《홍매정의(洪邁定議)》는 단연코 《생각이 닿는대로 즉시 기록한 글》이다. 그렇다면 우리 수필문단에서는 왜 《수필》을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해석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조선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이 본격화되던 시기(1930년대~1940년대)에 최초로 수필문학리론의 정립을 시도했던 사람은 김광섭일것이다. 그는 《수필문학소고》(《문학》19 34년 1기)라는 글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대로 쓴 글이다.》라고 했는데 수필이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는 식 해석의 장본인은 홍매가 아닌 김광섭임이 틀림없다.《글자 그대로》라는 수식어를 보더라도 김광섭은 《隨筆》이라는 두 글자를 리해할 때 조선에서 사용하던 《옥편》을 참조한 것이 분명하다. 《옥편》에서 《隨》를 《따를 수》, 《筆》을 《붓 필》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수필》을 《붓에 따른 글》, 즉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르른것이다. 따라서 《김광섭정의》는 한어문단어에 대한 틀린 판독(判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와전된 틀린 정의일 수밖에 없다. 김광섭이 잘못 채운 첫 단추 때문에 우리의 수필문학은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동안 비뚤어지게 옷을 입고있은 셈이다. 이제는 그 첫 단추부터 풀어서 바르게 채워야 하지 않나 싶다. 처음《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는 말을 접했을 때 먼저 생각났던 일이 있다. 1950년대나 60년대 초기 중국영화에서 자주 볼수 있었던 장면이였는데 첫사랑에 빠진 남녀주인공중의 한사람이 저녁에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일기를 적으려고 일기책을 마주했다가 련인에 대한 달콤한 몽환경에 도취된 나머지 붓 가는대로 손을 놀리다보니 공책 한페지는 전부가 련인의 이름자로 메워진다. 사실 《붓 가는대로 쓴 글》이란 앞의 경우 외에도 더 있을수 있겠는지 의문스럽다. 《글 쓰기라는 업보가 원쑤 같다》(최인호),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김현호)라고 말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글쓰기란 결코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인간의 령혼으로 씌여지는 글이 아닌가 싶다. 2004. 5
32    (수필) 순백의 꽃 《도라지》 댓글:  조회:5545  추천:55  2006-02-24
순백의 꽃 《도라지》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룡담산 정상에 엄청난 성을 쌓아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길림. 그 길림, 그 룡담산 아래에서 뿌리를 내리고 순백의 꽃을 피운 《도라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땅을 개척했던 선대들의 불요불굴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국 조선족 순수문학지의 백미로 자리 매김을 한 《도라지》. 이제 《도라지》홈페이지가 개설되면서 세계화시대의 벽지에서 피여난 《도라지》도 자신의 은은한 향기를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인터넷을 리용한 매스미디어에 실어 이 세상 저 끝에까지 전해줄수 있게 되였다. 《도라지》는 20세기의 마지막 하늘을 불태우던 밀레니엄 축제의 불꽃놀이와 같이 화려한것은 아니다. 이른 아침 샘터에서 길은 물동이를 이고 오솔길을 걸어오는 촌티 못 벗은 여인의 소박한 모습같은것이다. 《도라지》는 블루 마운틴 커피나,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루이 13세 브랜디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농가의 밥솥에서 우려낸 숭늉이나 농부들이 논둑에서 참으로 마시는 막걸리같은 것이다. 《도라지》는 세계화시대에서도 우직하게 우리 민족 문학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가려 하는 중국 조선족 문학인들의 량심이기도 하다. 그들이 지향하는 민족문학이 비세계적이고 페쇄적인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다만 다양한 민족문화의 가치들이 조화롭게 공존할수 있는 21세기를 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뿐이다. 《도라지》홈페이지를 방문하시게 될 모든 네티즌들에게 후애와 편달을 부탁드리는바이다. 2003. 4
31    (수필) <오동나무>를 심자 댓글:  조회:5769  추천:41  2006-02-23
를 심자 2년전의 추석이였다.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족 석, 박사생들이 저녁에 회식을 갖기로 하고 나를 초청했다. 초청 용의를 물었더니《추석이 되여 집 생각도 나고 해서 우리끼리 모여 회포를 풀기로 했구요, 이 기회에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초청하는 겁니다》라고 했다. 나는 전화로 집사람에게 량해를 구하고 회식장소를 찾아갔다. 대화중에 연구생들은 《우리도 조선민족과 연변의 발전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변 친구들로부터 ⟨너희들은 일단 북경으로 가면 졸업하고도 다시 안 돌아오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마치 민족과 고향을 등진것 같아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한 학생은 자신이 체험한바를 이야기했다. 몇년전 청화대학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그녀는 연변의 경제 발전에 보템하겠다는 일념으로 북경의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고 졸업후 곧바로 연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생각밖에 자치주 인사부문에서 그녀가 전공한 분야의 인재를 수용할수 있는 단위가 없다는 리유로 그녀를 고향인 룡정으로 보냈고 룡정시는 다시 어느 중학교 수학교사로 배치해주었다. 중학교에서 2년간 고민한 끝에 그녀는 석사생 시험을 거쳐 다시 청화대로 돌아왔다. 조선족의 두뇌라 할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연변의 인재류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였다. 연변은 중국의 변경지역이고 또한 바다길이 없기때문에 중국 내수나 세계시장을 겨냥한 제조업이 기간산업으로 부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연변의 발전전략은 하이테크 산업과 문화산업에 비중을 둘수밖에 없다. 문제는 하이테크 산업이나 문화산업은 상당 수량의 전문인재를 수요로 하는데 연변은 그런 인재를 유치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도리여 류실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 연변에는 현지 자원을 리용한 극히 제한된 제조업과 백두산을 자원으로 한 관광업이 남아 있을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반도의 남북화해무드와 조선의 새로운 경제정책에 따라 언젠가는 한국인들이 《3.8선》을 넘는 륙로로 백두산 관광을 할수 있을것이라는점을 심각히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만약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관광업마저 죽어버린다면 연변의 경제는 어떻게 되겠는가를 걱정해야 할것이다. 보다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연변이 살아남는 길은 21세기에 걸맞는 하이테크 산업과 문화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1990년대에 미국은 실리콘벨리(중국에서 《硅谷》이라고 하는)를 중심으로 정밀 전자공학을 기초로 하는 컴퓨터, 통신 분야의 하이테크 산업을 발전기켜 일본에 뒤졌던 산업경쟁력을 다시 회복시켰고, 제조업으로 세계 제일 경제대국이라 자랑하던 일본은 도리여 경제침체상황에 빠져들게 되였다. 중국은 1990년대 이래 북경시의 중관촌(中關村)에서 IT산업 중심의 중국 실리콘벨리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북경시 해전구와 그에 린접한 창평구, 대흥구까지를 중관촌 하이테크 산업개발구로 지정했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관촌 개발구는 중국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견인차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존 네이스빗은 하이테크 (high tech), 하이터치(high touch)라는 단어로서 21세기의 기술문명에 대한 균형을 잡으려 했다. 중국에서 첨단기술, 고신기술이란 말로 통하는 하이테크는 전자통신공학(IT), 생명유전공학(BT),생태환경공학(ET)등 유망산업들로 익숙해졌다. 하이터치는 인간이 감수하게 되는 기쁨, 포근함, 편안함과 같은 감성적이고 문화적인것이다. 만약 연변에서도 연변의 중관촌이라 할수 있는 하이테크 산업개발구와 문화산업개발구를 조성한다면 조선족 전문인재 유치는 물론 한족을 포함한 국내 전문인재와 해외인재 유치까지도 가능해 질수 있다. 중국속담에《집에 오동나무가 있으면 금봉황새가 날아온다.》는 말이 있다. 하이테크산업과 문화산업의 인재인 《금봉황새》를 유치하기 위하여 지금이라도 좋다. 《오동나무》를 심자. 2004. 4
30    (수필) 원일 아침 수상록 댓글:  조회:5227  추천:35  2006-02-22
원일 아침 수상록 설날 아침이다. 내가 나서 자라난 시골 고향 같으면 이 시각에 수탉의 세 번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질것이다. 이제 한창 도시의 빌딩숲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수십 마리로 무어진 비둘기떼가 아파트사이 공간과 푸른 하늘을 누비면서 빙빙 원무를 출연하고 있다.가까운 창밖에는 두 마리의 까치가 앙상해진 자귀나무가지를 오르내리면서《까-악》,《까-악》요란스럽게 울어대고 있다. 어제 밤 자정, 요란스럽던 폭죽소리에 놀란 원숭이해는 꼬리를 감추고 영원속으로 사라졌고, 이제 을유년 닭의 해의 시작을 알리는 눈부신 태양이 바야흐로 빛을 발산하고 있다. 12년만에 딱 한번 찾아오는《조류(鳥類)》의 해여서인지 뭇새들이 유난스럽게 극성을 부리고 있다. 닭의 해 벽두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나무군 총각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포수에 쫓기는 노루 한 마리가 쫓아와서 살려달라고 한다. 마음씨 고운 나무군은 노루를 나무짐속에 숨겨두고 뒤쫓아온 포수를 속여 보내였다. 살아난 노루는 나무군을 인도하여 산속의 맑은 호수까지 간다. 그리고 래일이면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하게 되는데 그 중 셋째 선녀의 옷을 숨겨 놓았다가 그 선녀를 안해로 삼되 네 아이를 낳기전에는 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행복에 도취된 나무군은 세 아이를 낳은 선녀에게 옷을 돌려주었고 선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홀로 남아 고독해진 나무군은 수탉으로 변해버렸다. 수탉이 지붕이나 담장 높은 곳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우는것은 하늘에 있는 선녀 안해를 못잊어 그러는것이란다. 오늘, 우리는 주변에서 21세기 판《나무군과 선녀》의 이야기가 만연되여 있음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수없이 많은 《선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몰려가고 그런 가정에서는《나무군》만 고독하게 홀로 남아 안해가 돈 보따리를 이고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2년전 나는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서 조선족《선녀》를 만난적이 있다. 함께 간 한국교수들이 음식주문을 하면서 《이 분은 멀리 중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니까 맛있는것으로 잘 대접해 주세요.》라고 서비스 부탁을 하니까 주인아줌마가 30대 후반의 박씨라는 조선족 웨이트리스를 보내 음식시중을 들게 했다. 식사하면서 갈비를 구워주고 있는 박씨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는데 그녀는 길림성의 어는 작은 현성에서 왔다고 한다. 남편은 현정부 산하 기관의 공무원이고 자신은 소학교 교사로 교직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돈을 벌기 위해 브로커에게 5만원의 돈을 지불하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였다고 한다. 첫 2년동안,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달고도 억척같이 일하여 한국에 나오기 위해 빌렸던 빚을 몽땅 갚았고 금년(2003년)초에는 합법로무자의 자격을 취득하였는데 명년 5월까지 애 학비나 벌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집에 남아 있는 남편외에 외지에서 대학 다니는 딸애까지 세식구가 세곳에서 생활하고 있어 지금도 박씨는 혼자 있을 때 집생각 때문에 가끔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건강하시고 열심히 돈을 벌어 될수록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덕담을 남기고 박씨와 해여 졌다. 지난해 여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박씨가 일하던 음식점에 들려 식사하게 되였다. 그런데 생각밖에 박씨를 다시 만나게 되였다. 《5월에는 집으로 가시겠다고 했잖아요?》라고 하니까 돌아가도 할 일도 없을것 같고 그래서 2~3년 더 일해 집 살 돈까지 마련해가지고 가기로 하고 눌러 앉았다고 한다. 돈이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버리면 개도 않 물어간다는 그 돈, 그러나 그 돈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수 없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다. 먹고 살만한 돈이 생기면 가전제품들을 갖추어야 하고 그것이 마련되면 좀 더 큰 내 집을 갖고 싶고 그 다음에는 자동차……그리고 끝없는 소유욕때문에 우리는 돈의 노예로 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가정들은 《나무군과 선녀》처럼 《리산가족》생활을 하고 있다. 과연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 번 돈이 래일의 행복을 기약할수 있을가? 떠오르는 을유년의 저 밝은 해를 바라보면서 우리 민족의 《리산가족》들이 하루 빨리《통일가족》으로 되기를 기원해본다. 2 《이아(爾雅)》 는 주나라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지은 책이라고 전해지는데 혹자는 공자의 제자들이 편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아》의 《익(翼)》조에는 닭의 다섯가지 덕목을 기록해 놓았다. 《머리위에 관(冠)을 썼으니 문(文)이요, 발에는 큰 발톱이 있으니 무(武)요, 적을 만나 필사적으로 싸우는것은 용(勇)이요, 먹이를 얻으면 서로 불러오는것은 인(仁)이요, 때를 맞추어 우는것은 신(信)이다.》(《首戴冠者, 文也; 足博距者, 武也; 敵前敢鬪者, 勇也; 得食相告者, 仁也; 鳴不失時者, 信也.》) 닭이 머리우에 볏을 달고 있는것을 관을 썼다고 했고 관을 썼다는것은 벼슬을 하는것과 같은 뜻이니 문덕이 있다거나, 큰 발톱이 있어 무덕이 있다고 한것은 닭의 외관적 모양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별반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용, 인, 신은 닭의 행위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인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탉은 적을 만나면 처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운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자기보다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용감하게 싸워서 쫓아내고만다. 영어에서도 《싸움닭과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이 《투지에 불타다(feel like a fighting cock)》라는 관용구로 정착되여 있다. 싸움에 림하는 수탉은 오직 투지에 불탈뿐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이아》에서 말하는 용(勇)이다. 그다음 수탉은 먹이를 발견하면 꼭꼭거리며 처자를 불러 함께 먹게 한후 새 먹이를 찾아나서는데 그것을 인(仁)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탉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려주는 광명의 예언자이기때문에 신(信)이라 했다. 옛성인들이 수탉을 극구 칭찬하여 수탉은 처자와 가정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와 식구들에게 먹이를 배려해주는 어진 품성을 구비했을뿐만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벽을 온 천하에 알려주는 지혜와 신의를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수탉을 리상형 남성의 화신으로 보았다. 다산 정약용은 《제변상벽모계령자도(題卞尙璧母鷄領子圖)》라는 시에서 암탉의 행위를 실감나게 묘사했다.목털은 곤두서서 고슴도치 닮았고,/제 새끼 건드리면 꼬꼬댁 쪼아 대네./....../낟알을 찾아내면 쪼는 체만하고서,/새끼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네. 시에서 제 새끼를 잘 보호하고 배고프더라도 먹이를 먼저 새끼들에게 먹이는 암탉은 모성의 사랑과 보호본능을 가진 리상형 어머니의 화신으로 그려졌다. 닭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닭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지 안나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한해 연길시 조선족의 리혼율은 68.4%,즉 3:2를 훨씬 초과한 상태이고 리혼녀성의 50%가 해외 돈벌이를 나갔다고 한다. (《흑룡강신문》05.1.26) 이제 우리는 조선족가정의 해체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리혼률은 하늘 높이 치솟고 있고 가정의 해체와 녀성의 류실로 인한 출산인구의 감소는 바닥을 내리치고 있다. 중국의 대륙에서 유유히 흐르던 조선족이라는 이 큰 강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감소현상 때문에 원천에서부터 고갈되여가고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음악가인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가족(FAMILY)》의 서문에서 《가족은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우리의 마지막 기적이다. 가족의 사랑은 바람과 같다. 본능적이고 꾸밈이 없으며 부서질듯 연약하지만 아름답고 때로 서로에게 화를 내도 결코 멈출수 없는 사랑, 그것은 우리 모두의 숨결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다.》라고 피력했다. 우리 민족 남자들은 이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마지막 기적》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도, 능력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 민족 녀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의 근원인 모성의 보호본능을 상실했단말인가? 옛 선비들이 칭찬한 닭의 덕목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반성해야 하지 않나 싶다. 3 한족(漢族)문화의 뿌리는 지신(地神)계렬에 두고 있다. 염제(炎帝)는 그의 어머니가 화양(華陽)이란 곳에 놀러 갔다가 신룡(구렁이)의 머리에 교감이 되여 염제를 낳았다. 황제(黃帝)족은 곰도템씨족(有熊氏)과 뱀도템씨족(蛇氏)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염황자손(炎黃子孫)인 한족은 한나라 후기 이전에는 구렁이를 룡이라하여 도템동물로 숭배하다가 불교가 전해 오면서 인도의 룡과 구렁이룡을 결합하여 오늘의 룡을 만들어 내였다. 우리 민족 문화는 천신(天神)계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군은 천체(天帝)의 아들과 웅녀사이에서 태여 났고, 주몽은 천제의 아들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여났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여났고 그의 왕후 알영은 닭의 화신이였다. 김알지왕도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여 났는데 그의 탄생은 흰닭과도 관련된다. 그래서 한족문화에서는 땅의 색깔인 검은색이 숭상(한나라때 까지도 황제의 면복은 검은색이 였다)되였고 땅에서 기여다니는 구렁이(불교가 전해진후에는 룡이)가 도템동물로 숭배되였다. 그 대신 우리 민족은 하늘을 대표하는 밝은 색깔인 흰색(백의 민족의 옷, 조선조의 백자)을 선호하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숭배하며 조상이 알에서 태여났다(삼국시대)고 하거나 새를 수호신으로 (솟대, 목안, 닭)모시는 문화를 창조하였다. 중국 고대에 만들어진 천간(天干), 지지(地支)의 12지에는 뱀과 룡이 동시에 선정되여 있지만 그 많은 새들 가운데 유독 닭만 선정된것도 한족의 지신숭배문화와 관련되지 않을수 없다. 어제까지도 닭의 해가 시작되기전에 결혼을 서두르는 커플들이 몰려들어 결혼등록기관이 붐비고 결혼예식장, 웨딩 포토 스튜디오 등 결혼과 관련되는 업체들이 호황를 누렸다고 한다, 을유년에는 립춘이 빠졌기때문에 불길한 《과부의 해》라는 민간 속설때문이였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는 을유년은 미래형이여서 단언할수는 없지만, 어제 밤에 사라진 갑신년 원숭이해는 《립춘》이 두 번이나 있어 《대길(大吉)》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불길한 해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수만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전쟁의 해였고, 남아시아 쓰나미로 25만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중국에서만 해도 지난 한해 각종 사고로 13만 7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개의 립춘을 가진 원숭이해에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생겼을까?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원숭이해가 마감하기전까지 결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것을 보면서 한족들에게 있어서 전통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게 된다. 한족문화의 속설과는 달리, 을유년 닭의 해는 우리 민족 민족사나 민족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운의 한해였다. 60년전, 그러니까 지난번 을유년 닭의 해에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우리 민족은 34년11개월 보름만에 나라를 찾았고 식민지시대에 금단되였던 우리의 성씨와 우리 말, 우리 글도 함께 찾았다. 중국 조선족도 일제와 위만주국의 통치에서 해방되여 처음으로 자신들이 개간한 땅의 주인으로 되였고 정권수립에 참여하여 나라의 주인으로 되였다. 60년만에 다시 돌아 온 을유년 닭의 해를 맞이하여 조선족 모두가 힘을 합쳐 희망의 홰불을 다시 밝히고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격감 등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면 싶다. 2005년 설날아침
29    (수필) 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댓글:  조회:4842  추천:58  2006-02-21
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흔히 인간의 삶은 무한히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과 사랑은 일상의 사소한 에피소드의 집적(集積)이고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복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앤 타일러는 자신의 장편소설 《종이시계》에서 말한다. 타일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자며 매일마다 하루 세끼의 밥을 먹고⋯ 우리의 일상생활은 무한한 반복이라고 할수 있다. 몇년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廊橋遺夢)》의 주인공인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처럼 40대나 50대에 늦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도 인생의 반복이라 할수 있다. 그러한 리치를 시인 김용택은 지난 세기말에 《새로운 세기의 해가 뜨더라도 그건 어제의 해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무한히 반복한다는 생각은 거시적일 수밖에 없다. 미시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똑같은 반복은 있을수 없다. 어제 내가 먹었던 세끼의 밥과 오늘 내가 먹는 세끼의 밥은 그 내용이나 수량이 같을수 없다. 40대나 50대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20대나 30대 당시에 경험했던 사랑과는 닮을수가 없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인간은 생물학적 로화과정에서 무엇인가 부단히 망각해가면서 또 새로운것을 배우기때문에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일수 없다. 태양도 모든 행성들에게 빛과 열 에너지를 발산시켜 주면서 식어가고 있기때문에 《새로운 세기의 해》가 《어제의 해》일수 없다. 그렇게 보았을 때 나는 삶은 무한한 반복이라고 하는 타일러나 내일의 해가 《어제의 해》라고 하는 김용택보다는 마거릿 미첼의 말이 더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날린다는 뜻의 《飄》라는 책이름으로 번역된 미첼의 장편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남부 대지주의 딸인 스칼렛 오하라가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패배로 부귀영화도 사랑도 모두 바람에 날려버린 후 자신의 땅 타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래일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소설을 개작한 영화는 그 말을 《래일은 래일의 태양이 솟아오른다》로 대체하고 있다. 둘 다 래일은 오늘의 반복이 아닌 또 다른 시작으로 보고있기때문에 미래지향적이여서 좋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실패와 성공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통과 희열로 점철된것이라 할수 있다. 누구나 쉽게 경험하게 되는 실패는 우리들에게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 실패가 클수록 우리가 감수하게 되는 불행과 고통은 커진다. 그러나 그 고통을 딛고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래일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 될수 있고 《래일의 태양》을 맞이할수 있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공의 희열에 젖어만 있지 않고 새로운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역시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인 《래일의 태양》을 껴안게 될것이다.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70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시 외에도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동화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남긴 인도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였을뿐만아니라 인도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나이와 관계없이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 2004년의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새로운 한해가 낡은 해를 대체했기때문에 우리 모두의 년륜에 한살이 보태여졌다. 지난 한해에 실패하고 좌절하고 불행했던 사람들은 그 마음의 상처들을 2003년의 마지막 언덕에 묻어두고 지난해가 아닌 또 다른 한해의 시작을 시도해야 한다. 지난해의 성공으로 보람을 느꼈던 사람들도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새해의 태양을 맞이해야 할것이다. 2004년 원일 아침
28    (수필)선 택 댓글:  조회:4476  추천:53  2006-02-20
선 택 인간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인생을 시작한다. 우선 태여날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선택할수 없다. 따라서 귀속 지위도 선택과 관계없이 결정된다. 부자집 자식으로 태여나느냐 아니면 가난한 집에서 인생을 시작하느냐 하는 가족배경과 가정출신 따위를 말한다. 더 큰 틀에서 본다면 민족출신, 국적 등도 선택전에 이미 운명적으로 결정되여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인간은 커가면서 항상 선택하며 인생을 살게 된다. 첫돐 날 우리는 돌상 앞에 앉아 부모와 집안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장래의 운명을 점치는 인생의 첫번째 《선택》을 하게 된다. 전통문화의 해석과 달리 그때의 선택은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물하면서 가족일원으로 승인받는 의례일뿐이다. 좀 더 커가면서 선택은 잦아진다. 아빠, 엄마를 따라 백화점에 갔을 때 내가 선택한 장난감이나 먹거리를 갖기 위해 부모들에게 억지를 쓰기도 하고 나의선택을 현실화하기 위해 형제나 친구들과 싸우기도 한다. 가정이나 유치원에서 실시하는 조기교육의 효과로 《공융양리(孔融讓梨)》형 리타주의적 선택도 있으나 유아시기의 선택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전무한 상태에서 선천적리기주의에 립각한 현실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선택이라고 할수 있다.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우리는 진정한 선택의 방법론을 배우게 된다. 학교교육의 본질은 미래를 선택하기 위한 준비과정이기 때문이다. 더 크게 되면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고, 직업과 직장을 선택하며 평생 함께 살아갈 인생의 배우자를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들이 모아져서 한 인간의 인생항로를 결정한다. 선택은 항상 어렵다. 그것이 설사 미래와 별 관련이 없이 유아시기의 선택과 같은 현실에 대한 간단한 선택일지라도 누구나 자기가 한 선택을 후회해본 경험이 있을것이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산 옷이나 신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쫓아가 바꾸는 경우를 가끔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한 선택이 미래와 적결되였을 때 선택은 더 어렵다. 미래라는것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것이기때문에 선택을 어렵게 한다. 선택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분석할수 있어야 하고 선택을 위한 주변 여건들의 변화상황을 예측할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눈앞의 리익도 미래의 희망도 제대로 선택할수 없는 사람을 우둔하다고 평가한다. 그대신 눈앞의 작은 리익은 잘 챙기지만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 결여해 큰 리익을 놓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 한족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소총명(小聰明)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약삭빠른 사람》이나《잔꾀부리는 사람》정도로 번역될수 있다. 미래에 대한 예지를 갖추고 래일의 큰 일을 위하여 오늘의 작은 리익에 대한 희생도 감수할수 있는 사람은 진짜 현명한 사람이다. 사회의 공공리익과 개인의 리익에 갈등이 생겼을 때 전자를 선택하여 후자를 희생시키는 사람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본보기로 되나 그와 정반대되는것을 선택한 사람은 그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된다. 나아가서 민적이나 국가의 큰 리익을 위해 비상상태에 개인의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으로 추대하며 민족이나 국가의 발전을 위한 항로를 선택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도자로 모신다. 어느 사회단체나 정당, 민족이 선택한 미래는 그 단체, 정당, 민족을 구성한 구성원 개개인이 선택한 미래의 총화이다. 중국 조선족공동체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200만 조선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선택한 미래상이 합쳐져서 조선족공동체의 미래선택이 된다. 1999년 한해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3800명의 조선족 신생아가 태여났다. 그 수자는 10년전인 1989년에 비해 4분의 1을 좀 웃도는 것이다. 만약 조선족공동체가 출산인구 감소의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그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지난 10년동안의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고 할 때 중국 조선족의 아기출산수는 2009년에 2000명으로 줄어들고 2019년에 500명, 2029년에 125명, 2039년에 31명, 그리고 2049년에는 0(Zero)으로 될것이다. 1999년에 출산된 조선족 녀자아이가 4000명 좌우인데 같은 해 한국으로 시집간 결혼적령기 녀성의 수자가 6000명을 초과했다는 사실과 출산인구 감소의 기하급수적 요소까지 계산한다면 중국에서 조선족 출산인구가 0으로 되기까지는 20년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것이다. 조선족 출산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조선족사회의 《처녀류실》과 직결된다. 조선족 공동체를 리탈하고 한국으로 시집간 녀자의 수가 6만명을 넘어섰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 낳아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가야 할 조선족 녀성 3명중 1명이 한국으로 가버렸다는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수의 녀자들이 도시의 유흥업소에 몰려있다. 때문에 농촌 총각이 장가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정도로 어려워졌다. 만약 조선족 남자들이 일년에 마시는 술의 량과 놀음으로 소모하는 시간을 모두 4분의 1로 줄이고 그대신 과학기술과 생산기능을 열심히 배우면서 악착같이 일해가는 책임성 있는 인생 길을 새롭게 선택한다면 조선족 녀성들도 구태여 낯설고 물설고 차별시하는 한국으로 가거나, 도시의 유흥업소로 몰려갈 필요가 없어지고 중국에서 자신들이 미래를 담보해줄수 있는 조선족 총각들과 결혼하여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미래를 선택할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할 때 줄어든 4분의 3의 출산인구가 금방 보충되지 않더라도 21세기를 사는 중국 조선족 공동체의 발전과 번영은 충실한 구성원 모두의 현명한 선택으로 담보될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배 사람을 위한 순풍은 있을수 없다. 이제 《조선족호》라는 배도 21세기의 항로를 선택해야한다. 선택을 위해 주어진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제시된 메뉴도 간단하다. 방향 없이 표류하다가 침몰해버리는과 여타 55개 민족호 배와 함께 시련을 극복하면서 앞길을 열어나가는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것이다. 2001. 5
27    (수필) 벼이삭은 성숙될수록 고개를 숙인다 댓글:  조회:4505  추천:53  2006-02-17
벼이삭은 성숙될수록 고개를 숙인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그러나 수교 10년 만에 중국과 한국은 《우호협력관계》의 나라를 넘어 《동반자관계》의 나라가 되었다. 중⦁일 수교보다는 20년 늦었지만 서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상황에서 수교를 단행했기 때문에 두 나라간의 선린관계는 재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 2001년 중국은 한국의 첫 번째 투자대상국과 두 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부상되었고, 한국은 중국의 세 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되여 두 나라 무역규모는 이미 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지금 중국에 장기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 가운데 한국인들이 숫자적으로 단연히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재중 외국인 유학생중 한국 유학생도 제1위를 점한다. 지난 한해에 중국으로 유학 온 한국 유학생은 1만 여명이나 되었는데 그 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중한 두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류는 급속히 발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재중한국인들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그 교류의 민간사절(使節)이자 주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 장기체류자 제1위》라는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20만 재중 한국인 모두가 민간사절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을 때 동반자로서의 두 나라 교류는 계속 장족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서 두 나라 교류의 발전에 역(逆)역할을 하는 한국인들을 가끔 보게 된다. 굳이 마약제조, 사기 등 의도적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두 나라 선린관계의 발전에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일 월드컵 때의 일이다. 6월 21일자 상해《청년보》에 《한 한국여자》가 쓴 《내가 본 중국사람》이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한국의 월드컵경기장에서 몇몇 중국인들이 한국축구팀의 선전(善戰)을 보면서 자기나라 일처럼 기뻐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글을 쓴 《한국여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응원하는 중국인들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느냐?》고 물었다. 중국인들은 《우리는 모두 아시아인들이잖아요. 당신들이 아시아를 대표해서 이기고 있지 않습니까, 아시아의 영광인데 물론 기쁘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여자》는 중국인들의 대답이 너무나 《황당무계하다》고 쓰고 있다. 《오늘의 국제경쟁은 국가대국가로 진행되고 있지, 주(洲)대 주(洲)의 경쟁이 아니다. 그리스인은 영국의 영광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 (이 《한국여자》는 유럽공동체도 모르는 모양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인민들의 영광이지 너희들이 거지처럼 구걸해 갈 것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한국여자》는 글에서 《우리 서울대학교는 과학기술면에서 너희 북경대학을 훨씬 앞질러 나갔고, 우리나라 기업(삼성, LG, 기아, 대우, 현대, JNC…등)은 폭풍마냥 너희 중국시장을 휩쓸고 있다.》 또 《유행 면에서 중국의 대부분 국토는 이미 ⟨한류⟩에 의해 완전히 소탕되고 말았다.》라는 등등 중국인들을 자극하는 오만함과 방자함을 서슴없이 표출시켰다. 우리는 어느 나라 국민이든지 《 오만한 자와 방자한 자들에게 등을 돌린》 다는 이치쯤은 알아야 한다. 월드컵 때 중국인 젊은이 층에서 일어난 반한(反韓)감정이 상기 《한 한국여자》와 같은 재중한국인들의 오만과 방자에 무관할 수 없다. 그 당시 한국 매스컴들은 한국팀의 4강 진출 과정에 일어난 일부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을 《중국인들의 대국주의의식 내지 고대의 종주국의식의 발로》라고 한 결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러한 의식이 더 진하게 남아있는 50대 이상 연령층의 중국인들은 도리어 한국의 4강 진출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반한감정으로 흐른 사람들은 대부분 《대국주의》, 《종주국》의식이 제일 희미한 20대들이었다. 그들은 《한 한국여자》가 글에서 표현한 《에 의해 완전히 소탕된》 소위 《친한파》들이였다. 물론 반한감정의 시원은 상업주의였다.(50만원 상금이 걸린 16강, 8강, 4강 맞추기 TV퀴즈응답에, 생각 밖으로 선전한 한국 팀 때문에 16강도 맞추지 못한)그러한 화풀이 식 반한감정에 기름 친 것이 바로 일부 한국인들의 오만과 방자함이었다. 어느 나라 민족이든 간에 그 나라 그 민족이 갖고 있는 문화적 장점이 있다. 우리는 외국에 갔을 때 그 나라나 그 민족의 문화적 장점을 겸손한 자세로 발견하고 배워야 한다. 오만과 방자는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 간의 우호교류의 금물이다. 벼이삭은 성숙될수록 고개를 숙인다. 2002. 11
26    (수필) 눈물없이 읽을수 없는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5471  추천:54  2006-02-16
눈물없이 읽을수 없는 사랑이야기 ---박경식교수의 수필 읽기 중국 한족의 전통문화가 원앙새를 사랑의 심벌로 선정했듯이 우리 민족은 기러기를 사랑의 새로 꼽는다. 기러기는 암수의 의가 좋고 사랑이 깊을뿐만 아니라 짝이 죽으면 다시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 정절(貞節)의 새이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혼례에서는 나무로 만든 목기러기를 백년해로의 서약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사용한다.《 신랑은 목안(木雁)을 쥐고 / 신부는 건치(乾雉)를 쥐었으니/ 그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이옥-조선왕조시대 시인). 이러한 상징성때문에 홀로 된 사람을 짝 잃은 《외기러기》라고 한다. 박경식은 기러기띠 녀자이다. 그녀는 순정으로 살아간다.《누구나가 인정해주고 누구나가 부러워한》 행복했던 46년간의 결혼생활이 그랬고 악성뇌종양으로 남편을 잃고 《외기러기》로 된 외로움 역시 그러하다. 그녀는 길림성 영길현 천강 출신이다. 1953년 9월부터 1957년 7월까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시절에 만나 함께 로맨틱한 사랑에 빠져버린 련인(김도권)과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 뜨거웠던 사랑을 결혼에 골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에서 조선문학과 세계문학 강의를 담당했던 그들 기러기부부는 1994년 전후로 퇴직하게 된다. 슬하에 일녀 일남을 둔 가정생활은 화려하게 흐드러져가는 타입은 아니였지만 가끔 가다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일상의 련속이였다. 그러던 박경식은 뒤늦게 《인간의 행 불행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인것》임을 깨닫게 된다. 《절대적으로 행복한 사람도 없고 절대적으로 불행한 사람도 없다.》 2001년 3월, 일본의 어느 대학강단에서 쓰러진 《남편이 불의의 잔인한 병으로 수술대에서 겨우 잔명을 이어받은 때로부터》그녀의 《나날은 불안과 초조와 고통으로 범벅이 된 암담한 시,공간이였다.》그러나 그녀는 고통을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남편에게 기대여만 산 안해가 이제는 남편의 지팽이가 되여야 할것이다. 내가 성한 한 남편을 절대 허전하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다. 그런데 불행은 그것으로 끝난것이 아니였다. 언어능력과 기억력이 점점 쇠잔해지고 있는 남편을 간호하던 그녀에게 2002년 11월에 폐암진단이 내려진것이다. 《내 명이 이뿐이라면 굳이 더 살자고 모대길것 없이 흔연히 깨끗하게 떠나야지!》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내가 병원에 가고 없는 동안 그리 불안해 하더라는 남편을 보자 홀연 눈물이 고여올랐다. 〈그래,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버려두고 나 홀로 먼저야 못 가지요. 당신을 고이 먼저 보내드리고 뒤를 따르리다.〉》 (2002년 11월 22일, 일기) 그 시각부터 그녀는 남편 먼저 가면 안된다는 강한 집념으로 살아간다. 언어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의식마저 날따라 몽롱해가는 남편을 향한 그의 사랑은 자신의 불치병에 대한 공황을 초월한다. 병원에서 화학치료를 받으면서 그녀는 남편을 위한 《체념할수 없는 희망을 기탁하면서》 《센바쯔루》(천마리의 종이학)를 날마다 접는다. 《설사 그것이 나타날수 없는 기적이라 하더라도, 이뤄질수 없는 헛된 꿈이라 하더라도, 나는 한결같이 빌면서 접고 접고 또 접는다.》 (2003년 7월 4일, 일기) 이제 그녀의 사랑은 진지한 집념으로 나타나는 순정의 기호로 되여버린다. 2003년 12월 2일, 김도권교수는 안해가 병석에서 형언키 어려운 고통을 이겨가며 접은 《천마리 깨끗한 학무리에 옹위되여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이제 박경식은 《외기러기》가 되였다. 《꿈에 임을 보러 베개에 지혀시니/ 반벽(半壁) 잔등(殘燈)에 앙금(鴦衾) 참도 찰사/밤중만 외기러기소리에 잠 못 이뤄하노라.》(이정보) 《지난밤 꿈에 남편을 보았다. 그 새 지지리도 그리웠건만 꿈이 없더니 어제 밤에 보았다.》(2003년 12월 17일, 일기)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두개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내게는 아직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의지로 삼는 자식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나의 사랑이 수요된다…. 아버지의 몫까지 사랑을 주어야지!》(2003년 12월 12일, 일기)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추억의 곳간》에 모아둔 사랑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70이 되면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것인데 이제는 혼자 완성할수 밖에 없다. 이제 《불치의 병》도, 죽음도 그녀에게는 무서움으로 될수 없다. 그리움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생의 마지막 순간 남편을 찾아 떠나갈 준비가 되여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인생이 길지 않은만큼, 이 제한된 시간내에 서둘러야 할 일》이 있는 만큼 그녀는 《강한 의지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진지하게, 즐겁게, 열렬하게 살아온 그이와의 보람있는 생을 꼭 애들에게 보여주고 물려주기》(2003년 12월31일, 일기) 위해 박경식은 이미 한권 분량의 일기를 정리하고있다. 그러나 박경식 기록보관소의 비공개시효(時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그녀는 우선 4편의 수필을 내놓았다. 앞으로 계속 발표되였으면 싶다. 그녀의 글에는 작고 소사하고 감동적인 일상과 함께 사랑과 행복에 대한 작은 깨달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박경식의 사랑은 《감동바이러스》이다.그녀의 사랑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감동바이러스》에 감염된 《감동환자》가 되여버린다.그래서 그녀의 글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읽을수가 없다. 박경식의 사랑에는 여백이 없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그 한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했었고 그가 떠난후에도 그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때문에 사랑으로 가득 차버린 그의 가슴에는 슬픔이나 고통이 들어앉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행복하다. 콜린 하긴스 작 《19 그리고 80》의 주인공 모드는 《나는 아름다움을 보고 울어. 그건 인간만이 느낄수 있는 감정이야.》 라고 말한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싶은 사람들에게 박경식의 수필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읽기전에 손수건을 꼭 준비할것도 귀뜸한다. 2004. 8
25    (수필)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댓글:  조회:4581  추천:54  2006-02-15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사랑은 동사》라는 담론은 참으로 멋이 있어 좋다. 우선 우리가 마음속의 사랑을 사전적 해석처럼 명사, 그것도 추상명사로 간주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중에서 구경 몇 사람이 그 사랑을 읽을수 있고 느낄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의 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행동으로 옮길 때 사랑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빛을 발할수 있을것이다. 지난 3월 초, 룡정에 있는 최려나의 집에서 가스 폭발사고가 일어나 어머니가 숨지고 12살의 려나는 전신화상을 입어 위독한 사태에 처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 소식이 조선족 젊은이들이 꾸리고 있는 모이자 사이트에 뜨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지금 내가 봉직하고 있는 중앙민족대학 조선족 학생들이 려나의 치료비용에 보탬하기 위한 모금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평소에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면서 모아온 용돈을 생면부지의 려나를 위해 재거나 주저함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라는 꽃쌈지에 담아 헌납하고 있다. 나의 제자들 가운데 학문의 길을 버리고 돈벌이에 나선 사람도 적지 않다. 간혹 그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끝에 《저도 돈을 많이 벌면 민족문화발전을 위해 기부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듯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물론 그 말이 빈말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다음날 실천으로 옮겨질 때 역시 훌륭한 일이 될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 구성원 가운데는《돈을 많이 번》사람보다는 자기앞에 놓인 삶이 힘들고 고단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다. 자신의 삶이 넉넉치 않으면서도 삶의 벼랑끝에 몰린 사람들의 불행과 힘겨운 사정을 리해해주고 또한 그 처지에 서서 볼수 있는,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삶은 그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모두가 풍요로워 질수 있다는것을 우리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서 발견할수 있다. 려나의 불행과 힘겨운 사정을 헤아려주려는 대학생들의 쌈지돈 모금이 바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평범한 일상일것이다. 만약 우리가 《민족대개조론》과 같은 거대담론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겠다는것과 별다름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불행이나 아픔을 느끼는 우리 민족 구성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린 불행한 사람, 려나와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를 당하거나 불치병에 걸려 절망에 빠진 사람,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려버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우는 사람 그 사람들의 불행과 아픔을 사랑으로 껴안지 못했을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한 거대담론보다는 우선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메말라졌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며 우리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된다》는 시대적 의식흐름에 편승한 나머지 너무나 숨차게 달려왔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야 할 때가 왔지 않나 싶다. 우리 민족의 발전이란 것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든가, 국가의 령도층에 많이 진출했다든가, 유명인사들이 많이 생겼다는것과는 동의어가 될수 없다.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 때 우리는 민족의 발전을 운운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행복의 키워드가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것일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돈, 권력, 명예 같은것으로 쉽게 행복해질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점과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아무리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보다 힘없고 고단한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수 있을 때 우리 모두가 행복해 질수 있을것이다.《베풀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부자가 될수 있다》라는 말은 성 테레사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사실 항상 베풀며 살아가는 삶보다 더 풍요로운 삶은 있을수 없다. 이제 4월에 들어서면서 봄은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 있다. 목련꽃이 지게 되면 아카시아꽃이 만발하게 될것이다. 이 화창한 봄날에 우리 대학생들의 자그마한 사랑의 마음들이 봄꽃 같은 아름다움으로 나를 행복해지게 한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2004. 3
24    (수필)군자의 교제는 물처름 담담하고 댓글:  조회:5113  추천:58  2006-02-14
군자의 교제는 물처름 담담하고 몇년전에 만주학에 관한 책을 한권 출간한적이 있다. 그후 만족출신인 사회과학원의 관기신 연구원이 내 연구실에 찾아와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시간이 되여버렸다. 내가 대접하겠으니 점심 먹고 가라고 하니까 관교수는 《군자지교 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라는 말을 거듭 하면서 사양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그런데 얼마전 어느 수필가가 쓴 글을 읽다가 《군자지교 담여수》를 해석하여 《군자들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있다》고 주장한 구절이 눈에 띄여 당혹감을 금할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교수가 그때 내 연구실을 나서면서 《우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귑시다》라는 말을 반복했단말인가 라고 생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군자지교 담여수》는 중국의 고전 《장자(庄子)》의 《산목(山木)편》에 나오는 말의 머리부분이다. 《군자의 교제는 물처럼 담담하고, 소인의 교제는 감주처럼 달콤하다. 군자는 담담하게 친분을 돈독히 하고, 소인은 달콤하게 그 친분을 끊는다.(君子之交淡如水, 小人之交甘若醴 君子淡以親, 小人甘以絶〭)》 그리고 거기에는 《리해관계를 계산하지 않기때문에 담담하고 도가 합일을 이루어 친해진다.(無利故淡, 道合故親)》란 해석이 붙어있다. 즉 《군자는 리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교제를 하기때문에 뜻을 같이 할수 있고 따라서 친교가 돈독해진다》는것이다. 여기서 장자가 주장한것은 친구간에 거리를 두라는것이 아니라 반대로 군자는 서로 교제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이른바 《도합(道合)》이라는 최고경지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것이다. 친구를 사귀면서 리해관계를 따지지 말고 마음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것은 동서고금 성현들의 공통된 생각인것 같다. 《진정한 친구는 모든 행복감 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을 주며, 리해타산을 따지지 않는다.》 (라 로슈푸코:《잠언집》) 《진실되고 참된 우정이란 서로가 공유하고 자신 의 행복이나 불행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감정 으로 림해야 하는것이다.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에 대한 격언》) 《요컨대,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와의 우정이라 부르는것은 서로 스스럼없이 말할수 있는 허물없고도 친밀한 관계를 이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우정은 서로 힘을 합쳐 하나의 감정을 공유하는것이다.》 (몽테뉴:《우정에 대하여》) 《모든 것을 잊고 도취하는 사람은 애인이지만, 모든것을 알고 기뻐하는것은 벗이다.》 (보나르:《우정론》)《우정은 대등한 인간끼리의 리해를 떠난 거 래다.》 (골드 스미스:《좋아하는 사람》) 《벗이란 무엇인가? 두 사람의 육체에 사는 하 나의 령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에르티우스》) 《사랑이란 무엇일가? 두 마음이 한몸으로 되는 것. 우정이란 무엇일가? 두 몸이 한마음으로 되는것.》 (루: 《교구 목사의 명상》) 《우정은 령혼의 결합이고 마음의 결혼이며 덕 성의 계약이다.》 (펜:《고독의 열매》) 《리해타산을 따지지 않는다》든가 《순수한 감정으로 림해야》한다든가 《리해를 떠난 거래》라는것은 장자가 주장한 《물처럼 담담》해야 한다는것이고 《하나의 감정을 공유하는것》, 《하나의 령혼》, 《두 몸이 한 마음으로 되는것》, 《령혼의 결합》이라는것은 결국 장자가 말하는 《친(親)》이고 《뜻을 같이 한다》는 《도합》이다. 부정부패와 인성의 타락이 사회적 불신을 조장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리해타산을 앞세워 감언리설과 뢰물교환으로 가까이 사귀다가 리해충돌이 생기면 원쑤로 되여 갈라지는 《소인》배들의 교제보다는 리해관계의 계산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뜻과 가치를 같이 하는 《군자》의 교제가 인간관계의 일반론으로 되였으면 싶다. 글을 쓰면서 고전에 기록된 잠언을 리용하려면 문장의 본의를 존중할줄 알아야 한다. 글의 일부분을 잘라내여 본의와 다르게 제멋대로 사용한다든가 아전인수식으로 해석을 덧붙이는것은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대 금물이다. 2004.5
23    (수필)고슴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 댓글:  조회:4881  추천:64  2006-02-13
고슴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 일반론 보다는 특수론을 따르는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얼굴모양 못지 않게 다양한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니말이다. 나와 너 혹은 너와 그 사람 사이의 거리를 두고 말하는 이른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일생동안 사귀게 되는 사람은 수십명에서 수백명, 수천명 심지어 수만명이 넘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진정한 친구도 있을수 있고 보통 친구도 있을수 있을것이며 심지어 어디에서인가 우연히 만나 인사나 하고 갈라진 사람도 있을수 있을것이다. 사람에 따라 한사람을 사귀여도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고 진심으로 사귀는 사람이 있고 그와 반대로 자신의 마음을 단단한 껍질속에 감추어놓고 언제나 일정한 거리밖에서 사람을 사귀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두고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생겼을 것이다. 함석헌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사람/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가 있으니〉 하며 빙긋 웃고 눈을 감을수 있는 그 사람/ 온 세상 찬성보다는 〈아니오〉 하고 머리를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약 한 사람이 죽음의 위험에 놓여졌을 때 살아남을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서로 양보할수 있는 친구를 가졌거나,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버려 외로울 때 내 마음을 포용해줄수 있는 친구를 가졌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스벤 레게너는 장편소설 《레만씨 이야기》에서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이웃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주인공 프랑크 레만을 그려내고 있다. 서 베를린의 어느 술집 스텐더인 프랑크에게는 《몇권의 책과 빈 침대가 있는》 단칸방이 있는데 인생을 《살아가지만》 인생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그 거리를 빈침대가 담보해주고 있다. 《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진 건 아니예요》라고 말하던 그의 애인도 결국 다른 남자의 련인이 되여버리지만 그는 그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응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프랑크 레만형 인간들을 가끔 볼수 있다. 그들에게는 삶이나 사랑이나 그 모두가 지켜야 할 《거리》일뿐이다. 《친구 없이 사는 삶은 황량한 사막에서 사는것과 다름없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지고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불행해지는 법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우정이라는 빛은 우리의 불행을 치유해주는 유일한 빛이기때문이다》라고 말한 그리시앙의 잠언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지를 나는 상상조차 할수 없다. 우리는 로마법에 기준한 촌수라는 잣대로 친족성원간의 피의 농도를 잰다. 나와 내 부모, 나와 내 자식 사이는 1촌, 나와 내 친형제 그리고 나와 내 할아버지나 나와 내 손자 사이는 2촌, 나와 내 아버지 형제 사이나 나와 내 형제 자식 사이는 3촌…이렇게 친족 사이의 관계는 부단히 증가될수 있는 수자로 표시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친족이외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잴수 있는 눈금 있는 잣대는 없다. 그렇다 해서 수자로 표시할수 없는 관계가 꼭 수자로 표시할수 있는 관계보다 거리가 멀다는것은 아니다. 《신앙을 같이 하는 속에서 생긴 우정, 리념을 같이하는 곳에서 생기는 우정, 학문의 연구를 같이 하는 생활속에서 생기는 우정, 즉 가치를 같이하는 우정은 때때로 혈육의 정보다 더 뜨겁고 짙은 경우를 얼마든지 본다.》(송건호: 《우정에 대하여》) 《어미 팔아 친구 산다》든가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우리 말 속담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박힌 가시를 빼줄수 있는것은 친구의 손밖에 없다.》(엘베시우스: 《잠언과 수상》)라는 잠언의 가치기준에 따라 친구를 사귈수도 있고 프랑크 레만처럼 어머니와 애인까지 포함한 모든 《이웃들》과 적정거리를 두고 사귈수도 있다. 다만 어떤 방식을 취하는가 하는것은 각자의 인생관이나 삶의 방식에 따를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친구나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적정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담론을 일반론으로 받아들일수는 없다. 너무나 가깝게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권태감이 생겨나 리혼하게 되기때문에 부부간에도 거리를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원인과 결과를 혼돈시킨 론리일수밖에 없다. 그렇게 리혼하게 된 부부는 시작부터 마음의 합일을 이루지 못했기때문에 로맨틱한 사랑을 성숙된 사랑으로 가꾸지 못했을뿐이다. 마음의 합일을 이루지 못했다는것은 《거리》를 없애지 못했다는 말인만큼 《거리》가 리혼을 부추긴것이지 《0거리》가 리혼을 불러온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슴도치에 관한 우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겨울철 서로 체온을 나눔으로 추위를 덜려고 하던 고슴도치들이 가까이 다가섰다가 서로의 가시침털때문에 상처를 입고 물러서서 적정거리에 머물수밖에 없었다는것이다. 가시침같이 날카로운 털을 곤두세운 고슴도치에 대한 선입견때문에 생긴 우화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을 우화로 리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우화이상의 뜻을 부여했을 때, 례를 들어 친구사이나 심지어 사랑하는 남녀사이에도 《적정거리》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어낸다면, 자가당착에 빠질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슴도치도 《0거리》 밀착접촉을 하기때문이다. 어릴 때 고향의 참외밭에서 고슴도치를 관찰할수 있었다. 고슴도치는 적으로부터의 위협을 느꼈을 때 가시침털을 곤두세운다. 먹이를 나를 때에도 가시침털을 세워 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휴식할 때에는 그 털을 신체에 평행되게 눕히기때문에 밀착접촉하는데 아무른 지장이 없다. 고슴도치도 포유동물인 이상 암수가 교미도 해야 하고 새끼들이 어미젖도 먹어야 하기때문에 밀착접촉은 불가피하다. 서양의 고슴도치를 본적은 없지만 도리는 같다고 생각된다. 《옥스포드대사전》에서 HEDGEHOG(고슴도치)란 단어를 찾아보면 커다란 채색사진이 먼저 한눈에 안겨온다. 새끼 고슴도치 세마리가 서로 더 유리한 위치에서 어미젖을 빨기 위해 서로 밀고 닥치며 어미의 몸에 올라타는 광경은 새끼고양이들이나 강아지들이 젖을 먹을 때의 풍경과 조금도 다를바 없다. 고슴도치들도 0거리 밀착접촉을 하기때문에 친구 사이나 심지어 련인들 사이에도 《적정거리》를 설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펴기 위하여 흔히 사용하는 고슴도치 우화도 인간의 독선일수밖에 없다. 고슴도치는 그들의 상상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나 사랑이나 결국은 거리이다》라는 담론보다는 《참된 벗은 또 하나의 나다》라는 키케로(《우정에 관하여》)의 잠언이 더 포근하게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것은 어쩔수 없다. 2004. 5
22    (수필)상혼(商魂)에 절여진 사랑의 축제 댓글:  조회:4876  추천:56  2006-02-10
상혼(商魂)에 절여진 사랑의 축제 《젊어서는 건강과 시간을 팔아 돈을 바꾸고 늙어서는 돈을 팔아 건강과 시간을 바꾼다》는 담론은 인생을 관조하는 인간들의 자조(自嘲)가 아닌가 싶다. 지난해 내가 존경하는 한 학자가 간암진단을 받은 후 3개월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생명의 마지막 3개월간에 《치료비용》이라는 명목에 따라 지불하고 간 돈은 무려 수십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때 나는 죽음나라의 대문을 노크하고 있는 불치병 환자들의 돈주머니를 노린 의료, 의약, 보건식품 등 업계의 함정이 얼마나 많은가를 절감할수 있었다. 젊고 늙음을 떠나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돈 팔아 건강과 시간을 바꾼다》는 말도 한가닥의 희망을 빙자한 사기일수밖에 없다. 죽음은 인간들의 영원한 불치병이기때문일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들이 사랑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영원한 불치병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지 않나 싶다.《사랑의 날》이라고 하는 밸런타인데이에 대한 매스컴들의 보도기사가 하나같이 돈으로 도배되여 있는것만 보더라도 그러한 생각이 무리만은 아닌듯 싶다. ☞ 대도시 최고급 호텔들은 젊은 련인들을 유치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 상해의 한 호텔은 최고급 룸을 밸런타인데이 룸으로 꾸며놓고 하루밤 방값을 8만 8천 888원으로 올려놓았다. ☞ 련인들이 선물용으로 가장 많이 찾는 물건은 붉은 장미와 쵸콜릿이다. 밸런타인데이 전후에 북경의 꽃가게들은 평소 한송이에 3원씩 팔던 장미꽃을 송이 당 10~20원으로 가격을 인상시켜 놓았다. ☞ 심양시는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여 순도 99.95%의 기념은화를 발행했다. ☞ 무한시의 한 마켓컨설팅 회사는 밸런타인데이에 첫사랑을 찾아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특수를 누리고 있다. 첫사랑을 찾는데 지급하는 비용은 2000원이다. ☞ 올해의 밸런타인데이는 주말이다. 홍콩 려행사들은 대륙련인들을 유혹하기 위한 3박2일의 패키지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밸런타인데이를 전후로 꽃과 호텔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북경석간(北京晩報)》,《경화타임지(京華時報)》, 《위클리 홍콩》등 신문에서 인용함) 이런 기사를 읽다 보면 밸런타인데이가 《사랑의 날》이기보다는 《상인의 날》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짙어진다. 중국에 상륙한지 불과 십년도 안되는 사랑의 날이 시작부터 《소비형 축제》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현실은 슬픔이 아닐수 없다. 아무리 현대인들의 사랑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날》만큼은 돈과 관계없는 순수한 《사랑의 축제》였으면 하는 아쉬움때문일것이다. 물론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중국대륙에까지 성공적으로 상륙한 밸런타인데이는 이미 고도로 상업화된 축제였다. 미국에서는 미국인의 80%가 밸런타인데이에 선물을 하기때문에 그날 10억장의 카드와 1억 1000만 송이의 장미 그리고 11억 달러 어치의 쵸콜릿이 미국시장에서 팔린다는 통계가 있다. 그리고 일본의 상점들은 불황을 탈출해보려는 몸부림으로 밸런타인데이(2월 14일-녀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에서 화이트데이(3월 14일-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까지의 기간을 젊은층 집중공략기간으로 잡아 판촉전을 벌인다고 한다. 금년 밸런타인데이에는 미국에서,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수치로 알려주는 《사랑탐지기 》가 출시되여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 장치가 작동되는 컴퓨터에 전화기를 련결한뒤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를 하면 《탐지기》가 상대방의 음성을 분석하여 그 결과를 5점부터 마이너스 1점까지 7단계로 나누어 컴퓨터 화면에 데이지 꽃잎으로 점수를 매겨준다고 한다. 가장 뜨거운 사랑은 5점, 반대로 가장 미지근한 사랑은 마이너스 1점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사랑탐지기》를 개발한 회사는 떼돈을 벌어 좋겠지만 사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탐지기》를 사용해서라도 진짜 사랑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탐지기》소비자들은 어딘가 측은해 보인다. 이렇게 《소비형 축제》나 《판촉형 축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상혼에 절여진 사랑의 축제는 아시아의 또 다른 하나의 문명고국인 인도에서 전통문화의 저항을 받고 있다. 지난해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앞에 모여 《밸런타인데이는 서구로부터의 문화적 오염》이라고 주장하면서 밸런타인데이를 금지하라고 국회에 촉구했고 인터넷 신문인 《테헬카》는 《밸런타인 데이는 제국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금년에는 《밸런타인데이가 전통적인 인도문화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힌두교《바즈랑 달》회원들이 밸런타인데이라고 적힌 대형 십자가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인도에 못지 않는 문명의 력사를 갖고 있는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밸런타인데이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차라리 우리에게 사랑에 관련되는 문화적 콘텐츠가 없었다면 그 답습을 쉽게 간과할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분명히 밸런타인데이보다 더 훌륭한 명실상부한 《사랑의 날》이 있는 실정이다. 《더 훌륭하다》는 수식어는 문화의 상대론적 립지에서 보았을 때 문제가 있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동양문화권의 립장에서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역설하기 위하여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아래의 비교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주기 바란다. 최근 영국에서 500년전의 밸런타인 련애편지가 발견되면서 밸런타인데이 력사는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지만 축일의 기원은 아직도 분명치 않다. 3세기에 순교한 성 밸런타인을 기리는 축일이라는 주장과 로마이교도의 루페르칼리아 축제설이 엇갈리고 있고, 또 성 밸런타인과 구애습관과는 련관이 없고 다만 동면에서 깨여난 새들이 짝짓는다는 2월 14일이 성인 축일과 합일되여 사랑의 날이 되였다는 주장도 있다. 거기에 비교했을 때 우리에게는 3000여년의 력사전통을 가진 《사랑의 날》이 있다. 까치들이 모여 몸둥이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만난다는 칠석(음력 7월 7일)은 기원설화에서 전개되는 사랑이야기로 보나 력사의 깊이와 문화콘텐츠의 가치를 보아도 명실공히《사랑의 날》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조상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전통문화의 현대적 재개발에 게으름을 피워왔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전통적 사랑의 날은 상업주의에 편승한 밸런타인데이에 밀려나 사라져가고 있다. 조금은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얼마전에 페막된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부분 대표들이 청명, 단오, 추석을 국가의 법정 공휴일로 정하자는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그 리유로는 젊은이들이 서양의 명절을 더 선호하고 있는 반면, 중국의 전통명절문화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휴일과는 상관없이 중국의 전통적 《사랑의 날》을 살리자는 주장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명절문화는 인간만이 행할수 있는 특수한 행위라고 할수 있다. 전통명절문화는 전통문화의 확립으로 그 사회를 안정시키면서 정신적으로 그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하비콕스는 《일상적인것을 단절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과거로 개방시키는 제축과, 경험적 타산이 무시하고 통과해버린 방문을 낱낱이 열어봄으로써 혁신의 가능성을 확대시키는 환상》(《바보제》, 1973)으로 명절축제문화의 의미를 새겼다. 따라서 축제의 원형은 민족의 연원과 관계되는 아득한 태고로의 귀의이라 할수 있다. 이러한 귀의를 통해 문화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봄으로써 새로운 혁신과 창조의 에너지를 확보하게 된다.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불치병이다. 그 불치병 때문에 인간은 생명중 가장 귀중한 젊음을 불사르기도 한다. 그러한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동양과 서양에서는 사랑의 축일을 만들었을것이다. 이제 우리는 상혼에 가리여진 사랑의 날의 진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하지 않나 싶다. 전통명절인가 수입명절인가를 떠나 우선 련인들의 돈주머니를 겨냥하는 사람이 없는 순수한 사랑을 위한 《사랑의 날》이 되였으면 싶다. 2004. 3
21    (수필)사랑의 신화학 댓글:  조회:5013  추천:67  2006-02-09
사랑의 신화학 사랑의 기원에 관한 두개의 색다른 신화가 있다. 그 색다른 두개의 신화때문에 인류는 영원히 사랑이라는 불치병을 앓게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철학가인 플라톤(platon)의 《향연》에 소개되여 있는데 사랑의 기원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신화로 평가되고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인간은 본래 두개의 얼굴과 네개의 팔, 다리를 가진 《완전한 형태》였다. 남성과 녀성의 성을 동시에 갖고있는 이 이중인간들은 무지무지한 체력과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기가 있어 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뭇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그들의 힘을 꺾어 더 이상 신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남자와 녀자 둘로 나누어버렸다. 사랑은 이렇게 둘로 나뉜 반쪽이 원래의 짝을 찾아 완벽하게 한덩어리를 이룸으로써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갈망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의 《아모르》와 《변신이야기》에서 또 다른 하나의 신화를 읽을수 있다. 우리가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것은 우리의 의사와는 조금도 관계없이, 천성적으로 장난기가 있고 조금은 무책임하며 심술이나 앙심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는 나젊은 신인 큐피드(《욕망》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이름)가 쏜 금화살을 맞았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리고 큐피드가 쏜 납화살을 맞았을 때는 사랑에서 도피하게 되기도 한다. 원래 남자와 녀자는 한몸이였으나 두 몸으로 갈라졌고 그때부터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결합하려 한다는 플라톤 신화의 론리는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여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는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도 전개된다. 비록 《성경》이야기에서는 남과 녀가 평등하게 반반으로 갈라진것이 아니라 남자의 한부분으로 녀자를 만들었기때문에 녀자가 남자에 종속되여 있는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한 몸에서 두 몸으로 갈라진것만은 분명하다.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융(jung)의 리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내면을 《애니마(anima)》와 《애니무스(animus)》로 나눌수 있는데 남성의 정신내면에 존재하는 녀성성은 《애니마》이고 녀성의 정신내면에 존재하는 남성성은 《애니무스》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애니마》나 《애니무스》를 이성에게서 찾게 된다는것이다. 즉 남성은 자기 마음속의 《애니마》와 닮은 녀성을 만나게 되면 첫눈에 반해버리고, 녀성은 자기 정신내면에 간직된 《애니무스》로 비춰지는 남성을《백마왕자》로 간주하게 된다. 융의 론리는 플라톤신화에서 두개의 몸으로 갈라진 인간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기억을 정신내면에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과 닮은 반쪽을 만나면 결합하려 한다는 말로 풀이할수 있다. 플라톤의 신화는 사랑을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결합하려고 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보았고, 그와 반대로 오비디우스의 신화에서 사랑은 우리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큐피드의 금화살에 명중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피동적인 행위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첫사랑에 깊이 빠져본 경험과 사랑하는 사람과 상당한 기간의 지속적인 사랑을 해본 경험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시작과 지속이라는 두개의 서로 다른 상태의 단계를 거칠수밖에 없음을 감지할수 있을것이다. 한사람의 첫 돌사진과 환갑사진이 별로 닮은 점이 없듯이 사랑의 시작과 나중에 진행되는 지속적인 사랑은 전혀 달라보일수 있다. 따라서 사랑이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이라 할수 있다. 첫사랑은 흔히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찾아온다. 《사랑의 불길은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마음을 태우고 있다.》(마그리트 드 나바르) 《우리는 리유없이 사랑하고》(르나르), 《사랑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찾아온다》(톰프슨).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무의식적인것이라 한다. 우리는 합리적인 계산을 거쳐 《적합한》 사람을 선별해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기질과 취향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수도 있고, 때로는 외모나 체질 등 조건이 흡족하지 않는 상대를 사랑하게 될수도 있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보았을 때 당신에게 더할나위 없이 적합해보이는 상대를 만났는데도 가슴에 불이 당기지 않아 사랑이 피여나지 않을수도 있다. 이러한 사랑의 부조리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큐피드 신에 전가시키고 있다. 우리의 소망과는 관계없이 큐피드 신의 금화살을 맞았기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되였고 큐피드 신의 납화살을 맞았기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대상자를 만났어도 사랑을 회피하게 된다는것이다. 큐피드의 금화살을 맞아 시작하는 사랑을 우리는 보통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상태》, 《사랑에 빠지는 상태》 혹은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한다. 로맨틱한 사랑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랑에 빠지는 일을 사랑의 본질로 리해한다. 그러한 《사랑에는 단 한가지 조건, 즉 열정이라는 조건밖에 없다. 그리고 이 조건은 누구나 충족시킬수 있다.》(존 암스트롱). 로맨틱한 열정에 대한 능력은 오늘날 인간성의 공동분모라고 할 정도로 보편화되여 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급속히 친밀해지고 상대방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뚜렷한 확신을 갖게 되며 극단적인 환희와 기쁨을 느끼게 된다. 《사랑이란 이를 테면 깊은 한숨과 함께 사는 연기, 사랑은 맑아져서 련인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불꽃이 되고, 헝클어져서는 련인의 눌물로 넘치는 큰 바다가 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은 분별하기 어려운 광기, 숨구멍조차 막히게 하는 고집인가 하면, 그것은 또한 생명을 기르는 단 이슬이기도 하다.》(셰익스피어). 《정열적인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인생의 절반, 그것도 아름다운 쪽의 절반이 가려져 있는것이다.》(스탕달) 《사랑은 아름다운 꿈》(샤프)이고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즐거운것은 없다.》(롱펠로) 그래서 《사랑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삶도 시작된다》(스큐데리양)고 한다. 로맨틱한 사랑은 사랑의 시작단계에 집중되여 있다. 그 다음에 다가오는 사랑을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사랑》 혹은 《성숙한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지속적인 사랑이며, 장기적인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는 난관에도 끄떡없는 사랑이다.》(존 암스트롱) 성숙한 사랑은 로맨틱한 사랑과는 별로 닮은점이 없다. 사랑의 비극은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을 사랑의 본질로 리해하면서 생기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체구조는 불같이 달아오르는 로맨틱한 사랑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끔 만들어져 있다. 성의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성간의 로맨틱한 련애감정의 유효기간은 길어서 3~4년 정도로 설정되여 있다. 유효기간이 종료되면 남녀사이의 로맨틱한 감정은 완전히 식어버린다. 그때 우리는 성숙된 사랑이라는 끈으로 남녀 사이의 인연을 계속 이어주어야 한다. 성숙된 사랑을 계속 큐피드의 금화살에서 기대할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오래 지속될수 있는 사랑의 또 다른 신화가 요청된다. 원래 한몸이였으나 두몸으로 갈라졌고 노력을 거쳐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새로운 합일을 이룬다는 플라톤의 신화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성숙한 사랑을 대변해주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완벽하게 한 덩어리를 이루어》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 된다는것은 성숙한 사랑이 아니면 이룰수 없는 경지이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로맨틱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사랑의 에너지를 리용하여 상대방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물론 그러한 일치는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일수 있다. 성숙된 사랑에서는 두개의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 둘로 남아있는다는 역설이 성립될수 있다. 플라톤신화에서 남녀가 합일을 이룬 《완전한 형태》일 때 《무지무지한 체력과 힘》이 생긴다는 론리는 사랑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남녀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은 모든 창조의 기초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남녀의 결합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초로 된다. 뿐만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인 령역에서도 사랑을 통해 남녀는 새롭게 재탄생된다. 인류가 창조한 모든 문명과 문화는 성숙한 사랑과 무관할수 없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하기》(에리히 프롬)때문이다.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능력은 누가나 갖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합일을 이루는 진정한 사랑은 성숙된 사람들의 몫일것이다. 2003. 11
20    (수필)사랑의 사회학 댓글:  조회:4591  추천:57  2006-02-08
사랑의 사회학 지난 주말,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북경 텔레비전 제3체널에서 방송되고있는 사랑에 대한 특별토론장면을 볼수 있었다. 미모의 녀성 사회자가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들먹이면서 중국남자들은 숙녀들에게 너무나 무뚝뚝하지 않느냐 라고 힌트를 주니까 토론에 참석한 20대 젊은 처녀로부터 60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자신들의 남자 친구나 남편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끼고 있다는 불만들을 늘어놓았다. 반론이 없이 일변도로 몰아가는 토론회는 중국 남자들에 대한 성토의 장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사랑이 모자라 《사랑실조(失調)》를 앓고 있다는 하소연도 아니고 남자들이 사랑한다는 말에 너무나 린색하여 달콤한 사랑의 표현에 굶주리고 있다는 그녀들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사랑도 어쩔수 없이 세계화되여가고 있구나》하는 기우지심(杞憂之心)이 짙어진다. 사실 중국어에도 영어 《아이 러브 유》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워 아이 니》라는 쉽게 련발할수 있는 사랑의 표준전달어가 있다. 다만 중국 남자들은 그 말을 별로 람용하지 않을 뿐이다. 그 대신 그들은 한번 결혼하게 되면 쉽게 리혼하지 않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백년해로(百年偕老)》는 아직까지도 사랑의 보편적 가치로 중국의 기성세대들에게 인정되고 있다. 그에 비교했을 때, 《어쩌면 숙녀들에게 저토록 친절할수 있을까》라고 감탄할 정도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아이 러브 유》를 곱씹어 대는 미국남자들은 결혼후 쉽게 리혼한다. 미국인들의 리혼률은 1979년에 이미 3:1의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 80년대 나는 미국의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어느 정신의학자가 쓴 글을 읽은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란 말을 값싸게 되풀이하지 않고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되풀이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하고 있지 않은 자기에게 자기 암시를 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의 지적은 《성실히 사랑하며 조용히 침묵하라. 성실한 사랑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라고 한 프리드리히 제어라인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 문화에 중독되여 가고있는 중국의 녀성들은 미국 녀성들의 삶을 흉내내고 싶어하고 그들의 개방문화를 따르려고 한다. 그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중국의 남자들도 마음에 내키든 내키지 않든 《워 아이 니》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게 되고 그러한 반복이 잦아질수록 리혼률은 도리여 높아지고 있다. 사실 태고시대에서 오늘에 이르는 사랑의 력사는 자유를 지향해온 력사라 할수 있다. 인류가 선택한 일부일처제에서 결혼의 본질은 배우자 서로가 사랑을 약속하면서 성관계의 배타적인 독점을 표방하는 사회적 계약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결혼이라는것은 배우자 서로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였다. 불과 백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일곱살이 되면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할수 없는》사회에서 자라나 《부모의 뜻에 따라, 중매군의 입놀림에 따라》사랑이 전무한 상태에서 결혼해 왔다. 서양인들이라 해서 더 나을것도 없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1837-1901)까지도 그들의 결혼은 쌍방의 가족 또는 중매인에 의해 계약되였고, 사랑은 일단 결혼이 성립된 다음에 전개되는것으로 인식되였었다. 그러한 혼인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인간사회는 여러 가지 법과 제도, 도덕과 여론, 종교 등 온갖 사회적 힘을 총동원하여 사랑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매려고 해왔다. 한편, 량산백과 축영대나 로미오와 쥴리엣 같은 동서방의 수많은 남녀들이 사랑의 자유를 위해 사랑을 구속해온 온갖 《사회적 힘》과 싸워왔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왔다. 사회의 진보와 함께 오늘날의 사랑은 선택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전한 자유를 확보한셈이다. 요즘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주변의 눈들을 개의치 않고 포옹하고 싶으면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으면 뽀뽀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또한 그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도 예전보다 훨씬 관대해졌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이제는 혼전성관계나 동거도 사회적 간섭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며칠전 신문을 보다가 상해, 북경, 청도 등 대도시에서 《누드 신혼사진 붐》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놀란나머지 이제는 누가 공공장소에서 《라체결혼식》을 치렀다해도 놀라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사랑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사랑의 안전성이 오히려 더 감소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사랑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황에서 결혼했던 지나간 세대나 한정된 자유를 전제로 결혼한 우리 세대는 별로 리혼하지 않았다. 리혼은 마치 사랑의 자유를 충분히 맛본 세대들의 몫인것처럼 인식되여 가고 있다. 그들은 《위선적》인 부모세대를 비판하면서 자유롭게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찾아 로맨틱한 사랑을 하면서 결혼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커플들이 도리여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면서 헤어지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조선족의 리혼률은 1999년에 2:1에 도달함으로써 세계화의 진원지인 미국을 훨씬 초월하였다. (리혼이 한국인과의 《위장결혼》과 련계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때 흔히 사용되는 구실이 《가짜리혼》이란 말이다. 그러나 법(法)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리혼은 《진짜리혼》이다.) 이제 사랑의 불안전성에 따른 리혼에 한해서만은 중국조선족이 미국을 향해 세계화개방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 싶다. 높은 리혼률로 아이들이 감수해야 할 상처는 어른들의 상처보다 훨씬 크다. 부모들의 사랑으로 커야 할 어린 시절, 가장 친밀했던 보호자들의 관계해체로부터 받은 상처는 평생을 두고 아픔을 줄수 있다. 사랑의 안전성이 감소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외도이다. 지난 80년대 중국의 민법이 《간통》을 형사범죄 범주에서 제외시키면서 혼외정사로 대표되는 불륜이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외도가 당사자에게 새로운 로맨틱한 사랑이나 쾌락이 될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배우자에게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가장 아픈 마음의 상처로 될수 도 있다. 중국에서 지금 매년 30%이상의 증가률을 보이고 있는 성병환자나 50%의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에이즈 환자도 불륜과 무관할수는 없다. 그보다 더 큰 불행은 불륜이 사랑을 말초적이고 단순한 성 접촉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사랑은 없고 포르노만 남은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을 계속 희망할수 있을까.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자유는 점점 확대되여가고 있지만 사랑의 안전성은 반비례로 축소되기때문에 사랑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따라서 진실한 사랑은 더더욱 귀중해지고 있다. 리혼과 외도의 확산이 부추기는 가정의 해체와 사랑의 황폐화는 이제 우리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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