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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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서유럽려행기[2] 댓글:  조회:4615  추천:0  2019-12-01
   서유럽려행(2) 갈릴레이 고향 피사를 찾아서       피사(比萨) 의 개황   밀라노대성당을 다 참관한다음 10시 20분 우리는 피사로 향했다. 이탈리아는 대부분 산지와 구릉지대라고 하지만 밀라노에서 피사로 가는데는 끝없이 펼쳐진 일망무제한  대 평원으로서 기차를 타고 중국의 동북평원을 달리는 듯한감이 들었다. 뻐스로 4시간에 280㎞달려 오후 2시 반에 피사에 도착하였다.   피사는 이탈리아중서부의 아르노 강(阿诺河)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이탈리아 토스카나주(托斯卡纳州)에 있는 도시로서 피사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면적은185,18㎢, 시의 인구는 약 9만명이다.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热那亚•威尼斯)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노바에 패하였으나 그 후에도 활발한 상업중심지었으며 예로부터 문예의 중심지로 번창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伽利略伽利莱, 1564~1642, 이탈리아 르네상스 말기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철학자)의 출생지로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이 곳에서 대학공부를 하였다.    파사의 대성당광장   피사의 대성당광장은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성벽안에는 잔디로 깔린 넓은 록지로 된 피사의 대성당광장이 있는데 광장에 들어서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념물인 세례당, 대성당, 종탑(사탑)이 차례로 있고 대성당 북쪽에 교회묘지(납골당) 등 대리석으로 된 네 건축물이 있는데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앞으로부터 세례당, 대성당, 사탑   1)  세례당 이 건축물은 이탈리아의 세례당 중 가장 큰 세례당으로서 둘레 107m, 지름 34m의 거대한 원형 건물로서 1063년에 시작하여 1350년에 준공하기까지 무려 3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처럼 건축기간이 길었던 만큼 이 세례당은 두 시대 양식, 즉 전반기에 제작된 아래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罗马式,10~12세기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지배적이였던 종교미술양식. 천정은 궁륭식으로 하고 내부에 매우 둔중한 굵은 기둥들을 많이 세웠으며 벽체는 두껍게 하고 거기에 날개벽을 덧붙여 보강하였다. 창문은 좁고 길며 벽, 기둥, 아치 등에 벽화 또는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이고 후반기에 지어진 웃부분은 고딕양식(哥特式,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나타난 건축 양식 즉 뾰족한 지붕과 둥근 천장)이라고 한다.     세례당       2)  대성당 피사의 대성당은 중세를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부스케토의 지휘아래 1118년에 완공된 것으로 중세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은 +자가모양 3층으로 지었는데 +자가 중심 교차점 3층 꼭대기에  또 원통형으로 한층 더 지어 4층으로 되었으며 4층 지붕은 반구형으로 되었다.   이 성당에서 피사 출신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성당의 천장에 매달려 있던 등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흔들이)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했다고  한다. 진자(振子)의 등시성이란 진자가 운동하는 시간은 진폭이나 진자의 질량에는 관계없이 진자의 길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대성당   3)  사탑 피사대성당에 부속된 사탑(종탑)은 갈릴레이와 함께 피사의 사탑으로 매우 유명하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사탑은 고르지 못한 지반 상태 때문에 기울어진 건축물로 유명하다. 1173년에 착공하여 137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약 200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제1차가 1173년~1178년, 제2차가 1272년~1278년, 제3차가 1360년~1372년으로 공사기간 간격이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제1차 공사때에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전체 높이 58m의 약 3분의 1에 불과한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기울어짐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계속하여 제2차 공사에서는 기울어진 각도에 맞춰 수정을 가한 뒤 건설을 재개했으나 기울기를 멈추지 못하고 제3차 공사를 맞이하여 7층까지 완공하였다. 사탑은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최대 높이는 58.36m나 된다. 속이 빈 원통의 주변을 기둥들로 두른 라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8층의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다.     사탑은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게는 14,500톤이며 기단은 직경이 19.6m이다. 탑은 1년에 약 1mm 정도씩 기울어져 현재 5.5도 정도 기울어져 현재는 꼭대기 층이 중심위치에서 4.5m(어떤 자료에는 5.3m)나 벗어나 있다. 이를 우려한 이탈리아 정부는 1990년에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해 기우는 쪽의 암반에 약 700톤에 달하는 납을 심어 두었고 한다.    이 사탑에는 갈릴레이가 물체가 자유낙하하는 시간은 낙하하는 물체의 질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법칙을 인증하기 위해 사탑 꼭대기에서 중량이 다른 크고 작은 두개의 철구를 동시에 떨어뜨려 두 철구가 동시에 땅에 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이 일화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비비아니(Viviani)가 지어낸 것이라는 속설도 있다.  피사의 사탑이라고 하면 그전에 책에서도 많이 보았고 텔레비에서도 여러번 보면서 세상에 저렇게도 신기한 일이 있는가? 어쩌면 저렇게 기울러진 것이 600년이 많이 넘도록 넘어지지 않고 저렇게 서있을가? 한번 직접 가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오늘 직적 현지에 와서 제눈으로 직접 실물을 보고 사탑을 배경으로 사진까지 찍으니 마음이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사탑       4)  납골당 피사 납골당은 대성당 북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피사의 력사적인 인물들이 묻혀 있고 한다. 유람객들은 모두세례당, 대성당, 사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야단이였지만 누구나 납골당에는 가지않았다. 나는 피사의 건축물들을 보고 우리 나라의 도시 건축물들을 보면 지은지 30~40년이 되면 허물어버리고 다시 짓는것이 많은데 이 건물들은 모두 중세기에 지은 것으로서 지은지 1,000년 거의 된 건물인데 아직도 이렇게 완전하게 보전되여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성당광장 성 밖에는 많은 관광상품상가들로 줄지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러가지 실용적인 상품들을 샀지만 나는 6유러(유러와 인민페 환률 1:8)를 주고 이딸리아에서의 상징적인 기념품으로 되는 사탑모형을 샀다.   [다음 계속]    
242    서유럽려행기[1] 댓글:  조회:4609  추천:0  2019-11-30
 서유럽려행기   주청룡 (2018년 11월 11일~23일)   머리말    기행수필은 수기보다 문학적 차원에서는 더 높다고 하겠지만 문학인이 아니고 일반 독자들이라고 할 때에는 기행수필보다 려행사를 따라 어떻게 돌아다니고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을 려행코스 그대로 돌아보고 듣고 자기가 느낀점을  써야 자기도 려행사를 따라 려행을 하는 감이라며 려행수기를 수필보다 더 즐겨 읽는다. 동남아의 몇개 나라와 지구 그리고 대만기행문도 수기로 써서 길림신문, 동북아신문, 조글로에 련재로 발표하였는데 나의 친척, 친구들이 그것을 보고 이번에도 그렇게 써달라는 것이였다. 기행수필을 쓰자면 나의 문학수준의 제한도 있겠지만 친척, 친구들의 요구에 의해 이번 서유럽려행도 려행수기로 썼다.     이번에 려행한 몇개 나라들이 지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딸리아 (남유럽)를 제외하고는 다 서유럽에 속하고 정치학적으로 이딸리아도 서유럽련합에 속하기에 이번의 려행을 《서유럽려행기》이라고 하였다.     서유럽려행기(1) 이딸리아로   호북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이 나의 생일선물로 유럽려행을 하라고 돈을 부쳐와 우리 부부는 지난해(2018년) 룡정화풍(华丰)국제려행사의 수속으로 본부가 심양에 있는 상업국제려행사에서 조직한 서유럽려행을 하게 되였다.    그 전에 동남아, 대만 등 여러 나라와 지구를 려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번에도 서유럽려행을 떠나기에 앞서 학생들이 수업을 받기전에 교과서를 예습하는 것처럼 관광명소에 대한 기본지식을 더 깊이 장악하기 위해  려행사에서 찍어 준 려행코스에 따라 먼저 매개 명소(景点)에 대하여 인터넷검색을 하여 초보적으로 지식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면 의문되는 점들이나 더욱 호기심이 끌리는 점들은 직접 려행을 하면서 관찰하면 남들보다 리해가 빠르고 관광효과도 좋게된다. 통일적인 출발지점이 북경이기에11월 11일 모두 북경수도공항에 모이기로 되여 있었다. 연변에서는 우리 부부와 연길의 한 중년녀성이 가게 되였는데 그날 우리 셋은 비행기를 타고 수도 공항에 도착하여 보니 이번 우리 려행단체는 모두 인솔자를 포함하여 17명이였는데 연변, 길림, 장춘, 심양, 안산, 호로도(葫芦岛) 등 곳으로부터 모이게 모이게 되였으며 조선족으로는 우리 부부뿐이였다. 12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2시반에 비행기가 이딸리아를 향해 떠나 장장 10시간을 날아 로마시간(동1표준시간대)으로 5시반에 이딸리아의 북부도시 밀라노(米兰)에 도착하였는데 북경시간(동 8표준시간대)으로는 12시 반이였으므로 이미 중국은 오후에 들어섰는데 미란은 아직 먼동도 트지않은 새벽이였다. 비행기가 해뜨는 방향을 등지고 날다니 장장10시간 밤으로 날았다. 입경수속을 하고 공항을 나와서 우리의 인솔자가 이제부터는 모든 행사는 로마로마시간으로 한다면서 시계를 로마시간에 맞추어 놓으라고 하여 시계바늘을 뒤로 7시간 늦추어 놓았다. 오늘의 려정은 처음으로 밀라노대성당을 참관하는 것이였는데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7시반에 뻐스로 밀라노대성당을 향해 떠났다. 뻐스에 앉아 가이드는 이딸리아와 밀라노시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어디로 려행을 가나 나는 가이드가 그곳의 개황이나 관광명소를 소개할 때에는 미형록음기를 켜 놓는 습관이 있다. 하여 나는 미형록음기부터 켰다. 이딸리아 개황 이딸리아의 공식 이름은 이딸리아 공화국이며 이딸리아의 북쪽은 알프스 산맥이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로서 북동쪽으로는 아드리아 해(亚得里亚海), 남동쪽으로는 이오니아 해(爱奥尼亚海), 남서쪽으로는 티레니아 해(第勒尼安海), 북서쪽으로는 리구리아 해(利古里亚海)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이딸리아는 산지와 구릉이 많고 평야는 전국토의 약 1/5이다. 이딸리아는 산지가 많은 편이어서 해발700m 이상의 산지가 35%를 차지하며 구릉지대가 42%, 나머지 23% 정도가 평지이다. 이딸리아 국토 면적은 301,338 km²이며, 인구는 2018년 추계로 5천 9백 30만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수도는 로마로서 수 세기 동안 서유럽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이딸리아는 1955년에 서유럽련합의 창립 성원국으로 되였으며 1957년 유럽공동체의 창립 회원국이였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련합이 되였다. 밀라노 개황 밀라노는 이딸리아의 북부에 있는 최대 도시로서 롬바르디아(隆巴迪亚)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강(波河)의 지류인 티치노강과 아다강 사이의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고 있다. 밀라노는 이딸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이며 이딸리아 최대의 산업 도시이자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이다. 인구는2016년도의 추계로1,349,426명, 면적은81.67㎢이다. 밀라노 시민들은 1870년 이딸리아의 통일국가 성립 이후 밀라노가 경제, 문화, 사상의 분야에서 선두적 역할을 했다고 하며 이딸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 주장한다. 밀라노가 로마에 밀려 제2의 도시로 된데는 로마의 력사적, 신화적 상징성, 피렌체(佛罗伦萨)를 중심으로 한 문예부흥의 흡수, 통합, 고전적 도시경관을 선호하는 경향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밀라노의 대성당(米兰大教堂) 뻐스가 한시간 달려 밀라노대성당에 도착하였다.   밀라노의 대성당 밀라노상징으로서의 밀라노대성당은 독일의 쾰른(科隆大教堂) 대성당과 함께 세계에서 제일 오랜 고딕양식(哥特式, 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나타난 건축 양식 즉 뾰족한 지붕과 둥근 천장)의 건물이자 바띠깐노의 성 베드로 대성당(圣彼得大教堂)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塞维利亚大教堂) 다음으로 가톨릭 대성당(天主教大教堂)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건물로서  미술사적으로는 가장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알려지고 있다.   백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지어진 이 건축물은  1386년 밀라노 령주(领主)였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해 건축을 시작하여 때로는 재정상의 문제로, 때로는 설계상의 문제로 큰 진척 없이1500년에 아치형천장을 완성하였으며 1774년에 제일 높은 고딕양식의 탑에 황금으로 도금한 성모마리아조각상이 완성되였고 1805년에 나뽈레옹이 여기에서 대관식을 가졌으며 정초식으로부터  500년이 지난 1897년에야 최후로 준공되였다고 한다. 그 결과 건물의 외양은 시각적 모순투성이가 되여버렸다. 육중하면서도 섬세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령감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첨탑(尖塔)에  공부타(拱扶垛, 대형 건물 외벽을 떠받치는 반 아치형 벽돌 또는 석조 구조물), 복잡한 격자무늬(바둑판처럼 가로세로를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이 되게 만든 무늬) 창살로 장식한 프랑스 고딕양식, 17세기 양식의 복도, 18세기 양식의 뾰족탑, 거기에 신고전주의 외관. 가고일(큰 사원의 지붕 등에 있는 날개달린 괴물의 상), 대리석상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지붕은 도시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1965년에 성당의 정면에 최후의 동문(铜门)이 안장되여 일각에선는 이것을 최후로 준공되였다고도 한다.   높이 157m, 폭 66m, 장랑의 길이 92m로 고딕양식의 진수(真髓)를 보여주는 이 건축물 외부 벽면은 3,159체의 정교한 명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여 있어  화려한 느낌을 준다. 하늘을 찌르는 135개의 탑 하나하나의 정상에도 성인(圣人)의 상이 장식되여 있고 그 중심인 108.5m의 가장 높은 첨탑에는 도시의 수호신인 황금으로 도금된 성모마리아동상이 솟아있다. 성당 내부는 4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있는데 외부의 다채로움에 비하면 장식이 거의 없어 오히려 소박한 모습이 경건함을 더해준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리용해 옥상으로 올라가면 작은 첨탑(尖塔)들로 숲을 이룬 화려한 모습을 볼수 있는데 가관이다. 수많은 첨탑과 함께 성자, 사도들의 조각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밀라노의 전경를 감상할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는 알프스 산맥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좀 안개가 끼여 알프스 산맥까지 보이지 않았다.   대성당 정면에는 넓다란  광장이 있는데 유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维托里奥•埃马努埃莱二世, 통일 이딸리아 왕국 최초의 왕)의 기마동상이 서 있어 유람객들은 대성당과 이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고 광장에는 또 수백마리의 비둘기들이 날아예다가도 땅에 내려앉고 또 날아예다가도 사람들이 먹이를 주면 와르륵 날아와서 먹이를 쫗아대고 있었다. 그러면 유람객들은 그 장면을 렌즈에 담기에 여념이 없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마동상  
241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댓글:  조회:6044  추천:0  2019-05-16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연변일보 2019-05-08 15:37:38 1919년 5월 4일 북경의 5,000여명의 애국학생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였으며 6월3일 후에는 운동의 주력도 학생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들에로 파급되였다. 습근평총서기는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5.4운동의 력사적 의의에 대해 《5.4운동은 철저한 반제반봉건의 혁명성, 구국강국의 진리를 추구하는 진보성, 여러 민족 각계 군중들이 적극 참여하는 광범성으로 중국사회의 진보를 추동하고 중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전파를 추진했으며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공산당의 설립을 위해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를 하고 새 혁명력량, 혁명문화, 혁명투쟁이 력사무대에 오르는 데 조건을 창조했는바 중국 구민주주의혁명이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으로 되여 근대이래 중화민족이 민족독립과 발전진보를 추구하는 력사과정에서 리정표적 의의가 있다.》고 말씀하였다. 5.4운동이 폭발하여 2년만에 중국공산당이 탄생하였고 30년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금년에는 5.4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을 맞이하게 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애국, 진보, 민주, 과학의 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이 정신이 한대 또 한대의 청년들을 분발시켜 나라를 부강시키고 중화민족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5.4 정신을 말하고 있는가고 하는데 5.4운동은 이미 100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100년 전의 5.4정신과 현시대 5.4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애국주의는 하나의 력사범주이며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다를뿐이다. 5.4운동시기 청년들의 애국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피와 목숨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싸우는 시위행진으로 표현되였지만 현시대 5.4정신은 그런 시위행진 형식으로 애국열정을 표현하는것도 아니고 꼭 적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것도 아니며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완성 하는것이다. 습근평총서기는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새시대 중국 청년운동의 주제, 새시대 중국 청년운동의 방향, 새시대 중국 청년의 사명은 바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견지하고 인민들과 함께 ‘두개 백년’분투목표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시대 청년들이 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자면 개인의 리상과 추구를 전 민족의 공동한 리상과 한데 융합시켜야 하며 《당의 기대, 인민의 기대, 민족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말며 이 위대한 시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조국에 보답하여야 한다고 본다. 태공에 오른 녀 우주비행원 류양과 왕아평을 비롯한 항공우주비행원들은 그 간고한 기술훈련도 이겨내고 마침내 태공에 오른것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중국 녀자배구팀이거나 세계급 운동대회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하여 금메달을 따낸 운동원들의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본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크게 말하면 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체를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고 본직사업을 사랑하고 인민군중을 위하여 복무하는것이다. 그러므로 큰 사업을 하여야만이 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다는것이 아니며 습근평총서기가 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대로 하는 것이 바로 5.4정신을 발양하는것으로 볼수 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발전중에 있고 국제정세가 급격하고도 복잡하게 변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과 등소평리론을 지도로 리상신념을 견정히 하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치여 19차 당대회정신과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상을 깊이 학습하고 터득하며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고 습근평총서기가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에 따라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여야 한다.  
240    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여 쓸모 없는것이 아니다 댓글:  조회:7854  추천:1  2018-12-24
  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여 쓸모 없는것이 아니다 흑룡강신문 //hljxinwen.dbw.cn  2018-12-17 09:03:04                     작성자: 주청룡   (흑룡강신문=하얼빈) 학교에서 지도자 직에 있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 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 것이다.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인제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해 오던 내가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다. 하여 많은 고민 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것이였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다. 그러던차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방문길에 오르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국 사무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신문사, 방송사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단위 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많은 멸시와 모욕을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한다고 들어왔던 터라 그들의 실생활을 알려면 바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에 가야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한국에 가서 처음으로 일자리를 찾은 곳이 서울 교외의 한 채소농장이었다. 농장에 가보니 중국조선족들이 온 하루 비닐하우스 안이나 뙤약볕에서 쉴새없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숙소마저 채소하우스 안이어서 찜통처럼 뜨거운 환경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잠자리는 땅바닥에 널판자를 펴고 그 위에 볏집을 깔고 비닐박막을 폈는데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이였다. 농장주의 애완견은 주인과 같이 집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격적인 모욕감까지 들었다. 하여 농장주를 찾아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하는가?’ 하면서 잠자리를 개선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더니 “돈 벌러 온 사람이 이러면 됐지 무슨 요구가 그리 많은가? 실으면 가라”는 것 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격분하여 그 현장을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가더라도 당신들이 며칠 내에 일꾼들의 잠자리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언론 매체에 공개를 하겠다고 위협적인 말을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며칠 후 거기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전화로 물어봤더니 농장주가 언론에 공개될까봐 두려웠던지 아니면 가책을 받았던지 창고 한칸을 내어 침대도 너무 헐망하지 않게 잠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국에 와서 작으나마 조선족의 인권보장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뿌듯한 감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서울과 경기도의 몇몇 건설현장에 가서 현지 체험을 하였다. 건설현장에서는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안전화, 안전벨트, 안전모로 전신무장을 하고 건설현장에 나섰다. 이렇게 3무장을 한다는 자체가 현장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측면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철판으로 된 폼(模板), 강관, 철근 등 무거운 물건들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한참 일하고 나면 겨울에도 온 몸이 땀벌창이 되곤 하였다. 그래도 청부업자들은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을 해대고 있었다. 부동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 차이가 있으므로 하여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도구를 연장, 쇠줄을 반생이라고 하는데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연장’이나 ‘반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에 그 말을 알아 못 들으면 60세 이상의 고령동포들에게도 “반생도 몰라” 하며 반말을 써가며 욕하고 어떤 때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스러운 욕을 퍼붓고 있었다. 표준말을 하는데 우리가 못 알아 들으면 욕해도 무방하겠지만 ‘반생’이란 한국 국어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를 쓰면서도 우리가 알아 못 듣는다고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돈벌이 온 것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고달프게 일하는 중국동포들의 실행활을 료해하려 갔기에 쫓겨나는 것이 겁나지 않았다. 하여 고용주를 찾아 중국동포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보장여 줄 것을 제기하였다가 결국 내가 해고당하고 말았다. 합리적인 건의를 제기한 것도 고용주와 엇선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일은 격분한 일이지만 또 다른 현장에 가서 실생활을 체험하여야 했기에 나를 놓고 말하면 크게 손해를 본것은 없다고 생각되였다. 오히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건설현장에서의 실생활을 체험하였고 일부 최하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에 대하여 마구 욕을 하면서 부려 먹으며 불공정한 대우를 하는 것도 직접 목격하였기에  나에게는 큰 성적으로 되였다고 생각되였다.   건설현장에서 해고 당하였으니 또 다른 현장에 가야 조선족들의 실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미 농장, 건설현장을 다 체험하여 봤으니 이번에는 산업현장에 가서 체험하는 것이다. 하여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찾은 것이 어느 한 조명등조립회사였다. 이 회사는 어지럽거나 위험한 일은 없었는데 노동시간이 12시간이나 되었고 어찌나 속도를 강조하는지 손에 불이 날 지경이었으며 조금만 속도가 늦어도 쌍욕을 퍼부었다. 지나치게 속도를 강조하다니 간혹 불량품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책임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부어 댔다. 중국조선족들이 일하는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보면 어떤 현장에서는 일을 하고도 청부업자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몇 달씩 일하고도 삯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일부러 불법체류자를 쓰면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도 불법체류자이기에 어디 가 신고를 하지 못하는 약점을 쥐고 일년 넘도록 월급을 주지 않는 악덕 고용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많고도 많았다. 나의 한 친척도 한국의 한 자그마한 건설현장에서 반년간 일하였는데 청부업자가 다음 달, 그 다음 달 하며 차일피일 미루며 월급을 주지 않다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반년 노동 대가를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른 일자리로 옮겨 돼지 사양장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하루 아침 돼지사양장에 불이 나자 그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자아희생적으로 불끄려 들어갔다가 돈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온 몸이 새까마게 재가 되여 그 자리에서 화장되여 나왔다. 잘 살아보려고 이국땅에 돈벌려 나갔다가 일한 노동공가도 못 받고 한줌의 재가 되여 고향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통탄한 일인가?   이렇게 한국에 와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중국에서 듣던 바와 같이 일부 최하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려 먹는 현상과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 가정부를 종으로 여기며 최저 한도의 인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현상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다.   우리가 한국으로 돈벌러 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것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인격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하고 인권은 보장되여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재한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그들이 인격적 무시를 당하지 말고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 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은 문화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조선족은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예의바르고 깨끗하고 문명한 민족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고 하여 소외당하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한겨레의 나라 한국에 와서 일부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나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여러 신문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3D업종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또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나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다.   KBS-1 라디오방송에서는 내가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고 하며 나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청하였다. 나는 그 프로에 출연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혜택으로 하여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가 우리 동포들에 준 사랑이다. 나는 우리를 보내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 준 한국정부의 사랑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3D업종에서 재한조선족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2009년 1월에 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한국기업인과 재한조선족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나도 그 간담회에 초대되었다. 그 회의에서 나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정책에 힘입어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돈을 벌고 있는 한편 한국의 경제건설에서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내가 직접 목격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의 일부 악덕 고용주들은 재한 중국조선족을 멸시, 모욕하면서 마구 부려먹는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간담회의 현장녹화가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어 온 지구촌에 전파되었고 이로 하여 한국사회의 중시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중국동포의 많은 절찬을 받았다.   그렇게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실생활을 조사하고 한국과 재한 중국조선족단체에서 공동 주최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하면서 한국사회와 재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재한조선족들 자신에게도 찾아 봐야 할 부족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어기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고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재한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하여 나는 "재한 중국조선족들 자각적으로 준법의식을 높이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2010년 한국에서 돌아와서 연변의 많은 농촌마을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고찰하고 2014년도에는 "농가"잡지 주필 홍천룡 선생과 함께 20여 일간 헤이룽장 농촌의 조선족 마을들을 고찰하면서 개혁개방후의 농촌조선족사회의 변화를 고찰하였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특히는 한국 노무송출이 조선족농민들과 도시 저소득층 조선족들에게서는 국내 다른 민족에 비해 짧은 시간내에 많은 돈을 버는 아주 좋은 기회였으며 빈곤해탈의 지름길이 될 수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로 하여 많은 조선족들이 빈곤에서 해탈될 수 있었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부 농민들은 도시에 아파트를 사놓고 안락한 도시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농민들은 한국에서 일하는 기간 축산농장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선진적인 사육기술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축산농장을 경영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고 있으며 어떤 농민들은 한국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선진적인 유기농법(예하면 표준화 육모관리, 오리농법)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무당산량을 제고할 뿐만 아니라 유기농입쌀을 명브랜드로 하여 높은 값으로 쌀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도시에 한식점을 꾸리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의 선진기술을 배워가지고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귀향창업을 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빈곤에서 해탈하고 한국의 선진기술을 배워 고향에 돌아와서 새로운 창업을 하는 사례들은 우리가 한국노무송출을 통해 얻은 긍정적인 부분들이지만 반면에 잃은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우리의 영농실력이 많이 뒤떨어지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농민들이 한국으로 나갈 때에는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맸지만 한국에서 10년 일하고 돌아와 보니 그 기간 다른 민족들은 대중형 농기계를 갖추어 놓고 조선족들이 내 놓은 토지에 규모화 경영을 실현해 인력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우리 삶의 터전에서 거대한 수입을 창출하며 막강한 영농실력을 과시하면서 지역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족농민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의 토지를 찾아 농사를 짓자 하여도 소농경영수준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리 애를 쓰고 농사를 지어도 얼마 떨어지는 것이 없으니 다시 토지를 그들에게 임대를 주고 임대비를 받거나 그들의 밑에서 고용일꾼으로 일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찌 잘 살수 있겠는가?   조선족농민들이 한국노무송출에서 돈을 좀 벌어 빈곤에서는 해탈되었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기의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니 결국에는 실력이 강한 자에게 먹히게 된거나 다름 없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역우세도 잃고 있다. 하여 조상들이 억척스레 가꾸어 놓은 우리 삶의 터전이 온전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각 향촌마다 우리 민족을 주체로 한 전문농장이나 농민전업합작사를 꾸려 외지에 나가는 촌민들이라도 이런 전문농장 혹은 농민전업합작사에 토지를 들여 놓고 주식형식으로 농장이나 전업합작사경영에 참가한다면 자기의 토지도급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농촌집체경제조직성원이면서도 농장 혹은 전업합작사의 성원으로서의 지위와 시장주체의 평등지위를 가질 수 있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족 인구의 대 이동으로 하여 지금 조선족 농촌마을이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심각하다. 대부분 조선족들이 한국노무송출이나 대도시로 나간 지 10년이 거의 되고 일부는 10년, 15년, 20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은 언어가 통하는 동족국가이고 한국노무는 짧은 시일내에 많은 돈을 벌어 빈곤에서 해탈할 수는 있지만 필경은 자기의 나라가 아닌만큼 우리가 한평생 살 곳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서 내 고장, 내 집에서 사랑하는 내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자지방의 자연우세를 충분히 살려 내 땅에서 농사도 짓고 다각경영도 하고 더 크게는 제2차산업, 제3차산업과 같은 구상으로 새로운 창업을 하면서 조상들이 우리에게 넘겨준 삶의 터전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권고하고 싶다.   3년 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사회를 조사하고 중국조선족들의 실생활을 체험하였으며 중국에 돌아와서도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조사하였기에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해 분석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 한국과 재한 조선족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여러 편의 글들을 써서 여러 언론매체에 발표할 수 있었으며 2012년에는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라는 1만 2000자에 달하는 묵직한 글도 써서 "중앙인민방송",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 등 여러 매체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년에는 3농문제 관한 계열칼럼을 써서 "길림신문"에 발표하여 "오늘의 화제"2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총적으로 나는 중국조선족이다. 나는 우리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유리한 일을 하는 것으로써 힘이 자라는 데까지 나의 여생을 바치려고 한다.      
239    ‘향촌진흥 전략’과 우리의 자세 댓글:  조회:4698  추천:1  2018-11-25
‘향촌진흥 전략’과 우리의 자세   du  연변일보   2018-11-22 08:40:17   최근, 중앙에서는 ‘향촌진흥 전략계획’(2018-2022)을 발표하였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고 향촌진흥을 다그치는 중요한 전략이라고 볼수 있다. 이는 농민들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앙의 이런 보조에 맞추어 우리가 취하여야 할 자세는 무엇이겠는가?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제2차 농촌토지 도급 기한이 지난 다음 또 30년 연장정책을 실시한다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그런데 토지도급 경영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토지를 우리가 다루지 않고 타민족에게 장기적인 임대를 준다면 그들이  대중형 농기계를 갖추고 대면적의 토지를 다루어 영농실력을 자랑하면서 그 지역 우세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조선족촌민들은  영농실력을 키우지 못하였기에 타민족의 영농실력에 먹히우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역우세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각 향촌마다 우리 민족을 주체로 한 전문농장이나 농민전문합작사를 꾸려 외지에 나가는 촌민들이라도 이런 전문농장 혹은 농민전문 합작사에 토지를 들여놓고 주식형식으로 농장, 전문합작사 경영에 참가한다면 자기의 토지도급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농촌 집체경제 조직성원이면서도 농장, 전문합작사의 성원으로서의 지위와 시장주체의 평등지위를 가질 수 있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고학력의 인재를 양성하고 영입해야 한다. 우리 주에서는 이미 2016년부터 우수한 대학졸업생, 석사, 박사 등 1000명 인재영입 프로제트를 가동하였다. 이에 적극 호응해나서는 인재들이 있는데 례하면 중앙민족대학 박사졸업생 리광이다. 그는 지금 고향에 돌아와 기층단련으로 왕청현 백초구진 당위 부서기, 정부 부진장을 맡고 빈곤해탈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데 나라의 전면 빈곤해탈 공략 목표보다 2년 앞당겨 올해에 빈곤해탈 임무를 완성하고 있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을 실시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고학력의 인재가 겸비되여 그들이 실제 사업을 이끌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생존조건이 악렬하고 생태환경이 취약하거나 자연재해가 빈번한 마을, 인구류실이 엄중한 마을을 이전하여 합병한다고 하였다. 인구가 적고 생태환경이 좋지 않은 마을은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계획’에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어 살기 좋은 곳에 이전해야 한다. 한때 국가에서 농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호당 3~4만원을 보조하면서  농민들이 주택개조를 하게끔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살던 한 고향마을만 보더라도 어떤 농민들은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이 시기를 놓치다보니 국가에서 주는 3~4만원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이번에도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계획’ 보조에 맞추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연풍경, 력사유적지, 혁명전적지 등을 리용하여 관광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농촌의 관광산업을 대폭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내의 어떤 농촌들을 돌아보면 아주 특이한 자연풍경, 소수민족의 특색부락, 력사유적지, 혁명전적지 등을 갖고 있어 관광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우세를 가지고 있다. 도문시 월청진 백룡촌의 김경남은 마을의 백년되는 조선족 전통가옥을 보수하고 거기에 조선족들의 전통 유형문화재들을 수집하여  조선족 백년부락으로 건설하여 국내외의 관관객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문시의 민족문화 행사도 그 마을에서 진행하고 있어  촌의 경제수입도 많이 올리고 있다. 왕청현에서는 새일대관심위원회 김춘섭 주임의 노력으로 항일전적지와 항일렬사들을 적극 발굴하고 기념비들을 세워 혁명전통 교양기지로 정하고 홍색관광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렇게 특이한 자연풍경을 갖고 있거나 력사유적, 혁명전적지 등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적극 발굴하여 이번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에 맞추어 주밀하게 관광산업 발전 계획을 짜서 해당부문에 제출하여 국가의 자금을 쟁취하여 관광산업을 발전시킨다면 본 지방의 경제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또 농촌 기층 당조직의 향촌진흥에 대한 전면적인 령도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도 조선족 당원 양성에 힘써야 한다. 지금 여러 농촌의 조선족촌들을 보면 대부분 젊은이들이 모두 출국하였거나 대도시에 진출하였기에 촌에서 핵심적 역할을 발휘하여야 할 젊은 당원들이 적다. 촌의 많은 중대한 사항들은 당지부대회에서 결정짓게 되는데 만약 조선족 당원이 없다면 어떻게 조선족농민들의 리익을 대표하여 발언하며 어떻게 민족특색이 있는 촌으로 건설하겠는가?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계획’은 수많은 농민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으로서 우리 주내의 수많은 향촌들에서도 이번의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고 중앙의 보조에 잘 맞추어 주인공의 자태로 아름다운 향촌, 아름다운 조선족사회 건설에 적극 나섰으면 하는 마음이다.  
238    하늘 나라에서라도 이런 복을 누렸으면 댓글:  조회:7146  추천:0  2018-10-29
 하늘 나라에서라도 이런 복을 누렸으면 주청룡     나의 처가집 형제들은 우리 집을 제외하고 네 집 식구나 모두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몇 달 사이 두고 두 집 처조카들이 결혼식을 하는것도 한국에서 하게 되여 나의 안해는 조카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한국에 나가고 아들은 외지에서 사업하다보니 요즘은 나절로 땍식이며 빨래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기밥가마,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랭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들이 구전하여 모든것이 손만 좀 놀리면 전부 자동으로 작동되여 어려울것이 없다. 이런 가전제품들이 자동으로 작동되는것을 보면서 나는 짜꾸만 저세상으로 가신 부모님들이 생각나군 한다. 우리 부모님세대에 70년대 말까지는 재봉기, 라지오, 손목시계, 자전거를 네가지 중기(四大件)라 하였는데 한 가구에 한두 가지는 있었지만 네가지를 다 갖추어 놓고 사는 집은 드물었으며 네가지가 다 있었다면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집이라고 말하였고 그 이상 더 본것이 없었기에 그것을 최고의 생활수준으로 생각하였으며 어깨가 으쓱할 정도로 행복지수가 높았다. 그러나 현시대에 와서는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자가용차로 바뀌고 핸드폰의 시계가 손목시계를 대체하고 라지오가 텔레비죤에 밀리우고 재봉기는 고물로 되여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수 있다.  우리 부모님시대에는 현대식 주방용 전기제품들은 하나도 없었고 전부 재래식이였기에 지금에 비하면 번다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나도 어릴적에 혹간 어머니가 외출하시면 내가 밥을 지었는데 쌀을 씻어 가마에 안치고 물을 맞추는데 처음 부은 물이 많은것 같아 좀 떠내면 적은 같고 다시 넣으면 또 많은것 같아 몇번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된밥이 되지 않으면 죽밥이 될 때가 있었으며 부엌을 오르내리며 불을 때는것도 쉽지 않았다. 좀 세게 때면 밥이 타고 탈가봐 약하게 때면 밥이 설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쌀을 씻어 전기밥가마에 안치고 눈금에 맞추어 물을 붓고 버튼을 누르면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진행되며 거기에 아가씨의 명랑한 알람소리가 곁들어 나온다. 얼마나 편리한가? 우리 부모님들은 상상도 못한 것들이다. 우리 부모님시대에는 국을 끓이거나 료리를 하고 덥혀먹을 때에는 가마에 안치고 부엌에 불을 때야 했다. 좀 간편하게 하려면 풍로에 곡스(농촌에서 황연불을 땔 때에 석탄재에 섞여 나온 채 타지 않은 석탄)불을 피워 료리를 하거나 덥혔다. 곡스는 연기가 없어 좋으나 곡스가 없으면 검은 연기가 가득나는 석탄불을 피워야 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점심에 일밭에서 들어오시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늘 이렇게 번다스러운 일을 하셔야 했다. 초중시절, 내가 일요일에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님들이 일밭에서 들어 오시자마자 점심을 드시게 하려고 풍로불을 피웠는데 한번은 곡스가 없어 풍로에 석탄불을 피웠는데 연기가 다 피여 오른 다음 남비를 올려놓아야 하는것을 연기가 다 피여 오르기 전에 올려놓아 새하얀 남비를 새까맣게 그을게 하였다.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였는데 어머니께서는 야단을 내시는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을  대견스럽게 여기면서 이제는 내가 셈을 차리여 부모들을 생각할줄 안다며 잘했다고 치하를 하시는것이였다. 지금 같으면 전자레인지에 넣고 몇 십 초 혹은 1~2분 돌려내면 다 될것을 그때에는 이런 것은 상상 할수도 없는 것으로서 그저 그렇게 번다스럽게 하였다. 지금은 빨래질을 하려면 빨래감을 세탁기에 넣고 전기만 넣으면 완전히 자동으로 탈수까지 되여 나온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세대에는 빠래감을 큰 대야에 가득 이고 강에 나가 방치질을 하면서 씻었는데 그것도 여름이면 괜찮았지만 이른 봄이나 늦가을이면 찬물에 손을 거의 얼구다 싶이 했다. 어느 해 늦가을 어머니가 병환으로 여러 날 들어 누어 빨래감이 큰 대야에 가득 쌓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병이 좀 나은것 같아 빨래감을 한 대야 가득 이고 강에 나가 빨래를 하시고 들어오셨는데 찬물에 손이 빨갛게 되였으며 너무 추워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던것이 그날 저녁부터 열이 오르면서 다시 앓기 시작하여 또 다시 병원놀음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좀 셈이 들었더면 어머니가 앓는 기간 자그마한 빨래들을 내가 조금씩 손빨래를 하였더라도 빨래감이 그렇게 쌓이지 않았을것이고 어머니는 채 났지 않은 몸으로 그날 빨래하러 나가지 않았을것이라고 반성하여 본다. 이외에도 지금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 비하면 우리 부모님들은 너무나도 원시적인 생활을 해 온것같다. 우리 부모님시대에는 가정용전기제품이란 고작 라지오 하나뿐이였다. 그것도 1962년도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유선방송을 듣다가 내가 생산대에 나와 일하면서 가정수입이 좀 있게 되여1970년도에야 라지오를 샀으며 그 라지오 하나로 뉴스나 문예프로 등을 듣는데만 끝였기에 감상효가가 많은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텔레비죤의 보급으로 하여 집안에 않아서 ‘국내외 뉴스’, ‘TV련속극’, ‘동물세계’ ‘세계각지’ 등 프로를 통하여 세상 구경을 다하며 지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서 진행하는 올림픽실황을 구경한다. 얼마나 현대적인 문화생활인가? 80년대까지만 하여도 하늘에서 날아 가는 비행기를 지상에서 올리쳐다 볼뿐 그것을 타리라곤 생각조차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되였으며 일자무식인 나의 장모님도 80고령에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이 자식 집 저 자식 집 왔다갔다하면서 만년을 보내다가 지난해에 87세의 년세로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생전에  “나는 현대 가정용 전기기구를 써 볼것을 다 써보고 비행기까지 타고 한국에도 몇번 다녀왔으니 죽어도 원이 없다.” 고 말씀하시였다. 나의 부모님들은 80년대 초에 모두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그때에 도시에는 텔레비죤, 전기밥가마, 가스레인지, 세탁기, 전기랭장고가 나오기 시작하였나 농촌에서는 미태동(未胎动)이였다. 나의 부모님들은 평생 시골에서 고생하시며 생활하시다니 이런것들을 구경도 못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시였다. 문화생활이란 어떤 것인걸 모를시고 평생 고생으로 살아 오시다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들 참으로 가엽게 생각된다.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들 하늘나라에서라도 이런 복을 받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문화시대〉 2018년 제2기에 게재  
237    우리의 고향 우리가 보듬고 가꿔야 댓글:  조회:5558  추천:0  2018-06-09
우리의 고향 우리가 보듬고 가꿔야 연변일보  2018-06-06 17:11:56     가 가 지금 대도시요, 연해도시요, 출국로무요 하면서 많은 조선족농민들이 타향으로 떠나고 원래 아담하고 살기 좋던 조선족 농촌마을에 가구수가 줄어들고 집이 있다 하여도 사람이 없고 터밭이 쑥대가 무성한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자가 살던 고향의 한 마을을 보면 원래 60여가구에 인구가 300여명 되던 인품 좋고 살기 좋은 순 조선족 마을이였는데 지금은 호구가 있는 조선족 호수는 42가구이지만 본 마을의 사람은 2가구가 살고 농사 짓는 호수는 한가구밖에 없으며 타민족이 5가구가 들어와서 살며 촌민소조의 조장도 타민족이 맡아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 호구도 있고 집도 있는 호수가 8가구가 있으나 다 외지에 가 있고 그외의 30가구는 본 마을에 호적은 있다지만 집도 없이 연길, 룡정에 들어와서 아빠트를 사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한국에서 벌어 온 돈으로 하루하루 ‘강태공의 낚시질’을 하고 있다. 그래도 려상(강태공)은 재능이 있었기에 입궁하여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아무런 재능도 없이 도시에 들어와 ‘강태공의 낚시질’을 한들 어찌 ‘입궁’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한국에서 벌어 온 돈을 다 써버리고는 또 한국행으로 새로운 리산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토지면적은 100여헥타르인데 본 마을의 한 가구가 8헥타르의 밭을 부치는외에 90여헥타르의 토지는 이 마을에 들어와 사는 5가구의 타민족들이거나 주변의 타민족들이 부치고 있다. 어떤 집에서는 토지를 임대주고 어떤 집들에서는 경영권까지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도를 한 실정이다. 더욱 한심한것은 토지도급권도 양도하고 집도 팔아버렸다. 습근평 동지는 19차 당대표대회 보고에서 제2차 토지도급이 끝나면 또 30년을 연장한다고 하였고 올해 중앙1호 문건에도 ‘도시에 들어가 호구를 붙인 농민들의 토지도급권, 주택기지 사용권, 집체수익분배권을 보호하여야 한다’고는 하였지만 주택을 이미 팔아버렸기에 ‘주택기지를 한번 이상 더 분배받지 못한다’는 정책으로 하여 이런 사람들은 주택기지 사용권을 이미 상실한 것으로 된다. 그들이 도시에 호구를 붙이고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인 직업을 찾았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도시에서 장기적이고 안정된 직업이 없이 남의 밑에서 눈치보기 일을 하면서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다시 본고장에 돌아와 살려고 하여도 집이 없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리고 다른 민족이 들어와 우세를 점하다 보니 원래 갖고 있던 조선족의 문화를 보존하기 어려우며 일부는 이미 파손되였으며 그 마을의 조선족들의 권익도 침해를 받은 실정이다. 이렇게 되면 조상들이 억척스레 개척한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 수도 있다. 이리하여 아직까지 그 마을에 호적이 있는 조선족 가구수가 40여호가 되는 이상 그 마을의 조선족문화를 보존하고 그 마을 조선족들의 리익을 보장하려고 그 마을에 호적을 두고 외지에 있는 일부 사람들과 그 마을 출신의 일부 지성인들이 함께 그 마을로 찾아가 해결을 하려 하였지만 그들이 조선족 지성인들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 법적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고향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한평생 농사만 지으란 말이 아니다. 도시에 들어가 창업을 하거나 자기의 적성에 맞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도시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민족이 농경인으로부터 도시인으로 되는 좋은 현상이다. 그렇지만 도시에 들어가 아무런 창업도 하지 않고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도 없이 남의 밑에서 눈치보기 일하면서 밑바닥 생활을 하거나 로동능력을 가지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강태공의 낚시질’하는 사람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본고장에 돌아와 자기의 집, 자기의 토지를 찾아 착실하게 농사도 하고 다각경영을 하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가꾸고 내 고향을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236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댓글:  조회:5578  추천:0  2018-04-16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육성방송   98.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돌아가야 한다”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2년전까지만 하여도 봄철에 들어서면서 논과 밭에서 타래쳐 오르는 검은 연기가 온 대지를 휩쓸면서 막대한 대기오염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곡초수거기계가 나와 곡초를 거두어 들이고 있는데 이는 아주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수거한 곡초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일부 농민들은 옥수수줄기를 소사료로 하고 있지만 곡초수거기계로 수거한 곡식줄기는 대부분은 재생에너지발전소에 판매되여 연료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부 매체에서는 이것을 아주 잘 된걸로 보도 하고 있는데 저의 견해로는 이는 절대적으로 NO. 제창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농업의 생태순환에서 엄중한 악순환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농작물의 줄기를 전부 다 곡초수거기계로 수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거하지 못한 곡초는 봄에 나가서 그대로 논과 밭에서 소각하고 있는데 발전소를 가거나 밭에서 그대로 태워버리나 농업의 생태악순환을 조성하는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농업의 생태순환이란 농작물이 토양으로부터 여러가지 영양물질을 흡수하고 태양에네르기로 광합작용을 하면서 생장발육하여 뿌리, 줄기, 잎, 종자, 열매를 맺고 그것들이 다시 여러가지의 경로를 통하여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땅밑으로 들어가서 다시 농작물에 흡수되는 것을 말합니다. 토양은 농작물이 자랄수 있는 여러가지 영양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농작물의 씨앗은 토양속에서 발아하여 뿌리가 내리면서부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을 흡수하고 광합성작용을 하여 하나의 식물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은 제한성을 갖고 있지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수십년간 농작물이 자라면서 토양속의 영양물질만 빨아내고 그만한 영양물질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토양은 척박하여 더는 농작물의 다수확을 확보하기 힘듭니다. 그 영양물질의 보충이란 바로 동물의 배설물이나 식물의 잎, 줄기 등을 썩혀 농가비료를 하여 밭에 내는것입니다.  곡식줄기를 밭에서 태우면 재밖에 남는 것이 없는데 그 주요한 성분으로는 탄살칼륨(K₂CO₃)입니다. 이렇게 하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칼륨원소는 해결할수 있지만 여러해 장기적으로이런 방식을 취 한다면 알칼리성(K₂CO₃가 알칼리성) 토양으로 전화할 뿐만아니라 나머지 성분들은 연기로 되여 하늘로 날아가 대기오염밖에 조성하지 않다습니다. 연기가운데의 이산화류황(SO₂)과 일산화질소(NO)로 하여 산생되는 이산화질소(NO₂)는 유해기체로서 대기를 오염시킬수 있지만 그것이 비료로 되여 땅속으로 들어간다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영양원소로 전화하게 됩니다. 이 방면에서 선진적인 생태순환 농법을 하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왕청현 종산목업(众山牧业)유한회사 리일룡 사장입니다. 그는 대량의 소와 닭을 기르고 20여 쌍의 밭을 다루고 있는데 수거한 옥수수줄기를 매초사료(青贮饲料)로 가공하여 겨울에 소의 주요한 사료로 하며 소가 배설한 분변으로는 대량의 지렁이를 번식시켜 닭사료로 하고 닭똥과 지렁이가 소의 분변에서 영양을 다 섭취한 다음의 잔류물은 유기비료로 다시 밭에 거름으로 내고있습니다. 이렇게 토양 → 농작물 → 가축사료 → 가축분변 → 토양으로의 생태순환을 하게합니다. 이외에도 곡초가 생태순환을 할수 있는 좋은 방법은 늪가스생산설비를 앉히여 곡초를 썰어서 늪까스 생산원료로 하여 다 발효시킨 다음 그것을 비료로하여 다시 밭에 내는것입니다. 이 방면에서는 흑룡강성 녕안시 명성조선족소진에서 시범적으로 “4위1체”생태온실하고 있습니다. “4위1체”생태온실이란 일광온실, 가축가금우리, 변소, 늪가스 이 네개 부분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경제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생태농업을 하는 하나의 생산모식입니다. 즉 태양온실의 한쪽에 가축가금우리를 짓고 그 밑에 늪가스생산설비를 앉히고 온실에서 남새, 과일을 생산할수 있고 뿌리, 줄기, 잎 등은 사료로 하거나 늪가스 생산원료를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늪가스로 밤에 온실안의 온도를 높이거나 주변 주민호에 에네르기를 공급할수 있으며 늪안에서 산생된 발효물질은 작물의 비료로 합니다. “4위1체”생태온실은 토지자원을 기초로하고 태양에네르기를 동력으로, 늪가스를 련결체(纽带)로 종식, 양식을 결합할수 있으며 페물을 보물로 전화시킬수 있는 자연생태순환계통입니다.  이미전에도 일부 농촌에서 늪가스 생산을 한적이 있지만 그렇게 리상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소규모로 하여 늪가스생산설비를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앉히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기술부문에서 농민들이 농작물줄기를 합리하게 리용할수 있는 방법과 기술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이것을 정밀하고 과학적이며 규모적인 설비를 앉힌다면 농촌에서 온돌난방과 주방칸의 에너지 래원도 해결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유기비료도 생산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운 곡식줄기를 헛타이 태워버려 대기오염을 조성하는것도 피면하고 그것을 합리하게 리용하여 유기비료도 해결하고 에너지 원천도 해결하여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수 있게 됩니다.  지금 정부로부터 농작물줄기를 밭에서 태우지 못하도록 강제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농민들로 놓고 보면 정말 딱한 사정입니다. 정부에서는 농작물줄기를 밭에서 태우지 못하게 하지, 또 태우지 않으면 한전 파종이나 수전모내기를 할수 없지 그럼 농민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정부와 과학기술부문에서 농민들이 농작물줄기를 합리하게 리용할수 있는 방법과 기술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잠시는 생태순환조건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소각하거나 재생에너지발전소에 가져가지 말고 움푹한 곳에 싸여 놓고 록비(绿肥)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곡식줄거리를 어떻게 종합적으로 리용하든지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다시 땅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자 리상적인 농업의 생태순환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8년 4월 13일
235    설날 아침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댓글:  조회:5477  추천:0  2018-03-06
이 세상 많은 일터에 순박하고 고결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하지만 오늘 내가 본 순박하고 고결한 사람은 그 어떤 명예도 직위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음력설날 아침 나는 무술년 새해 도시 면모를 흔상하려고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생각밖으로 밤새 터뜨린 폭죽쓰레기를 쓸어담고 힘겹게 쓰레기차를 끌고 있는 환경위생종업원이 눈에 안겨왔다. 순간 나의 머리 속에는 설도 따로 없이 도시의 환경미화를 위하여 거리를 누비는 이들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순박하고 고결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명절도 따로 없이 설날 아침에도 쓰레기차를 끄는 이들의 소행에 감동되여 이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쓰레기차를 끄는 아주머니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거동이 불편한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데 설명절이라 친척들이 모두 자기 집에 모여서 설을 쇤다고 했다. 밤새 아침 준비를 다 하고 아침 일찍 나와 일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같이 설도 쇠지 못하고 일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물음에 “우리가 하지 않으면 도시환경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시부모님과 친척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고 대답했다.   쓰레기를 쓸어모으는 아저씨는 “무한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딸애도 오고 대련에서 근무하는 아들,며느리도 다 와서 설을 쇤다.”고 했다. “외지에 나간 자식들이 모두 돌아와서 한 가정이 단란이 모여앉아 설을 쇠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참 수고 많으십니다.” 나의 말에 그는 “설날 아침에도 1년에 한두번쯤 있는 자식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해 서운하기는 하지만 이 일은 우리의 직업이니까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라고 하였다. 둘 다 가식이 없는 간단하고도 순박한 말이다. 이들의 한마디가 전체 환경위생종업원들을 대표한 마음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들은 도시미화를 직업으로, 자기의 담당이라도 생각하기 때문에 사명감으로 여기고 직업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신근한 로동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가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이들이 신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환경위생의식을 한층 더 높여 자기가 터뜨린 폭죽쓰레기를 자기가 쓸고 함부로 거리에 페기물, 담배꽁초를 던지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곳이 더 아름다워지고 환경위생종업원들도 숨 돌릴 사이가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1년 사계절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명절에도 휴식 못하고 불평없이 묵묵히 거리를 누비는 환경위생종업원들에게 진심으로 되는 숭고한 경의를 드린다. 길림신문 2018.3.5 
234    우리의 영농실력 남보다 못해 댓글:  조회:7969  추천:0  2018-01-29
[주청룡 홍천룡] 우리의 영농실력 남보다 못해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1-19 15:24:37 ] 클릭: [ ] 19세기 후반기부터 항일전쟁승리후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조선반도로부터 동북에 건너와 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동북의 벼농사는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였으며 조선족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조선족들의 인구 대 이동으로 그 자랑스러운 ‘특허’도 이제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도 안전성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중한수교후 한국기업이 중국의 연해도시에로 대거 진출하면서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많이 취직하게 되였으며 특히는 한국방문취업제로 많은 조선족들이 토지를 국내의 다른 민족에게 임대 혹은 양도하면서 한국로무의 길에 올랐다. 10여년동안 한국에서 돈을 벌었으니 이만하면 이제는 외국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고 고향에 돌아온 조선족도 있는데 정작 와보니 그전과 완전히 다른 상황에 부딪쳤다. 한국에서 10년 일하고 집에 돌아온 김모는 자기의 논을 되찾아 1년동안 농사를 지어보았는데 생각과는 딴 판이였다. 소농경제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농사를 짓다나니 많은 품을 들였으나 수입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그 기간 조선족만의‘특허’였던 벼재배기술을 다 장악하고 대중형 농업기계를 갖추어놓고 조선족들이 내놓은 토지를 임대맡아 농민전문합작사 혹은 전문 농장을 꾸려 규모화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력을 얼마 팔지 않고서도 거대한 수입을 창출했다. 영농실력의 차이가 천양지차였다. 김모는 할 수 없이 토지를 실력이 강한 사람들에게 다시 임대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토지임대비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였다. 약육강식이라고 김모는 비록 한국로무에서 돈을 좀 벌고 빈곤에서는 해탈되였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결국 자기보다 실력이 강한 사람들에게 먹히우고 만것이였다. 동북의 농촌 조선족마을을 돌아보면 이런 현상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조상들이 알심들여 개척한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조상들이 가꾸어 놓은 삶의 터전을 그래 그저 이렇게 잃고 말아야 한단 말인가? 이는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필자는 도시에 들어와 ‘강태공 낚시질’이나 하면서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에게 각성하고 속히 정든 고향에 돌아가 자기의 집, 자기의 땅을 찾아 착실하게 농사를 지을 것을 권장하고 싶다. / 길림신문 칼럼리스트 주청룡 홍천룡 2018년 1월 19일 길림신문
233    남명학 부주장과 같이 일하던 하루 댓글:  조회:7717  추천:0  2018-01-02
[아름다운 추억 64]남명학 부주장과 같이 일하던 하루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25 14:54:24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대의 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콩기음을 맸다. 그 날 오전 우리가 한창 기음을 매고 있는데 찌프차 한대가 밭머리에 와서 발동을 끄는 것이였다. 지금은 찌프차라면 보잘 것 없는 차지만 그 때 세월에는 찌프차라면 현급 이상의 간부들이 타고 다니는 차였기에 찌프차 한대 지나가도 모두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우리 밭머리에 와 서다니. 우리는 모두 일손을 멈추었다. 차에서 한 늙은이가 내리자 리휘 부장이 마중나가 그와 반가이 악수를 하는 것이였다. 나는 틀림없이 주의 간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리휘 부장이 이 분이 주정부 남명학 부주장(그 시기의 직명은 주혁명위원회 부주임이였지만 습관상 그냥 부주장이라고 불렀다)이라고 우리에게 소개를 하였다. 나는 남명학이라고 하는 분이 주정부 부주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뵌 적은 없었는지라 정말 기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새나 모든 행동거지를 보면 주의 간부다운 데는 한곳도 없이 보통 백성과 같아보였다. 그 때 우리 실험소조에는 로농 한분에 계셨는데 남명학 부주장께서는 인사가 끝나자 자기가 왔기에 일에 지장을 준다며 그 로농의 호미를 앗아쥐고 자기부터 엎드려 기음을 매였다. 그의 기음솜씨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쉼시간에 우리는 남주장 주위에 둘러앉았는데 그이는 노래 한수씩 부르며 즐겁게 쉬자고 하셨다. 그 때는 지정된 몇수의 혁명가요만 부르는 시절이라 모두 혁명가요 한수씩 불렀다. 그 자리에서 누가 이번에는 남주장님의 노래를 들어보자고 하였다. 남주장께서는 기다렸다는듯이 인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는데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 내 한말 들어보소-” 하며 첫마디를 떼시였는데 〈농부가〉였다. 모두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왜 이 노래가 나쁜가? 농부의 소박하고 랑만적인 마음을 담은 노래인데 왜 못 부르겠는가?” 하며 끝까지 불러내려갔다. 그러자 모두 “야, 듣기 좋은 노래다.” 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때 내가 지금 이런 노래를 불러 되는가고 묻자 “이 노래가 우리 조선민족의 민요인데 왜 자기 민족의 민요도 못 부르겠는가?”고 하시는 것이였다. 그리고 나서 “농사철에 대해서는 로농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 상급의 지시라고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로농들의 말을 들어야 하오.” “조 홰지(파종)는 곡우를 끼고 해야 하고 콩갈이(파종)는 립하를 끼고 하면 되오.”라고 하시며 곁에 앉은 로농에게 “로인님 제 말이 어떤가요?” 라고 물으신다. 이에 그 로농은 “글쎄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하였으면 좋겠는데 상급에서 어찌나 일찍 파종하라고 하는지. 우리는 리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남주장께서는 “지금은 군대 대표요, 반란파 대표요 하는 사람들이 올라앉아 맹목적으로 지휘한다니까.”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앞으로 로농들을 존중하고 로농들의 말을 잘 들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는 인차 “자, 또 한쉼 매여봅시다.” 하며 호미를 들고 일어나 선줄로 나가시는 것이였다. 점심때가 되자 공작대들원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불의에 닥친 일이라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우리 지방은 한전고장이라 그 때 시절에는 입쌀 한줌도 없어 그저 조밥을 대접하였다. 그런데 남명학 부주장은 오후에도 계속 나가 기음을 매고 하루 밤 우리 집에서 묵을 타산이였다. 그런데 리로 놓고 말하면 저녁식사 대접이 문제였다. 어떻게 저녁에 또 조밥만 대접하겠는가? 도시와 50리 떨어져있는 농촌이라 어디에 가서 돼지고기도 사올 형편이 못되였다. 그렇다고 하여 돼지를 엎어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되였다 그래서 실험소조의 조장은 우리 어머니더러 저녁에 두부를 앗아 대접하자고 하였다. 쟁글쟁글 끓는 뙤약볕에서 남주장은 우리와 같이 온 하루 기음을 매시고 저녁에 해가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오셨다. 조장이 나를 시켜 술을 사오려는 것을 눈치챈 남주장께서는 친히 자기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나를 주면서 이 돈으로 술을 사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한사코 안 받자 그이께서는 호미자루로 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쇼주(小朱) 왜 내 말을 안 들어?” 하면서 기어이 그 돈으로 술을 사오라고 하시는 것이였다. 그렇게 되여 나는 남주장에게서 호미자루에 엉덩이를 한매 얻어맞았다. 어쩌면 그 한매가 나의 마음을 그렇게도 기쁘게 하였던지? 나는 그런 매라면 자꾸만 맞고 싶었다. 저녁식사 때 조장이 “남주장께서 모처럼 우리 실험전에 오셔서 온 하루 이렇게 수고를 하셨는데 우리 농촌에는 아무 것도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저녁에 두부를 준비하였는데 서거픈 음식이지만 많이 잡수십시오.”라고 말하자 남주장께서는 “두부 만치 좋은 음식이 어디에 있소. 자 어서 가져오오. 그럼 오늘 농촌 아주머니가 손수 앗은 두부를 먹어봅세.”라고 말씀하시며 술잔을 들고 “자, 우리 같이 한잔 들어봅시다.” 하며 음식상의 기분을 돋구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다 가고 남주장께서와 비서, 그리고 리휘 부장이 남아서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되였다. 사실 그 날 남주장께서는 사업토론을 하려고 리휘 부장을 찾아왔었는데 리휘 부장이 공작대를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기음을 매자 그이도 우리와 같이 온 하루 일하시고 저녁에 리휘 부장과 사업토론을 하시는 것이였다. 사업토론이 끝나자 나도 그 자리에 끼여서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이가 리휘 부장(한족)과 이야기를 할 때 한어를 아주 류창하게 하시여 완전히 한족 같은 느낌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여 한어를 그렇게 류창하게 하시는가고 물었더니 어릴 때에 연길현 동성용 동성촌의 한 한족지주의 머슴으로 들어가서 돼지를 먹이다가 후에 공산당을 만나 혁명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연변의 열혈청년들을 인솔하여 항미원조전장에 났갔다는 것이였다. 나는 그 날 저녁에 그에게서 많은 혁명이야기를 들었다. 이튿날 아침식사가 끝나고 그들이 떠날 때에 비서가 식비를 계산하여 내놓는 것이였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장 어른께서 여기에 오셔서 일하신 것만 하여도 송구한 일인데 어떻게 식비를 받을 수 있습니가?” 하며 한사코 받지 않았다. 며칠 후 우리 어머니가 재봉기을 쓰려고 재봉기에 덮었던 보를 드니 그 밑에는 식비 명세표와 현금 그리고 량표  놓여있었다. 우리가 보지 않는 틈에 비서가 넣어놓은 것이였다. 그 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도 감격되여 눈물까지 훔치였다. 지금 세월 같으면 남주장께서 우리 실험전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기음을 매시고 쉼시간에 이야기를 나누시는 장면들을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영원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겠지만 그 때 세월에는 손에 쥔 것이 호미자루 밖에 없었으니 그런 영상자료 하나 없이 그저 머리속의 추억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으로 되고 있다. 길림신문 2017-12-25
232    외국로무는 우리의 영원한 터전이 아니다(주청룡, 홍천룡) 댓글:  조회:6201  추천:0  2017-12-25
한국의 방문취업제 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로무의 길에 올라 적지 않은 돈을 벌어 빈곤에서 해탈되였다.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매던 시기에 한국로무는 조선족농민들에게는 빈곤에서 벗어나는 필연적인 선택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본 고장에 남아있는 다른 민족들도 빈곤에서 해탈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외지로 떠나간 조선족들의 토지를 임대 맡아 다루기 시작하였는데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하여 그 사이에 농촌에서 기계로 밭을 갈고 살초제를 사용하여 풀 한포기 매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 풍작을 거두고 당지의 자연우세를 리용하여 다각경영을 하면서 많은 수입을 올려 빈곤에서 해탈했을 뿐만 아니라 치부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남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연해도시나 외국로무의 길에 오를 때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금성촌의 우경철씨는 자지방의 자연 우세를 빌어 목장, 무공해 채소재배기지, 양어장 등을 경영하고 여기에서 나는 무공해 육류, 어류, 채소를 자기가 꾸리는 식당에 공급함으로써 생산, 가공, 판매를 일체화한 집단형 업체로 발전시켰다. 당지에 본사를 두고 탕원, 가목사, 학강, 이춘, 이란, 목단강 등 8곳에 ‘탕왕우씨불고기성’ 체인점을 경영하는데 일석3조의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왕청현 배초구진 서성촌 김송섭은 토종 흑돼지 육질이 좋아 개량종돼지고기 가격보다 곱절 비싸고 수요량이 많다는 정보를 알았다. 그는 당지의 자연우세를 리용하여 왕청현동북토종흑돼지사육합작사를 꾸리고 477헥타르에 달하는 서산 골짜기에서 육질이 좋은 토종 흑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2008년도에 4마리로 시작한 토종 흑돼지 사육이 계속 늘어나 지금은 6,000여마리나 되였다. 사육기간이 최소 1년, 한마리에 3,000원씩 해마다 4,000마리 정도 출하면서 치부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외국로무는 대부분 가족을 떠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보기를 하며 고된 일을 이겨내며 돈 벌고 있다. 하지만 우경철씨와 김송섭씨는 본 고장에서 단란한 가족생활을 하면서 당지의 자연우세를 빌어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다. 돈 벌려고 한국간지 10년이 되여가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고 지어 15년, 20년이 다 되는 사람도 있다. 한국로무는 짧은 시일내에는 빈곤에서 해탈할 수 있지만 한평생 살곳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자지방의 자연우세를 리용하여 자기의 영원한 터전을 닦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냐고 권고하기 싶다. 길림신문 2017.12.22
231    ‘학생들’과 ‘애들’ 어떻게 불러야 할가? 댓글:  조회:5342  추천:0  2017-09-29
지금 학교에서 보면 일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학생들’이라고부르지 않고 ‘애들’이라 말하고 학생들과 말할 때에도 “동무 어디로 갑니까? 동무 여기로 오시오.” 이렇게 말하는것이 아니라 “얘, 니 어디로 가니? 얘, 니 여기에 오너라.”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요즘 젊은 세대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이렇습니까?, 저렇습니까?” 하는 식으식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니? 저렇니?”하는 식으로 말하는데 때론 늙은 세대로서 듣기에 참 거북스럽다. 학교에서 교육대상의 주체는 학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이 보편적으로 7주세 되면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사회적 신분이 학생으로 되고 학생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고 그 신분이 법률적인 인정을 받게되므로 학생이란 사회적 지위를 갖게된다.   그 어떤 원인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지칭은 어디까지나 ‘어린이’ 혹은 ‘애’이지 ‘학생’이 아니다.‘학생’이라는 것은 ‘어린이’ 혹은 ‘애’보다 사회상에서 승격된 지칭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어린이(애)들일지라도 학교에 다니면 그들의 사회적지위를 존중하여 ‘학생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애들’이라고 부르는것보다 더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전에 우리의 선생님들은 학교교육대상에 대하여 ‘학생’, ‘학생동무들’이라고 불러왔지 ‘애들’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우리반 학생들이”라고 말했지 “우리반 애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세기 8,9십년대에 들어 서면서부터 우리나라 조선족교육에서 점차적으로 ‘학생들’이라고 부르는것보다 ‘애들’이이라 부르는 것이 더 보편화 되여가고 있다.   이런 습관이 소학교에서 뿐만아니라 초중, 고중에서도 보편적이고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학생들까지 애들이라고 부르면 년령구조단계를 봐도 ‘애들’이란 지칭이 맞지 않거니와 대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너무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대화를 할때에는 무조건  “이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존대형 혹은 대등관계로 말하였고 학생들과 “이래라”, “저래라” 이런 하대형으로 말하는 교원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일부 선생님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사업을 하고 있는 제자를 보고서도 공적인 자리에서도‘야’ ‘자’하면서 말하는데 아무리 사제간이라고 하여도 제자가 인젠 사회인이기때문에 사적인 자리외에는 존대형 혹은 대응관계로 말하는게 바람직 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교육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관계로서 학생은 반드시 선생님을 존중하고 선생님은 학생을 사랑하는 ‘존사애생(尊师爱生)’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해야 하며 인격상에서도 선생과 학생을 대등관계로 대하고 어떤 활동에서도 학생이 자기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민주를 발양해야 한다.   교원들이 학생을 지칭할 때에는 ‘애들’이라기보다 ‘학생들’이라 지칭하고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는 “야,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의 하대형으로 말하지 말고 “동무,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하는 식으로 존대형을 써야 한다. 어찌보면 작은 일이라기도 할수 있지만 학생들에 대한 이러한 존대와 대등관계가 학생들의 인격도 존중하고 선생과 학생지간의 민주적이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존사애생’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연변일보 2017- 9- 27  
230    생방송: 이밤을 함께 합시다 댓글:  조회:6295  추천:0  2017-08-27
《이 밤을 함께 합시다》프로 생방송 2017년 8월 22일 주청룡 개시곡--《아름다운 동행》-- 안녕하십니까? 《이 밤을 함께 합니다》에서 인사 드리는 남경언입니다. 나라의 흥망은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주인공적 자세로 나라와 집단, 사회를 대한다면 문명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한몫 할수 있습니다. 지성인으로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칼럼쓰기와 민족력사답사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고있는 분이 있습니다.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에서 부교장사업하다 퇴직하신 주청룡선생님이 바로 그런분입니다. 오늘밤 생방송실에 모셨는데요, 잠시후 만나보겠습니다.             --타이틀--《아름다운 동행》--   인사 나누고: 물음: 1. 선생님은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문제에 대해 예리한 필봉을 돌리시고 많은 칼럼을 쓰시였는데요, 어떻게 되여 컬럼을 쓰시게 되였는지요? 학교에서 좀 령도사업을 하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것이였습니다.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인제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였습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사업을 해 오던 내가 사업을 결속짓는다는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습니다. 무엇이든 하지 않고 매일 마작치기를 하거나 그렇지않으면 쪽걸상을 가지고 나가서 늙은이들과 같이 그를밑에서 소일하며 보낸다는것은 너무나도 허무한 생활이라고 생각였고 일종 심리적 불안감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내 고향은 연변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내 고향 연변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자랐기때문에 농민들의 생활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던 고향을 비롯하여 연변의 여러 농촌을 돌아 다니면서 농촌실정을 고찰하였습니다.    2006년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고찰한 정황들을 종합하여 보니까 1.    농촌인구가 그 전에 비해 감소되였으며 그때까지도 많은 농민들이 소농경제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    많은 농민들이 제한된 경작지에서 저 소득의 수입으로 입고 먹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였습니다. 3.    장가를 못간 로총각들로 하여 혼인균형이 파괴되였습니다. 4.    학생수가 줄어들고 많은 학교가 페교 되였습니다. 5.    조선족들이 외국로무로 나가면서 외지의 사람들에게 경작지를 임대 혹은 양도하여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사자료을 가지고 “농촌조선족 인구의 이전을 어떻게 볼것인가?”란 제목으로 10,000여자 되는 글(론문)을 써서 2007년 6월에 흑룡강신문에 발표하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에서 저의 육성으로 방송되였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첫째로 중국조선족의 이주력사를 간단히 서술하고 연변에 조선족 집거구가 형성된 력사적 배경과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성립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두번째로는 농촌인구, 농경지와 농경인, 학교와 학생 등 연변 농촌조선족의 현황에 대하여 분석하면서 농업인구가 감소되고 농촌학교 학생수의 감소와 작은 학교의 페교는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는 것을 지적하고 조선족 교육을 보장할수 있는 대안을 제기하였습니다 세번째로는 농민들이 치부의 길로 나가는 도경을 6가지로 론술하였습니다. 네번째로는 혼인불균형 해결점과 조선족 공동체 해체의 방지대책에 대하여 6가지로 론술하였습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여 말하면 우리의 터전을 잘 가꾸고 지키고 조선족 공동체를 공고히 하며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것이였습니다. 2.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거쳐 필봉으로 우리 조선족을 대변하였다면서요? 예, 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 길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도 하고 일도 하면서 한국생활을 체험 하여 보면 출입국 관리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중국동포타운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고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에 있을 때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 일을 하면서 많은 멸시, 모욕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하여 왔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들의 실생활을 료해하자면 바로 산업현장, 건설현장에 가야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처음으로 서울 교외의 한 채소농장에 가봤습니다. 농장에 가보니 중국동포들이 온 하루 비닐하우스 안이거나 뙤약볕에서 쉼도 없이 구술땀을 흘리며 일하는데 숙소마저 찜통처럼 뜨거운 채소하우스 안이였고 그 안에서 먹고 자고 하했다.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이였다. 그집 애완견도 집주인과 같이 집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서울과 경기도의 몇몇 건설현장에 가서 현지체험을 하였습니다. 건설현장에서는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안전화, 안전띠, 안전모로 전신무장을 하고 건설현장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3무장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수 있었습니다. 중국동포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철판으로 된 폼(模板), 강관(鋼管), 철근 등 전부 무거운 물건들을 나르는 것이였는데 한참 일하고 나면 온 몸이 땀참봉으로 되였습다. 그래도 청부업자는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3D업종에서 다 그런것이 아니라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우리 중국동포들을 아무런 정치권리도 인권도 없는 인간으로 업신여기면서 마구 욕을 퍼부으면서 부려먹는것이였습니다.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돈벌이 온 것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고용주들은 의식적으로 불법체류자를 쓰면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도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신고를 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쥐고 일년 넘도록 월급을 주지않는 일이 있었고 지어는 일년 넘게 일하고서도 청부업자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로동공가를 받지 못한 일, 등 이러한 일들은 많고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중국에서 듣던바와 같이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리고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는 가정부를 종으로 여기여 고용인들이 최저의 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습니다. 우리가 돈벌러 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인격만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내 힘으로서는 중국동포들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중국동포들이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의 문화수준은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족은 로인을 잘 모시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례절바르고 깨끗하며 문명스러운 민족이라고 전국에 널리 자랑을 떨치고 있으며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고 제기하였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 하여 소외를 당하였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한 겨레의 고국에 와서 일부 하류계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동북아신문, 중국의 흑룡강신문, 료녕신문에 발표하여 중국에서 우리 조선족은 아주 우수한 민족으로 부상하고 있으므로 한국사회도 우리 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을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며”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저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자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리하여KBS-1 라지오에서는 제가 중국동포들의 의사를 충분히 말을 할수 있다고 하며 저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청하였습니다. 저는 그 프로에 참석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들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이 사랑에 감사를 들이며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중국에 돌아가서 잘 살겠다는 내용으로 말하였는데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곳곳에 전하여졌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에 KBS-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에서 공동 주최하여 《한국기업인과 중국동포와의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신문사에서는 또 제가 중국동포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표달할수 있다고 그 간담회에 초청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저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정책이 좋아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많이 나와 돈을 벌고 있고 우리 동포들도 고국건설에 한몫을 담다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모든 고용주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불공정한 대우를 하면서 일을 시키는 사례들을 숫해 들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것을 호소 하였습니다. 이것이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여 많은 중국동포들의 절찬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도 조선족들이 이 프로를 보고 제가 중국동포들의 속심의 말을 아주 잘하였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이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중국동포들에게서 찾아 볼점이 없는것은 아니였습니다. 중국동포들에게서 찾아볼 문제들을 보면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어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준수하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중국동포들의 이미지에 엄중히 손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동포들 자각적으로 한국의 벌률과 제도를 준수하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중국동포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몇몇 신문에 발표하여 중국동포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버는것으로써 한국정부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며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것을 호소하였습니다. 3. 여러 매체와 손잡고 많은 칼럼을 쓰시면서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한몫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예, 한국에서 3년 남짓이 체류하면서 한국사회와 중국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체험하면서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글을 많이 썼지요. 그리고 2010년 10월에 중국에 들어왔는데 이듬해의 어느 하루 중앙인민방송국의 《오늘의 화제》담당편집 박민걸 선생님이 저한테 전화가 왔던데  《선생님의 글을 보니 인제 중국에 들어오신 것 같은데 이제부터 우리방송의 〈오늘의 화제〉프로에 칼럼을 하여 달라는 청탁받았습니다. 그래서 2011년 7월부터 매주 《오늘의 화제》프로에서 시리즈로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분석하고 앞으로 해야할 일,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어떤 모순과 갈등이 있는가?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문제와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육성방송으로 칼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1년반 련속  출연하다나니 매주일마다 하나의 화제를 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 연변주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하업하시던 채영춘선생님, 연변대학 김관웅, 우상렬 교수님, 원 연변인민출판사 〈농가〉잡지 주필이였던 홍천룡선생님 등 분들을 중앙방송에 추천하여 같이 륜번으로 칼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앙인민방송뿐만 아니라 길림신문,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등 조선족 보도 매체에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4.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듯이 그런 비판과 반성의 자세가 있어야 우리에 대한 정학한 이미지  정립을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오신 후에도 여젼히 필을 놓지 않고 우리 민족의 발전과 진보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들었습니다. 2010년 10월에 귀국하여서도 우리 조선족사회를 위해 무얼 해야하는가 하는것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굴리던 중 한번은 제가 살던 농촌 고향마을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그전에는 다른 민족이 한호도 없이 순 조선족이 60여 호 단란하게 모여 살던곳이 2007년 한국 방문취업제 문이 열리자 출국로무요, 대도시요 하면서 떠나다니 조선족은 몇호밖에 없고 대부분 다른 민족들이 밭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누에 뽕입먹듯이 잠식되고 있었다. 매우 가슴아픈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농업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룡정시의 원 광신향 당위 김재범서기와 함께 연변의 여러 농촌들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조사하였습니다. 연변의 농촌 각지를 돌아 보니 거의 다 제 고향마을과 비슷한 상황이였습니다. 우리는 농촌조사가운데서 우리의 토지가 타민족에게 넘어가는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토지는 임대한 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 하면서 아주 락관적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농촌 마을이 다 그런것은 아니였습니다. 우리는 주 농업위원회를 찾아 우리의 뜻을 말하고 주 농업위원회의 알선으로 몇개의 선진촌들도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촌들을 방문하면서 여러가지 선진적인 경영모식도 많이 찾아내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서 토지가 타민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면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 방면을 노력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본 지방 촌민들에게 임대하여주어 외지에 갔다가도 아무때든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과학적인 규모화 농업을 하여 제한된 농경지에서 보다 높은 수확을 따내야 합니다. 셋째로는 생태농장을 꾸리는 것이였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배운 사육기술로 고향에 돌아와서 가축, 가금 생태농장을 꾸리는것입니다. 넷째로 자연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당지의 농산품, 특산품 등을 여러가지 명브랜드로 가공하여 수출형 농업을 하여야 합니다. 다섯째로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리는 것입니다. 분산된 농업으로는 다수확을 따낼수 없습니다.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려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하여 농사도 짓고 다종경영을 하면서 통일관리, 통일생산, 통일수확, 통일가공, 통일판매를 하여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의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섯째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입니다. 분산된 자연툰을 합병하여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춘 곳을 선택하여 집중촌을 건설하여 제한된 경작지를 감농군들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많이 꾸리여 그외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키면 여유의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할수있습니다. 모두어 말하면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을 건설하여 소도시화를 하는것입니다. 소도시화를 하면 도시에 시집가는 처녀들이 적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 총각들의 혼인 불균형도 해결할수 있으며 인구가 증가되면 자연히 학생수도 늘어나 우리민족 교육도 보장할수 있으며 조선족공동체를 더욱 건전히 구축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본 고장에서 집중촌건설에 투자하여 공업도 하고 과학적인 규모화농업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농촌조사를 개괄하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란 제목으로 만여자 되는 글(론문)을 써서 2012년도에 흑룡강신문, 《농가》 잡지와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 방송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란 론문을 써서 중앙인민방송, 〈농가〉잡지,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소제목형식으로 보면 1.  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2.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사회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3) 외화수입은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1) 조선족집거지 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게 되였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4. 금후의 전망 등 이러한 내용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국가중점도서의 항목으로〈개혁개방과 중국의 조선족〉이란 계렬 도서를 출판하게 되였는데 3농문제에 관한 책은 출판사의 홍천룡선생님과 저에게 맡겨 쓰게 하고 2015년도에 우리더러 농촌조사를 하라고 하여 목당강지구에 가서 녕안, 해림 등지를 돌고 계서지구에 가서 계서, 밀산 등지를 돌았으며 할빈지구에 가서 오상, 아성, 상지 등지를 돌았으며 가목사지구에 가서 화천현, 탕왕현 등 흑룡강 농촌 조선족 마을을 다니면서 3농문제에 대하여 조사를 하였습니다. 5. 우리 민족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기에 그런  보귀한 글들을 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밖에 선생님은 《중국조선족백년실록》 편찬사업에 참가하여 우리 력사 보존사업에 자신의 힘을 이바지한걸로 알고있습니다.  아, 이건 제가 《중국조선족백년실록》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기보 다 제가 쓴 전국로동모범 리호천사적이 여기에 수록되였지요. 6. 또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 회원으로서 항일전적지 답사에 참가하여 민족의 력사발굴에도 한몫 하고있다지요. 2015년 한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성 원들이 대전자 항일전적지, 소사하항일전적지, 내두산 항일밀영유적지, 어랑촌 13용사전적지, 공도진렬사기념비 등 곳을 답사하였고 6월에는 장암동참사유적지를 답사했으며 10월에는 또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성 원들이 연변아동문학학회와 함께 흑룡강 동녕현에 있는 〈동녕요새〉를 탐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연변 조선어방송 애청자협회의 회원으로 협회에서 조직한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소왕청항일전적지, 진한장렬사릉원 등 곳을 답사 혹은 참배를 한 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에서는 이런 답사기를 묶어서 책으로 편찬하려고 하는데 저는 이런 답사기를 써서 협회에 교부하였고 〈동녕요새〉 탐방은 기행문을 써서 지난해《송화강》잡지에 발표했습니다. 7. 우리에게는 참으로 자랑할만한 력사가 있지요.우리의 선배들이 피땀을 흘려 바꾸어온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력사를 전해가는것은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국가에서도 이 방면의 사업을 지지하면서 비물질유산발굴 등 면에서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하고있잖아요, 선생님은 자신의 지식과 인맥으로 우리 연변의 명인들을 소개하여 많은 호평을 받은걸로 알고있습니다. 금년 6월에 장춘텔레비죤방송국에서 비물질문화유산《중국조선족명인 기록편》 찍으러 연변에 왔었는데 주정협문사자료실에 찾아가서 자기들의 촬영을 도와 줄 사람을 요구하였는데 주정협에서 저를 추천하여 제가 촬영팀을 안내하며  전국로동모법이며 농민 벼육종가인 최죽송, 전국로동모 범 김시룡, 전국로동모범 우편배달원 리호천, 전국3.8붉은 기수 리옥금, 전국민병선진공작자 리종률, 연변사과배 품종을 백육해 낸 최창호, 조선족의 우수한 교육자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 림민호, 중국조선족 음학에서 정률성에 이어 공로가 큰 허세록 등 8명의 기록편을 찍었습니다. 8. 자신의 실제행동으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보여주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항상 손에서 필을 놓지 않고 보람있는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지요. 기행문도 쓰시였다지요. 한국에서 여러곳을 다니면서 유람을 하고 모두 기행문을 써서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였지요. 려행수필을 쓰면 문학적으로는 차원이 더 높겠지만 저는 수필을 쓰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도 있겠지만 독자들에게는 려행수기를 써야 글을 보면서 관광단과 함께 명승지를 돌아본다는 감을 주기에 중국에 돌아와서도 상해, 항주, 남경, 북경, 청도, 태산, 집안고구려유적지 등 곳을 다니면서 모두 려행수기를 써서 여러 신문에 발표하였고 조선의 평양, 금강산, 개성, 판문점, 동남아의 향항, 오문, 타이, 싱가포르, 말레시아 그리고 대만 등  곳을 려행한 것을 모두 려행수기를 써서 길림신문에 30여 기를 련재로 발표하였습니다.   아나운서: 필봉으로 멋진 만년을 장식해가고 있는 선생님이신데요, 만년에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   맺는말:   2017년 8월 22일 밤 9시 《이 밤을 함께 합시다》프로에서 생방송
229    불법광고를 엄하게 단속했으면 댓글:  조회:4902  추천:0  2017-07-28
지금 연변 각지 시내 거리 바닥을 보면 40~50m 거리 사이를 두고 노란색 페인트로 뚜렷하게 핸드폰번호 아래에 ‘办证刻章’이라 써놓고 건물벽에도 검은색으로 이같은 불법광고를 써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연변에서 거리 바닥이거나 벽에 이런 불법광고가 씌여져있는 것은 몇년전부터 있었다. 과거 써놓은 것이 지워지지 않은데다 또 새롭게 써놓아 도시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도시환경은 그 도시의 정신문명, 물질문명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데 중국에서 가짜증명, 가짜공인 암시장이 어떠함이 짐작된다. 제6조에는 공인제작업 특종업종허가증을 신청한 경영단위는 ‘공상영업허가증이 있어야 하고 고정된 영업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썼다. 거리 바닥이나 건물벽에 ‘증명을 떼주고 도장을 만들어 준다’고 하는 자들은 고정된 영업장소와 영업허가증이 없는 불법 소굴에서 위조하고 그 행위자체가 불법이기에 절대로 합법적 증명서나 공인일 수 없다. 공안부의  에는 ‘가짜인장, 가짜증명서, 가짜졸업장 등을 만드는 위법범죄활동 특점에 대처해 류동인원들의 불법 도장제작 거점을 제때에 발견하고 청산, 단속하여야 하며 가짜 증명서를 팔고 다니거나 공중장소에다 도장을 만들어준다는 광고를 붙이는 자에 대해 엄하게 조사, 처리해야 한다. 세집 관리를 강화하고 가짜 인장을 제조판배하는 소굴을 제때에 발견해야 한다.’고 썼다. 공안부문에서 이런 불법분자들을 타격하는 행동을 많이 벌여왔으리라고 믿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이들이 이렇게 빈번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 타격효과가 두드러지지 못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어떤 곳에서는 도시관리 부문에서 인부들을 불러 불법광고물을 제거하기는 하지만 거리 바닥에 써놓은 광고들을 전기연마기로 아무리 지운다 해도 깨끗하게 지울 수 없어 광고글씨가 여전히 보인다. 이같은 광고물 제거방법은 불법분자들이 해놓은 오염배출물 청소격으로 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의 오염배출물 청소보다 오염물을 배출하지 못하도록 써놓은 전화번호에 따라 추적조사를 하여 그들의 소굴을 짓부시고 이들을 엄하게 처단하는 데 진력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대책이라고 생각한다. 길림신문 2017-7-27
228    뻐스에서 만난 고마운 녀대학생 댓글:  조회:4946  추천:0  2017-06-01
며칠전 연길에서 룡정으로 가는 뻐스에서 있은 일이다. 필자의 옆에 앉은 한 20대의 처녀가 뻐스가 떠나기 전부터 열심히 책을 보고 있기에 무슨 책을 보나 곁눈질로 들여다 보니 교육학에 관한 책이였다. 교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한 필자인지라 교육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 처녀가 매우 대견해 보였다. 말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데 지장이 될 것 같아서 말을 건네지 못하였다. 뻐스가 룡정에 거의 도착하게 되자 그녀는 열심히 보던 책을 덮고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이였다. 필자가 어떻게 되여 교육학을 그렇게 열심히 읽는가고 물었더니 자기는 지금 연변대학 사범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금년에 졸업하게 되며 연변조선족자치주인력자원사회보장국의 금년도 사업단위공개초빙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이였다. 어떤 일터를 선택했는가고 물었더니 교원직을 선택하였다는 것이였다. 학생래원의 감소로 학생수가 줄어들고 페교현상이 심각한 정황하에서도 인민교원이란 영광스럽고 성스러운 직종을 선택한 그녀가 기특해보였 하여 필자는 인민교원이란 직업은 영광스럽고 성스러운 사업이라고 고무격려의 말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뒤에 앉아있던 한 40대의 남녀가 우리의 말에 참견했다. “그것은 전통관념입니다. 교원사업을 하여 돈을 얼마 벌겠습니까? 한국에 나가면 한달에 여기서 받는 월급의 몇배를 벌 수 있는데 젊은이들이 여기에서 무슨 사업할 멋이 있겠습니까?” 필자는 찬물을 끼얹는 그들의 말에 대뜸 유감을 표하면서 툭 내쏘았다. “만약 당신들의 말대로 모든 사범학원 졸업생들이 다 외국이거나 중국의 타지역에 나간다면 우리 민족의 후대양성사업은 누가 하겠는가? 우리 민족의 후대양성사업을 위해 사업단위공개초빙시험을 치려고 열심히 시험준비를 하는 이 학생이 얼마나 대단한가?” 공교롭게도 뻐스가 내가 내리려는 정류소에서 멈춰섰기에 나는 더 하려던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 시험준비생에게 시험을 잘 치라는 격려의 말 한마디밖에 하지 못하고 내렸다. 뻐스에서 내린 후 필자의 머리는 착잡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 학생이 연변대학 사범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대학시험을 칠 때부터 교육사업을 사랑하고 교육사업에 한생을 바치려는 념원을 안고 선택하였을 것이고 교육사업에 종사할 일념으로 졸업을 앞두고 사업단위공개초빙시험에 응하여 열심히 시험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낯모를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찬물을 끼얹었으니 그 학생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지금이라도 그 학생에게 더 많은 격려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학생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적지 못한 것이  안타까왔다. 그저 속으로 그 학생이 시험을 잘 쳐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를 바랄 뿐이였다. 한편 그 낯모를 남녀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정말 우리가 모두 그들의 말대로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외국에 가야만 하는가? 물론 로무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정한 수입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건 결코 전도가 유망한 모든 젊은이들의 유일무이한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외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가족, 내 고향을 떠나 낯선 외국땅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대부분 사람들은 남의 밑에서 눈치를 보면서 일하고 있다. 일정한 문화지식을 갖고 외국에 가서 사무직에서 일한다 하여도 그것은 온전하고 장기적인 직업은 아니다. 돈을 좀 더 번다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보다 잠시는 적은 월급을 받더라도 온전한 직업을 갖고 한집에서 내 가족 사랑을 느끼면서 일하는 것이 곧바로 한 가족의 기쁨이고 행복이며 내 고향 건설에 더욱 큰 힘을 이바지 할수 있는 옳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에 가서 일을 하더라도 장기적인 리산가족생활을 하지 말고  5, 6년간 돈을 번 다음 고향에 되돌아와서 새로운 창업을 하면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지금 연변에서 실행하고 있는 귀향창업프로젝트도 바로 내 고향을 더 잘 건설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겠는가? 뻐스에서 만난 이름 모를 녀대학생, 이런 대학생들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 민족의 후대양성사업이 끊기지 않을 것이고 조선족사회가 더욱 찬란한 미래를 가져오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길림신문 2017-6-1
227    영원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5.4정신 댓글:  조회:4767  추천:0  2017-05-07
중앙인민방송 ⟪오늘의 화제⟫프로 육성방송   영원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5.4정신   주청룡        올해 5월4일은《5.4》운동 98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였습니다. 각지에서는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혁명정신을 고양하는 취지하에서 5.4운동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적극 조직했습니다.       1919년 5월 4일, 북경의 3,000여명의 애국학생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밖으로는 주권을 찾고 안으로는 매국적을 징벌하자⟫는 구호를 높이 외치면서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였습니다. 그후 운동의 주력군은 학생과 민중에서 로동계급으로 범위를 넓혔고 파급범위도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20여개 성과 150여개의 대도시들로 확대되였습니다.      《5.4》운동의 력사적의의는 중국혁명사에서 구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신민주주의 혁명에로 들어가는 시대적 획분의 전환점이고 분수령이며 철저히 비타협적으로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봉건주의를 반대한데 있습니다. 5.4운동을 계기로 맑스주의가 중국에서 널리 보급되였고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였으며 사상과 조직면에서 중국공산당 성립을 위한 준비가 다그쳐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애국, 진보, 민주, 과학의 《5.4》정신을 계승, 발양하여 현시대의 청년들을 분발시킴으로써 국가부강과 중화진흥을 위하여 노력분투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5.4》운동정신을 말하는가하고 있습니다. 비록 《5.4》운동은 이미 98 년이 지났지만 98년 전의 《5.4》정신과 현시대 《5.4》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애국주의는 하나의 력사범주이며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다를뿐입니다.      《5.4》운동시기 청년들의 애국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피와 목숨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싸우는 시위행진으로 표현되였지만 현시대 《5.4》정신은 그런 시위행진 형식으로 애국열정을 표현하는것도 아니고 꼭 적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것도 아니며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완성 하는것입니다.       현시대 청년들은 등소평리론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드팀없이 당의 기본로선을 견지하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실천에 적극 뛰여들어 전면적으로 초요사회를 건설하며 습근평주석이 제출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시대 청년들에게 부여된 력사적 사명이며 현시대 청년운동의 방향입니다. 현시대 청년들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자면 개인의 리상과 추구를 전 민족의 공동한 리상과 한데 융합시켜야 하며 실제 행동으로 조국에 보답하여야 합니다.       지난달 22일 중국의 첫 화물우주선인 천주1호가 실험용 우주정거장 천궁 2호와 도킹에 성공한것도 바로 우리 나라  과학연구원들이 첨단과학연구분야에서 발양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중국 녀자배구팀이 지난해 제31차 올림픽운동대회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해 금메달을 따낸 것이 바로 중국꿈의 실현이며  운동원들이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것을 크게 말하면 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체를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고 인민군중을 위하여 복무하는것입니다. 때문에 큰 사업을하여야만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다는것이 아닙니다. 모든 청년들이 평범한 일터에서 자신의 맡은바 사업을 착실하게 잘 하는것도《5.4》정신을 발양하는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집체를 사랑하고 인민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것도 역시《5.4》정신을 발양하고 중국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것으로 간주할수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5.4》정신을 고양하는 중요성은 과거 애국청년학생들과 로동자들의 반제반봉건 희생정신을 기리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그와 동등하게 중요한것은 우리의 사업은 지금이나 금후에나 시종 일관 《5.4》정신을 절실히 수요하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5.4》정신을 고양하고 《5.4》정신으로 애국주의교육을 진행하는것은 우리가 시종일관 간과해서는 안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잡다단한 국제정세하에서 지속적인 안정발전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과 등소평리론을 지도로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함으로써 개혁개방의 거세찬 물결속에 적극 뛰여들어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분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7년 5월 5일
226    장정정신과 중국의 꿈 댓글:  조회:6750  추천:1  2016-10-11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육성방송  93. 장정정신과 중국의 꿈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장정정신과 중국의 꿈"이란 내용으로 말씁드리려 합니다. 금년 10월 22일은 중국로농홍군 장정승리 80주년 기념일입니다. 중국로농홍군은 왕명의《좌》경기회주의로선의 착오적인 령도로하여 제5차《반포위토벌》이 실패하자 홍군은 할수없이 1934년10월에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을 떠나 장정을 시 작하여 1935년 10월에 제1장면군이 섬서성북부의 오기진에 이르고 1936년 10월22일에 녕하 고원시 서길현 장대보에서 제1방면군과 제2방면군이 승리적으로 합류하기까지 2년동안에   공중에서는 매일 수십대의 적기가 정찰, 폭격하고 지상에서는 수십만의 적군이 포위, 추격, 차단, 저격하였지만 이 모든것을 격파하고 적수하를 네번이나 건너고 오강천험을 돌파하고 금사강을 뛰여 넘고 로정교를 탈취하여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센 대도하를 도강하고 천험한 랍자구를 돌파하고 눈사태에 파묻기면 시신도 찾기 어려운 설산과 사람이 빠지면 나오기도 바쁜 초지를 지나면서 2만5천리를 걸었는데 매일 평균 70리를 걸은것으로 됩니다. 로정교를 탈취할 때에는 적들은 홍군이 네바퀴가 달렸다 하여도 밤새에 로정교에 이르지 못 할것이라고 한것을 홍군은 두발로 강행군하여 로정교에 도착하여 로정교를 탈취하 였던것입니다. 장정은 이루다 형언할수 없는 간난과 위험에 봉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발로 11개 성을 종형하면서 2 만5천리의 험로를 답파하였다는것은 그야말로 세상을 놀래우는 인간기적을 창조하였으며 장정은 전 세계에서 있어 본적이 없는 력사적 기록이며 모택동동지는 “장정은 선언서이며 선전대이며 장정은 파종기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장정정신은 고도의 애국주의 열정과 그 어떤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영용분투한 공산주의정신입니다. 중국공산당은 장정정신이 있었기에 국민당반동파와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새중국을 창건할수 있었던것입니다. 장정이 승리한지 80년이 되지만 우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여전히 장정정신을 고양하고 발양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그 시기 그런 환경이였기 때문에 장정을 하였지만 지금 와서 왜 그렇게 하며 지금 와서 무슨 그런 정신이필요한가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장정승리는 이미 80년이 지났지만 80년 전의 장정정신과 현시대 장정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장정정신은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다를뿐입니다.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의 장정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피와 목숨으로 국민당반동파와의 치렬한 싸움으로 표현되였지만 오늘날 말하는 장정정신은 꼭 적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것이 아니며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등소평리론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드팀없이 당의 기본로선을 견지하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실천에 적극 뛰여들어 전면적으로 초요사회를 건설 하며 습근평주석이 제기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가 우리들에게 부여한 력사적 사명입니다.  양리위를 비롯한 우주비행원들이 그 간고한 기술훈련도 이겨내고 마침내 태공에 오른것이 바로 현시대의 장정정신이고 중국 녀자배구팀이거나 올림픽운동대회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하여 금메달을 따낸것이 바로 중국꿈의 실현이며  운동원들의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장정정신이라고 봅니다 위대한 도사 맑스께서는 《과학에는 탄탄대로가 없다. 오직 가파로운 오솔길 을 톱아 오르는 자만이 과학의 빛나는 절정에 오를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고 인조지구위성을 태공에 올린 과학가들의 그 과학의 탐구의 길도 그렇게 순탄한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들도 그 어떤 난관도 물리치는 장정정신이 있었기에 방사성원소의 인체에 대한 위험도 무릅쓰고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었고 인조지구위성을 태공에 쏘아 올릴수 있었으며 지난달 15일 실험용 우주정거장 천궁(天宫)2호 발사에 성공하여 독자적인 우주정거장건설 능력을 과시할수 있었던것입니다. 이달 중순에는 신주(神舟) 11호를 발사해 천궁2호와 도킹을 실현하고 우주비행사가 천궁2호에 들어가 일련의 과학실험을 하게 된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반면에 지금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수있는 일인데 참군하여 신병훈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 오는 청년들이 있는가하면 로무로 갔다가 간고한 로동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도로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 외국에 갔다가 일하기는 싫고 불법체류로 있으며 도박판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경찰에 신고되여 강제송환되여 오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장정정신과 같은 그런 간고분투의 정신이 없기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 장정정신을 고양하는것은 당년의 그 홍군의 간고분투의 정신을 기리는것도 있겠지만 우리의 사업은 지금에나 앞으로나 이 장정정신을 수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할것없이 계속하여 우리의 후대 들에게 장정정신을 고양하고 장정정신으로 애국주의교육을 진행하여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 주의 리완빈이 바로 이런 사람가운데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아들을 데리고 1년내에 홍군 제1방면군의 전반 장정코스를 답파하면서 아들에게 홍군의 장정력사를 알게끔하고 홍군의 그 어떤 난관도 물리치는 장정정신을 체득시 키는것으로써 애국주의교육을 하였고 또 아들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시킨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또1년을 거쳐홍군 제2방면군의 장정코스를 전부 답파 하였을뿐만 아니라 또 다시 안해와 함께 홍 25군과 홍 제 4방면군의 장정코스를 전부 답파하였습니다. 그의 사적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그와 그의 안해 신향자는 홍군장정승리 80주년 기념대회에서 선진개인과 우수연구원의 영예를 받아안았습니다.   우리는 이 리완빈처럼 장정정신을 고양하여 부동한 일터에서 꾸준히 노력하여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국꿈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는 과정에서 장정정신을 발양하여 장정정신으로 하여금 영원히 빛발치게 하는것이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6년 10월 14일 장정정신과 중국의 꿈 금년 10월 22일은 중국로농홍군 장정승리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왕명로선의 착오적인 지휘하에 제5차 《반포위토벌》이 실패하자 중국로농홍군은 1934년10월에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을 떠나 중국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장정을 할수밖에 없었다. 1935년 10월에 제1방면군은 섬서성 북부의 오기진에 이르렀고 1936년 10월22일에는 녕하 장대보에 이르러 제2방면군과 승리적으로 회합하였다. 이 2년동안에 공중에서는 매일 수십대의 적기가 정찰, 폭격하고 지상에서는 수십만의 적군이 포위, 추격, 차단, 저격하였지만 “좁쌀에 보총”인 홍군은 혁명적영웅주의로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세계 군사상 전례가 없는 대장정을 완성하였다. 적수하를 네번 건느고 오강천험을 돌파하고 금사강을 뛰여 넘고 로정교를 탈취하며 설산, 초지를 지난 2만5천리장정을 두고 모택동은 “장정은 선언서이고 선전대이고 파종기”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장정정신의 핵은 고도의 애국주의 정신과 그 어떤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 완강히 박투하는 혁명적영웅주의이다. 중국공산당은 장정정신이 있었기에 국민당반동파와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새중국을 창건할수 있었다. 장정이 승리한지 80년이 되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장정정신을 고양하고 발양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장정은 특정 년대 특정 환경이 만들어낸 력사일 뿐이라면서 지금에 와서 무슨 그런 정신이 필요한가고 묻는다. 장정이 끝난지는 이미 80년이 지났지만 80년 전의 장정정신과 현시대 장정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는다. 장정정신은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바뀌였을 뿐이다.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의 장정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혁명적영웅주의로 표현되였다. 오늘날의 장정정신은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여 전면적으로 초요사회를 건설하며 습근평주석이 제기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바로 시대가 우리들에게 부여한 력사적사명이다. 양리위를 비롯한 우주비행원들이 그 간고한 기술훈련도 이겨내고 마침내 태공에 오른것이 바로 현시대의 장정정신이고 중국 녀자배구팀이 올림픽운동대회에서 만난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낸것이 바로 중국꿈의 실현이며 운동원들의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장정정신이다. 우리나라 과학가들의 과학탐구의 길도 그렇게 순탄한것은 아니였다. 그들에게 그 어떤 난관도 물리치는 장정정신이 있었기에 방사성원소의 인체에 대한 위험도 무릅쓰고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고 인조지구위성을 태공에 쏘아 올릴수 있었으며 지난달 15일엔 실험용 우주정거장인 천궁(天宫)2호 발사에 성공하여 독자적인 우주정거장건설 능력을 과시할수 있었던것이다. 이달 중순에는 신주(神舟) 11호를 발사해 천궁2호와 도킹을 실현하고 우주비행사가 천궁2호에 들어가 일련의 과학실험을 하게 된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수 없다. 반면에 우리는 가끔 이런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참군하여 신병훈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 오는 젊은이, 로무에 나갔다가 간고한 로동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사람, 외국에 갔다가 일하기 싫지만 또 집으로 그냥 돌아오기도 싫어 불법체류하면서 도박판에서 허송세월하다가 강제송환되여 오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장정정신과 같은 그런 간고분투의 정신을 찾아 볼수 없다. 우리가 지금 장정정신을 고양하는것은 우리는 홍군의 장정정신을 과거에도 수요했지만 현재에도 미래에도 여전히 수요하기 때문이다. 왕청사람 리완빈은 실제행동으로 장정정신을 체험하고 고양한 사람이다. 그는 아들과 함께 홍군 제1방면군의 전반 장정코스를 답사하면서 아들에게 홍군의 장정력사를 알게 하고 홍군의 그 어떤 난관도 물리치는 장정정신으로 애국주의교육을 하였으며 또 아들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시켰다. 그는 또1년의 시간을 들여 홍군 제2방면군의 장정코스를 전부 답사하였을뿐만 아니라 안해와 함께 홍 25군과 홍 제4방면군의 장정코스를 전부 답사하였다. 그의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그와 그의 안해 신향자는 홍군장정승리 80주년 기념대회에서 선진개인과 우수연구원의 영예를 받아 안았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리완빈처럼 실제행동으로 장정정신을 고양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동한 일터에서 꾸준히 노력하여 하나하나의 자기의 작은 꿈을 실현하는것으로 중국꿈이란 위대한 장정의 승리를 앞당기는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길림신문 2016-10-10
225    동녕요새유적지 문화기행 댓글:  조회:6322  추천:1  2016-07-22
 동녕요새유적지 문화기행 주청룡   10월 3~5일,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와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성원들이 함께 세계반파쇼전쟁승리 및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며 동녕요새유적지 대한 문화기행이 있었다. 동녕요새유적지 동녕요새(东宁要塞)는 일본관동군이1933년, 동녕을 강점한 후 중쏘국경선을 마주하여 쏘련홍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쏘련을 진공하는 기지로 만들려고 1934~1937년 사이에 중국 로역군과 중국군포로 17만명을 끌어다가 동녕현 경내에 수축한 군사요새다. 일본군은 여기에 세개 사단 13만명을 주둔시키고  비행장10곳(그중 림시착륙장 4곳), 야전진지45곳, 진지구축물 400여 개, 야전탄약고 84개, 영구성 화력발사점 402곳, 토목화력발사점 511곳, 철갑보루 4곳, 영구성 지하무기고 79동, 지상무기고 235개, 여러 갈래의 반땅크참호(反坦克壕), 지휘소와 관찰소 111곳을 구축하여 대쏘련작전 일체화를 형성한 아세아에서 가장 큰 군사요새로서 일본관동군은 동녕요새를 동방의 마지노방어선이라고 자칭하였다.   동녕지하요새  지금 개방한 동녕요새는 일제가 동녕에 구축한 《승홍산요새》,   《훈산요새》, 《삼각산요새》, 《마달산요새》, 《남천산요새》, 《조일산요새》, 《십팔반요새》,《북천산요새》, 《출환산요새》, 《409고지요새》, 《236고지요새》등 11개 요새군(群)가운데의 하나인 훈산요새다. 훈산지하요새는 이미 개방한 통로가 1,163연장메터라고 하는데 우리는 요새 남쪽입구로부터 참관을 시작하였다. 지하요새는 상,중,하 세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주요 통로는 대략 높이 1.8m, 너비 1.5메터이고 어떤 곳에는 포탄을 운송하는 레루가 있었다. 통로의 좌우측에는 군관침실, 병사침실, 목욕실, 발전실, 탄약고, 취사실, 작전지휘실 등 크고 작은 방이 21곳이나 되고 가장 큰 방의 면적은 300m²나 되며 지하통로가 가로세로 뻗어 잘못 들어섰다가는 도로 나오기 힘든 미궁이였다. 동녕지하요새입구   지하요새를 돌아보고 북문으로 나오니 남쪽으로 돌아오는 유람길이 있었는데 길 량켠에 차례로 로역군초막, 엄페호, 고사기관총진지, 방공엄페호, 폭격맞은 또치카, 고사포진지, 기관총진지 등 지상 진지구축물유적들이 있었다. 1945년 8월 8일 쏘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 0시, 3개 방면군 174만의 병력으로 우리나라 동북에 진입하여 대일 작전을 개시했다.  8월 15일 일본천황이 투항을 선포하였지만 동녕요새의 일본관동군132려단 783대대는 쏘련홍군에 의해 통신시설이 전부 중단되여 일본의 투항을 모르고 계속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하여 쏘련홍군은 이미 포로된 일본관동군 제3군 후근 참모장 고노사다오(高野定夫)를 붙들어다 요새내의 관동군에 향해 일본천황의 투항서를 전달하여서야 8월 30일 요새내의  일본군이 투항하였다. 하여 동녕요새는 제2차세계대전의 최후전장이라고 한다.     동녕요새유적박물관 동녕지하요새 남쪽에는 동녕요새유적박물관에 있는데 박물관에는 540여건의 문물, 3,000권의 책, 400여장의 사진이 있었다. 동녕요새군유적박물관    박물관은 5개 부분으로 되여 있었는데 제1부 《중국침략일본군 아세아주 최대군사요새》에는 우리가 동녕요새를 참관한 내용들이였고 제2부 《일본군 중국침략죄증》에는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9.18사변》을 일으켜 전 동북을 점령하고 1932년에 위만주국괴뢰정권을 건립하였으며 1933년 1월 10일 전반 동녕이 함락된 내용들이였다. 제3부 《동녕에서의 항일투쟁》에는 저명한 항일장령, 왕덕림(王德林), 주보중(周保中), 김일성(金日成), 시세영(柴世荣), 리청(李青), 공헌영(孔宪荣), 오의성(吴义成). 고준봉(高俊凤) 등이 부대를 령도하여 동녕에서 일본침략자를 타격한 내용들이였다. 제 4부《최후의 싸움》에서는 중국인민들이 14년의 항전을 벌려 마침내 일본침략자를 중국에서 몰아 냈다는 내용이였다.   제5부《평화적 우호래왕》부분에는 모택동동지가 북경에서 김일성 주석을 접견하는 사진, 김정일 동지가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연회석상에서 호금도주석이 환영사를 하고 김정일동지가 답사를 하는 사진, 2002년 3월 조선 해당부문의 요청으로 중국의 항전로병들과 그의 가족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만수대에서 조선의 로전사와 그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가운데 원 흑룡강성 정협 부주석 리민(李敏:조선족)동지도 있었다. 다른 사진에는 원 흑룡강성 성장 진뢰(陈雷)와 그의 부인 리민이 조선을 방문하여 로전우인 조선 륙군차수 리종산(李宗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문물전시관에는 540여건의 일본군이 중국침략죄증유물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일본군이 사용하던 보총, 싸창, 권총, 작탄, 탄알상자, 군도, 철갑모, 방독면,  물뽐프, 밥가마, 밥곽, 물주전자, 복장, 등  무기와 생활용품들이 진렬되여 있었으며  중국 로역군들이 사용하던 괭이, 삽 등 도구와 로역군들을 우마와 같이 부려먹으며 쓰던 채찍도 있었다.  사진전시관에는 400여 폭의 진귀한 력사사진들이 있었는데 동녕항일련군 영렬명록에 17명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조선족이 9명, 한족이 7명이 있었고 일본군도 1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복건일부(福建一夫)로서 항일련군가운데의 유일한 일본사람이다.   그리고 김일성주석의 청년시절 사진도 있었는데 왕청항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련군을 령도하여 항일투쟁을 벌린 사적, 쏘련홍군과 함께 원동전역에 참가한 사진들이 있었다. 사진전시관에는 또 생매장을 당한 중국로역군들의 해골을 파낸 사진이며 행운스럽게 살아남아 광복을 맞이한 로역일군들의 사진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사진들을 보고 일본제국주의가 감행한 남경대학살을 련상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중국침략만행에 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사진전시관에는 또 쏘련원동군 독립보병 제 88려에서 영예롭게 붉은기훈장을 받는 장사(將士)들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가운데는 김일성(金日成), 주보중(周保中), 리조린(李兆麟), 왕명귀(王明贵), 강자화(江子华)가 있었으며 쏘련사람 이완노부(伊万诺夫)도 있었다. 사진전시관에는 또1945년 8월 일본관동군이 무조건 투항하면서 일본국기와 만주국 국기가 내리고 쏘련국기가 오르는 사진, 9월2일 일본의 도꾜만에 정박하고 있는 미군 미주리호 군함에서 일본이 투항서에 조인하는 사진, 중국주재 일본파견군 총 참모차장이 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하응흠(何应欽)에게 투항서를 넘겨주는 사진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번이 동녕요새에 대한 참관을 통해 전세계 반파쑈전쟁은 마침내 승리하였고 중국인민은 14년이란 간고한 투쟁을 벌려 마침내 일본침략자들을 몰아내고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정의의 전쟁은 기필코 승리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본 우익분자들은  철같은 력사사실을 부인하거나 지어는 합법화하고 미화하면서 헌법을 개정하여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기로 하고 일본을 전쟁의 길로 끌고 가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조어도를 저들의 령토라고 우기면서 국제 상호 신임을 파괴하고 지역긴장을 초래함으로써 중국인민들을 포함한 전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질책을 불러 일으키고있다. 우리는 이번 동녕요새문화기행을 통하여 일본침략자들의 중국에 대한 침략력사를 명기하고 선렬들을 기리며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항전의 위대한 정신을 고양하는 것으로 후대들에게 애국주의 교육을 진행하여 우리나라가 영원히 외래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국방교육을 진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       - 송화강집지 2016년 제 5기에 발표
224    청년공무원들의 한끼의 식사로부터 받은 계시 댓글:  조회:6692  추천:0  2016-06-08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육성방송  청년공무원들의 한끼의 식사로부터 받은 계시 주청룡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청년공무원들의 한끼의 식사로부터 받은 계시”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며칠전 점심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회식이 있었습니다. 퇴직 후 오랜만에 만난 친군인지라 몇가지 료리를 청하고 권커니 작커니하며 회포를 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30대의 남성청년 넷이 우리의 건너편 상에 와 앉더니 단 한 접시의 탕수육(糖醋肉)을 올려놓고 술 한잔도 없이 거의 한시간 아주 재미있게 나직한 목소리로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도덕품행이 아주 단정하고 수양이 있는 청년들 같았습니다. 한시가 거의 될 무렵 그들은 랭면 한 그릇씩 청하여 식사를 하고 자리를 뜨는것이였습니다. 오후 출근시간을 지키려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젊은 친구들인데 술 한잔도 없이 료리 한접시를 놓고 이야기도 조용조용 재미있게 하는지라 어디에서 일하는 청년들인가고 점잖게 물었더니 그들은 서로 동창생이거나 전에 함께 한 단위에서 사업하던 동료들인데 오늘 시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서로 만나게 되였으며 회의가 끝나자 이렇게 모여 점심식사를 하였다는것이였습니다. 그중에는 룡정시정부기관에서 사업하는 청년도 있었고 향진정부에서 사업하는 청년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쩌다 친구들이 서로 만났는데 술 한잔 나누면서 회포를 풀었더면 좋았을텐데.” 라고 하였더니 그들은 “우린 모두 공무원입니다. 공무원으로서 어찌 점심에 술을 마십니까?”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참으로 찬성이 가는 대답이였습니다. 그들인들 어쩌다 만난 동창생이거나 같이 사업하던 동료들인데 어찌 술 한잔 나누면서 회포를 풀기 싶지 않았겠습니? 하지만 친구를 만났다고 점심에 술상을 벌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당연히 시간이 길어지고 취기가 오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되면 오후에 제때에 출근할수 없고 출근하였다 하여도 술을 마신 상태라 맑은 정신으로 사업할수 없을것은 뻔한 일이지요. 제시간에 출근하고 출근시의 금주는 사업일군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직업수양이고 직업도덕입니다. 이 몇 년전까지만 하여도 사업일군들은 친지거나 손님이 찾아오면 점심이건 저녁이건 할것없이 술상이 벌어지는 것은 례사로운 일로 되였으며 어떤 접대비용은 공금으로 처리되는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18차 당대회 후 당중앙에서 사업작풍을 개진할데 대한 “8항규정”과 “6항금지령”을 내리면서부터 국가기관 사업단위에는 새로운 사업기풍이 보이고 있습니다. 30대의 젊은 공무원 넷이서 술한잔 없이 탕수육 한접시에 랭면 한 그릇씩 먹은 점심식사를 를 한다는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것은 이들의 직업생활에서의 구체표현이라고 봅니다. 지난 한 시기의 일부 공무원들의 사업규률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고 봅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게 엄격히 직업도덕을 요구하고, 더 나가서는 당의 규률, 즉 정치규률, 조직규률, 군중규률, 경제규률, 렴정규률, 사업규률, 생활규률로 자기를 단속한다면 인민대중이 원하는 훌륭한 공무원으로 될수 있다고 봅니다. 이 청년공무원들의 한끼의 식사로부터 우리에게 주는 계시는 아주 컸으며 우리사회의 희망을 보는듯 싶었습니다. 우리 공무원들이 모두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신작칙하여 이러한 사업작풍을 발양한다면  인민대중의 신임을 얻게 되며 당과 군중과의 관계가 밀접하여지게 되고 간부와 군중이 융합된 조화로은 사회로 구축될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6년 6월 24일 2016년 6월 6일 길림신문 "우리는 모두 공무원입니다." 주청룡 며칠전 점심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회식이 있었다. 퇴직 후 오랜만에 만난 친군인지라 몇가지 료리를 청하고 권커니 작커니하며 회포를 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술이 몇순배 돌았을 때 30대의 청년 넷이 우리의 건너편 상에 와 앉더니 탕수육(锅包肉) 한 접시를 청하고 술도 없이 료리만 먹으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것이였다. 오후 한시가 거의 될 무렵까지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탕수육을 굽내더니 랭면 한 그릇씩 청하여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것이였다. 젊은 친구들인데 술도 안 마시고 이야기도 조용조용 재미있게 하는지라 어디에서 일하는 사람들인가고 점잖게 물었더니 그들은 서로 동창생이거나 전에 함께 한 단위에서 사업하던 동료들인데 오늘 시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서로 만나게 되였으며 회의가 끝나자 이렇게 모여 점심식사를 하였다는것이였다. 그중에는 룡정시정부기관에서 사업하는 청년도 있었고 향진정부에서 사업하는 청년도 있었다. 필자가 “오랜만에 친구들끼리 서로 만났는데 술 한잔 나누면서 회포를 풀면 더 좋지 않은가?” 고 넌짓이 물었더니 청년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린 모두 공무원입니다.”라고 대답하는것이였다. “우린 모두 공무원”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답이였다. 그들인들 간만에 만난 동창생이거나 같이 사업하던 동료들을 만나 술 한잔 나눌 생각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친구를 만났다고 점심에 술상을 차리고 이야기를 나누면 당연히 시간이 길어지고 취기가 오를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후에 제시간에 출근할수 없고 출근하여도 술을 마신 상태라 맑은 정신으로 사업을 할수 없을것이다. 정부기관에 어떤 구체적인 규정이 언제 내려졌는지는 몰라도 몇해전까지만 해도 공무원들의 점심식사상에, 특히 친구나 지인을 만난 점심상에 술이 오르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였던가. 30대의 젊은 공무원 넷이서 탕수육 한접시에 랭면 한 그릇씩 먹은 점심식사, 며칠이 지난 오늘에도 생각하면 그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청년공무원들의 탕수육과 랭면이 주는 계시는 매우 크다. 우리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되고 새시대 공무원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또 룡정시의 찬란할 미래를 확신하게 된것이다. 사실 우리 공무원들이 모두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신작칙한다면 인민대중의 신임을 크게 얻게 될것이고 그러면 우리 사회가 당과 군중, 간부와 군중이 서로 융합된 조화로운 사회로 거듭나게 될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길림신문 20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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