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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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2] 댓글:  조회:6381  추천:3  2013-11-21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1-18 15:38:37 ] 클릭: [ ] 사림관저(士林官邸) 고궁박물원을 둘러본후 우리는 사림관저(士林官邸)로 갔다. 사림관저는 대북시 사림구 복립로(台北市士林区福林路)에 위치해 있는데 원래 장개석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대북시의 생태공원으로 되여 있다. 사림관저공원 사림관저는 일본 강점시기에 일본총독부의 원예소였다. 광복후 대만성 정부 농림청에서 농업실험소로 접수하여 사림원예실험분소를 성립하였다. 장개석이 대만에 오기직전에 당시의 대만성 정부 주석인 진성(陈诚)이 친히 이곳을 장개석의 관저로 정하고 1949년에 짓기 시작, 1950년 5월에 준공하여 장개석이 입주했다고 한다. 이곳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 좋고 물 맑으며 환경이 수려하다.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이 사망하자 9월에 송미령이 미국 뉴욕에 갔고 그로부터 이 관저는 비여 있다가 1996년에 대외에 개방했다. 지금은 관광명소와 시민들의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소로 되고있다. 사림관저는 산구와 평지로 나누는데 약 20헥타르의 산구는 경비지대이며 평지는 5.2헥타르다. 원내에는 고목이 하늘을 치솟고 가지각색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경치가 수려하고 그윽하다. 이곳은 광주와 같은 위도선에 놓여 기후가 광주와 비슷하였으며 식물종류들도 광주와 비슷하다. 사림관저는 밖으로부터 안으로 외화원, 내화원, 관저 몇개 구로 나눈다. 외화원에는 온실 분재구(盆栽区)와 장개석과 송미령이 즐기는 매화나무, 장미원, 망과, 다래 등 꽃과 나무들이 있어 련인들이 산책을 즐길수 있는 좋은 곳이라고 한다. 내화원은 중국식 정원과 서양식정원이 있으며 서양식정원의 묘포, 꽃꽂이예술, 조각, 못 등은 모두 서양풍정이 넘쳐나며 중국식 정원에는 아치교, 정자, 구불구불한 못, 물의 흐름 등은 동방정원의 조경이 고대 중국을 방불케 하고있다. 장개석과 송미령은 각자 다른 풍격이 있었는데 송미령은 서양화에 흠뻑 빠진 지성(知性)적 녀인이고 장개석은 봉건유교사상이 남아있는 관료였다. 관저정방(正房)은 2층 콩크리트구조로 외벽은 청회색으로 되었다. 1층은 큰 객실이고 2층은 침실, 식사칸, 송미령의 화실 등이 있다. 건축은 비록 서양식으로 하였지만 내부 장식은 중국전통풍격을 살리였다. 관저정방 식사칸에는 긴 상과 둥근상이 있었는데 사람이 적을 때에는 둥근 상을 사용하고 사람이 많을 때에는 긴 상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장개석은 음식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았으며 평시의 식사는 아주 간단하였다고 한다. 정관대문에 들어서면 복도에 4폭의 송미령의 친필국화가 있다. 책상과 걸상 역시 중국식과 서양식을 결합하여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암홍색의 주단을 깔았다. 송미령이 대만에 온후 중국화에 집착하여 국화대사 장대천(张大千)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란초, 참대, 산수화를 그리는데 정신이 팔렸다고 한다. 외계에서 송미령의 그림이 다른 사람이 대필한것이 아니냐 하는 여론이 있었는데 송미령은 공자의 탄생기념일에 여러 국화명가들을 요청하여 식사를 하고 식사후 손수 붓을 날려 그림재주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후 다시는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객실벽에는 장개석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의 유화유상이 걸려 있었다. 원내에는 또 례배당도 있는데 장재석은 원래 교를 믿지 않았지만 송미령과 결혼할 때에 송미령의 어머니가 기독교신자가 되여야만이 혼인을 허락한다는 조건에 의하여 장개석도 기독교를 믿게 되였다고 한다. 야류지질공원 (野柳地质公园) 이튿날(5월 2일)에는 먼저 야류지질공원(野柳地质公园)으로 갔다. 야류지질공원은 신북시만리향(新北市万里乡)에 위치해 있으며 북해안쪽으로 뻗은 좁고 긴 모습을 한 해갑(海岬)이다. 천백만년의 침식, 풍화작용으로 버섯바위, 초대바위, 생강바위, 호혈(壶穴),해식동굴 등과 같은 지형이 점차 형성되였는데 전체 길이는 1,700메터에 달한다. 야류지질공원은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지질공원이 되였고 또한 주변의 풍부한 해양생태, 어촌풍경 등의 다양한 풍경들이 더해져 교육, 관광 그리고 휴양지 기능을 갖춘 관광명소로 되고있다. 이곳에는 버섯바위, 촛대바위, 벌집바위, 생강바위, 바둑판바위, 피아노바위, 두부바위, 새바위, 아이스크림바위, 코끼리바위, 땅콩바위, 구슬바위, 락타바위, 여왕머리, 선녀신발, 화석, 해식절벽, 해식평대, 절리(암석에 비교적 규칙적으로 생긴 금), 해식동굴(海蝕洞), 해식골짜기 등이 있다. 지질공원 일각 표고버섯 모양을 한 버섯바위의 형성과정은 암층이 해수면 우로 로출되여 밤낮으로 해수의 침식을 받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암(砂岩)속의 단단한 결핵이 천천히 드러나게 되였다. 여기에 다시 바람과 해빛, 비물, 파도 및 동북계절풍의 강한 영향을 받아 목이 굵은것, 목이 가늘거나 목이 부러진 각기 다른 형태의 버섯바위가 형성되였다고 한다. 이 지질공원에는 이러한 버섯모양의 바위가 180여개나 된다. 녀왕머리바위 벌집모양의 바위의 형성원인을 보면 암석표면의 생물파편들이 용해되여 깎이고 다시 그 구멍들이 해수로 인해 용해되고 깎이게 되면서 구멍이 숭숭난 모양을 가지게 되였다고 한다. 초대바위 생강바위는 암층가운데의 비교적 단단한 칼슘성분의 돌덩이에 그 주변은 비교적 부드러운 암층으로 되여 있어 오랜 기간 동안 해수로 인한 일어나고 떨어지는 과정을 거듭하였다. 거기에 지층이 밀려오면서 가로 세로 교차된 균렬까지 더해지면서 형성되였다고 한다. 표범바위 신바닥바위 해식동굴은 해갑이 해수면 우로 상승하면서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암층이나 자연적으로 생긴 파렬면을 파도가 날마다 쓸어내면서 오목한 벽이 생기고 결국 파도의 끈질긴 힘으로 그것이 해식동굴로 되였다고 한다. 주청룡특약기자 [다음계속]
182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 댓글:  조회:7608  추천:0  2013-11-1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1-11 11:41:11 ] 클릭: [ ] 지난 4월 30일, 우리 부부는 연변문화국제려행사에서 조직한 대만관광을 떠났다. 5.1절 련휴기간을 리용하여 대만관광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 팀은 34명이였다. 연길-광주-대만 코스를 리용한 우리는 오후 4시에 연길공항을 떠나 저녁 10시에 광주에 도착하였다. 우리 연변에는 아직 복숭아꽃, 살구꽃도 피지 않은 이른 봄이였지만 광주는 빈랑나무, 빠나나나무, 야자수 등 열대식물들과 이름 모를 상록교목이 우거진 록색세계였다. 이튿날(5월 1일), 광주에서 12시에 떠나 대만 도원(桃园)비행장에 도착하니 1시 반이였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니 대만 평화려행사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40대 초반의 녀성 안내원(가이드)이 《조국대륙에서 오시는 관광객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热烈欢迎祖国大陆来的游客们)》며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하였다. 나는 《조국대륙》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만인민들이 대만을 중국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대륙을 그리고 조국의 품속을 그린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 후에도 안내원은 《대륙》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꼭 《대륙》앞에 《조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였다. 나는 이것이 바로 그들이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마음의 구체표현이라고 느껴졌다. 우리를 태운 차는 대북시로 향하였다. 뻐스에서 안내원은 대만과 대북시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대만은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대만해협, 남쪽으로는 바시해협(대만과 필리핀의 바탄제도 사이의 해협), 북쪽으로는 동해사이에 있는 섬으로서 광주와 같이 북회귀선 우에 놓여 있으며 전체 대만도서(台湾岛屿)의 면적은 36,200평방메터, 대만 본섬은 남북길이가 가장 긴곳이 394킬로메터, 너비가 가장 넓은 곳이 144킬로메터이고, 면적은 35,800평방킬로메터였는데 우리 연변(43,474평방킬로메터)보다 작다. 대만의 전체 인구는 2,320만명인데 그중 한족이 98%, 소수민족이 2%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수민족은 대만의 원 토착민으로서 주로 산구에서 산다. 대륙에서는 고산족이라 하지만 대만에서는 고산족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고산족을 13개 족군(族群) 나눈다. 대만은 행정구역을 5개 직할시[대북(台北), 신북(新北), 대중(台中), 대남(台南), 고웅(高雄)], 3개 성할시[기룽(基隆), 신죽(新竹), 가의(嘉义)]로 나누었다. 사진(1): 대만지도 대만은 산이 많은데 고산지대와 구릉지대가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하며 동부는 산맥이 많고 중부는 구릉이 많고 서부는 평원이 많은것이 특징이다. 대만은 5대 산맥, 4대 평원, 3대 분지로 되여 있다. 5대 산맥으로는 중앙산맥(中央山脉), 설산산맥(雪山山脉), 옥산산맥(玉山山脉), 아리산산맥(阿里山山脉), 대동산맥(台东山脉)이고, 4대 평원으로는 의란평원(宜兰平原), 가남평원(嘉南平原), 병동평원(屏东平原), 대동종곡평원(台东纵谷平原)이며, 3대 분지지로는 대북분지(台北盆地), 대중분지(台中盆地), 포리분지(埔里盆地)이다. 기후는 북부는 아열대기후이고 남부는 열대기후이며 산구를 제외한 지역의 년 평균기온은 22℃,년강수량은 2,000미리메터 이상에 달한다. 대만의 농업은 경작지가 전체면적의 1/4이며 주로 벼를 생산하는데 일년에 2모작, 3모작을 하며 미질이 좋고 생산량이 높다. 주요경제작물로는 사탕수수와 차다. 이외에 채소와 과일도 종류가 많다. 대북시는 대만북부의 대북분지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길이 28킬로메터, 동서너비는 20.5킬로메터 면적은 272평방킬로메터. 인구는 267만 6천명으로 대만의 정치, 경제, 문화, 상업 및 언론의 중심이다. 대북 고궁박물원 우리는 대북시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대북고궁박물원으로 갔다. 대북고궁박물원은 대북시 사림구외쌍계(士林区外双溪)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북고궁박물원은 총 부지면적이 16헥타르로 산과 물을 끼고 기세가 웅위롭고 푸른 기와 황색벽은 중국 전통적인 궁전색채를 띠였는데 1962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65년에 준공하고 1966년에 개관하였다. 대북고궁박물원. 고궁박물원의 주체건물은 4층으로 되였는데 남경국립중앙박물원, 북경고궁, 심양고궁과 승덕의 열하행궁(热河行宫) 등 곳에서 가져온 문물과 해내외 각계 인사들이 기증한 문물 도합 67만 7,609건이 수장되여 있다. 1층은 사무실, 도서관, 강연청, 2층은 서화전람, 청동기, 도자기, 후가장(侯家庄)공원묘지모형 및 묘에서 출토한 문물, 3층에는 서화, 옥기(玉器), 법기(法器: 부처 공양에 쓰이는 기구), 조각, 도서, 문헌, 비첩(碑帖), 수놓이, 4층에는 여러가지 특정주제전람(主题展览)이다. 문물은 서주시기의 상형문자로부터 시작하여 각개 시기의 문물들이 다 있었는데 옥으로 만든 명청시기의 공예품들이 많았다. 많은 문물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박물관의 규정에 의하여 사진을 한장도 찍지 못하였다. 박물원 앞 광장에는 여섯개의 흰 돌기둥에 푸른 오지기와를 얹고 《천하위공(天下为公)》이란 글을 새긴 커다란 패방이 있었다. 《천하위공》은 천하는 여러 사람의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손중산선생은 《천하위공》으로 《민권주의》를 해석하였는데 국가는 응당 국민이 공동소유해야 하는바 이것은 사람마다 평등한 정치적 리상이라고 하였다. 나는 손중산선생의 이 정치적 리념을 가슴에 안고 박물원과 이 패방을 배경으로 여러장의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천하위공(天下为公)》 패방 [후일계속]
181    로인활동실로 갈수 없는 로인들 댓글:  조회:7712  추천:2  2013-11-08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73) 주청룡 로인활동실로 갈수 없는 로인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로인활도실로 갈수 없는 로인들”이란 내용으로 말씁드리렵니다. 도시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여러 구역마다 건축물의 양지쪽에 로인들이 7,8명씩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런 로인들을 보면 대부분 70~80대의 로인들이거나 마작이나 기타 놀음을 모르는 60대의 로인들입니다. 이런 로인들은 봄과 가을이면 오전에는 건물동쪽 양지쪽, 오후에는 건물서쪽 양지쪽, 여름이면 반대로 오전에는 건물서쪽 그늘진 곳, 오후에는 건물동쪽 그늘진 곳, 이렇게 “이동작전”을 하면서 쪽걸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루하루를 소일하고 있습니다. 룡정시우정국에 가보면 비오나 추울 때에는 고객들이 쉴새없이 드나드는 현관에 10여명의 바깥로인들이 쪽걸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소일하고 있으며 룡정 서시장 안에 들어가 보면 어느 한 모퉁이에 안로인들이 맨바닥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거나 화투치기를 하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왜서 로인들이 이렇게 복잡한 현관이나 장마당안에서 때론 일부 상가들의 아니꼬운 시선을 받으면서 이렇게 지내겠습니까? 그들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비도 막고 바람도 막을수 있는 곳을 찾다니 이런 곳 밖에 없다는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도 안되는 로인들은 추운 겨울에는 아무데도 갈곳이 없이 아들며느리 출근하고 손자손녀가 학교에 간 다음은 혼자 집에서 고독하게 지루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철새처럼 이동할수도 없는 “초롱속에 갇힌 새”로 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로인권익보장법》제43조의 로후기구설립의 조건가운데 제 4항에는“기본적인 생활공간, 시설, 설비와 활동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 사회구역마다 사회구역활동실, 로인활동실 등 로인들의 활동장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장소들을 지나다 보면 마작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옵니다. 안에 들어가 보면 책 한권 신문 한장 없이 담배연기가 뽀얗게 집안공기를 흐리우고 있습니다. 사회구역 활동실이거나 로인활동실이라고 하기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런 장소는 마작을 노는 5,60대의 사람들에게 점령당하고 7,80대의 로인들은 아예 그런 장소로 드나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구역에서 이런 로인들에 대하여 가장 관심을 돌려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실 이러한 로인들의 요구도 높지 습니다. 그 어떤 오락도구도 요구없이 여럿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자그마한 방을 한칸 내여주면 만족이라고 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로인권익보장법》 제71조에는 “국가와 사회에서는 로인들에게 적합한 군중성 문화체육, 오락활동을 전개하여야 하며 로인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여야 한다.”고 하습니다. 사회구역활동실이거나 로인활동실을 꾸리는 취지는 주로 로인들을 대상하여 각종 문체활동을 진행하라는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다른 문체활동은 없이 전문 마작을 노는 장소로 제공되고 습니다. 마작을 노는 사람들은 개인이 영업을 하는 마작방에 가서 놀수는 있지만 7,80대의 로인들은 오도가도 할데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사회구역에서도 활동실에 대한 관리를 가강하여 활동실을 잘 꾸려 진정 로인들을 위한 사업으로 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6월 2일 연변일보 2013년 11월5일  
180    두만강변에서 오미자를 따다 댓글:  조회:6667  추천:0  2013-10-17
[려행수기]두만강변에서 오미자를 따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0-17 13:24:46 ] 클릭: [ ] 두만강변의 오미자재배기지(저 멀리로 조선의 산이 바라보인다). 국경절련휴 마지막날인 10월 7일, 룡정시통신련합회의 부분적인 회원들은 백금향 백금촌 1대에 자리잡은 오미자재배기지로 로동체험을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이날 아침 일행 7명은 2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앉아 기지로 떠났다. 승용차가 지신향 승지촌 남쪽 륙도하다리를 건너서자 길옆에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기념비와 《5.30폭동지휘부》 옛터 기념비가 있었다. 회원들은 기념비의 비문을 읽으면서 연변의 조선인 반일무장투쟁에 대한 사료를 학습하는 시간을 잠간 가졌다.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기념비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기념비는 룡정시 3.13기념사업회에서 1990년 3월 30일에 세운 기념비다. 1920년 1월 4일에 일본금융기관인 조선은행 회령지행으로부터 조선은행 룡정출장소에 길회철도부설 자금 15만원을 현금으로 수송한다는 정보를 장악한 조선인반일지사들이 이곳에 매복해있다가 그 돈을 탈취했다고 한다. 《5.30폭동지휘부옛터》기념비는 룡정시정부에서 2010년 5월 30일에 세운것인데 1930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연변의 조선족인민들이 중공연변특위의 령도하에 벌린 반제반봉건투쟁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였다. 거기에서 10여리를 더 달리니 대신저수지가 보였다. 대신저수지는 언제의 길이가 453메터, 높이 30메터, 총 저수량이 1900만립방메터인 룡정시에서는 제일 큰 저수지로서 룡정시내의 음료수와 세전이벌 2만무의 논에 관개수를 공급하고있다. 저수지옆으로 뻗은 길을 따라 푸른 물결 넘실대는 저수지풍경과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가을산 경치에 흠뻑 취했다. 한시간 넘게 걸리는 려정이 따분하지 않았다. 백금에서 삼합방향으로 15리가량 달리자 두만강변도로 왼쪽켠으로 오미자기지가 나타났다. 오미자기지의 리주운(52세)사장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는 회원들에게 오미자기지에 대하여 소개해주었다. 이곳은 인민공사때에 백금 1대라고 불리였는데 지금은 당지의 농가들이 모두 이사를 나가고 리사장이 혼자서 그 촌의 14헥타르의 밭을 전부 양도받았는데 3헥타르에는 2000여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2헥타르의 면적에는 오미자를 재배하고있었다. 사과는 묘목을 심은지 3년째되여 금년에 사과가 열리기 시작하였고 오미자는 재배한지 5년이 되는데 작년부터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리사장은 우리더러 먼저 사과밭을 돌아보면서 좋은 사과를 골라서 맛을 보라고 하였다. 과수원은 모두 애나무들이여서 많이 달리지는 않았지만 새빨갛게 탐스럽게 열렸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들고 즐겁다는 어린이. 오미자밭에는 새빨갛게 익은 오미자가 주렁주렁 탑스럽게 열려있었다. 탐스럽게 열린 오미자 우리는 기지의 장기술원과 같이 오미자를 뜯으면서 그에게서 오미자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오미자는 산골짜기 특히 전석지(轉石地)에서 자라는 목란과에 속하는 락엽성 덩굴식물로 열매는 오미자라고 한다. 꽃은 붉은빛이 옅게 도는 황백색을 띠며 열매는 8-9월에 붉은색으로 익는데 씨가 열매당 1-2개씩 들어있다. 열매는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가지의 맛을 고루 갖추고있다고 하여 오미자라 하는데 그가운데에서도 신맛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기술원이 우리더러 맛을 보라고 하여 맛을 보았더니 정말 신맛이 어찌나 강한지 온몸이 오싹 떨릴 지경이였다. 오미자는 약재로 쓰인다는것을 알았지만 어떤 병에 쓴다는것은 잘 몰랐는데 그날 기술원에게서 상세하게 들었다. 오미자는 대뇌신경을 흥분시키고 강장작용을 하며 심장활동을 도와서 혈압을 조절하고 간장에 들어가서는 간장의 대사를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효능은 성신경의 기능을 향진시키므로 유정(遺精), 몽정(夢精), 유뇨(遺尿), 정력감퇴 등에 효과가 좋으며 특히 기침에 효과가 매우 좋다고 한다. 기술원은 또 오미자의 생장습성을 소개하였는데 약산성부식토에서 잘 자라고 비옥하고 배수가 잘되는 곳에서 잘 자라며 다른 나무에 감아 올라가면서 자라는데 일반적인 덩굴식물들은 오른쪽으로 감아올라가면서 자라지만 오미자만은 왼쪽으로 감아올라가면서 자란다고 하였다. 오미자는 8월 하순부터 10월 상순사이에 익는 족족 따들여 말리는데 해빛에 말리거나 건조실에서 말리는데 해빛에서 말리면 색갈이 좀 검지만 건조실에서 온도를 조절하면서 말리면 색상이 곱다는것이다. 건조실에서 말릴 때에는 처음에 60℃좌우로 조절하고 오미자가 절반쯤 말랐을 때에는 온도를 40℃—50℃로 낮추며 8할 정도 말랐을 때에는 실외에 내놓아 해빛에 완전히 건조시킨다고 한다. 기술원의 소개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미있게 오미자를 따다나니 시간 가는줄을 몰랐다. 오미자 따는데도 학문이 있었다. 오미자송이를 잡아 아래로 당기면 잘 떨어지지 않지만 우로 살짝 당기면 가볍게 떨어졌다. 우리가 한참 신나게 따는데 리사장이 식사시간이 되였다고 알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1시 반이 되였다. 오미자를 따고있는 회원. 우리는 자기가 뜯은것을 모두 건조실에 날라갔고 기술원과 함께 오미자를 조심스레 건조실에 넣었다. 건조실에서 3일이면 건조작업이 끝나고 그때에 다시 오미자를 뜯는다고 하였다. 점심식탁에는 개고기, 돼지고기, 북경오리구이와 백금의 구수한 두부 그리고 여러가지 산나물들이 올랐다. 술은 당연히 오미자술이였다. 아마 우리가 로동체험간다고 해서 미리 준비한 모양이였다. 리사장은 수고하였다고 우리에게 돌아가면서 술을 권하였고 우리도 힘든 일은 아니지만 통신협회의 활동으로 산에 와서 현지로동체험을 한 재미에 너도나도 흥이 도도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권커니작커니 술잔을 들었다. 농촌의 시원한 가을공기를 마시면서 열심히 일한 끝에 먹는 오미자술맛은 달기만 하였다. 술을 마시면서 금년의 작황에 대하여 물었더니 리사장은 금년 오미자 수입을 약 십만원으로 내다보고 옥수수, 콩 등 작물에 사과수입까지 합치면 밥벌이는 된다고 겸손하게 말하는것이였다. 리사장은 또 사과는 래년이나 후년부터 많이 열릴것이라면서 그때가 되면 한국에 가서 벌기보다 몇배 높은 수입을 올릴수 있을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도 지키고 높은 수입도 올리는 리사장이 돋보이기만 하였다. 오후에는 할 일이 없었다. 글 쓰는 귀한 분들이 멀리까지 찾아와 방조해주니 대단히 감사하다며 리사장은 집에 가서 맛을 보라며 사과, 오미자, 호박, 무우 등을 우리 차에 실어주었다. 이날은 룡정통신협회 회원들에게 아주 뜻깊은 하루였다. 도시에서 따분한 글이나 긁적이던 우리가 현지로동체험을 통해 많은것을 배우고 또 단풍 든 가을풍경속에서 변화되여가는 농촌의 모습과 풋풋한 인정세태를 료해하였으니 이 아니 뜻 깊을손가.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179    동남아려행기[18] 댓글:  조회:6177  추천:0  2013-09-16
 동남아려행기[18]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16 10:53:11 ] 클릭: [ ] 말레이시아독립광장 10월 4일, 우리는 말레이시아독립광장으로 갔다. 록색진주초가 깔려있는 8헥타르 면적의 독립광장은 원래는 경기장이였는데 말레이시아독립을 기념하여 웅위로운 독립광장으로 고쳤다고 한다. 1957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가 영제국주의 통치로부터 독립하면서 이곳에 말레이시아국기가 처음으로 게양되였다. 광장남단에 있는 국기게양대는 높이가 103메터로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게양대라고 한다. 광장 한켠에는 화란(네덜란드)식의 건축물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이슬람교풍격의 건축물들이 있었다. 매년 8월 31일이면 말레이시아국민들이 여기에 모여 국가의 독립을 경축한다고 한다. 독립광장 국가영웅기념비 국가영웅기념비는 호빈공원(湖滨公园)맞음 켠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기념비는 높이는 15.54메터이고 황동으로 제조하였으며 기념비에는 《1914-1918、1939-1945、1948-1960》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14-1918、1939-1945는 각각 제1, 2차 세계대전을 의미하고 1948-1960는 말레이시아의 내전을 의미하는데 말레이시아력사에서 《비상시기》라고 한다. 말레이시아는 16세기로부터 선후로 뽀루뚜갈, 화란(네덜란드), 영국의 침략을 받았고 1911년에 영국식민지로 전락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때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1957년 8월 31일 영국식민지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독립전후 말레이시아에는 여러 차례 내전이 발생하여 많은 용사들이 희생되였다. 나라에서는 그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1966년에 세웠다. 국가영웅기념비(国家英雄纪念碑) 기념비 안쪽에는 또 대리석 기반우에 청동으로 주조한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7명 군인들의 조각상이 있는데 용사들의 기백과 풍채를 보여주었다. 그 주위에는 분수못이 있고 못 옆에는 반달형의 주랑(柱廊)이 있다. 영웅조각상(英雄塑像) 국가이슬람교사원(国家清真寺) 말레이시아 국가이슬람교사원은 꾸알라룸뿌르시의 중심지구에 있으며 세계에서 이름있는 이슬람교사원이며 동남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사원이고 이슬람건축예술의 걸출한 대표이다. 이 사원은 1957년에 말레이시아의 제1임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의 창의하에 착공하였으며 1965년에 전부 중공하였다고 한다. 이 사원은 건축조형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외관과 장식이 아랍이스람건축형식과 현대식을 서로 결합하였다. 사원의 주요 건축들로는 례배대전(礼拜大殿), 선례첨탑(宣礼尖塔), 릉묘와 사원 사무청사이다. 례배대전은 높고 넓으며 8,000명이 례배를 할수 있어 중대한 종교행사는 여기에서 거행한다. 건물우에는 49개의 크고 작은 꽃봉오리 모양의 둥근 지붕이 얹혀져 있으며 매 지붕은 18쪼각으로 조성되였는데 18은 이슬람교의 《5공(五功: 认、礼、斋、课、朝)》과 말레이시아의 13개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건물 우에는 또 뾰족한 탑들이 여러 개 있는데 이는 무슬림은 현대과학을 중시한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73메터이며 승강기와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국가이슬람교사원(国家清真寺) 오후에는 지방특산물상점, 보석상점들을 돌아보았는데 화페는 싱가포르 화페도 통용되였으며 환률은 인민페 대 말레이시아화페가 2.5:1이였다. 이로서 말레이시아 관광은 끝나고 다시 해관이 있는 신산시(新山市)로 향하였다. 이번 동남아려행에서 생각밖으로 인상 깊은것이 말레이시아가 도시나 산과 들, 도로 등 어디라 할것 없이 환경이 매우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이나 구릉지대에 비가 내려 물이 몰려내리는 곳이면 가로세로 전부 콩크리트로 물도랑을 만들어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수토류실이 없이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원래 나의 생각에는 말레이시아인들이 갈색인이고 하니 환경도 그냥 그럴테지 하고 생각하였는데 이번 려행길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였다는 인상을 갖게 되였다. 이때 나는 피부색갈이 검다하여 환경도 어지러울거라는 너무 어리석은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끼였다. 호텔에 들어 행장을 풀고 텔레비죤을 켜니 북경에 큰 눈이 내려 불도젤로 눈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곳은 35도의 무더운 날씨인데 북경에는 벌써 큰 눈이 내리다니? 11월 초에 북경에 큰 눈이 내리기는 력사상 보기 드문 일이지만 그래도 큰 눈이 내렸다는것은 벌써 겨울에 들어섰다는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이라지만 세상은 넓고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에서는 눈이 내리지만 한쪽에서는 꽃이 피고, 나는 이때 《장백산에 눈이 오고 오지산에 꽃이 피네》란 노래가 떠 올랐다. 그렇다 우리 나라를 놓고 보더라도 북방에서는 눈이 내리지만 남방에서는 꽃이 피고 있는데 전 지구적으로 놓고 볼때에 더 말할나위가 있겠는가? 이것도 이번 려행에서 나의 머리속에 추억으로 남아있을 하나의 자연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튿날 (11월 5일)아침 우리는 일찍 해관을 건너야 했다. 가이드는 우리를 해관까지 바래다 주었으며 갈라질 때에 중국동포들에 대한 석별의 정이 듬쁙 담겨 있었다. 이번 려행에서 3개 나라의 가이드들은 모두 화인 후예들이였다. 그들은 비록 중국을 떠나 나른 나라에서 살지만 그래도 모두 중화민족의 피를 타고 난 민족이라 중국이 번영발전할것을 바랐고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하여 감정이 깊다는것을 읽을수 있었다. 바로 향항가수 장명민이 부른 《나의 중국마음(我的中国心)》노래에 담긴 그런 감정이 그들의 마음에도 다 담겨 있다는것을 심심히 느낄수 있었다. 싱가폴공항에서 8시반에 비행기가 리륙하여 12시 반에 심수에 착륙하였다. 심수에서 오후 2시에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6시에 심양에 도착하니 심양에도 눈이 많이 내려 활주로를 제외한 곳에는 모두 새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이번의 려행길에 14일이란 시간이 그리 길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우리는 그 동안 모두 정이 들어 이후 서로 련락을 하려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면서 아쉬운 심정으로 《안녕! 안녕!》하면서 갈라졌다. (끝)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178    동남아려행기[17] 댓글:  조회:5491  추천:0  2013-09-09
동남아려행기[17]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09 09:50:52 ] 클릭: [ ]    쌍둥이빌딩 태자성의 유람을 다 끝내고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꾸알라룸뿌르로 갔다. 꾸알라룸뿌르시내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우는 것이 88층짜리 쌍둥이빌딩이였다.  이 빌딩은 말레이시아 석유공사의 종합사무청사로서 1998년에 준공되였는데 부지면적이 40헥타르, 높이가 452메터, 건물이 차지하는 지면이 28.95만평방메터이며 안에는 14만 평방메터의 쑈핑쎈터, 645칸의 동방문화호텔, 75만 평방메터의 사무실, 5500명이 기도할수 있는 이슬람교사원, 그리고 천연가스로 랭수를 제조할수 있는 랭각쎈터가 있는데 시내에 랭각공기를 공급한단다. 또 4500대의 차를 세울수 있는 지하 주차장, 하나의 석유박물관, 하나의 음악청 및 복합매체 회의쎈터를 갖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쌍둥이빌딩 이 집을 지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집이였으나 6년후에 대만에 101빌딩이 일어서면서 제1위를 자랑하던 자리에서 밀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목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쌍둥이빌딩이며 세계에서 네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또한 꾸알라룸뿌르의 표징이고 도시경관의 하나로 말레이시아의 경제발전이 상징이기도 하다. 소흑인박물관 오후에 우리는 소흑인박물관으로 갔다. 말레이반도의 밀림에는 아직도 3만명의 소흑인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원시적인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키는 매우 작은데 일반적으로 성인 남성의 키는 150센치메터 이하이고 녀성의 키는 142센치메터 이하이다. 피부는 짙은 갈색이며 머리가 크고 둥글며 코가 납죽하고 입술이 두터운 그들은 아직도 반원시적인 생활을 하고있다. 박물관에는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사진과 그들을 목각한 인형 그리고 그들의 생활도구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 진렬한 소흑인의 사진 박물관에 전시된 소흑인의 생활도구 국가박물관 이어 우리는 국가박물관을 참관하였다. 관내에는 4개의 전람관이 있는데 말레이시아의 력사와 경제사료, 말라이 풍속, 당지의 열대식물과 동물표본 등이 전시되여 있다. 전시품들 가운데는 또 16세기 말라이반도 남부에서 발굴한 중국도자기와 15세기에 전문 이슬람교 교도를 위해 만든 명나라 도자기들이 전시되여 있었으며 또 명나라 항해가 정화가 말라까에 들렀을 때의 문헌복제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그리고 로천전시구에는 옛날의 증기기관차, 대포 등이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증기기관차 그다음으로는 국가황궁으로 갔다. 지금의 황궁은 2011년에 새로 건설되였는데 지금의 국가원수가 바로 여기에서 등극의식을 하였다고 한다. 대문 량쪽에는 흰색제복을 입은 호위병이 각각 한명씩 총을 다리에 붙이고 차렷 자세로 경위를 서고있었다. 황궁은 대외에 개방하지 않기에 유람객들은 황궁의 밖에서 황궁을 들여다 볼뿐이였다. 그렇지만 호위병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는 있어 많은 유람객들이 호위병과 같이 사진을 찍는것이였다. 국가황궁 운정고원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우리팀은 계속하여 운정고원으로 향하였다. 운정고원은 말레이시아에서 새로 개발한 관광피서명승지이며 수도 꾸알라룸뿌르에서 약 50킬로메터 되는 곳에 있었다. 해발 2,000메터인 운정고원의 면적은 약 4900헥타르로서 동남아에서 가장 큰 고원피서지이다. 운정산 산장으로 올라갔는데 해발 800메터까지는 뻐스로 올라가고 그 곳으로부터는 공중삭도를 타고 올라갔다. 삭도를 타기전에는 비가 약간씩 내렸는데 삭도를 타고 구름우로 솟아오르니 구름이 발밑에 있었고 비도 발밑에서 내렸다. 삭도를 타고 산에 오르면서 보니 뭇산들이 첩첩이 둘러있고 나무와 화초들이 무성하였다. 운정산장 이곳에서는 변화무쌍한 운해(云海)를 만끽할수 있었으며 맑게 개였을 때에는 천하를 다 내려다 볼수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동쪽으로 아침해살에 붉게 물든 운해를 감상할수 있단다. 운정고원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산우의 오락시설도 구전하다. 산꼭대기에 인공호수가 있어 배놀이를 할수 있으며 온수 수영장, 호수주위를 도는 아동렬차, 골프장 등 시설들이 다 있다. 운정산의 건축군은 모두 해발 1772메터 되는 곳에 있다. 산우에는 18층이 되는 세채의 호텔, 국제가극원, 국제회의쎈터, 도박장 등이 있었다. 이곳의 도박장은 말레이시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도박장으로서 주말에는 24시간 영업을 하지만 평시에는 오전 4시부터 10시까지 영업을 중지한다고 한다. 우리 팀에서도 두 젊은이가 도박을 놀았는데 처음에 땄지만 결국에는 몇백원씩 잃고 나앉았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177    야회 댓글:  조회:7777  추천:5  2013-09-03
176    동남아려행기[16] 댓글:  조회:5255  추천:0  2013-09-03
동남아려행기[16]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03 11:28:53 ] 클릭: [ ]   다음날(10월 3일), 우리는 말라까해안으로 갔다. 말라까해협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서북쪽)과 서말레이시아, 타이반도(동남쪽)사이에 있는 해협으로서 인도양과 태평양을 이어놓는 수로이다. 해협의 전체 길이는 800킬로메터이고 가장 넓은 서북단의 너비가 249킬로메터이며 동남단의 가장 좁은데는 37킬로메터, 물의 깊이는 25~113메터에 달한다.     말라까해협에서 해안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인도네시아가 건너다 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도네시아를 건너다 보면서 사진도 찍고 마음껏 놀고 다음으로는 화란홍옥으로 향했다. 말라까하 동안(东岸)에는 정결한 광장이 있는데 광장주위에는 모두 화란(네덜란드)식의 붉은색 건물이 있다. 이런 건물들은 화란사람들이 동방에 보존하여온 가장 오랜 건물들로서 화란홍옥(荷兰红屋)이라고 부르며 대략 기원 1641년부터 1660년좌우에 건축한것이다. 그중 가장 크고 오랜 건물은 화란식의 텔레포터레드하우스(Stadthuys)이다. 이 집은 300여년래 줄곧 정부기관소재지로 있다가 1980년에 말라까박물관으로 고치였다. 집안에는 말라까의 각 시기의 력사유물들이 있는데 화란의 고대병기, 16세기이래의 뽀르뚜갈인 복장, 말레인들의 혼인복장, 금은장식품 등 수공업품 그리고 말라까항구에 정착했던 고대 배들의 도편들이 있으며 고대의 화페와 우표들도 수장되여있다.   화란홍옥 뽀르뚜갈성산(葡萄牙城山)은 말라까시 서남쪽 말라까하에 접근해있다. 명성조(明成祖)는 일찍 이 산을 《진국산(镇国山)》이라고 하였으며 후에는 《세인트폴언덕(圣保罗山)》이라고 불렀다. 산기슭에는 하나의 옛 보루가 있었는데 《싼띠아고 또치까 (圣地牙哥碉堡)》라고 부른다. 이것은 당시 뽀르뚜갈식민통치자들이 격패된 말라까왕국 군대의 반격을 막기 위해 건축한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지고 끊어진 담벽과 옛 요새의 성루(城楼)만이 우뚝 서있었으며 당시 쓰던 포들도 걸려있었다. 싼띠아고 또치까 (圣地牙哥碉堡) 높이 30여메터의 성루벽에는 당년 뽀루뚜갈군대의 허다한 도안들이 조각되여있으며 성루안에는 몇개의 비석이 완전히 보전되여있었다. 그리고 교외의 해변가에는 아직도 뽀르뚜갈건축풍격의 촌락이 완전히 보전되여있는데 뽀르뚜갈인의 후예들이 살고있으며 그들은 지금도 16세기의 뽀르뚜갈말을 하고있다. 말라까에서의 유람이 끝나고 다음으로는 130킬로메터 떨어진 태자성으로 향했다. 태자성(太子城)으로 가는 길에 밖을 내다보니 전부 구릉지대였는데 이름 모를 수종과 대면적의 종려나무를 볼수 있었으며 도로옆에는 인공재배로 된 많은 꽃들이 있었다. 싱가포르보다 꽃이 더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는 길에 또 안내원과 말레이시아 농업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농업인구는 137.59만명으로서 전국 취업인구의 16.8%이고 경작지면적은 414만 헥타르이며 농업은 주로 공예작물을 위주로 하고있는데 주요하게 고무, 기름야자(油棕), 후추, 코코아(可可), 열대과일이며 입쌀 자급률은 76%에 달한다고 하였다. 차는 1시간 45분 달려 태자성에 도착, 10시 반이 되였다. 태자성은 말레이시아의 새로운 행정도시로서 수도 꾸알라룸뿌르에서 남쪽으로 25킬로메터 떨어져있으며 면적은 264평방킬로메터에 달한다. 사면이 원시림으로 둘러싸여있는 태자성은 중심의 평원지대에 자리잡고있으며 인공강과 호수가 사면을 에돌고있다. 주요한 건물을 련결하여 놓아 하나의 작은 배로 수상부로부터 각개 부문으로 다 갈수 있다. 태자성의 이름은 이로 해 지어졌다고 한다. 태자성 광장중심에는 가지각색의 생화들로 장식된 분수못이 있으며 가운데 말레이시아국기가 높다랗게 게양되여있었다. 못주위에는 13개 주를 대표하는 주 기발들이 나붓기고있었다.   태자성광장   전반 태자성 행정중심은 수상부, 국가이슬람교사원(国家清真寺), 태자교(太子桥), 수상관저, 수상관저대교, 태자회의센터, 담맘식물원((达曼植物园) ) 등이다. 말레이시아정부는 2020년에 가서 태자성을 초세계적인 대도시로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그때 가면 태자성은 진짜 말레이시아의 행정중심이 되고 꾸알라룸뿌르는 말레이시아의 경제중심으로 된다고 한다. 광장 북쪽에는 수상부가 있었는데 담장도 경위인원도 없었다.  수상부 수상부를 중심으로 왼쪽은 국가재정청사이고 오른쪽은 수상이슬람교사원(水上清真寺)이다. 광장에서 비스듬히 마주보이는 곳에 수상이슬람교사원의 정문이 있었는데 이 사원은 4분의 3이 호수우에 건축되여있어 수상이슬람교사원라고 하며 말라이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사원이라고 한다. 이 수상이슬람교사원은 최고로 1만 2000명의 교도들을 수용할수 있는, 국가종교의식을 하는 장소이다. 수상이슬람교사원이 가관이다. 광장 남쪽에는 길이가 약 5킬로메터되는 큰길이 있는데 길 량켠에는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있고 가로수 량쪽과 태자호반에는 각이한 풍격의 국가행정 사무청사, 회의중심 및 호화주택과 더불어 울창한 숲과 호수 그리고 푸른 산이 어우러져 경치가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주청룡특약기자 [후일 계속]
175    동남아려행기[15] 댓글:  조회:6525  추천:0  2013-08-19
동남아려행기[15]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8-18 14:33:36 ] 클릭: [ ]   싱가포르의 려행을 끝내고 오후에는 말레이시아로 가게 되였다. 정심식사를 하고 싱가포르해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2시 반이 되였다. 싱가포르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싣고 말레이시아의 신산시(新山市)에 입경하였는데 싱가포르 해관에서 검사를 마치고 뻐스에 앉아 바다우에 놓인 그리 길지 않은 다리 하나를 건너니 말레이시아였다.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에 입경하는 해관검사는 그 어느 해관검사에 비하여 간단하였다. 우리들의 려행용 트렁크의 짐들은 해관검사를 어떻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싱가포르의 관광뻐스가 싣고 직접 말레시아에 입경하였고 사람만 해관검사를 하였는데 출입경 해관검사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 들어서니 그 나라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남성안내원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우리는 뻐스에 앉아 말레이시아의 력사적인 옛도시인 말라카(马六甲)로 향하였는데 거리는 약 200킬로메터이고 4시간 가량 걸린다고 하였다. 안내원은 우리와 인사를 나눈 후 말레이시아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8월 31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로서 13개 주와 3개 련방직할구로 조성된 련방제국가이며 공식명칭은 말레이시아련방이며 면적은 329,847평방킬로메터, 인구는 28,334,135명(2010년)이다. 수도는 꾸알라룸뿌르(吉隆坡)이지만 행정중심은 태자성이며 점차적으로 수도를 태자성으로 옮긴다고 한다. 정치체제는 립헌군주제이고 의회형태는 량원제이며 국가원수는 국왕으로서 왈 리드 알-잼 • 샤 압둘 할림(阿卜杜勒·哈利姆·穆阿扎姆·沙阿)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인 지브 압둘 라자크(纳吉布·阿卜杜尔·拉扎克)이다. 주요 종교로는 이스람교, 불교, 도교, 인도교이고 공식언어는 말레이어이며 주요 민족으로는 말레이족(60%), 화인(25%), 인도인(7%)인데 부유계층에서 80%가 화인이며 말레이시아의 70%경제가 화인들에게 장악되였다고 한다. 표준시간대는 중국,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UTC+8였다. 말레이시아는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650km 떨어져 있는 서말레이시아와 동말레이시아 두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이반도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면적 131,598㎢)는 길이 약 800km, 폭 325km이며 북쪽은 타이, 남쪽은 싱가포르, 서쪽은 말라카해협, 동쪽은 남중국해를 경계로 한다. 보르네오섬 북서부를 차지하는 동말레이시아(면적 198,160㎢)는 길이 약 1,075km, 폭 384km로 사라와크주와 사바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쪽은 남중국해, 동쪽은 셀레베스해, 남쪽은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섬과 접한다. 사라와크 주의 령토 안에는 영국 보호령이던 이슬람왕국 브루네이(文莱)가 있다.   말레이시아지도에서 본 말라카 말레이반도는 주로 산악 지형이다. 동말레이시아에는 해안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이 평야는 언덕 쪽으로 높아지다가 산악지형의 중심에 다다른다. 말레이시아는 대부분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수목작물, 특히 종려유, 야자유와 고무는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이다. 쌀도 주요한 산물이다. 석유채굴 및 생산과 주석채굴은 제1의 외화 획득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4시간 동안 말라카를 향해 달리면서 밖을 내다보니 전부 구릉지대였는데 다른 나무가 한그루도 없다고 할 정도로 어데라없이 전부 종려나무 수림이였다. 나는 안내원에게 어찌하여 종려나무를 이리도 많이 심었는가고 물었더니 종려수는 전반 말라이시아 경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로 기름을 짜서 식용유도 하고 유지공업의 원료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종려나무 말라카는 말라카주(州)의 수부도시이다. 말라카는 말라카해협에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옛도시이다. 말라카하가 가로 지나가는 말라카는 일찍 1403년에 말라카왕국의 수도로 되였고 1511년에 뽀르뚜갈식민지로 되였다가 1641년에 네덜란드에 점유되였으며 1826년에는 영국의 해협식민지(이전에 동남아시아 말라카해협의 옛 영국직할식민지를 통틀어 이르던 말)의 일부분으로 되였다. 삼보묘(三保廟)와 삼보정(三保井) 말라카에 가서 제일 처음으로 삼보묘에 갔다. 3보묘는 1673년에 건축되였는데 1405~1435에 7차나 항해한 중국명조 3보태감 정화를 기념하여 세운 사원이다. 정화가 매번 항해할 때에 여기에 머물렀으며 당시 말라카국 수령이 25차나 중국을 방문하였다. 1411년, 말라카 국왕부인과 540명의 수행인원이 중국남경으로 우호방분을 하였는데 명성조 주태(明成祖朱棣)가 봉천문에서 연회를 차려 환영하였으며 그들에게 허다한 진귀한 중국특산을 증정하였다. 그가 1년반 있다가 돌아갈 때에 명나라 정부에서는 그에게 특별히 한척의 배를 만들에 증정하였다. 1943년에 말라카국왕 잽싸다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열정적인 접대를 받았다고 한다. 삼보묘 주위는 큰 나무들로 둘러져 있었으며 대문에는 전포를 입고 위풍이 당당하게 손에 칼과 도끼를 든 두 장군의 그림이 있고 문 량켠에는 《五百年前留圣迹,四方界内显英灵》란 주련이 씌여져 있고 사원 중앙에는 정화의 초상화와 군복, 칼 등이 있었으며 우에는 《정화삼보공(郑和三保公)》란 표어가 걸려있고 량쪽에는 허다한 문관과 무관들의 신상(神像)들이 배렬되여 있었다. 이 사원은 1673년에 세워졌는데 처마의 네 귀가 뿔처럼 올리 쳐들고 붉은 기둥, 흰 벽, 검푸른 기와 등은 중국의 건축풍격이 다분히 들어 있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모든 건축재료들, 이를테면 한장의 벽돌, 한장의 기와들이 모두 중국에서 운반되여 온것이라고 한다. 사원안에는 향불이 가득 하였으며 사원 문어구에는 한쌍의 금사자가 있었는데 온몸이 금빛으로 눈부시였지만 사자머리 웃부분만 금빛이 약간 벗어져 이었다. 그것은 원래 신도들은 사자옆으로 지나갈 때에 사자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깃든다고 여겨 너무 쓰다듬어 그렇다는것이였다. 삼보정(三保井) 삼보묘에는 또 삼보정(三保井)이 있다. 정화가 7차례나 항해할 때에 모두 이곳을 지났는데 당시 이곳에는 우물이 없어 모두 산에 가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정화는 이러한 정경을 보고 처음으로 이곳에 우물을 팠다. 정화는 모두 7개의 우물을 팠는데 지금은 2개만 남아있다. 하나는 삼보묘 왼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삼보묘 뒤에 있다. 말라카 력사에서 여러 차례 심한 가물이 들어 다른 우물은 다 말랐지만 이 두 우물만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지 사람들은 이 우물을 신의 우물(神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나라의 귀중한 재산으로 우에 철사그물을 씌워 사용을 금지하고 문물을 보호하고있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174    동남아려행기[14] 댓글:  조회:4806  추천:0  2013-08-11
동남아려행기[14]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8-11 12:41:22 ] 클릭: [ ] 다음날(2일) 오전, 우리는 멀라이언(鱼尾狮)공원으로 갔다. 멀라이언공원은 엘리자베스공원이라고도 하는데 싱가포르강변 금융구에 위치해 있다. 공원의 주제는 8.6메터 높이로 우뚝 세워져 있는 멀라이언(鱼尾狮)조각상이고 또 그 축소판인 작은 멀라이언 조각상이 있다. 큰 멀라이언은 여러가지 음악에 맞추어 물을 내 뿜어 수막을 형성하며 레이저를 수막에 쏘면 음악의 절주에 따라 부단히 변화되는 오색령롱한 수막을 볼수 있는데 마치 립체영화를 보는것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구경할 때에는 그런 수막이 없었고 분수만이 있었다. 멀라이언(鱼尾狮)공원 상반신 사자와 하반신 물고기의 몸으로 된 멀라이언은 싱가포르의 상징이다. 상반신의 사자는 싱가포르 국명의 유래인 싱가(산스크리트어로 사자를 뜻한다)를 뜻하고 하반신의 물고기는 싱가포르가 하나의 작은 어촌으로부터 발전하였음을 뜻한다. 싱가포르가 사자도시라는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있다. 기원 4세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왕자가 탄 배가 폭풍을 맞아 이곳까지 표류하여 오자 이들은 이 섬에 등륙하였는데 뜻밖에 한 마리의 기이한 짐승을 발견하였다. 왕자가 저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니 수행원이 사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로부터 사람들은 이 섬을 사자성(狮子城)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멀라이언공원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작은 공원으로서 크게 구경할 것은 없지만 1972년 9월 15일, 리광요 수상이 제막 버튼을 눌러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멀라이언 조각상과 싱가포르강 우에 놓인 다리 그리고 강 량안의 이색적인 건축물들과 그 주변 길가의 꽃들로 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싱가포르는 도시미화가 잘되여 화원도시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화원의 도시라고 하지만 꽃이 어디에나 다 그리 많은것은 아니였다. 오래전부터 들어오던 화원도시였는데 나의 상상속의 그런 꽃도시는 아니였다. 그리하여 안내원과 화원도시라고 하는데 왜 꽃이 그리 많지 않은가고 물었더니 여러가지 화초와 꽃나무가 있으면 화원이 아닌가? 이런 화초와 꽃나무들이 계절에 따라 꽃이 피기에 늘 꽃으로만 있을수 없다는것이였다. 정말 맞는 말이였다. 여러가지 꽃이 피여있는 교목들도 있었는데 그런 꽃들이 일년사계절 그냥 피여 있을수는 없는것이다. 화원도시의 한 모퉁이. 멀라이공원 맞은 켠은싱가포르 고등법원과 국회청사였다. 국회청사 그다음 우리는 스리 마리암만사원(马里安曼兴都庙)으로 갔다. 스리 마리암만 사원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인도교(힌두교)사원으로 차이나타운 중심에 자리잡고있으며, 전염병과 질병치료의 녀신으로 알려진 마리암만을 위해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 사원은 1819년 무역상인 나라야 필라이(Narayan Pillai)가 스탬포드 래플즈경과 함께 싱가포르에 발을 디뎠던 력사적 사실과 련관이 있어 1823년 이 땅을 얻게 되였고 1827년 목재와 억새를 리용해 지붕을 만들어 사원을 세우게 되였다. 현재 보고있는 벽돌건축물의 사원은 1862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사원 입구의 탑은 인도교도들과 싱가포르 현지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지표로서 자리매김하고있다. 이 사원는 인도의 옛 건축풍격을 띠고있었다. 사원의 높은 탑은 금자탑모양으로 색채가 다양한 미술조각들이 있다. 인도교에서 이름이 있는 시바(湿婆: 인도교 3대신의 하나)와 남신(男神), 그리고 제일 지위가 있는 비슈누(毗湿奴: 인도교의 세 주신의 하나) 및 여러가지 각이한 조형들과 아릿다운 자태를 가진 녀신들, 코끼리와 원숭이 등 인도교의 동물신이 탑에 조각되여 있어 빈틈없이 조예가 깊고 정채로웠으며 웅장하였다. 스리 마리암만사원1 사원 입구우에는 방울이 달려있는데 들어가 참배를 하기전에 전문인원이 방울을 울려 신령에게 참배를 암시한다. 준칙에 의하여 신을 벗고 사원으로 들어가니 인도신화의 세계에로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사원안과 마당주위에는 벽에 모두 화려한 조각예술들이 있었다. 웃도리를 벗은 승려, 사리(纱丽: 인도의 녀성들이 평소에 입는 민속 의상. 재단하지 않은 기다란 면포(綿布)나 견포(絹布)로 허리를 감고 머리를 덮어씌우거나 어깨너머로 늘어뜨려 착용한다)를 입은 인도녀인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그러자 어떤 관광객들은 향을 피우고 두손을 열십자로 하고 무릎을 꿇고 례배를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사원을 돌아보면서 구경만 하였다. 스리 마리암만사원2 인도교는 농후한 신화색채를 띠였는데 사원안의 신상(神像)조각들은 모두 인도교신화와 련관되여 있다고 한다. 허다한 신상들은 삼두륙벽(三頭六臂: 세개의 머리와 여섯개의 팔을 가지고있다)으로 손에 련꽃을 든것, 칼, 창을 들고 사자나 거북을 탔거나 여러가지 괴수로 변신한것을 볼수 있었다. 나는 이런 벽화나 조각예술에 대하여 인도교의 똑똑한 함의는 모르지만 그 예술가치를 갖고 있다는것만은 알수 있었다. 스리 마리암만사원3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 계속]
173    라지오는 학습의 훌륭한 도구이다. 댓글:  조회:8152  추천:0  2013-08-02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68) 청해  라지오는 학습의 훌륭한 도구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라지오는 학습의 훌륭한 도구이다.”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책 이외에도 신문, 잡지, 라지오, 텔레비죤, 컴퓨터로도 많은 지식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지난세기 6,70년대에는 라지오가 신문, 잡지와 더불어 보도매체의 주요한 형식이자 학습의 훌륭한 도구로 되였지만 80년대부터 텔레비죤이 보급되면서 그에 밀리워 그의 매력을 잃고 있습니다. 책, 컴퓨터, 텔레비죤은 시각으로 감지하여야 하기에 전달물체가 근거리에서 사람의 시선과 직선을 이루어야만이 볼수 있지만 라지오는 다만 청각으로만 감지할수 있기에 라지오가 어느 방향에 있든지 상관없이 가까운 거리에서는 다 들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잠자리에서도 다 라지오를 들으면서 학습할수있습니다. 그리고 라지오방송은 소식전파가 빠릅니다. 텔레비방송이나 신문같은 것은 오전에 발생한 사건이 많이는 저녁이나 이튿날에 나 올수 있지만 라지오 방송은 점심에 벌써 나오고 어떤 프로들은 생방송을 통하여 청취자들과 사회자거나 아나운서와 직접 대화하고 교류할수 있는 등 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변조선말방송애청자친목회의 한 청취자는 “저의 라디오는 침대머리에 놓여 있는데 아침5시에 자동으로 켜지면서 ‘여기는 중앙인민방송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정다운 목소리에 이어 장엄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가 울려 나옵니다. 이러면 어떤 때에는 자다가도 이 소리에 깨여 납니다. 저의 하루 일과는 이렇게 아침에 중앙인민방송을 듣는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라고 말하였으며 다른 한 청취자는 “중앙인민방송의 소식보도와 시사해설프로는 저의 하루 일과에서의 필수과로 되고 있으며 기타 프로도 아주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저의 일생에서 소학교로부터 대학까지의 이 학교가 제1학교이고 중앙인민방송과 연변인민방송이 제2학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수 있는것은 제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외의 절대대부분의 지식은 독서와 중앙인민방송 그리고 연변인민방송을 통하여 장악한것이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독서는 정력을 집중하여 학습하여야 하지만 방송은 아침에 깨여나서 잠자리에서도 들을수 있고 또 밥먹거나 일하면서도 들으며 학습 할수 있기에 저의 제2학교이자 제일 좋은 교실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 두 방송의 매 프로는 저의 훌륭한 교재로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방송애청자들은 이렇게 라디오를 아주 훌륭한 학습의 도구로 삼지만 어떤 사람들은 라지오에 대한 말이 나오면 “지금 누가 라지오를 듣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는 방송애청자들에게는 유감스러운 말로 듣기는것입니다. 라지오를 통하여 음악이나 기타 문예프로를 감상하는 것은 일종 흥취로 될수 있겠지만 국내외 뉴스, 시사해설, 과학지식 등 프로들은 흥취보다도 시사학습과 기타 지식을 장악하는 학습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전철이거나 뻐스안에서 청소년들이 레시바를 끼고 MP3을 듣는 것을 볼수 있지만 방송애청자들은 산보를 하거나 외출할 때에는 소형라지오를 호주머니거나 손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방송을 애청하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건네면 “라지오가 얼마나 좋은 학습의 도구라고 이걸 잊고 다니겠습니까? 저는 어디로 가나 꼭 이걸 갖고 다니며 혹시 이걸 잊고 다니면 마음 한 구석이 비여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한 애청자는 소형라지오를 호주머니에 넣고 들으면서 조카네 집으로 갔는데 조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삼촌 라지오를 들으며 다니는 것을 보니 할아버지 다 되였네요.”라고 말하더란것이였습니다. 이런 말들은 자기 조카에게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젊은이들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은 지금 세월에는 늙은이들만이 라지오를 듣는다는 뜻으로 라지오 하면 늙은이라는 대명사로 될 정도로 젊은이들에게 각인되고 있는데 대하여 참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사업이 바쁘고 여러가지 활동이 많기에 늙은이들에 비해 라지오를 들을수 있는 시간이 적은것만은 사실인것입니다. 그렇지만 집에 들어와서는 라지오를 틀어 놓는 습관을 양성한다면 텔레비죤을 보거나 책을 보는 시간외에는 수시로 라지오를 들으면서 국내외 뉴스거나 시사해설 같은 것을 학습할수 있지않는가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지오가 때가 지난 것이 아니라 학습의 아주 훌륭한 도구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라지오를 듣는 습관을 양성하였으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7월 15일
172    동남아려행기[13] 댓글:  조회:5543  추천:1  2013-08-01
동남아려행기[13]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31 12:40:05 ] 클릭: [ ] 11월 1일 오전에 타이 5세황 티크행궁(五世皇柚木行宫)을 다 참관하고 오후에는 비행기를 타고 싱가포르로 갔다. 비행기가 방코크에서 리륙하여 약 2시간 반 정도 날아 싱가포르에 도착하니 거의 5시가 되였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다 마치고 나오자 향항려행사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있었고 남성 안내원이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하여 뻐스에 오르도록 하였다. 안내원은 우리와 인사를 나눈 다음 뻐스가 시내로 들어가는 사이에 싱가포르의 개황에 대하여 말하였다. 싱가포르는 말라이반도 남단에 위치해있는 하나의 섬으로서(주변의 여러 개의 부속섬을 포함) 1965년 8월 9일에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면적은 715.8 평방킬로메터이고 인구는 531만명이며 민족으로는 화인(77.3%), 말레인(14.1%), 인도인(7.3%), 그외 유럽인과 기타 종족(1.3%)이며 언어는 국어로는 말레이어로 하고 영어, 중국어, 타밀어(드라비다 어족에 속한 언어. 타밀족의 언어로, 스리랑카 공용어의 하나이다.)도 사용하고있다. 주요 종교로는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 인도교이고 정치체제로는 의회제와 공화제이며 대통령에 진경염(陈庆炎),총리에 리현룡(李显龙)이였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대통령은 어느 민족이든지 다 선거될수 있지만 총리만은 반드시 한족이여야 한다는것이다. 그 원인은 싱가포르의 부유계층은 대부분 화인들인데 그만큼 화인들이 머리가 좋다는것을 설명하며 총리는 정부수반으로서 머리가 좋은 화인이 맡아 하여야 싱가포를 잘 령도할수 있다는것이였다. 지금의 제3임 총리 리현룡은 제1임 총리 리광요의 아들이라고 한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이며 주로 금융업, 가공업, 해상운수업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금융업은 세계 금융쎈터지수의 순위에 따르면 런던, 뉴욕과 향항의 뒤를 이어 제4대 국제금융중심이다.   공업은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주도력량이며 주로 공업과 가공업을 하는데 공업으로는 렌즈생산과 전자공업인데 전자공업은 세계전자공업중심의 하나이다. 가공업으로는 주로 물가공, 생물가공, 기름가공을 하며 이미 세계 제3대 기름제련국으로 되였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태평양과 인도양사이에 있는 말라카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은 반드시 싱가포르 항구를 지나는데 3일(72시간)은 세금이 없이 머무를 수 있으며 서로의 화물교환과 매매를 할수 있는데 72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세금을 내거나 화물을 부리워야 한다는것이다. 부리운 화물을 싱가포르에서는 저렴하게 사들여 싱가포르 국제시장에 내놓는다고 한다. 이렇게 싱가포르의 해상운수업은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안내원이 싱가포르의 표준시간대를 말하면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UTC+8라고 하면서 타이에서 왔으니 시계를 다시 한시간 앞당겨 놓으라고 하였다. 안내원이 싱가포르의 개황을 소개를 하는 사이에 뻐스는 어느덧 화파산(花芭山)밑에 와 섰다. 이번 관광의 첫 코스가 바로 화파산에 오르는것이라고 하였다. 화파산은 싱가포르에서 부킷티마(武吉知马: 163메터) 다음으로 두번째 높은 산으로서 115메터의 작은 산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내가 해발고도로 말하는가 아니면 상대고도인가고 물으니 안내원은 싱가포르가 바로 바다가운데의 한 섬이기에 곧 바로 해발이 되므로 구태여 해발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럼 왜 가장 높은 부킷티마산에 오르지 않고 이 산에 오르는가고 물으니 부킷티는 구릉(丘陵)으로서 시내 중심에 위치하여 있고 그 주위에 그보다 높은 층집들이 가득하여 항구를 볼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해안을 볼수 없다는것이였다.   화파산에서 내려다 본 싱가포르 화파산은 바다옆에 있으며 높지 않아 쉽게 올랐는데 정말 오르고 보니 고층건물이 숲을 이룬 싱가포르 시내와 항구도 다 보일 뿐만아니라 바다건너 서쪽으로 인도네시아 해안이 어렴프시 보이고 북쪽으로 말레이시아해안을 비교적 똑똑히 볼수 있었다.   화파산에서 내려다 본 싱가포르항 저녁에는 센토사(圣淘沙)쑈핑쎈터와 백화점에서 관광쑈핑을 하는데 인민페 대 싱가포르화페 환률은 5:1이였다. 나는 쑈핑에는 흥미가 없었고 싱가포르의 야경에 매혹되여 그것을 구경하는데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싱가포르야경 싱가포르야경 싱가포르야경 싱가포르야경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171    조선족의 기형적 소비에 대하여 댓글:  조회:10274  추천:2  2013-07-24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66) 주청룡 조선족의 기형적 소비에 대하여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기형적소비를 절제하였으면”하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 조선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활절주가 빠르고 생활수준도 많은 제고를 가져왔으며 그 어느 민족에 뒤지지 않고 가장 앞줄에서 달리고 있습니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사회자 조충상이 연변에 왔을 때 인구비례로 하면 연길의 택시보유량이 전국에서 광주다음 두번째란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변사람들이 생활절주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생활절주가 빠르고 생활수준이 제고를 가져온것은 어디까지나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가운데는 떠벌려 랑비하는 바르지 못한 기풍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형적인 소비는 절제할바라고 봅니다.      최근 습근평총서기는 근검적약을 리행하고 떠벌려랑비하는것을 반대할데 대한 중요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우리와 같이 사는 한족들은 시안에서는 1원짜리 대중교통을 리용하지 택시를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은 뻐스를 타고 1원이면 갈곳을 급한일도 아닌데 5원에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바로 사치를 피우는 기형적인 소비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연변의 정황을 보면 보편적으로 택시는 한족들이 몰고 타기는 조선족이 탑니다. 한족 택시기사들의 말을 빌면 조선족이 없으면 우리 택시기사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는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조선족들의 돈이 한족들에게 들어간다는것입니다. 식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당은 대부분 한족이 경영하고 많이는 조선족들이 먹어댑니다. 역시 조선족들의 돈이 한족에게로 들어간다는것입니다.     지금 대도시의 진출 혹은 출국하여 돈을 벌어가지고 고향에 돌아 온 사람들이 친구들을 청하여 식당놀이를 하는 것은 규례가 아닌 규례로 되고있습니다. 다년간 외지에 가 있다니 친구들이 그리웠고 또 돈도 벌어 왔으니 한자리에 앉아서 친구들과 정을 나누는 것은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채를 주문할 때에 친구들이 채를 먹을만치 올리라고 하면 돈을 벌었다는게 째째하게 놀겠는가 하며 식탁에 다 먹지도 못할 채를 상다리 부러지게 올립니다. 결국 파티가 끝날 때 보면 절반도 먹지 못하고 쓰레기로 처리됩니다. 먹을만치 채를 올리면 체면이 깎이고 상다리 부러지게 올리면 체면이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기형적 소비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체면소비란 관념을 버리고 랑비가 없도록 먹을만치 적당하게 채를 올리는 것이 바로 소비관념에서 제창할 바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적지않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가지고 와서 도시에 들어와 아무런 일도 하지않고 이렇게 먹고 마시고 하면서 기형적 소비로 돈을 다 써버리고 또 다시 한국행을 합니다.     연변 교육고찰단이 관내의 여러 대도시의 교육을 고찰하고 돌아와서 한 보고가운데의 한가지 이야기입니다. 관내의 대도시들에는 노래방,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들이 아주 드물게 있었지만 연변에는 이거리 저거리에 유흥업소의 네온등 불빛이 명멸하다는것입니다. 이것 역시 조선족들의 생활절주가 아주 빠르고 보다 다채로운 문화생활을 추구한다는 것을 설명하지만 일종 기형적인 소비도 내포되였다는 뜻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한족들은 그 어떤 행사 뒤끝에 한번 회식이면 끝입니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2차로 노래방, 3차로 다방, 이렇게 2차, 3차는 보편적인것으로 되고 지어는 안마방, 양고기 뀀점하면서 4차, 5차로 온 밤을 지새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역시 기형적 소비입니다.     옛날부터 조선족은 10원을 허뜨려 잔돈을 만들어 다 써버리는 성질입니다. 지금은 100원을 허뜨려 잔돈으로 다 써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한족은 9원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1원을 더 벌어 10원을 만들어 저축는 성질입니다. 축적과 소비관념을 보면 조선족은 소비를 하여 버리고 한족은 축적을 하려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로부터 조선족이 한족에게서 돈을 꾸지 한족이 조선족에게서 돈을 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조선족들이 소비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소비가 있어야만 생활수준이 제고됩니다. 생산과 소비의 변증관계를 보면 생산이 소비를 결정하고 소비가 생산을 촉진합니다. 생산해낸 산품이 시장에 나와 소비자들에게 팔리지 않으면 경제운행이 침체상태에 이르며 사회재생산의 운행과정도 정지됩니다. 생산, 소비, 재생산 이렇게 경제가 순환하여야 인민의 생활이 향상됩니다. 그러므로 생활수준을 제고하고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반드시 소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소비를 하되 불필요한 기형적인 소비를 하지말고 그 돈을 자기의 적성에 맞는 창업에 쓰거나 우리의 생활을 향상기키는 더 바른 소비를 하자는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7월 1일  
170    동남아려행기[12] 댓글:  조회:5338  추천:0  2013-07-22
동남아려행기[1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22 10:28:37 ] 클릭: [ ] 31일 저녁은 타이에서의 마지막 저녁이였다. 그리하여 타이에서 가장 고급음식으로 불리는 황제음식(皇帝餐)을 먹기로 하였는데 각자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물론 자기돈으로 사서 먹는데 여러가지 음식가운데서 자기 마음대로 골라 사 먹기였다. 메뉴를 보니 제비둥지(燕窝)와 상어지느러미(鱼翅)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에서 제비둥지와 상어지느러미는 중국에서 가장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고급식탁에만 오르는 료리라는것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였다. 값은 제비둥지와 상어지느러미가 인민페로 각각 350원이였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700원을 내고 그 두가지를 올리였다. 상어지느러미는 맹물에 푹 삶은것 같았고 제비둥지는 야자 웃부분을 자르고 야자안에 제비둥지를 넣고 야자수와 함께 익혔는데 숟가락으로 저으니 다 녹아 액체가 되였다.  황제음식 제비둥지 황제음식 상어지느러미 제비둥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명조때의 대항해가 정화가 기원 1405부터 1433년 사이에 7번 항행하였는데 그중 한차례 그의 선대가 항행하는 도중 큰 폭풍을 만나 할수 없이 말라이군도의 한 무인도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련 며칠 갇히워 있다니 먹을것이 거의 떨어졌는데 바다의 한 벼랑에 허다한 백색의 제비둥지가 있는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선원들을 시켜 그것을 뜯어다가 맹물에 푹 삶아서 허기를 채웠다. 며칠후 선원들이 모두 혈색이 좋아지고 정신이 활기를 띠였다. 그리하여 정화는 돌아올 때 이 제비둥지를 가지고 와서 명성조 주태(明成祖朱棣)에게 바치여 황제로 하여금 대단히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 두가지 료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것이 문제였다. 황제음식이라니 당연히 특별히 맛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정작 먹어보니 그저 슴슴한 외에는 아무런 맛도 못 느꼈다. 우리가 먹을 줄 몰라서 그런가 아니면 본래 그런 맛인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황제음식을 먹어봤다는 점에서는 뿌듯하였지만 700원을 내고 별맛을 느끼지 못하고 먹었다는 점에서는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다음날(11월 1일) 오전, 우리는 타이 5세황 티크행궁(五世皇柚木行宫)을 참관하였다. 티크(柚木)는 목재로 쓰는 나무이름이고 행궁(行宫)은 예전에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무르는 별궁(別宮)을 말한다. 행궁을 참관할 때에 관광객들이 주의하여야 할 점들은 이곳도 대황궁과 마찬가지로 옷단장이 정결하여야 하고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녀성들은 짧은 치마를 입지 못하며 밖에서는 사진을 찍을수 있지만 안에서는 찍는것이 엄금되여 있었다. 티크행궁은 라마5세시기 1900년에 시작하여 지은 집으로서 원래는 세창도(世昌岛)에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것은 이미 방코크시 교외로 옮겨 온 행궁이란다. 이 건물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목조건축물로서 전부 티크나무구조로 된 행궁이다. 5세황 티크행궁(五世皇柚木行宫) 이 행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있다. 5세왕에게는 극히 총애를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특별히 세창도에 한채의 티크행궁을 지어 이 왕자로 하여금 병치료를 하면서 휴양을 하게 하였다. 세창도의 그윽하고 우아한 환경에서 왕자의 병은 약을 쓰지 않고서도 나았다. 5세왕은 너무 기뻐 왕자를 방코크로 데려왔는데 뜻밖에 얼마 안가서 돌연적으로 사망하였다. 5세왕은 너무 상심하던 끝에 세창도의 티크행궁을 방코크로 옮겨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창도에는 그 행궁유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전부 티크나무를 재료로 사용한 이 티크행궁의 특점은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지었고 건축풍격은 많이 구라파(유럽)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래도 타이의 전통풍격에 따라 지었다는것이다. 티크나무는 특별히 기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고온과 비바람에 잘 견디고 이 나무의 기름은 벌레의 침습을 막는 작용도 하여 아주 좋은 건축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행궁내에는 백년전의 왕실의 귀중한 일용품과 장식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장식품과 가구들은 구라파식으로 되여 있어 유람객들로 하여금 왕실의 화려한 생활을 료해할수 있었다. 행궁내에는 5세왕이 사용하던 타이의 제일 첫 실내욕실과 타이문자 타자기 그리고 타이도자기, 구라파가구가 있었는데 인상이 가장 깊은것은 대량의 거형 상아와 상아제품 그리고 왕실사진들이였다. 그외 티크나무로 된 틀에 백색건반은 상아로, 검은 색 건반은 서우뿔로 만든 피아노도 인상적이였는데 보는 사람들은 경탄하게 하였다. 5세왕은 젊었을 때에 구라파류학을 하고 돌아면서 민주정치와 구라파의 선진기술을 가지고 왔으며 재위 42년간에 노예제를 페지하고 서방의 문화를 인입하였으며 교육위생개혁을 실행하여 타이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국부(国父)》로 불리웠다. 이 행궁은 지금 라마5세의 박물관으로 되어 관광명소로도 되고있다. 행궁은 은기실(銀器室), 문서실, 취사방,왕의 방과 침실, 왕후의 방과 침실 등 30여 칸으로 되였다. 안에는 력대 군왕의 사진과 생활용품들과 진귀한 예술품들이 있었고 5세왕의 사무청과 침실의 일체 시설과 용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어 참관가치가 컸지만 안에서 사진촬영이 금지되여 한장도 못 찍었다. 사진/글 주청룡특약기자 [다음계속]
169    방학을 어떻게 보낼가? 댓글:  조회:7181  추천:0  2013-07-18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67) 주청룡         방학을 어떻게 보낼가?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방학을 어떻게 보낼것인가”라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방학이란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수업을 일정 기간 정지하고 쉬는것을 말합니다. 여름방학은 더위로 학업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때에 수업을 정지하고 쉬는 기간을 말하며 겨울방학은 추위로 학업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때에 학업을 정지하고 쉬는 기간을 말합니다. 방학을 그 의의로 말하면 한 학기동안 교실이란 작은 공간에서 긴장하게 진행되던 학습에서 해탈되여 머리를 쉬우면서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자기의 흥취에 맞는 여러가지 활동도 하고 사회와 접촉하면서 학교에서 배울수 없었던 지식을 학습하며 자신의 창의력을 키우는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중소학교 학생들은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해야 하는가? 아래에 몇가지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문체활동 음악, 무용, 미술, 체육 등 자기의 흥취에 맞는 여러가지 문체활동에 참가하여 기량을 닦아 자기의 특장을 발휘할수 있도록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독서 과외독서를 많이 하고 그 책속에서 여러가지 지식을 배우고 독후감을 쓰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로 문장을 짓는것으로써 자기의 습작능력을 제고 할수 있다고 봅니다. 자연에 대한 관찰 반급을 단위로 하여 등산, 야영 같은 활동을 하여 대 자연을 관찰하고 그 소감같은 것을 글로 정리한다면 자연에 대한 지식을 넓힐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조사 5~6명씩 한 개 소조를 무어 시장조사, 농촌조사, 공장에 대한 조사 등 사회조사를 하고 조사보고를 작성하여 조사단위의 심사를 거치고 학교에 회보하는 활동을 한다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질수 있고 창의능력을 제고할수 있어 앞으로 사회에 진출함에 있어서 밑거름으로 될수 있다고 봅니다. 유람 홍색관광을 조직하여 당지의 혁명력사유적지를 돌아본다면 오늘의 행복이 어떻게 왔는가하는 것을 느낄수 있으며 경제적 조건이 구비된다면 바다구경, 명승고적, 대도시를 유람하면서 세상과 접촉한다면 학생들의 시야를 넓힐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람을 하고 기행문을 쓴다면 습작능력을 제고 할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주변을 보면 학생들이 방학을 하게 될때에 사처에 “가정교사”광고들이 나붙고 심지어 담임선생님을 찾아 자기에게 학생을 보내달라고 하고 학생을 얼마 보내주면 그만큼 수수료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가정교사”를 꾸리는 것을 나쁘다고는 할수 없지만 거기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큰 부담으로 되고 학습효률도 높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본래 한 학기동안 교실이란 작은 공간에서 긴장하게 학습하였는데 또 그보다 더 작은 공간에 넣고 같은 내용을 곱씹으니 학생들이 흥취를 잃고 학습능률이 매우 낮습니다. 때문에 학부모들은 자기집 애의 특장을 봐서 그 특장에 맞는 활동에 참가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방학이면 학생들로 하여금 방학숙제를 참답게 완성하는 기초에서 독서도 하고 자기의 흥취에 맞는 여러가지 문체활동에 참가한다든가 사회조사, 야영, 홍색관광, 유람 등을 조직하여 사회와의 접촉을 많이 하여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총적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유쾌하고 즐거운 방학이 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7월 8일
168    동남아려행기[11] 댓글:  조회:5575  추천:0  2013-07-17
동남아려행기[1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17 12:04:43 ] 클릭: [ ] 식물원에서 본 야자수(椰子树) 다음날(31일), 우리는 다시 방코크로 향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제비둥지쎈터(燕窝中心),금불사(金佛寺) 등 곳에 들렸는데 이러한 곳들은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쇼핑을 목적으로 한 곳들이였다. 제비둥지쎈터에는 말 그대로 제비둥지가 많았다. 제비둥지는 금사연(金丝燕)이 해안의 바위굴 혹은 절벽틈에 튼 둥지로서 일부분 식물(食物)과 해조류, 제비털, 이끼 등 물질들이 제비의 타액선(唾液腺)에서 분비한 타액혼합물이 한데 점착되여 형성된것이다. 금사연둥지 제비둥지는 풍부한 단백질, 당류, 무기염 및 기타영양물질이 포함되여있어 중의들은 연와는 피부를 윤택하게 하고 혈을 돕고 기를 돋구며 체액의 분비를 촉진하고 보페양음(补肺养阴)효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맛이 특이하여 황제음식라고도 하며 귀빈식탁에 오른다. 이러한 약효와 식재료로 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대량 채집하는데 사람이 채집하기 바쁜것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채집하게 한다고 한다. 제비둥지쎈터에는 제비둥지외에 이름 모를 각가지 자연산 약재와 약품들이 가득하였다. 우리 관광팀에서도 약재와 약품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금불사는 타이 3대 국보중의 하나인 방코크의 금불사가 아니라 파타야에 있는 향촌의 작은 절당인데 려행사의 하나의 코스로 기실은 관광쇼핑점으로 되어 있었다. 절당안에는 중문으로 《룡보사(龙宝寺)》란 글자가 있었다. 안내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절은 태, 중 두 나라 인민들이 같이 모금하여 세운 절당이라고 한다. 그러니 두 나라 인민들의 우의를 상징하는 절당으로서 중국관광객들은 모두 이곳에 들러 향을 피우고 쇼핑도 하면서 두 나라의 우의를 증진하고있다. 룡보사(龙宝寺) 돌아오는 길에 식물원에 들렀는데 식물원은 대부분 과일나무들이였다. 여기의 과일나무들이란 관목, 교목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야자수, 빠나나나무 등과 같은 초본식물들이였다. 식물원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였던 수십가지 열대과일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과일매장마다 관광객들이 발길을 멈추게 하였는데 중국관광객들을 위하여 전부 중국어로 과일이름이 표시되여 있었다. 관광객들은 자지방에서 보지 못하였던 과일들을 조금씩 사서 맛을 보았는데 배가 불러 더 맛을 보지 못하는것이 유감스러웠다. 우리는 과일매장을 다 돌아보고나서 식물원을 돌아보았다. 나무마다에 주렁주렁 열린 열매들이 탐스럽기만 하였다. 그리고 나무마다 표시판에 중국어로 이름을 써서 세워놓았기에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었다. 야자, 빈랑(槟榔)같은것은 너무 높아 머리를 들어 쳐다보았고 빠나나, 망과, 두리언(榴莲)은 우리의 키 높이에 열려 만져볼수 있었고 파이내플(菠萝)은 너무 낮게 열려 무릎을 쪼크리고 앉아서야만 만질수 있었다. 망과도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색갈이 빨간것은 사과망과(苹果芒)라고 하였다. 사과망과(苹果芒) 식물원참관을 마치고 건과상점에 들렸다. 상점안에는 수십종에 달하는 건과들이 질렬되여 있었는데 마음대로 맛을 보고 자기의 요구에 따라 살수 있었다. 우리도 맛있는 건과들을 사려고 이것저것 맛보았는데 련거퍼 여러가지를 먹으니 어느것이 어느 맛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그 가운데서 몇가지를 골라 정갈하게 포장한 건과들을 샀다. 이렇게 여러 곳을 구경하다나니 방코크에는 오후 다섯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방코크시에는 고층건물들이 띄염띄염 있었고 대부분은 3~5층 집들이였다. 이날 방코크에 돌아와서 우리는 타이 독사연구쎈터를 참관하였다. 타이 독사연구쎈터는 비 영리성 기구로서 이전에는 전문 황실가족에서 연구하는 기구였기에 모두 《황가독사연구쎈터》라고 하며 지금은 관광항목으로 개방하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뱀조련사의 표현. 독사연구쎈터 부근에는 수만마리의 독사를 기르는 뱀사양장이 있는데 안경사, 살모사, 율모기, 금환사, 은환사 등 수십종 독사들이 있다. 독사연구쎈터에서는 또 관광업도 하기에 조련사의 뱀표현도 있었다. 뱀을 목에 감고 노는가 하면, 뱀의 입에 손가락을 넣기도 하고 뱀과 입을 맞추는가 하면 또 뱀의 입에서 독액을 짜내기도 하였다. 조련사가 뱀독액을 짜내고있다. 그리고 약품전시 매대에는 뱀독, 뱀기름, 뱀피, 뱀열, 사편(蛇鞭) 및 그것들로 만든 여러가지의 약품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해설원이 각종 약품들을 성능과 용처 등을 설명하였는데 그런 약품을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다음계속]
167    동남아려행기[10] 댓글:  조회:5091  추천:0  2013-07-09
동남아려행기[10]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08 16:50:44 ] 클릭: [ ] 코끼리 연기를 보다 다음으로 동파락원에 가서 코끼리 연기를 보았는데 참으로 볼만했다. 코끼리 5마리가 횡렬로 서있고 몇메터 앞에는 5개의 고무풍선이 한줄로 매달려 있었는데 조련사의 지휘하에 코끼리들이 송곳을 코로 감아뿌려 고무풍선을 터뜨리는것이였다. 어떤 코끼리들은 단번에 터뜨리고 어떤 코끼리들은 서너번만에 터뜨렸으며 시간이 다 될때까지 터뜨리지 못한 코끼리들도 있었다. 참으로 우스웠다. 그래도 다채로운것은 코끼리롱구였다. 5마리의 코끼리가 횡렬로 서서 10여메터 앞에 있는 롱구틀에 조련사의 지휘하에 롱구뽈을 뿌려넣는데 그것도 어떤 코끼리들을 단꺼번에, 어떤 코끼리들은 서너번에,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넣지 못하는 코끼리도 있었다. 뽈이 들어갈 때마다 관람객들이 박수를 치면 코끼리들도 신이 난듯 앞발을 들고 코를 홰홰 내젓는다. 그리고 볼링도 치는데 우의 두 종목과 비슷하였다. 코끼리가 롱구를 하고있다. 코끼리는 또 세바퀴자전거를 타기도 하였는데 자전거에 올라서서 코로 운전하고 앞발로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서 타는 모습이 너무 가관이였다. 삼륜차 타는 코끼리 그리고 두 코끼리가 코를 맞대고 한사람을 들어올리는 종목도 있었다. 조련사들이 관람객들속에서 한사람이 나오라고 하면 비위가 좋은 사람이 나서는데 두 코끼리가 마주 들어올리기도 하고 한마라 코끼리가 긴 코로 사람을 감아서 거뜬 들어올리기도 하였다. 긴 코로 사람을 감아올리는 코끼리 또 사람들이 한줄로 반듯하게 누우면 코끼리가 사람들을 가로타고 지나가기, 땅바닥에 반듯하게 누운 사람을 발로 안마하기 등 장면들이 있었는데 이런 장면들은 정말 보기가 아짜아짜하였다. 놀라운 안마기교를 선보이는 코끼리 코끼리축구 또한 볼만하였다. 한마리의 코끼리가 문을 지키고 다른 한마리가 문을 향해 공을 차는데 키퍼가 꼴을 먹을 때도 있고 코로 뽈을 막아낼 때도 있었다. 이외에도 20여마리의 코끼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기, 코로 훌라후프(呼拉圈儿)돌리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사람들과 바줄당기기 등도 있었다. 바줄당기기는 관람객들이 15명이 나가서 뒤에서 당기고 코끼리가 앞에서 끌었는데 15명의 사람들이 줄줄 끌려갔다. 그리고 코끼리 그림그리기도 인상적이였다. 아주 육중하고 둔해보이는 코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색칠까지 하는데 둔한것이 아니라 아주 령민해 보였다. 화가를 찜쪄먹을 코끼리의 그림솜씨 우리가 볼바에는 코끼리들이 조련사의 지휘에 잘 복종하는듯했다. 그러나 자기의 성질과 맞지 않을 때는 말을 잘 안 듣는 모양인지 조련사들이 모두 낫자루 같은데 매부리처럼 생긴 쇠붙이를 맞춘것(괭이자루처럼 크게 만든것을 저목장에서는 도비라고 한다)을 들고있었다. 훈련시킬 때 쓰는 도구같았다. 전날 우리가 코끼리를 탔을 때에도 주인이 그것을 쥐고 코끼리의 목을 가로타고 몰았는데 코끼리의 이마에는 구멍이 여러곳이 나있었고 그 상처자국에는 메틸바이올레트(紫药水)가 발려있었다. 아마 코끼리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그것으로 쿡쿡 찔러놓는 모양이다. 코끼리연기를 다 구경하고나니 저녁때가 거의 되였다. 저녁에는 《동방공주(东方公主)》호에 올랐다. 《동방공주》호는 파타야의 야경도 감상하고 인요들과 함께 노래와 춤을 추면서 즐길수 있는 큰 배였다. 《동방공주호》는 파타야의 해변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다가운에 정착되여 있었는데 우리 관광객들은 모두 작은 배를 타고 거기까지 가서 《동방공주호》에 오르게 되여있었다. 《동방공주호》는 대단히 큰 배로서 안에는 식당도 있고 가운데 무대가 있어 유람객들이 그안에서 여러가지 서양료리를 먹으면서 인요(人妖)들의 가무를 구경할수도 있었다. 밖을 내다보면서 파타야 해변가의 야경도 감상할수 있고. 여기 말로 하면 그것은 바다우의 나이트클럽이였다. 밤이 되니 유람선에서는 오색령롱한 네온등 불빛이 명멸하면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미끈한 체격에 예쁘게 화장한 인요들이 나와서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서양료리가 오르자 유람객들은 맥주며 와인을 마시면서 인요들의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흥이 도도해지자 그들과 같이 한덩어리가 되여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동방공주(东方公主)》 레스토랑서 동행들과 함께 그들 가운데는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갈색인종 다 있었다. 그들은 부동한 피부색갈에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손시늉을 해가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는데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세상의 여러 인종들이 다 모인 환락의 지구촌이였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인류가 사는 이 지구촌은 부동한 인종, 부동한 민족이 함께 사는 세상이요, 그들은 비록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르지만 모두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바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환락의 마당은 1시간 반가량 이어졌으며 서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어떤 사람들은 서로 싸인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지구촌 한마당 파타야 해변가는 고급호텔과 방갈로(孟加拉式平房), 레스토랑(서양식 료리를 하는 음식점) 등과 함께 밤에는 화려한 불빛, 낮에는 하늘을 누비는 해상락하산과 윈드서핑(风帆板) 등이 어우러져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낼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하여 《동양의 하와이》 또는 《타이의 리비에라(里维耶拉海岸)》라는 별칭을 가지고있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면 자비로 안마를 받는다. 안마는 반시간가량 하는데 40바트였다. 인민페로 환산하면 8.5원이다. 우리 팀에서 극소수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안마를 받았다. 안마사들은 전부 타이의 50,60대 녀인들이였는데 절반 손시늉으로 한어통화가 가능하였다. 타이에서 여러 관광쇼핑쎈터를 돌아보면 판매원들 모두가 한어는 뜨개말 정도로 다 했다. 그래서 젊은 녀성들이니 한어를 빨리 배웠겠다 생각하였었다. 늙은 안마사들까지 서툴지만 한어로 대화하는것이 이상하여 어떻게 되여 이렇게 한어를 잘하는가고 물었다. 중국관광객이 많으니 그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어를 배우게 된다는것이 그들의 대답이였다. /주청룡특약기자 [다음 계속]
166    동남아려행기[9] 댓글:  조회:4387  추천:0  2013-07-01
동남아려행기[9]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3-07-01 13:37:05 ] 클릭: [ ] 아름다운 해변도시 파타야. 이튿날(10월 30일) 우리는 파타야 바다가에 가서 놀게 되였다. 파타야는 정말 아름다운 해변도시였다. 타이의 전통 건물에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진 고층건물, 우리 지방에서 볼수 없는 열대식물과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들, 수정같이 맑은 바다물에 40킬로메터되는 백사장 해수욕장은 정말 유람객들을 매혹시켰다. 그리고 바다의 상공에는 채색의 락하산들이 하늘에서 떠돌아 다녔는데 채색고무풍선들이 하늘에서 둥둥 떠다니는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약 1킬로메터 정도 들어가서 바다 가운데 선체가 넓고 바닥이 평평한 바지선(驳船)이 여러대가 널려 있었는데 바지선에서 락하산이 뜨고 내리고 하였다. 우리는 해변가에서 쾌속정을 타고 바지선이 있는데로 갔다. 바지선에 올라 보니 유람객들이 락하산을 몸에 착용한 다음 긴 바줄을 쾌속정에 이어놓고 쾌속정이 고속도로 질주하면 공기의 부력으로 사람이 탄 락하산이 하늘공중에서 솟아올라 날아다니였다. 하늘공중을 몇 바퀴 돈 다음 쾌속정이 속도를 조절하여 바지선 가까이에 와 서면 락하산이 면바로 바지선 우에 와서 내리도록 되였다. 그것도 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반시간 넘어 기다려야 탈수 있었는데 락하라는 말 자체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반대로 배우에서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여 연놀이와 같이 신기하였으며 아래를 내려다 보면 당금 바다에 떨어질것만 같았지만 비행기에서 타 보지 못한 락하산을 배우에서 타고 하늘로 오르니 별 재미였다. 해상락하산 타기 우리는 여기에서 해상락하산타기놀이를 다하고 또 쾌속정을 타고 15분가량 걸려 코란으로 갔다. 파타야에서 가까운 바다에는 여러 섬들로 된 군도가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코란이다. 타이어로 섬을 《코》라고 하며, 타이의 섬에는 이름 앞에 《코》가 붙는데 《코란》은 《란섬》이라는 뜻이다. 《코란》은 《산호 섬》이라고도 하며 파타야 서쪽 7.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이곳은 해변가 모래가 희고 보드라워 해수욕, 일광욕, 모래욕을 하기에 좋을 뿐만아니라 스쿠버 다이빙(호흡기를 달고 부력조절조끼를 입고 잠수하여 바다속을 누비는 수중 스포츠)을 할수 있어 이곳을 택한다고 한다. 우리는 산호섬에 가서 미리 준비한 수용복만 입고 또 쾌속정을 타고 바다가운데 있는 바지선이 있는데로 갔다. 우리는 바지선에 올라 호흡기를 달고 수중안내원의 안내하에 7,8메터 깊이의 바다밑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바다밑에서 수중안내원을 따라 바다밑려행을 하였는데 물밑에는 산호도 있었고 여러가지 모양과 색갈을 가진 물고기들이 놀고 있었으며 수중안내원이 빵쪼각, 과자부스러기를 뿌리면 그것을 먹겠다고 막 모여 들었다. 아마 그 놈들도 사람단련을 거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것 같았다. 바다밑려행을 하는 과정에 수중안내원이 우리들을 물밑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러 장의 사진가운데서 먹이를 주어 가지각색의 물고기들이 모여들 때와 산호앞에서 찍은것이 가장 멋있었다. 바다밑려행. 바다밑 려행을 하면서 바다물 압력으로 몸이 좀 죄여드는 감을 느꼈고 부력으로 하여 몸이 우로 뜨는 감을 느꼈다. 반시간 가량 바다밑 려행을 하고 수면으로 올라오니 바다물 압력과 물의 부력에서 벗어나 몸이 아주 자연스럽고 후련한 감을 느꼈다. 바다밑려행을 마치고 다시 쾌속정을 타고 산호도에 와서 해수욕의 즐거움을 느끼였다. 해수욕장. 산호도 해수욕장에도 호텔, 식당, 각가지 관광쇼핑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7진불산(七珍佛山)으로 갔다. 7진불산은 산의 높이가 170메터로서 태왕의 등극 50주년을 기념하여 석가모니상을 조각한 신상(神像)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것은 한 고승(高僧)이 지금의 9세왕을 위하여 룡맥(龙脉: 풍수설에서 산의 기세와 기복)을 찾아서 산을 깎아서 종단면을 평평하게 하고 이딸리아에서 수입해 들여온 레이저기술로 석가모니불상도안을 새긴 다음 18톤의 24K 황금을 부어 넣어 만들었는데 이 황금은 9세왕을 애대하는 타이의 백성들이 자원적으로 헌납한것이라고 한다. 신상(神像)심장부위에는 석가모니의 사리(舍利, 석가모니나 성자(聖者)의 유골)가 안장되여 있다고 한다. 7진불산(七珍佛山). 원래 려행일정에는 9세 황묘를 참관하는것이 있었는데 시간상 관계로 그것이 취소되였다. 타이의 9세 황묘는 파타야에 있으며 지금의 국왕을 위하여 건축하였는데 미래의 행궁(行宮)이란다. 타이민중들은 9세 황묘를 《국왕묘(国王庙)》라고 부른다. 9세 황묘안에는 력대의 고승들의 사리(舍利)가 모셔져 있으며 그들의 밀랍상관(蜡像舘)이 있다고 한다. 9세 황묘, 밀랍상관, 7진불산은 타이에서 3대 기관(奇观)이라고 한다. 이러한 3대 기관에서 두가지나 보지 못한것이 참 아쉬웠다. 7진불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또 한 가무극장에서 가무를 보았는데 그것은 동파락원에서 본것과 같이 다 같은 타이민속표현이기에 여기에서 략한다. [후일 계속]
165    동남아려행기[8] 댓글:  조회:4876  추천:0  2013-06-23
동남아려행기[8]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6-23 15:45:46 ] 클릭: [ ]   이튿날(10월 29일) 오전에는 가죽제품상점, 보석상점 그리고 보석가공공장을 참관하고 오후에 타이만(泰国湾)동쪽해안에 위치한 파타야시로 향하였다. 파타야시는 방코크에서 남동쪽으로 약 150킬로메터 떨어져 있으며 원래 이름없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곳이였는데 1961년에 윁남전쟁시 미국병사들을 위한 휴양지로 개발되여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우면서 아시아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발전하였으며 지금은 면적이 22.2평방킬로메터, 10만 5천명 인구를 가진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특별 행정구역이라고 한다. 방코크에서 떠나 장장 세시간 달리는 가운데 대지는 전부 끝이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한 벌판이였는데 파타야에 거의 갈때에야 산이 보이였다. 그 일망무제한 벌판에는 논밭이나 빠나나밭이 드문드문 보이였으며 경작지로 쓰지 않는 풀밭이 많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풀밭을 보면서 우리고장은 한푼의 땅이라도 묵일세라 밭을 일구어 모두 경작지로 사용하고있는데 이곳은 경작지가 부족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가이드한테 타이의 농업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타이는 중부가 평원이고 동부는 고원이고 기타 지방은 산구라고 한다. 타이의 경제와 사회구조에서 농업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주요 농산품들로는 중부에 입쌀, 카사바(木薯, 감자처럼 괴경을 주요한 전분으로 한다.) 과일. 동북부에 옥수수, 북부에 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과일로는 빠나나, 두리언(榴莲), 야자 등이라고 한다. 파타야에 가서 제일 처음으로 93사(孤軍)박물관을 참관하였다. 93사는 원래 국민당 운남지구 제8군에 예속되였는데 1949년에 인민해방군에 패전하여 퇴로가 막히자 709퇀 부퇀장 리국휘(李国辉)는 잔여부대 약 1,000여명을 거느리고 중국 광서로부터 버마(缅甸)경내로 철퇴하여 당지에 체류하고있던 원 국민당 항일원정군 잔여부대와 합병하여 93사를 성립하였으며 장개석의 《훈령》으로 금삼각지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공작전을 하였다. 그러나 60년대 중기에 와서야 고군 제3대(孤軍第3代) 지도자들이 반공대륙은 불가능한 임무이라는것을 깨닫고 타이북부 금삼각지대인 미사락진(美斯乐镇)에 철퇴하여 국적도 없이 집단생활을 하였으며 생계를 위하여 아편을 심고 헤로인을 가공하여 장사를 하다가 타이정부를 도와 금삼각지대의 최대반정부 무장세력 쿤사(坤沙)조직을 소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종래로 자기가 중국사람이라는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타이국왕은 무기를 놓는 전제하에서 고군(孤軍)을 중국난민의 신분으로 타이에 머물게 하고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그들이 타이 국적을 신청하면 입적시킨다고 한다.   유명한 93사박물관 입구   고군박물관에는 고군이 국민당과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 반공작전을 한 사료들이 사진으로 벽에 붙어 있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던 장비도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는 또 장가도 못가고 보토리로 늙은 그들의 후대들이 작은 다락집에서 아편을 피우고있었는데 그들과 한어로 통화가 되는지라 물어보니 부모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떴으며 자기들은 장가도 못가고 금삼각지대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으면서 생활하다가 지금은 여기에 정착하여 사는데 박물관 경영자는 그들에게 매일 100바트씩 준다고 한다. 내가 《중국에 가 보고싶지 않은가?》물었더니 《왜 화인으로서 중국에 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갈 신세가 되지 못하니 이렇게 보낸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비록 이국땅에서 태여나서 자랐고 늙어왔지만 필경은 중국인후예로서 중국을 그리는 그들의 심정을 읽을수 있었고 관광객들을 위한 동물원안의 《동물》신세로 된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무거워 났다. 고군후대들(孤軍后代) 나오면서 보니 출구 우에는 한자로 커다랗게 還我國籍(나의 국적을 돌려달라)라고 씌여있고 왼쪽에는 고군귀화 선서문이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孤军入泰籍宣誓詞 (고군 타이 귀화 선서문) 我们要遵從國家的法律和服從國家的命令 (우리는 국가의 법률을 존중하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며)   我们要以生命来愛護和保衛我们所生存的國土 (우리는 목숨으로 우리가 생존해가는 국토를 애호하고 보위하며) 我们要忠誠擁戴當今皇上陛下和皇族 (우리는 충성으로 현임황제페하와 황족을 받들어 모시며) 我们要以身體和生命來保護皇上和實座 (우리는 신체와 목숨으로 황제와 그 실좌를 보호할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十年北伐(10년 북벌), 八年抗战(8년 항전) 四年内战(4년 내전) 叱吒金三角(질타금삼각) 勝敗論狗熊(승패로 졸장부를 론하다)   란 글이 적혀 있었다. 고군박물관(孤軍博物館)출구 나는 이 글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도 국민당에 충성을 다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남정북전하면서 싸워왔건만 차려진건 국적도 없는 타국떠돌뱅이신세였고 결국에는 타이국왕에게 목숨을 바칠것을 선서하게 되였으니 이는 국민당에 대한 저주가 아니가하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고군박물관에서 나와 뻐스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서 코끼리를 타고 야산을 유람하면서 악어늪으로 갔다. 코끼리를 탈때에는 당지의 코끼리몰이군이 코끼리의 목을 타고 관광객들이 코끼리 잔등에 올려놓은 안장에 둘씩 앉았다. 그전에는 그저 동물원에서 코끼리구경이나 하였지 난생 처음 타보는 코끼리라 이것도 타이 유람에서 하나의 큰 기쁨이였다. 그곳의 야산은 우리 고장처럼 교목이나 관목이 많은것이 아니라 대부분 10여메터 지어 몇십메터 높이 자란 커다란 초본식물들이였다. 코끼리를 타다 늪가에 이르니 악어낚기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는데 악어들이 욱실거렸다. 우리도 배를 타고 늪 가운데로 들어가서 악어낚기를 하였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낙시대에 고기를 달아매고 수면우에 드리우면 악어들이 그것을 먹겠다고 풀쩍 뛰여오른다. 사람의 동작이 더 날쌔면 악어가 헛탕을 치고 악어가 더 날쌔면 사람이 고기덩이를 떼운다. 소름끼치는 악어낚기 악어낚기놀음을 끝낸 다음 우리는 2인승마차(해방전에 말하던 이십오시)를 타고 뻐스 있는데로 왔다. 그날 저녁에는 동파락원(东巴乐园)에서 타이민족가무표현을 보았다. 그들의 민속표현에는 타이인들의 복장, 혼례, 서민생활, 왕실생활, 태권도표현 그리고 타이인들의 민족투쟁 등이 있었다. 타이인의 민속가무 그 투쟁장면은 가관이였는데 칼이 서로 부딛칠 때면 불이 번쩍거리기도 하여 아주 치렬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코끼리를 타고 칼싸움을 하는데 치렬한 싸움끝에 타이인들의 영용한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우리는 10여 마리의 그 육중한 코끼리가 무대에 등장하여 치렬한 싸움을 하는 장면을 통하여 타이인들의 풍속과 용감한 기개를 볼수 있었고 또 이런 공연을 보게 되여 희한하기만 하였다. 기상전(騎象戰)의 한 장면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164    동남아려행기(7) 댓글:  조회:25641  추천:0  2013-06-15
동남아려행기[7] 편집/기자: [ 김택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6-14 15:31:16 ] 클릭: [ ] 대황궁을 다 참관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퍽 지났다. 점심을 먹고 먼저 면세점(免稅店)으로 갔다. 면세점에는 금은보석장식품, 의복류, 전자제품, 가죽제품 등 여러가지 상품들이 많았는데 가죽제품에는 우리고장과 달리 코끼리가죽과 악어가죽제품이 많았다. 타이에서는 가죽제품에서는 이 두가지가 특산이라고 한다. 우리 팀에서도 이러한 가죽제품들은 중국에서 만나기 힘들며 값도 여기에서 사면 싸다고 가방이나 돈지갑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페단위는 타이바트(泰铢)이고 환률은 인민페 100원에 470바트였다. 다음으로는 방코크 중심을 가로 지르는 차오프라야강(湄南河)에 가서 유람선을 타고 차오프라야강 량안의 경치를 구경하는것이였다. 유람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시간 기다려서야 유람선을 탈수 있었다. 차오프라야강 량안 구라파식 건축물 유람선에 올라 보니 방코크중심부의 차오프라야강의 너비는 약 200메터가량 되였으며 량안의 경치 또한 그야말로 가관이였는데 배에 앉아서도 대황궁을 볼수 있었다. 뾰족한 지붕을 얹은 타이의 전통건물, 원추형으로 올리 솟은 구라파식 건물, 하늘을 찌를듯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 나무숲속에서 서로 키돋음을 하며 지은 건물들은 그 아름다운 경치로 하여 유람객들의 감탄만 자아냈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니 강 동쪽은 대왕궁을 비롯한 고대건축물들이 많았고 강 서쪽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많았다. 차오프라야강 량안 타이전통 건축물 유람선은 한시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때에는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하여 어둠이 깃들자 서로 마주앉은 식탁에는 여러가지 과일, 사탕, 과자, 빵에 서양료리 그리고 맥주, 와인 및 기타 여러가지 음료들이 올랐다. 저녁코스는 인요(人妖)가무표현을 관람하는것이였다. 인요들의 가무표현은 금동니오락궁(金东尼娱乐宫)에서 진행되였으며 타이에는 인요들의 가무표현장소가 많은데 금동니환락궁에서 하는것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하루에 몇번 공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들어갈 때에는 먼저 들어간 관람객들이 꽉 밀려나오고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갔어도 관람석은 만원이였다. 막이 열리자 배경에는 한자로 된 “2008曼谷明星歌舞团”》이란 푸른색 네온등이 있었고 그 우에는 또 라틴어로 된 기다랗게 붉은색 네온등으로 된 글발들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2008방코크스타가무단》란 뜻이였는데 여기서 스타란 바로 인요를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가이드와 같이 앉아서 인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타이의 인요는 근 1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데 일부 생활이 곤난한 집들에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자아이가 5~7살쯤이면 인요를 배양하는 곳으로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성기수술을 받은 다음 장기적으로 녀성호르몬 주사를 맞거나 복욕하여 변태적으로 발육하여 허리, 팔다리가 가늘고 젖가슴이 불룩하게 두드러져 나오는 등 녀성다운 모습을 갖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 인요들은 예쁘게 생기고 녀성화하였지만 손과 발이 큰것이 녀성과 구별이 된다고 한다. 인요들의 가무표현 인요들은 그곳에서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을 배우고 성장한 다음 공연하여 얻은 수입을 집에 보내여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장기간 주사를 맞은 원인으로 나이가 들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나중에는 심한 합병증으로 수명이 짧아지는데 평균수명은 40세라고 한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여 수명이 좀 연장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정상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많은 차이를 보이고있다고 한다. 공연절목은 가무가 위주였는데 타이의 전통적인 가무, 궁전가무와 현대 류행가무 등 종목들도 있었지만 중국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여 대륙, 향항, 대만의 노래들도 있었는데 례하면 《血染的风彩》,《黄土高坡》, 《潇洒走一回》 등 노래들도 있었다. 이러한 중국노래들이 나올때면 중국관관객들은 흥이 나서 같이 따라 하였다. 무대배경이 아주 황홀하였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인물체격도 뛰여났고 복장 또한 화려하였으며 노래소리도 아주 청아하여 매 절목이 끝이 날때면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였다. 하지만 그들이 입만 벌릴뿐 노래소리는 모두 사전 록음으로서 가창(假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식기 제거와 장기적인 녀성호르몬주사와 복용으로 하여 음성이 변하여 남성의 목소리도 녀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듣기가 아주 구차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인요들에 대한 가이드의 소개를 듣는 한편 그들의 표현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들이 지금 이 나이에는 무대에서 꽃피는 《처녀시절》을 보내면서 돈을 많이 번다지만 일단 이 아름다운 《처녀시절》이 지나면 행복한 가정도 이룰수 없고 생육도 할 수없는 남성도, 녀성도 아닌 페인으로 밖에 되지 않는가? 고독하고 쓸쓸하고 또 신체적인 허약으로 늘 병마와 싸워야 할 그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 났다. 공연이 끝나자 관람객들이 막 밀려서 나오는데 인요들은 먼저 나와서 관람객들을 끌어당기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사진 한장에 인민페로 20원이였다. 나는 원래는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을 생각이 없었는데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으로 인민페 100원을 주고 5장을 찍었다. 사진/글 주청룡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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