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그녀는 시원하게 “아리랑”을 한곡조 선보였다. 끊길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끊어내며 곡이 가다가 꺾어져내리고 그 음을 굴려서 살짝 꺾는 추임새가 그야말로 구성졌다.
어린시절 김춘매씨는 노래부르기를 즐겼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일찌기 민요를 접했다. 게다가 딸이 예술가로 자라주길 바랐던 부모님 덕분에 남들보다 먼저 전통음악에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취미로 배우는 정도였다. 그러다 10살때 우연히 할머니 뒤꽁무니에 묻혀 함께 공연구경을 갔다가 민요에 매료돼 선생님을 청해 민요를 배울 정도로 음악의 세계에 매료됐다.
그렇게 오로지 민요라는 외길을 걸으며 연변대학 사범분원에서도 민요를 전공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으며 하루에도 수십번 되뇌며 련습에 련습을 거듭했던 그녀. 졸업하고는 곧바로 화룡시문화관으로 직장을 잡으며 온돌공연팀을 따라 공연을 시작했다.
어릴적부터 민요를 부르던것을 시작으로 민요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불투명한 미래로 고민도 많았다. 함께 민요를 부르며 의지했던 선후배들도 하나둘씩 포기하고 떠났다. 게다가 주위에서 “밥벌이도 되지 않는 일을 그만두라”고 권고하는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민요를 향한 그녀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그냥 좋았어요. 민요를 부르다보면 그속에 담긴 뜻과 선인들의 지혜를 느낄수 있지요. 여기에 가슴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구슬프면서 특유의 흥겨운 가락이 있거든요. 그게 제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더라구요.”
그런 그녀의 열정때문이였을가? 김춘매씨는 국내 크고작은 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금상도 여러차례 수상했다.
요즘 김춘매씨의 고민은 민요를 옛것쯤으로 외면하는 현실과 젊은 세대가 우리의 소리를 들을 기회가 줄어들고있다는 점이다. 민요는 계승자가 많지 않아 계승자를 문화재에 지정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온돌공연팀도 함께 다니던 동료들이 다 포기하고 저 혼자만 민요를 하고있어요. 나중에라도 잊혀질가 두렵기도 하구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이다.
그러다가도 금새 밝게 웃으면서 “민요는 제 삶의 일부분이예요. 지금 사정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민요로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되련다는 제 꿈은 변함이 없구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스스로가 노력한만큼의 결과가 돌아온다고 믿는 김춘매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락을 향유하고 자랑스레 여기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김춘매씨와 같은이들이 있기에 아리랑의 미래는 보다 밝아지지 않을가 생각한다.
연변일보/글·사진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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