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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산의 마지막 햇살을 쫓는 남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4월29일 09시13분    조회:7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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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손룡규
 


언제인가 귀주성 오지의 장마당에서 희한한 사건이 벌어진 적 있다. 무용인 손룡규가 “인신매매범”으로 오인되어 하마터면 시골사람들에게 주먹다짐을 받을 뻔 했던 것이다.
“실은 여자애들에게 남다른 감이 잡혔어요. 화려한 옷차림은 물론 손짓 발짓에 유혹되는 무용의 그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때 손룡규는 여자애들에게 함께 지프차에 앉아 그들의 사는 마을에 가보자고 청을 들었다고 한다. 웬 외지 사나이에게 끌리다시피 차에 앉는 여자애들을 보고 시골사람들은 난리법석을 놓았다. 진짜 여자애들을 유괴하는 어수룩한 범행자처럼 비쳤던 것이다. 안내인으로 나섰던 현지 정부부문의 관원이 구구히 해석을 해서야 이 “유괴 사건”은 일단락을 지을수 있었다.

실제로 손룡규는 이런 소설 같은 “사건”을 한두번만 겪은 게 아니다. 민간무용을 수집하러 편벽한 소수민족지역을 다니면서 위험한 경계를 드나들기도 했다.
“협곡에 있는 마을로 가는데요, 산이 너무 험해서 내처 앉은걸음으로 내려갔습니다.”

산은 위에 눈이 흰 모자처럼 덮여있었고 가운데는 누런 흙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기슭에는 푸른 숲이 띠처럼 둘려있었다. 삼색의 산은 마치 한점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바깥세상의 사람들에게 쉽사리 문을 열지 않았다. 동행한 여제자는 무서워서 산을 내리지 못하고 산정에서 자리를 지켰다. 시간이 오랫동안 흘렀지만 감감 무소식인 스승이 잘못되었나 해서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고 한다.

귀주성 서북부의 문산(汶山) 지역 시골에 다녀오면서 있었던 에피소드였다.

“그 마을의 사람들은 수목 숭배와 조롱박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손룡규는 마치 모래더미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세상과 떨어진 고장일수록 문화와 풍속이 원시적인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지요.

손룡규는 토착민들의 생활에서 예술의 천성을 읽었고 그걸 다시 무용언어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이런 작품은 나중에 귀주성의 무용콩쿠르에서 선후로 은상, 금상을 수상하며 산에 잡풀처럼 묻혀있던 이름 없는 마을 나아가 현을 일약 유명한 고장으로 떠오르게 했다.

사실 이런 경력을 만들기에 앞서 손룡규는 진작부터 중국 예술계의 널리 알려진 유명한 무용인이다. 그는 베이징무용대학 안무학부에서 교원으로 있으면서 일찍 많은 무용작품을 창작, 와중에 그가 창작한 무용 “이즈러진 봄”은 1994년 “중화민족 20세기 무용경전작품”에 선정되었다. 이 행사는 중국문화예술계연합회와 중국무용가협회, 중국무용연구소 등이 공동으로 주최, 중국 무용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태양신(太陽神)은 태양산에 오른 사람에게 빛의 혜택을 베풀고 있었다.
 
“태양산”에 늦깎이로 오른 막둥이

예술학교 시험관 앞에는 흙냄새가 풀풀 나는 18살의 시골총각이 우두커니 섰다. 시험관이 노래 한곡을 주문하자 시골총각의 입에서는 언제인가 마을 놀이터에서 익힌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모를 내세, 이 논 저 논에 모를 내세…”

잇따라 터진 시험관의 웃음소리. “허허 동네 아바이 같구먼요. 춤을 잠깐 춰요.”

시골총각은 쑥스럽다는 듯 눈길을 떨어뜨렸다. “저는 춤을 출줄 모릅니다.”

시험관은 서로 뭐라고 수군거리더니 또 주문을 했다. “그럼 업간체조라도 해보세요.”

이윽고 시험관 앞에는 하나 둘 구령을 외치며 팔다리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이상한 화면이 펼쳐졌다.

“그때 저는 그분들이 체육학원 모집을 나왔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팔다리에 공연히 힘만 꽉 넣었거든요.”

손룡규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낯이 가려워난다고 한다. 그런데 “뜬 소가 울타리를 넘는다”고 할까, 노래와 춤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손룡규는 시험관들의 혜안에 따라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 입학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그 시절에 있을 법한 전설이었다. 손룡규의 무용생애는 그렇게 18살에 갑자기 시작되었다. 시골을 떠난 기쁨은 잠시였다. 예술학교에 들어서던 그날 손룡규는 그만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무용연습장에 나타난 학생들은 저마다 일자형으로 다리를 쩍 벌리는가 하면 몸을 활등처럼 뒤로 제끼고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이구, 이건 사람이 아니고 인형 같네요.”

그러나 손룡규는 금세 무용이라는 이 미지의 예술에 주술이 걸린 듯 자석처럼 빨려 들어간다. 언어로 표달할 수 없는 것을 무용언어로 표현하면서 내심적인 감각을 생명처럼 무용언어에 불어넣는 무용예술은 그를 보이지 않는 실로 칭칭 휘감고 있었다.

그해 겨울방학 손룡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썰렁한 연습장에 홀로 남았다. 난방을 주지 않아서 얼음의 굴 같은 연습장이었지만 춤사위와 함께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침실로 돌아오면 금방 이가 덜덜 방아를 찧었다. 옷을 꽁꽁 껴입고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한기는 이불귀를 젖히고 새어들었다. 그해 겨울 그의 두 귀가 모두 얼었다. 한쪽 귀를 베개에 대고 녹일 사이면 어느 결에 잠이 깜박 드는데 그 사이에 또 다른 한 귀가 얼어들었던 것이다. 배고픈 고생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침식사는 옥수수떡, 점심식사는 옥수수 국수, 저녁식사는 옥수수 죽이었다. 목요일 아침에 식탁에 오르는 기름떡과 일요일 아침에 식탁에 오르는 이밥 한 끼는 천하별미였다.

첫 겨울방학이라고 아들의 귀가를 고대하던 부친은 학교를 찾아왔다가 안쓰럽다 못해 눈물을 떨어뜨렸다.

“무용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굳어진 몸이잖아요. 남보다 걸음마가 늦었으니 대가를 지불해야지요.”

손룡규는 잠을 자기 전에 다리를 끈으로 머리위의 침대다리에 꽁꽁 동여맸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다리가 마치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서 침대에서 내려설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집착이 그의 무용재능을 정상급으로 밀어주었다면 짬짬이 익힌 피아노며 피리 연주는 그의 천부적인 예술재능을 한 귀퉁이나마 빠끔히 열어 보이고 있었다. 이처럼 예술학교에서 갈고 닦은 기량은 그의 몸에서 잠자고 있던 예술세포를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있었다.
 
“태양산”을 비추는 햇살

지난 세기 70년대, 학교에 무용교원으로 남은 후 화룡에 민간무용 수집차로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동네의 웬 로인이 무용수집자들의 모임에 찾아와서 수다를 떨었다.

“자네들은 아는가? 칼춤은 말이여, 단을 꺾어야 한다니까.”

다들 로인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한다는 눈치였다. 그런데 손룡규의 귀에는 그 말이 우레처럼 들렸다. 단을 꺾는다는 말은 곧바로 칼춤을 출 때 손목을 꺾는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무용에 남다른 느낌을 받고 있은 것 같습니다. 남에게 잘 들리지 않는 무용언어가 쉽게 들리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흙무지에서 뒹굴면서 자랐던 시골생활은 언제인가 전혀 새로운 화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흥이 나면 논두렁을 가로타고 어깨춤을 들썩이는 고향사람들의 춤가락에서 손룡규는 오락뿐만 아닌 여러 인간상과 그 속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었다.

1979년, 손룡규는 북경견학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발레 “백조의 호수”를 관람하게 된다. “백조의 호수”를 눈으로 접하는 순간 그는 감격을 말로 그려낼 수 없었다고 한다. 무용은 그때부터 더는 직업이 아닌 사랑으로, 그의 분신으로 자리을 잡게 되었다.

이듬해 손룡규는 북경무용대학 학생모집 시험에 응시했다. 공화국 창립 후 처음 전국적으로 모집하는 학생모집이었다. 문화대혁명 10여년동안 초야에 묻혀있던 인재들이 저마다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왔다. 북경 시험장에만 해도 응시생이 2천여명으로 합격률이 무려 80대1일에 박근했다. 손룡규는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북경무욕대학 교육학부 민간무용과에 입학했다.

북경무용대학은 중국 최고의 무용학부이다. 손룡규는 중국 예술계의 거물급 인사인 가작광(柯作光), 오효방(吳曉邦) 등을 모두 스승으로 모시는 행운을 지닐 수 있었다. 이 기간 그는 스승들의 지도하에 민간무용 유산을 정리하고 교과서를 편찬하는 등 작업에 적지 않게 관여했다. 1984년 졸업한 후 손룡규는 북경무용대학의 강단에 올라서게 되었다.

“예전에는 정서적으로 무용을 보았지요. 그때 어떤 주제를 갖고 무용을 만들었다고 하면 이때부터는 무용의 천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생활경험과 지식은 손룡규의 무용창작에 두 날개를 달아주었다. 졸업한 이듬해부터 손룡규는 해마다 시와 성, 전국적인 상을 줄줄이 안아왔다. 무용계의 최고권위의 상인 “연꽃컵(荷花杯)”, 예술학교부문의 최고의 상인 “도리컵(桃李杯)”의 수상명단에는 당연히 그의 이름이 연이어 찍혔다.

“무용은 종교와 가까워요. 원시인들의 제사활동 등에서 초기의 무용이 나왔지요.”

손룡규는 무용의 진수를 파악하기 위해 고서더미에 묻혔다. 천년전의 “시경” “도덕경”이 그의 책궤에 꽂혔고 음양팔괘의 “주역”이 그의 손에 들렸다. 그가 집필한 “종교와 무용”, “무용을 해석하면서 대우(大禹)를 말하다” 등 책과 논문에는 력사의 오랜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얼마 전 민간무용 수집을 하느라고 사막지대를 헤집고 다녔던 그는 이번에는 또 시집 “춤을 추는 사막의 백양나무”를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손룡규는 단지 무용인이 아니라 학자이고 시인이었다. 또 이처럼 안무가들의 관례를 깨고 현대무용과 고전무용, 소수민족 무용 등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 그의 이런 독특한 경력과 성과는 무용대학에서 그의 작품세미나를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2014년 11월로 예정된 이 세미나는 학교 사상 처음으로 개인의 작품 공연과 함께 그의 안무창작 방법연구토론을 하게 된다고 한다.
 
“태양산”의 마지막 해살은 어디에

원시상태의 진실한 옛 춤은 거의 전설로 되어가고 있는 현 주소이다. 길이 열리고 마을이 개방되면서 옛날의 춤은 이리저리 변형되고 가공이 되어 사람들의 시야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민간무용이 아직까지 원시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고장이 있어요.” 손룡규가 귓가에 속삭이듯 하는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수민족이 집거하고 있는 운남성과 광서성에는 자연미의 무용이 많지만 오지의 귀주성에는 아직도 원시상태의 춤들이 적지 않다는 것. 배달겨레의 “강강수월래”와 같은 둘레춤은 중국에도 있으며, 이중 제일 잘 보존된 원시상태의 둘레춤은 기실 귀주성에 있다고 한다.

이런 민간무용의 수집은 통상적으로 성과 시, 현의 선전부 등 정부부문을 통한다. 그러나 이때 수집자에게 선을 보이는 무용은 벌써 여기저기 가미된 경우가 다반사이다. 원시상태의 진실한 무용을 발견, 발굴하려면 바깥세상과 떨어진 오지의 마을에 찾아가야 한다는 게 바로 손룡규의 지론이다.

상고시절 태양을 쏘아 떨어뜨렸다는 전설적 영웅 후예(后羿)의 후손도 그렇게 만났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그들을 묘족의 후예라고 일컫지만 그들은 묘족 계렬과는 다른 각가인(革家人)이라고 자칭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여자들의 모자는 빨간색의 둥근 모양을 하고 있으며 거기에 화살모양의 꼬챙이가 꽂혀있었다. 그들은 길을 막고 술을 먹어야 길손을 마을로 들여보내며, 생황을 불면서 사랑의 뜻을 춤으로 전하는 기이한 풍속의 민족이었다.

그들의 독특한 풍속과 문화를 엮은 무용 “태양산”은 나중에 귀주성 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으며 뒤이어 전국 연꽃컵 경연에서 창작부문의 금상을 안아왔다.

“어느 원시부락에 갔는데요, 아직도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겁니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총 두세 자루가 있었는데, 어떤 집은 보루처럼 만들고 벽에 총구멍을 숭숭 뚫고 있었다. 총잡이들은 저마다 명사수였다. 어깨 뒤에 총을 멘 그대로 묘준도 하지 않고 총을 쏘아 단방에 새를 떨어뜨리더란다…

저택 부근의 찻집에서 전설 같은 이 이야기를 말하는 손룡규는 자못 흥분된 어조였다. 그는 이때만큼은 북경이 아니라 오지의 신비한 태양산에 달려가서 서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태양산의 원초의 기억을 담은 마지막 햇살을 만나고 있었다.


김호림
 "예술세계"잡지  2014년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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