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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와 중국조선족의 역할
- 세계한인경제문화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활용
1. 들어가는 말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조선족들은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 동북부지역(흑룍강성, 길림성, 료녕성)으로부터 동부 연해지역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2년 중한 수교 이후에는 한국을 중심으로 일본, 미국, 동남아, 러시아 및 유럽 등지에로 그 이동 범위를 점차 확대해 오고 있다. 2009년말 현재 한국에 장기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 인구는 36만 명으로 통계하고 있으며[1], 한국국적 취득자와 불법 체류자들을 합치면 45만 명에 달할 것이다. 이 외에 일본에 5만 명, 러시아에 3만 명, 미국에 4만 명, 동남아 및 유럽 등 지역에 3만 명으로 추계되어[2], 중국 이외의 국가와 지역에 6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이 외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지역에 10만 명, 청도(연태, 위해)를 중심으로 화북연해지역 20만 명,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화동지역5만 명, 광주, 심천을 중심으로 하는 화남지역 5만 명의 인구를 합치면 4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중국내 동북부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과거 대략 200만 명이 살고 있던 동북부 지역의 1/2 이상이 되는 조선족 인구가 중국의 대도시 지역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확산되어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8월에 한중 양국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18년간이라는 짧은 기간임에 불구하고 그 우호 협력관계는 “외교사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급속한 속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여기에는 가까운 지리적 위치, 근대에서의 공동한 역사적 경험, 경제 분야에서의 상호 보완 및 협력, 문화적 근접성 등에 의한 여러 원인들이 중요하겠지만, 이 외에도 한중 간에는 조선족이라고 하는 특수한 존재도 커다란 역할을 발휘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조선족이라고 하면, 중국의 시점에서는 중국 국적을 가진 공민으로 “중화민족”이라고 하는 다민족사회 중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국 혹은 한반도의 시점에서 보면 같은 핏줄을 가진 해외동포임에 틀림없다. 이에 따라 조선족은 한중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특수한 존재로서, 양국 관계에 있어서도 자체의 역할을 발휘하여 왔다. 물론 중국의 공민집단으로서 조선족은 한반도에 대하여 정치적 영향력은 직접 행사할 수는 없으나,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는 한중관계 발전에 대하여 그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본 발표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발전과 그 과정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역할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세계한인경제문화네트워크 구축에 있어서 조선족들의 역할 활용에 관하여 소견을 제언해보고자 한다.
2. 한중 관계의 변화와 발전
1992년 8월 24일, 한중 양국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그 후 양국 관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역문제 등 제반 영역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1) 선린우호협력 시기(1992-1998년)
1992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한국의 국가 원수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1994년 3월에 김영삼 대통령이 방중에 이어, 동년 10월 李鵬 국무원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중국의 국가원수로서 江澤民 국가주석이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이 시기, 양국 간의 교류는 주로 경제, 무역분야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군사, 안보 분야에서의 교류는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진척되었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소원해졌지만,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냉전기의 “대북 일변도” 정책으로부터 탈피하여 남북과의 “균형적인 발전 관계” 에로 전환하게 되었다.
(2) 협력동반자관계 구축 시기(1998-2003년)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江澤民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를 “선린우호협력관계”에서 “21세기를 향한 협력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킬 것에 합의하였다. 그후 양국은 동아시아 금융위기 극복에 있어서 경제 및 금융 분야를 중심으로 군축, 마약, 테러, 환경 등 분야에서의 협력도 확대해나갔다.
1999년 8월 조성태 국방장관이 한국의 국방장관으로서 첫 방중에 이어 2000년 1월 遲浩田 중국 국방부장이 답방함으로써 양국 간의 군사분야에서의 교류도 활발하게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 10월 朱鎔基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양국관계를 전면적인 새로운 협력단계에로 발전시키로 합의하였다.
한중 간의 협력, 발전과 양국 지도부 간의 상호 방문은 21세기에 있어서 양국 관계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3)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 발전시기(2003-2008년)
2003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였으며, 胡錦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양국관계를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함으로써, 양국 관계 수준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격상시켰다.
2005년 11월, 胡錦濤 국가주석이 한국을 국사 방문하였으며,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안보 등 제 분야에서의 협력을 확대하고,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ASEAN+3, 한중일 3국 협력, EAS, ARF, APEC, ASEM 등 지역 협력에 있어서도 긴밀한 협력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으며, 한국은 중국의 시장경제지위(MIES)를 인정하였다.
이 시기, 2006년 10월의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 2007년 4월의 溫家寶 총리의 방한 등으로 인하여 양국 지도부 간의 상호 방문이 의례화되었다. 또한 2006년 4월의 중국의 曹剛川 국방부장이 남북한을 방문하였으며, 2007년부터 한중 간의 군사 핫라인 설치에 합의하는 등 군사분야에서의 협력도 확대되었다.
(4)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 구축시기(2008년 - 현재)
2008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胡錦濤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양국관계를 기존의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에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키는데 합의함으로써, 양국간 경제, 통상 분야에서의 협력 심화 및 정치, 외교, 사회, 문화 등 제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를 추진하기로 하였으며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동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올림픽 개막식 참석 계기로 또 한 차례의 한중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으며, 같은 달 24일 胡錦濤 국가주석의 국빈 방한시에 양국 정상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 심화를 위한 협력 방안을 구체적으로 협의하였다. 방문기간 양국 정상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으며, 2010년 및 2012년을 각각 “중국 방문의 해”와 “한국 방문의 해”로 정하고, 관광을 비롯한 다양한 양자 교류 행사를 적극 추진하여 양국 간의 인적 교류도 크게 확대하기로 하였다.
1992년 8월에 한중 국교가 수립되어 201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국 관계는 “선린우호협력관계”로부터 “협력동반자관계”에로, “협력동반자관계”에서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에로, 현재는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에로 발전되어 그 관계는 날로 심화, 확대되어 왔다.
양국 수뇌 간의 상호방문을 비롯한 정치적 협력관계, 무역, 금융, 투자 등을 비롯한 경제적 협력관계, 문화교류, 군사교류 등 제반 영역에 걸쳐 한중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또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한중 양국은 상호 이해하고 상호 협력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기간 2000년의 마늘 분쟁, 2004년의 “동북공정” 논란, 2008년의 올림픽 성화 봉송 문제 및 인터넷 상의 양국 네티즌들의 논쟁 등으로 인하여 양국 간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중관계는 기본적으로 안정하고도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음은 모두가 공인하는 사실이며, 이러한 추세는 금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1] 「등록 외국인 국적·지역별 현황」(2009년 12월 기준), 법무부 통계, http://www.moj.go.kr/HP/COM/bbs_003/ListShowData.do?strNbodCd=noti0097&strWrtNo=49&strAnsNo=A&strOrgGbnCd=104000&strRtnURL=IMM_6070&strAllOrgYn=N&strThisPage=1&strFileP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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