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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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20년을 기념하여 댓글:  조회:518  추천:1  2022-03-31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20년을 기념하여 리성일(중국사회과학원) 2022년에 들어와서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는 설립 2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 2001년 11월말,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는 조선족학생센터(KSC)사이트 설립 1주년을 계기로 북경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였다. 당시 조선족대학생들과 교류를 많이 해온 민족번역국의 리란녀사가 제일 먼저 제안했다. 이에 청년세대들의 성장을 관심한 중국공정원의 강경산 원사, 중국과학원의 한경청 연구원, 김록송 연구원, 중앙민족대학의 서영섭 교수, 국무원발전연구센터의 김인웅 연구원, 김의진(현 애심장학회 고문) 회장 등 북경조선족사회의 여러 학자, 전문가, 기업가 및 직장인들이 적극 호응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우리 민족대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자원 결성한 민간자선모임으로 출발했다. 애심장학회 첫 장학금 발급식은 2002년 10월 13일 북경 중앙민족번역국에서 개최되였으며, 18명의 대학생들에게 3만여원이 전달되였다. 20년 동안, 150여만원의 장학금을 500여명 대학생들에게 2012년 9월 16일, 북경시민족련의회는 에 근거하여 상무리사회의 심의를 거쳐,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에 대하여 북경민족련의회 소속 공식 회원단위로 정식 비준하였다. 설립초기 김의진, 허성일 등 기업가들이 협찬한 2000원과 리란녀사가 애심장학을 위해 선뜻 기부한 1000원을 합쳐 3000원의 종자돈으로 출발하여 애심장학 전용구좌를 설치하였다. 그 동안 많은 애심인사들의 다년간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하에 애심장학회는 20년 동안 커다란 성장을 거듭해왔으며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애심장학단체로 발전하였다. 2001년 10월에 설립된 이래, 현재 2022년 2월말까지 모금된 후원금 총액은 인민페215.4만원, 그중에서 장학금과 활동비로 166.1만 원을 지출하였으며, 장학금 152.4만원을 18기에 걸쳐 500여명 대학생들에게 지원하였다. 또한 장학금외에도 수십여명의 우수자원봉사 대학생들에게 자원봉사상도 수여하였다. 이외에 북경정음우리말학교 후원리사회 단체리사로서 매년 5000원을 후원하고 있다, 애심장학회는 초기부터 중국공정원의 강경산 원사가 명예리사장을 담당하였으며, 현재는 중국과학원의 김창주 연구원을 명예리사장으로 모시고 있다. 초기 리사장은 최훈 사장이 담당하였고 현재는 커시안그룹의 박걸 동사장이 담당하고 있는데 박걸 리사장은 매년 거금의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다. 사무총장으로는 장학회 창시자의 한분인 리란녀사가 20여 년 동안 줄곧 맡아왔다. 현재 리사회는 명예리사장 김창주 연구원, 리사장 박걸 동사장, 부리사장 한룡갑 사장; 고문 중국인민해방군 류병훈 소장, 김의진 회장, 문일환 중앙민족대학 교수, 김룡철 북경과학기술대학 교수, 최훈 동사장, 김영식 동사장 및 사무총장 리란 녀사 등으로 구성되였으며, 리사회 산하에는 장학금 집행위원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집행위원회 초기 주임으로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정신철(현 북경정음우리말학교 교장) 연구원이 맡았으며, 2015년부터는 중국사회과학원의 리성일 박사가 맡고 있다. 집행위원회에는 사무총장 리란녀사를 필두로 장학회 부리사장 한룡갑, 고문 북경과기대학의 김룡철 교수, 리령 회장을 비롯하여 박정희, 박영자, 지연, 홍설매, 주소란 등 중요한 협력단체인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의 골간 멤버들, 중국림업과학연구원의 림원철 연구원, 북경공상대학의 김추 교수, 중앙민족대학의 김청룡 교수와 최유학 교수, 초창기부터 꾸준히 참여해온 지영권 사장, 김은휘 교원, 최광일 사장, 그리고 장학생 출신들인 조우송 변호사, 김현철 교수, 리영수 금융사, 김문철 변호사와 한동준 《중국민족》 잡지사 기자 및 커시안그룹의 리봉섭 부장 등 20여명의 집행위원들이 일상 운영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애심장학회는 초기에 매 학생들에게 장학금2,000원을 지원하였으나 10기부터는 3,000원으로 높였으며, 2019년 제16기 장학생부터는 5,000원으로 늘여 후원하고 있다. 대학생들에 대한 경제적 후원외에도 조선족대학생 자원봉사상, 대학생 성장포럼, 대학생 글짓기콩클, 북경시 통주구에 있는 주문빈렬사(본명은 김성호, 조선족출신 혁명렬사) 모교—로하중학교 탐방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왔다. 특히 북경의 조선족단체로는 처음으로 주문빈렬사의 모교인 통주 로하중학교를 방문하고 학교의 주문빈렬사 장학금을 1만원 기증하고 도합 네차례에 걸쳐 4만원을 후원하여 학교측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7년부터 수도 북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족대학생들을 네차례나 조직하여 통주 로하중학교 내에 세워진 주문빈렬사의 동상과 혁명렬사비, 애국주의혁명 전통교육 전시관 참관 등을 통한 애국주의혁명 전통교육을 진행해오고 있다. 이러한 의의 깊은 후원과 활동은 많은 애심 후원인사들이 다년간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서로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애심정신을 발양한 집단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국적과 민족,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여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된 특수한 활동방식이지만, 서로 믿고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애심리념이 구현되여있다. 오늘날 애심장학회의 성장은 북경커시안그룹(박걸 동사장),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리령 회장),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 중앙민족어문번역국 조문실, 민족출판사 조문실, 백우(伯友)골프협회(리명주 회장), 연변애심어머니협회, 연변장애자협회, 재외동포재단, 아시아발전재단, 신한은행 등 해내외 기업과 단체, 그리고 이미 작고하신 강경산 중국공정원 원사와 중국과학원 한경청 연구원 등 초창기 창설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애심 후원인사들의 사심없는 협조와 지지, 진심어린 후원과 절대 갈라놓을 수가 없다. 또한 인민넷 조문판, 《중국민족》잡지사, 중앙인민방송 조선어부, 《민족화보》잡지사, 료녕조선문보,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조글로사이트, 연변TV 사랑으로 가는길 프로, 중국조선족소년보, 《중학생》잡지사 등 우리 민족 사회의 언론매체들도 매우 중요한 홍보역할을 해왔다. 애심장학, 우리민족 사회의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 오늘날 애심장학회에는 학자와 전문가, 기업가, 직장인, 가정주부, 퇴직간부, 심지어 어린 학생들에게 이르기까지 전민족적, 전사회적인 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발전하였다. 최근에는 장학생출신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후에 애심장학회에 후원금을 기부하거나 집행위원회에 가담하여 활약하고 있어 장학회의 량성순환발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조선족사회가 점차 성장하고 성숙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의 주체성, 포용성, 나아가 고수준발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이 반영되여있다. 전국적으로 애심활동이 다양해짐에 따라 이제는 ‘애심’이 우리 민족사회의 하나의 새로운 리념과 대표적인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경애심장학회,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 전국애심녀성포럼, 전국 여러 지역의 애심어머니협회를 비롯하여 ‘애심’을 리념으로 하는 많은 단체가 설립되고 애심활동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는 전국적인 애심활동들이 서로 련결되고 협력함으로써 애심활동네트워크가 점차 형성되고 있는 추세이다. 오늘날, 경제적인 리유로 우리 민족 학생들이 학업을 그만두거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비록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를 비롯해서 진달래장학마을, 꽃망울회 등 여러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후원 활동을 벌리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경제적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가정과 학생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각 단체들은 자체의 활동과 친목을 도모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후대들에게도 관심과 후원으로 서로 사랑하고 이끌어주는 애심문화의 꽃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두번째 100년 분투목표를 향해 고수준발전을 리념으로 온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는 정세에서 문명한 우리민족사회를 건설하려면, 지금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애심문화를 널리 전파하여 전사회적인 애심문화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야 할 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까지 활동해온 애심단체와 활동을 널리 알리고 전사회적인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시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애심장학회 설립 20년을 기념하면서 애심장학회를 비롯한 전국적인 애심단체와 활동을 널리 소개하고 하루빨리 전국적인 ‘애심장학포럼’과 같은 전국적인 애심장학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서로가 분산된 활동이 아닌 서로가 협력하고 지지하는 애심리념과 함께 전사회적인 애심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나아가 우리민족문화의 하나의 브랜드로서의 ‘애심’문화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인식하고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가야 할 것이다.   인민넷 조문판
3    稳定的中韩关系有利于两国人民的共同利益 댓글:  조회:356  추천:1  2022-03-15
稳定的中韩关系有利于两国人民的共同利益   李成日,中国社会科学院亚太与全球战略研究院专家     2022年3月10日,韩国第20届总统选举结果终于揭晓,国民力量党候选人尹锡悦以微弱之差击败了执政党共同民主党的候选人李在明,当选为第20任韩国总统。   2021年3月,尹锡悦突然辞职检察总长职务以后,在一年的短暂时间内当上了最大反对党国民力量党的总统候选人,跟另一反对党国民之党候选人安哲秀实现了单一化,奇迹般地登上了总统宝座。尹锡悦的当选打破了过去韩国总统竞选的几个“魔咒”,实现了超高速成功当选总统的纪录:第一,打破了首尔大学法学院出身不能当总统的纪录。之前的大国家党候选人李会昌、李仁济、李洛渊、崔在亨、元喜龙等大牌政治家均是首尔大学法学院毕业的高学历者,但都未能成功。金泳三总统则是毕业于首尔大学哲学系专业。第二,打破了1987年韩国民主化以来未当选过国会议员不能当总统的纪录。卢泰愚、金泳三、金大中、卢武铉、李明博、朴槿惠以及文在寅等历届总统都有当过国会议员的经历,但尹锡悦长期在检察机关工作,一直没有在中央政治舞台上活动过。第三,打破了民主化以来稳定的中韩关系有利于两国人民的共同利益 一个阵营连续执政10年的纪录。冷战结束,在卢泰愚、金泳三为总统的保守阵营执政10年后,金大中、卢武铉为总统的进步阵营执政了10年。此后,李明博、朴槿惠为总统的保守阵营执政了9年。文在寅总统执政5年后,保守阵营的代表人物尹锡悦成功当选总统,结束了进步阵营的执政。第四,尹锡悦当选还打破了其他一些纪录,他是第一位首尔出身、20世纪60年代出生、检察总长出身的第一位当选的总统。此外,尹锡悦共获得16394895张选票,并以0.73%的最小得票率差当选了总统。     尹锡悦 图源新华社     尹锡悦虽然成功当选为总统,但他所面临的课题也不少。此次大选中,韩国国内舆论因保守阵营和进步阵营而严重分裂,而且以很小的差距获胜,加上拥有170个国会议席的共同民主党的牵制,他上任一开始可能就要解决很多问题。     第一,是国民舆论的整合问题。两大阵营纷纷表示,希望新当选的总统尽快改变国内保守和进步阵营之间严重对立问题,要尽快实现国民舆论的整合。   第二,由于尹锡悦没有当选过国会议员,如何进行权力分配,不仅关系到新的执政势力的凝聚问题,还关系到如何照顾为他当选而出力的党内外人士,也就是如何合理进行“论功行赏”的问题。这里很重要的问题是跟尹锡悦实现单一化的安哲秀的待遇以及跟国民之党的合并问题。如果推进不顺畅,可能再次造成分裂,也有可能造成很不雅观且失信的形象。   第三,尹锡悦竞选中所提出的各种公约的兑现问题也是能否维持对他支持率的关键。虽然他在竞选过程中提出了很多承诺,但如何兑现,尤其关键的是如何有效确保财政来源问题。目前,一半以上国会议席都被共同民主党所掌握,能否得到他们支持,仍然是个未知数。   第四,奥密克戎病毒在韩国迅速蔓延的情况下,其情况愈演愈严重,所以既要有效防控疫情,又要尽快恢复经济也是尹锡悦所面临的最大难题。尹锡悦虽然在竞选中多次谴责文在寅政府的防控措施不力,但他的新政府能否提出有效的措施也很难说。   此外,尹锡悦还面临一些对外关系问题。首先是停滞不前的朝韩关系能否得到改善,其次近几年一直冷漠的韩日关系能否恢复,还有俄乌冲突中,韩国既满足美国的需求,也能否减少经济损失,等等。当然,今年是中韩建交30周年,如何稳定和进一步发展中韩关系,也是很重要的外交课题。   尹锡悦在总统竞选中,多次谈到涉华问题,有些主张异常强硬,保守色彩极其浓厚,在国内外引起了不少反响。他本人以及外交安全智囊团队公开表示,要放弃文在寅政府在中美博弈之间的所谓“战略模糊外交”,加强韩美同盟为基轴的同盟外交,谴责文在寅政府的对华政策是一种“屈服外交”。甚至,还主张有必要时可以考虑,从美国购买“萨德”反导系统在韩国追加部署。如果他上任以后采取这种极端措施,中韩关系必然面临严重的挑战,甚至可能出现倒退。因此,中韩两国已经开始出现不少担忧的声音,希望两国关系继续发展下去。   事实上,稳定的中韩关系不仅符合两国人民的根本利益,也有利于维护朝鲜半岛的和平以及东北亚局势的稳定。冷战结束以来,中国已经跟7届韩国政府打过交道,其中不仅有保守政权,也有进步政权,而且基本上保持了持续发展的势头,积累了很多交往经验。当然,很有必要关注韩国新一届执政团队的言论和动向,警惕破坏两国关系的稳定,以免出现不必要的误解和战略误判。   过去的经验表明,越陌生的时候,越要进行交流和沟通。一方面祝贺新总统尹锡悦顺利起航,并希望韩国新一届政府继续推动中韩关系发展的同时,也要密切保持多层次、多渠道的沟通,尤其是高层之间的密切互动,尽快建立可信任、稳定的友好合作关系。   1992年中韩建交以来,两国关系一直稳定地友好发展,已经形成了全面战略合作伙伴关系。中国是韩国最大的贸易伙伴国,韩国是中国的第三大贸易伙伴国。两国之间的经贸合作是中韩关系的压舱石。虽然受到新冠肺炎疫情的影响,但两国之间的贸易额始终在增加,合作的机会也在增多,各种合作在持续扩大。如果韩国新政府上任以后,从中韩两国的共同利益和大局出发,双方共同努力有效管控分歧,积极沟通和摸索合作,那么两国合作的发展前景仍然会光明。   来源:中国经营网
2    북경대학 김경일교수님을 기리며 댓글:  조회:221  추천:2  2021-11-12
북경대학 김경일교수님을 기리며 〇리성일(중국사회과학원) 2021년 11월 8일, 항상 존경하는 북경대학 외국어학원 조선언어문화학과의 김경일교수님의 서거 1주기가 된다. 지난해 5월 28일에 마지막으로 위챗으로 련락드린 후 반년도 되지 못해 교수님은 불치의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2017년에 교수님은 저의 모교인 북경대학을 은퇴하셨지만 중국, 한국 및 일본 등 동북아지역에서 한창 정력적으로 활약하시다가 참으로 아까운 생을 너무나도 급작스레 마감하시였다. 전혀 예상없이 들이닥친 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잘 믿겨지지도 않고, 믿기도 어려운 심정이다. 촬영애호를 가지고 있는 고 김경일교수님 비록 교수님 밑에서 직접 공부를 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교수님의 제자라는 생각을 가져왔다. 돌이켜보니 교수님과의 인연도 이제 거의 30여년이 가까온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아마도 1992년 8월이 첫 만남으로 기억된다. 그 때는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이였다. 친구의 소개로 당시 아시안게임촌(亚运村)내에 있는 오주호텔(五洲大酒店)에서 개최되는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대회에 학생 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이 학술 대회는 국제고력학회(본부: 일본 오사카)가 주최한 조선학 국제학술대회로서 중국, 조선, 일본, 로씨야, 인도, 오스트랄리아, 독일 등 나라 외에도 당시 아직 중국과 수교하지 않은 한국 학자들도 대거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김경일교수님은 대회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을 담임하셨다.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나로서는 당시에는 제대로 리해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참가한 학술대회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에서 북경대학 최응구교수님이 국제고려학회 회장으로 당선되였으며 대회 페막식은 인민대회당 연회청에서 개최되였다. 인민대회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인상이 가장 깊은 것으로 우리 선배 학자들의 활약에 다시금 탄복하게 된다. 인민대회당에서 조선반도 관련 학술대회 페회식을 개최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것으로 거의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북경대학 김경일교수, 김훈교수, 중앙당학교의 조호길교수, 대외경제무역대학의 서영빈교수 등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족 중견학자들의 활약으로 인해 대회는 성공리에 개최되였다. 그후 조선, 한국 도서를 빌려보러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도서실에 갔을 때 교수님을 자연스럽게 여러차례 만나 뵙게 되였다. 만날 때마다 교수님은 항상 저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제가 석사공부를 할 때 우연하게도 교수님이 대학 교실에 와서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여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였다. 후에 알고 보니 교수님은 박사 공부를 하기 위해 40대인데도 젊은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학업에 열중하셨던 것이였다. 2001년에 제가 일본에 박사 공부 하러 류학간 뒤 얼마 되지 않아 교수님은 48세에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시였다. 후에 박사학위 론문은 학술저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기원〉(론형, 2005년 출판)이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간되였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졌다. 제가 석사 공부를 마칠 적에 일본 류학에 대해서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때마침 교수님도 일본 게이오대학에 일년 동안 방문학자로 다녀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쪽 사정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교수님의 소개를 통해서 저는 일본 게이오대학의 유명한 조선반도 전문가인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님 휘하로 박사 공부하러 떠나게 되였다. 오코노기교수님은 저의 류학 신청을 받고 김경일교수님께 저의 사정을 문의하셨으며 이에 교수님께서 지지와 협조의 말씀을 해주셨기에 제가 순조롭게 일본에 류학 가게 되였다. 일본에 류학갈 때 김경일교수님은 오코노기교수님은 참으로 유명한 분이시니 게이오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일본에서 류학 공부 할 때 학술회의 차로 일본에 오시는 교수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만날 적마다 깊은 가르치심을 받았으며 저도 항상 교수님과의 만남을 소중한 기회로 간주해 왔다. 제가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가서 대학 강의를 할 때에도 조선반도 관련 세미나에서 수차 만나 뵈였으며 교수님과의 인연은 같은 연구자로서 계속 이어지게 되였다. 2013년에 북경에 돌아온 후에 교수님은 자신이 주최하시는 북경대학 조선반도포럼에 흔쾌히 초청해주셨다. 이 포럼은 교수님이 2010년부터 3개월에 1회씩 개최하는 조선반도 관련 세미나로서 여기에는 북경대 교수들 뿐만 아니라, 중앙당학교, 중국사회과학원, 인민일보, 신화통신사 등의 유명한 학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하였다. 때로는 조선, 한국 및 일본의 학자, 전문가들과 함께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까지 70여차의 포럼을 운영해 오시였다. 2014년 10월부터는 교수님이 맡으신 한국 《내일신문》 중국 시평에 집필진 일원으로 저를 받아들여 주시였다. 이 중국 시평은 교수님이 2010년 10월부터 북경대학, 중앙당학교, 연변대학 등 조선반도 연구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한주일에 한편씩 관련 칼럼을 발표하는 중요한 플래트홈이였다. 7, 8명의 교수님들이 륜번으로 10여년 넘게 발표해왔으며 교수님은 병환에 계시면서도 지난해 4월에 마지막으로 한편을 남기시였다. 그동안 교수님은 150여편이 넘는 칼럼을 발표하시였다. 저도 이 시평 집필에 참여하면서 조선반도 문제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보다 폭넓은 리해를 가지게 되였다. 2015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된 중, 한, 일 국제심포지엄에 김경일교수님(앞줄 우2)과 함께 참석한 필자(두번째줄 좌1) 지난해 5월 말, 교수님으로부터 갑자기 이제부터 칼럼을 쓰지 못하니 자신을 대신해서 운영을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련락을 받았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워 그 리유를 문의해보았지만 설명이 없이 부탁만을 남기셨다. 당시 교수님의 병환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교수님이 믿고 맡기시는 것이기때문에 그 부탁을 수락하게 되였다. 얼마 후에 교수님의 불치병 소식도 듣게 되여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여 만나뵙고 싶었지만 사모님과의 통화를 통해서 치료에 전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찾아뵙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반년도 되지 않아서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코로나 사정으로 인해 교수님의 추도식은 열리지 못하고 유체 고별의식만을 팔보산(八宝山)장의관에서 거행했지만 전국 각지와 한국, 일본 그리고 주한중국대사관, 주조중국대사관 등 해내외 많은 곳에서 보내온 화환으로 교수님과의 고별의식을 장식하였다. 교수님의 생애에 대한 존경과 평가를 충분히 보아낼 수가 있었다. 당일 사모님을 만나뵈였지만 병환에 계신 교수님을 한번도 뵙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워 위로의 말씀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김경일교수님의 한생은 중국에서 태여나서 걸어온 우리 조선족들의 삶의 한단면을 충분히 보여주셨다. 교수님은 1953년 1월에 길림성 돈화시의 어느 한 시골에서 삼형제 중의 둘째로 태여났다. 열여덟의 나이에 군에 입대했으며 제대된 후에는 기계공장에서 근무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학입시가 회복된 후에 교수님은 25세의 나이에 연변대학 중문계에 입학하였다. 25세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할 나이지만 교수님은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기 위해서 고심한 자학을 통해 연변대학에 끝내 입학하였던 것이였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중앙민족어문번역국에 배치되였으며 번역국의 부편심, 《민족역단》 편집으로 근무하였다. 1992년에 북경대학 조선어학과에 전근되여 2017년에 은퇴하실 때까지 조선어학과 주임, 조선문화연구소 소장, 중한우호협회 리사, 일본게이오대학 객좌교수, 연변대학 겸직교수, 한국 동국대학 특약편집 등 해내외 여러 학술직을 담임하시였다. 김경일교수님은 조선반도 문제, 나아가 동북아지역 연구의 저명한 국제관계 전문가였다. 교수님의 저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기원》은 국내외 학계의 인정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교수님이 떠나신 후, 많은 학자들이 중국의 조선반도 연구에서 남겨놓은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말씀을 저에게 들려주시군 한다. 일본 게이오대학 오코노기교수님은 김경일교수님과의 학술교류를 통하여 조선반도 문제에 연구에 있어 균형 있는 시야의 중요성을 알게 되였다고 지적해주시였다. 특히 조선반도 문제 연구에 있어서 지정학적 영향을 완화시키고 지경학적 접근을 강조하시는 교수님의 주장은 지금도 참으로 의미가 깊다. 교수님의 문장은 항상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진보, 보수 진영에 관계없이 교수님의 객관적이고 예리한 분석과 론리적인 관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김경일교수님은 조선반도 문제 뿐만 아니라 조선족 연구에 있어서도 걸출한 학술성과를 남기시였다. 1990년에 북경에 있는 젊은 학자와 대학생들을 조직하여 《중국조선족이민실록》(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출판)을 집필, 편집하였다. 1989년 음력설 기간을 리용하여 길림, 료녕, 흑룡강 동북3성의 도시와 농촌 이민 1세대 60여가구를 직접 취재하고 기록을 남겼다. 기록에 나오는 이민 1세대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이 기록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 부주임의 격려사와 전임 연변대학 부교장이셨던 정판룡교수님의 머리말도 참으로 의미 깊은 글들이였다. 이 때에 이미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이 이렇게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사료로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후학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된다. 교수님은 1995년에 《중국조선족문화론》(료녕민족출판사)을 출판하였으며 이 글에서 월경민족, 변두리민족, 이주민족, 천입민족, 과경민족으로 불리우는 조선족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학문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아마도 조선족문화론을 가장 먼저 학술적으로 제기한 연구라고 사료된다. 교수님은 학자인 동시에 교수로서 훌륭한 교육자셨다. 수백명의 학부생을 제외하더라도 배출시킨 석, 박사생은 30명이 넘는다. 특히 교수님이 배양한 제자들은 북경대학, 상해외국어대학, 상해정법대학, 천진사범대학, 로동(鲁东)대학 등 대학 뿐만 아니라 당중앙 대외련락부, 중국 외교부, 중국사회과학원, 신화통신사, 중앙민족언어번역국, 중국국제문제연구원,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 상해국제문제연구원 등 여러 기관과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중에는 여러 명의 조선족출신 제자들도 있다. 또한 여러 명의 한국 류학생들도 배양해냈으며 원광대학 교수, 국회의원 비서 및 전문 기자들도 있다. 교수님이 배양한 후학들은 현재 중국의 조선반도 문제 연구에 있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금후에는 주도적 역할을 발휘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2018년부터는 한국 연세대학의 문정인교수, 일본의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와 손잡고 중, 한, 일 3국의 조선반도 연구 차세대 연구자 교류를 위해서도 많은 정력과 노력을 기울이시였다. 저도 교수님의 덕분으로 이 교류 네트워크에 참가하여 많은 젊은 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였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교수님이 마련해 준 교류가 당분간 지속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안정되면 이 모임이 다시 활성화되리라 기대한다. 현재 교수님의 뒤를 이어 교수님의 제자와 후학들과 함께 《내일신문》 중국 시평을 계속 집필하고 있다. 또한 교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교수님의 학술성과를 집대성하는 문집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날로 복잡해지는 정세 앞에서 교수님의 학문적 계시가 더 절박하게 느껴진다. 학문적 연구에 몸을 담은 이상 연구의 길을 견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배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양해나가야 할 사명감으로 인해 어깨가 무거워진다. 찾아보니 지금까지 교수님과 단둘이서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었다. 몇년전에 출장 기회를 리용하여 연변에 있는 고향집으로 모셔서 어머니가 직접 만든 시골 두부를 한끼 대접해드린 것이 그나마 조그마한 위안이 된다. 비록 교수님은 떠나셨지만 저 높은 곳에서 항상 지지하고 앞길을 밝혀주시리라 생각하게 되니 한결 더 그리워진다. 북경에서 리성일 씀 2021년 11월 8일
1    “고향 농촌은 그들이 있어 안심됩니다” 댓글:  조회:512  추천:2  2020-12-01
포장도로에 가로등, 로인활동실, 게이트볼장, 촌위생소까지…마을 파견 간부들 덕에 도시 부럽지 않은 학서촌 2년전부터 고향에도 인터넷이 설치되여 어머니와 위챗으로 련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였다. 전에는 장거리 전화로만 통화가 가능했지만 요즘에는 위챗으로 거의 매일 통화할 뿐만 아니라 가끔씩 영상통화도 하는데 참으로 편리하다. 70여세 나는 어머니도 이젠 휴대폰으로 고향의 이런저런 모습을 찍어서 보내오기도 하고 재미 있는 동영상이나 유모아를 위챗에 올리기도 한다. 매일이다 싶이 위챗으로 통화하게 되니 어머니의 하루 일과만이 아니라 고향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농촌 정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였다. 올해는 초요사회를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목표 년도이다. 수년전부터 농촌에서도 빈곤해탈 목표를 제시하고 정부에서 공작대와 제1서기를 마을마다에 파견하여 빈곤퇴치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고향마을인 룡정시 삼합진 학서촌에도 2016년부터 연변조선족차지주기상국의 김강철 주임을 비롯해 룡정시심계국의 태만석 과장, 임홍식 과장 세 분이 공작대로 파견되여왔다. 그 사이에 현지 정부와 공작대의 공동한 노력으로 고향마을의 기초시설이 크게 개선되였다. 포장도로에 가로등까지 가설되고 로인활동실, 게이트볼장, 촌위생소 등이 세워져 농민들도 도시 부럽지 않게 당과 정부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매년 양력설과 음력설, 단오, 추석이 되면 촌에서는 집집마다에 명태, 계란, 떡, 식품 등을 나누어주고 8월 15일 로인절이 되면 어른들을 모시고 게이트볼시합, 공연 관람을 조직하거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드린다. 촌에 파견되여온 공작대는 농촌 사업외에도 농민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 어머니가 고향에 홀로 계시는 나로서는 이런 분들의 고향에 대한 지원과 도움이 참으로 고맙다. 동네 로인들의 생활을 관심하고 늘 찾아뵙고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얘기를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자주 듣게 된다. 기실 농촌 사업은 쉽지 않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대부분 사람들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정책이나 혜택을 농민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고 실행해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일부 사람들이 사실의 자초지종도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공작대를 비판하거나 심지어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그 때마다 공작대 성원들은 내심하게 설득시킨다고 한다.       삼합진 박호범 진장이 촌민들과 함께 재해구조 작업을 펼치고 있다.   현재 농촌 마을을 두루 살펴보면 거주자 대부분이 로인들이다. 나이가 제일 젊은 사람이라도 50세 이상이다. 나의 경우 어머니가 홀로 고향에 계셔서 항상 걱정이였는데 지금은 공작대나 마을 간부들이 친자식처럼 동네 로인들을 잘 돌보고 있어서 많이 안심된다. 로인들은 게이트볼을 칠 때 사람이 모자라도 공작대 성원들을 불러 같이 친다고 한다. 과거에는 간부라고 하면 대하기가 어려웠지만 요즘에는 마을 사람들이 간부들과도 매우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삼합진의 박호범 진장은 동네 어른들을 보면 ‘맏아매’, ‘아즈바이’라고 친절히 부른다. 연변무장경찰부대의 림광군 대대장도 이전부터 마을에 오면 우리 어머니를 ‘아재’라고 불렀다. 퇴직한 후에는 우리 마을에 와서 살다 싶이 하면서 우리 집 ‘큰아들’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나도 고향에 가면 이런 분들을 만나뵙고 하는데 만날 때마다 고향의 후한 인정을 가슴깊이 느끼군 한다. 어느 한번은 동네 로인들이 로인절에 삼합진에 가서 게이트볼을 치고 점심식사 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식사가 끝난 후 동네로 돌아오는 교통편이 없어서 로인협회 회장이 공작대 제1서기에게 로인들을 좀 차로 실어달라고 전화를 하자 마자 공작대 성원이 차를 직접 운전하여 여러번에 나누어 로인들을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내가 어릴 적에는 간부들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를 보면 대단히 부러웠는데 지금 농촌에서는 간부들이 자가용으로 농민들을 위해 무상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한번 크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작년 봄에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했다. 주위에 미처 련락할 사람이 없어서 어머니는 공작대 김강철 제1서기에게 간신히 전화를 걸어 위험한 상황을 알렸다고 한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자 마자 당시 촌민위원회에 있던 공작대의 김강철, 태만석, 임홍식 세 분이 바로 차를 몰고 와서 어머니를 룡정시병원으로 모셔갔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당시 의사는 조금이라도 지체했더라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번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후 나는 정말 많이 놀라기도 했지만 또 그 분들이 정말 너무 고마웠다.       원 촌주재 제1서기 김강철(중간)이 기층에 심입해 촌민들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다.   이런 고마운 일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난 설에 고향에 갔다가 북경에 돌아온 지 며칠 안되여 어머니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목욕실의 수도가 고장 나서 물이 계속 샌단다. 나는 전화를 받고 어머니더러 빨리 공작대 성원들에게 련락해보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전화로 련락하자 공작대 성원들이 바로 달려와서 고장 난 파이프를 인츰 수리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농촌에서는 일이 사랑이고 일이 진정이고 진심인 것이다. 2016년 홍수 재해 뿐만 아니라 요즘 같은 코로나19 특수 시기에도 공작대 성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다. 지난 설명절 그들은 집에 가지도 못하고 련속 두주일 이상 집집마다 다니며 외지 인원을 조사하고 마스크를 나누어주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분망히 보냈다. 항상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그들이기에 밤마다 훤히 켜져있는, 공작대 성원들이 류숙하고 있는 촌민위원회 건물의 불빛을 보면 마음이 한결 안정된다고 촌민들은 말한다. 지난해 9월, 연변군분구에서 우리 마을에 종합수확기 두대를 지원했다. 군분구 사령원, 정위도 오고 룡정시와 삼합진 간부들도 다수 왔다고 한다. 수확기 한대가 13만원 이상에 달하여 농민들 자체의 힘으로는 구입하기 매우 어렵다. 김강철 제1서기의 노력과 주선으로 연변군분구에서 직접 지원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일부 매체에서도 행사 취재 차 마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어머니를 취재했다고 한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여서 어머니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산당 만세”, “해방군 만세”를 웨쳤다고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사전에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년로하신 어머니의 말씀과 같이 이는 오늘날 공산당의 은혜에 대한 농민들의 감사한 마음의 발로인 것이다. 농촌 파견 공작대 성원들은 고생이 참으로 많다. 삼합진정부 판공실의 김용남 주임이나 학서촌촌민위원회 김영식 주임은 나를 만날 때마다 공작대의 공로에 대해 치하해마지 않는다.       삼합진 학서촌 제1서기 류효항이‘빈곤부축 주제 행사의 날’당지 특산품 홍보 판촉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요즘에는 류효항이라는 젊은 한족 제1서기가 왔다. 그는 오자 마자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인사도 주동적으로 나누고 조선말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농촌은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희로애락과 함께 농촌으로서의 사는 멋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념려되여 북경에 있는 집에 모셔오려고 여러번 권고했지만 어머니는 항상 고향이 좋다고 한다. 아마도 번화한 대도시나 자식보다는 익숙하고 인심 좋은 고향이 더 편해서일 것이리라. 대도시에 나와서 산다고 고향 발전에 훈수나 큰소리만 치거나 미흡한 점만 지적하지만 말고 고향의 현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정과 실상에 대해 진정으로 깊이 있게 리해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리성일(중국사회과학원)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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