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揚州八怪 서예가
청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양주팔괴(揚州八怪)’ 서예가는 일반적으로 왕사신(汪士愼)ㆍ황신(黃愼)ㆍ금농(金農)ㆍ고상(高翔)ㆍ이선(李鱓)ㆍ정섭(鄭燮)ㆍ이방응(李方膺)ㆍ나빙(羅聘)을 가리킨다.
‘양주팔괴’는 건륭(乾隆, 1736-1795) 연간에 양주화단에서 활약한 여덟 명의 대표 서화가의 총칭이다. 그들의 예술 격조는 비교적 비슷하며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표방하여 승전계후(承前繼後)함으로써 서화사에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였다. 그림은 대부분 화훼ㆍ산수ㆍ인물을 제재로 삼았으며 이전 사람의 울타리에 구속됨이 없이 스스로의 풍격을 갖추었다. 시는 통속적이고 화창한 것을 강구했고, 서예 혹은 전각은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간략하게 하여 새롭고 기이한 것을 표방했으며 항상 시ㆍ서ㆍ화ㆍ인을 서로 결합하였다. 이는 당시 이른바 ‘전통’이라는 화풍과 같지 않아서 당시 화단에서는 ‘편사(偏師)’ㆍ‘괴물(怪物)’로 지목하여 마침내 ‘팔괴(八怪)’라 불렀다. 이들의 필묵기법은 근ㆍ현대의 서화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술 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괴(怪)’자는 바로 그들이 예술에서 대담하게 세속의 풍격을 타파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연스러운 생동함을 개괄하여 그들 예술에서 탐색한 반역적인 성격과 독창적인 정신을 반영하여 참신한 풍격으로 북으로는 수도를 대항하고 남으로는 소주와 비견하는 생동한 국면을 이루었다. ‘괴’로 작가들을 폄하하는 것은 부족하고 오히려 이는 법도에 병폐 아닌 것이 없으니 속박을 받지 않아야 성정이 살아나고 법을 취함에 실제를 의심해야 바른 것임을 반증해주었다. 그러므로 식견이 있는 선비는 예술 발전에서 이들의 ‘괴’를 매우 칭찬하면서 이것이 서화계에 차지하는 역사적 현실을 충분히 긍정하였다.
‘팔괴’의 예술은 사람과 생활에 접근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처한 경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들 대부분은 평민 화가에 속하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발휘할 기회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백성과 같이 살면서 빈곤함이 오래되면 가죽 옷이 해지고 주방이 황폐하면 콩과 조가 달다는 청빈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봉건사회의 질곡 아래 백성의 고난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이들 중에 비록 하급관리를 지낸 사람이 있었지만 성품이 성급하고 강직하며 세속의 흐름과 달리하여 백성을 위해 부탁하나 마침내 권력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파직하고 빈손으로 낙향하였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는 그 예술이 백성과 어느 정도 결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을 자신의 예술가로 만들고 그 작품을 매우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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