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힘 >>
- 나호열
아침 출근길, 본관 앞 목련이 드디어 꽃봉오리를 열었습니다. 4월인데도 유난히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잔뜩 웅크린 나무들이 안쓰러웠는데 아! 하고 짧은 감탄사가 하나로 세상을 환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무엇에 그렇게 홀연해졌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넋을 놓아버렸을까요? 한번 스쳐간 봄바람, 한 스푼의 따스한 햇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짧은 순간의 몸섞음, 그런 生의 전율이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生을 사랑합니다. 대상을 향하여 사랑한다고 되뇌일 때 그것은 생을 긍정하는 자신의 몸짓일 뿐이라는 당신의 말씀이 되살아납니다. 대상과 부딪칠 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전율, 직관적인 대상과의 몸섞음, 그것으로부터 나의 글쓰기는 시작됩니다.
간사한 소리가 사람을 느끼게 하면 어긋난 심기가 그러한 느낌에 응하여 나타난다. 올바른 소리가 사람을 느끼게 하면 심기가 그러한 느낌에 응하여 조화된 樂이 일어난다. 이렇게 간사한 소리를 부르면 어긋난 심기가 응하고 올바른 소리를 부르면 따르는 심기가 응한다. 그리하여 도리에 어긋나고 틀려 曲과 直이 나타나 각각 그 分限에 돌아간다. 이것이 만물의 이치다. 만물은 곡이냐 직이냐에 따라 느껴지는 것이다.
-禮記
조화된 樂이란 무엇일까요? 樂이란 즐기는 것이고 인간의 情은 그 즐거움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즐거움 속에는 淨化된 기쁨과 슬픔이 混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核, 그 알맹이는 나를 둘러싸는 印象, 영육을 감싸는 신비한 물감 같은 것이 되지요.
詩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충만 되어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사물들, 현상들, 증오는 사람을 이길 수 있겠지만 사랑은 지는 일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작은 몸짓이라고 말입니다.
서울 근교 어느 화가의 작업실 겸 찻집 한 귀퉁이에 아직 표구되지 않은 그림이 있습니다. 벌거벗은 두 남녀가 포옹한 채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 몸을 감싸안은 팔뚝의 힘줄에서 절실한 꿈틀거림이 나타나 있지요. 그 꿈틀거림에서 문득 불꽃을 보게 되었습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는
두 사람이 있다.
여기에서 생각은 잠시 멈춥니다.
위대한 舞임금게서 詩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노래는 말을 읊는 것으로 밝혔다……마음속에 있을 때는 持가 되고 말로 표현되어서 詩가 된다……詩는 持와 인간의 情性을 간직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七情을 간직하여, 사물과의 자극으로 감응되며 사물에 감응되어 志를 읊는다.
-[문심조령]
내 마음속의 志는 무엇일까, 당신을 절실히 사랑한다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서 나의 삶을 갈구하는 것, 우리는 창 너머의 그 무엇이 아니라 서로의 흐리고 작은 창이라는 사실이 때로는 아름답고 슬프지요.
그래서 차 한모금 마시고 다음 구절을 옮기게 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슴을 맞대어도
더욱 활활 타올라도
억세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에서 환희보다는 처연한 아픔이 떠오르는 것은 만남의 덧없음과 끝내는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삶의 끝을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생각은 포옹에서 불꽃으로, 불꽃에서 불꽃의 덧없음을 하염없이 흘러가고 맙니다. 여기에서 가슴은 답답해집니다.
시구를 다듬는 법은 杜甫가 그 묘를 다했다. 사람의 재주란 그릇의 모나고 둥근 것과 같아서 함께 겸비할 수 없다. 천하의 기이한 경치나 이상한 구경거리가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실로 사람의 재주가 뜻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은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경거망동하게 손을 놀리지 않고 반드시 갈고 닦은 연후에야 빛을 내려 무지개처럼 천고에 빛낼 수 있었다...
-李仁老 [破閑集]
나는 무엇을 가슴에 각인하려 하는가, 이렇게 행간을 훌쩍 넘어 재주나 부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가, 과연 절실한가 물끄러미 당신은 나를 쳐다봅니다. 초에 불을 당기며 '당신도 지금 이 촛불처럼 타고 있어요'라고 나지막히 말합니다. '우리는 불꽃을 이루며 그냥 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 아닐까요.'웃습니다. 삶이, 욕망이 부끄러워지면서 멋쩍게 다음 구절을 남깁니다.
우리는 서로를 밝히지 못한다.
한숨이 되어 뿜어 나오는 향기
그 몸짓만이 남아
우리의 삶은 무엇일까요. 힘겨움과 역겨움, 끊임없는 가난과 회의를 거듭하며 어느 아침의 목련처럼 문득 피어나면서 시듦을 예감하는 찰나적 희열에 어떻게 몸을 가누어야 하는 것인지요.
그림은 기울어가는 햇살의 그림자를 흡입하여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엉킴도, 윤곽도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더도 가지말고 이 자리에서
풀석거리는 한 줌의 재
불꽃 속에는
타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한지를 빌려 [불꽃]이라고 제목을 붙여 쑥스럽게 당신에게 보여 줍니다. 당신은 또 웃습니다.
시간을 재촉하여 서둘러 길을 되짚습니다. 산방의 주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도 보이지 않습니다. 노을 속에 [불꽃]을 던집니다.
무릇 시는 意로서 主를 삼는다. 의를 설정하기가 제일 어렵고 말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는 氣로서 주를 삼으니 기의 우월에 따라 시의 깊고 낮음이 비롯된 뿐이다. 그런데 본래 기는 타고난 것이니 배워서 얻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기를 타고나지 못하면 詩文을 아로새겨 다듬을 분 意로서 뜻을 펴지 못한다 시문을 아로새기고 단청을 들이듯 꾸미면 실로 아름답기는 하나 시 속에 함축된 것이 없어 깊이와 두터움의 意가 없게 되어 처음엔 그럴 듯 하지만 다시 보면 볼수록 시의 맛이 공허해져 버린다...
-李奎報, [白雲小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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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이진희(1972∼ )
나는, 나는
매일 나는 애벌레거나 곤충의 상태인 듯한데
밤이면 짐승이나 꿀 법한 꿈에 시달리면서도
한낮에는 천연덕스럽게
꽃이나 나무의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간신히 성장하는 기분, 도무지
나는 무얼까
어떤 숙제도 제대로 한 적 없는데
어떤 통과의례도 차분히 겪은 적 없는데
혓바늘이
따뜻한 입속 부드러운 혀를 상기시킨다, 내게
식도와 위장, 항문 말고도
아름다운 허파와 성대가 있다는 것을
성장 속도가 현저히 느린 나는 무엇이 아니면 좋을까
태어났으므로 죽음에 분명 가까워지고 있는데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이들에 대한 무례
무례함만이라도 조금 지워보자
나 혼자 체험했던 사소한 부끄러움과
당신이 애써 펼쳐 보여준 슬픔의 커다란 뺨이
동일하다고 쉽사리 단정 짓지 않기 위하여
‘나는 무얼까’, 묻게 될 때가 있다. 나이나 성별이나 가족 관계나 직업이나 용모나, 기타 외부적인 조건 외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고, 또 내가 알고 있는 ‘나’가 실제 ‘나’와 다를 수도 있다. 가령 거짓을 끔찍이 혐오하는 성향의 사람이 제 거짓 언행을 의식하지 못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무얼까’라는 질문에 진지해지면 ‘나는, 나는’ 하고 말을 더듬게 될 테다. 그런데 화자의 ‘나는, 나는’은 ‘매일 나는 애벌레거나 곤충의 상태인 듯한데’라는 노골적 자기 비하 표현에 대한 염치를 의식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아, 그런데 ‘애벌레’는 ‘알에서 나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곤충의 한 상태다. ‘벌레’라고 쓰려다 헛갈린 듯)
감정도 생각도 미개하고 미미함이 벌레 같다고, 제 낮의 얼굴과 밤의 얼굴이 완연히 다르다고, ‘어떤 숙제도’ ‘통과의례도’ 게을렀다고, 화자는 자신을 마구 나무란다. 참담한 자기 직시에 화자는 혓바늘이 돋는 지경이다. 그 ‘혓바늘’이 사람의 입, 즉 욕망은 ‘식도와 위장과 항문’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과 노래에 복무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상기시키네. ‘나’란 무엇인가를 넘어 ‘인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윤리적 성찰을 보드랍게 담고 있는 시다.
사족: ‘탐구생활’이란 말은 사실 잉여적 표현이다. 삶이라는 건 그 자체가 탐구의 과정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본성.’ 탐구생활이 끝난 뒤의 우리 삶이란 아마 별 볼 일 없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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