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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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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청소년 위한 SF세계명작소설

우주 함대의 최후-서광운 작
2021년 09월 22일 20시 21분  조회:728  추천:0  작성자: 강려
우주 함대의 최후
서광운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한국SF작가협회 편
 
지은이 서광운
도쿄 대학 수학과 수료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사
한국일보 초대 과학부장, 의사부장, 사설부장
대우 서울신문 문화부장
현 한국일보 과학부장
한국 SF 작가 협회 회장
 
번역한 책 : 버로우즈 작 [화성의 미녀]
지은 책 : [항공 기상의 과학], [세계를 움직인 재벌] 등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원수 박 홍근 / 문학박사 최인학
공학박사 임옥룡 / 이학박사 김희규
전교육감 김성묵
표지 그림 신동우
속그림 최 충훈
 
격려사 - 과학기술처 장관
 
사람은 딴 동물과는 달리 스스로의 환경을 거의 마음대로 만들어가며 살게 마련이다. 정신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특히 물질적인 환경 개조에 더 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적인 환경 개조는 기초 과학의 연구와 응용 과학의 발달이 이룩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기계 문명의 원리를 먼저 깨달은 서양 사람들이 오늘날의 인류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양보다 상당히 늦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도 1백년 전부터 기계 문명이 밀물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전기․수도․전화․기차․전차 등 문명의 이기는 한국인들을 놀라게 했고 또한 과학과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사견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의 국사를 돌이켜 보면 세계 최초의 활자와 거북선(철선)을 말들어 낸 과학의 핏줄기를 이어 받고 있어 근대과학을 소화하고 현대 과학에 도전하는 능력은 결코 남부럽지 않다. 다만 그러한 능력을 가꾸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과학을 크게 발전시키진 못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더 잘살기 위해서 조국 근대화라는 큰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마당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그리고 과학 하는 마음은 청소년 시절부터 기르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 우리 나라에도 과학소설(SF)작가협회가 있어 청소년들에게 과학 하는 마음을 재미있게 일깨워주는 작품을 엮어 계속 출간한다고 하니 이것이 하나의 산 과학 교재로서 널리 읽혀 우리 나라의 과학 목표 달성에 이바지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71년 12월
책머리에
 
한국 SF작가 클럽을 대표하여
서광운
 
우리에게는 단군 신화가 전해 오고 서양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가 있다. 모두가 비롯된 일들을 미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자못 이야기가 있어 대대로 본받아 왔는데 기계 문명이 지구 위에 일어서기 시작한 후부터, 특히 우리의 개화 백년 후부터 거기에는 무슨 신화가 생겼으며 또 창조되고 있을까요? 만일 지난날의 신화가 생명을 소중히 여겨 그 기원을 파고 캐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새로운 신화는 무릇 물질을 일구는 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처음으로 촛대를 들어 우리의 눈길을 우주의 얼개에 돌린 이는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이를테면 태극 오행설과 같은 우주 운행의 이치가 아니라, 별의 탄생에서 빛의 얼개에 이르는 본질을 꿰뚫어 오늘날 사람들은 이를 상대성 원리라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성 원리야말로 오늘의 새로운 신화 창조의 첫 장이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똑바로 쏜살같이 달리는 광선도 무거운 물체(별) 옆을 지나칠 적에는 구부러진다는 것입니다. 직행이 곡행이 된다는 말에 뭇 과학자들이 눈을 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SF, 그러니까 「사이언스 픽션(과학 소설)」은 그러한 신화를 가장 알기 쉽게 해설하는 작업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딱딱한 과학에서 부드러운 문학으로 뛰어넘고, 또한 공상적인 문학을 통해 실증 본위의 과학 분야로 들어갈 수 있는 쌍방 교통을 이룩하는 것이 바로 SF 작가들의 일거리입니다.「베르느」에서 시작한 SF는 백 년 동안에 놀랍게 발전하여 지금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눈부시게 꽃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단군이래 처음으로 SF 작가 클럽이 탄생한 것은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던 1969년의 4일 3일의 일. 당시 서울의 종로구 수송동에 자리잡고 있던 과학 세계사의 편집실이 바로 산실이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날에 뜻을 같이 한 창설 위원들의 이름을 적어 두면 김학수, 오영민, 강민, 신동우. 서정철, 이동성, 지기운, 윤실, 이흥섭, 최충훈, 강승인, 서광운 등입니다. 그리하여 잡지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한결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일독하면, 우리 나라의 SF소설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SF 한국편을 이처럼 알뜰하게 꾸며 내주신 아이디어 회관의 박훈 사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여러분의 성원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차 례>
 
성산포 우주 기지················· 8
은하계 원정 계획················ 11
목성을 향하여·················· 15
모두가 미지수·················· 21
알파별로 발진·················· 28
끝없는 고독··················· 32
공간의 마수··················· 33
또 하나의 함정················· 40
죽음의 표류··················· 44
날개 돋친 우주인················ 49
IQ는 미지수·················· 53
원목 빌딩···················· 57
우주인의 사연·················· 62
불을 내뿜는 로봇················ 70
영웅끼리의 대결················· 75
밀항 소년 마치나리··············· 83
변덕의 사연··················· 88
알파별의 비밀·················· 91
노고지리 별로·················· 96
고릴라 떼와 격전················ 100
개미 우주인의 정체는?············· 105
세라미 족의 심판················ 108
지구 도시를 만들다··············· 113
신온철의 사랑················· 117
운명의 첫사랑················· 119
고릴라와의 대결················ 124
황영숙의 볼모살이··············· 132
문명의 본질은?················ 138
무아오지 혜성의 접근·············· 142
한시가 바쁘다!················ 146
폭발하려는가?················· 150
천체와 천체의 우연한 조우··········· 152
위기! 타래 공간················ 155
 
SF 단편 소설 : 명령 시대
 
금발 미인··················· 159
자동 번역기의 위력··············· 161
추 석····················· 163
달의 도시··················· 166
 
작품 해설··················· 169
성산포 우주 기지
 
강마른 언덕을 휘어 넘자 한 눈에 훤하게 안기는 끝없는 수평선. 언제 보아도 파란 물결이 넘실거리는 수평선은 웬일인지 외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만석 박사는 얼굴이며 콧속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한껏 마실 양으로 두 팔을 힘껏 펼치고 심호흡을 했다. 허파로, 뱃속으로 찬 기운이 담겨지면서 온몸이 날듯이 가벼워진다.
"오 아름다운 지구여! 땅이여 흙이여! 나의 참다운 생명의 고향."
그의 입 밖으로 평소의 이만석답지 않은 말이 튀어 나왔다.
그는 결코 감상주의자도 시인도 아니다. 남이 보기에는 너무나 멋없는 우주물리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드디어 지구를 떠나 멀리 은하계의 저 별들이 살고 있는 딴 세계로 떠나야만 하는 작별을 며칠 앞두고 그의 눈에는 길가의 차돌 한 개, 들국화, 패랭이꽃, 달개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새삼스러운 정을 끌어당긴다. 그는 연보라색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코에다 댄다.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만석 박사는 어른답지 않게 아무렇게나 깔려 있는 바위에 두 다리를 죽 펴고 걸터앉았다. 그리고선 먼 수평선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눈길이 닿는 바다의 끝이 가물가물하다. 머리 속에서 문득 그래도 바다는 가깝고 좁은 데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실이지 지구는 좁다. 좁고 말고, 인간의 과학적인 사고력이 지구보다 더 커지고 넓어진 거야. 그만큼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 인간은 지구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선 거다. 좁은 세상에 발이 묶인 채 살고 싶지 않게 된 거다. 문명이 덜 발달했던 옛날에 마을의 젊은이는 제나름의 새로운 질서와 전통을 확립하려고 미지의 세계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구 전체가 너무도 단조로워서 공연히 섹스에만 정신을 쏟고 있지 않는가? 나날이 팽창하는 인구를 조절하고 제한한다는 구호만 내걸고 실은 정반대로 생명의 학대를 일삼고 있는데 지나지 않다.'
이만석은 공리를 맞물고 풀려 나오는 생각을 더듬을수록 고대 흙과 땅에서 느꼈던 지구에의 애착과는 정반대의 결론으로 줄달음질 치는 자기를 느꼈다.
서로 엇갈리는 부조리의 세상이다. 자기가 정말로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생활 집단은 거꾸로 진실한 것을 마다하고 물리친다. 동시에 자기가 반역하려고 애쓸수록 생활 집단은 자기를 따뜻하게 포옹해 주려고 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방향이 그 무엇인가에 이지러지고 만 것이다. 과학의 발달에 종교가 뒤따라오지 못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인간은 본바탕이 과학적인 생물이지 미신이나 종교적인 생물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만석 박사는 사색의 날개를 거두고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 35분이었다. 기지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15분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너럭바위에서 일어서면서 손 끝으로 바지에 기어오른 개미떼를 퉁겨 버렸다. 개미들은 무슨 날벼락이냐고 질겁을 하고 부리나케 굴러 도망쳐 갔다. 과연 은하계에서 인간은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살기 좋은 오아시스별을 발견해 낼 수 있을까? 처음부터 과학적인 바탕에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그러한 낙원을 건설할 수가 있을까? 이만석 박사는 그러한 기대에만 사로 잡혀 뜬 걸음으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휘청휘청 돌아서 따라가는 좁은 길은 이내 콘크리트의 넓은 길로 연이어져 길가에는 가죽나무 가로수의 짙은 푸른 잎이 울창하다.
이만석은 거기에 우두커니 서서 쏜살같이 질주해 오는 자동차를 보고 한 손을 들었다. 벌써 영업용차는 거의 볼 수 없는 시대이다. 자가용이나 관용차일지라도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한길의 어디서나 손을 들면 아무나 태워 주는 것이 세상의 풍조이다. 차는 우연히도 성산포 쪽으로 가는 차였다.
"우주 기지로 가는 길이신군. 나도 그리로 가는 길이요. 오동환 기지 사령관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오."
늙수레하게 보이는 노신사가 친절하게 차를 태워 주고 나서도 노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체 이만석에게 물었다.
"실은 우리 집의 딸아이도 뽑혀서 은하계 원정단에 한 몫 끼어 있다오. 이름은 황영숙이라고 하지."
노신사는 묻지 않는 말까지 털어놓았다. 딸이 은하계 원정 대원으로 떠나는 일이 퍽이나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황영숙이라면 선생은 혹시 황주일 교수가 아닌가요?"
"그렇소. 잘 알아 맞췄구려. 그런데, 딸년의 나이가 어려서 적이 걱정은 되지만 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애니까 도움은 되겠지."
황 교수는 줄곧 미소를 눈가에 담은 채 차를 몰았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었으나 서로 의견이 맞는 인간형임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흐뭇해했다. 자동차는 10분 가량 흐르는 동안 성산포 우주 기지에 다다랐다.
 
은하계 원정 계획
 
성산포 기지는 제주도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조촐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곳을 우주 개발청이 로켓 기지로 건설한 뒤부터 기지의 남북으로 활기 띈 소도시가 생겨난 곳이다. 이만석은 정문에 들어서자 본부 건물을 황 교수에게 가리켜 주고 자기는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걸어갔다. 모도록한 잔디밭을 걸으면서 그는 지금부터 강의해야 할 내용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서 되새겨 보았다. 우주사회학 강의! 아무래도 실감은 깃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일지라도 집단적으로 믿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헛기침을 하며 사무실의 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여비서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3시부터 강의할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외국의 우주물리학회에서 보내온 편지와 축하 전문을 책상 위에서 집어들고 한참 읽어 내렸다. 한결같이 한국의 은하계 원정의 안전과 성공을 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프라하 천문대에서 보내 온 와이말 박사의 편지는 옛 우정이 어려 있었다.
3시. 이만석 박사는 담뱃불을 짓이기다시피 끄고 나서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강의실로 향했다. 교실에서는 원정대원과 후보생들이 웃음판을 벌리고 있었다. 이만석 박사는 분필을 한 손에 들고 작은 소리로 강의를 시작했다.
"우리는 잠정적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아마도 영원히 이 문제만은 해결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섹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여러분도 다시 심중하게 생각해 보십쇼. 섹스는 과연 인간이 인생을 향락하기 위한 수단이냐, 또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종족 보존을 위한 기계적인 고통스러운 작업이냐 하는 문제에 해답을 내려야 합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뚜렷하고 올바른 해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한 몸이 되어 우주 여행을 하는 동안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겨서는 안 될 겁니다. 분명히 강조해 두겠습니다. 과거에는 섹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법에 의하여 사유 재산처럼 취급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구 위에는 우생학적으로 인류가 퇴화할 수도 있는 쓸데 없는 불구자 문제를 안고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모두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가장 합리적으로 인간을 진화시키기 위한 지름길을 연구 실험하자는 것이 바로 우리 우주사회학의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 사회에 있어서는 죽음은 삶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아마도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마저 자기가 소유할 수 없는 심경에 도달해야 될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은 조건에 따라 그 때마다 변경할 수 있도록 짜여진 우리의 생활 계획표를 다시 한 번 눈 여겨 들여다보십시오."
이만석 박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칠판에 걸린 브리핑 차트를 걷어 젖혔다.
거기에는 3대에 이르는 배우자 배정표가 건강, 혈액형, 전공별, 가계별로 미리 계산되어 짜여져 있다.
"이를테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기 위한 신화 속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는 덧붙이고 나서 대원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낯익은 제 1 함대의 부장 박민호, 대원 문창수, 신온철, 이상호와 여자 대원 방미란, 그리고 제 2 함대의 대장 홍성기, 부장 서윤철, 대원 김동수, 이팡호, 윤하운과 여자 대원 황영숙의 얼굴과 후보생들의 믿음직한 눈길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원정대는 제 1 함대와 제 2 함대로 나뉘어져 함대마다 대장을 포함한 여섯 명으로 편성되어 총인원 12명이다. 이만석은 스스로 제 1 함대의 대장을 겸한 총사령관이다. 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자공학, 생물학, 지질학, 천문학, 화학, 농학, 심리학, 의학 등 각 분야의 이름 있는 권위자로 편성되어 있다. 클로렐라를 태양이나 항성의 광선으로 재배하여 우주선 안에서 산소 공급을 받고 아울러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일쯤은 초보적인 농사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머지 않아 은하계로 떠날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약재에 의한 우주 식량을 개발한지 오래이다. 클로렐라는 재래 공간에 있어서 사람의 몸이 재래식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양 보충에는 알맞다. 그러나 광파 로켓을 타고 질량의 변화를 일으키는 속도로 비행하게 될 때 몸에 활기를 주는 새로운 영양제는 역시 한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몸을 허약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국의 한의학자 이재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근거로 새로운 우주 식량을 발전시켰다. 근 두 시간에 걸친 강의가 끝날 무렵, 기지 사령관 오동환 준장은 황주일 교수를 안내하고 강의실에 들렀다. 황 교수는 문턱을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기지 사령관이 이만석 박사를 소개하자 황 교수는 악수를 청하면서 얼굴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어허, 이 분은 아까 같은 차를 타고 와서 안면이 있는데 여간 능청맞지가 않군. 여보시오, 이 박사. 그럴 수가 어디 있단 말이오, 저런…."
"뭐, 불필요한 자기 소개를 꼭 해야만 되나요. 헛 허허허."
대원들은 이 박사의 대꾸가 마치 어린아이 같아 모두 한바탕 껄껄대며 웃었다. 기울어진 저녁 햇빛이 창문 너머로 비스듬히 비쳐왔다.
 
목성을 향하여
 
한국의 은하계 원정 계획은 결코 즉흥적인 것은 아니었다. 산업이 이를 뒷받침 할 만큼 크게 발달하고 인구도 1억 5천만 명이 넘어 국토는 재계획되고 농촌은 거의 공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이처럼 발달하게 되고 그만한 자력이 생기기까지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피땀을 흘리는 노력이 쌓여졌다. 동해와 남해안의 어족 자원과 동해안과 서해안의 해중 자원을 조리 있게 개발하고, 특히 해양 자원을 이용한 화학 공업을 발달시키고 전통적인 수예산업과 축산업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린 일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1천 5백 년 전에 동양에서 유일한 조선국으로서 기술을 발달시킨 그러한 전통적인 터전으로 복귀하자는 혁명이 뒤따랐기 때문에 민족은 크게 부흥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로켓 제조 기술은 조선 기술이 제 손에 익을 무렵부터 부쩍부쩍 발달했다. 이러한 기초 과학과 산업 기술의 뒷받침으로 한국은 국제우주개발기구의 협조를 받아 은하계 원정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원정 대원들이 그 동안 쌓아 올린 훈련은 새삼스럽게 늘어놓을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1970년대의 유치했던 우주 항공술을 이미 옛날 얘기로 돌리고 있는 국제 수준에 서 있는 인물들뿐이다. 수많은 전문가들 중에서 우주 개발청은 1백 명을 뽑아 적격 심사와 훈련 끝에 걸맞고 알맞은 12명을 뽑아 낸 것이다.
그 중에는 두 사람의 여자 대원들이 끼어 있었다. 9월 28일은 목성으로의 출발일. 그녀들은 출발을 사흘 앞두고 마지막 다짐을 했다.
"그래, 미란 씨는 죽는 날까지 내 동생이야. 지구 위에서도 때로는 공연히 외로운 것이 여자인데, 우주로 나가면 그야말로 기댈 데가 없지 않아, 여자의 마음은 여자밖엔 모른단 말이야."
황영숙은 방미란의 손목을 꼭 붙들고 그녀의 볼에 자기 볼을 가져다 댔다.
"언니, 걱정마세요. 결코 변하지 않을테니까요. 우리 두 사람이 이를테면 우주에서는 인류의 대표가 아니에요? 나는 늘 모든 일을 꼭 의논해서 언니 말대로 움직일께요."
"정말이지. 그럼 새끼손가락으로 약속을 해요. 음, 됐어. 이젠 안심이다."
황영숙은 방미란을 한참이나 껴안고 서로의 체온과 입김이 상통하는 것을 다짐했다.
원정대가 목성을 기지로 고른 데는 까닭이 있었다. 첫째, 목성의 구름 온도는 영하 140도나 된다. 원정대가 타고 떠날 로켓은 광자 로켓이다. 광자 로켓의 거대한 엔진에서 분출하는 본류가 작렬하는 흐름은 수백만 키로 떨어진 곳에서라도 지구의 모든 생물을 태워버릴 만큼 강하다. 따라서, 지구에서 훨씬 떨어진 정확히 말해서 지구에서 6억 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또 온도가 아주 낮은 목성을 태양계에서 벗어나는 우주 기지로 삼은 것이다. 목성에는 수소와 질소가 화합한 암모니아, 수소와 탄소가 화합한 메탄 가스 외에 수소와 헬륨으로 가득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적도의 지름은 지구의 약 11배, 부피는 1300배가 되며 12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는 점이 우주 발진 기지로서 유리했다. 한국은 목성 자체보다도 12개의 위성 중에서 화성보다 큰 두 위성 중의 하나인 델타 기지를 이용하기로 정했다. 지구에서 목성까지의 항해는 먼저 원자력 추진으로 우주 궤도에 오른 다음 광자 로켓은 발동시키지 않을 예정이었다. 지구와 태양과의 머나먼 거리일지라도 만일 광자 로켓을 발동시키면 불과 8분만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광자 로켓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태양계를 벗어날 때만 - 그러니까 목성에서 은하계로 향하게 될 때, 비로소 광자 로켓에 점화하게 될 것이었다. 9월 26일. 원정대의 모든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다. 기지 사령관 오동환 준장이 베푼 최후의 만찬은 분위기가 도리어 긴장된 것이었다. 서로들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과연 또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죽음의 우주 공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인지, 아무도 단정할 수 없는 순간 순간이 다가오고만 있었다. 연회의 자리에서는 '푸른 하늘 은하수…'를 가사 없이 흘리는 윤극영 작사의 반달 노래가 명랑하게 울리고 있었으나, 참석한 사람마다의 가슴에는 무슨 운명의 노래처럼 뒤집혀 들려왔다.
9월 27일. 아침부터 맑은 날씨. 대원 12명은 그들의 친구와 가족에게 보내는 마지막 녹음 편지를 테이프에 담았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리고 동포들이여 우리는 기어이 선공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우주 공간에는 갖가지 마력이 숨어 있을 것으로 압니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면서 한국 원정대의 안전을 빌어주십시오. 우리는 늘 동포의 뜨거운 성원이 있는 것으로 믿고 떠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만석 박사는 따로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음 해 두었다. 9월 28일. 기상 조건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수만 명의 제주 시민과 일부러 각 도에서 모인 사람들이 발사의 순간을 지켜보는 뜨거운 장면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오후 12시 15분 정각. 카운트다운 끝에 두 대의 형제 로켓은 우렁찬 폭음을 남기고 차례차례 성산포 기지를 떠났다. 눈부신 창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떠날 줄을 모르는 관중 속에서 가냘프게 흐느끼는 소리만이 듣는 이의 가슴을 에어냈다.
 
모두가 미지수
 
로켓이 발사된 지 8분 동안, 함정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자주 울리는 계기 소리만이 생명의 맥박처럼 살고 있었다.
" 휴…"
하는 신음소리를 내쉬며 맨 먼저 의식을 되찾은 이는 역시 이만석 박사였다.
"간이 콩알만 하게 된다더니 정말이야."
이 박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둘레를 살펴본다. 부장 박민호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매번 지구를 떠날 때마다 오장육부를 끌어당기는 통에 얼빠지겠어요. 입에선 쓴 물이 감돌고, 이래서야 어디 사람이 살겠어요."
그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조종석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차례 차례로 모두 의식을 회복해 갔다. 사실이지 로켓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기까지에는 몸 안의 간이 15cm나 아래로 끌리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예로부터 애(창자)가 끊긴다는 말이 있더니 몸이 허약한 자는 정말로 간이 끊길는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심을 그 때마다 대원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터이다. 이만석 박사는 당장에 성산포 기지의 컨트롤 센터에 신호를 보낸다.
"이상 없음. 모든 기능은 정상적이요."
"오케이, 궤도를 15도로 바로 잡고 제 2 함정과 나란히 위치를 고치시오."
김경호 박사의 조금 쉰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왔다. 귀에 익은 소리였지만 어딘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감각은 역시 지구와의 거리감 때문일까? 이만석 박사는 자칫하면 떠오르려는 몸을 가누면서 로켓의 진로를 바로 잡았다. 장차 컨트롤 센터의 김경호 박사는 제 1 함정 무궁화 호와 제 2 함정 독수리호의 비행 궤도를 시시각각으로 바로 잡는 지령을 보내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박사는 로켓의 벽을 보고 제자리에 앉아 저마다 맡은 일을 하고 있는 대원들을 돌아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온철 군 괜찮아요? 방미란 양은 기분이 어때?"
신온철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은 채 손만 들어 보인다. 방미란은 방실 웃어 보이며 여전히 계산기를 만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 박사는 제 2 함정의 홍성기 대장을 텔레비전으로 불러낸다.
"어떠시오? 다들 괜찮아요."
"베리 굿, 그러나 이제 졸음이 오기 시작하는 걸요. 그 동안 너무 긴장했나 봐요."
이마가 유달리 불거지고 안경 속의 눈망울이 영리하게 반짝이는 홍 대장이 걸걸한 소리로 대답했다. 이만석 박사는 지구의 중력권을 완전히 벗어날 무렵 원자력 엔진에 점화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로켓의 속도는 훨씬 빨라졌으나 컴컴한 죽음의 공간 저 편에 총총히 박힌 별들은 좀처럼 움직여 보이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나란히 떠서 세차게 달리는 한국의 우주 함대. 제비 두 마리가 정답게 나르는 모습과도 같이 아름답다. 태양의 뭉글뭉글한 표면보다 1백만 배나 밝은 레이저 광선을 신호 삼아 로켓에 켜고 가는 빛을 지구 위의 사람들은 낮에도 지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얼마나 훌륭한 일들이 아니겠느냐, 태양계가 태어난 지 약 50억 년, 지구에 생명이 발생한지 25억 년, 사람이 지상에 생긴지 1백만 년, 그리고 별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지 기껏 5천 년,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로켓을 만들어 낸 지 겨우 50 년 - 그리고 다시 말해서 화성으로 금성으로 자유롭게 여행하게 된지 20 년만에 한국의 우주함대는 처음으로 태양계를 벗어나서 은하계 원정에 착수한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은하계 원정을 통해서 갖가지 의문을 풀어야만 한다. 첫째 인류와는 전혀 모양도 IQ도 다른 우주생물과 만나서 그들의 문명을 탐지해야만 한다. 과연 계획대로 성공할는지, 또는 엉뚱한 사고로 말미암아 영영 실패하고 말 것인지, 언제쯤 지구에 되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두가 미지수다.
캡슐 안에는 벌써 진력이 난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듯 했다.
"텔레비전을 상업 방송으로 돌려 보지 그래."
이 박사는 대원에게 일렀다. 대원들의 신경이나 기분을 조절하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도 하기 때문에.
문창수가 스위치를 돌린 화면에는 프랑스의 어느 극장에서 중계되는 라인 댄스가 떠올랐다. 날씬한 허벅다리를 줄줄이 가지런히 꺾어 보이는 비키니 스타일의 여자들. 함정 안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쏠린다. 음악의 가벼운 리듬은 인류의 부질없는 소비 문화를 한결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해 준다. 이만석 박사는 거기에서 향수를 느끼기 보다 도리어 원시 민족과 다름없는 목표를 잃은 가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정대에 뽑힌 대원들은 월등하게 뛰어난 이성적 인간들이라고 스스로 다짐해 보기도 했다. 컨트롤 센터에서 목성에 착륙할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가 왔다. 캡슐 안에서는 순간 생기가 돌며 대원들은 부산히 허리를 굽닐며 기계 장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엔진을 뜯어고치고 목성의 위성으로 먼저 무궁화 호가, 다음 차례로 독수리 호가 각각 진입하여 델타 기지에 안착했다. 델타 기지가 있는 위성의 언저리에는 비교적 두꺼운 암모니아 구름이 없다. 대원들은 외출용의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쳐다 뵈는 태양은 늘 뿌옇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이른바 사마귀 우주복은 박민호 부장이 발명해 낸 것. 우주별에서 당할는지도 모르는 봉변에 대비해서 금방 스위치 하나로 둥글게 부풀을 순 있게 설계한 것이다. 평소에는 그대로 입고 다니다가 유사시에는 기압으로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게 되어 있어 사람은 그 속에서 마치 기선의 나침반처럼 중심을 잡을 수가 있어 재빨리 굴러가는 게 여간 편리하지가 않다.
우주복의 겉면의 실오리 하나 하나가 구슬 모양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톱니바퀴처럼 엇갈려서 서로 회전할 수 있는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공처럼 급히 굴러가도 딴 물체에 부딪치면 가벼이 구부러질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꼭 사마귀처럼 붙어 엉길 수도 있는 이점이 있고, 유사시에는 함정의 자력을 빨리어 저절로 굴러 갈 수도 있는 만능 복이나 다름이 없다. 대원들은 모두 사마귀 옷을 입고 작업을 시작한다. 델타 기지에서 할 일은 원자력 엔진 대신에 광파 로켓 장치로 엔진을 바꾸는 일이다.
"이상호, 윤상운 두 분이 애를 써 줘야겠어. 출발일과 시간은 나중에 컨트롤 센터에서 지시가 내리겠지만 우선 1주일을 잡으면 넉넉할 게요."
이만석 박사는 기지의 콘세트 본부에 두 청년을 불러놓고 부탁을 했다. 두 사람은 대원 중에서 엔진 수리를 맡은 중요한 전문가들이다.
"시간은 넉넉하겠지만, 혹 부분품이 모자라지는 않는지 모르겠어요."
이상호는 훤칠한 허리를 조금 구부리며 윤상운의 얼굴을 돌아다보며 말한다.
"모자라는 것은 성산포에서 보내달라고 하면 되잖아. 어쨌든 시작하자꾸나."
기지에는 밤이 없었다. 위성의 주기가 공교로이 노상 태양 면을 바라보고 돌고 있었다. 뗑그렁, 찰칵 찰칵 둔한 기계 소리가 울려온다. 또드락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쇠망치를 두들겨도 마치 나무 해머로 두드리는 무딘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기압 차이 때문일 것이다. 몇몇 대원들은 델타 기지 주변에 있는 특설 농장에서 과일이며 먹을 것을 실어 날랐다. 이 기지는 은하계 발전을 위해서 몇 해 전에 독일 과학자들이 건설해 놓은 터전이다. 그들은 시설을 만들어 놓고 국제적으로 아무나 이용할 수 있도록 이를 개방해 준 것이다. 하기야 먼 목성에서 누가 이용하든지 말든지 상관할 사람은 없겠지만. 작업은 예정표대로 진행되어 갔다. 벌써부터 모든 것이 제한되었지만 목욕만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델타 기지에서는 물을 얼마든지 합성할 수 있으니까 괜찮지만 일단 로켓을 타게 되면 목욕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힘들게 된다. 그만큼 산소와 수소의 합성이 통제되기 때문이었다. 이 박사는 늘 콘세트 본부에 앉아서 궤도 계산에 골몰했다. 인마좌(켄타우르스)의 알파별이 그래도 태양계에 가까운 별이다. 이 박사는 지금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를 그 별로 몰 작정이다.
보통 전파로 거기까지 통신하려면 가는데 4년 3개월, 돌아올 때까지는 8년 6개월이나 걸린다. 사하라 사막이 넓다고 한탄을 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막한 우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별로 가려면 귀찮은 리만 공간을 돌아가야 되겠지. 직선 코스로는 공간이 휘어져서 돌파하는데 애를 먹을 거야.'
이 박사가 혼자서 연필로 붓방아를 툭툭 치고 있노라니 까 문을 열고 황영숙이 고개를 디밀었다.
"괜찮아요? 들어가도."
"괜찮구말구. 어서 들어와요."
이 박사는 무슨 사고라도 나지나 않나 하는 걱정이 먼저 떠올랐으나, 황영숙의 맑은 눈망울에는 아무 근심이 없어 안심을 했다.
"저 약초를 배양하는 도중에 이상한 것을 봤어요. 보통 때는 아무렇지도 않는데 자력선을 쪼여 주면 약초의 뿌리를 삽시간에 먹어버리는 박테리아를 봤어요. 신기하죠?"
황영숙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 박사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한 눈치를 챈 황영숙은 손쉽게 결론만을 물었다. 그 박테리아의 성질을 일일이 설명하자니 고통스러웠다. 이만석 박사는 생물학자는 아니다.
"목성에 버리고 갈까요? 또는, 로켓에 싣고 갈까요?"
이 박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싣고 가야겠다."는 단정을 내렸다.
"저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모든 생명체는 그런 대로 쓸모가 있으리라고 확신을 하는 것이다. 델타 기지에서는 엔진을 뜯어고치는 일 밖에는 별일이 없었다. 벌써 날짜는 1주일 가까이 흘렀다.
 
알파별로 발진
 
하루는 김경호 박사로부터 결정적인 지시가 왔다. 10월 10일 오전 3시 정각에 델타 기지를 발진하라는 것이었다. 태양이 은하계의 중심을 돌고 있는 속도는 초속 220km, 분속으로 13,200km, 시속으로는 792,000km이다. 태양은 이러한 속도로 2억 5천만 년을 걸려 겨우 은하계를 한 바퀴 공전한다. 그러니까 10억 년에 4번 도는 셈이다. 이것을 지구에서 생명이 발생한 25억 년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벌써 10번 은하계를 공전한 셈이다. 이만석 박사는 태양이나 태양계의 이러한 속도가 은하계로 발진하는데 로켓을 가속시켜주지 못하는 것을 마음 속에서 언짢게 생각했다. 기왕이면 좀 더 빨리 공전하면 이용할 수도 있는데, 광파 로켓의 경우 초속이 28만km나 나오게 되니 공전 속도는 문제 삼을 것조차 없는 일이었다. 발진의 컨트롤 센터의 계수에 맞춰서 지시대로 움직이면 된다. 그러나 컨트롤 센터는 우주함대를 태양계 밖에서까지 유도해 줄 수가 없다. 전파의 속도로 보아, 너무나 시간차가 생기기 때문에 이 박사의 머리 속에서는 알파별로 코스를 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였다.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괴상망측하게 휘어진 리만 공간이 마치 지구 위의 반 앨런대처럼 한없이 깔려 있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지레짐작할 수 없는 것이 실존하는 우주의 생리이다. 이 박사는 이틀을 꼬박 생각을 가다듬어 우선 알파별 쪽으로 A코스를 정하기로 했다.
"그게 안전 제일의 코스지. 어쨌든 성공 있기를 길이 빌고 있겠네."
출발에 하루 앞선 날 저녁 성산포 기지 사령관 오동환 준장으로부터 격려를 겸한 작별인사가 도착했다. 이 박사는 출발 준비가 어지간히 챙겨진 전날 밤 콘세트 본부에 전대원을 소집하여 만찬을 벌렸다. 제 2 함대 대장 홍성기가 일어나서 엄숙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대원의 수는 꼭 12명입니다. 전에 그리스도가 마지막 만찬을 베풀었을 때에는 13번째에 앉은 유태인이 그를 배신했다고 전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러한 짓을 할 만한 13번째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닥쳐오는 곤란과 시련 속에서 저마다 마음속에서 13번째 배신자를 경계해야만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한국의 영예뿐 아니라 지구의 역사를 바꿀만한 위대한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원정 사령관 이만석 박사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야만 우리의 사명을 다 할 줄로 압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술이 한 잔씩 돌아갔다. 독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프리카의 술나무에서 자연 발효된 향기로운 브랜디를 마시고 황영숙, 서윤철은 포도주를 마셨다. 두 사람은 술을 입에다 대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생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체질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자 노래를 자청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김동수였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민요나 명곡 심지어는 유행가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노래가 없는 재주꾼이다. 태연스럽게 일어서서 그는 ‘오 나의 태양’을 늘어지게 불렀다. 가벼이 곱꺾으며 넘어가는 그의 테너 소리는 사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듣는 이의 가슴깊이 안겨주었다. 대원들은 2시간에 걸친 만찬을 마치고 제각기 잠깐 조리를 친 다음 이내 콘세트 본부에서 철수했다.
"나의 태양이 아니라 나의 사랑스러운 흙덩이지. 흙이야, 흙."
이상호가 땅에 꿇어앉아 두 손으로 흙을 한줌 쥐어 얼굴에 바르면 외쳤다. 여느 때 같으면 미쳤다고 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태양계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순간 그들은 언제 다시 흙을 밟을지 모른다. 저마다 흙바닥에 뒹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로켓의 트랩에 발을 얹고 올라갔다. 맨 나중에 부장 박민호가 무궁화 호의 문을 닫고 부장 서윤철이 독수리 호의 문을 닫았다. 이젠 선실로 옮겨 탄 원정대원들은 옷을 보통 우주복으로 갈아입었다. 로켓은 먼저 원자력 엔진에 점화되어 3시 정각에 불을 내 뿜었다. 훌쩍 떠오르는 가변 음은 지구의 그것과는 딴판이다. 델타 기지에서 4천만km 떠오른 다음에 비로소 광파 엔진으로 추진력을 바꾼다. 이제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번개같은 속도로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나란히 꼬리에서 불을 뿜고 간다. 자질구레한 성간 물질은 삽시간에 타버리고 말았다.
"동면 준비로 들어가야겠다. 로켓은 관성 유도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에 예정표대로 2교대로 근무해야겠다. 세 사람은 먼저 동면실로 들어가도록."
이만석 박사는 기침을 한 번 하고 목을 추스르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부장 박민호, 문창수, 방미란이 일어서서 비뚤거리며 칸막이의 저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끝없는 고독
 
칸막이를 넘어서 별실로 들어온 세 사람은 저마다 우주복을 두툼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박민호 부장은 약장에서 알약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반 년 동안을 산송장이 되야만 하니 지구에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하고 장난스럽게 지껄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동면하는 동안은 꿈조차도 없을 테니 저승에 간 거나 마찬가지겠어요."
방미란이 말을 받자 문창수는 대뜸 나무라듯이 눈을 흘기고 고쳤다.
"저승이라니 여기는 천당이요. 나는 알약의 효능을 믿고 먼저 자겠어."
문창수는 알약을 입에다 쑤셔 넣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로 삼킨다. 파이프에서 흘러나온 물이 지구에서처럼 흘러내리지 않고 물방울이 되어 아무렇게나 둥둥 떠오른다. 나머지 두 사람도 떠오르는 물방울을 붕어처럼 뻐끔뻐끔 빨아서 약을 삼키고 나서 침대에 가지런히 누어 몸을 벨트로 동여 묶었다. 헛기침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세 사람은 이내 동면 상태로 빠졌다. 숨소리가 멈출 무렵 방안의 온도는 무섭게도 영하 1백 70도까지 금방 내려가 버린다. 완전한 냉동 상태에서 숨쉬는 산소마저 절약하자는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별실의 둥근 유리창 너머로 그들이 깊이 잠든 모습을 확인하자, 쓴웃음을 씹으며 제자리에 돌아와서 제 2 함정 독수리 호를 불러냈다.
"홍성기 대장 독수리 호의 동면 상태는 어떻소?"
"방금 김동수, 이광호, 황영숙 세 사람이 완전히 동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은 순조롭소."
홍 대장은 안경을 벗어 들고 보고를 했다. 김동수의 깊은 테너 노래를 장차 여섯 달 동안은 듣지 못하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이만석 박사의 머리를 문득 스쳐갔다. 식생활이 변한 탓으로 스크린에 비친 대원들이 얼마간 해쓱해진 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우주 함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란히 쏜살같이 컴컴한 공간을 줄달음치고 있었다. 멀리 아득한 시간 너머에서 태양과 그 유성들이 오밀조밀하게 뭉쳐 반짝이고 있었다. 태양의 빛은 그다지 눈부신 것은 못되었다. 은하계의 저편에서는 그보다 수만, 수백만 배나 더 밝은 항성이 찬란하게 불타고 있기 때문에.
 
공간의 마수
 
이만석 박사는 신온철 대원을 불러 오후가 되면 으레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신온철은 역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인류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청년이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머리카락을 빡빡 깎아 버리는 묘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신 군은 우주인들의 문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만석 박사는 묻는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구의 경우는 이제 과학 문명이 비로소 발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라마다 고르지 않지만 우주별의 경우는 별 전체의 문명 수준이 한결같이 발달해서 인류보다 훨씬 앞선 데도 있고, 별에 따라서는 기계 문명이 발달할 대로 발달해서 멸망하고 다시 원시 상태로 되돌아간 데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문명은 단계적으로 순환하고 역사는 나사모양으로 되풀이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그럴듯한 얘기야. 잘난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단 말이겠지. 우리는 잘난 놈들과 만나야 의사 소통이 수월할 텐데…."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는 못난 놈들하고 만나야 의사 소통이 잘 됩니다. 사령관 님의 말씀이 옳은 것이죠. 저편의 높은 수준의 우주인으로서는 우리처럼 덜 발달한 인류와 만나는 편이 의사 소통을 하기에 쉽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신온철 대원은 마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구에서 보내오는 라디오 방송은 계속 나지막한 음악을 틀어주고 있지만 함정 안에서 단 세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일은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 전자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는 이상호는 가끔 항성들의 위치를 재어 제 1 함정의 비행 궤도를 수정하는 구실을 맡고 있었다.
"게시판을 늘 들여다보며 느끼는 일인데 사람은 입을 다물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또 이처럼 외딴 환경에서는 종교적인 믿음이 없이는 이겨 나가지 못할 것 같아요. 종교란 인류의 신화가 아니겠습니까?"
이상호도 엉뚱한 화제를 꺼내며 스스로의 고독을 달래는 판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믿음직하게 따라오는 제 2 함정의 톱상어 같은 모습 외에는 지구와의 통신 연락도 거의 끊기다시피 광막한 고립이 나날이 계속될 뿐이다. 그래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반 년이 넘었다. 무궁화 호의 선실 속에는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여태까지 동면해온 세 사람을 시간표대로 소생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만석 박사는 그날 아침부터 몸이 달아 어쩔 줄을 모른다.
"10시 정각에 온도를 올려주게. 조심스럽게 말이야."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상호의 솜씨인데요."
신은철도 안절부절을 못하고 들뜬 목소리이다. 언제나 조바심을 할수록 시간은 더디는 법. 그 동안 견디어낸 감정의 저수지가 이제 마지막 순간에서 둑을 무너뜨리고 쏟아지려고 한다. 10시 정각. 이상호는 온도 조정 단추를 힘껏 눌렀다. 창 너머에서 별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여섯 개의 눈길. 온도가 천천히 섭씨 20도까지 오르기를 기다려 세 사람은 둥근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약장에서 노란 색 알약을 세 알씩 꺼내서 한 사람씩 붙들고 입에다 넣었다. 물을 마시지 않더라도 입 안에서 저절로 녹아 그들의 몸 속의 핏줄에 스며들어 피의 순환을 일으켜 주는 활력제인 것이다. 1분, 2분, 3분. 그들의 살갗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면서 문창수가 맨 먼저 의식을 되찾았다
"으음!"
하는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눈을 뜨더니 팔 다리를 뻗치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상호는 아직도 잠결에서 헤매는 그의 어깨를 흔들어 주었다.
"오, 내가 살아났구나. 살아났어!"
문창수는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이만석 박사를 얼싸안고 눈물을 줄줄 흘린다. 박민호 부장, 방미란도 차례차례 의식을 되찾아 동면실 안은 때아닌 면회실 풍경을 야단스럽게 자아낸다.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어 서로가 발버둥을 치며 맞는 즐거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여보게, 신 군 그만 일어나지."
박민호 부장이 한마디하자 방바닥에서 껴안고 뒹굴던 방미란과 신온철이 멋쩍게 일어섰다 이만석 박사는 동면실을 뛰어 나와 사령실로 가서 독수리 호를 불러냈다. 독수리 호에서도 아무 탈없이 소생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여섯 달이라는 시간적인 차이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고 동면을 끝낸 그들은 한결같이 얘기했다. 무궁화 호도 독수리 호도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는 이 순간, 느닷없이 우주선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기 시작하지 않는가? 이만석 박사의 낯빛이 순식간에 새파래지면서 눈길은 즐비하게 박힌 계기판의 바늘을 쫓았다. 마치 지진을 만난 것처럼 우주선은 떨면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주선 내의 경보 장치가 저절로 울리며 제각기 제자리로 뛰어갔다. 잠옷을 우주복으로 갈아입을 겨를조차 없었다.
"사령관님, 함정이 예정 코스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무슨 강력한 기운에 끌려가고 있는 듯 합니다."
박민호는 재빨리 보고했다.
"엔진의 출력은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이상호도 스위치를 휘어잡으면서 보고했다. 이만석은 순간, 자력선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력선의 강도를 표시하는 계기의 바늘이 움직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늘은 20과 30 사이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뭘까? 자력선이 아니라면…."
이만석 박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 곡률 공간의 계곡에 떨어진 것이나 아닐까요?"
문창수가 스스로의 의문을 던졌다.
"그래? 이 군! 출력을 반으로 내려보게."
이만석은 지체없이 명령을 했다. 무궁화 호의 속력은 삽시간에 반으로 줄었다. 그런데도 함정은 그 이상의 속도로 비스듬한 코스를 날으는 것이 아닌가!
"문 군의 상상이 옳을는지도 모르겠어. 우주 함대는 지금 공간의 골짜기에 빠져서 급류에 휩쓸린 보트처럼 인력과 인력의 계류에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군. 박민호 부장의 의견은?"
 
이만석 사령관은 옆자리에 앉아서 한쪽 귀에다 리시버를 대고 있는 박민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선체가 마구 흔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죄며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문창수가 입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도 개의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이유라…."
이만석 박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주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박사는 잠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다. 사령실의 스피커에서 숨가쁜 소리가 들려왔다.
"제 1 함정! 이거 어찌된 일이요. 독수리 호의 기능이 마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신불수처럼 표류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비친 홍성기 대장은 두 눈을 질겁을 해서 크게 모들 뜨고 있었다.
"엔진을 끄고 표류하는 대로 몸을 맡기시오. 공간의 계곡에 떨어져 떠내려가고 있는 것 같소. 표류 속도가 약해질 때 탈출하기로 합시다."
이만석 박사는 우선 이렇게 지시를 내리고 선머리를 싸맨 채 미리 속에서 헝클어진 생각들을 톱니바퀴처럼 정리해 나갔다.
 
또 하나의 함정
 
"그거다! 인력권의 소용돌이와 소용돌이가 맞물린 곳에 있는 것에 틀림없다."
이만석 박사는 무릎을 딱 치고 일어서더니 창 밖으로 제 2 함정의 표류 형태를 정신없이 내다보았다. 그는 속도와는 이질적인 인력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인슈타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의 마디를 비로소 알았다. 우주의 가없는 공간은 넓은 바다와 같은 것이며 거기에 떠 있는 성운들은 한낱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 화산구와 다름없는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공간과 바다의 다른 점은 바다에 해류가 흐르고 있는 방향성과는 달리 공간에는 인력의 소용돌이가 도처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디와 마디 사이를 연결하는 인력의 손길 거기에도 불확정하지만 우주선이 통하는 꾸불꾸불한 길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급한 대로 이러한 가설을 인정하면서 빨리 우주 함대가 소용돌이의 가장자리까지 밀려나오기를 기다렸다.
"괜찮을까요? 사령관님."
독수리 호의 황영숙이 귀여운 얼굴을 스크린에 내밀면서 걱정스럽게 묻는다.
"걱정도 팔자군. 대한의 남아들이 이따위 사건으로 넋을 잃을 것 같은가?"
얼른 말을 가로채 신온철이 대답한다.
"헛허허허."
박민호가 호탕스럽게 웃어댔다. 모두 신경이 가냘픈 생각이 들어서다. 5일 동안을 엔진을 끄고 표류했을까. 한약을 달여서 먹고 있는 아침나절에 선체의 진동이 갑자기 멎었다.
"휴, 살았다!"
이상호는 소리 지르면서 기관실로 뛰어가서 엔진을 걸었다. 보조 엔진이 그 동안에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로켓의 발동은 금방 걸렸다.
"독수리 호! 알파별로 진로를 잡고 빨리 탈출하라!"
이만석 박사는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독수리 호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케이."
서윤철 부장의 대답이 기운차게 스피커를 울린다. 무궁화 호는 잽싸게 공간의 계곡을 빠져 나와 힘차게 불을 내뿜으며 항로를 예정된 제 코스에 접근시켜 갔다.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간신히 숨을 돌리고 성산포 기지에서 가져온 한국민요가 담긴 테이프 레코더를 틀었다. 국악원생들이 내뽑는 양산도의 멜로디는 함 내에 용기와 자신을 가득 채워 주는 듯 구성졌다.
"독수리 호! 어서 가시 거리로 오시오."
박민호 부장이 저편의 서윤철 부장을 불렀다. 한참만에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무궁화 호! 우리는 또 다른 함정에 빠진 듯 합니다. 아무리 발동을 걸어도 엔진이 움직이지 않소."
"뭐라고? 움직이지 않다니."
박민호는 성급하게 물었으나 이내 대답이 올 리가 없었다. 서윤철의 일방적인 호소만이 스피커에서 흘러온다.
"윤상운 군이 진땀을 빼며 점검했으나 허사였오. 그런데도 우주선은 X4호 별 쪽으로 강력히 끌려가기만 합니다. 구출 작업에 착수해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시선을 이만석 박사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할 것인지 말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가야지. 별 수 있나. 공동 운명체가 아닌가?"
사령관의 말이 떨어지자 로켓의 방향을 독수리 호 쪽으로 선회시켰다. 독수리 호까지의 거리는 전파 측정으로 22억 km쯤 떨어져 있었다. 광속으로도 두 시간은 걸리는 먼 거리에서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숨소리 마저 죽이고 로켓을 전속력으로 몰았다. 저마다 머리 속에서 독수리 호는 공간의 갈림길에서 저편으로 이끌려 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안 보이나?"
이만석 박사는 천체 망원경의 반사경을 들여다 보고 있는 방미란 양에게 물었다.
"아직도… 조금만 더 기다리셔요."
그녀는 눈동자를 더욱 조리며 두 손으로 마치 잠망경을 조정하는 것처럼 방향을 찾고 있었다.
"앗. 저기에 독수리 호가!"
방미란이 한참 후에 소리치자 이만석 박사는 천체 망원경을 넘겨받아 들여다보았다.
독수리 호는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둥둥 떠내려가고 있지 않는가? 이만석 박사가 반사경을 뚫어지게 지켜보는 한편으로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을 불렀다.
"홍 대장, 뭣하고 있소. 어서 대답을 해 줘야지."
이만석 박사는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건만 저 편은 쥐 죽은 듯 아무 대답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불러도 허사였다. 반사경에 비친 독수리 호는 마치 유령선처럼 주검을 연상시킬 뿐이었다. 이만석 박사가 대원들을 돌아다보려고 고개를 올리는 순간 로켓이 뒤집어지듯 크게 출렁거리는 바람에 그는 그만 이마를 망원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박사의 미간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박사님!"
놀램 속에서 방미란이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기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딴 대원들도 눈이 감기면서 픽픽 쓰러져 갔다. 제 2 함정도 필경 독수리 호와 같은 함정에 빠진 듯 했다.
 
죽음의 표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의식이 끊긴지 한 달이 지났을까, 또는 몇 해가 지났을까, 전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에서 맨 먼저 깨어난 사람은 제 2 함정 독수리 호의 황영숙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 속에서 큰 성문이 우뚝 서 있는 양지 바른 언덕을 두 동생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아마도 일요일이었는지 등산복 차림으로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성문을 지나치려고 하는데도 웬일인지 문이 꼭 닫힌 채 열리지가 않았다. 세 사람은 의아한 눈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약속이나 한 듯이 온몸의 기운을 모아서 어깨로 끙끙 성문을 떠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를 쓰고 떠밀고 있자니 별안간 두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세 자매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 휘청거렸다. 이 순간에 황영숙은 답답했던 꿈속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 위에서의 한가로운 장소가 아닌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원정대원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지 않는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녀는 독수리 호가 공간 계곡에 빠져서 로켓의 기능을 잃은 채 표류했던 생각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덜렁 내려앉는 가슴을 달래며 그녀는 침착해야 된다는 자의식 속에서 저도 모르게 창이 있는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한 눈에 한없이 깔린 모래사장이 보였다. 사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둥근 창에 바짝 대어 자세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로켓이 쓰러진 채 착륙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멀리 모래 언덕을 넘어 언뜻 보기에 20리쯤 떨어진 곳에 무궁화 호가 내동댕이 처진 채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황영숙은 마음을 가다듬어 고개를 실내로 돌려 홍성기 대장을 찾았다. 조정석에서 허리를 벨트로 묶인 채 머리를 바닥에 곤두박혀 있는 대장 홍성기,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가서 그의 몸을 일으키며,
"홍 대장. 정신을 차리셔요. 로켓이 불시착했어요."
외치다시피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홍성기 대장은 창호지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아무리 흔들어도 말이 없었다.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든 황영숙의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롭고 슬픈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 닥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누면서 이번에는 부장 서윤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세우며 마구 흔들었다. 그래도 까무러친 채 대답 없는 대원들! 황영숙의 두 눈에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못 이겨 눈물이 핑 돌았다. 우주의 외딴 별에서 영영 혼자만 의식을 되찾은 것일까. 그녀는 정신이 헝클어지기 시작하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어서 정신을 차려요. 여기가 어딘데 모두 이 모양일까."
황영숙은 발버둥을 쳐가며 바닥에 쓰러진 김동수, 이광호, 윤상운을 차례 차례로 흔들어 보았다. 그들도 산송장처럼 측 늘어진 채 아무 대답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황한 황영숙은 살같이 실내의 텔레비전 스위치를 틀고 무궁화 호를 불렀다.
"무궁화 호! 안 들려요? 어서 대답해요."
그래도 대답은 없었다. 통신기마저 고장이 난 것일까. 황영숙은 마치 죽음의 세계에서 혼자 살아 남은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홍성기 대장의 얼굴에 안경을 껴주면서 두 어깨를 붙들고 갖은 힘을 다해서 흔들었다. 그 때 뜻밖에도 스피커에서
"언니!"
하며 부르는 방미란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오,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스쳐 갔다.
"미란이니? 어떻게 됐어?"
자세히 묻는 황영숙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보자마자 방미란은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모두 이 모양이에요. 죽은 듯이 대답이 없어요. 이만석 사령관도 이상호도…."
콧물을 홀짝거리며 대답하는 방미란을 보고 황영숙은 나무랐다.
"울고만 있을 때니. 어서 물을 입에 부어주거나 알약을 먹여 봐요. 그 약 있지 않아. 동면에서 깨어날 때 먹는 약 말이야."
방미란에게 일러주면서 황영숙은 왜 진작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나 하는 뉘우침을 느꼈다. 그녀는 별실로 뛰어가서 약장에서 알약을 한 주먹 꺼내들고 홍성기 대장부터 차례로 입 속에다 한 알씩 쑤셔 넣었다. 다람쥐처럼 잽싸게 움직이며 대원들의 자세를 똑바로 고쳐 주기도 했다. 1분, 2분, 3분, …이 지나자 김동수가 맨 먼저 의식을 되찾았다.
"휴… 깨어났구나. 여긴 어디야?"
멀쩡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자 황영숙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로 의식을 회복해 갔다. 그러나, 그들은 황영숙이 훌쩍거리는 까닭을 누구도 알 리가 없다. 이처럼 난경에 빠졌을 때 어째서 여자가 먼저 의식을 되찾는 법일까?
"그건 여자의 생명력이 강한 탓이야."
훨씬 뒤에 김동수는 멋모르고 농담을 섞어가며 지껄였다.
 
날개 돋친 우주인
 
은하계 원정대원들은 낯모를 별에 불시착한 것이었다.
무궁화 호에서도 방미란이 재빠르게 시중을 든 덕분에 차례차례 의식을 되찾고 독수리 호와 서로 연락하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이만석 박사는 천문학 전문가인 문창수에게 별의 위치를 측정시켰다.
"독수리 호의 이광호 군도 함께 거들어 주게."
이만석 박사는 수학을 전공한 이광호를 스크린에 불러서 일렀다. 이만석은 총 지휘관인 관계로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의 위치를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로켓이 쓰러져 있어 천체관측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이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고 이만석 박사는 부장 박민호와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과 의논한 끝에 로켓을 곧추세우기로 정했다.
"제 1 함정은 이상호, 제 2 함정은 윤상운을 빼놓고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우주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서 작업을 돕도록."
이만석 박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사마귀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로켓의 비상구로부터 밖으로 나왔다. 굵직한 왕모래가 한없이 지평선 너머로 깔려 있는 적막한 사막이었다. 무궁화 호는 조금 높다란 언덕에 떨어졌기 때문에 멀리 독수리 호의 대원들이 깨알처럼 움직이는 모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상호는 기체 안에 자리잡고 스위치를 넣기 시작했다. 우주선은 이러한 사고를 미리 계산에 넣어 설계된 것이다. 전원이 들어감에 따라 우주선의 선실과 몸통에서 스프링 식의 팔 다리가 뻗쳐 마치 기중기로 기체를 끌려 올리다시피 천천히 고개를 들어갔다. 사방에서 스프링의 받침 살이 뻗어 지렛대처럼 몸을 일으켜서 두어 시간 후에는 완전히 자세를 고쳐 사다리까지 내려주게 되었다. 흔히 우주기지에서 보는 발사 가능한 자세 그대로 엔진을 꼬리에 두고 머리는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넓은 사막 위에 멀찍이 두 군데서 보였다. 무궁 호와 독수리 호는 이제 언제든지 발진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대원들은 정상적인 위치로 되돌아 간 우주선 내로 올라와서 비로소 숨을 돌렸다. 식사 반이 방사선 처리를 한 싱싱한 사과며 귤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문창수는 이내 천체 관측을 마치고 그들이 떨어진 별이 X4호 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자철 별이 아닌가. 엔진을 걸어 보게"
이만석 박사는 명령을 내렸으나 기관실의 이상호는 얼마 후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비통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 역시 걸리지 않는단 말이지. 시간을 두고 궁리해 볼 수밖에. 알았어요."
이만석 박사도 목소리를 낮추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할 일없이 그들은 식당에 차린 과일을 저마다 씹고 있었다. 독수리 호의 그들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스피커로부터 김동수의 테너 소리가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리…'하며 노랫가락을 흘리기 시작하자, 대운들의 죄였던 마음은 이내 풀어져 갔다.
"일리가 있는 소리야. 정말로 짜증을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역사에 밝은 신온철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반쯤 남아 있던 사과를 한꺼번에 입에 쑤셔 넣고 어석어석 씹었다. 두 볼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방미란은 허리를 비뚤며 킬킬거리며 웃는 꼴이 더 우스워 대원들도 한바탕 웃어댔다. 이만석 박사는 쓴웃음을 씹으며 그들의 천성이 이처럼 낙천적인 사실을 마음 든든하게 여겼다. 이 때였다. 우연히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린 부장 박민호는 멀리 지평선 위의 하늘에 먹구름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날아오는 그림자를 발견하자 흠칫 놀랐다. 순간 숨을 죽이며 창 옆으로 다가서서 뚫어지게 지켜봤다.
"뭐가 일어났어?"
덩달아 놀랜 대원들이 제각기 이마를 창에다 대고 내다보았다. 그들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독수리 호! 제 1 함정의 왼편 지평선을 살펴보라. 이상한 물체가 내습하고 있다!"
이만석 박사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켜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한 사람씩 교대로 완전 무장을 해야 해. 어서. 시간이 없다!"
이만석은 지체없이 명령했다. 졸지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는 애써 가라앉히며 대원들을 독촉했다. 검은 점은 점점 커지며 가까이 접근해 왔다. 하늘을 날아오는 그들의 후둑후둑하는 날개 소리가 가까이 들려 올 무렵에는 몸집의 크기가 독수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떼지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새 사람들이 아닌가! 날개를 가진 우주인들이다."
더할 수 없는 긴장이 삽시간에 실내를 휩쓸었다. 수백 마리의 우주인들이 손에 뾰족한 창을 들고 날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IQ는 미지수
 
우주선에 다다른 우주인들은 두 갈래로 갈라져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를 각각 포위했다. 무궁화 호를 둘러싼 그들은 대장처럼 보이는 대 여섯이 한 손에 창을 들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본 그들의 모습은 첫째, 키가 컸다. 모두 2m가 넘는 키에 어깨에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얼굴은 주둥이가 매의 부리처럼 튀어나오고 몸집에 비하여 얼굴이 유난히 작은 편이었다. 두 눈도 제대로 있지만 어딘가 조류의 그것과 닳은 데가 뚜렷이 엿보였다. 표정도 마치 브론즈로 만든 동상의 얼굴처럼 청동 색과 딱딱한 차가운 느낌을 주고 팔 다리는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나 다리가 팔에 비하여 짧은 모양은 마치 남극의 펭귄 새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펭귄처럼 약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마디마다 근육이 팽팽하게 불거져 튼튼한 전사임을 짐작케 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동안 나머지 우주인들은 날개를 등에 접은 채 우주선의 둘레를 휘돌고 있었다. 언듯 보면 옛날 남미나 아프리카에 있었던 식인종에게 포위 당한 착각을 일으킬만했다.
첫 인상이 차가운 매부리 우주인들은 우주선 밑까지 접근했으나 사다리를 거둬버린 만큼 밟고 올라올 길이 없었다. 새사람은 서로 수군거리더니 일제히 날개를 펼쳐 로켓의 창구가 있는데까지 날아 올라와서 배 안을 기웃거렸다.
이만석 박사는 결코 질겁을 해서 숨어 있지는 않았다. 둥근 창을 마주 보는 의자에 태연히 앉아서 우주인들의 관찰에 온 몸을 내맡겼다. 그는 적어도 그러한 편이 적의가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편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원들도 평소대로 기계를 수리하거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유사시에 탈출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물건은 챙겨 두어야만 했다.
우주인들은 번갈아 가면서 로켓의 내부를 기웃거리더니 이내 모습이 안 보인다. 그들은 로켓의 뾰족한 노스콘에 매달리며 무엇인가 의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한 놈이 되돌아와서 창으로 출입문을 쿡쿡 찔러 보곤 되돌아간다. 이만석 박사는 한 눈도 깜박하지 않고 오직 그들의 거동을 살필 뿐이다. 한 놈이 또 되돌아오더니 이번에는 빈손으로 유리창 너머에서 팔딱거리면서 나오라는 듯이 손짓을 한다. 그러면서 굳은 얼굴을 풀어가며 합장을 해 보인다. 이만석 박사는 아마도 적의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언제까지 이럴 게 아니라 내가 나가서 담판을 지어 보는 게 어떨까?"
이 박사가 뒤를 돌아보며 상의하자 부장 박민호는 정색을 하며 반대했다.
"이럴 때는 부장이 나서는 법입니다. 내가 나가서 만나보겠어요."
그러면서 스피커로 독수리 호의 부장 서윤철을 불러내어 그쪽 상황을 캐물었다. 상황은 무궁화 호와 비슷하게 호기심과 공포심이 뒤섞인 착잡한 분위기라는 대답이다.
"만일 납치해 가는 경우는 로켓에서 기관총 소사를 하기로 하고 우선 놈들의 문명이 어느 정도인가 탐지해 봅시다."
부장 박민호는 빈손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이만석 박사가 앞을 막 질렀다. 그리고선 스피커에 대고,
"독수리 호! 우리가 먼저 시험해 볼 테니 아무 일이 없거들랑 그 쪽도 나가 봐요. 지금은 조금 참으시오."
하며 일러 주었다.
박민호는 그 뒤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고 출입문을 열고 사다리를 내리고선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려딛으며 땅으로 내려갔다. 우주인들도 겁이 나서인지 그를 목격하자 단번에 달려들지 않고 멀찍이 거동을 살피기만 한다.
사람은 비록 죽을 고비가 닥치더라도 마음을 굳게 먹으면 자기도 모르게 침착해지는 법이다. 박민호는 몸을 사리면서 땅 위에 홀로 서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보고 다시 로켓의 둥근 창을 올려다보았다. 조그마한 얼굴들이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든든해졌다. 그러자 날개를 거둔 우주인 한 사람이 모래밭을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박민호 앞으로 와서 두 손을 합장해 보인다. 필경 적의가 없다는 뜻일 게다. 박민호도 말없이 합장해 보였다. 한 사람, 두 사람씩 대장급 만이 땅에 내려선 채 합장을 하며 모여들었다.
"부리마라! 부리마라!"
하며 맨 처음의 인물이 외쳤다. 짐작컨대 인사가 아니면 자기 소개일는지도 모른다. 박민호도 호응해서,
"박민호! 박민호!"
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할 리가 없다. 그들은 대뜸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날개가 있는 우주인과 날개가 없는 우주인이 싸우고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선 다시 날개가 있는 우주인과 둥그런 우주복을 입은 지구인의 그림을 그려 넣고 서로 합장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박민호는 그 중의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켜 자기를 따라서 우주선으로 올라가자고 손짓으로 말했다. 그들의 IQ도 꽤 높은 모양이었다. 서로 한 두 마디 상의하더니 세 사람만이 박민호의 뒤를 따라 사다리를 밟고 올라왔다. 우주선에 들어선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박민호가 가리키는 의자에 순순히 앉았다. 나머지 두어 놈이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민호는 종이와 볼펜을 꺼내어 여기가 어디며 인구는 얼마나 있고 아까 얘기한 싸움은 무엇을 뜻하느냐고 그림을 섞어가며 물었다.
그들 중 부리마라라고 외쳤던 자가 나서서 입으로 발음을 해가면서 글씨와 그림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글씨의 투로 봐서 그들의 문자가 퍽 단순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매부리 족은 아마도 지금 이 별의 딴 종족과 전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놈이 무엇인가 열심히 말했다. 아마도 자기네 편에 들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듯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분홍색 머리칼은 여자였고 녹색 머리칼은 남자였다.
"어쨌든 X4호 별을 탐험하려면 언제까지 로켓 속에서 살 수 없는 노릇이니 이놈들을 따라가서 본부가 있는 곳까지 가 보는 게 어떨까?"
이만석 박사는 상황을 종합한 끝에 서슴없이 말했다. 무슨 눈치를 채었는지 세 놈의 우주인은 꾸르르 꾸르르하며 기뻐하는 시늉을 한다. 이만석 박사는 여기서 일어난 상황을 대충 독수리 호에 알려 주었다. 그리고서는 이상호, 윤상운, 두 사람의 로켓 기관사만을 당분간 남겨 두고 나머지 열 사람이 부리마라의 뒤를 따르기로 한다.
"저 식물자력선 발사기를 저마다 휴대하도록 해야지."
이만석 박사는 잊지 않고 일러주었다.
 
원목빌딩
 
독수리 호에 연락해서 채비를 차린 원정대원들은 저마다 1인용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우렁찬 폭음을 뿌리면서 회전하는 것을 지켜보던 매부리 우주인들의 표정은 적이 당황한 듯 했다.
이만석 박사는 발 밑에 한없이 깔린 사막 위를 날면서 부리마라 족의 문명이 인간의 그것보다 수준이 낮지나 않을까 하고 상상하고 있었다. 두루 살펴보니 저마다 손에 창을 움켜쥔 우주인들이 마치 메뚜기 떼처럼 지평선의 저편 하늘을 보고 날아갔다. 그들은 그러나 날개를 퍼드덕거리지 않고 솔개처럼 늘인 채 기류의 통로에나 몸을 맡긴 듯 여유 있게 날아가고 있었다. 몸집에 비하여 어울리지 않으리 만큼 작은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둥실 떠가는 1인용 헬리콥터의 분대를 호위나 하듯이 에워싼 채 속도를 맞추어 나는 눈치가 엿보였다. 기필코 놈들의 문명이 대단치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선 지 이만석 박사는 장차 펼쳐질 운명에 일종의 호기심 마저 느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는 참이었다.
서로 말을 건네지는 않고 있지만, 딴 원정대원들의 생각도 비슷하리라. 200마일이 넘는 속력을 내가며 세 시간쯤 날았을 무렵, 저 멀리 덩그렇게 깔려 있는 고동색 수풀이 눈에 들어왔다. 산이라고는 아직도 눈에 띄지 않으니 그것은 한낱 사막의 오아시스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수풀이라면 풀빛이나 파란색에 익은 지구인의 눈에는 고동색 나무들이 서름한 인상을 안겨준다. 아마도 잎사귀가 없는 탓이리라.
그들은 어느새 밀림 위를 지나고 있었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무들의 크기는 거목도 이만저만한 거목이 아니었다. 지구의 빌딩의 몸통에 못지 않게 굵은 줄기에서 어마어마한 나뭇가지를 가진 이 식물은 그야말로 매머드 식물과 다름이 없었다. 눈어림으로 가지도 끝까지의 높이가 50m는 넘어 보였다. 거기서부터 사막은 가를 두르고 밀림이 펼쳐질 뿐이더니 우주인의 한 지휘관이 날개를 서너 번 퍼드덕거리며 쑥 대열을 앞질러 열댓 놈을 모아 놓고 무엇인지 야단스럽게 일러준다. 그러자 명령을 받은 놈들은 속력을 올리며 쏜살같이 앞질러 어렴풋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선발대이리라.
이만석 박사는 줄곧 속셈을 하고 있었다. 우주인들의 얼굴이며 몸통이 규소처럼 딴딴한 껍질로 덮여 있는 듯 한데 과연 총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또 보배처럼 저마다 몸에 지니고 있는 식물 자력선 총으로 비상시에는 위험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언젠가는 탈출하기 위해서는 미리 생각을 정리해 놓아야만 했다. 한참만에 우주인들은 목적지에 가까이 왔는지 갑자기 속력을 늦추었다. 그리고선 대장의 꽥꽥거리는 명령으로 사병들은 앞질러 언덕을 넘어간다. 이만석 박사는 고동색 수풀이 끊어진 언덕 너머에 고동빛의 이색적인 나무들이 수없이 알몸으로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분홍색 머리의 부리마라가 헬리콥터로 다가와서 이 박사에게 손짓을 한다. 아래쪽을 가리키며 소리지르는 꼴이 착륙해야 한다는 뜻인가 보았다. 이 박사는 알았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들어 대원들에게 착륙 준비를 알렸다.
"대장님, 이런 야만인들도 은하계에 살고 있는 모양이죠?"
마이크로폰을 통해서 역사학을 전공한 신온철이 비웃는 말투로 속삭인다.
"잠자코 있어야지 지금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나."
이만석 박사는 나무랐다. 일행은 이윽고 풀이 얕으막하게 자라 있는 넓은 광장에 내렸다. 이만석 박사는 헬리콥터에서 내리자 재빨리 원정대원을 불러 독수리 호의 부장 서윤철과 무궁화 호의 문창수를 헬리콥터 감시원으로 임명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서성거리는 우주인들. 여전히 대표가 나와서 손짓으로 저쪽 수풀을 가리키며 걸어가라는 시늉을 한다. 원정대원들은 순순히 응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낯선 데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투덜거리는 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원정대원들도 묵묵히 줄지어 갈 따름이다.
길가에 서 있는 지름이 20m또는 50m나 되는 훤칠한 통나무가 바로 우주인의 집으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의 밑동에 출입구가 둥글게 파여 있고 층계마다 수없이 많은 구멍이 보인다. 멀리서 보이는 원목 빌딩의 속은 우중충하며 휑뎅그렁해 보였다. 우주인들은 새 종류로부터 진화한 까닭에 아직도 나무에 깃들여 살고 있는 것일까. 원정대원들은 그러한 광경을 훔쳐보면서 언뜻 기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그렇더라도 그 규모가 지구보다도 훨씬 거창한 것에 한편으론 마음이 섬뜩해졌다.
 
우주인의 사연
 
부리마라 족의 임금이 기다리고 있는 원목 빌딩의 홀은 과연 넓었다. 깊숙한 곳에 동그마니 마련된 단위에는 용상이 놓여 있고 옆에는 왕비로 보이는 분홍색 머리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왕과 왕비는 부드럽고 함초름한 털옷을 무릎까지 걸친 찬란한 예복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단을 둘러싸고 곱게 단장을 한 우주인들이 50명 가량 앉아서 이만석 박사 일행의 입장을 숨소리마저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도 부장 박민호가 앞장을 선 채로 줄줄이 원정대원들은 걸어서 용상 앞에 한 줄로 늘어섰다. 부리마라라고 자칭한 우주인이 임금 앞에서 큰절을 하고 나더니 설명을 시작한다. 아마도 사막에서 발견한 경위를 보고하는 듯. 임금이 덤덤히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보고가 끝나자 일어서서 이만석 박사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합장을 한다.
이 박사도 그것이 적의가 없다는 뜻인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라 따라서 자기도 합장을 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속담 그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도 영리한 부리마라가 중간에서 열심히 설명을 한다. 저절로 필담이 시작되어 이만석 박사는 태양계를 그리고 은하계를 그려놓고 지구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납득시켰다.
"시와루키. 시와루키."
임금은 너그러운 낯빛을 지우고 알았다는 듯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합장을 해 보인다. 이만석 박사도 그저 합장을 해 보일 도리밖에 없었다. 접견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비록 적의는 없는 듯 하지만 원정대원으로서는 한 발짝 한 발짝이 긴장에 잠길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들이 부리마라의 안내를 받아 궁전 밖으로 나왔을 적에는 저마다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우주인들은 길을 말끔히 닦아놓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동차와 같은 기계 문명도 없는 원시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원정대원들은 한길에서 마주치는 우주인의 어른들이 별로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반면에 천사와 같은 귀여운 날개를 가진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뒤따르는 바람에 쑥스럽기도 하고 반가운 느낌이 감겨 왔다.
"저렇다니까, 어딜 가거나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거야."
황영숙은 뒤돌아보며 혼잣말로 종알거리며 감상을 새로이 했다. 본질적으로는 지구의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곡마단 풍경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이 숙소로 안내를 받은 곳은 역시 원목 빌딩의 넓은 홀이었다.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털로 만든 이부자리가 그 위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벽마다에 사람 모양의 생물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전쟁의 장면이 새겨져 있는 것은 웬일일까. 세찬 광선을 받고 허우적거리는 벽화의 장면 장면이 모두 섬뜩했다.
"분명히 이 벽화 속에 우주인들의 전통과 역사가 숨어 있을 게다. 어디 풀어나 볼까."
상고머리의 신온철이 우주복 안에서 싱긋 웃으며 일일이 들여다보며 살피기 시작했다. 부리마라는 그러한 움직임에 오직 슬픈 표정을 지워 보일 따름이었다.
"태양 숭배처럼 이곳의 우주인들도 천지창조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닐까? 여러모로 원시적인 냄새가 풍기는데…"
김동수가 적이 들뜬 소리로 고개를 갸우뚱해 보인다. 그러나 온갖 짐작이 맞아 들지 않았다. 원정대원들이 부리마라와의 필담으로 우주인들이 가진 법의 논리가 오달진 말과 계산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 뒤에 알았기 때문이다.
1주일 이상을 머무르고 있는 동안 원정대원들은 쉬이 그들의 말을 터득할 수 있었다. 3진법의 논리라면 이미 원정에 앞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어 훨씬 수월했다. 그리하여 의사 소통이 자유롭게 되자 매부리 우주인 사회의 수수께끼는 술술 풀려나갔다.
그들의 선조는 태초에 고도로 발달한 기계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X4호 별에는 전부터 평원 족과 산악 족이 살고 있어 부리마라는 평원 족이다. 그들은 산악족보다 훨씬 발달된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이 이를테면 지금도 먹는다, 안 먹는다는 두 가지 표현밖엔 없는 까닭도 덜먹는다, 많이 먹는다 따위의 빈부의 차, 건강의 차이가 없었던 찬란한 시대의 유산이다. 그러면 태평세월이 수 만년 동안 흘러갔는데 X4호 별에서 가장 귀중한 파라노이드 박테리아의 독점 문제로 평원 족과 산악 족이 핵전쟁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파라노이드 박테리아는 자석 철을 침식해서 자력을 얻어내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문명이 뒤진 산악 족이 이를 독점하려고 탐을 낸 까닭에 벌어진 핵전쟁으로 인구는 거의 전멸되다 시피하고 기계 문명은 망해 버렸다. 그 중에서도 산악 족의 일부는 깊은 동굴에서 천 년 이상이나 생명을 유지해 왔고 부리마라 족은 일부가 우주선을 타고 X4호 별의 위성 아미불로 피해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러한 비극을 가져오는 문명을 싫어하게 됐어요, 원시 상태가 차라리 편리하니까요. 맨 처음 설명한대로 산악 족이 또 다시 기계 문명을 건설하는 것을 반대하고 지금 전쟁 중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별과 상관이 없으니까 우리를 도와 주셔요."
부리마라는 목메인 소리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명분이 당당한 부탁을 받고 꽁무니를 빼는 것은 대장부의 정도가 못 된다. 이만석 박사는 부리마라 족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뒷걸음질 할 수도 없는 것이 원정대의 사명이 우주별의 평화적 답사에 있는 만큼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우겨본들 X4호 별에서 탈출하자니 별의 자력 때문에 꼼짝달싹 못하는 형편이다. 공연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우주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 보는 편이 차라리 현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부리마라가 알려 준 총동원의 날을 며칠 남겨 두고 원정대원들은 평원 족의 마을을 짝지어 돌아다니면서 신기한 나무의 씨앗을 모으곤 한다. 그 중에는 차돌처럼 단단한 종자도 있었다. 생물학을 전공한 황영숙은 동그랗지가 않고 팔모난 보석 같은 씨앗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이것만해도 우주별까지 따라온 보람이 생긴다고 속으로 만족했다.
핵전쟁의 탓 때문인지 야생 동물이란 통 볼 수가 없고 아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산이 있는 깊숙한 곳에서만 겨우 산토끼 종류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진군의 날이 왔다. 원시인 같으면 제법 북채 꽹과리를 치며 야단법석을 떨어야할 판인데도 우주인들은 궁전 앞 광장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서서 총사령관으로 보이는 애꾸 우주인의 훈시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이만석 박사를 비롯한 원정대원들도 마치 외인 부대처럼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애꾸의 훈시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의 선조가 이룩한 고도의 기계문명은 욕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삐오라 족(산악족)은 또 다시 문명을 재건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X4호 별의 또 하나의 비극이다. 우리는 오늘의 총공격에서 기어이 승리하리라."
우람한 소리로 외치는 애꾸의 연설은 대강 이런 줄거리였다. 이만석 박사의 지휘로 원정대원들은 처음에 그들이 내린 풀밭으로 돌아와서 헬리콥터의 엔진을 걸었다. 독수리 호와 무궁화 호에 남긴 두 사람을 빼놓은 10명은 훌쩍 허공으로 치솟아 방향을 정한 뒤에 수천 명의 우주인들이 날아가는 뒤를 따랐다.
"우리로선 생명을 바칠 필요는 없는 거야. 삐오라 족의 문명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뒤에 우리의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이만석 박사는 마이크로폰으로 가만히 일러 주었다. 저마다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속 100마일의 속도로 바람 칼을 날치처럼 꼿꼿이 펼치고 세차게 날아가는 불빛에 그래도 몸 안의 피가 뒤끓는다. 아무리 외인 부대라 할지라도 막 전쟁을 시작하려는 흥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박사님, 자칫 잘못하면 싸움에 말려들어 갈 것 같은 심정인데요."
박민호 부장이 익살을 부린다.
"그야 끝내 정당방위는 해야 될 게 아닌가. 상대방이 나를 죽이려는데 가만히 있는 바보가 있을까?"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이 모처럼 한 마디했다. 모두 가슴이 울렁거리는 증거였다. 얼마를 날았을까. 멀찍이 주뼛주뼛한 산들이 감청색을 띤다. 원정대원들은 이제 전쟁터에 가까이 온 것을 육감으로 알았다. 햇빛이라기보다 별빛에 창백하게 번쩍이는 우주인들의 창 끝이 자못 살벌한 긴장을 자아낸다.
"호리, 휘!"
외치는 소리가 별안간 앞쪽에서 일어나더니 우주인들은 예정하듯이 대대별, 중대별, 소대 별로 흩어져 진형을 짜면서 공격태세로 옮긴다. 이만석 박사가 쌍안경을 붙들고 아무리 산기슭에서 골짜기를 뒤져봐도 적의 모습은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공격 태세로 부라마족의 애꾸를 선두로 하는 군사들은 험한 산의 중턱을 포위하면서 내리 닿았다. 원정대원들은 한 분대처럼 뭉쳐서 움직였다. 부리마라가 속하고 있는 소대의 일원인 것이다. 그들은 기어올라가거나 몸을 감추지도 않고 당당하게 동굴을 찾아냈다. 바위산은 벌집처럼 동굴이 빙 둘러 파있는 모양인지 평원 족의 군사들은 한 개씩을 도맡아 동굴 앞에서 고함을 지르며 시위를 한다.
"삐오라, 삐라 부, 뿌 라라!"
삐오라 족 들이여, 나와서 싸워라, 그리고 싸워서 망하라는 뜻이다. 이만석 분대는 너럭바위를 찾아서 착륙한 뒤, 방미란과 김동수 두 경비원을 헬리콥터 옆에 남기고 부리마라 소대에 합류했다. 이만석 박사가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동굴 속에서 방사능을 피하여 2천 년이나 살았다니 상대방은 아마도 두더지가 다 됐겠다.'
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자 컴컴한 굴속이 별안간 밝아지더니 눈이 시도록 밝고도 밝은 빛 다발이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쏘아오지 않는가! 밖에서 멈칫거리던 평원 족은 순간 흠칫해서 몸을 사리더니 한결 고함 소리를 높인다. 눈부신 광선을 손으로 가리며 이만석 박사가 굴의 어귀에서 뚜렷이 목격한 물체는 뜻밖에도 로봇이었다. 이마 위에서 날카로운 광선을 내비치면서 한 놈, 두 놈씩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오는 로봇의 크기는 높이가 3m가 넘을까. 둥근 렌즈 눈을 둘 가진 로봇은 한 손에 쇠망치를 들고 앞을 한 바퀴 훑어보더니 곧장 이만석 박사가 서 있는 곳으로 굵직할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불을 내뿜는 로봇
 
로봇은 오른 손에 쥔 쇠망치를 번쩍 들어 내려치려고 겨눈다. 아무런 표정조차 없이 기계적으로 몸을 놀리는 폼이 오히려 무시무시하다고 할까. 징그러웠다. 이만석 박사는 순간 머리 끝이 쭈뼛해지며 등줄기를 치달리는 찬바람을 느꼈다. 그 쇠망치로 얻어맞는 날이면 박살이 날 것은 뻔하다. 재빠르게 그는 몸을 사리면서 손은 저도 모르는 결에 식물 자력선 발사기를 누르고 있었다. 기관총 모양의 발사기의 부리에서 내뻗치는 자력선은 소리 없이 로봇의 몸통을 파고 들어간다. 지금 자력선을 내뿜고 있는 시그널은 발사기의 계기반에 파르스름한 곡선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었다. 콩을 튀기는 듯 따다닥거리는 기관총의 요란한 소리에만 익숙한 사람이 청색 곡선의 율동을 지켜보는 일은 그다지 실감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효과는 이내 나타났다. 얼굴과 가슴 부근을 노리며 연방 쏘아대는 자력선을 이기지 못한 로봇은 졸지에 팔다리가 굳어지더니 맥없이 픽 쓰러져 간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나둥그러지자 부리마라 족의 전사들은 아연 함성을 올리며 사기를 돋구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가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판은 아니었다. 딴 동굴의 어귀에서는 로봇이 입에서 내뿜는 시뻘건 화염에 쪼인 부리마라 족들이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피신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광경이 퍼뜩 눈에 띄었다.
"호리 휘! (공격하라!)"
"삐오라, 뿌 라라! (삐오라 족이여, 싸워서 망하라!)"
연방 외치면서 로봇을 향하여 그들은 창을 던지고 돌멩이를 던지며 끈덕지게 싸우고 있었다.
"홍성기 대장, 몇몇 대원을 이끌고 전세가 불리한 쪽을 지원해 주게."
이만석 박사는 어느덧 흥분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오케이, 알았습니다."
"화염 방사기의 권내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게."
우당탕 퉁당 거리는 전투의 소란 속에서 이 박사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자력선 발사기의 위력으로 로봇은 한 놈씩 한 놈씩 정확하게 거꾸러져 가는데도 동굴 속에는 계속 로봇이 쇠망치를 들고 나타났다. 산악족의 전략인즉 부리마라 족과 넓은 싸움터에서 결전하기보다는 동굴에 접근하는 것만을 막아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른바 삐오라 족은 한 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다만 로봇만 내세워 싸우게 하고 있으니 그들의 문명은 상당한 수준인 듯했다. 싸움이 이럭저럭 한 시간 남짓 계속되는 동안 쌍방이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우주원정대의 자력선 발사기가 없었더라면 부리마라 족은 얼씬도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로봇의 성능은 그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침착하게 겨냥을 해 가면서 로봇의 가슴팍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태까지의 전과로 보아 로봇은 가슴 언저리가 가장 약한 듯했기 때문에, 아마도 거기에 심장처럼 중요한 전자 컨트롤 장치가 설비되어 있는 듯 했다. 여덟 군데의 동굴 어귀에서 벌어진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삐오라 족에 불리해져 갔다. 아직은 아무도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내보내는 로봇은 천만 뜻밖에도 원정대원들의 자력선 발사기에 맞아 어김없이 하나씩 하나씩 부서지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2백여 로봇이 거꾸러진 뒤부터 동굴에서는 새로운 로봇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뛰어 들어가서 흉악한 문명 재건자들을 끌어내라!"
부리마라의 사령관이 한 손을 번쩍 들어 호령을 했다. 1천여 명의 전사 중에서 반 이상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낸 평원족의 특공대는 기세를 올리며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뒤지지 않으려고 몸이 단 전사들의 두 눈에는 핏줄기가 일고 온몸에서는 살기가 풍긴다. 전공을 다투느라고 먼저 동굴 속에 뛰어든 병정들은 깊숙이 숨어있던 로봇의 화염에 말려 온몸을 비틀거리며 비명을 올릴 겨를조차 없이 숯덩이가 되어 숨졌다.
"로봇은 아직도 남아 있었군. 제발 앞장서서 놈들을 처치해 주셔요."
부리마라의 지휘관이 이만석 박사에게 청했다. 이만석 박사는 여덟 명의 대원을 한 사람씩 동굴에 배치하고 겨냥을 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부리마라 족들은 원정대원의 뒤를 따른다. 과연 삐오라 족이 굴의 출입구마다 배치해 놓은 로봇은 화염을 입에서 내뿜고 있었으나 자력선총을 당해 내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 갔다.
그러다가 마지막 로봇이 바위 뒤에 숨어서 느닷없이 내뿜는 화염에 닿아, 언어학을 전공한 서윤철 부장이 숨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라 소식을 전해들은 대원들의 분노는 머리 끝까지 솟아올라 재빨리 동굴 속의 광장으로 빠져 나온 박민호 부장이 뒤로부터 로봇을 들이쳐 단숨에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잇따라 헐레벌떡 쫓아온 황영숙은 숯덩이로 변한 서윤철의 주검 앞에 꿇어앉아 목을 놓고 울어댔다.
 
영웅끼리의 대결
 
굴 속의 광장은 천장에 붙은 조명 장치가 있어 침침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로봇이 쓰러지자 부리마라의 전사들은 다시 한 번 함성을 올리고선 광장 깊숙이 진격해 갔다. 이만석 박사는 황영숙, 신온철 두 사람에게 시체를 헬리콥터로 옮기도록 명령하고 부리마라 족을 뒤따랐다. 동굴은 들어갈수록 넓은 지하도시를 이루고 삐오라 족의 전사들은 수천 명이 한 군데에 포진하고 부리마라와 맞서고 있었다.
"너희들은 유일한 생명선이었던 로봇을 모조리 잃었다. 그것은 지구별에서 온 사람들의 자력선 총을 맞아 전자 장치가 말짱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항하겠느냐? 자력선 총은 너희들의 간을 단결에 꿰뚫고 말 것이다. 목숨이 아쉽거든 어서 항복하라!"
부리마라 사령관이 나서며 호령하였다. 그의 소리는 메아리 치며 쩌렁쩌렁 동굴 속을 울렸다.
과연 삐오라 족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두 어깨에는 날개가 퇴화해서 주먹만한 혹만이 남은 모습이 언뜻 눈에 띄었다. 옹기종기 몸을 움츠리고 있는 그들의 몸집도 부리마라에 못지 않게 큰 편이다. 몸의 특징은 평원족이나 산악족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서 대답을 해라! 1백을 세기까지 대답이 없으면 총 공격을 가해서 전멸시키겠다!"
부리마라 사령관의 기세는 등등하다. 이만석 박사는 뒤로 돌아서 그들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삐오라의 진지는 순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놈들은 지휘관 회의라도 소집한 모양이다. 무거운 침묵이 굴 속을 감돌고 있었다. 한참만에 회답이 떨어졌다.
"어쨌든 우리는 항복할 순 없다. 부리마라의 대표 전사와 삐오라의 대표 전사를 내세워 두 사람이 겨루어서 승부를 가르자."
"대장부로서 약자의 제안을 저버릴 수는 없는 법이니 무기를 버리고 한 놈만 나와서 부리마라의 영웅이 어떠한가 맛을 보아라!"
그러자 삐오라 쪽에서 한 놈이 광장의 한 복판으로 걸어나온다. 어깨의 바라진 모양이 억세게 생긴 놈이었다. 부리마라 쪽에서는 사령관이 손수 나섰다. 두 다리의 검실검실한 털이 마치 온 몸을 쇠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두 놈은 한 복판에서 맞서자 서로를 탐색하면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마치 곰과 곰이 상대를 노리는 것같았다. 양군은 숨소리 마저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움츠리던 부리마라가 별안간 날개를 확 펼치며 껑충 뛰어들어 삐오라의 가슴팍을 세차게 걷어찼다. 공격은 정확했다. 삐오라는 비실비실 나가떨어지려던 몸을 간신히 가누더니 두 번째 공격을 가하려는 부리마라의 날개를 와락 잡아챘다. 부리마라는 허우적거리며 상대방의 멱살을 잡아챘다. 두 놈은 뒹굴면서 엎치락뒤치락 상대방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피가 얼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살점이 벗겨져 나간다. 그래도 놈들은 씩씩거리며 물러설 줄을 모른다. 주먹이 번개같이 움직여 상대방을 후려갈기기를 계속했다.
20분이나 지났을까? 어느 쪽의 주먹인지는 몰라도 팍팍 두어 번 상대방의 얼굴을 갈기더니 선뜻 일어선 놈은 부리마라 쪽이었다. 부리마라의 전사들은 함성을 울렸다. 부리마라 사령관은 마치 공을 다루듯 사정없이 삐오라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발버둥치던 삐오라의 팔다리가 축 늘어지자 그는 영웅답게 손등으로 제 얼굴의 피를 문지르면서 한 발로 뻗어 버린 삐오라의 가슴을 내려딛고 외쳤다.
"삐오라의 야망은 이로써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X4호 별의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문명을 또 다시 재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이 주는 불편과 시련은 부리마라나 삐오라가 인공적으로 주는 멸망 보단 훨씬 견디어 내기 쉬운 것이다. 까닭에 우리는 삐오라의 항복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그 후, 문명을 다시는 재건하지 않겠다는 삐오라의 항복문서에 조인이 되고 동굴 속에 있는 과학 기계는 모두 파괴되었다. 이만석 박사는 삐오라 족의 문명이 파괴되기 직전에 일일이 사진을 찍어 놓았다. 박민호 부장은 귀중한 문헌을 일일이 뒤져 복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장차 지구의 문명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자료이기 때문이었다. 부리마라 족은 삐오라의 과학자 열댓 사람을 포로로 하고 개선하였다. 부리마라의 수도에 돌아온 원정대원은 먼저 서윤철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헬리콥터가 내린 광장을 내려다보는 높다란 언덕에 한국의 첫 희생자의 뼈를 묻었다.
"은하계의 유원한 별을 찾아온 지구 나그네의 피와 뼈가 여기에 묻혔으니 이 좁다란 묘지의 흙은 한국의 흙이나 다름이 없다. X4호 별에 흔적을 남기고 한 발 앞서 고향으로 돌아간 서윤철 부장의 영혼이여 고이 잠드소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으리. 군의 숭고한 정신을 길이 본받아 간직하리라."
이만석 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사를 읽고 있는 동안 여자대원 황영숙과 방미란은 얼굴을 손수건에 파묻고 하염없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원정대원들의 눈물은 동그마한 서윤철의 묘를 적시고 또 적시었다. 원정대원은 이미 생명의 위험을 각오한 사람들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서윤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리마라의 임금이 이번 전쟁의 공로를 아무리 치하해 본들 원정대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론적으로 X4호 별의 평화를 위해 서윤철은 훌륭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감정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허전한 마음을 과학을 탐구하는 정열로서 달랠 도리밖에 없었다. 이 박사는 삐오라의 과학자들과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했다. 부리마라 족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원정대원들이 그들과 접촉하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처럼 많은 수의 로봇을 어떻게 만들어 냈습니까? 동굴 속에는 이렇다할 만한 공장 시설도 없던데요?"
이만석 박사의 물음에 삐오라의 과학자는 고개를 저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 로봇은 우리의 세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파라노이드 박테리아를 독점하려고 일으킨 핵전쟁이 터지기 전에 우리의 선조가 만들어 놓은 로봇이 남아 있었을 따름이오. 그 후에도 동굴로 피해 온 나머지 후손들은 과학을 재건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몸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IQ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삐오라의 늙은 과학자는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문헌을 대대로 연구해서 옛날의 화려했던 문명을 되돌리려고 노력했으나, 우리는 원시적인 수법으로 구리를 녹이고 쇠를 뽑아 내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근 8백 년이나 걸렸습니다. 동력을 얻기 위해 발전소를 만들어야만 했는데, 사람의 손도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계곡을 막아낼 콘크리트 공사의 자재조차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동굴 속에 조명을 얻게 됐나요?"
함께 듣고 있던 문창수가 물었다. 그는 천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더욱 의문이 많았다.
"할 수 없이 모래를 녹여서 거울을 만들어 내서 항성의 광선을 이용한 항성 발전소를 만들어 동력을 얻게 되었어요. 그러나 온갖 발전에도 불구하고 4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변하는 X4호 별의 자력 때문에 그 때마다 어려운 일을 번번이 겪어야만 했습니다."
"4년마다에 자력 변화가 생긴다니 어떻게?"
이만석 박사는 귀가 번쩍 띄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첫 4년 동안은 자력이 강해져서 맥시멈 포인트에 달하고, 다음 4년 동안은 기준이 줄어들어 미니멈 포인트까지 떨어지는 주기 변화를 되풀이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 올해는 어느 쪽에 속하고 있는지?"
"내년이 바로 미니멈 포인트로 떨어지는 해에 해당됩니다."
"음 그래요?"
이만석 박사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귀는 삐오라의 설명을 건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X4호 별의 자력이 미니멈 포인트로 떨어졌을 때, 원정대원은 혹시 탈출할 수가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생각은 그 후부터 이만석 박사의 머리를 온통 사로잡은 숙제였다. 부리마라와 삐오라들이 눈치를 채면 난처한 사태가 벌어질는지도 모른다. 원정대원이 은밀히 알아본 결과 삐오라의 과학자 중에 그러한 날짜 계산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 노래를 곧 잘 부르는 김동수가 살살 꼬여서 자력 하강의 날이 이듬해 6월 15일임을 알아 냈다. 이만석 박사는 원정대원만의 회의를 열고 대책을 물었다.
"탈출하는 일을, 비밀리에 진행시켜야 옳으냐, 또는 부리마라에게 알려서 협조를 구하는 게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결정지어야 하겠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비밀리에 떠나버리는 편이 무난하지 않을까요?"
홍성기가 안경을 벗어 들고 말했다. 다른 대원들은 말문을 닫고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역시 부리마라의 임금에게 호소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돼요. 그자들도 전에는 훌륭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니, 흔히 생각하는 미개인은 아닐 겁니다. 비문명을 지켜나가려는 자가 어째서 우리의 출발을 방해할 리가 있겠어요. 남의 별에 왔으면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것이 법도가 아니겠어요?"
황영숙이 또랑또랑하게 주장한다. 그래도 한참 망설이던 대원들은 저마다 마음 속에서 저울질해 본 끝에 황영숙의 의견에 기울어졌다. 결정적인 까닭은 그들이 충분한 무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듬해 정월이 되자, 이만석 박사는 이 일을 부리마라 임금에 통고하고 기꺼이 허가를 얻어 부리마라의 수도를 떠나 사막의 복판에 있는 독수리 호와 무궁화 호로 돌아와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로켓을 지켜온 이상호와 윤상운은 기쁨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방미란과 황영숙을 얼싸안고 젊은이들은 춤추었다. 6월로 접어들자 모든 계기반이 과연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출발을 서두르자!"
생기를 되찾은 대원들의 낯을 보고 이만석 박사는 재촉했다. 6월 15일, 드디어 아침부터 내려세기가 시작되고 있는데, 사막의 지평선 너머에서 별안간 먹구름이 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부리마라 족이 떼지어 날아오는 모습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안절부절못하며 황급한 소리로 발진 명령을 내렸다.
 
밀항 소년 마치나리
 
별빛에 번득이는 창끝의 칼날이 심상치 않는 긴박감을 자아내면서 부리마라 족은 쏜살같이 날아들고 있었다. 귓전을 울리는 count down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마저 더디어 조바심이 공연히 앞섰다. 이만석 박사는 신호판과 부리마라 족의 내습하는 모양을 연방 번갈아 보면서 로켓이 무사히 떠나기를 마음속에서 빌었다. 7초, 6초, 5초, … 수백 명의 부리마라 족이 로켓에 다다라 순식간에 에워싸고 창 끝으로 유리창을 꾹꾹 찌르는 순간, count는 마침내 제로를 알렸다.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분사를 내뿜으려 훌쩍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만석 박사는 그제야 이마를 적신 진땀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휴… 저놈들이 환장을 했나!"
그는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벌떼처럼 분사의 반동으로 곤두박질치는 부리마라의 전사들을 저 아래로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이 아슬아슬하고 통쾌한 순간을 맛보고 싶지 않을리 없겠지만 대원들은 저마다 제자리를 지켜 기계를 조정하고 있었다. 우주선은 생명을 되찾은 기분에 몸이 단 듯 우주 공간을 향하여 죽죽 뻗어 나갈 따름이었다.
"독수리 호엔 이상이 없습니다. 엔진은 쾌조를 보이고 있고요."
홍성기 대장이 서슴없이 밝은 소리로 보고를 해왔다.
"이제 어지간히 올라왔는데 광파 추진기에 점화합시다."
이만석 박사는 가뿐해진 마음으로 말했다. 이만석 박사는 평소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휘관이 되면 흔히 어디는 이상이 없느냐는 식의 권위로 들볶는 이도 있지만, 그는 상대방에 책임을 내맡긴 이상, 그쪽에서 보내오는 보고를 확인하는 슬기를 잊지 않는다.
우주 함정이 나란히 제 궤도에 오르자 그는 X4호 별에서 1년 반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 꿈같이 느껴졌다. 핵전쟁에 얼마나 혼이 나고 시달려서 부리마라 족은 차라리 원시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을까? 어렴풋이 짐작이 안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만석 박사는 이러한 사건을 성산포의 우주 기지에 보고할 양으로 전자물리학을 전공한 이상호 대원으로 하여금 레이저 통신을 보내도록 지시를 했다. 태양계와는 아득하다기보다 까마득한 거리에 있기 때문에 과연 출력이 약한 레이저 통신이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있을는지 스피커에서는 김동수의 노래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는데, 독수리 호의 움직임이 별안간 떠들썩했다.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또 사고가 났나하는 초조한 눈길을 텔레비전의 스크린에 모았다.
"이 박사님 야단났습니다. 밀항한 소년이 한 놈 숨어 있었군요."
홍성기 대장이 목덜미를 움켜쥐고 스크린에 비쳐 보이는 소년의 어깨에는 날개가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삐오라 족의 소년이었다.
"이름이 뭐냐?"
"마치나리라고 합니다."
"무얼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지?"
…"아니오. 아버지가 숨어서 인류를 따라 떠나라고 말씀하시기에 감히 기관실에 숨어 있었습니다. 용서하셔요. 아버지는 문명의 한 고비를 넘은 X4호 별보다는 장래성이 있는 태양계 인류를 따라서 한껏 진보하라고 일러 주셨어요. 저도 그럴 생각으로 그만…"
소년은 두 눈시울을 내려 깔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때서야 이만석 박사는 부리마라 족이 로켓을 추격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리마라 측이 끝내 적대적일 수가 없을 텐데 역시 그들이 잡아놓은 삐오라의 포로 중에서 탈주자를 발견했기 때문에 원정대에 의심쩍은 생각을 던졌구나 싶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천문학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원정대에 X4호 별의 자력이 가장 약해지는 낱을 가르쳐 준 그의 아들이란 말인가? 이만석 박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비록 그 우주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도와 준 자의 한 사람일 것이다. 구태여 이름을 알아 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자식의 발전을 원하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은 우주별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 소년의 모습은 아직도 독수리 모양의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혹 그것은 강력한 방사능 때문에 유전을 통해서 대대로 변형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과학을 공부하려는 것이 갸륵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는 공동 운명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결론을 짓자 홍성기 대장에게 일러주었다. 소년 마치나리는 아직도 죄인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홍대장, 저놈이 운이 좋은 것 같소. 독수리 호에는 마침 결원이 한 사람 생기지 않았습니까? 따르는 자를 물리치라는 법은 없으니 놓아두고 훈련을 시킵시다. 황영숙 양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아요."
"실은 저도 동감입니다."
말이 떨어지자 황영숙은 못내 안타까워하던 표정에 웃음을 띄며 마치나리 소년의 어깨를 가만가만 흔들었다. 또 무슨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질겁을 하던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돌리더니 거기 황영숙의 미소를 보자 마음이 턱 놓이는지 또 한 번 울먹거린다.
 
변덕의 사연
 
소년은 첫째 성실했고 중력의 차이 때문인지 몸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인지 보통 사람보다 대 여섯 배는 더 힘이 센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이 여간 밝지 않아 유성이 산산조각이 나서 별똥이 된 아스테로이드를 1백 마일 밖에서도 영락없이 찾아내곤 한다. 황영숙은 마치 누이인양 낯선 소년이 더 이상 기를 죽이지 않도록 식물 재배를 거들게 했다. 그녀는 삐오라 족이 동굴 속에서 별빛을 이용해서 동력을 얻어 농사를 지어 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형제는 어디에 계시니?"
온실을 손질하면서 그녀는 마치나리에게 묻는다.
"어머니는 동굴 속에 계시고 아버지는 포로의 신세가 아니겠어요. 형제는 없습니다. X4호 별의 세계에서는 결혼하면 누구나 단 한 번 해산하기 마련입니다. 간혹 쌍둥이가 생겨 축하를 받기도 하지만…"
소년은 서먹서먹했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제법 정답게 재잘거린다. 약초를 재배하는 솜씨를 그는 금방 익히는 영리한 머리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황영숙은 목성의 델타 기지에서 발견한 자력선 박테리아의 존재는 일절 밝히지 않았다. 지금은 유리 상자 속에 갇혀 있지만 그 박테리아가 장차 어떠한 구실을 하게 될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선 내에서 평화로운, 그러나 지루한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세차게 은하계의 안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들의 위치를 살펴보자면 은하계의 지름을 가령 20마일로 잡은 도너스 형이라고 할 때, 태양계의 위치는 중심에서 7마일 떨어진 곳을 감도는 좁쌀 만한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태양은 이 변두리를 하루에 약 1,500만 마일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다. 한국의 우주 함대는 지금 중심을 비스듬히 보면서 겨우 1마일쯤 파고들었을까. 1천억 개의 별이 반짝이는 은하계는 너무나 광활하고 가없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지금 우주 함대가 목표로 치달리고 있는 별은 인마좌(센타우루스)의 알파별이다. 이만석 박사는 애당초의 예정대로 변광성인 알파별로 항로를 바로 잡은 것이다. 공기라곤 있을 리 없는 허공에서 번쩍이는 변광성은 확실히 우주 나그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혹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멀거니 뭉글뭉글 불을 내뿜기만 하는 항성의 멋없는 불덩이와는 달라서 변덕을 부리는 변광성은 한결 신기롭다. 거기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듯이 마음이 쏠리는 변덕, 별빛의 점멸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인간의 감성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람이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반복 작용으로 심장의 고동을 유지하기 때문일까. 혹은 태초에 진흙 바닥에서 생명이 형성되어 갔었을 때, 엷은 세포막을 폈다 오므렸다 하던 운동의 기원에서 익힌 감각이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우주 함대는 줄기차게 치닫는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마치나리 소년은 궁금증에 겨워 하루는 황영숙에게 묻는다. 마치나리는 막상 X4호 별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외로운 생각이 그림자처럼 마음을 감싸고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세계였지만 역시 삐오라의 고향이 자기 체질과 생리에 맞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하는 은근한 생각에 사로 잡혀 속으로 우울한 나날이 계속된 끝이었다.
"걱정이 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약이야. 우주선은 알파별을 스쳐서 은하계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작정이란다. 우리는 스스로의 고독과 싸워 이겨야만 해."
일러주는 황영숙도 일부러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훨훨 날아다닐 수도 없고 뜀박질도 제대로 못할 뿐더러 바닷물에 온몸을 적실 수도 없는 환경을 이겨내는 일은 여간 어렵지가 않다. 마치나리는 고독과 대결해야 하는 천체 비행 원칙의 제 1 조에 대한 훈련을 받은 일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지면 저절로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 쉽다. 무엇으로 마음을 달래야 하나? 얼굴이 얼마간 핼쑥해진 황영숙은 마치나리를 보며 손으로 약초를 가리켰다. 그래도 별빛을 받아 나날이 자라는 약초에서 변화를 찾을 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식물과의 소리 없는 대화가 유일한 위안이런가.
 
알파별의 비밀
 
알파별을 향하여 75일이 속절없이 흐르는 동안 노래쟁이 김동수가 어쩐지 시름시름하다가 마침내 헛웃음을 치며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눈꼬리를 치뜨고 호들갑을 떠는 정신 착란 증세를 아무도 가라앉히지 못했다.
"야단났군. 어쩌면 좋아?"
홍성기 대장은 김동수가 발작할 때마다 큰 한숨을 몰아치며 걱정을 한다.
"나는 동백꽃이 좋아요. 벌레하고 사랑을 속삭일 테야. 오! 나의 천사! 그대는 지금 어디에?"
두서없이 지껄이는 김동수가 발작을 일으킬 적마다 황영숙은 그의 두 손목을 붙들고 애원하다시피,
"김동수씨!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요. 여기가 어딘데 그러는 거에요? 안 돼요, 안 돼."
"내가 미쳤다고요. 허허허 멀쩡한 사람보고 왜 그래요. 손목 놓으세요, 오 나의 사랑스러운 벌레."
"은하계까지 와선 이게 무슨 망신이에요."
황영숙은 김동수의 두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으나 그는 여전히 실성한 말을 더듬거릴 따름이다. 애걸복걸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만큼 그의 증세는 날로 심해졌다.
"차라리 동면을 시켜버리지 않고. 그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뜬눈으로 지새우니 사람이 견딜 수 있겠어요."
참다못해 이만석 박사가 마이크를 통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가혹하지 않겠습니까?"
홍성기 대장은 반대했다.
"다른 대원들까지 신경을 쓰니까 할 수 없지 않아요. 질서는 유지해야지요."
이만석 박사는 적이 말소리를 높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튿날 이광호는 김동수를 동면실로 데리고 가서 눈물 어린 어조로 타일렀다.
"김 군, 아무래도 안되겠어, 이 박사가 자네를 동면시키라는 지시야. 동면이 싫거든 정신을 차리게. 내 말을 알아듣겠나?"
동수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지켜보면서 이광호는 호소했다.
"벌레하구 함께 살겠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나의 어깨동무였던가?"
입을 멍청하게 헤벌린 채 지껄이는 김동수의 두 눈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혀를 끌끌 차면서 이광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나서 알약을 꺼내 그의 입에 쑤셔 넣으며 글썽한 눈시울 너머에서 김동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하얗게 바래 가는 것을 보았다. 이광호는 연방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향의 노래를 불러주던 그의 모습을 머리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벨트로 김동수의 몸을 동이는 그의 두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침대 위에 누워버린 김동수를 남기고 이광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동면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더 행복할는지도 몰라."
밖의 둥근 창에서 들여다보며 온도를 조정하는 윤상운이 맥없이 한마디 픽 던진다. 아무도 말을 받지 않고 침울한 표정만 짓고 서 있었다. 실은 우주선에서 한 사람을 잃은 것 같은 쓸쓸한 생각이 저마다의 가슴을 에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독에 지친 가엾은 김동수!'
황영숙은 마음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단조로운 생활은 대원들의 정신적 긴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가 격은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적힌 지구의 역사책을 탐독함으로서 무료한 시간을 지워 갈 수밖에 없었다. 잠이 들면 꿈결에 보이는 내 고향 푸른 동산, 강물과 물결치는 바다, 그리운 사람들,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 잠을 깨면 아직도 우주선을 타고 있는 현실의 위화감 때문에 싱숭생숭 해졌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소년 마치나리는 한국말과 영어를 마스터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장에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자에게는 장래성이 있다는 좋은 증거였다. 우주 함대가 사람의 속내를 아랑곳하기 않고 살차게 치닫는 모습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람이 기계를 따라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우주선은 드디어 알파별의 중력권으로 들어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헬륨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알파별의 저 멀리선 지옥의 불덩이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불길이 콩 볶듯이 한결 차게 사방으로 튀긴다. 햇볕이란 여기서는 통하지 않을 만큼 뜨거운 기운이 공간을 전해온다. 만일 우주 함정이 거기에 빠진다면 창호지가 사르르 불타는 모양으로 대번에 연기로 변할 것이다. 열은 맨 처음에 수소의 분자 결합으로 시작하면서도 그다지도 큰 에너지를 어떻게 발산시킬 수 있을까? 멀거니 불덩어리의 장관을 지켜보고 있던 문창수는 자기가 전공한 천문학의 지식이 너무도 낭만적인 것만 같았다.
"더는 접근하지 말라! 궤도를 바꾸어 은경 20도 각도로 알파별을 스쳐 가도록!"
이만석 박사는 선글라스로 안경을 갈아 낀 채 지시했다. 우주 함정이 개미보다 작게 보이는 우주 공간에서 원정대원들은 한낱 허우적거리는 마이크로의 세계인에 지나지 않았다. 숨막히는 순간 순간에 잇달아 별안간 소나기처럼 전파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돌변이냐?"
무궁화 호의 전자물리학자인 이상호는 계기반의 바늘을 마구 깔딱거리게 하는 괴상한 전파에 새파랗게 질려서 중얼댔다.
"전파의 폭동일까?"
"아니야 테이프에 찍혀 나오는 곡선을 보게. 아무렇게나 보내는 신호가 아니야."
신온철은 조심스레 자동기록기를 기웃거린다. 온 대원들의 눈길이 거기에 모인다. 난잡한 전파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질서정연한 문맥이 있는 듯 했다. 대원들은 숨을 죽였다.
"우주 통신이다. 알파별의 저 너머에 고등 생물이 살고 있는 증거이다."
신온철이 자신있게 외치는 바람에 대원들은 고개를 들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노고지리 별로
 
수신 테이프는 누가 보더라도 질서 있는 분맥을 엿보게 한다. 과연 신온철의 말처럼 알파별의 저 너머에 고등 생물이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테이프를 전자 계산기에 넣어서 분석해 보도록 해요."
이만석 박사는 서슴없이 일렀다. 방미란이 익숙한 솜씨로 기계 처리를 척척해 낸 결과, 우주 전파는 모음의 빈도수가 높은 사실이 이내 밝혀졌다. 비슷한 분석 결과가 독수리 호에서도 보고되었다.
"모음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생명의 문명이 퍽이나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과연 그 우주인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일까, 또는 우호적일까?"
신온철은 역사 전공의 학자답게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일단 전파의 근원을 찾아서 접근해 봐야겠군."
“먼저 정찰해 보는 일은 모든 과학적 방법의 하나니까."
박민호 부장이 넌지시 일러주며 우주 통신을 해독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우주 함정은 알파별의 푸르락붉으락하는 변광을 뒤로 바라보며 세차게 허공을 치닫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거친 물결을 헤치고 달리는 군함의 기운찬 모습이 아니라, 바다 속을 전속력으로 소리 없이 달리는 잠수함의 모습과 비슷했다. 꼬리에서 세차게 내뿜는 광파 엔진의 불길은 초속 25만km의 엄청난 속도를 계기반에 새기고 있으나 가없는 우주 공간에서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마치 소가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만큼 느려 보였다. 무려 3년의 지루한 세월이 흘러간 뒤 우주 원정대는 문제의 별에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그 동안 원정대원들은 그 별 사람들의 언어를 완전히 마스터 할 수도 있었다. 만일 서윤철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들은 훨씬 빨리 그리고 손쉽게 우주인의 말을 해독할 수 있었으리라. X4호 별에서 삐오라 족에게 희생된 그의 죽음이 새삼 아쉽기만 했다. 이만석 박사는 얼마 후에 접근할 문제의 별을 천문학의 딱딱한 이름 RS6호 별 대신에 노고지리 별이라고 이름 지었다. 영원히 말없는 항성과는 달리 생물의 말들이 종달새처럼 들려오는 반가움을 이렇게 라도 표현할 도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주 원정대원들은 다른 우주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전파도 발신하지 않은 채 노고지리 별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정찰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푸른 바다도 있고 넓은 호수도 있고 산도 들도 있어 마치 인도의 어느 지방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광파 로켓은 저절로 원자력 엔진으로 바뀌어졌다.
"역시 깊은 산을 골라서 착륙하는 편이 유리할 거야."
이만석 박사는 그 편이 안전할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지형을 분석한 결과 노고지리 별의 적도를 남북으로 치달리는 산맥 속에 넓은 고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고원을 경기 고원으로 정하고 거기를 착륙 본부로 삼도록 합시다."
이만석 박사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좁고 단조로운 우주선 안의 생활에서 벗어나 두 발로 땅을 디뎌 보려는 즐거움은 아무도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이만석 박사는 지휘관답게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려다보이는 노고지리 별의 상공에는 보라색 구름이 뭉실뭉실 떠 있다. 지구의 그것처럼 뿌옇지 않는 사실은 대기권 속에 산소와 수소가 들어 있지 않다는 증거일까? 그들은 별의 중력권 내로 접근하자 조심스럽게 역추진 로켓을 발사하면서 밤중을 골라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계기반의 바늘이 움직임에도 맥이 통하는 순간에 이어 먼저 무궁화 호가 다음에는 독수리 호가 사뿐하게 대지 위에 내려 않았다. 노고지리 별의 중력에 대한 계산이 들어맞는 셈이었다. 로켓의 마지막 엔진이 꺼지자 우주선 내는 갑자기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안착했다는 안도감보다 한시라도 빨리 땅 위를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똑같이 솟아오르는 기분을 어찌하랴. 사마귀 우주복으로 갈아입은 원정대원들은 손에 자력총을 들고 조심스럽게 로켓의 트랩을 내려가면서 숨을 죽였다. X4호 별에서 밀항해온 마치나리 소년만은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이내 노고지리 별의 대기에 적응할 수가 있었다.
"야 이게 몇 년 만이냐. 흙을 손에 쥐어 보니 도리어 미칠 것 같다."
생물학을 전공한 황영숙 양이 상기된 얼굴로 기쁜 듯이 외쳤다. 이내 발사 위치를 고정시킨 로켓의 주변을 껑충껑충 뛰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전원 집합해 주시오."
이만석 박사는 엄숙한 말투로 이르고 나서 그의 주변에 모여든 대원들을 두루 살피더니,
"이제부터 우주인과 접촉을 해 봐야 되니까, 명령에 따라 이번에는 무궁화 호에서는 문창수가 독수리 호에서는 황영숙 대원이 남아서 로켓을 지키시오."
하며 주의 사항을 맺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김동수는 아직도 동면 중이었다. 그리고 보면 이만석 박사를 비롯한 박민호 부장, 신온철, 이상호, 방미란, 홍성기, 여광호, 윤상운 등 8명의 대원과 마치나리 소년만이 행동할 수 있는 인원에 지나지 않았다.
 
고릴라 떼와 격전
 
마치나리 소년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졸망졸망 앞장서서 산등성이로 올라섰다. 이만석 박사는 박민호 부장의 뒤를 따르고 대원들은 한 줄로 경계를 하면서 산등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한 눈에 안기는 경치는 산줄기를 따라 먼 기슭까지 밀림이 꽉 차있었다. 빽빽이 들어선 아름드리 나무는 길길이 하늘을 찌르는 활엽수였다. 지구의 경우라면 비가 많은 지방의 경치를 방불케 하는 지형이었다. 그리고 밀림의 바다가 끊어지는 가물가물하게 먼 곳에 널따란 신작로가 한 가닥 산모퉁이를 감돌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헬리콥터를 타고 하산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만석 박사는 혼자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이 별의 지형과 풍토를 조사할 겸 고생스럽더라도 걸어서 내려가 보는 게 어떨까요?"
박민호 부장이 말을 받아 자기 의견을 말했다.
"글쎄, 그럴듯한 생각이지만…."
"우선 로켓의 안전을 위해서 경기 고원의 사방을 탐색해 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이만석 박사가 행동 방침을 결정짓자 마치나리 소년은 몸에 배인 날랜 움직임으로 원정대원을 골짜기 길로 안내했다. 그는 어느새 커다란 몽둥이를 한 개 꺾어들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짜기 길을 따라 2시간 이상을 내려갔을 때, 앞쪽에서 별안간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고릴라다!"
하는 외침을 들은 원정대원들은 자력총을 고쳐들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하늘의 광선이 어른거리는 골짜기의 상사목에 수십 마리의 고릴라 떼가 우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놈들은 손에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원정대원들을 향하여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박민호 부장은 분명히 놈들의 동작에서 적의를 확인하자 자력선의 단추를 눌렀다. 발사를 알리는 계기반의 파란 율동이 고릴라의 앞가슴을 뚫고 당장에 놈들을 쓰러뜨려야만 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파란 율동은 일어나지가 않고 고릴라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알지 못할 소리를 꽥꽥거리면서 여전히 한 발짝씩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이만석 박사의 자력총도 마찬가지로 기동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의 자력총이 마비되어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질겁을 한 원정대원들은 자력총을 어깨에 매고 잽싸게 허리께 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벌써 선진의 고릴라와 마주친 마치나리 소년은 훌쩍 뛰어 오르더니 고릴라의 앞가슴을 발길로 걷어차고 있었다. 두발 차기로 힘차게 걷어채힌 고릴라 꽥하는 소리를 지르며 털투성이의 얼굴에서 눈의 흰자위를 굴리며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마치나리 소년의 기운이 장사라는 사실은 김동수가 노이로제에 걸렸을 때, 우주선 안에서 이미 목격한 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걸쌈스러운 줄 미처 몰랐다.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누런 앞니를 보이며 여러 놈들이 사납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마치나리 소년은 한 손에 몽둥이를 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을 사리며 다른 놈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숨을 가눌 수 있는 점이 얼마나 유리한지 알 수 있었다. 고릴라들은 으르렁대면서도 마치나리 소년을 슬슬 피하면서 원정대원들을 에워싸며 달려들었다.
"에잇! 이놈들이!"
박민호 부장은 가까운 놈의 가슴을 겨누고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꺼번에 대여섯 발이 내달리는 총알을 맞은 고릴라는 손에서 몽둥이를 내동댕이치며 자지러지는 폼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박민호는 아무리 전자공학이 발달해도 역시 재래식 화학 무기의 필요성을 비로소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외마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니 고릴라 떼는 돌격태세로 옮겨왔다. 방미란은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한 놈, 두 놈씩 찍소리 못하고 고릴라는 쓰러져 가는 데도 저 너머에서 새로운 패거리가 수 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대로 장기전을 벌리다가 권총의 총알이 떨어지는 날이면 원정대원들이 박살이 되리라는 것은 뻔했다. 첫째 놈들의 패거리가 이 음침한 밀림 속에 얼마나 숨어있는지 헤아릴 수 없지 않는가? 이만석 박사의 머리 속을 이런 계산이 스쳐 갔다. 지구전으로 들어가면 결국 이편이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모두들 싸우는 척 하면서 로켓이 있는 경기 고원까지 후퇴하도록. 필요 없는 싸움은 피해야 한다."
이만석 박사의 어정쩡한 명령을 원정대원들은 다같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나리 소년이 선두에 서서 으릉대는 고릴라를 막고 있는 동안 그들은 슬금슬금 골짜기를 치올라 산등성이로 후퇴해 갔다.
'웬 고릴라가 이처럼 많을까? 문명의 수준이 높은 데로 알았는데….'
이만석 박사는 고릴라를 피해가면서 한편으로 수수께끼를 풀기에 바빴다. 고릴라 떼는 산등성이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우악스러운 고릴라일지라도 자기네의 울타리 밖으로 물러간 원정대인을 추격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8명의 대원들은 짤막한 전투에도 벌써 지쳐 있었다. 오랜 우주선 생활이 그들의 기력을 쑥 빼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헬리콥터로 하산할 양으로 경기 고원까지 다다랐을 때, 하늘 높이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목격했다. 번개처럼 번쩍 하는 불빛을 본 그들은 그만 정신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개미 우주인의 정체는?
 
희미한 생각을 더듬어 가면서 맨 먼저 이상호가 깨어났다. 그 동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온몸은 밧줄로 꽁꽁 묶인 채였다. 이만석 박사도 박민호 부장도 그리고 방미란에 마치나리 소년까지 마찬가지로 손발을 묶인 채 한 방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이상호는 불현듯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의 높낮이도 또한 문명의 수준을 헤아릴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법이니까. 천장은 높고 벽과 방바닥은 반투명한 재료로 꾸며져 있었다. 데굴 데굴 굴러서 이만석 박사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는 발 끝으로 박사의 아랫배를 꾹꾹 누르며 신호를 보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옆자리에 뒹굴고 있는 황영숙의 궁둥이를 무릎마디로 질러보았다. 로켓을 지키기로 남아있던 황영숙과 문창수 마저 포로가 되고 말았으니 장차 원정대원을 구해 줄 희망조차 사라지고 만 셈이었다. 한참 끝에 이만석 박사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의식을 회복했다.
"이거 큰일 났군. 어떻게 된 셈이야?"
눈이 휘둥그래지며 중얼대는 이만석 박사를 보고 이상호는 말했다.
"문창수와 황영숙도 붙잡히고 말았어요."
"그럼 우주선도 빼앗기고 말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어떡하지?"
이만석 박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무슨 생각을 쫓기 위해서 일게다. 이상호가 뒹굴면서 자극을 주는 덕분에 원정대인은 한사람씩 의식을 되찾아갔다. 눈을 뜬 대원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서로 멀뚱멀뚱 상대편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하고 자문자답하는 표정이 처량할 정도였다. 이 때,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이상한 모양의 생물이 불쑥 나타났다.
"이제 모두 정신은 차린 모양이군."
지껄이는 생물은 개미 모양을 한 우주인이었다. 머리에 두 가닥의 촉각이 달린 우주인의 모습은 상반신은 꼿꼿하지만 엉덩이가 유달리 불거져서 마치 개미가 서 있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는 한마디 던지고 나더니 가까운 곳에서부터 발묶인 줄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상반신을 묶은 줄은 그대로 두고 보행의 자유만을 주려는 눈치였다. 삽시간에 모두 다리가 풀리자 저마다 일어서서 개미 우주인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키는 사람보다 조금 큰 편이었고 얼굴빛이 거무끄름한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는 아주 얇은 편이며 샌들과 비슷한 신을 신고 있는 것이 퍽 경쾌하게 보였다. 개미 우주인은 원정대원을 아주 얕잡아 보는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일어서라! 어느 별에서 떨어진 놈인지 몰라도 지금부터 취조를 받아야 한다."
생각보다는 가는 목소리로 지껄이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힘이 약하다는 것은 확실히 서글픈 일이었다. 그린나 이만석 박사는 개미 우주인들의 문명 수준에 일종의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반항도 하지 않은 채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치면서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거리의 풍경은 우주인들의 생활이 평화스러운 사실을 대번에 짐작케 했다. 일반 시민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택들은 한결같이 돔형에 유리창이 박혀 있고 공공 기관으로 보이는 건물만이 네모진 고층 빌딩을 이루고 있었다. (이 사실은 나중에 확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무들은 잎이 넓은 활엽수가 늘씬한 줄기를 뽐내고 서 있었고 해변에서는 어린 우주인들이 바닷물을 튀기며 물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이리로 들어와요."
복도의 막다른 방에 이르러 안내인 말했다. 모두 반 벙어리가 되어 말없이 시키는 대로 뒤따랐다. 마치 교회의 설교단과 같은 높다란 장소를 마주보고 원정대원들이 즐비하게 한 줄로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혹 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석 박사는 침착한 태도로 가장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원들은 차례대로 앉았다. 모두가 당당해 보였다. 숨을 죽이고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옆문을 열어 제치고 보라색 우주인이 여럿이 들어와 단위에 앉았다.
 
세라미 족의 심판
 
이만석 박사는 무지근한 머리를 애써 흔들며 개미 우주인들의 거동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다섯 놈의 우주인은 거칠 것이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단위에 올라 팔걸이 의자에 차례로 앉더니 그 중에서 가장 눈이 부리부리한 왕눈이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원정대원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훑어봤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의 태도가 퍽 오만하게 보였다. 이만석 박사는 그놈에게 반감을 느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놈들이냐?"
그자는 대뜸 호통을 치듯이 물었다. 그가 이곳의 검찰관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어쨌든 썩 기분이 좋은 자는 아니었다.
"태양계의 지구에서 온 지구인이요."
부장 박민호가 호탕스러운 성격대로 선선히 대답했다.
"태양계? 지구인?"
검찰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몸을 돌리고선 뒷자리의 우주인과 귀엣말로 그 무엇인가 나직이 수군거렸다. 그리고선 한참만에 자못 납득이 간다는 듯이 호들갑스러운 제스처로 두 팔을 벌리고 한바탕 껄껄 웃어댔다.
"지구인이란 말이지. 소년 시절에 할머니에게서 전설로 들어본 적이 있어. 마음씨가 고약한 생물이라지!"
쉰 살 남짓한 검찰관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 손은 깍지낀 채 둥글넓적한 얼굴에 야릇한 웃음을 담으며 지껄였다. 그리고선 잠깐 서류에 눈길을 주더니 고개를 들고 굳어진 표정으로 따졌다.
"그래, 너희들은 무슨 욕심이 또 생겨서 까마득한 허허 공간을 지르고 여기까지 왔나? 도대체 두목은 누구인가?"
"내가 바로 사령관이다. 보아하니 당신들의 문명이 꽤 높아보이는데 먼데서 찾아 온 손님을 이처럼 묶어놓고 푸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RS6호 별을 찾아온 목적은 단지 다른 별나라 우주인들과 친목을 맺고 발달된 문명을 배우러 왔을 뿐이지, 해치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어서 밧줄을 풀고 손님 대접을 하도록 하라."
이만석 박사는 눈을 부릅뜨고 고저고래 소리지르며 경우를 따졌다.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냐. 너희들은 우리의 변경 수비대 구실을 하고 있는 고릴라를 수백 마리나 죽인 범죄자들이다. 더욱이 어느 틈에 우리 세라미 족의 언어까지 마스터한 지능을 지니고 있으니 그 간사한 성격은 경계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밧줄을 풀어 주는 일은 간단하다. 너희들은 먼저 RS6호 별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은 뒤에 귀순한다는 적절한 표시가 있을 때만이 구속을 해제할 수 있다."
불끈 화가 난 검찰관은 이만석 박사를 보고 한 손으로 삿대질을 해가며 소리쳤다. 박민호 부장은 화가 미리 끝까지 올라왔으나 검찰관을 무섭게 노려보는 외에는 손을 써 볼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처지에 무슨 권위가 서겠는가? 마음씨가 누그러진 황영숙도 개미 우주인들의 오만 불손한 처사에 분통이 치밀어 올라왔으나, 꾹 참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모두 일어서서 뒤를 따라 오라!"
원정대원 모두의 신원 카드를 작성 한 뒤 검찰관은 벌떡 일어나더니 얄미운 한 마디를 던지고 앞장서서 나갔다.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라서 다다른 곳은 세라미 족의 네모진 고층 건물이 꽉 들어선 널따란 광장이었다. 거기에는 세라미 족의 남녀노소가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차 있었다. 마치 지구의 스페인에서 투우를 구경하려고 운집한 군중처럼 원정대원들을 한복판에 두고 에워싼 채 진기한 짐승을 보는 것처럼 저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쏟고 있지 않는가! 같은 우주 생물이지만 별마다 생활 환경이 다르면 이처럼 천대하고 적대시하는 것일까? 구경거리로 끌려나온 원정대원들의 가슴에는 울분이 치밀어 오를 따름이었다.
"여러분?"
검찰관은 관중들을 둘러보며 우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불청객의 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고발하기에 앞서 10명의 지구인의 신분을 설명해 두는 편이 참고가 될 듯합니다. 지구인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세 가지 종족이 있어 이들은 황색인종 특히 우랄 알타이계의 몽고리안족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검찰에서 옛 문헌을 조사한 결과 몽고리안족은 3백만 년 전에 로켓 기술을 배워 화성을 징검다리로 지구에 침입하여 고비 사막에 문명 기지를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의 자원을 바탕으로 은하계 정복을 꿈꾸다가 두 차례에 걸친 빙하 시대와 가뭄으로 멸망한 후 가까스로 남은 유족들이 유목 민족으로 탈바꿈해서 징기스칸의 지휘로 지구를 휩쓴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원심적인 우주 진출의 야망이 실패로 돌아간 쓰라린 혈통이 한 동안 구심적으로 작용하더니, 이제 주기적인 문명의 세력을 받아 또다시 원심적으로 되돌아 와서 RS6호 별까지 무엄한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본디가 영리한 종족인지라 이미 세라미 족의 언어까지 마스터하고 고릴라를 살해하는 등 우리의 평화를 침범한 것입니다."
검찰관은 그리고 나서 한결 말소리를 높여 외쳤다.
"여러분! 이 불청객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검찰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군중들이 외치는 아우성이 광장을 메아리치며 귀가 먹먹하도록 울렸다.
"고릴라와 맨주먹으로 대결시켜라!"
"죽여라! 후환이 두렵다!"
"노예로 만들어 국토를 개발시켜라!"
"고스란히 돌려보내라!"
저마다 외치는 주장이 이처럼 네 가지로 가려낼 수가 있었다. 이만석 박사는 험상궃은 검찰관의 말투와는 달리 노고지리 별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구 도시를 만들다
 
심판의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결국 원정대원들에게 중노동을 시키기로 결정지었다.
산소 공급만 끊으면 몇 분이 못 가서 죽는 지구인을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막판에서 우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스란히 RS6호 별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문명의 질이 낮은 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를 자기들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자가 많았다. 고릴라와 대결시키라는 주장은 피를 보지 않기로 정한 법률에 어긋나며 종족의 이상을 원시의 방향으로 역전시키는 짓이라고 공박을 받았다.
'역시 문명도가 높은 개미 우주인들의 판단이 다르기는 하군. 만약에 식물 자력총을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X4호 별에서는 아마도 부리마라 족이나 삐오라 족에 희생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목숨이 붙었으니 탈출의 기회를 엿볼 도리밖엔 없겠다'
이만석 박사의 판단은 동시에 모든 원정대원의 판단이기도 했다. 심판이 끝난 뒤의 검찰관의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입술에 띄우며 머리끝의 촉각을 마치 초랭이처럼 움직이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을 보이라고 성냥곽만한 딱지를 들이댔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으나 박사를 비롯한 원정대원, 그리고 마치나리 소년까지 발과 허리에 일일이 그 뭉글뭉글한 네모난 딱지를 붙였다. 나중에 알아 낸 일이지만 세라미 족은 보통 세포보다 수백 배나 전기 반응을 예민하게 받는 반세포의 물질을 개발해 내고 있었다. 원정대원들의 옴팍한 허리에 붙인 딱지는 바로 그러한 반세포 물질이며 세라미의 감시인들은 약한 전파 조종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을 리모트컨트롤 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부적 아닌 부적을 몸에 지닌 셈이었다. 원정대원들에게 부과된 노동이란 지구의 주거 양식을 그대로 노고지리 별에 건설하라는 과제였다.
"자식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지?"
늘 머리를 빡빡 깎은 역사학 전공의 신온철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야 뻔한 수작이 아니겠어. 첫째는 우리를 격리해 집단 수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둘째는 우리의 생활 환경을 통해서 지구인의 정신 문명을 알아보려는 속셈이지 뭐야."
수학을 전공한 이광호가 그럴듯한 설명을 붙였다. 과연 세라미 족의 기계 문명의 수준은 놀랄 만큼 높았다. 그다지 부피가 크지도 않은 전자 계산기가 로봇을 움직이며 온갖 공사를 시키는 판이었다. 원정대원이 해야 할 일은 로봇이 벌채해 온 나무의 질을 가려 내서 사이즈를 매겨 제재소에 보낸다거나 돌의 결을 맞추어 내는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전자 계산기는 초음파의 발사로서 돌의 성분을 가려 낼 수는 있었지만 돌의 결을 가려 내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는 동안 비탈진 산기슭에 2층집, 3층집, 그리고 30층의 사무실용 고층 건물까지 속속 들어서고 흔히 볼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장치까지 손쉽게 갖추어져 갔다.
"은하계까지 와서 건축 공사를 하게되니 이게 무슨 운명이야!"
신온철은 애초부터 푸념만 하는 쪽이다.
"인생 또한 즐겁지 않아요. 지구의 운명을 노고지리 별에 옮겨 심어 주는 것도 하늘이 정한 그 어떠한 섭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방미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는 거실에 들어앉은 뒤부터는 자못 낙관적이었다. 불편한 우주복과 무거운 배낭을 한시라도 벗어 던지고 홀가분하게 책상다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만석 박사, 독수리 호의 대장 홍성기, 박민호 부장 등은 밤이면 이마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세라미 족의 문명의 비밀을 파악할 길이 당장에는 없어 분하기 짝이 없잖아요. 아무래도 문명에는 꼭 찌르면 아픈 약점이 있을 텐데…."
"지금 처지로선 행동의 자유가 전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건축 공사가 다 끝난 뒤에 형편을 봐가며 기회를 엿볼 수밖에…."
박민호 부장의 걱정을 받아 홍성기 대장은 가끔 달래곤 했다. 이만석 박사는 별로 말문을 열지 앉았다. 무슨 깊은 생각을 다듬고 있겠지 하는 대원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그는 밤낮으로 세라미 족의 생활과 감정 그리고 거동의 온갖 습성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건축물의 외부 공사가 어지간히 끝난 뒤부터 개미 우주인들이 원정대원들에게 강요한 일은 실내 조각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문화재를 모방하여 공원도 만들어 놓으라는 지시였다.
"그것만은 로봇이 할 수 없지. 참 골치 아픈 일이 생겼군.“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가사 석굴암의 불상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이 엉뚱한 과학자들이 뛰어난 예술가의 솜씨를 모방할 수가 있을까? 지시가 전달된 뒤부터 원정대들의 시름은 나날이 깊어갈 따름이었다.
 
신온철의 사랑
 
그래도 황영숙에게는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대학 교수인 아버지 황주일 박사가 문화재 관리 위원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세계의 고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잦았던 것이었다.
"제가 설계를 해볼게요. 미숙한 솜씨겠지만 생각이 나는 미술품이나 문화재가 많으니까요."
뜻밖에도 황영숙이 앞장을 서서 정원 설계며 공원 설계를 서둘고 실내 장식과 조각을 재우치는 바람에 원정대원들은 한시름 놓게 되었다.
"역시 어릴 적부터 보아두어야 될 것은 보아두어야겠어. 황영숙 대원이 은하계에서 엉뚱한 실력을 발휘할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 과학과 예술이 서로 담을 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지구의 문명이 역시 낮은 것 같아."
신온철이 여러 사람의 칭찬에 맞장구치며 으레 격려해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과학과 예술의 교류라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일은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실내 작업장이기 때문에 윗도리를 벗어 젖히고 땀을 흘려가면서 일할 수는 있었지만 손 끝이 부르트고 망치로 잘못 때린 손가락에 거무스름한 멍이 드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수난이었다. 이처럼 원정대원들의 예술 작업이 지지부진하는 꼴을 못마땅해서였던지 하루는 세라미의 감독장이 한 여성을 데리고 작업장에 나타났다. 감독관의 뒤를 순순히 따라 그 여성이 작업장에 들어섰을 때, 원정대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생각이 저마다 들었을 것이다. 개미 우주인의 뒤를 따라 들어 온 여인은 세라미처럼 머리에 촉각이 돋지 않은 지구인 모습 그대로 아닌가! 그녀는 옷을 어깨에서 비스듬히 흘린 인도의 여성과 똑같은 차림이었다. 아니, 인도 여성이 이 별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금방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신온철은 못이 박힌 듯이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안차게 눈으로 쫓았다. 한눈에 그 신비스러운 여인에게 반한 것일까? 일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이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살갗도 개미 우주인의 보라색과 달리 희맑은 여인은 언뜻 보기에 25살 가량 되었을까? 놀라움에 감겨 너누룩해진 작업장의 복판으로 걸어온 감독관은,
"여러분이 수고하는지는 알지만 워낙 솜씨가 서툴러서 조각 전문가 한 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여인은 물론 세라미 족 출신입니다. 그러나 돌연 변이에 따른 기형아입니다. 이곳에서는 우주인의 표준에 어긋나는 돌연 변이의 기형아는 동족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기로 법률이 정하고 있습니다만 이 우비구니만은 특별히 감싸주고 있습니다. 조각에 대한 솜씨가 세라미 족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니까요. 여러분의 도움이 될 듯 해서 안내하는 것입니다. 지도를 받으시오."
감독관은 제법 두 볼에 미소를 띄우며 인사 소개를 했다. 우비구니라고 불린 여인은 아무말 없이 고개만 다소곳이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고개를 들었을 때, 신온철의 열기 띤 눈길은 우비구니의 조용한 시선에 닿아 어쩔 줄을 모르는 듯 했다.
"이만석 박사, 우비구니를 인수하시오."
감독관의 재촉하는 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신온철이 온 가슴을 방망이질하는 충동을 못 이겨 저도 모른 결에 한 발짝 내딛은 일은 또한 무슨 까닭일까?
 
운명의 첫사랑
 
신온철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에라도 이끌리는 듯 아련한 생각 속에서 우비구니의 앳된 얼굴만이 크게 돋보였기 때문에 발 밑이 들떠 있었다. 상고머리의 그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잡았을 때, 우비구니는 벌써 눈길을 거두고 이만석 박사가 서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발길을 옮기고 있지 않은가. 신온철은 그 자리에 선 채, 노고지리 별의 젊은 여성의 제스처를 지켜 볼 도리밖에 얹었다. 그녀는 이만석 박사 앞으로 다가서더니 나붓이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한 뒤, 두 손으로 합장을 했다.
'두 손으로 합장하는 몸짓은 X4호 별에서도 보았는데, 은하계의 우주인들은 모두 그러한 시늉으로 순종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일까?'
신온철은 생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그녀의 포동포동한 손등이며 손가락이 탐스럽게 눈에 뛰어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고를 좀 해줘야겠어요. 우리는 예술간가 아니어서 만사가 서투르니 빨리 공사를 끝내고 해방되도록 한껏 도와주시오. 언젠가는 은혜에 보답할 날도 있겠지요. 부탁합니다."
이만석 박사는 평범한 말로 인사했다.
"여러분의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제가 갖은 힘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으니 제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셔요."
단정하게 서서 방실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온몸에서는 꾸밈없는 기품이 풍겼다. 신온철 뿐 아니라 처음엔 당황했던 나머지 대원들도 멀찍이 이를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는 결에 친밀감을 느꼈다. 우비구니는 과연 조각의 명수였다. 그녀는 3차원의 곡선 처리 따위는 눈감고 떡을 썰어 내는 한 석봉의 어머니 못지 않게 척척 맞춰나갔다. 그녀를 도와서 일하는 황영숙의 솜씨도 나날이 늘어가서 한 달이 지날 무렵에는 황영숙도 일류 전문가의 수준에 달하는 듯했다. 돌을 쪼개고 새기는 즐거움을 이제는 대원들도 터득하게 되어 공사는 가속적으로 진전되어 갔다. 그러는 짬짬이 역사학을 전공한 신온철은 우비구니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이만석 박사의 지시를 지켜야만 해. 서로의 공동 운명을 배반해서는 안 되는 거야.'
신온철은 애절한 마음을 억누르며 우비구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때로는 등지고 일을 해 보았으나,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은 이미 둑이 터져 흐르는 여울과도 같았다. 한 눈에 반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걷잡을 수 없을 줄이야 미처 몰랐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마음껏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신온철씨, 너무 흥분해서는 불행이 뒤따르는 법이에요. 냉철하게 행동하기로 우리는 맹세하고 지구를 떠나지 않았어요. 감정을 죽이세요."
황영숙과 방미란이 신온철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번갈아 가며 충고를 하곤 했다. 그 때마다 신온철은 멋쩍게 웃을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신온철이 벼르고 벼르던 기회가 왔다. 노고지리 별에 지구의 소형 도시가 완성되던 날, 세라미 족의 개미 우주인 관계자들이 준공식을 축하하려고 파티를 베풀었다. 파티는 서울의 비원보다 몇 10배 우아하고 널따랗게 꾸민 정원의 한 누락에서 베풀어 졌는데, 서로 웃어가며 그럴듯하게 비위를 맞춰 가는 파티의 자리에 우비구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온철은 우비구니가 없는 사실을 깨닫자, 온 가슴이 새삼스럽게 방망이질치는 것을 꾹 누르며 열띤 눈길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찾아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는 결에 밖으로 뛰쳐나와 수목이 우거진 정원의 풀향기를 헤치며 그녀의 행방을 찾아 다녔다. 수풀로 가려진 석탑 뒤에도 없었고 연못가에도 없었다. 허둥지둥 돌계단을 올라가 아름드리 나무 사이를 찾아갔는데, 아! 우비구니가 4차원의 불상이라고 이름지은 특이한 모양의 돌부처에 기대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걸음을 멈춘 신온철은 보라색 별빛에 어린 우비구니의 신비롭고 황홀한 모습에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는 온몸의 용기를 불어 일으켜 조심조심 돌부처 쪽으로 발짝을 옮겨갔다.
"우비구니, 당신은 왜 외로이 서 있는 거요. 함께 파티의 자리로 되돌아갑시다."
신온철은 나직이 말을 건넸다.
"…"
"왜 대답이 없나요? 나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세요."
신온철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도 우비구니는 눈을 감고 선 채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온철은 미칠 것만 같았다. 더욱 몸이 달아오니 저도 모르는 결에 그녀의 두 손을 왈칵 붙잡으며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세요. 저는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와 가까이하면 당신이 불행해져요. 그만 돌아가셔요."
우비구니는 도리어 애원하다시피 가냘픈 소리로 두 손을 뿌리치려고 몸을 비틀었다.
"알아요. 당신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나의 불행쯤은 문제가 아녜요. 나는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첫눈에 당신이 나의 운명의 여자라는 것을 금방 느꼈지요.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 함께 돌아가든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립시다."
신온철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부짖었다.
 
고릴라와의 대결
 
신온철은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가 있는 산 속을 향하여 땀을 흘리면서 줄달음 치고있었다. 한 손으로 우비구니를 이끌면서 그들은 골짜기를 지나 산허리로 올라서고 다시 고개를 넘어 낭떠러지 아래까지 다다랐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위험해요. 고릴라의 본거지가 산비탈에 있을 거예요."
우비구니는 손짓을 하며 일러주었다. 두 탈출자는 지혜를 짜내면서 낭떠러지의 바윗돌을 붙잡고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참이었다. 우비구니도 자기와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탈출하고 싶었으리라 지구의 탐험대원들의 상냥스러운 태도가 마음에 들었으리라.
신온철의 안내를 받아가며 기를 쓰고 뒤따르는 우비구니의 표정은 결의에 가득 차 있으며 숨소리는 거칠었다. 눈 앞이 아찔해진 두 사람은 하마터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렇다니까. 공연한 모험을 하지 않도록 발바닥에 반세포 탐지기를 붙여놓지 않았는가! 너희들은 너무 무모한 짓을 저지른 거야."
세 개미 우주인 앞에서 신온철과 우비구니는 대항할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그들에게 묶여 허황한 사랑의 도피행을 몇 시간만에 결단내고 만 것이었다. 두 젊은 남녀는 우주 원정대원들과 격리된 채 이튿날 운동장에서 또 다시 심판을 받게 됐다.
험상궂은 증오에 찬 얄미운 목소리로,
"젊은 기형아가 사랑을 맺으려는 몸부림은 이해할 수 있으나 세라미 족의 율법을 어기고 경계선을 넘어서 도망간 사실은 용서할 수가 없다. 더욱이 지구의 포로 한 사람과 행동을 같이 한 사실은 우리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의 책임이 중하며 이는 마땅히 사형으로 처형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한가? 또한 지구인의 경우 아무리 율법을 모른다고 해도 포로의 신세를 잊고 특히 같은 처지에 놓인 동료를 배반한 일 또한 그저 둘 수 없다. 배반자의 처벌을 어떻게 하는 편이 온당하다고 보는가?"
여기에 맞추어 운동장의 구경석에 자리잡은 남녀노소들은 마치 스페인의 투우장에서처럼 저마다 손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우비구니의 사랑은 동정할 만하다. 법률로서 사랑을 금할 순 없다. 그대로 석방해라!"
"아니다. 경계선을 넘은 죄는 사형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죽여라!"
"노고지리 별의 으뜸가는 예술가를 죽여서는 안 된다. 목숨만은 살려 주어라!"
왁자지껄한 고함 소리를 가려낸 검찰관은 마침내 우비구니의 죽음을 면하게 하고 대신 종신 징역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 선고를 들은 신온철은 자기의 짝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저는 괜찮아요. 당신의 생명이 무사하다면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어요."
검찰직원의 우악스러운 팔에 끌려가면서 우비구니는 가까스로 이런 말을 남겼다.
"다음으로 이 무엄한 지구인은 어떻게 처형하리까?"
검찰관의 목청을 씻는 듯한 소리가 떨어지자,
"월경 죄는 사형으로 다스려라!"
"자기네 동료를 배반한 죄는 우리가 다스릴 순 없다. 그들 동료들에게 맡겨라!"
"사형 대신에 고릴라와 결투를 시켜봐서 이기면 놔주어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의견이 나온 중에서도 고릴라와의 대결이 두드러졌다. 검찰관은 중론에 따라 고릴라와 신온철을 대결시키기로 판정했다. 신온철은 섬뜩한 생각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검찰직원이 말없이 쥐어 주는 곤봉을 마다할 순 없었다. 운동장 저편에서는 벌써 곤봉을 한 손에 움켜쥔 3m키의 거대한 고릴라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고 있지 않는가! 신온철은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싸워서 깨끗이 죽어야겠다.'
그 우락부락한 시커먼 고릴라의 곤봉을 한 대 얻어맞는 날이면 그대로 죽어 버릴 것이 뻔했다. 신온철은 맨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운동장의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볼 뿐, 원정대원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지 없는지 신온철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고릴라는 이러한 결투에 자주 나와 봤는지 태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신온철도 거칠어지는 숨을 죽이며 몸을 사리고 기다렸다. 온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다가온 고릴라는 꽥꽥 소리를 내며 윽박지르더니 단번에 박살이나 내려는 듯 곤봉을 휘둘러 내리쳤다. 신온철은 재빨리 왼편으로 비껴 서며 머리 두 동강이 나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곤봉을 고쳐 쥐고 허점을 엿보다가 눈을 찌르려고 벼르는 수밖에 기운으로서는 도저히 당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차례 허탕을 친 고릴라는 사나운 목소리로 우르릉대더니 이번에는 목을 까륵거리면서 단숨에 해치우려는 듯 마구 곤봉 세례를 퍼부었다. 이리저리 쫓기면서도 신온철은 상대방의 약점이 명치뼈의 급소와 목구멍과 두 눈에 있음을 알아차리고 몇 번이나 노려보았다.
곤봉과 곤봉이 맞닿아 딱딱 하는 무딘 소리가 운동장에 허황하게 울릴 뿐 30분이 지나도록 승패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는 신온철의 날랜 동작에 더욱 성이 난 고릴라는 느닷없이 껑충 뛰더니 왼팔을 길게 뻗쳐 졸지에 신온철의 허리춤을 붙잡고 말았다. 그리고 곤봉을 휘둘러 막 내려치려고 눈을 부릅떴다. 위기일발이란 이런 순간을 이르는 말 일 것이다. 신온철의 머리는 이제 두 개로 쪼개져 산산조각이 날 것은 뻔했다. 신온철은 곤봉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며 도리어 고릴라의 배를 향하여 돌진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때, 어디선지 한 가닥 광선이 번득이더니 고릴라는 두 눈이 부시어 순간적으로 밸런스를 잃고 허공을 내리치고 말았다. 이 때다. 마음 속으로 외치며 신온철은 와락 뛰어 올라 고릴라의 앞가슴의 털을 움켜쥐고 곤봉으로 고릴라의 두 눈을 정신없이 찔렀다. 눈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자 고릴라는 더욱 흉악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신온철은 시력을 잃은 고릴라의 뒤를 돌아 펄쩍 뛰어올라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정수리와 뒤통수를 얻어맞은 고릴라는 마침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육중한 몸집이 땅바닥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군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손뼉을 쳤다. 신온철은 결정적인 아슬아슬한 순간에 번쩍하며 고릴라의 두 눈을 부시게 한 광선 때문에 결투에서 이겨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운동장의 서쪽 나무 뒤에 숨은 마치나리 소년이 거울과 같은 오목 렌즈를 쥐고 광선을 반사시켜 준 덕분이었다. X4호 별에서 지구에 데려다 달라고 밀항해온 삐오라 족의 마치나리 소년이 슬기롭게도 지구 도시를 벗어 나와 제 구실을 한 것이었다.
신온철은 이 사실을 알고 소년의 손목을 붙들고 목놓아 운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신온철이 목숨을 걸고 고릴라와 싸우고 있는 동안 이만석 박사를 비롯한 우주 원정대원들은 지구 도시 극장에서 특수 장치로 된 스크린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개미 우주인 세라미 족이 전에 찍어 놓은 기록 영화였다. 거기에는 지구와 화성과 목성, 금성 등의 진화 과정을 담은 기록사진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개미 우주인들이 태양계와 RS6호 별이 최단 거리에 접근했을 때 원정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구가 빙하 시대를 겪기 전의 식물 전성 시대에 그들은 지구에 삶의 터전을 구하러 가보았으나 때마침 은하계의 중심에서 방사하는 우주선의 강한 주기에 맞부딪쳐 거대한 식물과 공룡과 같은 생물이 차례 차례로 쓰러져 가는 바람에 영구 기지를 건설하지 못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세라미 족이 먼저 지구를 방문했단 말인가?'
천문학을 전공한 문창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저번에 몽고리안족의 역사를 설명한 것으로 보아 개미 우주인들의 얘기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듯도 했다. 원정대원들은 모처럼 스크린에 비친 지구의 모습, 목성의 모습을 보며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는가 하면 감정이 날카로운 방미란 양은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찍은 - 그렇다고 해서 1~2년 사이의 것이 아니라 우주 단위로는 5백 년 전의 사진이 있는 것은 또한 어찌된 셈일까?
이만석 박사는 스크린을 지켜보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만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개미 우주인들이 좌우하는 전파나 광선은 과연 어떠한 성질의 것일까? 하루바삐 정체를 캐내고 싶은 의욕만이 무르익어 갈 뿐이었다. 개미 우주인들은 신온철이 우비구니를 따라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감쪽같이 대원들을 속이고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있는 참이었다. 문명의 수준이 지구와는 다르니 꼼짝 말라는 과시였는지도 모른다. 그럴듯한 속임수에 빠져 온 대원이 마음을 놓고 있는 동안 오직 마치나리 소년만은 제 육감으로써 신온철의 신변이 이상이 생긴 것을 예감하고 남몰래 운동장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의 도움으로 위치를 모면한 신온철은 검찰관의 판정을 받고 호송 차에 몸을 싣고 지구 도시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극장으로 한 발짝 들어선 신온철은 정신없이 기록 영화를 구경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모습을 보자 또다시 허무감을 느꼈다.
 
황영숙의 볼모살이
 
신온철의 탈출 사건은 한낱 어리석은 감정의 장난으로 여겨졌을 뿐, 원정대원들은 그를 함부로 괴롭히지 않았다. 우주의 새로운 문명에 접하여 세라미의 개미 우주인과 사적인 접촉을 갖고 싶은 심정은 아무에게나 똑같은 감정이었기 때문이리라. 다만 신온철은 우비구니에 혹해서 이성을 잃고 행동의 시기를 잘못 판단했을 따름이다. 그의 탈출 사건이 있은 지 3년이 지났다. 갖가지 교류가 서서히 일어난 뒤, 개미 우주인들은 원정대원들이 결코 자기네들에게 해롭지 않는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인종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다.
"드디어 우리 대원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인정됐다. 오늘부터는 조심스럽게 RS6호 별의 비밀을 찾아 낼 수 있는 기회가 굴러 들어온 셈이다. 조직적으로 행동해야 된다."
어느 날 저녁 나절에 이만석 박사는 입이 벌어지도록 기쁨을 드러내면서 큰소리로 대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는 막 검찰청에서 되돌아 온 참이었다. 검찰관 오소리는 이마가 불거져 여간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었으나 원정대원들과 오랜 접촉을 겪고 있는 동안 원정대원들이 결코 적대적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는데는 조건이 하나 있소. 대원중의 황영숙을 우리 사무실에서 비서로 근무시키겠소."
오소리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소. 대답은 본인의 생각을 물어본 뒤에 하겠소."
바라고 기다렸던 기회를 놓칠세라 이만석 박사는 선뜻 언질을 주었다. 비록 오소리가 황영숙을 볼모로 앉힐 생각이 있더라도 황영숙은 한결 영리한 여성이었다. 결코 굽히지 않을 눈치 빠른 여자 대원이었고 더욱이 생물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동물의 습성에는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선뜻 대답한 것이었다. 그리고선 지구 도시로 돌아와서 이만석 박사는 따로 황영숙을 제방에 불러들여 오소리의 그러한 뜻을 비쳤다.
"그까짓 건 문제가 안돼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속담이 있지 않아요. 안성맞춤인 걸요."
자신 있게 매듭 지어주는 황영숙의 해맑은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이만석 박사는 속으로 얼마나 고마웠는지. 이런 곡절이 있은 지 닷새만에 자유 행동에 관한 정식 허가가 내리고 대신 황영숙은 아침이면 규칙적으로 꼬박꼬박 검찰관 오소리의 사무실에 출근하게 되었다.
황영숙은 오소리가 일러 준대로 전자 계산기의 단추를 조작하는 일을 맡아 해 내고 있었다. 세라미 족의 중요한 인물들의 동태를 적어놓은 카드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은 것이었다.
먼 빛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오소리의 눈길에 음탕한 눈치가 어려 있지는 않았다. 첫째 생식의 배수체가 다를 뿐더러 미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는 막연한 호감이 있을지언정 야릇한 충격이 있을 리가 없었다. 황영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늘도 가르쳐 준 일을 꾸준히 해치우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카드에 적힌 과학자 중에서 원정대원과 통할만한 인물이 없나 하고 남몰래 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때? 황영숙씨, 하는 일이 고되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불편한 점은 없어? 일이 손에 맞지 않으면 서슴없이 나에게 알려줘야겠어. 더 손쉬운 일로 바꿔드릴 용의가 있으니…"
오소리는 이따금 농담 섞인 말투로 떠들어 보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는 지구에선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척척 해 냈으니까요."
"그렇던가요. 아무튼 카드 정리는 급한 일입니다. 잘 부탁해요."
오소리는 처음보다는 훨씬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오소리는 황영숙의 일에 대한 습성을 몸소 관찰하고 기록해서 「지구인의 속성」이라는 논문으로 우주 박사 학위를 받아볼 생각을 품고 있었다. 오소리는 야심에 찬 인물이기도 했다. 날마다 저녁이면 황영숙은 고달픈 몸을 이끌고 지구도시로 돌아오곤 했다.
"언니 오늘은 무슨 일을 거들었지? 재미있는 일이야?"
방미란은 으레 궁금하다는 듯이 황영숙에게 물었다.
"세라미 족의 인구는 많지 않니. 오늘은 의사들의 동태를 정리했어. 별의별 연구를 다하고 있더군. 이를테면 영하 1백 70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소화 문제라든지 동면 문제라든지 하는…"
"퍽 재미있겠어. 난 요즘 방사선 의학 연구소에서 강의를 듣고 있어요. 그저 그래요."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니, 서로 기운을 내자."
"응, 문제없어."
두 여자 과학자는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황영숙은 과연 과학자들의 카드를 정리하게 됐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정리해 가면서도 창 너머로 들이치는 보랏빛 광선에 또렷이 적힌 카드 한 장에 눈길이 못 박히고 말았다. {에스무리 박사. 나이 153살. 중력 학자. 특히 RS6호 별이 은하계의 회전 궤도의 작용으로 변하는 원심력의 변화와 RS6호 별이 기상 변화로 생기는 질량 변화를 전공. 요즘은 지중 은하의 개발에 골몰하고 있음. 아직도 독신. 취미는 태양계 연구} 황영숙의 눈을 반짝 뜨게 한 까닭은 에스무리 박사의 취미가 태양계 연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중력학자 라면 지구 위에서는 지구물리학자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말할 나위조차 없이 그는 RS6호 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더욱이 태양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주인이라면 지구인과의 대화도 크게 환영할 것이다.
황영숙은 이날 밤 발걸음도 가볍게 되돌아와 이 사실을 이만석 박사에게 자상하게 보고했다.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난 이만석 박사의 두 눈이 힘차게 번쩍이는 것을 그녀는 혼자 흐뭇해했다.
 
문명의 본질은?
 
"여기에 지중 도시가 있다니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군. 어떻게 해서라도 탐지해 봐야겠어."
독수리 호의 대장 홍성기와 무궁화 호의 부장 박민호와 이마를 맞대고 이만석 박사는 결심을 내비쳤다.
"옳은 말씀입니다 마는 통행증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놈들도 거기만은 비밀로 하고 있는 듯 하지 않아요."
홍성기가 먼저 걱정했다. 그는 지질학을 전공한 까닭에 지하의 비밀을 일반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 통치자들의 심정엔 밝았던 것이다.
"황영숙 대원이 통행증을 입수해 내지 못할까?"
박민호 부장이 한마디한다.
"음, 오소리의 허가를 얻어본다? 에멜무지로 부탁이나 해보겠다."
이만석 박사는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황영숙과 오소리의 흥정은 생각하기보다 손쉽지가 않았다. 황영숙이 며칠을 두고 애걸복걸한 끝에 오소리는 이만석 박사가 빈손으로 여행한다는 조건을 붙여 허락해 주었다.
"빈손으로라도. 좋아요. 빈손일지라도 보고 듣는 게 얼마야."
이만석 박사는 RS6호 별의 지중 도시로 들어갈 채비를 차렸다. 산소 탱크에 넉넉한 산소를 공급하고 대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난 것은 이튿날 저녁나절의 일. 지하 도시로 들어가는 차량은 진공 파이프의 작용으로 삽시간에 목적지에 다다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지구의 승용차처럼 시트가 마련되어 있고 꼬리가 두드러지게 뾰쪽한 차에는 한 사람의 안내인과 딴 손님 두 사람이 탔다. 이만석 박사는 땅 속에 마련된 공원이며 투명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호수까지 있어 흰빛의 새들이 물 위에서 노닐고 있지 않는가. 그는 RS6호 별에서 본 흰색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땅위에서는 모든 것이 보라색의 세상이어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흰빛의 산뜻함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목적지에 다다른 이만석 박사는 일부러 휘뚤휘뚤하게 만들어 논 언덕길을 올라서 에스무리 박사가 연구하고 있다는 지중 운하개발연구소에 이르렀다.
"이 분이 에스무리 박사요. 이 분은 태양계의 지구에서 온 이만석 박사. 두 분이 인사하십시오."
안내를 맡은 개미 우주인이 소개를 했다. 두 사람은 한결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공손히 인사를 하고 합장을 했다. 에스무리 박사는 느닷없이 눈 앞에 나타난 지구인을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는지 보랏빛 얼굴이 상기되어 보였다.
"지구인이 노고지리 별까지 찾아왔다는 소문은 벌써 들었지만 운하를 개발하려니 일손이 바빠서 그 동안 지상에 외출할 겨를이 통 없었어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에스무리 박사는 멋쩍게 변명을 했다. 그러나 그의 취미가 태양계의 연구라는 선입감 때문인지 이만석 박사는 딴 개미 우주인에서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친밀감을 느끼는 터였다.
“태양계를 연구하고 계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도움이 되면 영광이겠습니다. 우리는 당신 별의 문명 수준을 이해하러 왔으니까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협력해 주시오."
"잘 알겠습니다. 내가 이처럼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우리 68대 선조가 태양계 탐험에 참가하여 지구까지 가 본 기록을 읽었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혈통이라는 게 묘한 것이니까요."
두 과학자는 맞장구를 쳐가며 그칠 줄 모를 잡담을 늘어놓았다. 이튿날 이만석 박사는 에스무리의 안내를 받아 지중 운하의 중수를 생산하는 공장을 견학했다. 모두 오토메이션 화하여 한쪽에서 물이 퐁퐁 쏟아져 나오는데 그들은 원소를 합성하고 분리하는데 박테리아를 활용하고 있는 점이 신기했다. 전기 분해의 세계는 먼 옛날에 완전히 극복했다는 뒷 이야기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친밀해지자 이만석 박사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도대체 RS6호 별의 문명이 이처럼 발달하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궁금해하는 이만석 박사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 볼 뿐 에스무리는 한 참 말이 없었다
 
무아오지 혜성의 접근
 
"그러한 비밀을 악용하려는 게 아니라 지구와 태양계도 이 별처럼 개발되어 사람들이 편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온 인류의 행복을 위해 과학과 기술로 이바지하려는 심정뿐입니다."
이만석 박사의 진지한 말소리를 고개를 흔들고 듣고 있던 에스무리는 무슨 결심이나 한 듯, 이윽고 무거운 말문을 열었다.
"나는 다 알고 있소. 태양계의 문명은 에너지로 확산해서 지금 핵융합 반응을 가까스로 컨트롤했을 따름이오. 우리는 곤충의 세계에 친척이 있듯이 원소와 맞먹는 원소를 개발해 냈오. 당신들이 이른바 반세계 이론은 여기서는 실천 단계에 들어간지 오래요. 폭발물을 견제한다는 일은 한편으론 위험한 일이오. 그래서 우리는 폭발성이 없는 정반의 원료로서 에너지를 손쉽게 얻고 있을 따름이오. 우리는 그밖에도 중력파를 가속하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조심스럽게 에스무리는 가르쳐 주었다. 이만석 박사는 그 정도의 이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알고 싶은 것은 무슨 원소를 어떤 원소와 맞먹어 소멸 에너지를 내는가 하는 비밀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이를 추구하기로 하고 에스무리와의 대화를 얼버무려 버렸다. 에스무리 박사는 RS6호 별의 질량이 과거에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는 말을 했다.
"은하계의 궤도를 돌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뜻하지 않는 왜곡된 공간을 통과할 적이나 강력한 방사선이 별 언저리를 지나칠 때, 질량의 변화는 지상의 표면 변화로서 생기기 마련이었습니다. 올해도 무아오지 혜성이 노고지리 별에 접근하는 주기에 해당하는데, 아직도 별 자체의 궤도를 바꿀만한 추진력이 개발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한입니다."
에스무리 박사는 침통한 낯빛에 어두운 그림자를 띄우며 말했다. 이만석 박사는 과학자의 고민이랄까 양심에는 국경도 변경도 없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일이라면. 이만석 박사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그와 공동 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석 달째, 이만석 박사는 RS6호 별에서의 모든 박테리아는 완전히 컨트롤되어 생산에만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지구의 인류는 얼마나 가엾은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따위도 컨트롤 못한 채 병이다, 흉년이다 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생지옥의 그것처럼 눈 앞에 아른거릴 뿐. 언젠가는 인류도 노고지리 별의 세라미 족과 같은 문명 수준에 반드시 도달하겠지만, 그 동안의 애처로운 희생을 단축하고 싶은 양심의 울부짖음을 이만석 박사는 도저히 저버릴 순 없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에스무리가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을 기밀 문서를 훔쳐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일 신온철처럼 실패하는 날이면 당장에 목숨을 잃어야 되는 비극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만석 박사는 무의미한 나날을 지하 도시에서 보내고만 있을 것일까?
"이만석 박사 아무래도 세상이 심상치 않소. 무아오지 혜성의 궤도가 바뀌어 예정보다 빨리 RS6호 별에 접근한 모양이오. 방금 지상에서 보내온 정보는 상당히 긴박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소. 당신은 어쩔 참이오"
어느날 아침 에스무리가 급히 텔레비전 전화로 알려 주었다. 이만석 박사로선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사태였지만, 개미 우주인들의 표정은 사뭇 긴장에 싸여 있었다.
"지상으로 돌아가서 원정대와 의논하겠소. 나로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럴 때가 아니오. 우리는 이러한 비상 사태를 염려해서 이미 지하 도시를 건설해 놓은 것이 아니겠소? 세상 일은 모르니까. 어서 내 사무실까지 와 주시오."
에스무리 박사의 숨가쁜 소리에 재우쳐진 이만석 박사는 그제야 덩달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차를 몰고 에스무리 사무실로 뛰어갔다.
"한시가 바쁘오. 무아오지 혜성이 만약에 우리별과 정면 충돌을 하는 날이면 인구의 80%가 희생되고 말 것이오. 이만석 박사는 그러한 최악의 상태를 예상해서 나는 사적으로 RS6호 별의 문명을 적은 비밀 문서의 카피(copy)를 한 벌 당신에게 맡기리다. 어서 지상으로 돌아가서 우리 별에서 떠날 준비를 서두르시오."
에스무리 박사는 핏발 선 눈을 빤히 뜬 채 이만석 박사의 손에 한 뭉치의 서류를 쥐어주며 독촉했다. 이만석 박사의 두 눈에 핑 도는 것이 있었다. 눈물 아닌 감격이었다.
"고맙소. 에스무리 박사, 최선을 다해 보겠소. 몸조심 하시도록…"
"행복을 비오."
더 지체할 수 없으리 만큼 사정이 급한 모양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서류를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선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지상으로 통하는 정류장으로 줄달음쳤다. 정류장에서는 벌써 지상에서 쏟아지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개미 우주인들은 태초의 원시적인 공포감에 휘말려 아우성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정신없이 두 손으로 인파를 뚫고 헤치며 상행 열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 가까스로 다다랐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손님은 열 댓뿐이었다. 스테이션의 스피커는 뚜렷하면서도 짤막하게 외쳤다.
"마지막 상행 열차 발차…"
이만석 박사는 쏜살같이 진공 파이프에 말려 들어가는 차량의 시트에 몸을 기대며 지구 도시에서 허덕거리는 대원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바심을 냈다.
 
한시가 바쁘다!
 
보랏빛이 찬란했던 세상이 졸지에 오렌지 빛으로 바뀌자, 우주인들은 질겁을 하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뭉글뭉글 떠 있는 오렌지 불덩어리를 뒤돌아보며 한 손으로 불빛을 가리면서 줄달음치는 개미 우주인들.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면서 그들은 지중 도시로 통하는 정류장을 향하여 아귀다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아오지 혜성이 접근하리라는 경보를 듣고서도 이다지 놀라지는 않았었다. 세상이 여전히 보랏빛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루밤 사이에 세상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자 개미 우주인들은 졸지에 천재지변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부리나케 검찰관의 사무실로 뛰어든 황영숙에게 오소리는 황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영숙 대원! 큰일났다. 무아오지 혜성이 궤도를 바꿔 RS6호 별로 직진해 오는 중이다. 지구인들은 한시 바삐 탈출해야 할 거다. 우리는 지금부터 지중 도시로 피난한다."
오소리는 평소에 거만하던 티를 흩날려 버린 채 들뜬 소리로 황영숙을 재촉했다. 그는 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가방 속에 서류 뭉치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느라고 정신이 없다.
"고마워요. 우리도 최선을 다 해 보겠어요."
황영숙은 뜻밖에도 침착해진 자기 자신을 느끼며 만족해했다. 그러면서도 서성거릴 때가 아니라는 긴박감에 휩싸여 그녀는 오소리의 사무실을 황급히 뛰쳐나와 지구도시로 부리나케 차를 몰았다. 거리마다 물밀듯이 아우성치는 피난민들.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뒤숭숭하다. 황영숙의 머리에는 문뜩 전쟁의 장면이 떠오르면서 몸이 오싹해졌다.
"야단났어요. 오소리마저 지중 도시로 피난가면서 우리더러 빨리 노고지리 별을 떠나래요."
허겁지겁 박민호 부장의 방으로 뛰어들어온 황영숙은 막힘 없는 소리로 외쳤다. 거기에는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을 비롯한 전 대원이 모여 불안한 표정으로 황영숙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아오지 혜성이 충돌할 기세라나 봐요. 거리는 온통 피난민들로 가득해요. 어쩌면 좋아."
황영숙의 숨가쁜 목소리는 방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홍성기 대장은 어쩔 줄을 모르고 오직 이마의 주름살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짚을 따름이었다. 이만석 박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온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문을 열어젖뜨린 채 뛰어드는 이만석 박사의 황급한 모습을 보자 대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박사님.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출발하자, 당장에 출발해야지, 모레면 우리는 혜성권 내에 들어서서 몰살되고 만다. 어서 채비를 차리도록!"
숨을 몰아쉬며 명령하는 이만석 박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원들은 뿔뿔이 자신들의 방으로 뜀박질을 했다. 노고지리 별에서 모은 자료를 챙기기 위해서. 그 틈바귀에서 마치나리 소년은 신온철의 소매를 낚아챈다.
"우비구니를 교도소에서 구출해 내야죠."
마치나리 소년은 무뚝뚝한 한 마디를 던져놓고 빤히 신온철의 두 눈을 지켜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신온철은 가슴이 덜컹했다. 멋쩍은 생각이 온몸을 스쳐 흐름을 짜릿하게 느꼈다. 자기만 탈출하려던 뉘우침.
"알았다. 함께 가자!"
신온철은 자기의 짐을 챙기자 마치나리 소년의 손목을 붙잡고 지구 도시를 뛰쳐나갔다. 바깥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벌써 기온이 오른 증거이리라. 신온철과 마치나리는 좁다란 뒷길을 골라 비틀비틀하면서도 단숨에 교도소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바지에 다다랐다. 교도소의 정문은 열려진 채 경비원의 그림자는 도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피난하고 말았구나. 수용된 자를 혹 죽이지나 않았을까?'
신온철의 가슴은 순간 요란스럽게 방망이질을 했다.
마치나리 소년은 잽싸게 감방을 기웃거리며 핏발선 눈초리로 우비구니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철장 속에 갇힌 개미 우주인의 죄인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저 두 사람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을 뿐. 돌아서 다섯번 째에 이르렀을 때,
"여기 있다!"
하는 어렴풋한 소리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앞을 다투며 뛰어갔다.
과연 제 7 감방의 철책을 손에 쥐고 해쓱해진 우비구니가 얼굴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신온철씨, 이게 웬일이에요."
눈이 휘둥그래진 우비구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정은 나중에 얘기하리라. 우선 이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철장의 자물쇠는 철통같이 튼튼해 보였다. 어느새 구해왔는지 마치나리 소년이 쇠망치로 자물쇠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에선 구슬땀이 내내 흐르고 있지 않은가? 신온철은 쇠망치를 가로채서 자물쇠를 내리쳤다. 대여섯 번 후려갈기는 통에 자물쇠 통이 마침내는 휘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어서 나갑시다. 한시가 바쁘니…"
신온철은 우비구니의 차가운 손목을 붙잡고 재우치며 마치나리와 함께 교도소를 내달았다. 지구 도시로 되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로켓이 있는 곳으로 가자!"
세 사람은 숨을 돌릴 겨를조차 없이 그 길로 산봉우리를 향하여 줄달음쳤다.
 
폭발하려는가?
 
"발사!"
이만석 박사의 명령이 어수선한 기계 소리를 뚫고 침착하게 울렸다. 마지막 카운트다운 끝에 무궁화 호에 뒤이어 독수리 호도 순조롭게 궤도에 올라섰다. 갑자기 들이닥친 긴장에 진종일 둘러싸였던 대원들은 그제야 저마다 제자리에서 긴 한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 것이었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RS6호 별, 그리고 세로 꼴의 한쪽 모서리에 위치하는 곳에서 불타고 있는 무아오지 혜성,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그 꼭지점으로 궤도를 잡은 뒤 광파 로켓 엔진에 점화했다. 속도는 한결 더 빨라졌다.
"전원이 무사히 탈출한 것을 우선 축하한다. 그러나 하루를 지나야만 무아오지 혜성의 영향권 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제자리에서 계속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이만석 박사의 말투는 극히 사무적이었다. 우주선 내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신온철은 우비구니를 되돌아보았다.
'아직도 기겁을 하고 있군. 차차 설명하면 풀리겠지. 어쨌든 노고지리 별에서 으뜸가는 조각가를 데리고 온 사실은 얼마나 장한 일이냐. 지구에 돌아가는 날이면 얼마나 사람들이 부러워할까?'
신온철은 우비구니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우주 세계의 왕자와 공주가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치나리는 본디대로 독수리 호에 타고 있었다. 그 소년의 기지로 우비구니를 구출해 낸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었다고 신온철은 생각을 되풀이했다. 우주 탐험대가 무아오지 혜성의 영향권 내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대원들의 곤두섰던 신경이 하루아침에 풀리고 말았다.
"우리는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당신이 지구도시의 건설을 거들어 준 일을…"
이만석 박사는 우비구니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
"태양계 사람들이 이처럼 평화로운 것도 모르고 노고지리 별사람들은 처음에 퍽 의심을 했지요. 너무 오랫동안 자기문명의 테두리 속에서만 살아 온 탓인가 봐요."
우비구니도 그 동안의 경과를 설명 듣고 우주 원정대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자,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노고지리 별의 참변은 참혹했다.
"박사님, 저걸 보십쇼."
박민호 부장이 가리키는 천체 망원경 스크린에 RS6호 별은 독수리가 노리는 병아리 같았다. 무아오지 혜성은 마치 우주 공간의 유령처럼 검은 머리에 시뻘건 불 꼬리를 한없이 끌며 RS6호 별을 보고 돌진하더니 고개를 잠깐 돌리는 듯 외면하다시피 RS6호 별을 스쳐갔다.
 
천체와 천체의 우연한 조우
 
오렌지빛 화염이 천지를 뒤덮다시피 발산하더니 혜성의 꼬리는 RS6호 별의 표면을 어루만지듯 서서히 지나쳤다. 처음엔 거머삼킬 것 같은 기세였던 것이 다행이 정면 충돌을 면하고 유유히 지나친 것이다. 스크린에 비친 이 광경을 보면서 모두 숨을 죽였다. 아마도 섭씨 1,700도의 고열이 발생했으리라. 노고지리 별의 지상에 남아날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원들이 허둥지둥 로켓 기지로 쫓아 올라왔을 때, 허망한 눈초리로 어쩔 줄을 모르던 고릴라 떼들의 가엾은 운명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노고지리 별의 개미 우주인들은 아득한 먼 옛날에 태양계에 기지를 마련하려고 지구에까지 다녀간 문명의 선구자들이었다. 지구보다 훨씬 앞선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지만 천체와 천체의 역학 관계를 해결하는 재주는 미처 손에 넣지를 못했다.
"인구의 4분의 3이 순식간에 불타 버리고 지상에 있던 모든 건물과 식물은 증발해 버렸다. 지구인들의 안전을 빈다."
나중에 중력학자 에스무리가 보내온 무전 연락으로 원정대원들은 그 처참한 - 어쩔 수 없는 - 광경에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 그러나 우비구니는 노고지리 별의 애처로운 운명에 그다지 슬픈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같이 보였다. 자기를 기형아라고 학대하던 개미 우주인에 대한 앙심 때문일까? 또는 지금 자기와 모습이 비슷한 지구인의 세계에 동화한 까닭일까? 우주에는 사람의 힘으로선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세계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거대한 힘과 힘의 충돌이지 결코 정신과 힘의 대결이 못된다는 것이 고대 혜성과의 마주침에서 증명되지 않았는가! 어느새 동면실에서 소생했는지 독수리 호의 김동수가 부르는 노래소리가 선실 속을 적시고 있었다.
 
뜨거운 공간에서
차가운 희망에 사는
우리는 우주 나그네
불과 물이 엉겨서
딱딱해진 별과 별들
오직 사람만이
눈물이 있다네 웃음이 있다네
우리는 꿈을 밝히는
우주 나그네, 우주 원정대
 
메마른 기계 소리를 훈훈하게 해 주는 노랫소리는 저마다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계획이란 예상할 수 있는데서 짜여지는 것이지 은하계에서처럼 미지의 세계에선 아슬아슬한 순간과 순간이 연속될 뿐이 아니겠는가하고 노래는 질문하고 있는 듯했다.
 
위기! 타래 공간
 
독수리 호에 탄 마치나리 소년은 김동수와 곧잘 어울렸다. 그는 바둑보다는 장기가 더 흥겨운 모양인지 나중에는 김동수와 맞장기를 두는 실력도 발휘하곤 했다. 근 4년 동안이나 동면실에 들어있던 김동수의 정신 이상은 이제는 완전히 나아져 방미란을 붙들고 헛소리를 하는 버릇도 없어졌다. 다만 그 전에 신경과민으로 노스탤지어를 노래하던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 차라리 기분 좋은 일이리라. 우비구니는 그녀대로 한국말과 역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신온철이 역사를 전공한 만큼 안성맞춤이었다.
"3면이 바다라면서 어획고가 형편없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비구니의 질문을 받자,
"아직도 봉건적인 사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죠,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테니…"
신온철은 얼버무려 버리곤 했다. 아무래도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대목은 우비구니에겐 금방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이러구러 우비구니의 한국말 실력이 제법 익어 일상 용어에 지장이 없을 만큼 향상되었다. 한 때는 남몰래 탈출하려다가 붙잡힌 사이니 만큼 서로 정이 들어 어학 공부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가 이처럼 평화로운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이만석 박사와 박민호 부장, 그리고 홍성기 대장과 윤상운은 에스무리로부터 받은 RS6호 별의 문명 기밀을 잠자코 정리하고 있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생산 면에만 활용할 수 있게 컨트롤했으니 대단한 수준이야. 금속 용해뿐 아니라 농작물을 합성시키는데도 바이러스를 이용하고 있으니 이것은 효소 따위로 겨우 당분을 얻어 내는 지구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도 없어."
이만석 박사는 서류를 연구할수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보통 동력은 우주 공간의 중력파를 뽑아내서 활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별마다의 천문도를 어찌나 자세히 구석구석까지 작성해 놓았는지 강력한 전파성에서 발사되는 전력을 마치 축전지처럼 저장하는 특수 장치도 지니고 있었다. 평균 수명은 3백 년, 장수하는 이는 5백 년까지 살 수 있는 의학적인 연구도 완벽했다. 지구인과 비교할 때 지구에서는 산소를 그 때마다 호흡해야 되니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일이 많았지만 개미 우주인들은 질소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신진 대사가 훨씬 느린 속도로 진행될 수 있도록 생리학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만석 박사가 기밀 문서를 거의 검토해서 정리했을 무렵,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또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또 공간 계곡에 떨어진 듯 합니다."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으로부터 첫마디 보고를 받자 이만석 박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최선을 다해서 탈출해 보자."
비상벨이 요란스럽게 울리더니 우주선 내에서는 삽시간에 전투 태세로 돌입했다. 은경 북동쪽 25도의 감마 지점에서의 불상사였다. 줄기차게 치달리던 로켓이 폭삭 내려앉더니 마치 소용돌이나 회오리바람 속에 휘말린 듯 기를 못쓰고 빙글빙글 돌고만 있지 않은가!
'광속으로 돌파하는 공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니 말이 되느냐 말이야.'
박민호 부장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으나 정반대였다. 여전히 회전하며 빠져나가는 물구멍의 물처럼 로켓은 몸체를 비뚤면서 방향을 잡지 못했다.
"박민호 부장! 어쨌든 RS6호 별에서 얻어 낸 기밀을 지구에 송신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애."
이만석 박사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일렀다.
"당장에 그렇게 하죠."
박 부장의 지시로 이상호는 타전을 시작했다. 서류의 전면을 전사로 떠서 한 장 한 장씩 보내는 일은 뒤흔들리는 방 안에서 그리 손쉽지는 않았다.
흔들리고, 뒤집어지고 타래 송곳처럼 뒤틀리는 우주선은 마치 깊은 수렁에 빠져가는 침몰선과도 비슷했다.
'혹 무아오지 혜성이 통과한 공간의 충격이 아닐까?'
이만석 박사는 생각을 가다듬느라고 안간힘을 썼으나 순간 정신을 잃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이저 송신을 맡은 이상호가 맨 마지막까지 의식을 버티고 있었으나, 그도 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침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우주 함대의 마지막은 너무도 허무했다.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마치 대양을 표류하는 돛대 잃은 어선처럼 뿔뿔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우비구니와 마치나리 소년의 목소리도 끝내 들리지 않은 채, 침묵의 영원한 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꿈속으로 처럼.
 
(후기)
우주 원정대가 은하계에서 실종된 지 5백 년만에 느닷없이 성산포 우주 기지의 레이저 수신망이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스크린은 RS6호 별의 문명의 비밀을 적은 수식과 부호를 한 줄씩 재생시키며 그려 내려갔다. 방대하고 귀중한 데이터였다. 그리고선 맨 나중에 '원정대원은 결코 외롭지 않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만석 박사의 애국적 충심이리라.
 
<끝>
■ SF 단편 소설 - 명령 시대
 
- 명령만 내리면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당신의 할 일은 전부 기계가 해 줄 것이다. 수학공부나 영어 따위로 머리를 썩일 필요도 없다.
 
금발 미인
 
서기 2019년 5월 14일 오전 8시 정각 준수는 눈을 떴다. 경종 시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으나 신경을 기분 좋게 자극해서 눈을 뜨게 하는 장치가 준수를 깨운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준수 도련님"
날씬한 금발 미인이 와서 상냥하게 인사한다.
"아아! 메리 잘 있었니? 내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줘."
준수는 기지개를 치며 명령한다.
"네, 그러겠어요."
메리는 쌩긋 웃으며 대답한다. 마치 아름다운 영화 배우처럼 매력적인 이 금발 미인은 준수네의 가정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었다. 21세기는 로봇 시대, 위험한 우주나 해저의 작업, 고층 빌딩 위의 작업, 중노동, 집안일 따위의 온갖 일을 로봇이 맡아 하고 있었다.
정밀한 전자 두뇌를 가지고 외모도 손색없는 미남 미녀인 로봇들은, 인간보다 우수하고 머리도 좋지만 인간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사람과 꼭같이 생겨서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로봇의 앞가슴에는 R이라는 커다란 푯말을 붙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는 벌써 준수의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 동생인 옥희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로봇 가정부인 메리가 요리를 겸손하게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한 요리들은 모두 고주파 레인지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반숙을 잡수시면서 할머니는 메리를 힐끔힐끔 보고 계셨다. 얼마 전에 로봇을 사기로 했을 때,
"얘들아 나는 금발은 싫다. 내가 젊었을 때처럼 머리카락이 새까만 미인을 사도록 하자, 여자의 머리는 검은 것이 좋으니라."
라고 할머니가 끝까지 고집하신 것이 생각나서 준수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준수와 옥희는 학교에 갔다. 21세기의 의무 교육은 4세부터 시작하여 대학 4년을 졸업할 때까지인데 금년 14세인 준수는 중학교 3년이었다.
준수네 중학교는 집에서 15km 정도의 거리, 준수는 매일 걸어서 다녔다. 15km나 되는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서 갈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움직이는 도로」에 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점점 속도가 빠른 도로로 갈아타다가 목적지에 가까이 오면 다시 느린 도로로 옮겨 타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이는 도로가 21세기의 도시에는 그물처럼 엉키어 있었다. 준수는 이렇게 해서 15km나 되는 거리를 단 10분만에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높이 150m의 원기둥 모양의 훌륭한 건물이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이 속에 있었다.
지금 중학 3년인 준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 가기로 희망하고 있었다. 21세기에서는 누가 세계의 어느 대학으로 가든 자유지만 좋은 대학에 입학하려면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하버드 대학은 그 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심한 대학이며,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한 준수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희망만은 크게 가져야지!
 
자동 번역기의 위력
 
준수는 130층에 있는 교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1분만에 올라갔다. 학생들의 책상에는 텔레비전과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의 책상에는 공항의 관제탑같이 스위치가 무수히 장치되어 있어, 이 스위치를 조종하여 학생 개개인과 이야기하기도 하고, 전체 학생에게 동시에 말할 수 있어 수업이 능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수업 과목을 국어, 사회, 수학, 과학은 20세기와 별다른 것이 없지만 하나 특이한 것은 영어 따위 외국어 과목만은 없어졌다. 자동 번역기가 발달하여 어떠한 외국어까지도 단번에 번역해 주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프랑스 파리의 학생 연극을 보기로 합시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교실의 한쪽 벽이 스크린으로 변하여 인공 위성이 중계해 주는 아름다운 천연색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 연극에 출연하는 학생들은 물론 프랑스의 중학생이지만 들려오는 대사는 전부 훌륭한 우리말. 21세기처럼 성우가 다시 취입하지 않아도 자동 번역기가 프랑스어를 순식간에 우리말로 번역하고 동시에 인공 음성 장치가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의 목소리로 재생시켜 주는 것이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사라지고 완전한 평화가 오는데 그것은 자동 번역기의 발달로 언어의 장벽이 무너져서 각 국민의 의사가 완전히 소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업이 끝나자 준수는 움직이는 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준수네 집은 30~40층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주택 지구에 있는데, 주택 지구 전체가 거대한 투명 돔으로 덮여 있었다. 이 돔은 21세기초에 건설된 것으로 돔 속은 공기의 오염에서 완전히 보호되며 기온의 조절도 자유로왔다. 그러나 지금은 기후의 조절도 인간의 힘으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태풍 따위 천재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이 돔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조만간 철거될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금발의 로봇 메리의 상냥한 인사를 받으며 돌아온 준수에게 뉴욕에서 텔레비전 전화가 와 있었다. 준수의 텔레팔(Tele Pal)인 제인에게서 온 것이다. 20세기에서는 서로 편지로서 사귀는 친구를 펜팔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텔레비전 전화로 사귀는 친구를 텔레팔이라 한다.
"미스터 준수 잘 있었어?"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뉴욕의 제인 양은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했다. 물론 자동 번역기가 영어를 즉시 한국어로 바꿔 주었다. 준수와 제인은 우주 전쟁의 위기에 대해서 한창 이야기했다. 화성에서 금성으로, 나아가서는 토성으로 우주 탐험하는 인류에 대해 다른 별의 우주인들이 위협을 느꼈는지 최근 지구를 자주 정찰하러 온다는 것이다.
"아이, 무서워. 지구로 공격해 오지나 않을까?"
"괜찮아 지구인이 평화를 원하고 다른 별을 절대 침략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
준수는 남자답게 제인을 격려했다. 21세기의 전쟁은 지구에서 우주로 그 스케일이 달라졌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를 이렇게까지 고도로 발달시킨 과학의 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추 석
 
20세기에서는 추석날이 되면 밤하늘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달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지금은 구름에 가리운 지구를 바라보고 추석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2019년 9월 27일 준수와 테레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달나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사는 관악산 기슭의 주택 지구에서 에어택시를 타고 김포 공항까지 1분만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이미 미국의 케이프 케네디 우주 기지로 떠날 거대한 HST(극초음속여객기)가 기다리고 있다. HST의 좌석에 자리잡은 두 사람에게 앞자리에 앉은 영감님이 미소지으며 말을 걸었다.
"오호! 자네들도 달나라에 가나? 나도 달나라의 한국 도시 「옥토끼」에서 기술자로 있는 아들 녀석을 찾아가는 참일세."
"정말 꿈 같은 세상이 되었구나.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다고 떠들썩하던 것이 내가 바로 자네들처럼 중학생 일 때 였거든."
준수가 물어보니 이 할아버지는 1954년생 이라고 대답했다. HST는 3만 m의 고도를 시속 1만km로 날아 순식간에 케이프 케네디 우주 기지에 도착했다.
"야! 저거다 우리가 탈 로켓!"
은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로켓을 가리키며 한규는 좋아했다. 화학 연료를 써서 나는 로켓은 20세기의 유물,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다 강력한 원자 로켓 시대이다. 달나라로 갈 여행자 40명은 세관에서 엄격한 소독을 거쳐 대합실로 안내되었다. 달나라에 지구의 세균을 잠입시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대합실 전체가 쓰윽 움직이는 듯하여 창 밖을 내다보니 벌써 지상 30m의 높이, 대합실이 통째로 기중기에 끌려 로켓 옆으로 접속되었다. 피픽하는 압축 공기의 소리가 들리면서 로켓 속으로 통로가 열렸다. 2m 정도의 이 통로를 빠져나갔더니 거기에는 로켓의 좌석, 두 사람씩 앉게 되어 있는 좌석이 40개 원형으로 둥근 창 밑에 줄지어 있었다. 준수와 테레사는 나란히 자리잡았다. 서울서 함께 타고 온 할아버지는 바로 앞좌석에 계셨고 백인, 흑인 등 동승객도 가지가지였다.
"여러분, 로켓은 앞으로 1분 뒤에 출발합니다. 벨트를 단단히 묶어 주십시오."
스튜어디스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로켓의 스튜어디스는 21세기 여성의 최고 인기 직업이었다. … 파이브, 포오, 쓰리, 투, 원, 제로,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드디어 출발입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와 더불어 준수와 테레사는 좌석에 눌리는 것 같은 굉장한 압력을 받았다. 계속 증가되는 중력 때문에 테레사는 자기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아 비명을 질렀다. 우주선 안에서의 중력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이 되지 못했으나 견딜 만한 정도였다. 2분 정도 지나 가까스로 중력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다음에는 몸이 마치 공기처럼 가벼워져서 무게를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어머! 저것 봐! 참 곱지."
준수는 테레사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하늘에 흩어져 있는 희고 붉고 푸르고 누런 온갖 빛깔로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 그리고 암흑의 대우주에서 붉은 혓바닥을 넘실거리며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어리 그것은 태양이었다.
"잠시 후 우주 스테이션에 도착합니다. 여러분 로켓을 바꿔 타셔야 합니다."
스튜어디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준수는 우주 공간을 유유히 돌고 있는 은빛의 도너츠처럼 생긴 우주 스테이션을 발견했다. 이윽고 로켓은 우주 스테이션에 도착, 케이프 케네디 우주 기지를 떠난 지 꼭 1시간 30 분만이었다.
"지구는 역시 푸르구나."
우주 스테이션 아래쪽에 빛나고 있는 지구를 테레사는 교과서에 쓰여 있는, 최초로 달의 주위를 선회한 보먼 대령의 말을 생각했다.
 
달의 도시
 
준수 일행 40명은 우주스테이션에서 잠시 쉬었다가 달 착륙용 로켓으로 갈아탔다.
지구에서 320km 떨어진 지점을 초속 8km로 돌고 있는 우주스테이션에는 약 100명의 직원이 상주하여 달 여행의 중계사무를 보기도 하고 우주 천문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주 스테이션에서 달까지의 여행은 약 18시간, 우주의 광경도 자꾸 보아오면 지루해지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심리, 승객 중에는 꼬박 꼬박 조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윽고 승객의 꿈을 깨뜨리고 스튜어디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곧 달세계의 공항에 도착합니다. 좌석 벨트를 단단히 매어 주십시오."
잠을 깬 승객들 입에서는 경탄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눈부시게 밝은 거대한 달세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의 바다' 위로 아페닌 산맥이 길다란 그림자를 던지며 절벽처럼 솟아있었다. 돌연 한규의 몸이 좌석에 눌려지는 듯 압력을 받았다. 로켓이 역분사 장치를 움직여서 속도가 떨어지고 천천히 달 착륙을 시작한 것이다. 달 표면에는 여기저기에 거대한 둥근 빵 모양의 돔이 흩어져 있었다. 세계 각국이 달에 건설한 도시였다. 미국이 건설한 <다이아나(달의 여신)>, 한국이 건설한 <고려>도 달에서는 가장 큰 도시의 하나였다. 굉장한 폭음과 더불어 충격이 느껴진다. 그때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이 들렸다.
"지금 막 달세계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행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준수와 테레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감격과 기쁨의 순간을 맞이했다. 매일 밤 관악산 기슭에서 쳐다보던 달세계에 38만km를 날아 이제 도착한 것이다. 달세계 공항에서 한국의 <고려시>까지는 지하철로 20분의 거리, 엘리베이터로 지상에 나올 때 준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라스틱 천장으로 밀폐된 돔 안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모두 지구에서 가져다가 심은 것들입니다. 이 나무들은 우리들의 생명의 수호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그 대신 산소를 내놓기 때문이지요. 어떠세요. 공기가 참 상쾌하지요."
어여쁜 달세계 관광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준수의 걸음은 나는 듯이 가벼웠다. 달의 중력의 지구의 1/6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안내원은 <고려시>의 지하에 있는 물과 공기의 정화공장으로 안내했다. 달세계에는 물과 공기가 없지만 달의 암석을 분리하여 물과 공기를 만들어 냈다. 암석에서 분해한 공기에다 질소나 헬륨 따위를 적당량 섞어 달의 인간은 호흡하고.
달세계에는 지금 <고려>와 같은 도시가 30군데 가량 있어 50만 명 정도의 인간이 살고 있으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는 어려운 일들이 숱하게 많았다. 20세기말에서 21세기초에 걸쳐 달에 상륙한 인류는 150℃를 오르내리는 낮의 더위와 무서운 밤의 추위 따위 악조건과 싸우면서 달세계 도시를 완성시킨 것이다. 지하 공장에서 나온 준수 일행은 돔 바깥에 전개되는 밤하늘을 보고 경탄의 소리를 질렀다. 새까만 우주 공간의 한복판에 찬연히 빛나는 거대한 지구의 모습이 갑자기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여! 아시아 대륙이 보이는구나! 한국도 저기 있군!"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들을 찾아온 할아버지가 어릴 때는 설마 자기가 달세계에서 지구를 쳐다볼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준수 일행은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지구의 장관을 바라보며 「달맞이」 아닌 「지구 맞이」를 즐기고 있었다,
 
 
작품 해설
 
우주 함대의 최후 - 서광운
 
눈에 보이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광선이 반사하기 때문인데 만일 광선이 발사하지 않는 물체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볼 수 없지 않는가. 가없이 넓은 우주공간에는 그러한 검정 물체가 있다. 천체물리학자들은 이를 이름지어 블랙홀(B1ack Hole, 검정 구멍)이라고 한다.
별들이 화려한 일생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묘지에 갈 때 그 모습인즉 온갖 원자나 중성자는 다 타버리고 핵만이 더 이상 분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똘똘 뭉쳐 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춘 절대 정지의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블랙홀은 오늘날 백조 좌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웃 별들에서 나오는 광선이나 가스는 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채 영원히 뛰쳐나오지 못한다. 광선이 나오지 못하는 까닭에 천체 망원경이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블랙홀의 무게는 각설탕 만한 것이 모름지기 태양의 무게에 수천 배에 달하고 있으니 블랙홀 근처의 광선이나 가스가 그 인력에 이끌려 옴짝 못하는 죽음의 현장이다. 이것을 이 작품 속에서는 타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 공간에 빠지면 전파조차 붙들려 발신할 수 없으나 편의상 여기서는 전파만은 탈출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 놓았다.
이만석 박사를 대장으로 하는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일종의 우주 산책이라고나 할까. 별들이 지니고 있는 뜻밖의 특성에 이끌려가기도 한다. 강한 자철별 X4호 별이 바로 우주선을 이끌어들이고 만다. 별이 그만큼 한살이를 어지간히 끝낼 때까지에는 거기에 아득한 문명이 피고 지고 할 수도 있는 법. 거기에서는 파라노이드 박테리아의 독점 문제로 핵전쟁이 일어나 기계 문명이 멸망하고 말았다.
핵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기까지에는 문명의 진화 단계에서 반드시 박테리아의 독점 이용 문제 생기게 마련이다. 인류를 비롯한 문명 공동체는 반드시 컴퓨터나 로봇과 같은 자동기계의 구사에 뒤이어 미생물을 이용하여 온갖 물체를 손쉽게 분해하여 값싸게 이용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 어떠한 사태가 일어날는지는 X4호 별에 남아 있는 독수리 날개모양의 부리마라 족의 생태를 보면 능히 짐작이 갈 수 있듯이 문명인은 자칫하면 다시 원시인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리 자철 별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밀물과 썰물처럼 자력의 강도가 교대되는 현상을 상정할 수가 있겠다. 그래서 자력이 약해진 순간에 한국의 우주원정대원들은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RS6호 별(노고지리 별)에 착륙했을 때, 뜻밖에도 개미모양의 세라미 족에 생포되어 대원들은 지구 모양의 표본 도시 건설에 동원된다. 여기서 국경 아닌 우주 공간을 넘어선 사랑이 맺어지는데 대원 신온철과 애인 우비구니의 사랑은 이질적인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야릇하게 펼쳐진다.
우주인과 인류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주사회학적인 일면에 처음으로 문제를 던져본 셈이다. 이 작품은 이렇듯이 박테리아의 생산 이용 문제에 초점을 두었는데 장차 인류는 이 문제와 심각한 씨름을 해야 될 것 같다. 그리고 블랙홀이 장차 우주물리학의 새로운 체계화를 추진하리라는 예언은 영원히 진리로 남을 것으로 안다.
 우주 함대의 최후
서광운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한국SF작가협회 편
 
지은이 서광운
도쿄 대학 수학과 수료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사
한국일보 초대 과학부장, 의사부장, 사설부장
대우 서울신문 문화부장
현 한국일보 과학부장
한국 SF 작가 협회 회장
 
번역한 책 : 버로우즈 작 [화성의 미녀]
지은 책 : [항공 기상의 과학], [세계를 움직인 재벌] 등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원수 박 홍근 / 문학박사 최인학
공학박사 임옥룡 / 이학박사 김희규
전교육감 김성묵
표지 그림 신동우
속그림 최 충훈
 
격려사 - 과학기술처 장관
 
사람은 딴 동물과는 달리 스스로의 환경을 거의 마음대로 만들어가며 살게 마련이다. 정신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특히 물질적인 환경 개조에 더 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적인 환경 개조는 기초 과학의 연구와 응용 과학의 발달이 이룩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기계 문명의 원리를 먼저 깨달은 서양 사람들이 오늘날의 인류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양보다 상당히 늦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도 1백년 전부터 기계 문명이 밀물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전기․수도․전화․기차․전차 등 문명의 이기는 한국인들을 놀라게 했고 또한 과학과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사견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의 국사를 돌이켜 보면 세계 최초의 활자와 거북선(철선)을 말들어 낸 과학의 핏줄기를 이어 받고 있어 근대과학을 소화하고 현대 과학에 도전하는 능력은 결코 남부럽지 않다. 다만 그러한 능력을 가꾸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과학을 크게 발전시키진 못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더 잘살기 위해서 조국 근대화라는 큰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마당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그리고 과학 하는 마음은 청소년 시절부터 기르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 우리 나라에도 과학소설(SF)작가협회가 있어 청소년들에게 과학 하는 마음을 재미있게 일깨워주는 작품을 엮어 계속 출간한다고 하니 이것이 하나의 산 과학 교재로서 널리 읽혀 우리 나라의 과학 목표 달성에 이바지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71년 12월
책머리에
 
한국 SF작가 클럽을 대표하여
서광운
 
우리에게는 단군 신화가 전해 오고 서양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가 있다. 모두가 비롯된 일들을 미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자못 이야기가 있어 대대로 본받아 왔는데 기계 문명이 지구 위에 일어서기 시작한 후부터, 특히 우리의 개화 백년 후부터 거기에는 무슨 신화가 생겼으며 또 창조되고 있을까요? 만일 지난날의 신화가 생명을 소중히 여겨 그 기원을 파고 캐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새로운 신화는 무릇 물질을 일구는 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처음으로 촛대를 들어 우리의 눈길을 우주의 얼개에 돌린 이는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이를테면 태극 오행설과 같은 우주 운행의 이치가 아니라, 별의 탄생에서 빛의 얼개에 이르는 본질을 꿰뚫어 오늘날 사람들은 이를 상대성 원리라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성 원리야말로 오늘의 새로운 신화 창조의 첫 장이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똑바로 쏜살같이 달리는 광선도 무거운 물체(별) 옆을 지나칠 적에는 구부러진다는 것입니다. 직행이 곡행이 된다는 말에 뭇 과학자들이 눈을 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SF, 그러니까 「사이언스 픽션(과학 소설)」은 그러한 신화를 가장 알기 쉽게 해설하는 작업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딱딱한 과학에서 부드러운 문학으로 뛰어넘고, 또한 공상적인 문학을 통해 실증 본위의 과학 분야로 들어갈 수 있는 쌍방 교통을 이룩하는 것이 바로 SF 작가들의 일거리입니다.「베르느」에서 시작한 SF는 백 년 동안에 놀랍게 발전하여 지금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눈부시게 꽃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단군이래 처음으로 SF 작가 클럽이 탄생한 것은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던 1969년의 4일 3일의 일. 당시 서울의 종로구 수송동에 자리잡고 있던 과학 세계사의 편집실이 바로 산실이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날에 뜻을 같이 한 창설 위원들의 이름을 적어 두면 김학수, 오영민, 강민, 신동우. 서정철, 이동성, 지기운, 윤실, 이흥섭, 최충훈, 강승인, 서광운 등입니다. 그리하여 잡지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한결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일독하면, 우리 나라의 SF소설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SF 한국편을 이처럼 알뜰하게 꾸며 내주신 아이디어 회관의 박훈 사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여러분의 성원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차 례>
 
성산포 우주 기지················· 8
은하계 원정 계획················ 11
목성을 향하여·················· 15
모두가 미지수·················· 21
알파별로 발진·················· 28
끝없는 고독··················· 32
공간의 마수··················· 33
또 하나의 함정················· 40
죽음의 표류··················· 44
날개 돋친 우주인················ 49
IQ는 미지수·················· 53
원목 빌딩···················· 57
우주인의 사연·················· 62
불을 내뿜는 로봇················ 70
영웅끼리의 대결················· 75
밀항 소년 마치나리··············· 83
변덕의 사연··················· 88
알파별의 비밀·················· 91
노고지리 별로·················· 96
고릴라 떼와 격전················ 100
개미 우주인의 정체는?············· 105
세라미 족의 심판················ 108
지구 도시를 만들다··············· 113
신온철의 사랑················· 117
운명의 첫사랑················· 119
고릴라와의 대결················ 124
황영숙의 볼모살이··············· 132
문명의 본질은?················ 138
무아오지 혜성의 접근·············· 142
한시가 바쁘다!················ 146
폭발하려는가?················· 150
천체와 천체의 우연한 조우··········· 152
위기! 타래 공간················ 155
 
SF 단편 소설 : 명령 시대
 
금발 미인··················· 159
자동 번역기의 위력··············· 161
추 석····················· 163
달의 도시··················· 166
 
작품 해설··················· 169
성산포 우주 기지
 
강마른 언덕을 휘어 넘자 한 눈에 훤하게 안기는 끝없는 수평선. 언제 보아도 파란 물결이 넘실거리는 수평선은 웬일인지 외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만석 박사는 얼굴이며 콧속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한껏 마실 양으로 두 팔을 힘껏 펼치고 심호흡을 했다. 허파로, 뱃속으로 찬 기운이 담겨지면서 온몸이 날듯이 가벼워진다.
"오 아름다운 지구여! 땅이여 흙이여! 나의 참다운 생명의 고향."
그의 입 밖으로 평소의 이만석답지 않은 말이 튀어 나왔다.
그는 결코 감상주의자도 시인도 아니다. 남이 보기에는 너무나 멋없는 우주물리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드디어 지구를 떠나 멀리 은하계의 저 별들이 살고 있는 딴 세계로 떠나야만 하는 작별을 며칠 앞두고 그의 눈에는 길가의 차돌 한 개, 들국화, 패랭이꽃, 달개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새삼스러운 정을 끌어당긴다. 그는 연보라색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코에다 댄다.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만석 박사는 어른답지 않게 아무렇게나 깔려 있는 바위에 두 다리를 죽 펴고 걸터앉았다. 그리고선 먼 수평선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눈길이 닿는 바다의 끝이 가물가물하다. 머리 속에서 문득 그래도 바다는 가깝고 좁은 데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실이지 지구는 좁다. 좁고 말고, 인간의 과학적인 사고력이 지구보다 더 커지고 넓어진 거야. 그만큼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 인간은 지구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선 거다. 좁은 세상에 발이 묶인 채 살고 싶지 않게 된 거다. 문명이 덜 발달했던 옛날에 마을의 젊은이는 제나름의 새로운 질서와 전통을 확립하려고 미지의 세계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구 전체가 너무도 단조로워서 공연히 섹스에만 정신을 쏟고 있지 않는가? 나날이 팽창하는 인구를 조절하고 제한한다는 구호만 내걸고 실은 정반대로 생명의 학대를 일삼고 있는데 지나지 않다.'
이만석은 공리를 맞물고 풀려 나오는 생각을 더듬을수록 고대 흙과 땅에서 느꼈던 지구에의 애착과는 정반대의 결론으로 줄달음질 치는 자기를 느꼈다.
서로 엇갈리는 부조리의 세상이다. 자기가 정말로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생활 집단은 거꾸로 진실한 것을 마다하고 물리친다. 동시에 자기가 반역하려고 애쓸수록 생활 집단은 자기를 따뜻하게 포옹해 주려고 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방향이 그 무엇인가에 이지러지고 만 것이다. 과학의 발달에 종교가 뒤따라오지 못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인간은 본바탕이 과학적인 생물이지 미신이나 종교적인 생물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만석 박사는 사색의 날개를 거두고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 35분이었다. 기지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15분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너럭바위에서 일어서면서 손 끝으로 바지에 기어오른 개미떼를 퉁겨 버렸다. 개미들은 무슨 날벼락이냐고 질겁을 하고 부리나케 굴러 도망쳐 갔다. 과연 은하계에서 인간은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살기 좋은 오아시스별을 발견해 낼 수 있을까? 처음부터 과학적인 바탕에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그러한 낙원을 건설할 수가 있을까? 이만석 박사는 그러한 기대에만 사로 잡혀 뜬 걸음으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휘청휘청 돌아서 따라가는 좁은 길은 이내 콘크리트의 넓은 길로 연이어져 길가에는 가죽나무 가로수의 짙은 푸른 잎이 울창하다.
이만석은 거기에 우두커니 서서 쏜살같이 질주해 오는 자동차를 보고 한 손을 들었다. 벌써 영업용차는 거의 볼 수 없는 시대이다. 자가용이나 관용차일지라도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한길의 어디서나 손을 들면 아무나 태워 주는 것이 세상의 풍조이다. 차는 우연히도 성산포 쪽으로 가는 차였다.
"우주 기지로 가는 길이신군. 나도 그리로 가는 길이요. 오동환 기지 사령관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오."
늙수레하게 보이는 노신사가 친절하게 차를 태워 주고 나서도 노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체 이만석에게 물었다.
"실은 우리 집의 딸아이도 뽑혀서 은하계 원정단에 한 몫 끼어 있다오. 이름은 황영숙이라고 하지."
노신사는 묻지 않는 말까지 털어놓았다. 딸이 은하계 원정 대원으로 떠나는 일이 퍽이나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황영숙이라면 선생은 혹시 황주일 교수가 아닌가요?"
"그렇소. 잘 알아 맞췄구려. 그런데, 딸년의 나이가 어려서 적이 걱정은 되지만 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애니까 도움은 되겠지."
황 교수는 줄곧 미소를 눈가에 담은 채 차를 몰았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었으나 서로 의견이 맞는 인간형임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흐뭇해했다. 자동차는 10분 가량 흐르는 동안 성산포 우주 기지에 다다랐다.
 
은하계 원정 계획
 
성산포 기지는 제주도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조촐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곳을 우주 개발청이 로켓 기지로 건설한 뒤부터 기지의 남북으로 활기 띈 소도시가 생겨난 곳이다. 이만석은 정문에 들어서자 본부 건물을 황 교수에게 가리켜 주고 자기는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걸어갔다. 모도록한 잔디밭을 걸으면서 그는 지금부터 강의해야 할 내용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서 되새겨 보았다. 우주사회학 강의! 아무래도 실감은 깃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일지라도 집단적으로 믿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헛기침을 하며 사무실의 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여비서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3시부터 강의할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외국의 우주물리학회에서 보내온 편지와 축하 전문을 책상 위에서 집어들고 한참 읽어 내렸다. 한결같이 한국의 은하계 원정의 안전과 성공을 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프라하 천문대에서 보내 온 와이말 박사의 편지는 옛 우정이 어려 있었다.
3시. 이만석 박사는 담뱃불을 짓이기다시피 끄고 나서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강의실로 향했다. 교실에서는 원정대원과 후보생들이 웃음판을 벌리고 있었다. 이만석 박사는 분필을 한 손에 들고 작은 소리로 강의를 시작했다.
"우리는 잠정적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아마도 영원히 이 문제만은 해결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섹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여러분도 다시 심중하게 생각해 보십쇼. 섹스는 과연 인간이 인생을 향락하기 위한 수단이냐, 또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종족 보존을 위한 기계적인 고통스러운 작업이냐 하는 문제에 해답을 내려야 합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뚜렷하고 올바른 해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한 몸이 되어 우주 여행을 하는 동안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겨서는 안 될 겁니다. 분명히 강조해 두겠습니다. 과거에는 섹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법에 의하여 사유 재산처럼 취급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구 위에는 우생학적으로 인류가 퇴화할 수도 있는 쓸데 없는 불구자 문제를 안고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모두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가장 합리적으로 인간을 진화시키기 위한 지름길을 연구 실험하자는 것이 바로 우리 우주사회학의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 사회에 있어서는 죽음은 삶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아마도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마저 자기가 소유할 수 없는 심경에 도달해야 될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은 조건에 따라 그 때마다 변경할 수 있도록 짜여진 우리의 생활 계획표를 다시 한 번 눈 여겨 들여다보십시오."
이만석 박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칠판에 걸린 브리핑 차트를 걷어 젖혔다.
거기에는 3대에 이르는 배우자 배정표가 건강, 혈액형, 전공별, 가계별로 미리 계산되어 짜여져 있다.
"이를테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기 위한 신화 속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는 덧붙이고 나서 대원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낯익은 제 1 함대의 부장 박민호, 대원 문창수, 신온철, 이상호와 여자 대원 방미란, 그리고 제 2 함대의 대장 홍성기, 부장 서윤철, 대원 김동수, 이팡호, 윤하운과 여자 대원 황영숙의 얼굴과 후보생들의 믿음직한 눈길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원정대는 제 1 함대와 제 2 함대로 나뉘어져 함대마다 대장을 포함한 여섯 명으로 편성되어 총인원 12명이다. 이만석은 스스로 제 1 함대의 대장을 겸한 총사령관이다. 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자공학, 생물학, 지질학, 천문학, 화학, 농학, 심리학, 의학 등 각 분야의 이름 있는 권위자로 편성되어 있다. 클로렐라를 태양이나 항성의 광선으로 재배하여 우주선 안에서 산소 공급을 받고 아울러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일쯤은 초보적인 농사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머지 않아 은하계로 떠날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약재에 의한 우주 식량을 개발한지 오래이다. 클로렐라는 재래 공간에 있어서 사람의 몸이 재래식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양 보충에는 알맞다. 그러나 광파 로켓을 타고 질량의 변화를 일으키는 속도로 비행하게 될 때 몸에 활기를 주는 새로운 영양제는 역시 한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몸을 허약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국의 한의학자 이재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근거로 새로운 우주 식량을 발전시켰다. 근 두 시간에 걸친 강의가 끝날 무렵, 기지 사령관 오동환 준장은 황주일 교수를 안내하고 강의실에 들렀다. 황 교수는 문턱을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기지 사령관이 이만석 박사를 소개하자 황 교수는 악수를 청하면서 얼굴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어허, 이 분은 아까 같은 차를 타고 와서 안면이 있는데 여간 능청맞지가 않군. 여보시오, 이 박사. 그럴 수가 어디 있단 말이오, 저런…."
"뭐, 불필요한 자기 소개를 꼭 해야만 되나요. 헛 허허허."
대원들은 이 박사의 대꾸가 마치 어린아이 같아 모두 한바탕 껄껄대며 웃었다. 기울어진 저녁 햇빛이 창문 너머로 비스듬히 비쳐왔다.
 
목성을 향하여
 
한국의 은하계 원정 계획은 결코 즉흥적인 것은 아니었다. 산업이 이를 뒷받침 할 만큼 크게 발달하고 인구도 1억 5천만 명이 넘어 국토는 재계획되고 농촌은 거의 공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이처럼 발달하게 되고 그만한 자력이 생기기까지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피땀을 흘리는 노력이 쌓여졌다. 동해와 남해안의 어족 자원과 동해안과 서해안의 해중 자원을 조리 있게 개발하고, 특히 해양 자원을 이용한 화학 공업을 발달시키고 전통적인 수예산업과 축산업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린 일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1천 5백 년 전에 동양에서 유일한 조선국으로서 기술을 발달시킨 그러한 전통적인 터전으로 복귀하자는 혁명이 뒤따랐기 때문에 민족은 크게 부흥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로켓 제조 기술은 조선 기술이 제 손에 익을 무렵부터 부쩍부쩍 발달했다. 이러한 기초 과학과 산업 기술의 뒷받침으로 한국은 국제우주개발기구의 협조를 받아 은하계 원정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원정 대원들이 그 동안 쌓아 올린 훈련은 새삼스럽게 늘어놓을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1970년대의 유치했던 우주 항공술을 이미 옛날 얘기로 돌리고 있는 국제 수준에 서 있는 인물들뿐이다. 수많은 전문가들 중에서 우주 개발청은 1백 명을 뽑아 적격 심사와 훈련 끝에 걸맞고 알맞은 12명을 뽑아 낸 것이다.
그 중에는 두 사람의 여자 대원들이 끼어 있었다. 9월 28일은 목성으로의 출발일. 그녀들은 출발을 사흘 앞두고 마지막 다짐을 했다.
"그래, 미란 씨는 죽는 날까지 내 동생이야. 지구 위에서도 때로는 공연히 외로운 것이 여자인데, 우주로 나가면 그야말로 기댈 데가 없지 않아, 여자의 마음은 여자밖엔 모른단 말이야."
황영숙은 방미란의 손목을 꼭 붙들고 그녀의 볼에 자기 볼을 가져다 댔다.
"언니, 걱정마세요. 결코 변하지 않을테니까요. 우리 두 사람이 이를테면 우주에서는 인류의 대표가 아니에요? 나는 늘 모든 일을 꼭 의논해서 언니 말대로 움직일께요."
"정말이지. 그럼 새끼손가락으로 약속을 해요. 음, 됐어. 이젠 안심이다."
황영숙은 방미란을 한참이나 껴안고 서로의 체온과 입김이 상통하는 것을 다짐했다.
원정대가 목성을 기지로 고른 데는 까닭이 있었다. 첫째, 목성의 구름 온도는 영하 140도나 된다. 원정대가 타고 떠날 로켓은 광자 로켓이다. 광자 로켓의 거대한 엔진에서 분출하는 본류가 작렬하는 흐름은 수백만 키로 떨어진 곳에서라도 지구의 모든 생물을 태워버릴 만큼 강하다. 따라서, 지구에서 훨씬 떨어진 정확히 말해서 지구에서 6억 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또 온도가 아주 낮은 목성을 태양계에서 벗어나는 우주 기지로 삼은 것이다. 목성에는 수소와 질소가 화합한 암모니아, 수소와 탄소가 화합한 메탄 가스 외에 수소와 헬륨으로 가득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적도의 지름은 지구의 약 11배, 부피는 1300배가 되며 12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는 점이 우주 발진 기지로서 유리했다. 한국은 목성 자체보다도 12개의 위성 중에서 화성보다 큰 두 위성 중의 하나인 델타 기지를 이용하기로 정했다. 지구에서 목성까지의 항해는 먼저 원자력 추진으로 우주 궤도에 오른 다음 광자 로켓은 발동시키지 않을 예정이었다. 지구와 태양과의 머나먼 거리일지라도 만일 광자 로켓을 발동시키면 불과 8분만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광자 로켓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태양계를 벗어날 때만 - 그러니까 목성에서 은하계로 향하게 될 때, 비로소 광자 로켓에 점화하게 될 것이었다. 9월 26일. 원정대의 모든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다. 기지 사령관 오동환 준장이 베푼 최후의 만찬은 분위기가 도리어 긴장된 것이었다. 서로들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과연 또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죽음의 우주 공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인지, 아무도 단정할 수 없는 순간 순간이 다가오고만 있었다. 연회의 자리에서는 '푸른 하늘 은하수…'를 가사 없이 흘리는 윤극영 작사의 반달 노래가 명랑하게 울리고 있었으나, 참석한 사람마다의 가슴에는 무슨 운명의 노래처럼 뒤집혀 들려왔다.
9월 27일. 아침부터 맑은 날씨. 대원 12명은 그들의 친구와 가족에게 보내는 마지막 녹음 편지를 테이프에 담았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리고 동포들이여 우리는 기어이 선공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우주 공간에는 갖가지 마력이 숨어 있을 것으로 압니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면서 한국 원정대의 안전을 빌어주십시오. 우리는 늘 동포의 뜨거운 성원이 있는 것으로 믿고 떠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만석 박사는 따로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음 해 두었다. 9월 28일. 기상 조건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수만 명의 제주 시민과 일부러 각 도에서 모인 사람들이 발사의 순간을 지켜보는 뜨거운 장면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오후 12시 15분 정각. 카운트다운 끝에 두 대의 형제 로켓은 우렁찬 폭음을 남기고 차례차례 성산포 기지를 떠났다. 눈부신 창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떠날 줄을 모르는 관중 속에서 가냘프게 흐느끼는 소리만이 듣는 이의 가슴을 에어냈다.
 
모두가 미지수
 
로켓이 발사된 지 8분 동안, 함정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자주 울리는 계기 소리만이 생명의 맥박처럼 살고 있었다.
" 휴…"
하는 신음소리를 내쉬며 맨 먼저 의식을 되찾은 이는 역시 이만석 박사였다.
"간이 콩알만 하게 된다더니 정말이야."
이 박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둘레를 살펴본다. 부장 박민호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매번 지구를 떠날 때마다 오장육부를 끌어당기는 통에 얼빠지겠어요. 입에선 쓴 물이 감돌고, 이래서야 어디 사람이 살겠어요."
그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조종석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차례 차례로 모두 의식을 회복해 갔다. 사실이지 로켓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기까지에는 몸 안의 간이 15cm나 아래로 끌리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예로부터 애(창자)가 끊긴다는 말이 있더니 몸이 허약한 자는 정말로 간이 끊길는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심을 그 때마다 대원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터이다. 이만석 박사는 당장에 성산포 기지의 컨트롤 센터에 신호를 보낸다.
"이상 없음. 모든 기능은 정상적이요."
"오케이, 궤도를 15도로 바로 잡고 제 2 함정과 나란히 위치를 고치시오."
김경호 박사의 조금 쉰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왔다. 귀에 익은 소리였지만 어딘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감각은 역시 지구와의 거리감 때문일까? 이만석 박사는 자칫하면 떠오르려는 몸을 가누면서 로켓의 진로를 바로 잡았다. 장차 컨트롤 센터의 김경호 박사는 제 1 함정 무궁화 호와 제 2 함정 독수리호의 비행 궤도를 시시각각으로 바로 잡는 지령을 보내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박사는 로켓의 벽을 보고 제자리에 앉아 저마다 맡은 일을 하고 있는 대원들을 돌아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온철 군 괜찮아요? 방미란 양은 기분이 어때?"
신온철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은 채 손만 들어 보인다. 방미란은 방실 웃어 보이며 여전히 계산기를 만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 박사는 제 2 함정의 홍성기 대장을 텔레비전으로 불러낸다.
"어떠시오? 다들 괜찮아요."
"베리 굿, 그러나 이제 졸음이 오기 시작하는 걸요. 그 동안 너무 긴장했나 봐요."
이마가 유달리 불거지고 안경 속의 눈망울이 영리하게 반짝이는 홍 대장이 걸걸한 소리로 대답했다. 이만석 박사는 지구의 중력권을 완전히 벗어날 무렵 원자력 엔진에 점화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로켓의 속도는 훨씬 빨라졌으나 컴컴한 죽음의 공간 저 편에 총총히 박힌 별들은 좀처럼 움직여 보이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나란히 떠서 세차게 달리는 한국의 우주 함대. 제비 두 마리가 정답게 나르는 모습과도 같이 아름답다. 태양의 뭉글뭉글한 표면보다 1백만 배나 밝은 레이저 광선을 신호 삼아 로켓에 켜고 가는 빛을 지구 위의 사람들은 낮에도 지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얼마나 훌륭한 일들이 아니겠느냐, 태양계가 태어난 지 약 50억 년, 지구에 생명이 발생한지 25억 년, 사람이 지상에 생긴지 1백만 년, 그리고 별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지 기껏 5천 년,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로켓을 만들어 낸 지 겨우 50 년 - 그리고 다시 말해서 화성으로 금성으로 자유롭게 여행하게 된지 20 년만에 한국의 우주함대는 처음으로 태양계를 벗어나서 은하계 원정에 착수한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은하계 원정을 통해서 갖가지 의문을 풀어야만 한다. 첫째 인류와는 전혀 모양도 IQ도 다른 우주생물과 만나서 그들의 문명을 탐지해야만 한다. 과연 계획대로 성공할는지, 또는 엉뚱한 사고로 말미암아 영영 실패하고 말 것인지, 언제쯤 지구에 되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두가 미지수다.
캡슐 안에는 벌써 진력이 난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듯 했다.
"텔레비전을 상업 방송으로 돌려 보지 그래."
이 박사는 대원에게 일렀다. 대원들의 신경이나 기분을 조절하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도 하기 때문에.
문창수가 스위치를 돌린 화면에는 프랑스의 어느 극장에서 중계되는 라인 댄스가 떠올랐다. 날씬한 허벅다리를 줄줄이 가지런히 꺾어 보이는 비키니 스타일의 여자들. 함정 안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쏠린다. 음악의 가벼운 리듬은 인류의 부질없는 소비 문화를 한결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해 준다. 이만석 박사는 거기에서 향수를 느끼기 보다 도리어 원시 민족과 다름없는 목표를 잃은 가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정대에 뽑힌 대원들은 월등하게 뛰어난 이성적 인간들이라고 스스로 다짐해 보기도 했다. 컨트롤 센터에서 목성에 착륙할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가 왔다. 캡슐 안에서는 순간 생기가 돌며 대원들은 부산히 허리를 굽닐며 기계 장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엔진을 뜯어고치고 목성의 위성으로 먼저 무궁화 호가, 다음 차례로 독수리 호가 각각 진입하여 델타 기지에 안착했다. 델타 기지가 있는 위성의 언저리에는 비교적 두꺼운 암모니아 구름이 없다. 대원들은 외출용의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쳐다 뵈는 태양은 늘 뿌옇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이른바 사마귀 우주복은 박민호 부장이 발명해 낸 것. 우주별에서 당할는지도 모르는 봉변에 대비해서 금방 스위치 하나로 둥글게 부풀을 순 있게 설계한 것이다. 평소에는 그대로 입고 다니다가 유사시에는 기압으로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게 되어 있어 사람은 그 속에서 마치 기선의 나침반처럼 중심을 잡을 수가 있어 재빨리 굴러가는 게 여간 편리하지가 않다.
우주복의 겉면의 실오리 하나 하나가 구슬 모양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톱니바퀴처럼 엇갈려서 서로 회전할 수 있는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공처럼 급히 굴러가도 딴 물체에 부딪치면 가벼이 구부러질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꼭 사마귀처럼 붙어 엉길 수도 있는 이점이 있고, 유사시에는 함정의 자력을 빨리어 저절로 굴러 갈 수도 있는 만능 복이나 다름이 없다. 대원들은 모두 사마귀 옷을 입고 작업을 시작한다. 델타 기지에서 할 일은 원자력 엔진 대신에 광파 로켓 장치로 엔진을 바꾸는 일이다.
"이상호, 윤상운 두 분이 애를 써 줘야겠어. 출발일과 시간은 나중에 컨트롤 센터에서 지시가 내리겠지만 우선 1주일을 잡으면 넉넉할 게요."
이만석 박사는 기지의 콘세트 본부에 두 청년을 불러놓고 부탁을 했다. 두 사람은 대원 중에서 엔진 수리를 맡은 중요한 전문가들이다.
"시간은 넉넉하겠지만, 혹 부분품이 모자라지는 않는지 모르겠어요."
이상호는 훤칠한 허리를 조금 구부리며 윤상운의 얼굴을 돌아다보며 말한다.
"모자라는 것은 성산포에서 보내달라고 하면 되잖아. 어쨌든 시작하자꾸나."
기지에는 밤이 없었다. 위성의 주기가 공교로이 노상 태양 면을 바라보고 돌고 있었다. 뗑그렁, 찰칵 찰칵 둔한 기계 소리가 울려온다. 또드락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쇠망치를 두들겨도 마치 나무 해머로 두드리는 무딘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기압 차이 때문일 것이다. 몇몇 대원들은 델타 기지 주변에 있는 특설 농장에서 과일이며 먹을 것을 실어 날랐다. 이 기지는 은하계 발전을 위해서 몇 해 전에 독일 과학자들이 건설해 놓은 터전이다. 그들은 시설을 만들어 놓고 국제적으로 아무나 이용할 수 있도록 이를 개방해 준 것이다. 하기야 먼 목성에서 누가 이용하든지 말든지 상관할 사람은 없겠지만. 작업은 예정표대로 진행되어 갔다. 벌써부터 모든 것이 제한되었지만 목욕만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델타 기지에서는 물을 얼마든지 합성할 수 있으니까 괜찮지만 일단 로켓을 타게 되면 목욕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힘들게 된다. 그만큼 산소와 수소의 합성이 통제되기 때문이었다. 이 박사는 늘 콘세트 본부에 앉아서 궤도 계산에 골몰했다. 인마좌(켄타우르스)의 알파별이 그래도 태양계에 가까운 별이다. 이 박사는 지금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를 그 별로 몰 작정이다.
보통 전파로 거기까지 통신하려면 가는데 4년 3개월, 돌아올 때까지는 8년 6개월이나 걸린다. 사하라 사막이 넓다고 한탄을 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막한 우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별로 가려면 귀찮은 리만 공간을 돌아가야 되겠지. 직선 코스로는 공간이 휘어져서 돌파하는데 애를 먹을 거야.'
이 박사가 혼자서 연필로 붓방아를 툭툭 치고 있노라니 까 문을 열고 황영숙이 고개를 디밀었다.
"괜찮아요? 들어가도."
"괜찮구말구. 어서 들어와요."
이 박사는 무슨 사고라도 나지나 않나 하는 걱정이 먼저 떠올랐으나, 황영숙의 맑은 눈망울에는 아무 근심이 없어 안심을 했다.
"저 약초를 배양하는 도중에 이상한 것을 봤어요. 보통 때는 아무렇지도 않는데 자력선을 쪼여 주면 약초의 뿌리를 삽시간에 먹어버리는 박테리아를 봤어요. 신기하죠?"
황영숙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 박사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한 눈치를 챈 황영숙은 손쉽게 결론만을 물었다. 그 박테리아의 성질을 일일이 설명하자니 고통스러웠다. 이만석 박사는 생물학자는 아니다.
"목성에 버리고 갈까요? 또는, 로켓에 싣고 갈까요?"
이 박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싣고 가야겠다."는 단정을 내렸다.
"저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모든 생명체는 그런 대로 쓸모가 있으리라고 확신을 하는 것이다. 델타 기지에서는 엔진을 뜯어고치는 일 밖에는 별일이 없었다. 벌써 날짜는 1주일 가까이 흘렀다.
 
알파별로 발진
 
하루는 김경호 박사로부터 결정적인 지시가 왔다. 10월 10일 오전 3시 정각에 델타 기지를 발진하라는 것이었다. 태양이 은하계의 중심을 돌고 있는 속도는 초속 220km, 분속으로 13,200km, 시속으로는 792,000km이다. 태양은 이러한 속도로 2억 5천만 년을 걸려 겨우 은하계를 한 바퀴 공전한다. 그러니까 10억 년에 4번 도는 셈이다. 이것을 지구에서 생명이 발생한 25억 년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벌써 10번 은하계를 공전한 셈이다. 이만석 박사는 태양이나 태양계의 이러한 속도가 은하계로 발진하는데 로켓을 가속시켜주지 못하는 것을 마음 속에서 언짢게 생각했다. 기왕이면 좀 더 빨리 공전하면 이용할 수도 있는데, 광파 로켓의 경우 초속이 28만km나 나오게 되니 공전 속도는 문제 삼을 것조차 없는 일이었다. 발진의 컨트롤 센터의 계수에 맞춰서 지시대로 움직이면 된다. 그러나 컨트롤 센터는 우주함대를 태양계 밖에서까지 유도해 줄 수가 없다. 전파의 속도로 보아, 너무나 시간차가 생기기 때문에 이 박사의 머리 속에서는 알파별로 코스를 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였다.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괴상망측하게 휘어진 리만 공간이 마치 지구 위의 반 앨런대처럼 한없이 깔려 있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지레짐작할 수 없는 것이 실존하는 우주의 생리이다. 이 박사는 이틀을 꼬박 생각을 가다듬어 우선 알파별 쪽으로 A코스를 정하기로 했다.
"그게 안전 제일의 코스지. 어쨌든 성공 있기를 길이 빌고 있겠네."
출발에 하루 앞선 날 저녁 성산포 기지 사령관 오동환 준장으로부터 격려를 겸한 작별인사가 도착했다. 이 박사는 출발 준비가 어지간히 챙겨진 전날 밤 콘세트 본부에 전대원을 소집하여 만찬을 벌렸다. 제 2 함대 대장 홍성기가 일어나서 엄숙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대원의 수는 꼭 12명입니다. 전에 그리스도가 마지막 만찬을 베풀었을 때에는 13번째에 앉은 유태인이 그를 배신했다고 전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러한 짓을 할 만한 13번째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닥쳐오는 곤란과 시련 속에서 저마다 마음속에서 13번째 배신자를 경계해야만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한국의 영예뿐 아니라 지구의 역사를 바꿀만한 위대한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원정 사령관 이만석 박사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야만 우리의 사명을 다 할 줄로 압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술이 한 잔씩 돌아갔다. 독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프리카의 술나무에서 자연 발효된 향기로운 브랜디를 마시고 황영숙, 서윤철은 포도주를 마셨다. 두 사람은 술을 입에다 대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생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체질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자 노래를 자청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김동수였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민요나 명곡 심지어는 유행가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노래가 없는 재주꾼이다. 태연스럽게 일어서서 그는 ‘오 나의 태양’을 늘어지게 불렀다. 가벼이 곱꺾으며 넘어가는 그의 테너 소리는 사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듣는 이의 가슴깊이 안겨주었다. 대원들은 2시간에 걸친 만찬을 마치고 제각기 잠깐 조리를 친 다음 이내 콘세트 본부에서 철수했다.
"나의 태양이 아니라 나의 사랑스러운 흙덩이지. 흙이야, 흙."
이상호가 땅에 꿇어앉아 두 손으로 흙을 한줌 쥐어 얼굴에 바르면 외쳤다. 여느 때 같으면 미쳤다고 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태양계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순간 그들은 언제 다시 흙을 밟을지 모른다. 저마다 흙바닥에 뒹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로켓의 트랩에 발을 얹고 올라갔다. 맨 나중에 부장 박민호가 무궁화 호의 문을 닫고 부장 서윤철이 독수리 호의 문을 닫았다. 이젠 선실로 옮겨 탄 원정대원들은 옷을 보통 우주복으로 갈아입었다. 로켓은 먼저 원자력 엔진에 점화되어 3시 정각에 불을 내 뿜었다. 훌쩍 떠오르는 가변 음은 지구의 그것과는 딴판이다. 델타 기지에서 4천만km 떠오른 다음에 비로소 광파 엔진으로 추진력을 바꾼다. 이제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번개같은 속도로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나란히 꼬리에서 불을 뿜고 간다. 자질구레한 성간 물질은 삽시간에 타버리고 말았다.
"동면 준비로 들어가야겠다. 로켓은 관성 유도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에 예정표대로 2교대로 근무해야겠다. 세 사람은 먼저 동면실로 들어가도록."
이만석 박사는 기침을 한 번 하고 목을 추스르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부장 박민호, 문창수, 방미란이 일어서서 비뚤거리며 칸막이의 저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끝없는 고독
 
칸막이를 넘어서 별실로 들어온 세 사람은 저마다 우주복을 두툼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박민호 부장은 약장에서 알약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반 년 동안을 산송장이 되야만 하니 지구에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하고 장난스럽게 지껄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동면하는 동안은 꿈조차도 없을 테니 저승에 간 거나 마찬가지겠어요."
방미란이 말을 받자 문창수는 대뜸 나무라듯이 눈을 흘기고 고쳤다.
"저승이라니 여기는 천당이요. 나는 알약의 효능을 믿고 먼저 자겠어."
문창수는 알약을 입에다 쑤셔 넣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로 삼킨다. 파이프에서 흘러나온 물이 지구에서처럼 흘러내리지 않고 물방울이 되어 아무렇게나 둥둥 떠오른다. 나머지 두 사람도 떠오르는 물방울을 붕어처럼 뻐끔뻐끔 빨아서 약을 삼키고 나서 침대에 가지런히 누어 몸을 벨트로 동여 묶었다. 헛기침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세 사람은 이내 동면 상태로 빠졌다. 숨소리가 멈출 무렵 방안의 온도는 무섭게도 영하 1백 70도까지 금방 내려가 버린다. 완전한 냉동 상태에서 숨쉬는 산소마저 절약하자는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별실의 둥근 유리창 너머로 그들이 깊이 잠든 모습을 확인하자, 쓴웃음을 씹으며 제자리에 돌아와서 제 2 함정 독수리 호를 불러냈다.
"홍성기 대장 독수리 호의 동면 상태는 어떻소?"
"방금 김동수, 이광호, 황영숙 세 사람이 완전히 동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은 순조롭소."
홍 대장은 안경을 벗어 들고 보고를 했다. 김동수의 깊은 테너 노래를 장차 여섯 달 동안은 듣지 못하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이만석 박사의 머리를 문득 스쳐갔다. 식생활이 변한 탓으로 스크린에 비친 대원들이 얼마간 해쓱해진 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우주 함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란히 쏜살같이 컴컴한 공간을 줄달음치고 있었다. 멀리 아득한 시간 너머에서 태양과 그 유성들이 오밀조밀하게 뭉쳐 반짝이고 있었다. 태양의 빛은 그다지 눈부신 것은 못되었다. 은하계의 저편에서는 그보다 수만, 수백만 배나 더 밝은 항성이 찬란하게 불타고 있기 때문에.
 
공간의 마수
 
이만석 박사는 신온철 대원을 불러 오후가 되면 으레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신온철은 역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인류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청년이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머리카락을 빡빡 깎아 버리는 묘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신 군은 우주인들의 문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만석 박사는 묻는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구의 경우는 이제 과학 문명이 비로소 발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라마다 고르지 않지만 우주별의 경우는 별 전체의 문명 수준이 한결같이 발달해서 인류보다 훨씬 앞선 데도 있고, 별에 따라서는 기계 문명이 발달할 대로 발달해서 멸망하고 다시 원시 상태로 되돌아간 데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문명은 단계적으로 순환하고 역사는 나사모양으로 되풀이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그럴듯한 얘기야. 잘난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단 말이겠지. 우리는 잘난 놈들과 만나야 의사 소통이 수월할 텐데…."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는 못난 놈들하고 만나야 의사 소통이 잘 됩니다. 사령관 님의 말씀이 옳은 것이죠. 저편의 높은 수준의 우주인으로서는 우리처럼 덜 발달한 인류와 만나는 편이 의사 소통을 하기에 쉽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신온철 대원은 마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구에서 보내오는 라디오 방송은 계속 나지막한 음악을 틀어주고 있지만 함정 안에서 단 세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일은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 전자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는 이상호는 가끔 항성들의 위치를 재어 제 1 함정의 비행 궤도를 수정하는 구실을 맡고 있었다.
"게시판을 늘 들여다보며 느끼는 일인데 사람은 입을 다물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또 이처럼 외딴 환경에서는 종교적인 믿음이 없이는 이겨 나가지 못할 것 같아요. 종교란 인류의 신화가 아니겠습니까?"
이상호도 엉뚱한 화제를 꺼내며 스스로의 고독을 달래는 판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믿음직하게 따라오는 제 2 함정의 톱상어 같은 모습 외에는 지구와의 통신 연락도 거의 끊기다시피 광막한 고립이 나날이 계속될 뿐이다. 그래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반 년이 넘었다. 무궁화 호의 선실 속에는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여태까지 동면해온 세 사람을 시간표대로 소생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만석 박사는 그날 아침부터 몸이 달아 어쩔 줄을 모른다.
"10시 정각에 온도를 올려주게. 조심스럽게 말이야."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상호의 솜씨인데요."
신은철도 안절부절을 못하고 들뜬 목소리이다. 언제나 조바심을 할수록 시간은 더디는 법. 그 동안 견디어낸 감정의 저수지가 이제 마지막 순간에서 둑을 무너뜨리고 쏟아지려고 한다. 10시 정각. 이상호는 온도 조정 단추를 힘껏 눌렀다. 창 너머에서 별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여섯 개의 눈길. 온도가 천천히 섭씨 20도까지 오르기를 기다려 세 사람은 둥근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약장에서 노란 색 알약을 세 알씩 꺼내서 한 사람씩 붙들고 입에다 넣었다. 물을 마시지 않더라도 입 안에서 저절로 녹아 그들의 몸 속의 핏줄에 스며들어 피의 순환을 일으켜 주는 활력제인 것이다. 1분, 2분, 3분. 그들의 살갗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면서 문창수가 맨 먼저 의식을 되찾았다
"으음!"
하는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눈을 뜨더니 팔 다리를 뻗치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상호는 아직도 잠결에서 헤매는 그의 어깨를 흔들어 주었다.
"오, 내가 살아났구나. 살아났어!"
문창수는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이만석 박사를 얼싸안고 눈물을 줄줄 흘린다. 박민호 부장, 방미란도 차례차례 의식을 되찾아 동면실 안은 때아닌 면회실 풍경을 야단스럽게 자아낸다.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어 서로가 발버둥을 치며 맞는 즐거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여보게, 신 군 그만 일어나지."
박민호 부장이 한마디하자 방바닥에서 껴안고 뒹굴던 방미란과 신온철이 멋쩍게 일어섰다 이만석 박사는 동면실을 뛰어 나와 사령실로 가서 독수리 호를 불러냈다. 독수리 호에서도 아무 탈없이 소생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여섯 달이라는 시간적인 차이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고 동면을 끝낸 그들은 한결같이 얘기했다. 무궁화 호도 독수리 호도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는 이 순간, 느닷없이 우주선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기 시작하지 않는가? 이만석 박사의 낯빛이 순식간에 새파래지면서 눈길은 즐비하게 박힌 계기판의 바늘을 쫓았다. 마치 지진을 만난 것처럼 우주선은 떨면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주선 내의 경보 장치가 저절로 울리며 제각기 제자리로 뛰어갔다. 잠옷을 우주복으로 갈아입을 겨를조차 없었다.
"사령관님, 함정이 예정 코스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무슨 강력한 기운에 끌려가고 있는 듯 합니다."
박민호는 재빨리 보고했다.
"엔진의 출력은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이상호도 스위치를 휘어잡으면서 보고했다. 이만석은 순간, 자력선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력선의 강도를 표시하는 계기의 바늘이 움직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늘은 20과 30 사이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뭘까? 자력선이 아니라면…."
이만석 박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 곡률 공간의 계곡에 떨어진 것이나 아닐까요?"
문창수가 스스로의 의문을 던졌다.
"그래? 이 군! 출력을 반으로 내려보게."
이만석은 지체없이 명령을 했다. 무궁화 호의 속력은 삽시간에 반으로 줄었다. 그런데도 함정은 그 이상의 속도로 비스듬한 코스를 날으는 것이 아닌가!
"문 군의 상상이 옳을는지도 모르겠어. 우주 함대는 지금 공간의 골짜기에 빠져서 급류에 휩쓸린 보트처럼 인력과 인력의 계류에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군. 박민호 부장의 의견은?"
 
이만석 사령관은 옆자리에 앉아서 한쪽 귀에다 리시버를 대고 있는 박민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선체가 마구 흔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죄며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문창수가 입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도 개의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이유라…."
이만석 박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주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박사는 잠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다. 사령실의 스피커에서 숨가쁜 소리가 들려왔다.
"제 1 함정! 이거 어찌된 일이요. 독수리 호의 기능이 마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신불수처럼 표류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비친 홍성기 대장은 두 눈을 질겁을 해서 크게 모들 뜨고 있었다.
"엔진을 끄고 표류하는 대로 몸을 맡기시오. 공간의 계곡에 떨어져 떠내려가고 있는 것 같소. 표류 속도가 약해질 때 탈출하기로 합시다."
이만석 박사는 우선 이렇게 지시를 내리고 선머리를 싸맨 채 미리 속에서 헝클어진 생각들을 톱니바퀴처럼 정리해 나갔다.
 
또 하나의 함정
 
"그거다! 인력권의 소용돌이와 소용돌이가 맞물린 곳에 있는 것에 틀림없다."
이만석 박사는 무릎을 딱 치고 일어서더니 창 밖으로 제 2 함정의 표류 형태를 정신없이 내다보았다. 그는 속도와는 이질적인 인력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인슈타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의 마디를 비로소 알았다. 우주의 가없는 공간은 넓은 바다와 같은 것이며 거기에 떠 있는 성운들은 한낱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 화산구와 다름없는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공간과 바다의 다른 점은 바다에 해류가 흐르고 있는 방향성과는 달리 공간에는 인력의 소용돌이가 도처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디와 마디 사이를 연결하는 인력의 손길 거기에도 불확정하지만 우주선이 통하는 꾸불꾸불한 길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급한 대로 이러한 가설을 인정하면서 빨리 우주 함대가 소용돌이의 가장자리까지 밀려나오기를 기다렸다.
"괜찮을까요? 사령관님."
독수리 호의 황영숙이 귀여운 얼굴을 스크린에 내밀면서 걱정스럽게 묻는다.
"걱정도 팔자군. 대한의 남아들이 이따위 사건으로 넋을 잃을 것 같은가?"
얼른 말을 가로채 신온철이 대답한다.
"헛허허허."
박민호가 호탕스럽게 웃어댔다. 모두 신경이 가냘픈 생각이 들어서다. 5일 동안을 엔진을 끄고 표류했을까. 한약을 달여서 먹고 있는 아침나절에 선체의 진동이 갑자기 멎었다.
"휴, 살았다!"
이상호는 소리 지르면서 기관실로 뛰어가서 엔진을 걸었다. 보조 엔진이 그 동안에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로켓의 발동은 금방 걸렸다.
"독수리 호! 알파별로 진로를 잡고 빨리 탈출하라!"
이만석 박사는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독수리 호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케이."
서윤철 부장의 대답이 기운차게 스피커를 울린다. 무궁화 호는 잽싸게 공간의 계곡을 빠져 나와 힘차게 불을 내뿜으며 항로를 예정된 제 코스에 접근시켜 갔다.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간신히 숨을 돌리고 성산포 기지에서 가져온 한국민요가 담긴 테이프 레코더를 틀었다. 국악원생들이 내뽑는 양산도의 멜로디는 함 내에 용기와 자신을 가득 채워 주는 듯 구성졌다.
"독수리 호! 어서 가시 거리로 오시오."
박민호 부장이 저편의 서윤철 부장을 불렀다. 한참만에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무궁화 호! 우리는 또 다른 함정에 빠진 듯 합니다. 아무리 발동을 걸어도 엔진이 움직이지 않소."
"뭐라고? 움직이지 않다니."
박민호는 성급하게 물었으나 이내 대답이 올 리가 없었다. 서윤철의 일방적인 호소만이 스피커에서 흘러온다.
"윤상운 군이 진땀을 빼며 점검했으나 허사였오. 그런데도 우주선은 X4호 별 쪽으로 강력히 끌려가기만 합니다. 구출 작업에 착수해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시선을 이만석 박사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할 것인지 말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가야지. 별 수 있나. 공동 운명체가 아닌가?"
사령관의 말이 떨어지자 로켓의 방향을 독수리 호 쪽으로 선회시켰다. 독수리 호까지의 거리는 전파 측정으로 22억 km쯤 떨어져 있었다. 광속으로도 두 시간은 걸리는 먼 거리에서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숨소리 마저 죽이고 로켓을 전속력으로 몰았다. 저마다 머리 속에서 독수리 호는 공간의 갈림길에서 저편으로 이끌려 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안 보이나?"
이만석 박사는 천체 망원경의 반사경을 들여다 보고 있는 방미란 양에게 물었다.
"아직도… 조금만 더 기다리셔요."
그녀는 눈동자를 더욱 조리며 두 손으로 마치 잠망경을 조정하는 것처럼 방향을 찾고 있었다.
"앗. 저기에 독수리 호가!"
방미란이 한참 후에 소리치자 이만석 박사는 천체 망원경을 넘겨받아 들여다보았다.
독수리 호는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둥둥 떠내려가고 있지 않는가? 이만석 박사가 반사경을 뚫어지게 지켜보는 한편으로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을 불렀다.
"홍 대장, 뭣하고 있소. 어서 대답을 해 줘야지."
이만석 박사는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건만 저 편은 쥐 죽은 듯 아무 대답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불러도 허사였다. 반사경에 비친 독수리 호는 마치 유령선처럼 주검을 연상시킬 뿐이었다. 이만석 박사가 대원들을 돌아다보려고 고개를 올리는 순간 로켓이 뒤집어지듯 크게 출렁거리는 바람에 그는 그만 이마를 망원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박사의 미간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박사님!"
놀램 속에서 방미란이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기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딴 대원들도 눈이 감기면서 픽픽 쓰러져 갔다. 제 2 함정도 필경 독수리 호와 같은 함정에 빠진 듯 했다.
 
죽음의 표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의식이 끊긴지 한 달이 지났을까, 또는 몇 해가 지났을까, 전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에서 맨 먼저 깨어난 사람은 제 2 함정 독수리 호의 황영숙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 속에서 큰 성문이 우뚝 서 있는 양지 바른 언덕을 두 동생들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 아마도 일요일이었는지 등산복 차림으로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성문을 지나치려고 하는데도 웬일인지 문이 꼭 닫힌 채 열리지가 않았다. 세 사람은 의아한 눈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약속이나 한 듯이 온몸의 기운을 모아서 어깨로 끙끙 성문을 떠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를 쓰고 떠밀고 있자니 별안간 두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세 자매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 휘청거렸다. 이 순간에 황영숙은 답답했던 꿈속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 위에서의 한가로운 장소가 아닌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원정대원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지 않는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녀는 독수리 호가 공간 계곡에 빠져서 로켓의 기능을 잃은 채 표류했던 생각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덜렁 내려앉는 가슴을 달래며 그녀는 침착해야 된다는 자의식 속에서 저도 모르게 창이 있는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한 눈에 한없이 깔린 모래사장이 보였다. 사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둥근 창에 바짝 대어 자세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로켓이 쓰러진 채 착륙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멀리 모래 언덕을 넘어 언뜻 보기에 20리쯤 떨어진 곳에 무궁화 호가 내동댕이 처진 채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황영숙은 마음을 가다듬어 고개를 실내로 돌려 홍성기 대장을 찾았다. 조정석에서 허리를 벨트로 묶인 채 머리를 바닥에 곤두박혀 있는 대장 홍성기,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가서 그의 몸을 일으키며,
"홍 대장. 정신을 차리셔요. 로켓이 불시착했어요."
외치다시피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홍성기 대장은 창호지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아무리 흔들어도 말이 없었다.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든 황영숙의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롭고 슬픈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 닥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누면서 이번에는 부장 서윤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세우며 마구 흔들었다. 그래도 까무러친 채 대답 없는 대원들! 황영숙의 두 눈에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못 이겨 눈물이 핑 돌았다. 우주의 외딴 별에서 영영 혼자만 의식을 되찾은 것일까. 그녀는 정신이 헝클어지기 시작하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어서 정신을 차려요. 여기가 어딘데 모두 이 모양일까."
황영숙은 발버둥을 쳐가며 바닥에 쓰러진 김동수, 이광호, 윤상운을 차례 차례로 흔들어 보았다. 그들도 산송장처럼 측 늘어진 채 아무 대답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황한 황영숙은 살같이 실내의 텔레비전 스위치를 틀고 무궁화 호를 불렀다.
"무궁화 호! 안 들려요? 어서 대답해요."
그래도 대답은 없었다. 통신기마저 고장이 난 것일까. 황영숙은 마치 죽음의 세계에서 혼자 살아 남은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홍성기 대장의 얼굴에 안경을 껴주면서 두 어깨를 붙들고 갖은 힘을 다해서 흔들었다. 그 때 뜻밖에도 스피커에서
"언니!"
하며 부르는 방미란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오,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스쳐 갔다.
"미란이니? 어떻게 됐어?"
자세히 묻는 황영숙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보자마자 방미란은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모두 이 모양이에요. 죽은 듯이 대답이 없어요. 이만석 사령관도 이상호도…."
콧물을 홀짝거리며 대답하는 방미란을 보고 황영숙은 나무랐다.
"울고만 있을 때니. 어서 물을 입에 부어주거나 알약을 먹여 봐요. 그 약 있지 않아. 동면에서 깨어날 때 먹는 약 말이야."
방미란에게 일러주면서 황영숙은 왜 진작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나 하는 뉘우침을 느꼈다. 그녀는 별실로 뛰어가서 약장에서 알약을 한 주먹 꺼내들고 홍성기 대장부터 차례로 입 속에다 한 알씩 쑤셔 넣었다. 다람쥐처럼 잽싸게 움직이며 대원들의 자세를 똑바로 고쳐 주기도 했다. 1분, 2분, 3분, …이 지나자 김동수가 맨 먼저 의식을 되찾았다.
"휴… 깨어났구나. 여긴 어디야?"
멀쩡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자 황영숙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로 의식을 회복해 갔다. 그러나, 그들은 황영숙이 훌쩍거리는 까닭을 누구도 알 리가 없다. 이처럼 난경에 빠졌을 때 어째서 여자가 먼저 의식을 되찾는 법일까?
"그건 여자의 생명력이 강한 탓이야."
훨씬 뒤에 김동수는 멋모르고 농담을 섞어가며 지껄였다.
 
날개 돋친 우주인
 
은하계 원정대원들은 낯모를 별에 불시착한 것이었다.
무궁화 호에서도 방미란이 재빠르게 시중을 든 덕분에 차례차례 의식을 되찾고 독수리 호와 서로 연락하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이만석 박사는 천문학 전문가인 문창수에게 별의 위치를 측정시켰다.
"독수리 호의 이광호 군도 함께 거들어 주게."
이만석 박사는 수학을 전공한 이광호를 스크린에 불러서 일렀다. 이만석은 총 지휘관인 관계로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의 위치를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로켓이 쓰러져 있어 천체관측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이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고 이만석 박사는 부장 박민호와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과 의논한 끝에 로켓을 곧추세우기로 정했다.
"제 1 함정은 이상호, 제 2 함정은 윤상운을 빼놓고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우주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서 작업을 돕도록."
이만석 박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사마귀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로켓의 비상구로부터 밖으로 나왔다. 굵직한 왕모래가 한없이 지평선 너머로 깔려 있는 적막한 사막이었다. 무궁화 호는 조금 높다란 언덕에 떨어졌기 때문에 멀리 독수리 호의 대원들이 깨알처럼 움직이는 모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상호는 기체 안에 자리잡고 스위치를 넣기 시작했다. 우주선은 이러한 사고를 미리 계산에 넣어 설계된 것이다. 전원이 들어감에 따라 우주선의 선실과 몸통에서 스프링 식의 팔 다리가 뻗쳐 마치 기중기로 기체를 끌려 올리다시피 천천히 고개를 들어갔다. 사방에서 스프링의 받침 살이 뻗어 지렛대처럼 몸을 일으켜서 두어 시간 후에는 완전히 자세를 고쳐 사다리까지 내려주게 되었다. 흔히 우주기지에서 보는 발사 가능한 자세 그대로 엔진을 꼬리에 두고 머리는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넓은 사막 위에 멀찍이 두 군데서 보였다. 무궁 호와 독수리 호는 이제 언제든지 발진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대원들은 정상적인 위치로 되돌아 간 우주선 내로 올라와서 비로소 숨을 돌렸다. 식사 반이 방사선 처리를 한 싱싱한 사과며 귤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문창수는 이내 천체 관측을 마치고 그들이 떨어진 별이 X4호 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자철 별이 아닌가. 엔진을 걸어 보게"
이만석 박사는 명령을 내렸으나 기관실의 이상호는 얼마 후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비통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 역시 걸리지 않는단 말이지. 시간을 두고 궁리해 볼 수밖에. 알았어요."
이만석 박사도 목소리를 낮추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할 일없이 그들은 식당에 차린 과일을 저마다 씹고 있었다. 독수리 호의 그들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스피커로부터 김동수의 테너 소리가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리…'하며 노랫가락을 흘리기 시작하자, 대운들의 죄였던 마음은 이내 풀어져 갔다.
"일리가 있는 소리야. 정말로 짜증을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역사에 밝은 신온철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반쯤 남아 있던 사과를 한꺼번에 입에 쑤셔 넣고 어석어석 씹었다. 두 볼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방미란은 허리를 비뚤며 킬킬거리며 웃는 꼴이 더 우스워 대원들도 한바탕 웃어댔다. 이만석 박사는 쓴웃음을 씹으며 그들의 천성이 이처럼 낙천적인 사실을 마음 든든하게 여겼다. 이 때였다. 우연히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린 부장 박민호는 멀리 지평선 위의 하늘에 먹구름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날아오는 그림자를 발견하자 흠칫 놀랐다. 순간 숨을 죽이며 창 옆으로 다가서서 뚫어지게 지켜봤다.
"뭐가 일어났어?"
덩달아 놀랜 대원들이 제각기 이마를 창에다 대고 내다보았다. 그들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독수리 호! 제 1 함정의 왼편 지평선을 살펴보라. 이상한 물체가 내습하고 있다!"
이만석 박사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켜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한 사람씩 교대로 완전 무장을 해야 해. 어서. 시간이 없다!"
이만석은 지체없이 명령했다. 졸지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는 애써 가라앉히며 대원들을 독촉했다. 검은 점은 점점 커지며 가까이 접근해 왔다. 하늘을 날아오는 그들의 후둑후둑하는 날개 소리가 가까이 들려 올 무렵에는 몸집의 크기가 독수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떼지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새 사람들이 아닌가! 날개를 가진 우주인들이다."
더할 수 없는 긴장이 삽시간에 실내를 휩쓸었다. 수백 마리의 우주인들이 손에 뾰족한 창을 들고 날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IQ는 미지수
 
우주선에 다다른 우주인들은 두 갈래로 갈라져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를 각각 포위했다. 무궁화 호를 둘러싼 그들은 대장처럼 보이는 대 여섯이 한 손에 창을 들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본 그들의 모습은 첫째, 키가 컸다. 모두 2m가 넘는 키에 어깨에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얼굴은 주둥이가 매의 부리처럼 튀어나오고 몸집에 비하여 얼굴이 유난히 작은 편이었다. 두 눈도 제대로 있지만 어딘가 조류의 그것과 닳은 데가 뚜렷이 엿보였다. 표정도 마치 브론즈로 만든 동상의 얼굴처럼 청동 색과 딱딱한 차가운 느낌을 주고 팔 다리는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나 다리가 팔에 비하여 짧은 모양은 마치 남극의 펭귄 새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펭귄처럼 약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마디마다 근육이 팽팽하게 불거져 튼튼한 전사임을 짐작케 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동안 나머지 우주인들은 날개를 등에 접은 채 우주선의 둘레를 휘돌고 있었다. 언듯 보면 옛날 남미나 아프리카에 있었던 식인종에게 포위 당한 착각을 일으킬만했다.
첫 인상이 차가운 매부리 우주인들은 우주선 밑까지 접근했으나 사다리를 거둬버린 만큼 밟고 올라올 길이 없었다. 새사람은 서로 수군거리더니 일제히 날개를 펼쳐 로켓의 창구가 있는데까지 날아 올라와서 배 안을 기웃거렸다.
이만석 박사는 결코 질겁을 해서 숨어 있지는 않았다. 둥근 창을 마주 보는 의자에 태연히 앉아서 우주인들의 관찰에 온 몸을 내맡겼다. 그는 적어도 그러한 편이 적의가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편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원들도 평소대로 기계를 수리하거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유사시에 탈출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물건은 챙겨 두어야만 했다.
우주인들은 번갈아 가면서 로켓의 내부를 기웃거리더니 이내 모습이 안 보인다. 그들은 로켓의 뾰족한 노스콘에 매달리며 무엇인가 의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한 놈이 되돌아와서 창으로 출입문을 쿡쿡 찔러 보곤 되돌아간다. 이만석 박사는 한 눈도 깜박하지 않고 오직 그들의 거동을 살필 뿐이다. 한 놈이 또 되돌아오더니 이번에는 빈손으로 유리창 너머에서 팔딱거리면서 나오라는 듯이 손짓을 한다. 그러면서 굳은 얼굴을 풀어가며 합장을 해 보인다. 이만석 박사는 아마도 적의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언제까지 이럴 게 아니라 내가 나가서 담판을 지어 보는 게 어떨까?"
이 박사가 뒤를 돌아보며 상의하자 부장 박민호는 정색을 하며 반대했다.
"이럴 때는 부장이 나서는 법입니다. 내가 나가서 만나보겠어요."
그러면서 스피커로 독수리 호의 부장 서윤철을 불러내어 그쪽 상황을 캐물었다. 상황은 무궁화 호와 비슷하게 호기심과 공포심이 뒤섞인 착잡한 분위기라는 대답이다.
"만일 납치해 가는 경우는 로켓에서 기관총 소사를 하기로 하고 우선 놈들의 문명이 어느 정도인가 탐지해 봅시다."
부장 박민호는 빈손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이만석 박사가 앞을 막 질렀다. 그리고선 스피커에 대고,
"독수리 호! 우리가 먼저 시험해 볼 테니 아무 일이 없거들랑 그 쪽도 나가 봐요. 지금은 조금 참으시오."
하며 일러 주었다.
박민호는 그 뒤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고 출입문을 열고 사다리를 내리고선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려딛으며 땅으로 내려갔다. 우주인들도 겁이 나서인지 그를 목격하자 단번에 달려들지 않고 멀찍이 거동을 살피기만 한다.
사람은 비록 죽을 고비가 닥치더라도 마음을 굳게 먹으면 자기도 모르게 침착해지는 법이다. 박민호는 몸을 사리면서 땅 위에 홀로 서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보고 다시 로켓의 둥근 창을 올려다보았다. 조그마한 얼굴들이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든든해졌다. 그러자 날개를 거둔 우주인 한 사람이 모래밭을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박민호 앞으로 와서 두 손을 합장해 보인다. 필경 적의가 없다는 뜻일 게다. 박민호도 말없이 합장해 보였다. 한 사람, 두 사람씩 대장급 만이 땅에 내려선 채 합장을 하며 모여들었다.
"부리마라! 부리마라!"
하며 맨 처음의 인물이 외쳤다. 짐작컨대 인사가 아니면 자기 소개일는지도 모른다. 박민호도 호응해서,
"박민호! 박민호!"
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할 리가 없다. 그들은 대뜸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날개가 있는 우주인과 날개가 없는 우주인이 싸우고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선 다시 날개가 있는 우주인과 둥그런 우주복을 입은 지구인의 그림을 그려 넣고 서로 합장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박민호는 그 중의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켜 자기를 따라서 우주선으로 올라가자고 손짓으로 말했다. 그들의 IQ도 꽤 높은 모양이었다. 서로 한 두 마디 상의하더니 세 사람만이 박민호의 뒤를 따라 사다리를 밟고 올라왔다. 우주선에 들어선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박민호가 가리키는 의자에 순순히 앉았다. 나머지 두어 놈이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민호는 종이와 볼펜을 꺼내어 여기가 어디며 인구는 얼마나 있고 아까 얘기한 싸움은 무엇을 뜻하느냐고 그림을 섞어가며 물었다.
그들 중 부리마라라고 외쳤던 자가 나서서 입으로 발음을 해가면서 글씨와 그림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글씨의 투로 봐서 그들의 문자가 퍽 단순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매부리 족은 아마도 지금 이 별의 딴 종족과 전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홍색 머리칼을 가진 놈이 무엇인가 열심히 말했다. 아마도 자기네 편에 들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듯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분홍색 머리칼은 여자였고 녹색 머리칼은 남자였다.
"어쨌든 X4호 별을 탐험하려면 언제까지 로켓 속에서 살 수 없는 노릇이니 이놈들을 따라가서 본부가 있는 곳까지 가 보는 게 어떨까?"
이만석 박사는 상황을 종합한 끝에 서슴없이 말했다. 무슨 눈치를 채었는지 세 놈의 우주인은 꾸르르 꾸르르하며 기뻐하는 시늉을 한다. 이만석 박사는 여기서 일어난 상황을 대충 독수리 호에 알려 주었다. 그리고서는 이상호, 윤상운, 두 사람의 로켓 기관사만을 당분간 남겨 두고 나머지 열 사람이 부리마라의 뒤를 따르기로 한다.
"저 식물자력선 발사기를 저마다 휴대하도록 해야지."
이만석 박사는 잊지 않고 일러주었다.
 
원목빌딩
 
독수리 호에 연락해서 채비를 차린 원정대원들은 저마다 1인용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우렁찬 폭음을 뿌리면서 회전하는 것을 지켜보던 매부리 우주인들의 표정은 적이 당황한 듯 했다.
이만석 박사는 발 밑에 한없이 깔린 사막 위를 날면서 부리마라 족의 문명이 인간의 그것보다 수준이 낮지나 않을까 하고 상상하고 있었다. 두루 살펴보니 저마다 손에 창을 움켜쥔 우주인들이 마치 메뚜기 떼처럼 지평선의 저편 하늘을 보고 날아갔다. 그들은 그러나 날개를 퍼드덕거리지 않고 솔개처럼 늘인 채 기류의 통로에나 몸을 맡긴 듯 여유 있게 날아가고 있었다. 몸집에 비하여 어울리지 않으리 만큼 작은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둥실 떠가는 1인용 헬리콥터의 분대를 호위나 하듯이 에워싼 채 속도를 맞추어 나는 눈치가 엿보였다. 기필코 놈들의 문명이 대단치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선 지 이만석 박사는 장차 펼쳐질 운명에 일종의 호기심 마저 느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는 참이었다.
서로 말을 건네지는 않고 있지만, 딴 원정대원들의 생각도 비슷하리라. 200마일이 넘는 속력을 내가며 세 시간쯤 날았을 무렵, 저 멀리 덩그렇게 깔려 있는 고동색 수풀이 눈에 들어왔다. 산이라고는 아직도 눈에 띄지 않으니 그것은 한낱 사막의 오아시스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수풀이라면 풀빛이나 파란색에 익은 지구인의 눈에는 고동색 나무들이 서름한 인상을 안겨준다. 아마도 잎사귀가 없는 탓이리라.
그들은 어느새 밀림 위를 지나고 있었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무들의 크기는 거목도 이만저만한 거목이 아니었다. 지구의 빌딩의 몸통에 못지 않게 굵은 줄기에서 어마어마한 나뭇가지를 가진 이 식물은 그야말로 매머드 식물과 다름이 없었다. 눈어림으로 가지도 끝까지의 높이가 50m는 넘어 보였다. 거기서부터 사막은 가를 두르고 밀림이 펼쳐질 뿐이더니 우주인의 한 지휘관이 날개를 서너 번 퍼드덕거리며 쑥 대열을 앞질러 열댓 놈을 모아 놓고 무엇인지 야단스럽게 일러준다. 그러자 명령을 받은 놈들은 속력을 올리며 쏜살같이 앞질러 어렴풋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선발대이리라.
이만석 박사는 줄곧 속셈을 하고 있었다. 우주인들의 얼굴이며 몸통이 규소처럼 딴딴한 껍질로 덮여 있는 듯 한데 과연 총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또 보배처럼 저마다 몸에 지니고 있는 식물 자력선 총으로 비상시에는 위험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언젠가는 탈출하기 위해서는 미리 생각을 정리해 놓아야만 했다. 한참만에 우주인들은 목적지에 가까이 왔는지 갑자기 속력을 늦추었다. 그리고선 대장의 꽥꽥거리는 명령으로 사병들은 앞질러 언덕을 넘어간다. 이만석 박사는 고동색 수풀이 끊어진 언덕 너머에 고동빛의 이색적인 나무들이 수없이 알몸으로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분홍색 머리의 부리마라가 헬리콥터로 다가와서 이 박사에게 손짓을 한다. 아래쪽을 가리키며 소리지르는 꼴이 착륙해야 한다는 뜻인가 보았다. 이 박사는 알았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들어 대원들에게 착륙 준비를 알렸다.
"대장님, 이런 야만인들도 은하계에 살고 있는 모양이죠?"
마이크로폰을 통해서 역사학을 전공한 신온철이 비웃는 말투로 속삭인다.
"잠자코 있어야지 지금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나."
이만석 박사는 나무랐다. 일행은 이윽고 풀이 얕으막하게 자라 있는 넓은 광장에 내렸다. 이만석 박사는 헬리콥터에서 내리자 재빨리 원정대원을 불러 독수리 호의 부장 서윤철과 무궁화 호의 문창수를 헬리콥터 감시원으로 임명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서성거리는 우주인들. 여전히 대표가 나와서 손짓으로 저쪽 수풀을 가리키며 걸어가라는 시늉을 한다. 원정대원들은 순순히 응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낯선 데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투덜거리는 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원정대원들도 묵묵히 줄지어 갈 따름이다.
길가에 서 있는 지름이 20m또는 50m나 되는 훤칠한 통나무가 바로 우주인의 집으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의 밑동에 출입구가 둥글게 파여 있고 층계마다 수없이 많은 구멍이 보인다. 멀리서 보이는 원목 빌딩의 속은 우중충하며 휑뎅그렁해 보였다. 우주인들은 새 종류로부터 진화한 까닭에 아직도 나무에 깃들여 살고 있는 것일까. 원정대원들은 그러한 광경을 훔쳐보면서 언뜻 기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그렇더라도 그 규모가 지구보다도 훨씬 거창한 것에 한편으론 마음이 섬뜩해졌다.
 
우주인의 사연
 
부리마라 족의 임금이 기다리고 있는 원목 빌딩의 홀은 과연 넓었다. 깊숙한 곳에 동그마니 마련된 단위에는 용상이 놓여 있고 옆에는 왕비로 보이는 분홍색 머리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왕과 왕비는 부드럽고 함초름한 털옷을 무릎까지 걸친 찬란한 예복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단을 둘러싸고 곱게 단장을 한 우주인들이 50명 가량 앉아서 이만석 박사 일행의 입장을 숨소리마저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도 부장 박민호가 앞장을 선 채로 줄줄이 원정대원들은 걸어서 용상 앞에 한 줄로 늘어섰다. 부리마라라고 자칭한 우주인이 임금 앞에서 큰절을 하고 나더니 설명을 시작한다. 아마도 사막에서 발견한 경위를 보고하는 듯. 임금이 덤덤히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보고가 끝나자 일어서서 이만석 박사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합장을 한다.
이 박사도 그것이 적의가 없다는 뜻인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라 따라서 자기도 합장을 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속담 그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도 영리한 부리마라가 중간에서 열심히 설명을 한다. 저절로 필담이 시작되어 이만석 박사는 태양계를 그리고 은하계를 그려놓고 지구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납득시켰다.
"시와루키. 시와루키."
임금은 너그러운 낯빛을 지우고 알았다는 듯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합장을 해 보인다. 이만석 박사도 그저 합장을 해 보일 도리밖에 없었다. 접견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비록 적의는 없는 듯 하지만 원정대원으로서는 한 발짝 한 발짝이 긴장에 잠길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들이 부리마라의 안내를 받아 궁전 밖으로 나왔을 적에는 저마다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우주인들은 길을 말끔히 닦아놓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동차와 같은 기계 문명도 없는 원시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원정대원들은 한길에서 마주치는 우주인의 어른들이 별로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반면에 천사와 같은 귀여운 날개를 가진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뒤따르는 바람에 쑥스럽기도 하고 반가운 느낌이 감겨 왔다.
"저렇다니까, 어딜 가거나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거야."
황영숙은 뒤돌아보며 혼잣말로 종알거리며 감상을 새로이 했다. 본질적으로는 지구의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곡마단 풍경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이 숙소로 안내를 받은 곳은 역시 원목 빌딩의 넓은 홀이었다.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털로 만든 이부자리가 그 위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벽마다에 사람 모양의 생물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전쟁의 장면이 새겨져 있는 것은 웬일일까. 세찬 광선을 받고 허우적거리는 벽화의 장면 장면이 모두 섬뜩했다.
"분명히 이 벽화 속에 우주인들의 전통과 역사가 숨어 있을 게다. 어디 풀어나 볼까."
상고머리의 신온철이 우주복 안에서 싱긋 웃으며 일일이 들여다보며 살피기 시작했다. 부리마라는 그러한 움직임에 오직 슬픈 표정을 지워 보일 따름이었다.
"태양 숭배처럼 이곳의 우주인들도 천지창조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닐까? 여러모로 원시적인 냄새가 풍기는데…"
김동수가 적이 들뜬 소리로 고개를 갸우뚱해 보인다. 그러나 온갖 짐작이 맞아 들지 않았다. 원정대원들이 부리마라와의 필담으로 우주인들이 가진 법의 논리가 오달진 말과 계산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 뒤에 알았기 때문이다.
1주일 이상을 머무르고 있는 동안 원정대원들은 쉬이 그들의 말을 터득할 수 있었다. 3진법의 논리라면 이미 원정에 앞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어 훨씬 수월했다. 그리하여 의사 소통이 자유롭게 되자 매부리 우주인 사회의 수수께끼는 술술 풀려나갔다.
그들의 선조는 태초에 고도로 발달한 기계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X4호 별에는 전부터 평원 족과 산악 족이 살고 있어 부리마라는 평원 족이다. 그들은 산악족보다 훨씬 발달된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이 이를테면 지금도 먹는다, 안 먹는다는 두 가지 표현밖엔 없는 까닭도 덜먹는다, 많이 먹는다 따위의 빈부의 차, 건강의 차이가 없었던 찬란한 시대의 유산이다. 그러면 태평세월이 수 만년 동안 흘러갔는데 X4호 별에서 가장 귀중한 파라노이드 박테리아의 독점 문제로 평원 족과 산악 족이 핵전쟁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파라노이드 박테리아는 자석 철을 침식해서 자력을 얻어내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문명이 뒤진 산악 족이 이를 독점하려고 탐을 낸 까닭에 벌어진 핵전쟁으로 인구는 거의 전멸되다 시피하고 기계 문명은 망해 버렸다. 그 중에서도 산악 족의 일부는 깊은 동굴에서 천 년 이상이나 생명을 유지해 왔고 부리마라 족은 일부가 우주선을 타고 X4호 별의 위성 아미불로 피해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러한 비극을 가져오는 문명을 싫어하게 됐어요, 원시 상태가 차라리 편리하니까요. 맨 처음 설명한대로 산악 족이 또 다시 기계 문명을 건설하는 것을 반대하고 지금 전쟁 중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별과 상관이 없으니까 우리를 도와 주셔요."
부리마라는 목메인 소리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명분이 당당한 부탁을 받고 꽁무니를 빼는 것은 대장부의 정도가 못 된다. 이만석 박사는 부리마라 족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뒷걸음질 할 수도 없는 것이 원정대의 사명이 우주별의 평화적 답사에 있는 만큼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우겨본들 X4호 별에서 탈출하자니 별의 자력 때문에 꼼짝달싹 못하는 형편이다. 공연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우주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 보는 편이 차라리 현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부리마라가 알려 준 총동원의 날을 며칠 남겨 두고 원정대원들은 평원 족의 마을을 짝지어 돌아다니면서 신기한 나무의 씨앗을 모으곤 한다. 그 중에는 차돌처럼 단단한 종자도 있었다. 생물학을 전공한 황영숙은 동그랗지가 않고 팔모난 보석 같은 씨앗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이것만해도 우주별까지 따라온 보람이 생긴다고 속으로 만족했다.
핵전쟁의 탓 때문인지 야생 동물이란 통 볼 수가 없고 아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산이 있는 깊숙한 곳에서만 겨우 산토끼 종류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진군의 날이 왔다. 원시인 같으면 제법 북채 꽹과리를 치며 야단법석을 떨어야할 판인데도 우주인들은 궁전 앞 광장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서서 총사령관으로 보이는 애꾸 우주인의 훈시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이만석 박사를 비롯한 원정대원들도 마치 외인 부대처럼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애꾸의 훈시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의 선조가 이룩한 고도의 기계문명은 욕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삐오라 족(산악족)은 또 다시 문명을 재건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X4호 별의 또 하나의 비극이다. 우리는 오늘의 총공격에서 기어이 승리하리라."
우람한 소리로 외치는 애꾸의 연설은 대강 이런 줄거리였다. 이만석 박사의 지휘로 원정대원들은 처음에 그들이 내린 풀밭으로 돌아와서 헬리콥터의 엔진을 걸었다. 독수리 호와 무궁화 호에 남긴 두 사람을 빼놓은 10명은 훌쩍 허공으로 치솟아 방향을 정한 뒤에 수천 명의 우주인들이 날아가는 뒤를 따랐다.
"우리로선 생명을 바칠 필요는 없는 거야. 삐오라 족의 문명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뒤에 우리의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이만석 박사는 마이크로폰으로 가만히 일러 주었다. 저마다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속 100마일의 속도로 바람 칼을 날치처럼 꼿꼿이 펼치고 세차게 날아가는 불빛에 그래도 몸 안의 피가 뒤끓는다. 아무리 외인 부대라 할지라도 막 전쟁을 시작하려는 흥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박사님, 자칫 잘못하면 싸움에 말려들어 갈 것 같은 심정인데요."
박민호 부장이 익살을 부린다.
"그야 끝내 정당방위는 해야 될 게 아닌가. 상대방이 나를 죽이려는데 가만히 있는 바보가 있을까?"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이 모처럼 한 마디했다. 모두 가슴이 울렁거리는 증거였다. 얼마를 날았을까. 멀찍이 주뼛주뼛한 산들이 감청색을 띤다. 원정대원들은 이제 전쟁터에 가까이 온 것을 육감으로 알았다. 햇빛이라기보다 별빛에 창백하게 번쩍이는 우주인들의 창 끝이 자못 살벌한 긴장을 자아낸다.
"호리, 휘!"
외치는 소리가 별안간 앞쪽에서 일어나더니 우주인들은 예정하듯이 대대별, 중대별, 소대 별로 흩어져 진형을 짜면서 공격태세로 옮긴다. 이만석 박사가 쌍안경을 붙들고 아무리 산기슭에서 골짜기를 뒤져봐도 적의 모습은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공격 태세로 부라마족의 애꾸를 선두로 하는 군사들은 험한 산의 중턱을 포위하면서 내리 닿았다. 원정대원들은 한 분대처럼 뭉쳐서 움직였다. 부리마라가 속하고 있는 소대의 일원인 것이다. 그들은 기어올라가거나 몸을 감추지도 않고 당당하게 동굴을 찾아냈다. 바위산은 벌집처럼 동굴이 빙 둘러 파있는 모양인지 평원 족의 군사들은 한 개씩을 도맡아 동굴 앞에서 고함을 지르며 시위를 한다.
"삐오라, 삐라 부, 뿌 라라!"
삐오라 족 들이여, 나와서 싸워라, 그리고 싸워서 망하라는 뜻이다. 이만석 분대는 너럭바위를 찾아서 착륙한 뒤, 방미란과 김동수 두 경비원을 헬리콥터 옆에 남기고 부리마라 소대에 합류했다. 이만석 박사가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동굴 속에서 방사능을 피하여 2천 년이나 살았다니 상대방은 아마도 두더지가 다 됐겠다.'
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자 컴컴한 굴속이 별안간 밝아지더니 눈이 시도록 밝고도 밝은 빛 다발이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쏘아오지 않는가! 밖에서 멈칫거리던 평원 족은 순간 흠칫해서 몸을 사리더니 한결 고함 소리를 높인다. 눈부신 광선을 손으로 가리며 이만석 박사가 굴의 어귀에서 뚜렷이 목격한 물체는 뜻밖에도 로봇이었다. 이마 위에서 날카로운 광선을 내비치면서 한 놈, 두 놈씩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오는 로봇의 크기는 높이가 3m가 넘을까. 둥근 렌즈 눈을 둘 가진 로봇은 한 손에 쇠망치를 들고 앞을 한 바퀴 훑어보더니 곧장 이만석 박사가 서 있는 곳으로 굵직할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불을 내뿜는 로봇
 
로봇은 오른 손에 쥔 쇠망치를 번쩍 들어 내려치려고 겨눈다. 아무런 표정조차 없이 기계적으로 몸을 놀리는 폼이 오히려 무시무시하다고 할까. 징그러웠다. 이만석 박사는 순간 머리 끝이 쭈뼛해지며 등줄기를 치달리는 찬바람을 느꼈다. 그 쇠망치로 얻어맞는 날이면 박살이 날 것은 뻔하다. 재빠르게 그는 몸을 사리면서 손은 저도 모르는 결에 식물 자력선 발사기를 누르고 있었다. 기관총 모양의 발사기의 부리에서 내뻗치는 자력선은 소리 없이 로봇의 몸통을 파고 들어간다. 지금 자력선을 내뿜고 있는 시그널은 발사기의 계기반에 파르스름한 곡선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었다. 콩을 튀기는 듯 따다닥거리는 기관총의 요란한 소리에만 익숙한 사람이 청색 곡선의 율동을 지켜보는 일은 그다지 실감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효과는 이내 나타났다. 얼굴과 가슴 부근을 노리며 연방 쏘아대는 자력선을 이기지 못한 로봇은 졸지에 팔다리가 굳어지더니 맥없이 픽 쓰러져 간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나둥그러지자 부리마라 족의 전사들은 아연 함성을 올리며 사기를 돋구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가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판은 아니었다. 딴 동굴의 어귀에서는 로봇이 입에서 내뿜는 시뻘건 화염에 쪼인 부리마라 족들이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피신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광경이 퍼뜩 눈에 띄었다.
"호리 휘! (공격하라!)"
"삐오라, 뿌 라라! (삐오라 족이여, 싸워서 망하라!)"
연방 외치면서 로봇을 향하여 그들은 창을 던지고 돌멩이를 던지며 끈덕지게 싸우고 있었다.
"홍성기 대장, 몇몇 대원을 이끌고 전세가 불리한 쪽을 지원해 주게."
이만석 박사는 어느덧 흥분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오케이, 알았습니다."
"화염 방사기의 권내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게."
우당탕 퉁당 거리는 전투의 소란 속에서 이 박사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자력선 발사기의 위력으로 로봇은 한 놈씩 한 놈씩 정확하게 거꾸러져 가는데도 동굴 속에는 계속 로봇이 쇠망치를 들고 나타났다. 산악족의 전략인즉 부리마라 족과 넓은 싸움터에서 결전하기보다는 동굴에 접근하는 것만을 막아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른바 삐오라 족은 한 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다만 로봇만 내세워 싸우게 하고 있으니 그들의 문명은 상당한 수준인 듯했다. 싸움이 이럭저럭 한 시간 남짓 계속되는 동안 쌍방이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우주원정대의 자력선 발사기가 없었더라면 부리마라 족은 얼씬도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로봇의 성능은 그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침착하게 겨냥을 해 가면서 로봇의 가슴팍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태까지의 전과로 보아 로봇은 가슴 언저리가 가장 약한 듯했기 때문에, 아마도 거기에 심장처럼 중요한 전자 컨트롤 장치가 설비되어 있는 듯 했다. 여덟 군데의 동굴 어귀에서 벌어진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삐오라 족에 불리해져 갔다. 아직은 아무도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내보내는 로봇은 천만 뜻밖에도 원정대원들의 자력선 발사기에 맞아 어김없이 하나씩 하나씩 부서지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2백여 로봇이 거꾸러진 뒤부터 동굴에서는 새로운 로봇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뛰어 들어가서 흉악한 문명 재건자들을 끌어내라!"
부리마라의 사령관이 한 손을 번쩍 들어 호령을 했다. 1천여 명의 전사 중에서 반 이상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낸 평원족의 특공대는 기세를 올리며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뒤지지 않으려고 몸이 단 전사들의 두 눈에는 핏줄기가 일고 온몸에서는 살기가 풍긴다. 전공을 다투느라고 먼저 동굴 속에 뛰어든 병정들은 깊숙이 숨어있던 로봇의 화염에 말려 온몸을 비틀거리며 비명을 올릴 겨를조차 없이 숯덩이가 되어 숨졌다.
"로봇은 아직도 남아 있었군. 제발 앞장서서 놈들을 처치해 주셔요."
부리마라의 지휘관이 이만석 박사에게 청했다. 이만석 박사는 여덟 명의 대원을 한 사람씩 동굴에 배치하고 겨냥을 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부리마라 족들은 원정대원의 뒤를 따른다. 과연 삐오라 족이 굴의 출입구마다 배치해 놓은 로봇은 화염을 입에서 내뿜고 있었으나 자력선총을 당해 내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 갔다.
그러다가 마지막 로봇이 바위 뒤에 숨어서 느닷없이 내뿜는 화염에 닿아, 언어학을 전공한 서윤철 부장이 숨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라 소식을 전해들은 대원들의 분노는 머리 끝까지 솟아올라 재빨리 동굴 속의 광장으로 빠져 나온 박민호 부장이 뒤로부터 로봇을 들이쳐 단숨에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잇따라 헐레벌떡 쫓아온 황영숙은 숯덩이로 변한 서윤철의 주검 앞에 꿇어앉아 목을 놓고 울어댔다.
 
영웅끼리의 대결
 
굴 속의 광장은 천장에 붙은 조명 장치가 있어 침침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로봇이 쓰러지자 부리마라의 전사들은 다시 한 번 함성을 올리고선 광장 깊숙이 진격해 갔다. 이만석 박사는 황영숙, 신온철 두 사람에게 시체를 헬리콥터로 옮기도록 명령하고 부리마라 족을 뒤따랐다. 동굴은 들어갈수록 넓은 지하도시를 이루고 삐오라 족의 전사들은 수천 명이 한 군데에 포진하고 부리마라와 맞서고 있었다.
"너희들은 유일한 생명선이었던 로봇을 모조리 잃었다. 그것은 지구별에서 온 사람들의 자력선 총을 맞아 전자 장치가 말짱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항하겠느냐? 자력선 총은 너희들의 간을 단결에 꿰뚫고 말 것이다. 목숨이 아쉽거든 어서 항복하라!"
부리마라 사령관이 나서며 호령하였다. 그의 소리는 메아리 치며 쩌렁쩌렁 동굴 속을 울렸다.
과연 삐오라 족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두 어깨에는 날개가 퇴화해서 주먹만한 혹만이 남은 모습이 언뜻 눈에 띄었다. 옹기종기 몸을 움츠리고 있는 그들의 몸집도 부리마라에 못지 않게 큰 편이다. 몸의 특징은 평원족이나 산악족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서 대답을 해라! 1백을 세기까지 대답이 없으면 총 공격을 가해서 전멸시키겠다!"
부리마라 사령관의 기세는 등등하다. 이만석 박사는 뒤로 돌아서 그들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삐오라의 진지는 순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놈들은 지휘관 회의라도 소집한 모양이다. 무거운 침묵이 굴 속을 감돌고 있었다. 한참만에 회답이 떨어졌다.
"어쨌든 우리는 항복할 순 없다. 부리마라의 대표 전사와 삐오라의 대표 전사를 내세워 두 사람이 겨루어서 승부를 가르자."
"대장부로서 약자의 제안을 저버릴 수는 없는 법이니 무기를 버리고 한 놈만 나와서 부리마라의 영웅이 어떠한가 맛을 보아라!"
그러자 삐오라 쪽에서 한 놈이 광장의 한 복판으로 걸어나온다. 어깨의 바라진 모양이 억세게 생긴 놈이었다. 부리마라 쪽에서는 사령관이 손수 나섰다. 두 다리의 검실검실한 털이 마치 온 몸을 쇠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두 놈은 한 복판에서 맞서자 서로를 탐색하면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마치 곰과 곰이 상대를 노리는 것같았다. 양군은 숨소리 마저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움츠리던 부리마라가 별안간 날개를 확 펼치며 껑충 뛰어들어 삐오라의 가슴팍을 세차게 걷어찼다. 공격은 정확했다. 삐오라는 비실비실 나가떨어지려던 몸을 간신히 가누더니 두 번째 공격을 가하려는 부리마라의 날개를 와락 잡아챘다. 부리마라는 허우적거리며 상대방의 멱살을 잡아챘다. 두 놈은 뒹굴면서 엎치락뒤치락 상대방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피가 얼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살점이 벗겨져 나간다. 그래도 놈들은 씩씩거리며 물러설 줄을 모른다. 주먹이 번개같이 움직여 상대방을 후려갈기기를 계속했다.
20분이나 지났을까? 어느 쪽의 주먹인지는 몰라도 팍팍 두어 번 상대방의 얼굴을 갈기더니 선뜻 일어선 놈은 부리마라 쪽이었다. 부리마라의 전사들은 함성을 울렸다. 부리마라 사령관은 마치 공을 다루듯 사정없이 삐오라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발버둥치던 삐오라의 팔다리가 축 늘어지자 그는 영웅답게 손등으로 제 얼굴의 피를 문지르면서 한 발로 뻗어 버린 삐오라의 가슴을 내려딛고 외쳤다.
"삐오라의 야망은 이로써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X4호 별의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문명을 또 다시 재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이 주는 불편과 시련은 부리마라나 삐오라가 인공적으로 주는 멸망 보단 훨씬 견디어 내기 쉬운 것이다. 까닭에 우리는 삐오라의 항복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그 후, 문명을 다시는 재건하지 않겠다는 삐오라의 항복문서에 조인이 되고 동굴 속에 있는 과학 기계는 모두 파괴되었다. 이만석 박사는 삐오라 족의 문명이 파괴되기 직전에 일일이 사진을 찍어 놓았다. 박민호 부장은 귀중한 문헌을 일일이 뒤져 복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장차 지구의 문명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자료이기 때문이었다. 부리마라 족은 삐오라의 과학자 열댓 사람을 포로로 하고 개선하였다. 부리마라의 수도에 돌아온 원정대원은 먼저 서윤철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헬리콥터가 내린 광장을 내려다보는 높다란 언덕에 한국의 첫 희생자의 뼈를 묻었다.
"은하계의 유원한 별을 찾아온 지구 나그네의 피와 뼈가 여기에 묻혔으니 이 좁다란 묘지의 흙은 한국의 흙이나 다름이 없다. X4호 별에 흔적을 남기고 한 발 앞서 고향으로 돌아간 서윤철 부장의 영혼이여 고이 잠드소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으리. 군의 숭고한 정신을 길이 본받아 간직하리라."
이만석 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사를 읽고 있는 동안 여자대원 황영숙과 방미란은 얼굴을 손수건에 파묻고 하염없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원정대원들의 눈물은 동그마한 서윤철의 묘를 적시고 또 적시었다. 원정대원은 이미 생명의 위험을 각오한 사람들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서윤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리마라의 임금이 이번 전쟁의 공로를 아무리 치하해 본들 원정대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론적으로 X4호 별의 평화를 위해 서윤철은 훌륭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감정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허전한 마음을 과학을 탐구하는 정열로서 달랠 도리밖에 없었다. 이 박사는 삐오라의 과학자들과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했다. 부리마라 족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원정대원들이 그들과 접촉하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처럼 많은 수의 로봇을 어떻게 만들어 냈습니까? 동굴 속에는 이렇다할 만한 공장 시설도 없던데요?"
이만석 박사의 물음에 삐오라의 과학자는 고개를 저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 로봇은 우리의 세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파라노이드 박테리아를 독점하려고 일으킨 핵전쟁이 터지기 전에 우리의 선조가 만들어 놓은 로봇이 남아 있었을 따름이오. 그 후에도 동굴로 피해 온 나머지 후손들은 과학을 재건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몸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IQ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삐오라의 늙은 과학자는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문헌을 대대로 연구해서 옛날의 화려했던 문명을 되돌리려고 노력했으나, 우리는 원시적인 수법으로 구리를 녹이고 쇠를 뽑아 내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근 8백 년이나 걸렸습니다. 동력을 얻기 위해 발전소를 만들어야만 했는데, 사람의 손도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계곡을 막아낼 콘크리트 공사의 자재조차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동굴 속에 조명을 얻게 됐나요?"
함께 듣고 있던 문창수가 물었다. 그는 천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더욱 의문이 많았다.
"할 수 없이 모래를 녹여서 거울을 만들어 내서 항성의 광선을 이용한 항성 발전소를 만들어 동력을 얻게 되었어요. 그러나 온갖 발전에도 불구하고 4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변하는 X4호 별의 자력 때문에 그 때마다 어려운 일을 번번이 겪어야만 했습니다."
"4년마다에 자력 변화가 생긴다니 어떻게?"
이만석 박사는 귀가 번쩍 띄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첫 4년 동안은 자력이 강해져서 맥시멈 포인트에 달하고, 다음 4년 동안은 기준이 줄어들어 미니멈 포인트까지 떨어지는 주기 변화를 되풀이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 올해는 어느 쪽에 속하고 있는지?"
"내년이 바로 미니멈 포인트로 떨어지는 해에 해당됩니다."
"음 그래요?"
이만석 박사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귀는 삐오라의 설명을 건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X4호 별의 자력이 미니멈 포인트로 떨어졌을 때, 원정대원은 혹시 탈출할 수가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생각은 그 후부터 이만석 박사의 머리를 온통 사로잡은 숙제였다. 부리마라와 삐오라들이 눈치를 채면 난처한 사태가 벌어질는지도 모른다. 원정대원이 은밀히 알아본 결과 삐오라의 과학자 중에 그러한 날짜 계산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 노래를 곧 잘 부르는 김동수가 살살 꼬여서 자력 하강의 날이 이듬해 6월 15일임을 알아 냈다. 이만석 박사는 원정대원만의 회의를 열고 대책을 물었다.
"탈출하는 일을, 비밀리에 진행시켜야 옳으냐, 또는 부리마라에게 알려서 협조를 구하는 게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결정지어야 하겠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비밀리에 떠나버리는 편이 무난하지 않을까요?"
홍성기가 안경을 벗어 들고 말했다. 다른 대원들은 말문을 닫고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역시 부리마라의 임금에게 호소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돼요. 그자들도 전에는 훌륭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니, 흔히 생각하는 미개인은 아닐 겁니다. 비문명을 지켜나가려는 자가 어째서 우리의 출발을 방해할 리가 있겠어요. 남의 별에 왔으면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것이 법도가 아니겠어요?"
황영숙이 또랑또랑하게 주장한다. 그래도 한참 망설이던 대원들은 저마다 마음 속에서 저울질해 본 끝에 황영숙의 의견에 기울어졌다. 결정적인 까닭은 그들이 충분한 무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듬해 정월이 되자, 이만석 박사는 이 일을 부리마라 임금에 통고하고 기꺼이 허가를 얻어 부리마라의 수도를 떠나 사막의 복판에 있는 독수리 호와 무궁화 호로 돌아와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로켓을 지켜온 이상호와 윤상운은 기쁨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방미란과 황영숙을 얼싸안고 젊은이들은 춤추었다. 6월로 접어들자 모든 계기반이 과연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출발을 서두르자!"
생기를 되찾은 대원들의 낯을 보고 이만석 박사는 재촉했다. 6월 15일, 드디어 아침부터 내려세기가 시작되고 있는데, 사막의 지평선 너머에서 별안간 먹구름이 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부리마라 족이 떼지어 날아오는 모습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안절부절못하며 황급한 소리로 발진 명령을 내렸다.
 
밀항 소년 마치나리
 
별빛에 번득이는 창끝의 칼날이 심상치 않는 긴박감을 자아내면서 부리마라 족은 쏜살같이 날아들고 있었다. 귓전을 울리는 count down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마저 더디어 조바심이 공연히 앞섰다. 이만석 박사는 신호판과 부리마라 족의 내습하는 모양을 연방 번갈아 보면서 로켓이 무사히 떠나기를 마음속에서 빌었다. 7초, 6초, 5초, … 수백 명의 부리마라 족이 로켓에 다다라 순식간에 에워싸고 창 끝으로 유리창을 꾹꾹 찌르는 순간, count는 마침내 제로를 알렸다.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분사를 내뿜으려 훌쩍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만석 박사는 그제야 이마를 적신 진땀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휴… 저놈들이 환장을 했나!"
그는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벌떼처럼 분사의 반동으로 곤두박질치는 부리마라의 전사들을 저 아래로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이 아슬아슬하고 통쾌한 순간을 맛보고 싶지 않을리 없겠지만 대원들은 저마다 제자리를 지켜 기계를 조정하고 있었다. 우주선은 생명을 되찾은 기분에 몸이 단 듯 우주 공간을 향하여 죽죽 뻗어 나갈 따름이었다.
"독수리 호엔 이상이 없습니다. 엔진은 쾌조를 보이고 있고요."
홍성기 대장이 서슴없이 밝은 소리로 보고를 해왔다.
"이제 어지간히 올라왔는데 광파 추진기에 점화합시다."
이만석 박사는 가뿐해진 마음으로 말했다. 이만석 박사는 평소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휘관이 되면 흔히 어디는 이상이 없느냐는 식의 권위로 들볶는 이도 있지만, 그는 상대방에 책임을 내맡긴 이상, 그쪽에서 보내오는 보고를 확인하는 슬기를 잊지 않는다.
우주 함정이 나란히 제 궤도에 오르자 그는 X4호 별에서 1년 반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 꿈같이 느껴졌다. 핵전쟁에 얼마나 혼이 나고 시달려서 부리마라 족은 차라리 원시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을까? 어렴풋이 짐작이 안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만석 박사는 이러한 사건을 성산포의 우주 기지에 보고할 양으로 전자물리학을 전공한 이상호 대원으로 하여금 레이저 통신을 보내도록 지시를 했다. 태양계와는 아득하다기보다 까마득한 거리에 있기 때문에 과연 출력이 약한 레이저 통신이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있을는지 스피커에서는 김동수의 노래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는데, 독수리 호의 움직임이 별안간 떠들썩했다. 무궁화 호의 대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또 사고가 났나하는 초조한 눈길을 텔레비전의 스크린에 모았다.
"이 박사님 야단났습니다. 밀항한 소년이 한 놈 숨어 있었군요."
홍성기 대장이 목덜미를 움켜쥐고 스크린에 비쳐 보이는 소년의 어깨에는 날개가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삐오라 족의 소년이었다.
"이름이 뭐냐?"
"마치나리라고 합니다."
"무얼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지?"
…"아니오. 아버지가 숨어서 인류를 따라 떠나라고 말씀하시기에 감히 기관실에 숨어 있었습니다. 용서하셔요. 아버지는 문명의 한 고비를 넘은 X4호 별보다는 장래성이 있는 태양계 인류를 따라서 한껏 진보하라고 일러 주셨어요. 저도 그럴 생각으로 그만…"
소년은 두 눈시울을 내려 깔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때서야 이만석 박사는 부리마라 족이 로켓을 추격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리마라 측이 끝내 적대적일 수가 없을 텐데 역시 그들이 잡아놓은 삐오라의 포로 중에서 탈주자를 발견했기 때문에 원정대에 의심쩍은 생각을 던졌구나 싶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천문학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원정대에 X4호 별의 자력이 가장 약해지는 낱을 가르쳐 준 그의 아들이란 말인가? 이만석 박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비록 그 우주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도와 준 자의 한 사람일 것이다. 구태여 이름을 알아 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자식의 발전을 원하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은 우주별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 소년의 모습은 아직도 독수리 모양의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혹 그것은 강력한 방사능 때문에 유전을 통해서 대대로 변형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과학을 공부하려는 것이 갸륵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는 공동 운명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결론을 짓자 홍성기 대장에게 일러주었다. 소년 마치나리는 아직도 죄인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홍대장, 저놈이 운이 좋은 것 같소. 독수리 호에는 마침 결원이 한 사람 생기지 않았습니까? 따르는 자를 물리치라는 법은 없으니 놓아두고 훈련을 시킵시다. 황영숙 양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아요."
"실은 저도 동감입니다."
말이 떨어지자 황영숙은 못내 안타까워하던 표정에 웃음을 띄며 마치나리 소년의 어깨를 가만가만 흔들었다. 또 무슨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질겁을 하던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돌리더니 거기 황영숙의 미소를 보자 마음이 턱 놓이는지 또 한 번 울먹거린다.
 
변덕의 사연
 
소년은 첫째 성실했고 중력의 차이 때문인지 몸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인지 보통 사람보다 대 여섯 배는 더 힘이 센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이 여간 밝지 않아 유성이 산산조각이 나서 별똥이 된 아스테로이드를 1백 마일 밖에서도 영락없이 찾아내곤 한다. 황영숙은 마치 누이인양 낯선 소년이 더 이상 기를 죽이지 않도록 식물 재배를 거들게 했다. 그녀는 삐오라 족이 동굴 속에서 별빛을 이용해서 동력을 얻어 농사를 지어 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형제는 어디에 계시니?"
온실을 손질하면서 그녀는 마치나리에게 묻는다.
"어머니는 동굴 속에 계시고 아버지는 포로의 신세가 아니겠어요. 형제는 없습니다. X4호 별의 세계에서는 결혼하면 누구나 단 한 번 해산하기 마련입니다. 간혹 쌍둥이가 생겨 축하를 받기도 하지만…"
소년은 서먹서먹했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제법 정답게 재잘거린다. 약초를 재배하는 솜씨를 그는 금방 익히는 영리한 머리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황영숙은 목성의 델타 기지에서 발견한 자력선 박테리아의 존재는 일절 밝히지 않았다. 지금은 유리 상자 속에 갇혀 있지만 그 박테리아가 장차 어떠한 구실을 하게 될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선 내에서 평화로운, 그러나 지루한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세차게 은하계의 안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들의 위치를 살펴보자면 은하계의 지름을 가령 20마일로 잡은 도너스 형이라고 할 때, 태양계의 위치는 중심에서 7마일 떨어진 곳을 감도는 좁쌀 만한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태양은 이 변두리를 하루에 약 1,500만 마일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다. 한국의 우주 함대는 지금 중심을 비스듬히 보면서 겨우 1마일쯤 파고들었을까. 1천억 개의 별이 반짝이는 은하계는 너무나 광활하고 가없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지금 우주 함대가 목표로 치달리고 있는 별은 인마좌(센타우루스)의 알파별이다. 이만석 박사는 애당초의 예정대로 변광성인 알파별로 항로를 바로 잡은 것이다. 공기라곤 있을 리 없는 허공에서 번쩍이는 변광성은 확실히 우주 나그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혹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멀거니 뭉글뭉글 불을 내뿜기만 하는 항성의 멋없는 불덩이와는 달라서 변덕을 부리는 변광성은 한결 신기롭다. 거기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듯이 마음이 쏠리는 변덕, 별빛의 점멸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인간의 감성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람이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반복 작용으로 심장의 고동을 유지하기 때문일까. 혹은 태초에 진흙 바닥에서 생명이 형성되어 갔었을 때, 엷은 세포막을 폈다 오므렸다 하던 운동의 기원에서 익힌 감각이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우주 함대는 줄기차게 치닫는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마치나리 소년은 궁금증에 겨워 하루는 황영숙에게 묻는다. 마치나리는 막상 X4호 별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외로운 생각이 그림자처럼 마음을 감싸고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세계였지만 역시 삐오라의 고향이 자기 체질과 생리에 맞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하는 은근한 생각에 사로 잡혀 속으로 우울한 나날이 계속된 끝이었다.
"걱정이 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약이야. 우주선은 알파별을 스쳐서 은하계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작정이란다. 우리는 스스로의 고독과 싸워 이겨야만 해."
일러주는 황영숙도 일부러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훨훨 날아다닐 수도 없고 뜀박질도 제대로 못할 뿐더러 바닷물에 온몸을 적실 수도 없는 환경을 이겨내는 일은 여간 어렵지가 않다. 마치나리는 고독과 대결해야 하는 천체 비행 원칙의 제 1 조에 대한 훈련을 받은 일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지면 저절로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 쉽다. 무엇으로 마음을 달래야 하나? 얼굴이 얼마간 핼쑥해진 황영숙은 마치나리를 보며 손으로 약초를 가리켰다. 그래도 별빛을 받아 나날이 자라는 약초에서 변화를 찾을 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식물과의 소리 없는 대화가 유일한 위안이런가.
 
알파별의 비밀
 
알파별을 향하여 75일이 속절없이 흐르는 동안 노래쟁이 김동수가 어쩐지 시름시름하다가 마침내 헛웃음을 치며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눈꼬리를 치뜨고 호들갑을 떠는 정신 착란 증세를 아무도 가라앉히지 못했다.
"야단났군. 어쩌면 좋아?"
홍성기 대장은 김동수가 발작할 때마다 큰 한숨을 몰아치며 걱정을 한다.
"나는 동백꽃이 좋아요. 벌레하고 사랑을 속삭일 테야. 오! 나의 천사! 그대는 지금 어디에?"
두서없이 지껄이는 김동수가 발작을 일으킬 적마다 황영숙은 그의 두 손목을 붙들고 애원하다시피,
"김동수씨!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요. 여기가 어딘데 그러는 거에요? 안 돼요, 안 돼."
"내가 미쳤다고요. 허허허 멀쩡한 사람보고 왜 그래요. 손목 놓으세요, 오 나의 사랑스러운 벌레."
"은하계까지 와선 이게 무슨 망신이에요."
황영숙은 김동수의 두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으나 그는 여전히 실성한 말을 더듬거릴 따름이다. 애걸복걸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만큼 그의 증세는 날로 심해졌다.
"차라리 동면을 시켜버리지 않고. 그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뜬눈으로 지새우니 사람이 견딜 수 있겠어요."
참다못해 이만석 박사가 마이크를 통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가혹하지 않겠습니까?"
홍성기 대장은 반대했다.
"다른 대원들까지 신경을 쓰니까 할 수 없지 않아요. 질서는 유지해야지요."
이만석 박사는 적이 말소리를 높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튿날 이광호는 김동수를 동면실로 데리고 가서 눈물 어린 어조로 타일렀다.
"김 군, 아무래도 안되겠어, 이 박사가 자네를 동면시키라는 지시야. 동면이 싫거든 정신을 차리게. 내 말을 알아듣겠나?"
동수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지켜보면서 이광호는 호소했다.
"벌레하구 함께 살겠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나의 어깨동무였던가?"
입을 멍청하게 헤벌린 채 지껄이는 김동수의 두 눈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혀를 끌끌 차면서 이광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나서 알약을 꺼내 그의 입에 쑤셔 넣으며 글썽한 눈시울 너머에서 김동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하얗게 바래 가는 것을 보았다. 이광호는 연방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향의 노래를 불러주던 그의 모습을 머리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벨트로 김동수의 몸을 동이는 그의 두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침대 위에 누워버린 김동수를 남기고 이광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동면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더 행복할는지도 몰라."
밖의 둥근 창에서 들여다보며 온도를 조정하는 윤상운이 맥없이 한마디 픽 던진다. 아무도 말을 받지 않고 침울한 표정만 짓고 서 있었다. 실은 우주선에서 한 사람을 잃은 것 같은 쓸쓸한 생각이 저마다의 가슴을 에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독에 지친 가엾은 김동수!'
황영숙은 마음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단조로운 생활은 대원들의 정신적 긴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가 격은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적힌 지구의 역사책을 탐독함으로서 무료한 시간을 지워 갈 수밖에 없었다. 잠이 들면 꿈결에 보이는 내 고향 푸른 동산, 강물과 물결치는 바다, 그리운 사람들,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 잠을 깨면 아직도 우주선을 타고 있는 현실의 위화감 때문에 싱숭생숭 해졌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소년 마치나리는 한국말과 영어를 마스터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장에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자에게는 장래성이 있다는 좋은 증거였다. 우주 함대가 사람의 속내를 아랑곳하기 않고 살차게 치닫는 모습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람이 기계를 따라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우주선은 드디어 알파별의 중력권으로 들어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헬륨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알파별의 저 멀리선 지옥의 불덩이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불길이 콩 볶듯이 한결 차게 사방으로 튀긴다. 햇볕이란 여기서는 통하지 않을 만큼 뜨거운 기운이 공간을 전해온다. 만일 우주 함정이 거기에 빠진다면 창호지가 사르르 불타는 모양으로 대번에 연기로 변할 것이다. 열은 맨 처음에 수소의 분자 결합으로 시작하면서도 그다지도 큰 에너지를 어떻게 발산시킬 수 있을까? 멀거니 불덩어리의 장관을 지켜보고 있던 문창수는 자기가 전공한 천문학의 지식이 너무도 낭만적인 것만 같았다.
"더는 접근하지 말라! 궤도를 바꾸어 은경 20도 각도로 알파별을 스쳐 가도록!"
이만석 박사는 선글라스로 안경을 갈아 낀 채 지시했다. 우주 함정이 개미보다 작게 보이는 우주 공간에서 원정대원들은 한낱 허우적거리는 마이크로의 세계인에 지나지 않았다. 숨막히는 순간 순간에 잇달아 별안간 소나기처럼 전파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돌변이냐?"
무궁화 호의 전자물리학자인 이상호는 계기반의 바늘을 마구 깔딱거리게 하는 괴상한 전파에 새파랗게 질려서 중얼댔다.
"전파의 폭동일까?"
"아니야 테이프에 찍혀 나오는 곡선을 보게. 아무렇게나 보내는 신호가 아니야."
신온철은 조심스레 자동기록기를 기웃거린다. 온 대원들의 눈길이 거기에 모인다. 난잡한 전파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질서정연한 문맥이 있는 듯 했다. 대원들은 숨을 죽였다.
"우주 통신이다. 알파별의 저 너머에 고등 생물이 살고 있는 증거이다."
신온철이 자신있게 외치는 바람에 대원들은 고개를 들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노고지리 별로
 
수신 테이프는 누가 보더라도 질서 있는 분맥을 엿보게 한다. 과연 신온철의 말처럼 알파별의 저 너머에 고등 생물이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테이프를 전자 계산기에 넣어서 분석해 보도록 해요."
이만석 박사는 서슴없이 일렀다. 방미란이 익숙한 솜씨로 기계 처리를 척척해 낸 결과, 우주 전파는 모음의 빈도수가 높은 사실이 이내 밝혀졌다. 비슷한 분석 결과가 독수리 호에서도 보고되었다.
"모음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생명의 문명이 퍽이나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과연 그 우주인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일까, 또는 우호적일까?"
신온철은 역사 전공의 학자답게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일단 전파의 근원을 찾아서 접근해 봐야겠군."
“먼저 정찰해 보는 일은 모든 과학적 방법의 하나니까."
박민호 부장이 넌지시 일러주며 우주 통신을 해독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우주 함정은 알파별의 푸르락붉으락하는 변광을 뒤로 바라보며 세차게 허공을 치닫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거친 물결을 헤치고 달리는 군함의 기운찬 모습이 아니라, 바다 속을 전속력으로 소리 없이 달리는 잠수함의 모습과 비슷했다. 꼬리에서 세차게 내뿜는 광파 엔진의 불길은 초속 25만km의 엄청난 속도를 계기반에 새기고 있으나 가없는 우주 공간에서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마치 소가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만큼 느려 보였다. 무려 3년의 지루한 세월이 흘러간 뒤 우주 원정대는 문제의 별에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그 동안 원정대원들은 그 별 사람들의 언어를 완전히 마스터 할 수도 있었다. 만일 서윤철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들은 훨씬 빨리 그리고 손쉽게 우주인의 말을 해독할 수 있었으리라. X4호 별에서 삐오라 족에게 희생된 그의 죽음이 새삼 아쉽기만 했다. 이만석 박사는 얼마 후에 접근할 문제의 별을 천문학의 딱딱한 이름 RS6호 별 대신에 노고지리 별이라고 이름 지었다. 영원히 말없는 항성과는 달리 생물의 말들이 종달새처럼 들려오는 반가움을 이렇게 라도 표현할 도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주 원정대원들은 다른 우주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전파도 발신하지 않은 채 노고지리 별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정찰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푸른 바다도 있고 넓은 호수도 있고 산도 들도 있어 마치 인도의 어느 지방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광파 로켓은 저절로 원자력 엔진으로 바뀌어졌다.
"역시 깊은 산을 골라서 착륙하는 편이 유리할 거야."
이만석 박사는 그 편이 안전할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지형을 분석한 결과 노고지리 별의 적도를 남북으로 치달리는 산맥 속에 넓은 고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고원을 경기 고원으로 정하고 거기를 착륙 본부로 삼도록 합시다."
이만석 박사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좁고 단조로운 우주선 안의 생활에서 벗어나 두 발로 땅을 디뎌 보려는 즐거움은 아무도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이만석 박사는 지휘관답게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려다보이는 노고지리 별의 상공에는 보라색 구름이 뭉실뭉실 떠 있다. 지구의 그것처럼 뿌옇지 않는 사실은 대기권 속에 산소와 수소가 들어 있지 않다는 증거일까? 그들은 별의 중력권 내로 접근하자 조심스럽게 역추진 로켓을 발사하면서 밤중을 골라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계기반의 바늘이 움직임에도 맥이 통하는 순간에 이어 먼저 무궁화 호가 다음에는 독수리 호가 사뿐하게 대지 위에 내려 않았다. 노고지리 별의 중력에 대한 계산이 들어맞는 셈이었다. 로켓의 마지막 엔진이 꺼지자 우주선 내는 갑자기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안착했다는 안도감보다 한시라도 빨리 땅 위를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똑같이 솟아오르는 기분을 어찌하랴. 사마귀 우주복으로 갈아입은 원정대원들은 손에 자력총을 들고 조심스럽게 로켓의 트랩을 내려가면서 숨을 죽였다. X4호 별에서 밀항해온 마치나리 소년만은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이내 노고지리 별의 대기에 적응할 수가 있었다.
"야 이게 몇 년 만이냐. 흙을 손에 쥐어 보니 도리어 미칠 것 같다."
생물학을 전공한 황영숙 양이 상기된 얼굴로 기쁜 듯이 외쳤다. 이내 발사 위치를 고정시킨 로켓의 주변을 껑충껑충 뛰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전원 집합해 주시오."
이만석 박사는 엄숙한 말투로 이르고 나서 그의 주변에 모여든 대원들을 두루 살피더니,
"이제부터 우주인과 접촉을 해 봐야 되니까, 명령에 따라 이번에는 무궁화 호에서는 문창수가 독수리 호에서는 황영숙 대원이 남아서 로켓을 지키시오."
하며 주의 사항을 맺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김동수는 아직도 동면 중이었다. 그리고 보면 이만석 박사를 비롯한 박민호 부장, 신온철, 이상호, 방미란, 홍성기, 여광호, 윤상운 등 8명의 대원과 마치나리 소년만이 행동할 수 있는 인원에 지나지 않았다.
 
고릴라 떼와 격전
 
마치나리 소년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졸망졸망 앞장서서 산등성이로 올라섰다. 이만석 박사는 박민호 부장의 뒤를 따르고 대원들은 한 줄로 경계를 하면서 산등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한 눈에 안기는 경치는 산줄기를 따라 먼 기슭까지 밀림이 꽉 차있었다. 빽빽이 들어선 아름드리 나무는 길길이 하늘을 찌르는 활엽수였다. 지구의 경우라면 비가 많은 지방의 경치를 방불케 하는 지형이었다. 그리고 밀림의 바다가 끊어지는 가물가물하게 먼 곳에 널따란 신작로가 한 가닥 산모퉁이를 감돌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헬리콥터를 타고 하산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만석 박사는 혼자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이 별의 지형과 풍토를 조사할 겸 고생스럽더라도 걸어서 내려가 보는 게 어떨까요?"
박민호 부장이 말을 받아 자기 의견을 말했다.
"글쎄, 그럴듯한 생각이지만…."
"우선 로켓의 안전을 위해서 경기 고원의 사방을 탐색해 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이만석 박사가 행동 방침을 결정짓자 마치나리 소년은 몸에 배인 날랜 움직임으로 원정대원을 골짜기 길로 안내했다. 그는 어느새 커다란 몽둥이를 한 개 꺾어들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짜기 길을 따라 2시간 이상을 내려갔을 때, 앞쪽에서 별안간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고릴라다!"
하는 외침을 들은 원정대원들은 자력총을 고쳐들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하늘의 광선이 어른거리는 골짜기의 상사목에 수십 마리의 고릴라 떼가 우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놈들은 손에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원정대원들을 향하여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박민호 부장은 분명히 놈들의 동작에서 적의를 확인하자 자력선의 단추를 눌렀다. 발사를 알리는 계기반의 파란 율동이 고릴라의 앞가슴을 뚫고 당장에 놈들을 쓰러뜨려야만 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파란 율동은 일어나지가 않고 고릴라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알지 못할 소리를 꽥꽥거리면서 여전히 한 발짝씩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이만석 박사의 자력총도 마찬가지로 기동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의 자력총이 마비되어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질겁을 한 원정대원들은 자력총을 어깨에 매고 잽싸게 허리께 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벌써 선진의 고릴라와 마주친 마치나리 소년은 훌쩍 뛰어 오르더니 고릴라의 앞가슴을 발길로 걷어차고 있었다. 두발 차기로 힘차게 걷어채힌 고릴라 꽥하는 소리를 지르며 털투성이의 얼굴에서 눈의 흰자위를 굴리며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마치나리 소년의 기운이 장사라는 사실은 김동수가 노이로제에 걸렸을 때, 우주선 안에서 이미 목격한 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걸쌈스러운 줄 미처 몰랐다.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누런 앞니를 보이며 여러 놈들이 사납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마치나리 소년은 한 손에 몽둥이를 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을 사리며 다른 놈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숨을 가눌 수 있는 점이 얼마나 유리한지 알 수 있었다. 고릴라들은 으르렁대면서도 마치나리 소년을 슬슬 피하면서 원정대원들을 에워싸며 달려들었다.
"에잇! 이놈들이!"
박민호 부장은 가까운 놈의 가슴을 겨누고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꺼번에 대여섯 발이 내달리는 총알을 맞은 고릴라는 손에서 몽둥이를 내동댕이치며 자지러지는 폼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박민호는 아무리 전자공학이 발달해도 역시 재래식 화학 무기의 필요성을 비로소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외마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니 고릴라 떼는 돌격태세로 옮겨왔다. 방미란은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한 놈, 두 놈씩 찍소리 못하고 고릴라는 쓰러져 가는 데도 저 너머에서 새로운 패거리가 수 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대로 장기전을 벌리다가 권총의 총알이 떨어지는 날이면 원정대원들이 박살이 되리라는 것은 뻔했다. 첫째 놈들의 패거리가 이 음침한 밀림 속에 얼마나 숨어있는지 헤아릴 수 없지 않는가? 이만석 박사의 머리 속을 이런 계산이 스쳐 갔다. 지구전으로 들어가면 결국 이편이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모두들 싸우는 척 하면서 로켓이 있는 경기 고원까지 후퇴하도록. 필요 없는 싸움은 피해야 한다."
이만석 박사의 어정쩡한 명령을 원정대원들은 다같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나리 소년이 선두에 서서 으릉대는 고릴라를 막고 있는 동안 그들은 슬금슬금 골짜기를 치올라 산등성이로 후퇴해 갔다.
'웬 고릴라가 이처럼 많을까? 문명의 수준이 높은 데로 알았는데….'
이만석 박사는 고릴라를 피해가면서 한편으로 수수께끼를 풀기에 바빴다. 고릴라 떼는 산등성이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우악스러운 고릴라일지라도 자기네의 울타리 밖으로 물러간 원정대인을 추격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8명의 대원들은 짤막한 전투에도 벌써 지쳐 있었다. 오랜 우주선 생활이 그들의 기력을 쑥 빼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헬리콥터로 하산할 양으로 경기 고원까지 다다랐을 때, 하늘 높이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목격했다. 번개처럼 번쩍 하는 불빛을 본 그들은 그만 정신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개미 우주인의 정체는?
 
희미한 생각을 더듬어 가면서 맨 먼저 이상호가 깨어났다. 그 동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온몸은 밧줄로 꽁꽁 묶인 채였다. 이만석 박사도 박민호 부장도 그리고 방미란에 마치나리 소년까지 마찬가지로 손발을 묶인 채 한 방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이상호는 불현듯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의 높낮이도 또한 문명의 수준을 헤아릴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법이니까. 천장은 높고 벽과 방바닥은 반투명한 재료로 꾸며져 있었다. 데굴 데굴 굴러서 이만석 박사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는 발 끝으로 박사의 아랫배를 꾹꾹 누르며 신호를 보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옆자리에 뒹굴고 있는 황영숙의 궁둥이를 무릎마디로 질러보았다. 로켓을 지키기로 남아있던 황영숙과 문창수 마저 포로가 되고 말았으니 장차 원정대원을 구해 줄 희망조차 사라지고 만 셈이었다. 한참 끝에 이만석 박사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의식을 회복했다.
"이거 큰일 났군. 어떻게 된 셈이야?"
눈이 휘둥그래지며 중얼대는 이만석 박사를 보고 이상호는 말했다.
"문창수와 황영숙도 붙잡히고 말았어요."
"그럼 우주선도 빼앗기고 말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어떡하지?"
이만석 박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무슨 생각을 쫓기 위해서 일게다. 이상호가 뒹굴면서 자극을 주는 덕분에 원정대인은 한사람씩 의식을 되찾아갔다. 눈을 뜬 대원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서로 멀뚱멀뚱 상대편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하고 자문자답하는 표정이 처량할 정도였다. 이 때,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이상한 모양의 생물이 불쑥 나타났다.
"이제 모두 정신은 차린 모양이군."
지껄이는 생물은 개미 모양을 한 우주인이었다. 머리에 두 가닥의 촉각이 달린 우주인의 모습은 상반신은 꼿꼿하지만 엉덩이가 유달리 불거져서 마치 개미가 서 있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는 한마디 던지고 나더니 가까운 곳에서부터 발묶인 줄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상반신을 묶은 줄은 그대로 두고 보행의 자유만을 주려는 눈치였다. 삽시간에 모두 다리가 풀리자 저마다 일어서서 개미 우주인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키는 사람보다 조금 큰 편이었고 얼굴빛이 거무끄름한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는 아주 얇은 편이며 샌들과 비슷한 신을 신고 있는 것이 퍽 경쾌하게 보였다. 개미 우주인은 원정대원을 아주 얕잡아 보는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일어서라! 어느 별에서 떨어진 놈인지 몰라도 지금부터 취조를 받아야 한다."
생각보다는 가는 목소리로 지껄이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힘이 약하다는 것은 확실히 서글픈 일이었다. 그린나 이만석 박사는 개미 우주인들의 문명 수준에 일종의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반항도 하지 않은 채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치면서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거리의 풍경은 우주인들의 생활이 평화스러운 사실을 대번에 짐작케 했다. 일반 시민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택들은 한결같이 돔형에 유리창이 박혀 있고 공공 기관으로 보이는 건물만이 네모진 고층 빌딩을 이루고 있었다. (이 사실은 나중에 확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무들은 잎이 넓은 활엽수가 늘씬한 줄기를 뽐내고 서 있었고 해변에서는 어린 우주인들이 바닷물을 튀기며 물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이리로 들어와요."
복도의 막다른 방에 이르러 안내인 말했다. 모두 반 벙어리가 되어 말없이 시키는 대로 뒤따랐다. 마치 교회의 설교단과 같은 높다란 장소를 마주보고 원정대원들이 즐비하게 한 줄로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혹 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석 박사는 침착한 태도로 가장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원들은 차례대로 앉았다. 모두가 당당해 보였다. 숨을 죽이고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옆문을 열어 제치고 보라색 우주인이 여럿이 들어와 단위에 앉았다.
 
세라미 족의 심판
 
이만석 박사는 무지근한 머리를 애써 흔들며 개미 우주인들의 거동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다섯 놈의 우주인은 거칠 것이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단위에 올라 팔걸이 의자에 차례로 앉더니 그 중에서 가장 눈이 부리부리한 왕눈이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원정대원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훑어봤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의 태도가 퍽 오만하게 보였다. 이만석 박사는 그놈에게 반감을 느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놈들이냐?"
그자는 대뜸 호통을 치듯이 물었다. 그가 이곳의 검찰관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어쨌든 썩 기분이 좋은 자는 아니었다.
"태양계의 지구에서 온 지구인이요."
부장 박민호가 호탕스러운 성격대로 선선히 대답했다.
"태양계? 지구인?"
검찰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몸을 돌리고선 뒷자리의 우주인과 귀엣말로 그 무엇인가 나직이 수군거렸다. 그리고선 한참만에 자못 납득이 간다는 듯이 호들갑스러운 제스처로 두 팔을 벌리고 한바탕 껄껄 웃어댔다.
"지구인이란 말이지. 소년 시절에 할머니에게서 전설로 들어본 적이 있어. 마음씨가 고약한 생물이라지!"
쉰 살 남짓한 검찰관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 손은 깍지낀 채 둥글넓적한 얼굴에 야릇한 웃음을 담으며 지껄였다. 그리고선 잠깐 서류에 눈길을 주더니 고개를 들고 굳어진 표정으로 따졌다.
"그래, 너희들은 무슨 욕심이 또 생겨서 까마득한 허허 공간을 지르고 여기까지 왔나? 도대체 두목은 누구인가?"
"내가 바로 사령관이다. 보아하니 당신들의 문명이 꽤 높아보이는데 먼데서 찾아 온 손님을 이처럼 묶어놓고 푸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RS6호 별을 찾아온 목적은 단지 다른 별나라 우주인들과 친목을 맺고 발달된 문명을 배우러 왔을 뿐이지, 해치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어서 밧줄을 풀고 손님 대접을 하도록 하라."
이만석 박사는 눈을 부릅뜨고 고저고래 소리지르며 경우를 따졌다.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냐. 너희들은 우리의 변경 수비대 구실을 하고 있는 고릴라를 수백 마리나 죽인 범죄자들이다. 더욱이 어느 틈에 우리 세라미 족의 언어까지 마스터한 지능을 지니고 있으니 그 간사한 성격은 경계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밧줄을 풀어 주는 일은 간단하다. 너희들은 먼저 RS6호 별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은 뒤에 귀순한다는 적절한 표시가 있을 때만이 구속을 해제할 수 있다."
불끈 화가 난 검찰관은 이만석 박사를 보고 한 손으로 삿대질을 해가며 소리쳤다. 박민호 부장은 화가 미리 끝까지 올라왔으나 검찰관을 무섭게 노려보는 외에는 손을 써 볼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처지에 무슨 권위가 서겠는가? 마음씨가 누그러진 황영숙도 개미 우주인들의 오만 불손한 처사에 분통이 치밀어 올라왔으나, 꾹 참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모두 일어서서 뒤를 따라 오라!"
원정대원 모두의 신원 카드를 작성 한 뒤 검찰관은 벌떡 일어나더니 얄미운 한 마디를 던지고 앞장서서 나갔다.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라서 다다른 곳은 세라미 족의 네모진 고층 건물이 꽉 들어선 널따란 광장이었다. 거기에는 세라미 족의 남녀노소가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차 있었다. 마치 지구의 스페인에서 투우를 구경하려고 운집한 군중처럼 원정대원들을 한복판에 두고 에워싼 채 진기한 짐승을 보는 것처럼 저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쏟고 있지 않는가! 같은 우주 생물이지만 별마다 생활 환경이 다르면 이처럼 천대하고 적대시하는 것일까? 구경거리로 끌려나온 원정대원들의 가슴에는 울분이 치밀어 오를 따름이었다.
"여러분?"
검찰관은 관중들을 둘러보며 우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불청객의 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고발하기에 앞서 10명의 지구인의 신분을 설명해 두는 편이 참고가 될 듯합니다. 지구인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세 가지 종족이 있어 이들은 황색인종 특히 우랄 알타이계의 몽고리안족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검찰에서 옛 문헌을 조사한 결과 몽고리안족은 3백만 년 전에 로켓 기술을 배워 화성을 징검다리로 지구에 침입하여 고비 사막에 문명 기지를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의 자원을 바탕으로 은하계 정복을 꿈꾸다가 두 차례에 걸친 빙하 시대와 가뭄으로 멸망한 후 가까스로 남은 유족들이 유목 민족으로 탈바꿈해서 징기스칸의 지휘로 지구를 휩쓴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원심적인 우주 진출의 야망이 실패로 돌아간 쓰라린 혈통이 한 동안 구심적으로 작용하더니, 이제 주기적인 문명의 세력을 받아 또다시 원심적으로 되돌아 와서 RS6호 별까지 무엄한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본디가 영리한 종족인지라 이미 세라미 족의 언어까지 마스터하고 고릴라를 살해하는 등 우리의 평화를 침범한 것입니다."
검찰관은 그리고 나서 한결 말소리를 높여 외쳤다.
"여러분! 이 불청객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검찰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군중들이 외치는 아우성이 광장을 메아리치며 귀가 먹먹하도록 울렸다.
"고릴라와 맨주먹으로 대결시켜라!"
"죽여라! 후환이 두렵다!"
"노예로 만들어 국토를 개발시켜라!"
"고스란히 돌려보내라!"
저마다 외치는 주장이 이처럼 네 가지로 가려낼 수가 있었다. 이만석 박사는 험상궃은 검찰관의 말투와는 달리 노고지리 별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구 도시를 만들다
 
심판의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결국 원정대원들에게 중노동을 시키기로 결정지었다.
산소 공급만 끊으면 몇 분이 못 가서 죽는 지구인을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막판에서 우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스란히 RS6호 별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문명의 질이 낮은 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를 자기들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자가 많았다. 고릴라와 대결시키라는 주장은 피를 보지 않기로 정한 법률에 어긋나며 종족의 이상을 원시의 방향으로 역전시키는 짓이라고 공박을 받았다.
'역시 문명도가 높은 개미 우주인들의 판단이 다르기는 하군. 만약에 식물 자력총을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X4호 별에서는 아마도 부리마라 족이나 삐오라 족에 희생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목숨이 붙었으니 탈출의 기회를 엿볼 도리밖엔 없겠다'
이만석 박사의 판단은 동시에 모든 원정대원의 판단이기도 했다. 심판이 끝난 뒤의 검찰관의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입술에 띄우며 머리끝의 촉각을 마치 초랭이처럼 움직이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을 보이라고 성냥곽만한 딱지를 들이댔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으나 박사를 비롯한 원정대원, 그리고 마치나리 소년까지 발과 허리에 일일이 그 뭉글뭉글한 네모난 딱지를 붙였다. 나중에 알아 낸 일이지만 세라미 족은 보통 세포보다 수백 배나 전기 반응을 예민하게 받는 반세포의 물질을 개발해 내고 있었다. 원정대원들의 옴팍한 허리에 붙인 딱지는 바로 그러한 반세포 물질이며 세라미의 감시인들은 약한 전파 조종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을 리모트컨트롤 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부적 아닌 부적을 몸에 지닌 셈이었다. 원정대원들에게 부과된 노동이란 지구의 주거 양식을 그대로 노고지리 별에 건설하라는 과제였다.
"자식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지?"
늘 머리를 빡빡 깎은 역사학 전공의 신온철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야 뻔한 수작이 아니겠어. 첫째는 우리를 격리해 집단 수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둘째는 우리의 생활 환경을 통해서 지구인의 정신 문명을 알아보려는 속셈이지 뭐야."
수학을 전공한 이광호가 그럴듯한 설명을 붙였다. 과연 세라미 족의 기계 문명의 수준은 놀랄 만큼 높았다. 그다지 부피가 크지도 않은 전자 계산기가 로봇을 움직이며 온갖 공사를 시키는 판이었다. 원정대원이 해야 할 일은 로봇이 벌채해 온 나무의 질을 가려 내서 사이즈를 매겨 제재소에 보낸다거나 돌의 결을 맞추어 내는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전자 계산기는 초음파의 발사로서 돌의 성분을 가려 낼 수는 있었지만 돌의 결을 가려 내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는 동안 비탈진 산기슭에 2층집, 3층집, 그리고 30층의 사무실용 고층 건물까지 속속 들어서고 흔히 볼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장치까지 손쉽게 갖추어져 갔다.
"은하계까지 와서 건축 공사를 하게되니 이게 무슨 운명이야!"
신온철은 애초부터 푸념만 하는 쪽이다.
"인생 또한 즐겁지 않아요. 지구의 운명을 노고지리 별에 옮겨 심어 주는 것도 하늘이 정한 그 어떠한 섭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방미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는 거실에 들어앉은 뒤부터는 자못 낙관적이었다. 불편한 우주복과 무거운 배낭을 한시라도 벗어 던지고 홀가분하게 책상다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만석 박사, 독수리 호의 대장 홍성기, 박민호 부장 등은 밤이면 이마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세라미 족의 문명의 비밀을 파악할 길이 당장에는 없어 분하기 짝이 없잖아요. 아무래도 문명에는 꼭 찌르면 아픈 약점이 있을 텐데…."
"지금 처지로선 행동의 자유가 전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건축 공사가 다 끝난 뒤에 형편을 봐가며 기회를 엿볼 수밖에…."
박민호 부장의 걱정을 받아 홍성기 대장은 가끔 달래곤 했다. 이만석 박사는 별로 말문을 열지 앉았다. 무슨 깊은 생각을 다듬고 있겠지 하는 대원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그는 밤낮으로 세라미 족의 생활과 감정 그리고 거동의 온갖 습성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건축물의 외부 공사가 어지간히 끝난 뒤부터 개미 우주인들이 원정대원들에게 강요한 일은 실내 조각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문화재를 모방하여 공원도 만들어 놓으라는 지시였다.
"그것만은 로봇이 할 수 없지. 참 골치 아픈 일이 생겼군.“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가사 석굴암의 불상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이 엉뚱한 과학자들이 뛰어난 예술가의 솜씨를 모방할 수가 있을까? 지시가 전달된 뒤부터 원정대들의 시름은 나날이 깊어갈 따름이었다.
 
신온철의 사랑
 
그래도 황영숙에게는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대학 교수인 아버지 황주일 박사가 문화재 관리 위원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세계의 고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잦았던 것이었다.
"제가 설계를 해볼게요. 미숙한 솜씨겠지만 생각이 나는 미술품이나 문화재가 많으니까요."
뜻밖에도 황영숙이 앞장을 서서 정원 설계며 공원 설계를 서둘고 실내 장식과 조각을 재우치는 바람에 원정대원들은 한시름 놓게 되었다.
"역시 어릴 적부터 보아두어야 될 것은 보아두어야겠어. 황영숙 대원이 은하계에서 엉뚱한 실력을 발휘할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 과학과 예술이 서로 담을 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지구의 문명이 역시 낮은 것 같아."
신온철이 여러 사람의 칭찬에 맞장구치며 으레 격려해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과학과 예술의 교류라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일은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실내 작업장이기 때문에 윗도리를 벗어 젖히고 땀을 흘려가면서 일할 수는 있었지만 손 끝이 부르트고 망치로 잘못 때린 손가락에 거무스름한 멍이 드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수난이었다. 이처럼 원정대원들의 예술 작업이 지지부진하는 꼴을 못마땅해서였던지 하루는 세라미의 감독장이 한 여성을 데리고 작업장에 나타났다. 감독관의 뒤를 순순히 따라 그 여성이 작업장에 들어섰을 때, 원정대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생각이 저마다 들었을 것이다. 개미 우주인의 뒤를 따라 들어 온 여인은 세라미처럼 머리에 촉각이 돋지 않은 지구인 모습 그대로 아닌가! 그녀는 옷을 어깨에서 비스듬히 흘린 인도의 여성과 똑같은 차림이었다. 아니, 인도 여성이 이 별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금방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신온철은 못이 박힌 듯이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안차게 눈으로 쫓았다. 한눈에 그 신비스러운 여인에게 반한 것일까? 일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이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살갗도 개미 우주인의 보라색과 달리 희맑은 여인은 언뜻 보기에 25살 가량 되었을까? 놀라움에 감겨 너누룩해진 작업장의 복판으로 걸어온 감독관은,
"여러분이 수고하는지는 알지만 워낙 솜씨가 서툴러서 조각 전문가 한 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여인은 물론 세라미 족 출신입니다. 그러나 돌연 변이에 따른 기형아입니다. 이곳에서는 우주인의 표준에 어긋나는 돌연 변이의 기형아는 동족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기로 법률이 정하고 있습니다만 이 우비구니만은 특별히 감싸주고 있습니다. 조각에 대한 솜씨가 세라미 족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니까요. 여러분의 도움이 될 듯 해서 안내하는 것입니다. 지도를 받으시오."
감독관은 제법 두 볼에 미소를 띄우며 인사 소개를 했다. 우비구니라고 불린 여인은 아무말 없이 고개만 다소곳이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고개를 들었을 때, 신온철의 열기 띤 눈길은 우비구니의 조용한 시선에 닿아 어쩔 줄을 모르는 듯 했다.
"이만석 박사, 우비구니를 인수하시오."
감독관의 재촉하는 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신온철이 온 가슴을 방망이질하는 충동을 못 이겨 저도 모른 결에 한 발짝 내딛은 일은 또한 무슨 까닭일까?
 
운명의 첫사랑
 
신온철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에라도 이끌리는 듯 아련한 생각 속에서 우비구니의 앳된 얼굴만이 크게 돋보였기 때문에 발 밑이 들떠 있었다. 상고머리의 그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잡았을 때, 우비구니는 벌써 눈길을 거두고 이만석 박사가 서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발길을 옮기고 있지 않은가. 신온철은 그 자리에 선 채, 노고지리 별의 젊은 여성의 제스처를 지켜 볼 도리밖에 얹었다. 그녀는 이만석 박사 앞으로 다가서더니 나붓이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한 뒤, 두 손으로 합장을 했다.
'두 손으로 합장하는 몸짓은 X4호 별에서도 보았는데, 은하계의 우주인들은 모두 그러한 시늉으로 순종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일까?'
신온철은 생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그녀의 포동포동한 손등이며 손가락이 탐스럽게 눈에 뛰어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고를 좀 해줘야겠어요. 우리는 예술간가 아니어서 만사가 서투르니 빨리 공사를 끝내고 해방되도록 한껏 도와주시오. 언젠가는 은혜에 보답할 날도 있겠지요. 부탁합니다."
이만석 박사는 평범한 말로 인사했다.
"여러분의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제가 갖은 힘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으니 제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셔요."
단정하게 서서 방실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온몸에서는 꾸밈없는 기품이 풍겼다. 신온철 뿐 아니라 처음엔 당황했던 나머지 대원들도 멀찍이 이를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는 결에 친밀감을 느꼈다. 우비구니는 과연 조각의 명수였다. 그녀는 3차원의 곡선 처리 따위는 눈감고 떡을 썰어 내는 한 석봉의 어머니 못지 않게 척척 맞춰나갔다. 그녀를 도와서 일하는 황영숙의 솜씨도 나날이 늘어가서 한 달이 지날 무렵에는 황영숙도 일류 전문가의 수준에 달하는 듯했다. 돌을 쪼개고 새기는 즐거움을 이제는 대원들도 터득하게 되어 공사는 가속적으로 진전되어 갔다. 그러는 짬짬이 역사학을 전공한 신온철은 우비구니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이만석 박사의 지시를 지켜야만 해. 서로의 공동 운명을 배반해서는 안 되는 거야.'
신온철은 애절한 마음을 억누르며 우비구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때로는 등지고 일을 해 보았으나,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은 이미 둑이 터져 흐르는 여울과도 같았다. 한 눈에 반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걷잡을 수 없을 줄이야 미처 몰랐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마음껏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신온철씨, 너무 흥분해서는 불행이 뒤따르는 법이에요. 냉철하게 행동하기로 우리는 맹세하고 지구를 떠나지 않았어요. 감정을 죽이세요."
황영숙과 방미란이 신온철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번갈아 가며 충고를 하곤 했다. 그 때마다 신온철은 멋쩍게 웃을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신온철이 벼르고 벼르던 기회가 왔다. 노고지리 별에 지구의 소형 도시가 완성되던 날, 세라미 족의 개미 우주인 관계자들이 준공식을 축하하려고 파티를 베풀었다. 파티는 서울의 비원보다 몇 10배 우아하고 널따랗게 꾸민 정원의 한 누락에서 베풀어 졌는데, 서로 웃어가며 그럴듯하게 비위를 맞춰 가는 파티의 자리에 우비구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온철은 우비구니가 없는 사실을 깨닫자, 온 가슴이 새삼스럽게 방망이질치는 것을 꾹 누르며 열띤 눈길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찾아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는 결에 밖으로 뛰쳐나와 수목이 우거진 정원의 풀향기를 헤치며 그녀의 행방을 찾아 다녔다. 수풀로 가려진 석탑 뒤에도 없었고 연못가에도 없었다. 허둥지둥 돌계단을 올라가 아름드리 나무 사이를 찾아갔는데, 아! 우비구니가 4차원의 불상이라고 이름지은 특이한 모양의 돌부처에 기대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걸음을 멈춘 신온철은 보라색 별빛에 어린 우비구니의 신비롭고 황홀한 모습에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는 온몸의 용기를 불어 일으켜 조심조심 돌부처 쪽으로 발짝을 옮겨갔다.
"우비구니, 당신은 왜 외로이 서 있는 거요. 함께 파티의 자리로 되돌아갑시다."
신온철은 나직이 말을 건넸다.
"…"
"왜 대답이 없나요? 나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세요."
신온철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도 우비구니는 눈을 감고 선 채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온철은 미칠 것만 같았다. 더욱 몸이 달아오니 저도 모르는 결에 그녀의 두 손을 왈칵 붙잡으며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세요. 저는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와 가까이하면 당신이 불행해져요. 그만 돌아가셔요."
우비구니는 도리어 애원하다시피 가냘픈 소리로 두 손을 뿌리치려고 몸을 비틀었다.
"알아요. 당신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나의 불행쯤은 문제가 아녜요. 나는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첫눈에 당신이 나의 운명의 여자라는 것을 금방 느꼈지요.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 함께 돌아가든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립시다."
신온철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부짖었다.
 
고릴라와의 대결
 
신온철은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가 있는 산 속을 향하여 땀을 흘리면서 줄달음 치고있었다. 한 손으로 우비구니를 이끌면서 그들은 골짜기를 지나 산허리로 올라서고 다시 고개를 넘어 낭떠러지 아래까지 다다랐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위험해요. 고릴라의 본거지가 산비탈에 있을 거예요."
우비구니는 손짓을 하며 일러주었다. 두 탈출자는 지혜를 짜내면서 낭떠러지의 바윗돌을 붙잡고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참이었다. 우비구니도 자기와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탈출하고 싶었으리라 지구의 탐험대원들의 상냥스러운 태도가 마음에 들었으리라.
신온철의 안내를 받아가며 기를 쓰고 뒤따르는 우비구니의 표정은 결의에 가득 차 있으며 숨소리는 거칠었다. 눈 앞이 아찔해진 두 사람은 하마터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렇다니까. 공연한 모험을 하지 않도록 발바닥에 반세포 탐지기를 붙여놓지 않았는가! 너희들은 너무 무모한 짓을 저지른 거야."
세 개미 우주인 앞에서 신온철과 우비구니는 대항할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그들에게 묶여 허황한 사랑의 도피행을 몇 시간만에 결단내고 만 것이었다. 두 젊은 남녀는 우주 원정대원들과 격리된 채 이튿날 운동장에서 또 다시 심판을 받게 됐다.
험상궂은 증오에 찬 얄미운 목소리로,
"젊은 기형아가 사랑을 맺으려는 몸부림은 이해할 수 있으나 세라미 족의 율법을 어기고 경계선을 넘어서 도망간 사실은 용서할 수가 없다. 더욱이 지구의 포로 한 사람과 행동을 같이 한 사실은 우리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의 책임이 중하며 이는 마땅히 사형으로 처형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한가? 또한 지구인의 경우 아무리 율법을 모른다고 해도 포로의 신세를 잊고 특히 같은 처지에 놓인 동료를 배반한 일 또한 그저 둘 수 없다. 배반자의 처벌을 어떻게 하는 편이 온당하다고 보는가?"
여기에 맞추어 운동장의 구경석에 자리잡은 남녀노소들은 마치 스페인의 투우장에서처럼 저마다 손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우비구니의 사랑은 동정할 만하다. 법률로서 사랑을 금할 순 없다. 그대로 석방해라!"
"아니다. 경계선을 넘은 죄는 사형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죽여라!"
"노고지리 별의 으뜸가는 예술가를 죽여서는 안 된다. 목숨만은 살려 주어라!"
왁자지껄한 고함 소리를 가려낸 검찰관은 마침내 우비구니의 죽음을 면하게 하고 대신 종신 징역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 선고를 들은 신온철은 자기의 짝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저는 괜찮아요. 당신의 생명이 무사하다면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어요."
검찰직원의 우악스러운 팔에 끌려가면서 우비구니는 가까스로 이런 말을 남겼다.
"다음으로 이 무엄한 지구인은 어떻게 처형하리까?"
검찰관의 목청을 씻는 듯한 소리가 떨어지자,
"월경 죄는 사형으로 다스려라!"
"자기네 동료를 배반한 죄는 우리가 다스릴 순 없다. 그들 동료들에게 맡겨라!"
"사형 대신에 고릴라와 결투를 시켜봐서 이기면 놔주어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의견이 나온 중에서도 고릴라와의 대결이 두드러졌다. 검찰관은 중론에 따라 고릴라와 신온철을 대결시키기로 판정했다. 신온철은 섬뜩한 생각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검찰직원이 말없이 쥐어 주는 곤봉을 마다할 순 없었다. 운동장 저편에서는 벌써 곤봉을 한 손에 움켜쥔 3m키의 거대한 고릴라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고 있지 않는가! 신온철은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싸워서 깨끗이 죽어야겠다.'
그 우락부락한 시커먼 고릴라의 곤봉을 한 대 얻어맞는 날이면 그대로 죽어 버릴 것이 뻔했다. 신온철은 맨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운동장의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볼 뿐, 원정대원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지 없는지 신온철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고릴라는 이러한 결투에 자주 나와 봤는지 태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신온철도 거칠어지는 숨을 죽이며 몸을 사리고 기다렸다. 온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다가온 고릴라는 꽥꽥 소리를 내며 윽박지르더니 단번에 박살이나 내려는 듯 곤봉을 휘둘러 내리쳤다. 신온철은 재빨리 왼편으로 비껴 서며 머리 두 동강이 나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곤봉을 고쳐 쥐고 허점을 엿보다가 눈을 찌르려고 벼르는 수밖에 기운으로서는 도저히 당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차례 허탕을 친 고릴라는 사나운 목소리로 우르릉대더니 이번에는 목을 까륵거리면서 단숨에 해치우려는 듯 마구 곤봉 세례를 퍼부었다. 이리저리 쫓기면서도 신온철은 상대방의 약점이 명치뼈의 급소와 목구멍과 두 눈에 있음을 알아차리고 몇 번이나 노려보았다.
곤봉과 곤봉이 맞닿아 딱딱 하는 무딘 소리가 운동장에 허황하게 울릴 뿐 30분이 지나도록 승패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는 신온철의 날랜 동작에 더욱 성이 난 고릴라는 느닷없이 껑충 뛰더니 왼팔을 길게 뻗쳐 졸지에 신온철의 허리춤을 붙잡고 말았다. 그리고 곤봉을 휘둘러 막 내려치려고 눈을 부릅떴다. 위기일발이란 이런 순간을 이르는 말 일 것이다. 신온철의 머리는 이제 두 개로 쪼개져 산산조각이 날 것은 뻔했다. 신온철은 곤봉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며 도리어 고릴라의 배를 향하여 돌진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때, 어디선지 한 가닥 광선이 번득이더니 고릴라는 두 눈이 부시어 순간적으로 밸런스를 잃고 허공을 내리치고 말았다. 이 때다. 마음 속으로 외치며 신온철은 와락 뛰어 올라 고릴라의 앞가슴의 털을 움켜쥐고 곤봉으로 고릴라의 두 눈을 정신없이 찔렀다. 눈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자 고릴라는 더욱 흉악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신온철은 시력을 잃은 고릴라의 뒤를 돌아 펄쩍 뛰어올라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정수리와 뒤통수를 얻어맞은 고릴라는 마침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육중한 몸집이 땅바닥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군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손뼉을 쳤다. 신온철은 결정적인 아슬아슬한 순간에 번쩍하며 고릴라의 두 눈을 부시게 한 광선 때문에 결투에서 이겨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운동장의 서쪽 나무 뒤에 숨은 마치나리 소년이 거울과 같은 오목 렌즈를 쥐고 광선을 반사시켜 준 덕분이었다. X4호 별에서 지구에 데려다 달라고 밀항해온 삐오라 족의 마치나리 소년이 슬기롭게도 지구 도시를 벗어 나와 제 구실을 한 것이었다.
신온철은 이 사실을 알고 소년의 손목을 붙들고 목놓아 운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신온철이 목숨을 걸고 고릴라와 싸우고 있는 동안 이만석 박사를 비롯한 우주 원정대원들은 지구 도시 극장에서 특수 장치로 된 스크린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개미 우주인 세라미 족이 전에 찍어 놓은 기록 영화였다. 거기에는 지구와 화성과 목성, 금성 등의 진화 과정을 담은 기록사진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개미 우주인들이 태양계와 RS6호 별이 최단 거리에 접근했을 때 원정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구가 빙하 시대를 겪기 전의 식물 전성 시대에 그들은 지구에 삶의 터전을 구하러 가보았으나 때마침 은하계의 중심에서 방사하는 우주선의 강한 주기에 맞부딪쳐 거대한 식물과 공룡과 같은 생물이 차례 차례로 쓰러져 가는 바람에 영구 기지를 건설하지 못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세라미 족이 먼저 지구를 방문했단 말인가?'
천문학을 전공한 문창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저번에 몽고리안족의 역사를 설명한 것으로 보아 개미 우주인들의 얘기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듯도 했다. 원정대원들은 모처럼 스크린에 비친 지구의 모습, 목성의 모습을 보며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는가 하면 감정이 날카로운 방미란 양은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찍은 - 그렇다고 해서 1~2년 사이의 것이 아니라 우주 단위로는 5백 년 전의 사진이 있는 것은 또한 어찌된 셈일까?
이만석 박사는 스크린을 지켜보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만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개미 우주인들이 좌우하는 전파나 광선은 과연 어떠한 성질의 것일까? 하루바삐 정체를 캐내고 싶은 의욕만이 무르익어 갈 뿐이었다. 개미 우주인들은 신온철이 우비구니를 따라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감쪽같이 대원들을 속이고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있는 참이었다. 문명의 수준이 지구와는 다르니 꼼짝 말라는 과시였는지도 모른다. 그럴듯한 속임수에 빠져 온 대원이 마음을 놓고 있는 동안 오직 마치나리 소년만은 제 육감으로써 신온철의 신변이 이상이 생긴 것을 예감하고 남몰래 운동장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의 도움으로 위치를 모면한 신온철은 검찰관의 판정을 받고 호송 차에 몸을 싣고 지구 도시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극장으로 한 발짝 들어선 신온철은 정신없이 기록 영화를 구경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모습을 보자 또다시 허무감을 느꼈다.
 
황영숙의 볼모살이
 
신온철의 탈출 사건은 한낱 어리석은 감정의 장난으로 여겨졌을 뿐, 원정대원들은 그를 함부로 괴롭히지 않았다. 우주의 새로운 문명에 접하여 세라미의 개미 우주인과 사적인 접촉을 갖고 싶은 심정은 아무에게나 똑같은 감정이었기 때문이리라. 다만 신온철은 우비구니에 혹해서 이성을 잃고 행동의 시기를 잘못 판단했을 따름이다. 그의 탈출 사건이 있은 지 3년이 지났다. 갖가지 교류가 서서히 일어난 뒤, 개미 우주인들은 원정대원들이 결코 자기네들에게 해롭지 않는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인종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다.
"드디어 우리 대원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인정됐다. 오늘부터는 조심스럽게 RS6호 별의 비밀을 찾아 낼 수 있는 기회가 굴러 들어온 셈이다. 조직적으로 행동해야 된다."
어느 날 저녁 나절에 이만석 박사는 입이 벌어지도록 기쁨을 드러내면서 큰소리로 대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는 막 검찰청에서 되돌아 온 참이었다. 검찰관 오소리는 이마가 불거져 여간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었으나 원정대원들과 오랜 접촉을 겪고 있는 동안 원정대원들이 결코 적대적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는데는 조건이 하나 있소. 대원중의 황영숙을 우리 사무실에서 비서로 근무시키겠소."
오소리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소. 대답은 본인의 생각을 물어본 뒤에 하겠소."
바라고 기다렸던 기회를 놓칠세라 이만석 박사는 선뜻 언질을 주었다. 비록 오소리가 황영숙을 볼모로 앉힐 생각이 있더라도 황영숙은 한결 영리한 여성이었다. 결코 굽히지 않을 눈치 빠른 여자 대원이었고 더욱이 생물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동물의 습성에는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석 박사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선뜻 대답한 것이었다. 그리고선 지구 도시로 돌아와서 이만석 박사는 따로 황영숙을 제방에 불러들여 오소리의 그러한 뜻을 비쳤다.
"그까짓 건 문제가 안돼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속담이 있지 않아요. 안성맞춤인 걸요."
자신 있게 매듭 지어주는 황영숙의 해맑은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이만석 박사는 속으로 얼마나 고마웠는지. 이런 곡절이 있은 지 닷새만에 자유 행동에 관한 정식 허가가 내리고 대신 황영숙은 아침이면 규칙적으로 꼬박꼬박 검찰관 오소리의 사무실에 출근하게 되었다.
황영숙은 오소리가 일러 준대로 전자 계산기의 단추를 조작하는 일을 맡아 해 내고 있었다. 세라미 족의 중요한 인물들의 동태를 적어놓은 카드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은 것이었다.
먼 빛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오소리의 눈길에 음탕한 눈치가 어려 있지는 않았다. 첫째 생식의 배수체가 다를 뿐더러 미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는 막연한 호감이 있을지언정 야릇한 충격이 있을 리가 없었다. 황영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늘도 가르쳐 준 일을 꾸준히 해치우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카드에 적힌 과학자 중에서 원정대원과 통할만한 인물이 없나 하고 남몰래 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때? 황영숙씨, 하는 일이 고되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불편한 점은 없어? 일이 손에 맞지 않으면 서슴없이 나에게 알려줘야겠어. 더 손쉬운 일로 바꿔드릴 용의가 있으니…"
오소리는 이따금 농담 섞인 말투로 떠들어 보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는 지구에선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척척 해 냈으니까요."
"그렇던가요. 아무튼 카드 정리는 급한 일입니다. 잘 부탁해요."
오소리는 처음보다는 훨씬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오소리는 황영숙의 일에 대한 습성을 몸소 관찰하고 기록해서 「지구인의 속성」이라는 논문으로 우주 박사 학위를 받아볼 생각을 품고 있었다. 오소리는 야심에 찬 인물이기도 했다. 날마다 저녁이면 황영숙은 고달픈 몸을 이끌고 지구도시로 돌아오곤 했다.
"언니 오늘은 무슨 일을 거들었지? 재미있는 일이야?"
방미란은 으레 궁금하다는 듯이 황영숙에게 물었다.
"세라미 족의 인구는 많지 않니. 오늘은 의사들의 동태를 정리했어. 별의별 연구를 다하고 있더군. 이를테면 영하 1백 70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소화 문제라든지 동면 문제라든지 하는…"
"퍽 재미있겠어. 난 요즘 방사선 의학 연구소에서 강의를 듣고 있어요. 그저 그래요."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니, 서로 기운을 내자."
"응, 문제없어."
두 여자 과학자는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황영숙은 과연 과학자들의 카드를 정리하게 됐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정리해 가면서도 창 너머로 들이치는 보랏빛 광선에 또렷이 적힌 카드 한 장에 눈길이 못 박히고 말았다. {에스무리 박사. 나이 153살. 중력 학자. 특히 RS6호 별이 은하계의 회전 궤도의 작용으로 변하는 원심력의 변화와 RS6호 별이 기상 변화로 생기는 질량 변화를 전공. 요즘은 지중 은하의 개발에 골몰하고 있음. 아직도 독신. 취미는 태양계 연구} 황영숙의 눈을 반짝 뜨게 한 까닭은 에스무리 박사의 취미가 태양계 연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중력학자 라면 지구 위에서는 지구물리학자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말할 나위조차 없이 그는 RS6호 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더욱이 태양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주인이라면 지구인과의 대화도 크게 환영할 것이다.
황영숙은 이날 밤 발걸음도 가볍게 되돌아와 이 사실을 이만석 박사에게 자상하게 보고했다.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난 이만석 박사의 두 눈이 힘차게 번쩍이는 것을 그녀는 혼자 흐뭇해했다.
 
문명의 본질은?
 
"여기에 지중 도시가 있다니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군. 어떻게 해서라도 탐지해 봐야겠어."
독수리 호의 대장 홍성기와 무궁화 호의 부장 박민호와 이마를 맞대고 이만석 박사는 결심을 내비쳤다.
"옳은 말씀입니다 마는 통행증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놈들도 거기만은 비밀로 하고 있는 듯 하지 않아요."
홍성기가 먼저 걱정했다. 그는 지질학을 전공한 까닭에 지하의 비밀을 일반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 통치자들의 심정엔 밝았던 것이다.
"황영숙 대원이 통행증을 입수해 내지 못할까?"
박민호 부장이 한마디한다.
"음, 오소리의 허가를 얻어본다? 에멜무지로 부탁이나 해보겠다."
이만석 박사는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황영숙과 오소리의 흥정은 생각하기보다 손쉽지가 않았다. 황영숙이 며칠을 두고 애걸복걸한 끝에 오소리는 이만석 박사가 빈손으로 여행한다는 조건을 붙여 허락해 주었다.
"빈손으로라도. 좋아요. 빈손일지라도 보고 듣는 게 얼마야."
이만석 박사는 RS6호 별의 지중 도시로 들어갈 채비를 차렸다. 산소 탱크에 넉넉한 산소를 공급하고 대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난 것은 이튿날 저녁나절의 일. 지하 도시로 들어가는 차량은 진공 파이프의 작용으로 삽시간에 목적지에 다다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지구의 승용차처럼 시트가 마련되어 있고 꼬리가 두드러지게 뾰쪽한 차에는 한 사람의 안내인과 딴 손님 두 사람이 탔다. 이만석 박사는 땅 속에 마련된 공원이며 투명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호수까지 있어 흰빛의 새들이 물 위에서 노닐고 있지 않는가. 그는 RS6호 별에서 본 흰색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땅위에서는 모든 것이 보라색의 세상이어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흰빛의 산뜻함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목적지에 다다른 이만석 박사는 일부러 휘뚤휘뚤하게 만들어 논 언덕길을 올라서 에스무리 박사가 연구하고 있다는 지중 운하개발연구소에 이르렀다.
"이 분이 에스무리 박사요. 이 분은 태양계의 지구에서 온 이만석 박사. 두 분이 인사하십시오."
안내를 맡은 개미 우주인이 소개를 했다. 두 사람은 한결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공손히 인사를 하고 합장을 했다. 에스무리 박사는 느닷없이 눈 앞에 나타난 지구인을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는지 보랏빛 얼굴이 상기되어 보였다.
"지구인이 노고지리 별까지 찾아왔다는 소문은 벌써 들었지만 운하를 개발하려니 일손이 바빠서 그 동안 지상에 외출할 겨를이 통 없었어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에스무리 박사는 멋쩍게 변명을 했다. 그러나 그의 취미가 태양계의 연구라는 선입감 때문인지 이만석 박사는 딴 개미 우주인에서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친밀감을 느끼는 터였다.
“태양계를 연구하고 계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도움이 되면 영광이겠습니다. 우리는 당신 별의 문명 수준을 이해하러 왔으니까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협력해 주시오."
"잘 알겠습니다. 내가 이처럼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우리 68대 선조가 태양계 탐험에 참가하여 지구까지 가 본 기록을 읽었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혈통이라는 게 묘한 것이니까요."
두 과학자는 맞장구를 쳐가며 그칠 줄 모를 잡담을 늘어놓았다. 이튿날 이만석 박사는 에스무리의 안내를 받아 지중 운하의 중수를 생산하는 공장을 견학했다. 모두 오토메이션 화하여 한쪽에서 물이 퐁퐁 쏟아져 나오는데 그들은 원소를 합성하고 분리하는데 박테리아를 활용하고 있는 점이 신기했다. 전기 분해의 세계는 먼 옛날에 완전히 극복했다는 뒷 이야기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친밀해지자 이만석 박사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도대체 RS6호 별의 문명이 이처럼 발달하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궁금해하는 이만석 박사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 볼 뿐 에스무리는 한 참 말이 없었다
 
무아오지 혜성의 접근
 
"그러한 비밀을 악용하려는 게 아니라 지구와 태양계도 이 별처럼 개발되어 사람들이 편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온 인류의 행복을 위해 과학과 기술로 이바지하려는 심정뿐입니다."
이만석 박사의 진지한 말소리를 고개를 흔들고 듣고 있던 에스무리는 무슨 결심이나 한 듯, 이윽고 무거운 말문을 열었다.
"나는 다 알고 있소. 태양계의 문명은 에너지로 확산해서 지금 핵융합 반응을 가까스로 컨트롤했을 따름이오. 우리는 곤충의 세계에 친척이 있듯이 원소와 맞먹는 원소를 개발해 냈오. 당신들이 이른바 반세계 이론은 여기서는 실천 단계에 들어간지 오래요. 폭발물을 견제한다는 일은 한편으론 위험한 일이오. 그래서 우리는 폭발성이 없는 정반의 원료로서 에너지를 손쉽게 얻고 있을 따름이오. 우리는 그밖에도 중력파를 가속하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조심스럽게 에스무리는 가르쳐 주었다. 이만석 박사는 그 정도의 이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알고 싶은 것은 무슨 원소를 어떤 원소와 맞먹어 소멸 에너지를 내는가 하는 비밀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이를 추구하기로 하고 에스무리와의 대화를 얼버무려 버렸다. 에스무리 박사는 RS6호 별의 질량이 과거에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는 말을 했다.
"은하계의 궤도를 돌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뜻하지 않는 왜곡된 공간을 통과할 적이나 강력한 방사선이 별 언저리를 지나칠 때, 질량의 변화는 지상의 표면 변화로서 생기기 마련이었습니다. 올해도 무아오지 혜성이 노고지리 별에 접근하는 주기에 해당하는데, 아직도 별 자체의 궤도를 바꿀만한 추진력이 개발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한입니다."
에스무리 박사는 침통한 낯빛에 어두운 그림자를 띄우며 말했다. 이만석 박사는 과학자의 고민이랄까 양심에는 국경도 변경도 없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일이라면. 이만석 박사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그와 공동 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석 달째, 이만석 박사는 RS6호 별에서의 모든 박테리아는 완전히 컨트롤되어 생산에만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지구의 인류는 얼마나 가엾은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따위도 컨트롤 못한 채 병이다, 흉년이다 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생지옥의 그것처럼 눈 앞에 아른거릴 뿐. 언젠가는 인류도 노고지리 별의 세라미 족과 같은 문명 수준에 반드시 도달하겠지만, 그 동안의 애처로운 희생을 단축하고 싶은 양심의 울부짖음을 이만석 박사는 도저히 저버릴 순 없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에스무리가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을 기밀 문서를 훔쳐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일 신온철처럼 실패하는 날이면 당장에 목숨을 잃어야 되는 비극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만석 박사는 무의미한 나날을 지하 도시에서 보내고만 있을 것일까?
"이만석 박사 아무래도 세상이 심상치 않소. 무아오지 혜성의 궤도가 바뀌어 예정보다 빨리 RS6호 별에 접근한 모양이오. 방금 지상에서 보내온 정보는 상당히 긴박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소. 당신은 어쩔 참이오"
어느날 아침 에스무리가 급히 텔레비전 전화로 알려 주었다. 이만석 박사로선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사태였지만, 개미 우주인들의 표정은 사뭇 긴장에 싸여 있었다.
"지상으로 돌아가서 원정대와 의논하겠소. 나로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럴 때가 아니오. 우리는 이러한 비상 사태를 염려해서 이미 지하 도시를 건설해 놓은 것이 아니겠소? 세상 일은 모르니까. 어서 내 사무실까지 와 주시오."
에스무리 박사의 숨가쁜 소리에 재우쳐진 이만석 박사는 그제야 덩달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차를 몰고 에스무리 사무실로 뛰어갔다.
"한시가 바쁘오. 무아오지 혜성이 만약에 우리별과 정면 충돌을 하는 날이면 인구의 80%가 희생되고 말 것이오. 이만석 박사는 그러한 최악의 상태를 예상해서 나는 사적으로 RS6호 별의 문명을 적은 비밀 문서의 카피(copy)를 한 벌 당신에게 맡기리다. 어서 지상으로 돌아가서 우리 별에서 떠날 준비를 서두르시오."
에스무리 박사는 핏발 선 눈을 빤히 뜬 채 이만석 박사의 손에 한 뭉치의 서류를 쥐어주며 독촉했다. 이만석 박사의 두 눈에 핑 도는 것이 있었다. 눈물 아닌 감격이었다.
"고맙소. 에스무리 박사, 최선을 다해 보겠소. 몸조심 하시도록…"
"행복을 비오."
더 지체할 수 없으리 만큼 사정이 급한 모양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서류를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선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지상으로 통하는 정류장으로 줄달음쳤다. 정류장에서는 벌써 지상에서 쏟아지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개미 우주인들은 태초의 원시적인 공포감에 휘말려 아우성이었다. 이만석 박사는 정신없이 두 손으로 인파를 뚫고 헤치며 상행 열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 가까스로 다다랐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손님은 열 댓뿐이었다. 스테이션의 스피커는 뚜렷하면서도 짤막하게 외쳤다.
"마지막 상행 열차 발차…"
이만석 박사는 쏜살같이 진공 파이프에 말려 들어가는 차량의 시트에 몸을 기대며 지구 도시에서 허덕거리는 대원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바심을 냈다.
 
한시가 바쁘다!
 
보랏빛이 찬란했던 세상이 졸지에 오렌지 빛으로 바뀌자, 우주인들은 질겁을 하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뭉글뭉글 떠 있는 오렌지 불덩어리를 뒤돌아보며 한 손으로 불빛을 가리면서 줄달음치는 개미 우주인들.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면서 그들은 지중 도시로 통하는 정류장을 향하여 아귀다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아오지 혜성이 접근하리라는 경보를 듣고서도 이다지 놀라지는 않았었다. 세상이 여전히 보랏빛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루밤 사이에 세상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자 개미 우주인들은 졸지에 천재지변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부리나케 검찰관의 사무실로 뛰어든 황영숙에게 오소리는 황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영숙 대원! 큰일났다. 무아오지 혜성이 궤도를 바꿔 RS6호 별로 직진해 오는 중이다. 지구인들은 한시 바삐 탈출해야 할 거다. 우리는 지금부터 지중 도시로 피난한다."
오소리는 평소에 거만하던 티를 흩날려 버린 채 들뜬 소리로 황영숙을 재촉했다. 그는 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가방 속에 서류 뭉치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느라고 정신이 없다.
"고마워요. 우리도 최선을 다 해 보겠어요."
황영숙은 뜻밖에도 침착해진 자기 자신을 느끼며 만족해했다. 그러면서도 서성거릴 때가 아니라는 긴박감에 휩싸여 그녀는 오소리의 사무실을 황급히 뛰쳐나와 지구도시로 부리나케 차를 몰았다. 거리마다 물밀듯이 아우성치는 피난민들.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뒤숭숭하다. 황영숙의 머리에는 문뜩 전쟁의 장면이 떠오르면서 몸이 오싹해졌다.
"야단났어요. 오소리마저 지중 도시로 피난가면서 우리더러 빨리 노고지리 별을 떠나래요."
허겁지겁 박민호 부장의 방으로 뛰어들어온 황영숙은 막힘 없는 소리로 외쳤다. 거기에는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을 비롯한 전 대원이 모여 불안한 표정으로 황영숙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아오지 혜성이 충돌할 기세라나 봐요. 거리는 온통 피난민들로 가득해요. 어쩌면 좋아."
황영숙의 숨가쁜 목소리는 방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홍성기 대장은 어쩔 줄을 모르고 오직 이마의 주름살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짚을 따름이었다. 이만석 박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온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문을 열어젖뜨린 채 뛰어드는 이만석 박사의 황급한 모습을 보자 대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박사님.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출발하자, 당장에 출발해야지, 모레면 우리는 혜성권 내에 들어서서 몰살되고 만다. 어서 채비를 차리도록!"
숨을 몰아쉬며 명령하는 이만석 박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원들은 뿔뿔이 자신들의 방으로 뜀박질을 했다. 노고지리 별에서 모은 자료를 챙기기 위해서. 그 틈바귀에서 마치나리 소년은 신온철의 소매를 낚아챈다.
"우비구니를 교도소에서 구출해 내야죠."
마치나리 소년은 무뚝뚝한 한 마디를 던져놓고 빤히 신온철의 두 눈을 지켜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신온철은 가슴이 덜컹했다. 멋쩍은 생각이 온몸을 스쳐 흐름을 짜릿하게 느꼈다. 자기만 탈출하려던 뉘우침.
"알았다. 함께 가자!"
신온철은 자기의 짐을 챙기자 마치나리 소년의 손목을 붙잡고 지구 도시를 뛰쳐나갔다. 바깥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벌써 기온이 오른 증거이리라. 신온철과 마치나리는 좁다란 뒷길을 골라 비틀비틀하면서도 단숨에 교도소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바지에 다다랐다. 교도소의 정문은 열려진 채 경비원의 그림자는 도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피난하고 말았구나. 수용된 자를 혹 죽이지나 않았을까?'
신온철의 가슴은 순간 요란스럽게 방망이질을 했다.
마치나리 소년은 잽싸게 감방을 기웃거리며 핏발선 눈초리로 우비구니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철장 속에 갇힌 개미 우주인의 죄인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저 두 사람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을 뿐. 돌아서 다섯번 째에 이르렀을 때,
"여기 있다!"
하는 어렴풋한 소리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앞을 다투며 뛰어갔다.
과연 제 7 감방의 철책을 손에 쥐고 해쓱해진 우비구니가 얼굴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신온철씨, 이게 웬일이에요."
눈이 휘둥그래진 우비구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정은 나중에 얘기하리라. 우선 이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철장의 자물쇠는 철통같이 튼튼해 보였다. 어느새 구해왔는지 마치나리 소년이 쇠망치로 자물쇠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에선 구슬땀이 내내 흐르고 있지 않은가? 신온철은 쇠망치를 가로채서 자물쇠를 내리쳤다. 대여섯 번 후려갈기는 통에 자물쇠 통이 마침내는 휘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어서 나갑시다. 한시가 바쁘니…"
신온철은 우비구니의 차가운 손목을 붙잡고 재우치며 마치나리와 함께 교도소를 내달았다. 지구 도시로 되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로켓이 있는 곳으로 가자!"
세 사람은 숨을 돌릴 겨를조차 없이 그 길로 산봉우리를 향하여 줄달음쳤다.
 
폭발하려는가?
 
"발사!"
이만석 박사의 명령이 어수선한 기계 소리를 뚫고 침착하게 울렸다. 마지막 카운트다운 끝에 무궁화 호에 뒤이어 독수리 호도 순조롭게 궤도에 올라섰다. 갑자기 들이닥친 긴장에 진종일 둘러싸였던 대원들은 그제야 저마다 제자리에서 긴 한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 것이었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RS6호 별, 그리고 세로 꼴의 한쪽 모서리에 위치하는 곳에서 불타고 있는 무아오지 혜성,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그 꼭지점으로 궤도를 잡은 뒤 광파 로켓 엔진에 점화했다. 속도는 한결 더 빨라졌다.
"전원이 무사히 탈출한 것을 우선 축하한다. 그러나 하루를 지나야만 무아오지 혜성의 영향권 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제자리에서 계속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이만석 박사의 말투는 극히 사무적이었다. 우주선 내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신온철은 우비구니를 되돌아보았다.
'아직도 기겁을 하고 있군. 차차 설명하면 풀리겠지. 어쨌든 노고지리 별에서 으뜸가는 조각가를 데리고 온 사실은 얼마나 장한 일이냐. 지구에 돌아가는 날이면 얼마나 사람들이 부러워할까?'
신온철은 우비구니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우주 세계의 왕자와 공주가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치나리는 본디대로 독수리 호에 타고 있었다. 그 소년의 기지로 우비구니를 구출해 낸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었다고 신온철은 생각을 되풀이했다. 우주 탐험대가 무아오지 혜성의 영향권 내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대원들의 곤두섰던 신경이 하루아침에 풀리고 말았다.
"우리는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당신이 지구도시의 건설을 거들어 준 일을…"
이만석 박사는 우비구니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
"태양계 사람들이 이처럼 평화로운 것도 모르고 노고지리 별사람들은 처음에 퍽 의심을 했지요. 너무 오랫동안 자기문명의 테두리 속에서만 살아 온 탓인가 봐요."
우비구니도 그 동안의 경과를 설명 듣고 우주 원정대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자,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노고지리 별의 참변은 참혹했다.
"박사님, 저걸 보십쇼."
박민호 부장이 가리키는 천체 망원경 스크린에 RS6호 별은 독수리가 노리는 병아리 같았다. 무아오지 혜성은 마치 우주 공간의 유령처럼 검은 머리에 시뻘건 불 꼬리를 한없이 끌며 RS6호 별을 보고 돌진하더니 고개를 잠깐 돌리는 듯 외면하다시피 RS6호 별을 스쳐갔다.
 
천체와 천체의 우연한 조우
 
오렌지빛 화염이 천지를 뒤덮다시피 발산하더니 혜성의 꼬리는 RS6호 별의 표면을 어루만지듯 서서히 지나쳤다. 처음엔 거머삼킬 것 같은 기세였던 것이 다행이 정면 충돌을 면하고 유유히 지나친 것이다. 스크린에 비친 이 광경을 보면서 모두 숨을 죽였다. 아마도 섭씨 1,700도의 고열이 발생했으리라. 노고지리 별의 지상에 남아날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원들이 허둥지둥 로켓 기지로 쫓아 올라왔을 때, 허망한 눈초리로 어쩔 줄을 모르던 고릴라 떼들의 가엾은 운명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노고지리 별의 개미 우주인들은 아득한 먼 옛날에 태양계에 기지를 마련하려고 지구에까지 다녀간 문명의 선구자들이었다. 지구보다 훨씬 앞선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지만 천체와 천체의 역학 관계를 해결하는 재주는 미처 손에 넣지를 못했다.
"인구의 4분의 3이 순식간에 불타 버리고 지상에 있던 모든 건물과 식물은 증발해 버렸다. 지구인들의 안전을 빈다."
나중에 중력학자 에스무리가 보내온 무전 연락으로 원정대원들은 그 처참한 - 어쩔 수 없는 - 광경에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 그러나 우비구니는 노고지리 별의 애처로운 운명에 그다지 슬픈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같이 보였다. 자기를 기형아라고 학대하던 개미 우주인에 대한 앙심 때문일까? 또는 지금 자기와 모습이 비슷한 지구인의 세계에 동화한 까닭일까? 우주에는 사람의 힘으로선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세계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거대한 힘과 힘의 충돌이지 결코 정신과 힘의 대결이 못된다는 것이 고대 혜성과의 마주침에서 증명되지 않았는가! 어느새 동면실에서 소생했는지 독수리 호의 김동수가 부르는 노래소리가 선실 속을 적시고 있었다.
 
뜨거운 공간에서
차가운 희망에 사는
우리는 우주 나그네
불과 물이 엉겨서
딱딱해진 별과 별들
오직 사람만이
눈물이 있다네 웃음이 있다네
우리는 꿈을 밝히는
우주 나그네, 우주 원정대
 
메마른 기계 소리를 훈훈하게 해 주는 노랫소리는 저마다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계획이란 예상할 수 있는데서 짜여지는 것이지 은하계에서처럼 미지의 세계에선 아슬아슬한 순간과 순간이 연속될 뿐이 아니겠는가하고 노래는 질문하고 있는 듯했다.
 
위기! 타래 공간
 
독수리 호에 탄 마치나리 소년은 김동수와 곧잘 어울렸다. 그는 바둑보다는 장기가 더 흥겨운 모양인지 나중에는 김동수와 맞장기를 두는 실력도 발휘하곤 했다. 근 4년 동안이나 동면실에 들어있던 김동수의 정신 이상은 이제는 완전히 나아져 방미란을 붙들고 헛소리를 하는 버릇도 없어졌다. 다만 그 전에 신경과민으로 노스탤지어를 노래하던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 차라리 기분 좋은 일이리라. 우비구니는 그녀대로 한국말과 역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신온철이 역사를 전공한 만큼 안성맞춤이었다.
"3면이 바다라면서 어획고가 형편없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비구니의 질문을 받자,
"아직도 봉건적인 사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죠,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테니…"
신온철은 얼버무려 버리곤 했다. 아무래도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대목은 우비구니에겐 금방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이러구러 우비구니의 한국말 실력이 제법 익어 일상 용어에 지장이 없을 만큼 향상되었다. 한 때는 남몰래 탈출하려다가 붙잡힌 사이니 만큼 서로 정이 들어 어학 공부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가 이처럼 평화로운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이만석 박사와 박민호 부장, 그리고 홍성기 대장과 윤상운은 에스무리로부터 받은 RS6호 별의 문명 기밀을 잠자코 정리하고 있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생산 면에만 활용할 수 있게 컨트롤했으니 대단한 수준이야. 금속 용해뿐 아니라 농작물을 합성시키는데도 바이러스를 이용하고 있으니 이것은 효소 따위로 겨우 당분을 얻어 내는 지구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도 없어."
이만석 박사는 서류를 연구할수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보통 동력은 우주 공간의 중력파를 뽑아내서 활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별마다의 천문도를 어찌나 자세히 구석구석까지 작성해 놓았는지 강력한 전파성에서 발사되는 전력을 마치 축전지처럼 저장하는 특수 장치도 지니고 있었다. 평균 수명은 3백 년, 장수하는 이는 5백 년까지 살 수 있는 의학적인 연구도 완벽했다. 지구인과 비교할 때 지구에서는 산소를 그 때마다 호흡해야 되니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일이 많았지만 개미 우주인들은 질소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신진 대사가 훨씬 느린 속도로 진행될 수 있도록 생리학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만석 박사가 기밀 문서를 거의 검토해서 정리했을 무렵,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또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또 공간 계곡에 떨어진 듯 합니다."
독수리 호의 홍성기 대장으로부터 첫마디 보고를 받자 이만석 박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최선을 다해서 탈출해 보자."
비상벨이 요란스럽게 울리더니 우주선 내에서는 삽시간에 전투 태세로 돌입했다. 은경 북동쪽 25도의 감마 지점에서의 불상사였다. 줄기차게 치달리던 로켓이 폭삭 내려앉더니 마치 소용돌이나 회오리바람 속에 휘말린 듯 기를 못쓰고 빙글빙글 돌고만 있지 않은가!
'광속으로 돌파하는 공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니 말이 되느냐 말이야.'
박민호 부장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으나 정반대였다. 여전히 회전하며 빠져나가는 물구멍의 물처럼 로켓은 몸체를 비뚤면서 방향을 잡지 못했다.
"박민호 부장! 어쨌든 RS6호 별에서 얻어 낸 기밀을 지구에 송신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애."
이만석 박사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일렀다.
"당장에 그렇게 하죠."
박 부장의 지시로 이상호는 타전을 시작했다. 서류의 전면을 전사로 떠서 한 장 한 장씩 보내는 일은 뒤흔들리는 방 안에서 그리 손쉽지는 않았다.
흔들리고, 뒤집어지고 타래 송곳처럼 뒤틀리는 우주선은 마치 깊은 수렁에 빠져가는 침몰선과도 비슷했다.
'혹 무아오지 혜성이 통과한 공간의 충격이 아닐까?'
이만석 박사는 생각을 가다듬느라고 안간힘을 썼으나 순간 정신을 잃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이저 송신을 맡은 이상호가 맨 마지막까지 의식을 버티고 있었으나, 그도 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침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우주 함대의 마지막은 너무도 허무했다.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마치 대양을 표류하는 돛대 잃은 어선처럼 뿔뿔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우비구니와 마치나리 소년의 목소리도 끝내 들리지 않은 채, 침묵의 영원한 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꿈속으로 처럼.
 
(후기)
우주 원정대가 은하계에서 실종된 지 5백 년만에 느닷없이 성산포 우주 기지의 레이저 수신망이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스크린은 RS6호 별의 문명의 비밀을 적은 수식과 부호를 한 줄씩 재생시키며 그려 내려갔다. 방대하고 귀중한 데이터였다. 그리고선 맨 나중에 '원정대원은 결코 외롭지 않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만석 박사의 애국적 충심이리라.
 
<끝>
■ SF 단편 소설 - 명령 시대
 
- 명령만 내리면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당신의 할 일은 전부 기계가 해 줄 것이다. 수학공부나 영어 따위로 머리를 썩일 필요도 없다.
 
금발 미인
 
서기 2019년 5월 14일 오전 8시 정각 준수는 눈을 떴다. 경종 시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으나 신경을 기분 좋게 자극해서 눈을 뜨게 하는 장치가 준수를 깨운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준수 도련님"
날씬한 금발 미인이 와서 상냥하게 인사한다.
"아아! 메리 잘 있었니? 내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줘."
준수는 기지개를 치며 명령한다.
"네, 그러겠어요."
메리는 쌩긋 웃으며 대답한다. 마치 아름다운 영화 배우처럼 매력적인 이 금발 미인은 준수네의 가정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었다. 21세기는 로봇 시대, 위험한 우주나 해저의 작업, 고층 빌딩 위의 작업, 중노동, 집안일 따위의 온갖 일을 로봇이 맡아 하고 있었다.
정밀한 전자 두뇌를 가지고 외모도 손색없는 미남 미녀인 로봇들은, 인간보다 우수하고 머리도 좋지만 인간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사람과 꼭같이 생겨서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로봇의 앞가슴에는 R이라는 커다란 푯말을 붙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는 벌써 준수의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 동생인 옥희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로봇 가정부인 메리가 요리를 겸손하게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한 요리들은 모두 고주파 레인지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반숙을 잡수시면서 할머니는 메리를 힐끔힐끔 보고 계셨다. 얼마 전에 로봇을 사기로 했을 때,
"얘들아 나는 금발은 싫다. 내가 젊었을 때처럼 머리카락이 새까만 미인을 사도록 하자, 여자의 머리는 검은 것이 좋으니라."
라고 할머니가 끝까지 고집하신 것이 생각나서 준수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준수와 옥희는 학교에 갔다. 21세기의 의무 교육은 4세부터 시작하여 대학 4년을 졸업할 때까지인데 금년 14세인 준수는 중학교 3년이었다.
준수네 중학교는 집에서 15km 정도의 거리, 준수는 매일 걸어서 다녔다. 15km나 되는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서 갈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움직이는 도로」에 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점점 속도가 빠른 도로로 갈아타다가 목적지에 가까이 오면 다시 느린 도로로 옮겨 타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이는 도로가 21세기의 도시에는 그물처럼 엉키어 있었다. 준수는 이렇게 해서 15km나 되는 거리를 단 10분만에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높이 150m의 원기둥 모양의 훌륭한 건물이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이 속에 있었다.
지금 중학 3년인 준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 가기로 희망하고 있었다. 21세기에서는 누가 세계의 어느 대학으로 가든 자유지만 좋은 대학에 입학하려면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하버드 대학은 그 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심한 대학이며,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한 준수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희망만은 크게 가져야지!
 
자동 번역기의 위력
 
준수는 130층에 있는 교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1분만에 올라갔다. 학생들의 책상에는 텔레비전과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의 책상에는 공항의 관제탑같이 스위치가 무수히 장치되어 있어, 이 스위치를 조종하여 학생 개개인과 이야기하기도 하고, 전체 학생에게 동시에 말할 수 있어 수업이 능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수업 과목을 국어, 사회, 수학, 과학은 20세기와 별다른 것이 없지만 하나 특이한 것은 영어 따위 외국어 과목만은 없어졌다. 자동 번역기가 발달하여 어떠한 외국어까지도 단번에 번역해 주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프랑스 파리의 학생 연극을 보기로 합시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교실의 한쪽 벽이 스크린으로 변하여 인공 위성이 중계해 주는 아름다운 천연색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 연극에 출연하는 학생들은 물론 프랑스의 중학생이지만 들려오는 대사는 전부 훌륭한 우리말. 21세기처럼 성우가 다시 취입하지 않아도 자동 번역기가 프랑스어를 순식간에 우리말로 번역하고 동시에 인공 음성 장치가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의 목소리로 재생시켜 주는 것이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사라지고 완전한 평화가 오는데 그것은 자동 번역기의 발달로 언어의 장벽이 무너져서 각 국민의 의사가 완전히 소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업이 끝나자 준수는 움직이는 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준수네 집은 30~40층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주택 지구에 있는데, 주택 지구 전체가 거대한 투명 돔으로 덮여 있었다. 이 돔은 21세기초에 건설된 것으로 돔 속은 공기의 오염에서 완전히 보호되며 기온의 조절도 자유로왔다. 그러나 지금은 기후의 조절도 인간의 힘으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태풍 따위 천재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이 돔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조만간 철거될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금발의 로봇 메리의 상냥한 인사를 받으며 돌아온 준수에게 뉴욕에서 텔레비전 전화가 와 있었다. 준수의 텔레팔(Tele Pal)인 제인에게서 온 것이다. 20세기에서는 서로 편지로서 사귀는 친구를 펜팔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텔레비전 전화로 사귀는 친구를 텔레팔이라 한다.
"미스터 준수 잘 있었어?"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뉴욕의 제인 양은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했다. 물론 자동 번역기가 영어를 즉시 한국어로 바꿔 주었다. 준수와 제인은 우주 전쟁의 위기에 대해서 한창 이야기했다. 화성에서 금성으로, 나아가서는 토성으로 우주 탐험하는 인류에 대해 다른 별의 우주인들이 위협을 느꼈는지 최근 지구를 자주 정찰하러 온다는 것이다.
"아이, 무서워. 지구로 공격해 오지나 않을까?"
"괜찮아 지구인이 평화를 원하고 다른 별을 절대 침략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
준수는 남자답게 제인을 격려했다. 21세기의 전쟁은 지구에서 우주로 그 스케일이 달라졌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를 이렇게까지 고도로 발달시킨 과학의 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추 석
 
20세기에서는 추석날이 되면 밤하늘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달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지금은 구름에 가리운 지구를 바라보고 추석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2019년 9월 27일 준수와 테레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달나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사는 관악산 기슭의 주택 지구에서 에어택시를 타고 김포 공항까지 1분만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이미 미국의 케이프 케네디 우주 기지로 떠날 거대한 HST(극초음속여객기)가 기다리고 있다. HST의 좌석에 자리잡은 두 사람에게 앞자리에 앉은 영감님이 미소지으며 말을 걸었다.
"오호! 자네들도 달나라에 가나? 나도 달나라의 한국 도시 「옥토끼」에서 기술자로 있는 아들 녀석을 찾아가는 참일세."
"정말 꿈 같은 세상이 되었구나.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다고 떠들썩하던 것이 내가 바로 자네들처럼 중학생 일 때 였거든."
준수가 물어보니 이 할아버지는 1954년생 이라고 대답했다. HST는 3만 m의 고도를 시속 1만km로 날아 순식간에 케이프 케네디 우주 기지에 도착했다.
"야! 저거다 우리가 탈 로켓!"
은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로켓을 가리키며 한규는 좋아했다. 화학 연료를 써서 나는 로켓은 20세기의 유물,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다 강력한 원자 로켓 시대이다. 달나라로 갈 여행자 40명은 세관에서 엄격한 소독을 거쳐 대합실로 안내되었다. 달나라에 지구의 세균을 잠입시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대합실 전체가 쓰윽 움직이는 듯하여 창 밖을 내다보니 벌써 지상 30m의 높이, 대합실이 통째로 기중기에 끌려 로켓 옆으로 접속되었다. 피픽하는 압축 공기의 소리가 들리면서 로켓 속으로 통로가 열렸다. 2m 정도의 이 통로를 빠져나갔더니 거기에는 로켓의 좌석, 두 사람씩 앉게 되어 있는 좌석이 40개 원형으로 둥근 창 밑에 줄지어 있었다. 준수와 테레사는 나란히 자리잡았다. 서울서 함께 타고 온 할아버지는 바로 앞좌석에 계셨고 백인, 흑인 등 동승객도 가지가지였다.
"여러분, 로켓은 앞으로 1분 뒤에 출발합니다. 벨트를 단단히 묶어 주십시오."
스튜어디스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로켓의 스튜어디스는 21세기 여성의 최고 인기 직업이었다. … 파이브, 포오, 쓰리, 투, 원, 제로,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드디어 출발입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와 더불어 준수와 테레사는 좌석에 눌리는 것 같은 굉장한 압력을 받았다. 계속 증가되는 중력 때문에 테레사는 자기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아 비명을 질렀다. 우주선 안에서의 중력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이 되지 못했으나 견딜 만한 정도였다. 2분 정도 지나 가까스로 중력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다음에는 몸이 마치 공기처럼 가벼워져서 무게를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어머! 저것 봐! 참 곱지."
준수는 테레사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하늘에 흩어져 있는 희고 붉고 푸르고 누런 온갖 빛깔로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 그리고 암흑의 대우주에서 붉은 혓바닥을 넘실거리며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어리 그것은 태양이었다.
"잠시 후 우주 스테이션에 도착합니다. 여러분 로켓을 바꿔 타셔야 합니다."
스튜어디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준수는 우주 공간을 유유히 돌고 있는 은빛의 도너츠처럼 생긴 우주 스테이션을 발견했다. 이윽고 로켓은 우주 스테이션에 도착, 케이프 케네디 우주 기지를 떠난 지 꼭 1시간 30 분만이었다.
"지구는 역시 푸르구나."
우주 스테이션 아래쪽에 빛나고 있는 지구를 테레사는 교과서에 쓰여 있는, 최초로 달의 주위를 선회한 보먼 대령의 말을 생각했다.
 
달의 도시
 
준수 일행 40명은 우주스테이션에서 잠시 쉬었다가 달 착륙용 로켓으로 갈아탔다.
지구에서 320km 떨어진 지점을 초속 8km로 돌고 있는 우주스테이션에는 약 100명의 직원이 상주하여 달 여행의 중계사무를 보기도 하고 우주 천문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주 스테이션에서 달까지의 여행은 약 18시간, 우주의 광경도 자꾸 보아오면 지루해지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심리, 승객 중에는 꼬박 꼬박 조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윽고 승객의 꿈을 깨뜨리고 스튜어디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곧 달세계의 공항에 도착합니다. 좌석 벨트를 단단히 매어 주십시오."
잠을 깬 승객들 입에서는 경탄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눈부시게 밝은 거대한 달세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의 바다' 위로 아페닌 산맥이 길다란 그림자를 던지며 절벽처럼 솟아있었다. 돌연 한규의 몸이 좌석에 눌려지는 듯 압력을 받았다. 로켓이 역분사 장치를 움직여서 속도가 떨어지고 천천히 달 착륙을 시작한 것이다. 달 표면에는 여기저기에 거대한 둥근 빵 모양의 돔이 흩어져 있었다. 세계 각국이 달에 건설한 도시였다. 미국이 건설한 <다이아나(달의 여신)>, 한국이 건설한 <고려>도 달에서는 가장 큰 도시의 하나였다. 굉장한 폭음과 더불어 충격이 느껴진다. 그때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이 들렸다.
"지금 막 달세계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행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준수와 테레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감격과 기쁨의 순간을 맞이했다. 매일 밤 관악산 기슭에서 쳐다보던 달세계에 38만km를 날아 이제 도착한 것이다. 달세계 공항에서 한국의 <고려시>까지는 지하철로 20분의 거리, 엘리베이터로 지상에 나올 때 준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라스틱 천장으로 밀폐된 돔 안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모두 지구에서 가져다가 심은 것들입니다. 이 나무들은 우리들의 생명의 수호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그 대신 산소를 내놓기 때문이지요. 어떠세요. 공기가 참 상쾌하지요."
어여쁜 달세계 관광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준수의 걸음은 나는 듯이 가벼웠다. 달의 중력의 지구의 1/6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안내원은 <고려시>의 지하에 있는 물과 공기의 정화공장으로 안내했다. 달세계에는 물과 공기가 없지만 달의 암석을 분리하여 물과 공기를 만들어 냈다. 암석에서 분해한 공기에다 질소나 헬륨 따위를 적당량 섞어 달의 인간은 호흡하고.
달세계에는 지금 <고려>와 같은 도시가 30군데 가량 있어 50만 명 정도의 인간이 살고 있으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는 어려운 일들이 숱하게 많았다. 20세기말에서 21세기초에 걸쳐 달에 상륙한 인류는 150℃를 오르내리는 낮의 더위와 무서운 밤의 추위 따위 악조건과 싸우면서 달세계 도시를 완성시킨 것이다. 지하 공장에서 나온 준수 일행은 돔 바깥에 전개되는 밤하늘을 보고 경탄의 소리를 질렀다. 새까만 우주 공간의 한복판에 찬연히 빛나는 거대한 지구의 모습이 갑자기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여! 아시아 대륙이 보이는구나! 한국도 저기 있군!"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들을 찾아온 할아버지가 어릴 때는 설마 자기가 달세계에서 지구를 쳐다볼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준수 일행은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지구의 장관을 바라보며 「달맞이」 아닌 「지구 맞이」를 즐기고 있었다,
 
 
작품 해설
 
우주 함대의 최후 - 서광운
 
눈에 보이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광선이 반사하기 때문인데 만일 광선이 발사하지 않는 물체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볼 수 없지 않는가. 가없이 넓은 우주공간에는 그러한 검정 물체가 있다. 천체물리학자들은 이를 이름지어 블랙홀(B1ack Hole, 검정 구멍)이라고 한다.
별들이 화려한 일생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묘지에 갈 때 그 모습인즉 온갖 원자나 중성자는 다 타버리고 핵만이 더 이상 분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똘똘 뭉쳐 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춘 절대 정지의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블랙홀은 오늘날 백조 좌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웃 별들에서 나오는 광선이나 가스는 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채 영원히 뛰쳐나오지 못한다. 광선이 나오지 못하는 까닭에 천체 망원경이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블랙홀의 무게는 각설탕 만한 것이 모름지기 태양의 무게에 수천 배에 달하고 있으니 블랙홀 근처의 광선이나 가스가 그 인력에 이끌려 옴짝 못하는 죽음의 현장이다. 이것을 이 작품 속에서는 타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그 공간에 빠지면 전파조차 붙들려 발신할 수 없으나 편의상 여기서는 전파만은 탈출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 놓았다.
이만석 박사를 대장으로 하는 무궁화 호와 독수리 호는 일종의 우주 산책이라고나 할까. 별들이 지니고 있는 뜻밖의 특성에 이끌려가기도 한다. 강한 자철별 X4호 별이 바로 우주선을 이끌어들이고 만다. 별이 그만큼 한살이를 어지간히 끝낼 때까지에는 거기에 아득한 문명이 피고 지고 할 수도 있는 법. 거기에서는 파라노이드 박테리아의 독점 문제로 핵전쟁이 일어나 기계 문명이 멸망하고 말았다.
핵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기까지에는 문명의 진화 단계에서 반드시 박테리아의 독점 이용 문제 생기게 마련이다. 인류를 비롯한 문명 공동체는 반드시 컴퓨터나 로봇과 같은 자동기계의 구사에 뒤이어 미생물을 이용하여 온갖 물체를 손쉽게 분해하여 값싸게 이용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 어떠한 사태가 일어날는지는 X4호 별에 남아 있는 독수리 날개모양의 부리마라 족의 생태를 보면 능히 짐작이 갈 수 있듯이 문명인은 자칫하면 다시 원시인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리 자철 별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밀물과 썰물처럼 자력의 강도가 교대되는 현상을 상정할 수가 있겠다. 그래서 자력이 약해진 순간에 한국의 우주원정대원들은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RS6호 별(노고지리 별)에 착륙했을 때, 뜻밖에도 개미모양의 세라미 족에 생포되어 대원들은 지구 모양의 표본 도시 건설에 동원된다. 여기서 국경 아닌 우주 공간을 넘어선 사랑이 맺어지는데 대원 신온철과 애인 우비구니의 사랑은 이질적인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야릇하게 펼쳐진다.
우주인과 인류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주사회학적인 일면에 처음으로 문제를 던져본 셈이다. 이 작품은 이렇듯이 박테리아의 생산 이용 문제에 초점을 두었는데 장차 인류는 이 문제와 심각한 씨름을 해야 될 것 같다. 그리고 블랙홀이 장차 우주물리학의 새로운 체계화를 추진하리라는 예언은 영원히 진리로 남을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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