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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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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회 섭현의 사적지
2014년 02월 15일 12시 23분  조회:4779  추천:0  작성자: 김성룡

태항산의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1942년말에서 1943년 사이에 연안으로 많이 떠났다.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는 새로운 정풍운동이 시작되였고 국내외 정세에 관한 교육이 본격화되여 각지 주요간부들을 소환하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는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고있었다. 조선독립동맹 조직을 강화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려면 많은 간부들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태항산에서 싸우던 대부분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연안으로 떠났다.

태항산에 남은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은 1943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의 투쟁을 재조직해 나갔다. 그는 하북성 섭현의 남장촌과 중원촌을 전전하면서 조선의용군 교육을 강화하고 부대를 확대했다. 그리고 투쟁경험이 풍부한 간부들을 각지 조선인이 집거한 곳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투쟁에로 이끌었다.

(권립교수) “무정동지는 “그러다가 1941년부터 당중앙의 명령에 따라 화북지구의 조선인민을 조직하는 사업에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조직사업과 조선의용군 지도사업에 나섰습니다.”

무정이 남장에 머물렀던 집 정문

무정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거처했던 곳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이 남장촌에 거처했던곳은 현지의 지주집이였다. 지금의 남장촌 528번지와 529번지에 유적이 남아있다.

답사팀이 흙집과 벽돌집이 섞여 있는 남장촌의 좁고 그늘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담으로 둘러싼 커다란 집 한채가 보였다. 담은 후에 벽돌로 다시 쌓은것으로 보이나 비교적 정교하게 만든 정문에서 우리는 옛 건물모습을 어렴풋이 보아낼수 있었다. 입구에는 하남점진 남장촌 528번지라고 밝혀있었다.

문을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있었고 마당 세면에 낡은 건물들이 있었다. 맞은 편에는 흙으로 된 단층집이 있었는데 금방 허물어질것만 같았다. 왼편 역시 2층으로 된 낡은 흙집이였다. 그리고 오른쪽에 검푸른 벽돌로 만든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2층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이 바로 항일전쟁시기 지주가 살던 집이였고 후에 무정과 경위원이 거처를 잡았던 곳이다. 집 옆에 비슷한 벽돌 단층집이 있었다. 역시 검푸른 벽돌로 만들어진 괜찮은 집이였는데 번지수는 529번지였다. 당시 지주 집은 모두 벽돌로 된 좋은 건물이였다. 지금 볼수 있는 흙집들은 마을사람들이 지주 집 넓은 뜨락에 새로 지은 집이다. 비록 새로 지었다하지만 흙으로 지었기때문에 오히려 더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항일전쟁시기 무정사령원이 머물렀던 집은 528번지의 2층으로 된 벽돌집이였고 529번지의 벽돌로 지은 단층집은 의용군 간부들이 머물던 곳이였다.

남장촌에서 우리는 리사화로인의 소개로 무정사령원의 통신원으로 있었던 왕소안(王小安 76세)로인을 만났다.

1943년 당시 16세 어린 나이였던 왕소안로인은 근 3년간 무정의 통신원으로 있었다. 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남장촌에는 조선의용군과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 도합 300여명이 있었다. 생활이 어려웠기때문에 무정은 전사들과 학원들을 거느리고 훈련과 학습을 하는 한편 부근의 산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감자를 심었다. 조선의용군사령부에는 무정과 취사원(炊事員) 한명, 경위원 두명 하여 4사람이 있었다. 무정은 사격술이 대단하였다. 계절에 따라 강가에 나가 물오리를 사냥하였는데 늘 백발백중이였다. 하남점진에는 의용군이 운영하는 대중병원(大衆醫院)이 있었는데 한번은 왕소안이 무정의 편지를 병원의 백은도(白殷道)원장에게 전했다. 백은도원장은 서한을 본 다음 무료로 왕소안의 신체검사를 해주었다. 무정을 비롯해 조선의용군은 모두 조선말을 하였는데 현지인들과만 중국어로 대화하였다한다.

왕소안로인은 다리에 난 상처를 가르키면서 부상당하던 경위를 이야기했다. 한번은 그가 무정사령의 명령에 따라 소금 구하러 형대부근으로 갔었다. 그때 적의 포격을 받았는데 파편에 상처를 입었던것이다. 다행히 동행했던 김부장이 그를 부축하여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였다한다. 왕소안로인은, 무정사령부에 4명 부장이 있었는데 한분은 김씨이고 한분은 양씨라고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당시 성씨에 직함을 붙여 불렀기때문에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1944년 조선독립동맹이 태항산을 떠나 연안으로 간 다음, 나머지 조선의용군은 무정과 함께 야전사령부 정치부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았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조직, 선전, 경영 등 세개 부를 두었는데 리유민(李維民)이 조직부장, 김창만이 선전부장을 맡고 홍림(洪林)이 경영부를 책임졌다. 선전부 산하에 양계가 선전과장을 맡았다. 그러므로 왕소안로인이 회억한대로 무정과 함께 있었다는 김씨, 양씨 성을 가진 간부는 선전부 부장인 김창만, 선전과장인 양계인것으로 추정된다.

왕소안로인 내외분은 남장촌 431번지에 살고있었다. 낡은 단층집이였는데 구들에는 잘 포개여놓은 이불과 나무 궤가 있었고 바닥에 낡은 쏘파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왕소안로인은 조선에서 보내온 화책(畵冊) 두권을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섭현에서 활동할때 무정은 남장촌 마을사람들의 상황을 더욱 잘 료해하기 위해 나이가 어리고 순박한 왕소안을 통신원으로 받아들였던것이다. 1945년 무정은 명령에 따라 요원들을 거느리고 연안으로 갔지만 왕소안은 그냥 고향에 남아있다보니 부대와의 련락을 다시 가지지 못했다.

해방후 왕소안로인은 3년간 군 복무를 하였다는 증명이 없었기때문에 줄곧 평범한 농민으로 지금까지 지냈다. 왕소안로인은 후에 조선에서 화책을 보내주었다고 하였다.

무정의 경위원을 맡았던 남장의 왕소안 로인

남장의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옛터에서 왕소안 로인(좌)과 함께

답사팀은 남장촌으로부터 하남점진 하일촌(河一村)으로 갔다. 강 건너에 위치한 하일촌은 남장촌 보다 퍽 작았고 마을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 보였다. 1,000여명 인구가 사는 마을 집들은 매우 낡아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생산운동에 나선 조선의용군은 하일촌에서 3.1상점, 대중병원, 사진관, 방직공장을 운영하였다.

1942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침략군은 병력과 물력 부족으로 본격전인 공격전을 개시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적들은 정면전장에서 국민당군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는 한편 팔로군들이 활동하는 항일근거지에 대해서는 포위와 봉쇄 정책을 실시하였다. 게다가 련속되는 가물로하여 태항산근거지에는 기근이 들었다.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생산자구(生産自救)》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43년 무정이 태항산에 온후 조선의용군의 생산활동은 본격화 되였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감자나 채소를 심고 목화를 재배했을 뿐만아니라 변구 진남은행(晉南銀行)으로부터 돈 만원을 빌려 병원과 상점, 리발소를 차렸다. 무정의 1945년 사업보고에서는 당시 의용군의 경제운영 상황이 상세히 밝혀지고있다.

하일촌에는 하남점인민법정(河南店人民法庭)이 있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였는데 이곳이 바로 항일전쟁시기 의용군이 운영하던 3.1상점 옛터이다.

3.1상점은 1943년 3월 2,000여원을 내여 세운 상점으로서 쌀, 소금, 비누, 성냥을 팔았다. 점원은 4명이였고 책임자는 신태식(申泰植)이였다.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였는데 부지런히 운영하여 10만원의 월수입을 올렸다. 명절이면 상점에서는 렴가로 항일가족이거나 빈민들에게 물품을 내주었고 또 늘 마을사람들을 도와 좋은 일을 해주었다.

3.1상점 옛터에서 조금 더 나가면 낡은 옛집이 있었다. 괜찮은 부호의 집이 아니면 사당 자리인것 같았다. 정문에는 하남점진 하일촌 112번지라고 밝혀있었다. 리사화로인은 이곳이 의용군이 경영한 대중병원 유적지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112번지 건물과 그 옆의 114번지 건물이 모두 대중병원으로 사용되였던 건물이라고 알려주었다.

대중병원은 1943년 3월 2,000여원을 투자해 세운 병원으로서 내과와 외과, 약제실이 갖추어졌었다. 백퇀대전(百團大戰)때 팔로군에 체포되여 항일근거지에 오게 된 백은도는 교육을 받고 조선의용군에 참가한뒤 내과의사겸 대중병원의 원장을 지냈다. 부원장이며 외과의사였던 김상현(金尙顯)은 자원적으로 의용군사업에 참가하였다가 병원에 배속되였다. 약제사 김희원(金熙元)은 1942년 12월 림분(臨汾)에 주둔했던 적군으로부터 도주해 온 자원병(自願兵)이였다. 그리고 리화림(李華林)을 비롯한 일부 녀성의무일군도 한동안 병원에 있었는데 모두 조선 사람이였다. 병원은 월수입이 3만여원이였다. 병원 의사들은 의술에 많은 심혈을 쏟았으며 각종 소염제를 만들어 현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병원은 또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거나 약값만 받았다. 그리고 계절마다 마을사람들에게 천연두 예방주사를 놔주었다.

의용군이 운영한 3.1방직공장은 대중병원 뒤쪽에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을뿐이다. 방직공장은 1945년 3월 1일에 착공하였고 책임자는 홍림이였다. 공장에 30여명 로동자가 있었는데 모두 조선인이였다.

리사화로인은, 하일촌 마을 입구에 조선의용군이 세운 사진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버드나무 한그루와 그 옆에 찌그러진 집 한채가 있을뿐이였다.

조선의용군은 이처럼 어려운 환경속에서 생산경영운동을 적극 전개해 자급자족 하였을뿐만아니라 현지 백성들을 도와주면서 힘을 키웠다. 문화지식이 있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단순한 농사뿐만아니라 병원이나 상점, 공장 경영도 곧잘 해냈던것이다.

조선의용군이 꾸린 "3.1상점" 이 있었던 곳

조선의용군이 꾸린 대중병원 건물

대중병원으로 리용되였던 옛 건물

하일촌 마을을 떠나면서 조선의용군의 사적지들을 너무나도 잘 아는 리사화로인에게 감탄이 갔다. 리사화로인은 1984년 5월에 12명으로 구성된 연변조선족자치주 원 조선의용군 간부 전적지 고찰단이 섭현에 왔다고 하면서 그때 그분들과 함께 다니며 기억해 두었다고 설명해주었다.

1984년에 섭현을 방문한 원 조선의용군 간부로는 윤재덕(尹載德), 정길운(鄭吉雲), 최명세(崔明世), 리섭, 고철 등이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이들이 항일전쟁시기 직접 활동했던 옛 사적지를 둘러보고 자상히 설명한것이 지금 섭현 당사연구실 자료로 남아있다.

다음은 하남점진 적안촌(赤岸村)으로 갔다. 팔로군 129사 군부가 있었던 적안촌은 지금 혁명전통 관광을 이르는 《홍색관광(紅色旅遊)》을 적극 개발하고있다. 거액을 투자하여 유적지들을 잘 복원하였기때문에 지금 많은 관광객을 류치하고 있다한다.

적안촌은 하남점진 서북쪽으로 2, 3킬로메터 떨어진 산비탈에 위치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129사 사령부와 중공중앙 북방국 태항분국, 태항구(太行區) 당위원회가 있던 곳이다.

팔로군 129사는 홍군 제4방면군과 부분적인 섬북홍군으로 개편한 부대이다. 류백승이 사장, 서향전이 부사장을 맡았고 1938년에는 등소평(鄧小平)이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1937년 10월 19일, 화북에 진출한 129사 769퇀이 양명보(陽明堡) 비행장을 습격하였다. 한시간 격전을 거쳐 24대의 적기를 불태워버리고 100여명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양명보 습격전은 129사의 첫 항일 대승전이였다. 1938년 2월, 129사 주력부대는 장생구(長生口), 신두령(神頭嶺), 향당포(響堂鋪) 등 3차례 전역을 펼쳐 침략자들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1940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중국은 극심한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국민당군의 정면전쟁의 실패로하여 장개석은 중경을 비롯한 서북 오지에 몰리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 중경까지 쳐들어간다고 위협하면서 비밀리에 국민당과 담판을 진행하였다. 인력, 물력 부족으로 장기전을 할수 없었던 일본은 시급히 장개석의 항복을 받아내야 했던것이다. 일제의 막강한 허울에 질겁한 사람이 많았기때문에 전반 중국은 실패와 망국의 비분에 잠겨있었다. 이런 비관정서를 떨쳐버리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은 공격전을 개시하여 전국 인민의 항전의지를 고무하기로 결정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12월 5일까지 팔로군 100여개 퇀이 일제가 통제한 정태선(正太線)을 차단하기 위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백퇀대전이다. 129사는 120사와 협동하여 3개월 남짓한 공격전에서 수만명 적을 소멸하였다. 129사만 하여도 크고 작은 전투 500여차를 겪었으며 7,500여명 적을 소멸함으로써 휘황한 승리를 이룩하였다. 129사의 적극적인 항일전과 휘황한 전과는 전민의 항쟁을 한껏 고조시켰고 적후 항일근거지도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였다. 이해 12월 129사는 사령부를 섭현 적안촌에 설치하였다.

적안촌의 팔로군 129사 지휘부 기념비

129사 류백승, 등소평 등 지휘원들의 동상


129사 사단 지휘부 건물



적안촌의 129사단 지휘부로 통하는 돌계단 길



적안촌을 찾은 조선의용군 항일로간부(1984년)

적안촌에 들어서면 붉은 기 모양으로 된 붉은 돌비석을 보게 된다. 비석에는 129사라는 금빛글발이 새겨져 있었고 비석뒤편 광장에는 129사 지휘원들의 동상이 있었다. 가운데 류백승과 등소평이 서고 그 옆에 4명의 사령부 요원이 둘러서있는 모습이였다.

적안촌은 산세를 타고 형성된 마을이다. 부지면적이 1,800여평방메터인 사령부 옛터는 하원(下院), 상원(上院), 후원(后院) 세개 4합원 구조의 집으로 되였다. 하원은 현지인들이 제를 지내던 사원자리였다. 사령부 회의실, 사무실, 경위원 숙사가 이곳에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언덕에 올라서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담과 집들이 있었는데 사령부 옛터의 상원이였다. 가운데 사령부 각 부서 집무실 자리가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류백승과 등소평의 옛 거처가 있었다. 상원은 섭현의 가장 큰 부자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1940년, 연안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리유민을 비롯한 10여명 조선혁명가들이 팔로군 사령부 산하의 적공부(敵工部)에 배치되여 한동안 사업하였다. 그들은 로획한 적의 문서와 정보를 번역하고 적군포로를 심문하였으며 대적선전 계획을 세우는 등 일들을 하였다.

상원 뒤편으로 후원이 있었는데 작전실과 사령부 기타 요원들의 거처였다.

류백승과 등소평은 5년간 이곳에서 항일전쟁을 지휘하였다.

적안촌 마을 서북쪽에는 묘파산(廟坡山)이 있다. 지금 산에는 렬사기념탑과 정자, 장군들의 묘소가 축조되여 장엄한 분위기가 한결 짙었다. 129사 출신인 류백승 원수와 서향전 원수, 리달(李達) 장군을 비롯해 6명 공화국 원수와 장군의 골회가 이 산에 묻혀있다. 1990년 등소평이 칠필로 《장군령(將軍嶺)》이라는 석자를 써주었는데 지금 이 글은 산언덕 담벽에 새겨져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사람들은 묘파산을 장군령이라고 부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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