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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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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옛터
2014년 03월 16일 17시 22분  조회:5422  추천:0  작성자: 김성룡

국민당의 수십만 반동군대의 포위와 추격을 물리치고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한 홍군은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해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창설해나갔다.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된후 수많은 조선혁명가와 청년들이 팔로군이 개척한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모여왔다. 중국공산당에서는 태항산에 모인 조선혁명가와 조선청년들을 지도하고 이들을 조직하기 위해 무정을 태항산에 파견하였다.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을 겪은 조선혁명가 무정은 새로운 임무를 맡고 태항산으로 향했다.

 

섭현 중원촌 전경

중원촌 촌어구에 세워진 루각

팔로군 초대 포병퇀장이며 조선의용군 사령원인 무정이 중원촌에 거처하였던 곳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던 무정은 줄곧 중국공산당 중앙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온 혁명가였고 홍군과 팔로군의 군사전문가였다.

2만 5천리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다시 홍군부대를 따라 력차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6년 홍군동정에 참가한 그는 홍군 제1방면군과 함께 황하를 건너 산서 경내에서 싸웠다. 홍군의 동정에서 조선혁명가 양림이 희생되자 당중앙에서는 조선혁명가들을 더욱 잘 보호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위험한 일선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이해 6월 홍군은 동정을 마치고 섬북에서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中國人民抗日紅軍大學)을 설립하였다. 무정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작전부대를 떠나 고위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홍군대학 1과에서 학습하였고 졸업후 총사령부 작전과장을 담임하였다.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중국로농홍군은 본격적인 항일전쟁의 수요에 따라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와 팔로군 총사령부는 항일투쟁을 더욱 유력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팔로군 포병부대를 창설하기로 하였다.

1937년 말, 팔로군 총사령부의 포병주임으로 임명된 무정은 포병부대 건립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7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진서남(晉西南) 전략요새인 림분에 갔다. 그는 그곳의 부대까지 합쳐 근 1,000명에 달하는 전사들로 포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권립교수) “7.7사변후 팔로군 총사령부 주임직을 맡은 무정은 중국인민의 포병건설에 나섰습니다. 1938년 1월에 림분에서 중앙군위 포병퇀 성립대회가 열렸습니다. 중공중앙 북방국의 책임자 양상곤이 축사를 하고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봉이 무정동지를 포병퇀 퇀장으로 임명할데 관한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임명장을 선독했습니다.”

1938년 1월 28일, 림분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 창설식이 있었다. 무정이 포병퇀 퇀장으로, 구창성(邱創成)이 정치위원으로, 원광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중앙북방국 책임자인 양상곤(楊尙昆)이 축사를 하였고 국민당 제2전구 사령인 염석산도 대표를 파견해 축하했다.
포병퇀은 편성되였지만 여러가지 곤난이 많았다.

우선 포병부대가 쓸만한 대포가 얼마 없었고 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몇사람 없었다. 무정은 단기 훈련반을 꾸리고 직접 교관을 맡았다. 그는 전사들에게 사격원리와 포 다루는 요령을 가르쳤다. 이 시기 무정이 직접 훈련해낸 포병간부들은 후날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 고위 지휘자로 되였다. 이해 2월, 태원(太原)이 일제에게 강점되자 림분지역이 적의 공격목표로 되였다. 포병부대를 보호하고 계속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무정은 총부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거느리고 섬북으로 철수하였다. 그들은 섬북 락천(洛川)에 새로운 훈련기지를 정했다. 모택동은 무정을 비롯한 포병부대 지휘자들을 직접 접견하였고 주은래, 주덕, 팽덕회를 비롯한 당과 팔로군 지도자들이 락천기지에 와서 포병퇀을 시찰하였다.

 

(권립교수) “무정은 포병간부 훈련반을 꾸리고 직접 교관을 맡았습니다. 이때 양성해낸 포병간부들이 새중국의 제1대 포병 지휘관으로 됐습니다. 1938년부터 무정은 포병퇀을 거느리고 대일작전에 나섰습니다. 1939년 2월에는 포병퇀의 절반을 거느리고 태항산 근거지의 팔로군 전방사령부 소재지에 와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다가 1941년부터 당중앙의 명령에 따라 화북지구의 조선족인민을 조직하는 사업에, 화북 조선청년 련합회 조직사업과 조선의용군 지도사업에 나섰습니다.”

 

1939년 2월, 무정은 포병퇀을 거느리고 다시 황하를 건너 진동남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출격하였다. 이때 서안과 락양 팔로군 판사처를 통해 포병부대에 수요되는 장비가 송달되였고 전사들도 잘 훈련되였기때문에 포병퇀의 전투력은 크게 강화되였다.

1940년에 팔로군이 백퇀대전을 전개할 때 무정은 포병부대를 거느리고 전투가 가장 치렬한 곳으로 달려가 유력하게 전투를 지원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팔로군 포병퇀을 창설하고 일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던 무정은 조선의용대를 재정비하고 조선혁명가들을 규합시키기 위해 포병부대를 떠나게 되였다. 그는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독립동맹 주요사업을 책임지고 그때로부터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과 함께 하게 되었다.

중원촌 마을 북쪽에는 비교적 높은 둔덕이 있다. 돌길을 따라 둔덕에 오르면 찌그러져가는 낡은 절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중원촌 원정보사 옛 절이다.

문에 들어서니 낡은 흙벽에 걸린 《섭현중원촌원정보사문물보호구(文物保護區)》라는 간판이 보였고 작은 마당 앞에는 검은 벽돌 단층집이 있었다. 푸른 기와와 벽돌로 된 건물이였다. 정교한 꽃무늬와 그림으로 장식된 처마나 집앞에 세운 옛 돌비석을 보아서 사원이 분명하였다. 집 벽에는 《태항신화일보구지(太行新華日報舊址)》라는 작은 간판이 있었다. 사원의 신상(神像)은 사원 맞은 편에 새로 지은 흙집에 옮겨져 있었다.

섭현 중원촌의 원정보사 옛터(화북조선혁명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태항 신화일보사가 있었던 곳(원정보사 내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창설지로도 추정되는 원정보사 옛터(항일전쟁시기 신화일보사도 이곳에 있었다)

 

 1942년 11월 1일, 조선독립동맹은 이곳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華北朝鮮靑年革命學校)를 개설하였다. 교장은 무정이였고 교무주임은 김학무였다. 제1기에 20, 30명 학원을 받았는데 학습기간은 5개월이였다. 학교는 비교적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화북 적점령구로부터 조선인들이 탈출해 올 경우를 대비해 그들을 교육시켜 조선의용군에 가입시키는데 있었다.

 

(귄립교수) “1942년 11월 1일에 태항산근거지에 화북조선청년 학교를 꾸리고 화북각지의 조선족청년들을 흡인했습니다. 이해 일본군이 천진, 북경에 조선인특별훈련반을 꾸려 우리 청년들을 전쟁의 대포밥으로 만들려한 그 음모에 대처하여 꾸린 학교였습니다. 무정을 교장으로 김학무를 교도주임으로 한 이 학교는 1944년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로 고쳐졌습니다.”

당시 화북전역을 석권한 일본침략자들은 더 많은 조선인을 조선국내, 중국 동북으로부터 화북에 강제 이주시켰고 또 천진을 비롯한 각지에 조선징병특별훈련반을 세웠다. 그리하여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해 많은 조선청년들이 항일근거지로 찾아왔다.

학원들은 중원촌 원정보사에서 공부하였고 부근 공지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1943년에 이르러 학원수가 훨씬 많아지고 조선의용군도 확대되여 본거지를 옮기게 되였다. 이들은 중원촌을 떠나 하남점진 남장촌으로 옮겨갔고 이곳은 신화일보 인쇄공장으로 사용되였던 것이다.

원정보사 옛절이 있는 둔덕에 서 있노라니 중원촌 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이따금 무정사령원이 경위병을 데리고 골목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환각으로 보이는 듯 싶었다. 그리고 귀전을 스치는 바람결을 타고 씩씩한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구령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였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바로 이 원정보사의 빈방에 모여 앉아서 무릎에 책을 펼쳐들고 문화지식과 정치를 학습하였고 군사기능을 익혔던 것이다.

이날 점심 다시 현성에 돌아와 빈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후 우리는 짐을 챙겨 가지고 산서성 좌권현으로 출발할 계획이였다.

좌권현은 섭현과 린접해 있었다. 섭현에서 답사해야할 마지막 코스인 석문촌을 지나면 바로 좌권현 경내이기때문에 우리는 석문촌을 답사하고 그 길로 계속 좌권현으로 가려 했다.

리숙영과장이 미리 차를 준비시켜주었다. 그리고 줄곧 우리의 답사를 도와주었던 섭현의 《공자님》 리사화로인도 석문촌까지 계속 안내하였다.

 

섭현의 고마운 분들과 혜여지면서(우로 세번째 리사화 로인)

렬사릉원

팔로군 참모장 좌권장군 묘소

좌권장군 묘소(조선혁명가 장진광이 설계)

태항산에서 희생된 진광화, 윤세주 렬사 묘소

 

차는 섭현 현성을 출발해 고속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달렸다. 맑은 청장하가 굽이굽이 흐르고 한쪽으로는 무연한 산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10여분 달려 우리는 석문촌 련화산(蓮花山) 기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산기슭에 있는 진기(晉冀)렬사릉원으로 향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봉이 멀리 보였고 그 앞에는 낮은 산언덕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산밑 골짜기로 무성한 소나무 숲이 보였다. 우리는 오솔길을 따라 산언덕으로 오르면서 선렬들의 령전에 증정하기 위해 들꽃을 꺾었다.

산기슭 골짜기에 넓은 평지가 있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사이로 돌비석과 기념탑이 보였는데 좌권장군묘지였다. 해묵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사이에 돌로 쌓은 커다란 묘지와 하늘높이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탑에는 《좌권장군기념탑》이라고 새겨져있었다. 장방형으로 된 묘지앞에는 《좌권장군》이라고 새겨져있었고 그 우에 가로로 《좌권장군비묘》라는 영문자모가 새겨져있었다. 한자 병음을 새긴것이 아니라 우리 글 발음을 영문으로 적혀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좌권장군묘는 조선청년련합회 선전부장을 맡았던 조선혁명가 장진광이 설계했다. 중국항일전쟁시기에 희생된 중국공산당의 최고급 장령의 릉원을 조선혁명가가 설계해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의용대에는 얼마나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는가를 짐작할수 있었다.

좌권장군묘에서 작은 골짜기를 지나면 높은 산언덕이 있다.

해빛 밝은 언덕에는 조선의용대 주요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의 묘비가 있다. 좌권장군묘소 보다는 많이 작았지만 돌로 정교하게 만든 이들 묘소도 역시 장진광이 설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1942년 5월 일제의 포위토벌에서 희생된 조선혁명가 진광화, 윤세주는 좌권장군과 함께 이곳에 안장되였던것이다.

답사팀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들꽃을 렬사들의 묘소에 증정하고 묵도를 드렸다. 윤세주 렬사가 작사한 노래 <최후의 결전>이 귀전에서 울려퍼지는 듯 하였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 원쑤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혈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지들아/

독립의 깃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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