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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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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17장 화전군정대학과 길동군정대학 댓글:  조회:3372  추천:1  2018-05-17
1946년 국민당군이 장춘과 길림시를 점령하자 길림성 당위원회와 성정부는 돈화를 거쳐 연길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길림성 군구와 정부기관, 군정학교가 모두 연길로 옮겨졌고 연길은 동만해방구의 정치,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그리고 연변지역은 동북에서 우리군의 가장 확고한 근거지의 하나로 되였다. 국민당군이 수시로 공격해올수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동만근거지를 더욱 공고히하기 위해 길림성 당위원회와 성정부는 군사, 정치 자질이 높은 대량의 기층간부를 양성해 정권을 공고히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생산을 발전시켜 전선을 지원하도로 하였다. 동북에 온 공산당과 조선의용군은 처음부터 간부양성에 중시를 돌리고 심혈을 기울렸기때문에 각지에 여러 군정대학교들이 있었다. 아군이 동만과 북만으로 철수함에 따라 각지 군정학교들도 북만과 동만에 집중되기 시작했는데 1946년 5월에 연길에만 하여도 4개 군정학교가 모이게 되였다. 화전으로부터 철수하여 온 화전군정대학,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 그리고 조선의용군이 건립한 조양천교도대, 연길에서 꾸린 길동군정대학이였다.   조선의용군 7지대 주요 간부와 장병들 화전군정대학을 설립한 의용군 7지대 주요 간부들   화전군정대학은 1946년 1월 14일 조선의용군 제7지대가 화전에서 설립한 군정학교로서 300여명 학원이 있었다. 주요 책임자는 교장에 최명, 부교장에 량환준이였다. 1946년 음력설기간 동북국의 명령에 따라 산성진에서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가 설립되였는데 도석도가 교장 겸 서기를 맡았다. 동만분교의 백여명 학원들은 화전에서 강의를 받다가 화전이 점령되자 화전군정대학과 함께 연변으로 철수해왔다.   화전군정대학 출신의 서계영(82세, 연길)   화전군정대학에 있었던 서계영 로인은 당시 상황과 혁명에 참가하게 되였던 경위를 답사팀에 이야기해 주었다. “광복후 각지에 토비가 많았습니다. 특히 조선사람들을 많이 괴롭혔는데 우리집도 토비들에 의해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대 이웃한 한족이 저와 의형제처럼 지냈는데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   광복후 연변처럼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곳과는 달리 북만, 남만, 길림지역을 비롯한 산재지역의 조선족 농민의 피해는 더욱 막대하였다. 선량한 백성들은 비록 민족이 다르지만 서로 믿고 도와주면서 지냈지만 국민당과 결탁한 토비들은 조선사람을 미워하면서 더 극심하게 괴롭혔던것이다. 서계영 로인의 회억에 의하면 당시 팔로군 한분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고 자기집에서 하루밤 머물고 갔는데 화전에 조선사람들의 군정학교가 있다며 그리고 가라며 쪽지를 써주었다. 그리하여 이웃한 한족 형과 함께 가려했지만 그 한족 형은 그래도 국민당군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면서 따라 주지 않았다고했다. 그냥 앉아서 당할수는 없었다. 자기가 가꾼 터전을 지키고 조선사람도 이 땅에서 주인되여 살수있는 길은 혁명의 길 뿐이였다. 그리하여 서계영 로인은 혼자 화전으로 떠났다고했다. 당시 화전군정대학은 시험을 쳐서 학원을 받아들여 정치대와 군사대로 나누었는데 학원은 40여명 녀성학원을 포함해 250명이였다. 그후 서란부대로부터 한개 교도중대가 조동되여 와서 전교 학원들은 3개 중대로 편성되였는데 그 수는 350명이였다.   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조룡호 로인은 화전군정학교 생활과 학습상황을 이렇게 소개해 주었다. “1928년 4월 반석에서 출생했습니다. 그해가 바로 우리 부모들이 한국에서 중국에 들어온 해입니다. 1945년 ‘8.15’에 길림 천강이라는 곳에서 소학교 교원을 하다가 이듬해 1월에 화전군정학교에 자원해서 갔습니다. 조선의용군 선견대 세사람이 우리 천강에 와서 조선족 농민동맹을 통해 학원모집을 했던것입니다. 나는 교원이고 또 청년동맹 맹원이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군정학교의 취지를 들었고 혁명의 전도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곧 청년동맹의 소개신을 가지고 마을청년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천강서 길림까지 딱 백리입니다. 백리를 이틀 걸어 길림시에 가서 다시 길림시 청년동맹의 소개를 받아가지고 길림에서 화전까지 삼일간 걸어갔습니다. 학교에 가보니까 그때는 군정학교라 했지만 학교가 아주 스산했습니다. 해방전(광복전)의 소학교 자리를 리용해서 군정학교를 했는데 걸상과 책상도 소학교애들이 쓰는것을 썼고 자는것은 콩크리트 바닥에 그냥 짚을 펴놓고 잣습니다. 그때 정말 간고했습니다. 식사는 주요하게 고량밥(수수밥)을 먹었고 소금물에 배추를 섞어서 반찬으로 먹었습니다. 거기에서 삼개월간 공부했습니다. 당시 공부는 군정학교의 령도들이 관내 연안에서 대다수 나왔습니다. 박훈일이요 최명이요… 박훈일은 조선의용군 7지대 지대장이였고 최명은 정위였습니다. 그 학교는 모두 조선족이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정치, 군사, 시사 이런 방면에 학습을 하다가 국민당이 들어오는 바람에 화전에서 연변에 나오게 되였습니다.”   조선의용군 7지대의 최명이 교장을 겸하고 윤태형이 조직교육과 과장을 맡아 학교의 수업과 행정사무를 전면 책임졌다. 정치과의 주요내용은 사회발전사와 중국공산당 당사, 정치경제학이였으며 군사과의 주요내용은 보병작전과 총, 포 사격이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인 조남기 상장도 화전군정대학에서 공부했다. “주보중장군은 나를 보며 배양할 가치가 있으니 먼저 참군하지 말고 학습하라고했습니다. 그래서 길림군정대학에 가게 되였습니다. 보낼때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였습니다. 학교는 길림시에 있었는데 나는 한어말을 잘 못했기에 며칠 안되여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화전에 가게 되였습니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가 꾸린 조선족 군정학교였습니다. 가 보니 다 조선족이였습니다. 그때 나는 문화정도가 낮아 겨우 소학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인식을 제고하고 사상면에서 진보하기 위해 정치과를 선택하려했는데 군사과에 배정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길림분교에 가서 한족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큰 결심을 내리고 한어말공부부터 많이 했던것입니다. 그러다가 1946년 7월에 우리는 연길로 철퇴하게 되였는데 그때 이 두 학교가 합쳐졌습니다.”    1946년 5월말에 장춘, 길림의 당조직과 군대는 연길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국민당군이 화전으로 공격하자 화전군정대학 학원들도 명령에 따라 대후방인 연길로 향했던것이다. 화전군정학교 학원들은 연변에 가서 더욱 확고한 근거지를 만들고 언제가는 다시 고향땅으로 올것이라는 결의를 다지며 연길로 떠났다.   1945년말부터 1946년2월까지 연변에는 길동군정대학과 연변대학 학생모집을 한다는 통보가 나타났다.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뜻있는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동군정대학 준비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에 지금의 연길시 중앙소학교 자리에서 정치, 작문, 수학 세 과목 시험과 신체검사를 진행하여 500명 학원을 모집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족 학원 380명과 조선족 녀성학원 50명이 포함되였다.   길동군정대학에 갈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금옥 로인(80세, 연길)   길동군정대학을 다녔던 연길시의 김금옥 로인은 당시 학교에 가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가문에서 시집보낼 궁리들을 하고있었습니다. 이러다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다나니 길동군정대학 학생모집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돈을 모아서 차표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보따리를 하나 꿍져 사랑칸에 감추어놓았습니다. 3월27일부터 길동군정대학에서 시험을 쳤습니다. 26일 표를 끊어 놓았습니다. 그때는 농사철이 아니여서 오빠는 놀러 나가고 엄마와 형님이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님과 어머니가 있어서 밖에 나갈수 없었습니다. 나는 업고있던 조카를 엄마한테 밀어 맡기며 놀러 나가라고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얘가 왜 이렇게 아침에 똘구는가고 했습니다. 엄마가 밖에 나간후 형님이 물동이를 이고 나가자 사랑칸에가 보따리를 쥐고 문을 나오려고 하는데 형님이 들어왔습니다. ‘어디가오?’ ‘형님에 내 군대에 가오’ ‘군대어디에 가오?’ ‘연길에 가오.’ ‘집에 식구들이 없는데 어디에 가오…’ 나는 자동차부로 냅다 뛰였습니다. 자동차에는 사람들이 이미 꼴똑 앉았습니다. 나는 보따리를 위에 올리 던지고 그사람들이 손을 쥐였습니다. 그래서 차에 탔는데 우리 엄마가 맨발바람으로 달려나와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한창 있다가 차가 떠나자 엄마를 보니까 엄마가 그냥 손짓을 하고 계셨습니다.”   봉건유습이 채 가셔지지 않은 당시, 녀성으로서 남성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함께 공부하고 생활한다는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였다. 하지만 뜻있는 우리민족 젊은 녀성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과 배움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것이다.   (김금옥 로인)“…그래서 연길에 와서 군정대학교에 보명하니까 연길시 중앙소학교에가 시험을 쳐라했습니다. 산술시험을 쳤고 어째서 참군하는가 물었습니다. 거기에 일본 동경법대를 졸업한 녀자가 있었습니다. 태금옥이라고 그때 27살이였습니다. 그외에는 모두 일반학교를 다니던 녀자들이였습니다. 그사람들이 몽땅 시험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한개 녀성대를 만드는데 거기 지도원이 현옥선이라고 녀학교 선배언니가 있었습니다. 나는 참군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오빠가 왕청에 갔는데 곁에서 말하다러고 했습니다. 녀자가 군대에 가면 남자들과 한방에서 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빠가 이틀이나 걸어서 왔습니다. 와서 보초들과 이름을 대조하고 찾아왔던것입니다. 내가 숙소에 들어서니 오빠가 있었습니다. 오빠라는 말도 못하고 나를 잡으러 왔다고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보초가 와서 오빠를 남성대에 배치해 사흘간 있으면서 우리의 훈련과 생활을 보게 했습니다. 떠나면서 오빠는 우리의 학습과 생활을 보고 시름놓고 떠난다구 했습니다. 군정대학에서 우리 오빠에게 참군증명을 주었습니다. 현에 주재문 현장이 참군증을 주었는데 왕청현에서 내가 제일 처음 참군했습니다.”   학생모집이 완수되자 1946년 4월에 길동군정대학 개교식이 성대히 열렸다. 길동군구 지도간부와 조선의용군 간부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학원들은 마음속으로 한생을 혁명에 충성할것을 맹세하였다. 길동군정대학은 괴뢰만주국 학교자리였던 지금의 연길시 하남가 민족호텔자리에 세워졌다. 교장은 길동군구 사령원 강신태가 맡았고 부교장은 중국공산당 연변지방위원회 서기였던 옹문도가 맡았다. 그리고 교도원은 조선의용군의 김룡수가 맡았다. 120명 한족 학원들은 1중대에 편입되고 380명 조선족 학원들은 2중대, 3중대, 4중대 그리고 녀성중대로 편성되였다. 길동군정대학 1기생인 황인순 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당시 생활은 아주 간고하였다. 붉은 수수쌀밥에 멀건 소금국을 먹으면서 학습했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스스로 콩나물을 기르고 땔나무도 하군 했다. 그리고 키가 작아 3.8식보총을 겨우 다루었지만 이악스럽게 사격, 투탄, 긴급집합 등 실전련습을 훌륭히 완수해냈다고한다.
28    제16장 북만 토비숙청 댓글:  조회:3784  추천:3  2017-12-17
1946년 6월 26일에 장개석은 중경평화담판의 합의서를 찢어버리고 화북에 집결한 수십만 국민당군을 동원해 해방구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반파쑈전쟁이 승리한후 중국에서의 평화적인 노력은 모두 무산되여버렸고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시작되였다. 근 1년간의 시간을 리용해 군사적 포치를 완수한 장개석은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을 휘몰아 해방구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정주에 있던 류치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해방구를 공격했고 화북의 국민당군은 산동해방구, 하북과 섬서 해방구를 공격했다. 관내에서 국민당군이 여러 해방구를 대거 공격하였지만 동북의 국민당군은 새로운 공격을 발동할 여력이 없었기에 한동안 동북은 계속 휴전상태가 이어졌다. 이러한 정세에 비추어 장춘으로부터 할빈에 온 중공중앙 동북국은 회의를 열고 3가지 비상포치를 했다. 하나는 랍법전투를 사례로 적을 유인하여 분산시키고 각개 소멸한다는 작전경험을 총화하고 널리 보급하며 다른하나는 동북에서의 투쟁방침을 견지하고 남만을 포기하지 않으며 세번째로는 계속 토비를 숙청하고 후방을 공고히한다는것이였다.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림표가 동북국 서기, 동북민주련군 총사령 겸 정위를 맡고 팽진, 라영환, 고강, 진운 등이 동북국 부서기를 맡았다. 7월에 동북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모두 할빈에 모여 당면 동북의 정세를 연구하였고 금후사업을 토의하였다. 회의에서 채택한 “동북의 정세와 과업”이라는 결의는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고 7월 7일 정식 반포되였는데 이를 “7.7결의”라고도 한다.   우세한 국민당군을 전승하려면 공고한 근거지가 있어야했고 근거지를 공고히 하려면 우선 토비부터 숙청해야했다. 당시 동북경내 100여개 현에 토비가 도사리고있었는데 남만에 5만, 북만에 10만에 달하는 크고작은 토비무리가 있었다. 당시 첫단계의 토비숙청을 거친 동만의 연변지역만이 비교적 안정했을뿐이였다. 국민당군이 장춘, 길림을 점령하고 송화강기슭에까지 도착하자 북만 각지 토비들은 더욱 살벌했다. 놈들은 도처에서 살인, 방화, 략탈을 서슴지 않았고 공산당정부를 공격해 간부를 살해하고 조선족 마을을 략탈하였다. 그리하여 동북민주련군 3분의 1의 주력부대와 지방부대가 동원되여 토비숙청에 나섰다.    북만의 토비숙청 답사를 위해 안내에 나선 사학자 서명훈 선생   흑룡강성 할빈에 있는 사학자 서명훈 선생은 당시 북만 조선족부대의 토비숙청을 답사팀에게 소개해주었다. “3지대는 토비숙청 제일선에 적게 나갔습니다. 그때 진운이 ‘조선의용군 3지대는 퇀 편제지만 려단급 대우를 하라. 국제부대이기 때문에 간고한 전투에는 참가하지말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하지만 수요에 따라 수차 토비들과 싸웠는데 이를테면 연수에서 전투가 있었고 그다음 상지전투, 팔가산 전투가 의용군에서 했습니다. 목단강군구의 토비숙청상황은 3지대의 경우와 달랐습니다. 목단강군구의 14퇀, 영안의 조선부대들은 영안현에 마린하전투, 그때는 신안진도 영안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세린하전투 가장 큰게 마계하 전투, 동안사건, 목단강시내 ‘5.15’사건…이렇게 모두 제1선에서 토비들과 싸웠습니다. 내가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들은데 의하면 동안전투가 간고했습니다. 동안전투에서 우리부대가 흑산이란 곳에 주둔했었는데 두목 사문동 계통의 토비 700명이 동안에 들어와 조선사람은 무조건 막 죽이는 판이였습니다. 조선사람들은 갈데 없어 국경에 가까운 쏘련쪽으로 갔습니다. 생존자들의 회억에 따르면 그들은 중국사람인것처럼 가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토비들은 조선사람 옷을 입으면 무조건 죽였습니다. 곁에 한족들이 많이 도와주어 겨우 살아났다고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14퇀 장병들은 다수 조선사람이였는데 두개 영이 달려가 토비들을 소멸했습니다. 토비숙청에서 목릉전투, 마계하전투에서 우리전사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목단강군구 조선족부대인 제14퇀 3영과 제15퇀 3영, 사령부 경위련, 보안퇀 제2영, 수녕성정부 경위련, 포병퇀 조선족련은 첫단계 토비숙청에서 정운봉과 마희산을 비롯한 많은 토비들을 소멸하였다. 1946년 5월부터 목단강군구 주력부대는 부사령원 류현권(刘贤权)의 인솔하에 세길로 나누어 림구(林口)의 리화당(李华堂), 목릉(穆棱)의 왕지림(王枝林), 계서(鸡西)의 사문동(谢文东)을 공격하였다.   목릉현부근의 대천장 오늘의 공화향일대에는 다섯개 마을에 300여 가구의 조선족이 살고있었다. 광복이 되자 150명 조선족청년이 부대에 참가하여 목릉조선독립영을 편성하였다. 왕지림을 토벌하기 위해 이 부대는 목단강군구 주력부대와 함께 마교하(马桥河)쪽으로 나갔다. 5월 12일, 300여명 토비가 목릉을 공격했다. 현정부에 남은 10여명 조선족 전사들은 현정부 청사를 지켜 용감히 적과 싸웠다. 그들은 정확한 사격으로 수차 적을 물리치면서 정부청사를 사수하였다. 한편 목릉기차역에서는 김홍국과 신태환 두 조선족 전사가 뜻하지 않게 수십명 토비의 공격을 받았다. 신태환은 허리에 총을 맞은 김홍국을 안고 역사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적이 계속 공격해 오자 신태환은 두 창문에 총을 걸고 이쪽저쪽 왔다갔다하면서 사격했다. 그의 정확한 사격에 7~8명 적이 쓰러졌고 나머지 놈들은 머리를 들수없었다. 한동안 대치하던 중 도대체 아군수가 얼마인지 판단하지 못한 적은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한편 더욱 치렬한 전투는 목릉현 북가(北街)의 독립영 영부층집에서 진행되였다. 패장 허만호와 김철룡은 관리원 리남해, 반장 허만수를 비롯한 17명 조선족 전투원과 함께 150여명 적을 대적하면서 영부를 사수하고있었다. 놈들이 뜨락으로 밀려올때 허만호 패장이 옆으로부터 경기관총을 사격해 적을 쓰러눕혔고 바른편으로 허만수가 정확한 사격으로 련속 적을 쓰러뜨렸다. 당황한 놈들은 철뚝으로 철퇴하여 계속 맞사격을 하였다. 적은 다시 공격해왔다. 이때 영부 아래층에 몸을 피하고있던 50여명 녀성과 아동들이 《최후의 결전》을 부르면서 아군의 사기를 붇돋아주었다. 전사들은 더욱 용감하게 싸워 해질 무렵까지 또 한차례 적을 물리쳤다. 목릉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접한 군구 조선족 독립영은 밤도와 50리길을 달려왔다. 망원경으로 적정을 살피던 영장 허태동(许泰东)은 북가의 기름 가공방이 적 지휘부임을 판단하고 날이 밝자 곧 공격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먼저 포격으로 적 지휘부를 날려버린 다음 북가를 포위공격하여 대부분 토비를 소멸했다.   목릉현 토비숙청에서 희행된 렬사들의 묘소   국민당군이 사평을 공략하고 련속 장춘, 길림을 차지하면서 예리한 공격태세를 보이자 목단강부근의 토비들도 이들과 합세할 태세로 목단강을 점령하려 시도했다. 5월 14일, 600명에 달하는 토비가 목단강시를 공격했다. 놈들은 신화로와 홍운교를 넘어 군구사령부를 포위공격하였고 부근의 목단강군정간부학교와 수녕성정부를 공격했다. 군구사령부에서는 조선족부대인 경위련이 조명선(赵明善) 련장의 지휘밑에 침착하게 적과 싸웠고 성정부에서도 조선족경위련이 련장 김종과 지도원 허동섭의 지휘밑에 적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다. 간부학교에서도 조선족학생들이 한족학생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웠다. 삽시에 목단강시 전부가 초연에 휩싸였다. 목단강군구 사령부 뜨락에는 조선족 기술자 남정웅(南正雄) 등 7~8명이 낡은 일본제 땅크를 수리하고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땅크수 김병준(金秉俊)은 곧 땅크를 몰고 참전하였다. 땅크는 사령부를 공격해오는 적을 물리치고 간부학교를 거쳐 성정부로 달렸다. 길모퉁이에 숨었거나 물도랑에 숨어 사격하던 놈들은 땅크의 기총사격에 이리저리 쓰러졌다. 수류탄을 던져도 소용이 없었다. 땅크는 거리의 락엽을 쓸어내듯이 성정부부근의 적을 숙청해 버렸다. 그리하여 날 저물기전에 목단강시의 총소리는 멎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부근에 있던 목단강군구 정위 김광협도 제14퇀 3영의 조선족장병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목단강 보위전에서 아군은 토비두목 왕소정을 생포하고 수백명 토비를 소멸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부영장 정우(郑友), 련장 최인규(崔仁奎), 땅크수 김병준을 비롯한 6명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5월 26일에 목단강시 기차역 광장에서 승리경축대회와 렬사를 추모하는 추도회가 성대히 열렸다.    목단강시 토비숙청 전적지 홍운교 목단강과 마교하 토비숙청과정을 이야기하는 현지 농민 목단강기념관에 전시된 93명 조선족렬사들의 토비숙청 사적 목단강시 혁명렬사 기념비와 기념관   목릉현과 목단강시를 공격하려던 토비를 숙청한 다음 아군은 재차 부대를 정비해가지고 계속 계서쪽으로 공격했다. 계서로 통하는 길목인 마교하촌에는 범흥산을 두목으로하는 400여명 토비가 있었다. 아군은 정면공격과 적의 퇴로에 미리 매복하는 전술을 결부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범흥산은 아군의 정면공격에 배겨내지 못하고 퇴각하던 중 다시 아군의 포위에 걸려들었다. 5시간의 접전을 거쳐 아군은 마교하를 수복하고 적 백여명을 격살하고 백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목단강군구 제14퇀 3영과 제15퇀 3영의 조선족 장병들은 기타 부대와 함께 련이어 림구, 계서, 수분하, 동녕 등지를 수복하고 왕지림, 리화당, 사문동이 거느린 토비들을 숙청했다. 수분하로 진격하던 14퇀 3영은 세린하(细麟河)에서 적과 조우하였다. 아군은 목단강으로부터 기차로 땅크를 실어다 적을 공격해 철도남산고지를 점령하고 적 230명을 소멸하였다. 이어 1946년 6월과 7월에 조선족 장병들은 또 민주련군 359려와 함께 동흥폭란을 평정하고 오림현(五林县)에서 토비 400여명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신안진(해림) 토비숙청을 이야기하는 현지 농민   마교하, 신안진, 계서 토비숙청에서 희생된 조선족렬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토비숙청에서 희행된 43명 조선족렬사들을 기념하는 비문   북만의 토비숙청에서 또 조선족 장병으로 구성된 “동철부대”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광복후 김동철(金东哲), 김명세(金明世)를 비롯한 36명 가목사의 조선족 청년이 일제가 버린 총을 들고 마을을 지켜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5000여명 규모로 확대되여 삼강인민자치군 조선족영으로 편성되였다. 연안에서 온 한족인 류곤(刘坤)이 영장을 담임하고 김동철이 교도원을 맡은 이 조선족영은 송화강, 흑룡강, 눈강이 흐르는 드넓은 삼강평원을 주름잡으며 토비와 싸웠다. 김동철 교도원은 사문동 수하의 기병퇀 참모장 김해정(金海静)을 설득해 아군에 넘어오게 했다. 이들은 한달 남짓한 사이에 2500여 킬로메터를 달려 30여차의 전투를 하면서 토비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놈들은 “조선부대가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았고 사람들은 이 부대를 “동철부대”라 불렀다. 소문을 듣고 더욱 많은 조선족 열혈남아들이 동철부대를 찾아와 입대하였다. 서명훈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동철부대는 의란에서 리화당의 토비무리를 격퇴한후 목단강까지 적을 추격해 소멸했고 목단강의 조선족부대와 함께 리화당, 사문동의 토비무리를 격퇴시켰다. 그리고 벌리에 동철부대 렬사 기념비가 있다고했다. 1946년 5월 동철부대는 칠대하(七台河) 부근의 청룡산을 포위공격해 사문동의 토비무리 200여명을 소멸하고 계속 적을 추격했다. 사문동은 계서로 도주해 리화당, 장우신(张雨新) 등 토비무리를 수습한후 동안에 쳐들어가 5월 26일 피비린 “동안사변”을 조작했다. 조선족부대의 타격을 받은 토비들은 동안거리를 훑으며 조선족이라면 남녀로소 불문하고 살해했다. “동안사변” 소식을 접한 동철부대 전사들은 치솟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으며 만악의 토비를 끝까지 소멸할 결의를 다졌다. 동철부대는 모든 곤난을 극복하면서 계서, 계동, 벌리, 밀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토비를 추격하였고 놈들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않았다. 동철부대는 리련희 토비무리를 숙청하고 북만의 주력부대인 359려와 함께 기타 대부분 토비들을 숙청했다. 아군의 드센 공격과 추격작전에 지칠대로 지친 토비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으며 토비두목들은 하나하나 나포되였다. 그리하여 마희산, 리화당, 장우신, 사문동을 비롯한 토비두목들은 선후로 민주련군에게 포로되여 총살당했다.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저지른 사문동은 벌리에서 공개심판을 받은후 토비숙청에서 희생된 동철부대의 16명 렬사를 위해 세운 16렬사기념비 앞에서 처형되였다. 피로 얼룩진 목단강, 가목사, 밀산지역의 간고한 토비숙청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이곳 토비숙청에서 수많은 무고한 조선족 농민들이 피해를 보았고 또 많은 우수한 조선족 장병들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조선족부대의 전투적 업적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정신은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될것이다.   동북민주련군 주력이 할빈에 도착함에 따라 북방의 대도시 할빈시는 동북해방구의 정치군사중심지로 되였다. 북만의 목단강지역 토비숙청이 거의 마무리되고있을때 할빈부근에 잠복했던 토비들은 국민당 특무들의 사촉하에 할빈시를 탈환할 모략을 꾸미고있었다. 놈들은 할빈을 공점하고 아군의 지휘체계를 파괴함으로써 곧 장춘으로부터 북상하는 국민당군 주력부대와 함께 북만해방구를 전부 차지하려 시도했던것이다. 국민당으로부터 륙군중장 위임장을 받은 토비두목 강붕비(姜鹏飞)는 할빈부근의 토비들을 규합해 할빈시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강붕비는 장춘쟁탈전에서 아군의 심한 타격을 받은 철석부대의 두목이였다. 그는 리화당의 잔여세력을 배극도에 집결시키고 류작비(刘昨非)의 무리를 아성에 집결시켰으며 할빈시 근교와 송화강 이북에는 토비두목 류송파(刘松坡)와 류경산(刘景山)을 배치해 8월 28일에 동시에 할빈시를 공격하려했다. 1946년 8월 24일 저녁에 강붕비는 할빈시 광복호텔(光复饭店)에서 부하 장교들과 술을 마시고있었다. 그는 국민당 신1군이 곧 할빈으로 공격해 온다면서 이 기회를 빌어 할빈을 점령하고 부귀를 누리자고 부하들을 구슬렸다. 하지만 강붕비의 일거일동은 언녕 아군 정보일군의 손에 장악되여있었다. 술판이 한창 짙을 무렵 민주련군 특공대가 나타나 강붕비와 그의 부하들을 술자리에서 전부 체포했다. 강붕비를 비롯한 적 두목을 전부 제거했지만 놈들의 폭란은 막지 못했다. 1946년 8월 28일에 황창회(黄枪会) 폭도 3000여명은 원 계획대로 할빈에서 폭란을 일으켰다. 당시 할빈의 위수임무를 맡은 주요 력량이였던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명령을 받고 토비들과의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폭도들이 고향(顾乡)에 주둔한 의용군 1대대 2중대의 병영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전사들은 중대장 한택치(韩铎治)의 지휘하에 침착하게 싸워 수십명 폭도를 격살하고 적을 물리쳤다. 다른 천여명 폭도는 도외(道外)를 거쳐 태평교(太平桥)부근으로 공격해왔다. 놈들은 부적을 달고 총뿐만 아니라 칼과 창까지 들고 달려들었다. 태평교를 수비하던 3중대 장병들은 중대장 최서화(崔瑞华)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사격했다. 수십명 폭도가 총알을 맞고 쓰러져서야 혼비백산한 폭도들은 어둠속에 줄행랑을 놓았다. 3중대는 전투에서 수십명 폭도를 격살하고 50여명을 포로했다. 이로써 조선의용군 제3지대 장병들은 승리적으로 황창회의 폭란을 평정하고 정치군사중심지인 할빈시를 승리적으로 보호했다.   1946년말에 이르러 북만의 토비들은 대부분 숙청되였고 북만근거지는 더욱 공고히 되였다. 북만토비숙청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위수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황창회의 폭란을 성공적으로 제압했으며 목단강군구 조선족장병들은 두려움없이 싸워 가목사지역의 동철부대와 함께 토비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목단강시 렬사릉원의 기념조각 목단강시 렬사릉원의 기념비   지금 목단강시 렬사릉원에 가면 마교하전투, 목릉전투, 목단강시 보위전투에서 희생된 93명 조선족장병들의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그리고 할빈시 렬사릉원에도 21렬사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1946년 9월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의 3대대 7중대가 향방구(香坊区)의 시교에서 토지개혁할때 리영택(李英泽) 중대장과 박만근(朴万根) 부중대장이 한개 소대 30여명 전사를 거느리고 사리툰(舍利屯)으로 달려갔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21명이 희생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향방비행장에서 렬사들을 위한 성대한 추도식을 가졌다. 후에 렬사들은 이곳 할빈시렬사릉원에 모셔졌던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철부대의 16명 용사를 기리는 16렬사기념비도 벌리에 세워져있다.   조선의용군 3지대의 21렬사기념비를 소개하는 서명훈 선생   흑룡강성의 이러한 기념비들은 북만을 공고히하고 토비숙청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조선족장병들의 업적과 토비숙청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친 렬사들의 사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줄것이다.   북만토비숙청에서 영용히 희생된 조선족 장병들의 넋은 영원할것이다!
27    제15장 적과의 대치 댓글:  조회:2442  추천:0  2017-03-09
1946년 5월 18일, 사평에서 철수한 민주련군은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20만 병력을 송화강이북으로 철수시켰다. 5월 22일에 동북국은 장춘으로부터 할빈에 철수하고 국민당군은 23일 장춘을 다시 점령하였다. 28일 중국공산당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길료성 당위원회와 정부, 군구는 길림시로부터 돈화를 거쳐 연길로 철수하게 되였다. 따라서 장춘과 길림시 부근 각현의 공산당 조직과 부대도 각기 철수하게 되였다. 동북민주련군 주력이 송화강이북으로 철수한후 동북해방구의 상황은 극히 곤난하였다. 해방구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을뿐만 아니라 각기 분할되여있었다. 막대한 희생을 낸 민주련군은 극도로 피로했고 전투력도 크게 약화되였다. 게다가 아군이 편성한 지방부대에는 총을 가지고 국민당쪽으로 전향하거나 흩어져 버리는 현상까지 나타났고 잠복했던 특무들의 사촉하에 각지의 토비들도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당중앙에서는 “큰길을 내주고 량옆을 차지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내놓았다. 할빈에 도착한 동북국 기관과 민주련군 총부는 연길을 중심으로하는 동만과 치치할을 중심으로하는 서만을 통제하고 통화를 거쳐 남만지역과 련계를 확보하기로하였다.   돈화의 길림성 당위와 정부가 있었던 옛터 비석(장춘, 길림이 강점되자 길림성 당위와 정부는 돈화를 거쳐 연길에 철수)   장춘이 다시 국민당의 손에 들어간후 국공량당의 담판도 한단락 마무리 짓게 되였고 쌍방은 송화강을 사이두고 6월 7일부터 15일간 휴전한다고 선포했다. 점령한 지역이 많아지자 국민당군은 각곳을 수비해야했기 때문에 병력을 분산해야했고 계속 송화강이북으로 전면공격을 발동할 여력이 없었던것이다. 승리의 자세로 장춘을 시찰한 장개석은 지도를 살펴보더니 불현듯 길림시 동부 교하와 서란사이에 위치한 랍법(拉法)을 발견했다. 그는 동만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이곳에도 부대를 파견해 주둔할것을 명령했다. 뭇산에 둘러있는 좁은 평지에 위치한 랍법은 말그대로 북만과 동만을 이어놓는 중요한 길목이였고 장춘, 길림지역으로부터 로야령 산지를 넘어 연변쪽으로 진출할수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국민당 고위장교들은 이곳에 부대를 주둔하면 후방과 멀리 떨어졌기에 쉽게 북만과 동만 민주련군의 협공을 받게 된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어 부대를 파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개석의 명령을 거역할수없게 되자 료요상은 할수없이 71군 263퇀을 신참(新站)에, 264퇀을 랍법에 주둔시킬수밖에 없었다. 장춘, 길림으로부터 철수하던 조선족 부대인 길동경비 2려 5퇀은 적을 유인하면서 서서히 철퇴하였고 길동경비 2려 4퇀은 교하 동북방향에서 위호령을 등지고 신참, 랍법 철길을 향해 매복하고있었으며 장춘쟁탈전에 참가했던 조선퇀도 부근에서 적을 견제하면서 싸웠다. 신참, 랍법에 들어온 고립된 적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동북민주련군 주력인 1종대 1사와 2사가 동원되였다. 6월 7일 길동경비부대는 1사와 2사에 배합하여 공격전에 투입되였다. 아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적을 각기 포위하여 소멸하였다. 경비 2려 5퇀은 신참역을 점령하고 주력부대와 함께 적 263퇀을 전멸하고 퇀장 위요동(韦耀东)을 격살하였다. 그리고 로획한 중무기를 민주련군 1종대에 넘기고 포로들을 돈화에 수송했다. 신참, 랍법이 수복됨에 따라 랍법으로부터 할빈, 랍법으로부터 연변으로 통하는 도로와 철도선이 확보되여 동만과 북만이 다시 이어지게 되였다.   신참,랍법 전투가 있었던 랍법 정거장 랍법전투 기념비   돈화에서 만난 사학자 양명곡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46년 5월 28일 길림성 당위원회와 정부는 길림으로부터 돈화에 옮겨왔습니다. 당시는 국민당군이 이미 길림시를 점령한 상황이였습니다. 8월 17일 성당위원회와 성정부는 연길로 옮겨갔습니다. 돈화에 있는 기간 두가지 큰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신참, 랍법 작전계획을 제정하고 작전명령을 내렸으며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룩했고 국민당군을 로야령 서부로 몰아냈습니다. 두번째 큰 일은 돈화에서 돈화회의를 소집하고 ‘토지개혁과 군중을 전면 동원한다’는 중앙의 7.7지시를 관철함으로써 동만의 형세를 안정시키고 동만해방구를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이번 돈화회의와 동만해방구를 보위하는 전반 작전과 사건중에서 한족과 조선족 두 민족은 잘 단합해 공동으로 지역안정을 유지하고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한편 길림시 동부의 로야령(老爷岭)을 점령한 국민당군이 계속 동만근거지로 공격해오는것을 막기 위해 동만의 군민이 동원되여 할바령에 방어공사를 수축했다. 장춘쟁탈전에서 명성을 떨쳤던 조선퇀인 길동경비 1려 1퇀은 교하일선에 포진했고 길동경비 1려 3퇀은 할바령(哈尔巴岭)에 포진하여 반영구성 방어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할바령 솔숲, 지금도 전호가 패였던 흔적을 찾아볼수있었다 할바령 수축공사에 참가한 리동원 렬사 학생시절 모습 할바령수축공사에 참가한 오룡진 렬사   답사팀을 안내해 할바령 방어공사 전적지를 찾은 연변의 사학자 리송덕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연변의 동대문을 굳게 지키기 위한 방어조치를 취했습니다. 국민당은 석달이면 두만강까지 공격해 들어 올것이라고했고 우리 동북민주련군 사령부에서는 국민당군에게 한치의 땅도 내주지 말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연변의 군민이 동원되여 할바령 수축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공사를 진행할때 연변의 군민이 10만이 동원되였고 군대가 3천명, 두개 퇀이 동원되였습니다. 공사 총길이는 30리입니다. 그때 직접 이 전호를 판 전투영웅 신일권동지를 모시고 이 현장을 답사했는데 바로 여기에 가다가 많은 또치까들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전호를 팠는데 철로 뗏목 레루장을 가져다 놓으면서 주요한 대목에다, 이렇게 했는데 석달동안 했습니다. 이렇게 동만의 대문을 지키는 이 할바령 수축공사는 석달만에 기본상 완수됐습니다. 그러나 우리군의 새로운 작전에 밀려 국민당군은 줄곧 연변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할바령수축공사의 그때의 정황입니다.”   할바령수축공사에는 동만의 조선족부대 300여명과 많은 농민이 동원되였다. 정면 10킬로메터, 종심 20킬로메터인 이 방어공사로하여 동만근거지는 더욱 확고해졌으며 국민당군은 끝내 이곳으로 공격해 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방어공사를 수축하는 일터에서 길동부대 9련의 “황소”로 불리우는 김중호, 7련의 “힘장사” 구자준(具兹俊)이 로동영웅으로 평선되고 7련의 정동학, 장창록도 로동모범으로 표창받았다. 그리고 리동원(李东元), 정청송(郑青松), 오룡진(吴龙珍) 등이 공을 세웠다.   1946년 하반기 동만의 해방구는 연길, 왕청, 훈춘, 안도, 교하, 돈화, 서란, 유수, 오상 등 9개 현과 구태, 영길, 덕혜, 화전을 비롯한 불완정한 현이 포함되여있고 인구는 210만이였다. 이 가운데 연변지역이 80%를 차지하고있고 인구총수의 40%가 조선족이였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길림성정부와 길림군구는 연변을 가장 확고한 근거지로하는 한편 길북(吉北)을 안정시켜 할빈을 보장하고 길남(吉南)의 투쟁을 견지함으로써 남만과의 련계를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연길을 중심으로한 길동을 뒷심으로하고 돈화와 교하에 버티고서서 서란, 유수쪽으로 한 주먹을 휘두르고 반석과 화전방향으로 다른 한 주먹을 내 지른다는 전략 구상이였다. 반석과 화전을 중심으로하는 길남지역은 대부분 국민당군에게 강점되고 사실상 송화강이동의 횡도자와 화수림자, 홍석라자를 비롯한 3개 구밖에 없었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화전보안퇀의 조선족 장병들은 퇀장 양상곤과 부퇀장 송무선의 인솔하에 강동 3개 구를 지키면서 적과 간고한 유격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왕효명이 거느린 24려의 70퇀과 72퇀도 이 부근에서 활동했다.   화전보안퇀 주요간부들 반석현대대에 참가했던 반석의 로전사 리만룡(외쪽), 박현선(오른쪽) 눈덮인 길림시 대툰(당시 조선족마을이였음)   1946년 5월 25일 반석현대대 전사들은 반석현 당위원회와 현정부를 호위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반석현대대 400여명 전사는 4개 련으로 구성되였는데 1련이 한족전사들이고 기타 2련, 3련, 4련은 모두 조선족 전사들로 편성되였다. 당시 4련은 리홍광지대에 재편성되고 기타 세개 련이 간부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있었다. 국민당군이 도처에서 우세를 점하고 공격해오게 되자 현대대 1련이 국민당군에 넘어가려했다. 소식을 접한 현위서기 뢰명옥(雷鸣玉)은 즉각 2련과 3련 전사들을 거느리고 1련 주둔지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혁명하려면 남아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기를 놓고 떠나 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1련의 반수이상이 끝내 대오를 떠나 버리고말았다. 뢰명옥 서기는 남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송화강이남 적구를 전전하면서 간고한 투쟁을 계속 견지하였다.  길림시 당사연구실에서 사업했던 사학자 진지(陈智)는 일찍 뢰명옥 서기와 함께 사업했던 곽명광을 취재한적이 있다면서 반석현 대대의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그가 소개한데 의하면 반석현대대는 후에 독립지대로 편성되여 강동에서 토비숙청을 했으며 아군 주력부대와 배합해 싸웠다. 그리고 길림시 당사연구실의 사학자 장영생(张永生)의 소개에 의하면 길림유격대와 화남유격대를 합병해 편성된 화남유격대대(桦南游击大队)도 강동에서 활동했으며 화남유격대대의 중대장 박길희(朴吉熙)와 지도원 서상철(徐尚哲)이 거느린 2중대는 전부 조선족으로 구성되였다고한다. 이들은 강동에서 싸우는 아군 부대와 배합해 싸웠고 현지에서 지주무장과 토비를 숙청했으며 적 정찰병을 포로하면서 투쟁을 견지하였다고한다. 서란과 유수를 중심으로한 길북지역은 장춘쟁탈전에 참가했던 조리회의 부대가 투쟁을 견지하고있었다. 장춘, 길림지역의 청장년들도 구성된 이 부대는 적을 견제하면서 길북 근거지를 확대해 나갔다. 한편 적 점령구에서도 조선족인민은 공산당과 유격대를 따라 지하투쟁을 견지했다. 길림시 강북대툰(江北大屯)은 조선족마을이였다. 일찍부터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진보인사 최중현(崔仲铉)과 장인덕(张仁德)은 마을에서 야학을 꾸리는 형식으로 130명 젊은 청년을 조직해 모두 조선의용군에 참가시켰다. 후에 국민당군이 길림으로 들어오자 최중현, 장인덕, 권중철(权重哲), 리동근(李东根), 김병선(金炳先), 리대만(李大万), 리명준(李明俊) 등 7명 조선족당원으로 조직된 길림강동특별지부는 적후에서 계속 지하투쟁을 견지했다. 그들은 적정을 료해하고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족청년을 동원해 해방구에 보내는 등 사업을 진행했다. 길림시 당사연구실의 사학자 류동명 선생이 소개한데 의하면 길림강동특별지부에서는 길림시 강북과 강동에 설치한 국민당군의 63개 화점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 아군 영북현 보안퇀에 보내주었고 적 주둔군 번호와 방어상황을 알려주었다고한다. 이들의 뛰여난 정보사업은 아군의 무장투쟁과 이후 길림시 해방에 아주 유리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영길, 교하지역에 유격전을 하는 길교유격대대(吉蛟游击大队)가 있었는데 중대장 윤해근(尹海根)이 거느린 길교유격대대 2중대는 전부 조선족 전사들이였다고 한다. 이 부대는 적후에서 적 첩보원을 응징하고 토비들을 숙청했으며 전투에서 부단히 장대되여 길림군구 독립 6퇀으로 되였다고 한다. 우세한 국민당군이 대도시를 강점하고 해방구로 공격해 오고있는 가장 위급했던 시기 장춘, 길림지역 조선족 군민들은 이와 같이 자각적으로 공산당을 따라 싸웠으며 공산당 간부들을 보위하고 유격투쟁을 견지하였을뿐만아니라 지하투쟁 임무를 훌륭히 완수함으로써 특출한 기여를 했던것이다.  
26    제14장 전략적 후퇴 댓글:  조회:3285  추천:0  2017-02-08
피어린 장춘 쟁탈전이 끝났다. 전반 전투에서 조선족 열혈청년들로 구성된 조선퇀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두려움없이 싸우면서 장춘을 점령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일반 전사로부터 퇀장, 부퇀장에 이르기까지 280여명 우리민족의 훌륭한 아들들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렬사릉원에는 장춘쟁탈전에서 희생된 박락권 퇀장, 고생호 부퇀장을 비롯해 수많은 렬사들이 고이 잠들고있다. 연변의 사학자 리송덕 선생은 렬사릉원을 찾은 연변의 방송애청자들에게 장춘쟁탈전의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1946년도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동안 장춘에서 우리 연변경비 1퇀이 장춘공격부대의 동남종대에 편입되여 싸웠습니다. 동남종대는 세개 퇀으로 구성되였는데 연변경비 1퇀은 동땅 조선족입니다. 퇀장 박락권이구 부퇀장이 고생호구 정치부 주임이 최동광입니다. 최동광이 해방후 자치주인대 주임을 했던 태항산 간부입니다. 이래서 장춘으로 약 천여명이 한개 퇀이 들어갔습니다. 이래서 장춘전투를 사흘했는데 우리 조선족퇀이 아주 큰 공헌을 했습니다. 예. 이래서 마지막 중앙은행청사까지 들어가면서 약 280명이 희생되였습니다. 그 가운데 급이 가장 높은 분이 박락권 퇀장입니다.”   연길렬사릉원의 박락권 퇀장과 고생호 부퇀장 묘비   조선퇀 6련 지도원이였던 김응삼 로인은 아직까지도 소중한 사진 한장을 간직하고있다. 장춘을 점령한후 통신원 김영호와 다른 한 련급간부와 전선에서 남긴 기념사진이였다. 사진은 색이 바랬지만 씩씩하고 름름한 당시 우리 용사들의 모습을 찾아볼수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신경을 바라고”라는 글이 씌여있었다.   장춘쟁탈전이 있은후의 기념사진(왼쪽 첫 사람 김응삼 지도원, 오른쪽 첫 사람 경위원 김영호) 장춘으로 행군하는 조선퇀 장병들(김응삼 수장)     김응삼 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당시 장춘은 신경으로 불리웠고 조선퇀은 연변의 토비숙청을 마치고 장춘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춘, 길림지역, 연변 등지에는 아직까지도 수백명에 달하는 장춘쟁탈전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남아있다. 더우기 장춘쟁탈전에 참전했던 수많은 조선족 로전사분들이 우리 신변에 계신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년로한 탓으로 일부 로인들은 세상 떳지만 많은 분들이 생존해 계신다. 우리는 그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만년을 관심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한다고 생각된다. 장춘쟁탈전은 동북민주련군의 첫 중대한 승리로서 사평전투에 믿음직한 후방기지를 제공했고 국민당군의 북진을 지연시켰다. 이로써 동만근거지를 더욱 공고히하고 북만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시간과 조건을 마련해주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장춘쟁탈전을 통해 우리군은 대도시를 공격하는 소중한 작전경험을 쌓았다.    한편 1946년 4월, 중국공산당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북만의 민주련군 359려단과 송강군구, 목단강군구, 합강군구의 각 부대도 할빈을 포위하고 쏘련군의 철수를 기다리고있었다. 당시 할빈에는 국민당 접수관원과 그들이 끄러모은 경비부대가 있었다. 북만의 최대도시 할빈을 장악해 공고한 근거지를 만들려는 공산당의 전략적 의도에 따라 조선의용군 제3지대도 할빈포위전투에 참가했다. 그들은 할빈교외의 사마툰에 전선지휘소를 설치하고 주덕해 정위의 지휘하에 할빈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있었다.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은 일찍부터 지하간부들을 할빈에 남겨 할빈의 조선족 가운데서 활동했다. 조선독립동맹 지하일군들인 리현준, 리장춘, 김인환 등은 적정을 탐지하고 옷과 약품, 돈을 모아 의용군에 보냈으며 조선인 로동자들을 동원해 자본가들과 투쟁했다. 그리하여 조선인 로동자 400~500명을 조직동원하여 내응 할 준비를 했다. 이 정황을 안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서는 조선족 항일간부 류동호를 할빈에 잠입시켰다. 류동호는 리영택, 마창근, 한탁치 등 3명 중대장과 함께 할빈으로 가서 조선인 로동자 500명을 접수해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제3대대에 편입시키고 할빈으로 들어오는 아군을 영접하기 위해 준비했다. 이때 할빈 한국민회에 소속되였던 150명 조선인 경비부대도 무장을 가지고 조선의용군에 의거해 넘어왔다. 이는 할빈에 잠복했던 우리 지하일군들의 간고한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였다. 류동호는 이들을 제3대대에 편입시켰다.   1946년 4월 28일, 쏘련군의 철수와 더불어 민주련군은 할빈으로 진격했다. 할빈접수는 상상외로 순조로웠다. 이때는 장춘이 해방된뒤라 저항해봤자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할빈시내의 국민당군은 총 한방쏘지 않고 도주해버렸다. 할빈시가 해방된후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공산당에서 가장 믿어주는 부대로서 동북국과 민주련군 주요 지도자들의 경비임무와 할빈시 위수임무를 맡았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남강의 원 일본령사관자리에 지대부를 설치하였다. 3지대 제1대대는 지대부와 함께 있으면서 도리구와 도외구를 책임졌고 2대대는 길 건너편의 원 흥농합작사 자리에 주둔하면서 태평교구와 삼과수일대를 책임졌으며 3대대는 남강, 향방구 일대를 분담했다.   중국인민해방군 군사학원 정문 력사상황을 설명하는 군사학원의 리화 소좌   군사과학원 군사력사분회의 리화 소좌(소령)는 장춘, 할빈, 치치할을 점령한 의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항일전쟁이 끝난후 국민당 장개석은 아미산에서 내려와 승리의 과실을 독점하려했습니다. 관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수차의 무장충돌이 발생하고있을때 국민당은 동북은 주권문제만 존재하기 때문에 쏘련으로부터 동북을 접수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북의 내정문제를 승인하지 않았던것입니다. 1946년 봄, 국공량당이 사평에서 치렬한 쟁탈을 진행하고있을때 우리당은 부분적인 무장력량을 조직해 국민당의 수중으로부터 치치할, 장춘, 할빈을 빼앗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장춘을 차지한후 장개석의 외교문제는 내정문제로 바뀌게 되였습니다. 때문에 장춘의 해방과 더불어 동북문제 담판에서 공산당은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평보위전과 국민당과의 동북쟁탈에 확고한 후방기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중경담판이 있은후 국공량당은 1946년 1월 10일 “국내 군사충돌을 중지할데 관한 명령”, “충돌을 중지하고 교통을 회복할데 관한 국공 쌍방의 명령과 성명”을 비롯한 4개 문건을 정식 조인하였다. 하지만 국공량당의 정화성명은 동북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북에서의 포성은 끊기지 않았다. 1946년 3월에 쏘련군이 심양으로부터 점차 철군함에 따라 충돌은 더욱 심각해졌다. 국민당군은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을 휘몰아 두길로 나누어 남만의 본계와 사평을 공격했다. 1946년 4월말에 이르러 장춘, 할빈, 치치할 세 도시가 아군에게 장악되였다. 민주련군이 피어린 혈전을 거쳐 장춘을 해방하고 이어 할빈, 치치할까지 해방하자 대노한 장개석은 모든 대가를 아끼지말고 사평을 공격할것을 명령했다. 북평에서 신장치료를 받고있던 두률명은 장개석의 명령이 떨어지자 급급히 심양에 와서 부대를 재정비하고 사평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4월 18일, 장춘이 해방될때 국민당 신1군과 71군은 사평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고 민주련군은 첫 대규모적인 도시방어전을 진행했다. 전투는 처음부터 백열화되였다. 적아쌍방은 한치의 땅을 두고 피와 목숨으로 박투했다.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동북민주련군은 국민당 신1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쌍방 모두가 허다한 희생을 냈다. 4월 27일 국민당군 동북총사령인 두률명은 공격중점을 본계에 두고 본계수비군이 사평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본계를 점령했다. 이어 국민당군은 10개 정예사단을 모아 사평을 공격했다. 5월 18일까지 피를 말리는 공방전은 치렬하게 진행되였고 국민당군은 탑자산진지를 공략하였다. 탑자산 진지를 잃음으로하여 전반 방어선에 구멍이 생기게 되였고 사평을 사수하던 동북민주련군 주력이 적의 포위권에 들 위험에 놓이게 되였다. 게다가 이때 동북민주련군은 적 만여명을 소멸했지만 8천여명 이상의 희생을 낸 상황이였다. 더는 지체할수없다고 판단한 동북민주련군 총사령인 림표는 곧바로 동북국과 중앙에 상황보고를 한뒤 부대를 이끌고 사평에서 철수하였다. 전보를 접한 중앙에서는 우선 한달간의 피어린 혈전으로 사평을 사수한 동북민주련군의 영웅적 행동을 충분히 긍정하고나서 상황에 따라 주동적으로 철수하는것을 동의하였다. 그러면서도 국공량당의 담판을 고려해 사평이북의 공주령이나 장춘에 새로운 방어진을 구축할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평에서 철수한 동북민주련군 주력은 허다한 희생을 냈을뿐만 아니라 장병들은 지칠때로 지쳤고 조직체계마저 흩어질 위험이 있었기에 도저히 효과적인 방어진을 칠수없었다. 림표는 장춘까지 내주고 송황강을 경계로 적군과 대치할것을 주장했지만 동북민주련군 내부에는 중앙의 지시대로 장춘을 끝까지 수비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두가지 인식이 엇갈리고있을때 동북민주련군 정위인 라영환이 나서서 림표의 주장을 따랐다. 그는, 대도시인 장춘과 길림을 지켜내려면 대량의 병력이 수요되지만 아군은 그럴만한 병력이 없을뿐더러 장병들이 모두 극도로 지쳤기때문에 지켜낼수없을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적이 매하구로부터 길림시로 진격한다면 장춘을 수비하는 아군 주력이 전부 포위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장춘으로부터 철군해 송화강이북에 방어진을 쳐야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동북국은 림표와 라영환의 주장을 받아들여 할빈을 중심으로한 송화강이북으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사평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동북민주련군 주력을 추격해 공주령, 장춘, 길림을 련속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때 전선이 길어지고 병력이 분산되였기때문에 국민당군도 기동부대가 크게 부족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6월 7일 국공량당 대표는 동북에서 15일간의 휴전협의를 달성했다.   장백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길림을 지나 송원시에 이른다음 큰 굽이를 돌아 다시 동북방향으로 흘러 할빈을 지나 흑룡강과 합쳐 바다로 들어간다. 국민당군과 동북민주련군은 바로 송화강을 사이두고 대치단계에 진입하였던것이다. 장춘, 길림을 차지한 국민당군은 북진하려했지만 덕혜까지 점령하고는 송화강에 막혀버렸고 연변을 중심으로하는 동만을 공격하려던 동진길은 로야령의 험한 산세에 막혀버렸다. 이로써 대치단계의 더욱 간고하고 치렬한 접전은 송화호 동부의 산지와 장춘-할빈사이의 송화강을 사이두고 진행되였다.  
25    제13장 장춘쟁탈전 하편 댓글:  조회:2843  추천:0  2016-09-18
1946년 봄, 동북에서의 국공량당간의 겨룸은 무력투쟁과 담판의 형식으로 진행되고있었다.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10여만 주력군이 심양으로부터 본계, 사평으로 공격태세를 취했고 동북민주련군 총사령인 림표는 손에 장악한 팔로군, 신사군 주력부대를 사평부근에 포진했다. 이로써 동북에서의 대결전 태세가 이루어졌지만 동북에서의 정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공량당의 담판도 치렬하게 진행되고있었다. 쌍방은 동북에서의 군사분단선을 어디로하여야하는가에 신경을 쓰고있었다. 하지만 무력으로 얻지 못한것은 담판으로서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국민당은 동북중부의 중요한 대도시인 장춘을 장악해 동북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하려했고 공산당에서도 장춘을 차지함으로써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으려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치렬한 격전이 벌어지고있는 장춘에 집중되였다.   장춘공격전에 동원된 조선족퇀은 동남종대에 배속되여 장춘시 동남부로부터 돌진해 들어갔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부분적 장병과 연변경비 1퇀 주력으로 편성된 조선족퇀은 박락권 퇀장을 잃는 큰 손실을 보면서고도 전투를 계속 견지해 싸웠다. 조선족퇀 1영과 2영 전사들은 장춘의 동식물원 부근에 당도했다. 답사팀을 안내한 김응삼 로인은 동물원 전적지를 알려주었다. “지금 여기 보이는 이게 그전엔 뭐라했는가면 제1차 장춘공격전에서 이곳은 동물원이라고했는데. 이곳이 조선족퇀으로는 의미 깊은 곳입니다. 지금 보이는것은 돌로하고 철로 이렇게 해놓았는데 그때 이 동물원은 벽돌로 쌓았습니다… 16일날. 그렇게 하고서 고생호 부퇀장이 대리로 부대를 지휘했는데 그날 저녁으로 ‘부대를 다 모이시요.’했습니다. 전룡화 영장이 우리 련에 왔습니다. 우리 련은 원래 퇀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동물원방향으로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동물원방향이 바로 이곳입니다. 벽돌담이였고 하는데 많이 500~600명이 모였습니다.” 아군이 담을 넘자 많은 적이 반격해왔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남먼저 사격위치에 당도한 기포련의 김룡환(金龙焕) 패장은 기관총 받침대가 도착하지 못한것을 발견했다. 적은 당금 눈앞에 닥쳐올 위급한 상황이였다. 어찌할것인가? 김룡환 패장은 땅에 엎디면서 자기 잔등을 받침대로하고 사격할것을 기관총 사수에게 명령했다. 사수는 명령을 어길수없어 52킬로그람이나 되는 총신을 김패장의 등에 놓고 적을 향해 사격했다. 적 몇놈이 이리저리 쓰러지자 다른 놈들은 땅에 납짝 엎뎌 머리를 들지 못했다. 사수는 사격을 멈추고 김패장의 오장륙부가 터지지나 않았나 살펴보았다. 그런데 김패장이 머리를 돌리며 “이 사람이 왜 사격하지 않소? 명령이요. 빨리 사격!”하고 소리쳤다. 사격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사격하기 시작했다. 박락권 퇀장이 희생된후 전투지휘를 맡은 고생호 부퇀장과 몇몇 간부가 의논한 끝에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정면으로만 공격하지 말고 야간습격, 배후습격, 측면공격을 결부해 령활하게 적을 타격하자는것이였다. 아군은 새로운 전술에 따라 슬기롭게 적을 타격했으며 최소한의 손실로 동물원 적의 방어선을 돌파했을뿐만 아니라 270여명을 포로하였다.   동물원부근에 모인 조선족퇀 지휘부 요원들은 새로운 작전을 연구하였다. 김응삼 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서 한 500여명이 모여 대리퇀장 고생호, 리방남 창모장, 최동광 주임 세분이 조용조용 얘기했습니다. ‘지금 복수해야한다. 이번의 전투는 어떻게 하는가?’ ‘적의 배후공격, 측면공격하구’ 그때 날은 컴컴했으니까 지휘원들의 명령에 따라 각 부대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병력을 집중해 측면공격, 배후공격을 해 적을 격퇴시켰습니다…”   2일간의 격전을 거쳐 조선족퇀은 건국대학, 정수공장, 의과대학, 대륙과학원, 동물원을 비롯한 적의 거점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흥인광장(兴仁)에 도착했다. 지금 해방광장으로 불리우고있는 괴뢰만주국시기의 흥인광장은 동서 흥인로와 남북 쓰딸린거리가 합치는 주요한 길목이다. 당시 광장서북쪽에 만자회(万字会)청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은행건물로 변했다. 기재에 의하면 만자회청사는 3층으로 된 철근과 콩크리트 축조물이였고 청사둘레에 담이 둘러있었다.     원 만자회청사가 있었던 낡은 건물 괴뢰만주국협회협회(만자회) 중앙본부 옛터 표지판   아군은 먼저 흥인광장의 기타 건물을 점령하고 반월형으로 만자회 청사를 포위했다. 조선족퇀 전사들은 연막과 은페물을 교묘하게 리용하면서 담에 접근하여 담을 폭파하였다. 길이 열리자 돌격대원이 앞장서서 들어가 1층으로부터 공격했다. 급해난 적 지휘관은 책상과 걸상, 나무궤 따위를 주어다 계단을 막았다. 한편으로는 부하들이 도주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한편으로는 아군의 공격을 차단하려는 수단이였다. 그러자 조선족퇀 전사들은 건물밖의 두더러진 부분을 잡고 2층으로 기여 올라갔다. 창문가에 이르러 먼저 수류탄을 던진후 연기속을 헤치며 벼락같이 들어가면서 사격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군을 보자 적은 계단이 막혀 도주하지도 못하고 그자리에서 전부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만자회 청사에서 조선족퇀은 또 백여명 적을 포로하였다. 이날 적정을 살피러 나왔던 동남종대 부사령원인 오형부가 흥인광장 전투에서 총을 맞고 희생되였다.   조선족퇀 장병들은 치렬한 시가전을 치르면서 계속 시 중심부로 공격해 들어갔다. 삼도만 토비숙청때 4련 련장이였던 전룡화는 이때 2영 영장직무를 맡고있었다. 그는 제2영을 거느리고 훈춘가로부터 공격해 가장 먼저 시중심부인 대동광장, 지금의 인민광장에 접근하였다. 당황한 철석부대 지휘관은 한발자국도 퇴각하지 말것을 엄명하고 예비부대를 투입해 2영의 량측을 공격하였다. 아군의 상황은 아주 불리하였다. 통신원을 퇀지휘부에 보냈지만 종무소식이였다. 위기의 시각 전룡화 영장은 과단하고도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그는 량측의 적을 관계치 말며 4련과 5련으로 돌격조를 묶어 앞으로 공격하고 6련은 화력엄호를 할것을 명령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앞장서 탄우속을 헤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무섭게 공격해오는 아군을 보자 적은 더럭 겁부터 앞썼다. 량측 공격부대도 제풀에 물러가 버렸고 적진지에서는 백기가 흔들렸다. 아군의 과감한 행동으로 장춘시 중심부로 통하는 길이 트이게 되였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20여명 사상자가 나타났고 영장 전룡화가 장렬히 희생되는 큰 대가를 치렀다. 전룡화 렬사, 룡정중학교 시절의 모습   전적지에서 설명하던 김응삼 로인은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 가운데 다시 강조할것은 우리 제2영 영장 전룡화 동지입니다. 그는 태항산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원래 룡정중학교를 졸업하고 항일하기 위해 관내에 들어가 조선의용군에 참가했는데 이 분이 저기 훈련소인데 앞장서서 돌격했습니다. 그는 옆에서 적이 나오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뚫고 들어갔기 때문에 길을 열어놓을수있었습니다.”   “조선의 독립과 만주의 200만 동포를 위해 투쟁하고 앞으로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비장한 맹세를 했던 우리의 영웅 전룡화 렬사! 그는 말 그대로 해방과 자유를 위한 성스런 혁명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쳐 싸웠던것이다. 전룡화 영장이 거느린 2영이 격전을 진행할때 1영과 3영도 부근에서 치렬한 시가전을 진행하고있었다. 평양(平阳)식당부근에서 싸우던 1영은 결사대를 조직해 앞길을 헤쳤다. 1련 련장 허철과 지도원 한용은 다투어 자진하는 우수한 전사들 가운데서 하룡만(河龙满), 정길룡(郑吉龙), 박덕실(朴得实), 강일순(姜日顺), 박창환(朴昌焕), 차경철(车京哲), 박정호(朴正虎), 신만송(申满松), 조복수(赵福秀), 리종덕(李钟德) 등 10명을 결사대로 선정했다. 결사대는 수류탄을 터쳐 철조망과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두려움 없이 공격했고 그 뒤로 1련 장병들이 신속하게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1련은 50여명 적을 격살하고 500여명을 포로하면서 장춘시 중심부에 접근했다. 아군은 정길룡, 강일순, 박창환, 차경철, 신만송, 박정호 등 6명 결사대 대원을 비롯해 20여명이 희생되였다. 한편 김명주(金明柱) 영장이 거느린 제3영도 적 길림경찰총대와 3개 대대를 기본상 소멸했다.   장춘시 중심부인 인민광장은 당시 동인광장이라고 불렀는데 주변에 괴뢰만주국 시정부청사, 경찰국, 방송국, 은행청사가 있었다. 모두 전쟁년대에 지은 건물이기때문에 아주 견고하였다. 이 가운데 은행청사와 시정부청사는 지금도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여있다. 4일간의 혈전을 거쳐 장춘을 공격하던 아군 3개 종대가 모두 이 광장주변까지 도착하였다. 아군은 먼저 주변의 거점을 제거하고 마지막에 집중적으로 중앙은행 건물을 공격하기로 했다.   괴뢰만주국 중앙은행청사(지금의 장춘시 중국인민은행 청사)   4월 18일 새벽, 최후의 공격이 개시되였다. 서남종대는 경찰국과 방송국 청사를 공격하였고 동북종대는 은행청사 부근의 작은 거점을 공격했다. 동남종대는 쓰딸린거리, 민강로(民康路), 장춘대가(长春大街)를 따라 적 시정부청사를 공격했다. 동남종대의 주요 공격부대인 조선족퇀이 시정부청사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 길림성정부 사무청사로 사용되고있는 건물이 바로 괴뢰만주국 시정부청사였다. 건물자체도 기본상 원모습을 보존하고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족퇀 장병들은 이곳에서 치렬한 전투를 진행했다. 아군은 척탄통, 박격포, 기관총을 비롯한 무기를 집중해 사격하였고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앞으로 전진하였다. 강력한 포격에 건물에 불이 달렸다. 조선족퇀 포병이였던 김주필(金周弼) 로인과 조선족퇀 3영 8련 1패 1반 전사였던 김병욱 로인은 그때의 전투상황을 이렇게 회억했다. “우리는 시정부를 공격하던 전사들이 적의 반격에 많이 죽고 공격이 어려워지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포 한문을 끌어다 시정부 청사를 향해 쏘았습니다. 포탄이 시정부 건물에 떨어지자 적진은 삽시에 수라장이 되였습니다. 적들은 층집에서 몰려나와 무기를 버리고 살길을 찾아 헤맸습니다.” “거기 시정부청사까지 밀고 나가는데 적의 화력이 어찌나 센지…적들도 최후 발악을 하는것 같았습니다. 마주 서서 자꾸 총질하여 건물이나 유리창이나 성한데 없었습니다. 시가지전이란게 그렇게 간고했습니다. 어디 피할데도 없구, 그래 ‘확’ 들어가면서 ‘훅’ 날창으로 찌를래기를 하는데 나도 몇놈 찔렀는지 모릅니다. 시정부를 공격할때 날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악을 먹고 뒤잔등을 찌르니 푹 들어가는것이였습다. 놈은 면바로 잔등에 찔려 ‘왁’하고 나가 쓰러졌습니다. 거기서 몇놈 잡구 그랬는데 마지막 그놈들도 최후발악으로 이도하즈까지 막 튀여나왔습니다.”   청사에 불이 달리자 적은 급급히 밖으로 도주해 나와 아군과 백병전을 치렀다. 조선족 전사들의 두려움 모르는 기세와 능란한 창격술앞에서 적병은 전의를 상실하고 모두 손을 들었기때문에 오후 2시쯤해서 시정부청사를 완전 점령하게 되였다.   주변 거점을 제거한후 아군 3개 종대는 병력을 집중해 가장 완고한 적 중앙은행 청사를 포위 공격하였다. 회색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방대한 건물은 지하 2층 지면 4층으로 되였고 봉페된 철창과 무거운 철문이 설치되여 더없이 견고하였다. 당시 철석부대 4천여명 적이 이 건물에 포진하고있었으며 건물 지하실에는 대량의 무기와 탄약, 식량, 약품이 저장되여있었다. 60여년만에 다시 장춘 중앙은행 전적지를 찾은 김응삼 로인은 자못 감회가 깊었다. “…이걸 보니깐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의 전투 모습이 다시 떠오릅니다. 이곳은 중국인민은행입니다. 그때는 위만주국의 중앙은행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건물은 아주 견고하다는걸 우리도 알았습니다. 당시 철석부대 지휘부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철석부대의 무장력량의 마지막 소굴입니다. 그놈들은 끝까지 저항하고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이 기둥말이요…앞에는 다 마대에 흙을 넣고 전체 토치까로 만들어놓고… 뿐만 아니라 창문에 기관총, 보총을 배포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18일날 만주국의 시정청사를 공격하고 그다음에는 이걸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18일날 오후부터 공격시작했습니다. 보다싶이 이것은 은행건물로 지은 집이여서 여간만 견고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탄알이 튕겨나갈뿐 적을 사살하지 못했습니다. 포를 쏘아도 돌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큰 효력이 없었습니다.”   4월 18일 오후부터 적의 마지막 거점인 중앙은행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아군은 엄호를 받으면서 수차 공격했지만 적의 화력이 강했기때문에 드넓은 광장을 통과할수가 없었다. 공격이 안되자 아군은 포 사격 위치를 다시 배정해 가까이에서 정밀사격을 하였다. 포탄은 적의 코앞에서 터졌고 철조망과 은페물, 장애물은 일제히 제거되였다. 뿐만 아니라 창문으로 날아들어간 포탄이 터지면서 청사에 불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군 포격에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서 아군은 신속히 건물에 접근했다. 김응삼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먼저 포격을 가했는데 우리 대포는 구경이 큰것도 아니고 포신도 짧아 1메터 좀 남을까하는 거지요. 구경이 50미리인지 그런데, 아까 건물 벽을 보니 지금도 포탄자리가 있습니다. 포탄자리에 매질해 놓은거 아닌가 가 생각합니다.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고 보기도 좋고 그런데 그때는 은행청사가 축조된지 오라지 않기에 나무가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주변건물도 없었고 주위 200메터가 모두 개활지였습니다. 우리 퇀지휘부가 길 건너 2층집에 잡고있었습니다. 개활지에서 적의 중기관총 사격에 손실이 많았습니다. 악독한 철석부대는 원래 만주국의 헌병대와 마적을 끌어모아 편성했습니다. 놈들은 저녁에 몇번 반격을 시도하다가 캄캄할때 저기 ‘왁’하고 나왔지요.”   마지막 적 지휘부인 중앙은행 청사를 공략하던 과정을 설명하는 로간부 김응삼   아군이 광장을 지나 중앙은행 건물과 수십메터 거리를 두었을때 갑자기 건물의 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천여명 적이 막 쓸어나왔다. 갑작스런 반격에 아군은 잠시 밀리웠고 조선족퇀도 민강로 입구까지 밀려났다. 더는 물러설수 없었다. 뒤에는 수천명 적 포로와 가득 쌓아놓은 무기들이 있었다. 놈들이 그걸 차지하면 그 후과는 상상할수 없었다. 조선족퇀 전사들은 저마다 총창을 꽂나들고 밀고나오는 적과 치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전투가 한창 치렬할때 아군 기타 종대가 공격해 적을 포위하자 반격하던 적은 모두 투항하고말았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조선족퇀의 고생호 부퇀장마저 희생되였다. 고생호 부퇀장의 희생된 과정을 당사자들인 장덕만 로인과 김응삼 로인의 증언이 비슷하였다. “퇀장경위원이 수장을 앞에 세웠습니다. 앞장서 가던 고생호 부퇀장은 옆 골목에서 튕겨나온 적의 날창에 찔렸습니다. 거기서 가슴에 찔렸는데 치료하다가 나오는 어간에 세상떴습니다. 전사들은 혈안이 되여 총창을 들고 적과 육박전을 했습니다. 1중대 중대장이 여섯이나 날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다음 기관총 놀음하구. 무력이 약하니깐 놈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   (김응삼 로인)“18일 중앙은행청사 공격전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서 대부분 적이 다 투항할때였지요. 고생호 부퇀장이 경위원을 거느리고 전장을 수습하고있는데 구석진 곳에서 완고한 적 한놈이 갑자기 날창으로 푹 찔렀지요. 뜻하지 않게 고생호 부퇀장이 복부에 찔려 쓰러졌습니다. 그분은 아마 후방으로 수송되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희생되였을겁니다.”   이튿날 새벽녘에 중앙은행 건물 창문마다 백기가 나타났다. 완전히 고립된 적은 줄줄이 투항해 나왔는데 그 수가 4000명이나 되였다. 중앙은행청사를 점령함으로써 장춘쟁탈전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24    제12장 장춘쟁탈전 상편 댓글:  조회:4667  추천:0  2016-09-06
1946년 2월에 쏘련군의 철수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되였다. 이때는 장개석도 대량의 정예군을 동북에 진입시켰기때문에 쏘련군의 철수를 더 지연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정부의 촉구도 심해졌다. 미영정부는 쏘련은 주둔기한을 연장한 기회를 빌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북의 공업 원자재와 각종 공업설비 그리고 괴뢰만주국정부시기 은행비축금을 자국으로 수송해가고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속히 쏘련군을 동북에서 철수시킬것을 촉구했다. 이 무렵 “얄따회의”개최 1주년을 기념하면서 회의기간의 비밀협의내용이 세상에 공개되였다. 중국의 리익에 손상을 준 이 협의내용이 공개됨으로하여 쏘련을 반대하는 전국적인 항의활동이 진행되였다. 더는 틀고앉아 있을수 없게 되자 쏘련정부는 1946년 3월부터 철군하기 시작했다. 불만이 가득한 쏘련군은 국민당과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고 행장을 수습해 훌쩍 떠났다. 3월 12일 심양을 내놓고 13일에는 사평을 내놓았다.  수십만 정예군이 동북에 발을 들여놓자 장개석은 미국정부의 조절관원인 마셀에게도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동북은 이미 국민당의 천하라고 생각한 그는 공산당과의 평화담판을 극구 거부해 나섰다. 줄곧 중국의 평화담판을 조률해오던 마셀도 할수없이 3월 11일 어두운 표정으로 귀국해 버리고말았다. 장개석의 평화담판의 가면은 드디어 백일하에 드러났다. 동북에 진입한 국민당 정예군은 심양을 점령해 본거지로 만든 다음 주변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해 사평으로 공격하려 시도하였다. 하지만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3종대와 4종대는 본계를 중심으로 적의 공격을 유력하게 견제하고있었고 쏘련군의 철수와 함께 황극성이 부대를 거느리고 신속히 전략적 요새인 사평을 점령하였다. 공산당 동북국의 림시거처인 무순에 있던 림표는 신속히 새로운 작전방안을 구상해냈다. 그는 서만군구(西满军区) 주력을 사평에 모이게 하고 길료군구의 라화생(罗华生), 하경적(贺庆积), 등극명, 조리회(曹里怀)의 4개 려단을 장춘주변에 집결해 장춘을 해방할 준비를 하게 했으며 북만의 주력부대를 사평으로 남하하게 하고 359려단은 할빈주변에 포진하게 했다.     1차 사평공점 전술도표   1946년 4월부터 국공량당의 주력부대는 사평주변에서 치렬한 쟁탈전을 시작하였다. 동북 한복판에 놓인 사평은 교통요도이고 전략적 요새로서 동북을 차지하려는 국공량당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였다. 쏘련군이 사평에서 철군하자 민주련군 황극성 부대가 사평에 진입해 국민당 접수관원을 축출하였다. 그후 민주련군 사령부는 동원할수있는 각 야전군 주력을 사평부근에 집결시켰다. 한편 국민당은 정예군을 몰아 사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평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남만에서는 3종대와 4종대가 본계를 중심으로 국민당 주력부대를 견제하고있었고 동만과 북만의 부대는 정력을 집중해 장춘과 할빈, 치치할을 공격함으로써 사평의 아군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90만 인구를 가진 장춘시는 일제통치시기의 괴뢰만주국 정치, 경제, 군사 중심지로서 신경(新京)이라고 불렀다. 일제가 패망한후 장춘을 접수한 국민당은 괴뢰만주국 군인으로 제2총대와 제4총대를 편성하였고 각지의 15개 경비대대, 한개 기병대대, 5개 경찰중대 그리고 일본군 잔여세력을 긁어 모아 그 병력이 2만여명에 달했다. 특히 한간 강붕비(姜鹏飞)가 지휘하는 제2총대의 한개 사단인 “철석(铁石)”부대가 전투력이 강했다. 이 부대의 전신은 일본관동군 (铁石)소장이 조직한 경비부대로서 많은 중국군민을 살해한 죄악의 부대였다. 동북민주련군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길료군구의 전부 주력이 동원되여 장춘을 포위하고 1946년 4월 14일부터 장춘공격전을 개시했다. 북만에서 남하한 양국부(杨国夫)의 3개 려단으로 편성된 서남종대(西南纵队)는 서남방향으로부터 장춘을 공격하고 조리회(曹里怀)가 거느린 길림, 장춘부근의 부대로 편성된 동북종대(东北纵队)는 동북방향으로부터 장춘을 공격했으며 하경적(贺庆积)이 거느린 경비 1려 1퇀, 2려 5퇀, 24려 71퇀으로 편성된 동남종대(东南纵队)는 동남방향으로부터 장춘을 공격했다. 특히 동남종대의 경비 1려 1퇀은 조선의용군과 연길보안퇀을 바탕으로한 조선족퇀으로서 박락권이 퇀장을 담임하였고 당시 부대번호는75퇀이였다. 1946년 4월 14일 새벽녘에 장춘을 공격할 모든 부대들이 출발지점에 도착하였다. 이날 오전 국민당은 쏘련군으로부터 장춘시정부 행정권을 넘겨받았고 쏘련군 마지막 렬차는 점심에 장춘을 떠났다. 국민당 군정관원들이 장춘을 장악한것을 축하하고있을때 뜻하지 않은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군 3개 종대가 세개 방향으로 장춘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던것이다. 동남종대는 이도하자(二道河子), 남령(南岭)부근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남종대 70퇀은 경비 2려 5퇀을 개편한 부대로서 적 한개 중대를 물리치고 장춘동역을 점령하였고 71퇀은 남령의 몇개 거점을 공점했다. 이때 75퇀인 조선족퇀은 이통하를 건너 정수공장을 거쳐 곧추 진격하였다.   이도하에 새롭게 부설된 장춘대교   조선족퇀 2영 6련 지도원이였던 김응삼 로인은 답사팀과 함께 장춘시 여러 전적지를 다니며 당시 전투상황을 소개했다.  “…저쪽으로부터 진공이 시작되였는데 그때 이런 다리가 없고 다리가 있어도 간단하고 좁고 요런데를 건넜는데 여기에도 포로를 많이 했습니다. 첫 방어선입니다. 우리는 각종 기관총이요 박격포의 엄호밑에 공격하니까 적은 한시간이나 될까 대항하다가 철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이 여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첫 방어선을 한시간도 못되여 돌파하고 저기 빨간 집 저기 앞에까지 나갔지요.”    장춘대학, 괴뢰만주국시기 건국대학이다. 이곳은 북으로 시중심에 이르는 인민대가(人民大街)의 첫 시작이기도 하다. 인민대가는 당시 쓰딸린대가로 불리운 장춘시 남북 주요거리로서 거리 량켠에 콩크리트와 각종 암석으로 축조한 견고한 건물이 많았다. 외곽전투를 마치고 공격하던 조선족퇀 1영은 이 부근에서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건국대학이 있었던 자리(오늘의 장춘대학) 건국대학 부근의 원 정수공장 자리   1영 1련과 2련, 퇀직속 기포련이 일제히 엄호사격을 할때 3련은 신속히 건물에 붙어섰다. 전사들은 십여개 수류탄을 각반으로 한데 묶어서 벽을 폭발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수차 폭발하자 사람이 드나들수있는 크기만큼 구멍이 생겼다. 전사들은 그곳으로 밀고들어가 1층의 적을 소멸하고 신속히 2층 계단으로 공격했다. 적은 모든 화력을 계단에 집중하여 아군은 머리를 들수없었다. 이때 3련 박희선(朴熙善) 련장이 나무나 짚 같은것을 얻어다 불을 달아 련속 계단에 던졌다. 자욱한 연기에 휩싸여 적이 눈을 뜨지 못하는 기회를 리용해 전사들은 벼락같이 돌진해 적 수십명을 생포하고 건국대학을 점령했다. 건국대학과 정수공장을 점령한후 동남종대 조선족퇀은 계속 쓰딸린거리를 따라 북상하면서 싸웠다. 적은 대륙과학원 건물과 석탄주식회사 숙소건물에 방어진을 치고 악을 쓰고 저항했다. 치렬한 건물 쟁탈전과 시가전이 벌어졌다.   지금의 중국과학원장춘응용화학연구소는 괴뢰만주국시기 대륙과학원이였다. 연구소 주건물은 외벽을 다시 수선하고 장식했을뿐이지 옛 건물 그대로이다. 당시 이곳은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과학원으로서 지면 2층 지하 1층으로 되여있다. 200명 적이 화강암으로 된 견고한 이 건물 주변에 철조망과 록채(鹿砦)를 설치하고 지붕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고있었다. 조선족퇀3영이 이곳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괴뢰만주국시기 대륙과학원이였던 중국과학장춘응용화학연구소   조선족퇀 3영 8련 1패 1반 전사였던 김병욱 로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소 알수있었다. “4월 13일에 어디도착했는가면 장춘남쪽에 도착했습니다. 우린 동남부대에 편입되였습니다. 동남부대가 되여가지고 수도공장을 지나 진공해 들어가는 판이였습니다. 건국대학 지나서 그래 어디까지 갔는가면 대륙과학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아주 완고한데지요. 견고한 건물이고 철조망하고 전기철망 휘둘렀지.… 이를 쳐야하는데 임무는 다른련에 다 내리고 우리에겐 차레 없었습니다.… 철조망을 뚫기 위해 뒤에서 엄호하는 부대가 포로 길을 헤치는데 적의 화력이 어찌나 센지 몇개 련이 전진하다가 다 후퇴했습니다. 우리 8련이 임무가 떨어져 갔는데 마침 살데를 만났는지 포격에 문이 확 마사져 열려 거기로 적의 시체를 밟으며 들어갔습니다. 1층까지 들어갔습니다. 수류탄을 암만 뿌려야 적이 구석구석 다 숨는 판인데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우리 반은 적 30명을 생포했습니다. 그리고 련장의 명령에 따라 포로를 후송해갔지요. 대륙과학원은 포를 어찌나 많이 쐈는지 불이 붙었습니다.”   적아쌍방은 치렬한 화력제압 싸움을 진행했다. 그러나 적이 우에서 아래로 사격하기때문에 아군은 적의 화력을 제압할수없었고 폭파수나 돌진하려던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없었다. 수차 공격했지만 안되자 동남종대 부사령원 오항부(吴恒夫)가 사령원 하경적(贺庆积)에게 전화를 걸어 포병지원을 요구했다. 동남종대의 포병은 삽시간에 건물 지붕우의 진지와 건물앞 철조망을 다 날려버렸다. 대문도 포격에 박살났다. 대기하고있던 전사들은 신속히 건물에 접근해 수류탄과 폭파물로 적의 화점을 까부셨다. 건물 웃부분이 불타고있었기에 적은 아래로 내려오다가 시퍼런 날창을 꼬나들고 돌격해 들어온 우리 전사들을 보자 겁을 먹고 무뤂을 꿇었다. 조선족퇀 3영 전사들은 전투가 끝나자 포로를 후송하는 한편 건물의 불을 끄고 건물실험실의 소중한 의기와 표본을 꺼내면서 싸움터를 정리했다. 한편 3영과 병행하여 쓰딸린거리 북쪽으로 공격하던 조선족퇀 1영과 2영도 치렬한 시가전을 치르고있었다. 김응삼 로인의 소개다. “15일 아침 5시부터 공격했는데 적은 고층건물을 리용하고 십자거리에는 보루를 만들어 대항했습니다. 그때는 건물이 많지 않고 여기 4월이니 지금은 나무잎이 큰데 그때는 갓 나무잎이 싹이 트기 시작했단지요. 앞을 보니 환하지뭐. 그러니 진공부대가 진공하다니 자꾸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사망자가 번번한 곳으로 진공하다가는 많이 쓰러졌습니다. 전투에서 우리 박락권 퇀장이 이분이 싸움에서 아주 용감합니다. 항일련군 출신인데 쏘련홍군이 나올때 같이 나온분입니다. 어떤 말을 좋아하는가하면 ‘요또 마이치’ 로씨야어로 쌍놈이라는 뜻인데… 망원경으로 우리부대 돌진하는걸 보다가 박격포, 중기관총 화력엄호를 지휘하다가 적탄에 맞아 희생되였습니다.” 전투는 시작부터 백열화 되였다. 구석구석 또치까가 설치되였고 건물마다에서 총알이 비오듯 했다. 돌격하던 전사들이 련거퍼 쓰러지는것을 보던 박락권 퇀장은 화력엄호를 맡은 6련진지에 와서 직접 중기관총 화력을 지휘하였다. 그가 허리를 펴고 망원경으로 적의 화력을 관찰할때 뜻하지 않게 적의 총알에 명중되였다.   조선족퇀 1영 1패 1반의 전사였던 장덕만 로인은 박락권 퇀장이 총에 맞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들이밀어 시내 옆에 들어붙었습니다. 9시가 될때 내밀기 시작했는데 시내의 건물들은 다 일본 관사입니다. 박퇀장이 싸움해서 그날로 총에 맞았습니다. 내 앞에 사택에 있구 박퇀장은 2영 교도원과 말하느라구 같이 있구 그랬는데 총알이 련속 날아와 집 모서리 벽돌이 탁 튀였고 동시에 박퇀장도 총에 맞았습니다.”     로전사 장덕만, 당시 조선족으로 구성된 75퇀 1영 1련 1패 반장으로서 동만토비숙청과 장춘쟁탈전에 참가   장춘쟁탈전에서 희생된 박락권 퇀장   박락권 퇀장이 쓰러지자 경위원들이 다급히 그를 구호하였고 얼마후 전지(战地)구호대 녀성들이 달려왔다. 구호대의 조영희(赵英熙), 최하진, 윤순자, 림정옥, 원정선, 유창덕 등 수많은 조선족 녀성들이 포화를 무릅쓰고 전선에서 뛰고있었다. 통신원이 달려와 박락권 퇀장이 부상했다고 하자 조영희와 최하진은 만사 제체놓고 뛰여갔다. 그들이 비발치는 탄우속을 헤집고 일본인 주민구에 도착했을때 박퇀장은 이미 의식을 잃고있었다. 그들은 먼저 지혈시키고 상처를 싸맨 다음 포를 끄는 마차에 싣고 급급히 후방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위중한데다 피를 많이 흘렸기때문에 박퇀장은 더 견지하지 못했다. 그는 품에 간직한 군공메달과 증서를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는 숨을 거두었다.
23    제11장 북만과 남만에서 댓글:  조회:3088  추천:0  2016-07-23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에는 토비가 많았다. 이 가운데서도 흑룡강성의 토비가 특히 살벌했다. 리화당(李华堂), 사문동(谢文东), 마희산을 두목으로하는 크고작은 비적떼는 한때 북만 3분의 2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비적들은 공산당 간부를 살해하고 백성의 재물을 략탈했으며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지르군했다. 특히 조선족과 조선족마을에 대해 더욱 극심하게 괴롭혔다. 그리하여 논의 벼가 익어가는것마저도 버리고 살길을 찾아 자리를 뜨는 사람이 많아졌다. 많은 조선족 마을이 비게 되였고 도처에 조선족 피난민 대렬이 줄지어 다녔다. 도중에 비적들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살해된 사람도 얼마인지 모른다. 간악한 비적들과는 무장으로 싸워야 했다. 북만에서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족 청년들이 무기를 들고 비적과 싸웠다. 송화강기슭의 목란현을 해방하는 싸움은 제3지대의 첫 토비숙청 전투였다.   방송국을 방문한 사학자 서명훈 선생(오른쪽)   흑룡강 사학자 서명훈 선생은 북만의 토비숙청 상황을 이렇게 개괄했다. “3지대는 토비숙청 제일선에 많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진운이 조선의용군 3지대는 퇀 편제지만 려단급 대우를 하라고 지시하면서 조선의용군은 국제부대이기 때문에 간고한 전투에는 참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요에 따라 연수전투 다음 상지전투 등 싸움을 겪었습니다. 목단강 조선족부대의 토비숙청은 조선의용군 3지대의 토비숙청과 달랐습니다. 목단강의 14퇀, 영안의 조선족부대는 토비숙청의 주력으로서 영안현의 마린하전투, 그때는 신안진도 영안에 속했습니다. 세린하전투 가장 크게 마교하전투, 동안사건 그리고 목단강시내 ‘5.15’사건 다 제1선에서 토비들과 싸웠습니다. 내가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들은데 의하면 동안전투가 비교적 간고했습니다. 동안전투에서 우리부대는 흑산이란곳에 주둔했었는데 토비 700명이 동안에 들어와 조선사람은 무조건 막 죽이는 판이였습니다. 조선사람들은 갈데 없어 국경에 가까운 쏘련쪽으로 갔습니다. 동안학살에서 생존한 분을 만나 보았는데 그분은 한족옷을 입고 위장해서야 겨우 살아날수있었다고했습니다. 특히 마을의 한족분들이 도와주어서 살수있었다고합니다. 조선의용군이 비적들과 많이 싸웠기에 비적들은 조선사람을 마구 학살했던것입니다. 당시 소식을 듣고 조선부대 두개 퇀이 들어가 토비들을 소멸했습니다. 그후 목릉전투와 마계화전투에서 많은 조선족 전사들이 희생되였습니다.”   1946년 2월 당시, 근 2000명에 달하는 토비가 목란(木兰)현성을 차지하고 주변 마을을 략탈하고있었다. 북만에 도착한 팔로군 359려단과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공동으로 목란현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토비들은 목란현성 주변에 흙으로 담을 쌓고 많은 또치까를 설치해놓았다. 그리고 담에 물을 부어 얼구어 난공불락의 얼음산을 만들었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송강군구의 통일적인 포치에 따라 참전했다. 제2대대 2중대와 제3대대는 김택명 지대장의 인솔하에 목란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거나 지원병이 오는것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그리고 제1대대는 팔로군 주력인 359려단과 함께 현성공격에 참가하였다. 길목을 통제하던 제3대대와 제2대대 2중대는 적을 가득 싣고 오는 적 지원군 트럭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매복했던 전사들이 일제히 사격하였다. 전투는 한동안 지속되였고 중무기를 갖춘 아군의 공격에 토비들은 황급히 오던길로 도주해 버렸다. 전투에서 2중대장 류창렬과 1소대장 리영구가 중상을 입었다. 아군은 수차 현성을 공격했지만 적의 완고한 저항과 얼음으로 된 담을 돌파할수없었다. 방법을 고안하던 끝에 조짚을 묶어 방패로 만들고 공격하자는 묘계가 나왔다. 전사들은 소대별로 나누어 새벽 추위를 무릅쓰고 조짚을 묶어 너비 2~3메터, 높이가 근 2메터에 달하는 커다란 조짚 은페물 4개를 만들었다. 공격이 개시되자 십여명 전사들이 은페물 하나씩 밀고 나갔다. 신기하게도 적탄은 조짚을 뚫지 못했고 아군은 4개의 조짚 은페물을 굴려 담에 접근했다가 담을 넘어 공격해 들어갔다. 당황한 적은 손을 들고 투항하거나 북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흑룡강성 오상(五常)시는 일찍부터 조선사람이 비교적 많이 모여 사는 고장이다. 산 좋고 물 맑아 벼농사가 잘되여 이곳 입쌀은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있다. 일제가 패망한후 많은 토비들이 오상의 조선족 마을을 공격해 입쌀을 빼앗으려했다. 그리하여 벌써부터 많은 조선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무장대를 조직해 일제가 버린 무기를 들고 오상을 지키고있었다. 1946년 1월 29일, 음력설을 앞두고 산하툰의 2000여명 토비가 오상을 돌연 습격했다. 오상 무장대의 600여명 조선족청년은 수중의 수십자루의 보총에 칼이나 창을 들고 적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 민주정부를 보위하는 한편 거리마다 골목마다 싸움터로 만들어 우세한 적과 두려움 없이 싸웠다. 전투가 백열화로 되고있을때 마침 무기와 음력설 물자를 싣고 길림쪽으로 달리던 팔로군 359려단의 자동차 몇대가 오상을 지나게 되였다. 전투장면을 목격한 그들은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였다. 혼비백산한 토비들은 많은 시신을 남기고 급급히 도주해 버렸다. 전투가 끝난후 싸움에 능한 오상 조선족 청년들이 마음에 든 359려단 책임자는 300여명 조선족청년을 접수해 359려단 5퇀에 편입시켰다. 이들 가운데는 후에 흑산대호산전투에서 소문난 “강철8련”으로 불리운 영웅적 부대도 있었다.    동북야전군 10종대 28사 83퇀 3영 8련의 지도원 김교진이 남긴 회억록   강철 8련의 지도원 김교진은 해방후 오상 조선족청년을 위주로 편성된 8련의 상황을 자상히 적은 자료를 남겼다. 자료를 보면 “1946년 2월, 우리 동북민주련군 359려단이 군중을 발동해 공고한 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료녕으로부터 북상하는 길에 오상현을 지날때였다. 지방정부와 협상하여 현지의 4개 련 가운데서 2개 련은 현지에 지방무장으로 남기고 다른 2개 련을 5퇀에 편입시켰다. 5퇀은 이 전사들을 3영에 편입시켜 기포련과 8련을 구성했다. 우리 8련은 이렇게 조직되였다”고 쓰고있다. 1946년 봄 쏘련군이 철군할때까지 북만에서는 토비숙청을 끝내지 못했다. 각지 농촌과 심산밀림에 계속 많은 비적들이 잠복해있었다.   민주련합정부를 수립할데 관한 공산당의 주장과 평화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946년 1월 7일부터 동북인민자치군은 동북민주련군(东北民主联军)으로 개칭하였다. 산해관을 넘어 금주, 심양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잠시적인 휴전기회를 빌어 신1군, 71군, 60군, 93군을 진황도에 상륙시켰으며 계속 북진을 시도했다. 국민당군의 공격에 맞춰 동북 각지의 국민당특무들도 일본군 잔여세력과 비적들을 사촉해 공산당에 대항하게 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료동군구의 1개 퇀과 2개 포병련, 지방부대 그리고 조선의용군 제1지대 주력이 통화지역에서 토비숙청을 시작했다. 아군은 집안을 공격해 200여명 비적을 소멸한후 림강을 공략하여 1000여명 토비를 제거했다. 그리고 계속 몽강, 장백, 무송을 해방했다.   옥황산에서 굽어본 안개속의 통화시   장백산 여맥의 뭇산들로 둘러져있는 통화시는 아름다운 산간도시이다. 옥황산기슭으로 혼강이 흘러 이 산간도시에 활력을 보태주기도 한다. 동북민주련군 통화지대 사령부는 강건너 옥황산기슭에 자리하고있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행정사무를 보는 전원공서가 있었다. 당시 통화시는 공산당과 민주련군이 장악하고있었지만 일본주민구에는 무기를 놓은 수천명 일본관동군 포로가 있었고 국민당특무도 많았다. 그리고 급급히 편성한 통화보안대에도 불순분자들이 많았다. 전반 동북정세가 국민당에게 기울어진다고 판단한 이들은 국민당특무의 획책에 따라 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통화시 신화대가(新华大街)와 광명로(光明路)가 합치는 곳은 옛날 남관가(南关街)로 불리우는 조선인 집거지였다. 남북으로 간도려관, 조선리발소, 평양려관, 동양하숙을 비롯한 가게와 술집이 있었던 곳이다. 통화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이곳에 지대부를 두었고 원 평양려관자리에 중대부를 두었다. 일본잔여세력과 통화보안대내의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준비하고있다는 기미를 알아차린 조선의용군 1지대는 1946년 양력설을 며칠 앞두고 2000여명 규모의 무장시위를 했다. 이에 질겁한 적은 폭동기일을 음력설로 미루었다. 1946년 2월 3일 새벽, 이도강(二道江)발전소를 통제한 폭도들은 전등불을 신호로 폭동을 일으켰다. 동시에 통화 옥황산에 세무지의 화토불이 타올랐다. 수천명 일본관동군 포로, 원 괴뢰만주국 경찰, 국민당 특무가 통화지대 사령부와 전원공서, 강남비행장, 포병학교, 공안국을 목표로 공격했다. 폭도들도 통화지대와 조선의용군 제1지대 주력이 대부분 토비숙청을 나갔다는것을 탐지했던 것이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 중기반장이였던 최창수 로인은 이렇게 회억했다. “2.3폭동은 병원에서 겪었어요. 일본포로들이 도주했다가 잠복했던 놈, 국민당 정치특무하고 합병해 폭동을 일으키려했던것이지요. 우리 팔로군 사령부는 당시 옥황산에 있었는데 하루는 제가 병원에 있는데 불이 세번 왔다가 꺼지고 했습니다. 세번 왔다갔는데 그다음부터 총성이 났어요. 놈들이 사령부를 습격하고 우리 부대를 습격했던것입니다. “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출신의 변혜옥 로인, 옥황산 렬사탑에서   75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답사팀을 안내해 통화시의 여러 전적지들을 답사한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출신의 변혜옥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는 바로 통화 옥황산입니다. 46년도 2월 3일 새벽에 패망한후 남은 왜놈들이 두목자 텅탠(藤田实彦) 참모장이라는 이놈을 위수로해 수천명 폭도들이 이 아래에 있는 팔로군 사령부(통화지대 사령부)를 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때 많은 희생을 가져오고 위급한 시기에 우리 조선의용군이 여기 와서 폭도들을 진압하고 육박전을 해 가지고 생명으로서 이 팔로군 사령부를 보위했습니다. 우리 통화를 지키고 해방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조선의용군 1지대의 주요간부들이 외출했기때문에 당시 통화에 남은 주연, 심청, 주홍성, 리성만을 비롯한 간부들이 비상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주홍성은 경위중대를 거느리고 사령부를 보위하기로하고 기타 간부들은 통화시 각지에 주둔하고있는 각중대와 련락하기로 했다. 얼마후 수십명 폭도가 일본군도를 휘두르며 사령부로 공격해왔다. 건물주변에 은페물을 만들고 대기하던 경위중대는 주홍성의 명령이 떨어지자 세길로 나누어 반격해 폭도를 전부 소멸했다. 강남비행장에 있던 250여명 일본인 비행원은 비행장을 통제하고 비행기와 땅크를 동원해 통화를 점령하려 시도하였다. 적의 시도를 미리 간파한 조선의용군 1중대는 비행장 주변에 매복하고 로창영 분대만 남겨 보초를 서게 했다. 적이 로창영 분대를 공격하면서 치렬한 접전이 벌어질때 매복했던 1중대는 중대장 정동화의 지휘에 따라 번개같이 적을 포위하고 사격하였다. 폭도들은 무리로 쓰러졌고 남은자들은 겁을 집어먹고 다투어 투항하였다. 강남비행장의 적을 제압한 조선의용군 1중대는 얼어붙은 혼강을 건너 포병학교와 땅크부대 대부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도 치렬한 격전이 벌어지고있었는데 1중대는 수비하고있던 통화지대 경위부대와 함께 앞뒤로 적을 공격해 200여명 폭도 전부를 소멸했다. 한편 조선의용군 제5중대는 중대장 고응석(高应锡)의 지휘하에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때 병원의 원장으로 있던 원관동군 시바다 (柴田) 대위는 100여명 일본인을 3개 분대로 나누고 병원의 요해처를 차지하고있었다. 잔인한 일본군 의사들은 수술칼로 자고있는 아군 부상자 150여명을 살해하고있었던 것이다. 병원에 도착한 5중대는 치렬한 격전을 거쳐 폭도를 전부 제압했지만 전투에서 정종덕(郑钟德), 김창식(金昌植), 허승곤(许承坤) 세 전사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5중대는 병원의 기타 부상자들을 보호한 다음 전투가 가장 치렬한 전원공서로 달려갔다.   통화지구 전원공서 옛터 지금의 통화시 당위원회   통화지구 최고행정기관인 전원공서는 이번 폭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옥황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은 전원공서를 포위하고 공격하면서 1층, 2층까지 점령한 상황이였다. 통화지구 전원인 장아천(蒋亚泉)은 사전에 경위부대내의 불순분자를 처단하고 청사 3층을 사수하고있었다. 위급한 시각에 조선의용군 5중대가 도착했고 김기주가 거느린 2중대도 도착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부분적 통화지대 한족전사들과 합세하여 폭도들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아군은 건물 내외로 공격해 적을 제압하였다. 전원공서 보위전투에서 아군은 폭도 100여명을 격살하고 100여명을 생포했다. 날 밝을 무렵 총성이 멎었다. 통화시는 다시 평화를 찾았다. 조선의용군 경위중대와 5중대는 전보국청사를 지켜낸 복흥섭 중대장이 거느린 3중대와 함께 반격을 실시해 통화시 각곳에 널린 폭도들을 숙청하고 폭동진압의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의용군 김응석 중대장은 5중대를 이끌고 일본인 주민구를 수색하던중 한 일본인 집 천정에 숨어있는 29명 폭도를 납포했는데 그 가운데 폭동의 주요 획책자였던 후지다 미쯔히꼬(藤田实彦)도 있었다. 조선의용군 1지대 지도원이였던 최강 로인은 통화폭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통화는 당시 일본놈이 거주하고있었고 또 일본군 잔여세력이 잠복해있었습니다. 비행기 땅크 대포들이 다 일본인이 장악하고있었습니다. 이때 일본군 잔여세력과 국민당 지하반동세력이 결합해 통화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 조선의용군 1지대가 이들을 진압했습니다. 당시 통화지대라는 한족부대가 있었는데 그안에는 국민당의 지하당원 이런 불순분자들이 많아서 팔도하자에 가서 정돈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폭동진압임무는 조선의용군 1지대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근 3천명 폭도들의 폭란을 진압하고 주모자를 다 잡아서 총살하거나 포로로 가두었습니다. 이 폭동은 전국을 놀래웠습니다. 연안의 당시 신화통신사는 폭동과정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승리한후 군중대회는 남경주재 쏘련 미국 영국 대사관에 일본군 잔여세력의 죄악을 폭로하는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 폭동은 국내외를 물론하고 전국을 진감시킨 엄숙하고 또 아주 랭정하게 이 모든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데 성공한 그런 전례가 되였습니다. 우리는 그후에 동북국의 명령에 따라 조선의용군을 리홍광지대로 이름을 고치기로 결정했습니다. 3지대 5지대도 마찬가지로 조선의용군, 조선독립동맹 공작위원회 등 명칭을 없애고 군대는 리홍광지대요 뭐요 바뀌여지고 지방조직은 동북조선인민민주련맹으로 명칭이 바뀌여졌습니다. 그후 우리는 리홍광지대시기 토비숙청에 몰두해 토비 500여명을 소멸했습니다.”     통화시 민주로에 있는 농업은행, 통화폭동을 진압한후 폭도들의 폭행과 진압성과를 전시하던 곳   “2.3”폭동을 진압한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통화에서 리홍광지대로 재편성되고 조선독립동맹도 동북조선인민민주련맹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였다. 통화폭동을 진압한후 리홍광지대는 통화시조선족중학교 운동장에서 토비숙청 동원대회를 열고 세갈래로 나뉘여 본격적인 남만 토비숙청에 나섰다. 조관이 한 대대를 거느리고 집안과 림강 등 현으로 출발하고 안민이 한개 대대를 거느리고 류하현으로 출발했으며 장롱이 한개 대대를 거느리고 무송과 정우현으로 떠나갔다. 1946년 6월에 쌍양현 당정간부들이 몽강현으로 철수할때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부근에 있던 리홍광지대의 한 분대가 달려가 당정간부들을 구하고 토비를 숙청했다. 그리고 림강현에서는 조선족으로 구성된 현대대의 제3중대는 조세결, 정동화가 거느린 리홍광지대 제6중대와 배합해 림강의 토비를 숙청했다. 한편 리홍광지대의 안민 대대는 기병을 선두로 통화시부근의 “군지뢰(滚地雷)”라는 별호를 가진 토비두목이 이끄는 토비를 숙청했으며 조광 대대는 집안현의 손하남, 종해산이 거느린 토비무리를 소멸했다. 그리하여 1946년 11월까지 리홍광지대는 장백산 남쪽기슭에서 활동하던 크고작은 토비무리를 기본적으로 소멸하고 국민당 정규군의 공격을 유력하게 견제하였다.
22    제10장 동만 토비숙청 하편 댓글:  조회:3579  추천:1  2016-05-04
조선의용군이 연변에 도착함에 따라 연변지역의 조선족 경비부대는 병력과 조직력을 크게 보강하게 되였다. 일제가 버리고간 무기를 주어들고 복장도 변변치 못한 경비부대에는 총도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전사들이 많았고 그렇다할 전략전술도 없었다. 하지만 항일전쟁시기 중국관내에서 일정한 전투경험을 쌓고 공산당의 정치주장과 팔로군의 전략전술을 배운 연안과 태항산 의용군 전사들이 연변 경비부대의 련장, 지도원을 맡으면서 부대의 전투력이 강해졌다. 단순히 자기의 땅을 지키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들었던 조선족 청장년들은 태항산과 연안의 조선의용군 간부들로부터 공산당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팔로군의 전략전술을 알게 되였고 또 이들을 통해 보다 정규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던것이다.     경비부대에 적극 참가하는 조선청년들(자료사진)   1946년초에 들어서서 토비숙청은 튼튼한 동만근거지를 창설하는 급선무로 나섰다. 화룡 송하평의 곽영춘 토비무리와 왕청 평강의 전보흥 토비무리를 제거한후 연변의 경비부대와 조선의용군은 두길로 나누어 왕청과 안도방향으로 진격했다. 삼도만 토비들을 소탕한후 1946년 2월에 조선의용군 15퇀, 16퇀은 왕청현 보안퇀과 합쳐 왕청대흥구의 토비들을 공격했다. 대흥구에는 원 일본특무였던 요옥령(姚玉龄)이 거느린 700여명 토비가 있었다. 아군이 맹렬한 포격으로 대흥구를 공격하자 토비들은 다투어 도주하였고 수백명이 포로되였다. 묘령(庙岭)에서 적아쌍방은 대치단계에 들어갔다. 토비두목 마희산(马喜山)과 리무경(李茂庆)이 지원군 600여명을 보내 반격했지만 우리부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토비들은 천교령(天桥岭)쪽으로 밀려나 포위되였다. 고립무원의 경지에 놓인 리무경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묘령,천교령 토비숙청경과를 이야기하는 사학자 리송덕   이때 북만 목단강군구에서도 부대를 조직해 록도(鹿道), 춘양(春阳), 천교령, 묘령 방향으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북만의 부대와 연변부대가 남북으로 마희산을 협공하는 태세가 이루어졌다. 1946년 2월에 북만의 목단강군구 원 산동 팔로군 전송지대(田松支队)와 녕안경비퇀(宁安警备团) 2000여명 장병들이 마희산의 토비소굴인 록도를 점령했다. 흑룡강성과 길림성이 린접한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록도는 동만과 북만을 이어주는 철도선이 지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자못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있다. 흑룡강의 사학자 서명훈 선생이 소개한데 의하면 토비 마희산을 숙청하는 전투에 많은 조선족 부대가 참가했다. 수녕군구 1퇀 2영이 전부 조선족청년으로 구성된 부대였고 목단강군구 경위퇀 2영도 조선족부대였다. 사도하자(四道河子)를 공격할때 수녕군구 1퇀 2영 1련 련장 박봉관(朴风官)을 비롯해 17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위퇀 2영은 연변의 조선족부대와 함께 로묘에서 10여시간의 격전을 거쳐 적을 전부 소멸했다. 아군은 로묘(老庙) 북산의 적 또치까를 제압한후 공격해 들어가 적과 치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두시간 남짓한 격전을 거쳐 토비 한개 대대를 소멸하고 퇀장이하 200여명을 포로했다. 남북으로 협공하던 북만과 동만부대는 천교령에서 회합했으며 토비 400여명을 격살하고 국민당 강북정진군(江北挺进军) 사령인 정운봉(郑云峰)을 비롯해 640명을 포로하고 600여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토비두목 마희산은 대세가 기울어지자 라자구로 도주했다. 이로써 동만과 북만간의 교통로가 열려 근거지건설에 유력한 담보를 제공하게 되였다. 묘령, 천교령일대에서 대패한 마희산은 200여명 부하를 끌고 왕청 라자구에 가서 그곳의 토비두목 안진유(安振有)와 합쳤고 훈춘의 토비까지 끌어들여 무려 천 5백여명에 달했다. 놈들은 부근 산을 차지하고 고지사이에 포병진지까지 구축해 놓았다. 연변의 토비숙청부대는 천교령에서 재편성을 거쳐 경비 1려 산하에 1퇀, 2퇀, 3퇀, 훈춘보안퇀, 포병퇀을 두었다. 조선의용군 16퇀으로 편성된 경비 1려 1퇀은 새로운 임무를 맡고 돈화, 장춘방향으로 진군한외에 기타 부대는 라자구를 공격했다. 겨울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이여서 날씨는 자못 싸늘하였고 겨우내 쌓인 눈은 녹지 않고있었다. 토비숙청에 참가했던 로전사들이 회억한데 의하면 그때 전사들은 군복도 변변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속옷도 없었다. 모두가 울로초로 만든 짚신을 신었기때문에 동상입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할때가 되면 눈을 녹여 익힌 보리밥을 그냥 옷자락으로 받아서 먹군 했다고한다. 라자구에 도착한 이 영웅적 부대는 강신태 사령원의 명령에 따라 경비부대 6련 련장 리섭이 6련과 7련의 주광문패를 거느리고 적의 포병진지를 제거할 임무를 맡았다. 리섭 련장은 유리한 고지에 중기관총을 걸어놓고 6련 1패와 주광문패를 거느리고 숲속에 은페된 적 포병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척탄통수도 련발사격을 가했다. 뜻하지 않은 공격에 적이 정신을 못 차릴때 선두에 선 주광문패가 돌진해 적 평사포를 로획했고 기타 부대도 우회하여 적을 추격하였다. 전투에서 아군은 말 여덟필이 끄는 야포 한문, 평사포 한문을 비롯해 여러가지 포와 중기관총을 로획하고 적 30여명을 격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드센 공격에 배겨날수없게 되자 적은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쪽으로 도주했다. 라자구의 조선족 농가   라자구 토비를 숙청한 다음 연변의 주력부대도 철수하고 왕청현 보안퇀과 연길보안퇀, 훈춘보안퇀이 왕청 경계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교활한 토비들은 아군이 경비를 늦춘 사이 재차 공격해 들어와 포로한 전사들과 80여명 조선족 군중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했다. 분노한 경비부대는 4월과 5월에 드넓은 밀림을 헤치며 로흑산(老黑山)까지 추격해 토비두목 안진유를 격살함으로써 왕청토비숙청의 철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에 와서 동만의 토비들은 대부분 제거되였다. 왕청에서의 토비숙청은 아주 간고하게 진행되였지만 동만 군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승리를 이룩할수있었다. 특히 녀성들의 기여가 컸다. 배초구 조선족 녀성 김순옥(金顺玉)은 마을 녀성들을 동원해 불을 때고 음식을 장만해 전사들을 위로했고 또 부상병들을 따뜻히 돌봐주었다. 묘령에서 싸울때 10여일 동안 장병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있었는데 이를 안 룡수촌 녀성들은 김기옥(金基玉)의 령솔하에 함지에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밤도와 전선에 찾아가 전사들을 대접했다. 그들은 전사들이 쉽게 밥을 먹을수있도록 배추잎으로 밥주걱을 싸서 전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전투가 승리하자 그들은 또 떡함지를 메고 길가에서 만나는 전사들에게 떡을 쥐어주었다. 이 마을 김금옥(金今玉) 녀성은 우연하게 탄약 한상자를 발견했는데 이를 감추어두고 토비들의 위협공갈을 다 물리치고 끝내 조선의용군에게 넘겨주었다고한다. 라자구 토비를 숙청할때 춘양촌의 녀성책임자인 김해송은 마을 녀성들을 데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일쌀을 모아 방아에 찧어 맛있는 떡볶기를 만들어 이튿날 수백명 토비숙청 장병들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인민의 열성적인 지원에 큰 감동은 받은 장병들은 더욱 힘을 내서 토비들을 숙청했다.   한편 연변의 경비부대는 안도, 돈화 방향에서도 토비숙청을 진행했다. 1946년 3월, 연변경비부대 주력이 강신태 사령원의 인솔하에 왕청의 토비를 숙청할때 연변군분구 부사령원인 구회괴(邱会魁)는 조선족부대인 경비3퇀과 4퇀을 지휘해 안도에 있는 토비 선씨(单氏) 3형제를 공격했다. 선병준(单秉俊), 선병인(单秉仁), 선병의(单秉义) 3형제는 항일전쟁시기 일제에게 빌붙어 경찰대대 두목을 하던 자들로서 일제가 패망한후 토비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안도현 공안대대를 조직하였다. 천여명 병력을 가진 이들은 주로 이도백하(二道白河), 량강, 송강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백성을 괴롭히고있었다. 아군은 우선 오도양차(五道阳岔), 오늘의 고동하(古洞河)의 적 한개 대대를 포위공격했다. 4퇀 박근식 퇀장은 전사들을 이끌고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화력으로 적을 제압했다. 궁지에 빠진 놈들은 아군의 남북협공을 받아 전부 소멸되였다. 이어 이 부대는 대전자(大甸子), 오늘의 만보(万宝)향에서 담판을 거쳐 필서문(毕书文)의 토비무리 800명의 투항을 받아냈다. 3월 16일에 경비 3퇀과 4퇀은 료남독립사의 협조를 받으면서 이도백하의 적을 공격하고 또 안도현성까지 점령함으로써 동만과 남만을 련결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토비들을 격살하고 선병준과 선병의를 포함한 350여명 토비를 포로하였다. 선병인은 200여명 졸개를 거느리고 화전, 길림일대로 도주했지만 길림시가 해방될때 포로되여 처형당했다. 1946년초, 연변지역의 각 부대번호는 비교적 혼잡했다. 작전수요에 따라 지방보안부대가 경비부대로 승격하고 여러 경비부대가 수차 집중재편성되면서 부대 번호가 자주 변하게 되였다. 특히 조선의용군이 들어오면서 거듭 재편성됨에 따라 부대번호가 더욱 자주 변했다. 동만의 토비숙청때로부터 근거지보위, 장춘-길림지역 전투때까지의 부대변화상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러하다. 조선의용군 16퇀은 연길1퇀과 합쳐 삼도만 토비숙청을 진행한후 돈화부근에서 토비숙청을 하다가 장춘으로 들어가면서 길동경비부대 1려 1퇀으로 된다. 이 부대는 연변뿐만 아니라 길림성적으로 공산당이 장악한 비교적 유력한 전투부대였다. 조선의용군 15퇀은 안도 명월구에서 경비 3퇀과 합병해 길동경비 2려에 소속되였다가 길림군구 독립 3퇀으로 승격된다. 이 부대 1영이 한족이고 2영과 3영 그리고 퇀직속부대는 모두가 조선족으로 편성되였다. 조선의용군 17퇀은 훈춘에서 재편성을 거쳐 훈춘보퇀으로 되였다.   왕청과 안도의 토비무리를 숙청한후 연변을 중심으로한 동만근거지는 북만과 남만으로 이어져 더욱 확고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연변 각현 보안부대를 제외한 기타 조선족 부대는 돈화, 교하, 길림방향으로 밀고나가면서 팔로군에 배합해 계속 토비들을 숙청하였다. 흑룡강의 사학자 김우종 선생이 제공한 자료를 보면 연변의 조선족부대는 당시 공산당의 가장 믿음직한 부대였다. 연변의 당정사업을 책임졌던 옹문도는 회억록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우리는 부대건설에서 조선족 무장에 의지했기때문에 연변의 부대에는 무장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앞써 돈화현에 8개 무장대대가 있었는데 조선족 대대를 제외한 기타 7개 대대는 모두 전향했다.” 돈화에 남은 이 조선족 대대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지원을 받아 돈화의 토비두목 류화일을 생포한후 독자적인 돈화보안 독립대대로 되였다. 조선의용군으로부터 36명 간부를 지원받은 독립대대는 곧 길동군구 돈화 제4경비대대로 편성되여 산하에 4중대, 5중대, 6중대, 기포중대를 두었다. 독립대대 규모는 600명이고 대대장에 황봉록(黄风录), 정위에 김무(金武)였다. 그리고 4중대 중대장은 최봉준(崔风俊), 지도원은 오호연(吴浩然)이였으며 5중대 중대장은 박필수(朴必洙), 지도원 리일홍(李一红)이였고 6중대 중대장 리성진(李圣振), 지도원 홍순각(洪淳阁)이였으며 기포중대  지도원은 어해송(鱼海松)이였다. 국민당의 위임장을 받고 국민당쪽으로 전향한 돈화지역 기타 무장은 기대작(纪大作), 당옥(唐玉)을 두목으로하는 토비무리로 되였다. 1946년 양력설을 계기로 토비두목 당옥이 홍석라자(红石砬子)에 들어가 략탈하고있다는 소식을 접한 돈화 제4경비대대는 신속히 마을을 포위했다. 하늘에서는 흰눈이 펑펑 쏟아졌고 전사들은 흰천으로 위장하고 길목에 매복했다가 토비순라병 세놈을 붙잡았다. 놈에게서 적정을 알아낸 황봉록 대대장은 4중대와 기포중대로 정면을 공격하고 기타 부대는 우회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날 밝을 무렵 전투가 시작되였다. 이곳 토비들은 포수로 있던 자가 많아 사격술이 좋았다. 아군은 중기관총을 걸고 적의 화력을 압도했으며 박격포로 마을어귀 포루(炮楼)를 폭발시켰다. 그리자 전사들이 일제히 던진 수류탄 폭발소리가 귀를 때렸다. 질겁한 적은 머리를 들지 못했고 달려온 우리 전사들앞에 다투어 투항했다. 이번 홍석라자 공격전에서 300여명 적을 소멸했지만 토비 두목 당옥은 10여명 심복을 데리고 도주해 버렸다.   눈덮힌 동만의 산과 물   돈화부근의 토비가 살벌했기때문에 1946년 2월에 관내에서 온 팔로군을 위주로 편성된 길동경비 2려가 려장 등극명(邓克明)의 인솔하에 토비숙청에 투입되였다. 이들은 대부분 관내에서 왔기 때문에 동북의 환경에 대해 잘 모르고있었다. 돈화경내 삼대산(三台山)부근에서 토비들은 아군 경비 2려 4퇀 1영을 포위공격하였다. 치렬한 전투에서 4퇀 1영 교도원 왕문빈(王文斌)을 비롯해 127명 아군 장병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후 3월 1일에 토비들은 또 안개가 많은 대황툰(大荒屯)에 매복했다가 경비 2려 5퇀을 포위공격했다. 치렬한 전투를 거쳐 5퇀은 대황툰을 점령하고 토비들을 숙청했지만 퇀장 강현여(江贤如)를 비롯해 136명 장병이 희생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경험을 총화한 경비 2려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쏘련군 땅크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토비를 사하연(沙河沿)쪽으로 몰아갔다. 홍석라자 전투를 마친 돈화의 조선족부대인 제4경비대대는 또 줘무태(柞木台)의 토비 류첩명(刘捷明)을 토벌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일제의 밀정을 하던 류첩명은 백여명 토비를 이끌고 줘무태 부근에서 “왕”노릇을 하고있었다. 음력설이 다가오자 놈들은 부근의 마을을 략탈해 백성들이 기르는 새끼돼지까지 모조리 빼앗고도 성차지 않아 삼도황구(三道荒沟)쪽으로 나와 조선족마을의 입쌀과 황소를 략탈하려했다. 제4경비대대는 적 두목부터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6중대의 2소대를 삼도황구로 통하는 길목에 매복시키고 기타 부대로 줘무태를 정면공격했다. 2패 전사들은 눈을 파헤치고 삼각대형으로 길목에 매복해있었다. 눈속에 두시간정도 매복해 있으니 날이 밝기 시작했고 줘무태 산어구로부터 일본군복에 군도를 차고 서양말을 탄채 20여명 졸개를 거느리고 오는 토비두목이 나타났다. 그놈이 분명 류첩명이였다. 부대 명사수 최영준(崔永俊)이 류첩명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가 오형모(吴亨模) 반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격했다. 요란한 총소리와 수류탄 터지는 속에 류첩명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기타 토비들은 무릅을 꿇었다. 몇놈이 겨우 빠져 도주해 가보니 줘무태도 이미 4대대 기타 전사들이 점령한터라 할수없이 돌아와 총을 바쳤다. 이번 전투에서 돈화 경비 4대대 조선족장병들은 토비두목 류첩명을 비롯해 30명을 격살하고 150여명을 포로했다. 그리고 무기외에 로획한 량식과 말, 소는 다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1946년 3월말에 이르러 연변의 주요한 토비들은 대부분 제거되고 남은 토비 2천여명이 돈화부근의 사하연, 관지(官地), 황니허즈(黄泥河子) 등지에 집중되여있었다. 등극명 려장은 경비 2려 전부주력을 이끌고 돈화현 보안대와 쏘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토비들을 공격했다. 대포, 로케트포를 비롯한 중무기를 동원한 아군은 사하연, 관지, 흑산(黑山), 액목(额穆) 등지에서 토비를 전부 숙청해 버렸다.     라자구 토비숙청 렬사기념비와 렬사명단   삼도만 토비숙청을 마친 조선의용군 제16퇀 6련 지도원 김응삼과 4련 련장 전룡화는 연길에서 병치료를 마치고 고향방문을 한뒤 왕청 배초구에서 부대에 복귀했다. 김응삼 로인의 소개에 의하면 경비 1려 1퇀은 왕청에서 토비숙청을 하고 명월구를 거쳐 돈화방향으로 진격했으며 돈화와 액목지구에서 비적들과 싸우다가 이듬해 4월에 장춘방향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이 부대 전사로 있었던 김병욱 로인은 돈화에서의 토비숙청은 아주 간고했지만 조선족 전사들은 드높은 열의로 가는곳마다 애민공작을 해서 인민들의 신뢰를 받았다고했다. “부대는 가는 곳 마다 애민공작을 잘 했습니다. 마을에 가면 마을사람들을 도와 5리밖에 가서 물을 길어다주군했습니다. 그리고 마당도 쓸어주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국민당이 다 달아나고 없으니 관지를 거쳐 액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싸우면서 토비숙청하느라 자꾸 돌아당겠지 뭡니까? 동고일대루, 장산령고개를 넘어가면 어딘가면 교하쪽입니다. 그래 거기서 토비숙청하다가 토비는 크게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무기를 많이 거두어들였습니다. 토비들이 감춰두었던 것들입니다. 그래 처음으로 나에게도 무기가 차례져서 어떻게 좋은지... 바지도 그런 바지를 언제 입어봤겠소? 미용저고리 다 집어치우고 덧저고리로 일본아들 수꾸노, 그걸 입으니 군대 같기도 하고 일본군대 같기도 하고 꼬쟁바지에 다가. 그런데 각반이라 있어야지, 신은 중국사람들 헝겊신 신고 거기서 있다가 또 행군했습니다. 황니하에서 교하쪽으로 진군해 들어가니 들어갈때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갔는데 그때까지는 태극기를 썼습니다.”   돈화인민들은 쌀을 보내고 돈을 보냈으며 부상병을 간호하고 위문공연을 하는것으로 토비숙청부대를 지지해주었다. 돈화조선민족해방동맹에서는 백성들을 동원해 수건, 양말, 치솔들을 모아 부대에 보냈으며 녀성동맹에서는 돈화영화관에서 부대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 많은 조선족 부대가 참가한 동만에서의 토비숙청은 승리를 거두었고 토비화근을 비교적 철저하게 제거했다. 그리하여 동만은 확고한 근거지로 되여 치렬한 장춘쟁탈전에 많은 병력을 파견할수있었고 사평에서 싸우는 공산당 주력부대의 튼튼한 뒷심이 될수있었다. 또한 전반 동북쟁탈전에서 동만은 줄곧 가장 유력한 후방의 하나로 될수있었다.
21    제9장 동만 토비숙청 상편 댓글:  조회:3006  추천:0  2016-04-25
1945년말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은 신속한 행동으로 동북 대부분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였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새로운 전투에 뛰여들도록 동북의 광범한 여러민족인민을 단합시켰다. 항일련군속의 조선인 간부와 조선의용군은 신속히 남만, 북만, 동만에 진출해 조선인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조선인 군민을 이끌고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민주정권을 세우는 성스러운 전투에 나서게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동북진출은 자유와 해방을 찾는 광범한 조선인민을 공산당의 두리에 뭉치게 했으며 전반 동북의 민주정권건설과 토비숙청 그리고 동북에서 국민당과의 대결전을 진행할수있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은 장개석은 평화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무력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부유한 동북을 독점하고 자기의 독재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그는 수천만 동북인민을 계속 수탈하려 시도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국민당 정예군은 산해관을 넘어 금주를 강점하고 심양을 접수하면서 동북에 발을 들여놓았다. 전쟁의 불길은 동북에서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1945년 11월, 발해연안의 진황도에 상륙한 국민당군은 동북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산해관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철수하는 동북인민자치군을 추격해 수중(绥中)에 이르렀다. 국민당군의 공격소식을 접한 동북인민자치군의 총사령인 림표는 급급히 남하하여 흥성(兴城)에 도착했지만 동북에 들어온 팔로군과 신사군, 조선의용군 각 부대가 동북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각곳에 분산되여 있었기때문에 수중에 방어할만한 병력이 없었다. 림표는 할수없이 금주부근 수백킬로메터 공간을 내주면서 적의 주력을 분산시킨후 병력을 집중해 각각 타격할 작전을 구상하였다. 게다가 이때 쏘련정부가 태도를 바꿈으로하여 공산당의 립지는 더욱 어렵게 되였다. 쓰딸린은 동북각지에 널린 10여만 공산당부대로는 장비가 우수한 국민당 수십만 정예군을 막아낼수없다고 생각했고 쏘련정부가 계속 공산당을 지지하다가는 동북에서 아무런 리득을 챙기지 못할뿐더러 미국과 영국 정부의 더 큰 정치압력을 받게 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잠시 중지하고 장개석 국민당정부에 행정권을 넘길것을 동북에 주둔하고있는 쏘련군 사령부에 지시했다. 11월 26일, 쏘련군은 심양에 있던 중국공산당 동북국을 축출했고 동북 대중도시에서 공산당을 축출했으며 국민당 관원을 보호하고 그들을 도와 정부체계를 수립하였다. 쏘련이 태도를 바꿈에 따라 동북의 상황은 더욱 혼잡해졌다. 숨어있던 국민당 특무와 괴뢰만주국 관원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수시로 공산당 간부를 습격하고 암살했으며 각지 보안대, 치안대에도 전향하는 자가 많아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모택동과 당중앙에서는 동북문제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12월 28일, 모택동은 동북국에 보내는 중공중앙의 지시문을 작성했다. 바로 “공고한 동북근거지를 건립하자”는 그 유명한 보고였다. 글은 광범한 동북 농촌과 인민에 의지해 공고한 근거지를 다져나감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이룩할것을 동북국에 지시했다. 이때 쏘련군의 지지를 받은 장개석은 심양과 장춘에 부대와 군수품을 공중수송하는 한편 국민당이 동북을 완전 장악할때까지 철군기일을 연장할것을 쏘련정부에 요구했다. 그러지 않아도 동북에서 더욱 많은 리익을 챙기려하고있던 쏘련은 이 요구에 응해 철군기일을 1946년 1월후로 미룰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비위에 거슬렸다. 미국은 쏘련군이 계속 중국에 남아있으면 자기리익에 손상주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평화담판을 적극 주장해 나섰다. 미국 륙군참모총장이였던 마셀(马歇儿)장군이 직접 나서서 국공량당의 평화담판을 촉성하여 잠시적인 휴전상태가 나타났다. 하지만 국민당은 동북의 일본군 포로와 괴뢰만주국 군인과 경찰 심지어 마적떼까지 사촉해 계속 공산당과 대항하게 하였다.   옹문도(1912-1997) 한족 1945년 11월부터 1946년 2월가지 길림성 연길지방위원회 서기, 길림군구 연길군분구 정치위원을 담임, 해방후 국가림업부 부장, 서기 등 직을 련임.     1945년말 연안에서 파견한 공산당 간부인 옹문도가 연변에 도착해 연변의 당정사무를 책임지게 되였다. 동북내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중되여있는 연변지역은 항일전쟁때부터 반일조직과 공산당조직이 있었기때문에 혁명토대가 비교적 좋았다. 그리하여 연변에 도착한 옹문도는 비교적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할수있었다. 
20    제8장 동만에 도착한 의용군 5지대 댓글:  조회:2794  추천:0  2016-04-14
1945년 11월 심양의 조선의용군 군인대회에서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편성해 동만지역으로 파견했다. 동만은 장백산을 중심으로한 중국과 조선 국경지역을 말한다. 대체적으로 장백산 북쪽기슭의 두만강으로부터 길림시주변까지, 장백산 남쪽기슭의 압록강 상류로부터 길림시주변까지의 지역이 포괄된다. 청조말기부터 일제 강점시기까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동만에 정착했기 때문에 이 지역 조선인수는 백여만명에 달했다. 이들을 쟁취하여 혁명에로 이끌기 위해 중국내에 남은 조선독립동맹의 가장 중요한 간부와 조선의용군 정예부대로 제5지대를 편성했던것이다. 제5지대 지대장에 리익성이고 박일우가 직접 정위를 맡았다. 그리고 전우가 5지대 참모장을 맡고 주혁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9개 중대 900여명 규모인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심양을 떠나 도보로 동만을 향해 진격했다. 중국관내에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간고한 항일전쟁을 겪어왔던 이들은 모두가 드높은 사상각성과 풍부한 혁명경력을 가진 우수한 혁명간부이면서 또한 훌륭한 전사였다. 심양에서 출발한 이들은 드높은 혁명열의로 조선족마을을 거칠때마다 혁명선전을 진행하면서 훌륭한 청년들을 받아들여 대오를 장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수한 간부를 남겨 현지의 혁명사업을 돕게 했다. 원 조선의용군 제5지대 무전대에 있었던 김응삼 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의용군 각 지대중 오직 5지대에만 무전기가 있었다고했다. “박일우 그분이 지대 정치위원이고 부사령원인데 내가 원래 무전대에 있었는데 무전대는 리홍광지대도 없고 북만에도 없고 딱 박일우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분은 공산당에서 가장 신임을 받는 사람이였습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무전대 전사였던 김응삼 로인(길림성 반석에 거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씩씩하게 전진하는 조선의용군은 도처에서 조선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응삼 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제5지대는 도보로 료녕성 청원에 이르렀을때 흰 조선옷을 입은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조선의용군은 맞아주었다. 그리고 친인을 만난듯이 즐거워했고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간부들은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의용군의 투쟁사를 이야기했고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배워주기도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조선의용군이 곧 떠난다고하니 “우리 조선인의 군대가 조선사람을 보호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가?”하면서 서운해했다. 그러자 리익성 지대장은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남만지역은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책임졌으니 그분들이 곧 올것이며 제5지대는 명령에 따라 계속 동만으로 가야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지대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마을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제5지대 용사들을 바래주었다고한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용사들은 청원에서 기차를 리용해 길림시 부근의 반석역에 도착한후 수요에 따라 10여명 간부를 반석에 남겨 투쟁을 지도하게 했다. 그리고 반석을 거쳐 길림시에 도착하였다. 길림보안대 제3총대 제7대대는 모두가 조선청년으로 구성된 부대라는것을 안 박일우 정위는 부분적인 간부를 남겨 제7대대의 사업을 지도하게 했다. 제5지대 간부들은 화전에 가서 제7대대 전원과 회합했으며 길림시부근의 쌍하진, 강밀봉, 구전, 오리하, 서양, 차로하, 화피창 등지에서 더 많은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12월말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정식 편성했다. 항일전쟁시기 연안에서 활동했던 오랜 혁명가인 박훈일이 새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제7지대의 지대장과 정위를 맡았다. 그리고 최명이 부지대장 겸 부정위를 맡고 김극이 참모장, 최중렬이 부참모장을 맡았다. 그러나 사람은 많았지만 무기가 많이 부족했다. 지대부에서는 항일련군 1로군 1사가 남겨놓은 무기를 찾아낼 임무를 5중대 중대장을 맡았던 송무섭에게 맡겼다. 명령을 받은 송무섭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전과 몽강 접경지의 산속을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50여자루의 3.8식보총을 찾아내 무장하게 되였다. 무기는 좋지 않았지만 일제와 간고한 투쟁을 진행했던 항일련군이 남긴것이라고 생각하니 전사들은 더없이 기뻐했다. 드디어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1,500여명 규모에 6개 중대로 나뉜 전투부대로 되였으며 화전을 중심으로 서란, 횡도하자, 상산툰, 화수림자, 팔도하자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어린 항쟁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후에 화전보안퇀으로 되였다가 길림지역 조선족부대인 72퇀으로 확대 편성되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길림에서 기차를 리용해 연길로 가려했지만 지대 전원이 탑승할수없게 되자 참모장 전우가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선발대로 먼저 가게 되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를 실은 기차는 흰 연기를 토하며 첩첩한 산곡을 지나 연길로 향했다. 기차는 룡담산, 강밀봉, 교하를 거쳐 험산준령을 뚫고 돈화역에 도착했다. 부유한 두만강기슭과 길림-장춘지역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한 돈화는 지리적으로 자못 중요하였다. 그리고 돈화는 괴뢰만주국시기 일본 관동군 제1방면군의 주요한 거점이였기에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량의 무기가 남겨졌고 민간에 흩어졌다. 돈화시 당사판공실의 사학자 양명곡 선생은 당시 돈화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쏘련군은 8월 19일에 돈화에 왔습니다. 그때 돈화는 일본군의 중요한 기지였기때문에 대량의 무기가 남아있었고 일본 패잔병들이 산속에 숨어 자주 마을을 습격해 량식을 빼앗군했습니다. 십여년간 일제의 억압을 받던 돈화부근의 마을사람들은 다투어 무기를 들고 마을을 지켜싸웠습니다. 그러다가 11월에 항일련군 간부 류건평, 박영선, 심봉산 등이 왔고 또 연안으로부터 양상규, 양상곤 등이 왔습니다. …조선족은 박영선이였는데 박영선은 쏘련에서 왔고 류건평의 안해였습니다. 돈화에 온 이들은 돈화현사업위원회를 설립하고 영길현의 령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돈화보안 사령부를 설립했습니다. …양상곤은 백퇀대전때의 팔로군 퇀장이였는데 성격이 불같아 누구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친형인 양상규만이 그를 단속할수있다고하여 두 형제가 함께 돈화에 와서 부대를 책임지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총을 든 사람들은 선량한 백성이였지만 이들을 거느린 두목은 대부분 괴뢰만주국시기의 현장, 보장, 경찰, 군관을 하던자들이여서 암암리에 국민당의 위임장을 받았던 탓으로 매우 불순했습니다. ” 당시 돈화부근에는 지금의 향이나 진 규모인 촌이 10개가 있었는데 촌마다 모두 자체의 무장이 있었다. 항일련군 간부들은 돈화에 온후 이들을 8개 대대의 돈화보안부대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류화일이 현장으로 되였다. 원래 괴뢰만주국 군의로있던 류화일은 일제가 패망하자 곧바로 신분을 바꾸어 돈화현의 돈 있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치안유지회 회장이 되였으며 영문을 모르는 쏘련군의 지지를 받아 돈화현 현장까지 했던것이다. 암암리에 국민당의 위임장을 받은 류화일은 백방으로 공산당과 항일련군 간부들의 활동을 방애하였다. 그는 국민당의 위임장을 들고다니며 돈화보안대의 대대장, 중대장을 임명하면서 부대를 장악하고 국민당정부와 쏘련정부가 체결한 이른바 “중쏘친선조약”을 턱대고 쏘련군을 찾아가 공산당이 설립한 민주정권을 승인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쏘련군은 더는 보호할수없으니 빨리 돈화에서 철수할것을 돈화현 사업위원회에 통보했다. 류건평과 양상규, 양산곤 등 공산당 간부들은 할수없이 전향하지 않은 보안대의 조선족대대를 거느리고 남황니허쪽으로 철수하였다. 류화일은 도처에서 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고 살해했으며 팔로군을 습격하였다. 뿐만아니라 연길로 문서를 가져가는 주보중의 안해 왕일지와 강신태의 안해 장경숙까지도 억류하고있었다. 그리고 돈화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를 일본패잔병이라고 쏘련군에 거짓보고를 하여 무장해제를 하게했던것이다.   동만으로 통하는 길목인 돈화기차역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가 탑승한 기차가 돈화에 도착한후 뜻하지 않게 쏘련군의 저지를 받게 되였다. 전우는 전체 대원들에게 맹동하지 말고 사태를 주시할것을 명령하고 쏘련군과 협상하려했다. 하지만 쏘련군은 상급의 지시라고 하면서 무조건 무장해제를 한다고했다. 사태확대를 막고 쏘련군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전우는 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쏘련군의 태도는 자못 단호하였기에 협상이 잘 되지 않고있을때 강신태가 나타났다. 그는 주보중의 부인 왕일지와 안해 장경숙이 억류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급히 돈화에 왔던것이다. 그때 왕일지와 장경숙은 쏘련군의 도움으로 이미 풀려났었다. 전우를 만난 강신태는 쏘련군을 찾아가 이들은 조선의용군이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대오라고 극구 설명해서야 오해가 풀렸고 선발대는 다시 무기를 찾게 되였다. 한편 전우가 거느린 선발대가 돈화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제5지대 본부는 박일우의 지휘하에 급급히 돈화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눈길을 헤치며 급행군하여 화전의 상산툰을 거쳐 교하로부터 진군하다가 돈화에서 철수한 양상곤과 돈화현 보안대 조선족대대를 만났다.   돈화의 사학자 양명곡   돈화의 사학자 양명곡 선생은 당시 보안대의 조선족대대는 국민당에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돈화현사업위원회의 공산당 간부들을 보위하면서 싸웠다고 이야기했다. “보안대의 나머지 한개 대대는 현위를 보위하여 남황니허에 갔습니다. 조선족대대입니다. 이 조선족대대는 국민당과 결탁하지 않고 중국공산당을 긴밀히 보호하여 철수하였습니다. 1945년도 년말일것입니다. 현위는 18도구에 갔는데 거기서 회의를 열고 출로를 토의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의용군 5지대가 도착했습니다. 태항산 5지대라고했는데 영의 규모였습니다. 이들은 길림, 교화쪽으로부터 돈화에 왔습니다. 돈화에서 이들은 양상곤과 만났는데 서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들은 함께 현성을 탈취하자고 했습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정기두(郑基斗)가 거느린 돈화보안대 조선족대대를 합쳐 천여명의 병력이 돈화부근에 집결되였다. 이들은 우선 비행장을 지키는 반란군의 무장을 해제한후 돈화현성의 경찰대대를 공격했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류화일을 생포하고 돈화에 새로운 인민민주정권을 세웠다. 돈화의 질서를 회복한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36명 간부를 남겨 돈화의 조선족대대를 훈련시키게 하고 연길로 떠났다. 돈화조선족대대는 공산당의 령도하에 돈화부근에서 계속 토비들과 싸웠으며 후에는 길동군구 독립 6퇀의 기간력량으로 되였다. 1945년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한 조선의용군 간부 30여명이 연길에 도착해 조선의용군 판사처를 설립하였고 년말에 드디어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연길에 도착하였다.   동만으로 향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1945년 말에 연변에 도착   연길에 도착한 조선의용군은 항일련군과 합쳐 력량을 크게 확대했을뿐만 아니라 민주대동맹을 토대로 동만의 당원 발전사업에서도 큰 성과를 가져왔다. 연변은 항일전쟁시기 반일유격대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던곳이고 조선족 군중속에 공산당조직이 계속 존재했기 때문에 군중토대가 아주 좋았다. 일제가 패망한후 연변의 조선족 가운데서 공산당조직은 신속히 확대되였는데 1947년의 통계를 보면 연변의 2,057명 당원 중 조선족 당원수가 반을 넘는 1,120명이였고 1948년에는 연변당원총수 3,175명 가운데 조선족 당원수가 2,579명으로서 근 80%를 점했다. 이와 같은 훌륭한 군중조직과 당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연변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신속히 확대되였으며 강신태가 거느린 3개 경비퇀과 훈춘보안퇀을 합쳐 조선의용군 제15퇀, 제16퇀, 제17퇀, 포병퇀으로 확대편성되였다. 연변의 무장은 초기부터 당의 직접적인 령도하에서 발전되였기때문에 공산당의 가장 믿음직하고 전투력이 강한 무장으로 되였다.
19    제7장 광복후 길림지역 댓글:  조회:2719  추천:1  2016-03-29
아름다운 송화강 기슭에 자리잡은 길림성 길림시는 성 소재지인 장춘과 더불어 남만과 북만, 동만을 이어주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리고 토질이 놓아서 일찍부터 많은 조선인이 길림시주변에서 송화강의 물을 리용해 농사를 짓으며 살아왔다.   일제가 패망하자 국민당은 동북을 독점하기 위해 미리부터 장춘과 길림시에 접수대원을 파견했으며 괴뢰만주국 경찰과 군인, 지주무장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였다. 한편 군사통제를 실시하고있는 쏘련군은 민생에는 별 관심을 돌리지 않았고 대중도시의 기본 치안상황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협정에 따라 행정권을 국민당에게 넘겨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동북의 기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길림지역 상황도 아주 혼잡하였다. 이러한 혼잡한 시국에 동북에 도착한 공산당 동북국 간부들은 쏘련군에 있던 항일간부들과 련계를 가지고 군중을 발동하고 길림시를 쟁취하기 위해 힘썼다. 제9기 전국정협 부주석인 조남기 장군은 광복후의 길림지역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할대 조선족은 길림지역에 많이 산재해있었습니다. 한 반달동안은 괜찮게 보냈지만 9월총에 이르러 사회는 무정부 상태에 들어갔고 사회가 아주 혼잡해졌습니다. 국민당의 사촉하에 괴뢰만주국 헌병, 경찰이였던 사람들이 지주세력과 결탁해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조선족의 상황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자주 강탈을 당했는데 소, 돼지 다 빼앗기고 릉욕까지 당하군했습니다. 당시 쏘련홍군은 내정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았기에 곤난을 많았습니다. 9월 중순에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마을의 80여명 조선족 청년들을 규합시켜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총은 많지 않았는데 80여명이 십여자루의 보총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도주할때 버려진 칼이나 창 다 합쳐 20개 안되였는데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는 당시 조선족 7개 자연촌, 40평방킬로메터 범위를 지켰습니다.”     9기 전국정협 부주석인 조남기 장군   길림시 주변 조선족청년들은 시국이 혼잡해지고 토비가 많아지자 스스로 무장을 마련해 마을을 지켜 싸우기 시작했다. 길림시 영길현 차로하의 조선족청년들은 조남기를 따라 일제가 버리고 간 총이나 칼을 가지고 자기 마을을 지켰다. 하지만 국민당의 사촉하에 토비가 더욱 창궐해지는 상황에서 진정 자기를 지키고 마을을 지킬려면 보다 믿음직한 조직을 찾아야했다.   (조남기장군)“우리는 출로를 찾아야했고 뒷심이 될 곳을 찾아야했습니다. 의지할곳을 찾기 위해 나는 길림시의 조직, 사실 조선독립동맹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이 동맹에 참가할것을 요구하고 량환준 동지의 소개로 참가했습니다. 이후 세가지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쏘련홍군을 옹호하는것이고 그때는 팔로군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는것이며 세번째로 팔로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것이였습니다.”   일본이 투항한후 리진국, 량환준, 황범식, 황재동을 비롯한 조선인 유지인사들이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리진국을 위원장으로 한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일본제국주의 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하자!”, “조선의 통일과 완전 독립을 견결히 지지하자!”, “중조 민족의 단결을 강화하고 공동의 적을 반대하자!”등 구호를 제기했다. 1945년 9월 1일, 길림시조선족소학교에서 길림지역 조선인대회가 소집되였는데 무려 500여명이 참가하였다. 대회에서 중국의 조선인의 전도와 미래를 두고 치렬한 론쟁이 있었지만 길림시조선인해방동맹이 자기의 역할을 잘 발휘해 대다수 조선인의 지지를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최중렬, 최필현, 최경자, 황병훈, 배극, 황귀현, 남춘후, 장사백, 장인덕, 리찬해, 반병하, 안창수 등 50여명 성원을 더 받아들였다.     길림지역 조선인대회가 소집되였던 곳(원 길림시조선소학교 자리)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쏘련군에 있는 조선인 대위 박진섭(朴镇燮)을 통해 쏘련군 정치부의 지지를 받게 되였고 길림시 대마로의 원 괴뢰만주국 은행청사에 자체의 사무기구를 설치하게 되였다. 그리고 박진섭 대위를 통해 쏘련군 길림시 위수부사령원인 왕효명(王效明)을 알게 되고 또 중국공산당 길림특별지부의 서기 리유민(李维民)과 련계를 가지게 되였다. 왕효명과 리유민의 소개로 량환준을 비롯한 조선인해방동맹 간부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유민은 1945년 10월 18일, 통천가의 김정혁의 집에서 조선인해방동맹 주요간부를 모아놓고 중국공산당 길림특별지부산하의 길림조선인 분지부를 설립하였다. 량환준이 분지부 서기를 맡고 최중렬이 조직위원, 리진국이 선전위원, 황재동이 로동위원, 배극이 청년녀성위원을 맡았다. 이때로부터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선전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중국공산당 길림조선인 분지부가 설립된후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은 주동적으로 분지부의 령도를 받으면서 선전여론사업을 적극 전개했다. 황범식이 주필을 맡은 우리글 간행물 “해방”잡지는 당의 정책과 주장을 적극 선전하였다. 청년녀성위원인 배극은 이때 허윤도와 김순호 등과 함께 조선인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수백명 맹원을 가진 조선인청년동맹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일제와 괴뢰만주국 잔여세력을 청산하고 중조 민족의 단결을 추진하며 민족문화교육을 발전시키는것을 취지로했다. 배극이 청년동맹의 위원장을 맡고 우리글 간행물 “종”을 출간하였다. 허윤도는 이 잡지의 주필을 맡고 “계급과 계급투쟁”, “대중철학”, “련합정부를 론함”등 주요한 글을 번역해 실었다. 청년동맹은 또 3기에 거쳐 청년강습반을 꾸리기도했다. 중국공산당 길림시특별지부 조선인분지부 산하에는 또 황병훈이 맡은 길림 조선인 농민협회, 김찬해가 위원장을 맡은 길림 조선인 녀성동맹이 있었다. 량환준이 조직한 조선인해방동맹에 참가한 조남기는 마을주변에서 자위대 조선청년들을 훈련시키고 조선족마을을 순라하였다. 11월이 되여 팔로군 선견대가 길림주변에 나타났다. 략탈을 일삼는 국민당의 선견대, 치안군과는 달리 팔로군은 민족단결을 주장하면서 여러민족 인민을 평등하게 대하고 백성을 추호도 범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조남기 장군은 팔로군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했고 팔로군에 입쌀을 지원하던 일을 회억했다. “11월쯤에 팔로군 선견대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직접 본데 의하면 동북의 방을 보면 량쪽이 구들이고 가운데가 바닥으로 되여있습니다. 팔로군에 부분적 조선족 전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구들에서 자고 한족 전사들은 그냥 바닥에 짚을 깔고 잤습니다. 이것이 평등이라고했습니다. 팔로군에 대해 들은적이 있지만 팔로군이 나쁘다는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알게 되니 더욱 팔로군에 호감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때 팔로군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먹는 문제였습니다. 공작대를 농촌에 보내 량식을 징수했지만 국민당처럼 사처로 다니며 빼앗지 못하기에 참 어려웠습니다. 동북의 한족들은 팔로군에 대해 잘 몰랐고 국민당만 정통으로 생각했기에 량식을 내놓지 않고 나쁜 쌀만 조금 내놓군했습니다. 팔로군이 조선족에 대해 이렇게 좋은데 우리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선족을 동원해 쌀을 거두었습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일제통치할때 쌀을 얼마 바치고 지주에게 얼마 뜯기우고나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곳저곳 쌀을 바치지 않아서 많이 남을것이니 남은 량식을 팔로군에게 바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팔로군의 지지가 없으면 우리의 힘으로 마을을 지켜내기 힘들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 20여만근을 바치게 되였습니다.”   1945년 12월 27일에 길림시 영길현 차로하에서 길림성 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길림성정부를 세웠다. 대회에서는 주보중을 길림성 주석으로 선거하고 “길림성 시정강령”을 채택했다. 대회기간 조남기가 자위대 청년들을 이끌고 20여만근의 입쌀을 가지고 공산당과 팔로군을 찾아왔다. 보고를 들은 주보중은 즉각 조남기를 만나 면담했다. 18살밖에 안되는 조선족 청년이 단번에 20여만근의 입쌀을 팔로군에 가져왔다니 주보중도 크게 놀랐던것이다. 수십년간 혁명경력에서 무수한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일제에 대항해 싸워왔던 주보중은 “조선민족은 참 대단한 민족”이라고 치하했다. 그는 조남기에게 무슨 요구가 없는가고 물었다. 조남기는 선뜻이 팔로군에 참가할 의향을 밝히고 자기뿐만 아니라 자위대를 거느리고 팔로군부대에 참가하겠다고 표했다. 주보중은 조남기의 요구를 들어주고나서 조남기에게는 먼저 참군하지 말고 학교에 가 공부하라고 일깨워주었다. 대단한 조직력을 갖춘 훌륭한 젊은이였지만 한어말을 한마디도 못하는데다 문화정도가 낮은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주보중은 조남기더러 군정대학에 가 공부할것을 권고했다.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이 길림에 도착하기전 항일련군 간부 왕효명과 량환준이 조직한 길림조선인해방동맹의 노력하에 공산당이 령도하는 지방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왕효명이 길림시에서 조직한 길림보안대는 총병력은 8천여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길림보안대 제3총대 제7대대는 길림시주변의 천여명 조선족청년들을 규합시켜 편성한 부대였다. 1945년 11월 28일, 길림보안대 제3총대 제7대대 조선족 청년들은 무장을 들고 매하구로부터 화전으로 공격하는 팔로군 부대를 도와나섰다. 그들은 화전현 부근의 동위자에서 치렬한 전투를 치렀고 백여명 국민당 선견군을 격파하고 화전을 해방했다. 화전을 해방한후 제7대대는 화전에 남아 민주정부를 보호하고 토비를 숙청하였다.   동북에 들어온 중국공산당 동북국 지도간부들은 일찍부터 조선인문제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11월초 동북국 북만분국 부서기를 맡았던 림풍(林枫)은 심양시 서탑부근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인문제를 연구할것을 량환준에게 지시했다. 당시 료녕성 신빈과 심양에서 각기 한명, 흑룡강성에 2명, 길림시에 2명, 조선의용군 2명이 대표로 회의에 참가했다. 량환준은 림풍의 지시에 따라 소수민족 문제에 관련해 조선인 대표들과 토의하고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정권건설과 군대건설에 힘쓰며 힘을 모아 장개석을 타도하고 새중국을 세우기 위해 분투한다는 주장을 내 세웠다. 그리고 첫째 조선족농민은 계속 부치던 토지를 부치고 규정에 따라 토지세를 납부하며 둘째 조선족인민은 자녀들을 조선족학교에 보내고 학교가 없으면 새학교를 운영하도록 허용하며 셋째 조선족인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족청년을 공산당부대에 참군하도록 동원한다는 내용의 제안을 동북조선인대표대회 제안으로 교부하였다. 국민당군이 산해관, 금주를 점령하고 심양으로 공격해오자 회의는 급급히 마무리 되였다. 하지만 중국내 조선인이 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평등권과 자치권을 누리려는 대표들의 의견은 당 지도부에 전달되였고 당의 중시를 받았다.
18    제6장 북만에서의 조선의용군 3지대 댓글:  조회:2567  추천:0  2016-03-23
  중앙인민방송국을 찾은 흑룡강의 사학자 서명훈    조선의용군 심양 군인대회가 있은후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은 새로운 투쟁방략을 확정하고 중국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민주주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중국내 동북에 거주하고있는 광범한 조선인민을 단합시켜 새로운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정지었다.  조선의용군 군인대회의 포치에 따라 주덕해, 리덕산(李德山), 김연(金延), 리근산(李根山), 관건(关键), 리욱성(李旭成), 류등(刘登), 김학룡(金学龙) 등 19명 간부가 북만으로 파견되였다. 남만에 천여명 조선의용군이 남아있고 동만에 천여명 조선의용군을 파견한것과는 달리 북만에는 19명 간부만 파견한것은 그곳에 일찍부터 조선의용군 지하일군이 활동하여 이미 확고한 토대를 닦아놓았기 때문이였다.  조선독립동맹에서 파견한 조선의용군 지하일군인 김택명(金泽明)은 북만의 조선인을 동원해 반일투쟁을 진행할 임무를 맡고 일찍부터 흑룡강성에서 활동하여 튼튼한 군중토대를 닦아놓았다. 그는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군중을 발동했으며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김택명의 원명은 리상조(李相朝)이다.  1915년 조선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여난 그는 일찍부터 반일에 뜻을 품고 중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광주 중산대학에서 공부했고 남경의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38년 무한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 요원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제5기를 졸업했다. 1940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이듬해부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에서 활동하였다. 1942년 9월부터 그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서 활동하게 되였다. 조직에서는 그에게 5가지 중요한 임무를 주었다.  첫째, 동북과 조선의 반일단체들을 찾아 이들과 화북 조선독립동맹간의 련계를 건립하는것이다.  둘째, 진보적인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을 모아 혁명단체를 조직하며 통일전선사업을 전개하는것이다.  셋째,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련계하여 사업을 전개하는것이다.  넷째, 동북의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고 동북지방의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무장력량을 강화하는것이다.  다섯째, 조직된 혁명단체나 항일부대가 없을 경우 자체로 조선민족반일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조선민족의 힘을 키우는것이다.  김택명은 우선 농민으로 위장하고 파언현(巴彦县) 동성농장에 자리 잡았다. 마을상황을 료해한후 진보적인 청년 조경형을 조선독립동맹의 첫 맹원으로 받아들였고 1943년 5월에는 원용주, 김용덕, 한탁주 등 10여명을 받아들여 조선독립동맹 제12지부를 결성하였다. 그후 할빈 동과수의 반일활동가 정경호, 수화현의 김용진, 할빈의 현정민 등을 쟁취해 이해 10월 6일에 할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설립대회가 있은후 이들은 각지에 파견되여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면서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규합시키기 시작했다.  김택명은 또 그동안의 사업상황을 북경시 서직문외 교장호동 12호에 설치한 중국공산당 북평지하련락소를 통해 조선독립동맹총부에 보고했다. 북만특별위원회는 흑룡강 각지에 농민강습소나 협화청년단과 같은 조직을 리용해 선전사업을 진행했으며 국내외 상황을 자상히 소개하는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시정신을 전달하였다. 1945년에 쏘련군의 동북출병 소식을 접수한 이들은 미리부터 적의 무기를 탈취하여 최후승리를 이룩할 준비를 다그쳤다. 파언현 당안관에 보존되여있는 당시 제12지부의 선전삐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백만의 생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며 전쟁을 일삼는 흉악한 마귀 일본제국주의는 지금 붕괴되여가고있다. 때는 왔다. 그 독사의 유린을 당하고있는 민족들은 다 같이 궐기하라! 광명은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고있다!  피압박민족은 단결하자!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도하자!  중국은 중화민족의 중국이다!  조선민족해방 만세!             조선반일독립동맹 12지부”    선전삐라는 중국과 조선 인민을 최후의 결전에로 부르는 격문으로 되여 적의 숨통을 찔렀다. 삐라를 발견한 일본군과 괴뢰만주국 경찰들은 출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였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는 할빈에 정식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흑룡강성의 사학자 서명훈 선생은 당시 할빈의 상황과 김택명의 활동에 대해 소개했다.  “1945년도 일본놈들이 무조건 투항한 다음 그 당시 우리 할빈은 아주 란잡했습니다. 할빈에는 그때 쏘련 홍군이 들어와 군사관리를 하고 국민당도 할빈을 차지하려 들어왔고 공산당도 들어왔습니다. 공산당쪽에 8월 20일 쏘련홍군과 함께 리조린이 들어왔습니다. 할빈은 여러 세력이 쟁탈하는 그런 큰 도시였습니다. 조선민족으로 일찍 나와 활동한게 김택명입니다. 이 분은 1943년도 연안에서 두가지 신분, 조선독립동맹 맹원과 중국공산당 당원 신분이였습니다. 북만에 파견되여 빠언현(파언현) 동성촌에 있으면서 지하에서 독립동맹 북만사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1943년 10월에 할빈에 들어와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광복후 리조린과 손잡고 조선독립대대, 할빈보안총대에 조선독립대대를 건립하게 되였습니다. 8월 20일 남만 확대회의에서 정경호, 조경현을 모아서 지하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이 지상에서 마음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민족을 보호할려면 무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리조린을 찾아가 두 자동차의 무기를 가졌습니다. 8월 22일, 오상과 빠언에서 군대를 모집했는데 40일간에 300명이 모였습니다. 조경형이 선동한 동선촌만 하여도 80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때 사꾸라학교 지금의 60중인데 거기에 모여 훈련하였습니다. 9월에 사꾸라학교에서 훈련받고 9월 20일에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정식으로 선포했습니다. 초기 병력이 300명인데 11월중순에는 6개 중대에 한 900명으로 확대되였습니다. 조선독립대대는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받았으며 주로 할빈에서 송강군구 빈강위원회를 지키며 현지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1945년 8월 20일 할빈시 도리구 만몽호텔에서 열린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 대회는 조직성원과 간부명단을 정식 공포했다. 특별위원회 서기로는 김택명이고 김용진, 정경호, 현정민, 조경형이 각기 조직, 사회, 선전, 농민사업을 맡았다. 한편 북만특별위원회는 각지 조선인 보호사업을 제기하면서 자체 무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조선청년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 조선청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22일에 김택명은 며칠사이 모인 300여명 조선청년을 도리구 사꾸라소학교, 지금의 할빈시 60중에서 훈련시켰으며 9월 25일에는 600명 규모의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편성하였다. 동북항일련군 출신인 리조린이 쏘련군과 협상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털어 이 독립대대를 무장시켰다. 이 시기 김택명의 노력하에 할빈지역 각현에는 조선독립동맹 조직이 있게 되고 자체의 무장이 있어 조선사람의 생명재산을 보호할수있었다.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 대부옛터, 지금의 할빈시 제3중학교(김영훈 촬영)    서명훈 선생은 당시 조선의용군 제3지대가 설립될때의 경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얄따협의에 따라 할빈은 국민당이 접수해야한다니 공산당은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마침 이때 해방직후니깐 연안의 조선의용군은 주덕의 6호명령에 따라 심양에 모였습니다. 신사군과 태항산, 연안에 있던 팔로군의 조선의용군이 다 심양에 모여 11월 7일에 군인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래 무정이랑 조선에 가고 나머지는 1지대, 3지대, 5지대로 나누었습니다. 3지대만 19명을 보냈습니다. 할빈에 김택명의 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가 있으니까.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이미 있으니깐 19명, 주덕해 리덕산 관건 그리고 가족까지 다 들어왔습니다. 할빈에서는 3지대 성원이 온다는걸 알고 원일우, 할빈의 의사인데 그를 보내 주덕해를 맞이하게 했습니다. 12월 19일 주덕해랑 석탄차를 타고 할빈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 김택명이 가서 영접했는데 그들은 연안군정대학의 동창생이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같이 싸우게 되니 기뻐했습니다. 하루밤을 자고나서 철거하게 되니까 할수없이 할빈을 떠났습니다. 그날밤 성고자를 거쳐 배극도에 갔습니다. 그리고 11월 5일에 정식 3지대를 건립했습니다. 지금 그 집은 없고 터만 있습니다. 그때 마을 술공장이였는데 900명이 다 들어가지 못하고 눈이 오는데 밖에서 눈에 앉아 3지대를 설립했습니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총무처장에 관건이였고 부대를 3개 대대 9개 중대로 편성하였습니다.”    1945년 11월 20일, 쏘련은 얄따협의에 따라 할빈시 행정권을 국민당정부에 넘겨주게 되였고 따라서 공산당과 팔로군은 할빈을 떠나게 되였다. 공산당이 할빈에서 조직한 보안총대에는 국민당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국민당쪽으로 귀화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하지만 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만은 견정하게 중국공산당과 조선독립동맹을 따라 끝까지 투쟁할 결의를 다졌다. 할빈에 도착한 주덕해는 김택명과 손잡고 조선독립대대를 이끌고 할빈을 떠나 11월 25일에 빈현(宾县)경내의 배극도(蜚克图)라는 작은 진에 가서 한 술공장 자리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했다.     조선의용군 3지대 창립대회가 있었던 배극도의 옛터, 원 지주집 술공장자리(김영훈 촬영)    사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확대 재편성한 셈이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였고 부지대장에 리덕산, 정치처 주임에 리근산이였으며 참모장에 김연, 공급처장에 관건, 교도대 대장에 고영룡, 위생대 대장에 공효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흑룡강 각지에서 가는곳마다 조선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수많은 청년들이 적극 참군할것을 신청했다.    서명훈 선생은 당시 조선족의 참군열은 참 대단했다고 감탄했다.  “그때는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리해하기 어렵지요. 3지대 조경형이, 연변대학에 있던 그분이 오상에 가서 가자마자 동원하니 심덕봉이란 사람이 4형제 모두 부부간에 다 참군했습니다. 오상에서는 한달사이에 500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할빈하구 오상의 기차가 직접 못오니 가깝지만 오지못하니 마차를 타고 아성을 돌아서 할빈에 왔습니다. 흑룡강성 자료를 보니 전송강성쪽으로 한족사람은 인구의 3이 좀 넘지만 조선은 7이 넘었습니다. 할빈뿐만 아니라 목단강도 다 그렇습니다. 아까 말했던 빠언현 동성촌은 한주사이에 백여명이 나오고 후에는 녀성들도 참군했습니다. 토비숙청에서 전사들이 부상하니 호사가 필요했으니깐…참군열이 대단했습니다.”        조선의용군 3지대 창립지점을 안내한 흑룡강 사학자 서명훈(김영훈 촬영)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전투부대이면서 공작대였다. 그들은 각지에서 토비를 숙청하고 인민을 보호했으며 한편으로는 공산당의 정책을 선전하고 각지의 정권건설을 지원하였다. 3지대 정위인 주덕해는 조선족의 생산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지방간부를 적극 양성했으며 조선족 출판, 문예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3지대는 기관지 “신민일보”를 출간했다. 이 신문은 목단강의 “인민일보”와 더불어 중국내 정착한 조선인을 상대로 조선독립동맹의 주장과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을 적극 선전했다.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는 또 각지에 조선족학교를 세우고 간부와 교원양성에 진력하였다. 이로써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항일련군이 조직한 기타 조선인 부대와 함께 북만지역 조선인을 보호하고 토비를 숙청하면서 정권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17    제5장 남만에서의 조선의용군 1지대 댓글:  조회:2581  추천:0  2016-03-20
팔로군 주덕 총사령의 제6호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출해 심양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군인대회를 열고 중국내의 조선족을 보호하고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 참여할 방침을 확정지었다. 군인대회의 포치에 따라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가 신속히 조직되였으며 제1지대가 2지대를 확건, 조직하고 3지대가 4지대를, 5지대가 6지대를 확건, 조직하기로 결정했기에 잠시 2지대, 4지대, 6지대를 설치하지 않았다. 분공에 따라 왕신호(王信虎)와 방호산(方虎山)이 제1지대를 책임지고 남만에서 활동하며 주덕해가 제3지대를 조직할 임무를 맡고 19명 간부를 거느리고 북만으로 갔다. 그리고 박일우와 리익성이 거느린 제5지대는 연변을 중심으로한 동만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동만으로 떠났다. 심양 군인대회의 결정에 따라 남만에서 활동하게 될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편성되였다. 지대장에 왕신호이고 정치위원에 방호산이였으며 참모장에 안빈, 정치처 주임에 주연이였다. 1지대는 2,000여명 대원을 9개 보병중대와 기포중대, 경위중대로 편성했다. 왕신호의 본명은 김웅(金雄)이다. 1914년 조선 경상북도에서 태여난 그의 경력은 한청과 비슷하다. 그는 1930년대에 중국에 이주했다가 1933년 9월에 남경중앙군관학교 제10기 보병반에서 학습했다. 당시 일본인의 간섭으로하여 조선학생은 신분을 밝힐수없었기때문에 중국이름인 왕신호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7년 김웅은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40년 군사교원의 신분으로 팔로군 2종대와 함께 신사군 활동지역인 강소성북부에 가 신사군 제3사 적공과(敌工科)에서 사업했다. 그는 신사군을 도와 포로를 심사하고 적의 전문을 번역하며 정찰임무를 수행하면서 신속히 퇀급간부로 성장했으며 수차의 근거지 보위전투에 참가했다. 1944년 1월에 그는 100여명 조선청년을 모아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를 조직하기도했다.    조선의용군 1지대에서의 방호산   방호산의 경력은 잘 밝혀지지 않고있다. 그는 일찍부터 혁명에 참가했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당의 파견을 받고 주덕해(朱德海), 리권무(李权武), 김일(金一) 등과 함께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서 학습하다가 연안에 오게 된다. 그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간부훈련대 동북간부훈련반에서 공부하다가 1945년 연안 조선의용군 본부와 조선혁명군정학교 사생과 함께 동북으로 왔다. 군인대회가 있은후 새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무순을 거쳐 12월에 통화로 갔고 한청은 의용군 선견종대를 전부 제1지대에 넘기고 새로 독립대대를 조직해 료동으로 나갔다. 독립대대 1중대는 차균섭 중대장의 인솔하에 천일농장과 조광농장에서, 제2중대는 김귀현 중대장의 인솔하에 영구시에서, 제3중대는 리풍 중대장의 인솔하에 영흥농장에서 확군하기로 했다. 이때 영구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료녕성 영구, 지금도 이곳에는 일부 조선족이 살고있지만 대부분 논은 한족이 가꾸고있었다. 발해만연안의 이 논들은 모두 일제의 강제이주로하여 온 조선인이 바다를 막고 개척해 놓은 유서깊은 땅이라 할수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찰병이였던 최학만 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영구가 조선사람이 많이 있게 되였는데 그 원인은 일본이 제정때 남조선(한국)으로 농민을 모집해 거기다가 1구로부터 12구까지 바다를 막아 농사를 지었다. 땅을 만들어 벼를 심어야했기에 조선사람이 많다. 조선의용군은 거기 가서 확군했다. 150명이 참가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정찰병이였던 최학만 로인(심양) 한청이 거느린 조선의용군 독립대대 직속중대는 김응팔이 중대장을 맡고있었다.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구방자진(沟帮子镇)의 일본중심농간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농간국의 일본군경들은 투항하지 않고있었다. 김응팔은 30여명 결사대를 거느리고 적의 구령을 알아낸후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을 앞세워 보초선을 통과한뒤 갑자기 공격해 적을 전부 투항시켰다. 그들은 일본인의 무기와 탄약을 로획해 무장했다. 그리하여 독립대대는 영구에서 600여명으로 확대되였다.   (최학만 로인) “……영구시내에 있는데 국민당이 3시쯤 되여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 불질을 하다나니까, 그때 우리 손에 한사람 탄알 두알 세알 다섯, 열사람에 수류탄 하나밖에 없는데 그놈들은 전부 자동무긴데 해볼수있소? 그래 쫓기워서 리석재로 쫓겨왔지요. 리석재에 오니 또 들어와서 또 쫓겨쫓겨 안동까지 갔습니다…국민당에게 쫓겨가면서 환인으로해서 관전. 그리해서 가는데 장백산을 목표로 가는데 지방지방마다 공산당이 들어오면 뭐나 다 뺏앗아 간다. 붙들어간다. 이래가지고 자본가 지주들이 악선전을 하는 말을 듣고 우리를 겁내 한다. ‘어이? 들어와서 하는걸 보니 물도 긷고 마당도 쓸지 인민에 대한 태도라든가 국민당과 전혀 달랐다. 마을에 들어오면 젊은 녀성을 겁탈하고하는데 그런것도 없이 좋은 군대거든.’ 그래서 백성들이 일어나 대자본가와 지주가 어느어느 골짜기에 숨어있다고 알려주었지요. 우리 말하면 토비지요. 그래 그 정보를 듣고 잡으러 가지요. 그놈들도 감시하면서 다 총을 가지고 도망하구. 몇사람 잡기는 했는데 관전과 환인에서 활동을 하다가 점점 무송까지 들어갔습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가는 곳마다 “우리의 군대”라고 조선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조선청년들은 다투어 자기부대인 조선의용군에 참군하였다. 그리하여 철령에서 조직된 500명 규모의 조선의용퇀이 있게 되고 산동의 조선의용군 채국번이 뱃길로 동북에 와서 확군한 압록강지대도 있게 되였다. 이 부대는 모두 통화로 이동해 제1지대 본부와 합병했다. 통계에 따르면 광복초기 료녕성 각지에서 만여명 조선청년이 참군하였다.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류하현에서는 1500여명이 참군하고 환인현에서는 2100여명이 참군했다. 이들은 조선의용군에 입대했을뿐만 아니라 동북민주련군 야전부대인 제3종대에도 많이 참군하였다. 해룡현대대 대부가 있었던 곳을 가르키는 매하구의 리병길 로인(1지대 륙군중학교 출신)   길림성 매하구 린근의 조선청년들은 해룡에 모여 다투어 입대하였다. 이들은 해룡현대대에 편입되였고 그중 우수한 청년은 야전군 주력부대인 제3종대에 편입되였다.   장춘에서 만난 82세 고령인 권상준 로인, 그는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 9사 포병으로서 산성진에서 입대한 분이다. “산성진에 있었는데 일본놈이 투항했다고했어요. 부근에 조선족이 많았고 조선소학교도 있었는데 하루는 해룡에서 군대를 모집한다고했습니다. 많은 조선청년이 갔지요. 그래 나도 갈려고 생각했어요. 가보니 해룡현에 이미 많은 조선족 청년이 모여있었는데 늦었다고했지요. 먼저 가면 반장, 패장 이렇게 한다고했거든요. 그건 대수롭지 않고 부대에 왔으니 됐다고 생각했는데 얼마후 주력부대인 제3종대로 뽑혀가게 되였습니다. 우리 중대가 전부 갔지요. 가보니 3종대에 우리 조선족이 많았습니다. 다 우리처럼 이 부대에 참가했지요.”   해룡현대대에서 1지대로 다시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 포병에 입대한 권상준 로인(장춘)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심양에서 조선독립동맹 남만공작위원회를 설립하여 각지 대중사업을 책임지게 하였다. 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하여 남만 각지에서 무려 만여명 조선청년이 참군하여 조선의용군 제1지대와 동북인민자치군 제3종대에 편입되였다. 환인현(桓仁县)만 보더라도 조선족 3000여가구에 2100명이 참군했다. 위원회는 또 각지에 조선족중학교를 세우고 소학교를 회복하였다. 제1지대는 교원양성반을 꾸려 470명 교원을 양성해 각지 조선족학교에 보냈고 대량의 간부를 양성해 각지 정권건설을 지원했다.  남만 근거지가 공고히 되기전에 국민당 정예군이 공격해왔다. 상대적으로 력량이 약한 동북인민자치군은 전략적 요새만 수비하고 대부분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제1지대도 통화에 집결하게 되였으며 이때 병력은 무려 5000여명으로 확대되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통화를 중심으로 각지의 토비를 숙청하면서 공산당 민주정권을 보위하는 남만의 주요한 지방력량으로 되였다.
16    제4장 오가황 조선의용군군인대회 댓글:  조회:2370  추천:0  2016-03-17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광복을 맞이했지만 가난한 조선족 농민의 살길은 여전히 험악하기만 하였다. 비록 쏘련군이 대도시를 점령하고 치안을 유지한다지만 기타 소도시와 농촌은 토비들의 성화가 극심했다. 게다가 국민당 특파원이 동북에 들어와 일본군 포로, 괴뢰만주국 군인과 헌병, 경찰을 보안부대로 편성하고 민족리간정책을 쓰면서 조선인마을을 습격하고 재물을 략탈했다. 그리하여 많은 조선인이 란세를 피해 반도로 떠났다. 1947년의 통계를 보면 중국 동북경내의 조선족 인구는 216만명으로부터 110만명으로 급감했다. 자기의 터전이 아까워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야했다. 광복이라고는 하지만 가난한 조선족농민에게 있어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아득히 멀어만 보였다. 그들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일제와 싸웠던 자기의 군인이 오기를 바랐으며 자기를 지켜줄 믿음직한 군대와 민주정부가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더욱 많은 열혈청년은 단연히 무기를 들고 자발적으로 마을과 터전을 지켜 나섰다.   오가황소학교에 세워진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기념비  심양시 우홍구(于洪区) 대흥향(大兴乡)의 오가황(吴家荒)조선족중심소학교는 최근들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있다. 한것은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사적지 기념비가 드디어 2007년 11월 10일 이곳에 세워졌기때문이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주름잡으며 일제와 싸웠던 조선의용군은 60여년전, 바로 이곳에서 군인대회를 열고 중국내 조선인을 단합시켜 중국해방전쟁에 참여할 결의를 선포했던것이다.하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문제가 비준되지 않았다. 조선의용군 출신의 간부와 로전사들은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십여년간 노력해왔다. 심양의 조선의용군으로 편성된 리홍광지대 3퇀 중기반장으로 있었던 최창수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조선의용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려했는데 처음에는 자리가 없어서 그냥 그러다가 장례신이요 등 로간부들이 다 세상뜨고 우리가 드디어 하게 되였는데, 어떻게 했는가면 로전사들이 돈을 내고 오가황소학교의 자리를 빌어 기념비를 세우게 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철령에서만도 우리동무들이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이것을 해 놓음으로써 희생된 동무들에게 떳떳히 말할수있습니다. ‘자 너네는 갔지만 우리도 이렇게 해 놓았다’고, 그래 집에 가도 마음이 아주 편안합니다. …이걸 못보고 간 동무들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나지요. 산성진, 류하, 통화, 림강, 무송, 휘남 그리고 여기 와서 우린 심양까지 해방하고 항미원조에 나갔습니다.” 해방전쟁시기 동북대지를 휩쓸며 무장투쟁을 진행했던 조선의용군의 불후의 업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십여년간 애써 온 우리 로전사분들이시다. 자기의 리직금을 한푼두푼 모아서 희생된 전우에게 미안하지 않게 우리민족의 력사 공적을 남기려는데 꼬박 십여년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항일간부 장례신(张礼信)을 비롯한 분들은 기념비가 세워지는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말았다 한다. 기념기 축성과정을 설명하는 리홍광지대 출신인 최창수로인 심양시 서탑구의 한 주민구 부근에는 조선족 제6중학교가 있었다. 주민구여서 교문은 크지 않았고 그곳으로 들어가면 몇개 교수청사로 둘러있는 큰 운동장이 하나 있었다. 이 자리는 원 서탑조선학교 자리였는데 지금은 제6중학교로 변했다고한다. 이곳은 1945년 8월 15일, 심양시 조선인 민회가 “8.15” 경축대회를 열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당시 심양시 조선인 “8.15”경축대회에는 약 50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80세 고령인 심양의 조선의용군 리홍광지대 선전대 출신인 서영화로인은 당시 경축대회의 견증자이다. “이곳은 지금 심양시 조선족제6중학교인데 당시는 서탑조선소학교였습니다. 저앞 건물자리가 옛날 강당자리인데 거기서 경축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에서 한청이 동원하여 참군하게 했으며 많은 조선청년이 따라 나섰습니다.” 일제패망후 심양조선인들이 모여 경축대회를 했던 곳을 설명해주는 서영화로인 리홍광지대의 정찰병이였던 최학만로인은 당시 심양과 심양부근 조선인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일본놈이 투항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는 심양으로 왔는데 심양에 와 가지고 8월 18일날 한청이라고 해방후 료녕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했던 분인데, 이 량반이 연안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그는 심방자 학교마당에다 책상을 놓고 래일 조선사람들 회의한다해서 갔습니다. 그래 가보니 한청이란 량반이 ‘청년들, 나라 잃고 36년동안 압박을 받던 우리가 해방됐는데 우리 이제는 총을 들고 싸워야한다. 입대하라!’ 이겁니다. 그래 18일날 정식 군복을 입고 그때 군복이라 행방없지뭐, 총 하나를 받았습니다.” 최학만로인은 83세 고령이였지만 조선의용군 간부 한청의 호소에 따라 입대하던 일을 잘 기억하고있었다. “8.15”경축대회가 있은후 심양에서 지하투쟁을 하던 기열료군구 조선의용군의 한청이 8월 18일 조선청년을 조직해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를 창건하고 지대부를 황고구(皇姑区) 주강가 조선족소학교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청은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조선의용군 주력부대가 오기전에 벌써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던것이다. 한청(韩青)은 1912년 12월 조선 경상남도에서 태여났다. 1931년 중국 심양시 서탑지역에 이주해온 그는 신문을 통해 남경중앙군관학교에서 조선인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반일에 뜻을 둔 한청은 행장을 꾸리고 배를 리용해 상해에 갔으며 거기서 조선청년전위동맹에 참가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1938년 10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자 한청은 제2구대에 소속되였다가 태항산항일근거지로 갔다. 후에 한청은 당의 파견을 받고 연안에 가서 리상조(김택명), 김웅, 리근산, 홍림 등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항일군정학교 제5기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한청은 졸업후 팔로군 제129사 정치부에서 사업했다. 그러다가 1943년부터 기열료군구 적공부(대적공작부) 간사로 지하공작을 했으며 1945년 8월에 조직의 파견을 받고 심양에 오게 되였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항일로간부인 한청은 해방후 1996년 심양에서 서거했다.   조선의용군 선견대를 조직했던 혁명가 한청(리직후 심양에서 별세)   심양조선인 “8.15”경축대회가 있은후 한청은 주강가 조선족소학교에 조선의용군등록소를 설치했는데 사흘만에 백여명 조선청년이 찾아와 등록하였다. 서탑뿐만 아니라 심양주변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조선청년이 구름처럼 모였는데 한달사이 1000여명 규모를 갖추게 되였다. 이때 팔로군이 심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한청은 팔로군 선견대의 정위 당개(唐凯)를 찾아가 무기를 공급받았고 청년들을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로 편성하였으며 학교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60여년의 변천으로 주강가조선족소학교는 언녕 사라지고 남은 그 자리마저 찾기 힘들었다. 어렴풋이 나마 운동장 하나가 있어 이곳이 옛날 학교자리였다는것을 짐작할수있었다. 9월에 관내로부터 주연(朱然)이 거느린 조선의용군 선견대 100여명이 심양에 도착했다. 진찰기변구 기동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연안과 태항산에서 출발한 의용군 주력보다 썩 먼저 심양에 왔던 것이다. 이 대오는 부근 조선청년들을 규합시켜 신속히 400명 규모로 확대되였고 다시 한청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쳐 1,400여명 규모의 선견종대로 편성되였다. 한청이 선견종대 대장을 맡고 주연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으며 산하에 12개 중대를 두었다. 어디로 갈것인가? 중국공산당과 조선독립동맹의 명확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한청과 주연은 선견대를 거느리고 우선 해방된 조국으로 가려했다. 무순의 리홍광지대 출신의 항일간부 최강 로인의 증언이다. “한청이 거느린 선경종대는 심양을 떠나 조선인이 많이 집거해있는 안동, 환인 방향으로 나가면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서 20여일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쏘련군은 ‘포츠담공고’에 따라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조선의용군의 무장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청은 쏘련측과 교섭하여 무기를 되찾은 다음 부대를 거느리고 11월초에 신의주를 떠나 다시 심양에 오게 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국내외 상황은 아주 복잡하였다. 공산당의 10여만 군인과 3만 간부가 신속히 동북으로 진격하고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개석은 더욱 불안했다. 그는 공산당의 동북진출 행정을 지체시키기 위해 이른바 평화담판을 한다는 구실로 모택동을 중경에 초청해 발목을 잡아두려고 꾀하였고 또 9월 5일에는 공공연히 미군을 청도, 천진, 진황도에 등륙시켰다. 이는 쏘련의 불만을 자아냈다. 미국이 중국내에 병력을 포진하고 동북으로 세력을 확장할가 두려웠던 쏘련은 비밀리에 팔로군과 공산당에게 더욱 많은 편리를 줄것을 동북의 쏘련주둔군에 지시했다. 8월 28일에 모택동은 공산당 대표로 중경에 도착해 10월 11일까지 중경에 머물면서 국공담판을 지도하는 한편 계속 전반 정세발전을 지켜보았다. 10월 31일, 중공중앙에서는 동북의 모든 부대를 동북인민자치군(东北人民自治军)으로 개칭하고 림표를 동북인민자치군 총사령으로, 팽진을 제1정치위원으로, 라영환(罗荣桓)을 제2정치위원으로 임명하는 명령을 하달했다. 장개석도 웅식휘(熊式辉)에게 국민당의 동북행정대권을 맡기고 군지휘를 두률명(杜聿明)에게 맡겼다. 하지만 쏘련군이 협조하지 않았기때문에 국민당은 쏘련군이 주둔하고있는 대중도시에 소수 접수관원만 보내 정부간판을 걸었을뿐 쏘련주둔군의 거부로 부대를 동북에 들여보낼수없었다. 쏘련측으로부터 랭대를 받은 두률명은 울화가 치밀어 무력으로 동북진출을 강행했다. 11월 중순에 그는 진황도에 도착한 국민당 정예부대인 13군과 52군을 동원해 산해관을 지키는 동북인민자치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쟁의 포성이 다시 동북대지에서 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11월 10일, 후속으로 동북 심양에 모인 조선의용군과 조선의용군 선경종대가 합쳐 2000여명이 조선족마을인 대흥향의 오가황조선학교 운동장에 모여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전체대회를 성대히 열었다. 산해관에서 포성이 울부짖는 가운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새로운 정세에 맞춰 금후 사업방향과 방략을 확정지었던 것이다.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은 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을 1지대, 3지대, 5지대로 나누어 각기 남만, 북만, 동만으로 가서 현지조선인을 보호하고 군모집을 진행함으로써 중국해방과 조선해방을 위해 준비한다고 선포했다. 조선의용군 군인대회에 관한 최강 로인의 회억이다. 그는 당시 조선의용군 1지대 9중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우리 조선의용군이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의해 동북으로 진군하게 되였습니다. 여기 도착한 시간이 45년 9월말 경에 오가황, 대석교 이 일대에 조선의용군이 주둔하게 되였고 의용군 사령부는 시내에 있었습니다. 오가황 조선소학교의 중요한 의의는 이 대회에서 조선독립동맹 간부가 70여명이 조선으로 귀국하고 조선의용군 전군은 동북에 남아있어가지고 중국인민해방전쟁에 참가하기로 되였습니다. 이것을 이 자리에서 선포한것입니다. 조선의용군 사령인 무정장군이 조선의용군 약 2천명을 모아놓고 선포하기를 조선독립동맹 간부는 귀국하고 남아있는 조선의용군은 1지대 남만, 3지대 북만, 5지대는 동만지구로 가기로 했으며 간부들 명단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조선족력사의 출발점이 이곳에서 시작되였다는것을 강조하고싶습니다.”   조선의용군 노래를 열창하는 심양의 리홍광지대 로전우들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사실 조선의용군의 운명과 중국내 조선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였다. 그리하여 동북의 조선민족은 조선의용군과 항일련군 지사들의 호소를 받들고 피압박 중국인민과 어깨겪고 싸우면서 철저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우게 되였다. 심양시 우흥구 대흥향의 오가황조선족소학교에 세워진 조선의용군 기념비는 오늘도 많은 리홍광지대 로전사분들이 찾아와 기념활동을 하군 한다.
15    제3장 조선의용군의 동북진출 댓글:  조회:2876  추천:0  2016-03-11
중경에 자리하고있던 국민당 통수인 장개석은 일제패망후 전국범위에서 자기의 독재통치를 실현하려는 야심을 품고 세력확장에 서둘렀다. 이를 실현하려면 중국 서남부와 서북부에 모여있는 국민당 정예군을 신속히 전국각지 특히는 전략적 요지인 동북에 보내야했다. 일본이 항복할 기미가 보이자 장개석은 8월 10일에 즉각 팔로군과 신사군에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 두목인 오까무라 야스지(冈村宁次)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국민당군에게만 투항하고 공산당군에게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전했다. 8월 14일, 장개석은 대표를 쏘련에 보내 “중쏘친선동맹조약(中苏友好同盟条约)”을 맺게 했다. 장개석을 통해 동북에서 세력을 뻗치려는 미국을 제어하고 전후 동북에서 실리를 챙기기 위해 쏘련은 장개석 국민정부와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공산당과 팔로군에 대해 줄곧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시 조차법을 연장해 계속 국민당에게 막강한 후원을 제공했을뿐만 아니라 함대를 동원해 국민당군을 각지에 수송했다. 공산당이 항일군민을 이끌고 섬북과 화동, 화북의 광활한 근거지를 개척했기때문에 국민당군은 동북으로 오려면 배길과 항공로를 리용할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으며 장개석은 대량의 관원과 정예군을 동북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름진 동북대지는 국공량당의 쟁탈대상일뿐만 아니라 쏘련과 미국이 세력범위를 확장하는 초점지로 변해갔다. 1945년 봄, 연안 양가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기간 모택동은, “우리당과 중국혁명의 최근과 미래 전도로부터 볼때 동북은 각별히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모든 근거지를 다 잃는다해도 동북만 장악하면 중국혁명은 공고한 기반을 가지게 될것이다.”라고 재삼 강조했다. 일제패망을 앞두고 중국공산당에서는 동북근거지 창설에 선손을 썼다. 연안에 있던 팔로군 총사령 주덕은 쏘련군의 진격과 함께 련속 7개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 가운데 8월 11일 주덕이 반포한 제6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쏘련홍군의 중국과 조선경내로의 진입작전을 돕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에 참가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는 즉각 소속부대를 통솔해 팔로군과 원동북군 각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해 적을 소멸하는 동시에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해방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주덕 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신속히 동북으로의 진군길에 들어섰다.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의 300여명 학원과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있던 수백명 조선의용군은 각기 팔로군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발길을 재우쳤다.    선전공작을 하는 조선의용군    항일전쟁시기 중국관내에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수한 국제부대인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1938년 10월 10일, 포화가 울부짖는 무한에서 창립된 반일무장인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군과 함께 싸우면서 중경까지 갔다가 다시 항일최전선인 팔로군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나갔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의 령도하에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되여 항일근거지 군민과 함께 두려움없이 일제와 싸웠다. 조선의용군은 또 자체 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을 창건하고 유능한 간부를 선발해 동북을 포함한 전국 조선인 집거구에 파견함으로써 조선주민들에게 항쟁의 희망을 심어 주었고 항일에 나서도록 조선청년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내 조선 열혈청년은 조선의용군을 찾아 태항산과 연안으로 왔으며 일제 강제징병에 끌려갔던 많은 조선청년도 각성하고 조선의용군에 찾아오기도 했다. 하북성 발해연안에는 지금도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일제의 강제이주로 10여만 조선농민이 하북 발해만 연안에서 벼농사를 짓다 남겨둔 논이다. 당시 하북성 로태(芦台)농장과 란현(滦县)의 백각장(百各庄) 농장에 조선농민이 많이 집중되였고 벼 생산량이 많아 비교적 유명했다. 이곳 조선농민들을 쟁취하기 위해 조선의용군 간부들은 비밀리에 집단부락을 다니며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했다. 패망을 앞둔 일제가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더욱 가심화함에 따라 많은 조선청년이 조선의용군을 찾아나섰고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격했다.                    하북 발해만의 로태농장        란현백가장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김응삼 로인  현재 길림성 반석시에 살고있는 김응삼(金应三) 로인은 하북성 로태농장부근의 백각장이라는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당시 15살이였던 그는 동네 낚시터에 낚시대를 드리운채 친구 세명과 함께 부모몰래 조선의용군을 찾아 연안으로 갔다. 이들은 진찰기변구에 찾아가 조선의용군을 만났으며 조직의 파견을 받고 연안에 가서 연안군정대학 학원으로 되였다. 김응삼 로인은 조선의용군을 찾아갈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친구의 아버지를 통해 연안에 조선의용군이 있다는 이야기를 비밀리에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있고 또한 조선사람들의 부대에 참가하여 싸워야만 일본놈의 탄압에서 해방될수있다고 생각하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연안으로 떠났습니다. 적의 또치까밑으로 기여서 사선을 넘었습니다. 집에 알리면 반대할가봐 낚시대를 팔자로 강가에 드리워 놓았습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보면 팔로군을 찾아 간줄 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달만에 연안에 도착하였는데 그때의 그 기쁨은 이루다 말할수없습니다.”
14    제2장 쏘련군과 함께 귀국한 항일련군 댓글:  조회:3014  추천:0  2016-03-07
동북에 진출한 쏘련군에는 특수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일전쟁시기 동북대지를 휩쓸며 간고하고도 치렬한 전투를 진행해온 항일련군 장병들이였다. 항일명장 허형식(许亨植)과 리홍광(李红光)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겨레 항일지사들이 동북대지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쳐 싸웠다. 동북의 심산밀림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와 싸운 이들의 항일의거는 일제 식민통치하에 있던 수천만 동북인민에게 특히는 동북에 정착한 조선인에게 있어서 희망의 등불이였다. 김광협, 주보중, 강신태 쏘련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1945년 7월에 항일련군 간부들은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를 재구성했다. 바이족인 주보중(周保中)이 서기를 맡았고 위원에는 리조린(李兆麟), 풍종운(冯仲云), 왕효명(王效明), 왕일지(王一知) 등을 비롯해 조선인 강신태(姜信泰)와 김광협(金光侠)도 망라되였다. 항일련군중의 조선지사들은 대부분 조선사업위원회를 구성해 조선으로 나갔지만 중국공산당의 동북위원회에 강신태와 김광협을 비롯한 조선인을 포함시킨것은 이들이 동북에서 싸웠던 경력이 있어 동북상황에 대해 익숙한것과 중국동북에 조선농민이 많이 거주하고있는 현실을 고려한 사안으로 추정된다. 한편 주보중은 1945년 9월에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온 중공중앙 동북국 서기인 팽진(彭真)을 만나 당조직관계를 회복하였으며 그가 령도하는 동북위원회의 조직관계와 자료, 당비를 전부 팽진에게 맡겼다. 주보중 등은 쏘련군에서의 특수한 지위를 리용해 쏘련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으며 각지에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군대를 모집하는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였다. 분공에 따라 주보중은 장춘에, 리조린은 할빈에, 풍종운은 심양에 가서 사업했고 조선인 강신태는 연길에, 김광협은 목단강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들은 쏘련군을 도와 사회치안을 유지하고 당조직을 회복했으며 무장을 확대하였다. 10월에 이르기까지 동북항일련군은 4만여명으로 확대되였으며 일본이 패망한데 비추어 부대명칭을 동북인민자위군(东北人民自卫军)으로했다. 항일련군 출신인 한족간부 왕효명(王效明)은 길림시에서 쏘련군 길림시 위술(卫戍)사령부 부사령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길림시 지하공산당원인 리유민(李维民)을 만나 당조직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우선 량환준(梁焕俊)이 조직한 길림시 조선인해방동맹을 쟁취하고 량환준을 비롯한 조선인간부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11월 21일에 길림시에서 길림 전성 보안총대를 설립하고 수천명 청년들을 규합시켰다. 길림시와 부근 조선족마을의 청년들도 보안총대에 참가해 한개 대대로 편성되였다.  동북위원회 위원인 강신태[원명 강건(姜健)]는 최명석(崔明锡), 박락권(朴洛权), 김만익(金万益), 강위룡(姜渭龙), 김명수(金明洙), 려영준(吕英俊) 등 22명 동북위원회 연변사업위원회 간부들을 거느리고 9월 18일, 연길 군용비행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쏘련군의 공격으로 일제가 항복했지만 사실 동북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대량의 일본군 잔여세력이 구석구석 도사리고있었고 무장을 든 수많은 마적떼가 도처에서 백성을 괴롭히고있었다. 게다가 연길, 룡정 거리에는 “국민당 길림성 연변판사처”, “국민당 연길현 당부”라는 간판이 나 붙었고 국민당이 끌어모은 별동대, 보안대, 자위군, 치안유지회가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강신태는 우선 지희겸(池喜谦), 강동주(姜东柱), 박동운(朴东云)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조직한 군중조직을 통합시키고 이들을 쟁취함으로써 군중을 발동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9월 19일에 연길시에서는 600명 조선족대표가 4만여명 회원을 대표하여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대회를 열고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총동맹”을 설립하고 강동주를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조직은 연변사업위원회의 지도를 받으면서 10월에는 지희겸이 위원장을 맡은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칭되여 폭넓게 군중사업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 시기 최무(崔武), 최문국(崔文国)을 비롯한 개명인사들이 창간한 조선문판의 “한민일보(韩民日报)”가 있었다. 신문은 11월에 “연변민보(延边民报)”로 개칭하고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되였다. 강동주가 주필을 맡은 이 신문은 첫기부터 모택동의 글 “련합정부를 론함(论联合政府)”을 련재하였다. 쏘련군 복장을 입었지만 조선말을 하는 동북위원회의 이 특수한 군인들은 우선 조선족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였다. 더우기 동북땅에서 만악의 일제와 싸웠던 항일련군 출신이라는것을 안 조선족 청장년들은 다투어 무기를 들고 이들을 따라 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신태는 김만익을 대장으로하는 연길경비대를 조직하여 훈련시켰다. 그리고 최광(최명석 崔名锡), 박락권, 최시영(崔时英)등을 왕청, 룡정, 화룡, 훈춘에 보내 정권건설과 당조직 확건, 무장대 조직사업을 진행하게 했다.  그리고 전윤필(全允弼), 박근식(朴根植), 엄군섭(严君燮)이 거느린 룡정별동대와 리주설, 김수억(金寿忆) 등 조선족 농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화룡 평강구 장인강자위대(长仁江自卫队)를 접수해 재편성하고 5개 퇀의 확군계획을 세웠으며 조충렬(赵忠烈)이 거느린 로투구별동대를 연변경비 2퇀 4련으로 편성했다. 그리하여 김만익은 연길에서, 박락권은 룡정에서, 박근식은 화룡에서, 남창수(南昌洙)는 조양천에서, 최광은 왕청에서 각기 조선족 무장을 조직했다. 길림성 연길에서 만난 원 독립6사 문서로 있었던 리복룡(李福龙) 로인은 조충렬 렬사가 당시 부대를 조직하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저의 상급인 조충렬 렬사는 연변에서 무장대오를 조직한 조직자의 한분입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청년동맹을 조직했습니다. 연변에서 민주동맹 대회를 할때 그는 로투구(老头沟)지구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회의에서 항일련군 출신인 강신태의 보고를 듣고 무장대오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로투구에 돌아온후 청년동맹 성원들과 함께 지주집 무장과 당시 치안유지회의 무장을 탈취하여 170여명의 무장을 조직했습니다.  후에 이들은 명월구의 부대와 합쳐 경비퇀을 편성했으며 조충렬 렬사는 지도원직을 맡았습니다. 지도원은 반드시 공산당원이여야했습니다. 조충렬 렬사는 당시 가장 먼저 입당한 분입니다. 연안에서 온 손장상(孙长祥)이 그의 소개인이라고합니다. 그는 1947년 3월 7일, 길림부근의 사간방(四间房)이라는 곳에서 싸울때 전우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13    제1장 '8.15'광복의 의미 댓글:  조회:2570  추천:0  2016-03-02
 “모택동의 평가”정순주 장군의 서예 1945년에 들어서서 아마 조금이라도 정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을 얼마든지 판단할수있었을것이다. 당시 중국내에는 근 20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고있었다. 이들은 동북뿐만아니라 관내 화북, 화동지역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고 또한 무한, 중경, 상해를 비롯한 대도시에도 일부 조선인 시민이 살고있었다. 수십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 “망국노”의 신세로 살아오던 그들은 일본의 패망을 손꼽아 기다리고있었다. “쏘련군의 땅크가 막 들어왔고 일본놈들이 무기를 놓았습니다. 해방을 받은 우리는 밖으로 뛰여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함께 거리에 떨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쏘련군을 환영했습니다.” “프랑카드를 들고 쏘련군을 환영하였는데 코가 크고 키가 큰 쏘련군이 땅크를 앞세우고 줄을 서서 들어오는데 저 앞고개에서 이쪽 골짜기까지 쭉 늘어섰습니다.” 아마 어린시절 우리는 당시의 이러한 정경을 친히 목격하였거나 로인분들로부터 많이 전해 들었을것이다. 지금도 70, 80세 로인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군한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이라고 즐거워하던 그때에도 사람들은 저들의 앞에 놓인 운명을 몰랐을것이다. 구경 누가 이 땅의 주인이며 어떠한 정당이 어떠한 정부를 세울것이며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갈것인지? 당시 아무도 이를 명확히 몰랐다. 특히 중국내 조선인들은 자기의 운명이 어찌될지 더욱 몰랐으며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항복하고 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였다는 순간의 기쁨에 잠겨있었을뿐이다. 세계 반파쑈전쟁이 최후단계에 진입하던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따시에서 열린 “얄따회의”에서는 쏘련군의 동북출병이 결정되였다. 쏘련은 출병조건으로 동북의 대련과 려순에 대한 조차권을 요구했고 중장철도(中长铁路)와 외몽골의 현상유지라는 조건을 제기했다. 쏘련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타협으로 이 조건은 수락되였다. 한편 태평양전장에서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한 미국은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이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닥쳐왔다. 시기를 놓칠세라 쏘련군은 8월 8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9일 령시부터 동북의 일본관동군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150만 쏘련군이 일거에 국경방어선을 돌파해서 한주도 안되는 사이에 동북 전역을 석권하자 8월 15일 점심, 일본 히로히또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사람들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자유와 해방을 경축했다. 하지만, 평화는 그처럼 쉽게 실현되지 않았고 더우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남이 베풀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였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세인의 시선이 부유한 중국 동북에 집중되였다. 쏘련과 미국이라는 당시 세계 량대세력이 동북을 눈박아 보았고 중국내의 국공량당이 동북을 주시하고있었다. 대흥안령, 소흥안령, 장백산맥으로 둘러있는 드넓은 동북평원은 기름진 땅과 풍부한 광산자원을 가지고있었지만 위도가 높은 동토대였기에 량곡생산이 제한을 받았고 옛날에는 벼농사를 상상도 못했으며 광산개발도 잘 되지 않았다. 인류가 19세기에 들어 서서야 동북개척이 본격화되였다. 특히 조선인이 대거 동북에 이주함에 따라 동북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였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농민들은 저온지대인 중국동북에서 드디어 벼농사를 성공시켰으며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답으로 만들었다. 이때로부터 동북의 농업발전의 터전이 마련되였으며 동북은 유명한 곡창으로 변했다. 일찍부터 동북에 눈독을 들인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통해 동북을 강점하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큰 저항이 없이 130여만 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800만 인구를 가진 동북을 내버리고말았다.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청나라 말대황제인 부의(溥仪)를 괴뢰황제로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세웠으며 조선으로부터 더욱 많은 조선농민을 동북에 강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고 동북을 중국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철도부설과 광산개발을 진행했다. 일제가 패망할때 동북의 선탄생산량은 전국의 49%를 점했고 강철생산량은 전국의 90%이상을 차지했으며 14,000킬로메터의 철도선과 10만킬로메터의 도로가 있게 되였다. 당시 동북은 중국의 가장 큰 공업기지였으며 가장 큰 곡창이였다. 부유한 동북을 차지하기 위해 장개석은 웅식휘(熊式辉)를 동북행원(东北行辕) 주임으로 임명하여 쏘련군으로부터 행정권을 인계받으려했고 두률명(杜聿明)을 동북보안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쏘련과 적극 담판하면서 각종 권력을 인계받는 동시에 동북의 일본군 잔여세력과 괴뢰만주국 군인, 경찰 그리고 무장토비 20여만명을 규합했으며 먄마에서 훈련받은 신1군과 신6군을 포함한 정예부대 25만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국민당 주력군이 모두 중국 서남부에 집결되여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은 미국함대의 도움으로 국민당 정예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동북의 한간, 괴뢰군, 지주무장, 특무, 관료 그리고 마적과 류랑배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유지회(维持会)를 설치하였고 무장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공산당의 중앙주석인 모택동은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설립해야한다는 정치주장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금후의 투쟁은 어떤 나라를 세우는가 하는 투쟁이다. 무산계급이 령도하는 인민대중의 신민주주의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아니면 대지주, 대자산계급이 독재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투쟁일것이다. 지금 이 투쟁은 항전승리의 열매를 탈취하려는 장개석과 그 탈취를 반대하는 우리와의 투쟁으로 나타나고있다.” 항일전쟁승리의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공산당은 3만 간부와 10여만 팔로군, 신사군을 동북에 긴급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동북을 차지할것인가? 세계 반파쑈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1945년 하반기, 풍요로운 동북은 국공량당이 힘을 겨루는 주요한 쟁탈지로 되였고 또한 쏘련과 미국 량대 세력까지 눈독을 들이는 초점지역으로 변했다. 그리고 전반 중국인민앞에는 두가지 운명이 놓여지게 되였다. 장개석을 위수로한 국민당은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이 통치하는 독재정권을 수립하려했고 공산당은 력사적 조류에 순응하고 민주주의적인 련합정부 설립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하려했던것이다. 동북에 온 공산당 간부들은 각지에 공산당조직을 설립함과 동시에 광범한 인민을 단합시키기 위해 군중조직인 동북인민민주대동맹(东北人民民主大同盟)을 조직, 령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국민당의 이른바 유지회와 투쟁하였다. 그리고 동북경내 조선족 집거지들에도 모두 조선인민주대동맹 조직이 설립되였고 산하에 농민, 청년, 녀성분맹이 설치되여 활발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2    영원한 기념비(2)--해방전쟁시기 조선민족의 투쟁사 답사 댓글:  조회:5534  추천:74  2009-11-03
2. 쏘련군과 함께 귀국한 항일련군       동북에 진출한 쏘련군에는 특수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일전쟁시기 동북대지를 휩쓸며 간고하고도 치렬한 전투를 진행해온 항일련군 장병들이였다. 항일명장 허형식(许亨植)과 리홍광(李红光)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겨레 항일지사들이 동북대지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쳐 싸웠다. 동북의 심산밀림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와 싸운 이들의 항일의거는 일제 식민통치하에 있던 수천만 동북인민에게 특히는 동북에 정착한 조선인에게 있어서 희망의 등불이였다. 쏘련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1945년 7월에 항일련군 간부들은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를 재구성했다. 바이족인 주보중(周保中)이 서기를 맡았고 위원에는 리조린(李兆麟), 풍종운(冯仲云), 왕효명(王效明), 왕일지(王一知) 등을 비롯해 조선인 강신태(姜信泰)와 김광협(金光侠)도 망라되였다. 항일련군중의 조선지사들은 대부분 조선사업위원회를 구성해 조선으로 나갔지만 중국공산당의 동북위원회에 강신태와 김광협을 비롯한 조선인을 포함시킨것은 이들이 동북에서 싸웠던 경력이 있어 동북상황에 대해 익숙한것과 중국동북에 조선농민이 많이 거주하고있는 현실을 고려한 사안으로 추정된다. 한편 주보중은 1945년 9월에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온 중공중앙 동북국 서기인 팽진(彭真)을 만나 당조직관계를 회복하였으며 그가 령도하는 동북위원회의 조직관계와 자료, 당비를 전부 팽진에게 맡겼다. 주보중 등은 쏘련군에서의 특수한 지위를 리용해 쏘련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으며 각지에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군대를 모집하는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였다. 분공에 따라 주보중은 장춘에, 리조린은 할빈에, 풍종운은 심양에 가서 사업했고 조선인 강신태는 연길에, 김광협은 목단강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들은 쏘련군을 도와 사회치안을 유지하고 당조직을 회복했으며 무장을 확대하였다. 10월에 이르기까지 동북항일련군은 4만여명으로 확대되였으며 일본이 패망한데 비추어 부대명칭을 동북인민자위군(东北人民自卫军)으로했다. 항일련군 출신인 한족간부 왕효명(王效明)은 길림시에서 쏘련군 길림시 위술(卫戍)사령부 부사령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길림시 지하공산당원인 리유민(李维民)을 만나 당조직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우선 량환준(梁焕俊)이 조직한 길림시 조선인해방동맹을 쟁취하고 량환준을 비롯한 조선인간부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11월 21일에 길림시에서 길림 전성 보안총대를 설립하고 수천명 청년들을 규합시켰다. 길림시와 부근 조선족마을의 청년들도 보안총대에 참가해 한개 대대로 편성되였다.   동북위원회 위원인 강신태[원명 강건(姜健)]는 최명석(崔明锡), 박락권(朴洛权), 김만익(金万益), 강위룡(姜渭龙), 김명수(金明洙), 려영준(吕英俊) 등 22명 동북위원회 연변사업위원회 간부들을 거느리고 9월 18일, 연길 군용비행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쏘련군의 공격으로 일제가 항복했지만 사실 동북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대량의 일본군 잔여세력이 구석구석 도사리고있었고 무장을 든 수많은 마적떼가 도처에서 백성을 괴롭히고있었다. 게다가 연길, 룡정 거리에는 “국민당 길림성 연변판사처”, “국민당 연길현 당부”라는 간판이 나 붙었고 국민당이 끌어모은 별동대, 보안대, 자위군, 치안유지회가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강신태는 우선 지희겸(池喜谦), 강동주(姜东柱), 박동운(朴东云)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조직한 군중조직을 통합시키고 이들을 쟁취함으로써 군중을 발동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9월 19일에 연길시에서는 600명 조선족대표가 4만여명 회원을 대표하여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대회를 열고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총동맹”을 설립하고 강동주를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조직은 연변사업위원회의 지도를 받으면서 10월에는 지희겸이 위원장을 맡은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칭되여 폭넓게 군중사업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 시기 최무(崔武), 최문국(崔文国)을 비롯한 개명인사들이 창간한 조선문판의 “한민일보(韩民日报)”가 있었다. 신문은 11월에 “연변민보(延边民报)”로 개칭하고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되였다. 강동주가 주필을 맡은 이 신문은 첫기부터 모택동의 글 “련합정부를 론함(论联合政府)”을 련재하였다.     쏘련군 복장을 입었지만 조선말을 하는 동북위원회의 이 특수한 군인들은 우선 조선족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였다. 더우기 동북땅에서 만악의 일제와 싸웠던 항일련군 출신이라는것을 안 조선족 청장년들은 다투어 무기를 들고 이들을 따라 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신태는 김만익을 대장으로하는 연길경비대를 조직하여 훈련시켰다. 그리고 최광(최명석 崔名锡), 박락권, 최시영(崔时英)등을 왕청, 룡정, 화룡, 훈춘에 보내 정권건설과 당조직 확건, 무장대 조직사업을 진행하게 했다. 그리고 전윤필(全允弼), 박근식(朴根植), 엄군섭(严君燮)이 거느린 룡정별동대와 리주설, 김수억(金寿忆) 등 조선족 농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화룡 평강구 장인강자위대(长仁江自卫队)를 접수해 재편성하고 5개 퇀의 확군계획을 세웠으며 조충렬(赵忠烈)이 거느린 로투구별동대를 연변경비 2퇀 4련으로 편성했다. 그리하여 김만익은 연길에서, 박락권은 룡정에서, 박근식은 화룡에서, 남창수(南昌洙)는 조양천에서, 최광은 왕청에서 각기 조선족 무장을 조직했다. 길림성 연길에서 만난 원 독립6사 문서로 있었던 리복룡(李福龙) 로인은 조충렬 렬사가 당시 부대를 조직하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저의 상급인 조충렬 렬사는 연변에서 무장대오를 조직한 조직자의 한분입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청년동맹을 조직했습니다. 연변에서 민주동맹 대회를 할때 그는 로투구(老头沟)지구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회의에서 항일련군 출신인 강신태의 보고를 듣고 무장대오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로투구에 돌아온후 청년동맹 성원들과 함께 지주집 무장과 당시 치안유지회의 무장을 탈취하여 170여명의 무장을 조직했습니다. 후에 이들은 명월구의 부대와 합쳐 경비퇀을 편성했으며 조충렬 렬사는 지도원직을 맡았습니다. 지도원은 반드시 공산당원이여야했습니다. 조충렬 렬사는 당시 가장 먼저 입당한 분입니다. 연안에서 온 손장상(孙长祥)이 그의 소개인이라고합니다. 그는 1947년 3월 7일, 길림부근의 사간방(四间房)이라는 곳에서 싸울때 전우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연길에서 만난 조충렬 렬사의 차녀 조순복(赵顺福)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했다. “8.15광복후 저의 아버지께서는 로투구 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그이는 당지의 혁명선각자들인 박남언, 임윤식 등과 함께 별동대를 조직하였고 별동대 대장을 맡았습니다. 대오는 170명이였는데 로투구의 탄광과 아마공장, 천보산의 치안유지회를 해산시키고 그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무장했습니다. 어머니의 회억에 따르면 제가 태여나서 얼마안되여 어머니는 저를 업고 아버지를 찾아 부대에 갔다고합니다. 부대가 휴식하고있다하니 아버지에게 나를 보여주려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지금 부대는 휴식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찾아오면 지도원인 내가 어떻게 남을 이끌겠는가?’고 나무람했다고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서러움을 참고 다른 아주머니들과 함께 종일 전사들의 빨래를 해주고 떠났다고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혁명을 위해 가족도 돌보지 않았으며 목숨까지, 모든것을 바쳤습니다. ” 로투구뿐만 아니라 연길, 룡정, 화룡, 훈춘, 왕청을 비롯한 연변각지에 모두 조선족청년들로 무어진 크고작은 무장조직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길림성 화룡시 신광촌에서 살던 윤룡철(尹龙哲) 로인은 박근식[注:박근식에 대해 전문적인 자료는 극히 적다. 김산의 회억한 글 “아리랑의 노래”나 해륙풍 쏘베트근거지의 자료들을 통해 그의 약력을 조금 알아볼수있다. 박근식은 일찍 형님 박영을 따라 로씨야에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며 또 중국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에 다니기도했다. 졸업후 광주의 조선인혁명가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하여 싸우다가 해륙풍에 철수하였으며 해륙풍에서 다시 국민당의 토벌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상해를 거쳐 동북으로 갔다. 광주봉기에서 형님 박영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동북에서 조직을 찾지 못한 박근식은 한동안 고향인 룡정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광복을 맞이하게 되였다. 광복후 부대를 조직해 공산당을 따라 싸웠으며 당적 회복문제로 한동안 애를 먹었다는 설도 있다. 그후 그는 조선으로 나갔다.] 이 거느린 화룡부대에 참가했었다. 지금 82세 고령인 윤룡철 로인은 당시 박근식 부대가 조직되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소개한데 의하면 일찍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혁명에 참가해 광주봉기를 겪었던 박근식은 룡정의 동흥중학교(东兴中学校)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곧 청년들을 규합해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쏘련의 중국어방송을 통해 쏘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했다는것을 알고 미리부터 유지인사들을 규합해 환영대회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9일에 3.1소학교(지금의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에서 만명군중이 모인 환영집회가 있게 되였다. 지금도 당시 환영대회를 기념하기 위한 커다란 동북해방기념비가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켠에 세워져있다. 집회가 있은후 박근식은 청년동맹을 통해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8월 26일에 벌써 룡정별동대를 편성하게 되였다. 별동대는 9월에 그 규모가 이미 600명에 달해 룡정경비대로 재편성되였다. 룡정경비대는 후에 화룡부대와 합병해 연변경비3퇀으로 편성되고 박근식이 퇀장을 맡았다. 이 부대는 후에 동북민주련군 10종대 30사에 합류했다. 윤룡철 로인은 “풍부한 혁명경력이 있는 박근식은 자애롭고도 의지가 강한 분이였다.”고한다.     1945년 10월, 화룡 서성에서 참군한 김병욱(金炳旭) 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남의 집 살이”를 하던 그는 먹고 잘데가 없어 고민하던끝에 부대를 찾아가니 “박반장”이 창고지기부터 시작하라고했다. 그때 무장대오라고하지만 변변한 의복이나 무기가 없었고 대원들은 베옷을 입거나 일본군 바지를 입었고 혁띠도 없어 새끼줄로 허리를 동이군 했다. 그리고 무기라고는 일본군이 남기고간 낡은 보총이였고 어떤 대원은 그것도 없어 날창 하나를 차거나 수류탄 몇개를 가지고있었을뿐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사기가 높았고 뜨거운 열기로 전투에 참가했다. 길림군구 사령부와 정치부에서 편찬한 <중국인민해방군 길림성군구군사>수정고를 보면 1945년 9월 당시 길림군구는 길림과 합강(合江) 두개성과 송강성(松江省)의 주하이동지구를 포함한 길합군구(吉合军区)로 되여있다. 주보중이 길합군구 당위원회 서기, 군구사령원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는 장춘지역의 부대를 통솔했고 길림경비사령인 왕효명이 교하, 돈화를 포함한 길림지역 부대를 책임졌으며 연변지역은 강신태 사령원이 경비 1퇀, 2퇀, 3퇀을 지휘했다. 한달 남짓한 사이에 박락권을 퇀장으로 하는 연변경비 1퇀이 연길에서 조직되고, 최광을 퇀장으로하는 연변경비 2퇀이 왕청에서 조직되였으며, 박근식을 퇀장으로하는 연변경비 3퇀이 화룡에서 조직되였다. 뿐만 아니라 훈춘, 안도, 돈화 등지에도 지방 보안부대가 조직되여 연변지역 조선족 경비부대 총병력은 7천 5백여명에 달했다. 망국의 한을 지닌 동북의 조선족청년들은 명망높은 항일련군 간부들의 호소에 응해 무장조직에 적극 참가했던 것이다.     길림성 연길시 고려촌 광영원에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김병욱 로인은 당시 박락권 부대에 편성되였었다. 그의 회억에 따르면 박락권은 쏘련군 복장에 말을 타고 다녔으며 일찍 동북에서 일제와 싸운 항일련군 출신으로서 조선사람들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한다. 그리고 박락권 퇀장은 키가 크고 씩씩한 사람이라고하면서 그는 늘 말을 타고 연설하고 연설이 끝나서야 말에서 내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군 했다고한다.       일제패망후 흑룡강성의 상황은 아주 복잡했다. 쏘련군이 군사관제를 실시하는 상황에서 할빈시는 각종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장소로 되였다. 동북항일련군의 리조린 장군은 할빈에 도착하자 당조직 회복과 확군 사업을 틀어쥐었다. 당시 할빈시와 부근 각현에는 많은 조선족이 살고있었다. 다년간 일제가 민족리간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에 현지 한족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사람에게도 불만이 컸다. 연길에서 만난 김정순(金贞顺) 로인은 일찍 흑룡강성 오상현에서 교원사업하다가 조선독립동맹에 참가했고 또 조선의용군 3지대 교도대 녀성중대에 참가한 분이다. 82세 고령인 김정순 로인의 소개에 따르면 당시 흑룡강 조선사람들은 집밖으로 나오기도 두려워했다. “일본놈들이 일본사람은 1등 국민, 조선사람은 2등 국민, 한족과 기타 민족은 3등 국민이라고 획분하였기에 많은 한족사람들이 조선사람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고 미워했습니다. 일본놈들이 투항한후 우리는 집밖으로도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리조린 장군이 할빈에 와서 ‘조선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땀을 흘리며 싸웠다’고 하면서 ‘조선사람 하나도 다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할빈에서 리조린은 신속히 조선독립동맹의 책임자 김택명(金泽明, 일명 리상조 李相朝)과 련계를 가졌다. 할빈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사업했던 사학자 서명훈(徐明勋)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김택명은 1943년에 조선의용군의 파견을 받고 흑룡강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파언(巴彦)현에서 독립동맹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43년 10월에는 할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일제가 패망한후 그는 리조린 장군과 손을 잡고 할빈보안총대의 조선독립대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할빈의 조선족 주민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면서 계속 확대, 발전되였다. 한편 목단강지역에서는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온 김광협이 활발한 활동을 진행해 고려경찰대를 조직했다. 고려경찰대의 50여명 조선족 청년들은 일본군이 버리고간 낡은 보총을 메고 허리에 수류탄 몇개씩 차고 목단강시 공화가, 공민가, 평안가를 순라하면서 조선족을 보호하고 사회치안을 유지했다. 목단강시 고려경찰대 대장에 정창호(郑昌浩)이고 부대장에 조운세(赵云世)였다. 고려경찰대가 조직되였던 자리는 목단강시 북방공구공장이였고 후에는 1.21공장으로 바뀌였다고 기록되여있지만 지금은 전부 개발구로 변해 명확히 찾아볼수 없었다.     김광협은 쏘련군의 목단강시 위수사령부 부사령과 공산당의 목단강군구 정위라는 이중 신분을 가지고 조선족무장을 적극 확대해 나갔으며 목단강지역 조선족마을로부터 1,500여명 청년을 모아 조선족부대인 14퇀 3영과 15퇀 3영, 군구경위련을 편성했다. 이들은 한족부대인 14퇀 2영과 37퇀의 반란음모를 분쇄하고 현지 민주정부를 보호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밖에 제2퇀 3영도 조선족 청년으로 구성되였는데 퇀장은 김동규였다. 서명훈 선생의 다년간 연구를 종합해 보면 당시 목단강지역 조선족부대는 다음과 같다.   牡丹江军区    司令员  李荆璞 (汉族)  政委 金光侠                                     警卫连  连长 赵明善              十四团  三营  营  长 柳昌权 教 导 员  李青松 副营长 郑昌浩 副教导员  赵云世 十五团  三营  营  长 郑求益 教导员 赵石满 保安团  二营  营  长 金长权 教导员 姜云鹤                         副营长 郑  友 警卫团     团  长 王景坤(汉族)政  委 吴**(汉族) 副团长 金奉国        副政委 金镇浩 二营 营  长 金奉奎  副营长 张应天 四  团  四营 营  长 朴学甫  副教导员 张东植   김광협이 정위를 맡은 목단강군구에는 조선족부대가 많았다. 목단강시에서 조직한 고려경찰대가 군구 14퇀 3영으로 편성되였다. 영장 류창권, 교도원 리청송. 목단강시교와 부근 각현의 조선청년들이 모여 15퇀 3영으로 편성되였다. 영장에 정구익, 교도원에 조석만. 목단강시 수비임무를 맡은 보안퇀 2영 영장은 김장권, 교도원 강운학, 부영장 정우. 녕안 와룡향, 강남향, 란강향 등 여러 향의 조선족자위대로 편성된 경위퇀 퇀장은 한족인 왕경곤이고 정위 역시 오씨성을 가진 한족이며 부퇀장 김봉국과 부정위 김진호는 조선족이다. 이 부대 2영은 전부 조선족으로서 영장에 김봉규, 부영장에 장응천이다. 녕안현 동경성의 여러 조선마을 조선족치안대 350여명이 모여 4퇀 4영이 편성되였는데 영장은 박학보이고 부교도원은 장동식이였다. 목단강군구뿐만 아니라 북만의 합강군구(合江军区)에도 유명한 조선족부대인 “동철부대”가 있었다. 합강군구 1퇀 2영에 편입된 이 부대 영장은 한족인 류곤(刘坤)이였고 교도원 김동철(金东哲), 참모장 김해정(金海静)이하 600여명 장병은 모두가 조선족이였다. 이밖에도 허태동(许泰东)이 조직한 목릉현조선독립영을 비롯해 빈현(宾县), 오상(五常), 상지(尚志), 연수(延寿), 파언, 수화(绥化), 수릉(绥棱), 덕도(德都) 등 많은 현에 모두 200여명 규모의 조선족 독립대대가 있었고 동흥(东兴), 의란(依兰), 계서(鸡西), 해림(海林), 동녕(东宁) 등 현에 100여명 규모의 조선족중대가 있었다.    “8.15”광복후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진출한 항일련군 지도간부들은 중국공산당 중앙과의 련계를 회복하고 당조직을 발전시켰으며 각곳에서 공산당의 부대를 조직했다. 동북각지의 조선족은 조선독립동맹을 통해 공산당의 정치주장을 지지하면서 공산당부대에 적극 참가하여 흑룡강성 할빈지역, 목단강지역, 가목사지역, 길림성의 길림지역, 연변지역에 대량의 조선족 독립대대, 경찰대, 경비퇀, 보안퇀이 나타났다. 이들은 토비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사회치안을 유지했으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할 준비를 했던것이다.사진설명:1. 주보중, 김광협, 강신태2. 조충렬 렬사 유상3. 조충렬 렬사 묘소4. 룡정별동대5. 당시 화룡에서 입대한 윤룡철 로인6. 길림군구사의 45년 부대편성표7. 박락권 8. 박락권부대에 참가했던 김병욱 로인
11    영원한 기념비(1)--해방전쟁시기 조선민족의 투쟁사 답사 댓글:  조회:5126  추천:32  2009-10-26
“8.15”광복의 의미   1945년에 들어서서 아마 조금이라도 정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침략군의 패망을 얼마든지 판단할수있었을것이다. 당시 중국내에는 근 20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고있었다. 이들은 동북뿐만 아니라 관내 화북, 화동지역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고 또한 무한, 중경, 상해를 비롯한 대도시에도 일부 조선인 시민이 살고있었다. 수십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 “망국노”의 신세로 살아오던 그들은 일본의 패망을 손꼽아 기다리고있었다. “쏘련군의 땅크가 막 들어왔고 일본놈들이 무기를 놓았습니다. 해방을 받은 우리는 밖으로 뛰여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함께 거리에 떨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쏘련군을 환영했습니다.” “프랑카드를 들고 쏘련군을 환영하였는데 코가 크고 키가 큰 쏘련군이 땅크를 앞세우고 줄을 서서 들어오는데 저 앞고개에서 이쪽 골짜기까지 쭉 늘어섰습니다.” 아마 어린시절 우리는 당시의 이러한 정경을 친히 목격하였거나 로인분들로부터 많이 전해 들었을것이다. 지금도 70,80세 로인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군한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이라고 즐거워하던 그때에도 사람들은 저들의 앞에 놓인 운명을 몰랐을것이다. 구경 누가 이 땅의 주인이며 어떠한 정당이 어떠한 정부를 세울것이며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갈것인지? 당시 아무도 이를 명확히 몰랐다. 특히 중국내 조선인들은 자기의 운명이 어찌될지 더욱 몰랐으며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항복하고 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였다는 순간의 기쁨에 잠겨있었을뿐이다. 세계 반파쑈전쟁이 최후단계에 진입하던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따시에서 열린 “얄따회의”에서는 쏘련군의 동북출병이 결정되였다. 쏘련은 출병조건으로 동북의 대련과 려순에 대한 조차권을 요구했고 중장철도(中长铁路)와 외몽골의 현상유지라는 조건을 제기했다. 쏘련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타협으로 이 조건은 수락되였다. 한편 태평양전장에서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한 미국은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이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닥쳐왔다. 시기를 놓칠세라 쏘련군은 8월 8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9일 령시부터 동북의 일본관동군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150만 쏘련군이 일거에 국경방어선을 돌파해서 한주도 안되는 사이에 동북 전역을 석권하자 8월 15일 점심, 일본 히로히또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사람들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자유와 해방을 경축했다. 하지만, 평화는 그처럼 쉽게 실현되지 않았고 더우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남이 베풀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였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세인의 시선이 부유한 중국 동북에 집중되였다. 쏘련과 미국이라는 당시 세계 량대세력이 동북을 눈박아 보았고 중국내의 국공량당이 동북을 주시하고있었다. 대흥안령, 소흥안령, 장백산맥으로 둘러있는 드넓은 동북평원은 기름진 땅과 풍부한 광산자원을 가지고있었지만 위도가 높은 동토대가 많았기에 량곡생산이 제한을 받았고 옛날에는 벼농사를 상상도 못했으며 광산개발도 잘 되지 않았다. 인류가 19세기에 들어 서서야 동북개척이 본격화되였다. 특히 조선인이 대거 동북에 이주함에 따라 동북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였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농민들은 저온지대인 중국동북에서 드디어 벼농사를 성공시켰으며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답으로 만들었다. 이때로부터 동북의 농업발전의 터전이 마련되였으며 동북은 유명한 곡창으로 변했다. 일찍부터 동북에 눈독을 들인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통해 동북을 강점하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큰 저항이 없이 130여만 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800만 인구를 가진 동북을 내버리고말았다.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청나라 말대황제인 부의(溥仪)를 괴뢰황제로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세웠으며 조선으로부터 더욱 많은 조선농민을 동북에 강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고 동북을 중국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철도부설과 광산개발을 진행했다. 일제가 패망할때 동북의 선탄생산량은 전국의 49%를 점했고 강철생산량은 전국의 90%이상을 차지했으며 14,000킬로메터의 철도선과 10만킬로메터의 도로가 있게 되였다. 당시 동북은 중국의 가장 큰 공업기지였으며 가장 큰 곡창이였다. 부유한 동북을 차지하기 위해 장개석은 웅식휘(熊式辉)를 동북행원(东北行辕) 주임으로 임명하여 쏘련군으로부터 행정권을 인계받으려했고 두률명(杜聿明)을 동북보안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쏘련과 적극 담판하면서 각종 권력을 인계받는 동시에 동북의 일본군 잔여세력과 괴뢰만주국 군인, 경찰 그리고 무장토비 20여만명을 규합했으며 먄마에서 훈련받은 신1군과 신6군을 포함한 정예부대 25만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국민당 주력군이 모두 중국 서남부에 집결되여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은 미국함대의 도움으로 국민당 정예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동북의 한간, 괴뢰군, 지주무장, 특무, 관료 그리고 마적과 류랑배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유지회(维持会)를 설치하였고 무장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공산당의 중앙주석인 모택동은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설립해야한다는 정치주장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금후의 투쟁은 어떤 나라를 세우는가 하는 투쟁이다. 무산계급이 령도하는 인민대중의 신민주주의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아니면 대지주, 대자산계급이 독재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투쟁일것이다. 지금 이 투쟁은 항전승리의 열매를 탈취하려는 장개석과 그 탈취를 반대하는 우리와의 투쟁으로 나타나고있다.” 항일전쟁승리의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공산당은 3만 간부와 10여만 팔로군, 신사군을 동북에 긴급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동북을 차지할것인가? 세계 반파쑈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1945년 하반기, 풍요로운 동북은 국공량당이 힘을 겨루는 주요한 쟁탈지로 되였고 또한 쏘련과 미국 량대 세력까지 눈독을 들이는 초점지역으로 변했다. 그리고 전반 중국인민앞에는 두가지 운명이 놓여지게 되였다. 장개석을 위수로한 국민당은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이 통치하는 독재정권을 수립하려했고 공산당은 력사적 조류에 순응하고 민주주의적인 련합정부 설립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하려했던것이다.     동북에 온 공산당 간부들은 각지에 공산당조직을 설립함과 동시에 광범한 인민을 단합시키기 위해 군중조직인 동북인민민주대동맹(东北人民民主大同盟)을 조직, 령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국민당의 이른바 유지회와 투쟁하였다. 그리고 동북경내 조선족 집거지들에도 모두 조선인민주대동맹 조직이 설립되였고 산하에 농민, 청년, 녀성분맹이 설치되여 활발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중된 길림성 연변의 민주대동맹 우리글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东北人民民主大同盟宣言    第二次世界大战은 联合国인 中苏英美의 英雄的战斗에 의하여 东西两方의 파시스트 侵略者德国 및 日本을 粉碎하였음으로 우리는 荣光의 胜利를 获得하고 世界는 东亚의 平和를 实现하였다. 우리 东北地方이 日本의 强盗的侵略을 遭遇한以来 中国人民은 历史上再见할수없는 血성의 杀害 및 凄惨奴役을 받아 피와 눈물속에서 被辱被害의 十四年이란 긴 黑暗时代를 지내왔다. 胜利의 苏联红军이 东北에 出师하여 日구를 驱逐하고 东亚人民의 가索를 解脱하여 中国国家의 土地를 光复하였다. 우리에게 自由와 幸福의 生活을 가져다준 伟大한 红军에게 우리人民은 衷心으로 感谢한다. 이번 历史的一九四五年八月十四日에 中苏两国间에는 意义至大한 中苏友好同盟条约이 缔结되여 两国间의 永久한 友谊가 巩固하여졌으니 日구의 再起를 共同防御하며 东亚经济를 共同建设하며 东亚文化를 共同重建하자. 延边一带의 数万中韩住民을 包括한 空前의 劳农青总同맹은 伟大한 红军이 우리에게 준 自由와 幸福을 굳게 하기 为하여 东北人民民主大同맹으로 改造되였다. 그러면 우리의 主张은 무엇이냐. 우리는 彻底히 日구의 残滓分子를 消灭한后 全国绝大多数人民을 基础로한 统一战线的인 一个의 民主联盟的国家制度의 建立을 主张한다. 우리는 이 国家制度를 新民主主义的国家制度라 称한다. 이것은 人口가 最大한 中国으로써 要求하는 适合한 国家制度다. 우리가 新民主主义의 政治를 主张하는것은 外来의 民族压迫을 驱逐하고 国内의 封建主义的 및 파시스트的 压迫을 废止함에 在하고 此种制度를 废止한后 다시 旧民主主义制度를 建立하지말고 一切民主阶级이 联合된 统一战线的政治制度를 建立함에 在한다. 우리의 主张은 孙中山先生의 主张과 完全히 一致하다. 孙中山先生은 그가 著作한 国民党 第一次代表大会宣言에 “近世各国의 所谓民权制度는 往往 资本阶级이 专有하여 平民을 压迫하는 工具로써 造成되였었는데 国民党의 民权主义는 一般이 平民의 共有가 되고 少数人이 私有할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孙先生의 伟大한 政治的指示다. 中国人民 및 其他一切民主分子는 반드시 이 指示에 服从하여 이를 坚实히 决行하여야할것이며 또 이 指示에 违背하고 反对하는 者에게는 何人이나 何集团이나 一切坚决한 斗争을 하여 이 完全하고 正确한 新民主主义的三民主义 정治原则을 保护하고 发扬하여야할것이다. 本同盟은 各党派各社会团体 및 宗教团体及男女를 不分하니 本同盟의 纲领과 规约을 承认하고 新民主主义를 为하여 奋斗하려는 사람들은 均一히 个人的으로나 团体的으로나 入盟할수있다. 各界의 同胞여 新民主主义를 为하여 斗争하자, 勇往直前하여 入盟하자.                                                   一九四五年十月                            中华民国东北人民民主大同盟 延边执行委员会   연변집행위원회가 발표한 동북인민민주대동맹 선언문을 보면 연변지역에는 이미 로동자, 농민, 청년동맹을 비롯한 조직이 있었고 이들을 규합해 다시 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조한다는것을 알수있다. 그리고 조선인을 포함한 동북인민민주대동맹은 자산계급이 독재하고 일반인을 압박하는 낡은 제도를 페지하고 모든 민주계급이 련합된 통일전선적인 정치제도를 건립할것을 주장하고있다. 이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련합정부 수립주장과 일치하다고할수있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혼잡한 동북상황에서 모택동의 민주주의 련합정부를 수립할데 관한 주장을 광범한 대중들에게 적극 선전하였으며 중국인민과 중국내 조선민족이 직면한 두가지 운명을 더욱 명확히 밝혀주고있다. 중국공산당연변위원회는 1945년 11월에 발표한 “中韩民众에게 告함”이라는 글에서 “现下中国全体形势를 考察하면 两个前途가 存在하고잇다! 独裁的统治를 继续하고 民主改革을 不许하고 중국을 苦痛이 重叠한  非独立, 不自由, 非统一, 不富强한 陈旧状态에 退步식히려는것이니, 이것은 日本侵路者로부터 解放된 中国을 黑暗의 中国으로 退步식히자는것이다. 或者는 一切의 困难을 克服하고 全国人民을 团结하고 独裁的统治를 废止하고 民主改革을 实行하고 民主力量을 巩固扩大하고 日寇의 残余를 彻底히 肃清하고 间谍을 惩罚하야 中国의 前途로하여금 独立, 自由, 民主, 统一, 富强의 新国家가 되게 하려는것이다. 中国의 四亿五千万人口中数百万产业工人, 数千万手工工人, 三亿六千万农民阶级, 其他广大한 小资产阶级, 自由资产阶级, 开明绅士, 其他爱国分子는, 다 第二의 前途를 要求한다.”라고 지적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이를 위해 24년간을 싸워왔다고 밝혔다. 글은 전국범위에서 민주개혁을 실행하려면 관료자산계급을 대변하는 국민당의 반인민적인 전제정권을 페지하고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건립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민족의 단결을 파괴하고 중국인민의 민주개혁을 저애하는 국민당 전제정권을 반대하고 민주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독립과 자유, 민주, 통일, 부강의 새중국을 건설하는 길로 나갈것을 호소했다.   당시 동북경내에는 216만 조선인이 정착해 살고있었지만 “8.15”광복이 되면서 수많은 인파가 조선반도로 밀려감으로써 중국내 조선인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년간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가꾸어놓은 터전을 버리기 싫은 대다수 농민들은 자리를 뜨려하지 않았고 자기의 터전을 지키고 잘 가꾸려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일제주구와 괴뢰만주국 잔여세력을 모아 유지회를 조직하고 민족리간정책을 실행하면서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의 독재를 대변하는 국민당 보다는 조선인까지 포함한 전인민적인 신민주주의 련합정권을 수립한다는 동북인민민주대동맹과 중국공산당의 정치주장이 더 마음에 와 닿았을것이며 진정 평등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해방을 위해 싸울 결의를 다지게 되였을것이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동북에 정착해 벼농사에 종사해왔던 이들은 이때로부터 중국인민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간주하고 자기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중국에서의 립지를 마련하기 위해 피어린 항쟁을 시작했으며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에 마멸할수없는 기여를 하게 되였던 것이다. “8.15”광복은 중국인민뿐만아니라 중국내 조선인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새로운 항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였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 사람마다 평등한 사회는 누가 베풀어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총가목을 잡고 독재정권과 싸워야만이 이루어질수있었던것이다. 이는 중국인민의 운명이고 중국내에 남은 조선인민의 운명이기도 했다.   “8.15”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까지, 중국내 이주해 살아오던 조선이민들이 중화민족의 일원인 중국조선족이 된 이 거창한 력사를 밝혀내고 방송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공적을 알리기 위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처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방송센터는 공동제작을 기획하고 답사진을 구성하여 자유와 해방을 위해 중국의 거창한 력사대하속에서 자주적으로 자기의 립지를 다져놓은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재조명하고저 2007년부터 본격적인 답사길에 올랐다.     원 동북민주련군 1종대 포병이였던 김인섭(金仁燮)로인은 길림성 화룡시병원에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답사팀을 만나주었다. 침상에 누운 김인섭 로인은 “20대 청년들이 무리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 사람들이 오늘의 행복이 어떻게 왔는가를 정말 알아 달라는겁니다. 내가 목숨이 아까운것 보담두 우리나라가 어떻게 건설되였는가를 알아달라는겁니다.”라는 마지막 소원을 남겼다. 시간은 좀처럼 기다려주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정처없이 흐르는것이 또한 력사이다. 60여년전의 그 벅찬 력사를 찾는 우리의 답사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로인분들의 베개가에 귀를 대고 마지막 숨결을 느끼면서 그 격정의 나날들을 알아야했고 력사의 현장을 검증해야했다.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의 거울로 비춰보지 않으면 자기를 알수없고 오늘을 사는 자세를 바르게 가질수없다. 력사를 망각하는것은 배신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사진설명: 1. “모택동의 평가”정순주 장군의 서예 2. 동북인민민주대동맹 선언문[리송덕 제공] 3. 중한민중에게 고함[리송덕 제공] 4. 10부작 TV다큐 5. 10부작TV다큐 6. 렬사들을 추모하여 [연길렬사릉원]          
10    “영원한 기념비”두번째 단계 취재기록② 댓글:  조회:4832  추천:66  2008-12-07
   “영원한 기념비”두번째 단계 취재기록②         1.       화수림자 렬사기념비   2.       화수림자전투 전적지 비석   3.       해룡보안중대가 조직되던 상황을 소개하는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리병길 로인   4.       림강렬사릉원에 모셔진 조선족렬사 김봉산 묘비   5.       리홍광지대 병원으로 사용되였던 림강의 대호병원 (변혜옥,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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