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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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광복’ 재조명 댓글:  조회:6654  추천:9  2012-11-10
‘광복’ 재조명 정인갑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각 나라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받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투항으로 인하여 광복되었다.’ 우리는 60여 년간 이렇게 여겨왔지만 지금 꼼꼼히 생각하여 보면 이 말에는 문제점이 있다. ‘광복’이란 말의 의미를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광복을 통하여 일본에게 강점되었던 나라를 되찾고 해방되었을 뿐 많은 문제 상에서 광복된 나라로서, 피해국으로서의 응분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a, 일본은 지금까지 저들의 한국, 중국 등에 대한 침략을 승인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 ‘진출’했느니, 그들에게 ‘구미의 침략을 막아주었’느니, 그들의 ‘진보와 발전을 도와주었’느니 라고 왜곡하며 이런 내용을 역사교과서에까지 써넣고 있다. b, 야스쿠니 신사에 침략 원흉들을 민족영웅으로 모셔놓고 나라 수상(首相)을 포함한 광범위한 일본인들이 참배하고 있다. 이러한 작태는 피해국에 대한 정신적 타격으로 되고 있다. c, 아직 영토완정의 권리를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광복으로 찾은 나라의 주권도 에누리 없는 주권이 아니다. 이를테면 일본이 한국의 독도를 자기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중국영토 조어도(釣魚島)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일본이 속심은 독도와 조어도 뿐만 아니라 한국 전역과 중국 만주가 지금도 자기의 영토라는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d, 피해국은 아직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e, 중국과 북한은 아직 전쟁배상금을 받지 못하였고 한국도 겨우 새발에 피에 불과한 배상금밖에 받지 못하였다. f, 일본이 식민통치와 침략전쟁 중 노략해간 피해국의 많은 국보급(國寶級) 문화재를 아직 돌려받지 못 하도 있다. … 상기 외에도 문제가 많을 것이지만 필자의 역사지식이 천박하므로 일일이 열거하지 못한다. 이런 황당한 일이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은 당시의 특수한 시대배경과 관계된다. 2차 대전은 반파쇼 전쟁으로부터 출발하여 공산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의 대립으로, 즉 냉전체제의 진입으로 결속 지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바야흐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공산주의를 막고 강대한 소련을 견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므로 패전국 일본을 진일보 청산하기보다는 재무장시켜 공산주의와 소련을 견제하는 군사 동맹으로 삼아야 했었다. 중국에는 장개석과 모택동의 대결이 대두됐다. 장개석은 공산당을 소멸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했었다. 그리하여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以德報怨)’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침략자를 우대하며 광복의 권리를 관철시킬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만소속 조어도(釣魚島)도 이런 정치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갔다. 한반도도 중국의 정세와 비슷하였다. 광복의 권리를 관철시킬 사이도 없이 이내 이승만과 김일성의 대결이 대두됐다. 북한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미국 군정부나 이승만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심도 있게 청산할 여지도 없었고 또한 청산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에 패전하고 투항했지 한국, 중국 등에게 패전하고 투항한 것이 아니다. 한국, 중국 등을 침략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패전도 투항도 하지 않았는데 웬 ‘광복’이란 말인가? 일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피해국들이 짝사랑으로 외치는 ‘광복’이지 사실은 ‘광복’이 아니다. 또한 이내 전승국 미국과 한 편으로 되어 자유세계를 보위하는 전초병으로 되었으니 자기의 침략과오를 승인하지 않을 ‘구실’이 당당하고, 이어 세계에서 버금가는 경제대국까지 되었으니 더욱 거만해졌다. 그러므로 60여 년간 피해국에 져야 할 응분의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대 원인을 빌미로 일본의 착오를 합리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 같은 시대환경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쟁의 과오를 철저히 승인하고 탈태환골(脫胎換骨)하였다. 독일이야말로 거인(巨人)의 나라이며 일본은 왜인(矮人)의 나라이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였다. 우선 이데올로기 대립의 냉전 체제가 없어졌다. 다음은 경제성장을 이룩한 중국이나 한국이 일본의 눈치를 보아야 할 이유도 기본적으로 없어졌다. 우리는 60여 년간 외쳐온 ‘광복’을 재조명하여야 한다. 광복 후 찾지 못한 모든 권한들을 지금부터 시작해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시계바늘을 1945년 8월 15일로 돌려놓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 우선 한국, 중국 등 피해국이 단결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다음은 미국의 태도가 변하게끔 유도하여야 한다. 냉전체제가 해소된 이상 미국은 동맹국이라는 입장을 고집하며 일본의 편을 들어주지 말아야 한다. 미국이 새로운 태도로 나설 수 있는 시대적, 역사적 장애는 거의 없어졌다.
118    헛된 일 댓글:  조회:7253  추천:3  2012-11-03
헛된 일 정인갑 인간은 당연 헛일을 하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제한된 인생을 효과적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사실은 저도 모르게 많은 헛일을 하게 된다. 아래의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필자가 군부대에서 병사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킬 때 경험한 일이다. 군사체육훈련 과목에 철봉 ‘턱걸이’가 있다. 10번이어야 합격인데 신입병졸들은 대부분 3번 정도밖에 못한다. 하루에 10분씩 20일에 200분 훈련하면 합격할 수 있다. 하루에 1시간씩 훈련해도 20일이 걸린다. 미련한 교관은 하루에 1시간씩 20일 훈련시켜 1,000분이란 헛된 일을 하게 된다. 중국은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까지 모두 50분 수업하고 10분 쉰다. 북경의 모 초등학교에서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학급의 여러 개 반에서 절반 A는 50분 상과하고 10분 쉬고, 절반 B는 40분 상과하고 20분 쉬었다. 그런데 학기말 시험에 두 부류 학생의 성적이 거의 같았다. 아마 상기 A는 매일 1시간 정도의 헛된 일을 하는 셈인 듯하다. 초등학생의 수업은 30분을 초과하면 효과가 나쁘며 40분을 초과하면 하나마나 하다는 설이 있다. 필자가 미국 LA의 친구 집에서 목격한 바는 초등학생은 오전만 등교한다. 숙제도 내주지 않으므로 책가방을 학교에 두고 집에 온다. 이렇게 가르친 미국학생이 한국이나 중국의 학생보다 수준이 낮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인생대하(大河)의 차원에서 낮을 것 없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본문을 쓰는 동기는 이 문제에 관해 한-중(한족) 두 국민의 기질을 비교해 보려는 데 있다. 중국인에 비해 한국인은 헛일을 많이 하는 편이다. 한국인들은 자녀를 배양함에 학령 전의 유아 때부터 영어학원에 끌고 다니고, 학교에서 지칠 대로 공부한 후 또 학원에 보내 공부시키며, 휴일도 쉬우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학생이 아마 한국 학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그중 많은 공부는 헛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해인가 필자는 한국으로부터 3월 말에 걸려온 이런 전화를 받았다: 모 정치 거물이 4월 말에 북경에 가는데 청화대학의 특강을 안배해 달라. 필자는 그 전화를 받고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4월 초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출장이 5월 말로 바뀌었으니 5월 말로 해 달라. 필자는 청화대학에 건성으로 전화 한 통 걸고는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5월 초에 또 전화가 결려왔다: 6월 말로 연기해 달라. 그 번에야 필자는 학교에 찾아가 대충 안배해 놓았다. 그런데 6월 초에 또 전화가 왔다: 갑자기 러시아로 출장 가니 청화대학의 특강을 취소해 달라. 필자는 왜 그 전화를 받고 시종 건성으로 대하였는가? 헛일을 잘 하는 한국인의 기질을 알기 때문이다. 그 거물이 ‘출장’, ‘특강’의 콧방아만 찧어도 보좌관과 비서는 신속히 움직인다. 만약 그런 기질도 모르고 일사불란하게 대하며 30킬로나 먼 청화대학으로 여러 번 오갔다면 수십 시간의 헛일, 1천여원의 택시비 낭비에 나중에 사기꾼이라는 누명을 썼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성격이 급하고 ‘빨리빨리’의 기질이므로 상쇄(相殺)되는 헛일을 많이 한다. 중국인은 성격이 느긋하며 ‘만만디’이므로 무슨 일에 봉착하면 ‘글쎄’, ‘좀 지켜보자’, ‘설마’하다보면 ‘그 일, 그만두어도 괜찮아’로 변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항상 바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듯하다.
117    닭을 죽여 원숭이한테 보여주다(殺鷄給猴看) 댓글:  조회:7262  추천:6  2012-10-08
지금 한국에서는 사형을 두고 논란이 많다. 한쪽에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 형벌의 목적은 교화, 정치적 악용의 가능성 등을 들며 사형을 극력 반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극악의 범죄자는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사형취소의 주장이 우세어서 1997년부터 지금까지 15년간에 사형을 집행한 사례가 한 건도 없다고 한다. 필자는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수천 년의 실천을 통하여 얻어졌으며 객관적 진리를 반영한 중국어 사자성어를 살펴보자. ‘殺人償命’, ‘以命抵命’, ‘以血還血’, ‘以血償血’, ‘以血洗血’, ‘以殺去殺’, ‘以殺止殺’, ‘懲一儆百’…. 모두 살인자는 목숨으로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형으로써 살인을 막자는, 사형으로 극악 자를 두렵게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은 수천 년간 법질서를 유지함에 사형이란 극치의 형벌이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전형적인 예로 진(秦)나라 말년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농민봉기, 이어 군벌의 혼전, 마지막 항우와 유방의 초한(楚漢)전쟁으로 말미암아 국가는 대혼란에 빠져 수없는 생령의 목숨을 앗아갔다. 유방이 승리한 후 내건 슬로건 약법삼장(約法三章) ‘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 중 첫째가 ‘살인자는 죽인다’이며 새로 건립한 한(漢)나라 법의 기초가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도 중국은 극악의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며 여기에는 유녀(幼女)를 강간한 자도 포함한다. 중국의 유녀 강간 자가 한국보다 현저하게 적은 원인이 여기에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은 후진국이니 사형을 없애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범죄를 막을 길이 없고 한국같이 선진국의 문턱에 닿았으며 인권을 중요시하는 나라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다’ 라며 필자를 반박하는 자가 있을 듯하다. 천만에 말씀이다. 미국은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며 지구촌에서 인권을 가장 수호하는 나라라고 자부한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사형을 폐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야말로 범죄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나라이다. 한국은 10만 명 중 97명이 수감되어 있는데 반해 미국은 성인의 1%, 즉 10만 명 중 751명이 수감되어 있다. 선진국이어서 인권을 중요시한다며 범죄자의 인권은 존중해주며 피해자의 인권은 무시할 수 있는가? 또한 교화를 한다는 것과 지은 죄는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별개이다. 수십 년간 한국은 모든 것을 미국과 같게 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옆에서 보는 우리의 눈에는 참새가 고니 걸음을 한다는 느낌이다. 이미 판정된 살인자인데도, 심지어 사람을 7~8명이나 죽인 자인데도 TV에 등장할 때는 인권을 존중한다며 그의 얼굴을 가려주는 등, 역겨워 못 보겠다. 사회질서는 엉망이고 사람들은 공포에 떠는데 경찰의 힘은 깨알만치 왜소하고 검찰의 힘만 잔뜩 키워놓고 있다. 만약 한국이 계속 이 길로 나아가면 머지 않는 앞날에 미국처럼 범죄의 나라로 될 각오를 하여야 한다. 중국어 사자성어에 ‘殺鷄儆猴’란 말이 있으며 그것을 풀어쓴 ‘殺鷄給猴看’이라는 격언이 있다.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위협을 준다는 말이다. 정말 위협을 줄 수 있는지, 그래서 까불던 원숭이가 점잖아지는지, 아니면 일종의 비유에 불과한지는 모를 일이다. 단 원숭이마저 죽이면 무서워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하는 뜻에서 역시 철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116    ‘호적에 의한 국적 취득’ 질의 댓글:  조회:14412  추천:2  2012-08-26
재외동포가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은 한국에 호적이 있나이며 한국국적 취득자 대부분은 한국에 호적이 있는 자 및 그들의 후손이다. 필자는 한국의 ‘호적에 의한 국적취득’ 정책은 잘못된 것이라 본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손춘일(孫春日) 소장의 저서 (북경 中华书局 출판, 2008년)에 따르면 조선족의 중국이민은 대체로 5개 단계로 나뉜다. 1단계, 1860년대~1910년, 생활이민(罹災难民의 이민). 2단계, 1911~1918년, 파산이민(일한합병 후 파산된 농민의 이민). 3단계, 1919~1931년, 독립이민(중국 동북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한 이민). 4단계, 1932~1936년, 자유이민(자발적으로 삶을 개척해 보려는 이민). 5단계, 1937~1945년, 집단이민(동북에서 수전을 개척하려 일본인이 조직한 이민). 1~2단계의 이민은 독립군에게 공량미 및 경비를 바치며 살았으므로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5단계 이민은 일본인이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별로 하지 않았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령 64호’의 이름으로 ‘조선호적령’을 반포하였다. 장기간의 조사와 준비를 거쳐 1929~1931년 조선반도 전역의 거주민에 대한 호적등록을 완성하였다. 상기 1~3단계의 이민은 대부분 한국에 호적이 없고 4~5단계의 이민은 거의 다 호적이 있다. 그때의 호적은 대일본제국 산하(지방정부) 조선총독부의 호적이므로 일본호적이다. 한국에 호적이 있다는 말은 일본신민(臣民)이 되었던 사람이고 호적이 없는 사람은 일본신민이 되기 싫거나, 심지어 일본침략자를 반대하러 중국으로 일찍 떠난 사람이다. 전자는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고, 후자는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 맞는 정책인가? 1937년 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을 계기로 중일전면전쟁이 폭발하였다. 일본은 중국으로 대량 증병하여 100만 관동군이 되었다. 또한 동북에 수전을 풀어 관동군의 쌀밥도 해결하고 일본 국내 양식부족도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 여기에 ‘공헌한’자가 바로 1937~45년의 5단계 집단이민이다. 일본과 싸운 독립이민은 국적취득자격이 없고 일본인의 보호를 받으며 벼농사를 지어 일본군을 쌀밥으로 먹여 살린 집단이민은 한국국적 취득자격이 있다. 얼마나 황당한가? 필자는 5단계이민의 대상자를 비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중국동포의 대부분이 북조선사람이며 남한에 호적이 있을 리 만무하며 당연 국적취득자격이 없다. ‘호적에 의한 국적취득’ 정책은 분단을 재외동포까지 확대시켰으며 분단의 력사도 1945년부터 1929년까지 끌어올려 놓았다. 이런 정책을 내놓고도 망신스럽지 않은가? 해외로 늦게 이민 간 사람일수록 한국에 가까운 친척이 있을 가능성이 많으며 국적을 취득할 자격이 더 있을 수도 있으며 이런 와중에 호적 유무를 참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적의 유무를 공식으로 정책화하면 36년의 식민통지를 합리화하거나 다른 일련의 황당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관계당국에서 재검토하기 바란다.
115    <"9.3"과 중국조선족> 재론 댓글:  조회:7766  추천:11  2012-08-19
필자의 은 가장 기초적인 상식을 운운하였는데 파문을 일으킬줄 몰랐다. 부득불 본문장을 써서 필자의 견해를 보충한다. 익명의 모욕은 저질인간으로 취급한다. 명절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성탄절, 구얼방절(古尔邦节,Qur'an) 같은 명절은 종교적명절이므로 해당종교의 모든 신도들의 명절이다. 泼水节와 那达慕는 타이족과 몽고족의 명절이므로 시쐉반나와 내몽고는 물론, 기타지역도의 타이족과 몽고족도 모두 그 명절을 쇤다. 국가의 규정에 ‘9.3’은 중국조선족명절도, 연변조선족명절도 아닌, 연변의 지역명절이다. 연변에 사는 6가지(?) 민족의 250만 인구 모두에게 해당되는 명절이다. 이는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필자는 이런 주장을 할 추호의 자격도 없음),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법률담당 사장(司长)의 해석이다. 이 분야 최고권위의 말도 믿지 않을것인가? 1980년 북경시에서 처음 조선족운동회를 할 때 필자는 조선족명절 ‘9.3’에 하여야 한다고 고집하며 民委의 령도와 다투다가 끝내 지고 말았다. “‘9.3’은 조선족명절이 아니라 연변의 지역명절이다”라는 말 한방에 끝나버렸다. 만약 ‘9.3’에 료녕성의 모 조선족학교가 하루 쉬었다고 가정해보자. 상급 추궁 왈: “왜 쉬었나?” 교장 답: “조선족명절에 하루 쉰것이 잘못됐나?” 상급 훈계 왈: “‘9.3’은 조선족명절이 아니라 연변의 지역명절이다.” 이 한방에 그 교장은 말문 막힌다. 만약 ‘9.3’에 연변의 모 한족학교에서 상과하였다고 가정하자. 상급 추궁 왈: “왜 상과했나?” 교장 답: “조선족명절에 한족도 덩달아 쉬려하나 우리 학교는 안 쉬었다.” 상급 훈계 왈: “‘9.3’은 조선족명절이 아니라 연변의 지역명절이다. 우리 한족도 포함된다.” 이 한방에 그 교장은 고개 숙이고 만다. 1980년의 필자, 앞에 가설한 료녕성 모 조선족교장, 연변 모 한족교장의 주장은 모두 법에 위배된다(不合法). ‘9.3’이 조선족명절이라는, 법제 의식이 모호한데서 비롯된것이겠다. “조선족명절이면 어쩌고, 다민족명절이면 어쩌고 당신은 왜 이제 와서 쓸데없는 군소리를 하느냐?” 라며 필자를 질책하는 사람이 있다. 쓸데없는 군소리가 아니다. 필자는 2008년 8월, 흑룡강성 동강시(同江市) 허저족(赫哲族) 자치향—가진구향(街津口乡)에 가서 사회조사를 한적이 있다. 자치향과 동강시의 한족간부들이 자치향을 위해 허저족보다 더 열심히 뛰고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위해 뛰는자는 거의 조선족뿐인데 여기는 한족이 더 열심히 뛰고 있으니 리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 답: “소수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우리 대한족의 당연한 의무이다.” 필자 문: “다른 리유는 없는가?” 답: “이자 말한것은 공(公)적인것이고 사(私)적으로 말하면 우리 한족도 같이 리익을 본다. 우리 같은 편벽한 동강시가 성이나 중앙에 가서 손을 내밀만한 여건이 전혀 없다. 단 허저족자치향이라는 이름을 걸면 달라진다. 동강시가 그동안 발전할 수 있은 것은 많이는 허저족자치향이라는 카드를 활용한데 있다.” 필자의 전우(战友) 수십명이 그곳의 령도직에 있으므로 이런 속심말을 들을 수 있었다. 허저족뿐만이 아니다. 내몽고, 신강, 운남 등 소수민족 지역을 위하여 북경에 온 간부들을 보면 한족간부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런데 연변은 조선족들만 뛴다. 기념비 모금도 조선족에게서만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다. 여러 민족에게서 다 모금하여야 다민족의 명절이라는 법적 규정에 부합된다. 필자는 30여년간 북경에 살며 도움받으러 찾아온 자치주 조선족간부들을 많이 보았다. 한족간부들은 왜 오지 않는가? 만약 연변이나 길림성의 한족간부들이 나서면 조남기나 리덕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거나 더 능력있는 사람과 인맥이 닿을지도 모른다. 이젠 조남기와 리덕수가 은퇴하였으니 누구를 찾아갈 생각인가? 한족은 안 뛰고 조선족만 뛰는 리유가 무엇인가?  a,‘9.3’은 조선족명절이라는 오해 때문에.b, 조선족이 한족보다 잘났기 때문에.c, 한족에게 능력발휘의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d, 조선족이 열심히 뛰고 있으니 우리 한족들은 굿이나 보다가 떡이나 먹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4가지 중에 있으리라 추측해 본다. 자치주는 승승장구로 발전하다가 1990년대부터는 내리막길을 걷고있다. 수십년간 연변 외의 조선족들은 정치, 경제, 사회의 면에서는 연변과 별 관계가 없었으나 문화와 교육의 면에서는 연변의 도움을 받아왔다. 이제는 그것도 한국의 영향에 밀리고 말았다. ‘9.3’ 60주년을 맞이하며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비를 세우고 찬양하는 것도 좋다. ‘9.3’ 그날만은 신나게 놀아도 좋다. 그러나 그날을 빼고는 자치주 성립 60년간 존재하는 문제점은 무엇이며, 지금 직면한 위기의 객관 조건, 주관 원인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잘하여 자치주의 추락을 모면할 것인가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야 한다. 지금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생사존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위기의식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비나 세우고 찬양만하며 마음이 부풀어있을 때가 아니다. 연변조선족들이 그사이 자치주의 터전을 지키느라 수고한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개별적 연변사람은 夜郎自大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연변은 지금 번영창성하고 있고, 중국조선족의 중심이며, 중국조선족을 리드해나가고, 연변의 주장은 다 정확하며, 밖의 사람의 견해는 다 유치원 수준이고…. "9.3"을 중국조선족의 명절로 보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책임자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등등은 모두 이러한 자대망상증에서 기인된것이다. 이것 역시 연변을 추락시키는 원인중의 하나겠다. 눈을 크게 뜨고 13억을 바라보고 전세계를 바라보기 바란다. 연변밖의 말도 경청하기 바란다. ‘当局者迷, 旁观者清’의 도리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114    ‘9·3’과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7658  추천:8  2012-08-16
‘9·3’과 중국조선족 정인갑 ‘9·3’(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일) 60주년이 다가오며 “‘9·3’ 명절은 조선족에게만 속하는 유일한 명절이다”라며 ‘9·3’과 조선족을 한데 묶는데 이는 큰 오해이다. 1. 필자는 대학생시절 북경시조선족대학생활동을 조직하느라 중앙민족대학에 자주 드나들며 다른 민족은 국가에서 명절을 쇠어주지만 조선족은 명절이 없음을 알았다. 하여 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써 “북경시에서 ‘9·3’을 쇠게끔 해 달라, 좋기는 그날 조선족운동회를 조직해 달라”는 요구를 강력히 제기하였다. 1980년 상반년, 스웨덴의 한인교수 조승복이 북경대학을 방문하였으며 많은 조선족유지인사가 모였다. 그번 모임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싸쿵랴우(萨空廖)가 “좋은 소식을 알린다. 금년 ‘9·3’절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거행하기로 결정지었다”라고 선포하였다. 이때 민족사무위원회 다른 한 법률담당 조선족 H사장(司長)이 즉각 반발하였다: “‘9·3’은 연변의 지역명절이지 조선족명절이 아니다. 북경에서 ‘9·3’을 쇠는것은 불법이다.”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여 그번 운동회가 무산될 번하다가 겨우 치르기는 하였으나 부득불 9월 3일을 피해 9월 14일에 거행하였으며 이름도 ‘북경시민족운동회’라 하며 불법을 모면하였다. 30여년간에 북경시조선족운동회를 10여 차례나 치렀으나 9월 3일이나 그날과 린접된 날에 치른적이 한번도 없다. 2. ‘9·3’은 200만 조선족과 무관한 명절이다. 연변 여러 민족의 공동명절이다. 관계된다면 80만(지금은 50만?) 연변조선족과만 관계된다. ‘자치주성립일이니까 연변조선족의 명절로 볼수도 있지 않는가?’라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만약 연변의 인구 100%가 조선족이면 자치주를 설립하지 않아도 자치주이다. 다른 민족이 있기 때문에 자치주를 설립한 것이며 그래서 다민족공동명절이다. 지금 조선족이 연변인구의 1/3가량 차지한다고 할 때 더욱 조선족명절이라고 말할 수 없다. 3. 만약 ‘9·3’이 중국조선족명절이 아니라면 ‘노래비’요 ‘9·3비’요 하는데 범조선족을 거들면 적합하지 않다. 아니 불법이다. ‘아리랑’, ‘장백산’, ‘두만강’ 등은 범민족이 동의만하면 조선족 브랜드가 가능하지만, ‘9·3’을 조선족 브랜드로 하면 법적 제재를 받을 소지가 있다. 국가 규정상 연변지역 브랜드를 200만 조선족 브랜드로 확장시켰으니 말이다. 우리민족의 브랜드가 될 수 없다면 구태여 연변지역을 위한 ‘노래비’요, ‘9·3비’요 하는 것을 세우는것은 별 의미가 없다. 길림, 장춘, 할빈…등 도시에 이런 상징적 건물이 있는가? 이런 거금을 들인 이미지공정(形象工程)은 광대한 인민군중이 가장 싫어하는 작태이다. 4. 조선족 간부요, 기자요, 시인이요 하는 분들이 민족애의 열정에 불타 ‘노래비’요, ‘9·3비’요 하며 우리민족의 브랜드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권고하고 싶은것은 진정 우리민족을 위해서라면 이번 ‘9·3’ 60주년의 좋은 기회에 중국조선족명절을 만들기 바란다. 연변지역명절도, 연변조선족명절도 아닌 200만 범조선족의 명절 말이다. 그러면 중앙민족대학의 조선족학생들도 국가의 대접을 받아 한끼(한잔) 잘 얻어먹고 주눅 없이 붉으스레한 얼굴에 배를 삐죽이 내밀고 팔자걸음을 하며 캠퍼스에서 활개 칠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전 중국의 조선족이 그날을 공휴일로 하루 쉬며 자기 나름대로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113    탈북자 북송과 중국의 인권문제 댓글:  조회:6796  추천:2  2012-08-09
최근 탈북자 북송문제를 둘러싸고 중국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중국의 탈북자 북송문제를 너무 견책할 수 없고(不可厚非), 또한 중국에 인권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탈북자문제로 중국의 인권문제를 너무 비하하면 잘못이라고 본다. 필자는 조선의 친척을 초청하고자 북경시 공안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마침 필자의 학생이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의 알선으로 해당 부문의 책임자와 담화하는 기회를 가졌다. 담화 중 중국정부가 탈북자를 북송한다는 말이 나왔다. 필자가 “북송하면 죽이는데 이런 비인도적 행위를 감행하여서 되겠느냐?”고 질책하니 그 책임자는 “두 나라간의 협정이 이러한데 우린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필자가 북송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한 바, 탈북자를 되도록 붙잡지 마는 것, 붙잡았지만 빠져나갈 수 있는 방에 가두어놓아 탈출하게끔 방임하는 것 등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교수님 대단히 총명하군! 사실 북송된 자는 개별인 뿐이다”고 하며 입을 다물었다. 알고 보니 북송된 자는 탈북자의 백분의 1~3정도밖에 안 된다. 중국에는 ‘인민전쟁’이라는 것이 있다.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발동한다는 뜻인데 만약 중국정부가 ‘인민전쟁’의 방법을 쓰면 탈북자의 거의 전부를 쉽게 체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 정부가 ‘탈북자 아무개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데 붙잡아 보내 달라’라는 상세한 정보를 제시하면 체포해 북송하여야 한다. 또한 잇살에 끼워있던 밥알이 요지에 쑤셔나오 듯 재수 없이 붙잡히는 자도 있다. 붙잡힌 자도 특수 케이스로 풀려나오는 자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중국정부의 탈북자 북송은 양국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최저 한선의 일일 뿐 인도주의와 인권문제 상의 기본적인 양심은 지켰다고 보아야 하겠다. 탈북자문제에는 이 외에도 다른 복잡한 문제가 많다. 중-조 변경지역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굶주림에 못 이겨 두만강을 건너온 북한걸식자를 조선족 마을에서 며칠간 잘 먹여주고 쌀도 푸짐히 지워 보냈더니 훗날 그자식이 장정 여럿을 데리고 그 마을을 기습하고 양식과 기타 물품을 털어가곤 한다. 중국 인신매매 자들이 탈북자 여성을 팔아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탈북자 중에는 북한 공작원(스파이)도 꾀나 섞여있다고 한다.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 뛰어든 탈북자 중 사망 선에서 허덕이는 자는 별로 없고 한국의 인권, 시민, 종교 단체와 단합이 되어 호의호식하던 자, 예쁘장한 젊은 여자의 경우 돈 있는 한국 사장과 불륜관계를 맺고 흥정만정 지내던 자 등이 많다고 한다. 즉 진정한 난민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자는 적고 그렇지 않은 자가 오히려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선족의 신세를 그렇게 많이 지고도 조사 때 조선족을 악한 인간으로 비하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래야 한국에 가야만 살 길이라는 이유가 서기 때문이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중국정부가 탈북자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오는 족족 한국으로 보내주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다. 수백만의 탈북자가 밀려올 수도 있고, 인신매매가 기승을 부리고, 사회치안은 엉망이고, 중조관계에 극도의 악영향을 끼치고, 한국사회에도 골칫거리이고…  
112    해외동포들은 가승을 남겨놓자 댓글:  조회:6245  추천:6  2012-08-06
[삼강만평(三江漫評) ②] 해외동포들은 가승을 남겨놓자 정인갑 중국역사상 서역의 72개 나라를 정복한 당나라의 탁월한 장군 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인이며 천하를 진감한 명나라 요동좌도독 이성량(李成梁)은 조선인이다. 지금 고선지의 후손이 10만 명쯤은 될 것이며 이성량의 후손도 천 명이 넘을 듯하다. 다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족보라도 남겼다면 일일이 찾을 수 있는데 말이다.지금 중국의 사이트에 이런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중국조선족은 일본 침략자의 앞잡이이며 일본놈보다 더 악독한 인간이다. 2차 대전이 후 갈데없어 중국에 머물러 있다.’중국조선족은 전민족적으로 반일하였으며 무수히 많은 항일 열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억이 막힌다. 족보라도 있으면 이런 터무니없는 무함은 당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필자의 처가 학부모회의 때 한국말을 하였다고 저녁에 아들이 대노했다: "반 학생들이 ‘너의 엄마는 주절주절 새소리(鳥語)를 하더라’라며 놀려줄 것이다. 앞으로 조선말을 하지 말 것, 조선말 하려면 학교에 나타나지 말 것!" 아마 손자 세대쯤 가면 아예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고치고 살 듯하다. 필자의 어느 후손이 출세하여 유명인사가 되어 사람들이 “당신 외국혈통이라던데 혹시 조상이 일본인이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 “아마 일본인이 맞을 듯하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필자의 조부는 반일 독립군에게 공량미를 바치며 살았고 처조부는 독립군으로서 일본군에게 잡혀 교형을 당했다. 구천 하에서 그이들이 이 말을 들으면 기가 막힐 것이다. 족보라도 남겼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10년 전 중국과학원 이춘성(李春城) 교수가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족보를 필자에게 주며 가승(家乘: 家史)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춘성의 형 이봉덕은 미국 로스-안젤스에 살므로 이춘성의 자식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간지 오래되었다. 필자는 대견하게 보았으며 기꺼이 가승 100부를 만들어 드렸다. 그 가승의 맺는말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들이 한일합방의 화에 쫓겨 조국을 떠난지 어언 100년이 돼온다. 손자 세대부터는 미국인 행세를 할 듯하다. 인생을 하직하기 전 이 일을 생각하면 허전한 마음과 슬픈 심정을 금하지 못할 때도 많다…‘방랑 자체가 인류의 본성이며 그저 나는 지구촌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그뿐이 아닌가 라며 자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에 살든, 어느 나라의 국민이든 우리 가문의 원 뿌리는 한국이고 이 몸에 흐르는 피의 원천은 한민족이라는 것만은 후손들이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본 가승을 만들어 남기는 바이다. 후손들이 대대로 이 가승을 간직하며 물려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실로 눈물겨운 말이다. 작년이 우리 겨레가 세계로 흩어진 원인이 되는 한일합방 100주년이다. 만약 우리 세대 때 족보(가승)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의 후손은 고선지나 이성량의 후손처럼 된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필자는 이미 이라는 원고를 작성해 놓고(學心은 필자의 조부이다) 북한 6촌 형님이 자료를 가지고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700만 해외 동포들이 다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111    중국 조선족 공동체 댓글:  조회:5755  추천:1  2012-08-01
[삼강만평(三江漫評) ①] 중국 조선족 공동체 정인갑 세계적으로 해외이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를 랭크하면 중국인, 인도인, 아일랜드인, 유태인, 이탈리아인, 한국인이라고 한다. 모두 이민 2세부터, 늦어서 3세부터 그 나라 사람에게 동화되어버린다. 유태인도 종교만 남고 나머지는 동화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한 번은 필자가 모 재미동포와 그가 숙박하고 있는 호텔방에서 담배를 피우며 상담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18살 나는 딸(2세)이 안방으로부터 나와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때 필자는 너무 당황하였다. 재미동포의 경우 2세면 우리말도 모르고 기질도 우리민족이 아니다. 일본도 조총련계를 제외하면 재미동포와 거의 비슷하다. 재구소련 동포의 경우 3세에 거의 동화돼버렸다. 유독 중국조선족은 이민 6세가 지났지만 동화되지 않고 민족특징을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필자의 아들(4세)이 한국에서 유학할 때 필자의 친구와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아들이 담배를 피우니 “너 아버지 앞에서 담배 피우냐?”라고 묻자 아들이 “무슨 말씀입니까? 조선족이 어떻게 아버지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는 정말 배달의 후손에 손색이 없구나”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즉 중국조선족은 감정, 정서에까지 뉘앙스마저 우리 겨레에 손색없다. 이뿐이 아니다. 조선족 집거구역 동북에서 수 천 킬로 떨어진 상해의 조선족 A와 서안의 조선족 B가 티베트에서 만났다고 하자. 둘이 술 한 잔 하며 말해 보면 A의 부친이 B의 선생에게서 배운 적이 있소, B의 조부가 A의 조부와 동창이요 하며 이내 인연상 연결된다. 둬 다리만 건너면 192만 조선족이 다 이런 연결이 가능하다. 언어, 풍속, 습관, 문화, 예술, 감정, 정서, 인연…, 게다가 조선족 자치주(1개), 자치현(1개), 자치향(6개), 자치마을(천여개), 대학(1개), 초・중・고교(근 천개, 1990년대까지), 방송국(1개), 신문(4개), 출판사(4개), 예술단(10개 정도), 이 모든 요소를 통틀어 감안하여 필자는 ‘중국조선족공동체’라는 용어를 쓰곤 한다. 중국조선족공동체는 중국이라는 나라 안의 ‘준(准) 나라’이고 중국 사회 안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사회이다. 지금 이 공동체는 점점 해체되고 있으며 아마 2060년대에 가면 거의 해체될 듯하다. 세계 이민사에서 이처럼 이민 200년간 자기의 민족공동체를 유지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 실로 인류역사상의 기적이다. 최근 10여 년 간 중국조선족을 연구하는 해외의 많은 석사, 박사 생들이 필자를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중국조선족공동체’라는 내용으로 학위논문을 쓸 것을 권고하곤 하였다. 그들은 꼭 쓰겠다고 철석같이 대답하고는 감감 무소식이다. 우리겨레의 해외이민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 장기 거주하는 한국인만 하여도 40만 명이 넘으며 불원간에 100만명을 바라보게 된다. 국경의 개념은 점점 퇴색되고 문화가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이 시대 중국조선족공동체의 산생, 발전 및 소망(消亡)에 대한 연구는 한낱 중요한 테마라고 보여 진다. 편집자주: 본문은 한국 코리안신문에 련재중  
110    재중국 한국유학생의 매음 댓글:  조회:9563  추천:2  2012-07-31
재중국 한국유학생의 매음 정인갑 한국인이 북경에서 꾸리는 인터넷신문 ‘onbao.com’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의 매음 현상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사실은 지금이 아니라 약 4년 전에 필자는 이미 이런 일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 상해에서 한국 남대생들이 매음(賣陽?)한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사실 ‘남남북녀’이며, 한국드라마 중 남배우의 미모와 기질에 대한 중국여인들의 호감이 더욱 강렬하다. 마치 일본 여인들이 배용준에게 미치는 것처럼 말이다. 상해의 30~40대 싱글 여기업인들이 한국 남대생과 재미를 본 후 친지에게 자랑꺼리로 이야기 한다. 필자는 민족자존심이 대단히 상한 심정이며 ‘한국 남대생이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박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매음이지만 어떤 로맨틱한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며 자기 위안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onbao’에서 말하는 지금의 현상은 ‘로맨틱’을 운운하며 스쳐버릴 일이 아니다. 한국 여대생의 매음이 북경에도 개별 인이 아니다니 말이다. 그 원인을 간단히 중국의 물가상승과 환률 절상, 즉 경제적 원인으로 보았지만 필자는 이렇게 간단하게 보지 않는다. 1인당 GDP가 2만 달러인 한국인이 5천 달러도 안 되는 가난한 중국에서, 그것도 대학생들이 매음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근 중국의 물가 인상과 웬화 절상 때문에 중국유학 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래도 선진국과 한국에 비해 등록금이나 생활비용이 많이 싼 편이다. 캠퍼스 안에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돈이 모자라지 않겠지만 술 먹고, 연애하며 노래방에 드나들면(한국 유학생에게 이런 현상은 심함) 집에서 준 돈이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한국은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으며 중국 유학생 대부분은 한국에서 말단대학도 붙지 못한 나머지 20%되는 고졸들이다. 일반적으로 청소년학생의 도덕성 고하(高下)는 그의 학습열정 및 학습성적의 고하와 정비례된다. 말단대학도 붙지 못한 20% 고졸이 중국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가 얼마 되겠는가? 필자의 경험으로는 한국에서 대졸한 대학원생, 한국에서 대학에 진학한 후 중국에 간 학과생, 그리고 병역필하고 간 30세 좌우의 학생들은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지만 상기 10대 후반의 고졸 대부분은 별로이다. 선진국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43%이고 다른 선진국들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외국유학을 합치면 거의 100%이지만 취업률은 20%도 안 된다. 재중국 한국유학생의 취업률은 2%도 되나마나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래도 노후대책의 자금을 탕진하며, 심지어 가문망신도 감내하며 중국에 유학 보내야 하는가? 학부모들이 심사숙고할 문제이다. 지금 재중국 외국유학생의 근 50%가 한국인이다(다른 50%는 나머지 200개 나라의 합계). 정상인가? 그사이 재중국 한국 유학생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차치할 수 있지만 이제는 매음까지 마다하며 나라망신, 민족망신까지 자아내는데 강 건너 불 보 듯해서는 안된다. 국가적 차원에서 무슨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개별적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성적도 괜찮은 학생의 생활고를 국가에서 돌보아 주어야 하고 더욱이 중국유학생에 대한 도덕적 교육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109    없는 자가 너덜대기는? 댓글:  조회:6615  추천:12  2012-07-24
없는 자가 너덜대기는? 정인갑   ‘穷哆嗦’란 말이 있다. 북경 음은 ‘츙둬숴’이고 동북 음은 ‘츙떠서’다. ‘없는 자가 너덜대다’이다. 우리겨레는 한족(漢族)에 비해 너덜대기를 좋아하며 그러므로 돈이 마를 수밖에 없다. 필자의 고향은 조선족1/4, 한족3/4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조선족은 논농사, 한족은 밭농사, 그 소출은 논은 무당(200평) 500kg, 밭은 무당 200~300kg이다. 벼는 kg당 0.3원(元)이고 밭곡식은 kg당 평균 0.16원이다(1980년대). 조선족이 한족보다 퍽 잘 살아야 맞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족은 벽돌기와집에서 살고 조선족은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산다. 무슨 군일(결혼 등)이 생기면 한족은 100~500원씩 척척 내는데 조선족은 10원이 없어서 벌벌 떤다. 조선족은 평시에 너덜대며 다 써버렸고 한족은 웬만한 일에는 너덜대지 않다가 요긴한 대목에만 쓴다. 조선족은 아침, 점심, 저녁에 다 술이며 결혼, 생일 등 잔치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으며 놀이도 많고 내는 턱도 많다. 마을에 한족 양 과부가 사는데 찌들게 가난했다. 그런데 아들이 장가갈 때 삼간 벽돌기와집을 짓지 않겠는가! “어디서 돈 생겼나?” 과부 왈: “돈이 80전 있으면 20전 보태 지갑으로부터 궤안으로 옮겨 넣고, 8원이 생기면 2원 보태 궤안으로부터 저축소로 가져가기를 25년간 하였더니 삼간 벽돌기와집이 생기더라.” 북경인은 대부분 각종 잔치를 안한다. 이따금 이런 일을 목격한다. 직장 동료가 각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시탕, 시옌(喜糖, 喜煙)!”하며 사탕 열 아문 알과 담배 한 갑 놓고 나간다. “언제 결혼했나?” “서너 달 됐어.” “축하!” 이것으로 끝. 단 신랑, 신부 불알친구 열 아문, 두 집 사돈 열 아문이 모여 밥 한 끼 먹으며 그때 내는 부조는 보통 2천~1만 원이다. 필자는 북경의 직장에서 25년 근무하며 같은 편집실 동료의 결혼 두 차례에 선물용으로 52원 쓴 것이 전부다. 만약 연길에 살았다면 월당 군일에 두 번 참가했어도 25년에 600번, 책 몇 권 쓸 시간이 낭비되었을 것이며, 한 번에 200원씩 부조했어도 12만 원, 또한 술 때문에 간병에 걸려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도 너덜대기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 필자가 사는 인천 모 3거리에 며칠에 한번씩 ‘☓☓축제’라는 현수막이 바뀐다. 한국에 대형 축제가 1년에 1,200여 번이라고 한다. 인구가 한국과 비슷한 중국 요녕성은 대형축제가 1년에 1백번도 되나마나한데 말이다. 축제 한 번에 1~5억 원을 날린다. 축제에 몇 번 가 봤는데 너덜댈 뿐 별 효과가 없는 듯. 혹자는 말한다: ‘사람이 살며 너덜댈 재미마저 없으면 무슨 멋인가?’ 필자도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한족 속에 끼워 사니 ‘너덜댈’ 기회가 적어 단조롭다. 그러나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필자의 한족 동료들이 은퇴한 후에 부부동반으로 ‘작년은 유럽이다, 금년은 구 쏘련이다, 명년은 호주다, 후년은 미국·캐나다이다’라고 관광을 하며 유람기도 출판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고향나들이 한번 하려고 해도 경제력이 모자란다. 이제는 우리 겨레도 생활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는 모여서 술 몇 잔, 노래 몇 수, 춤 몇 번의 식으로 ‘너덜대’는 삶을 사는 것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수준을 좀 더 고상하고 뜻 깊은 데로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즉 재테크와 취미추구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108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지? 댓글:  조회:6823  추천:17  2012-06-22
 필자는 중국어 사자성어(成語)를 꽤나 선호한다. 써먹기도 좋고, 생활 중 부딪히는 현상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자성어도 있다. 이를테면 ‘기인우천(杞人憂天)’같은 것이다. 그래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2002년 말~2003년 상반기 중국에 난데없는 전염병 ‘사스’가 유행되었다. 죽는 사람이 생기고, 매일 사스에 걸렸거나 사스로 의심되는 환자의 숫자를 방송하고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으며 나중에는 학교는 방학, 직장단위도 마비상태에 처했다. 필자도 출근 금지를 당하여 두문불출 하여야 했다. 한 친구는 한국에 출장 가다가 한국 공항에서 쫓겨 돌아왔다. 필자의 조카가 고향에서 결혼잔치를 하는데 타지방사람, 특히 북경 등 사스가 유행되는 지역 사람을 1개월간 잡아 가두고 격리시킨다고 하므로 갈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이 빨리 어느 식당으로 와서 같이 식사하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미친놈아, 죽으려 환장했냐? 사스가 무서워 못가겠다.” “사스에 걸리면 내가 책임질 터이니 빨리 와!” “네가 어떻게 책임진다는 거야?” 한참 옥신각신 하였지만 호기심이 강한 필자는 ‘무슨 말을 하나 보자’라는 생각에 찾아갔더니 그의 말을 이러하였다.“지금까지 사스에 걸려 죽은 자가 같은 기간에 교통사고로 죽은 자의 1/100도 안 된다. 밖에 나서면 차에 치워죽을 가능성이 사스에 걸려 죽을 가능성보다 100배 이상 많다. 누구나 평생 문밖을 나가지 말아야 하며 인간은 집에 엎드려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杞人憂天이다. 나는 맘대로 싸다니지만 괜찮지 않아!”맞는 말이다.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인간이 확실히 있으며 나도 그중의 하나구나! 나는 속이 확 열리는 감이었다. 이튿날부터 나는 마음대로 활개치고 돌아다니며 볼 장 다 보았다. 북경도서관에 가서 찾을 서류를 찾으며 큼직한 논문도 수월히 완성하였다. 평시 같으면 도서관에 사람이 붐비어 효율이 낮았지만 그때는 텅 빈 빌딩에 돌아다니며 많은 자료를 짧은 시간 내에 섭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한국인들은 광우병에 겁먹고 있는데 역시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격이다. 1996년 광우병이 인지 되서부터 지금까지 17년간 미국 쇠고기를 먹은 117개 나라의 수십억 인구 중 광우병이 단 한 사람도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 등은 쇠고기를 밥처럼 많이 먹고 한국은 적게 먹으며 한국의 세관 검역은 아주 세심하며 까다롭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인이 미국 쇠고기로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교통사고로 죽은 확률의 만분의 일도 안 될 듯하다. 한국에서 미국 쇠고기로 광우병이 100년, 아니 천 년에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이다.2008년 10여 만, 수십만, 심지어 백 만 명이 참가한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가 여러 번 진행되었는데 거기에 낭비된 시간을 누계하면 수백 명의 수명이 빼앗긴 셈이다. 처넣은 초 값만 따져도 꽤나 많은 극빈층을 구제하고도 남을 것이다. 사자성구 ‘기인우천(杞人憂天)’, 이 인간 사회의 진리를 표현한 말을 한국인들이 반복 음미해 보았으면 한다.
107    우리겨레 무형문화재와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8834  추천:37  2012-06-08
2009년 10월 무용 농악무가 중국문화의 신분으로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고, 특히 2011년 6월 가곡 아리랑이 중국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등록된 후 한국국민의 반발이 심했다. ‘중국이 한민족의 문화를 빼앗아서 자기의 문화로 만드는 것은 일본이 독도를 빼앗아서 자기의 영토로 만들려는 것과 본질상 다를 바 없다’고까지 한 사람이 있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그가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등록된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도 있는가?’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침 필자의 후배 친구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중국소수민족담당위원 직에 있으므로 알아보았더니 걸핏 보기와 다르다. 농악무를 유네스코에 신청하는 서류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농악무는 조선반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로부터 이주하여 올 때 해당 문화를 지니고 왔으며 100여 년간 이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왔다. 전승인(傳承人)은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 노인농악무예술단 김명춘(金明春)이다.’ 중국 각 급의 문화재로 등록된 서류내역도 이와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그러니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우리겨레 문화의 변두리에 있는 조선족이 해당 문화의 주인행세를 하니 좀 외람되었다는 감이다. 또 7,000만 겨레의 공동재산을 내가 써 먹으니 좀 꺼림칙하다. 중국 8개 소수민족이 모두 같은 민족의 주변 국가와 이런 상황이 존재한다. 앞으로 이런 국가들과 공동 신청하려 한다지만 조선족의 경우 남북한이 자존심상 공동신청을 거부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신청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각 민족은 저마다 자기의 문화재를 등록하느라 혈안이 돼 있다. 문화가 가장 발전한 조선족이 남북한의 눈치를 보며 신청하지 못하다가 문화 불모지라는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등록되면 경비가 조달된다. 또한 관광객들이 찾아오므로 짭짤한 수입의 재미도 본다고 한다. 중국조선족도 이런 경비를 조달받고 관광수입도 챙겨야 할 것이 아닌가? 부자동네인 한국이 중국조선족의 문화 사업을 발전시키라고 경비상 얼마 도와 줬길래 이런 신청을 막을 자격이 있겠는가? 문제는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인구의 천분의 1.5밖에 안 되므로 워낙 세련된 조선족문화의 모든 것이 중국인의 눈에 희귀하게 보여 진다. 그러므로 웬만한 것도 신청하면 등록된다. 큰 농악무, 아리랑으로부터 작은 아기 돌잔치, 퉁소, 짚신까지 말이다. 이미 등록된 것이 유네스코 급 1개, 국가 급 14개, 성 급 25개, 주・시・현 급13개, 합계 53개가 되며 불원간에 100개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 겨레의 모든 것이 중국의 문화재로 등록되기 마련이다.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후 문헌을 뒤적이며 ‘우리 겨레의 문화는 조선반도에서는 벌써 없어졌고 다만 중국조선족이 국가민족정책의 혜택을 입어 계승하였다’라고 왜곡될 우려가 있다. 그러면 중국이 우리겨레 문화의 종주국(宗主國)으로 되는 셈이겠다. 심사숙고할 일이다.
106    강릉 단오제와 중국 댓글:  조회:7080  추천:23  2012-05-27
2005년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으로 규정된 후 중국인들의 반발이 거세었다. 중국의 단오절을 표절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중화서국(中華書局) 영도가 필자에게 원고 한 편을 주며 잡지에 실리려는데 쓸 만한가 보아 달라고 하였다. 중국의 단오절을 ‘표절’한 한국의 졸렬한 행위를 비판하는 문장이었다. 필자는 쓸 가치가 없다는 태도표시를 하였다. 단오절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비교적 정설로 모아지는 견해는 춘추시대 초나라 애국자 굴원(屈原)을 기념하기 위하여 생긴 명절이다. 굴원은 기원전 약340년~약278년의 사람이다. 그때 동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은 주(周)나라라는 큰 우산 밑에 수백 개의 제후국으로 돼 있었다. 이 지역의 중화(中華)-황하(黃河) 문화는 세계 4대 고대문명권 중의 하나이다. 이 중화문화는 동아시아 지역의 크게 중하(中夏), 동이(東夷),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 다섯 갈래로 나뉘는 수백 가지 민족이 더불어 창조한 문화이다. 우리 한민족은 동이민족의 후손이므로 당연 중화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장본인 중의 하나이다. 2,000여 년간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 모두 이 단오절을 쇠어 왔다. 물론 지역별로 그 내용과 형식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현대, 당대로 오며 중국 대륙에서는 이 단오절이 점점 유야무야 되어 그날에 종자(粽子: 대나무 잎이나 갈대 잎에 싸 먹는 찰밥)를 먹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이 명절을 중시해왔고 전 민족적으로 쇠어 왔다. 특히 강릉단오제는 그야말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단오절문화를 창조한 장본인 중의 한 성원이고, 또한 지금까지 이 문화를 중국인을 포함한 세계인이 괄목할 만한 정도로 발전시켜 왔는데 표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단위 영도는 필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긍정하고 그 문장을 잡지에 실어주지 않았다. 문제는 필자가 이 일을 한국의 역사학 교수나 문화인에게 말하였다가 냉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이 어떻게 중화문화권에 속한단 말인가? 우리는 중화문화권과 별개인 배달-단군문화이다.” 실은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아연실색하며 반문하였다: “전 세계가 다 4대고대문명권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배달-단군문명권을 합쳐 5대문명권설을 주장하는 저서를 써서 세계인의 인정을 받을 만한가?” 한국과 중국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네 것, 내 것을 가르기 어렵다. 네 것, 내 것이 아닌 공동한 우리(한국과 중국을 포함하는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서로 충돌될 사안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단군은 13세기에 씌어진 에 비로소 나타나는 고고학적, 문헌적 고증을 할 수 없는 전설적, 신화적 인물에 불과하다. 중화문화권과 대등, 대립시키는 문화로 보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다. 한국문화를 중화문화권에서 분리시키면 민족자존심이 강해지는 것 같지만 황하문명의 창조권, 발전권을 포기하는 셈이니 오히려 민족의 역사공로를 부정하는 허무주의로 돼버린다.
105    인간도 자연에 수동적인 존재 댓글:  조회:5628  추천:5  2012-05-13
한국 제19대 국회위원 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를 보며 필자는 엉뚱한 생각, 이를테면 이런 선거가 계절이나 날씨와 관계되나, 관계되지 않나 생각해 보았다. 관계된다고 본다. 동물은 필연적으로 자연 환경에 얽매여 산다. 곤충류, 어류, 파충류, 조류, 심지어 일부 포유류 동물까지 보통 그가 사는 환경과 색깔이 비슷하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 색깔마저 환경에 적응시켜야 한다. 고급동물인 인류에 비해 얼마나 수동적이고 가련한가! 사실 이 점에서 인류도 동물과 비슷한 점들이 있다. 열대지방의 흑인은 보통 몸이 야위다. 몸 표면적 대 몸 체적의 비례가 커서 체온을 잘 발산시키기 위해서이다. 추운 지역의 백인은 반대로 몸이 뚱뚱하여야 체온발산을 방지하는데 이롭다. 또한 코 구멍이 긴데, 기관지까지의 길이가 멀어야 흡입된 찬 공기를 데우는데 이롭다. 에 따르면 인간의 오장육부는 4계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체 각 기관의 병은 계절별로 잘 걸리거나 잘 치유되며 잘 죽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질환과 대비해보면 대충 맞아떨어진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고급 동물-영장류임에도 불구하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4계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역시 편에 인간은 정서와 심리활동을 4계절에 맞추어야 잘 보양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중 봄철은 만물이 소생하므로 아침 일찍이 일어나 활개 치며 산책하라고, 즉 의욕 방출형에 걸맞게 하라고 했다. 확실히 봄철은 억눌렸던 정서를 발산하거나 싸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계절이다. 반정부데모 같은 행위도 봄철에 잘 행해진다. 지난 100년 간 한국과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3.1운동’ ‘4.19혁명’ ‘5.18(광주)’ ‘6.29항쟁(4월에 시작)’; 중국의 ‘5.4운동’ ‘5.30운동’ ‘4.6천안문사태(1976년)’ ‘6.4천안문사태(1989년, 4월 5일 발발)’ ‘4.22(파룬궁)’…모두 봄철 4, 5월에 집중된다. 그러므로 중국의 공안당국이거나 무장경찰부대는 4~5월의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곤 한다. 물가를 올리거나 대량의 범인을 처형하는 등 국민의 정서를 자극할만한 일은 되도록 정서를 수렴하는 가을철이나 안정을 추구하는 겨울철에 행한다. 한국 위정자들은 이런 문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1998년 5월, 필자는 홍콩기자와 한국의 IMF를 취재하러 왔다가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데모를 수없이 목격하였다. 반년만 늦게 시작했으면 퍽 안정적으로 행해졌을 건데 말이다. 보통 총선이나 대선 같은 것은 봄철에 행하면 야당과 진보세력에 이롭고, 겨울철에 행하면 여당과 보수세력에 이롭다. 이번 총선도 꽃샘추위 아니었더라면 투표율이나 유권자의 정치경향의 결과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간도 자연환경에 수동적인 존재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한민족은 좌경성, 극단성, 충동성이 강한 반도 기질이므로 총선도 겨울에 치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04    ‘박해문화’의 뿌리는 어디에? 댓글:  조회:6022  추천:4  2012-04-25
필자의 아들은 고려대에서 유학할 때 두 가지 애로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었다. 공부만 하면 ‘범생(範生)’이라며 ‘왕따’시키고, 외국유학생을 왕따시키는 것이다. 왕따는 욕먹기가 일쑤이고 자칫하면 얻어맞는다. 중국에는 없는 한국문화이므로 어쩔 수 없다 하였다.  개별 인을 왕따시키고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박해(迫害)를 가하는 현상을 필자는 ‘박해문화’라 이름 짓는다. 한국의 왕따현상은 일종 부정적인 사회문화, 박해문화로 보아야 한다. 이런 박해문화의 뿌리는 유교문화에 있다. 유교문화의 두 가지 핵심, 혈연(血緣)과 등급(等級) 문화 중 등급문화에서 기인된다. 사람을 그의 신분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상위가 하위를 훈계, 박해, 구타할 수 있다. 유교문화의 ‘삼강(三綱: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妻綱)’은 임금은 신하에, 부친은 자식에, 남편은 부인에 대해 절대적 권위가 있으며 신하, 자식, 부인은 그 권위에 무조건 굴종하여야 하며 심지어 박해를 받아 마땅하다. 현재 한국사회를 보면 등급은 무수히 많다. 사장/사원, 원로사원/신입사원, 선배/후배, 상급생/하급생, 교장/교원, 교원/학생, 군관/사병, 시부모/며느리, 남자/여자, 부자/빈자, 한국인/외국인, 팔팔한 자/어수선한 자, 명브랜드 사용 자/싸구려 사용 자…없는 데가 없다. 한국 사회에는 가해와 피해의 가능성과 위기가 무궁무진하게 잠재해 있으며 이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한 극치의 예가 왕따문화, 군부대, 학교 캠퍼스의 자살사건과 폭력이다. 같은 유교문화권인데 박해문화가 왜 한국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가? 중국의 유교문화는 한(漢)나라 후부터 각광을 잃었고 사회분야에서는 점점 퇴색되었다. 송(宋)~명(明) 때는 성리학의 퇴폐문화로 변질되어 더욱 국민의 버림을 받았으며 1919년 5·4운동, 1966년 문혁, 두 번의 된 서리를  맞은데다가 공산주의 평등주의까지 겹쳐 사회상 유야무야로 되었다. 단 이 등급문화가 정치상 현유 중국의 중앙집권독재통치에는 어느 정도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은 조선 500년간 유교문화를, 그것도 퇴폐로 변질된 성리학 단계의 유교문화를 국교로 추앙하였다. 유교문화 중 ‘仁義理智信孝’ 등 인간관계의 윤리도덕관념은 구미문화에 없는 인류문화의 정화이겠다. 한국이 유교문화의 정화 ‘仁義理智信孝’ 등을 계승한 것은 좋지만 유교문화의 찌꺼기, 등급문화를 왕따-박해문화까지 악화시킨 것은 심사숙고할 문제이겠다. 한국 군부대에서 자살한 왕따, 왕따에게 사살당한 박해자를 합치면 연간 세 자리수라고  한다. 몇 차례의 전역에서 죽은 숫자에 해당된다. 또 왕따당하고 자살한 학생이 자주 나타나며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학생은 아주 많다는 통계가 나왔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박해현상을 즉시 없애 버린다는 군, 경찰청, 학교 등 책임자의 호언장담은 어처구니없다. 중국이 2,000년의 노력으로 퇴색시킨 유교 등급문화의 뿌리를 1년에 없앨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을 일종 그릇된 사회문화현상으로 보며 몇 년, 십여 년, 수십 년의 장기 노력을 거쳐야 한다는 전략적 계획을 세우고, 전 사회적 풍기의 개변에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103    조선의 한식절 댓글:  조회:5645  추천:9  2012-04-10
조선에서 찍은 달력에 4월 4일이 붉은 글씨로 씌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곤혹스러워 하였다. 김정일, 김정은과 관계되는 날인지 하며 말이다. 사실은 김정일, 김정은과 별 관계가 없다. 4월 4일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휴식하는 한식절(寒食節)이다. 한식절은 어떻게 생긴 명절인가?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 헌공(獻公)은 서방에 있는 여융(驪戎) 부족을 점령하고 절세의 미녀 여희(驪姬)를 데려와 부인으로 하였으며 그가 해제(奚齊)를 낳았다. 헌공은 여희의 꼬임에 빠져 해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하였으며 태자 신생(申生)을 죽였다. 이에 둘째 아들 중이(重耳)는 내란을 피해 서쪽 적지(狄地)에 피신해 있다가 19년 만에 진목공(秦穆公)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가 바로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하나인 이름난 진문공이다. 권좌에 오른 진문공은 19년간 자기를 따라다닌 가신을 하나하나 등용하였으며 공로가 가장 큰 개자추(介子推)를 맨 나중에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자추는 급류용퇴(急流勇退)의 미덕으로 면산(綿山)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진문공이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지르면 나오겠지’하며 불을 질렀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큰 나무를 껴안은 채 불에 타 죽었다. 진문공은 너무 비통한 나머지 그가 타 죽은 4월 4일을 기념하여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하였다. 그 날에는 불을 지피 지 못하게끔 돼 있어 찬 밥을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식절의 유래이다. 전통적으로 한식절이나 그 이튿날인 청명절에 산소(묘소)에 가는 습관이 있다. 북한에서는 한식절에 산소 가며 이날 전국적으로 하루 휴식한다. 문제는 하루 쉬는 정도가 아니라 장관을 이루는 아주 대단히 큰 명절이며 김일성, 김정일 생일 다음으로 가는 명절, 전통 명절 중 가장 큰 명절이다. 필자는 1985년 친척방문차 평양에서 한식절을 체험한 적이 있다. 그날 평양 버스회사, 각 기관, 단체, 사업체의 차는 물론이고 중앙당과 국무원차까지 총 동원되어 평양 시민을 평양시 주변 묘소로 나른다. 아마 150만 평양시민의 절반 이상은 묘소에 가는 듯하다. 평양시 도처에서 사람들이 차를 기다리며 그 줄이 보통 1킬로 정도 길다. 물론 산소마다 사람들로 온통 덮여 있고 오후 3시쯤이면 돌아오는 인파가 더욱 인산인해를 이룬다. 조선에서 왜 한식절이 이렇듯 큰 명절일 수 있을까? 세습제로밖에 풀이할 수 없다. 조선 고위층 간부의 대부분은 만경대학원 졸업생들이다. 필자가 방문 갔던 1985년의 경우 1930년대부터 김일성과 같이 항일 빨찌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후손만이 만경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대권뿐만 아니라 모든 고위층 간부가 다 혈연관계로 세습되는 셈이다. 조상을 중요시하는 성묘가 혈연관계로 세습하는 권력 승계 간에는 일맥상통하는 내재적 무엇이 있어서이다.
102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새로운 단계 댓글:  조회:7514  추천:27  2012-02-27
올해는 중한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이며 중국동포의 한국행도 어언 30년이 가까워 온다. 중국속담에 ‘삼십 년 하동, 삼십 년 하서(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라는 말이 있듯이 30년이면 시대가 바뀐다. 재한 중국동포사회도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때가 되었다. 1980년대 상반기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중국동포나 한국인이나 모두 감개무량하여 서로 끌어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동포들은 한강기적으로 부흥한 한국에 긍지를 가졌으며 한국인들은 한 세기가 지났지만 타국에서 민족의 문화를 고스란히 지켜온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에 대해 감탄하였다. 과연 피는 물보다 짙음을 실감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잠시였다. 인간관계는 이해(利害)의 관계이고 감정은 이지(理智)를 대체 하지 못하며 현실은 이상보다 냉혹하다. 중국동포에게 한국은 이내 노다지판으로 간주되었다. 불법 입국, 사기 결혼, 불법 체류…일부 동포들은 금전 앞에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중국동포는 부담거리, 고작해야 3D업종의 염가일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한국정부도 근시안적인 처사를 많이 하였다. 용역 사기, 비자 매매, 임금 체불, 부당한 구금과 강제 추방…. 중국동포들은 돈은 벌었지만 수 없는 피와 눈물을 흘렸다. 시간은 가고 세월은 흘렀으며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의 재한 중국동포는 이전의 중국 동포가 아니며 새로운 탈바꿈을 하고 있다. 재한 중국동포는 완전히 업그레이드하여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첫째, 재한 중국동포사회가 형성되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주축으로 하는 많은 중국동포들이 정당하게 한국국적으로 귀화할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방문취업제를 기해 중국동포의 한국행은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H2, F4, F5를 주축으로 하는 여러 가지 형식의 비자를 받아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한국체류 중국동포는 52만 명이며 그 중 국적 취득자가 12만 명이나 된다. 한국에는 엄연히 중국동포사회가 형성되었다. 둘째, 중국동포는 한국사회의 사회-정치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전에는 불이익을 당해도 벙어리 냉가슴 알이 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어디 가서 하소할 데도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밀려 더는 참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도 동포를 불쌍히 여기는 한국 목사 등이 나서서 동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동포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딱한 사정을 해결해 주는 동포 자체의 사회단체, 행정업체, 언론이 수십 개나 된다. 동포들의 고독과 슬픔을 달래주는 친목회도 많이 생겼다. 이런 단체들이 한국의 각 유력 정당에게 서한을 보내 동포의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을 호소한 적도 있다. 최근에는 이런 단체, 언론, 친목회를 모아 단일 창구─재한 중국 동포단체연합회를 만들려고 움직이고 있다. 그 전형적인 사례로 이 연합회 준비위원회의 타이틀로 서울시 정무부시장 김형주와 브리핑도 가진 적이 있다. 이번 브리핑에서 재한 중국동포의 처우를 개선해 줄 데 관한 많은 의견과 건의를 제출했다. 재한 중국동포가 스스로 자기를 고육하고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새 시대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 셋째, 중국동포는 3D업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 중국동포는 중국 56가지 민족 중 교육 수준이 가장 높다고 자부할 정도로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중국동포의 대부분은 F2비자이고, F2비자는3D의 36가지 업종에 밖에 취업할 수 없다는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이것이 중국동포가 3D업종에서 헤매는 주요 원인이겠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유학비자(D2)로 들어온 자가 누계 수천 명, 그 중 석사, 박사 학위공부를 하는 자만도 1,000명이 넘는다. 학위공부를 마치고, 또는 F4비자로 들어와 한국의 각 대학에서 현직교수를 하는 자가 20명이 넘는다. 한국의 각 회사, 기관, 단체에서 중견 직에 있는 자도 수없이 많다. 그들의 노력은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문화 등 분야에서 점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재한 중국동포들로 구성된 장기협회, 연예인협회, 중의(中醫)협회, 여성 리더스협회, 축구협회, 미술?서예협회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런 협회의 결성은 동포사회 문화생활의 격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품위를 과시하고 있다. 넷째, 동포들의 투자 등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우선은 동포들이 경영하는 식당, 점포 등 영세업체이다. 다음은 동포들의 부동산 구입이다. 중국에서 성장한 동포 기업가들의 한국 투자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G2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해외 진출에 따라 중국의 자본을 한국으로 유치시키는 중개업자도 많아지고 있다. 동포 사업가들의 부상은 멀지 않은 장래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고무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국동포가 갈 길은 아직 멀며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많은 동포가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합격된 한국국민이 되려면 아직 거리가 멀다. 아직 한국의 역사, 문화, 풍속, 습관에 생소한 사람이 많으며 한국의 각종 정치제도와 시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동포는 상기의 변화와 걸맞게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한국 정부가 중국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문제점이 많으며 시책에도 허점이 많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외국인을 우대할 때는 중국동포를 외국인에서 제외시키고, 동포를 우대할 때는 중국동포를 외국인이라며 제외한다. 재한 중국동포는 이렇듯 한국 시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아니, 지금까지 한국정부는 중국동포에 대한 확고한 정책이 없다. 지금 중국은 G2의 국가, 가장 돈 많은 나라로 부상하고 있으며 전 세계가 중국시장과 중국경제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동포는 어떻게 보면 중국의 연장선에 있고, 또 시각을 바꾸어 보면 한국과 중국의 연결선에 있다. 지금 한국은 중국시장을 외면하면 살아갈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정부는 정신을 차려 재한 중국동포를 정시하고 그들을 포옹하여 한국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끔 조건을 마련하여 줄 때가 왔다.
101    ‘성폭행’, ‘성추행’ 댓글:  조회:7369  추천:2  2012-01-08
지금 한국에서 ‘성폭행(性暴行)’은 광범위하게 쓰고 있지만, 법조계에서는 쓰는지 몰라도 ‘강간(强姦)’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아마 ‘강간’이란 말이 저속하고 듣기 싫어서 ‘성폭행’으로 대체하였을 것이다라고 한다. 마치 ‘☓하다’를 ‘섹스하다’로 대체한 것처럼 말이다. 국어사전에 ‘성폭행’이란 올림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말은 근래에 새로 생긴 듯하다. 인터넷에서 ‘성폭행’을 검색해 보니, ‘강간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daum)’, ‘상대방의 동의 없이 억지로 성관계를 맺는 일(naver)’로 적혀 있다. 결국 ‘성폭행=강간’이고, 그러므로 ‘성폭행’으로 ‘강간’을 대체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다. 우선 성폭행을 일률 강간이라 볼 수 없다. 필자의 고향에서 이런 일이 생긴 적이 있다. 마을의 한 곱상한 40대 초반 과부에게 중매가 자주 들어오는데 그녀는 한동안 혼사에 동의할 듯 말 듯하며 선물과 돈을 챙기고는 거절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하여 마을에서 의론이 분분하며 인심도 좀 잃었다. 이에 격분한 마을의 20세 좌우 청년 몇몇이 좀 혼내 주어야겠다며 그녀를 탈곡장 움막으로 끌고 가 발가벗기고 라이터로 음모를 한바탕 지지고 유방도 주먹으로 줴박았다. 그 청년 몇몇은 유죄판결로 실형을 언도받았으며 죄명이 ‘성폭행’이었다. 그러나 강간은 아니었다. 또 이런 일도 있다. 남녀 간에 한동안 연애를 하다가 일방이 거절하자 서로 헤어지기에 즈음하여 마지막 이별 키스에 남자가 여자의 혀를 물어 잘라버리거나 유방을 칼로 찌른 것, 마지막 기념 섹스에 여자가 남자의 음경을 물어 잘라버린 것 등이다. 모두 성폭행 죄이다. 그러나 강간이 아니다. 다음은 모든 강간이 일률 성폭행이 아니다. 불법적인 행위로 부녀를 간음하였으면 폭행이 없어도 강간일 수 있다. 광주 인화학교의 경우 교장이나 교원이 물리적 위협수단으로 간음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강간이다. 지적 장애인이면 반항할 줄 모르거나 반항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16세 이하의 소녀를 간음하였으면 폭행이 없어도 강간으로 취급할 수 있다. 또 폭행을 쓰지 않았어도 위구심으로 권력자에게 응한 간음도 강간으로 취급할 수있다. 저속하거나 듣기 싫다고 ‘姦’자를 외면해 버리면 그에 따르는 많은 단어를 상실하게 되는데 이것은 언어생활상의 큰 손해이다. 우리말 한자어에 다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어의 경우 간음에는 ‘강간(强姦)’, ‘화간(和姦)’, ‘통간(通姦)’, ‘유간(誘姦)’, ‘편간(騙姦)’, ‘점간(點姦: 손가락간음)’, ‘계간(鷄姦: 항문 간음)’ 등이 있다. 성추행은 강간을 포함한 모든 성적 희롱을 뜻하나 역시 개념상 너무 추상적이다. 중국어의 경우 성추행에 상기 간음을 나타내는 단어들 외에 ‘비문(緋聞)’, ‘외설(猥褻)’, ‘불검점(不檢點)’, ‘동수동각(動手動脚: 집적거리다)’ 등 많은 단어와 표현방법이 있다. 성추행이 비교적 보편적이고 엄중한 사회현상이므로 ‘강간’을 포함한 비교적 세분된 단어를 써서 추상적인 ‘성폭행’, ‘성추행’보다 의미를 정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00    한국어가 우리말의 표준어로 되려면 댓글:  조회:8160  추천:8  2011-12-05
한국이 겨레의 정치, 경제, 문화의 소용돌이 위치에 있으므로 한국어가 점점 겨레의 공동어로 자리매김해가고있다. 이는 누구의 주관욕망에 의하는것이 아니라 객관적 추세라고 생각된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를 꺼리고있다. 중국조선족도 꺼리는데 북측은 더 말할것 없지 않겠는가? 공동어로 보기도 꺼리는데 표준어로 보기는 더욱 언짢다. 조선과 중국조선족을 합하면 겨레의 1/3이 훨씬 넘는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꺼린다면 심각한 문제이다.한국어가 표준어로 되자면 많은 약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1. 언어무정부주의상태 문제 한국에는 언어를 관장하는 권력기구가 없으므로 언어무정부주의상태이다. 주요표현은 영어를 람용하는것이다. 한국인은 공식, 비공식, 출판물, 구어(口語)에서 모든 영어단어를 마음대로 사용할수 있다. 이런 현상을 막는 국가적조치가 없다. 아니, 국가권력기구가 없다. 지하철에서 ‘출입도어를 닫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출입문을 닫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관광 시즌이므로 티켓 값이 비쌉니다’라고 하는데 ‘관광철이므 표값이 비쌉니다’라면 얼마나 좋은가? 그 외에도 ‘북경오리’ 요리를 ‘북경닥’ 요리라 하고 ‘닭’고기 요리를 ‘치킨’ 요리라고 하는 등 많은 기본 단어를 기탄없이 영어로 표현하고 있다.중국은 國家語言文字委員會에서 이런 문제를 관장한다. 모 외래어 단어를 쓸 수 있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법으로 규정한다. 이를테면 인터넷이 금방 생겼을때 민간에서 한동안 ‘英特耐, 英特耐特, 因特耐, 因特耐特’ 등으로 헛살려 썼었다. 그러다가 위원회 산하 표준처에서 ‘인터넷’을 ‘因特網’으로, ‘네티즌’을 ‘網民’으로 써야 한다는 규정을 내렸다. 이 규정이 내리자 13억은 무조건 이를 따랐다. 법이 결정한것이기 때문에.한국에도 이런 권력기관이 있어야 한다. 쓸 필요성이 있는 외래어를 선정하여 쓰되 권력기관에서 이를 감독하여야 한다. ‘문’을 ‘도어’, ‘표’를 ‘티켓’, ‘철’을 ‘시즌’, ‘오리’를 ‘닥’, ‘닭’을 ‘치킨’으로 대체한다는 규정이 없으면 공식적으로 쓰는것을 권력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 이런 영어를 람용하는데 대해 한국인도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한국외에 사는 겨레들은 마지못해 따라 쓰기는 하지만 표준어로 받아들일 수 없다. 2. 두음법칙 문제‘두음법칙’을 간단히 말하면 ‘ㄹ’가 단어의 맨 앞에 나타날때 뒤따르는 모음이 경모음이면 ‘ㄴ’로, 연모음이면 ‘ㅇ’로 하며, ‘ㄴ’가 단어의 맨 앞에 나타날때 뒤따르는 모음이 연모음이면 ‘ㅇ’로 하는 법칙이다. 이를테면 ‘라체(裸體), 류행(流行), 리론(理論), 뉴대(紐帶)’를 ‘나체, 유행, 이론, 유대’로 한다. 모두 한자어이다. 여기에 문제점이 많다. ‘아리랑이란 낭자를 한자로 어떻게 쓰나?’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하자. 앞은 ‘랑’이고 뒤는 ‘낭’이므로 황당하다. 성이 ‘유’씨라면 ‘柳劉俞’중 어느것인지 막연하다. 성명 ‘金龍植’은 ‘김룡식’, ‘김용식’이 다 가능한 듯하다. ‘法律’은 ‘법률’로 쓰면서도 ‘紀律’은 ‘기율’로 쓴다. 두음법칙은 두음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며 퍽 더 복잡하다.북한처럼 ‘라체, 류행, 리론, 뉴대’라 쓰고 ‘나체, 유행, 이론, 유대’로 읽는것이 어떠냐고 어느 국어학자에게 건의한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러하다: “북한방언에서는 ‘라, 류, 리, 뉴’라는 발음이 되지만 서울방언에서는 이런 발음이 안되므로 이렇게 쓸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쓰면 억지로 ‘라, 류, 리, 뉴’라는 없던 발음이 생기므로 서울어음이 난잡해진다.” 옛날 우리말에 순한소리 ‘ㄱㄷㅂㅈ’만 있었고 거센소리 ‘ㅋㅌㅍㅊ’와 된소리 ‘ㄲㄸㅃㅉㅆ’가 없었다. 후에 거센소리 ‘ㅋㅌㅍㅊ’가 새로 생겼다. 된소리 ‘ㄲㄸㅃㅉㅆ’로 중국어의 탁음(濁音)을 표기하다가 우리말에 고착되였다. 우리말의 음소(音素, 포님:phoneme)가 풍부해졌으며 언어표현력을 제고시켰다. 이는 우리말의 발전을 의미한다. 언어는 이렇듯 없던 음이 생길수도, 있던 음이 없어질수도 있으며 자체의 변화발전 규률에 따라 변화발전하지 누구의 주관 욕망으로 좌지우지할수 없다. 필자가 보건데 ‘라려리녀’와 같은 새로운 음의 산생은 필연적이며 ‘서울말’이라는 틀로 막을수 없다. 사실 우리말에 없던 두음 ‘라려리녀’가 역시 중국어를 표기하다가 새로 생겼다. 다만 지역형평의 차이로 북측 말에는 완전히 생겼고 서울말에는 아직 숙성되지 않았거나 좀 어색한 단계에 있다. 그러나 서울말에도 이미 생긴것이 확실하다. 영어 외래어 ‘라디오, 류머니즘, 리스트, 뉴스’ 등을 자유로이 발음하고 있지 않는가? 서울사람은 지금 이런 두음을 영어 외래어일때는 발음을 잘하고 한자어 ‘외래어’일때는 발음이 안되는척 한다. 영어 ‘라디오’는 잘 발음하며 한자어 ‘라체(裸體)’는 ‘나체’라 밖에 발음이 안된다고 우긴다.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다. 몇십년밖에 안되는 구미 외래어의 두음은 받아들이고 수천년의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방언에서 쓰고있으며 서울말에서도 이미 형성단계에 있는 한자어 두음은 외면한다는것은 어물성설이다. 3. 띄어쓰기 문제 같은 교착어인 일본어는 띄어쓰기를 안한다. 그래도 의미파악에 별로 애로가 없다. 필자가 족보정리때문에 각 문중의 재료를 많이 보았는데 1960년대까지 문중 어르신들의 편지 등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을 터득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 한글은 넓적글자고 우리말에는 토씨가 많으므로 띄어쓰기를 안해도 괜찮으며 웬만히 하면 족하다. 조선의 법을 따른 중국조선족어는 합성명사, 토 없이 이어지는 명사 및 불완전명사, 조동사로 이어지는 용언부를 많이는 붙여쓴다. 절약의 원칙은 언어문자 생활의 중요한 원칙이라고 할때 우리의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한국에서는 너무 많이 띄어쓴다는 감이 든다.한국의 영향이 크고 또한 경제적 리익을 감안하여 서울말을 공동어로 쓸수는 있지만 문제점이 많으며 우리겨레말의 표준어로 보기에는 아직 미비하다. 다른 문제점도 있지만 우선 주요한 상기 3가지 문제점을 거론하여본다. 필자는 중국어전공이며 조선어는 아마추어수준이므로 상기의 견해에 오류가 있으리라 믿으며 많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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