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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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39 ]

139    인구가 많으면 축재도 잘 된다 댓글:  조회:8902  추천:1  2014-06-23
인구가 많으면 축재도 잘 된다 정인갑   중국고서 에 이런 말이 있다: “長袖善舞, 多金善賈(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 지당한 말이며 최근 필자는 여기에 한 마다 더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든다: “多人善財(인구가 많으면 축재도 잘 된다).”   필자가 근무하던 중화서국에서 2005년경에 우단于丹이 지은 이란 책을 출간하였었다. 근 1천만 책이 팔렸다. 책 당 수입이 중화서국은 10웬, 우단의 인세는 8웬이니 중화서국이 1억 웬(한화 180억 원), 우단이 8천 웬(144억 원)을 버는 셈이다. 중국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웬만한 나라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숫자이다.   재작년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G2의 일원으로 되었다. 2013년 미국의 GDP는 16.7조 달러, 중국은 8.9조 달러이고 일본은 5.0조 달러이다. 어떤 서방 금융전문가는 중국인민폐 3.0웬을 1달러로 하여야 합리하다며 중국을 환률 조작국이라 공격한다. 만약 중·미 환률을 정말 3.0으로 하여야 맞는다면 중국의 GDP는 벌써 미국을 초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몇 년 안에 미국과 일본을 합한 수치에 달하게 된다. 역시 중국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중국의 GDP가 아무리 높다고 한들 1인당 GDP가 낮은데 무슨 의미가 있나’ 라며 필자의 문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딱 그렇지도 않다.   최근 해외 물품을 들여오는 중국의 포털 사이트―중국 인터넷상거래 주식업체(국영이 아닌) 알리바바(阿里巴巴)가 뉴욕증시에 상장신청을 하였다. 상장이 되면 주식총액이 1,680억 달러일 전망이며 그의 상거래 규모는 미국의 대표적 인터넷상거래 업체인 아마존과 이베이를 합친 것보다 많으므로 미국인을 경악케 하였다. 알리바바는 또한 한국 대표적 기업인 삼성전자의 주식총액(1,950억달러)에 접근한다. 알리바바는 1999년에 창립한 회사이고 사장 마운(馬雲)은 영어교사, 관광가이드 출신이며 162센티미터의 키에 인물도 볼 멋없다.   그런 그의 회사가 짧은 14년에 반세기를 넘나들며 3세대인의 노력을 경주한 삼성전자를 따라잡을 수 있는 원인 역시 중국인구가 많기 때문이리라. 지금 중국에 재정규모나 수입이 세계 랭킹 1위인 기업이 많으며 알리바바처럼 짧은 기간 내에 부를 창출한 기업이 수없이 많다.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던 100여 년 전 중국은 동아병부東亞病夫로 세계에 이름났다. 심지어 감기가 유행해도 중국에서 건너온 병이라고 몰아붙였을 정도이다. 20여 년 전 서방국가가 ‘중국인은 출국의 자유도 없다’며 중국의 인권을 폄하할 때 한 중국지도자가 ‘약 1억쯤 미국에 보낼 터이니 받아주겠느냐’고 말해 미국인이 질겁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원래 인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부담이 크다는 것뿐이었다. 필자가 1987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모택동과 중공 그만하면 대단하지, 10여 억 인구를 먹여 살렸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눈에 10억 중국인은 10억 거지와 다름이 없게 비쳤을 것이다.   고작해야 염가인력이 많다는 것뿐이었으리라. 한중수교 직전에 많은 해외거주 한국인기업이, 한중수교 직후에 많은 한국 내의 기업이 투자하러 중국에 진출하였다. 그때 필자는 그들의 통역을 많이 맡았으므로 그 사연을 잘 알았는바 누구나 중국에서 가공하여 한국으로 반입하거나 선진국에 팔아먹을 생각만 하였지 제품을 중국에 팔 궁리를 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중국은 어느새 ‘다인선재’의 ‘신인구론’으로 변했다. 중국인이 물품 소비자로부터 상품 구매자로 변하여 부담거리가 돈더미로 변했다. 중국인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시장이 크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지금 세계 각 선진국들은 중국을 견주며 중국시장에 뛰어들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일본 한국인 거부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관광 때 만난 야후 창업자 제리 양(역시 알리바바의 투자자)의 소개로 관광가이드 마운을 알게 되었다. 바로 알리바바가 창립된 이듬해의 일이다. 손회장은 무명에 경험이 없는 마운을 만난 지 6분 만에 선뜻 2천만 달러를 알리바바에 투자하였다. 34.4%의 지분을 가진 그는 이번 상장이 성공할 경우 14년 만에 2천만 달러가 580억 달러로 되어 2,890배로 불어나는 셈이다. 마운을 보는 혜안이 있었겠지만 13억인구, 다인선재의 식견이 더 큰 작용을 하였으리라.   한국경제발전의 장애는 자원이 결핍한 것도 있겠지만 더 큰 원인은 내수시장의 인구가 5천만밖에 안 되는 것이다. 만약 통일을 이룩하면 재외동포까지 합쳐 8천만을 훌쩍 초과하게 된다. 8천만의 내수시장이면 다인선재의 입내라도 낼만 하다. 게다가 해외시장을 잘 개척하면 더 유망할 것이다. 통일무용론을 주장하거나 FTA체결 때마다 제동을 거는 한국 정치인과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138    서울표준시 재검토 댓글:  조회:8302  추천:3  2014-05-14
서울표준시  재검토  정인갑     세계표준시는 영국 그린비치 천문대 위치를 시발점으로 하여 동서로 각각 12개 구역, 도합 24개 구역으로 나뉜다. 북경은 동8구에 속하고 도교는 동9구에 속한다. 서울은 동8구와 동9구의 사이에 위치하여 있다. 습관상 모 지역의 표준시를 그린비치 시간과 정수(整數) 차이가 나게 한다. 그러면 서울표준시는 도교 또는 북경 표준시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린비치 시간과 반드시 정수 차이가 나야 되는 것은 아니다. 소수小數 차이가 나도 괜찮다. 그렇다면 서울이 도교시간보다는 좀 늦고, 북경시간보다는 좀 빠른 별도의 표준시―서울표준시를 채용할 수도 있다.   한국은 인구로 보나(북한 인구와 해외동포를 합치면 8,000만) 경제실력으로 보나 모두 세계 10위권에 접근하는 중요한 나라이다. 아니, 대국이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다. 얼마든지 자기의 주체성을 살려 서울표준시를 별도로 채용할 수도 있다. 국가 및 민족의 자존심과 위상의 고양에 걸맞으려면 서울표준시를 써야 마땅하다고 본다.   한국인이 다른 나라와 관계를 두절하고 한국 내에서만 활동한다면 서울표준시를 써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 관계하며 활동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은 경제상 수출입에 대한 의뢰도가 높은 나라이므로 대외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한일관계, 한중관계의 편리를 감안하면 도교표준시 또는 북경표준시를 쓸 수도 있다. 지금 서울은 도교표준시를 쓰고 있으므로 일본과 거래하는 데는 퍽 편리하다. 앞으로 계속 도교표준시를 쓸 것인가?   얼마 전 재중국한인회 동북삼성연합회 손명식 회장께서 소주蘇州 한인상회의 송년회에서 서울시간을 북경표준시로 바꾸자는 건의를 내놓았다(본 2004년 2월 *일 기사 참조). 필자는 아주 지당한 건의라고 생각한다.   우선 경제와 인적 교류상 한일 거래와 한중 거래 중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를 보자.   1965년 한일 수교로부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는 한일 거래가 당연 주요한 거래였으며 한국의 근대화 실현에 막대한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가 성숙될수록 한일 간의 경제는 상호보완의 관계로부터 상호 배척의 관계로 전환하였다. 대신 상호 보완 관계인 중국과의 거래가 급부상하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이런 변화는 더욱 빨라졌다.   지금 중국은 한국의 제1무역상대국이며 한국경제의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는 25%이다. 2년 전 중국경제 규모가 일본을 제치고 G2국의 하나로 부상되었으며 앞으로 중국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더욱 중요한 나라로 변해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중간의 인적교류가 한일 간의 인적교류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연합뉴스의 발표(2013, 10, 4.)에 의하면 재중동포는 258만이고 재일동포는 89만이다. 재일동포 중 약 절반이 한국과 거래하지 않는 북한편향이므로 한국에 드나드는 재중동포가 재일동포의 5배가량 된다. 또한 한국에 체류 중인 중국동포와 중국의 기타민족이 80만을 초과한다.   지금 한국을 다녀간 중국관광객과 중국을 다녀온 한국관광객을 합치면 1년에 8백만 정도 되며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여서 바야흐로 1천 만을 넘게 된다. 그러나 한·일관광객은 한·중관광객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다.   정치관계를 말하면 더욱 뚜렷하다. 일본은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며 일본의 한국침략죄행을 승인하지 않는다. 골수 전범분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고 참배하며 일본군성노예 죄행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은 광복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며 한국이 아직 일본의 식민지이라는 관념이 잠재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교표준시를 쓰면 우리의 자존심이 어떻게 되겠는가?   앞에 서울이 세계표준시가 북경 동8구와 도교 동9구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느 구에 더 치우쳐 있을까? 본 문장을 다 쓴 후 세밀히 검토해 보니 서울은 북경표준시에 더 치우쳐 있음을 발견하였다. 동경東經120°가 동8구의 표준 경선經線이고 동경135°가 동9구의 표준 경선이다. 세밀하게 말하면 동경120°±7.5° 즉 동경112.5°~127.5°가 동8구이고, 동경135°±7.5° 즉 동경127.5°~142.5°가 동9구이다. 서울은 동경127°이므로 당연 동8구에 더 가깝다. 평양은 동경125°44'이므로 서울보다 더 동8구에 가깝다.   북경이 아침 8시이고 도교가 아침 9시일 때 서울표준시는 8시 28분이고 평양표준시는 8시 22분 46초이다. 이렇게 볼 때 만약 그린비치 시간과 정수 차이의 표준시를 취한다면 서울표준시를 도교표준시로부터 북경표준시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틀린 도교표준시를 맞는 북경표준시로 복귀시키는 셈이다.   한국의 경제이익과 정치자존심에 관계되는 중대한 사안이므로 한국의 관계당국에서 이 문제에 대해 중시하여야 마땅하다. 서울표준시를 쓰던가, 아니면 북경표준시를 쓰기 바란다.
137    재한중국동포식당에게 하는 건의 댓글:  조회:8387  추천:5  2014-05-07
본문은 중국요리를 취급하는 재한중국동포식당에게 하는 건의이다. 중국의 음식문화는 손님에게 음식 대접을 할 때 요리의 숫자를 따진다. 상대방을 정중히 대접하려면 최저 8가지로부터 시작하여 12가지, 16가지…요리를 대접해야 한다. 상대방을 간단히 대접(吃頓便飯)한다고 해도 좀 서먹서먹한 관계라면 최소 4가지는 대접해야지 그에 미달이면 망신을 면할 수 없다. 불알친구를 대접할 때만은 이런 구애를 받지 않아도 된다. 중국동포식당의 중국요리는 한 접시의 양이 중국 식당의 2배가량 되며 가격도 물론 중국식당의 2배, 이를테면 평균 1.3만 원가량 받는다. 둘이 식사하러 가서 8가지를 시키면 10만 원 가량 나오며 3/4은 버리게 된다. 염치불문하고 4가지만 시켜도 5만 원 정도는 나오며 절반을 버리게 된다. 돈을 새겨 음식을 버리기 너무 아깝다. 그러므로 필자는 중국손님을 대접할 때마다 신경을 쓰게 된다. 차라리 일식집에 가서 생선회를 대접한다. 5만 원짜리 생선을 시키면 둘이 족히 술 안주할 수 있으며 다 먹는다. 대접받은 자는 비싼 일식음식의 대접을 받았다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동포식당에 가서 4가지 요리에 5만 원을 쓰면, 절반을 버리게 되며 상대방은 속으로 쩨쩨하다(짜다)고 깔볼지 모른다. 필자는 동포식당에서 식사할 때 이런 건의를 해봤다: “대·소 접시로 나누고 소 접시는 양을 55%가량 담고 가격도 7천 원가량 받으면 좋겠다.” 식당 주인은 들은 체도 안 한다. 한 식당 주인은 필자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인건비 때문에 양을 많이 담건 적게 담건 본전은 비슷합니다. 차라리 많이 담고 배로 받는 것이 식당의 이익입니다.” 아하!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었구나! 손님의 손해로 식당의 이익을 챙긴다? 시장경제와 역행하는 이런 방식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누군가는 필자의 건의처럼 운영할 것이며 그 사람이 바로 더 성공하게 된다고 필자는 믿는다. 1987년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필자는 중화요리 집에서 모 한국인의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더러 주문하라고 하여, 4사람이고, 또한 그런 장면이면 최소 8가지를 시킬 것이라 여기고 우선 4가지를 시켰다. 그런데 그 4가지만 먹고 말았다. 아니꼽게 생각되어 다른 식탁들을 돌아보니 3~4인이 모두 두어 가지 정도만 시켜 먹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음식의 절반을 버렸으며 만약 필자가 8가지를 시켰다면 큰 망신을 할 뻔했다. 여럿이 가서 한두 가지 요리만 시켜먹어도 괜찮은 것이 한국의 음식문화이다. 그러므로 중국요리가 한국에 정착할 때 역시 한두 가지만 시켜먹어도 되게끔 하느라 한 접시의 양이 많게 된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아야 한다. 옛날 한국거주 화교가 수만 명에 불과했고 한국의 중화요리 식당에서 식사하는 자가 대부분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 귀화한 중국동포가 10여 만, 장기거주자가 70~80만, 해마다 한국에 출장·관광 오는 중국인이 수백만에 이른다. 이제는 한국에서 중국요리에 중국의 음식문화를 동시에 접목시킬 때가 되었다.
136    ‘자유왕래’, 너무 늦었다 댓글:  조회:10547  추천:7  2014-03-13
‘자유왕래’, 너무 늦었다 정인갑   일전에 ‘재외동포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회의가 있었다. 김재원 한나라당 국회의원께서 재중, 재러시아 동포에 대해 자유왕래 혜택을 중심으로 하는 7가지 사항의 의제를 제출하고 이미 70여 명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동의 사인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서경석, 김해성 목사 등이 이번 회의를 발기한 것이다. 황우여 한나라당 대표의 축사도 있었다.   필자는 재중동포의 일원으로서 김재원 의원, 서경석 목사, 김해성 목사, 곽재석 이주동포개발연구원장 및 황우여 대표 등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필요한 회의이기는 하지만 부득불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와서 중·러 동포에게 자유왕래의 혜택을 준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 억울하게 30년 형기의 언도를 받은 ‘죄수’를 29년의 옥살이를 한 후에 풀어준다는 감이 든다.   중·러 동포들이 한국을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약 1985년경부터이므로 이미 29년이나 된다. 원래 29년 전에 벌써 중·러 동포에게 자유왕래의 혜택을 주어야 맞다. 그러나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자유왕래를 막았다. 그토록 많은 중·러 동포의 가정이 파산되었고, 천문학적인 금전의 손해를 보았으며 심지어 자살한 자도 비일비재하다. 잇살마다 신물이 날 정도이다. 자유왕래 혜택의 의미가 거의 없게 된 이제 와서야 혜택을 준다? 어이없다.   왜 자유왕래 혜택의 의미가 거의 없게 됐다고 하는가? 중국사회변화의 시대적 낙인을 심층 분석해보면 안다. 1977~1981은 중국사회변화의 중요한 시기이다. 1977년부터 도시청소년의 하향下鄕이 정지되었고 1978년부터 고시에 의한 대학생모집을 대대적으로 하였으며 1979년부터 개혁개방하였고 1981년부터 ‘1부처 1자식’제도를 실행하였다.     1960년생이면 1978년에 고졸이고 1983년경부터 결혼한다. 1960년 이후 출생이면 농촌의 고된 일을 한 경력이 없고 대학에 많이 갔으며 개혁개방을 맞나 도시에 가서 돈벌이도 해 봤고 일률 자식 하나밖에 없다(공부시키거나 집을 마련해주는 등 경제 부담이 적다).   그러므로 한국 3D업종에서 달갑게 일할 중국동포는 1959년 이전 출생이 주축이다. 작년까지 1948년(66세) 이전 출생이 일을 그만두었고 금년은 1949년, 명년이면 1950년 출생…이 일을 그만두게 된다. 게다가 중국경제가 급부상하므로 짧아서 2~3년, 길어서 5~6년이면 한국에 일하러올 중국동포는 얼마 안 된다. 한국에 가고 싶어 할 때는 제한하고 이제는 심상한데 자유왕래의 혜택을 준다? 반가운 심정이 별로 안 생긴다.   작년부터 한국은 북경, 상해 호적의 중국인이면 일률 복수비자의 혜택을 주었다. 북경, 상해 호적의 중국인은 4천만이나 된다. 동포가 아닌 4천만의 중국인에게 자유왕래의 혜택을 주면서도 100여만의 중국동포는 지금까지도 제한한다? 한심하다.    당장 자유왕래 해도 모르겠는데, 민주당도 사인운동을 벌인 후 국회에서 통과되고, 헌법재판소의 자유왕래 인정 판정이 나고, 또한 그것을 정책으로 옮기는 데는 아직 1~2년이 걸릴 조짐이라고 한다. 그러면 30년의 ‘형기’가 만료된다. 해주고도 고맙다는 말 듣지 못할 것이다.
135    자식농사가 가장 중요한 농사 댓글:  조회:7313  추천:1  2014-02-04
인간의 욕망은 1위가 식욕이고 2위가 성욕이며 3위가 명예욕이란 말이 있다. 배부르면 몸 풀 생각이 나고 그 다음은 이름 날릴 궁리를 한다. 인간 생산의 랭킹은 어떠할까? 1위가 인간 자체의 생산, 2위가 곡물생산, 3위가 돈 생산일 것이다. 인간 자체의 생산을 자식농사라고도 한다. 유교문화가 전통인 우리겨레는 자식농사를 가장 중요한 농사로 보아왔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동포의 생활수준이 획기적으로 높아졌으므로 자식농사도 쉬워졌다. 자식에게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더 좋은 옷을 입히며 공부도 마음껏 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생겼다. 많은 가정이 지리멸렬된 것이다. 필자는 북경에서 조선족소학교를 10년간 꾸린 경력이 있다. 지리멸렬된 가정의 학생이 2/3 점하였다. 즉 부모가 이혼한 자, 부모 쌍방 또는 일방이 타지방 또는 해외에 돈 벌러 간 자가 2/3이다. 이런 어린이는 부친 또는 모친과만 생활하거나 조부모 또는 다른 친척집에서 생활한다. 그들은 정신상 건전한 사람으로 육성되기 아주 어렵다. 필자는 어릴 때 엄마의 매를 많이 맞으며 자랐다.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밥 짓던 엄마는 부지깽이로 걸핏하면 필자의 엉덩이를 한바탕 때린다. 그러면 필자는 이내 밖으로 내뺀다. 조금 지나 돌아오면 엄마는 마치 금방 때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상냥하게 대해준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다. 매를 맞아도 사랑의 매로 생각되고 반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친척집에서 자란 어린이는 완전히 다르다. 잘못해도 때리지도 엄하게 욕하지도 못한다. 이내 천대와 괄시로 생각되고 때리고 욕한 자도 가책을 받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슬하에서 자란 사람은 남의 비평, 아무리 냉혹한 비평도 달갑게 접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접수하기 싫어한다. 비평에 대한 부동한 태도, 이는 근근이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사실 단친(單親) 가정이나 친척집에서 자란 어린이에게 존재하는 문제점은 이보다 퍽 복잡하고도 많다. 대개 공부를 잘 안 하고 돈 쓰기만 좋아하며, 어린 나이에 술 마시고 담배피우고 연애하며, 심지어 10대 소녀가 임신하여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다가 죽는 것도 필자는 본 적이 있다. 15세 좌우의 몇 년 사이에 무너진 도덕성, 일그러진 인생은 평생 바로잡기 어렵다. 어릴 때 입은 정신상의 상처는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재한 중국동포의 대부분은 자식을 중국에 두고 왔으며 십상 팔구는 자식농사의 실패를 감내해야 한다. 몇 억을 벌었댔자 중국 대도시의 큼직한 집 한 채 값도 되나마나 하다. 큰 농사를 망치고 작은 농사를 하는 셈, 깨알을 쥐며 수박을 놓치는 셈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북경에서 항상 우리 동포더러 자식이 고중을 졸업한 후에 북경에 오던가, 아니면 자식을 북경으로 데려다가 북경호구를 만들어 주고 같이 생활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재한 중국동포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 들어가 자식이 고중을 졸업한 후 한국에 나오던가, 아니면 자식을 한국에 데려다가 같이 생활하며 공부 시키던가. 한국에 재중동포의 학력학교(초·중·고교)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이다.  
134    김치의 중국 이름 ‘辛奇’질의 댓글:  조회:11034  추천:11  2013-12-26
김치의 중국 이름 ‘辛奇’질의 정인갑 약 200~300년 전 중국어의 기基, 키其, 히希 음이 북경 음에서 구개음화하여 지, 치, 시로 변했고 -ㅁ받침이 -ㄴ받침으로(三:삼→산) 변하였다. 이것이 근대중국어가 현대중국어로 변한 중요한 표징의 하나이다. 중국 표준어음(북경 음)에 ‘김’이나 그와 유사한 음이 없다. 그러므로 ‘김치’의 중국 이름을 음역音譯하기 아주 어렵다. 그사이‘泡菜(pàocài파우차이)’라 불렀는데 문제점이 있다. 논리학적으로 볼 때 ‘담근 채소’라는 뜻인‘泡菜’가 나타내는 개념의 외연外延이 너무 넓다.‘화장실’을‘환경보호시설’이라 이름 짓거나 ‘신발’을 ‘교통도구’라 이름 짓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중국에도 ‘泡菜’라 부르는 음식이 있다. 필자가 먹어본 음식으로 사천四川음식에‘泡菜’가 있으며 무를 절여 발효한, 고추를 넣어서인지 약간 분홍색이 나는 음식이다. 사천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타 지역에도 ‘泡菜’라 부르는 음식이 많을 듯하다. 최근 한국농림수산부가 김치를 중국어‘신기辛奇(xīnqí신치)’로 이름 지었지만 언어의 차원에서 볼 때 역시 잘 지은 이름이 아니다. 아마‘맵고도 신기한’음식이라는 취지겠지만 현대중국어에서‘辛’은 ‘맵다’는 뜻이 아니다.‘맵다’를‘랄辣(라là)’라고 하며 그러므로 중국인은 김치를‘辣白菜’라고도 한다. 그러나‘辛白菜’라고 하지는 않는다. ‘辛’은‘辛苦·辛勞·辛勤·辛酸’등 다음절 단어에만 쓰이며‘고생하다, 수고하다’의 뜻이다.‘辛奇’라는 단어에 억지로 뜻을 부여하자면‘기특하게 수고하다’,‘대단한 수고’,‘수고가 기특하다’등으로 풀이될 수밖에 없다. 설사‘辛’의‘맵다’는 뜻이 잘 전달된다고 해도 김치의 이름으로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지역은 서남쪽의 사천, 운남, 귀주, 호남 등 몇 개 성의 사람들인데 대부분 극빈지역이다. 비싼 한국 김치를 많이 사먹을, 돈 많은 동남연해 지역의 사람은 매운 음식을 아주 싫어하고 기타 지역도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한국에서 고추를 어떻게 개발해서인지 사실 김치는 매운 음식과 맵지 않은 음식 중간에 있다. 김치 이름 자체에‘맵다’는 뜻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는 없다. 필자는 매워서 안 먹겠다고 우기는 중국인에게 항상 ‘먹어보아라, 그리 맵지 안하’라며 설득하곤 한다. 중국의 방언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치’한 글자만은 김치의‘치’와 음이 같지 않느냐하겠지만 그렇지 않다.‘奇치’는 북경, 동북 등 지역의 발음이고‘奇’를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기·키’로 발음한다. 아마‘기·키’로 발음하는 인구가‘치’로 발음하는 인구의 몇 배는 될 것이다. 결국은‘辛奇’와‘김치’는 의미나 발음이나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 된다. 필자는‘沉菜침채(천차이chéncài)’라는 이름도 된다고 본다.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沉菜’가 김치의 어원이고 조선시대 문헌에서 김치를‘沉菜’라고 하였다. 沉菜의 고대발음‘딤치’이다. 지금 평안도 방언에서 ‘김치 담그다’를 ‘딤장’이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상도, 함경도에서 ‘짐장’이라 하는 것도 다 ‘沉藏’의 한자어음이다. 이‘딤치’가 구개음화하여 ‘짐치’로 됐다가, 또 같은 치음(ㅈ·ㅊ)이 이화異化 현상이 일어나‘짐치→김치’로 변하였다. 한국 김치냉장고 유명 브랜드 ‘딤채’는 바로 ‘沉菜’의 고대 음이다. 중국에서 이미 사라진지 수백 년이 되는 말을 한국에서는 지금도 쓰고 있구나 하며 문헌을 좀 아는 중국 지식인들이 한국의 유서 깊은 문화에 감탄할 것이다. 또한 ‘담근 음식’이라는 뜻이 지금도 어느 정도 살아 있다. ‘金菜김채(jīncài진차이)’도 될 듯하다.‘뭐 대단해서 “金”자까지 붙이나’하면 ‘김치의 한국음을 그대로 옮겼다’라고 해석하면 된다. 또 중국에는 음식이름을 과장 표현하는 문화가 있다. 이를테면 식당 메뉴에 닭의 발을 鳳爪(봉황의 발)라 하듯이 말이다. 과장은 거짓말이 아니다. 沉菜건 金菜건 다 썩 잘 지은 이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辛奇보다는 낫다. ‘서울’의 중국이름 ‘漢城’을 ‘首爾’로 모색하고 고치는데 장장 10여 년이 걸렸다. 그런데 우리 겨레의 귀한 물질자산, 유네스코의 인류유형문화재로 등록이 된 김치를 서둘러 서뿔이 ‘辛奇’라고 고쳐 부르며 심지어 중국에 상표등록까지 하고자 하는데 바람직한가? 사실 김치의 이름을 중국어로 어떻게 짓는가는 서울을 중국어로 어떻게 부르는가 보다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133    복지와 함정 댓글:  조회:7922  추천:6  2013-11-18
며칠 전 아침, 필자는 출근버스를 탈 시간이 좀 남았고 날씨도 추워 대림역 8번 출구에서 1번 출구로 가는 육교의 의자에 앉아서 좀 쉬었다. 그런데 웬 50대 후반의 멀쩡한 남자가 와서 지금 몇 시인가 물어보아 알려주었다. 말씨로 보아 중국동포였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떡 사먹게 돈 좀 주세요”라며 손바닥을 내 미는 것이었다. 필자는 바지 지갑에서 철렁거리던 동전을 몽땅 털어주었다. 100원짜리 서너 개에 500원짜리 한 개 쯤 되었다. 그는 내 옆에 서서 그 동전을 손바닥에 놓고 한참 키질하다가 떠나갔다. 아마 맘속으로 ‘요까짓 것밖에 안주나? 깍쟁이 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듯하였다. 이 일을 색각하며 요즘 필자는 착잡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1인당 GDP가 1백~4천여 달러인 중국에서 평생 살며 이런 조선족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었는데 1인당 GDP가 2만2천 달러인 한국에서 이런 일을 목격했으니 생각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복지가 화근이라고 생각한다. 복지는 양 날의 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잘 실행하면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좋은 제도로 될 수 있고, 잘못 실행하면 나라의 재정을 망가뜨리고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로 전락시키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 제도를 간단히 해부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산 분야에서 생산수단을 국가소유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 분야에서 최대의 복지제도를 실행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온 국민을 게으름뱅이로 만들었고 나라의 재정을 파탄의 경지로 몰아갔다. 그러므로 14개 사회주의 나라가 그 체제를 포기했고 아직 고집하고 있는 북한의 생활수준이 한국의 1/20이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자유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점점 맹목적으로 복지를 늘이고 있다. 자칫하면 복지를 하다가 망한 사회주의 국가의 전철을 밟을 위험이 따른다는 각오를 하기 바란다. 서유럽의 경우 복지를 가장 늘인 이탈리아가 맨 먼저 재정위기의 시궁창에 빠져 모대기고 있다. 이젠 복지의 바람이 한국에 불어와 한국의 재정을 파탄의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으며(나라와 공기업의 빚이 천문학적 숫자) 한국국민을 점점 게으름뱅이로 전락시키고 있다. 매일 저녁 8시 수원 지하철역 8번 출구 앞에 가면 어느 자선단체에서 주는 공밥을 얻어먹으러 줄 선 자가 1백 명이 넘는다. 밤에 서울역 지하통로에 노숙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걷기 불편할 지경이다. 공밥 먹는 자나 노숙자 중에는 아직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60세 이하의 사람이 적지 않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부유하여 복지를 많이 하는 나라일수록, 이를테면 일본과 미국의 노숙자가 한국보다 더 많은 현상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항상 이런 말을 해 왔다. 한국인은 중노배기들도 공밥 얻어먹고 노숙하지만 재중국 조선족들은 심지어 꾀나 연로한 사람도 다 제 힘들여 일하며 살면 살지 놀고먹을 궁리는 안 한다. 우리는 한국에서 살아도 떳떳하다. 그런데 이젠 조선족도 복지에 매혹되어 공밥에 신경 쓰는 자가 점점 많아지고 심지어 동냥아치도 생기고 있으니 안타깝다. 재한 중국동포들이여, 자중하자. 동포타운
132    개천절과 중국의 하상주 단대공정 댓글:  조회:7767  추천:0  2013-11-13
개천절과 중국의 하상주 단대공정 정인갑 금년의 개천절 10월 3일은 단군 건국 4345주년으로 그 행사가 성대하였다. 필자는 텔레비전으로 기념행사에 관한 기사를 보며 수중의 라는 고서를 한 번 더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생각난 것이 중국의 하상주夏商周 단대공정이다. 중국은 1996년 5월부터 시작하여 2000년 9월까지 ‘하상주夏商周 단대공정’이라는 이름하에 이 세 왕조의 연대를 확정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이는 여러 분야의 학자 200여명이 5년간 힘써 달성한 성과이다. 중국 역사를 반만년으로 잡지만 하·상·주의 건국은 기원전 21세기, 기원전 16세기, 기원전 11세기로만 어림잡아놓고 있을 뿐이다. 확정적인 연대는 에 있는 서주西周 공화共和 1년, 즉 기원전 841년부터이다. 이는 고대문명국 중 기원전 4,241년부터 비교적 확정적인 연대를 갖고 있는 이집트에 비하면 자존심이 꺾일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연구를 거쳐 상기 세 왕조의 설립 연대가 각각 기원전 2,070년, 기원전 1,600년, 기원전 1,046년으로 해명됐으며 상조 중반기부터는 각 임금이 연대까지 확정됐다. 무슨 방법으로 수천 년 전의 연대를 확정할 수 있었는가? 아래의 두 가지 예를 보자. 한 청동기의 명문銘文에 따르면 서주 정鄭나라 의왕懿王 원년은 기원전899년이다. 또 고본古本 에 ‘의왕 원년 경성의 날이 두 번 밝았다(懿王元年天再旦於都)’라는 기재가 있다. 날이 두 번 밝을 수 있는 가능성은 동틀 무렵 개기일식(日全蝕)이 일어났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1997년 3월 9일 동틀 무렵에 개기일식이 이러나는 신강新疆 북부지역에서 체험한 결과 확실히 날이 두 번 밝는 감이었다. 정나라의 위치가 지금의 섬서陝西 서화西華 혹은 봉상鳳翔 일대며 천문학 계산에 따르면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841년간에 동틀 무렵 이 지역에서 일어난 개기 일식은 기원전 899년뿐이다. 이로써 의왕 원년을 기원전 899년으로 확정지었다. 금문과 천문학으로 연대를 확정한 예이다. 주여왕周厲王의 재위 연한을 에서는 37년이라 하지만 , , , 금본今本 에서는 각각 13년, 14년, 24년으로 다르다. 소편종蘇編鐘의 명문에 ‘惟王三十又三年王親遹省東國南國유왕삼십우삼년왕친휼성동국남국’이라는 기재가 있다. 여왕과 선왕宣王이 모두 33년 이상 재위했으니 어느 왕인가? 여왕 자신이 만든 종주종宗周鐘의 명문 ‘王肇遹省文武勤疆南國’이 위 명문과 부합된다. 또 에 진후晉侯 소蘇는 선왕 13년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유왕삼십삼년’ 중의 왕은 여왕이지 선왕이 될 수 없다. 이로 하여 여왕 재위 연한의 13년, 14년, 24년 설이 무너졌다. 청동기 명문을 연대 확정에 활용한 예이다. 2천 년 전부터 연구해 왔지만 큰 성과가 없던 과제를 이번에 해결할 수 있은 원인은 바로 상기 문헌학, 고고학, 문자학, 천문학, 탄소측정학 등 9개 분야의 44가지 전문가가 서로 합동하여 과학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단대공정이 아직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논란도 많다. 본 공정의 책임자는 마무리 짓는 글에서 이는 중국 상고역사 단대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앞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계속 연구, 수정될 것이다 라고 겸손한 말을 했다. 한국 역사상 확정할 수 있는 최초의 연대는 아마 위씨衛氏조선으로 기씨箕氏조선을 대체한 기원전 194년일 것이다. 그것도 중국 고서에 근거한 것이지 한국문헌에는 없다. 반만년 역사라고 하지만 그 전의 연대는 공백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한국 장서각藏書閣, 규장각奎章閣의 목록을 보면 적지 않은 도서의 저자 또는 출간 연대가 공백이다. 필자는 북한 방문 때 1994년에 구축한 단군릉을 견학한 적이 있다. 높이 22미터, 변 길이 50미터의 능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해설자의 말에 따르면 바로 그곳에서 5천여 년 전 단군 임금 부부의 해골을 발굴해냈다고 한다. 그 해설자의 기세당당한 태도와 열정에는 탄복이 가지만 필자는 그의 말을 추호도 믿고 싶지 않다. 한국의 개천절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고서, 한국의 에도 단군 건국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단군에 관한 기록은 (1287)나 (1363)에 비록 나타났는데 둘 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것을 민간 전설쯤으로 생각하고 웃어넘기면 그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을 국책으로 여기고 단기 4345년이니, 건국일이니 하고 있다. 역사는 과학이어야 한다. 한국은 과학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역사는 희박하고 정서적으로, 감성적으로, 어림 잡이로 취급하는 역사가 범람하는 것이 문제점이다.
131    이름부터 바로 지어야 한다 댓글:  조회:7318  추천:1  2013-10-11
  이름부터 바로 지어야 한다 정인갑     일본 침략군에게 성상납자로 충당되었던 여성들을 최초에 ‘여자근로 정신대挺身隊’라 불렀다. 1992년 제1차아시아연대회의(서울)에서 이 명사를 폐지하고 ‘위안부慰安婦’라 고쳐 불렀다. 최근에는 또 영어 ‘military sexual by Japan’에 맞추어 ‘일본군성노예’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장장 68년 만에야 정명正名이 되었으니 너무 한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명의 의의에 대해 중시가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므로 이 글을 쓴다.     사실상 한국에는 이렇게 정명을 한 것이 적지 않다. ‘이조李朝’라는 명사도 약 70년간 부르다가 ‘조선’으로 고쳐 불렀다. 일한합방 후 일본인은 저들이 멸망시킨 나라를 비하하여 ‘이조’라고만 불렀다. 한국, 중국 등도 이렇게 따라 불렀다. 20여 년 전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미 이를 정명하여 다시는 ‘이조’라는 명칭을 쓰지 않기로 하였다. 매우 지당한 처사이다.   일본군주를 일본과 중국 등은 ‘천황’이라 부르지만 한국만은 ‘일왕’이라고 부른다. ‘천황’은 ‘황제’이므로 뭇 왕국을 통솔하는 군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일본 본국과 조선총독부, 만주국, 대만 등 식민지를 망라하는 4개 ‘나라’를 통솔하는 황제의 뜻이 잠재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은 ‘천황’이라 부르지 않는다. 합리한 처사이며 필자는 한국인의 바른 처사를 찬양하며 중국사학자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한국에는 아직 정명되지 않은 것이 많다.     한국이 1592년 일본에게, 1636년 청국에게 당한 침략은 한국역사상 아주 잔혹한 침략이었다. 전자의 경우 나라가 망할 뻔했고 후자의 경우 60만 국민이 청국으로 끌려가 노예로 되었으며 임금이 꿇어 엎디어 비는 치욕까지 감내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 두 차례의 침략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 칭한다. 한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이름만 들으면 마치 일본인이 변경에서 집적거리며 노략질이나 좀 한 것과 같은 감이다. 명나라 말 척계광戚继光이 평정한 ‘왜구倭寇’는 바로 산동성 해안에서 중국인을 노략질한 일본인들이 저지른 사건을 일컫는다. ‘왜구倭寇’와 ‘왜란倭亂’은 정도가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필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두 이름을 침략의 정도와 걸맞게 고쳐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일합방’에는 ‘한’자를 앞에 놓았기 때문에 한국이 주체가 되어 일본과 합쳤다는 의미가 잠재해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항상 ‘일한합방’이라고 고쳐 불렀다. 얼마 전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필자의 칼럼 을 출판할 때 출판사 측에서 필자 문장 중의 ‘일한합방’을 아예 ‘일한병탄日韓倂呑(일본이 한국을 삼키다)’으로 고쳤다. 너무나 잘 고쳤다고 보며 한국도 적어도 ‘일한합방’이라 부르든가 좋기는 ‘일한병탄’이라 불렀으면 좋겠다.     1950년 일어난 한반도의 전쟁을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 초에 중국정부는 단동丹東에 중조우호기념탑을 세웠는데 그 외벽에 ‘1950년 6월 25일 조선반도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로 씌어 있다. 중국의 입장에 ‘내전’이란 애매모호한  말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부르는 ‘6·25전쟁’이라는 이름도 ‘내전’이란 이름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필자가 보건대는 ‘6·25남침전쟁’이라 고쳐 불러야 적절하다고 본다.     지금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 ‘다문화가정’도 잘못된 이름이다. 1980년대 미국의 미래학자 헌팅턴은 냉전체제가 해소됨과 아울러 앞으로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없어지고 문화의 충돌로 변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론 및 현재 세계적 관례에 따르면 관형어 없이 ‘문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문명(황하문명, 중동문명, 인도문명 등)’과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 두 가지 뿐이다. 종교적으로 볼 때 한국의 다문화는 1~2천 년 전에 이미 형성되었고 최근 10~20년간 외국인과의 결혼에서 생긴 가정은 오히려 종교 갈등이 없다. 또 한국에 시집온 중국인(여러 민족), 몽고인, 베트남인, 일본인은 모두 황하문명권에 속한다. 그 나머지는 아마 100분의 1이 될까 말까 할 것이다. 즉 문명권으로 보아도 다문화가 아니다. 그리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다민족가정’이라 부르는 편이 더 사물의 본질에 접근할지 모른다.     ‘800만 재외동포’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의미에서는 이렇게 불러도 괜찮다. 그러나 정치적 의미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에는 거주국국적 자, 한국국적 자, 이중국적 자 등 신분이 다른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일이 성사될 수 없다(名不正…則事不成).’ ‘정신대’나 ‘위안부’라면 그녀들이 자원으로 일본군에게 봉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일본군성노예’라 불러야 사물의 본질을 찌르며 문제해결의 방향이 바르게 된다. ‘일본군성노예’라 불러야 한다는 통일된 견해가 생겼고 언론에도 대서특필한지 한 달이 돼 오는데 지금도 한국에서 여전히 ‘위안부’라고 부르고 있다. 한심하다.
130    구의사 종친회 댓글:  조회:7683  추천:3  2013-09-07
  구의사 종친회 정인갑     1987년 초 필자는 난데없이 이런 편지를 받았다: ‘저의 이름은 풍영섭馮榮燮이며 수백 년 전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망명한 명나라 대신의 후손이다. 그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하는데 교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와 줄 수 있는지…회답을 학수고대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는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풍씨를 만났다. 70이 가까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청나라 수도가 심양일 때 조선왕자가 그곳에 인질로 갇혀 있었다. 그때 명나라의 대신 9명도 인질로 있었으며 조선왕자와 친하게 지냈다. 1644년 명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대청제국은 자부심을 과시하며 조선왕자를 놓아주었다. 9대신도 풀려났지만 망국노 신세에 갈 데 없어 조선 서울에 가 살기로 작심하였으며 조선왕자 또한 쾌히 받아주었다.     9대신은 서울에 정착했고 그 후손들의 조직이 바로 구의사九義士 종친회이며 당시는 풍씨가 회장이었다. 풍씨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구의사 종친회도 내 세대까지고 나의 아들, 손자들은 이에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죽으면 후손들은 이 역사를 아예 잊어버릴 것 같아서 이에 관한 책을 남겨놓으려 하는데 자료를 찾을 수 있어야지. 정교수님께서 제발 도와 달라.”     사실 풍씨는 이 일로 북경도서관, 북경대학도서관, 요녕성도서관 등에 편지를 써봤지만 회답 한 통 받지 못하였다. 한국 체류 중인 북경대 조선어 교수 이귀배李貴培 교수의 귀띰으로 ‘정인갑’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어 일루의 희망을 품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써보았다고 한다. 필자는 그에 대한 경모의 심정을 금할 수 없었으며 쾌히 동의하였다.     필자는 꽤나 신경을 써서 중국사회과학원 도서관장서 에서 구의사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 그러나 복사해주지도 않고(1919년 이전의 책은 복사 금지), 비치된 필름도 없었다. 해당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대학 동문을 찾아 몰래 빌려내어 복사하여 풍씨에게 드렸다. 풍씨는 그 자료에 근거하여 등 책을 만들었다.     후에 필자는 풍씨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아마 풍씨는 이젠 사망하였을 것이고 구의사 종친회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644년으로부터 금년까지 370년이 되었으니 이미 15세대 내려왔을 것이고 그 후손의 인구는 만 명이 넘을 듯하다. 한국의 적지 않은 족보에 초대 조상이 중국에서 온 아무아무 고관高官이고 또 아무아무 조상이 중국의 송宋, 명明 또는 청淸의 과거시험에 진사급제하고 금의환향하였다고 자랑하지만 중국문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근거가 없다. 대부분은 사대주의사상에 물젖어 조작한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구의사종친회만은 확실한 중국 명나라 고관의 후손이다. 구의사 종친회 외에도 중국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이민한 중국인이 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중국민족인가, 아니면 한민족인가? 에누리 없는 한민족이다.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자기네를 한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민족의 속성을 혈연으로 보기 보다는 문화로 보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혈연이지만 역사의 대하에서 보면 특정 역사에 속하는 문화이다.     1992년 필자는 풍씨의 안내로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하면下面 대보리大寶里 대보산大寶山에 가본 적이 있다. 깎아 세운 듯한 암석에 ‘朝宗巖’(낭선군朗善君 이오李俁의 필적), ‘만절필동萬折必東, 재조번방再造藩邦’(조선 선조대왕의 필적), ‘사무사思無邪’, ‘비리불동非禮不動’(명明 의종毅宗 황제의 필적), ‘일모도원日暮途遠, 지통재심至痛在心’(조선 효종孝宗대왕이 학자 송시열宋時烈에게 내린 필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산비탈에는 명 의종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이 비치돼 있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 왜적을 물리쳐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곳이다.     몇 백년간 구의사종친회는 이곳의 제사를 지내왔으며 풍씨가 지낸 제사도 수십 년이 된다고 한다. 필자도 경건한 마음으로 제단에 촛불을 붙이고 술을 붓고 큰 절 세 번 하였다. 이민 360여년이 지났지만 종친회를 뭇고 모국을 그리는 정신, 수십 년을 하루와 같이 제사지낸 성의, 정말 필자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이 일이 중국에 알려져 해외 판에 풍씨의 사적이 실려졌으며 풍씨를 ‘해외적자海外赤子’라고 불러주었다. ‘적자’는 고향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순결한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해외에 사는 우리 겨레는 어떠한가? 중국조선족의 경우 풍씨와 대비하면 너무나 부끄럽다. 조만간에 중국조선족은 중국인에 동화되고 말 것임이 뻔하다. 그러나 그 누가 자기 가족의 역사를 엮어 후세에 남겨줄 생각을 해봤나? 이런 목적으로 필자는 지금 한국에 와서 족보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해외에 사는 우리 겨레들이 적어도 가승家乘(가정의 역사) 정도는 남겨야 한다는 문장을 이미 여러 편 썼다. 많은 중국조선족이 이에 호응하여 주기 바라며 만약 필자의 도움이 필요하면 서슴없이 연락하기 바란다.  
129    순갑(順甲) 예찬(禮讚) 댓글:  조회:9339  추천:3  2013-07-14
순갑(順甲) 예찬(禮讚) 정인갑   지난 6월 6일 재한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동향 60여명이 순갑(順甲) 잔치를 치렀다. 1947년생이어서 올해 66세나는 동갑동향 11명이 환갑잔치 상 비슷한 큰 상을 단체로 받았고 함께 모인 동향 후배들이 그들의 만수무강과 나머지 인생이 순조롭기를 기원하였다. 뜻 깊은 이 행사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중국의 전통문화에는 나이와 관계되는 명칭이 많다. 10세 안팎 충년(沖年), 15세 지학(志學)계년(笄年), 20세 약관(弱冠), 30세 이립(而立), 40세 불혹(不惑), 50세 지천명(知天命), 60세 이순(耳順)환갑(還甲)주갑(周甲)회갑(回甲), 70세 종심소욕(從心所欲)·고희(古稀)희수(稀壽), 77세 희수(喜壽), 88세 미수(米壽:八+八=米), 99세 백수(白壽:百-一=白)…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순갑(順甲)이라는 명칭은 없다. 무순 동향의 순갑 잔치는 어떻게 생겼나? 2006년 필자는 고향 무순에 가서 모 동창의 환갑잔치에 참가한 적이 있다. 기차로 북경에 돌아오는 길에 어느 심양 한족과 동석하였는데 그도 동창의 ‘환갑’에 참가하고 돌아가는 길이란다. 그런데 60세 환갑이 아니라 66세 생일이란다. 그의 설명은 아래와 같았다: ‘60세에 환갑을 쇠자니 너무 젊다는 감이다. 70세 생일을 쇠자니 그전에 죽는 사람도 꾀나 있고, 또한 나이가 좀 많아 술도 시원하게 마실 수 없거니와 팔팔하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기자니 몸이 다소 불편하다. 비교적 적합한 나이가 66세이다, 또한 66은 육육순(六六順)이므로 길한 숫자이다. 그러므로 지금 심양의 한족들은 66세의 생일을 쇠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 이듬해가 바로 필자의 환갑이었다. 젊은 나이에 환갑을 쇠자니 좀 건방지고 싱거워보였다. 게다가 아들이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아 절을 할 손자도 없다. 하여 ‘일흔 살 날 때 가서 보지’라며 환갑을 쇠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심양 한족의 말을 꺼냈더니 여러 동창들이 한국에 나와 있는 66세의 동갑들이 같이 6월 6일에 잔치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으며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번 순갑 잔치었다. 서울의 무더운 7월을 피하느라 양력 6월 6일에 치렀지만 동북삼성 같으면 음력 6월 6일(양력 7월 초·중순)에 치러도 좋을 듯하다. 이 잔치 이름을 ‘육육순갑(六六順甲)’이라 지었으며 순갑(順甲)으로 약칭한다. 육육은 66세라는 뜻과 중국전통문화에 순조롭고 길한 숫자 육육순(六六順)이라는 두 가지 뜻을 겸하고 있다. ‘갑(甲)’은 해(年)라는 뜻이다. 66세의 동갑들이 6월 6일에 모여 축제를 벌였으니 실로 육육육육(六六六六) 대순(大順), 특대순(特大順)이다. 이 축제를 원만히 치렀으니 우리 동갑들은 나머지 인생이 무한 순조롭게 잘 펼쳐질 것이라고 믿는다. 금년에 47년생이 쇠었으니 명년에는 48년생, 후년에는 49년생…잔치 날 우리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나갈 것을 다짐했다. 우리 무순 동향뿐만 아니라 많은 재한 동포들, 심지어 중국에 있는 동포들도 나이 66세에 순갑 잔치 치를 것을 건의한다. 옛날 70세까지 사는 사람은 희소하였다. 지금은 70대는 보통이며 80대, 90대까지 사는 자도 비일비재하다. 65세를 기준으로, 그 이하를 중년으로 하고 66세 순갑 잔치부터 노년의 시작으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28    정묘, 병자호란과 중국조선족이민사 댓글:  조회:9326  추천:2  2013-06-26
정묘, 병자호란과 중국조선족이민사 정인갑   최근 몇 년간 필자에게 중국조선족의 이민사에 관한 자문이 자주 들어오곤 한다. 그러면 필자는 줄곧 아래와 같이 알려주곤 하였다: a, 1860년대~1910년의 생활이민. b, 1911~1918년 파산 이민. c, 1919~1931년 독립이민. d, 1932~1936년 자유이민. e, 1937~1945년 집단이민 등이다.   얼마 전 필자의 자문을 받고 어느 포럼에 참가하여 이렇게 발언하였다가 중국 측 학자의 반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중국 측 학자의 발언에 따르면 중국조선족 이민사에 1620~30년대의 ‘이민’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1620~30년대의 ‘이민’이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의 일을 일컫는 것이다. 이 문제는 중국조선족이민사에 관하여 팽팽하게 대립된 두 가지 관점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란 무엇인가? 여진족(女眞族)이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賓縣)에 후금 정권을 설립한 이래 국력이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명의 속국이며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으로 나라를 되찾은 조선은 금-명 전쟁 때 명의 편에 섰으며 출병하여 금과 전쟁도 하였다. 조선의 후환을 없애고 명과의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두 차례의 대형 침략전쟁을 발동하였는데 한국 역사상 이를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라고 한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금은 조선인을 부지기수로 죽이고, 재물도 부지기수로 약탈하였으며 조선인 60만 명을 노략해 갔다. 노략된 조선인은 모두 노예로 전락되었다. 심양(瀋陽) 노예시장에서 매매된 조선인 노예만 하여도 몇 만 명이나 되었다. 노예시장에서 마주친 자식과 부모, 형제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감할 정도로 비참하였다.   노략당한 사람 중에는 왕실, 대신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세자 이형(李瀅) 가족의 남자 8명, 부인 11명, 가정(家丁) 9명, 태감 7명, 일꾼 22명이 있다. 차자 이구(李湨) 가족이 부인 5명, 가정 3명, 일꾼 16명, 병정 44명도 있었다. 그 외에 상서(尙書) 안일훈(安一訓), 시랑(侍郞) 박로(朴魯), 박황(朴黃), 무관 이집사(李集思), 문관 이명순(李明順), 미응하(米應夏),이택고(李澤高), 견류성(甄類成), 이규(李奎) 등 182명에 말 303필이 붙잡혀 갔다.   조선왕조 때 200여 년 간 권귀 행세를 한 안동김씨의 집성촌 경북 안동군 소산(素山) 마을에 가면 김상헌(金尙憲)의 시조를 새긴 큰 바위가 세워져 있다: ‘가노라 三角山아/다시보자 漢江水야/故園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은 예조판서에 있으며 반청(反淸)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동조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에 붙잡혀 가 6년간 옥살이를 하고 돌아왔다. 그가 잡혀가는 길에 서울을 지나며 쓴 것이 위의 시조이다.   후에 청이 ‘은혜’를 베풀어 노략해간 조선인을 되찾아가게 하였으나 너무 많은 돈이나 양식을 받기 때문에 돌아온 자가 백에 한둘 정도뿐이었다. 천신만고를 거쳐 스스로 도망쳐 온 자가 있었으나 청의 압력에 못 이겨 다시 붙잡아 보내진 자도 많았다. 돈을 주고 속회(贖回)되어온 부자집 부녀들은 시집에서 더러운 몸이라며 받아주지 않아 다시 비극의 심연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1970년 12월 필자가 군복무를 할 때 행군훈련 차 요녕성 개원현(開原縣) 위원보향(威遠堡鄕)의 어느 박가촌이라는 마을에 들린 적이 있었다. 조선족이 아니라고 우기다가 80대 노인을 찾아가 반복 설득하니 “조선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 가문의 두 형제가 몇 백 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하였는데 지금은 18세대쯤 된다. 저의 조부가 한국말을 좀 할 줄 알았는데 부친 세대부터는 한국말을 전혀 모른다.”고 말하였다. 지금 북경 동북쪽으로부터 동북 전역에 이르는 지역에 이런 박가촌이 가끔 보이는데 바로 정묘, 병자호란 때 붙잡혀간 조선인의 흔적일 것이다. 다른 성씨도 많겠지만 민족 특색의 성씨가 아니므로 고증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 부류의 사람을 중국조선족 이민사에 넣어야 하는가이다. 정묘,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간 우리민족은 이민이 아니고 포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잔혹한 압박을 받았으며 가장 비참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또한 이들은 완전히 동화되었으므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조선족 구성원에 속하지 않는다. 이를 우리민족의 이민사에 넣는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중국인이 이를 이민사에 넣자고 하지만 이는 가해자의 주장에 불과하다. 피해자의 견해를 더 존중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60만 명 중 많이 잡아 절반이 돌아왔다고 쳐도 30만의 후손이면 지금 적어도 500만은 될 것이다. 이 또한 우리민족의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을 이민사에 넣으면 적합하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 어떤 차원으로 취급하여야 마땅한가는 학술계가 연구해 볼 바이다.
127    언론과 국민의 기질 댓글:  조회:10388  추천:2  2013-06-13
언론과 국민의 기질 정인갑 ‘물질은 정신을 결정한다(物質決定精神)’, ‘존재는 의식을 결정한다(存在決定意識).’ 이는 유물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당연 정신의 반작용도 부인하지 않는다. 한개 나라의 역사, 영토, 체제, 문화, 교육, 경제 등 존재는 그 나라 국민의 정신면모―국민의 기질을 형성시킨다. 한 사람의 기질 형성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지만 그가 평생 종사한 직업의 존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평생 유치원, 초등학교 교원만 한 자는 보통 사고가 협소하다. ‘아무개는 나의 누룽지를 훔쳐 먹었다’, ‘아무 학생은 내 얼굴에 대고 방귀를 뀌었다’, ‘어느 누구는 남의 숙제를 베꼈다’ 등이 그가 해결해야 할, 학생들이 고발하는 ‘시비’ 거리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면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국민성이나 개개인의 기질 형성에 그 나라 언론의 작용도 크다고 본다. 한국인의 기질이 중국인보다 협소한 원인을 소국이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항상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최근 윤창중 사건 등을 통하여 한국 언론의 책임도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모로 보나 윤창중 사건은 사실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만약 윤창중 같은 사건이 중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취급되었을 것인가? 주요한 언론들은 한동안 잠잠하고, 항간에서 쉬, 쉬! 하다가, 조사가 마무리된 후에 약 4~8초의 이런 기사를 한번만 낸다: ‘윤창중이 이번 해외방문 때 풍기문란(不檢點) 의 일을 저질러 관계부문에서는 비평을 했으며 본인은 사표를 냈다.’ 심지어 이 일이 사소하므로 기사를 안 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한국은 이 일을 약 8개의 TV 채널이 각각 평균 8시간 이상씩 다루었으니 누계 64시간, 그 외에 주요 신문에도 많은 기사가 나갔다. 큰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북한의 핵, 미사일, 전쟁도발 망언,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이런 큰일보다 오히려 ‘내 얼굴에 방귀 뀌었다’ 급의 ‘시비’에 더 집착했다. 윤창중 사건뿐만이 아니다. 매일 나가는 한국 주요 매체의 뉴스를 보면 ‘모 화재에 몇 백만 원의 재산 피해를 보았다’, ‘모 승용차 충돌 사건으로 3사람이 다쳤다’, ‘모 연예인이 이혼 위자료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등 ‘남의 숙제를 베꼈다’ 급의 기사가 부지기수이다. 이런 뉴스들은 끊임없이 한국국민을 협소한 국민으로, 한국정치인을 소인배정치꾼으로 만들고 있다. 결과―다 언론의 책임은 아니지만―한국국민은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데모한다. 좀 큰일이면 촛불 시위이다. 한국 국회는 사소한 일에 너무 집착하고 싸운다. 말하자면 ‘누룽지를 훔쳐 먹었다’ 급의 일로 국민은 데모하고 국회는 싸우고, 나라는 살풍경하다. 언론이 이런 일에 열중하니 이런 일을 조장(助長)하는 효과를 빚어내며 악순환 시킨다. ‘13억 대국의 언론과 한국 언론을 어떻게 대등하게 비교하나?’ 그렇지가 않다. 중국 인구는 춘추전국시대에 2천만 좌우였고 통일 진(秦)부터 명(明)말까지는 5~8천만에서 맴돌았다. 그때 중국이 만날 ‘누룽지 훔쳐 먹었다’ 급의 일에 집착하였다면 그렇듯 많은 위대한 정치가가 배출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은 북한, 해외국민까지 합치면 인구가 8천만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 대국의 수천 년간의 인구 숫자와 맞먹는다. 게다가 인구와 경제력을 합치면 세계 10위권에 드는 대국에 속한다. 다만 국민의 기질이 아직 대국화 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 원인에는 한국 언론의 책임도 크다. 텔레비전 시대이므로 더욱 이러하다. 중국은 황금(黃金) 뉴스 시간대(時間帶)의 뉴스가 반시간뿐이다(19:00~19:30). 한국 인구와 대등한 한 개 성의 뉴스가 이 시간 뉴스에 하루에 한 건(4~8초가량) 나가기도 어렵다. 중국 한 개 성 규모의 황금 시간대의 뉴스가 한국은 50분이다(KBS21:00~21:50, SBS20:00~20:50 등). 그러므로 온갖 사소한 일들을 다 취급하여 시간을 채우고 있다. 그 시간을 대폭 줄이고 국내 뉴스 15분, 국제 뉴스 15분 정도만 하며, 큰 뉴스만 취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은 뉴스를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지방 언론에서 취급하던가, 아니면 KBS, MBC, SBS 등에서 취급하더라도 황금 뉴스 시간대가 아닌 다른 시간에 하면 된다. 그렇게 몇 년 내지 10년 정도 견지하면 한국국민, 한국 정치인도 지금보다 좀 대범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126    다문화가족과 인종개량 댓글:  조회:14512  추천:16  2013-06-05
지금 적지 않은 외국 여인이 한국으로 시집오며 한국여인에게 장가오는 외국남자도 늘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다문화가족이 많아지고 있다. 이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며 앞으로 한국에 끼칠 영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뚜르게네프(1818~1883)의 소설 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사람이 체첸 시골의 한 집에 들렀는데 그 집의 여인이 절세의 미녀였으므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작가는 이 장면에 이어 체첸 여인은 보편적으로 예쁘며 혹시 세계에서 가장 예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프랑스 과학 환상 소설가 쥘 베른(1828~1905)의 소설 (1869)에 말레이시아의 여인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여놓은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당시 세계 노예시장에서 말레이시아 여인의 값이 가장 비싸다고 하였다. 50년 전 필자가 중학생 시절에 상기의 책들을 보았으며 그 당시는 이런 말들의 정수(精髓)를 느끼지 못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다 과학적으로 도리에 맞는 말들이다. 유전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혈연관계가 먼 사람 간, 좋기는 타민족과 결합할수록 그 후손이 건강하고 총명하며 인물도 예쁘다고 한다. 이번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의 흉수가 텔레비전에 공개되었을 때 우리에게 준 첫 인상이 어쩌면 둘 다 그렇게도 잘 생겼나이다. 그들은 러시아 안에 있는 체첸공화국 사람이다. 체첸인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계통의 나흐족으로서 주위의 다른 민족과 많이 혼혈된 민족이다. 필자는 서울 지하철 안에서 아주 예쁘게 생긴 이방 여인 대여섯이 한데 뭉쳐 다니는 것에 서너 번 부딪친 적이 있다. 호기심이 들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물어보았더니 말레이시아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키가 좀 작고 피부가 약간 검기는 하지만 정말 대단히 예뻤다. 말레이시아 사람은 남북으로 몽골이아 인종과 남양군도 인종으로 혼혈되었고, 게다가 서양 인종까지 합류하여 인종적으로 대단히 많이 혼혈된 민족이다. 중국은 북방 사람이 남방보다 예쁘고 동쪽 사람이 서쪽보다 예쁘다. 가장 못난 사람이 혼혈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서남―운남, 귀주, 광서 등―사람들이다. 우리 한민족은 2천 년 전부터 영토가 점점 쪼들렸으므로 혼혈이 많이 되지 못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체질이나 지력이나 인물이 고작해야 보통 수준밖에 안 된다. 일본인보다 나을지 몰라도 중국인보다는 못하다. 1987년 필자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친구를 만나러 학생 2,000명이나 된다는 어느 학원의 문어귀에 둬 시간이나 서 있은 적이 있다. 들락날락하는 20대 초반의 여학생 수백 명을 보았지만 예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국여자 왜 못생겼나’라는 말을 했다가 한국인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때 필자가 반박한 말이다: “중국여인은 한국여인보다 키가 한주먹(대충 10cm) 크고, 엉덩이가 한주먹 높이 달려 있으며, 허리는 한주먹 가늘다.” 이것이 이른바 필자의 유명한 한중 여인 인물비교의 ‘세주먹설’이다. 후에 많은 한국인이 중국에 진출하였으며 그때 필자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세주먹설이 맞다고 인정하여주었다. 20여 년 간 한국 다문화가족에서 출산된 아이가 늘어나고 있으며 작금에는 이 때문에 한국인구의 축소를 모면했다는 통계도 나왔다. 앞으로 다문화가족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다문화가족에서 출산된 2세는 1/2이 외국혈통, 3세는 1/4이 외국혈통, 4세는 1/8이 외국혈통…이다. 문제는 2세, 3세, 4세…로 벋어나가며 외국혈통의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만약 외국인과 결혼한 자가 10만 명이고, 평균 한 가정에서 아이를 둘씩 낳으며, 평균 25년이 한세대라고 할 때 약 200년 8세대가 지나면 외국혈통의 한국인이 1,280만 명, 한국인구의 1/4을 차지하게 된다. 2,000여 년 전 중국 연(燕)나라 장군 위만(魏滿)이 한반도에 쳐들어가 고조선 왕을 죽이고 자칭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거느리고 간 대오는 1천여 명밖에 안 된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남은 중국 과두(寡頭) 통치자가 고작해야 몇백 명밖에 안되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가장 많은 외족이 한반도에 와 살은 예이겠다. 10만 명의 외국인 결혼자, 이는 5천 년의 민족사에 전례 없던 기적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가 높아진데서 일어나는 좋은 현상이겠다. 당장은 별치 않을지 몰라도 먼 앞날을 바라볼 때 민족인종의 개량에 크게 기여될지도 모른다. 이런 차원에 입각하여 한국인과 외국인의 결혼을 권장하며 질이 높은 이방인과의 결혼은 더욱 장려하고 그들의 후손에 대한 교육에도 중시를 돌렸으면 한다.
125    한국에 한 번 더 간절히 충고해 본다 댓글:  조회:15107  추천:13  2013-04-27
한국에 한 번 더 간절히 충고해 본다 정인갑   최근 발표된 러시아 전문가 안드레이란고프의 문장은 우리겨레에게 큰 충격을 줄만한 문장이다. 그의 문장에 따르면 비록 조상, 선친의 고향이고 돈도 번 고장이지만 중국 조선족은 한국보다 중국에 더 친근감을 가지며 종국적으로 한국에 정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족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조선족과 한국 간은 많은 껄끄러운 일이 있었다. 한국의 책임? 조선족의 책임? 양자 모두의 책임? 아니면 재외 동포와 모국간의 관계는 본래 이런 것?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생각해 왔다. ‘화교와 모국, 일교(日僑)와 모국, 유태인과 모국 간은 관계가 좋은데 우리는 왜 이러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란코프 교수는 그 책임을 한국에 돌렸다: ‘한국 정부가 이(조선족―필자의 주)를 반기지 않는다.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들이 고국인 한국에 몰려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조선족들도 한국에 남게 되면 “2등시민”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향에서는 한국에서 느끼게 되는 차별을 느끼지 않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이는 제3자의 견해, 공정한 신판이므로 한국정부가 이 문제를 정시하여야 한다고 본다. 재한 조선족과 한국과의 밀원관계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잠깐 뿐이었다. 1987년 필자가 처음 한국에 갔을 때 환영을 받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왔다’, ‘한 세기 간 이역 땅에 살며 우리의 말과 풍속을 지켜왔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앞으로 우리가 중국에 진출할 때 도와줄 사람이 바로 당신네들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급전직하하였다.   한국정부가 중국동포를 섭섭하게 한 일들을 아래의 몇 가지로 요약해 본다.   1. 한국인의 중국동포에 대한 용역(傭役) 사기로 천과 만을 헤아리는 조선족이 피해를 보고 심지어 파산된 가정, 자살한 사람도 많지만 한국정부는 10여 년간 이를 방치하였다.   2. 중국동포가 한국에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하고 유독 여자가 시집가는 길만 열어놓아 중국조선족공동체의 해체를 조장(助長)하였다.   3. 방문취업제 자체는 괜찮지만 한국어시험이라는 액화 때문에 중국동포가 엄청난 손해를 보게 하였다. 또한 방문취업제를 퇴보한 기술교육으로 대체하였다.   4. 이름 좋은 ‘기술교육’은 중국동포에게 비자장사를 하는 자들을 돕는 부정만 초래한다.   5. 중국동포에게 이중 잣대를 쓴다. 외국인을 우대할 때는 동포라며 우대하지 않고(해마다 수천억의 자금을 외국인에게 쓰지만 50%를 차지하는 중국동포에게는 쓰지 않음), 비자문제에 부딪치면 외국인이라며 제한한다.   물론 조선족의 잘못도 있다. ‘가짜’ 약 장사, 사기 결혼, 위명 여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의 잘못은 한국 정부의 그릇된 정책이 유발한 것이며 그 책임은 주요로 강자인 한국 정부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란고프의 말이 천만 맞다.   지금 한국의 상황은 한국인이 1등시민, 탈북자가 2등시민, 기타 외국인(필리핀, 몽고, 베트남 등)이 3등시민, 중국동포는 4등시민이다. 란고프의 중국동포 ‘2등시민’ 설은 한국에서의 중국동포의 지위를 좀 높게 보았다. 만약 사돈에 팔촌까지 얽으면 중국동포의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그들을 ‘4등시민’으로 취급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소냐?   세계 각국에 널려 있는 유태인은 2천 년 전에 고국을 떠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1950~60년대의 이스라엘은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더 열악하였다. 그런데도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찾아가면 다 너그럽게 받아주고 우대하였다. 란고프 교수는 바로 1950~60년대에 이스라엘로 찾아간 러시아 적 유태인과 비교하여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불과 100년 전에 떠난 동포, 아직 한국에 많은 친인척이 있는 인간, 그것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후손을 이렇게 까지 냉대해서 되겠는가?   태국 태족(泰族)과 중국 다이족(傣族)은 본래 같은 민족이다가 갈라졌으며 지금은 서로 낯선 사람 취급을 하며 만나도 그리 반가움을 못 느낀다. 중국동포는 이주 100여 간 완벽하게 민족성을 지켜왔으며 지난 날 중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워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외면하는 변두리까지 왔다. 한국이 돈 벌 고장이 못되는 그날이 오면 200만 중국동포는 모국과 외면해 버리는 그 날이 올 듯하다.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우리민족은 세계 어디에 살던 헤어지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로 남았으면 했는데 말이다. 너무나 안타깝다.   이제라도 한국정부에서 중국동포를 진실로 화끈하게 우대하는 정책을 내놓아 그사이 생긴 알력을 미봉해보기 바란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다. 약 10년쯤 지나면 이 기회도 없어진다. 필자는 20년 전부터 이런 글을 많이 썼지만 오늘 한 번 더 써본다.  
124    ‘오일재상’ 댓글:  조회:7867  추천:2  2013-02-13
‘오일재상’ 정인갑 박근혜 당선인이 선정한 국무총리 후보 김용준이 선정 된지 5일 만에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아들의 병역비리, 부동산 투기의 의혹으로 여론이 비등하자 미연에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김용준 본인의 인격과 그에 대한 여야 정당의 평가에 대하여 필자는 별 관심이 없다. 오직 이 소식을 접한 필자의 머리에 ‘오일경조(五日京兆)’라는 중국 고대 장고(掌故)가 떠올랐다. ‘경조’는 ‘경조윤(尹)’의 준말인바 지금의 ‘서울시장’과 비슷한 관직이다. ‘오일경조’는 서울시장을 닷새밖에 못한다는 말이다. 국무총리는 옛날 재상에 해당되므로 필자는 오늘 일어난 사건에 ‘오일재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오일경조’의 출처는 이다. 장창은 한무제(漢武帝) 때에 경조윤을 하였으며 비상히 총명하였다. 부인의 눈썹을 그려줬으므로 황제가 파직시키려 하였다. 고급관료의 체통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장창은 황제에게 “소인이 알기로는 부부간의 관계에는 눈썹을 그려주는 것보다 더 추잡한 일이 많을 건데요”라고 하니 황제가 말문이 막혔으며 파직처분을 취소하였다. 이렇듯 총명한 장창이 양운(楊惲)의 사건에 연루돼 처벌받을 위험에 임박했다. 장창은 당할 봉변을 모면하기 위해 심복 서순(絮舜)으로 하여금 양운 사건을 담당하게 했다. 그런데 서순은 시간을 끌며 사건 처리를 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며 권하니 “장창은 이제 오일경조가 뻔한데 내가 왜 그를 따르겠나”라며 동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화가 난 장창은 재빨리 손 써 서순을 처형해버렸다. 이 장고를 중국관료들은 2천여 년 간 내려오며 기억하고 있다. ‘오일경조’는 ‘임직 시간이 짧거나 곧 관직을 떠나다’ 뜻의 사자성구로 고착됐다. 이 성구는 경우에 따라 ‘며칠 안 남았으니 그놈을 따르지 말자’, 또는 ‘며칠 안 남았지만 서둘러 그놈의 비위에 거슬리다가 손해 보지 말자’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 행정부의 관료는 너무 빈번하게 바뀌는 것이 흠이다. 김영삼~이명박 정부의 20년에 바뀐 총리가 16명이나 된다. 거의가 다 ‘오일재상’, ‘오일경조’이다. 대통령 외에는 왜 임기가 없는지? 중국은 건국 63년에 국무총리를 모두 6번 밖에 바꾸지 않았다(주은래, 화국봉, 조자양, 이붕, 주용기, 온가보). 주은래의 종신제 외에는 대체로 임기가 5~10년인데 괜찮은 듯하다. 국회의 인사청문회 제도를 실행한 후 고위층 관료가 오일재상, 오일경조에도 못 미친다. 전 이화여대 총장 장상 여사가 국무총리로 발탁됐다가 20여일 만에 국회에서 그 인준이 부결됐다. 국무총리를 가장 짧게 한 사람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했는데 이번에는 발탁된지 5일 만에 사퇴한 새 기록이 생겼다. 모두 총리를 하루도 해보지 못한 낙태아이이다.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한국의 인사제도가 너무 각박한 것이 아닌지, 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관료의 나라로 될지 모르겠다. 어쨌든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123    ‘세 번째 아이’의 의미 댓글:  조회:7837  추천:6  2013-01-18
‘세 번째 아이’의 의미 정인갑 zhengrj@naver.com   이번 대선에 모 후보가 세 번째 아이에 한해 무료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대선 공약을 내놓았다. 특정 유권자에게 어떤 실리를 가져다줌으로써 어떻게 표밭과 연결될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못 천박한 생각이고 필자는 좀 더 깊은 의미를 따져 보련다. 아이를 셋 이상 낳으면 인구 중에 젊은 층의 비례가 커지므로 인력 시장이 그만큼 활력을 띨 것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지속되면 나라의 인구가 불어난다. 국토는 좁고 인구가 많은 한국인데 이제 인구가 또 불어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장원하게 보면 불행이 아니겠는가? 원래 인구가 많음은 그만큼 부담이 크다는 것뿐이었다. 지난 세기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던 때 거지가 몇 억이나 되는 중국은 동아병부로 이름났었다. 감기가 유행해도 중국에서 건너온 병이라고 몰아붙였을 정도이다. 20여 년 전 서방국가가 ‘중국은 인권이 없다’, ‘출국의 자유도 없다’라며 중국을 폄하할 때 등소평이 ‘한 1억쯤 미국에 보낼 터이니 받아주겠느냐’고 말해 미국을 당황하게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돈 적이 있다. 필자가 1987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모택동과 중공 그만하면 대단하지, 10여 억 인구를 먹여 살렸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인구는 밥 먹는 부담거리였다. 중국의 각 도시, 특히 북경은 인구를 줄이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타지방 사람의 진입을 막았다. 그러나 인구가 많다는 개념의 의미가 점점 변하고 있다. 인구가 많음은 먹여 살릴 걱정거기가 아니라 구매자가 그만큼 많으므로 돈더미가 큰 시장이라는 것이다. 호금도가 각종 국제회의에 참가할 때 많은 나라의 지도자가 호금도와의 단독 회면을 바라는 것은 예뻐서가 아니라 13억 시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중국을 외면할 수 없는 것도 13억 시장 때문이리라. 유럽 프로축구 팀과 미국 프로농구 팀에 중국선수가 활약하는 데는 다른 의미가 있다. 중국TV는 이 팀들의 경기를 반드시 중개방송하며 중국인들도 그 경기의 관람을 선호한다. 중국선수 몇 때문에 13억 중국인의 이목을 끌므로 선수의 수준을 떠나 광고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중국선수를 쓸 만하지 않은가! 한국도 이런 이득을 챙길 생각을 해볼 만하겠다. '20-50국'이라는 개념이 있다. 1인당 소득 2만 달러(20K, K는 1천), 인구 5천만 명(50M, M은 100만)을 동시에 달성한 나라다. 국제사회에서 1인당 소득 2만 달러는 선진국 문턱 진입의 기준, 인구 5천만 명은 대국의 기준이다. 한국은 2012년 6월 23일 오후 6시 일본•미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영국에 이어 세계 7번째로 ‘20-50’클럽 국가가 됐다. 이 소식이 중국조선족의 모 사이트에 게재되었을 때 200만 중국조선족이 얼마나 격동되고 마음이 벅찬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이 ‘20-50국’의 영예를 잃을 위험이 있다. 한국인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불원 간 한국인구가 5천만에 훨씬 못 미치는 때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 번째 아이에 한해 무료 교육을 실시한다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병역 면제 등 다른 혜택도 많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남북이 통일되고 인구가 1억을 넘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3만 달러에 달한다면 그야말로 세계 어느 나라나 괄목하고 우러러보는 나라가 될 것이 아닌가!
122    우리 겨레의 디아스포라 댓글:  조회:11203  추천:6  2012-12-30
“디아스포라”는 한 민족 집단이 본토를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민족이산의 의미이다. 1세기 때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수많은 유대인이 세계로 흩어진 것이 방대한 디아스포라의 예이겠다. 2,000여 년간 우리 겨레의 디아스포라를 대충 짐작해 보면 아래와 같다. a, 기원전 108년 한(漢)이 고조선을 멸망하였을 때 많은 우리겨레가 중국내륙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b, 660년 백제가 망할 때 많은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상층귀족, 심지어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였다. c,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 20만 명의 고구려 유민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중 일부는 말갈족과 함께 발해국을 세웠었다. d, 임진왜란(1592~) 때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e,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 청국으로 잡혀간 우리겨레가 60여 만이다. f, 한일합방이후 중국, 일본 등으로 확산된 우리겨레가 200만이 넘는다. g, 1960년대부터 한국인의 해외이민이 활발해졌고, 1990년대 이후는 글로벌화하며 많은 한국인이 해외로 진출하였으며,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이 앞으로 진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 것으로 짐작된다. 2,000여 년간에 형성된 우리 겨레 디아스포라의 후손을 통계하면 2,000만 명도 넘을 것이다. 이들의 역사는 우리 겨레의 민족사(국사와는 구별됨)의 소홀히 할 수 없는 조성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이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으며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다행히 일본과 중국에서 외교관 활동을 한 유주열(柳洲烈 전 나고야 및 베이징 총영사)선생이 진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재일본 조선인 후예 박무덕(朴茂德)이 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납치돼 간 조선인 중 기술자들은 전쟁 후 쇄환되어오지 못했다. 특히 일본의 남쪽 가고시마(鹿兒島) 근처로 납치 이주된 전라도 남원 陶工들이 그의 예이다. 당시 가고시마 영주는 도공들이 조선의 백자를 만들 수 있도록 최대의 배려를 하였다. 조선의 이름, 집, 음식, 복식, 사당 등을 보존토록 하여주었다. 기술 유출을 우려하여 외부와 격리, 고립시키고 마을 내 조선인끼리만 통혼토록 하였다. 수백 년간 철저히 관리한 결과 가고시마의 사츠마(薩摩) 도자기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명치유신이 지방 영주(大名)제를 폐지되고 중앙집권제를 실행하자 상기 조선인 도공촌이 해체되었다. 도공의 자녀들도 도공직을 세습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일본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조선도공 박수성(朴壽勝)은 성(姓)을 일본士族(양반) 성 도고(東鄕)라 고치고 5살(1887생) 난 아들 朴茂德을 東鄕茂德(도고시게노리)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도고시게노리는 東京帝國大學 독문과를 졸업하고 31살에(1913) 중국 奉天(沈陽)총영사관의 영사관보로, 1919년에 주독대사관에 부임하였다. 당시는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외식민지도 빼앗기고 전쟁 배상금지불을 위해 나라의 존위가 위태로운 때었다. 독일에서의 이러한 체험은 후에 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에 활용되었다. 1945년 그는 外相의 신분으로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천황에게 건의한 사람이었다. 무덕은 베를린에서 근무하며 40세의 나이에 독일여인의 배우자를 얻었다. 그녀의 남편은 건축가 게오르그(Georg de Lalande)이다. 그는 당시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 청도(靑島)에서 일하다가 1901년 일본 고베에서 활약하며 많은 건축 작품을 남겼다. 과거 경복궁 일부를 헐어 지었던 조선총독부건물도 그가 설계한 것이다. 총독부는 게오르그가 폐질환으로 41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일본인 조수에 의해 후에 완성됐다. 1926년 박무덕 부부는 딸과 함께 워싱톤의 미국대사관에서 3년간 근무하고, 베를린의 독일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전임되었으며 3년 후 제네바의 군축기구 일본대표부의 사무국장을 거쳐 구미국장의 보임을 받아 외무성으로 귀임하였다(1933), 무덕은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 주독일대사, 주소련대사를 거쳐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해에 외상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1944년 4월 종전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두 번째로 외상을 맡는다. 일본의 패전후 극동재판소의 재판을 거쳐 전범으로 1950년 7월 도쿄 스가모 감옥에서 황달로 옥사하였다. 두 번째의 외상 재임 중 자신의 비서관 도고후미히코(東鄕文彦)를 도고 姓을 이어 받을 데릴사위로 삼는다. 도고후미히코는 나중에 주미대사와 외무차관이 된다.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외무성에 입부, 유럽-아시아국장이 되고 주화란 대사를 역임한 현재 교토 산업대의 도고가즈히코(東鄕和彦)교수다. 일본 사츠마 도자기의 창시자 조선인 도공 朴平意의 후손이 3대를 이어 일본의 고위 외교관으로 활약한 명문집안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 겨레 디아스포라의 빛나는 한 페이지다. 이상은 유주열(현재 한일 협력위원회 사무총장)선생의 강연(10.26)을 요약한 것이다. 유주열선생은 학자 형 외교관으로서 그가 근무하고 활약하는 지역(일본, 중국 등)에서 우리 겨레를 잊지 않고 겨레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많은 글을 집필 책으로도 발간하였다.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성공사례이기도 한 박무덕의 사실을 소설화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하며, 또한 해외에 정착했거나 진출 현지에서 성공한 우리 겨레 100명의 사적을 수집, 정리할 욕망도 있다고 한다. 정말 존경스럽다.
121    한국인과 중국인의 음주습관 차이 댓글:  조회:12723  추천:8  2012-12-20
중국의 괜찮은 식당에는 보통 여종업원이 술을 따라준다. 대개 왼손을 엉덩이에 대거나 허리에 차고 오른손(왼손잡이면 왼손으로)을 앞으로 쭉 내밀어 술을 붓는다. 한국인이 보기에는 기가 막힌, 술맛이 딱 떨어질 자세이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음주습관은 엄청나게 다르다. 위에 말한 것은 그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필자는 한국인 음주습관 6가지를 살펴 중국인에게 종종 가르치며 한국인과 술을 마실 때는 이를 지켜야 한다고 충고하곤 한다.   ①자기가 술을 붓건 타인이 붓는 술을 받건 두 손을 쓰며 왼손잡이도 오른손을 써야 한다. 거리가 멀어 손이 닿지 않으면 왼손을 오른 손목 또는 오른팔에 대거나 앞몸에 대도 두 손을 쓴 것으로 인정한다. 단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부을 때는 한손을 써도 괜찮다.   ②술을 연령의 순서로 부어야 한다(단 대접해야 할 특정 손님에게 먼저 붓는 것은 연령에 구애받지 않음). 중국인들은 앉은 순서대로 붓는 것이 상례이므로 20대 청년에게 먼저 붓고 60대 노인에게 그 다음에 부어도 괜찮다.   ③자기 술을 제 손으로 붓지 말아야 한다. 즉 자작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인은 자작도 상례이며 어떤 술상에서는 아예 자작하며 마신다.   ④윗사람이 동석했을 때 얼굴을 그 사람의 반대쪽으로 돌리며 술을 마셔라. 중국인은 젖비린내가 나는 놈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턱밑에 다가서서 노인과 잔을 부딪치며 “건배!”해도 괜찮다.   ⑤잔이 비기 전에는 술을 붓지 말라. 즉 첨잔하지 말아야 한다. 아마 한국인은 죽은 자에게 제사지낼 때 첨잔하므로 첨잔을 싫어하는 듯하다. 중국인은 첨잔이 상대방을 존경하는 뜻이라 여기므로 오히려 더 예의적이다.   ⑥ 자기가 마시고 난 잔으로 상대방에게 술을 권하라. 즉 이미 술을 다 마신 자기의 빈 잔을 상대방의 손에 쥐어주고 그 잔에 술을 부어 상대방이 마시게 하는 것으로 예의를 표시한다.   ‘각자가 자기의 음주습관을 지키면 그뿐이지 구태여 한국인의 음주습관을 따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중국인들도 있다. ‘한국인의 습관이 중국보다 더 미풍양속이므로 당연 그 습관을 따르라’라고 필자는 권고한다. 사실 ①∼④는 유교정신, 미풍양속으로 풀이되는데 ⑤는 개운치가 않으며 특히 ⑥이 걸린다. 잔을 주고받음으로 하여 너무 빨리 마셔 신체건강에 해로우며 위생에도 불리하다.   부언할 것은 중국인은 어떤 술을 마시냐를 꽤나 따진다. 소주의 경우 고농도(52도 이상)와 저농도(38도 좌우), 향냄새의 유와 무, 가격(10만 원정도, 5만 원정도, 1만 원정도) 등. 또한 수수(高粱)로 빚은 소주라야 좋은 술로 인정한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무작정 '참이슬'이 아니면 '처음처럼'이고 18도 좌우이며 알코올 희석주도 개의치 않는다.
120    한국의 감옥 문화 댓글:  조회:10897  추천:6  2012-11-29
약 10여 년 전 중국 모 조선족 신문에서 한국으로 밀항하다가 붙잡혀 수개월간 갇혔던 자가 쓴 수감 소감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문장에 따르면 한국 감옥은 죄수들을 매우 우대한다. 죄수를 구타하지도 않고, 병에 걸리면 제때에 치료도 해주고, 심지어 옥리가 사금을 내어 죄수에게 과일을 사다주는 일도 있다. 감옥 안은 위생도 깨끗하고 화식 표준도 꾀나 높았다. 최근 한국 TV방송 A채널 ‘쾌도난마(快刀亂麻)’ 프로에서 대도(大盜) 조세영의 출연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옛날 유명한 도적이었는데 후에 개조되어 착한 사람으로 변하였으며 지금은 죄수들에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수감된 적이 많고 심지어 일본의 감옥에도 갇혔던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감옥은 일본의 감옥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죄수를 우대한다. 한 나라 감옥이 죄수를 우대하는 정도는 당연 그 나라의 발전, 문명, 민주 정도와 정비례된다. 아직 죄수를 체벌하는 중국의 감옥, 그보다 더 잔혹한, 인간의 생명을 파리 목숨 취급하는 북한 감옥의 악명은 이해가 가지만 한국보다 월등하게 앞선 일본의 감옥이 한국의 감옥 보다 못하다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답안은 유교문화와 그에 따른 역사적 유래이다. 필자가 애독하고 있는 조선의 실학자 정다산(丁茶山)의 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편에 죄수에게 폭행을 가하면 안 되고 우대해야 한다는 많은 법률과 임금의 교시가 게재돼 있으며 또한 죄수를 우대한 많은 예를 들며 옥리들을 교육하였다. 아래에 예를 들면: 제주(齊州) 참군 왕가(王伽)가 죄수 70여 명을 거느리고 경성으로 가는 길에 죄수들이 고생하는 것을 측은히 여기며 몸에 씌운 칼(枷), 수갑(鎖)을 다 풀어주고, 스스로 어느 날까지 경성 어디까지 찾아오라, “만약 달아나고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대신 사형을 당하게 된다”고 하였다. 죄수들은 기뻐 감격하였으며 제때에 해당 장소에 당도했다(중국 隋 때의 일). 한 젊은 청년이 살인죄로 수감되었다. 교동상(膠東相) 오우(吳祐)는 그는 결혼하였지만 아직 자식이 없는 상황을 알고 부인을 데려다 감옥 안에서 부부 동숙(同宿)시켰으며 부인은 드디어 임신이 되었다. 사형에 처하는 날 그 청년은 손가락을 깨물어 아이가 자란 후 오우의 은혜를 꼭 갚으라는 유언을 남겼다(後漢 때의 일). 포욱(鮑昱)이 자양령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 사람이 살인하고 옥에 갇혀 죽게 되었다. 그의 부모가 울면서 후손이 끊어지겠다고 호소하니 포욱은 죄수의 처를 데려다 옥에 넣어 수갑을 풀어주고 동숙(同宿)하게 하였다. 드디어 임신되어 아들을 낳았다(後漢 때의 일). 는 약 200년 전에 씌어진 책이다. 200년 전에 이미 이런 정책을 실행했으며 옥리들을 이런 정신으로 교육하였다는 말이다. 참 대단하다. 경찰과 감옥은 이렇듯 선진국의 수준을 초월하는 감옥 문화를 창조해 냈는데 국민의 수준이 문제된다. 경찰의 업무집행을 방해하는 자, 경찰을 마구 욕하는 자, 심지어 술에 취한 후 경찰을 마구 구타하는 자가 한국 사회에 비일비재하다. 한국 경찰이 너무 선비형이 아니냐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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