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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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 24) 댓글:  조회:2062  추천:0  2020-11-01
24. 잠자는 공주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하늘의 신(神)이 천사(天使)더러 지상에 내려가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세가지를 선택한 후 가져오라고 했다. 천사는 지상에서 보고 들은 것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세가지로 꽃, 아기의 웃음, 어머니의 사랑을 선택하였다. 천사가 지상의 세가지 아름다움을 가지고 하늘의 신 앞에 갔을 때는 아름답던 꽃은 시들어버렸고 아기는 자라서 더는 아기가 아니였다. 그래서 신은 변함이 없는 어머니의 사랑만을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받았다. 어머니의 사랑은 동그라미처럼 돌고 돌아도 끝이 없고 한없이 커지기만 한다. 받지는 않고 한없이 주기만 하면서도 기뻐하는 어머니는 언제 한번 자식들 앞에서 그 공로들을 따졌던가! 어머니의 손은 자애의 손이고 어머니의 눈은 사랑의 눈이며 어머니의 마음은 자비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한마디 말에서 자식들은 얼었던 마음을 사르르 녹일 수 있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을 그대로 본딸 수 없다. 어머니는 우리를 비춰주는 태양이며 우리를 지켜주는 마음속 기둥이며 우리를 감싸주는 안식처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역시 어머니인 나의 안해도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래의 글은 내가 안해(맹영자)의 탄신 93주년 생일파티에 올린 축하문이다. 맹모 생신 93주년에 올리는 축하문 오늘은 맹모의 93주년 생신일입니다. 오늘의 행사를 위해 참여하고 또 수고하신 귀빈 여러분과 온집식구들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로약한 몸인지라 자신의 일상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장모님을 부양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현서(贤婿) 최명림(崔明林), 딸 김혜란(金蕙兰)과 가정부, 그리고 맏아들 김상술(金相术) 부부를 비롯한 자녀, 자부와 손자, 손녀, 증손 일동에게 맘속으로 깊이 간직해오던 치하의 말을 올립니다! 맹모가 산출한 4남 1녀와 그의 자손으로 이뤄진 27명의 대가정은 모두 맹모의 잉태와 양육의 노력으로 이룩되였습니다. 그만큼 맹모는 위대한 녀성이며 나의 둘도 없는 ‘록색로친’입니다! 인생의 자연적인 산출과 사회생활, 찬란한 문화, 문명 그리고 절대적 사랑, 꿈, 행복 등 인류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어머니가 창조한 걸작들입니다. 저의 손녀 영화의 박사지도교사인 한국의 안영희 박사는 훈춘 경신의 방천에서 사막공원과 련꽃늪 등 아름다운 중, 조, 로 3국의 풍경을 만긱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는데 “어머니가 저를 낳아주셨기에 저는 오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보게 되였습니다!” 하며 몸을 낳아준 어머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도 50대 중반에 천신만고 끝에 두번째 장백산으로 불리우는 화룡 청산 베개봉의 절정에 올라가 만물을 굽어보며 베개봉암석에 ‘어머니’라는 위대한 세 글자를 새겼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사회의 그 어떤 여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의 허물을 덮어감추면서 모자간 혹은 모녀간의 절대적인 은정을 유지합니다. 엄마를 잃은 젖먹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이 순간 엄마를 잃은 아이가 부르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오며는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 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여 필 때마다 안아주세요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 눈에서 피가 흐른다 … 눈물이 앞을 가려 계속 읽어내려갈 수 없습니다… 맹모는 문화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며 백석(白石)에서 순진하게 자랐고18세에 ‘갓바위집’ 김룡천의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철이 없는 남편의 랭대를 받으면서도 수십년을 힘겨운 수전농사에 종사하였습니다. 맹모는 젊은 나이였지만 조상들의 성묘로 가는 길에 늙으신 시아버님을 업고 구수하강을 건너면서 시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하였습니다. 맹모는 4남 1녀의 잉태와 양육에서 갖은 생활난에 맞띄웠지만 용케도 이겨냈으며 매서운 양력설날 추위에도 홑옷 바람으로 남편과 함께 산에 가 땔나무를 하면서도 군말이 없었습니다. 맹모는 가지가지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온 손색 없는 참된 어머니이자 용사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자식들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단결, 화목, 우애와 지극한 효성으로 우리 대가정의 창성발전의 길을 펼쳤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비운을 구원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항상 몇십년을 갈라졌던 가족이 상봉하는 것처럼 서로 그리워하고 쓰다듬어주고 아끼면서 산다면 그 인생의 길은 비단의 길이며 만화방초로 가득한 삶의 아름다운 길로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단길 개척자 맹영자 만세! 위대한 어머니 맹영자 만세! 만만세!!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건강, 행복 만세! 김수철 2016년 추석 잠자는 공주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최대의 선물은 바로 래일의 일을 오늘에 모르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2017년 5월 7일에 내가 훈춘 경신에 가서 이른봄에 피는 식물꽃 사진을 찍고 돌아온 이틀후인 5월 9일에 안해가 94세의 나이로 고종명을 하였다. 안해의 93주년 생신에 올린 나의 축수문이 일년도 못되여 부인의 추도문으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 때 만약 내가 욕심을 버리고 그 축수문의 “맹영자 만세!”를 “맹영자 백세!”로 표했더라면 혹시 백세를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후회막급이였다. 내가 안해와 함께 한 인생사는 안해를 통해 머리 속의 오점을 지워낸 인생사이며 서로가 함께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부모가 정해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분수에 넘치는 나의 욕망을 실천한 인생사이기도 하다. 나는 만약 내가 아버지의 선택에 불복하고 안해와의 약혼을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였을가 하는 상상도 해본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맺어진 우리 부부의 연을 내가 만약 끊어버렸다면 그 징벌로 후세에 불구자녀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나는 안해인 맹영자씨를 평생의 동반자로 존중했다. 그래서 안해가 세상을 뜬 후에도 삼성촌 자택의 주방에 안해의 사진을 정히 모시고 늘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올해(2017년) 추석에 나는 자녀들과 상의한 후 안해의 묘지에 비석을 세웠다. 그 때 나는 비문으로 의 가사를 선택하였는데 자녀들이 ‘子女一同立碑’라고 쓰니 늙은 나이에 토를 달지 못하고 묵묵히 자녀들이 하는 대로 따라주었다. 이런 아쉬움으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로 하고 의 노래로 이 글을 맺는다. 앵두빛 그 고운 두 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여나 나에게 하얀 미소 지을가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351    100세 리남조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다”고 댓글:  조회:2298  추천:0  2020-10-17
할머니네 가족사는 중국조선족 100년사의 축소판     언제부터 시대의 화제로 오가던 “지금은 고령화시다”가 오늘(10월3일) 에 “지금은 백세시대다”로 확실해 졌다.  이날 연길 카이락스수정궁에서 펼쳐진 “백세수연례”의 주인공은 리남조(李南祚,延吉市北山亍丹城委42组5单元201)로 이날  “수연례”먼저 방영한 동영상에서 모든 하객들이 리남조할머니의 독서, 필기. 바느질. 설겆이. 두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땅을 짚는 운동을 하는 믿기어려운 화면을 보고  “확실한 백세시대다!”고 찬탄하였다.   “백세수연례”는 리남조네 가족사를 소개하는 록화방송으로 막을 올렸다.  리남조할머니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 3대가 반일투사이고 형제 8남매(7남1녀)인 리남조는 10살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농사일을 했고 결혼후 54세에 남편을 잃고 혼자몸으로 자식들(2남 6녀)의 뒤바라지를 하여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대학교수 등 5명인재를 키워낸 자랑스러운 어머니로 지금 5대에 53명(큰딸 80세)의 대가족이 중국, 한국, 미국, 오스틀리아 4개국서 살고있는 존경스럽고 행복한 할머니이다. 리남조의 할아버지 리수원(数元,1874-1959)은 어린나이에 서당공부하며 신동이라 불렸다. 리수원은 어느날 마을에서 조직한 시(诗)발표모임에서 반일(反日)시를 발표했다는 죄명으로 일본경찰들이 체포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자 1913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신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망명한후 “사람은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된다”며 자비를 출자하여 유하현 삼원포에 생물동학교를 설립, 우수한 학생을 반일무관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에 추천하였다. 그리고 명신년토벌을 피해 흑룡강성 녕안 밀강에 이사한 후에도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촌장으로 일했다.  1923년 가을에 리수원은 동경성으로 이사, 1924년에 처음으로 대종교의 제3주교인 윤세복을 만나 대중교에 입교하고 아들 리대성도 입교시켰다. (大倧教란 1909년에 창교된 우리 민족의 고유의 종교로 1910년ㅡ 1920년까지 독립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 1911년에 만주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 후에 교단중앙본부를 만주로 옮기고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무장세력을 양성, 일제는 “종교통제안”이란 명목으로 대종교를 탄압ㅡ 편자) 리수원은 대종교 동경성교당의 전무, 상교를 력임하면서 대종교 2인자로 활약, 1928년부터는 전직 대종교요인으로 대종교의 운영비, 대종교총본사사업, 대종학원운영으로 큰공을 세웠다.   리남조의 아버지 리대성(大成)은 1923년초에 간목성공사(垦牧城公司)가 설립되였는데 동북군집단군 10군 부군장 곽송령이 공사주임이였다. 1924년에 리대성은 간목성공사의 한국인대표로 있다가 공사경리로 발탁하여 곽송령의 소개로 민국지방군 기병중대장인 마해산을 알게되고 그와결의형제를 맺고 간목성공사산하의 500여쌍의 수전을 경영하는 실업가로 된후 동경성,할빈을 나들며 곡식무역을 담당하였다. 리대성은 1925년에 김좌진장군이 영안에서 신민부를 설립할때 동경성대표로 참석하여 회의 장소와 식사까지 전담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후 일제가 중국의 조선인을 전면적인 타격을 시작하자 리대성은 마해산에게 군자금을 후원하는 등으로 영안현내의 4000여명의 한국인들이 위기를 넘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32년초에는 마해산과 공동으로 작전하여 소룡만과 잉가령에서 일본군 천야부대 기습에서 성공, 당년 12월에는 한국독립군의 차도선과 함께 경박호반대첩을 하였다. 1932년부터는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농장을 운영하면서 딸 리근숙이 유격대를 조직하는데 10만원의 자금을 해결해 주었다.  1933년 10월에 영안에서 체포되여 할빈관동군 사령부에 7개월 감금되였다가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되여 지방형 3년재판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후에 일본놈들에세 참살당했다.   리남조의 사촌언니 리근숙(根叔)은 리대성의 큰형님 리만석의 딸인데 그녀가 출생 1년후에 생모가 죽자 리대성이 입양한후 이름을 선오(善吾)로 개명하고 친딸로 되였다. 리근숙은 어려서부터 중국말을 잘하고 웅변능력이 좋고 독서를 아주 즐겼다. 9.18사변후 항일구국운동에 뛰여들고 1930년에 입당, 1934년에 참군한후 정치사업을 하다가 항일독립 제4군 부녀주임겸 선전처 처장을 담임했다. 리근숙은 1940년대 초에 쏘련에가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하고 만주로 돌아와 동경성 사라진에서 지방사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뻐스안에서 일본 사복경찰에게 발각되여 체포된후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불구가 되여 잠시 석방되였다가 다시 체포되여 일제놈들에게 참살당했다.   리남조가족사소개 록화방영이 끝나자 선임국가민족사무위원회주임 리덕수와 주당위선전부 선임부부장 채영춘이 축사를 올렸다. 리덕수는 축사에서 “조선족 100력사의 견증인인 리남조할머니의 건강장수비결은 ‘화목+건강=애심’이다”  “리남초할머니는 많은 각고(各苦)를 이겨내고 나라와 가족, 이웃을 위하여 기여하었다”고 말하였고 채영춘은 “리할머니의 가족사는 우리 민족력사의 숙영이며 중국조선족100년사의 축소판이다”,  “리남조할머니의 100년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오늘의 실천으로 증명했다.”  “리남조할머니는 우리 모두 의 교오이고 자호이다!”고 말하였다. 축사를 이어 리남조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손을 높이 흔들며 기쁨과 감사를 표하고 나서 이렇게 답사했다.   ... 나의 오늘의 있음은 나라의 덕분이고 자식들이 효도한 덕분입니다. 우리집의 모든 사람들이 나쁜일을 절대 안했습니다. ... 지금은 글을 써도 글씨가 삐뚤어서 쓰고싶은 글도 방정하게 못써서 아주 아쉽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식들의 효도하에서 건강장수하십시요!   이날의 “백세수연례”는 실로 모든 하객들의 기쁨과 행복의 현장, 배움의 현장, 감동의 현장이였다.   필자는 리남조할머니의 수연례 먼저 그를 인터뷰했는데 그때 인터뷰채록 요약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문; 언제 중국에 오셨습니까? 리: 우리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다. 백년전에 할아버지가 온가족을 데리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 심양, 해림서살다가 나중에 동경성에 정책했다. 나는 심양태생이다. 문: 문화정도는? 리: 할아버지한테서 한글(韓文),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사비로 6년제 소학교를 세운후 4년간 그학교들 다녔다. 그리고 초혼후 7년간을 혼자지낼 때 대정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중학교도 대수 다녔다.  문: 결혼은 언제 하였습니까? 리: 결혼을 말하자니 힘들다. 이때까지 비밀로 지켰다. 내가 18살 때 8남 1녀네집의 막내아들의 눈에 들어 부모들이 그를 만나본후  그가 병자인것을 모르고 한달후에 나를 그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하자부터 앓는 남편을 의사가 보더니 부부생활을 하면 안된다기에 7년간을 혼자지냈다.  25세에 5년 년상인 김병훈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2년 터울로 6녀 2녀를 출산하였다. 문: 지금의 건강상황은 ? 리: 안경이 없이 신문을 보고 바늘귀도 꿴다. 썩 오래 전에 딸집을 가다가 물도랑에 넘어져서 무릅뼈가 탈골했던 후유증으로 가끔씩 무릎이 아픈 외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 이발이 부실하여 십년 전에 8500원을 팔아 치료를 하고 요즘에 불편해 3000원을 팔아 틀이를 했다. 나의 몸에 로인반점도 없다. 건강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나를 못 따른다.  문: 건강비결은? 리: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40세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여러가지 건강운동을 만들고 그운동을 50년견지해 왔다. 얼마 전에 큰아들이 나에게 발운동을 어떻게 하면 좋다며 알려주니 나는 그운동을5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견지했다니 놀라 하였다. 문: 이제 몇 년을 더 살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리:. 운동원처럼 건강하지는 않지만 먹을 것을 제대로 먹으니 지금 생각에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환한웃음) 문: 지금까지 잘했다고 하는 일이 있다면? 리: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혼 때 둘이 털털 이로 만난 것은 잘한 것 같고 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문;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리: 생활이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 간고하고 고지식하게 살아 온 것이다.  그밖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문; 억울한 일이 있다면? 리: 내가 가도에서 련조장, 선전워원으로 공작하다가 감독원을 시키니 나는 남을 감독할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아버지가 일본놈들에게 총살 당한후 원쑤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후에 보니 토비로 되였다. 하여 오빠의 문제로 가도에서 “可疑分子”로 몰려 모든 사업을 박탈당한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항일렬사인데 오빠문제로 렬사가족을 묵과당하고 “가이분자”로 몰리니 그때 정말 억울 하였다. 문: 반성되는 일은 없는지요? 리: 이때까지 “예, 예”하면서 살아왔기에 반성할 일이 별로 없다. 마음에 가책되는 일이 한 점도 없다. 문: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리: 지금까지 우리가문이 좋은 가문인지 아니면 나쁜 가문인지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뜻인즉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의 항일력사를 기록한 책이 없다는데서의 서운함이다 ㅡ편자) 문: 효도란? 리: 효도란 부모님이상 조부, 증조부…를 대상해 쓰는 말이다. 녀자가 절개를 지키면 렬녀, 훌륭한 안해를 조강지처, 훌륭한 어머니를 현처량모라고 말한다. 문: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다면? 리: 아무런 요구가 없다. 저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문: 그 년세에 이성에 대한 생각이 나는가요? 리: 나는 이성을 말하면 듣기도 싫다. 나는 총명한 증손들에게 빠진 재미로 산다. 실로 리남조할머니로 말하면 마음은 진짜고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0년 10월 17일)
350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 전"(련재 23) 댓글:  조회:2409  추천:0  2020-10-15
23. 명리를 위한 소작(小作)이 아닌 인생철학 대작(大作)으로 오기활선생에게: 2016년 10월 15일에 선생이 작성해준 질문제강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 고령자에게는 전화나 면전 질문보다도 이런 문자질문이 더 편합니다. 인제는 사유력도 점점 떨어지고 두뇌도 점점 퇴화되여가므로 어순배렬기능이 많이 못해졌습니다. 오선생의 취재 때 수차나 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안이 틀릴가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선생이 미리 질문제강을 짜주어 참 다행이였습니다. 제가 질문제강에 따라 선조들이 걸어온 력사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개인생활과 사회활동을 계통적으로 쓴다면 내용이 확실하고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퍽 효과적일 것입니다. 기실 저는 오선생이 저의 자서전을 쓰겠다고 할 때 처음에는 딱 잘라 거절했지요. 그러다가 오선생의 부인(김금복)까지 저의 사적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 사적들을 채록하여 저의 자서전 출판에 도움을 주었고 또 오선생의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자연인의 인생사를 쓰고 싶은 대로 다 쓰세요.”라는 권고에 저는 생각을 바꾸고 “시름을 놓고 마음대로 쓰겠다”고 필을 들었습니다. 오선생이 작성한 질문제강은 저의 앞길을 훤히 밝혀주는 리정표였습니다. 저는 자서전에 지금 젊은 세대들이 알 수 없는 당시의 자연환경, 사회환경과 력사인물, 력사사실들을 쓸 것이니 후대들에게 교양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저의 자서전에는 제가 걸어온 92년(1925년—2016년) 동안의 인생사도 많겠지만 근 400년전의 우리 민족의 력사도 들어있습니다. 속에는 근 400년전의 에 슴배인 사람냄새가 풍기는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이는 저의 생각으로는 중국 조선민족의 혈연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사료인 동시에 진품 혹은 명품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자서전은 학습, 학교생활, 교육생활, 과학학술활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평범한 생활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인생사의 의미심장하고 무궁무진함을 인생철학의 경지에 상승시킨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오기자와 저의 숙명적인 만남과 인연도 역시 저의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이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는 인연과 운명의 체험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현명한 인사들의 소행임을 어찌할 바 없습니다. 저는 더 큰 것을 위해서 저에게 채찍질하는 오기활선생을 사랑해야 하는 것만이 저의 참다운 인도주의라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오선생 역시 오선생에게 많은 페를 끼치는, 오선생의 금쪽 같은 시간을 훔쳐내는 이 김수철을 ‘미워’함이 ‘당연’하겠지만 ‘김수철이 좋은 인연을 만난 덕분에 얻은 생명’이니 오선생이 언제까지나 저를 고무격려해주어야지요. 끝으로 저의 자서전이 ‘나 개인의 명리를 날리는 소작(小作)이 아닌 인생철학의 대작(大作)으로’ 되게끔 쓰기를 부탁합니다. 저는 평생을 장자의 ‘지인무기(至人无己)’, ‘신인무공(神人无功)’, ‘성인무명(圣人无名)’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지켜왔습니다. 장자는 몇천년전에 벌써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공을 내세우지 않으며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건대에는 상당한 부류의 현대인들이 맨 앞자리에 오르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으며 겸손을 잊고 타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패배라고 여기면서 자신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명예와 출세만을 위해 땀을 흘리고 명예와 출세를 갈라놓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연은 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가요? 그것은 자연에는 명예나 욕심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을 부언하면서 오선생의 아낌없는 로고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밤 12시
349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 22) 댓글:  조회:2487  추천:0  2020-10-01
22. ‘3인방’의 핍박으로 량산에 오르다 나, 황영수(黄永秀), 김론범(金论范) 교수는 지난 50년대에 한동네(룡정현광신향 광신대대)에서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자란 친구들로서 농학원을 다닐 때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3인방’이라고 불리웠다. 하지만 필자가 오늘 말하는 ‘3인방’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기활, 서규철, 황영수 등 세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2016년 여름,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지내다가 정년퇴직한 서규철옹이 ≪길림신문≫에서 오기활기자의 기사를 읽고 전화로 오기자한테 나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였다. 그러자 오기자는 지금 한창 나의 자서전에 대해 구상하고 있는데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며 서규철옹한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서규철옹은 연변농학원 황영수 교수한테 련계를 취해 오기활기자의 뜻을 전달하였다. 황교수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발벗고 나서서 연변농학원의 몇몇 원로들을 조직하여 소위 ‘희망조’라는 소조를 내왔다. 그런 후 또 자기가 직접 나서서 연변대학로간부사업 사무실, 연변로교수협회 등 관련 부문을 찾아가 내가 개인적으로 한창 마무리중인 ≪길림성식물채색도감≫ 편집과 출판에 관한 사항을 회보하고 관련 부문과 함께 직접 우리 집을 방문한 후 ‘김수철자서전’을 쓸 데 관한 건의를 하였다. 그 후 연변대학로간부사업 사무실 유관 일군들로부터 연변농학원 원장에 이르기까지 나를 방문하며 정황을 료해했고 ≪길림성식물채색도감≫과 ‘김수철자서전’의 출판을 나의 개인사업이 아닌 연변대학 연변농학원의 중요사업으로서 오기활기자에게 집필을 맡길 것을 부탁하였다. 황영수 교수는 년로하고 쇠약한 몸이였지만 사처로 다니면서 내가 자서전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적지 않은 힘도 보태주어 나는 항상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뿐이였다. 한번은 그가 부인과 함께 룡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양천에 있는 우리 집으로 일보러 오다가 그만 넘어져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가서 봉합수술까지 받았다. 사실은 그전에도 학교측에서 학교의 수요라며 나에게 자서전을 쓸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자서전을 쓴다는 것이 나로 놓고 말하면 아주 힘에 부치는 일이고 또 큰 부담으로 여겨져 뚝 잘라 거절해버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영수 교수 등이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데서 어쩔 수 없이 ‘핍박에 못이겨 량산’에 오른 것이였다. 나는 나의 자서전이 나 개인의 일뿐만이 아니라 학교 나아가 사회의 수요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여생을 더욱 보람 있게 사는 데 추동력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나는 학교와 사회의 수요에 좇아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 과중하고 험난한 일을 떠맡기로 결심하였다. 마치도 다빈치가 절세의 명화 를 자기가 제일 하고 싶은 일로 여기고 열심히 그렸듯이 말이다. 2016년 10월부터 나는 오기자가 작성해준 질문제강에 따라 열심히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80세 이상인 다른 로인들 보고 나처럼 글을 쓰라고 하면 언녕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에게 건강한 몸을 주신 부모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나의 자서전은 연변대학 농학원의 위상을 떨치고 또 농학원이 배출한 한 인물을 만방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나는 연변대학 농학원의 존엄이나 품위를 위하여 만단의 준비로 이 자서전을 훌륭히 완성할 것이다.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이 정신적으로 가장 즐거운 일로 될 때가 있다. 어쩐지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이 글로 ‘3인방’의 로고와 관련 부문의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김수철 2017년 11월 조양천에서
34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21) 댓글:  조회:2370  추천:0  2020-09-16
21. “아니, 오늘이 생시요 꿈이요!?” 1946년에 내가 만난 정석룡(郑锡龙)은 지초와 란초마냥 나를 동화시킨 친구이자 스승이다. 첫 만남 정석룡은 1946년 내가 태양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우리 횡도 9대(향양)에 이사를 왔다. 갓 이사를 왔을 때엔 내가 교직에 있다보니 별로 래왕이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정석룡은 가정성분이 지주라고 해서 좋은 학교를 다녔지만 직업이 없이 농촌에 왔다고 했다. 정석룡은 해방전에 연길공업학교를 다녔는데 후에 알고 보니 나의 둘째동생 문철(文哲)이와 연길공업학교 토목과의 동기동창생이였다. 정석룡은 성분 때문에 비관하지 않았고 자진하여 일을 찾아했다. 당시 태양구(太阳区)의 정치령도는 팔로군에서 파견한 왕두(王斗)라는 분이 책임졌고 지방간부로는 리의일(李义日)과 최일룡(崔日龙)이 기억에 남아있다. 1947년초에 나는 룡정의과대학(龙井医科大学)에 입학했다가 신입생 정치신분 재심에서 성분(纠编中农) 때문에 락방되여 농촌에 내려갔다. 그로 하여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던 중 어느 날 나와 같은 처지인 정석룡을 떠올렸다. ‘옳다, 그는 나를 리해하고 동정해줄 거야!’ 1947년 춘삼월의 어느 날 저녁에 나는 정석룡을 찾아갔다. 그의 집에는 땅을 분배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쓴 나무패말들이 방구석을 채웠다. 그의 부인[임해순(任海顺)]은 나를 진작 알고 있다며 반가워하였다. 마침 저녁식사 때여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기에 둘이서 소주까지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처지인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허물없이 토로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마침 정석룡이 자기가 지금 한창 태양구모택동사상선전대를 책임지고 문예공연을 준비한다며 나의 협조를 바랐다. “우리가 지위와 보수를 따지지 않고 능력과 열정을 다한다면 꼭 해 뜰 날이 있을 것이요.” 정석룡은 내가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로 나를 감화시켰다.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정석룡과의 만남으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였다. 그는 나의 마음속 기둥이며 나에게 삶의 희망을 준 지기지우였다. 정석룡은 성분문제로 비관하지 않고 토지개혁공작대를 찾아가 일을 돕겠다고 자진해나섰다. 공업학교 토목과 출신인 그를 놓고 말하면 토지 측량과 분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무보수로 일을 했지만 불만이 전혀 없었고 서로 앞장서서 일을 찾아하면서 조직에서 자기를 써주는 것을 다행과 축복으로 생각하였다. 정석룡은 농촌에서 사상이 단정하고 일정하게 재간이 있으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인재’를 모집하여 태양구모택동사상선전대를 조직함으로써 조직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가 해방 초기에 남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모택동사상선전대’를 조직한 것은 지금 봐도 그는 확실히 남보다 앞서가는 인재였음을 알 수 있다. 정석룡은 당지 군중들 속에서 위신이 높은 부녀대표와 함께 며칠 사이에 예쁜 녀성 15명으로 구성된 모택동사상선전대인 ‘태양구가무단’을 설립하였다. 그 때 나는 공업학교 출신인 그가 단막극(短幕剧)의 곡(曲)까지 창작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석룡은 후에 류감수(柳甘洙) 등 세명의 남자배우를 받아들였는데 류감수는 배우 겸 독창가수로 인기가 많았다. 무대장치는 목수에게 맡기고 무대의 채색화 배경과 배우들의 얼굴화장은 내가 담당하였다. 나는 이런 재간을 태양소학교 한계성(韩启星) 교장한테서 배웠다. 그 때 태양구가무단은 재미 있는 단막극과 아름다운 춤노래로 가는 곳마다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대중들의 문화갈증을 풀어줬으니 손바닥이 터질 듯한 박수갈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태양구모택동사상선전대의 모든 성과는 정석룡의 멸사봉공(灭死奉公)의 사업정신과 사업태도로 얻어진 것이다. 정석룡에 대한 나의 평가다. 첫째, 성질이 유순하고 침착하며 남의 걱정을 내 걱정으로 여기여 사람들의 존중을 받으며 ‘동네아바이’로 불리웠다. 둘째,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 있게 추진하였기에 하는 일이 진전이 빠르고 실수가 없었다. 셋째, 타인의 우점을 찬양해주고 상대에게 희망을 주는 사업형 인간이다. 넷째, 인내성이 강하고 망동하지 않으며 하는 일을 끝까지 책임진다. 그런데 우리는 농촌을 떠난 후 45년간이나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지난 80년대 어느 날, 멀지도 않은 룡정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났다. 그 때 그는 룡정화학공장에 출근하다가 공장이 파산되는 바람에 만년을 어렵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정석룡의 연줄로 당시 태양향의 소학교 동창과 옛친구들인 손창익(孙昌翼), 한성우(韩圣禹), 박명권(朴明权)의 소식을 알게 되여 우리 넷은 한동안 서로 다니며 즐겼다. “제가 바로 정석룡의 아들입니다!” 2016년 1월 11일, 나는 건강자문으로 나를 찾아오겠다는 오기활기자의 전화를 받고 “장담은 못하나 놀러 오는 셈 치고 와보라.”고 했더니 이튿날에 조양천 삼성촌에 있는 우리 집에 왔다. 오기활기자는 같이 동행한 손님을 전임 ≪길림신문≫, ≪연변일보≫ 부주필, ≪지부생활≫잡지 주필을 지낸 정경락이라며 지금 페암치료중이라고 소개하였다. 서로 건강상식에 대해 얘기하던 중 내가 정경락의 명함을 다시 보면서 “정석룡을 아오? 내가 지금 정석룡의 아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정석룡은 나와 한마을(태양향 횡도촌 9대)에서 살았는데 우리는 당시 모택동사상선전대에서 함께 활동한 동갑내기였소.”라고 말했더니 글쎄 정경락씨가 “제가 정석룡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86세에 타계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이것이 꿈이요 생시요? 정석룡의 아들이 우리 집에 오다니?” “더 가까이 오오, 내가 좀 안아보기오.” 나는 돌연적이고 우연한 만남에 한참이나 그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오기자가 암환자를 데리고 온다더니… 석룡의 아들이 암으로 나를 찾아 왔구만…” 오기자도 눈물을 흘렸다. 경락씨는 갖고 온 음식으로 점심상을 차리고 나에게 술을 올리며 큰절을 하였다. “신문사 부주필까지 했다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만… 오늘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났소.” 나는 너무나 반가워 손자한테서 선물로 받은 일본술을 내놓았다. “이 술을 이 기쁜 날에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소. 경락이 우리 한잔 하기오!” 나도 경락씨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나는 경락씨가 기침을 할 때마다 그의 등을 다독이면서 나의 처방 대로 1년간을 견지하면 병이 치유될 것이니 걱정을 말라며 희망을 주었다. 그 날 정경락씨와 오간 대화이다. 정: “92세까지 살면서 어느 때가 제일 황금시기였습니까?” 김: “지금이오. 지금은 시간이 많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깐 정말 행복하오. 지금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소. 이 세상이 다 내 것인 것 같소.” “혼자서 일하는 멋이 있고 혼자서 사는 법도 배우오. 나는 로친을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해야 할 일을 다그치고 있소.” 정: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 “겁이 안 나오. 자연사를 인생으로 받아들이오. 죽음이란 참외나 도마도가 다 익으면 절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요. 이것이 자연사요. 옛날엔 화장터가 겁났는데 지금은 친해지오. 자연사는 철학적 인생이라오.” 정: “법정스님이 하늘냄새가 그립다고 했는데 하늘냄새란 무엇입니까?” 김: “하늘은 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무런 욕심이 없소.” 정: “정말 멋지게 터득을 하셨습니다.” 경락씨가 박수를 쳤다. 경락씨의 물음에 답하는 내가 마치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학생 같아보였다. 또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경락씨의 모습이 마치 그의 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여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60년전에 나의 앞길을 밝혀주던 지기지우가 7년전에 떠나갔고 그의 아들마저 2016년 7월에 63세 나이로 하늘나라에 갔다니 비감하기 그지없었다. 이 글을 오기활기자의 칼럼 로 마감한다. 뒤늦은 효도 선친님은 시공대(工程队)의 대장직에 계시면서도 집이 없어 여덟번이나 이사를 하며 세집살이를 했으므로 우린 선친님을 무능하다고 했답니다. 자식의 취업으로 선친님이 앞당겨 리직휴양을 할 때 우린 이는 선친님이 응당 해야 할 책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정성분으로 우리가 영향을 받을 때 우린 선친님의 자식으로 된 것을 원망하였습니다. 이런 자식들의 앞에서 선친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원래 말씀이 적으신 선친님은 모든 아픔과 고통, 유감과 불행을 침묵으로 묵새겼을 것입니다. 오늘 뒤늦게나마 이런 도리를 알게 된 이 아들의 마음은 아프기만 합니다! 이 아들은 부모님에 대한 가장 큰 효도가 돈이 아닌 리해임을 오늘에야 뼈저리게 느낍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여있을 때는 그 존재의 가치를 깊이 느끼지 못하다가 불행하게 이승을 떠난 후에야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이 아들은 ‘있을 때 잘해’라는 말뜻을 오늘에야 비로소 절감합니다.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어머님을 잘 리해하면서 아버님한테 하지 못한 효도를 어머님께 해드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는 지난 2009년 8월 6일 리직휴양간부 정석룡옹(86세)의 추도식에서 한 아들(정경락, 56세)의 한단락이다. 아버지의 일생을 ‘근(勤)’, ‘렴(廉)’, ‘엄(严)’으로 귀납한 경락씨는 ‘십년내란’시기에 억울하게 투쟁을 당하면서도 공장이 안 돌아가면 목에 걸었던 ‘개패’를 벗어놓고 공장을 위해 달아다녔고 공장이 돌아가면 또다시 ‘개패’를 목에 걸고 투쟁을 받던 일, 시공대 대장으로 일하면서도 집이 없어 여덟번이나 이사하며 세집살이를 했던 일, “일생동안 아버지와의 대화가 100시간이 안된다.”는 실례로 아버지의 ‘근, 렴, 엄’을 추억했다. 아버지를 저승에 보내며 ‘뒤늦은 효도’를 하는 경락씨는 고인에게 남처럼 술을 부어올리며 효성을 표할 대신 86(86세를 뜻함)송이의 흰 국화꽃을 드리는 것으로 깨끗하고 순결한 인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빌었다. 국화는 늦가을 서리에도 어김없이 청초한 꽃을 피우며 꿋꿋한 삶을 사는 군자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람들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음”을 국화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86송이의 흰 국화를 받은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가. 그리고 국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효도를 표하는 자식들 역시 사랑스럽고 행복해보였다. 필자는 정경락의 ‘뒤늦은 효도’가 정경락 혼자만의 ‘뒤늦은 효도’가 아닌 모든 자식들의 ‘제철 효도’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존경하는 ‘근, 렴, 엄’님! 고인님은 이제부터 이 산 저 산에 피여난 천국의 아름다운 꽃밭에서 사세요. 그리고 두견새, 파랑새로 다시 태여나 가고팠던 저 먼곳으로 훨훨 날아가세요. 고 존경하는 아버지시여! 생전의 슬픔이랑 아픔이랑 훌훌 다 털어버리고 좋은 일만을, 행복했던 일만을 기억하면서 저승에서 영생하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길림신문≫(2009년 8월 18일)
347    조화수로 알아보는“읽혀지는 글”쓰기 댓글:  조회:2779  추천:0  2020-09-05
조화수로 알아보는“읽혀지는 글”쓰기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로 력사(문자)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21세기의 ‘리시진’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96)는 “문자기록은 문명의 산물로서 인류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이다”며 문자기록의 산생과 사명을 강조한다. 문자기록으로 한권의 책, 한편의 글의 가치는 독자들의 읽힘에 따라 책과 글의 가치가 창조되는것이다. 최근 필자는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읽혀지는 글”을 쓸 것인가? 이에 필자는 본인이 발표한 글들의 조회수에서 답을 찾기로 하였다.  그래서 2011년 3월부터 2020년 3월까지 발표한 필자의 언론과 기사 총 328편의 조회수를 합계하여 몇 가지 내용으로 분류하여 정리해 보았다.(물론 매편의 조회수는 그 글이 “좋아서”만이 아닌, “글이 아니여서” 한번다시 읽었음을 인정함) 아래에 조회수로 정리, 분석해 본다. 1, 328편의 총조회수 1,132,779회, 매편 평균 3453회다. 2, 그중 1만회 이상이 4편, 9000회 이상이 3편, 8000회 이상이 3편, 7000회 이상 3편, 6000회 이상 14편, 5000회 이상 57편 4000회 이상이80편이다. 3, 1만회이상의 글로는 2012년 8월 27일에 발표된 “덜된사람”(15446회), 2012년 9월 4일에 발표된 “처음처럼”(15204회), 2018년 4월 18일에 발표된“가슴아픈 추억”(10238회), 2018년 4월 18일에 발표된 “기자 그리고 꽃”( 10104회)이다. 4, 조회수가 7000회 이상의 글의 제목을 순서적으로 보면 “텔레비죤대신에 책장을”, “기대되는‘한줄기’문화”, “다함께 웃읍시다”, “다가오는 식혁명”, “한국진출이 남긴 여운”, “동포라고 하면서 왜?”, “연길강반에 제발 장자를 세우지 말자” 등이다. 이상의 조회수와 제목순으로 보아 독자들이 관심하고 읽혀지는  글들로 1, 민족애 2, 초심을 명기, 3, 자녀교육, 4, 효도(추억), 5, 이웃사랑, 6, 건강, 7, 한국진출, 8, 사회문제반영이였다. . 필자는  “읽혀지는 글”들로 다음의 례문들을 펼친다. 1, 민족사랑:            “덜된”사람 (2012년 08월 27일 10시 02분 조회:15706 )   월전에 중학교 교장, 진당위서기, 국장을 지낸 정년퇴직간부가 필자와 하는 말이다. 는 는 아직 원숭이로부터 사람에로 채 진화되지 못했다는 말로 해석된다. 세상에 완전완미한 사람이 없듯이 누구를 물론하고 덜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이 표준이 사전에 없다보니 필자로서는 인간이 , 가 무엇이 표준인지를 모르고 지냈다. 그런 와중에 일전에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 리광남과의 인터뷰에서 항간에서 말하는 의 표준을 알게 되였다. 리광남대좌는 군령만도 40여년이라는데 조선말을 그렇게도 잘하였다. 그래서 고 물었더니 이란다. 부모님들이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 부탁하는 말씀이 고 하더란다. 그로부터 그는 부모님들의 말씀대로 이 안되기 위하여 노력했다. 자기만이 아니라 두 딸도 참된사람으로 키우려고 집에서 조선말을 하도록 강요했단다. 확실히 그랬다. 지난 50, 60대에 동네 로인들이 어느 퇴역군인이 우리 말을 잘 안하면 그를 다며 후론했다. 는 아직 채 익지 않은것으로 역시 는 말이다. 연변일보사 김원준선생이 하던 말이다. 김원준네 동네 0 0가 참군하여 부대후근처에서 2년간 돼지를 사양, 복원하던 첫날에 어머니의 손을 쥐고 하고 감격해 하다가 고 말해 동네서 그를 며 이라고 하더란다. 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이뤄지고 그 관계를 원할하게 하는것이 소통이다. 이는 노벨상수상자 한국 선임대통령 김대중의 말이다. 이는 중국 제1임 조선족방송교수 서방흥안아운서의 말이다. 이는 민족출판사 우빈희사장의 말이다. 이로 보아 그 사람의 언어수준과 수양이 그가 사람이 되고 안되고를 가늠하는것 같다.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 가 확실히 많다. 필자가 서두에서 말한 그 주임은 노래방에서는 조선말노래를 그렇게 잘부르면서도 사회활동에서 한족말만 하니 그는 에 속한다. 한번은 몽땅 조선족들로 시급에서 조직한 에서 모 조선족국장이 한어로 사회하고나서 며 한어로 발언하기에 필자가 고 물으니 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다. 다시 생각하면 그역시 에 속한다. 더욱 한심하기로 그날 모임좌담회에서 거의 모두가 한어로 발언하기에 향중학교에서 온 대표는 “한어수준이 낮아서 미안하다” 조선말로 발언했다. 필자는 우리 말과 글을 점점 더 하는 이 사회가 안타깝다.자기의 을 위해 한어나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좋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도 모르는 그네들이 우리 민족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고 하니 의문이다. 그래서 미래가 걱정이다. 필자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시키는 이 타민족이 아닌, 는 , 우리 글과 우리 말을 외면하는 와 들이다. 유능한 조선족들이 당과 정부의 요직에 등용되여 나라의 발전을 위해 중임을 맡을것을 필자는 바란다. 그런데 연변에서 조선민족의 비례로 선정되는 민족간부만은
346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 20) 댓글:  조회:2598  추천:0  2020-09-01
20. “나의 노력과 힘의 15%를 회보합니다.” 지난해(2016년) 10월 12일, 연변대학 로간부처, 연변대학 로과학기술사업자협회, 연변로교수협회 책임자들과 나의 학우 대표들이 그 바쁜 일정에도 92살인 나를 위문하러 우리 집까지 왔다. 아마도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나의 성과들이 빠진 것이 많아 내가 죽기 전에 후세에 남기고저 최근 3년간에 ≪길림성식물채색도감≫ 출판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제 상황을 알아보려고 찾아온 것 같았다. 사실 ≪길림성식물채색도감≫은 응당 나보다 더 유식한 한족 분들이 맡아하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현재로 놓고 보면 식물사생화를 직접 그리는 식물학자가 나밖에 없고 또 아직까지는 정력이 너무 뒤떨어지지 않다보니 내가 맡아하게 된 것이였다. 나는 위문하러 온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늙은이네 집까지 찾아와서 위문해주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여러분은 나의 만년에 새힘을 보태준 셈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하는 것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인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 나는 “미국의 강철대왕이며 최고 자선가인 카네기는 ‘한 사람이 취득한 업적에는 사회의 힘과 노력이 85%를 점하고 개인의 노력과 힘이 15%를 점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서 저의 15%의 노력과 힘을 남김없이 회보하려고 합니다.” 하며 퇴직후 내가 한 일들을 일일이 회보하였다. 이하는 내가 1987년 정년퇴직후에 출판된 저서(공저)들이다. ≪长白山东北部野生经济植物志≫(延边人民出版社, 1990) ≪敦化中药简志≫(1990) ≪中国长白山经济植物彩色图鉴≫(延边人民出版社) ≪항암본초(抗癌本草)≫(김수철 번역, 한국 바람과 물결, 1992) ≪원색백두산자원식물≫(한국 아카데미서적, 1994) ≪中国长白山野生花卉≫(中国林业出版社, 2003) ≪한국항암본초(韩国抗癌本草)≫(한국 도서출판, 2004) ≪원색백두산자원식물≫에서 사진과 설명을 내가 전부 맡아했고 내가 번역한 ≪항암본초≫는 번역외에도 원문에 없었던 실물화(实物画)를 배합함으로써 그림과 글이 모두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였다. 총적으로 나는 퇴직후에 한가하게 지낸 적이 거의 없었다. 10월 12일에 방문을 왔던 분들이 하는 말이다. “김수철은 후반전에 더 멋진 ‘꼴’을 넣었다.” “연변대학 박물관에 ‘김수철인물관’을 설치할 것이다.” “오기활기자는 천리마(김수철)를 발견한 백락이다.”
内蒙古民族语言授课学校小学一年级和初中一年级将使用国家统编《语文》教材五方面不变 朝鲜族文化 今天       8月29日,自治区政府新闻办举行自治区民族团结进步月系列新闻发布会第一场——民族教育新闻发布会。 会上自治区教育厅厅长侯元指出:今年秋季学期起全区民族语言授课学校小学一年级和初中一年级将使用国家统编《语文》教材学生课业负担不会增加。以下五个方面不会改变。(1)其他学科和其他年级课程设置不变。(2)使用教材不变。(3)授课语言文字不变。(4)蒙古语文、朝鲜语文课时不变。(5)现有双语教学体系不变。自治区司法厅厅长郝泽军指出,国家统编语文教材使用与《民族区域自治法》不矛盾。在民族语言授课学校使用统编语文教材,总体上是实施宪法和法律的活动。是贯彻落实《中华人民共和国国家通用语言文字法》、《中华人民共和国教育法》、《中华人民共和国义务教育法》和《中华人民共和国民族区域自治法》的具体措施。使用国家通用语言文字教育与《民族区域自治法》也是一以贯之,一脉相承的。《中华人民共和国教育法》第十二条规定,国家通用语言文字为学校及其他教育机构的基本教育教学语言文字,学校及其他教育机构应当使用国家通用语言文字进行教育教学。民族自治地方以少数民族学生为主的学校及其他教育机构,从实际出发,使用国家通用语言文字和本民族或者当地民族通用的语言文字实施双语教育。《中华人民共和国义务教育法》第四条规定,凡具有中华人民共和国国籍的适龄儿童、少年,不分性别、民族、种族、家庭财产状况、宗教信仰等,依法享有平等接受义务教育的权利,并履行接受义务教育的义务。第五条规定,各级人民政府及其相关部门应当履行本法规定的各项职责,保障适龄儿童、少年接受义务教育的权利。适龄儿童的父母或者其他法定监护人应当依法保证其按时入学接受并完成义务教育。《中华人民共和国民族区域自治法》保障各民族使用和发展本民族语言文字的自由,推广使用全国通用的普通话和规范汉字,鼓励民族自治地方各民族公民相互学习,但是并没有免除履行其他法律的义务,也就是说《教育法》《国家通用语言文字法》规定的义务仍要履行,更不能排斥。国家通用语言文字教育与使用少数民族语言文字教育在法律体系中是一脉相承,一以贯之相辅相成的关系,无论各级地方人民政府和教育及其他机构,每个公民、还是父母及其法定监护人都应当履行法定义务。自治区党委统战部副部长、民委主任奇锦玉指出,坚持党的领导,是民族教育沿着正确方向前进的根本保证。认真贯彻党的民族政策和国家法律法规,是民族教育取得辉煌成就的关键所在,铸牢中华民族共同体意识,是贯穿各级各类学校民族团结进步教育的主线。 原文来源:《内蒙古日报》官方微信   来源:《内蒙古日报》官方微信 “五个不变”让我心里有底   日前,按照国家统一部署要求,自治区教育厅印发《全区民族语言授课学校小学一年级和初中一年级使用国家统编语文教材实施方案》,今年秋季学期起,全区民族语言授课学校小学一年级和初中一年级将使用国家统编《语文》教材。实施方案发出后,记者采访了相关领域学者、家长、市民等,请他们谈了各自的看法。 内蒙古师范大学民族学人类学学院院长乌日陶克套胡认为:“从长远来看,对个人而言,掌握多种语言肯定有益处。少数民族学生,不仅学好母语,还要学习掌握国家通用语言,将来也要学习英语等其他语言,以适应当前全球化、信息化的大潮流。此外,语言不仅是交流沟通的桥梁,还是获取新知识、新能力、新思想的很重要的工具,是拓展人类思维能力的方法。” 内蒙古师范大学附属蒙古族学校的一位一年级新生的家长说:“我们孩子幼儿园是蒙古语授课,刚开始听说今年民族语言授课学校小学一年级要使用国家统编《语文》教材了,也有过担心,怕孩子不适应。但是了解到使用国家统编《语文》教材后,其他学科和其他年级课程设置不变,使用教材不变,授课语言文字不变,蒙古语文、朝鲜语文课时不变,现有双语教育体系不变的‘五个不变’,让我心里有底了。师资方面我倒是不太担心,因为各蒙古语授课学校一直也有《汉语》课程。” 呼和浩特市民胡女士说:“推进国家通用语言文字教育,有利于让民族地区各民族群众享受更加公平、更加有质量的教育,对少数民族学生今后的就业、接受现代科学文化知识等都有利。” 记者还采访到一位呼和浩特市蒙古语授课学校的教师。她说,8月23日至28日,她刚刚参加完相关的师资培训,正在为开学后的教学工作做准备。
344    民族教育的教学语言文字不能变 댓글:  조회:4733  추천:0  2020-08-31
             民族教育的教学语言文字不能变 1)语言政策与少数民文教育   从我国目前语言竞争的情况看,主要表现在国内通用语汉语与国际通用语英语之间的冲突和博弈。 国内还有国内通用语汉语与少数民族语言的普及和而教育负担轻重问题。  “重英语、轻汉语”造成的另外一个比较突出的问题是汉语语言处于一种相对弱势的地位。“重汉语语、轻民文”问题也逐渐出现。   我国作为语言资源大国,在语言资源保护、语言文字传承和语言产业开发等方面长期存在语言资源意识较弱、语言经济意识不强的情况,这直接导致相应领域的政策缺失或规划不足,也进一步阻碍了语言产业化的发展。    教学语言政策的制定包含多方面的、长远的考量,执行和推广语言政策的效益在短期内很难有显著体现,透过经济学的视角来分析语言活动的供求、成本、损益、得失等基本维度,能够更清晰地理解语言政策的社会经济价值,更有效地制定出切合实际并能带来更好效益的语言政策。 教学语言政策是公共政策的重要组成部分,语言使用习惯是重要文化习惯。应有计划地研究相关国家语言政策及语言使用习惯,出版相关书刊,以便当事者遵守这些政策、尊重这些习惯。 更应该做好社会语言服务工作。语言服务,需要政府与民间双手推动、更多依靠民间力量,需要公益服务与有偿服务双腿行进。应向政府、企业、社会机构及家庭、个人等提供各种语言服务,包括语言规划、语言咨询、语言教育、语言翻译、语言技术支撑等。   延边尤其要敢于承担向中国政府、朝鲜,韩国,企业、社会机构及家庭、个人等提供多种语言文字服务,包括朝鲜文字规划、咨询、教育、翻译、信息技术支撑,利用韩流,汉风,朝流的交叉集散地环境优越条件,打造互联网+多国文字(跨境文字)优势+东北亚电子商务=  延边文化互联网经济发展+先行先导,改革开放急遽(极快地气温急遽上升)发展新形势。朝鲜文信息化建设应该列入“十四五”规划和州政府重点工作当中给予关注。 因为朝鲜文字是延边州的得天独厚的文化产业重要资源,也是关系到地方民族经济跨入国际产业信息产业标准化和互联网经济竞争的重要武器。加上中国朝鲜民族存立条件是中国朝鲜文字存在,中国朝鲜文字存在条件是其教学语言文字的制定和存在。“互联网+朝鲜文字+”才是延边州的州自治和脱贫致富的21世纪的重要武器。 “互联网+朝鲜文字+”是凝聚70多万在外(海外)朝鲜族和国内分散在各地区,领域的朝鲜民族(北,上,广,青,义等地大约4,50万)的重要载体。 朝鲜文字是传承朝鲜民族文化、凝聚民族力量的基础和重要载体。朝鲜文教学语言文字的地位不仅关系到朝鲜族文化的传承和发展,还关系到掌握网络舆论主导权和话语权、确保国家信息安全等问题。 总之;边疆少数民族经济发展不能离开少数民族语言文字。一个少数民族语言文字的发展前提是其早期教学语言文字(即幼儿期,中小学期)地位的巩固和发展有着决定性因素,尤其是互联网时代。特别是中国朝鲜族科技文化教育领域可持续发展的产业,具有民族特色的多种文化复合的产业才能可持续发展。   建设好模范少数民族自治州的先决条件是重视少数民族语言文字标准化,规范化,信息化。发展少数民族经济的最大资源是少数民族语言文字。 朝鲜文字是少数民族文字,又是国际语言,它的语言服务,包括语言规划、语言咨询、语言教育、语言翻译、语言技术水平研究课题和产业的形成是我延边州的更是重要的领域。   忘记或无视少数民文领域的21世纪互联网+,大数据,云计算是导致失败,兴旺少数民文领域的21世纪互联网+,大数据,云计算是绝对能成功的。因为一路一带也是多语种,多众文化的漫长走廊的构思。   延边也要走东北亚边路,东北亚边带,那也是多语种带,多文化的领域。中朝韩日俄蒙各国领域中朝鲜文字是国际公用语言之一。这就是历史我们地区的有力的语言优势,是可急遽发展的天然条件,作为中华多民族一员的优势之一。 2)朝鲜文字的语言地位危机 “语言地位规划”就是要确定语言(包括文字)及其变体的社会地位,从而也就大致确定了在什么场合应该使用什么语言。一个国家刚刚独立之时,选择哪种语言作为国语或官方工作语,一个国际组织用什么语言作为官方语言或工作语言,都会遇到语言地位规划问题。 在一个国家,当某种语言被选定为国语或官方工作语言之后,就需要对该语言及其文字进行持续的规范化、丰富化工作,使其能够承担起地位规划所赋予的任务。这种工作叫做语言的本体规划, 比如词典编纂、语音规范、文字改革或整理、语法大典的编纂、科技术语的翻译与规范等。语言本体规划和语言地位规划,在很大程度上需要通过教育来实现,于是需要做好语言教育规划,亦称为语言习得规划。 此外,要巩固某种语言的地位,使之快速而广泛地传播,还需要做语言声望规划,通过各种举措,树立起某种语言的声望,使人们愿意学习它,应用它,并在学习和应用中得到精神、文化、教育、经济等多层面的利益。这四大规划,称为经典的语言规划。 语言在对文化的阐释过程中,也能促进文化的发展、甚至是文化的重新建构。语言与教育有着如此密切的关系,尽管语言与民族的关系比较复杂,但它往往具有民族名片、民族图腾、民族象征的作用。这样,可以把中国朝鲜文字语言的文化教育功能总结为: 1.中国朝鲜语言是中国朝鲜族文化教育生活最为重要的组成部分;  2.中国朝鲜语言是凝聚中国朝鲜族文化教育最为重要的载体; 3.中国朝鲜语言是中国朝鲜族文化教育最为重要的阐释者; 4.中国朝鲜语言是中国朝鲜族文化教育最重要的建构者; 5.中国朝鲜语言是中国朝鲜族民族的文化图腾。 6.中国朝鲜语言存在是中国朝鲜族存在的保证和担保。 教育语言规划还需要考虑多路向,特别要注意发展“自下而上”的语言规划,并注意“自上而下”与“自下而上”两种规划路向的相互配合。 当前,人类语言生活正从单语向双语、多语的方向发展,语言规划理念也应当从“单语主义”向“双语(多语)主义”转变。各语言规划主体之间要相互沟通协调,各种语言规划的路向要相互配合,相得益彰,避免、减缓语言冲突,促进语言生活的和谐。(同时为国际国内共享发展,共图共荣)。中国朝鲜族教育语言在“双语(多语)主义”竞争上具有相当的国际竞争力。 3)少数民族地区的民族教育的教学语言文字地位不能变   据了解,根据教育部规定,从今年9月秋季学期开始,全国义务教育阶段的语文、历史以及道德与法治这3门学科将使用国家统编版教材。据此推断,经过几年后,随即逐步推广全学科统编版教材。   3.1 这是完全是“自上而下”的错误决定,朝鲜族社会不能接受的。 3.2目前情况下很难承担使用国家通用语言(用汉语)进行教学。特别是语文将替代现有朝鲜族中小学汉语课目后,难度大大增加。   3.3朝鲜语文课目极有可能成为辅修课目,列入地方教材。朝鲜语文课目也极有可能退出高考课目。如朝鲜语文退出高考,朝鲜族学生不会主动去学习朝鲜语文。   3.4三科统编教材推广使用后,朝鲜族中小学其他学课逐步采用国家通用语言授课,朝鲜族中小学将逐渐失去民族特色,这是趋势。丧失本民族语言教育权利的教育不是民族教育的。   3.5会出现朝鲜族中小学格局变化,朝鲜族学校逐步消失,在延边州将形成无朝汉学校之分的办学格局,朝鲜族教育退出历史舞台。   3.6朝鲜族幼儿园随之变成汉族幼儿园,如果从学前教育开始推广国家通用语言,后续的义务教育中民族语言教育很难进行。(母语和通用语言先后认知有图解,言解,字解过程)   3.7朝鲜族中小学教师大面积出现分流。无法承担国家通用语言教学的教师将离开教师岗位,尤其是现有汉语和朝鲜语文教师面临“另谋出路”,朝鲜族教育出现严重的社会不稳定因素。 4.紧急建议 三科统编教材,要翻译成朝鲜语再使用,教学用民族语言进行。 其他学科教材逐步使用国家统编教材,但都要翻译成朝鲜语使用。 强烈要求朝鲜语文课目不能退出高考。 朝鲜族高考自主命题语文科目政策不能变。 5.应该得到全社会的民族教育语言地位的共感,教育改革才能成功。尤其是处于濒危语言的民族地区。 语言文字是国家的公用资源,也是一个民族的生活工具,朝鲜文字是吉林省和延边州的重要战略资源、民族事业兴旺发达的重要基础,其信息化建设是关系到国家的意志、掌握话语权的重大问题。经过我们的不断努力,中国朝鲜文必将成为中华优秀文化的重要组成部分,与其他兄弟民族语言文字共同实现繁荣与发展。       对此特别紧急建议,以防语言规范规划损失和图谋民族教育的顺利发展。             2020年08月14日     附件;我国的 宪法和各种法规及细则; 中华人民共和国法律法规中有关语言文字的规定(摘要)     一、《中华人民共和国宪法》(1982)   第4条 第四款 各民族都有使用和发展自己的语言文字的自由,都有保持或者改革自己的风俗习惯的自由。   第19条 国家推广全国通用的普通话。   第121条 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在执行职务的时候,依照本民族自治地方自治条例的规定,使用当地通用的一种或者几种语言文字。   第134条 各民族公民都有使用本民族语言文字进行诉讼的权利。人民法院和人民检察院对于不通晓当地通用的语言文字的诉讼参与人,应当为他们翻译。   在少数民族聚居或者多民族共同居住的地区,应当用当地通用的语言进行审理;起诉书、判决书、布告和其他文书应当根据实际需要使用当地通用的一种或者几种文字。   二、《中华人民共和国民族区域自治法》(1984通过,2001年修正〕     第10条 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保障本地方各民族都有使用和发展自己的语言文字的自由,都有保持或者改革自己的风俗习惯的自由。   第21条 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在执行职务的时候,依照本民族自治地方自治条例的规定,使用当地通用的一种或者几种语言文字;同时使用几种通用的语言文字执行职务的,可以以实行区域自治的民族的语言文字为主。   第36条 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根据国家的教育方针,依照法律规定,决定本地方的教育规划,各级各类学校的设置、学制、办学形式、教学内容、教学用语和招生办法。   第37条 第三款 招收少数民族学生为主的学校(班级)和其他教育机构,有条件的应当采用少数民族文字的课本,并用少数民族语言讲课;根据情况从小学低年级或者高年级起开设汉语文课程,推广全国通用的普通话和规范汉字。   第47条 民族自治地方的人民法院和人民检察院应当用当地通用的语言检察和审理案件,并合理配备通晓当地通用的少数民族语言文字的人员。对于不通晓当地通用的语言文字的诉讼参与人,应当为他们提供翻译。法律文书应当根据实际需要,使用当地通用的一种或者几种文字。保障各民族公民都有使用本民族语言文字进行诉讼的权利。   第49条 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教育和鼓励各民族的干部互相学习语言文字。汉族干部要学习当地少数民族的语言文字,少数民族干部在学习、使用本民族语言文字的同时,也要学习全国通用的普通话和规范汉字。     民族自治地方的国家工作人员,能够熟练使用两种以上当地通用的语言文字的,应当予以奖励。   第53条 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提倡爱祖国、爱人民、爱劳动、爱科学、爱社会主义的公德,对本地方内各民族公民进行爱国主义、共产主义和民族政策的教育。教育各民族的干部和群众互相信任,互相学习,互相帮助,互相尊重语言文字、风俗习惯和宗教信仰,共同维护国家的统一和各民族的团结。   三、《中华人民共和国教育法》(1995)   第12条 汉语言文字为学校及其他教育机构的基本教学语言文字。少数民族学生为主的学校及其他教育机构,可以使用本民族或者当地民族通用的语言文字进行教学。   学校及其他教育机构进行教学,应当推广使用全国通用的普通话和规范字。   四、《中华人民共和国义务教育法》(1986)   第6条 学校应当推广全国通用的普通话。   招收少数民族学生为主的学校,可以用少数民族通用的语言文字教学。   五、《中华人民共和国义务教育法实施细则》(1992)   第24条 实施义务教育的学校在教育教学和各种活动中,应当推广使用全国通用的普通话。 师范院校的教育教学和各种活动应当使用普通话。   第25条 民族自治地方应当按照义务教育法及其他有关法律规定组织实施本地区的义务教育。实施义务教育学校的设置、学制、办学方式、教学内容、教学用语,由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依照有关法律决定。   用少数民族通用的语言文字教学的学校,应当在小学高年级或者中学开设汉语文课程,也可以根据实际情况适当提前开设。   六、《幼儿园管理条例》(1989)   第15条 幼儿园应当使用全国通用的普通话。招收少数民族为主的幼儿园,可以使用本民族通用的语言。     七、《扫除文盲条例》(1988)   第6条 扫除文盲教学应当使用全国通用的普通话。在少数民族地区可以使用本民族语言文字教学,也可以使用当地各民族通用的语言文字教学。   第7条 个人脱盲的标准是:农民识1500个汉字,企业和事业单位职工、城镇居民识2000个汉字;能够看懂浅显通俗的报刊、文章,能够记简单的帐目,能够书写简单的应用文。   用当地民族语言文字扫盲的地方,脱盲标准由省、自治区人民政府根据前款规定制定。   基本扫除文盲单位的标准是:其下属的每个单位1949年10月1日以后出生的年满15周岁以上人口中的非文盲人数,除丧失学习能力的以外,在农村达到95%以上,在城镇达到98%以上;复盲率低于5%。     基本扫除文盲的单位应当普及初等义务教育。   八、《中华人民共和国商标法》(1982)   第7条 商标使用的文字、图形或者其组合,应当有显著特征,便于识别。使用注册商标的,并应当标明“注册商标”或者注册标记。   九、《企业名称登记管理规定》(1991)   第8条 企业名称应当使用汉字,民族自治地方的企业名称可以同时使用本民族自治地方通用的民族文字。     企业使用外文名称的,其外文名称应当与中文名称相一致,并报登记主管机关登记注册。   第9条 企业名称不得含有下列内容和文字:   (1)有损于国家、社会公共利益的;   (2)可能对公众造成欺骗或者误解的;   (3)外国国家(地区)名称、国际组织名称;   (4)政党名称、党政军机关名称、群众组织名称、社会团体名称及部队番号;   (5)汉语拼音字母(外文名称中使用的除外)、数字:   (6) 其他法律、行政法规规定禁止的。   十、《国家工商行政管理局关于在部分城市进行广告代理制和广告发布前审查试点工作的意见》(1993)附件四:广告审查标准(试行)   第23条 广告中语言、文字的表述必须真实、规范、健康、文明,不得欺骗或误导公众。   第24条 广告中使用的语言、文字、计量单位等,必须尊守国家的有关规定和规范标准。     十一、《关于向国外送达民事或商事司法文书和司法外文书公约》(1965)   第5条 如依上述第一款送达文书,则中央机关可要求该文书以文书发往国的官方文字或其中之一写成,或译为该种文字。   第7条 本公约所附范本的标准栏目均应用法文或英文写成,亦可用文书发出国的官方文字或其中之一写成。 相应空格应用文书发往国文字或法文或英文填写。   十二、《中华人民共和国经济合同仲裁条例》(1983)   第5条 在少数民族聚居或者多民族共同居住的地区,应当用当地民族通用的语言、文字进行调解、仲裁和制作调解书、仲裁决定书;应当为不通晓当地民族通用语言、文字的当事人提供翻译。   十三、(中华人民共和国居民身份证条例)   第3条 居民身份证登记项目包括姓名、性别、民族、出生日期、住址。   居民身份证登记项目使用全国通用的文字填写。   民族自治地方的自治机关根据本地区的实际情况,可以决定同时使用本民族的文字或者选用一种当地通用的民族文字。   十四、《中华人民共和国民事诉讼法》(1991)   第11条 各民族公民部有用本民族话言、文字进行民事诉讼的权利。   在少数民族聚居或者多民族共同居住的地区,人民法院应当用当地民族通用的语言、文字进行审理和发布法律文书。   人民法院应当对不通晓当地民族通用的语言、文字的诉讼参与人提供翻译。   第68条 书证应当提交原件。物证应当提交原物。提交原件或者原物确有困难的,可以提交复制品、照片、副本、节录本。     提交外文书证,必须附有中文译本。   第240条 人民法院审理涉外民事案件,应当使用中华人民共和国通用的语言、文字。当事人要求提供翻译的,可以提供,费用由当事人承担。   第264条 外国法院请求人民法院提供司法协助的请求书及其所附文件,应当附有中文译本或者国际条约规定的其他文字文本。     人民法院请求外国法院提供司法协助的请求书及其所附文件,应当附有该国文字译本或者国际条约规定的其他文字文本。   十五、《中华人民共和国刑事诉讼法》(1979)   第6条 各民族公民都有用本民族语言文字进行诉讼的权利。人民法院、人民检察院和公安机关对于不通晓当地通用的语言文字的诉讼参与人,应当为他们翻译。   在少数民族聚居或者多民族杂居的地区,应当用当地通用的语言进行审讯,用当地通用的文字发布判决书、布告和其他文件。   第65条 讯问咙、哑的被告人,左当有通晓聋、哑手势的人参加,并且将这种情况记明笔录。   十六、《中华人民共和国行政诉讼法》(1989)   第8条 各民族公民都有用本民族语言、文字进行行政诉讼的权利。   在少数民族聚居或者多民族共同居住的地区,人民法院应当用当地民族通用的语言、文字进行审理和发布法律文书。   人民法院应当对不通晓当地民族通用的语言、文字的诉讼参与人提供翻译。   十七、《中华人民共和国法院组织法》(1979)   第6条 各民族公民都有用本民族语言文字进行诉讼的权利。人民法院对于不通晓当地通用的语言之字的当事人,应当为他们翻译。在少数民族聚居或者多民族杂居的地区,人民法院应当用当地通用的语言进行审讯,用当地通用的文字发布判决书、布告和其他文件。   十八、《中华人民共和国全国人民代表大会和地方各级人民代表大会代表法》(1992)   第38条 少数民族代表执行代表职务时,有关部门应当在语言文字、生活习惯等方面给予必要的帮助和照顾。   十九、第一届全国人民代表大会第五次会议关于汉语拼音方案的决议(1958)   第一届全国人民代表大会第五次会议讨论了国务院周恩来总理提出的关于汉语拼音方案草案的议案,和中国文字改革委员会吴玉章主任关于当前文字改革和汉语拼音方案的报告,决定:(一)批准汉语拼音方案。(二)原则同意吴玉章主任关于当前文字改革和汉语拼音方案的报告,认为应该继续简化汉字,积极推广普通话;汉语拼音方案作为帮助学习汉字和推广普通话的工具,应该首先在师范、中、小学校进行教学,积累教学经验,同时在出版等方面逐步推行,并且在实践过程中继续求得方案的进一步完善。   汉语拼音方案   (1958年2月11日第一届全国人民代表大会第五次会议批准)(略)   二十、《中华人民共和国和西班牙王国关于民事、商事司法协助的条约》(1992)   第6条 请求的手续   二、请求书的格式应当按照1965年11月15在海牙签订的《关于向国外送达民事或商事司法文书和司法外文书公约》的格式填写。   请求送达的司法文书和司法外文书应当一式两份,并附有被请求的缔约一方文字或英文或法文的译本。   第11条 格式和文字   调查取证请求书的格式应当与本条约附录中的标准格式相符,空白部分用被请求一方文字或英文或法文填写。调查取证请求书所附文件必须附有被请求的缔约一方文字或英文或法文的译文。   二十一、《中华人民共和国和比利时王国关于民事司法协助的协定》   第5条 语言和译文   一、双方中央机关书信联系使用本国语言。   二、司法协助请求书和所附文件用请求一方的官方语言或其中一种官方语言缮写,并附有被请求一方的官方语言或其中一种官方语言的译本。 1.3.2   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语文工作条例      (1988年7月21日吉林省第七届人民代表大会常务委员会第四次会议批准   1997年9月26日吉林省第七届人民代表大会常务委员会第三十三次会议批准修改)        第一条   本条例根据《中华人民共和国宪法》、《中华人民共和国民族区域自治法》及《延边朝鲜族自治州自治条例》的有关规定,结合本州的实际制定。        第二条   自治州自治机关在朝鲜语文工作中,坚持语言文字平等的原则,认真贯彻执行党和国家的有关法律条款和民族语文政策,提高朝鲜民族科学文化素质,巩固和发展平等、团结、互助的社会主义民族关系,为自治州的社会主义物质文明和精神文明建设服务。        第三条   朝鲜语文是朝鲜族人民行使自治权利的主要语言文字工具。自治州自治机关加强对朝鲜语文工作的领导,保障朝鲜族公民有使用和发展自己的语言文字的自由。        第四条   自治州自治机关在执行职务的时候,以朝鲜语言文字为主,通用朝、汉两种语言文字。        第五条   自治州自治机关教育和鼓励各民族干部互助学习语言文字。朝鲜族干部在学习、使用本民族语言文字的同时,要学习全国通用的普通话和汉文;汉族和其它少数民族干部也要学习朝鲜语言文字。        第六条   自治州自治机关在朝鲜语文工作中,充分尊重朝鲜语文的发展规律,促进朝鲜语文的健康发展。        第七条   自治州人民政府设立朝鲜语文工作委员会,其职责是:      1、宣传、贯彻执行党和国家的民族语文政策,检查督促《中华人民共和国宪法》、《中华人民共和国民族区域自治法》、《延边朝鲜族自治州自治条例》等法律、法规中有关语言文字的条款和本条例的实施;      2、根据有关法律条款、政策和本条例,制定朝鲜语文工作的具体措施和实施规划;      3、检查督促朝鲜语文的学习、使用和翻译工作;      4、组织和管理朝鲜语文的规范化及其推广工作;      5、管理朝鲜语文的研究工作,组织学术交流;      6、组织朝鲜语文专业人才的培训工作;      7、协调朝鲜语文工作各部门之间的业务关系。        第八条   各县(市)设朝鲜语文工作机构,统一管理本县(市)朝鲜语文工作。 第三章   朝鲜语文的学习和使用        第九条   自治州自治机关在政治、经济、教育、科学、文化、卫生、体育等领域里加强朝鲜语文的学习和使用工作。        第十条   自治州地方国家机关下发的文件、布告等公文,用朝、汉两种文字同时并发;自治州地方国家机关下发的宣传学习等材料,可同时或者分别使用朝、汉两种文字。        第十一条   自治州地方国家机关和州内的企事业单位的公章、牌匾、奖状、证件、标语、公告、广告等均用朝、汉两种文字。        第十二条   州内生产并在州内流通的商品名称、说明书,州内服务行业的经营项目、品名、价格表等均用朝、汉两种文字书写。        第十三条   自治州地方国家机关和州内的企事业单位召开的会议,应当同时或者分别使用朝、汉两种语言文字。 。。。。。。    。。。。。。。   。。。。。。   。。。。。。。   。。。。。。。 。。。。。。。   第二十九条   自治州地方国家机关和州内的企事业单位的公章、牌匾、商品名称的文字翻译由州、县(市)翻译机构负责审核。        第三十条   自治州自治机关重视朝鲜文译汉文的工作,积极向全国各地介绍自治州的政治、经济、文化和历史。      自治州自治机关重视汉文译朝鲜文的工作,积极向本州介绍全国各地的先进科学技术和政治、经济、文化等方面的情况。        第三十一条   自治州自治机关重视朝鲜语规范化工作,自治州朝鲜语文工作委员会按照朝鲜语规范化原则,制定朝鲜语规范化方案。        第三十二条   自治州自治机关加强对朝鲜语文研究工作的领导。朝鲜语文的研究工作,贯彻“百花齐放、百家争鸣”的方针,坚持理论联系实际的原则,解决朝鲜语文发展过程中出现的理论和实践问题。        第三十三条   自治州自治机关依照国家的规定,重视同国内外朝鲜语文学术界的学术交流;根据需要可聘请外国朝鲜语专家、学者来自治州任职或讲学;选派朝鲜语文工作者出国考察、研究。        第三十四条   自治州自治机关加强朝鲜语文工作队伍的建设。自治州内高等院校,研究部门和朝鲜语文工作部门,采取多种形式,积极培养有社会主义觉悟、有独立工作能力的朝鲜语文工作者。        第三十五条   自治州自治机关依照国家有关规定,有计划地选送朝鲜语文工作者到国内外高等院校和研究部门进修,不断更新他们的知识,提高他们的业务素质。        第三十六条   自治州自治机关加强对朝鲜语文工作者的管理,有计划地进行业务考核、晋级和职称评定等工作,充分调动他们的积极性。        第三十七条   州朝鲜语言工作委员会对违反本条例的单位和个人,依据有关法律、法规和规章的规定,给予处罚。        第三十八条   自治州人民政府可根据本条例制定实施细则。        第三十九条   本条例解释权属于自治州人民代表大会常务委员会。        第四十条   本条例自颁布之日起施行。 发布日期:2004年6月26日   实施日期:2004年6月26日   1.4朝鲜族语言文字规范标准研制发布及信息处理情况   1977年以前,中国的朝鲜语尚未制定明确的规范原则,只依照朝鲜的朝鲜语规范。1977年,根据国务院的决定东三省成立了朝鲜语文工作协调小组(三协),统一管理中国朝鲜语文工作。自此,朝鲜语的规范化逐步走向正常轨道。在三协的指导下,1977年到1985年制定了规范原则和朝鲜语规范统一方案。     三协于1986年成立了中国朝鲜语规范委员会,由东北三省及北京、青岛等地有关朝鲜语文专家学者及工作人员组成。委员会成立至今已召开11次业务会议,整理修改了《朝鲜语语法》、《外来语标记法》;审核并规范体育、法律、地理等领域的朝鲜语名词术语22万5千余条;审核制定了《朝鲜语规范原则》和《汉朝自然科学名词术语统一案》;编辑出版了国家标准《信息交换用朝鲜文字编码字符集》,编辑整理了《朝鲜语规范集》综合本、《学生用朝鲜语规范集》;《朝鲜语地名词典》也即将出版。   80年代末延边州成立了朝鲜语文规范化委员会,下设音乐、舞蹈、医学、新闻、杂志等若干个分科,广泛开展朝鲜族语规范活动,现已规范词汇3500余条。   术语标准化工作方面, 根据全国术语标准化技术委员会少数民族语特别委员会的要求,1996年成立了中国朝鲜语术语标准化工作委员会。术标委成立后完成了《朝鲜语术语数据库的一般原则与方法》的编写,制定了《朝鲜语术语标准化工作原则与方法》,现已着手翻译有关的国家标准。为了加快朝鲜语术标委工作进程,提高朝鲜语文信息处理能力,术标委于1997年、1999年举办了术语标准化培训班和‘99朝鲜语信息处理国际学术会议。   延边地区朝鲜语信息处理工作始于1985年。由延边电子信息中心设计完成了国家标准《信息交换用朝鲜文字编码字符集》的编写任务,并组建了中国朝鲜语信息处理学会,开发研制了朝鲜语信息处理系统,在州内得到广泛应用。为实现朝鲜语信息处理国际化目标,该中心积极同朝鲜的计算机中心、韩国国语信息学会、延边朝鲜语研究所联合,完成了三国通用的《国际标准信息技术用语词典(1-25)》编译工作。现已在朝鲜语字母排序、键盘排序安排等方面取得了突破性进展。延边医学院也研制开发出朝文电脑激光排版印刷系统。     由于朝鲜文组字拼写方式的特殊性,已实现的朝文处理系统及操作系统种类很多,归纳起来,分为组合式和整字式。组合式直接在西文操作系统上实现;整字式以汉字操作系统为基础,用软件插接兼容,通过改造操作系统在系统级上实现朝文、汉字、西文兼容。中央民族学院和航天部在整字式朝文操作系统上开发的朝汉英语语音兼容处理系统,于1989年通过了技术鉴定。   1.5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实施细则  各县(市)人民政府,州人民政府各委局室,州直企事业单位: 州语委制定的《〈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实施细则》业经州人民政府第二十七次常务会议通过,现印发给你们,请认真贯彻执行。 二00五年三月四日 《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实施细则 州语委 (二00五年二月二十四日) 第一条 为进一步规范我州朝鲜语言文字工作,根据《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以下简称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制定本实施细则。 第二条 州、县(市)人民政府朝鲜语言文字工作机构和翻译机构,负责指导、检查本实施细则的贯彻落实情况。 第三条 州、县(市)人民政府建立、健全由朝鲜语文、民族事务、工商、公安、建设、交通、教育、广电、文化、新闻出版等部门为成员的朝鲜语言文字工作协调机构,确定职责范围,加强对本行政区域朝鲜语言文字工作的组织协调。 第四条 州朝鲜语言文字规范委员会设立杂志系统、新闻系统等若干个分支机构。 分支机构负责收集需规范的新词术语,并提交规范委员会进行规范。 第五条 州内公民、法人和社会团体,在使用朝鲜语言文字时,必须使用规范的朝鲜语言文字。 第六条 凡在公共场所从事公共服务需在公章和牌匾、奖状、证件、标语、公告、广告、会标、标志(以下简称市面用语物)以及公用设施上印写文字内容的,均同时使用朝汉两种文字。 第七条 同时使用朝汉两种文字时,应遵循下列原则: (一)字体规范,字号相等; (二)横向排列时,朝文在前、汉文在后或朝文在上、汉文在下; (三)竖向排列时(面对面时),朝文在右、汉文在左; (四)环形排列时,从左向右朝文在外环、汉文在内环,或者朝文在左半环、汉文在右半环。 第八条 州人民政府重视同国内外朝鲜语言文字学术界的学术交流,根据需要可聘请国外朝鲜语言文字专家、学者来州任职或讲学,选派朝鲜语言文字工作者出国考察、研究。此项工作具体由州朝鲜语文工作委员会协同相关部门和单位组织实施。 第九条 州朝鲜语文工作委员会(翻译局)作为职能部门,成立延边朝鲜语学会和延边翻译工作者协会,鼓励、支持、指导朝鲜语言文字工作者和翻译工作者的学术活动。 第十条 州、县(市)人民政府下发涉及党和国家方针、政策且基层朝鲜族干部群众需要了解的文件,应当翻译成朝文,与汉文文件同时下发。 第十一条 州内机关、企事业单位、社会团体和个体工商业者的公章、牌匾等的文字翻译,由州、县(市)翻译机构负责翻译或核准。 第十二条 凡未经州、县(市)人民政府翻译机构翻译或核准的市面用语物,刻字社、广告社、美术社等不予制作。 第十三条 州内国家机关和事业单位应对其工作人员进行朝鲜语言文字培训,为不通晓汉语的朝鲜族公民提供朝鲜语言文字方面的服务。 第十四条 汉译朝、朝译汉翻译工作者(除国家公务员外),按照国家有关规定,须经各级人事部门专业技术职称评定、取得一定级别的翻译职称(资格)后,方可从事专业翻译工作。 第十五条 州人民政府对贯彻实施《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和本《实施细则》,并有下列情形之一的部门、单位和个人进行表彰和奖励: (一)长期从事朝鲜语言文字工作和翻译工作,成绩突出的; (二)在朝鲜语言文字工作和翻译工作学术研究方面,成果突出的; (三)在贯彻实施《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中,贡献突出的。 第十六条 违反《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和本《实施细则》,制作市面用语物因未经专业翻译机构翻译或核准而造成经济损失或不良社会影响的,由制作部门、单位和个人负责。 第十七条 违反本《实施细则》第七条规定的,由朝鲜语文工作机构会同有关部门责令其限期改正。逾期不改的,予以通报批评,或动员其拆除市面用语物,所需经费由相关部门、单位或个人承担。 第十八条 实施《朝鲜语言文字工作条例》和本《实施细则》的行政机关工作人员未认真履行职责,在工作中玩忽职守、滥用职权、徇私舞弊的,按情节轻重,进行批评教育或给予行政处分。 第十九条 本《实施细则》自2005年4月1日起施行。      
[논설]현대 “아Q” 들의 행보– 소수민족교육언어 취소문제를 말하다/살구나무 新青岛NEWS 3天前 78 언어의 상실은 민족의 소실 현대 “아Q” 들의 행보  – 소수민족교육언어 취소문제를 말하다. – 글쓴이/살구나무         요즘 연변자치주 민족언어(조선어)교육과 대학 입시에 관한 중앙교육부의 지시에 따라 래년부터는 연변 조선족 중소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를 취소하고 일률로 중국어문으로 입시를 대체하며 학교에서의 수업도 원래 조선어로 가르치던 것을 전부 중국어로 가르쳐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선족 사회의 많은 성원들의 사이에서 소문이 분분하다.  사실의 진상이 어떠하든 간에 이는 이미 중국 전역 소수민족 교육사업에서의 민족언어 사용문제와 민족대융합이라는 정치적 문제와 직결되어 큰 갈등을 부르는 중대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제정에서는 이미 명명백백 중국의 “각 민족은 모두 자기의 언어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가 있으며 모두 자기의 풍속습관을 보존하고 개혁할 자유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제14항)라고 법적으로 규정지어 놓은 바다.  소수민족지역의 공민들이 민족언어문자를 향유하는 권리는 우리나라 이 규정한 중요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그럼 왜 이런 법적인 규정도 어기면서 민족언어를 취소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기에 그 내속을 깊이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세간의 여론은 흔히 정확하다.  소수민족지역에서 민족언어를 없애면 실은 그 해당 소수민족도 서서히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는 소수민족과의 대단결을 옹호하고 중화민족의 대융합을 제창하는 시대의 정신과 세계적인 보편원리에 배치되는 행보이다.  더우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 어긋나는 민족교육 “정책”이다.  그러므로 이런 민족언어 취소정책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우선 에서 제정한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과 언어교육 정책을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 뿐더러 새 시대의 중국의 융성발전과 민족 대단결, 대융합을 두 손 들어 옹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대융합은 단일한 언어사용과 획일적인 교육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족 아이들에게 자기 민족어로 수업을 듣지 못하게 하고 중국어로 수업을 듣게 하는 획일적인 교육방안은 실은 민족 공동발전과 대융합을 돕는 일이 아니다.  머나먼 서방의 나라언어인 영어를 필수적인 외국어로 삼으면서도 국내 소수민족언어를 무시하고 취소하려는 사대주의 오류를 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조선어 과목은 외국어로서도 남겨두고 학교에서 선택과목이라도 설정해 놓아야 한다.  민족언어가 없이 어찌 민족문화와 습관이 존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민족언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야 말로 여러 민족의 민족언어와 교육 및 문화습관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교육부 정책지도자들은 이런 점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둘째, 역사적 시각, 미래적 지향에서 보더라도 민족언어 취소정책은 민족언어의 보존과 발전을 저애하는 행위이다.  일제가 1910-45년대 사이에 조선을 강제로 침략한 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모든 야비한 책략과 정책을 동원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창씨개명(创氏改名)”과 조선글 말살 정책이었다.  그러나 조선글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고 민족언어로 굳건히 지댕해 오면서 오늘의 현대조선어로 발전해 왔다.  중국이 해방을 맞은 직후 일찍 주은래 총리께서도 중국의 조선족 언어는 북조선의 언어를 기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물론 력사적으로 더 소급해 보면 청나라 만족이 중국을 통치하던 시기는 반대로 중국인들이 대다수 인구구성원을 이루었으므로 소수민족인 만족이 되려 중국어를 주동적으로 배우고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중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족관리를 등용하여 나라를 관리할 수요에 영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족의 모어인 만어는 점차 쇠미하게 되었고 오늘 날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사실 세계 역사에서 보면 많은 민족언어들이 등장하고 사라짐을 거듭하였는데 그런 생성과 사멸은 모두 정치적, 인위적인 요소보다도 문화적, 실용적 요소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절되면서 자율적으로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그 어떤 당면의 정책적 수요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와 문화법칙에 대한 몰상식한 표현으로서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런 어리석은 행정적 편리와 사대주의 논리로써 민족언어교육 사업과 정책을 간단화하지 말고 조폭하게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습근평 주석의 새 시대 “중국의 꿈”의 일환으로 국내적으로는 민족대단결과 대융합의 과제는 자못 중요한 의미를 띤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앞으로도 더욱 기세차게 전개되어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열린 사상과 미래지향적 의식 및 무드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문을 닫아 걸고 내부에서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요소를 피해야 하지 불란 집에 기름을 퍼붓는 식으로 화를 더 고장시켜서는 안 된다.  하물며 미국과 서구 등 국제 사회에서 지금 “중국 때리기”에 한창 열을 가하고 이는 와중에서 이런 불미스런 민족언어교육 취소라는 정책을 들고 나와 이른바 “민족융합”을 시도하는 행위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우에서 말했지만 민족언어 생존문제는 역사와 문화적 및 사회적 수요의 법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그 생존이 결정될 문제이지 인위적, 정치적으로 조절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책을 만드는 간부들은 언어학자와 교육학자 및 력사학자 등 광범위한 지성인들과 군중들의 의견과 건의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이는 국내의 민족융합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서구 세력이 중국의 궐기를 제한하고 파괴하는 마당에서 더욱 불리한 협화음을 불러와 국내적 갈등을 악화시킬 위험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민족융합에 불리한 장애를 설정함으로써 결국 “중국의 꿈”의 실현에 부적격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넷째, 민족자치주 정부가 설정된 민족지역에서는 마땅히 수요에 의해 민족언어와 민족교육 시스템이 마련되고 지속되어야 한다.  이는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상식수준의 리치이다.  그런데 왜 연변자치주 령도들은 이를 외면하고 연구하지 않고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지 않고 있는지 실로 자못 궁금하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바른 말을 하고 진리를 숭상하고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오늘날 자치주 령도간부들, 특히 조선족 민족간부들은 흔히 상급의 눈치에는 민감하나 자기 민족 인민들의 의견에는 그닥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불평의 말을 자주 듣는다.  왜 사실과 진리를 말하기 꺼려하는가?   매우 불 보듯 자명한 일이지만 그것은 자기의 자그마한 “벼슬” 때문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것이 어찌 자치주의 “자치”이며 자치주의 행정인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려는 “현대 아Q”들의 행보가 아닐 수 없다.  로신 선생은 중국민족의 렬근성을 비판하면서 당시 시내혁명 전후에 펼쳐진 중국관리들의 행보를 아Q라는 전형적 인물형상을 소설화하면서 강세에 처한 외래세력에는 머리를 숙이고 반대로 자기의 수치와 분노의 분풀이를 자기보다 힘이 약한 국내인들에게 돌리는 정치인들의 행보를 무자비하게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민족언어교육제도도 마찬가지로 자명한 리치이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도리는 소학교문도 못 가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어찌 남의 일같이 방관하고 순순히 양보할 문제이겠는가?  아Q가 가짜 외국 놈한테 귀뺨을 한 대 얻어맞고도 한마디 불평 소리도 못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쇼D를 보고 꾸짖다가 되려 쇼D한테서도 모진 매를 맞고 “정신승리법”을 리용하여 분노를 가까스로 삭인다.  즉 “아버지가 아들한테 맞았다고 생각하자”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니 우습기보다도 몹시 가련한 일이 아니겠는가!  제발 연변 자치주의 이런 “아Q”식 행보가 다시 거듭되지 않았으면 한다. (널리 퍼뜨려 주세요!!!) 글쓴이/  살구나무 2020년 8월 27일  文章已于2020-08-28修改 阅读 1.8万 赞574在看260   写下你的留言 精选留言 두만강오태공 147     延龙图新农夫 박。 108     엄유진 86     朴万浩 83 한 민족이 언어를 잃어가는것은 그민족의 혼을 잃는것과 같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기를!!!.   mika   style 69 만약에 말입니다 이런일이정말로 일어난다면 정책실시한 분들도 그책임 회피할수 없을겁니다   金星 62 한어를 잘하시는 자치주정부 어르신들 번역 부탁합소이다!   chizhegen 57 민족문화를 대표하는민족언어가위협받고있으며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조선민족음악예술도 위기를맞고있는현실이안타갑다 이대로가다간 어느땐가~죽국조선족이 력사무대에서 사라지지않을가가심히 우려스럽다. 민족자치지역에서 우수한민족문화가사라져서는 절대안된다조선민족 당정간부들의 손에 민족의 운명이 달려있다. 중국이라는 대륙이 세계에서 빛날수있는겄은 56개민족의단합과 다양하고 우수한민족문화때문이다   Зиосуньпиль 52     상행선 47 각민족은모두자기의언어문자를사용하고발전시킬자유가있다!   (才能教育)曹老师 45 只取消朝鲜语还是其它少数民族语言也要取消?这不仅仅是我们朝鲜族一个民族的担忧。   tty 44 무작정 정책이라고 수직선을 긋지 말고 머리를 맞대고 대학입시출제 감독관리를 강화하던지 중국어문의 정체성이 민족에게 꼭 심어줄 의향이라면 교과서편찬에서 정도껏 수위를 조절하던지 문제의 근본성을 갖고 연구토론과 적중한 건의와 절충선을 잡아가는게 맞다고 봅니다, 불협화음은 국익을 훼손하고 국민의 인권에도 정당성을 도려내는 일로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우리에겐 신성한 연대도, 중앙민족학원도 있지 않습니까,,수수방관 안 할걸로 알고 민족정책의 방향을 위해 평행선을 달리는데 힘과 노력 함께 할것을 응원합니다   李芷嫣的爸爸 43     中喆 40 一条鱼有病也就是一条鱼的问题,一池子鱼有病那就是水的问题了   云帆박삿갓 39 정책의 종지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조선어문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시험을 비롯하여 모든 면에서 손해와 류실 등 불리한 현상이 발생할것입니다   ADNS 31 문화를 잃어버린 민족은 소멸되기 쉽고 언어문자를 잃어버린 민족은 자체문화를 잃기 마련이다. 오늘날 중국이라는 대국이 강대하게 발전해온 과정에 건국이래 제정한 민족정책이 거대한 작용으로 나라의 화합과 안정이 이루어 졌으며 또한 그로인해 나라는 오늘처럼 발전해온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에 지정된 민족자치권리를 말살해버린다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것이다. 연변주 당정관리자라면 이러한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면 명예와 권리를 바라고한 짓거리라고 볼수 밖에 없는바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기를 바란다.   黄庆顺 27 朝鲜族语文好学,只有小学就可以,读写会话,写个信就可以了。   权大夫 25 될수없는일입니다 민족단결을중히 하는국가로있을수없는 정책이지요.   咸胜镐 25 이 글은 애국정신 뚜렷한 직언 입니다, 그러기에 저도 돌렸습니다, 진정한 애국은 틀린것을 틀렸다 할 수있는 충언 이라 생각 합니다 。저도 이런 소문을 접하고 간대사 이런일이 있으랴 했는데 空穴来风아닌것 같습니다.저자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   옥 천 * 24 중국 공ㅅㄷ이 제일 무서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분렬입니다. 그러면 이런 정책을 낼 수가 없죠?기자님께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로겠지만 만약에 중국 조선족이라면 이런 기사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민족의식에 붙여 애국정신도 함께 구비되 길 바랍니다.   볼런티어(林) 23 사실이 아니길 빌어보면서 이번 2020년 대학입학시험 조선어문 시험지를 한족 선생이 채점하는 거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로 아이들이 상처 받는 일은 없었으면   韩国户外延吉市新时代购物广场5楼 22 우리민족 언어는 나라에서만 지켜줘야 하는것이라니라고 생각이듭니다 .우리 모두 어느나라에 살든지 자손들에게 자기 만족유래를 잘알리고 후손들에게 어릴때부터 민족의 자부심을 전하면 그어떤 힘도 혈통을 막을수 없다고생각 됩니다 저는 조선족 이여서 행복합니다.   安成男 20 프랑스의 위대한 문학가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나오는 아멜선생은 이렇게 애기했습니다. "노예가 된 인민일지라도 자기의 언어를 아로 새겨 두기만하면 감옥의 대문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것과 같다 . " 한 민족이 언어를 잃는다는것은 그 민족의 혼을 잃는것과 같습니다 . 사실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민족언어를 취소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맞서야 합니다 .   柒 20 댓글들을 보면 거저 자기 자식이 커서 사회 나가서 적응 잘 못한다고 얘기들 하시는데 자기 개인의 뜻을 위해 민족이 없어져도 된다는 말입니까?언어를 잃는다는것은 곧 민족이 없어진다능동 의미합니다.난 자기 개개인도 좋지만 민족에 대해 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당신의 자식들이 겉으로는 한족인척 한족학교 다니고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 사회나가서 어느만큼 출세를 합니까?조선족 글자 제대로 쓸줄 모르고.자기 이름은 쓰는가?그래구두 나가서 조선족이라구 지껄이구 다니겠지.우리 주덕해 할아버지가 노하시겠다.우리 모든 조선족들 진짜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입니다.   Ron 19 구체적인 행정문서도 함께 올리면 더욱 믿음성이 있겠는데 좀 아쉽습니다. 보충할 수 있겠습니까?   金冠昊 16 이건 사실입니다,제가 알건대도 지금 소학교에서 실행하고 잇는 사실입니다,이미 다른 소수민족도 이렇게 진행되고 아직 우리 조선족이 마지막 취소대상으로 남아잇는 싱태입니다.언어를 잃으면 민족도 없어집니다.조선족으로서 이런 일이 일어나길 원합니까? 이건 막아야 합니다.   赵香月 16     쑤라니 15     金福顺 15 정확한 소식을 아시려면 百度, 에 들어가서 검색해보세요. 검색해본결과 사실과 다릅니다. 이문장을 쓰신기자.이公众号편집 선생님 문장을 올릴때 국가심의 규정에 부합되는지 심사숙고바랍니다.   金福顺 14 중앙교육부의 도장이찍힌 공문을 보여주세요 .   하늘 13 너무나도 슬픈 현실 !자기 민족 언어가 없어지면 력사도 없어지고 민족이 없어진다는걸 왜 모르실까 ?그리고 글쓴이한테 애국심에 문제가 잇다 하는 사람들 얼마나 애국하길래 애국애국하는지 참 답답하다 .누구는 애국안해서 이런글 쓸가요 ?자기민족 언어를 쓰자는데 이게 애국과 뭔관계가 잇습니까 ?누구나 다 입다물고 그대네처럼 잇으면 조선민족이 계속 존재할가요 ?불현뜻 시 한마디 생각나네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홍심 13 조선어문과 취소설에 대한 정확여부는 잘 모르겠구나 제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지금 우려가 생기는건 사실입니다.소학교에서 한어로 교학을 할수 없는 선생은 배척을 당하는 처지이며 올해부터 조선족이 한족학교를 마음대로 갈수가 있다고 하니 앞으로 조선족학교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老朴 13 这可能吗?   Han YS 12 중국에서 한어를 제대로 쓰고 읽고 표현하는것이 혹시 우리민족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 저 개인적인 생각 입니다 연변조선족들이 언어장애가 심각 한 것 같습니다.    11 예전의 우리연변조선족문화를잃지않고 한국의문화에휩쓸리지않었더라도 이정도는 되지않았을건데   金才虎 10 이것 왼말입니까 말도 안되는일이죠 우리민족은 중국땅에서 교육수준이 평균적으로 제일높다고 자청하지않습니까 국내적으로도 인정을받는일이구요 제언어. 없는 민족이 민족이라고 인정받겠습니까 자기글 자기언어 없는 민족이 어찌 이땅에서 굳굳히 서있겠습니까 그누가 이런짓한답데까 맞아죽을놈이지 않그렀스니까   忠道 10 这是国家有关部门的政策性红头文件决定吗?“是”和“不是”了解清楚后再发议论好了!   Cosmos 9     欢乐天地 9 저는 힘이 없는 중국조선족3세대라고 할수 있습니다. 너무도 엄청난 소식에 놀랐다가 평시에 고민하던 일이 생겼구나 하고 바꿔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농촌가면 한족이 다 차지하고 한가문마다 한족과 결혼하지 않은집이 없고 예전엔 한족과 결혼했다면 말 꺼내기 부끄러워 하던것이 지금은 조선족임을 알고 업신여길가봐 나타내지 않는것을 여럿을 목격하고 놀랐습니다 손주들이 소학교인데 조선어 책과 함께 한어책울 읽는데는 한도가 있고 사회에 나가면 한어로 생활해야하니 별수없다는데 할말을 잃었습니다. 저마다 할수있는 자그만한 것이라도 지구촌으로 변하는 시세에 발맞추려면 어려운 기로에 서 있는것이 분명합니다.   piaocy 9 在教育事业展板前,金辉向总书记介绍了“双语教学”,在朝鲜族学校里都采取双语教学模式,即朝鲜语和汉语,等孩子们小学毕业了,就既会朝鲜语,又掌握了汉语。이내용은어떻에리해해야대죠?   李芷嫣的爸爸 9 문장이 아무리 길어봐야 일뿐이지요,그리고 우리말엔 이런 경우에는 이란 단어를 자주쓰지 는가 아닙니다.   崔光奎 8 朝鲜语文字是好学,这是朝鲜文字的优点,应全世界普及,这更不应该成为我们抛弃朝鲜文字的理由!   南玉兰 8 연길시 모소학교 3학년1반 반주임은 조선말을 일언 반구도 모르는 순수한 한족입니다. 가장들은 학생들이 한족말을 잘하게 생겼다고 기뻐합니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가요.   옥 천 * 8 @李芷嫣的爸爸 저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아서 답장을 남깁니다. 한 기사를 봤을 때 먼저 봐야할 것은 ‘보도내용의 진실성’입니다. 저는 이 기사의 첫 자연단락을 보고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1)다음 해부터 조선어문을 없애고 모두 한어로 강의한는 것을 실행할 수 있을까?2)한족학교에서는 “语文”이라 하고 조선족학교에서는 “한어”라고 표현하는데 “중국어문”이라니……과연 조선족분이 쓴 기사가 맞는지요?3) 민족 단결을 추구하고 민족 분렬을 무서워하는 ㄱㅅ당에서 이 민감한 시기에 이런 정책을 낸다고?4) 보도의 진실성도 보장 못하는 기사를 낸 기자의 목적은 무엇일가?저는 인민을 위해 일하는 당이 훌륭한 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ㄱㅅㄷ은 지금도 잘 하고 있구요. 그러므로 여기서 루머같은 기사를 보도 손가락질 하는 것보다 우리 민족문화을 발양하고 나라 부강에 힘쓰는 것이 더 의미있지 않겠습니까?   老沈 7 提供政府公文等具体证据,要不然告你造谣   老 朴 6 是真的吗?不可相信。   蓝天 6 这是真的吗?是不是招摇?没有看到正式文件以前,不能胡说,要相信党中央。不信谣不传谣。切记切记。   梦回唐朝 6 中华民族2000多年来一直是民族大融合的过程,春秋战国时期的战国七雄都是汉族吗?汉族只是一个名称而已,只有强大的中华文化才能代表中国。现在的汉族本来就是5000年民族大融合的产物。   윤청남尹清男 5 언어나 문자는 살아가는데 도구일 뿐 다 잃는 것처럼 생각은 틀림 영혼이란 말도. 이 사회에서 이것으로 살아갈수있다고 생각 합니까 연변을 나서면 어떤가요 민족이 강대해지려면 모든 것 구전해야 함 유태인이 영어권으로 넘어와서 무엇이 업어졌어요 강대해 졌지요 조선어를 차요에 둔다는 뜻일겸다 ㅐ업쌘단 말은 아날겸다 개혁은 무조건 해야해요 우리 아버지때 했으면 지금 우린 적어도 한국은 안갔을 겁니다 모든 것 살아가기 위해 적응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됨 살기 위해 조국도 떠나왔잖아요  
342    사라지는 고향 댓글:  조회:2341  추천:0  2020-08-31
글 | 오수란 · 방송 | 구서림    9월이 되면 2학년생이 되는 딸애가 새학기부터 우리네 한어교재를 안 쓰고 한족아이들이 배우는 어문교재를 배우게 된다고 한다. 13년 7월생 애를 일찍 붙여놓고 1학년 내내 고생했던 나인지라 겁부터 덜컥 났다. 전번학기 한어도 가까스로 통과하고 겨우 안도하던 마당에 교재를 바꾸게 되면 이 여리여리한 아이가 과연 따라갈 수 있을가 하는 로파심에 방학엔 아예 1학년부터 2학년 한어 어문교재를 모두 구입해다 선행학습을 시작했다. 날마다 과문을 읽히다 보니 저도 몰래 발견되는 사실이 있었다.    모어를 조선어로 하는 애들에게 맞춤형으로 설계된 우리 한어교재는 기초단계의 훈련문제들이 풍부했다. 병음부터 필획 익히기, 한자 익히기, 한자로 단어 만들기… 우리가 영어를 배우고 일본어를 배울 때 거쳐야 하는 기초단계처럼 우리 한어교재에는 제2언어 습득으로서 거쳐야 할 단계들이 차곡차곡 배렬되여있었다. 그러나 중국 어문은 다르다. 중국 어문은 한어를 모어로 하는 애들에게 맞춤형으로 설계된 교재라서 한어기초가 전혀 없는 우리 애들에게 썩 친절하지가 않았다. 필획이나 편방이나 이런 기본기를 훌쩍 뛰여넘어 바로 내용 분석하기, 주요 내용 알아보기로 진입하는 거다. 마치 모어를 조선어로 하는 우리 애들을 위해 설계된 조선어문교재랑 비슷했다. 조선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애들에게도 우리 조선어문교재는 썩 친절한 교재가 아닐 것이다. 왜냐, 이 교재는 우리말에 익숙한 조선족아이들을 위한 교재니까. 단순한 언어습득 차원에서 출발한 교재가 아니라 문화교양까지 목적으로 하는, 말 그대로 어문교재인 것이다.    새학기부터 교재에 시작되는 이런 변화, 아이들의 성장엔 득이 될가? 독이 될가?    이 문제를 답하기 전에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하고저 한다.     1968년 1월 미국의 상하의회에서 통과된 《이중언어교육법》에 당시 존슨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중소학교에서 시행되게 되였다. 사실 미국에서는 애초에 비표준영어를 사용하는 군체에 영어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막대한 예산을 들여 표준영어를 유일한 언어기준으로 하는 단일언어교육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실시해온 이 단일언어교육은 실패로 끝이 났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배운 모어가 학교에서 부정 당하면서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학교생활에 위축되고 흥미를 잃고 결과적으로 학업성적이 떨어지고 학업을 중단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 대책이 바로 《이중언어교육법》이다.     이 법안은 첫째로, 학생들의 중도탈락을 막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였고 학습지진아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이며 시골벽지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법안이였다. 둘째로 이 법안은 모어가 영어가 아닌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서 그 어린이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좀더 나은 출발, 좀더 나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였다. 즉 “그들의 인종이나 거주지역이나 부모의 수입에 관계없이 모든 소년, 소녀들의 잠재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준다”는 것이다.    이중언어교육은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였던 셈이다.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이 변강지역의 안정에 유리하다는 이 점 말고도 또 떠오르는 점이 있다. 바로 내 고향, 도문시 월청진이다.    내 고향은 월청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문시 월청진 석건촌이다. 석건은 시골이라고는 하나 촌에 종이공장에 석유정제공장이라는 두개의 큰 공장이 있었고 학교소속의 인쇄공장까지 가지고 있는 꽤 큰 동네였다. 아버지는 석건소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계셨고 어머니는 학교소속 인쇄공장에 출근하셨다. 문학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아이들 작문지도도 잘해주셔서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생기로 들끓던 연변의 여느 시골들처럼 석건도 생기와 희망이 숨쉬였고 꿈과 기대가 자라는 동네였다. 그랬던 석건촌이 지금은 잡초만 자라는 황페한 마을로 되여버렸다. 석건이 아니라 월청진 자체가 몰락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람이라고 찾아보기 힘든 빈집들 뿐이니 말이다. 언제부터가 시작이였을가?     시작은 아이들이 사라지고 학교가 페교되면서부터다. 석건소학교에 학생 열댓명이 남아있을 때까지도 석건에는 어느 정도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건소학교를 월청중심소학교와 합병해버리면서 석건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결국 월청중심소학교 교장으로 되였다. 그러나 성격이 괴벽하고 고집이 강한 아버지는 늘 상급부문의 령도들과 맞지를 않았다. 물론 나는 그게 교육사업에 대한 애착이라고 생각을 해주지만 자신을 거역하는 사람을 좋아할 령도는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진정부의 누군가와 다투고 진정부 문교부라는 곳에 이름을 걸어둔 채 강제퇴직을 당하게 된다. 교장선생님이 하루아침에 내 아버지로만 남게 된 거다. 그 후 월청중심소학교도 페교되면서 월청진은 아이들이 없는 곳으로 되여갔다.     학교는, 교육은 나무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였다. 뿌리가 시드니 가지와 잎이 죽어버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석건소학교와 중심소학교가 사라지면서 월청진은 이내 인가가 없는 빈 마을이 되여갔고 공장들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당연히 어머니네 인쇄공장도 페쇄되여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였고 아버지와의 모순으로 힘들어하던 진정부의 어느 분도 결국은 존재 가치가 사라져갔다. 사람이 없는 동네에 령도가 웬 말일가. 당연히 그 분도 어느 순간 아버지처럼 령도 타이틀을 내려놓고 민간인으로 돌아가 아무개 아버지로 남게 되였다.    물론 기인우천식의 걱정은 좋은 일이 아니다만 한때의 영광이 한순간 텅 빈 추억이 되여 빈 껍데기만 남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을가.    다시 돌아와 오늘을 생각하자. 사실 이렇게 많은 걱정을 늘어놓은 건 별것 없다. 일곱살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의 걱정과 시름과 불안이다. 나는 21세기를 살아갈 내 아이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한어는 한족처럼, 조선어는 조선족답게 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영어도 잘 배우고 일본어나 로씨야어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언어들을 모두 잘 배웠으면 좋겠다. 왜냐, 우리에게 우세란 언어적인 것, 문화적인 것 이것 뿐이니까. 우리는 태여나서부터 한어와 조선어 두가지 언어를 들으면서 자란다. 완벽한 이중언어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이건 실내수업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주변엔 일본이나 로씨야 같이 린접국들이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 언어학자나 뇌과학연구자들이 모두 증명했다 싶이 12세 이전부터 시작해서 배운 언어는 모두 모어 수준으로 장악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모어를 완벽하게 장악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이중언어인으로의 성공사례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까이로 보면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 역시 성공한 이중언어 사용자이다. 일본에서 태여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일본어와 영어 두가지 언어와 문화권에 익숙했던 그는 작품 창작에서 자신의 태생적 우세를 충분히 활용하여 영국성과 일본성, 서구성과 동양성이 혼종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으며 세계인의 인정을 받았다. 또 2000년 남아공월드컵과 2014 브라질월드컵 주제가를 부른 유명가수 샤키라(夏奇拉) 역시 레바논계(아랍) 아버지와 스페인(카탈루냐)-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난 환경우세를 리용하여 아랍과 라틴계 등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요소들을 통합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음악색채를 형성했고 그게 세계에 통하게 되였다.    사람은 자기답게 살아야 경쟁력이 있고 민족도 자기가 잘하는 걸 해야 한다. 가장 민족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건 아직까지 통하는 론리다. 부디 경계에서 태여난 이 천사 같은 아이들에게도 밝고 순탄한 진달래 꽃길이 펼쳐질 수 있기를…    참여 안내:    “달팽이 약속”에 투고하고 싶으시다면 아래 QR코드를 스캔하시고 친구추가 해주세요! 받은 작품은 심사후 발표 여부를 결정합니다.       监制:金光永 审稿:赵香兰 编辑:具瑞琳 制作:崔月丹 하단의 “阅读原文”을 클릭하시면 “아리랑쇼(阿里郎秀)”프로그램을 시청할수 있습니다. 阅读原文 阅读 1679 赞66在看45   写下你的留言 吴基活 删除未精选 참훌륭한 글입니다.우리 민족교육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책을 지고있는 우리민족간부들이 민족의 사명을 지니고 제구실을 해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우사모를 지키느라 상급의 지시릏 그저 예예하면서 따르지만 말고 모주석의 "10대관계를 론함"을 무기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하늘나라에 계시는 주덕해, 리정문, 김학철...등 민족간부들과 민족을 지키는 문학가...들이 이 글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할가요? 주1급어르신들과 연대령도, 학자들이 우리민족을 지키기에 주저없이 용맹히 떨쳐 나서시오... 吴基活 删除未精选 이문제에서 우리민족만 나서면 협애한민족문제라는 모자를 씌우거나 쓸수있는데 유지한족들이 나서서 "민족문제와 외교에는 작은일이 없다"로 적극 나서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민족의 대언자로... 回复   以上留言被公众号精选后,将对所有人可见 精选留言 莲粉 1 우리 민족의 언어와 글, 나아가 민족 력사와 문화까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 내지 고뇌... 누구나 깊이 사고해야 할 과제가 아닐는지?   图腾诗人 南永前(朋友) 1 是的,如何搞好两种语言教育是个大课题,现在的状况不能不令人担忧!   冠伯  
341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련재19) 댓글:  조회:3081  추천:0  2020-08-13
19. 93세에 동년을 회억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무엇이나 다 크다. 그래서일가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첨벙거리며 놀았던 강이 조그마한 강인데도 아주 넓은 강으로 기억된다. 나무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소학교 운동장 주변에 늘어섰던 나무들을 떠올릴 때 작았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별반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내가 살았던 집도 다 커보인다. 그뿐이랴! 손바닥 만한 마당에도 무슨 추억들이 구석구석 그렇게 많이도 숨어있는지. 겨우 엉덩이를 붙일 만한 크기의 뒤마루도 추억 속에서는 대청마루보다도 더 넓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들로 종종 밤잠을 설칠 때가 있다. 나의 출생지는 지금 지명으로는 조양천진 태양향 횡도촌 향양툰이다. 그때 향양툰은 수전농사를 위주로 하는 지역이였다. 93년이 지난 오늘도 역시 조양천진에서 살고 있으니 횡도는 나를 낳아준 산실이고 또 나를 길러준 요람이며 나의 령혼이 깊이 뿌리 내린 고향땅이다. 나는 늘 고모의 따뜻한 등에 업혀다니군 했다. 지금도 불을 밝힌 집마당의 널뒤주에 앉아서 긴 수염을 내리쓸며 얘기를 나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리고 밤이면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에 끼여서 재롱을 부리고 어리광을 피우던 일도 때론 눈앞에서 가물거린다. 내가 네댓살되던 때의 일이니 아마도 1928년 4월 쯤의 일이겠다. 그 때 아버지는 34세였고 어머니는 25세로서 한창 젊음을 자랑하던 시절이였다. 나는 때때옷을 입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꽃천으로 치장한 소수레에 앉아 외가집 나들이를 하게 되였다. 그 때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 때 나에게는 세살짜리 동생이 있었지만 둘째어머니가 길렀으므로 나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하였다. 그 때 외가집은 조양천[그 때에는 천수해(川水海)라고 불렀다.] 서남쪽 골짜기에 자리한 쌍기정자(双基亭子)에서 살고 있었다. 털렁거리는 수레에 앉아 조양하를 건너 가고 또 가니 길 서쪽에서 마을이 나타났다. 바로 태흥촌이였다. 마을 한복판에 학교건물이 우뚝 서있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국기게양대가 제일 눈에 띄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게 큰 학교건물과 넓다란 운동장을 난생처음 보는지라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마도 내가 가는 도중에 그만 잠이 들었던 모양이였다. 아버지가 나를 깨우면서 철길을 보라고 하였다. 그 때 철길은 작은 기차만이 다닐 수 있는 소철길이였다. 이어 아버지가 “을록(애명)아, 불술기(기차의 방언)가 방금 지나간 것 같구나. 철길 우에 아직도 연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걸 봐선.”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기차란 두갈래 철길 우에서 굴러가는 수레일 것이라는 정도로만 리해했을 뿐이였다. 외가집은 여섯칸짜리 초가집이였는데 외할머니께서 동향 바깥출입문이 있는 뒤방에 병환으로 누워계시고 있었다. 그 때 외할머니께서 나에게 엿가락을 늘여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할아버지와 이모들의 모습도 똑똑하지는 않지만 어슴푸레 떠오른다. 그리고 외가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사암(砂岩)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가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버지가 모는 수레에 앉아 외가집 나들이를 하던 꿈만 같던 나날들, 나는 정말 행운아였다. 행복했던 이런 기억들이 내가 살아온 발자취로 되여 지금까지도 남아있으니 이 모두를 금싸락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누군가는 “어린아이들은 언제나 동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행복할 때에만 동시를 쓸 수 있다. 그것은 어른들은 행복할 때에야만이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내가 93세의 나이임에도 잊지 못할 동년시절의 기억들이 많은 것은 아마도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너무 행복해서가 아닐가! 김수철 2017년 2월 25일
340    창조적 인간 댓글:  조회:3242  추천:1  2020-08-12
나라의 개혁개방대문을 활짝 열리자 많은 조선족들이 돈벌이로 내지나 외국으로 륙속 진출했다. 이에 비춰 여러 조선족농촌을 돌아보면 상당수의 남자들이 부인을 한국에 보내고 외토로 지내며 안해가 부쳐온 “뼈돈”을 쓰면서 무직”으로  매일을“보내는 실정이엿다.   심지어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나는 60전부터 “디보(底保)를 받는다”며 자랑을 했다. 필자가 돌아본데 따르면 상당수의 농촌“외톨이”들이 집앞뒤 터전마저 가꾸지 않아 풀이 무성하였다.  고향마을의 모모는“낮에  바깥나들이를 하다가 저녁늦게 돌아와서 불을 때기 싫어서 그냥 전기담요를 펴고 잔다”, “아침밥을 먹은 사발마저 싯기 싫어서 한데쌓아 두었다가 함께 싯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차라리 마을에 “외토리집체호를 꾸려서 집체로 먹고 자면서 생활경비라도 줄이라”, “그리고 외토리들을 조직하여 공밥을 먹지 않는 활동”을 하라고 건의하였다.   이한 실정에 비춰 월전에 필자는 “하루라도 공밥을 먹으면 마음에 걸립니다”는 70대로인 박길봉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1950년 7월 9일에 도문시 월청진 마패2대에서 형제3남1녀의 막내로 태여난 박길봉은 9살에 아버지를 잃고 24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농촌서 대학꿈을 꿨는데“문화대혁명”으로 중학(초중)을 2년을 다니고 귀향하여 농사일을 하다가 1969년에 참군하여  3년을 복무하고 제대한후 마패대대(촌) 공청단지부서기사업을 맡고 사업하던중 1972년 가을에 상급의 문건전달로 대대(촌)채석장에 갔다가 일손을 돕던중 그만 락석사고로 머리에 중상을 입었다. 그후 조직에서는 그번 사고를 공상(公伤)으로 처리하면서 그의 호구를 마을의 비농호로 넘겨주었다.  그렇다고 박길봉은 농사일을 멀리 아니하였다.  49살에 부인을 잃고 두 아들의 “어머니”로 지내면서도  15년간 생산대 대장사업을 하였고 51살부터 6년간을 마패대대 당지부서기사업을 하였다. 당지부서기로 일하던 기간에 그가 당원양성, 물길개발, 상납금완성등 면에서 업적이 돌출하여 그의 사적이 6번이나 “연변일보”에 실리기도 하였다.  “공밥을 먹지않는다”는 길봉씨의  좌우명이다.  길봉씨는 “나는 일을 아니해도 변변히 삽니다”“나는 지금 혼자서 자취하는데 경제래원이 넉넉합니다.”며 6가지 내용으로 자기네 가정경제상황을 소개하였다.   “나의 경제래원이 이만하면 농촌서 부유축에 속하지요, 그러나 나는 하루라 공밥을 안 먹기위하여“계절도우미”를 찾아 하고 과수재배기술을 배워 200여 그루의 오얏나무를 재배하면서 경제수입을  톡톡히 늘입니다.  지난해에는 남을 무상으로 돕느라고 시작한 “떡군”(찰떡치기)이 그만 주인의 마음에 들어 몇달간을 이른새벽부터 도문아침시장에서 떡을 쳤답니다” 사회적인 대접을 받아야 할 년세인데 “떡꾼”으로 일하니 많은 사람들이“저집 경제형편이 오죽 어려우면 저 년세(71)에 떡을 치겠는가”며 뒤에서 후론한다는 필자의 말에 길봉씨는 보기 좋은 웃음으로 두손을 펴보이며 “돈벌이보다도 내가 신심이 있으니 하는거지요. 아직까지는 신체는 변변합니다. 한평생 굳어진 나의 손에는 가시도 못듭니다”“이나에에’떡꾼’으로 불려다닌것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며  몸자랑을 하였다..   인뷰를 마감할때 길봉씨가 하는 말이다.. “ 당원의 임무를 끝까지 완성하자니 쉽지는 않습니다.” “지금 남을 위해 복무할 조건이 안되니 당원자격이 없지요.” “ 그래서 매년  30원표준의 당비를 50원을 내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표시합니다.”    박길봉씨야말로 당대 농촌의“창조적 인간”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창조적 인간은 여가를 게으름으로 버리지 않는다. 창조적 인간이란 자신을 신뢰하면서 하루하루를 기쁨과 함께 생활하고 열렬한 목표지향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창조적 인간은 자기의 힘을 목표 지향의 형태로 방출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다. 오기활    
339    사상,반성,그리고 하고픈 말 댓글:  조회:3107  추천:1  2020-08-09
로공산당원들의 말을 들어 본다    필자는 올해 당창건99주년 생일을 계기로“홍광향 원로촌부녀주임만남회”(이하 만남회)에 활동에 두번초청되였다. 이“만남회”의 6명회원들은 당령이 40년이상의 70대로당원들로 황금란(오공촌), 로영애(집중촌), 리현숙(홍위촌), 정금자(수남촌),박계숙(흥진촌),강련옥(향기관)이다. 올해까지 3년을 이어온 이“만남회”는 올해만 두번 조직했는데 올해 모임에는 홍광향의 로촌당지부서기 집중촌의 한진길(74), 10년이상 홍광향당정기관사업자로 필자가 초청되였다. 홍광향은 1965년 5월 1일에 도문시가 성립될때 도문서 유일한 농촌인민공사(향)였는데 지난 농촌체제개혁때  도문서 “홍광향”을 두개지역으로 갈라 월청진과 석현진에 귀속시킨데서 도문시 “종자향”이 력사무대에서 사라졌다. 지난 5월“만남회”는“당원은 한폭의 기치이다”를 주제로 모두가 오늘의 자신을 돌이켜 보고 혁명렬사 유복녀로 지난 년대에“길림성로력모범”,”길림성3.8홍기수”, “연변조선족자치주10대녀걸”인 로영해(73)가 지금은 다리병으로  앉은뱅이 된 형편에서 무한보위전영웅들게 현금 1만원을 헌금한 사적에 따라“지금 앉은뱅이로 되고보니 성했을때 더 많은 일을 못한것이 제일 후됩니다”는 그의 애달픔발언에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두번째로 6월 “만남회”는“지난날에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 지금에 후회되는 일, 사회, 후대에게 하고싶은 말”로 “만남회”를 “백화만발”“백가쟁명”의 열기로 넘치게 하였다.   이하는 6월 “만남회”때 “쌍백”(双白)발언내용이다. 문: 지난 날에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 답: 지난날 우리는 사상을 먹으면서 일했다.  1년에 겨우 70원씩 보조를 받으며 죽을둥 살둥을 모르고 일했다. 심지어 부녀활동자금을 해결하기위하여 개인이름으로 대부금을 맡아서 활동경비를 해결하면서 집체에 손해를 주거나 공금을 점하려는 속궁리는 한번도 못(안)했다. 지금생각해도 잘했다고 여겨지며 아무런 후회가 없다. 문:돌아보면 반성되는 일이 있다면? 답: 그때나 지금이나 기층간부들은 우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산아제안(계획생육)사업을 너무 극좌적으로로 추진한것 같다. 생육부녀들을 쫓아다니면서 억지로 절육수술을 기켰고 임신부녀가 있으면 기어코 벌금을 시켰다.  지금도 “최3백”(임신으로 300원을 벌금당한 녀성의별명)을 만나면 매우 송구스럽고 반성하게되는 마음이다. 문: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답;촌에 젊은이들이 없는것이 문제다. 심지어 (어느) 촌에는 젊은이가 없어서 60세로인이 민병련장을 맡고있다. 농촌의 앞으로가 걱정된다. 빈곤호부축사업이 실제적이면 좋겠다. 대중토론도 없이 일하기 싫어하는 60전“노랑배”를 디보(底保)주는데 이는 너무하다. 어느 빈곤호는 빈곤부축으로 콩기름만 12병이나 받았다며 너무 많아서 어느 식당에 무상으로 주려해도 안받더라며 “골이아프다.”고했다. 이런 말을 해야 옳은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민당”인지 모르겠다.  초심을 명기하기 위하여 당원들이 입당선서를 다시할때 그모임에 참가한 비당원들까지 함께 입당선서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어느 촌에서는 건당기념활동에 비당원이 당휘를 달고 참가했다. 지금의 당내 규정(정책)을 모르겠는데 지금은 촌마다에 “촌민위원회”간판과 함께 “,,촌 당지부”란 간판이 걸려있는것에 리해가 안된다. 당지부는 어느급의 당,정집행기관도 아닌 당의  제일 기층조직으로  공장( 公章)도 없는데  당지부란 간판을 걸다니 말이 안된다.  .   이밖에도 올해 음력설야회의 소품에서 나오는“중공마신향마곡촌촌민위원회”간판도 한심하다. “촌민위원회”의 간판머리에“중공”을 달다니 말이 되는가? .중국이라고 해도 모르겠는데..... 필자는 두번의 “만남회”에서 초심을 잊지않고 사명을 명기하기위해 만년까지 당격을 지키는 로당원들게 경의를 드린다.   오기활    
33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18) 댓글:  조회:2814  추천:2  2020-08-01
18. 나, 일본학자 그리고 일본행 나와 일본과의 인연은 동북림업대학 류삼규 박사가 맺어주었고 또 그를 통해 돈독히 하였다. 동북림업대학에서는 자주 국제학술보고회를 조직하였는데 류박사는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오기만 하면 꼭 나를 초청하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본학자들과 류창한 일어로 식물학지식들에 관해 교류를 하군 하였다. 그리고 일본교수들은 저들의 박사연구생들을 나에게 맡겨 실습지도를 받게 하였다. 일어에 능숙한 나는 어느새 그들과 우스개도 주고받는 허물없는 사이로 되였고 그들과 려행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뿐이랴! 나는 청소년시기에 읽었던 일본문학작품들을 떠올리면서 그들과 일본문학작품에 대해 교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내가 청년 때에 일본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접했던 사이죠 야소(西条八十), 야마다 비묘우(山田美妙), 오자끼 시로우(尾崎士郎), 미끼 로흐우(三木露风) 등 일본작가들에 대해 언급하자 젊은 일본학자들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검색해보고는 “아! 그런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하며 나의 일본문학지식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후 나는 류박사 덕분에 일본행도 할 수 있었다. 박사연구생―아베(阿部) 동북림업대학에 드나드는 일본 동경대학 학술단 단원들중에는 이이야마(饭山)라는 가장 년로하고 저명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동경대학 교수로 있을 때 자기의 박사연구생 아베를 흑룡강성 안달에 있는 류삼규 박사의 실험지로 데리고 와서 나한테 맡기며 실습지도를 부탁하였다. 나는 아베를 온종일 풀밭에 데리고 다니면서 교학지도를 하였다. 하루는 식물실습을 끝낸 후 나와 아베 단둘이서 길가에 걸터앉아 한담을 하고 있는데 실습지의 식당을 관리하는 한 아가씨가 우리에게 포도를 건네주며 먹으라는 것이였다. 나는 포도를 껍질을 뱉지 않고 대강 씹어서 삼켜버렸지만 아베는 포도즙만 빨아먹고는 껍질과 씨는 뱉아버리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롱담조로 아베에게 말을 걸었다. “아베야, 포도는 야만인처럼 먹어야 몸에 좋단다. 껍질에는 즙보다 더 진한 안토시아닌과 활성물질이 있어 버리면 랑비란다. 그리고 씨는 미끌미끌하여 통째로 삼키기 쉽단 말이야. 씨에는 영양분이 그닥 많지는 않지만 넘기면 위벽과 장벽 청소도 해주고 변배출도 촉진하는 역할을 하지.” 총명한 아베는 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참 옳은 말씀입니다. 좋은 일은 서둘러서 실행하라고 했으니 저도 선생님처럼 먹어보겠습니다.” 하며 내가 알려준 대로 먹기 시작했다. 꾸밈이 없고 순박한 그의 마음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 후 내가 요청으로 동경대학에 갔을 때 마침 아베가 다까노 데쯔오(高野哲夫) 교수의 학생으로 박사공부를 하였기에 우리는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베가 그 때 포도를 먹던 이야기를 꺼내 우리는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오매불망하던 일본행 1) 나의 일본행 조건 류삼규 박사와 일본학자들의 노력으로 나는 2007년에 일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장백산야생자원식물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였다. 그리고 이란 론문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론문의 필자로는 나외에 류삼규, 오명근, 다까노 데쯔오 등 교수들이였다. 론문의 키워드와 요점은 영어로, 그 외의 것은 일어로 서술하였는데 론문 전부를 나절로 컴퓨터로 타자해야 하였다. 일문타자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걱정이 앞섰으나 마음을 먹고 해보니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론문은 A4용지로 6페지에 달했다. 보고할 때 환등편도 30장을 준비하였다. 이 작업은 오명근 박사가 협조하기로 하였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요청한 목적은 바로 내가 직접 론문을 발표하는 것이였으므로 나의 론문작성이 내가 일본행을 할 수 있은 가장 관건적인 요건으로 되였다. 나의 출국수속은 처음부터 오명근 박사가 책임지고 했고 나는 그와 함께 2007년 5월에 연길에서 떠나 대련에서 하루밤을 체류하고 이튿날에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2) 창공에서 본 일본 흐린 날씨였지만 비행기가 구름 우로 오르니 기내는 개인 날처럼 해볕이 쬐였다. 비행기가 황해를 날아 산동반도에 이르더니 거기서 다시 가없는 푸른 바다를 동행하며 서울을 지나 부산을 경유했는데 현해탄을 건널 때 나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였다. 그런 와중에 얼마쯤이나 지났을가. 나는 그만 화뜰 놀라 정신을 차리고 하늘 아래를 부감했다. 마침 후지산(富士山)이 흰머리를 구름 밖에 내놓고 위용을 떨치고 있지 않겠는가! 아! 후지산! 내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후지산에 관한 이야기들이 눈사태처럼 밀려와 나의 머리를 황홀케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매혹적인 후지산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비행기에서 본 일본의 산야는 푸르른 록지였다. 곳곳에는 깨끗하고 네모난 논밭과 네델란드에서나 볼 수 있는 넓고 울긋불긋한 꽃밭들이 경관을 이루었다. 해안선을 따라 날던 비행기가 내륙으로 향하더니 낮게 뜨며 잠간 사이에 나리다공항에 착륙했다. 모든 입국수속을 끝마치고 출구로 나오니 류삼규, 다까노 데쯔오, 장흔흔(张欣欣) 등이 마중을 나와 반기며 짐을 차에 실어주었다.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중형 승용차를 몰고 동경대학을 향해 달렸다. 3) 국제교육기지에서 일본엔 황사가 없는지 길가의 초목들이 한결 더 푸르러보였다. 게다가 무상기가 긴 때문인지 나무가지는 우리 동북보다 더 길게 자라서 나무의 모양들이 달라보였다. 천백년에 이르는 고목들이 도처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리니 그 곳은 동경대학 농장과 실험교학청이 즐비하게 들어선 원림지였다. 우리의 숙소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의 연구소 부근에 있는 이층회관에 정해졌다. 회관의 길쭉한 강당은 미닫이로 칸막이를 하여 평시의 리용에 편리를 주었다. 바닥은 일본 특유의 다다미로 깔았는데 다다미는 길게 자란 골풀로 짠 돗자리와 벼짚을 한데 꿰매여 다진 것이였다. 이부자리는 포근한 비단이불과 비단요였다. 그 넓은 방을 나와 오명근 박사 단둘이 차지하였다. 회관을 관리하는 50대 남성인 다까노 데쯔오(高野哲夫) 교수가 자주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군 하였다. 그는 생각 밖으로 내가 일본말을 잘하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더 자주 드나들면서 얘기를 주고받았고 지어는 롱담까지 하면서 허물없이 지냈다. 동경대학 아시아환경자원연구중심이 바로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까노 데쯔오 교수는 우리들에게 자기의 연구실을 구경시켰다. 류삼규 교수의 비서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북림업대학의 장흔흔도 다까노 데쯔오 교수의 도움으로 일본 문부성(文部省) 국비류학생으로 여기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었다. 장흔흔의 부모님들은 흑룡강성 대경에서 살고 있었는데 장흔흔은 무남독녀로서 부모님들이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다. 여기는 장흔흔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박사연구생들로 운집된 학부였다. 장흔흔외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녀박사연구생도 있었는데 내가 “만나게 되여 반갑소.”라고 했더니 그녀도 “저도 교수님을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받는 것이였다. 내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묻자 그녀는 “저의 이름은 엘리자예요.”라고 수집어하면서 대답하는 것이였다. 따라서 여기가 바로 높은 국제적인 차원의 교육기지임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럴 때 쯤에 물찬 제비마냥 호리호리한 몸매의 한 처녀애가 달려들어오는 것이였다. 찬찬히 보니 아베였는데 다까노선생의 제자로 여기에 와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였다. 이이야마 교수가 쯔꾸바(筑波)세계농업연구소의 소장으로 전근하니 아베도 여기에 오게 되였고 한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우리는 또 안달에서 포도를 먹던 얘기를 나누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4) 국제학술보고회 2007년 6월 3일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그것은 내가 아시아의 최고학부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장백산야생자원식물세미나’에서 론문발표를 하기 때문이였다. 청중들 모두가 대학 교수, 저명한 학자, 박사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우수한 박사연구생들로서 ‘학술보고를 일삼으면서 학술생애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였다. 때문에 학술보고 수준의 여하를 가늠하는 론문평론에서 신경이 바늘끝마냥 예민하고 또 야박할 정도로 보고서의 내용을 족집게질 하는 청중들인 것 만큼 일언반구라도 틀린다면 그보다 더 체면이 깎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나만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우세를 하나씩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1) 나에게는 한국자원식물학회에서 주최한 국제학술보고회에서 여러 차례 보고를 한 국제무대의 경험과 단련이 있다. (2) 나는 식물의 일어명칭을 많이 알고 있고 능숙한 라틴어와 영어로 식물학명을 말할 수 있다. (3) 나는 장백산식물현지답사를 많이 했었기에 돌연적인 질문을 받더라도 잘 응부할 자신이 있다. (4) 일어가 능숙하기에 나의 의사를 막힘없이 표달할 수 있다. (5) 류삼규 박사와 오명근 박사가 나를 많이 고무격려해주고 기술적으로도 많이 협조해줄 것이다. 오박사가 식물환등방영을 담당하기에 뒤심이 든든하다. (6) 보고의 조직자이며 사회자인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것이다. 이러고 보니 나는 모든 조건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것 만큼 겁나하고 잘하지 못할 리유가 거의 없었다. 나는 우선 영문과 일문으로 된 서면학술보고 100부를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발부하였다. 학술보고가 시작되였다. 얼핏 둘러보니 청중들이 50~60명은 잘되는 것 같았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금쪽같이 귀중한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격스럽고 죄송스러웠다.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연단에 올라 나를 소개하고 나서 청중들에게 부탁까지 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이신 김수철 교수가 동북아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식물의 수직분포와 우리 나라의 후지산과 많이 류사한 중조변경에 자리한 장백산식물에 대한 보고를 하십니다. 저는 중국 할빈에서 김교수님을 자주 만나보았고 또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박수를 아끼지 맙시다.” 나의 보고는 오명근 박사의 능란한 컴퓨터조종환등기술로 원만히 마무리를 하였다. 보고가 끝나자 한 청년이 일어나서 나에게 질문했다. “장백산이라면 산꼭대기에 일년 내내 흰눈이 덮여있겠지요?” “눈은 7~8월이면 거의 녹고 9~10월이 되면 또 내립니다. 장백산은 산봉이 흰 부석이기 때문에 눈이 없어도 그냥 하얗게 보입니다.” 이어 나는 말했다. “땅은 사시장철 내내 얼어있는 동토대(冻土带)구요.” 이 때 또 한 청년이 일어나서 질문했다. “우리 나라의 후지산엔 키가 2m에 달하는 왕엉겅퀴가 있는데 그런 식물이 장백산에도 있는지요?” “그건 정말 굉장히 큰 엉겅퀴입니다. 내가 래일 후지산으로 가는데 그걸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걸 천추만대 후세에 남겨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장백산에도 엉겅퀴가 있지만 그렇게 큰 종류는 없고 다만 그에 비교할 만한 것으로 도깨비엉겅퀴가 있는데 귀엽고 아름다워 등산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답니다.” 내가 대답하자 바람으로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페회를 선포했다. 그리고는 연단에서 내려오는 나를 마중하며 두 손을 힘껏 잡아주더니 흥분에 넘쳐 찬사까지 보내주었다. “학술보고가 아주 성공적이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이날 보고에 대해 나보다도 더 걱정한 분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류삼규 박사와 오명근 박사였다. 보고가 끝나자 그들은 나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격동에 못이겨 이렇게 말했다. “보고가 정말 성공적이였습니다!” 5) 축하파티 한국자원식물학회에서는 매번 국제학술보고회가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꼭 축하파티를 열었다. 이런 파티는 대회의 성공을 축하하려는 것이 목적이였지만 보고회 참가자들의 호상간의 친목을 도모하려는 목적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번 국제학술보고회는 아시아에서 최고학부로 손꼽히는 동경대학에서 열렸으므로 그 축하파티도 당연히 동경대학에서 치르게 되였다. 시장에서 여러가지 해산물과 육류, 과채, 조미료를 구입해왔다. 점잖아보이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친히 팔을 걷고 나서자 수하의 젊은 교수, 박사, 연구생들도 그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엔 식당 아줌마까지 모두 동원되여 파티준비에 나섰다. 저녁때가 되여서야 축하파티가 시작되였다. 술에 얼근히 취한 지식인들이 평소의 침묵을 깨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와 다정하게 마주앉아 마음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술기운을 빌어서 아시아차원의 생태환경과 자원식물연구, 그리고 인재양성에 대한 다까노 데쯔오 박사의 공로를 극찬하였다. 따라서 나는 중한수교를 수립함에 있어서 위훈을 떨친 한국의 애국화교인 한성호 박사가 북경대학에서 웅변을 토할 때 “중국사람들은 웃음과 박수에 너무 린색하다.”고 하며 남을 칭찬하기를 싫어하는 중국사람들의 린색함을 지적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지라 중국사람들도 린색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주 박수를 보내며 웃음꽃을 피웠다. 좋은 점은 서로간 찬양하고 앞으로 서로 버팀목이 되며 속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러한 파티는 무성한 줄기와 잎으로 되여 보다 아름답고 큰 꽃을 피울 것이며 보다 크고 쓸모 있는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동경대학에서의 학술보고는 나의 학술연구에서 종지부가 아닌 시발점으로 되였다. 자만자족하면 종착점이 되고 허심탐구하면 시발점이 되니깐. 6) 아, 후지산! 오매불망 바라던 것이 그 어떤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지게 되는 메커니즘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동경대학에서 학술보고를 끝낸 이튿날, 연변농학원 졸업생인 장거현(张巨贤)이 찦차를 몰고 우리 거처에 왔다. 후지산으로 놀러 가자는 것이였다. 나의 평생소원이 류삼규 박사의 배려로 이뤄진 것이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각이였다. 나, 오명근, 류삼규는 장거현이 운전하는 찦차에 앉아 후지산을 향해 출발했다. 꿈이냐 생시냐를 가리려고 눈을 지긋이 감았더니 일전에 꾼 남가일몽(南柯一梦)이 떠오른다. …어느 한번 나는 장백현성에 가게 되였는데 도착하자 바람으로 그 곳의 절경인 고탑공원을 거닐게 되였다. 그 때 놀랍게도 고탑 아래에서 ‘문화대혁명’ 때 우리 농학원에서 대자보를 제일 많이 쓴 ‘혁명용사’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내가 천리타향에서 친구를 만나자 너무 반가워 인사를 했더니 그 친구는 반가워할 대신 이렇게 나를 훈계하는 것이였다. “당신은 왜 그냥 그 모양 그 꼴인가? ‘문화대혁명’ 때도 ‘백전(白专)’도로를 걷더니 지금도 일본사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다니 원… 내가 그렇게 충고를 했는데도 말이야… 응?” 친구는 나를 훈계하고 나서 나의 변명을 들을 념도 하지 않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가일몽이였다. 기회를 엿보아 정치적인 야욕을 채우려 했던 그 때 그 친구의 훈계가 일본행인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젠 후지산으로 왔으니 후지산에 대해 얘기해보자. 중국의 장백산은 올라가는 곳이 북파(北坡), 서파(西坡), 남파(南坡) 세곳뿐이다. 동파(东坡)에는 장백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다. 그런데 후지산은 사방이 자기들의 땅이기에 등산길이 13갈래나 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등산객들이 장백산처럼 붐비지도 않고 등산료금도 받지 않으며 곳곳에 안내패말이 세워져 등산객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나는 안내패말이 하도 많아 너무 신기해 찰칵찰칵 사진기렌즈에 담았다. 내가 첫눈에 반한 것은 후지산 기슭과 허리에 울창하게 서있는 침활혼성림이였다. 장백산은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많다. 6월초의 후지산은 하얀 눈으로 덮였고 눈 아래는 돌바다(石海)를 이뤘다. 그리고 6월이였지만 웬일인지 개화한 꽃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6월초의 장백산에서는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해있음을 볼 수 있다. 학술보고에서 그 질문자가 말했던 유명한 ‘왕엉겅퀴’의 웅장한 모습도 나의 시각을 파고들었다. 아직은 꽃봉오리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후지산은 자연보호구였으므로 나는 일초일목(一草一木)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표본으로 채집하고 싶고 기념으로 남기고 싶은 초목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바쁜 일정이라 일일이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었다. 기슭에 있는 매점으로 들어가니 천연식물들로 만든 기념품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속히 동경으로 가야 했으므로 관계일군들과 몇마디 인사말을 건넸을 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식물로 만든 그 미묘한 공예품들은 더 구경할 수 없었다. 귀로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신기한 식물들, 알고 싶은 식물들이 우리의 차가 멈춰서기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하지만 무심한 차는 앞으로 앞으로 달릴 뿐 좀처럼 멈춰설 줄을 몰랐다. 이번 후지산려행은 너무 급한 걸음이라 아쉬움만 남겨주었다. 만약 일주일이란 시간을 더 줬더라면 아주 만족스러운 려행으로 되였을 텐데. 우리의 장백산처럼 후지산 역시 일본의 명산이며 동북아의 명산이다. 나는 누가 또 나에게 후지산으로 가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한달음에 뛰여가 아쉬움만 남겨놓은 후지산을 만긱할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후지산이 없으면 살 재미가 없다고 한다. 상품도 후지산상표가 있으면 잘 팔린다고 한다. 우리 백의동포들이 장백산을 선조들의 령산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사람들도 후지산을 령산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이런 감정으로 후지산행을 바라고 또 바랐건만 이번 후지산행은 나에게 아쉬움만 남겨주었다.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저녁)  
337    묵향 천리, 덕향 만리 댓글:  조회:2806  추천:0  2020-08-01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었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2020-07-31 09:11:14     1988년 여름, 상해 황포강 나루터에서 저자 고 김응준 시인)과 그의 우연이라 할가 아니면 인연이라고 할가, 시인 고 김응준 은사님과 교분을 쌓아온 지도 어언 6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59년 훈춘고중시절 한어과임이셨던 고인의 선정을 받아 한어과 대표를 맡아 하면서부터 은사님과 정분을 다져왔고 줄곧 은사 삼아, 형님 삼아 공경해오던차 지난 7월 7일 불행히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그냥 굳어져버렸다. 지난해 11월 중순 내가 치료차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병석에 계시는 은사님을 찾아뵌 것이 아마 그와 생전 맑은 정신상태에서 가진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내가 귀국하는 대로 함께 손잡고 리수일과 신순애의 사랑을 노래한 씨나리오를 쓰자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귀국 후 코로나사태로 하여 찾아뵙지 못하다가 사망 전날 병상을 찾았을 때, 둘째 딸 홍심이가 혼미중인 아버지의 귀에 대고 “장춘삼촌 오셨어요.”라고 알리자 즉시 눈을 뜨고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악수는 분명 은사님의 영면 전 우리 사제간 사귀여온 60여년 긴 세월의 마지막 석별에 찍은 종지부였다. 돌이켜보면 과연 ‘탄지일휘간(弹指一挥间)’이라고, 1959년 선생님께서 북경대학 중문학부 연수를 마치고 25세의 꽃나이 총각선생으로 훈춘고중 한어과임교원으로 부임되여 온 후 그의 검소한 차림새와 소탈한 성격, 더우기 생활 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학생들의 호감을 자아내면서 자석마냥 끄당겨 따르게 하였다. 수업 또한 인기 만점, 한어교연조의 한족교원들도 뺨칠 정도로 한자어 발음 성조(声调)표기 하나 틀림없이 확실하게 가르쳐주시던 그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한어작문과 문학에 뜻을 둔 제자들을 별도로 이끌어 문학의 꿈을 키워주신 은사님, 그래서 더욱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하였다. 특히 생활난으로 어려운 제자들에게 사랑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시던 그 시절 감격스러운 일화가 어찌 한두가지 뿐이랴! 지난 세기 50년대 후반 되게 어려웠던 년대에 은사님 가정형편도 초근목피로 겨우나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이였지만 가끔가끔 시골에서 온 이 제자를 자기 집으로 불러주었다 “이거라도 배불리 먹기요, 숙소에서 배곯기보다는 나을 거요…” 된장 한숟가락 떼여 수수밥에 발라주시던 은사님, 지금도 그 사랑, 그 정에 목이 메군 한다. 수수밥이나 두병밥으로 기아를 달랜 후 선생님의 침실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선생님의 공부비결도 발견하게 되였다. 이미 중국 명문대인 북경대학 연수까지 마친 상당한 수준이였지만 선생님의 침실 3개 벽면과 천정은 온통 친필로 쓴 한어 사자성구(成语)로 도배가 되여있으니 앉으나 서나 누우나 겨를만 있으면 한어성구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암기할 수 있었다. “아, 공부는 이렇게 하고 지식은 이렇게 쌓는구나…”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비법까지 배웠으니 어찌 은사님을 숭배하지 않고 또 따르지 않을 수가 있으랴! 1962년 6월, 중앙민족대학 입시를 앞두고 은사님은 반달 동안 무등 신경을 쓰시며 까근히 작문지도를 해주었다. 지어 연길로 시험을 치러 가는 날 아침 뻐스역까지 바래주면서 시험을 칠 때 우선 작문 출제를 제대로 포착하라고 재삼 당부하셨다. 이렇듯 인생의 전도에 관련된 관건적 시각에 친동생마냥 깐깐히 챙겨준 그 은혜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하여 세월이 가고 점차 ‘철’이 들면서 내 나이 칠십이 된 해부터 매년 음력설이면 빠뜨리지 않고 은사님께 ‘강다짐’ 세배를 올려왔다. 은사님께서는 또 매년 방학이면 100리, 200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춘화, 경신, 량수 등 오지에 사는 제자들 가정을 찾아 방문하셨다. 훈춘 시골 촌락 골목길에 은사님의 발자국이 찍혀졌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제자들과 학부모들은 여전히 그이를 ‘우리 선생님’이라고 친절히 부르고 있다. 새삼스레 위챗에서 읽었던 명언 두 구절이 떠오른다. “좋은 사람과의 인연은 소중하고 또 오래갑니다.” “란향백리(兰香百里) 묵향천리(墨香千里) 덕향만리(德香万里).” —백화문체로 풀이하면 “란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묵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네.” 고 김응준 은사님이야말로 1954년에 발표한 처녀작을 시작으로 문단 데뷔 66년 동안 무려 7000여수의 시가 창작과 더불어 저서 23부를 펼쳐내면서 천리(에 날린) ‘묵의 향기’를 《시향만리》(연변시인협회 간행물 제호)로 승화시키고 아울러 모든 제자, 친지, 동료들에게 믿음과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온 만리(에 날린) ‘덕의 향기’임에 손색이 없다. 6년 전 2014년 8월 9일 연길 국제호텔에서 가진 ‘김응준 시인 탄신 80돐, 문단 데뷔 60돐 및 최신작 《사랑으로 가는 길》 출판 기념회’에서 올린 축사 한 대목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날 옛 훈춘고중 7기 졸업생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내가 50여명 동창생들의 마음을 담아 은사님께 강태공(姜太公)에 관한 옛 전설 한토막을 들려드렸다. 옛날 강태공이 주무왕(周文王)을 도와 80세 되는 해에 상(商)나라를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세운 후 80년을 더 살아 160살을 누리였다고 하여 후세인들은 강태공의 인생을 ‘전(前)80, 후(后)80’이라고 불렀단다. 그러니 “은사님께서도 이미 80년을 살았으니 오늘 이 기념행사를 시점으로 ‘김응준 후(后)80년’ 생을 시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언을 하였다. 과연 은사님께서는 제언을 받아들이신 듯 탄신 80돐 기념회 후 즉시로 여생의 최종작품이라면서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창작에 살손을 대셨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년 후인 2016년 9월 급작스레 뇌혈전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경각에 놓인 상황에서도 이미 시작한 글이 중도이페될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시각을 다투어 혼신의 ‘피를 쏟아, 뼈를 갉아, 생명을 바쳐가며’(《희비 쌍곡선》 머리말) 무려 36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마무리하여 2018년 7월 드디여 세상에 내놓으셨다. 이러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만년에 로익장을 과시하면서 시가 창작 한 우물만 파온 고인에 대해 원로시인 김철옹은 그를 ‘시에 미친 사람’이라 평했고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고인의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서평에서 “우리 겨레의 시문학을 위해 열심히 뛴”, “한뉘 시를 위해 분투한 투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다사다난한 인생을 마감한 고 김응준 시인은 조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년에 안해를 잃고 만년에 딸자식을 앞세웠지만 완강한 의지로 파란만장한 인생고를 딛고 오직 시가 창작에 혼신을 다한 다수확 시인이다. , 등 500여수의 가사와 , 등 500여수의 애정시들은 고 김응준 시인의 대표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원로시인 김철은 《김응준시선집》 머리말에서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은 사람이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은사님은 시인이면서 또한 번역에도 상당히 능한 다재다능한 분이시다. 2009년부터 국가출판총서 ‘대중화문고(大中华文库)’의 특별위탁에 응해 중국의 고대명작 《론어》, 《당시선집》 및 수십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등 수많은 한문저서들을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우리 민족 문화발전 창달에 한몫을 감당하였다. 시가 창작과 고한문 번역 자질을 겸비한 그이는 중국조선족 시가문단치고 흔치 않은 출중한 존재로 각인되여있다. 고 김응준 시인의 타계에 연변작가협회 김영건 부주석은 “중국조선족 문단에 ‘큰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애석함을 표했고 연변시인협회 전병칠 회장은 “중국조선족 시단은 훌륭한 시 스승을 잃었고 연변시인협회는 덕재 뛰여난 코기러기를 잃었다.”고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고 김응준 은사님께서는 80여성상을 그렇듯 젊고 빛나고 보람차게 살아오면서 항상 여러모로 우리의 귀감이 되였다. 수십년간 고인을 은사로, 형님으로 고이 받들어 모시게 된 긍지와 자랑을 맘속 깊이 새기면서, 재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림장춘                                     (필자는 “연변일보”사 선임 부사장, “연변일보”선임 부주필)
336    한국인은 “싸움족”? 댓글:  조회:3372  추천:1  2020-07-22
안창호와 외국인들, 그리고 한국”국민의사”의 말을 들어본다.   언젠가 어느 술상에서 오가던 얘기들이다. ㅡ “나(우리)는 잘 모르겠는데 왜 한국은 국기의 색갈부터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나눠졌을가?  옛날엔 조선이 8도라던데 지금은 남북조선에서 거의 모두 한 개도를 “남, 북”으로 갈랐기에 조선이 16도라고 한다. ㅡ  2차세계대전후 쏘,미등 대국들이 한개 조선을  남북   두개조선으로 만들었다면 조선16도(?)는  자체로 나눴는지  아니면 외국사람들이 나눴는지?   모두가 아무런 정답도 찾지못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음으로 넘겼다.    필자는 어제(7월19일)저녁 9시반에 한국 KBS방송에서 한국의 네 댓되는 엘리트들이 출연하여 고박원순서울시장의 사망을 화제로 한국언론계를 곁드는 것을 시청하였다. ㅡ 박웜순시장이 실종된후 8시간내에 언론에서 박시장실종에 관한 보도가 2300여차나 되였다.  박시장의 실종부터 8일간에 모 기자는 혼자서 무려 51건의 기사를 발표하였다. ㅡ기사중의 상당수는 무익한 정보고 오보며 거짓이였다. ㅡ한국 언론은 갈등을 조작하고 싸움을 붙이고 지켜본다. 언론의 “분탕질”이 실로 문제이다...   이에 비춰 필자는 이런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1, “한국, 한국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의 저자 베인 & 코리아 이성룡대표가(미국계 한국인) 10년간 한국을 드나들며 100개 이상의 한국 기업과 정부기관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조사를 하고나서  발표한 글이다.  ㅡ“언론들은 부정한 행위를 비난할 때와 똑 같은 노력으로 진정한 역할 모델의 사례를 알리는데 앞장서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문을 들추면 온통 부정적인 기사들 뿐이다.  언론의 관심은 스캔들을 폭로하는 데만 집중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조선, 동아, 중앙일보를1주일간 검토해 보고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들이 각각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보라. 긍정적인 기사가 1건이라면 스캔들과 관련된 기사가 최소한 7ㅡ8건은 될것이다.”  2,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핵심되는 인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내무총장을 지낸 안창호(1878.11. 9, - 1938. 3. 10.)의 글이다. .  “과거나 현재나 우리 동포들은 어디 모인다 하면 으레 싸운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은 사랑으로써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죽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 정직이 곧 애이다”   안창호는 계속하여“우리민족의 정의를 배양하는 데 관한  일곱 가지 제시”를 발표했다.  첫째,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우리는 걸핏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데 이제는 자기 허물만을 스스로 고치기에 전념하자.  둘째, 개성을 존중하자.  둥근 돌이나 모진 돌이나 다 쓰임새가 따로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나와 틀리다고 해서 나무랄 것이 아니다.  셋째, 자유를 침범하지 말자. 아무리 동지라고 해도 개인의 자유가 있다. 남을 내맘대로 리용하려다가 듣지 않는다고 욕하면 안된다.  넷째, 물질적 부탁들 하지 말자. 친구들간에 돈을 빌리려다 실패하면 등을 돌리는데 그렇다 하여 정의을 단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섯째, 정의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부모, 부부, 동지의 정의가 각각 다르다. 아무리 친해도 더 사랑하고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신의를 지키자. 약속을 꼭 지켜야 정의가 이어진다.  일곱째, 례절을 존중하자, 친하다고 례절이 무너져선 안 된다.   (그런데 한민족의 유전자문제인지 안창호가 지적한 한국인의  고질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년에 필자는 한국손님을 접대하면서 그네들 서로간의 싸움을 피부로 느꼈다. 한번은 같이 온 두분이 첫날 저녁부터  다투더니 3일만에 싸움으로 갈라졌다.  또 한번은 한번에 한국손님 5명을 접대했는데 역시 3일동안에 “내당→네당→우리당” 하면서 싸우다가 세 패로 갈라졌다.  그외도  . 한국에서는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도  “나무 위에 올라가기” 바쁘게 탄핵이요 심판이요 하면서 “나무를 흔들어” 떨구려니 말이다.) 3,  다음은  외국인들의 평가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트프는 자기의 저서(중국이 미국 된다)에서 각국 사람들의 기질을 이렇게 소개했다.  ㅡ 미국인이 두 명이면 법적 맞고소가 일어나며 중국인은 흥정을 하고 일본인은 친절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싱가포르인은 학교성적표를 보자 하고 대만인은 해외 이민을 의논하며 스웨덴인은 쎅스에 빠져들고 한국인은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4, 한국의 “국민의사”로 불리며 사회정신의학적으로 한국사회의 현상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시형박사가 자기의 저서(품격)에 올린 글이다.  “ 프랑스 파리의 어느 호텔에는 ‘한국 단체 손님 사절’이란 간판이 나붙어 있다.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들이 제멋대로 떠들고 싸우는 통에 호텔에서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우리는 모였다 하면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는 너무 거칠며 너무 직정(直情)적이다. 합리적이고 이(리)성적이어야 할  국회토론도 그만 감정이 폭팔, 난투극이 벌어진다. 그게 또 방송에 그대로 보도된다. 아이들이 볼까 두렵다.  한국의 시위는 결렬하다. 길을 막는 건 예사고 유혈충돌, 방화, 투석,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회사 기물을 파괴, 불도 지른다. 구호부터 살벌하다. “결사쟁취”, “목숨까지 걸다니...”   한국사람들의 싸움이 오죽했으면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일본인이 자기의 저서를 “한국인들에게 돌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쓴 책”이라고 언급하였겠는가.  5, 필자의 체험이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에 연길기아자동차정비서비스유한공사 사장이며 연변기아기술훈련원 원장인 박병현(朴炳玹)씨가 급병(심장병?)으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원장의 급사를 “조선일보”(한국)에서는 “연길은 총칼의 도시”란 제목으로 1면 톱기사로 발표했다. 이에 “연변일보” 한국취재단(해외부)3명이1996년 12월 중순에 한국을 취재할때 “조선일보”편집국 국장과 함께 정치부주임을 찾아가서 “서울에는 급사사건이 발생하지 않는가? 우리도“서울은 총칼의 도시”라고 보도하라는가며 항의를 제기 하니 정치부주임이 하는 말이 “팔아서 돈을 버는 신문을 꾸리자니 할수 없지요.”며 황당히 답변하었다. 아마도 한국은 언론인들이 오보거나 거짓보도를 해도 장본인에 대한 책임이 없는것 같았다. 우리쪽은 철저히 조사하고 견결히 추긍하는데.  필자는  이시형 박사의 “한국인들의 ‘한차원 높은 품격을 위한 7가지 덕목”을  막글로 올린다.  1, 감정을 누르고 이(리)성으로 행동하는 절제, 2,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 3,약간의 여유로도 함깨 즐거울 수 있는 배려, 4, 결과보다 과정의 가치를 알게 하는 정직, 5,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신의, 6, 현역으로 새롭게 데뷔하기 위한 필수ㅡ 배움, 7, 한국인다운 세계인으로 클로벌 마인드(세계적 인지도) 십수년 전 안창호의 “7가지 제시”에 따른 당대 이시형박사의 “7가지 덕목”이였다. 이 밖에  갑,을방의 서로가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몇 마디를 부언한다.  ㅡ“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보수, 나와 다른 의견도 경청할 줄 아는 진보”, 진보는 “새것”이 왜 좋은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잘 가르칠 의무가 있고 보수는  귀를 열고 잘 들어야 할 태도가 필요하다...   오기활 2020년 7월21일
335    《바보님》의 서거를 두고 댓글:  조회:3073  추천:0  2020-07-20
《정치인은 바보다》 《그냥 바보로 지내겠다》던 한국 로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으로 《바보》 인생을 마감했다. 세상사에 암살, 피살, 모살로 인생을 마감한 대통령은 종종 있어도 《자살》한 대통령은 흔치 않다. 생의 마감까지 《바보》를 지킨 로무현은 명실공한 《바보》이다. 그런데 《바보》의 자살에 한국사상 최고로 조문객이 백만명이였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문객보다 3 배나 웃돈다니 《바보》의 《자살》과 《박통령》의 《피살》이 한동전잎의 량면이라 판단된다. 력사는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니말이다. 퇴임후 《성공한 농부》가 되려고 평범한 《시골촌부》로 지내던 《바보님》은 《끝 모를 고통》으로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며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는 유서를 남기며 자결을 선택하였다. 우리 조선족의 불멸의 영령 김학철선생이 《작가로서 글을 쓸수 없으니 인생이 끝났다》며 금식(禁食), 금약(禁藥)으로 생을 마감하듯이. 《바보님》의《끝 모를 고통》을 알고저 생전에 그가 남긴 글을 찾아보았다.  2009년 3월 4일.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린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한다.》 3월 5일.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가 말을 건다. 당신이 조금전에 뉴스에 나왔어요. 〈정치를 하지 마라〉는 글을 올린 모양이지요?》 《현실 정치이야기는 한마디도 안했는데? 공연히 시비들이야.》 아내가 다시 받는다. 《련속극 하나 끝나고 새 련속극을 하고 있는데, 자꾸 지난 연속극 주인공이 나오니 사람들이 짜증내는 거 아니겠어요?》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련속극에 나간 일이 없다. 《아니, 련속극에 나가기는 누가 나가오? 언론이 자꾸 나왔다고 쓰니까 사람들이 헛갈리는 거지.》 사실 그동안 현실 정치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하지 말란 법도 없지만 정치를 한다는 소리가 욕처럼 들려서 그랬다. 참 힘들다. 감옥이 따로 없다. 푸념이 아니다... 《바보님》이 대체 어느 수렁이에 빠져 이처럼 궁지에 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필자는 정치를 떠나서 《아량이 전혀 없는》 《한(韓)민족》의 고약한 《인품》과 과거형 《습관》이 괘씸해 했던 말을 다시 반추하며 또 뱉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다. 필자는 한국인들 앞에서 히딩크를 곁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대통령도 외국인을 초빙해야 합니다.》 《 한국서 훌륭한 대통령이 나올수 없습니다.》 《 한국사람들은 사람을 나무 위에 오르라고 춰올리고는 나무를 흔들어 그 사람을 떨구니말입니다.》 전유는 말고 현유를 보면 그들은 로무현을 대통령에 올려놓고 흔들어서 1년후에 탄핵, 퇴임했는데도 계속 흔들어 서 《자결》을 해서야 법무부가 모든 관련 조사를 끝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한국 정치에 이바지한 부분이 있는데 아직 그 평가를 받기도 전에 그와 같은 비극적인 조사결정을 했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이는 어느 학자의 애탄이다. 《외로웠을 대통령, 서러웠을 대통령, 억울했을 대통령 미안합니다. 막무가내로 백성을 무시하는 이 세태에 민중을 닮은 대통령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군요,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요행이도 이렇게 추모하는 조문객이 있어서 천만 다행이다. 유태인은 《쓰라린 력사에 보복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 잊지는 않는다.》로 력사를 대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선진민족이라고 입자랑을 하는 《한(韓)민족》은? 《죽음은 견딜수 없지만 치욕은 견딜수 있다》 《치욕은 죽음보다 가볍다》는데 《바보님》은 정녕 무거움을 택했다. 그렇다면 《바보님》의 선택 마감이 한국정치인들에게 남긴 《유산》이라 할가? 아니면 《숙제》라 할가? 《이미 떠난 목숨은 되살릴수 없다지만 그의 뜻은 늘 되살아날것이고》 《그의 뜻은 모든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밖에 단 한가지 유감이라면 《바보님》이 생각을 바꿔서 〈자살〉을 〈살자〉로 했더라면...하는 바람일뿐이다.   오기활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05-28]
33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7) 댓글:  조회:3057  추천:0  2020-07-10
숙제가 아닌 숙제로 훌륭한 강연을 청취하거나 값진 책을 읽고도 심득마저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공부를 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강연자나 저자가 나에게 숙제를 내지 않았지만 심득 두편으로 사회에 대한 나의 책임감을 단 얼마라도 표하고저 한다.  심득 1 만고(万古)의 본보기―김수봉(金守峰) 나는 1925년생으로서 올해 89세이다. 1987년에 연변농학원 식물학교수직에서 퇴직한 후 지금 조양천진 삼성촌(三成村)에서 식물과 동무하며 인생의 ‘2모작’농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 2013년 3월 6일, 나는 자연료법강습반에서 김수봉 회장의 강의를 듣고 일시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하여 나의 수강심득을 표명하고저 하니 심득의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겠다. 1) 록색보건기지 건설의 유공자 김회장은 극도로 험난한 환경 속에서 단련된 불사조로서 칠칠암야에서 불빛을 찾아내는 의력과 특기로 15가지 직업을 새롭게 바꾸면서 자연의학진료령역(自然医学诊疗领域)에서의 서광을 향해 달려 끝내 자기가 설정한 목적지에 도달한 만고의 본보기이다. 김회장의 지칠 줄 모르는 분투정신과 실천활동은 나를 감개무량하게 했고 또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십여년전에 나는 심한 어지럼증으로 룡정의 모 병원을 찾아갔다가 의사가 주는 한아름의 항생소를 들고 돌아오게 되였다. 그 때 나는 들고 온 항생소들을 몽땅 버리고 뜸(灸)으로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하였다. 항생소는 어지럼증을 조장하는 약제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병이 나면 뜸으로 치료하여 89세인 지금까지도 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나는 며느리의 갑상선암수술후의 재발을 막기 위해 뜸으로 치료를 했는데 이미 5년이 지났지만 재발하지 않았다. 딸의 유방암도 의사들은 수술치료를 권했지만 나는 뜸과 항암초약으로 치료해 지금까지 건강하게 보내고 있다. 대성시의 병원을 찾아다니며 거금으로 암병을 근치한 환자들이 얼마나 될가? 나는 물리료법이나 화학료법은 어느 정도는 치료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인체의 정상적인 세포와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인체의 면역력을 해친다고 알고 있다. 사람들의 체내에는 오장륙부의 출장소(出张所)인 반사구(反射区=经穴)가 있다. 안마봉(按摩棒)이나 크림통으로 정확하고도 끈질기게 반사구를 다스린다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희망봉(希望峰)에 올라 개선가를 울릴 수 있다. 이 길이 바로 김수봉 회장이 첫마디에 말씀한 ‘새로운 희망의 믿음’이며 구세주이다. 지금 현대의사들이 속수무책이라는 인류의 의난병들을 특기의사(特技医师)들이 해결하는 실례가 적지 않다. 의학은 림상경험이 풍부하고 따라서 과학적인 리론이 뒤받침함을 력사가 증명한다. 림상경험의 맨 앞줄에 특기의사들이 서있다. 현대의학의 기초리론에는 림상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면 의난병치료에서 많은 난제가 뒤따르고 있다. 그것은 박사나 교수들의 론문에는 노벨상급의 발명창조가 많지만 그 론문들이 환자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2) 그의 교육리념과 ‘구세주의적’ 전략 금전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이 의롭지 못한 수단으로 얻은 재물이라면 결국에는 화를 면치 못한다. 마찬가지로 권력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라면 형사처분을 면치 못한다. 금전과 권력을 모두 손에 거머쥔 진시황도 불로초를 캐려고 동남동녀 500쌍을 동해국(东海国)에 보냈으나 종무소식으로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되였다. 로(老), 병(病), 약(弱), 사(死) 앞에서는 금전과 권력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학문의 세계는 끝이 없다. 마음을 비우고 지식을 갈망하는 삶을 산다면 스승의 강의가 사막이 비물을 흡수하듯이 종자를 키우고 결실을 맺으며 반복적으로 번식하여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됨으로써 기하학적 수자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수봉 회장이 바라는 교육리념이며 구세주의적 전략일 것이다. 3) 연변대지에 뿌리를 박고 “연변은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연변대지에 떳떳이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정신적 기둥이다. 인생의 정신적 생명문화령역을 탐색하고 고창하며 실효적인 생명관리기능을 전수하는 김수봉 회장과 같은 분들이 있기에 우리 연변의 민생건설은 새로운 빛을 뿌리고 있는데 이는 우리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지구촌을 상대한 넓고 넓은 공간에서 오직 이 연길이란 작은 도시를 정착지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김수봉 회장이 너무너무 고맙다. 김수봉 회장의 강의 덕분에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식물학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만 살았던 나는 산정에 올라 높고 푸른 창공과 일망무제한 대지를 본 듯하여 인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김수봉 회장에게 감사를 표하며 부디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김수철 2013년 3월 6일 밤 11시 15분  심득 2 중국 화장실혁명의 선도자―한성호(韩晟昊) 2016년 10월 15일, 나는 오기활선생이 사진과 함께 나에게 선물한 장편실화소설 ≪중한우호의 전기인물—한성호≫를 단숨에 읽고 천고의 기인이며 기재(奇才)인 한성호 박사에게 완전히 매료되였다. 길림신문사 남영전 사장은 한성호 박사를 “중한수교의 대업을 위해 한국 로태우 대통령의 밀사로 혁혁한 공훈을 세운 화교로서 그는 소설이나 신화에서 나오는 인물보다도 더 전기적이고 더 신화적인 기인(奇人), 기재(奇才), 기지(奇志), 기적(奇绩)적인 인물이다.”고 평하였다. 1927년 8월 28일, 길림성 장백현 반절구 금화향 리천동에서 출생한 한성호는 16살에 길림국립사범대학에 입학한 장백현의 첫 대학생이였다.  ‘8. 15’해방후인 1947년 토지개혁 때 한성호 일가는 자본가, 국민당특무, 반혁명폭동의 조직자 등으로 몰리고 사형판결을 받았다. 한성호는 처형되기 바로 전에 동창생친구의 도움으로 산속으로 도망을 치다가 추격하는 총탄에 맞고 쓰러져 심산 속에서 50여일간 사경을 헤맸다. 그러다가 요행 살아남은 그는 부득불 조선을 거쳐 한국으로 도망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한성호는 의학을 전공한 박사로서 한국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의 ‘어의’로 지냈다. 로태우 대통령은 취임한 며칠 만에 한중수교를 성사시키려고 대통령의 밀사로 한성호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한성호는 갖은 노력 끝에 한중수교를 성사시키고 말았다. 2000년 양력설 전야에 한성호 박사는 산동성정부의 초청으로 ‘태산 새 천년 축제’행사에 참가하였다가 관광명소의 화장실들이 똥오줌으로 넘쳐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돌아오자 바람으로 ≪한화천지≫(잡지)에 “산 우에 분변이 사태를 이룸은 산 아래 더러운 관료가 있음이다. 금그릇을 들고 더러운 돈을 벌며 나라와 민족의 얼굴에 똥칠을 하니 분노를 금할 길 바이 없다!”는 내용의 장편글을 발표하고 잡지 수권을 산동성 당정지도자에게 부쳐보냈다. 한성호 박사의 글을 읽고 크게 놀란 태안시당위 막진규 서기는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실태조사에 나섰다. 그리고는 2억 5,000만원을 투자하여 석달간에 2,216개 변소를 개조하였다. 태안시의 화장실혁명은 중국 화장실혁명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1993년 2월 19일, 한국정부는 중한수교 및 한중경제무역발전과 한의학연구에 특수한 기여를 한 한성호에게 한국 최고훈장인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한성호는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한국 ‘국민훈장’을 수여받은 위인이다. 나는 한성호의 시구로 숙제 2를 완성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노니 개인의 득실에 초연하고 산과 들을 사랑하노니 견강함은 당연하니라 하늘과 땅을 사랑하노니 갈 곳은 오직 자연인가 하노라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저녁
333    “성했을 때 일을 더 많이 못한것이 후회 됩니다” 댓글:  조회:3464  추천:0  2020-07-01
지난 4월 27일, 필자는 “도문시 월청진 집중촌(원 홍광향농안촌)의 로아매가 무한보위전영웅들에 1만원을 헌금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집중촌 전임 당지부서 한진길(74)의 안내하에 로영애(73)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22년만에 만난 당년의 “꼬리없는 암소”로 불린 로영애는 2급지체장애자로 ”앉은뱅이”가 되여 집중촌의 파가이주로 전기와 물공급이 때없이 정지되는 “2호동네”에서 텔레비도 못보며 고독하게 지냈다.  “심장병으로 주원치료를 받다가 금방 출원하였습니다.” “병자는 약보다도 사람을 더 귀해 합니다” 생각밖으로 우리를 만난 로영애는 이렇게 말하며 넉넉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의며 기뻐하였다.               혁명렬사의 유복녀 로영애는 도문시 일광산기슭에 자리한 중개지팡에서 일광산의 기를 받고 태여난 혁명렬사 로동률의 유복녀다.  그의 아버지(로동률)는 결혼하자 10일 만에 참군한후 항미원조전선에서 장렬히 희생였고 그의 할아버지 또한 몇년사이에 둘째아들까지 잃다보니 생가슴을 앓다가 손녀(로영애)의 이름을 짓고 며칠후에 사망했다. 그러다보니 동네방네에 “중개지팡(동네이름)로씨네는 한집에무복한 4녀자가  산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성질이 과한 할머니가 더는 어쩔수 없이 “한구들에서 세 과부(할머니, 큰어머니, 어머니)가 살지 못한다며 제일 나어린 청상과부 어머니(태옥순)를 멀리 외딴곳으로 개가 시켰다. 이렇게 기억도 없는 나이에 엄마와 생리별을 한 로영애는 나이가 들면서부터 희생된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저 학교에서 단체로 조직해 보는 영화가 “전투편”이라고 하면 곧바로 집에 달려가서 한 장밖에 없는 아버지의 어슴푸레한 사진을 가지고 와서 영화를 보면서 영화속에서 사진의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찾느라고 눈정신을 팔았다고 한다.   책가방만 메고 다닌 “허망돌이”  “나에겐 아무런 학졸업증도 없습니다.”고 고백하는 로영애의 간추린 과거사다. 로영해는 소학교에 다닐때에 륵막염에 걸려 책가방을 멘 “허망돌이”로 지내다가 룡정고아원에 이송된후 14살에 도문에 돌아오니 학습성적이 안된다며 전일제중학교에 받지 않는데서 단 렬사후대라는 조건으로 민반(半工半?x)학교인 도문진중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런데 당년에 “떡판학교”(일을 많이 하기에 늘 떡을 쳐 먹는다고)라고 불린 도문진중은 이름이 학교이지 내내 일만 하는 학교였는데 일례로 학교건물까지 학생들로 운영하는 학교벽돌공장에서 생산한 벽돌로 학생들로 학교를 지었다. 그때 남보다 실팍한 로영애는 학교단지부선전위원으로 대홍벽돌공장(大红砖厂) 공장장의 책임을 3년간이나 맡고 죽을둥 살둥을 모르고 일을 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부업을 하느라고 학생들을 3개월이나 동원하여 왕청현 하마탕에 가서  길닦이부업을 시켰다. “후 ㅡ “하고 긴 한숨을 짔는 로영애는 생각할수록 “일생에서 제일 큰 원한이 학교공부를 못한것이라 반추한다.   “독한”할머니와 일방통 “남도치”의 아래서 사회에 진출한후 로영애는 “녀자가 나돌면 절대 안된다”는 엄격한 할머니의 단속과 매일 초저녁이 되면 비자루를 내 흔들며 “ 8시 전에는 꼭 집에 들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호통하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시집갈 나이가 되자 “너는 내가 키웠으니 꼭 내말을 들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위엄에 감히 어쩔수 없어 아무런 대구(对口)도 못하고 할머니의 독단적인 주선으로 22살 나이에 최근에 외시에서 이사를 왔다는  “남도치총각”과 결혼 하였다. 결혼후 남편(배동섭)은 당신은 과수기술원부터 시작하여 대장, 회계 등 하고픈 일은 다하면서도 일방적으로 “한집에서 둘이 다 나돌면 안된다”는 엄포로 하여 혁명렬사의 후대라는 믿음으로 사회에서 맡겨주는 사업과 임무를 “지하공작”으로 남편의 눈을 속여야 했다. “그때 남편의 압력이 오죽했으면 내가 1973년에 당지부에 처음 올린 입당신청서도 남편의 눈을 피하느라고 쌀뒤주속에 숨겨 두었겠습니까?!”. 로영애가 남편의 “단속”에서 해방되기는 1988년 8월 28일에 입당 한 후부터였다. 90년대의 “신문인물 로영애는 지난 90년대의 상당한 신문인물이였다.  이하는 필자가 22년 전에 “연변일보“에 보도한 기사이다. 12월 19일, 필자는 도문1호선공공뻐스에서 도문시 홍광향 농안촌의 부녀주임 로영애(53세)를 만났다. 우연하게 기자를 만난 로주임은 수인사를 나누자바람으로 새해의 신문주문을 화제로 하였다. “졸업증도 없고 합격증도 없는 내가 농촌에서 신문까지 안보면 어떻게 정책을 알겠습니까?”  “나는 1973년에 촌부녀주임사업을 맡은 후부터 해마다 연변일보, 동북과학기술보, 가정신문... 등 신문잡지를 주문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학교졸업증도 없고 공무원합격증도 없는 농촌간부들이 신문을 안보면 머리가 텅비고 군중들과 얘기를 할 밑천이 없어서 “벙어리”신세가 된단다. 로영애는 당보를 통해 당과 나라의 방침정책을 학습하고 과학기술신문잡지를 통해 농업기술을 배우면서 광범한 부녀들을 치부의 길로 이끄는 선두자였다. 그는 1989년에 전 주에서 제일 처음으로 도문시 축목국과 손잡고 “농안촌양돈협회”를 조직해 과학양돈을 농안촌의 기둥치부산업으로 부상시켰다. 비록 그에게는 소학교졸업증마저 없다지만 그가 꾸준하게 신문잡지를 통해 당의 방침정책과 과학농법을 배우며 앞장서 농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었기에 그에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10대녀걸”,  “길림성 3.8홍기수”,  “길림성로동모범”이란 당당한 “자격증”이 있다.  상품경제시대에는 “졸업증”을 내걸고 투정질만 하는 간부, 자리만을 치키면서 일을 해 못 내는 간부를 대중들은 외면한다.   알은 못 낳고 날마다 “꼬꾸댁”거리며 울기만하는 암탉은 기필고 나중에 주인의 버림을 당하고 만다 (연변일보, 1998.12.7.)                명불허전 1988년에 남편의 “구속”에서 해방되여 가물에 단비를 맞은 로영애는 하는 사업마다 “안된다”와 “못한다”와는 인연이 없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으로 거의 하는 일마다에 번창하였다.  3년간의 알찬 노력으로 로영애는 1991년에 “도문시10대표병”으로 당선된것을 시작으로 90년대에는 “길림성로동모범”, “길림성3.8홍기수”, “연변조선족자치주 10대녀걸”이 등 굵직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았다.  그야말로 노력의 뿌리는 쓰지만 노력의 열매는 그처럼 달았다. 오늘도 “당원은 정년이 없다”는 로영애는 지금 비록 “앉은뱅이”로 되였지만  당소조장(당원 22명)의 책임을 맡고 쌍지팡이와 택시차에 의거하여 로당원방문, 적극분자배양, 당원서류정리 등 당무사업으로 무척이나 다망하였다. 그는 지난해 3월 24일까지 7명의 당원을 발전시킨 뒤를 이어  올 7.1에 또 새로운 당원을 발전시킬 계획으로 지금 자료준비에 한창이였다.  “예비당원고찰자료와 신입당원자료준비로 또 한(한진길)서기를 못살게 굴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로영애는 여러가지 서류들을 한서기의 앞에 내놓으며 도음을 청했다.  .      무한보위전에 만원을 기부  이 몇달간 로영애는 코로나19와 사투하는 무명영웅들의 사적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고 한다. “생각해 보세요.우리 아버지 년대는 전쟁년대로 총을 들고 적들과 싸우며 나라와 가정을 보위하고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시대로 서로가 부러움 없이 모두가 만족하게 사는 시대입니다. 이런 화평시대에 행복한 가정을 떠나서 생명을 무릅쓰고 코리나와 싸우는 의무일군들의 정신이 얼마나 보귀합니까?” 무한보위전에서 희생된 부모들과 그들의 후대를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섭니다.” “나는 학비를 2원씩 낼 때부터 나라의 신세로 살아 왔습니다.  내가 이때에 나라의 빚을 갚지지 않으면 언제 갚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로영애할머니는 신체때문에 다니면서 방독물품을 사서 무한보위전에 기부할수 없어서 안타깝게 보내던차 지난 2월 27일에 당지부에서 당원들에게 무한보위전에 헌금할수 있다고 호소하자 이틑날(28)에 급히 택시를 불러 은행에 가서 현금을(만원) 찾아 가지고 도문시홍십자협회책임자한테 맡겼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지난해에 사별한 남편의 사진을 정중히 모신 유상앞에서 “내가 무한보위전선에 현금 만원을 기부 했는데 잘 했습두? 못 했음두?”라고 물었더니 남편이 “잘 했다!”며 희죽히 웃더라고, 그리고 두 아들에게 토론을 안하고 기부를 했다며 미안하다며 뒤늦게 알렸더니 둘째는 “어머니가 참 잘했다”고, 큰아들은 “좀 더 기부했더라면 좋았겠습니다”며 어머니에게 엄지를 보이더란다. 실로 그 엄마에 그 아들이였다.  아름다운 인생마무리 인터뷰는 일문일답으로 마감 했다. 문: 지금까지 인생에서 제일 기뻤던 일은? 답: 학생때 입단과 사회서 입당한 것이다, 문;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답: 첫째는 남한테 부담을 주지 않는 것, 다음은 나누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일전에 시부련회를 찾아가서 앞으로 불우이웃돕기활동이 있으면 동참할것이니 꼭 제때에 알려달라고 단단히 부탁했다. 문: 돌이켜 보면 미안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답; 사회혁명을 한답시고 가정혁명을 잘 못한 것이다. 우리 아들이 둘다 리혼을 했다(리혼은 불법이 아닌데 말이다ㅡ 편자) 문: 아쉬운 일이 있다면? 답; 첫째는 공부를 못한것이 평생 아쉽고 둘째는 내가 아들로 태여 났다면 사회에 좀 더 많은 일을 했을것인데... 문: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답: 내가 성한 몸으로 마음대로 다닐때 일을 많이 못한 것이다 이 밖에 “이제부터는 자기몸을 알고 일(당소장)을 하세요”는 필자의 권고에 “그래도 조직에서 이런 페인을 믿고 신부름을 시키니 늘 기쁘게 생각하며 만족해 합니 생각한다”고 했다.    아직까지 나라의 빚을 채 갚지 못했다는 혁명렬사의 후대,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려는 로영애의 인생마무리에 머리가 숙여진다.   오늘의 금상첨화라고 할가. 돌아오는 길에서 한진길이 “로영애가 도문본보기(图们好人)로 평선되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니까 필자가 오늘 만난 한진길과 로영애는 당년엔 “길림성로동모범”이요 오늘엔 사회의 훌륭한본보기였다. 부록: 한진길은 집중촌당지부서기로 33년, 현임 도문시 신민사회구역 기층당지부서기로 11년을 지내고 있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0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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