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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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진정 감동을 먹었습니다!》 (오기활) 댓글:  조회:6989  추천:41  2011-04-12
《진정 감동을 먹었습니다!》 -오기활기자심리학을 전공한 오룡걸이 본 일본국민 A B C 도문적 오룡걸(35)씨가 일본서 류학공부를한지도 10여년이 된다.용걸씨는 동경중앙대학에서 심리학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 동경의 모 학교에서 심리학을 강의한다. 지난 3월 11일, 일본의 강진과 쓰나미로 3월 20일에 귀국한 그는 요즘 학교측의 요청으로 4월 11일에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4월 10일 오후, 기자는 룡걸씨 만나 특대강진과 쓰나미발생후 일주일간에 그가 느낀 일본인상을 들어 보았다. 《나는 중, 일, 한 비교문화에 흥취를 가집니다.》용걸씨는 이런 화두로 《진정 감동을 받았다》를 렬거했다. 눈물 없는 할머니 이번 쓰나미는 일본국민들의 웃음마저 쓸어간듯 하였다. 대재난을 겪는 일본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한결같이 굳어졌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해도 아주 심중하였다. 일본 텔리비에 보도된 감동사례다. 일본구조대(자위대)가 어느 할아버지의 시체를 찾아가지고 주인할머니를 찾아갔다. 령감의 시체를 만난 할머니는 먼저 령감의 시체에 묵례를 하고나서 다시 자위대한테 몇번이나 허리굽혀 묵례를 할뿐 얼굴에 눈물한점 흘리지 않았다. 《무정》해서? 아니였다. 할머니는 울음을 자제하였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할머니의 말씀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것만도 얼마나 행운스럽습니까? 또 남편의 시체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그 많은 사망자나 실종자에 비하면 그래도 내가 행복하지요...》 용걸씨는 할머니의 《행복관》에 진정 감동을 먹었단다. 《화장실을 리용하십시요》 일본사람들은 웬간히 가까운 친구가 아니면 절대 손님을 자기집에 모시지 않는단다. 이번 특대지진에 교통이 마비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걸어야만 했다. 룡걸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생각 밖에도 이번 지진에 생존한 도로의 주택가에는 《우리집 화장실을 리용하십시요》 라는 안내문들이 곳곳에 있더란다. 용걸씨는 《화장실안내문》으로부터 《나 속에 우리가 있고 우리 속에 내가 있는》 일본국민들의 함께하는 높은 소질을 또 한번 직접 체험했단다. 급급한 출군족들 이번 지진은 전철을 포함한 공공교통망을 마비시켰다. 용걸씨는 《이곳, 나 같으면 수십리나되는 출근길이 교통마비로 회사원들이 출근을 못하는것이 당연할 것인데 일본사람들은 그렇지 않더라》고 했다. 지진이 일어난 이튿날, 사람들은 아침 다섯시에 출근길에 올랐고 총총걸음으로 걸음을 재촉 했다. 또 전에는 볼수없던 녹쓴 자전거들이 줄을 이뤘다. 사람들은 자가용을 사용할수 없으니 집에 처박혀있던 《녹쓴 자전거》를 동원해 출근하는 것이였다. 세인들이 다 알고있는 140년만의 최악의 재난인데도 일본국민들은 출근의 직책을 재해의 핑계로 버리지 않았고 단 앞당겨 출근길에 오르고 총총걸음과 녹쓴 자전거로 출근과 시긴을 보장하였다. 고상한 택시운전수 지진은 재해지역의 교통뿐이 아닌 통신망도 마비시켰다. 용걸씨에게는 은행에 출근하는 R씨라 불리는 중국친구가있다. 지진이 일어난 날 R씨는 기타 은행원 3명(일본인)과 함께 퇴근길에 올랐다. 이들이 니혼바시에서 고엔지로 갈때다. 숱한 인파속에서 헤매치던 R씨 일행중의 한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안달아났지만 이들은 잃어버린 친구를 찾을래야 찾을 방도가 없었다. 셋이서 한참 볶아치다 길가에 서있는 한 택시를 발견했다. 이들은 요행을 바라고 달아갔지만 운전수가 없었다. 다시 주위를 찾아보니 운전수가 공공전화실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보니 이 택시기사는 핸드폰이 통하지 않는데서 공공전화를 리용해 집식구와 련계를 달려고 묵묵히 서서 초조한 가슴을 달래고있었던것이다. R씨네가 동무를 잃어버린 사연을 듣고 딱해하던 택시기사는 그냥 집식구들과의 련계를 포기하고 이들을 싣고 길을 떠났다. 용걸씨는 중국, 일본, 한국의 재난사를 대비하면서 이번 대지진과 쓰나미를 통해 일본국민이 자국민의 공공도덕과 공공질서현실을 세계에 전시했다며 선진국, 선진국민들에게서 받았다는 깊은 감동을 몇번이나 반추했다.
8    술 만세! 만만세!!(오기활) 댓글:  조회:8871  추천:51  2011-04-11
                 술 만세!  만만세!!  나는 1982년에 농촌에서 를 수립할 때 라 불리운 애주가이다. 항간에서 로인들이 는데 아무튼 나는 지금까지는 누구한테 술에 본적도 크게 취한적도 없다. 그래서 연변일보사 홍춘식선배님이 고 늘 말씀하였다. 술은 정치와 생활에 불가분이다 고 한다. 그만큼 술은 나라정치와 개인생활을 떠날수 없다. 술의 이중성을 표현한 명언을 적어본다. -술은 피곤한 령혼의 오아시스, 고뇌로 얼룩진 상처를 달래는 감로수, 삭막한 삶의 윤활유, 악마가 보내준 선물, 범죄의 아버지, 령혼을 황페시킨 독약, 시의 원천, 시름을 잃게 하는 망우물(忘憂物), 불후의 예술을 창조하는 원천,,, 등 나는 술을 허나 절대로 억지로는 권하지 않는다. 좋은 음식은 좋게 먹어야 한다. 술은 사랑 우정의 상징이다 아세아 한국㈜내쇼날프라스틱 림채홍회장은 고 한다. 는 설과 같이 권하지 않을 사람에게 술을 권하면 술을 잃는것이요 술을 권할 사람에게 안 권하면 사람을 잃는다. 술은 절대로 강권하지 말아야 한다. 24년전에 썼던 칼럼을 적어본다. - 시간: 1986년 12월 29일, 장소: 모 시 기관당위 송구영신연회 술잔이 몇배 돌자 이번 순으로 제일 높은 지도자가 술을 붓는다. > 술잔을 받고 재간이 없다며 딱해하는 이다. 술잔을 지켜보는 서기, 곁군들의 압력에 할수 없이 잔을 쭉- 낸다. 서기님의 뒤를 이어 급에 따라 붓는 어른들의 술잔이 이어진다. 서기님의 술을 냈으니 다른 상급분들이 붓는 술을 내지 않을수가 없었다. 술상에서 상급이 하급을 이렇게 관심할줄을 몰랐다. , 을 마시는 그 모습이 구차했다. 이튿날에 오간 얘기다. 실로 대접이 토역(土役)으로 된셈이다. 지나간 글이지만 오늘봐도 생각이 달라진것이 없다. 술은 남편에 비유되고 술잔을 부인을 뜻한다고 한다. 녀자가 깨끗한 술잔에다 남성에게 정성껏 술을 올림이 이런 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자는 한국의 를 부정한다. 는 위생에도 불결하다. 술은 사람 됨됨이를 가늠한다 옳은지는 몰라도 는 말이 있다. 술에 취해 평상심을 잃은 사람은 신용없는 사람, 술을 마시고 우는 사람은 인(仁)이 없는 사람, 술을 마시고 화를 내는 사람은 의(义)롭지 못한 사람, 술만 마이면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례의 없는 사람, 술을 마시고 따지고 드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고한다. 술은 형태는 물이지만 마시면 불, 혹은 기타로 된다. 유태인의 탈무드에 있는 얘기다. 옛날 노아라는 사람시대에 큰 홍수가 졌다. 그 홍수로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심판(죽음)을 받았다. 그후 노아가 많은 포도원을 일궜는데 마귀들이 몰려와서 포도나무에 양 피, 사자 피, 돼지 피, 원숭이 피 순으로 거름으로 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포도원료) 처음에는 양처럼 온순하고 다음은 사자처럼 포악하며 그 다음은 돼지처럼 미련하고 나중에는 원숭이처럼 별짓을 다한다. 그래서 는 욕까지 있다. 무주상심 이딸리아 캄포바소가톨릭대학 아우구스토 디카스텔루오보박사 연구팀은 총 100만명의 샘풀과 9만 400여명의 사망자를 대상으로 한 34건의 대규모 조사자료를 토대로 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나는 늘 이런 말을 한다. 담배는 페를 상하게 하고(煙伤肺) 술은 간을 상하게 하며(酒傷肝) 술이 없으면 마음이 상하게 된다(無酒傷心). 심장이나 마음이 상하면 절대 안된다! 술을 마시는 지혜 누구에게나 다 약이 되는 술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고 말한다. 곤난한 시대에 조선족 주정뱅이가 많았던 원인이 이를 설명한다. 말하자면 조선족들은 비싼 안주를 못먹고 눅거리 술을 먹다보니 먼저 취하고 빨리 취하기 마련이다. 나는 술을 한때도 거르지 않는다. 밥을 먹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기 위해 밥을 먹는다. 식후 술이나 물안주에 마시는 술은 술이 헤풀정도다. 술은 천천히 마셔야 한다. 술 주(酒)자를 보면 술은 닭이 물을 마시듯 마시라는 뜻이다. 술은 멋으로 분위기로 마신다. 성공을 경하할 때는 기쁜 분위기에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송별상에서는 기분을 위하여 저마다 한곡씩 넘기며 멋으로 마신다. 나는 노래방보다는 앉은 술상에서 수저반주에 흘러간 노래를 부르며 마시기를 즐긴다. 자리를 옮기는것은 질색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 2, 3차를 하겠다면 나는 가 아닌 라며 거부한다. 차려놓은 안주를 버리고 다른 장소를 찾으면 랑비다. 주독, 숙취 다스림 1996년 말, 한국(주)두산경월을 취재할 때 적은 기록이다. 두산경월회사에서는 70여년의 실천과 사회공모를 통해 을 이렇게 정리했다. 인체에서 분해할수 있는 최대 알콜량은 한시간에 25미리리터, 25% 소주로 환산하면 100미리리터(2잔정도)다. 알콜은 체내에 흡수된후 먼저 알데히드로 전화된후 초산으로, 나중에 물과 탄산가스로 산화된다. 술은 위에서 약 20% 흡수, 나머지는 소장에서 빨리 흡수된다. 주독을 뽑는데는 갈근즙(葛根汁)이, 숙취에는 인삼,꿀물,오이가 좋다. 간장보호는 오두탕이다.(칡, 감초 각 600그람, 관중32그람,검정콩,누런콩, 푸른콩, 팥,녹두 각 40그람, 10리터 물에 푹 고은 다음  두고 마신다) 자네 집에 술이 있거든 / 나를 부르소 / 초당(草堂)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를 부르리/ 백년 덧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는 어느 음악가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이렇게 읊조린다.  무주상심! 적량유익!(無酒伤心 适量有益!) 고금중외에서 만중이 목이 터지도록 왕이나 령수 만세를 높이높이 불렀건만 자고로 세상에 이 없었다. 허나  만은 로 이어질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오기활             길림신문 2006년 12월 26일 (본문은 동북3성 조선족술문화응모작품임)
7    <<정부를 비평하라>> 댓글:  조회:7065  추천:45  2011-04-08
<<정부를 비평하라>> -오기활 길림신문 고급기자  지난 3월 14일, 온가보총리는 중외기자회견에서 <<당전 우리의 최대위험은 부패에 있다>> <<나는 국가의 운명은 민심에 달려있고 인민들의 원망을 해결하고 인민들의 념원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조건을 창조해 인민들로 하여금 정부를 비평하고 감독하게 해야 한다고 인정한다>>고 하였다. 언젠가 호남성 장사시에서 <<전 시 당원지도간부렴정교육대회>>를 소집하고 권력, 금전, 녀자들로 락을 부린 호남성 침주시 전임 부시장 뢰연리가 죄수복을 입고 주석대에 올라 자기의 경험교훈으로 전 시 당원지도간부들에게 생동한 렴정<<교육>>을 하였다는 기사가 <<길림신문>>에 실렸다. 뢰연리는 침주시 부시장직에 오른후 9년사이에 30여차에 걸쳐 600여만원을 수뢰하였다. 일전 인민넷 <<7일반부(七日反腐)>>는 <<국가개발은행 원 부행장이 200만원을 내놓으며 죄를 승인>> 등 지도간부 부패관련기사를 수두룩히 올렸다.. 당정간부들의 간부부패를 화제로 다룬 어느 술상에서 오간 얘기다. <<6,70년대에 자본주의길로 가는 당권파를 잡아내기 위해 대중을 발동하여 허무한 <문화혁명>을 했다면은 지금 바로 대중을 발동하여 부패한 당권파를 잡아내는 확실한 문화혁명을 해야 한다>> <<창녀들은 그래도 자기의 몸을 팔고 돈을 버는데 부패간부는 인민이 준 권리로 제 염낭을 챙긴다>> <<반부패는 영원한 주제다.>> 반부패는 <<영원한 주제다>>가 천진만확(千眞萬確)이라 하겠다. 2005년 관직매매로 전국을 들썽케 한 흑룡강성 수화시 당위서기 마덕의 관직매매에 참여한 관원이 무려 256명에 달한다고 하니 관직매매가 얼마나 엄청한가. 관리자의 제1생명은 청렴이다. 송나라 려본중(1084-1145, 시인, 학자)은 1000년전에 벌써 <<벼슬살이를 하는 방법은 오직 세가지다>>며 <<첫째는 청렴, 둘째는 신중, 셋째는 근면이다. 이 세가지를 알면 몸가짐을 안다>>는 <<벼슬살이처방>>을 내놓았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인류의 발전사는 권리와 권력의 쟁탈사, 부패와 반부패의 투쟁사다. 진정한 선진국은 청렴국가를 건설하는것이다. 하여 유엔은 2003년 12월 9일에 90여개 회원국이 멕시코에서 <<유엔반부패협약>>을 제정, 이 날을 <<세계반부패의 날>>로 정하였다 반부패력량의 근본은 민중에 있다. 연변 주규률검사위원회에서 공보한 통계에 따르면 백성이 신소, 제보한 안건 572건가운데서 부현급이상 간부와 관련되는 사건이 5건이였다. 327건을 조사처리, 9명을 사법기관에 이송하고 363명에게 각종 처분을 주었다. 중경시 <<암흑타격>>행동에서 군중들의 고발안건이 1만여건, 그중 80%가 실명고발을하였다. 청렴한 사람은 청렴을 편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청렴을 리롭게 여긴다. <<집안을 이루는 도는 검소와 근면이며 정치의 요체는 공정한 청렴이다>>를 정부관원들에게 추천한다.
6    경영인을 찾으라 (오기활) 댓글:  조회:4982  추천:40  2011-04-04
경영인을 찾으라 -오기활 길림신문 고급기자식물퀴즈<<왕중왕>> 김수철교수의 호소지난 3월 28일 기자는 독자들의 민간약초제문에 정답을 주고저 원 연변농학원 농학부식물학교연실 김수철교수를 찾았다.이번 만남을 위하여 기자는 전화로 만남의 목적, 장소, 시간을 예약할때다.<<장소는 조양천진 삼성5대, 시간은 래일 오후,,,>> << 부잰부싼(不見不散)!>> 김교수님의 힘찬 약속이였다.                  식물퀴즈<<왕중왕>>교수님과 필자는 지난 70년대 사제간이다.오후 4시경, 우리를 마중나온 교수님은 생각보다도 더 건강하셨다. 자애로운 실눈길로 두손을 힘껏 잡아주는 교수님은 참 건강하다는 경탄에 <<길가의 풀 덕분에 지금까지는 병원을 모르고 일반사람들보다 건강하게는 삽니다.>> 라며 너털웃음을 앞세웠다.올해 87세인 교수님은 연변농학원 제1기생, 1950년부터 정년퇴직할 때(1987년)까지 연변농학원 농학부식물학교연실의 강사, 교수로 식물형태, 식물해부, 식물분류, 식물라틴어 등 교학, 연구에 전공하였다.    지금 교수님은 연변생물학회 명예회장, 길림성초원학회 고문, 대한민국자원식물학회 고문, 연변동광ALOE연구소 소장 등 직무를 맡고 석양의 여광을 빛내고 있다. 교수님은 식물의 <<척척할아버지>>요 식물퀴즈<<왕중왕>>이다.1973년 김교수님이 우리를 이끌고 백두산아래 청산에서 15일간 중초약을 교학할때아무튼 어떤 풀이나 물어보면 학명, 별명, 생육지, 리용, 채집계절, 분포를 빠짐없이 알려줬다.   필자는 교수님의 높은 명망을 한국에서 실증했다.1999년 필자는 한국에서 세계자연농업의 선도사로 호칭받는 조한규박사님의 자연농업특강을 일주일간 수강했다. 특강중 어느하루 조박사님이 필자를 데리고 서점에 가더니 <<백두산자원식물(원색)>>이란 투터운 책을(값 45,000원) 나한테 선물했다. <<백두산자원식물>>은 한, 중 두나라 전문가들이 팀을 무어 2년간 백두산의 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한기초상에서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 등 자연과학 연구지침서로 김교수가 안상덕, 리상래와 함께 세상에서 처음 출판했다. 그 때 내가 책값이 부담스러워서 비싸다고 하니 조박사가 <<책값만은 비싸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며 이 책은 김수철교수님이 집필한 값진 책이라고 하였다. 내가 김수철교수님의 제자라고 하자 박사님은 오선생이 훌륭한 스승님을 모셨다고 부언하였다. 교수님은 정년퇴직후 17 권(편)이나 되는 귀중한 론저를 출간한 평생교수다.김교수님의 저택은 한 벽이 책으로 장식되였었다. 심지어 소래며 광주리며 눈에 쉽게 띄우는 그릇에마저 책이 가득 담겨있었다.김교수님은 지금까지 안경을 멀리했고 일본고찰 때는 일어로 타자해 투고를 했단다. 그의 집마당에는 큼직한 위성가마가 세개나 있다. 영문을 물으니 온 지구촌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란다.<<경영인을 찾으시오>><<나는 길가의 풀을 먹고 지금까지 병원을 모르고 남보다 건강하게 삽니다.>>  이는 김교수의 습관어였다. 교수님은 주변에 개발할 중초약과 민간료법이 정말 많단다. 교수님은 시중에서 값이 비싸야 좋은 약이라는 편견을 청산해야 한다며  생당쑥, 익모초, 삽주, 골담초의 특별한 효능을 렬거하면서 솔잎한가지로만 많은 성인병을 막아낸단다. 평생을 산천초목과 같이 해왔지만 오늘도 그의 손에선 서책들이 떨어질새 없단다<<주변의 재래약초를 현대적설비로 제조한다면 값이 싸고도 효능이 높기에 경영이 쉽고 리익창출이 높습니다>> <<병원이 고생하면서 쉽게 해결할수 없는 병을 민간초약처방으로 쉽게해결할 병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1994년에서 모진 감기에 걸렸는데 되꼬리(蒼耳子)단방처방으로 감기를 뗐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가요?>>이렇게 말하는 교수님은 <<본초강목>>을 쓴 리시진은 장사군이 아니다며 중초약의 효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나와 같은 학자나 기술자들은 경영의식이 없다지만 의식주가 해결되였기 때문에 돈욕심이 없습니다.>> <<민간약의 효능에 중시를 돌리고 나 같은 학자들의 재능을 충분히 개발,리용하십시요>>.이렇게 건의하는 교수님은 만약 경영인(활력가)를 찾아 연변민간약연구소를 설립하고 고문을 잘 모시고 민간약재와 민간처방을 개발한다면 협회의 경제적운영은 물론 농민들의 수익창출에 큰 보탬이 된다고 확신했다.                    겸허에 유머까지 우리의 만남은 37년만이다.이번 만남에서 교수님은 건강하고 선량하며 유머적인 농촌할아버지로 보였다.필자가 전화로 만남을 약속하니 별로 보탬이 될 것이 없겠으니 <<이 골안을 잘못 찾아온 걸로 각오하고 오시요>>라고 겸허하게말씀했고 우리가 어디까지 왔다니 몸소 마중을 나왔으며 만남의  첫말씀이 <<길가의 풀을 먹으며 병원을 모르고 남들보다 건강하게 삽니다>>였다. 더욱히 안스러운 것은 이날은 교수님량주께서 연길에 게시는 숙모님(리영숙)의 95주년 생신일에 가야 했는데 우리가 온다니 사모님(맹영자, 88세)이 혼자서 먼저 갔고 교수님은 별도로 택시차를 마련해놓고 우리를 기다린 것이다.교수님은 연변일보와 길림신문의 애독자라며 기자들의 이름도 곧잘 외웠다. 교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대단한 영광이라며 우리더러 교수님이 스크랩한 신문기사에 친필싸인을 해달라고 청을 들었다교수님의 겸허함은 자기<<자랑>>을 멀리 함에 집합되였다. <<교수님이 수상한 최고 대상은 무엇입니까?<<그런것은 알려줄것이 못되지요>>이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필자의 요구대로 리력서를 복사해주면서도 수상편만은 주지않았다. 교수님저택의 벽에는 년세가 듬직한 박사할머니의 사진이 정중히 모셔져있다. 저기 박사분이 누군가고 물으니 교수님은박사가 아닌 숙모님이라며 숙모님의 박사학위는 증손이 드린것이란다. 언젠가 숙모님의 증손(반계)이 중앙대학박사학위를 받고 할머니한테 문안을 왔다가 손자의 박사모를 쓰고 기념사진을 남겼단다. <<우리의 혼사는 두집부모들이 내가 낳기도 전에 정했다오.>> <<로친은 문맹인데가가 나보다 년상이여서 처음에는 곡절도 있었구,,,>><<지금보면 정말 다행이오. 로친에게 농촌녀성의 매력이 있고 거기에 문맹이다 보니 리론적으로 나의 학술을 반박할 일이 없으니 얼마나 편안하고 화목한지 모르겠소. >><<나는 한생 채집을 하는 직업이라 무엇이나 버릴줄을 모르는 <과유불급>병이 있어도 로친이 평생 타발을 안하니 얼마나 편안하오…>>교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여도 이렇게 유머적이다.교수님은 인생에서 술이 없어서는 안된다면서 이 좋은 만남에 술이 없으면 되겠는가며 손수 술상을 차리고 젊은이들에게 <<백세주>>를 대접하였다. 한때는 60도 빼갈을 한근반은 마셨다는 교수님은 술은 정말 좋은 음식인데 술의 좋고 나쁨은 마시는 사람에게 달렸단다..<<나는 오선생의 짧은 글을 마음을 씻어주는 명심보감이라고 말하오. 인간의 령혼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더 많은 좋은 글을 써주시오.>><<힘내시요!>> <<힘내시요!>>어제(31일) 교수님이 전화로 제자한테 부탁하는 <<힘내세요>>재창이다. 김수철교수님이야 말로 <<박사>>고모님과 년상부인님의 사랑속에서 책무지와 길가의 풀을 안주로 술과 동무하며 백두산의 정기를 받는 멋쟁이 건강장수학자다.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필요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제자는 김교수님의 백세장수에 따르는 그의 불타는 여열을 기대해 본다.
5    백성의 지도자들 (오기활) 댓글:  조회:7588  추천:52  2011-04-02
백성의 지도자들 오기활 길림신문 고급기자   나는 남들로부터 이런 부탁을 곧잘 받는다. <<나(그)를 위해 좋은 말을 해달㈜라>> <<우리를 위해 할 말을 콱 해달라>> <<좋은 말을 해달라>>는 나더러 누구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달라는것이고 <<할말을 콱 해달라>>는것은 백성을 위해 할말을 꼭 해달라는것이다. 나를 놓고 말하면 이런 부탁은 <<위공대변(爲公代辯)>>하느냐 <<위사대변(爲私代辯>>하느냐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라 하겠다. 흔히 상급에서 시찰이나 검사를 온다고 하면 당지의 어른들이 사전에 시찰대상에게 <<보희불보우(報囍不報忧)>>를 지시 혹은 암시를 한다. 즉 좋은 말만 하고 나뿐(?)말은 말라는 눈치다. 그래서 당사자는 없는것도 있다고 적은것도 많다고 안 한것도 했다며 입발린 말만 한다. 그 결과 현지어른들은 상급에서 치적을 얻고 백성의 불신을 얻게 된다. 연변의 초대주장 주덕해동지는 당과 정부앞에서 <<찬송가>>만이 아닌 <<고충가>>도 불러 당과 정부의 집정에 도움을 주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었다. 1962년 주은래총리가 연변을 시찰할 때 주덕해동지는 <<희>>와 함께 <<우>>를 실사구시적으로 회보한데서 우리 조선족이 한족보다 입쌀공급을 더 받고 고추가루보조금을 따로 받는 등 소수민족우대정책을 향수하였다. 도문시초대시장(1965년) 김하권은 <<문화혁명>>때 쓴 자본주의길로 나가는 집권파란 모자를 방금 벗고 1975년에 도문시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임직된지 얼마 안되는데도 곁군들의 눈총을 피해가며 성에서 온 시찰단의 숙소에 찾아가서 도문시민들이 오염된 두만강물을 먹는 <<우>>를 통사정을 하면서 회보한데서 도문시민들의 식수(食水)문제를 해결하였다. 2005년 연변대학 김병민총장이 국무위원 진지립(陳至立)이 시찰을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연변대학캠퍼스통합확장공사가 부딪친 고충을 회보하고저 하니 해당책임자가 사전에 <<우>>는 말하지 말것을 암시했다. 이에 진퇴량난에 처한 김총장이 성당위부서기 전철수한테 속심을 터놓았더니 전서기가 <<국무위원을 모셔오는 목적이 바로 도움을 받자는것인데 왜 곤난을 반영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꼭 제기하라》고, 그리고 실사구시적으로 수요되는 자금을 말하라고 하였다. 하여 국가의 상당한 자금을 쟁취하였다. 도문시 홍광향 달라자촌은 지난 90년대 연변의 첫 <<텔레비죤마을>>로 교석, 진모화, 류화청 등 여러 국가급지도자들이 시찰하였다. 언제 들었던 리춘실(서기)의 말을 적어본다. <<번마다 시에서 배워주는 말만 하다보니 교석이 <무슨 곤난이 있는가?> 는 물음에도 양어장을 확대개조할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말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아쉽다>> <<보희>>는 간부들이 치적을 얻고 <<불보우>>는 백성들이 불익을 당한다. 필자는 주덕해, 전철수, 김하권 등 지도자들의 <<보희보후>>가 백성지도자들의 영원한 계주봉으로 되여줄것을 기대한다.
4    추억의 추도문 댓글:  조회:7820  추천:36  2011-03-30
            추억의 추도문                                 오기활 길림신문 고급기자필자는 요즘 서류를 정리하다가 1994년 10월 28일에 작고한 사촌매부의 추도문을 다시 읽으며 인생의 가치관을 반추하게 되였다.이 추도문은 17년전 사촌매부(허세근)장례식에서 아들(허룡길)이 올리는 추도사에 감동을 받고 수장한것이였다. 허세근은 도문철도렬차단의 말단로동자(목공)였다. 그의 생전에 우리가 받은 인상이라면 그가 《남을 돕는데 진심이다》는것뿐이다. 그런데 매부는 《훌륭한 남편》이나 《훌륭한 아버지》로 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글쎄 50대 중반에 타계한 그가 집에 남긴 유산이란 단위에서 분배받은 24평방메터의 허름한 한족식집과 14촌짜리 흑백텔레비가 전부였다. 전화마저 없었다. 그는 술상에서 늘 이런 말을 하였다.《부모들이 내 이름을 세근(世根)이라 지은것은 나더러 인간세상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라는 바램이였는데 아직 뿌리를 내리자면 멀었소…》우리는 그때만도 그의 말을 우스개로 흘려 버렸는데 아들의 추도사를 들으며 그가 말하는 뿌리란 사랑의 뿌리임을 알게 되었다. 추도문은 이렇게 쓰고있다.《나에게는 허숙방이라고 부르는 한족누님이 있습니다. 허숙방은 우리아버지가 그를 구해주고 얻은 딸이랍니다…》사실은 이러했다.전 세기 5,60년대 허세근이 섬서철도국 공무단에서 재료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하루는 그가 서안시내에서 일을 보다가 웬 처녀가 어린애를 안고 안절부절 못하는것을 목격했다. 허세근이 달려가서 사정을 물어보니 사천성 어느 농촌에서 왔다는 18살짜리 처녀애가 타인의 소개로 남자대상을 만나려고 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불시에 동생이 병에 걸렸다는것이다.허세근은 두말없이 애를 엎고 철도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들은 급성페염이라며 급히 입원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세근이는 그애를 자기 딸이라 하고 입원시켰다. 며칠간의 치료가 끝나 병원에서 출원하자 자기 집에 데려다 며칠간 살뜰히 보양한 다음 그를 집에까지 데리고 가서 부모한테 맡겼다.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몇달후에 어린애의 어머니가 딸애를 데리고 다시 허세근을 찾아와서 자기는 생활이 쪼들려 더는 애를 부양할 능력이 없으니 이 애를 친딸로 받아달라고 사정할줄을.그때 세근이네는 아직 아이도 없는 신혼생활이였다. 하지만 마음씨 착한 세근이는 두말없이 받아드렸다. 그 애의 어머니는 너무도 반가와 딸애의 이름이 소방(素芳)이라며 새아버지가 마음대로 이름을 개명하라고 했다. 그래서 세근이는 한어발음으로 素와 비슷한, 조선족들이 이름에 흔히 쓰는 淑을 택해 淑芳이라 작명했다.허세근은 숙방이를 친딸처럼 키웠고 두집사이 관계도 돈독이 하였다. 그러다가 1969년에 허세근이 도문철도분국으로 전근하게 되자 친부모를 영영 떠나야 할 숙방이가 불쌍하다며 또 다시 친부모들에게 맡겼다. 그후 서로간의 여라가지 원인으로 서로간의 련락이 끊어졌다. 허세근은 숙방이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인편을 통해 숙방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1984년부터는 돈을 팔면서 《사천일보》 등 신문, 잡지에 광고를 냈고 그래도 안되니 사천성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1986년 5월 23일, 사천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허세근의 민족우애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숙방이를 찾았다는 소식과 상세한 통신주소를 보내왔다. 허세근은 너무도 기뻐했다. 그래서 이미 애어머니로 되였다는 숙방이가 기회를 만들어 동북에 오겠다는데도 참지 못하고 1991년초에 성도에 찾아가서 숙방이를 보고야 시름을 놓았다. 숙방이를 찾아서부터 허세근이 사망되기까지 허세근은 숙방이가 부쳐온 편지를 94통이나 받았다. 편지마다에는 조선족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절절한 효심이 담겨있었다. 1992년 7월 중순, 숙방이는 아버지가 간암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눈물에 젖은 편지와 함께 현금 200원을 보내면서 병치료에 보태라고 하였다. 숙방의 편지와 돈을 받은 허세근은 병석에서 진정할수 없었다. 허세근은 숙방이가 보낸 돈을 보람있는 일에 써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7월 25일 오전, 병석에서 일어나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40돐경축활동 판공실에 찾아가 현금 100원을 내놓으면서 자기의 딸을 찾아준 당과 정부에 감사를 드리며 적은 돈이지만 자기네 부녀간의 성의라면서 자치주창립40돐기념행사에 보태라고 하였다. 1992년 8월 16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속절활동 《속보》는 《허동무의 마음》이란 제목으로 허세근의 아름다운 애족애주정신을 소개하였다. 자치주창립40돌경축 지도판공실에서도 그에게 감사장과 함께 자치주창립40주년기념마크 3매를 보내왔다. 이상의 속보, 감사장, 기념마크는 그가 사망한후 가족들이 그의 유물을 정리하던중 우연히 발견한것이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것이다. 사망자의 유물을 서로 돌려보며 가족들은 남편,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흐느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허세근이 연길에 갔다가 연길기차역에서 흑룡강성 밀산에서 왔다는 손님(3명)들이 돈가방을 잃어 버리고 애간장을 태우는것을 목격했다. 고향애(그의 고향은 흑룡강성해림임)가 앞섰던지 그는 자기의 호주머니에 돈이 없자 연길기차역의 아는 사람을 찾아 자기이름으로 돈을 꿔서 그들에게 차비로 주고도 자기집(도문)에 모셔와 잠을 재우며 술상까지 차려서 대접시켰다. 그후 그들이 돌아간후 며칠이 지나도 전화한통 없으니 집식구들은 아버지가 쓸데없는 돈을 팔았다며 원망하였다. 《내가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절대 노여워 말라.》 허세근은 가족들에게 《준것은 다 잊고 가진것만 기억하라》며 베품의 삶을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마저 중풍으로 앓다보니 우리집 생활은 퍼그나 곤난하였습니다. 그런 형편에서도 남을 돕는것을 락으로 한 아버지의 인생은 베푸는 인생이였습니다…》 아들이 쓴 아버지추도문을 다시 읽는 이 시각, 필자의 귀전에는 19년전 추도문을 들으며 상객들이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귀전에 들려오며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수 없었다. 매부가 간암으로 세상을 뜬후 중풍으로 투병중이던 사촌녀동생(오미옥)마저 세상을 떴다. 어머니장례를 치른 며칠후다. 외조카(허해란)가 을형간염으로 앓는 외숙부(오기용)를 찾아와 문병하면서 외숙모(김순복)의 손에 돈봉투를 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돈(2000원)을 삼촌의 병치료에 보탬하세요. 이 돈은 어머니장례때에 받은 부조돈입니다. 며칠후 우리 둘은 취직하러 안쪽으로 갑니다. 우리는 젊으니깐 나가서 벌면 되지요…》 《나와 오빠가 토론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숙모는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철없는 나이(룡길 25살, 해란 23살)에 그것도 고아로 모든 일에 돈을 앞세워야 할텐데 어머니의 장례부조돈까지 몽땅 내놓는 그들의 대견스러운 처사에 목이 메였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구나! 너희들은 앞으로 돈을 써야 할 일이 너무 많단다. 선량한 너희들을 하느님이 도와 줄것이다!》 봉투를 돌리는 숙모의 손은 더없이 떨렸다. 후에 안 일이지만 용길이는 부모들이 생전에 꿔준 빚돈을 받으면서도 생활이 어려운 몇집의 돈은 받지 않았단다. 지금 룡길이는 청도, 해란이는 상해서 가정을 꾸려놓고 열심히 산다. 한 인간의 미덕은 그의 평소의 적선(積善)으로 완성된다. 희생과 봉사는 맹인도 볼수있고 귀머거리도 들을수 있는 사랑의 언어요, 자비의 메시지다. 필자는 추도문을 덮으며 고인의 생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거룩함을 느끼게 된다. 그에 따라 아버지를 거울로 베품의 삶을 엮는 조카들이 더욱 대견스러웠다.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발자국을 남긴다.》 《후대들에게 1억(亿, 재산)을 남기지 말고 추억을 남기라.》  
3    일본 로씨야 그리고 우리의 줄서기 (오기활) 댓글:  조회:7614  추천:37  2011-03-27
일본 로씨야 그리고 우리의 줄서기 -오기활 길림신문 고급기자   요지음 텔레비를 보면 대지진을 겪는 일본사람들이 그런 복새판에서도 조용히 줄을 서서 물건을 사는 정경을 보면 진정 감동을 먹게 된다. 그것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에게 꼭 필요한 물건만을 사면서 수량을 자제하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다. <<우리는 둘이라도 서로 미는데 로씨아사람은 둘이라도 줄을 선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로씨야에서 목격한 일이다. 모스크바 등 대도시는 물론 자그마한 향촌의 뻐스정류소에서도 고객이 서너명이여도 조용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리고 뻐스가 오면 줄을 선 순서대로 한사람씩 올랐다.   우리가 입경할 때 목격한 일이다. 로씨야사람들은 조용히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통관문이 열리면 줄을 선 순서대로 점잖게 통관하는데 중국사람들(대부분은 조선족)은 련 며칠간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서서(밤이면 앉는 줄임) 통관을 기다가도 일단 통관문만열리면 섰던 줄을 팽개치고 서로 밀치고 닥치며 복새판을 이뤘다. 하여 통관질서를 유지하던 로씨야 변방군들이 량족켠의 긴걸상에 올라서서 통관하는 중국사람들의 골통에 고무곤봉으로 하나하나씩 내리쳤다. 그야 말로 <<중국이 맞는>> 기분이였다. 철도와 륙로의 교차구에 설치한 차단봉의 길이도 이곳은 륙로넓이보다도 더 긴데 로씨야는 2메터도 안되였다. 그런데도 일단 차단봉이 내리면 아직 기차가 오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자리에 서서 기차가 오리를 기다렸다. 이곳은 멀리 기차가 오는것도 마다하고 길너비를 가로막은 차단봉밑으로 빠져나가는데 말이다. 중국사람들은 기차에 오를 때 서로 밀고 닥침은 좌석쟁탈을 위해서라고 쳐도 좌석표가 있는 극장은 왜서 밀고 닥치며 입장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자각적으로 줄을 선 력사가 있다. 60년대엔 줄을 서서 식당밥을 타먹었고 70년대에는 배급소에 가서 통장을 들고 줄을 서서 쌀과 콩기름을 타먹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처럼 습관된 줄문화를 왜서 버렸는지? 개혁개방후 우리는 외국의 좋다는것을 거의 다 따라 배우면서도 왜서 문명한 줄문화는 따라배우지 않는지? 뢰봉이 <<출국>>했다더니 줄문화까지 가지고 <<출국>>했는가? 필자는 함께하는 세상, 더불어사는 세상에서 <<하나는 열을 위하고 열은 하나를 위하는>> 몸가짐으로 저마다 사회에 필요한 사람, 유용한 사람으로 되기 위한 몸가짐을 가꾸자는 바람이다.
2    50년 주사와 나만의 주도 댓글:  조회:8364  추천:41  2011-03-18
                  50년 주사와 나만의 주도  어느 대학(한국)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무엇인가는 질문에 가장 많은 답이 한(恨), 정(情) 흥(興)이였다. 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이런 정서를 담아낸 마법(묘약)을 술 한글자에 모았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유전되였는지 여하튼 남들로부터 애주가라는평을 받고있다. 동네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벽에다 는 맹세를 써놓고도 술을 계속 했다며 란다.   나는 50년간 출렁이며 지내온 나의 주사(酒史)에서 난 아직 주정뱅이라는 말은 못들었다. 주정뱅이라고 해도 쾐찮은데 말이다. 필자가 이글에서 말하는 주정뱅이라는 주정은 주정(酒酲)도 아니고 주중(酒重)도 아닌 주정( 酒正)을 말한다.   나는 때마다 술을 마신다. 그렇다고 때마다 많이 마시는것은 아니다. 그저 보통 술 한잔을 부어놓고 것으로 술이 끝나면 밥도 끝난다. 심지어 자랑은 아니지만 품위있는 대표단으로 한국에 갔을 때도 나만은 아침에도 반주술로 을 한병씩 배정받았다.  라는데말이다.   나는 집에서 마시는 술은 자작(自作)한다. 매년 5월 25일부터 6월 15일 사이에 송순주(松笋酒)를 만드는데(60도, 100근씩) 지금은 나보다도 부인이 더 명심할 정도이다.   나는 집에 온 손님들게 두만강이 말라도 우리 술독은 마르지 않는다면서 고 자랑을 한다. 나는 밖에 나가면 며 술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감주든 소주든 청주든 맥주든 아무튼 술 주(酒)자가 있으면 된다. 비록 자랑은 아니지만 아무튼 여러가지 술을 섞어 마셔도 거의 무탈이다. 그래서 술상에 앉으면 나절로  자기를 라 자칭한다. 나는 보통 술을 는 안한다. 술 주(酒)자를 파자하면 삼수변에 닭 유로 닭이 물을 마시듯 마시라는 뜻이다. 그래서 백주는 혀끝으로 마시고 맥주는 목으로(큰 모금으로) 마신다.   나는 술안주도 별로 가리지 않는다. 가마에 들어갔다가 온 음식은 썩두부를 빼고는 다 먹는다. 안주가 정 없으면 텔레비(電視)안주도 좋다. 지금은 좀 틀리지만 언제까지도 조선족은 술을 마시기 위해 안주를 먹고 한족은 안주를 먹기 위해 술을 마셨다. 조, 한족의 술잔과 접시의 대소를 비교하면 이점을 알수 있다 술안주는 그래도 낙지나 명태처럼 안주가 좋다. 씹을만한 안주가 없으면 말추렴도 좋다. 란 사람이나 고장을 것을 말한다. 공인들은 공장장을 공장장은 국장을 국장은 시장을 것이다. 안주는 처음에는 님, 서기로부터 시작해서 놈, 눔으로 바뀌는데 돈을 팔지 않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데는 허물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우점과 그 지방의 특점을 말하는 도 있다. 나는 술상에서 누구나 들락날락하지 말라고 한다. 아니면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수 있다고…   술상에서 하는 말은  는 말과같이 거의 모두가 진담이다. 때문에 나는 훗날이 며 용서해 달라(주라)는 말을 흔히 곧이듣지 않는다. 술상에서 보면 어떤술을 마시고 어떤안주를 먹느냐가 아닌 누구와 마시는가로, 맛이 아닌 기분으로 마신다. 나는 이렇게 기분으로 마시는 술맛을 이라고 한다. 나는 술을 내가 마시기 위해 남을 권하고 남을 마시게 하기 위해 내가 마신다. 술상에서는 서로간 련대성이 필요하고 고조와 분위기의 동원이 필요하다. 이상은 나만의 주법(酒法)(?)이고 주도(酒道)이다.   이밖에 나는 독자들에게 특별히 할 말이있다. 말하자면 음주량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둘째라면 서러워할 우리 민족에게 아직까지 통합된 확실한 건(권)배어가 없는것이 유감이다. 건배어는 술상의 주혼(酒昏)이다. 미국, 영국에는 상대방에게 유쾌한 기분을 빌어주는 형의 건배어가 있고, 중국, 일본에는 잔을 비우자는 형의 건배어가 있으며 한국에는 상황에 따라 앞에 수식어를 부쳐서 형 건배어가 있으며 조선에는 즐거운 술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형 건배어가 있다. 근년에 연변에 중국의 , 한국의, 조선의 형 외에도 2박자, 3박자형의 신조어가 나타났다. 례하면 , 를 주제로   는 뜻이다. 그외에도 상기건배어의 자매편으로 (延边阿理郞- 絶喜够!)도 함께 2편을 추천하였다. 뜻인즉 우리 민족의 아리랑을 주제로 연변의 즐거움을 나타내려는 것이였다. 나는 독자들에게 한번 이 건배어를 사용해 볼것을 건의한다. 한번이 두번이 되고 한술상에서 두술상으로 이어지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연변의 홍보대사(代詞)로 될것이라고 필자는 믿어진다.   끝으로 필자는 우리 민족의 문명한 술문화의 발전과 흥성을 기대하며 모든 독자들이 문명한 술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연변의 술상 건배어를 만들기에 함께 노력할것을 건의한다. /오기활 (본작품은 동북3성 우리민족 술문화응모작품임)          길림신문  : :21011.3. 18 .
1    내가 본 일본의 방지진 대책 댓글:  조회:8152  추천:35  2011-03-16
내가 본 일본의 방지진 대책 오기활 칼럼니스트 일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지진국》이다. 그만큼 지진에 익숙한 일본인들의 항지진의식과 항지진준비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꼼꼼하다 요즘 텔레비에서 일본지진관련 화면을 보면 일본국민들이 대지진앞에서 침착하게 행동함에 진정탄복된다. 소학교학생들마저 덤벼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며 온정을 찾으니 말이다. 2년 전 필자는 일본동경(오다이바)에서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인들의 항지진의식과 항지진준비를 관찰하였다. 지진체험을 하는 부자간 일본은 매년 3월의 첫 주일을 전국적인 소방주로, 이 주간에 일본의 매개 중소학교에서는 지진화재에 관한 예방, 대책실천활동을 전개한다. 중소학교만이 아니다. 이번 지진때 일본에 있는 며느리는 지난 11월에 대학교에서 배운 지진대책훈련이 큰 효과를 보았다고했다. 집안에서 잡일을 하다가 큰 진동이 있자마자 먼저 문을 열어놓고 방지진모자가 미처준비못된 정황에서 후라이판을 머리에 쓰고 대처하였다고 한다. 나는 일본에 체류하던 기간에 중소학생은 물론 부모들이 어린애까지 데리고 과학기술관에 와서 지진체험을 직접함께하는 현장을 경상적으로 보았다. 지진교육의 현장 일본은 선진적인 통신정보시설로 유사시 45초 이내에 지하철과 고속도로의 모든 차량들이 동시에 경보를 울려 사람들이 제때에 피난하게 한다. 이번 지진때도 며느리가 지진소식을 접하자 거의 동시간에 중국에 전화를 쳐도 못 받으니(목욕중) 인츰 한국에있는 동생에게, 동생이 중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우리에게 알리다 보니 우리는 누구보다도 빨리 지진소식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일본 국내는 핸드폰이 걸리지 않아서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한밤중에야 통화하고 서로간의 안전을 확인하게 되였단다. 고층아빠트에 설치된 지진탈출구 일본의 각 지역에는 지진체험관, 지진피난소, 《지진창고》 등 지진대책시설이 구전하기에 성인들은 물론 모든 중소학생들이 직접 지진체험을 할수 있었다. 일단 지진이나 기타 화재가 발생하면 주민들은 주변의 《피난소》에 들어 가는데 동경목(目黑区)에만 하여도 40개의 피난소가 있다고 한다. 피난소에는 모든 생필품과 비상대책 준비시설과 물품이 매우 구전하다고한다. 피난소마다 1250여명의 피난민을 용납할수 있다. 일본은 항지진 《자주방재조직》이 잘 보급되였다고 하는데 그 때까지만해도 일본의 60%이상 가정에서 항지진 《자주방재조직》에 가입하였단다. 일본의 현대건축물은 기초부터 항지진대책이 잘 된 것은 물론 건축구조를 보면 1 층의 상당한 높이는 해일이 닥쳐올 것을 대처해 물이 쉽게 통과할수 있는 《물길》 로 되였고 건축구조물도 철물, 아니면 알뉴미늄에 유리가 주체였다. 건축물벽이 거의 모두가 유리로 되였으니 일단 지진이 일어나면 《유리비》가 내리기 때문에 파괴된 건축물의 상해로인한 인명피해를 줄이게 된다. 지진발생시 해일이 빠지고 <<유리비>>가 내리는 현대건축물 고층아빠트는 지하부터 옥상까지 지진때 안전하게 탙출할수 있는 탈출구가 있었고 집집에는 《비상지진상자(가방)》가 준비되여 있었다. 지진은 돌발성이 강하고 파괴력과 위해력이 불가사의하며 파급범위, 인원사상, 자산손실 등 위해성이 자연재해중 거의 첫자리를 차지하는 재해다. 섬의 나라, 지진의 나라로 불리는 일본의 민중성적인 방재해 의식은 가히 우리들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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